대한지리학회지제51권제1호 2016(167~184)?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 중국동북 3 성조선족이주를중심으로 최재헌 * 김숙진 ** Geographical Interpretation of Korean Diaspora in Northeastern China: Its Migration and Spatial Diffusion Jae-Heon Choi* Sook-jin Kim** 요약 : 본논문은중국조선족의이주과정을시기별로해석하고각시기에따른이주공간의변화를조선족인구 분포의변화를통해밝히려고하였다. 중국조선족의이주는 19 세기말부터본격적으로일어났으며, 1910 년까 지의난민월경기, 1930 년까지의정치이주기, 1945 년까지의강제이주기, 그리고해방이후최근까지의경제 이주기로나누어그특징을고찰할수있다. 1910 년대와 1930 년대, 2000 년대의변화과정을고찰하면중국조 선족의이주는벼농사의재배와밀접한관련이있으며초기에는국경인근에벼농사가유리한지역으로우선이주가시작되어그주변으로조선족취락이확대되는접촉확산으로, 1930년대강제이주에따라철도를따라집단촌이건설되고 2000년이후연해도시를중심으로집적지가확대되는계층확산으로해석이가능하다. 중국조선족의디아스포라공간은초기에형성된인구밀집지에서지속적으로인구가증가하고안정적으로유지되었으나, 최근농촌공동체에서도시공동체로변화하고동북3성위주의단일지역분포패턴에서연해대도시와해외이주가포함된다지역분포패턴으로변화하고있다. 주요어 : 중국조선족, 디아스포라, 이주과정, 확산, 동북 3 성 Abstract : This paper investigates the migration process of Korean population in Northeastern China since the 19th century, focusing on the population distribution patterns in different time periods which reflect changes and diffusions of diaspora space. Korean migration into Northeastern China seemed to begin from the late 19th century, and can be classified into four different periods including cross-border refugee period (19th to 1910), political exile period(1911-1931), forced migration period(1932-1945), and economic-driven migration period(after 1946). The Korean migration into Northeastern China was closely related to paddy field rice farming by Korean migrants, which can be interpreted as a process of contagious diffusion starting from border area between Korea and China at the early stage. And then, process of hierarchical diffusion occurred along with urban centers on the railways from the 1930s. At the later stage, Korean migration has extended to coastal urban centers, other big cities in China and other countries including Korea since the 2000s. Recently, ethnic Korean communities in China have experienced changes from rural village based community to urban district based community as well as from single-nuclei ethnic structure around Northeastern China toward multi-nuclei ethnic structure extending to coastal urban areas in China. Key Words : ethnic Korean community in China, diaspora, migration process, diffusion, Northeastern China 이논문은 2014년도건국대학교 KU학술연구비지원에의한논문임 (This paper was supported by Konkuk University in 2014). * 건국대학교이과대학지리학과교수 (Professor, Geography Department, College of Science, Konkuk University), choijh@ konkuk.ac.kr ** 건국대학교이과대학지리학과부교수 (Associate Professor, Geography Department, College of Science, Konkuk University), sjkim@konkuk.ac.kr - 167 -
최재헌 김숙진 1. 서론 1) 연구배경과연구목적 중국조선족은중국에거주하는우리민족을통칭하는용어이다. 최근우리나라에이주하거나체류하면서머무는조선족의수가점점늘어나면서중국조선족의역사적형성과정과공간분포, 그리고조선족사회의문제점에대하여깊은이해가요구되고있다. 중국내에서도조선족의위상에대해여러시각이존재한다. 먼저조선족은디아스포라가아니며 100% 조선족일뿐으로한반도와분리해서생각해야한다는초국적이주민 (transnational migrant) 적인시각과함께 ( 황유복, 2008), 이와는상반되게중국조선족을중국국민이면서도이중문화배경과신분을갖고있는코리안디아스포라의한갈래로이해하고자하는시각이존재한다 ( 조성일, 2013). 다음으로는중국조선족의거주지는여러민족이거주하고있는 제3의영역 에속하는특수한공간적특성을갖고있으며정치경제생활에서는중국화되었지만문화적측면에서는모국문화의유전인자를간직하고있는변인문화형태의특성을가지고있다는시각이있다 ( 김강일 허명철, 2001; 김호웅, 2010). 분명한점은전체인구수가 200만명에달하는중국조선족이한반도와가장가까운중국동북3성의주요지역에집중적으로거주하고있으며, 한국과중국의정치, 경제, 문화적인관계가밀접해질수록중간인으로서의중국조선족의역할이증대하고있다는것이다. 특히, 중국조선족은동북3성에서민족자치주, 민족자치향, 민족촌까지다양한 집거구 를형성하여한반도밖에서또다른민족공간을형성하고있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부여가가능하다. 중국조선족의디아스포라에대하여최근지리학분야에서는초국적이주의관점에서다양한연구들이이루어지고있다. 조선족이주네트워크의특성과송출지역의사회공간적변화의특성을밝힌연구 ( 박광성, 2008; 2010; 김홍배, 2014; 이영민, 2012; 이영민등, 2012; 2013), 조선족의이주경험을다룬연구등 ( 김현미, 2008; 리화, 2012) 이있지만최근시점에서의수용지와송출지에초점을맞춘연구가대부분으로, 역사적인과정에초점을맞추면서도도시발달과관련한공간확산과정을연구한학술적연구는극히드물다. 본연구와관련한연구경향은첫째중국조선족공동체의형성과정과특징에대한연구, 둘째, 조선족의논농사나경제적활동등조선족사회의특징을여러주제를통해다룬연구, 셋째, 중국조선족이주사를다루면서동북3성의현이나시단위로작성된지역지리연구들로대별된다. 첫째, 중국조선족공동체의형성과정에대한대표적인연구들로는문화기술지 (ethnography) 관점에서 1930년대만주의조선족마을공동체형성을흑룡강성오상현등의사례를통해밝히려고한연구 ( 강위원, 2005; 김왕배 이수철, 2008), 1990년대이후동북3성에집중되어있던조선족이중국전역으로흩어지면서조선족공동체의변화와해체를다룬연구 ( 권태환 박광성, 2004; 권태환, 2005; 김재기, 2005; 신주백, 2012) 등을들수있다. 이들연구들에서주목할점은조선족공동체가벼농사를중심으로형성된농촌공동체이며, 한국과의교류가활성화된 1990년대이후도시화와한국이주의영향으로이들공동체가급속히와해되고있다는것이다. 둘째, 조선족의경제적활동들과여러주제에대한연구로는의례와축제를중심으로한조선족생활문화의지속과변동 ( 강위원등, 2005), 조선족과벼농사 ( 박진환, 1995), 조선족의기업활동 ( 이장섭, 2011), 마을규모에서조선족취락의공간구성과가옥특성에대한연구 ( 김수인등, 1997; 김일학 박용환, 2009) 들도수행되었다. 특히, 조선족인구의분포가벼농사지역의분포와일치하며출신지역이가옥특성에반영된다는연구결과에서인구분포와변화의요인에대한다양한시사점을얻을수있다. 셋째, 조선족의이주사에초점을맞추면서중국의동북3성지역의지역특징을다룬연구들로는일제강점기조선족의이주사와인구학적특성을다룬연구들이대부분을차지한다 ( 김병호, 1991; 1992; 1993; 류승렬, 2007; 류충걸 김석주 김화, 2009; 박경숙, - 168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2009; 심혜숙, 1992; 유필규, 2008; 이종수, 2009; 이형찬, 1988; 주성화, 2007). 또한특정지역의이주과정을지역지리적관점에서밝힌연구들이있다. 예를들어연수현이나상지시의조선족형성과정을이주사를중심으로기술하거나 ( 한득수, 2009; 김병호, 1997), 20세기초조선족의중국내몽골지역이주과정을분석한연구 ( 김선호, 1999) 등이있다. 이중에서심혜숙 (1992) 의연구는중국조선족인구분포에대한역사지리적연구를수행하여이주경로의특색과출신지방등을밝히고있어본연구내용에많은시사점을제공하였으나최근의경향은반영하지못한한계가있다. 따라서지리학적시각에서중국조선족의이주과정을 20세기초반부터파악하여현재까지인구분포의변화와공간확산의과정, 1990년대이후인구이동의동태성과그파급효과를분석한다면중국조선족의디아스포라공간에대한체계적인이해가가능할것이다. 본연구는중국동북3성에분포하고있는중국조선족의정착과정의특색과시기별인구분포의특징과이주패턴, 그리고조선족사회의문제점을공간적시각에서고찰하고자하는것을목적으로하였다. 구체적인연구주제는다음과같다. 첫째, 조선족의동북 3성이주의공간적확산과정의특색을시기별과지역별로나누면어떤패턴이나타나는가? 둘째, 조선족인구분포와조선족집거구의분포특색은무엇인가? 셋째, 조선족인구의도시체계별분포패턴과그변화및공간적특색은무엇인가? 2) 연구방법및자료주요연구지역은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포함하는동북3성으로설정하고, 연구를위한분석단위로시와현, 그리고조선족집거구를중심으로분석하였다. 연구자료는문헌연구를통하여기출판된국내외문헌을분석하고일제강점기만주지역의인구센서스자료와인터넷접근이가능한중국통계자료와통계연보를사용하였다. 상세한조선족집거구의파악은중국행정구역총람 (www.xzqh.org) 을참고하였다. 이외에중국에서출간된문헌에나와있는인구 자료를간접적으로활용하였다. 중국에서는인구센서스자료를제외하고는통계자료의신뢰성이대체로낮으며인구센서스의해외공개를극히제한하고국외반출을통제하기때문에기존의연구결과의내용을엄밀히분석하여제2차자료를주로이용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문헌연구를주로하였고, ArcGIS 를이용하여각도시와현지역에분포하고있는조선족의인구를시기별로지도화하고해석하였다. 또한 2013년 7월 17일부터 24일까지실시한흑룡강성과길림성일대의답사와인터뷰결과를부분적으로활용하였다. 특히, 본연구에서는지리적근접성에따라시기별이주과정의차이가발생하는지, 조선족의이주과정에서연쇄이주 (chain migration) 의특징이전시기에걸쳐나타나는지, 그리고공간확산 (spatial diffusion) 의과정이접촉확산에서계층확산의유형으로변화하는가에초점을맞추어살펴보았다. 2. 본론 1) 중국조선족의이주과정과조선족집거지의형성 중국조선족의이주의출발점에대해서는조선족을고구려내지발해고조선의후손들로보는견해, 14세기원 명시대에국경을넘어이주한조선인들로부터보는견해, 명 청교체기인 17세기로보는견해, 그리고 19세기후반이후본격적으로조선인이이주한것으로보는견해등이있다. 17세기에는자연재해와전쟁이잦았던시기였다. 특히, 1619년명 청전쟁에동원되었던강홍립장군휘하의 5천명의장병들이청에항복하고, 정묘호란 (1627) 과병자호란 (1636) 에조선인인질수만명중에서일부귀국자를제외하고대부분요동지방에머물게되면서조선인의중국정착이이루어졌다고볼수있다 ( 표 1). 하북성청룡현팔가자향박씨가구, 요녕성개현의진툰향박가구촌, 그리고요녕성본계현산성자향박보촌의박씨들이모두 17 세기에이주하였다는연구결과가이를입증한다 ( 김진 - 169 -
최재헌 김숙진 표 1. 중국조선족이주의역사적사건 연도 1619 1627, 1636 1677 1712. 5. 12. 1861-1870 1872 1875 1883 1900 1903 1905 1907 2월 1909 1910 1920-31 1918, 1922 1920 6. 7. 1925 1931 1945 1949 1952 9. 3. 1955. 12월 1966-1976 1992 1999 2007 역사적사건명 청전쟁에출정한강홍립휘하의조선중군오천명투항정묘호란과병자호란에의해 20만명의인질이강제이주장백산이북천여리에봉금지구설정백두산정계비를세워청나라와국경획정, 토문강에대한해석논란수해, 한재, 충재등재해로인한월경민발생 (1861, 1863, 1866, 1869, 1870) 함경도삼수, 인저로부터후창군의막치까지압록강대안에 18개조선인촌락정착통화지구하전자상전자에서벼농사재배성공봉금정책폐지 이민실변 실시, 두만강이북에조선인개간지구지정러시아훈춘점령친러파에의해이범윤을간도관리사로파견, 연변이주민증가러일전쟁에일본승리, 을사늑약체결, 남만주철도주식회사설립으로장춘과대련간철도경영권장악재주조선인보호를구실로용정에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설치간도협약으로조선족의거주권, 재산및토지소유권승인, 연변을만주침략을위한동남부기지화, 철도부설권, 영사재판권취득. 그대가로간도영유권을청에양도한일합방, 일제에의해토지조사법발포, 1912년 8월토지조사령과시행규칙발표일제의토지조사사업과산미증식계획으로인한농민이주발생동양척식회사, 동양권업회사각각지점만주설립봉오동전투, 일제에의해연변 4개현과동녕현등 5개현 1만명의조선인학살반일인사체포후일본에인도하는 미쯔야협정 체결, 항일독립단체참의부와정의부가남만주, 북만주에서신민부로결속중일전쟁발발해방이후만주거주조선인의절반이귀국중화인민공화국수립연변조선족자치구설립으로중국정부의 55개소수민족중에하나로지위부여중화인민공화국헌법에의거하여자치구를자치주로개칭, 장백현조선족자치현설치, 흑룡강성, 내몽고, 요녕성등지에 21개조선족자치향건립문화혁명기로조선족문화의수난과경제침체한중수교재외동포법이제정, 60세이상친척초청허가, 2000-2001년 50세이상초청허가방문취업제실시 국, 1993). 그러나 19세기이전에이주한조선인은이미중국에동화되어서역사적흔적을찾기어렵기때문에추적이가능한 19세기이후조선족이주가본격화된것으로보는견해가우세하다. 신주백 (2012) 과심혜숙 (1992) 의연구결과를검토해보면중국조선족의이주과정은시대별주요사건과관련하여크게 19세기후반에서한일합방 (1910) 이일어난 난민월경기, 1910년에서만주사변 (1931) 에이르는 정치이주기, 1931년에서해방 (1945) 에이르는 강제이주기, 그리고 1945년이후최근에이르는 경제이주기 로구분가능하다. 일제강점기의인구자료를조합하여만주지역의조선인인구변화를살펴보면지속적으로증가추세를보이지만 1910년을전후로하여증가폭이커지고, 다시 1931년이후변곡점이나타남을확인할수있다 ( 그림 1). 1907년 71,000명에서 1911년 126,000명, 1912년에 248,403명로늘었고, - 170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그림 1. 1907~1945년간도및만주조선인인구추이자료 : 이규태 (2000) p.187 ( 高崎宗司, 中國朝鮮族, 明石書店, 동경, 1996, p.16에서인용 ) 1920 년대동안 50 만명까지늘어나다가 1931 년 63 만 명, 그리고 1935 년에 80 만을넘었고 1945 년에는 216 만명에이르고있다 ( 이규태, 2000). (1) 난민월경기 먼저, 난민월경기 는 19 세기후반에서한일합방이 일어난 1910 년까지로한반도북부의수해와가뭄등 자연재해에의해난민의월경이주가발생한시기이다. 청나라는 1677년부터봉금령을선포하여이주를금지하였고 1712년부터압록강과두만강을경계로경계비를세워국경선을확정하고조선인의월경을금지하였다. 1785년에는조선과청이모두쇄국정책을실시하고연안에병력을배치하여월경자는사형에처하였다. 그러나 1861년부터 1870년까지한반도의자연재해가빈발함에따라 1872년압록강대안에불법으로월경한 18개의조선인촌락이세워지기도하였다. 이들은은거하기쉬운산간분지에정착하였는데두만강중류와해란강지류및육도하상류와같은곳이었으며, 주로구릉이나단구등에정착하여밭농사를주로지었다 ( 김준선, 2012). 본격적인조선인의중국이주는청나라가봉금령을폐지 (1885) 하고이민실변 ( 移民實邊 ) 정책과황무지를 개간하는전문개간구역을지정한 1880년대부터이루어지기시작하였다. 조선인이주자수가늘어나면서조선족취락은초기의압록강과두만강중심에서상류와하류지역으로확대되기에이른다. 이에따라해란강유역과육도하상류에인구가집중되고부르하통하유역에도조선인수가증가하였다. 이들조선인들은농사뿐아니라금, 은석탄등의광물자원채굴등지하자원의개발에도참여하여산간에광산마을에도분포하였다. 그이유는청나라의 봉금지대 였던이곳이한반도와인접하였고경작지개간에유리하였기때문이다. 특히, 압록강상류의요녕성남만주일대는벼농사에적합한기후조건을갖추었고 1875년통화상전자에서벼재배를성공하여간도보다이른시기에조선인이민이시작된곳이었다. 당시조선인은수해의위험이높은저습지보다수해우려가적은구릉지의밭을수전으로개조하여논농사를짓는경우가많았다. 주목할점은조선인의이주사와논농사는불가분의관계를가진다는점이다. 예를들어조선인들의흑룡강성이주를보면 1897~1916년에흑룡강성의남부를흐르는영안시일대의목단강유역으로이주하여논농사를지었고, 1895년이후에는흑룡강성의중부에있는오상현일대의송화강유역에논농사이주를하였으며, 그리고 1904년이후에연해주에서우수리강을건너밀산현일대의흑룡강성동부에벼농사를시작하면서이주한것을들수있다 ( 박진환 김광길, 1999). 또한러일전쟁이끝난 1906년경부터봉천일대에평안도출신들이주로이주하여벼농사를이식한사실을들수있다 ( 김영, 2009). (2) 정치이주기이어진 정치이주기 는한일합방 (1910) 을전후로하여만주사변 (1931) 까지한일합방에따른항일독립을목적으로한항일인사의이주와일제에의한토지조사사업으로농토를잃은소작인과빈농이대거이주한시기이다. 조선인에대한실효지배를목적으로하여청일간에일본영사관을간도에설치하는것을골자로하는 간도협약 (1909) 체결과이어진한일합방 (1910) 으로정치적이유로인해간도와백두산내륙지역으로의이주가증가하였다. 특히, 조선총독부에 - 171 -
최재헌 김숙진 의한 토지조사사업 (1910~1918) 과 1920년대산미증식계획에따라토지를잃은농민들의만주이주가급증하면서조선인마을이독립운동의거점이되었다. 이시기동안만주지역에서는조선독립을위한정의부, 참의부, 신민부가결성되는등항일무장투쟁이본격화되었는데일본은독립군의봉오동전투 (1920) 에대한보복으로 1만명이넘는조선인을학살하고취락을불태우는만행을저질렀다. 또한항일인사체포와인도를위한미쯔야협정 (1925) 을체결하는데이른다. 이주자의출신지도이전시기와달리평안도와함경도에서한국의여러지방으로다양해졌다. 연변지방의경우조선족은주로논농사에유리한토질과개간지가있던해란강중하류에분포하였으며, 연길과화룡, 훈춘, 안도, 돈화현으로주거지역을확대하였다 ( 그림 2). 이시기에수전면적도 0.01% 에서 4% 로확대되었으며이주민의증가에의해학교수가증가하고소규모도시들이생겨났다 ( 심혜숙, 1992). (3) 강제이주기 강제이주기 는 1931년부터 1945년사이에일제의이민정책에의해만주로강제이주한개척민들과빈농들이대거동북지방으로이주한시기로서, 당시조선인이주는동북지방의항일유격대활동을억제하고만주를일제의통치하에두려는대륙침략정책의일환이었다. 일본은만주사변 (1931) 을일으키고만주국을세우면서만주를일본의전쟁식량기지로만들기위해집단이민정책을실시하였다. 만주척식주식회사 (1935) 를내세워개척촌을건설하고조선인을강제이주시킴으로써흑룡강성과길림성중부, 북만주일대하천부근에한반도남부출신들의집단촌이세워졌다. 당시이민단부락은의도적으로산지와함께수전이유리한하천연변의평야지대에집중하였다. 또한철도부설사업에따라조선인의이주는이전시기와달리 1930년대개통된철도노선을따라이루어졌다. 조양천-개산툰선, 화룡-조양천선, 도문-목단강선, 도문-돈화선이건설되어이주통로가되었다. 예를들어당시흑룡강성이주민은청진-도문-목단강철도를통해동녕과호림을거치거나청진-조양천- 돈화-교하철도를따라하얼빈과치치하얼로이주 하는노선이일반적이었다. 그결과조선족인구밀집지는한반도접경지대인길림성지역을벗어나 1930 년대중반이후에는흑룡강성일대로확대되었다 ( 그림 2). 한편, 이들조선족의출신지방은각지역과이주시기에따라상이한패턴을보인다 ( 김일학 박용한, 2009; 리흥국등, 2010). 먼저압록강유역은평안도이주민, 그리고두만강일대는함경도이주민이주류를차지하여지리적인근접성 (proximity) 이중요한요인이되었다. 예를들어 1910~1921년재만조선인의원적통계표 (1922) 을분석한자료에의하면두만강인근의북간도는함경북도출신이인구의 70% 인반면, 압록강인근의서간도는평안북도출신이 37% 이고다음으로경상북도와함경북도가각각 10~20% 를차지하였다. 한편, 흑룡강성일대에는일제에의한집단촌에이주하였던경상도와전라도출신들도다수분포하였다. 1932년의남북조선인분포에대한자료를분석한결과를보면재만조선인 49만명중, 44 만명인약 89% 가북부지방출신이며, 남만주지방에서는한반도북부가 90.8%, 남부가 9.2% 인반면, 북만주지방에서는한반도남부출신이 52%, 북부출신이 48% 의비율을보인다 ( 주성화, 2007). 이렇게이주시기에따라원적지분포가다르게나타나는이유는 1936년을경계로그이전은한반도북부지방에서자유의지에의해가까운두만강과압록강유역, 그리고중러국경지역및흑룡강성과요녕성의일부내륙지역으로이주하였고, 그이후에는조선인개척민을위주로한강제이주에의해한반도남부지방의이주민들이흑룡강성과길림성의내륙지역에이주한데서찾을수있다. (4) 경제이주기 경제이주기 는해방이후중국에남은조선인들이 1990년대들어와한국과의교류가활발해지면서경제적목적의이주가활발하게진행되고있는시기로서중국조선족농촌공동체가해체되고한국에서의노동경험을축적한중국조선족들이농촌에서벗어나연안도시로이주하는현상이우세하다. 광복 (1945) 이후만주에있던조선인중에서약 50-172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만이귀국하고, 구소련의극동지역에있던일부조선인이중국흑룡강성의밀산, 호림일대로이주하였다. 사실구소련의러시아의연해주일대는동만주지방과공동생활권으로인식되어많은조선인이이주하였지만, 1860년베이징조약의결과아무르강동쪽이러시아에편입하면서중국동녕현과애훈등의지역으로조선인의재이주가이루어졌고, 1890년대초에는시베리아와간도의조선인이대규모로북만주일대로이주하면서동녕, 영안, 해림, 목릉등일대에조선인개간민촌을형성하였으며, 1917년극동지역정세불안과 1928년구소련의사회주의집체화정책등을이유로연해주의조선인은다시북만주중국동북지방으로이주하는등복잡한과정을거쳤다 ( 서명조, 1985; 주성화, 2007). 특히, 1937년극동지역조선인의중앙아시아강제이주는연해주와중국조선인의정체성에차별화를가져온큰사건이었다. 당시 171,781명이강제이주되었고 76,625명은우즈베키스탄으로, 95,256명은카자흐스탄으로강제이주하였다 ( 기광서, 2002). 그결과소련해체전에연해주 43,000명의한인을포함하여총 438,650명의한인인구가구소련에거주하였다. 1949년중화인민공화국수립이후 1952년연변조선족자치구설립과 1955년연변조선족자치주승격, 그리고장백산조선족자치현과자치향등이설립된뒤에조선족은중국국적을가지게되었으나중국의호구제에따라원적상황에는큰변화가없이중국동북 3성에남아있었다고볼수있다. 즉, 두만강과압록강유역은각각함경도와평안도출신이많고, 내륙에있는흑룡강성은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충청도등출신지가다양하고, 길림성은경상도와평안도두개지역출신이우세하며, 요녕성은경북, 평안도, 강원도등의출신들이주로분포하는패턴을유지하였던것이다. 중국조선족인구의가장큰변화는한중수교가이루어진 1990년대들어와서일어났다. 경제적기회를찾아한국으로의이주와동북3성에서벗어나중국의연안도시로이주하면서과도한인구유출로인해동북 3성농촌지역의조선족집거구가없어지거나합병되는등공동체해체의문제까지봉착하게되었다. 한편 으로는과도한조선족의유입에따라한국에서도국내저임금시장을잠식하는등노동시장교란문제와불법체류자문제가사회적부담으로작용하고있다. 2) 중국조선족인구변화와지역분포패턴 (1) 중국조선족인구변화해방이후중국에거주하던조선인의약절반이귀국한것으로추정되지만중국통계에따르면조선족인구수는 1953년 1,120,405명, 1964년 1,339,567명, 1982년 1,765,204명, 1990년엔 1,923,361명, 2000년에는 1,923,842명, 그리고 2010년에는약 1,830,000 명으로증가폭이크지않으며 2000년이후부터인구수가오히려감소하였다 ( 표 2). 특히, 2000~2010년사이연평균 -4.8% 의속도로감소하였다 ( 표 4). 이런급속한인구감소의원인으로는중국전체와소수민족의인구증가율과비교하였을때낮은인구증가폭, 그리고빠른출산률감소와함께경제성장에따른도시화의영향도중요한요인으로꼽힌다 ( 김두섭 유정균, 2013). 한예로 1971년 4.42였던총출산율이 1974 년에 1.89로떨어졌고, 1989년에는 1.56, 1999년에는 1.1로낮아졌다 ( 권태환, 2005, 18). 조선족의인구분포에서보면동북3성은여전히조선족인구의최대집적지로나타난다. 동북3성이조선인인구에서차지하는비율은 1953년 99% 에서, 1964년 97.7%, 1982년에 97.9%, 2000년에 92%, 그리고 2010년에약 88% 로점차낮아지는추세를보인다 ( 표 2). 이를각성별로나누어보면조선인인구수는길림성이가장높으며이어서흑룡강성과요녕성이순으로나타난다 ( 표 3). 그러나각성의전체인구수는증가하는반면조선인인구수는감소하기때문에각성에서조선인인구의비율은계속낮아지고있다. 그결과 2010년길림성의조선인비율은 3.79%, 흑룡강성은 0.86%, 요녕성은 0.55% 에불과하다 ( 표 3). 특히, 조선족이가장집중거주하고있는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의경우에도 1995년 859,956명을정점으로 2000년에는 842,135명, 2010년에는 736,991 명으로감소하였다. 따라서연변조선족자치주전체인구수에서조선족이차지하는비중도 1978~2010년 - 173 -
최재헌 김숙진 표 2. 중국조선인인구수와동북3성인구비율의변화 (1953-2010) 인구 (10,000명) 연도 중국전체인구수 조선족인구수 동북3성인구수 ( 비율 ) 1953 59,435 112 111.9 (99.9) 1964 69,794 135 131.9 (97.7) 1982 100,818 177 173.3 (97.9) 1990 113,368 192-2000 126,583 192 177.5 (92.2) 2010 1,339,720 183 160.7 (87.8) 출처 : 김두섭 유성균 (2013) 재인용, 자료 : 연변조선족자치주통계국 (2012) 표 3. 중국동북3성의조선족인구수와비율의변화 연도 길림성흑룡강성요녕성전체인구조선족비율 (%) 전체인구조선족비율 (%) 전체인구조선족비율 (%) 1953 11,290,073 756,026 6.69 11,897,039 231,510 1.95 20,386,458 132,869 0.65 1964 15,668,663 866,627 5.53 30,132,771 307,594 1.53 26,946,200 146,513 0.54 1982 22,560,024 1,104,074 4.89 32,665,512 431,644 1.32 35,721,693 198,252 0.56 2000 26,802,191 1,145,688 4.27 36,237,576 388,458 1.07 41,824,412 241,052 0.58 2010 27,452,815 1,040,167 3.79 38,313,991 327,806 0.86 43,746,323 239,537 0.55 자료 : 김병호 (1991), 중국인구센서스통계 (2000, 2010) 동안에 40.6% 에서 36.5% 로급격하게낮아졌다 ( 그림 2). 자치주의지정요건이소수민족비율이 30% 이상이라는점을고려하면조선족자치주의해체가현실이될우려도있다 ( 이병기, 2006). 더구나조선족은행정구역상 50여개의자치향 ( 진 ) 과 1개의자치현, 그리고 1개의자치주를가지고동북3성전역에서촌락을단위로집거하고있기때문에인구감소가지속된다면농촌공동체의해체와현재중국정부가지정한집거구의해제로이어질수있다. 한편으로동북3성의조선족인구가줄어드는반면 2000년이후중국해안에자리한연해도시들과일부대도시의조선족인구수가늘어나는경향을나타낸다. 2000년과 2010년의중국성시별조선족인구분포를살펴보면기존의조선족집거지였던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내몽골은모두인구감소를겪고있고그밖의중국내다른지역에서도조선족인구가줄어들고있는반면에, 산동, 북경, 천진, 광동, 상해, 강 그림 2. 연변조선족자치주의조선족인구변화 (1978-2011) 자료 : 김두섭 유정균 (2013), 연변조선족자치주통계국, 2012 소, 광서, 복건, 절강등의연해도시지역이나대도시에서는조선족인구가증가하였다 ( 표 4). 특히연해도시의인구증가가두드러지는데, 동북3성과내몽골이외의연해지역에거주하는조선족인구수는 2000 년 85,396명에서 2010년에는 177,934명으로크게증 - 174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표 4. 중국조선족의중국지역별분포와증가율 (2000-2010) 구분 2000 2010 증가율 전국 1,923,842 1,830,929-4.8 길림 1,145,688 1,040,167-9.2 흑룡강 388,458 327,806-15.6 요녕 241,052 239,537-0.6 산동 27,795 61,556 121.5 내몽고 21,859 18,464-15.5 북경 20,369 37,380 83.5 하북 11,783 11,296-4.1 천진 11,041 18,247 65.3 광동 10,463 17,615 68.4 상해 5,120 22,257 334.7 강소 5,048 9,525 88.7 하남 4,312 1,457-66.2 사천 3,137 1,548-50.7 호북 2,949 1,960-33.5 호남 2,693 1,180-56.2 안휘 2,660 1,200-54.9 광서 2,008 2,701 34.5 산서 1,813 663-63.4 복건 1,785 2,157 20.8 절강 1,767 6,496 267.6 강서 1,703 543-68.1 운남 1,693 1,343-20.7 섬서 1,620 1,129-30.3 감숙 1,565 559-64.3 신강 1,463 1,128-22.9 귀주 1,192 664-44.3 충칭 1,044 637-39.0 해남 786 973 23.8 녕하 472 403-14.6 청해 453 312-31.1 서장 51 26-49.0 자료 : 중국인구센서스, 2000, 2010 주 : 음영지역은인구증가지역임. 가하였다 ( 표 4). 그리고, 상해와산동성, 절강성 ( 항 주 ), 강소성 ( 소주 ), 북경등의대도시지역에거주하는조선족수가크게늘어나고있어조선족의집거지가동북3성에서벗어나연해도시지역, 대도시로확대되고있음을알수있다. (2) 중국조선족인구분포의지리적해석앞에서언급한바와같이중국조선족의분포는누적된이주과정의산물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이와같이역사적사건에따라시기별로다르게조선족이정착하는과정은기존의연구결과 ( 심혜숙, 1992) 에서이용한자료를통해해석할수있다 ( 표 5). 첫째, 1916년조선족인구가만명이상거주하는도시는길림성에서는통화시 ( 집안현, 통화 ), 백산시 ( 임강시, 장백자치현 ), 연변조선자치주에서는용정, 화룡, 왕청현, 요녕성에서는본계시 ( 환인자치현 ) 로나타나이들이조선족밀집지로서초기의중심지가되고있다. 이들은대부분논농사가일찍부터도입된지역으로서조선족의인구분포가논농사의분포지와밀접한관련성을보이고있음을알수있다. 특히, 1910년대에조선족의중심지역은대부분국경에인접한지역들로나타나인접지역으로의이주가뚜렷하며근접성에따른접촉확산의형태로서해석된다. 둘째, 1916년과 1930년, 그리고 1936년을비교하면각시기별로새롭게조선족의중심지역으로부상한지역이확인된다. 길림성의경우 1916년에조선족이분포한기존도시들중심으로 1930년에는거의모든도시에서인구증가가있었으며, 연변자치주훈춘이새로운조선족중심도시로부상하였다. 요녕성의경우에도조선족인구는유사하게 1916년에정착한지역을중심으로하여 1930년에는거의모든도시에서증가하였으며, 무순시의신빈과청원자치향에서조선족인구가새롭게증가하였다. 흑룡강성에서는 1930년부터하얼빈을중심으로북부에있는오상시, 연수현, 목란현등에서조선족인구가증가하였다. 특히, 철도교통이편리한하얼빈과밀산시의경우인구수의증가폭이더크게나타난다. 이것은 1930년부터시작된일제에의한강제이주가흑룡강성을중심으로이루어졌음을시사한다. 1936년에는일부자료미비로인구가제시되지못하였으나전반적인추세는기존의조선족인구집적지를중심으로인구가증가하는추세를보인다. 이런경향은교통의요지를중심으로한계층확산으로서해석이가능하다. 셋째, 2000년의도시별로인구의분포를보면길림성의경우초기조선족중심지들이이후인구밀접지 - 175 -
최재헌 김숙진 성도시명구, 시, 현 길림성 길림시 통화시 장춘시 백산시 표 5. 조선족인구규모별동북 3 성도시분포 조선족인구수 ( 명 ) 1916 년 1930 년 1936 년 2000 년 서란시 - 568 - 화천시 1,398 3,122 - 반석시 92 2,361 - 영길현 23 1,856 - 통화 / 동창 / 이도강 10,275 13,980 9,029 매하구해룡현 1,507 2,459 5,737 집안 22,533 16,082 15,032 휘남 171 981 1,775 유하 5,356 8,098 6,879 이도 / 남관 / 조양 90 1,379 - 쌍양 60 581 - 유수시 - 1,012 - 농안현 20 118 - 임강시 10,085 1,295 3,170 무송현 2,200 3,275 166,000 99,000 48,000 25,000 장백자치현 9,770 11,110 22,246 연길시 연길시 - - - 200,000 용정시 용정시 79,486 - - 190,000 화룡시화룡시 22,782 100,344-152,000 길연변왕청현왕청현 25,965 38,074-85,000 림조선족도문시도문시 - - - 82,000 성자치주훈춘시훈춘시 - 49,452-80,000 안도현 안도현 2,915 4,296-52,000 돈화시 돈화시 55 7,864-22,000 화평 178 8,033 22,298 신민 86 207 2,824 심양시 법고현 36 86-83,000 용중 - 34 529 강평 1 156 - 순성 / 신무 / 동주 377 4,373 16,036 무순시 청원자치향 - 1,202 4,436 49,000 요녕성 신빈자치현 - 19,256 14,501 철령현 61 2,428 6,131 철령시 청하 / 개원 40 3,858 9,722 23,000 서풍 123 2,004 2,733 진흥 / 원보 / 진안 4,861 9,903 19,112 단동시 봉성 580 3,228 5,711 15,000 관전자치현 9,838 10,076 8,417 본계시 본계 118 474 1,745 환인자치현 13,480 17,188 10,348 14,000 요녕성 반금시 반금 - - 1,029 12,000-176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요녕성 흑룡강성 안산시해성시 15 11 2,098 10,000 대련시 - - - - 10,000 목단강시 하얼빈시 가목사시 계서시 녕안 3,000 5,359 32,056 목릉 24 1,534 4,647 동녕 197 2,875 8,001 아성 338 2,011 2,874 쌍성 - 733 613 하얼빈 - 1,980 7,092 오상시 - 733 2,856 방현 - 812 1,552 통하현 - 836 963 연수현 - 1,722 3,111 목란현 - 1,010 976 미란현 - 834 4,151 탕원 - 895 1,265 화천현 - - 1,324 부원현 - - 2,511 호림시 - - 1,295 계동현 - 550-134,000 49,000 47,000 34,900 밀산시밀산시 1,090 4,207 11,906 25,600 치치하얼태래현 - 766 862 19,000 학강시라북현 - 740-11,000 북경북경시 - - - 20,000 산동성청도시 - - - 28,000 기타지역 - - - 137,500 총계 231,142 380,351 281,529 1,923,000 출처 : 김재기, 2005, 중국조선족농촌집거구해체위기와집중촌건설, 통일문제연구, 44, p.115 자료 : 중국 2000 년인구센서스 (2002) 주 : - = 자료없음. 표 6. 인구규모별동북 3 성도시의분포체계 (2000) 구분 조선족인구수 1 만명 ~5 만명 5 만명 ~10 만명 10 만명 ~20 만명 20 만명이상 길림요녕흑룡강길림요녕흑룡강길림요녕흑룡강길림요녕흑룡강 지역명 장춘백산돈화 무순철령단동본계반금안산대련 하얼빈가목사계서밀산치치하얼학강 통화왕청도문훈춘안도 심양 - 용정길림화룡 - 목단강연길 - - 소개 3 7 6 5 1 0 3 0 1 1 0 0 자료 : 저자정리 - 177 -
최재헌 김숙진 역으로발달한경향을찾아낼수있다. 길림성에서는 1910년대인구밀집지였던길림시, 통화시, 장춘시, 백산시가 2000년에이르기까지도시위계를그대로유지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수위도시인연길시는일제강점기이후에급격하게발달하였으며초기에조선족인구밀집지인용정, 화룡, 왕청현, 도문시, 훈춘시, 안도현, 돈화시의경우에도위계성을가지면서발달하였다. 흑룡강성에서는하얼빈 ( 아성 ) 과밀산을제외하고는거의대부분이 1930년이후에조선족인구가거주하였으며, 조선족밀집거주지역으로는목단강시, 하얼빈시, 가목사시, 계서시, 밀산시, 치치하얼시, 학강시의순으로나타난다. 현재조선족인구분포는각성별로보면 1930년대조선족인구수의위계와거의유사한모습을유지하고있어초기접촉확산이일어난이후교통의요충지를중심으로한인구집중이지속적으로유지된결과로해석된다. 특히, 2000 년에이후에는북경과청도와같이대도시중심으로조선족인구가새롭게증가하고있는경향이확인된다 ( 표 5). 한편, 김병호 김재기 (2003) 는중국조선족의분포형태를동북3성조선족의거주지가서로연결되면서계층이나누어져있는닭볏의형태 ( 계관형상 ), 또는부채모양의형태로해석하였다. 즉, 남쪽은국경으로막혀있기때문에연변 ( 연길, 용정, 도문 ) 을중심지역으로하여거리증가에따라동쪽, 북쪽, 서쪽으로조선족인구수가감소하는형태라는것이다. 이들도시들을인구규모에따라살펴보면길림성연길이인구 20만이상도시로가장큰도시이고, 다음 10만명 ~20만명의도시에는길림성의용정, 길림, 화룡, 흑룡강성의목단강시가해당한다. 차하위의인구 5만명 ~10만명사이도시로는요녕성의심양이요녕성에서조선족인구가가장많은도시이며, 길림성에서는통화, 왕청, 도문, 훈춘, 안도가여기에해당된다. 그다음계층인 1만명 ~5만명사이의도시로는길림성의장춘, 백산, 돈화, 요녕성의무순, 철령, 단동, 본계, 반금, 안산, 대련, 그리고흑룡강성의하얼빈, 가목사, 계서, 밀산, 치치하얼, 학강시순으로나타난다 ( 표 6). 즉, 연변지구에가장많은조선족인구가거주하고, 다음으로흑룡강성의목단강시, 하얼빈시가, 그다음조선족인구집적지이며, 길림성의길림, 장 춘, 백산, 돈화가그다음집적지이고, 마지막으로요녕성의무순, 철령, 단동, 본계, 반금, 안산, 대련등이가장작은규모의인구집적지로나타난다 ( 그림 2). 넷째, 이런조선족인구의지리적인분포패턴을자세히보면위도와관계가있어하얼빈을중심으로대부분그남쪽과동쪽에분포하고있다. 이곳은모두북위 50도이남에해당하여벼농사가가능한곳이다. 가장북쪽에있는조선족촌은흑룡강성손오현연강향동광촌이고제일동쪽에있는조선족촌은흑룡강성무원현조길향영강동방조선족촌으로알려져있다. 중국조선족은주로강하천유역이나평탄한지역과철도연변에분포하는데, 목단강, 송화강, 목릉하, 해랑하, 마연하, 수분하, 탕왕하, 왜긍하, 라림하, 눈강등의강하천유역과, 삼강평원, 흥개호평원, 송눈평원지역이여기에해당한다. 또한흑룡강성에서조선족이집거하고있는 30개현이나길림성에서조선족이집거하는 23개현, 요녕성의철령, 심양, 무순, 본계, 단동등은모두철도연변에위치한다. 다섯째, 조선족의민족자치지역은중국의정치상황에따라많은변화를겪었다. 1952년 8.9. 중화인민공화국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 이발표되면서 1952년 9월 3일연변조선족가치구가성립하였다. 1954년부터는자치주, 자치구, 자치현으로나누어지고, 하부단위인자치향이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 내몽고자치구등에서만들어졌다. 1956년구와촌급의조선족자치단위를 30개의조선족자치향으로변경하였고 1958년에는자치향이인민공사로다시바뀌면서문화혁명때폐지되었다가, 1985년이후 16개의조선족자치향을회복하였다. 2000년을기준으로동북3성중국조선족의민족향 ( 진 ) 의개수는흑룡강성 (19개소) 이가장많고이어서요녕성 (17개소), 길림성 (11개소) 의순이며, 인구수에서는요녕성 (111,740), 흑룡강성 (95,074), 길림성 (47,573) 의순으로나타나조선족민족향의경우에는벼농사재배에용이한요녕성과흑룡강성일대에많이분포하고있음을알수있다 ( 표 7). 동북3성에있는조선족민족향 ( 진 ) 은전체조선족인구의약 10% 를차지하고대부분다른민족이나한족과잡거하고있지만, 정착과정에서조선족만이있는조선족민속촌도 2,000여개가있다. 이중에서연변 - 178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그림 2. 동북3성조선족의인구분포변화 (1916, 1930, 1936, 1990, 2000) 자료 : 김재기, 2005, 115 / 중국 2000년인구센서스 (2002) 자치주에 1,000개, 흑룡강성에 500개, 길림성에연변을제외한산거지구에 300개, 요녕성에 260여개, 내몽고자치주에 30여개의조선족촌이분포한다 ( 김재기, 2003). 그러나앞으로이들조선족민족촌이인구유출에따라그수가감소하고많은문제에봉착할것으로예상된다. 3) 이주에따른중국조선족사회의변화중국조선족공동체는단순한종족이나혈연적개념이아니라정치적의미를띤역사적개념으로접근하고, 시대적현실을반영한조선족인구의뚜렷한공간확산과정은지리적인해석을필요로한다. 조선족사회의변화는이주에따른농촌사회의변화와직결되어다양한문제에봉착하고있으며위기와함께 새로운변화과정을보여주고있다 ( 권태환 박광성, 2004; 김재기, 2005; 김홍배, 2014; 박광성, 2010; 여필순, 2013) 첫째, 조선족의인구이동과관련한인구문제를들수있다. 인구성장률이지속적으로감소하고해외유출인구수가계속증가하고있으며, 농촌지역에서의여성인구유출에따라성비불균형문제와농촌총각들의혼인문제가발생하였다. 또한청장년층농업노동력이이주함으로써농촌노동력의고령화문제와함께한족농민들의조선족촌진입으로노동력의양적, 질적변화가야기되어농촌마을의해체로이어지고있다. 이것은과거농촌을기반으로한중국조선족공동체와정체성에큰변화가발생한것으로해석된다. 그러나동북3성에집단이민을통해조선족만의폐쇄적생활공간을형성하였던과거와달리, 한국 - 179 -
표 7. 동북3성중국조선족민족향 ( 진 ) 의설립연도, 인구수 (2000년) 최재헌 김숙진 성 현시 민족향명 설립연도 인구수 개수 인구소계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동풍현 삼합민족조선족향 1996 3,391 영길현 토성자민족조선족향 1961 12,195 교하시 오림조선족향 1957 3,745 류하현 삼원포조선족진 1984 3,420 류하현 강가점조선족향 1956 4,281 휘남현 루가조선족향 1956 2,700 통화현 대천원조선족만족향 1989 5,426 통화현 금두조선족만족향 1983 3,116 집안시 량수조선족향 1984 1,706 매하구시 화원조선족향 1984 3,879 매하구시 소양만족조선족향 1987 3,714 의란현 연란조선족향 1985 2,665 오상시 민락조선족향 1984 5,326 상지시 하동조선족향 1985 6,012 상지시 어지조선족향 1990 2,842 해림시 신안조선족진 1984 7,944 영안시 와룡조선족향 1987 5,409 영안시 강남조선족만족향 1987 9,075 동녕현 삼차구조선족진 1984 7,365 화천현 성화조선족향 1984 3,781 탕왕현 탕왕조선족향 1985 8,800 밀산시 하평조선족향 1985 5,377 밀산시 홍개호조선족향 1985 4,048 계동현 계림조선족향 1983 9,350 계동현 명덕조선족향 1985 3,139 우의현 성부조선족만족향 1989 2,159 몽북현 동명조선족향 1984 3,576 수화시 홍화조선족향 1956 3,642 철력시 년풍조선족향 1985 2,806 북안시 주성조선족향 1956 1,758 심양시 동릉구혼하참조선족향 1984 7,018 심양시 석불조선족석백족향 1992 6,000 심양시 우홍구대흥조선족향 1983 4,262 안산시 송삼태자조선족만족진 1985 6,000 무순시 전전조선족진 1984 5,141 무순시 리석채조선족진 1984 5,558 무순현 대남조선족만족향 1984 4,200 신빈현 왕청문조선족진 1985 3,192 청원현 남팔가조선족진 1985 1,392 환인현 아하조선족향 1965 11,500 환인현 륙도하조선족향 1985 7,000 환인현 괴마자조선족향 1985 12,200 환인현 보락보조선족진 1985 7,451 관전현 하로하자조선족향 1985 1,468 개원현 석백족조선족향 1984 17,413 대와현 영흥조선족향 1984 5,000 해성시 송치자조선족만족진 1985 6,945 자료 : 김재기, 2003 재인용 ( 沈林, 2001, 中國的民族鄕, 北京, 民族出版社, 161-227) 11 47,573 19 95,074 19 95,074 17 111,740-180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과연해지역, 기타해외로의이주를통해중국조선족의생활영역의개방적확대가이루어지고또다른디아스포라공간을형성하고있는중이라할수있다. 이는중국동북3성을중심으로한중국조선족의디아스포라가농촌공동체에서벗어나새로운공간에서조선족도시공동체로질적변화를하는것을의미한다. 이미조선족이주의목적지인한국이나중국연해지역, 기타해외지역에서는이런새로운조선족도시공동체가출현하고있으며이에따른디아스포라경관을형성하고있다. 둘째, 교육문제와함께농촌의인재고갈문제를들수있다. 한국으로의노동이주, 연해도시로의진출, 여성의혼인이주, 출산률저하, 거주지역의확산등에의해조선족학령아동수가점차감소하고조선족학교의학생수가감소하면서조선족학교통폐합이일어나는등민족교육이심각하게위축되며, 주류사회인중국사회에서정치적기반이되는조선족간부수가동북3성을중심으로하여줄어들고있다는지적이있다. 그러나최근연해도시나한국으로의이주현상은고립된조선족만의교육환경에서벗어나글로벌한교육을받을기회로작용한다면중국에서새로운인적경쟁력을구축할수있는전기가될수있다. 특히조선족청소년들에게글로벌교육과민족정체성교육을결합하도록지원이이루어진다면새로운돌파구마련도가능할것이다. 셋째, 농촌마을의인구감소로인한행정통폐합에따라조선족의전통풍습이사라지고마을공동체가와해되는문제를들수있다. 그러나최근농촌에서떠나도시지역으로의주거지이동에의해길림성과흑룡강성에서도시지역에조선족의아파트촌이나집거구또는집중촌건설이진행되고있는사실을볼때, 도시지역의조선족집거지를새롭게형성하고이를바탕으로양질의교육환경과전통보존환경및투자환경의조성이이루어진다면오히려지속가능한조선족공동체건설의계기가될수있을것이다. 즉, 오늘날중국조선족사회에서많은농촌마을이급격히해체되고있지만소도시지역이새로운조선족의집거지로변화하고있는모습이관찰된다. 또한조선족의생활영역이경제적기회를찾아동북3성을넘어한 국과전중국으로확대되고연해지역도시에새로운형태의조선족타운이생겨나고있는진행형으로볼수있다. 그러므로최근발생하고있는중국조선족의디아스포라공간의변화는중국조선족공동체의재구조화과정으로이해하여연변중심의단일지역에서벗어나네트워크를통한다양한지역으로의디아스포라공간확대과정으로전환하고있다고해석할수있을것이다. 3. 요약및결론 중국조선족은동북3성에서밀집거주함으로서한반도밖에서의민족공간을형성하고있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가있으며, 그시기별정착과정과이주패턴및인구분포를공간적인시각에서해석할필요가있다. 중국조선족의중국정착사를살펴보면 18 세기부터자연재해와강제이주로시작하여냉전이전이 1980년대말까지북한과의밀접한관계를형성하였고동북3성, 특히연변조선족자치주에집중적으로거주하면서벼농사위주의농촌촌락중심의안정된생활을유지하였다가 1990년대부터개혁개방정책과한국과중국과의국교정상화로한국으로의이주가증가하면서출산력저하와함께인구수가감소하고빠른속도로농촌촌락의해체를겪고있으며, 중국내연해지역과대도시로, 다시일본, 미국, 유럽등의글로벌차원으로이주네트워크가넓어지고있는특징이나타난다. 중국조선족의이주과정은청이봉금령을폐지한 19세기이후에본격적으로이루어졌으며시대별주요사건에따라 4단계로구분할수있다. 즉, 19세기후반에서한일합방 (1910) 이일어난 난민월경기, 1910년에서만주사변 (1931) 에이르기까지항일독립과일제에의해농토를잃은빈농들이정치적목적을가지고이주한 정치이주기, 1931년에서해방 (1945) 에이르는시기동안일제의대륙침략정책의일환으로개척민들이강제적으로집단촌을만들어이주한 강제이주기, 그리고 1945년이후 1990년대한중국교정상 - 181 -
최재헌 김숙진 화로교류가본격화된최근에이르는 경제이주기 로구분가능하다. 이주시기에따라원적지의분포가다르게나타나길림성과요녕성의국경에접한부근은함경도와평안도출신이많은반면흑룡강성과내륙지역에는한반도남부출신들이많이분포하고있다. 특히, 조선인의중국으로의이주는만주지역에걸쳐서일어났으며벼농사의재배와밀접한관련이있다. 한일합방에서해방직전에이르는기간동안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의동북3성의조선인인구는지속적으로증가하여해방직전에는 216만명에이르렀으며, 해방이후에도 112만명을유지하였고 2000년까지지속적으로증가하여 192만명이었으나이후출산률감소와도시화의영향으로계속감소하는추세이다. 동북3성이조선족인구의최대집적지였으나최근연해지역대도시의비중이커지면서그비율이낮아지고, 조선족의집거지가동북3성에서벗어나연해도시지역으로확대되고있다. 조선인인구수는길림성이가장높고이어서흑룡강성과요녕성의순으로나타난다. 연변의경우조선족인구가차지하는비율이급격하게낮아지고있다. 중국조선족의인구분포는누적된이주과정의산물로서국경에서가깝고논농사가일찍도입된지역들이인구밀집지역으로나타나며기존의인구밀집지를중심으로누적적으로인구가증가하는추세를보인다, 즉, 초기정착지들이이후에도누적된인구집적지로발달하여안정된특성을나타낸다. 1930년대이후에는흑룡강성으로조선족거주지역이확대되었는데이것은강제이주가흑룡강성을중심으로이루어진결과로해석된다. 대부분이중국조선족인구는북위 50 도를경계로그남쪽에분포하고있어벼농사와관계가깊음을알수있다. 또한조선족자치향 ( 진 ) 의분포도벼농사재배에용이한지역에주로분포하고있는특징이있다. 도시규모별분포는연길을수위도시로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의도시들과흑룡강성의목단강시와하얼빈시가차하위를차지하고, 이어서요녕성의심양, 길림성의통화등연변인근이도시, 다음으로요녕성의도시들이가장차하위집적지를형성하는형태를보인다. 즉, 지리적근접성에따라시기별이주과정의차이가발생하고, 이주과정에서원 적지별로집단촌을건설하는연쇄이주가이루어졌던것이다. 조선족취락의발달을확산 (spatial diffusion) 의개념으로파악할때벼농사재배지가확산되는접촉확산의특징으로부터철도를따라도시지역으로조선인취락이확대되는계층확산으로그특징이변하였다. 한편, 1990년대이후중국내연해지역과대도시, 한국을비롯한타국가로의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공간적변화가일어나는데, 이로인한중국조선족사회는인구문제와교육및민족정체성문제, 농촌공동체의와해문제들에봉착하고있다. 하지만, 이런문제와변화를농촌공동체에서벗어나도시공동체로질적변화를하는과도기적과정으로서이해하고새로운기회의계기로삼을필요가있을것이다. 즉, 동북3성위주의농촌공동체대신에연해대도시위주의도시공동체를건설하고, 폐쇄적민족교육에서개방적글로벌교육으로전환하여새로운조선족인재양성의계기로삼으며, 양질의교육과투자환경을조성하여지속가능한조선족공동체건설을꾀할수있다. 따라서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공간변화는중국조선족공동체의재구조화과정으로이해하고공간의다변화과정으로이해할수있다. 이런측면에서앞으로의연구는현재한국에서의중국조선족의디아스포라형성과정에대한연구뿐만아니라, 급격하게변화하며기존의농촌공동체의와해를겪고있는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공간변화라는상황에서, 조선족정착과정에대한역사지리학적연구를통해과거의경관복원, 지명문제, 중국조선족의마을구성과경관해석등의연구가시급하며, 공간스케일을고려하여농촌지역중심의중국내부에서의조선족공동체의변화와방향, 중국조선족이목적지가되고있는한국과해외지역에서의적응과정과공동체에대한연구등이함께이루어질필요가있다. 또한, 농촌공동체에서도시공동체로의질적변화에대한대응방안, 중국조선족의정체성교육방안, 이주과정에서의사회적적응과사회적병리문제, 지속가능한중국조선족공동체건설을위한계획과방안등에대하여체계적인연구가지속되어야할필요가있다. - 182 -
중국조선족디아스포라의지리적해석 주 1) 본논문에서는이해를쉽게하기위하여중국지명을중국발음이아닌우리말한자발음을이용하여표기하였다. 참고문헌강위원, 2005, 흑룡강성의조선족, 고함커뮤니케이션. 강위원 김시덕 안화춘, 2005, 중국흑룡강성조선족생활문화의지속과변동 : 의례와축제를중심으로, 한국사진학회지, 12, 206-217. 권태환, 2005, 중국조선족사회의변화 1990년이후를중심으로, 서울대학교사회발전연구총서 23, 서울대학교출판부. 권태환 박광성, 2004, 중국조선족대이동과공동체의변화 : 현지조사자료를중심으로, 한국인구학, 27(2), 61-89. 기광서, 2002, 구소련한인사회의역사적변천과현실, 2002 재외한인학회연례학술대회논문집. 김강일 허명철, 2001, 중국조선족사회의문화우세와발전전략, 연변인민출판사. 김경일 윤휘탁 이동진 임성모, 2004, 동아시아의민족이산과도시 : 20세기전반만주의조선인, 역사비평서. 김두섭 유정균, 2013, 연변조선족인구의최근변화 : 1990년, 2000년및 2010년중국인구센서스자료의분석, 중소연구, 36(4), 121-149. 김병호, 1991, 중국조선족인구와분포문제에대한연구, 동아연구, 22, 131-163. 김병호, 1992, 중국조선족의인구발전과분포변화의추세, 동아연구, 25, 239-253. 김병호, 1993, 중국조선족인구간론, 중앙민족대학출판사, 연변. 김병호, 1997, 중국의민족문제와조선족, 학고방. 김선호, 1999, 20세기초조선족의중국내몽골지역이주과정연구, 백산학보, 66, 119-137. 김수인 김승제 김종영, 1997, 중국조선족의지역분포및농촌마을구성에관한연구, 대한건축학술발표논문집, 17(2), 553-556. 김영, 2009, 중국요녕성이벼농사와조선인이민사회 : 1875-1931, 한국학연구, 21, 71-98. 김왕배 이수철, 2008, 1930년대만주의조선족마을공동체, 동방학지, 144, 33-73. 김일학 박용환, 2009, 조선족농촌주거공간구성형태의지역적특징에관한연구, 농촌계획, 15(4), 75-87. 김재기, 2003, 중국동북3성조선족집거구의현황과특성에관한연구, 한국동북사논총, 28, 53-76. 김재기, 2005, 중국조선족농촌집거구해체위기와집중촌건설, 통일문제연구, 44, 115. 김진국, 1993, 중국에서의조선족역사연구, 조선대동북아연구, 96(1), 125-141. 김춘선, 2012, 청조시기한인이만주이주와정착 (1), 한중미래연구, 2, 21-53. 김현미, 2008, 중국조선족의영국이주경험 : 한인타운거주자의사례를중심으로, 한국문화인류학, 41(2), 39-77. 김호웅, 2010, 중국조선족과디아스포라, 한중인문학연구, 29, 1-20. 김홍배, 2014, 초국가시대해외조선족네트워크에관한연구, 평화학연구, 15(1), 29-47. 류승렬, 2007, 연변지역강원도출신자의일제강점기이주사연구, 한국사연구, 138, 217-253. 류충걸 김석주 김화, 2009, 흑룡강성조선족인구와경제, 연변인민출판사. 리화, 2012, 국경을초월하여공생하는조선족가족 : 한국이주노동으로인한분산거주경험을중심으로, 중앙사론, 36, 497-534. 리흥국 김호남 장희망, 2010, 중국조선족문화및그특색에관한연구, 연변인민출판사. 마곤, 1995, 어제날길림지구조선족개황, 김택주필, 길림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박경숙, 2009, 식민지시기 (1910-1945) 조선의인구동태와구조, 한국인구학, 32(2), 29-58. 박광성, 2006, 세계화시대중국조선족의노동력이동과사회변화, 서울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박광성, 2010, 초국적인인구이동과중국조선족의글로벌네트워크, 해외한인연구, 21, 357-374. 박진환, 1995, 중국흑룡강성의벼농사와조선족, 농업경제연구, 36, 197-236. 박진환 김광길, 1999, 흑룡강성탕왕조선족향농촌의과거와현재, 북방농업연구, 8, 44-79. -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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