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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42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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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 례 特 集 2013년도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여진천 5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방상근 55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박문수 9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 학적 성찰 박준양 139 종합토론 205 硏 究 論 文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김수태 235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김정환 289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조수정 329

4 차 례 書 評 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안창모 375 김정신, 도서출판 미세움, 2012 資 料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83 附 錄 연구소 소식(2013년 7~12월) 433 간행 규정 445 집필 원칙 451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윤리 규정 457

5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여진천* 1. 머리말 2. 신앙의 동기 3. 신앙의 실천 4.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5. 맺음말 국문 초록 이 땅의 천주교는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구도자적 열정과 노 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의 동기를 보면, 당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과 권철신 형제가 복음을 받아들였 다. 이들과 달리 정약종은 도교( 道 敎 )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가 후에 신앙 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온 그들은 복음적 삶으로 신앙을 성장시켰고 전파하였다. 이벽은 찾 아가서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권일신은 적극적으로 * 배론성지 문화영성연구소 소장 신부.

6 6 교회사연구 제42집 신앙을 전파하였고,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책임감을 갖고 대처 했다. 권철신은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신앙의 실천이 친인척과 제자들 에게 큰 영향을 주어 여러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명도회장으 로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정약종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 천한 삶은 전교의 원동력이었다. 이들은 박해를 받아 시련과 유혹을 당하였다. 이벽은 부친의 박해를 받 아 집안에 감금되어 1785년 죽음을 당하였다. 1791년 권일신은 정조 에 의해 집중적인 회유를 당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회오문 ( 悔 悟 文 )을 지어 신앙을 부인하였지만, 유배 도중 죽 음을 당하였다. 권철신은 1791년 이후 1801년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나, 1801년 박해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승훈은 1785년에는 벽이문 ( 闢 異 文 )을 짓고, 1791년에는 관직에서 삭직되었 고, 1795년에는 유혹문 ( 惑 文 )을 지어 교회를 떠났으나, 잠잠해지 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정약종은 1801년 박해를 받아 죽음의 공포에 맞서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 데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은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 를 떠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선택 하셨는데, 그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제어 :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평신도 지도자, 세례, 신앙, 박해, 순교

7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7 1.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평신도 지도자 5위인 1) 이벽( 李 檗, 세례자 요한, 1754~1785), 이승훈( 李 承 薰, 베드로, 1756~1801), 권철신( 權 哲 身, 암브 로시오, 1736~1801), 권일신( 權 日 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1), 정약종( 丁 若 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 등은 믿음의 문을 통하여 교 회에 들어왔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살았고,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고 통과 죽음을 당하였다. 지금까지 이들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런 데 정약종 2) 을 제외하고는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신앙에 대한 연구보 다는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지에 집중되어 있다. 3) 1) 주교단은 2013년 3월 춘계 주교회의에서 창립 선조, 창설 주역, 창립 주역 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지 않기로 했다. 5위 중 정약종은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에 포함되어 있고, 그 외 4위는 2013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결정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와 동료 132위 에 포함되어 있다. 2) 송석준, 정약종과 유학사상, 한건, 정약종의 신학사상, 원재연, 정약종 쥬교요지 와 한문서 학서의 비교연구, 서종태, 정약종의 주교요지 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 주명준, 정약종 가문의 천주교 신앙 실천 ( 한국사상사학 18, 한국사상사학회, 2002) 등이 있다. 3) 이승훈에 관한 연구는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활동,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활동과 정치적 입지,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이원순, 이승훈 후손의 천주신 앙, 이이화,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만천유고 를 중심으로 및 이승훈 관계 한문과 서한 자료가 실려 있다(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2002년 2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과 천주신앙 세미나에서 차기진, 권철신 이벽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서종태, 이벽 이승훈 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 이성배, 광암 이벽에 대한 신학적 고찰, 류한영, 이승훈 권철신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신학적 견해, 곽승 룡, 한국 천주교 창설 주역들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 등이 발표되었고, 2005년 5월에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이벽 세례자 요한 세미나에서 류한영, 한국의 시복시성 작업과 이벽연구의 의미, 차기진, 광암 이벽 관련자료의 종합적 검토, 최선혜, 조선시대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통제와 처벌, 여진천, 조선후기의 효사상과 천주교 신앙과의 연관성, 심상태, 이 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등이 발표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 회사연구소, 2007). 2009년 9월 창설주역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의 순교사실과 그 평판 세미나 에서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 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 성, 류한영,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생애와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 최인각, 창설 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 심상태,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과

8 8 교회사연구 제42집 신앙의 해 ( ~ )를 지냈고 순교자 124위의 시복( 諡 福 )이 다가오는 이때,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들 5위의 신앙 의 동기와 실천, 그리고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자 한다. 이들의 신앙의 동기는 각각 달랐지만, 신앙의 고백과 실천을 통 해서 신앙을 성장시켰으며, 박해와 시련을 당할 때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항구한 모습을 지녔다. 이들의 이러한 신앙의 특징은 상대주의, 물질만능 주의와 세속주의 등으로 신앙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제시할 것이다. 2. 신앙의 동기 1770년대 말과 1780년 초에 이르러 한문서학서( 漢 文 西 學 書 )에 대 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천주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신앙 운 동이 태동하였다. 이벽,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의 집안은 전통적 인 유학을 고수해 오고 있었는데, 이들은 성호( 星 湖 ) 이익( 李 瀷, 1681~ 1763)의 학통을 4) 이어받았다. 이러한 성향이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케 해 주는 실마리가 되었고,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꾸어 준 극적인 전환의 정점에는 이벽이 있었다. 그는 안정복( 安 鼎 福, 1712~1791) 순교문제 재조명 등이 발표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 시성추진위원회, 2010). 강원교회사연구소에서 광암 이벽과 포천지역 천주교 라는 주제로 2012년 3월 17일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4) 이익의 문하에 李 用 休, 李 彦 이 있었는데, 그들은 양명학과 公 安 派 의 영향을 받아 파격적 시어를 구사하며 유교적 세계관에서 탈주하였다. 남인학자들의 지향점은 17세기 중반부터 六 經 체제 긍 정과 성리학 비판, 그리고 실천 윤리의 고취였다. 즉 유학의 근본정신에 입각해 현실을 비판하는 원리주의 경향이었다. 그 경향이 학문으로의 서학에서 신념으로의 서학으로 넘어가는 단초일 것이 다. 이경구, 서학의 개념, 사유체계와 소통 대립 양상, 한국사상사학 34, 한국사상사학회, 2010, 177쪽 각주 65).

9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9 과 권철신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774년에 권철신의 스승으로 주자학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중시하던 이병휴( 李 秉 休, 1710~1776)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중용 ( 中 庸 )에서 상제( 上 帝 ), 귀신의 실체, 천명( 天 命 )의 실천 등을 강조했던 것은 유학 자체에서 윤리를 보장하는 초월적 존재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 특히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권철신이 정약전( 丁 若 銓, 1758~1816) 등과 함께했던 강학에 참여하였다. 6) 이승훈은 이벽에 대해 그 사람은 이미 우리 종교에 대한 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연구는 무익하지가 않았으니, 천주교 의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 열성은 그의 지식보다 더 했습니다. 그는 나를 가르치고 격려했는데, 우리 는 천주님을 섬기고 또 다른 사람들이 천주님을 섬기도록 서로 도왔으며 라고 7) 하였다. 그는 조선의 개종 사업을 시작하여 구세주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 세례자라는 이름으로 1784년 9월 자신의 집에서 이 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8) 5) 이벽의 중용 에 대한 생각은 정약용, 여유당전서 의 中 庸 自 箴 (2집, 권3)과 中 庸 講 義 補 (2집, 권4)에 부분적으로 전한다. 북학파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朴 齊 家 는 이벽을 경제의 선비이 자 사물의 본성을 깨우친 이로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 정유고략 ( 貞 稿 略 ) 권2, 四 悼 詩 四 首 )를 쓰기도 했다(이경구, 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푸른역사, 2013, 135쪽). 6) 차기진, 권철신 이벽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 사연구소, 2007, 27~45쪽 참조 ;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先 仲 氏 墓 誌 銘 鹿 菴 權 哲 身 墓 誌 銘 ;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300~302쪽. 7) 이승훈이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 서한, 최석우 역주,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 사연구소, 1992, 172쪽. 8) 달레, 앞의 책, 312쪽 ; 김대건 신부는 그들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이벽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는 후에 세자 요한이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큰 학자로서 참 하느님의 교리에 대하여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고 하였다(김대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184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221쪽).

10 10 교회사연구 제42집 이승훈은 외숙 이가환( 李 家 煥, 1742~1801)의 영향을 받아 서학의 천문, 역상( 曆 象 ), 특히 수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9) 그의 신앙 동기는 이벽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 즉 1783년 10월 동지사행( 冬 至 使 行 )의 서 장관( 書 狀 官 )인 부친 이동욱( 李 東 郁 )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이벽이 북경 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서양 선비로 전교하는 사람이 있다. 그대 가 가서 만나보고 신경( 信 經 ) 한 부만 구해 달라. 더불어 세례받기를 청하 면, 선교사들이 분명 그대를 매우 사랑하여 기이한 물건과 패물( 玩 好 )을 많이 얻을 것이다. 반드시 그냥 돌아오지 말게 라고 10) 하였다. 이에 그는 이벽의 권고와 수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성당을 찾아갔다. 북당 선교 사들에게 다과를 대접받고 천주실의 ( 天 主 實 義 ) 수질( 數 秩 ), 진도자 증 ( 眞 道 自 證 ), 성세추요 ( 盛 世 芻 ), 기하원본 ( 幾 何 原 本 ), 수리정 온 ( 數 理 精 蘊 ) 등과 시원경( 視 遠 境 ), 지평표( 地 平 表 ) 등을 받았다. 11) 당 시 예수회 선교사 방타봉(Ventavon) 신부는 27세의 이승훈은 박학하 여, 그 서적들을 열심히 읽고 거기서 진리를 발견하고 교리를 깊이 연구 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고 12) 하였다. 1784년 2월 무렵 북 당 성당에서 그라몽(Grammont, 梁 棟 材 ) 신부는 천주님께서 그를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예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신앙의 문을 처음으로 9)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 활동과 정치적 입지,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39쪽. 10) 황사영, 백서 44행 ; 若 鍾 供 原 初 李 蘖 聞 有 西 洋 學 裝 送 李 承 薰 隨 其 父 東 郁 貢 使 之 行 入 往 洋 人 所 居 之 堂 與 洋 人 結 識 購 得 洋 書 以 歸 ( 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0월 27일 경오). 11) 西 洋 人 卽 將 天 主 實 義 數 秩 分 置 各 人 前 有 若 茶 飯 之 接 待 渠 初 不 展 看 納 之 歸 裝 且 語 及 曆 象 則 西 洋 人 又 以 幾 何 原 本, 數 理 精 蘊 等 書 及 視 遠 鏡 地 平 表 等 物 贈 爲 行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활동과 정치적 입지, 40쪽. 12) 방타봉 신부의 1784년 11월 25일자 서한 (최석우, 앞의 글, 11쪽) ; 페레올 주교는 곧은 마음 을 가졌고 특히 천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명민한 이성으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쉽게 인정하여 천주교를 믿기로 했습니다 고 하였다( 페레올 주교가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1844년 1월 4일자 서한,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201쪽).

11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1 열었으므로 그에게 성 베드로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고 13) 하면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귀국한 그는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 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 었다. 14) 이벽은 1784년 3월 이승훈이 귀국하면서 갖고 온 책들을 읽어 교리 를 터득한 후, 가까운 친구들을 설득하여 교화시켰다. 15) 그해 9월 감호 ( 鑑 湖 )에 사는 그는 사류( 士 類 )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에 사는 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며 그의 집을 찾아가 10여 일을 묵으며 교리를 전하였다. 이에 그의 동생 권일신이 입교하여 열심히 믿기 시작하였다. 그는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성인을 주보 ( 主 保 )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16) 그는 대저 그 학술은 천주( 天 主 ) 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일을 삼가는 의리가 고서 ( 古 書 )의 어두컴컴한 새벽 남모르는 곳이 더욱 드러나니 엄히 공경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라 는 가르침과 은연중 합치되기에 그때 과연 열람하였습 13) 그라몽 신부의 1790년 6월 23일자 서한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활 동, 12쪽). 14)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이승훈 최창현 대질 ; 矣 身 與 丁 若 銓 若 鏞 權 日 身 輩 相 會 於 李 檗 家 而 果 有 代 洗 等 事 依 倣 其 書 而 爲 之 (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8일 이승훈 공 초) ; 구베아 주교는 그는 천주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의 동포들의 전도사가 되어, 몇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영세를 주었습니다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교회사연구 8, 182쪽 ; 而 李 承 薰 稱 號 晩 泉 者 自 爲 神 父 與 矣 兄 弟 互 相 往 來 製 給 矣 兄 弟 別 號 而 矣 長 兄 範 禹 爲 道 摸 次 兄 履 禹 爲 發 羅 所 矣 身 則 馬 頭 ( 邪 學 懲 義, 正 法 罪 人 秩, 김현우조). 15) 황사영, 백서 44행 ; 김대건 신부는 이리하여 1784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과 관인들이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여기에 매혹되어 그리스도께 가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선조로부터 이 어받은 오류를 떠나 참 하느님에게로 전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 하였다(김대건, 앞의 글, 223쪽). 16) 始 李 檗 首 宣 西 敎 從 者 旣 衆 曰 鑒 湖 士 類 之 望 鑒 湖 從 而 靡 不 從 矣 遂 駕 至 鑒 湖 旬 而 後 反 於 是 公 之 弟 日 身 熱 心 從 檗 公 作 虞 祭 義 一 編 以 明 祭 祀 之 義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鹿 菴 權 哲 身 墓 誌 銘 ).

12 12 교회사연구 제42집 니다 고 17) 하였다. 여기서 천주를 공경한다는 것은 서경 ( 書 經 ) 상서 태갑 ( 商 書 太 甲 ) 상편( 上 篇 )에 나오는 임금이 덕을 밝히려고 새벽부터 일 어나서 노력했다는 뜻과 통한다고 밝힌 것이다. 즉 그는 서경 에 나오는 상제천( 上 帝 天 )에 대한 관념을 원용함으로써 천주에 대한 공경을 논하는 천주교를 동양고래의 사상과도 합치되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18) 권철신은 1784년 9월 자신의 집에 온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하여 들었을 때 믿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받아들일 결심을 하였다. 그는 신앙 동기에 대해 제 동생이 인천에서 저에게 편지 를 보내 말하기를, 그 학문에 대해 처음에 들었을 때는 허황하여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 책을 얻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주재하는 이를 흠숭한다는 말과 생( 生 ), 각( 覺 ), 영( 靈 ) 등 삼혼설( 三 魂 說 ), 화( 火 ), 기( 氣 ), 수( 水 ), 토( 土 )의 사행설( 四 行 說 )은 참으로 지극한 이치가 있어서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책을 깊이 이해한 뒤에 공격 해야지, 뭇사람을 따라 대충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 로 저도 보았습니다 고 19) 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적 신앙 이해의 면모를 드러내 주고 있고, 보유론( 補 儒 論 )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이해하며 그 신앙 의 타당성을 말했던 것이다. 20) 이를 대학자로서 세례를 받은 신자라는 사 실을 더하여 생각해 보면, 그런 단순한 서술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숨어있 는 핵심적인 진술, 바로 영과 진리로써 주재자를 흠숭해야 한다는 것, 그 17) 大 抵 其 學 以 天 主 爲 重 而 其 寅 畏 謹 事 之 義 暗 合 於 古 書 昧 爽 丕 顯 嚴 恭 寅 畏 之 訓 故 其 時 果 爲 看 閱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18)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116쪽. 19) 矣 弟 自 仁 川 抵 書 矣 身 斡 其 學 之 初 頭 所 聞 盧 不 可 信 矣 其 後 得 看 其 書 則 其 中 欽 崇 主 宰 之 說 生 覺 靈 三 魂 之 說 火 氣 水 土 四 行 之 說 誠 有 至 理 不 可 誣 者 須 熟 看 此 書 然 後 攻 之 不 可 隨 衆 泛 斥 故 矣 身 亦 看 此 書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20)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16쪽.

13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3 래서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다 라는 신앙고백 으로 볼 수 있다. 21) 이벽의 방문과 동생의 권유로 입교한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의 한 분인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를 주보로 하여 세례를 받 았다. 이때 실학자 안정복은 1784년 그에게 보낸 셋째 서한에서 지금 또 듣자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지금 세상에 사문이 기대를 걸고 친구들이 믿고 소중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후배들의 종주가 될 사람이 공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 異 學 )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 라고 22) 하였다. 유학자였던 권철신이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탈주자학 적 학풍에 기인한다. 그는 공자( 孔 子 ), 맹자( 孟 子 ), 순자( 荀 子 ) 사상의 중 심인 선진유학( 先 秦 儒 學 )을 학문의 궁극적인 표준으로 삼아 주자학에 구 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유롭게 해석했고,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도덕적 실천 공부를 극단적으로 강화해 나갔다. 23) 또한 서명( 西 銘 )과 서학 사상과의 연관성을 볼 수 있는 데, 주어사 강학 때에 정약전, 김원성( 金 源 星 ), 권상학( 權 相 學 ), 이총억( 李 寵 億 ) 등과 함께 해 질 녘에는 서명을 외었다. 24) 정약용은 이 서명의 실천 21)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0, 129~134쪽. 22) 안정복은 권철신 이가환 정약전 이승훈 이벽과 이기양의 아들인 이총억 이방억 등이 천주교 교리를 학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안정복, 覆 稿 권10, 與 權 旣 明 弟 三 書 兼 呈 士 興, 갑진 12월 ; 이만채, 벽위편 권2, 安 順 菴 乙 巳 日 記 (차기진, 권철신 이벽 이승훈 가문과 천주교 수용, 42~43쪽, 각주 53) 재인용). 23)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2010, 101~103쪽. 24) 嘗 於 冬 月 寓 居 走 魚 寺 講 學 會 者 金 源 星 權 相 學 李 寵 億 等 數 人 鹿 菴 自 授 規 程 日 入 誦 西 銘 莊 嚴 恪 恭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先 仲 氏 墓 誌 銘 ) ; 영조는 장횡거가 西 銘 에서 말한 백성은 나 와 한 핏줄 이란 民 吾 同 胞 를 즉위 초에 諸 臣 於 國 事 或 不 能 視 若 自 己 事 則 何 能 有 爲 也 張 橫 渠 曰 民 吾 同 胞 物 吾 與 也 爲 國 之 道 要 不 出 此 라고( 승정원일기 574책, 영조 즉위년 9월 26일조) 강 조하였고, 영조 49년의 소회에서도 喬 木 世 臣 心 豈 木 也 腸 豈 石 歟 莫 云 只 云 說 弊 若 聞 救 弊 予 則

14 14 교회사연구 제42집 을 학문의 기본이라고 하면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뜻을 봉양하며, 친구 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 火 氣 )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 芝 蘭 )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 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와 전원( 田 園 ),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 하여 내 것 네 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 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 게까지 돌려주었다 고 25) 하였다. 이를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백성은 나 와 한 핏줄 의 정신을 집안에서 실사구시( 實 事 求 是 )로 독실하게 실천했다 는 뜻이다. 그러나 서학을 공부한 대학자의 실천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복 음을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 정신 그대로 받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에 대 한 기록이나 마찬가지이다. 26) 정약종은 그의 형제들과 남인 계열의 다른 인물들보다는 늦게 입교하 였다. 그는 과거 시험에 뜻이 없었고 선도( 仙 道 )를 배워서 불로장생( 不 老 長 生 )하고자 했으며, 천지개벽설( 天 地 開 闢 說 )을 믿었다. 그러나 개벽이 되 면 신선도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생각 끝에 신선설 및 개벽설 자체에도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를 통해 지상천국적 현세나 미래 사회에 대한 갈망을 천주교 신앙 안 曰 體 君 體 先 貞 白 一 心 常 誦 張 子 西 銘 也 夫 라고 西 銘 정신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강조했다(박 광용, 조선의 18세기, 국가 운영 틀의 혁신, 정조와 18세기, 역사학회 편, 푸른역사, 2013, 67쪽). 25) 정약용, 앞의 책, 鹿 菴 權 哲 身 墓 誌 銘. 26)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1~132쪽.

15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5 에서 용해시켜 나가게 되었다. 즉 도교( 道 敎 ) 신앙 내지는 후천개벽설에 대한 비판과 청산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그가 초기 교회의 입교자들과 다른 측면을 찾을 수 있다. 유학보다 는 도교가 종교적 성격이 더욱 강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는 초기 입 교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보다 강렬한 종교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다. 27) 그는 1786년 3월 중형( 仲 兄 )인 정약전에게서 천주교에 관하여 들 었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회의가 아우구 스티노(Augustino, 354~430) 성인의 망설임과 비슷한 점을 생각하면서, 이 성인을 주보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28) 세례받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가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29) 구베아(Gouvea, 1751~1808) 주교 가 표현한 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그렇게 허약한 도구를 사용 하여, 세례에 필요한 것을 간신히 배운 그 젊은이가 그의 동포들의 사도와 설교자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힘을 지니게 하는 전능 의 큰 기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에 복음이 전파된 기원과 그 발 전은 분명히 하느님이 하신 일이었다 라고 30) 하였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유로이 응답한 이가 바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 꾼 이벽이었다. 그의 권유대로 이승훈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한국 교회 의 반석이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의 전교로 인해 신앙을 받아들인 권일신 27) 황사영, 백서 35행 ; 달레, 앞의 책, 440~445쪽 ; 조광,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 사, 2010, 391~393쪽. 28)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 供 曰 若 鍾 之 神 父 李 承 薰 代 父 權 日 身 而 神 父 者 領 洗 之 謂 也 代 父 者 敎 授 之 稱 也 ( 辛 酉 邪 獄 推 案, 1801년 2월 13일 최창현 공 초) ; 달레, 앞의 책, 441쪽. 2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11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25쪽. 30) 구베아 주교의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203쪽.

16 16 교회사연구 제42집 과 강렬한 종교적 지향을 갖고 있다가 개종한 정약종 등 초기 교회 지도자 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자유로이 응답하여 세례 를 받았다. 초기 지도자들의 신앙 동기는 다양했다. 스스로 혹은 권유에 의해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를 위해서 완전하고 성숙한 신앙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신앙의 출발이 필요한 것이다. 31) 이렇듯 초기 교회는 사 제 없이 평신도들의 열정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힘의 원동력은 세례성사 였던 것이다. 32) 세례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교회의 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구베아 주교는 그 사람들 중에서 다시 전도사들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이승훈) 베드로보다 더 열심해져서 머지않아 천 명이 넘은 남녀 동포들이 세례를 받고, 새 조선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 33) 하였다. 이어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 베드로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 베드 로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된 신입 교우들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리하 여 5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신자의 수가 약 4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고 34) 하였다. 이렇게 세례를 통해 거룩한 교회가 널리 확산된 것이다. 3. 신앙의 실천 이벽은 1784년 4월 15일 누이( 丁 若 鉉 의 첫 부인)의 기제( 忌 祭 )를 지 낸 후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마재에서 서울로 가는 배를 타고 오면서 그 31) 가톨릭교회 교리서 1253항. 32)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 가톨릭신문, 2013년 8월 11일자 21면. 33) 이승훈이 1789년 말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2쪽 ;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앞의 책, 182쪽. 34) 구베아 주교가 Sant Martino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앞의 책, 189쪽.

17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7 들에게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에 대한 이치를 설명하였 다. 이때 정약용은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마치 하한( 河 漢 )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그 후 서울로 찾아온 그들에게 천주실의, 칠극 등 을 보여주었는데, 정약용은 1787년 이후 4~5년간 천주교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 35) 1784년에서 1785년 무렵에 이가환에게서 한문서학서들은 식견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어찌 생사의 도리를 깨달아 내세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논리적으로 대답하 자, 그가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가환에게 천학초함 ( 天 學 初 函 ) 과 성년광익 ( 聖 年 廣 益 )을 빌려주었는데, 이가환은 정독한 후 이것은 과연 진리요 정도로다 라고 하면서, 비밀리에 그와 왕래하였다. 36) 이 사 실은 안정복이 권철신에게 요즈음에 정조( 庭 藻, 이가환), 자술( 子 述, 이 승훈), 덕조( 德 操, 이벽) 등이 서로 긴밀히 언약하고 신학( 新 學 )의 학설을 익힌다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네 라고 37)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어 그는 찾아온 실학자 이기양( 李 基 讓, 1744~1802)에게 천지의 존재 이유, 세상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의 아름다운 질서, 4원소( 元 素 )의 조화와 하느님의 섭리의 다양한 원리, 다양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영혼에 대한 교리, 상선벌악 등 한마디로 견고하고 공략할 수 없는 원리들에 기댄 천주 교의 진리와 명확성의 명백한 증거를 갖고 설명하였다. 이에 이기양은 토 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38) 35) 정약용, 앞의 책, 先 仲 氏 墓 誌 銘 附 見 閒 話 條 ; 甲 辰 下 從 李 檗 舟 下 斗 尾 峽 始 聞 西 敎 見 一 卷 書 자찬묘지명 ( 集 中 本 ) ; 旣 上 庠 從 李 檗 游 見 西 敎 見 西 書 丁 未 以 後 四 五 年 頗 傾 心 焉 자찬묘지 명 ( 壙 中 本 ). 36) 황사영, 백서 47~48행. 37) 안정복, 覆 稿 권10, 與 權 旣 明 弟 三 書 兼 呈 士 興, 갑진 12월. 38) St.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é(1860), vol. 4, M.E.P, pp. 5~17 (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3쪽).

18 18 교회사연구 제42집 명례방에 사는 역관 출신 김범우( 金 範 禹, 토마스)의 집에서도 공동체 모임이 이루어졌다. 이벽은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전했고, 그는 입교 후 온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 계급에서 여러 사람을 가르쳐 입교시 켰다. 39) 이벽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공동체 기도 모임에 대해 이벽이 라는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 있 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 라고 하면서 책을 옆에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여 깨우쳐 주는 것이 유가의 사제 간 예법에 비해 더욱 엄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모이는데 약 두어 달이 지나니 사대부와 중인으로 모이는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추조의 금리가 그 모임이 술 먹고 노름하는 것인가 의심되어 들어가 보니,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해 괴하고 이상스러웠다 고 40) 하였다. 이렇듯 그는 정약전 형제와 권철신 형제를 찾아가서 전교하고 이가환 등 찾아오는 이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켰고, 신앙을 적극 전파하였으며, 거룩한 전례에 주 도적으로 참여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래서 박해자들은 그를 사당( 邪 黨 )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괴( 巨 魁 )가 되는 자 41) 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승훈이 저술한 만천유고 ( 蔓 川 遺 稿 )에 수록된 천주공경 가 ( 天 主 恭 敬 歌 ), 한문본 성교요지 ( 聖 敎 要 旨, 협주 첨부본)와 임신년 (1932년)에 뎡 아오스딩 이란 이름으로 필사(전사)된 한글본 셩교요지 등은 42) 이벽의 저술로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저술되거나 전사된 39) 달레, 앞의 책, 318쪽. 40) 이만채, 앞의 책, 乙 巳 秋 曹 摘 發, 進 士 李 龍 舒 等 通 文 回 文. 당시 정약종도 참석했다고 했는데, 그는 1786년에 정약전으로부터 천주교를 들었기 때문에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41) 正 言 李 毅 采 疏 略 曰 噫 彼 李 檗 者 最 是 邪 黨 中 渠 魁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3월 11일 정해) ; 執 義 柳 疏 略 曰 若 論 邪 黨 之 渠 巨 魁 則 李 檗 是 已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3월 15일 신묘). 42) 성교요지, 하성래 이성배 공역, 가톨릭출판사, 1976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가톨 릭출판사, 1979 ;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1979(수정증보판, 2001) ; 이이화,

19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19 자료라는 측면에서, 또 이 자료들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점 등 때문에 그의 저술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43) 이승훈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었다. 그는 교 회에서 물러남과 다시 나옴을 거듭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신앙에 대한 입장을 여러 가지 형태로 표명했다. 44)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했 던 45) 그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 乙 巳 秋 曹 摘 發 )사건 시 부친이 천주교 서적을 불사르는 동시에 칠언율시( 七 言 律 詩 ) 두 편을 짓자, 벽이문 ( 闢 異 文 )을 지어 형조판서 김화진( 金 華 鎭, 1728~1803)에게 보내었으며, 벽 이시( 闢 異 詩 )를 지었다. 46) 그런데 이는 일시적으로 신앙이 흔들렸던 것에 불과하였다. 즉 그는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러는 동안 박 이승훈 관계문헌의 검토 만천유고 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 김동원 편저, 영성의 길 광암 이벽의 성교요지, 하상, ) 차기진은 천주공경가 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첫째, 잡철의 성격을 지닌 만천유고 의 저자(편자)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 천주공경가 에 첨부되어 있는 부기, 즉 기해년(1779) 섣달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이 지은 가사 라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문본 성교요지 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첨부되어 있는 부기, 즉 천학초함 을 읽고 광암 이벽이 작성하여 주를 붙인 것이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는 성교요지 에 있는 구약의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실제로 구약 의 내용이 조선에 알려진 시기는 훨씬 후대로 추정되고 있다 고 하였다(차기진, 광암 이벽 관련 자료의 종합적 검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184~186쪽). 44)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9~ 80쪽. 그는 박해와 신앙고백의 거듭된 엇갈림에 대해 7개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했다. 1) 교회 창설 전후기(1783년 말~1785년 초) 신앙심과 교회 활동, 2) 최초의 박해 전후기(1785년 봄~1786년 여름) 최초의 배교 선언과 세례성사의 지속적 수행, 3) 반촌 강습회 전후기(1786년 후반~1788년 후반) 가성직제도의 실시와 심적 갈등, 4) 2차례 밀사 파견 전후기(1789~1790년) 회개와 신앙고백, 퇴거의 모색, 5) 진산사건 전후기(1791~1794년) 두 번째 배교 선언과 신자로 서의 관직 생활, 6) 예산 귀양살이 전후기(1795~1796년 봄) 세 번째 배교와 성리학자로의 회귀 표명, 7) 신유박해 전후기(1796년 여름~1801년 2월 26일) 죽음을 앞둔 당파적 의리와 死 信 의 향방 등이다. 45) 李 承 薰 諺 飜 之 事 曾 所 目 擊 (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1일 황사영 공초). 46)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 벽위문에서 천당지옥설 과 위 천주횡행설 을 비판했고, 天 彛 地 紀 限 西 東 暮 堅 虹 橋 靄 中 一 炷 心 香 書 共 火 遙 瞻 潮 廟 祭 文 公 이라는 벽이시 를 지었다(이기경, 闢 衛 編, 서광사, 1978, 84~85쪽).

20 20 교회사연구 제42집 해가 일어나서 우리 가족은 어느 가족보다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나의 형제들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세를 중단시키지 않기 위해 다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대신하게 하였습 니다 라고 47)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권일신과 함께 교회를 이끌었는데, 정약용은 서양의 호인 베드로를 칭하고 다녔다 고 하였고, 최창현은 신부로서 활동하였다 고 하였으며, 정약종에게 세례를 베풀기 도 하였다. 48) 이렇게 그는 교회의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승훈도 여러 차례 을사년(1785) 이후에는 배척했다고 진술했지만, 과연 을사년 이후에 한 번 이 천주학을 믿었으며, 몇 년 동안 단념할 수 없었 다 고 49) 고백하였다. 그래서 황사영은 그 후 그는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회를 봉행 하였습니다 고 50) 하였다. 그가 외형적으로 배교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 고, 이는 외척내수( 外 斥 內 守 ) 내지 외배내신( 外 背 內 信 )의 이중적 모습으 로 자신의 내면적 천주 신앙을 지킨 것이다. 51) 1786년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심과 선교열을 북돋우려 가( 假 )성무집행제도 52) 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1787년 이 제도가 47) 이승훈이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 서한, 교회사연구 8, 172쪽. 48) 달레, 앞의 책, 322~328쪽 ; 問 曰 李 承 薰 招 內 乙 巳 以 後 改 革 云 而 以 矣 供 觀 之 則 承 薰 之 稱 西 洋 號 與 矣 身 同 遊 乃 在 乙 巳 之 後 承 薰 豈 非 誣 罔 乎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정 약용 공초) ; 供 曰 若 鍾 旣 受 領 洗 於 李 承 薰 則 其 爲 神 父 之 狀 已 告 於 前 招 而 矣 身 亦 嘗 以 承 薰 爲 神 父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6일 최창현 공초). 49) 矣 身 果 於 乙 巳 以 後 一 審 爲 此 術 而 數 年 未 能 斷 念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이승훈 공초). 50) 隨 後 厥 父 嚴 禁 惡 友 亂 謗 承 薰 猶 忍 耐 奉 敎 (황사영, 백서 44행~45행). 51)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49쪽. 52) 이 제도를 흔히 가성직제도 라고 하였다. 그런데 황사영은 백서 에서 妄 行 聖 事 (48행)라고, 달레는 교계제도 (앞의 책, 323쪽)라고, 노용필은 신자교계제도 (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 한 국사학, 2008, 237쪽)라고 하였으며, 원재연은 모방성직제도 (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 고백, 36쪽), 조광은 가성무집행제도 (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325쪽)라고 하였다.

21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1 잘못된 일임을 알고 중단하였다. 그리고 1789년 북경에 밀사 윤유일( 尹 有 一, 바오로)을 파견하면서 보낸 서한에서 이 제도의 실시로 인한 잘못 때 문에 이승훈은 깊은 죄의식에서 나온 절박한 구원 의식을 드러냈다. 즉 나는 완전히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고, 또 자진하여 마귀의 종이 되 어, 성사들을 집전하는 일에 관여하기까지 엄청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 것은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영혼까지 잃어버리게 하였으므로 나의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 53) 고 하였다. 그는 1787년 겨울 반촌 ( 泮 村 ) 김석태( 金 石 太 )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기경( 李 基 慶 )은 정 미년 10월 무렵부터는 승훈의 무리들이 다시 천학( 天 學 )을 숭상한다는 말 이 귀에 시끄러울 정도였습니다 고 54) 하였다. 1790년 4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은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 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결정하였다. 55) 그해 7월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보 내며 쓴 서한에서 결국 우리를 직접 가르치고 우리에게 보다 효력 있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제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서야 떨어진 깊은 구렁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해 낼 수 있겠습니까 라고 56)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밀사의 파견과 이승 훈의 서한은 북경 교회뿐만 아니라 교황청까지 크게 감동시켰다. 구베아 주교의 요청에 따라 비오(Pius) 6세(1717~1799) 교황은 1792년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교회를 특별히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위임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교황청과도 간접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또한 그것 은 이미 5년간에 4천 명의 신자를 갖게 된 조선 교회 발전의 기반을 더욱 53) 이승훈이 1789년 말에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1쪽. 54) 至 丁 未 十 月 間 承 薰 輩 復 崇 天 學 之 說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3일 갑신). 55) 구베아 주교의 1790년 10월 6일자 서한, 앞의 책, 182~183쪽 ; 有 一 懇 請 於 主 敎 以 邀 出 神 父 爲 約 而 庚 戌 春 還 來 之 後 與 承 薰 樂 敏 等 日 夜 謀 議 專 以 請 來 神 父 爲 計 矣 ( 邪 學 懲 義, 移 還 送 秩, 유관검조). 56) 이승훈이 1790년 7월 11일에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178쪽.

22 22 교회사연구 제42집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57) 1791년 11월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평택 현감이던 이승훈은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때 홍낙안( 洪 樂 安, 1752~?)은 채제공( 蔡 濟 恭, 1720~ 1799)에게 장서 ( 長 書 )를 보내 윤지충과 권상연( 權 尙 然, 야고보)을 사형 에 처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 사교의 무리를 일망타진할 것을 촉구했다. 형조 신문에서 이승훈은 구서( 購 書 ), 간책( 刊 冊 ), 반회( 泮 會 )를 모두 모함이며, 그러한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삭직( 削 職 )을 당했 다. 58) 정약종도 신해 이후에는 이승훈이 서학에 전심하지 아니했으므로 그를 심복하지 않았다 고 했고,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올 당시 지황( 池 璜, 사바)은 이승훈의 서한을 휴대하지 않았는데, 대개 그때 이승훈은 이 미 반교를 하고 있었다 고 59) 하였다. 그럼에도 미약하게나마 교회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즉 홍익만( 洪 翼 萬 )은 저는 갑인년(1794)에 이승훈에 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 60) 하였다. 이에 대해 황사영은 신해년에 체포 되어 배교하고는 성교회를 비방하는 글을 여러 번 썼으나, 그것은 모두 자기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 61) 하였다. 1795년 4월 주문모( 周 文 謨, 야고보) 신부 실포( 失 捕 ) 사건이 일어나 자, 그해 7월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을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승훈은 예산으로 귀양을 가서 거기서 사학 가운데서 가장 요상하 고 도리에 어그러진 말들을 세 단락으로 나누어 깨부수고 미혹됨을 깨우 57)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 활동, 22쪽. 58)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14일 이승훈 공초. 59) 辛 亥 以 後 則 承 薰 不 爲 傳 心 此 學 故 矣 身 不 爲 心 服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3일 정약종 공초) ; 至 矣 身 來 時 池 璜 不 待 李 承 薰 之 書 字 蓋 其 時 彼 已 叛 敎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基 讓 等 推 案,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공초). 60) 至 於 甲 寅 年 間 又 見 中 國 出 來 冊 子 故 種 種 講 論 於 家 煥 承 薰 若 鍾 嗣 永 等 家 而 受 邪 號 於 承 薰 稱 以 安 堂 亦 受 領 洗 之 法 矣 (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洪 翼 萬 ). 61) 황사영, 백서 45행.

23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3 치는 글 ( 惑 文 )을 지어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62) 이처럼 1785년, 1791년, 1795년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이승훈은 그 사건의 관여자로 지목되었는데, 그의 한문서학서 구래( 購 來 )가 천주 교 관계 사건의 원인 내지는 원죄처럼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63) 그 는 1785년 박해에 벽이문 을 짓고, 1791년 박해에 삭직을 당하였으며, 1795년 박해에 귀양가서 유혹문 을 지었다. 즉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마다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거나 공동체를 보호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신앙을 배척했다. 그러나 박해가 잠잠해지면 다시 교회로 돌아와 신앙생 활을 하면서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세례를 주고, 가성무집행제도를 만들 어 활동하며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등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것처럼 세상의 박해 와 하느님의 위로 가운데 있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64) 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신앙의 동태에 대해 을묘년에 신부님이 이 나라에 왔다는 말을 듣 고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성사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얼마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자 두려워 다시 움츠렸습니다 고 65) 하였다. 권일신은 장인 안정복에게 천주교는 참으로 진실한 학문이고 천하의 큰 근본과 통달한 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거듭 권유하기도 하였 다. 66) 1785년 아들 권상문( 權 相 問, 세바스티아노)과 함께 김범우의 집에 62) 일성록, 정조 19년 7월 26일 을해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유혹문 ( 惑 文 )의 내용은 降 生 救 贖, 天 堂 地 獄 說, 그리고 위천주횡행설( 爲 天 主 橫 行 說 )을 배격하였을 것이다(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78~80쪽). 63)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72쪽. 6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새 천년기 8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14쪽. 65) 황사영, 백서 45행. 66) 向 來 省 吾 權 日 身 之 字 力 勸 此 學 余 聞 若 過 耳 之 風 其 後 又 移 書 勸 之 謂 此 學 眞 眞 實 實 天 下 之 大 本 達 道 專 在 於 是 (이만채, 앞의 책, 安 順 菴 乙 巳 日 記, 答 李 士 興 乙 巳 春 ).

24 24 교회사연구 제42집 서 있었던 신앙공동체 모임에도 참석하였고, 사건이 일어나자 형조에 아 들, 이윤하( 李 潤 夏 ), 이총억, 정섭( 鄭 涉 ) 등을 데리고 가서 압수한 서적과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요구였다. 67) 이 사건 이후 그는 조동섬( 趙 東 暹, 유스 티노)과 함께 용문산에 있는 절에 가서 8일 동안 피정을 하였다. 68) 1786년 봄 가성무집행제도하에서 신부로 활동하다가 69) 1787년 봄 성무 활동을 중단하고 윤유일을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구베 아 주교의 조상 제사 금지령 70) 을 담은 사목 서한을 받고 이승훈 등 일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책자 간행에도 참여했고, 71) 1791년 정광수( 鄭 光 受, 바르나바)에게 교리를 가 르쳤다. 72) 충주 공동체를 세웠던 이기연( 李 箕 延 )의 결안에는 권일신과 67) 비변사는 權 日 身 之 溺 於 邪 學 卽 親 知 所 共 聞 知 曾 於 乙 巳 年 自 秋 曹 推 金 姓 中 人 之 際 日 身 以 士 夫 之 子 自 入 法 曹 之 庭 願 與 金 姓 同 被 其 罪 卽 此 一 款 爲 渠 斷 案, 故 親 知 皆 與 之 相 絶 이라고 하였고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5일 병자), 그는 則 乙 巳 年 間 中 人 忘 其 名 金 姓 人 以 尊 奉 西 學 事 被 訊 推 而 渠 與 金 哥 爲 相 親 之 間 伊 時 以 渠 與 金 哥 同 看 天 主 實 義 之 故 頗 爲 衆 口 之 指 目 厭 然 自 諱 有 所 未 安 果 挺 身 自 服 於 曹 庭 要 爲 卞 破 解 紛 之 計 라고 하였다(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8) 달레, 앞의 책, 322쪽. 69) 이승훈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1789년 말에 보낸 서한,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73쪽 ; 황사영, 백서 48행 ; 김대건 신부는 그 당시 이승훈, 권일신, 이존창 즉 이단 원, 최창현, 유항검 등이 아주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사제들을 선출하고 세례, 견진, 고해 등 온갖 성사들을 집전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들은 북경 주교님은 앞으 로는 그 주교와 사제들이 더 이상 성사를 집행하지 말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명령에 그대 로 순종하였고 그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김대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223~227쪽). 70) 중국 의례에 대한 찬 반 논쟁은 1715년 3월 19일 글레멘스 11세의 칙서 Ex illa die 를 통해 중국 의례에 대한 7가지 금지령이 선포되었고, 1742년 7월 11일 베네딕도 14세는 Ex quo singulari 를 선포하여 글레멘스 11세의 칙서를 재천명하였다. 1939년 12월 8일 교황청은 중국의례에 관한 훈령 을 통해 조상 제사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허용은 아니라도 상당히 관용적 인 조치를 취하였고, 1958년 한국 주교단은 한국교회 공동 지도서 에서 제 상례에 관하여 허용 및 금지 의식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허용 의식은 시체나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의식은 제사에 있어서 축문( 祝 文 ), 합문( 闔 門 ), 장례에 있어서 고복( 皐 復 ), 사자밥, 반함( 飯 含 ) 등이다. 71) 罪 人 權 日 身 家 所 藏 邪 書 使 之 一 一 搜 來 矣 回 告 內 以 爲 所 有 書 冊 無 遺 搜 閱 而 別 無 關 於 邪 學 冊 子 只 有 辛 亥 瞻 禮 爲 名 長 廣 數 寸 一 冊 書 帖 冊 後 面 列 錄 邪 學 諸 書 名 目 一 冊 及 邪 書 目 錄 謄 書 紙 一 片 ( 승정원 일기, 정조 15년 11월 12일 계미). 72) 辛 亥 年 始 學 邪 書 於 日 身 處 受 號 巴 爾 納 (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鄭 光 受 ).

25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5 연결되어 사학에 깊이 홀렸다. 집안의 제사에 참석지 않았으며, 집안에서 부터 가까운 동네에 이르기까지 남녀들을 속이고 꾀어내어서 한 고을을 미혹시켰다.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즐겨 사학의 괴수가 되었다 고 73) 하였다. 그는 최창현, 이존창( 李 存 昌, 루도비코), 유항검 등과 더불어 신자 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 열성을 배가하던 중, 1791년 11월 3일 교주( 敎 主 )로 지목을 받아 체포되었다. 총회장 최창현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르는 사람이 권일신, 정 약종, 이존창 이고, 74) 정약전도 가장 존경하여 믿은 자는 권일신 이 며, 75) 이존창도 자신과 최필공과 권일신 을 사학의 괴수로 지목하였 다. 76) 이처럼 교회 지도자로서 활동했던 그는 신앙을 적극적으로 전파했 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해지자 책임을 지려고 했 을 정도로 공동체를 보호하려고 했고, 구베아 주교의 가성무집행제도 금 지령에 따라 교도권에 순명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으로 교회 내에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권철신이 신앙을 받아들이자 온 가족이 믿고 따랐고, 77) 그는 양근 일대에 살던 이들에게도 전하였다. 78) 신유박해에 그에게 천주교를 배운 73)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各 道 正 法 罪 人 秩, 結 案 招 締 結 日 身 沈 惑 邪 學 不 參 家 祭 先 自 家 內 以 至 隣 里 誘 男 女 誤 一 邑 自 作 窩 主 甘 心 邪 魁 眞 贓 已 露 情 踪 難 掩 究 其 罪 狀 萬 戮 猶 輕 云 云 辛 酉 十 二 月 正 法. 74) 矣 身 最 所 尊 仰 者 則 權 日 身 丁 若 鍾 李 存 昌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최창 현 공초). 75) 其 時 尊 信 者 卽 權 日 身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4일 정약전 공초). 76) 京 中 崔 必 恭 爲 魁 湖 中 則 矣 身 未 悟 之 前 得 魁 萃 之 名 楊 根 則 權 日 身 爲 魁 首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7일 이존창 공초). 77) 황사영, 백서 11~12행 ; 鹿 菴 之 弟 日 身 首 離 刑 禍 死 於 壬 子 之 春 盡 室 皆 被 指 目 鹿 菴 不 能 禁 (정 약용, 앞의 책, 녹암권철신 묘지명 ) ; 경기감사 이익운은 日 身 罪 斃 之 後 渠 之 同 黨 尙 不 知 改 依 舊 爛 漫 往 來 不 絶 則 權 哲 身 之 全 家 稔 惡 不 待 輸 款 而 皎 然 矣 라고 하였다( 순조실록 권2, 순조 원년 2월 21일 정묘). 78) 심문관들이 到 今 陽 根 一 境 無 非 邪 學 是 遣 問 其 所 從 來 則 皆 自 矣 身 之 家 是 如 乎 矣 又 況 所 謂 矣 身

26 26 교회사연구 제42집 죄로 양근 조응대( 趙 應 大 )는 강진으로, 윤지겸( 尹 持 謙 )은 진해로, 윤학겸 ( 尹 學 謙 )은 사천으로, 며느리 숙혜( 淑 惠 )는 순천으로, 행랑에 살던 순덕( 順 德 )은 칠원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회장 강완숙( 姜 完 淑 )의 서찰을 받기도 하였다. 79)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과 친인척들이 앞장서서 천주교를 수용 하여 지방 각지에 신앙공동체 설립을 주도하였다. 즉 광주( 廣 州 ) 공동체의 정약전 형제들은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여주 공동체의 김건순( 金 健 淳, 요사팟)은 여러 차례 찾아와서 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강생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며, 내포의 이존창은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그의 문하로 옮겼다. 포천 공동체의 홍교만( 洪 敎 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 의 고종사촌이고, 충주의 이기연, 권상익( 權 相 益 ), 이재섭( 李 載 燮 ) 등은 그 의 사돈, 조카, 사위이다. 80) 특히 충주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 및 양근, 광주 등의 지역과 밀접히 연결된 곳이었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 하여 양근의 권일신 일가는 충주를 통혼권( 通 婚 圈 )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 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 관계를 통하여 충주에 천주교가 전해졌던 것이 다. 81) 그리고 호남의 유항검( 柳 恒 儉, 아우구스티노)은 천주교를 연구하려 고 찾아오기도 하였고, 진산의 윤지충( 尹 持 忠, 바오로)은 정약전을 통해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82) 輩 敎 友 皆 指 矣 身 爲 鄕 中 之 窩 窟 矣 라고 물었다(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79) 역주 사학징의 1, 조광 역주, 한국순교자현양회, 2001, 262~264쪽 ; 矣 身 常 書 札 往 復 處 則 丁 若 鍾 丁 若 鏞 及 吳 錫 忠 權 哲 身 文 榮 仁 等 家 書 禮 相 通 處 段 哲 身 及 哲 身 妹 家 ( 邪 學 懲 義 권1, 正 法 罪 人 秩, 姜 完 淑 ). 80) 권일신의 동생인 權 得 身 의 아들 권상익은 충주에 살던 이기연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기연의 아들 李 仲 德 은 신유박해에 전라도 장수로 유배되었고, 며느리 權 阿 只 連 은 충주에서 1801년 8월 순교 하였다. 권상익은 영덕으로 유배되었고, 이기연은 12월 충주에서 순교하였다(여진천, 권철신 권일신 후손들의 천주신앙,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2013, 234~237쪽). 8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49쪽.

27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7 그는 1791년 동생 권일신의 죽음 이후 드러내놓고 신앙 활동을 하지 는 않았다. 83) 그럼에도 그는 도량이 크고 헌신적인 사람이어서 여러 사람 의 신임을 얻고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저 양반이 천주교를 참된 교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서 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자들이 고문으로 변절했다는 소식을 듣자, 가엾은 사람들 같으니! 그로 인해 그들이 반평생 거둬들인 노고를 헛되 게 하고 아무 보상도 없는 형벌을 받으니 참으로 유감스럽구나! 라고 한 탄하였다. 84) 이는 저명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적극적으 로 벗어버리지 않았고, 자기 삶의 원칙을 공부한 대로 실천한 독행자로서 의 명망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퇴거(은수)의 삶은 성리학 신봉으로 인한 삶의 선택이라기보다 천주교 신봉으로 인한 삶의 선택이었다. 85) 당시 교회 안팎에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즉 강세륜( 姜 世 綸 )은 그 소굴 속에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을 말하자면, 조정의 벼슬아치로 는 이가환이 있고 경기에는 권철신과 정약종 같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라 고 하였고, 황사영( 黃 嗣 永, 알렉시오)은 서양의 천주교를 하는 사람 중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로는 양반의 경우 저와 권철신, 정약종 무리들이다 고 86) 하였다. 이가환은 사학의 괴수로 호중( 湖 中 )의 이존창, 양근의 권철 82)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99~101, 106~107쪽 참조. 83) 그는 신해년(1791) 이래로 문을 닫아걸고 허물을 자책했습니다. 또 시골구석에 처박혀 지낸 6년 동안 한 번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고 하였다(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 황사영, 백서 12행. 84) 罪 人 權 哲 身 卽 日 身 之 兄 而 與 其 弟 欽 崇 邪 書 酷 信 三 魂 四 行 之 說 及 夫 日 身 罪 斃 之 後 迷 不 知 變 致 使 楊 根 一 境 愚 惑 訛 誤 寔 繁 其 徒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6일 임신) ; 달레, 앞의 책, 440쪽. 85)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4~136쪽. 86) 以 窩 窟 之 世 所 共 知 者 言 搢 紳 則 有 李 家 煥 近 畿 則 有 權 哲 身 丁 若 鍾 輩 ( 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5월 25일 임오) ; 洋 敎 中 表 著 者 在 士 夫 則 矣 身 及 哲 身 若 鍾 輩 (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0일 황사영 공초).

28 28 교회사연구 제42집 신, 서울의 최필공이라고 하였다. 87) 이처럼 그는 1784년부터 1791년까 지 보여주었던 실천적 삶과 가르침은 친인척들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존경을 받았고, 여러 지방에 신앙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1791년부터 그의 드러나지 않는 삶은 복음적인 퇴거(은수)로 볼 수 있다. 정약종은 입교한 이후 항구한 열심으로 신앙을 실천하였다. 특히 그 는 재혼한 아내 유( 柳 ) 세실리아와 금욕을 하며 살 생각을 하였다. 이는 당시 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던 정덕관( 貞 德 觀 )에 따라 재혼한 이후에도 금 욕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환과( 鰥 寡 )의 정( 貞 ) 을 지향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그의 엄격주의적 신앙을 나타내며, 개인 윤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교적 완덕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88) 그는 1794년 홍익만과 한문서학서를 가지고 교리를 토론하였고, 1795년 이후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여러 신자, 즉 양반 황사영, 중인 최창현, 현계흠( 玄 啓 欽 ), 손인원( 孫 仁 遠 ), 이합규( 李 逵 ), 손경윤( 孫 敬 允 ), 홍필주( 洪 弼 周 ), 강완숙, 그리고 양인( 良 人 ) 김계완( 金 啓 完 ), 백정( 白 丁 ) 황일광( 黃 日 光 )과 황차돌( 黃 次 乭 ), 89) 각수( 刻 手 ) 송재기( 宋 再 紀 ), 포 수( 砲 手 ) 김한빈, 고공( 雇 工 ) 임대인( 任 大 仁, 토마스), 총모장( 帽 匠 ) 장 덕유( 張 德 裕 ), 김일호( 金 日 浩 ) 등과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90) 그는 임대인 87) 湖 中 之 李 存 昌 陽 根 之 權 哲 身 京 中 之 崔 必 恭 爲 之 云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4일 이가환 공초). 88) 정덕의 세 등급 중 가장 아래 등급은 부부의 정숙함, 중간 등급은 홀아비와 과부의 정조, 으뜸 등급 은 동정이라고 하였다(판토하, 박완식 김진소 역, 칠극, 전주대출판부, 1996, 252~253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394, 441쪽. 89) 罪 人 黃 日 光 學 習 邪 書 於 李 存 昌 移 接 若 鍾 隔 隣 受 洗 受 號 號 以 深 淵 ( 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2월 26일 무진 ; 황일광은 자기에게는 자기 신분으로 보아, 사람들이 그를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 고 하였다(달레, 앞의 책, 474쪽). 90) 邪 書 出 自 承 薰 而 若 鍾 樂 敏 輩 相 與 之 爛 漫 討 論 有 何 傳 襲 之 可 言 乎 (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1일 황사영 공초) ; 역주 사학징의 1, 162, 170, 190, 199, 203, 215, 222, 230, 235쪽 ;

29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29 에게 십계명과 칠극을, 황차돌에게 십계명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91) 이 렇게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던 그의 실천적 사상은 종교 운동가로서의 면 모를 강하게 드러내는데, 양반 지배층 중심의 기존 질서로부터 그 자신의 존재와 사상이 이탈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92) 그는 주일에 첨례할 때 최창현이 만들어 보내준 금장단선( 錦 帳 緞 ) 으로 된 휘장을 천주상( 天 主 像 )에 걸고 무릎 꿇고 앉아서 경문을 외면서 하느님의 은혜를 생각하였다. 93) 그는 천주교의 전파와 보급에 상당한 기 여를 했던 명도회( 明 道 會 )의 회장으로서 주문모 신부와 자주 연락하면서 자신의 집에 여러 번 맞아들였고,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며 교리를 연구하 고 전파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황사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속 이야기에는 서툴렀으나 교회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가장 좋아하였고, 비록 병이 들어 괴롭고 양식이 없어 굶주릴 때에도 그런 고통을 모르는 사 람 같았습니다. 혹 한 가지 조그만 도리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잠자고 밥 먹는데 맛이 없었으며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 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묵상 공부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굳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싫증 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는 깨 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를 하고 나서는 곧 강론을 펴기 시작해서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였으므로, 다른 이 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혹 자기가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2월 12일 임대인 공초 ; 순조실록 권3, 순조원년 12월 26일 무진. 91) 丁 書 房 敎 誘 矣 身 先 學 十 戒 七 克 而 被 捉 臟 物 矣 兄 日 光 往 接 于 廣 州 分 院 若 鍾 家 行 廊 矣 漢 彬 爲 名 漢 亦 爲 來 留 其 行 廊 而 始 學 十 戒 於 若 鍾 處 是 白 遣 ( 邪 學 懲 義 권2, 作 配 罪 人 秩, 任 大 仁, 黃 次 乭 ). 92)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397쪽 ;,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08쪽. 93)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최창현 공초, 2월 12일 정약종 공초.

30 30 교회사연구 제42집 알아 깨닫게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딱하고 민망 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 내는 기색도 없이 말이 술술 풀려 나와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놓아도 가려내 는 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 뀜이 없었고, 정확하고도 기묘하였습니다.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 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고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습니다. 94) 그는 1799년 선교사 영입을 위한 서양의 큰 배를 청해오려던 계획에 동참하여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95) 또한 당시 한문서학 서는 한글로 많이 번역되었는데, 96) 그는 번역에 그치지 않고, 교인 가운 데 우매한 사람 ( 敎 中 愚 者 )을 위해 한글로 된 교리서 쥬교요지 (2권) 를 97) 저술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이 성세추요 보다 더 우수하다고 평가하면서 인준하였다. 또한 교리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 기 위한 성교전서 ( 聖 敎 全 書 )의 편찬을 시도하였다가 박해로 중단하였 다. 98) 이 책의 저술을 통해서 그는 조선 교회에서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분명히 해 주었다. 99) 이처럼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하면서, 복음의 권고대 94) 황사영, 백서 36~38행. 95) 김유산의 1801년 4월 26일자 진술에 언급된 중국 천주당 신부에게 보내는 서찰을 쓴 서울에 사는 丁 生 員 은 정약종일 가능성이 높다. 역주 사학징의 1, 102쪽 각주 79). 96) 1801년 당시 형조에 압수되어 소각된 천주교 서적은 모두 120종 117권 199책이었는데, 한글로 씌어진 책은 83종 111권 128책이었다(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91~95쪽). 97) 정약종이 엮은 우리말 최초의 한글 교리서로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벌, 영혼의 불멸을 밝히면서 이단을 배척하는 일종의 호교서이고, 하권은 천주의 강생 과 구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조한건, 정약종의 쥬교요지 에 미친 서학서의 영향, 서강대 석사 학위논문, 2006). 98) 황사영, 백서 36~38행. 99)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03쪽.

31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1 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형제적 친교로 신앙을 실천하였다. 명도회장 으로서 주문모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복음 전 파에 온갖 열정을 다했다. 그는 주보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 신앙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왔듯이, 그도 믿음을 통 하여 스스로 강해졌다. 또한 성인이 방대한 저술들을 통하여 믿음의 중요 성과 믿음의 진리를 설명하였듯이, 100) 그도 교리서를 저술하여 당시 신자 들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 신앙을 굳건히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4. 신앙의 시련과 항구함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 시 이부만( 李 溥 萬 )은 아들 이벽에게 신앙 을 버리도록 강요하면서 목에 끈을 매달고 죽으려고 하였다. 그는 부친의 박해를 받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부인하겠는가? 또 어떻게 부친을 죽도 록 내버릴 수 있는가? 라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부친에 대한 효 사이에 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 101) 그는 명시적으로 하느님을 믿지 않 겠다는 배교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회의 말을 사용해서 닥친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결국 그는 부친에 의해 감금된 상태에서 말할 수 없 는 고통을 받다가 병 102) 에 걸린 지 8~9일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부친과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신앙 100)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교서, 믿음의 문 7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9쪽. 101) St.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é(1860), vol. 4, M.E.P, pp. 26~ 27(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7쪽) ; 달레, 앞의 책, 320~321쪽. 102) 당시 페스트가 유행했다는 기록은 없는데, 다블뤼는 la peste(중국에서는 Jo ping이라고 하는), 달레도 페스트(중국에서 Io ping이라고 불리는 티푸스의 일종)라고 하였다. 리델이 엮은 한불 자전 에 peste는 염병( 染 病 )이라고 하였다.

32 32 교회사연구 제42집 을 선택한 최필제( 崔 必 悌, 베드로) 등과 같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과 부친 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즉 묵언의 거룩한 행동으로 신앙과 효를 증거한 것이다. 103) 그는 부친을 위시한 다른 가족들로부터 갖은 수단으로 범주적( 範 疇 的 ) 신앙 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극심한 위협을 당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배교하지 않음으로써 범주적 신앙 도 저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말 로 부친의 죽음을 저지시킴으로써 효를 실천하는 초월적( 超 越 的 ) 신앙 도 아울러 성 취하였다. 그는 극도로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범주적이고 초월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믿고 증거한 신앙으로 처신하였던 것이다. 104) 1791년 목인규와 홍낙안은 권일신을 교주 라고 고발하였다. 105) 그 는 그해 11월 3일 체포되어 7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1차 심문에서 천주교 에 대한 금령이 내려진 이후 서학서를 보기가 어려워 보지를 못했다고 했 다. 3차 심문에서 천학문답 ( 天 學 問 答 )을 지은 안정복과 입론( 立 論 )이 준엄하지 못해 인심을 격려하고 경계시킬 수 없다고 말을 주고받은 일이 있는데, 이는 이 학술을 위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 103) 최선혜, 조선시대 가족원에 대한 가장의 통제와 처벌 이벽을 중심으로,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207~226쪽 ; 여진천, 조선후기의 효 사상과 천주교 신앙과의 연관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258~263쪽 ; 곽승룡 신부는 그의 침묵을 심리적 상징적 사목적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침묵(마르 15, 2-5)과 연관되어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곽승룡, 한국천주교 창설주역들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 한 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129~143쪽). 104) 심상태, 이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양업교회사 연구소, 2007, 291~293쪽. 105) 亦 欲 打 破 其 窩 窟 而 偃 然 以 敎 主 自 處 不 畏 典 章 不 避 指 目 反 以 爲 榮 者 自 有 其 人 卽 權 日 身 是 也 (이만 채, 앞의 책, 睦 進 士 仁 圭 與 發 通 諸 儒 書 ) ; 前 都 正 睦 萬 中 所 製 通 文 及 進 士 睦 仁 圭 抵 書 士 林 以 斥 其 自 作 敎 主 之 罪 焉 日 身 (이만채, 앞의 책, 洪 樂 安 問 啓 ) ; 館 學 儒 生 宋 道 鼎 等 上 疏 曰 李 承 薰 之 貿 冊 乃 其 作 俑 之 凶 權 日 身 之 敎 主 卽 護 法 之 賊 也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6일 정축).

33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3 였다. 그런데 5차 심문에서 제가 만약 그것이 사학( 邪 學 )임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어찌 그것이 요사스럽다고 말하기를 어려워하겠습니까. 그 책 가운데 밝게 천주를 섬긴다 든가 사람들에게 충효( 忠 孝 )를 느끼게 한다 는 등 몇 구절의 좋은 말 외에는 다른 것은 실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 니 어떻게 억지로 요서( 妖 書 )라고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리고 6차 심문에서 직방외기 ( 職 方 外 紀 )와 천주실의 를 읽었다고 하면서, 예 수의 사람 됨의 사정( 邪 正 )은 비록 그 책의 전체적인 대의는 모르지만,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으로 엄숙 공경하고 삼가 두려운 모습으로 천주를 받들면 법이 없어도 자연 임금에게 충성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 그 부 모에게 효도한다 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사람 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이 이치에 벗어난 사설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 사람이 삿 되다고 배척해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7차 심문에서 그 학술은 대체로 공( 孔 ) 맹( 孟 )의 학문과 달라 인륜에 어긋날 뿐더러 나아 가 제사를 폐지하고 사람의 마음을 빠뜨리게 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사학( 邪 學 )입니다 고 106) 하였다. 11월 5일 비변사는 을사년 이후라도 그가 만약 회개하여 자책하고 정학으로 돌아왔다면, 온 세상이 어찌 이렇 게까지 지목하겠습니까 라고 107) 하였다. 또한 형조는 그가 교주라는 칭 호에 대해서는 뜬소문으로 돌려 극구 변명을 하면서도, 유독 예수에 대해 서는 끝내 그가 사특하고 망령되다고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엄 한 매를 치면서 묻는 데도 전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니, 그가 그 학문에 빠 져 미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 108) 하였다. 106) 矣 弟 當 初 四 五 年 沈 溺 之 故 浮 謗 無 以 得 免 是 白 乎 矣 第 有 可 證 者 他 邪 學 者 廢 祀 而 矣 身 家 則 不 廢 祀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107) 大 抵 日 身 之 自 入 秋 曹 願 被 同 罪 者 大 是 的 贓 明 驗 其 爲 妖 學 之 窩 主 可 以 知 之 雖 於 乙 巳 之 後 渠 若 悔 悟 自 責 復 歸 正 學 則 一 世 之 指 目 豈 至 於 此 乎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5일 병자). 108) 其 敎 主 之 稱 歸 之 於 浮 言 之 科 極 口 發 明 獨 於 耶 蘇 終 不 斥 言 其 邪 妄 嚴 訊 之 下 一 辭 如 前 可 見 其 沈 溺 迷 惑 雖 於 施 威 之 下 始 於 邪 學 二 字 遲 晩 至 於 敎 主 書 冊 兩 段 事 不 可 以 其 發 明 有 所 準 信 請 更 加

34 34 교회사연구 제42집 이처럼 1, 3차 진술로 볼 때, 신앙을 실천하지 않은 것처럼 진술하였 고, 7차 진술에서 제사 폐지를 언급하면서 이 점에서는 사학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5, 6차 진술에서 요서라고 할 수 없고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배척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정조는 그해 11월 11일 그 에 대한 회유를 직접 지시했기에, 집중적이고 집요한 회유를 받았다. 16일 형조는 그가 15일 옥중에서 회오문 을 작성했다고 보고하였으며, 이에 정조는 위리안치( 圍 籬 安 置 )에서 호서로 이배( 移 配 )토록 하였다. 109) 결국 그는 유배지 예산으로 가는 도중에 엄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음을 당 하였다. 그런데 11월 11일부터 집중적인 회유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15일 에 지은 회오문 을 보면, 다만 이전의 잘못됨을 고치고 뉘우침으로써,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려는 (임금 의) 성스러운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80세 노모께서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 르고, 형제들은 무고하게 잡혀 들어오니 라고 110) 하였다. 이 글은 자신 이 배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천리( 天 理 )의 공( 公 )에 입 각한 삶과 인욕( 人 慾 )의 사( 私 )에 입각한 삶을 각각 2조목씩 들고 있다. 보통 사대부의 글이라면, 하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임금의 뜻에 집중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사람 되 嚴 刑 期 於 取 服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109) 仍 命 權 日 身 崔 必 恭 等 處 曉 諭 義 理 使 之 自 新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1일 임오) ; 班 之 魁 日 身 中 之 魁 必 恭 若 痛 自 尤 悔 歸 於 正 學 則 其 徒 不 過 遇 風 之 鴻 毛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2일 계미) ; 移 配 權 日 身 於 湖 西 使 開 誘 爲 邪 學 者 日 身 於 獄 中 作 悔 悟 書 刑 曹 以 啓 上 意 其 眞 箇 革 心 使 之 移 配 於 有 邪 學 地 方 欲 其 立 跡 自 ( 정조실록 권33, 정조 15년 11월 16일 정해) ; 日 身 始 抵 死 不 屈 擬 配 濟 州 旣 上 論 之 誨 之 日 身 自 獄 中 作 悔 悟 文 上 之 流 配 禮 山 出 獄 未 幾 而 死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15, 녹암권철신 묘지명 ). 110) 矣 身 沈 惑 異 端 不 知 末 流 之 弊 終 至 於 滅 倫 亂 常 有 甚 於 夷 狄 禽 獸 將 使 家 敗 身 亡 不 免 凶 禍 矣 身 之 罪 百 死 難 贖 而 至 今 假 息 國 恩 罔 極 粉 骨 碎 身 無 以 報 答 惟 有 改 悔 前 非 以 副 愛 欲 生 之 至 意 人 其 人 之 聖 念 八 老 母 奄 奄 號 絶 兄 弟 無 辜 竝 被 矣 身 於 此 眞 是 得 罪 於 五 倫 忽 忽 念 此 不 覺 叩 心 而 泣 血 日 前 口 招 矣 身 旣 以 耶 蘇 之 學 妖 邪 不 正 ( 승정원일기, 정조 15년 11월 16일 정해).

35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5 게 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 앞에 상위 개념으로 서술되어 있는 부분 이 특징적이다. 이 부분에 그가 말하고자 했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사적 인 삶으로는 자식 된 도리로서 노모의 임종까지는 지켜야 한다는 보은을 강조했지만, 공적인 삶으로는 하늘이 사랑하여 살리려고 한다는 점을 지 적하였다. 이를 당시 교회 상황에 비춰본다면, 초기 교회의 지탱을 위해서 필수적이었던 성직자 영입이 실패한 직후였으므로, 이를 성공시킬 때까지 는 자신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111) 이처럼 임금의 지 시에 의한 집중적인 회유를 받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공권력이 아닌 압제 로 변질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덕적으로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 고,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112) 결국 그는 신앙에 관한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범주적 그리스도 신앙 을 간직하면서 받게 된 귀양 판결 후 하늘의 뜻에 따라 팔순 노모께 대한 효도를 다하며 살 것을 종용한 임금의 뜻에 순응하였다. 그는 익명( 匿 名 ) 의 양식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신앙 도 성취한 뒤에 감형을 받고 나서 즉 시 닥친 죽음을 맞았다고 보기에, 순교로 신앙적 삶을 마쳤다고 볼 수 있 다. 113) 그렇지만 이러한 내밀한 심정을 추론할 수 있지만, 정조의 회유 지시에 의해서 외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 에 없다. 114) 그런데 당시 유생들은 권일신이 천주교를 버렸는지 알 수 없고, 또 나오자마자 다시 믿었다고 하였다. 정치적 의도가 담긴 진술로 보이지만, 1795년에 관학유생 박영원( 朴 盈 源 )은 경기 지방의 권일신과 호서의 이 111)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38~146쪽. 112) 가톨릭교회 교리서 1787, 1903항. 113) 심상태,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의 천주신앙, 453쪽. 114) 조광,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논평, 161~162쪽.

36 36 교회사연구 제42집 존창 같은 무리들로 말하면 전의 형옥에서 모두 자복했었는데 옥문( 獄 門 ) 을 나오자마자 또다시 예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고 115) 하였다. 좌의정 이병모( 李 秉 模 )는 근년 이래로 불순한 학문이 날로 성하게 번지고 있습 니다. 이른바 권일신의 무리는 지금 이미 죽었으나 그 이웃 마을에 점점 물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다시 이전과 같으며, 호남까지도 선동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고 116) 하였다. 그리고 이만채( 李 晩 采 )는 일신이 유배되 기 전에 도중에 죽어서, 진정한 감화 여부는 알 수 없게 되어 애석하 다 117) 하였다. 교회 측 기록은 그의 배교 여부를 단정하지 않았다. 달레는 그의 생 애 중에 그렇게도 위대하였고, 형벌 중에서 그렇게도 위대한 것을 보아 온 그 사람이 이렇게 그의 최후 순간을 비겁한 나약으로 흐리게 하는 것을 보게 되니 이 무슨 광경인가. 그러나 또 얼마만한 교훈인가. 물론 기록들 이 별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굴복 행위의 정도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을 공공연한 배교로 규정지을 수도 없지만 하나의 승리를 이 야기하지 않고 이 풀 수 없는 의문 앞에서 우리는 마음에 슬픔을 안은 채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고 118) 하였다. 권철신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었고, 의금부에서 2월 11일 두 차 례, 18일, 19일, 21일에 각 한 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1차 심문에서 양근 일대를 천주교에 물들게 만든 괴수임을 자백하라고 하자, 이러한 비방은 동생과 함께 이 책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책을 보았습니다. 115) 畿 縣 之 日 身 湖 西 之 存 昌 年 前 刑 獄 渠 皆 自 服 而 出 獄 門 又 復 如 前 ( 정조실록 권43, 정조 19년 7월 24일 계유). 116) 近 年 以 來 邪 學 日 益 熾 盛 所 謂 權 日 身 之 類 今 雖 已 斃 而 其 隣 里 鄕 黨 之 間 漸 染 猶 復 如 前 至 於 湖 南 亦 不 無 煽 動 之 慮 云 ( 정조실록 권51, 정조 23년 5월 5일 임술). 117) 日 身 未 及 發 配 而 徑 斃 未 知 眞 箇 感 化 與 否 可 惜 (이만채, 벽위편 권3, 刑 曹 啓 目 權 日 身 刑 招 ). 118) 달레, 앞의 책, 360쪽.

37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7 신해년(1791) 제 동생이 이 때문에 형벌을 받았으며 나라에서 금지하는 일도 매우 엄했습니다. 또 그때 제 동생이 살아나왔습니다. 임금님의 은혜 가 한이 없어서 문을 닫아걸고 감읍( 感 泣 )하였습니다. 저는 자청해서 제 동생이 베껴놓은 사서( 邪 書 ) 오십여 권을 감영에 바치고 감영 마당에서 불태웠습니다. 이 뒤로는 집에 한 권의 책도 없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제 허물을 자책했습니다. 사학( 邪 學 )에는 오륜( 五 倫 )이 없습니다 고 하 였다. 그리고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한두 명의 교주를 고발하라고 하자, 시골구석에 처박혀 지낸 6년 동안 한 번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 니다. 제 자신의 혐의도 벗지 못하는데, 누가 교주임을 무슨 이유로 알 수 있겠습니까? 천주학 패거리에 대해서는 조무래기들이나 우두머리를 막론하고 참으로 정확히 지적하여 아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고 하였다. 또한 최필공을 아느냐고 묻자, 안다고 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그리고 가까운 고을에 사는 정가( 丁 哥, 정약종)가 이 학을 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눈으로 보지 못한 내용이라고 하였다. 정약종이 했던 학문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기와 같은 비방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날 신장 5대를 맞았다. 119) 18일 3차 심문에서, 신해년 이후에 신부가 된 이가 바로 권철신이라 고 여러 사람이 지적했다고 하자, 그는 제 동생 권일신의 일로 숱한 지목 이 모두 저에게 씌어졌으나, 저는 지금 이미 사악한 천주교를 배척하여 끊고 믿지 않습니다. 배척하여 끊은 사람에게 어떻게 신부와 대부의 칭호 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19일 4차 심문에서 윤유일의 흉악스럽고 비밀스런 일(1790년 북경 방문)에 대해서는 과연 알았으나 관아에 고발하 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정황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죄 라는 것 119)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1일 권철신 공초.

38 38 교회사연구 제42집 을 늦게나마 자복합니다 고 하였고, 신장 30대를 맞았다. 120) 위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그는 1791년 이후 교회와 관계가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그런데 1차 심문에서 국은이 망극하여 이에 보답하 려 노력했다는 것은 정조에 대한 모반죄에 걸려들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이 모두 지목한다는 물음에 동생 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 는데, 이는 퇴거 (은수) 상태에 대한 일관된 설명이지만, 다른 교우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한 선택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는 심문을 받을 때, 체포되지 않은 신자들에 대한 고발을 하지 않았다. 1차 심문에서 최필공, 정약용 형제를 아느냐는 질문에 안다고 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 다. 2차 심문에서는 우두머리 및 일반 신자들을 고발할 사람이 없다고 하 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달리, 1791년 이후에도 그는 교회 활동을 드러 나지 않게 한 것으로 보인다. 즉 경기 감영에 갇혀있는 이중배가 천주교 를 믿는 권철신을 찾아가 만나보았습니다 라고 하자, 마마의[ 痘 醫 ]로서, 또 동네의 잔칫집에 왔다가 방문한 것이라고 121) 하였다. 그리고 김건순 (요사팟)이 양부가 세상을 떠난 18세(1793) 이후부터 22세(1797) 사이 에 권철신을 밤에 찾아가서 하느님의 존재와 삼위일체, 강생의 신비를 듣 고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122) 또한 황사영은 교우 중에 밖으로 나타나지 않은 자 중에 쓸 만한 자로 양반에 있어서는 자신, 권철신, 정약종 등 이 라고 123) 하였기 때문이다. 3차 심문의 진술 자체로만 보면, 교회를 배척하여 끊었다고 볼 수 있 120)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8일, 19일 권철신 공초. 121) 問 曰 李 中 培 被 囚 於 畿 營 納 供 以 爲 往 見 邪 學 人 權 哲 身 云 爾 則 矣 身 之 到 今 發 明 豈 成 說 乎 供 曰 村 中 過 婚 家 衆 人 齊 會 時 李 中 培 亦 來 過 而 仍 訪 矣 身 家 而 已 (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9일 권철신 공초) ; 供 曰 李 中 培 以 痘 醫 來 留 村 中 伊 時 矣 孫 之 痘 一 二 次 尋 見 矣 ( 推 鞫 日 記, 1801년 2월 18일 권철신 공초). 122) 달레, 앞의 책, 490~491쪽. 123) 辛 酉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1801년 10월 10일 황사영 공초.

39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39 다. 그러나 1791년 이후 신부든, 대부든 이를 인정하게 되면 계속적으로 연루자가 생겨나게 되는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답변은 배교한 것이라기보다는 본인과 관계없음을 진술함으로써, 다른 교우들을 계속해서 연루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의 진술일 것이다. 124) 그가 가혹한 형 벌을 받으면서도 끝끝내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배교했 다고 겉으로는 진술한 것과 달리, 속으로는 여전히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 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문관 앞에서 배교하고, 그것을 믿게 하려고 한 것 은 단지 박해를 모면하기 위해서 꾸며댄 것이지, 천주교에 대한 입장이 변하여 진실로 그것을 버리거나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125) 교회 측 기록은 그의 죽음에 대해 배교 여부를 단정하지 않았다. 즉 황사영은 그가 매를 맞고 죽었는데, 그가 선사( 善 死 )하였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고 126)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체포되어 판관들 앞 에 서자, 그는 상세하고 조리 있게 천주교와 신앙 실천을 설명했으며, 형 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답변하여, 직 책상 심문에 참석했던 가장 악착스러운 적들 중 한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서 그곳에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심문을 받는 다른 죄인 들을 보면, 모두가 정신이 나간 듯 보이나, 권철신만은 고문을 받는 가운 데서도 잔칫상에 차분히 앉아있는 사람처럼 답변한다. 심리가 끝나기도 전인 음력 2월 21일 권 암브로시오는 66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어떤 이들 에 의하면 매를 맞고 사망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에 의하면 상처의 후 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가 감옥 밖에서 마지 막 숨을 거두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정황이 그들로 하여금 그 124)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147~152쪽 참조. 125) 서종태, 이벽 이승훈 권철신의 순교여부에 대한 검토, 68~71쪽. 126) 황사영, 백서 52행.

40 40 교회사연구 제42집 의 항구심에 약간의 의혹을 품게 한 것으로 보인다. 정황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떠한 자료에도 근거하지 않은 단순 한 의혹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토록 수많은 세월 동안 형벌을 받기까지 감정과 행동에 있어 의연함을 보여준 이 교우에 대한 우리의 추억을 얼룩 지게 하지는 못한다 고 127) 하였다. 그는 주재자의 존재를 진리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흠숭을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서학에는 오륜( 五 倫 )이 없다 고 유학과 천주교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결정했던 제사 금지령을 거부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실천했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순교적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가 천주교에 대한 신 앙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128) 1801년 2월 9일 사헌부에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사학치성 ( 邪 學 熾 盛 )의 원흉으로 주벌( 誅 罰 )할 것을 청하면서, 이승훈이 구입해 온 요서( 妖 書 )를 그 아비에게 전하고, 그 법을 수호하기를 달갑게 여겨 가계 ( 家 計 )로 삼았습니다 고 129) 하였다. 이승훈은 그다음 날 체포되어 2월 18일까지 6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 여정에 대해 추궁을 당하자, 1791년 이후에 천주 교를 떠났고, 1795년 예산 유배 시 지은 유혹문 을 필사하여 각 면리( 面 里 )에 일일이 돌려서 예산 일대가 다시는 물들지 않도록 했다고 하였 다. 130) 또한 자신이 주자학에 전념했다고 하면서, 주자백록동연의 ( 朱 子 127) St. A. Daveluy, Notes pour l Histoire des Martyrs de Coreé( ), vol. 4, M.E.P, pp. 108~109(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318~319쪽) ; 달레, 앞의 책, 440쪽. 128) 조광,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논평, 162~163쪽. 129) 李 家 煥 李 承 薰 丁 若 鏞 之 罪 可 勝 誅 哉 承 薰 則 傳 其 父 所 購 之 妖 書 甘 心 護 法 作 爲 家 計 ( 순조실 록 권2, 순조원년 2월 9일 을묘). 130) 矣 身 乙 巳 後 雖 未 斷 意 斥 絶 辛 亥 後 則 果 永 斷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4일

41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1 白 鹿 洞 衍 義 )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척사인( 斥 邪 人 ) 이기경도 자신의 척사 사실을 알고 있었고, 척사론자이며 혼척( 婚 戚 )이 되는 심유( 沈 )와 교류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증인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정학 ( 正 學,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과 함께 사학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131) 그럼에도 그는 이가환이나 정약용을 집권층 내부로부터 제거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줄 수 있었던 구서전법 ( 購 書 傳 法 )한 사실을 집 중적으로 추궁받았으며, 자위교주 ( 自 爲 敎 主 )가 되었음을 비난받았다. 그 는 천주교를 조선에 전파한 원흉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 던 것이다. 132) 2월 25일 이병모는 이승훈은 당초에 사서를 구입해 가지 고 와서 온 세상에 전하여 배포하였으니 인심이 함닉되고 세도가 어그러 진 것은 진실로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그가 작용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 다. 문서에 적발된 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신부 등의 말은 명호를 만든 것인데 신과 같이 앙모하는 자를 신부라고 일컬으니 신을 대신할 수 있다 는 말이요, 아비를 대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양인들과 난만 하게 왕래하고 있는데 그 실정을 구명해 보면 지극히 흉참하였으니, 이 또 한 일률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 133) 하였다. 결국 그는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이승훈 공초) ; 원재연은 매우 중대한 害 敎 행위이자 비난받아야 마땅한 적극적인 배교 행위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심리적 변화을 일으킨 요인은 첫째, 예산 유배(1795년 7월 하순부터 이듬 해 봄까지)는 그전까지 맛볼 수 없었던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이 있었고, 둘째,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신자들을 억압하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한 정약용과의 교류, 즉 두 사람도 처음에는 갈등을 느꼈을 것이나, 차츰 교회를 탄압하는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들 의 양심 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천주교 신앙을 완전히 지워버렸을 것이라고 하였다(원재연, 이 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65, 67~68쪽). 131)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0일 이승훈 공초. 132)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77~78쪽. 133) 李 承 薰 則 當 初 購 來 邪 書 傳 布 一 世 人 心 之 陷 溺 世 道 之 訛 誤 苟 求 其 源 莫 非 渠 所 作 俑 以 現 捉 於 文 書 者 言 之 神 父 等 說 做 作 名 號 仰 之 如 神 者 謂 之 神 父 可 代 神 父 則 謂 之 代 父 至 與 洋 人 爛 漫 往 復 究 厥 情 跡 至 凶 至 此 亦 宜 用 一 律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5일 신미).

42 42 교회사연구 제42집 황사영은 그의 순교 여부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즉 이가 환, 정약용, 이승훈 등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회를 해쳤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믿음을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세속을 따랐으나 가까운 옛 친구를 만나면 깊은 정을 잊지 못하여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날 생각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 는 교회 서적을 전파한 죄가 있어 아무리 배교한다 해도 사형을 면하기가 어려우므로, 그것이 선사( 善 死 )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 더 두고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 134) 하였다. 그러나 달레는 배교자로 죽 었다고 단정하였다. 즉 이승훈의 죽음은 이가환의 죽음보다도 훨씬 더 비참하였다.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는데,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로도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듭되고 고집스러운 비겁이 하느님의 인내심을 지치게 한 모양이었던지 그는 자기 의 배교를 철회하지 않고 통회한다는 조그마한 표시도 하지 않고 숨을 거 두었다. 맨 먼저 영세한 그가, 자기 동포들에게 성세( 聖 洗 )와 복음을 가져 왔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으되,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라고 참수당하였으나, 배교자로 죽었다 고 135) 하였다.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갈망하던 구도의 과정에서 이 땅에 천주교가 전해졌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조상 제사 거부를 통해 서 동양의 기존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가치 인정에 매우 인색했다. 그는 보 유론의 입장에서 천주교에 입교하였지만, 그 보유론이 당국과 교회로부터 모두 부정되던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천주교 신앙과 전통적 문화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이때 그가 드러내었던 행 134) 황사영, 백서 17, 45~46행. 135) 달레, 앞의 책, 448~449쪽.

43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3 동은 천주교회를 떠나고 전통문화로 회귀해 가는 것이었다. 그는 기교자 ( 棄 敎 者 )였지 이른바 배교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조 선에 천주교회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영예와 함께, 18세기 지식인 중 하나로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전통문화와 새 시대의 도 래를 예시해 주는 새로운 문화와의 사이에서 무수한 갈등과 고뇌를 겪었 던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다. 136) 정약종은 1801년 1월 19일 임대인을 시켜 책 궤짝을 포천 홍교만의 집에서 아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되었다. 좌포청은 2월 8일 정 약종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2월 11일부터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았다. 이때 그는, 저는 본래 이 가르침을 정학( 正 學 )이라고 알았을 뿐 사학이라고 알지 않았 습니다. 압수한 서책은 과연 저희 집에서 나왔습니다. 교주는 제가 문자를 다소나마 이해했던 까닭에 따로 가르치고 전수하는 자가 없었으며 소굴이 나 도당에 관해서는 문을 닫고 홀로 있었던 까닭에 따로 고할 사람이 없습 니다. 제가 만약 사학이라고 인식했다면 어찌 감히 그것을 했겠습니까? 그 가르침은 대공지정( 大 公 至 正 )하고, 가장 진실된 지식의 도리입니다. 때 문에 몇 년 전 나라에서 금한 이후에도 처음부터 바꾸려는 마음이 없었습 니다. 비록 만 번 형벌을 당해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 다. 삶을 바라고 죽음을 꺼리는 것은 사람의 일상적 감정인데 어찌 죽음 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의를 등지고 살고자 하는 데에 이르러 서는 천지간의 죄인이 되어서 살더라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도당을 지적하라고 하는데, 조정에서 정도로 인식하고 현인으로 지목하여 관직을 주고 상을 준다면 어찌 가리켜 고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 여 번번이 형륙을 가하니 어찌 고할 수 있겠습니까? 137) 136) 조광, 신유교난과 이승훈, 84~85쪽.

44 44 교회사연구 제42집 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대공지정( 大 公 至 正 )하며, 자신의 신앙을 정도( 正 道 )로, 또한 배교를 의를 등지고 사는 행위라고 확고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우고 가르친 자와 와굴 및 도당은 없고, 체포되지 않은 주문모 신부에 대해서도 서양과 중국에는 신부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다며 138) 천주교 공동체 보호를 위해 끝까 지 함구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 남겨둔 기록이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즉 나라 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군주이며, 집에도 큰 원수가 있으니 아버지이다 ( 國 有 大 仇 君 也 家 有 大 仇 父 也 )라는 말이었다. 139) 당시 십이자흉언 ( 十 二 字 凶 言 )으로 불린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임금과 부친이 천주교 신앙을 금 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임금과 부친의 존재 가치까지 거부하면서, 천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여 보급하고자 했다.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로의 접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충효일 맥의 교화를 지상의 목적으로 삼고 있던 사회에서 충효라는 구래의 가치 보다 더욱 중요한 새로운 가치가 있음을 140) 주장하고, 자신들에게 적용 되는 왕법의 부당성을 지적함으로써 절대적인 왕권을 상대화하는 작업을 137)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38) 至 於 敎 主 則 矣 身 粗 解 文 字 故 別 無 師 授 而 窩 窟 徒 黨 則 杜 門 獨 處 故 別 無 可 告 之 人 矣 西 洋 及 中 原 皆 有 神 父 而 此 地 方 別 無 之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39) 이기경의 闢 衛 編 에 작은 細 字 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窮 凶 之 言 云 者 搜 探 文 書 中 渠 之 日 記 有 曰 國 有 大 仇 君 也 家 有 大 仇 父 也 十 二 字 伊 時 諸 臣 兩 司 諸 臺 請 對 施 以 不 待 時 之 律 以 不 忍 筆 諸 文 字 之 意 漏 於 公 私 文 蹟. 이기경, 闢 衛 編, 313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11쪽, 각주 105) 재인용.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다. 즉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마 태 10, 35-36). 140) 선교사들이 천주를 천지의 大 君 大 父 로 소개하고 천주에 대한 공경이 충 효를 포함하는 더 근원적인 윤리라고 설명한 것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사회 운영에 대한 큰 파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천주라는 존재 앞에 군신, 부자는 평등한 존재가 되고 세도 실현은 천주 공경으로 귀속하기 때문이었다. 천주를 대군, 대부로 인정하여 충효를 포괄하는 새로운 가치로 설정하고 이를 신앙의 근거로 삼는 일은 조선 입교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이경구, 서학의 개념, 사유체 계와 소통 대립 양상, 167~168쪽).

45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5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당시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말이어서 조정에 박해의 정당성을 확실히 부여해 주는 사건으로 확 대되었다. 141) 그래서 다른 신자들에게 적용되었던 요언혹중죄( 妖 言 惑 重 罪 )보다 더 무거운 범상부도죄 를 적용받게 되었다. 142) 그럼에도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고, 143) 그해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 하였다. 그는 순교하러 갈 때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라 고 했고, 서소문 밖에 있던 이들에게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것 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 아서 행하시오 라고 말했다. 칼에 한 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 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다시 엎드 렸다. 144) 앵베르(Imbert, 1796~1839) 주교는 그가 1801년 박해 때에 자신을 천국으로 보낼 칼날이 떨어지는 것을 보겠다고 해서 (관례대로 엎 드려서가 아니라 나무토막에 대고 누워서) 눈을 뜬 채 참수를 당하고자 했던 영광스러운 순교자 라고 145) 하였다. 141)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128~129쪽 ; 조광, 정약종과 초기교회, 411~416쪽 ; 罪 人 丁 若 鍾 文 書 日 記 中 有 向 父 罔 測 之 說 向 國 不 道 之 說 參 鞫 時 原 任 大 臣 金 吾 堂 上 相 率 請 對 以 爲 若 鍾 斷 不 可 晷 刻 容 貸 今 旣 輸 款 當 用 不 待 時 之 律 矣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12일 무신) ; 권엄 등 63인 상소문 중에 乃 有 今 番 窮 凶 極 惡 絶 悖 不 道 之 言 至 發 於 文 書 此 誠 前 古 所 無 之 變 怪 也 라고 하였다(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18일 갑자). 142) 丁 若 鍾 則 不 但 爲 邪 術 之 魁 鞫 庭 嚴 問 之 下 一 味 頑 悍 之 死 靡 悔 妖 獰 慝 振 古 所 無 而 於 渠 猶 屬 餘 事 以 渠 梟 心 腸 至 向 君 親 肆 發 凶 言 臣 等 憤 之 已 悉 於 日 前 請 對 而 此 賊 不 可 但 用 妖 言 惑 衆 之 律 當 以 犯 上 不 道 結 案 正 法 ( 승정원일기 97책, 순조 원년 2월 25일) ; 天 主 大 君 也 大 父 也 不 知 事 天 生 不 如 死 祭 祖 先 拜 墳 墓 皆 謂 以 罪 過 甚 至 於 謂 父 爲 大 仇 向 君 上 亦 作 罔 測 之 說 滅 倫 敗 常 莫 此 爲 甚 以 犯 上 不 道 捧 遲 晩 正 法 ( 순조실록 권2, 순조원년 2월 26일 임신). 143) 問 曰 又 向 矣 身 之 父 忍 爲 罔 測 之 說 至 於 向 國 家 肆 發 不 道 之 言 尤 萬 萬 至 凶 絶 悖 苟 有 一 分 秉 彛 豈 忍 崩 於 心 而 筆 諸 書 乎 供 曰 矣 身 自 知 罪 今 始 追 悔 矣 問 曰 矣 身 當 初 何 忍 爲 此 等 凶 言 乎 供 曰 萬 死 無 惜 矣 (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1801년 2월 12일 정약종 공초). 144) 황사영, 백서 39~40행. 145)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자 서한, 앵

46 46 교회사연구 제42집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새롭게 받아들인 신앙을 깊게 이해하면서 실천 하였으며,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버렸다. 맏아들 정철상( 丁 哲 祥, 가를로)은 1801년 박해에, 둘째 아들 정하상( 丁 夏 祥, 바오로)과 딸 정정 혜( 丁 情 惠, 엘리사벳), 그리고 부인 유 세실리아는 1839년 박해에 순교하 였다. 146) 또한 후대의 신자들도 그를 본받으려 했다. 즉 1815년 청송에 살던 최봉한( 崔 奉 漢, 프란치스코)은 정약종을 따라 배우고 주문모로부터 전해 받은 뒤에 재를 넘어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는 교우촌을 이루어 교주 ( 敎 主 )가 되었다고 147) 하였다. 5. 맺음말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에 대한 초기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응답으 로 이 땅에 천주교가 전해졌다.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자발 적인 구도자적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동기를 보면, 당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이는 이벽이었고, 그의 권 유로 이승훈과 권철신 형제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도교적 기반을 갖고 있 던 정약종은 이에 대한 회의에 빠졌다가 천주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 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세례를 받아 반석이 된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이들은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신자 수가 5년 만에 4천 명으 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321쪽. 146) 조광, 정약종 가족의 천주교 신앙 실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 천주교수원 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3, 249~276쪽. 정철상은 1801년 4월 2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 하였고, 하느님의 종 124위에 포함되어 있으며, 유 세실리아, 정하상과 정정혜는 103위 성인 에 포함되어 있다. 147) 靑 松 罪 人 崔 奉 漢 從 遊 於 若 鍾 師 受 於 文 謨 收 拾 邪 贓 暗 自 踰 嶺 轉 入 深 峽 誘 集 流 民 自 爲 敎 主 而 押 囚 營 獄 之 後 旋 卽 致 斃 ( 순조실록 권18, 순조 15년 6월 18일 임신).

47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7 로 늘어났다. 이러한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한국 교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교회로 들어와 신앙을 간직한 그들은 복음적 가치에 맞는 실천적 삶으로 신앙을 성장시켰고 전파하였다. 이벽은 찾아 가서 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논쟁을 벌였으며, 명례방 신앙 공동체 모임을 주도하였다. 이승훈은 박해를 받을 때는 교회를 떠났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와 세례를 지속시켰고, 가성무집행제도를 실시했으 며 북경 교회와 연락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을 하였다. 권일신은 적극적 으로 신앙을 전파하였고,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책임감을 갖고 대처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권철신은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신앙의 실천이 친인척과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각 지역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었다. 특히 1791년 이후의 삶은 복음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약종은 교회 가르침을 철저 하게 실천하고자 하였다. 신분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실천 한 삶은 전교의 원동력이었다. 명도회장으로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 였고, 교리서를 저술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굳건히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어 누리기 위해 신앙을 받아들이고 활동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이처럼 훌륭한 성덕을 남겼던 이들도 1785년, 1791년, 1795년, 1801년의 박해를 받아 시련과 유혹을 당하였다. 이벽 은 부친의 박해를 받아 집안에 감금된 상태에서 1785년 갑작스러운 질병 으로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는 하느님과 부친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가운 데 신앙을 증거한 것이다. 권일신은 1791년 체포되어 7차례의 심문을 받 으면서 용기를 내어 당당히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11일부 터 15일 사이 정조에 의해 집중적인 회유를 당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

48 48 교회사연구 제42집 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회오문 을 지어 신앙을 부인하였다. 결국 감형되어 유배 도중에 죽음을 당하였다. 권철신은 1791년(56세) 이후 1801년(66세)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였으나, 다른 이들 의 증언에 의하면 1791년 이후에도 신앙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진술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 다. 이승훈은 1785년에는 벽이문 을 짓고, 1791년에는 관직에서 삭직 되었고, 1795년에는 유혹문 을 지어 교회를 떠났다. 그러나 잠잠해지 면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겉과는 달리 믿음을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약종은 항구한 신앙을 보여주었는데, 1801년 박해를 받아 죽 음의 공포에 직면하면서도 이에 맞서 용기를 내어 신앙을 옹호하고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면서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은 가혹한 박해와 시련을 겪으면서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을 때,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 났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수치스 럽게 하지는 않는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선택하셨는 데, 그는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해를 지낸 이때, 초기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의 모범을 통하여 신앙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면서, 신앙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복음화에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 정 속에서 이들의 신앙과 순교자적 죽음을 충실히 살아갈 때, 곧 다가올 그들의 시복이 큰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투고일 : 심사 시작일 : 심사 완료일 :

49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49 참고 문헌 1. 자료 鹿 菴 權 哲 身 墓 誌 銘 (정약용) 帛 書 闢 衛 編 覆 稿 邪 學 罪 人 嗣 永 等 推 案 邪 學 懲 義 ( 역주 사학징의 1, 조광 역주, 한국순교자현양회, 2001) 先 仲 氏 墓 誌 銘 (정약용) 純 祖 實 錄 承 政 院 日 記 辛 酉 邪 獄 推 案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家 煥 等 推 案 辛 酉 邪 獄 罪 人 李 基 讓 等 推 案 日 省 錄 正 祖 實 錄 推 鞫 日 記 2. 저서 논문 곽승룡, 한국천주교 창설주역들의 삶과 신앙고백에 대한 사목적 고찰,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김대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1845), 성 김대건 안 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50 50 교회사연구 제42집 노용필, 한국천주교회사의 연구, 한국사학, 박광용, 사료를 통한 권철신 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박광용, 조선의 18세기, 국가 운영 틀의 혁신, 정조와 18세기, 역사 학회 편, 푸른역사, 서종태,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한 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심상태, 이벽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 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과 순교문제에 대한 재조명,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 추진위원회, 안응렬 최석우 역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엥베르,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여진천, 권철신 권일신 후손들의 천주신앙,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원재연,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활동과 신앙고백, 한국천주교회 창설주 역의 천주신앙,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이경구, 서학의 개념, 사유체계와 소통 대립 양상, 한국사상사학 34, 한국사상사학회, 2010., 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푸른역사, 이기경, 闢 衛 編, 서광사, 이승훈, 이승훈이 북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1789년 말 서한, 최석우 역주,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51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51 조 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88., 신유교난과 이승훈,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정약종 가족의 신앙 실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 앙 3, 천주교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조한건, 정약종의 쥬교요지 에 미친 서학서의 영향, 서강대 석사 학위 논문, 차기진, 만천 이승훈의 교회 활동과 정치적 입지, 교회사연구 8, 한 국교회사연구소, 1992., 광암 이벽 관련 자료의 종합적 검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권철신 이벽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석우, 한국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이승훈의 교회활동,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판토하, 박완식 김진소 역주, 칠극, 전주대학교출판부, 페레올,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52 52 교회사연구 제42집 ^_pqo^`q The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early laymen leaders in Korean Catholic Yeo Jin-Cheon Baeron shrine Institute of culture and sprituality Catholic was introduced into this land thanks to the early laymen leaders respondence to God s providence. It was approached not from missionaries, but from their own spontaneous passion and endeavor. If we look at the motive of religious belief, it was Lee Byeok who changed the interest of Western Learning into Catholic religious belief. And with his suggestion, brothers Lee Seung Hoon and Kwon Cheol Shin accepted the gospel. Different from them, Jeong Yak Jong felt doubt about Taoism and then accepted the gospel later. Three of them were baptized by Lee Seung Hoon, and they baptized many people afterwards ; so the number of believers increased up to 4,000 people in 5 years. Their vibrant activity is the merit of Korean Catholic church. These people, who entered into the God s church through baptism, developed and spreaded religious belief. Lee Byeok spreaded the gospel to those who came to him and by visiting others. Lee Seung Hoon left the church when the persecution was fierce, but when the dust settled, he came back. Kwon Il Shin tried to spread the gospel enthusiastically and when the community was in hardship, he tried to cope with it responsibly. Kwon Cheol Shin had much influence on his relatives and students through his religious life until 1791 and it led to creating communities in many places. Jeong Yak Jong embodied the life for human equality and dignity in the hierarchical society, and it became the impetus to the entire religion. He also devoted himself to the community by serving as a

53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53 leader and wrote Catechism. In the journey of spiritual life, these people who left a mark of great virtue suffered from prosecution that occurred in 1785, 1791, 1795, and 1801 and had to endure temptation. Lee Byeok died in 1785 while being locked inside of his house under the persecution from his father. In 1791 King Jeong-Jo conciliated Kwon Il Shin and he was put in the situation where he could not make a virtuous decision so he made Hoeomun to deny his religious belief but he died on the banishment. Kwon Cheol Shin stated that he did not have religious life from 1791 until 1801, but due to persecution he died in Lee Seung Hoon built Byokimun in 1785, was removed from public office in 1791, and the he left the church in 1795 upon building Youhogmun. he came back to the church when the dust settled. Jeong Yak Jong was faced with the fear of death because of persecution in 1801, but he had a courage to protect religious belief and the church community by giving on his life. However, Lee Seung Hoon, Kwon Cheol Shin and Kwon Il Shin stated that they had rejected their religious belief temporally and left the church. Their attitudes were regrettable but it does not make them disgraceful, because God chose Peter who denied the God, but later he became the big pillar of the church. Keywords : Lee Byeok, Lee Seung Hoon, Kwon Cheol Shin, Kwon Il Shin, Jeong Yak Jong, baptize, religious belief, persec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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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방상근* 1. 머리말 2. 첨례표의 사용 3. 첨례표의 내용과 신앙생활 4. 맺음말 국문 초록 천주교회는 고유한 1년의 시간 주기를 갖고 있다. 교회력(전례력)이라고 불리는 이 1년의 시간은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등 그리스도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력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다. 천주교 신자로서의 1년은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그러한 증거로 을축년(1865년)과 병인년(1866년)의 첨례표( 瞻 禮 表 )가 남아 있다. 첨례 표란 오늘날의 축일표를 말하며, 여기에는 축일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지 켜야 할 여러 지침도 수록되어 있어, 신자들이 1년 동안 신자로서의 삶을 *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56 56 교회사연구 제42집 살아가게 하는 준거로서 역할을 했다. 따라서 첨례표는 조선 후기 천주 교인들의 신앙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신자들은 성경직해 와 같은 책을 통해 전례주년을 이해 하였고, 수진일과 에 수록된 영첨례표 를 통해 첨례표의 작성 원리 를 알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부터 첨례표 를 만들었고, 이 첨례표에 의거해서 신앙생활을 했다. 첨례표에는 주일과 대소재, 주님과 성모 성인들의 축일, 신심회와 관련 된 날, 파공에 대한 규정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신자들은 첨례표 에 정해진 날짜와 규정대로 이러한 내용들을 실천했다. 물론 첨례표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모두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첨례표에 있는 내용들은 공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실천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박 해 시대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생활의 기본 틀을 보여준다 고 하겠다. 한편 병인박해 이후 정의배 성인의 부인인 피 카타리나가 첨례표를 만 들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 지 에 기축년(1889년) 첨례표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1866년 이후 선 교사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첨례표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했고, 신앙의 자유 이후에는 다시 인쇄된 첨례표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제어 : 교회력, 성경직해, 수진일과, 시헌력, 주일, 대재, 소재, 축일, 신심회, 파공, 성모 신심, 부활 신앙, 예수 성심

57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머리말 천주교회는 고유한 1년의 시간 주기를 갖고 있다. 교회력(전례력) 또 는 전례주년이라고 불리는 이 1년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중심으 로 구성된다. 즉 예수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성령 강림 사건을 중심으 로 하면서, 여기에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성인의 축일이 더해져 전례 력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력에 따라 신 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된다. 천주교 신자로서의 1년은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그러한 증거 로 을축년(1865년)과 병인년(1866년)의 첨례표( 瞻 禮 表 )가 남아 있다. 첨 례란 교회의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기념하는 축일을 말하며, 첨례표 (축일표)란 이러한 축일을 1월부터 12월까지 날짜순으로 표시한 것이다. 첨례표에는 축일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지켜야 할 여러 지침도 수록되 어 있어, 신자들이 1년 동안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준거로서 역 할 한다. 따라서 을축 병인년의 첨례표는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신앙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 료가 이러한 측면에서 주목된 적은 없다. 물론 조선 후기 신자들의 시간 개념과 관련하여 첨례표를 언급한 논문과 글 1) 들은 있지만, 신자들의 신앙 생활과 관련해서 본격적으로 첨례표가 분석된 적은 없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조선에 도입된 교리서 1) 조현범,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간, 청계논총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1999 ; 조광,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경향잡지 1614호, 2002년 9월호 ; 조광,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경향잡지 1651호, 2005년 10월호 ;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도의 일상생활,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인문화사, 2010 ;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 인들의 시간 세계, 빛 356호, 천주교 대구대교구, 2012년 12월호. 일제 시대(1916~1933년) 의 첨례표 연구로는, 김정환의 글(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첨례표 연구, 제177회 한국교회사연구 소 연구발표회 발표문, )이 있다.

58 58 교회사연구 제42집 기도서 묵상서 첨례서 복음해설서 성인전 등의 서적이나, 신자들이 남긴 서한 저서, 또는 그들의 문초 기록, 선교사들의 서한에 나타나는 내용 들을 토대로 연구되었다. 그리하여 신자들의 교리 지식, 기도 생활, 첨례 모습, 단체 활동 등,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성모 신심 순교 신심 같은 신심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는 점에서, 순교 신심은 박해 시대 한국 교회의 특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은 일정한 한계성도 지닌다. 먼저 서적의 경우 는 보급 범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신자들이 보았는지 불명하 다. 그리고 처음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도입된 서학서들은 조선 교회의 필 요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니라, 중국 신자들을 상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 라서 이 내용들이 모두 조선 교회에 적용되었는지는 의문이며, 앞으로 중 국에서 도입된 서학서 중에 어떤 내용이 실제 조선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 쳤는지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2)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862~1865년 조선에서 간행된 성교일과 성찰기략 성교요리문답 천주성교공과 신명초행 회죄직 지 영세대의 주교요지 천당직로 천주성교예규 성교절 요 쥬년쳠례광익 등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책들은 처음부터 조선 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내용 분석은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적뿐만 아니라 서한과 저서도 남긴 신자가 한정되어 있고, 문초 기 록도 신앙의 습득 배교 순교가 중심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즉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개별적인 또는 개별 분야 2) 이러한 방향의 연구로는, 조한건의 쥬교요지와 한역서학서와의 관계 ( 교회사연구 26, 한국교 회사연구소, 2006)와 셩경직해광익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11)가 있다.

59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59 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신앙생활의 전체적인 틀을 알기에는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첨례표가 주목된다. 첨례표는 1년 동안 신자들이 신 자로서 준수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즉 첨례표에 담긴 내용들은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신앙의 지침이자 실제로 당시에 실천되고 있던 내용들 이다. 따라서 첨례표는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그 특성을 가장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첨례표 분 석 작업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2. 첨례표의 사용 기록상 첨례표와 관련해서 가장 빠른 것은 1791년 권일신의 집에서 나온 신해첨례 ( 辛 亥 瞻 禮 )라는 책이다. 3) 이것은 신해박해 당시 형리( 刑 吏 )들이 양근의 권일신 집에서 압수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의 신자들은 1791년 이전부터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첨례표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첨례표에 따라 주일과 축일에 미 사나 첨례를 거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서학서의 내용을 전수( 傳 授 )하면서 처음으로 영세( 領 洗 )와 첨례( 瞻 禮 )의 법을 알았다거나, 1784~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집 회할 때 신자들이 날짜를 약속하고 모였다 ( 約 日 聚 會 )는 것 5), 그리고 1786년부터 시작된 평신도 성직제(가성직제) 6) 하에서 미사가 집전되었다 3) 승정원일기 정조 15년(1791) 11월 12일 ; 조현범, 앞의 논문, 187쪽. 4) 이 시기 지도급 신자들이 첨례표를 소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들은 첨례표를 토대로 신앙 모임을 주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5) 이만채 편, 김시준 역주, 천주교 전교 박해사(벽위편),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95~96쪽.

60 60 교회사연구 제42집 는 것 7) 등에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790년 이승훈이 윤유일 편에 북경 으로 편지를 보낼 때, 그 날짜를 성령 강림 후 7주일 이라고 쓴 것 8) 은, 당시 이승훈이 전례주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 주일의 정확한 날짜 (7월 11일)까지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신자들은 어떻게 첨례표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들여왔거나 신자들이 독자적으 로 만들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9)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 조선 신자들이 북경을 왕래한 것은 1784년의 이승훈과 1789~1790년의 윤유일, 1793년 의 지황 등 세 차례뿐이다. 따라서 매년 중국으로부터 첨례표를 제공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 신자들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과연 이 시기 신자들이 첨례표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10) 이와 관련해서 1784년 이 승훈이 북경으로부터 가지고 온 서적들이 주목된다. 당시 이승훈은 종교 의 진리에 대한 것 미신에 대한 반박서 칠성사( 七 聖 事 )의 해설서 교리 문답 복음서의 주해( 註 解 ) 그날그날의 성인 행적 기도서 등을 가지고 왔다. 11) 이 중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성경직해 라고 추정되는 복음서의 6) 지금까지 1786년 이승훈 등이 세운 교계제도를 가성직제도 ( 假 聖 職 制 度 )라고 칭해 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가짜, 거짓 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 타당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의 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필자는 이승훈 등이 세운 교계제도가 평신도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평신도 성직제(도) 라고 칭하고자 한다. 이 용어에는 가 ( 假 )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특징인 평신도들의 활동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 최석우, 이승훈 관계 서한 자료,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73, 175쪽. 8) 최석우, 앞의 논문, 177쪽. 9) 조현범, 앞의 논문, 187~188쪽. 10) 조현범은 천주교인들이, 주일은 7일마다 온다, 성탄은 동짓날 사흘 뒤다, 부활절은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춘분이 지난 뒤 만월 후의 주일이다 등, 초보적인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대략적으로 주일과 축일을 계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조현범, 앞의 논문, 188쪽). 11) 샤를르 달레,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307쪽.

61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61 주해 와 수진일과 라고 생각되는 기도서 이다. 먼저 성경직해 는 1년 동안의 주일과 첨례를 소개하고, 각 주일과 첨례에 해당하는 성경 말씀과 그에 대한 해설을 수록한 책이다. 즉 장림 (대림) 시기 예수 성탄 삼왕내조 봉재(사순) 시기 예수 부활 예수 승천 성신 강림 시기 와 관련된 주일과 첨례, 그리고 성모와 성인 들의 첨례에 대한 성경 말씀과 해설이다. 따라서 이 책을 본 신자들은 1년 동안의 교회력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떠한 날들을 기념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이 1790년경에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수의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전례주년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12) 이처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전에 신자들이 교회력의 흐름과 기념해야 할 주일 축일들을 알고 있었다면, 다음으로는 주일과 축일의 구체적인 날짜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주일과 축일의 정확한 월일( 月 日 )을 알아야 주일과 축일을 준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수진일과 이다. 필자가 첨례표와 관 련해서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책 안에 매년 첨례표를 만드는 방법 을 설명한 영첨례표 ( 永 瞻 禮 表 )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필자가 확인한 수진일과 판본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간행 연도를 알 수 없는 것(1)이고 나머지는 1823년에 중간된 책(2)이다. 그런데 1790년에 최 필공이 수진일과 를 소유하고 있었고, 또 그 내용의 일부가 한글로 번역 되어 있었다는 사실 13) 은, 기도서인 이 책이 성경직해 처럼 많은 사람에 게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12) 최석우 몬시뇰은 성경직해 가 일찍이 번역된 것은 필연코 주일과 축일에 사용하기 위한 긴급한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천주교회, 교회사연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24쪽). 13) 이기경 편, 벽위편, 서광사, 1978, 127~128쪽 ; 승정원일기 정조 15년(1791) 11월 11일.

62 62 교회사연구 제42집 1과 2에 수록된 영첨례표 는 내용이 약간 다른데, 1에 수록된 것은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쿠플레(Couplet, 栢 應 理, 1623~ 1693)의 저술이고, 2에 수록된 영첨례표 의 저자는 알 수 없다. 다만 2가 1823년의 중간본이라는 점에서,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보았던 수 진일과 는 판본 1일 가능성이 크며, 이 판본에 수록된 영첨례표 의 내 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첨례표 에는 9가지의 이동 축일을 정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A] 모름지기 먼저 춘분( 春 分 )을 살펴 부활첨례를 계산해야 한다. 만약 춘 분이 보름 전이면, 보름 후에 주일이 있고, 보름 후에 춘분이 들면, 부활첨 례는 다음 달 보름 후 주일로 이동한다. 부활 2일 전(모두 대재)이 예수수 난이며, 예수수난 1일 전이 건정성체대례이다. 성체대례 전 주일이 성지예 의( 聖 枝 禮 儀 )이며, 성지예의 전 40일이 성회(봉재수일)이다. 부활 후 40일 이 예수승천이며, 예수승천 후 10일이 성신강림이다. 성신강림 후 주일이 천주성삼이며, 천주성삼 후 4일이 예수성체이다. 자료 A를 보면, 먼저 춘분을 기준으로 부활첨례날을 정한 다음, 이 날을 토대로 예수 수난, 건립성체대례, 성지예의, 성회례의, 예수 승천, 성 령 강림, 천주성삼, 예수 성체 등 9개의 이동 축일을 차례로 계산하는 방 법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춘계는 성회례의 7일 후에 있고, 하계는 성신 강림 후에 있다. 추계는 성가광영( 聖 架 光 榮 ) 후에 있고, 동계는 루치아[ 路 濟 亞 ] 성녀 축일 후에 있다(모두 첨례 4, 6, 7일과 관계된다) 고 하여, 사계( 四 季 )와 사계 소재( 小 齋 )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셋째, 주일은 곧 시헌력의 28수( 宿 ) 내 방( 房 ) 허( 虛 ) 묘( 昴 ) 성

63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63 ( 星 ) 4일이며, 전 2일은 모두 소재를 지킨다 고 하여, 주일과 소재에 대해 서도 언급하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승훈이 가져온 성경직해 에도 주 일 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 설명에도 聖 敎 每 七 日 立 一 主 日 卽 逢 虛 昴 星 房 太 陽 之 日 是 也 14) 라고 하여, 영첨례표 처럼 주일이 방 허 묘 성 4일임을 말하고 있다. 넷째, 이동 축일 사계 소재 주일에 이어 영첨례표 에는 고정 축일 을 설명하고 있다. 이때 고정 축일의 기준은 예수 성탄인데, 성탄은 동지 ( 冬 至 ) 후 4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탄절을 기준으로, 성탄 하루 뒤가 성 스테파노 축일, 스테파노 축일 하루 뒤가 사도 요한 축일 등과 같은 방식으로 날짜를 계산하여, 삼왕내조, 성모헌당예수, 성 마티아 종도, 성 모 영보, 심획성가, 성 세자 요한 탄생, 성 야고보 종도, 성 라우렌시오, 성모 승천, 성 발도로메오 종도, 성모성탄, 성 마태오 종도, 성 미카엘 대 천사, 성 시몬 타대오 종도, 제성첨례, 추사이망, 성 안드레아 종도, 성모 시잉모태, 성 도마 종도 등의 축일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1년 동안의 대재, 대재와 주일이 겹칠 경우, 대재와 소재가 같은 날일 경우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언급했듯이, 영첨례표 에는 신자들이 1년 동안 지켜야 할 주일 이동 축일 고정 축일 대재와 소재 등을 어떻게 계산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방법에 따르면 특정한 해의 첨례표는 충분히 만들 수 있고, 조선의 신자들 역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첨례표를 만들었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성 원리만으로 첨례표를 만들 수는 없다. 주일과 기준이 되 는 절기의 정확한 날짜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들 14) 聖 經 直 解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58쪽.

64 64 교회사연구 제42집 은 어떻게 구체적인 날짜들을 알았을까? 물론 직접 계산했을 수도 있겠지 만, 이 시기 역서( 曆 書 )의 보급 실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시대 역서는 진상( 進 上 )과 각 관청 및 관료들에게 나누어주는 공건( 公 件 )과 관상감에서 사적으로 가지는 사건( 私 件 )을 계산하여 필요한 수만큼 인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4천 건( 件 ) 정도가 인쇄되었 는데, 이후 점차 수량이 늘어 1791년에는 14,670축( 軸 ), 1797년에는 16,000축, 1798년에는 18,000축의 역서가 인쇄되었다. 15) 그리고 이렇 게 인쇄된 역서 중 사건( 私 件 )은 상인들을 통해 시장에서 일반인들에게 판매되었다. 16) 따라서 조선 후기 역서는 4~5집에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 로 보급률이 높았다고 할 수 있으며, 17) 이에 천주교 신자들도 어렵지 않 게 역서를 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역서는 1653년(효종 4)에 채택된 시 헌력( 時 憲 曆 )이다. 시헌력에는 24절기가 표시되어 있고, 각 날짜는 숫자 간지( 干 支 ) 납음오행( 納 音 五 行 ) 28수( 宿 ) 12직( 直 ) 등 5종류의 시간 주기로 표기되어 있다. 18) 예를 들어 1796년 1월 13일(양력 2. 21)의 경 우, 해당 시헌력에는 十 三 日 庚 申 木 虛 破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19) 이 중 네 번째인 허( 虛 )가 28수에 해당한다. 15) 정성희,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과 반포, 조선시대사학보 23, 조선시대사학회, 2002, 132~ 133쪽. 16) 1885년의 경우, 진상과 관용 역서가 465축 6건, 각 관청에서 사용할 역서가 1,804축 15건인 반면, 관상감 관원들이 관리하던 것이 15,189축이었는데, 이 15,189축이 일반인들에게 판매되 는 것이다(정성희, 앞의 논문, 136~138쪽). 17) 1801년 조선의 인구가 7,513,792명이므로, 이 시기 18,000축의 역서가 인쇄되었다면, 21명당 1개의 역서가 생산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한 가구의 가족 수가 5명이라면 4~5가구당 1개의 역서가 배부될 수 있다. 18) 이창익, 시헌력 역주에 나타난 시간 선택의 의미, 종교문화비평 창간호, 한국종교문화연구 소, 2002, 266~271쪽 ; 이창익, 조선후기 역서의 구조와 의미, 민속학연구 17, 국립민속박 물관, 2005, 238~239쪽. 19) 大 淸 嘉 慶 元 年 歲 次 丙 辰 時 憲 曆 (규장각 소장, 奎 7639).

65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65 따라서 시헌력만 있으면 24절기와 28수의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고, 이것을 토대로 영첨례표 의 원리를 적용하면 쉽게 첨례표를 작성할 수 있다. 즉 춘분이 언제인지를 알 수 있으므로 부활첨례날을 알 수 있고, 부활첨례날을 기준으로 이동 축일을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동지를 알 수 있으므로 예수 성탄 축일을 알 수 있고, 이를 기준으로 여러 고정 축일 의 날짜를 계산할 수 있다. 아울러 주일은 28수의 방 허 묘 성 4일이라 고 했는데, 28수는 시헌력에 표기되어 있으므로 따로 계산할 필요도 없다. 결국 성경직해 를 통한 전례주년에 대한 이해, 수진일과 영첨 례표 에 수록된 첨례표의 작성 원리, 그리고 당시 시헌력의 광범위한 보 급 상황이 맞물리면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부터 조선의 신자들 은 첨례표를 작성하고, 첨례표에 의거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 다. 20) 그리고 이승훈이 1790년 편지의 발신일을 성령 강림 후 7주일 이 라고 쓴 것과 권일신의 집에서 신해첨례 가 발견되고, 1791년 이전에 원 시보(야고보)가 주일과 축일을 지킨 것 21) 등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 해 준다고 하겠다. 3. 첨례표의 내용과 신앙생활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 창설 직후부터 첨례표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했 고, 이러한 생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즉 1800년 12월 최필제가 체포 될 때 압수된 첨례단 ( 瞻 禮 單 ), 1801년 윤현의 집에서 압수된 첨례단, 20) 물론 첨례표에 대한 지식과 첨례표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첨례표를 통해서 라고 생각된다. 21) 3장의 자료 C 참조.

66 66 교회사연구 제42집 1817년 조숙을 체포시킨 축일표, 1865년과 1866년에 제작된 첨례표 등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첨례표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을까? 1866년의 첨례표를 중심으로 그 내용과 그 속에 담겨있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주일 첨례표에는 1년 동안의 주일이 표시되어 있다. 주일은 7일에 한 번씩 오는 것으로, 주일이 어떤 날인지는 1865년에 간행된 쥬년쳠례광익 에 잘 설명되어 있다. [B] 1년 안에 52주일이 있으니 천주를 공경하는 날이라. 천주가 비로소 만 물을 만드실 때 엿새에 다 갖추시고 제 7일에 공부를 파( 罷 )하시고 세상 사 람을 명하사 이 날을 삼가 지키게 하신지라. 고로 성교회에서 매양 7일마다 한 주일을 세우니, 무릇 교( 敎 )에 있는 자는 마땅히 백공( 百 工 )을 파하고 친 히 성전에 나아가 미사를 참예하고 도리를 들을 것이오. 또한 마땅히 국왕 과 부모와 만민과 친우와 자기를 위하여 고루 고루 복되이 그느르시 22) 기를 정성으로 기구하며, 또 세상 사람들이 진주( 眞 主 )를 알아 공경하기를 구할 지니, 이 같이 하여야 주일의 예를 다하여 신익( 神 益 )을 얻으리라. 23) 즉 주일은 천주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날로, 천주를 공경하는 날이다. 따라서 교우들은 이날에 모든 일을 중지하고 성전에 나가 미사에 참여하 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B의 내용은 聖 年 廣 益 (저자 미상)에 수록된 主 日 의 내용과 같다. 그리고 聖 經 直 解 의 주 일 설명과도 거의 같다. 다만 聖 經 直 解 에는 B의 내용 중 밑줄 친 부 22) 그느르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아 보살펴 주다. 23) 쥬년쳠례광익 1, 주일.

67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67 분 대신에, 방 허 묘 성이 태양과 만나는 날이 주일이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다른 책과는 달리 주일이 언제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통해, 조선의 신자들은 주일이 언제이며, 어떤 의미의 날이며, 그날에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 데 聖 年 廣 益 과 聖 經 直 解 는 1784년 이승훈이 가지고 온 책으로, 주 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읽히던 서학서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의 설립 초기부터 주일의 시기 의미 할 일 등에 대해 정확 히 알고 있었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주일을 준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원시보(야고보)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C] 그는 주일과 축일에는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모든 사람을 청하여 먹 게 하였다. 사람들이 모이고 나면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주의 날 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 날을 지내야 하고, 또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천주교의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24) 위의 자료는 홍주 사람으로 1799년 청주에서 순교한 원시보가 1791년 이전에 활동하던 내용이다. 원시보는 주님의 날인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 야 함을 알고 있었고, 이를 자선과 함께 실천하고 있었다. 25) 2) 소재와 대재 주일에 이어 첨례표에는 소재( 小 齋 )와 대재( 大 齋 )를 지키는 날이 표 시되어 있다. 한불자전 ( 韓 佛 字 典 )에 따르면 소재는 음식을 절제하거나 24) 한국천주교회사 상, 417쪽. 25) 이처럼 원시보가 홍주에서 주일과 축일을 제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주일과 축일이 표시된 첨례 표를 가지고 있었거나 그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68 68 교회사연구 제42집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며, 대재는 단식을 의미한다. 소재는 사계( 四 季 ) 소재와 일반 소재로 나뉜다. 사계 소재란 춘 하 추 동 사계절의 일정한 날(첨례4-수, 첨례6-금, 첨례7-토)에 지켜야 하는 재 26) 이다. 이 재를 지키는 이유는, 첫째 천주의 자비하심으로 오곡이 풍 성하기를 구함이고, 둘째는 천주께 성교회에 항상 좋은 감목과 탁덕을 주 시어 열심히 성교 일을 다스리게 해 주시기를 구함이다. 27) 사계 소재 외에 영첨례표 에는 주일 2일 전(첨례6)에 소재를 지키도 록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첨례표를 보면 이러한 규정에 맞게 표시된 소재 일은 1866년 1월 2일밖에 없다. 그리고 나머지 소재일은 특정한 축일, 즉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예수 승천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축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성 라우렌시오 치명 축일 성모몽소승천 성 발도로메오 사도 축일 성 마태오 사도 축일 제성첨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의 전날에 표시되어 있다. 첨례표의 소재 표시와 관련해서, 먼저 주일 2일 전에 지켜야 하는 소 재가 한 번밖에 표시되지 않은 것은, 소재를 지킬 날을 신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첨례표에는 하루만 표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 고 특정한 축일 전날에 소재를 지킨 것은, 이 축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 각한 결과인데, 특히 사도들의 축일이 거의 대부분 포함된 것으로 보아, 당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사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대재의 경우는, 수진일과 에 수록된 영첨례표 에 1년 동안의 대재는 9일, 즉 성회( 聖 灰 ) 후 7번의 첨례6과 부활 1일 전 및 성탄 26) 1866년의 첨례표상 춘계 소재는 1월 7일 9일 10일, 하계 소재는 4월 9일 11일 12일, 추계 소재는 8월 11일 13일 14일, 동계 소재는 11월 13일 15일 16일이다. 27) 쥬년쳠례광익 1, 사계 소재 ; 聖 年 廣 益, 四 季 減.

69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69 1일 전 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첨례표에도 9번의 대재가 영첨례표 에 규정한 날에 표시되어 있다. 대체로 사순 시기에 대재가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재와 대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며 온전히 자신을 그리 스도께 봉헌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과 이웃에 대 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금식하여 절약한 음식으로 가난 한 이웃들을 돕는 의미도 있다. 아울러 금식재( 禁 食 齋 )는 속죄와 정화, 수 행과 극기를 위한 적절한 방편이라고도 한다. 28) 이러한 의미의 금식재는 성경직해 에도 언급되고 있다. 즉 재( 齋 )를 지킴으로써 얻은 이익을 설명하는 한편, 음식을 절제하는 육신의 재보다 는 죄악을 제거하는 영성( 靈 性 )의 재를 긴요한 재라고 하였고, 절약한 음 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선재( 善 齋 )라는 어느 성인의 말도 소개하고 있다. 29) 이러한 내용들이 신자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 다. 하지만 김세박(암브로시오)이 1791년 대소재를 지키지 못하게 하며 천주교를 욕하는 아내 때문에 집을 떠난 사실, 1801년 황사영이 백서 에서 신자들의 대소재 관면을 요청한 것, 1811년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소재의 관면을 요청한 것과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다만 대재나 지키고 경문을 외울 줄밖에 모른다 는 표현, 1866년 감옥 안에서도 대소재를 지킨 손자선 성인 30) 등의 사례로 보아, 박해 시대 신 자들은 대소재를 엄격히 지키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28) 정진석, 금식재, 한국가톨릭대사전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1073쪽. 29) 聖 經 直 解 I, 417~428쪽. 30) 백서 119~120행 ; 한국천주교회사 중, 26~27, 35, 117쪽 ; 한국천주교회사 하, 442~ 443쪽.

70 70 교회사연구 제42집 3) 축일 첨례표에는 교회에서 기념해야 할 여러 축일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 에는 주님과 관련된 축일과 성모 마리아, 천사들, 성인들과 관련된 축일들 이 있다. (1) 주님의 축일 오늘날 교회의 전례력은 1년을 주기로 부활 시기, 성탄 시기, 연중 시기로 구분되며, 부활과 성탄이 그 중심을 이룬다. 박해 시대 역시 성 탄 삼왕내조 봉재(사순) 부활 승천 성신 강림 이라는 흐름 속에 그리스도의 생애와 신비가 전례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첨례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첨례표를 통해 일찍부터 전례주년에 익숙해 있었다. 신자들은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수난 속에 십자 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부활 승천했다 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권에 있는 예수의 강생-수난-부활-승천 이야기 는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서술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최해두가 자책 에 서 그리스도의 강생구속( 降 生 救 贖 )에 대해 언급한 것과 1827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경언이 형벌의 고통 속에 예수의 수난을 상기한 것 31) 도 마찬가 지의 예가 될 것이다. 기해박해 당시 수난대재날(예수고난) 오주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며 밤새워 통곡하였다 는 김성임(마르타) 성녀 32) 와 예수의 수난을 자주 기 억하며, 몸이 편하면 제자의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여겨 가시나무를 머리 에 얹고, 방아도 찧으며, 잠도 적게 잤다 던 이국후(엘리사벳) 33) 순교자의 3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101쪽. 32)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510쪽.

71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71 표 1 첨례표의 주님의 축일 축일 날짜 1 성회례의, 봉재 고난 주일 성지 주일 건립성체대례 예수고난 망예수부활 예수부활 주일, 개재 사백주일 심획십자성가 예수 승천 성신 강림 주일 천주성삼 주일 예수 성체 예수 성심 예수보혈 주일 예수 현성용 주일 성가광영 장림 수주일 망 예수 성탄 예수 성탄 예수 수할손례 삼왕내조 찬송 예수성명 주일 사례도 있다. 아울러 당시 신자들이 부활첨례를 성대히 지낸 사실 34) 에서 도, 첨례표를 토대로 주님과 관련된 축일을 기념하며 신앙생활을 전개하 33) 김영수 번역, 박순집증언록, 성황석두루가서원, 2001, 99쪽. 34) 한국천주교회사 상, 458쪽 ; 한국천주교회사 중, 52쪽.

72 72 교회사연구 제42집 던 신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편 1865년 첨례표에는 1866년 3월까지, 1866년 첨례표에는 1867년 4월까지의 주일과 축일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다음 해의 첨례표 일부를 신자들에게 미리 알려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부활 신앙과 좀 더 관련이 깊지 않은가 생각된다. 즉 1865년 첨례표에 실린 1866년 첨례 표는 3월 26일 예수 승천, 3월 29일 주일에서 끝나고, 1866년 첨례표에 수록된 1867년 첨례표는 4월 27일 예수 승천에서 끝난다. 그리고 이어서 성신 강림 주일이 시작된다. 35) 결국 1865년과 1866년 첨례표에 수록된 1866년과 1867년 첨례표 는 부활 시기까지 표시된 것이며, 이것은 당해 연도의 첨례표가 만들어질 때, 다음 해의 부활 시기까지 신자들이 기억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36)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부활 신앙을 고취시켰다고 생 각하며, 이렇게 고취된 부활 신앙은 다시 순교 신심으로 이어져 한국 교회 에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2) 성모 축일 첨례표에는 성모 마리아의 축일들도 표시되어 있다. 표 2 에서 알 수 있듯이, 성모 축일은 예수 관련 축일 다음으로 많은데, 이것으로 보아 박해기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쥬년쳠례광익 (1865년)의 성모성탄 항목에 소개된 성모 마리아 의 역할, 즉 성모 마리아를 통해 병든 자가 나음을 얻고 죄 있는 자가 35) 1866년과 1867년의 예수 승천 날짜가 1달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1865년에 윤달이 있었기 때문이다. 36) 김정환 신부가 제공해 준 일제 시대의 첨례표(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에는 양력 1~12월까지만 수록되어 있어 1865~1866년의 첨례표와 다르다. 이것으로 보아 16개월씩 수록된 박해 시대의 첨례표는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특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하겠다.

73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73 사함을 얻으며, 근심하는 자가 위로를 얻는다는 것, 그리고 성모 마리아 가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 37) 라는 것은, 박해기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성경직해 에도 쥬년쳠례광익 처럼 성모성탄첨례 항목이 있으 며, 성모에 대한 성경직해 의 설명도 쥬년쳠례광익 의 내용과 비슷하 다. 38) 즉 성모는 항상 자비한 마음을 열고 있어, 사로잡힌 자( 虜 人 )가 놓임을 구하면 놓이게 하고, 착한 사람이 나아가기를 구하면 나아가게 하 고, 죄인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고, 병든 자가 낫기를 구하면 낫게 하고, 표 2 첨례표의 성모 축일 축일 날짜 1 성모취결례 성모 통고 성모 영보 성모왕고 성부 이사벨 성모 성의 성모 설지전 성모몽소승천 성모성탄 찬송 성모성명 주일 성모 칠고 매괴주일 성모자헌 성모시잉모태 (동 성 요셉) 동국대주보 ) 성모 나시매 사로잡힌 자 놓임을 얻고 병든 자 나음을 얻고 죄 있는 자 사함을 얻고 근심하는 자 위로를 얻고, 선인에게는 총복을 더으시고 성모는 동정의 표준이요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오, 선인의 스승이시오, 죄인의 의탁이시오, 병인의 나음이시오 ( 쥬년쳠례광익 2, 성모성탄 ; 이재순, 周 年 瞻 禮 廣 益 의 分 析, 한국교회사논문집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407쪽). 38) 성경직해 10권은 성모첨례 만을 모아놓은 것인데, 첫 쪽부터 7쪽에 걸쳐 성모 에 대한 설명 을 한 후, 표 2 의 13, 8, 4, 7 첨례에 대한 성경 말씀과 해설을 싣고 있다.

74 74 교회사연구 제42집 근심하는 자가 위로를 구하면 위로해 준다. 39) 또 성모는 하늘에 있는 별(남 북극성)과 같아, 그 자비심은 항상 일정하고 변함이 없다. 그러므 로 보고 바랄 수 있고, 생각하고 본받을 수 있으므로, 길[ 路 ]이 좋지 않더 라도 (성모를 기준으로 해서) 천당에 이를 수 있다 40) 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신자들은 초기부터 성경직해 등을 통해 성모가 어 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성모 신심도 점차 깊어졌다고 생각 한다. 41) 그 결과 1791년에 순교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순 교 전에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여러 번 불렀으며, 1798년에 순교 한 이도기(바오로)도 순교 전에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하례하나이다 라 고 외쳤다. 홍낙민(루카)은 성모의 전구에 대한 믿음으로 매일 묵주신공을 바쳤으며, 1801년 공주에서 순교한 이종국은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천당 복을 누리러 간다 고 하였다. 42) 1811년에는 신자들이 북경에 보내는 서한에서, 성모님께 하느님의 의 노( 義 怒 )를 푸시어 신자들이 7성사에 참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으 며, 43) 1845년 김대건 신부는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동정 성모의 상 본을 선원들에게 보이며 성모의 구원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1838년에 원 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를 조선 교회의 주보로 신청하여 1841년에 교황청의 허락을 받았고, 1861년에 조선 선교지를 8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성모 축일로 명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44) 39) 聖 經 直 解 II, 359쪽. 40) 聖 經 直 解 II, 361쪽. 41) 성경직해 와 같은 복음해설서가 당시 신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김진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하느님 말씀 살이 성경직해광익을 중심으로,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 대학교, 2005 참조. 42) 한국천주교회사 상, 354, 408, 451~452, 455쪽. 43) 한국천주교회사 중, 22~23쪽, 44) 한국천주교회사 하, 69, 137, 324쪽,

75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75 그런 가운데 조선에는 성모와 관련된 신심 단체도 설립되었다. 기해 박해 때 순교한 남명혁(다미아노)은 성의회( 聖 衣 會 )의 회원이었고, 병인박 해 때 순교한 이문홍(바오로) 회장도 성모의 정덕( 貞 德 )을 추모하여 성의 회에 가입했다 는 기록이 있다. 45) 그리고 성의회와 비슷한 시기에 매괴회 가 설립되었고, 1846년에는 성모성심회도 설립되어 있었다. 46) 후술하겠 지만, 이러한 신심회와 관련된 내용도 첨례표에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박해 시대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전구자로 굳게 믿었으며, 이에 수많은 순교자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하였다. 그리고 성의회 매괴회 성모성심회 등 성모와 관련된 신심 단체가 3개나 설립되어 있었다 는 점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모 축일, 성모신심회와 함께 첨례표에는 성모 신심의 증거가 또 하 나 표기되어 있다. 즉 1866년 첨례표에 양력 5월의 시작과 끝인 3월 17일 (양력 5월 1일)과 4월 17일(양력 5월 30일)에 성모 성월 시작, 성모 성월 종 이라는 표기가 있다. 이 표기는 1865년의 첨례표에는 없는데, 이것으 로 보아 성모 성월은 1866년부터 조선 교회에서 시행하려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성모 성월의 존재는 박해 시대 신자들의 성모 신심을 보 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하겠다. (3) 성인 천사 축일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지고 온 책 중에, 그날그날의 성인 행 적 이 있다. 이 책은 聖 年 廣 益 이라고 추정되는데, 1년을 주기로 날마다 그 날이 축일인 성인들의 전기를 수록하고 있다. 聖 年 廣 益 은 도입 직후 45) 한국천주교회사 중, 393쪽 ;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현대문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275쪽. 46) 이 시기 단체에 대해서는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5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참조.

76 76 교회사연구 제42집 표 3 첨례표의 성인 천사 축일 성인 날짜 1 성 마티아 종도 성 요셉 (성모) 동국대주보 성 가브리엘 대천신 성 요셉 은보 성 말구 성사 성 필립보 야고보 2위 종도 성 발라바 종도 성 요한 세자 탄 성 베드로 바오로 2위 종도 성녀 막달레나 성 야고보 종도 성부 안나 성 라우렌시오 치명 성 요아킴 성 발도로메오 종도 성 마태오 종도 겸 성사 성 미카엘 대천신 호수천신 성 루가 성사 성 라파엘 대천신 성 시몬 다두 2위 종도 성 안드레아 종도 성 방지거 사베리오 동국대주보 성 도마 종도 성 스테파노 수선치명 성 요왕 종도 겸 성사 성 바오로 귀화 여러 신자에게 읽혀졌으며, 1801년에 압수된 서적 중에는 한글본 셩년 광익 도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의 신자들은 일찍부터 가톨릭의 성인

77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77 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신자들은 성인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례명을 짓는데, 그 성인은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주보성인은 박해 시대 신자들의 삶의 모델이며, 특정한 주보성인의 선택은 주보성인처럼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결과 주보성인에 대한 특별한 신심까지 일어나게 된다고 하 겠다. 47) 표 3 은 첨례표에 수록된 성인과 천사 관련 축일인데, 여기에는 모 든 사도와 복음사가들이 있고, 3명의 대천사와 호수천신이 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가족(안나 요아킴 요셉)과 동국대주보(성 요셉 성 프란 치스코 사베리오)가 있으며, 2명의 치명자(성 라우렌시오 성 스테파노) 가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성녀 막달레나 및 바오로 성인의 회두 사건을 기념하는 성 바오로 귀화 축일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박해 시대 신자들은 표 3 에 있는 성인과 천사들을 공적으로 기념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물론 첨례표에 수록된 성인 축일은 조선 교회에서만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첨례표에 수록된 성인 축일을 공적으로 기념 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공경심도 깊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예 는 신자들의 세례명에서도 나타난다. 즉 1801년 이전에 세례명을 알 수 있는 남자 신자의 54.3%가 사도였는데, 48) 이것은 사도들의 축일이 첨례 표에 수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첨례표에는 성 요셉 축일(2. 3)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축일 (10. 27), 그리고 표 2 의 성모시잉모태 축일(11. 2)에 동국대주보라는 47) 박해 시대 세례명을 짓는 과정과 세례명의 특징, 의미에 대해서는, 방상근, 18세기말 조선 천주 교회의 발전과 세례명, 교회사연구 3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참조. 48) 방상근, 앞의 논문, 79쪽.

78 78 교회사연구 제42집 표기가 있다. 이것은 당시 조선 교회의 주보이신 성 요셉과 원죄 없이 잉태 되신 성모 마리아를 신자들에게 기억시키고, 두 주보의 도움으로 조선 교 회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성 요 셉 축일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축일에 성모와 성 요셉을 부기 ( 附 記 )하고 있는 것은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을 조선 교회의 주보로서 함께 기념하던 당시의 교회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49) 다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은 1748년에 희망봉에서부터 인도 중국 일본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 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사 베리오 성인이 주보인 동국은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여러 나라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50) 즉 인도 일본에 복음을 전하고 중 국까지 진출하려다 선종한 성인을 동양 선교의 주보로 기억하면서, 성직자 가 없던 시기 성직자의 파견과 신앙의 자유를 꿈꾸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의 신자들이 첨례표상의 성인들만 공경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01년 이전에 이미 성년광익 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 었고, 쥬년쳠례광익 (1865)에도 첨례표에 수록되지 않은 31명의 성인 들이 더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신자들은 첨례표상의 성인 축일을 공적으로 지내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성인전을 읽고 다른 성인들의 삶도 본받으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동정녀 심 바르바라가 성인 들의 생애에서 보았던 위대한 모범에 감동하여 결혼을 단념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 51) 이나, 문영인(비비안나)이 성인들 49) 천주성교공과 권3의 성모시잉모태 찬미경 에도 동국대주보 성 요셉에 대한 기도 가 함께 수 록되어 있다(이정운, 한국천주교회의 주보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재인식과 3000년기 한국교 회,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대학교, 2005, 307~308쪽). 50) 조광 교수의 교시( 敎 示 ). 천주성교공과 권3의 성방지거 사베리오 도문 에도 인도국과 동방의 으뜸 탁덕이신 성방지거 동방 성교의 근기여 전능하신 천주여 이미 성방지거의 전교함과 영적 으로 동방 여러 나라 사람을 성교회에 모이게 하신지라 라는 대목들이 있다. 51) 한국천주교회사 상, 471~472쪽.

79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79 의 전기를 읽고 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을 따라 순교하 려는 원을 드러냈다 52) 는 것 등은 당시 신자들의 성인 공경 의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4) 단체 활동 첨례표에는 신자들의 단체 활동과 관련된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즉 매괴회, 성의회, 예수성심회, 성모성심회, 전교회 등 5개 단체와 관련된 날을 표시하고, 매양 자기든 회 보람을 지키는 회우가 고해 영성체하고 마땅히 행할 신공을 지키면 전대사를 얻느니라 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리고 예수성심회 규구 도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1865년의 첨례표에도 있는 것이다. 단체와 관련해서 첨례표에는 예수성심회의 표시가 있는 날이 25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매괴회 19일, 성의회 13일, 성모성심회 10일, 전교회 4일 순이었다. 그리고 단체의 기념일이 겹치는 경우는, 연관성은 알 수 없지만 매괴회와 예수성심회가 14일로 가장 많았고, 단독으로 기념하는 날은 성의회가 10일로 가장 많았다. 5개의 단체 중 성모성심회는 1846년 11월 2일 수리치골(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에 설립되었고, 매괴회와 성의회는 1846년 이전에 이미 조 선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단체들은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것으 로, 조선 교회의 성모 신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하겠다. 한편 1857년경에 설립된 전교회는 신심 단체는 아니다. 선교사들의 선교 사업을 돕기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는 단체이다. 프랑스 리옹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전교회는 각지의 회원들로부터 수합된 회비를 전교 지역에 보냄 52) 한국천주교회사 상, 504쪽.

80 80 교회사연구 제42집 표 4 첨례표의 단체 관계표 단체 함께 기념하는 단체 날 수 비고 매괴회(19) 예수성심회(25) 성모성심회(10) 성의회(13) 전교회(4) 매괴회 단독 2 성모성심회 1 성의회 3 예수성심회 14 전교회 0 예수성심회 단독 7 성모성심회 4 성의회 0 매괴회 14 전교회 2 성모성심회 단독 5 매괴회 1 예수성심회 4 성의회 1 전교회 2 성의회 단독 10 성모성심회 1 매괴회 3 예수성심회 0 전교회 0 전교회 단독 2 예수성심회 2 성모성심회 2 매괴회 0 성의회 0 성모성심회 + 성의회(1) 성모성심회 + 전교회(2) 매괴회+성의회(1) 예수성심회 + 전교회(2) 성모성심회 + 매괴회(1) 예수성심회 + 성모성심회(2) 으로써 천주교의 선교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는 1857년경에 전교회가 설립되어 정의배(마르코) 회장이 회원을 모집하고 회비를 관리한 듯하다. 특히 1857년 1년 동안 최양업 신부가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81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81 가입시킨 것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박해 지역의 신자들이 나눔의 정신을 가지고 선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사례라고 하겠다. 53) 다음으로 예수성심회는 1865년의 첨례표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865년 이전에 조선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865년 첨례표에 예수성심회 규구 가 소개되고, 또 첨례표에 5개의 단체 중 예수성심회 와 관련된 날이 가장 많은 것은, 이즈음 교회가 예수성심회를 적극적으로 장 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예수성심회가 강조되면서 예수 성심 에 대한 신자들의 신심도 점차 커져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9세기 중반 조선의 신자들은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신앙생활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체 활동은, 신앙 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또 성직자들을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신자들의 신앙심을 강화시키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신자들 의 신심회 가입을 적극 권장했다. 54) 아울러 신자들도 신심회에 가입하면 전대사( 全 大 赦 ) 55) 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또 장차 천당에서 아름 다운 결실을 거둘 수도 있다고 함으로, 56) 신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심회를 포함한 단체 활동은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첨례표에 신심회와 관련된 날들을 표시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신심회와 관련된 날이 48일로 상당히 많았는데, 이 숫자는 첨례표에 내용이 표시된 121일의 40%에 달하는 것 53) 전교회에 대해서는, 방상근 앞의 책, 179~180쪽 참조. 54)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다블뤼 신부의 활동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교우 집단에 도착하 면, 신자 수가 적기 때문에 흔히 24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하게 됩니다. 일찍부터 미사성제를 드리고 성체를 영하여 주고 견진과 혼배성사를 주고, 그 다음에는 매괴회 와 성의회 에 입회를 시켜야 합니다 ( 한국천주교회사 하, 94쪽). 55) 죄에 대한 유한( 有 限 )한 벌을 모두 취소할 수 있는 사면. 56) 미과수원 (필사본), 1886.

82 82 교회사연구 제42집 이다. 따라서 박해 시대 신자들은 1년 중 3일에 한 번은 주일 대소재 축일 중 한 날을 지켰고, 1주일에 한 번은 신심회와 관련해서 신공을 바쳤 다고 하겠다. 한편 교회에서는 신심회에 들지 못한 신자들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 는 길도 열어두었다. 즉 신심회에 들기 위해서는 신부에게 입회 의사를 밝혀야 하는데, 신부를 만날 수 없는 경우에는 신심회에 들지 못해 전대사 를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없게 된다. 그런데 첨례표에 부기된 내용을 보면, 공번 표시가 되어 있는 날에는 신심회에 든 이나, 아니든 이나, 모든 교우가 고해 영성체하고 마땅히 행할 신공을 지키면 전대사를 얻는다 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날로는 성 요셉 동국대주보, 예수 성체, 성 베드로 바오로 이위 종도, 성모몽소승천, 호수천신, 성 프란치스코 사베 리오 동국대주보 축일 등이 있었다. 5) 파공 첨례표에는 파공( 罷 工 )에 대한 내용도 있다. 즉 파공과 대파공, 그리 고 파공하지 않아도 되는 축일 등이 표시되어 있다. 파공하는 날은 모든 주일과 성모취결례, 성모 영보, 예수 승천, 예수 성체, 성 요한 세자 탄, 성 베드로 바오로 이위 종도, 성모성탄, 성모시잉 모태, 예수수할손례, 삼왕내조 등 10일이며, 57) 특히 전일을 파공해야 하 는 대파공은 예수 부활 주일, 성신 강림 주일, 성모몽소승천, 예수 성탄이 다. 따라서 이 14일은 주일과 함께 축일 중에서도 중요한 축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자들도 이러한 축일의 성격을 알고 신앙생활을 영위했을 것 으로 생각한다. 57) 1865년 첨례표에는 예수고난과 성 요셉 동국대주보 축일도 파공으로 되어 있다.

83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83 다만 조선 교회의 경우, 중국이나 통킹, 그 밖의 몇몇 극동 지방의 포교지에서와 같이 교황청의 허락하에 신자들은 주일 정오부터는 일을 할 수 있었다. 58) 그러나 1846년에 순교한 한이형(라우렌시오)은 아무리 농 사일이 바빠도 파공날 오후에는 절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관면 을 통해 일을 할 수 있었지만 파공 의무를 지키고자 한 것이며, 이러한 한이형의 모습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준수하려 했던 신자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외 나머지 축일들은 파공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러한 날에도 모든 교우가 첨례와 파공의 본분이 있지만, 힘써 지키면 공이 있고, 지키지 못 해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 라는 설명을 붙여 파공을 권장하고 있다. 59) 한편 첨례표에는 파공 관면과 관련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즉 예수 성체( 양 5. 30) 성 요한 세자 탄일( 양 6. 24) 성 베드로 바오로 이위 종도( 양 6. 29) 축일인 세 날은, 농사 하는 사람에게 가장 긴급한 때이므로, 주교가 교황의 은혜를 받아 파공을 특별히 관면하되 첨례는 마땅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세 날 중에 주일이 있으면 그날은 관면하지 않으며, 또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은 이 관면 에 해당하지 않는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농번기에 대한 교회의 배려를 보여주는 것인데, 위의 세 축일이 속해있는 양력 5월 말에서 6월은 농부들에게는 매우 바쁜 시기 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주일과 함께 예수 성체, 성 요한 세자 탄일, 성 베드로 바오로 이위 종도, 예수 성심, 성 바르바라 종도 등의 축일이 들어 58) 한국천주교회사 하, 129쪽 ; 한편 쥬년쳠례광익 1권 주일 항목에는, 주일과 파공 첨례 때 가장 빈궁한 사람만 반일 파공을 허락한다고 되어 있다. 즉 가난한 사람은 오후에 일을 할 수 있는데, 속여서는 안 되며, 만일 반일 파공도 하지 않으면 승천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59) 천주성교공과 권2의 첨례하는 규식 에도 파공할 본분이 없는 첨례에는, 비록 첨례를 할 본분 은 없으나 하는 것이 좋으니, 할 때에는 초행공부와 해당 첨례의 기도문과 찬미경과 성모를 찬송 하는 경과 이완공부(마침 기도)를 염해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84 84 교회사연구 제42집 있다. 이 중 예수 성심과 성 바르바라 종도 축일은 파공 축일이 아니므로 상관없지만, 나머지 세 축일은 파공 축일이기 때문에 농부들에게는 시기 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에 교회에서는 농번기에 대한 배려로 농부 들에 한해 이 세 날의 파공을 관면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날이 주일인 경우는 관면을 허락하지 않아, 주일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엄격하 게 준수토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 장림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 는, 혼인 음식과 의복을 화려하게 하는 것을 엄금한다 라고 함으로써, 대 림 시기에서 성탄 시기, 사순 시기에서 부활 시기까지 신자들이 검소하고 경건하게 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첨례표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살 펴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첨례표는 모든 신자가 신자로서 준수해야 할 내용과 그것을 언제 실천할지를 알려주는 신앙 지침표이다. 여기에는 당 시의 신자들이 실제로 지키고 실천한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이러한 점에 서 첨례표는 박해 시기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첨례표에는 주일과 대소재, 주님과 성모 성인들의 축일, 신심회와 관련된 날, 파공에 대한 규정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신자들은 첨례 표에 정해진 날짜와 규정대로 이러한 내용들을 실천했다. 즉 주일과 축일 에는 미사와 첨례에 참석하여 주님의 거룩한 날을 지켰고, 관련 성인들을 기렸다. 그러면서 우리를 위해 강생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굳

85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85 게 믿었고, 성모 축일과 3개의 성모신심회, 성모 성월을 통해 전구자로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성인들의 첨례 때에는 조 선 교회의 주보와 12사도, 복음사가, 치명성인 등을 기억하며, 성인들의 삶을 본받는 기회로 삼았다. 다음으로 대소재가 표시된 날은 금육과 금식을 철저히 지켰으며, 신 심회에 가입한 후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날에는 전대사를 얻기 위해 기도 를 바쳤다. 그리고 파공으로 규정된 날에는 생업을 쉬었다. 특히 첨례표에 는 신심회와 관련된 날들이 많았는데, 이것은 성직자들의 사목적인 고려 와 신자들의 신앙적인 필요성이 결합되어 신자들의 신심회 가입이 활발했 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상의 것들이 박해 시대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이후 일상적인 기도 생활, 교리 공부, 전교와 같은 교회 활동 을 하였고, 성직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성사도 받았다. 그리고 십계명을 준 수하는 등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으며, 그러다가 박해가 일어나 체포 되면 배교하거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다. 이처럼 첨례표에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모두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첨례표에 있는 내용들은 공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실천이 요구된 다는 점에서,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실질적인 신앙생활과 신앙생활의 기본 틀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60) 한편 병인박해 이후 정의배 성인의 부인인 피 카타리나가 첨례표를 60) 첨례표상의 주일과 첨례는 천주성교공과 의 주년주일 주년첨례 목록과 같다. 따라서 박해 시대 신자들은 첨례표상의 주일과 첨례날에 천주성교공과 에 있는 해당 주일과 축일의 내용으 로 예식을 거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보아 첨례표는 당시의 첨례서, 기도서 등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활용되었다고 하겠다. 아울러 1862년 최형의 책임하에 성교일과 를 3,000여 질, 성찰기략 을 1,000여 권 간행한 사실은, 당시 교회 서적의 분포 범위가 매우 넓었 음을 보여주는데, 을축년 병인년 첨례표도 인쇄본이라는 점에서 상당수가 인쇄되어 신자들에게 배포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86 86 교회사연구 제42집 만들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 지 에 1889년 첨례표가 소개된 것으로 보아, 1866년 이후 선교사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자들은 첨례표를 만들어 신앙생활을 했고, 신앙의 자 유 이후에는 다시 인쇄된 첨례표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투고일 : 심사 시작일 : 심사 완료일 :

87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87 참고 문헌 1. 자료 백서 승정원일기 聖 年 廣 益 쥬년쳠례광익 천주성교공과 聖 經 直 解 미과수원 大 淸 嘉 慶 元 年 歲 次 丙 辰 時 憲 曆 (규장각 소장, 奎 7639). 이기경 편, 벽위편, 서광사,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만채 편, 김시준 역주, 천주교 전교 박해사(벽위편), 국제고전교육협 회,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현대문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김영수 번역, 박순집증언록, 성황석두루가서원,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저서 논문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빛 356호, 천주교대구대교 구, 2012년 12월호. 김정환,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첨례표 연구, 제177회 한국교회사연구 소 연구발표회 논문,

88 88 교회사연구 제42집 김진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하느님 말씀 살이 성경직해광익을 중 심으로,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대학교,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천주교사 연구 (5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18세기말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과 세례명, 교회사연구 34, 한국교회사연구소, 샤를르 달레,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이재순, 周 年 瞻 禮 廣 益 의 分 析, 한국교회사논문집 II, 한국교회사연 구소, 이정운, 한국천주교회의 주보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재인식과 3000년 기 한국교회, 이성과 신앙 29,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창익, 시헌력 역주에 나타난 시간 선택의 의미, 종교문화비평 창간 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2., 조선후기 역서의 구조와 의미, 민속학연구 17, 국립민속박 물관, 정성희,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과 반포, 조선시대사학보 23, 조선시 대사학회, 조 광,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경향잡지 1614호, 2002년 9월호.,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경향잡지 1651호, 2005년 10월호., 조선후기 천주교도의 일상생활, 조선후기 사회와 천주교, 경 인문화사, 조한건, 셩경직해광익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2011.

89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89 조현범,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간, 청계논총 1, 한국정신문화연 구원 한국학대학원, 최석우,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천주교회, 교회사연구 2, 한국교 회사연구소, 1979., 이승훈 관계 서한 자료, 교회사연구 8,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90 90 교회사연구 제42집 ^_pqo^`q Roman Catholics Religious Life in the late Joseon Period through the Liturgical Calendar Bang, Sang-Keun Research Foundation of Korean Church History The Roman Catholic Church has its own annual cycle named the Liturgical Calendar which is structured with the life of Jesus Christ including the birth, death, resurrection and ascension of Jesus. Roman Catholics lead a religious life according to the Liturgical Calendar and keep their identity as a believer. This kind of one-year period as a Roman Catholic existed during the Joseon period as well, and its trace can be found in the Liturgical Calendar in 1865 and This Roman Catholic Calendar includes various instructions for followers as well as feasts. It played a guideline for believers to live a Roman Catholic life for one year. Therefore, this calendar is important data which describes the religious life of Roman Catholics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The believers during the Joseon period understood liturgical year through books such as Sung-Gyeong-Jik-Hae and figured out how to prepare the calendar through the perpetual calendar in Su-jin-il-gwa. Therefore, made the calendar before Father Zhou Wen-mo, the first missionary priest in Korea, was invited into Korea. They lived a religious life according to the calendar. In the calendar, the Sabbath, fasting, abstinence, feasts of the lord, Marian feasts, days of confraternities, feast of all Saints and rules on rest from servile works. Believers observed these rules on the designated date according to the calendar. Of course, not all their religious life was reflected on the calendar. However, the information on the calendar is a framework for their religious life

91 첨례표 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91 during the age of persecution because it requires all followers to observe. Meanwhile, since the Byeongin Persecution, Catarina, St. Chung ui-bae s wife, made the calendar and distributed to believers. In addition, the Roman Catholic Calendar in 1889 was introduced in Korean Bibliography. Therefore, it appears that follows made the Liturgical Calendar and lived a religious life even though there were no missionary priests around since After the freedom of religion was declared, then, the calendar was reprinted and widely distributed. Keywords : Liturgical Calendar, Sung-Gyeong-Jik-Hae, Su-jin-il-gwa, Sabbath, fasting, abstinence, feast, confraternities, servile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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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박문수* 1. 머리말 2. 사회영성의 식별 기준 3. 시기 구분 4. 교회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5. 의미와 결론 국문 초록 이 글에서는 광복에서부터 현재까지 한국 교회의 민족사 참여를 사회영 성의 관점에서 성찰한 결과를 다룬다. 사회영성은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자세 로 정의할 수 있다. 광복 후 현재까 지 교회의 민족사 참여를 교회가 사회에 대응한 방식의 성격, 사회영성의 지표들을 기준으로 네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첫째 시기는 광복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한반도의 사회 성격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칠 사건들이 대부분 일어났다. *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94 94 교회사연구 제42집 그러나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맹아 단계였을 뿐 의미 있는 발전이 이뤄 지지는 않았다. 둘째 시기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87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교회는 민족사의 여러 계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영성도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였다. 또한 이전 시기에 싹텄던 교회의 사회 문제에 대한 자각도 더 깊어졌다. 셋째 시기는 1988년부터 2007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정치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시민사회도 급속도로 성장 하였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이전 시기에 축적된 경험들이 사회복지와 사회사목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사회영성의 형태들도 더 다양해지고, 실현 분야도 더 넓어졌다. 마지막 시기는 2008년 이후에서 현재까지이다. 교회는 환경 정의, 정의 문제에 두 번째 시기처럼 활발하게 참여하는 중이다. 사회영성 측면에 서는 역사상 가장 다양한 형태들이 등장하였고, 평화를 매개로 국제 영 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히는 중이다. 종합해보면, 사회영성이 성장했을 때 교회는 역사 안에서 긍정적인 평 가를 받았다. 이때 복음의 본질도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에 더 깊이 뿌리 내렸다. 그만큼 사회영성은 교회가 인류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하는 정 도를 잴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주제어 : 가톨릭 사회 교리, 민족사, 사회사목, 사회영성, 천주교 사회 운동

95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머리말 그리스도교 영성에 사회영성 1) 이 따로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 영성에 이미 사회적 역사적 차원이 들어있는 까닭이다. 2) 도날 도어는 이 맥락에 서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 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카 6, 8)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3), 이 구절에서 주님이 요구하신 세 가지 요청을 균형 있게 통합 1) 한국 교회에 최근 사회영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산하 토머 스 머튼 영성연구회에서는 토머스 머튼 영성의 여러 차원 가운데 실천 측면을 강조하여 사회적 영성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한국그리스도사상 20, 한국그리스 도사상연구소, 2012 참조. 1) 가톨릭대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에서는 2011년부터 김수환 추기경의 영성을 조명하는 세미나를 매 년 개최하면서 사회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영성은 인간 존엄성의 옹호, 가난한 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는 태도 정도로 정의된다. 1) 개신교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의 김진호 목사는 교회의 공공성, 타인과 함께 수평적으로 나누 는 관계의 품성 을 사회적 영성이라 정의한다. 최근 개설되는 교회 내의 여러 공개강좌, 강의 제목 에서도 사회적 영성 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1) 교회 바깥에서도 간혹 사회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때는 대부분 활동 가들의 소진( 消 盡 ) 회복, 역량 강화 수단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경우에는 영성의 원천을 인본 주의에서, 이에 도달하는 방편들은 종교 안팎에서 자유롭게 선택한다. 반면 그리스도교 사회영성 은 신앙인이 신앙의 동기에서 출발하여 영성의 원천과 방법 모두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찾는다. 2)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 영성이 타계적 영성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통해 실현되는 현세적 이고 평범한 것임을 노동헌장 반포 90주년을 기념하는 자신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 5장 노 동의 영성 에서 밝힌다. 그는 이를 밝히기 위해 사목헌장 34항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 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를 인용하고 있다. 그의 노동 영성은 간단히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 활동에 참여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이를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 에까지 고루 미치 게 하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그의 첫 사회 회칙 진리 안의 사랑 에서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상호 관계 안에서 완전해집니다 (53항)라고 가르치며 그리스도교 영성의 일상성,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 였다. 3)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1요한 4, 20) ;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 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 35-40).

96 96 교회사연구 제42집 하는 것을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정의하였다. 4) 또한 그는 우리의 영성은 종교 신앙적인, 도덕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세 차원 중에서 단지 하 나나 둘이 아니라, 모두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5) 면서, 사회적 차원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필수 요소임을 분명히 하였다. 프랜시스 미헌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차원을 인간 내면, 인간 상호 간 그리고 구조 (structure) 등 세 차원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특히 구조 차원을 가장 크게 강조하였다. 구조가 인간 상호 간 차원을 포괄하는 넓 은 개념이고, 현대 사회 대부분의 영역들(경제, 교육, 노동, 문화, 복지, 정치 등)이 구조의 지배를 받는다는 이유에서였다. 6) 미헌은 사회영성이 교회 안에서 내면을 강조하는 전통 영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강조돼 왔고, 관심도 덜 받아왔다는 문제의식하에 이를 보 완하기 위해 사회영성은 구조적 차원,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가치가 드러나거나 실현되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신앙 혹은 이 신앙에서 비롯된 일관된 삶의 자세 7) 라고 정의하였다. 그리스도교 구원은 본래 개인적 사회적 정신적 육체적 역사적 신약성경에서는 이 두 말씀이 가장 자주 인용된다. 이 말씀들 외에도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혹은 내적) 삶이 사회생활과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4) 황종렬, Donal Dorr, 영성과 정의, 왜관 : 분도출판사, 1990, 31쪽. 5) 같은 책, 34쪽. 6) Francis Xavier Meehan, Contemporary Social Spirituality, ORBIS, 1982, pp. 6~8. 그의 영성 에서 유추해보자면 구조는 어항에 비길 수 있다. 어항의 물이 썩으면 아무리 건강한 물고기를 풀어 놓아도 산소 부족으로 죽게 마련이듯,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구조가 건강하지 않으면 훌륭한 신앙인 들도 건강할 수 없다.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과 영성의 인간 내면 차원이 구조적 차원과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인 셈이다. 7) ibid., p. 6. 여기에는 개인뿐 아니라 교회와 같이 실행의 주체가 집단인 경우도 포함된다. 개인과 교회 두 차원 모두에 다 적용되는 정의라는 뜻이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는 평신도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서 사회적 차원을 중요하게 고려하였다. 예수님의 성령을 따라 세상을 건설 하게 하며, 사람들이 역사와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초월해 볼 수 있게 하고, 자기 형제자 매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열정적 사랑을 기르게 하며, 주님께서 그들을 바라보 시듯 그들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듯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 교황청 정의 평화평의회, 간추린 사회 교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6, 545항.

97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97 초월적인 인간의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8) 당연히 이를 실현하는 방편인 영성도 이 다양한 차원을 포괄한다. 9) 따라서 사회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 을 구성하는 여러 차원 가운데 하나일 뿐 새로 정의를 내려야 할 개념은 아니다. 다만 교회사 안에서 사회영성이 과도하다 싶을 만큼 덜 강조되어 왔고, 무엇보다 현 단계 한국 교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측면인 까닭 에 전통적인 내면주의(intimist) 영성과 균형을 맞춘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10) 교회는 항상 민족사에 참여한다. 그런데 교회가 현실에 대해 침묵하 면 기득권 옹호 행위로, 참여하면 특정 정파와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 정 치 행위로 평가받는다. 교회가 특정 시공간에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 교회도 전래 이후부터 민족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고, 이에 대하여 교회 안팎으로부터 긍정 부정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 11) 한국 교회사를 살펴보면 한국 교회는 순탄한 시기보다 시련과 고난의 역사를 더 오래 거쳐 왔다. 전래 초기에는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숭 8) 같은 책, 38항. 9) 영성의 본질적 정의 대신 이 글에서는 신앙인의 삶의 방식, 본질에 이르는 방편 에 가까운 개념으 로 사용하고자 한다. 10) 요즘 사용되는 의미, 곧 구조를 강조하는 사회영성은 교회에서 사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는 19세기 말에 와서야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영성에 대한 본격적 관심은 제2차 바티칸 공의 회부터 시작된다. 교회의 사회적 실천에서 공의회가 분기점이 되는 까닭이다. 근대 이전에는 사 회영성이 교회의 삼중 본질 가운데 하나인 디아코니아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다. 교회의 가장 깊은 본질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kerygma-martyria), 성사 거행(leitourgia), 그리고 사랑의 섬 김(diakonia)이라는 교회의 삼중임무 이 임무들은 상호불가분의 관계 사랑의 실천은 교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 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한 부분이며, 교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 필수적인 표현이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5항-가). 그러나 이 봉사 는 자선 구호 차원에 머물러 있어 현대에 와서 구조적 접근을 시도하는 사회복지와 차이가 있었다. 11) 민족사가 폐쇄적 함의를 갖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1980년대 말 한국이 세계화 조류에 편승하 게 되면서 민족사가 더욱 협소한 의미로, 심지어는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럼 에도 민족사를 사용하고자 하는데, 민족사를 세계사와의 유기적 관계에서 고찰이 가능하다고 보 기 때문이다.

98 98 교회사연구 제42집 고함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로는 역사에서 지워버 리고 싶을 만큼 나약한 모습도 간혹 보여주었다. 이 후자의 모습은 한국 천주교회가 지난 2000년 대희년을 맞으며 발표한 과거사 반성 문건 쇄 신과 화해 에 잘 나타나 있다. 12) 이 문건은 전체 일곱 개의 반성 또는 잘못에 대한 고백 항목 가운데 1~3항에서 한국 교회가 민족사에서 저지 른 과오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 문건에서 한국 주교들은 우리는 참회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새롭 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 다 라고 끝맺으며, 이 문건을 작성할 때 사용하였던 성찰 기준을 간접적 으로 제시하였다. 대략 이 기준은 교회가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 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노력 등이다. 그런데 성찰 기준이 될 수 있는 이러한 요소들과 여기에 이르기 위한 윤리 지침들을 교회 안에서는 사회 교리에서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교회 가 민족사에 함께한다 는 말을 가톨릭 사회 교리의 주요 원리와 가치가 한국 사회에 실현되도록 교회가 노력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에 교회 가 민족사에 함께 해왔다 또는 함께한다 함은 교회가 부끄럽고 나약한 모습보다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 을 만들기 위해 노력 한 또는 노력하는 모습이라는 뜻으로 옮길 수 있다. 이 글은 광복에서부터 현재까지 한국 교회가 민족사에 참여하는 과정 에서 보여준 모습을 사회영성의 관점에서 성찰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사회영성 실현 대상을 사회 교리에서 교회가 윤리적 12)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과거사 반성문건 쇄신과 화해, 2000년 12월 3일.

99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99 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가르친 영역들, 이를테면 인권, 사회정의, 경제(분 배 정의), 문화, 민생, 복지, 생명, 통일, 평화, 환경 등을 선정하였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 대상 영역들이 전통적 의미의 사회복지, 노동 운동, 농민 운동, 빈민 운동과 같이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 인권을 기준으로 참 여한 계층별 민생 운동, 불의한 정치권력과 그들의 민주주의 질서 교란 행위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민권 인권 운동,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 운동 을, 인간 생명과 가정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생명 운동,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민족의 통일을 위한 통일 운동, 평화 운동, 1980년대 후반부터 새 로이 대두된 환경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환경 운동,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문화 영역에 대한 참여 등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대체로 사회 교리의 관심 영역과 일치한다. 두 번째는 각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들을 특정할 때 부득이 이 분야 연구자들의 기준을 따르고자 했다. 사회영성 실현 주체는 제도적 차원의 교회(예-성직자 또는 교회 공인 단체의 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제2차 바 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에서 규정한 모든 신원을 포괄하는 하느님 백성 을 기준으로 삼았다. 세 번째 광복 이후의 역사 서술에 대하여는 이미 이 분야 연구자들이 기본 사실들을 정리한 바 있기 때문에 개관하는 수준에 머물고, 대신 각 시기마다 사회영성이 어떻게 심화 발전되는지 평가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13) 13) 강인철은 박사 학위논문인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에서 광복 후부터 1962년까지 개신교를 망라하여 그리스도교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정리하였다. 전쟁 과 종교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에서는 한국 전쟁을, 종교정치의 새로운 쟁점들 (오산 : 한 신대학교출판부, 2012)과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오산 : 한신대학교출판부, 2012) 은 민주화 이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정치학자 김녕은 한국 교회사 전체를 다루면서도 유신 이후에서부터 1989년까지에 대한 교회의 사회참여 과정을 학위논문에서 다루었다. 한국 정치 와 교회 국가갈등 (서울 : 소나무, 1996). 추교윤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논문에서 유신 체제에서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다루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100 100 교회사연구 제42집 아쉽게도 새로운 주제에 대한 탐색적 연구이다 보니 글 전개 과정에 서 논리적 비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교회에 사회영성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이를 심화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차원에 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2. 사회영성의 식별 기준 사회영성을 사회(세상) 영역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자세라 정의하였다. 사회영성을 이렇게 정의하면 교회의 실천 과정 또는 그 결과 를 평가하는 지표로는 신자 개인 또는 교회가 신앙을 사회적으로 표현하 는 행위들에 기준을 제공하는 사회 교리가 적합하다. 이에 교황청 정의평 화평의회에서 간행한 간추린 사회 교리 에서 제시하는 원리와 가치들을 식별 지표로 사용할 것이다. 14) 이 문헌에서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대략 다섯 가지로 추릴 수 있 권위와 사회적 역할 (김포 : 위즈앤비즈, 2009). 최종철은 박정희 정권 시기를 집중적으로 분석하 였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톨릭대출판부, 1997). 유신 체제에서 민주화 시기까지를 다룬 석사 논문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안수영, 한국 가톨릭사제의 사회참여 활동의 특징과 변화, 충남대대학원 석사 논문, 2001 ; 연규영,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의 정의구현 활동에 대한 고찰, 광주 가톨릭대대학원 석사 논문, 2006 ; 천선영, 한국 가톨릭교회 사제들의 정의구현 활동 : 그 논리적 구조와 대안적 전망, 서강대 대학원 석사 논문, 문규현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II (빛두레, 1994)도 이 시기를 상세 하게 다루고 있다. 유홍렬은 한국천주교회사 下 (가톨릭출판사, 1992)에서 광복 후에서 1960 년대 초까지 한국 교회사의 흐름을 짧게 일별하였다. 조광, 노길명, 오경환의 저술들 가운데서도 일부가 이 시기를 다루었고, 얼마 전부터는 종교학계에서도 이 시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시작 하였다. 14) 사회 교리 문헌의 출처와 번호는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가 간행한 간추린 사회 교리 를 기준으 로 하고, 옆에 문헌명과 항목 번호를 표기한다. 간추린 사회 교리 에서 인용한 항목들을 표시할 때는 매번 각주를 달지 않고 인용구 다음에 문헌명과 항목 번호만 표시할 것이다. 이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사십 주년, 팔십 주년 그리고 사목헌장 역시 마찬가지로 매번 각주를 달지 않고 인용구 다음에 문헌명과 항목 번호만 표시할 것이다.

101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01 는 원리들과 네 가지 근본 가치들을 제시하고 있다. 15) 대체로 이 원리와 가치들을 기준으로 교회의 사회적 실천이 사회영성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이 영성을 어느 정도 실현하는지 그 정도를 평가해볼 수 있다. 16) 1) 가톨릭 사회 교리의 중심 원리 (1) 인간 존엄성의 존중 원리. 교회는 인간을 되풀이될 수 없는 유 일무이한 존재 침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 ( 간추린 사회 교리 131항), 그리고 사회의 궁극적 목적 ( 간추린 사회 교리 132항)으로 본 다. 인간이 초월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에 근 거하여 인간의 초월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 ( 간추린 사회 교리 132항) 이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2) 보조성의 원리. 교회는 모든 책임과 결정이 지역 공동체들과 제도 들 안에서 각 개인이 주도권을 쥐게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논지의 보조성의 원리를 가르친다.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 회에 맡길 수 없는 것처럼, 한층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 이며, 올바를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 간추린 사회 교리 186항 ; 사 십 주년 49항). 15) 이 원리와 가치들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돼 있고, 가치들은 원리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선( 善 )의 구체적인 측면을 인정한다는 표현이자 사회생활을 올바로 조직하고 질서 있게 이끌어 나가는 준거의 역할 ( 간추린 사회 교리 197항)을 한다. 16) 본래 이러한 기준들을 적용하여 평가하려면 지표들을 선정하고, 지표를 측정할 수 있는 구성 요소들을 설정하여 각 구성 요소당 척도를 부여, 계량화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시간을 고려하여 사회 교리의 중심 원리와 주요 가르침을 지표로 삼아 주관 적 평가만을 시도하겠다. 사실 특정 시대의 어떤 사건 또는 문건이 대표성을 띠는지를 결정하기 는 쉽지 않다. 주관을 피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102 102 교회사연구 제42집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보조성의 원리에 속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 데 하나를 참여 로 본다. 그리스도인이 노동, 경제 활동, 정보와 문화, 무 엇보다 정치 생활 분야 등에 책임 있게 참여할 때 사회질서의 안정과 민주 주의를 영속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7) (3) 연대성의 원리. 교회는 신자와 교회 간의 일상적 연대와 세계적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인간이 한 인류가족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이기에 국가의 경계를 초월해 모든 사람의 권리와 발전을 증진시킬 상호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특히 부유한 국가들의 가 난한 나라들에 대한 책임을 필수로 본다. 18) (4) 공동선의 원리. 공동선은 경제, 정치, 문화와 같은 사회적 삶의 조건의 총체를 가리키는데, 이 조건들은 모든 인간이 기꺼이 그리고 충분 히 자신의 인간성의 성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 전체를 아우른다. 따라 서 사회 교리는 개인의 권리를 항시 공동선의 증진 여부라는 맥락에서 판 단한다. 이 또한 개인이나 일국 차원이 아니라 국제 영역으로 확대 적용해 야 하는 원리이다. 19) 17)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하여 국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유로이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부름 받은 국민들의 가장 커다란 열망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모든 질서를 이루는 주축 가운데 하나이고 민주주의 체제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 간추린 사회 교리 190항). 18) 연대성은 인간의 타고난 사회적 본성,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과 권리, 그리고 일치를 향한 개인과 민족의 공동 노선을 특별히 강조한다. 개인들과 민족들 사이의 상호 의존의 유대 ( 간추 린 사회 교리 192항)를 촉진하고 윤리적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연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함을 강조한다. 19) 공동선이란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 ( 간추린 사회 교리 164항 ; 사목헌장 26항)이다. 공동선은 모든 사회 구성원을 포함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공동선을 이루고 증진하 는 데에 협력할 의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 간추린 사회 교리 167항 ; 팔십주년 46항).

103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03 (5) 재화의 보편적 목적.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욕구를 충족하고 기본 생활을 영위할 때 재화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인류 에게 땅을 공평하게 허락하시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셨다. 20) 2) 근본 가치 이 근본 가치에는 진리, 자유, 정의, 사랑 등 네 가지가 포함된다. 이 가치들은 공권력, 이른바 국가권력이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 는지를 평가하는 척도 역할을 한다. 21) 그리스도인은 이 가치들을 기준으 로 현세 질서에 개입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1) 진리. 진리는 인간의 행실과 말이 올바르다는 뜻 진실 또는 솔 직함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참된 것을 보여주 고, 자신의 말로써 참된 것을 드러내며, 이중성과 위선을 피하게 하는 덕 22) 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진리가 하느님의 말씀 이고, 하느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드러났으므로, 예수께서도 진리 라고 믿는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66항). 교회는 모든 사람은 언제나 진리를 추구하고 존중하며 책임 있게 증언하여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 ( 간추린 사회 교리 198항)고 하면 20)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 ( 간추린 사회 교리 171항 ; 사목헌장 69항). 21) 경제, 정치, 문화, 기술의 본질적 개혁과 필요한 제도 개혁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공권력의 필수적인 준거가 된다 ( 간추린 사회 교리 197항). 22)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2468항. 이하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4 104 교회사연구 제42집 서,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은 물론 모든 인간의 의무임을 강조 한다. 이 주장은 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이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2) 자유. 자유는 이성과 의지에 바탕을 둔,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31항). 자유는 인간이 지닌 최상 의 존엄성의 표지 ( 사목헌장 17항 참조)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가치이다. 자유는 남용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23) (3) 정의. 전통적인 의미의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 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 ( 가톨 릭 교회 교리서 1807항)이다. 주관적인 기준의 정의가 다른 사람을 한 인격체로 인정하려는 의지에 바탕을 둔 행위 라면, 객관적인 기준의 정의 는 상호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 적용되는 확고한 도덕 기준 ( 간추 린 사회 교리 201항)이다. 현대에는 교환 정의, 분배 정의, 법적 정의, 그리고 사회정의 가운데 특히 사회정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사회정의는 사회 정치 경제적 측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의의 구조적 차원과 그 해결책과 관계 ( 간 추린 사회 교리 201항)가 있기 때문이다. (4) 사랑. 사랑은 본질상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 ( 하느님 23) (자유는) 오직 진리와 정의로 다스려지는 상호 유대가 사람들을 서로서로 이어 주는 그곳에, 참으로 존재한다. 자유가 사회적으로 온갖 다양한 차원에서 수호될 때 자유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지고 폭넓어진다 ( 간추린 사회 교리 199항).

105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05 은 사랑이십니다 18항)이다. 이 사랑에서 앞의 세 가지 가치들이 흘러나 온다. 사랑은 정의를 전제로 하면서도 정의를 초월한다. 따라서 사회적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회의 중개를 활용해 이 웃의 삶을 개선하고 이웃의 가난을 초래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 ( 간추린 사회 교리 208항)이어야 한다. 이상의 사회 교리 원리들과 가치들이 평가 지표가 되겠다. 아직 추상 적이기는 하지만, 앞의 주교회의 반성 문건보다는 더 상세한 식별 기준이 다. 24) 이 지표를 활용하여 이러한 측면들이 많이 드러날수록 사회영성이 심화 발전된 것으로 평가하겠다. 3. 시기 구분 광복 후 한국 교회의 민족사 참여는 교회가 대응한 방식의 성격 25), 사회영성의 구성 지표들을 기준으로 할 때 대략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광복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광복, 미군정 기,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분단, 한국 전쟁, 전후 24) 사회 교리가 중요하게 제시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종말론적 상대주의이다. 구체적인 역사의 역동성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한정적이고 확정된 사회 경제 정치 조직의 시각으로는 식별해낼 수 없다 ( 간추린 사회 교리 51항). 이것은 교회가 모든 체제에 대하여 동일시가 아니라 상대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25) 사회영성을 성장시키는 교회의 대응은 대략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진다. 우선, 사회복지(이전에 는 구제와 시혜적 봉사) 차원에서 전개된다. 사회복지는 교회의 삼대 본질 가운데 하나인 봉 사 (diakonia)를 실현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써, 실제로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사회봉사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이 활동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교회가 일관되고 보편적으로 지속해왔기 때문에 사회영성의 일차 구성 요소이다. 두 번째로는 구조적 차원으로 접근하였던 시도, 곧 사회-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차원의 실천이다.

106 106 교회사연구 제42집 복구, 자유당 독재, 4 19 학생 혁명, 5 16 군사 쿠데타 등 이후 한반도의 사회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줄 주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러 나 교회의 대응 측면에서 보면 소극적인 사회복지, 정치세력화, 그리고 교 회와 국가 관계에서 현상 유지를 추구하는 모습이 지배적이었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교회가 공산주의에 대하여 선악( 善 惡 ) 이분법, 십자군 논리를 따름으로써 당대에 특히 단독 정부를 출범시킨 남한을 이 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심지어 전쟁 중일 때 와 전쟁 끝 무렵에는 교회가 다른 사회 세력보다 더 호전적인 입장을 취함 으로써 사회영성과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 후반에 가톨릭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 최되고, 세계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신의 선교 (missio dei) 신학, 제3세계 신학, 해방신학 등과 같은 상황신학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분위 기도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사회사업은 사회복지로 성격이 전환되면서 구 조적 접근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영성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1960년대 후반에서 1987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민족사의 여 러 계기에 교회가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던 때이다. 역사적으로는 개 발독재, 유신 체제, 10 26, 군부 쿠데타, 광주 민중 항쟁, 군부독재 등과 같이 교회의 참여가 요청되는 사건들이 이어졌다. 교회는 이 요구에 부응 하며, 이전 시기와 다르게 국가권력과 갈등 관계를 유지하면서 반유신 체 제 저항 활동, 인권 수호 운동, 민생 운동에 투신하였다. 26)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이 시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게 된다. 26) 교회가 사회로부터 대안적 헤게모니 기구 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었고,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의 가르침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107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07 이 시기에는 이미 이전 시대에 싹트기 시작했던 교회의 사회 문제에 대한 자각이 더 구체화되었고, 이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시도들도 활발해졌 다. 전 교회적인 사회참여 흐름이 신자들의 사회의식을 고조시킴으로써 사회영성도 성장할 수 있었다. 27) 게다가 교회의 실천에 사회적 호응까지 따르면서 정당성도 높았다. 셋째, 1988년부터 2007년까지이다.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기이 다. 이 시기에는 정치 영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고, 시민사회도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경제, 문화 영역에서는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국 경제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편입이 가속화되면서 10년 사이에 구제금융 사태와 금융 위기를 연이어 겪었다. 이 과정에서 시장(자 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자본과 시민사회의 갈등 구도가 형성되었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이전 시기에 축적된 경험들이 사회복지와 사회 사목 영역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교회에 참여를 요구하는 빈도가 줄었고, 이로 인해 교회의 사회적 관심이 제도화된 교회 영역을 넘어 뻗어 나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사회영성은 형태가 더 다양해지고, 분야도 더 넓어졌다. 마지막으로, 2008년 이후에서 현재까지이다. 집권 여당이 그동안 쌓 아온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과를 무시하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 27) 신자들의 사회참여 의사를 물은 설문조사 결과들(가톨릭신문 창간 60주년 기념 설문조사 가톨릭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에서는 제1차 조사(1987)에서부터 제2차 조사(2000)까지는 동의 비율이 높게 유지되다가, 제3차 조사 때는 감소세로 접어드는 양상이 나타났다. 교회의 사회참여 가 활발했던 시기에는 신자들의 동의 비율도 높아지고, 반대 경우에는 동의 비율이 낮아진다는 뜻 이다. 이는 반대로 신자들의 암묵적인 지지와 동의가 교회의 사회참여를 촉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톨릭신문사,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대구 : 가톨릭신문사, 2000, 138쪽 ; 가톨 릭신문사,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대구 : 가톨릭신문사, 2007, 153~154쪽.

108 108 교회사연구 제42집 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빈번해졌다. 소득의 양극화도 심해져 계층 고착화 가 우려되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또한 환경 문제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 에서 여러 대립되는 이슈들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에 교회는 상 층부에서부터 주요 국가 의제들에 대하여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현재도 여러 사안에서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사회영성 측면에서는 구성 요소가 가장 다양하고 평화를 통해 국제적 인 영역으로까지 관심의 대상이 넓어졌다. 이전 시기의 모든 요소를 포함 하면서도 새로운 차원과 영역으로 넓어지는 시기로 평가된다. 이렇게 네 시기로 나누어 시기별 주요 사건과 교회의 대응을 개관하 고, 이에 따라 사회영성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4. 교회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광복 후에서 현재까지를 네 시기로 나누었는데, 이 장에서는 시기별 로 교회의 참여사를 개관하고, 이어 각 시기에 사회영성이 어떤 성격을 띠었고 또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살펴본다. 1) 광복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이 시기 교회의 민족사 참여는 광복과 함께 형성된 미군정과의 우호 적 협력의 시기, 단독 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시기, 전쟁 시기, 개신교와 경쟁하면서 정치세력화를 모색하는 시기, 5 16 군사 쿠데타 이 후 시기 등으로 나뉜다.

109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09 먼저, 첫 번째 시기에는 교회가 미군의 남한 진주와 함께 원조를 제공 하며 간접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 천주교회의 직접 지원에 힘입어 미군정과 밀월 관계를 형성하였다. 미군정의 종교 정책이 그리스 도교에 일방적으로 우호적이고 심지어 특혜에 가까웠던 터라 교회로서는 이를 거부하기 쉽지 않았다. 마침 3 8선 이북을 소련이 점령하고 있었고 전 교회적으로도 공산주의와 대결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그리스도교 정권 인 미군정과 교회와의 유착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28) 미군정은 남한의 그리스도인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았 음에도 성탄절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공영 방송에서 그리스도교 선교를 허용하였으며, 적산( 敵 産 )을 그리스도교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배분하는 혜택을 제공하였다. 29) 이로 인해 형성된 교회와 미군정과의 우호적 관계 는 미군정이 후원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협조로 이어졌다. 교회가 이승만 과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30) 교회는 이러한 우호적 환경 덕에 개신교에 대한 경쟁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세력화에도 나설 수 있었다. 1946년 2월에 있었던 민주의원 구성, 같은 해 10월에 실시된 과도 입법의원 선거에 참여한 경우가 일례이다. 교회는 이때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에 천주교 대표로 장면을 추천하여 당선 시켰다. 31) 28) 최종고는 이 시기 교회가 미군정, 이승만과의 유착 과정에서 노기남 대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한국 교회의 최고 수장이었던 노 주교가 미군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노 주교 측보다는 미군정의 적극적인 태도가 더 큰 영향을 주었고, 이승만과는 반일, 반공, 친미주의 노선에서 일치하였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최종고, 제1공화국과 한국천주교회, 한 국천주교회창설이백주년기념 한국교회사논문집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860~862쪽. 29) 강돈구, 해방이후 종교와 정치, 한국 근대 100년의 사회변동과 종교적 대응, 한국학술정보, 2013, 104~106쪽. 30) 노길명은 미군정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대 정책을 일찍부터 신학적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결 구도에서 반( 反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있던 천주교와 개신교를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의 생산 과 보급의 통로 로 만들기 위한 통치 전략으로 본다. 노길명 박형신 외,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 동, 이학사, 2009, 24쪽.

110 110 교회사연구 제42집 두 번째, 이 시기에 교회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적극 관여하게 된 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정기총회의 결의로 남한만의 단정 수립이 확정되기 전부터 교회는 남한만의 단정 수립을 주장하는 우익 진영을 지 지하였다. 교회는 경향신문 을 통해 이 입장을 적극 지원하였다. 일례 로, 가톨릭청년 은 유엔 결의가 있고 난 뒤 이를 5천 년 역사의 경사 라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32) 이후에도 교회는 단독 정부 수립을 고집하며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민족주의 진영을 비난하였다. 33) 남한 단독으로 총선을 치르게 되었을 때는 신자들에게 지방 선거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신자들의 출마와 이들의 당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종용하였다. 34) 이 선거를 위해 서울교구에서는 유엔 조선위원단 입국 직후인 1948년 1월 11일 서울교구 각 본당 유지인 교우들로 천주교시국 대책위원회 를 구성하고, 이어 개별 본당 차원에서도 본당대책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35) 천주교는 이미 노기남 주교 주도로 1945년 9월 천주교 평 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한민당(한국 민주당)에 발기인으로, 9월 16일 한민 당 창당 때는 40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36) 세 번째인 전쟁 시기에는 천주교회가 전쟁을 유사 종교로 간주된 공 산주의와의 성전 내지 십자군 전쟁 으로 해석하였다. 37) 전쟁을 반대하거 31) 유홍렬, 增 補 한국 천주교회사 下 卷, 가톨릭출판사, 1992, 447쪽 ; 최종고는 앞의 글에서 노기 남 주교를 정치주교로 평가하고, 노주교의 회상록 을 인용하며 장면의 정치 입문과 당선 과정 에 적극 개입하였음을 밝힌다. 최종고, 앞의 글, 854~860쪽 참조. 32) 가톨릭청년 1948년 4월호, 2~3쪽. 33) 최종고는 교회가 이승만에게는 상당한 밀접 내지 유착 상태를 보여주면서 왜 당시 김구, 김규식 이 주도한 남북협상과 문화인 108명의 시국선언에 대하여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하여 의구심을 표한다. 그는 이때 보여준 교회의 행위가 정교밀착이라고 평가한다. 최종고, 앞의 글, 862쪽. 34) 경향잡지 1948년 2월호, 17~19쪽. 35) 경향잡지 1948년 2월호 ; 천주교청년 1948년 4월호 참조. 36) 강인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624쪽. 37) 강인철, 전쟁과 종교, 오산 :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263쪽.

111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11 나 전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교회가 전쟁 피해 당사자가 되면서부터는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공격 강도를 더 높였다. 이 시기에 교회가 보였던 반공 활동의 예를 들어본다. 1950년 8월 부산 범일동 성당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서울교구와 이북 교구 출신 10여 명의 신부들이 젊은 신부, 신학생, 청년 신자 3,000명을 규합하여 천주교 청년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군에서 무기를 지급할 수 없어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전쟁 참여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1951년 중반부터 시작된 정전 협상 때는 이를 원수와의 타협 으로 간주하여 시종일관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전쟁의 평화적인 종결을 지속 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38) 극단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 방식의 문제 해결책이 안고 있는 위험성들과 약점들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전쟁 중에 는 물론이고 전쟁 후에도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전쟁에 대한 한국 교회 의 태도는 맹목적 이었다. 39) 네 번째 시기에 천주교는 이승만과 갈라지게 되면서 독자적 정치세력 화를 시도하여 개신교와 경쟁에 나선다. 실제로 1956년 5 15 선거(3대 대통령 및 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총력을 경주, 마침내 당선시켰다. 1958년 총선에서는 천주교 신자 의원 9명, 예비자 4명을 당선시켰다. 40) 이후 개신교가 이승만에 밀착하여 정치 세력화 의도를 노골화하자 위협을 느낀 교회는 장면과 민주당에 밀착하여 1960년 정 부통령 선거에서 개신교와 정면 대결을 벌였다. 41) 38) 같은 책, 267쪽. 39) 같은 책, 268쪽. 40) 강인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646~647쪽. 41) 같은 책, 649쪽. 이에 대하여는 다른 평가도 내릴 수 있는데, 당시 세계 교회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던 반공 흐름을 지역 교회가 거부할 수 없었고, 반공주의는 이미 일제 시대부터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 왔던 흐름이며, 광복 후 교회가 미군정, 이승만과 유착하면서 이미 공산주의에 대해

112 112 교회사연구 제42집 마지막 시기인 5 16 군사 쿠데타 이후 1960년대 중후반까지는 군부 의 정치 보복을 우려해 쿠데타를 승인하는 입장에 섰다 쿠데타로 출발한 박정희 정권이 이승만 정권의 그리스도교와의 정교유착 관계를 탈 피, 호의적 종교 집단에는 자유방임적 자유를 허용하고 비판적 입장을 취 하는 종교 집단에는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이중적인 종교 정책을 폈던 탓 이다. 교회는 장면과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경험이 탄압의 빌미가 될 것 을 우려해 군사 쿠데타 주역들을 승인하였다. 42)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전쟁 후에 교회가 해외 원조를 기반으로 교육, 의료, 아동복지, 노인복지 영역에 기여하였다. 생존과 전후 복구가 시급한 시기에 교회는 교회의 재건 사업에 치중하면서도 가난하고 주변화된 이웃 들과 함께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우선 교육복지 측면에서는 해외 원조를 이용하여 간호학교, 기술학교 등을 설립해 가난한 이들의 자립을 도모하였다. 43) 아울러 고등 교육, 간 호, 약제, 양재, 방직 등 다양한 분야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가난한 이들의 장기적 자립과 사회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44) 의료복지 측면에서는 교회가 전쟁이 끝난 뒤 1959년까지 병원 10개 소, 의원 4개소, 의과대학과 간호학교를 설립하여 의료인 양성 사업을, 의 료 사업의 연장에서 구라( 救 癩 ) 사업도 시작하였다. 1960년대는 외원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회가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그리 고 전쟁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남북 지역 모두에서 직접 피해를 입었으니 더욱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당시 상황에 더 가까울 터이다. 그럼에도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이유는 평가 준거로 삼은 사회 교리의 원리와 가치들 때문이다. 42) 노길명, 한국사회와 종교운동, 빅벨출판사, 1988, 34쪽. 43) 1950년 이후 설립된 각급 학교와 기술학교, 외국 가톨릭 기관이 제공한 유학 장학금에 대한 상세 내역은 역시 장정란이 잘 파악, 정리해 놓았다. 장정란, 한국전쟁과 선교 실상,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237~243쪽 참조. 44) 같은 책, 242~43쪽.

113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13 국제 수도회의 파견 관구 혹은 총원의 지원을 받아 수도회 자체에서 병원 을 설립하는 시대였는데, 15개의 병 의원을 수도회가 설립 운영하였다. 특히 수도회는 의료 사업을 농촌과 소도시 지역에 집중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을 지향하였다. 45) 아동복지 측면에서는 해방 후에 수녀원들이 보육원을 설립 운영하 는 것으로 대처하였다. 전쟁 중과 전쟁 후에는 전쟁고아들을 대상으로 하 는 고아원과 보육원을 다수 설립하여 아이들을 돌보았다. 46) 노인복지 측 면에서는 아동복지보다는 적었지만, 역시 수녀원을 중심으로 오갈 데 없 는 노인들을 돌보았다. 47) 교회는 같은 해외 원조를 받았던 개신교와 달리 원조의 많은 부분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다. 교회 재건도 시급하였지만 이에 필요 한 재원들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우선 사용함으로써 사회영성의 태동에 기여하였다. (2) 사회영성 이 시기의 사회영성은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분법, 중세기의 타계 ( 他 界 )적 영성에 가까웠다. 사회 교리에서 말하는 내면주의가 지배하는 시 기였다. 이 맥락에서 교회가 차용한 영성은 성모 신심과 순교영성이었다. 이 두 영성은 사회적 격변기에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당시 교회가 열성적으로 수행한 반공 선전과 활동에 비춰보면 공산주의와의 성전( 聖 戰 )에서 교회가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설 사 지더라도 순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소지가 더 크다. 45) 박문수, 가톨릭교회와 근대적 사회사업의 도입과 발전, 한국 근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 회(중), 가톨릭출판사, 2005, 439~440쪽. 46) 같은 책, 443~444쪽. 47) 같은 책, 444~445쪽.

114 114 교회사연구 제42집 타계적 영성은 영성의 사회적 차원을 간과한 채, 교회가 개인 구원에 만 치중하게 만들었다는 면에서 내릴 수 있는 평가이다. 그러나 이 타계적 영성은 역설적으로 적극적인 현세 영성이기도 하였다. 정교분리 원칙을 위배하고 집권 세력과 밀착 관계를 형성한 것이 한 가지 예이다. 정치세력 화를 추구한 경우가 두 번째 예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예에 대하여는 다른 해석이 있다. 일례로 김녕은, 장면의 정치 참여를 가톨릭 신앙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려 한 시도로 이해 한다. 장면이 가톨릭에 기반을 둔 종교적 이상을 정치 영역에서 실현하려 노력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정치가 장면에게 있어서 가톨릭 신앙은 절대 적인 비중을 차지했으며 늘 본인의 독실한 가톨릭 신앙과 그가 맡게 된 정치를 하나로 일치시키려 했다. 48) 조광도 장면과 그의 제2공화국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야 함을 강조하 였다. 조광은 장면 정권이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언급의 일부 로만 취급되는 것을 지양하고, 제2공화국의 역사는 해방 이후 줄곧 이승 만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그침 없이 성숙시켜 가고 있던 고상한 이념들 의 결론이었다 49) 는 점을 새롭게 해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지적들을 고려하면 장면의 정치 참여는 교회적 시각에서 새롭 게 조명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광복 후 한동안 교회가 미군정, 이 승만 정권과 밀착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회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정도를 지나친 행위들로 평가할 수 있다.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와 공격, 심지어 전쟁까지 불사 하려한 측면은 인간 존엄성 존중 원리의 위반임은 물론 정의, 그리고 정의 48) 김녕, 장면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시민사회 : 이상과 현실, 장면 총리와 제2공화국, 경인문 화사, 2003, 366쪽. 49) 조광,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 ;,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10, 247쪽.

115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15 의 실현인 평화에 대한 부족한 이해의 사례이다. 당시 세계 교회 전체가 반공 노선에 서 있었고, 분단 후 북한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의 소식을 듣던 중이라 감정에 치우쳤던 탓일 터이다. 그러나 강인철이 앞에 서 지적한 바처럼 전쟁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인간의 존엄성, 평화 등에 대 한 숙고가 전쟁 중에도 그리고 전쟁 후에도 없었던 것은 반성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전체 시기에 걸쳐 교회는 역사의식이 부족하였 다. 자신의 결정과 행위가 민족사에 어떤 영향을 줄지, 또는 주어야 하는 지 자의식이 부족하였다. 이로 인해 천주교는 이후에 전개되는 친미 반공 체제 확립에 큰 기여를 하게 되고, 그만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더디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원조 물자와 비용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우선 사용하고, 이를 통해 장기적 사회 발전의 기초를 놓음으로써 사회 영성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시혜 적 자선 사업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당대의 이웃 종교와 정부 활동에 비 교해보면 방법상으로 가장 근대적이었고 투자 액수도 가장 많았으며, 그 리고 태도 면에서도 가장 헌신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시기는 교회 가 사회복지에서 보인 헌신성이 아니었다면 자칫 사회영성의 암흑기가 될 수 있었다. 2) 1960년대 후반에서 1987년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이 시기부터 천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 개발독재의 모 순 분출, 정권의 탄압에서 교회를 수호할 목적으로 체제를 비판하는 입장 에 서게 된다. 50) 1962년 교계제도 설정으로 한국인 고위 성직자들이 국

116 116 교회사연구 제42집 내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조직상의 계기가 마련된 데다, 곧이어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러한 참여를 뒷받침할 교리-신학적 자원을 제공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공의회의 사목헌장 은 현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한층 진취적인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비판적 정치 참여를 고무하였다. 51) 이 시기에는 민생 문제에 대하여도 신자들을 중심으로 참여가 시작된 다. 1960년대 초 노동 분야에서 시작한 민생 운동은 농민, 도시빈민으로 이어졌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대되 었다. 1970년대 초에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등장 후 본격적으 로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움직 임도 활발하였다. 가장 먼저 참여를 시작한 분야는 민생이었다. 민생 운동은 노동 쪽부 터 참여가 시작되었다. 이 분야에 대한 참여는 천주교 노동청년회 결성과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천주교 노동청년회는 1958년에 시작하여 1960년대 에 수원교구 선면공업주식회사 노조 결성, 서울대교구 드레스미싱 노조 결 성, 전주교구 제지공업 임금 인상 사건 등에 관여했다. 52) 교회 전체로는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JOC 회원이 주도적으 로 노조를 결성하다 탄압받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노동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이후 JOC 회원들이 생산직 노동자들 중심으로 구 50) 사제단의 창립 주역이었던 함세웅 신부는 교회가 정권에 대한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 교회 의 수호 목적이었음을 밝히고 이를 반성한다. 교회가 한 주체가 된 것은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의 피납, 구속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 형제의 납치 사건이나 김지하 시인 사건 때에는 무관심하였던 교회가 주교가 구속됨에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어적으로 대응하였다는 데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함세웅,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역사와 증언, 종교신학연 구 1, 1988, 263쪽. 51) 같은 책, 263쪽. 52) 명동천주교회, 한국 천주교 인권운동사 : 명동천주교회 200주년사 제1집, 명동천주교회, 1984, 49쪽.

117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17 성되면서부터 활동의 중심은 임금, 근로 조건, 인격적 대우 등 노동 현실 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53) 천주교 노동 운동은 농민 운동이 출발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천주 교 농민회는 처음 한국 천주교 노동청년회 농촌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10월 17일에 한국천주교청년회 를 창립하였다. 이때는 천주교 농촌청년 이 중심이 되어 착한 사람, 착한 생활, 모범 농사 등을 통한 마을의 환경 변화를 추구했고 주로 종교, 기술, 생활 교육을 통한 계몽 활동에 주력하 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1971년 11월 조직강화위원회에서 농민 권익 옹호, 사회정의 실현 을 활동 목표로 설정 했다. 이것이 천주교 농민 운동의 첫걸음이 되었고, 천주교 농민 국제연맹 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천주교농민회로 거듭나면서 1974년 민간단체로서 최초의 농지 임차 관계 조사 를 통해 토지 문제를 제기했고, 1975년부터 쌀 생산비 조사 를 통한 가격 보장 활동에 나섰다. 현장 또는 전국 단위로 외국 곡물 수입 반대, 강제농정 시정, 부당농지세 시정, 농협민주화 등의 활동을 전 개하였다. 농협이 고구마 계약수매를 이행하지 않아 발단이 된 함평고구 마사건 (1976~1978)에서도 농민은 2년 만에 승리하였고, 이를 계기로 농 협의 고구마 수매, 80억 원 부정을 폭로하였다. 54) 또한 감자농사 폐농으 로 발단된 안동농민회 사건 (세칭 오원춘 사건)은 천주교 농민 운동이 뿌 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빈민 운동도 시작되었다. 도시빈민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교회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1968년 연세대 도시문제 53) 박문수, 가톨릭 사회운동, 한국가톨릭대사전 1, 1994, 160~162쪽. 54) 명동천주교회, 같은 책, 439~456쪽 참조.

118 118 교회사연구 제42집 연구소 내 도시선교위원회에서 하는 실무자 교육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당시에는 천주교 노동청년회 회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 다. 이때 조직가가 주민들과 함께 주민조직을 만들고 그들이 스스로의 조 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알린스키의 지역 사회 조직 방식을 검 토하였다. 그 후에는 인성회 안에 있는 인간개발사무국 을 중심으로 빈 민 지역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이들 간에 유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빈민 지역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 어 나가려 노력하였다.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 설립의 바탕이 된 복음자리 공동체의 형 성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7년 170세대가 복음자리로 이 주해서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의 보금자리를 건축하면서 자부심과 성취 감을 느끼고 자신들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80년대 전면적인 철 거의 시발점이었던 목동 재개발 과정에서 복음자리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 험을 바탕으로 목동 지역민이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운영함 으로써 자신들의 경험을 사회사목으로 확장해나갔다. 55) 두 번째로 유신 체제 반대와 인권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시기 별로 주체에서 차이가 나타났다. 1970년대에는 정권에 대해 비교적 자율 성을 갖는 개신교, 천주교와 같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종교들이 저 항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자율적 영역에 속하는 사제들이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형태상으로는 예언자적이고, 내용적으로는 고발의 성격이 강하였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1969년에 주교회의 상설 기구로 설치되 55) 박보영, 천주교도시빈민화를 통해 본 천주교 빈민운동,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사, 2009, 168~171쪽 참조.

119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19 었다. 56) 1975년 12월 10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직속 기구로 재발족하 고, 명칭도 한국정의평화위원회에서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로 변경 하였다. 57) 한국정의평화위원회는 1976년 3월 1일 명동 성당 3 1절 미사에서 민주 구국선언 을 발표하였고, 1977년에는 한국의 인권 문제, 미군 철수 문제에 관한 메시지를 각국 정평위에 전달하였다. 1978년에는 교권 수호를 위한 기도회와 성명서 발표 등의 활동을 하였고, 1980년까지는 주요 사건 에 대한 성명서 발표 및 인권 사건들에 대한 대책 활동도 병행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구속자 석방, 정평위 백서 발간, 각종 시국사건에 대한 성명서와 입장 발표를 이어갔다. 1982년부터는 인권 주일을 대림 제2주일 로 지정, 주교회의 명의로 담화문 발표를 시작하였다. 1987년까지는 이전 시기의 연장에서 성명서 발표, 주요 사건에 대한 개입 활동을 하였다. 58) 세 번째는, 1980년대에 시작된 통일 문제에 대한 참여이다. 통일 문 제에 대한 관심은 1982년 12월 10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사업회 북한선교부가 출범하면서 시작되었다. 북한선교부는 1984년 11월 주교 회의 직속 기구로 개편되었고, 1985년 10월 13일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 회 결정에 따라 북한선교위원회로 개칭하였다. 59) 이때까지는 주로 조직, 문서 활동이 중심이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앞에서 전개된 교회의 사회참여와 같은 맥락 혹 56)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설립 25주년 기념 자료집 1969~1994, 빅벨출판사, 1994, 241쪽. 57) 같은 책, 242쪽. 58) 같은 책, 243~252쪽. 59) 경향잡지 ( ), 20~21쪽.

120 120 교회사연구 제42집 은 분야에서 활동이 이루어졌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교회의 사회복지 영역도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노동자를 위한 복지 사업이다. 수원교구는 1963년 한국 교회 최초로 안양 근로자회 관을 설립하였고, 1966년 6월에는 서강대학교에서 부설로 산업문제연구 소 를 설립하였다. 60) 여자 수도회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 말부터 여대생 기숙 사업, 버스 안내양들을 위한 교양 교육 사업, 숙박시설 제공 사업, 여성 노동자 교육 사업도 시작되었다. 청소년 복지는 1950년대에 고아원, 보육 사업의 형태로 이미 전개되 고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는 1980년대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이 사 업은 주로 아동복지를 전문으로 하는 수도회들이 담당하였다. 재소자 복 지는 1970년 4월 서울대교구 교도소 후원회(교도사목회)로 시작되어 현 재와 같은 교도사목으로 이어졌다. 61) 현대 사회복지의 개념으로는 이 시기에 교회의 민생 문제 관여, 정의 구현 활동, 인권 운동 등도 사회복지에 포함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 교회의 사회참여는 전체가 사회복지 활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사회영성 이 시기에는 제3세계의 등장과 함께 종교 영역에서도 독립, 해방 움 직임이 활발하였다. 이 움직임의 영향으로 귀납적인 방법에 기초한 상황 신학들이 대륙마다 등장하였다. 유럽에서는 정치신학과 하느님의 선교 신학, 중남미에서는 해방신학, 북미에서는 흑인신학, 아시아에서는 토착 화 신학이 활발하였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개신교 신학자들 중심으 로 민중신학이 탄생하였다. 이들 상황신학은 해당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 60) 산업문제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565쪽. 61) 같은 책, 445쪽.

121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21 인들의 사회적 실천을 해석하고 이를 추동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문에 신학의 현장도 아카데미에서 생생한 삶이 이어지는 현장, 특히 가난 한 이들의 삶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이 신학들은 공통적으로 그동안 소홀하였던 그리스도교 영성의 사회 적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피억압자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그에 따라 신론과 그리스도론도 재정립하였다. 심지어 사회과학을 신학의 도구 로 활용하기도 했다. 특히 해방신학은 역사적 유물론을 분석방법론으로 활용할 정도였다. 62) 해방 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하여도 적극 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신앙의 보편주의를 넘어 신앙과 신학의 민족화 에도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 민족화는 토착화의 한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흐름들은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 물에서 마신다 63) 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에 이르는 방편은 가난한 이들 의 우선적 선택 이다.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 빈곤을 경험하는 이들에서부 터 온갖 차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에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존재 한다. 이때 영성은 스스로 가난해짐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처지가 되고 또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는 자세로 이해된다. 이 과정에서 고통, 순교가 따르기도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것은 생명권을 긍정하기 위하 여 벌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 노력에서 힘을 얻는다. 64) 예수의 자기 비움(kenosis)에서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이 동일시가 가난한 이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힘이 되며, 함께 투신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이러한 힘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못자리가 된다. 62) 추교윤은 해방신학이 이 시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천주교 사회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추교윤, 천주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특성,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 사, 2009, 43~44쪽. 63) 이성배 : Gustavo Gutiérez, 해방신학의 영성, 왜관 : 분도출판사, 1987 참조. 64) 같은 책, 62쪽.

122 122 교회사연구 제42집 그리고 이 체험이 깊어질수록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고 궁극에는 그분과 같은 운명이 된다. 가난한 이들에서 출발하여 가난한 그리스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이 사회영성의 기초가 된다. 이 시기에는 정의가 두 번째로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사제단의 이름 에 정의 구현 이 들어간 점이나, 5공화국이 역설적으로 정의사회 구현 을 강조한 사실은 당시의 시대정신이 정의 였음을 보여준다. 이 정의에는 분 배 정의, 사회정의가 모두 포함된다. 당연히 이 정의는 인간의 기본권 보 장과 연결돼 있다. 인간에 가장 기본적인 존엄을 인정받을 수 없었던 시절 이니 사회정의의 요구를 인간 존엄성 실현에 시금석으로 삼을 만하였다. 세 번째는 연대성이었다. 실천 과정에서 개신교와의 교회 일치는 물 론 기층 민중들과의 넓은 유대가 형성되었다. 교회의 경계가 넓어진 것이 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세상 전체로 넓어졌다. 교회의 이러한 자 기 비움은 교회가 국민으로부터 도덕적 권위를 얻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 을 담당하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 교회의 민족사 참여가 사회영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측면은 다수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았 다는 사실이다. 이후 다소 제도화되기는 하지만 이러한 기억은 교회 안에 서 사회사목이 확장되는 모습으로,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65) 그 리고 최근 시국선언에 다수의 성직자 수도자가 참여하는 모습도 넓게 보 면 이 기억의 재생이라 할 수 있다. 66) 65) 박보영은 천주교도시빈민회 활동가들이 2000년대 들어 다양한 복지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지역 공동체에 투신하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박보영, 앞의 책, 185~186쪽. 이러한 현상은 1970~80년대 천주교 사회 운동 각 부문에 종사하던 활동가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이들 활동가들은 천주교를 떠나 시민단체로 옮겨 가거나 생활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교회에 머물던 활동가들은 새로운 사회사목 분야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66) 기억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교회 사회영성에는 초대 교회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순교영성도 영향 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23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23 이처럼 이 시기에는 이전 시기에 맹아를 볼 수 있었던 단계에서 사회 영성이 크게 성장하고 확장되는 계기를 맞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하였던 교회상도 이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따라서 이 시 기를 사회영성의 성장기로 부를 수 있다. 3) 1988년부터 2007년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고, 형식적 민 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로는 이전 시대의 사회적 역동이 크게 감소하 였다 이후에도 국가와의 갈등은 계속되지만, 5공화국 때나 1970년 대에 비교할 때 그 빈도는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갈등의 강도도 상당히 약 화돼 이 시기에는 교회와 국가 간 갈등 사례에서 1989년의 임수경 양 문규현 신부 방북 사건과 1995년 한국통신 노조 진압을 위해 김영삼 정부 가 명동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한 일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 67) 일 정도였다. 시민사회가 성장하였고, 이 성장은 자연스레 천주교의 사회적 관심을 교회 안으로 향하게 하였다. 68) 이로 인해 천주교의 사회 운동은 대부분 체제내화되고, 69) 이 틀 안에서 사회사목과 사회복지를 양 날개로 하여 이 67) 김녕, 제5공화국 이후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7, 712쪽. 68) 자율적인 시민운동은 기존의 민중 운동과 분리되면서 폭이 더욱 넓어졌다. 특히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추교윤, 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역할, 김포 : 위즈앤비즈, 2009, 199~203쪽. 69) 추교윤은 이 시기에 교권에서 급진적 성향을 보이는 천주교 사회 운동 단체들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천주교 사회 운동 안에서 세 가지 형태로 분화가 일어났다고 보았다. 이 가운데 사제 단과 정의평화위원회 같은 단체들은 이전 시기와 달리 정치 현실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중심으 로 하는 온건한 특성 을 가진 집단으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객관적 상황의 변화 라는 측면도 있지만 체제내화의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추교윤, 앞의 책, 54~55쪽.

124 124 교회사연구 제42집 전 시대의 관심을 지속해나가게 된다. 1990년대 들어 1980년대까지 뚜렷하였던 정치 영역에서 전개된 국 가와의 갈등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대신 생명 문제가 국가와 갈등의 초점 이 되었다. 70) 모자보건법 71), 생명공학 분야에서 인간 복제 및 인간 배아 연구의 제한 72) 등 교회의 생명윤리와 충돌하는 쟁점들에 대하여 직접 정 치적 행동을 한 경우 등이 그 예이다. 이 양상은 정교분리를 실천하고, 종교다원주의가 실현된 나라에서는 어느 종교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자신의 문제를 공적인 의제로 삼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73) 이 현상은 종교가 공적 영역으로부터 퇴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읽혔다. 74) 따라서 이 시기에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대응하였던 정치 현안들이 주로 기존의 인 권, 민주화와 관련된 문제에서 가톨릭 생명윤리에 위배되는 현안으로 변 화해가는 것을 이러한 흐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론적으로 한국은 정교분리를 완전히 실천하는 나라이다. 실제 이 시기에 교회가 국가의 사회정치적 의제를 거론하는 경우는 이전 시대 70) 이 원인에 대하여 신자들의 중산층화가 이때부터 거론되기 시작한다. 1970~80년대 가톨릭교회 의 사회참여에 공감하며 입교한 중산층 신자들이 이 시기부터 체제 내로 편입되면서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내 신자 구성층의 변화와 함께 시민사회의 구성이 다양해지면서 교회가 독자적인 의제를 설정하기 어려 워진 것도 영향을 주었다. 71) 이 법안에서 낙태를 허용 또는 방조하는 규정이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일례 로 청주교구는 백만인 서명 운동, 국회 청원 운동, 타 종교와의 연대 운동 시도 등을 통하여 나름 의 정치적 실천을 해왔다. 72) 이에 대하여는 신구교계가 합심하여 이런 연구와 시도들을 금지하는 법률 제정을 요구하였다 ( 국민일보 2001년 5월 11일자). 73)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의 독주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양적 성장이 이어지면서 1980년대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 3대 종교의 정립 구도가 형성된다. 천주교와 개신교 간에는 이미 거리가 존재하였던 데다 불교가 부상함으로 인해 어느 종교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정치 영역에서뿐 아니라 종교 영역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사실상 종교 다원 상황을 형성 고착시켰다. 74) 미국식의 공민 종교(civil religion)가 될 가능성도 점차 높아간다.

125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25 에 비하여 크게 줄었다. 75) 반면 모성보호를 이유로 한 낙태 관련 법안, 생명 존엄성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입법 시도에 대하여는 반대를 분명히 하고, 직접 정치적 행동에도 나서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 또한 정치적 행동에 속하지만 이전 시대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대까지 주요 쟁점으로 삼았 던 민주화와 인권 관련 의제들을 199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다루었는데 이전 시대에 비하여 빈도가 줄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 원회는 매년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키며 메시지를 발표하고, 외국 인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며, 산하에 사형제도폐지소위원 회와 환경소위원회를 신설하고 이 두 기구를 통해 사형 폐지 운동과 환경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주요 국가적 사안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 하거나 세미나를 개최하여 교회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76)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이 시기에 자립에 성공하고 마침내 해외 원조를 시작하는 단계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였다. 사회복지를 매개로 국가와의 제휴도 크게 늘어났다. 77) 국가와의 제휴 범위와 양은 천주교 교세의 인구 수 비중을 크게 추월하는 것으로 한국 종교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 75) 민주주의 실현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천주교 사회 운동 진영의 퇴조에서 잘 드러난다. 1990년대 들어 기층 운동과 직접적인 정치적 실천을 앞세우는 운동은 심각한 자원의 감소를 경험하였다. 아울러 교회의 사회정치적 실천의 빈도도 감소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김녕, 앞의 글 참조. 76)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연혁. 참조. 77) 심흥보는 이 현상을 그동안 천주교가 이루어 왔던 사회복지 활동의 정신과 업적을 사회가 인정 해 준 결과 라고 평가하였다. 심흥보,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388쪽. 실제 이러한 현상을 국가가 가톨릭의 투명성을 인정해 준 결과로 해석 가능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가톨릭과 같이 사회적 위신이 높은 종교들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궁극의 목적이 국가의 책임을 민간에게 전가하는 데 있고, 국교가 아닌 바 에야 종교별 형평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되는 측면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일례로, 보건복지부 2001 보건복지백서 는 국가가 종교와 같은 민간 복지 자원을 개발하고 육성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88쪽 참조.

126 126 교회사연구 제42집 다. 78) 정부 지원에 힘입어 천주교의 사회복지 참여 분야, 시설 단체 수, 재원 규모는 같은 시기에 여러 배 성장하였다. 79) 해외 원조는 한국 교회의 공식 해외 원조 실무를 담당하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를 중심으로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위원 회는 로마에 본부를 둔 국제 카리타스를 통하여 아시아 외 지역에 긴급구 호 사업을 지원하였고, 아시아 지역 개발 사업은 아시아인간발전협력체를 통하여 지원하였다. 80) 사회사목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하였는데, 국가사회복지의 손 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장 먼저 다가가 이를 정착시켜 사회복지 영역으로 이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일례로, 이 시기가 시작되는 1988년 교세통계 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특수 사목(거의 대부분 사회사목 영역)에 종사하 는 사제가 이 시기가 마무리되는 2007년에 721명으로, 본당 사목자 수 대비 37.3%를 기록한 경우를 들 수 있다. 81) 이는 사제 성소의 급격한 증가, 그에 따르지 못하는 본당 설립을 일차적 원인으로 볼 수 있지만, 교회의 민족사 참여 의지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 시기의 사회복지 영역은 국가와 제휴하게 되면서 본래의 사회영성 측면이 약화되었다. 대부분의 활동 주체가 본당 신자에서 전문 직업인으 로 이전되었고, 재원도 상당 부분을 국가가 책임지게 되면서 신자와 본당 78) 이태수, 시민 사회 내에서의 가톨릭의 사회복지의 역할과 과제, 시민사회와 종교사회복지, 학지사, 2003, 165쪽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한국천주교사회복지편람 200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7쪽. 79) 박문수, 천주교의 사회복지, 한국종교교단연구 VIII : 사회복지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58~63쪽 참조. 80) 박문수, 근대적 사회사업에서 사회복지로의 발전, 한국 근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하), 가톨릭출판사, 2006, 360쪽. 8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회 통계, 1988, 2008 참조.

127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27 이 수동적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체제내화되긴 했어도 사회사목 영역 이 사회복지보다 사회영성의 성장에 더 크게 기여하였다. (2) 사회영성 이 시기에도 교회의 민족사 참여는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다만 그 빈 도와 강도는 이전 시대에 비하여 현저하게 줄었고 다소 약해졌다. 이 때문 에 이전 시대에는 가난한 이들(혹은 주변화된 이들)의 우선적 선택 이 사 회영성의 핵심이었는데, 이때부터는 보조성 과 연대성 이 사회영성의 중 심 요소가 되었다. 우선 보조성은 사회복지 영역에서 국가와의 제휴 범위가 늘어나면서 과거와 같이 갈등 전략만을 고수할 수 없게 되면서 중요해졌다. 교회와 국가가 정교분리에 가깝게 각자의 고유 역할을 존중하면서도 협력을 도모 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휴와 견제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는 보조성의 원리 가 사회영성의 주요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연대성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축이 제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중요해졌다. 1970년대에는 시민사회의 토대가 빈약하여 교 회 역할이 중요하였다면, NGO들이 광범위하게 늘어난 상황에서는 오히 려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시민사회의 성장을 가로막을 위험이 있다. 이 경우에는 교회가 시민사회에 대하여 보조성의 원리에 충실하게 독립적 발 전을 보장하면서, 국가와 시장에 대하여는 시민사회와 연대를 통해 사회 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사회참여의 일부 형태가 사회사목이라는 이름으로 제도 안에 편입되 기는 하였지만, 본당과 달리 비신자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영역이 되다 보니 역시 책임자와 실무자 간, 실무자와 대상자 간 보조성의 원리가 중요

128 128 교회사연구 제42집 해졌다. 사회복지 영역도 비신자들이 실무자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면서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 영역이 개방된 공간에서 교회 의 모습을 직접 노출하는 장이 되어 교회가 선교 일선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한국이 세계화의 격랑에 빠져드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한 국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했고, 정 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 패러다임으로 이동하였다. 세계화는 한국 사회의 다문화 사회화도 촉진하였다. 외국인 노동자의 이 주로 시작된 다문화 사회는 결혼 이주민, 사업 목적의 장기 체류 외국인, 기타 이유 등으로 일 년 이상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현재는 인 구의 4%에 육박하고 출신국도 백여 개 나라에 이른다. 이 때문에 나그네 환대 가 중요해졌다. 특히 현재는 다문화 사회 담론 에 충실하게 이주민 들과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천주교는 물론,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정의의 문제가 이전 시기처럼 사회영성의 중요 한 차원이 되었다. 이전 시기에 성장하게 된 사회영성은 이 시기에 이르면서 훨씬 다양 한 차원을 포괄할 필요가 커졌다.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택 이 정의, 보조성, 연대성 더 나아가 경제 정의, 생태 정의 로까지 넓어져야 할 주 객관적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영성의 차원이 넓고 다양해지면서 이전 시기처럼 특정 가치가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이전 시기에 형성 발전된 사회영성이 더 넓은 영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어서 퇴조라기보다는 다른 측면 들의 심화로 볼 수 있다.

129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29 4) 2008년에서 현재까지 (1) 교회의 민족사 참여 천주교회는 이전 정부 들어서부터 2008년 미국 광우병 소고기 수입 을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시작으로, 용산 남일당 철거 반대 참여, 4대강 사업 중지 촉구 활동 82), 핵발전 반대,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해왔다. 특히 두 번째 시기를 연상시키는 빈도와 강도로 참여해왔다. 강정마을에서는 여러 명의 사제와 수도자들이 공무 방해를 이유로 구속될 정도로 반대 운동의 강도가 컸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0년 3월 12일 춘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 서 생명 문제와 4대강 사업에 대한 입장 을 통해 4대강 사업에 대한 우려 입장을 공식 표명하였다. 같은 해 4월 21일에는 4대강 사업에 관한 세미 나 를 개최,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2011년 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잡지 7월호에 원자력 발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 이라는 제하의 기고를 통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또한 이해에는 대림 제 2주일부터 한 주간을 사회 교리 주간 으로 제정하였다. 이어 강 주교는 2012년 3월에 한미 FTA, 과연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라는 글을 주교회의 홈페이지에 기고하였고, 최근에도 주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꾸 준히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는 2011년 9월 15일 강 정마을 해군기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지 건설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천 82) 2010년 3월 8일 1,100명의 사제가 중단을 촉구하는 선언에 동참했고, 5월 10일에는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전국 사제 수도자 5005인 선언 (교구 사제 1,580명, 남자수도회 282명, 여자수도회 3,143명)을 발표하였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16일자).

130 130 교회사연구 제42집 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대한문과 강정마을에서 미사를 이어왔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4대강 사업, 원자력 발전,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한미 FTA와 같이 한국 사회 내에서 이해 집단 간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는 쟁점에 대하여 일관되게 종말론적 상대주의 83) 입장에서 의견 을 표명해왔다. 교회의 정당한 예언직 수행을 반대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 음에도 교회는 이러한 움직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사회복지 측면에서는 이전 시기의 마지막에서 전개되던 추세가 현재 도 이어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사목도 확장 일로에 있다. (2) 사회영성 교회의 참여 양상은 두 번째 시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영성의 내용은 크게 다르다. 이 시기에 사회영성이 다시 확장되는 것을 보면 두 번째 시 기의 기억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둘째 시기의 경험은 세 번째 시기에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다가 이번 시기에 이르러 부분적으로 수렴되며 다시 부상하였다. 이 시기의 사회영성은 인간을 넘어 생태계로 범위가 확장되고, 평화 가 새로운 요소로 등장하였다. 평화는 비단 국내를 넘어 동북아시아 더 넓게는 아시아 전체로 관심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 시기를 세계 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로 보았는데, 정작 교회의 관심이 이 영역으 로까지 확장되는 것은 이번 시기부터이다. 그러니 현재가 사회영성이 가 장 심화된 시기라 평가할 수 있다. 83) 교회는 현세적 야심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간추린 사회 교리 13항). 하느님 나라에 비춰보면 지상의 어떤 사회질서도 완 전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모든 사회 체제에 대하여 상대적인 위치에 있다.

131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31 물론 현재의 영성에는 이전 시대 사회영성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들을 옹호하는 활동에서는 여전히 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선 택이 요청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는 시민사회와의 보조성과 연대성이 요구된다. 강정의 경우에는 동북아 평화, 생태 정의가 중요한 차원이 된다. 노동 문제에서는 경제 정의가 요청된다. 따라서 이 시기가 기간은 짧지만, 이전 시대 사회영성의 모든 차원이 하나로 모이면 서 성숙의 단계에 이르는 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5. 의미와 결론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는 역사학뿐 아니라 다른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도 흥미 있는 주제였다. 교회 안에서도 이 활동이 한국 사회 안에서 긍정 적인 평가를 얻은 경험이었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이 경험들을 이 글과 같이 다른 각도에서 의미를 해석해보는 작업은 없었다. 분명 지난 70여 년의 경험이 한국 교회는 물론 보편 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소중한 지혜들이 들어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아직 낯선 주제인 사회영성을 기준으로 교회의 민족사 참여 경험을 들여다보니 새삼 새롭게 다시 조명해야 할 분야들이 많음을 보게 된다. 교회 외부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건들이나 인물들을 통해 의미가 드러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다른 각도로 보면 교회 안에서도 보이지 않게 면면히 기억으로 전수되는 넓은 경험의 층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 방법이 미숙하여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앞으로 가능성 이 충분하다. 사회영성은 이제 한국 교회가 미래를 열어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132 132 교회사연구 제42집 정신적 자산이다. 다행히 한국 교회는 지난 70여 년 동안 긍정, 부정의 경험 모두를 통해 사회영성을 심화 발전시켜 왔다. 특정 시기에는 사회복 지가, 또 어떤 시기에는 사회사목이 중심이 되면서 면면히 사회영성을 심 화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이 요소들을 발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더 확산 시키는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실 교회가 잊고 싶은 시절에도 사회영성은 싹을 틔웠다. 잠복기로 보이던 시기에도 사회영성은 조용히 널리 확산되었다. 이 때문에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 다시 불붙을 수 있다. 지금의 교회가 보여주는 실천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측면은 교회사에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 을 터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영성이 우리 시대의 교회에 주는 교훈이다. 사회영 성이 꽃필 때 교회는 민족사 안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반대로 민족 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통해 참여할 때 사회영성이 당대는 물론 기억으 로 다음 세대에 전수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다수가 반대하고, 따라오지 않 는다 해도 사회영성의 기준에 맞는 참여를 멈춰서는 안 된다. 교회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의와 악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 소명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교회는 한국을 넘어 인류 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할 수 있을 터이다. 투고일 : 심사 시작일 : 심사 완료일 :

133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33 참고 문헌 강돈구, 해방이후 종교와 정치, 한국 근대 100년의 사회변동과 종교 적 대응, 한국학술정보, 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학교출판부, 1997., 전쟁과 종교, 오산 : 한신대학교 출판부, 김 녕, 제5공화국 이후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 학교출판부, 1997., 장면과 가톨릭교회, 그리고 시민사회 : 이상과 현실, 장면 총리 와 제2공화국, 경인문화사, 노길명, 한국사회와 종교운동, 빅벨출판사, 1988., 광복 이후 한국 종교의 정치간의 관계 해방공간부터 유신시기 까지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27, 한국종교학회, 노길명 오경환, 천주교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대구 : 가톨릭신 문사, 노길명 박형신 외,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사, 명동천주교회, 한국 천주교 인권운동사 : 명동천주교회 200주년사 제1집, 명동천주교회, 박도원,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박문수, 가톨릭 사회운동, 한국가톨릭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가톨릭교회와 근대적 사회사업의 도입과 발전, 한국 근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중), 가톨릭출판사, 2005.

134 134 교회사연구 제42집 박문수, 근대적 사회사업에서 사회복지로의 발전, 한국 근 현대 100 년 속의 가톨릭교회(하), 가톨릭출판사, 2006., 천주교의 사회복지, 한국종교교단연구 VIII : 사회복지편, 한 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박보영, 천주교도시빈민회를 통해 본 천주교 빈민운동,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사, 오경환, 해방 이후 천주교의 성찰과 전망, 1945년 이후 한국종교의 성찰과 전망, 민족문화사, 오경환 신부 화갑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가 톨릭대학교출판부, 유홍렬, 補 한국 천주교회사 下, 가톨릭출판사, 이성배, Gustavo Gutiérez, 해방신학의 영성, 왜관 : 분도출판사, 장정란, 한국전쟁과 선교 실상,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조 광, 한국천주교 200년, 햇빛출판사, 1989.,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조광 외, 장면총리와 제2공화국, 경인문화사,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천주교 인권위원회, 천주교 인권위원회 15년사, 천주교인권위원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천주교의 위상 : 70년대 정의구현 활동에 대한 종합과 평가, 왜관 : 분도출판사, 최종고, 제1공화국과 한국천주교회, 한국천주교회창설이백주년기념 한국교회사논문집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35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35 최종철,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 : 인천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추교윤, 한국 천주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역할, 김포 : 위즈앤비 즈, 2009., 천주교 사회운동의 전개와 특성, 한국의 종교와 사회운동, 이학사, 한국 갤럽,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한국 갤럽,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 천주교 대사전(부록),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한국그리스도사상 20, 한국그리스도사상연 구소,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 한국 천주 교 정의평화위원회 설립 25주년 기념 자료집 1969~1994, 빅벨 출판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노동하는 인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3.,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1,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2000.,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2001., 간추린 사회 교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5., Pope Benedict XVI,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함세웅,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역사와 증언, 종교신학연구 1, 황종렬, Donal Dorr, 영성과 정의, 왜관 : 분도출판사, Francis Xavier Meehan, Contemporary Social Spirituality, ORBIS, 1982.

136 136 교회사연구 제42집 ^_pqo^`q The Catholic Church s participation in national history and the growth of social spirituality from 1945 to the present Moonsu, Park Vice director, Catholic Academy for Korean Culture This thesis deals with the result of reflection on the Catholic Church s participation in national history from a social spirituality perspective since 1945 to the present. The social spirituality can be defined as an attitude which Christian put the teachings of God into practice in the society. The era that the Catholic Church has participated in national history since 1945 to the present can be divided into four periods according to characteristics of the Church s way of responding to social problems and evaluating indicators of social spirituality. The first period extends from 1945 to mid 1960s. In this period profound events that which would influence greatly to the formation of the Korean society, had occurred. But there were no significant progresses in the realm of social spirituality. The social spirituality was in embryo stage in this period. The second period extends from the late 1960s to The Catholic Church participated in many circumstances of national history in this period. There were remarkable growths in social spirituality accordingly. The church came to be conscious of social problems deeper than the earlier period. The third period extends from 1988 to The procedural democracy had realized partially, and civil society had progressed rapidly also. In the realm of social spirituality experiences which had accumulated in the earlier period extended to social welfare and catholic social ministries. The form of social spirituality had diversified and the area of actualization had extended.

137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137 The last period extends from 2008 to the present. The Catholic Church is participating in environmental issues and social justice problems actively like the second period. The most various forms of social spiritualities in history are being flowered in this period. The catholic church is extending its participation ranges to international issues through a peace problem. Considering all the facts, the more social spirituality grew, the more the Catholic Church received positive evaluations in history. The essence of the Gospel has rooted in the mind of contemporaries also. Therefore the social spirituality can be a significant assessment scale to measure level of church s contribution to development and maturity of mankind. Keywords : the Catholic Social Teaching, history of nation, social pastoral ministry, social spirituality, catholic social movement

138

139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박준양** 1. 서론 2. 과학주의(scientism) 3. 세속주의(secularism) 4. 신영성 운동(new spirituality movement) 뉴에이지(New Age)를 중심으로 5. 결론 국문 초록 오늘날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세계적인 문화적 흐름과 운 동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과학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신영성 운동이다. 이 세 가지 흐름들은 기본적으로 각기 분리된 독자적인 흐름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상 서로 연결되어 더욱 상승적인 작용을 하며 한국 사회 안에서도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먼저, 현대의 과학기술 만능주의는 그 독자적 세계관과 배타적 진리관을 구축함으로써 종교와 * 이 글은 2013학년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비연구비 의 지원을 받아 연구 작성된 논문이다. ** 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신부.

140 140 교회사연구 제42집 신앙의 영역을 점점 축소시키는 악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무신론적 과 학주의는 근본주의적 관점에서 종교와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가 한다. 한편, 세속주의는 상대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세속주의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정적 의미의 상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속주의는 하나의 부정적 차원의 사회-문화적 풍조를 의미하며, 이는 자신의 기분에만 맞고 좋으면 뭐든지 합리화될 수 있다 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신영성 운동의 대표적 경우인 뉴 에이지는 전체론적/전인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사람들을 잘못된 영성의 개념과 방향으로 이끈다. 이러한 세 가지 흐름은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 에 큰 도전과 위협을 구성하기에, 이들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사목적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이 흐름과 운동들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게 함 으로써 더 이상 교회의 신자들이 여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왜 사람들이 이러한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빠져 신앙을 저버리고 교회를 등지는지에 관해 듣고 그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 다. 셋째, 보다 능동적이고 지혜로운 복음 선포와 깊은 사목적 배려를 통해 더욱 역동적인 신앙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보 호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현대 기술 문명의 발전 속에 목마름을 느끼 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신비 체험을 향한 지적이고 영적인 요구를 깨달 아야만 한다. 교회의 전통적인 호교론적 가르침을 단순히 전수하고 반 복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 비를 선포하고 증언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주제어 : 그리스도교 신앙, 과학주의, 세속주의, 상대주의, 신영성 운동, 뉴에이지, 신비사상

141 1. 서론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2013년에 걸쳐 전 세계의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의 해 (Year of Faith)가 선포되었다. 2013년 2월 말 자진 사임한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재위 2005~2013)가 선포한 신앙의 해 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개최 50주년을 기념하여 2012년 10월 11일에 개막 되었고 2013년 11월 24일에 폐막되었다. 이처럼 신앙의 해 선포라는 보편 교회적 기획은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가 마주한 전반적인 도전과 위 기 상황에 대한 자각과 성찰을 통한 쇄신을 전제하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믿음의 이유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복음화 (New Evangelization)를 통해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을 북돋아 선교 정신을 고취시키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나아가, 현대 세계 안에서 추진되는 새로운 복음화 란 무의미한 신 앙생활을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이미 알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복음과 신앙을 축소되고 왜곡된 형태로 아 는 사람들이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게까지도 새로이 복음을 선포하고 사목적 접근을 시도하는 광범위한 작업 을 포괄해야 한다. 본 논문은 이렇듯 신앙의 해 를 맞아 이루어지는 신앙적 성찰과 점 검이라는 맥락에서, 오늘날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세계적 인 문화적 흐름과 운동은 무엇이며 그것이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교회적 대응의 사명은 어 떠해야 하는가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밝히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하나의 동일한 세계 안에서 동일한 시간대에 교차되는 여러 다양한 스펙 트럼(spectrum)을 분석하면서 그 가운데 건전한 신앙생활에 특별히 위험 요소로 다가오는 주요 흐름 세 가지를 꼽아본다면, 과학주의(scientism),

142 142 교회사연구 제42집 세속주의(secularism), 그리고 신영성 운동(new spirituality movement) 을 말할 수 있겠다. 이 세 가지 흐름은 기본적으로 각기 분리된 독자적인 흐름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더욱 상승적인 작용을 하 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흐름의 정체와 문제가 구체적으 로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에 위협을 구성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도전에 대응해야 할 교회적 과제는 무엇인지를 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할 것이다. 2. 과학주의(scientism) 1) 과학기술 만능주의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주요한 흐름으로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과학주의 (scientism)다. 그런데 과학주의 란 용어는 여기서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는 기술지상주 의 (technocentrism)적 관점의 과학주의, 즉 과학기술 만능주의 를 말할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놀라운 발전을 목격한다. 특히, 스마트폰(smart phone)의 일반화 등으로 드러나는 정보통신기술 (information technology) 산업의 급성장,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과학적 으로 더 깊이 탐구하고자 하는 생명공학(biotechnology) 산업의 발전은 우 리의 삶을 매우 편리하고 용이하게 한다는 긍정적 결과를 자아내지만, 다 른 한편으로 부정적 영향 또한 드러내게 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과도 같이 대중화된 최첨단 전자기기들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홍수에 마비되 어,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에 관해 질문하고 반성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상실해버린다.

14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43 나아가, 가장 큰 문제는 과학이 전통적인 불가침의 영역을 넘어서고 대체하면서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착각과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이다. 베네딕도 16세가 말하듯이, 기술의 우위성은 사람들이 물질로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드는 경향 1) 을 파생시키기 때 문이다. 이러한 과학적 실증주의(scientific positivism)에 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 역시 다음과 같이 그 위험성을 지적 하였다. 과학적 탐구의 영역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특히 형이상학적이거나 윤리적인 전망에 대한 일체의 호소를 배격하는 실 증주의적 정신(mens positivistica)이 지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과학자 들은 윤리적 가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인간 인격과 그 사람의 일생 전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그들 관심의 중심에 놓은 위험을 무 릅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극단적인 일부는 기술적 진보를 위한 기회 라 생각하고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자연과, 심지어 인간 존재자에 대해 서까지도 거의 신적인 능력을 행사하려는 유혹에 굴복하는 듯이 보였습 니다. 2) 실제로,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으로 어느 장소든 상관없이 네트워크 (network)에 접속 가능하다는 유비쿼터스 (ubiquitous computing) 개념 의 등장은, 동시에 모든 접속자를 그 해당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1) 베네딕도 16세, 진리 안의 사랑 :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는 온전한 인간 발전에 관한 회칙 (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9, 113쪽(7항), [원문 : Litterae encyclicae Caritas in Veritate de humana integra progressione in caritate veritateque, Acta Apostolicae Sedis 101, 2009, pp. 641~709]. 2) 요한 바오로 2세, 이재룡 옮김,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회칙 (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9, 59~60쪽(46항), [원문 : Litterae encyclicae Fides et Ratio de necessitudinis natura inter utramque,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7(1998), Bologna : EDB, 2000, pp. 898~1091(nn. 1175~1399)].

144 144 교회사연구 제42집 망 안에서 관찰, 통제가 가능하다는 가공할 현실로의 전이를 가능케 한 다. 3)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이제껏 하느님의 능력으로 간주되던 무소부재 ( 無 所 不 在 ) 혹은 편재( 遍 在 )의 개념이 사실상 기술적 차원에서 현실화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과거에는 불가능한 것 이라 여기던 인간 생명체의 복제 가능성 등에 관한 연구가 시도되면서, 이 는 사실상 하느님의 창조적 전능( 全 能, omnipotens) 개념이 과학기술에 의해 침범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명윤리(bioethics) 분야의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은 물론이다. 4) 따라서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하늘을 바라볼 필요가 없게 만든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의 새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듯 과학기술의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가능해 지는 것 같은 미래에 대한 환상은,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에 기초한 매스 미디어(mass media) 산업을 통해 더욱 확산되어 나간다. 이제 종교적 믿 음의 의미와 가치가 의문시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즉,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으로 말미암아 과학기술 자체가 절대적 가치로 인정되는 사태가 발생 한다. 이런 맥락에서, 스위스 출신의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 ) 은 모든 건물을 오직 자연과학이라는 토대 위에만 세우려 하는 5) 심각 한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오늘날 자연과학의 역할은 당연히 정당한 평가 를 받아야 하지만,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세우려는 잘못을 범해서 3) 심광현,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학 과학사, 2009, 50~55쪽 참조. 4) 오늘날 생명윤리 분야의 여러 문제들에 관하여 Francis S. Collins, 이창신 옮김, 신의 언어, 김영사, 2009, 237~274쪽, [원문 : The Language of God : A Scientist Presents Evidence for Belief, New York : Free Press, 2006] 참조. 5) Hans Küng, 서명옥 옮김,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 : 만물의 시초를 둘러싼 갈등과 소통의 드라마, 왜관 : 분도출판사, 2011, 63쪽, [원문 : Der Anfang aller Dinge : Naturwissenschaft und Religion, München : Piper Verlag GmbH, 2005].

145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45 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나아가, 현 교황 프란치스코(재위 2013~ ) 는 첫 회칙 신앙의 빛 (Lumen Fidei, )을 통해서, 과학기술 의 맹신에 기초한 배타적 가치관을 진리 개념과 연결하여 비판적으로 지 적한다. 현대 문화에서는 기술(technology)의 진리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으로 제작하고 측량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로 여겨집니다. 또한 기능적이고, 삶을 좀 더 편하고 쉽게 만드는 것이 진리로 여겨집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확실하고,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으며, 함께 토론하 고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로 여겨집니다(25항). 6) 결론적으로, 굳이 종교와 신앙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적 발전을 통해 독자적 세계관과 배타적 진리관을 구축 함으로써 종교와 신앙의 영역을 점점 축소, 퇴화시키는 것이 바로 오늘날 과학기술 만능주의의 도전이며 위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과학적 무신론(scientific atheism)의 도전 7) 과학주의의 두 번째 범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형이상학적 영역에 대한 침범을 바탕으로 더욱 공격적인 무신론적 과학주의가 등장하 게 된다는 점이다. 이를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무신론 (new atheism) 혹은 과학적 무신론 (scientific atheism)이라 부를 수 있고, 만일 6) 프란치스코, 김영선 옮김, 신앙의 빛 : 신앙에 관한 회칙 (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 36~37쪽, [원문 : Litterae encyclicae Lumen Fidei de fide, Acta Apostolicae Sedis 105, 2013, pp. 555~596]. 7) 이 단락은 다음의 글들 내용을 발췌, 요약 및 수정, 보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PARK, Junyang(박준 양),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가톨 릭 신학과 사상 69, 신학과사상학회, 2012, pp. 162~177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 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새천년복음화연구소 논문집 3, 새천년복음화연구소, 2012, 35~39쪽.

146 146 교회사연구 제42집 이를 종교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무신론적 근본주의 (atheist fundamentalism)나 반( 反 )종교적 근본주의 (anti-religious fundamentalism), 혹 은 과학적 근본주의 (scientific fundamentalism)라고 부를 수 있겠다. 사실, 지금까지 근본주의 란 용어를 일반적으로 종교적 근본주의 (religious fundamentalism), 즉 기독교 근본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 등을 가 리키는 맥락에서 사용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역설적이게도 종교적 근본 주의 외에 무신론적 맥락의 반종교적 근본주의 라는 용어가 새로이 등장 하게 된 것은, 근래의 과학적 무신론 이 종교적 근본주의 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특징들, 즉 협소하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인 세계관과 더불어 적이라고 규정하는 비판 대상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 그리고 매우 공격적 이고 전투적인 성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8) 이처럼 현대 세계의 새로운 과학적 무신론이 기존의 종교적 근본주 의 와 다를 바 없는 교조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며 종교와 신앙을 비판하는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최근의 여러 학자는 과 학적 근본주의 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종교적 근본주의나 과 학적 근본주의 모두 공통으로 보이는 현상은 실재에 대한 매우 편협하고 배타적인 해석, 그리고 그에 입각한 공격적 성향이며, 이들 모두는 종교 자 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남겨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와 신앙을 등지게끔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과학적 근본주의는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와 연결되어 그 폐해를 가속화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과학적 근본주의가 신봉하는 실재관이다. 인 8) 근본주의의 특징에 관하여 Karen Armstrong, 정준형 옮김(오강남 감수), 신을 위한 변론 : 우리 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웅진지식하우스, 2010, 415~421, 446~469쪽, [원문 : The Case for God, New York : Alfred A. Knopf, 2009] 참조.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신념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를 억압하려 드는 광신주의(fanaticism) 의 독선적 진리관과 배타 적, 공격적 성향에 대하여 지적한다. 프란치스코, 앞의 책, 37쪽(25항) 참조.

147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47 간의 이성으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의 근거와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 은 바로 자연과학(natural science)뿐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자연과학적 방 법론이야말로 참 실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반면 에 다른 모든 종교적 믿음은 근거 없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 간주한다. 9) 이러한 현대 과학적 무신론을 이끌어가는 대표적 인물로는 영국 옥스 퍼드(Oxford) 대학교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를 꼽을 수 있다. 10) 그는 미국 하버드(Harvard) 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였던 에드워드 O. 윌슨(Edward O. Wilson, 1929~ )이 주창한 사회생물학 (sociobiology)을 기본 바탕으로, 11)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 1882)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자 시도하 였으며, 마침내 종교의 영역에까지 들어와 무신론적 주장을 공격적으로 내세우게 된다. 윌슨의 사회생물학 자체가 이미 많은 논쟁을 일으켰는 데, 12) 도킨스는 이를 훨씬 더 무신론적이고 반종교적으로 발전시키며 대 9) Cf. Alister McGrath, Bestseller Atheisms : The New Scientism, Concilium 4, 2010, p )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을 이끌어가는 몇몇 주요 인물들에 관해서 John F. Haught, God and the New Atheism : A Critical Response to Dawkins, Harris, and Hitchens, Louisville, KY :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 참조. 11) 에드워드 O. 윌슨은 생물학과 사회학을 연결시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사회-문화 현상 전체를 해석하고자 시도한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다. 이러한 사회생물학 분야의 대표적 저서로는 Edward O. Wilson, Sociobiology : The New Synthesis,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참조. 윌슨에 의한 사회생물학적 관점의 인간관에 대해서는 Edward O. Wilson, 이 한음 옮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00, [원문 : On Human Nature, Cambridge, MA : Harvard University Press, 1978] 참조. 사회생물학적 연결과 통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윌슨은 지식의 단일성을 의미하는 Consilience 라는 핵심 개념을 제시하였고, 국내에서는 이것이 통섭 이라는 용어로 번역되었다. Edward O. Wilson, 최재천 장대익 옮김, 통섭 : 지식의 대통 합, 사이언스북스, 2005, [원문 : Consilience : The Unity of Knowledge, New York : Alfred A. Knopf, 1998] 참조. 12) 사회생물학의 주장과 관련된 국내외의 논쟁들에 관하여 김동광 김세균 최재천 엮음, 사회생 물학 대논쟁, 이음, 2011 ; Franz M. Wuketits, 김영철 옮김, 사회생물학 논쟁, 사이언스북 스, 1999, [원문 : Gene, Kultur und Moral : Soziobiologie-Pro und Contra,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0] ; Ted Peters Martinez Hewlett, Evolution from Creation to New Creation : Conflict, Conversation, and Convergence, Nashville, TN : Abingdon Press, 2003 참조.

148 148 교회사연구 제42집 중적으로 확산시켰다. 이제 다윈의 진화론은 더 이상 하나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 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도킨스는 1976년의 유명 저서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 에서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에는 유사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 제자(replicator)가 필요하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진화의 복제 자가 유전자(gene)라면, 문화적 유전자의 복제자는 바로 밈 (meme)이다. 이 밈 이란 단어는 모방을 의미하는 그리스(Greece)어 어근에서 따와 도 킨스가 만든 신조어이다. 마치 그때그때 유행하는 패션(fashion) 감각이 하나의 밈 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모방되고 전해지듯이, 결국 신 이라는 개념도 인간의 뇌와 뇌 사이를 뛰어다니며 전염되는 하나의 밈 에 불과하 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13) 도킨스는 이후 눈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 1986), 14) 에덴의 강 (River Out of Eden, 1995), 15) 악마의 사도 (A Devil s Chaplain, 2003), 16) 지상 최대의 쇼 (The Greatest Show on Earth, 2009) 17) 등 여러 책을 계속해서 집필했는데, 그중에서도 2006년에 발간 된 저서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18) 은 전 세계적인 논쟁을 불 13) Richard Dawkins, 홍영남 옮김,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02(개정판), 305~310쪽, [원 문 : Selfish Gene,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 참조. 14) Richard Dawkins, 과학세대 옮김, 눈먼 시계공 : 진화론은 미리 설계된 적이 없는 세계의 비밀 을 어떻게 밝혀내는가, 민음사, 1994, [원문 : The Blind Watchmaker : Why the Evidence of Evolution Reveals a Universe Without Design, New York : W.W. Norton & Company, ] 참조. 15) Richard Dawkins, 이용철 옮김, 에덴의 강 : 리처드 도킨스가 들려주는 유전자와 진화의 진실, 사이언스북스, 2005, [원문 : River Out of Eden : A Darwinian View of Life, New York : Basic Books, 1995] 참조. 16) Richard Dawkins, 이한음 옮김,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 기, 바다출판사, 2005, [원문 : A Devil s Chaplain : Reflections on Hope, Lies, Science, and Love, New York : Houghton Mifflin Company, 2003] 참조. 17) Richard Dawkins, 김명남 옮김, 지상 최대의 쇼, 김영사, 2009, [원문 : The Greatest Show on Earth : The Evidence for Evolution, New York : Free Press, 2009] 참조. 18) Richard Dawkins, 이한음 옮김,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김영사, 2007,

149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49 러일으켰다. 19) 여기에서 도킨스는 과학적 주제를 넘어서 종교와 신앙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며, 과학이 전통적인 신학의 영역을 대체해야 한 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실재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처럼 종교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줄 수 없기에 종교적 신앙이란 거짓된 믿음에 근거한 망상에 불과하 다고 규정한다. 그는 초자연적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 종 교를 제거하면 세상은 훨씬 더 안전한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 스도교는 이러한 거짓된 종교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제시한다. 영국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교의 세계적 이론물리학자인 스티 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 )은 리처드 도킨스만큼 전투적이지 는 않지만, 2010년의 저서 위대한 설계 (The Grand Design)를 통해 이 전의 작품들에서 드러났던 은유적 방식이 아니라 명시적이고 공격적인 무 신론을 전개한다. 그는 이제 철학은 현대 물리학의 놀라운 발전을 결코 따 라잡지 못하기에 죽은 것이라고 단언하며, 인생과 우주의 비밀에 관한 물 음은 오직 과학만이 대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이제 과학은 우 주의 신비가 어떻게 (how) 이루어지는지만 아니라 왜 (why)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결론적으로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생성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 강조한다. 20) 이제 서구 사회에서뿐 아니라, 급속도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정보화 사회로 이행된 동북아시아에서도 이러한 무신론적 과학자들의 전투적이 [원문 : The God Delusion, New York : Houghton Mifflin Company, ] 참조. 19) 리처드 도킨스에 대한 대표적 비판으로는 Alister McGrath, 김태완 옮김, 도킨스의 신 : 리처드 도킨스 뒤집기, SFC 출판부, 2007, [원문 : Dawkins God : Genes, Memes, and the Meaning of Life, Oxford : Blackwell, 2007] ; Alister McGrath Joanna Collicutt McGrath, The Dawkins Delusion? Atheist Fundamentalism and the Denial of the Divine, London :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2007 참조. 20) Stephen Hawking Leonard Mlodinow, 전대호 옮김, 위대한 설계, 까치글방, 2010, 9~15, 227~228쪽, [원문 : The Grand Design, New York : Bantam Books, 2010] 참조.

150 150 교회사연구 제42집 고 근본주의적인 주장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세계 곳곳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근본주의적 흐름들 간의 충돌과 갈등, 그리고 전쟁 등에 역겨움을 느끼고 지쳐버린 사람들, 특히 젊은 층에게 종교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이다 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적 근본주의는 많은 사 람에게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며, 과학적 근본주의는 이 러한 탈종교 현상을 돌이킬 수 없이 더욱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3) 과학주의 시대의 신학적 성찰 오늘날 새로이 전개되는 과학주의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과연 어떠한 신학적, 사목적 대응을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성 찰을 제공할 수 있겠다. 첫째, 과학기술 만능주의의 맹점과 환상에 대해 언급해야 할 필요 가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긍정적 결과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 지만, 그 이면에서 발생되는 부작용들에 대한 지적이 필요하다. 과학기 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은, 그리고 과학기술의 진보 자체 가 보편적 인간 사회의 진보로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명백해진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를 신학자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구체 적으로 설명한다. 원자력공학, 유전공학, 집중 의학, 녹색 혁명, 생산 자동화, 경제 기술 통신의 세계화 등, 거의 모든 주요한 과학 기술적 진보는 예기치 않았거 나 알아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한다. 20세기 말 거 품경제가 붕괴되고 난 뒤에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도 이른바 금융시장 이 자기 조정 기능을 가지고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더는 믿지 않 는다. 제3천년기에도 세계열강들은 여전히 가난 기아 질병 문맹과의

151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51 싸움이 아니라, 전방위적 군비 확장에 수십억씩 투자하고 있다. 이 모든 것 이 이성을 거역한다. 21) 이러한 전 세계적 차원의 흐름과 현상이 일으키는 여러 문제에 대한 자각 속에, 한국 교회의 차원에서도 환경 오염으로 인한 생태 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생명윤리 분야의 생명 수호 활동이 이미 구체적으로 진행 중이 다. 나아가, 정보화 시대의 정신적 폐해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폭력과 갈등으로 인한 정신적 일 탈과 사회적 파괴 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의 간접적 과제와 역할이기도 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 생 명을 경시하는 문화적 풍조를 가리켜, 생명의 문화 와 반대되는 죽음의 문화 라고 호칭하였는데, 22) 오늘날 직접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뿐 아니라 이처럼 언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 삶에 상처와 피해를 주는 경 향성 역시 넓은 의미에서 죽음의 문화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적 무신론의 공격적인 도전에 대해 정확한 분석과 진단, 그리고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그 주장의 허구성과 폐해에 대하여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 한 사목 헌장 (Lumen Gentium, )에서는 부당하게 실증 과 학의 한계를 넘어서 만사를 과학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 하는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대한 문제로 여겨야 하고 더욱더 치밀한 검토를 하여야 한다 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교회는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서 신 21) Hans Küng, 앞의 책, 63쪽. 22) 요한 바오로 2세, 송열섭 옮김, 생명의 복음 : 인간 생명의 가치와 불가침성에 관한 회칙 (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39~40쪽(12항), 56~58쪽(21항), [원문: Litterae encyclicae Evangelium Vitae de vitae humanae inviolabili bono,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4(1994~1995), Bologna : EDB, , pp. 1206~ 1445(nn. 2167~2517)] 참조.

152 152 교회사연구 제42집 부정의 숨은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며, 무신론이 일으키는 문제들의 중 요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21항 참조). 사실, 과학적 언어들로 이루어진 현대의 무신론적 주장 이면에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표출해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분노와 적대감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23) 해석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철저하게 중립적인 전제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이 미 그들이 가진 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과 반감에서 출발하였다고 분 석 가능하다. 24) 이미 형성된 무신론적 견해와 주장을 과학적 지식을 통해 보다 더 설득력 있게 합리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25) 과연 그들의 과학적 양심에 의거하여 순수한 학문적 탐구의 기반에서 출발하였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입견에 의거한 그들의 종교적, 신학적 지식은 매우 피상적이고 한계적이며, 그들이 공격하는 대상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숙 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임을 또한 지적할 수 있겠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반종교적 공격 안에서 드러나는 종교적, 신학적 지식 자체 나, 그들이 주로 비판과 공격 대상으로 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입장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교 전통에 입각한 건전한 신학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26) 23)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p. 175~176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 록), 38쪽 참조. 24) 해석학적 관점에 바라본, 이해의 실존론적 선구조( 先 構 造 )와 전이해( 前 理 解 ) 개념에 대하여 박준 양, 성경과 전승의 관계에 대한 해석학적 조직신학적 고찰, 가톨릭 신학과 사상 60, 신학 과사상학회, 2007, 238~241쪽 ; 심상태, 한국 교회와 신학 전환기의 신앙 이해, 바오로딸, , 206~209쪽 참조. 25) Alister McGrath, 앞의 책, 33, 186쪽 참조. 26)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 176 참조.

15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53 셋째,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은 반드시 필연적으 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유물론적이 고 무신론적인 진화생물학적 입장에서는 새로운 창조 (creatio nova)를 향한 광대한 우주와 심오한 인간 생명의 신비를 모두 다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27) 과학적 무신론자들의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환원주의적 입장은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에 반드 시 그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우주와 인간 생명의 신비는 인간 이성에 의해 어느 정도 탐구될 수 있지만, 그 모두가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여전히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영 역에 속한다. 인간의 실존은 유전자에 의해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 니며, 신비를 추구하는 인간의 영적 차원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기 술의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영혼(soul)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 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교회의 가르침은 진화론을 전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며, 과학과 신학의 책임 있는 대화를 통해 이에 관한 연구가 진지하게 지속되기를 권고하면서도, 인간 영혼에 관한 영역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28) 따라서 교회가 책임 있게 가르치고 전파해야 할 것은, 신학과 과학이 상호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 비판에 입각한 상호 대화를 통해 함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모두 우주의 기원과 인간 실존의 신비에 대한 진리 탐구적 열망의 동일한 샘에서 솟아나와, 각자 다른 길에서 그 위대한 신비를 향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해 가능하다. 29) 나아가,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회칙 신앙의 빛 을 통해서, 27) Jürgen Moltmann, 김균진 옮김,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86, 230~238쪽, [원문 : Gott in der Schöpfung : Ökologische Schöpfungslehre, München : Christian Kaiser Verlag, 1985] 참조. 28) 박준양, 창조론, 아름다운 세상의 회복을 꿈꾸며, 생활성서사, 2008, 150~151쪽 참조.

154 154 교회사연구 제42집 과학의 한계를 조정하고 보완해 주는 신앙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과학의 시각은 신앙으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신앙은 과학자들이 실재의 고갈될 수 없는 모든 부 안에서 실재에 늘 열려 있도록 격려합니다. 신앙 은 과학적 연구가 몇 가지 공식으로 만족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비판적인 감각을 일깨워주고, 자연이 언제나 더욱더 큰 실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창조의 신비 앞에서 경이감을 갖게 함으로써 신앙은 이성의 지평을 더욱 넓혀 줍니다. 이는 과학적 탐구에 개방되어 있는 세상에 더 큰 빛을 비추 기 위함입니다(34항). 30) 넷째, 과학주의에 빠져 교회를 등지고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에 대 한 이해와 사목적 배려가 요구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떠나가 게 하는가에 대한 분석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와 대응이 필요 할 것이다. 정말 그들이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공격하는 종교의 비합리적 모습을 우리 교회에서 발견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들이 교회의 어 떤 측면에 실망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교회에 대한 반론과 요구에 담겨 있는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읽고자 노력해야 한다. 즉, 그들의 지적인 요구와 진리 추구에 대한 열망이 무엇인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하겠 다. 그러므로 과학주의에 대한 반론은 단순히 전통적인 호교론적 맥락의 방어적 대응을 넘어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회 안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진리추구의 열망이 발견되고 체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과학 29) Cf. John F. Haught, Science and Religion : From Conflict to Conversation, New York : Paulist Press, 1995, p. 203 ; Hans Küng, 앞의 책, 64~69쪽 ; Jürgen Moltmann, 김균진 옮김, 과학과 지혜 :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하여, 대한기독교서회, 2003, 47~53쪽, [원문 : Wissenschaft und Weisheit : Zum Gespräch zwischen Naturwissenschaft und Theologie, Gütersloh : Christian Kaiser/Gütersloher Verlagshaus GmbH, 2002]. 30) 프란치스코, 앞의 책, 50~51쪽.

155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55 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길은, 거룩한 신앙의 유산과 교회의 현재적 삶 안에서,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열망이 채워지는 역동적 체험과 증언이 가 득 샘솟게 하는 것이다. 31)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 (Lumen Gentium)이 무신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다음 대 목(21항)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무신론의 치유는 한편으로는 교리의 올바른 제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 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에서 기대하여야 한다. 교회가 할 일은 하느 님 아버지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하고 성령 의 인도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정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살아 있는 성숙한 신앙의 증거, 곧 어려움을 분명히 알고 이겨낼 수 있도록 훈련받은 신앙의 증거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빛나는 신앙의 증 거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보여주었고, 또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신 자들의 전 생활에, 세속 생활에까지 젖어들어 신자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 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그 풍요성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마침내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함께 분투하 며 일치의 표징으로 드러나는 신자들의 형제애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주 는 데에 매우 크게 기여한다. 한마디로, 무신론에 대한 효과적이고 진정한 대응은 교리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의 삶을 통한 신앙의 증거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31) Cf.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p. 176~177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 가?(초록), 38~39쪽.

156 156 교회사연구 제42집 3. 세속주의(secularism) 1) 상대주의(relativism)와 세속주의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주요한 흐름의 또 하나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세속주의 (secularism)이다. 세속주의 는 세속화 (secularization)와는 구별된다. 세속화 란 근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반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실재가 종교적, 형이상학적 영역의 독점으로부터 벗 어나 분리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중립적 용어이다. 즉,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세속의 각 분야의 정당한 자율성 역시 인정되며 인간 중심적 세계 관이 점차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세속주의 는 이러한 세 속화의 역사적 흐름 속에 생겨나는 하나의 가치관이라고 일반적으로 정 의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는 그리스도 신앙과 대립되는 부정적 가치관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리키는 특징적인 용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32) 그런데 세속주의 는 상대주의 (relativism)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정적 의미의 세속주의 는 상대주의 의 한 변형된 형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사회문화적 관점 에서 바라본다면 상대주의 라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본다면 세속주의 라 부를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넓은 의미로서의 상대주의를 크게 두 가지 차원으 32) 세속화 와 세속주의 개념 및 그 구분에 대하여 Walter Kasper, 심상태 옮김,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왜관 : 분도출판사, , 17~21쪽, [원문 : Einführung in den Glauben, Mainz : Matthias-Grünewald-Verlag, 1972] ; 박찬호 옮김, 가톨릭 교회의 상황, 이성과 신앙 53,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신앙연구소, 2012, 190쪽, [원문 : Situation der Katholischen Kirche, 이성과 신앙 53, 2012, 169~183쪽] ; 노길명, 민족사와 천주교회, 한국교회사연구 소, 2005, 338쪽 ; 정희완, 세속화, 세속주의 그리고 그리스도교 세속주의 문화와 새로운 복음 화, 가톨릭신학 22,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13, 90~104쪽 참조.

157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57 로 구분해 고찰해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상대주의에 대한 일반적이고 고유 한 의미의 이론적 개념이라면, 두 번째는 세속주의와 연결된 실천적 맥락 의 상대주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33) 첫째, 철학적, 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상대주의는 더 이상 절 대적 가치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리 라고 믿는 것들은 사실상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생성된 지식에 불과 하기에 모두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절대적인 신앙적, 도덕적 가치나 정의 개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 는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 가치 와 정의 개념은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판단에 종속되는 것으로 전락 해버린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과학주의와 의 연결성이다. 앞서 다룬 바 있는 과학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사회- 문화적 현상은 자연법에 기초한 보편적 인간 이성의 활동에 의해 생겨나 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개념에 속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무신론적 과학주의는 문화적 상 대주의와 연결되며 그 이론적 배경의 하나로 작용한다. 둘째, 광범위한 사회 현상을 포괄하는 문화적 풍조(ethos)로서의 실 천적 상대주의를 말할 수 있다. 이는 근대를 이끌어온 서구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의 위기 뒤에 도래한 일종의 허무주의(nihilism)라고 규정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33) 이러한 구분에 관하여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p. 178~179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이들 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0~41쪽 참조.

158 158 교회사연구 제42집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허무로 돌리는 이 허무주의는 현대인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추종자들은 탐구가 목적 그 자체이지, 진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허무주의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인생이란 결코 한시적인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감각과 경험의 기회에 지나 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찰나적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투신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널리 퍼져 있는 정신 자세의 뿌리에는 허무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34) 이처럼 사상적이라기보다는 감각적 경험을 추구하는 허무주의적 (nihilistic) 풍조로서의 상대주의를 말할 때, 그 구체적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젊은 층에 만연한 자기만족 추구의 문화 (culture of complacence)이다. 자신의 기분과 느낌(feeling)에 좋은 것이라면 그 어떤 것 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여기는 풍조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번째 관점의 상대주의는 쉽사리 세속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바로 여기에 상대주의와 세 속주의의 깊은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이다. 베네딕도 16세는 이러한 의미에 서 아무것도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최후의 준거로 그저 제 자 신과 자기가 바라는 것들만 인정하는 상대주의의 독재 35) 에 대해서 지적 한다. 자기 생각에 맞고 제 느낌과 기분에 좋은 것이면 그 어떤 것도 정당 화될 수 있다고 믿기에 부정적 가치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져, 세속주의와 물신주의( 物 神 主 義 ), 극단적 이기주의 등 반( 反 )복음적 흐름과 풍조들이 널리 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는 그 리스도교 신앙에 어긋나는 세속주의 가치관의 만연을 조장하게 된다. 특히 젊은 층에서 발견되는 세속주의 풍조는 바로 이러한 사회문화적 34)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회칙, 60쪽(46항). 35) Joseph Ratzinger(베네딕도 16세), 페터 제발트(Peter Seewald) 대담 및 정리, 정종휴 옮김(유경 촌 감수), 세상의 빛, 가톨릭출판사, 2012, 85쪽, [원문 : Licht der Welt, Vatican City :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10].

159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59 풍조로서의 실천적 상대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과거와는 달리, 사 회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의 양식 안 에서 극단적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 나 자신에게 좋고 만족스러우며 안전하게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사회의 극심한 경쟁 구조 속에 생존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민과 성찰은 사라지고 순간순간 개인적인 흥미와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공동체 정신은 실종 되어가며, 생명을 존중하고 가족적 가치를 중시하는 아시아의 전통문화 역시 점점 약화되어 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 점차 감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최근에 계속 보고되는 높은 자살률과 무책임한 낙태 현상, 극단으로 치닫는 학교 폭력 과 청소년 폭력, 그리고 무분별한 생명공학 연구와 개발 등은 이 같은 세 속주의 현상을 잘 드러낸다. 36) 바로 이러한 사회 풍조와 현상이야말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 명의 문화 와 반대되는 죽음의 문화 라는 용어를 통해 지적하고자 했던 생명 파괴 현상과 생명 경시의 문화적 풍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7) 2) 물신주의(Mammonism)의 도전 세속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바로 황금만능주의, 혹은 물신주의 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삶의 최우선적 가치를 차지하 게 되는 그릇되고 전도된 가치관을 의미한다. 베네딕도 16세는 일찍이 36)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 183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1~42쪽 참조. 37) 요한 바오로 2세, 생명의 복음 : 인간 생명의 가치와 불가침성에 관한 회칙, 39~40쪽(12항), 56~58쪽(21항) 참조.

160 160 교회사연구 제42집 돈과 재물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고, 자유시장의 모델이 삶의 모든 면에 서 그 냉혹한 법칙을 부과하고 있는 서방과 같은 세계 38) 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지만, 이는 더 이상 서구 세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급속한 산업화와 서구화 과정을 겪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재물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음이 드러난다. 다음의 인용문 은 이러한 현상을 잘 묘사한다. 이제 서구화와 산업화의 길을 걸어가며 급속도로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 을 겪고 있는 아시아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돈이 전부라는 암묵적 사고방 식이 팽배해 있음이 여러 통계조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 오 늘날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외모에 너무 집착하여 성형수술, 명품 가 방, 보석과 패션(fashion) 의류 등에 지나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표피적 인 외적 아름다움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부와 힘을 상징하는 아이콘(icon) 이 되었다. 한 가정에서 하나의 아이만을 낳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과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이렇듯 개인의 아름다움과 부를 추구하는 극단적 개 인주의는 더욱 드세어지고 물질만능주의의 형태로 왜곡되어 나타난다. 반면에 사회적 공존과 공동선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더욱 약화되어가고 있다. 39) 이러한 세속주의 흐름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긋나는 잘못된 경향이 기 때문에, 교회적이며 신앙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복음서에서는 이 처럼 재물과도 같은 세속적 부귀영화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전도된 가치 관을 단호히 배격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38) Joseph Ratzinger, 정종휴 옮김, 그래도 로마가 중요하다 : 신앙의 현재 상황 비토리오 메소리 (Vittorio Messori)와의 대담, 바오로딸, 1994, 94쪽, [원본 : Rapporto sulla fede, Roma : Edizioni Paoline, 1985]. 39)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2쪽.

161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61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μαμων )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 24). 여기에 나온 재물 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 마모나스 (μαμων )는 예수님께서 직 접 사용하시던 아람어에서 나온 말이며,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발견된다(마태 6, 24 ; 루카 16, 참조). 마태오 복음서 6장 24절 의 문맥에서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이 단어는, 재물 자체 라는 가 치중립적인 일차적 의미가 아니라 재물의 마력 이라는 이차적 의미로 해 석되어야 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라틴어와 영어에는 의인화된 표현으로 재물의 신( 神 ) 을 가리키는 맘몬 (Mammon)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는 인간을 재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이끌어 파멸시키는 유혹과 죄악의 실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배금사상 ( 拜 金 思 想 ) 혹은 황금만능주의 를 의미하는 맘몬주의 (Mammonism)를 의인화시켜 번역한다면 물신주의 라는 단어가 가장 적당하다고 할 수 있겠다. 40) 이러한 물신주의는 가장 극단화된 세속주의 흐름으로써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을 멀 게 하여 악영향을 계속 미친다. 3) 세속주의 시대의 신학적 성찰 베네딕도 16세는 과거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 1927~ ) 라는 이름의 신학자로 활동하던 시절에 펴낸 유명 저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1968)에서 시작하여 신앙교리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 장관직을 거쳐 사도좌의 직무를 수행할 때까지 40) Aloysius Pieris, 성염 옮김, 아시아의 해방신학, 왜관 : 분도출판사, 1988, 37~38쪽, [원문 :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Maryknoll, NY : Orbis Books, 1988] ; 박준양, 그리스 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생활성서사, 2009, 79~80쪽 참조. 맘몬 개념에 관한 보다 자세한 신학적 성찰은 조규만, 하느님과 맘몬(mammon), 가톨릭 신학과 사상 10, 가톨릭 대학교출판부, 1993, 5~34쪽 참조.

162 162 교회사연구 제42집 발표한 많은 문헌을 통해 현대의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상대주의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해왔으며, 최근에는 이를 상대주의의 독재 (dictatorship of relativism)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하였다. 41) 사실, 베네딕도 16세는 주 로 신학적이고 이론적 차원의 상대주의에 대해 대응해 왔다고 평가되지 만, 현대 세계의 세속주의와 물신주의에 대해서도 그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42) 그리고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차원 모두에서 적 극적으로 이에 대한 비판적 대응과 예언자적 고발을 계속해 나간다. 먼저 이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첫 회칙 신앙의 빛 을 통해서 상대주의의 심각 한 문제를 진리 개념과 연결하여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오늘날 진리는 개인의 삶을 위해서만 그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개인의 주관적 확실성 으로 축소되고는 합니다. 하나의 공통된 진리는 전체주의의 완고한 통제 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34항). 43) 이렇듯 자 신만의 확신에 의거한 개인의 주관적 진리 개념은 끝내 그 개인에게만 유 효한 것이 되며, 공동선을 위한 노력 속에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제시, 적용 41) Joseph Ratzinger, 장익 옮김,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왜관 : 분도출판사, 2007(신정판), [원 문 : Einführung in das Christentum : Vorlesungen über das Apostolische Glaubensbekenntnis, München : Kösel-Verlag, 2000] ; 베네딕도 16세, 세상의 빛, 83~98쪽 ; 박준양, 그리스 도 신앙 어제와 오늘 에 나타난 베네딕도 16세의 신학 사상 교의신학적 접근, 사목연구 19,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7, 145~192쪽 ; 황경훈, 새로운 복음화 와 아시아 교회 : 제13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와 FABC의 복음화관 고찰, 신학전망 180, 광주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3, 45~46쪽 참조. 42)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2009년 6월 13일 교황청 백주년재단이 주최한 국제회의 폐막식에서 전 지구적 금융 위기를 몰고 온 현재의 경제 체제는 재고되어야 하며 연대와 인간 존엄성을 우선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model)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금융 위기 원인이 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현 경제 체제는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paradigm)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 고 있다 고 말했다. 교황은 또 모든 법과 규범이 무너지고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참석자들 의견에 뜻을 같이하며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면서 형제애와 공동선을 위한 경제 활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경제 이익보다 인간 존엄성이 먼저 : 교황 베네딕토 16세, 연대와 인간 우선하는 경제 문화 촉구, 평화신문 2009년 6월 21일자 7면 참조). 43) 프란치스코, 앞의 책, 49~50쪽.

16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63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상대주의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관한 질문을 의미하게 되는, 보 편적 진리 (universal truth)에 관한 질문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25항 참조). 44)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본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5월 25일 바티칸에서 열린 국제회의를 통해 현대 세계의 빈곤 문제와 재정적 위기 가 경제적 차원 자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인간의 가치보다 돈과 권 력을 숭배하는 분위기 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인 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의무에 대해 강조하였다. 45) 또한 브 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거행된 제28차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기간 중 2013년 7월 24일 거행된 미사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참 석자들에게 돈과 권력, 쾌락과 같은 우상에 집착하지 말고 소외된 이웃 을 위해 살아가기를 당부 하였다. 46)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는 세상의 상대주의 및 세속주 의, 그리고 물신주의에 맞서 비판적 대응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 공동체 역시 그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교회도 세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신자들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와 세속 주의적 풍조에 감염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세속 주의적 가치관의 도전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순교성인들이 남긴 삶의 자취와 죽음의 결단 안에서 하나의 훌륭한 모범 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순교 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 자체가 바로 증 44) 같은 책, 37쪽 참조. 45) 돈, 권력 아닌 인간과 공동선이 먼저 : 교황 프란치스코 백주년 재단 설립 20돌 국제회의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6월 2일자 7면 참조. 46)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돌보는 데 앞장서라 : 프란치스코 교황, 브라질 사목방문 및 리우세계청년 대회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8월 4일자 7면 참조.

164 164 교회사연구 제42집 언 (μαρτ ριον)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47) 한국 순교성인들의 경우,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겠다는 선택은 그 당 시 사회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특히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도 몰이해와 버림받는 것을 각오한 결과였으며, 나아가 죽음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결 단이었다. 당대의 지배적인 유교 질서 안에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가면서 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가장 절대적 (absolute) 가치로 받아 들였고 생명을 바쳐 이를 증언한 순교자들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오늘의 모든 상대주의적 흐름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모범적 길을 발견하게 된 다. 과거와 같은 명시적 박해와 물리적 탄압은 없지만 세속주의 가치관이 만연해 신앙과 교회를 위협하는 현실 속에, 어떻게 신앙선조들의 정신을 재발견하고 순교적 증언 을 통해 오늘의 도전에 대응할 것인가는 한국 교 회 구성원 모두의 과제라 할 수 있겠다. 48) 구체적으로 본다면, 특히 사회문화적 풍조로서의 상대주의와 세속주 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삶과 신앙을 통합하는 길을 찾을 수 있 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사실, 현재 한국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삶 따로 신앙 따로 즉, 삶과 신앙의 분리라고 지 적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적 가치가 세상 안의 일상적 생활에서 잘 구현되 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신앙의 차원에서, 그리고 신 앙을 삶의 차원에서 (Bring our life to faith and faith into our life) 49) 47) 요한 바오로 2세, 김웅태 옮김, 교황 권고 아시아 교회 (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114쪽(49항), [원문 : Adhortatio apostolica post synodum pro Asia Ecclesia in Asia,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8(1999), Bologna : EDB, 2002, pp. 1126~1309(nn. 1772~1937)] ; 박준양, 삼위일체론, 그 사랑의 신비에 관하 여, 생활성서사, 2007, 15쪽 참조. 48) PARK, Junyang, Fundamentalism and Relativism : Why Young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p. 182 ; 박준양, 근본주의와 상대주의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초록), 43~ 44쪽 참조. 49) Cf. Thomas H. Groome, What Makes Us Catholic : Eight Gifts for Life, San Francisco :

165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65 통합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삶과 신앙의 역동적인 통합적 관계를 체험케 하는 그 무엇인가가 신자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상대주의 및 세속주의 흐름에 대처하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효과적인 길은 교회 공동체 스스로의 자성과 쇄신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성찰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시대의 표징 (signa temporum)에 대한 해석과 연결된다. 50) 즉, 세속주 의 흐름이 만연한 현대 사회가 드러내는 온갖 부정적 소외 현상들에 대한 관심과 대응은, 시대의 표징에 대한 해석과 자각 속에 이루어지는 교회의 자기 성찰과 쇄신 작업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51) 사실, 교회의 지속적 쇄신 이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Lumen Gentium) 8항에서는 자기 품에 죄 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Ecclesia sancta simul et semper purificanda)는 끊임없이 참회(poenitentia)와 쇄 신(renovatio)을 추구한다 고 천명한다. 한편, 교황청 신앙교리성 산하의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는 1999년 12월 대희년을 앞두고 발표한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Memory and Reconciliation : The Church and the Faults of the Past)이라는 문헌에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1274) 성인의 말 씀을 인용하여 아직 순례의 여정에 있는 교회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하여서는 안 된다 고 말한다. 52) HarperSanFrancisco, 2002, p ) 시대의 표징 (signa temporum) 개념에 대하여 박준양,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나타난 성령론 적 전망, 가톨릭 신학과 사상 56,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6, 144~148쪽 참조. 51)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사목적, 신학적 성찰, 사목연구 24,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09, 178쪽 참조. 52)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

166 166 교회사연구 제42집 이러한 교회 공동체적 쇄신의 맥락에서, 2013년 발표된 다음의 글은 세속주의에 대처하는 교회의 당면 과제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다. 교회 역시 세속주의 문화 속에 존재하고 있다. 사실 대상으로서의 세속주 의(문화)가 아니라 교회 안의 세속주의가 더 문제인지도 모른다. 신앙이 세 속주의 문화 안에서 어떻게 고백되고 재현되는지, 신앙이 세속주의 문화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없다면 아마 도 세속주의에 대한 교회의 비판은 공허하거나 위선일 위험이 있다. 하느 님에 대한 부정(공격적 무신론자들)보다 하느님에 대한 왜곡(자본주의와 욕망 문화에 의해 변질된 종교와 신앙)이 더 문제적이지 않을까? 세상의 문화(세속주의 문화)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자신을 쇄신함 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이 먼저가 아니라 (세속주의 문화 안에 서 있는) 교회의 쇄신이 먼저다. 53)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쇄신이라는 차원에서, 현 교황 프란치스코가 세속주의적 가치관에 오염되어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적 삶에 대 해 반성을 촉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5월 21일 바티칸 미사 강론을 통해 출세주의와 교회 내에서의 권력 추 구욕은 교회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죄악 이라고 말하면서, 그리 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나 쉽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 한다 고 지적하였다. 54) 또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거행된 제28차 ( ),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98~99쪽, [원문 : Memory and Reconciliation : The Church and the Faults of the Past,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8(1999), Bologna : EDB, 2002, pp. 1578~1681(nn. 2310~2406)] 참조. 53) 정희완, 앞의 논문, 117~118쪽. 54) 교황 교회 내 출세주의 권력추구 오래된 죄악 : 진정한 권력은 주님의 희생 따르는 것, 가톨 릭신문 2013년 6월 2일자 10면 참조.

167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67 세계청년대회 기간(2013년 7월 23~28일) 중 브라질 주교단 및 남미 주 교단과 만난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행정주의를 비판하며 교회가 효율성과 사업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NGO 기구와 다를 게 무엇이냐 고 반문했다. 55)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러한 실천적 가르침, 그리고 거기에 매우 긍정 적으로 반응하는 전 세계 많은 사람의 공감과 지지는 오늘날 상대주의와 세속주의에 대처하는 교회의 자세와 그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잘 시사한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필리 2, 6-11 참조)에 기초한 복음적 가치의 창출과 체험적 증언이야말로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세 속주의 흐름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 할 수 있겠다. 4. 신영성 운동(new spirituality movement) 뉴에이지(New Age)를 중심으로 1) 신앙과 이성의 관계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흐름 중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현대의 신영성 운동 (new spirituality movement)을 꼽 을 수 있다. 신흥 종교 운동 (new religious movements)은 현대 세계에 55)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돌보는 데 앞장서라 : 프란치스코 교황, 브라질 사목방문 및 리우세계청년 대회에서 강조, 7면 참조. 동일한 맥락에서 한국 교회를 향한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2003년 7월 한국을 방문한 도미니코 수도회의 카를로스 알퐁소 아스피로스 총장 신부는 한국 교회의 급성장에 따른 후유증에 대해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조언하였다. 교회는 비즈니스(business)적 사고를 가지면 안 됩니다. 항상 영성적 시각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따라서 외형 이나 결과보다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교세가 약해도 복음적일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까지 한국 사회 특유의 빨리빨리 습관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도미니코 수도회 아스피로스 총장 신부 : 늘 영성적 시각으로 보고 판단해야, 평화신문 2003년 7월 20일자 8면 참조).

168 168 교회사연구 제42집 서 기성 종교들과 대립하며, 혹은 그 내부나 가장자리로부터 새로이 출몰 하는 광범위한 종교적 분파들을 가리키기 위해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일반 적인 용어이다. 56) 그런데 종파들 (sects 혹은 cults)이라고도 불리는 신흥 종교 운동의 조직적 성격과는 달리, 뉴에이지 (New Age) 운동처럼 육체 적 건강과 정신적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영적 체험을 통해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시도하는 흐름의 비조직적인 네트워크를 가리켜 신 영성 운동 (new spirituality movement)이라 부른다. 일본에서 등장한 정신세계 운동 과 한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기( 氣 )수련 운동 도 이러한 범 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57) 신영성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흐름은 이른바 자기 안의 영성 을 추구 하는 뉴에이지 운동이다. 이는 현대 세계 안에서 서구 문화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반발로부터 비롯되어 명백히 반( 反 )그리스도교적 성격을 지니며 여 러 다양한 동양 종교적 요소들을 많이 수용하여 혼합주의(syncretism) 형 태를 보이는 다양한 흐름의 네트워크라고 정의 가능하다. 뉴에이지 운동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종교적 대안으로 자처하며 등장한 동시에 음악, 영화, 56) Cf. Eileen Barker, Changes in New Religious Movements, in Rethinking New Religious Movements, Michael Fuss(ed.), Rome : 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 Research Center on Cultures and Religions, 1998, p )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 7~10, 33~38쪽 ; 노길명, 앞의 책, 341, 345~350쪽 참조. 한편, 독일 출신의 종교학자 미카엘 푸스(Michael Fuss) 등은 신흥 종교 운동 의 범주를 더 넓게 잡아 뉴에이지를 그 안에 포함시키며, 그 세계적인 흐름을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말한다. 첫째, 여호와의 증인 과 모르몬교, 그리고 통일교 등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가장자리에서 출몰하여 발전하는 집단들의 범주이다. 둘째, 영지주의적( 靈 知 主 義 的 ) 밀교 성향을 보이는 범주로서 뉴에이지(New Age) 운동과 과학 교 (Scientology)를 들 수 있다. 셋째, 동양의 종교적 전통을 서구에 이식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범주이다. 이 경우는 역사 안에서 동양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던 과정과는 정반대의 흐름을 보 인다(Michael Fuss, L arcobaleno della nuova religione mondiale, Lateranum 62, 1996, pp. 446~448 ; John Weldon, A Sampling of the New Religions,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67, 1978, pp. 407~426 참조). 이하 신흥 종교 운동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신학적 평가는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사목적, 신학적 성찰, 169~191쪽 참조.

169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69 출판, 학회, 회의, 기타 활동이나 행사 등의 대중문화 안으로 파고들어 확 산되면서 더욱 깊은 생존 기반을 모색해왔다. 뉴에이지는 하나의 조직체나 통일된 운동이라기보다는, 세계적으로 생각하며 지역적으로 활동하 는 (think globally but act locally) 느슨한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58) 이미 뉴에이지를 포함한 신영성 운동의 일반적 특징들에 대해 고찰하 는 여러 연구물이 나왔기에, 본 논문에서는 뉴에이지를 중심으로 그 도전 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학적 쟁점들에 주된 초점을 맞추어 논하기로 하겠 다. 먼저 왜 많은 현대인이 신영성 운동에 이끌리는가를 조직신학적 관점 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구 사회의 경우, 20세기 후반부터 뉴에이지 운동이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은 그동안 서구 문화를 지배해오던 이성주의적 흐름과 경향이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힌 까닭이라고 분석 가능하다. 사실, 근대에 접어들 며 많은 사상가는 인간의 합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과장하면서 신앙으 로부터 분리된 거대한 이성적 체계를 구축하고자 시도하였다. 59) 이후 끊 임없이 계속되는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 속에 인간 소외 현상은 심화되어 갔으며, 이제 근대를 지나 이른바 탈( 脫 )근대적 (post-modern) 시대에 접 어들며 해체주의적 경향과 더불어 이성주의에 대한 염증이 찾아온 것이라 진단할 수 있겠다. 탈근대 란 근대성 (modernity)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 한 문화적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본래 미학적 혹은 기술적 현상과 관련해 사용되다가 점차 철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의 영역으로 그 개념이 58) 교황청 문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Culture) 종교간대화평의회(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 생명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 뉴에이지 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4, 30~33쪽, [원문 : Jesus Christ the Bearer of the Water of Life : A Christian Reflection on the New Age, Vatican City :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3] ; 노길명, 앞의 책, 344~345쪽 ; 전명수, 뉴에이지 운동과 한국의 대중문화, 집문당, 2009, 12쪽 참조. 59) 이성과 신앙의 역사적 분리 과정에 대하여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 에 관한 회칙, 58~62쪽(45-48항) 참조.

170 170 교회사연구 제42집 확장되었다. 근대성 이 현세적, 물질적, 합리적 성격을 지닌다면, 탈근대 는 합리성으로부터의 탈피와 더불어 개별화, 소비화, 문화화 등의 특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과학화, 조직화, 체계화를 강조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는 보다 정서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차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시 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전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다시 이끌기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자유롭고 임의적인 영적 관심으로 인도 한다. 60)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영성주의적 흐름의 원인 은 보다 복합적인 차원에서 분석 가능하다. 근대적 관점에서 지나치게 합 리적 이성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던 서구에서는 점차 이성에 대한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여 탈이성적, 신비적 세계관에 대한 도취 현상이 확산되었 다. 이러한 서구 사회의 탈근대적 상황에 대한 분석이 한국 상황에도 상당 부분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미 산업화와 서구화 과정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도 서구의 경우처럼 탈( 脫 )이성주의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도교로부터의 이탈 현상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정반대 측면의 해석이다. 한국은 서구 화된 사회이긴 하지만 본래부터의 서구 사회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맥 락에서,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 오랫동안 깊게 자리한 비( 非 )이성적 신비주 의 경향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다. 스리랑카(Sri Lanka) 출신의 예수회 신학자 알로이시어스 피어리스 (Aloysius Pieris, 1934~ )는 아시아 상황에서 발생하는 우주적 종 교 (cosmic religion)와 초우주적 종교 (metacosmic religion) 간의 갈등 과 통합에 대해서 말한다. 우주적 종교 란 애니미즘(animism), 토테미즘 60) 노길명, 앞의 책, 338~339쪽 ; 박승찬, 다양성을 인정하는 영원한 진리 추구 : 가톨릭 철학의 흐름과 동향 2(현대 가톨릭 신학의 흐름 18), 가톨릭신문 2013년 7월 28일자 8면 참조.

171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71 (totemism), 샤머니즘(shamanism) 등 원시 부족 사회 때부터 사람들의 삶과 문화 안에 정착한 일차적 종교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초우주적 종 교 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정립된 거대한 몇몇 세계 종교 전통들을 가리킨 다. 피어리스가 주장하는 바는, 초우주적 종교 가 어느 사회에 뿌리내리 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일차적인 우주적 종교성 과 조화로운 긴장의 상호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통합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 주적 종교 가 초우주적 종교 에 의해 종속되고 정화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한번 이러한 통합 과정이 발생한 후에는, 강압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미 정착한 초우주적 종교가 또 다른 초우주적 종교에 의해 대체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거대한 세계 종교들이 자리한 아시아에서 그리스 도교의 선교가 어려운 점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피어리스는 설명한다. 61) 이러한 피어리스의 견해에 입각하여, 한국인들의 종교 심성에 자리한 일종의 불안정성과 비이성적 신비주의 경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한 국의 지역적인 우주적 종교성 은 내륙 아시아에 중심을 둔 샤머니즘인 데, 62) 이와 처음 결합된 초우주적 종교 는 바로 불교이다. 불교 전통은 서구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이성적 기반을 그리 중시하지 않으며 직관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그리고 조선 시대를 거치며 억불숭유 정책을 통해 불교 로부터 유교로의 강압적인 대체 과정을 거쳤고, 그러면서도 불교는 여전 히 생존해왔다. 그리스도교가 철저한 주도권을 지녔던 서구에서 발생한 우주적, 초우주적 종교성의 결합 과정과는 달리, 한국의 샤머니즘은 불교 나 유교와의 결합 과정 속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근대에 이 르러 그리스도교가 도래하여 또다시 일정 부분 결합되는 과정을 거친 후 61) Aloysius Pieris, 앞의 책, 107~109쪽 참조. 62) 샤머니즘의 지역적 확산에 대하여 William Johnston, 이봉우 옮김, 신비신학 사랑학, 왜관 : 분도출판사, 2007, 183쪽, [원문 : Mystical Theology : The Science of Love, Grand Rapids, MI : Zondervan, 1996] 참조.

172 172 교회사연구 제42집 에도 샤머니즘의 영향력은 충분히 정화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종교학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는 샤머니즘의 토대 위에 불교 와 유교, 그리고 단기간에 급성장한 그리스도교가 불안정한 공존을 이루 는 매우 독특한 종교 상황이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랜 기간 철학적 신학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문화의 지속적이 고도 안정적인 영향 속에 있어 왔던 서구 문화와는 달리, 한국인의 종교 심성 안에서는 그 어떤 불안정성(instability)이 발견된다 할 수 있으며, 이성적 합리성(rationality)의 기반 또한 그리 충분치 않다고 분석 가능하 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은 쉽사리 비이성적인 신비주 의적 세계관에 빠져들 수 있다. 신비 추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종교적 갈망 이기에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신비 추구 과정이 쉽사 리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될 수 있다는 데에 함정이 있다. 안정성이 결여되 고 이성적 합리성이 간과된 신비 추구적 신앙은 미신이나 광신의 경향으 로 흐르기 쉽다. 바로 여기에 신영성 운동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뉴에이지 운동의 한국적 수용에 있어 유리했던 점은 뉴에이지의 전체론적/전인주의적 (holistic)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 적 합리성에 기초하여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구분하는 서구의 이분법적 (dualistic) 구도와는 달리, 뉴에이지가 내세우는 전체론적/전인주의적 접 근은 정서적 동일성과 신비감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종교-문화적 심성에 별 부담감 없이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존재하는 기성 종 교들을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 이전에, 문화적 전달을 통한 정서적 접근이 더 많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80~1990년대에 걸쳐 한국 사회에서 뉴에이지 계열의 많은 서적이 출간되면서 뉴에이지 운동의 전파 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63)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정보 매 체와 대중문화를 통해 계속 확산되어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문화적 현상

17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73 으로 인정받으며,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기다리는 상태라 하겠다. 이런 한국적 현상에 대한 우선적인 대안으로서,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안정성(stability)과 이성적 합리성의 기반을 다시금 공고히 하는 것을 생각 해볼 수 있겠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이성의 올바른 관계 정립이라 할 수 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의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 의 헌장 (Dei Filius, )에서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서로 대립 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실로 올바른 이성은 신앙 의 기초를 드러낸다 고 강조한다(DH 3019 참조). 64) 한편, 국제신학위원회 역시 2012년 문헌 오늘의 신학 : 전망, 원칙, 기준 (Theology Today : Perspectives, Principles, and Criteria)을 통해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다음 과 같이 정의한다. 이성을 거부하거나 멸시하는 신앙은 미신이나 광신에 빠질 수 있고, 의도 적으로 신앙에 자신을 닫아놓는 이성은 크게 진보할 수 있다 해도 인식될 수 있는 것의 절정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는 진리 가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단일성을 이루기 때문에 가능하다.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와 이성에 의해 발견된 진리는 동일한 원천에서, 곧 이성을 창조하시고 신앙을 주신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궁극적 으로 서로 모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서로를 지탱해 주고 비추 어 준다(64항). 65) 63) 한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41쪽(64항) ; 전명수, 앞의 책, 12~18, 118, 133~ 134쪽 참조. 64)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3권(트렌토 공의회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김영국 손희송 이경상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6, 809쪽, [원문 :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Giuseppe Alberigo et al.(eds.), Bologna : Istituto per le scienze religiose, 1972] 참조. 65)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l Theological Commission), 손희송 박준양 안소근 옮김, 오늘 의 신학 : 전망, 원칙, 기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57쪽, [원문 : Theology Today : Perspectives, Principles, and Criteria, Washington, D.C. :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12].

174 174 교회사연구 제42집 위의 인용문이 지적한 대로, 한국적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종교 심성 이나 신앙생활에 있어 이성적 토대와 합리적 기반이 그리 튼튼하다고 볼 수 없기에 쉽사리 신영성 운동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측면의 분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대로,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 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도 같다 는 점을 일깨우는 것과 신앙과 철학이 각각의 자율성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로 자기 본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깊은 일치의 회복 66) 이야말로 한국 교회가 당면한 쇄신과 새 복음화의 과제를 위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자 개인의 차원에서 이러한 접근이 어렵다면, 교회 공동체적 차원 의 배려가 요구된다. 신앙생활을 위한 건전한 합리성을 담보하는 가장 좋 은 방법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정화되고 검증된 공동체적 전통의 지지 와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에 충실하게 살며 교회 공동체의 축적된 전통으로부터 배우는 것이야말로 건전하고 효과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2012~2013년 신앙의 해 를 맞아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신자들의 신앙적 기초를 든든히 다지기 위해서 내건 다섯 가지 기본 지침(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 교회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미사로 하나 되는 신앙,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 )은 압축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2) 전체론적/전인주의적(holistic) 접근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화에 등을 돌리고서 물고기자리 로부터 물병자 66)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 :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회칙, 7, 62쪽(48항).

175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75 리 로의 이동이라는 점성술적 전망에 기초하여 새로운 영적 추구와 신비 탐구를 표방하며 사람들을 현혹시켜 끌어모으는 뉴에이지 운동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이제 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뉴에이지와 같은 신영성 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전체론적/전인주의적 접근을 하면서 효과적으로 사람 들을 끌어모은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 나라는 전인주의적 인간관을 내세우는데, 이는 종국적으로 모든 것이 우주 적 일원론( 一 元 論 )으로 환원된다는 관점의 전체론 (holism)으로 귀결된다. 즉, 단일하고 전인적인 인간은 언젠가 우주의 영적 에너지(spiritual energy)와 결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에너 지란 우주 안에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생명력을 의미하는데, 이 우주적 에너지가 바로 기( 氣 )이고 또한 보편적 그리스도이며 신( 神 )이라고 해석된 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바로 우주에 충만한 신적 본성 이다. 비인격적 실재로서 우주적 의식의 탁월한 표현인 신적 본성이 만물 안에 내재하며 하나의 참된 실재를 구성한다고 주장하기에 범재신론( 汎 在 神 論, panentheism)적 입장이 그 근저에서 발견되며, 이러한 일원론적 관 점은 뉴에이지 운동의 신지학( 神 智 學, theosophy)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 로 분석된다. 67)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쟁점이 되는 것은 이처럼 전인주의를 표방하는 뉴에이지와 최근 전인적 관점에서 새로운 대체의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흐 름과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 다. 68) 지금 한국 사회에 유행 중인 다양한 웰빙(well-being) 추구와 힐링 67)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40쪽 ; 노길명, 앞의 책, 351쪽 ; 전명수, 앞의 책, 163~174쪽 참조. 전체론(holism)과 일원론(monism), 그리고 범신론(pantheism) 간의 관계에 대 하여 Lawrence Osborn, Guardians of Creation : Nature in Theology and the Christian Life, Leicester(England) : Apollos, 1993, pp. 57~58 참조.

176 176 교회사연구 제42집 (healing) 지향적 문화에는 어느 정도의 뉴에이지 운동적 요소들이 섞여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 세계적 차원에서 하나의 새로운 흐름 으로 부상 중인 전인의학(holistic medicine) 자체가 모두 뉴에이지 계열이 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다. 전인적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 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의 인간관 역시 기본적으로 단일하고 통합적인 인 간관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69) 뉴에이지의 전체적이고 전인주의적인 시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 과는 달리 혼합주의적(syncretistic) 성향을 지닌 일원론에 근거한다는 것 이다. 70) 사실, 전인의학의 세계적 흐름에는 뉴에이지 운동의 혼합주의적 요소를 지닌 것에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의 건전한 접근까지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기에 이를 한 가지 관점에서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71) 그러므로 결국 중요한 것은 관찰과 식별이라 하겠다. 68) 이러한 논란에 대하여 전명수, 앞의 책, 163~166쪽 참조. 69)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죽음 심판 지옥 천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30~31쪽 ; 심상태, 인간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62~68쪽 참조. 70) 뉴에이지 운동의 큰 특징은 상대주의적이며 혼합주의적인 경향성에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여러 동양 종교들 사이의 혼합주의적 전망을 드러낸다. 그래서 뉴에이지는 역사적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 그리스도적 자각을 위한 동양 종교들의 깊은 영향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혼합주의 적 경향성은 하나의 일원론으로 귀착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물병자리 시대의 전망이 제공하는 전체성(totality)의 한 부분적 조각을 구성하게 된다(박준양, 뉴에이지 (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가톨릭신학 12,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08, 49~50쪽 참조). 71) 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보완 대체적 전인의학 흐름에 관하여 Jon Kabat-Zinn, 장현갑 김교현 김정호 옮김,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상 하), 학지사, , [원문 : Full Catastrophe Living : Using the Wisdom of Your Body and Mind to Face Stress, Pain, and Illness, New York : Bantam Dell, 1990] 참조. 영성 (spirituality) 개념을 도입한 전인의학 흐름의 대표적 경우에 관하여 Christina M. Puchalski(ed.), A Time for Listening and Caring : Spiritualty and the Care of the Chronically Ill and Dying,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참조. 전인의학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적 차원의 접근에 관하여 Daniel P. Sulmasy, 김인규 옮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하느님 : 의사와 건강관리 전문가들을 위한 영성, 가톨릭출판사, 2010, [원문 : The Healer s Calling : A Spirituality for Physicians and Other Health Care Professionals, Mahwah, NJ : Paulist Press, 1997] ; The Rebirth of the Clinic : An Introduction to Spiritualty in Health Care, Washington D.C. : Georgetown University Press, 2006 ; 박준양, 영적 돌봄의 인간학적 신학적 의미, Health & Mission 17, 한국가 톨릭의료협회, 2009, 4~14쪽 참조.

177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77 인간학적 관점에서 말하는 전인적 인간관이란, 그 어느 한 특정 측 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단일한 인간을 통합적으로 보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구분(distinction) 가능하지만 분리(separation)할 수 없는 인간의 다섯 가지 차원, 즉 인간의 신체적(physical), 논리-지성적 (logico-intellectual), 심리-정서적(psycho-emotional), 사회적(social), 그리고 영적인(spiritual) 측면의 다섯 가지 차원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인적 인간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 다섯 가지 차원 중 어느 한 가지도 배제하거나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균형(balance) 과 조화(harmony)를 이루어 전체를 모두 포괄하는 통찰을 의미한다. 72)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동일하게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인간관에 대 해 말한다 하더라도 뉴에이지 운동의 전인주의와 분명히 구별되는 것은, 그 혼합주의적 관점을 배척한다는 점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니는 고유한 신학적 인간학에 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유비적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는 존재( 存 在 )의 유비( 類 比 ) (analogia entis)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존재의 유비 란 실재들 사이의 유사성( 類 似 性 )과 비유 사성( 非 類 似 性 ), 즉 유사성과 상이성( 相 異 性 )을 동시에 포함하는 개념이 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유사성과 비유사성이 동시 에 존재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창세 1, 참 조)라는 사실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1215년 의 제4차 라테란 공의회(Concilium Lateranense IV)에서는, 창조주 하느 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유사성에 관해 말할 때에는 반드시 그보다 더 큰 비유사성(상이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규정하였다(DH 806 참조). 73) 72) 박준양, 영적 돌봄의 인간학적 신학적 의미, 4쪽 참조. 73)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2권 전편(제1-4차 라테란 공의회 제1-2차 리옹 공의회), 김영국 손희송

178 178 교회사연구 제42집 그러므로 인간은 한편으로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그분을 향해 성 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세상과 우주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느님 의 초월성에 온전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하느님과 의 비유사성을 체험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됨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자신의 본래적 정체성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연적, 역사적 존재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향한 초월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따라 서 역사성과 초월지향성이라는 두 측면의 조화롭고 균형 잡힌 통합이야말 로 인간 존재의 역설적 실존이며 본래적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74) 반면에, 신영성 운동의 대표적 흐름인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인간이 종국적으로 우주의 에너지와 결합되어 마침내 신성( 神 性 )에 도달할 수 있 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관과의 결정적 차이점을 드러낸 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학의 은총론에서도 신화 은총 ( 神 化 恩 寵, gratia deificans)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이다. 한마디 로, 이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통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 게 (2베드 1, 4) 된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75) 초대 교회의 여러 교부가 천 명했던 다음의 신학적 명제는 이러한 구원관과 은총관을 잘 요약한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Deus homo factus est ut homo fieret Deus). 즉, 하느님의 구원 역사(history of salvation) 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죄악으로 인해 훼손된 인간에게 다가 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상호 관계성 안에서 그리스도 이경상 박준양 변종찬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9, 232쪽, [원문 : Conciliorum Oecumenicorum Decreta, Giuseppe Alberigo et al.(eds.), Bologna : Istituto per le scienze religiose, 1972] 참조. 74) 박준양, 창조론, 아름다운 세상의 회복을 꿈꾸며, 55~58쪽 참조. 75) 가톨릭 교회 교리서, 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옮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460항(201 쪽), [원문 : 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Vatican City :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97] 참조.

179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79 의 구원 사건을 통해 인간을 성장시키는 하나의 신비적 교육 과정으로 이 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적 구원 과정의 목표로서 인간의 신화 ( 神 化, deificatio) 개념이 제시된다. 이러한 은총으로서의 신화 개념은 인간이 글자 그대로 하느님과 똑같게 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감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참된 본질과 정체성을 발견하고 회복하게 된 다는 차원에서 이해 가능하다. 76) 그리스도교 신학적 관점의 건전한 영적 추구와 참된 신비적 탐구는 전인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유사성 의 체험을 거치는 동시에,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앞에서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깨닫는 비유사성의 체험을 통해 비로소 그 진정한 출발이 이루어 진다. 반면에, 인간이 신과 결합되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뉴에 이지의 전인적 인간관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 비유사성 차원을 간과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적 관점에서는 전인적 인간이 초월지향성을 가 지고 살며 설혹 초자연적 체험을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연적이고 역사 적 존재로 남아 있다고 보기에 하느님의 초월성이 계속 보전된다. 반면에,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역사적 인간이 우주내적( 宇 宙 內 的 ) 체험을 통해 신 성( 神 性 )으로 직접 전환될 수 있다는 관점의 전인주의를 표방한다. 77) 이러한 인간관의 차이는 신론( 神 論 )과 그리스도론적 차원의 결정적 차 이점으로 연결된다. 뉴에이지 운동은 전인주의적 접근에 기초하여 단일한 우주적 통합을 추구한다. 따라서 뉴에이지는 모든 종교의 기원적 동일성과 76) Gisbert Greshake, 심상태 옮김, 은총 선사된 자유, 성바오로출판사, , 49쪽, [원문 : Geschenkte Freiheit : Einführung in die Gnadenlehre, Freiburg im Breisgau : Herder, 1977] ; 박준양, 은총론, 그 고귀한 선물에 관하여, 생활성서사, 2008, 178~181쪽 참조. 77) 뉴에이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실현하고자 부름을 받았다. 의식의 확장 체험을 통해 성장하면서 자아를 실현한 인간은 신성한 내적 조명에 도달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 안에서 내적 그리스도 를 실현하는 순간이다. 우주적 최종 실재로서의 신적 본성이 한 개인 의 내부 안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36쪽 참조).

180 180 교회사연구 제42집 무차별적 화해를 제시하며, 마침내 하나의 우주적 정신 으로서의 보편적 그리스도 로 모든 것을 수렴하는 완전하고 새로운 대체 종교(alternative religion)임을 스스로 표방한다. 따라서 우주적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 공동체적 소속감과 평화 정신, 그리고 보편적 믿음과 가치에 대한 공동 추구는 뉴에이지 운동의 정서적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처럼 상대주 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범재신론에 기초한 뉴에이지 운동의 전체적 (holistic) 전망이 인류의 보편적 형제애를 내세우며 무차별적으로 확산될 때, 그리스도교 신앙이 선포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초월-역사적 구원 신 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유일성(unicity)과 보편성(universality) 에 관한 교의적( 敎 義 的 ) 메시지는 심각한 도전에 마주하게 된다. 78) 3) 자기만족 추구의 영성 탈근대 시대의 문화적 흐름은 종교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입장에 도 변화를 주게 되어 다양한 종교 변용(transformation of religion)을 일 으키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제 더 이상 기성의 종교 전통에 얽매이지 않 고 임의적이고 자유로운 영적 추구를 하며 살게 된다. 일종의 개인주의 영성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종교적 의무감으로부터 자유 로워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삶 안에서 대면하게 되는 여러 상황과 체험들을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과 의식이나 제도 안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율적 각성과 나름의 의미 부여를 통해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79) 실제로 최근의 사회학적 조사에서 이러한 현상이 분명히 보고된다. 특 78) 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50~51쪽 참조. 79) 노길명, 앞의 책, 339쪽 ; 전명수, 개인주의적 영성 운동과 세속화 논쟁, 담론201 13, 한국 사회역사학회, 2010, 59~69쪽 참조.

181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81 히 서구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not particularly religious) 스스로 영적인 삶을 산다고 (but spiritual) 자부하 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80) 예를 들어,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필요와 영적 요구에 따라 프랑스 테제 공동체(The Taizé Community)의 초교파적 기 도 모임, 가톨릭의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뉴욕 시(New York City) 강연, 한국 불교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등에 자유로이 참석하며 자신의 영적 추구를 지 속해 나간다. 그러나 어떤 특정 종교의 조직에 속하지도 않고 그 가르침이 나 계율, 윤리적 의무 등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필연적 으로 어느 정도의 혼합주의적 경향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한 세속주의에 물든 젊은이들에 비교해볼 때 상대 적으로 더 건전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으나, 종교적-신앙적 차원에서는 보다 더 올바른 방향으로 계도와 교정이 요구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러 한 개인주의 영성 은 이미 앞서 언급한 상대주의 차원의 자기만족 추구의 문화 (culture of complacence)가 영적 차원으로 업그레이드(upgrade)된 버전(version), 즉 자기만족 추구의 영성 혹은 자기도취적 영성 이라 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주관주의적, 상대주의적 영적 추 구 경향과 이중 소속 현상, 그리고 혼합주의적 성격은 전형적인 뉴에이지 의 특징이다. 81)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신영성 운 동의 위험에 매우 쉽게 노출된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뉴에이지 운동은 이러한 개인주의적 영성 지향의 사람들을 겨냥해 이미 오래전부터 영성의 80) Cf. Christian Smith Melinda Lundquist, Soul Searching : The Religious and Spiritual Lives of American Teenagers,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p. 77~83, 118~ ) 뉴에이지에 관한 사목적 성찰을 위한 지침들 : 2004년 6월 16일 뉴에이지에 관한 국제회의 총회 토론을 위한 최종안, 7항(교황청 문화평의회 종교간대화평의회, 앞의 책, 217쪽) ; 주교 회의 신앙교리위원회, 건전한 신앙생활, 40쪽 참조.

182 182 교회사연구 제42집 상품화 를 진행해 왔다. 82)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적 추 구는 하나의 취미나 상품이 될 수 없으며 기술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 다. 특히 그리스도교적 영적 추구를 말할 때, 신앙의 신비 (mysterium fidei)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를 빼놓을 수는 없다. 뉴에이지 운동 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이는 다른 개념과 의미에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사람이 되신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달리, 뉴에이지 문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흔히 수많은 현 자나 전수자, 또는 화신( 化 身 ) 가운데 한 명으로 제시 83) 될 뿐이다. 뉴에 이지에 따르면, 역사의 예수님은 유일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원하고 보 편적인 비인격적 속성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의 여러 지상 발현 중 하나이다. 진정한 그리스도는 하나의 역사적 인물의 범주로 제한 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 ( 理 想 )이며 우주적 정신 이라는 것이다. 84) 이러한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론적 주장과 그리스도교의 신앙교리 사이 에 존재하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역사적 예수님의 십자 가 사건과 죽음이 드러내는 구원론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평가이다. 그리 스도교 복음에 따른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n)는 하느님께서 단순히 사 람의 외적 형상만을 취하셨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그 죽을 운명의 나약하고 82) 뉴에이지 운동에서 전개되는 영성의 상품화 흐름에 관하여 전명수, 앞의 논문, 72~73쪽 참조. 83) 교황청 문화평의회 종교간대화평의회, 앞의 책, 122~123쪽. 84) 뉴에이지의 주장에 따르면, 우주적 그리스도의 정신은 역사 안에서 매번 상이하게 여러 차례 드러났는데, 부처나 마호메트, 그리고 조로아스터 같은 인물들이 그 구체적 경우이며, 역사적 예수님 또한 이러한 범주의 한 인물이라고 한다. 우주적 그리스도 가 이처럼 역사 안에서 거듭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힘을 드러내 보여도 인간은 이를 쉽게 망각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환생 (reincarnation) 이론이 뒷받침된다(박준양, 뉴에 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교의신 학적 관점에서, 35~37쪽 참조).

18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83 비참한 조건과 마침내 죽음 자체까지도 모두 수용하셨음을 의미한다. 85) 반면에, 뉴에이지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고통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배제하고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부인하거나 재해석 86) 하려고 시도한다. 이처럼 신영지주의( 新 靈 知 主 義, Neo-Gnosticismus) 87) 노선에 서 결코 고통받을 수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 를 주장하는 뉴에이지의 견해 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신 비가 드러내는 유일무이한 구원론적 의미를 축소하고 은폐하는 쪽으로 나 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뉴에이지 운동은 고통을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기 에 현대인들에게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달콤한 약속을 제공한 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셨 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 진리는 안락한 구원 을 추구하는 뉴에이지 운 동의 추종자들에게 이해와 수용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그러나 현대의 과 학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뉴에 이지가 제공하는 십자가 없는 우주적 그리스도론 과 고통 없는 편안한 구 원관이 큰 매력과 유혹으로 다가갈 수 있다. 88)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1989년 서한 그리스도 교 명상 (Orationis Formas)을 통해, 교의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되 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당신 성자 85) 박준양, 종말론,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생활성서사, 2007, 60~61쪽 참조. 86) 교황청 문화평의회 종교간대화평의회, 앞의 책, 122~123쪽. 87) 초대 교회의 영지주의( 靈 知 主 義, Gnosticismus) 이단 계열의 한 분파인 가현설( 假 現 說, Docetismus) 추종자들은, 로고스(Logos)가 인간의 나약하고 비참한 육체적 조건을 외양으로만 취한 것처럼 현시 된 것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적 예수님의 지상 행적 중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은 로고스 의 신성( 神 性 )에 적합하지 않다고 간주하여 모두 거부한다(박준양, 성령의 보편적 현존과 활동에 관한 식별-교의신학적 원리들, 가톨릭 신학 9, 한국가톨릭신학학회, 2006, 30쪽 각주40) 참조). 88) 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44~45쪽 참조.

184 184 교회사연구 제42집 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기 양도를 무시한다 면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 89) 고 분명히 천명한 다. 영적 호기심에서 여러 명상의 기술을 탐색하며 자신의 내적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영적 여정의 단초와 시작은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진정 한 영적 추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적 관점에서 본 다면, 진정한 영성적 추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신비를 따르는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관상의 유일한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유형이든 상관 없이 방법이나 기교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 실재이다. 기술에 의존하기보 다는 오히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왜 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에까지 이르 렀으며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처 지까지 겪으셨기(마르 15, 34 참조) 때문이다. 90)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나자렛 예수님의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거부하는 뉴에이지의 우주적 그리스 도론 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필연적 연 속성과 동일성이라는 근본 원리를 부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에 자리한,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의 단일한 위격 개념 91) 이 거부되고 왜곡되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그리스 89) 교황청 신앙교리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Faith), 최영철 옮김, 그리스도교 명상 : 그리스도교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한 서한 (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9, 19쪽(20 항), [원문 : Epistula Orationis Formas de quibusdam rationibus christianae meditationis, in Enchiridion Vaticanum : Documenti ufficiali della Santa Sede, vol. 11(1988~1989), Bologna : EDB, 1991, pp. 1668~1705(nn. 2680~2716)]. 90) 같은 책, 27쪽(31항). 91)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위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성( 神 性 )과 인성( 人 性 )의 불가분하고 혼합 없는 위격적 일치 (unio hypostatica)를 천명한 451년 칼케돈 공의회(Concilium Chalcedonense)의 가

185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85 도론은 나자렛 예수님을 그저 신적 원리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의 발현을 실현한 여러 위대한 역사적 인물 중 하나라고 보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원리로 제시되는 역사의 예수님과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과 동일성은 거부되기에 이른다. 예수님은 주님이심 (로마 10, 9 ; 필립 2, 11)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고백이야말로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론 적 주장을 배척하는 결정적 기준점이 된다. 그러므로 뉴에이지가 말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개진하는 진정한 우주적 그리스도론 이 란 신앙의 그리스도 를 모든 우주적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반드시 역사적 예수님과의 연속성과 동일성이라는 공리 ( 公 理 ) 위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92) 5. 결론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해치는 문화적 흐름으로 지금껏 고찰해온 과 학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신영성 운동의 세 가지는 각기 독자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사실상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만능주의에 기초하여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감각을 상 실하여 세속주의와 극단적 개인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뉴에이지와도 같 은 신영성 운동의 상대주의적, 혼합주의적 접근은 매력적인 호소로 다가 올 것이다. 즉, 과학주의와 세속주의가 만들어내는 소외 상황이 정신적 위기 속의 사람들을 그릇된 종교적 운동과 왜곡된 영성적 흐름으로 오도 르침(DH )에 대하여 박준양,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 385~395쪽 참조. 92) 박준양, 뉴에이지(New Age)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 개념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46~49쪽 참조.

186 186 교회사연구 제42집 ( 誤 導 )하는 것이다. 사실, 신영성 운동의 대중적 성공은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정신적 위기와 세속주의 사회의 방향 감각 상실을 반영한다고 말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흐름들의 확산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향한 하나 의 커다란 도전이며 심각한 위협을 구성하기에, 교회는 책임감을 가지고 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한다. 이처럼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생 활을 저해하는 현대의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지금까지의 모든 성찰 을 바탕으로, 신학적-사목적 차원의 네 가지 전망을 결론적으로 제시할 수 있겠다. 첫째, 이러한 흐름과 운동들에 대한 알림과 교육을 통해 더 이상 교회 의 신자들이 여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잘 인도하고 돌보는 일이 필요하 다. 93) 특히, 신영성 운동이 이른바 영성 이라고 내세우는 바가 얼마나 허 구적이고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야 한다. 이는 역사 안에서 온갖 그릇된 영적 유혹의 기만을 밝혀내며 진정한 신앙적 체험을 보호하고 가르쳐온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들의 지식 증대 자체가 교육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판단과 대응 을 위해 필요한 식별(discernment)로 인도하는 일이다. 94) 식별이란 성령 의 현존과 인도 아래 성경 말씀의 빛에 비추어 선함과 악함,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지금 여기에서 (hic et nunc) 역사( 役 事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밝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느님 뜻에 관한 식별은 반드시 그에 따른 변화와 성장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식별이란, 성령을 따르는 93) 최근에는 한국 교회 안에서 신흥 종교 운동의 하나인 신천지 운동의 위협과 피해가 보고되지만, 아직 이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신학적 연구가 잘 나와 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이는 향후의 과제 로 남긴다. 개신교 측의 신천지 운동에 대한 대응과 연구에 대해서는 정윤석 진용식 장운철, 신천지 포교 전략과 이만희 신격화 교리, 한국교회문화사, 2007 ; 최삼경 외 13인, 이단 신천지 대처법 A to Z, 안양 : 기독교포털뉴스, 2013 ; 현대종교 편집국 엮음,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 의 정체, 월간 현대종교, 2007 참조. 94)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사목적, 신학적 성찰, 180쪽 참조.

187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87 교회적 삶의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발견 하여 그에 따라 살고자 하는 역동적인 노력과 그로 인한 쇄신 및 성장을 가리킨다. 95) 이러한 식별에 기초해 이루어지는, 문화적 흐름의 오류와 영 적 기만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은 현대 세계 안에서 추진되는 새로운 복음 화 를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를 구성한다. 둘째, 이러한 문화적 흐름과 종교적 운동에 빠져 교회를 등지고 신앙 을 저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학적-신학적 이해와 성찰, 그리고 사목적 배려와 접근이 요구된다. 아마도 그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을 겪으며 방황 할 때, 신앙생활을 통해 그들 삶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 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 기대거나 의지할 만한 위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사실, 뉴에이지나 신흥 종교 운동의 대중적 성공은 사람 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겪는 갈등과 문제들, 혹은 사회생활을 통해 겪게 되는 어려움과 소외 상황 등을 잘 파고들어 접근하는 것 때문이라 할 수도 있다. 서구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소외감을 더 많이 느끼는 이주민 계층 에서 그 추종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96) 과 학만능주의와 물질주의, 상대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물신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 등에 사로잡혀 방황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등지고 뉴에이지 같은 신영성 운동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느끼는 정 신적 황폐함과 내적인 좌절, 그리고 절망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는 역동적인 복음 선포와 지혜로운 사목 적 배려를 통해 더욱 생동감 있는 신앙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잘못된 문화 95) 박준양, 성령론, 그 신비로운 현존과 작용에 관하여, 생활성서사, 2007, 50쪽 참조. 96) Cf. Segretariato per l ecumenismo e il dialogo della Conferenza Episcopale Italiana, Di fronte ai nuovi movimenti religiosi e alle sette : Nota pastorale del Segretariato per l ecumenismo e il dialogo ( ), in Enchiridion della Conferenza Episcopale Italiana, vol. 5(1991~ 1995), Bologna : EDB, 1996, p. 829(n. 1780) ;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사목적, 신학적 성찰, 176~177쪽.

188 188 교회사연구 제42집 적 흐름이나 신영성 운동의 교회 내 침투 및 사회적 확산을 예방해야 한 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례, 교리 교육이나 신자 재교육, 공동체적 친교와 나눔, 그리고 토착화 등의 차원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더욱 활력을 주 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느님 께 사랑받는 유일한 인격적 존재임을 자각하게끔 도와주는 손길 이 필요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신앙 안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인도하 는 사목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97) 자신의 구체적 삶 안에서 진정성 있게 신앙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모범이야말 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희망을 선사하는 교황 프란 치스코의 예언자적이며 봉사자적인 리더십(leadership)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실제적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넷째, 우리는 오늘날 영적 탐구와 신비적 추구를 향한 많은 사람의 열망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 의 정신적 소외는 심해지고 더욱 심각한 영적 빈곤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 다. 그래서 비록 뉴에이지 같은 신영성 운동의 흐름에 빠지긴 하였지만, 그들의 영혼 안에 담긴 영적 목마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즉, 현대 세계 안에서 확산되는 종교적 인간 (homo religiosus)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98) 만일 우리가 현대 세계의 과학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신영지주의적 흐름의 확산 안에서 영적 빈곤함과 소외 속에 방황 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교회는 여기에 대해 모든 거짓과 기만을 넘어서 참된 영성적, 신앙적 체험을 증거하고 97)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사목적, 신학적 성찰, 181쪽 참조. 98) Cf. Michael Fuss, Il fenomeno della nuova religiosità in Europa : Una sfida pastorale, Sette e Religioni 2, 1992, p. 297.

189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189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다. 혹시 사람들의 열망에 방향적 오류가 있다면 이를 교정하고 정화하면서, 그들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다운 구 원 체험으로 인도해야 할 예언자적 사명과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신앙의 수호자인 교회는 이러한 울부짖음과 열망이 오직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 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 14, 6 참조)에 대한 진정한 체험을 통해서만 응답되고 채워질 수 있는 것임을 증언해야 한다. 99)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는 특히 뉴에이지 같은 신영성 운동의 도 전과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차원의 호교론적 방 어에만 머물지 않고, 이 시대를 살며 영적으로 목말라하고 우주적 관심 속에 신비적 추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과 신비를 호소력 있게 선포하고 증언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결국, 이러한 교회적 성찰과 대응 작업에 관한 모색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신비사상(mystical thought)의 재발견,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 이 있는 초세기 부정신학 ( 否 定 神 學, apophatic theology) 100) 에 대한 새 로운 성찰이란 향후 과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투고일 : 심사 시작일 : 심사 완료일 : ) 박준양, 신흥 종교 운동의 도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 사목적, 신학적 성찰, 187쪽 참조. 100) 부정신학의 흐름에 대하여 William Johnston, 앞의 책, 36~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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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201 경제 이익보다 인간 존엄성이 먼저 : 교황 베네딕토 16세, 연대와 인간 우선하는 경제 문화 촉구, 평화신문 2009년 6월 21일자 7면. 돈, 권력 아닌 인간과 공동선이 먼저 : 교황 프란치스코 백주년 재단 설 립 20돌 국제회의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6월 2일자 7면. 교황 교회 내 출세주의 권력추구 오래된 죄악 : 진정한 권력은 주님의 희생 따르는 것, 가톨릭신문 2013년 6월 2일자 10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돌보는 데 앞장서라 : 프란치스코 교황, 브라질 사목방문 및 리우세계청년대회에서 강조, 평화신문 2013년 8월 4일자 7면.

202 202 교회사연구 제42집 ^_pqo^`q A Systematic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Cultural Streams and Movements of Today Which Interfere Sound Christian Faith PARK, Junyang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Nowadays there are some cultural streams and movements which interfere sound Christian faith in the world: scientism, secularism, and new spirituality movement. On the one hand, these are basically three distinctive and separated streams, but, on the other hand, they are actually interconnected, and they produce together more negative effects also in the Korean Society. First of all, a modern belief that science and technology are everything builds up its own world view and have exclusive view of truth. It thus have bad influence on religions and Christian faith by limiting continuously their spaces. Moreover, atheist scientism directly attacks them from the viewpoint of fundamentalism. And, secularism is closely connected with relativism. Secularism can be said a kind of relativism in a negative sense from the viewpoint of Christian faith. In other words, secularism means a kind of social and cultural ethos in a negative sense, and it refers to an attitude that anything can be justified as long as it is good for one s feelings. Finally, New Age movement, which is the most representative case of new spirituality movement, lead people to a wrong conception and direction of spirituality in their holistic approach. Since, these three streams constitute a big challenge and threat to the Christian faith and Church, we needs a theological reflection on and pastoral response to them. Firstly, we need to let the faithful know well about the danger of these streams and movements so that people are not to follow them any more. Secondly, we must try to listen to and understand

203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203 why people are abandoning their faith and leaving the Church in order to follow those streams and movements. Thirdly, we need to protect the faithful from the penetration of those three streams and movements into the Church by offering the faithful dynamic experiences of faith through an more active and wise proclamation of the Gospel and deeper pastoral care. So we have to try to build up and offer more active and dynamic programs of liturgical service, catechetic courses, religious education, community meeting, and inculturation. Fourthly, we must be aware of the intellectual and spiritual needs for mystical experience of people of today who feel thirsty in the development of modern technological civilization. Especially in order to respond effectively to the challenge and threat of new spirituality movement such as New Age, we need to find how to proclaim and testify the mystery of Jesus Christ to the people of these days, going beyond only transmitting or repeating the traditional apologetical doctrines of the Church. All these reflections on the suitable and effective response of the Church in front of the challenge of those cultural streams and movements lead us to a urgent task of rediscovery of mystical thought and apophatic approach in the theological and spiritual tradition of Christianity. Keywords : Christian Faith, Scientism, Secularism, Relativism, New Spirituality Movement, New Age, Mystical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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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종합토론 사회자 노길명 명예교수 고려대학교 토론자 조광 교수 연세대학교 김정숙 교수 영남대학교 박정우 신부 가톨릭대학교 손희송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노길명 : 한국 천주교회는 불과 2백 년을 넘을 정도의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것 은 한국 천주교회가 이루어온 독특한 특성들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한국 천주교회는 서구 선교사들의 개입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내재적 요구와 자발적 노력에 의해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발생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로, 한국 천주교회는 오랫동안 정치권력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왔다는 점이다. 영국의 개신교 교회역사가인 로빈슨 (C.H. Robinson)이 고대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 았다고 하더라도 19세기에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206 206 교회사연구 제42집 시련과 형고( 刑 苦 )를 겪었다고는 잘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국의 초기 신자들이 받았던 박해는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한국 천주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후 신자의 수효가 1백만 명에 이르기까지는 정확히 190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나 1백만 명에 다시 1백만 명이 늘어 2백만 명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12년밖 에 걸리지 않았고, 이후 7년마다 1백만씩 늘어 현재는 5백30만 명에 이르 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활발한 사회복지 활동, 인권 운동, 사 회정의 운동, 민주화 운동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만 큼 성장하여 왔다는 것은 건전한 신앙과 영성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양적 성장에 비해 과연 질적 으로도 성숙한 신앙과 종교문화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비판적 시 각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 기도 합니다. 다원적이고 세속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삶의 문화들이 그리스 도 신앙을 해치고 있으며, 교회 내에서도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흐름과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신앙의 순수 성을 회복하기 위해 전임 교황이신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작년 10월에 신 앙의 해 를 선포하셨습니다.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의 유산을 되새기고 그것을 오늘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오늘 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문화 속에서 어떻게 구현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오늘의 심포지엄 주제 를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로 설정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207 종합토론 207 이제부터 발표자들의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종합토론을 하도록 하겠 습니다. 먼저, 발표자들의 발표 내용에 대한 지정토론자들의 논평과 질의 를 들은 다음, 발표자의 답변을 듣고, 이어 자유로운 토론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자리를 함께해 주신 청중들께서도 좋은 질문과 논평을 해 주 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제1 주제인 천주교 수용과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 성 에 대한 논평과 질문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시고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이신 조광 교수님으로부터 듣도록 하겠습니다. 조광 : 여진천 신부님의 논문을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 논 문은 초기 교회사를 이끌어 가던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을 집중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좋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문으로 생각됩니다. 이 논문을 통해서 평신도 지도자 들의 특성과 신앙 특성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도를 강화시키기 위해 몇 가지 문제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먼저 연구방법론과 관련된 의견입니다. 서론 첫 부분에서 교황 문헌 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장마다 시작 부분에 교리서 등을 근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역사 연구 방법은 연역법이 아니라 귀납적 방법을 우선시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서술은 역사학 계통의 논문으로서는 지나친 연역적 연구 방법이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각종 칭호가 많이 등장합니다. 역사학 논문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를 객관화시켜야 합니다. 모든 칭호는 빼고 명망을 쓰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수원가톨릭대학교의 신앙과 이성 (2005년)에 초 기 교회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오늘 발표와 관

208 208 교회사연구 제42집 련해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연구사적인 차원에서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은 내용에 대한 의견을 몇 가지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우선 자료 집 5쪽에서, 이들은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으면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학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라고 하였는데, 당시 성호학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학문 경향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료집 6쪽(본지 11쪽), 이벽 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었 다 라는 부분에서는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등이 세례를 받은 장 소가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료집 11쪽, 그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공 동체는 얼마 안 되어 명례방 역관 출신 김범우의 집으로 이전되었다 라는 부분에서 명례방으로 이전되었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집회처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따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가성직 제도에서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이 해괴하고 이상스러웠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점도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이벽의 저술이라고 단정하는 만천유고 ( 蔓 川 遺 稿 )에 대한 부분입니다. 만천유고 는 이승훈의 저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천은 만초천의 준말이고 이승훈이 만초천 부근에 살았기 때 문에 여기에서 만천이란 호가 유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성직제도 라 는 용어에 대해서 가 ( 假 )라는 글자는 가짜라는 의미와 임시라는 의미도 있을 텐데, 요즘에는 가짜라는 의미로 많이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1930년대 나왔던 용어보다는 다른 용어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이 더 바람 직하지 않을까 합니다. 혹시 이 용어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면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료집 15쪽(본지 22~23쪽), 그는 예산으로 귀양을 가서 거기서 와 그는 1795년 박해에 귀양가서 라는 부분에서 보 외 ( 補 外 )라는 용어에 대해 다시 살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벽이 페스 트에 걸려서 죽었다고 했는데, 조선에 페스트가 유행한 기록은 없습니다.

209 종합토론 209 이 부분은 재검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척사론자인 심유( 沈 )라 고 했는데, 심유는 이승훈의 사돈이 되는 사람으로, 척사론자이며 혼척( 婚 戚 )이라는 표현도 넣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표현에 대한 의견 몇 가지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감호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감호는 권철신의 별호라고 보기보다는 권철신이 거주하 던 곳의 지명입니다. 참고로 호 ( 湖 )는 호수의 개념이 아니라 강물이 흐르 다가 그 흐름이 멈추듯 잔잔한 부분을 지칭하는 전통 지리학 용어입니다. 감호는 양수리 부근의 한강 가운데 특정 부분을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친절하게 감호가 입교하면 으로 번역하기보다는 감호에 사는 그가 입 교하면 정도로 번역하면 좋을 듯합니다. 다음에 강완숙을 여회장으로 표 현하셨는데, 당시 상당수의 기록을 보자면 그냥 회장으로 나옵니다. 그렇 다면 여회장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좀 더 생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조광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내용들에 대해서 발표자이신 여진천 신부님께서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진천 신부님 : 조광 교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연구방법론상의 문제 에 있어서, 논문 주제를 받고 발표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조선 시대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이 갖고 있었던 신앙과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은 어떨까를 늘 생각하면서 이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교수님께서 교회 문서 들을 인용한 것에 대해 역사학적 입장에서 정확하게 지적을 잘 해주셨습 니다. 완성될 논문에 수정 보완토록 할 것이고, 앞으로 연구하는 데에도 좋은 지침을 주셨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내용에 있어서는 첫째, 권일신, 최창현, 정약용, 김범우 등이 세례를 받은 장소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서, 최창현과 이승훈의 대

210 210 교회사연구 제42집 질 심문에서 최창현이 이벽의 집에서 갑진년에 어찌 너는 나를 위하여 영세하고 나를 위하여 신부가 되지 않았다고 하느냐? 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2월 13일에 이승훈은 갑진년에 정약용과 더불어서 이벽의 집에 서 회합하고 정약용은 이 술에 유혹되었습니다. 그가 저에게 영세받기를 청했던 까닭에 저는 이것을 한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2월 18일에 이벽의 집에서 책을 모방해서 대세 등의 일을 하였다 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둘째, 신앙공동체 모임에서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는 것에서, 당시 참여한 분들에게서 이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박해자의 기록입니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라는 것은 성호경을 긋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외의 행동은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연구해보겠습니다. 셋째, 가성직제도 라는 용어에 대해서, 당시 황사영은 백서 에서 망 행성사( 妄 行 聖 事 )라는 표현을 썼고, 연구자들은 교계제도, 신자교계제 도, 모방성직제도, 가성무집행제도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적해 주 신 것처럼 좀 더 바람직한 용어를 연구해보겠습니다. 넷째, 이승훈이 예산으로 귀양을 갔다 라기보다는 보외되었다라고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분명히 그를 예산현으로 정배 ( 定 配 )하라 ( 정조실록, 정조 19년 7월 26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이벽이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고 했는데, 당시 페스트가 유행 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는 그 가 페스트(중국에서 역병이라 부르던 티푸스의 일종)에 걸렸다는 용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리델 주교의 불한자전 에 페스트는 염병( 染 病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표현을 인용했는데, 좀 더 연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11 종합토론 211 여섯째, 내용과 표현, 방법론에 있어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족한 점들을 교수님께서 꼼꼼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기존 연구 성과 를 인용하면서도 좀 더 치밀하게 고민하고 연구했어야 했는데, 저의 불찰 이기도 합니다. 완성될 논문에서 교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부분들을 수정 하고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제2 주제 첨례표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 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영남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김정숙 교수님께서 논평과 질의를 해 주시겠습니다. 김정숙 : 안녕하십니까. 소개받은 김정숙입니다. 오늘 방상근 선생님 이 애써서 작성하시고 연구하신 첨례표에 대한 것을 자세히 읽을 수 있었 습니다. 논문을 읽고 신선하다는 느낌으로 탄복할 때는, 중요한 주제를 찾 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자료를 찾은 경우입니다. 지금의 이 논문은 두 가지 를 다 충족하고 있으므로 매우 배움이 많은 논문입니다. 달력이란 시간을 다스리는 것이며, 인간의 사고를 연속적으로 파악해 내는 방법입니다. 일종의 표준화 작업인데, 특히 시간의 표준화는 사람들 의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게다가 천주교는 일 년을 큰 단위로 하고 한 주간을 소단위로 삼아 전례 생활을 하는 종교 입니다. 그래서 전례를 익히는 일은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신앙화하는 길 입니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 신자들의 신앙생활 지침표였던 첨례표를 제 대로 읽어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본 논문에서 교회 초창기 신자들이 첨례표를 어떻게 만들었겠는가 하는 고민, 첨례표를 통해서 그 일상생활 이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짚는 것은 박해 시대 신자들의 일상생활을 알기 위한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연구자는 당시의 성인 공경, 대소재,

212 212 교회사연구 제42집 현존 단체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습니다. 다만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몇 가지 제언 겸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첨례표를 파면 팔수록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더 나오겠지만, 여 기서는 이 논문에서 언급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토론하고자 합니다. 먼저 첨례표에 대한 선행 연구에 관한 정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동 일 주제를 읽는데, 시간과 노력을 적게 들이고 정확한 정보에 도달하도록 해 주는 것은 연구자의 배려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지난 8월에 구술 발 표되었던 김정환 신부의 1916~1970년 첨례표 연구 도 언급이 되면 좋 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너무 방대한 작업이 되겠지만, 앞으로 박해 시대 이후 첨례표 변화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둘째로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을축년 첨례표와 병인년 첨례표에 대해 설명을 하면 좋을 듯합니다. 현재 한희동 신부가 기증한 을축년 첨 례표 가 약현 성당 내 서소문순교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가톨릭대사전 에는 절두산의 병인년 첨례표 가 제일 오래된 첨례 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적해 주면 타인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 다. 또 모리스 쿠랑의 조선서지 에는 기축년 첨례표 (1889년)가 실려 있습니다. 이들을 함께 언급해 주면 박해 시대 첨례표에 관한 정확한 정보 가 되지 싶습니다. 세 번째로,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첨례표는 일 년을 주기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고에서도 1년이라고 나와 있습 니다. 실제 첨례표를 보면 보통 이듬해 삼사월까지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 다. 이 이유를 생각해보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네 번째로 몇 가지 사례를 덧붙이면 논문을 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들이 있습니다. 가령, 자료집 39쪽(본지 60쪽)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원본 한

213 종합토론 213 부만 있으면 필사하던 당시의 보급 방법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이점은 초창기 교회에서 첨례표가 얼마나 보급되었는지의 여부에 대 해서도 열쇠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회는 프랑스에서 발간된 다 블뤼 전기에 그가 당시 최근 보급된 성의회에 열심이었던 점을 보충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보충 사례들이 더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첨례표를 통한 신자들 의식의 변화를 짚어야 하지 않을 까 생각됩니다. 첨례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자들에게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의식, 그 충격과 받아들이는 각오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천주강생, 서력기원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간 측정법의 전개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당시 신자들이 살았던 전 근대 사회에서는 간지( 干 支 )를 사용하여 60년을 하나의 주기로 삼았습니 다. 그리고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한국에서 햇수를 세는데 본 격적으로 서기를 쓴 것은 5 16 이후입니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은 한 국에서 200년가량 앞서 서력기원인 천주강생 을 기점으로 해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혀 낯선 달력을 사용한 그들의 의식에는 새로운 긴 장과 타인과는 다르다는 또 다른 각오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첨례표에서 읽어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발표를 들으면서 저희가 혹시 착각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 하 나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 주일보다는 첫첨례 몇 일 이런 식의 표현이 굉장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발표를 하실 때 요일, 주일이라고 하 시니까, 요일이 같이 불렸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한 번 분명히 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김정숙 교수님께서 질문을 해 주신 내용에 대해서 발표자인 방상근 선생님께서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214 214 교회사연구 제42집 방상근 : 부족한 글인데, 좋게 읽어봐 주셔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 다. 선생님께서는 제언 겸 질문으로 다섯 가지 정도를 말씀하셨는데, 답변 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선생님께서는 첨례표에 대한 선행 연구 정리와 박해 시대 이후 첨례표의 변화 문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특히 선행 연구와 관련해서 대 전의 김정환 신부님 연구를 언급하셨는데, 말씀대로 김정환 신부님은 일 제 시대 이후 즉, 1916~1970년까지의 첨례표 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리고 그 내용을 지난 8월 교회사 연구자 모임에서 발표하였습니다. 그런 데 8월의 발표문은 아직 완성된 논문은 아니었고, 완성된 논문은 바로 다 음 달 26일에 저희 연구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공식적인 발표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제 글에는 완성된 논문을 소개할 생각이었 습니다. 그리고 첨례표의 변화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이 부분도 8월의 발 표 내용으로 보아 김 신부님의 글에 실릴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김 신부님 의 연구 내용과 겹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꼭 필요하다면 간략한 흐름 정도 는 언급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첨례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냐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다루는 을축년과 병인년 첨례표에 대해서는 각주에서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박해 시대 첨례표에는 보통 이듬해 삼사월까지를 함께 다루고 있는데, 이 이유를 생각해 보았느냐는 질문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1865년 첨례표에는 1866년 3월까지, 1866년 첨례표에는 1867년 4월까지의 내 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 해의 첨례표 일부를 신자들에게 미 리 알려준다는 의미가 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865년 첨례표에 실린 1866년 첨례표나, 1866년 첨례표에 실린 1867년 첨례표는 모두 예수 승천까지만 수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 시기

215 종합토론 215 까지만 수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당해 연도의 첨례표가 만들 어질 때, 다음 해의 부활 시기까지 신자들이 기억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습 니다. 따라서 한 첨례표에는 두 번의 부활 시기가 수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신자들에게 부활의 중요성과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 어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취된 부활 신앙은 다시 순교 신심으로 이어져서 한국 교회에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제가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쓴 것은, 신부님도 안 계시고 첨례표를 만들 줄 모른다면 중국으로부터 가져 와야 하는데, 그렇다면 누군가가 밀사로 파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문 모 신부의 입국 전에 조선 신자들이 중국을 왕래한 것은 10년 동안 세 번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중국으로부터 매년 첨례표를 가져온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첨례표 한 장만 있으면 필사해서 배포할 수 있지만, 그 한 장을 구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의회 관련 이야기는, 샤를 살몽의 다블뤼 주교 전기 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서 언급되는 성의회는 각주 55번(본지 81쪽) 에서 언급되는 내용과 같습니다. 즉 두 자료 모두 다블뤼 주교의 서한 내 용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첨례표를 통해 신자들의 의식 변화를 짚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서력기원인 천주강생 등 전혀 낯선 달력을 사용한 그 들의 의식에는 새로운 긴장과 타인과는 다르다는 또 다른 각오가 있었을 것인데, 그러한 마음을 첨례표에서 읽어내야 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지당한 말씀인데, 솔직히 이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발표에서 말씀 드렸듯이, 첨례표는 어느 날에 주일과 첨례를 지켜라, 언제 대소재를 지키 고 파공해라, 언제 기도하면 전대사를 얻는다 등 신자들의 신앙생활 지침

216 216 교회사연구 제42집 서입니다. 따라서 첨례표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천주교인으 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 내가 비신자와 다르다는 의지의 표 현입니다. 첨례표 안에서 이 이상 어떤 구체적인 의식의 변화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천주강생 등 시간에 대한 것도, 신자들이 낯선 달력을 사용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첨례표의 경우 연도는 천주강생 몇 년 이라고 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주일과 축일의 날짜는 모두 음력으로 표시되어 있습니 다. 다시 말해 신자들은 음력이라는 기존의 시간 개념 속에서 신앙생활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의 일상생활화 가 이루 어지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당시 신자들이 시간 때문에 새로운 긴장을 하고 타인과 다르다는 인식을 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파공이나 대소재 등 신앙의 내용, 그리고 실천 문제와 관련이 있지, 전례력이 음력으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자들이 시간과 관련해서 의식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자료상으로도 그러한 것들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노길명 : 감사합니다. 그러면 세 번째 주제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이라는 발표문에 대한 논평을 박정우 신부님께 서 해 주시겠습니다. 박정우 신부 :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는 뚜렷하게 합의되어 보 편적으로 쓰이는 정의는 찾기 어렵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 영성이란 하 느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내적 태도나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 니다. 발표자가 사회영성 의 정의를 프랜시스 미헌의 표현에 따라 구조

217 종합토론 217 적 차원,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가치가 드러나거나 실현되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신앙, 혹은 이 신앙에서 비롯된 일관된 삶의 자세, 혹은 사회(세상) 영역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자세 라고 정의한 것 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영성에 이미 사회적 역사적 차원이 들어있는 까 닭 에 사회영성이 따로 있진 않다 는 지적도 옳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기에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인간의 구원 과 무관하지 않고,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는 영역이 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간추린 사회 교리 60항 참조). 발표자의 지적대 로 한국 교회사 안에서 과도하다 싶을 만큼 덜 강조되어 왔고, 무엇보다 현 단계 한국 교회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까닭에 내면주의적 영성 과 균형을 맞춘다는 차원에서 따로 사회영성 을 지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영성 이라는 표현은 사실 2011년 가톨릭대학 교 김수환 추기경 연구소에서 하느님을 닮은 인간 사랑 김수환 추기경 의 사회영성 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 때 쓰였던 것 이외에 한국 교회 안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었습니다. 영성 을 찾는 목소리가 많아지는 현 대에서 사회영성 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 있도록 이 용어가 자주 사용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발표자는 사회영성의 평가 기준으로 혹은 지표로써 사회 교리의 네 가지 중심 원리와 여덟 가지 주요 가르침을 적용하였습니다. 발표자의 지 적대로 계량화된 지표가 아니라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로써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특정 시대에서 교회가 민족사의 구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 세상 안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해 왔는가를 전체적으로 평가 하는 지표로써 사용하는 데 어느 정도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여덟

218 218 교회사연구 제42집 가지 가르침 중 세 번째 사랑과 정의의 일치 는 그 개념도 모호하고, 구체 적인 역사 시기에 이 가르침을 기준으로 평가한 내용도 명확하지 않습니 다. 교회가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안에서 어떤 사업을 했는데, 그 사업이 과연 정의 를 전제했는지 아니면 정의 없는 사랑 인지 여부를 평 가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사실 이웃 사랑 의 개념 안에는 당연 히 정의 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회칙 하느님 은 사랑이십니다 에서 정의 는 주어야 할 몫을 정당하게 주는 것을 의미 하고 사랑 은 정당하게 주어야 할 것 이상을 더 내어주는 것이라고 그 개념을 구별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의롭 지 못한 위선적인 신앙을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사랑과 정의의 일치 라는 표현은 사용할 수 있지만, 사회영성의 지표로써 사용하기는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경제 정의, 정의의 열매인 평화, 환경 정의 등 발표자가 제 시한 다른 가르침들 안에 이미 정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고, 발표자가 강 조하는 인권 과 인간 발전 은 인간 존엄성의 원리, 인간의 정치경제적 권리 인정 및 존중,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에 포함될 수 있 으므로 이 셋째 항목은 삭제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회 교리의 가르침에 문화에 대한 봉사 와 생명의 존엄성 수호 가 평가 지표로써 추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문화에 대한 봉사 는 간추린 사회 교리 554항~562항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안에서 신앙과 일상생활이 분리되 지 않도록, 또 교회의 가치관과 전통이 현대 사회 안에 현존하며 영향을 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간추린 사회 교리 는 특히 복음의 영감을 받는 사회 정치 문화를 건설하는 데에 투신 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사회 정치 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555항). 또한 오늘날 평신도의 정치 참여는 이들의 참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온갖 차별을 지

219 종합토론 219 양하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확대하며, 문화적 박탈로 인한 사회적 빈곤 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557항). 그런데 발표자는 교회가 장면 박사를 지원한 것이 단지 교회의 생 존, 확장, 정치세력화에 대한 관심만 넘쳤을 뿐 이라고 부정적으로만 보 고 있는 듯합니다. 문화에 대한 봉사 도 사회영성의 지표로 볼 수 있다면 교회사에서 장면의 정계 진출은 한 평신도 정치인이 자신의 가톨릭 신앙 의 이상을 펼침으로써 한국 사회와 정치에 문화적으로 긍정적인 기여를 하려고 했던 측면은 없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생명의 존엄성 수호 역시 중요한 사회영성의 지표로서 간 주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존엄성 수호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낙 태와 산아제한 반대 부터 생명공학의 배아 연구와 조작, 산전 진단과 선 별 낙태, 안락사 등 인간 생명을 이기적인 도구로 사용하려는 현대의 죽 음의 문화에 대응하는 중요한 사회적 활동입니다. 간추린 사회 교리 553항은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봉사 영역 중에서 인간에 대한 봉사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임신에서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생명에 대 한 권리를 확언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모든 권리 가운데 으뜸가는 권리 이고 다른 모든 권리를 위한 조건 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혼 인과 가정을 수호하는 것 역시 시급한 요구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환자의 줄기세포를 복제하는 연구가 성공했다고 떠들었지만 결국 사기극으로 끝난 2005년 황우석 사태가 우리 사회에 몰 고 온 파장은 엄청났고,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황우석의 복제배아 줄 기세포 연구가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용감하게 지적했던 한국 교회의 목소 리는 평가해야 할 중요한 교회사적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후 가톨 릭교회가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에 참여하여 배아 연구 의 한계를 정 하거나, 소위 존엄사 입법 시도에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여 관철하는

220 220 교회사연구 제42집 등 국가의 생명윤리 정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 습니다. 발제문에는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 수호 라는 측면이 단순히 교 리상으로 교회와 국가가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들 (자료집 79쪽)이라고 평가절하하여 다루는 느낌입니다. 생명 문제가 교회가 민족사에 기여하는 사회영성의 지표로써 포함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발표자의 의 견을 묻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4. 교회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중 1988년 부터 2007년까지 부분에서 발제자는 교회가 1990년대 들어서 국가와 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을 일상적으로 구사하였다 (자료집 79쪽)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시민사회의 성장 과 함께 신자들의 중산층화 로 인하여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발제자가 지적했듯이 이 시기는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을 계기로 직선제 개헌이 이 루어지고 형식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에 교회가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어야 할 사안들이 줄어든 탓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교회가 당연히 사회 교리에 따라 행동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교회의 중산층화 때문에 혹은 국가와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 으로 침묵을 지켰다고 본다면, 이 시기에 교회가 적극 대응했어야 하는 구체적인 국가적 의제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특히 발제자는 이 시기에 교회가 국가의 공적 의제를 거론하는 경우 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고 하면서, 주교회의 산하 정의평화위원회가 1980년까지 쟁점으로 삼았던 민주화와 인권 관련 의제들을 1990년대 들 어 거의 다루지 않고 비교적 온건한 환경 문제 등에 국한시킨 것이 대표 적 사례 이고, 2001년 대우노조 폭력 진압 사건에서 침묵을 지킨 것도 교회가 JPIC(정의, 평화, 창조질서 보전)로 집약되는 이 시대의 문제에

221 종합토론 221 대하여 교회가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 일이 이 시기에 가장 부족한 점 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제자의 이러한 평가에 본 토론자 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첫째, 이 시기에는 민주화와 인권보다는 환경 및 농촌 문제와 통일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시기였습니다. 발 제자가 사회영성의 한 지표로 지적한 환경 정의 에 있어서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것이 다른 사회 문제에 비해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부터 대구의 푸른평화, 서울의 하늘 땅 물 벗, 인 천의 가톨릭환경연대 등 각 교구별로 환경 운동 단체가 생겨났고, 1992년 에는 전국환경사제모임, 2001년에는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환경 소위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또한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 되면서 우리 농촌 살리기가 사회와 교회의 중요 이슈로 부각되었을 때 각 교구와 주교회의는 가톨릭 농민회와 협조하여 농업 문제 해결을 논의하였 고, 1994년 4월 춘계 주교회의 총회에서는 우리 농산물 직매장 설치 운동에 협조하고 전체 교회 차원의 전담기구로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를 결성 하기로 결정했습니다(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천주교회, 422쪽 참조). 둘째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 활동과 관련해서도 정의, 평 화, 환경과 관련하여 이 시대의 문제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정평위의 활동 자료를 살펴보면, 매년 12월, 인권 주일 메시지에서 정의, 평화, 인권과 관련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지 적해 왔고, 1993년 7월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에 관한 성명서 발표, 1995년에는 지역 갈등 관련 세미나 개최, 1997년 대선을 앞둔 시기에는 정치 발전을 위한 호소문 과 신자 교육용 자료집 발표, 1998년에는 IMF 구제금융 관련 전국 간담회 개최, 1999년에는 인간 존엄성과 사형 제도 폐지 세미나 개최 및 자료집 발간, 2000년 정보화 시대와 인간 존엄성 세미나 개최,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한 종단 대표자 모임 시작, 2001년 주교

222 222 교회사연구 제42집 회의 산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와 환경소위원회 설립,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남북 평화와 화해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개최, 2005년 골프장 건설 붐에 대한 반대 의견 표명 등의 활동을 해왔습니다(주교회의 정의평 화위원회 연혁 자료). 주교회의 정평위가 주교들의 자문기구이며, 구체적 인 활동을 주도하는 성격의 단체라기보다 각 교구 정평위의 협의체임을 고려할 때 성명서 발표와 세미나, 자료집 발간 등 나름대로 필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봅니다. 셋째로, 발표자가 예를 든 2001년 대우노조 폭력 진압 사건과 관련 해서도 대우노조원들의 집회 장소와 보호의 장소로 교회가 산곡동 성당과 피정의 집을 제공해 준 것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교회의 대사회적 활 동이고, 폭력 진압이 있었을 때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강력한 항의를 표시했음에도 교회가 침묵을 지켰다고 표 현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 당국이나 정위평화위원회가 모든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고, 정권과의 관계를 고려해 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사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시기에 정의 평화 인권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고 평가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2008년에서 현재까지 의 부분에서 발표자는 한국 교회가 4대강 사업, 원자력 발전,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한미 FTA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쟁점에 대하여 일관되게 진보적 입장을 표명해 왔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맞는 말 이긴 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교회가 어느 쪽 편을 든다는 인상을 주는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고, 실제로 교회는 그런 측면을 우려하고 있습 니다. 2012년 인권 주일 메시지에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이용훈 주 교는 교회는 보수와 진보 중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는

223 종합토론 223 보수와 진보를 포함하는 인권 과 사회 교리 에 따라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용훈 주교는 이어서 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 모두가 근본적으로 이러한 복음의 가치를 추구하는 한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고 보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다면 그 자체로 허구 요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보수와 진보는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아니라, 서 로 보완하고 상생의 길을 찾는 여정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07년 논란이 되었던 사학법 개정과 관련하여 거꾸로 교회는 보수 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학법 개정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지금도 그 입장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립학교 교육의 자율성을 침해 하고 국가의 지나친 간섭을 경계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 과 혼인의 가치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2008년 이후 소위 보수 정부 정책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하 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진보를 지지한다고 말하기보다는 보수 정부의 정책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존(환경)이라는 교 회 가르침의 근본 가치를 훼손하고 있고 절차 면에서도 비민주적, 비윤리 적이며 폭력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을 강조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발표자는 이 시기에 사회영성, 사회사목과 사회복지가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동의하면서 이 시기가 전 시기와 구분되는 것은 교회의 리더십의 역할도 있겠지만, 교회 내적인 요인보다 는 교회 외적 요소에 의해 교회에 요구되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임을 지 적하고 싶습니다. 즉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후 4대강 사업, 제주 해군기지 사업, 핵발전소 확대, 용산참사 등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와 공동선의 가치를 훼손하고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밀어붙이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 문에 이에 따라 사회 분야에서 불의한 권력에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정의

224 224 교회사연구 제42집 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교회의 역할도 함께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 역할을 맡은 주교회의 의장 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주교와 정의 평화, 환경 분야에서 책임을 맡은 교회 지도자들이 현재 그 역할을 잘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사회영성의 확장과 교회의 사회참 여 확대 현상은 슬픈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어둡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발표자의 말대로 사회영성이 꽃필 때 교회도 민족사 안에서 긍정적 인 평가를 받았 고 한국 교회가 미래를 열어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신 적 자산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영성 확산의 주체는 교회의 성직자들뿐 아니라 더 많은 일반 신자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선적으로 교회의 어느 시기이든 민족사에 참여하는 올바른 사회영성의 확대를 위해 서는 교회 지도자인 주교들과 사회사목 혹은 사회복지 분야의 책임을 맡은 성직자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 춘계 주교회의에 서 주교단 전체가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한 담화문을 발표한 것이 교회 전체의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에 큰 동력을 일으킨 것은 대표적인 예 입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 는 복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 등 일관된 도덕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한국의 역사적 현 실 안에서 적용하고 그것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리더십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2011년 주교회의에서 대림 제2 주일부터 한 주간을 사회 교리 주간 으로 제정함으로써 각 교구에서 사회 교리학교 가 확대되고 일반 신자들의 사회 교리에 대한 인식과 교육 열기 가 높아졌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교회의 사회영성 확산은 제도적으 로 사회 교리를 얼마나 신자들에게 효과적으로 교육하고, 사회사목과 사회 복지 현장에서 얼마나 실천하고 있느냐, 그리고 실제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의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사회영성에 따라 예언자

225 종합토론 225 적인 목소리를 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 교리를 통한 사회영성보다는 개인의 기복과 마음의 평화를 위한 내면주의적 영성 이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예비자 교리서가 1992년 교황청에서 사회 교리를 대폭 강화하여 새로 발 간한 가톨릭교회 교리서 의 구조에 따라 개편된 것이 2004년 이후에 불 과합니다. 사회 교리의 기본 원리인 인간 존엄성, 연대성, 공동선, 보조성,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 재화의 보편적 목적, 인권, 정의, 평화, 창조 질서의 보존, 생명 존중, 정의와 평화, 문화의 복음화, 인간의 해방과 발전 등과 같은 사회 교리의 기본 개념들이 제도적으로 모든 세례받는 신자들에 게 충실하게 교육될 수 있는 신자 교육 구조가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노길명 : 네. 박정우 신부님의 논평에 대해서 박문수 선생님께서 답변 을 해 주시겠습니다. 박문수 : 박정우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께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세 가지로 요약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부님께서 생명 보호 가 사회 교리의 중요 평가 지표가 되어 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아쉽게도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측 면입니다. 사회 교리의 사회 정치적 측면을 더 강조하다 보니 이 모든 가 르침의 기초가 되는 생명 보호 차원을 간과하였습니다. 보완토록 하겠습 니다. 사랑과 정의 의 일치 지표에 대하여도 사랑이 모든 원리와 가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니 따로 선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고맙게 받아 들입니다. 지적에 감사하고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226 226 교회사연구 제42집 두 번째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시대를 구분하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을 특정( 特 定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들을 제 대로 특정하지 못하면 시대 전체에 대한 평가가 왜곡될 수 있어, 되도록 필자의 주관을 개입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당대를 연구한 논문이나 저서들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사건들을 선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랬음에 도 연구자들이 대부분 사회학자, 정치학자들이다 보니 다른 사건들보다 사 회 정치적 사건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적하신 대 로 특정 영역이 과( 過 ) 대표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 분야를 연구 하는 분들의 논조가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균형을 잃은 것도 있어 다 소 편향적 느낌을 준다고 지적하신 점도 인정합니다. 가능한 대로 이 지적 들을 참고하여 논조를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수정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일관되게 사회 교리에 입각하여 예언 직무를 수 행한 것인데, 여기에 대해 진보적 이라 평가한 것이 자칫 특정 사회 세력 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한 답변입니다. 물론 진보 적이라는 말이 진보주의자들을 지지한다는 의미와 같지는 않습니다. 저는 교회의 주장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가깝다 는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을 뿐입니다. 사실 교회의 입장은 종말론적 상대주의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에 비춰 보았을 때 완벽한 체제나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교회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체제에 대하여 상대적 입장을 취하고, 또 그에 입각하여 이 모두를 비판합니다. 때로 이러한 태도가 특정 시기와 상황에서 그 사회의 진보적 주장과 일치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우를 가리켰습니다. 전체적으로 신부님은 제가 1990년대 이후의 시기를 평가한 부분에 주로 이견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지적들 대부분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227 종합토론 227 또한 인정합니다. 이 지적들을 전적으로 수용하겠습니다. 제안하신 대로 평가 지표들을 조정하고 나서, 새로 설정한 기준에 입각해 재평가해보도 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길명 : 그러면 오늘 마지막 주제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이라는 발표문에 대한 손희 송 신부님의 논평과 질문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손희송 신부 : 먼저 신학생 양성과 신학 연구로 바쁘신 중에도 훌륭한 논문을 집필해 주신 박준양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논문은 현대 세계 에서 우리 신앙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 분석을 바탕 으로 교회가 신앙의 성장과 활성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는 데 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울대교구에서 신앙의 해 의 세 부 실천 계획을 기획한 주무 부서인 사목국의 책임자인 저의 입장에서 이 논문은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님께서 는 신앙의 해 가 시작된 2012년 10월 11일 날짜로 발표하신 사목 교서 에서 오늘날 유럽 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과도한 과학 적 사고방식과 개인주의 (염수정 대주교, 신앙의 해 사목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앙의 해 안내서, 2011, 16쪽)라고 진단하셨습니다. 물 론 이것은 유럽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를 지구촌 이라는 말 로 표현할 정도로 세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지역의 문제는 다소 시간차를 두면서 다른 지역의 문제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 니다. 저는 염 대주교님께서 오늘날 신앙의 위기 요인을 정확하게 짚어주 셨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를 좀 더 학문적으로 밑받침할 수 없을까 하는 아 쉬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박 신부님의 논문이 이러한 아쉬

228 228 교회사연구 제42집 움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저 개인적으로는 더욱 반갑고 고마웠던 것입 니다. 논문의 주요 내용을 짚으면서 제 의견을 보태는 방식으로 논평을 진행하겠습니다. 비교적 긴 논문이지만, 매우 짜임새 있고 논리적으로 작성되어 있기 에 이해하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이 논문은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두 가지 초점을 두고 전개됩니다. 하나는 전 세계적 맥락에서 오늘날 건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이 무엇이며, 그 것이 우리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교회적 대응과 사명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발제자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서 과 학주의, 세속주의(혹은 상대주의) 그리고 신영성 운동을 꼽으면서, 이 세 가지는 각기 독자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분석합니다. 발제자가 잘 설명한 대로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빠져서 종교와 신앙을 무 의미하게 여기는 이들, 또한 과학적 관점만을 배타적으로 고집하면서 종 교와 신앙을 적대시하는 이들은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런 태 도는 세속주의 혹은 상대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부 정하게 되면 모든 것을 상대화하게 되고, 결국은 개인의 편안함과 안락함 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며, 그 편안함과 안락함을 보장할 수 있는 돈에 집착하는 물신주의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이런 이들은 이른바 신영성 운 동의 대표주자 격인 뉴에이지가 표방하는 자기만족 추구의 영성, 즉 고 통 없는 안락한 구원 을 약속하고, 어려운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사이비 영성에 큰 매력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절대자인 하느님을 거부하고 인간 은 자신을 절대자로 삼아서 자기만족 추구에 열중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흐름이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포이어바흐, 마르크 스, 니체로 대표되는 근대 무신론도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진행되었습니

229 종합토론 229 다. 그들은 근대의 자연과학, 인문과학에 근거해 신은 인간의 투사에 불과 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 소외를 초래한 종교와 신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 을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는 공격적인 무신론을 주창하였습니다. 또 한 니체는, 무신론은 신적 권위에 기반을 둔 기존의 윤리도덕과 가치 체계 의 붕괴로 이어져서 허무주의로 귀결될 것을 예고합니다(한스 큉, 성염 옮김, 신은 존재하는가 1, 분도출판사, 1994, 511~512쪽). 아울러 신 을 잃어버린 인간은 초인 ( 超 人 ), 곧 육체적 건강과 즐거움, 욕망을 추구 하고, 전쟁과 투쟁을 불사하며, 증오, 냉혹함, 복수를 찬양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한스 큉, 같은 책, 517쪽) 니체가 묘사한 초 인은 신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인간, 자기만족 추구 에 열중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놀랍게 닮아있습니다. 근대 무신론과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 모두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 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심 (창세 3, 5 참조)에 빠져서 하느님의 명을 어깁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 에 무조건적 신뢰를 두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 하느님처 럼 되려는 욕심 에 더 취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교묘하게 부정하고 이 세상의 중심이 되려는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은 (아담이 하와에게 탓을 돌린 것처럼) 서로 분열되고 (카인이 아벨 을 죽여 없애듯이) 폭력적 다툼에 빠져서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쫓겨난 것처럼)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게는 마음 깊은 곳에서 피조물이 아닌 창조자가 되려는 욕망 이 도사리고 있고, 그러한 욕망을 추종하면 결국 불행의 나락에 떨어진다 고 경고하는데, 이 메시지는 역사를 통해서 재현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발제자는 오늘날 신앙을 위협하는 다양한 흐름과 운동을 소개한 후에

230 230 교회사연구 제42집 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발제자가 제안한 대로 우선 이런 흐 름과 운동의 맹점과 폐해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자기반성의 자세로 살 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교회와 신자 개개인의 쇄신과 정화 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자기반성적 성찰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 제시한 길이기도 합니다. 공의회는 사목헌장 에서 근대 무신론은 인 간을 고귀한 천품에서 추락시키는 위험한 이론과 운동 이라고 규정하면 서 단호히 배척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서 신 부정 의 숨은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 ( 사목헌장 21항)해야 한다고 천명합 니다. 또한 무신론의 발생 원인 중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역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 사목헌 장 19항)고 설명하면서, 무신론의 극복은 이론과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 고 역설합니다. 즉 교리의 올바른 제시 그리고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하고 성령의 인도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정화하는 것 ( 사목헌장 19항)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대응 방식, 곧 비판적 대응-자기 성찰- 자기 쇄신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모든 흐름과 운동에 적 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발제자는 이런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 자신의 정화와 쇄신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몸 이 건강할수록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건강할 수록, 다시 말해서 깊은 믿음에 근거해서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굳건한 희망을 걸고 산다면, 신앙을 저해하는 세력 에 대한 면역력도 높아질 것입니다. 발제자가 강조한 교회의 자기 쇄신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231 종합토론 231 순교 정신의 실현입니다. 순교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가 장 절대적 가치로 받아들여 생명을 바쳐 증거한 분들로서, 그분들의 정 신이 오늘날 상대주의와 세속주의로 만연된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방식으 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신자들은 물론 비신 자들까지도 이태석 신부에게 감동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 맞게 순교 정신 을 실천하여 오직 복음을 절대적 가치로 인정하고 살다가 갔기 때문일 것 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103위 성인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고, 또한 하느님 의 종 124위 시복시성, 순교자 2차 시복시성 운동,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 운동 이 진행 중입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와 신자들 각자의 순 교 정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외적인 숫자나 규모에 연연하기보다는 정신과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서, 구체적으로 일상의 삶 속에서 순교 정신을 실천해나가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 정신을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순교자들처럼 깊고 굳건한 신 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먼 것 같습니다. 신앙을 기르고 다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발제자가 지적한 대로 한국인 의 종교 심성에는 뉴에이지와 같은 사이비 영성 운동에 쉽게 빠질 정도로 감성 위주의 비이성적 신비주의 경향이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앙에는 감성적 요소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만, 그것은 이성과 조 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는 이 관계를 돛단배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불어 오는 바람을 받아서 배를 움직이는 돛처럼 감성은 신앙에 활력을 불어넣 어 줍니다. 반면에 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키처럼, 이성은 신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약간 도식적으로 말하면, 서구 교회 는 인간의 합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앙이 식어버렸고, 반면 한국의

232 232 교회사연구 제42집 신자들은 감성적 차원에 너무 쉽게 끌려서 불안정한 신앙, 미신적이며 광 신적인 신앙에 빠질 위험이 다분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발제자가 주장하 였듯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안정성과 이성적 합리성의 기반을 다시금 공 고히 하는 것 이 시급하고,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도 교리 교육이나 신자 재교육 등이 지금보다는 좀 더 강화되고 다양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한국 교회의 신앙 성숙을 위해 이성적 합리성의 강화가 필요한 것은 사실 이지만, 서구 교회처럼 이성적 합리성을 과도하게 중시하여 신앙을 식게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제자가 그리스도 교 신비사상, 특히 부정신학의 재발견을 강조한 것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많은 현대인이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문명의 성과를 누리면서도 그 폐 해로 인해 영적 갈증을 심하게 느끼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고려할 때 가톨 릭교회의 오랜 전통인 신비사상을 새롭게 조명하여 참된 영성 운동이 활 성화되도록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된 영성을 살아가 는 이들, 곧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우리 마음보다 크신 하느님 (1요한 3, 20)을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마르 12, 30) 섬기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참된 영성을 사는 이들이 많아 질 때 사이비 영성 운동이 내놓은 불량 영성 상품 에 현혹되어 피해를 입는 이들이 적어질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노길명 : 네,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논평이나 질문보다는 보완해 주신 의미로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박준양 신부님, 답변 부탁드립니다. 박준양 신부 : 부족한 후배의 논문을 꼼꼼히 읽으시고 날카롭게 지적 해 주셔서 손희송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말씀드릴 것 은 없고, 제가 논문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정확히 짚어서 논평을 해 주

233 종합토론 233 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노길명 : 지금까지 발표자의 발표 내용에 대한 지정토론자들의 질의 와 논평, 그리고 그에 대한 발표자들의 답변 내용을 들었습니다. 오늘 발표자들께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짧은 역사에도 급성장할 수 있 었던 동력은 초기부터 쌓아온 순교영성 과 사회영성 이었다는 점에 동의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영성을 바탕으로 민족사 에 적극 투신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사회영성을 키워왔습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천주교회는 한국 사회가 나타내는 다종교 상황에서 높은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친화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순교영성과 사회영성은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이고 자랑이라고 하겠 습니다. 그러기에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최근 그리스도 신앙을 저해하는 흐름이 세차게 밀려오고 있습 니다. 과학주의와 세속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적 영성을 추구하는 흐름과 운동들이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적인 가치와 윤리를 해치고 있는 것입니 다. 이러한 흐름과 운동들은 교회 안에도 스며들어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 고 있습니다.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을 보존하고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신앙 의 순수성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순교영성이란 그 리스도 신앙의 바탕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기 본권과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투신하는 것이라고 가 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참다운 평화가 있게 될 것이고, 세상의 복음화도 촉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해 를 보내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234 234 교회사연구 제42집 과제를 검토한 오늘의 학술회의는 나름대로 의미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 각됩니다. 좋은 발표와 논평을 해 주신 발표자와 논평자 그리고 끝까지 자리를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면서 오늘의 학술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235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김수태* 1. 머리말 2. 자찬묘지명 에 대한 논쟁 3. 자찬묘지명 의 천주교 관련 내용 4. 자찬묘지명 의 새로운 이해 5. 맺음말 국문 초록 지금까지 정약용과 천주교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서 논쟁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접근 방법과 달리 정약용이 자찬묘 지명 에서 언급한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자찬묘지명 의 내용에 대한 이해 역시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임을 말해준 다는 긍정론과 이와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부정론으로 크게 나누어진 다. 이 가운데 현재 부정론이 우세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236 236 교회사연구 제42집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자찬묘지명 에 대한 본격적 인 분석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남긴 두 개의 묘지명인 광중본 과 집중본 에서 천주교를 서 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더 이상 천주교가 서학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종교로서 조선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정약 용이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천주 교 박해의 정치적 원인을 밝혀주는 한편, 순교사 중심의 한국 천주교회 사 이해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정약용이 이를 통해서 조선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관용책 내지 포용책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신처럼 반대파의 무고 로 인하여 그러한 고통을 받는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 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약용이 배교하면서 1796년에 작성한 비방을 변명 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에서 천주교를 사교라고 규정하면서 비 판하던 양상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 약용이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해 다시 달라진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체적으로 정약용에게 그러한 변 화가 일어난 시기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인 1820년대 무렵, 늦어도 1822년의 일로 파악된다. 주제어 : 정약용, 묘지명, 서학, 서교, 천주교, 이벽, 순교사

237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머리말 필자가 정약용을 제대로 만난 것은 대학 시절 실학연구입문 수업을 들을 때였다. 이광린 선생이 실학자들의 저술에 대한 강독을 통해서 정약 용이 매우 논리적인 글쓰기를 한 훌륭한 학자였음을 강조해 주었던 것이 다. 그리고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가 유배에서 돌아온 만년에 다시 천주교 신앙으로 돌아왔는가 하는 주제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사 측과 한문학 및 철학 등 다른 분야 연구자들과의 논쟁도 배우게 되었다. 이때 그가 관심을 가졌던 천주교 신 앙의 내용이 어떠하였을까 하는 점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그를 직접 다루어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필자에게 정약용을 간접적으로 다루어볼 기회가 우연하게 다가왔다. 내포 지역의 사도로까지 불리는 이존창을 연구하면서 정약용이 그를 체포 하는 데 실제로 관여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도 정약용의 참여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있어 여전히 혼란스럽게 만들 고 있지만, 1) 필자는 그가 이존창의 체포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 고 있다. 2) 이러한 점은 정약용의 사상과 활동에 대하여 연구자들이 무언 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하였다. 이런 가운데 2012년 11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주최한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인 다산 정약용과 서학 및 천주교와의 관계 에 참석하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다. 3) 다 알다시피 다양한 분야를 매우 깊이 있게 섭렵한 정약용의 생애나 학문은 어느 한 연구자의 힘만으 1) 조성을, 정약용과 교안, 한국실학연구 25, ) 김수태, 이존창의 신앙과 배교문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 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교회사연구 39, 2012에 모두 실려 있다.

238 238 교회사연구 제42집 로는 쉽게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종합적인 정리를 하는 자리를 통해서 새로운 연구를 가능하게 해 주는 또 다른 계기를 마련 해 주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때 필자에게 정약용이 저술한 자찬묘지명 ( 自 撰 墓 誌 銘 )의 한 구 절이 인상 깊게 읽혀졌다. 다름 아니라 그가 천주교를 서교( 西 敎 )라고 불 렀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정약용이 만년에 이르러서 천주교를 단순히 서학( 西 學 )이나, 사학( 邪 學 )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것들과 구분되는 서교 ( 西 敎 )라는 용어를 새롭게 사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전에는 그것이 단순하게 학( 學 )이었는데, 이제는 그에게 종교, 즉 교( 敎 )가 되었음 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필자가 무지한 탓이지만 한국 천주교회 사의 이해와 관련해서 서교라는 용어는 현재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4) 그러나 조선 후기 사상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용 어의 사용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필자에게 현재 논쟁 중인 정약용 만년의 천주교 신앙 여부에 대해 조그만 실마리를 가져다주는 것 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서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서교라고 언급할 정도로 정약용의 내면과 사상에 여전히 천주교는 우호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 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약용과 관련된 천주교 사료를 구체적으로 다시 검토할 필 요가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를 다룬 기존의 연 구에서 이들 사료가 미시적으로 검토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 은 사료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서 시기별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데에서도 살펴볼 수 4) 강재언은 조선의 서학사, 1990, 11쪽에서 서양의 종교와 윤리의 측면을 서교, 그 학술적 측면 을 서학으로 갈라서 쓰기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서학 안에 서교를 포함시켜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239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39 있듯이, 5) 이 주제에 대해서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새로운 접근 방법 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는 비로 소 체계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돌아온 직후부터 심포지엄에 실린 논문들과 관련 참고 문헌들, 특히 사료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으며, 이번에 그 일부를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다름 아니라 정약 용이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드러낸 천주교 관련 내용들과 그 의미를 간 단하게 정리해볼 것이다. 2. 자찬묘지명 에 대한 논쟁 정약용과 천주교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서 논쟁이 있다. 6) 그러나 그 문제 모두를 다룰 능력은 필자에게 없다. 때문에 정약용 의 자찬묘지명 에서 언급된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검토 해보고자 한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에서 언급된 천주교 관련 내용에 대한 논쟁은 그것이 여전히 천주교 신자임을 말해준다는 이른바 긍정론과 이와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부정론으로 나누어진다. 긍정론자인 최석우는 1980 년대에 들어와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와 다블뤼의 조선순교사비망 기 에서 정약용을 언급한 내용을 자찬묘지명 과 연결하여 이해하였다. 7) A 정약용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 5) 조성을, 앞의 논문을 참고하라. 6) 김상홍은 쟁점을 모두 7개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 다산문학의 재조명, ) 최석우, 정다산의 서학사상, 정 다산과 그 시대, 1986, 119~122쪽.

240 240 교회사연구 제42집 기 시작했다. 천주교 진리는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 그는 늘 외딴 방에 틀어박혀 소수의 친구밖에는 만나지 않았고, 속죄를 위해 자주 단식 과 그 밖의 고행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몹시 고통을 주는 띠를 늘 매고 있었고, 또한 몸의 여러 곳을 작은 쇠사슬로 감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묵상을 하곤 했다( 한국천주교회사 및 조선순교자비망기 ). B-1 나는 건륭 임오년에 태어나 지금 도광의 임오년을 만났으니 갑자가 한 바퀴를 돈 60년의 돌이다. 무엇으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횟수이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려 금년부터 정실하게 몸을 닦아 실천한다면 명명( 明 命 )을 살려서 나머지 인생을 끝마칠 것이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집중본( 集 中 本 ). B-2 나의 사람 됨됨이는 착한 일을 즐겨했고, 옛것을 좋아했으며, 행동으 로 실천하는데 과단성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런 지경에 이르는 화 란을 당했으니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무릇 평생 동안 지은 죄가 아주 많아 가슴속에 후회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이하여 한 가롭게 세월 보내는 일을 그만두고, 아침저녁으로 성찰하는 일에 힘써 하 늘이 내려주신 성품을 회복할 수 있어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간다 해도 큰 잘못은 없으리라.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광중본( 壙 中 本 ). 최석우는 A와 B의 기록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A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약용이 철저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시기가 B에서 그가 회갑 을 맞이한 1822년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과 이상하리만큼 일치한 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주교 신앙만은 존 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자찬묘지명 에서 언 급된 정약용의 배교 사실과 다른 행동들까지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 8) 정약용이 보여준 한때의 배교는 외적인 것이었 고, 내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강요된 배교였으며, 강요된

241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41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만년에 정약용은 다시 신을 선택하였는데, 이번에는 결코 강요된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최석우는 교회 측 자료에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가 유배에 서 풀린 뒤 천주교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계속한 사실이 뚜렷함에도 불구 하고 다른 연구자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 를 들고 있다. 우선은 교회 측 자료에 대한 불신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또 다른 이유는 그런 사실이 정약용의 저술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다. 그래서 그는 교회 측 자료를 불신하기에 앞서 비판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9) 그리고 정약용의 저술에 대해서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단순한 논리이며, 그보다는 저술에 대한 내적 비판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10) 어떤 저술의 신빙성을 판단하고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저 자가 말한 것만이 아니라, 말하고자 한 것, 솔직히 말할 수 없었던 것 등까 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적 비판의 기본자세라는 것 이다. 이와 함께 최석우는 침묵의 논증이란 역사의 해석이론을 적용할 것을 바란다. 문헌상의 침묵으로부터 어떤 암시나 숨은 사실을 해석해내는 이 러한 방법은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할 위험스런 해석 방법이기는 하지만, 정약용의 경우처럼 천주교에 대해 반대이든 찬성이든 자신의 입장을 분명 히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 침묵이 암시하는 보다 깊은 뜻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석우는 정약용의 배교 기록을, 그가 나이가 들어 스스로 묘지명 을 작성하면서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오해를 아직도 받고 있음을 한탄 8) 최석우,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다블뤼의 비망기를 중심으로, 다산학보 5, 1983, 27쪽. 9) 최석우, 위의 논문, 43~44쪽. 10) 최석우, 1997 ; 백민정, 보론 정약용에 대한 기존연구 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2007, 435~436쪽에서 재인용.

242 242 교회사연구 제42집 한 것 등에 볼 수 있듯이, 어쩔 수 없이 나온 불가피한 거짓 증언으로 파악 하였다. 최석우의 문제 제기는 이후 정약용의 학문을 이해하고 천주교와의 관 련성을 주목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석우의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자찬묘지명 에 실린 내용 가운데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일부의 내용만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찬묘지명 가운 데에서 어떤 부분을 부인하고, 어떤 부분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 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이 한때 배교한 사실을 굳이 부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에서도 의문이 든다. 정약용의 배교는 여러 사실로서도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또한 한 사람의 신앙에서 시기별 로 여러 변화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이 다. 이러한 까닭에 최석우의 주장은 연구자들로부터 그대로 받아들일 정 도로 설득력을 얻기는 힘들었다. 이후 최석우의 견해에 대해 여러 비판이 나왔으며, 지금까지도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석우의 견해에 대한 집중적인 비판은 김상홍에 의해서 최근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11) 자찬묘지명 에서 말하는 내용은 정약용과 천주교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부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그는 정약용이 천주교와 절의( 絶 義 )한 후 다시는 신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료별 사안별 쟁점별로 나누어 밝혀왔다. 자찬묘지명 에 대 한 최석우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11) 김상홍, 다산의 비본 묘지명 7편 과 천주교, 한국실학연구 24, 2012.

243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43 신해년(1791) 이래로 국가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지하자 마침내 천주교 에서 마음을 끊고 말았다(광중본). 김상홍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자찬묘지명 을 비롯 해서 정약용이 지은 여러 묘지명 자료들이 비본( 秘 本 )이었다는 사실을 강 조한다.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만일 이 것이 공개되면 후손들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묘지명을 통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결코 천주교도가 아니었는데 도 억울하게 화를 당하였다고 누누이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그는 자찬묘지명 은 거짓 증언이 아니라, 진실 의 기록이자 양심선언서라고 말한다. 김상홍은 최석우가 제시한 B 사료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자찬 묘지명 을 정확히 해석해보면 정약용이 천주교를 다시 믿기 시작하였다 는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자찬묘지명 에 결코 천주교를 다시 신봉하려는 다짐이나 신앙생활의 새 출발을 의미하는 내용 이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석우가 인용한 B의 내용 모두는 천주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정약용이 회갑을 맞이하여 지 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 여생을 유교주의적 삶으로 일관하고자 한 다짐일 뿐이라고 이해하였다. 즉 정약용이 유교적 삶을 실천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 및 회한을 통해서 앞으로 철저한 유교주의적 삶으로 일관하려는 의 지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정약용이 유학자로서 죽고 기억되 길 바란 인물이라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의 심증에 근거해서 자찬묘지명 에 보이는 천 주교 관련 내용 등을 거짓말로 규정하고, B를 바탕으로 정약용이 천주교 를 다시 믿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엄청난 오류라고 비판하였다. 다시

244 244 교회사연구 제42집 말하자면 정약용의 양심선언서인 자찬묘지명 의 내용 중 천주교와 절의 했다는 앞부분의 기록은 불신하고, 뒷부분은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 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상홍의 해석은 현재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자 신은 이 연구는 다산의 천주교 신봉 여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 다산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고 자평한다. 12) 백민정 역시 최석우 의 주장이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다면서 김상홍의 견해를 지지한다. 13) 물 론 연구자가 연구하는 사상가의 진정한 의도를 찾으려고 하는 작업은 매 우 중요한 일이나, 사상가 자신의 저서와 표현된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문헌상의 침묵으로부터 어떤 암시나 숨은 사실을 해석해내 려고 하는 방법 역시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할 위험스러운 해석 방법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약간은 복합적인 느낌을 주고 있지만, 원재연 또한 이 같은 김상홍의 체계적 반론은 교회사를 전공하지 않는 비 천주교인으로서 현재까지 거의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또 반론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보 여준 교회사에 대한 세밀한 관심에 대해서 경탄을 표한다. 김상홍 교수의 이러한 교회사에 대한 관심은 교회사를 교회 안의 신자만의 특별한 역사 로 취급해온 그간의 일반 역사학계의 관행과 인식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선구적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고 평가하고 있다. 14) 그러나 김상홍의 이해 역시 그대로 따르기만은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한다. 교회 측 자료에서 말하는 내용을 그와 같이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 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기록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이란 워낙 생생하고 12) 김상홍, 다산의 문학연구, 다산학 21, ) 백민정, 앞의 책, 426~427 및 435~436쪽. 14) 원재연,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교회사연구 39, 117쪽.

245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45 구체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것은 김상홍이 정약용이 남겼다고 하는 조 선복음전래사 를 그가 작성한 묘지명들과 연결시켜서 이해해 보려고 노 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5)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다블뤼의 사료 수집이란 그만의 노력이 아니라 최양업 신부를 비 롯한 한국인 신자들의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16) 정약용의 사상에 대한 기존의 많은 연구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김상 홍의 견해처럼 정약용을 철저한 유교주의자로 일관했다고만 보기는 어렵 다. 사실 최석우 역시 정약용의 이러한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17) 원재연도 지적하고 있듯이 정약용에게 천주교와 유교는 그의 회통적 사고 내에서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 물론 백민정은 김상홍의 천주 교 입장에 대한 반론 작업이 서학의 영향만으로 정약용의 철학을 이해하 던 기존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 점은 주목해도 좋을 것이다. 19) 그렇다고 해서 정약용의 사상에서 유학 이외의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백민정은 정약용 사상의 전체 규모를 드러내기 위해서 는 그의 사상적 편력을 서학 혹은 유학 등의 어느 한 곳에 배속하려고 한 기존의 연구 경향을 지양하고, 더 나아가 동서 융합의 산물로 단순 기 술해온 입장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보다 더 확대 시키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새로운 안목의 체계 속에서 고대 유학, 주자학, 서학, 고증학, 훈고학, 양명학 등의 다양한 학 15) 김상홍, 다산의 비본 묘지명 7편 과 천주교 를 참고할 것. 16) 김수태, 최경환 가문의 삶과 천주교 신앙, 청양 다락골 성지 발표회, ) 원재연, 앞의 논문, 77 및 111~112쪽. 18) 원재연, 위의 논문, 123쪽. 19) 백민정, 앞의 논문, 427 및 471쪽.

246 246 교회사연구 제42집 문적 조류가 서로 충돌하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지평을 그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정약용 철학의 면모를 제대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약용의 사상을 살필 때 천주교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유교만 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역시 어느 한 부분에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최근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을 단독으로 다룬 김형호의 연구 가 천주교와 관련된 또 다른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20) 그 역시 정약용이 천주교가 아닌 정통 유학 에 뿌리를 둔 경학자임을 강조한다. 그를 유학의 굴레 안에서 새로운 모색 을 통해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는 학문으로 나간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자찬묘지 명 에 천주교와의 관련된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유교와 함께 천주교 역시 자찬묘지명 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화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김형호는 자찬묘지명 의 광중본과 집중본의 찬술 의도가 다르다고 전제하면서 당시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던 천주교와 관련된 서술에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광중본에서는 천주교에 대해 연 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는 달리, 집중본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의도 적으로 회피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집중본에서는 광중본에 보이는 정미년(1787) 이후 진산사건(1791) 사이에 대한 천주교 기록이 빠지고 대신 천주교에 마음을 둘 겨를이 없었다는 내용으로 기술되었다는 것이 다. 그는 이것을 정약용이 천주교를 종교로써 빠져들고 신봉한 것이 아니 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20) 김형호, 다산 자찬묘지명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2010.

247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47 특히 집중본에서는 광중본보다 천주교와 관련된 옥사에 대한 서술이 눈에 띄게 보강되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전달되는 의미상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사건의 전개 과정과 내역들이 내용상 더욱 자세하게 기술되 어 있다는 것이다. 즉 집중본의 기술이 세밀해지고 사건에 일화가 추가되 면서 전반적으로 광중본보다는 사건에 대한 정약용의 주관적 입장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중본은 신유박해의 시말을 중심 으로 전개되는 광중본에 비해 서술에 있어서 전후 정황과 전개 과정에 대 한 세부 묘사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김형호는 이 시기에 있어서도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입장이 부 정적이라는 점에서는 김상홍의 기본적인 관점과 공통적이다. 정약용이 천 주교 문제에 대해 당당히 의사를 표명하고 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정약용이 천주 교를 이유로 연이어 발생한 옥사의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 하였다. 21)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그러한 사건들이 자신과 동류를 모해 하기 위해 증거 없이 벌어진 부정한 모함이었음을 토로하였다는 것이다. 옥사의 원인은 천주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약용이 포함된 선류 ( 善 類 ) 를 제거하기 위해서 악당 ( 惡 黨 ) 혹은 악인이라고 표현되는 집단의 정치 적 음모에 의하여 발생된 것으로 보았다. 즉 정약용이 천주교 문제를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형상화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이러한 사건들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라기보다는 거짓 역모설, 즉 사화( 士 禍 )에 해당하는 것 으로 정리된다. 김형호에 의하여 시도된 자찬묘지명 집중본과 광중본에 대한 비교 21)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248 248 교회사연구 제42집 검토는 그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넘어서 새로운 시도로 높이 평가된다. 비교 분석을 통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사료 비판의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기존의 연구에서 자찬묘지명 은 다루어진 빈도에 비해 간략한 인용에 그쳤으며, 필수적인 것이 아닌 부수적인 자료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때문 에 그는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연구된 성과가 사실상 전무하다고까지 비판한다. 22) 이러한 점에서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에서 언급된 천주교 관련 내용들은 보다 자세히 새롭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3. 자찬묘지명 의 천주교 관련 내용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은 두 개이다. 무덤에 함께 묻힐 묘지명인 광 중본과 문집에 실을 묘지명인 집중본이 그것이다. 광중본은 1,015자이며, 집중본은 12,313자이다. 집중본은 광중본의 10배 이상의 분량일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다. 정약용의 후손인 정규영은 사암연보 에서 정약용이 회갑이 되던 해인 1822년에 자찬묘지명 을 지었다고 전한다. 1818년 8월 오랜 유배 생활에서 벗어난 지 4년이 되는 해의 일이었다. 이것은 정약용이 집중본과 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회갑을 맞이하여 한평생 을 돌아본 사실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정약용이 왜 두 개의 묘지명을 만들었으며, 두 개의 묘지명 가운데에서 어느 것을 먼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 다. 이 문제를 다룬 기존의 연구에서는 광중본이 1차로 저술되고, 집중본 22) 김형호, 앞의 논문, 3~4쪽.

249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49 이 2차로 계속해서 저술된 것으로 분석한다. 23) 비슷한 시기 혹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같은 해였을 것으로 생각 된다. 그것은 집중본이 조선 후기 묘지명의 양식으로서는 이례적인 현상 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은 정약용이 집중본에 특별한 의 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보았다. 즉 광중본에서 미처 달 성하지 못한 찬술 목적이 집중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광중본 과 같은 묘지명 양식을 채택하고 집중본을 새롭게 찬술한 것을 보면 1차 적으로 광중본을 찬술하고 난 뒤에 그가 느낀 아쉬운 점이나, 거기에 수록 하지 못한 내용들이 있어 집중본으로 보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천주교와 관련된 서술이 눈에 띄게 보강되었다고 말한다. 즉 집중본은 광중본에서 정약용이 자신의 생애를 전달하는데 천주교와 같이 사건의 전말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에 대해 상당 부분 보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집중본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서 광중본이 간략하게 다시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약용이 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고는 집 뒤 자( 子 )의 방향 쪽에다 널이 들어갈 광( 壙 )의 형태를 그어 놓고, 나의 평생의 언행을 대략 기록하여 그 광 속에 넣을 묘지( 之 誌 ) 로 삼겠다. 명( 銘 )은 다음과 같다. 라고 하여, 집중본이 오히려 광중본과 같은 기능을 하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집중본을 자신의 무덤 속에 함께 넣을 묘지명으로 말하고 있 23) 김형호, 앞의 논문, 21~23쪽.

250 250 교회사연구 제42집 는 것이다. 이와 달리 광중본에서는 그러한 설명 없이 묘는 집 뒤 자( 子 ) 의 방향 언덕에 정해 두었으니 오래전부터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곳이 다 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정약용이 처음에 집중본을 저술할 때 이를 무덤에 넣을 묘지명으로 생각하고 저술한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약용이 집중본을 완성하고 나서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생각 이 바뀌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무덤 속에 넣을 묘지명으로 삼기 위해서 저술하기 시작한 집중본의 분량이 너무 커졌던 것이다. 그만큼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 자신의 일생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집중본에 보유 ( 補 遺 )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집중본에 빠진 내용을 추가로 보충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정약용은 이를 문집에 넣을 집중본으로 설정하고, 새로이 광중본을 저술하였을 것이다. 광중본은 집중본을 통해서 자신의 일생을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 에 그렇게 자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당시의 일반 관례에 맞추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광중본에는 그가 꼭 무덤까지 함께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들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은 집중본과 광중본의 두 가지 종류가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듯이 24) 정약용이 처 음부터 이를 이른바 비본( 秘 本 )으로 삼으려고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인 집중본과 광중본은 어떠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이 두 개의 묘지명에서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4)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251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51 1) 집중본의 천주교 관련 내용 집중본은 연대기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집중본은 정약용의 자서전, 즉 개인사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하겠다. 정약용은 집중본의 첫 부분에서 그가 이가환과 이승훈과 함께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공부한 사실을 먼저 말한다. 그의 학통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천주교 서적을 읽게 된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 갑진년(1784)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 음으로 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관련되는 책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 나 다른 공부에 전념하고 있어, 거기에 참으로 마음을 기울일 겨를을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다음 정약용은 이기경과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집중본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정약용이 신해년부터 이기경의 활동을 크게 지목 한 것은 아마도 천주교 박해가 그에게서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 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기경 역시 천주교 서적을 읽는 것을 즐겨 하 였는데, 그가 무신년(1788)부터 천주교에 대한 다른 마음을 먹게 되면서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해박해(1791)를 매우 간단하게 언급한 다음 그와 이기경의 대립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호남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옥사가 있자, 악인( 惡 人 ) 홍낙안 등이 공모하여 이를 기회로 자신을 포함한 착한 무리들, 즉 선류( 善 類 )를 다 제거하려 하였다 는 것이다. 정약용은 신해박해 자체보다 여기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그는 천주 교 박해가 정치세력 상호 간의 대립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가 목만중과 홍낙안, 이기경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는 가 운데 이승훈의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정약용과 이기경의 갈등이 일어나 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천주교 서적을 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

252 252 교회사연구 제42집 냐는 것이었다. 천주교에서 멀어진 이기경은 자신을 예외적으로 처리해 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약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거기 에다가 이승훈은 이기경이 자신을 무고했다고 주장하면서 감옥에서 풀려 나고, 이승훈의 처벌을 주장한 이기경이 오히려 유배를 가게 되자 이기경 과 정약용의 관계가 틀어져 원한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이기경은 그가 주모한 신유박해 때까지 기어코 정약용을 죽여 없애려고 했던 것으 로 정리된다. 집중본에서 천주교의 문제는 을묘년(1795) 4월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부터 다시 서술된다. 을묘박해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 한 그는 그것으로 그친 일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목만중 등이 이 사 건을 트집 삼아 자신을 비롯한 선류들을 다시 제거하려고 하였기 때문이 다. 정약전까지 언급된다. 정조는 조야( 朝 野 )에서 이런 소문을 얻은 것은 결국 정약용의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금정찰방으로 임명하였다. 이것 은 정약용이 이미 천주교에서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새롭게 증명해줄 것을 바라는 정조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금정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는 역졸을 비롯한 세력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을 권고하면서 회유하였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천주교의 확산을 바 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정약용은 내포의 사도로 불린 이존창의 체포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과 무관함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정조가 정약용이 이존창의 체포 에 공로가 있는 것으로 정리하여 다시 그를 서울로 불러올리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아무리 다시 벼슬길에 오르고 싶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일찍이 계책을 내거나 세운 적이 없는데, 지금 이존창을 잡은 일을 과장하여 임금의 은혜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집중본은 내포 지역에서 정약용의 활동과

253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53 천주교와의 관계를 길게 설명하고 있다. 병진년(1796)에 이르면 정약용은 집중본에서 매우 놀랄만한 발언을 전해주고 있다. 이해 6월에 그는 동부승지( 同 副 承 旨 )가 되었다. 동부승지 로서 그는 집중본의 처음과 달리 자신과 천주교의 관계를 새롭게 말하고 있다. 자신이 단순히 천주교 서적을 보는 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 그는 대개 일찍이 마음으로 흔연히 좋아하고 사모하였으며 일찍이 거론하여 사람들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 심술에도 일찍이 기름이 배 어들고 물이 스며들며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우거지듯 하였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는 내용이 담긴 소( 疏 )를 올렸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가 당시까지도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비방을 받게 되었다는 것 이다. 그리고 정약용은 정조가 자신이 올린 소를 통해서 자신이 천주교로 부터 이미 멀어진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는 무오년(1798)에 들어오면 정약용은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과 그의 형인 정약종을 논급한 것을 기록하고 있 다. 또한 사헌부의 대신인 민명혁이 정약용이 혐의를 무릅쓰고 벼슬살이 를 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정약용이 병을 이유로 나가 지 않았더니 한 달이 넘어서야 체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들어오면 서얼 조화진이 이가환과 정약용 등이 여전히 음으로 천주교를 믿고 있다고 주 장하면서, 한영익이 그의 심복이라는 것이다. 정조는 한영익이 주문모 신 부를 고발한 인물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하며 정약용에 대한 무 고로 이해하였다. 이에 경신년(1800)이 되자 정약용은 자신을 참소하고 시기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그 칼날을 피하려고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으 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정약용은 이러한 비난을 피할 방도를 계속해서 모색하게 된다. 그만큼 천주교와의 관계가 끝까지 그를 따라다닌 것이다.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자 정약용은 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254 254 교회사연구 제42집 한다. 정조가 승하하자 정약용을 미워하던 악당이 더욱 날뛰며 날마다 유 언비어와 위태로운 말을 지어내어 듣는 사람들을 의혹케 하였다는 것이 다. 이들은 이가환 등이 장차 난을 일으켜 4흉, 8적을 제거하려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가환과 반대되는 정치세력만이 아니라, 당 시의 재상들과 명사들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고 말 한다. 이에 정약용은 화색( 禍 色 )이 일어날 징조가 날로 급해짐을 헤아리면 서 다시 낙향을 선택하고 말았다고 한다. 정약용은 1801년 1월에 일어난 책 궤짝, 이른바 책롱( 冊 籠 )사건을 먼 저 소개하고 있다. 천주교 서적 및 성물이 담겨 있던 책 궤짝 안에 5~6인의 문서가 혼잡해서 들어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약용 집안의 편지가 들어 있 었던 것이다. 윤행임 등이 그 상황을 알고서 정약용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먼저 체포되어 심문받으면서 화봉( 禍 鋒 )을 누그러뜨린 다음, 이 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 러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중본은 2월에 일어난 신유박해를 자세히 언급한다. 2월 8일에 양 사( 兩 司 )가 계를 올려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국문하기를 청하여 모두 하옥되었다. 그리고 그의 형인 정약전 정약종 및 이기양 권철신 오석 충 홍낙민 김건순 김백순 등도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정약용의 경우 누명을 명백하게 벗겨줄 만한 증거가 많았기 때문에 곧바 로 형틀에서 풀려나 사헌부 안에서 편하게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신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석방할 것을 의논했음도 알려준다. 그러나 정약용의 암행어사 시절 악연을 맺었던 서용보만이 고집을 부려서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이때 정약용을 미워한 악당들은 정약용이 죽지 않은 것을 알고 흐트러진 문서 더미 가운데에서 삼구( 三 仇 )의 설을 찾아내어 억지로 정씨( 丁 氏 )의 집문서로 정하고, 또 모함하여 드디어 정약

255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55 종에게 사형이라는 극률( 極 律 )을 가하고 정약용으로 하여금 재기할 수 있 는 길을 막았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정약용은 삼구( 三 仇 )의 설은 이미 안정복의 저서에도 있기 때문에 역시 무고임이 분명하다 고 말한다. 정약용은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홍낙안과 이기경 등이 온 갖 계책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정약용 등을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면서 그 를 반드시 죽이고야 그만두려 하였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홍낙안이 천 사람을 죽이더라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죽이지 않느니만 못하다 고 말한 사실까지 전하고 있다. 그를 함께 모함했던 박장설이 그가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죽이겠소 고 한 말까지 알려준다. 이 역시 정약 용이 황사영과 무관하다고 주장한 여러 사람의 도움 속에 이루어진 일임 을 자세히 말한다. 이때 정약용이 황사영을 역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것은 다른 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듯이 황사영이 추구한 서양 선박 요청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25) 이는 황사영이 백 서 를 통해서 정약용을 배교자라고 규정한 것과 비교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약용은 강진현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정약용은 강진에 이르러서는 문을 닫아걸고 사람을 만나보지 않 았다고 한다. 그러나 임술년(1802) 여름에 현감 이안묵이 다시 하찮은 일 로 무고하였지만, 사실이 아니어서 곧 중지된 사실도 말하고 있다. 한편 집중본의 보유에서는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의 일을 소 개한다. 무인년(1818) 가을에 그가 살아 돌아오자 목만중의 손자인 목태 석이 그에 관해서 그와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서 혹독하게 상소한 일이 있 25) 그것은 정약용이 저술한 다른 묘지명에 언급되고 있듯이 서양 선박 요청 사건과 관련된 문제이다. 정약용은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56 256 교회사연구 제42집 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할아버지인 목만중은 정약용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스스로 천주교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는데, 그 손자인 목태석은 나가서는 여전히 (천 주교를 : 필자 주) 추종하며 따라다니며 스스로 잘못을 고칠 생각을 않고 있다 고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왜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독설을 퍼붓는단 말인가 하며 반문하고 있다. 2) 광중본의 천주교 관련 내용 광중본은 집중본과 달리 연대기적인 내용이 그리 많지 않다. 천주교 관련 부분도 역시 그러한데, 비교적 간단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역시 정약용은 이가환 및 이승훈과 함께 이익의 학문을 공부하였음을 먼저 말 하고 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과정에 대해서 광중본은 집중본과 달리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다. 천주교 서적을 본 시기를 정약 용이 결혼한 1776년 이후부터 1787년 이전 사이의 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광중본에서는 정미년(1787)을 그의 천주교 신앙에서 또 다른 분기점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1787년과 가까운 시기로만 추 측하게 하고 있다. 광중본은 집중본과 달리 그가 독실한 신자가 된 시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정미년부터 매우 열심히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이 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도 4~5년 동안이었음을 분명히 말하 고 있다. 이것은 집중본에서 처음과 달리 동부승지로서 소를 올린 시기에 그러한 사정을 언급하고 있는 점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집중본 에서는 이기경이 그다음 해인 무신년에 천주교와 갈라섰다고 말한 것과도 비교가 된다고 하겠다. 이를 집중본의 내용과 연결하여 보면 정약용이

257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년 천주교 서적을 읽게 되었지만, 그가 열심한 신자가 된 시기는 1787년으로 이해된다. 무덤에 함께 묻힐 묘지명인 광중본에서 정약용이 한때 독실한 신자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점이 의미가 있 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그가 천주교에서 멀어진 시기는 광중본과 집중본 모두 신해 년(1791)으로 공통적이다. 집중본과 달리 광중본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신해년 이후로 국가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지하 자 마침내 천주교에서 마음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가 배교한 사실 역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가 배교한 시기인 을묘년 (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 사람인 주문모 신부가 오자 국내가 흉흉해졌 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그가 금정도 찰방으로 쫓겨났다고 말하 고 있을 뿐, 그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회유한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다. 이점 역시 집중본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그러나 광중본 역시 집중본과 마찬가지로 신유박해를 중점적으로 언 급하고 있다. 집중본에서는 1799년에 처음 언급된 민명혁이 이때 등장한 다. 집중본에서는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상소를 올렸다고 기록한 것과 달 리, 광중본에서는 이때 사헌부의 민명혁이 상소하여 발생한 것으로 설명 하고 있다. 광중본은 이때 정약용이 투옥된 사실과 그의 형제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과정을 집중본과 달리 매우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역시 황사영 백서 사건이 언급된다. 황사영을 역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두 기록 모두 동일하다. 나머지 내용은 집중본을 축약한 것과 같다. 홍낙안, 이기경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으며, 결국 강진현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B에 언급되었듯이 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에 대해 그의 사 람 됨됨이는 착한 일을 즐겨 했고, 행동을 실천하는 데 과단성이 있었다.

258 258 교회사연구 제42집 그러나 마침내는 이런 지경에 이르는 화란을 당했으니 운명이었다고나 할 까 라고 하며, 자신이 천주교와의 관련 때문에 겪은 여러 어려움을 운명 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시 그에 대한 박해를 집중본과 마찬가지로 화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공통적인 사실이다. 4. 자찬묘지명 의 새로운 이해 그러면 정약용이 두 개의 묘지명을 통해서 서술한 천주교 관련 내용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기존의 연구에서처럼 일부의 내용에 주목하 여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그칠 사항은 아닌 것이 다. 자찬묘지명 이 정약용이 회갑이 되던 해에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정약 용 만년의 천주교 이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집중본과 광중본의 차이 우선 두 개의 묘지명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가 변화 되었는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계속해서 이 문제를 다루어보자. 먼저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집중본에서는 그와 천주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다. 26) 1784년 그와 이벽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천주교를 듣고 관련 서적을 읽었다는 사실만을 밝히고 있 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공부에 바빠서 더 이상 관심을 쏟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1796년에 자신이 동부승지로서 소를 올린 내용을 소개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가 단순히 천주교 서적을 본 것만 26) 김형호, 앞의 논문, 25~28쪽.

259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59 이 아니라, 이를 즐겁게 사모하였으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소개하였 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정약용에게 객관적 사실이었다는 것은 광중본에서 1787년 이후 4~5년 동안 매우 열심히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음을 밝히 고 있다는 점과 일치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중본에서는 집중 본과 달리 이러한 사실을 내용의 첫 부분에서 바로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차이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무덤에 함께 묻힐 광중본을 통해 서 정약용은 그가 한때 천주교 신자였으며, 매우 열심히 믿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정약용이 지은 정약전 묘지명 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C-1 일찍이 이벽을 따라 놀며 역수( 曆 數 )의 학문에 대하여 듣고 기하원 본 을 연구하여 정밀하고 오묘한 뜻을 파헤쳐 신교( 新 敎 )의 설을 듣고서 기뻐하였으나 몸으로는 믿지 않았다. C-2 갑진년(1784) 4월 보름날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는 이벽 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배 속에서 천지조 화의 시초, 사람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 등을 듣고 황홀함과 놀람과 의아심 을 이기지 못해 마치 장자 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 라 는 것과 비슷했다. 서울에 온 후 이벽을 따라다니다 천주실의 와 칠극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흔쾌하게 그쪽으로 기울어 버리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이벽을 처음 만났을 때 천주교를 듣고 기뻐하였으나 몸으로 믿지는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기록에서는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면서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집중본과 광중본의 두 내 용을 뒤섞은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때 광중본에서는 경심( 傾 心 -마음을

260 260 교회사연구 제42집 기울였다)으로, C-2에서는 경향( 傾 響 -울림에 기울었다)이라고 하여 표현 상의 차이도 보여주고 있다. 즉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정도일 뿐이지, 광중본처럼 자못 마음을 기울여서 몰두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 려할 때 광중본은 자신이 천주교 신앙을 가졌고, 포기한 시기를 보다 구체 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정약용이 광중본 을 통해서 그의 신앙고백까지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묘지명 사이에서도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가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집중본과 광중본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에서 정약용이 당시 천 주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집중본에서 는 정약용이 천주교에 한때 기울어진 사실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것과 달리, 신해박해 이후 정약용이 천주교와 멀어진 사정을 계속해서 끝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집중본에 실린 보유의 내용에서도 그것 은 마찬가지이다. 정약용은 목태석의 말을 빌어서 1818년 유배에서 풀려 난 직후에도 여전히 천주교를 추종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따라다닌다고 지 목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정약용 스스로 그 무렵까지도 천주 교와 거리를 두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 들기 때문이다.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또 다른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 이러한 측면 을 더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달리 광중본에서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 그가 천주교에서 마 음을 끊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배교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 는 것이다. 이는 독실한 신자였다는 것과 배교하였다는 사실을 함께 소개 하는 극과 극의 표현 방식임을 보여준다. 이때에도 정약전 묘지명 과 비 교할 때 내용상에 차이가 나타난다.

261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61 그러나 그때는 제사지내는 일을 폐해버린다는 설이 없었는데, 신해년(1791) 겨울 이후로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더욱 엄중해지자 한계가 드디어 구별되 어 버렸다. 정약용은 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자신이 그렇게 된 사정을 자찬묘지 명 을 통해서는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집중본을 보 면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임명되어 천주교 신자들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권고한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그가 왜 배 교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보다 주목되어도 좋을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천주교 에 대한 정약용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 다. 물론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배교 이후 정약용과 천주교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배교를 강조한 광중본에서 배교한 사실과 관련되는 내용을 거의 기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또 다른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때 정약용은 그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 문제로 금정찰방으로 쫓겨났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무고를 받아 장기현을 거쳐, 강진현으로 유배를 갔다고 단순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자찬묘지명 을 쓸 당시 정약용의 내면세계가 매우 복합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2) 서교라는 용어의 사용 집중본의 보유에서 목태석의 상소가 언급된 것은 1818년의 일이었 다. 이때까지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집중본에서는 1819년과 1820년의 일을 더 말하고 있다. 1820년에 들어 와서는 산과 시냇가를 산보하면서 인생을 마치기로 했다는 기록까지 남기

262 262 교회사연구 제42집 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존의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묘지명을 쓴 1822년의 시기와 관련된 부분이다. A에 인용된 교회 측 자료에서는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즉 1820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천주교 진리가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 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818년 이후, 특히 1820년부터 1822년까지 정약용이 천주교와 관련된 그의 입장에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변화는 자찬묘지명 에 보이는 천주교 관련 용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에서 천주교를 일관되게 서교( 西 敎 )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종교라는 것이다. C-1 기록인 정약전 묘지명 을 통해서 정약용은 천주교를 신교 ( 新 敎 )라고까 지 언급하고 있다. 기존의 종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라는 것이다. 이때 정약 용은 자찬묘지명 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유학을 종교로 이해하지 않고 있다. 학 ( 學 )으로만 기록하고 있는 것과 커다란 차이가 나는 용어의 사용이다. 27) 기존의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서학 안에 천주교를 포함해 이해하여 왔 다. 28) 서학이란 이 ( 理 )적 측면의 서학, 즉 천주교와 기 ( 器 )적 측면의 서 학, 다시 말하면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서 로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서학 속에 그렇게 모두를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서학과 서교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정약용은 천주교 서적은 서서( 西 書 )라고 말한다. 이 역시 일반적으로 27) 다른 묘지명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지켜지고 있는 듯하지만, 이가환 묘지명 에서 사설 혹은 사학 이란 말이 나오기도 한다. 28) 강재언 등에 의해서 이러한 내용이 처음 규정되었지만, 최근 이에 대한 정의로는 원재연, 18세 기 후반 정약용의 서학연구와 사회개혁사상, 교회사학 9, 2012, 182쪽이 참고가 된다. 여기 에서는 서학 또한 서학서라고 부르고 있다. 원재연의 교시에 의하면 천학초함 에서 이편과 기 편으로 나누고 있다고 한다.

263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63 한역서학서 라고 표현되고 이해되는 것과도 차이가 나는 사실이다. 천주교를 서학이 아니라 서교로 서술한 것은 정약용의 한국 천주교회 사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C-1에서 천주교를 신교로 파악할 때 언급된 이벽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왜냐하면 정약용은 이벽이 서교, 즉 천주교를 선교한 최초의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권철신 묘지명 을 통해 정약용은 1784년 이벽이 맨 먼저 서교를 선전하기 시작하자 따르던 사람이 많았다고 말한다. 또한 이가환 묘지명 을 통해서 1784년 겨울에 자신의 죽은 친구인 이벽이 수표교에 살면서 처음으로 서교를 선전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즉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1784년에 우리나 라에서 천주교가 학문이 아니라 종교로서 처음 믿게 된 것을 말하고 있다 고 하겠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이벽이 천주교를 선교함으로써 서학과 서 교가 서로 구분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29) 사실 정약용은 거의 대부분의 묘지명에서 이러한 서술을 원칙으로 하 고 있다. 이것은 마테오 리치의 구분과도 바로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서광계는 문도( 問 道 )로 인하여 서학( 西 學 )하게 되었는데, 이지조는 서학을 사모하다가 서교( 西 敎 )를 따르게 되었다. 30) 마테오 리치 역시 서학과 서교를 구분하고 있다. 서학을 사모한 결과 로 서교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서학의 시대와 서교 의 시대는 서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정약용이 자찬묘지명 에서 천주교를 서교로 기록한 것은 그 이전 29) 이때 정약용이 생각한 교 의 개념은 보다 천착되어야 할 것이다. 30) 이원순, 조선서학사연구, 1986, 11쪽에서 재인용. 원재연의 교시에 의하면 서광계가 이지조 로, 이지조가 서광계로 교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논리의 전개에 는 무리가 전혀 없다.

264 264 교회사연구 제42집 시기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가 1796년에 작성한 비방 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 辯 訪 辭 同 副 承 旨 疏 )와 자찬묘지 명 과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비방을 변명 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는 자찬묘지명 을 작성할 때 정약용의 천 주교 이해가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집중본에 서 수천 자라고 소개될 정도로 이 글은 긴 분량인데,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는 자신이 한때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일부 내용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내용은 그것과 방향이 크게 다르다. 여기에는 정약용 이 천주교를 적극 비판한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D 신이 이 책을 본 것은 대개 약관( 弱 冠 ) 초기였는데, 이때에 원래 일종의 풍조가 있어, 능히 천문( 天 文 )의 역상가( 曆 象 家 )와 농정( 農 政 )의 수리기( 水 利 器 )와 측량( 測 量 )의 추험법( 推 驗 法 )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세속에서 서 로 전하면서 이를 가리켜 해박하다 하였는데, 신은 그때 어렸으므로 그윽 이 혼자서 이것을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력( 性 力 )이 조솔( 躁 率 )하여 무릇 어렵고 깊고 교묘하고 세밀한 것에 속하는 글은, 본래 세심하게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조박 ( 糟 粕 )과 영향( 影 響 )을 끝내 얻은 것이 없고, 도리어 사생설( 死 生 說 )에 얽 히고, 극벌의 경계[ 克 伐 之 誡 ]에 귀를 기울이고, 이기( 離 奇 : 비뚤어진 것을 가리킴)하고 변박( 辯 博 )한 글에 현혹되어, 유문( 儒 門 )의 별파( 別 派 )로 인식 하고, 문원( 文 垣 )의 기이한 감상( 鑑 賞 )으로 보아, 남들과 담론할 때는 기휘 한 바가 없었고, 남들이 배격하는 것을 보면 과루( 寡 陋 )해서인가 의심하였 으니, 그 본의를 따져보면 대체로 이문( 異 聞 )을 넓히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동안 뜻하고 종사한 것이 영달에만 있어서, 태학( 太 學 )에 들 어온 후로 오로지 뜻을 전일하게 한 것은 곧 공령학( 功 令 學 : 科 文 )으로, 월과( 月 課 )와 순시( 旬 試 )에 응시하기를 새매가 먹이를 잡으려 듯이 정신을 쏟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이러한 기미( 氣 味 )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벼슬길

265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65 에 나아간 후로 어찌 방외( 方 外 )에 마음을 쓸 수 있겠습니까. 해가 오래고 깊어갈수록 마침내 다시는 마음속에 왕래하지 않아서 막연히 지나간 먼지 와 그림자처럼 느꼈는데, 어찌 그 명목( 名 目 )을 한 번 세워 청탁( 淸 濁 )을 분별하지 못하고서 고지식하게 지금껏 벗어나지 못하였겠습니까. 허명만 사모하다가 실화( 實 禍 )를 받는다는 것은 신을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 책 속에 윤상( 倫 常 )을 상하고 천리( 天 理 )에 거슬리는 말은 진실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또한 감히 전하의 귀를 더럽힐 수 없으나, 제사( 祭 祀 )를 폐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신이 옛날 그 책에서 또한 본 적이 없습니 다. 갈백( 葛 伯 )이 다시 태어났으니, 시달( 豺 獺 )도 놀랄 것입니다. 진실로 조 금이라도 사람의 도리가 미처 없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어찌 마음이 무 너지고 뼈가 떨려서 난맹( 亂 萌 )을 배척하여 끊어버리지 않고, 홍수가 언덕 을 넘고 열화( 烈 火 )가 벌판을 태우듯 성하게 하겠습니까. 신해( 辛 亥 )의 변( 變 )이 불행히 근래에 나왔으니, 신은 이 일이 있은 이래 로, 분개하고 상통( 傷 痛 )하여 마음속에 맹세해서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 고 성토하기를 흉역( 兇 逆 )같이 하였는데, 양심이 이미 회복되자 이치가 자 명해졌으므로, 전일에 일찍이 흠모한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하나도 허황 하고 괴이하고 망령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이른바, 사생의 말 은 불씨( 佛 氏 )가 만든 공포령( 恐 怖 令 )이고, 이른바 극벌의 경계[ 克 伐 之 誡 ] 는 도가( 道 家 )의 욕화( 慾 火 )를 없애라는 것이고, 그 이기하고 변박하다는 글은 패가( 稗 家 ) 소품( 小 品 )의 지류( 支 流 )에 불과한 것이니, 이 밖에 하늘 을 거역하고 귀신을 경멸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국 문인( 文 人 )에 전겸익( 錢 謙 益 ) 담원춘( 譚 元 春 ) 고염무( 顧 炎 武 ) 장정옥( 張 廷 玉 ) 같은 무리는 일찍이 그 허위를 밝히고 그 두뇌( 頭 腦 )를 벽파( 劈 破 )하 였는데도 어리석게 알지 못하여 잘못 미혹됨을 받았으니, 이는 모두 어린 나이로 고루 과문한 소치였습니다. 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워하고 분하게 여기며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마음은 명백하여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속이고 숨기겠습니 까. 신이 마땅히 위벌( 威 罰 )을 당해야 할 일은 실지로 8~9년 전에 있었는 데, 다행히 전하의 비호하심을 입어서 유사( 有 司 )의 형장( 刑 章 )에서 피할

266 266 교회사연구 제42집 수 있었습니다. 죄가 있었지만 처벌받지 않아 무거운 짐을 등에 진 것 같 았던 바, 이어 재작년 7월에 특별히 성지( 聖 旨 )를 받고 호우( 湖 郵 )의 금정 찰방( 金 井 察 訪 )로 보직되었지만, 오히려 늦은 것입니다. 자찬묘지명 의 어느 곳에서도 정약용이 천주교를 이와 같이 직접적 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내용 모두를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에서 거의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한때 천주교 신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용서를 계속해서 받았다는 사실만을 강조하 고 있을 뿐이다. 정약용의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에서는 자찬 묘지명 에서 천주교를 일관되게 서교로 표현되는 것과 다르게 기록되고 있다. 이는 당시 정약용의 천주교 이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31) E-1 신은 이른바 서양사설( 西 洋 邪 說 )에 대하여 일찍이 그 책을 보았습니 다. 그러나 책을 본 것이 어찌 바로 죄가 되겠습니까,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으려고 책을 보았다 [ 看 書 ]고 한 것이지, 참으로 책만 보고 멈춰버렸다면 어찌 죄라고 하겠습니까. 애초부터 마음속에 기뻐서 즐거워(마음으로 흔연 히 좋아하고) 사모하듯 하였고, 처음부터 치켜세우며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 하며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본바탕에 처음부터 기름이 엉키고 물들 고 뿌리박고 가지가 얽혀 있듯이 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E-2 더구나 신이 부임한 지방은 곧 사설( 邪 說 )이 그르친 지방으로서, 어 리석은 백성이 현혹( 眩 惑 )되어 진실로 돌이킬 줄 모르는 무리가 많았습니 다. 그러므로 신이 관찰사( 觀 察 使 )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수색해서 체포할 방법을 강구하여 그 숨은 자를 적발하고 화복( 禍 福 )의 의리를 일깨워주어, 그들이 의심하고 겁내는 것을 효유( 曉 諭 )하고, 척사( 斥 邪 )하는 계( )를 만 31) 김치완, 辯 謗 辭 同 副 承 旨 疏 의 논리구조로 본 서학 논의의 주요쟁점과 그 의의, 동서철학연 구 54, 2009는 이 문제를 다룬 연구이다.

267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67 들어서 그들에게 제사를 권하고, 사교( 邪 敎 )를 믿는 여자를 잡아다가 그들 에게 혼인을 하도록 하고, 다시 일향( 一 鄕 )의 착한 선비를 구해서 서로 더 불어 질의하고 논란하여 성현의 글을 강론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생각하 건대, 신이 한 일이 자못 진보가 있었으니, 스스로 다행스럽고 기쁘게 여깁 니다. 이것이 누구의 은혜이겠습니까. E-1은 집중본에서 인용된 부분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집중본에서 생략된 그 앞부분에서 천주교를 서양사설( 西 洋 邪 說 )이라고 표현하고 있 다. E-2를 보면 바로 직전 역임한 금정에서의 활동을 기록할 때에도 정약 용은 천주교를 사교( 邪 敎 )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그것은 반대파들이 자신을 모함할 때에도 그들의 표현대로 천주교를 사교로 인용하였던 데에 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찬묘지명 의 서술 방식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금정은 홍주에 있는 곳으로 대부분 서교를 믿고 있었다. 임금께서 나로 하 여금 잘 회유시켜 금지시키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내가 금정에 도착하여 그곳의 호족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을 거듭거듭 설명해주고 제사 지내 는 일을 권고하였더니 사림들이 듣고는 사태를 바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 고들 했었다. 이기경도 서교 듣기를 즐겨 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는데 홍낙안 등이 이 사건을 핑계 삼아 착한 무리들을 모두 제거해버릴 것을 꾀 하려고 하여 번옹(채제공 : 필자 주)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총명한 재 주와 지혜로 드러내는 관료와 선비들의 열 명 중 7, 8명은 모두가 서교에 빠져 앞으로 황건 백련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268 268 교회사연구 제42집 자찬묘지명 에서는 모두 서교로 고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집 중본과 광중본은 공통적이다. 이기경이나 홍낙안 등 정약용을 천주교와 연결시켜 죽이려고 한 사람의 활동에서 언급되는 내용까지도 모두 서교라 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1796년에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 를 사양하는 소 를 작성할 때와 자찬묘지명 을 기록할 때 정약용의 천주 교관이 변화된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기에 충분한 것으로 생각된다. 32) 즉 정약용의 사상에서 확인되는 새로운 변화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33) 정약용이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해 달라진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1820년대 무렵에는, 늦어도 1822년에 들어와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34)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하 는 부분이다. 그리고 정약용은 그러한 변화를 자신의 자서전적 역사서인 묘지명을 통해서 밝혀두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정약용의 천주 교 이해와 관련해서 자찬묘지명 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정약용이 처음 천주교를 믿었 던 당시의 천주교 이해와 그대로 일치시켜 볼 수 있는지는 곧바로 파악할 수는 없다. 32) 한편 정규완이 저술한 사암선생연보 에도 천주교 관련 비난 문구 등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정약용이 천주교를 변호하는 듯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 2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 1991). 그러나 후에 첨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원재연, 다산 정약용의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113쪽). 33) 집중본에서 언급되고 있는 안정복의 경우에도 천학문답 등을 통해서 서학, 양학, 서사지 학, 서양서 등으로 표기하고 있을 뿐이다. 학 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정약용과는 차이가 나는 견해이다. 34) 정약전 묘지명 이 1816년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더 빠른 시기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여전 히 천주교를 사학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가환 묘지명 이 1822년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박석무 역주, 다산산문선, 1985, 76 및 192쪽) 역시 이 무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69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69 3) 천주교 박해의 원인에 대한 이해 정약용이 천주교를 사교 혹은 사설로 이해하지 않고 서교로 이해한 것은 천주교 박해를 이해하는 정약용의 관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이다. 처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난 것은 바로 제사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정약전 묘지명 과 비방을 변명하고 동 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찬묘지 명 에서 천주교 박해의 원인으로 이 문제를 더 이상 천착하지 않고 있다. 집중본에서는 정약용의 금정에서의 활동과 관련해서 제사 지내기를 권하 였다는 사실이 언급되었으며, 광중본에서는 그냥 금령 때문이라고 말하 고 있다. 자찬묘지명 집중본에서는 그보다는 천주교 서적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의 문제와 연결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이기 경이 성균관에서 천주교 서적을 보았다는 사실을 문제로 제기함으로써 시 작되었다고 한다. 한때 천주교를 듣기를 즐겨 하면서 그 서적을 베껴놓기 까지 한 인물이 그렇게 한 것이다. C-2에 보이듯 천주교 서적에서 담고 있는 내용의 옳고 그름이 논의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은 집중본 에 인용된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의 내용에서처럼 단순히 그것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 아들였느냐, 아니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신유박해 때 위관( 委 官 )이 정약 용에게 무릇 서서( 西 書 )의 글자 하나라도 읽은 사람은 죽음이 있을 뿐 살아날 수는 없다 라고 한 말에서 그러한 논의의 심각성과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접근이라는 것이 정약용의 입장이었다. 집중본 에서 이기경의 입을 빌어서 천주교 서적에 좋은 내용도 있다는 사실을 드 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상적 자유 혹은

270 270 교회사연구 제42집 학문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D에 언급되고 있듯이 당시 서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일종의 풍조였다는 것 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이문( 異 聞 )을 넓힐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 런 상황 속에서 이를 제한시킨다면 견문을 넓힐 기회가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정약용은 광중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 신의 학문을 정리하면서 그러한 공부가 가능했던 것은 정조가 궁중 내부 에 있는 모든 비장된 서적은 담당관의 허가가 있어야 볼 수 있는데, 보겠 다고 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비장된 서적 안에는 서양 서적도 물론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책들과의 만남까지 가능한 시대적 조건이 그의 학문을 발전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정약용이 지은 이가환 묘지명 에도 자세히 나온다. 천주교 서적에 대한 비판이 최헌중처럼 서학에 대한 비판까지 이어지자, 사람들에게 서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형성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공(이기환)을 시켜 책을 만들어 수리( 數 理 )와 역상( 曆 象 )의 원리를 밝히고자 하여, 장차 연경에서 책을 사오게 하려고 친필로 자문을 구하였 다. 공이 대답하기를 시속의 무리들이 식견이 워낙 어두워 수리가 어떤 학문인지, 교법( 敎 法 )이 어떤 법술인지를 알지 못하고 혼동하여 꾸짖고 호 통을 치는데, 이 책을 편찬한다면 저에게 더욱 비방의 소리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장차 위로 성덕( 聖 德 )에 누를 끼칠 것입니다 하며 이 일을 중단했 다. 임금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조의 입장은 다른 것이었다. 정조는 서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일행의 학문도 사학( 邪 學 )으로 몰아붙이고 일행의 역법까지도

271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71 또한 서법( 西 法 )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는 말인가. 유식한 선비들이니 어디 더 변명해 보아라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서양의 책이 우리나라에 나타나기는 수백 년이 된다. 사고( 史 庫 )나 옥당의 옛 장서에 소장된 것도 몇십 권만이 아니며, 연전에도 특별히 명령하여 구 입하도록 했었다. 이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은 이로 보면 알 수 있다. 옛날 정승인 충문공 이이명의 문집에도 서양인 소림대와 편지를 주고받으 며 그들의 법서( 法 書 )를 구해보았던 것이다. 라고 하여, 조선에서 서양 서적을 읽은 것이 오래되었으며, 이이명과 소 림대, 즉 포르투갈 신부인 수아레즈와의 35) 교류까지 이루어진 것을 설명 하였다. 때문에 정약용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1791년 신헌조가 올린 상 소 가운데에서 겉으로는 정통사상을 보호한다 하고는 속으로는 남을 모 함할 계략을 꾸민 것 이라는 내용을 인용하여 비판하였다. 즉 유교와 관 련된 것도 아니고, 천주교와 관련된 것도 아니며 남을 모함할 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거기에는 서학과 서교를 엄밀히 구분하기도 어려 운 실정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풍속을 교정하는 데 형벌만 사용하는 것은 가장 저급한 수단인데 더구나 천주교를 막는 데 있어서 라 고까지 말하고 있다. 36) 천주교 서적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에게 형벌을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천주교 서적이 나 교리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적인 인간관계 혹은 당파 의 문제에서 발생한 것을 계속해서 설명하였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천주 35) 강재언, 앞의 책, 90쪽. 36) 이가환 묘지명.

272 272 교회사연구 제42집 교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낸 명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를 끝까지 죽이려 고 한 이기경과의 관계가 그러하였다. 그것은 서용보의 경우에도 마찬가 지였다. 정약용이 암행어사 시절 서용보의 직권 남용을 적발하였는데, 그 러한 악연이 신유박해 때나 그 이후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 다. 조화진의 경우에도 자신이 한영익과 혼인을 맺지 못하고, 한영익이 정 약용의 서제와 혼인을 하자 그에 대한 원망으로 정약용을 제거하려고 하 였다는 것이다. 결국 박해가 일어난 것은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이 들의 모함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정약용과 이들 인물과의 관계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 이 아니었다. 집중본에서 이기경이 정약용에게 원한을 품게 되자 정약용 은 우리 당( 吾 黨 )의 화란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라 고 예견하였듯이 당파 의 문제였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의 실상이 당파의 문제라는 사실은 정약 용이 저술한 이가환 묘지명 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미년 여름(1779) 내가 정헌( 貞 軒 -이가환)에 들렀을 때 공이 쓸쓸하고 맥 이 없는 듯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말하기를 당파싸움 하는 무리들이 천 냥 의 돈으로 나를 사겠다고 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라고 하였 다. 내가 대감께서 천 냥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5백 냥도 못되겠습니다그 려 라고 했다. 한두 명의 음흉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주둥아리를 놀려 10년이 넘도록 유 언비어로 선동하고 현혹시켜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귀에 익도록 해놓았 으니 정권 사람들이 무얼 알았겠는가. 평소에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만 익 히 알고 있다가 이때(신유박해 : 필자 주)에 이르러 죽였을 뿐이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란 종교에 대한 박해가 아니라, 반대파를 제거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천주교에 대

273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73 한 박해는 개인 관계에서라기보다는 이와 같이 당파의 문제와 연결되어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정약용은 자신이 포함된 세력을 선류( 善 類 )로, 그를 모함하는 세력들을 악당 혹은 악인들로 대비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의 연구에 서도 이미 잘 지적되고 있는데, 37) 악인 혹은 악당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 다 착한 무리를 모두 제거해 버릴 것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반대 세력의 인물들이 정약용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세력 확장을 꾀한 부분도 지적하고 있다. 목만중을 비롯한 악당들이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이가환과 이승훈을 선동하고 뜬소문을 퍼뜨리고, 이 사건을 트집을 잡아서 착한 무리들을 완전히 구렁텅이에 넣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후 신유박해 때에 이르기까지 황사영 백서 사건을 포함해서 그가 전혀 관 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파 세력들은 그를 끝까지 죽이려고 하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목만중의 손 자가 지독한 상소를 하였다는 것을 소개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박해의 본질이 천주교와 무관한, 무고한 억울한 사람들의 희생이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때 정약용 이 다른 묘지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듯이 포함된 이들 선류 안에는 천주교 신자였던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들도 모두 포함되어 있 었다. 정약용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였느냐 아니었느냐는 사실을 넘어서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정약용은 이벽을 벗이라고 표현할 정 도이다. 때문에 정약용은 이들과 맺은 학문적 및 우정의 관계를 매우 중요 시한다. 그래서 정약용은 다른 묘지명의 저술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박 해와 관련해서 역사상에 잘못 이해될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을 올바르게 복 37) 김형호, 앞의 논문 및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274 274 교회사연구 제42집 원시켜주려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이념 적으로 서로 다르더라도 공존하면서 함께 살아갈 것을 바랐던 것이 아닐 까 한다. 그것은 이기경과의 갈등 이후 정약용이 그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기경이 유배를 가게 되자, 때때로 이기 경의 집에 찾아가서 어린 자식들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이기경의 어머니 제사 때에는 금전적으로 도와주기도 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정조를 설득 하여 그를 다시 석방하도록 하였다. 이후 다시 이기경이 벼슬하게 되었지 만 아는 친구로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자, 정약용만이 홀로 그에게 안부와 날씨를 물으며 평상시처럼 지내고자 하였다. 이른바 친구란 친구로 삼았던 것을 없앨 수 없다 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기경과의 관계 개선은 정약용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약용이 만년에 작성한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관용책 내지 포용책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정약전 묘지명 의 표현을 따른다면 신해박해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한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사실이 운명처럼 그를 끝까지 얽 혀 매었던 것이다. 칡이나 등나무 얽혀 있듯이 그렇게 천주교에 얽혀 매 어진 것이 풀기가 어려워 명확하게 화란이 다가옴을 알면서도 막아낼 수 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일생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찬묘 지명 의 중요한 사상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신처럼 무고로 인 하여 그러한 고통을 받는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5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75 4) 한국 천주교회사의 정리 정약용은 자신의 고난과 관련해서 천주교의 문제를 기술하였는데, 그러한 천주교 관련 내용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선은 정약용이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배교의 역사를 보여준 사 실을 지적해두고 싶다. 현재 배교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 만, 38) 사실 정약용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던 자신의 배교의 역사를 자찬 묘지명 을 통해서 서술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그를 이전에는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이 아까워 배교한 배교 자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중본에 의하면 신유박해 때 심문 을 받으면서 이러한 사실이 기록된 백서 를 읽었던 것이다. 때문에 정약 용은 정약전 묘지명 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 이 천주교 신앙에 대한 태도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을 말한 다음, 오호, 골육이 서로 싸워 자기의 몸과 이름을 보존한 것과 순순하게 받아들 여 엎어지고 뒤집혀 천륜에 부끄럼 없음이 어떻게 같을 것인가. 뒷세상에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라고 하여, 어떠한 방식으로든 황사영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배교 문제를 설명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를 역적으로 언급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천주교 신자라도 국가의 존립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곧바로 반천주교적 38) 김수태,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276 276 교회사연구 제42집 인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약용의 이러한 모습은 집중본에서 신유박해 때 그가 감옥에 있었을 때의 상황을 통해서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처음 신유년 봄에 옥중에 있을 때 하루는 근심하고 걱정하다 잠이 든 꿈결 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는 19년도 참고 견디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 라고 했었다. 옥에서 나오던 때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옥에 있던 날이 꼭 19일이었다. 유배지에서 고향에 돌 아옴에 당하여 헤아려보니 경신년(1800) 벼슬길에서 물러나던 때로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운명에 정해져 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정약용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19일 동안 감옥에 있을 때 근심하고 걱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낼 자 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의 인생살이가 운명, 즉 하늘의 뜻에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약 용은 순교하지 않고 현실에 타협해서 살아남은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광중본의 서두와 집중본의 중간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언급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배교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광중본에서는 천 주교에 마음을 끊었다고 하면서 배교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무덤에 함께 가지고 갈 광중본을 통해서 그가 천주교 신앙인이었으며, 동 시에 배교자라는 역사적 사실을 함께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 내용 은 거의 소개하고 있지 않다. 이와 달리 집중본에서 그가 배교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천주교 관련 내용의 대부분은 배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정약용이 집중

277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77 본의 처음에서 광중본과는 달리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은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배교를 하였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된 신자가 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일관되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서술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정약용은 집중본을 통하여 자신이 시기별로 어떻게 배교하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서적을 읽은 사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때에 종기를 따내 버림이 옳지 않 겠느냐고 주장했던 것이다. 39) 천주교 서적을 읽었거나 읽은 것이 잘못되 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정찰방으로서 그가 한 일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천주교를 믿고 있던 역속( 驛 屬 )들을 회유하였으며, 그곳의 세력가들 에게 천주교 금령을 설명하면서 제사 지내는 일을 권고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천주교의 확산을 바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존창 의 체포 문제와 같이 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분명히 정리하고 있 다. 그가 아무런 모의나 계획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계기 로 정약용을 서울로 다시 올라가게 하려는 이들을 겸연쩍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때문에 정조의 뜻까지도 어겼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를 인용한 부분에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단순히 읽은 것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온통 천주교를 받아 들였으며 이를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한 잘못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그가 다시 정조의 신임을 얻어 벼슬살이를 계속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후에도 그를 천주교와 연결시키려는 모함이 계속되자 화를 면하고자 처자를 거느리고 낙향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책롱사건이 일어 39) 이 기록은 보다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현재 최석우 등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은 배교의 시기를 1795년으로 보고 있어 논쟁이 되고 있는데(원재연, 앞의 논문, 124쪽), 집중본을 따른다면 1791년이 옳을 듯하다. 이것은 광중본과도 일치한다.

278 278 교회사연구 제42집 났을 때 그가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강조하였다. 천주교에서 강조한 삼구 설( 三 仇 說 ) 역시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정복을 빌어 무고라고 말한다. 신유박해 때에도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황 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황사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말 하면서 그를 역적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배에서 돌아온 해에 목 태석이 상소를 올려 그가 여전히 천주교를 추종하며 따라다니면서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지 않다고 완곡하게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 한 사실들은 그가 한때 천주교 신자였지만, 신자로서 천주교에 제대로 충 실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40) 다음으로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한국 천 주교회사를 위한 여러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정 약용 나름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 한 것처럼 정약용은 한국 사회에 천주교가 종교로써 처음 인식된 것은 1784년이라는 것이다. 이때 이벽을 강조하고 있다. 이승훈의 세례에 의미 를 주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와 달리 이벽이 처음 천주교를 종교로써 선전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천주교 박해의 본질을 정치사적 시각에서 본 것 역시 중요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를 이기양 묘지명 을 통 해서 이를 한둘의 음사( 陰 邪 )한 사람과 악당과 악인들이 죄가 없는 착한 사람들을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억울하게 옥사시키고 유배 지에서 죽게 한 사화( 士 禍 )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가환 40) 이러한 점에서 다블뤼가 그(정약용 : 역자 주)의 저서에서 그 자신의 배교와 그의 형제 친척 친지들의 배교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며 이런 사실이 그의 이야기에 진실성을 더해 주고 있습니 다 라고 남긴 말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정약용이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자신의 배교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

279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79 묘지명 을 통해서 대계( 臺 啓 )로서 발단을 일으키고 신문으로 죄안을 성립 시켜 증거도 없고 장물도 없는데 곧바로 장살( 杖 殺 )하고 끝내 기시( 棄 尸 ) 해 버린 것은 기축 경신년의 옥사에서도 없던 일이라고까지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정약용의 이러한 이해는 이후 달레 의 한국천주교회사 나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 에서 천주교 박 해를 보는 관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41) 무엇보다 정약용이 당시까지의 천주교회사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 여 서술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1784년부터 1801년에 일어난 황사 영 백서 사건까지의 내용들이다. 1784년에 이벽을 통해서 서교에 대해서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이기경을 통해서 1788년에 들어오면 함께 천주교를 공부하고 믿은 사람들이 서로 길을 달리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중앙 관료나 선비들 가운데 열에 7, 8명이 천주교에 빠졌다는 사실 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은 신해박해가 일어난 1791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때 이기경, 목만중, 홍낙안 등이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과 대립하게 되면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계기는 역시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함께 나타났던 것 으로 보았다. 이때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의 국적과 출신 지역, 조선에서의 거주 지역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내포 지역의 천주교 상황도 전한다. 역졸이나, 이존창처럼 어떤 신분의 사람들까지 천주교를 믿고 있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796년 그가 동부승지로 있을 때 천주교 서적 문제가 다시 제기된 일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대 세력에 의하여 정약전에 이어 정약종에까지 박해가 미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정조의 사후 이들이 어떻게 세력 규합을 하여 정약용이 41) 김수태, 이능화와 그의 사학, 동아연구 4, 1984 및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교 회와 역사 300, 2000을 참고할 것.

280 280 교회사연구 제42집 관련된 집단을 제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책롱사건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신유박해로 자신이 체포되어 풀려나는 과정을 황사영 백서 사건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구설도 언급된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기록할 때 역시 순교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신해박해와 관련해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옥사( 獄 事 )가 있었다고만 언급한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의 체포 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최인길, 윤유일 등 3인이 장살된 사실을 전 하고 있다. 순교자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굳이 이 부분 에서 이러한 내용을 서술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알 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훈이 유배를 가게 된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과 이가환은 지방으로 자리를 옮긴 사실도 함께 이야기한다. 이것은 천주교 박해의 결과가 사람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미쳤는가를 알려 주고자 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신유박해 부분을 통해서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 다. 2월 8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이 모두 투옥되었고, 정약용의 형인 약전 및 약종과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홍낙민, 김건순, 김백순 등이 차 례로 투옥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때 누가 순교하였으며, 누가 살아남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여름에 일어난 또 다른 순교 사건도 알려준다. 이해 여름 에 옥사가 더욱 확대되어 왕손( 王 孫 ) 인, 척신 홍낙임, 각신 윤행임 등이 모두 사사( 賜 死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 이 언급된다. 이때 정약전, 정약용, 이치훈, 이관기, 이학규, 신여권 등이 또 체포되어 투옥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들에 대해서는 유배로 그쳤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정약용은 자찬묘지명 을 통해 신유박해의 시말을 구체 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정약용의 기록은 한국 천주교회

281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81 사의 이해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김상홍에 의해서 다시 지적되고 있듯이 이러한 기록들은 다블뤼 의 한국 천주교회사 자료 수집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 다. 42) 정약용 만년의 천주교 신자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김상홍 역시 자 찬묘지명 을 비롯하여 정약용이 저술한 여러 묘지명의 천주교 내용을 다 블뤼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남 긴 자료를 읽어본 다블뤼는 그의 책은 그의 집에 숨겨져 아무에게도 공 개되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에도 극소수를 제하고는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에 김상홍은 다블뤼가 정약용의 여러 묘지명을 보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정약용이 저술하였다고 하는 조선복음전래사 는 존재하지 않으며, 7개의 묘지명을 비롯한 비 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 등을 묶어서 그렇게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한다. 이것은 이른바 총칭설 ( 總 稱 說 )을 주장하는 김상 홍과 실재설 을 주장하는 최석우가 유일하게 일치하고 있는 부분으로 받 아들여진다. 현재 필자는 그 실체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 사 에 대해서는 별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정약용이 자찬묘지 명 등 여러 자료를 통해서 언급한 한국 천주교회사의 내용들은 역시 후 대의 교회사 서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는 점만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사실 신유박해 때까지 있었던 정약용 의 개인사는 그대로 한국 천주교회사의 큰 흐름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에 대한 그의 개인 신앙사이기도 하지만, 곧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43) 42) 김상홍,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43) 이러한 까닭에 다블뤼는 정약용에 대해서 학식 있고 청렴하기로 알려진 그는 조선에 천주교가

282 282 교회사연구 제42집 5. 맺음말 지금까지 정약용이 저술한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정약용과 천주 교와의 관계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한 부분을 다루어보았다. 이러한 분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기존의 연구에서 정약용이 시기적인 변화 없 이 천주교 신자였다든지, 그와 달리 천주교와 완전히 단절된 인물이었다 고 주장하는 설명이 조금은 지나친 해석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 다. 정약용이 다시 천주교로 돌아왔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의 단계 로서는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나 자찬묘지명 을 통해서 그의 입장이 반 천주교적이라는 해석은 그대로 따르기가 어렵 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오히려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속에 천주 교의 영향이 여전히 깊게, 오래 남았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더 나아가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한 정약용의 입장은 비록 현재 천주교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천주교가 용납되어야 한다 는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44) 이러한 관점에서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을 굳이 정의를 해본다면 그가 처음에 천주교 신앙을 가졌을 당시의 그것처럼 보유론적( 補 儒 論 的 ) 천주 교 신앙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름 아니라 집중본에 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만년까지 그의 학문적 관심에서 차지한 최대의 주제는 바로 상 제례 부분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유교의 상 제례 가운 데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새롭게 변화시킬 부분을 찾아서 나름대로 그 전래할 때 일어난 모든 사실에 참여하였고, 그가 아주 잘 아는 사실에 관해 적어놓았습니다. 끝 으로 나는 그의 저서에서 다른 구전과 모순되는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확언할 수 있습 니다. 그의 이야기는 간략하고 정확합니다 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 아닐까 한다. 44) 최근 허흥식에 의해서 1830년대 오규일이 요한 이란 정약용의 세례명을 새긴 인장을 증거로 정약용이 죽을 무렵 천주교 신앙을 간직했던 것으로 본 주장이 나왔다(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 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토론문).

283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83 것을 쇄신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45) 정약용이 이와 같이 상 제례에 깊 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가 한때 천주교를 믿었다가 배교를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천주교의 제사 금지령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에 정약용이 유교의 상 제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서 천주교와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만 제대로 극복할 수 있다면 조선 후기의 한국 사회에서도 천주교의 수용이,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한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상 제례에 대한 연구는 천주교의 제사 금 지령에 대한 그의 응답으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당시의 천주교는 제사를 거부하며 지역적으로나 신분적으로나 자신이 천 주교를 믿었던 초기의 양상과 달리 민중 신앙 운동으로까지 새롭게 변화 되는 과정을 밟고 있어서 정약용의 노력은 그러한 흐름과는 서로 함께할 수 없는 본질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46) 그렇게 정약용은 평생 천주교 와 엇갈리는 만남을 운명처럼 계속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위해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기존의 연구와 관련된 문제이지만 조금은 일반 인들이 접근하기 쉽게 서술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우선 가지게 된다. 여전 히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 문이다. 그리고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사료들이 종합적으로 정 리되었으면 한다. 이번에는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다루었지만, 정약용 이 저술한 또 다른 묘지명들에도 천주교 관련 사료들이 풍부하게 있기 때 문이다. 정약용에 대한 그 밖의 여러 자료에서도 찾아보려는 노력이 병행 45) 최기복, 천주교회의 유교제례 금령과 다산의 상제례관, 교회사연구 39를 참고할 것. 46) 한편 김선희는 정약용이 중국의 입교자들과는 신앙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교적 유신 론보다는 유신론적 유교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기독교적 신을 자기 전통 안에서 유교적 신으로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 2012, 470 및 491쪽).

284 284 교회사연구 제42집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최근에 나온 여유당전서 에 대한 정본은 이러한 작업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바탕으로 이들 사료에 대한 비교 분석이 필요할 것이 다. 자찬묘지명 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었지만, 서로 다른 내용으로까 지 오해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그러한 사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정약용이 일관되게 주장하고자 한 내용이 무엇인가 를 올바르게 읽어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47) 이와 함께 이들 사료에 대한 정확한 번역과 가능하다면 풍부한 내용을 담은 역주 작업이 이루어 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현재 몇 가지 번역이 나와 있지만, 그러 한 정도로서는 사료의 의미를 정확하게 천착하는 데 많은 한계를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만 있다면 이를 통 해서 정약용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읽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한 다. 이때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역시 더욱 올바른 방향으로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국사 연구,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시대와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제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수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정약용 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문제들을 다루어 볼 것을 이 자리를 빌어서 약속드린다. 투고일 : 심사 시작일 : 심사 완료일 : ) 여기에 대해서는 원재연, 앞의 글, 55쪽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285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85 참고 문헌 강재언, 조선의 서학사, 김상홍,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 고, 다산문학의 재조명, 2003., 다산의 문학연구, 다산학 21, 2012., 다산의 비본 묘지명 7편 과 천주교, 한국실학연구 24, 김선희, 마테오 리치와 주희, 그리고 정약용, 김수태, 이능화와 그의 사학, 동아연구 4, 1984.,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교회와 역사 300, 2000., 이존창의 신앙과 배교문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2011., 최경환 가문의 삶과 천주교 신앙, 청양 다락골 성지 발표회, 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 2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연구, 김치완, 辯 謗 辭 同 副 承 旨 疏 의 논리구조로 본 서학 논의의 주요쟁점과 그 의의, 동서철학연구 54, 김형호, 다산 자찬묘지명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박석무 역주, 다산산문선, 백민정, 보론 정약용에 대한 기존연구 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 용의 철학, 원재연,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교 회사연구 39, 조성을, 정약용과 교안, 한국실학연구 25, 2013.

286 286 교회사연구 제42집 최기복, 천주교회의 유교제례 금령과 다산의 상제례관, 교회사연구 39, 최석우,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다블뤼의 비망기를 중심으로, 다산 학보 5, 1983., 정다산의 서학사상, 정 다산과 그 시대, 1986.

287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자찬묘지명 을 중심으로 287 ^_pqo^`q The Epitaphs of Jung Yak-yong : Insight into his relationship with Catholicism Kim, Soo Tae Chungnam National University Over the years there has been extensive, varied, and critical discussion about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the prominent Joseon scholar, Jung Yak-yong, often simply known as Dasan(1762~1836), and his relationship with Catholicism. This paper will differ from other approaches, in concretely focusing on those parts of the two extant epitaphs which specifically relate to Catholicism. Although written in 1822, these works including the Guang-jung-pon(found on his memorial stone) and the Jip-jung-pon, (published post-posthumously) are, as per Jung s instructions, considered his final statements. Whether his memorial inscription affirm he was a Catholic believer is both positively and negatively asserted. While most contemporary scholarship tends to favour the negative point of view, this position is difficult to sustain because there is a lack of an exhaustive analysis of the actual inscription. Both the Guang-jung-pon and the Jip-jung-pon posit Catholicism as a Western Religion. However, there is need for a more nuanced position given that both works suggest that Catholicism has now been accepted in, and provide a description of, this new religion in Joseon. Significantly, the epitaphs provide both a political reason for the persecution of Catholic believers and an insight into understanding the significance of martyrdom in th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Furthermore, through these words Jung Yak-youg suggests the need for a

288 288 교회사연구 제42집 broader, more tolerant government policy towards Catholics in Joseon. He is concerned that there will not be a re-emergence of the same political and ideological suffering that has been inflicted on him as a falsely accused member of the opposition faction. Jung s final words are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ose he wrote in the Memorial (1796). In that work he criticised Catholicism as a heretical religion and a perversion of the truth. This difference in language allows us to postulate that Jung Yak-yong, somewhere in the early 1820 s, and following his release from exile, changed his attitude to the new religion from the West. Keywords : Jung Yak yong, Dasan, Epitaphs, Western Learning, Western Religion, Catholicism, Yi Byeok, Martyrdom

289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김정환* 1. 머리말 2. 큰 첨례표의 제반 사항 3. 큰 첨례표의 내용 1 : 주일과 축일 4. 큰 첨례표의 내용 2 : 일러두기와 각종 규정 5. 맺음말 국문 초록 한국 천주교회의 고유한 달력인 큰 첨례표는 현재 1865~1866년, 1916~ 1970년의 것들만 남아 있다. 본 연구는 이들 중 1916~1933년을 한정하 여 다룬 연구로 뮈텔 주교가 재임하던 기간이다. 이렇게 기간을 한정한 이유는 이 큰 첨례표들이 한 주교의 관할 아래 발행된 것들이어서 일관 성이 있고, 조선 후기와 현대를 연결하는 시점이기에 신앙생활의 변화를 탐구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290 290 교회사연구 제42집 1916~1933년의 큰 첨례표는 뮈텔 주교의 관할 아래 작성되어 각 지역 의 본당을 통해 보급되었다. 큰 첨례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과 축일이 음력으로 언제인지를 신자들에게 알려 신앙생활을 돕는 데 있었 다. 1896년부터 양력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의 신자 들은 여전히 음력 체계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신자들이 은사를 어떻게 얻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들은 보편적인 면과 그 시기만의 고유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보편적인 면은 신앙의 내용과 관련되 어 있다. 천주교의 고유한 달력은 성경의 내용과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큰 첨례표에 반영되 는 내용도 그대로 유지된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천주교회가 큰 변화를 겪을 때까지 큰 첨례표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 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들은 시대 변화에 따라 그 이전 시기에 없거나 변화된 내용들이 반영되어 있고, 그 이후와도 구분 되는 변화의 양상들이 반영된 고유한 면들도 가지고 있다. 주제어 : 첨례표, 축일표, 뮈텔 주교, 천주교 신앙생활

291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머리말 필자는 뮈텔 주교의 일기를 연구하던 중 그 안에 여러 시간이 중첩되 어 있어서 그것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뮈텔이 일기의 날짜를 기록하는 데 기본으로 사용한 양력(그레고리우스력)으로부터 천주교의 교 회력,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는 음력, 심지어 러시아인들이 사용하는 율리 우스력까지 다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1) 그 시간들은 그냥 흘러가는 무엇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는 뮈텔의 일기를 연구하는 데 기반이 되는 요소였다. 이러한 고민을 하던 중 옛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였고, 뮈텔 자신이 작성한 바 있는 첨례표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첨례표는 옛 신자들 누구나 사용하던 달력이었으나, 현재 실물로 남 아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1916~1970년까지의 첨 례표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다행히 얻어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2) 그 안에 는 흔히 알려진 한 장짜리 첨례표 (이하 큰 첨례표 )뿐만 아니라 성직자 들을 위한 라틴어 전례력과 매일 첨례표 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자료들 을 스캔 작업하고 보존 처리하기 위해 하나씩 넘겨보다 보니 일제 강점기 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과 종교, 사회적 현상을 한눈에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16~1970년까지 연속으로 남아 있는 큰 첨례표는 일제 강점기, 해 방과 6 25 전쟁 기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과 이후의 시기를 거치 1) 러시아는 1917년 혁명이 있기 전까지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였고, 이후에는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 하였다. 2) 필자는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와 이영춘 신부의 도움으로 이 첨례표들을 빌려 스캔 작업을 하여 연구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료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도회 오숙영 수녀가 김진소 신부에게 기증한 자료라고 한다. 귀중한 자료를 보존하고 공개해 준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92 292 교회사연구 제42집 면서 시대에 따른 변화가 일어났다. 3) 본 연구에서 다룰 내용은 이 첨례표 들 중 가장 앞선 시기인 뮈텔 주교 재임기에 작성된 것들을 대상으로 삼았 다. 1916~1933년에 해당하는데,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에서 신앙 자유기로 넘어오면서 형성된 신앙생활의 내용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 있 어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용이하다. 이 기간에 작성된 큰 첨례표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반적인 내용과 형식이 바뀌기 전까지 한 시 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옛 한국 교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큰 첨례표가 천주교 전례력이 반영된 달력이고 보면 이와 관련된 연 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조현범의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 간 4), 조광의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과 일을 그치고 기도 와 선행을 하는 날 에서처럼 천주교 전례력이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가지는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큰 첨례표가 부분적으로 이용되는 경우 가 먼저 진행되었다. 5) 이어 큰 첨례표를 직접 대상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 었는데 2012년 김정숙이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를 통해 간략 하지만 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기의 첨례표 전체를 일괄하였고, 6) 2013년 들어 방상근이 1866년 발행된 큰 첨례표를 주 대상으로 하여 첨례표 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을 연구 발표 3) 1916~1939년 기간에는 큰 변동이 없다가 일제가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린 이후인 1940~1945년 에는 황국신민의 서사 와 국가축제일 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기념일이 강제되어 큰 첨례표에 실린다. 1945~1953년은 해방과 6 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인쇄용지의 질이 크게 저하되고 내용도 일부분 간소화되었으며, 전쟁 후인 1954~1966년 기간에는 1939년 이전처럼 회복세를 보이면서 1961년 부터 칼라 인쇄가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이후 발행된 1967~1970년 의 큰 첨례표는 근본적으로 변화를 보이는데 첨례표 라는 이름이 축일표 로 바뀌고, 공의회 이후 대사 교리가 약화되면서 1968년부터는 은사회 표시가 없어지는 등 큰 변화가 일어났다. 4) 조현범,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간, 청계논총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 조광,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경향잡지 1614호, 2002년 9월호 ;, 일을 그치 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경향잡지 1651호, 2005년 10월호. 6)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빛 356호, 천주교 대구대교구, 2012년 12월호.

293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293 하였다. 7) 필자는 2013년 8월 대전교구 청소년교육회관에서 개최된 제3회 한 국교회사연구자 모임에서 년 첨례표 연구 를 습작으로 발표 한 바 있다. 그때의 연구는 1916~1970년 사이에 발행된 큰 첨례표 전체 의 내용과 흐름을 파악한 것이었는데 이번의 연구는 그날 발표하고 토론 한 내용을 참조하여 수정 보완하고, 연구 대상 시기를 1916~1933년으 로 한정하여 진행한다. 남아 있는 큰 첨례표들 가운데 박해 시대 이후 첫 번째의 것들이고, 한 교구장 주교의 책임 아래 발행된 것이어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큰 첨례표는 양력과 음력으로 병기된 주일과 축일의 날짜, 신자들이 지켜야 할 각종 재계와 은사를 얻기 위한 방법과 기호 표시 등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숫자와 기호, 날짜 등은 단순한 나열처럼 보이지만, 신앙생활의 내용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는 한 시 대의 신앙 상태와 흐름을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 해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들의 내용은 물론 당대 한국 교회 의 모습도 함께 그려보려 한다. 2. 큰 첨례표의 제반 사항 1) 첨례표의 종류 흔히 첨례표 로 통칭되는 옛날의 전례력은 세 종류가 있다. 성직자들 이 사용하는 성무일력 (Ordo Divini Officii, 聖 務 日 曆 ) 8), 신자들과 성 7) 방상근, 첨례표 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신앙의 해 기념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자료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294 294 교회사연구 제42집 직자들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책인 매일 첨례표,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사 용하는 한 장짜리 첨례표 (큰 첨례표)이다. 성무일력 은 줄여서 Ordo 9) 라 불렸는데 전례 전반과 매일의 첨 례에 필요한 사항들이 자세히 적힌 소책자로,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성직 자들을 위해 라틴어로 제작된 전례력이다. 필자가 실물을 통해 확인한 것 은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1943년 성무일력 과 내포교회 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는 1961년의 것이다. 10) 전자는 파리 외방전교회 의 상하이 대표부에서 발행하였는데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가로 12cm, 세로 18cm, 150쪽 분량으로 1942년 7월 15일 홍콩 대목구장 발토르타 (H. Valtorta) 주교의 인준을 받아 발행되었다. 후자는 1960년 10월 1일 홍콩 교구장의 인준을 받아 발행된 것으로 크기는 약간 작아지고 285쪽 분량으로 두꺼워졌으나 전체 구성은 동일하다. 책 제목이 Ordo Divini Officii Recitandi로 바뀌고 발행처는 홍콩 Catholic Truth Society로 되 어있다. 성무일력 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쪽 번호가 별도로 표기된 전반부 에는 전례 지침이 수록되어 있고, 다시 1쪽부터 시작하는 후반부는 매일 의 전례에 필요한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다. 11) 매일의 항목들은 양력을 기 준으로 작성되었는데 그 오른쪽에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혼용하여 음력 날짜가 병기되어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 직자들 모두 이 전례력을 사용하였다. 8) 이 책의 원제목은 Ordo Divini Officii로 라틴어를 아는 성직자들을 위한 소책자여서 한국어로 번역된 바 없어 여기서는 편의상 聖 務 日 曆 으로 번역하였다. 1915년 경향잡지 기사에 성교회 원첨례표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라틴어 첨례표를 지칭하는 듯하다( 경향잡지 329호, 305쪽). 9) 1909년 8월 라리보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문서번호 ). 10) 내포교회사연구소의 성무일력 은 1998년 선종한 유인성 신부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11) 1943년 성무일력 의 경우 앞부분은 로마 숫자로 되어 있고, 뒷부분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 였다.

295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년부터 매일 축일표 로 이름이 바뀐 매일 첨례표 는 성무 일력 의 요약본과 같은 소책자이다. 매일 첨례표 는 언제부터 발행되었 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921년 이전부터 있었는데, 12) 호남교회사연구 소에는 1935년 것부터 소장되어 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발행된 것들 은 가로 9.5cm, 세로 14.5cm 내외의 크기로 40여 쪽 분량이다. 13) 맨 앞에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범례들이 나와 있고, 이어 양력을 기준 으로 매일 전례에 필요한 항목들이 나와 있다. 부록으로 교구별 성직자들 의 주소와 천주교회에서 발행된 책들의 목록이 실려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발행된 책들은 요일, 날짜, 숫자가 한자로 표기되었고 첨례를 설명하 는 내용은 한글로 되어 있다. 14) 해방 후부터 표지에 수록된 연도에만 아 라비아 숫자가 사용되다가 1960년대 들어 양력의 날짜 기록에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였다. 15) 큰 첨례표는 낱장으로 되어 있는 한 장짜리 전례력으로 매일 첨례 표 가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구분을 위해 큰 첨례표 라 불렸다. 16)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신자들은 흔히 집의 벽에 붙여놓고 사용하거나 접어서 휴대하였다. 큰 첨례표는 상, 중,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마다 날짜별로 전례 관련 사항을 세로글씨로 표기하였다. 17) 각 단마다 양력과 12) 천주 대전에 공로를 더 세우리로다. 큰첨례표와 매일 첨례표에 다 자세히 설명하고 가르쳤으 니 ( 경향잡지 479호, 1921년 10월, 436쪽). 중국과 그 인근 지역 모두에 대소재 관면 규정을 적용한다는 내용 중에 매일 첨례표 에 대한 언급이 있다. 13) 이와 같은 크기로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매일 첨례표 는 1935, 1936, 1937, 1941, 1944, 연도 미상 1권, 1947, 1949, 1950, 1957, 1955년 판이다. 함께 소장되어 있는 1959년과 1962년 책은 가로 11cm, 세로 16.5cm로 30쪽 내외의 분량이다. 14) 1941년 매일 첨례표 에만 예외적으로 양력의 날짜들이 아라비아 숫자로 기록되었다. 15)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소장한 책 중에는 1962년 매일 첨례표 부터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었 으며, 책을 보는 방식도 현대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기존의 검은색 이 아닌 녹색으로 인쇄되었다. 하지만 쓰기 방식은 여전히 세로쓰기를 유지하였다. 16)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58쪽. 17) 1866년 이전에 발행된 첨례표들은 상하 2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음력으로만 날짜가 표기되어 있다.

296 296 교회사연구 제42집 음력 날짜를 위 아래로 병기하고 그 아래에 주일과 주요 첨례(축일)의 명칭을 써 놓았다. 18) 매일 첨례표 가 매일의 전례 전반과 그날그날의 성경 장절을 표시한 반면 큰 첨례표는 주일과 주요 첨례의 날짜가 언제이 고 신자들이 지킬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안내하고 있다. 글자는 한글과 한자만 사용되다가 1954년부터 부분적으로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 되기 시작하였다. 성무일력 은 뮈텔 역시 사용하고 있었고, 19) 첨례표는 사목 방문 중 에도 가지고 다녔다. 20) 매일 첨례표 는 그가 교구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그도 사용하였을 것이나 기록상으로는 확인되 지 않는다. 전례력은 미사와 성무일도와 같은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업무 수행이나 일상생활 안에서도 요긴하므로 꼭 필요한 것 이었다. 뮈텔은 여행 중에도 일기를 썼으므로 그러한 필요성을 더욱 느꼈 을 것이다. 2) 발행과 보급 현대에 이르러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에서 총 괄하여 한국 교회 전체의 전례력을 발행한다. 하지만 과거의 전례력 발행 은 각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직접 관할해야 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 다. 이런 이유로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어 서울과 대구로 분리됨에 따라 두 교구는 각자의 첨례표를 발행하였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 18) 큰 첨례표는 가로, 세로 모두 3단으로 나뉘어 총 9면이 되도록 접힌 흔적이 있는데 판매할 때부터 그랬는지, 보관 과정에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19) 1909년 8월 라리보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문서번호 ). 20) 혼배 보례 6건. 견진자 4명, 노자 성체 1명. 길들은 강당에서부터 이 환자의 방까지 거적 또는 짚거적이 깔려 있었다. 40명의 고해자 중 병자 2명은 자기 집에서 고해를 했다. 첨례표를 잊고 왔기 때문에 그것을 보내 달라고 서울에 편지를 썼다 ( 뮈텔 주교 일기 1918년 12월 4일). 이 부분의 원문을 보면 les calendiers (첨례표들)이라는 복수 명사를 사용하는데 두 종류 이상 의 첨례표를 가리키는 듯하다.

297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297 표 1 큰 첨례표의 인쇄일 첨례표의 연도 인쇄일(연도는 좌측의 -1) 첨례표의 연도 인쇄일(연도는 좌측의 -1) 월 10일 월 12일 월 28일 월 27일 월 12일 월 27일 월 5일 월 27일 월 5일 월 27일 월 27일 월 28일 월 7일 월 12일 월 7일 월 12일 월 12일 월 12일 어 있는 첨례표들은 서울대목구의 것으로 1933년까지는 뮈텔 주교, 1942년 까지는 라리보 주교, 1954년까지는 노기남 주교의 이름으로 발행되었고, 1955년부터 천주교회 감준 이라는 명칭으로 한국 교회 공통으로 발행되 었다. 뮈텔 주교 일기 에는 교구장이 어떻게 첨례표를 발행하는지 나와 있다. 뮈텔은 8월 중순에서 9월 초순 사이에 이듬해의 첨례표(calendier) 를 자신이 직접 편집했다. 21) 그가 해외에 나가 부재중일 경우 권한을 위 임받은 부주교가 그 일을 대신하였다. 22) 이때 교구장은 성무일력 을 참 조하여 자기 교구의 첨례표를 작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3) 파리 외방전 21) 첨례표를 편집했다. 두세 신부가 점심 식사에 왔다 ( 뮈텔 주교 일기 1907년 9월 3일) ; 계속 더운 날씨이다. 1915년 첨례표를 편집했다 ( 뮈텔 주교 일기 1914년 8월 19일) ; 오늘 아침에 미사 참례자들이 매우 많았다. (음력) 18일이어야 하는데도 17일을 5월 1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가 첨례표에 잘못 기록하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뮈텔 주교 일기 1915년 4월 30일). 22) 나의 부재중 첨례표를 작성한 두세 신부는 주로 유럽인들과 일본인 교우들 때문에라도 오늘 소재 를 관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연하다 ( 뮈텔 주교 일기 1909년 1월 1일). 23) 성무일력 과 더불어 중국에서 먼저 발행되었을 중국 교회의 큰 첨례표를 참조하여 작성했을 가능 성도 있다. 삼천기도 등 중국식 용어들을 한국의 큰 첨례표에 그대로 사용한 것도 그 영향으로 생각된다.

298 298 교회사연구 제42집 교회 상하이 대표부에서 발행되는 성무일력 이 먼저 출판되어 각 지역 교회로 보급되면 거기에 나와 있는 주일과 축일, 양력과 음력을 대조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각 교구에서 지켜야 할 고유한 기념일, 즉 주교좌 성당의 봉헌일과 교구장 주교의 성성일 등을 첨가하면 교구의 고 유한 첨례표가 완성된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는 1925년까지는 9월 초순에서 10월 초까지 인쇄 시기가 일정하지 않다가 1926년부터는 9월 27일, 1930년부터는 10월 12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발행된 큰 첨례표는 11월 초부터 시작되는 가을 판공 이전에 각 지역 본당으로 보급되었다. 큰 첨례표의 맨 좌측 서지 사항 아래에 賣 捌 所 各 地 方 天 主 堂 이라고 명기하고 있듯이 보급소가 각 본당이었는데 판공 기간 중에 관할 신자들에게 판매되었다. 가격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 데 1935년의 첨례표 가격은 2전( 錢 )이었다. 24) 후대에는 우편 판매도 실 행되었는데 뮈텔 주교 재임기에는 그러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25) 3) 구성과 서지 1866년의 첨례표를 보면 가로가 길고, 세로가 짧은 한 장의 종이에 상 하 2단으로 되어 있으며 음력으로만 날짜가 표기되어 있다. 뮈텔 주교 재임기처럼 상 중 하 3단의 첨례표로 형태가 갖추어지고, 양력을 병기하 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인박해 이후 프랑 스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한 해가 1878년이므로 그 사이에는 조선에서 첨 24) 1935년 매일 첨례표, 39쪽. 당시 천주교 요리문답 은 12전이었다(같은 책, 32쪽). 25) 첨례표(내 1954년) 값 5환. 송료 1장 7환, 송료 1백장 55환, 송료 2배장 백환 ( 경향잡지 1027호, 1953년 10월 1일, 81쪽) ; 매일 첨례표 는 발행 후 얼마 안 되어 절판되었으므로 주문에 응하지 못함을 양해시라. 미구에 예수의 일생 화첩 이 나올 것이다. 작년 가을에 나간 성모의 일생 화첩 과 같이 오 주 예수의 일생을 191 상본으로 표시하면서 간단한 설명을 붙인 것이다 ( 경향잡지 1043호, 1955년 2월 1일, 94쪽).

299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299 례표 인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6) 모리스 쿠랑의 한국 서지 를 보면 1889년 기축년 첨례표 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장. 한글 cm. 유럽식 연도로 시작되고 끝나는 이 달력은 조선의 월 별로 구분되어졌다. 이 달력은 천주교의 행사를 조선식 날짜로 알려주고 있 다. 이 특별한 표식들은 일을 하지 않는 날들인 대파공, 파공, 야소성심회, 성모성심회, 성의회, 매괴회, 전교회, 미입회( 未 入 會 ) 등의 날짜들을 알려 주고 있다. 이 달력은 수평으로 3부분 나뉘어 있다. 끝에는 우리, 주교, 블 랑, 본감목 백준( 本 監 牧 白 准 )에 의해 인가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27) 이렇게 상 중 하 3단의 형태를 갖추고 세로글씨로 인쇄된 첨례표의 형태는 1967년 세로가 길고 가로글씨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첨례표의 구성과 형태는 일정하지만, 크기와 지질 은 일정하지 않다. 재질도 한지, 중질지, 미농지(기름종이) 등 다양한 용지 로 이루어져 있고, 같은 재질이라도 리그린의 함량이 차이가 있는 것도 있으며, 펄프의 조성이 각각 다르다. 연도별로 생산된 종이가 일정하지 않 기 때문입니다. 표 2 첨례표의 크기와 용지(1916~1933년) 연도 크기(cm) 지질 1916~1918 가로 54.5 세로 40 한지 1919 가로 48 세로 ~1933 가로 45.5~47.5 세로 34.3~35.3 중질지와 미농지의 중간 26) 방상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첨례표를 작성하여 사용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2013년 8월 17일 한국교회사연구자 모임에서 김정환의 년 첨례표 연구 발표 후 토론에서 밝힘). 27) 모리스 쿠랑, 이희재 역, 한국서지, 일조각, 1997, 699쪽.

300 300 교회사연구 제42집 3. 큰 첨례표의 내용 1 : 주일과 축일 1) 주간과 요일 첨례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은 주일과 축일이 음력으로 언 제인지를 주지시키는 데 있다. 1896년 1월 1일부로 양력이 공식적인 날 짜 계정으로 사용되었으나, 보편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여 일반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음력 체계가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28) 여기에 조선 전래의 생활과는 리듬이 다른 7일 단위의 주일 개념이 천주교 전례에 사 용되기 때문에 첨례표가 없으면 때에 맞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거의 불 가능하였다. 한 달보다는 작고 하루보다는 긴 단위가 일주간이라면 한국에서는 전 통적으로 두 개의 주간 개념이 존재하였다. 음력의 한 달을 상순, 중순, 하순으로 구분하는 10일 단위의 주간과 5일을 주기로 오는 장날에 적용되 던 5일 단위의 주간이 그것이다. 이렇게 주간 개념은 있었으나 주간의 하 루하루에 이름을 붙이는 요일의 개념은 없었다. 따라서 7일을 주기로 한 서양식 주일 개념과 그것을 세분하여 요일로 구분하는 것은 비신자들은 물론 신자들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이 주간 개념을 실생활에 적용하여 살 아간 최초의 인물로 홍유한을 꼽는다. 그는 조선에 유입된 천주교 서적을 통해 7일마다 주일( 主 日 )이 온다는 것을 알고 1770년에 7일, 14일 등 7의 배수가 되는 날을 주일로 삼아 교회의 계율을 실천하였다. 29) 홍유한이 양력을 알지 못한 채 음력을 바탕으로 주일을 계산한 것과 28) 내일부터 시행될 새로운 연호를 알리는 또 다른 포고령도 실리다. 조선 왕조 개국 505년은 유럽의 달력 혹은 태양력( 太 陽 曆 )이 처음으로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태양을 세움, 즉 建 陽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연호는 왕의 치세 각각에 대해서 단 한 번만 사용될 예정이다 ( 뮈텔 주교 일기 1895년 12월 31일). 29)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54~55쪽.

301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01 달리,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한 이후에는 양력에 기준을 둔 주일 개념이 자 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중적인 달력이 보급되지 않았고, 30) 더구나 양력 날짜를 쉽게 알 수 없었던 시기에 신자들이 그것에 맞춰 주일과 축일을 지켜나가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음력과 양력이 병기되어 있는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에서도 역시 주일의 표시는 중요한 요소였다. 거기에는 한 해의 52(혹은 53) 쥬 일 이 빠지지 않고 표시되어 있는데 현대의 전례력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표 3 큰 첨례표와 현재 전례력의 비교 큰 첨례표의 주일 장림 주일 삼왕내조 후 주일 봉재 전 주일 봉재 후 주일 부활 후 주일 강림 후 주일 현재 전례력의 주일 대림 제 주일 연중 제 주일 사순 제 주일 부활 제 주일 연중 제 주일 큰 첨례표에서 주일을 계산해 나갈 때 기점이 되는 날은 장림 1주일, 삼왕내조(주님 공현 축일), 봉재수일( 封 齋 首 日, 재의 수요일), 예수 부활, 성신 강림 주일이다. 오늘날 연중 주일 로 불리는 기간은 삼왕내조와 성 신 강림을 기준으로 하여 ~후 주일 로 표시되었는데 명칭은 다르나 기 30) 조선 후기에 시헌력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기는 하였으나, 일반 서민들을 위한 달력의 형태는 아니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큰 첨례표의 경우 순 한글로 되어 있고, 구매하여 쉽게 볼 수 있는 달력이 어서 대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302 302 교회사연구 제42집 준점은 동일하다. 큰 첨례표를 눈여겨보면 현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요일 개념이 아 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일마다 쥬일 은 표시되어 있으나, 주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오는 첨례나 재계를 설명할 때는 영복 날, 통고날, 첫첨례 六, 첫첨례 七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요일 개념이 희박하던 때에 한국 교회는 신자들이 요일을 인식할 방 법을 고민한 듯하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를 통해 계산하는 법과 주일을 첫째 날로 따져 숫자로 계산하는 법이었다. 표 4 큰 첨례표의 요일 표기 요일 일 월 화 수 목 금 토 첫째 둘째 묵주기도식 요일 주일 환희 통고 영복 환희 통고 영복 숫자식 요일 一 二 三 四 五 六 七 1~7의 숫자로 요일을 세는 방법은 조선 후기 박해 시대 때에도 있 었다. 기해일기 를 보면 정하상 순교자가 자주 첨례 육 을 지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31) 뮈텔이 작성한 첨례표에서 숫자식 요일, 즉 첫첨례 六 (첫 금요일)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1년부터다. 32) 매월 첫 금요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에서 나왔는데 뮈텔 주교 일기 에는 첫 금요일 (1er Vendredi 혹은 Premier vendredi) 33) 이라고 나온다. 요일 개념에 익숙한 선교사들에게는 그대로 쓸 수 있는 용어였으나 동양의 신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 31) 하성래 감수,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97, 77쪽. 32) 1921년 큰 첨례표. 33) 뮈텔 주교 일기 1905년 6월 2일 ; 1923년 2월 2일.

303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03 국에서 사용되던 숫자식 요일 계산법으로 산정한 첫첨례 五, 첫첨례 六, 첫첨례 七 (첫 토요일)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는데 한국 교회에서는 첫첨 례 오, 육, 칠을 지칭할 때만 사용될 뿐 다른 때에는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한국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일 계산법은 묵주기도식 방법 이었다. 1916년 큰 첨례표부터 통고날, 영복날 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데 1950년까지 줄곧 사용되었다. 옛날의 묵주기도는 환희(환희의 신비), 통고(고통의 신비), 영복(영광의 신비)이 월-화-수, 목-금-토의 단위로 반 복되었다. 따라서 첫 영복날 은 영광의 신비를 처음으로 바치는 요일, 즉 수요일을 뜻하고, 둘째 영복날 은 토요일을 뜻한다. 1866년 첨례표에는 이런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을 보아 묵주기도식 요일 계산법은 박해 시 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의 요일 표기는 1896년 발행된 시헌력에도 등장하지만, 34) 대중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큰 첨례표에서 7요일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43년이다. 1942년 과 이듬해의 일러두기를 비교해보면 1943년에 둘째 통고날 (금요일), 첫 영복날 (수요일)이라고 부가적으로 요일을 사용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표 5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 비교(1942, 1943년) 1942년 첨례표의 일러두기 1943년 첨례표의 일러두기 그저 소재날은 주년 내 매주일 둘째 통고날 사계와 봉재 때에 첫 영복날 성신강림 전일과 성모몽소승천일 그저 소재날은 一, 주년 내 매주일 둘째 통고날(금요일) 二, 사계와 봉재 때에 첫 영복날(수요일) 三, 성신강림 전일과 성모몽소승천일 34) 이창익,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창비, 2013, 89~90쪽.

304 304 교회사연구 제42집 묵주기도식 요일 계산법은 1951년부터는 더 이상 첨례표에 나타나 지 않는다. 나아가 1967년부터는 아예 첨례표의 중심란에 날짜와 더불어 요일이 병기되기 시작한다. 35) 이때부터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고, 날짜 표기에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었으며, 첨례표가 축일표 로 이름이 바뀌는 등 현대적 양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신자들 안에서 현대식 요일 개념이 보편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하나의 징표다. 이상에서 살펴본 주일과 요일 개념의 정착 과정은 5일이나 10일 개 념의 전통적 시간 단위 안에 7일 단위의 주간과 요일이라는 낯선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큰 첨례표가 신자들에게 왜 필요했는지 를 말해준다. 기존의 시간 개념 안에 살아갈 수밖에 없고, 현대처럼 주간 개념으로 정착된 달력이 없던 시대에 살던 이들에게 큰 첨례표가 없으면 주일과 축일, 각종 재계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2) 축일과 고유 기념일 (1) 부활절 관련 축일 축일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의 핵 심인 부활과 성탄 시기의 날짜와 재계를 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인들의 축일을 표시하는 것이다. 우선 가장 중요하고 기간이 긴 것은 부활절을 전후한 시기이다. 이 기간은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관련이 있는 봉재 전의 3주일, 성신 강림 후의 몇몇 축일을 포함하면 그 기간이 네 달을 넘기 때문에 첨례표의 축일 중 가장 많은 35) 1967년 축일표.

305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05 표 6 부활절 관련 축일 축일 이름 현재의 명칭 봉재 전 3, 2, 1주일 없어짐 성회례 봉재수일 재의 수요일 봉재 후 1~4주일 사순 제1~4주일 고난 주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지 주일 건립성체대례 성 목요일 예수 수난 성 금요일 망 예수 부활 부활 성야 예수 부활 주일 예수 부활 대축일 일이부 첨례(부활 후 월, 화요일) 부활 팔일 축제(부활 주일부터 8일) 사백 주일 부활 제2주일 부활 후 2~5주일 부활 제3~6주일 삼천기도(예수 승천 전 3일) 없어짐 예수 승천(목요일) 주님 승천 대축일(주일) 성신 강림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일이부 첨례(강림 후 월, 화요일) 없어짐 성삼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 성체 첨례(목요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성체 거동(강림 후 2주일) 예수 성심 첨례(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금요일) 부분을 차지한다. 예수 부활 주일은 춘분이 지난 만월 후 첫 일요일이어서 음력으로 계산되므로 해마다 그 날짜가 다르다. 따라서 봉재 기간의 첫날(봉재수일) 도 매년 다르기 때문에 봉재 전 3주일(칠순 주일)도 시작 시기가 달랐 다. 36) 봉재 기간(사순절)이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면 봉재 전 주 36) 흔히 봉재 전 3주일은 칠순 주일, 봉재 전 2주일은 육순 주일 이라 불렀다.

306 306 교회사연구 제42집 일 은 봉재를 준비하기 위한 기간에 해당한다. 37) 봉재 기간은 지켜야 할 재계들이 가장 많은 때였다. 매주 금요일에는 대재(금식재)를 지켜야 하고,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에도 대재를 지켜야 한다고 첨례표에 기록되어 있다. 평일에도 매주 금요일은 소재(금육재)를 지켜야 하므로 봉재 기간 금요일에는 소재도 적용되었으며, 더불어 봉재 기간에는 매주 둘째 영복날 (토요일)에도 소재를 지키라고 첨례표 좌측 하단의 일러두기에 적혀 있다. 그만큼 희생과 극기가 강조되고 있었다. 부활 시기에 이르면, 지금은 부활 주일을 포함하여 8일을 부활 팔일 축제 로 지내는데 첨례표에는 부활 주일 후 월, 화요일을 일이부 첨례 로 지냈다. 한편 첨례표에는 성신 강림 주일 후 월, 화요일에도 일이부 첨 례 38) 를 거행하도록 표시하였는데 현재의 전례력에는 없는 축일이다. 이 것을 보면 과거에는 부활 주일과 성신 강림 주일을 같은 비중으로 생각했 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연중 시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표현할 때 강림 후 주일 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성신 강림을 그만큼 더 중요하게 생각 했다는 반증이다. 현대와 비교해볼 때 예수 승천 첨례와 성체 첨례(성체 거동 포함)에 37) 조선 후기 박해를 받을 때의 순교자나 성덕을 갖춘 인물들의 전기를 보면 덕행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로 봉재 기간에 얼마나 극기를 실천하였는지를 제시하곤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이런 전통은 박해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80년대 초반 까지 일부 교구에서는 사순절 교서를 별도로 발표하여 극기와 보속의 기간을 보내도록 교구장이 독려한 것을 보면 현재 정기적으로 교서가 발표되는 부활절과 성탄절에 못지않은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김정환, 대전교구장들의 교서 이해, 교우들에게 : 대전교구장들의 교서, 대전교구사 연구소, 2007, 432~437쪽). 38) 부활과 성령 강림 후의 일이부 첨례는 본래 8부(octave)인데 한국 교회의 사정을 고려하여 일이 부로 간소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6년 이후의 첨례표에는 일이부 로 표시되어 있으나 본래는 팔일이부 라는 표현이었다(1866년 첨례표 참조). 뮈텔 주교 일기 에도 성령 강림 후에 8부 (octave)가 온다고 적혀 있으나 첨례표에는 일이부 로 기록한 것도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뮈텔 주교 일기 1898년 5월 28일 참조). 이 일기의 내용을 참조한다면 저성 첨례 후에도 본래는 8부 축일(octave de la Toussaint)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발행된 첨례표에는 그 기록이 전혀 없다.

307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07 대한 비중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첨례표에는 승천 첨례 전에 삼천기도 를 하라고 되어 있다. 삼천( 三 天 )은 삼일( 三 日 )을 뜻하는 중국식 표현으로 삼 일기도 를 말하는데 승천 첨례(당시에는 목요일) 이전 월, 화, 수요일에 거행되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성체 첨례의 경우 성체 거동과 짝을 이루 는데 첨례표에는 주일에 성체 거동을 거행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성 체 거동을 사정에 따라 선택적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의무 축제라는 것 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지역별로 한 본당을 정하여 거행되는 성체 거동에 는 주변 본당 신자들이 함께 동참하여 큰 축제를 이루었다. 뮈텔 주교 재 임기인 1903년 처음으로 성체 첨례와 더불어 거행된 성체 거동은 그의 재임기는 물론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39) 이전에는 파공 축일이었던 성체 첨례가 1902년부터 파공이 아닌 축일로 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에서는 매년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40) (2) 성탄절 관련 축일 양력 12월 25일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성탄절 관련 축일은 부활절에 비해 기간이 짧다. 큰 첨례표에 나오는 성탄 관련 축일은 큰 틀에서는 오늘날과 큰 차이 가 없다. 1월 1일과 2일의 예수 할손례 와 찬송 예수 성명 이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로 통합되고, 1921년 이전에는 없던 성가 첨례 가 성가정 축일 이라는 이름으로 날짜를 변경하여 기념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성탄 때부터 기념되는 성탄 팔일 축제 가 큰 39) 성체 첨례. 용산에서는 대첨례이다. 9시 30분에 주교 대례 미사. 이어 신학교 구내에서 성체 거동이 있었다. 아침에는 비가 올 듯한 날씨였으나 미사 중에 개기 시작해서, 성체 거동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에서 거행된 최초의 성체 첨례날의 성체 거동인 것이다. 서울과 제물포의 신부 전원, 그리고 선박의 지도 신부가 참석했다 ( 뮈텔 주교 일기 1903년 6월 11일). 40) 나는 9시 반 미사를 드리고 나서, 폐지된 파공 첨례인 아름다운 성체 첨례가 완전히 간과되어지 지 않기를 바라며 성체를 내모셨다 ( 뮈텔 주교 일기 1902년 6월 1일).

308 308 교회사연구 제42집 표 7 성탄 관련 축일 축일 이름 장림 수주일 장림 2주일 장림 3주일 장림 4주일 망 예수 성탄(12월 24일) 예수 성탄(12월 25일) 성 스테파노 수선치명(12월 26일) 성 요왕 종도 겸 성사(12월 27일) 저성 영해 치명(12월 28일) 예수 할손례(1월 1일) 찬송 예수 성명(1월 2일) 삼왕내조(1월 6일) 성가 첨례(1922년부터 삼왕내조 후 첫 주일) 삼왕내조 후 주일들 현재의 명칭 대림 제1주일 대림 제2주일 대림 제3주일 대림 제4주일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예수 성탄 대축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성탄 팔일 축제 주님 공현 대축일(1월 2~8일 사이 주일) 성가정 축일(1969년부터 성탄 후 첫 주일. 주일 없는 경우 12월 30일) 연중 주일들 첨례표에는 없는데 이는 성교회 원첨례표에는 일이부뿐 아니라 팔부첨 례이나, 교우들이 쓰는 첨례표에 일이부를 두지 않음은 성탄 후 연3일에 다른 큰 첨례가 있기 때문이다 41) 라는 경향잡지 의 기사에서 보듯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3) 보편 교회의 축일 연례 축일은 특정한 성인과 천사, 중요한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는 고 정된 기념일이다. 축일은 보편 교회 전체가 공통으로 기념하는 날이 있고, 41) 경향잡지 329호, 305쪽.

309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09 각 지역 교회 안에서 한정적으로 기억하는 고유의 축일이 있다. 큰 첨례표 에 나타나는 보편 교회의 축일과 현대의 그것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 8 연례 축일 축일 이름 현재의 명칭 1월 25일 성 바오로 귀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월 2일 성모취결례 주님 봉헌 축일 2월 25일 성 마지아 종도 성 마티아 사도 축일(5월 14일) 성 요셉 보천하 대주보 은보 (부활 후 2주일 주간 수요일) 성 요셉 대축일(3월 19일) 3월 21일 성 분도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7월 11일) 3월 25일 성모 영보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4월 25일 성 말구 성사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5월 3일 심획십자성가 없어짐 6월 24일 성 요한 세자 탄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6월 29일 성 베드로 바오로 이위 종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7월 2일 성모 왕고 엘리사벳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 31일) 7월 16일 성모 성의 없어짐 7월 22일 성녀 막다리나 성녀 막달레나 기념 7월 25일 성 장 야고버 종도 성 야고보 사도 축일 7월 26일 성부 안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8월 5일 성모 설지전 없어짐 8월 6일 예수 현성용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8월 10일 성 노렌죠 치명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8월 15일 성모몽소승천 성모 승천 대축일 8월 24일 성 발도로메오 종도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9월 8일 성모성탄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9월 14일 성가 광영 성 십자가 현양 축일 9월 15일 성모 칠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9월 21일 성 마태오 종도 겸 성사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9월 24일 성모 입속로회 없어짐

310 310 교회사연구 제42집 축일 이름 현재의 명칭 9월 29일 성 미카엘 대천신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10월 2일 호수천신 수호천사 기념일 10월 7일 매괴 첨례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 10월 18일 성 루가 성사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10월 28일 성 시몬, 다두 이위 종도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11월 1일 저성 첨례 모든 성인 대축일 11월 2일 추사이망 위령의 날 11월 21일 성모 자헌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종도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12월 3일 성 방지거 사베리오 동국 대주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12월 8일 성모시잉모태 조선 성교회 대주보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12월 21일 성 도마 종도 성 토마스 사도 축일(7월 3일) 큰 첨례표와 현재의 전례력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축일은 명칭이 현대 식으로 바뀌거나 그 날짜가 변경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유지되 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것은 마리아 관련 축일로 명칭이 바뀌거나 축소 혹은 폐지되었다. 성모취결례(2월 2일)는 주님 봉헌 축일 로, 성모 영보(3월 25일)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 심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성모 성의(7월 16일), 성모 설지전(8월 5일), 성 모 입속로회(9월 24일) 42) 축일은 폐지되었다. 폐지된 또 하나의 축일은 5월 3일의 심획십자성가( 尋 獲 十 字 聖 架 )로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를 땅속에서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날 이다. 이 축일은 그 십자가 조각을 의미하는 보목( 寶 木 )과 연결되는데 그 42) 성모 입속로회 : 13세기에 세워진 자비 수도회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자비의 성모 축일 (9월 24일)을 의미하는 듯하며 1696년부터 전례력에 삽입되었다( 마리아 축일, 한국가톨릭대사 전 4,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2411~2415쪽).

311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11 것을 공경하는 신심이 널리 퍼져 있었다. 1844년 김대건 신학생이 소팔가 자에서 쓴 편지에 보목을 보내주기를 청하는 내용이 있고, 43) 1921년 뮈 텔이 홍콩 방문 중 성 금요일에 보목을 공경하는 의식을 거행한 기록이 있다. 44) 지금도 국내의 몇몇 곳에는 보목으로 알려진 유물들이 있으나 보 목을 공경하는 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45) 보편 교회의 축일은 실생활에 필요한 절기를 인식하는 데에도 유용하 게 사용되었다. 옛 신자들이 흔히 말하는 세자 요한 첨례 때면 장마가 온다, 베드로 바오로 첨례 때는 늦은 모를 심기에 적당하다, 몽소승 천 때에 김장 배추 씨를 심는다 는 등의 표현은 신앙심의 표출을 넘어 현실적 절기 인식의 방법이었다. 특히 6월 29일 베드로 바오로 첨례 를 전후한 시기는 모내기를 할 수 있는 가장 늦은 절기로, 이때 모를 심지 못하면 한 해의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비신자들도 신자들에게 그 첨례가 언제 오느냐를 묻곤 하였다고 한다. 46) 농사에 필요한 절기들은 태양력으로 계산이 되기 마련인데 음력을 기 준으로 생활을 하는 대중들에게 그것을 헤아려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았 다. 때문에 해의 길이로 미루어 짐작하거나 식물이 자라나는 현상들을 보 아 농사의 때를 짐작하곤 하였는데 양력으로 고정되어 있는 축일들은 절 기 인식에 유용한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매년 발행되는 큰 첨례표 에 축일의 날짜와 그에 해당하는 음력 날짜가 표기되므로 큰 첨례표는 실 생활 안에서도 유용했던 달력이었다. 43) 존경하올 신부님, 만일 가능하시다면 성경과 영신수련을 위한 매일 묵상책과 보목, 상본, 특히 성모님의 무염시태 상본과 십자고상과 묵주 그리고 깃털 펜을 깎는 칼도 함께 보내주시기를 청합 니다 ( 이 빈 들에 당신의 영광이, 68쪽). 44) 예수 수난. 의식이 9시에 나자렛에서 노래로 거행되었다. 오후 3시에 베다니아에서 성로 신공이 있었고, 6시 15분에는 보목( 寶 木 ) 경배가 있었다 ( 뮈텔 주교 일기 1921년 3월 25일). 45) 대전교구 합덕 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에 보목이 보존되어 있다. 46) 전주교구 김진소 신부의 증언.

312 312 교회사연구 제42집 (4) 지역 교회의 축일 첨례표에는 한국 교회에서 고유하게 지키는 축일들이 표시되는데 뮈 텔이 작성한 첨례표에는 4개의 고유 첨례가 있었다.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첨례날에 봉헌식을 가진 명동 주교좌 성 당은 축성 기념일을 그 첨례날로 정해야 했으나, 뮈텔이 주교의 직권으로 저성 첨례(11월 1일) 팔부 축일이 끝나는 다음 주일로 정하였다. 성신 강 림이 대축일이어서 축성 첨례를 위한 고유 기도를 성무일도에 넣을 수 없 어서 매년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과 이 때문에 프랑스의 동료 선교사들과 성무일도와 축일을 함께 기념할 수 없기 때문에 정교조약에 따라 프랑스 내의 성당들이 공동으로 축일을 지내는 날을 택하여 정하였다. 47) 뮈텔은 교구장으로서 선포한 규정에 따라 그 이듬해부터 1914년까지 매년 11월 에 성당 축성 첨례를 기념하였다. 48) 하지만 1915년부터 봉헌식이 거행된 표 9 서울대목구의 고유 첨례(1916~1933년) 첨례 이름 5월 29일 경성교구 본회 성당 축성 첨례 9월 21일 마태오 종도 겸 성사. 본 감목 승품일 9월 26일 조선 치명 복자 79위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조선 성교회 대주보 비고 명동 주교좌 성당 봉헌 축일 뮈텔 주교 성성일 1927년부터 기념하기 시작 한국 교회의 주보 축일 47) 성당 축성 준비를 위해 대재를 지켰다. 성석( 聖 石 )에 넣을 성유골과 증서( 證 書 )를 준비했다. 성유골은 제농성인의 동료 순교자들의 것으로 그 유해는 로마 성밖 성 바오로 대성전 구역, 스칼 라 캘리(Scala Caeli) 성당에 모셔져 있다. 저녁 6시 반, 순교자들 무덤의 문 앞 지하 성당에 모신 성유골 앞에서 부활 시기의 순교자들을 위한 조과( 朝 課 )와 찬과( 讚 課 )를 바쳤다. 나는 거기 에 모인 공동체 앞에서 성당을 축성하는 주교에게 축성일이 아닌 다른 날에 축성 첨례를 정할 수 있는 주교 의식서의 규정에 의거하여 이렇게 선언했다. 가능한 한 파리 신학교의 우리 동료들 과 성무일도와 축일을 함께 지내고, 또 성신 강림 대첨례와 그 8부( 八 部 ) 때문에 성당 축성 축일 의 성무일도를 이 기간에 넣을 수 없으므로 이 때문에 오는 성당 축성 첨례의 8부를 위해 매년 특별한 첨례표를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저성 첨례 8부 다음 주일로, 즉 정교조약 ( 政 敎 條 約 )에 의해 프랑스의 교회들이 그들의 성당 축성 축일을 지내는 날을, 서울의 성모무염시 태 (준)대성당의 축성 기념일로 정한다 고 했다 ( 뮈텔 주교 일기 1898년 5월 28일). 48) 뮈텔 주교 일기 1899년 11월 12일 ; 1914년 11월 15일.

313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13 5월 29일을 축일로 정하고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49) 결국 프랑스 교회와 그곳의 동료들에 중점을 두어 축성 축일을 지내던 것을 한국 교회 내에서 의미가 있는 날로 택하게 된 것이다. 9월 21일 본 감목 승품일 은 뮈텔이 주교로 성성된 날을 기념하는데 주교 성성일의 표시에 있어 부교구장 주교의 경우는 제외되었다. 1921년 과 1927년 5월 1일에 각각 서품된 드브레 주교와 라리보 주교의 성성일 은 첨례표에 표시되지 않았다. 50) 뮈텔은 부주교가 임명된 후 대부분의 일 을 위임하였는데 교구장으로서 꼭 담당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였 다. 특히 사제 양성에 관련된 일, 예를 들어 신학생들의 시험을 직접 주관 하거나 서품식을 거행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위임하지 않았다. 첨례표에 표시된 교구장 주교만의 승품 기념일은 그 교구의 최고 장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9월 26일 조선 치명 복자 79위 첨례 는 1927년부터 기념하였다. 뮈 텔 주교는 자신이 신부일 때부터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해 부단히 노 력하였고 그 결과 1925년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축일로 제정되어 1927년 9월 26일에 처음 거행되는 이 첨례는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 기에 최대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51) 순교 복자들의 여러 그림을 걸어 장 49) 뮈텔 주교 일기 1915년 5월 30일 ; 1916년 5월 29일 ; 1916년 첨례표. 50) 뮈텔 주교의 사망으로 라리보 주교가 서울대목구장을 승계한 이후에는 그의 성성일이 표시되었다. 51) 우리 복자 첨례. 아침 미사에서 영성체자들이 많았다. 10시에 주교석에서 나의 참례와 더불어 보좌 주교석에서 라리보 주교의 주교 대례 창미사. 용산에서 전원 참석. 주교의 성대한 입장. 복자 성화들이 전시되었는데, 79위 복자 찬양 그림은 대성당의 정면에, 다른 두 그림, 복녀 김 골롬바의 순교, 복자 유 베드로의 형벌 그림은 좌우의 두 제대 앞에 전시했다. 참례자들, 특히 여자들이 많았다. 두 학교의 참례 덕분에 대성당이 가득 차 보였다. 그저께 저녁에 돌아온 사우어 주교가 우리와 같이 점심 식사를 하러 왔다. 6시에 용산의 김 요셉( 金 善 永 ) 신부에 의한 복자 찬양 연설, 이어 유해 친구, 끝으로 내가 주재한 장엄한 성체 강복. 유해를 친구하는 동안 특별석 에서 조선말로 번역된 순교자 찬가 를 불렀고, 모든 어린이들이 일제히 후렴을 되풀이했다. 매 우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파이프오르간은 후렴 반주를 하고 또 성가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크게 연주했다 ( 뮈텔 주교 일기 1927년 9월 26일).

314 314 교회사연구 제42집 식하고 용산의 신학생들이 전원 참석하는 가운데 특별 강론, 성체 강복, 유해 친구로 이어졌고, 샤를르 구노가 한국 교회 순교자들을 기리며 작곡 한 순교자 찬가 52) 를 제창하였다. 뮈텔은 1926년부터 이 노래를 명동 고아원의 성가대 아이들과 용산 신학생들에게 연습을 시켜 즐겨 부르게 했고, 이후 순교 복자 축일에는 빠짐없이 부르게 했다. 12월 8일 성모무염시태 첨례는 보편 교회의 축일이며 동시에 한국 교회의 주보성인 축일이었다. 파공을 지킬 축일은 아니지만, 용산 신학생 들을 명동 주교좌 성당으로 다 오게 하고 주교 대례 미사로 거행하며 축일 을 지냈다. 4. 큰 첨례표의 내용 2 : 일러두기와 각종 규정 1) 일러두기의 내용 큰 첨례표에서 주일과 축일의 표시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항 이 신앙생활을 위해 신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들과 그에 따른 은사를 표시 해 주는 것이다. 별도의 일러두기와 기호를 통해 큰 첨례표 전반에 걸쳐 관련 내용들이 표시되어 있다. 상, 중,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첨례표의 맨 아랫단 좌측에는 일러 두기난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신자들이 지켜야 할 중요 내용들이 적혀 있다. 1916~1933년 큰 첨례표는 발행되는 해에 따라 약간의 변동은 있으 나 큰 틀은 계속 유지되는데 대사 관련 규정, 파공과 대송, 사순절과 대림 절의 재계, 단식재와 금육재의 순으로 되어 있다. 52) 지금은 가톨릭 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 로 되어 있다.

315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15 표 년과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 비교 186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 장림 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는 혼인의 음식과 의복을 화려히 하는 이를 엄금하노라. 예수 성체와 성 요한 세자 탄일과 성 베드로 바 오로 세 날은 농사하는 사람에게 가장 긴급한 때 라. 이러므로 주교가 교화황의 은혜를 받자와 파 공은 특별히 관면하되 첨례는 마땅히 지킬 것이 오 세 날 중에 만일 주일이 겸하였으면 그날은 관면을 못할 것이오 농사 아니한 사람은 이 관면 중에 두지 아닌 것이니 전대로 지킬지니라. 이는 파공 보람이오, 이는 대파공 보람이 니 마땅히 전일 파공할 것이오, 이는 파공 아 닌 보람이라. 十 이는 공번된 보람이니 회에 든 이나 아니 든 이나 모든 교우가 고해 영성체하고 마땅이 행할 신공을 지키면 전대사를 얻나니라. 매괴회 보람, 성의회 보람, 예수성심회 보람, 성모성심회 보람, 전교회 보람. 매 양 자기 든 회 보람을 나간 회우가 고해 영성체 하고 마땅히 행할 신공을 지키면 전대사를 얻을 지니라. 예수성심회 규구 : 지극히 달고 단 우리 예수 성 심아 나를 주사 항상 너를 간절히 사랑케 하소 서. 천주경 성모경 종도신경 각 한 번.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 아무 교우를 의논치 말고 이 보람 있는 첨례 에 가히 대사를 얻을 것이요 회에 든 자는 본 회 보람 있는 첨례에 가히 전대사를 얻을 것이로되 도모지 마땅히 고해 영성체하고 교화황의 뜻대 로 기도하여야 이에 전대사를 얻을 지니라. 성교회의 엄한 법이 주일과 파공 첨례에 교우가 다 마땅히 미사에 참례할 것이요 할 만하되 아니 하고 비록 주일 첨례경을 외오나 대죄를 면치 못 하리니 오직 신부 계신 지방이 과히 멀거나 혹 달리 조당 있는 이는 가히 정한 경문 외움으로써 미사 참례치 못함을 기울 것이요 또 주일과 파공 첨례에 종일 육신 일을 그칠 것이니 오후에 부득 불 일할 연고가 있는 교우는 다 마땅히 성사 때 마다 본당 신부께 관면을 얻을 것이요 가장이 제 집안사람을 위하여 관면 받는 것이 또한 가하되 오직 대파공에는 관면이 도모지 없느니라. 장림 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 혼인의 즐거운 잔치 화려함을 성 교회에서 엄금하느니라. 교종의 명령을 받들어 봉재 안의 주일날과 각 주 일의 첨례 이와 삼과 오에 소재 관면을 허락하되 한자리에는 육찬과 어찬을 겸하여 먹지 못할 것 이요 다만 건립성체대례날에는 소재를 의례대로 지킬지니라. 교종께서 조선 교우를 측은히 여기사 이왕 허락 하신 관면 외에 또 매 주일 둘째 영복날과 대첨 례 전날 소재를 감하셨으매 본분으로 지킬 소재 는 다만 좌에 기록한 날뿐이라. 매 주일 둘째 통고날 봉재 때와 사계 소재에는 첫 영복과 둘째 영 복날 건립성체대례날 대재와 소재 날에 돼지기름과 닭의 알 먹기를 허 락하였으나 대재날 저녁 요기에는 닭의 알을 못 먹을 것이요 예수 수난 본 날에는 낮에도 닭의 알을 금하노라. 이후에 관면을 준행하는 자는 마 땅히 봉재 때에 혹 애긍하며 혹 주일마다 매괴 오단을 외옴으로써 궐함을 기울지니라.

316 316 교회사연구 제42집 이전 시기와의 변화를 비교하기 위해 현존하는 첨례표 중 서로 가장 가까운 시기인 1866년과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를 비교해보면 위 와 같다. 두 큰 첨례표는 서술과 순서상의 다름은 있으나, 전체 내용은 비슷한데 그 가운데에서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1866년 큰 첨례 표에는 모내기 철에 오는 성체 첨례, 세자 요한 첨례, 베드로 바오로 첨례 세 날에 주어진 파공 관면이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에는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뮈텔 주교 일기 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성체자들이 많았다. 교우들은 첨례표에 따라 오늘 성 요한 세자 첨례를 지킨다. 파공 첨례는 아닌데 그런 사실을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공연 히 그들을 놀라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뮈텔 주교 일 기 1912년 6월 24일). 위의 기록들을 참조할 때 1866년에 이미 주어진 성체 첨례, 요한 세 자 첨례, 베드로 바오로 첨례의 파공 관면 규정이 박해 시대 이후에는 한 동안 적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912년 6월 이전에 파공 첨례가 아닌 것으로 다시 규정이 바뀌었고 1913년부터는 큰 첨례표에 그 바뀐 내용이 적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1916년 큰 첨례표에는 세 첨례 날에 표, 즉 파공이 아닌 첨례로 표시되어 있어 바뀐 규정이 반영 되어 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1916년에 이르러 파공 규정이 약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1866년의 일러두기에는 파공 관면이 있는 첨례라 하더라 도 주일인 경우에는 관면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1916년에 이르면 주 일 오후부터는 관면이 적용된다고 되어 있다. 1866년과 1916년 큰 첨례표의 다른 부분들도 비교해보면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첫째, 1866년에는 주일 외의 다른 요일 표기가 없다. 1916년 큰 첨례표에는 이 시기부터 고유하게 나타나는 묵주기도식 요일 표기가

317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17 있고, 1921년부터는 첫첨례 육 과 같은 숫자식 요일 표기도 등장하는데 1866년에는 그런 요소들이 없다. 둘째, 1866년에는 없던 성체 거동 표 시, 지역 교회의 고유한 축일 표시, 성 요셉 축일의 동국대주보 라는 표 시 등이 1916년에는 나타난다. 이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가시적 인 변화이다. 성체 거동의 경우 1903년 6월 용산 신학교에서 처음 거행 되었는데 이것은 박해 시대에는 거행될 수 없는 축일이었다. 53) 2) 대사 관련 규정 죄에 따른 벌, 즉 잠벌을 면하기 위한 보속을 대신할 수 있는 대사( 大 赦 )를 얻는 것을 옛 신자들은 중요하게 여겼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교회에서 규정한 기도나 선행 등을 합당한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인데 큰 첨례표에서 제시하는 첫 방법은 표시(보람) 54) 가 있는 첨례에 참례하 는 것이었다. 그 첨례들은 예수 성탄, 예수 부활, 성신 강림, 성모 승천의 4대 대축일이다. 은사회에 가입한 사람은 그 회의 표시가 있는 날에 고해성사와 영성 체를 하고 교황의 뜻대로 기도하면 전대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표시(보 람)와 은사회는 -예수성심회, -성모성심회, -성의회 보람, -매괴 회, -전교회, 十-성가회(혹은 ) 등이 있었다. 은사회( 恩 赦 會 )는 이름 그대로 은사를 얻기를 바라면서 자유로이 가입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가입 할 의무는 없었지만 아무나 가입할 수도 없다고 규정하였다. 55) 견진성사 를 받은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었고, 단지 은사만 얻을 목적으로 가입하여 좋지 않은 표양을 보이는 것을 경계하였다. 큰 첨례표의 은사회 표시는 53) 뮈텔 주교 일기 1903년 6월 11일. 54) 보람 :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거나 다른 물건과 구별하기 위하여 해두는 표적을 뜻하는 옛말. 55) 르 장드르, 이영춘 역주, 회장직분, 가톨릭출판사, 1999, 202~204쪽.

318 318 교회사연구 제42집 1967년 축일표 로 이름이 바뀌고 가로쓰기 양식의 새로운 첨례표가 발행 된 이듬해인 1968년부터 없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사 교리 가 약화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3) 파공과 대송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에서 두 번째로 강조되는 것은 파공과 대송 규 정이다. 주일과 축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육체노동을 삼가는 파공( 罷 工 ) 규정은 -대파공 축일, -파공 축일, -파공 아닌 축일 셋으로 나뉘 어 있었다. 대파공 축일( )은 어떤 이유에서건 일체의 육체노동을 금하는 날로 예수 성탄, 예수 부활, 성신 강림, 성모 승천의 4대 대축일이 여기에 해당 한다. 파공 축일( )은 모든 주일과 예수 승천 축일, 원죄 없으신 성모 마 리아 축일, 모든 성인의 날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날은 부득이한 경우 오후에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데 오전에 미사나 공소 예절에 참례 하고 본당 신부로부터 관면을 얻거나, 성사 때 미리 관면을 얻은 경우에만 허락되었다. 집안사람의 경우 가장이 대표로 관면을 받았고, 공소의 경우 신자들을 대신하여 회장이 관면 받을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관면을 받 거나, 아예 판공 때 본당 신부가 1년 동안 관면 받을 사람들에게 손을 들 라고 하여 그것을 허락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56) 파공 아닌 축일( )은 주 일이 아닌 일반적인 축일로 파공의 의무는 없으나, 경건하게 지내도록 권 고하였다. 대송 규정은 대파공과 파공 축일에 부득이 미사나 공소 예절에 참례하 지 못하는 경우 교회가 규정한 기도를 바침으로써 대신함과 동시에 파공의 56) 전주교구 김진소 신부의 증언.

319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19 의무도 함께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대송은 기도서에 있는 주일경과 축일 기도문을 찾아서 바쳐야 하는데, 글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 십자가의 길을 바치거나 주님의 기도 33번씩 두 번을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57) 4) 혼인 제한, 단식재, 금육재 전통적으로 대림절과 사순절은 금욕이 강조되는 기간이므로 지켜야 할 재계가 많은 기간이다. 두 기간에 공통으로 지킬 규정은 화려함과 기쁨 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혼인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림절에는 시 작하는 첫날(장림 제1주일)부터 삼왕내조 축일(1월 6일)까지, 사순절에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제2주일(사백주일)까지 교회 내 혼인이 허락되지 않았다. 1866년과 1916년 큰 첨례표의 관련 내용을 보면, 1866년에는 장 림 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는 혼인의 음 식과 의복의 화려히 하는 이를 엄금하노라 라고 되어 있고, 1916년에는 장림 수주일부터 삼왕내조까지와 성회례의부터 사백주일까지 혼인의 즐 거운 잔치 화려함을 성교회에서 엄금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 두 내용을 보면 대림과 사순 시기에 혼인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의복과 음식을 피하라 는 의미로 해석되나 실제 적용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는 물 론 현대에 이르러서도 일선 본당에서는 이 시기에 혼인 미사를 거행하지 않곤 한다. 단식재(대재)의 규정은 일러두기난이 아니라 주일과 축일이 적힌 난 에 대 라고 별도로 표시되어 있다. 단식재를 지킬 날은 사순 시기의 매주 금요일과 예수 성탄 전야 때였다. 교회법에서 정하는 단식재는 본래 57) 르 장드르, 회장직분, 67쪽.

320 320 교회사연구 제42집 사순 시기 주일 외의 모든 날, 사계 때와 성령 강림 전날과 성모 승천 전 날, 모든 성인의 날 전날과 예수 성탄 전야 때였으나 조선 교회에서는 교 황의 관면으로 간소화되었다. 58) 금육재(소재)의 규정은 복잡하고, 큰 첨례표에 나와 있지 않은 평일에 도 적용되기 때문에 주의사항란에 별도로 그 규정을 적어 놓았다. 1916년 큰 첨례표의 일러두기에 의하면 사순절에는 본래 모든 날에 금육재를 지 켜야 하나, 교황의 배려로 조선 신자들은 봉재 안의 주일날과 각 주일의 첨례 이와 삼과 오에 소재 관면 을 해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와 삼과 오 는 주일부터 따져 둘째, 셋째, 다섯째 되는 날을 말하므로 월, 화, 목요 일을 말한다. 다만 성 목요일에는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표 11 사순절 때 금육재 지킬 날 요일 일 월 화 수 목 금 토 금육재 규정 지키지 않음 지키지 않음 지키지 않음 금육재 (사순, 사계 때) 지키지 않음 금육재 금육재 (사순, 사계 때) 위의 표는 금육재 규정들을 정리한 것인데 매주 금요일은 어느 시기 를 막론하고 지켜야 하고, 사순절과 사계( 四 季 ) 때에는 수요일과 토요일에 도 지켜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사계는 춘계(봉재 후 1주간), 하계(성신 강림 주간), 추계(성가 광영 주간), 동계(장림 3주간)를 말한다. 이 규정은 1917년 세계 교회의 규정이 완화됨에 따라 사순절 매주 수요일의 금육재 규정은 없어졌다. 59) 이 밖에도 큰 첨례표에는 성 요셉 성월(3월), 성모 성월(5월), 예수 58) 르 장드르, 회장직분, 77~78쪽. 59) 경향잡지 제387호(1917년 12월), 529~530쪽.

321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21 성심 성월(6월), 복자 성월(9월), 매괴 성월(10월)의 첫날에는 초일, 마지 막 날에는 종일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음력에 익숙한 신자들에게 양력으 로 계정되는 성월이 언제 시작되고 마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또한 매월 초에는 요일 개념이 희박한 신자들을 위해 첫첨례 오(첫 목요일), 첫 첨례 육(첫 금요일), 첫첨례 칠(첫 토요일)을 표기해 줌으로써 신심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5. 맺음말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사용된 첨례표는 세 종류로 성직자들이 사용하 던 성무일력, 신자들과 함께 사용하던 매일 첨례표, 가장 보편적으 로 쓰인 첨례표 (큰 첨례표)가 있었다. 이제까지 다룬 내용은 현존하는 큰 첨례표 중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하여 보급한 1916~1933년까지를 대상으로 한 연구였다. 이 시기의 큰 첨례표는 각 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직접 작성하여 관할 본당을 통해 보급하였다. 뮈텔의 경우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한 성무일력 을 참조하여 서울대목구의 큰 첨례표를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매년 9월 초순을 전후하여 완성한 것을 10월 중순에 인쇄하였다. 이 큰 첨례표들은 상 중 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맨 아랫단 하단에 일러두기난을 두었 으며, 음력과 양력을 혼용하여 세로글씨로 인쇄되었다. 그 이전 1866년의 큰 첨례표가 상 하 2단에 음력으로만 표기된 것과 비교할 때 형식상 다른 면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 구성과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큰 첨례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과 축일이 음력으로 언제인지

322 322 교회사연구 제42집 를 신자들에게 알려 전례 생활을 돕는 데 있다. 1896년부터 양력이 공식 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조선의 신자들은 여전히 음력 체계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례력은 조선에서 사용된 바 없는 양력 7일의 주간 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첨례표 없이 때를 맞춰 전례에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큰 첨례표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사항은 신자들이 어떻게 재계를 지 키고 은사를 어떻게 얻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맨 아랫단 하단에 별도로 표기된 일러두기에는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지켜야 할 파공과 대송 규정, 단식과 금육 규정, 사순절과 대림절에 지켜야 할 내용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전례 참석에 따라 얻는 대사 규정과 은사회(신심 단체)에 참여 하여 얻는 대사 규정을 알림과 동시에 관련 축일의 하단에 별도로 표시도 해두었다. 이러한 모습은 전례와 성사의 준행과 그에 따른 은사에 집중되 어 있는 당시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뮈텔 주교 재임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들은 변하지 않은 보편적인 면 과 그 시기만의 고유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보편적인 면은 신앙과 신심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천주교 전례력은 성경의 내용과 교리, 그에 따른 신심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이와 관련된 사항들이 근본적으로 바뀌 지 않는 한 큰 첨례표에 반영되는 내용도 그대로 유지된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천주교회가 큰 변화를 겪을 때까지 뮈텔 재임기를 포함 한 전후 시기에 발행된 큰 첨례표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들은 고유한 면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1866년 큰 첨례표와의 비교에서 보았듯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전 시기에 없거나 변화된 내용들이 반영되었고, 뮈텔 재임기 안에 서뿐만 아니라 그 시기 이후에도 변화의 양상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을 큰 첨례표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본 연구에서 충분히 다루지

323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23 는 못하였지만 이는 그 시대를 거치며 변화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살피는 데 요긴하므로 심층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1916년부터 1970년까지의 큰 첨례표를 차례로 넘겨봤을 때 시대의 변화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단순화된 가시성은 큰 첨례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당대에 중요하게 여겼던 사항들을 그 시 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단순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한 시 대의 상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더구나 1916~1970년 큰 첨례표의 경우 매년의 사항들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일제 강점기, 해방과 6 25 전쟁 기, 현대에 이르도록 연속으로 남아 있는 흔치 않은 자료여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투고일 : 심사 시작일 : 심사 완료일 :

324 324 교회사연구 제42집 참고 문헌 1. 자료 1866년 첨례표 (절두산 순교 기념관 소장본). 1916~1970년 첨례표 (큰 첨례표,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본). 매일 첨례표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본). 1942년 Ordo Divini Officii(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본). 1960년 Ordo Divini Officii Recitandi(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본). 경향잡지 영인본, 한국교회사연구소. 하성래 감수,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 1~8,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저서 논문 김정숙,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 세계, 빛 356호, 천주교 대구대 교구, 2012년 12월호. 대니얼 로젠버그 앤서니 그래프턴, 김형규 옮김, 시간 지도의 탄생, 현실문화, 르 장드르, 이영춘 역주, 회장직분, 가톨릭출판사, 모리스 쿠랑, 이희재 역주, 한국서지, 일조각, 방상근, 첨례표 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신 앙의 해 기념 심포지엄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자료 집,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창익,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창비, 2013.

325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25 조 광,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경향잡지 1614호, 2002년 9월호., 일을 그치고 기도와 선행을 하는 날, 경향잡지 1651호, 2005년 10월호. 조현범, 19세기 조선 천주교회와 시간, 청계논총 1, 한국정신문화연 구원 한국학대학원, 1999.

326 326 교회사연구 제42집 ^_pqo^`q A Study on Christian Calendar during the Bishop Mutel s Term of Administration Kim, Jeong Hwan Naepo Research Institute for Church History There are only christian calendars, the unique calendar of Korean Catholic Church, for 1865 to 1866 and 1916 to 1970 left. This study is limited in the christian calendars for 1916 to 1933 during the Bishop Mutel s term of administration. The reason why the study is limited in a certain period is that these christian calendars have consistency because they are issued under the command of the same bishop and it is easy to survey on the change of religious life since the period is connecting between the late Choseon Dynasty and modern times. The christian calendars for 1916 to 1933 were prepared under the command of Bishop Mutel and distributed to regional parishes. The major purpose of christian calendars was to help religious lives of Catholics by informing dates of sundays and feast days on the lunar calendar. It is because Catholics of the Choseon Dynasty was living in the lunar calender system even though the solar calendar has been officially used since Another important purpose of christian calendars was to instruct Catholics that how indulgence can be obtained. The christian calendars issued during the Bishop Mutel s term of service have the universality and the temporal uniqueness at the same time. The universality is related to contents of religious beliefs. Since the unique calendars of the Catholic Church is based on the Bible and dogma, the contents of christian calendars are maintained unless they basically change. Therefore, the contents of christian

327 뮈텔 주교 재임기의 큰 첨례표(1916~1933년) 연구 327 calendars did not fundamentally change until the Catholic Church experienced the big change due to Vatican Council II. Nevertheless, the christian calendars during the Bishop Mutel s term of administration includes contents changed with time or not existed before and have the uniqueness reflecting changing aspects distinguished from the post-period. Keywords : christian calendar, Bishop Mutel, lives of Cathol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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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조수정** 1. 들어가는 말 2. 중세의 교회와 예술 3. 교회와 미술관, 그리고 대안공간 4. 나오는 말 국문 초록 교회 건물을 시각적 이미지로 장식하는 전통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 도그마에 입각한 종 교적 도상으로만 교회를 장식하는 관례는 이천 년의 그리스도교 역사상 후반기에 시작된 것이었다. 교회미술은 곧 종교적 주제의 미술이라는 등 식은 교회 역사상 특정 부분에서만 분명히 성립된다는 결론으로부터 본 연구는 시작된다. 중세의 교회미술은 종교적 도그마 이외의 어떤 주제 * 이 논문은 2011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다(NRF-32A B00117). ** 대구가톨릭대학교 기초교양교육원 조교수.

330 330 교회사연구 제42집 를 포용할 수 있었는가, 그 의도와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더 나아가 교 회미술은 한 사회의 문화 현상을 어느 수준까지 포괄할 수 있었던가,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를 통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다. 이 연구의 의도는, 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된 교회미술의 면모 를 통해, 전례를 거행하는 성스러운 장소라는 교회의 모습 외에, 이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교회의 모습과 역할을 뚜렷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 이다. 대안공간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은 아직까지 연구된 바 없고, 논의 의 대상이 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미술의 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교회가 수행한 역할이란 바로 대안공간과 매우 유사한 것이 었다. 대안공간의 개념으로 교회의 역할을 설명하는 이유는 지역 사회 와 공공성을 품을 수 있는 공간적 성격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 영역 이 외의 다양한 주제들-이질적인 문화, 정치와 역사, 우주와 자연, 일상생 활과 교육 등을 교회가 예술로써 품어왔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회를 담 아내고 매개하는 틀거리로서의 교회는 바로 현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대안공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다문화 사회에서 문화사목의 일환으로 기여할 수 있는 우리나라 교회의 새로운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교회가 비종교적 주제-비그리 스도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주제의 작품을 수용할 수 있었는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작품들을 거론할 수 있는지 중세 서유럽과 비잔티움 교회를 대상으로 살펴본다. 본 연구는 역사, 사회, 예술, 그리 고 종교를 아우르는 통섭적 고찰로서, 교회가 한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 할과 가능성을 예술의 장( 場 )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한다. 주제어 : 교회, 미술관, 대안공간, 중세 예술, 비잔티움 미술

331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들어가는 말 교회 건물의 외부나 내부를 장식하는 조형적 이미지는 그리스도교의 도그마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주제를 담고 있다. 우리가 현대 의 교회 건물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듯, 수난의 도구이자 동시에 영광 과 승리, 그리고 구원의 상징인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앱스(apse)의 중앙에 세워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하는 십자가의 길 은 네이브(nave)의 벽면에 열네 개의 장면으로 그려진 다. 또한 그리스도의 육화( 肉 化 ) 강생( 降 生 )과 복음 선포, 죽음과 부활, 재림과 마지막 심판, 그리고 인류의 구원에 관련된 교리는 유리화나 조각 등의 매체를 통해서도 형상화된다. 교회 건물을 시각적 이미지로 장식하는 이 같은 전통은 초기 그리스 도교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것이지만, 1) 그리스도교 도그마 에 입각한 종교적 도상으로만 교회를 장식하는 관례는 이천 년의 그리스 도교 역사상 후반기에 시작된 것이었다. 도데카오르톤 (Dodekaorton), 즉 그리스도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열두 장면으로 구성된 교회 내부 장식 프로그램은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확립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는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서유럽의 교회미술에도 중대하고 지 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2) 역으로 말하자면, 비잔 1) 현존하는 최고( 最 古 )의 그리스도교 유적인 두라-유로포스(Doura-Europos)의 그리스도교인의 집 은 250년경 개인의 저택을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한 사택 성당(house-church)으로, 세례실 내부에 는 중풍병자를 고치는 예수, 물 위를 걷는 기적, 선한 목자, 아담과 이브, 빈 무덤 이 그려져 있다. Johannes Quasten, The paintings of the Good Shepherd at Dura-Europos, Mediaeval Studies 9(1947), pp. 1~18. 2) Christian Heck, Moyen Âge, Chrétienté et Islam(Paris : Flammarion, 1996), pp. 92~93, 544. 열두 장면(축제)은 다음과 같다. 예수 탄생 예고, 예수 탄생, 성전 봉헌, 예수의 세 례, 영광스러운 변모, 라자로의 부활, 예루살렘 입성, 십자가형, 아나스타시스 (Anastasis), 예수의 승천, 성령 강림, 성모의 잠드심.

332 332 교회사연구 제42집 티움 도상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는 주제의 선택이나 표현에 있어서 서유 럽의 교회미술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교회미술은 곧 종교적 주제의 미술이라는 등식은 교회 역사상 특정 부분에서만 분명히 성립된다는 위의 결론으로부터 본 연구를 시작하고자 한다. 중세의 교회미술은 종교적 도그마 이외의 어떤 주제를 포용할 수 있었는가, 그 의도와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더 나아가 교회미술은 한 사회 의 문화 현상을 어느 수준까지 포괄할 수 있었던가,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를 통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이 연구 의 의도는, 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된 교회미술의 면모를 통해, 전례를 거 행하는 성스러운 장소라는 교회의 모습 외에, 이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교회의 모습과 역할이 뚜렷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교회가 비종교적 주제-비그리스도교적이 거나 세속적인 주제의 작품을 수용할 수 있었는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작품들을 거론할 수 있는지 중세 서유럽과 비잔티움 교회 를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중세 이후에도 이와 관련된 많은 자료 가 있을 것이지만, 본 연구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장하지는 않으려 하며, 근현대 교회미술의 예는 후속 연구를 기대하기로 한다. 역사, 사회, 예술, 그리고 종교를 아우르는 통섭적 고찰로서, 교회가 한 사회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가능성을 예술의 장( 場 )이라는 측면에서 조 명하는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는 현대 우리 사회의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333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중세의 교회와 예술 1) 정치, 역사에 관련된 주제 시대와 지역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나의 소우주로 인식되었으며, 내부 장식도 이 같은 사고 체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3) 천상을 상징하는 앱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네 복음서 저자의 상징 들, 그리고 천사들의 그림으로 채워졌으며, 네이브는 지상의 교회를, 그리 고 교회 바닥은 지상 세계를 상징하는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그림의 주제 는 성경의 이야기나 성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리스도교 종교 전통에서 가져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교회가 비종교적인 주제, 예를 들어 정치적인 주제나 당대의 사회상과 관련된 주제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제작하도록 한 사례는 역사적 으로 드물지 않다. 통치자의 초상이나 출정하는 병사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그림은 물론, 사회의 일탈과 풍자를 주제로 한 작품들도 교회의 벽면 을 장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547년에 완성된 라벤나(Ravenna)의 산 비탈레(San Vitale) 성당은 황 제와 황비의 초상이 교회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 잡은 예를 보여준다(도판 1-1, 1-2). 4) 제대 뒤편, 앱스의 북쪽 벽면은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와 신하들, 그리고 남쪽 벽면은 테오도라(Theodora) 황비와 궁녀 3) 조수정,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상학 연구 카파도키아의 비잔틴 교회를 중심으로, 서 양중세사연구 13, 2004, 13쪽 ; Manuscrit de Cosmas Indicopleustés, Vat. Gr. 699, f. 43 ; D. Talbot Rice, L Art de l Empire byzantin(paris, 1995), p. 89, fig ) Etienne Coche de la Ferté, L art de Byzance(Paris : Citedells & Mazenod, 2001), pp. 106~107 ; 임산, John Lowden,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미술, 한길아트, 2003, 104, 125~135쪽. 라벤나의 비잔티움 미술에 관해서는 S. Cristo, The Art of Ravenna in Late Antiquity, The Classical Journal 70 3(Feb.-Mar., 1975), pp. 17~29 ; G. Gardini, Le Collezioni del Museo Arcivescovile di Ravenna(Ravenna : Museo Arcivescovile, 2011) 참고. 비잔티움 미술에 표현된 황제의 이미지에 관하여 A. Grabar, L Empreur dans l art byzantin (Paris : Les Belles Lettres, 1936) 참고.

334 334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1-1.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신하들, 547년, 산 비탈레 성당, 라벤나. 도판 1-2. 테오도라 황비와 궁녀들, 547년, 산 비탈레 성당, 라벤나.

335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35 들 의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첫 번째 모자이크의 경우, 화면의 오 른쪽으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대주교와 두 성직자들을, 왼쪽으로 고관과 호위병들을 대동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제병( 祭 餠 )이 담긴 성 합( 聖 盒 )을 들고 있는 위풍당당하고 근엄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인물들은 모두 정면을 향한 자세로 표현되었지만, 손과 발의 모양으로 미뤄 볼 때 이들이 성대한 미사 행렬에 참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작( 聖 爵 ) 을 든 테오도라 황비 역시 궁녀들 앞에 서서 행렬에 참여하는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화는 교회 내부의 낮은 벽면에 그려졌기 때문에, 황제의 자줏 빛 의상과 빛나는 후광, 그리고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장식된 황비의 관은 물론 그녀의 얼굴 표정까지도 쉽게 관찰된다. 산 비탈레 성당의 건립 공사는 고트족의 지배하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라벤나의 주교였던 에클레시우스(Ecclesius, 재위 522~532/3)가 착공하여 빅토리우스(Victorius) 주교 시대에도 공사가 지속되었다. 은행가 율리아 누스 아르겐타리우스(Julianus Argentarius)가 2만 6천 솔리디(Solidi)에 달하는 모자이크 제작 비용을 후원하였으며, 비잔티움 황제 부부의 초상을 그려 넣을 계획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540년에 고트족 으로부터 라벤나를 탈환하였고, 비잔티움의 교회로 성격이 바뀐 산 비탈 레 성당에는 황제 부부의 초상이 그려지게 되었으며, 546년에 라벤나에 도착한 막시미아누스 주교는 그다음 해에 성당을 축성하였던 것이다. 5) 황제의 초상을 제단에 그려 넣은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라벤나 가 비잔티움의 영토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환기하는 것일 수도 있고, 황제 부부의 성대한 행렬을 보여줌으로써 제국의 수도 성 소피아 성당의 헌당식 5) Alain Duceillier, Les Byzantins(Paris : Seuil, 1988), p. 86 ; Henri Irénée Marrou, L église de l Antiquité tardive (Paris : Seuil, 1985), p. 181 ;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84~86쪽.

336 336 교회사연구 제42집 을 재현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nus)의 반 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화가 단순한 초상이기 이전에 정치적 변화와 역사의 굴곡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는 점이며, 이는 당시 사람들의 눈에도 그대로 비쳐졌을 것이다. 6) 황제의 초상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이나 라벤나와 같은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제국의 변경 지방인 카파도키아의 교회에도 그려졌다. 특히 콘스 탄티누스와 헬레나의 초상은 현재까지 마흔 개가 넘는 작품이 보고되어 있으며, 그중 10세기와 11세기에 제작된 작품이 유난히 많은 점은 마케도 니아 왕조가 영토 확장을 위해 적극적 공세에 나선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 려 재조명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7) 차우쉰(Çavu in)의 포카스(Phocas) 성당은 황제의 초상뿐만 아니라, 황제의 친척들, 그리고 장군들과 출정하는 병사들의 모습까지 볼 수 있는 독특한 예이다. 콘스탄티누스와 헬레나는 중앙 앱스의 벽면에 등신대( 等 身 大 )로 표현되었고, 북쪽 앱스에는 당시의 황제였던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Nicephoros II Phocas)와 황비 테오파노(Theophano), 황제의 아버지 바 르다스 포카스(Bardas Phocas), 황제의 형제 레온 포카스(Leon Phocas), 그리고 명문이 지워져 신원 확인이 어려운 또 한 명의 친척이 그려졌다(도 판 2). 한편 네이브의 북쪽 벽면에 자리 잡은 멜리아스(Melias) 장군과 장 차 황제가 될 요한네스 치미스케스(Johannes Tzimiskes)의 기마상은 비 잔티움 군대가 아랍과의 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환기시킨다(도판 3). 8) 6) 황제와 황비의 초상이 교회에 그려진 예는 이외에도 많이 발견된다. 성 소피아 성당의 나르텍스 (narthex)에는 레오 6세 (Leo VI, 재위 886~912, 9세기 말 제작), 이층 갤러리에는 콘스탄티 누스 9세(Constantinus IX)와 황후 조에(Zoe) (11세기 제작) 그리고 요한네스 콤네노스 2세 (Johannes Comnenos II)와 이레네(Irene) (12세기 제작)의 모자이크화를 볼 수 있다. Etienne Coche de la Ferté, L art de Byzance, pp. 194~195, ) H. Ahrweiler, L idéologie politique de l Empire byzantin(paris : P.U.F, 1975), pp. 48~50. 관련된 교회 목록은 조수정,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상학 연구, 12~13쪽 참고. 8) C. Jolivet-Lévy, La glorification de l empereur à l église de Grand pigeonnier de Çavu in,

337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37 교회의 내부를 황제나 장군의 초상으로 장식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적 이데올로기가 암시적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방법에서 한 발 더 나간 경 우도 있다. 1066년 직후에 제작된 바이유(Bayeux) 태피스트리 는 노르 망디 공작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재위 1066~1108)이 영국을 정복한 이야기를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하는데, 7미터가 넘는 태피 스트리 곳곳에는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 장면을 비롯하여 당시의 일 상적 삶이 매우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기록이자 정치 적 선전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래도록 교회 내부에 걸려 있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었다(도판 4). 9) 또한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Otranto) 대성당의 바닥을 장식한 모 자이크화는 알렉산더(Alexander) 대왕과 아더(Arthur) 왕의 전설적인 이 야기를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도판 5). 작품을 구상한 판탈레온(Pantaleon) 수사는 구약 성경과 코란의 가르침은 물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켈트족과 노르만족, 스칸디나비아, 비잔티움, 페르시아 그리고 아랍의 역사와 설화들 을 한데 섞은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1163년에 완성된 이 작품 은 로저 2세(Roger II)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노르만 왕국을 세운 이후의 문화 접변 현상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10) Dossiers Histoire et Archéologie n 63(1982), pp. 73~77 ; 조수정,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상학 연구, 15쪽. 9) 마틸다(Mathilda, 1102~1167) 여왕의 태피스트리 라고도 하며 현재는 바이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Gale R. Owner-Crocker, King Harold II and the Bayeux Tapestry(Woodbridge : Boydell & Brewer, 2011) ; 조성애, Jannic Durand, 중세미술, 생각의 나무, 2004, 57, 60~61쪽 ; E.H. Gombrich, 서양미술사, 168~169쪽 ; H.W. Janson & A.F. Janson, 서양 미술사, 180쪽. 10) 오트란토 대성당은 1088년 완공되었고, 바닥의 모자이크화는 12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 모자 이크화에 관해 Grazio Gianfreda, Il Mosaico di Otranto(Lecce : edizioni del Grifo, 2008) 참고.

338 338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2.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황제와 가족, 963~969년, 차우쉰 성당, 카파도키아. 도판 3. 멜리아스와 치미스케스 장군, 963~969년, 차우쉰 성당, 카파도키아.

339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도판 4. 바이유 태피스트리, 1066년, 바이유 박물관. 도판 5. 알렉산더 대왕, 1163년, 오트란토 대성당. 339

340 340 교회사연구 제42집 2) 우주와 자연에 관한 주제 교회의 미술은 종교 이외에 역사와 정치, 그리고 동식물을 포함한 자 연, 세상과 우주라는 인간의 탐구 영역인 과학도 주제로 삼았다. 5세기 말에 건립된 헤라클레아 린케스티스(Heraclea Lyncestis)의 대 바실리카(basilica)는 4계절을 상징하는 동물과 식물을 주제로 한 모자이크 바닥 장식으로 유명한데, 중앙에는 사슴들이 물을 먹는 샘이 그려져 있다 (도판 6). 11) 교회의 바닥을 동식물의 그림으로 장식하는 것은 고대 로마 미술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성스러운 그림들을 밟고 지나다니는 것은 합당 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교회가 종교적 주제로 교회 바닥을 장식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2) 동식물 모티브는 교회의 바닥 이외에도 주두 ( 柱 頭 ), 코니스(cornice), 천장과 벽면, 팀파늄(tympanum) 그리고 출입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오스 폴리에욱토스(Hagios Polyeuctos) 성당의 기둥 조각 13) 이나 산 비탈레 성당의 천장 모자이크화 와 임포스트(impost) 조각 14) 등에 나타난 풍부한 자연 묘사는 천국을 상 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인간을 둘러싼 지상 세계의 생명력 을 나타내는 것이다(도판 7-1, 7-2). 7세기 이래 서유럽에서는 게르만 미술과 페르시아-아랍 미술의 영향 으로 고전적인 동식물 모티브에 있어서 표현상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산 페드로 드 라 나베(San Pedro de la Nave) 성당 15) 의 주두 조각에서 보듯, 11) 이 모자이크화는 나르텍스에 그려진 것이다. Milorad Medic, Technique, materials and conservation of the mosaic of the large basilica at Heraclea Lyncestis, Heracleis 3(1967), pp. 87~ ) Christian Heck, Moyen Âge, pp. 70~71. 13) 524~527년 제작. 현재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입구에 놓여 있다. John Lowden,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미술, 70~71쪽. 14) 산 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화와 조각은 6세기 중반에 제작되었다. 각주 5), 6) 참조. 15) 산 페드로 드 라 나베는 7세기 중엽 스페인의 자모라(Zamora) 지방에 세워진 작은 성당이다. 포도 덩굴과 사람 얼굴, 그리고 마주 선 동물이 서고트 스타일로 저부조로 조각된 주두가 남아 있다. Christian Heck, Moyen Âge, p. 161.

341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41 도판 6. 바닥 모자이크, 5세기, 헤라클레아 린케스티스의 대 바실리카. 도판 7-1. 천장 모자이크, 6세기, 산 비탈레 성당, 라벤나.

342 342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7-2. 주두 장식, 6세기, 산 비탈레 성당, 라벤나. 도판 8. 주두 조각, 7세기, 산 페드로 드 라 나베 성당, 자모라, 스페인.

343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43 마주 선 짐승이나 꼬임 무늬, 기묘하고 환상적인 형태의 동물들이 교회 장 식에 등장한다(도판 8). 11세기 이후로는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예가 남아 있다. 디종(Dijon)의 생-베니뉴(St-Bénigne) 대성당 16), 생-브누아-쉬르-르와르 (Saint-Benoît-sur-Loire)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 17), 우르네스(Urnes) 의 스타브(Stave) 성당 18), 도라드(Daurade) 수도원 19), 무와삭(Moissac) 수도원 20), 올네-드-생통쥬(Aulnay-de-Saintonge)의 성 베드로 성당 21), 수이야크 성당(Souillac) 22), 라-샤리테-쉬르-루아르(La Charité-sur-Loire) 의 성 십자가 성당(Eglise Sainte-Croix) 23), 수비니(Souvigny) 수도원 성 16) 대성당 지하에 위치한 원형 크립트(crypt, 1018)에는 야수들을 형상화한 로마네스크 시기의 주두 조각 장식이 남아 있다. 이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Rita Wood, The Two Major Capitals in the Crypt of Saint-Bénigne at Dijon, The Antiquaries Journal 89(2009), pp. 215~239 참고. 17) 멧돼지를 비롯한 동물들의 주두 조각은 1040년경 제작되었다. Christian Heck, Moyen Âge, pp. 236~ ) 1050년경 지어진 스칸디나비아 성당이다. 노르웨이의 첫 번째 그리스도교 미술로서 나무와 돌로 지은 교회의 벽면을 조각으로 장식하였다. 게르만 미술의 꼬임 무늬와 동물 문양이 특징적이다. 최병길, Germain Bazin, 세계조각의 역사, 미진사, 1994, 108쪽 ; Hans-Emil Liden, Stave Churches in Medieval Scandinavia : An Encyclopedia, ed., Phillip Pulsiano(New York : Gerland Publishing, 1993), pp. 609~ ) 도라드 수도원의 안뜰을 둘러싼 회랑의 주두에는 곰 사냥 등이 조각되어 있다. 아이메릭 드 페이락 (Aymeric de Peyrac)의 연대기에 따르면, 도라드 수도원의 회랑은 1080년 완공되었다. Marcel Aubert, La sculpture française au moyen-âge(paris : Flammarion, 1946), p. 62 ;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191쪽. 20) 무와삭 수도원의 회랑은 1100년 완성되었다. 회랑의 주두 조각은 대부분 성경의 이야기, 성인들 의 생애를 담고 있지만, 동물들의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Meyer Schapiro David Finn, The Romanesque sculpture of Moissac(New York : G. Braziller, 1985) ; Maria Cristina Pereira, Les images-piliers du cloître de Moissac, Bulletin du centre d études médiévales d Auxerre, n 2(2008). Avaliable, July 17, ) 1120~1130년경 완성되었다.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생통쥬 지역의 주두 조각은 스페인을 경유한 아시아와 이슬람의 영향을 나타내는데, 동물과 종려 나뭇가지와 기형의 인체가 서로 뒤얽힌 아라 베스크(arabesque) 모양이 특징적이다. Christian Heck, Moyen Âge, p ) 1130~1140년경 제작된 서쪽 벽의 트뤼모(trumeau)에는 환상적인 짐승들이 엉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Germain Bazin, 세계조각의 역사, 165쪽. 23) 부르고뉴 지방 니에브르(Nièvre)에 위치한 이 성당은 12세기에 완공되었으며, 네이브의 트리포 리움(triforium) 아랫부분에는 동물들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344 344 교회사연구 제42집 당 24), 그리고 느베르(Nevers)의 생-소뵈르(St-Sauveur) 수도원 성당 25) 의 동 물 조각들을 예로 들 수 있다(도판 9-1, 9-2). 비잔티움 교회 역시 동물 조각을 사용하였는데, 아테네의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Panagia Gorgoepikoos) 성당은 다양한 여러 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장소로서, 마주 선 그리 퐁 을 비롯하여 그리스, 로마, 초기 그리스도교, 비잔티움 시기의 여러 조 각이 성당 정문을 장식하고 있어 특이한 느낌을 준다(도판 10). 26) 교회는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동물과 괴물의 문양을 건축 장식에 이 용하였다. 사자, 황소, 독수리, 뱀, 말, 곰, 코끼리, 낙타, 원숭이, 멧돼지 같은 동물은 물론, 발이 매우 큰 외다리 인종 스키아포도스(skiapodos), 개의 머리를 가진 사람 사이노세팔루스(cynocephalus), 말굽을 가진 사람 히포포도스(hippopodos), 에티오피아 해안에 사는 네눈박이 사람, 보물 을 지키는 독수리 사자 그리퐁(griffon), 사티로스(satyros), 머리에 뿔이 하나 달린 일각수, 인어,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 사람의 얼굴을 가진 곤 충류 만티코레(mantichore)와 같은 환상적인 괴물들이 교회의 곳곳에 조 각되었다. 그리고 게르만 미술의 마주 선 동물 문양과 꼬임 무늬, 페르시 아와 비잔티움의 직물에 등장하는 야수, 시리아의 채색 삽화와 아랍 세공 품에서 유래한 맹수와 얽혀서 싸우는 짐승들, 머리가 둘 달린 괴물들의 24) 11세기에 건립된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이다. Annie Regond Pascale Chavelier, Sculptures médiévales en Auvergne(Clermont-Ferrand : Presses Universitaires Blaise Pascal, 2008) ; Neil Stratford, La frise monumentale romane de Souvigny(Ville de Souvigny, 2002). 25) 느베르는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생-소뵈르 수도원 성당에는 전설적인 용을 타고 있는 기괴한 에티오피아 사람, 만티코레, 일각수 등이 주두에 조각되어 있었다.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289쪽. 현재는 교회의 입구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내부의 조각은 느베르의 고고학 박물관 (Musée archéologique de la Porte du Croux)에 보관되어 있다. 작품 목록은 Catalogue du Musée lapidaire de la Porte du Croux(Nevers : Imprimerie et Lithographie Fay, 1873) 참고. Available, pdf. July 10, ) 이 성당은 12세기 말 건립되었으며, 서쪽 정면의 그리퐁 조각은 10~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된다. Etienne Coche de la Ferté, L art de Byzance, pp. 186~187, 507.

345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45 도판 9-1. 동물 조각 장식, 1050년, 스타브 성당, 우르네스, 스칸디나비아. 도판 9-2. 동물 조각 장식, 1120~1130년, 성 베드로 성당, 올네 드 생통쥬, 프랑스.

346 346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10. 동물 조각 장식, 10~11세기, 파나기아 고르고에피쿠스 성당, 아테네. 모습도 교회건축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27) 단순함과 엄격함을 추구하는 시토회의 수도자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 르(St. Bernard de Clairvaux)와 같은 인물은 종교적 주제 대신 잡다한 27) 로마의 대 플리니우스(Plinius, 23~79)가 그의 저서 자연사 에서 언급한 고대의 전설적 괴물 이야 기는 세비야의 이시도루스(Isidorus de Sevilla, 560~636)의 어원전서, 베네딕도회 수사이며 시인인 라바누스 마우루스(Hrabarus Maurus, 776~856)의 우주론 (De Universo/De rerum naturis, 842~846), 신학자 호노리우스(Honorius Augustodunensis, 1080~1150/1151)의 세 상의 모습 (Imago mundi, 1110), 그리고 뱅상 드 보베(Vincent de Beauvais, 1190~1264)의 저 서를 통해 중세 서유럽에 전해졌다.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286~287쪽. 한편 괴물 도상은 이슬람 문화에서 기원을 찾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Christian Heck, Moyen Âge(Paris : Flammarion, 1996), pp. 62~63 참고.

347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47 동물의 조각을 교회에서 보게 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지만, 28) 신이 창조한 세상을 보여주는 창으로써의 동물 조각은 당대 사람들의 마 음을 사로잡았고, 그 창작 활동은 고딕 시기에까지 이어진다. 파리의 노트 르담(Notre-Dame) 대성당의 북쪽 출입구(la Porte rouge) 벽면, 29) 랑 (Laon) 대성당의 서쪽 파사드(façade) 탑 30), 메츠(Metz) 대성당 31) 과 상 스(Sens) 대성당 32) 파사드의 북쪽 입구의 벽면 등이 동물들의 조각으로 꾸며졌다(도판 11-1, 11-2). 중세의 교회는 미사 전례를 거행하는 종교적 장소일 뿐만 아니라 당 대인들의 호기심을 일깨우는 일종의 자연사박물관과 같은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중세 교회에 조각된 괴상한 동물 중에는 악과 악마를 상징하는 것들도 있지만, 33) 교회의 예술은 종교적 도그마만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 니라, 시대정신을 반영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로마 네스크 조각이 보여주는 상상력과 표현력은 사회적 혼란과 공포,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사람들의 감성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34) 요컨대 중세의 교회는 시대정신을 담은 예술을 포용하였고 발 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28)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가 성 티에리(St. Thierry)의 수도원장 윌리암에게 보낸 편지 : 임영방, 중 세 미술과 도상, 185쪽 ; 김수경, Annie Shaver-Crandell, 중세의 미술, 예경, 1991, 21쪽. 29) Thierry Crépin-Leblond, Paris. La cathédrale Notre-Dame(Paris : Editions du Patrimoine, 2000). La porte rouge 의 동물 조각상은 다음 웹사이트의 그림과 사진 참고. Available, ; article1413. July 15, ) 1200년경 완성된 랑 대성당의 종탑 위에는 16마리의 황소상이 있다. 31) R. Bourgon, La Cathedrale de Metz(Metz : Œuvre de la cathedrale, 1976) ; Alexandra Gajewski Zoë Opacic(eds.), The Church of the Order of St Antony at Pont-à-Mousson and post-1300 Gothic Architecture at Metz, The Year 1300 and the Creation of a new European Architecture(Turnhout : Brepols Publishers, 2008), pp. 53~66. 32) Alain Erlande-Brandenburg, La cathédrale Saint-Etienne de Sens : La première cathédrale gothique(turnhout : Brepols, 2007). 33) 무와삭, 도라드 그리고 수이야크 수도원에는 악마의 이미지가 조각되어 있다. 34)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185~186쪽.

348 348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동물 조각 장식, 노트르담 대성당, 파리. 도판 동물 조각 장식, 메츠 대성당.

349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49 교회는 우주의 조화 라는 주제도 받아들였다. 35) 천체와 계절, 음악 과 세상이 이뤄내는 조화설, 곧 자연의 수적인 원리는 랭스(Reims)의 생 레미(Saint-Rémi) 성당 36) 과 클뤼니(Cluny) 수도원 성당 37) 에 잘 표현되 어 있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 성당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8선법을 의인화 하여 주두에 조각하였는데, 이는 음악을 통한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것 이며(도판 12), 38)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도움도 필요 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 일상생활에 관한 주제 먹고 마시고, 일하고 쉬고, 사랑하고 싸우는 일상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도 교회라는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위에서 언급한 바이유 태피스트 리 에는 요리하는 사람들,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들, 시중드는 하인, 사랑하는 남녀, 대패질하는 사람 등 일상의 삶이 과감하고 솔직하게 표현 되어 있다(도판 13). 35) 호노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Imago Mundi에서 우주와 인간의 신비로운 조화를 설명하였다. 우주의 네 기본 요소인 공기, 물, 땅, 불은 인간 세상과도 연결되어 있어 동서남북의 네 방향, 천국의 네 강, 네 계절, 인생의 네 시기(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인간의 혈액에 따른 네 기질(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냉담기질), 그리고 네 덕목(정의, 힘, 절제, 사려)을 상징하게 된다. 중세 대학은 4과(quadrivium, 산수, 기하, 천문, 음악)와 삼학(trivium, 문법, 논리, 수사학)을 합한 일곱 자유 학예를 가르치는데, 이는 우주의 일곱 행성,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의 일곱 음조와 연결되어 우주 의 조화를 상징한다. E. Mâle, L art religieux du XIIe siècle(paris : Arnaud Colin, 1953), p. 317 ; Nicholas Ryan Foster, The Imago Mundi of Honorius Augustodunensis(Portland State University, 2008). 36) 랭스의 생 레미 성당의 역사와 건축, 조각, 색유리창에 관한 정보는 다음 도서인 H. Reihard, La Cathédrale de Reims : son histoire, son architecture, sa sculpture, ses vitraux(paris : P.U.F, 1963) 참고. 12세기에 제작된 생 레미 성당 앱스의 바닥 모자이크에는 지구와 네 방위 기점을 향하는 네 강, 그리고 네 계절이 묘사되어 우주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284쪽. 37) M.F. Hearn, Romanesque sculpture(new York :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pp. 102~116. 성무일도석 주변의 주두는 12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천국의 네 강, 계절 과 덕목, 학문을 상징하는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다. 38) 8 은 우주를 이루는 4 요소의 배가 되는 숫자이며, 우주와 인간의 조화를 상징한다. E. Mâle, L art religieux du XIIe siècle, p. 320 ;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284~285쪽.

350 350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12. 그레고리오 성가 8선법의 의인화, 주두 조각, 12세기, 클뤼니. 도판 13. 바이유 태피스트리 중 식사 장면, 1066년.

351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51 노동하는 인간의 이미지는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부터 모자이 크, 필사본, 부조, 조각 등 다양한 장르에서 나타났다. 350년경 건립된 산타 코스탄차(Santa Costanza) 성당은, 당초 마우솔레움(mausoleum) 으로 구상되었던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지만, 종교적 색채가 비교 적 옅은 일상적 이미지들로 장식되어 있다. 천장의 모자이크화는 포도나 무 덩굴과 장식 패턴,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포도를 수확하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도판 14). 39) 인간의 노동이라는 주제는 4세 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티르(Tyre) 40) 의 모자이크에서부터 12세기의 오트란토 대성당의 모자이크화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많은 예가 남아 있다. 중세 시대에 있어서 일 이란 숭고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41) Ora et labora, 즉 기도하고 일하라 는 성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수도자 뿐만 아니라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지침으로 받아들여졌고, 노 동하는 인간의 숭고함은 제때에 씨를 뿌리고 거두어들이며 저장하는 모습 을 보여주는 열두 달의 월례 노동 이라는 주제로 형상화되기에 이른다. 샤르트르(Chartres) 42), 아미앵(Amiens) 43), 생-드니(Saint-Denis), 상스 (Sens), 상리스(Senlis), 랭스(Reims)의 대성당, 그리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 성당의 파사드에 조각된 매달의 노동은 열두 별자리와 짝을 지어 있으며, 이는 계절의 순환, 그리고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나타낸다(도판 15-1, 15-2, 15-3). 또한 중세인들은 일 년 열두 달을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네 계절은 네 복음서 저자로, 그리고 열두 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39) John Lowden, Early Christian & Byzantine Art,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미술, 38, 40쪽. 40) Maurice H. Chéhab, Fouilles de Tyr, Bulletin du Musée de Beyrouth, t. 33~36(1983~1986). 41) Annie Shaver-Crandell, 중세의 미술, 47쪽. 42) 1145~1155년경, 파사드의 왼쪽 정문, 부스와르(voussoir). 43) 1235년경, 파사드 아래쪽 벽면. Christian Heck, Moyen Âge, p. 312.

352 352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14. 포도 수확, 천장 모자이크화, 350년, 산타 콘스탄차. 도판 월-1월-2월, 아미앵 대성당.

353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53 도판 월-5월-6월, 아미앵 대성당. 도판 월-10월-11월, 아미앵 대성당.

354 354 교회사연구 제42집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44) 중세의 교회에는 또한 다양한 직업의 세계가 그려져 있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색유리 그림창에는 칼을 쓰는 사람, 망치를 쓰는 사람, 양털을 손질 하는 사람, 빵을 만드는 사람, 고기를 파는 사람 등 열아홉 가지의 직업이 그려졌고(도판 16-1, 16-2), 캔터베리(Canterbury) 대성당에는 씨를 뿌리 는 농부의 모습이 있으며, 45) 카오르(Cahors)의 성 에티엔느(Saint-Etienne) 성당에서는 말에 편자를 끼우는 사람의 모습도 볼 수 있다(도판 17). 46)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의 초상 외에, 일반인들 의 초상도 교회를 장식하였다. 오르타(Orta)의 산 쥴리오 성당(San Giulio) 의 강론대에는 볼피아노의 기욤(Guillaume de Volpiano)이라는 인물이 조각되어 있으며(도판 18), 47) 나움부르크(Naumburg) 대성당의 서쪽 제 단 둘레에는 에카르트(Eckardt, 1032~1046)와 우타(Uta), 헤르만 폰 메이센(Hermann von Meißen)과 레그린디스(Reglindis) 를 비롯한 설립 자 군상이 등신대로 서 있다(도판 19-1, 19-2). 48) 일반인의 모습이 교회 내 부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49) 44) Juan Plazaola, L église de l art, Des origines à nos jours(paris : Le Cerf, 2008), p. 157, fig 페라르 대성당 박물관(Musée de la cathédrale, Ferrare)의 추수하는 사람-9월 은 단순한 풍속을 보여주는 이미지라기보다, 깊은 종교적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45) Canterbury Cathedral(1180~1220년경). Gilles Plazy, The History of Art in Pictures : Western Art from Prehistory to the Present(New York : Barnes & Noble, 2004), p ) 12세기 중엽. Annie Shaver-Crandell, 중세의 미술, 56쪽. 47) 12세기 초. Christian Heck, Moyen Âge, pp. 246~247 ; Germain Bazin, 세계조각의 역사, 304~305쪽. 48) 1260년경. Juan Plazaola, L église de l art, p. 179 ; Christian Heck, Moyen Âge, p. 323 ; Annie Shaver-Crandell, 중세의 미술, 100쪽 ; E.H. Gombrich, 서양미술사, 195쪽 ; 임영 방, 중세 미술과 도상, 474~475쪽. 49) 실제 얼굴 모습을 재현한 조각도 제작되었는데, 프라하의 성 비투스 성당은 건축가이자 조각가 인 페터 팔러(Peter Parler)의 자화상 으로 유명하다. 1374~1385년, 트리포리움(triforium) 조 각. Milena Bartlová, The Choir Triforium of the Prague Cathedral Revisited : The Inscriptions and Beyond, Prague and Bohemia. Medieval Art, Architecture and Cultural Exchange in Central Europe, Zoë Opacic(ed.), British Archeological Association, 2009, pp. 81~100.

355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55 도판 다양한 직업-말을 돌보는 사람, 샤르트르 대성당. 도판 다양한 직업-고기를 파는 사람, 샤르트르 대성당.

356 356 교회사연구 제42집 도판 17. 편자를 끼우는 사람들, 12세기 중엽, 성 에티엔느 성당, 카오르. 도판 18. 볼피아노의 기욤, 12세기 초, 산 쥴리오 성당, 오르타.

357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57 도판 에카르트와 우타, 1260년, 나움부르크 성당. 도판 헤르만 폰 메이센과 레그린디스, 1260년, 나움부르크 성당.

358 358 교회사연구 제42집 4) 교육에 관한 주제 중세 학문은 철학과 7학예-문법, 수사, 논리의 3학과 기하, 산수, 천 문, 음악의 4과-로 구성되는데, 이를 의인화한 여인상이 그림과 조각 등으 로 교회를 장식하였다. 가장 오래된 예는 샤르트르와 랑 대성당으로, 이 두 곳은 대성당 학교 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는데, 이를 반영하듯 7학예의 의인상으로 파사드와 색유리 그림창을 장식하였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오른쪽 정문의 아키볼트(archivolt)에는 한 학생의 귀를 잡아당기며 꾸짖는 여인이 조각 되어 있는데, 이는 문법을 의인화한 것이다(도판 20). 이 외에 오세르(Auxerre), 상스(Sens), 루앙(Rouen), 클레르몽(Clermont) 대성당에도 7학예 를 형상화한 부조가 남아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 클뤼니 수도원 성당의 주 두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법이 형상화되어 있었는데, 음악은 미사의 한 부분으로 중요성을 갖는 점 이외에도 우주 질서의 근본이 되므로 인간이 조 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50) 철학과 7학예 외의 학문-의학, 연금술, 건축, 그림도 의인화되어 교회 를 장식하는 경우가 있었다. 51) 50) 각주 36) 참조.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5)는 음악을 우주의 구성 요소로 보았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음악의 7음계는 7행성에 상응하며, 이는 우주의 신비로운 상응 관계를 보여준다 는 것이다. John Marenbon, Great Medieval Thinkers : Boethius(Oxford University Press, 2003), pp. 5, 15~16, ) 랭스 대성당에는 유리병에 담긴 소변을 관찰하는 여인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의학을 나타낸다. 또한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연금술을 상징하는 Majus 라는 신비로운 여인상도 있다.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543~544쪽.

359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59 도판 20. 7학예, 샤르트르 대성당.

360 360 교회사연구 제42집 3. 교회와 미술관, 그리고 대안공간 중세의 교회는 신의 집이기도 했지만, 이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 울이었다. 말하자면 교회는 이 세상의 모습으로서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 교회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 역사, 우주와 자연, 학문과 교육, 그리고 일상의 모든 주제를 예술로써 포용하는 장이었다. 특히 13세 기의 중세미술은 대성당 학교 및 대학의 발달과 더불어 백과전서적인 성 격을 보였다. 교회는 일상의 공간이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상으로서 의 예술을-그것이 예술이라는 자각 없이-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건축으로서의 교회는 그 탄생으로부터 예술적 가치를 논하게 되는 대상이며, 예술 작품으로서의 교회는 또한 다양한 예술 작품을 잉태하고 탄생시키고 양육한다. 그렇다면 중세의 교회는 미술관과 같은 역할을 했 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의 전시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긍 정적일 수도 있겠으나, 선뜻 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거대 박물관과 미술관 의 등장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의 부정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미술 이래 일상을 소재로 삼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미술관은 오히려 미술과 일상의 역설적인 분리, 다르게 표현하자면 대중 으로부터 미술의 소외를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였음을 주장하는 학자들 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술 작품을 감상하러 미술관에 가는 것 은 매일의 일상사와는 구분되는 특별한 이벤트 같은 행위가 되어버렸으 며, 따라서 미술 작품이란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공간에 존재하 는 이질적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52)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이 마치 진열된 상품처럼 52) 김동일,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 갈무리, 2010, 61~62쪽.

361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61 존재하게 됨으로써 박제된 표본처럼 생명력을 잃게 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원래의 조건과 환경으로부터 떼어내기 (decontextualization)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일례로 여러 나라의 관광객이 길게 늘어선 루브르 박물관의 복도에 걸린 수많은 성모자상 앞에서는 깊은 종교적 감수성이 잘 일깨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그림들이 미술관에 수집 되는 대신 어느 한 성당의 어둑어둑하고 깊숙한 벽감에 원래대로 걸려있었 더라면 그곳을 찾은 순례객들은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중세의 교회는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과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역할을 수행했다. 이전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는, 종교성은 물론 구체적 일상, 그리고 시대정신을 담은 하나의 소우주로서의 예술을 제시 하였으며, 여기에는 항상 통합( 統 合 )과 조화( 調 和 )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 었다. 이는 두 개의 세계, 즉 지상과 초자연적 세계가 예술을 통해서도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성( 聖 )과 속( 俗 )의 이분법적 분리를 넘어선 문화장( 文 化 場 )의 통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인간관 이 전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교회의 예술 역시 전인적인 것이 어야 하며, 따라서 종교와 정치, 지역과 문화, 성스러움과 속됨의 분류 체 계에 따라 특정 요인을 소외시켜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예술과 일상이 만나는 역동적인 문화 실천의 장이었던 것이 고, 이를 현대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미술관의 등장 이후 제도화된 문화장 에 새로운 요소로 부상하는 대안공간 (alternative space)의 역할과 유사 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안공간 의 개념 정의는 현재 진행형이어서 지역에 따라 그리고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으나, 구태여 정의하자면, 일반 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의미로는 비영리 전시 공간으로서 일반인이 공공성 과 실험성을 가진 미술과 만나는 자리 라고 할 수 있다. 53) 우리나라의 대 안공간 의 역사는 매우 짧다. 1999년에 최초의 대안공간이 등장했으니 이

362 362 교회사연구 제42집 제 겨우 14년의 역사를 쓴 셈이다. 하지만 그 역할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한 것이어서, 수원에 위치한 대안공간 눈 의 경우 마을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문화적 생활 패턴을 바꿔놓을 정도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래된 가옥을 수리하여 누구에게나 개방된 전시장과 찻집, 도서관 을 만들고, 마을 주민들과 국내외 미술가들이 참여한 골목 벽화 그리기 등 수원 행궁동 예술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를 추진한 결과, 지역을 대표 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무명의 작가들, 전시 기회를 갖기 어려운 작가들에게 전시 공간을 제공하며, 마을 주민들이 직접 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자리를 만들고,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북카페와 창작 공간을 마련하는 등 주민들의 일상과 연결된 작업을 해오고 있다. 54) 거대 미술관이 문화 상징 자본과 정치 자본을 통해 미술계의 주류에 편입하는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현 상황에서 대안공간의 문화적 실천은 일상의 미 술을 포함한 새로운 시각적 시도를 구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고 하겠다. 55)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자신만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그림 들로 가득 찬 현대의 거대 미술관은, 어떠한 그럴듯한 미학적 해설로 포장 한다 해도, 일반 대중을 위한 자리는 결코 아니다. 고상한 예술과 일상 사이에 존재하는 불행한 틈은 다만 우리 사회의 소통의 부재를 드러낼 뿐 이다. 거대 미술관이 문화적 권력을 장악하고 극소수 선택된 자들의 지배 적 예술관과 그 결과물을 선택의 여지 없이 강요하는 반면, 대안공간은 도시빈민, 이주자,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삶, 그리고 그들의 사회정치적 53) 대안공간의 개념 및 역사에 대해서 이동연, 한국의 대안공간 실태 연구, 문화사회연구소, 2006, 17~42쪽 참고. 54) 대안공간 눈 웹페이지 참고. 55) 각주 3) 참조. 김동일,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274~278쪽 ; 전영백, 196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 미술사연구 23, 2008, 81, 434~438쪽 ; 서상호, 지역에 서 대안적 활동들, 로컬리티 인문학 4, 2010, 363~378쪽 ; 오재환, 부산 대안문화와 대안 공간의 역동성, BDI 포커스 96, 2011, 1~12쪽.

363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63 요구들을 예술로 표현하며 새로운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대안성 (alternativity)을 획득한다. 바로 이 지점이 문화장의 역동적 변화를 가져오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대안공간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은 아직까지 연구된 바 없고, 논의의 대상이 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미술의 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역사적 으로 교회가 수행한 역할이란 바로 대안공간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본 연구자가 대안공간의 개념으로 교회의 역할을 설명하는 이유는 지역 사회 와 공공성을 품을 수 있는 공간적 성격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 영역 이외 의 다양한 주제들-이질 성격 문화, 정치와 역사, 우주와 자연, 일상생활과 교육 등을 교회가 예술로써 품어왔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회를 담아내고 매개하는 틀거리로서의 교회는 바로 현대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새로 운 대안공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다문화 사회에서 문화사목의 일환으로 기여할 수 있는 우리나라 교회의 새로운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기점으로 한국 교회는 교회미술의 현 대화와 토착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는데, 56) 문화다원주의적인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동인은 전례헌장 (Sacrosanctum Concilium) 제7장 123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는 어떠한 미술 양식도 자기 고유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오로지 민 족들의 특성과 환경 그리고 각종 예식의 필요에 따라 각기 그 시대의 양식 들을 받아들였으며, 여러 세기의 흐름을 통하여 이루어진 미술의 보화를 온갖 배려로 보존하게 하였다. 또한 우리 시대와 모든 민족과 지역의 미술 은, 거룩한 성전과 거룩한 예식에 마땅한 존경과 마땅한 경외로 봉사한다 면, 교회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여 미술은 지난 여 56) 김종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전례 토착화, 교회사연구 25, 2005, 119~ 175쪽.

364 364 교회사연구 제42집 러 세기에 위대한 사람들이 가톨릭 신앙을 노래한 저 놀라운 영광의 합창 에 자기 목소리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57) 이는 일상을 담은 예술, 그리고 지역 전통을 담은 예술을 매개로 교회 가 현대 다문화 사회와 소통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술이란 본래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가 예술을 품은 이유는 무지한 문맹인들의 교화를 위함이었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 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58) 학자들이 깨우친 철학, 신학 이론을 쉽게 전달하기 위함이었고, 우주와 역사를 보여주기 위 함이었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농사일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다양한 문 화 전통에 속한 평범한 인간들을 위한 일상의 예술을 담을 수 있는 공간, 교회와 예술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 4. 나오는 말 중세 서유럽과 비잔티움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교회가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종교이고, 진선미가 하나로 만난다면, 미를 추구하는 예술과 종교는 합일을 향해 갈 수 있으며, 이들이 현실에서 일반 대중과 만나게 되는 자리는 교회일 것이 다 라는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중과 일상으로부터 유리되지 5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 68~69쪽. 58) 그림이 빈자의 성서 (biblia pauperum)라는 개념은 6세기 말, 그레고리오 교황이 문맹자들이 책을 읽을 수 없으니 성당 벽면을 통하여 읽도록 하라 고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Louis Réau Gustave Cohen, L art du moyen-âge et la civilisation française(paris : Albin Michel, 1951), p. 335 ;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184쪽 ; Annie Shaver-Crandell, 중세의 미술, 13쪽.

365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65 않은 미술, 그리고 존재 의미를 지닌 생명력 있는 미술을 품는 공간으로서 의 교회, 즉 하나의 대안공간으로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주장은, 비록 명 확한 정의로 드러나지는 않았었지만,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이미 체험되 었던 것이고, 잊혔던 그 필요성이 이제 다시 거론되고 구체화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교회는 문화적 실천 주체로서 갖는 성격 의 독특함과 역사적 무게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었고, 사회 현상으로서의 관찰 대상에서도 열외에 놓여 있었 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현대 사회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회 적 현상으로 그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 대안공간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조명하려 하였다. 대안공간으로서의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로 확산되는 이면에는, 기존의 문화장이 충족시킬 수 없었던 요인들이 교회 라는 공간을 통해 생산되고 소비될 수 있는 가능성과 이에 대한 기대 심리 가 자리 잡고 있다. 본 연구가 교회라는 공간을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문화 생산의 장으로서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도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 으며, 이들이 요구하는 것, 즉 미술을 상품 가치로 환산하려는 자본주의 논리와 작가의 개인적 의지만이 허용되는 창작 활동을 넘어섬에 대한 추 구가 결국 우리 사회의 문화적 지형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동인으로써 작 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다양한 문화 전통과 가치를 하나로 포용할 수 있는 역할을 교회가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술한 오트란토 대성당 의 모자이크화가 구약 성경과 코란의 가르침, 고대 그리스와 로마, 켈트족 과 노르만족, 스칸디나비아, 비잔티움, 페르시아 그리고 아랍의 역사와 설 화들이 어우러진 새로운 이미지였음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본 논문에서 다루었듯, 대안공간으로서 교회의 역할과 가능성은 역사 적으로도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의 교회가 이를 의

366 366 교회사연구 제42집 식적으로 다시 받아들이고 문화적 실천에 옮기는가에 관한 문제, 그리고 교회가 누구에게나 심리적으로도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 는 순전히 교회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대안공간으로서의 교회라는 이론 적 배경을 다루는 본 논문에 이어, 구체적인 방법과 사례,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후속 연구가 보충되기를 기대한다. 투고일 : 심사 시작일 : 심사 완료일 :

367 참고 문헌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6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김동일,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 갈 무리, 김종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천주교회의 전례 토착화, 교회사 연구 25, 서상호, 지역에서 대안적 활동들, 로컬리티 인문학 4, 오재환, 부산 대안문화와 대안공간의 역동성, BDI 포커스 96, 이동연, 한국의 대안공간 실태 연구, 문화사회연구소, 임 산, John Lowden,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미술, 한길아트, 임영방, 중세 미술과 도상, 서울대학교출판부, 전영백, 196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 미술사 연구 23, 조수정, 헬레나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도상학 연구 카파도키아의 비 잔틴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중세사연구 13, 2004, 최병길, Germain Bazin, 세계조각의 역사, 미진사, A. Grabar, L Empreur dans l art byzantin(paris : Les Belles Lettres, 1936). Alain Duceillier, Les Byzantins(Paris : Seuil, 1988). Alain Erlande-Brandenburg, La cathédrale Saint-Etienne de Sens : La première cathédrale gothique(turnhout : Brepols, 2007). Alexandra Gajewski Zoë Opacic(eds.), The Church of the Order of St Antony at Pont-à-Mousson and post-1300 Gothic Archit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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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69 H. Ahrweiler, L idéologie politique de l Empire byzantin(paris : P.U.F, 1975). H. Reihard, La Cathédrale de Reims : son histoire, son architecture, sa sculpture, ses vitraux(paris : P.U.F, 1963). Hans-Emil Liden, Stave Churches in Medieval Scandinavia : An Encyclopedia, ed., Phillip Pulsiano(New York : Gerland Publishing, 1993). Henri Irénée Marrou, L église de l Antiquité tardive (Paris : Seuil, 1985). Johannes Quasten, The paintings of the Good Shepherd at Dura-Europos, Mediaeval Studies 9(1947). John Marenbon, Great Medieval Thinkers : Boethius(Oxford University Press, 2003). Juan Plazaola, L église de l art, Des origines à nos jours(paris : Le Cerf, 2008). Louis Réau Gustave Cohen, L art du moyen-âge et la civilisation française(paris : Albin Michel, 1951). M.F. Hearn, Romanesque sculpture(new York :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Marcel Aubert, La sculpture française au moyen-âge(paris : Flammarion, 1946). Maria Cristina Pereira, Les images-piliers du cloître de Moissac, Bulletin du centre d études médiévales d Auxerre, n 2(2008), Avaliable, July 17, Maurice H. Chéhab, Fouilles de Tyr, Bulletin du Musée de Beyrouth,

370 370 교회사연구 제42집 t. 33~36(1983~1986). Meyer Schapiro David Finn, The Romanesque sculpture of Moissac (New York : G. Braziller, 1985). Milena Bartlová, The Choir Triforium of the Prague Cathedral Revisited : The Inscriptions and Beyond, Prague and Bohemia. Medieval Art, Architecture and Cultural Exchange in Central Europe, Zoë Opacic(ed.), British Archeological Association, Milorad Medic, Technique, materials and conservation of the mosaic of the large basilica at Heraclea Lyncestis, Heracleis 3(1967). Neil Stratford, La frise monumentale romane de Souvigny(Ville de Souvigny, 2002). Nicholas Ryan Foster, The Imago Mundi of Honorius Augustodunensis(Portland State University, 2008). R. Bourgon, La Cathedrale de Metz(Metz : Œuvre de la cathedrale, 1976). Rita Wood, The Two Major Capitals in the Crypt of Saint-Bénigne at Dijon, The Antiquaries Journal 89(2009). S. Cristo, The Art of Ravenna in Late Antiquity, The Classical Journal 70-3(1975). Thierry Crépin-Leblond, Paris. La cathédrale Notre-Dame(Paris : Editions du Patrimoine, 2000).

371 교회와 미술관 : 중세미술의 주제 분석을 통해 본 교회의 역할에 대한 연구 371 ^_pqo^`q The Church and the Museum : study on a role of the Christian church from the thematic analysis of medieval art Soo-Jeong CHO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The appearance of huge museums negatively affected contemporary art in two ways. The first is paradoxical separation between art and ordinariness, in other words, alienation of art from the public. That is to say, going to the museum to see paintings became a special event, distinct from a daily incident ; it means art work became an extraneous subject existing in a special space out of our daily life. When we are reminded that the art has its origins in human daily struggle for survival, the phenomenon of separation between art and ordinariness is the exception rather than the rule in human history. The second is the phenomenon of desacralization of art. It doesn t refer only to the case of religious art. The desacralization of art means that paintings exhibited in a museum lose their vitality like stuffed specimens ; this is the result of a decontextualization from their environmental condition of art works. From a medieval art historian point of view, this study tries to give one solution to the problems that result from the modern museum s appearance. For this, we look first at the church and its art in the historical context, as factors contributing to combination of art and daily life. Next, we discuss the possibility of church as an alternative space for art. Often comprising a place converted from another use, an alternative space is different from a traditional commercial venue used for the exhibition of artwork. As sales are not the main priority of alternative spaces, alternative spaces continue to expand the definitions of art and

372 372 교회사연구 제42집 art exhibition. The Church and the Museum : study on a role of the Christian church from the thematic analysis of medieval art is a convergence study of history, society, art and religion ; it looks into the possibility and role of church in the future of Korean society and culture. Keywords : Church, museum, alternative space, medieval art, Byzantine art

373 서평

374

375 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김정신, 도서출판 미세움, 2012 안창모*1) 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역사 에서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수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교회건축의 발전 과정이 어떠한지 소 개하고, 전례 에서는 종파별로 전례가 건축 양식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었 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양식 에서는 각 종파의 주요 교회 건축물 을 보여주며 각 교회건축의 양식적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교회건축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짐작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제목과 다른 서술 체계다. 이 책은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다른 책과 차별된다. 첫째, 독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역사책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교회건축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역사 와 전례 그리고 (교회건축)양식 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작 책을 서술하는 체계는 역사, 전 례, 양식의 순서가 아니다. 학자들은 생리상 자신의 사관과 학문적 성과가 1)* 경기대학교 일반대학원 건축설계학과 교수.

376 376 교회사연구 제42집 가장 잘 드러나는 통사 부분의 성과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역사를 앞세우기보다 개별적인 교회건축을 앞세우 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가장 자랑할 수 있는 부분을 뒤로 돌리고 독자들 이 부담 없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선택권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돌아볼 수 있는 매력적인 교회건축을 책의 앞부분에서 풍부하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역사책이면서도 서술 체계를 다르게 하여 책을 어디에서부터 읽 을지 에 대한 선택권을 독자에게 넘긴 것이다. 중요한 각각의 교회를 상세하고 전문적인 수준으로 소개하면서도 교 회건축에 대한 관심을 현장으로 확장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정확한 주 소를 병기하는 친절함도 돋보인다. 책의 성격상 가이드북의 성격을 전면 에 내세우기는 어려웠겠지만, 인터넷이 발달하고 내비게이션 서비스가 발 달한 요즘, 각 교회 건축물에 대한 정확한 해설과 위치 정보는 독자들에 게, 책 다음은 자신의 행동 이라는 사실을 인지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책을 읽은 후 또는 책을 들고 자연스럽게 현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 는 책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성으로 인해 이 책은 학자가 서술한 책이 지만, 학자의 입장보다는 독자의 입장을 배려한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 다. 이것이 이 책이 갖는 첫 번째 가치다. 둘째, 이 책은 장소와 공간을 적시하며 전개되는 교회사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책은 책 안에 구체적인 장소가 언급되지만 해당 장소 와 실체가 독자들에게 가시적으로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역사학은 독자 들이 역사책을 읽으며 책의 내용을 온전하게 머리로 이해할 것을 강요하 는 학문이다. 따라서 역사책을 읽으며 저자의 주장에 온전하게 동화되기 위해서는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저자 수준의 공간 지각력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과 역사의 현장을 일치시키는 것은 역사책이 대중성을 갖기

377 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377 위한 기본 요건이지만, 이를 갖추고 있는 역사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역사적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들에게 역사책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 유이기도 하다. 역사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어디엔가 기댈 곳 이 필요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역사책은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 다. 한때 신문처럼 디자인된 역사신문 이라는 역사책이 큰 인기를 끌었 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 반해 건축 역사책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하다.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 은 자신들의 눈높이를 독자들에게 맞추는 데 서툴다. 이는 건축가들이 기 본적으로 계몽적 시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계몽적 저자의 눈높이는 독자들의 눈높 이와 어긋나게 되고, 저자들은 한 걸음 또는 두 걸음 앞서나가게 된다. 독자들이 부지런히 쫓아오면 어느 틈엔가 저자는 저만치 멀리 가 버리고 없다. 그러한 차이는 독자와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의 구성은 독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 쉬어가면서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마도 이 책을 손에 쥐는 독자들은 무신론자보다는 유신론자일 가능 성이 높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권 하고 싶다. 우선 자신이 믿고 있는 종파의 교회건축에 기대어 이 책을 읽 으라고 권하고 싶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교회건축의 순서는 과감하게 무시해도 좋다. 저자가 책의 구성을 이와 같이 했을 때는 책을 첫 페이지 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자신이 정해준 순서에 따라 읽을 것을 요구 했을 리 없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교회건축을 저자의 설명과 함께 하나 씩 들여다보노라면 역사와 전례가 공간 속에 펼쳐지면서 자신의 종교 건

378 378 교회사연구 제42집 축에 통달할 수 있다. 그다음에 다른 종파의 교회건축을 들여다보면 그 차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파별 교회건축의 차 이가 눈에 들어오면, 독자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종교 건축을 온전히 소화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 책은 전례와 교회 공간 그리고 건축 양식을 일대일로 맞춰가 는 재미가 있다. 이러한 재미는 각 종파의 교회건축이 어떻게 다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 종파의 교회건축이 얼 마나 같은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회건축에서 나타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종교와의 거리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해 본다면, 저자가 바라는 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 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것이 나열되어 있는 경우 공통점보다는 차이를 드러내고 찾아내는 데 익숙하다. 특히 종교의 경우 남과는 다른 나 또는 나와 다른 남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그러한 익숙함은 공존보다는 차별화를 통해 자신의 우위 또는 존재감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곤 한다. 그러나 시선을 바꾸면, 현저하게 다를 것으로 예상되는 종 파의 교회건축에 의외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 종교가 갖는 근친성의 발견 은 이웃한 종교 간의 거리를 교회건축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좁힐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이 땅에서 복음을 펼친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 정교회가 그리 스도교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 종교가 어려운 시기에 민중들의 편에 서면서 이 땅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379 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379 책을 읽다 보면, 한옥 교회가 종파와 관계없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뾰족한 첨탑을 교회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는 많 은 사람에게, 교회가 한옥으로 지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매우 새로운 내용일 것이다. 한옥 교회가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인데, 서로 간에 꽤나 거리가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성공회가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한옥을 교회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던 초기에 교회가 한옥을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교파로 갈린 그리스도 교 사이의 거리가 매우 하찮은 것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의 교회 건축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각 종파가 만족할 만큼 충분히 서술되 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종파별로 각기 입장이 다르겠지만, 이는 종교의 문 제가 아니라 근대 교회건축 권위자인 저자의 학술적 판단이라는 점이 존 중되어야 할 부분이다. 종파별로 다른 전례를 갖고 있는 각 종교가 자신들의 교회건축을 어 떻게 다르게 만들어왔는지를 저자와 함께 하나씩 짚어가는 재미와 함께, 각 종파의 전례 차이가 가져오는 교회건축의 차이가 그 차이를 넘어 본질 적으로 같을 수 있다는 고민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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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부는 공동 작업으로 동아일보 에 게재된 천 주교 관련 기사 목록을 작성했다. 최근에 교회사 연구자들은 교회 자료뿐 만 아니라 비교계( 非 敎 界 ) 일간지 및 잡지 등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 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검색해서 이용하였을 뿐이고, 이처럼 기사 검색 목록을 작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구자들이 일일이 검색어를 입력하 는 불편함이 없이 보다 쉽게 기사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한 이번 작업이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일간지에 보도된 천주교 관련 기사가 매우 많기 때문에 일단 일제 시기로 한정해서 발췌하였다. 일제 시기로 한정한다고 해도 당시에 발행 된 신문의 기사를 모두 발췌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동아일보 의 기사만을 다루었다. 동아일보 가 1920년 4월에 창간되 었다가 1940년 8월에 폐간되었으므로 발췌된 기사는 1920~1940년에 보도된 것들이다. 천주교 관련 기사 중에서 한국 천주교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만을 추려서 정리했다. 그렇게 발췌된 기사는 총 490건이며, 내용 별로 분류하면 다음의 표 1 과 같다.

384 384 교회사연구 제42집 표 1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 내용별 분류(1920~1940년) 분류 항목 주요 내용 기사 건수 교구 교구 행사 개최, 주교 관련 소식 56건 본당 본당 대축일 행사, 성당의 건축, 본당 신부 관련 소식 115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파리 외방전교회, 성 베네딕도 수도회 9건 단체 청년회, 소작인회 42건 교육 예수성심신학교, 유치원, 보통학교, 남대문상업학교, 야학, 강습소, 강습회, 강연회, 학교 후원회 117건 선교회 수도회 자선 교회사 문학 출판물 기타 고아원, 양로원, 시료소(施療所), 이재민 구호, 빈민 구제 73건 서학, 천주교 백년사( ) 36건 가톨릭 문학의 대두 1건 가톨릭 잡지 및 서적 신간 소개 7건 사건 사고(棄兒 등) 합계 34건 490건 천주교 관련 기사의 대부분은 짧은 소식이다. 하지만 본당사 및 교구 사를 편찬할 때 사실 확인을 위한 자료로 유용하다. 그리고 가톨릭 청년 운동, 가톨릭 사회복지 활동 등의 연구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일제 시기 일반 사회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 교구 교회 법인으로 京城區天主敎維持財團 허가 , 2면 7단 경성구천주교유지재단의 설립을 5월 9일부로 허가. 천주교의 은경축 , 3면 7단 1920년 9월 10일에는 뮈텔 주교의 은경축, 9월 20일에는 신학생 서품식이 거행 될 예정.

385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85 신부의 서품식 , 3면 6단 1920년 9월 18일 명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의 주례로 서품식을 거행. 閔 주교의 甲 宴 , 3면 12단 9월 21일 명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 회갑연을 거행할 예정. 천주교 閔 德 孝 주교의 회갑 축하 , 4면 6단 1920년 9월 21일 명동 성당에서 뮈텔 주교의 환갑 및 은경 축하식 거행(사진). 원산 천주교 近 況 , 4면 2단 1921년 3월 이래, 원산 천주교회(원산교구)의 사목이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독일 베네딕도회로 이관. 總 督 僧 正 초대 , 2면 8단 사이토 총독이 1921년 5월 2일에 뮈텔 주교 등을 관저로 초대하여 만찬을 열 예정. 천주교 주교 환영회 , 4면 4단 1921년 6월 15일 원산부 명석동 천주교회에서 (사우어) 주교 부임 환영회가 개최. 천주교 辛 주교 환영 , 4면 1단 원산 지역 유지들이 1921년 6월 28일에 사우어 주교의 환영회를 개최. 安 주교 기념 성대 , 4면 7단 6월 26일 대구에서 안(드망즈) 주교 서품 25주년 기념식이 거행. 法 王 使 節 入 京 期 , 1면 10단 교황사절 자르디니 대주교가 경성에서 개최되는 천주교 司 敎 會 議 (주교회의)에 참 석하기 위해 9월 2일에 東 京 에서 올 것이라고. 천주교 순교자 表 彰 式 , 2면 9단 6월 로마에서 열릴 예정인 순교자 표창식(시복식)을 위해 뮈텔 주교, 드망즈 주 교, 韓 모(한기근 신부) 등 3명이 순교자 4명의 유골을 가지고 3월 18일에 출발. 천주교 조선인 側 자치 실시 확정 , 2면 6단 선교사들이 조선인 자치 독립 교회제를 채용하기로 결의.

386 386 교회사연구 제42집 元 山 女 修 師 院, 원산에서 계획 (부록), 3면 1단 원산 천주교(원산교구)는 여자수사원을 설치하기로 계획 중. 치명자 시복식 , 4면 6단 9월 25일부터 3일간 평남 평원군 읍내 천주교회에서 全 조선 천주교 치명자 시복 기념식이 거행. 데부뎃 주교 長 眠 , 5면 7단 드브레 주교가 1월 18일 뇌일혈로 선종. 全 市 에 彌 滿 한 奉 悼 의 氣 分 , 2면 9단 명동 성당에서 신부와 수녀들이 純 宗 의 승하를 봉도. 독일 수도원, 덕원으로 이전 , 3면 3단 10월 1일 베네딕도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 해서 지방 천주교 자치회 조직 , 4면 9단 3월 27일과 28일에 재령 천주교회에서 황해도 천주교회 지방 대표가 모여 황해 도 천주교 自 治 基 成 會 의 규칙 통과와 발전책을 토의. 순교의 碧 血 로 장식된 천주교 포교 百 年 祭 , 2면 1단 9월 24일~26일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聖 祭 가 거행. 복음의 전파는 180여 년 전 , 2면 1단 조선교구 설정 百 年 祭 관련.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蘇 주교 임명 등을 소개. 성대한 歡 迎 裡 法 王 代 表 入 京 , 2면 3단 9월 11일에 교황사절 무니 주교가 경성역에 도착(사진). 생명을 희생, 진리를 찾는 민족 무니 僧 正 의 感 想 談 , 2면 3단 경성을 방문한 교황사절 무니 주교의 소감. 法 王 代 表 마저 淸 光 祭 거행 , 2면 7단 9월 26일 조선교구 설정 百 年 祭 를 앞두고 교황사절 무니 주교의 주재로 명치정 천주교회에서 천주께 淸 光 을 구하는 제사가 거행.

387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87 천주교 開 敎 百 年 紀 念 會 , 2면 6단 9월 26일 명치정 천주교회에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축하회가 개최될 예정. 사설 천주교 百 年 祭 , 1면 1단 9월 26일에 열리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식에 대한 설명. 장엄한 百 年 祭 거행 , 2면 1단 9월 26일 명치정 천주교회에서 조선교구 설정 百 年 祭 가 거행(사진). 천주교회의 百 週 기념식 , 4면 4단 9월 26일에 평양부 관후리 천주교회에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및 순교자 기념 축하식이 거행. 法 王 使 節 招 待 宴 , 2면 7단 9월 27일에 교황사절 무니 주교 환영회가 개최(사진). 천주교 百 年 祭 , 3면 9단 9월 26일 平 北 博 川 邑 천주교회에서 천주교 조선 傳 道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축하식이 거행. 第 一 世 주교 蘇 氏 百 年 後 에 장례식 , 2면 7단 조선교구의 초대 주교 蘇 주교의 유해를 9월 23일에 만주에서 조선으로 옮겼고, 10월 15일에 장례식을 거행할 예정. 天 主 公 敎 會 대표자 대회 , 3면 6단 4월 12일부터 15일까지 장연읍 천주교회에서 황해도 천주교회 각군 대표자 대회 와 청년회 대표 대회가 개최. 조선 在 住 56년 閔 주교 금일 별세(석간) , 2면 1단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가 1월 23일에 별세. 閔 주교 葬 儀 에 6천 명 會 葬 (조간), 2면 7단 1월 26일 명치정 천주교회에서 뮈텔 주교의 장례식이 거행.

388 388 교회사연구 제42집 천주교 閔 주교 장례식 (석간), 2면 1단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의 장례식 사진. 許 多 업적 두고 양화진에 安 眠 (석간), 2면 4단 1월 26일 명치정 천주교회에서 뮈텔 주교의 장례식이 거행. 황해 카톨릭교구 성체 거동 대회 (석간), 5면 7단 황해도 準 自 治 敎 區 (감목대리구)는 6월 20일에 안악 매화리 천주교회에서 제2회 성체 거동 대회를 개최할 예정. 천주교 전래 150주년 (석간), 2면 9단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식이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 행사 일정을 소개. 사설 천주교와 조선 (조간), 1면 1단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식 맞아 천주교 전래와 조선에 대한 내용을 소개. 천주교 입국 150주년 (조간), 2면 1단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식 관련.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 5천여 신도 폴 法 使 환영 (조간), 2면 1단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가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 교황대사 入 壤 (석간), 2면 6단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가 평양에서 열린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축하식 에 참석(사진). 천주교 150주년 崇 嚴 盛 大 한 기념식 (석간), 2면 1단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식이 평양 관후리 천주교회 광장에서 개최(기념 식 사진). 외국 인사의 朝 鮮 生 活 觀 맹목적 추종이 破 綻 의 主 因, 낭비 생활을 청산하라, 천주교 주교 元 亨 根 氏 談 (부록), 3면 5단 라리보 주교가 조선에서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을 소개.

389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89 박애정신으로 성모병원 창설 (조간), 2면 1단 재단법인 경성구천주교유지재단의 성모병원이 5월 11일에 개원식을 거행할 예정 (성모병원과 박병래 병원장 사진). 간도 천주교 傳 道 四 十 年 祭, 今 秋 간도에서 거행(용정) (석간), 4면 10단 8월 중순에 간도 천주교 전래 40주년 기념제가 열릴 예정. 沒 書 (조간), 4면 11단 대구 천주교회(대구교구)는 6월 11일에 대구교회(대구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식 을 거행할 예정. 天 主 敎 區 설치 25주년 기념식(대구) (조간), 4면 4단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경축식이 명치정 성당에서 거행(경축식과 안세화 주교 사진). 간도 천주교 40주년 기념식 제반 준비를 완료(용정) (조간), 5면 4단 간도 천주교 40주년 기념 경축대회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위원회 간 부와 대회 순서가 결정. 카톨릭 敎 에서 朝 滿 을 獨 立 區 로 (조간), 2면 8단 교황청은 일본 조선 만주를 독립 관구로 하고, 동경에 大 司 敎 를 임명할 예정이 라고. 安 世 華 氏 서거 (조간), 6면 6단 대구교구장 안세화(드망즈) 주교가 서거. 全 南 敎 區 로서 法 王 廳 을 指 令 (조간), 4면 10단 교황청이 전남교구(광주지목구)를 설정. 광주지목구는 광주에 성당을 신축하고 낙성식을 거행(성당 사진). 천주교 京 城 區 精 神 總 動 員 諸 行 事 (조간), 2면 5단 경성교구 교회와 신자들은 전시 체제하에서 매일 매월 연중으로 나누어 정신총 동원 행사를 실행하기로 결정. 대구 천주교회에서 銃 後 報 國 을 결의 (조간 3면, 석간 7면) 9단 대구교구는 국민총동원과 관련하여 교구 내 신자들이 실행할 매일 매주 매월 연중 행사를 결정.

390 390 교회사연구 제42집 미사 聖祭 十八日 집행 천주교회 내에서 (조간), 2면 8단 선종한 교황에 대한 추모 미사가 18일 명치정 천주교회에서 거행될 예정. 소식 (석간), 1면 11단 조선 천주교 경성교구 司敎館 비서인 오기선 신부가 인사차 동아일보사를 방문. 2. 본당 耶蘇 행적 활동사진 , 4면 5단 원산부 명석동 천주교회는 1921년 7월 14일에 원산 천주교회와 원산 청년회 및 동아일보지국의 후원으로 예수 행적 활동사진을 상영. 耶蘇 행적 사진 後報 , 4면 4단 1921년 7월 14일에 있었던 예수 행적 활동사진 상영에 1,000명이 참석. 천주교의 耶蘇 映寫 , 4면 3단 원산 천주교회는 예수 행적 활동사진을 대구에서 상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람들 을 대구로 파견. 天主公敎會 축하식 , 4면 4단 9월 12일 인천 본당은 드뇌 신부의 은경축 축하식을 거행. 인천의 성탄 축하식 , 4면 5단 寺町 천주교회는 12월 24일에 성탄 축하식을 열 예정. 의주 천주당 성탄식 , 4면 4단 의주 천주교회는 12월 25일에 천주 성탄식을 성대히 거행. 天主公敎 성탄제 , 4면 3단 진남포 천주교회는 12월 24일에 성탄제를 거행. 사리원 크리스마스 , 4면 3단 사리원 각 교회 크리스마스 준비로 바쁨. 천주교회는 24일 실시.

391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91 四 十 五 年 間 을 奮 鬪 한 천주교의 신부 , 3면 1단 선종한 로베르 신부의 행적과 장례식을 소개. 羅 馬 法 王 추모식 , 4면 7단 원산 천주교회는 1월 30일에 교황 추도식을 거행. 인천에 성탄 축하 , 4면 5단 인천 寺 町 천주교회는 12월 24일에 성탄 축하식을 개최할 예정. 천주교 성탄 축하식 , 4면 5단 사리원 천주교회는 12월 24일에 성대한 성탄 축하식을 거행. 金 海 宅 여사의 기부 , 4면 5단 황해도 장연의 신자인 김해택은 소유 전답 3,462평을 장연 천주교회에 기부. 李 起 俊 氏 출발 , 4면 6단 사리원 본당의 이기준 신부는 경성으로 전임되어 7월 9일에 출발. 성모승천 축하식 , 4면 7단 목포 연동 천주교회는 8월 15일에 성모 승천 축하식을 거행. 원산 천주교회의 送 迎 , 4면 8단 옥낙안(에카르트) 신부의 북간도 전임과 김시련(슈미트) 신부의 부임으로 9월 2일에 送 迎 會 를 개최. 천주교당 성탄 기념 , 3면 7단 진주 옥봉리 천주교회는 12월 24일 성탄 축하식을 개최. 내 동리 명물 중림동 천주교당 , 3면 1단 중림동 성당과 조선 천주교 역사를 간략히 소개(중림동 성당 사진). 천주교당에 벼락 , 2면 2단 8월 3일 중림동 성당에 벼락이 떨어져 피해 입음. 인천 성탄 축하 , 3면 1단 인천 천주교회는 12월 24일에 예수 성탄 축하식을 거행할 예정.

392 392 교회사연구 제42집 동아일보 기자 지방 순회 正 面 側 面 으로 觀 한 봉산과 안악 (부록), 1면 1단 단체 소개. 봉산군 단체 중에 천주교회가 있음. 동아일보 기자 지방 순회 正 面 側 面 으로 觀 한 金 泉 의 表 裡 (부록), 4면 1단 단체 소개. 김천 천주교회, 대표자는 이약슬. 천주교당 건축, 固 城 敎 徒 들이 , 5면 2단 고성군의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을 건축하기로 협의. 龍 騰 虎 躍 兩 日 間 쇄도한 관중과 勇 壯 한 각종 경기 , 5면 1단 진남포 천주교회는 5월 23일에 열린 진남포 시민 대운동회에 참가. 耶 蘇 승천 축하 , 5면 7단 문산 천주교회는 5월 20일에 예수 승천 축하식을 거행. 해서 지방 사리원 성탄 준비 , 4면 8단 사리원 천주교회는 12월 25일 성탄일을 기념하기 위해 축하식을 준비 중. 보안 신부 영면 , 2면 6단 종현 천주교회의 프아넬 신부가 영면. 각 지방의 크리스마스 평원 , 4면 9단 평원 천주교회는 24일부터 25일까지 크리스마스 축하를 진행. 순회 탐방(3) 봉산 지방 大 觀 (3) , 4면 3단 사리원 천주교회는 1913년에 설립. 신자는 2백 명. 순회 탐방(27) 해주 지방 大 觀 (1) , 4면 4단 1916년에 南 旭 町 에 천주교회를 설립. 신자는 150여 명. 순회 탐방(43) 신천 지방 大 觀 (3) , 4면 3단 신천 천주교회의 신자는 5백여 명. 순회 탐방(73) 평양의 偉 觀 (6) , 4면 10단 평양의 천주교회는 1개소(관후리). 신자는 4백여 명.

393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93 순회 탐방(80) 신의주의 번영(3) , 4면 5단 미국인(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지. 신자는 2백여 명. 순회 탐방(99) 사회 各 般 이 施 設 의 初 期 (2) , 4면 3단 1919년에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에 천주교회가 설립. 신자는 약 2천 명. 순회 탐방(120) 풍광이 明 媚, 南 國 의 情 緖 (2) , 4면 1단 30년 전에 濟 州 城 내와 右 面 서홍리에 천주교회가 설립. 신자는 183명. 순회 탐방(139) 日 人 은 旺 盛, 우리는 漸 衰 (9) , 4면 2단 1890년경에 김보록(로베르) 신부가 대구에서 선교를 시작. 天 主 公 敎 大 邱 敎 區 가 설치. 대구부의 영세자는 조선인 3,971명, 일본인 130명(성당 사진 2장, 수녀원 사진 1장). 순회 탐방(152) 萬 般 事 業 을 交 通 에 企 待 (5) , 4면 2단 춘천읍에 布 敎 所 를 두고 약 2백 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유야무야. 순회 탐방(156) 海 西 의 巨 邑, 敎 育 이 不 備 (8) , 4면 4단 안악 용문면 구화리( 매화리 의 오류)는 천주교의 모범촌. 안악읍의 신자는 40여 명. 새집에서 屋 上 에서 본 京 城 의 八 方 , 2면 3단 서울에서 제일 높은 종현 성당에 대해 설명. 순회 탐방(185) 地 味 는 肥 沃 한데, 棉 花 가 名 産 (3) , 4면 6단 용강 지방에 천주교회는 2개소, 신자가 140여 명. 사업 성공자 열전(17), 蠶 業 성공가 안성 閔 泳 鍾 氏 , 4면 1단 안성 미산리 천주교회의 강도영 신부가 농가 구제책으로 桑 苗 를 배양하여 농가에 무료로 분배하고 蠶 業 을 권유. 순회 탐방(203) 정거장 근처부터 日 人 이 蠶 食 , 4면 3단 수원 지방의 천주교 신자는 130여 명. 순회 탐방(228) 교육은 幼 稚 하고 상권은 中 人 에게 , 4면 5단 이천 개하리 천주교회를 소개.

394 394 교회사연구 제42집 순회 탐방(251) 생산이 풍부하여 關 西 의 富 庫 (3) , 4면 3단 용천 지방에 천주교회는 1개소, 신자가 15명. 순회 탐방(262) 九 月 山 下 의 無 味 한 僻 村 (2) , 4면 5단 장연 지방에 천주교회는 1개소, 신자 60여 명. 순회 탐방(283) 두만강 流 筏 은 擧 皆 集 散 , 4면 7단 1926년에 임갈충(히머) 신부가 회령에 會 堂 을 세우고 선교. 신자는 70명. 순회 탐방(293) 일반 생활의 근거는 火 田 , 4면 5단 화천 지방에 천주교회는 3개소, 신자는 90명. 순회 탐방(321) 波 瀾 重 疊 한 국경의 요충(8) , 4면 5단 의주 지방의 천주교 신자는 3백여 명이고, 천주교회에서 유치원과 양로원을 운영. 기호 지방 성체 거동 기념식 , 4면 8단 음성군 감곡면 천주교회는 6월 17일에 성체 거동 기념식을 거행. 순회 탐방(448) 논산 평야는 南 鮮 에 有 數 (2) , 4면 6단 논산 천주교회는 1906년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고, 부속 사업으로 유치 원을 경영. 순회 탐방(475) 인삼으로 유명한 고려의 舊 都 (9) , 4면 5단 개성 천주교회는 1900년에 루블레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고, 현재는 서병익 신부 가 재직. 신자는 170여 명. 순회 탐방(507) 産 米, 産 紙 는 全 鮮 에 著 名 (4) , 4면 3단 김천 지방의 천주교 신자는 1천 3백여 명. 순교자 기념 거행 , 5면 1단 평양 관후리 천주교회는 9월 26일에 부속 성모여학교에서 기해 병오년 순교자를 기념하는 提 燈 행렬을 거행.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 기념 성당 , 4면 4단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천주교회는 김대건 신부의 묘소에 기념 성당을 건립하고 9월 18일에 헌당식과 낙성식을 거행.

395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95 크리스마스 예산 , 4면 5단 예산 천주교회는 12월 24일에 성탄 축하식을 개최할 예정. 천주교 헌당식 , 3면 9단 황해도 곡산 천주교회는 8월 중순경에 천주당을 준공하고, 10월 3일에 헌당식을 거행. 천주교 축성식 , 3면 8단 합덕리 천주교회는 10월 9일에 교당 축성식을 거행. 천주교당 신축 낙성식 , 3면 10단 합덕리 천주교회는 10월 9일에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신축 교당 낙성식을 거행. 會 合 , 3면 10단 안성 천주교회는 12월 24일에 성탄 축하식을 거행. 지방 여론을 聽 함(29) 洪 原 篇 (2) , 5면 1단 원산 천주교회의 농업 경작. 崔 永 秀, 養 蠶 모범촌인 미산리 답사기 , 5면 3단 미산리 천주교회의 강도영 신부가 농가 구제책으로 桑 苗 를 배양하여 농가에 무료 로 분배하고 蠶 業 을 권유. 소식 , 3면 11단 신천 천주교회 이기준 신부가 6월 5일에 신임 인사차 동아일보 신천지국을 방문. 會 合 , 3단 9단 음성 감곡면 성당의 신축 낙성이 10월 7일에 거행. 천주교당 건축 , 6면 4단 독일인(베네딕도 선교사)들이 영흥읍에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토지를 매수. 용정 천주당 신부 피살 , 2면 용정 천주교회 콘라도 신부가 6월 5일 용정에서 옹성라자로 가던 중에 피살.

396 396 교회사연구 제42집 안성 時 話 孔 安 國 氏 석별 , 3면 3단 안성 천주교회 선교사이자, 안성 안법학교 설립자 겸 교장인 프랑스인 공안국(공 베르 신부)이 경성 천주교 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어 9월 22일에 안성을 떠남. 천주교당, 안악에 신축 , 4면 2단 김명제 신부의 설계로 안악에 강당 신축 공사에 착수. 會 合 , 3면 9단 왜관 천주교회는 11월 4일에 성당 낙성식을 거행. 소식 (석간), 3면 8단 괴산 천주교회 정원진 신부가 동아일보 괴산지국을 방문. 家 庭 百 態 ( 其 4) 老 處 女 (조간), 3면 1단 종현 천주교회 신자인 林 順 分 의 이야기. 春 風 秋 雨 40여 년 종현 천주교당 수리 (조간), 2면 5단 종현 성당의 십자가를 수리하는 중(성당 사진). 2 人 夫 중상 (조간), 2면 9단 8월 22일 고원 성당 건축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독일인 수사가 사망. 고원 天 主 公 會 堂 건축 (조간), 5면 1단 고원 천주교회는 12월 16일에 성당 낙성식을 거행할 예정(성당 사진). 준공 가까운 회령 천주교당 (석간), 3면 1단 회령 성당 사진. 준공된 평강 천주교당 (석간), 3면 1단 평강 성당 사진. 평창 대화리에도 화재, 3호가 전소 (조간), 5면 5단 강원도 평창의 천주교회에서 화재. 인근에도 옮겨 3호가 전소. 김천 천주교당 2만 원으로 신축 (석간), 3면 6단 김천읍에 성당을 신축.

397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97 김천읍 천주교회당 신축 (석간), 3면 1단 신축된 김천 성당 신축 사진. (고원 지방) 사회단체의 動 靜 종교계 (조간), 3면 1단 천주교는 3년 전에 읍내에 大 건물을 세우고 포교에 착수. 신자는 80명. 韓 論 氏 귀국 (석간), 7면 5단 평북의 비현 천주교회 한륜(한논) 신부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귀국. 신축 중의 사리원 천주교당 (조간), 3면 5단 신축 중인 사리원 성당 사진. 금일의 사진 뉴스 (석간), 5면 1단 신축된 회령 천주교 제2교당 사진. 천주교회 내에 무전을 설치 (조간), 2면 2단 신의주 헌병대는 신의주 천주교회 미국인 신부가 교회에 설치된 무전 수화기로 해외와 연락을 취하고 있는 사실을 탐지하고, 이를 고발. 교당 신축 위해 전재산을 (조간), 4면 5단 조선 북국 성당의 신축을 위해 한 신자가 대지와 밭을 기부. 東 洋 一 의 종탑 (조간), 2면 1단 종현 성당의 종탑 공사가 완료. 종탑의 시계는 동양에서 제일 큼(종탑 사진). 歸 來 한 徐 伊 良 신부 환영회 성황 (조간), 7면 8단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다가 돌아온 진남포 교회의 서이랑(스위니) 신부를 위한 환영회가 개최. 신고산 천주교회당 신축 낙성식 (조간), 5면 5단 신고산 천주교회는 6월 20일에 성당 신축 낙성식을 거행(신고산 성당 사진). 춘천 천주교서 祈 願 祭 를 거행 (조간), 5면 5단 춘천 천주교회는 기원제를 지내고 국방헌금을 모집할 예정.

398 398 교회사연구 제42집 국방헌금 위문금 (조간), 5면 9단 신천읍 척서리 천주교회는 국방헌금을 모아 신천 경찰서에 전달. 카톨릭 예식으로 將 士 위령제 (조간), 5면 8단 평양 신리 천주교회는 支 那 事 變 희생 장병 위령제를 거행할 예정. 위령제 장엄히 거행 (조간), 5면 7단 평양 신리 천주교회는 위령제를 거행. 두도구 중요 기관 (조간), 8면 1단 종교 단체 중에서 천주교회가 포함. 국방헌금 위문금 (조간), 5면 4단 중강 천주교회 신자들이 강계 헌병분대에 국방헌금을 기탁. 국가 평화 기원 聖 祭 거행 (조간), 7면 9단 충남 서천 천주교회는 국가 평화 기원 성제를 거행. 주교 환영회 (조간), 7면 12단 왜관 천주교회는 드망즈 주교의 환영회를 개최할 예정. 왜관 교육계 은인 이동헌 신부 香 港 行 (조간), 7면 1단 왜관 천주교회 이동헌(리샤르) 신부가 치료를 위해 홍콩을 향해 출발. 카토릭 敎 會 武 運 彌 撒 聖 祭 (석간), 2면 9단 경성부 내 4개 천주교회는 11월 1일에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미사성제를 거행할 예정. 秋 期 巡 回 傳 道 (조간), 7면 11단 삼랑진 천주교회는 秋 期 공소 순회를 할 예정. 천주교 신부 任 竭 忠 氏 (조간), 6면 6단 흥남 천주교회 독일인 임갈충(히머) 신부를 소개(성당과 임갈충 신부 사진). 地 料 독촉에 우는 百 餘 戶 의 빈민 (석간), 2면 6단 인천 旭 町 지역 천주교회 소유지에 빈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천주교회가 주민들

399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399 에게 변호사를 고용하여 地 料 를 납부하라고 하여 주민 대표가 원형근(라리보) 주 교에게 갔으나 만나지 못함. 旭 町 주민 대표 再 次 로 陳 情 (조간), 7면 5단 천주교회가 인천 욱정 지역의 주민들에게 체납 지료를 독촉하자 주민 대표가 라 리보 주교에게 갔으나 두 차례 모두 만나지 못함. 인천 旭 町 의 주민 결국 各 各 流 離 乎 (조간), 7면 8단 인천 旭 町 지역 주민 대표가 라리보 주교를 만나 체납된 지료를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주교가 거절. 주민들은 流 離 할 형편에 이르렀음. 천주교 삼랑진 교회 묵상 개최 (조간), 6면 14단 삼랑진 천주교회는 3일간 묵상회를 개최. 기독교도 시국좌담 (조간 3면, 석간 7면) 4단 부여경찰서는 3월 26일에 군내 기독교 교역자 등을 초청하여 시국좌담회를 개최 했는데, 금사리 천주교회 김영식 신부도 참석. 종교계 巨 星 천주교 신부 劉 載 玉 氏 (석간), 6면 6단 양양 천주교회 유재옥 신부에 대해 소개(사진). 근엄한 종교가 신부 崔 宗 哲 氏 (석간), 4면 10단 공주시의 최종철 신부의 활동과 업적에 대해 소개. 武 運 長 久 祈 願 영등포 천주교회서 (조간), 4면 12단 영등포 천주교회는 6월 9일에 皇 軍 武 運 長 久 祭 를 거행. 삼랑진 천주교회 皇 軍 慰 靈 祭 집행 (조간), 4면 2단 삼랑진 천주교회는 7월 7일에 지나사변 1주년을 기념하여 황군 위령제를 거행할 예정. 빈민의 慈 父 潘 論 氏 歸 來 (조간), 4면 13단 안주 천주교회 신부였던 潘 論 (바론) 신부가 1년 만에 안주를 방문. 국방헌금 (조간 3면, 석간 7면) 9단 예천 천주교회가 국방헌금을 납부.

400 400 교회사연구 제42집 五十名의 匪團이 佛天主敎會 襲擊(海州) (조간), 1면 10단 4월 27일에 匪賊이 해주 천주교회를 습격. 조선 최초의 佛國博士 尹乙洙氏 巴里大學서 논문 통과 (석간), 2면 3단 윤을수 신부의 박사 논문이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통과. 양양 천주교도 赤誠, 국방헌금 납입 (조간), 4면 6단 양양 천주교회 신자들이 중일전쟁 국방헌금을 납입. 영등포 천주교회당 도림산에 이전 (석간), 7면 3단 영등포 천주교회가 도림산으로 이전할 예정. 靑葉에 어린 성당 (조간 3면, 석간 7면) 1단 장호원 성당 사진. 3. 선교회 수도회 천주교의 성체 거동 , 3면 4단 성 분도 수도원(베네딕도 수도원)은 1920년 6월 3일 혜화동 성 베네딕도 수도원 에서 성체 거동 행사를 거행. 허영의 거리를 떠나(1) 천주교 수도원 (부록), 2면 1단 조선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대한 설명(명동 성당과 수녀들의 사진). 허영의 거리를 떠나(2) 천주교 수도원 (부록), 2면 1단 조선에 진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대한 설명(수녀들의 묘지 사진). 佛國婦人 가메로, 外國婦女가 본 조선 가정의 장점과 단점 , 3면 1단 프랑스인 가밀 수녀가 본 한국의 가정. 천주교 大僧正 게브리앙 씨 來邱 , 3면 1단 파리 외방전교회 총장 드 게브리앙 주교가 5월 15일에 대구에 도착(사진). 천주교 수녀원 , 4면 5단 천주교 원산 수녀원은 함남 안변군 위익면 신대리에 분원을 신축 중.

401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01 在大邱 佛人 7명에 소집령 (조간 3면, 석간 7면) 11단 대구 남산 천주교회 프랑스 신부(파리 외방전교회) 7명이 본국으로부터 소집령을 받음. 佛國 선교사 소집 해제로 귀환 (석간), 2면 3단 경성 주재 프랑스 선교사들이 본국 정부의 소집으로 중국 봉천으로 가서 대기하 고 있었는데, 소집 해제가 되어 경성으로 되돌아왔음. 불란서 교회의 신부 하氏 應召 (조간), 2면 2단 프랑스 선교사 2명이 본국으로부터 제2차 소집령을 받아 입대를 하기로 했음. 4. 단체 모임 예수 행적 활동사진회 , 3면 9단 예수성심회는 7월 10일부터 2일간 경성 공회당에서 크리스마스 활동사진회를 개최할 예정. 천주교 청년회 총회 , 4면 5단 진남포 천주교회 청년회는 12월 25일에 정기총회를 개최. 연합 정구대회 개최 , 4면 6단 명도회 운동부는 5월 28일 대구 남산정 천주교회에서 연합 정구 대회를 개최. 단결한 천주교 청년 , 3면 5단 각 지방의 청년회가 연합하여 교회 발전과 교육 사업에 노력하기 위해 근래에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를 조직. 천주교 청년회 창립 , 4면 6단 평양 천주교 청년회의 창립총회가 7월 16일에 개최. 천주 청년 창립총회 , 4면 6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의 창립총회가 8월 20일에 개최. 천주교 청년회 총회 , 4면 6단 수원 천주교 청년회의 창립총회가 9월 11일에 개최.

402 402 교회사연구 제42집 천주교 청년회 총회 , 4면 5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의 임시총회가 9월 10일에 개최. 천주교 청년회 창립 , 4면 5단 사리원 천주교 청년회가 10월 29일에 창립. 천주 청년 토론 , 4면 5단 사리원 천주교 청년회는 11월 20일에 성당에서 토론회를 개최. 천주교 청년회 총회 , 4면 6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11월 23일 임시총회를 개최. 회칙 개정 및 보결 임원 선거. 安 昌 男 君 今 五 日 夜 京 城 에 도착 , 3면 1단 종현 천주교 청년회 회원들이 남대문 정거장에서 비행사 안창남을 환영. 진주 천주 청년 巡 劇 , 4면 6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선교의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12월 28일부터 1월 6일까지 순회공연. 천주 청년회 토론회 , 4면 5단 사리원 천주교회 청년회는 1월 19일에 성당에서 토론회를 개최. 천주 청년 남녀 토론 , 4면 5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1월 20일 옥봉리 교회당에서 제22회 남녀 연합 토론회를 개최. 천주교 청년회 총회 , 4면 4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2월 4일에 임시총회를 개최. 천주 청년 토론회 , 4면 6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2월 6일에 옥봉리 성당에서 토론회를 개최. 천주교 여자 청년회 , 4면 6단 진주 천주교회 여자 청년회는 2월 25일에 창립총회를 개최.

403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03 천주교 청년 토론회 , 4면 6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2월 24일에 토론회를 개최. 천주교 청년회 총회 , 4면 5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3월 20일에 청년회관에서 정기총회를 개최. 여자 청년회 토론회 , 4면 5단 진주 천주교 여자 청년회는 3월 19일에 옥봉리 성당에서 제1회 토론회를 개최. 母 親 靑 年 활동사진 , 4면 7단 개성 천주교회 희망의 모친청년회 는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활동사진 대회를 개최. 여자 청년회 총회 , 4면 7단 진주 천주교 여자 청년회는 6월 17일 옥봉리 성당에서 임시총회를 개최. 여자 청년 토론회 , 4면 7단 진주 천주교 여자 청년회는 6월 16일 옥봉리 성당에서 토론회를 개최. 천주교 청년 토론 , 4면 5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6월 23일에 옥봉리 성당에서 토론회를 개최. 여자 청년 토론회 , 4면 5단 진주 천주교 여자 청년회는 6월 16일에 옥봉리 성당에서 토론회를 개최. 천주 여자 청년 토론 , 4면 7단 진주 천주교 여자 청년회는 6월 30일에 옥봉리 성당에서 제3회 토론회를 개최. 천주 청년회 정기회 , 4면 8단 평원 천주교 청년회는 8월 15일에 평원 성당에서 정기총회를 개최. 천주 청년회 정기회 , 4면 8단 평원 천주교 청년회는 8월 15일에 정기총회를 개최.

404 404 교회사연구 제42집 합덕리 小 作 會 , 3면 1단 충남 당진군 합덕면 합덕리(천주교회 소유지) 소작인들은 소작회를 결성하여 임 원 선거 및 규칙을 제정. 성탄 축하식 거행 , 3면 6단 진주군 천주교 여자 청년회는 12월 25일에 천주 성탄 기념식을 거행. 天 敎 小 作 人 會 , 3면 6단 안성 천주교회는 경성교구 소유 토지 소작인을 소집하여 상품 수여식을 거행. 천주 女 靑 年 1주년 기념식 , 3면 7단 진주 옥봉리 천주교 여자 청년회는 창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 소작인 포상 , 5면 11단 2월 16일 안성 천주교회는 안법학교 내에서 우량한 성적을 낸 소작인을 대상으로 포상. 會 有 小 作 總 會 , 3면 8단 합덕 천주교회와 교회 소유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 등으로 조직된 합덕리 會 有 地 小 作 가 3월 1일에 총회를 개최. 재령 천주교 여자 청년회 사업 , 2면 5단 재령 천주교 여자 청년회의 사업을 소개. 加 特 力 會 총회 , 3면 9단 문산 천주교회는 6월 1일에 문산 가톨릭회 정기총회를 개최. 천주교 小 作 人 會 , 4면 3단 안성 천주교회 소작인회는 2월 4일에 안법학교에서 총회를 실시. 순회 탐방(2) 봉산 지방 大 觀 (2) , 4면 3단 사리원 천주교 청년회는 1923년에 설립. 회원이 20명. 會 有 地 소작 정총 , 4면 8단 합덕리 천주교회의 소유 토지 小 作 는 4월 4일에 정기총회를 개최.

405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05 소작인 총회 (조간), 4면 6단 합덕 천주교회의 소유지 소작인 총회가 2월 27일에 개최. 天道敎 순교자 기념 聖劇의 밤 (조간), 5면 9단 청진 천주교 청년회는 순교자 기념 성극을 개최( 천도교 는 천주교 의 오류). 5. 교육 대구 해성학교 운명 , 4면 2단 대구 해성학교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짐. 원산 獨語 강습 개설 , 4면 4단 원산 천주교회는 1921년 5월 15일부터 명석동 舊 춘성학교에서 독어 강습회를 개최. 원산 천주교회 활동 , 4면 5단 원산 천주교회는 남녀 학술 강습회를 개설. 소학교와 중학교 설립 계획 중. 천주교 유치원 확장 , 4면 3단 진남포 용정리 천주교회는 마리아 유치원 교실 확장과 인원 증원을 협의 중. 원산 천주교회 사업 , 4면 1단 원산 천주교회는 해성보통학교 인가 신청 수속 중. 내년에는 중학교를 신축할 예정. 천주교회 강연회 , 4면 2단 원산 원석동 천주교회는 11월 1일에 옥낙안(에카르트) 신부의 강연을 실시. 천주교 유치원 신축 , 4면 3단 진남포 용정리 천주교회는 11월 중순에 마리아 유치원을 신축하고 12월 5일 낙 성식을 거행. 천주교회 공개 강연 , 4면 3단 원산 명석동 천주교회는 12월 7일 해성학교 강당에서 에카르트 신부의 강연을 실시.

406 406 교회사연구 제42집 素 人 劇 興 行 , 4면 3단 재령 천주교회 유치원이 素 人 劇 을 주최(광고). 재령 소인극 흥행 , 4면 3단 진남포 천주교 청년회는 재령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부인 야학 및 유치원의 경 제적 보조를 위해 1월 3일부터 2일간 소인극을 실시. 소인극 흥행 , 4면 3단 재령 천주교회 유치원이 소인극을 주최(광고). 영유 천주당 야학회 , 4면 4단 영유 천주교회는 야학회 설립 후 남녀 학생을 모집. 유치원 선전 素 劇 , 4면 5단 재령 천주교 유지들이 1월 3일과 4일, 진남포 천주교 청년회를 초청하여 유치원 선전을 위한 소인극을 개장. 행운의 소의상업 , 3면 1단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소의상업학교는 천주교회의 유지인사들이 학교 경영을 담 당하기로 절차 진행 중. 마리아 유치원 보육식 , 4면 5단 진남포 용정리 천주교회는 4월 2일에 마리아 유치원 제1회 보육증서 수여식을 거행. 천주교의 교육열 , 3면 5단 대구 천주교회 유지들이 해성중학을 설립하기 위한 기성회를 조직. 해성중학 임원회 , 4면 4단 대구 천주교회는 5월 14일에 해성중학교 임원회를 개최. 聽 衆 三 千 , 3면 3단 간도 위문 강연단은 8월 1일과 2일에 간도 천주교회에서 강연회 및 환등회를 개최. 천주교 청년회 강연 , 4면 5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9월 13일에 진주 옥봉리 성당에서 강연회를 개최.

407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07 천주 청년 야학 강습 , 4면 3단 사리원 천주교 청년회 주최로 야학 강습소를 개설. 천주 청년 강연회 , 4면 6단 사리원 천주교 청년회는 4월 3일에 성모성심학원에서 강연회를 개최. 海 星 普 校 운동회 , 8면 5단 원산 천주교회의 해성보통학교는 5월 26일에 춘계 대운동회를 개최. 培 命 校 유지비 부담 , 4면 5단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진주군 문산면 천주교회의 배명학교를 위해 有 志 會 가 조직. 진주 천주 청년 강연 , 4면 7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6월 9일에 강연회를 개최. 천주 청년 대강연회 , 4면 8단 경남 진주 천주교 청년회는 8월 15일에 특별 대강연회를 개최. 평원 영청학원 설립 , 4면 8단 평원군 읍내 천주교회는 영청학원을 설립. 해성학교 신축 기공 , 4면 10단 원산 천주교회의 해성보통학교는 校 舍 건축에 착수. 준공기는 3년 후. 은율에 유치원 설립 , 4면 6단 은율 천주교회 이보환 신부의 特 志 와 신자들의 정성으로 10월에 유치원이 개원. 柳 宗 悅 氏 강연 , 3면 7단 일본 동양대학교의 柳 宗 悅 (야나기 무네요시)이 11월 27일에 경성 旭 町 천주교회 에서 강연. 博 文 校 의 曙 光 , 3면 1단 인천 박문학교의 남학교 신축을 위한 박문학교 신축기성회가 조직.

408 408 교회사연구 제42집 靑 年 其 他 集 會 孔 校 長 기념식 , 3면 6단 안법학교 후원회는 안법학교 설립자 겸 교장인 공베르 신부의 취임 15주년 기념 식을 거행. 박문 기부 허가 , 3면 1단 2월 18일 道 당국이 박문학교 신축 기성을 목적으로 한 기부를 허가. 婦 人 讀 本 발간 , 3면 7단 평원 천주교회는 부인 야학을 설립. 신년에 회보 부인독본 을 발간. 의주 영어 강습 , 3면 6단 의주 천주교회는 3월 4일에 부속 유치원 교실에서 영어 강습을 개강. 매괴학교 盟 休 , 2면 3단 합덕리 천주교회의 매괴학교 학생들이 교사의 불성실함을 이유로 동맹 휴학. 매괴학교 폐지 , 2면 8단 매괴학교 교장인 백문필(페랭 신부)은 동맹 휴학의 주모자들은 무기정학, 일반 학생들은 復 校 시킨다고 발표했다가 돌연히 폐교를 선언. 30명에 黜 校 처분 대구 曉 星 女 校 의 불상사 , 2면 1단 천주교 학교인 효성여학교에서 교사와 여학생들 사이의 갈등으로 30여 명의 학 생들이 출교 처분됨. 海 星 女 學 悲 運 , 3면 6단 진주 옥봉리 천주교회의 해성여학원이 설립자의 사임으로 폐교에 처함. 동아일보 기자 지방 순회 正 面 側 面 으로 觀 한 金 泉 의 表 裡 (부록), 4면 1단 학교 순례. 김천 천주교회는 성의학교를 운영. 남자 교원 3명. 남학생 85명, 여학 생 20명. 동아일보 기자 지방 순회 正 面 側 面 으로 觀 한 신천과 재령 (부록), 1면 1단 학교 순례. 재령 천주교회가 3년 전에 천주교 유치원을 설립. 아동 50여 명.

409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09 안법학교의 서광 , 5면 1단 안성 천주교회 소유 토지를 관리하던 유지들이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안법학 교에 기부. 문제의 佛 恩 강습 , 4면 8단 강화군 불은면 잉성리의 불은강습소와 천주교회가 경영하는 石 水 門 書 堂 이 갈등. 전주에 勞 夜 창립 , 4면 8단 11월 23일 橋 本 朴 京 來 가 성당을 빌려 노동 야학을 창립. 인천 博 文 校 의 場 風 波 , 2면 8단 학교 당국자와 교원 간의 갈등으로 2백여 명의 학생들이 휴학. 감정으로 免 職 박문보교 사건 , 2면 4단 인천 박문학교의 이여구 신부와 교원 간의 갈등으로 교원들이 면직되었음. 啓 生 普 校 학예 전람 , 2면 8단 종현 천주교회 계성보통학교는 6월 26일과 27일에 아동 학예품 전람회를 개최. 순회 탐방(7) 인천 지방 大 觀 (1) , 4면 1단 인천 천주교회 박문학교는 작년에 校 舍 를 신축. 순회 탐방(14) 익산 지방 大 觀 (1) , 4면 2단 천주교회 경영의 사립 계명학교는 1910년에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았음. 학생은 60여 명. 순회 탐방(98) 사회 各 般 이 시설의 초기(1) , 4면 2단 고마리 천주교회의 윤의병 신부가 1923년에 숭애강습회를 설립. 생도는 1백여 명. 순회 탐방(172) 三 防 藥 水 와 釋 王 寺 松 茸 (5) , 4면 1단 안변 내평의 천주교회는 삼덕강습소의 경비 일부를 담당. 종교 초월 순조선식으로 가르쳐 , 3면 4단 안성 안법학교 설립자인 孔 安 國 (공베르 신부) 약력. 안법학교 연혁 및 現 狀.

410 410 교회사연구 제42집 순회 탐방(367) 명실상부의 平 南 平 原 (4) , 4면 6단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 천주교회에서 경영하는 영청학교. 21년 역사를 가진 안법학교 悲 運 , 4면 5단 안법학교는 경비가 곤란하여 봄 새학기부터 학급을 축소. 40 年 來 학제 변경 용산 신학교 혁신 , 2면 3단 용산 신학교에서는 봄 신학기부터 보통 교육은 중림동 加 明 普 校 에서 하고, 중등 교육은 남대문상업학교에서 한 후에 용산 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과 철학만을 전문으로 공부하게 한다는 제도로 변경. 동북 지방 천주교 음악 강연 , 4면 7단 함흥 운흥리 천주교회는 4월 20일에 음악 강연 대회를 개최할 예정. 천주교회에서 初 等 校 설립 , 4면 6단 진남포 천주교회는 미국 선교회와 진남포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초등학교 설립 인가를 교육 당국에 신청. 안성 안법학교 記 念 式 과 致 謝 式 , 5면 3단 7월 13일에 안법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식과 설립자 겸 교장 孔 安 國 (공베르 신부) 의 취임 20주년 致 謝 式 을 거행(치사식과 공안국 신부의 사진). 부인 강습 종료 , 7면 3단 논산 하기 부인 강습회는 9월 6일 논산 천주교당에서 終 會 式 을 거행. 영유 유치원 , 5면 9단 평남 평원군 영유 천주교회는 유치원을 경영하기 위해 院 舍 를 신축할 계획. 無 産 兒 童 교수 , 6면 5단 강원도 평강읍 천주교회 이종순 신부는 9월 초순부터 무산 아동을 교수. 춘천에 신설된 소화 유치원 , 7면 4단 춘천 천주교 이기준 신부는 유치원을 설립. 12월 8일부터 원아 모집을 시작할 예정.

411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11 지방 여론에 訴 함(16) 安 城 篇 (3) , 3면 1단 안성 천주교회 내에 있는 안법학교가 경영난에 있음. 불국 정부에서 南 商 에 보조 , 2면 4단 프랑스 외무성에서 남대문상업학교에 1931년도 보조금으로 2만 5천 프랑을 보 조할 것이라고 함. 무산 아동에 학용품 급여 천주교의 美 擧 , 3면 9단 평강 천주교회 李 신부(이종순)는 작년부터 무산 아동 교육을 실시하였고, 올해는 학용품을 지급. 영어 강습회 , 6면 6단 안주 천주교회는 11월 중순부터 영어 강습회를 개최할 예정. 배명강습회 , 3면 3단 진주군 문산 천주교회는 11월부터 문맹 퇴치를 위해 배명강습회를 개시. 회령 時 話 명락학교 新 生 , 3면 1단(4단) 회령 천주교회는 무산 아동 교육을 위해 4년제 명락학교를 신설하기로 하고 새 校 舍 를 건축 중. 전주 천주교에서 校 舍 확장 신축 , 3면 8단 전북 전주 천주교회는 강습소의 校 舍 를 신축. 제2회 학생 브나로드 운동 각지 대원 소식(18) , 4면 1단 부안군 소식. 브나로드 대원은 부안 천주당을 빌려 강습을 개설. 순교자 기념일 강연회 개최 , 3면 4단 경성 천주공교회 청년 단체는 9월 25일에 순교자 기념일 강연회를 개최. 新 校 舍 신축 , 3면 5단 대구 불란서 천주교 전주지부는 校 舍 를 신축하여 9월 새학기부터 학원을 이전. 영흥 천주교 경영의 남산학원 개강 (석간), 3면 5단 영흥 천주교회는 2월 3일부터 초등 과정의 학술 강습원을 개강.

412 412 교회사연구 제42집 會 合 (석간), 3면 10단 부안 천주교회 강습소 학부형회가 4월 16일에 개최. 곡산 小 花 幼 園 園 舍 를 건축 (석간), 3면 4단 곡산 천주교회의 구천우 신부의 노력으로 유치원 원사를 신축(원사 사진). 곡산 재봉 강습 (조간), 3면 7단 곡산 천주교회는 5월 26일부터 동아일보 곡산지국, 씽거회사 곡산분점의 후원을 받아 천주교회 유치원에서 자수 강습회를 개최. 곡산 재봉 강습 종료 (석간), 3면 5단 곡산 천주교회의 주최로 실시된 곡산 재봉 강습회가 6월 15일에 종료. 안성 안법학교 신축 확장 (석간), 4면 1단 안성 천주교회 육가은(뤼카) 신부의 노력으로 안법학교의 校 舍 를 신축 중. 위령제 不 參 拜 로 해성학교 폐쇄? (석간), 3면 3단 진남포 용정리에 있는 천주교 경영의 사립 해성학교에서 9월 15일에 거행된 만주 사변 전몰자 위령제에 참배하지 않자, 平 南 道 당국이 학교 당국자에게 실상 보고 를 엄명. 곡산 유치원 인가 (조간), 5면 1단 곡산 천주교회의 유치원이 11월 30일부로 설립 인가를, 12월 11일부로 원장과 보모 채용 인가를 받았으며, 12월 23일에 개원식을 거행할 예정. 認 可 정원 넘었다고 八 十 餘 名 을 逐 出 (조간), 6면 1단 영흥 천주교회의 남산학원은 무산 아동과 연령 초과 학생을 가르쳤으나 정원 초 과로 규정에 어긋나므로 나머지 학생을 축출함. 本 社 주최 제4회 하계 계몽운동(6) (조간), 4면 1단 원주군. 계몽운동 별동대원이 원주 성당에서 經 文 시간을 이용하여 교육을 실시. 本 社 주최 계몽운동 第 一 線 동정(9) (석간), 4면 1단 만주국 연길현 명월구. 명월구 천주교회는 계몽운동을 지원. 계몽운동 책임대원 이 교회 학교인 해성학교에서 교육을 실시.

413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13 本 社 주최 제4회 하계 계몽운동(12) (조간), 5면 1단 만주국 간도 용정. 계몽운동 책임대원이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해성유치원에서 교육을 실시. 本 社 주최 제4회 하계 계몽운동(15) (조간), 4면 1단 연길현 다조구 운하시. 계몽운동 책임대원이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해성학교 강 당에서 교육을 실시. 가톨릭 강연회 (석간), 4면 2단 종현 가톨릭 청년회는 9월 25일에 순교자 기념 강연회를 개최할 예정. 평양 카도릭교회 강연회 성황 (석간), 3면 3단 평양 천주교회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의 후원을 받아 9월 27일에 가톨릭 대강연회 를 개최(강연회 사진). 幼 兒 會 설립 (석간), 7면 7단 경남 합천의 유지들이 천주교회 내에 유아회를 설치하고, 4월 3일에 개회한다고. 덕원신학교 十 四 日 개교 (석간), 2면 6단 덕원신학교는 2월 1일에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았고, 5월 14일에 개교할 예정. 신고산 강습소 인가 (조간), 3면 9단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 천주교회는 6월 3일부로 학술 강습소의 인가를 받았음. 會 合 (조간), 3면 12단 함남 신고산 해성강습소의 개강식이 6월 25일에 천주교회 광장에서 개최. 천주교 기념 대강연회 (석간), 2면 9단 명치정 천주교회는 순교 복자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식과 기념 강연회를 개최. 합천 幼 園 인가 (조간), 3면 5단 경남 합천 천주교회는 11월 2일에 유치원 설립 인가를 받았음. 조선인 교육을 本 位, 연길에 중등교 신설 (조간), 2면 7단 간도 천주교회는 다음 해에 조선인 자제들을 위한 중등 교육 기관을 설치할 예정.

414 414 교회사연구 제42집 영청학교 부흥 운동 (조간), 3면 4단 영유 천주교회의 영청학교를 소개하고, 지방 교육에 대한 관심을 촉구. 청진 해성학교 증축 야학 설치 (석간), 4면 5단 천주교 독일 선교사가 운영하는 청진 해성학교가 증축되었음. 비운의 영청학교, 一 般 이 유지하기로 (석간), 4면 5단 영유 천주교회의 영청학교는 校 舍 를 신축하기로 결정. 경비는 천주교의 보조 외 에 일반의 찬조를 받기로 하였음. 읍안학원 창설 (조간), 5면 10단 고원 천주교회는 무산 아동을 위한 읍안학원을 설치. 라디오 (석간), 3면 6단 라디오 방송 안내, 천주교회 神 學 豫 科 합창단. 동평학교 개교 (조간), 5면 6단 평양구 천주교회(평양지목구)는 평양 신리에 동평학교를 설립(학교 전경과 교장 양기섭 신부의 사진). 평양 동평학교 개교식 (조간), 5면 8단 동평학교의 개교식이 5월 28일에 열림(개교식 사진). 천주교 재단에서 3천원 토지 기부 (석간), 4면 1단 안성 천주교회의 안법학교 관련 역사를 소개. 조선천주교유지재단에서 토지를 기부. 2 個 年 年 限 의 소화학원 개교 (조간), 4면 8단 남원 천주교회의 석종관 신부가 세운 소화학원이 6월 20일에 개교. 曙 光 의 안법학교 (조간), 4면 1단 안법학교는 조선천주교유지재단으로부터 토지의 사용권을 얻어 재정의 기초를 세우고, 교내의 제반 설비를 확충하는 동시에 종래의 4년제를 6년제로 변경하기 로 하였음. 고원 해성학원 개설 (조간), 5면 7단 고원 천주교회는 무산 아동을 위해 7월 1일에 해성학원을 개설(학교 전경 사진).

415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15 용정 海 星 校 음악단, 연길에서 대성황 (조간), 5면 10단 간도 천주교회의 용정 해성소학교 음악단은 대강당 건축 찬조를 위한 음악회를 개최. 안법보통학교 후원회 창립 (조간), 4면 7단 안법보통학교 후원회가 창립. 숙천 유치원 설립 (조간), 5면 10단 韋 (월쉬) 신부가 숙천에 유치원을 설립. 소식 (조간), 5면 13단 북청 천주교 선교사 엄광호(엥크) 신부가 사립 북청 해성보통학교 승격 인사차 동아일보 북청지국을 방문. 燦! 교육 원산 여교육기관 완비 (조간), 4면 4단 원산 지역의 학교를 열거하면서 원산 천주교회의 해성학교를 소개. 新 興, 紀 全 잃은 全 州, 해성학교에 서광! (조간), 2면 1단 전주의 천주교 학교인 해성학교가 신자 이춘화의 기부로 증축하고 사립 보통학교 로 인가를 신청(건물과 이춘화 씨 사진). 任 신부 축하식 (조간), 7면 9단 감곡면 왕장리 유지들은 매괴학교 설립자인 임가미(부이용) 신부가 총독부로부터 공로자 표창을 수여받은 것을 축하. 廢 門 했던 旺 林 校 新 校 舍 에 재개 (조간 3면, 석간 7면) 5단 수원 천주교회의 왕림학원이 郡 당국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개편되어 재개. 百 萬 圓 재단 확립되어 東 星 商 業 에 법인 인가 (조간 동성상업학교 재단 확립(학교 전경과 교장 장면 사진). 석간 2면) 2단 소화학원을 신축 (조간 3면, 석간 7면) 11단 남원의 김영구 신부가 사설 초등교육기관 소화학원을 인수하고 이후 협소한 校 舍 도 신축.

416 416 교회사연구 제42집 왕림학원에 서광 院舍 신축에 착수 (석간), 4면 1단 수원 왕림리에 있는 왕림학원의 원사 신축 공사가 착수. 수원 왕림학원 新 校舍 낙성 이전 (조간, 석간), 3면 1단 수원 왕림학원의 새 校舍가 준공됨에 따라 校舍를 이전. 위대한 공로자 안법학교 설립자 孔安國氏 (석간), 3면 11단 안법학교 설립자인 孔安國(공베르 신부)의 공로를 소개. 6. 자선 불국 사람 孔安國氏의 善心 , 3면 9단 안성 천주교회의 공베르 신부의 공익사업과 자선 사업. 京仁 고아 위안 , 4면 3단 경성부 사회사업 연구회 주최로 고아원 아이들을 위안하기 위해 4월 29일 각 고 아원 순회. 인천 천주교회 고아원도 대상. 發狂한 死刑 女囚, 자식을 죽이고저 , 3면 8단 사형 선고를 받은 여자 죄수의 아이를 천주교회에서 5월 17일 인도 받아 양육하 기로 함. 천주 청년 水害 同情 , 4면 3단 평양 천주교 청년회, 수해 동정금 모금하여 동아일보사 평양지국에 송부. 천주 청년 素人劇 , 4면 7단 진남포 천주교 청년회 주최와 동아일보 평양지국 후원으로 7월 17일 평양 장대형 성당에서 자선소인극을 개최. 藥峴 천주교 청년회 , 3면 9단 약현 천주교 청년회는 동아일보사에 의뢰하여 평양 홍수 이재민을 위해 돈과 쌀 을 보냄. 안성의 수해 동정 , 3면 7단 안성 천주교 청년회는 수해 동정금 모집을 위한 활동.

417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17 합덕 천주교회 자선 , 3면 8단 당진군 합덕면 합덕리 천주교회는 수해 피해자에게 租 10석을 분급. 사회사업단에 8,500원 하사 , 1면 9단 2월 11일에 사회사업단체에 하사금이 내려졌는데, 천주교회 영아원, 천주교 수녀 원 부설 여자 고아원도 포함. 인천 救 濟 사업 , 3면 1단 인천 천주교회 부속 고아원을 소개. 천주 청년 소인극 , 3면 7단 1924년 12월 25일 합덕리 천주교 청년회는 소인극을 공연하여 그 수입금을 기 근 구제회에 보냄. 禁 食 하야 救 饑 , 3면 1단 원산 천주교회는 매주 금요일 금식한 것을 모아 남쪽의 굶주린 이들에게 보내기 로 결정. 禁 食 代 로 救 饑 , 3면 1단 원산 천주교회는 4월 말일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금식한 것을 모아 남쪽의 굶주린 자에게 보내달라고 동아일보사에 부탁. 기근 구제 금품 , 2면 10단 각 지역의 천주교회 및 천주교 단체들이 기근 구제금을 모집하여 동아일보사에 보냄. 수해 동정금 , 3면 6단 종현 천주교회 수녀원 기숙사생들이 의복 35건을 기부. 외국인측도 奮 起 , 3면 2단 프랑스 천주교회가 이재민 구제에 노력. 水 災 同 情 金 , 4면 9단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 천주교회 강도영 신부가 12월에 수재 동정금 60전을 냈음.

418 418 교회사연구 제42집 순회 탐방(139) 日 人 은 旺 盛, 우리는 漸 衰 (10) , 4면 7단 수녀회(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915년 10월 15일 대구에 고아원을 설립. 고아의 수는 44명. 사회사업에 서양인 단체 기부 , 2면 3단 서양인 단체인 서울구락부에서 사회사업단체를 위해 총독부 사회과에 1백 원을 기부 신청하자, 사회과에서 명치정 천주교회 고아원 등에 지원. 惡 疫 과 外 人 慈 善 , 5면 7단 의주군 비현 천주교회의 미국인 徐 (스위니) 신부는 홍역을 앓은 無 産 아동들을 병원에 입원시켰음. 고아원에 5백 원 , 4면 9단 4월 3일 仁 川 府 協 議 會 는 인천 천주교회에서 경영하는 고아원에 5백 원을 보조 하기로 결의. 고아원을 위한 慈 善 市 , 3면 2단 인천 서양 부인회는 인천 천주교회 경영 고아원을 위해 5월 21일과 22일 인천 山 手 町 公 會 堂 에서 慈 善 市 를 개최할 예정. 경성부 보조금 , 5면 5단 경성부에서는 사회사업단체에 보조하였는데, 천주교 고아원에 6백 원을 지급. 조선 최초의 兩 處 에 고아원 , 5면 3단 경성 인천 천주교회 부속 고아원을 소개. 고아원 순례 수녀원 고아원 , 17면 4단 종현 천주교회 兒 院 을 소개. 인천 빠사 會 천주교회 주최 , 3면 5단 인천 천주교회의 가톨릭 부인회는 고아 구조의 목적으로 5월 26일에 빠사회(바 자회)를 개최할 예정. 고아원에 동정 , 4면 1단 인천 천주교회에서 경영하는 고아원에서는 1927년 12월부터 1928년 5월까지 기부금을 모금.

419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19 기호 지방 고아원에 기부, , 4면 9단 부천군 서곶면 유지들이 인천 천주교회에서 경영하는 고아원에 기부. 사업단체 보조금 5천2백 원 用 處 , 2면 6단 경성부에서 천주교회 고아원에 보조금 6백 원을 지급. 慘 憺 한 旱 水 災 와 각지 동포의 뜨거운 동정 , 4면 1단 평남 평원군 영유 천주교회는 關 北 수재 이재민들을 위해 救 濟 會 를 조직하였고, 聖 소화데레사 少 女 會 는 연극을 개최하여 입장료를 구제회에 기부. 김천 천주교 회와 불교 청년회는 구제금을 모집하여 동아일보사에 전달. 고아양육원 慰 安 遠 足 會 , 2면 8단 10월 13일 시내에서 천주교회 부속 고아원 등이 노량진에서 慰 安 遠 足 會 를 할 예정인데, 경비가 부족. 구제금 遝 至 , 5면 5단 평원군 영유 천주교회는 구제금 66원 12전을 동아일보사에 기탁. 구제금 답지 , 5면 2단 용인 남곡리 천주교회는 구제금 14원을 동아일보사에 기탁. 천주교 부인회, 申 采 浩 가정 동정 , 2면 7단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 천주교 부인회는 신채호 가정에 보내달라고 동아일보사에 위탁. 천주교 연합회 수해 구제금 , 2면 9단 9월 22일 천주교 연합회는 여름 수재민을 위해 40원을 구제금으로 동아일보사에 기탁. 府 內 各 단체, 총독부 보조 , 2면 4단 총독부에서 경성 천주교 고아원에 보조금 1천4백 원을 지급. 천주교 신부가 73 戶 에 正 租 1 斗 式 , 7면 7단 공세리 천주교회의 프랑스인 신부는 朝 星 學 校 校 舍 였던 건물을 仁 州 實 業 靑 年 會 에 기부하여 회관으로 사용하게 함. 신부는 청년회의 사례금으로 베를 구입하여 가난한 집에 분배.

420 420 교회사연구 제42집 春 窮 당한 농민에 무이자 白 米 배부 , 7면 8단 미산리 천주교회의 육가은(뤼카) 신부는 4월 15일경에 白 米 를 구입하여 농민들 에게 무이자로 배부. 원산 고아에게 의복을 분급 , 6면 4단 원산 천주교회는 원산부의 빈곤한 집안의 아이와 고아에게 의복 1벌씩을 분배. 구제금품 사리원에서 , 5면 2단 사리원 천주교회는 在 滿 동포들을 위해 구제금품을 사리원 재만 동포 구제회에 기탁. 在 滿 피난 동포 慰 護 金 品 답지 , 4면 1단 인천 천주교회는 재만 피난 동포들을 위한 위호금품을 동아일보사에 의뢰. 在 滿 피난 동포 慰 護 金 品 답지 , 6면 1단 진주군 옥봉리 천주교회 해성유치원 등이 재만 피난 동포들을 위한 위호금품을 동아일보사에 의뢰. 在 滿 피난 동포 慰 護 金 品 답지 , 5면 1단 仁 川 府 寺 町 천주교회는 재만 피난 동포들을 위한 위호금품을 동아일보사에 의뢰. 在 滿 피난 동포 慰 護 金 品 답지 , 6면 1단 영유 천주교회, 진남포 천주교회 등이 재만 피난 동포들을 위한 위호금품을 동아 일보사에 의뢰. 在 滿 피난 동포 慰 護 金 品 답지 , 4면 1단 천주교회 具 신부 등이 재만 피난 동포들을 위한 위호금품을 동아일보사에 의뢰. 在 滿 피난 동포 慰 護 金 品 답지 , 6면 1단 곡산 천주교회는 在 滿 피난 동포를 위한 위호품을 동아일보사에 의뢰. 在 滿 피난 동포 慰 護 金 品 답지 , 4면 7단 경원선 高 山 驛 前 천주교회는 在 滿 피난 동포를 위한 위호품을 동아일보사에 의뢰. 御 下 賜 金 사회사업단체에 , 2면 11단 기원절을 앞두고 사회사업단체에 하사금이 내려졌는데, (경성) 천주교회 고아원,

421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21 인천 천주당 부속 고아원, (대구) 천주공교 수녀원 부설 여자 고아원에 각각 5백 원씩 지급. 고아를 위하여 60년 盡 力 (석간), 2면 9단 경성 천주교회 고아원 간사인 황 프란치스카는 사설 사회사업에 30년 이상을 종 사한 공로로 恩 賜 財 團 慶 福 會 의 연금을 받게 되었음. 자선 음악회 평양에서 개최 (석간), 3면 6단 평양 관후리 천주교회는 1월 25일 자선 음악회를 개최할 예정. 성황 이룬 평양 음악대회 (석간), 3면 1단 평양 천주교회 주최 음악대회 사진. 慶 福 會 의 寄 金 京 畿 道 三 團 에 (조간), 2면 6단 경복회 기금이 경기도 사회사업단체에 교부되었는데, 인천 천주교회 부속 고아원 도 포함. 대구 천주교회 금품 걷어 災 地 에 (석간), 2면 5단 대구 천주교회는 모은 금전, 곡식, 의복을 수재민에게 전해 줄 것을 동아일보 대 구지국에 의뢰. 救 濟 의 소리는 聖 域 에도 (석간), 2면 1단 중림동 약현 천주교회는 동아일보사에 수재민 구호품을 전달. 대구 천주교회 의복 新 調 寄 托 (석간), 2면 4단 대구 천주교회는 이재민을 위한 금전, 곡식, 의복을 동아일보 대구지국에 전달. 종교 域 內 에 救 濟 炬 火! (석간), 2면 6단 춘천 천주교회 소화 데레사 부인회는 성금과 의복을 모아 신자 일동의 이름으로 삼남 지방의 수재민을 위해 기탁함. 은율 천주교 신도 동정금 모아 기탁 (석간), 2면 6단 은율 천주교회 신자들이 수재의연금을 기탁. 敎 徒 의 誠 心 衣 服 百 一 點 (석간), 2면 5단 진주 천주교회는 삼남 지방의 수재민들을 위한 의연금을 전달.

422 422 교회사연구 제42집 字 垣 總 督 謹 話 (석간), 1면 6단 일본 천황이 사회사업의 장려를 위해 하사금을 68개 단체에 내렸는데, 경성 천주 교회 고아원, 대구 수녀원의 부설 여자 고아원, 의주 천주교회 양로원 등이 포함. 카톨릭 養 療 所 평양 기림리 설치 (석간), 5면 8단 평양 천주교의 미국인 신부가 빈민을 위한 시료 기관을 기림리에 세울 예정. 진남포 양로원에 歲 饍 을 기증 (조간), 2면 11단 진남포 여성 동우회는 진남포 천주교회의 양로원에 수용된 노인에게 세찬을 보냄. 경영비 얻고자 영화의 밤 개최 (조간), 4면 7단 평양 신리 천주교회 경영의 나사렛 양로원이 운영비 마련을 위해 영화의 밤을 개최. 천주교에서도 수재민 식사 제공 (석간), 4면 3단 비현 천주교회는 수재민을 수용하고, 식사를 제공. 가엾은 동무들을 찾아서 불란서 교회 고아원의 고아들 ( 新 年 號 其 二 ), 1면 5단 명치정 천주교회의 고아원을 소개(고아들의 사진). 御 內 帑 金 下 賜 와 南 總 督 의 謹 話 (조간), 1면 1단 御 內 帑 金 의 하사 대상에 경성 천주교회 보육원, 대구 천주교회 수녀원의 여자 고 아원이 포함. 천주교 신부가 극빈 20호에 施 惠 (조간), 8면 3단 진주 천주교회 김계룡 신부는 지역 극빈가정을 구호. 異 域 에서 포교 40년, 최후로 2만 원 희사 (조간), 2면 6단 인천 천주교회 전학준(드뇌) 신부가 빈민의료기관을 설치하라고 2만 원을 희사함. 3만 원 又 復 희사 (석간), 7면 3단 인천 천주교회 전학준(드뇌) 신부의 지원으로 설립된 빈민의료기관인 해성병원의 낙성식이 10월 15일에 거행. 양양의 천주교도 수해 구제금 依 托 (조간 석간 2면) 2단 양양 천주교회는 關 北 수해 이재민들을 위한 구제금을 모금.

423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23 大同鑛業出版農村, 연말 동정금 분배 (석간), 2면 7단 大同鑛業出版農村社가 연말 동정금을 각 단체에 분배해 달라고 동아일보사에 기 탁. 기부금은 명치정 천주교회의 보육원에도 분배. 外人 선교단의 위문금품 헌납 (석간), 2면 1단 평안도 주재 신부와 신자들이 일본 적십자에 구호자금을 기부. 영흥 천주교회 동정금 기탁 (석간), 2면 6단 영흥 천주교회는 한파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한 성금을 기탁. 天恩의 鴻大에 感奮 (조간), 2면 1단 內帑金 하사 목록에 경성 천주교회 보육원, 인천 천주교회 부속 고아원, 대구 천 주교회 수녀원 부설 여자 고아원이 포함. 7. 교회사 劍頭에 復活 歡喜 천주교도의 성지 서소문 , 2면 4단 서소문과 관련된 역사를 소개하였는데, 천주교 순교지라는 점도 밝히고 있음. 風雨 20년 한말 정객의 회고담 독립협회장 윤치호 씨(4) , 2면 1단 尹致昊가 元山 監理였을 때, 천주교 신자들의 행패에 대해 프랑스 공사관에 항의. 崔南善, 조선 역사 講話(27) 제35장 西學의 流行 , 4면 1단 서양 학술의 유입에 대해 설명. 崔南善, 조선 역사 講話(46) 144. 병합 , 4면 1단 1909년 12월 22일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종현 성당에서 이재명에게 피습. 兩大 受難期 72人 流血 , 2면 3단 丙寅 戊午 兩大 수난에서 천주를 배반하지 않은 확실한 증거가 있는 순교자가 72명. 조선인 최초 신부 金大建氏 경력 , 2면 3단 김대건 신부의 약력과 초상화.

424 424 교회사연구 제42집 金 庠 基, 東 學 과 東 學 亂 (8) , 5면 3단 북경 함락으로 조선인은 서양세력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에 대한 危 懼 觀 念 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동학을 출현하게 한 직접적 동기였음. 李 允 宰, 一 貫 한 피의 歷 史 가톨릭 布 敎 百 年 ( 上 ) , 5면 1단 조선교구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천주교 100년사를 소개. 천주교의 조선 전래를 다룸. 李 允 宰, 一 貫 한 피의 歷 史 가톨릭 布 敎 百 年 ( 中 ) , 5면 1단 천주교의 조선 전래와 신앙의 확산을 다룸. 李 允 宰, 一 貫 한 피의 歷 史 가톨릭 布 敎 百 年 ( 下 ) , 5면 1단 교황의 선교사 파견을 다룸. 李 允 宰, 一 貫 한 피의 歷 史 가톨릭 布 敎 百 年 ( 續 ) , 5면 1단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 大 院 君 의 박해, 신앙의 자유를 다룸. 金 瑗 根, 朝 鮮 鑄 字 考 (7) , 5면 1단 천주교 서적의 수용에 대해 다룸. 姜 奉 吉, 義 血 로 꾸며진 조선 천주교사(1) , 5면 10단 壬 辰 倭 亂 때 조선에 왔던 세스페데스 신부를 다룸. 姜 奉 吉, 義 血 로 꾸며진 조선 천주교사(2) , 5면 1단 學 理 的 연구에서 종교적 신앙으로의 전환, 假 聖 職 제도, 북경교구에 선교사 파견 요청, 辛 酉 迫 害 를 다룸. 姜 奉 吉, 義 血 로 꾸며진 조선 천주교사(3) , 5면 3단 조선교구 설정과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 조선 최초의 신학생들의 외국 유학, 己 亥 丙 寅 迫 害 를 다룸. 姜 奉 吉, 義 血 로 꾸며진 조선 천주교사(4) , 5면 3단 천주교 사상이 理 學 으로 환영을 받았던 때를 다룸. 姜 奉 吉, 義 血 로 꾸며진 조선 천주교사(5) , 5면 1단 조선인 신부 金 大 建 과 崔 良 業 을 다룸.

425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25 姜 奉 吉, 義 血 로 꾸며진 조선 천주교사(6) , 5면 2단 박해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천주교 신자들, 신앙의 자유를 다룸. 姜 奉 吉, 義 血, 義 血 로 꾸며진 조선 천주교사(6) , 5면 7단 濟 州 敎 案, 신앙의 자유 이후 50년간의 천주교의 발전을 다룸( 6회 가 아니라 7회 가 맞다). 李 瑄 根, 續 朝 鮮 最 近 世 史 (조간), 3면 1단 리델 주교의 체포를 다룸. 李 瑄 根, 續 朝 鮮 最 近 世 史 131 구미열강과의 외교관계(21) 對 佛 關 係 四 (조간), 3면 1단 한불조약, 병인양요, 리델 주교의 활동 등을 다룸. 李 瑄 根, 續 朝 鮮 最 近 世 史 132 구미열강과의 외교관계(22) 對 佛 關 係 四 (조간), 3면 1단 리델 주교의 입국과 체포, 조선인 신자의 순교 등을 다룸. 李 瑄 根, 續 朝 鮮 最 近 世 史 132 구미열강과의 외교관계(23) 對 佛 關 係 四 (조간), 3면 1단 리델 주교의 체포와 추방 등을 다룸. 李 瑄 根, 最 近 史 上 의 三 丙 年 丙 寅 洋 擾 史 話 (1) (신년호 부록 10), 1면 6단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를 다룸. 李 瑄 根, 最 近 史 上 의 三 丙 年 丙 寅 洋 擾 史 話 (2) (신년호 부록 1), 1면 3단 병인박해의 원인을 다룸. 李 瑄 根, 最 近 史 上 의 三 丙 年 丙 寅 洋 擾 史 話 (3) (신년호 부록 1), 5면 2단 러시아의 위협, 프랑스와의 연합을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방비하자는 신자들의 건의 등을 다룸. 李 瑄 根, 最 近 史 上 의 三 丙 年 丙 寅 洋 擾 史 話 (4) (신년호 부록 1), 5면 1단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의 접촉 등을 다룸.

426 426 교회사연구 제42집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5) (석간), 5면 1단 대원군과 천주교 측의 접촉이 실패한 배경 등을 설명.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6) (석간), 3면 1단 병인박해 당시 선교사와 신자들의 처형 등을 다룸.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7) (석간), 3면 4단 리델 신부의 탈출과 제1차 프랑스 군함의 침입 등을 다룸.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8) (석간), 3면 3단 프랑스 함대 1차 후퇴와 그 여파 등을 다룸.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9) (석간), 3면 1단 프랑스 군함의 재침입 등을 다룸.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10) (석간), 3면 1단 병인양요에 대한 설명.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11) (석간), 3면 4단 리델 신부의 수기를 통해 본 병인양요.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12) (석간), 3면 2단 미국선 소각 사건 (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소개. 李瑄根, 最近史上의 三丙年 丙寅洋擾 史話(13) (석간), 3면 5단 미국선 소각 사건 (2)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전개와 신미양요 등을 설명. 8. 문학 洪曉民, 文壇 時評(2) 카톨릭 文學의 擡頭 (조간), 5면 2단 가톨릭 문학에 대한 비판.

427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출판물 신간 소개 , 3면 7단 시조(8월호) 내용 중 내가 천주교인이 되지 않은 이유 라는 제목의 글이 실림. 신간 소개 , 3면 8단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별 제6호. 도서 출판 일보 , 4면 10단 대구 천주교회 회보 제32호. 조선 古美術의 해외 소개 , 4면 4단 독일인 엑카르트 신부(성 베네딕도회)가 독일에서 朝鮮美術史 를 출판. 출판 일보 , 5면 8단 천주교회보 제60호. 偵察機 종교적 정기 출판물에 대하여 (석간), 3면 3단 종교 단체의 출판물을 소개. 천주교(基督舊敎)는 가톨릭청년, 은총. 신간 소개 (조간), 3면 10단 가톨릭청년 창간호 만주 간도 용정시 천주교회에서 발행 10. 기타 1개월간에 3차 대홍수 , 3면 1단 홍수로 명동 성당의 뒤 언덕이 무너져 주위의 집들이 파손됨. 천주당 前에 棄兒 , 3면 8단 9월 8일 대구 천주교회 앞에 버려진 아이를 대구 경찰서에 맡겼다가 도로 데려감. 氷世界의 23星霜! 가련한 孤女의 자살 , 2면 8단 명동 성당 부속 고아원에서 23세의 여자가 자살.

428 428 교회사연구 제42집 孤 女 自 殺 哀 話 , 2면 5단 종현 천주교회 수녀원 고아원에 수용되었었던 23세의 정 마리아의 자살과 관련 된 소식. 明 治 町 에 棄 兒 , 2면 6단 5월 6일 대구 명치정 천주교회 앞에 버려진 고아를 고아 구제회에서 양육하기로 함. 생활난으로 棄 兒 , 2면 7단 5월 29일 사리원 천주교회 부근에서 생활난으로 버린 아이 발견. 雙 童 女 兒 를 , 2면 5단 6월 15일 대구 명치정 천주교회 앞에 버려진 출생 7개월의 쌍둥이 여아를 중국인 과 조선인에게 양육하게 함. 天 主 敎 堂 가던 길에 전차에 轢 死 한 부인 , 2면 6단 9월 8일 황금정에서 성당에 가던 부인이 전차에 지쳐 사망. 천주교당에 화재, 손해는 별로 없어 , 2면 9단 11월 2일 종현 천주교회 문지기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 北 風 寒 日 에 路 上 死 體 , 3면 1단 11월 21일 인천부 寺 町 천주교회 뒷문 근처에서 40세가량의 사람이 凍 死. 교회서는 출교, 처녀의 부모는 유고죄로 고소한다고 , 2면 10단 여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야학교 교원(천주교 신자)에 대한 내용. 가련한 삼남매 , 2면 8단 안성읍 내장기리에서 부모를 잃은 3남매를 천주교회와 경찰서가 돌보지 않음. 一 朝 에 兩 處 棄 兒 , 5면 2단 11월 11일 대구 천주교회와 남산정 천주교회 앞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 수녀원에 棄 兒 , 5면 3단 23일 명치정 이정목 천주교회 수녀원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

429 동아일보 천주교 관련 기사(1920~1940년) 목록 429 명치정 棄 兒 , 2면 6단 명치정 천주교회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 기생 노릇하기 위해 낳은 딸을 내버려 , 7면 4단 기생이 되기 위해 2살 여아를 명치정 천주교회에 버린 여성이 체포됨. 間 島 서도 軍 募 大 公 團 조직 , 2면 1단 金 武 烈 등이 간도 용정촌 천주교회 방면에서 군자금을 모금. 천주교당 前 棄 兒 , 2면 9단 10월 19일에 종현 천주교회 앞에 어린아이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 飢 母 에게 젖 안 나서 교회당 前 棄 兒 , 7면 4단 대구부 명치정 천주교회 앞에서 2살 된 남아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 명치정 棄 兒 , 2면 7단 3월 24일 명치정 천주교회 안에서 여아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 盜 難 防 止 法 第 一 着 實 行 者 , 2면 8단 9월 11일 프랑스인 지사원(시잘레) 신부가 南 大 門 商 業 學 校 교정에 들어온 두 청 년을 때리고 새 법령(도난방지법)을 모르냐고 호통. 실업 청년회 회관을 중수 , 3면 3단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실업 청년회는 공세리 천주교회 成 (드비즈) 신부가 기증한 건물을 증축하여 회관으로 이용. 여아를 遺 棄 , 2면 9단 12월 6일 명치정 천주교회에 여아가 유기된 것을 발견. 取 調 中 의 竊 盜 도망했다 被 逮 , 3면 9단 천주교 신자인 金 某 는 자전거 절도범으로, 공주 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던 도중에 도망갔다가 다시 체포되었음. 경산과 경주인, 대구 와서 棄 兒 , 3면 4단 6월 3일 명치정 천주교회에 남아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

430 430 교회사연구 제42집 천주교 신부가 굿한다고 구타 (석간), 3면 5단 대동군 서천면 동포리에 사는 張 씨가 굿을 하자, 미국인 신부가 異 端 이라 하면 서 장 씨를 구타. 남산병원 의사 斫 殺 은 無 根 (석간), 3면 7단 경남 창원에서 천주교회 회장에게 치료받던 정신 이상자가 그를 도끼로 살해하고 부인과 말리던 사람에게도 중상을 입힘. 창원 살인 사건 19일 送 局 (석간), 3면 9단 경남 창원에서 천주교회 회장 이상철을 도끼로 살해한 범인이 19일에 송환됨.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 5. 춘향전에 보여주는 사상 (석간), 3면 1단 조선 후기 천주교가 민중 종교가 되었다고 설명. 천주교당에 棄 兒 1개월 되는 남아 (석간), 2면 5단 명치정 천주교회에 생후 1개월 영아가 유기된 것을 발견. 천주당 門 前 에 유아를 遺 棄 (석간), 5면 6단 용정리 천주교회에 생후 2개월 된 아기가 유기된 것을 발견. 세계 각지 천주교당에서 王 여사 週 忌 에 福 기도 (석간), 2면 5단 안정근의 장모인 왕재덕의 1주기에 로마 교회, 중국의 각 교회, 조선의 교회에서 추도미사를 거행. 新 春 各 國 領 事 館 巡 訪 記 佛 國 領 事 館 (조간), 2면 1단 프랑스 영사관 순방기 안에 천주교 유입 역사 등을 간략히 설명(종현 성당 사진). 이태리 사절단 일행, 열광적 환영 준비 (석간), 2면 4단 이탈리아 親 日 사절단이 경성을 방문하였는데, 천주교회도 방문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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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 연구소 소식 433 연구소 소식 (2013년 7~12월) 1. 연구활동 1) 연구발표회 (1) 제177회(10월 26일 오후 2시, 연구소 회의실) 1 제1 주제 제 목 : 언문 필사본 텬쥬실의 목록 의 구성과 그 설정의 의의 발표자 : 노용필(한국사학연구소) 토론자 : 조광(고려대학교) 2 제2 주제 제 목 : 뮈텔 주교가 작성한 첨례표들 발표자 : 김정환(내포교회사연구소) 토론자 :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2) 제178회(12월 14일 오후 2시, 연구소 회의실) 1 제1 주제 제 목 : 보령 갈매못 순교자들의 시신 유해 이장과 남포 서재골의 옛 무덤 자리 발표자 :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토론자 : 김정환(내포교회사연구소)

434 434 교회사연구 제42집 2 제2 주제 제 목 : 한국 가톨릭 미술 전람회 연구 로 발표자 : 정수경(인천가톨릭대학교) 토론자 : 조수정(대구가톨릭대학교) 1954년 성미술전을 중심으 2) 심포지엄 (1) 신앙의 해 기념 심포지엄 주제 :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흐름과 과제 일시 : 2012년 9월 13일(금) 오후 1시 30분~6시 장소 : 명동 주교좌 성당 교육관 305호 1 인사말 : 소장 김성태 신부 2 제1 주제 제 목 : 천주교 수용과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신앙 특성 발표자 : 여진천(배론성지) 토론자 : 조광(고려대학교) 3 제2 주제 제 목 : 첨례표 를 통해 본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발표자 :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토론자 : 김정숙(영남대학교) 4 제3 주제 제 목 : 광복 후 천주교의 민족사 참여와 사회영성의 성장 발표자 : 박문수(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토론자 : 박정우(가톨릭대학교)

435 연구소 소식 제4 주제 제 목 : 오늘날 건전한 신앙을 저해하는 문화적 흐름과 운동에 관한 조직신학적 성찰 발표자 : 박준양(가톨릭대학교) 토론자 : 손희송(서울대교구) 6 종합토론 사 회 : 노길명(고려대학교)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도 하반기 공개대학 제목 :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2) (9월 12일~12월 12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8시 30분, 연구소 회의실) 제1주(9월 12일) : 개강 미사 및 특강 제2주(9월 26일) : 김진후(비오)와 을해박해(1815) 순교자(1) 제3주(10월 10일) : 을해박해(1815) 순교자(2) 제4주(10월 17일) : 조숙 권천례 동정 부부(1819)와 정해박해(1827) 순교자 제5주(10월 24일) : 원주 대구의 기해년(1839) 순교자 제6주(10월 31일) : 전주의 기해박해 순교자(1) 제7주(11월 7일) : 전주의 기해박해 순교자(2) 제8주(11월 14일) : 병인박해기 서울 경기 충청도 순교자 제9주(11월 21일) : 병인박해기 경상도 순교자(1) 제10주(11월 28일) : 병인박해기 경상도 순교자와 윤봉문(2) 제11주(12월 5일) : 최양업 신부와 이성례 마리아 제12주(12월 12일) : 종강 미사 및 수료식

436 436 교회사연구 제42집 4)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동인회 특별강좌 (1) 제2차(11월 23일 오후 3시, 연구소 회의실) 제목 : 성경 여성 교회 강사 : 김성태(본 연구소 소장) 2. 간행물 1)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와 역사 제458~463호 2) 한국교회사연구소, 한마음한몸운동본부 25년사 3. 행사 7월 1일 : 교회와 역사 제458호 발행 19일 : 연구소 후원회 미사 겸 최석우 몬시뇰 선종 4주기 추모 미사 (장소 : 명동 성당 지하 소성당) 8월 1일 : 교회와 역사 제459호 발행 14일 : 한국교회사연구소 직원 연수(~15일, 장소 : 남양주 나르지오 연수원) 15일 : 연구소 설립 제49주년 설립 기념 및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 (장소 : 연구소 회의실) 17일 : 연구소 설립 제49주년 기념일

437 연구소 소식 일 : 연구소 후원회 미사(장소 : 명동 성당 지하 소성당) 9월 1일 : 교회와 역사 제460호 발행 12일 : 하반기 공개대학 제1강 13일 : 2013년도 한국교회사연구소 심포지엄(장소 : 명동 성당 교육관) 26일 : 공개대학 제2강 27일 : 연구소 후원회 미사(장소 : 명동 성당 지하 소성당) 10월 1일 : 교회와 역사 제461호 발행 10일 : 공개대학 제3강 17일 : 공개대학 제4강 18일 : 연구소 후원회 미사(장소 : 명동 성당 지하 소성당) 24일 : 공개대학 제5강 26일 : 제177회 연구발표회(장소 : 연구소 회의실) 31일 : 공개대학 제6강 11월 1일 : 교회와 역사 제462호 발행 7일 : 공개대학 제7강, 제17회 한국가톨릭학술상 시상식-이원순 고 문 공로상 수상(장소 : 로얄호텔) 14일 : 공개대학 제8강 15일 : 연구소 후원회 미사(장소 : 명동 성당 지하 소성당), 제41차 이사회(장소 : 연구소 회의실) 21일 : 공개대학 제9강 23일 : 동인회 송년 미사 및 특별강좌(장소 : 연구소 회의실) 28일 : 공개대학 제10강

438 438 교회사연구 제42집 12월 1일 : 교회와 역사 제463호 발행 5일 : 공개대학 제11강 12일 : 하반기 공개대학 종강 미사 14일 : 제178회 연구발표회(장소 : 연구소 회의실) 20일 : 연구소 후원회 미사(장소 : 명동 성당 지하 소성당) 31일 : 종무식(장소 : 연구소 회의실)

439 연구소 소식 수증도서(2013년 하반기) 1) 국내 도서 (1) 단행본 2014 사목지침서, 천주교 인천교구, 2013 교회의 심장,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1 남성동본당 50년사, 천주교 안동교구 남성동성당, 2013 동성 100년사, 동성 중 고등학교, 2011 믿음의 문 :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신앙의 해 제정 자의 교 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2 박황월(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 회고록,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 회, 2013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청주교구 50년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회 청주교구 이사회, 2012 자양2동 성당 30년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자양2동성당, 2013 자양동성당 35년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자양동성당, 의 기억과 역사 : 천주교편 5, 5 18 기념재단, 2013 청주교구 50년사, 천주교 청주교구, 2013 태평양잡지 1 2, 국가보훈처, 2013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 25년사, 툿찡 포교 베네딕 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 2013 한국 골롬반 선교회 통계 내역 : 1933~2013, 한국골롬반선교회, 2013 한국 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3,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

440 440 교회사연구 제42집 추진위원회, 2013 한국 천주교회 총람 : 2004~2012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 핵기술과 교회의 가르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 행복한 노동,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2013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75년사 : 1937~2012년 역사, 한국 재속프 란치스코회 국가형제회, 2013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75년사 : 지구 단위형제회 역사, 한국 재 속프란치스코회 국가형제회, 2013 노용필, 韓 國 中 國 歷 代 帝 王 世 系 年 表, 한국사학, 2013 다산학술문화재단, 다산 탄신 250주년 기념사업백서, 사암, 2013 단테 알리기에리, 최민순 옮김, 단테의 신곡 상 하, 가톨릭출판사, 2013 도미닉 그라시 조 파프로키, 송열섭 옮김, 미사 참례하는 사람들의 일상 살기, 가톨릭출판사, 2013 바티스타 몬딘, 이재룡 옮김, 자유인, 가톨릭출판사, 2013 발터 카스퍼 외, 순교의 신학적 고찰, 형제애, 2013 방미영, 스텔라, 내게 기대어 줄래?, 으뜸사랑, 2013 샤바낙, 유은희 옮김, 진도자증, 순교의맥, 2013 서공석, 그리스도 신앙, 빅벨, 2013 수원교구 50년사 편찬위원회,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의 말씀, 천주교 수원교구, 2012, 초대 교구장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 의 말씀, 천주교 수원교구, 2012 수원교회사연구소,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천주교 수원 교구, 2013

441 연구소 소식 441 수원교회사연구소,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3 아드리앙 로네 폴 데통베, 안응렬 옮김,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상 하, 가톨릭출판사, 2013 안소근, 아름다운 노래, 아가, 성서와함께, 2013 안충석, 정의와 사랑, 가톨릭출판사, 2013 알프레드 막스 크리스티앙 그라프, 권유현 옮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 제사, 성서와함께, 2013 양업교회사연구소, 황석두 루카 성인 전기 자료집, 천주교 청주교 구 연풍순교성지, 2013 오덕주, 50년의 발자취, 서울대교구 가톨릭여성연합회, 2013 유영희, 가슴 속의 질문과 삶 속의 고백, 빅벨, 2012 이노스 비피, 김정훈 옮김, 견진성사 전에 꼭 알아야 할 미사의 역 사, 가톨릭출판사, 2013 장 루이 스카, 염철호 권연진 옮김,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 성서와함께, 2013 정덕주, 참 믿음의 사람 향산 한영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3 정진석, 닫힌 마음을 활짝 여는 예수님과의 대화, 가톨릭출판사, 2013 제임스 마틴, 이순 옮김, 성자처럼 즐겨라!, 가톨릭출판사, 2013 제임스 켈러, 염봉덕 옮김, 크리스토퍼 하루 3분 묵상, 가톨릭출판 사, 2013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황사영의 신앙과 영성, 한국천 주교중앙협의회, 2013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2013~2014 전례력,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3

442 442 교회사연구 제42집 차엘리사벳, 천만번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 김영걸 감독 일대기 화 보집, 들숨날숨, 2013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 도 요안 신부 전기, 가톨릭출판사, 2013 추교윤 옮김, 내적인 삶의 발견, 가톨릭출판사, 2013 칼 헤르만 쉘클레, 조규만 조규홍 옮김, 신약성경신학 3, 가톨릭출 판사, 2013 페르비스트, 노용필 옮김, 교요서론 :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한 천주 교 교리서, 한국사학, 2013 하성래, 영혼의 횃불 권철신 권일신 순교 이야기, 하상출판사, 2013 한광석, 기도의 ABC, 가톨릭출판사, 2013 함규진 이병서, 오리( 梧 里 ) 이원익 그는 누구인가, 녹우재, 2013 홍순수, 김금남 옮김, 숨어서 외로운 이들 : 초대 사목회장 홍순수 강연 모음, 천주교 서울대교구 자양2동성당, 2013 (2) 연속간행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48,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2013 가톨릭사상 46, 대구가톨릭대학교 가톨릭사상연구소, 2013 가톨릭신학과사상 71, 신학과사상학회, 2013 누리와 말씀 20~33,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6~2013 다산학 22, 다산학술문화재단, 2013 대동문화연구 82 83,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 구원, 2013 동방학지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3

443 연구소 소식 443 사목연구 31,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 2013 사학지 45, 단국사학회, 2013 서울학연구 51 52,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2013 숭실사학 30, 숭실사학회, 2013 신앙과 삶 1~28, 부산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2013 신학과철학 22,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3 아시아여성연구 52-1,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 2013 역사교육 , 역사교육연구회, 2013 이성과 신앙 54,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신앙연구소, 2013 인간연구 25,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13 인천학연구 19 인천학연구원, 2013 종교문화연구 20, 한신대학교 종교와문화연구소, 2013 종교와 문화 24,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13 한국기독교와 역사 3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3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한국민족문화 48 49,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한국사연구휘보 , 국사편찬위원회, 2013 한국사학사학보 27, 한국사학사학회, 2013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26-1,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2013 (3) 참고도서 가산 불교대사림 1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13

444 444 교회사연구 제42집 (4) 학위논문 송란희, 천주교 종교박물관 교육프로그램 활성화 방안 연구, 중앙 대학교 예술대학원, ) 국외도서 (1) 서양서 1 단행본 Antonius Maria Bernasconi, Acta Gregorii Papae XVI 3, Ex Typographia Polyglotta, 1902 Régis, Ladous, Le Vatican et le Japon dans la guerre de la Grande Asie orientale, Desclée de Brouwer, 연속간행물 American Far East 2012, 2013 Australian Far East 2012, 2013 The Far East 2012, 2013 (2) 동양서 1 단행본 韓 國 獨 立 運 動 的 歷 史, 韓 國 獨 立 運 動 史 硏 究 所, 2013 韓 國 獨 立 運 動 の 史, 韓 國 獨 立 運 動 史 硏 究 所, 2013

445 간행 규정 445 간행 규정 제1장 (목적) 제1절 이 규정은 재단 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이하 연구소 라 한 다) 정관 제4조 제3항에 따라 학술지인 敎 會 史 硏 究 (이하 학술지라 한다)의 간행 규정을 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제2장 (명칭) 제1절 敎 會 史 硏 究 로 표기한다. 제2절 영문으로는 Research Journal of Korean Church History 라 표기한다. 제3장 (간행) 제1절 학술지는 연 2회(6월 30일, 12월 30일) 정기적으로 발간함 을 원칙으로 한다. 제4장 (편집위원회) 제1절 구성 1 학술지의 심사와 편집에 관한 사항들을 심의하고 결정하기 위 해 편집위원회를 둔다. 2 편집위원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추천받아 본 연구소의 소장 이 위촉한다.

446 446 교회사연구 제42집 3 편집위원장은 편집위원 가운데에서 연구소 소장이 선임한다. 4 편집위원회의 활동을 위하여 편집간사를 둔다. 제2절 임기 1 편집위원장과 편집위원의 임기는 2년이며, 연임할 수 있다. 제3절 역할 1 학술지의 편집에 관련된 주요 사항들을 심의하고 결정한다. 2 투고 논문의 1차 심사에 대한 심사 여부를 결정한다. 3 심사할 논문에 대한 심사위원을 선정한다. 제4절 회의 1 연 2회 개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단, 편집위원장이 필요하 다고 판단할 경우 소집할 수 있다. 2 위원 과반수 이상의 출석으로 개최되며, 출석위원 과반수 이상 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5장 (투고 원칙) 제1절 범위 1 교회사와 관련된 분야를 학술적으로 다룬 논문을 게재하는 것 을 원칙으로 한다. 단,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인접 분 야의 논문도 게재할 수 있다.

447 간행 규정 447 제2절 종류 1 연구 논문 2 비평 논문(서평 설림 회고와 전망 등) 3 자료 소개 제3절 분량 1 연구 논문은 200자 원고지 150매 이내로 함을 원칙으로 한다. 2 비평 논문과 자료 소개 등은 200자 원고지 100매 이내로 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4절 외국어 초록과 주제어 1 원고를 제출할 때 A4 용지 1장 내외로 작성된 외국어 초록을 첨부해야 한다. 2 원고를 제출할 때 국문 및 외국어로 작성한 5개 내외의 주제어 (keyword)를 첨부한다. 제5절 필자 1 필자가 2명인 경우에는 연구 공헌도에 따라 제1 필자와 공동 필자로 구분하여 명시한다. 2 필자가 3명 이상인 경우에는 제1 필자와 제2 필자 및 기타 공동 필자를 구분하여 명시한다. 제6절 투고 1 학술지에 원고를 게재하고자 하는 사람은 집필 원칙 에 따라 작성해야 한다.

448 448 교회사연구 제42집 2 학술지의 발간일로부터 2개월 전인 4월 30일 10월 31일까지 원고를 본 연구소에 제출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7절 게재료 심사료 1 논문을 게재하고자 하는 자에게 일정한 게재료와 심사료를 요 구할 수 있다. 제6장 (심사 원칙) 제1절 심사 방법 1 편집위원회는 투고된 논문에 대하여 3인의 심사위원을 선정하 여 심사를 위촉하며, 편집위원이 심사위원을 겸할 수 있다. 2 심사위원은 비밀심사를 원칙으로 하고, 그 결과를 규정된 논문 심사서 양식에 따라 서면으로 정리하여 편집위원회에 제출한다. 제2절 판정 방법 1 심사위원은 주제의 독창성, 논의의 정확성, 자료 활용 및 연구 방법의 타당성, 학계 기여도 등을 종합하여 게재(A), 수정 후 게 재(B), 수정 후 재심사(C), 게재 불가(D) 등으로 판정 처리한다. 2 심사위원은 수정 후 게재 이하를 판정할 경우, 그 사유를 구체 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제3절 심사 결과 처리 1 게재 : A A A, A A B 2 수정 후 게재 : A A C, A A D, A B B, A B C, B B B, B B C 3 수정 후 재심사 : A B D, A C C, B C C, C C C, A C D, B B D

449 간행 규정 게재 불가 : A D D, B C D, B D D, C C D, C D D, D D D 제4절 심사 결과 통보 1 논문 투고자에게는 심사 결과를 통보하며, 수정 후 게재 이하를 통보할 때에는 그 사유를 전달한다. 2 수정 후 게재나 수정 후 재심사 판정을 받은 투고자는, 수정 또는 보완 요구를 존중해야 한다. 3 심사 결과에 동의하지 않는 투고자는 심사 결과에 대하여 납득 할 만한 이유를 갖추어 재심을 요청할 수 있다. 4 투고자의 재심 요청에 대하여 편집위원회에서 타당하다고 인정 할 경우 새로운 심사위원을 선정하여 재심사를 의뢰할 수 있다. 이 경우 심사위원 선정은 편집위원장에게 위임한다. 5 투고자는 재심 결과에 대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제5절 비평 논문 자료 소개 등은 편집위원회에서 청탁 및 수록 여부를 결정하며, 별도의 심사를 받지 않는다. 제6절 기타 본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관례에 따른다.

450 450 교회사연구 제42집 부 칙 1. 이 규정은 1985년 5월 1일에 결정 시행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1995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2. 이 규정은 2001년 1월 1일부터 개정 시행한다. 3. 이 규정은 2004년 7월 1일부터 개정 시행한다. 4. 이 규정은 2012년 1월 1일부터 개정 시행한다.

451 집필 원칙 451 집필 원칙 2003년 12월 30일 제정 제1장 본문 표기 방식 제1절 문체는 간결한 문어체를 원칙으로 한다. 제2절 문장은 한글 사용을 원칙으로 한다. 제3절 고유 명사 전문 용어 자료 논저명은 처음에만 해당 외국 어로 표기한다. 단, 정확한 한글 발음을 표기하기 어려울 경 우에는 계속해서 해당 외국어로 표기할 수 있다. 제4절 본문의 문장 속에 사용하는 부호는 다음과 같다. 1 인용 2 재인용 혹은 강조 어구 3 문헌 저서 정기 간행물(학회지 포함) 신문 4 논문 작품 5 한글과 발음이 다른 한자 표기 예) 버들꽃나루 楊 花 津 6 동일 사항의 나열 제2장 인용 방식 제1절 모든 인용문은 논리 전개상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52 452 교회사연구 제42집 제2절 본문 가운데에서 인용하는 경우에는 겹따옴표( )로 묶으 며, 출처는 각주로 단다. 제3절 겹따옴표로 묶인 인용문 안의 인용문은 홑따옴표( )로 묶 는다. 제4절 문장을 이루지 않는 단어나 구절의 인용문은 홑따옴표( )로 묶으며, 인용자에 의해 강조되거나 변형된 인용구는 방점 또는 이탤릭체, 고딕체로 표기한다. 단, 강조의 경우, 한 문장 이 내에서 별도 표시한다. 제5절 전략 중략 후략 등의 말줄임표는 으로 표기한다. 제6절 문단을 바꾸어 별도의 문장으로 인용할 경우, 글자 크기를 본문보다 한 포인트 줄이고 겹따옴표를 붙이지 않으며, 출처 표기는 제2장 제2절과 같이 한다. 그리고 앞 뒤의 본문과 각각 한 줄씩 띄어서 본문과 구별하고, 왼쪽 오른쪽의 여백 도 한 칸 들여쓰기로 한다. 제7절 모든 종류의 인용문은 그 출처를 밝히고, 쪽수까지 제시해야 한다. 재인용의 경우, 원전( 原 典 )과 인용서를 상세하게 밝혀 야 한다. 제8절 인용문 안에서는 마침표를 사용할 수 없다. 다블뤼 주교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 ) 다블뤼 주교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 ) 제3장 각주 표기 방식 제1절 모든 주는 각주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53 집필 원칙 453 제2절 동양어로 된 논저인 경우에는 아래의 원칙을 따른다. 1 논문 A. 필자명 논문 제목 게재지명 권수 호수 간행처 간행 연도 쪽수의 순서로 표기한다. 단, 간행처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경우에 는 표기하지 않을 수 있다. B. 논문은, 게재지는 안에 표기한다. C. 논문과 게재지 사이에는 쉼표를 넣고, 인용 논문과 각주의 끝은 마침표로 표시한다. D. 게재지의 권 호 집 등은 숫자만 표기한다. 예컨대 제3권 제5호 인 경우에는 3-5로 표기한다. E. p pp 면 등은 모두 쪽으로 표기한다. 방상근, 병인박해기 천주교 여성 신자들의 존재 형태와 역할, 敎 會 史 硏 究 19, 2002, 75쪽. F.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기사의 경우에는 문건(기사)명 신문(잡 지)명 발행 연월일 면수의 순서로 표기하되, 필자가 있는 문건 (기사)을 인용할 때에는 문건(기사)명 앞에 필자명을 표기한다. 단, 신문은 면, 잡지는 쪽으로 표기한다. 교회와 정치, 가톨릭시보 1960년 6월 5일자 3면. 노기남, 1950년 연두사, 경향잡지 1950년 1월호 7쪽. G. 여러 차례 간행된 논문의 경우 필자가 구분하기를 원할 때 콜론 (:)을 사용한다. H. 여러 논문을 연속해서 인용할 경우에는 세미콜론(;)을 사용한다. 2 저서 A. 저자(편자 편저자 역자)명 서명 간행지 간행처 간행 연도 쪽수 순서로 표기한다. 단, 간행지가 서울인 경우 생략할 수 있다.

454 454 교회사연구 제42집 B. 서명은 로 표기한다. C. 국내 도서로 서울에서 간행되었을 경우 간행지를 생략할 수 있다.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 學 과 斥 邪 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D. 번역서일 경우에는 번역된 현재의 서지 사항을 표기하되, 역자 명 다음에 :을 붙인 뒤 원저자를 명시한다. 단, 필자의 필요에 따라 원전의 서지 사항을 명시할 수 있다. 김혜정 : Mark A. Peterson, 유교 사회의 창출, 일조각, E. 인용 서적이 편저일 경우에는 편자의 이름 끝에 편 또는 編 을 붙인다. 편저물 속의 논문을 인용할 때 편저자를 생략하고 해당 논문의 필자만을 표기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들의 전기, 천주교 대구교구, 중복의 경우 A. 동일인의 저서나 논문, 혹은 그 밖의 범주에 해당하는 글이 두 번 이상 인용될 경우 바로 앞의 것은 같은 책이나 같은 논문, 또는 같은 글 등으로 표기한다. B. 바로 앞은 아니지만 이미 앞에서 인용된 경우에는 앞의 책이나 앞의 논문 또는 앞의 글 등으로 표기한다. C. 재인용을 할 때 구분이 필요한 사항은 표기하되, 특별히 구분할 필요가 없는 서지 사항은 생략할 수 있다. D. 같은 필자(저자)의 논문(저서)이 둘 이상 나올 경우에는 필자(저 자) 제목 쪽수를 표기하되, 논문의 경우에는 게재지를 생략한다. 유홍렬, 高 宗 治 下 西 學 受 難 의 硏 究, 34쪽. 이원순, 한국 천주교 교육 사업의 교육사적 의의, 22쪽.

455 집필 원칙 455 제3절 서양어로 된 논저인 경우에는 아래의 원칙을 따른다. 1 논문 A. 필자명 논문 제목 게재지명 권수 호수 간행처 간행 연도 쪽수의 순서로 표기한다. B. 논문은 겹따옴표( ) 안에 제목을 쓰고, 게재지는 이탤릭체로 표기한다. C. 권수는 Vol.을 붙이지 않고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한다. D. 호수는 No.를 붙이지 않고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한다. E. 권수와 호수가 같이 있는 경우에는 -으로 연결하여 표기한다. F. 쪽수는 p.나 pp.로 표기한다. 2 저서 A. 저자(편자 편저자 역자)명 서명 간행지 간행처 간행 연도 쪽수의 순서로 표기한다. B. 서명은 이탤릭체로 표기한다. C. 권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한다. D. 쪽수는 p.나 pp.로 표기한다. E. 인용 서적이 편저일 경우에는 편자의 이름 끝에 ed.을 붙인다. 편저물 속의 논문을 인용할 때 편자를 밝혀 준다. Donal A. Baker ed., Confucians Confront Catholicism in Eighteenth-Century Korea, University of Washington, 중복의 경우 A. 동일인의 저서나 논문, 혹은 그 밖의 범주에 해당하는 글이 두 번 이상 인용될 경우 바로 앞의 것은 같은 책이나 같은 논문, 또는 같은 글(또는 Ibid.) 등으로 표기한다.

456 456 교회사연구 제42집 B. 바로 앞은 아니지만 이미 앞에서 인용된 경우에는 앞의 책이나 앞의 논문 또는 앞의 글(또는 op. cit.) 등으로 표기한다. 제4절 한적본( 漢 籍 本 )을 인용하는 경우 1 가장 큰 책의 범주는 로 묶고, 하위는 로 묶는다. 하위를 다시 나눌 경우에는 중간 방점( )을 사용하여 구분한다. 정약종, 쥬교요지, 텬쥬온젼이알으시니라, 국학자료원, 서지 사항을 표기할 때에는 동양서의 일반적인 표기법에 따라 판본을 밝혀 둔다. 단, 판본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서( 經 書 )나 사료( 史 料 )는 서명과 편명만을 표기할 수 있다. 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8월 임진. 제5절 각주 안에서 서명을 인용하는 경우 1 인용 대상을 제외한 부수적인 서지 사항은 모두 괄호로 처리한다. 2 불필요한 서지 사항은 괄호 안에서 생략할 수 있다. 제6절 각주에서 참고 문헌과 인용문을 달 경우 1 각주에서 참고 문헌을 달 때에는 해당 문장의 끝부분에 괄호를 하고, 그 속에 표기한다. 2 각주에서 인용문을 제시할 경우에는 인용문을 겹따옴표( )로 묶어 주고, 전거는 그 뒤에 표기한다. 3 각주에서 자신의 논문이나 저서를 인용할 경우 졸고( 拙 稿 ) 졸 저( 拙 著 )나 필자( 筆 者 ) 저자( 著 者 )로 표기하지 않고, 자신의 이 름을 그대로 표기한다. 제4장 본 지침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교회사연구 의 관례에 따른다.

457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윤리 규정 457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윤리 규정 제1장 목적 1) 이 규정은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이하 연구소 로 표기한다) 가 수행하는 연구활동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연구자들의 연구윤리를 확립하여 연구부정행위를 예방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2) 아울러 연구자들의 부정행위가 발생했을 때 이를 엄격하고도 공정 하게 검증하여 합당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필요한 원칙과 기준을 규정하는 데 실질적인 목적이 있다. 제2장 적용 대상 이 규정은 본 연구소의 연구활동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 는데, 구체적인 적용 대상은 다음과 같다. 1) 본 연구소의 연구발표회 및 심포지엄 발표자 2) 학술지 교회사연구 에 연구논문 설림 서평 자료 해제 등을 투고한 연구자 3) 본 연구소에서 간행하는 연구서 및 이에 준하는 저서의 저자와 자료집의 편찬자 4) 본 연구소의 연구지원비를 지원받는 연구자

458 458 교회사연구 제42집 제3장 연구 부정행위의 범위 1) 표절 이미 발표되거나 간행된 논문 저서의 내용 또는 다른 사람의 창 의적인 구상 개념 논리 자료 연구체계 연구 과정과 내용 등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도용한 경우에는 표절 로 간주한다. 2) 중복 게재 연구자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간행되었거나 게재가 예정된 자 신의 연구물을 그대로 또는 약간의 문장과 내용만 수정 보완하여 투고한 경우에는 중복 게재 로 간주한다. 3) 위조와 변조 존재하지 않는 자료나 논문 저서의 내용을 사용한 경우에는 위 조 로 간주하며, 이미 발표된 자료나 논문 저서의 내용을 임의로 변형 삭제함으로써 연구 내용이나 결과를 왜곡한 경우에는 변 조 로 간주한다. 4) 대필 다른 사람이 집필한 원고를 자신의 이름으로 투고하거나 발표한 경우에는 대필 로 간주한다. 5) 태만 연구 내용이나 연구 결과에 기여한 사람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명 기하지 않은 경우나 이미 발표된 연구 성과를 정당한 이유 없이 소개하지 않은 경우에는 태만 으로 간주한다. 6) 기타 위에 규정되지 않았지만 본 연구소의 연구윤리위원회에서 자체 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는 이를 부정행위로 간주 한다.

459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윤리 규정 459 제4장 연구윤리위원회 제1절 구성 : 본 연구소의 연구윤리위원회(이하 위원회 로 표기한다)는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1) 위원장(1인) : 위원장은 연구소 소장이 겸임한다. (2) 위원(8인) 1 당연직 위원(2인) : 연구소 부소장, 연구실장 2 위촉직 위원(6명) : 연구소의 연구위원 편집위원 가운데에서 위원장이 위촉한다. 3 위원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연구실장을 실무 간사로 선임한다. (3) 연구자의 부정행위를 공정하게 조사하기 위하여 해당 분야의 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위원회에 참여시킬 수 있다. (4) 위촉직 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하며, 자문위원은 필요에 따라 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한시적으로 위촉한다. 제2절 기능 : 위원회에서는 다음에 제시된 사항들을 담당한다. (1) 연구윤리의 확립에 필요한 제도를 수립하고, 그 제도를 유지 운영한다. (2)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제보를 접수하여 조사 판정 제재에 관한 업무를 수행한다. (3) 연구 부정행위를 제소한 사람을 보호하고, 제소된 연구자의 인 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4) 그 밖에 위원장이 요청한 사항들을 처리한다.

460 460 교회사연구 제42집 제3절 소집 : 위원회는 다음에 제시된 부정행위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위 원장이 소집한다. (1) 연구발표회 및 심포지엄의 발표원고에 대한 의혹이 사전 또는 사후에 제기되었을 때 (2) 학술지 교회사연구 에 투고한 원고의 심사과정에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3) 학술지 교회사연구 가 간행된 이후 수록 원고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4) 본 연구소에서 간행 예정이거나 이미 간행된 연구서 자료집 등의 내용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5) 본 연구소의 연구지원비를 지원받는 연구자의 연구계획서나 연 구 결과물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제4절 회의 (1) 위원장은 회의를 소집하고 주재한다. (2) 회의는 재적위원 2/3 이상의 출석(위임장 제출자 포함)과 출석 위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3) 위원회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자문위원이나 그 밖의 관 계자를 출석시켜 의견을 청취할 수 있다. (4) 해당 안건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위원(위원장 포함)은 회의 조사 심의 판정에 참여할 수 없다.

461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윤리 규정 461 제5장 조사 : 위원회에서 연구 부정행위 대상으로 의결된 경우 다음과 같 은 조사를 실시한다. 1) 학술지 교회사연구 에 투고되었거나 수록된 원고의 경우에는 편집위원장이 관련 분야 전문가 3인 이상의 자문을 받아 조사보 고서를 작성한 다음, 위원회에 제출한다. 2) 그 밖의 경우에는 연구실장이 관련 분야 전문가 3인 이상의 자 문을 받아 조사보고서를 작성한 다음, 위원회에 제출한다. 3) 조사는 신고 접수일로부터 15일 이내에 착수하고, 조사 시작일 로부터 30일 이내에 완료한다. 4) 연구윤리 규정 위반으로 제소된 연구자는 위원회의 조사에 협조 해야 한다. 협조하지 않을 경우 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연구소의 모든 연구활동에 참여를 제한시킨다. 제6장 소명 : 부정행위 조사 과정에서 위원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 우에는 제소자와 조사 대상자에게 소명의 기회를 제공한다. 1) 요청을 받은 제소자와 조사 대상자는 위원회에 출석하여 소명하 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위원회는 제소자와 조사 대상자에게 동등 한 의견 진술 이의 제기 변론의 권리와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2) 위원회에 출석한 제소자와 조사 대상자는 구두 소명과 함께 서 면으로 소명서를 제출해야 한다. 3)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출석할 수 없는 제소자와 조사 대상자는 서면으로 대신 소명할 수 있다.

462 462 교회사연구 제42집 제7장 제재 : 부정행위로 판정받은 조사 대상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제재 조치를 취한다. 1) 부정행위로 판정을 받으면, 연구소의 홈페이지와 교회사연구 에 해당 사실과 제재 조치를 게시하고, 관련 기관에 통보하여 해당 연구물의 삭제를 요청한다. 2) 발표 또는 게재 간행 이전에 발생한 경우에는 발표 게재를 취소하고, 사유 발생일로부터 3년 동안 조사 대상자의 본 연구 소 연구활동 참여를 제한한다. 3) 발표 또는 게재 간행 이후에 발생한 경우에는 사유 발생일로부 터 5년 동안 조사 대상자의 본 연구소 연구활동 참여를 제한한다. 4) 조사 대상자가 위원회의 판정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거나 수용하 지 않을 경우에는 본 연구소의 연구활동 참여를 영구히 제한한다. 5) 피해 연구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사실에 대한 사과문 을 연구소의 홈페이지와 교회사연구 에 게재한다. 6) 조사 대상으로 선정되었지만 부정행위로 판정받지 않은 연구자 에 대해서도 위원회는 원고의 내용에 대한 수정 보완을 요구할 수 있으며, 사안의 경중에 따라 한시적으로 본 연구소의 연구활 동 참여를 제한할 수 있다. 제8장 제보자 및 조사 대상자의 권리 보호 1) 위원회는 제보자와 조사 대상자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2) 제보자나 조사 대상자가 부정행위 조사 과정에 대한 내용과 일 정의 제공을 요청할 경우 위원회는 이에 성실히 응한다.

463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윤리 규정 463 3) 부정행위에 대한 제보 사실은 최종 판정이 내릴 때까지 외부에 공개할 수 없다. 4) 위원회의 판정에 동의하지 않는 제소자 또는 조사 대상자는 판 정 결과를 통보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위원회에 재조사를 서면으로 요청할 수 있으며, 거부할 수 있는 합당한 사유가 없는 경우에는 위원회가 이를 수용해야 한다. 5) 무혐의로 판정받을 경우 연구소는 조사 대상자의 명예회복을 위 해 노력해야 한다. 제9장 관련 기록의 보관 및 공개 1) 조사 및 심의와 관련된 모든 기록은 조사 종료 후 5년 동안 보존 해야 한다. 2) 결과 보고서는 판정 후 공개할 수 있으나, 제소자와 조사 대상자 의 신원은 공개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 제10장 보칙 1) 이 규정에 정하지 아니한 사항은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과학기술부 훈령 제236호, )에 따르거나 교회법 관계 법령 및 일반 판례를 존중하여 위원회에서 결정한다. 2) 이 규정은 재단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 개정한다. 부 칙 1) 이 규정은 2008년 2월 21일에 재단 이사회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며, 이날부터 시행한다.

464 敎 會 史 硏 究 원고 모집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교회사 관련 논문을 모집합니다. 투고 논문은 공정한 심사를 거쳐 본 연구소 학술지 敎 會 史 硏 究 43집 (등재지, 2014년 6월 30일 발간 예정)에 게재됩니다. 1. 주제 교회사와 관련된 분야. 단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인접 분야 논문 투고 가능 2. 원고 마감 2014년 4월 30일 3. 원고 분량 200자 원고지 150매 이내 4. 보내실 곳 5. 이외 자세한 사항은 연구소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거나 이메일 및 전화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홈페이지_http:// 연구소 전화_ (내선 205번, 백병근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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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 편집위원장 노길명(고려대학교) 편집위원 김수태(충남대학교) 김정신(단국대학교) 노용필(한국사학연구소) 박찬식(제주대학교) 박태균(서울대학교) 서종태(전주대학교) 여진천(배론성지 문화영성연구소) 장정란(가톨릭대학교) 조광(고려대학교)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한건(부산가톨릭대학교) 편집 간사 백병근 편집 서선미, 유혜진 제42집 2013년 12월 20일 인쇄 2013년 12월 30일 발행 편집 발행자 발행처 韓 國 敎 會 史 硏 究 所 廉 洙 政 재단 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 중구 삼일대로 330 평화빌딩 전화 (02) 지로 등록 제10-132호 가격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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