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관논총_26집_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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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朝鮮王朝前期의 科擧와 身分制度 崔 永 浩* I.序論 Ⅱ. 良人의 科擧應試 Ⅲ. 賤出身의 登科 Ⅳ. 鄕吏와 科擧 V. 館軍과 科擧 Ⅵ. 良人과 仕宦 Ⅶ. 士와 良人의 區別 Ⅷ. 儒學修業과 社會身分 Ⅸ. 良人의 學校入學 Ⅹ. 儒學生의 特典 Ⅺ. 軍役과 身分 Ⅻ. 結論 Ⅰ. 序 論 朝鮮王朝는 朱子學 중심의 新儒學을 신조로 하는 儒學人들이 세운 儒敎國家였다. 이들 儒學人은 朝鮮王朝라는 국가기구를 통해 자기네들이 믿고 있는 유학의 이념을 실현하려 고 하였다. 그들은 유교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열쇠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인재를 구하여 등용하는 用人에 있었다고 믿었다. 朝鮮王朝 創建에 가장 핵심인물 의 하나였던 鄭道傳은 그의 朝鮮經國典 에서 治天下國家之要 在於用人而已 1)라고 하 여 나라를 다스리는 요결은 用人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用人當 天下受福 否則或受 其禍 用一人當 天下合而譽之 否則共指而嫉之 2)라고 하여 용인을 잘하면 천하가 복을 받 고 용인을 잘못하면 화를 입는다라고 하여 用人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鄭道傳뿐만 아니 라 그 후의 인물들도 거의 모두 用人의 중요성을 되풀이하였다. 朝鮮王朝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인재를 등용하는데 주로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하 였다. 즉 첫째는 科擧이고, 둘째는 門蔭이고, 셋째는 薦擧였다. 이 가운데서 물론 科擧가 가장 중요한 官吏등용의 문이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朝鮮前期에 있어서 관리를 선발하는데 어떠한 身分層이 응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규명하여 당시 사회의 身分構造를 이해하려고 한다. * 하와이大學校 史學科 敎授. 1) 三峯集 권13( 朝鮮經國典 入官, 민족문화추진회) p ) 위의 책 권9( 經濟文鑑 宰相職在任人) p. 18.

2 國史館論叢 第26輯 이 문제에 대해서는 宋俊浩 韓永愚 李成茂교수들의 좋은 연구가 있었고 또한 최근에는 劉承源 교수의 朝鮮初期 身分制硏究 라는 우수한 저서가 나와 조선전기의 신분구조에 대해 새로운 이해와 시사를 많이 주고 있다. 필자는 朝鮮前期의 身分制度를 科擧에 있어서 良人이 응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科擧制度와 身分制度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한다. Ⅱ. 良人의 科擧應試 朝鮮王朝는 국왕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들의 官人國家(Bureaucratic State)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官吏로 뽑힌다는 것은 곧 朝鮮王朝의 엘리트 가 된다는 것 이었다. 그리고 관리가 되는 가장 중요한 길은 國家考試인 科擧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엘리트 형성에 가장 중요한 科擧에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신분층의 사람이었을까? 특히 良人身分을 가진 사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朝 鮮社會의 權力구성과 身分구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조선사회가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도의 사회였기 때문에 良 人은 科擧에 나갈 수 없었고 兩班들만이 응시할 수 있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근년에 와 서 이러한 종래의 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양인들도 과거에 응할 수 있었다고 하는 주장이 나왔다. 이것은 필자가 1974년 美國의 東洋學會誌인 Journal of Asian Studie s 에서 처음 제기하였고 그 후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가지 활발한 학술적 논평이 일어 났으며, 宋俊浩교수도 朝鮮時代의 科擧와 兩班 및 良人 이라는 논문을 歷史學報 69輯(1976)에 발표하여 良人도 科擧에 응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李成茂교수도 역시 전체적 논조에는 차이가 있으나 科擧應試에 있어서 良人에 대해 제도적인 차별은 없었다는 기본적인 전제에 동의하고 있다. 즉 李교수는 그의 力著 朝鮮初期兩班硏究 에서 良人은 賤身分이 아닌 이상 원칙적으로 응시할 資格이 있었 다 (p. 59)라고 서술하고, 또한 朝鮮初期에 있어서 법제적으로 良人의 科擧應試를 제한하 는 아무런 규정도 없었다 (p. 374) 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李교수의 주논점은 良人이 科擧응시를 하는데 있어서 비록 제도적인 제한은 없었 으나 실제에 있어서 다른 여건들 때문에 良人이 응과 及第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라 고 주장하는데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여건을 李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良身分 중에서 良人은 科擧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經濟的 能力, 敎育與件, 까다로 운 應試節次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科擧에 應試

3 - 147 하여 及第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3)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良人이 원칙적으로는 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다 고 하여 李교수도 적어도 원칙적인 면에 있어서는 良人도 應試할 수 있었음을 시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칙적으로 良人이 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宋교수나 李 교수나 필자는 합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良人이 응시할 수 있었다 하는데 대해서 李교수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즉 李교수는 첫째로 科擧준비를 위한 경제적인 능력, 둘째로 교육적인 여건, 셋째로 應試절차의 까다로움의 세 가지 이유를 들어 良人이 실제적으로는 科擧에 응시하여 급제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科擧에 良人身分者가 제외되었고 兩班身分者만이 응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중 요한 문제를 두고 논의할 적에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것은 李교수가 제시한 세 가지 여 건이 '良人에 한해서만 적용이 되었고 兩班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만 약에 이 여건이 良人에게만 적용이 되고 兩班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良人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이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반면에 그것이 良人 과 兩班에게 공통으로 적용이 되었다면 良人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없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良人에게 부여되었다는 세 가지 제한적 여건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첫째, 科 擧 응시를 위해서 다년간의 준비가 필요한 데 이를 위해서 상당한 경제적 능력이 필요 하였다는 것이다. 科擧준비의 공부를 위해서는 확실히 상당한 시일을 요했을 것이며 이 것을 뒷바라지하는데 상당한 경제적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경제적 제한성이 良人에게만 한해서 주어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우 리는 이 경제적 제한이 良人에게와 마찬가지로 兩班子弟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兩班子弟들도 良人子弟들과 마찬가지로 科擧준비에 필요한 경제적 능력이 미비할 시에는 마찬가지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 은 양반이라고 해서 모두가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또 양인이라고 해서 전부가 빈곤에 허덕였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朝鮮社會를 이야기할 때에 일반적으로 良人보다 는 兩班들이 경제적 위치가 훨씬 더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반이 면 반드시 모두가 富者였고 양인이면 반드시 모두가 가난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 면 兩班들 가운데도 빈궁한 자가 있었으며 良人들 가운데도 富者가 있었기 때문이다. 兩班들 가운데도 가난한 자가 비일비재했던 예로 花潭 徐敬德의 예를 들 수 있다. 徐 敬德의 집안이 빈궁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의 神道碑銘에 보면 花潭의 3) 李成茂, 朝鮮初期 兩班硏究 (一潮閣, 1980) p. 72.

4 國史館論叢 第26輯 祖父인 副司勇 徐順卿에 대해서 아래의 사실이 적혀있다. 副司勇公 家貧 耕人之田 而分粟甚均 田主信之 不自莅分.4) 祖父 徐順卿은 집안이 가난해서 남의 논밭을 경작하였는데 수확한 곡물을 지주와 나누 어 가질 적에 徐順卿이 얼마나 정직하게 분배를 하였던지 지주가 그를 완전히 신용하였 다고 하는 내용이다. 물론 花潭의 가문에 정직한 祖父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러한 사실을 神道碑에 적었다고 하겠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花潭의 할아버지가 비록 副司勇의 말단직을 가졌지만 그는 한때 일개 小作人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집안에 태어난 徐敬德은 兩班이건 良人이건 간에 빈곤한 가문에서 태어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科擧에 응시하는데 있어서 경제적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徐敬德은 中宗 26년[1531]에 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그런 이유로 科擧응시에 있어서 집안이 가난해 서 제약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지언정 당사자가 양인신분이었기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경제적인 여건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과 신분적인 여건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서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것은 경제적 여건에서 오는 제한이란 조선왕 조 시대에 한해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이고, 어느 사회이고 간에 공통적으로 있는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현 1991년대의 우리나라 사회를 두고 볼 때 경제적 그리고 다른 환경의 여건 때문에 시골출신의 아이가 서울의 부자집 아이보다 서울대학교에 입학 하기가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시골출신들이 신분적 제약을 받고 있다 고는 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조선전기에 있어서 良人들이 科擧응시하는데 있어서 신분적 제한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다음으로 科擧응시절차가 까다로워 良人이 제약을 받았는가 하는 점을 검토해 보자. 실제로 實錄을 보면 科擧에 있어서 應試者의 家門을 조사했다는 것이 몇 군데 있 다. 흔히 이 내용을 가지고 良人들을 科擧에서 배제하였다는 증거라고 주장할지 모르겠 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太宗實錄 에 我朝科擧之法 非徒試才 亦以辨族屬也 라는 구절이 있다. 科 擧의 법은 응시자의 재능만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族屬까지도 구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과연 양인을 과거에서 제외시키기 위해서 辨族屬 한다는 것일까. 太宗 17년 2월 庚辰조의 해당 문장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我朝科擧之法 非徒試才 亦以辨族屬也 願自今 赴生員東堂鄕試者 各其所居官申名色考其族屬 4) 花潭集 3, 10앞.

5 - 149 可赴試者 錄名升于其官 其官升于監司 監司更考 許令赴試 京中漢城試 則漢城府考 其京在所備 三員文字及戶口 其鄕試漢城試入格者及赴館試者 成均正錄所 亦考上項明文 方許赴試 申明色京 在所 擧工商巫覡雜色賤口之裔 及身犯不孝不道者 正錄所不加精察者 憲司糾察 痛繩以法.5) 약간 길게 인용한 이 글은 응시자에 대해 辨族屬 을 엄격히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실제로 일반양인이 辨族屬 의 대상이 된다는 구절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차라리 통제의 대상이 된 자를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즉 신분배경조사의 대상은 工商巫 覡雜色賤口之裔 와 身犯不孝不道者 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良人이 科擧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수속절차에 관한 것으로 大典後續錄 禮典 諸科조에 보면 科擧등록시 四祖 중 에 顯官이 없는 응시자는 保單字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다음과 같다. 擧子錄名時 四祖非有衆所共知顯官者 外方人則保單字及京在所備三員 京居人則保單字及當 部官員備三員 着名進呈後 許赴 如有可疑 則着名員及京在所當部官員 推閱帳籍憑考 犯者冶 罪賤役定體 四館官員並罷黜.6) 이 법조문은 어떻게 보면 良人의 科擧응시를 막으려고 한 것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 나 이것도 그 역사적 배경을 들어다 보면 전혀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 법조문이 수록되어 있는 大典後續錄 은 中宗 38년(1543)에 반포된 것이다. 그러 나 이 後續錄 이 편찬되기 전에 벌써 科擧錄名이 문란해져서 이로 인해 많은 물의가 일어났다. 즉 中宗 32년 8월에 司諫院에서 아래와 같은 狀啓를 올리고 있다. 凡科擧之時 四館錄名 非但記錄姓名而已 必考內外及己身痕咎有無 而許赴例也 今者 非徒庶 孽得中罪人與逆黨之裔 亦多有入格者 而矇不致察 並令許赴 至爲非矣 四館官員 請並推考 其 入格者 並令摘發停擧.7) 四館에서 科擧응시자를 조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庶孽과 罪人과 逆黨之裔가 합격하는 예가 있으니 응시자의 가족배경을 더 엄격히 조사하여 이러한 자가 응시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해 中宗 33년 8월에 司憲府에서 이와 비슷한 啓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 음과 같다. 5) 太宗實錄 권33, 17앞뒤. 6) 大典續及註解 (中樞院) pp ) 中宗實錄 권85, 40앞.

6 國史館論叢 第26輯 科擧國家重事 必考四祖錄名許赴者 所以辨別族類 以請仕路也 近來人心不古 庶孽及市井子 孫賤隷之產 皆不安分 或追改戶籍 或四祖冒作虛御入籍 或淫婦之出 假着保員之名 濫赴試場 間或有登第者 故此類爭相慕放 科擧輕賤 仕途不淸 名分大毀 至爲寒心 (下略).8) 仕路를 맑게 하기 위해 科擧등록시에 四祖를 조사하지만 庶孽과 市井子孫賤隷들이 서 류를 위조하여 응시하니 科擧가 천해지고 名分이 훼손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논의가 있는데 연대적으로 볼 때 大典後續錄 의 上 記한 規定은 이러한 토론을 겪은 후에 법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도 錄名時 良 人이 응시자격에서 제외되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錄名時 四祖 중에 顯官이 없는 자에게 保單字를 요구한 것은 庶孽 및 市井子孫賤隷之產을 배제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 던 것이지 결코 양인을 제외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四祖 중에 顯官이 없는 집안은 양인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라 많은 양반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後續錄 에서 규정하고 있는 非有衆所共知顯官者 의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지 확실히 이야기는 못하겠지만, 朝 鮮前期 사회에 있어서 四祖 중 顯官을 가진 집안이 전체적으로 보아 그렇게 많지는 않았 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奎章閣 소장의 國朝文科榜目 (규장각 106)을 보면 登科者들 의 四祖 이름이 적혀 있고 또한 그 가운데 文科及第者가 있으면 그것 역시 표시하고 있 다. 이것을 보면 世宗 3년(1421)에서 仁祖 8년(1630) 사이의 총등과자는 4,842명으로 그 중에 四祖 가운데 登科者가 있는 文科及第者는 1,796명으로 전체의 37.1% 밖에 되지 않 는다. 세 사람 중에 두 사람은 四祖 중에 文科登科者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四 祖 중 顯官이 없는 자는 保單字를 제출해야 한다는 규정은 양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 니라 많은 양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다음 교육에 있어서 양인들이 자기의 신분 때문에 과거 응시에 필요한 학교공부를 할 수 없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것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겠지만 여기에서 결론적으로 이야 기하면 敎育에 있어서 良人이라고 하여 제한을 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가 종합해 볼 때 良人이라고 하여 과거에 응시를 못하게 하였다 는 아무런 증거를 찾을 수 없다. 朝鮮前期에는 科擧응시에 있어서 良人은 자기 신분 때문 에 제한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Ⅲ. 賤出身의 登科 8) 中宗實錄 권88, 18앞.

7 - 151 위에서 본 바와 같이 良人신분을 가진 사람이 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다면 실제로 良人 신분으로 文科에 응시하여 급제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불행히도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확실한 회답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필자가 아는 한 朝鮮王朝實錄 이나 기타 사료에 양인으로 응과하여 합격하였다는 실례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良人의 응과내지 등과자의 기록이 없었음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이 사실이 실제로 良人이 응과할 수도 없고 등과할 수도 없었다 는 증거라고 내세우기 쉽다. 그러나 필자는 반대로 이것이야말로 科擧에 있어서 양반과 양인의 신분적 차별이 없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 문이다. 첫째로 우리는 양인신분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文科에 등과한 예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潘碩枰(? 1540)은 中宗朝人으로 원래는 어느 宰相집의 家奴였다고 한다. 그가 어릴 적에 才能과 性品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의 奴 主가 그를 아껴 글공부를 시키고 나중에는 자식없는 어느 富者宅에 맡겨 그의 신분을 감 추고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 후에 潘碩枰은 生員이 되었다가(年代는 미 상) 中宗 2년 (1507)에 文科에 등과하여 벼슬길에 올라 八道監司를 두루 지내고 刑曹判書까지 되었다 고 한다.9) 여기에서 潘碩枰이 자기가 奴라는 賤身分을 감추었기 때문에 그가 등과하여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 않았는가 라고 이견을 제시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 록에 보면 그가 賤身分이었음이 당시에 다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즉 中宗 9년(1514)에 潘碩枰이 弘文館의 어느 자리에 임명되었을 당시 司諫院은 弘文館 非但見其人物 必觀門 地 潘碩枰門地微踐故已不署經 10)이라고 하여 그의 門地가 미천하기 때문에 署經을 내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실록의 史官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碩枰出於賤孽 居于鄕曲 其祖母知其向學 欲掩賤振起門戶 携其孫 賃寓京城 親織紝爲衣食 令就學遂登科第 揚歷中外 位躋六卿 人皆賢智其祖母.11) 賤孽出身의 潘碩枰을 그의 祖母가 서울로 데려가 바느질하면서 공부시켜 과거에 登科 케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賤孽身分을 감추어 가면서 자기의 손자를 공부시킨 潘碩枰의 祖母를 모든 사람들이 장한 할머니로 칭찬하였다는 사 실이다. 9) 星湖僿說 上(慶熙出版社) p ) 中宗實錄 권20, 3뒤. 11) 中宗實錄 권20, 3뒤.

8 國史館論叢 第26輯 이와 같이 潘碩枰이 賤身分出身이라는 이유 때문에 司諫院이 한 때 署經을 거부하기까 지 하였지만, 왕은 이러한 司諫院의 항의를 물리치고 그를 관직에 등용하였으며 潘碩枰은 궁극에 文武가 겸비된 淸白의 인물로 인정받아 8도의 方伯을 두루 거치고 判書를 지나 죽은 후에는 壯節 이라는 謚號까지 받았던 것이다.12) 또한 崔湑는 그의 母가 婢妾產 이었고 外祖母는 樂工의 女이었던 微賤한 출신이었다. 그는 어느 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進士가 되었고 진사로서 成宗 11년(1480) 文科親試에 壯元及第하였다. 그가 親試에 응과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 고 있다. 上幸成均館 行釋奠 取士 命(鄭)昌孫等取文科崔湑等三人 以啓卽拜湑成均館典籍 湑之母乃禹鈞婢妾產也 以是不得赴擧 是日儒生聞入試闈 未能點名 湑得入試焉.13) 즉 崔湑는 어머니가 婢妾產이었기 때문에 文科試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성종이 成均 館에 나가 親試를 하였을 때 유생들이 바른 절차를 밟지 않고 마구 시험장에 들어가는 혼란한 틈을 타서 응시하여 등과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또한 장원을 하였기 때문에 즉시 로 成均館典籍으로 임명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典籍임명에 대해 그의 外係庶孽爲已祖業賤口 라는 소송이 있어 臺諫이 署經을 내어 주지 않았다가 司憲府가 그의 가계를 조사하여 결국에는 다음과 같은 판정 을 내렸다. 及第崔湑 外曾祖母乃禹鈞之弟三妻也 外祖母樂工金良之女也 雖族派至微 不可論以庶孽 而 爲賤也.14) 즉 그의 가계는 至微하나 그의 外曾祖母가 세번째의 正妻로 들어갔기 때문에 庶孽로 취 급하여서는 안된다고 판정한 것이다. 그러다가 2년 후 성종 13년(1482)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급제의 자격으로 崔湑는 자기의 外祖 禹孝忠은 曾祖父인 禹鈞이 妾으로서가 아니라 세번째의 妻로 正式으로 요해 서 생긴 嫡室 所生이라고 주장하여 崔湑 자신의 敍用을 간청하여 드디어 왕의 허락을 받 아 벼슬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崔湑는 이 상소에서 자기 자신을 臣草茅賤士 門地孤寒 而無祖先門閥之望 15)이라고 하고 있다. 12) 朝鮮人名辭書 p ) 成宗實錄 권114, 1앞뒤. 14) 成宗實錄 권130, 2뒤. 15) 成宗實錄 권143, 5뒤 6뒤.

9 이렇게 門地가 孤寒이었던 崔湑는 궁극에 府使의 직에 오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 崔湑의 신분과 仕宦에 대해서 명종 8년(1553) 進士 金師諤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成宗朝 崔恕以私賤冒登文科 其主吿焉 成宗大王 特以公賤 代贖其身 官至府使.16) 이 글은 庶孽差待를 반대하면서 최서의 예를 든 것이지만 최서가 文科壯元한 시기부터 70여년을 지나 내용이 사실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여하튼 최서는 門地가 아주 낮은 가계 에서 나와 문과에 장원하여 府使의 직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壬辰亂 때 名文章家로 알려져 明나라와의 事大의 咨奏를 맡았던 崔岦( )은 원래 賤人이었다. 그러나 그는 賤役을 면제받아 명종 10년(1555)에 進士가 되어 명종 16 년(1561)에는 式年文科에 장원을 하였다.17) 李瀷은 崔岦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簡易堂崔岦賤人也 始爲李靑蓮後白陪從 後免役登科壯元 名大振 有文集行于世.18) 壯元을 한 최립은 그 후 載寧郡守( 宣祖實錄 권15,10뒤)와 全州府尹( 宣祖實錄 권30,11앞)이 되었다가 壬辰亂이 일어나자 그의 文章力 때문에 事大文을 맡게 되었다. 그 러나 그가 承文院提調에 임명되었을 때 以地處卑微 라는 이유로 사양하니 선조는 卿文 章振一世 門地何足論 勿辭 라고 하여 門地가 무슨 상관이냐,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19) 그리고 선조 28년 10월에 掌隷院判決事로 임명되었을 때 최립은 자기가 生地 之卑 立身之微 라는 이유로 또 다시 사양을 하니 선조는, 卿文章動一國 當地艱虞之時 方委以辭命之任 豈可辭職 若其門地 又何足論 宜勿辭 更加勉力20) 이라고 하여, 門地에 구애치 말고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최립 본인이 門 地가 卑微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록에서 史官도 崔岦을 門地寒微 21)라고 하 고 있어 그의 寒微한 가계는 당시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었다. 崔岦은 궁극에는 刑曹參判까지 올랐으며 그의 아들 崔東望도 선조 22년(1589)에 文科에 등과하였다.22) 尹溪는 中宗 6년(1511)의 文科別試에 生員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그의 결혼에 대해 16) 明宗實錄 권14, 53뒤. 여기의 崔恕는 崔湑의 잘못일 것이다. 17) 朝鮮人名辭書 p ) 星湖僿說類選 下(朝鮮古書刊行會) p. 333, 國朝榜目 (國會圖書館) p ) 增補文獻備考 권221, 31뒤. 20) 宣祖實錄 권68, 43앞 44앞. 21) 宣祖實錄 권76, 7뒤. 22) 國朝人物考 下(서울大學校圖書館) p. 99.

10 國史館論叢 第26輯 다음과 같은 물의가 일어났다. 稀蹄守瑚 摘妾俱有女 姜㶏議嫡女 尹溪議庶女 皆已納采後 尹溪登第 以嫡女歸之 欲以庶女 姜㶏 㶏家請勿與爲婚 宗簿寺啓 還姜㶏納采而罪瑚 從之.23) 윤계는 稀蹄守瑚의 庶女와 결혼하기로 정해 두었다가 그가 文科에 급제한 후 稀蹄守瑚 의 嫡女와 결혼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史臣은 실록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尹溪姜㶏 皆以生員有名 然尹則門地至賤 姜則稍優於尹 故瑚以嫡議㶏 以庶議溪 俱納采 而 溪捷文科瑚以嫡女妻溪 欲以庶女歸㶏 㶏家訟之不娶 瑚本無識 不足數也 物議甚非溪之議庶娶 嫡也.24) 여기에서 문과에 급제한 尹溪는 門地가 至賤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중종 10년(1515)에 윤계가 弘文館修撰으로 물망에 올랐을 때 司憲府에서 今擬 修撰之望 至爲非矣 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史官은 溪 本系微賤人 亦猥瑣 有是 論也 25)라고 하여 거듭 윤계의 門地가 微賤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윤계의 가계가 구 체적으로 어떠하였기에 微賤人으로 낙인찍혔는지 우리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실록의 기록을 볼 때 윤계는 미천한 가문에서 나와 文科에 급제하였던 것이다. 그는 文科 에 등과한 후 成均館典籍이 되었으며( 中宗實錄 권65, 20앞), 安邊府使( 中宗實錄 권78, 34앞)와 延安府使( 中宗實錄 권97, 49앞)를 거쳐 明宗 즉위년(1545)에는 命知中 樞府使로 謝恩兼奏聞進賀使가 되어 明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明宗實錄 권2, 89앞). 尹元衡의 일당으로 악명 높았던 陳復昌도 門地가 비천한 사람이었다. 李廷馨은 東閣 雜記 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陳復昌 乙未松宗親試 擢壯元 門地卑賤 其父義孫 以錄事去官爲縣監 或云 復昌之母 屢經人 而歸義孫 人尤賤之 復昌能文善射.26) 즉 陳復昌은 그의 어머니가 여러 남자를 거쳐 그의 아버지와 결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奎章閣에 있는 國朝榜目 에서도 其母屢經人而爲義孫妻 生復昌 이라고 하고 있다.27) 23) 中宗實錄 권14, 43뒤. 24) 中宗實錄 권14, 43뒤 44앞. 25) 中宗實錄 권23, 23앞. 26) 李廷馨, 東閣雜記 ( 大東野乘 권10) pp ) 國朝榜目 3, 40앞.

11 이렇게 문지가 비천한 陳復昌은 윤원형의 일당으로서 副提學이 되었고 大司憲까지 되었 던 것이다.28) 그리고 李再榮은 선조 32년(1599)에 있었던 文科庭試에 장원급제하였는데 그의 어머니 는 私婢로 賤倡이었다고 한다. 李再榮이 許通을 받아 壯元하니 이에 대해 史官은 실록에 서 再榮以賤倡之子 至登龍榜之首 先王名分一朝掃也 豈不深可歎哉 라고 평하고 있다.29) 그리고 司憲府는 다음과 같이 李再榮의 등과를 취소하여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及第李再榮乃私婢鶴今之子 鶴今是賤倡之尤甚者也 擧國莫不賤汚 曾中監試初試 臺官旣以此 論 啓削去 豈可籍名正科 以通仕路重貽 士大夫之羞辱哉 請命削科 再榮停擧 永不許赴 實出 於公議 而四館拘於私情 輕易解停 使此賤倡之產濫入場屋 其循私曲疵之罪 不可不懲 請該官 掌務官 亦命罷職.30) 司憲府는 이재영의 어머니가 私婢 鶴今이며 그는 賤倡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司憲府의 항의에 대해 선조는 처음에 旣爲許通 不須削罷 라고 하여 이재영의 등과를 취소않으려고 하다가 司憲府의 再啓에 못이겨 결국에는 削科하고, 또한 유생등록 을 소홀히 한 四館관계자들을 推考하기를 동의하였다.31)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李再榮의 文科紅牌는 박탈당하지 않고 급제의 자격을 그냥 견 지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재영은 선조 39년에 漢吏學官이 되었고( 宣祖實錄 권 204, 5뒤), 光海君 7년에는 承文院校檢이 되었다가( 光海君日記 鼎足山本 권97, 1앞), 다음 해에는 奉常寺主簿가( 光海君日記 鼎足山本 권103, 5뒤)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仁祖反正이 일어나 李再榮은 許筠 李爾瞻의 일당으로 몰려 벌을 받게 되는데 그 때는 그가 判書李選之孽產 而或云詩人李達潛通而生 32)이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머 니가 私奴婢였고 천한 倡女였던 이재영은 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등과한 사례가 朝鮮前期를 통해 엄연한 사실로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수는 극히 적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稀貴한 경우라고 하겠다. 그 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렇게 미천신분출신의 사람들이 자기의 신분 을 속인다든지 許通을 받는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는 사례들이 뚜 렷이 있는데 비해 미천신분보다 위에 있었던 良人이 응과 급제하였다는 기록이 전혀 없 다는 사실이다. 왜 조선전기를 통해서 良人이 과거에 응시하여 물의를 일으킨 예가 단 하 나도 없었을까. 微賤출신자들이 과거에 응시한 예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때 양인출신자들 28) 東閣雜記 pp , 國朝榜目 3, 40앞. 29) 宣祖實錄 권110, 9앞. 30) 宣祖實錄 권110, 9뒤. 31) 宣祖實錄 권110, 10앞. 32) 仁祖實錄 권1, 16뒤.

12 國史館論叢 第26輯 이 응과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틀림없이 양인신분을 가진 사 람도 과거에 응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인이 응과하여 등과하였거나 그것으로 말썽 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은 良人이 응시하고 급제를 하여도 당시 사회에서 는 전혀 무방하였으며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었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良人應試登科者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良人이 응과를 하지 못 하였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그 당시에 양인의 응과를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Ⅳ. 鄕吏와 科擧 朝鮮前期에 있어서 良人이 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에 있어서 良人과 鄕吏의 지위를 비교함으로써 양인과 과거와의 관계를 좀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태까지 鄕吏의 신분은 양인보다 上位에 있는 中人層 으로 이해해 왔 다. 이렇게 鄕吏를 良人신분보다 높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우리는 朝鮮前期사회 신분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상당한 혼돈을 빚었다고 보겠다. 조선전기에 있어서 鄕吏의 신분위치에 대해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鄕吏는 일반적으로 양인보다 신분이 낮았다고 필자는 본다. 이것은 아래에 서 설명하는 이유 때문이다. 鄕吏의 신분 변천에 대해서는 이미 몇 가지 논문이 밝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재 론을 할 필요가 없다.33) 이들 논문을 통해서 향리의 신분이 高麗朝를 통하여 점점 낮아져 高麗末 朝鮮初에 이르 러서는 이른바 身良役賤 의 위치로 전락되고 마는 것을 알 수 있다(李成茂교수의 논문은 제외). 그리고 劉承源교수도 그의 朝鮮初期의 身良役賤 階層 ( 韓國史論 1, 197 3)34)이라는 논문에서 鄕吏가 良人신분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고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향 리가 身良役賤 에 속했다는 증거를 충분히 제시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향 리는 身良役賤 즉 신분적으로는 良人이었지만 그가 맡은 役은 賤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鄕吏가 일반 양인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하는 것은 향리가 통상적으로 驛吏 鹽 干 牧子 등의 身良役賤層과 같이 취급되고 있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는 우리 가 허다히 볼 수 있다. 經國大典 刑典 賤妻妾子女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짓고 있다. 33) 李光麟, 其人制度의 變遷에 對하여 ( 學林 3, 1954). 金成俊, 其人의 性格에 對한 考察 ( 歷史學報 10, 1958). 李成茂, 朝鮮初期 鄕吏硏究 ( 韓國史硏究 5, 1970). 34) 이 論文은 著者의 朝鮮初期 身分制硏究 에 재수록되어 있음.

13 - 157 鄕吏 驛吏 鹽干 牧子等嫁自己婢所生 於父役處定役 不通仕路.35) 그리고 이 大典의 條文 해석 문제로 중종 6년(1511) 에 크게 논의되었을 때 劉承源교 수가 지적한 것처럼 意見이 百出되었는데 거기에서도 향리는 驛吏 鹽干 牧子 등과 같이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 논쟁에서 柳順汀은, 意者 鄕吏 驛吏 鹽干 牧子 雖是衣役 其苦與賤役無意 라고 하였으며 盧公弼은, 鄕吏 驛吏 鹽干 牧子 其役最重 而雖有闕 不可以平民充役 라고 하였고 또한 鄭眉壽는, 大抵 鄕驛吏 鹽干 牧子 本是無罪良民 世傳苦役 已爲哀憫 이라고 하였다.36)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盧公弼의 鄕吏 등의 役이 아주 무 거운 것이기 때문에 비록 결원이 생기더라도 평민으로 充役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하면 平民을 향리 등이 부담하고 있는 苦役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 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논의에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劉承源교수가 지적한 것 처럼 鄕吏 驛吏 鹽干 牧子의 當事者와 그 所生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 論者에 있 어서든 이들이 양인임은 자명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 이다.37) 그리고 또한 향리의 지위에 대하여 大典續錄 刑典 訴寃조에 보면 如工商 僕隷 鄕 吏 驛吏 卑賤之人 38) 云云하여 鄕吏를 아예 工商 僕隷 驛吏와 같은 卑賤之人 으로 취급하 고 있다. 이렇게 향리가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그 苦役을 사면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 15년(1484) 정월 同副承旨 成健은 다음과 같은 啓를 올리고 있다. 州縣專以鄕吏維持 而鄕役甚重 人人思砍免鄕.39) 35) 經國大典 (中樞院) p ) 中宗實錄 권13, 35앞 36뒤. 37) 劉承源, 朝鮮初期 身分制硏究 p ) 大典續錄及註解 (中樞院) p ) 成宗實錄 권162, 1앞.

14 國史館論叢 第26輯 즉 鄕役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향리들이 鄕役을 면제받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향리는 양인보다 신분적으로 높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鄕吏 의 신분은 身良役賤이었기 때문에 양인보다 신분이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양인과 향리의 지위의 차이는 政府에서 이들에게 주는 賞罰에서도 찾아볼 수 있 다. 즉 세종 11년(1429) 12월에 鑛石產地를 조사하여야 한다는 中軍摠制 李蔵의 啓에 다 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今來日本深重靑名及水銀石 請分送各道 依樣廣求 如有吿者 良人賞職 人吏免役 公賤已身 放 私賤賞給.40) 그리고 세종 12년(1430) 10월에 工曹가 이와 비슷한 啓를 올리고 있다. 工曹啓 水銀深重靑等物 產於州郡者頗多 請令監司 擇遣守令 詳加訪門, 有見吿眞水銀 重深靑者僧及良人隨品賞職 鄕吏驛吏免役 賤人則賞錢.41) 이 두 啓에서 賞與로 양인에게는 賞職을 주고 鄕吏에게는 免役을 시켜줄 것을 요청하 고 있다. 이것은 良人과 鄕吏의 신분적 차이가 있었고 양인이 향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 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세종 15년(1433) 11월에 慶源寧北鎭을 설치하였을 때에 徙民을 장려하였는 바 거기서, 自募入居者 良民則賞以本處土官職 鄕驛吏則永免其役 賤口則永放爲良42) 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犯法者에 대한 징벌에 있어서도 일반 양인과 향리의 지위에 차이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세조 6년(1460) 閏11월에 下三道敬差官 徙民事目을 兵曹에 서 정립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조문이 있다. 其中楊說凌辱者 並依法決杖 鄕戶則極邊 驛子良民則定爲鄕吏 爲先入送.43) 여기에서 벌로서 鄕吏는 極邊의 驛子가 되도록 하고 양민인 경우에는 벌로써 향리로 40) 世宗實錄 권46, 20뒤 21앞. 41) 世宗實錄 권50, 8앞. 42) 世宗實錄 권62, 18앞. 43) 世祖實錄 권22, 24앞.

15 격하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賞罰에 있어서 良人과 鄕吏에 대한 差等대우를 볼 때 朝鮮前期에 있어서 향리 의 사회적 지위는 工商人을 제외한 일반양인보다 낮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성종은 한때 軍戶本是良民 鄕吏本是賤人 이라고까지 이야기 하였던 것이다.44) 이렇게 양인보다 낮은 身良役賤의 鄕吏에 대해서 經國大典 吏典 鄕吏조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凡鄕吏中 文武科生員進士者 並免子孫役.45) 즉 鄕吏로서 文武科 또는 生員進士試에 합격하면 그의 자손이 향리의 역을 면제받았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규정상 향리는 신분상 아무런 거리낌없이 과거에 응시 하고 及第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지로 이들 鄕吏출신자들이 科擧에 응시하여 합격한 예가 있는 것이다. 鄕吏 가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기 신분을 貢生이라고 불렀는데 掾曹龜鑑 에 보면 鄕吏子 孫稱以貢生 이라고 하고 있다.46) 필자가 현존하고 있는 中宗 8년(1513)에서 宣祖 18년 (1585) 사이의 司馬榜目 7개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가운데 貢生 즉 鄕吏로서 生員進 士試에 합격한 자의 수는 다음과 같다. 中宗 8년(1513)-貢生 2人 中宗 23년(1528)-貢生 1人(父가 戶長인 者 1인) 中宗 38년(1543)-貢生 3人 明宗 19년(1564) -貢生 없음 宣祖 9년(1576)-貢生 1人, 館軍 1人 宣祖 12년(1579)-貢生 1人 宣祖 18년(1585)-貢生 없음, 保人 1人 이와 같이 鄕吏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법적으로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응시하여 합격한 예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賤役을 맡고 있는 鄕吏는 科擧에 등과하여 출세의 길에 오를 수 있는데 비해 庶孽子孫은 仕路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道理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庶孽출신인 魚叔權이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庶孽子孫不許擧仕路 非三韓舊法也 自撰定大典之後 始加禁錮 至今未百年矣 覆載之內 九州之外 據土地而以國名者 奚啻百數 而未聞有禁錮之法 況鄕吏水軍役之至賤 而猶赴科擧 語其內外世系 則初無本貢可據 或嫁流民 或娶逃人 誰能辨其良賤哉. 以卿大夫之子 只無外家 44) 成宗實錄 권166, 9뒤. 45) 經國大典 p ) 掾曹龜鑑 1, 5뒤.

16 國史館論叢 第26輯 而世世禁錮 雖出衆之才適用之器 終屈首死牖下 曾鄕吏水軍之不若可憐哉.47) 이와 같이 庶孽禁錮에 대해 不滿을 품고 있는 魚叔權에 의하면 鄕吏와 水軍은 至賤의 役을 가진 자이며 그 內外世系는 믿을 만한 本貫조차도 없으며, 혹 流民에게 시집가고 혹 도망인을 취하여 그가 良인지 賤인지조차 분간을 할 수가 없다고 분개하고 있다. 誰能辨 其良賤哉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향리들은 당당히 과거에 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鄕吏出身의 사람들이 文科에 등과하고 있는 예들이 있다. 그 중에서 天 安郡吏出身의 李得全의 경우는 여기에서 특기할 만하다. 즉 中宗 13년(1518) 5월 特進官 李長坤은 李得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前司藝李得全 本天安郡吏 好讀書 家甚貧 郡中廝隷 皆怜憫 或與衣食 親喪居廬六年 不出閭 里 此其操行之可見 又善敎後輩 學者多贏糧來學 及取科登仕 見謫廢朝 分配龍川 一道之人皆 就學 向者以微過 被罪見罷 今可復用於成均館.48) 天安郡吏였던 李得全은 극히 가난하여 郡의 종들까지도 그를 불쌍히 여겨 옷과 음식을 줄 정도였다는 것이다. 極貧한 郡吏출신의 李得全은 燕山君 10년(1504)에 進士가 되었고 같은 해에 문과에 등 과하였다 奎章閣所藏의 國朝文科榜目 에도 그를 天安鄕吏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中宗 9년(1514) 6월에 司憲府 持平에 임명되었을 때 司諫院에서 持平 李得全 門地卑微請 遆之 라고 하여 門地가 비미하다는 이유로 持平임명을 반대하여 이에 왕이 동의하고 있 다.49) 그러나 그는 같은 해 10월 安岳郡守로 있을 때 司諫院에서 그를 合於師儒 不可爲 外任 이라고 하였으나 왕은 司諫院의 反對를 물리쳤다.50) 그 후 중종 11년 4월에 司憲府 掌令에 임명 되었으나 이것 또한 臺諫의 반대를 받았다. 이에 대해서 실록의 史臣은 다음 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初吏曹判書安瑭 欲擬得全爲掌令 以當爲吏役 難之 參判宋千喜曰 鄭陟以鄕吏 位至二品 金 守文以鄕吏 爲獻納 有何妨 遂擬之.51) 李得全을 掌令에 임명할 때 그가 향리출신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鄭陟과 金 守文이 향리출신으로 각각 二品 자리에 오르고 司諫院의 獻納이 된 先例를 따라 李得全을 47) 稗官雜記 (永信아카데미) p ) 中宗實錄 권33, 33앞. 49) 中宗實錄 권20, 33앞. 50) 中宗實錄 권21, 2뒤. 51) 中宗實錄 권24, 46뒤.

17 掌令에 천거하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鄕吏出身으로 문과에 등과한 인물들이 있다. 李馨期는 縣吏로서 世宗 2년 (1420)에 文科에 등과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정월에 그가 鄕吏身分을 감추고 응과하였다 고 하여 그의 文科合格證을 박탈당했다. 이에 대해 실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權知成均學諭李馨期 本定山縣吏 匿其世系 冒稱士族 乃登庚午科 至是憲府劾曰 仕進之初 功飾虛僞 欺罔朝廷 若令從仕 則姦巧冒濫之從 繼蹤而起 請依律科罪 從五定役 其保擧人金南 秀尹會宗 皆論如法 上命奪馨期紅牌 餘皆勿論.52) 縣吏의 가문을 감추고 士族으로 冒稱하여 應科하였다는 이유로 李馨期는 그의 紅牌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나 2년 후인 世宗 4년 4월에 실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적고 있다. 還給及第李馨期紅牌 左議政李原 參賛卞季良啓 收紅牌故事所無 故有是命.53) 역사적으로 紅牌를 박탈한 先例가 없었다는 이유로 鄕吏出身의 李馨期에게 文科登科者 의 자격증을 되돌려 주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전기에 있어서 향리출신의 사람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급제하고 있는 것 이다. 이렇게 良人보다 신분이 낮은 鄕吏가 과거에 나가고 있음을 볼 때 良人들도 자격이 갖추어져 있으면 과거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V. 館軍과 科擧 다음으로 平安道와 黄海道에 永定된 館軍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平安道와 黃海道는 중국으로 來往하는 通路이기 때문에 이 兩道에 속하는 驛館은 다른 지역보다 더욱 중요하였다. 따라서 이 驛館을 鄕吏가 맡느냐 軍戶가 맡느냐 하는 것을 두 고 크게 논의되었다가 결국에는 향리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더 좋은 軍戶를 館軍으로 永 定시켰던 것이다.54) 그러나 이렇게 양인들에게 苦役인 驛吏에 해당하는 職役을 떠맡김으로써 이들 가운데 원성이 높아져 나중에는 이들에 대한 동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中宗 11년(1516) 5월에 領 52) 世宗實錄 권11, 4뒤. 53) 世宗實錄 권16, 2앞. 54) 成宗實錄 권166, 6뒤 10뒤, 13뒤 16뒤. 中宗實錄 권20, 20앞뒤와 권25, 25뒤.

18 國史館論叢 第26輯 議政 鄭光弼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였다. 黃海道館軍 亦苦役也 所當護恤 且館軍世傳其業 故民尤怨苦 依鄕吏之例 三丁中一子定爲他 役 以開通仕路 則似可也. 또한 左議政 金應箕도, 館軍事 前旣定議 其子孫許通 文武科生員進士矣 라고 하여, 고역을 맡은 館軍들에게 科擧에 나갈 수 있게 하여 仕路를 열어줌으로써 위로 를 하자고 하였다.55) 이러한 논의를 거쳐 중종 38년(1543)에 大典後續錄 이 편찬되었을 때에 다음과 같 은 규정이 제정되었다. 平安黃海道 永定館軍 元是良民 其子孫 無痕咎者 許文武科生員進士試.56) 즉 평안도와 황해도의 館軍으로 永定된 자는 원래는 良民이니 흠과 나무랄 데가 없는 자는 文武科, 生員進士試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양민의 자손은 하자가 없는 한 과거에 당당히 응시할 수 있다고 法條 文으로 보장해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Ⅵ. 良人과 仕宦 위에서 극히 드문 사례이지만 賤身分출신의 사람들이 科擧에 등과한 경우와 身良役賤 의 鄕吏와 館軍이 합법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음을 보았다. 다음으로 朝鮮前期사회 에 있어서 차지하였던 양인의 지위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조선사회는 확실히 신분을 중요시 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朝鮮王朝가 나라의 기본 이념으로 받아들인 朱子學은 名分을 무엇보다도 더 중요시 하였으며 각 사회구성원이 자기가 맡은 本分을 알고 그에게 주어진 범위내에서 분수에 넘치지 않은 행동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사회에 있어서 신분의 차이를 두는 것은 55) 中宗實錄 권25, 25뒤. 56) 大典後續錄 ( 大典續錄及註解 所收, 中樞院) p. 199.

19 자연의 天理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 16년(1485) 大司諫 韓堰은 易經 을 인용하면서 易曰 天尊地卑 乾坤定 矣卑高以陳 貴賤位矣 57)이라 하였고 또한, 臣聞易曰 上天下澤履 君子以辨上下定民志 夫上下之分 如天尊地卑 不可易也 苟或上下之分 一紊 則民志不定而國事日非矣 豈不誠可畏哉58)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태까지 이러한 上下의 구별에 대한 개념이 조선시대를 통해 이른바 양 반과 양민의 신분의 구별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래서 尊貴한 벼슬자리는 兩班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지 일반양민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실록과 기타의 사료를 조사해 볼 때 거기에서 누누히 강조되는 上下貴賤 의 구별은 적어도 벼슬하는 仕路에 관계되는 한 양반과 양인의 구별이 아니고 良과 賤의 구별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계되는 것으로 劉承源교수가 최근 그의 朝鮮初期 身分制 硏究 에서 이것을 잘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 위에서 인용한 韓堰이 주장하는 貴賤구별은 무엇을 두고 하는 것일까. 우리가 실록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전후사정을 캐어보면 그의 논의대상은 柳子光과 趙得琳의 아 들 즉 庶孽出身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如天尊地卑 不 可易也 라 함은 다음의 내용을 두고 하는 것이다. 國家自祖宗開國之初 特嚴嫡庶之分 其於受職之時 以爲等限 況議於科擧之際乎 贓吏淫 婦之子庶孽賤隷之產 不得與科目 載在令甲 今子光得琳之子 特令赴擧 以東方千古禮義之典 壞於一朝 是果謂之合於風敎乎. 59) 韓堰이 名分을 문란시킨다고 통탄하는 것은 贓吏淫婦之子와 庶孽賤隷之產이 과거에 응 시함을 두고 일컬음이다. 양인이 과거에 응시함이 名分의 문란이라고 하는 내용은 어디에 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經國大典 禮典에 보면 科擧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제 의 대상은 贓吏之子, 再嫁女 및 失行婦女의 소생 그리고 庶孽子孫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도 양인이 과거에 나갈 수 없다는 규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兩班과 良人의 차별도 찾을 수 없다. 工商人을 제외한 양인이 仕宦의 길에 오르는데 대해 조선전기에 있어서는 57) 成宗實錄 권179, 13앞. 58) 成宗實錄 권180, 1앞. 59) 成宗實錄 권180, 1앞뒤.

20 國史館論叢 第26輯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고 하겠다. 양인이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世祖代 北方徙民을 장려하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즉 평안 황해 강원 三道에 移民을 장려하기 위해 세조 5년(1459) 12월에 議 政府에서 다음과 같은 규정을 건의하여 왕의 승인을 받고 있다. 下三道良人應募者 自慶尙全羅道 移平安者 則有無職並超五資 移江原黃海者 則三資 叙 用 有欲爲其道土官者聽. 下三道公私賤人應募者 免賤永良 以通仕路. 60) 慶尙道와 全羅道에서 평안 황해 강원 三道 徙民에 응모하는 양인은 벼슬자리에 敍用을 할 뿐만 아니라 公私賤人으로 응모하는 자에게는 免賤을 시켜 永久히 良人으로 만들어 仕路의 길을 열어주기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免賤永良 以通仕路 라는 내용은 良人이 벼 슬길에 나아갈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仕路에 오르는데 있어서는 양반과 양인(工商人은 제외)의 차별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朝鮮前期에 있어서의 엄격한 신분구별의 중심은 양인과 천인과의 관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成宗 17년(1486)에 補充隊 에 소속된 자들의 신분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盧思愼은 我國人物 非良則賤 只有二途耳 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61) 물론 盧思愼이 언급한 것은 당시의 신분을 狹義에서가 아니 라 광범위하게 분류하면 良과 賤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지 良 중에 士와 良人의 구별이 또한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士와 良의 차별은 뒤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우선은 조선전기 의 신분을 크게 나누어 良과 賤으로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흥미있는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세종 10년(1428)에 儀體制法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는데 이에 관해 卞季良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大抵 儀禮制法 自天子至於庶人 須有等差 此出於天理之本然 今朝廷之制 品官祭四代 庶民祭三代 亦未嘗以品官 混於庶人也.62) 즉 先祖에 대한 祭祀는 品官인 경우에는 四代를, 庶民은 三代를 모신다는 것인데 品官 을 지니지 않은 자는 庶民과 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당시의 제법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상에의 제사는 品官을 지내지 않는 자는 兩班이나 士人의 구별없이 庶人과 동등 의 祭祀를 하였다는 것이다. 60) 世祖實錄 권18, 19뒤. 61) 成宗實錄 권189, 24뒤. 62) 世宗實錄 권41, 17뒤.

21 그리고 이에 대해 鄭招 역시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本朝六品以上祭三代 七品以下祭二代 庶人只祭考妣之法 若父爲六品以上 得爲三代 身沒之 後 其子無職 只祭父母 當撤去曾祖與祖神主 及後日除授六品 復作神主 勢有難處.63) 6품 이상은 三代, 7품 이하는 二代, 庶人은 父母에 한해 祭祀한다는 법에 따를 것 같으 면 만약에 父가 六品 以上이 되면 三代祖까지 제사를 보게 되고 本人이 죽은 후 그의 아 들이 無職일 경우 이 法에 따라 曾祖와 祖의 神主를 철거하여야만 하게 되며 또 나중에 그 아들이 6품 이상의 벼슬을 가지게 되면 神主를 다시 만들어야만 하는 불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父가 6품 이상의 벼슬을 가진 자라도 그 아들이 品 官이 없으면 庶人과 같은 禮式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兩班이니 士니 하여 일반 양인과 구별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朝鮮前期에는 크게 중시된 제사에 있어 서도 身分의 구별은 양반과 양인의 차별이 아니라 品官者와 無品官者(良人을 포함한)의 차별이었던 것이다. Ⅶ. 士와 良人의 區別 이와 같이 朝鮮前期사회의 신분이 크게 분류해서 良과 賤으로 구별되어지고 그것이 또 良身分內에서 品官者와 無品官者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양반과 일반 양인과의 신분의 차 별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이른바 양반과 양민의 신분은 어떻게 구분이 되었을까. 여기에서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양반의 개념이 언제성립되었는지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이 가진 兩班의 개념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상당히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朝鮮王朝 建國初, 즉 太祖 2년(1393) 7월에 都評議使司가 올린 啓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兵法當豫備鍊習 臨時應變 前期之季 法令廢弛 視爲餘事 中軍軍候所陣圖之法 敎學之名 皆 爲文具願自今主掌訓鍊觀 集兩班子弟及成衆官 各領可敎者 講習兵書陣圖 其有成才者 依前降 敎旨試取擢用. 64) 63) 世宗實錄 권41, 17앞. 64) 太祖實錄 권4, 1앞뒤.

22 國史館論叢 第26輯 兵法에 의하여 兩班子弟를 모아서 군사훈련을 시켜 그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탁 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兩班은 軍事訓鍊의 대상이 되고 있다. 成宗 19년(1488)에 明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董越은 그의 朝鮮賦 에서 兩 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以先世嘗兼文武者 謂之兩班 兩班子弟 止許讀書 不習技藝 或所行不善 則國人皆非之.65) 兩班은 先世에 文과 武를 겸한 자들이며 그의 자제는 글과 武藝를 닦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成宗 13년(1482)에 大司憲 蔡壽는 譯者와 醫者가 東西班으로 특명 탁용되는 것 을 반대하여 醫譯之流 皆出賤微 非士族也 라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夫東西兩班 皆三韓世族 其間或有微者 皆由科擧而進 豈可使舌人醫人雜處於其間 卑朝廷而 辱君子乎.66) 양반은 모두 三韓世族들이지만 그 가운데 간혹 寒微한 사람들이 끼어 있는데 이들은 모 두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成宗 15년(1484)에 魚世恭은 兩班之家 皆是士族 이라고 하고 있다.67) 그리고 16세기 후반에 이를 것 같으면 栗谷 李珥는 그의 社倉契約束에서 양반을 庶族 有職者(謂非士族 而稱兩班 如校生忠賛別侍之類) 68)라고 하여 庶族有職者란 士族이 아니면 서 校生 忠賛衛 別侍衛와 같은 부류로서 양반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士族과 兩班은 구별되는 것이며 양반은 庶族有職者를 말하고 있다. 仁祖 2년(1624) 5월 大同廳의 計口收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崔鳴吉은 다음과 같이 언 급하고 있다. 百姓則皆有屬處 而中間稱以兩班者 無役閑遊 臣意莫如畫一定役也.69) 여기서는 양반은 중간층에 있는 자들로 無役閑遊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양반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각각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하 65) 朝鮮賦 (朝鮮史編修會) 6앞. 66) 成宗實錄 권140, 13앞뒤. 67) 成宗實錄 권172, 8앞. 68) 栗谷全書 16, 47뒤. 69) 仁祖實錄 권6, 14뒤.

23 튼 양반은 일반 양민들과 구별되는 집단이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양인과 양 반의 구별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兩班의 개념이 時代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여기서는 편리한 대로 兩班과 士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쓰기로 하겠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양반이라는 신분이 세습적인 것으로만 알아 兩班家門에 태어나지 않으면 士族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래서 士와 良人의 구별은 가문으로 결 정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士가 되는데 가장 중요 한 관문인 科擧제도에 양인도 참가할 수 있었음을 볼 때 가문이 士와 良人의 구별을 결 정한다는 설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士와 良의 신분구별을 家門으로 결정하였다면 그 家門의 혈통을 정확히 기록하는 族譜 또는 家系가 보편적으로 발달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 재 알고 있는 많은 族譜의 편찬은 17세기 중엽 이후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壬辰亂 전에도 族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壬辰前에 편찬된 족보는 얼마되지 않은 名門氏族에만 한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17세기 전기에 편찬된 金烋의 海東文獻總錄 에는 15개만의 族譜와 姓譜가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70) 그리고 우리나라의 족보로는 世宗 5년(1423)에 편찬된 文化柳氏의 族譜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이것을 다시 增補하여 明宗 20년(1565)에 嘉靖譜 를 내었는데 그 跋文에 다음 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竊觀夫今世之人 雖爲厚門巨室 尙不記高玄之名字者 比比有之 況乃親盡服盡 而至於雲仍之 遠者乎.71) 當代의 아주 큰 가문들이라 할 지라도 高祖와 玄祖의 이름조차도 기록하지 않은 가문 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文化柳氏 族譜 다음으로 오래된 安東權氏 族譜는 成宗 7년(1476, 成化 12)에 편 찬되었는데 이 成化族譜序에서 徐居正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吾東方 自古無宗法 又無譜牒 雄巨家大族 絕無家乘 纔傳數世 有不紀高曾祖考名號者 子孫 浸以乖隔 或不識媤功之親 同路人何待服盡親盡 而疎且遠哉.72) 徐居正도 우리나라에는 譜牒이 발달되지 않아 巨家大族들로 高祖와 曾祖의 이름을 기 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血統을 중요시하는 族譜의 편찬은 壬辰亂 以前에는 70) 海東文獻總錄 pp ) 文化柳氏世譜 (正祖 21年版) 房3앞. 72) 安東權氏世譜, 徐居正 四佳集 13, 10뒤.

24 國史館論叢 第26輯 비교적 드문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朝鮮前期社會에 있어서 양반이 되는 것은 가문으로만 통해 이루어 졌다고 단정할 수 없다. Ⅷ. 儒學修業과 社會身分 朝鮮前期에 있어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士는 가문으로 결정이 되지 않았고 또한 양인 도 과거에 나아갈 수 있었다면 士와 良의 구별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겠는가. 여기에서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필자의 의견으로는 士와 良의 구별은 당사자가 유학을 공부하고 따 라서 정식으로 학교에 등록되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士와 良 의 최종한계선은 본인이 서울의 四學이나 지방의 鄕校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儒學공부를 專業으로 하고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달려 있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朝鮮朝 國家는 朱子學一色의 新儒敎國家이었다. 이 新儒敎國家의 支配層은 孔子 以後의 正統派 聖賢들의 이념이 구현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또 실제로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유교적 이상국가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주동역할을 하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유학에 통달한 사람에 한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사회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유학 공부에 전념해야 했으며 그 밖에 아무리 經濟力이 있고 家門이 좋다고 해도 유학의 지식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조선왕조의 권력체제는 Marx의 이론 즉 經濟力소유자가 사회정치권을 장악한다는 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지배층은 벼슬아치를 가진 官人들이었지 富를 가지고 또는 안가 지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徐居正은 全羅道 淳昌에 있는 歸來亭에 붙 힌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予又聞 古之君子 任有常祿 居有常業 故其進退綽綽 今之任者 大抵以官爲家 居無常業 一 失其俸無所於歸 徘徊顧望 以招貪位之譏竊祿之誘 惜哉 鳴呼.73) 즉 벼슬아치는 항상 보장되어 있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그 祿俸을 잃어버리면 돌아 갈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전기사회에서 지배층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벼슬아치를 가져야만 했으 며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科擧를 통하는 것이 正道이었다. 그리고 科擧에 응시하는 7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9, 淳昌조, 20앞.

25 데 있어서 儒學의 專門知識이 절대 필수조건이었지 경제력이니 가문같은 것은 부차적인 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家門이 뛰어난 집 자제들이나 貧寒家門의 자제들이나 간에 마 찬가지로 자기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과거에 등과하여 관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꿈이었다. 이러한 儒敎國家였기 때문에 글공부는 儒學공부에 직결되었으며 유학공부를 전업으로 하고 안하는 것이 신분구별에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재미있는 예로 申叔舟의 孫 大提學 申光漢( )의 다음과 같은 어릴 적 이야기가 있다. 申企齋光漢 少失父母 鞠於老婢 年十八猶不知書 與隣兒戱于川 隣兒踢公仆水下 公怒叱 曰 汝隷奴何敢凌公子 兒曰 如君不知書 亦公子耶 是必無腸公子矣 公大慚始折節讀書 文藻 水湧 明年以萬里 (斤+鳥)賦 魁禮闈 未幾登第 典之衡二十年.74) 비록 명문 집안의 貴公子로 태어났으나 글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賤隷집 아이조차도 너 같이 글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公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며 비웃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申光漢이 글공부를 하지 않았을 적에 公子 대우를 못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선 비가 없었던 지방에서 글공부를 함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에서 과거에 등과하는 자가 나왔던 예들이 있다. 즉 世宗 10년(1428) 5月 威吉道監司 崔蠲이 다음과 같은 啓를 올리고 있다. 本道地極北鄙 前不設學校 識字者盖寡 今文明之化廣被 大小州縣 各置敎官 生徒之額 不減 他道 登科第者比比有之 人皆觀感 漸抛馳馬試劒 咸願叩篋横經.75) 學校가 전혀 없었던 咸鏡道地方에 文學을 아는 자가 거의 없었는데 朝鮮初期에 文明化 가 되어 各州縣에 學校가 생기고 生徒가 늘어남에 따라 科擧에 등과하는 자가 나오는 정 도까지 되었다는 내용이다. 심지어는 많은 사람들이 감동이 되어 말과 칼을 버리고 글공 부를 하기 원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茶山의 牧民心書 에 보면 左賛成 李尙毅( )의 成川府 使 때의 공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李賛成尙毅爲成川府使 本府僻在遐遠 民不知學 莫有占科名者 公遂興學 爲先擇其民之俊秀 者 親自訓勵 郡中翕然競勸 弦誦相聞 不三年有一人中小科 謂之破天荒 自是登小科者相繼 而 至有捷大科出宦途者 人皆稱之.76) 74) 金時讓, 荷潭破寂錄 (昭代粹言의 권一), 明宗實錄 에서는 申叔舟之孫 世以文章顯 早孤失學 十五始讀書 라고 하고 있다(권19, 45앞). 75) 世宗實錄 권40, 16뒤.

26 國史館論叢 第26輯 成川府는 벽지였기 때문에 글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합격한 자도 전혀 없었는데 李尙毅가 府使時 興學하여 平民 가운데 우수한 자를 골라 공부를 시 킨 결과 글공부가 널리 유행하여 3년이 못가서 小科에 합격한 자가 생겼고 그 후에는 문 과에까지 등과하여 入宦한 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를 통해서 볼 때 벼슬은 커녕 글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지역에서도 學校를 세워 유학공부를 시킴으로써 그 지방에서 登科者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글공부와 벼슬길에 오르는데 있어서 본인이 반드시 가문이 좋은 양반집안에서만 나와야 한다는 설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비록 출신이 벼슬을 한 집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儒 學修業만 하면 良人이라 할지라도 科擧길에 나갈 수 있고 또 벼슬아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朝鮮前期에는 양인이라 할지라도 글 공부만 잘하면 출세의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젊은 사람들이 儒學修業을 하는 곳은 물론 學校였다. 조선사회에서 차지했던 학 교의 역할이 극히 중요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들어서자마자 나라에서 學校를 중요시하 여 처음부터 학교제도를 정비하였던 것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전국 각 郡縣에 鄕校가, 수도 漢陽에는 四學이 세워졌으며 또 주로 生員進士들이 文科공부를 하기 위해 成均館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글공부 즉 儒學修業이 출세길에 절대필수조건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나라에서 세운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 래서 成宗은 학교의 사명을 國之學校 盖欲預人材 治國安民也 77)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Ⅸ. 良人의 學校入學 그러면 朝鮮前期社會 엘리트의 시발점이 되는 學校에는 어떤 신분자가 들어왔을까. 여 기에 이른바 양반과 양인과의 구별이 있었을까. 朝鮮前期사회에서 차지하는 學校의 역할 이 너무나 중요하였기 때문에 어떤 신분배경을 가진 사람이 입학하였는가 하는 점을 확 인하는 것은 당시사회의 신분구조를 파악하는데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四學과 鄕校에 양인도 양반과 똑같이 입학할 수 있었 다. 이에 대해서는 李範稷교수가 朝鮮前期의 校生身分 에 이미 충분한 자료를 제시해 76) 牧民心書 ( 茶山全書 8) 10뒤 11앞. 77) 增補文獻備考 권209, 2앞.

27 주고 있다.7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良人도 四學과 鄕校에 아무 제한없이 입학할 수 있었 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의미에서 보충 설명하기로 하겠다. 첫째로 양인의 입학은 학교에 관한 節目과 事目 등 나라에서 만든 규정에서 권장하게 끔 되어 있었다. 明宗 원년(1546)에 반포된 京外學校節目에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童蒙訓導可常人物 勿論士族庶孽見設六員 外加設四員 蒙士族及凡民子弟 自八九至十五六歲 者 先誨小學 能明句讀稍解文理然後 次敎以大學論語孟子中庸 陞之於學.79) 그리고 宣祖 15년(1582)에 王의 명을 받고 당시 大提學이었던 李珥가 만든 學校事目에 다음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除生進外 京中志學之士 皆入于下齋及四學 外方則勿論士族寒門 凡學儒者 皆入鄕校 初入時 諸生十人薦其志學 然後試講許入 以學校模範使之飭行 若厭憚拘束不籍名于學校者 不得赴科 擧.80) 이렇게 明宗 원년의 京外學校節目에서는 蒙士族及凡民子弟 라 하고 栗谷이 만든 學校事 目에는 勿論士族寒門 凡學儒者 皆入鄕校 라고 하여 用語조차도 의심할 여지없이 양인도 四學과 鄕校에 입학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부규정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인의 기록에 의해서도 양인의 학교입학이 가능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中國 明나라 사신 董越은 그의 朝鮮賦 에서 成均館에 대해 生員進士居者上齋 升學居者曰下齋 升學卽民間俊秀者也 81)라 하였고, 燕山君 3년(1497) 藝文館 待敎 鄭希良의 상소 중 崇學校 에 관해 我國家內立成均館 以養公卿之子弟 外設鄕 校以育民間之俊秀 此卽聖主之遺制也 82)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宣祖初에 領議政을 지낸 李浚慶( ) 은 四坊各有學舍 敎卿大夫子弟 及凡民俊秀年八歲以上者 83)라고 하고 있다. 여기의 民間之俊秀 는 양인의 자제들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렇게 양인의 자제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新白丁까지도 世宗代에 學校에 들어 갈 것을 권장하였다. 세종 14년(1432) 10월에 禮曹의 啓에 新白丁旣雜處平民 相爲婚嫁 差定 軍役 其子弟願讀書者 請許赴鄕校 라고 요청 하였는데 세종은 이것을 승인하고 있다.84) 즉 78) 韓國史論 3(1976). 79) 增補文獻備考 권203, 8뒤. 80) 增補文獻備考 권207, 16앞, 栗谷全書 15, 42앞. 81) 朝鮮賦 28뒤 19앞. 82) 燕山君日記 권25, 22뒤. 83) 李浚慶 東臯遺稿 8, 3뒤 4앞. 84) 世宗實錄 권58, 3뒤.

28 國史館論叢 第26輯 정처없이 집단적으로 떠돌아다니던 流移民 新白丁을 정착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애쓴 결 과 이제는 이들이 平民들과 섞여 살고 또 서로 혼인까지 하게 되고 軍役까지 차정이 되 었으니 新白丁 가운데 글공부를 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學校에 입학시켜 주자는 내용이 다. 이렇게 新白丁까지도 양인처럼 정착이 되었을 적에 학교교육을 시키는데 하물며 양인 의 입학은 말할 여지조차 없다고 보겠다. 또 다시 여기에서 비록 규정상으로 入學의 제한이 없었겠지만 실제로 양인들이 경제적 여건의 한계 때문에 입학을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할런지 모르겠다. 물론 글공부를 하는데 경제적 제한이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가 명심하여야 할 것은 위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양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빈곤에 허 덕였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뒤에서 다시 지적하겠지만 學校에 입학하 여 儒學修業을 함으로써 얻는 혜택이 막대하였다. 學生과 校生으로서 가지는 특전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의 자제들은 學校에 입교함으로써 오히려 집안 형편이 더 좋 아 질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同族意識과 地方意識이 강한 나라에서는 동족이나 同鄕人 가운데 자질이 우수하고 장래가 유망한 자가 있으면 그를 도와 同族과 同鄕을 빛나게 하는 예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良人出身者들도 학교 특히 鄕校에서 儒學修業을 함으로써 士가 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나가는 鄕校生 가운데는 農民出身도 있었다. 이른바 士出 於農 이라는 유교의 개념이 조선전기사회에 실지로 있었다고 필자는 본다. 士出於農 에 대해서 定宗 2년(1399) 門下府가 署經法을 주장하면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士出於農 而工商不擧焉 今官敎之法一行 而工商賦隷尙有冒進之意 若仍不革 則必至於混雜 朝廷矣.85) 이 밖에 學生들 특히 鄕校生들 가운데 농민출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災殃이 있었을 때 와 농번기에는 放學을 시켰다는 예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太宗 16年 3月 : 衣食足而後 治禮儀 各郡鄕校生徒 賚糧甚難 姑且放學( 太宗實錄 권31, 18앞). 世宗 卽位年 9月 : 慶尙道觀察使申商啓 道內禾穀 因風水之灾並皆不稔 鄕校生徒棄其產 業 在校讀書 實所不堪 請分放學( 世宗實錄 권1, 26뒤). 世宗 5年 正月 : 禮曹據京畿忠淸 道監司關啓 請分各官失農輕重 鄕校生徒或全放學或分番 85) 定宗實錄 권3, 3앞.

29 - 173 幷他道行移( 世宗實錄 권19, 6뒤). 世宗 5年 3月 : 禮曹據咸吉道監司關啓 失農各官鄕校生徒 旣已放學 其校官亦令 各歸本家 待秋還任 從之 仍命並他道行移( 世宗實錄 권19 22앞). 世宗 7年 4月 : 禮曹據江原道觀察使牒啓 道內各官鄕校生徒 限農月放學( 世宗實錄 권 28, 5뒤). 成宗 元年 2月 : 禮曹啓 江原道諸邑 司譯院生徒 奉常寺齋郎樂工 及鄕校生徒 可自備糧者 外 限早穀成熟 放遣何如( 成宗實錄 권3, 9뒤). 이러한 일련의 기사는 鄕校生徒 가운데에 농민출신이 있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世 宗 즉위년의 기사 鄕校生徒 葉其產業 在校讀書 云云은 鄕校生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 었음을 의심없이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성종 원년의 기사 양식을 손수 마련할 수 있는 鄕校生徒 외에는 早穀이 성숙할 때까지 放學을 시키자는 제안은 鄕校生 가운데 에 자기가 직접 양식을 마련할 수 없었던 校生들이 많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조선전기의 학교에 兩班子弟들만이 入學하였다는 주장은 타 당하지 않으며 良人子弟도 학교에 入籍하여 儒學修業을 할 수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X. 儒學生의 特典 그러면 四學과 鄕校에 입학한 學校生들에게 어떠한 특전과 의무가 주어졌을까.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주어진 특전의 하나는 당시 사회에 있어서 명예로운 士人이 될 수 있는 길이 이들에게 열렸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經國大典 에 규정된 禁制에 저촉되 지 않는 한 모두가 다 나라의 등용문인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때에 따라서 학교에 등 록이 안되었을 경우에는 과거에 응시못하는 예도 있었다.86) 그래서 成宗은 大抵儒生學聖 人之道以他日事君行道爲志 87)라고 하여 儒生은 聖人의 道를 배워 후일 王을 섬기고 道를 행하기 위한 목적임을 밝혔다. 이렇게 聖學을 배운 자가 科擧 길에 올라 出仕하게 되면 모두가 朝士가 되는 것이다. 즉 此人等 今日雖爲擧子 他日若出於仕路 則皆爲朝士也 라고 하였다.88) 그래서 이들이 今日之士 明日之大夫 今日之大夫 明日之卿相 89)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반 平民이 士가 되는데 학교가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86) 增補文獻備考 권207, 16앞. 87) 成宗實錄 권146, 14앞. 88) 中宗實錄 권92, 2앞. 89) 成宗實錄 권203, 4앞뒤.

30 國史館論叢 第26輯 磻溪 柳馨遠은 그가 만든 學校事目에서 士와 民의 구별의 시발점을 학교에 두고 있다. 夫旣設閭塾黨庠 則非獨爲士者有敎 天下之民無不敎之人矣 至於州縣之學 則擇庠塾之秀以 入 已非小學之比 士民之辨於玆始焉90) 磻溪는 17세기 사람으로 그가 만든 學校事目이 반드시 朝鮮前期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고 할 수는 없겠으나 士民之辨의 시작이 학교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儒家의 일반적인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 유학 생이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이 유학생 들을 바로 士라고 부르는 데에는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士가 될 수 있는 이른바 士의 후보생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儒學生이 받은 또 하나의 특전은 이들이 학교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 나라에 서 생활보호를 해 준 사실이다. 이 보조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으며 또한 어 느 정도였나 하는 점에 있어서는 아직 확실한 것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자료로 짐작컨대 상당했으리라 믿어진다. 예를 들면 端宗 즉위년(1452) 6월에 集賢殿에서 올린 興學之事 가운데 다음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一. 夫學心無他累 可以專精 謹接烈女傳 太祖高皇后 言於太祖曰 善理天下者 以賢才爲本 今 生員廩食於太學 而妻子無所仰給 彼寧無所累於心乎 太祖卽命 月賜糧給其家以爲常 我國公 儲不敷難於賜糧 乞外方生徒居館者 令在所邑 完護本家 蠲免差役 庶使生徒專心學業. 一. 四部學生中 有外方來學者 及京中寒生 專仰學廩者盖多 小遇凶荒 輒減四部學廩誠爲未便 今後雖値凶歉 毋減廩食永爲恒式.91) 敎育과 科擧에 관계되는 이 長文의 與學之事는 왕의 인준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지방에서 올라와 成均館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 학생이 거주하는 縣邑에서 學生의 本家를 완전히 보호하고 그들 가족이 지고 있는 差役을 덜어주게끔 하 여 그 학생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四學에서 공부하고 있는 外方學生과 京中에 가난한 학생 가운데 학교에서 나오는 양식에만 전적으 로 의존하고 있는 자가 많으니 이들에게는 흉년이 들더라도 식량공급량을 줄이지 말 것 을 영구한 규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이 밖에 鄕校에 대해서도 많은 田結과 奴婢를 하사하고 있으며 中宗 5년(1501) 3월에 는 각도에서 혁폐되고 있는 사찰의 農地를 鄕校에게 넘겨주어 학생들의 생활보조에 충당 90) 磻溪隨錄 9, 34앞뒤. 91) 端宗實錄 권1, 29앞.

31 하도록 令을 내렸다. 즉 命以各道革廢寺社田 屬鄕校以補諸生廩養 이라고 中宗實錄 에 기록되어 있다.92) 이렇게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나라에서 양식을 공급해 가면서 그들로 하여금 聖學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또한 때에 따라서 공 부성적이 우수한 校生은 戶役의 일부를 탕감받는 혜택을 입었다. 즉 成宗 3년 2월 藝文館 에서 올린 興學節目에 校生有月科優等者 量減戶役 93)이라고 하여 이들 儒學生의 공부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나라에서 나오는 혜택 외에도 私的인 경제적 지원도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예 를들면 가문이나 親族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자기들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가 나올 경 우 그를 재정적으로 원조해 주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지역의식이 강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同鄕人 중에 우수한 자를 지원해 주는 경우도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學契같은 것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으리라 믿어진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조선전기사회에 있어서 유학공부를 하는 능력만 있었다면 비 록 빈곤한 집안의 출신이라 할지라도 웬만하면 학교에 적을 두고 유학공부를 할 수 있었 을 것이다. 아마도 유학생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전은 軍役의 면제였을 것이다. 유학생들의 軍 役免除에 대해서는 다른 學者들의 연구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李成茂씨는 朝鮮初 期에는 成均館 四學 鄕校의 儒生들도 軍役을 免除받았다. 이들 官學生은 과거를 거쳐 장 차 兩班官僚가 될 수 있는 官職候補者들이었으므로 이들의 修學도 軍役과 相殺되는 것으 로 파악되었다 94)라고 하였다. 그리고 閔賢九씨도 官吏로서 進出하기 위한 前段階로서 訓鍊을 받는 成均館과 鄕校 등의 儒生도 免除되었다 95)라고 하였다. 그리고 日本人學者 有井智德씨도 戶籍上에 人丁이면서 軍籍에 記載되지 않은 者로서 東班流品 有蔭子弟 儒 生 僧侣 等이 있었다 96)라고 하고 있다. 軍籍免除가 조선전기사회에서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가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 다. 軍役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學校에 모여든 사실만 봐도 軍役免除가 얼마나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經國大典 에 郡縣의 鄕校에 入籍할 수 있 는 유생의 수를 정해 두고 있는데 아래에서 다시 지적하겠지만 유생수가 정원을 초과하 게 됨에 따라 額內 額外數를 둘 정도까지 되었는 바 이것은 그만큼 軍役免除의 특전을 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世祖 때부터는 이들 學生 가운데 儒學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生徒들에게는 다시 軍役에 충정시키기까지 하였 92) 中宗實錄 권10, 58앞. 93) 成宗實錄 권15, 16앞. 94) 李成茂, 朝鮮初期 兩班硏究 p ) 韓國軍制史 (近世前期篇) p ) 有井智德, 李朝初期の戶籍法について ( 朝鮮學報 39 40, 1966) p. 82.

32 國史館論叢 第26輯 으며,97) 나아가서는 鄕校가 軍役避役處가 되어 간다는 논의까지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특전과 혜택을 볼 때 儒學生이 된다는 것 그 자체가 벌써 당시 사회에서는 상 당히 명예스러운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빈곤한 환경에 태어난 양인이라 할지라 도 儒學공부의 능력만 있었다면 鄕校에 입학하여 글공부를 하려고 함은 당연하였다. 그러 므로 나라에서 제정한 이러한 특혜는 능력있는 학생들을 學校에 끌어들이는 자극제가 되 었을 뿐 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 길러내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을 것이다. Ⅺ. 軍役과 身分 儒學生들이 軍役을 免除받는 것이 나라에서 베푸는 특전이라면 이들 유학생은 이 특전 의 대가로 儒學공부에 전념하여야 할 의무가 또한 주어졌다. 신분에 따라 役이 정해진 朝 鮮朝에서는 일찍이 金錫亨씨가 주장한 것처럼 儒學을 공부하는 儒生이라는 것 자체가 이 들 儒學生에게 주어진 하나의 役이었다라고 할 수 있으며 유학공부를 한다는 役을 짐으 로써 軍役을 대신하였다고 할 수 있다.98) 그렇기 때문에 李成茂씨가 지적한 것처럼 군역 은 조선 사회의 社會身分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99) 조선조에 들어와서 儒學生을 軍役에 충정시킨 처음 기록은 世祖 때인 것 같다. 世祖 7 년(1461) 禮曹가 啓를 올리기를 人才를 기르는 것은 나라에 重大事이니 京과 지방의 학 교에 學問에 정통한 자를 골라 스승으로 보내어 학생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를 하게 하 며 성격이 좋은 生徒들은 포상하고 또한 40세가 넘어도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는 자는 軍役에 차정할 것을 제의하여 왕의 승인을 받고 있다. 禮曹啓 敎養人才 國家重事 諸自今 京外敎授官 敎導學長 擇學問精熟 堪爲師表者 授之 成均館四部 勤慢則本曹常加檢察啓聞 外方則觀察使 親自講問 移文本曹轉啓 始有成効者 特 加褒獘 京外除生員進士及升補入學者外 年過四十者 不學閑遊者 各其敎官 報本曹 移文兵曹 充定軍役 以懲其餘 守令不能修明學校者 令觀察使 嚴加糾理 從之.100) 이와 같이 世祖 때부터 儒學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유생들을 군역에 充定하고 있다. 이는 世祖의 성격상 그의 治策에 軍事面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 97) 增補文獻備考 권207, 4앞. 98) 金錫亨, 李朝初期 國役編成의 根抵 ( 震檀學報 14, 1941). 99) 李成茂, 朝鮮初期 兩班硏究 pp ) 世祖實錄 권25, 10뒤 11앞. 이와 같은 기사가 增補文獻備考 권207, 4앞과 권209, 9앞뒤에도 있음.

33 다. 후일 成宗 2년(1471) 11월에 申叔舟는 啓하기를 世祖非不重學校 特以銳意兵事 101)라 고 하였으며 또한 世祖 자신도 그의 在位 8년(1462) 4월에 豫留意武備 士卒精鍊 戎器亦 完 豫無可憂 102)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그의 군비 강조책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世祖가 儒學의 학문을 장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즉 世祖가 이제는 武備가 잘 되어 있어 두려울 것이 없노라고 하였을 적에 都承旨 洪應은 대답하기를 臣意以爲勿數 設科 取僥倖非材者 鄕學儒生 雖年老者 勿定軍役 以儲養之 라 하였으며 이에 世祖는 然 其所以益 廣學之道爾主之道 103)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儒生의 軍役差定이 계속된 바 이제는 鄕校에 入籍 學生數를 정해 놓고 이 정원 외의 額外儒生은 軍籍에 등록하였다. 이것은 世祖 14년 (1468) 6월에 大司諫 芮承錫의 다음과 같은 疏에서 알 수 있다. 且鄕校生徒 定其額數 數外儒生悉錄軍籍 是國家之待人才也 有限人才 豈可定額 而待之哉 伏願毋定儒生之額.104) 쓸만한 인재의 수가 한정되어 있는데 어찌 鄕校生徒의 額數를 한정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니 儒生數에 定額을 두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世祖代에 鄕校生徒가 軍役에 충정된 데 대해 비판의 소리가 높아 世祖가 죽은 후에 이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그래서 睿宗 원년(1469) 閏 2월에 領議政 韓明澮는 다 음과 같은 啓를 올리고 있다. 外方鄕校生徒 不論老幼 皆定軍役 雖有質美者 終不得成就 臣願生徒自十五歲至二十歲 勿令局定 俾成其業.105) 그리고 成宗 2년(1471) 11월에 領事 申叔舟도 다음과 같은 啓를 올리고 있다. 世祖非不重學校 特以銳意兵事 學校稍弛 今宜擇敎官 訓誨儒生 且世祖所以定額者 時方籍軍 人 皆托名鄕校 以避軍伍故耳 今軍籍已成 宜勿定額 令藝文館議興學條件 以啓可也.106) 즉 世祖가 鄕校의 生徒를 額內 額外數로 정한 것은 軍人의 籍을 가진 자들이 모두 鄕 101) 成宗實錄 권13, 8앞. 102) 世祖實錄 권28, 11앞. 103) 世祖實錄 권28, 11앞. 104) 世祖實錄 권46, 43뒤. 105) 睿宗實錄 권4, 19뒤 20앞. 106) 成宗實錄 권13, 8앞.

34 國史館論叢 第26輯 校에 이름을 올려놓고 軍役을 피하려 하였기 때문이므로 이제는 軍籍이 완성되었으니 鄕 校에 定員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鄕校에서 공부하는 儒生들을 軍役에 충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의 소리에 따라 成宗 3년에는 藝文館을 시켜 새로운 규정 興學節目을 제정케 하였다. 이 절목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一. 各於界首官 擇所屬諸邑有才行校生 毎年六月都會 或請書或製述優等者 依舊例直赴生 員進士會試. 一. 校生所讀書日課 毎月季 報監司 監司巡行時 考日課或講或誦 依學令勸懲 仍須錄簿 以 憑敎官殿最.107) 이 규정에 따르면 校生이 儒學을 공부한 것을 매일 기록해 두어 月末에 監司에게 보고 하게 되어 있으며 또 매일 經書를 講 또는 誦하는 것을 시험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考講의 방법으로 유학생의 유학공부를 장려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유생과 軍役避役문제는 조선전기를 통해서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이 에 대해서 계속 논의가 있었던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後日에 나라에서 귀히 쓸 인재들에 게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어야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들을 우대하다 보니 學校 가 피역소가 되어 버리는 불미스러운 결과를 초래케 되어 조선조는 이러한 二律背反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생들에게 軍役면제의 특전을 주다 보니 군역을 피하기 위해서 학교에 사람 들이 모여드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실록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成宗 18年 正月 : 韓明澮 曰 鄕校生徒 則有軍士衙前等雜類子孫 年至四十五十 而 謀避軍役冒名儒籍者頗多 擇年壯無用者 充歲貢 不亦宜乎( 成宗實錄 권199, 21뒤 22앞). 中宗 12年 8月 : 大司諫文瑾曰 外校校生 托名儒籍 年幾六十而不識一字 故以鄕校 爲 避役之地矣( 中宗實錄 권29, 41 뒤). 明宗 3年 9月 : 司成 鄭希弘啓 名爲校生者 亦皆無賴避役者 故學校爲虛器( 明宗實錄 권8, 42뒤 43앞). 이와 같이 學校가 軍役逃避에 이용되다보니 문제는 자꾸만 심각하여졌다. 그런데 여기 서 우리가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비록 學校가 많은 사람의 軍役피역처로 이용되 107) 成宗實錄 권15, 15뒤 16앞.

35 었지만 이것은 또한 학교에 양인들이 많이 다녔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다. 이렇게 良人들이 많이 모여들다보니 이른바 士族子弟들은 자기들보다 신분이 낮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기 위해 學校에 나아가지 않는 현상까지 일부에서 일어났다. 中宗 31년(1536) 정월 執義 鄭萬鍾은 다음과 같이 啓하고 있다. 且學校事 外方儒生 專不赴校 臣於少時見之 大邑則雖士族 多赴鄕校 近來則皆以赴校爲辱 而全不赴矣 今者令考書徒許赴別試矣 若不赴學校 俾無赴擧之路 則外方亦庶幾赴校矣.108) 士族들은 전에는 모두 향교에 나가고 있었는데 근래에 와서 향교에 가는 것을 수치스 러운 것으로 여겨 鄕校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金安老도 동의하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鄭萬鍾之言是矣 今之校生 皆避軍役者也 士族子弟則名爲業儒而不赴鄕校 以鄕校下流之所 聚而羞入焉.109) 鄭萬鍾의 말대로 향교에 나가는 校生은 모두 軍役을 피하려는 자들이어서 士族子弟들은 이를 부끄러히 여겨 鄕校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鄭萬鍾과 金安老의 기록에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하나는 향교가 군역의 避役所가 되어 가고 있어서 이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士族子弟들 은 향교에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군역을 피하기 위해 향교에 입적한 校生은 많은 사람들이 士族이 아니고 양인출신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良人도 鄕校에 나가 儒學공부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良人身分이면서도 鄕校에 나가 공부할 수 있었으며 또 그 가운데에는 능력만 있 으면 과거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四學과 鄕校에 入籍해 있는 양인들은 士族출신 과 마찬가지로 司馬試와 文科試에 응시하는데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았다. 따라서 鄕校生 들이 많이 응시하는 司馬試와 鄕試에는 심지어는 正兵 保人 水軍의 身分者들까지도 한 때 응시하고 있었다. 明宗 9년(1554) 9월 檢討官 尹毅中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小臣頃爲試官 又見外方生員進士榜目 或I兵 或保人 或水軍 皆得參選焉 此由於軍籍之新 刷也 在立法之初 雖不可毀其成憲 然得參試選者 皆業儒者也 以業文之儒 編於行伍 豈不爲明 時之大欠乎 大明高皇帝時 有一儒生 編於軍卒 有司請令赴行陣 高皇帝曰 得一儒士而失一軍 卒何害 卽令解伍 高皇帝時 去古遠矣 而尙有如此之政 此後王所當法也 今各官豈無一箇遺丁 而以此業文之儒 爲卒伍乎 若以餘丁充其數 而抄除入格之儒生 則豈不使下人 有所觀惑 而聖 108) 中宗實錄 권81, 6뒤 7앞. 109) 中宗實錄 권81, 7앞.

36 國史館論叢 第26輯 上右文之意 益著矣.110) 이렇게 儒學을 공부하는 儒生들을 軍卒로 편입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던 바 명종 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今時學校廢弛 文風不振 皆予勸獎之道 不盡其方也 今者正兵水軍參選者 皆爲儒者也 啓意至 當 自上亦知其意 以新法之立 未敢輕毀 然此人之外 豈無餘丁 參選之人 宜可刷除 而以他丁 充之.111) 明宗도 유학을 공부하는 儒者가 軍役에 충정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正兵 保人 水軍이라 할 지라도 儒學을 공부하면 儒者가 될 수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今者 正兵水軍參選者 皆爲儒者也 라고 明宗이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 다. 유학공부를 하여 生員進士의 鄕試에 나아가는 자는 모두 儒者이며 正兵 保人 水軍도 儒者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栗谷이 제정한 學校事目에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毎大小科擧時 若有志學之士 名偏軍伍 願赴科擧者 京則館官 外則守令 審察眞僞 亦許赴擧.112) 儒學의 뜻을 둔 자이면 비록 軍卒에 배치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眞意를 확인한 후에 과거응시를 허락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유학에 참뜻을 두는 자들에게는 학교공부와 과거응시의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실제의 예가 있다. 즉 崔山斗는 燕山君 10년(1504)에 生 員이 되고 中宗 8년(1513)에 文科에 합격한 후 淸顯의 자리인 弘文館 司憲府 司諫院의 관 직을 두루 거쳐 趙光祖의 일파로 몰려 己卯士禍 때 화를 입어 유배를 당했다. 그는 문장 이 뛰어나 당시 湖南三傑 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출신성분은 軍 保이었다. 己卯錄補遺 는 崔山斗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世居光陽 親族皆以軍保 隷戍列鎭 公嘗奉使歸故鄕 必求酒肴於諸鎭主邑 親詣其所寓營廨 俯 伏獻酢 不敢以榮貴凌親宗族.113) 즉 崔山斗는 집안이 대대로 내려오는 軍保출신이었던 것dl다. 이러한 寒門출신의 배경 110) 明宗實錄 권17, 38뒤 39앞. 111) 明宗實錄 권17, 39앞. 112) 增補文獻備考 권207, 16뒤 17앞. 113) 己卯錄補遺 ( 大東野乘 2) p. 525와 燃藜室記述 Ⅱ (民族文化推進會) p. 731.

37 때문에 崔山斗는 官職임명 때 여러번 문제가 일어났다. 中宗 8년 4월에 弘文館에 임명되 었을 때 正言 蘇世讓은 崔山斗가 起自寒微 雖有學問 不可 114)라고 반대하였다. 2년 후 中宗 10년 10월에 司憲府가 崔山斗를 다시 반대하였을 때 實錄史臣은 山斗雖曰寒微 氣 度雄毅文詞富贍 豈不合於玉堂乎 115)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中宗 13년 7월에 司憲府의 持 平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또 다시 물의가 있은 듯 臣本微賦 朝廷之收錄 亦非分也 라 고 하여 사직을 청원하였을 때 중종은 사직못하게 말렸다.116) 이러한 일련의 사실을 볼 때 일반 양인들도 학교에서 아무런 제한없이 유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한 科擧에도 응시할 수 있었으며 능력에 따라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이다. 그리고 學校는 반드시 士族出身 身分者만이 나가는 곳이 아니었다. 학교에는 사족 출신들도 있었고 양인출신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들 良人出身 學生들 가운데에는 軍役을 피하기 위해서 入籍하고 있는 者들도 물론 있었고 그리고 이들 學生들 중에는 유학공부 에 태만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유생들의 軍役도피와 공부태만을 막기 위 해 明宗 때에는 校生에 대한 考講이 다시 논의되고 제정되었다. 이에 대해 明宗 12년(1557) 10월에 司諫 金汝孚는 아래와 같이 上言하고 있다. 臣見兵曹事目 外方校生考講不通者 四祖無顯官 則充定水軍 此寘蘇復水軍之策 而外方校生 士族居多 若不通考講者 皆定水軍 則子子孫孫永爲賦役 以儒冠之人 一時充定水軍 至爲未便 大抵爲法 必洽於人情然後 可以永久行之 今者兵曹 以旅外正兵 破定于步兵闕額 臣意以爲 旅 外正兵及閑丁之微賤者充定水軍 考講不通者 若微賤之人則已矣 若士族之人 則勿定水軍 則物 情可安 而法亦永久行之也. 이에 대해 明宗은 아래와 같이 회답하고 있다. 今欲充補水軍 故兵曹爲此事目矣 然名付校籍者 一朝爲賤役 似爲未便 當更商議爲之.117) 金汝孚에 의하면 새로 제정된 兵曹事目에 따라 外方校生들이 考講에 不合格하면 그 중 四祖 가운데 顯官이 없는 자는 賤役인 水軍에 충정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旅外의 正兵과 閑丁出身인 자가 水軍에 충정되는 것은 상관없겠지만 外方校生들 가운데에는 士族出身도 많이 끼여있는데 이들마저 水軍에 충정되어 賤役을 맡게 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항의에 明宗도 동의하여 鄕校에 籍을 두고 있는 儒生들이 考講에 실패하였다 하 여 즉시로 水軍에 배치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니 새로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할 것을 지시 114) 中宗實錄 권18, 19앞. 115) 中宗實錄 권23, 23앞. 116) 中宗實錄 권34, 4앞. 117) 明宗實錄 권23, 54앞.

38 國史館論叢 第26輯 하였다. 우리는 金汝孚의 위의 疏에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四祖 중 無顯官者도 士族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考講에 不通했을 때 四祖 중 無顯官者는 水軍 에 충정된다고 했는데 이것은 四祖 중 顯官이 있는 자는 水軍에 충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士族이 水軍에 충정되는 것은 좋지못하다 하는 것은 四祖 가운데 顯官을 지낸 사람이 없었다 해도 士族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外方校生 가운데 에는 士族도 있고 일반良人도 校籍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水軍충정에 旅外正兵과 閑 丁이 가는 것은 상관없으나 士族이 간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 다. 이와 같이 學校에는 良人出身 身分者도 入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水軍充定문제를 가지고 明宗代에 더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즉 東臯 李浚慶 도 水軍議라는 啓를 올리고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議者以爲今之旅外在各邑者 但是士族之人 豈可以此破定賤役乎 臣意亦以爲士族之人 一朝定 爲賤役則有妨國家優待士族之盛意矣 但於許多旅外之中 豈盡士族而絕無凡民乎 士族之人自當 爲正兵 而凡民豈不可爲水軍乎 要令監司兵使 詳加區別而量定之耳 在昔初定水軍之時 亦豈盡 非平民而別有種類乎況水軍苦歇 雖不如正兵 又非公私賤之比 而許通正科旣無仕路之防 則其 中拔萃者 自可起以爲士類矣 何可謂之賤役 而非士族旅外莫之定乎.118) 李浚慶의 논의의 요점은 水軍충정에 있어서 士族이 충당되는 것은 부당하며 平民들이 충정되는 것은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校生 중에는 양인출신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하여야 할 점은 비록 水軍이 지니는 苦役이 正兵이 나 公私賤에 비할 바 못되지만 이들은 許通이 되어 있어 科擧에 정식으로 나아갈 수 있 으며 仕路에 오르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으니 그 중에 뽑힌 자는 士類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自可起以爲士類矣 라고 하고 있다. 양인출신으로 水軍이 된 자들도 과거를 통해서 仕宦길에 오를 수 있으며 士族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볼 때 良人에게는 과거길이 막혔으며 通仕의 길이 막혔다는 설 은 성립될 수 없다고 하겠다. 良人身分이라 할지라도 능력에 따라 學校에 入學할 수 있었 고 儒學공부를 한 후에 科擧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벼슬자리에도 오를 수 있 었던 것이다. 이렇게 良人身分出身이 士族이 될 수 있는 시발점은 儒學공부를 할 수 있는 學校였던 것이다. 조선전기사회의 신분구조에 있어서 學校가 차지한 위치는 이러한 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였다. 이렇게 學校를 기점으로 하여 양인출신이 신분적으로 上昇의 길에 오를 수 있었던 반 면에 능력이 없거나 태만한 士族出身이 士族 이하의 신분으로 전락, 身分下降의 길로 내 118) 東臯集 7, 6앞뒤.

39 려갈 수도 있었다. 이것은 學校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모두가 士族이 되거나 軍役을 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學校에서는 원칙적으로 열심히 儒學을 공부하여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었고 이들의 태만함을 막기 위해 儒學生들은 정기적으로 考講을 쳐야만 했다. 이 考講에 떨어지는 자는 군역에 차정되는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실례를 우리는 柳希春의 眉巖日記草 에서 찾을 수 있다. 즉 宣祖 4년(1571) 6월 14일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陳井壽世儉之子也 去庚午年 以校生考講不通 定正兵戶首 三羅力請還校 余囑于牧使 卽改 定而還校籍119) 이것은 校生考講에 不合格하여 正兵戶首로 차정이 되었다는 좋은 예이다. 柳希春과 같 은 사람들의 특별 청탁으로 궁극에는 校籍을 도로 찾기는 하였지만 이것을 통해 볼 때 考講에 落講한 學生들은 많이 軍役차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柳希春의 從孫 둘이 軍役에 차정될 뻔 하였는데 敬差官의 특별 배려로 考講에 겨우 합격하여 軍役을 가까스로 모면한 예가 있다. 眉巖日記草 甲戊년(宣祖 7) 4월 26일의 기사를 보면 柳光霖이 海南에 내려갔을 때 거기에서 閑丁으로 차정되었는데 그가 有志儒生 이라는 것과 士族子枝 이라는 이유로 敬差官의 특별 배려로 方外考講을 받아 간신히 軍役을 모면하였다.120) 그리고 같은 해 6월 2일에는 柳希春의 兄 柳成春의 親孫인 柳光龍도 이와 비슷한 경우에 처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柳希春은 자기의 아들 景濂 에서 온 吏讀가 섞인 편지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見景濂簡 光龍蒙李府尹厚贐 呈狀于敬差官 敬差官批云 已曾畢請事乙 分揀未便爲在果(하거 니와) 柳成春親孫是在如中(인데) 士大夫子枝是沙餘良(일지라도) 學業儒生 則遽定軍役 加于 (더욱) 矜惻爲昆(하니) 報都事道考講後 進退施行向事(할일) 觀此都事尹(先覺)君 必動惻隱 光龍可免軍役矣 深喜深喜.121) 柳光龍이 儒生으로 考講에 낙강하여 軍役에 차정될 뻔 하였다가 全羅都事 尹先覺의 특 별한 고려로 면제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柳光霖과 柳光龍의 경우를 볼 때 비록 士大夫子弟라 할지라도 考講에 낙제하면 군역에 차정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柳光龍은 그의 祖父가 柳成春으로 生員과 文科 를 거쳐 吏曹正郞의 淸要職에 오른 자로서 己卯士禍에 유배되었으며 당시 尹衢 崔山斗와 119) 柳希春, 眉巖日記草 ) 眉巖日記草 ) 眉巖日記草 14 : 391.

40 國史館論叢 第26輯 함께 湖南三傑이라고까지 불리었던 인물이다. 이러한 명성을 가진 할아버지의 孫子도 軍 役에 차정 될 뻔 하였으니 그 밖에 이름도 없는 士族의 후예 중 많은 사람들은 군역을 지 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儒學의 능력이 약해 考講에 실패하였을 경우에 한한 예이다. 그래서 이 章의 결론을 짓는다면 조선전기에 있어서 士族과 良人의 신분구별을 어디에 서 찾겠는가 할 때 당사자가 직접 軍役을 지느냐 안지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하겠다. 이미 다른 학자들이 지적하였듯이 양반이나 士族이라고 하여 군역이 면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兩班이나 士族도 國役을 져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兩班과 士族은 軍 役을 지는 대신 儒學공부를 하여야만 하는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國役을 이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儒生이란 조선전기사회에 있어서 일종의 특권신분이었으며 또한 동 시에 그가 지니는 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儒役 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한, 그 儒生은 軍役차정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반면 이 儒役 을 다하지 못하고 수시로 실시 하는 考講에 落講하였을 경우, 그는 儒生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어 일반양인처럼 軍役에 충정되었다. 이렇게 儒生의 자격을 잃고 군역을 직접 지게 되었을 경우, 그는 이미 士族의 신분을 상실함과 동시에 양인의 신분으로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士族과 良人의 신분한계점을 우리가 구태여 찾는다면, 그것은 본인이 軍役을 직접 지고 있는가 안지고 있는가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軍役충당 如否가 조선전기사회의 士와 良人의 신분구조를 판가름을 한 중요한 한계선이었다고 필자는 본다. 朝鮮時代의 戶籍에 기재된 身分이 주로 國役을 담당하고 특히 軍役賦課의 대상을 기준으로 하여 편성되어 있 음은 지금 지적한 점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즉 柳澍는 興陽 人으로 그의 祖上 五代祖는 世宗朝에 兵曹判書를 지낸 柳濕이었으며 그의 父 忠貞은 長 興都護府使를 지낸 士族家門이었다. 그러나 그는 젊었을 때 글공부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 에 주위의 사람들을 몹시 걱정시켰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가 19세 되던 해에 玄谷 趙先生 의 門人으로 들어왔는데 그의 學業은 여전히 不精하여 이로 인해 그의 夫人이 걱정을 하 여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年十九委禽於玄谷趙先生之門 夫人媲德多儀 有女士風焉 玄谷以文章鳴世 夫人見習已高 憫 其夫子之學業不精矣 公一日自外入內 則夫人方勤女紅 公曰吾家不甚貧寒 何乃苦絍之如此也 夫人正色規諷曰 雖以皇后之貴 親供玄紞 而況士庶之婦 寧不苦絍 且今世士夫家不務科業不能 顯揚 則易降丁役 是以預辦疋布耳 公奮然益勵 乃有學道求志之意.122) 즉 柳澍가 글공부를 게을리하고 있는데 하루는 그의 夫人이 길쌈질을 집에서 하고 있 122) 高興柳氏文獻 4, 18뒤 19앞.

41 기에 柳澍가 자기집은 아직 가난하지 않는데 왜 길쌈질같은 고생스런 일을 하느냐고 물 었더니 夫人이 정색하여 대답하기를 요즘 세상에 서 士夫집 사람이라 할 지라도 글공부 를 하지않고 이름을 올리지 않으면 쉽게 丁役으로 떨어지니 疋布를 마련하기 위해서 일 하노라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에 柳澍는 충격을 입어 공부를 열심히하여 明宗 16년 (1561) 봄에 司馬試에 또 같은 해 가을에는 文科에 각각 합격하고 궁극에는 左承旨의 자 리까지 올랐다. 이 글에서 柳澍의 夫人은 儒學공부를 精히 하지 않으면 비록 士大夫家門 출신이라 할 지라도 丁役으로 강등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는 良人 士族의 身分辨別이 儒學공부 와 軍役充當 如否에서 찾아야 한다는 좋은 예이다. Ⅻ. 結 論 朝鮮王朝는 儒敎國家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支配者들은 孔子와 그 이후에 나온 儒學先 賢들의 가르침을 실제로 朝鮮社會에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 하려고 노력하였다. 적어도 조선전기는 儒學先賢들의 理想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智 와 德을 겸비한 사람들을 선출하여 이들에게 벼슬을 주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라 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用人이야말로 儒學理念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핵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朝鮮前期는 國力의 막대한 부분을 관리선발에 기울였던 것이다. 朝鮮朝 全期를 통해서 관리등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문은 과거제도였다. 科擧 특 히 文科試를 통해서 나라에서 필요한 官吏를 대부분 등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文科試를 통해 벼슬자리에 오르면 누구든지 일약 그 사회의 엘리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 거제도는 조선전기사회의 신분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良人身分의 사람들이 生員進士試와 文科試에 응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朝鮮前期 국가의 지도층형성에 있어서 양인의 위치를 좀더 잘 가늠할 수 있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良人도 科擧에 응할 수 있었다. 양인을 과거에서 배제하는 아무런 제도적 장애는 적어도 조선전기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제도적으 로 양인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경제적인 제약때문에 양인들은 科擧에 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科擧에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과 희생을 요구했기

42 國史館論叢 第26輯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과거준비를 위한 경제적 부담은 良人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라 兩班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兩班이면 반드시 모두 富者였으며 良人이면 반드시 모두 貧困 하였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兩班들 가운데에도 가난한 자가 있었으며 良人들 가운데 에도 富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제약으로 양반과 양인의 신분 적 차별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良人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제약을 받았 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良身分者가 아무런 제도적 제약을 받지 않고 과거에 나갈 수 있었던 증거로 양인보다 신분의 지위가 낮은 身分層의 사람들이 과거에 登科한 예를 볼 수 있다. 극히 예외적이기 는 하겠지만 潘碩枰 崔岦 등 賤身分出身의 사람들이 文科에 登科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鄕吏 館軍 水軍 등 일반 良人보다 地位가 낮은 이른바 身良役賤의 사람들이 과 거에 나갈 수 있게끔 法的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즉 經國大典 의 吏典 鄕吏조에 凡鄕 吏中文武科 生員進士者 123)) 云云하여 鄕吏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음을 확인해 주 고 있고, 또한 大典後續錄 兵典에는 平安黃海道 永定館軍 元是良民 其子孫無痕咎者 許赴文武科生員進士試 124)라고 하여 양민이면 科擧試에 나갈 수 있었다고 명백히 규정짓 고 있다. 이러한 朝鮮前期의 法條文을 볼 때 良人이 科擧에 응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대 해 아무런 의심을 가질 수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身良役賤者들이 실제로 科擧에 급제하고 있는 사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전기를 통해서 양인의 신분을 가진 자로서 과거에 합격하거나 과거에 응시 하려고 했다는 사례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을 가지고 良人은 科擧에 나갈 수 없 었다는 이유로 삼는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賤身分의 사람들이 자기의 身分을 속여가며 應科를 한 사례들이 있는데 비해 어찌 良人들이 하나도 과거에 나가려 고 하지 않았겠는가. 良人의 科擧응시에 대해 아무런 말썽도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良人 들이 科擧에 통상적으로 응시하고 合格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전기사회의 身分構造에 있어서 學校의 역할이 또한 큰 것이었다. 한양의 四學과 地方의 鄕校는 科擧준비를 하는 儒生들을 교육시켰는데 이들 學校에는 양인신분의 제자 들이 士族의 子弟들과 함께 入籍하여 儒學을 공부하였다. 이들 學校 특히 鄕校에서는 士 와 良의 身分的인 구별없이 個人의 儒學공부의 능력에 따라 校生을 入校시켰다. 그리고 鄕校에 入籍한 校生들에게는 여러가지의 特典이 주어졌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혜택은 軍役의 면제라고 할 수 있다. 즉 校生들이 儒業을 專業으로 공부하고 있는 123) 經國大典 p ) 大典續錄及註解 p. 199.

43 한 軍役에 차정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이러한 혜택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 들이 校生이 되고자 하였으며, 이로 인해 鄕校는 軍役避役所가 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까지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鄕校에 考講制度를 두어 校生들이 儒學修業을 정기적으로 考 課하였다. 이 考講에 떨어지는 자는 곧 군역에 차정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仁祖 전까지의 朝鮮前期에는 당사자가 士族出身이든 양민출신이든 상관없이 考講에 落講하면 가문에 상 관없이 똑같이 軍役에 충정되었던 것이다.125) 考講에 실패하여 군역에 일단 차정되면 士 族家門出身이라 해도 그는 양인으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양인이 校生이 되어 儒學공부 를 하여 科擧를 통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것을 고려 할 때 우리는 學校야말로 士와 良의 구별을 하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朝鮮前期의 社會身分構造가 다분히 개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朝鮮前期社會의 엘리트인 士의 身分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가 출생한 가문 이 아니라 儒學을 專業으로 수업하고 있는가 하는데 달려 있었던 것이다. 士族家門出身이 라 할지라도 四學이나 鄕校에서 儒學修業을 怠慢하여 考講에 落第하였을 경우 軍役에 차 정되어 良의 身分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양민출신의 자제들이 鄕校 등에서 儒學을 공부하 여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올라 士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朝鮮前期의 社會身分構造는 제도적으로 상당히 流動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當代社會에 있어서 士人들만이 가지는 힘과 명예와 영광이 너무나 莫大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特權과 혜택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일단 士가 된 家門에서도 그 네들이 차지한 이른바 기득권을 대대로 보호하고 견지하기 위해 자기의 家勢를 기울어 자제들로 하여금 儒學修業에 전념토록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우세한 기득권을 가진 士族 들과 경쟁을 할 일반 良人들은 여러가지 여건상 많이 불리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朝鮮前 期時代에 있어서 과거합격자들이 士族家門에서 많이 나온 현상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 하여야 할 줄 안다. 이렇게 조선전기사회에서 士의 身分이 가문이 아니라 儒學修業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볼 때 우리는 조선전기사회를 세습적인 귀속적(Ascriptive) 사회가 아니라 다분히 능력위 주(merit)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李順命은 古阜의 貢生으로 訓導가 되어 成宗 5년(1474)에 文科에 급제하였다.126) 그가 成宗 25년 7월에 司憲府의 掌令에 임명되었을 때 持平 宋汝諧는 그가 寒微 출신이고 糟 糠之妻를 버린 薄行 의 인물이기 때문에 臺諫자리에 합당치 못하다고 그의 임명을 반대 125) 仁祖初에 가서 이 落講充軍法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拙稿, 幼學 學生 校生考-17 세기 身分構造의 변화에 대하여- ( 歷史學報 101) 참조. 126) 國朝榜目 (국회도서관)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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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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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관논총_43집.hwp 朝鮮後期 薦擧制와 山林의 政界進出 鄭 求 先* Ⅰ. 머리말 Ⅱ. 薦擧制의 整備 1. 鄕薦法의 整備 2. 別薦法의 整備 Ⅲ. 山林의 薦擧와 政界進出 1. 山林의 政界進出 2. 山林의 成分과 官歷 Ⅳ. 實學者의 薦擧制論 1. 薦擧制論 擡頭의 背景 2. 崔漢綺의 科薦併用論 3. 丁若鋪의 南行制論 V. 맺 음 말 I. 머 리 말 中國 漢代의 鄕擧里選制에서 비롯된 薦擧制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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