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1. 황비창천 이 새겨진동제 팔각 꽃 무늬 거울 煌丕昌天 [ 銘銅製八菱形鏡] 2014년 9월 12일(금) 오후 1시~6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 이 거울은 인물들을 태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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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1. 황비창천 이 새겨진동제 팔각 꽃 무늬 거울 煌丕昌天 [ 銘銅製八菱形鏡] 2014년 9월 12일(금) 오후 1시~6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장 이 거울은 인물들을 태운 한 척의 배가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항해하고 있고 윗부분에 아래위로 '황비창천(惶丕昌天)'이란 글자가 있어 '황비창천' 거울 또는 해선경(海船鏡), 해박경(海舶鏡)이라고도 한다. 왼쪽 아래에는 구름에 에워싸여 머리만 보이는 한 마리의 용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유형은 송 금대에 유행했는데, 주로 금 지역에서 많이 출토해 금계(金系) 동경(銅鏡)으로 생각된다. 개성(開成) 근처의 고려 고분에서도 여러 점 출토되었으며, 형태는 외연(外緣)이 원형(圓形)과 팔 릉형(八稜形)인 두 종류가 있다. 이 거울은 팔릉형으로 용과 물고기, 파도의 표현이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었고 주조 수 법도 좋은 편이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황비창천' 거울(德 607)처럼 배가 오른쪽(깃발은 왼쪽)을 향해 순항하고 깃 발은 왼쪽으로 흩날리고 있어서 원래 거울을 고려에서 그대로 범(范)으로 뜬 다음 다시 주조하여 '황(惶)'자가 좌우 반대로 되었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2.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 1402년(태종 2)에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와 이회가 만든 세계지도. 채색 필사본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를 포함하는 구대륙 지도다. 지도 하단에 권근(權近)이 쓴 발문과 양촌집 陽村集 (권22, 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에 의 하면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 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 를 중국에 서 들여와 이 지도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추가하여 새로 편집한 지도이다. 현전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 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회의 팔도지 도 도 이 지도의 우리 나라 부분을 통해서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은 전하여지는 것이 없고, 사본이 일본 경도에 있는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에 전하여지고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주최 및 주관 :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 후원 : 인천광역시

3 국제학술회의 진행순서 시간 제목(시간) 내용 비고 13:00~13:05 개회 (5분) 국제학술회의 일정 소개 김락기 (강화고려역사재단 사무국장) 13:05~13:10 개회사 (5분) 인사 말씀 채웅석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가톨릭대 교수) 13:10~13:45 기조강연 (35분)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안병우 (한신대학교 교수) 제1부: 외교와 교류 <사회 : 강옥엽(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3:45~13:50 (5분) 국제학술회의 소개 및 발표 진행 13:50~14:10 발표1 (20분)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장동익 (경북대학교 교수) 14:10~14:30 발표2 (20분) 14:30~14:50 발표3 (20분)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의 공존과 갈등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구산우 (창원대학교 교수) 백승호 (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14:50~15:10 휴식 (20분) 중간휴식 제2부: 상호인식과 배려 <사회 : 강옥엽(인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5:10~15:30 발표4 (20분)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국인( 國 人 )과 외국인( 外 國 人 ) 이진한 (고려대학교 교수) 15:30~15:50 발표5 (20분)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천하관, 축제와 교역 김기덕 (건국대학교 교수) 15:50~16:10 발표6 (20분)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모리히라 마사히코 (일본 큐슈대학교 교수) 16:10~16:30 휴식 (20분) 중간휴식 및 장내 정리 3부 : 종합토론 <좌장: 윤용혁(공주대학교 교수)> 16:30~17:55 종합토론 (85분) [약정토론] 김순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E.J.슐츠 (미국 하와이대학교 교수)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이형우 (인천대학교 교수) [지정토론] 이정신 (한남대학교 교수), 한기문 (경북대학교 교수), 남동신 (서울대학교 교수) 최종석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이강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7:55~18:00 폐회사 (5분) 인사 말씀 박종기 (강화고려역사재단 대표이사, 국민대학교 교수) * 일정 및 시간은 변동될 수 있습니다.

4 목 차 기조발표 :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11 안병우 한신대학교 교수 제 1주제 :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23 장동익 경북대학교 교수 제 2주제 :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의 공존과 갈등 49 구산우 창원대학교 교수 제 3 주제 : 공동번영을 위한 교역과 문화교류 : 여-송 교류를 중심으로 61 백승호 중국 절강대학교 교수 제 4 주제 : 고려시대 투화( 投 化 )와 거류( 居 留 ) 국인( 國 人 )과 외국인( 外 國 人 ) 75 이진한 고려대학교 교수 제 5 주제 : 팔관회에 온 외국인들 천하관, 축제와 교역 89 김기덕 건국대학교 교수 제 6 주제 : 여일관계( 麗 日 關 係 )와 표류민 피로인 문제 99 모리히라 마사히코 일본 큐슈대학교 교수 토론문 1 :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113 김순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토론문 2 : 10~14세기 고려의 국제관계사 119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토론문 3 : 12세기 초의 고려 129 Edward J. Shultz 서강대학교/University of Hawaii at Manoa 교수 토론문 4 :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토론문 135 이형우 인천대학교 교수

5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기 조 발 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안 병 우 한신대학교 교수

6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안 병 우 (한신대학교 교수) 1. 왜 개방을 말하는가? 2. 고려 전기 대외교류와 개방성 3. 원 간섭기의 대외교류와 개방성 4. 개방 논의의 현재성과 동아시아 1. 왜 개방을 말하는가? 개방성은 일반적으로 공간이나 지위의 이동(movement)과 변화(change), 행정이 나 정책의 입안과 수행에 있어서 공지성(publicity), 정치적 입장의 다양성이나 다원성 (diversity)을 의미한다..1) 그러므로 개방은 다른 나라 뿐 아니라, 국내에서 다른 집단이 나 개인에게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오히려 후자가 때로는 더 중요한 개방으로 여겨진다. 개방의 내용은 무엇인가? 정보와 물자, 지위와 권력, 문화와 사상 등이 개방의 내용이 될 것이다. 즉 정보와 전략 물자에 대한 접근 기회의 공유, 지위의 상승과 권력 획득의 기 회 보장, 사상 종교와 문화에의 접근과 향수의 권리 향유 등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런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 있는 사회는 개방사회라고 할 수 있다. 개방은 개혁이라는 단어를 자주 동반한다. 20세기에 단행된 대표적인 개방 사례로 꼽 을 수 있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나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글라 1) 그 반대는 정지(immobility)나 정체(stagnation), 비밀(secret), 신념체계의 획일성(uniformity) 고수라고 한다.(황경식, 1995 개방사회란 무엇이며 누가 그 적인가 개방사회의 사회윤리 철학과현실사). 11

7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스노스트(glasnost)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방과 개혁은 깊은 관계에 있는 것 이다. 오히려 개방 보다 개혁 을 앞세워 개혁/개방으로 부르거나, 개방의 확대를 뜻하 는 글라스노스트보다 정치 경제 개혁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가 훨씬 널리 알려진 데서 알 수 있듯이, 개방은 개혁의 일부 혹은 수단으로 간주되는 모습도 보인다. 개방이 개혁을 동반하거나 초래한 사실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서구에 대한 문호 개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이미 16세기부터 유럽과 빈번히 접촉하며 유럽 문명 을 수용하였다. 유럽 상인들의 거주를 허용하였으며, 이들은 쇼군과 다이묘의 경제 이익 에 봉사하였다. 그러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기독교 전파 문제로 갈등이 발생하자 네 덜란드 상인의 나가사키 거주만 허용하는 정도로 개방을 축소하였다. 무력을 앞세운 미 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은 그 충격을 딛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천황제 근대국가를 수립하였다. 개방이 국가 체제의 변혁을 초래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문호를 개방한 나라는 청이었다. 18세기 이후 영국이 인도와 동남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청과의 교역을 늘려가면서 차 수입 대금으로 지급하는 은 이 부족해지자, 인도산 아편을 수출하였다. 청이 이를 금지하자 영국이 청을 공격하여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은 서양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중체서용( 中 體 西 用 ) 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 하는 한계를 보였다.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체제 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개방의 한계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마침내 1910년 신해혁명으로 청조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에서 최초 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조선은 개방론과 쇄국론이 대립하는 상태에서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개항한 후 잇달아 서구 열강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일본 상인을 비롯하여 서구의 의사, 선 교사, 사업자 등이 체류하였으며, 일본과 청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여 변화를 꾀 하였다. 당시의 지배층은 신식 제도와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체제 변화 를 수반하는 전면 개방에는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다. 체제 개혁을 수반하지 않는 소극 적 개방은 국권의 상실로 귀결되었다. 개방과 개혁의 갈등, 비대칭성이 2) 심각하게 나타났 고, 결국 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개방사회는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사회이며, 현실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3) 그렇게 본다면, 중세사회에서 개방사회의 요소를 찾는 것은 무망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 고, 서구의 이론과 사상을 받아들여 성립된 한국의 민주주의도 그것을 수용하고 체화할 수 있는 역사적 바탕을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해왔다고 볼 수 있다. 중세 왕조 체제 하 에서도 점진적으로 개방을 위한 조치나 그것과 연관된 개혁 운동이 있었음에 유의할 필 요가 있다. 여기서는 고려를 중심으로 개방과 개혁에 관해 소묘해보고자 한다. 2. 고려 전기 대외교류와 개방성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국가의 위상을 확고히 하 는 한편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고 하였다. 고려가 건국할 때 중원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10국이 다투는 격변의 시대였다. 태조는 건국 이듬 해 오월( 吳 越 )에 사신을 파견한 데 이어 후량, 후당, 후진에 계속 사신을 보냈다. 4) 고려의 적극성은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혜종과 정종, 광종 대에도 후진, 후한, 후 주, 송과 사대외교를 계속하였으며, 거란의 침입으로 단절되었던 송과의 국교는 문종 25 년(1071) 고려가 사신을 보내 재개하였다. 고려의 주 교류국이었던 송은, 개방의 측면에서 볼 때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송은 주요 무역항에 시박사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로 무역을 장려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화 이론을 강화하며 고전적 형태의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였다. 고려시기의 대외 개방이 정치 사회 개혁으로 연결된 대표적인 사례로 과거제의 시행을 들 수 있다. 과거제는 광종 9년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도입하였다. 과거제는 광 종이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채용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귀화인을 우대한 고려의 개방성이 낳은 성과였다. 이 때 시작된 과거제는 내용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조선 말기까지 900년 넘게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로 기능하였다.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가 도입됨으로써 골품제에 기반을 둔 신라의 관등 제는 완전히 폐기되었고,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계층이 크게 확대되었다. 고려의 관료제 는 품관과 이서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합쳐 관리층 으로 부른다면, 고려 의 양인 신분은 크게 관리층 과 평민층 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평민층에서 관리층으로, 향리층에서 품관층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하였다. 품관층은 자신의 지위를 2 ) 김대환, 1988 개방과 개혁의 비대칭 사회경제평론 1, 한국사회경제학회 3) 칼 포퍼 지음 이현구 역, 2006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4) 고려가 12회 파견한 데 비해, 중국은 2회만 보내왔다. 1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3

8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신분화하지 않음으로써 향리나 평민이 지배층으로 진입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지 않았 다. 또한 과거 시행 이후로 정치는 유학을 공부한 문인들의 몫이 되었다. 과거는 정치 주 도층을 무인에서 문인으로 바꾸었고, 지방의 무인과 지방 성주 장군의 후예들을 독서인 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볼 때 과거제는 보다 넓은 계층에게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으며, 그를 통해 고려의 지배층을 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개방적인 정 책은 지방 유력자로 존재하던 성주 장군층과 그 후예를 흡수하고 왕권을 강화할 정치 적 필요성에서 시행했지만, 그 전제는 그들을 현실적 세력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것 은 불교와 유학, 풍수지리, 도참 등 다양한 사상의 병존을 용인하던 당시의 사상 경향 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개방정책의 또 다른 성과로 관원의 부패를 막기 위한 대관제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 지만 언론의 보장을 위한 간관제의 도입을 들 수 있겠다. 역사상 한국은 여러 차례에 걸 쳐 중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체제를 개혁하였다. 율령제를 일거에 도입하여 다이카개신을 추진한 일본과 같은 극적인 계기는 없었지만, 당 송의 제도를 도입한 신라 경문왕 때나 고려 성종 때의 개혁은 정치제도의 측면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정치제도 전반의 개혁 이 갖는 의미도 크지만, 여기서는 대간제의 정착에 관하여만 살펴보려고 한다. 중국에서 간관과 대관 제도는 진 한대에 시작되었다. 대관제는 당에 이르러 어사대로 정비되었고, 간관제는 수나라에 이르러 집서성과 문하성에 간관을 배치하는 것으로 정비 되었다. 당과 송은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중앙 귀족 통제의 필요성 때문에 사정 담당 부서를 두었으며, 무열왕 이후 사정부( 司 正 府 ), 외사정( 外 司 正 ), 내사정전( 內 司 正 典 )으로 발전하였다. 발해에서도 감찰기구로 중정대를 두었고, 선조성 ( 宣 詔 省 )에 간관을 두었다. 그러나 삼국과 발해에서 간관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건국 초기에 사헌대를 두어 관원의 비리를 규찰하게 하였으며, 내의성의 내의 사인( 內 議 舍 人 )이 간관의 기능을 수행케 하였다. 사헌대는 성종 때 어사대로 변경되었고, 간관의 기능은 내사문하성(중서문하성)의 낭사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감 찰과 간관의 기능을 법으로 규정하고 제도상으로 보장하였으며, 이 제도는 조선에서 더 욱 발전되었다. 5) 대관제는 관원의 부패를 방지하여 청렴도를 높이는 데 기여하며, 간관제는 정책 결정 과 인사에서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치였다. 특히 고려의 대관과 간관이 서경권( 署 5 ) 박용운, 1980 대간제도의 성립 고려시대 대간제도 연구 일지사 經 權 )을 행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서경권은 당 송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던 제도로서, 국왕의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제도였다. 대간제는 관료의 청렴 뿐 아니라 국 왕권의 남용도 제어하여 고려의 국왕으로 하여금 황제 독재 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하 는 방패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이나 송의 제도를 도입하면서 고려 나름대로 변용하여 개방성을 높이려 하였음을 보여준다. 12~13세기에 발생한 무인정변과 농민 천민의 봉기는 개방성의 위기 국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11세기 중반 이후 고려의 개방성은 내적으로 약화되었다. 관료층이 고착화 되고, 문벌이 형성되어 권력을 독점하였다. 새롭게 진출하는 정치세력은 문벌에 의해 배척 도태되었다. 한안인 세력이 이자겸 일파에 의해 도태된 것이나 묘청 일파가 김부식 등에 의해 배척된 것이 그것이다. 문벌이 주도한 유학사상과 교종 불교가 맹위를 떨치면서 풍 수도참 사상은 약화되어 사상의 균형도 파괴되었고,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도 약화되었 다. 향리층과 평민층은 물론 통일전쟁기와 여진 정벌 등에서 국가의 보위와 안정에 공헌 한 무반과 병사들의 계층 상승의 길은 좁아졌고, 대우도 나빠졌다. 무인정변에 다수의 병사들이 참여한 현상, 특히 사병 출신의 이의민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실이 이를 뒷받 침한다. 무인정권 시기 개방성은 불균형적으로 확대되거나 위축되었다. 무인집정과의 사적인 관계에 따라 천인에게도 관직이 개방되었다. 양천의 신분제 질서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모든 천인이 해방된 것은 아니며, 신분제 자체가 폐기된 것도 아니었다. 신분 이동은 개 별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다. 반면 관료제 안에서 부패 감시와 언론의 역할을 담당하던 대간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무인집정은 황제도 갖지 못했던 독재권 을 행사했으며, 그 심복들과 함께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널리 농장을 설치하고 고리대를 하여 경제적 이득 을 챙겼다. 그들의 불법행위는 규제받지 않았다. 그에 따라 토지를 상실하고 과도한 수 탈에 노출된 농민은 봉기하였다. 3. 원 간섭기의 대외교류와 개방성 원 간섭기에 이르러 사정은 일변하였다. 원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고려의 국왕은 사상 처음으로 외국을, 그것도 빈번하게 방문하게 되었다. 몽골 공주가 고려 왕비가 되 어 개경에 거주하였으며,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의발( 衣 髮 )은 몽고 형식으로 바뀌었다. 1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5

9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개경에 몽골인을 비롯한 색목인들이 거주하면서 그들의 언어와 풍속이 전파되었다. 고려 는 스스로를 몽고에 전면적으로 개방하였다. 국권을 크게 제약받은 상태에서 일어난 비 정상적 개방이었지만, 그 어느 시기보다도 대외 개방성은 높아졌다. 당시 개방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현상의 하나는 외국인의 귀화이다. 귀화인으로 주 목되는 것은 제국대장공주의 겁령구( 怯 怜 口 )로 따라온 6) 네 사람이다. 이들 네 명은 모 두 몽고식 이름을 보유하였지만, 출신 종족과 종교가 제 각각이었다. 인후( 印 候, 몽고 명 忽 刺 歹 )는 순수 몽고인으로 원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재상까지 올랐으 며, 연안 인씨( 延 安 印 氏 )의 시조가 되었다. 7) 차신( 車 信, 몽고명 車 忽 䚟 )은 고려인인데 어 머니가 황실 가문의 유모였으며, 상장군 찬성사를 지냈다. 장순룡( 張 舜 龍, 몽고명 三 哥, 1254~1297)은 회회인( 回 回 人 )으로 무관으로 출세하였으며,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노영( 盧 英, 몽고명 式 篤 兒 )은 색목인으로 분류되는 하서국( 河 西 國, Tangut) 사람으로 장군이 되었다. 8) 이들의 등장은 원나라의 세계성과 고려의 국제적 다인종적 교류를 단적 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귀화는 고려의 계획이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이 어서, 타율적 성격을 띠었다. 그에 비해 홍건적의 난을 피해 1358년에 피난 온 위구르인 설손( 偰 遜 )을 공민왕이 부 원후( 富 原 候 )에 봉한 것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고려의 개 방성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9) 그의 아들 장수( 長 壽, 1341~1399)와 미수( 尾 壽, )는 여말선초에 명( 明 )과 의 외교업무에 공헌하였고, 동생 설사( 偰 斯 )도 명의 사신으로 다섯 번이나 고려를 방문 하여, 고려와 명의 외교는 한때 설씨 가문이 담당하였다. 손자 설순( 偰 循 )은 세종 13년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삼강행실도 를 편수하고 통감훈의( 通 鑑 訓 義 ) 의 저술에 참여하였 다. 그밖에 여러 외국인이 귀화하였다. 원 간섭기에는 개혁을 요구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충렬왕 25년 정동행성의 평장정 사로 부임한 활리길사( 闊 里 吉 思 )가 노비제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원의 법과 관행에 따라 노취양녀혼( 奴 娶 良 女 婚 )의 경우 절혼( 竊 婚 )으로 간주하여 그 소생은 양인으로, 비 가양부혼( 婢 嫁 良 父 婚 )의 경우 정상혼으로 간주하여 그 소생을 양인으로 판정하려 하였 6) 겁령구는 ke-ling-k ou(집안아이)의 음역이며, 怯 憐 口 로도 표기하였다. 겁령구는 충렬왕비만 데리고 왔다. 충선왕비 薊 國 大 長 公 主 는 闊 闊 不 花 와 闊 闊 歹 두 명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있었지만 겁령구라고는 부르지 않았고 고려에 귀화하지도 않았다. 7 ) 고려사 열전 권36, 인후 열전 8) 고려사 열전 권36, 장순룡, 차신, 노영 열전 9) 박종기, 2008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푸른역사 다. 이러한 활리길사의 방침을 고려는 일양위양( 一 良 爲 良 ) 으로 인식하였고, 전통적 판 정 기준인 약부약모( 若 父 若 母 ) 일천즉천( 一 賤 則 賤 ) 의 원칙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발 하였다. 충렬왕은 직접 상소를 올려 노비제 개혁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0) 그의 노비제 개혁 시도는 원에서 지원신격( 至 元 新 格 ) 을 반포하며 추구하고 있었던 정치개혁을 고려 에 적용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원이 보장한 고려의 국속까지도 무리하게 변경하려 하여 충돌이 발생하였고, 결국 좌절되었다. 11) 비록 외부 권력에 의한 타율적 개혁 시도였지만, 활리길사의 노비제 개혁 시도의 좌절로 노비가 감소되고 양인이 증대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의 고려 사회가 그 정도의 탄력성도 지니고 있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성리학 도입과 사회변화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능동적으로 원에서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충선왕은 만권당을 조성하고 익재 같은 학자 를 불러 원의 성리학자들과 교유하게 하였다. 성리학자들의 출신은 다양하였지만, 지방 에서 진출한 향리의 자제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차츰 관계에 진출하여 공민 왕 대에는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농장의 발달로 대표되는 당시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 면에서 성리학자들은 개방과 개혁의 비대칭을 극복하려는 실천성 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개혁방안을 놓고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은 분열하였다. 온 건 개혁을 주장한 이색 등의 무리는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인정하고 병존을 도모 하였으나, 사회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정도전 같은 급진 개혁파들은 농장문제를 해결하였으나, 불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입장을 가졌다. 사상의 다양성이 위협 에 직면한 것이다. 이들이 조선을 건국한 후 사상의 다양성은 부정되었고, 성리학만이 학 문[ 斯 文 ]으로 대우받는 유일성의 시대가 되었다. 4. 개방 논의의 현재성과 동아시아 현재 대외 개방의 주된 지표는 경제 즉 상품과 자본의 이동이다. 한국은 1960년대 이 래로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대외 개방을 확대해 왔고, 중국은 1980년대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한 이래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며 개방을 확대 1 0 ) 고 려 사 권 8 5 刑 法 2 奴 婢, 충 렬 왕 2 6 년 1 0 월 1 1 ) 이 강 한, 征 東 行 省 官 闊 里 吉 思 의 고 려 제 도 개변 시 도 韓 國 史 硏 究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7

10 기조발표 개방성과 고려,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해 왔다. 이러한 개방정책의 결과로 세계경제에서 동아시아의 경제적 위상은 빠른 속도로 높아졌다. 12) 동아시아 국가 상호간에는 무역 및 투자가 활발하며 제도적 통합도 많이 이루어져 있다. 한국은 ASEAN, 미국, EU 등에 이어 2012년에 한 중 FTA 협상을 개시 하였고, 한 중 일 3국간의 FTA 협상도 추진하고 있다. 13) 북한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3 국은 경제공동체 건설을 향해 전진을 거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의 사정을 보면, 개방의 편차는 상당히 크다. 지금 시점에서 개방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은 대외 개방의 확대나 그 의미를 음미하는 데도 목적이 있겠으나, 현재 의 사회체제나 사회운영이 폐쇄적이라는 진단 위에서 사회 개혁을 위해 개방을 추진하거 나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충분히 개방된 사회는 현 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방사회의 이념적 기초에 바탕을 둔 유일한 체제가 민주사 회라고 한다면, 14) 동아시아의 현실은 개방사회에 가장 가까운 나라와 가장 먼 나라가 병존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민주화지수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대개 20위 권에 속하며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분류된다. 그에 비해 중국과 북한은 민주주의 지 수가 가장 낮은 권위주의 체제 로 분류되며, 특히 북한은 최하위에 속한다. 이런 발표 결과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대외 개방과 내부 개혁이 가장 필요한 나라는 말할 것 도 없이 북한이다. 중국의 내부 개방 정도도 상당히 미흡하다. 이러한 개방성의 격차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불안정하게 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이다. 그러면, 한국과 일본의 개방 정도는 충분한가? 그렇지는 않다. 개방사회에 도달하기 에는 아직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개방사회를 측정하는 척도로 흔히 사용하는 언론자 유와 정보 공개를 살펴보자. 15) 국경 없는 기자회 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 은 2007년 이래 계속 하락하여 2014년 57위를 기록했다. 16) 일본도 2011년 후쿠시마 원 전 사고 이후 언론이 제대로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고 정부와 친( 親 )원전 세력들이 정보 를 차단하며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 데 영향을 받아 2012년 22위에서 2013년 53위, 올 해 59위로 하락했다. 중국과 북한은 모두 최하위권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언론 상황 은 개방사회와는 먼 거리에 있다. 정보공개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로, 사회 개방의 중요한 요소이자 전제이다. 한국은 공공기관이 보유 관리하는 정보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국 민의 참여와 국정 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1996년에 정보 공개법을 제정하였다. 17) 그러나 한국의 정보공개 실적은 일본보다 전반적으로 뒤지고, 시 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악화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인다. 특히 2007년 이후 정보공개실적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정책투명성의 급격한 악화로 귀결되었다. 투명 성의 부족은 국가경쟁력지수와 부패인식지수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 은 정책투명성은 크게 후퇴했지만, 국가경쟁력지수와 부패인식지수에서 한국보다 월등히 앞서 있다. 18) 북한이나 중국 같은 권위주의 체제에서 정보공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내외 개방성은 반부패(청렴도)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개방 의 확대와 소득의 증가는 부패와 역의 상관관계를 가지는데, 한국은 시장개방도에 비해 청렴도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19) 부패는 소득의 증가뿐만 아니라 개방의 확대에 따라 감소할 수 있다. 개방의 결과로 국제 표준이 국내에 통용되게 되면 전통적 부패나 비리 가 줄어들 수 있고, 관세장벽이 제거됨에 따라 부패의 기회가 감소한다. 반면 부패한 사 회는 시장체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쟁능력을 손상시키고 국제 신용의 상실과 금 융위기를 초래하여 시장개방을 늦추게 한다. 20) 동아시아에서는 국가별로 개방의 편차가 클 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경우 개방과 개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대칭성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아직도 개방의 성과가 내부 개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고, 개방을 통해 개방의 주체가 이익을 획득하 12)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기준으로 28.4%로 유럽연합(EU) 25.2%, 북미국가(NAFTA) 25.8%를 능가하였 다.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8%로 유럽의 38.3%보다는 낮지만, 유럽이 감소세에 있는 반면 동아시아는 증가 추세에 있다. 북미의 비중은 14.2%로 역시 감소하였다. 수입 비중도 26.7%로 증가한 반면 유럽과 북미의 비중은 각각 38.0%, 16.2%로 감소하였다. 13) 최낙균, 김영귀, 2013 동아시아의 가치사슬구조와 역내국간 FTA의 경제적 효과 분석 한국대외경제정책연구원 보고서 1 4 ) 황 경 식, 개방 사 회란 무 엇 이며 누 가 그 적 인 가 개방 사 회 의 사 회 윤 리 철 학 과 현 실 사 15) 언론자유지수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하는 민주주의지수, 독일의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와 함께 정치적으로 선진국 수준을 비교하는 기준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16) 국경 없는 기자회는 한국의 언론자유 순위를 2003년 39위, 2004년 26위, 2005년 31위, 2006년 31위, 2007년 37위로, 2008년 47위, 2009년 69위, 2010년 42위, 2011년과 2012년 44위, 2013년 50위로 매겼다. 2009년에는 MBC PD 수첩 제작진을 체포하는 사건이 있었다. 17) 공공기관의정보공개에관한법률(법률 제5242호 신규제정 ) 18) 정책투명성은 2007년 34위에서 2010년 111위로, 제도는 26위에서 62위로 곤두박질쳤다. 그 결과 2007년 11위로 최고수 준까지 올라갔던 WEF 국가경쟁력지수는 차츰 하락하여 2010년 22위가 되었으며, TI부패인식지수는 40위 정도에 맴돌 고 있다(송희준 등, 2011 한국과 일본의 정보공개 성과 비교 하계학술발표대회 발표논문집). 19) 이재형, 2002 반부패와 시장개방사이의 상호관계 : 국가별 비교 도시행정학보 Vol.15 No.2.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 하는 부패지수에 따르면, 2009년에 180개 나라 가운데 한국은 39위로 일본의 17위보다 훨씬 낮았다. 중국은 79위, 베트 남은 120위였다. 20) 한국의 경우 개방과 반부패 그리고 소득사이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100점 만점인 개방지수가 10점 증가하면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약 1,540 미국달러가 증가하며, 10점 만점인 반부패지수가 1점 증가하면 1인당 국내총생산은 약 2,304달러 증 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이재형, 개방과 반부패 그리고 소득사이의 관계: 이중통계검사 ) 1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9

11 고 있으며, 민중을 위한 개혁에는 소극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개방과 개혁의 속 성은 사실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세에는 개방의 효과가 극히 제한된 영 역에 미친 데 비해 오늘날은 개방의 효과가 사회의 거의 전 영역에 미치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아시아에서 개방과 개혁은 더 확대되어야 하고, 대외 개방의 성과가 내부 개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의식의 개방이 필요하다. 개방과 개혁은 국제 표준, 인류의 보편 가치를 기준으로 하되, 동아시아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각 사회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확대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애국주의)가 불식되 고 역사문제와 영토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개방은 갈등 을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상품과 자본 뿐 아니라 사람 에게도 좀 더 개방적이어야 할 것이다. 단 일민족의 신화에서 벗어나 다양한 외국인들의 체류와 기여에 마음을 열고 기회를 제공해 야 한다. 정부가 작성한 2040년 통일한국의 미래상에서 열린 국가 정책으로 해외 인재 를 적극 영입하여 인구 구조의 역동성을 확보하고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여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다는 전망을 세운 것은 21) 쌍기를 받아들인 개혁이 지금도 필 요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제1주제 발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장 동 익 경북대학교 교수 21) 외교안보연구소, 2014 통일한국 2040 보고서 - 글로벌 리더 통일한국 국립외교원, 15쪽 2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2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장 동 익 (경북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Ⅱ. 대립에서 공존으로 Ⅲ. 공존을 위한 제 방책 Ⅳ. 공존에서 패망으로 Ⅴ. 맺음말 Ⅰ. 머리말 21세기는 세계화가 급격히 이루어져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특정지역에서 는 국가 간의 연합화가 이루어져 장차 새로운 형태의 세계적인 국가의 등장을 예측해 볼 수도 있다. 이에 비해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패권주의가 등장하여 각국 사이에는 영토 문제, 어느 한 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둘러싸고 대립과 투쟁이 날로 드세어지고 있다. 이들 현상 중에서 후자는 세계인들이 염원하고 있는 지구촌의 평 화와 공존( 共 存 ) 공영( 共 榮 )의 발전에 크게 역행하는 반동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전근대사회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 간의 관계는 평화와 공존의 시대가 없었 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기가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여 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국가 간의 관계는 대립과 투쟁을 본질로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국가들은 공통의 목표 이익 혹은 이데올로기를 대체로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정 국가의 대외정책의 결정은 국익( 國 益 )을 바탕으로 이 루어지는 것이기에 대외관계의 여러 현상도 오직 국익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견해도 있다(Thomas A. Bailey 1980년 2쪽). 23

13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그렇다고 하여 전근대사회에서 이루어졌던 국제관계는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때만 보다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명제 하에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성을 배제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곧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들이 정치 경제적 협력을 바탕으로 한 우호와 교류를 강조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전근대사회의 국가 간에 있었던 대립과 투쟁의 이면 ( 裏 面 )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공존을 위한 외교정책의 여러 양태( 樣 態 )를 부각시켜 볼 필 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국경을 마주한 나라 사이에는 늘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였기 때 문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서 한국사에 있어서 여타의 그 어느 시기에 비해 주변의 여러 민족과 접촉 충돌이 많았던 고려시대를 대상으로 하여 북동아시아 3국의 국제정세의 변 화와 이에 따른 고려정부가 취한 대표적인 외교정책의 여러 유형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한다. 1) 이에서 제시된 부족한 점들은 향후 동학들의 조언을 받아 수정 보완하도 록 하겠다. Ⅱ. 대립에서 공존으로 년(태조25) 태조 왕건( 太 祖 王 建 )은 거란( 契 丹 )이 보낸 낙타를 모두 만부교( 萬 夫 橋 ) 아래에서 굶어죽게 하였다. 우리들은 후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를 재통일한 태조왕건의 외교정책을 논하면서 고 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자, 그 유민을 포섭하고 거란을 적대시하였 다.,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니 본받지 말아야 한다. 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訓 要 十 條 ; 두산동아 2011년 99~100쪽). 또 이러한 태조의 거란에 대한 결연한 의지는 942 년(태조 25) 10월에 일어난 만부교의 사건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 사실과 이에 관련된 자료를 적시하면 다음의 자료 1과 같다. 만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그 사신 30인을 섬[ 海 島 ]에 유배 하였고, 낙타[ 槖 駝 ]는 만부교( 萬 夫 橋 )의 아래에 매어두어 다 굶어죽게 하였다( 고려사 권2, 세가2, 태조 25년 10월). b. 처음 고려국왕 왕건( 王 建 )이 군사를 일으켜 인국( 鄰 國 )을 통합하여 상당히 강대해졌 다. (938년, 태조 21년 3월 이후) 호승( 胡 僧 ) 말라( 襪 囉 )를 통해 후진( 後 晋 )의 고조( 高 祖 ) 석경당( 石 敬 瑭 )에게 전하기를 발해는 우리들과 혼인( 昏 姻 )한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 게 포로가 되었으니 청하건대 후진[ 朝 廷 ]과 함께 합세하여 공격하고자 합니다. 라고 하 였으나, 고조가 회보( 回 報 )하지 않았다( 자치통감 권285, 後 晉 紀 6, 齊 王 下 ). c. 충선왕[ 德 陵 ]이 일찍이 신 제현( 齊 賢 )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낙타[ 橐 馳 ] 를 보낸 것을 다리 밑에 매어두고 꼴이나 마태( 馬 太 )를 주지 아니하여 굶어죽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 다리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 낙타가 비록 중국에서 생산되지 않 으나 중국에도 또한 일찍이 양축( 養 畜 )하지 않은 때가 없고, 나라의 군주( 君 主 )는 수십 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있으나 그 폐해가 백성을 상하게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는다. 또 물리치고 안 받으면 그만이지, 어찌 받아가지고 굶겨서 죽이는 데에 이르게 하였을까? 라고 하셨다. 신은 대답하기를, 왕업( 王 業 )을 창시( 創 始 )하여 왕통( 王 統 )을 자손에게 영원히 전하는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그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송( 宋 )의 태조( 太 祖 )와 같은 사람은 궁금( 宮 禁 ) 안에서 산돼지를 기르게 하였는데 인종 ( 仁 宗 )이 그것을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습니다. 뒤에 요인( 妖 人 )을 얻었을 때에 도리어 피 [ 血 ]를 채취( 採 取 )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송 태조의 생각이 또한 여기까지 미쳤던 것입니까? 이것도 또한 정론( 定 論 )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송 태조의 돼지를 양축( 養 畜 )한 뜻이 피를 채취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우 리 태조가 이러한 일을 한 까닭은 장차 오랑캐들의 속임수[ 譎 計 ]를 꺾으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또한 후세의 사치심을 억제하려고 한 것인지, 아마 반드시 미묘한 뜻이 있었을 것 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공손히 묵묵히 생각하여 힘써 행하여 몸소 본받을 것이고, 어리 석은 신이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역옹패설 前 集 1). 자료 1a. 942년(태조 25) 10월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서 낙타[ 槖 駝 ] 50필을 선물하였다. 왕이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더불어 평화를 이어오다가 갑자기 의심[ 貳 心 ]을 일으켜 맹약 을 어기고 멸망시켜 버렸으니, 이는 매우 무도( 無 道 )하므로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1) 이 논문에서 外 交 는 국가와 국가의 政 治 的 交 涉 을 가리키지만, 이에는 使 臣 往 來, 國 書 授 受, 戰 爭, 漂 流, 歸 化 移 住 [ 投 化 ], 貿 易 과 같은 人 的 接 觸, 交 流 등도 포함된다. 이때 a는 태조 왕건이 거란의 사신을 유배시키고 낙타를 만부교의 아래에서 아사( 餓 死 )시킨 사실을 전하는 것이고, b는 고려와 발해는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표현될 정 도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c는 만부교사건에 대한 원인의 구명( 究 明 )과 그 에 대한 충선왕과 이제현의 판단이 제시되어 있다. a의 내용을 외교정책의 결정과 관련을 지어서 볼 때, 태조 왕건의 조치는 927년(태조 2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25

14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10) 11월 무렵 후백제를 방문한 거란의 사신이 등주( 登 州, 현 山 東 省 登 州 市 )에서 피살된 소식을 듣고서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후백제가 거란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발 로 추측되기도 하였다( 韓 圭 哲 1994년; 李 孝 珩 2004년). 또한 이러한 태조 왕건의 외교적 자세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볼 때 발해를 동족의 국가로 인식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북 진정책의 추진을 위한 방략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거란 사신의 피살(927년)과 만부교사건(942년)은 15년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 어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그 사이인 937년(태조 20) 거란의 사신 이 고려에 도착하였을 것인데, 이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곧 거란의 사신파견이 이루어졌던 1년 전인 936년(태조 19, 天 顯 11) 9월 8일 고려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과 11월 12일 거란에 의한 후진 황제( 後 晋 皇 帝 ) 석경당( 石 敬 瑭 )의 책봉과 석경당의 연운( 燕 雲 ) 16 주( 州 ) 할양으로 인해 북동아시아 3국의 대치 양상이 거란과 중원( 中 原, 五 代 )의 대립에서 거란과 고려의 대립으로 이전되었을 것이다. 이때 거란의 사신은 그들이 후진에게 신속( 臣 屬 )을 관철시켰던 바와 같이 고려에게도 신속을 요구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2) 그래서 다음해에 고려를 유람하던 인도승( 印 度 僧 ) 말라( 襪 囉, 㗌 哩 嚩 日 羅 )를 통해 고 조 석경당에게 인척( 姻 戚 )의 국가인 발해[ 渤 海, 我 婚 姻 也 ]가 거란에 멸망당했음을 전하 고, 후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할 것을 제의하였을 것이다. 고려와 발해가 인척관계였다는 점은 당시의 기록이 극히 소략하여 어떤 실마리를 잡을 수 없고, 비교적 고려초기의 사실 을 많이 알 수 있었던 이제현( 李 齊 賢, 1287~1367)조차 그 발해와 서로 혼인하였다는 것과 같은 일은 국사( 國 史 )에서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려와 발해의 관계는 불분명한 점이 없지 않지만, 고대 이래 북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국가 사이에는 상호간의 세력관계에 의해 형제( 兄 弟 ), 옹서( 翁 壻 ), 부자( 父 子 ), 군신( 君 臣 ) 등의 형태로 결 합되던 사례가 많았음에 비추어 볼 때 태조 왕건의 말이 전혀 실제와 다른 식사( 飾 辭 )만 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발해와 고려의 인척관계가 어떠하였던 만부교사건에서 나타난 태조의 행위는 제왕( 帝 王 )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적 군주상( 君 主 像 )이라고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므 로 청소년들에게 자주 강조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구절은 아니다. 곧 충선왕이 말한 바 의 물리치고 안 받으면 그만이지, 어찌 받아가지고 굶겨서 죽이는 데에 이르게 하였을 까? 와 같이 외교적인 면에서도 비신사적인 행위의 하나일 것이다. 전근대의 어떤 특정국 가가 상대국에 대해 어떤 외교적인 제의를 하였을 때 상대국의 대응을 유형별로 상정해 2) 이때 거란은 915년 이래 弓 裔 의 泰 封 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때 체결하였던 兄 弟 의 關 係 [고대국가 이래 북동아시아의 여러 민족 사이에 이루어졌던 慣 行 의 하나인 兄 弟 之 國 ]에서 君 臣 關 係 로의 改 定 을 요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보면 긍정적인 수락, 즉각적인 반발, 무대응, 묵살 등이 있을 수 있을 것인데, 태조의 행 위는 즉각적인 반발일 것이며 그 방법조차 충선왕이 언급한 것처럼 은근한 방법이 아니 라 적대적인 반대의 표시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국익의 관점에서 도 이해되지 않는 조치일 것이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결정을 준 수 하여야 하였 을 그의 아 들이며 후계자 들인 혜종 정종 광종 등은 국초의 공고하지 못했던 제왕( 帝 王 )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여야 할 급선 무를 제치고 거란과 접경하고 있던 북방지역의 국방력 확충과 성곽축조에 주력하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대립의 시기에는 오로지 군비( 軍 備 )의 강화만이 공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음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2. 서희( 徐 熙 )는 거란의 장수 소항덕( 蕭 恒 德 )과 담판을 벌여 강동( 江 東 ) 6주( 州 )를 획 득하였다고 한다. 993년(성종 12, 統 和 11) 윤10월 3일 이후 고려의 부수상인 내사시랑평장사 서희와 거 란 침공군의 사령관인 부마( 駙 馬 ) 동경요양부유수( 東 京 遼 陽 府 留 守 ) 소항덕이 거란군의 진영인 봉산군( 蓬 山 郡, 현 평안남도 구성시)에서 행한 담판은 여러 면에서 후세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모범적인 외교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外 交 通 商 部 2009년; 韓 國 中 世 史 學 會 2012년). 또 이는 고려정부가 취한 실리적 외교의 하나로서 이후 고려의 외교정책의 결정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 이의 명암을 찬찬히 살펴볼 때가 되었다. 만부교의 사건으로 인해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가 중단되었던 것 같고, 이후 양국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44년( 會 同 7, 혜종 1) 1월 이래 거란의 후 진( 後 晋 )에 대한 대대적인 정토전( 征 討 戰 )으로 인해 거란이 고려 측에 어떠한 요구를 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때 후진에 의한 고려와의 연대도 모색되었으나 고려의 병력이 매우 취약하여 어떠한 결실을 맺지 못하였던 것 같고, 고려도 거란의 남진을 방 어하기 위해 947년(정종 2) 광군( 光 軍 ) 30만을 편성하여 장차 동원될 수 있는 국방력을 증강시키는 동시에 서북지역의 성곽의 축조에 노력하였던 것 같다. 당시의 형편은 칠대 실록 의 소진( 消 盡 )으로 인해 그 전모를 알 수 없으나 거란과 단교한 942년(태조 26) 10월 이후 거란의 1차 침입이 시작된 993년(성종 12) 10월까지의 사실은 다음과 같다. 947년(정종 2) 光 軍 30 萬 을 編 成 함. 德 昌 鎭 西 京 王 城 鐵 甕 博 陵 三 陟 通 德 德 成 鎭. 950년(광종 1) 長 靑 鎭 ( 長 平 鎭 의 誤 字?) 威 化 鎭. 951년 撫 州, 952년 安 朔 鎭, 960년(광 2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27

15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종 11) 濕 忽 ( 嘉 州 ), 松 城 ( 拓 州 ), 967년(광종 18) 樂 陵 郡, 968년 威 化 鎭, 969년 長 平 鎭 寧 朔 鎭, 970년(광종 21) 安 朔 鎭, 972년 雲 州, 973년(광종 24) 和 州 高 州 長 平 鎭 博 平 鎭 高 州 嘉 州 信 都 城, 974년 嘉 州 安 戎 鎭. 979년(경종 4) 淸 塞 鎭. 983년(성종 2) 樹 德 鎭, 隘 守 鎭, 984년(성종 3) 文 州, 또 이해에 鴨 綠 江 岸 에 城 을 쌓아 關 城 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女 眞 의 공격으로 실패함. 이들 성곽이 축조된 서북지역은 국초의 청천강과 함흥만을 연결 짓는 북쪽 국경선(북 위 39.5도)을 넘어 청천강 남쪽에 위치한 안북부( 安 北 府, 현 평안남도 안주시, 북위 39.5 도 )에서 덕창 진( 德 昌 鎭 ) 박 릉 ( 博 陵 ) 낙 릉 군( 樂 陵 郡 ) 신 도 성( 信 都 城, 이상 모 두 평안 남 도 박천군), 태주( 泰 州, 평안북도 태천군)를 거쳐 압록강 하류인 영삭진( 寧 朔 鎭, 현 평안북 도 의주군, 북위 40.2도, 경도 124.5도)에 이르는 내륙에 위치해 있었다. 이후 내륙의 요 새를 교두보로 삼아 각지에서 연해지역에의 진출을 도모하면서 984년(성종 3) 압록강안 의 영삭진에서 압록강구로 나아가 전진기지[ 關 城, 城 柵 을 위주로 쌓은 城 ]를 쌓으려고 하다가 실패하였던 것 같다. 후일 거란과 화평한 이후에 개척된 강동 6주는 모두 이들 고려의 성곽이 위치한 서쪽의 연해안에 위치하였다. 추측하건데 이 시기에는 거란과의 주된 통로이었을 청천강에서 압록강구까지의 연해 안 지역은 압록강 여진으로 불리던 서여진( 西 女 眞, 熟 女 眞 )이 장악하고 있었고, 고려와 연결되어 있었던 여진은 주로 한반도의 동부지역에 할거하고 있었던 동여진( 東 女 眞 )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형편에서 고려는 동여진의 협조를 받아 한반도의 내륙통로를 따라 압 록강까지 북진하면서 성곽을 축조하여 장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 었던 것 같다. 고려가 942년(태조 26) 10월 거란과 단교한 이후 984년(성종 3)까지 42년간 고려와 거란 사이에 접촉했던 구체적인 흔적은 찾아지지 않는다. 이는 당시의 고려 측의 연대기 가 매우 소략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란 측의 자료에는 그 이전( 년)과 그 사이에도(984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였음을 보아 거란 측의 통교 재개나 국경 [ 地 界 ] 획정을 위한 사신파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송과 긴밀한 관계에 유지하고 있었던 고려, 특히 송의 선진 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던 성종과 모화적( 慕 華 的 )인 면을 진하게 풍기고 있었던 유학자출신의 관료들에 의해 거란과의 통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 던 것 같다. 이로 인해 985년(성종 4) 7월 이래 거란의 고려정벌이 준비되었지만 요동지역에서의 홍 수로 인해 단행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다음해(986년) 1월 거란이 고려에 궐렬( 厥 烈 )을 보내와 청화( 請 和 )하였다고 하는데, 6개월 전까지 정벌을 준비하던 거란이 화평을 제의 한 것은 고려의 군사력보다는 같은 달 21일 대대적으로 북벌을 단행한 송에 대처하기 위 한 하나의 방책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2월 4일 송이 감찰어사 한국화( 韓 國 華, )를 고려에 파견하여 거란을 정벌할 때 조병( 助 兵 )을 권유하는 조서를 전하게 한 것 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고려가 이 전쟁에 참여하여야 할 명분은 없었던 것 같다. 곧 같은 해 5월 한국화가 도착하여 태종( 太 宗 )의 조병을 명하는 조서를 전달하였 으나 성종이 천연( 遷 延 )하여서 군사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한국화가 위덕( 威 德 )으 로써 달래니 설득하였다고 한다. 왕이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출동시켜 서쪽에서 만나겠다 고 약속한 후에 한국화가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 고려가 실제로 군사를 동원하였던 사실은 고려 측의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지 만, 당시의 송 측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화의 완강한 요청에 의해 성종이 대상( 大 相, 4 品 上 ) 한광( 韓 光 )과 원보( 元 輔, 5 品 上 ) 조항( 趙 抗 )으로 하여금 군사 25,000인을 이끌고 청 천강[ 浿 江 ]을 넘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서 고려군의 지휘관이 여타의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으나 그들이 띠고 있는 관계( 官 階 )는 중국인이 알 수 없는 고려초기의 관계이므로 이 자료는 송에서 임의로 만들어질 성질의 것이 아닐 것이지만, 이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 라도 약간의 과장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이때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 거란을 공격하였 다면 고려와 거란의 양국 관계는 심각해져서 다음 해 6월 고려에서 주군( 州 郡 )의 병기를 거두어 농구로 만들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후 991년(성종 10, 統 和 9) 2월 거란이 압록강 하류의 사주( 沙 洲 )인 검동도( 黔 同 島 ) 2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29

16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에 위구( 威 寇 ) 진화( 振 化 ) 내원( 來 遠 )의 3성을 쌓아 수졸을 주둔시켜 고려를 공제하게 하는 동시에 여진(서여진으로 추측됨)과 송의 접촉을 차단시킬 때까지 5년간 송과 거란 은 군사적으로 대치, 전쟁을 번갈아 하였다. 이때 고려는 송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 하는 것에 안주하고, 거란의 팽창에 대처한 여진이 송에 표를 올려 거란을 정벌해 줄 것 을 요청하다가 거절되자 거란에 투항하였음에도(991년), 또 거란이 소항덕으로 하여금 고려의 정벌을 명하였음에도(992년) 아무런 대응을 마련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는 고 려가 거란과 송의 대치를 이용하여 고식적으로 자국의 안정과 국방제도의 정비에만 노력 하였을 뿐, 거란과 송이 일시적으로 휴전한 이후의 정세를 예단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 다. 이는 다음 해(993년) 5월 압록강 이남의 연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서여진[ 西 北 界 女 眞 ]이 거란의 침입을 통보하였음에도 듣지 않다가 8월 재차 거란병의 도착을 전하자 그 때서야 제도( 諸 道 )에 병마제정사( 兵 馬 齊 正 使 )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같은 해 10월 거란의 1차 침입에 대처한 고려군의 응전은 패배뿐이었을 것이 고, 고려정부의 대응도 패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굴복을 행한 후 토지의 할양[ 割 地 ], 또는 신속( 臣 屬 )을 전제로 한 조공과 책봉의 두 방책의 선택만이 제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이로써 후자를 제시한 서희와 이를 채택한 성종의 외교정책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서 북쪽의 연해지역을 확보하여 국경선을 압록강구까지 확장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오 늘날까지 받고 있다. 3) 이는 일면 경쟁에서 화평, 공존으로 나아가는 좋은 외교정책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반도의 정세에 큰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어느 특정국가 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에 안주하다가 일시적으로 제국( 帝 國 )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고 구려 영역의 회복이라는 국시( 國 是, 北 進 政 策 )조차 방기한 방책이었을 뿐이다. 또한 국제정세에 어두워 송의 북벌만을 믿어 그 병세( 兵 勢 )가 거란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였던 것 같고, 압록강 하류의 남북 양안에 위치하면서 거란에 저항 하고 있던 여진이 991년(성종 10, 統 和 9) 거란에 귀속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 다. 그래서 992년 거란에서 정벌의 명이 내려지고, 다음해에 거란의 침입에 대한 풍문이 있 어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진의 귀순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는 거란군의 신속한 전진조차 예측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 결과 국초 이래 막대한 국력을 동원하여 축조 되었을 압록강 하류에서 출발하여 청천강에 이르는 내륙지역의 성곽에 포진하였던 진수 군( 鎭 戍 軍 )을 동원하여 침략군의 후방을 유린하지 못하고 황급하게 굴복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3) 이때 고려가 취한 외교정책은 송과 거란 사이의 對 立 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적절히 활용한 전형적인 세력 균형적 방책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공존을 위한 제 방책 년(현종 10) 고려가 거란을 격퇴한 후 북동아시아 3국은 세력 균형을 이루며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 제목은 중학교교과서의 내용을 적절히 축약한 것으로(두산동아 2011년 105쪽) 사 실에 비교적 적합하지만, 3국이 비슷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력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북동아시아 3국의 형편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993년(성종 12) 윤10월 고려가 거란에 신속( 臣 屬 )을 약속한 이후 같은 해의 12월 무렵 수상인 문하시중 박양유( 朴 良 柔 )를 거란에 보내어 표를 받들고 죄를 청하였다[ 奉 表 請 罪 ]. 다음해(994년) 1월 17일 박양유는 거란에서 표를 올리자 거란의 성종( 聖 宗 ) 야율융 서( 耶 律 隆 緖, 971~10311, 982~1031 재위)와 섭정을 하고 있던 승천황태후( 承 天 皇 太 后 ) 소작( 蕭 綽, 953~1009, 982~1009 섭정)은 여진의 거주공간이었던 압록강 동쪽 수백 리 의 땅을 취하여 고려에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2월에 처음으로 거란의 연호인 통화 ( 統 和 )를 사용하였고, 4월에 박양유로 하여금 표문을 가지고 가서 정삭을 행한다는 것 을 통고하고 피로인( 被 虜 人 )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서 고려는 중원의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던 거란의 외번( 外 藩 )인 제후국[ 藩 屬 國 ]으로 지위가 격하된 형편에 서 여러 가지의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을 것이다[ 稱 藩 納 貢 ]. 거란은 고려를 신속시켜 송과의 관계를 청산하게 하여 요동지역에서의 안정을 도모한 이후, 979년( 太 平 興 國 4) 이래 송에 의한 연운지역( 燕 雲 地 域, 현 북경시에서 산서성의 북 부 大 同 市 지역까지)의 회복을 위한 북벌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이른바 송 요 전 쟁을 다시 격화시켜 나갔다. 곧 거란은 995년( 統 和 13) 1월 이래 송의 서쪽 변경인 인주 ( 麟 州, 현 섬서성 神 木 市 서북지역)를 침입하기 시작하여 이후 10년간에 크고 작은 전쟁 들이 지루하게 이어지게 되었다. 997년( 至 道 3) 3월 송 태종 조광의( 趙 光 義 )가 붕어하고 진종( 眞 宗 ) 조항( 趙 恒 )이 즉위한 틈새를 노려 거란의 성종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누차 에 걸쳐 송을 공격하여 여러 지역을 점령하여 나갔다. 1004년 9월 소태후( 蕭 太 后 )와 성종 ( 聖 宗 )은 송을 공격[ 南 伐 ]하기 위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선무( 宣 撫 )하는 동시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윤9월 거란군이 고안( 固 安, 현 하북성 지역)에 집결하여 순안군( 順 安 軍, 현 하북성 保 定 市 高 陽 縣 동부지역) 위로군( 威 虜 軍, 현 하북성 保 定 市 徐 水 縣 서 부지역) 북평채( 北 平 寨, 현 하북성 順 平 縣 동북지역) 등을 공격하고, 11월에 덕청군( 德 淸 3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1

17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軍, 현 하남성 淸 豊 서북지역)을 격파하고 단주( 澶 州, 현 하남성 濮 陽 市 )를 압박하였다. 이때 거란군의 대장 소달름( 蕭 撻 凜 )이 전선을 시찰하다가 송의 복병을 만나 전몰하 자 거란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송군의 협격( 挾 擊 )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항장( 降 將 ) 왕계 충( 王 繼 忠 )을 통해 송에 화의( 和 議 )를 떠보기도 하였다. 이때 송의 진종은 깊이 남진한 거란군을 피해 남쪽으로 천도를 하려다가 재상 구준( 寇 准, 961~1023)의 건의를 받아들 여 전선에 나와 독전하면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단주( 澶 州 )를 결전장으로 삼 아 병력을 집중시켰다. 그렇지만 단주가 돌파되면 동경( 東 京, 현 하남성 開 封 市 )이 위험 하다고 판단하여 거란에 폐백( 幣 帛 )의 제공을 조건으로 하여 화약을 체결할 것을 제시하 였다. 이에 12월 양국이 단연( 澶 淵 )에서 강화를 체결하여 25년간에 걸친 송 요 전쟁은 끝 이 나고, 양국은 형제국가가 되어 송은 거란에 세폐( 歲 幣 )로 은( 銀 ) 10만 량, 견( 絹 ) 20만 필을 제공하게 되었다[ 澶 淵 之 盟 ]. 이상의 사실을 통해 볼 때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에 걸친 북동아시아의 정세는 북쪽에 위치한 거란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송과 고려는 모두 북진이 좌절되었을 뿐 만 아니라 거란군의 침입에 대해 천도론( 遷 都 論 )과 할지론( 割 地 論 )이 제기되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국경선의 방어에 급급한 형편에서 송은 세폐를 통해, 고려는 신 속을 통해 영역의 경계[ 地 界 ]를 확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간혹 양국이 국경에서 충돌한 시기를 제외하고 거란이 멸망한 1125년(인 종 3, 保 大 5)까지 변함이 없이 조공과 책봉의 체제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4) 그렇지만 양국의 관계가 설정될 초기에 고려는 1000년(목종 3) 10월과 1003년(목종 6) 8월의 두 차례에 걸쳐 송에 사신을 보내 접촉하면서 송이 군대를 국경에 주둔시켜 거 란을 견제하여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때 고려가 송과 접촉한 의도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거란의 어떠한 압제로 부터 벗어나려는 방책의 하나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고려와 거란이 체결하였던 군신관계 곧 조공과 책봉 체제의 내용이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한 기록이 매우 소략하여 이후에 이루어진 양국사이에 이루어진 각종 접촉 사례들을 모아서 그 실상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거란의 제후국으로 전락하였던 고려가 짊어져야 했을 부담의 일면 이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994년(성종 13, 통화 12) 4월 고려가 박양유를 거란에 파견하여 표를 올리고 정삭( 正 朔 )을 실행한다는 것을 통고한 이후, 같은 해 11월 기악( 妓 樂 )을 바쳤으나 퇴각( 退 却 ) 당하였다고 한다. 또 다음해의 2월 방물( 方 物 )과 매[ 鷹 ]를 바치고, 9월에 방물을 바치 고, 10월에 동자( 童 子 )를 보내 거란어( 契 丹 語 )를 학습하였고, 이해에 거란에 혼인을 요청 하여 다음해(996년) 3월 허락을 받아 부마 동경요양부유수 소항덕의 딸이 하가( 下 嫁 )되 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1002년(목종 5) 6월 무렵에는 본국의 강역도( 疆 域 圖, 地 理 圖 ) 까지 바쳤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한 강역만이 아니라 강역도에는 호구의 총계가 기록되 어 있으므로 편적호구( 編 籍 戶 口, 版 籍 )를 보고한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원의 황제에 대해 주변의 외번( 外 藩 )인 제후국들이 행해왔던 군신관계의 양 태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기에 고려가 거란에 불평등한 관계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당시 고려가 거란에 대해 행한 여러 유형의 사례 중에서 초창기의 모습을 5) 집행된 순서 로 살펴보면 다음 <표1>과 같다. 시기 994년 (성종 13) 995년 (성종 14) 996년( 성종 15) 997년 (목종 즉위) 999년 (목종 2) 1002년 (목종 5) 1004년 <표1> 10세기 후반 이래 고려의 거란에 대한 의례( 儀 禮 ) 고려 의례 내용 4.-, 表 를 올려 正 朔 의 施 行 을 報 告 11.- 頃, 妓 樂 을 바쳤으나 退 却 당함 2.- 頃, 方 物 과 鷹 을 바침 9.- 頃, 方 物 을 바침 10.- 頃, 童 子 를 보내 契 丹 語 를 學 習 是 年, 契 丹 에 請 婚 2.- 頃, 再 次 童 子 를 보내 契 丹 語 를 學 習 3.-, 納 幣 함 5.- 頃, 사신을 보내 問 安 人 事 를 함. 이후 일정한 때가 없이 使 臣 을 파견함 6.- 頃, 納 幣 하며 蕭 恒 德 의 妻 인 越 國 公 主 의 喪 을 弔 問 11.-, 成 宗 의 薨 去 와 穆 宗 의 卽 位 를 보고 1.- 頃, 使 臣 을 보내 宋 과의 戰 勝 을 賀 禮 6.- 頃, 本 國 의 地 理 圖 를 바침 요(거란) 3.14, 使 臣 을 보내 타이름 11.19, 고려국왕을 책봉 3.2, 고려의 請 婚 을 허락 11.-, 高 麗 國 王 生 日 使 를 파견 11.-, 高 麗 國 王 致 祭 使 兼 新 王 認 准 使 를 파 견 9,- 頃, 고려국왕을 尙 書 令 으로 임명 9.8, 南 伐 을 위해 宣 撫 4) 조공과 책봉의 체제는 John K. Fairbank가 언급한 것처럼 貿 易 을 위한 道 具 또는 形 式 의 次 元 을 넘어 國 家 의 安 保 를 담보할 수 있는 裝 置 이다. 곧 中 原 의 歷 代 王 朝 들의 周 邊 國 家 를 향한 王 道 的 이지 못한 軍 事 力 의 行 事 를 抑 制 할 수 있 는 독특한 國 際 秩 序 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階 序 制 (hierachy)를 특징으로 하였던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장 기간에 걸쳐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安 全 辨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는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Westfalen 體 制 에 익숙해 있었던 西 洋 人 들에게 매우 특이한 국제질서로 理 解 될 수도 있었다(David. C. Kang 2010년). 5) 고려사 의 凡 例 에 의하면 世 家 篇 은 圓 丘 籍 田 燃 燈 八 關 등과 같은 日 常 的 인 事 實 은 처음 보이는 것만 記 錄 하여 그 事 例 를 나타내었는데, 만일 帝 王 이 親 히 行 하였으면 반드시 記 錄 하였다.( 如 圓 丘 籍 田 燃 燈 八 關 等 常 事, 書 初 見, 以 著 其 例, 若 親 行 則 必 書 ) 라고 하였지만, 이들 항목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事 實 이 1~2 次 에 일어난 것은 반영되어 있으나 3 次 以 下 는 많은 경우가 省 略 또는 縮 小 되었다. 3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3

18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시기 1005년 (목종 8) 1008년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보면 고려는 거란에 대해 조공과 책봉의 관계에서 흔히 보이 던 하례( 賀 禮 ), 문후( 問 候 ), 납폐( 納 幣 ) 등을 위해 사신을 정기적으로 파견하였고, 주청 ( 奏 請 ), 위문( 慰 問 ), 하례 등을 위해 비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전자는 1009년(현 종 즉위) 12월 11일 소태후( 蕭 太 后 )가 붕어하기 전까지 3월의 천추사( 千 秋 使, 賀 皇 太 后 生 辰 使 ), 춘하계문후사겸납폐사( 春 夏 季 問 候 使 兼 納 幣 使 ), 9월의 추동계문후사( 秋 冬 季 問 候 使 ), 10월의 동지사( 冬 至 使 ), 11월의 성절사( 聖 節 使, 賀 千 齡 節 使 ), 하정사( 賀 正 使 ) 등의 6 개의 사행이 있었으나 명목이 다른 사신단이 함께 파견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또 거란의 전승( 戰 勝 ), 황실의 경조사가 있을 때, 고려의 주청, 특별한 진헌( 進 獻 ) 등이 있을 때도 각각 사신이 파견되었다. 고려 4, 宋 과의 和 親 [ 澶 淵 之 盟 ]을 賀 禮 4.- 頃, 中 京 의 完 成 을 賀 禮 의례 내용 이에 비해 거란에서 고려에 파견된 정기적인 사신은 국왕생일사 뿐이었고, 책봉사, 선 무사( 宣 撫 使 ), 각종 물품의 하사를 위한 횡선사( 橫 宣 使, 혹은 橫 賜 使 ), 중요한 사안의 통보사( 通 報 使 ) 등의 비정기적인 사신이 있었지만, 고려가 거란에 파견한 사신단의 횟수 에 비해 그 사례가 극히 적었다. 이는 인신( 人 臣 )인 제후가 천자에게 세시( 歲 時 )에 따라 인사를 올려야 함이 마땅하지만, 잦은 사행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너무나 크기에 제후 국의 국력에 심대한 손상을 초래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보다 150년 정도의 세월이 경과한 1071년(문종 25, 熙 寧 4) 무렵 고려가 거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쪽으로 송과의 연결을 도모할 때, 그 주된 이유의 하나가 거란의 징구( 徵 求 )를 벗어나기 위함이 었다고 한다. 또 고려에 파견되어 온 거란 사신단의 탐욕과 징구도 심하여 그들을 접대 하는 장소의 각종 기물( 器 物 )들을 철거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요(거란) 1009년 (현종 즉위) 3.- 頃, 皇 太 后 의 生 辰 을 賀 禮 12.12, 皇 太 后 의 喪 을 通 報 1010년 (현종 1) 1020년 (현종 20) 1022년 (현종22) 1.- 頃, 사신을 보내 皇 太 后 를 致 祭, 會 葬 9. - 사신을 보내 秋 季 問 候 를 드리고, 사 신을 東 京 에 보내어 修 好 함 11.1, 사신을 보내 冬 至 를 賀 禮 2.-, 사신을 보내 表 를 올려 藩 을 稱 하고 朝 貢 을 從 前 대로 바칠 것을 약속하고 6년 간 拘 禁 되어 있던 거란사신을 귀환시킴 6.13, 持 書 使 를 東 京 에 파견 11.- 頃, 聖 節 使 를 파견 5.21, 사신을 보내 顯 宗 의 罪 를 容 恕 해주 고, 그의 요청을 수용 8.3, 거란의 東 京 持 禮 使 가 와서 春 夏 季 問 候 使 를 1 次 만 보내되 千 齡 節 賀 禮 使 正 旦 使 와 同 行 하게 하고, 秋 冬 季 問 候 使 도 1차만 보내되 太 后 生 辰 賀 禮 使 와 同 行 하게 함 그런데 조공과 책봉체제가 중원의 제국( 帝 國 )과 주위의 제국( 諸 國 )들이 종주국과 번 속국으로 맺어지는 일종의 우호적 국제관계로서, 천자가 번속국의 내정을 간섭하지 않 으며[ 王 者 不 治 夷 狄, 錄 戎 者, 來 者 勿 拒, 去 者 勿 追 ], 작은 규모의 조공에 대해 대량의 회 사( 回 賜, [ 薄 來 厚 往 ]를 표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주변국의 내속( 來 屬 )을 권유하고, 자국의 인민들에게는 대국의 관대함을 보여 주려고 하는 자기현시적( 自 己 顯 示 的 )인 방책 으로 보이지만, 중원에 연륙( 連 陸 )되어 있는 한반도의 사례를 통해 볼 때, 이민족으로부 터 쓰라린 상처를 받았던 고려시대사를 전공하는 필자에게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관 용적 학자들의 견강부회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다. 6) 고려시대의 경우를 통해 볼 때도 한반도와 접경( 接 境 )하지 못하였고, 북방민족의 군 사적 압력을 고려와의 연대를 통해 조금이라도 약화시켜 보려고 했던 북송에서 그러한 정책이 일부 위정자에 의해 일시적으로 채택되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중원의 주변민족에 대한 일관적인 외교정책이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북송을 제외한 고려와 접촉하였던 대 부 분 의 왕 조인 거란 ( 契 丹 ) 금( 金 ) 몽 골( 蒙 古 ) 명( 明 ) 은 고려왕 조 와 의 관 계에서 1 9 세기 이 래 소수의 제국주의국가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외형적으로는 보호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약소국에 대해 약육강식을 자행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지배를 받 은 식민지와 반식민지국가( 半 植 民 地 國 家 )들은 그들이 강요하여 체결했던 불평등조약에 묶여 수많은 인민들이 강하게 수탈을 당하였는데, 전근대사회에서 중원의 제국( 帝 國 )이 실시했던 조공과 책봉체제가 제국주의국가의 추한 행태와 같이 운영되었다고 하여도 과 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허울만 번듯한 거란과 고려의 불평등적인 조공과 책봉체제는 1125년(인 종 3, 天 會 3) 8월 거란이 멸망한 후 금( 金 )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던 같다. 곧 7년 전 인 1118년(예종 13, 天 輔 2) 2월 금주( 金 主 ) 아골타( 阿 骨 打 )가 거란에게 명하여 형( 兄 )으 로 금 제국( 金 帝 國 )을 섬기는 동시에 세공( 歲 貢 )을 바치게 하고, 거란의 송( 宋 ) 하( 夏 ) 고려에의 왕 복 서한 ( 往 復 書 翰 )인 조( 詔 ) 표( 表 ) 첩( 牒 )의 서식을 요 구 하 자, 6월에 거란 이 수용하였다고 한다. 이 점을 통해 볼 때 이후 송 하 고려는 금으로부터 지난 날 거란에 게 행하였던 외교정책[ 稱 藩 納 貢 ]과 같은 방식의 외교정책을 준수하도록 강요받았을 것 6) 조공과 책봉의 체제의 順 機 能 을 강조하였던 학자들은 오랑캐들[ 外 夷 ] 의 조공을 통해 中 原 의 皇 帝 는 정권의 정통성을 얻었고, 인근 국가의 帝 王 은 책봉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군사적인 압박에서 해소되었으며 朝 貢 品 과 回 賜 物 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조공과 책봉의 관계는 비용과 효과의 측면에서 중원과 인근 국가의 모두에게 利 得 이 되는 국제관계였다는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였지만, 피압박국가의 자주성과 정체성이 고려 되지 못한 한계도 없지 않다. 3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5

19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이고, 고려왕조도 1126년(인종 4, 天 會 4) 4월 금에 대해 신하를 칭하면서 표를 올렸고, 1129년(인종 7, 天 會 7) 11월 대대로 직공( 職 貢 )을 바치겠다는 서표( 誓 表 )를 올렸다. 7) 2. 11~12세기 북동아시아 3국의 우호와 선린을 위한 여러 사례 994년(성종 13, 統 和 2) 4월 고려가 거란에 신속되고, 1004년( 統 和 22, 景 德 1) 12월 거란과 송이 강화[ 澶 淵 之 盟 ]한 후 금 제국이 건립된 1115년(예종 10, 收 國 1)까지의 100 여 년에 걸쳐 북동아시아 3국은 큰 분쟁이 없이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 기에도 영역과 인민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경계지역에서는 작은 규모의 충돌이 많이 발 생하기도 하였고, 공적인 사신단의 내왕에도 일정한 규제가 있었다. 또 국경지역에서는 인민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관소( 關 所 )가 설치되어 경비가 삼엄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 역상인 구법승이 자유롭게 3국을 오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국의 안정과 인국( 隣 國 )과의 우호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특정국의 조병요청( 助 兵 要 請 ), 제3 국의 초유( 招 諭 ) 등도 거부하였고, 타국의 군사력이 자국의 영내에 진출, 통과요청[ 假 道 ] 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형편 하에서 북동아시아 3국의 정부차원에 이루어진 상대국의 관민( 官 民 )에 대 해 행해진 인도적 배려는 여러 형태로 찾아진다. 먼저 대립과 충돌의 시기에 구류되었던 사신단의 귀환, 또는 관료로의 발탁, 피로된 군인들을 자국군대에의 편입, 피로된 인민 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시킨 귀화주( 歸 化 州 )의 설치, 탈출한 피로인의 송환 등이 있었는데,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그 외에 대다수의 경우는 무역상인 구법승의 내왕, 표류인의 귀환, 투화인의 수용과 귀환, 도망자[ 逋 逃 人 ]의 퇴거( 退 去 ) 등이 있었다. 이들 시책들은 왕도정치를 표방하는 통치자[ 皇 帝 ]가 인민을 교화하기 위해 먼저 행하 여야 기본덕목의 하나인 인정( 仁 政 )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이민 족[ 外 夷 ]에게도 미쳐야 한다는 유교[ 孟 子 ]의 영향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동북아 모든 지역의 여러 제왕( 帝 王 )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고 대체적으로 그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여러 국가에 유입된 여러 유형의 이민족들에게 통치자 들은 의식( 衣 食 )을 풍성하게 해주는 덕화( 德 化 )가 아닌 비인격적 처사로서 대우하는 경 우도 없지 않았으며, 고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북동아시아 3국의 외교 방침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패권( 覇 權 )의 쟁탈과 패자( 覇 者 )로서의 위상을 확고 히 하는 것이고, 인의( 仁 義 )에 입각한 외교는 하나의 공구( 工 具 )일 뿐인 한비자( 韓 非 子 ) 에 의해 주창된 패도( 覇 道 )의 선양이었던 점도 없지 않다. 한편 북동아시아의 권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해양으로 떨어져 있으면서 한 중의 어느 국가와도 공식적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던 일본의 인민들도 3국을 왕래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들이 3국의 인민과 접촉하게 된 계기는 국제무역, 구법, 표류, 피로인 쇄환( 被 虜 人 刷 還 ), 해적 행위[ 倭 寇 ] 등이었는데, 왜구를 제외한 여타의 경우에는 한 중으로부터 비인도적 대우를 받았던 경우는 전시( 戰 時 )를 제외하고 찾아지지 않는다. 이러한 처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도착한 3국의 인민들도 엄격한 조사를 받은 후, 표 류인은 연희( 延 喜 ) 년간(901~922) 단마국( 但 馬 國, 타지마노쿠니, 현 兵 庫 縣 의 북부지역) 에 내착한 이국인의 예에 의거하여 양( 糧 )을 지급받아 귀환되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투 화인( 投 化 人 )은 이주 희망인[ 參 來 人, 곧 投 化 人 ]과 도망자[ 逋 逃 人 ]가 구별되어 수용과 퇴거가 결정되거나 소지품이 몰수된 후 억류당하거나, 왕성( 王 城 ) 외곽의 가로( 街 路 )에 방치되어 인민의 구경꺼리가 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이상에서 11~12세기 북동아시아 3국에서 행해진 우호와 선린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 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북방민족인 거란, 여진의 강한 군사적 압박 하에서 북송, 남송, 고려 등이 납폐, 조공 등의 명목에서 차이가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일한 내용인 세폐를 통 해 그들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방책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송과 고려와 같이 피해자 측인 남쪽의 정주민( 定 住 民 )이 무력적 방어를 방기한 것은 아 니었고, 항상 굳건한 전비( 戰 備 )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고려왕조의 경우에 북 방민족과의 전선지역인 서북계에 거의 61,000~71,000인의 군인을 주둔시킬 수 있는 체 제를 구축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성지( 城 池 )를 축조 보수하고,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이의 배치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의 안정된 국제정세를 구축하는 가장 중요 한 요인이 될 수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8) 7) 이처럼 고려왕조가 中 原 에 대해 藩 屬 國 으로 부담하였을 의무는 13세기 후반 大 蒙 古 國 의 지배질서 하에 들어간 이후에 도 世 祖 쿠빌라이에 의해 강요된 納 人 質 籍 編 民 置 郵 驛 出 師 旅 輸 糧 餉 助 軍 儲 등의 六 事 로 이어졌다. 또 이것이 다시 1369년( 洪 武 2) 9월 21일 明 帝 國 에서 藩 王 [ 蕃 王 ]의 朝 貢 禮 를 定 할 때, 禮 官 이 1264 年 (원종 5, 至 元 1) 6월 元 宗 이 上 都 ( 現 內 蒙 古 自 治 區 錫 林 郭 勒 盟 正 藍 旗 동쪽)에서 世 見 之 禮 를 行 한 것을 上 奏 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볼 때 明 의 藩 王 朝 貢 禮 도 蒙 古 의 制 度 를 遵 用 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明 太 祖 實 錄 권45, 홍무 2년 9월 壬 子 21 日 ; 大 明 會 典 권58, 禮 部 16, 蕃 王 來 朝 儀 ). 8) 세계화가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對 立 과 紛 亂 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서는 自 衛 를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의 군사력과 상대방의 역량을 제한할 수 있는 적절한 외교는 國 益, 특히 국가안보를 擔 保 하는 최소한의 手 段 일 것 이다(Hans J. Morgenthau 1949년 440쪽). 3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7

20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Ⅳ. 共 存 에서 敗 亡 으로 1. 야수( 野 獸 )는 순치( 馴 致 )될 수 없고, 늑대[ 狼 ]로 바뀐 경우는 있었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한반도의 북변 일대에서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을 회유 포섭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여진의 일부는 고려의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참전하여 군공을 세워 호시( 互 市 )에서 어떤 특혜를 부여 받았던 것 같다. 그 후 고려정부는 정령( 政 令 )과 교화( 敎 化 )가 미치는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을 화내 여진( 化 內 女 眞 )으로, 그 외곽의 여진을 화외 여진( 化 外 女 眞 )으로 구분하여 차등이 있게 대우하였던 것 같다. 전자 중에서 순화 ( 馴 化 )가 이루어진 일부는 판적( 版 籍 )에 편입시켜 고려인과 동일하게 취급하였고, 그렇지 못한 경우는 기미주( 羈 縻 州 )로 편제시켜 통솔하고 있었던 것 같다. 또 그 외곽의 화외 여 진은 독립적 정치적 단위를 형성하면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관작( 官 爵 )과 각종 회사품 ( 回 賜 品 )을 받아 갔던 작은 규모의 제후국과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고, 이들 중의 일 부는 고려를 부모지국( 父 母 之 國 )으로 부르기도 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긴밀한 관계로 인해 송에 파견된 고려의 사신단은 항상 여진의 사신단을 거느 리고 들어갔는데, 이로 인해 송도 여진의 사신이 오지 않을 때는 고려로 하여금 초유( 招 諭 )하여 함께 오게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098년(숙종 3) 이후부터 여진의 고려에의 내 조가 크게 감소되었는데, 이는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여진의 성장과 자 립성에 의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도 여진에 대 해 종전의 회유정책에서 탈피하여 분리정책을 구사하여 이들을 천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 았다. 이때 송화강( 松 花 江 ) 일대에서 발흥한 완안부( 完 顔 部 )가 주변의 부족을 통일하고 고려의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이에 대응한 고려 측의 반격이 1104년(숙종 9), 1107년(예종 2)의 두 차례에 거친 여진 정벌이었다. 그 결과 한반도의 동북쪽의 넓은 지역에 9성이 축 조되어 국초이래의 북진정책이 처음으로 실천된 것 같았으나 새로운 영역을 유지할 수 있는 인적, 경제적 기반의 결여, 주화론( 主 和 論 )의 등장, 여진의 환부( 還 付 ) 요청 등으로 인해 2년 후에 환부되고 말았다. 이후 여진은 한반도 동북부를 지배하면서 고려의 영향 력 하에 있었던 여진세력을 굴복시켜 인적 물적 기반을 더욱 확충하여 패자로서의 발돋 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2세기 여진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면서 북동아시아의 정세는 다시 요동을 치게 되 자, 거란과 송은 여진과 접경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고려를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였다. 곧 송은 고려가 요 여진 양국의 사이에 있으므로 1077 년( 熙 寧 10)의 예에 의거하여 고려사신단을 우대하였으며(1111년), 사신의 명칭을 국신사 ( 國 信 使 )로 승격시켜 개봉부( 開 封 府 ) 변경( 汴 京 )에 파견되어 온 사신의 서열[ 班 次 ]을 서하 ( 西 夏 )의 상위에 두고 객성( 客 省 )으로 하여금 대접하게 하였다가(1113년) 다시 거란의 예 와 같이 추밀원에 예속시키기도 하였다(1115년). 또 휘종( 徽 宗 )은 고려사신 이자량( 李 資 諒 ) 등을 불러 예모전( 睿 謀 殿 )에서 사연( 賜 宴 )하고 여진을 초유하여 오게 하였고(1117 년), 고려의 세자가 문종( 文 宗, 父 王 )의 신병치료를 위해 요청한 의관( 醫 官 )을 파견하기도 하였다(1119년). 그러다가 1125년 12월 금이 연경( 燕 京 )을 함락시키고 다음해 1월 변경( 汴 京 )에 침입하자 4월 고려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금을 후방에서 공격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126년). 이러한 송의 고려 사신에 대한 우대는 북진정책을 추진하려던 신종대( 神 宗 代 )의 고려 에 대한 외교정책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인데, 신종의 별세 후에 이루어졌던 고려의 사신에 대한 지방관의 영접 거부, 배신( 陪 臣 )이라고 멸시, 사신관( 使 臣 館 )의 출입 제한, 상경( 上 京 )을 위한 지리도( 地 理 圖 )의 압수, 거란의 세작( 細 作 )으로 의심 등과 각종 박대 행위를 일삼던 종래의 무례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는 종래에 고려가 여진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형편을 인지하고 있었던 송의 어떤 환상에 의한 것이겠지만, 고려는 그러한 송의 욕구를 채워줄 형편이 아니었다. 또 송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신흥의 여진과 접전하여야 할 노제국( 老 帝 國 ) 거란은 1115 년(예종 10) 1월 금을 창건한 아골타가 공격을 더욱 강하게 해옴에 따라, 같은 해 4월 이래 3차에 걸쳐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서 조병( 助 兵 )을 요청하였지만 어떠한 도움도 받 지 못했던 것 같다. 거란의 고려에 대한 조병 요청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을 것으로 추 측되지만 양국의 자료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으니 실상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1120년(예 종 15) 2월 금이 거란이 고려에게 조병을 요청한 것을 질책하였음을 볼 때, 상경( 上 京, 현 内 蒙 古 自 治 区 巴 林 左 旗 林 东 镇 남쪽)이 함락된 5월, 또는 다음해 1월 중경( 中 京, 현 辽 寧 省 昭 乌 达 盟 寧 城 县 天 义 镇 大 明 乡 지역)이 격파될 때 까지도 고려에 대해 어떤 기대 를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1111년(예종 6) 송이 거란과 여진의 사이에 있던 고려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 려의 사신을 우대하기 시작한 이래, 고려도 대륙에서의 전운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곧 같은 해 10월 중서문하성과 추밀원[ 兩 府 ]이 변방사( 邊 方 事 )를 의논했던 것, 예종이 다음해 5월 3품 이상에게, 11월 중서성에 각각 방어 대책을 하문한 것을 통해 알 수 있 다. 그러다가 아골타가 즉위한 1115년 이후 거란의 조병 요청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 38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39

21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고 양국 사신의 내왕이 예전과 같았으나 원병의 파견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 던 것 같다. 이 시기에 고려가 거란에 보낸 국서의 내용이 남아 있지 않아 고려가 취한 정 치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단지 1126년(인종 4) 7월 송이 고려에 금을 공격할 것을 요청한 답서에서 송이 먼저 금을 공격할 때 조병하겠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였던 것 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함께 고려는 1116년(예종 11) 8월 이래 금이 내원( 來 遠 ) 포주( 抱 州 ) 2성을 공격하 려고 할 때 금에 사신을 보내 포주를 돌려주기를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다음해(1117 년) 3월 금이 형제지국의 체결을 요구해 왔을 때 어떤 결정도 하지 아니하고 관망의 자세 를 취하였다. 또 1118년( 政 和 8) 2월 이래 송이 여진을 초유 연계하여 거란을 협공하려고 할 때(1120년, 海 上 之 盟 ), 고려에 파견되어 온 의관( 醫 官 )을 통해 여진을 끌어들여 거란 을 도모하려는 것은 잘못이며, 호랑( 虎 狼 )과 같은 여진을 대비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고 한다. 9) 이는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형세를 살피며 가만히 기회를 엿보는 늑대와 같 은 여진에게 스스로 문을 개방하고 들어오라고 하는 송의 외교정책에 대해 고려가 반대 의 의사를 제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과 같이 12세기 전반 북동아시아에서 금 제국이 등장하여 거란이 멸망하고 송이 남쪽으로 몰려날 때 송 거란은 무력에 의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지 못하고 고려를 매개로 하여 수성( 守 成 ) 또는 역전( 逆 戰 )을 도모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신흥제국( 新 興 帝 國 )의 등장에 대해 관망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고려의 후원을 받지 못하고 모두 패망의 길 을 걷게 되었다. 어쩌면 우유부단한 정책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는 고려도 쟁패전을 전 개하고 있던 제국( 帝 國 )들의 틈새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여 접경하고 있던 신흥의 패 자( 覇 者 )로부터 일정한 담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겨우 자신의 영역이었던 압록강 동쪽지 역의 극히 일부분만을 회복하였을 뿐이다. 그 조차 지난날 거란에 신속하였던 체제를 그 대로 인정한 연장선 하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결국 12세기 전반 고려가 취한 외교정책 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던 인국( 隣 國 )이 새로운 제국으로 등장할 때 호혜적 동맹을 형성하거나 승세에 편승하지 못하고, 중립적 자세를 취하여 방관하다가 피압박의 국가 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9) 貴 耳 集 권 下, 宣 和 元 年 間, 高 麗 遣 使, 一 旦 忽 上 奏, 以 其 王 病 求 醫, 上 擇 二 良 醫 往. 歲 餘 方 歸, 二 醫 奏, 王 館 醫 甚 勤, 謂 曰, 高 麗 小 國, 世 荷 國 恩, 不 敢 忘. 聞 天 子 用 兵, 遼 實 兄 弟 國, 苟 存 之, 猶 是 爲 中 國 捍 邊, 女 眞 乃 虎 狼, 不 可 交 也. 願 二 醫 告 諸 天 子, 早 爲 之 備. 太 平 治 迹 統 類 권25, 契 丹 女 眞 用 兵 始 末, 宣 和 元 年 六 月, 高 麗 國 忽 上 奏, 以 其 王 病 求 醫. 上 命 擇 二 良 醫 往, 歲 餘 方 遣 歸 奏, 館 二 醫 甚 勤, 謂 曰, 高 麗 小 國, 世 荷 國 恩, 不 敢 忘. 聞 天 子 用 兵, 遼 人 實 兄 弟 國, 苟 存 之, 尤 足 爲 中 國 捍 邊, 女 眞 虎 狼 不 可 交 ( 深 沈 不 可 測 ) 也. 願 告 之 天 子, 早 爲 備 之. ( )는 四 庫 全 書 本. 2. 고려 사람들이 몽골의 침입에 어떻게 맞서 싸웠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제목은 중학교 교과서의 몽골의 침입에 맞서다 라는 작은 제목에서 제시된 학습 의 목표이며, 이에 대한 설명 중의 일부분이 40여 년 간 계속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 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로 기술되어 있다(두산동아 2011년 125 쪽). 또 종래의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질 때 강조되었던 무인정권의 몽골에 대한 항쟁에 대 한 서술이 축소되고, 이 전쟁에서 고려가 입은 피해, 양국이 강화한 이후의 사실들이 보 완되어 있다. 향후 13세기 후반 이후 대원몽골국( 大 元 蒙 古 國 )의 지배질서 안에 들어간 고 려가 멸망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보강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 시기 이전에 있었던 몽골과의 항쟁과정에서 고려 가 채택한 외교정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206년(희종 2) 12월 대몽골국을 건립한 테무진[ 鐵 木 眞 ]이 점차 남진하여 1209년 12 월부터 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함에 따라 하북지역은 다시 크게 혼란하게 되었다. 이 때 금의 예하에 있던 거란인[ 契 丹 遺 種 ]들이 궐기하여 1213년(강종 2) 3월 야율유가( 耶 律 留 哥 )가 요동에서 요( 遼, 후일의 大 遼 收 國 )를 건국하였지만, 1215년에 야율유가가 몽골 에 투항한 후 야시불( 耶 厮 不 )이 요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들은 몽골군의 토벌에 밀려 다 음해 8월 14일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쳐들어 왔다. 이후 거란군은 2년 5개월 동안 한반 도의 서북부에서 고려군과 치열한 쟁패전을 거듭하다가 1218년(고종 5) 12월 주력부대가 고려군에 밀려 강동성( 江 東 城, 현 平 安 南 道 江 東 郡 )에 들어갔다. 이때 고려군은 예상하지 못한 1만의 몽골군과 그들에 의해 이끌려온 2만의 동진군( 東 眞 軍 )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동진에서 한반도의 동북부지역을 거쳐 강동성으로 왔다고 한다. 이들 몽골 동진군과 합세한 고려군은 다음 해(1219년) 1월 14일 강동성을 함락시켰 고, 20일 몽골군의 지휘관 카친[ 哈 眞 ] 자라[ 札 剌 ]와 고려군의 지휘관 조충( 趙 冲 ) 김취려 ( 金 就 礪 )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형제관계의 동맹을 맺어 자손만대까지 이날을 잊지 않기 로 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몽골군의 지휘관이 파견한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여 24일 고종 ( 高 宗 )을 알현하고 강화하였다고 한다. 이때 몽골과 고려는 형제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전선의 지휘관 사이에 체결된 동맹이 몽골정부에 의해 승인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이 후 몽골에 의한 수많은 요구사항을 통해 볼 때 국가 간의 형제관계라는 것은 의문의 여 지가 없지 않다. 그런데 고려사 에는 1218년(고종 5) 12월 몽골군이 강동성의 인근에서 고려군과 조 우( 遭 遇 )하기 이전에 고려와 몽골이 접촉한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몽골군의 40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41

22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한반도에의 진입은 사전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군대를 이끌고 월경( 越 境 )하였다고 이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더라도 침략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더 구나 양국이 강화한 이후 몽골정부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수탈, 그들이 파견한 지휘관들의 도륙, 사신들의 행패 등과 결부시켜 볼 때, 오랑캐[ 夷 狄 ] 중의 오랑캐 [ 韃 靼 ]의 장수에게는 오직 전쟁에서의 승리가 최고의 목적일 뿐 질서와 교섭, 그 어느 것 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으로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몽골군이 한반도에 진입했던 1218년(고종 5) 12월 이전에 몽골의 사신이 고 려에 도착하여 강화를 도모하려고 하였던 흔적이 찾아지고 있어 몽골이 외국과의 첫 접 촉에서조차 야만적인 행동을 취하였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려군의 지 휘관이었던 조충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金 龍 善 2006년 335쪽). 이때 몽골국( 蒙 古 國 )의 지휘관 카친[ 合 珎 ] 자라[ 札 剌 ] 등이 군사[ 勝 兵 ] 만여 인을 거느리 고 동쪽 경계로부터 들어와서 강동성( 江 東 城, 岱 州 )을 10) 함락시키려 하면서, 다만 우리나 라와 화친을 청하고 거란에게는 복수를 하고자한다는 사연( 辭 緣 )으로 조충[ 公 ]의 군영 에 청하니 조충이 즉각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보다 먼저 몽골국이 40여 인을 보내 첩( 牒 ) 을 가지고 선박을 통해 정주( 定 州 )에 도착시켜 금일과 같이 강화를 요청한 일이 있었다. 조정이 의논하기를 이들이 대요수국( 大 遼 收 國, 契 丹 遺 種 )인지 알 수 없고, 일반인이 몽골 문서( 蒙 古 文 書, 蒙 古 文 字 )를 위작( 僞 作 )하여 거란에게 복수한다는 명목을 들고 있지만, 실은 우리를 정탐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회보( 回 報 )하지 않았다( 時, 會 蒙 古 國 軍 帥 合 珎 札 剌 等 率 勝 兵 万 餘 人, 自 東 鄙 入, 欲? 拔 岱 州, 只 請? 和 我 國, 復 讎 契 丹 之 辭, 請 於 公 軍 營?, 公 卽 奏 聞. 先 是, 蒙 古 國 遣 四 十 餘 人, 齎 牒 乘 船 定 州, 請 如 今 日 講 和 事. 朝 廷 議 以 爲 莫 是 契 丹 遺 種, 一 般 人 僞 作 蒙 古 文 字, 名 復 讎 契 丹, 實 欲 偵 探 我? 耶, 遂 不 報 ). 11) 이 자료를 통해 보면 카친[ 合 珎 ] 자라[ 札 剌 ]의 군사가 고려에 진출하기 이전에 몽골 국( 蒙 古 國 )으로 표기된 몽골정부가 첩( 牒 )을 소지한 40여 인의 사신단을 선박을 통해 정주(현 平 安 北 道 定 州 郡 )에 파견하여 고려와 강화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고 려정부는 대요수국의 전쟁의 와중이어서인지 알 수 없으나 몽골사신에 의해 제시된 강화 제의와 대요수국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첩을 대요수국의 모략, 또는 일반인에 의한 위조 1 0 趙 ) 冲 墓 誌 銘 에는 江 東 城 이 岱 州 城 으로 表 記 되어 있는데, 이때의 勝 戰 으로 인해 江 東 縣 이 岱 州 로 昇 格 되었을 가능 성이 있다. 11) 이에서 添 字 는 實 物 判 讀 에서의 推 定 이 아니고 文 脈 을 통해 추측한 것이다. 라고 치부하고 회신하지 않았던 것 같다. 1209년(희종 5) 12월 이래 몽골은 금 제국을 대파하고 하북과 요동을 석권하고 있었 으므로 1211년(희종 7) 5월 금에 파견된 고려사신이 통주( 通 州, 현 北 京 市 通 州 區 )에서 몽골군을 만나 피살되어 그 시신이 금에 의해 송환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도 사신이 길 이 막혀 귀환하였고, 1214년(고종 1) 금에 파견된 사신이 몽골군으로 인해 중도에서 귀 환하였음을 통해 고려는 신흥제국 몽골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 카친[ 合 珎, 哈 眞 ] 자라[ 札 剌 ]의 군량요청을 받은 조충과 김취려는 사태의 엄중성을 인지 하고 즉각 정병( 精 兵 ) 1천을 파견하여 미( 米 ) 1천 석[ 千 斛 ]을 주었다고 한다. 또 한광연 ( 韓 光 衍 )의 묘지명에 의하면 이때 몽골군이 왔다는 사실을 접한 3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 되었다고 한 점을 보아 당시 유라시아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는 몽골군은 고려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처럼 욱일승천과 같았을 몽골제국의 형편을 고려의 위정자들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 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사신을 처음 접한 정주( 定 州 )의 지방관이 박대하여 축출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려정부가 몽골의 강화요청을 요구한 사신단과 첩에 대한 대처가 상대국의 제의에 대한 수락, 반발, 무대응, 묵살 중의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비외교 적 대응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고려정부의 처사는 몽골에게는 묵살로 받아들여질 수 도 있었을 것이고, 양국 간의 공동관심사 또는 상호이익이 거부된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는 향후 양국 사이의 폭력행위의 실마리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반복될 때 정치 또는 외교의 최후 수단이라고 불리어지는 전쟁으로 이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고려정부의 지향점이 없는 외교적 자세는 이후에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이는 1224년(고종 11) 1월 몽골의 영향력으로부터 이탈하려던 동진이 사신을 보내와 몽 골과의 단절을 전하고 호시( 互 市 )를 요청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고려 가 몽골과 형제맹약을 체결한 국가였다면 동진의 요청이 접수될 수 없을 것이고, 다음해 에 일어난 탐욕적이었다고 하는 자구르[ 著 古 與 ]의 피살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1129년(고종 16) 2월 이래 고려는 동진과 화의를 의논하였는데, 이것이 다음 해의 몽골에 의한 고려정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고, 1231년(고종 18) 8월 몽골원수 사르 탁[ 撒 禮 塔 ]에 의한 고려정벌로 이어졌던 것 같다. 또 1232년(고종 19) 12월 사르탁이 김 윤후( 金 允 侯 )에 의해 사살되었을 때 고려는 국서를 동진에 보내 몽골과의 화호는 본의 가 아닌 것, 사르탁의 사살, 몽골군의 철수 등을 전하고 동맹을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몽골의 침입을 방어할 수 없는 약소국가들이 공동방어에 나서겠다는 무모한 약속 42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43

23 제 1 주제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던 대외정책의 제 유형 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고려가 택할 외교정책이 아니라 섶을 지고 불난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패망의 길을 자초한 것이었다. 12) 이후 고려의 지배층들은 과거 그들의 선조( 先 祖 )들이 실행했던 상대국과의 전쟁 화의 ( 和 議 )라는 전술 배합의 병행 위에 제3자와의 연대 모색을 통한 국익의 확보라는 외교정 책을 구사하지 못하다가 대원몽골국의 지배질서 하에 들어서고 말았다. 또 이 시기의 지 배층들은 오랑캐들로부터 국가[ 王 朝 ]와 신민( 臣 民 )을 지켜야 한다고 선창( 先 唱 )하였을 것이지만, 그들의 행동거지를 통해 볼 때 자신과 일족들의 온전한 삶을 보전하기 위해 전쟁을 지속적으로 이어 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10~13세기의 북동아시아 3국의 국제정세의 변화, 이에 따른 고려정부가 취 한 외교정책의 여러 유형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의 소결론들을 모아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먼저 고려왕조의 창업자인 태조 왕건의 외교정책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942년의 만 부교 사건은 제왕( 帝 王 )으로서의 올바른 정치행위라고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있고, 국익의 관점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조치일 것이다. 또 태조의 그러한 행위는 상대국의 제의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며, 국가 간에 대립이 있을 때 군비의 강화만이 공존의 근간이 될 수 있 다는 강경노선을 채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993년 서희와 소항덕의 사이에 이루어진 담판은 여러 면에서 후세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모범적인 외교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이는 고려정부가 취한 실리적 외 교의 하나로서 이후의 외교정책의 결정에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곧 신속( 臣 屬 )을 전제로 한 조공과 책봉을 제시한 서희와 이를 채택한 성종의 외교정책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서북쪽의 연해지역을 확보하여 국경선을 압록강구까지 확장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일면 경쟁에서 화평, 공존으로 나아가는 좋은 외교정책 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반도의 정세에 큰 영향력을 줄 수 없는 어느 특정 국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가 자주성을 상실하고, 영역의 회복이라는 국시( 國 是 )조차 12) 어떤 특정 강대국(great power)의 군사력이 너무나 강할 때는 중 소국에 의한 세력균형 역할은 불가능 할 것이다. 방기한 방책이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셋째, 1019년(현종 10) 고려가 거란을 격퇴한 후 북동아시아 3국은 세력 균형을 이루 며 어느 정도 평화를 유지하였다고 하지만, 3국이 비슷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력 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곧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에 걸친 북동아시아의 정세 는 북쪽에 위치한 거란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송과 고려는 모두 북진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란군의 침입에 대해 천도론과 할지론이 제기되는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국경선의 방어에 급급한 형편에서 송은 세폐( 歲 幣 )를 통해, 고려는 신속을 통해 영역의 경계[ 地 界 ]를 확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형편 하에서 고려와 거란 사이에 체결된 조공 책봉체제는 왕도정치를 표방하 는 통치자가 인민을 교화하기 위해 먼저 행하여야 하는 기본덕목의 하나인 인정( 仁 政 )에 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실상을 해부해 보면 이 시기 북동아시아 3국의 외교 방침은 오로지 국제관계의 기본 바탕인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패권의 쟁탈과 패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 것이고, 인의( 仁 義 )에 입각한 외교는 하나의 공구( 工 具 )일 뿐인 한비 자에 의해 주창된 패도( 覇 道 )의 선양이었을 뿐이다. 넷째, 12세기 전반 북동아시아에서 금 제국이 등장할 때 송 거란은 무력에 의한 적극 적인 공세를 펴지 못하고 고려를 매개로 하여 수성 또는 역전( 逆 戰 )을 도모하였던 것 같 다. 그렇지만 고려의 어떠한 후원도 받지 못하여 모두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려도 쟁패전을 전개하고 있던 제국( 帝 國 )들의 틈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패자( 覇 者 ) 가 된 인국( 隣 國 )과 호혜적 동맹을 형성하거나 승세에 편승하지 못하고, 중립적 자세를 취하여 방관하다가 피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섯째, 13세기 전반 고려의 무신정권은 중원( 中 原 )에서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몽골에 대한 정보와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들의 교섭제의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 한 채, 임기응변적으로 동진( 東 眞 )과 같은 약소국과 함께 공동방어에 나서겠다는 외교정 책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곧 국초이래의 상대국과의 전쟁 화의라는 전술 배합의 병행 위 에 제3자와의 연대 모색을 통한 국익의 확보라는 외교정책을 구사하지 못하다가 대원 몽골국의 지배질서 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는 고려의 전통적인 세력 균형 정책이 대적이 없는 강한 군사력을 지닌 몽골제국에게 수용되지 않았던 결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 다. 그렇다면 대원몽골국의 강한 압제 하에서 국가를 온전하게 살려 낼 수 있었던 당시의 외교정책은 어떠한 방책이었는가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한반도 분단이라는 현재의 외교 상황을 우리 역사학자들도 함께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4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45

24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10~14세기 아시아의 상호 교류와 협력 참고문헌 具 山 祐, 高 麗 成 宗 代 對 外 關 係 의 展 開 와 그 政 治 的 葛 藤 韓 國 史 硏 究 7 8, 金 龍 善, 高 麗 墓 誌 銘 集 成, 翰 林 大 學 出 版 部, 2006 朴 宗 基, 11 世 紀 高 麗 의 對 外 關 係 와 政 局 運 營 論 의 推 移 歷 史 와 現 實 30, 1998 徐 聖 鎬, 高 麗 太 祖 代 對 契 丹 政 策 의 推 移 와 性 格 歷 史 와 現 實 34, 1999 外 交 通 商 部, 21 世 紀 創 造 的 實 用 外 交 와 徐 熙 ( 發 表 要 旨 ), 2009 李 基 白, 高 麗 兵 制 史 硏 究, 一 潮 閣, 1968 李 鎭 漢, 高 麗 武 臣 正 權 期 宋 商 의 往 來 民 族 文 化 3 6, 李 孝 珩, 渤 海 遺 民 史 硏 究, 釜 山 大 學 校 博 士 學 位 論 文, 2004 張 東 翼, 宋 代 麗 史 資 料 集 錄, 서울대출판부, 2000 張 東 翼, 高 麗 時 代 의 對 外 交 涉 과 海 防 韓 中 日 의 海 洋 認 識 과 海 禁, 東 北 亞 歷 史 財 團, 2007 張 東 翼, 高 麗 時 代 對 外 關 係 史 綜 合 年 表, 東 北 亞 歷 史 財 團, 2009 張 東 翼, 佛 典 의 流 通 을 통해 본 高 麗 時 代 의 韓 日 關 係 石 堂 論 叢 58, 2014a 張 東 翼, 高 麗 世 家 初 期 篇 補 遺 1 2, 景 仁 文 化 社, 2014b 韓 圭 哲, 渤 海 의 對 外 關 係 史, 新 書 苑, 1994 韓 國 中 世 史 學 會, 中 國 에서 바라본 第 1 次 麗 遼 戰 爭 과 徐 熙 ( 發 表 要 旨 ), 2012 森 平 雅 彦 等, 櫟 翁 稗 說 譯 註 年 譜 朝 鮮 學 1 4, 宇 野 伸 浩, 遼 朝 皇 族 の 通 婚 關 係 にみられう 交 換 婚 史 滴 1 7, 張 東 翼, 高 麗 時 代 の 對 外 關 係 の 諸 相 東 アジ ア 海 をめぐる 交 流 の 歷 史 的 展 開, 東 方 書 店, 川 口 卯 橘, 傳 說 の 都 開 城 と 其 古 蹟 名 勝 朝 鮮 史 學 5, 宋 史 提 要 編 纂 協 力 委 員 會, 宋 代 史 年 表 ( 北 宋, 南 宋 ), 東 洋 文 庫, 1967, 1974 李 云 泉, 朝 貢 制 度 硏 究, 新 華 出 版 社, 2004 Thomas A. Bailey, A Diplomatic of the American People, 10th. ed. (Englewood Cliffs, NJ:PrenticHall, 1980) David. C. Kang, East Asia before the West : Five Centuries of Trade and Tribute(New York: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Hans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 The Struggle for Power and Peace(New York:Alfred A. Knopf, 1949, p.440) 제2주제 발표 제도와 정책의 수용과 배제 화풍( 華 風 )과 토풍( 土 風 )의 공존과 갈등 구 산 우 창원대학교 교수 46 강화고려역사재단-한국중세사학회 공동 국제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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