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x8pt\306\355\301\375.hwp)

Size: px
Start display at page:

Download "(120x8pt\306\355\301\375.hwp)"

Transcription

1 출판 현대 인문 사회과학의 결정판

2 인류는 어떻게 평등사회로 발전해 왔는가? 권력은 어떻게 형성됐고 어떻게 변화했는가? 역사와 정치 경제란 무엇인가?

3 서문 필자는 1956년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에서 태어나 철암국민학교를 다니다 1968년 부친을 여의고 이용소 머리감는 꼬마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0년부터는 강원도 인제에서 이용소 머리감는 꼬마로 생활했으며 그 후 요리 집의 보이( 웨이터)생활도 하고 요리사 노릇도 했으며 1978 년 이용사 면허증을 취득했으나 이용업에 종사하지 않고 1979년 강원도 삼척군 도 계읍으로 내려가 결혼하면서 먹고 살기위해 석탄 광부생활을 시작합니다. 탄광에서 몇 차례 해고되고 해고투쟁을 전개해 복직되므로 이름이 알려져 1990년 탄광지역 총파업 때 한보탄광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구속되었으며 이후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탄광들이 폐광되었기 때문에 강원도 동해로 내려가 시내버스 운전사가 됩니다. 시내버스 운전사가 되어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관리자( 배차)에게 폭행을 당하고 오히려 해고가 되면서 해고무효 투쟁을 전개하던 중 부인이 당신은 노동운 동에 미쳐서 처 자식을 부양할 자격이 없으니 나가라. 면서 쫓아내므로 혼자가 되어 서울에 올라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서울에서 시내버스 운전사로 취직했으나 2006년 한건의 사고가 발생되었다 면서 해고하므로 또다시 직장을 잃고 방황하던 중 2007년 탄광에서 구속되었던 사 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고 2008 년 촛불집회가 벌어집니다. 촛불집회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위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사람들과 대화 중 화폐도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생 산물이므로 존치 시켜야 한다, 고 주장하는 말을 듣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는 데 불평등의 근원을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면서 오히려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고심하다 집필을 결심했습니다. 인류가 아무리 노동을 해도 불평등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노력한 만큼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와 제도 때문이고 착취와 갈취 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모 든 착취와 갈취를 해체시킬 수 있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에 맞았다면 맞은 사람이 건설 현장이나 낙석위험 밑으로 지나가거 나 아니면 누군가 돌을 던져 맞은 것이지 원인 없는 결과란 없습니다. 그런데도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고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기득권을 차 지하고 근원을 은폐하려는 무리들이 하는 주장이고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원인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 사람을 만나도 주거지 거주지 ( )나 직장이 같은 동네에 있거나 왠지 걷고 싶어 그쪽으로 갔는데 상대방의 직장이나 거주지가 거기 있다거나 아니면 회사일로 또는 무료해서 그 장소를 갔다거나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타납니다.

4 인류역사는 실패를 경험하며 발전한다면서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분 석하지 않고 실패한 경험만 강조하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려는 무리들이 피 착취자 들에게 분노만 표출하다 억압당하고 포기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평등한데 무엇 때문에 어떻게 통제당하고 억압받으며 불평등한 삶을 살게 됐는가를 분석해야 하며 지도와 지시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설명돼야 합니다.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려면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통제의 기틀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고민해야 하고 억압과 통제의 근원을 깨트리려 노력할 때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불평등은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통제하고 지시하는 행위들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도록 강요 하는 것이 집단이나 조직이라는 명분입니다. 그러므로 왜곡된 평등과 자유에 대한 주장들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모두가 평등하 고 풍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해 법을 찾기 위해 이글을 집필했습니다. 하지만 생활이 여의치 못해 글을 쓰지 못하다가 2010년 봄에 집필을 시작했으나 얼마 쓰지 못하고 생활고 때문에 김치공장에 들어가 노동을 시작했지만 공장에서 관리자( 반장)라는 사람의 비인격적인 행위에 공장을 그만두고 집필에 열중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은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우주학과 지구과학을 설명한 것으로 관계없는 성인 분들은 초기의 생활상이나 농경사회의 출현부터 읽으시면 지루하시 지 않게 책 내용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5 목 록 1. 우주의 탄생 1 ~ 3 2. 지구의 탄생 3 ~ 9 3. 고생대 9 ~ 중생대 10 ~ 백악기 10 ~ 신생대 12 ~ 인류의 탄생 12 ~ 초기의 생활상 15 ~ 원시종교의 출현 18 ~ 집단생활의 시작 19 ~ 농경사회의 출현 20 ~ 수컷들의 침략과 문명의 발달 23 ~ 노예시대의 시작 26 ~ 법( 규칙) 의 출현 28 ~ 모세의 탄생 32 ~ 불교의 탄생 34 ~ 로마제국의 출현 36 ~ 로마공화정으로 발전 38 ~ 스파르타쿠스 저항 43 ~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45 ~ 예수의 탄생 46 ~ 로마제정의 출발 49 ~ 평등사상의 종교화 52 ~ 로마제국의 분리 54 ~ 무함마드( 영어 명: 마호메트) 의 탄생 55 ~ 서로마제국소멸과 비잔티움 59 ~ 봉건시대( 중세) 60 ~ 백년전쟁과 농민혁명 63 ~ 소작농의 출현 66 ~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69 ~ 종교전쟁과 청교도 혁명 78 ~ 식량생산의 대량화 81 ~ 평등사상의 발전 84 ~ 평등을 위한 저항 89 ~ 노동자저항과 혁명 99 ~ 유산자 위선자 민주주의 정착 104 ~ 107

6 37. 과학발달과 다수결 선거선출주의 107 ~ 전기의 발전 112 ~ 모터의 발견 114 ~ 자동차의 출현 115 ~ 생산의 자동화 116 ~ 분배불균등에 의한 공황과 학살전쟁 122 ~ 전쟁을 혁명으로 125 ~ 공황으로 파시스트독재정권 발호 128 ~ 엄청난 인명살상 2차 대전 136 ~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조선장악 139 ~ 공동체사상 말살과 시장자유주의 확산 141 ~ 신용카드와 대형마트 출현 144 ~ 생산로봇의 출현 145 ~ 체코혁명과 금융대공황 147 ~ 평등한 사회 149 ~ 생산과 분배 150 ~ 남녀의 평등 152 ~ 154 본문은 하이퍼링크와 책갈피 기능을 사용하여 목록에서 언제든지 페이지들을 찾아 읽어보고 목록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7 우주의 탄생 우주의 탄생 과정을 밝혀내는 이론을 우주론이라 하고 우주론은 우주가 최초에 어 떤 상태에서 출발해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최초 우주의 모든 물질은 한곳에 밀집되어 극 초고밀도 극 초고온 극 초고압의 덩 어리였다가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폭발을 일으켰는데 이 폭발을 빅뱅이라고 하며 폭발력에 의해 우주는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폭발 때문에 우주공간의 밀도와 온도가 낮아지고 우주 공간에 흩어진 물질이 중력 으로 인해 뭉쳐지면서 별과 은하를 만들었다고 분석하고 있는 대폭발설은 우주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 론적 우주론 이라고 합니다. 처음 우주는 시간도 공간도 에너지도 없는 무( 無 ) 의 상태였으며 과냉각 된 물처럼 불안정한 ' 요동하는 무' 에서 급격한 팽창이 일어나 약 150억 년에서 200억 년 전 빅뱅(Big Bang)이라는 대 폭발을 일으켜 한없이 팽창( 무중력 상태에서의 대폭발로 지금 도 팽창하고 있다고 함)하면서 쿼크( 소립자의 복합모델에서의 기본 구성자 6종과 3류가 있 으며 쿼크와 쿼크 사이의 접착제역할은 글루온이 담당한다.)와 반쿼크( 쿼크의 반입자)가 생성되었다가 반쿼크는 사라지고 쿼크가 중성자와 양성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 최근 허블우주망원경으로 발견한 것을 토대로 계산한 결과 137 억년전이라고 함) 빅뱅으로 인해 외부은하의 스펙트럼에 나타난 적색편이( 적방( 赤 方 ) 편이라고도 하는데 우주팽창에 의한 도플러효과로 파장이 몰리기 때문이라 판단함. 일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매우 중력이 큰 별에서 나오는 스펙트럼선은 약간 긴 파장 쪽으로 몰리는 현상을 적색편이 라고 하며. 레이저를 인공위성에 실어 지구중력에 의한 마이크로파 영역의 스펙트럼선의 적 색편이를 측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다.)로 외부은하들이 우리 은하계로부터 빠른 속도로 후퇴하고 후퇴속도는 외부은하까지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이며 거리가 100만 pc ( 파섹) 증가할 때마다 은하의 후퇴속도가 50~100km/s씩 증가하는 것을 증거로 분 석하고 있습니다. ( 지금도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함) 그 폭발로 백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주에는 각종 소립자들이 만들어졌고 우주 온도가 3,000K에 이르자 마침내 양성자와 전자가 결합하여 수소원자가 만들어졌다 는 것입니다. 폭발로 인해 무한하고 광활한 지금의 우주 공간이 생겼으며 공간을 떠다니던 양성 자와 전자가 결합한 알갱이와 먼지들이 부딪치며 서로 마찰하게 되었고 마찰하면서 금속성을 띈 물질들은 마찰과 부딪치는 충격으로 열이 발산되고 발산된 열에 의해 자력이 생기자 먼지 같은 알갱이들이 서로 끌어당기며 뭉쳐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50억 년에서 90억년이 흐르는 동안 먼지덩어리들은 점점 커지면서 운석이 되었고 이 운석들은 내부 마찰에 의한 열을 발산시키면서 점점 더 뭉쳐지고 커지며 행성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억 년 가까운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행성들이 모여 은하계를 이루게 되고 오늘 날 인류가 살고 있는 태양계가 생성되었으며 광활한 우주에는 인류가 존재하고 있 는 태양계와 같은 태양계가 몇 개가 있는지 현재의 인류과학문명으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에는 지구 은하계와 같은 형태의 은하계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은하계는 먼 은하일수록 우리 지구은하와 빠르게 멀어진다는 3K 의 우주배경복사(cosmic microwa ve backgroun d radiation, CMB, CMBR, CBR, MBR, 또는 잔재 복사(relic radi ation)( 전 자천문학) 는 우주를 채우고 있는 전자기파의 한 형태) 등을 근거로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8 가장 먼저 탄생된 것이 태양이고 그 주위로 8개의 행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태양계 라 부르며 태양은 지구에서 1억 4960만km 밖에 있고 지구가 근일점( 近 日 點 ) 을 지나 는 1월에는 250만km( 평균거리의 1.7%)가 가까워지고 원일점( 遠 日 點 ) 을 지나는 7월에 는 250만km 더 멀어지며 지름은 약 139만km로 지구 지름의 109배이며 부피는 지 구의 130만배 질량은 약 g로 지구의 33 만배가 된다고 합니다. 태양의 밀도가 지구보다 작은 이유는 고체의 껍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전체가 거대 한 고온의 기체이기 때문이며 태양의 기체를 이루는 원소는 대부분이 수소H, 다음 이 헬륨 He 이고, 이 밖에 극히 적은 양의 나트륨 Na, 마그네슘 Mg, 철 Fe 등 지구 상에 있는 원소 약 70종이 기체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됐다는 것이며 육안으로 보아 둥글고 빛나는 부분을 광구( 光 球 ) 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현재 태양의 중심은 초고온 초고압의 기체로 이루어졌으며 가장 많이 있는 수소의 원자핵( 양성자)이 충돌해서 열핵융합반응( 熱 核 融 合 反 應 ) 을 일으키므로 온도는 x107k, 압력은 약 30억atm인 양성자 4개가 헬륨의 원자핵( α입자) 으로 뭉쳐 있으며 질량의 0.7 % 가 소실하여 에너지로 바뀌면서 태양이 매초 당 방대한 에너지를 방 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계를 돌고 있는 행성은 2011년 현재까지 모두 8개로 파악되고 있으며 태양계 는 항성( 태양), 행성(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위성( 달, 포보 스, 데이모스 등등.), 소행성( 트로이 소행성단 등), 혜성( 핼리혜성 등), 유성, 그 밖의 천 체들을 총칭해서 태양계라 부르고 있습니다. 행성의 종류로는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지구형 행성이라 하며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을 말하고 암석으로 형성되어 단단한 것이 아니라 목성, 토성, 천 왕성, 해왕성처럼 기체, 액체들로 이루어져 있는 행성을 목성형 행성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내행성은 태양 주위를 지구 안쪽으로 공전하는 수성, 금성을 칭하며 외행성은 지구 바깥쪽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으로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외 행성이라 합니다. 태양계를 살펴보면 태양과 가장 가까운 행성이 수성으로 태양에서 가깝기 때문에 낮은 온도가 435도로 뜨겁고 밤이 되면 영하 180도까지 내려가며 태양에서 4500 만km~7000만km 정도 떨어져있고 공전주기는 88일이며 자전주기는 약 59일로 확 인되고 있고 태양계 중에서 가장 작은 행성이라는 것입니다. 태양에서 가까운 두 번째 행성은 금성으로 금성은 화산활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 며 이산화탄소가 대기의 99% 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온실효과가 심하게 일어나 수성보다 더 뜨거워 낮밤으로 400도 정도를 유지하고 태양에서의 거리는 약 1억 800만km가 되고 공전주기는 225 일, 자전주기는 243일이며 금성의 크기와 무게는 지구보다 약간 작고 기압은 지구 1기압의 90배인 90 기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태양에서 세 번째의 거리에 있는 행성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 달이라는 1 개의 위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전주기는 365일이고 자전주기는 24시간이며 태양으 로부터 거리는 1억 5000만km떨어져 있으며 지구형 행성들 중에는 가장 크다는 것 입니다. (21세기 들어와 최근 밝혀진 바로는 달의 중력에 의해 지구가 안전하게 축으로 자 전할 수 있으며 달이 없으면 자전축을 잃어버려 혼돈스러운 회전으로 지구에 생물체가 존재 할 수 없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태양계의 4번째 행성은 화성으로 포보스와 데이모스로 불리는 2개의 위성이 있으며 지구와 마찬가지로 북극남극 같은 곳이 존재하고 계절의 변화가 있으며 자전주기는 지구와 같이 24시간 30분으로 약간 길며 온도가 낮에는 20 도, 밤이 되면 -80도 정 - 2 -

9 도로 극지방의 밤 온도는 -120도가 되며 공전주기는 2 년에 가깝고 산소, 물, 질소 등이 있지만 대부분은 이산화탄소가 차지하고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는 2억 2794만 km이며 2년 2개월마다 지구에 근접하는데 가까울 때에는 약 2억 700만km, 멀 때 에는 2억 5000만km 며 지구에서는 화성이 빛나는 붉은 별로 보입니다. 태양으로부터 5번째 존재하는 목성은 가장 큰 행성으로 공전주기가 약 12년 정도 이며 현재까지는 28개의 위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자전주기는 1일이 되지 않 은 것으로 확인됐으며 구름 위의 표면온도가 -120도이고 위성주위에 아주 조그만 고리가 있으며 태양으로부터 약 7억 7900만km 떨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태양에서부터 6번째 존재하는 토성은 두 번째로 큰 행성으로 지금까지는 43개의 위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현재까지 발견된 행성들 중 가장 많은 위성을 가진 행 성으로 자전주기가 10시간이라고 하며 공전주기는 30년으로 매우 길고 암석과 얼 음 덩어리로 되어 있는 A 부터~F까지라는 뚜렷하고 아름다운 큰 고리가 있으며 태 양으로부터 거리는 약 14억 4천만km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태양으로부터 7번째 존재하는 행성은 천왕성으로 크기는 지구의 약 4배이고 현재까 지는 15개의 위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태양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온 도는 -150~170도가 되고 공전주기는 85년으로 토성과 마찬가지로 고리가 있지만 옆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수소와 메탄 등이 있기 때문에 푸르게 보입니다. 태양으로부터 8번째 존재하는 행성은 해왕성으로 청색 빛을 띠고 있어 천왕성과 매 우 비슷하며 현재까지는 11개의 위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천왕성처럼 푸르게 보이는 이유는 메탄, 수소 등이 있기 때문이고 해왕성의 공전주기는 165년이며 태 양계에서 가장 멀어 표면평균온도는 -200도고 자전주기는 19시간으로 태양으로부 터 약 20억 45만km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태양으로부터 9번째 존재하는 행성은 명왕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행성분류법에 의해 명왕성은 왜 행성으로 분류돼 태양계의 행성에서 퇴출되었습니다. ( 명왕성은 1930년 미국 로웰천문대에서 톰보가 발견해 태양계 행성으로 등록, 2006년 8월 24일 국제천문연맹 (IAU) 은 체코 프라하에서 표결을 통해 명왕성의 행성 자격을 왜 소행성(dwarf planet)으로 분류하는 내용의 행성에 대한 정의를 제정) 명왕성은 지름 2306km( 달 지름의 3분의 2)로 크기가 다른 행성에 비해 작고 태양계 외곽에서 태양 궤도를 도는 카이퍼 벨트 안에 존재하는데 2003년 명왕성보다 큰 제나를 발견한 캘리포니아공대 마이클 브라운 교수가 명왕성이 행성이라면 제나도 행성으로 인정돼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됐습니다. 행성에 대한정의 (a) in orbit around the Sun, ( 태양 주위를 돌고) (b) has sufficient mass for its self-gravity to overcome rigid body forces so that it assumes a hydrostatic equilibrium (nearly round) shape, ( 충분한 질량을 가져 자체 중력으로 유 체역학적 평형을 이루는 한편 타원형이 아닌 구형( 球 形 ) 을 유지하며) (c) has cleared the neighbourhood around its orbit( 주변 궤도의 다른 천체들을 깨끗이 흡수할 수 있는 천 체( 공전 구역 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천체))에 미달돼서 퇴출되었습니다. 성간가스( 별과 별사이 공간 대부분은 기체와 수소를 주성분으로 하는 원자와 분자로 이루 어진 가스고 이 가스는 대략 90% 의 수소와 10% 의 헬륨, 약간의 추가적인 원소( 천문학에서 말하는" 금속") 로 구성되었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함.) 지구의 탄생 목 록 현재까지 지구 탄생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한 이론은 정립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받아들여지는 가설로는 성운의 수축과 회전/ 원시 태양의 형성/ 원시 지구의 형성/ 마그마 바다의 형성/ 지구의 분화 과정을 통해 현재와 같은 지구를 형성했을 것이 - 3 -

10 라 분석하고 있습니다. 46억년전 지구의 반지름이 현재의 1/2 이었을 때를 원시지구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원시 지구에는 평균 1년에 1000개가 넘는 미행성체가 충돌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지구 자체의 중력이 커지면서 미 행성을 끌어들이는 힘도 강해지고 충돌 규 모도 더욱 커졌다는 것입니다. 44억 년 전 미행성체들은 엄청난 고속으로 지구에 충돌해 원시 지구의 성장( 크기)을 가속시키고 미행성체가 지표에 충돌하며 일어난 현상인 엄청난 고온 고압으로 미행 성체가 가지고 있던 물이나 이산화탄소 등의 휘발성분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증발한 수증기가 원시대기를 형성하게 됐고 수증기가 만들어낸 대기로 인해 온실효과가 나 타나 충돌에너지가 방출되지 못해 지표 온도가 계속 상승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원시지구와 충돌한 미 행성들은 주성분이 암석이나 금속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물 과 이산화탄소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된 충돌로 엄청난 압력과 열이 발생 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미행성에 갇혀 있던 물과 이산화탄소가 날아갔으나 충돌에 의한 먼지와 수증기들이 태양빛을 차단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원시 지구의 표면에는 수증기와 이산화탄소가 쌓여 지구의 대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원시 지구는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기체인 이산화탄소가 온실 효과를 일으키므로 미행성이 원시지구와 충돌할 때 발생되는 엄청난 열이 온실 효 과를 일으키는 기체들과 함께 방출되면서 열이 우주 공간으로 달아나지 못하고 지 구 대기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방사성 행성들의 폭발로 가열과 중력수축 작용이 발생하므로 지구는 태양과 같이 엄청난 온도 속에 녹아내려 마그마 바다를 이루었고 무거운 물질( 철, 니켈 등)은 지 구 중심부로 가라앉았을 것이며 가벼운 물질은 지각으로 분화되었을 것이라고 과학 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마그마 바다는 원시 대기의 변화에 따라 수증기를 흡수 또는 방출하여 용융 평형상 태에 이르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화산 활동으로 물, 메탄, 이산화황, 메탄 등이 포함 된 대기가 생겨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40억년전 원시 지구가 현재의 80% 정도로 성장했을 때 미행성체의 충돌도 줄어들 고 충돌 에너지도 감소하므로 지표의 온도가 내려가면서 지구가 냉각되어 마그마는 굳어졌고 4억년 정도 기간 동안 수증기를 다량 함유하고 있던 원시 대기에 마침내 큰 비를 내리게 됨으로 원시 지구 전체를 물이 덮었다고 합니다. ( 지구는 성간 분자 구름의 비어있는 곳에서 성간 분자구름이 몰려들어 생겼는데 처음에는 화산활동으로 엄청 뜨거웠지만 눈으로 된 혜성이 날아와 충돌하면서 물이 생겨나면서 식게 되었다는 이론도 있 습니다.) 지구 지하에는 마그마, 그 위에는 얇은 원시 지각, 바다, 그 위에 이산화탄소의 대 기를 지니는 층상 구조를 가지게 되었는데 지구의 층상구조는 열대류를 유발하고 이를 통해 대륙은 급격히 성장하였으며 지구의 진화는 운석 충돌이라는 외적 요인 과 대류 운동이라는 내적 요인이 서로 결합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마그마바다는 굳어지고 물로 뒤덮인 지구에 지각의 약한 틈을 뚫고 물이 스며들면 서 끓는 압력에 의해 격렬한 화산분출이 시작됐으며 이러한 화산분출로 마그마 속 에 갇혀 있던 기체가 대량으로 지구표면으로 방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구는 지각으로 스며드는 물로 인해 수분이 끓는 엄청난 압력 때문에 화산폭발이 계속 되었고 화산폭발에 의해 화산섬이 생기면서 대기가 만들어지게 됐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남아프리카 대륙을 만들었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하고 있고 이러한 주장은 원시화강암 덩어리의 나이에 대한 판단으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11 원시 대기의 성분은 주로 수증기(H2O), 수소(H2), 메탄(CH4), 암모니아(NH3) 등이었 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양이 많은 수증기는 일부가 두터운 구름층을 형성해 비가 되 어 내리다 뜨거운 지구 표면으로부터 열을 받아 다시 증발을 반복했고 일부는 강한 햇빛을 받아 수소(H2)와 산소(O2)로 분해되었을 것으로 분석합니다. 질량이 상대적으로 무거운 산소가 메탄(CH4)과 암모니아(NH3)와 반응하여 이산화탄 소(CO2), 수증기(H2O), 질소(N2) 등을 만들어 원시 대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원시 대기 성분은 오늘날의 대기 성분과는 크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원시바다는 철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으므로 붉은 녹색이었고 하늘도 붉은 색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대기에 포함돼 있던 다량의 수소는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고 물과 이산화탄소를 주성 분으로 하는 현재 인류가 살 수 있는 지구 대기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식음에 따라 맨틀( 지구 지각과 핵 사이의 부분으로 깊이 약 30km에서 약 2,900k m 까지를 의미)의 대류는 완만해지고 대류의 크기도 커졌으며 이런 현상으로 인해 지 구 표층은 두꺼운 판으로 성장하게 되고 이 판이 맨틀 내부로 가라앉는 운동이 일 어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초기에 지각이 형성되면서 지구 내부에서는 열적 대류가 시작되고 지구의 내부물질 이 화산 활동을 통해 지각을 뚫고 지표 밖으로 나오면서 지각에 화성암이 형성되었 으며 지각에서는 기권, 수권( 기권은 수증기를 제외한 지구상의 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지 구 표면에 해양 호수 하천 얼음 등과 같이 다양한 형태로 분포되어 있는 물의 범위, 수권은 성분에 따라 해수( 짠물) 와 육수( 민물) 로 구분하는데 육수는 수권의 약 2.8% 를 차지하며, 빙 하, 하천수, 호소( 늪, 소택, 습원), 지하수 등을 말한다.)의 작용으로 침식과 풍화 작용이 일어나고 퇴적 작용도 함께 일어나면서 활발한 지각 변동으로 퇴적암, 변성암이 만 들어지고 지각은 점점 더 두꺼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점점 더 식어감에 따라 초기의 지각은 더 두꺼워졌으며 이 지각은 맨틀의 대류 운동에 의해 수평으로 이동하거나 맨틀로 가라앉게 되면서 현재는 초기 지각 의 일부분만 남아 있으며 약 40억 년 전에 형성된 초기지각의 한 조각을 가장 오래 된 암석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산활동으로 지표면이 융기( 지질학에서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지표면의 수직 상승, 지표면의 융기는 홍적세 빙하가 녹거나 제거될 때도 일어나는데 이런 탄성적인 재상 승을 측정할 수 있고 현재 캐나다 남부와 페노스칸디아( 스칸디나비아 지역) 에서 진행되고 있다 함.)되면서 바다 밑의 지각이 조각나니 녹은 용암사이로 물이 스며들었고 이 때 뜨거운 물과 용암이 섞이면서 화강암( 가볍고 단단함. 현무암보다 밀도 낮음. 대륙성 암석은 무거움. 바닷물의 침식작용도 견뎌냄.)이 만들어졌으며 화강암이 융기하면서 최 초의 대륙지각이 생성되었다고 광물학과 암석학에서 주장합니다. 10억년 동안 화산폭발이 끊임없이 반복되므로 화강암의 원시대륙은 점점 커지면서 화강암의 지각도 생겨나게 되고 물이 지구를 덮고 있던 시대는 끝났고 대륙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 지금도 지구에서 활동하는 화산은 약 850개가 있고 대부분 ( 약 80%) 환태평양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활동하는 화산에서 마그마가 흘러내리면서 1년 에 7만 7 천 평방미터의 지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34억 년 전 6억년이라는 기간 동안 물로 뒤덮여 있던 대기의 성분은 조금씩 바뀌 어 갔으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CO2)는 빗물에 녹아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로 들 어가면서 대기 중에는 철 성분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뜨거운 태양 볕과 번개의 작 용으로 메탄(CH4)과 암모니아(NH3) 등이 반응해 원시적인 유기물이 합성되면서 단 백질로 변화해서 박테리아라는 생명의 씨앗을 탄생시켰다는 주장입니다

12 34억년전 초기에는 홍황세균과 황색세균이 화학적 유기물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나 스토로마톨라이트라는 산소를 생성하는 세균인 시아노 박테리아가 나타나면서 생명 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으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원시해양에 고인 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어 내리는 과정을 반복하 면서 육상의 많은 화학물질을 녹이며 바다로 흘러들어 원시해양에는 여러 가지 화 학물질이 농축될 수밖에 없었으며 원시지구의 강한 자외선과 번개에 의해 농축된 화학물질에서 아미노산처럼 생물체를 이루는 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 다는 것입니다. 원시 바다에서도 지각 사이로 흘러드는 물이 끓는 현상으로 압력이 가중되므로 화 산 분출이 매우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주로 현무암질 지각이 만들어지면서 대 륙이 형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양의 염소이온(Cl -) 이 물속으로 녹아 들어가게 되고 강한 산성의 비와 강물은 아직 완전히 굳지 않은 육지로부터 나트륨(Na +) 과 마그네슘(Mg2 +) 등의 광물질을 녹여 바다로 운반해 염분을 가진 바닷물을 만들었 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시지구에 비가 내릴 때 박테리아는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었고 오랜 세월을 거쳐 진화하면서 바다에서 박테리아가 녹색조류로 진화했으며 최초의 초록색 식물은 클 라미도모나스 클로렐라 같은 녹색조류라는 것입니다. 약 25억 년 전 원시지구에 발생된 번개현상과 뜨거운 태양 볕을 받으면서 대륙 해 안에 유기체가 생기기 시작하므로 지구에 큰 변화가 발생되는데 이 과정에서 극적 인 역할은 한 것은 오늘날도 발견되고 있는 스트로마 톨 라이트라는 원시 유기체로 서 미생물이 얇은 막을 생성하는 현상이라 합니다. ( 이것을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생물 체의 조상이라고 봅니다.) 햇빛과 이산화탄소가 풍부하고 경쟁상대자가 없으므로 수분이 충분히 공급되는 한 이들 초기 녹색조류는 스스로 양분을 만들고 산소를 내보내는 작용을 끝없이 반복 하는 과정을 거쳐 지구에 산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속에서만 존재하는 식물인 녹조류가 건조한 육지 위에서 생활하게 됨에 따라 지 면에 부착된 넓직한 평면구조로 그 성장유형이 변화되었다는 것이며 초기의 육상식 물은 축축한 토양에 부착하여 생활함으로써 물질대사에 이용되거나 대기 중으로 증 발된 물 대신 토양으로부터 수분을 보충했다고 주장합니다. 지구에 산소가 생성되게 되자 산소로 숨 쉬는 식물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유기물들이 육상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진화되면서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서도 자랄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조류들은 어마어마한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날의 수 많은 식물들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맨틀(mantle) : 지각 바로 아래 외핵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암석층으로 모호면에 서 약 2900KM깊이까지의 부분으로 지구 전체 부피의 약 82%, 지구 전체 질량의 약 68% 를 차지함. ( 구성 물질 : 주로 감람암질 암석) 외핵 : 2900KM 깊이부터 약5100KM깊이까지의 부분으로 지진파의 S파가 전파하지 못하여 액체 상태라고 추정하고 있음. ( 맨틀 암석을 채취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는 모콜 프로젝트로 고작 180미터를 파다가 실패와 치솟는 비용 때문에 1966 년에 중단함.) 내핵 : 5100KM 깊이부터 지구중심까지의 부분으로 고체 상태라 추정함. [내핵은 고체이고 외핵은 액체이며 맨틀은 가소성 고체의 성질을 나타내는데 이는 각 층의 녹는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으며 녹는점은 온도와 압력의 함수가 깊이에 따라 변하 는데 지구 표면에는 규산염과 철-니켈 합금이 고체로 존재할 만큼 충분히 온도가 낮으며 - 6 -

13 맨틀은 온도가 높지만 상대적으로 압력이 낮아 규산염 광물이 용융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점 성이 낮으며 하부 맨틀은 엄청난 압력을 받기 때문에 상부 맨틀보다 점성이 높다는 것이며 철-니켈 합금으로 되어 있는 외핵은 높은 압력에도 불구하고 녹는점이 맨틀에 비해 낮기 때문에 액체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고 내핵은 지구 중심부의 압력이 높아 고체로 존재한다 고 함] 암석의 나이로 25억 년 전 지구에는 원시 대륙이 생성되었으며 바다 속과 대륙은 스트로마 톨 라이트라는 원시 유기체로 다 뒤덮였다는 것입니다. 이 스트로마 톨 라이트라는 원시 녹조류가 원시지구를 덮었는데 햇볕을 받아 광합 성 작용을 일으키며 산소를 발생하게 되어 대기는 산소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산소의 양이 늘어나면서 광합성 작용으로 만들어진 산소 기체( 분자)는 자외선에 의 해 분해되어 산소원자가 되었으며 이 산소원자가 주변의 다른 산소분자와 결합하면 서 오존(O3)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오존층은 태양으로부터 지구로 들어오는 생물 에 유해한 자외선을 흡수하여 막아 주는 역할을 하면서 바다에서 태어나 진화한 생 물들이 육지로 올라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오파린(Aleksandr Ivanovich Oparin)은 초기지구의 진공 상태를 만들고 전기를 이용한 번개현상을 실험하여 탄화수소가 질소 산소와 반응하 면 유기화합물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지각에서 발열되는 에너지와 화학반응을 하면 서 아미노산, 지방산 등 여러 가지 유기화합물이 자연합성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 니다. 자연합성 된 유기화합물은 다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여러 종류의 단백질을 생성 했고 이 단백질은 주변의 유기분자들과 결합하여 세포의 원형질과 유사한 코아세르 베이트(Coacervate : 액적 液 適 ) 로 생성됐다가 새로운 분자들이 흡착되며 화학반응을 일으켜 원시생명체로 추측되는 유기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 지구상의 생 명의 기원 The Origin of Life on Earth> 을 발표하므로 확인됐습니다. 산소가 생성된 후 20억년이 지난 15억 년 전 지구는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 며 대기에는 이산화탄소막이 희석되면서 대기는 깨끗해지고 푸른색을 가지게 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지구모습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15억 년 전 10억년 동안 스트로마 톨 라이트는 어마어마한 산소를 내뿜으면서 지 금의 지구 상태인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스트로마 톨 라이트가 만들어낸 엄청난 산소 수치로 인해 지구에 대기권이 형성되 었으며 이때 형성된 산소의 양은 오늘날에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판단하 며 산소밀도가 높아졌을 때 대기권 상층부에서는 오존층이 생겨나게 되었고 오존층 이 자외선을 차단함으로서 생명체가 바다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원시태양의 볕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고 뜨거웠기 때문에 직접 자외선을 쬐이게 되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높은 산소량 때문에 오존층이 생겨남으로서 물속에 서 존재할 수 있는 녹조식물이 육상으로 올라와 생존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는 주 장입니다. 7억 년 전 대륙들은 남극에 모여 붙어서 초 대륙( 거대한 대륙)인 ' 로디니아' 를 형성 했으며 로디니아는 적도에서 북극으로 흐르는 난류성 해류를 차단했기 때문에 지구 는 적도까지 모두 얼어붙었다는 것입니다. 지도에서 밝혀진 사실은 바다 밑에는 대양중앙부에서 주위의 해양 분지보다 높이가 2500~3000m 솟아오른 대규모의 해저산맥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를 해령( 海 嶺 ) 이라 고 칭하며 해령의 중앙에 분포하는 깊은 골짜기를 열곡( 裂 谷 ) 으로 분류 한다고 합 - 7 -

14 니다. 해저산맥의 열곡과 협곡은 연결되지 않은 채 서로 단절돼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기 준으로 해저 면은 몇 개의 대륙판으로 나눠져 있으며 또 이러한 열곡, 협곡의 존재 는 해저 면이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이를 근거로 대륙이 이동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표면 아래 깊숙한 곳에서 맨틀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지각 하부에서 생성되는 대 류현상에 따라 순환하는 맨틀이 상승하는 부위가 융기되어 대륙판이 밀리고 그 틈 에 새로운 해양지각이 생성되는 것이며 맨틀이 가라앉은 곳은 오래된 해양지각 판 이 끌어당겨져 지구 안쪽으로 밀려들어 움직이면서 대륙은 계속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부단한 변환에 의하여 대륙이 1년에 평균 2.5cm씩 이동하고 있으며 두 대륙 이 오랜 기간 동안 이동하면서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도록 이동했다는 것이 판구조 론입니다. 6억 3000만 년 전에는 빙하기였으므로 지구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으나 지 구내부의 화산분출로 얼음덩어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빙하기는 지구에서 정기적으로 발생되는데 지형학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 점이 중요 하다고 주장되고 있으며 그 분석 중 하나는 빙하가 발달하거나 후퇴 시 침식과 퇴 적작용에 의해 생성된 빙하지형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해수면의 상승 또는 하강 운동 에 의해 해안 및 하곡( 河 谷 ) 지형 발달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점이라 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빙하작용의 흔적은 북미대륙에 60% 정도와 북유럽에 20% 정도로 집중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고산 지대에 흩어져 있고 주로 고산 지대에서 빙하가 계 속해서 두껍게 형성되면 빙하의 바닥 쪽에는 압력이 높아져 녹기 시작하면서 지면 과의 접촉부가 미끄러워 빙하가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빙하는 일정한 주기로 발생된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천문학적인 원인으로 살펴보면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1년에 한 번씩 공전 할 때 정확하게 동그란 원을 그리며 도는 게 아 니고 약 10만년을 주기로 원에 가까운 모양에서 점차 납작한 타원형을 그리며 도는 데 이 납작한 타원의 정도를 이심률이라고 하고 이심률이 작을수록 원에 가깝고 클 수록 타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심률이 최대가 되는 때에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가장 멀어지므로 지구 에 도달하는 태양열의 양도 대폭 줄어들게 되는데 이때는 겨울이 한 달 이상 길어 지게 되고 아마도 수천 년 동안의 보통 때보다 훨씬 더 추운 지구가 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이때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평균거리보다 약 1천8백만 km나 멀어지게 되는 것이고 태양열의 양이 줄어드는 또 하나 이유는 지구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인데 지 구가 태양을 돌때 23.5도 기울어져 돌고 있으므로 계절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고 여 름에는 북반구가 태양을 향하고 겨울에는 남반구가 태양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3.5도로 기운 것이 일률 고정적이 아니라 실제로는 약 4만1천년을 주기로 21.5도와 24.5도 사이로 바뀌는데 이 기울기가 적어지면 여름이 서늘해지고 겨울은 덜 춥게 된다고 합니다. 팽이를 돌리면 팽이 축이 지면에 경사져 있을 때 팽이가 비틀거리며 도는 것처럼 지구 자전축도 경사져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계절마나 지구와 태양사이의 거리는 - 8 -

15 서서히 변하게 되는데 이 운동의 주기가 약 2만 3 천년이라는 것입니다. 약 1만 2천 년 전엔 현재와 달리 북반구의 여름이 근일점에 생기고 겨울은 원일점 에 나타남으로써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추웠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4만 1 천년, 10 만년, 그리고 2만3천년 주기로 일어나는 이 세 가지의 효과가 합쳐지 거나 극대화되면 지구에 빙하기가 시작된다는 것인데 가장 극심한 추위를 나타내는 지역이 북반구에 있어 빙하기는 북반구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빙하가 발달하게 되면 태양으로부터 받는 지구의 복사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지구의 기온은 점점 낮아지면서 빙하의 성장 조건을 더욱 가속시키게 되고 지구 자전축의 경사 효과 이심률의 변화 중 어느 한 가지 효과만으로도 소빙하기를 가져오기 충분 한데 만약 이 세 가지 효과가 중첩되면 지구의 대부분은 얼음으로 덮인다고 합니 다. 자연적 현상에 의해 지각은 얼었다 녹았다하면서 수축되었다 팽창되었다 하는 과정 을 반복하고 풍화작용과 유수에 의한 마모와 융해 작용( 암반에서 가용성( 可 溶 性 ) 광물 은 녹고, 불가용성 광물은 잔유 물로 남겨짐) 그리고 빙하가 흐르는 압력에 의해 부서 지고 엄청난 화산재와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존재했다가 사멸되어 썩는 과정을 수십 억 년 간 반복하고 거치면서 식물이 뿌리내릴 수 있는 영양이 풍부한 흙이 생성 되 었다는 것입니다. 지각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부서진 알갱이들이 쏟아지는 빗물에 의해 휩쓸 려 흐르며 부딪치고 부서지는 과정을 수십 억 년 동안 반복하면서 낮은 지역으로 흘러들어 낮은 지역에는 식물이 뿌리 내릴 수 있는 흙이 더 많이 축적되었으리라 봅니다. 고생대 목록 지질학적으로 5억 6000만 년 전부터 2억 2500 만 년 전까지를 캄브리아기 오르도비 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석탄기 및 페름기의 6 기( 紀 ) 로 구분하며 캄브리아기에서 실 루리아기까지의 시대를 구고생대, 데본기에서 페름기까지의 시대를 신고생대라고 하며 구고생대 층은 영국의 웨일스 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되어 세계적인 모식지( 模 式 地 ) 로 선정되어 있으며 데본계와 석탄계 하부 층은 중부 유럽의 바리스칸 지향사( 地 向 斜 ) 지역에 잘 발달되어 국제 표준지역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5억 5000만년전 초 대륙( 거대한 대륙) 로디니아는 분리되었으며 3억 년 전 대륙들은 초 대륙 ' 판계아' ( 판 운동론에 따라 대륙이 갈기갈기 갈라져 3억년가량 따로 떨어졌다가 고생대 말기 ( 약 2억5 천만 년 전) 에 다시 하나로 뭉쳐 로라시아대륙과 곤드와나 대륙이 결 합된 형태를 " 판게아" 라고 함.)를 다시 만들었지만 극지방에 있지 않아 빙하기가 발생 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4억 년 전 1억 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대륙판은 다시 한 곳으로 모이면서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당시 습지에 존재했던 식물들이 지하로 매장되고 썩 으면서 석탄이 되었다는 것이며 얕은 바다 속에 살던 해양생물들은 석유와 천연가 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5억 4,200만 년 전을 캄브리아기라고 하는데 1909년 왈콧이라는 사람이 캐나다 록 키산맥에서 처음으로 진귀한 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므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생명체 진화에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5억 4200만 년 전 내장기관과 소화기관이 있 는 다양한 종류의 화석을 발견한 사실입니다. 이 화석들의 발견으로 인해 지금까지 인류가 알고 있듯 지구에는 공룡이 존재하다 멸종했다는 가설 이전에 소화기관과 내장기관이 갖추어진 유기체가 존재했다는 것 - 9 -

16 이고 이 유기체들의 생존상태는 매우 복잡했으며 생태환경도 암컷과 수컷이 교접하 므로 동물이 번식한다는 학설을 뒤집는 것으로 캄브리아기에는 단순히 식물만 존재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잡아먹으며 동물로 발전하는 현재의 과학으로는 이해될 수 없 는 복잡한 환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무기경쟁이 진화되고 가속화되었으며 일부 종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껍질을 만들거나 튼튼한 골격을 완성하기도 하고 잡아먹히지 않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적 아를 분석하고 사물을 관찰할 수 있는 눈이 생기고 상대를 잡아먹 기 위해 씹을 수 있는 이도 생기는 구조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2억5000만 년 전 어마어마한 화산이 폭발하면서 북아메리카를 300m깊이에 묻어버 릴 만한 양의 용암이 분출되고 온 대기를 뒤덮은 화산재가 태양 볕을 가리면서 지 구에 존재하고 있던 전체 생명체의 90% 가 멸종됐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 다. 화산이 폭발한지 1천만년이 흐른 뒤인 2억4000만 년 전 온갖 종들이 지구에 존재 하기 위해 진화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마침내 동물이라고 불리는 공룡이 지구상에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지구 환경이 오염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 풍부했던 공룡시대에 공룡들은 몸 의 길이가 작게는 9미터에서 크게는 40미터의 크기까지 자랄 수 있었으며 수명도 짧게는 4~5년에서 길게는 150 년까지도 살았다 합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므로 초식을 주식으로 한 공룡들은 육식공룡들에 대항하고 살아남 기 위해 몸집은 키워야 했기 때문에 몸무게가 100톤에 달하는 공룡도 있었으며 육 식을 하는 공룡들은 몸이 무거우면 사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냥이 용이하도록 몸집을 키우지 않는 대신 민첩하게 활동하는 근육이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중생대 ( 트라이아스기(Triassic Period)) 목 록 중생대시기로 고생대 페름기와 중생대 쥐라기의 사이를 트라이아스기라고 부르고 있으며 약 2억 3000만 년 전부터 1억 8000만 년 전까지 지속되는 기간을 삼첩기 ( 三 疊 紀 ) 라고도 하는데 트라이아스기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 시대 최고 지층인 독일 의 지층이 3개로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실제 표준 지층은 스 위스의 석회암 해성층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페름기 말에 형성된 초 대륙 판게아가 유지되었으며 해안선은 단조로웠고 기후는 건조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습하고 더워졌으며 초기에는 주로 포유류 형 파충류와 원시 포유류 대형 파충류가 번성했으며 중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공룡이 등장하게 되었고 바다에는 원시 어룡과 수서 파충류 그리고 원시적인 암모나이트와 하늘에는 익룡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1억 년 전 초 대륙 판계아가 분리되면서 대 지각변동을 일으켜 현재의 육지라 할 수 있는 대륙을 형성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죽은 동물들과 식물들은 지하로 매 립되거나 땅위에 묻혀 썩으면서 오늘날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연료인 석탄과 석유 류로 변화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백악기 목 록 백악기는 중기에 이르기까지 하늘에는 익룡이 날아다녔으며 공룡의 일부가 방산 적 응의 결과 조류로 진화했다고 보고 있으며 발가락이 셋 달린 공룡인 코에루로사우 르스가 이시기에 출현했다는 것이고 이 가운데 일부가 진화하여 조류가 되었으며 조류는 백악기 말에 있었던 대멸종에서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17 백악기시대에는 고생대에 형성된 초 대륙인 판게아가 분리되어 오늘날의 대륙과 같 은 모습으로 나뉘게 되었지만, 대륙의 위치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 되며 백악기 동안 대서양이 점점 넓어지고 북아메리카에서는 조산대와 네바다 조산 대의 활동이 있었다고 유추되고 있으며 후기에는 세비어 조산대와 라라미데 조산대 가 활동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곤드와나를 이루던 남아메리카, 남극,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는 이때 분리 되었다는 주장이고 당시 인도와 마다가스카르는 서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판게아 대륙의 분열로 인해 남대서양과 인도양이 형성되었고 당시 아프리카 대륙의 이동으로 테티스해는 점차 좁아졌으며 초 대륙의 분열과 대륙의 이동 때문에 백악 기의 해수면이 높아졌고 각 대륙의 많은 부분이 바닷물에 잠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백악기라는 이름은 해당 시기에 살았던 조개나 산호류에서 만들어진 탄산칼슘이 퇴 적하여 형성된 백악에서 유래하는데 이 시기에 형성된 백악은 대부분 석회비늘편모 조류에 의해 생성된 것을 말하며 해령의 융기와 해수의 순환으로 인해 지구 전체에 서 퇴적층이 발견되며 전 세계에 걸쳐 퇴적된 탄산염이 응축된 퇴적암을 백악이라 고 칭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백악 지층은 미국 캔자스 주의 스모키힐 백악층으로 여기에서는 당시 살던 다양한 생물의 화석이 많이 발굴되었고 영국 잉글랜드의 남서부에 분포 한 윌드와 중국의 진저우 시 인근에 분포한 이시안 층이 대표적인 백악이라고 합니 다. 석회비늘편모조류가 살았던 흔적을 백악이라 부르는데 축적되던 지층들이 지각변동 에 의해 절벽으로 드러나게 된 것으로 잉글랜드 남부 해안의 도버 백색 절벽과 북 해 연안의 여러 곳에 이와 비슷한 백악 절벽들이 발견되었고 백악 절벽 층에서는 성게, 베렘나이트, 암모나이트, 모사사우루스와 같은 당시 수생 생물의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백악기 시기 인도지역에서 왕성하게 일어났던 화산 활동으로 이산화탄소가 증가하 므로 기온이 상승하게 되었으며 해령을 따라 발달한 플룸 구조로 인해 해수면도 상 승하였고 초 대륙이 분열하면서 대륙들은 바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서의 대양을 연결하는 해량이었던 테티스 해 역시 지구 기온을 올리는데 일조하 였으며 알래스카나 그린란드에서 발견되는 식물화석과 남위 75도 지점이었던 남극 대륙에서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상당히 온난화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해수면 온도는 평균 약 37 C로 추정되며 더운 곳은 42 C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고 있고 이는 현재의 해수면 온도에 비해 약 17 C 정도 높은 수치이며 바다 속 심해 역시 현재에 비해 C 정도 높았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백악기에 이르러서야 속씨식물이 출현했다고 판단하는데 이후 속씨식물은 꾸준히 퍼져나가 백악기 후기에는 엄청나게 많이 번성했고 당시 속씨식물로는 녹나무, 버 즘나무, 분꽃나무, 버드나무, 사시나무, 감탕나무, 두릅나무, 생강나무 등의 속씨식 물이 꿀벌과 함께 공생 관계를 이루며 함께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곤충의 분화도 계속되어 개미, 흰개미 등과 함께 나비목에 속하는 나비, 나방 과 같은 생물들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진딧물, 메뚜기, 혹벌레와 같은 곤충들도 이시 기에 출현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수온으로 인해 오늘날의 산호와 같은 고착동물이었던 루디스트가 연안을 메 웠고 이 사이를 암모나이트가 헤엄치고 다녔으며 백악기 후기에는 부리에 촘촘한

18 이빨이 있는 헤스페로르니테스 라는 새가 출현하였는데 날지는 못하고 물속을 헤엄 치며 물고기를 사냥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6550만 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얕은 바다에 소행성이 충돌하며 대량의 먼지 가 발생되고 충돌 충격으로 지구에서 2번째로 큰 화산이 폭발해 화산재가 대기 중 에 치솟았으며, 유카탄반도 밑 암석층에서 막대한 양의 유황 성분이 분출되면서 몇 년 동안 햇빛이 지구 표면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빙하기까지 도래하자 지구의 기온 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대부분 지구생명체는 멸종되었고 당시 해저 플랑크톤과 몸체 가 작은 일부 포유류가 살아남아서 현재로 진화했다고 합니다. 신생대( 新 生 代, Cenozoic Era) 목 록 신생대는 지질 시대의 구분 중 가장 최근의 시대로 약 6500만 년 전 공룡이 멸종 한 시기부터 10,000년 전까지를 통칭하는 말로 작고 단순한 포유류가 나타나 하늘 과 땅과 바다로 번져나가는 ' 포유류의 시대' 라고 합니다. 5000만 년 전 지구상에 군림하던 공룡들은 멸종되고 공룡처럼 덩치가 크지 않은 새로운 종들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수 천 만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종들이 탄생했 다가 멸종되기를 거듭하면서 현재 존재하는 종들이 지구에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200 만 년 전~1만 년 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지구는 빙하기와 간빙기를 수도 없 이 반복해 거치면서 빙하가 커졌다 줄어들었다 하는 과정을 몇 백번 반복하며 지금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합니다. 인류의 탄생 목 록 현재까지 지구에서 발견된 화석으로 보아 약 500~100만 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초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원인( 猿 人 ) 류가 탄생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호모 하빌리스)해서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인에 속하는 화석표본에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모두 직립 자세( 두 발로 걸음)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과, 또 그것은 골반의 형태나 두개저( 頭 蓋 底 ) 에 있는 대 후두공( 大 後 頭 孔 ) 의 위치와 크기로부터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약 500만 년 전 아프리카는 남북을 관통하는 산맥이 형성되면서 동서는 왕래가 불 가능해져 동, 서 양쪽에 서로 다른 진화를 일으키게 하는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했 는데 산맥의 서쪽은 풍부한 강수량으로 인해 열대우림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 열매 등 먹이가 풍부해서 두 다리로 걸어야만 하는 진화가 필요 없으므로 계속 나무 위 에서 사는 동물로 남았다고 합니다. 반면 산맥의 동쪽은 구름으로 막혀 강수량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숲이 차츰 사라졌 고 초원이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에, 원 인류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숲과 숲 사이의 초원을 걷게 된 것이며, 이때 존재했던 원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같은 원 인류가 진화하여 현재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생인류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침팬지의 경우 아과( 亞 科 ) 인 호미니데(Homini dae)까지 현재의 인간과 흡사하며 고생물학적 연구 결과 인간과 침팬지는 6백 5십 만 년에서 7백 4십만 년 전 사이에 갈라졌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으며 분자생물학자 들의 연구에 따르면 5백 4십만 년에서 6백 3십만 년 전에 갈라졌을 것이라고 간주 되고 있습니다. 이 두 그룹은 97에서 99.4% 까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침팬지를 호모(Homo)속( 屬 ) 에 넣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19 현생 영장류를 분류하면 우선 반 원류( 半 猿 類 ) 와 원류( 猿 類 ) 로 나뉘고 원류는 유미원 류( 有 尾 猿 類 ) 와 유인원으로, 유미원류는 다시 구세계원( 舊 世 界 猿 ) 과 신세계원( 新 世 界 猿 ) 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반 원류는 얼핏 보면 원숭이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가장 원시적인 종류로서 안경원 숭이 여우원숭이 등이 여기에 속하며 유미원류는 원숭이나 비비( 狒 狒 ) 에 해당하고 신구 양 대륙에 갈라져 있으며, 서식하는 방식에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꼬리가 있는 원숭이와 대비하여 꼬리가 없는 것이 곧 유인원으로서 오늘날 적도 아 프리카에 서식하는 고릴라와 침팬지,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오랑우탄과 긴팔원숭 이 등이 이에 포함된다고 할 것이며 이들 각군( 各 群 ) 은 지금부터 약 6,000만 년 전 인 신생대 초기에 존재한 조상에게서 점차 갈라져 나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나뉘고 제3 기는 다시 팔레오세( 世 ) 에오세 올리고세 마이 오세 플라이오세로 나누어지며 제4기는 이른바 인류의 시대로 지금부터 약 200만 년( 약 100 만년으로 추정하고 있었으나 최근의 새로운 연대측정법에 따라 늘어났음) 전에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발견된 화석을 증빙자료로 보면 신생대 초기에는 현생의 반 원류와 비슷한 종류가 살았고 에오세에 이르러 신세계원이 유미원류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며 구세계원 계통에서 유인원의 첫 조상은 올리고세에 서식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으 며 그 무렵에는 긴팔원숭이 계통에서 이미 갈라져 나왔고, 마이오세에서 플라이오 세 초기에 걸쳐 다른 세 종류로 변화( 진화)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생물학에서는 이른바 계통수에서 인류로 진화하는 과정이 언제 갈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데, 인류와 유인원의 근연관계를 강조하 는 설의 경우에는 마이오세 말기 또는 플라이오세에 고릴라나 침팬지 계통에서 갈 라졌다는 설과 그 반대로 마이오세 초기 또는 올리고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 장이 서로 대립되고 있습니다.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류는 제4기가 되어서 나타나는데 제4기는 홍적세 와 충적세로 나뉘고 있으며, 홍적세는 다시 네 차례의 빙하기와 그 사이의 간빙기 로 분류되며 약 l 만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와 동식물상( 動 植 物 相 ) 이 오늘날과 거의 비슷해진 시대를 충적세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홍적세에 나타난 인류는 원인( 猿 人 ) 원인( 原 人 ) 구인( 舊 人 ) 신인( 新 人 ) 으로 분류되며 이 는 화석을 통해 판단되고 있으며 원인( 猿 人 ) 으로는 남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 스와 파란트로푸스, 동아프리카의 진잔트로푸스가 대표적이며 적어도 진잔트로푸스 는 제1빙기 이전인 200만 년 또는 100만 년 전에 살았던 가장 원시적인 인류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 초기 원 인류는 직립 보행을 하기 위해 골반이 발달되면서 넓어졌으며 팔은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충분히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에 보행에 지장을 주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발달되었을 것이라 분석되고 있으며 짐승을 물어 죽이기 위해 있 었던 송곳니는 발달하면서 음식을 씹기 편리한 치아로 진화하였고 하악관이 발달되 면서 머리도 커지고 뇌 용량도 커졌다고 합니다. 약 170~30만 년 전에는 원인( 原 人 )( 호모 에렉투스) 류가 거주했으며 이들은 추운 빙 하기가 닥쳐오자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아시아, 유럽 등으로 이주하게 되므로 분포 하는 삶의 영역이 넓어졌으며 자바원인, 북경원인, 하이델베르크인 등이 이에 속한 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공식 학명으로 호모 에렉투스라고 명명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약 240만 년 전의 것으로 인류가 처음

20 사용한 석기를 일반적으로 올두바이공작(Oldowan Industry) 이라 하며 이때 사용한 석기는 그때그때 임시적으로 만든 것으로 판단되고 이보다 정제된 석기는 발달한 올두바이공작(Developed Oldowan Industry) 이라 하며 이후 매우 정제된 형태로 발견 된 석기를 아리안공작 이라고 합니다. 아리안공작은 아프리카와 유럽 및 인도에 걸쳐 발견되는데 모든 곳에 분포된 것은 아니며 대표적인 석기는 주먹도끼를 비롯한 각종 양면가공석기(biface)로 이런 석기 는 약 150만 년 가까이 호모 에렉투스와 초기 호모 사피엔스 집단이 사용한 도구 로 보이며 석기제작에는 돌보다 강도가 약한 나무 사슴뿔을 사용해서 원석을 때리 는 방법과 간접타법을 응용해 보다 정제된 형태의 석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호모 에렉투스란 ( 똑바로 선사람)이란 뜻으로 원인에게 직립 인이란 이름을 붙인 것 은 500~200만 년 전 직립보행 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화석이 먼저 발견되었 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때부터 불을 사용하므로 원인들은 추운 혹한기가 발 생되는 온대지방까지 분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며 오랜 기간 동안 생 각하는 생활을 하므로 두개골용량은 ml로 커지고 주먹도끼( 손도끼)라고 불리는 돌망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석기시대 중기인 약 20 만~35,000년 전에는 구인( 舊 人 )( 호모 사피엔스) 이 나타나 생 활한 흔적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은 몸에 동물의 가죽을 걸치거나 지 붕과 옆면을 막고 움집을 지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줄도 알았고 불을 자유롭게 사용하므로 추운지역까지 삶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으며 머리도 커져 뇌의 크기가 1200~1600CC 까지 발달하여 현생인류( 신인)와 비슷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생활상은 시체를 매장하였고 시체에 채색을 하기도 했으며 동굴에 거주하고 석기제작 등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박편석기( 원석을 보다 정교하게 만든 석기)를 사용 하였으며 돌칼, 돌송곳, 돌창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1859년 독일의 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된 화석은 지명의 이름을 따 네안데르탈인이라 고 부르는데 이때의 인류를 호모사피엔스의 일종( 혹은 아류)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 다. 3만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를 신인( 新 人 )(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이라 칭하며 상동인, 그리말디인(Grimaldi man), 크로마뇽인(Cro Magnonman) 등 화석인류 와 현대인을 통 털어 부르는 명칭으로 공식 학명은 현대인의 학명과 똑같이 호모사 피엔스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고 부릅니다. 1868년 프랑스남부 크로마뇽지방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 크로마뇽인)은 오늘날 북부 유럽인과 외모, 두뇌 크기가 비슷하고 뇌 크기는 1500~1600 CC 정도며 타제석기 를 사용했고 골각기( 작살), 활과 창 등을 사용하던 기록들이 라스코 동굴에 벽화로 남아 있어 이때의 생활상과 주술적 의식과 예술적 감각을 알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인류의 조상이라며 아래에 적시한 종들이 600~700만 년 전부터 있었다 는 학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으나 그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Sahelanthropus tchadensis (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700 만~600 만년 전) Orrorin tugenensis ( 오로린 튜게넨시스, 600 만~580 만년 전) Ardipithecus ramidus ( 아르디피데쿠스 라미두스, 440 만년 전) Australopithecus anamensis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 420 만~390 만년 전) Australopithecus afarensis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380 만~300 만년 전) Kenyanthropus platyops (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 400 만년 전) Australopithecus africanus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300 만~250만년

21 전) Australopithecus garhi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250 만년 전) ( 파란트로푸스 속으로 분류되는 3 종이 있다고 함. 270 만~120 만년 전) Homo habilis ( 호모 하빌리스, 240 만~170 만년 전) Homo georgicus (190 만~180 만년 전) Homo erectus ( 호모 에렉투스, 180 만~10 만년 전) Homo ergaster ( 호모 에르가스터) Homo antecessor ( 호모 안테세소르) Homo heidelbergensis (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 하이델베르크인), 60 만~20만 년 전) Homo neanderthalensis (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 네안데르탈인), 20~3 만 년 전) Homo floresiensis (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2 만~1 만 년 전) Homo sapiens ( 호모 사피엔스, 20 만~ 현재) 초기의 생활상 목 록 문명사학자들은 대체로 신석기시대에서부터 청동기 시대까지를 모계중심사회로 보 고 있으며 인류가 집단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던 초기 농경사회를 이루었던 청동기시 대가 도래 하면서 부계중심사회로 바뀌게 되고 그 후 고대부족국가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초기 원 인류는 자연에서 야생동물과 같은 생활을 했으므로 거주지를 찾거나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찾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냥도 하 고 열매를 채집하기 위해 따뜻한 기후로 변화되는 곳으로 이동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동물들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면서 살아가던 원 인류들은 나무막대기를 창처럼 찌르는 곳에 사용하거나 몽둥이처럼 휘두르고 주먹돌을 가지고 사냥을 하면서 손의 쓰임새가 늘어나게 되었고 손을 많이 사용하므로 손을 점점 더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화산폭발과 번개, 그리고 바람에 의해 나무들이 부대끼면서 수백만 년 동안 수많은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들은 유추할 수 있고 불에 타죽은 동물들의 시체를 뜯어 먹으면서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 인류는 맹수처럼 날고기를 먹지 않고 익혀먹기 시작했을 것이며 무기를 다루기 위해 손의 역할이 커지면서 자유로워져 불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초기에는 화산폭발이나 자연발화로 발생된 불을 가져다 사용했을 것이나 돌을 무기 나 칼로 사용하기위해 깨다가 불통이 튀어 마른풀잎에 불이 붙기도 했을 것이며 심 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에서 부대끼는 소리가 나는 것을 관찰하다 나무는 마찰에 의해 불이 붙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싯돌과 나무를 비벼서 불을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면서 불을 피우고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원 인류가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었 을 뿐 아니라 어두운 밤에도 생활할 수 있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을 것이 며 빙하기와 혹한기의 추운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리라 봅니다. 불은 사용하여 음식물을 익혀 먹는 습관을 가진 원 인류들은 음식을 익히기 위한 그릇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단순하게 흙으로만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 을 것이며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 부족들이 사용하듯 돌을 불에 집어넣고 뜨겁게 달 궈서 달궈진 돌과 음식을 땅에 묻어 익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 흙이 불 위에서 오래 구워질수록 단단해 진다

22 는 사실을 발견하고 흙으로 빚어 불에 구운 그릇( 도기)을 사용하기 시작 했을 것이 며 돌을 불에 올리거나 받쳤다가 달궈진 돌들이 녹으며 흘려내려 반짝이는 현상을 발견하고 반짝이는 물질인 금과 은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청동기 와 철기도 발견하게 됐으리라 추정합니다. 금이나 은은 녹는 온도가 약하기 때문에 빨리 발견됐지만 청동과 철기는 녹는 온도 가 높아야 할 뿐 아니라 연금술이 발달되어야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오랜 시 간이 흐른 뒤에 발견됐을 것이고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녹일 수 있는 은과 금이 먼 저 발견됐을 것입니다. 구석기 시대에는 날카로운 돌을 주워 사냥한 동물들의 껍질을 벗기기도 하면서 생 활했으나 날카로운 돌이 없으면 직접 돌을 깨트려 날카로운 면을 만들어 사용하거 나 큰 몸돌에 충격을 가하므로 날카로운 면을 떼어내 사용할 수 있게 된 때를 뗀 석기시대라 부릅니다. 당시에는 모계사회라고 하는데 욕정이 발동된 수컷들은 암컷을 보면 교접( 섹스)을 가지면서 생활했을 것이며 교접 후 수컷은 떠나고 또 다른 수컷들을 만나면 또 교 접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암컷들의 생활이 반복되면서 잉태를 한 암컷들은 홀로 아이 를 낳고 키워야했을 것입니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들은 아이를 낳다 난산으로 수많은 암컷들이 죽 었을 것이라 판단되며 잘못 채취한 식물을 먹고 앓거나 죽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무 엇이 먹을 음식이고 무엇이 독이 들어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런 생활을 수백만 년 동안 계속반복하면서 먹어도 되는 안전한 먹을거리들이 분류됐다고 봅니다.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사냥하거나 채취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수백만 년 동 안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난교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은 부계가 누구인지 알 수 없 고 단지 자신을 낳고 키워준 모계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자연스럽게 모계사회 를 형성하게 됐으리라 판단합니다. 난교( 亂 攪 ) 속에 암컷들은 계속해 자녀를 낳을 수밖에 없고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는 함께 생활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론가능하며 원 인류는 일반 동물과는 달리 임신 기간과 양육기간이 길어서 수태한 암컷들은 사냥보다는 열매나 채집을 위주로 생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사냥하려는 맹수로부터 아이를 지키고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 암컷끼리 소규모 무리를 지어 생활했을 것입니다. 백 만년 이상 되풀이되는 생활을 해 오면서 암컷의 나이가 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먹여 살리는 역할도 하게 되었을 것이며 아이가 성장한 암 컷은 수컷들의 간음행위에 저항하거나 수태기간 동안의 안전을 위해 먹을 것을 요 구하기도 했다고 판단됩니다. 모계사회는 엄격한 복종적 형태보다는 공동으로 아이를 양육하며 사나운 맹수에 대 항하여 자신들을 지키고 안전하게 먹을거리를 채취하거나 사냥하기 위해 상호도모 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멸종하여 사라진 사나운 맹수로부터 수많은 희생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강한 수컷의 종자를 받으려는 암컷도 생겨나 수컷들끼리 경쟁을 붙여 강한 자와 교 접하기도 했을 것이며 수컷의 일방적인 교접을 거부하고 먹을 것을 가지고 오는 수 컷을 필요로 하는 생활도 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잦은 화산폭발과 지진 그리고 홍수와 화재 등의 자연재해와 사나운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이의 양육은 모계사 회에서 공동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후손이란 종족보전의 한 방편임과 동시에 사냥하는 힘의 원천이기에 농경사회가 시

23 작되어 국가가 형성되고 핵가족화를 이루기 이전에는 집단이나 무리가 모두 협심하 여 함께 공동으로 양육했을 것이라는 것은 추론 가능하며 인류는 이렇게 수백만 년 동안 종족번식과 보전을 위해 살아왔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계사회의 흔적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히말라야 산 맥 끝자락 중국 사천성 서부지방의 대소금천지역의 강 하류에 위치한 여왕 곡으로 이곳은 빙하가 밀려오면서 만든 협곡이 워낙 험준해 외부와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다부일처( 多 夫 一 妻 ) 제의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계사회를 이루고 다부일처 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남성들이 여성들 보다 월등하게 많이 태어나는 현상이 있어서 성비( 性 比 ) 가 맞지 않아 남성의 수효가 많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를 하게 되면 결혼을 하지 못하는 남성이 발생되어 분쟁이 끊임없을 것이라는 명분도 한몫 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는 남자가 결혼하기 위해 여성의 부모에게 지참금을 지급하면 얼마든지 부 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남자는 결혼 지참금을 지급한 이후부터는 일을 하지 않 고 놀아야 하며 남자가 돈을 벌면 돈을 벌어서 후처를 얻으려고 한다며 부인에게 폭행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무리에서 생활해온 여성이나 남성이 여성을 폭행할 수 있고 죽임까지 행사할 수 있는 집단 또는 무리에서 살아 온 여성일수록 정조( 貞 操 ) 관념이 강해서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과 욕망을 억누르고 자신의 욕정을 스스로 부정하며 갇힌 사상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은 지식을 습득 하지 못한 여성일수록 정조관념과 가족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남성의 무력으로 여성이 폭행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지만 집단 이나 무리가 생계를 책임지지 않고 남성이 물질을 가져와야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길들려져 있는 여성은 생계를 위해 폭력도 참아야하고 아이는 늙었을 때 생계를 보 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무리나 또는 집단이 생계를 책임지는 지역의 여성들은 처녀 ( 處 女 ) 를 버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가족에 묶여 갇혀있지 않으며 자유롭고 개방적인 생활을 합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도 모계중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유럽의 많은 국가들 중에 비 옥한 토지를 가지고 농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국가들은 사냥을 하며 살았던 민 족보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채취하는 등 노동을 할 수 있는 일손( 노동력)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여성이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 식물은 영양분을 섭취해야 살 수 있는데 인류는 영양분 을 먹을거리로 충당하고 먹을거리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아니면 자 연에서 채취 또는 수확한 곡물로 유지되는데 힘센 남성들은 주로 사냥을 했겠지만 실패할 확률도 높아 안정적이지 못한데 비해 자연에서 채취하는 과실과 곡식은 수 태기간 때문에 활동이 적은 여성들이 채집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거나 열매를 거둬들이기 위해선 일손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손을 생산할 수 있는 여성이 당연히 우선되는 것이며 특히 많은 아이를 생산하는 여성을 우대 하면서 자연스럽게 모계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초기 원 인류는 모계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무리를 이루게 되었으며 소규모의 무리 가 공동으로 사냥하기 위해서 사냥을 하자거나 어디에 사냥감이 있다거나 어느 방 향으로 달아나고 있으니 포위하라거나 하는 무리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의 표현은 필수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먹을거리인 동물을 사냥하기 위한 신호를 주고받는 생활을 수 백 만년 동안 하면서

24 서로가 알아들을 수 있으며 의사가 소통되고 표현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가 발달하 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원 인류들은 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습관이 몸에 배이면서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먹을거리를 공동으로 사냥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필요를 느끼고 집단과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진화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주 오랜 선사시대 때 원 인류들이 살아가던 동굴에서 벽화들이 많이 발견 되는데 이러한 동굴벽화들은 의사와 발성을 통일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목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을까를 판단해 봐야 할 것입니다. 원 인류들이 후손들에게 삶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벽화를 그리지는 안았을 것이고 필요에 의해 벽화를 그렸을 것인데 벽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같은 의미로 표현하고 같은 소리를 내도록 통일하기 위해 동물과 물고기의 그림을 그리고 사냥 하는 모습도 그렸을 것이고 그것을 어려서부터 같은 의미와 표현으로 이해하고 훈 련했을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래밭이나 땅에다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을 것이지만 땅이나 모래위에 그 리는 그림들은 자연현상에 의해 금방 지워져 버리므로 지워지지 않도록 암벽이나 동굴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원시종교의 출현 목 록 과학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원 인류들은 당시에 잦은 화산폭발과 지진, 비바람과 천둥번개 그리고 추운겨울에 내리는 눈에 의해 수많은 희생을 당하고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현상을 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판단하고 신을 만들기 시작했 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계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 인류들은 사냥을 떠났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 아져 앞을 분간할 수 없거나 번개가 치면서 수십억 년 동안 성장한 숲속에서 불이 붙거나 하는 현상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으니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며 겨울이 닥 쳐 엄동설한의 추위와 눈보라가 내리는 현상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자연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니 하늘에는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이 있다고 믿고 하늘에 빌고 태양을 보고도 빌었을 것이며 바다를 보고도 빌고 나무와 바람을 보고도 빌면서 신을 만들어 냈다고 판단됩니다. 초기에는 모두가 모여 함께 기원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를 지낸 음식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자들이 생겨났을 것이며 이들이 주술사노릇을 하면서 힘 들고 위험한 사냥을 하지 않으니 자연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이 생겨 제비가 낮게 날 거나 개미가 집을 찾으면 비가 온다는 것을 발견하고 비가 올 것을 얘기하면서 스 스로의 격을 높였을 것입니다. 주술사들은 사냥을 하다가 부상을 당하거나 자연재해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 하기 위해 야생동물들 같이 온천에 몸을 담그거나 항생제 성분이 있는 오미자 같은 것을 돌 위에 놓고 찌어서 바르거나 삶아서 사용했을 것이며 이러한 것들이 지금까 지 전해져 내려오는 민간요법과 한의학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자연을 신으로 만들어 우상화 하던 현상들은 세계 곳곳에서 현재까지도 나타나고 있는데 태양신을 섬기고 바다용왕을 섬긴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이렇게 원시시대 종 교에서부터 비롯된 미신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공동으로 사냥하고 공동으로 생활하던 원시시대는 제( 祭 ) 도 공동으로 지냈을 것으로 판단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이나 사냥 중 부상을 입는 인류도 생겨 치료할 방법 을 찾지 못하던 원시인들은 동물처럼 자연에서 치유( 온천이나 약초)를 찾거나 귀신을

25 쫓아내야 한다는 미신( 현재도 무당이나 목사들이 안수기도로 치료한다며 몽둥이로 환자를 때리거나 굶겨죽이는 곳도 있음)행위가 원시종교였다고 봅니다. 사냥을 나가지 않아 자연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 주술사들은 획득한 사냥감 중 맛있는 부위를 차지 하기위해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먼저 제를 지내야 한다 며 안정적으로 먹을 것을 획득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권력을 행 사하는 제사장이라는 위치까지 만들어 냈다고 판단됩니다. 집단생활의 시작 목 록 떠돌아다니던 원 인류들은 항상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곳을 찾아 생활했을 것이며 채 취했던 열매가 넘쳐나 버리고 가는 일들을 오랫동안 반복하다 이듬해 찾았을 때 새 로운 나무가 자라나 열매가 맺혀있는 것도 발견하게 되고 생포했던 동물들이 새끼 를 낳아 번식한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활을 시작했다 고 보고 있습니다. 농사와 목축으로 안전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들은 정착하여 생 활하게 됨으로 집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며 처음에는 모계로부터 내려오는 모계혈통의 사람들끼리 모여 집단을 이루었을 것으로 봅니다. 집단이 무리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이들 중 장성한 수컷들은 사냥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수컷들처럼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냥하며 살아가는 환경을 유지했으리라고 판단됩니다. 사냥이란 항상 성공할 수 없어 무리를 짓는 것이 사냥을 하거나 생존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원 인류의 수컷들도 무리를 짓기 시작했을 것이며 영역다 툼과 사냥감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도 수없이 많이 했을 것입니다. 무리를 짓고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진 원 인류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닌 다른 무리들의 집단을 발견하기도 했을 것이며 발정 난 수컷들은 암컷들과 교접하기 위 해 어린 수컷들을 살해하고 먹을 것을 강탈하기도 했다고 봅니다. 또한 암컷이 없는 수컷 무리들끼리 싸움을 하게 되면 포로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무리의 수컷들은 모두 살해했을 것이며 더러는 식육을 먹기도 하는 식인 생활도 나타났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다와 강가에 위치한 원 인류들은 조개나 물고기종류를 채취하며 살았을 것이고 울창한 밀림이나 산악지역에서는 사냥이나 열매와 식물을 채취하고 초원지역에서는 사냥과 야생 조나 수수 같은 것을 채취하는 것이 생존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거주 하던 지역적 환경에 따라 사냥과 채취, 수렵하는 방법들이 다양하고 서로 다르게 발달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원시시대 때 생활했던 유적이 발굴된 장소에는 옷이나 움집을 꿰매기 위해 고기의 뼈에 실을 묶어 사용했던 흔적들이 있으며 물고기를 잡기 위해 사용했던 그물추와 조개껍질이 쌓여 있는 것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원 인류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 안 물고기를 수렵했던 것으로 봅니다. ( 오이도 패총 : 경기도 시흥 오이도에 있으며 선사 시대 때 채취해 먹은 조개껍데기가 쌓여 이루어진 퇴적층 유적.) 원시시대에 바닷가나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조개류 어류를 잡아 식용으로 했으리라 는 것은 쉽게 상상되며 석기시대의 조개더미[ 貝 塚 ] 에서 돌 동물의 뼈, 뿔 조개껍데 기 등으로 만든 낚시 창 작살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어업은 인류의 역사와 더 불어 발전해 왔을 것이며 기원전 3,500년(5,500 년 전)경 이집트에서는 칡덩굴 짚 등 에 무거운 돌을 묶어 그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당시 생활했던 유적들은 현 재까지 발굴된 사실로 확인하고 있음)

26 원 인류는 손이 상당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발달했을 것이고 손놀림이 발달 하여 미세한 물건도 잡을 수 있게 발전하면서 근대에 와서는 삼 무명실로 그물을 짜 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로 작은 그물추에 가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발견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라스카에서 발굴된 배 조각을 방사선으로 탄소 측정한 결과 약 25,000년 전 배 의 조각으로 판명되므로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물고기를 잡아 생활했다고 유추하 는 것이며 초기의 배는 뗏목을 이용한 통나무배와 카누모양의 배들이 인류가 최초 로 사용했던 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 돌자구나 돌낫등 유물의 발견) 한반도나 외국에서 발굴되는 유적으로 보아 6,000년 전부터 인류는 흙으로 빗은 토 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토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담기도 하고 끓이기도 하는 생 활을 하면서 오래 동안 불에 구워진 토기는 단단한 옹기가 된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부산 동삼동 유적 6000 년전 빗살무늬토기를 제작하여 사용한 흔적) 농경사회의 출현 목 록 인류는 약 1만 년 전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음) 비로소 식 량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석기시대에 보리를 재배했던 흔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나오는 유적 으로 확인할 수 있고 1 만~1만 2 천 년 전 원시민족인 호서인( 湖 棲 人 ) 의 유적에서도 인류가 작물을 주식으로 섭취한 증거들이 나타난다는 사실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석기시대인 6,000~7,000( 기원전 5,000~4,000 년전)년경에는 밀 보리 조 아마 등의 작물을 재배했으며 중국에서는 4,700( 기원전 2,700 년경)년전인 신농시대( 神 農 時 代 ) 에 이미 5 곡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원시농업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8,000년( 기원전 6,000 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최초로 시작된 농업이 세계적으로 전파되었다 는 것이 하나 있으며,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웨이허평원[ 渭 河 平 原 ], 티그리스 및 유 프라테스 강 연안, 인더스 강 연안, 나일 강 연안, 남부멕시코, 남아메리카 등 7개 지역이 고대부터 발달된 농업을 이루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처음엔 팔레스티나 시리아 북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부까지 걸친 비옥한 초 승달 지대(Fertile Crescent) 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아시아가 급격히 건조하자 사막의 오아시스에 인간과 동물이 모여들어 공존하면서 야생식물인 보리와 밀을 재배하고 야생하던 산양 염소 소 등 유제류( 有 蹄 類 ) 동물을 가축화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농경문화의 시작은 사막지방이 아니라 산록지대였음이 밝혀지면서 농경 목축이 산 악지대에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에서 시작된 코카서로이드(Cocasuloid)계 인종의 맥류재배를 주체로 한 농 경문화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몽골로이드(Mongoloid)계가 서류( 薯 類 ) 중심 농업을 이룬 농경문화, 서아프리카의 니제르(Niger)강 상류에서 시작된 니그로이드(Negroid) 계 인종의 농경문화, 인디언계 인종의 서류와 잡곡을 중심으로 하는 신대륙에 기원 한 농경문화 등 4 개 지역이 제시되기도 합니다. 4 개 농경문화 발상지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지중해 농경문화로서 8,000년( 기원전 6,000 년경)전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발생하여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은 맥류 유채 완두 잠두 순무 등을 주로 재배했으며 소 면 양 산양 말 등을 가축화하여 농사와 목축을 겸한 혼합농업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유적을 연구한 발표에 의하면 중근동( 中 近 東 ) 의 티그리스 및 유프라 테스 강 유역으로부터 이란 고원과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 북부를 포함하는 이란 이 라크 시리아의 경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9,000년( 기원전 7,000 년경)전부터

27 비슷한 시기에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는 동남아시아 기원의 근재농경문화( 根 栽 農 耕 文 化 ) 로 바나나 얌(yarm) 타로(Taro) 사탕수수 등 영양번식작물이 초기재배의 주종이었고 돼지나 닭 등의 가축도 사육했 으며 바나나는 5000년( 기원전 3,000 년경)전 말레이시아에서 재배했다고 합니다. 셋째는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에 걸쳐 사바나(Savannah)를 잇는 지대에서 발생한 사 바나 농경문화로 7,000~5,0 00년( 기원전 5,000~3,000 년경)전부터 피 기장 조 수수 등 잡곡류와 두류 참깨 등을 재배했다는 주장입니다. 넷째는 신대륙 중남미로 카리브 해 연안에서는 카사바(cassava)를 멕시코에서는 고 구마, 그리고 안데스산맥의 높은 지대에서는 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옥수수 두류 호박 등도 재배했다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에서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부족으로 발전했으며 도시가 들어서게 된 것 은 10,000년( 기원전 8,000 년경) 전에서 4,000년( 기원전 2,000 년경)전까지의 사이에 이 루어 진 것으로 유추하고 있고 이러한 근동( 아나톨리아와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등 유 럽과 가까운 서아시아)지방이 발달하면서 서구문명이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므로 근동 지방이 현재 문명발전의 최초지역이라고 보는 것이며 초기 문명의 1 차 지역(pristine region)은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중남미, 중앙안데스 지역이라고 합니다. 농경의 시작은 버리고 간 곡식들이 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 식물을 재배하게 된 근원으로 보고 있으며 계획적으로 씨앗을 뿌려 재배하기 시작한 초기 농경은 피를 비롯한 몇 가지 밭곡식을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초기 농경 단계에서도 남자는 여전히 농사보다는 위험하고 힘든 사냥으로 살았을 것으로 판단되며 여자( 출산 양육 때문에 사냥을 할 수 없으며 어린새끼를 데리고 식물을 채집, 재배하는 생활의 시작)들이 사냥보다 쉽고 안전하게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농경생활로 정착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수렵이나 채취로 획득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위험하기도 하고 불규칙적이라 불안정 하지만 농사는 씨앗을 뿌리고 수확기가 되면 몇 배의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어 농업이 점점 발전하게 되고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갈이농사로 발전하자 농업에서 남자의 힘이 필요하므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농업에 종사하는 부계사회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시시대에는 나무와 짐승의 뼈 또는 돌도끼로 나무를 베어야 하고 뿌리를 뽑고 잡 초와 돌을 없애 땅을 고르고 흙을 부드럽게 해야 하는 힘든 노동을 통해 밭을 만들 었기 때문에 노동으로 만들어낸 농토를 떠나려 하지 않아 정착하게 된 것이며 점차 농토에 대해 점유를 주장하는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리가 집단으로 정착하여 공동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사냥을 한 짐승이나 농경으로 채취한 수확물은 개인이나 모계가족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 무리의 생존을 위한 공 동의 수확물로 인식했으며 사냥은 먼저 공격하여 위험하고 힘들게 사냥을 성공시킨 사람이나 농사에서 힘든 일을 맡은 사람에게는 공로가 있는 만큼 조금 더 분배받도 록 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농경이 시작될 즈음 사냥꾼들은 사냥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산짐승을 울타리에 가두었는데 울타리에 가둔 짐승들이 해가 바뀌면서 새끼를 낳거나 더욱 크고 토실 한 먹이로 자라는 것을 보고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하면서 가축만 전문적으로 키우 는 유목집단이 나타나게 되었고 유목집단생활 때문에 최초로 공동체와 공동체사이 에 분업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입니다. 사냥과 채취와 수렵은 공동체 생활에서 힘센 수컷과 임신으로 사냥에 참석할 수 없 는 암컷간의 성별 분업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으며 집단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28 기르는 생활이 정착되면서 육식을 즐기는 무리들은 농사를 짓는 노동보다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유목생활을 선택하면서 공동체를 접촉하며 물물교환을 발생시켰다 고 보고 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는 무리들은 초지가 풍부한 지역을 떠돌며 가축을 길렀기 때문에 고 기는 풍부했으나 식물과 양념들이 부족하므로 농사를 짓고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 는 무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면 가축과 곡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먹을거리를 획득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으므로 물물교환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농경사회 초기에는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화전 농업부터 시작하였다가 점차적으 로 동물의 사육( 목축)과 식물재배( 농경)로 발전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수렵채취시 대에는 부족했던 식량을 대량으로 수확하게 되면서 안전한 먹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 원 인류는 인구를 증가시키며 노동력도 확보했다고 봅니다. 삼림을 불태워 경작하는 농경방법은 지력을 감퇴시켜 매년 수확이 감소되고 수년 후에는 같은 식물이 자라지 않으므로 이동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화전( 火 田 ) 농 업을 일명 shifting cultivation( 이동 경작)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약탈농업이라고 부르 는 것은 토지의 영양분을 약탈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서양은 소규모 무리가 집단을 이룬 초기에 양을 사육하며 생활했다고 보고 있으며 가축을 먹이기 위해 좋은 목초를 찾아다니는 유랑농업( 流 浪 農 業 ) 을 하면서 토지가 있으면 농작물의 종자를 파종하고 유랑의 길을 떠났다 파종한 농작물을 수확할 무 렵 돌아와 그 작물을 획득하는 생활을 하고 지력이 소모되면 경작 장소를 옮기는 농사를 지었다는 주장입니다. ( 양이 인류최초로 사육한 가축이라 함) 인구가 늘어나고 유랑농업을 위한 토지가 불충분해 정착생활의 필요성이 생겨 정착 하면서 불가피하게 약탈농업이 시작되었고 한곳에 여러 해 같은 작물을 심으면 수 확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지력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토지의 일부분을 돌려가며 농 사를 짓는 삼포식( 三 圃 式 ) 농법이 발달하면서 생산량이 증가해 개인이 먹는 것 이상 의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밭농사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빗물로도 재배가 가능했으나 벼농사 같이 물이 많이 소요되는 농사들은 수량이 풍부한 평야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류는 강가에서 살 기 시작했으며 평야가 넓으므로 많은 집단들이 무리를 지어 평야에 모여 살게 되면 서 무리의 단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리끼리 부락을 형성하여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면서 집단공동체를 이루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풍부하여 수 천 년 동안 계급과 빈부 격차 가 없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았을 것입니다. 모계사회에서 함께 수 백 만년 동안 생활하던 습관대로 모든 행사는 무리끼리 모여 공동으로 논의하고 홍수로 피해를 입거나 사냥으로 부상을 입어 먹을 것이 부족한 무리와는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자연피해에 대처하기 위해 공동으로 제방을 쌓는 등 집단이 함께 노동하는 공동체생활을 수 천 년 동안 유지했다고 봅니다. 당시의 농사를 지었던 지역은 크게 3 곳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중동 중심(near east center 이란 이락 시리아 터키) 지방은 1만 년 전 밀을 재배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며, 중남미 중심지역에서는(central/south America center 옥수수, 고추, squah, bean, guards)흔적이 있고, 멕시코 고원지대와 페루의 고원지대에서는 옥수수, 고추, 감자 등을 재배했으며, 극동 중심(far east center 벼, peas, bean)지역에서는 주로 벼 같은 논( 습지)에서 자라는 작물을 재배한 흔적들이 발견된 유적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습 지는 유기물분해로 인해 고고학적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동지방은 북쪽으로는 구릉과 산맥 그리고 남쪽으로는 반 건조지역과 사막이 광활

29 하게 펼쳐져 있어 지리적으로 매우 다양하며 식물군( 식생, 植 生 ) 이 분포되어 있는 것 을 분석하면 환경지대를 8 개소로 나눌 수 있는데 해안평야(coastal plain s), 충적평야 (alluvial plains), 산록지대(piedmont), 반 건조고원지대(semiarid highland), 구릉과 계곡 (foothills and intermon tane valleys), 산악지대(mountain ranges), 저지대(depressions), 그리고 사막(deserts)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수컷들의 침략과 문명의 발달 목 록 집단농경사회를 이룬 초기도 모계사회를 유지했을 것이며 사냥으로 생활하던 수컷 무리들은 모계로 형성된 부락에는 항상 먹을 식량이 풍부하고 암컷들과 교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명을 살상하는 총 같은 것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힘이 센 자가 폭 력을 행사해 먹을 것을 빼앗고 여자를 겁간하는 생활이 수 없이 많은 세월동안 되 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없는 침략과 약탈로 피해를 입은 무리는 자신들이 고생해서 생산한 물질을 빼앗 기지 않기 위해 집단을 이루고 함께 대항하는 힘을 기르며 무력으로 자신들이 생산 한 먹을거리와 생활터전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침략과 약탈을 일삼으며 무력으로 학살하며 무리를 정복한 자들은 지배자가 되어 정착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무력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던 침략무리들이 처음으로 권력형성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컷들의 침략에 식량을 빼앗기던 암컷들은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정복자가 된 수컷들 중에 힘이 센 수컷의 씨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고 이런 과정들이 부계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힘이 센 아이도 태어났을 것이고 힘이 센 자들은 침략 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족을 장악하고 힘을 과시하므로 폭력이 횡횡하는 부족사회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성이나 양심은 없고 오직 힘이 센 자가 무리를 억압하고 복종시키는 환경이 오랜 기간 반복되면서 서열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서열이 높은 자의 아이는 어 려서부터 부모의 비호를 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성장했다고 봅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 무력으로 무리를 복종시키고 군림하는 힘과 싸움기술만 배우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보다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힘만이 절대 권력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 지금은 돈이 힘이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성장환경과 비교가능) 집단생활을 하면서 사냥을 하던 때 언어보다는 뜻이 전달되고 의미를 이해하는 언 어가 필요했을 것이며 공동이 같은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발달하면서 인류 실생활에 엄청난 비약적 발전을 가져오는 동기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남겨진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는 최초의 문자는 5,000년( 기원전 3,000 년경)전을 전후 해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고대인들은 음성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만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쥔 자들이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멀리 있는 사람에게도 의사를 전달하는 방 법은 없을까 궁리하면서 그림이나 매듭을 이용해 어떤 사물이나 의사를 전달하던 것이 사람들 사이에 일정한 약속이 되면서 문자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문자나 공식적인 기호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인 체계가 있어야 하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서로 합의되어야 하므로 수 백 만년 동 안 기호나 그림 또는 선화 등을 통해 간단히 소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기록하고

30 보전할 수 있는 문자가 생기므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게 됩니다. 문자의 기원으로는 이집트의 상형문자(Hieroglyph)와 중국의 갑골문자( 甲 骨 文 字 ) 그리 고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Cuneifor mscript)를 들 수 있는데 초기 형태 문자들은 모두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며 7,000년( 기원전 5000 년경)전 구석기 중기의 유적에 돌이나 뼈에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새긴 조각에서 문자의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자들이 점차 발전해 3,000년( 기원전 1,000 년경)전에는 선사인류문명이 사용 하던 그림문자 흔적이 발견된 것이며 초기의 그림문자는 단지 기억을 보조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사용된 것은 인류문명이 크게 발달한 중국,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마야 등의 문자라고 합니다. 약 3,500년 전 무렵에 그림문자를 더 간결하게 생략해서 만든 상형문자가 이집트 유적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시기별로 히에로글리프문자, 히에라티크문자, 데모 티크문자, 멜로에문자로 나누고 있으며 히에로글리프문자의 명칭은 성스럽게 조각 한 문자라는 뜻에서 성각문자( 聖 刻 文 字 ) 라고도 하며 히에로글리프문자는 처음에 표 의문자로 탄생하여 표음문자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날 이집트알파벳 24자가 되었다 는 것입니다. 현대문자의 시작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모여 단어와 단문이 되었다 발전하며 문 장을 나타내게 되었고 히에라티크문자는 이집트 성각문자의 약자라고 할 수 있는 히에로글리프문자로 보고 있으며 4,650년( 기원전 2,650 년경)전부터 시작하여 3,000 년( 기원전 1,000 년경)전까지 사용했다고 봅니다. 2,700년( 기원전 700 년경)전부터 1,600년( 기원후 400 년경)전 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 되는 히에라티크문자를 흘려 쓴 초서체라고 할 수 있는 데모티크문자는 사물( 事 物 ) 을 그려 그것과 관련 있는 의미를 나타낸 문자라 할 수 있는 상형문자로 중국의 초 기 한자( 漢 字 ) 와 고대이집트문자인데 고대 4대문명을 이룩한 무리들은 모두 독자적 인 상형문자를 발전시켰으며 비교적 오래된 것은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수메르 또는 엘람인의 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발견된 상형문자는 750개정도의 표현을 기본적인 체계로 만들었으며 오랜 기 간 동안 어떤 변형도 겪지 않고 사용됐다는 사실은 마지막 신전이었던 필레 사원이 폐쇄될 때까지 똑같은 상형문자를 사용한 것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이 문자들의 독 창성과 복잡성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대상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 그림문자" 로 이 문자들을 겹쳐 사용하면 추상적 인 개념도 표현할 수 있는데 풍뎅이나 말똥풍이 또는 태양 같은 상형문자가 그런 것이며 표의문자나 그림문자의 다른 단어에서 자음근이 생길지라도 표음문자를 변 형시켜 간단히 음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둘째는 " 표음문자" 로 같거나 다른 형태의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했으며 어떤 물체를 묘사하지 않고 하나의 자음이나 보다 더 많은 자음을 나타낸다는 것으로 표 음문자는 표의문자보다 늦게 생겨난 것으로 보며 글자마다 일정한 음가를 가지고 있어 발음을 규칙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 한정부호" 로 문맥 속에서 한 기호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지 적하는 것인지 알려주는 부호로 많은 고대이집트 단어들은 같은 기호를 가지고 있 었으나 완전히 다른 의미를 표현할 수 있었는데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 의 마지막에 " 한정사" 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하면서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 중기이집트" 또는" 고전기 이집트어" 는 중 왕국시대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 문법학

31 자들이 주로 연구하는 언어와 이집트 학의 계기가 된 상형문자도 이 시기에 속해 있으며 유명한[ 시누혜 이야기]도 중 왕국시대에 쓰여 졌다고 합니다. 1799년 나폴레옹 군의 한 장교에 의해 나일강 서쪽델타지역 리시드라는 마을에서 2,200년( 기원전 196 년)전 열두 살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멤 피스에 모인 사제들이 그리스어로 왕을 기리는 칙령을 만들어 돌에다 새긴 높이 약 117Cm, 너비 약 74Cm인 로제타석이 발견돼 고대에 사용하던 상용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어로 썼지만 민중문자와 상형문자로 된 번역이 함께 새겨져 있다함.) 문자의 발달은 단순한 그림문자인 상형문자에서 설형문자( 楔 形 文 字 쐐기문자cuneiform script)로 발전하고 설형문자는 그이전의 그림문자와 달리 구체적 사물뿐 아니라 동 작이나 추상적인 개념까지 표현할 수 있도록 예를 들면 발( 脚 ) 이란 단어는 발뿐 아 니라 서다와 간다. 또는 온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화살이란 말은 산다( 生 ) 와 ' 생명' 을 함께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대상이나 목적격개념이 없기 때문에 완벽한 문장이 되지는 못했지 만 마귀를 쫓는 주문( 呪 文 ) 과 집권자들이 권력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신격화하면 서 신과 신전을 찬양하는 글, 도시와 도시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서술하기도 하고 사회질서를 위한 칙령이나 법전 등을 나타낼 수 있었으며 ' 대홍수 이야기' 와 ' 길가 메시서사시'' 우르남무 법전' 등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수메르의 설형문자는 아카드인으로 이어지고 다시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들에게 전해져 고대오리엔트전역에 퍼지게 되었으며 인도유럽어계통인 히타이트어와 페르 시아어에도 전해져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 3천 년간 서아시아 지역의 공용어로 사용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을 원정할 때 크게 위축됐다가 약 1,900년( 서기 74 년)전 완전히 사라졌으나 19세기 중엽 유럽언어학자들에 의해 해독되면서 인류의 과거역사를 알 수 있게 됐다고 합 니다. 기록과 유적을 살펴보면 설형문자는 바빌로니아나 아시리아 등 셈계의 여러 민족들 과 비( 非 ) 셈계인 후르리 히타이트 페르시아에서도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마리문서 아 마르나문서)페르시아의 설형문자부터 자획( 字 畵 ) 이 줄어들고 자수도 37자로 정리되었 다가 시리아의 라스 샤므라에서 발견된 우가리트왕국의 설형문자시대에는 글자가 30 자로 줄었다가 현재의 완전한 알파벳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고대이집트 글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3,300년( 기원전 13 세기)전 19왕조 시대에 상형문자로 쓴 ( 사자( 死 者 ) 의 서( 書 ) Book of the Dead) 라는 글이 있으며 예언 이나 마법 또는 의술이나 약전( 藥 典 ) 그리고 요리, 천문, 시간의 측정 등을 다룬 지 리에 대한 글들도 기록으로 남아있고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으로 1년은 365일과 1/4 일으로 변화한다는 사실들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현재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의 체계를 이룰 수 있는 표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자음만 표기할 수 있게 만들어 사용하던 페니키아인들 문자로 이것이 그리스 로 전해져 자음문자의 몇 가지 글자와 모음문자( α, ε, η, ι, ο) 를 만들고 여기에 ν( 입 실론)과 ω( 오메가)를 추가하여 24자를 사용하다 후에 로마인들이 라틴계의 여러 언 어로 표기하면서 문자의 기초가 됐으며 로마시대 라틴문자는 23자였으나 중세에 I 에서 J가 분리되고 Y에서 U와 W가 분화하여 현재의 26 자가 됐다고 합니다. 라틴어계통 여러 언어의 대부분은 라틴문자알파벳을 다소 수정하고 보충한 것( 이탈 리아어는 21 자, 에스파냐어는 28 자)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형( 字 形 ) 은 중세에 이르러 그 전에 사용하던 글자의 대문자에 소문자를 추가하였고 16세기에 인쇄술의 발명과 함 께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의 안정된 원형을 갖췄다는 것입니다. ( 인류역사는 기록

32 을 남길 수 있는 시기를 역사시대라 하고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시대는 선사시대로 나누고 있으며 선사시대는 다시 구석기시대,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나누고 구석기시대는 다시 전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합니다.) 모두가 공동으로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탄생되도록 오랜 세월동안 인류 는 점차적으로 발전했으며 무력으로 부족을 침략하고 권력을 형성한 자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기를 나타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나타내고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전쟁을 일으키므로 사람들을 강제로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 이런 현상은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 잘 나타나고 있음) 침략자인 부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힘자랑 하는 자들끼리 싸우는 일이 비일 비재했을 것이기에 무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는 평화를 잃어버리고 폭력이 난무하는 혼란을 겪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누구나 부족장의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 러 공동체는 모두가 평등하게 논의하는 구조로 발전했다고 봅니다. 강요된 전쟁 때문에 죽기도 하고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은 부족민들이 거부하 는 현상도 있었을 것이고 혼자서 무력으로 강제로 복종시키려 하다가 무리를 지어 반발하는 세력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서로를 존중 하는 평등한 공동체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당시는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이 현대의 군인이나 경찰들처럼 혈세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농사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침략자인 부족장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의무도 없었을 것이고 폭력을 거부하며 반항하는 자들도 있었다고 봐 야 하므로 직접적으로 죽이고 죽는 전쟁에서도 명령체계와 복종이란 있을 수 없었 다고 봅니다. 서로가 존중하는 평등한 공동협동체가 되었지만 권력을 차지한 자들은 계속 전쟁을 하면서 패배한부족의 남자들을 포로로 삼아 농사일과 침략에 대비한 성을 짓거나 향락과 안락한 생활을 위한 궁전을 짓고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사상으로 길들이는 신전을 짓는 노동에 강제 동원하여 혹사했을 것이고 여자들은 전쟁에 참가했던 병 사들의 교접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노예 시대의 시작 목 록 문자가 발달하고 힘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을 과시하면서 수 천 년 동안이나 이웃부락을 침략해 곡식을 강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며 남자들을 노 예로 삼아 물질을 대신 생산해주는 노예가 생기자 전쟁에서 승리한 부족들은 노동 을 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을 착취하며 살기 시작했다고 판단됩니다. 이때 까지도 가족이란 개념은 없었을 것이며 남자가 여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면 받아 줬을 것이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관계를 가지면 임신이 되고 임신이 되면 노동을 할 수 없어 생계를 유지 못하니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관계를 요구하는 남성 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생활들이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반복되면서 여성들에게는 먹을 것이 넘쳐났을 것이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하는 섬세한 노동을 할 수 없어 여성에게 먹을 것을 제 공하지 않고 마음대로 관계를 가지며 섬세한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혼인 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필요에 의해 가족이라는 구성체를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처럼 일부일처제 가 아니라 귀족이나 힘이 있는 자들은 가족에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관계를 맺었을 것이고 이러한 일들은 한반도에서 있었던 왕들의 역사로도 확인되는 것이며 오늘날 기득권들의 생활 형태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동체 무리나 또는 집단이 종족 번식과 보존을 위해 공동으로

33 아이들을 양육하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소그룹인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먹는 것을 책임지고 생산 하는 씨족시대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당시는 힘이 약한 부족을 공격하면 언제든지 물질을 생산하고 수족처럼 부릴 수 있 는 노예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처럼 울타리에 가둬놓고 강제노동을 시켰으며 노예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모든 먹을 것을 생산하고 주인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성과 저택을 지었지만 노예들은 가축우리에 갇혀 먹는 것까지 제한 당했다고 합니다. 무력으로 침략해 점령한 부족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관리하면서 노예들이 생산하는 물질로 편안하게 호의호식하고 향락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자 힘이 생긴 자들 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힘이 없는 부족을 침략하게 된 것이고 이러 한 침략전쟁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어를 하거나 침략을 하기 위해 집단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훈련된 병사들을 필요했을 것이며 노예들을 잡아 올 수 있는 병사들이 훈련받을 시설은 노 예들의 강제노동으로 만들고 노예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이 필요해 졌기 때문 에 귀족과 평민이라는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게 됐다고 봅니다. 전쟁을 통해 힘을 과시하면서 권력을 만들어 편안하게 누릴 수 있게 되자 수많은 부족을 침략했을 것이며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많은 노예를 확보했지만 분배가 이 루어지지 않아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억압하기위한 수단으로 왕 국을 건설하고 강제로 통제하기 위해 규칙인 법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부족민들과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침략을 받아 살해되기도 하고 붙잡 혀와 혹독한 노예노동을 하게 된 것에 반발해 몰래 탈출을 기도하고 도망가기도 했 을 것이며 힘이 있는 자들은 저항하면서 내부에서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는 일들이 수도 없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6천 년 전 충적평야 주변에서 노예들을 동원해 소규모 관개농업( 인공적으로 물 관리 시설을 만들어 물을 공급 이용하는 농업방식.)을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농사를 짓는데 쟁기를 사용하기도 하고 또 바퀴가 달린 짐수레가 만들어지자 노예들을 가혹하게 혹사시키면서 무거운 돌을 날라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성을 쌓기도 한 것 입니다. ( 수메르와 마야, 황허문명, 아즈택, 잉카, 인더스, 메소포타니아, 이집트문명 등) 바퀴의 발달은 집을 짓기 위해 나무를 다듬다가 밟아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둥근 것은 굴러가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며 이런 경험 을 통해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때 물건 아래 둥근 나무들을 받치면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원리를 발견하고 수레바퀴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바퀴는 청동기 시대인 5,200년( 기원전 3200 년경)전 메소포타미 아 수메르족이 처음으로 발명하여 마차의 바퀴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A depiction of onager-drawn carts on the Sumerian "battle standard of Ur" (circa 3200 BC) 농사를 짓기 위해 수리시설을 고안하고 노예를 동원해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수로공 사로 수세식화장실을 만들고 목욕탕을 지었으며 먹을 것이 풍부하니 귀족들은 호화 생활을 누리지만 침략전쟁에 참여하고 피해까지 입은 병사들은 똑같은 호화생활을 누릴 수 없어 반발하기 시작했을 것이며 이런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불만들 이 폭발하게 되었을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문명 초기 침략전쟁에 승리한 부족들은 전리품을 부족의 공동소유로 공정하게 나누 어 불만이 없었을 것이나 훈련된 병사조직이 생기면서 병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명 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로 계급이 형성되고 귀족과 평민으로 나누어지면서 신분이

34 높은 자들이 전쟁승리의 전리품을 독식하므로 이에 불만은 표현하는 병사들이 늘어 났을 것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신분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을 독식하는 귀족들의 행위에 반발해 전쟁에 참여 했던 병사들은 자신이 잡은 포로는 자신의 노예라면서 몰래 붙잡아가기도 했을 것 이고 자신이 강탈한 물건은 자신의 것인데 전쟁도 하지 않은 귀족이 차지 하냐며 물건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여 내부분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도 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호화생활을 하던 귀족들이 더 이상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없 게 되자 규칙( 법률)도 만들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귀족의 후손이 반드시 엄청난 괴력과 흉악한 성격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후손만 태 어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약한 후손도 태어났을 것이고 무력을 거부하고 이성과 양 심을 찾으려는 후손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침략자가 되어 왕족이나 귀족을 칭하 던 자들이 대를 이어 권력을 물려주거나 자신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후손을 지키고 혈통을 보전하기 위해 규칙을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법( 규칙) 의 출현 목 록 지금까지 발견된 사실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법전은 4,000여년( 기원전 2100 년~ 기원전 2050 년 사이)전 점토판에 새겨진 우르남무법전( 法 典, Code of Ur-Nam mu)으로 최초에 니푸르에서 두 조각이 발견되어 1952년 샤무엘 크레이머에 의해 번역됐으며 추가로 우르에서 점토판이 발견되어 1965 년에 번역했다고 합니다. 내용은 " 고아는 부유한 이에게 보내지지 않으며 과부는 힘센 이에게 보내지지 않고 재산이 1쉐켈의 사람은 1 미나의 사람에게 보내지지 않았다. 는 등의 내용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절도한 사람은 사형되어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정에 서도 노예와 주인간의 차별을 두고 있으며 귀족들이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병사들 로부터 강탈한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조항들이 있을 뿐 공정하게 지켜야 한다거나 평등을 위한 규칙들이 아닌 것입니다. 법률적 강제규칙들은 프랑스 모르강(De Morgan)과 함께 1901 년 수사(Susa)에서 페 르시아 탐험대가 발견하기도 했는데 300년 후인 3,700년( 기원전 1,690 년경)전 바빌 로니아 왕국 함무라비 왕( 기원전 1724~1682 년 재위)이 즉위 38년에 높이 2.5m, 둘 레 1.8m의 상부에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장면을 부조한 탑이 발견된 것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성문법이라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총 3,000행으로 282조의 설형문자로 기록됐는데 특징은 사람의 권리를 3계급( 귀족 평민 노예)으로 나누어 신분에 따라 형 벌을 결정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단순한 사고에 의한 살인도 사형에 처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뺨을 때리면 손을 자르 도록 했으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내용 같지만 실상은 공공의 안녕과 모두가 평등하게 지키는 규칙을 정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과 천민 그리고 노예의 차이를 분 명하게 규정하므로 귀족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보장하고 권력을 행사하면 서 신체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내용으로 된 것입니다. 내용은 자유인의 눈을 뺀 자는 그 눈을 빼고 자유인의 뼈를 부러뜨린 자는 그 뼈를 부러뜨리며 천민의 눈을 빼거나 뼈를 부러뜨린 자는 은1마누의 형에 처하고 노예가 자유민의 뺨을 치면 그 귀를 자른다고 하는 규정들이 있습니다. 영주가 자유인이나 노예에게 땅의 경작을 명했는데 농사를 짓지 않아 땅이 못쓰게 되면 은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어 노예나 자유인은 귀족이 마음대로 노동 을 시킬 수 있었고 이를 거부하면 은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등 무력으로 침략하여 권력을 쥔 자들의 수탈행위를 정당화하는 규정들입니다

35 역사기록에 의하면 4,500( 기원전 2,500 년)년전 역사시대에 밀 재배면적의 6배나 많 은 보리를 재배했으나 역사시대의 후기로 오면서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토양 비옥도 가 낮아져 밀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으며 대추야자( 메소포타미아), 무화과( 고원지대), 올리브( 레반트 지역)등 과수재배를 시작했고 대추야자는 넓은 경작면적이 필요하지 않고 염류농도에 상당한 내성이 있어 전 지역으로 급속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00 년 전( 기원전 3,000 년경) 나일강 유역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과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수메르와 아카드에 도시부족과 도시연맹체가 존재했으며 이때부터 강력한 힘을 가진 군사통치자가 지배하는 국가가 탄생되기 시작했다는 것 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초기 농경에서 도시로 발전하는데 4천년이나 걸렸지만 이집트의 문 명발달은 약 2,50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걸었던 길과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발전했는데 농경촌락들을 부락단위로 편성시키 면서 성공적으로 농업기반을 마련하므로 신속하게 안정을 찾게 되었으며 교역과 관 개공사를 한 것들이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왕국을 건설한 자들은 가뭄과 폭풍우 그리고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것에 의해 많 은 피해를 입게 된 대중들에게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다는 거짓말로 백성들을 복 종시키고 다스리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신들을 탄생시켰으며 스스로를 무소불위의 신이라 자처하며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약탈을 목적으로 침략해서 사람을 학살하며 부족을 점령하고 왕국을 건설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다면 권력에 저항하게 되므로 복종심을 심어 통제 지배하기 위해 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은 신의 아들이라 자처하며 노예들 을 혹사하는 노동으로 신전을 지었고 자신들의 권위와 안전을 위해 성과 궁전을 짓 기 시작했습니다. 포로로 잡힌 노예들은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지배자들이 호화스럽게 누릴 수 있 도록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렀고 무거운 바위 돌을 날랐으며 조금이라도 게으름 을 피우거나 반항하면 맞아 죽었고 제대로 먹지 못해 힘든 노동을 하다 쓰러지면 가차 없이 채찍질을 당하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강제노역을 당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노예들이 속출하자 노예들의 원기를 북 돋운다며 마늘과 고추를 먹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 고추와 마늘을 먹인 기록은 스핑 크스와 피라미드 건설 때 기록되어 있음) 이렇게 건설돼 발달한 제국이 이집트와 마야문명으로 마야인들은 5,000년전( 기원전 3,000 년경)에 멕시코 남부 치아빠스주 고원지방에 살았고 3,500년( 기원전 1500 년경) 전 부터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2,800년( 기원전8 세기경)전에는 멕시코의 남부 지 방과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미의 여러 지역에서 까지 생활했다고 합니다. 2,500년전( 기원전 5 세기)에는 띠깔과 와학뚠을 중심으로 번성하기 시작해 1,700년 전( 기원후 300 년경)까지 엄청난 문화발전을 이루었고 중심도시는 과테말라북부에 있 는 엘뻬뗀으로 과테말라고원지방족인 끼체 민족과 더불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5,200년( 기원전 3,200 년)전 이집트 보다 통일국가의 출현이 약 60년이나 발전이 늦 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됐는데 수메르인들은 각지에 도시부족을 세우기 시작 했으며 중심엔 신전을 건설했고 정치나 생활은 신전을 중심으로 했으며 도시부족들 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초기인 4,350년( 기원전 2350 년경)전 셈족의 사르곤 1세가 통 일하여 아카드왕조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사르곤 1세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사들의 무력으로 도시부족들을 침 략하며 정복을 시작했고 정복한 도시부족들에 관료들을 임명하므로 집권의 틀을 갖

36 추고 자신을 스스로 했다는 것입니다. 키시(Kish)의 왕, 사계( ) 四 界 의 왕, 수메르 아카드의 왕 이라 칭 이런 칭호가 후일 메소포타미아지배자의 명칭이 되었으며 아카드인은 수메르도시부 족이 습득하고 있던 문자를 비롯해 신화( 神 話 ) 문학 기술 예술 등 수메르적 요소를 폭넓게 흡수하고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생활하므로 인종적으로 양자가 점점 융합하 여 바빌로니아세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수메르인은 4,050년( 기원전 2050 년경)전 막강해서 우르 제3왕조를 세웠으나 5왕조 107 년 만에 엘람인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이신 라르사 마리 바빌론 등의 여러 부 족들이 패권을 다투다가 아무루계( 系 )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가 3,700년 ( 기원전 1700 년경)전 이집트에 맞설 강력한 병사로 힘을 갖게 되므로 제국을 건설하 고 함무라비 법전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함무라비는 각 부족들이 우상화하던 신들의 계보를 통합해 바빌로니아문명을 부흥 시켰지만 이 무렵 이란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 목축으로 살던 히타이 트 후르리 카시트 등의 부족들이 말이나 전차( 戰 車 ) 를 이용해 농경지대를 침략해 약 탈하고 도발을 일삼아 강력했던 바빌론 제1왕조는 3,600년( 기원전 16 세기 후반)전 히타이트인에 의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4,000년( 기원전 2000 년경)전 이집트는 제12대 왕조를 세우고 강력한 병사들로 무력 을 행사하며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으나 3,700년( 기원전 1700 년경)전부터 셈계( 系 ) 의 유목민인 힉소스인이 서( 西 ) 아시아로부터 침입하므로 오리엔트는 혼란스러웠다는 것 입니다. 3,500~3,400년( 기원전 15~14 세기)전 이집트 왕인 아멘호테프3 세, 아나크톤4세는 아 시아 각국 왕 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히타이트 후르리( 미탄니) 아시리아 카시트( 카시) 와 힉소스 족을 추방하므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 나일강 중류의 텔 엘 아마르나 에서 발견된 360 통의 아카드어로 기록된 설형문자 점토판문서( 아마르나 문서) 는 이집트 왕 인 아멘호테프 3 세, 아나크톤 4 세와 아시아 각국 왕 사이에 교환된 공식서간( 公 式 書 簡 ) 으로 확인) 평화롭던 부족들을 침략해 정복자가 된 자들은 제국을 건설하고 왕이라 칭했으며 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자처했으므로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에 의해 별자리가 이 동하고 변화하는 시기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별자리의 이동을 기록하고 분석하다가 나일 강이 범람할 때는 일정한 위치에 시리우스( 큰개자리 α별) 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태양력( 태양 공전주기인 일을 12 달로 나눈 것)을 만들게 되는 등 천문지리가 발달할 수밖 에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태양력과는 달리 태음력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태음력 은 달의 운행만을 기준으로 삼아 달이 일 만에 보름달이 되었다가 그믐달 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1개월의 기준으로 삼아 활용하고 있으며 현재의 음력 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메르인들이 번성했던 3,700년( 기원전 1,700 전경)전 나일강변에 큰비가 내리면서 대홍수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비옥했던 농토들이 침수되고 농사를 지었던 많던 곡식들이 떠내려가는 비참한 상황이 발생하자 왕들은 신의 저주가 내렸다면서 신에게 제물을 받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받치 는 죽음의 제를 지내므로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주면서 복종시켰습니다. 많은 부족을 정복하여 제국으로 발전한 침략자들은 점령당한 부족에게 자신들이 믿 는 신을 모시는 신전( 페르시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2,447 년( 기원전 447~432 년) 전 익티 노스의 설계로 세워진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 아테네라는 여신을 위한신전) 도 노예노동으로

37 만든 것임)을 짓도록 하고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게 제를 지내게 함으로 복종하는 사 상으로 길들이고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부족을 침략해 정복한 자들은 패배한 종족의 기득권력 들에게 공물을 바치 는 식민지로 예속될 것을 강요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학살하고 남은 자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자신들이 저지른 흉악한 악행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순종시키기 위해 신을 자처하며 자신들은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고 세뇌하며 억압했습니다. 평화롭게 살던 부족들을 침략하여 점령한 자들이 점령부족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신 을 자청한 것이며 자신들의 악독한 행위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며 통제 지배 하기 위한 방법으로 부활을 주장하고 부활할 장소라며 노예들을 혹독하게 억압하며 수천 년간 신전과 자신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들며 권력을 유지한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이루었다는 이집트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금석병용 시대를 경유해 역사시대( 왕조시대)로 이행됐다는 것이며 구석기시대에는 자연경관( 自 然 景 觀 ) 이 왕조시대와 달랐는데 유럽 빙하기( 氷 河 期 ) 의 영향으로 우기( 雨 期 ) 와 건기 ( 乾 期 ) 현상이 주기적으로 나타났으며 당시 인류가 거주했던 지역은 하곡지대가 아니 라 서쪽방면의 대지( 臺 地 ) 였다고 합니다. 아슈르기( 期 ) 무스티에기 솔뤼트레기 등에 속하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나일 강에 형성된 단구( 段 丘 ) 위나 파이윰호수( 湖 ) 하르가 등의 오아시스주변 높은 지점에서 발 견되고 있으며 중기까지의 문화는 이집트 전토( 全 土 ) 에 걸쳐 동일한데 비해 후기에 는 지방마다 다르게 특색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파이윰 지방은 에피르발루아 문화, 하르가 오아시스의 아테리안 문화 등이 발굴되 었기 때문에 당시 북아프리카는 다우습윤( 多 雨 濕 潤 ) 에서 건조( 乾 燥 ) 로의 이행기( 移 行 期 ) 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약 7,000( 기원전 5000 년경)전 건조화가 진전되어 나일 강 수위( 水 位 ) 가 내려가 자연 환경이 현재와 비슷하게 됐을 때부터 사람들은 나일 강 하곡에 정착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점차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평화롭게 살 던 시기에서 이웃부족을 침략해 노예로 삼고 공물을 바치는 왕조시대가 형성됐다고 합니다. 신석기 후기 유적으론 카이로 서남 80km 에 있는 파이윰문화와 중부 이집트동안( 東 岸 ) 의 델 타사유적이 많이 발굴됐는데 이때까지도 사람들은 떠돌아다니는 수렵생활 을 한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른 흔적들도 나 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집트 상 하는 각각 다르게 발전된 것으로 보이며 발굴 된 유물로는 토기와 석기 그리고 골각아기( 骨 角 牙 器 ) 바구니세공[ 籠 細 工 ] 직물과 피 혁제품 팔레트( 화장접시) 꾸미개[ 裝 身 具 ] 등이 있습니다. 유물로 보면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자신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인 옷이나 신발 같은 물질들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침략자들이 왕조를 만들고 각 지 역에 분포되어 있던 수공업 작업에 익숙한 사람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고 야금( 冶 金 ) 이나 무기제조 또는 피혁이나 도기( 陶 器 ) 그리고 약기와 약품 등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노예들은 자신들을 혹독하게 억압하는 감독관과 지배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고기를 잡고 생필품인 주택과 신발 그리고 가구 또는 귀족들이 타고 다닐 마차와 귀족들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금광에서 목숨 걸고 생 산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남자노예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받고 게으름을 피우면 채찍을 맞으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이고 여자노예들은 음식을 만들고 귀족들이 입고

38 생활할 옷을 만들었으며 집안을 청소하고 식물을 채취하기도 했지만 유흥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금석병용기( 金 石 倂 用 期 ) 시대에는 상( 上 ) 이집트엔 바다리 유적이 하( 下 ) 이집트에선 메 림데 유적이 발굴되는데 바다리 유적은 고타( 敲 打 ) 에 의한 것으로 주조한 방법에 대 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최초의 구리제품과 현저히 발달된 토기가 발굴되었으 며 시나이 누비아산( 産 ) 공작석( 孔 雀 石 ) 이나 홍해산( 紅 海 産 ) 조개, 시리아산의 삼목재 등 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공물을 받았거나 강탈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탄생 목 록 3,300년( 기원전 1,200 년경)전 이집트왕국은 많은 종족들을 정복해 살았는데 특정종 족들의 자손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자 왕족( 기원전 년경) 들은 숫자가 많 은 종족은 전쟁나면 적들의 편에서 권력을 빼앗을 수 있다고 우려하며 태어나는 남 자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유아들을 살해하므로 종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고 권력을 유지하기도 했는 데 특정종족의 아이로 태어나 학살을 피해 강가에 숨겨졌던 모세( 본명 요김' 야훼께서 세우신 자' 라는 의미였으나' 모세' 라는 이름은 이집트 공주가 지었다 함)라는 사람이 이집 트공주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40세가 되던 해 같은 종족이 노예로 혹독하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해 노 예를 부리던 감독관인 이집트인을 살해한 후 동족들에게 함께 저항할 것을 호소했 으나 동조하는 사람들이 없어 혼자 외롭게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게 되었고 도망간 곳에서 유목민으로 생활하던 미디안족( 族 ) 사제( 司 祭 ) 인 이드로( 르의엘)의 딸 시뽀라 와 결혼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제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제사라는 신을 믿는 행위를 통해 사람들을 복종시키 고 모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모세는 80세 되던 해 이집트로 돌아와 권력을 잡은 자들이 신격화 하고 칭송했던 태양신과 헤라 신을 부정하고 자신은 하느님( 야 훼)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고 설파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엔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에 법률과 규칙에 얽매여 숫자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니 모든 관습과 법률의 속박에서 벗 어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혹독한 채찍질과 감시 감독 속에 억압받으며 지배자에게 필요한 모든 물질 을 생산하는 노예들과 전쟁에 참여하고도 강탈한 물질을 차지하지 못해 불만을 가 지고 있었던 병사들 그리고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족에게 굽실거리고 억압받으 며 살던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됐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모세는 이들과 함께 세력을 규합해서 힘을 기르고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에 대항해 싸워 이기므로 자신의 종족을 노예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종족을 해방시킨 모세는 여러 종족이 모여 살며 권력찬탈의 폭 력이 난무하는 이집트를 벗어나 자신의 종족끼리 평화롭게 거주할 비옥한 땅을 찾 아 유랑생활을 시작했으며 평소 자신이 주장했던 평등사상과 철학에 따라 힘을 가 졌지만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은 모세는 우상을 섬기는 신전을 만들지 말 것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으므로 사람을 제물로 바치거나 살아있는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제를 지내지 말라는 언약들을 구약과 율법으로 남겼다 는 것입니다

39 수많은 부족들을 침략하여 힘으로 왕국을 건설한 제국의 왕들은 힘만 있을 뿐 조직 을 관리할 수 있는 두뇌나 행정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부에서 폭정에 저항하는 사 람들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권력을 잡으려는 무리들도 있어 수많은 분열을 일 으키면서 호시탐탐 권력을 찬탈할 기회를 노렸습니다. 왕국을 건설하고 귀족생활에 젖어 살아온 자들은 다른 부족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 탈하려고 노력할 때는 강성한 힘이 있었지만 편안하고 안락한 귀족생활로 향락에 젖은 생활을 즐기면서 힘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힘은 점점 약해지고 무기력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힘이 있거나 덩치가 큰 자들은 성장하면서부터 약자를 괴롭히거나 물건을 강탈하며 살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단순하고 미련한 경우( 남의 물건을 강탈하기 위한 머리를 사용하는 자도 있지만)가 많지만 힘이 약하거나 덩치가 작 아 항상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괴롭힘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고심하며 살아가므로 두뇌회전이 빠른 경우 가 많다는 것입니다. 당시엔 거친 들판과 산야에서 목축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던 종족들은 사나운 맹수 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맹수들과 싸우면서 단련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이 무기를 준비하고 기마병으로 무장해 왕족들이 지배하지만 군사력이 없어 전 쟁능력을 상실한 변방을 수시로 침략해 양식과 부녀를 납치하는 수탈전쟁을 수없이 되풀이 하다가 왕국을 점령하기도 했기 때문에 힘으로 건설된 왕국들은 소멸되었다 가 탄생되었다가를 반복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마야제국은 1,700 년전~1,200년( 기원후 년)까지를 구 마야제국이라 하고 1, 200년 전부터 500년 전( 년)까지를 신 마야제국으로 부르고 있으며 신 마 야제국의 중심지는 유까딴 반도로 멕시코북부지역의 똘떼까 문화권과 교류하며 번 성했습니다. 기원후 5세기 전후에 번성했던 구 마야제국은 9세기 후기 북부지방에서 내려온 이 짜족과 도시연맹을 결성했지만 560년(1,450 년경)전 마야족과 이짜족 간에 전쟁이 발 생해 마야빤은 파괴되고 1563년에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마야제국의 흔 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야인은 농경에 의지하는 도시였음에도 사회신분제도로 차별이 엄격해 사제의 신 전이나 귀족의 궁전들을 높은 구릉 위에 요새같이 구축하고 이 구릉을 평민들이 사 는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다닥다닥 붙은 오두막이 도시를 뺑 둘러싸고 있으며 중간 계층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극히 소수의 지배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들로 나눠져 귀족들이 사제직을 맡았으며 귀 족은 폐쇄적이고 스스로를 알메헤노브라 불렀는데 그 의미는" 아비와 어미를 가진 자" 즉 혈통을 지니고 있는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난 교생활을 했고 가족은 침략으로 지배자가 되어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자들만이 형성 했을 것으로 추측됨) 마야나 잉카제국은 강력한 병사들이 있었으며 태양신을 섬겼고 왕은 스스로 태양신 의 아들이라 칭하며 신전과 제단을 만들었고 귀족계층, 일반평민, 노예계층으로 철 저하게 신분을 나누었으며 태양신에게는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받치는 의식을 진행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왕이 지명하는 사람을 제단위에 눕히고 마야는 살 아있는 남자가슴에 잉카는 여자가슴에 칼을 꽂아 살해하고 심장을 꺼내는 의식을

40 행하므로 대중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며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 이러 한 사실들은 당시 새긴 그림문자와 조각의 유물들로 확인되고 있음) 무력으로 왕국을 건설한 무리들의 통치수단인 종교의식 때문에 제물로 받쳐질 사람 들이 필요했으므로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며 침략하여 노예를 확보했 으며 확보된 노예들의 노동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고 신전들과 귀족들이 누리고 살 아갈 수 있는 건물들을 지었으며 신전의 제물로 받쳐졌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탄생 목 록 2,500년( 기원전 563~483? 년경)전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 ( 山 ) 기슭에 카필라성(Kapilavastu: 迦 毘 羅 城 ) 을 중심으로 샤키야족( 釋 迦 族 ) 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의 왕 슈도다나(Śuddhodāna: 淨 飯 王 ) 와 부인 마야(Māyā: 摩 耶 ) 사이에 싯다르 타(Siddhārtha: 悉 達 多 ) 고타마(Gautama: 瞿 曇 ) 라는 왕자가 태어났으나 생후 7일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이모에 의해 양육되면서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배우며 성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풍속이 결혼한 여성은 친정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남편에게 돌아와야 했기 때 문에 마야부인이 고향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서 싯다르타 고타마를 낳았다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아소카( 阿 育 王 ) 라는 왕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석가 모니가 탄생한 자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석주( 石 柱 ) 를 세웠는데 이것을 1896년에 발견하여 해독되므로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인도 역사는 50만년전 호모 에렉투스가 생활하던 시기부터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류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는 7만5천년전 타밀나두 지방에서 생활하기 시 작한 것으로 발굴되었고 5,300년( 기원전 약 3300 년경)전 무렵부터 3,300년( 기원전 1300 년경)전까지 고대 인더스 문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3,900년( 기원전 1900 년경)전 까지 이어진 청동기 시대 하라파 시기와 이후 철기 시대인 베다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베다 시대에 들어 힌두스탄 평원에 는 십육대국으로 불리는 고대 도시 국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십육대국의 하나인 마가다에는 2,600년( 기원전 6~5 세기)전 베다종교( 다양한 신)와 브 라만교( 힌두교의 원조)만 있던 인도에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와 불교의 창시 자인 싯다르타 고타마와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문((samana, 沙 門 ) 이란 노력하는 사 람 이라는 정도의 뜻)을 구성하고 후일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 순종이란 뜻)교가 탄생 했습니다. 아리안 족들은 강력한 군사력과 재빠른 기마병을 갖추고 있었으며 글자를 사용하였 기 때문에 힘이 약한 부족을 침략해 식민지를 넓혀갔으며 이들이 침략으로 정복한 부족에게는 베다종교를 믿게 하면서 4개로 구성되는 계급의 신분제도를 만들어 통 치했다 합니다. 인도의 신분제도를 카스트( 혈통을 뜻하는 포르투칼어 카스타(casta) 에서 유래한말)제도 라고 하는데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사람은 죽어 다시 태어나 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혈육을 물려받아 태어나면 부모의 계급과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원주민을 억압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던 4 계급제도를 신앙의 기원으로 하여 강요한 사상으로 현재까지도 통치 수단으로 유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카스트는 1. 신분과 직업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2. 태어나면서부터 지위를 세 습하고( 태어날 때 부모가 가지고 있던 신분의 세습) 3. 타고난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직 업을 선택할 수 없도록 할 뿐 아니라 4. 다른 신분과는 결혼을 금지하며 같은 계급

41 끼리 결혼하도록 강제하고 일상생활도 같은 신분끼리 어울리도록 규정됐습니다. 카스트의 계급구성과 특징을 살펴보면 최고신분은 성직자들인 브라만이라는 신분으 로 제사의식을 독점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며, 둘째계급은 귀족과 무사들로 정 치와 병사를 지휘하여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크샤트리아라 불리는 신분이 며, 셋째는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과 상인계급으로 바이 샤라는 신분이고, 마지막인 넷째 수드라계급은 노예로 위의 세 신분들에게 봉사해 야 하는 의무를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다고 합니다. 왕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의 지휘를 받아 통치해야 하는 정치체제를 갖춘 환경 속에서 성장한 싯다르타 고타마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 어나 당시 풍습에 따라 16 세에 부인인 야쇼다라( 耶 輸 陀 羅 ) 와 결혼했으며 아들 라훌 라( 羅 睺 羅 ) 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생후 7일 만에 모친이 죽은 사실과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것 등 인생의 철 학에 직면해 고뇌하다 29세 때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생로병사 와 고뇌가 생기는 근원을 파악하고자 고행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처음엔 출가자의 풍습에 따라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 苦 行 ) 에 전념해 신체가 해골처 럼 됐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 江 ) 을 건너 마가다국 ( 國 ) 왕사성( 王 舍 城 :Rājagha) 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스승들을 차례 로 찾아 무소유처정( 無 所 有 處 定 ) 비상비비상처정( 非 想 非 非 想 處 定 ) 이라는 선정( 禪 定 ) 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해 부다가야 부근의 산 림으로 들어가 6 년간 고행했으며 다시 보리수( 菩 提 樹 :Bodhi-tree) 아래에 자리 잡고 깊은 사색에 빠졌다가 정각( 正 覺 :abhisambodhi) 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의 내용<아함경( 阿 含 經 )> 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으나 사제( 四 諦 : 苦 集 滅 道 의 4 가지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 십이인연( 十 二 因 緣 ) 사선삼명( 四 禪 三 明 )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해 자연의 이치 즉 법( 法 :dharma) 칙을 깨달고 집필했는데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공포도 고 통도 나아가 애욕도 산란이 발생되지 않는 부동( 不 動 ) 의 마음( 내공)을 이루는 것을 깨달으면 번뇌와 속박에서 해방되고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 直 觀 ) 이 아 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 如 實 知 見 :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옳게 봄) 이라고 설파하여 성인으 로 추앙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상을 깨달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며 신이나 계급 으로 구분 짓고 차별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하고 다니자 하급신분으로 태어나 억압받고 노예로 생활하던 많은 사람들이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같이 모여 들게 되 었다고 합니다. 군중들이 모여들어 열망하므로 불교가 탄생된 것이며 불교가 많은 신도를 확보하고 강성해지자 카스트제도는 부정되고 성직자들의 권위가 약화되어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성직자들이 최고 권력인 성직을 회복하기 위해 종교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입니다. 이 전쟁에서 불교가 패하고 불교를 가르치던 승려들이 카스트를 신봉하는 성직자들 의 무력에 학살당하므로 불교는 인도에서 사멸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성직자들 이 권력을 잡아 신분제도를 부활시켰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釋 迦 牟 尼 )( 석가는 샤카( 샤키야,Sākya) 라는 민족의 명칭을 한자로 발음한 것이고 모니(muni) 는 성인이라는 의미라 함))는 석가문( 釋 迦 文 )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 能 仁 寂 默 ) 또는 보통 석존( 釋 尊 ) 부처님이라고도 하기도 하며 석가모니란 본래는 ' 석가족

42 ( 族 ) 또는 샤카족 출신의 성자' 라는 뜻으로 불교를 창시한 인도의 성자( 聖 者 ) 로 부처 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존, 석존, 세존, 석가,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 ( 佛 )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초기불교는 예배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굽타왕조 이후부터 권력을 잡은 자들이 불탑과 불상을 만들고 유신론적 신앙인 힌두교( 잡교와 밀교)와 같은 형태로 변질시 켜 석가 정신이 훼손되면서 지금의 종교형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슬람병사는 8세기 이후 북서인도까지 진출했다가 11세기에 다시 몇 왕조가 북부 인도에 들어와 아프가니스칸, 간다라, 캐시미르 등지에서 불교사상을 억압하고 12 세기 말엽-13세기에 걸쳐 불교사원을 침공해 불태우며 파괴하고 승려들을 살해하 거나 추방하므로 인도에서 불교는 사멸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출현 목 록 고대 로마( 라틴어: Roma antiqua)역사가들은 2,800년( 기원전 8 세기경)전 이탈리아의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일 때 에트루리아인들이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와 정착해 살았으며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마그나 그라이키아)지방에도 그리 스 인들이 넘어와 정착하고 살면서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들이 정착해 살던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형성됐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700년( 기원전 7 세기 무렵)전 비옥한 땅에서 농경사회를 이루어 평화롭고 풍족하게 살았던 티베리스 강( 현재의 테베레강) 하류의 라티움이라는 지역을 인도 유럽계 고대 이탈리아인에 속하는 라틴인과 사비누스인의 일부가 무력을 사용해 침략하면서 정 복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라티움을 무력으로 침략해 비옥한 땅에서 생산한 곡물을 강탈하므로 먹을 것이 풍 부해져 침략에 재미를 느낀 침략자들은 농사짓는 노동보다 전쟁으로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시키며 병사를 육성하고 무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시작했는데 침략무리를 이끌던 로물루스( 버려져 늑대에 의해 자랐다는 전설을 가진 Romulus와 Rem us 쌍둥이 형제)라는 사람이 2,700년( 기원전 753 즉위)전 왕이라 칭하면서 로마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사람을 학살하며 약탈행위로 빼앗은 재물로 더 많은 병사를 육성하여 이 탈리아를 통일한 자들은 정복한 지역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질서를 유지하는 법을 만들고( 라틴어: Ius Rom anum) 로마의 고대법( 古 代 法 ) 은 민족적 색채가 짙은 형식주 의이며 관습 위주( 主 ) 로 하다가 2,400 년( 기원전 449 년) 전 12 표법( 表 法 ) 을 축( 軸 ) 으로 하였 다.)계급으로 나누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초기부터 침략에 참여해 병사를 보유했으며 지휘능력을 발휘한 자들은 자칭 신의 자손이라는 3개의 귀족( 파트리키)계급들로 나누고 최 고위직인 집정관( 콘술), 침략지 역을 통치하는 총독( 사트라프), 고급관리인인 감찰관( 켄소르)이라는 직책으로 나누어 권력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침략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귀족에 소속되었으며 전쟁 중 타 부족이 저항하지 못 하도록 잔인하게 학살하는 병사들을 칭송하며 진급시키고 전리품으로 침략한 부족 의 여자들을 마음대로 겁간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노예로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하 므로 평민들은 병사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자랑으로 느끼고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병사를 많이 보유해 무력을 갖춘 자들은 전쟁으로 수많은 부족을 침략하고 사람을 학살하거나 포로로 포획했으며 붙잡힌 부족민은 노예가 되어 침략자와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길러야 했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거

43 리( 농사와 목축, 어로)와 생필품( 관제수공업)과 신전이나 귀족들이 거주할 궁전 또는 저택을 짓는 노동을 하면서 감시받고 갇혀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생필품 등 모든 물질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하 는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도구, 말을 알아듣고 할 줄 아는 도구로 분 류해 가축처럼 취급했으며 소유자는 노예의 생명을 뺏거나 양도 매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는 혹독한 감시와 통제 속에 어떠한 권리도 없이 주인에게 소유된 개인 재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 노예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부분적으로 재산을 모으면 자유를 살 수 있 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노예재산은 주인 것이라 있을 수 없고 미국 남북전쟁 전까지 도 흑인노예는 자유를 매수할 권리마저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유일한 탈출구는 노예끼리 뭉쳐서 착취에 저항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죽는 것뿐이었습니다. 침략 당하여 부족민이 죽고 거주할 땅과 가족을 잃어버린 부족의 노예도 아니고 정 주민도 아닌 도시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살기 위해 스스로 도시를 찾아 들어온 사람 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외국인이라고 불렸으며 생활은 노예보다 자유로웠지만 소속 이 명확하지 않아 언제든지 학살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람이 살지 않은 땅에 화전을 일구며 살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측 가능하 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귀족들이 차지하고 자기 땅이라며 유흥을 즐기기 위 해 사냥을 하면 쫓겨 다니며 살았을 것이고 생산하는 물질이 한정되어 부족했기 때 문에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하기도 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재산을 많이 보유했다는 표현이 있다고 화폐가 사용됐다는 주장이 있는데 화 폐가 유통되려면 힘든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화폐라는 종이쪽지나 동전이 언제든 지 유용한 물질로 교환될 수 있다는 대중적 합의가 있어야 하며 보편적이고 믿을 수 있도록 보장되는 체제를 갖추고 화폐를 제작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참 뒤까지인 그리스에서 병사와 관리( 관료)들에게 소금을 봉급으로 지불하고 소금 으로 노예를 사고 물질을 교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폐는 사용되지 않 았으며 물물교환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것입니다. 병사들의 무력으로 평화롭게 살던 부족을 침략해 정복하고 질서유지라며 모든 사람 들을 통제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지배직책을 모두 장악한 무리들은 자신이 거느 린 병사들을 동원해 더 많은 부족들을 침략하고 물질을 약탈하며 포로를 붙잡아 노 예로 부리면서 더욱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병사가 부족해지자 전공을 세운 자들은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일 정한 직책을 준다며 노예들을 병사로 동원했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는 병사들과 도 망가는 노예들이 늘어나 호화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침략에 성공한 귀족의 재산( 붙잡혀온 노예와 강탈한 재물)은 풍족했지만 전쟁에 참여 하지 못해 빈곤한 귀족들은 전쟁에 참여할 권리를 갖거나 재물을 분배받는 제도를 만들려고 해 권력다툼이 치열해 졌으며 침략하려고 병사들이 도시를 비운사이 주변 부족병사들의 침략까지 받으면서 점점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몰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왕만이 붉은색 옷과 신발을 사용할 수 있었고 색깔옷 감을 만드는 곳에 노예노동을 사용했으며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호화스럽고 웅장하 게 꾸민 거대한 마차를 타고 수많은 신하들과 생산노동은 하지 않고 왕의 시중만 드는 노예를 거느리고 거리를 행차하는 것을 즐겨 생산이 줄었습니다. 또한 권위를 내세우며 과시하기를 좋아했고 주지육림에 빠져 향락과 쾌락을 즐겼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고도 갖은 세금( 곡물과 생필품 등)이라는 명분으로 수탈당해 비 참하게 살아가던 병사들이 불평등과 수탈로 빈곤해지니 불만을 가지고 귀족에 대항

44 해 암살하기도 하는 등 끝없이 내란을 일으켜 쇠퇴하게 됩니다. 귀족을 자처한 자들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신화를 유포하고 신을 믿 을 것을 강요하며 대중들을 통제했으나 평민들은 석가모니( 불교 창시자)와 모세( 성경 속 인물)가 주장했던 평등사상과 2,500년( 기원전 469~470 년경)전 소크라테스(Σωκρά της)와 그 이전 철학자들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 고 주장한 사실을 깨우쳐 그들의 신을 부정하며 복종을 거부했다고 봅니다. 철학자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것들을 부정하며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고 만물은 어 디에서 유래하며 무엇으로 탄생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물들 의 다수성과 자연은 수학적으로 어떻게 기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봉착해 끝없이 고뇌하면서 발전시켜온 철학의 역할로 많은 평민들이 침략자들의 지배논리인 신화 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족으로 뭉친 평민들이 수없이 많은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므로 귀족들은 로마에 살고 있는 종족들 중 숫자가 많아 뭉쳐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30개의 부족대표 에게 권리를 줄 수밖에 없게 되어 투표에 참여하여 표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쿠 리아회(Comitia Curiata)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선출된 부족대표들은 평민들을 위해 유일하게 귀족들의 폭정과 횡포를 막아내는 역 할을 했으나 부족에서 대표권을 가진 자들은 귀족들처럼 누리고 살려고 공물을 늘 려 징수하며 챙겼기 때문에 평민들은 더욱 빈곤하게 됐습니다. 귀족들은 불만을 표출하는 평민들이 귀족들의 향락과 호화로운 생활에 저항정신을 갖지 않고 스포츠와 도박을 즐기며 병사들의 체력과 전투기술( 사람을 죽이는 일)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경기장을 만들어 흥미위주의 공연과 맹수사냥을 보여주면서 관 심을 돌리기 위해 격투를 벌이는 검투사경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귀족들을 호화로웠지만 평민들의 삶은 궁핍해져 반발하는 내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권력을 탐하는 귀족들은 호시탐탐 권좌를 노렸기 때문에 절대왕권이 상실되면서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만들어 귀족들의 의견을 수렵할 수밖에 없었으며 원로 원의 투표로 2대( 누마)부터 왕( 기원전 715~673 년)을 선출했다고 합니다. 투표로 왕을 선출했어도 귀족들끼리의 권력다툼이었고 선출된 왕(Rex)은 군사지휘 권과 공동체 문제에 전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재판관의 권한을 가졌으며 종교의 식을 집행하고 전시에는 귀족이라도 왕권(imperium)으로 신하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 단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절대권력 때문에 귀족 간 권력쟁탈을 위한 음모가 끊이지 않았는데 평민들까지 저 항하므로 귀족들에게만 인정하던 시민권을 재물을 가진 평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시민회(Populus Romanus)를 만들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시민회는 행정관의 임명이나 전쟁과 평화에 대해 추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지만 시민회의 결정사항은 300 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Senatus)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에 명분뿐이었다고 합니다. 다수의 불만을 저지하고 안정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이러한 정책은 놀고먹으며 누리고 사는 귀족이 확대되고 세금이 늘어나 평민들 불만이 더 많이 생겼으며 힘이 여러 종족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 빈부격차는 해소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 부족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켜 재물을 약탈하고 토지를 강탈해서 부를 축적시켜 줌으로 귀족들에게 만족을 주고 평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 에 더욱 수많은 부족을 침략해 영토를 확장하고 노예를 포획한 것입니다. 로마공화정으로 발전 목 록

45 이후 왕권은 3대왕 툴루스-호스틸리우스( 기원전 673~641 년), 4대왕 안쿠스-마르티 우스( 기원전 641~616 년), 양자로 왕이 됐으나 선왕의 친아들에게 살해당한 5대왕 타 르퀴니우스-프리스쿠스( 기원전 615~579 년), 선거 없이 원로원승인으로 왕이 됐다 딸 과 사위에게 살해당한 6대왕 세르비우스-툴리우스( 기원전 579~534 년), 장인을 살해 하고 민회선거나 원로원승인 없이 왕이 된 7대왕 타르퀴니우스( 기원전 534~509 년) 까지 왕정이었으며 침략전쟁을 거듭하며 무한하게 지역을 넓혔습니다. 침략으로 토지가 무한이 늘어나고 강탈한 물질이 넘쳐 귀족들 생활은 호화스러웠지 만 전쟁에 참여하느라 농사를 짓지 못해 궁핍해진 평민들이 내란을 일으켜 200년 이 넘도록 권좌를 누리던 로마 왕권 정치는 2,500년( 기원전 5 세기경)전 권력을 차지 하려는 귀족들이 평민들과 합세해 전쟁에서 돌아오는 에트루리아계왕을 축출하므로 왕정은 사라지고 과두 공화정(Res Public Roman)으로 넘어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공화정을 수립하자 원로원이 실권을 행사하는 정치기구가 되어 귀족들의 권한은 증 대됐지만 평민들의 권한은 없었으며 귀족계급에서 선출한 집정관(consul) 2명이 1년 의 임기동안 최고권인 군사 사법 종교 등의 국가권력을 1개월씩 돌아가며 집행할 수 있게 분산시키고 중임할 수 없게 했습니다. 선출된 집정관 두 사람에게 동등한 권한을 주므로 상호 견제하도록 했고 국가전쟁 시에는 한사람의 독재관(dictator) 에게 6개월간 절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하 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영토 확장과 이탈리아 내 다른 종족과 전쟁으로 평민들의 협력이 절대적 으로 필요한데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노동을 하지 못하거나 농사를 짓고도 납세로 빈곤해진 평민들은 정치적 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을 품고 무력봉기를 일으키므로 평 민에게도 점차적으로 평등한 권한을 내어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화제를 수립하면서 공포한 발레리우스(Valerius) 法 에 평민이 사형언도를 받으면 백 인 회에 상소할 수 있는 권리까지 보장했으나 2,500년( 기원전 494 년경)전 대외전쟁 을 위해 출정한 병사들이 전쟁을 거부하고 성산에 모여 요구조건을 내세우며 내전 을 준비하고 농성을 벌이므로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민회(Con ciliu m Plebis)를 창립하게 됐다고 합니다. 평민회에서 선출된 사람의 신분은 절대 보장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있고 행정관들의 어떤 행위든 금지하는 거부권(veto)을 행사할 수 있게 2 명의 호민관(tribunus)을 평민들에 의해 평민에서 선출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므로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긴 것 입니다. 그 후 호민관수는 4명으로 증가하고 10명까지 늘어났지만 호민관은 행정적 기능이 나 군사적 권한이 없고 매우 소극적으로 제한된 민권(potestas)을 갖고 있을 뿐이며 평민회는 호민관을 선출하고 평민전체에 관한 사항에 대한 입법권을 갖고 있었지만 평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이 뇌물을 받고 특정 무리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법을 표 결(plebiscita)하여 오히려 평민의 권리를 제약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400년(5 세기 후반( 기원전 417 년))전 평민의 권리를 확대하고 보장한다면서 푸블리 우스(Publilius) 法 으로 호민관이나 집정관에 의해 소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부족 회( Comitia Tributa)를 만들게 됐고 후일 법무관 직이 부활되면서 집정관의 직무 중 일 부를 부족회가 행사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부족회의 권한은 입법권은 없으나 백인 회 및 원로원에서 인준된 법안의 가부를 결 정할 수 있도록 권한이 확대됐다가 후일 쿠리아회는 종교적 기능으로 축소되고 백 인회의 권한도 점차 부족회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했습니다

46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병사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로 구성 됐고 병사들이 내란을 일으키면서 권리를 주장하므로 귀족들의 권익을 위주로 만들 었던 관습법은 점차 사라지고 5세기 중기에 이른 2,400년( 기원전 449 년)전 최초의 성문법인 12표 법을 만들게 됐지만 귀족들의 계급적 배타성과 우월감은 12표 법에 도 그대로 방영됐다고 합니다. 제10표 및 11 표에는 귀족 평민간의 통혼이 금지되는 조항들을 존치시키고 있어 평 민들이 계속 저항하자 2,300년( 기원전367 년)전 리키니우스- 섹티우스法 을 공포하면서 법적으로 권리를 보장하고 평민에도 권력 직인 집정관 1명이 선출될 수 있게 됐으 며 귀족들의 토지독점을 금지하고 평민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법률에도 각 시민의 토지소유는 500 유게라(jugera)로 한정한다고 규정됐기 때문에 평민들이 계속 불만을 나타내며 저항하므로 2,300년( 기원전 300 년) 전 마침내 오굴니아 법이 만들어지면서 평민에게도 신관직( 제사장)과 동시에 공직취 임권도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2,300년( 기원전 287 년)전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에 의해 부족회의에서 결의 하는 법안들이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발효할 수 있게 되므로 평민들의 국정참여는 법적으로 최대한 인정받게 됐지만 평민의 평등은 법적 관념상에 불과했고 사실상 귀족들과 재산을 많이 가진 자들의 공직점유 현상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원로원은 재산이 없는 평민들이 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방해하기 위해 관직복무를 무보수 명예직으로 만들어 재산을 보유한자들이 관직을 매점매석하고 권력을 강화 하자 관직에 당선된 평민들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동경의 대상인 귀족들처 럼 생활하기 위해 재산을 모으는 곳에 권력을 사용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 에 없었다고 합니다. 권력을 차지한 자들은 열주( 列 柱 ) 정원과 식당 침실 도서실 휴게실 주방이 붙은 대저 택을 짓고 수많은 은기( 銀 器 ) 를 사용하면서 매일 호화로운 연회를 열며 동방에서 들 여온 조상( 彫 象 ) 회화( 繪 畵 ) 등 많은 미술품을 장식하고 뽐내면서 노예들에게 문지기 를 시키고 전차경기나 노예끼리 서로 죽이는 검투사(gladiator) 경기를 즐기며 쾌락 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이런 문화는 상류층들은 정신적 육체적인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속주나 총독 그 밖의 관직에 당선되려면 평민들의 환심을 사야 했기 때문 에 무료배급을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귀족들은 소수 노예관리자만 부려도 엄청난 재화가 불어나므로 여가와 시간을 즐겁 게 보낼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하며 옷을 갈아입거나 밥을 먹는 것까지 노예들에게 수발을 들게 했고 매 끼니마다 온갖 산해진미를 차리고 자신이 먹던 음식은 미천한 것들은 먹을 수 없다며 버리게 했다고 합니다. 사인교와 팔인교라는 가마를 만들어 노예들이 매고 다니도록 하며 자신의 발로 땅 을 밟는 것조차 수치로 알고 살았지만 병사로 전쟁에 참여하고도 부를 축적하지 못 한 평민들은 작은 1 室 家 (atriun) 저택에서 귀족들과는 엄청나게 차이 있는 생활을 했 으므로 자연스럽게 불만이 쌓이고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단체로 무력을 형성하고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내란밖에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강탈해도 나누면 부자가 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모 두가 풍족하면 특권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만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며 철저하게 권력을 지키고 재산을 불릴 수 있는 방안들을 연구하며 평민들이 권리를 요구하면 병사들의 무력을 동원해 잔인하게 진압했다고 합니다

47 귀족들은 재물과 권력을 지키려고 평민들의 요구를 잔혹하게 억압하다 살해되기도 했고 평민들 중 소수가 권리를 요구하면 귀족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의 무력으 로 억압하고 학살하므로 부족끼리 집단으로 뭉쳐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서 집단저항 을 시작한 것입니다. 관직의 단계는 집정관직을 거쳐야 원로원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고 총독은 침략당 해 공물을 바쳐야 하는 점령국의 속주들을 수탈해 부유해질 수 있었지만 소농 출신 병사들은 전쟁으로 오래 고향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하면서 포에니전쟁( 기원전3세기-2 세기 중엽)( 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탈하여 차지하려는 전쟁)을 치르고 빈부격차는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잡혀온 노예와 점령한 부족의 땅을 차지하며 재산이 늘어나자 대농장을 만들어 누렸고 병사를 지휘하는 계급은 강탈한 재물로 재산은 늘릴 수 있었지만 원 로원이 병사계급의 정치 발언권 확대를 방해하고 정쟁을 일삼으며 토지개혁을 거부 하므로 개정된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에 의해서도 신분을 상승하는 원로원에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점령국이 늘어난 로마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배불균등으로 빈부격차가 발생된 것인데 포에니전쟁을 치르느라 논밭을 짓밟아 농지가 황폐해지면서 중소농 이 몰락하자 귀족들은 중소농과 전쟁으로 점령한 부족의 토지를 차지하고 시실리 섬 병합 후 속주들에게 공납으로 곡물을 바치게 하며 반도 내 농민들에게는 곡물보 다 과수재배를 권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량된 농경법을 만들었으며 많은 포로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귀족 들은 1,800년(200년전) 까지 대농장(Latifundia)을 만들면서 로마 초기사회의 핵심을 이루던 자유 신분의 중 소농은 사라지고 토지도 없으며 부채에 허덕이는 빈민층이 생겨나고 평민들은 소작인(colonus)이나 노예로 몰락했다는 것입니다. 침략을 성공하면서 계속 노예가 늘어나 노동력이 풍부해지고 침략한 부족들의 비옥 한 토지를 점령한 귀족들은 대농장을 만들어 노예가 노예를 감시하고 통제 관리하 도록 노예관리자를 두기 시작했으며 노예관리자들이 수확량을 기록할 수 있게 글을 가르치고 노예를 혹독하게 부리도록 강요했다고 합니다. 글을 알게 된 노예관리자들은 자신이 동족을 억압하며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찾아 달아나기도 했으며 혹독한 착취노동행위에 저항하는 노 예들에 의해 귀족대신 살해당하기도 하면서 무력으로 참혹하게 노예를 관리하고 통 제하는 노예관리자들이 탄생됐다고 합니다. 빈부격차가 극심해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끝없이 내란을 일으키자 2,100년 ( 기원전 년) 전 재무관( 기원전133)과 호민관( 기원전137)을 역임한 티베리우스 그라쿠 스(Tiberius Gracchus, 기원전 년) 가 개혁을 추진했으며 반대하는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Marcus Octavius)를 물러나게 하고 부족 회를 통해 개혁안을 강경책으로 통과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라쿠스가 만든 개혁법은 페르가몬왕 아탈로스 3 세의 유토( 遺 土 ) 와 귀족이 점유한 일정량 이상의 공지( 公 地 ) 를 로마에 반환하도록 하고 토지 없는 농민과 시민들에게 분배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제도 개혁을 거부하는 원로원이 반대하면서 원로원결의의 권한으로 시민들 의 권리를 일시 정지시키고 동조하는 평민 3,250명 이상을 학살하며 자신들의 기득 권이 침해당하면 병사들을 동원해 평민들의 권리주장을 무력으로 억압한다는 본보 기를 보였다고 합니다. 저항의 내란으로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늘었지만 여전히 선출될

48 수 있는 평민은 소수에 불과했고 소수는 관직에 올라 귀족들이 나누어 갖던 재물 중 일부를 나누는 위치에 올랐으나 기왕에 물려받은 토지와 재산을 보유한 귀족들 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습니다. 선출된 자들은 귀족들이 누리는 호화롭고 쾌락적인 생활을 동경해 재물을 긁어모으 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평민들 위에 군림하며 수탈하고 폭력을 휘둘러도 임 기가 보장돼 임기동안은 관직에서 쫓아 낼 수 없었고 평민들은 투표하고 선출할 수 있는 권리만 있었을 뿐 관직에 선출된 자들을 제재하거나 횡포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내란이 끝없이 반복됐습니다. 초기 원로원은 임금에게 정책적 조언을 ' 권고' 하는 직책이었으나 한니발이 침공한 제2차 포에니전쟁( 기원전 218 년~202 년) 때 공화정의 의사결정 구조로는 긴급히 발생 된 전쟁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어 원로원에게 임시적으로 원로원 비상결의를 사 용할 수 있게 하자 각종 조치들을 재빠르게 취해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 내면서 원로원이 최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원로원 비상결의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했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 (Gaius Gracchus, 기원전 ) 는 원로원을 배제하고 형보다 더 과격한 개혁을 추 진하면서 티베리우스의 토지 법안을 다시 부활시켜 토지분할위원회에 사법권까지 행사하도록 하다가 두 형제는 모두 원로원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원로원은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출신 폭력배를 동원해 유권자를 협박하며 공포분 위기를 조성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기위해 온갖 협잡으로 모함하고 음모를 꾸미며 폭력을 행사하므로 권력이 부유층과 귀족계급에게 장악됐습니다. 2,100년( 기원전 110~105 년)전 동맹국에 로마시민권을 부여하라는 요구가 거부되자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프랑스의 갈리아, 소아시아에서 계속해서 내란이 발생했으며 2,100년( 기원전 91~88 년)전 폰투스(Pontus)왕이 로마 총독의 악정과 징세청부업자들 의 횡포로 감정이 악화된 민심을 이용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평민들은 내란을 일으키고 접경 부족들이 침략하므로 저항을 잠재우고 침략을 막기 위해 시민권한을 확대할 수밖에 없어 국가권력 대부분을 원로원에서 부족회로 이양 하고 라틴족과 이탈리아 족에게까지 시민권을 인정하게 됐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내란과 침략을 무력으로 억압하려면 1인이 강력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 도록 해야 한다며 반발해 공화정이 무너지고 일인지배의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 는 독재 관을 선출하게 됐습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157 86) 는 집정관으로 선출된( 기원전107) 후 토지 없 는 시민을 의용병으로 정규군에 편입하고 제대하면 군 지휘관이 토지를 분배해주며 소유할 수 있도록 군제개혁을 실시하므로 병사들이 군 지휘관에게 재물이나 토지의 분배를 기대하고 복종하여 군 지휘관의 권력이 막강해졌으며 병사들의 무력을 바탕 으로 북아프리카 및 게르마니아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것입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마리우스가 권력을 잡자 원로원은 귀족을 옹호하며 병사를 통제하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138 78) 에게 동방원정을 명하면서 귀족 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는데 부족회가 마리우스를 지휘관으로 추천하고 제지하므로 두 기관이 서로 최고 권력을 주장하며 충돌해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는 시발점이 됐 다고 합니다. 이 결과 첫 번째의 내란은 원로원과 술라가 거느리고 있는 귀족들의 병사가 승리를 거둬 술라는 원로원에 의해 무기한의 독재 관으로 임명됐고( 기원전82) 귀족세력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로원 수를 600명으로 증가시켜 권한을 증대하는 반면 호 민관과 부족회의 권한을 크게 삭감하고 권력을 전유했다는 것입니다

49 이렇게 조치를 취한 술라는 자신의 업적이 항구적으로 수립됐다면서 정계에서 은퇴 ( 기원전79)하자 귀족들이 파벌싸움을 일으키며 야망을 위한 反 술라 폭동이 전 이탈 리아 반도에 파급되고 정국이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폼페이우스(Gaeus Pompeius, Magnus, 기원전 ) 는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 한 공로를 주장하며 평민에 접근하여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 기원전70 년) 됐는데 선출되자 평민을 기망하고 귀족의 입장을 옹호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쿠스 저항 목 록 폼페이우스가 진압했다는 반란은 유명한 노예들의 반란으로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 아에서 출생했는데 "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며 법률과 관습 또는 규칙으로 억압하거 나 억압당하며 얽매여 사는 것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모세가 주장했던 평등사상이 담긴 율법서를 읽고 율법학자나 철학자들의 설법을 들으며 자유롭게 살 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포에니전쟁 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자 침략을 거부하고 자기부족 병사들을 이끌고 반대편으로 갔는데 전쟁에서 패한 로마군병사들이 스파르타쿠스 탓에 패했다며 트라키아를 침 공하여 부족민들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때 잡힌 사람입니다. 노예는 (Statius)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 의미는 ' 서서 기다리는 자' 로서 하루 종일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 살아있는 도구' 라고 표현했을 정도 로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광산에서 혹독한 노동을 하다 목숨을 잃고 농장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농사 와 가축을 기르거나 각종 신발과 옷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숙련노예와 저택에서 정 원사, 가정부, 유모 평민들의 오락과 도박을 위한 검투사 노예로 주인들의 부를 축 적시키고 안락한 생활을 위한 일을 하며 성욕을 채워주는 대상이었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살해하며 물질을 빼앗는 침략을 통해 점령한 자들은 권력을 누리고 패배자들은 침략자들에게 억압받고 통제당하며 지배받기 때문에 용맹하고 강력한 사람을 흠모하는데 적들에게 가족과 부족민을 살해당하고 잡혀온 스파르타쿠스는 분노에 차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젊고 병사들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스파르타쿠스는 미항 나폴리 북쪽 2마일 지점에 있는 카푸아에 살던 렌툴루스 바티아테스라는 사람의 검투노예가 되어 가혹한 훈련 을 받으며 경기에서 동료를 살해하거나 맹수들과 싸웠다고 합니다. 저녁이면 안주인들의 성적노리개가 되어 주인이 던져주는 더러운 음식을 먹으며 생 활하는 비참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동료노예 70명과 탈출( 기원전 73 년)해 베수비우 스 화산근처에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검투사노예들이 탈출해 거점을 마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망노예들과 빈민들이 모여들었고 마리우스가 포로로 잡아왔던 킴브리아 족과 튜톤족, 쓰라키아인 등 고 도의 검투사훈련을 받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출신병사들도 합류했다고 합니다. 많은 숫자가 모이니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남부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갈 리아에 인접한 포강근처까지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침략 자들처럼 신분에 차별을 두거나 억압과 착취를 위한 특권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모 두가 평등하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로마병사들이 계속 침략하므로 로마군의 추격을 피해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가려고 항구까지 갔으나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출신병사들은 친족들이 모두 살해당한 고향으

50 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흩어지지 말고 로마에서 살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고도로 훈련받은 검투사들로 뭉친 이들은 추격자 정무관 클로디우스, 바리누스와 후일 집정관이 된 렌툴루스가 이끄는 로마병사들을 세 차례나 연패시키며 다시 남 부이탈리아로 돌아갔다가 레기움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지휘한 병사들에 의 해 루카니아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전사( 기원전 71 년)하고 6,000여명이 체포되어 아피 아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 됐다고 합니다. 크라수스가 "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 고 묻자 6,000명이 모두 자신이 스파르타쿠스 라고 주장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존경하는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이 사건 후 기 득권들은 노예 한명이 주인을 살해하면 그 가정에 있는 노예가 수백 명일지라도 전 원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선포했습니다. 법률이란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 평등한 규칙이 아니라 이렇게 침략과 학살로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이 자신들의 억압과 권위적인 명령 등 폭정에 저항하지 못하 게 억압하며 부를 지키고 신변을 보장하려 기득끼리 마음대로 만들고 기득권들이 판결하며 혈세로 살며 무력을 행사하는 병사들이 대행으로 집행하는 것입니다. 술라시대의 제도를 개정하고 민권을 확대하는 한편 지중해의 해적을 토벌하고 소아 시아를 정복해 파르타아를 통치한 크라수스가 전사하고( 기원전53) 마리우스의 조카 인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 가 평민들과 합세해 서방 및 갈리아지방을 장악하며 라인 강 근처와 브리타니아( 켈트족이 사는 영국)까지 로마세력으로 확장하 고 이때 경험을 갈리아 戰 記 (De Bello Gallico)라는 책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지금의 영국)를 점령하기 위해 기원전 55년과 54년 거대한 전함으로 노예들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노를 젓게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막강한 해 상력을 행사하며 로마병사들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세력을 확장하고 원로원권력을 축소하자 동방 및 이집트를 세력 하에 둔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시기하며 원로원과 결탁하고 카이 사르를 암살하려하다가 실패해서 로마가 양분되는 계기가 됐으며 카이사르는 평민 들로 구성된 민의회의지지 아래 제1 차 삼두정치 시대를 열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는 전쟁에 참여했던 장군들이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권력을 찬탈하는 일이 많아 귀족들은 언제 누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을 뺏을지 몰라 불안 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병사들을 로마밖에 주둔시키거나 해체하고 장군 혼자 로마로 입성하도록 했습니다. 병사를 지휘하는 전쟁밖에 몰랐던 카이사르는 혼자 입성하면 귀족들의 시기와 음모 로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유명한 "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며 병사들과 입성해 권력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자 수탈이 심해 평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으며 자신을 죽이려던 원로원을 배척하고 동방과 서방에 있는 2명의 장군들과 로마에서 병사가 많아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 이렇게 3 명이 권력을 행사하는 삼두 정치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로마문화가 유럽화가 되는 계기가 됐고 갈리아를 통치한 기간이 종결( 기원전50)됐는데 원로원의 권력 강화를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폼페이우 스에 맞서 2,150년( 기원전 49 년) 루비콘(Rubincon)강을 건너며 로마로 진격해 로마 공화정 말기 두 번째 내란을 일으키자 폼페이우스는 에피루스(Epirus)로 도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부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왕실 피가 다른 피와 섞이는 것을 막 기 위해 만든 라지드법에 의해 남동생과 혼인하고 함께 권력을 잡은 클레오파트라 가 있었으며 폼페이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로

51 도망갔는데 카이사르의 군대가 쫓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폼페이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암살했다고 합니다. 폼페이우스를 잡으러간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5세와 클레 오파트라를 여왕으로 옹립하며 이집트를 로마세력아래 굴복시키고 클레오파트라와 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뜻)과 개선하여 10년 임기의 독 재관(dictator) 에 취임( 기원전45)됐으며 그 후 최고제사장(pontifex maximus)을 겸하는 종신집정관이 되므로 전 로마군의 지휘권 국고처리권을 장악하여 임페라토르(impera tor)란 칭호를 얻고 금화에 얼굴을 새겼다는 것입니다. 독재관은 투표로 선출하는 직책이고 임기는 6개월로 규정되었으나 병사들의 무력으 로 권력은 잡은 자들은 종신독재관의 지위를 가질 수도 있었으며 금화가 발행되고 얼굴이 새겨졌다고 해서 현재처럼 물질을 교환하는 시장이 존재하고 유통되었을 것 이라 곡해하기도 하는데 당시 귀족들은 번쩍이는 귀금속을 즐겨 착용했습니다. 금화의 용도는 시장에서 물질을 교환하는 화폐가 아니라 권력과 가까운 귀족이라는 신분을 표시하는 징표였으며 귀족들 사이에 누가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고 있느냐 는 부의 척도를 과시하며 노예를 사고팔 수 있는 것이었을 뿐 화폐로 물질을 사고 팔거나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물물을 교환하는 시장이 존재 했던 것으로 봅니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목 록 클레오파트라는 어려서부터 방대한 양의 책을 읽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식을 갖 고 있었으며 천부적인 말솜씨로 수많은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 는데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 의 지혜와 미모를 이용해 유혹하려고 바닥에 까는 양탄자에 자신의 나신을 돌돌 말 아 방에 들어가 펼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결혼한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면서 그를 지지하 는 세력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자 도망했던 클레오파트라( 당시 21 세)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내려온 로마 장군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암살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를 옹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권력을 위해 카이사르( 당시 52 세)를 유혹하여 이집 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한편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남동생을 무찌를 병사도 지원 받아 왕좌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국이었던 이집트여왕( 기원전 51-30)인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인 카이사르가 닦아 놓은 발판을 딛고 아들 카이사리온을 로마의 황제로 만들 고 이집트와 로마 전체를 통치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당한 후 자신과 아들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고 로 마권력은 안토니우스파와 옥타비아누스파로 양분되어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카이사르를 따라다니며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는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 여 유혹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를 경험으로 영웅의 정부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클 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정식결혼을 요구하고 태어날 아이들의 후계 권을 보 장받자 로마에 선전포고( 기원전 32 년)를 해 전쟁이 벌어집니다. 악티움(Actium)해전( 기원전 31 년)에서 이집트 군이 아그리파에게 패하자 안토니우스 는 배안에서 자살하고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름다운 옷과 온갖 보석 으로 치장한 후 꽃 속에 누워 독뱀을 풀고 가슴을 물려 자살( 기원전 30년 8월10 일)했 다고 기록됐습니다. 카이사르는 귀족들의 평민수탈과 억압을 금지하고 원로원으로 집중된 권력을 분산

52 시키려고 막강한 독재체제를 구축했는데 공화제의 전통을 수호하려 맹렬히 반대하 는 공화론 자들에 맞서다 2,050년( 기원전 44년 3월15 일) 폼페이우스극장 안에서 브 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가 지휘하는 암살범들에게 살해( 이것이 시저의 " 브 루투스 너마져도" 라는 유명한 연극임)됐다는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암살로 로마공화제의 전통이 유지되는 듯 했지만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 4 년~146 년, 118 년간의 전쟁) 후 만연된 로마사회의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해소될 수 없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영토팽창은 정지되고 귀족들 간 정치권력 투쟁과 평민들 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내란이 끊이지 않아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 帝 政 ) 으로 전환 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카이사르 암살 후 평민들이 내란을 일으켜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이 약화되자 귀족들 이 질서를 유지한다며 제2차 삼두정치 기틀이 되는 국가질서재건위원회( 기원전 43 년)를 구성하고 5년 임기로 3인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편제하고 카이사르의 조 카이자 양자인 안토니우스와 병사를 보유한 장군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 간 을 선출하지만 평민들의 권리와 재산분배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2차 3두 정치로 전환해도 내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7차례의 내전을 무력으로 진 압한 옥타비아누스는 2,030년( 기원전29 년)전 원로원의 제1인자가 되어 막강한 권력 을 행사하며 공화제국가로 회귀( 기원전27 년)시켰습니다. 그러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하며 호민관직권, 프로콘 술명령권 등 관직에 부수하는 여러 권한 권능을 한 몸에 집중시키고 종신토록 행사 하도록 했으며 총독의 권한이던 속주( 屬 州 ) 의 통치권까지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며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 나 바루스의 게르만원정(8 년)때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진격도중 역습을 당하여 2만의 정예군단을 잃고 패퇴하므로 로마의 북국경이 확정됐으며 이시기 로마는 고 대에서 고전시대로 변화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를 원수정치( 元 首 政 治 ) 라 칭하며 아우구스투스가 종신토록 절대적 독재 권력을 행사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자 억압에 짓눌린 평민들이 정치참여권과 평등 권 리를 요구하며 내란을 일으키니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노예와 아녀자를 제외한 각 부족민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게 되었으며 투표인수를 확인하기 위해 호구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목 록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이때 베들레헴에서 인지 나사렛에 서 인지 호적을 등록하러 갔다 마구간에서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 사이에 예 수라는 사람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당시 시리아지방총독은 퀴리누스( 퀴리뇨,Quirinus)였다고 성경( 루카2장1~7 절)에도 기 록됐는데 퀴리누스는 서기 6년에서 서기 9년까지 총독이었고 인구조사는 그의 부임 초기( 서기6 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의 탄생시기와 장소는 기독교내에서도 정확 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4명의 동방박사가 찾아왔다는 설이나 천사가 목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 하며"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라고 하나님을 찬양( 누가 2:4)했다는 복음서의 내용은 성경비평 학이 등장하면서 종 교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주장과 해석이라고 평가합니다. ( 예수가 태어난 곳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서로 누가 복음서와 마태 복음서에 베들레헴이라고 되어있고 마가복음서 와 요한복음서에서는 나자렛 출신이라고 되어있음.)

53 가톨릭이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복음서는 예수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당시 행 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몇 세대가 흘러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내용이라는 것이며 표현도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마태오 복음서(2장1~16 절)에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 이 나타나고 " 헤롯왕이 2세미만의 갓난아이들을 살해하도록 명을 내려 그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루카 복음서(2장1~2 절)에는 "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 해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을 찾았다" 고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에는 예수가 "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 주님은 하느님 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네 믿음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라며 크게 칭찬했다고 하는데 예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메시아 비밀사상을 갖고 있던 복음사가 마르코는" 주님은 그리스도 입니다." 라고 고백한 베드로에게 "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말라" 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신학자인 존 도미니크 로산은 ' 역사적 예수' 에서 " 예수의 친구들에 의한 예수의 매 장부터가 완전한 허구이자 비역사적" 이라며 " 자연기적과 예수의 부활을 다루는 신 약성서의 주된 주장은 부활 그 자체가 아닌 매우 정치적인 것으로 초기기독교공동 체들의 권력과 권위에 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일 뿐" 이라고 주장 하고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국 기자 세 사람은 1982년 성혈과 성배 (TheHoly Blood And The H oly Grail/ 미카엘 베이전트, 리처드 레이, 헨리 링컨 공저)라는 책을 통해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녀까지 뒀으며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와 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이 부활연극을 한 다음 로마병사들의 호위 속 에 프랑스로 망명해서 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 골(gaul) 지방에 정착한 예수는 아내 막달라 마리아와 사이에 자녀를 두고 은둔 생활을 하며 80세 넘게 살다 프랑스남부 마을 렌느르샤토에서 수 킬로 떨어진 야산 몽 카르두에 묻혔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렌느르샤토에서 교회를 세워 교구장 으로 지내다 프랑스의 액생 프로방스 생봄에서 죽었고, 예수의 제자 나사로는 마르 세이유에 주교관구 겔트교회를 세워 주교로 있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친척 징표를 가진 예수후손들이 현재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 살 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예수가의 비밀을 지키는 성당기사단( 聖 堂 騎 士 團, 1118년 예루 살렘 순례자 보호를 위해 조직된 교회 군대)과 시온의 小 수도원이라는 비밀조직이 은폐 하며 보호해왔다는 사실들이 영국재판정에서 판결로 남아있게 됐다고 합니다. 판결내용은 "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로 망명해 84살까지 살다 죽었으며, 예수는 로마병사 판델라의 아들이었다." 고 판결한 것이며 예수의 후손들 은 4세기 후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 왕조에 협조하며 카롤링거 왕조의 비지코트가등 8개의 가문을 이루다가 기독교가 번성하자 겉으로 예수의 혈통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의 27대 후손이라는 피에르 플랭타르씨와 그의 아들이 법정에서 진술하게 됐으며 이 진술과 판결을 지켜보던 신부, 수녀, 목사들은 방청석에서 옷을 찢으며 통곡했고 기독교인이 목매자살하며 교회가 문을 닫는 일들이 영국 전역에서 발생하자 영국정부는 혼란이 지속되고 전 세계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결문 의 공개 및 해외 유출을 금지시키고 언론보도를 통제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부모에 순종하며 살았고( 누가 2:51) 12살에 아버지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 학자들과 성서( 구약)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굉장히 뛰어난 두뇌와 상당한 재능을 겸비하고 논쟁을 즐겼으며 " 모든 인간을 평등하기 때

54 문에 법과 규칙 또는 관습에 얽매여 억압받고 사는 사람들은 노예" 라며 자유롭게 살 것을 설파한 모세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지키려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족들이 공포심을 유발하고 강압적으로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산 재물을 바치 며 우상을 떠받들던 수많은 신전과 신앙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것 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은 야훼( 하나님)를 내세우며 믿는다고 주장했다고 보며 종족 을 해방시킨 모세의 사상을 가졌으리라 분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귀족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먹을거리와 주택, 의류 그리고 신발 등 모든 물질을 생산하면서도 법과 관습에 갇혀 억눌려 사는 노예와 불평등한 계급으로 억압 받아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내용들이 성경 속에 많은 것을 보면 고난을 겪으며 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생활했다고 보입니다. 공생활에서 최초의 유월절(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거기서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었다(27년 4 월)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이 땀 흘려 먹을 것 을 생산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으로 사는 사람들은 배척한 것으로 보이고 우상을 섬 기며 산 재물을 바치는 신앙들을 부정하므로 사람들을 설득하며 평등사상을 주입하 기위해 야훼(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강조했으리라 봅니다. 기득권인 귀족들의 신앙을 근거로 생활하거나 평민계급 중 조금 여유 있게 살며 자 신도 부를 축적하고 침략전쟁에 참여하면 귀족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환상을 쫓던 사람들을 예수를 음해했을 것입니다. 노예와 평민들을 지배하며 쾌락적이고 호화롭게 누리던 기득권들은 대중들이 절대 적으로 복종할 믿음( 종교)이 있고 자신들을 신의 아들로 인정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신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외치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좋게 보지 않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평등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의 활동을 모함하고 방해했을 것이고 예 수는 세금이라며 수탈당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이 병사들을 동원해 자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니 세금을 내지 않아야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고 강조하기 위해 자신은 야훼(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온 유대 왕( 요한19:19)이 라고 칭했으리라 봅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예수는( 마태 4:1) 30세경 야훼의 용서와 사랑을 전파하려 자신의 고향 갈릴리나사렛으로가 예배드리며 이사야예언서를 인용해 자신이 고난 받는 민중들과 함께하는 메시아로서 살아갈 것을 설파하자 고향사람들이 지혜에는 감탄했지만 ' 저 사람은 목수( 요셉)아들 아닌가.' 라고 말하며 예수가 변변치 않은 직 업을 가진 사람임을 지적하였다( 누가복음서 4:16-22)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는 유년시절을 '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고 ( 누가 복음서 2,52)기록하고 있으며 유월절 후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의 교회로 나갔으 나 사람들이 평등만 주장하는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을 알고 세례요한처럼 회개의 필 요성을 깨닫고 회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회개를 강조하자 예수에게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이 요한보다 많아지게 됐는데 사람 은 물질적 가치보다 평등한 사상으로 각성하고 죄지은 자들은 잘못을 회개하고 되 풀이되는 죄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전파해야 하는데 갈릴리 땅에 전도사가 없다고 판단해 유대전도를 그만두고 갈릴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구속되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며 돌아오 는 길목에 예수를 맞으려는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가 하면 유대교종교권력의 횡포로 소작농으로 전락한 이들이 억압받으며 재배하던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며 환대하고 갈릴리바다 동북쪽연안 광야지방까지 군중들이 모

55 여들어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예수가 출생한 년도와 활동을 그만둔 시점에 대한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고 단지 성경에 과월절 전날인 목요일 밤 최후의 만찬을 들고 이튿날 아침 2명의 강도들과 함께 신을 모독한 죄명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했다는 내용과 죽었다는 기록이 없는 내용만 있을 뿐 당시의 황제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내용도 없고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보는 앞에서 처형됐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황제를 지낸 사람으론 년은(Tiberius) 티베리우스가 황제였으며 37-41년 까지는(Gaius / Caligula)가이우스-칼리귤라가 황제였고 역사가 타키투스가 110년경 에 쓴[ 연대기](Annalia)에는 15권 44장 2절에서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54-68 년) 가 로마 시내에 화재가 나자 ' 그리스도' ( 유대종족을 칭하는 것으로 추정)인들을 방화범 으로 지목하고 박해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 그리스도인' ( 타키투스는 라틴어:Chrestiani라 기록하여 예수를 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음)이 " 티베리우스황제 치세 때 행정관 폰티우스 필라투 스 ( 본티오 빌라도는 흔히 총독이라고 하는데 팔레스타인은 총독이 아닌 행정관이 다스린 속령)에 의해 처형된 자가 외치던 ' 이 사악한 미신' 은 계속 번져나가고 있다" 고 기술 되어 있다는데 이는 후일에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속주였던 비티니아 총독으로 재직 중이던 소 플리니우스는 112년경 트라 야누스황제( 년)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티니아 지방 그리스도인들이 성가를 부 르며 그리스도를 신처럼 여긴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억압받는 민중들은 모세와 요한 그리고 예수의 영향을 받아 평등사상을 깨우쳤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 는 종교를 배척하고 모여 권리와 평등을 주장하며 갈망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120년경[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를 저술했는 데<클라우디우스의 생애>편에서 클라우디우스황제(41-54 년)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크레스 투스가 예수를 뜻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수에토니우스가 서술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루가에 의하면 클라우디우 스황제의 유대인추방령으로 고린토로 이주한 유대인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 신들처럼 천막제작을 한 바울과 같이 일했다는 기록이 있고 갈릴리지방의 유대인 독립군사령관으로 있다 패전을 앞두고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De bello Judaico)에서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에게 돌로 치는 형벌을 가했다는 기록만 있 다는 것입니다. 로마제정의 출발 목 록 로마공화정시절 노예나 여자 그리고 빈곤층에게 투표권이 없었지만 권력을 독점하 지 못하도록 평민들이 선출했으므로 제정초기에는 대중들을 속이려고 공화정 형태 를 가장하여 로마황제를 제1시민(priceps, 프린켑스)이라 칭하고 원로원은 과거 민회 가 보유하던 입법권과 모든 법적권한을 가진 듯이 보였으나 황제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며 원로원의원을 임명하므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원로원이 국정을 운영하던 공화정은 무너지고 상징적일 뿐이긴 했으나 원로원이 국 가를 통치한다는 명목상의 형식을 유지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뒤를 이은 율리우스-클 라우디우스(Julio-Claudian) 왕조는 스스로를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 원 로원의 제 1 의원)라 표현했으며 이는 4현제 시대까지도 이어지는 전통이었다는 것입 니다. 프린켑스(Princeps)가 가진 권한은 1개 선출직 원로원의원들은 감히 범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으며 18 세기 절대주의 황제 들은 황족들이 권력을 승계한 것과

56 달리 대부분 친족에게로 권력이 물려졌지만 혈연관계가 없어도 프린켑스가 생전에 지명한 후계자에게 권력이 유연하게 이양되면서 국가 최고 권력자로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 권위)를 크게 확대하고 통치한 시기를 원수정(Principate)이라 칭하며 제정 전기로마로 분류한다고 합니다. 칼리굴라(37 41 년) 는 광적인 성격의 인물로 궁전을 넓혀 대형목욕탕을 만들고 귀족 들이 나신으로 참석하는 연회를 열며 노예와 평민 중 빼어난 미모의 여성들을 선발 해 특정대상 없이 마음에 들면 누구든 농락하도록 하는 등 쾌락적인 생활을 하다 국고가 바닥나자 시민의 재산을 몰수했고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황제예배( 皇 帝 禮 拜 ) 를 집도하는 등 폭정을 하다 근위군 장교에게 암살됐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클라우디우스(41-54 년)아내 메살리나는 검투사출신이었는데 노예를 위시한 많은 남 자들과 성관계를 하는 난잡스런 생활을 하다 처형당했다고 하며 메살리나가 처형당 해 황비의 자리가 비자 아들( 네로)을 데리고 홀로 살던 황제의 질녀 아그리피나는 황비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황제의 노예이자 심사위원인 팔라스를 자신의 침실로 끌 어들여 아름다운 육체를 제공하며 유혹해 황비가 됐다는 것입니다. 당시 귀족들은 대형목욕탕에서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하며 유흥을 즐겼지만 저택에 있는 부인들은 남편과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해 힘센 노예나 건장한 병사들을 대상 으로 욕정을 해소했는데 아이가 생기면 귀족부인에게서 난 아이는 귀족신분을 갖고 노예여자에게서 태어나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예였다고 합니다. 아그리피나는 14살 때 오빠 칼리큘라 황제(37-41 년)와 첫 관계를 맺고 15살 때 결 혼했다 사별했으며 명문귀족과 재혼해 아들( 네로)을 출산 했지만 이혼했고 오빠인 칼리큘라의 동성애상대자와 관계를 맺으며 부추겨 오빠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추 방당했으나 칼리큘라가 암살되자 로마로 돌아왔고 메살리나가 처형당하자 심사위원 인 팔라스에게 육체를 제공하므로 황비가 된 탕녀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요염하고 농후한 아그리피나의 육체적 매력에 빠진 클라우디우스(57 세)는 근친상간 이라는 여론을 무시하고 아그리피나(32 세)를 정식 황후의 자리에 앉혔으며 황후가 된 아그리피나는 전 남편아들인 네로를 황제자리에 앉히기 위해 클라우디우스의 장 남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친딸인 옥타비아와 네로를 결혼시키므로 네로가 장차 로 마황제의 후계자로 인정받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황제의 딸과 네로를 결혼시켜 후계자자리를 굳힌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성인식을 거 대하게 진행한 후 클라우디우스가 좋아하는 버섯요리에 독을 타 대접하고 식사를 마친 클라우디우스(54년 10월 23 일)가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지자 크게 놀라는 척하 며 매수해 놓은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황제가 먹은 것을 모두 토하게 하고 황제의 목 속에 독을 집어넣어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숨을 거두자 아그리피나는 재물로 매수한 근위대의 도움으로 네로 를 로마황제자리에 오르게 했으나 황제가 된 네로는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황제의 친딸인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새로운 연인과 결혼하려 하자 이런 네 로의 행위를 반대하면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전 황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지지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입니다. 네로가 황제가 되자 아그리피나는 사사건건 정책에 간섭하는 섭정을 폈으며 자신의 초상이 든 금화를 발행해 " 위대한 어머니" 라는 칭호를 받고 황제의 권위를 능가하 는 권력을 행사했으며 그녀의 애인인 팔라스도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청탁을 받아 오는 등 권력을 남발해 네로는 팔라스를 먼 곳으로 추방했는데 이런 행위에 화가 난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굴복시키려했다고 합니다.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불안해하다 자신의 어머니가 황제를 독살한 것처럼 브리타니쿠스의 식사에 독을 넣

57 어 살해했고 네로의 이런 행동을 본 아그리피나는 생명에 위협을 느껴 네로를 회유 하기 위해 아름답고 농후하며 능숙한 자신의 육체를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으로 황후자리에 오른 아그리피나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 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 권력을 행사하려면 자신의 아들마저 육체로 유혹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연회자리에서 네로에게 음란한 애무를 퍼부었으며 술에 취해 혼미해진 네로는 자신도 모르게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본능적인 음욕에 빠 져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육체관계를 가져도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권력에 간섭하는 것을 배척했으며 황제권 력을 유지하려면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므로 호화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보장하 기 위해 평민들을 수탈하자 굶주린 민중들의 원성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는 폭정이 아니라 근친상간 때문에 여론이 나빠 자신의 정책 을 거부한다며 아그리피나를 바다에 수장시키려고 배에 태웠다 실패하자 병사들에 게 끝까지 쫓아가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은 황후가 되고 아들은 황제가 되어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려고 했던 권력에 대 한 욕심이 아들을 후대에 길이 남을 폭군으로 만들었으며 네로의 병사들이 아그리 피나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자 자신의 잠옷을 걷어 올려 아랫배를 내밀고 " 여기를 찔러라! 네로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하며 저항하다 병사들의 칼날에 처참하게 난 자당했다는 것입니다. 네로는 로마에 화재가 발생하자 불난 자리에 황금으로 된 궁전을 짓겠다며 대규모 건설 건축정책을 펼쳐 재정이 파산하니 재물이 항상 풍족한 신전을 털어 재정을 충 당했으며 그래도 부족하자 기득 층인 지주들과 부유한 자들에게 죽으면 모든 재산 을 왕국( 황제의 정치자금)에 헌납한다는 유언장을 쓰라며 강요했다고 합니다. 이런 정책에 불만을 가진 원로원출신과 군인 등 재물을 축적해 귀족행세를 하던 자 들이 황제를 새로 옹립하자는 여론을 조성하자 정보를 입수한 네로가 자신을 반대 하는 사람들을 체포해 자살하도록 명령하거나 추방하고 예술이라며 음악과 연극을 즐기고 나체로 돌아다니는 생활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왕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권력에 집착했던 아그리피나가 명령하는 모습만 보며 성장 한 네로도 타인을 굴복시켜야 복종한다는 권위주의와 우월주의에 빠져 타인을 지배 하고 억압하며 통제해야 한다는 사고 속에 성장했다고 보면 양육환경이 네로를 오 히려 아그리피나보다 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네로의 폭정과 귀족들의 호화방탕하고 쾌락적인 삶을 위해 징세를 높이므로 수탈이 심해 헐벗고 굶주리게 된 평민들은 불평등에 불만을 품고 평등을 요구하며 저항하 는 일들이 끝없이 반복되던 중 로마 시가 갑자기 7주야 동안 불에 타는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로마에는 네로가 황금궁전을 짓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아 민심 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황제를 폐위하자는 원성이 높아지자 병사들을 동원해 불만을 표출하는 평민들을 체포해 폭행하고 살해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불을 질렀다는 거 짓 소문을 퍼트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추방했다는 것입니다. 선출권한 있는 귀족들을 위한 가혹한 징세로 평민들을 수탈해 헐벗고 굶주린 민중 들이 저항하면서 68년 갈리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네로는 원로원을 소집해 진압하 려 했지만 원로원과 근위대까지 네로의 재물수탈과 폭정에 반대하며 평민들과 합세 하므로 도망자 신세가 됐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네로가 쫓겨 난 후 명의 왕이 권력을 행사하던 년을 지나 귀족들의 권력암투와 4 69 굶주린 평민들의 저항이 높아지니 대중들이 정치에 불만을 갖지 않도록 즐길 것을

58 제공해야 한다며 베스파시아누스황제(72 년)가 네로가 지은 황금궁전( 도무스아우레스) 인공호수를 메우고 거기에 대형 경기장을 짓도록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콜로세움의 정식명칭은 플라비우스이며 콜로세움이란 ' 거대하다' 라는 뜻을 가진 Colossale( 콜로사레) 또는 경기장 옆에 네로가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금도금상 콜로 소를 세웠기 때문에 콜로세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는 설이 있는데 이렇게 건설을 시작한 대형경기장은 8년이 지나 베스파시아누스황제 아들 티투스황제 때인 80 년에 완공됐다고 합니다.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로 높이 57m, 둘레 500m 경기장 내부는 길이는 최대 188 m, 최소 16m로 1층은 높이 10.5m 의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높이 11.85m의 이오 니아식 기둥, 3층은 11.6m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4층은 관중들이 작열 하는 햇빛을 가리는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고정시키는 벽이 있고 이외에도 계단과 독립 공간이 있으며 내부는 약 5 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 放 射 狀 ) 으로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인 70년에 수탈에 견디지 못한 유대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요 구하며 저항하자 병사들의 무력으로 이들을 살육하고 10만 명을 잡아 노예로 부렸 는데 그 중 4 만 명을 동원해 콜로세움을 건축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농사짓는 노예는 목에 건물을 짓는 노예들과 배를 젓는 노예들은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 노동을 시켰는데 건물을 짓다 높은 곳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떨어져 죽거나 무거운 돌을 나르다 바위에 눌려 압사하기도 했으며 힘이 빠져 지치면 가차 없이 채찍을 맞으며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설된 콜로세움경기장 바닥은 모래로 덮고 곳곳에 사냥터분위기를 위해 나 무와 구릉을 설치했으며 바닥 밑에는 노예들과 맹수들을 가둬둘 수 있는 각종 우리 시설을 만들고 글라디아토르( 劍 鬪 士 ) 시합과 맹수연기( 猛 獸 演 技 ) 등으로 평민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하므로 정권의 수탈행위에 저항할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시간을 뺏었으 며 승자를 예측하고 재물을 거는 도박을 조장했다고 합니다. 수만 명이 들어가는 대형경기장에서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신변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법을 어기거나 모세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평등한 권리를 주장 하는 사람들, 주인에 반항하는 노예들을 참혹하게 처형하며 자신들에게 반기를 들 지 못하게 억압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고 화합을 강조하는 정치의 장 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처참하고 참혹한 억압과 살육이 이루어지던 콜로세움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검투사 경기를 금지시킨 후 지진으로 무너지기도 하고 중세에 군사적 요새로 이용 하기도 하다가 성당이나 궁전 등 건축에 사용될 자제로 제공되면서 황폐하게 무너 진 것을 18세기경 교황의 명에 따라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난당한 현장으로 복구됐다고 합니다. 로마는 평민들의 끝없는 저항과 권력을 탈취한 자들이 더 많은 재물과 권력을 차지 하기 위한 권력투쟁으로 내분이 끊이지 않아 네로(54-68년까지 집권 Nero)와 콘스탄 티누스 1 세( Constantine I)까지를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들과 평민의 권리 를 대변한다는 선거선출 귀족 그리고 평민들과의 대립역사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에게 복종심을 심기 위해 만든 귀족의 신을 부정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 들이 번져나가 내란이 끊이지 않자 284년 디오클레티안황제는 로마제국을 4등분으 로 나누어 권력을 각각 부황들에게 분산하고 안정을 꾀하여 로마는 다시 평화를 찾 는 듯 했는데 부황들이 황제가 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해 통제가 불가능해졌습니다. 평등사상의 종교화 목 록

59 자신의 노동으로 농사지으며 자유롭게 사는 민중들이 세금징수( 수탈)와 통치를 거부 하고 귀족계급과 권력을 부정하며 평등을 주장하므로 통치가 불가능하자 서방의 콘 스탄티누스1세와 동방의 리키니우스가 313년 2월 밀라노에서 협의하고 그리스도를 종교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며 조직을 확장하도록 후원했다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로마를 통일시킨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5월 11일 대제로 등극해 비잔 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며 로마제국의 새 수도를 건설했지만 모두가 평 등을 주장하므로 통제할 수 없자 모든 침략자들이 신을 빙자해 복종을 강요한 것처 럼 그리스도를 신격화하면서 통치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억압과 탄압으로 숨어서 모세와 석가모니 그리고 요한과 예수의 사상과 진리에 대 해 이야기하던 것이 종교로 인정되면서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도사가 말하는 평등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따르니 통제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권력을 주니 기득권이 됩니다. 그 후 이글니스 황제( 년 Eugenius)를 마지막으로 395년 로마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 副 帝 ) 가 지배하는 사두체제를 도입하게 됐 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주최하며 수도사들을 소집하자 이때 참석한 에우세비우스 주교는 " 황제가 공의회 개막식에 입장하는 모습이 마치 하늘 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 (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3권10 장)" 고 아부 하며 권력에 복종하므로 사제가 제사장지위까지 오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 337~361)가 제위를 이어 종 교를 인정하며 안정을 도모했고 게르만족이 갈리아를 침공해 거듭 패한 콘스탄티우 스는 권력다툼 중에 죽인 사촌의 아들로 전투경험은 전혀 없고 철학공부만 한 율리 아누스를 사령관에 임명하자 율리아누스가 지휘능력을 발휘해 쉽게 게르만족을 격 퇴했다고 합니다. 게르만족을 격퇴한 율리아누스는 승전한 병사들과 수도로 진군해 황제가 됐으며 자 신은 제우스신을 종교로 가지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교를 인정했고 자신도 모든 사람 은 평등하다고 믿는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궁중의 미용사, 요리사, 환관 등을 추방 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363년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원정 갔다 전사 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발렌티아누스 1 세(Valentianus, 364~375)와 발렌스(Va lens, 364~378) 두 형제 가 지배했으며 이때 로마병사들은 게르만족이 주축이었는데 375 년 훈(Hun)족이 볼 가 강을 건너 동고트(Ostrogoth)족을 침략하자 6 만의 서고트(Vishgoth)족이 로마영내 로 피난했는데 지나친 수탈에 시달린 서고트족들은 식량문제로 권력과 갈등이 폭발 해 폭동을 일으킵니다. 구습의 통제만으론 지배질서를 유지하지 못하자 테오도시우스1세는 칙령(391 년)으 로 달이나 꽃, 그리고 곡물과 태양 등에 신성한 혼(genius)이 있다며 우상을 섬기는 신앙들을 금지하고 그리스도교만을 국교로 선포하므로 사제들이 원로원의원까지 선 출되는 기득권이 됐다고 합니다. 사제단(Collegium Pontifi cum)은 제례의 제문을 보관하고 의식을 감독하는 직책이었 지만 국교로 인정되면서 가장 높은 수도사는 최고 제사장(pontifex maximus)이 되었 고 황제가 주관하던 신전에서 여러 신의 의식을 치르고 예배를 집도하며 다중을 제 어할 수 있게 되므로 권력을 행사하게 됐는데 복점관(augur)은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예언인양 점을 쳐주며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수도사라는 신분이 제사장이 되고 귀족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기득권이 되자 예배를

60 관장하던 수도사들은 평등과 자유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만사를 신에 게 감사하며 참을 것과 복종을 강요하므로 특정 능력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 럼 조장하여 진실과 정의는 은폐되고 온갖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게 됐습니다.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 먹거나 사용하는 모든 물질은 사람들의 땀 흘린 노동으로 창 출되는 것임에도 풍년이 된 것은 하느님이 햇살을 주신 덕이니 감사해야 한다거나 화산폭발이나 자연재해가 발생되면 하느님이 실험하는 것이니 참고 견뎌야 한다고 강요하는 등 스스로 행동해야하는 저항을 잠재우고 신에게 의지하는 의타심과 복종 심을 강조하며 통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교에 세뇌된 신자들은 옆에 있는 물건을 자신이 손으로 잡고 사용해야 함에도 기 도하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듯이 착각하는 의타심을 갖게 됐으며 과학적 사고는 상실되고 복종하며 참고 사랑으로 살아야 된다고 세뇌되어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 면 저항해야 함에도 거짓말에 세뇌되어 온정을 바라고 신에게 기도만하면서 불의에 순종하게 됐습니다. 권력을 잡은 수도사들은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신의 심부름꾼임을 주장하고 부 활로 보복을 암시하며 다중을 착취해 누리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운명이나 창조 론으로 천국과 지옥을 강조하고 사후를 대비하라며 죄를 지어도 회계로 사함 받는 다는 거짓말로 많은 재물을 헌납할 것을 요구하며 본질을 드러냈습니다. 과학이 부족해 수도사들의 거짓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신자들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가 있고 교리나 경전들은 창조주의 절대명령이기 때문에 성실하게 수 행하면 천국에 간다는 황당한 거짓에 속아 수도사들이 힘든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헌금과 십일조로 호의호식하며 누리고 사는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378년 8월 9일 발렌스 황제는 8만 로마군을 지휘하며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 운 아드리아노플에서 고트족과 전쟁하다가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진 로마군보다는 기 병으로 무장한 고트족의 기동력에 밀려 로마병사들이 패하고 발렌스 황제도 전사하 므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가 황제를 승계했습니다. 원시시대는 돌칼이나 나무칼 동물의 뼈 등을 무기로 사용하는 종족보다는 철을 발 견하고 강력한 철로 먼저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종족이 승리했고 고대 전쟁은 누 가 더 신속하고 용맹하며 폭력을 능숙하게 행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고 전쟁에 승리한 종족이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황제가 됐으나 고트족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전 평민을 병사로 동원했는데 병사가 된 평민들이 노동을 못해 생산되는 물질이 부족해도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전 쟁 물자를 위해 가혹하게 징세하니 굶주린 병사들이 명령을 거부하므로 침략자들을 격퇴할 수 없게 되자 테오도시우스는 어쩔 수없이 고트족에게 제국 내 정주를 허락 하고 굴복합니다. 힘으로 로마를 굴복시킨 고트족들 대부분이 다뉴브 강 이남을 장악하고 반달 (Vandal)족은 판도니아 지방을 프랑크족은 라인 강 이남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들 은 독자적인 법과 왕을 두고 로마의 징세를 거부하므로 사실상 로마제국 안에 새로 운 부족국가들이 건설된 것과 같은 형태로 세력을 형성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분리 목 록 테오도시우스는 생전에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 명의 아들을 부황제로 임명해 다스렸는데 395 년 그가 사망하자 장남인 아르카디우스(Arcadius)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황제가 되고 차남인 호노리우스(Honorius)는 서로마황제가 되어 로마는 완전히 동과 서로 분리됐습니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권력은 게르만족의 무장( 武 將 ) 인

61 스틸리코가 장악하고 무력을 행사하므로 한때 평화로운 듯이 보였는데 스틸리코를 처형하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황제를 호칭하는 자들이 늘어나 또다시 혼란스러워 졌을 때 많은 병사들을 보유한 서고트족 알라리크 왕이 410년에 로마시를 점령했 다는 것입니다. 그 뒤 서고트족은 에스파냐로 이동했고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했으 며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리아를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각 각 왕국을 세우자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서고트족과 프랑크의 힘을 빌려 아틸라 가 이끄는 흉노족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격퇴하므로(451 년) 권력을 되찾았는데 455 년 반달족에게 로마시가 또 다시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강력한 병사를 지휘하는 게르만인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장군이 로마권력을 행사하 고 황제는 명목상의 명칭만 가지고 있었는데 가혹한 징세와 억압에 굶주린 평민들 이 반란을 일으키자 모든 책임을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탓으로 돌리고 황제를 폐위(476)하므로 서로마제국은 막을 내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서로마제국이 사라지고 그 지역은 프랑크 족이 무리( 영주의 등장)를 이루고 살았으 나 샤를마뉴 대제( 종교 황제)때 통일해 서로마제국의 영토와 비슷할 정도로 정복하 고 국가를 형성하므로 동로마와 서로마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완전히 분리됐으며 샤 를마뉴대제가 죽고 나서 왕국이 다시 3개로 분열되고( 동/ 중/ 서 프랑크) 후일 지금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됐다고 합니다. 지금 독일이 자리하고 있는 동 프랑크를 마자르족이 침략했을 때 오토1세가 침략을 막아내자 교황이 오토1세를 황제로 인정했지만 동 프랑크는 형식만 황제국가일 뿐 이었으므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려 했는데 대농장제로 물질이 풍족해 많은 병사를 소유한 영주들이 왕권을 부정하므로 분열되면서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됐 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 영어 명: 마호메트) 의 탄생 목 록 570년 4월 22일 무함마드는 아버지 압둘라( 압달라 Abdallah)가 죽고 어머니 아미나 (Amina bint Wahb)에게서 태어났으나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여 고 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압둘 무탈리브( 압둘 무딸립 Abdul Muttalib)에게 맡겨졌 다가 8살 때 할아버지가 사망하므로 하심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숙부 아브 탈리 브( 아부 딸립 Abu Talib)의 보호 하에 성장했다고 합니다. 삼촌 아브 탈리브는 딸린 식구는 많은데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삼촌의 직업인 무역 을 따라다녔는데 12세에 삼촌과 시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바히라라는 그리스도교 수 도사를 만나 모세와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알라 하나님께서는 양치기 목동이 아닌 자를 예언자로 보내신 적이 없다. 모세도 목동이었고, 다윗도 그랬으니 나 또한 야 즈야드에서 내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며 예언자 직을 맡게 됐다. 고 무함마드가 목 동 시절을 하칼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영리하고 예민한 무함마드는 낮에는 광활한 하늘을 보고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보 며 깊이 사색할 수 있었을 것이고 가축을 기르는 목동생활은 무함마드에게 수도자 들의 덕목인 청빈과 사색생활을 깨달아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 을 때는 배불리 먹지 않았고 부와 명예보다는 진리와 진실을 찾으려 노력했을 것입 니다. 어린 시절 양치기로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 한쪽지역에서는 많이 생산되고 흔한 곡물이나 물질( 원료), 그리고 문화를 습득하여 생산되지 않는 지역을 찾아 많이 생산되는 물질을 교환하여 이익을 남기고 문화를 전파하 는)으로 생활하다 삼촌의 소개로 부자며 과부였던 카디자(Khadijah)의 대상( 大 商 ) 에 고용( 취직)됐다고 합니다

62 당시 대상이던 카디자는 젊었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무함마드의 성품과 두뇌회전이 빨라 많은 이익을 남겨주는 상술에 감동해 구혼하므로 무함마드는 595년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에게 새끼낙타 20마리를 선물로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 2남 4 녀가 태어났는데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유년기에 사망했고 딸들 중에서도 파티마 ( 파띠마 Fatima)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는 건장한 남자가 대상무역을 떠나 성공하는 것이 영웅시되던 시절이라서 모든 가문이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했는데 아들들이 어려 사망한 무함마드는 사회 적으로나 종족번식에 큰 결함이 됐을 뿐 아니라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많은 사람들 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큰 수치가 되어 고민이 깊었으리라 봅니다. 무함마드가 얼마나 영민한가를 나타내는 설명으로 낡은 카바 신전을 헐고 새로 짓 기 위해 당시 신성하다고 믿은 흑석을 옮겨야 했는데 공사에 참여한 부족 간에 그 흑석을 누가 옮겨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분쟁이 생겨 자칫하면 부족 간의 전쟁 으로 비화되려고 할 때 그들은 신전 문을 제일 처음 지나가는 사람을 중재자로 삼 기로 했다고 합니다. 당시 믿음이 가는 자로 소문난 무함마드가 그 문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인부들이 중 재를 부탁하자 무함마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긴 옷을 가져와 땅에 펼치게 하고 자신이 흑석을 들어 그 옷에 올려놓고 부족 대표들이 옷의 귀퉁이를 잡고 같이 옮 기게 하므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지혜로 해결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부를 축적한 카디자와 결혼하고 자신이 대상으로 활동하며 먹고사는 것은 문 제가 없었지만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무함마드는 당시 아라비아의 현자들이 했던 것처럼 넓은 사막과 산을 찾아 사색을 즐겼고 히라산 동굴에서 금식하며 진리를 찾 으려 명상에 잠겼다 40세(610 년)때 깨달음을 얻어 자신은 알라( 하느님)신의 말을 전 하려온 메시아( 예언자)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4년 동안 깊은 사색에 잠겨 고민하던 무함마드는 614년부터 대중에게 자신이 깨달 은 진리들을 알리기 위해 알라( 하느님)만이 유인한 신이며 "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 은 평등하고 자유롭다" 는 사상을 가지고 철학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도록 사람이 지켜야 할 의무와 믿음과 행동이라는 내용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무함마드가 사파라는 작은 언덕에 혈연관계 사람들을 모아놓고 나는 한 명 의 경고하는 사람으로 우리가 무서운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 을 믿으십시오. 알라께서 내게 명하길 나의 가장 가까운 친지인 여러분들에게 경고 하되 나 자신은 현세와 내세에서 여러분들에게 아무런 이로움도 가져다 줄 수 없음 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듣고 삼촌인 아부라합이 너는 없어져 야 해 라고 소리 지르고 군중들은 미치광이라 놀리며 등을 돌렸다고 합니다. 당시 카바 안팎에는 360여 가지의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고 권력을 차지한 자들은 자신들이 신과 인간사이의 중재자라 주장하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모세와 예수의 추종자들까지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잊어버리고 서로 자신의 이익을 쫓 아 여러 종파와 파벌로 나뉘어져 있어 상당히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악습과 관습에 젖어 우상을 섬기는 종교를 가진 메카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취 급했으나 평등을 주장하는 그의 말에 귀 기울려 듣고 점점 이해하게 되면서 따르기 시작했는데 619년 하심가의 가장이자 숙부인 아부 딸림이 사망해서 하심가는 더 이상 무함마드를 보호해 주지 못했으며 사랑하는 아내도 죽고 같은 피를 나눈 부족 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합니다. 메카에서는 사람들이 거짓말 장이며 미치광이라고 놀려 생활할 수 없게 된 무함마 드는 동쪽에 있는 다이프로가 자신은 알라신의 메시아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63 왔다고 하자 다른 종교를 믿던 다이프 시민들은 무함마드에게 돌을 던지며 쫓아내 돌팔매질을 피해 포도밭에 엎드린 무함마드가 깊은 밤이 되어 자신에게 힘이 없음 을 한탄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놀리고 폭행했지만 굴하지 않고 신의 말씀을 들으라며 신 앞 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에 법이나 규칙 또는 관습에 매달려 누구에게 구 속되거나 착취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라고 설교하자 노동을 하 고도 세금으로 빼앗겨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물질을 생산하고도 감시 속에 억압받 으며 노예로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 모였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예수처럼 여러분이 세금을 내면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그 세금으로 먹고 살 면서 여러분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병사들만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에 세금을 내 지 말라야 합니다. 라고 강조하기도 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길을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쉽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라면서 진실을 추구하고 믿을 것을 호소하며 다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말을 믿고 따르자 신의 아들을 자처하며 부족민들을 통 제해 누리고 살던 무리들이 모함하기 시작했으며 이슬람교도가 된 아비시니아인 흑 인 노예 빌랄은 주인이 뜨거운 모래 위에 눕혀놓고 가슴에 크고 무거운 바위로 짓 누르는 고문을 하며 이제 너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라면서 무함마드를 따 르지 못하게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고문을 하고 괴롭혀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 는 사상을 신앙으로 선택한 사람들의 정신을 바꿀 수 없자 족장들은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 들을 제한된 구역 내에서만 살도록 강제하고 식량공급을 중단했는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래 식량을 전하므로 더 이상 억압수단이 될 수 없어 식량금지령을 폐지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지혜가 넘쳐 아라비아 부족사회의 관습과 인습을 바꿨으며 당신 의 형제가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던지 나쁜 일을 당하고 있던지 그를 도우십시오. 라고 말하자 어떤 사람이 저는 그가 나쁜 일을 당할 때는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 나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다면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그가 나 쁜 일을 하지 못 하도록 막는 것이 그를 돕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했답니다. 또한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손님을 정성스럽게 접대해야하며 이웃 을 영예롭게 하고 진실하고 선한 것만 말하며 만일 사악한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 침묵을 지켜야합니다. 라고하기도 하고 가장 완성된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좋건 나쁘건 가리는 일없이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 는 사람입니다 라며 설파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남자가 무함마드를 찾아와 양 몇 마리를 달라고 구걸하자 두 언덕 사 이를 오가며 풀을 뜯는 많은 양들을 전부 가지라며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궁 핍한 자를 도우며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고 불운하며 버림받은 사람들을 도우라 했 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 남자가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에게 이슬람을 받아들이시오. 무함마드는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라며 소문을 냈다고 합니다. 재물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자 620년 6명의 순 례자들이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고 다음 해에는 6명 중에 5명이 7명의 제자를 데려 와 12명이 제자가 되어 무함마드의 사상을 전파하니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됐고 권 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논리로는 대중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고문하고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한 시기에 부족 간 전쟁과 약탈로 혼란스러운 메디나에서 집을 제공한다며 와서 질서를 유지해 달라고

64 초청하므로 622년 7월 16일 250마일 거리에 있는 야스랍이라는 도시로 이주하게 됐는데 이것을 헤즈라라고 칭하며 야스랍은 예언자의 도시 메디나-툰-나비라고 불 리게 됐고 이때부터 이슬람력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력으로 사람을 노예로 삶아 부를 축적해서 누리던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정의 를 선택하는 것이 자비요, 짐을 진자의 보따리를 들어주는 것이 자비요, 질문하는 이에게 다정하게 대답하는 것이 자비요, 통행에 불편한 것을 제거해 주는 것이 자 비요, 형제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 자비입니다. 라고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니 어떠한 차별이나 특권도 있을 수 없어 여 러분이 가졌다고 착각하는 기득권을 버리고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똑같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자유를 보장하십시오, 이것만이 진실이고 정의요 지식이므로 인 간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입니다. 이렇게 설교하기도 했을 것이라 봅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인 평등한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선 강력한 힘이 있 어야 한다고 생각해 공동체인 ' 움마(Ummah)' 의 모체를 만들어 병사들을 육성했으 며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병사가 되자 624년 해마다 메디나를 공격하여 침략 과 약탈을 일삼는 메카 군을 메디나 남서에서 격파함으로 메디나의 최고 수장이 되 었습니다. 무함마드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을 들고 전투했다는 설도 있는데 624년 바르트 전투에서 이슬람군의 두 배가 넘는 쿠라이시 부족의 대군을 격파해 대승을 거두자 많은 아랍인들이 알라신을 믿게 됐으며 메카의 대상( 隊 商 ) 을 습격하고 신의 계시라며 예배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향하게 하므로 메카 정복 의지를 나타냈 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병사들의 무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과 규칙 또는 관습이라는 핑계로 권위주의를 내세우며 무력으로 억압하는 행위에 굴종하면 할수록 폭력이 습관화된 자들에 의해 이웃까지 혹독하게 박해당하니 평등을 부정하고 권위를 내세우며 억압 하는 행위에 저항하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라고도 했을 것입니다. 우흐드 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다음 해에 꾸레이쉬 족들이 메디나를 총공격해 왔으며 막아 냈으며 베두인들과 유태인들 그리고 메디나 안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이 음모를 꾸미고 627년 만 명도 넘는 병사들로 진격해온다는 정보를 준 페르 시아인 살만의 충고로 무함마드는 병사들과 함께 도시주변에 큰 도랑( 한다크)을 파 서 막았다고 합니다. 한 달이 넘도록 메디나를 공격했지만 방어막을 뚫지 못한 침략자들은 원조를 못 받 아 식량이 부족해졌으며 연합 족 병사들 사이에 서로 힘자랑으로 싸움을 벌이며 불 만이 고조됐는데 기상상태까지 악화되면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침략자들은 스스로 병사들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부터 메디나는 침략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5주 6 신( 五 柱 六 信 ) 1. 믿음의 선언( 샤하다)(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 는 그의 사도임을 증언합니다. 고 외치는 일) 2. 예배( 솰라)( 코란 1장을 외우며 하루 다섯번 절할 의무.) 3. 구빈세( 쟈카트)( 수입 중 생활을 영위하는 최소 금액( 최저생계비) 을 제외한 금 액 2.5% 를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할 의무, 가난한 사람은 내지 않아도 됨) 4. 단식( 쏴움)( 매 년 9 월( 라마단 달) 에 매일 새벽 예배부터 저녁 예배까지 단식하고 절약된 곡식이나 비용은 단식이 끝난 다음 날' 이둘피트르' 축제일에 ' 자카아툴피트리' 라 해서 주변 가난한자 또는 성 원에 나눠주는 일) 5. 성지순례( 핫즈)( 평생에 한번은 12월 둘-힛자에 정해진 순례 기간에 메카를 순례해야하며 만인이 평등하게 이흐람이라는 바느질이 없는 두개의 무명천으로 몸을 감싸 입고 정해진 코스를 돌며 그 비용은 본인이 순수하게 노동한 대가로 벌어들인 돈으로 해야 됨.)와 1. 하나님( 알라) 2. 천사들 3. 경전( 코란과 이전 경전) 4. 사도와 예언자들 5. 정명 6. 최후 심판을 믿고 실천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65 628년에 메카인들과 메디나인들 사이에 후다베야 라는 휴전협정을 맺었는데 2년 동안 꾸레이쉬족이 계속 공격하므로 630년 만 명의 병사와 진군해 피한방울 흘리 지 않고 메카를 정복한 무함마드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 라고 말하 며 카바 신전의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시민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므로 알라신 을 믿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메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정복을 계속해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했을 뿐 아 니라 당시 두 강대국인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을 포함한 많은 황제와 군주들에게 이슬람으로 초대한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와 정복을 꿈꾸고 알라신의 메시아라며 평 등사상을 세계로 전파하는 원정 계획을 세우던 중 병사했다는 것입니다. 아라파트 평원에서 무함마드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해가 바뀌면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백성들이여, 신전을 짓거나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예배라 는 핑계로 권위주의를 강조하며 타인의 노력을 갈취해 누리고 사는 허상을 타파하 십시오. 모세와 다윗 그리고 예수는 신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여러분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하려 왔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과부들과 여러 번 결혼(11 번)했으나 50세 때 당시 9살인 아부바크르의 딸 아이샤와 결혼한 것이 마지막으로 지금도 중동사회의 모델이 되어 미성년여아가 40~50살 남성들과 결혼하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며 632년 6월 8일 ( 이슬람력 11년 3월 13 일) 63세의 나이로 애처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가 조용 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메디나시대 이슬람을 지배한 무장( 武 將 ) 무함마드는 메카정복 이후 아라비아와 주변 국을 점령했으니 신의 사도라는 핑계로 대중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 가 될 수도 있었지만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논의했고 인간은 평등하므로 누가 누구를 대신해서 노동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당하는 노예라 며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으며 겸손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와 주변국까지 점령했음에도 사후 약간의 소지품만 남았을 뿐 재산이 없고 평등과 자유를 주장했을 뿐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성전을 짓거나 자신을 위한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가 썼다는 코란의 원본은 없으며 그 의 삶을 칭송하고 갈망하는 후세들이 700 년대에 이븐 히샴의 채록( 採 錄 ) 과 그 외의 많은 구술( 하디스)에 의해 코란으로 정리해 지금의 이슬람교가 됐다는 것입니다. 서로마제국소멸과 비잔티움 목 록 서로마 제국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이스탄불)에 수도를 건설 한 동로마제국은 권력을 장악하고 요직에 앉아 귀족행세를 하던 게르만족을 추방하 고 로마를 지배하던 왕과 귀족들이 권력을 차지했는데 이때부터를 16-19세기 역사 가들은 비잔티움(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 제국이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561년은 유스티니안이 집권해 강력한 무력으로 귀족과 평민들을 통제하며 복지정 책과 유화정책 펼쳐 번성했으나 7세기경 동방 문화의 영향을 받은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삼았으며 8세기경 이슬람이 공격해와 시리아와 이집트 를 점령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했다고 합니다. 비잔티움은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내므로 유럽과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고 9세기 초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므로 무슬림에 정복당 한 땅의 반환을 요구하며 다시 전쟁을 시작해 1,000년에는 바실레이오스 2세가 불 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하고 제국의 면모를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동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그리스도교는 동방정교( 그리스, 러시 아 정교)로 칭하면서 로마에 남아있던 그리스도교와 분리되었으며 서로마는 일찍 소

66 멸됐기 때문에 로마교황이 그리스도교의 수장이 되었지만 동로마는 황제가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동방정교의 수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침략전쟁을 계속하던 비잔티움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했으며 귀족 들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위한 가혹한 세금에 굶주린 평민들이 저항하고 귀족들 간 에 권력을 차지하려는 암투로 혼란스러워 지배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때 터키와 베 네치아가 침략해오므로 1,095년 콤네노스 왕조가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 다. 비잔티움제국이 도움을 요청하자 서유럽은 종교병사인 십자군을 조직해 지원하므로 계속 권력을 유지했는데 제4차 십자군이 들어와 약탈을 시작했으며 1204년 콘스탄 티노폴리스가 완전히 정복되자 몇몇 후계 국가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 이다가 마지막에 니카이아 제국이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니카이아 제국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했지만 동로마를 전체적으로 지배할 수 없어 서로마와 같은 절차를 거쳐 종족들이 모여 영주가 권력을 행사하는 부족들 로 분열하기 시작하면서 에게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만 남았으나 이것마저 1453년 5월 29일 메메드 2 세에게 함락당하고 로마제국은 소멸됐다고 합니다. 봉건시대( 중세) 목 록 로마제국의 황제들이 없어지고 각 지역에서 많은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토지 를 장악해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들이 스스로를 영주라 칭하면서 같은 지역에서 같 은 혈통을 타고난 부족민들끼리 모여 사는 부족국가를 이루었는데 이때부터 로마시 대의 귀족가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부터 귀족이 되고 권력을 행사하게 된 그리스도 수도사들이 스스로 주교가 되고 교황이 되었지만 농사를 지을 땅이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리가 없어지자 스스로 병사를 만들고 침략전쟁을 시작하므로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왕들이 그리스도를 종교로 받아들이면서 종교권력이 강화됐습니다. 종교가 권력을 행사하자 그리스도를 우상이라며 믿지 않거나 복종을 거부하는 수많 은 사람들을 이단이라거나 마녀 또는 악마로 몰아 악랄하게 살해하기 시작했고 무 함마드를 추앙하는 알라신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은 700년경부터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며 침략전쟁을 시작해 1600 년대 까지 종교전쟁이 벌어집니다. 751년 피핀이 교황의 지원으로 프랑크황제(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가 되며 기증한 중 부이탈리아가 훗날 교황령이 되고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프랑스어 샤를마뉴)대제가 도나우 강변까지 점령해 " 오스트마르크(Ostmrak)"를 설치하고 오스트리아의 변방지대 에 점령영역인" 마르크(Mark)"를 설치한 후 로마교황( 교황 레오 3 세)으로부터 " 로마인의 황제" 란 칭호를 받습니다. 이것은 로마교황이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 그리스도교와의 갈등 속에 든든한 후원자 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지원한 것이며 카롤루스가 이때 정복한 작센은 뒤에 독일 국가 초기형성에 기여했으며 카롤루스 사후 프랑크 왕국이 3등분되면서 서 프랑크 는 지금의 프랑스, 중 프랑크는 이탈리아, 동 프랑크는 독일의 기원이 됩니다. 726년 레옹 3세는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으나 황제가 된 후 굶주린 평민들의 불 만이 높아지자 수도사들이 하는 일없이 기도할때마다 재물을 걷고 헌납 받으며 많 은 부를 축적해 대중들의 삶이 황폐해 졌다면서 돌로 우상을 만들어 대중을 속이고 갈취해서 혹세무민하는 성상제작을 금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왕국이 삼분되고 919년에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독일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헝가리를 침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년에 슬라 브( 폴란드)를 정복하고 헝가리에게 곡물을 납부하지 말고 수공예품( 신발의류직물류 등

67 필요한 생필품)을 납부를 하라고 했는데 그 아들이 962 년 등극한 오토대제입니다. 오토대제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겠다며 침입한 헝가리 군을 물리치고 권력을 강화하 기 위해 국가종교제도를 도입해 주교와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고 수도사들에게 봉 건영주의 작위를 수여하면서 주교 령으로 왕을 보호한다고 발표하도록 하므로 영주 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강화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오토는 곧 북 이탈리아를 침략해 정복하므로( 이후 북이탈리아) 교황으로부터 황제( 신 성로마제국)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황제의 병사들을 사용해 로마교회의 권력을 강화 시키며 보호해주는 대신 교황은 황제가 점령한 이탈리아 내의 영토를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고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칭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슬라브족( 오스트리아도 Ostmark 라는 변방의 한 주였음)의 땅을 점령하 면 공작들을 점령지역(Mark 라 칭함)에 파견해 다스리게 했는데 슬라브족은 영토를 점령당하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고 다시 프랑크가 이들을 점령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다 브란덴부르크는 훗날 프로이센이 되었고 뮌헨주변은 오스트리아가 됐다 는 것입니다.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자칭하고 주교임명권한과 황제를 인정할 권한이 자신 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황제는 국가를 통치하고 교황도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에 부 속되어 있는 국민의 한사람으로 주교도 황제가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해 프랑크 제 국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 행사를 놓고 권력다툼이 치열했다고 합니다. 종교의 수탈이 극심해 도시민들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지지 했으나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던 귀족들이 교황 그레고리 7세와 결탁해 서임권을 주 지 않으면 황제에서 퇴위시키겠다고 협박하므로 1077년 카사노 성에서 황제가 굴 복하게 되고 이때부터 프랑크는 교황이 서임권을 행사하게 됐습니다. 서임권은 실질적으로 종교권력을 행사하는 주교들을 임명하는 권한으로 황제지위를 보장받고 대중을 다스리는 권력의 밑받침이기 때문에 당연히 황제가 행사해야 한다 면서 고수하고 황제를 종교아래 굴복시키려는 교황은 주교는 종교에 속하기 때문에 교황이 행사해야 한다면서 서로 권력 다툼을 한 것입니다. 종교와 정권 간에 권력암투가 격화되면서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왕들과 종교가 권력 을 장악했을 때를 중세라 하며 이때까지도 노예제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먹을거리와 생활필수품들은 여전히 노예나 평민들이 생산합니다. 종교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가장 악랄하게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자연재해가 발생하 면 신이 노했다고 하거나 부정이타서 그렇다며 종교와 자신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 람을 이단이라며 화형하기도 했고 주로 혼자 사는 여성들은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애완동물을 많이 길렀는데 동물을 기르는 행위를 마녀라며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에 대한 기록 중에 애완동물을 기르는 유럽 귀족들과 성직자에 대한 말이 있는 데 그리스도교회는 애완동물 소유를 못마땅해 했으며 동물에게 먹일 음식이 있으면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며 비판하고 동물과 친밀한 관계는 우상숭배와 관계있 다며 모함했는데 애완동물에 대한 편견은 종교재판 때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이교도라는 증거라고 했으며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이유만 으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고 동물과 친한 것을 간악한 마녀의 행위로 몰아갔는데 마녀로 고소되었던 여자 중 많은 사람이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동떨어진 생활을 하거나 혼자 사는 힘없는 여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신이 있다고 속이는 자들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어리석으며 비양심적이고 편협하 냐면 하느님이 땅을 창조했으며 지구는 평편하고 끝에 가면 끝없는 낭떠러지가 있

68 다고 강조했는데 우주를 관찰했던 코페르니쿠스와 브루너가 지구는 평평하지 않고 둥글고 태양주의를 자전하며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자 화형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달 위는 천상계고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된다며 연구금 지를 명했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다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1633 년)을 받았으며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지동설을 철회하고 설파하지 말 도록 강요받고 화형당할 뻔했다가 마지막 생애를 가택에 갇혀 지냈습니다.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침략전쟁으로 선량한사람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했던 무 리들이 신의 아들이라며 사람들을 억압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라고 세뇌 하므로 노동을 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착취하면서 누리고 살기위한 수단일 뿐 신이 있다면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 악마적 행위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저주하고 학살하는 행위가 악마 짓임에도 이를 은폐하고 신이 있 다고 믿게 하기 위해 악마와 귀신 그리고 뱀파이어와 흡혈귀를 만들어 내고 사람들 에게 허위 소문을 퍼트리면서 공포를 느끼게 하므로 대중들이 착각해 맹목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에 매달리게 정신을 잠식하고 재물을 갈취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권력을 잡고 성직자들이 귀족처럼 누리고 살기위해 십일조와 강제 헌금을 강요해서 서민들의 삶은 궁핍하기 짝이 없는데 황제까지 굴복해 종교에 대한 불만 의 목소리가 높아 불신이 팽배하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 년 그리스도인이 순 례 갔다 피살되었다 는 거짓을 퍼트려 여론을 돌리려고 십자군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슬람은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동로마제국의 힘이 약화되자 프랑크족들은 내부 의 불평등 때문에 발생되는 불만을 억압하고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1074년 약탈 전쟁을 시작했다가 패하므로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고 교황은 동방정교를 로마가톨 릭 교황권 아래 두려는 목적으로 성지회복이란 명분으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교황은 신께서 그들을 이끄시고 그들의 일을 도우신다. 신을 위해 일을 행하다 죽 는 자는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것이다. 가난한자 구원받지 못할 죄를 지은 자 들은 그곳( 예루살렘)에 가면 행복해지고 부유해질 것이다. 주저하지 말라 내년여름에 진군하라. 신께서 원하신다! 라며 대중과 신도들을 선동했다고 합니다. 교황은 은자 피에르라는 광신도를 이용해 전쟁을 선동했고 피에르는 교황의 말을 듣고 기사들을 동원해 노략질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유대인을 학살하며 약탈하고 베 오그라드에서도 약탈하다 헝가리왕국 기병대의 반격으로 군사를 잃었으며 베오그라 드의 중장보병대에 대패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갔습니다.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그들을 배에 태워 이슬람영토에 데려다 주었으 나 피에르는 거기서도 약탈을 일삼다 셀주크 투르크군을 만나 제리고르돈 요새와 키보토스 요새에서 전멸하고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했으며 은자 피에르는 알렉시오 스 1 세에 의해 목숨을 구해 달아난 것이 군중십자군이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은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 가혹하게 착취하므로 빈곤해진 민중들이 불만을 표출하고 정책에 반대하거나 평등을 요구하 며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부정하면 기득권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대중들을 참혹하 게 살육하는 전쟁도 벌이는 것입니다. 전쟁을 벌이더라도 자신들은 전장에 참여하지 않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자유를 요 구하는 대중들을 전시라는 핑계로 강압적으로 명령에 복종하도록 길들이거나 학살 하고 평민들이 병사로 출정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전쟁으로 짓밟아 황폐해진 토지를 싸게 거둬 재물까지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을 조장합니다. 대부분 유럽 왕들은 동쪽왕국의 힘을 알고 있어 전쟁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며 주 변왕국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십자군에게 자신들의 병사와 기사들을 내주면 권

69 력을 찬탈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거느리는 지방영주들에게 그들의 기사 와 병사들을 십자군전쟁에 동원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침략전쟁을 거부하면 이교도로 몰아 공격받았는데 제1차 십자군원정이 승리하자 영 주들은 자신을 왕이라 칭하며 예루살렘주변을 자신의 영지로 삼고 통치하기 위해 노예나 죄인신분으로 참가한 병사들에게도 기사작위를 봉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2차 십자군전쟁부터는 수많은 영주나 기사 또는 병사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왕보다는 재물이 부족해 병사들의 절대적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지 못하던 가난했던 귀족들과 지방영주들은 물질이 풍족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영토를 새롭게 확장할 야심에 병사들을 동원했지만 십자군이 계속 이슬람 군에 패하므로 기사와 병사를 잃어버린 영주들은 힘이 쇠약해져 왕들에게 종속되는 계기가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제1차 십자군 원정(1096 년~1099 년)을 시작으로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 년~1148 년) 등 총 10차례의 전쟁을 치렀으나 대패하고 종국에는 청소년십자군 이라고 해서 소년 소녀 3만 여명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일 부 상인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려갔다고 합니다. 초창기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두었으 나 이슬람이 단결하고 아마드 앗딘 장기( 장기라 불림)나 살라흐 엣 딘( 살라딘으로 불 림)같은 지도자가 등장해 세력을 결집하고 반격하므로 십자군은 계속 대패해 기독 교가 실제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총 전쟁 중 일부 기간밖에 없습니다. 무지와 광신적인 믿음으로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은 강간과 약탈을 일삼았으 며 당시 성지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동방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학살과 약 탈, 하기아 소피아성당에서의 무례로 비잔티움 제국국교인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 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해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을 고착화시켰습니다. 전쟁말기에 화승총이 사용되므로 육체적인 힘과 칼과 창 등 무기로 수많은 사람들 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재물을 강탈해 입신출세 했던 기사계급들의 힘이 소멸되므로 직업군( 상비군)에 들어가거나 거리의 부랑자 또는 상인이 됐으며 장교들은 대토지를 차지하고 귀족이 되거나 장교단을 형성해 융커라 불리게 됩니다. 대토지를 차지하고 장원을 만들어 영주 직을 획득해 귀족이 되거나 장교단을 형성 해 정치적 입지를 굳히지 못한 기사들은 상인과 공업 인으로 변신해 노동자와 농민 들을 잔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며 부를 축적하므로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는 대장원 이나 정치적입지로 기득권을 차지한 기사들과 같은 위치로 상승하려 합니다. 십자군전쟁의 패배로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병사를 동원했던 교황권이 크게 실추되 면서 그리스도적 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졌으며 전쟁 물자를 공급하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확장을 통해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고 유럽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물품들을 공급하므로 부를 축적하는 기반이 됐습니다. 서유럽은 십자군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한 물질로 경제가 발전했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가장 이득을 봤지만 십자군은 가 톨릭이 아닌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러 유대인 대학살의 동기가 됐으며 우호적이던 가톨릭과 이슬람이 적대적으로 원수가 되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백년전쟁과 농민혁명 목 록 중세는 결혼하면 여자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결혼한 남자에게 지참금으로 받 쳤는데 신의 자손인양 주장하며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대중위에 군림하던 프랑스 왕과 봉신인 영국 왕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전략결혼을 했는데 카페왕조( 프랑스왕 조)의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죽자 4촌 형제 필리프 6 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70 샤를 4세 누이의 아들인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자신의 엄마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 해도 자신은 남자기 때문에 프랑스왕위 계승자라면서 권력을 내 놓으라고 주장하자 필리프6세는 봉신이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못마땅한데 왕위 까지 내 놓으라니 봉토를 몰수하여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늘리기 위해 1340년 6월 영국과 프랑스 간에 전쟁을 벌입니다. 필리프 6세는 1337년에 영국 왕의 봉토였던 아키텐 령에 병사들을 파병해 무력으 로 점령하고 몰수를 선언했으며 노르망디 해안에는 함대를 보내 영국을 위협하자 에드워드3세는 필리프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고 자체 군사력을 준비하면서 혈족으로 형성된 왕가인 신성로마제국황제와 라인 강 및 네덜란드제후 등과<황제대 관>으로 절충하여 공수동맹의 약속을 성립시키고 전쟁을 시작합니다. 전쟁의 핵심은 유럽 최대 모직물이 생산되고 있는 공업지대로 원료인 양모 공급국 인 플랑드르 공국과 포도주의 최대 생산지인 아키텐 령에 속한 가스코뉴 공국으로 프랑스 왕의 종주권 아래에 속했는데 영국이 관리하고 있어 이 두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왕족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부와 권력을 위해 116년간 동안 벌인 전쟁으로 수많은 병사와 양민들이 학살됐으며 농지는 황폐해지고 병사로 동원된 농민과 노예들이 노 동을 못해 먹을거리가 없어 굶주릴 때 영국군이 들어와 약탈과 강간이 극심해지고 귀족의 병사들까지 약탈에 앞장서자 1358 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귀족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많은 양민들은 학살과 약탈 그리고 강간에 노출될 뿐 아니라 귀족의 병사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면 병사를 석방하는 대속 금까지 부담해 야 했으므로 분노한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북프랑스의 보베이지 지방에서 자크리 ( 당시 농민 호칭이었던 자크의 집합명사)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권력을 유지하고 부를 늘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왕족들은 전쟁에 참여한 병사 들을 회군시켜 농민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므로 농민들의 저항은 진압했지만 전장에 서 병사들을 철수시키므로 포로가 된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 불하고 아키텐 지방과 칼레시( 市 ) 라는 영토는 영국에게 빼앗깁니다. 1364년 프랑스에서 장 2세가 죽고 샤를 5 세가 즉위하자 전쟁을 하기 위한 재정( 財 政 ) 을 비축하고 늘렸으며 아키텐귀족들을 선동해 영국식민지에서 벗어나 자유공국 이 되라고 선동하므로 아키텐의 귀족들이 영국에 반항하면서 영국이 내란으로 어수 선해지자 다시 전쟁을 재개했습니다. 1369년 흑태자의 동생 존 오브고트가 이끈 영국군이 프랑스를 침입했다 프랑스군 에게 패배하고 영국해군은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해군에게 잇달아 패 배하므로 브레티니-칼레 조약으로 영국에 빼앗겼던 아키텐 지방과 칼레시 영토의 대부분을 프랑스가 점령하고 1375 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맺게 됩니다. 오랜 전쟁으로 평민들은 헐벗고 굶어죽는데 귀족과 성직자들은 호의호식하며 호화 롭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한 영국의 성직자 존 볼은 성속귀족( 聖 俗 貴 族 ) 을 비판 하고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도대체 귀족은 어디 있고 평민은 어디 있 었습니까? 라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니 계급으로 구분해서 억압받지 말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며 다녔습니다. 교황과 황제는 귀족을 인정하지 않고 평등사상을 주입하고 다닌다면서 존 볼을 몇 번이나 투옥시켰으나 결코 자신의 양심과 진리를 속일수가 없어 귀족도 먹어야 사 는데 모든 먹을 것과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질들은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모두가 균등하게 노동하고 공정하게 분배 받아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 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71 존 볼은 1366년 교회로부터 파문되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리자 귀족들 은 그를 켄트의 미치광이 성직자라고 폄하하고 모함하며 놀렸지만 그래도 꺾이지 않고 방랑설교를 계속하다가 1381년 옥중에 갇혔을 때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자 각 지의 농민에게 은유( 隱 喩 ) 로 된 회장( 回 章 ) 을 보내 농민봉기군을 조직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농토는 황폐화되고 노동을 하지 못하므로 생산되는 물질이 부족해 삶 이 피폐해진 민중들에게 전쟁비용을 모은다며 15 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인두세( 人 頭 稅 ) 를 징수하고 왕명으로 노동자규제법(1. 건강한 남녀는 신분을 막론하고 1346년 이전 의 품삯으로 일해야 한다. 2. 노동자, 농민의 도망을 금지한다. 3. 물가는 1346년 이전의 것 을 기준으로 삼는다. 4. 위반자는 엄벌에 처한다.)을 발표한 것입니다. 1381년 5월 영국 에섹스 지방에서 와트 타일러의 지휘아래 농민들은 농민군을 결 성하고 반발하기 시작했으며 켄트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까지 확대되어 잉글 랜드왕국의 절반이상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면서 런던으로 진군해 하느님을 핑계로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던 수녀원과 수도원을 불태우고 진군했습니다. 런던에 도착한 농민군은 감옥을 파괴하고 존 볼을 구출했으며 런던시민과 합류하고 도시를 점령하여 혹독하게 이윤을 남기던 플랑드르 상인들을 징벌하고 왕의 삼촌이 자 원성의 대상이었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 존의 저택을 파괴했으며 대법관 서드베 리와 재무장관 로버트 헤일스 경을 처형하고 국왕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합니다. 농민군의 요구는 하느님을 핑계로 십일조와 헌금을 혹독하게 갈취해 자신의 배를 채우는 (1. 켄터베리 대주교를 처형할 것. 2. 인두세의 부활 및 금지. 3. 농민의 사냥 권을 보 장할 것. 4. 농노제를 폐지할 것. 5. 농지세금을 1에이커당 4 펜스로 고정할 것. 6. 곤트의 존과 간신배들의 처형할 것. 7. 매매의 자유를 보장할 것)등을 요구했습니다. 전쟁의 폐해로 국고가 바닥나 용병을 고용할 수 없는 국왕 리처드2세(1377~1399 년) 는 어쩔 수 없이 농민군에 굴복하여 농노제를 폐지하고 상거래의 자유를 보장하며 토지세는 4펜스를 고정으로 한다는 해방 장에 서명하자 대부분의 농민들은 만족하 고 귀향하지만 와트 타일러의 지휘아래 켄트, 웨섹스, 런던 시민들은 사람은 누구 나 평등하니 농노제를 완전히 폐기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거부합니다. 농민과 도시민이 결합한 민병대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탄압적인 법령을 폐 지 할 것과 하느님이라는 핑계로 종교가 수탈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 해줄 것. 농민들의 노예화를 금지하고 자유화 를 요구하며 국왕과 맞섰으나 6월 15 일 국왕과 협상 장소에 참석했던 런던시장 월리엄 월워스가 휘두른 칼날에 타일러 가 목을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와트 타일러가 암살로 부상을 입고 세인트 바솔로뮤 병원으로 옮겨지자 민병대는 왕을 향해 화살을 발사하려 했지만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던 용병인 기사들이 막아 서면서 국왕은 도피하고 지휘관을 잃어버린 민병대가 우왕좌왕하며 엉거주춤할 때 피신한 국왕은 나는 그대들의 지도자요 그대들의 왕 이니라!! 가만히 있지 못할 까!! 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민병대가 해산하자 런던시장은 병원을 찾아가 와트 타일러를 살해하고 나중에 월리 엄 경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국왕은 민병대가 자진해산하고 흩어지자 용병들을 동 원해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7월에 존 볼을 체포해 교수 척 장분지형으로 살해하므로 농민들의 봉기는 끝나게 됐지만 국왕이 서명한 해방 장에 의해 이때부 터 농노제와 인두세는 사라지게 됩니다. 십자군전쟁으로 재물을 모아 힘을 축적한 이탈리아에서는 재물은 많이 가지고 있으 나 사회적 신분이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어 귀족들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던 상공인 들이 피렌체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들을 선동해 치옴피의 폭동( ) 을 일으 키며 신분상승을 꾀합니다

72 성직자들의 수탈과 전쟁비용을 노동자와 농민의 세금을 징수해 치르면서도 승리하 면 전리품으로 귀족들만 배불리는데 민중들에게 전쟁비용을 부담시켜 죽도록 노동 을 하고도 헐벗고 굶주리며 고통 받는다고 민중들을 선동해서 2년 이상의 세월동안 피렌체를 점령하므로 귀족들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소작농의 출현 목 록 로마가 소멸되고 넓은 땅과 그 땅에서 거주하는 무리들을 거느린 영주들은 노예노 동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바다의 생선을 포획했으나 노예들은 오랜 기간 동안 농사를 짓는 노동을 해도 자신의 재물은 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유마저 억압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 농사짓는 일을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주들은 많은 땅을 차지하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해 사 람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노예노동으로 큰 성을 짓거나 대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병 사들과 함께 살며 자신의 영토에 있는 산짐승들도 전부 자기 것이라 주장하며 농민 이 배가고파 산짐승을 잡아먹으면 그 사람을 참혹하게 처형하기도 했답니다. 악랄하게 사람을 학살하도록 강요하는 영주만 처형하면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지 않겠지만 영주의 병사로 있는 자들은 영주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살려는 자들이기 때문에 영주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주를 위해 목숨까 지 받치며 노예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갈취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이 노동을 기피하므로 일을 시키기 위해 노예관리자를 두었으나 노예관리자 들이 노예들에게 살해당하는 일들이 발생되므로 소수의 노예관리자로는 관리할 수 없게 되니 10명당 1명의 노예관리자를 두었는데 이것이 훗날 산업사회로 발전하면 서 생산 공장이나 건설현장 관리자( 반장)의 시조라 봅니다. 노예관리자들이 혹독하게 감시 감독하며 노예들을 무력으로 억압하므로 초기에는 농사를 지어 많이 생산할 수 있었지만 노예관리자와 노예들이 결탁해 영주를 살해 하고 토지를 점령하거나 도망가기도 했으며 노예관리자들에게 많은 물질을 제공해 야 하기 때문에 영주들이 호화롭게 살며 재산을 늘릴 수 없었습니다. 영주들은 어쩔 수 없이 노예들이 생산노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약간의 토 지를 나누어주고 일정 시간은 영주의 영지에서 의무적으로 농사를 짓는 노동을 하 도록 하고 자투리 시간에 노예에게 나누어준 토지에서 자신을 위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됐다고 합니다.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노예들은 처음엔 영주의 영지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땅에 농사를 지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노예의 후손들이 태어 나자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노예들은 영주의 영지에서는 대충 대충 농사를 짓고 자 신의 땅에 정성을 쏟으면서 생산을 늘렸습니다.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부가 축적되지 않자 영주들은 토지를 회수하고 종 교를 이용해 억압하며 노동을 강요했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가 생기지 않고 희 망도 없는 노동을 거부하자 일정범위의 농지를 사용하는 대신 그 땅에서 생산되는 소출에서 일정량을 영주에게 받치라며 소작을 시작한 것입니다. 소작을 하게 된 농노들 중 극소수는 넓은 토지를 소작 받아 다시 소작을 주면서 재 물을 축적하게 되자 노동을 기피하고 노예를 사드리며 땅을 소유하려 하니 영주들 은 농노들이 더 이상 재물을 축적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추수된 곡물에서 많은 양의 소작료를 징수하므로 노예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 졌습니다. 농지가 없는 도시에서는 숙련노예들이 관제수공업으로 신발과 의류 그리고 식기와 가구 등 사람이 살아가면서 실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만이 아니라 귀족들이 권위를 내세우고 재물을 뽐내기 위해 즐겨 사용하고 있는 각종 보석들의 세공과 장

73 신구들을 만들고 귀족의 재산을 관리해주기도 했습니다. 노예에서 도망하거나 해방된 숙련노예들은 배운 기술이라고는 신발과 옷을 만들거 나 또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땅이 없어 먹을 것을 생 산할 수 없으니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들을 먹을 것과 교환해 생존했는데 그들이 물 건을 생산하며 기술을 교환하기 위해 한군데 모여 살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니 그곳에 가면 필요한 물질을 먹을 것과 언제든지 교환할 수 있다는 소 문이 나고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장을 생성하게 됐다 고 봅니다. 노예들의 땀 흘린 농업노동을 갈취해서 누리고 살던 자들은 숙련노예들에게는 곡물 이 없어 빼앗아 갈 수 없게 되자 농작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한다면서 생산하는 물질의 량에 따라 곡물을 징수하거나 만들어낸 물 질을 강제 징수해 갔을 것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생활이 되풀이 되면서 많은 물질을 차지한 자들도 생겨났으며 재물을 많이 차지한 자들은 현재 같이 과학이 발달되지 않아 보관시설도 없었기 때 문에 재물을 창고에 쌓아 놨는데 썩어 못쓰게 되기도 했을 것이며 빈곤한 사람들은 재물이 풍족해진 자들에게 재물을 빌리기도 했다고 봅니다. 재물을 빌려주고 차용증 같은 것을 교환했을 것이나 이 차용증은 재물을 빌려간 자 가 죽거나 도망가면 다시 회수할 수 없고 재물은 쌓아두면 썩기 때문에 안전하게 재물을 늘리고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차용증대신 언제든지 물질교환이 가능한 화폐 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화폐로 물질을 교환할 수 있고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이 됐어도 노예는 생필품을 생 산하거나 농사를 지어야 하니 시간이 없고 노동은 노예나 하는 것이라며 기피하던 도시룸펜과 부랑자들이 화폐를 취득하기 위해 숙련노예들이 만들어낸 물건을 가져 다 작을 부락으로 돌며 판매해 이윤을 남기며 화폐를 유통하는 상업이 시작됐을 것 입니다. 유럽에서 오늘날 인쇄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1,397년이나 1,398년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가 금화를 찍어내는 일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금화를 찍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금형을 이해했으며 그것 을 응용해 1,434년 인쇄연구를 시작해서 1448 년에 인쇄소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이 당시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긴 것이 금이 었으므로 금의 무게를 단위로 한 금화가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는 많은 사람들이 금화를 제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 기득권들이 통제하고 통합하기 위해 은행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영국중앙은행은 1694년 W. 페터슨의 제안에 따라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 은행으로 당시에는 다른 사적 금융업자들이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으므로 독점적인 발권은행( 發 券 銀 行 ) 은 아니고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난 해소를 목적으로 설립했다고 합니다 년 잉글랜드 은행권이 법화( 法 貨 ) 로 지정됐고 1844년 잉글랜드 은행조례( 필 은 행조례)에 의해 새로운 발권은행의 설립이 금지됐으며 1854년 많은 은행에서 보유 하고 있는 예금계정을 대체해 상호간 결제를 실시하게 됐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인 류역사에서 화폐와 상인의 생성은 오래되지 않았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통해 대중을 복종시키고 통치하므로 부

74 정부패가 극에 달했는데 요한12세는 10 代 에 교황으로 선출돼 유부녀의 침실에서 죽었으며 교황의 사생아아들이 교회정책을 좌지우지했으며 자신들의 종교를 믿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는 공포정치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화폐를 발행하고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땀 흘려 생산한 물질로 교환되는 시장을 형성했을 것이며 화폐가 교환수단과 축적수단이 되자 화폐만을 노리는 도적과 강도 그리고 사기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화폐를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갈취하기 위해 도박과 매춘 등 각종 범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화폐를 만들었지만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다면 화폐자체로는 아무런 물질도 생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쌓아두면 썩으며 악취만 풍기지 그 어떤 가치도 없기 때문에 화 폐를 가치 있는 물질로 인정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유통시켜야 하며 화폐에 가치 를 두려면 물질이 교환되는 시장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화폐가 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교환 할 수 있게 되면서 화폐를 빌려주는 고리대금업 이 시작되고 화폐를 빌려 줬다는 이유로 이자라는 것을 만들어 원금의 몇 배에 달 하는 폭리를 취하기도 하는 등 땀 흘려 생산한 물질들을 가로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폐만능주의에 빠져 화폐를 차지하기 위한 도박이 판을 치고 자신들 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은 천한 노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업신여기며 타 인의 재물을 가로채려고 사기와 도박을 업으로 삼은 무리들은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을 살해하기도 하는 등 악행을 저지릅니다. 바둑이나 장기 또는 그림이나 음악,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 그리고 글쓰기나 도박, 방송과 행정, 감시통제 등의 행위는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 어떤 물질도 생 산되지 못함에도 풍족하게 사는 것은 기득권을 위해 노예들이 노동생산만이 경제라 는 진실을 깨달을 시간과 정신을 갖지 못하게 방해한 대가로 누리고 삽니다. 처음 상인들은 작은 부락과 도시를 돌며 물건을 판매하려갔다 한적한 주택에 주인 이 없으면 귀중품들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며 부녀자들이 혼자 있는 것을 보면 패 악 질을 저지르기도 하므로 작은 부락에 사는 사람들은 누가 자신의 물건을 가져갔 는지 몰라 서로 이웃을 믿지 못하는 불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재물을 모은 자들이 생기니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나서게 됐을 것이고 재물을 모은 상인과 장인은 안전하게 재물을 지키기 위해 토지를 구입하려 하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부락을 이루니 귀족들은 이들이 토지 를 구입할 수 없게 하기 위해 특정지역에서만 거주하도록 강제했을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모았지만 특정지역에 갇혀 살아야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을 벗어나려 했지만 권력의 방해로 지역을 벗어날 수 없자 사람들과 힘을 합쳐 저항했을 것이며 이런 과정을 거쳐 재물을 차지한 자들은 자신들을 가둬놓은 지역을 벗어날 수 있게 되고 대표를 뽑아 자신들을 가둬놓는 자들과 협상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봅니다. 이들이 처음에는 자신들이 갇혀 지내는 지역 안에 사는 사람들끼리 뭉치기 시작했 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분화되어 같은 물질을 생산하는 사람들끼리 뭉치 기 시작했으며 상인들도 자신들의 연합체를 만들어 이들과 함께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하므로 영주들은 물론이고 황제도 위협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뭉치므로 힘이 생기자 이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연합체를 상징하며 자신들을 억압하 는 병사들과 전투가 벌어지면 함께 보고 모일 수 있게 깃발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1430년 지기스문트 황제가 도시의 깃발을 벗어난 개별적인 깃발을 가져서는 안 된다 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위력적으로 저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합체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모세와 예수 그리고 석가와 무함마드가 주장했던 것처럼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하고 평등하게 발언하며 대표를 선출해도 전권을 행사

75 하는 것이 아니라 현안 문제를 구성원들과 함께 논의하고 결정되면 스스로 결의하 고 대항했기 때문에 강했을 것입니다. 상술로 부를 축적한 자들은 물건을 판매하려 다니면서 어떤 물질을 대중들이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파악하게 됐을 것이며 처음에는 숙련노예들에게 필요한 물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해 가지고 다니며 팔고 물건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불량품을 속여 팔아 이윤을 남겼을 것이라 봅니다. 상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물질을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숙련된 노예 나 농민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판매해 이익을 남기고 사는 사람들로 물건을 살 사람인지 구경만 할 사람인지를 판단해야 했고 눈치를 살펴 반드시 물건이 필요 한 사람이면 감언이설로 꼬드겨 비싸게 팔아 부를 축적합니다. 또 상품을 가져오면 그것을 단계별로 나누어 상품과 중품 그리고 하품으로 분리하 고 상품을 비싼 가격에 판매하므로 많은 이익을 남겼을 것이며 눈속임을 통해 일단 판매해 이윤만 남기면 되기 때문에 겉으로는 똑같은 양으로 보이게 하거나 싱싱하 게 보이도록 속임수를 써서 이익을 취하는 것입니다. 상인들은 물질을 판매만 하고 숙련노예들이 물건을 생산하는 양식을 갖추었을 것이 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직접 만들어 판매해야 이익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만들 어내기 시작했을 것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한 도구나 기계 들은 숙련노예들이 소지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욕심이 생긴 상인들은 노예들이 상품을 만드는 도구나 기계들을 구입하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 임금을 지불하며 물건을 만들어 내기도 했을 것이고 물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도 처음에는 한군데서 한 개의 물건을 만들었겠지만 물건을 만들 어내는 속도가 느려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 분업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한사람이 한자리에서 냄비의 손잡이와 냄비를 만들고 뚜껑을 만들며 뚜껑손잡이를 만들어 조립해 완성시키던 것을 한 사람은 냄비만 만들고 다른 곳에서 손잡이를 만 들며 또 다른 곳에서 뚜껑을 만들고 다시 뚜껑손잡이를 만드는 분업을 통해 한곳에 서 집중적으로 조립해 빨리 생산하는 방법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부를 축적한 자들은 물건을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것도 모자라 아무런 물질도 생산 되지 않는 화폐지만 물건을 구입해야 할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주고 이자라 며 더 많이 갚을 것을 요구하여 부를 늘렸을 것이며 이들은 돈이 급하게 필요한 사 람에게는 높은 이자를 받아 더 많이 갈취했으리라 봅니다. 노예의 노동력을 영주가 보유한 병사의 무력으로 억압하다 수많은 저항에 부딪쳤던 자들은 화폐라는 교환수단과 축적수단으로 재물을 거머쥐게 되니 먹을 것과 필요한 물질을 교환할 수 있는 화폐를 억압무기로 삼아 노예들에게 잠자는 시간외에는 쉴 시간도 없이 노동을 하도록 강제했습니다. 노예의 노동은 어른이나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생산노동에 동원됐으며 탄광이나 금광 그리고 철광과 금속 광을 가리지 않았으며 농촌과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 그리 고 직물을 직조하는 가내수공업과 공장에서 먹을 것도 변변히 못 먹고 잠 못 자며 노동을 하니 노예들의 수명이 짧아져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목 록 평등사상을 종교로 변질시켜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이 대중들에게 우월성을 과시하 고 위화감을 조성하면서 복종시키기 위해 거대한 성전을 지었으며 더 많은 부를 축 적해 권위를 내세우려고 죄를 아무리 많이 지은 사람도 면죄부를 사면 지은 죄를 사함 받는다는 거짓말을 퍼트리며 면죄부를 판매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습니다

76 비양심적이고 악독한 행위로 재물을 긁어모은 자들에게 면죄부는 신에게 미리 들어 놓는 보험처럼 받아들여져 엄청 많이 팔렸는데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1402 년 교회가 인덜전스(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 했다 이단으로 몰려 1415 년 처형됐다고 합니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을 통해 독일교회 안에서 개혁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했는데 이것은 모두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련된 것으로 대표 적으로 폐해가 큰 첫 수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고 이어서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을 비판했습니다.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엄청나게 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을 그리게 하고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 같은 것을 짓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신이라는 핑계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 가는 흡입행위를 합리화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배교, 우상숭배, 살인, 간통 등의 죄를 지으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도록 추방했는데 쫓겨난 신자들이 배교를 하는 일이 늘어나자 교회에서는 공개적 으로 죄를 고백하고 부과하는 형벌을 받으면 다시 교회로 받아준다고 하므로 이때 부터 고해성사가 실시됐다고 합니다. 중세교회에서는 개인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면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기도, 금식,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의 일정한 벌을 주는 보속(Satisfacio)을 하도록 하며 개인고해를 했는데 이후 보속을 덜해주는 대사를 두 었고 나중에는 돈으로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중세 일부교회는 대사의 효력을 보속의 경감뿐 아니라 모든 죄를 용서받고 심지어 연옥에 있던 영혼도 하늘나라에 간다고 선전했으며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 요한 테 첼(Johann Tetzel)이라는 부흥사는 성서를 인용해 ' 대사를 사면 부모의 영혼도 하늘 나라에 간다.' 라는 설교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사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1517년 가을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짓는 재정을 늘려야 한다는 핑계로 평등과 자 유를 주장했던 모세와 예수의 사상을 부정하고 기득권이 되어 사람들의 자유를 부 정하고 혹독하게 억압하며 면죄부란 거짓을 팔아 부를 축적하는 행위와 주교와 교 황이 강제하고 있는 결혼문제 등에 대해 95 개 조항으로 반박했습니다. 당시 마인츠에는 1455년 구텐베르크에 의해 발명된 인쇄기가 가동되고 있었기 때 문에 루터가 작성한 95개 반박문이 인쇄되어 빠르게 배포될 수 있었으며 그 내용이 대중들에게 널리 확산되고 알려지자 종교개혁 문제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면서 마르틴 루터는 순식간에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됐습니다. 신부며 신학자였던 루터는 1525년 카타리나 폰 보라라는 수녀와 결혼해 6자녀를 뒀는데 종교를 불신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이 늘어나 종교가 대중장악력을 잃으 니 신부가 신으로부터 엄청난 사명을 받고 살아가는 사도인양 포장하기위해 결혼을 금지시키고 성직자라 부르는 것은 비양심적으로 만드는 위선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가 95개 조항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는 교서를 보내 협박하자 루터는 교황의 편지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 교황이 1521년 루터를 파 문하자 루터는 공정한 청문회도 없이 파문됐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다니므로 로마 황제인 카를 5 세가 보름스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출두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교황의 편지를 태우면서 예수는 걸어 다녔는데 교황은 가마를 타고, 예수는 제 자의 발을 씻어줬는데 교황은 자신의 발에 입 맞추라 하며,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교황은 예수의 종들을 이단이라고 화형에 처했기 때문에 그는 가증스러운 적그리스도며 교 황이 나를 이단자라 파문하면 나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파문하리라. 교황은 그리스도

77 의 목자가 아니라 악마의 사도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1521년 4월 루터가 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15일에 걸친 대장정의 길을 가는데 종교의 억압과 수탈에 지친 대중들이 따라다녀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넘쳤으며 교회와 제국의 관심이 집중되자 제국의회는 보름스칙령으로 루터의 법익( 法 益 ) 을 박탈하고 모든 저술의 출판을 금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회에서 교황이라는 권력에 신부라는 직분을 잃어버리고 황제가 법익을 박탈하므 로 죽임을 눈앞에 둔 위험에 처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작센의 프리 드리히가 납치를 위장하고 구출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옮겨 융커 게오르크라고 불 리는 기사로 신분을 위장하고 그곳에서 성경번역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작센 프리드리히는 영주로 왕권에 저항하는 권력다툼을 목적으로 루터를 구출했는 데 루터는 10개월 동안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황제와 교황을 피한 도망자신분으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성경( 신약)을 독일어로 번역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쓸 수가 없 어 '9 월 성경' 이라 명명하고 1522년 9 월에 출판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번역한 성서가격은 1권이 가정부 1 년간 급료에 해당하는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9월 성경 의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 12개월 동안 2쇄에 걸쳐 6000부 가 인쇄됐으며 1534년 무렵 루터는 히브리어 성경( 구약)을 번역해 출판하므로 일반 인들도 모세와 예수가 주장했던 평등과 자유에 대한사상을 깨달았다고 봅니다. 루터는 번역방법에 대해 집 안에 있는 어머니와 거리에 있는 아이들 시장에 있는 보통 남자와 이야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잘 관찰하고 그들이 말하는 방식과 요구에 맞추어 번역해야 한다. 라고 실토하므로 성경은 원본 그대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에 맞게 번역된 것입니다. 종교의 수탈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대중들의 원성이 극에 달해 종교개혁 바람이 불고 있는 와중에 콜럼버스라는 사람이 13세기 이탈리아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의 < 동방견문록>을 읽고 신대륙을 발견하는 탐험가가 되기 위해 1484년부터 후원자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자 아들 디에고와 함께 포르투갈을 떠났다고 합니다. 포르투갈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후원자를 찾다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 을 만나 지원을 받고 의사, 목수, 은 세공사, 에스파냐 황실사절, 아랍어 통역사 등 모두 90명의 인원과 항해를 했는데 1492년10월12일 핀타호의 선원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 가 육지가 보인다. 라고 외치므로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신대륙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는데 그들 은 작은 창 말고는 무기도 없고 태도도 호의적이다. 내가 칼을 보여주자 한 남자가 칼날을 잡는 바람에 손을 베였다. 나는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갖도록 하고 싶다. 무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개종시키고 싶다. 라고 회상했을 정도로 평화롭게 살 고 있었습니다. 칼도 모르고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통제하고 굴복시키기 위해 거짓을 주장하는 창조론과 유일신을 세뇌하며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만 취득하면 권력이 되는 시장을 전파하려고 39명의 선원이 권력을 행사하는 식민지를 만들었으며 에스파냐왕실에는 신대륙에 향료와 금광이 많다고 거짓 보고를 하고 돌아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에 현혹된 에스파냐왕국의 지원을 받아 17척의 선박과 1200여명의 선원을 모아 두 번째 도착한 아메리카에는 남겨두고 떠났던 39명의 선원들이 황제인양 군 림하며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는 등 악행을 저지르다 원주민들에게 몰살당한 후라서 콜럼버스는 보복하기 위해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려고 사냥했습니다. 콜럼버스는 1495년 초 타이노족 5백 명을 4척의 선박에 실어 유럽에 노예로 팔았

78 으며 이렇게 팔려온 원주민들은 머나먼 바다를 건너 갈 수도 없어 이국에서 엄청난 박해를 받으며 노예생활( 킨타쿤테 만딩고) 을 해야 했고 아메리카에서는 14세 이상의 원주민 남자들은 석 달에 한 번씩 강제로 금을 바치라며 억압했다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면서 유럽 질병인 천연두와 같은 바이러스가 퍼져 50년 동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사망했음에도 자신의 야망을 위해 4번째로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지원한 작은 배 4척을 타고 1502년 5월 항해를 갔다 돌아와 1506년 5월 21일 54 세로 숨졌다고 합니다. 교회가 타락해 우상을 섬기고 대중들을 착취해 재물을 모아 부를 축적하고 흥청거 리며 산다고 반발하던 종교개혁가인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1522년 세 자녀를 둔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를 가진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주교에게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제출했다는 것입니다. 7월에는 시 당국이 기획한 토론회에서 67 제안( 提 案 ) 을 발표하고 설득하므로 종교개 혁에 호응하도록 했으며 제2 회 토론에서는 성 화상( 聖 畵 像 ) 폐지에서부터 십자가와 제단 그리고 오르간으로 예배하는 것과 성직자의 결혼은 금지시키는 것은 성경에 어긋나고 오히려 성직자들을 비양심적으로 타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가 십자군이라는 용병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 라고 비판했으며 성직자의 결혼금지는 믿음지상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의 자연 적 본능인 성적욕구를 제어하고 의무화하는 것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자유 를 허락한 신의 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는 불타는 정욕 때문에 그 동안 많은 흉측한 짓들 을 해왔다." 고 실토하며 " 마음을 상하게 할 정도로 자주 그리고 결렬하게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만으로도 결혼의 명백하고 충분한 이유가 된다." 했으며 " 음탕하고 뻔뻔 스런 개" 로 여겨지는 자신들이 일반인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모순된 현실을 바로잡 기 위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카를슈타트는 성직자에게 강요된 독신생활은 은밀한 동거뿐 아니라 간음, 동성연애, 자위행위를 조장해 음란의 나락에 빠뜨리고 억압된 성적욕구는 성직수행을 해친다 고 했으며 츠빙글리는 67제안 49에서 교회가 결혼을 금지시키면서 내연의 처를 거느리라고 돈을 지급하는 것은 스캔들이다. 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독단적인 횡포로부터 모세와 예수가 살아갔던 사상들로 되돌리기 위해 개혁 가들이 활동한 것을 프로테스탄트라고 칭하는 것이며 1525년 취리히에서 최초로 프로테스탄트교회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법이 만들어지자 신성로마제국과 영국 에서도 성직자의 결혼을 법적으로 승인하게 됐습니다. 성직자가 신의 대리자라며 혹독하게 수탈하고 착취하는 행위 그리고 황제가 세금을 징수해 부리는 병사를 동원해 무력으로 억압하며 불평등을 강조하는 행위에 짓눌렸 던 소 영주 후텐과 지킹겐은 루터가 교황과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독립적인 권력을 잡기하기 위해 1522년 제국기사들과 반란을 일으켰다 연방 군주 들에 의해 진압됩니다. 1524년 6월 슈바르츠발트지방의 스튈링겐 백작이 농번기에 백작부인이 실을 감는 데 사용할 달팽이껍질을 모아오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초야권( 노예나 소작농들은 결혼 하면 반드시 첫날밤을 신부가 영주와 동침해야 됨)을 반납하는 대신 현금을 내 놓으라 고 요구했으며 농사를 짓는 농기구를 빌려주고 엄청난 사용권을 요구하는 고리대금 업의 횡포에 반발해 농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농사도 지었지만 모직물의 발달로 많은 가난한 농민들이 자유롭게 미개간 지 공유지 등 공동이용이 가능한 토지에 양을 길러 양모를 생산했는데 영주와 일부

79 요먼(Yeoman)들이 농민들이 농사짓던 토지에까지 울타리를 둘러치고 자신의 영토라 면서 농민들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사용료를 받아 챙겼습니다. ( 인클로져) 요먼(Yeoman)이란 영국에 장원제가 해체될 시기 지주소작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농민들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해서 암투가 벌어지면서 분열했는데 40실링 이상의 자유보유지( 自 由 保 有 地 ) 를 사들이면 독립된 자영농민이 될 수 있었고 이렇 게 농민들 중 상층부를 이룬 사람들을 칭하는 뜻입니다. 당시는 농사도 지었지만 공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도시공장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지만 공장에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휴식시간도 없이 노동을 하는 것보다 농촌 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낫다며 농민들은 농사짓기를 원했는데 노동자가 필 요한 상공인들과 귀족의 결탁으로 울타리를 장려해 횡포가 극에 달했습니다. 영주들과 요먼들이 농민들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행위로 인해 자신의 노동으로 먹을 것을 생산해 자유롭게 살던 농촌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 게 된 많은 농민들은 쫓겨나 도시로 나가 노동자가 되거나 예비노동자인 도시 영세 민이 되어 빈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농사를 지을 때는 남자는 논에서 여자는 밭에서 일해서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어 여자가 남자를 단속하지 않았지만 도시에서 노동자가 되자 남자가 벌어주는 수입으 로 여자와 가족이 먹고 살게 되므로 여자와 가족들의 생계를 남자에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어 남자를 단속하고 묶어두는 일부일처제가 강화됩니다. 여성들 스스로가 먹고 살길이 없어 선택한 일부일처제 강화는 여성들이 육아와 가 사노동에 속박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먹을 것을 벌어온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에서 폭 력행위도 참아야 했으며 한 사람과 한번 결혼이라는 굴레를 쓰면서 성생활이 만족 하지 못해도 참고 살아야하는 인간본능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남성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남성우월주의나 칠거지악 또는 모성본능 이라는 거짓에 세뇌되어 한번 성관계를 가지면 평생 그 남성만 기다리며 살아야 하 고 남성이 사회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노동을 회피하면 여성이 자기 몸을 희생해서 라도 그 남성의 씨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강제착취를 낳았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존재가치는 부정되고 며느리 또 는 누구 엄마로 칭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낳았지만 자신의 성씨와는 무관한 결혼한 남편집안의 성씨를 따르는 종족을 유지하고 번창시키기 위해 남편이 경제능력이 없 으면 여성이 벌어 가족 전체를 먹여 살리는 착취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남성노동자에게는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가 주어져 노 동현장에서 인간이하의 비인간적인 욕설과 기계취급을 받아도 저항하지 못하고 참 아야 하는 족쇄가 되었으며 자녀에게 들어가는 학비와 양육비용을 벌기 위해 평생 을 감시와 통제 속에 생산하는 노예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산업의 발달은 계층 간 삶의 질도 변화시키는데 농사를 짓고 살 때는 누구나 논밭 에 나가 자신이 노동한 만큼 농작물을 수확해서 큰 차이가 없었으나 도시로 쫓겨나 공장노동을 하면서 모두에게 균등하게 노동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공인 들에 의해 노동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수입이 없어 더 빈곤해 집니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물질을 생산하고 이윤을 남기는 상공인들은 모든 사람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기도 하지만 자신의 권리와 노동력만큼의 임금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해고하므로 절대복 종을 강요하고 저임금으로 채용하기 위해 예비노동자인 실업자를 양산합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숙련공과 비숙련공, 제조업과 비제조 업 철강업과 화학업종, 관리직과 비 관리직, 사무직과 생산직 등등으로 나뉘어 계층

80 간에 반목대립하게 하므로 단결할 수 없도록 분열을 조장하고 착취계층인 상공인들 의 이윤을 위해 헌신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대 농장제인 장원제도가 무너졌음에도 영주계급이 부역을 부활하고 농민의 생산을 제한하며 착취하자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던 농민들이 봉기하게 되었으며 당시에 농 민 단에는 용병출신 한스뮬러가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병사들은 이탈리아 를 침공 중이었기 때문에 영주를 지원해 줄 수 없어 굴복했습니다. 농민 단들은 부근 소도시에서 종교적 압박을 받던 시민들과 손잡고 신앙의 자유와 봉건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며 저항했고 영주측은 황제병사들의 지원을 받지 못해 농민들을 진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섭에 응하자 농민들은 영 주를 굴복시키고 승리한 후 10 월에 자진해서 해산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땀 흘려 노동해도 항상 가난에 찌들어 사는데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정치 관료들은 노동한번 하지 않고도 자신들보다 호화롭게 살아가는 불평등한 세상을 바 로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농민들은 한스뮬러와 함께 겨울 동안 조직을 더 강화했고 1525 년 봄에는 남독일 전역에서 독자적인 농민 단이 결성되었습니다. 농민 단은 주교와 교황이 마음대로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을 중단하고 지역주민들이 직접 성직자를 선임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했으며 농노제와 세금을 폐지할 것 그리 고 부역지대조세를 경감하고 공유지를 해방시키라는 등을 요구하며 농민을 억압하 던 많은 수도원과 성채를 불태웠습니다. 농민들이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는 저항이 벌어지자 마르틴루터는 영주와 황제를 찾 아가 하느님의 종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고 부추기 면서 권력에 저항하는 농민들은 미친개를 때려잡듯이 누구든 할 수 있는 사람은 찌르고, 치고, 죽이게 하라 고 말하며 선동했습니다. 루터는 평등사상을 외면하고 성직자들이 대중을 통제하고 다스리며 기득권으로 누 리기 위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성전 안에서만 있는 것이지 성전을 벗어 난 사회생활에서는 평등하지 않다. 고 강변하면서 억압과 착취에 견디지 못해 폭 발한 농민들의 분노를 무력으로 억압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 이라는 수장령(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면서 평등을 부정했고 양민을 학살하며 억압으로 권력 을 누리는 자들의 폭력을 정당화 했으며 종교를 권력에 종속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권력의 억압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도록 강요했습니다. 루터의 선동으로 학살당하던 농민 대들이 성직자를 불신할 때 종교개혁가 이자 신 부인 토마스 뮌처는 루터가 농부와 수공업자의 현실을 배반하고 있다 면서 거짓 말 박사 혹은 비텐베르크의 정신 나간 나약한 인물 이라고 비난하고 가난한 사람 들을 곤궁에서 구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혐오스 러운 일이다. 라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외쳤습니다. 뮌처는 모든 고리대금업자, 도둑, 강도 중 국왕과 지배자들은 최악이다. 그들은 가 난한 농부들과 수공업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해 누리고 산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소 한 법률을 하나만 어겨도 그 대가를 치러야하지만 영주나 성직자들은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는다. 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으므로 저항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뮌처는 빈부의 격차가 없는 사회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 라고 외치며 사람 들을 설득하고 다니자 1524년 만스펠트와 그 근처 광부와 농민이 저항을 시작해 튀링겐과 하르쯔를 지나 14일 만에 40여 개의 수도원과 수녀원을 점령하고 파괴하 면서 점점 들불처럼 빠르게 커지기 시작해 1525년 초봄에는 남쪽 바이에른과 중부

81 독일의 헤센지방을 뺀 신성로마제국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루터는 농민혁명의 책임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제후에게 있다면서 혁명적 개혁자 등 장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면서도 독일의 제후들에겐 옛 자치단체 규범과 관습으로 되 돌아가라며 저항하는 농민들을 병사의 무력으로 때려잡으라고 선동했고 농민들의 무장봉기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저항을 희석하고 굶주림으로 생기는 혼란은 기독교인이 고난 받는 것이라며 교인들의 합류를 막았습니다. 농민과 광부 그리고 도시민들은 1성직자를 교구민이 뽑을 권리 2성직자가 누리고 살기 위해 십일조와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금지 3농노제의 폐지 4사냥과 고기잡이는 필요한 사 람이 자유롭게 하도록 보장 5연료와 목재로 사용하는 벌목의 자유보장 6가혹하게 세금을 늘리는 증세금지 7부역 증대 거부 8농사도 짓지 않는 자들이 징수하는 토지세반대 9영주 가 농민이나 서민을 처벌하는 행위금지 10목초지를 영주가 통제하는 행위를 금하고 공동으 로 사용 11사람이 죽어도 돈을 받는 사망세 폐지 12위 조항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 도록 보장하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뮌처는 그리스도께서 말하길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대들은 이 칼 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거스르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 해야 한다. 모세의 다섯 번째 경전 7장에 말하길 너희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동 정치 말고 그들의 제단을 부수고 그들의 우상을 파괴하고 불 질러 나의 분노가 너 희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라면서 무장저항은 주장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은 5월 2일 쉬톨베르크로 진격해 공작 보도 3세에게 농민군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서명을 받아냈으나 5월 14일 프랑켄하우젠에서 화승총으로 무 장한 병사들에 의해 학살당하며 패배하자 보도 3세는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도륙했 으며 뮐하우젠에서 사로잡힌 뮌처는 온갖 고문을 당하다 5월 27일 36살의 나이로 법이라는 명분으로 살해당했습니다. 뮌처가 구상한 천년왕국은 고문당하며 진술한 기록밖에 없는데 농민군에 함께한 목표는 모든 기독교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과 복음을 거부하는 군주 및 지주들을 죽 여 없애는 것이며 모든 물질은 공유하고 쓸 일이 생긴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 며( 분배) 이를 거부하는 군주, 공작, 지주들은 처음에는 경고를 받고 그 다음에는 참 수한다. 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농민전쟁으로 절대적 권한으로 대중을 지배했던 교황청과 주교들이 억압하고 착 취하던 통치행위가 막을 내렸으며 노동을 하지 않고 창조론이라는 거짓과 유일신이 라는 위선을 팔아 편하게 먹고 살려는 자들이 교황청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교회를 만들어 내므로 그리스도교는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나눠진 것입니다. 힘들게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헌금과 십일조만 걷어도 평생을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다고 판단한 신학대학 졸업생들이 교회를 짓고 목회자라면서 우후죽순처럼 여기 저기서 준동하기 시작하자 이들을 통제하고 숫자를 제한하기 위해 교회중앙조직인 장로회와 영국국교회( 성공회), 예수회 등을 만들었습니다. 종교가 신교와 구교로 나누어지자 신교와 구교 사이에 끝없는 전쟁이 벌어졌는데 신교는 사람에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성경을 쫓아 올바로 해석하고 따르기 위해서 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했고 구교는 지금까지 이어왔던 구 지배질서를 유지하면서 교황을 섬기는 것이 성경에 충실한 것이라며 신교를 배척했습니다. 로마가톨릭 성직자들의 독재에 반발해 새로운 신교를 만든 성직자들이 구성한 신교 에는 로마가톨릭구교의 강제 헌금과 수탈을 거부하는 상공인들과 몰락한 귀족들이 모이므로 많은 신자를 확보한 신교는 빠르게 성장하여 종교적 영역을 넘어 정치권 력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기득권으로 성장합니다. 구교를 고수하고 있는 성직자들 중 일부는 영주라는 칭호를 받고 봉토를 받아 노동

82 자와 노예의 노동을 착취하며 누리고 살 수 있지만 교회만 가지고 십일조와 헌금만 으로 생활하던 성직자들은 신자 수가 줄어들수록 정치적 권한도 약화됐을 뿐 아니 라 수입이 줄어 생활이 어려워지게 됐습니다. 성직자들이 누리고 살기 위해 수효가 줄어든 신자들에게 더 많은 헌금과 수입보다 넘치는 십일조를 징수하므로 신자들이 빈곤해지자 그 모든 어려움이 성직자가 누리 고 살기위해 수탈해서 빈곤해진 것이 아니라 이단이고 악마 교인 신교에 있다고 설 교하여 적대감을 심으면서 신교를 억압하고 탄압한 것입니다. 가톨릭이 갈라져 싸움을 벌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불구가 됐으며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들은 종교가 내란에 휩싸여 통치 질서를 유지할 수 없자 1555년 아 우구스 부르크에서 종교의 자유를 평민이 아닌 영주들에게 맡긴다며 화의를 종용하 므로 일단락 됐습니다. ( 아우구스 부르크의 화의) 농민들의 저항이 병사들의 무력으로 진압 당하자 농민군이 준동하지 않았던 남쪽 바이에른과 중부독일의 헤센 지역 영주들은 현재의 회사사장들이 사규( 社 規 ) 를 만들 듯 자기 영토 안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농민을 억압하는 규칙을 정하고 과중한 벌금을 징수하며 착취한 행위를 재판농노제라 합니다. 법이란 모든 사람이 공정하게 지키기 위해 존재하거나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법 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 있는 자들( 선출직 국회의원도 당선되면 귀족이고 자신들의 이익 을 위한 법을 만들지 일반국민이 법을 만들지 못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해관계 있 는 대중들을 굴복시키고 착취를 합리화 하기위해 만듭니다. 도로교통법 같은 것도 모두가 지켜야 할 질서 규범 같지만 국민의 혈세로 먹고 살 면서 법을 집행할 권한 있는 자들은 법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법이라는 핑계로 대중들의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하면서 자연스럽게 억압에 순종하도록 길들이기 위 해 사용하는 것이고 범칙금이라며 수탈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므로 평등사상을 깨우친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 며 누구나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외치다 토마스 뮌처까지 처형당하고 장 칼뱅 이 루터와 츠빙글리의 사상을 요약했다며 그리스도교 강요 (Institutes of the Christi an Religi on)라는 책을 발행하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칼뱅이 예정설과 근면 금욕 그리고 자기직업에 대한 충실을 강조하고 모든 사람들 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몰락하던 봉건귀족과 노동착취 와 양민갈취로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은 세금으로부터의 자유와 시장과 이자획득의 자유라며 지지하므로 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출발했습니다. 칼뱅이 영주와 귀족들로부터 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소유한 재물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개인재산뿐 아니라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도 인정되므로 노동력착취가 합법화되고 시장자유가 인정되면서 갈취가 합법화 됩니다. 칼뱅은 국교회에서 행하는 로마가톨릭의 제도 의식( 儀 式 ) 을 배척하면서도 도덕과 주 일( 主 日 : 일요일) 의 신성화 그리고 향락제한을 주창하므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철 저하게 종교를 앞세워 교회가 공중도덕과 위생 및 화재 예방 같은 모든 문제에 관 여하며 통제하도록 종교법을 강화하고 신권통치를 주장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학살하고 억압해 대중들이 종교를 믿도록 강요하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억압해도 순종하도록 길들이는 제도를 만들고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를 착취하고 양민들을 갈취하는 행위, 고리대금을 합리화하여 빈부격차를 당연시 하도록 했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만든 규칙과 규정들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착취를 보장하고 범죄를 합리화하며 권리를 존중하는 도구로 승인했지만 반공법( 국

83 가보안법)처럼 억압과 착취를 거부하고 양심을 쫓는 사람들은 고문하고 학살하므로 진실을 은폐하고 헤게모니를 만드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종교가 말하듯 기도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성직이 신의 대리자라면 성직자는 농 민이나 어민들이 재배 수확하거나 채취 또는 포획한 음식을 먹지 말고 존재해야 하 며 노동자들이 감시와 통제 속에 시간 맞춰 출 퇴근하며 새벽잠 저녁잠을 못자고 지 옥 같은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사용하지 말고 존재해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는 노동은 하지 않고 평등을 주장하지만 권위를 내세우고 자녀들은 선교활동이라며 해외여행을 보내 호화롭게 살도록 보장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폐쇄적으로 신자들이 결속해야한 다며 신자들끼리 상인들의 물건도 사고팔도록 하고 조직을 통제 관리하는 대가로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신을 팔아 누리는 자들은 신자들이 과학이 부족해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판단할 수 없도록 하느님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양심에 어긋난 범죄를 저질러 도 용서를 구하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용서받는다. 고 거짓말하는 것이며 신자들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양심에 위안이 되어 종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칼뱅이 제네바에 도입한 교회법으로 4년도 안돼서 58명이 처형되고 76명이 추방됐 으며 16세기말까지 대략 150 명이 화형 당했는데 춤추는 것이나 카드놀이도 집정 관에 의해 처벌 하므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거나 또는 신학적으로 칼뱅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가혹하게 억압했습니다. 기록에는 예를 들어 한 미용사가 신부의 머리를 단정치 못한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틀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머리를 만지는데 함께 한 그 어머니는 여자 친구 두 명과 함께 그 일을 도왔다는 이유로 같은 벌을 받았다 는 기록이 있는 것 을 보면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위해 어떻게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농민들이 저항할 때 상공인들이 물질을 판매할 권한의 자유( 착취와 갈취의 자유)를 요구하고 칼뱅이 주장한 재산소유의 권리를 위해 또 자신들이 몰락한 귀족( 침략학살 자의 후손들)보다 재물이 풍요로움에도 사회적 지휘와 권한이 낮은 것에 반발하니 사회가 혼란스러워집니다. 네덜란드는 중세 이후 모직물공업과 중계무역을 하고 광범한 자치권을 행사하며 한 창 번창했는데 종교개혁 이후 북부 여러 주에 칼뱅파( 派 ) 의 신교도가 급증하면서 자 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556년에 에스파냐 왕이 된 펠리페2세는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임을 호언하면서 신교도들을 탄압했습니다. 도시에 대해 중세( 重 稅 ) 를 부과하고 상업을 제한했으며 자치권을 박탈하고 본국으로 보내는 공물을 늘려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수탈을 늘리자 1566년부터 북부는 물 론 남부 여러 주의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시민까지 봉건 대 귀족이었던 에그몬트 백 작과 호른 백작의 지도 아래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1567년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한 알바공은 정예병 1 만 명을 끌고 와서 일명 " 혈 ( 血 ) 의 평의회( 評 議 會 )" 라는 심문소( 審 問 所 ) 를 개설하고 지도자인 에그몬트와 호른 등 을 비롯한 8,000 명 이상을 종교재판( 宗 敎 裁 判 ) 으로 처단하면서 독재공포정치로 갈취 의 자유를 요구하는 프로테스탄트( 신교도)들을 잔악하게 학살했습니다. 학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알바공은 상류귀족과 부유한 시민계급의 재산을 몰수하고 무역에 중세를 부과함으로 상업 활동이 마비되고 매뉴팩처의 기능이 정지되므로 실 업자가 증가하자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와 착취의 자유를 찾아 시민들은 영국, 독 일 등으로 10 만 명 이상이 망명하게 됩니다. 공포정치를 펼치며 억압하고 수탈하자 1572년부터 에스파냐의 지배층에게 고이젠

84 ( 거지들)이라 불린 신교도( 칼뱅파)를 중심으로 해상에서 에스파냐의 은선단( 銀 船 團 ) 을 습격했으며 오라내공 빌렘을 지도자로 선출하고 다수의 귀족과 상 공업자 그리고 농민들이 합세하여 독립전쟁으로 발전했습니다. 1576년에는 남북 여러 주가 브뤼셀에 모여 동맹을 맺음으로 독립전쟁이 본격화되 지만 종교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도 이해관계가 다른 남 북의 불일치( 不 一 致 ) 가 해소되지 않아 대립할 때 새로 부임해 온 총독 파르마공( 公 ) 의 종교 이간책에 넘어 가 1578 년 남부는 에스파냐에 굴복하게 됩니다. 홀란드 등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고 항전하면서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했으며 윌리엄을 초대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설립하고 자체적으로 제도와 체제를 만들어 공물의 상납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치국 권한을 행사하던 중 1584 년 윌리엄이 로마가톨릭교도에게 암살당합니다. 1588년 에스파냐 무적함대가 격파되고 오랜 전쟁과 내전으로 재정적으로 궁핍할 때 펠리페2 세가 사망하자(1598) 펠리페 3세가 즉위하면서 1609년에 에스파냐와 12 년간의 휴전조약( 休 戰 條 約 ) 을 체결했으나 휴전이 만료되고 계속 전쟁하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에스파냐 속령( 屬 領 ) 이던 네덜란드는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종교전쟁과 청교도 혁명 목 록 종교가 권력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땀으로 물질이 풍족해져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양민을 갈취해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이 늘어났지만 귀족들은 권위가 무너졌으며 재물을 축적할 수 없으니 구교와 신교 간에 30년이라는 오랜 기 간 동안 전쟁[ 三 十 年 戰 爭, Thirty Years' War] 을 일으킵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구교를 채택했는데 30년 전쟁의 발단은 구교( 로마가톨릭)를 부 정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남부를 중심으로 루터와 칼뱅의 사상을 받아들여 개신교 를 만들고 갈취로 부를 축적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그노(Huguenot)라 불렀는데 이 신교를 구교가 억압하고 탄압한 것이 위그노 전쟁입니다. 구교를 신봉하는 기즈 공작이 1562년 예배를 올리던 신교도들을 기습 공격해 시작 된 전쟁은 3차전 후 양측이 합의를 이뤘으나 귀족들과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지 않 았으며 1572년 8월 24 일 성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 의 축제일( 카트린의 딸과 나바르 왕의 결혼식)에 참석한 신교신자들을 기즈 공작이 대량 학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하자 격분한 신교도들이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신교도들을 학살해서 벌어진 위그노 전쟁은 3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종교 간의 기득권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내전으로 번져 통치가 불가능 해지자 국왕으로 등극한 앙리 4세가 화해시키기 위해 1592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598년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함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낭트칙령의 주된 내용은 1. 로마가톨릭 이외의 믿음을 탄압한다는 조항 삭제, 2. 개신교의 예배는 기정사실로 인정된 지역에서 허용하고 파리시에서는 금한다. 3. 개신교신자의 재산상 속, 대학교입학, 관리취임을 허용, 4. 개신교신자가 장악한 요새를 종교의 자유를 위한 안전 지대로 인정. 5. 파리 고등법원 내에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간의 분쟁기구 설치( 개신교 6 명, 로마 가톨릭 10 명) 지방고등법원에서의 분쟁기구는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수를 같게 함. 등으로 구교에 유리한 내용입니다. 성직자와 권력 그리고 신자간의 이권 때문에 발생한 종교 분쟁을 화의나 칙령을 발 표한다고 근본적인 원인인 구교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생활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항상 불씨를 안고 있었고 권력을 차지한 왕들이 신교를 믿느냐 구교를 믿느 냐에 따라서 또한 재물을 축적할 욕망에 따라 재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1617년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왕위에 올라 구교의 절대 신앙을 강요

85 하자 년 독일의 신교( 프로테스탄트)와 구교( 가톨릭) 제후( 諸 侯 ) 들이 각기 신교 연합과 로마가톨릭교 연맹을 결성해 대립할 때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 프로테 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또다시 30 년 종교전쟁이 시작됩니다. 1619년 페르디난트 2 세가 황제가 되자 보헤미아인들은 팔츠선제후( 選 帝 侯 ) 프리드 리히 5세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대항하므로 전쟁이 발생되었는데 1620년 바이서베 르크 싸움에서 패배하자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헤미아의 신교 ( 프로테스탄트)도들은 극심하게 탄압했습니다. 권력과 구교들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 버지니아(' 처녀' 라는 뜻)' 에 가면 농토가 풍부하며 엄청나게 넓은 땅을 자신이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표시 한 만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말에 1620년 102 명이 ' 메이플라워' 호 를 타고 도착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 땅은 버지니아도 아니고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의 첫 식민지로 삼기 시작해 1 585년에 남자 89명과 여자 17명을 버지니아 지방에 데려가 살게 하면서 점령하려 했던 것인데 1589년에 영국 배가 다시 찾아가니 왕실에서 보냈던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원주민만 있었습니다. 영국왕실에서는 엄청나게 넓은 영지가 있음에도 머나먼 땅으로는 아무도 가려고 하 지 않아 공물을 받지 못하던 차에 구교가 신교를 억압하고 왕실도 구교방식으로 통 치해야 부를 축적하고 대중들을 억압하며 쉽게 수탈할 수 있기 때문에 신교도들을 추방하고 식민지로 삼을 욕심에 퍼트린 말에 신교도들이 현혹된 것입니다. 처음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는 엄청나게 넓은 대지에 원주민들은 사냥 과 유랑생활을 하며 평화롭게 살았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곳 인줄 알고 자신이 경 작하지 못할 정도로 넓은 땅들을 차지했지만 돌아온 원주민들은 자신의 영토에 이 방인들이 침입한 것을 보고 쫓아내려 했습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화력( 총)으로 무장한 이주민들을 자기영토라지만 나무창과 나무 활로 무장한 원주민부족이 당해내지 못하고 부족이 멸종하므로 초기 청교도들이 정 착하면서 이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농사지을 농장과 목장을 만들기 위해 많은 땅을 차지하며 원주민 여러 부족과 전쟁이 벌어집니다. 자신이나 가족의 힘으로 경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을 차지한 청교도들은 원주 민을 사냥해 노예로 삼기 시작했으며 자유롭게 살다 붙잡혀온 원주민들이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도망가자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과 목에 쇠사슬을 묶어 목 화밭과 옥수수 또는 밀밭에서 강제노동을 시키며 부를 축적했습니다. 당시는 직물산업이 발달하던 시기라 많은 사람들이 옷감을 만들 수 있는 목화를 재 배했으며 다른 농사도 마찬가지지만 기계가 발달되지 못했던 시절엔 목화와 사탕수 수를 재배하는 것은 사람의 손이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한 작업이고 식물의 표면이 거칠어 잘못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생기는 매우 험한 작업입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영토를 노리다 신교와 구교간의 전쟁을 빌미로 영 국과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독일을 침공했으나 황제 군에게 패배 하고 1629 년 뤼베크 조약으로 화해했으며 황제가 배상령( 賠 償 令 ) 으로 종교제후( 宗 敎 諸 侯 ) 의 영지( 領 地 ) 를 회복시키므로 신교를 인정한다고 선포하게 됩니다. 신교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가 프랑스의 후원으로 독일을 침공해 라이프치히전투에서 황제 군을 격파했으나 1632년 뤼첸전투에서 패배했으 며 계속 패배를 거듭하던 스웨덴 군은 1634년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이 암살되 자 1635 년 황제와 그리스도교군의 작센 선제후는 프라하에서 화의를 맺습니다. 독일영토를 탐낸 프랑스가 1635년 스웨덴과 연합해서 독일과 에스파냐에 선전포고

86 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자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제후들과의 오랜 내전으로 전세가 불리해 1641년 종전을 제의하므로 1644년부터 시작된 강화회의는 1648년 베스트 팔렌조약이 성립되면서 독일인구 1/3을 죽음으로 몰고 간 30년간의 종교전쟁이 끝 난 것입니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국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을 차지하고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제후국이던 프로이센은 18세기 초에 왕국이 되었으며 브레멘과 베르뎅은 스웨덴이 점령했고 프랑스와 스웨덴은 독일제국의회에 선거권을 가지므로 독일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영방군주와 성직자들이 권력을 누리기 위해 30년 동안이나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 던 종교전쟁이 막을 내리므로 독일 제후국 내의 루터파와 칼뱅파는 구교와 같은 동 등한 지위를 획득하게 되지만 전비를 부담하느라고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 하게 전락했으며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착취는 극에 달했습니다. 임금을 지급한다고 하지만 전시라는 핑계로 상공인들은 노동현장에 명령체계를 갖 추고 식사 값도 되지 않는 저임금을 지불하면서 강압적으로 하루 종일 생산노동을 강요했으며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할 뿐 아니라 수면 까지 취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노동하며 죽어갔습니다. 반항할 힘과 판단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어린아이들을 노동현장에 선호했는데 넓 은 굴을 팔 수 없는 광산에서는 체구가 작은 어린아이들을 광부로 채용해 혹독하고 위험한 노동을 강요했으며 여성들의 세심한 노동을 요구하는 방직공장에서는 어린 소녀들을 고용해 하루 15 시간 이상씩 노동을 시킨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억압과 착취를 거부하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면서 1662년의 모스크 바 민중반란이 발생했다 진압됐으며 1770년대의 스텐카 라진 대반란이 발생해 절 대왕정에 저항했지만 실패하므로 차리즘(Tsarism)이 강화되고 전국회의( 全 國 會 議, Ze m ckii Sobor, 젬스키 소보르)가 소멸하면서 중앙 행정기구가 재편성됩니다. 독일과 유럽이 종교전쟁으로 분열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도 신구교간의 분쟁이 일어 나게 되는데 찰스 1세가 왕권을 강화하기위해 의회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 수하면서 폭정을 정당화하고 반발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구교로 복귀해서 신교도인 청교도들을 탄압하자 결국 청교도혁명(1642년-1653 년)이 일어났습니다. 찰스 1세는 황태자시절에 에스파냐 공주에게 청혼을 했다 퇴자를 맞자 앙심을 품고 에스파냐를 정복하려고 했으며 전쟁을 벌이기 위한 군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 을 걷으려고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가 찰스1세의 제의를 거부하자 의회를 해산했 다가 1628년에 3 차로 회의를 소집합니다. 3차로 의회가 열리자 하원의원 에드워드코크는 권리청원( 의회 동의 없이는 세금을 걷 지 못하며, 법에 의하지 않고는 누구도 구속할 수 없다. 는 것으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내용)을 제출했고 돈이 급했던 찰스1세는 권리청원에 서명을 하고 돈만 챙긴 다음 의회를 또 해산 시켜버리는 폭정을 저질러 왕당파와 의회파가 대립했는데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승리하게 됩니다. 왕당파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이 절대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하는 국왕파고 의회 파는 런던과 옥스퍼드를 중심으로 권력은 선출자의 뜻에 따라 의회를 중심으로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의회파가 권리청원을 제 출하자 찰스 1 세는 병사들의 무력으로 의회 파를 없애려고 군대를 모았습니다. 의회 파는 5만 명에 달하는 철기 군을 조직하고 대항하므로 왕당파가 패했으며 승 리한 의회파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입헌 군주제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젠트리 출신 신교도 크롬웰은 스스로 호국경이라고 칭하고 종교적으로 국민을 통제하기위해 풍

87 기단속법을 만들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도박을 금했습니다. 또한 일요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며 극장을 없애버리는 등 금욕적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독재정치를 실시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죽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민들이 그의 목을 치고 1688년 다시 권리장전( 인권선언)을 제출해 의회가 승 인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니 이를 명예혁명이라 합니다.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한 인권선언의 내용은 1.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 정지를 금지한다. 2.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 평시의 상비군을 금 지한다. 3. 선거의 자유, 의회 발언의 자유, 국민청원권을 보장한다. 4. 의회를 소집 한다. 5. 국민의 청원권, 의회의원의 면책특권, 신체의 자유에 관한 제반규정 6. 왕 위계승자에서 로마가톨릭 교도를 배제한다. 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크롬웰이 죽고 찰스 2세가 즉위하자 영국국민들은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갈망했으나 왕당파가 다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들은 거의 왕당파가 독차지하므로 기사당의회가 되었고 찰스 2세는 이를 배경으로 철저한 전 제 정치를 펼쳐 구교와 절대군주제에 위협이 되는 청교도들을 억압합니다. 1670년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서 20만 파운드의 연금을 받고 반란이 일어나면 영 국과 군사적 원조를 받는다는 밀약을 맺으며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에스파냐 및 네 덜란드에 대한 전쟁에 협력할 것을 약속하며 로마가톨릭세력을 복귀시키자 신흥지 주들의 힘이 약화됐고 기사당의회에도 불안감을 심어 반발세력이 생깁니다. 젠트리(Gentry)는 영국에서 귀족의 지위는 없으나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고 요 먼 이상 귀족이하의 토지소유자를 뜻하는 말로 부유한 지주와 법률가 성직자 등 전 문적인 직업을 가진 자 및 부유한 상인 등을 핵심으로 이루었던 계급으로 후일 신 사를 뜻하는 영단어인 젠틀맨(Gentleman)은 여기서 유래됩니다. 식량생산의 대량화 목 록 청교도들이 바다를 건너가 원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고 부를 축적할 시기에 영 국에서는 런던 대 흑사병(1665년 1666 년) 이 발생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 으며 흑사병으로 많은 농노와 노동자들이 죽어 생산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 어들자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위가 상승하게 됩니다. 성직자와 상인 그리고 귀족과 예술인들은 생산노동은 감시와 통제 지시를 받는 노 예들이나 하는 비천한 행위라고 거부했기 때문에 흑사병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이 사 망하므로 먹을 것과 사용할 수 있는 물질이 부족해지자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행하 던 가혹한 억압을 금지하고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야 했습니다. 흑사병의 원인균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토양 속에 서식하며 간혹 설치류와 인간 의 체내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데 미셀 드란코르가 정립한 바에 의하면 야생화 된 개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개들은 벼룩에 의해 감염되거나 썩은 시체를 먹은 개의 피를 벼룩이 빨아서 설치류나 인간에게 전파하면 흑사병이 발병된다고 합니다. 농민의 감소는 농사방법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지력( 地 力 ) 의 쇠퇴와 토지노 화를 방지한다며 권력이 경지이용을 제약해 생산성은 낮추고 농업발전을 방해하면 서 강제로 시행하던 휴한제( 休 閑 制 ) 를 폐지하여 경작면적이 늘어났고 순무와 클로버 같은 사료작물을 윤작하므로 가축들의 겨울사료가 확보됐습니다. 목초를 재배하여 가축사료가 늘어나므로 가축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토양의 지력을 위해 비료가 사용되면서 곡물생산이 늘어났고 곡물생산을 늘리기 위해 우마( 牛 馬 ) 가 끄는 목재쟁기로 10Cm 정도깊이로 논밭을 뒤엎던 것을 철재쟁기가 개발되면서 더 깊게 갈 수 있고 뒤집게 되므로 식량생산이 늘어났습니다

88 후일 손으로 파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1730년대 J. 털(Jeth ro Tull)에 의해 조잡한 파종기가 출현함( 直 線 條 播 法 ) 으로 경작용( 쟁기, 가래), 곡물수확용( 낫, 기계), 곡물처리용( 탈곡기)등 용도별로 농기계를 만드는 기계공업이 시작되었으며 1785년 쿡이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파종기를 발명했습니다. 식량난이 해소되고 사람들의 생활상은 나아졌지만 귀족인 영주들과 상공인들의 수 탈과 착취로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대중들의 원성이 높았는데 영국국왕인 월리엄 3 세는 전쟁을 빌미로 절대군주제로 회귀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민을 무력으로 짓밟 으며 억압할 수 있는 수단인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을 만들려 혈안이 됩니다. 독재를 강화하고 땅을 뺏어 부를 축적하며 국민을 억압할 핑계로 벌이는 전쟁비용 을 모으고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하게 되었으며 구 텐베르크가 만들어낸 금속활자에 의해 인쇄술은 발전했어도 동력이 개발되지 못했 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동으로 화폐를 찍어내는 노동자가 생겨났습니다. 인간은 혼자의 노동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물질과 생선 등 모든 물질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힘든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을 필요한 물건과 물물교환을 하며 어울려 살았으나 화폐를 사용하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생산 노동을 하지 않고 화폐만 취급하며 살아가는 부류가 나타납니다. 은행이 만들어지자 아무런 물질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화폐만 관리하는 은행원들이 생겨났고 화폐만 노리는 각종 범죄가 생겨났으며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되면서 이자 라는 핑계로 화폐가 생산노동자들의 노동력과 물질을 합법적으로 착취 수탈할 수 있는 장치( 제도)가 되었고 각종 고리대금업이 기승을 부립니다. 화폐를 유통시키는 시장이 형성되면서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 농민 어민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에 이윤이라며 가격을 올려 판매하고 먹고사는 상인들이 활개를 치게 됐으며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먹고 사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까지 먹여 살 려야 하는 생산에 종사하는 인민들의 삶은 더욱 황폐하고 혹독해집니다.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정치인과 관료들의 먹을 것과 사용할 물질을 생산해야 했던 노동자 농민 어민들이 화폐만 취급하는 금융업 종사자들과 물질을 판매하면서 먹고 사는 상인들까지 먹고 사용할 물질까지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죽도록 노동하지만 생활은 궁핍해지는 것입니다. 착취와 갈취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 거나 다중들을 갈취해 풍족해지지만 생산노동을 하면서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 되지 않아 수입이 없는 다수가 늘어나 소비가 되지 않는 현상을 공황이라 합니다. 공황의 근본 원인은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노동한 만큼 분배가 이루 어지지 않아 빈부격차가 발생하면 대다수인 인민들이 수입이 없어 물질을 구입하지 못하므로 상인들은 상품을 팔지 못해 폐업하게 되고 남은 상인들은 조금 팔아서라 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기득권들은 소비가 멈추면 자신들이 마음대로 화폐를 찍어 공사판을 늘리고 복지라 며 나눠주고 소비를 부추기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다수는 앞으로 굶 주릴 것이 두려워 저축하기 때문에 경제( 소비)는 살아나지 못하고 가치 없는 화폐가 넘쳐 인플레이션만 강화됩니다. 분배불균등 때문에 발생되는 공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만들어 야 하는데 온갖 비양심적인 악행으로 부를 축적하고 기득권이 된 자들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며 언제든지 저희들끼리 뭉쳐 권력을 찬탈하기 때문에 기득권을 지키고 부를 보장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합니다. 기득권자들 간의 서열다툼은 수많은 인민들을 학살하는 전쟁을 통해 자신이 절대

89 다수인 인민들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므로 입지를 강화하며 권력기반을 굳힐 수 있기 때문에 인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복종시키며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전쟁을 조장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수 인민들은 억압 착취 학살당해도 권력을 노리지 않지만 기득권들은 호시탐탐 권 력을 노리기 때문에 수많은 인민들이야 죽건 말건 전쟁으로 다수 인민을 억압하고 생산된 물질과 공장을 때려 부수고 건설하는 재건과정을 통해서 일자리와 임금을 지불하므로 다중의 불만을 달래고 기득권을 유지합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War of the League of Augsburg)혹은 팔츠 계승전쟁(War of the Palatine Succession)은 년까지 있었던 전쟁으로 잉글랜드 계승전쟁(War of the English Successio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1685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폐기하면서 주변국과 공국들이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낭트칙령을 폐기하자 남 서 프랑스에 살던 신교도 약 100만이 동요를 일으키며 반 발했고 당시 생산노동을 하지 않지만 재산을 모아 중산층으로 살던 약 40만 명의상 인 기사 공예인 군인 등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으로 망명하므로 프랑스로서는 그 만큼의 부가 빠져나가는 손실이 발생합니다. 노동자와 농 어민이 땀 흘린 노동으로 생산한 물질로 형성된 재화들이 프랑스를 빠 져나간다고 귀족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며 전쟁을 일으키고 전장에 참여한 수많은 병사들이 죽는다고 해도 귀족들의 삶에는 어떤 손해도 없고 오히려 강제적으로 국민들을 억압하는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가 존중하며 살아야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데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했으며 타인의 재능을 훔치고 지시하고 통제하며 착취 해 부를 축적한 자들과 그 후손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했으며 지금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하면 할수록 착취하 고 억압하는 자들이 없어지지만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저항하지 않고 복종 하면 할수록 복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함께 살아가면서 저항하는 사람들까 지 통제와 감시 속에 고통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루이 14 세는 알사스 북부 팔츠지방 공가( 公 家 ) 가 권력을 이을 남계( 男 系 ) 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동생 오를레앙공( 公 ) 의 부인( 妃 ) 이 팔츠가( 家 ) 출신임을 이유로 영토를 요구했고 독일황제와 바이에른 작센선제후 그리고 에스파냐 네덜란드 스웨덴 왕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독주를 견제할 준비를 했습니다. 전쟁은 프랑스의 팔츠침공으로 개시되는데 전투는 유럽에서뿐 아니라 아메리카 식 민지로도 확대되었으며 루이( 태양왕)의 야망을 막기 위한 동맹은 잉글랜드-네덜란드 총독-왕 윌리엄 3 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 세, 스페인의 카를로스 2 세, 사 보이 공국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등 전 유럽이 연합하도록 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루이는 전쟁을 치르는 병사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을 사용하기 때문에 지나친 군사비 지출로 1696년 프랑스 국민들을 경제적 위기로 빠트렸으며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들이 생산 장비가 파괴되고 농지가 황폐화 되면서 국가들의 재정 이 어려워지자 1696 년 사보이가 동맹에서 이탈합니다. 사보이공국이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동맹군이 약화되자 모든 동맹국들은 재빨리 협 상을 맺어 안정을 취하고자 1697년 9월 레이스웨이크에서 조약을 맺고 서명하므로 전쟁참가 국들은 어떤 성과도 없이 수많은 병사들을 동원해 민간인과 병사들을 학 살하던 9 년 전쟁은 끝났지만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 졌습니다. 병사들은 침략한 지역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재물은 강탈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이

90 사용하는 총과 총알 그리고 군복과 전쟁 중 먹는 모든 물질들은 노동자와 농민 그 리고 어민들이 땀 흘린 노동으로 수확하거나 채취 또는 생산한 것으로 과학적인 생 산력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 수공업노동은 말로 할 수 없이 혹독했습니다. 노동자 농민 어민들은 병사들뿐 아니라 상인 성직자 귀족 정치인 법관 공무원 교육자 의 사 음악 미술가 예술가와 도박사 강 절도범 거리의 룸펜과 거지 등 모든 사람이 살아 가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사용할 물질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가혹했지만 상공인 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자를 판매해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합니다. 노동을 업신여기며 기피하는 자들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욱 혹독하게 노동력을 착취 당했는데 어민들이 사용하는 어망과 그물 그리고 어선 등 모든 어구들을 노동자들 이 만들어야 했고 농민들이 사용하는 쟁기와 낫 파종기 등 모든 농기구를 생산하면 서도 겨우 끼니를 이어갈 수 있을 뿐 부자가 되지 못합니다. 귀족들이 권력을 지키려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이 한창일 때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했던 물리학자 드니 파펭은 1695년에 증기압축으로 실린더가 작동되는 엔진을 만드는 실험에는 성공했지만 세상을 떠나고 토머스 세이버리가 1698년에 세이버리 기관을 발명하고 국왕 앞에서 실험에 성공하여 특허를 받았습니다. 그 후 영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인 토머스 뉴커먼은 파펭이나 세이버리보다 개선된 방식인 증기에 냉수를 부어 식히면서 증기가 액화되어 생기는 진공 감압으로 피스 톤을 움직이게 하는 배수용 증기기관을 제작하여 1712년부터 콘월의 구리 광산에 서 분출되는 지하수를 배출하는 펌프로 사용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방적기계 직물기계 등이 급속히 발달하여 공업이 활성화 되었으며 1764년 글래스고 대학수리소에서 일하던 와트는 뉴커먼기관의 수리요청을 받고 개 량에 착수해 1769년 1월 5 일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의 소모를 줄이는 새롭게 고안한 방법 이란 특허를 취득하고 비약적인 산업기계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평등사상의 발전 목 록 과학이 발달하는 속에 대중들의 정신을 깨우는 철학도 함께 발전하는데 1754년 장 자크 루소는 디종 학술원에서 " 무엇이 인간 불평등의 근원인가?" 라는 서문을 학술 연구 공모전에 제출하면서 소유권 제도와 사회조직의 발전으로 생긴 불평등과 비참 함 그리고 자연 상태의 행복과 평등의 근원을 발표합니다. 1755년 학문적 가치보다 혁명의 원리에 영향을 미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계몽 기에 주장했던 내용은 자연 상태나 사회계약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1762년에 저술한[ 사회 계약론]에서 자유와 평등은 자연권으로 국가가 제약한다면 사회계약에 의해 제한될 수 있으며 권력은 주권을 보장하면서 집행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권력 행사가 정당화되기 위한 조건으로 국민의 전체 의사와 상위한 항상 정당한 일반 의사에 따라 집행하되 그것은 집행 후라도 다수결( 多 數 決 ) 에 의해 반드시 확인 되어야 한다고 하여 다수결 민주주의 원리를 주장하므로 권력집행의 일방적인 독재 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면서 인간평등과 자유를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종교이론과 그 폐해가 발생되는 원인을 분석해 발표하자 가톨릭교회는 성직자를 공격한다는 이유로 체포 장을 발부하므로 1762년 스위스로 도피했다가 1770년 파리로 돌아와 1772년부터 1776년까지[ 루소가 장 자 크를 판단한다.]외의 글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자유주의정신을 일깨웁니다. 루소는 모든 사회악과 사회갈등의 근원이' 경제 불평등' 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지배와 피지배가 강화될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문제가 만 연해지는 것을 보고 이를 ' 일반의지론' 으로 풀어나갔으며 사상 최초로 인간평등문제 를 실천적으로 파고들어 해석하므로 철저하게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91 모든 종교, 이슬람교는 카스트, 그리스도교는 부활과 가족, 불교는 윤회를 주장하며 설파하는 것은 왕권과 기득권이 혈통으로 세습되고 대물림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드리도록 강요하며 무력을 사용해 다중을 억압하고 갈취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활과 상속을 강조하며 보복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과 혈육( 혈통)의 강조는 상속( 세습)을 뜻하므로 신분세습을 세뇌하는 것이며 부 활과 상속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자의 재물을 강탈해 누리고 사는 자들이 다 중을 억압하고 갈취하는 행위는 자신이 죽임을 당해도 부활해 보복한다거나 자손에 의해 보복 당한다는 것을 강조하므로 저항하지 못하게 억압하는 수단입니다. 혈통주의는 제3신분의 사람들이 관직이나 기사계급으로 진입할 수 없게 족쇄로 작 용한 것이며 혈통을 중시하는 상속제도는 같은 혈육끼리도 적자( 赤 子 ) 와 서자( 庶 子 ) 라는 신분상 차별을 두어 조선시대에 유명한 홍길동전에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 라고 표현했듯 평등을 부정합니다. 루소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동등하고 평등하므로 자손이 생존방식을 자연 에서 습득하고 성장하며 집단에서 배워야 함에도 부모가 양육하며 자손의 행동과 사상을 강요하는 것은 부모라는 핑계로 혈육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평등을 부정하는 상속이라며 자연으로 돌아가라 는 명언을 남깁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고 주장하므로 문명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밝혀냈으며 " 자연은 인간을 선량 자유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 노예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라고 설명 하므로 억압을 벗어난 인간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건설을 강조했습니다. 자연(natura) 은 서구어로 본성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간의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주장한 것이며 루소는 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강 조하므로 자연의 낭만성과 야성이 아닌 원시공산사회의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평등 한 사회의 원형을 복원할 것을 다중들에게 설명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9년 전쟁이 종전되고 3년만인 1700년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즉위하면서 이전에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고 발트 해 지방을 탈환하겠다면서 덴마크와 작센을 연합국으 로 북방동맹을 맺고 스웨덴을 침공했으나 덴마크와 작센 군이 각개 격파당하고 각 각 패배하여 대북방전쟁의 1 차전이 끝납니다. 스웨덴은 1560년부터 1658 년까지 핀란드만( 灣 ) 을 중심으로 카렐리아(Karelia), 잉그 리아(Ingria), 에스토니아(EstonIa ), 리보니아를 침략하여 통일했으며 30년 전쟁 중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외레순 해협(1645년과 1658 년 점령)의 북부와 독일의 포메라니아 서부 비스마르(Wismar), 브레멘 공국과 베르덴(Verden)을 점령하고 국가 를 건설했습니다. 외레순 해협은 덴마크의 셸란섬과 스웨덴의 스코네반도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현재 는 덴마크와 스웨덴을 오갈 수 있는 철로와 다리가 놓여 있고 가장 붐비는 뱃길로 1859년까지 덴마크가 양쪽 해안을 장악하고 이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로부터 해협세( 海 峽 稅 : 통행료) 를 징수했으며 바이킹 시대에는 북유럽 국가들 사이의 해전무 대였습니다. 연속적으로 패하던 러시아는 1709년에 잉글랜드(1707 년에 영국), 하노버, 네덜란드, 프로이센, 폴란드-리투아니아(1701년-1706 년, 1709 년까지)와 동맹을 맺었으며 스웨 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1704년-1709 년)와 오스만 제국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동맹 을 맺고 전쟁을 한 것입니다. ( 전쟁이 길어져 동맹국가가 바뀌기도 함.) 인력과 물자가 부족해 21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병사( 용병 외인부대) 들의 봉급과 전쟁 물자를 국가 재정으로 지불할 수 없게 된 스웨덴이 결국 패배하

92 므로 뉘스타드 조약과 스톡홀름 조약으로 1721년 종결되면서 러시아는 발트 해의 지배자가 되고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전쟁으로 약 10만 명에 달하는 각국의 무고한 양민들이 기아와 질병 그리고 전 쟁의 포화로 죽었으며 스웨덴 병사 약 25,000명과 시민 등 175,000명이 전쟁으로 죽었고 러시아군은 약 75,000 명, 폴란드군은 14,000-20,000 명, 작센군은 약 8,000 명 덴마크군 약 60,000 명 등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것입니다. 러시아와 스웨덴이 발트 해를 놓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사이 1700년 어릴 적부 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약해 후계자가 없을 것이라 우려했던 스페인의 카를로 스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모든 영토와 권한을 루이14세의 손자 앙주공작에게 물 려주므로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 5 세(Philip V of Spain)왕이 됐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1 세(Leopold I of Habsburg)가 스페인왕위는 합스부 르크 가문의 권리라며 계승권을 주장하므로 전쟁이 발발했는데 루이14세가 공세를 강화하자 다른 유럽 국가( 영국 주도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공화국)들이 프랑스의 영 토 확장을 제어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측에 가담했습니다. 혈육으로 보면 루이14 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앤(Anne of Austria)이 카를로스 2세 의 선왕 펠리페 4세 딸이며 루이14세의 아내 마리아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는 사 촌으로 카를로스 2 세의 이복 누나인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의 유일한 아들인 프랑스 왕세자 루이(Louis, le Gran d Dauphin)가 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조의 레오폴트 1세는 스페인왕의 사촌으로 그의 어머니는 펠리페 4세의 다른 여자 형제이며 카를로스 2세의 아버지 펠리페 4세는 왕명으로 자신에게 오스트리아 계승권을 물려줘서 받았던 적이 있었 기 때문에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앙주가 죽으면 스페인영토를 프랑스왕세자가 계승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주변 유 럽국들은 프랑스가 강대국이 되어 자신들을 침략하면 영토를 지킬 수 없다는 위기 감과 전쟁에 참여하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할 수도 있다는 기대로 프랑스와 스페인 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결성하고 전쟁에 참여한 것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입니다. 전쟁은 같은 시기에 같이 벌어진 앤 여왕전쟁으로 유럽만이 아니라 영국식민지 주 민들 프랑스식민지주민(corsairs)과 스페인령인 남미북안(Spanish Main)에 거점을 둔 사략선, 해적선과 싸웠으며 북아메리카까지 번져 약 40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병사들을 죽이고 1713 년 위트레흐트조약의 체결로 끝났습니다. 처음 조약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위가 한 사람에게 물려지지 않도록 보장하는 내 용이었기 때문에 1712년 7월 10일까지 체결되지 않다가 펠리페 5세가 스페인과 프 랑스의 왕위가 한 사람에게 양위되게 하지 않겠다고 합의하므로 영국과 프랑스가 휴전에 동의하면서 1713년 4월 11 일에 최종 체결된 것입니다. 이 전쟁 결과로 루이14세의 손자 앙주는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으로 인정되고 필 립과 그의 후손인 베리 공작( 루이14 세의 가장 어린손자)과 오를레앙 공작( 루이14세 조 카)은 같은 프랑스 공작들에게까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스페인의 왕권에 대한 주장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스페인 영토인 시칠리아 섬과 밀라노공국 일부는 사보이아에 양도하며 신성로마제 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인 카를 6 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나폴리 왕국, 사 르데냐 그리고 밀라노 공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있는 아마 존과 오야포크(Oyapock)강 사이에 있는 영토의 영유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스페인은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그리고 세인트 키츠 섬의 거의 대부분 지역과 이익 이 많이 낫던 노예무역 계약 독점권인 아시엔토는 그레이트브리튼에 빼앗겼으며 북

93 아메리카에서 프랑스는 루퍼츠랜드와 아카디아, 양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뉴펀들랜드에 대한 권한을 영국에 1737년 독일지방에 괴팅겐대학이 설립되면서 종교가 일반적으로 강요하던 창조론 이라는 허상만 가르치던 관념적 종교의 통제에서 벗어나 과학이 연구되고 임마누엘 칸트와 헤르더 등이 활약하면서 " 질풍노도의 시대(Sturm und Drang) " 라는 평등과 자 유를 주장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대중들의 의식이 발달합니다. 프랑스는 이때 이로쿼이족에 대한 그레이트브리튼의 종주권과 먼 지역의 인디언에 게 그 어떤 나라와도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인정하므로 일레 생 장( 현재 프린스에드워 드 섬)과 후일 루이스버그 요새가 세워지게 되는 일레 로얄레( 현재 카페브레톤 섬)를 포함한 북 아메리카 식민지영토들을 유지하게 됩니다.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과 1714년까지 전쟁을 계 속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이 1720년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아 1750년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서로 공식적으로는 전쟁 상태로 있었습니다. 침략전쟁으로 사람을 학살하며 재물을 강탈해 부를 축적하거나 노동자를 착취하고 다중을 속여 권력을 차지한 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아도 될 것 같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상대방에게 먹 히기 때문에 힘을 키우려고 혈안이 되어 전쟁이 끝이지 않는 것입니다. 힘든 일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가 함께 따뜻한 밥이나 먹는 것을 행복으로 느끼며 살고 싶은 민초들의 바람은 꿈일 뿐 사람위에 군림하려고 권력을 장악하는 자들을 없애지 못하면 억압자들은 피억압자들을 분열시키고 피억압자들끼리 갈등을 조장해 서 싸우도록 명령하고 조종하기 때문에 평화나 행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나자 영토의 일부를 상실한 제국들은 1740년부터 신성로 마제국 카를 6세가 여성에게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살리카 법 (Salic law)을 고쳐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로 오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한 것을 이유로 또다시 전쟁을 벌려 1748 년 맺은 엑스라샤펠 조약에 의해 종결되었습니다. 권력을 계승하기 위한 전쟁으로 또다시 수많은 병사와 양민들이 학살당하고 조약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가 인정되고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양도하며 영토의 일부를 상실하는 대가로 전쟁이전의 상태로 왕권은 유지됐지만 양 민들의 피해와 죽음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종료됐지만 지하광물이 풍부하고 비옥해 생산의 근거지였던 슐레지엔을 빼 앗긴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왕위를 이어가기 위해 곡식과 석탄이 생산되는 요지를 빼앗겨 생활이 어려워졌다며 원성이 높아지자 영토를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대립 하다가 다시 7 년 전쟁( ) 을 벌입니다. 프랑스의 모렐리는 1755 년 자연법전 (Code de la nature, ou de véritable esprit de ses lois, de tout temps négligé ou méconnu)을 통해 인류의 최초 단계가 자연적 질 서의 평화인데 침략자들이 사유재산을 주장하면서 봉건제도와 사회 불평등이 발생 됐다며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평등한 세상을 건설해야 된다고 발표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이 발생된 원인을 카를이 법을 바꾸어 자신을 왕위에 앉힌 사실과 헝가리와 보헤미아여왕이자 오스트리아 여 공비 그리고 파르마 여 공작이 되어 합스부르크왕가 영토를 계승하고 남편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1 세(Francis I, Du ke of Lorraine)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려한 탐욕에 있음을 숨겼습니다. 프로이센은 30년 전쟁이 끝난 후 독일북부지역에 위치해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부 를 축적할 수 있었던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1701년 1월 18일 프리드리히 1세가

94 프로이센 공국에 등극하면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여 관료제를 정비하며 군대를 강 화하고 프로이센 형( 型 ) 의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하면서 형성됐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 동원할 용병을 사용하면 많은 비용이 들고 그것은 생산하는 노 동자와 농민에게 피해가 될 뿐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서 자체 국력을 강조하고 민족주의를 조장하며 젊은이들로 구성된 정규군을 창설하고 병사 들을 훈련시켜 운영하면서 강대해진 것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세금을 늘려 군비를 증강하고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 왕과 막 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혼인시켜 제휴하며 러시아 스웨덴 작센 기타 독일의 제국 들과도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을 포위하자 영국과 동맹한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 는 1756년 8 월 기선을 제압하려고 작센을 침입하므로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기습작전으로 프로이센이 초기에는 승전했으나 적군의 반격과 1759년 8월 오스트 리아 러시아 연합군에게 대패하므로 잠시 베를린까지 점령당했는데 영국의 대( 大 ) 피 트마저 실각하므로 원조가 끊겨 고전하다가 1762 년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제( 女 帝 ) 가 죽고 표트르 3 세가 즉위하여 자신을 지지하므로 승기를 잡았습니다. 1763년 2월 15 일, 라이프치히에서 약 30km 떨어진 후베르투스부르크 성( 城 ) 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3국이 조약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확인받고 유럽에서 강국의 지위에 올랐으며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영국 프랑스 양국의 오랜 싸움은 영국이 승리해 대 식민제국이 됐습니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33세에 쿠데타를 통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권을 찬탈했으며 사 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렸지만 결혼을 하지 않아 후사가 없기 때문에 사망 후 혈육인 조카 카를 울리히가 러시아 황제와 스웨덴 국왕 양쪽 의 승계인이 됐는데 카를은 어릴 때 자신이 자라던 프로이센을 동경했습니다. 카를 울리히( 표트르3 세)는 안할트체르프스트라는 작은 공국의 공주인 예카테리나와 결혼했는데 신경질적이며 반항적인데다 완고한 카를은 전략결혼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 예카테리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폐인이 되어 부 부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으며 불행한 결혼기간을 보냈습니다. 명목상 황태자와 황태자비인 두 사람은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는데 예카테 리나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가 각각 아버지가 다른 정부소생이었으며 카 를은 황제에 올랐지만 정치에는 관심 없고 러시아를 증오하면서 황실에 자신의 고 향인 프로이센 세력을 끌어들이자 예카테리나는 모반을 준비합니다. 그녀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유럽의 계몽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사상을 정책으로 발표하므로 러시아의 군대와 인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정부 중 한명인 오를로프는 그녀가 지시를 내리면 바로 동원할 수 있는 여러 연대 병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시키고 있었습니다. 궁정 인물들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 그리고 일반대중의 지지를 얻 은 예카테리나는 1762년 7월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군대를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 크에서 쿠데타를 일으키자 놀란 표트르 3세가 예카테리나에 맞설 군대를 모았지만 병사가 적어 표트르 3세는 6 개월 만에 아내에게 왕권을 강탈당했습니다. 8일 후 카를은 예카테리나의 정부 손에 암살당했으며 1762년 9월 모스크바에서 성 대한 대관식을 거행하고 예카테리나 2세로 러시아 차르가 되어 자신의 약속을 지키 려고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해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착취를 금지시키고 러시아 인민들을 더 잘살게 하겠다며 대민정책을 발표하지만 실현하진 않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헌법은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놀랄만한 내용이지만 공표만 했을 뿐 실현하지 않았으며 귀족들의 지지로 차르에

95 오른 그녀는 왕권을 유지하게 위해 귀족들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이권을 줬는데 러 시아 농노들을 더욱 혹독하고 가혹하게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합니다. 1773년 돈카자흐 출신으로 프로이센과의 7 년 전쟁, 폴란드전쟁, 러시아 터키전쟁 등 유럽의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유럽의 평등과 자유에 대한 사상을 습득한 푸가초 프는 러시아 각지를 방랑하면서 농노들의 참혹한 삶과 비참한 현실을 보고 스스로 죽은 표트르 3 세라 사칭하며 농노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푸가초프에 의해 발생된 반란은 우랄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카잔 펜자 사라토프 등 도시를 점령하고 러시아 전역으로 퍼졌으며 각지에서 지주 를 붙잡아 재판하고 재산이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게 나눠주면서 진행했지만 예카 테리나 2 세의 병사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평등을 위한 저항 목 록 1760년 조지 3세가 국왕이 되기 전까지 1세기 이상 아메리카 식민지는 각각 식민 지의회를 가지고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식민지영국인은 본국의 영국인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는데 조지 3세가 등극하고 식민지정책으로 가혹하게 징 세하므로 식민지인들은 권리 자유 특권을 쟁취하기 위해 항쟁합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부에는 상공업 그리고 자영농업, 남부에는 노예를 사용하는 농장을 경영했으며 해외식민지경쟁에서 주도 권을 확보하므로 제국체제를 새롭게 개편하려던 영국은 죠지 3 세 즉위(1760) 후 인 지세와 차세의 부과 등 중상주의적인 식민정책을 채택했습니다. 1763년 7년 전쟁의 책임으로 프랑스 미국식민지가 파리강화회담으로 소멸되자 영 국은 식민지들을 자신의 통제 안에 가두기 위해 설탕 법, 당밀법 등으로 당밀, 설 탕, 철, 소금 등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뿐 아니라 신문, 일간지, 트럼프카드 등 미국식민지에서 출판되는 모든 출판물에도 세금을 부과한다고 발표합니다. 영국의 이런 일방적인 결정들은 커다란 반발을 불러 식민지인들은 "No taxation wit h out representation( 대표 없이는 과세 없다) " 는 구호를 내걸고 영국의회에 대표를 보낸 적이 없으니 본국이 일방적으로 만든 법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조세법에 반발 하자 인지세법이 간접세라는 조세원칙에 맞지 않아 인지세법을 철폐하게 됩니다 년 인지조례는 철폐됐으나 타운센드제법( 諸 法 ) 이 다시 제정되므로 식민지인들 은 본국의 모든 과세에 반대하게 되고 1765 년에 군대숙영법( 軍 隊 宿 營 法 ) 을 제정하자 식민지인의 반감이 누적됐는데 70년 식민지인들이 보스턴에서 항의 시가행진을 하 는 중 영국군과 충돌해 5 명의 시민이 사망하게 됐습니다. 미국식민지엔 억압을 거부하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며 독립을 요구하 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왕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왕당파들이 왕에게 청원하자고 해서 청원을 시작했는데 1772년 청원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 은 식민지인들은 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연락하며 비합법 저항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독립전쟁의 또 다른 원인은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은 프랑스와 전쟁하는 영국을 지원하여 승리하자 비옥한 중서부지역으로 진출하려 했는데 영국정부는 식 민지를 보호한다며 ' 인디언 보호구역' 으로 설정하고 이동을 금지시켰으며 병참 법을 제정하고 영국군대 주둔비용의 일부를 식민지민에 부과합니다. 이때 영국본토에서는 이발사이자 가발공이였던 리처드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 라는 사람이 1767년 하그리브스가 발명한 다축방적기를 개량하고 와트의 증기기관 과 연결해 1771년 수력을 동력해 소수의 노동자가 대량의 실을 뽑아 낼 수 있는 수력방적기(water frame)를 발명하므로 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96 1773년 영국은 미국식민지 상인들의 차에 대한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동인도회사가 독점권을 행사하는 관세법을 통과시키자 식민지자치를 무시한다며 분노한 보스턴 시민들이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항구 안에 정박 중인 동인도회사 선박 2척을 급습하 여 342 개의 차 상자를 깨뜨리고 차를 모조리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영국정부는 1774 년 보스턴 항( 港 ) 을 봉쇄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억압하며 배상을 요 구하고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자치권을 정지시키는 등 징벌적인 여러 법을 제정하며 징세하자 미국 식민지인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법( 法 ) 으로 규정하고 버지니아 식민지제의로 제1 회 대륙회의를 소집했습니다. 1774년 제1 차 대륙회의 폐회연설에서 패트릭 헨리가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는 말을 했다는데 헨리는 개개인의 권리보다는 왕당파에 가까운 사람이라 왕에 대 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설도 있으며 결과는 평화의 청원 문 작성과 자치적으로 민병 대를 조직해 훈련시키고 군수물자를 비축하는데 합의합니다. 1775년 제2 차 대륙 회의에서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 스턴, 토머스제퍼슨 등 다섯 사람이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대륙 군을 창설했으며 조지워싱턴장군을 대륙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각 주에 군사와 물자 지원을 요청하므로 사실상의 연방의회가 됐고 미국독립전쟁이 준비됩니다. 1775년 영국군과 대륙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해 전쟁단계로 접어들자 T. 페인이 공화제 독립( 共 和 制 獨 立 ) 을 호소하는 정치 팜플렛[커먼센스 common sense]을 발행하 고 버지니아 대표 R.H. 리의 독립결의( 決 議 ) 제안으로 T. 제퍼슨이 기초하고 B. 프랭클 린과 J. 애덤스가 가필한 독립선언문이 대륙회의에서 76년 7월 4일 만장일치로 가결 됐습니다. 이 선언문에는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가 있음과 권리를 위해 정부를 조직하며 정부의 정당성은 피치자( 被 治 者 ) 의 동의( 同 意 ) 라며 정부가 기본인권을 침 범하면 국민은 그 정부를 전복할 권리가 있다는 혁명권( 革 命 權 ) 을 명시하고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므로 독립전쟁의 정당성을 언급하여 국민의 권리와 외국의 군사적 지 지를 얻을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으로 유럽처럼 무력으로 약한 부족을 침략해 사람들을 학살하고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가 왕국을 만들고 왕이 무력으로 다중을 억압하며 통치하는 왕조가 아니라 다중의 선출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생기고 국가의 책임과 의무 를 규정하는 기초가 된 것입니다. 아메리카와 영국이 식민지를 둘러싼 독립전쟁이 한창일 때 유럽의 프로이센에서는 노동자와 시민들을 갈취해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과 귀족 사이에 권력을 차지하려는 암투가 계속 일어났으며 1770년대 말부터 군국주의 전통아래 국가의 검열에도 불 구하고 계몽주의 책 생산이 증가하므로 신흥 독서층이 형성됐습니다. 평등을 주장하는 천부(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등 불가침의권리)의 권리를 칼뱅의 영향을 받은 상공인들은 노동자의 노동력착취와 이윤이란 명분으로 다중을 갈취하는 물질 판매의 자유라고 왜곡했으며 성직의 혹독한 착취와 허구를 깨달은 대중들이 종교를 배척하자 성직자들의 초기종교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유럽은 평등에 대한 사상들이 전파되면서 억압받는 민중들이 깨달을 때 미국독립전 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영국과 식민지제국( 帝 國 ) 부활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 미국을 부추겨 독립을 권장하고 지지했으며 영국의회는 퀘벡조례를 제정하고 캐나 다 서쪽지역까지 로마가톨릭교를 승인합니다 년 사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 대륙군이 승리하자 벤저민 프랭클린 은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독려하고 프랑스가 연대하여 1781년 요크타

97 운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대륙군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므로 1783 년 파리조약으로 영국정부는 미국의 독립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대륙회의는 1777년 11 월 미합중국 초기헌법이라 할 수 있는 연합규약( 聯 合 規 約 ) 을 기초로 하여 1787 년 서북( 西 北 ) 토지법 등을 제정하였고 81 년 이후 연합의회( 聯 合 議 會 ) 로 개칭하고 독립전쟁을 지도하여 독립을 이뤄냈으며 89년 연방헌법 제정으로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신정부를 수립하고 해체합니다. 178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고 권좌에 오른 요제프 2세는 계몽주의에 영향 을 많이 받은 인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면서 농노해방, 사 형과 고문의 폐지, 교육권의 확대 등 많은 개혁을 구상하지만 타인의 노동력을 착 취하거나 갈취해 누리고 사는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요제프는 전인구의 1/4에 불과한 독일인을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를 시행하는 정책을 펼치려 했지만 타민족들의 반항에 봉착해 실패하고 스스로 자신의 묘비명에 " 가장 훌륭한 의도를 가졌으나 하려고 한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한 요제프2 세가 잠들다." 라고 새겨 넣었는데 오늘날 계몽전제군주( 啓 蒙 專 制 君 主 ) 라고 불립니다. 유럽 열강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에 성공한 미국혁명에 프랑스가 직접 군사지원을 하기 위해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면서 너무 많은 물질을 제공하므로 심각한 재정위기가 닥쳤으며 전쟁비용을 부담하느라 헐벗게 된 프랑스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혁명으로 발전됩니다. 영국에서는 1779 년 방사( 紡 絲 ) 방적공( 紡 績 工 ) 이던 제임스하그리브스[James Hargrea ve]라는 사람이 한 사람의 노동자가 여러 개의 방추( 紡 錘 ) 를 동시에 작동시켜 생산 할 수 있는 복식수동( 複 式 手 動 ) 방적기를 발명했던 것을 개량해서 1825년 R. 로버츠가 완전자동화 된 뮬(mule: 잡종)방적기를 발명하므로 엄청난 생산발전을 가져옵니다. 노동자들이 좀 더 쉬운 방법으로 물질을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 낸 기계의 발달로 숙련노동자가 하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할 수 있게 되자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 해 부를 축적하는 상공인들은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높은 숙련노동자를 해고하며 더 많은 이윤을 남깁니다. 경력이 많고 오래 숙련된 노동자들은 임금이 높으니 이들을 해고하고 기계를 작동 시킬 수 있게 글 읽는 교육을 받았으며 가족이 딸리지 않은 젊은 노동자들을 싼 임 금으로 고용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고 상대기업보다 싼 가격에 판매하므 로 재산이 부족한 소기업들을 도태시키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합니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원인은 봉건적인 신분제인 성직자( 제1 신분), 귀족( 제2 신분), 재산 있는 평민( 제3 신분)에 입각한 앙시앵 레짐( 구제도)을 타파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 하거나 갈취해 재산을 축적한 행위에 저항해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주장하면서 구체제와 왕정을 타도하고 봉건적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제3 신분에 속하는 상인, 제조업자와 법률가, 의사, 문필가 등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 자유 직업인으로 이루어진 신흥계급은 칼뱅의 종교개혁 후 재력이 성장했음에도 귀 족과 정권으로부터 멸시받았으며 길드와 같은 봉건적 제도로 불이익을 당했고 농민 과 노동자는 봉건적 의무와 세금이라는 명분의 수탈로 피폐해졌습니다. 구제도 아래 제 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은 면세특권과 봉건특권을 누리고 제3신분인 평민만이 모든 재정 부담을 안았는데 부르봉 왕조의 사치스러운 궁정생 활과 루소 같은 계몽 사상가들의 혁명사상이 시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때 미국 의 독립혁명 소식은 큰 동요를 가져왔습니다. 영국에서는 1733년 J. 케이가 제직능률이 향상되는 기계적인 위입장치인 플라잉셔틀 수직기를 발명하고 1785년 영국의 E. 카트라이트가 증기의 원동력을 이용한 역직기

98 를 발명해 자동방적기 및 역직기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근대적 공업의 기초가 확립 되고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면방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합니다. 프랑스는 특권계급에게 과세하고 왕실경비의 삭감을 통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던 루이 16세는 귀족과 왕실의 반발로 실패하자 1789년 5월 그 동안 소집되지 않았던 신분제의회인 3부회를 소집했는데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신분 간에 충돌이 벌어져 제3 신분의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왕이 제3신분 회의실을 폐쇄하라고 명령해 쫓겨난 의회는 6월 21일 실내 테니스 코트에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테니스코트의 서 약)저항하자 부분적인 양보안을 내고 회의를 신분별로 행하라고 명령했는데 제3신 분이 거부하자 어쩔 수 없이 귀족대표에게 국민의회의 합류를 지시합니다. 국민의회는 7월 7일 헌법위원회를 창설하고 9일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로 명칭을 개칭하며 체제를 갖추고 저항하자 성직자 및 귀족 등의 동조자들이 합세하게 되었 으며 이들은 국민주권을 주장하며 입법의회가 권력을 행사하는 헌법재정을 요구하 자 왕은 병력이 동원될 때 까지 참다 무력탄압을 시도했습니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다중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국민의회는 봉건제( 무상) 폐 지선언 및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을 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권 리가 있다고 명시한 자연권 주권재민의 원리와 억압에 대한 저항권을 함께 포함하 므로 혁명이 지향하는 기본적인 사회의 이념을 밝힙니다. 인권선언의 내용을 간추리면 [ 제 1 조 인간의 권리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제 2조 모든 정 치적 결사의 목적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제 3조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이 명시하지 않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제 4조 자유는 타 인에게 해롭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제 5조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면 금 지할 권리가 없다. 제 6 조 법은 일반시민의 의사 표명이다. 제 7조 누구도 법의 규정과 정 하는 형식에 의하지 않고는 소추, 체포 또는 구금될 수 없다. 제 8 조 범죄 이전에 제정 공 포되고 합법적으로 적용된 법률 아니면 처벌될 수 없다. 제 9조 모든 사람은 범죄자로 선고 되기까지 무죄로 추정되므로 체포하더라도 신병을 확보하는데 불가결하지 않은 모든 강제조 치는 법에 의해 준엄하게 제압된다. 제 10조 누구도 그 의사에 있어 종교상의 것일지라도 그 표명이 법에 의해 설정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방해될 수 없다. 제 11조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 출판하며 평등하게 교육받고 사상과 의견을 자유 롭게 소통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제 12 조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보장은 공공무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는 모 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설치되는 것으로 그것이 위탁되는 사람들의 특수 이익을 위해 설치 되지 아니한다. 제 13조 공공 무력과 행정비용을 위한 조세는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되 어야 한다. 제 14조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해 공공 조세의 필요성을 검토하 며 용도를 추급하고 액수, 기준, 징수, 그리고 존속기간을 설정할 권리를 가진다. 제 15조 사회는 모든 공직자로부터 그 행정에 관한보고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제 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 되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아 니한다. 제 17조 불가침 적이고 신성한 권리인 소유권은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필요성이 명백하고 또 정당하며 사전의 보상조건하가 아니면 침탈될 수 없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왕은 군대를 국경에서 베르사유 주변으로 이동시키므로 파리 시민에게 극도의 불안 과 분노, 공포를 조장했고 7월 11일 국민에게 신망 있던 삼부회 최고책임자 네케르 를 파면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해서 7월 13일 무장하고 다음날 바스티유감옥을 포위하니 관료인 교도소 지휘자 베르나르-레네 드 뢰네는 80여 명의 부하들과 함 께 총을 쏘며 저항하다 사살 당했습니다. 바스티유감옥을 파옥하고 점령한 1000명의 무장시민군은 파리시내로 들어가 시장 관사와 주교 청을 점령하고 시장을 사살했으며 사살한 시장 플레제이유의 머리를 창에 꽂아 파리 시내를 누비며 무력을 과시하고 헌법과 입법의회를 구성해 봉건제 의 억압을 금지하고 징세를 철회하라고 외치며 다녔다고 합니다

99 시민군의 무력에 힘입은 국민의회는 8월 4 일 의회에 봉건제 영주제 폐지의 안건을 결의하고 9월 26 일 인권선언을 채택해 행정 사법의 개혁에 착수하므로 정치적 민주 주의를 확립하고 정교( 政 敎 ) 의 분리와 교회재산의 국유화로 전쟁으로 부족해진 재정 을 충당하고 다음해 성직자세속 법을 제정했습니다. 파리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국민의회는 길드와 동업조합 그리고 내국관세와 통행세 를 폐기해 생산 판매자의 권리를 확장했으며 신분제구분으로 복잡했던 사법구역과 행정구역을 정리하고 귀족계급이 권력을 행사하며 법이란 핑계로 다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던 기구인 고등법원을 폐지합니다. 최초의 헌법기초( 起 草 ) 에 착수해 1791년 9월 프랑스사회를 권력분립에 입각한 단원 제의 입헌군주제와 유산계급의 지배체제가 집행할 수 있는 헌법을 완성하고 9월 30 일 해체하므로 새로 들어선 입법의회는 왕당파 지롱드 당의 미라보, 라파예트 등 이 장악하고 입헌왕정 정체를 수립하므로 착취가 만연한 사회로 발전됩니다. 1791년 소집된 입법의회의 미온적 태도와 왕권으로 회귀하려 반혁명움직임을 보이 던 루이16세가 도망가다 잡히는 바렌느 사건이 발생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프랑스혁명의 자국전파를 우려해 왕을 해치면 전쟁을 하겠다며 협박해서 파리 시민 들이 1792년 4 월 왕궁을 습격해 국왕과 왕비를 잡아가두므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시민들이 국왕과 왕비를 체포해 왕권을 정지시키고 유산자입법의회를 부정하므로 1792년 9월 국민공회가 소집되었으며 국민공회는 개회와 함께 공화정을 선포하고 의용군을 소집하기 위해 민중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하며 혁명의 열기를 높여 대중들 이 전쟁을 위한 의용군으로 나서기를 자원하며 혁명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함에도 평등을 부정하고 침략전쟁으로 살상을 일삼으며 재산을 강탈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양심적 행위로 권력을 형성한 자들이 자신 들과 같은 부류 일개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무고한 수십만의 병사들을 희생시 키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데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국민공회에는 성직과 많은 부를 축적한 귀족을 대표하는 지롱드당과 신흥 중산층과 상공인을 대표하는 자코뱅( 산악당)당이 대립했는데 혁명전쟁 승리와 민중세력을 배 경으로 자코뱅 당이 주도권을 잡자 1793년 6 월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공공 지원을 보장하는 헌법과 봉건제를 무상폐지하고 유산자민주주의 기틀을 만듭니다. 방토즈법을 공표하므로 국민공회를 혁명파인 자코뱅 당이 장악하게 되자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공개처형하고 1793년 10월부터 의용군의 무력을 바탕으로 공안 위원회의 강화, 국민총동원령, 최고가격제( 물건 값 상승을 제한)등 공포정치로 반발세 력들을 억압하다 피에르가 처형되고 정권은 왕당파 지롱드 세력들이 장악합니다. 방토즈법은 프랑스 혁명 중 1793년 2월 26 일, 3월 5 일 국민공회( 國 民 公 會 ) 가 채택 한 법령으로 공화국 적( 왕당파)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재산을 분배받을 애국자의 리스트( 명단)를 작성하기로 한 것으로 로베스피에르파( 派 ) 가 정권을 장악할 미끼로 공표했으나 이듬해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7월 27 일 완전히 폐기됐습니다. 국민공회는 공안위원회를 강화해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 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 무를 강조하며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 ' 혁명정부' 의 성립 을 선언하고 반혁명 분자라며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롤랑 부인 등 1년 동안 약 1만 명 이상을 기요틴( 단두대)으로 죽였습니다. 공안위원회의 총력전체제는 1793년 말까지 무력으로 국내 불만을 억압하려고 대외 전쟁으로 여론을 돌렸으나 산악파내부의 당쟁과 자코뱅의 에베르파와 왕당파의 당 통파, 로베스피에르파 등 3파로 분열한 상태에서 에베르파가 1794년 3월 식량사정 악화를 빌미로 시민을 충동해 봉기를 계획했다 체포돼 기요틴에서 처형됩니다

100 혁명정부는 4 월에 당통파를 숙청하고 로베스피에르파가 권력을 독점하고 대( 對 ) 유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최고가격제와 물자통제 배급제를 강화하고 위반자를 처형하는 독재권력 학살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독재자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7 월 처형됨으로써 테르미도르의 반동 은 종료됩니다. 1794년 봄 이후 도시와 농촌의 독립적인 소생산자가 자유롭고 평등한 덕의 공화 국 을 이상으로 외치던 로베스피에르는 당내에서 분파적 움직임을 보인 왕당파의 당통 등과 과격파 에베르 등을 처단하면서 파리민중( 상- 뀌로뜨)의 지지율이 저하되 자 1794년 7 월 테르미도르가 반발해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냈습니다. 1795년 입헌 공화정과 유산자까지 투표할 수 있는 헌법을 제정하고 5인의 총재가 협의하여 국가정책을 결정하도록 하는 연립총재정부를 출범시켰지만 5인의 연방 총 재정부는 선출된 자들끼리 이익을 위해 분열되고 권력을 잡은 자들이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부정 부패로 프랑스국민들을 실망하게 만듭니다. 5인의 연방총재 정부 대표자들이 왕당파와 공화파로 나뉘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분열되고 자신의 재산 늘리기에 급급한 모습에 실망한 국민들이 불평등한 제도와 체제를 바꾸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요구해 혼란스러울 때 병사를 지휘할 권한 을 가진 나폴레옹이 병사들의 무력으로 총재정부를 무너트리고 정권을 찬탈합니다. 프랑수아 바뵈프는 인권선언만으론 굶주림을 달랠 수 없다. 며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공화정치를 하려면 생활혁명이 필요하다며 호민관( 護 民 官 ) 지( 誌 ) 를 발행하고 법( 法 ) 과 신분의 평등 그리고 교육과 취직의 기회균등, 토지사유의 금지, 생산물의 배당과 분배는 국가가 공정하게 배급해야 재산이 평등해 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뵈프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비밀리에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결사조직을 만들고 착취가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킬 계획 으로 구( 舊 ) 자코뱅당원 에베르파( 派 ) 혁명군장병 소시민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무장봉 기를 준비하다 발각되어 1796년 5월 체포됐으며 1 년 만에 처형됩니다. 나폴레옹은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졸업 후 지방연대 포병소위로 임명 됐으며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해 파올리장군 휘하에서 코르시카국 민군 부사령에 취임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육군으로부터 군대이탈 3회와 2 중 군적이 문제돼 휴직 당했습니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해 처음 무훈을 세우고 F. 로베스피에르의 동생과 우정을 맺어 이탈리아국경 군 지휘를 맡았으나 왕 당파 테르미도르(Thermidor) 의 반동쿠데타 때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 로베스피에 르파( 派 ) 로 몰려 체포되었다가 석방됐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자 1795년 10월 5일 왕당파 들은 혁명정부가 실시했던 모든 정책을 백지화하므로 상류층과 상인들이 방데미에르 달(10 월을 말함) 13일 정권을 찬 탈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수세에 몰린 국민공 회( 國 民 公 會 ) 가 구원을 요청하고 나폴레옹은 무차별적 포격으로 반란을 진압합니다. 반란을 재빠르게 진압한 공로로 재기의 기회를 포착한 나폴레옹은 1796년 3월 신 분이 높은 바라스의 정부( 情 婦 ) 이자 사교계에서 이름 높은 조세핀과 재혼하므로 총 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1797년 2 월 만토바를 점령하므로 신망을 얻게 됩니다. 알프스를 넘어 사르데냐를 정복하고 북이탈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권력을 잡을 야심을 드러내고 점령지역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자신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 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온 것이지 점령자가 아니라며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인민공화국들을 건설하므로 인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101 이런 소식이 프랑스로 전해져 생산노동을 하면서 불평등한 신분차별과 생활고에 고 통 받는 인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점령군이 니스와 사보이를 침략하고 빈으로 진 격하자 오스트리아가 화의를 요청해와 10월에 캄포포르미오에서 네덜란드( 현재 벨기 에)와 이오니아 제도를 점령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지지를 굳힙니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략해 카이로에 입성했지만 나폴 레옹이 지휘하던 해군이 7 월 아부키르만( 灣 ) 전투에서 영국함대에 패하므로 본국과 연락이 두절돼 무림고원이 된 나폴레옹은 5만여 명의 병사들을 버리고 혼자 이집트 를 탈출해 10 월에 프랑스로 귀국했습니다. 영국은 증기기관 발명으로 생산기계가 발달해 생산되는 물질은 넘쳐났지만 오랜 전 쟁으로 인민들의 삶은 빈곤했으며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씩 노동하면서 비위 생적이고 위험한 노동환경에 방치된 여성과 연소노동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단결해 서 저항하는 파업이 계속되자 정권은 1799 년 단결금지법을 발표합니다. 프랑스로 귀국한 나폴레옹은 5명의 총재가 논의해 정책을 집행하는 총재정부를 무 너트리고 왕권으로 회귀를 갈망하던 셰이에스 탈레랑 등과 손잡고 1799년 11월 9 일( 브뤼메르 쿠데타) 군을 동원해 요인들을 감금하므로 총재정부를 무력화한 후 자신 을 통령으로 추대하도록 강요해 정권을 찬탈하고 독재정치를 시작합니다. 국민들을 통제( 무력억압)하지 못하면 권력을 지킬 수 없는 나폴레옹은 군의 무력으 로 정권을 찬탈한 행위에 국민들이 반발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혁명초기 원 성이 높아 해체시키고 국립민간방위대가 담당했던 치안유지 권한을 파기하고 파리 경찰청을 창설해 다시 경찰무력으로 국민을 억압 통제했습니다. 권력을 찬탈한 나폴레옹은 1800년 국내 자본의 안정화를 위한다면서 민간이 마음 대로 은행을 만들어 찍어내고 잉글랜드 은행이 찍어서 유통되고 있던 화폐를 통제 하기 위해 자신의 사적주식회사로 프랑스은행을 설립하고 1803년부터는 정부가 임 명하는 총재가 프랑스 은행을 통제 관리하도록 하는 발권은행을 만들었습니다. 경찰 무력으로 국민의 반발을 억누른 나폴레옹은 1802년 대중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다며 제1 편 시민의 권리, 인격보호, 주거, 후견인, 보호 자, 부모와 자식, 결혼, 혼인의 취소( 이혼)등 제2 편 소유권 사용권 재산권의 존중 등, 제3 편 상속 기부 부부재산계약 채무 등을 명시한 민법전을 만듭니다. 모두가 평등한 법이 아니라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인정한다는 법률이 만들어지자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공업 인들과 노동자 농민 어민들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을 유통이라며 판매하고 이윤이라며 갈취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 그리고 노동을 하지 않는 성직자등이 지지하므로 권력이 강화됩니다. 사람은 노동자 농민 어민이 땀 흘려 생산하는 물질에 의해 존재할 수 있음에도 물질 을 교환할 수 있는 화폐를 발행해 세금을 징수하고 사법권과 행정직을 만들며 지방 자치를 폐지하므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어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 소수 관료가 집단 을 통제 관리하며 공적으로 인민을 수탈할 수 있는 틀을 만들었고 절대 권력을 행사 하기 위해 로마가톨릭교회를 부활시킵니다. 사법이나 행정을 집행하는 무리들은 국민이 선출하거나 임명하지 않았음에도 국민 의 혈세로 먹고 살며 국민을 억압 통제하며 세금이란 명분으로 수탈하기 위해 존재 하는 것이며 상명하복의 명령체계에 따라 상사가 자신의 위법을 은폐하기 위해 지 시해도 이성과 양심도 없이 그 명령을 완수해야 하는 로봇이 되는 것입니다. 혈세로 먹고 살게 된 자들은 승진이나 좋은 보직을 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상사에 게 있어 상사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무능력자로 분류돼 도태되기 때문에 이성 과 양심을 버리고라도 반드시 상사의 명령을 완수해야 하고 상사에게 아부하기 위

102 해 상납해야 하므로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공기관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혈세로 임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민들이 늘어나는 것이며 공공업무를 집행하는 자들의 역할은 다수 인민 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규칙( 법률)을 만들거나 노예관리자가 되어 각종 징수 란 명분으로 인민들이 반발하지 못하도록 통제 관리하면서 수탈하는 것입니다. 관료들은 자신들도 통제와 억압 속에 감시받으며 생활하는 제복 입은 임금노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먹고 살기위한 직장이지만 인민을 통제하며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업무에 충실할수록 억압 통제받는 인민들 간에 반목 질시가 강화되는 것이고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 유혈충돌로 발전합니다. 1800년 지방민이 후보자를 추천해 선출하던 사법관선거와 지방관리 선출선거를 폐 지했으며 양원제 입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대의제와 입법부의 권한을 통령정부 가 행사하며 법률 발의권마저 행정부가 행사하도록 했고 각 지방의 도지사들도 통 령이 임명하며 선거는 정권이 채택한 사람에게 유산자가 투표만하도록 했습니다. 중앙집권체제로 정비한 나폴레옹은 1802년 인민투표를 실시해 선출직 통령이 됐으 며 1804년 봄 자신이 황제임을 선포하므로 절대 권력을 장악했지만 상공인들의 착 취와 임명직 공직자들의 수탈이 극심했으며 기계발달로 노동자들이 생산한 물질은 넘치지만 농업은 피폐해지고 일자리 없는 다수인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입니다. 인민대중을 무력으로 통제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혁명정신인 평등과 자유 그리고 박 애라는 핑계로 오스트리아를 침략하고 유럽대륙을 점령했는데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하자 1808년 베를린칙령으로 대륙과 섬나라인 영국의 통상을 금지시키는 대륙봉 쇄령으로 경제적 압박을 가합니다. 대륙봉쇄령은 지하자원과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없는 유럽지역 각 국가들에게 반 나폴레옹 감정을 일으켜 저항하도록 했으며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러시아를 본 보기로 응징하는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는 권력층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809년 조세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습니다. 프랑스가 대륙봉쇄령을 내리자 영국도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해상봉쇄 정책으로 맞섰는데 1812년 프랑스로 향하던 미국상선을 영국이 나포해 미국의 통상활동이 방해받자 미국은 상업상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며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제2의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미 영전쟁이 발생합니다. 영국 육 해군은 체서피크 만( 灣 ) 해안을 황폐화시켰고 블레이던즈버그 전투에서 승 리한 영국은 미국의 워싱턴 D.C 공공건물들을 불태우므로 지금의 대통령궁도 그때 불탄 것을 하얀 페인트로 칠해 화이트하우스로 불리게 되었으며 미국은 총 23,765 명 사상자를 영국은 총 8,618 명의 사상자를 내고 성과 없이 끝납니다. 1812년 러시아를 침략해 모스크바만 점령하면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나 폴레옹은 혹독한 추위와 기상변화를 파악하지 못해 의욕을 상실한 병사들과 함께 침략전쟁에 패배했고 1814년 3 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 를 점령당하므로 전쟁의 책임을 물어 엘바 섬으로 유배됐습니다. 영국에서는 1811 년 중부 북부의 직물공업지대에서 노동자들을 하루 15시간 이상씩 노동을 시키면서 가족부양은 고사하고 빵 한 개를 살 수 없어 본인조차 생활할 수 없는 임금을 지급하면서 엄청난 이윤을 챙긴 상공인들이 자동수직기와 뮬방적기로 생산 시스템을 바꾸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들이 발생됩니다. 영국 정부가 상공인들과 결탁해 단결금지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파업이나 공장점거 등 집단적인 저항을 할 수 없게 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해고된 것은 상공인들의 게걸스러운 욕심과 상공인간에 이윤을 위한 대량생산 경쟁 때문에 발생되는 해고를

103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물질을 생산하는 기계 탓이라며 기계를 파괴합니다. 노팅엄셔 요크셔 랭커셔를 중심으로 정체불명의 N. 러드라는 인물의 지도아래 운동 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해서 러다이트라 불렀는데 비밀결사( 秘 密 結 社 ) 형식을 취하고 야간에 복면을 쓰고 기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치안당국도 실태를 파악하지 못했고 일반인들에겐 신비집단으로 알려졌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배되자 국외로 망명해 독일코블렌츠에서 반( 反 ) 혁명 해방군의 수령이 되고 이탈리아 영국 등지를 유랑하던 루이16세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프랑스로 돌 아와 입헌 군주제를 약속하고 노동자나 농민 등 억압받는 민중들의 권리와 혁명의 자유도 인정한다는 헌법을 공포하고 루이18 세로 등극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엘바 섬에 유배됐다 탈출한 나폴레옹이 이듬해 1815년 3월 파리로 돌아오자 루이 18 세는 벨기에의 젠트(Jent) 로 도망가고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 백일천하)에 올랐으 나 영국과 전쟁에 나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자 다시 파리로 돌아와 7월 8 일 왕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루이18 세는 입법권과 사법권의 독립, 법 앞에 만인 평등, 개인 재산권 의 불가침, 기본적 국민의 인권을 규정한 헌법을 공표하고 1815년 8월 초 입헌군 주제의 약속에 따라 선거를 실시하자 왕당파가 압승을 하므로 로마가톨릭교 추기경 인 리셜리외공을 총리로 등용해 혁명사상인 자유와 평등주의 정신을 억압합니다 년 의회를 해산시키고 실시된 선거에서 입헌군주파가 다수가 되자 구( 舊 ) 귀족 과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을 회유하며 안정을 도모했으나 1821년 왕당파의 J.B. 빌 렐 백작이 수상이 되자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며 혁명정신을 말살하고 절대왕정복귀의 기틀로 회귀하려다가 1824 년 죽었습니다. 1790년 새뮤얼 크럼프턴이 증기기관을 원리로 뮬방적기를 발명해 면사를 대량 생 산할 수 있게 됐고 증기기관을 발전시킨 볼턴 앤드 와트가 설계도를 제공하고 업자 들이 부품을 만들어 1814년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관차가 더럼광산에서 항구까지 운행됐으며 1825 년 세계 최초의 철도용 기관차 로코모션호가 만들어졌습니다. 1819년 영국에서는 전쟁과 생활고에 고통 받던 랭커셔 주의 직물공업지대에서부터 대중들이 평등을 주장하는 시위가 시작돼 8월 16일 맨체스터의 세인트피터광장에 직조공을 중심으로 약 6만 명이 의회개혁과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자 기병대가 습격 해 11명이 사망하고 400 명이 부상당하는 피털루학살이 벌어집니다. 영국에선 불평등으로 다중들이 굶주리는 원인을 상인들과 영주들이 은행을 설립하 고 마음대로 화폐를 찍어내므로 땀 흘려 생산한 물질과 교환되지 않는 불환화폐가 넘쳐난 탓이라며 화폐를 찍을 때는 반드시 찍은 양만큼의 금을 예치하고 금의 양에 맞추어 화폐를 발행하라는 금본위제화폐를 실시합니다. 1821년 그리스는 해방을 목표로 1814 년에 조직된 친우회( Φιλική Εταιρεία) 를 중 심으로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하고 3월 6일 혁명주의자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 며 도나우 공국에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혁명전쟁을 일으키고 유럽 열강들의 지원 을 받아 1829 년에 독립되어 그리스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왕실은 1812년 성립된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 헌법을 실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왕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폭압적인 정치로 억압하고 수탈하므 로 빈곤에 견디지 못한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며 혁명이 발생했으며 카디스에서 일어난 군사반란으로 왕실은 전복되고 페르디난도 7 세는 포로가 됩니다. 러시아는 스페인의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자는 명분으로 5국 공동개입을 주장했는 데 영국은 자유주의 운동이 국경을 넘어 유럽공동체에 현실적인 위협을 주는 경우에만 간 섭이 정당화된다. 라는 명분을 들어 반대하면서 러시아가 스페인반란에 개입하는 것

104 을 빌미로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우려해 반대합니다. 스페인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1822년 10월 베로나에서 회의를 열었 으나 러시아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영국은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므로 합 의에 이르지 못하다가 12월 오스트리아 제국의 나폴리왕국이 단독으로 개입하려고 하자 프랑스가 스페인으로 진군해 혁명을 진압했습니다. 루이 18세가 죽자 1824년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동생 샤를 10세는 부활한 가톨릭 교회의 옹호를 받아 왕권신수설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헌법에 선거의 평등권이 있음에도 세금을 많이 낸 사람에 대해서만 선거권이 허용된다며 1830년 의회를 해산하고 7 월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렇게 치러진 선거 결과에도 의회군주파가 승리하자 샤를은 7월 26일 칙령으로 선거권을 제한하고 출판의 자유까지 금지시키면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한다고 공포 하자 파리 시민들이 27일부터 29일까지( 영광의 3 일) 시가전을 벌이며 반발했고 당황 한 샤를은 총리 폴리냐크 공을 파면하면서 무마하다 쫓겨납니다. 26일 자유주의 저널리즘이 독재 권력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자 27 일 소( 小 ) 상공인 기능공 노동자 학생 등 파리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해 군과 충돌했는데 병사들이 알제리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력과 탄약이 부족하고 평등을 지지하 는 병사들이 무력진압을 거부하므로 정부 측이 밀리게 됐습니다. 28 일에는 참여하는 시민들이 늘어나 바리케이드 수가 늘고 금지했던 삼색기( 三 色 旗 ) 가 나부꼈으며 시가전에서 군이 패배하자 29일 시민들이 왕궁을 장악했고 샤를은 7월 칙령의 철회 및 내각교체를 협상카드로 내고 타협을 시도하다 거절당하자 8월 2 일 손자 보르도공( 公 ) 에게 양위하고 영국으로 도망갔습니다. 의회군주를 요구하는 시민들은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데 양위한다고 보르도공이 정 권을 대물림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선거로 선출해야 했지만 함께 싸웠던 시민들 중 입헌왕정파와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은 개혁보다는 현실에 머물고자 오를레앙 가( 家 ) 의 아들 루이필리프를 추대해 다시 왕가가 권력을 잡게 됩니다. 침략전쟁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강탈하며 권력을 만든 자들이 자신들의 혈육 이 대를 이어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혈통과 가족주의를 강조한 것이며 자신의 위 치에서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조의 의미는 노동자는 대를 이어 노 동을 하고 정치가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겠다는 헤게모니를 만드는 것입니다. 유럽은 나폴레옹의 침략전쟁이 끝나고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는 인민들의 요구가 거 세지면서 1830년 벨기에 독립혁명이 벌어지고 미국에서는 1831년 8월 21일 흑인 노예 냇 터너(Nat Turner/Nathaniel Turner)가 중심이 돼 사우스햄턴에서 노예들을 억 압 갈취하는 백인 농장주들을 살해하면서 저항합니다. 저항은 이틀 만에 진압되고 몇 개월 동안 숨어 다니던 냇 터너는 10월 30일에 체 포돼 11월 5일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1월 11일에 교수형으로 죽자 공포에 떨었던 남부 백인사회는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노예의 교육과 이동 그리고 집회를 금지하는 억압적인 법률을 제정합니다.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3주 동안 후계계승 논쟁으로 혼란해졌는 데 1825년 12월 14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부 청년장교들이 차르( 군주에 대 한 호칭) 왕조를 잇는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입헌군주제와 농노제폐지 등 서부 유럽같이 평등과 자유주의사회를 건설하고자 봉기를 계획했습니다. 봉기는 준비결의와 조직이 충분하지 못한데다 실행직전에 북부결사의 지도자인 파 벨페스텔이 체포되면서 니콜라이 1세에게 계획이 알려져 사전에 진압됐으며 임시정 부를 구성하고 새로운 사회를 집권하기로 했던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공작이 도망

105 치고 봉기를 일으켰던 체르니고프 연대까지 진압되면서 실패합니다. 니콜라이 1세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여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121명의 데카브 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벨 페스텔, 릴리예프, 카홉스키, 세르게이 무 라비요프, 페스트체프 류민 등 5명은 1826년 7월 25일에 처형당했으며 31명이 감 옥에 갇히고 나머지 푸시킨을 포함한 사람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됐습니다. 데카브리스트( 러시아 말로 12 월이라는 말)의 난 혹은 12월 혁명당원이란 나폴레옹 침 략전쟁 당시 유럽의 자유주의사상에 영향을 받은 젊은 청년장교들이 1825년12월 충성을 거부하고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일으킨 사건을 말하는 것이며 이를 진압한 니콜라이 1 세는 자유주의에 위협을 느껴 전제정치를 더욱 강화합니다. 평등한 사회란 경제뿐 아니라 권력도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조직이라는 틀에 묶이 거나 부부나 부모자식 또는 형제라는 혈육이나 남 여나 노 소라는 구분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는 자유주의를 착취의 자유를 요구했던 부르주아 사상이라며 비방하고 왜곡하며 자유를 폄하하는 것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등이란 억압과 착취가 없이 모두가 서로 존중받는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조직이 라는 핑계로 타인을 통제 지시하거나 억압하는 행위 또는 부모라는 이유로 자녀를 억압하거나 지시하고 생활고를 비관해 살해하는 행위와 형제라며 아우를 억압하는 것은 평등한 사회를 목표로 하는 인류의 미래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부모나 혈육 또는 부부라는 핑계로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이성과 양심도 없이 억압 하며 심적 또는 물질적으로 피해를 입히고 자신의 권리와 권한만 주장하거나 타인 의 노동력을 착취 또는 억압하는 행위는 망종이며 지탄받아 마땅한 죄악으로 반드 시 근절시키고 제재해야 할 패악입니다. 자신의 존엄이나 존재가치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타인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행위에 저항하므로 획득되는 것이 지 자신의 권리를 위한 저항을 포기하고 안주하려거나 종교라는 허상에 매달려 기 도만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노동자저항과 혁명 목 록 프랑스는 독재정치를 펼치던 샤를을 몰아냈을 때 하원이 공위( 空 位 ) 를 선언하자 입 헌왕정파와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들이 오를레앙공의 아들 루이필리프를 추대하고 새로운 헌장을 지킬 것을 맹세하면서 다시 왕가가 권력을 잡았는데 이를 선거로 선 출했다고 해서 국민의 왕 또는 바리케이드 왕이라고 칭했습니다. 1830년 7월 혁명은 루이필리프 1세가 권력을 행사하는 왕정을 만들고 보수적인 입 헌왕정( 立 憲 王 政 ) 을 시장자유주의로 바꿨지만 귀족과 왕족, 부를 축적한 소수가 다중 인민을 억압할 수 있는 지배체제를 만들었을 뿐 신분과 빈부격차가 해소되지 않으 므로 벨기에독립과 빈 체제 국제자유주의운동의 기폭제가 됩니다. 왕족이 권좌를 차지했지만 절대 권력을 행사할 권한은 상실했으며 온갖 착취와 갈 취로 재산을 축적한 상공인과 그들의 후원과 사주를 받은 하수인들이 의회에 진출 해 있고 이들은 언제라도 능력이 없다는 핑계로 의회를 통해 왕족을 몰아내고 새로 운 권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이 권력을 행사합니다. 국민공회는 겨우 입법부에 법률을 제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으며 재산을 축 적한 자들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져 유산자의 권력을 강화했을 뿐 노동자 와 재산 없는 농민들은 자신이 땀 흘린 노동 결과물을 자신이 취급하거나 처분할 권리나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혁명이후 권력을 잡은 부자들은 귀족들과 연합해 영국에서 들여온 자동생산기계로

106 산업을 확장하고 노동자들에게 생계 할 수없는 최저임금을 주면서 엄청난 이윤을 남겨 부를 축적했으며 상인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생산한 물질을 헐값에 사들이고 비싼 가격에 판매해 이윤을 남기며 부를 축적하기 시작합니다. 물질이 화폐라는 매개체를 통해 교환되면서 금융업 종사자들 수가 불어났으며 금융 업종사자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물질을 획득하기 위해 화폐의 유통필연성 을 조장하며 공장을 짓기 위해 많은 돈을 빌리는 사람들에게는 소액 이자로 대출하 고 소액을 빌리는 서민에게는 고액의 이윤을 챙겼습니다. 모두에게 균등하게 일자리와 재물을 분배할 수 없어 발생한 1830년 공황으로 빈부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굶주린 인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 해 철도공사를 시작했던 프랑스는 1837년 파리에서 생제르맹앙레 간에 철도를 개 통했으며 다중의 저항을 달래기 위해 도시재건축과 철도건설을 시작합니다. 폴란드에서는 1832 년 폴란드 생산자 동맹을 만들고 강령으로 공유재산, 사회적집산 주의, 무계급사회, 민중-민족의 지배를 주장했으며 1836 년 폴란드인민 회로 발전 하여 강령으로 폴란드인민과 연대, 평등한 민주주의, 국제연대, 농민대중과 함께 사 유재산의 폐지와 사회적 소유를 설파하다 1863년 1 월 봉기합니다. 바르샤바의 젊은이들이 Poland, Lithuania, Rusia인들에게 아시아의 봉건제와 유럽 의 착취제도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목숨 건 투쟁을 해야 한다며 무기를 잡을 것을 호소하며 모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경작농지는 농민이 소유해야 한다며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는 왕령지의 땅을 분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신 왕족이 아닌 지주들에게는 배상을 지불하고 루테니아인( 오늘날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과 유대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차별도 폐지해야 한다면서 형제적 사랑을 호소하므로 초기에는 노동자, 대학생만 참여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농민과 빈민들이 호응하자 재산을 몰수당할까 두려워한 지주들이 봉기에 앞장섭니다. 봉기에 함께 했지만 명망 있는 자들이 임시정부의 권력을 차지하자 무산자에 대한 토지수여를 거부하고 열강개입을 호소하여 프랑스가 군을 파병해 월등한 화력으로 혁명군을 학살하자 수세에 몰리게 된 평등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산속으로 피신하며 저항했고 러시아에서는 1864년 3월 2 일 차르가 농노해방령을 내리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발생된 1830년 7월 혁명은 1789 년 혁명시기에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이 전파되어 있던 유럽에 들불처럼 번졌으며 남부 네덜란드에서 7월 혁명 이후 한 달 만에 브뤼셀에서 혁명이 발생되고 같은 해 10월 벨기에는 독립을 선언했으며 런던조약을 통해 폴란드는 국제적으로 독립국가로 승인받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부를 축적한 상공인들이 생산기계의 자동화로 10 명의 노동자가 만들던 물질을 1명의 노동자가 노동해도 더 많은 물질이 생산되자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했으며 해고된 노동자들이 수입이 없어 소비를 못하니 소 상인들이 폐업하고 노동자들과 서민의 빈곤은 극에 달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실직한 노동자와 도시서민들은 자신들의 노동력과 재물을 갈취해 부자가 된 자들이 먹다버린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고 병을 앓기도 했으며 병들어 신음하는 도시빈민을 부자들이 더럽고 재수 없다며 폭행을 가하고 쫓아내니 이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굶어죽지 않기 위해 저항하게 됩니다. 공황은 이윤이 남지 않는다고 생산을 중단하거나 환경재앙으로 농사가 않되 발생하 는 물질부족공황이 있고 자동생산기계의 발달과 노동자들을 기계처럼 부려 물질을 다 팔지 못한 정도로 생산해 발생하는 과잉생산공황과 분배불균등으로 빈부격차가 발생해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못하는 금융공황이 있습니다. 공황이 발생되면 노동자와 서민을 갈취해 먹고살던 룸펜들이 궁핍해져 사기 절도 강

107 도 등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리며 노동자가 생산한 물질은 넘쳐나기 때문에 가격이 하락하고 많은 물질을 판매하지 못해 이윤이 없는 상인들은 조금 팔아서라도 먹고 살아야 하니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됩니다. 잠자는 시간도 없이 힘겨운 생산노동으로 물질을 만들고도 빈곤에 허덕이는 노동자 들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도 하고 공장을 점거하는 파업도 했지만 권력 이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저항하지 못하게 강제하고 1832년 법률을 개정했음에도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자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선거권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1836부터 런던에서 W. 오언을 고문으로 하고 W. 러벗을 노동자대표로 내세워 런던 노동자협회를 결성했으며 버밍엄에서는 은행가 T. 애트우드가 노동자들의 힘을 이용 하기 위해 버밍엄 정치동맹을 만들고 북부와 서부에서는 F.E. 오코너가 노던스타 지를 발간하여 노동자들이 저항을 시작한 것을 차티스트운동이라 부릅니다. 1837년 공장 법을 개정했지만 1838년 5월 런던의 윌리엄 러벳은 재산이 없는 사람 도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남성의 보통선거권, 균등한 선거구 설정, 비밀투표, 매년 선거, 의원의 보수지급, 의원 출마자의 재산자격제한 폐지 등 6 개 조항을 명시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을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이 헌장을 실현시키는 전국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각지를 순회하며 집회를 열고 1839년 2월에는 런던에서 5월에는 버밍엄으로 옮겨 통일대회를 열었으며 국민청원 서명운동을 하면서 노력했는데 오코너지지파와 러벗 지지파가 대립해 결말을 짓지 못하고 6월 120 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합니다. 무력이 따르지 않는 청원은 지배계급에서 직접적인 피해가 없으므로 거부됐으며 오 히려 러벗 등 청원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관헌들에게 체포되므로 런던대회가 무산되 고 노동자들의 파업결의도 취소되는 등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관헌들의 여론조작과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탄압으로 9 월에 해산됐습니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생산기계 발명으로 노동이 단순화 되므로 성년남성들의 숙련되 었던 수공업노동가치가 감소되고 공장 법으로 힘이 약한 여성과 나이어린 노동자를 고용해 저임금을 지급하며 장시간노동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노동환경이 비위생 적이고 위험한 상태로 방치돼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생명이 짧아졌습니다. 생산하는 노동이 없으면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질이 생산되지 않고 물질이 부족하면 전체 인민대중의 저항이 커질 뿐 아니라 귀족들이 생존하는데도 문제가 발생되므로 노동자를 보호할 수밖에 없는데도 노동력 보호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 라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1802 년 처음 만든 것이 공장법입니다. 노동력의 보호를 위해 만들어야 할 공장 법을 여성과 연소노동자들에게 장시간노동 을 강제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저하시키며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와 노동자들의 삶은 참혹해졌지만 기업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할 권리와 상인은 대중을 갈취할 자유 를 침해한다면서 거부해 기업과 상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상공인에게 유리한 공장 법임에도 상공인들은 지키지 않고 노동자를 착취해 잠도 못자고 먹을 것도 부족한 상태에서 죽도록 생산노동만 하므로 노동자들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됐는데 이모든 원인이 권력을 귀족과 유산자들만 행사할 수 있도록 되 어있는 선거에 있다며 봉기하니 1837 년 임시방편으로 다시 개정한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프루동은 1840 년 대학의 현상논문에서 소유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내고 재산이란 도둑질한 물건이다. 라고 정의하고 농부가 자신이 일할 토지와 장 인이 도구나 작업장을 소유할 권리는 본질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년 소유자에 대한경고 (Avertissement aux proprietaires )라는 저서를 발행하므 로 권력의 미움을 받아 체포됐으나 그의 깊은 학문적 이해가 부족한 판사들이 내용

108 을 이해할 수 없다고 양심적으로 판결함으로 석방되었으며 를 팔고 수상운수회사에 사무책임자로 취업되어 갔습니다. 1843년 자신의 인쇄소 거기에서 직조공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회원과 접촉하다 프로이센의 마르크스와 러 시아의 바쿠닌을 만났으며 이들은 노동자가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동의했지만 프루동이 권력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되므로 집단주의는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가져와 다중인민에게 더 가혹한 억압을 안겨주므로 누구에게나 자 유가 보장되는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프루동은 소유는 권력= 착취= 지배로 통하는 수단으로 국가권력기구가 생기고 통제 라는 틀을 갖추게 되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되기 때문 에 평등을 부정하는 결과가 발생되므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집단주의를 주장하 는 것은 평등과 자유를 부정하고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난 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 민중Le peuple]지에 나폴레 옹 3세를 비판하는 글과 경제적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 이라는 저서를 발행했다가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벨기에로 피신했다 파리로 돌아와 체포 됐으며 생트펠라지 감옥에서 생활하다 1852 년 석방됐습니다. 저서는 자신의 이론에 입각한 교환은행을 제안하면서 화폐와 이자를 사회악의 근원 으로 보고 노동에 의해 취득한 재산만 인정하기 위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을 표기 하는 증권을 발행하고 교환하는 은행설립을 주장했지만 노동력을 교환하는 시장이 나 은행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계급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년 에프라지 피에가르드(Euphrasie Piegard)와 결혼하고 혁명가의 고백 민 중의 목소리 를 발행했다 기소되어 감옥생활을 했으며 1858년 혁명과 교회의 정 의론 을 발행하고 다시 3년의 징역형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브뤼셀로 피 신해 레프 톨스토이를 만납니다 년 파리로 돌아와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를 쓰는 등 소유제도의 근거를 법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그 어떤 이유에 의해 서도 재산은 정당화될 수 없으니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안은 직접생산노동자 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던 프루동은 1865 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영국의 차티스트운동은 1840년 오코너가 맨체스터에서 전국헌장협회를 설립하고 1842년에 325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제출했으며 같은 해 버밍엄에서 정치동맹 대신 완전선거권동맹을 조직하며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거부되므로 동맹이 깨 지고 러벗이 물러났으며 북부에 번졌던 파업운동은 무력으로 진압됩니다. 오코너는 노던 스타 및 전국헌장협회를 통해 굴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으나 성과 없이 물러나고 G.J. 하니가 대표로 선출돼 마르크스 엥겔스와 협력하며 1845년 설 립한 우애( 友 愛 ) 민주주의협회를 기반으로 노동자조직을 호소하면서 570만 명의 청 원서명을 모아 4 월 런던에서 대 청원시위운동을 시도합니다. 시위는 경찰과 군의 무력에 대항하지 못하므로 진압되었으며 청원서는 하원의원에 전달했지만 이것 역시 부결되었을 뿐 아니라 기득권들이 1847년 노동자들을 보호 한다면서 10시간 노동법 등 보호입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저항을 달래므로 노동자 투쟁이 다소 진정 됐습니다. 노동자투쟁이 진정되자 기득권들은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법질서라는 명분으로 경찰을 동원해 체포하고 투옥시키는 등 탄압이 극심해져 전국헌장협회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차티스트운동은 1858 년의 대회 후 소멸됐습니다. 마르크스는 1844 년 경제학 철학초고( 草 稿 ) 와 법철학비판서설 ( 法 哲 學 批 判 序 說 ) 을 발표했으며 1842년 처음 만났던 F. 엥겔스와 1845년에 파리에서 재회하고

109 공동으로 신성가족 과 독일 이데올로기 라는 책을 집필했으며 여기에서 처음으 로 유물사관을 주장하므로 새로운 철학의 장을 정립 설명했습니다. 1847년에 P.J. 프루동( ) 이 발표한 빈곤의 철학 을 관념적이라며 비판 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했다면서 철학의 빈곤 을 썼으며 그해 런던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 공산주의자동맹 강령인 공산당선 언 을 공동명의로 집필하고 이 선언문을 2 월에 발표합니다. 마르크스가 전반적으로 주장한 내용은 인류는 원시시대와 노예제시대를 거쳐 산업 사회로 발전했으며 산업사회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때문에 생산하는 노동자와 농 민들이 노동하면 노동할수록 노동으로 이익을 남기는 공장주나 토지소유주는 많은 부를 축적하지만 물질을 직접 생산하는 사람들은 더욱 빈곤해 진다는 것입니다. 산업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으며 생산수단을 소유 한 유산자 중심의 분배구조와 경쟁 때문에 분배불균등이 발생하고 빈부격차가 커지 면서 결국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못해 공황이 발생되기 때문에 공정하게 분배하 는 사회로 발전하지 않으면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주장입니다. 산업사회는 재산을 소유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유산자와 재산이 없어 몸으로 노동하며 착취당하고 살아가는 무산자로 나뉘고 착취는 잉여노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생산노동을 중단하면 착취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무산자가 생산노동을 멈추고 단결로 저항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두가 공정하게 노동하고 공정하게 분배받는 공산주의사회는 저절로 발전하는 것 이 아니라 무산자들이 단결하고 뭉쳐서 투쟁할 때만이 건설될 수 있기 때문에 무산 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고 집단을 이루어 무력을 갖추고 투쟁으로 착취체제와 구질서제도들을 소멸시켜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 가족관계 등 유산자를 위한 관념적 사고를 설교하며 다중을 세 뇌시키므로 무산자들이 과학적 분석을 할 수 없도록 방해하고 은혜와 온정주의를 강조하므로 억압과 착취당하면서도 투쟁하지 않고 순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마 약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랑과 평화란 힘이라거나 권한 또는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고 동등한 입장을 갖추 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할 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인데 어느 한쪽이 억압받거나 착 취당한다면 억압과 착취라는 불평등에 저항하지 않고 계속평화가 이루어졌다면 그 것은 굴종과 복종이 오래 동안 유지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1846년 폴란드에서는 2월 22일 공화국 농민들이 민족정부를 선언하고 봉기를 일으 키는데 크라쿠프( 폴란드의 전통 민속)정신을 바탕으로 농민들이 토지의 소유자가 되 며 소작과 부역이 사라지는 사회체제를 건설할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봉기 지도부 를 포함한 모든 슐라흐타의 장원을 습격하고 영주와 그 가족들을 살해했습니다. 농민들은 점령당국의 착취와 수탈을 거부하며 저항했는데 지도부는 농민들의 분노 를 애국으로 몰기위해 슐라흐타에게 향하도록 하자 다른 지역은 폴란드 왕령 경작 지였지만 산악지대 농민들은 오스트리아가 경작지를 매각하므로 생계터전을 박탈당 했기 때문에 지도를 부정하고 오스트리아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합니다. 1832년부터 시작한 폴란드의 크라쿠프 봉기는 런던의 폴란드 생산자동맹 강령으로 인민의 연대, 공유재산, 사회적 집산주의, 무계급사회, 민중- 민족의 지배 를 강조했 었으나 1836 년에는 폴란드 인민의 강령 으로 폴란드 인민과의 적극적 연대, 혁명 적 민주주의, 국제연대, 사유재산의 폐지와 사회적 소유를 내세웁니다.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폴란드 크라쿠프봉기는 의견이 합쳐지지 못했으며 지도를 자 청하는 귀족들과 독립을 주장하는 왕족간의 권력다툼이 되면서 저항하던 농민들을

110 오스트리아군대가 부다페스트로 진입하여 무력으로 무자비하기 학살하고 강제 진압 하므로 수천 명의 망명자를 낳고 진압당합니다. 프랑스는 루소의 자유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프루동, 바쿠닌 등이 주장하는 자유주 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1847년 초부터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루이필리프와 권 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를 금지한다고 발표하므로 ' 연회' 라는 편법을 사용해 유산자들과 억압받는 세력이 모여 집회를 했습니다. 1848년 프랑스는 1830년 혁명으로 샤를왕조를 몰아내고 왕조통치를 종식했음에도 유산자들이 옹립한 루이필리프 권력에 의해 중도주의 군주제 형태를 고수하면서 노 동자와 농민들을 세금이라는 명문으로 수탈하므로 생산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 해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굶주리던 인민들은 다시 저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789년에 제정된 헌법(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자유롭고 권리도 평등 하다. 제2 조 모든 정치적 결합 목적은 인간의 자연권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있다. 제3 조 모든 주권( 권력) 의 원리는 인민 속에 있다. 제4조 모든 사람의 자유는 존중돼야 하며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을 준수하라고 요구했습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 열린 공개토론회가 정치적 시위로 발전하자 혈세로 먹 고사는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분노 한 민중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면서 24일에 왕궁까지 위협하자 루이필리프는 퇴위 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망명하므로 임시정부를 구성합니다. 시청에 설치한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성년 남자( 여성제외)의 보통 선거제를 선언하는 동시에 실업자를 구제하기위한 기관으로 국립 작업장을 설립했는데 4월 23일의 선거에서 유산자와 기회주의자들이 압승하자 새로 선출된 의회가 국립 작업 장을 폐쇄하므로 노동자들이 6 월에 저항(6.23~26)했으나 군에 의해 진압됩니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노동자와 농민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해 투표로 권력자를 선출 하는 선거제가 정착되자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농민이나 다수 대중을 수탈하 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한 은행가 대지주 산업자본가들이 질서당( 秩 序 黨 ) 을 결성하고 공화주의파와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는 루이블랑 등이 대립합니다. 다수결에 의한 대의제는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조건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 나 갈취해 부를 축적하고 선거자금을 사용할 수 있는 유산자나 다중을 속이는 위선 으로 이름을 날린 명망가들이 선거를 통해 소수가 다수를 지배 통제하는 거짓 민주 주의일 뿐 만인이 평등한 민주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유산자 위선자 민주주의 정착 목 록 다중이 투표를 하지만 선출되면 특권이 주어지고 세비로 생계걱정이 없으며 각종 법률이나 정책을 입안할 때 이익 관련자들이 뇌물을 갖다 바치므로 자연스럽게 재 산을 축적하고 후일 연금이라며 생활비가 주어지기 때문에 선출된 자들은 평등을 바라지 않고 특권을 누리는 기득권이 되는 것이고 투표자는 거수기로 전략합니다. 다수결선출 대의주의는 다수가 선출할 권한은 있을 뿐 선출된 소수는 임기가 보장 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다중을 갈취하며 피해를 입히는 법률이나 정책 을 입안해도 막을 수 없고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법률이나 정책을 입안해도 다수는 관여할 수 없이 권리만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다수결선출이 민주주의라는 왜곡으로 온갖 권모술수와 조작 그리고 음모와 모략이 횡횡하게 되었으며 특정인이나 특정사상을 지지 받기위해 집단을 편 가르기 하므로 집단이나 조직이 분열되고 다수가 소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세뇌 하므로 집단의 무리 중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수단이 됩니다

111 모든 집단이나 조직의 일원은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되면서 다 수의 폭력이 정당화 되었으며 아무리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도 불합리를 찬동하는 다 수에 의해 소수의 정의롭고 순수한 사상들이 불이익을 당하면서 불평등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848년 4월 말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실시하자 재산을 축적한 자들과 기회 주의로 명망을 얻은 자들 그리고 나폴레옹의 영광을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 르트가 재현해 줄 것이라고 믿은 농민들에 의해 12월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 파르트가 당선되고 제2 공화정이 출범합니다. 급진파와 왕권으로 회귀하려는 왕당파 그리고 평등을 주장하는 공화주의파가 선거 에서 대립했으나 정치의식이 낮고 종교의 인정주의에 세뇌된 농민층은 급진파가 기 득권들을 척살하고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에 충격 받아 거부하고 중산층은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데 반대해 결국 보나파르트가 당선된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투표권을 행사했을 뿐 그 어떤 경제적 정치적 권한도 얻지 못했 으며 보나파르트는 헌법을 개정해 연임하려다가 의회가 거부할 것을 알고 1851년 12월 2일 지도적인 정치가들을 체포해 구금하며 국민투표로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 켜 연임하면서 1852년 12월 황제라 칭하고 나폴레옹 3 세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주변국으로 번지기 시작해 1848년의 봄이라고 명명하게 되는데 헝 가리는 혁명을 일으켜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자치와 자율권을 인정받았으며, 체코는 시민적 권리와 언어의 권리를 보장하는 교서를 받았고, 슬로베니아는 민족적/ 정치 적 요구보다 사회적 불만을 해소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는 1848년 3월 25일 자그레브의 집회를 통해 코슈트의 제안과 오스만터 키제국의 승인으로 일시적으로 마쟈르 족에 통합되었으며,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의 농민들이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정치의식에 눈 을 뜨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독일지역에서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해 독일의 모든 공국 내 자유주의 지도자 들 제창으로 1848년 3월부터 통일 독일을 건설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를 암마인 지역에서 열어 예비의회(Vor-parlament)를 하고 국민의회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50 인 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장크트파울 교회에서 국 민의회가 개최되었으며 선거에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 다수가 당선되어 의원직을 차지하자 4월 서남부에서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이 봉기를 일으킨 것을 억 압하므로 통일 독일을 위한 헌법이 탄생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습니다. 국민의회는 통일된 독일에서 보장되어야 할 기본원칙과 기본인권에 관해 상당히 오 랜 기간 동안 토론했으며 그밖에도 행정부의 성격, 독일의 영토 범위 등과 같은 문 제도 결정해야 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이복동생이며 라이닝겐 대공인 카를의 주재로 임시정부를 구성합니다. 국민의회가 임명한 행정부는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 문제로 덴마크와 전 쟁을 시도했으나 의회를 무시하던 프로이센이 갑자기 8월에 전쟁을 중단하므로 라 이닝겐 대공은 1848년 9월 5일 사임했으며 후임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자유주의자 인 안톤 폰 슈메를링이 12 월까지 이어가다 하인리히 폰 가게른으로 교체됩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4세는 자유주의를 혐오하면서 갈수록 대중을 무력으로 억압하고 통제해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갈취해야 누리고 살 수 있다는 보수파 조언자들과 지내며 무력을 행사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페르디난트 황제가 조카인 프란츠 요 제프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는데 그도 보수주의 장관들에 의존합니다

112 독일의 두 강대공국에서 평등을 부정하는 보수주의 권력이 들어서므로 독일주권의 성격과 영토범위에 대해 다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1848년 말 국민의회는 중앙정부 인물이나 성격에 관해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독일헌법에 포함될 기 본권에 관한 토론을 종결하고 1849년 1월 헌법초안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각국 에 전달했습니다. 독일의 영토범위는 3월 4일 오스트리아헌법에서 제국은 하나의 단일체로 간주되고 제국 전체가 새로운 독일에 가입하지 않으면 소국이 별개로 독일에 가입할 수 없다 고 선포하므로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영토를 포함시켜 ' 대독일'(Grossdeutsch)을 꿈꾸 던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자유주의에 타격을 주었고 프로이센이 통일의 중심이 되 는 ' 소독일'(Kleindeutsch) 방안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3월27일자로 헌법이 채택되면서 중앙 행정권은 세습 황제의 손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왕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무마하기 위해 보통선거의 시행을 약속하 고 3월28일 국민의회에서 신임 황제에 대한 투표를 실시한 결과 290표는 프로이센 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찬성하였으며 248 표가 기권했습니다. 4월 3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의회 의장 두아르트 짐손이 황제 위를 제의하 러갔으나 보수적이고 우월주의자인 그는 다른 독일 제후들 이외의 사람들에게서 독 일 황제 위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헌법 초안도 거부하므로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 아의 지원을 받지 못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됩니다. 5월경 가게른 내각이 붕괴되었으며 대다수의 대의원들은 자국정부의 소환명령을 받 아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잔류 의원들은 슈투트가르트로 옮겨갔지만 6월 18 일 뷔르템베르크 군대와 경찰의 무력에 의해 해산되면서 통일 독일을 만들려던 프 랑크푸르트 의회와 그 의회를 성립시켰던 활동들은 끝났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억압과 통제를 거부하는 자유주의 통일운동이 활발해졌으며 마치니 등의 청년 이탈리아당이 1848년 11월 로마 공화국을 건설했으며 북이탈리아에서는 사르디니아의 통일운동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성립되었고 폴란드 헝가리 뵈멘 덴마 크에서도 독립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면서 대의제선거제가 정착됩니다. 힘으로 침략해 다중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해 부를 축적하며 권력을 누리던 왕조 시대는 대부분 막을 내리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한 유산 자들이나 다중을 속이는 사기술로 명망을 얻은 위선자들이 사회구성원의 선거를 통 해 소수 지배자를 선출하는 계약에 의한 국가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1803년부터 1848 년까지는 미국의 " 서부 개척시대" 라고 하는데 개척민들은 담배 농 사에 필요한 새로운 농토를 찾아 서부로 이동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어린이와 여성 을 포함한 인디언원주민 약 300만 명을 학살하고 장악했으며 미국정부는 인디언을 보호구역에 강제수용(1830 년)하고 1850 년에 도망노예단속법을 만듭니다. 1823년 12월 2일 군사력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 미국대통령 제임스먼로는 임기 7년 째 되는 해 의회 일반교서 연설에서 미국은 전쟁에( 유럽 전쟁이든 식민지 전쟁이든 간) 참여하지 않는 대신 유럽강국들이 미국이나 멕시코 등 미 대륙에 있는 주권 국 가들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침략하는 전쟁도 거부한다면서 중립을 선언합니다. 드레드스콧(Dred Scott)은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미 육군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존 에 머슨(John Emerson)이 소유한 미주리 주 노예였지만 에머슨이 자신이 근무하는 군 적에 따라 일리노이로, 위스콘신 준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으며 새로운 부임지 로 옮겨갈 때마다 스콧을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부인소유가 아니었습니다. 1846년에 에머슨이 죽고 스콧은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는데 자청해서 노예에서 해 방시켜 주겠다며 유혹하는 노예제 폐지론을 주장하는 변호사들의 요청으로 에머슨

113 의 미망인을 당사자로 자신은 연방법에 의해 노예제가 금지된 일리노이와 불법인 위스콘신 준주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노예가 아니라 고 주장했습니다. 1857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흑인노예 드레드스콧이 자신은 에머슨부인 소유의 노예 가 아니라고 주장했음에도 북부출신판사들은 미국의회가 미국영토내의 노예제도를 금지할 권리가 없으며 노예는 미국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헌법 아래 보호되지 않고 소송권도 없다 고 판결하므로 남북전쟁의 기초가 마련됩니다. 미국은 북부와 남부의 생활풍토가 달라 북부는 산업 공업 어업을 유지했고 토지가 비옥한 남부는 농업, 플랜테이션 등을 통해 생활했기 때문에 북부는 노동자가 필요 했고 남부는 자신들을 대신해 농사지을 노예를 필요로 했는데 노동자가 필요한 북 부는 인간평등이라는 원칙을 주장하며 노예제 폐지를 요구하는 전쟁을 벌입니다. 60년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시작된 남북 전쟁은 1861년 4월 남부동맹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865년 까지 4년 동안 수많은 인민들이 전사하거나 질병으로 죽게 만든 전쟁을 북부 군이 승리하자 해방흑인 국을 설치했으며 헌법 13 조를 수정해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공업을 지향한 북부가 이기므로 산업이 발전하게 됐으며 전쟁과정에 병사들을 나르기 위해 또 노동자가 생산한 물질을 운반하려고 1869년 최초로 대륙 횡단 철도를 건설했고 열차가 운행되면서 노동자모임인 노동기사단이 결성됐으며 선거권이 없던 여성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전국여성참정권협회를 만듭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흑인 노예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 졌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주인에 게 억압받고 예속되는 노예로 살아온 흑인들 중 일부는 내가 밖에 나가도 임금노 예로 살아야 하는데 거주할 주택도 없고 취업도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예전대로 노 예로 살면서 월급을 받겠다. 며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생활하며 자라온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데 인간은 아무리 많이 생산되고 다루기 쉬운 생산도구가 발명되어도 그것을 자유 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숙련되고 효율성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오래 동안 사 용해 손에 익은 비효율적인 생산도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두 평등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부모형제의 간섭 을 받거나 유아시절부터 학교라는 조직에 갇혀 지시받고 군대라거나 직장에서 통제 와 감시 속에 살면서 사회에서까지 법률( 규칙)에 통제되고 지시받는 갇힌 틀에서 벗 어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부모라는 핑계로 자녀를 마음대로 억압하고 통제하다 생활이 어렵다고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행위는 폐륜을 넘어 악행을 저지르는 망종이며 형제나 부부 또는 상사라고 해서 상대방의 자유와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 하며 간섭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부당한 억압이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성되고 지켜질 수 있는 것으로 누가 누구를 착취하거나 법이나 규칙 또는 관습이나 조직 그리고 혈육이나 가족 등 그 어떠한 이유로든 상대방의 자유를 부정하고 의사를 통제 또는 지시하며 억압하려 들면 절대로 평등한 세상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상호존중이란 서로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하며 신뢰란 상호간에 숨김과 가식이 없이 진솔하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행동해야 생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며 자신은 좋다고 표현할지 몰라도 상대방을 귀찮게 치근거리거나 부담을 주어 불편하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과학발달과 다수결 선거선출주의 목 록

114 프랑스 보나파르트 정권은 재산이 있는 상공인의 권리와 시장자유주의를 우선하는 보수정치를 펼치면서 생산노동을 하는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들게 노동을 하고도 수 입이 없어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빈곤해지면서 다수가 소비를 못해 공장에서 아 무리 좋은 물질을 생산해도 팔리지 않는 공황이 계속이어 집니다. 노동자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며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좁은 도시를 허물어 도로를 확장하고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며 수입을 얻어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재건축 과 도시정비 사업을 전개하면서 수입이 생긴 다중이 소비하므로 산업생산이 배로 늘고 대외무역은 3 배로 증가했지만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못했습니다. 1854년 3월 28 일 러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 간에 전쟁이 발생하자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오스만 제국이 연합전선을 형성했는데 사르데냐 왕국은 이탈리아를 통일시키고 싶은 욕망에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을 계산으로 참전했으며 전쟁의 대부분은 흑해에 위치한 크림반도에서 벌어졌기에 크림전쟁이라 합니다. 이 전쟁은 4번의 전투에서 러시아제국이 완패하므로 종전을 맞았으며 1856년 파리 조약으로 러시아제국은 헌법을 수정해야 했고 다뉴브하구 및 흑해인근에서 영향력 을 잃고 흑해는 모든 국가의 군함 통과를 보장하기 위해 무장이 제한되는 중립지역 이 됐으며 오스만제국은 탄지마트라는 개혁을 추진해야 했습니다. 1856년 3월 30일 체결된 조약을 통해 러시아출신의 핀란드공작이 소유하던 발트 해의 올란드제도와 모든 군 관련 함선의 항해 및 군무장이 불가해지자 인근의 투르 크영토는 중립국 지위를 얻게 됐으며 오스만에 복속되어 있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은 통합되어 독립헌법을 제정하고 남쪽 베사라비아영토를 양도받습니다 년에 인도에서 발생된 세포이항쟁 또는 세포이반란 ( 영어: Indian Rebellion of 1857)은 세포이용병들을 중심으로 무력으로 영국의 식민지정책을 반대하며 일으킨 저항이 인도전역으로 확산된 사건으로 영국은 " 세포이의 반란" 이라 부르고 인도에 서는 " 제1 차 독립전쟁"(First War of Independence)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당시 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동인도주식회사는 인도대중들을 통제하기 위해 군을 사 용했으나 본국 군인들이 부족하므로 대부분 용병을 채용했는데 영국군의 90% 이상 이 세포이용병들이었기에 가능했으며 이들은 무굴제국의 복권을 선언하므로 식민지 를 거부하고 옛 지배층과 규합해 여러 지역에 거점을 만들어 저항했습니다. 영국은 19세기 중엽까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여 다종교사회인 인도에 시크교 국, 마라타동맹, 마이소르왕국의 내분을 조장하는 방법으로 인도 전역을 점령하면서 지배하기 시작해 인도의 정치, 경제, 조세제도를 무너뜨린 후 자국의 면제품을 인도 에 값싸게 공급하자 인도 최대 산업이던 면직물산업이 몰락하게 됩니다. 카스트제도와 많은 악습이 존재하는 인도는 시급히 유럽의 문물을 전파하며 개혁을 시도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영국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많은 양의 자원을 인도 로부터 수탈해갔는데 영국 동인도회사의 용병인 세포이용병들이 영국군장교들의 차 별, 빈곤, 민족주의적 행위에 자존심이 폭발해 항쟁으로 번집니다. 용병들은 영국의 수탈행위 때문에 자신의 민족들이 빈곤해 진다며 감정이 좋지 않 았는데 인도용병들에게 지급하는 신식무기인 엔-필드 소총탄약통에 힌두교도가 신 성시하는 소의 기름과 이슬람교도가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기름이 발라져있다는 소 문이 돌면서 탄약통 수령을 거부하므로 대대적인 항쟁의 근원이 됐습니다. 1854년 5월 인도 델리 근교 소도시 메루트에서 처음 봉기한 세포이들에게 항명죄 로 10년의 중노동형이 선고되자 동료 세포이들이 분노해 대규모 무력봉기를 일으켰 으며 영국의 식민지정책으로 착취와 수탈로 빈곤에 허덕이던 민중들의 분노도 함께 폭발해 델리를 장악하고 영국군을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1859 년까지 지속됩니다

115 영국군은 본국의 증원 군과 네팔용병인 구르카, 시크교도들을 투입하고 월등한 화 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저항군의 지도자역할을 했던 옛 봉건세력들은 이 권다툼과 이해타산만 따지면서 저항의 정당성을 확립하지 못해 저항군들은 우왕좌 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영국군의 진압과 보복은 무자비해 붙잡힌 세포이들을 대포에 묶고 인간탄환으로 처 형하거나 도륙하기도 했으며 항쟁의 실패로 무굴제국 황제가 폐위되면서 무굴제국 의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고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지배가 끝나고 대영 제국이 인도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됨에 따라 인도제국이 됩니다. 영국은 이 항쟁으로 인도의 문화정책을 허용하고 구제도와 관습을 존중하면서 지배 층의 착취와 갈취 그리고 통제와 억압을 인정해주며 식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합 의하므로 인종, 종교, 카스트의 구별 없이 광범위한 계층이 규합되어 영국의 식민정 책을 반대했던 항쟁은 무산되고 인도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습니다. 1856년에 종전한 크림 전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협력체제는 부활했지만 빈부격차 때문에 발생된 경제침체는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고 빈곤에 허덕이는 대중들이 분 노하고 이윤을 남기지 못한 상공인들이 동요하며 체제를 유지할 수 없자 1859년 나폴레옹 3 세는 일부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도를 정비하려했습니다. 1861년 서유럽이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러 시아에서는 나로드니키( 인민주의자( 人 民 主 義 者 ) 라는 뜻의 러시아어) 라는 조직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후진성으로 유지되는 농촌공동체를 바꿔내고 농노를 해방하 기 위해 ' 토지와 자유파' 를 만들어 활약하기 시작합니다. 농노소유자로부터의 인신해방( 人 身 解 放 ) 과 차르제의 봉건성( 封 建 性 ) 타도를 외치며 A.I. 게르첸과 N.G. 체르니솁스키는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농민에 대한 계몽운동을 벌 였으나 1874년 경찰의 탄압이 극심해 지는 과정에 대립이 생겨 1879 년 ' 인민의 의 지파(Narodnaya volya) ' 와 ' 흑토( 黑 土 ) 재분할파(Chyo rnyi peredel) ' 로 분열됩니다. 1867년 스웨덴의 물리학자 알프레드 노벨은 실수로 쏟아 니트로글리세린에 규토를 혼합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특허를 따므로 질산칼륨과 황의 혼합물로 시작해 그 리스의 불( 황 로진 생석회 석유의 혼합물)로 불리던 화약이 1313년 슈바르츠가 발명했 던 흑색화약의 수십 배 폭발력을 발휘하는 물질이 되면서 살상무기도 발전합니다.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폭정을 일삼던 부르봉 왕가가 쫓겨났으며 혁명 지도자들이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 사촌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 안하자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의 반대에도 불구 하고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고 1870년 6월 21 일 수락을 발표했습니다. 통일독일을 꿈꾸던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덴마크(1864)와 오스트리아 (1866)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력이 더 강한 남부독일을 합 병하지 못하고 있다가 무력으로 병합하려 했는데 러시아와 영국이 반대하므로 어쩔 수 없이 단 4 개의 연방만을 독일로 편입시킨 후 영토를 늘리려 했습니다. 프랑스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합병을 꾀하자 비스마르크는 런던 회의에서 룩셈 부르크를 중립국가로 만들어 프랑스의 룩셈부르크 합병을 좌절시켜 프랑스가 이에 항의해서 프로이센 인이 스페인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철회하라는 문서를 보내므로 스페인은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 세를 왕으로 선출합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려면 프로이센의 협력이 필요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 중왕국을 선포하므로 헝가리의 자치를 인정해야 하는 등 어수선했으며 러시아는 비 스마르크로부터 흑해 조약을 풀겠다는 약속을 받고 친 프로이센 경향을 보였는데 보나파르트는 엠스전보사건으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7월 19일 프로이센에

116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엠스전보사건이란 1870년 7월 7일 프랑스의 베네딕트 대사가 빌헬름 1세의 휴양지 인 엠스를 찾아가 스페인왕위 계승 같은 건의 재발 방지를 보장하라고 요구하지만 빌헬름 1세는 관심 없다며 거절했으며 나폴레옹 3세는 안일하게 프로이센이 항복할 것을 바라면서 사실상의 " 철회 보장" 만 요구한 것입니다. 그라 몽은 서면 보장을 요구하면서 협상 기한을 7월 12일로 최후통첩하고 빌헬름 1세는 레오폴드의 스페인 왕위 수락을 동시에 취소했는데 다음 날인 7월 13일 베 네딕트와 빌헬름 1세가 회동한 내용이 변경되어 영국 신문에 발표되자 이를 본 나 폴레옹 3 세가 분노를 일으키며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인민들이야 전쟁으로 죽거나 말거나 자신의 명예와 통일독일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이 전쟁은 9월 2일 스당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프로이센군 의 포격으로 전사하면서 포위망을 뚫지 못하다가 포위망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항복하고 포로가 되면서 끝납니다. 보나파르트를 포로로 잡은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포위하자 파리에서는 국가방위를 위한 임시 공화제정부를 수립한 기득권들이 프랑스 국민에게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완강하게 저항할 것은 요구했는데 9 월 말에 스트라스부르, 10월 말에는 메츠 요새 가 함락되었으며 1871년 1월 28 일 마침내 파리까지 점령당합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파리개성( 開 城 ) 직전인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 방에서 독일제국( 도이칠란드(Deutsch land))을 선포하고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추대하 자 이에 굴욕을 느낀 프랑스 국민들의 반감을 초래했으며 러시아는 전쟁이 끝나기 도 전에 크림전쟁의 패배로 흑해 해협에 관해 맺었던 협정파기를 선언했습니다.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을 제안하고 논의했지만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왕권정치 를 했기 때문에 정식 강화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 의회가 없어 2월13일 보르도 에서 개회한 새로운 의회는 나폴레옹 외교정책의 비판자인 오를레앙파의 아돌프 티 에르를 공화국 행정수반으로 선택합니다. 3월 1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이 체결됐는데 프랑스는 동부프랑스 지역 프로이센 군 주둔비와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고 알자스와 로렌의 절반을 양도하는 조건으 로 체결되자 국민들은 황제가 전쟁을 일으키다 패했고 유산자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조약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없다면서 프로이센군에게 적의를 나타냅니다. 3월 1일 파리에 프로이센군이 입성하자 파리 시민들은 침묵하면서도 적의를 내보이 며 저항하고 소극적인 반발도 계속해서 벌어지면서 상황이 악화되자 현지상황을 보 고받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통일독일이 목적이었으므로 민심을 동요해선 안 된다 며 철수를 명령해 3월 4 일 프로이센군이 파리에서 철수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3월 3일 프로이센군과 왕조 그리고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는 유산자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국민방위대를 결성했으며 국 민방위대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위해 중앙위원회 결성을 제안하고 유산자들끼리 구 성한 티에르 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구체제의 연장선에 있는 유산자의회 티에르 정부는 파리 시민의 고통과 저항에는 무관심하면서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3월 18일 농성 중인 시민들이 사용하려고 국민방위대가 준비한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고 정규군에게 명령하자 군인들은 명 령에 불복종하며 명령을 내리는 르콩트와 토마장군을 사살했습니다. 위선자와 유산자들로 구성된 의회는 베르사유로 도망했으며 이를 계기로 시민들 사 이에 숨어든 프락치와 생명을 중시해야 한다는 온정주의자들이 반발해 논쟁이 벌어 졌는데 시민들은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존중해야 하는데 정권과 의회는 국민의 안

117 전과 주권을 보장하지 못하므로 정부가 아니라고 결론 냅니다.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하거나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 한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고 혈안인데 종교의 온정주의에 세뇌되어 억압과 착취 통제를 깨달지 못한 사람들은 기득권을 보위하기 위해 인류를 학살한 무리를 옹호합니다. 정규군과 국민방위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 를 결성했으며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 인민의회)은 남녀 차별 없이 모두 투표할 권리가 있고 선출된 의원들은 임기 없이 언제든지 시민이 자격을 박탈할 수 있으며 중앙위원회는 그 때까지 잠정기관이라고 선언했습니다. 26일 절반정도가 참여해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85명의 의원이 선출되자 1871년 3월 28일 코뮌의 성립을 선포하고 노동자들은 10 시간 노동, 제빵공의 야근 철폐, 종교 와 정치의 분리 등을 실시하고 야간에는 권리를 학습했으며 여성권익을 위해 탁아 소를 설치해 여성을 육아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치적으로 운영됐습니다. 파리코뮌은 프랑스를 인민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방정부로 만들기 위해 호소문을 풍 선에 매달아 날려 보냈으며 마르세이유, 리옹, 생테티엔, 툴루즈, 나르본, 그레노블, 리모쥬 등의 지방에도 파리시와 같은 코뮌 결성을 선언했으나 자치방위군을 결성하 지 못해 혈세로 살며 학살만 교육받은 정규군의 무력으로 단기간에 진압됩니다. 코뮌은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하고 인민에 의한 자치 국민군설치, 주 거보장, 관리봉급의 최고액결정, 종교와 사유재산국유화, 공장은 노동조합이 관리하 고 부채를 탕감하며 이자를 폐기하고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최저생활을 보장하며 아 동의 야간노동을 금지시키고 여성참정권과 탁아소를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 했습니다. 파리코뮌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기득권을 누리던 각국의 정권들은 자신들의 영토로 파리코뮌사상이 전파될 것을 두려워해 조속한 진압을 티에르정권에 주문했으며 프 랑스 정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벨기에, 대영제국 이 진압군을 파병합니다. 1871년 5월 21일 시민들이 튈르리 궁전 정원에서 코뮈나르( 코뮌 지지자) 전사자 가 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는 사이 미리 숨어있던 간첩으로 부터 생클루 문 근처에 국민방위군이 없다는 하얀 손수건 신호를 받은 연합군은 베 르사유군 맥마흔(Mac-Mahon)장군의 지휘 하에 파리로 진입했습니다. 긴박한 소식이 코뮌 의회에 알려지자 의원들은 서둘러 방위태세를 위해 동분서주하 고 코뮌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금술의 군복과 금빛으로 장식한 군 장교는 싫다, 민중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혁명의 종소리는 울렸다.< 중략> 시민 여러 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함께 죽을 것입니다. 라는 호소문을 발표합니다. 밤이 되면서 시내에 들이닥친 정부군 본대 2만 명과 연합군은 시민들이 비무장을 하고 있었음에도 눈에 보이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며 학살을 자행했고 파리 시내교 차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파리코뮌의 마지 막 " 피의 일주일" 이라는 학살만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혈세로 살며 학살만 훈련한 군의 만행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 늘날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적게는 3만 명부터 많게는 5만 명이라는 주 장이 있으며 코뮌이 진압되자 기득권들은 코뮌사상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시민 10 만여 명을 체포하고 4 만여 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합니다. 코뮌에 참여했던 7,500명의 인사들은 프랑스 식민지인 누벨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되 기도 했으며 파리코뮌의 평등과 자유주의사상에 충격을 받은 미국 보수언론들과 개

118 신교 목사들은 파리코뮌 같은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평등과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사상이라며 노동운동을 탄압해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파리코뮌이 진압되자 유산자의회가 선출한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제 3공화 국이 출범했는데 1873년 빈부격차가 극심해 공황이 발생하자 티에르가 자신을 지 지하던 왕당파를 버리고 공화주의에 동조하므로 왕당파는 그를 해임하고 5월 군사 령관 맥마흔을 수반으로 교체합니다. 미하일 바쿠닌은 1848년 프라하의 봉기와 1849년 드레스덴의 봉기에 참가했다 체 포되어 1857년 러시아정부로부터 시베리아에 유형 됐지만 1861년 탈출하고 1863 년 폴란드의 무장봉기와 년 이탈리아의 혁명에 참석했던 자신의 경험들 을 정리한 사상을 1871 년 신과 국가 에 발표합니다 년 스위스로 이주해 비밀혁명전위대인 ' 사회민주주의동맹' 을 설립하고 착취주 의 사회를 범세계적인 평등주의연방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유럽 노 동자당의 연합체인 제1인터내셔널(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으나 1872년 마르크스가 헤이그 대회에서 다수란 명분으로 바쿠닌과 동료들을 축출합니다. 이때부터 사상논쟁은 조직으로 분열하고 숫자를 내세운 힘겨루기 다툼으로 변질되 는데 바쿠닌이 저술한 압제의 제국독일과 사회혁명 L'Empire Knouto-germanique et la révolution sociale (1871) 및 무정부주의 사회 Staat en anarchie (1873) 는 마르크스 와의 논쟁을 다룬 것이라고 합니다. 바쿠닌은 완전한 평등주의혁명은 폭력을 통한 기존질서의 파괴라며 무장투쟁을 역 설하므로 에스파냐 이탈리아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지만 권력을 부정하며 인민들을 정치적인 통제, 중앙집권, 권위주의로 복종시키기 위한 조직을 만들어 통제하며 질 서를 유지하는 것은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바쿠닌의 주장은 공산주의정당을 만들고 프롤레타리아집단독재를 통해 혁명을 일으 키는 것이 공산주의로 가는 단계라 주장하는 마르크스의 오류를 지적했으며 생산에 있어서는 단체가 함께 참가하고 그 재산을 공동소유해도 " 개인에게 자유가 보장돼 야 한다." 는 주장으로 러시아의 니힐리즘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합니다. 혁명적 독재와 평등주의의 차이점은 겉모습일 뿐이고 그 둘은 소수의 ' 지성' 과 다수 의 ' 어리석음' 을 가정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라는 동일한 원리로 그 둘은 머 지않아 통제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적, 경제적 특권으로 대다수 민중의 정치적 경제 적 종속을 유지하려는 점에서 지배논리가 됩니다. 1875년 독일 고타에서는 F. 라살이 이끌던 전 독일노동자동맹과 A. 베벨 및 W. 리프 크네히트가 당수로 있던 정당들이 통합되면서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이라고 명했으며 1878년 독일의 비스마르크 정부에 의해 불법정당으로 제재 받고 오히려 유명해져 번창하다가 1889년에는 제2 인터내셔널의 창설을 돕습니다. 1882년 6월 일본에서 은행조례가 공포되고 10월 일본은행이 만들어지면서 초대총 재로 요시하라 시게토시[ 吉 原 重 俊 ] 가 업무를 개시하여 1885년에 일본은행권을 금본 위가 아닌 은본위 태환은화를 발행하며 발권업무를 시작했고 1899년 12월에는 기 존 국립은행 및 정부지폐 통용( 유통)을 금지하고 일본은행권으로 일원화시킵니다. 전기의 발전 목 록 기원전 550년경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보석인 호박( 고대는 귀한 보석이었음) 을 깨끗하게 닦기 위해 베 조각으로 문지르다가 호박 주위에 있던 먼지와 실 새털 천조각 등 가벼운 물질들이 호박에 붙는 것을 보고 연구를 거듭하다가 마찰전기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전기에 대해 몰랐던 고대그리스 사람들은 마찰전기에 의해 호박이 물질을 끓어 당

119 기는 것을 보고 호박 속에 신( 神 ) 이 있다고 믿으며 호박을 호신용 부적으로 달고 다 녔으며 철학자들 사이에는 마법의 돌로 불렸고 탈레스는 흡인력이 우주를 지배하는 새로운 요소로 알았으며 이때부터 호박을 전자(electron)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600년 영국의 의학자 길버트는 양의 전기와 음의 전기가 끌어당기는 마찰전기를 증명하기 위해 실험하고 저서 De Magnete ( 전자기론) 에서 'Electrica' 로 명명했는데 1646년 영국의 브라운이 저서 Pseudodoxia Epidemica ( 유행 하는 외견상의 도수관) 에서 전기(Electricity) 라는 단어를 사용하므로 전기라는 용어가 됐다는 것입니다. 길버트가 발표한 가설에 자극을 받은 당시의 학자들은 여러 가지 물질에 대해 같은 실험을 반복하다 마찰전기에 의해 불꽃방전이 생기는 사실도 발견했으며 불꽃방전 시에 생기는 발광을 모을 수 없을까 궁리하다 1746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의 뮈센 브뢰크가 유리용기에 물을 넣고 전기를 모으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년 미국의 프랭클린은 ' 일류체설'( 一 流 體 說 ) 을 발표하면서 전기유체( 電 氣 流 體 ) 는 그것에 여분으로 있으면 (+) 전기가 되고 부족하면 (-) 전기가 되는데 유리전기 쪽을 (+) 전기, 수지전기 쪽을 (-) 전기 라고 칭하므로 오늘날 전기를 사용하는데 플러스극과 마이너스 극이라고 이름 붙이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1752년 미국의 프랭클린은 당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자연에서 발생하는 번개현상 을 실험실에서 생기는 불꽃방전과 같은 전기로 보고 연을 날리는 실험을 통해 번개 는 불꽃방전과 같은 전기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전기를 모으는 장치인 축전지의 이름을 대학이름을 따서 라이덴병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전기를 모아놓은 라이덴병이라 부르던 축전지를 사람이 손으로 만지면 전기에 의해 강력한 충격을 받자 이 현상을 충격놀이라 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1776년 일본의 에도( 江 戶 ) 시대 후기 히라가( 平 賀 源 內 ) 가 충격놀이를 즐기다 마찰전기를 발생 시키는 기전기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1777년 독일의 리히텐베르크는 절연물의 표면상에서 불꽃방전을 일으키는 실험을 하다 황의 착색분물이 절연물의 표면상에서 방전이 진전하는 과정이 색도형으로 기 록됐는데 음의 전하를 띤 황백색의 황 분말이 한쪽에만 부착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 하고 불꽃방전을 일으키면 양극성의 전하가 남는 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1785년 프랑스 쿨롱이라는 사람이 양전기와 음전기가 끌어당기는 현상을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현상으로 보고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발견한 것이 쿨롱의 법칙이며 마찰전기를 이론적으로 통일했는데 모든 전기현상은 전하가 시간 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 것을 정전기( 靜 電 氣 ) 현상이라고 정의됐습니다. 1791년 이탈리아의 의학자 갈바니는 개구리를 해부하던 중 주변에서 불꽃방전이 발생하면 그 불꽃발생과 동시에 죽은 개구리다리가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하고 개구 리체내의 신경에 전류가 닫으면 신경이 반응하게 되므로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때부터 전류가 흐르는 현상을 갈바니전기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1799년 이탈리아 물리학자인 볼타는 현재 전지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전기발생 장치를 발견해 전류를 연속으로 발생시킬 수 있게 되므로 동전기시대가 시작되었다 고 할 수 있고 1873년 영국 맥스웰의 가설로 흡인작용과 반발작용으로 동작되는 정전기현상과 전류에 동작하는 동전기현상을 통칭해서 전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년 에디슨은 전기 투표기록기( 投 票 記 錄 機 ) 를 발명해 최초로 특허를 받았으며 1869 년에는 주식상장표시기( 株 式 上 場 表 示 機 ) 를 발명해 생긴 돈으로 뉴저지 주의 뉴 어크에 공장을 세우고 1871 년에 인자전신기( 印 字 電 信 機 ), 1872 년에 이중전신기, 1876 년에 탄소전화기를 발명합니다. 1876년에 연구소를 멘로파크로 옮기고 1877 년에 축음기, 1879년에 백열전등을 발

120 명하고 1887년에 다시 연구소를 웨스트오렌지로 옮겨서 1891 년에 영화촬영기 영사 기 1891~1900 년에 자기선광법( 磁 氣 選 鑛 法 ) 과 에디슨 축전기 등을 발명하므로 오늘 날 까지 사용되고 있는 전기와 영상기록장치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1879년 영국의 물리학자인 J.J. 톰슨은 여러 가지 연구를 하면서 전기는 아주 미세 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이 작은 입자의 호칭을 전자라고 불 렀으며 전기는 이 전자들의 이동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임을 처음으로 밝혀내면서 전기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에디슨은 모든 사람들이 전기를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소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 積 算 電 力 計 ) 배전방식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와 배 전반( 配 電 盤 ) 의 설계와 배전 충전 발전에 이르기까지의 전 기기체계( 機 器 體 系 ) 를 만 들고 1882 년에 세계 최초로 중앙발전소와 에디슨 전등회사를 건설합니다. 에디슨은 대학 강의를 경멸하고 보통 교육에 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 나의 틀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독창적인 사고를 길러내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무 엇이 만들어지고 있는가의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 라고 비판하면서 천재란 99% 가 땀이며 나머지 1% 가 영감이다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학자라는 직업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 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인정하는 틀 속에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인정받아야 학자로 임명 될 수 있으며 교육내용은 자신이 습득한 내용을 체제와 제도 안에서 살아남거 나 성공하라며 기득권이 되어 전수할 뿐 평등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모터의 발견 목 록 모터를 전동기( 電 動 機 )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회전력( 回 轉 力 ) 을 발생시키는 기계로 전 기적 에너지를 역학적 에너지로 바꾸는 장치인데 공장이나 가정에서 널리 쓰이며 자동차, 냉장고, 드라이어, 배수펌프, 에어컨, 보일러, 컴퓨터 등 부착되지 않은 곳 이 없으며 가전제품의 90% 이상이 모터의 힘을 사용합니다. 1873년 빈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으며 이때 전시되어 있던 여러 대의 발전기는 증 기기관을 구동시켜 발생되는 동력으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했는데 조수 한사 람이 발전중인 발전기와 정지중인 발전기를 실수로 접속시키자 증기기관이 연결되 지 않아 돌지 않으리라 판단했던 정지중인 발전기가 갑자기 돌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란 담당자들이 여기서 생각하게 된 것이 증기기관이 구동시키는 축을 연결 하지 않고 발전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만으로도 회전하는 기관( 모터)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모터나 전동기의 구조는 발전기와 같은 원리로 만들 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 플레밍은 전기연구에서 왼손의 가운데손가락, 집게손가락, 엄지손가락을 서로 직각이 되게 벌리고, 가운데손가락을 전류의 방향으로, 집게손가락을 자계의 방향으 로 하면 힘의 방향은 엄지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아주 편리한 법칙 을 발견해 모터의 회전방향을 정할 때 사용하게 됐습니다. 오늘날 사용하게 된 모터를 발명한사람 이라고 하면 영국의 물리학자 마이켈 패러 데이(Michael Faraday:1791~1867)와 미국의 전기 물리학자 조셉 헨리(Joseph Henry 1798~1878)로 알려 졌으며 패러데이의 위대한 발견[ 전자기 유도]이란 논문에서 출발 해 변압기와 발전기를 만들었으며 그 후 모터 원형이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미국의 조셉 헨리(Joseph Henry)는 패러데이와 거의 같은 무렵에 전자기 모터의 원 형을 만들었는데 단지 연구발표가 늦었을 뿐 헨리가 패러데이보다 빨리 전자기 유 도를 발견했으며 모터의 발명도 헨리가 최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 지나 주장일 뿐이고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이론입니다

121 자동차의 출현 목 록 르네상스시대의 대예술가이며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82년 봄 어느 날 성당에 걸린 벽시계의 태엽을 감다 실수해 태엽 감는 키가 튕겨져 나오면서 이마를 맞아 크게 다쳤는데 그 태엽이 풀리는 힘을 이용하면 바퀴를 굴러가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착안해 태엽자동차를 구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든 자동차는 멀리 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실용성이 없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다가 1600년경 네덜란드의 시몬 스테빈이 돛단배에 바퀴를 달아 풍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고안했으나 이 역시 바람이 불어야 움직일 수 있고 조 향타( 요즈음 말로 핸들)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1765년 제임스 와트가 증기 엔진을 완성하자 1769년 프랑스 군인인 니콜라 죠셉 퀴노(Nichoolas Joseph Cugnot)는 증기엔진의 힘으로 대포를 옮길 수도 있다고 생각 해 1771년 포차 견인용 증기 삼륜차를 만들었는데 퀴노가 발명한 증기차는 무거운 보일러와 2 개의 실린더가 앞바퀴에 얹혀 방향이 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움직이는 운반체를 연구하다 1780년에 알레산드로 볼타라는 사람이 전기방 전에 의해 수소를 연소하며 움직이는 장난감을 만들었고 1806년 스위스의 프랑수 아 이삭 리바츠가 수소와 산소를 이용하는 내연기관을 개발했으며 1823년엔 사무 엘 브라운이 레오나르도 행정 이라 부르는 압축행정 없는 내연기관을 특허로 등록 합니다. 1824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니콜라스 레오나드 사디 카르노가 온도 차를 가져오는 압축행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1826년 사무엘 모레이가 압축공정이 없 는 기체 및 증기기관 의 특허를 받았고 1838년 영국의 윌리엄 바르넷이 최초로 실 린더가 작동하는 방식의 내연기관을 개발해 특허를 냈습니다 년 영국의 앤더슨(Anderson)이 전기자동차를 제작했고 1873년 프랑스의 가스 통 플랑테가 축전지를 발명해 전기자동차를 만들었으나 충전할 수 없어 사라졌으며 1899 년 프랑스의 제나찌(Camille Jenatgy)가 100km/h가 넘게 달릴 수 있는 자동차 를 만들었지만 1회 충전으로 주행거리가 길지 않고 멀리 갔다 전기가 없으면 돌아 올 수 없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1854년 이탈리아의 에우게니오 바르상티와 펠리스 마테우치가 런던에서 내연기관 특허를 획득하고 1856 년에 폰드리아 데 피그노네 가 바르상티-마테우치가 특허 낸 엔진을 개량해 5마력의 가벼운 엔진으로 제작한 것이 더욱 개량되어 두개의 실린더 를 이용하는 엔진으로 발전했습니다. 1860년 벨기에의 에티에네 르느와르는 실린더와 피스톤 그리고 주 연봉으로 구성 해 내연기관에 휘발유를 발화시켜 사용할 수 있는 내연기관을 만들었으며 1862년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가 라겐의 도움을 받아 합작으로 등유를 이용한 내연기관을 발명하면서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년 니콜라스 어거스트 오토(Nikolaus August Otto)가 4행정 사이클 내연기관을 완성했지만 엔진의 부피가 크고 무거워 실용되지 못하다가 1870년 오스트리아 빈 의 지크프리트 마르쿠스가 가솔린엔진을 손수레에 장착하고 움직이게 하므로 최초 로 움직이는 운송기구가 탄생하게 됩니다. 내연기관이 발전되어 오면서 1884년 독일의 다임러 벤츠사의 엔지니어가 길이는 길지만 오토보다 높은 출력을 낼 수 있는 가벼운 엔진을 개발하고 보조바퀴가 장착 된 모터사이클을 만들어 움직이게 하므로 세계 최초로 가솔린 기관엔진을 부착한 자동차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내연기관[ 內 燃 機 關, internal combustion engine] 은 연료가 기관의 내부에서 에너지를

122 연소시키면서 생긴 열에너지인 연소가스를 직접 피스톤 또는 실린더 내에서 터빈블 레이드( 깃) 등이 움직이게 하는 열에너지를 기계적인 힘으로 바꾸는 기관을 말하며 가스터빈 제트기관 로켓 등도 내연기관이라고 불립니다. 내연기관은 사용되는 연료에 따라 가스기관 가솔린기관 석유기관 디젤기관 등으로 분류하는데 석유 가스 가솔린 기관은 점화플러그( 점화전)에 의해 전기불꽃으로 발화 할 수 있지만 디젤기관은 연료를 고온 고압의 공기 속에 압축했다가 분사하면서 자 연발화 시키는 것입니다. 내연기관은 1. 흡입 2. 압축 3. 폭발 4. 배기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4행정이라 하는데 1. 흡입은 연료와 산화제( 공기)를 기관 안으로 빨아들이고 2. 압축은 기관안의 연료가 타면서 열을 발산해 기관 안이 팽창되는 것이며 3. 폭발은 압축된 공기가 피스톤을 밀어내고 4. 배기는 산화된 기체를 밖으로 내보내며 움직이는 힘을 만들어냅니다. 1894년 독일의 엔지니어 루돌프디젤은 불꽃이 있어야 시동을 걸 수 있는 휘발유 엔진은 언제든지 불꽃에 의해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 보다 안전한 엔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엔진기관 안에서 공기를 매우 압축시켜 얻은 높은 열로 기름 을 태워 폭발시키는 압축착화기관인 디젤엔진을 발명했습니다. 디젤엔진은 에너지 비용이 저렴하며 효율이 높고 안전해서 경제적이라고 알려지면 서 유럽과 미국 사업가들이 몰려 광산, 공장, 선박, 기차, 건설장비, 트랙터, 경운기 등에 사용되는데 이렇게 엔진과 전기 그리고 모터가 발명되고 이를 접목해서 자동 생산 기계로 발전시키므로 인류는 비약적인 생산력발전을 가져옵니다. 생산의 자동화 목 록 유럽이 분배불균등 때문에 발생되는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평등과 자유를 주장 하며 요동치고 있을 때 엔진과 모터와 전기의 발전은 생산기계를 자동화시켜 소수 의 노동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물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되므로 물질을 생산하는 산 업사회가 아니라 물질을 판매하기 위한 상업사회로 발전됩니다. 상업사회가 되자 생산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화폐로 이자놀이만 하면서 타인의 노동 생산물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금융업자들과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유통이라며 이 윤을 남기며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빈곤해지고 빈부격차는 점점 더 벌어집니다. 인류가 살기 위해 먹는 것과 존재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물질은 노동으로 생산되 는 것임에도 생산자들의 노동결실은 은폐되고 노동자 농민 어민의 땀 흘린 노동생산 물을 말품과 눈치를 보며 사기로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상술이 활개 치면서 아무런 물질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시장과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수의 생산노동만으로 물질이 풍부하게 생산되자 기득권들은 수입 없는 다수 인민 들이 저항하지 못하게 통제하기 위해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산자보다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는 각종 관료( 임금노예며 노예관리자)들을 만들어 안정적인 급료를 지급 하면서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충성을 강요합니다. 상명하복의 계급체계는 말잘 듣는 철 밥통들을 만들어 각종의 세금, 범칙금, 과태료 라는 명분으로 인민들을 수탈하고 징수하기 위해 통제하며 억압할 수 있는 각종의 법률을 입안하면서 모든 인민들이 착취와 갈취당하는 체제와 제도에 자연스럽게 통 제당해도 복종하도록 길들이는 도구가 되면서 철저한 계급사회를 만듭니다. 관료들이 기득권을 차지한자들의 명령에 복종하고 충실히 수행하는 기계로 세뇌시 키기 위해 승진이나 전보배치권한을 가지고 국가를 주장하며 충성은 대단히 위대한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인양 부추기면서 충성경쟁을 강요하는데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로봇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123 관료들을 늘리는 것은 다중 인민들을 억압하고 관리하며 통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던 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며 소비를 하도 록 조장하고 공장에서 물질을 생산하는 기업주와 판매하는 상인들에게 이윤을 보장 하므로 기득권들이 부를 늘리고 체제를 유지하는데 이용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거짓학술과 문화 예술 광대놀음과 도박 잡기 스포츠 등을 퍼트려 다중이 진 실은 파악할 수 없도록 시간을 빼앗고 다수 인민들의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노 동력만 착취하는 체제와 제도 때문에 분배불균등이 생기고 분배불균등 때문에 빈부 격차가 발생되며 빈부격차 때문에 공황이 온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혈안입니다. 노동자들이 새벽잠 저녁잠 못자고 감시와 통제 속에 죽도록 일하고도 생계를 이어 가지 못하고 생활이 어려운 것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공장을 개인이 소유하고 노동자를 임금노예로 부리며 착취하는 제도 때문에 빈곤해지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개인이 게으르거나 무능하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왜곡하며 거짓을 퍼트립니다. 생산수단은 유산자 아니면 후일 빼앗길 사기꾼만이 소유할 수 있고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생산노동은 하지 않고도 생산자가 땀 흘려 창출한 물질에 자신들이 챙길 이 윤가격을 포함해 넘기는 공장( 기업)주들과 인계받은 물질에 가격을 올려 판매라는 갈취로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뿐이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공장주의 노동착취를 금지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라면 생산자를 해고해서 임금을 줄 이고 더 강한 노동을 강요하는 노동력착취로 물질을 생산해 자신의 이윤을 남기기 때문에 절대로 공장주나 상인들은 가난해 지지 않으며 죽도록 노동하는 생산자들만 지옥 같은 노동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빈곤에 허덕이며 가난해집니다.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노동력이 제대로 인정되려면 8시간 노동으로 생산한 물 질을 8시간분의 임금으로 취득할 수 있어야 하지만 혈세로 먹고사는 관료들을 위해 생산제품에 세금을 부과하며 노동자를 혹독하게 관리하고 감시하는 관리자, 물질을 판매하는 상인들과 운수업종사자 그리고 관련 기업주들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12시간 혹은 15 시간의 노동력을 지불해야 취득할 수 있게 됩니다. 생산노동에 의해 거지 사기꾼 종교인 도둑 등 전체 모든 인류가 살아갈 수 있음에도 물질을 생산하는 생산노동 종사자들은 빈곤해 지는 것이며 건설노동자들은 새벽잠 과 저녁잠을 못자며 생명에 위협을 받고 무거운 물질을 취급하며 고공노동으로 주 택을 건설해도 정작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주택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관료들은 다중이 채용하거나 선출하지 않았음에도 혈세로 월급 받고 혈세로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혈세로 마련한 장비로 수단방법가리지 않고 국민의 생각할 시간을 뺏을 방법을 연구하고 세금이란 명분으로 다중들을 억압하며 수탈하려 혈안이 되어 뇌물을 받고 향연을 요구하며 체제유지를 위해 소비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다중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소비를 조장하는 관료들을 많이 고용해도 생산자인 동시 소비자인 다수에게 안정적인 수입과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불평등 때문에 빈부 격차가 발생되고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못하니 상품을 팔지 못해 공황이 발생될 때 굶주린 노동자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려 폭력을사용합니다. 1873년 발생된 공황은 생산기계가 자동화되면서 점점 주기가 빨라져 소비하는 관 료를 만들어도 소비할 수 없을 만큼 생산되자 서비스직과 예술 문학 스포츠 광대 등 소비하는 계층을 만들고 수입을 보장하면서 억압받는 생산자들과 동조하지 못하게 분열시켜 생산하는 사람들은 통제와 억압 속에 노동력 착취만 극심해집니다. 다수의 관료를 만들고 임금을 지급하며 분배와 소비를 조장해도 임금을 지급받는 자들은 생산자나 억압자인 동시에 소비자일 뿐이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 인이나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판매하는 상인들 그리고 도적질이나 투기 사기로 타인

124 의 노동생산물을 갈취하는 자들만 부를 축적할 수 있습니다. 1886년 미국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기업주들과 상인들은 백 달러짜리 종이돈으로 담배를 말아 피울 때 1주일 내내 노동을 하고도 1달러 75센 트 밖에 받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다 참지 못하고 시카고를 중심으로 자신들도 인 간이라고 노동자도 인간으로 살 권리가 있다면서 단결하고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감시와 통제 속에 굶주림과 저임금으로 생활을 하던 노동자들의 저항소식은 전국으 로 확산되고 1886년 5월 1 일을 기해 8 시간 노동 을 요구하는 총파업에 돌입했는 데 경찰은 경고도 없이 파업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무자별적으로 총을 발포하므로 어린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분노한 노동자 시민들이 5월4 일 노동기사단 주도로 헤이마켓 광장 에 모여 경찰의 살인 만행을 규탄하는 평화집회 를 하는데 경찰이 강제로 해산할 것을 명령한 직후 폭발물이 터지며 경찰 66명이 부상하고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경찰은 즉각 시위대에 총기를 발사해 수많은 시민과 노동자가 사망하고 해산됩니다. 경찰과 기득권들은 노동자들과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던 무정부주의자 등 앞에 나섰 던 사람 8명을 폭탄 테러범으로 체포하고 판사들은 8명중 5 명은 사형, 3명에게는 금고형을 선고했는데 이 폭탄테러 사건은 훗날 노동자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기업주와 경찰들이 짜고 조작한 사건이었음이 알려 졌습니다. 실상을 알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현장의 파업지도자인 엘버트 파슨즈가 형 장에서 숨을 거두며 " 민중의 소리를 들으라." 는 말을 남기고 산화했으며 1889년 파 리에서 열린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이날을 기념해 5월 1일을 만국 노동자 들의 날( 메이데이)로 정하고 8 시간 노동을 목표로 투쟁한 것입니다. 1887년 11월 13일 발생된 과잉생산공황으로 평생 죽도록 노동을 하고도 굶주리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모여 평화롭게 시위를 하는데 노동자들의 시위가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군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해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 생되는데 이것을 피의 일요일 사건(Bloody Sunday)이라고 합니다. 1892년 미국의 거부가 된 카네기는 1872년 미국 최대 규모인 홈스테드 철강소를 세우고 4,000여명의 비숙련 노동자를 고용하고 하루 12시간씩 노동을 강요하면서 주당 9달러의 임금을 지급하던 임금을 자동생산기계를 도입하고 더 삭감하겠다고 하자 800여명의 조합원과 3,000 여명의 비숙련공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합니다. 자신들은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노동자에게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임금을 지급하며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더욱 삭감하겠다고 하자 분노한 노 동자들은 임금삭감을 반대하고 1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유일한 협상 창구인 노 동조합을 인정하라며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으면 파업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카네기를 대신해 공장을 관리하던 헨리 클레이 프릭은 기능공이 없어도 자동화 시 스템으로 물품을 생산할 수 있고 실업자가 넘치므로 노동자들은 쉽게 고용할 수 있 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공장 주변 3마일에 가시철조망을 치 고 탐조등을 설치하며 핑커튼 흥신소에서 무장한 사설경비대 300 명을 고용합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더욱 많이 집결해 공장과 경비원들까지 포위하며 협상을 요구하 자 카네기는 노동자와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주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주지사는 주정부 연방군을 파견해 무력으로 진압하므로 무장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4개월 만에 주정부군 총탄에 10명이 죽고 60 명이 부상하며 진압 당했습니다. 당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던 알렉산더 버크만과 엠마 골드만 등은 무력학살과 진 압에 분노해 자신의 동료들과 홈스테드 제강사건의 핵심에서 있던 프릭을 암살하려 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체포됐으며 카네기는 노동자에게 저임금과 12시간 맞교대로

125 근무하도록 강요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부를 축적하고 거부가 됩니다. 1892년 러시아 크로폿킨은 [ 빵의 정복 La Conquêtedu pain] 1899년엔 [ 어느 혁명가 의 추억 Memoirs of a Revolutionist] 1902년엔 [ 상호부조론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등 저서를 발표하는데 실업자는 증가하며 임금은 저하하고 지가폭등으로 굶주리고 억압받던 노동자들은 반정부운동을 유산자들은 입헌운동을 일으킵니다. 1894년 조선에서는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신분차별로 인해 죽도록 생산노동을 하고 도 굶주리던 소작농들과 노비들이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가혹하게 노동력만 착 취하는 악독한 양반들을 살해하는 살상( 殺 傷 契 ) 계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 터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저항인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합니다. 인간취급을 못 받던 노비와 머슴 그리고 소작농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조선 군병만으로 민중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된 조선기득권( 양반과 왕조)들이 타국의 무력으로 억압하기 위해 병사를 요청하므로 조선통치권을 놓고 청 일간 전쟁이 벌 어져 승리한 일본이 1904 년 조선에 병사를 주둔시킵니다. 러시아에서는 나로드니키[ 人 民 主 義 ] 의 전통을 이어받은 농민들이 활동하면서 알렉산 드르 2세를 암살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며 지하에서 암약하다 1901년 말 지도자로 V.M. 체르노프, A.F. 케렌스키, B.V. 사빈코프 등을 선출하고 기득권요인들을 암살하고 무장투쟁하자며 러시아 사회혁명당[ 社 會 革 命 黨, 농민정당] 을 창당했습니다. 1903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려고 하자 이를 부정하는 러시 아와 1904년 전쟁이 벌어져 러시아가 패하고 1905년 러시아에서는 14만의 굶주린 노동자들이 1월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르 니콜라이2세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 상(icon)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들고 평화롭게 시위했습니다. 사회개혁론자이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인 가폰(Georgy Gap on) 신부의 인솔 아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요구하며 왕궁을 향해 평화적으로 행진하 는데 군경의 발포로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이 부상하는 대형유혈사태가 발생해 차르를 하느님처럼 떠받들던 러시아 민중들이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일요일에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시작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수도 노동자들 이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전국으로 확산됐고 5월에는 각지에서 군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했으며 6 월 말에는 포테톰킨호( 號 ) 의 반란이 일어나고 10월에는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이자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며 혁명전선이 됩니다. 니콜라이 2세는 10 월 국민에게 신교( 信 敎 )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와 입법권을 갖는 제헌의회를 창설할 것을 약속하는 선언을 발표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불평등 과 억압에 시달려 노동자편에선 병사들은 투쟁을 계속하여 12월 하순엔 모스크바 노동자들이 10 일간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계속이어 갑니다. 입헌정부를 요구하며 혁명을 외치던 유산자와 기회주의자들은 차르의 10월 선언에 만족하고 더 이상 저항은 의미 없다면서 멈출 것을 강조해 찬반을 둘러싸고 저항했 던 주체 간에 분열을 가져오면서 1906년 5월 최초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Duma) 가 구성되면서 러시아 혁명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1904년 8월 22일 조선에 병사들을 파병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장악한 일본은 강압 적으로 재정( 財 政 ) 과 외교( 外 交 ) 부문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 顧 問 ) 을 둔다는 내용으 로 외국인용빙협정( 外 國 人 傭 聘 協 定, 제1 차 한일협약) 을 체결하고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大 韓 帝 國, 이하 한국) 과 한일협상조약( 韓 日 協 商 條 約 ) 을 체결합니다. 을사( 乙 巳 ) 라는 명칭은 1905 년이 육십갑자의 간지( 干 支 ) 에 해당되어 지칭하는 것으 로 명목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 保 護 國 ) 으로 되어 을사보호조약( 乙 巳 保 護 條 約 ) 이라고 칭했었으나 보호국이라는 명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植 民 地 ) 한 것을 미

126 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발하므로 을사조약 이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을사오조약( 乙 巳 五 條 約 ) 혹은 을사늑약( 乙 巳 勒 約 ) 이라 칭하는데 5개 항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금지하고 통감부( 統 監 府 ) 와 이사청( 理 事 廳 ) 을 둔다는 내용으로 개항장과 13 개 주요 도시에 이사청을 두고 11 개 도시에 지청( 支 廳 ) 을 설치하면서 통감부는 병력 동원 권과 시정 감독권을 장악하므로 최고 권력으로 식민통치가 시작됩니다. 미국에서는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한 자들이 권력과 유착하면서 자신들 이 마음대로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던 것을 중단시키고 국가가 관리하기 위해 1913년 발효된 연방 준비은행법에 의해 12개 산하 연방 준비은행과 연방공개 시장위원회, 연방자문회의 등을 구성하고 연방 준비은행을 설립합니다. 연방 준비제도이사회는 법정 한도 내에서 12개 산하 연방 준비은행 회원은행들의 준비금 요구사항과 할인율을 검토 결정하고 이사회 회원은행의 예산을 심의하며 12 개 연방 준비은행은 공익을 위해 설립된 민간 기업으로 9명의 이사회가 운영하며 이사 중 6명은 회원 은행들이 3 명은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에 의해 임명됩니다. 미국의 콜로라도 주 트리니다드 북서쪽 19Km에 위치하고 있는 루드로 광산에서 석 탄을 생산하던 광부들은 다른 탄광보다 20% 나 적은임금(1일 1달러68 센트)을 지급하 며 채굴한 석탄 톤수를 속이고 무임금 노동을 강요하며 회사가 제공한 집과 상점에 서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해야하는 억압 통제 속에 빈곤하게 생활합니다. 당시 광산은 록펠러 가문소유의 콜로라도 퓨얼 & 아이언 컴퍼니(Colorado Fuel & Ir on Company, CF&I), 로키 마운틴 퓨얼 컴퍼니(Rocky Mountain Fuel Company, RMF), 그리고 빅터- 아메리칸 퓨얼 컴퍼니(Victor-American Fuel Company, VAF)라는 세 개 의 가장 큰 탄광이 서로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각 광산들은 광부들이 뭉칠 수 없어야 쉽게 통제하며 사망재해가 발생해도 큰 보상 없이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에 주로 동유럽, 남유럽, 멕시코에서 건너온 이 민자들을 광부로 고용했는데 여러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을 섞어 의사소통을 힘들게 하므로 노동자들이 뭉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손쉽게 관리했던 것입니다. 광부들이 단결해서 저항하지 못하게 노무관리시스템을 구성한 광산주들은 광부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핑계로 회사 내에 광부들이 채굴한 석탄 이익금으로 급여를 지급 받는 안전 관리자들과 자체 보안대를 설치하고 광부들에게 생명을 건 위험한 노동 과 무임금 노동을 강요하고 저임금을 지급하면서 부를 축적해 거부가 됩니다. 먹을 것도 못 먹고 잠잘 시간도 없어 깡마른 광부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씩 노동하 고도 1달러 68센트의 임금을 받고 회사가 제공한 사택에서 비싼 주거비를 지불해 야 했으며 회사가 설립한 상점에서 강제로 비싼 가격의 물건을 구입하고 회사가 지 정한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아야 하는 규정에 묶여 통제당하고 착취당한 것입니다. 광산주들은 그것도 모자라 광부도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깨우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매일 매일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노동력을 착취하고 고분고분한 비조합원들은 배려 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조합원들은 일상에서 실수가 발생되도록 조장하고 사소한 실수가 발생하면 사고로 몰아 정신적 복종까지 강요하며 통제합니다. 광부들은 채굴한 석탄 톤수에 대해서만 임금을 받고 석탄운반을 위해 부설하는 철 로와 갱을 지지하는 지주작업은 무보수로 작업해야 했으며 안전을 무시해 갱이 무 너지는 사고가 발생하면 짧게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안전을 위한 전부 였으므로 1884년과 1912년 사이 1,700 명 이상의 광부들이 탄광에서 사망했습니다. 1913년 9월 매일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똑같은 노동을 하며 노 동력을 착취당하는 생산기계로 살던 광부들은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생산기 계에서 벗어나고자 1. 노조인정, 2. 채탄가격 인상( 임금 10% 인상효과) 3. 일 8시간

127 노동법 준수, 4. " 무임금 노동" ( 철로 부설, 갱지주 작업, 불순물 제거, 등)에 임금지급, 5. 채탄무게 측정 때 노조 선출인원 입회, ( 사측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6. 회사가 지정하지 않은 상점과 기숙사 그리고 의사를 이용하고 선택할 권리, 7. 콜로라도 주 법의 엄격한 준수( 광산안전법규, 전표의 폐지 등)와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회사 보 안대폐지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합니다. 극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광부들은 콜로라도 주 석탄 채굴 회사연합에 걸 맞는 지위 를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미국광부노조(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UMWA) 를 결성하고 노동조합 주도로 파업을 시작하자 곧바로 탄광에서 해고되고 사택에서 도 쫓겨나 탄광 부근에 천막을 짓고 생활하면서 거대한 천막촌을 이뤘습니다. 광부들은 회사와 협상을 빨리 끝내고 자신이 거주하던 사택으로 돌아가 생활할 것 이라고 생각했으나 광부들의 채탄수입금으로 생계와 부를 축적하는 관리자와 광산 주들은 고분고분해야 할 광부들이 단결하고 저항하는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볼드윈 - 펠츠 탐정사무소를 고용해 광부들을 무참히 짓밟습니다. 석탄생산은 숙련도는 떨어지고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죽어도 큰 부담이나 말썽 없 이 굽실거리며 생산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에 파업노동자와 딱지 (Scab, 파 업 비참가노동자를 경멸하는 호칭) 를 분류해 대체 노동자들은 광산보안대와 탐정사무 소 무장경비들로 보호하면서 파업노동자에겐 조소를 보내고 위협하며 도발합니다. 파업을 조속히 마무리 시켜야 명성을 날리며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탐정사무소에 서는 끝없이 파업노동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위협하고 도발을 시도했 으며 차량을 개조해 장갑차를 만들고 주변을 정찰한다며 한밤중에 천막촌에 탐조등 을 환히 비추거나 무작위로 사격을 가해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광산주들은 파업을 조속히 마무리해야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광부들의 동요도 막을 수 있고 자신들의 규정대로 작업시키며 착취해야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에 탐정 사무소를 압박하고 푸에블로 CF&I 공장에서 커다란 투어링 세단에 강철 방호재와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를 만들어 지원하면서 파업노동자를 탄압한 것입니다. 파업노동자들은 밤낮없이 천막촌에 굉음을 일으키며 돌아다니다가 한밤중에는 무차 별적인 사격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는 이 차량을 데스 스페셜 이라 불 렀는데 장갑차량의 빈번한 사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되자 가족들을 보 호하기 위해 천막아래 땅굴을 파고 두더지처럼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갑차와 회사 보안대 그리고 탐정사무소 용역깡패들의 무작위적인 총기 난사와 폭 력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광부의 아내들은 파업이 끝날 때 까지 자신 들이 먹고 생활해야 할 곡식들과 사용하던 일용품들을 자루에 담고 시장에서 자신 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총기와 바꿔야 했습니다. 10월 28 일, 파업과 관계된 폭력행의가 도마에 오르자 주지사 일라이어스 M. 아몬 스가 콜로라도 주 방위군을 출동시켰는데 주 방위군 지휘관 존 체이스는 크리플 크 릭에서 노동자들이 파업할 때 노동자들을 폭행해 악명을 떨친 사람을 학살하는 로 봇으로 광산촌 루드로에도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파견된 것입니다. 1914년 3월 10 일, 대체 노동자시신이 포브스 근처 철로위에서 발견된 걸 핑계로 천막촌 광부인 포브스 거주자들이 용역깡패들의 총격으로 몇 일전 죽은 아이의 장 례식에 간 사이에 주 방위군 지휘관 체이스는 포브스 천막촌을 철거하라면서 공격 해 광부들과 어린아이 그리고 아녀자 등 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콜로라도 주지사는 혈세로 유지되는 방위군을 지원할 자금이 바닥나서 주 방위군을 소환할 수밖에 없게 되자 방위군 두 부대를 콜로라도 남부에 남겨두는 대신 탄광회 사들에게 무력으로 파업광부들을 억압할 수 있도록 주방위군 제복을 입은 민병대를

128 조직하도록 하므로 용역깡패와 보안대가 합법적으로 무장합니다. 4월 20 일 아침, 루드로의 그리스 이민자가 부활절을 지낸 다음날 세 명의 보안요원 이 한 남자가 파업 노동자 측에 붙잡혔다고 억지를 쓰며 석방을 요구하므로 천막촌 지도자인 루이스 티카스에게 알려져 티카스는 천막촌에서 반마일(0.8 km) 정도 떨어 진 루드로 마을 열차 역에서 민병대 지휘관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남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민병대 2개 중대가 천막촌 근처 루드로 남쪽 반마일 철 도를 따라 능선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것을 본 티카스는 급히 천막촌으로 돌아와 알 리므로 광부들은 민병대 측면에 자리를 잡았는데 곧 총격전이 벌어졌으며 지나가던 화물 열차가 보안대가 기관총을 놓은 곳에 멈춰 막아 주므로 광부와 그 가족들은 블랙 힐 이라 부르는 동쪽 언덕으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오후 7:00 민병대는 천막촌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천막촌을 사수하던 루이스 티카스와 다른 두 사람이 민병대에 잡혔는데 민병대 지휘관 중 하나인 칼 린더펠트 중위가 티카스와 다른 두 남자를 죽이고 시신은 지나다니는 열차가 보도 록 전시해 놓고 지역 철도 노조에게 시신을 가져가 매장하라고 강요합니다. 싸움이 벌어질 동안 4명의 여자와 11명의 어린이가 천막 밑에 파놓은 대피호 속에 숨어있었는데 민병대가 천막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불길에 갇혀 2명의 여자와 어린 이 모두가 질식사 하므로 광산노조측은 무장봉기를 촉구하고 콜로라도 주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모든 조합원의 무장봉기를 촉구하면서 열흘간 게릴라전이 벌어집니다. 콜로라도 주 트리니다드에서는 광산노조가 조합본부에서 공개적으로 무기와 탄약을 파업 노동자들에게 나누어줬으며 여자와 아이들이 민병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 살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700~1000명의 노동자들이 잇따라 광산들을 습격해서 보안대를 쫓아내거나 죽이고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광부들이 보안대에 맞서 싸운 10일 동안 루드로 천막촌 희생자를 포함해 119명이 사망하자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연방군을 보내 양측을 무장해제 시키고 400명이 넘는 노동자를 구속하고 332명을 살인혐의로 기소했으나 파업을 주도한 존 로슨만 은 살인죄가 선고됐다 콜로라도 주 대법원에서 파기됩니다. 루드로에서 천막촌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학살을 일삼던 민병대와 주 방위군의 장 교 10명을 포함해 22명의 군인들이 군사법원에 회부되었지만 학살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기소한 것은 형식적인 행위였을 뿐 루이스 티카스를 폭행한 혐의로 린더펠 트 중위만 가벼운 징계를 받고 모두 무죄가 됐습니다. 록펠러 재단은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총기로 무장하고 무력으로 노동자들을 학살하 고 억압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해 미국의 거부가 되었는데 후일 록펠러 후손들이 진 상을 알고 가문이 수치스럽다며 부를 챙겨 떠나기도 했으며 록펠러는 이때의 살상 만행을 회계한다면서 그 유명한 록펠러자선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임금을 지급하면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 합법화되자 분배불균등에 의한 빈부격차가 극심해 지면서 수입이 없어 굶주리는 인민들이 늘어나고 다수가 불만이 쌓이자 기득권자들은 부를 분배할 수도 없고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타국을 침 략해 식민지로 삼으며 재물을 강탈하기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분배불균등에 의한 공황과 학살전쟁 목 록 1914년 독일은 영국을 뛰어넘어 세계경제를 주도했으며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 을 앞서기 시작하자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경쟁자로 모로코에 서 광산자원과 무역시장을 두고 대립했는데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산지인 로렌이 망 하면서 독일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129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식민 지를 점령해 분배불균등으로 발생하는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침략전쟁이 불가피 했으며 보스포러스(Bosporus) 에서 바그다드까지 철로를 놓으면 바그다드에 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져 인도까지 연결되는 철도 노선공사를 시작합니다. 이 철도를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으로 투자하여 설치하려했으나 양국 간 각각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거절당하자 풍부한 경제를 바탕으로 자체적으 로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독자적으로 375 마일( 약 604 킬로미터) 에 달하 는 철도선 건설을 강행하면서 국제적으로 반목과 질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대 세르비아 계는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고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이 같은 민족이라며 단결 을 강조하면서 세르비아인들도 상대를 적대시하며 뭉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므로 대( 大 ) 세르비아계와 범 게르만계로 나눠지면서 민족주의가 정착하게 됩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경 사라예보를 친선 방문했던 오스트리아-헝가 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소피아 황태 자비가 샛길로 차를 잘못 몰고 들어갔다 세르비아왕국 출신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 (1894 년~1918 년)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을 사라예보사건이라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군 참모총장 프란츠콘라트 폰 회첸 도르프는 이것은 광신자 1 인의 범죄가 아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제국은 남부슬라브인, 체코인, 러시아 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들의 야망 폭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전쟁을 해야만 한다. 면서 전쟁을 주장합니다. 도르프는 세르비아 왕국에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을 왜 저질렀나? 라며 1. 반 오 스트리아 교육금지. 2. 반 오스트리아 단체해산. 3. 반 오스트리아 관리파면. 4. 반 오스트리아 관련 출판물의 몰수, 소각. 5. 사라예보사건 재판에 오스트리아 관리참 여. 6. 무기의 국외 반출금지 시간 이내의 회답. 등 10 가지를 요구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인 독일과 마찰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세르비아에 상기 조항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세르비 아는 모든 조항을 무조건 수용하며 재판 참여역시 협상이후에 받아들일 생각이 있 다고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즉각 세르비아와의 외교단절을 선언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베오그라드를 향한 포격명령을 내리자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포탄이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므로 빈과 페테르부르크 정부는 즉각 총동원령을 내려 인 류역사상 처음으로 엄청난 인명을 살상하는 세계 1 차 대전이 발생합니다. 이 전쟁은 대영제국, 프랑스 제3 공화정, 러시아 등이 주요 연합국으로 참천했고 독 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약 9 00만 명이 전사하고 1918년 독일제국에서 혁명이 발생해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공화국정부가 수립됐으며 11월 11 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게 됩니다. 1918년 9월 말 참모본부가 패전을 인정하며 조속한 휴전의 필요성을 주장하므로 10월 3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막스 폰 바덴 내각이라는 의원제 내각이 탄생했고 내 각에 의해 휴전교섭을 진행했지만 초대 의원제 내각이 충분한 의회활동을 하지 못 하자 평등을 요구하는 저항이 과격해지면서 황제 퇴위를 요구합니다. 1918년 11월 3일 킬 군항에서 해군수뇌부의 독선적이고 독자적인 전투계획에 반대 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킬의 노동자들도 이 반란에 합류해 노동자-병사평 의회가 구성됐으며 노동자-병사평의회가 킬 시의 실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 자 독일북부에서 서부 및 남부로 급속하게 혁명이 확대됐습니다

130 11월 9일에는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성공하자 독일황제 빌헬름2세를 강제로 폐위시 켰으며 사회민주당 당수인 에베르트가 임시대통령으로 지명되면서 임시정권을 세우 고 11월 10일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민주당과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 단체 인 독립사회민주당이 연합해 연립정권을 구성합니다.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중순에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유산자끼리 선 출되는 의회제를 반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군부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지원 병부대에 의해 진압되고 1919년 1월 19일 실시한 총선거에서 민주공화파는 사회민 주당 163 석, 민주당 75 석, 중앙당 91 석을 차지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평등을 주장하는 독일인민당은 19석 독일국가인민당은 44석 독립사회 민주당은 22석을 얻으므로 민주공화파가 승리하게 되고 2월 6일에 에베르트가 의 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샤이데만을 총리로 하는 민주공화파 3당의 연립정부 가 만들어지고 공식적으로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됩니다. 새로운 정권은 6월 28일에 베르사유조약에 서명하고 8월 14일에는 민주공화헌법이 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바이마르공화국헌법이 발효됐지만 바이마르체제는 주요 정 치세력들 사이의 타협이어서 군대-관료-사법제도 등 억압과 착취세력에 대한 발본 색원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선출 자들에 대한 불신은 직접선거로 광범한 권한을 지닌 대통령제를 선택해서 권 력을 집중시키므로 장래에 대한 불안을 남겼으며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세력 및 국 민들 사이에 여전히 제정( 帝 政 ) 에 대한 충성을 지닌 사람들도 있어 혁명이후 가장 큰 현실적 과제였던 경제 분배에 대해 실효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1919년 8월 11일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독일어: Die Verfassung des De utschen Reiches)은 국민주권주의로 보통 평등 직접 비밀 비례대표의 원리에 의한 선 거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국가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며 국가하원은 3분의 2 의 찬성으로 대통령탄핵을 국민투표에 부의할 수 있습니다. 국가내각은 총리가 추천하는 장관들로 구성하되 총리와 장관들은 대통령이 임명하 고 내각은 수평적 조직형태의 권한으로 각 장관은 자기 임무를 총리의 지시에 따르 지 않고 독자적으로 집행하며 장관들은 법안이나 중요한 안건을 내각 내에서 사전 조정하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내각 내에서 다수결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내각은 하원에 법안제출권을 가지고 상원에서도 발안권이 있으며 국가하원과 국가 대통령은 국민들이 직접선출하고 국민의 권리로 국민발의와 국민투표로 입법에 참 여할 수 있으며 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주는 독자적인 자유헌법을 가져야 하고 모든 권력은 21 세 이상 성인남녀의 선거에 의한 비례대표로 이루어진다고 규정합니다. 하원은 입법권과 정부감사 권을 가지며 불신임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하원이 신 임을 철회할 경우 총리와 장관들은 즉각 사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바이마르 헌법 으로 경제 분배에 대한 내용과 국민의 권리에 대한 내용 그리고 국가라는 집단이 국민에게 보장해야 할 복지의 방향과 내용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 142조에서 교육과 병자의 치료는 무료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 145조에서 8년 동 안의 교육은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며 교육과 학습에 필요한 모든 자원은 무료로 제 공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교육비용이 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된 아이들에게는 정부가 교육받을 수 있도록 주거와 교육비를 지원하는 것입니다. 제 조에서는 풍치법이라고 해서 예술 역사 자연이나 풍경 또는 기념물은 보호 150,, 및 치료해야 한다고 규정하므로 정치권력이나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 대로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하고 국토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 국토에 살아가 는 모든 국민의 공동소유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국가가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131 제 114조에서는 국민들 개개인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으로 모든 국민의 동의와 합의 로 만든 법률에 규정된 범죄행위가 없는 한 어떠한 이유로도 자유를 억압할 수 없 으며 개인적인 자유의 박탈은 법률에 근거해서 허용하되 법률이 정한 순서로 진행 하며 반대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 119조부터는 생활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데 남녀의 결혼은 평등에 근거하고 가 족생활의 보전은 헌법으로 특별히 보호하도록 했으며 제 121조에서는 어린이들에 게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개발을 위한 동일한 기회를 갖도록 규정하고 제 122조 에서는 청년은 정신적 도덕적 착취에 맞서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제 155조에서는 유통( 상인)의 독점이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토지를 사용하고 남 는 이윤을 정부가 통제하며 주거 및 농가의 농토사용도 법률에 근거해서 사용해야 하고 직장이나 개인재산의 지출 없이 활용할 수 있지만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모든 광물 자원 및 자연의 이용은 국가가 감독하고 감시하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제 159조에서는 노동과 경제조건의 결사로 모든 사람과 모든 직종에 대한 계약을 보장하지만 노동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불법으로 취급하므로 노동자의 해고를 금지하고 있으며 제 161조에서는 국가가 노동권을 보장하지 못해 수입이 없으면 건강과 업무능력 그리고 나이를 고려해 국가가 실업수당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제 165조에서는 노동자의 임금 및 노동조건과 규제는 고용주와 노동조합이 동등하 게 참여하고 동등하게 합의하도록 했으면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지구노동자평의회 가 자유롭게 참여해 결정하도록 하므로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경제주체인 노동자들 의 권리를 국가가 철저하게 보장한 것입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상인이란 생산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 농민 어민의 땀 흘린 노동생산물을 가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윤을 포함시켜 판매하므로 가격을 상승 시키고 기업주도 생산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노동생산물로 부를 축적해서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착취와 갈취권한을 제한했습니다.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이 권한을 박탈당하지 않고 양심 껏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신분을 보장하기 위해 제 104조에서는 법원판사들의 신분을, 제 129조에서는 일반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고 곳곳에 양심을 강조하므로 정권이 마음대로 자격을 박탈할 수 없도록 보장한 것입니다. 이 헌법은 히틀러에 의해 폐기됐으며 현재 독일은 국민건강과 관련된 의료는 국가 가 책임지며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은 택시비를 지급하고 환 자의 집으로 왕진을 가며 아이들의 교육은 무상으로 실시하고 학비가 없는 학생들 은 학업 할 수 있도록 주거비와 교통비 그리고 식비를 정부가 지급합니다. 복지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모든 기업은 이윤의 70% 를 세금으로 징수하며 모두가 공정하게 지켜야 할 법률의 범칙금을 일률고정으로 책정하면 재산 정도에 따라 불 이익이 되기 때문에 범칙금은 소유한 재산에 비례해서 % 로 부과하므로 모든 사람 들이 평등하게 부담을 느끼며 지키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을 혁명으로 목 록 독일이 전쟁을 치르며 구제도를 무너트리고 공화국을 만드는 사이 러시아에서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인민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불만을 해소할 수 없었던 니콜 라이 2세는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면서 많은 병력 을 파병하도록 선동해 무려 1500 만 명이나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대패하므로 사기가 저하되는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병사로 전장에 참여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공업이 도입됐지만 노동력이 줄어 생산되는 물질은 없고 인민의 생계에 사용돼야 할 국가예산 마저 전쟁에 쓰면

132 서 민중들의 생활은 당장 먹을 빵과 우유가 없을 정도로 어려워집니다. 니콜라이 2세는 국정을 황후에게 맡기고 1915년부터 직접 전투에 지휘자로 참전하 므로 재정도 고갈되고 페트로그라드 민중들이 먹을 밀가루가 생산되지 않아 반입도 절반으로 줄어 빵도 살 수 없었고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절반으로 줄면서 빵과 우유를 구입하기 위해 시민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습니다. 3월 7일( 러시아력 2 월) 국제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은 빵과 우유를 요구하 며 시위를 벌이고 같은 처지에 놓인 노동자 8만 명이 시위에 가담하면서 파업으로 이어지자 황후는 군을 동원해 군중들을 막을 것을 명했으며 기병대가 군중들을 거 칠게 해산시키다 물러서자 2 열 횡대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합니다. 노동자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혁명가를 부르며 ' 자유를, 시민의 행복을, 조국 러시아의 부흥을' 을 외치며 저항했으며 니콜라이는 수도방위사령관 하발로프에게 병사를 동원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지만 2월 27 일 진압을 거부한 일부사병들이 페트 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를 구성하면서 혁명으로 발전했습니다. 러시아력으로 3월 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 나 폐위되고 루소와 프루동 사상에 기초한 평등과 자유주의자들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초한 노동자집단주의자들 종교의 프로테스탄트를 기초로 억압과 착취의 시장자유 주의를 주장하는 그룹들이 연합하면서 케렌스키임시정부를 탄생시킵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통치하는 임시정부는 인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생산 노동을 해야 할 젊은이들이 전쟁에 동원돼 생산되는 물질이 없으며 군비로 막대한 물질이 빠져나가고 분배불균등 때문에 다수가 굶주리게 된다는 민중들의 요구를 무 시하므로 경제파탄이 나면서 생활이 어려운 민중들의 지지를 잃게 됩니다. 9월로 들어서자 노동자집단주의를 주장하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면 서 1917년 11월 7일( 러시아 구력 10월 25 일)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 위 원장 트로츠키)가 1,000명의 적위대를 지휘하며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급 습해 케렌스키 임시정부 몰아내고 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합니다. 소비에트대회 명으로 평화에 관한 포고 와 토지에 관한 포고 를 선포하며 인민위 원회를 구성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추대했으며 1918년 1월 23일 개최된 제3차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노 농 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를 공동위원회로 결 정하고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 을 채택함으로 혁명이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소비에트 부의장으로 지주와 기득권을 옹호하며 권력을 행사하다 11월 혁명( 구력 10 월)이 발생하자 여자로 변장하고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지주와 기득권들의 재산으로 지원받으며 백군을 소집하고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카자흐부대와 수도 탈 환을 꾀하며 내전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1당 정치체제를 구축한 레닌은 다중이 선출하는 선거제도가 아니라 다중들이 인정 하고 순응하도록 인민들은 대표권을 행사하는 대의원만 선출하고 대의원들이 전당 ( 전국대회)대회에서 의장을 선출하는 권력체계를 구축하므로 선거선출제도의 폐해를 이중으로 사용하면서 다중의 의사를 봉쇄하고 집단독재를 만듭니다. 집단독재 권력이 완성되자 기득권을 누린 자들은 생산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하고 기득권이 되어 인민을 억압한 것이라면 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공동생산에 의한 공동분배를 실시할 것이라고 선포하며 공업생산기계( 공장)의 개인소유를 금지하고 대지주들의 토지까지 몰수합니다. 러시아 인민들은 자신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노동을 하거나 노동한 임금으로 시장 에서 화폐로 필요한 물질을 구입하며 갈취 당했던 체제에서 벗어나 집단농장에서 공동으로 노동하고 노력한 만큼 배급받으면서 착취당하지 않게 되자 열심히 노동한

133 결과 공업과 농촌지역에서 경제가 급속도록 발전하게 됩니다.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이 투표권을 행사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여성 을 남성의 억압과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한다며 탁아소를 설치하자 러시아 가정에 서는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90% 가 넘었고 봉건제에서 남성들에게 억 압받으며 순종만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이혼하면서 알코올중독자가 급증합니다. 소비에트의 이러한 조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기득 권을 누리던 자들에게 충격이 되어 미국 개신교목사들부터 시작해서 공산주의는 독 재정권이고 빨갱이 사상이라며 악선전하고 극렬 반대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 의 사상을 타도하자는 반공법이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전 세계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은 공정한 분배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 산주의를 신봉하는 빨갱이라며 탄압하기 시작했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살던 러시아 기득권들은 자신들도 살기 위해 저항한다며 백군을 만든 것입니다. 기득권을 누리던 자들은 화폐를 많이 축적하고 있어 반혁명 백군을 동원하므로 소 비에트에서는 화폐를 개혁하고 공동배급을 실시한다고 했지만 모든 혁명이 그랬듯 이 특정 조직을 준비하고 혁명을 하려면 기득권들이 탄압하고 억압해서 조직이 유 지될 수 없었기 때문에 혁명조직 소수로는 전국적 행정력을 장악하지 못합니다. 인류역사에서 혁명이란 로물루스 형제가 로마의 지배질서를 만들거나 소수독재자들 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행위처럼 소수 특정 조직이나 단체의 선전선동 으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노동하고도 기득권의 착취와 지배 통제에 억눌 리고 굶주린 다중들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레닌은 다수를 차지하는 인민들로 형성된 중 소농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의 토지 와 사유를 인정하므로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공동생산에 의한 공동분배는 이루어지 지 못했고 혁명에 앞장섰던 무리들은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고위관료나 생산하는 노 동자와 농민을 지휘 통제하는 관료가 됩니다. 모든 인민들이 평등하고 누구나 자유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 하다는 사상과 경제는 땀 흘린 노동생산물일 뿐이라는 사실들을 알려내고 다수결에 의해 선출하는 선거제도는 다중에겐 선출할 권리만 있을 뿐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 지 못하고 박탈되는 잘못된 제도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특권을 없애야 했습니다. 러시아혁명을 통해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글자를 모르는 문맹 이라는 핑계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전파하지 않았으며 지도라는 명분으 로 인민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권력을 행사했고 내전과 전쟁이 발생했다는 핑계로 농민들의 생산물을 도시노동자를 위한다며 강제 공출하기도 합니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했던 연속혁명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성장전화 ( 成 長 轉 化 ) 라는 산업이 고도로 발전해 분배불균등이 발생될 때 인민들이 피 흘린 혁 명을 통해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가 된다는 2단계 혁명론을 주장하면서 자유 와 평등을 요구하는 수병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단독재를 강조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 우리의 이익과 임무는 다소라도 재산을 소유한 계급의 지배적 지 위를 폐기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전 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진 행됨으로 경쟁이 그치고 생산력이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을 영속시키는 일이다>는 마르크스이론을 주장하며 레닌과 대립하기도 합니다. 전시경제라면서 네프경제를 실시하므로 러시아에서 화폐와 시장이 형성됐으며 임금 을 지급받아 필요한 생필품을 시장에서 구입해야하는 노동자들은 다른 제국주의와 다름없이 자신들은 임금노예일 뿐이라는 사실들을 자각하고 생산노동을 기피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생산력은 급격히 저하하게 됩니다

134 기업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인은 없어도 지휘 통제하는 관료들은 존재했으며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을 인정하므로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판 매하며 이윤을 남겨 화폐를 축적할 수 있는 상인들이 늘어나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면서 권력까지 행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조직과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보수교육이 라면서 특권의식을 주입받고 자신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잘못됐다고 따지는 사람들 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니 말이 많으면 빨갱이라 규정하고 경계하면서 자신 이 가진 우월적인 지위를 남용해 무력을 행사하며 억압하려 합니다. 구소련 관료들의 행위 때문에 현실 피착취계급들은 자신들이 통제당하면서 착취당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권리를 위해 저항해야 새로운 기득권을 만들어 줄 뿐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되지 못한다는 패배의식에 젖어 자신의 안위만 강조하 면서 분열하고 자신의 가족과 안주하기 위해 저항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공황은 세계 1차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만 발생시킨 것이 아니라 인류역사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는데 그 첫째가 남성들은 전쟁터에 나가있고 남성대신 생산을 담당한 여성들이 자신들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부터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생리대가 만들어지고 인명을 살상하기위해 무기와 함께 과학이 발달했는데 영국에서는 탄환을 연속으로 발사하는 기관총을 만 들었으며 독일에서는 독가스와 잠수함을 영국은 탱크를 프랑스는 전투기를 오스트 리아에서는 곡사포를 이탈리아는 세계 최초로 기관단총을 개발합니다. 세계 1차 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패전한 제국들을 차지하기 위해 오스만제국 에 진입했는데 민족주의자들이 1919년 5월 19일부터 아나톨리아에서 무장하고 저 항하며 터키 대국민의회를 만들어 그리스- 터키전쟁, 터키- 아르메니아전쟁, 프랑스- 터키전쟁을 거쳐 반발하다가 1923년 7 월 연합국과 로잔조약을 맺음으로 스미르나, 콘스탄티노플, 동부 트라키아 지방을 회복하고 터키공화국으로 독립됩니다. 1919년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략한 조선국에서 독립을 요구하며 3.1만 세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인민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황국식민으로 세뇌시키기 위 해 1920년 5월 27 일 지진제( 地 鎭 祭 ) 라는 기공식행사를 하고 남산 한양공원에 조선 신사를 건립해서 참배를 강요하며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시작합니다. 1925년 6월 27일 일본제국은 내각고시를 공표하여 신사의 격을 높이고 신사의 명 칭을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개칭했으며 신사에 둘 3 종신기( 三 種 神 器 ) 라는 상징 물들을 일본에서 가져오는 형식을 취하고 10월 15 일 진좌제( 鎭 座 祭 ) 라는 행사를 진 행하며 조선인민들에게도 참배를 강요하면서 식민정신을 세뇌했던 것입니다. 무력으로 타인의 평화로운 터전을 점령한 자들은 로마제국이 건립되기 이전부터 자 신들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또는 신에게 인간은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허구를 강제로 주입시키므로 인민들이 순종하고 복종하도록 세뇌시키고 피억압자들이 불평 등에 저항하지 못하게 통제했습니다. 공황으로 파시스트독재정권 발호 목 록 이탈리아에서는 1908년 2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통치하던 트렌토의 사회주의 당 당원이며 노동당서기로 지역 정치신문인 라보니레 델 라보라토레 ( 이탈리아어: L' Avvenire del Lavoratore, 노동자의 미래)의 편집진으로 활동하며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 베니토 무솔리니가 부각하기 시작합니다. 무솔리니는 급진잡지인 라 보체 ( 이탈리아어: La Voce, 목소리) 에 사회주의자의 시각 으로 본 트렌토 ( 이탈리아어: Il Trenti no veduto da un Socialista) 을 기고하고 반기독

135 교운동을 내세운 소설 추기경의 애인 을 상티 코르바야와 함께 집필해서 1910 년 일 트렌토 에 발표하며 사회주의자임을 강조하므로 명망을 얻습니다. 1919년 3월 23일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200여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파쇼< 일 파르 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 이탈리아어: 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 파쇼 이탈 리아 전투분대)를 설립하고 1922년 10월 27일에서부터 29일까지 로마진군이라 명명 한 쿠데타로 루이기 파크타 총리를 실각시키고 총리가 됩니다. 총리가 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국가주의자, 우익뿐 아니라 가톨릭신자이며 이탈리 아 인민당 소속 장관 두 명을 포함시킨 연정내각을 구성하고 그의 동생 아말도를 파시스트당 기관지< 일 포폴로>편집장에 앉혀 자신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선전하도록 하므로 이탈리아 헌법에서 규정한 독재자 지위를 합법적으로 획득합니다. 독재자로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다중의 굶주림을 해소하고 소비를 촉진 해야 기득권과 착취당하는 다수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기득권들의 이익 을 보장하기 위해 국유지불하, 임대법의 완화, 노동조합해산과 같은 일련의 법안들 을 통과시켜 부유한 상공업자와 지주들의 이익을 보장하면서 지지를 받습니다. 피착취계층들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대규모 공공토목사업과 국가주도 공업화를 진행해 고용을 높이며 실업률을 낮췄고 " 곡물전투" 라며 5 천여 농장을 건립하고 토 지전투 라며 폰티네 습지를 개간해 다섯 곳에 " 새마을" 을 건립하면서 건설노동자들 의 수입을 보장해 소비를 촉진하면서 대중이나 기득권으로부터 신임을 얻습니다. 다중의 지지를 획득한 무솔리니는 1923년 6월 전국을 단일 선거구로 하고 총선에 서 25% 이상 지지를 획득한 정당에게 의회의석의 3분의 2를 배분하는 아체르보 법 을 통과시키고 1924년 4월 6일 첫 총선을 실시하며 검은셔츠단을 동원 폭력을 행 사하므로 파시스트당을 중심으로 한 " 국가동맹" 이 64% 의 지지를 획득합니다 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통과시킨 법에 따라 무솔리니는 공식적으로" 행정수반" 이 자" 국가원수" 가 되면서 의회의 동의 없이 국왕을 끌어내릴 수 있는 권력을 차지하 자 지방자치를 폐지했으며 상원 역시 해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헌법 조항들을 폐기하고 경찰독재 통제국가로 만듭니다. 1928년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므로 이탈리아 의회를 해 산했으며 의회를 대신해 5년 전 자신이 조직한 파시즘대의회가 그 자리를 대신하도 록 격상시켜 파시즘대의회가 무솔리니의 업무를 정지시킬 권리와 탄핵까지 가능하 게 보였지만 파시즘대의회를 소집할 권한은 무솔리니에게만 있었습니다. 탄핵 없는 절대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범죄와 전쟁이라며 체사레 모리를 팔레 르모의 지사로 임명하자 모리는 마을들을 포위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잡아 고문하며 자백을 강요하는 잔인함으로 " 강철지사" 란 별명을 얻다가 1927년 마피아와 결탁해 1929 년 해임됐는데 무솔리니는 마피아를 근절시켰다며 의원으로 임명합니다. 무한 권력을 차지한 무솔리니는 총선은 불법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는 기아코모 마 테오티를 검은셔츠단( 이탈리아어: 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 파쇼 이탈리아 전투 분대) 소속 아메리고 두미니를 사주해 살해하고 마테오티의 시신을 집 밖에 세워둔 마테오티의 자동차로 옮기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실패합니다. 마테오티를 살해한 두미니는 잡혀 단지 이틀간 구류되었을 뿐 별 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15년간 파시스트로부터 금전지원을 받으며 호화롭고 편안하게 살았고 초 기에 연정내각에 동참했다 야당이 된 무리들은 국왕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 솔리니의 독재행위를 불신임하기 바라면서 국회 등원을 거부했습니다. 여기에 동참한 야권 연대는 공산당의 안토니오 그람시 사회당의 피에트로 네니 자,, 유당의 피에로 고베티와 지오바니 아멘돌라 등이 주도하면서 대중적인 반파쇼 운동

136 으로 발전했지만 국왕은 검은셔츠단의 폭력공포에 떨었고 내란으로 발생될까 불안 해하면서 무솔리니가 집무실을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두는 역할만 합니다. 농민들에게 과다한 보조금을 지급해 국가부채가 증가하는데 생산기계 발달로 공장 과 건설현장에 장비와 기계가 도입되면서 소수가 생산해도 공장에 팔지 못한 물질 이 쌓이고 다수 인민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해 발생되는 빈 부격차로 굶주리는 다수 대중이 늘어나면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산업사회가 발전할수록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극심하게 착취당하는 것이며 시장이 발달할수록 대중들에 대한 갈취가 극심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부를 축적하며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 체제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도 빈부격차는 해소될 수 없어 만년 모순으로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언론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폰티네 습지의 개간과 간척사업으로 새마을을 건설한 것 과 농업정책으로 실업률을 개선한 것을 자신의 성과로 선전했지만 이를 위해 최소 1만 명 이상 농민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은 은폐했고 1940 년에 " 곡물전투" 와 " 토지 전투" 정책이 폐기돼 폰티네 습지는 제2 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늪이 됐습니다. 공황으로 경기가 후퇴하자 무솔리니는 " 조국의 금" 운동을 개시하면서 목걸이나 반 지 등에 사용된 금과 보석을 국가에 헌납하면 " 조국의 금" 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철 제 팔찌를 나눠주면서 다중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모인 금을 금괴로 만들어 국가 경 쟁력을 상승시킨다면서 국립은행에 비축합니다. 1935년 무솔리니는 분배불균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다중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 해 소비를 촉진시켜야 하기 때문에 기업을 국유화하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외국기 업의 주식을 국가에 납부하는 것으로 시작해 모든 은행을 포함한 이탈리아 내 기업 4분의 3을 국유화 시키고 1938 년부터는 정부가 가격통제를 실시했습니다. 집단독재가 아닌 파시스트 1인 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 독일을 제외한 모든 외국과 무역을 단절하고 이탈리아를 자급자족 경제 체계로 만들었지만 분배불균등으로 빈 부격차가 생겨 발생되는 공황을 막지 못하게 된 무솔리니는 약소국들을 침략해 약 탈하고 식민지로 삼아 시장을 넓히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가 무솔리니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사이 독일에서도 히틀러독재가 발호 되는데 1차 대전의 책임을 물어 연합국이 1,32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요구하고 배 상금지불이 늦다는 이유로 1923년 1월 프랑스가 루르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이 화폐 를 무한정 찍어내므로 물가가 폭등하고 가치 없는 불환화폐가 넘쳐납니다. 외국화폐를 인정하는 것은 화폐를 제시하고 그 국가에서 창출한 노동생산물을 가져 와 노동 없이 창출된 물질이 비축되면서 자국에 이익이 돼야 하는데 독일이 지불한 배상금으론 독일에서 생산된 물질을 가져 올 수 없기 때문에 배상금 지불이 늦다는 구실로 독일을 점령한 것은 화폐가 경제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웁니다. 화폐가 가치를 가지지 못하자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폭등하고 혈세로 먹고 살다 경찰생활을 마치고 연금으로 생활하던 연금생활자들과 도시서민들 그리고 노동으로 물질을 생산하면서 임금을 지불받고 그 임금으로 자신이 생산한 물질을 다시 시장 에서 구입해 사용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생활은 빈곤해져 큰 타격을 받습니다. 화폐는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 어떤 물질도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화폐가 인 정되려면 반드시 교환되는 물질이 있어야 하는데 물질은 생산하지 않고 시장에서 판매만으로 먹고 살려는 상인과 노동생산을 하지 않는 실업자만 늘고 농어민과 노 동자들이 물질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화폐는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경제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슈트레제만 총리는 1923년 독일의 공업과 농업자원을 담보로 렌텐마르크화를 발행해 불환지폐를 회수하고 이듬해 이를 다시 마르크화로

137 교환함으로 다소 경기를 부양시키고 경제안정을 위해 연합국에 배상지불을 연장하 는 도스안( 案 ) 을 제시하다 로카르노조약을 맺고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포기합니다. 독일이 서부국경을 침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로카르노조약을 맺음으로 연합군이 라인란트에서 철군하고 독일의 국제연맹가입이 성사되자 연합군은 군사관리위원회 를 해체하며 미국대표 영을 의장으로 하는 배상조정위원회를 구성하므로 국내의 노 동생산인력들이 노력하면서 경제가 회생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경제는 1929년 초 독일의 복지시스템과는 달리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트 정 신에 입각한 시장자유주의 경제로 극소수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착취와 갈취로 일자리가 없어 수입 없는 다중이 물건을 구입할 수 없으니 팔지 못해 넘쳐나는 자 동차와 공업용품이 증시를 폭락시키는 미국의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정체됩니다. 당시 세계경제는 과학문명과 생산기계의 자동화로 생산된 물질이 넘쳐 팔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물질을 1차 대전으로 파괴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생산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을 지급하면서 소비를 유발해 발전하기 시작했고 전후 피해를 복구하면서 생산 되는 물질을 사용하며 건설노동자들의 소비까지 촉진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미국은 세계 1 차 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신흥공업과 새로운 생산기술발달, 산업전반에 걸친 기계화, 기업조직의 거대화, 새로운 노무관리방식을 도입하고 자동 차, 화학, 전기, 토목, 석유등 산업에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해 라디오와 영화가 보급되고 집집마다 라디오와 자동차를 보유합니다. 모두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하는 시장자유주의 정책은 과실이 기업가와 일부부유층에게만 돌아가므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자들은 단순작업을 되풀이 하는 기계에서 자동화기계에 밀려 실업자가 되므로 수입이 없어 사회적 구매력이 감소하므로 대량생산으로 물건은 넘치지만 소비할 사람은 줄어드는 것입니다. 전쟁 전에는 유럽의 각국들에 생산한 물질을 판매할 수 있었지만 유럽의 부유층 말 고는 상품을 구매해야 할 대중들은 자국의 상품을 소비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과의 무역거래가 저하되면서 생산된 물질과 실업자가 넘치고 쌓이는데 상인들은 조금 팔아도 먹고살아야 하니 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됩니다. 소비가 정체되면서 투자( 갈취)할 곳을 찾지 못한 기득권들의 화폐가 대출을 종용하 고 증권 등 투기시장으로 몰리면서 과도한 여유화폐로 주가가 기업체의 실질가치 이상으로 높아지는 주식시장 거품현상을 유발해 1929년 10월 24일 주식가격이 폭 락하는 이른바 ' 암흑의 목요일' 이 발생하자 기업들이 연쇄파산하며 붕괴합니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문명으로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기구와 농사방법이 발전하고 생산기계가 자동화되면서 전세계인구가 먹고도 넘칠 만큼의 농산물과 물질이 풍족 하게 생산되지만 다수는 굶주리고 타인을 착취하고 갈취하는 극소수만 풍요를 누립 니다.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공황은 공업으로 물질을 생산하던 유럽 승전국들과 일본에서 도 나타나면서 세계적인 대 공황으로 발전해 세계 곳곳에서 굶주린 인민들이 기득 권들의 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체제와 제도 때문에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죽도록 노동하고도 굶주린다는 원성이 높아지며 분배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1930년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댐과 사회간접자본인 고속도 로를 건설하는 등 토목공사를 실시하면서 실업률을 줄이고 수입을 보장하므로 소비 를 유도하며 회생시키려 노력했지만 분배불균등은 해소되지 않고 국민세금이 건설 업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면서 빈부격차만 커졌습니다. 1930년 3월 세계 공황의 여파는 독일에 가장 큰 타격을 주어 거듭되는 혼란이 가 중되자 예산안 처리문제를 놓고 진통을 앓던 브뤼닝 내각이 헌법에 규정된 긴급권

138 을 발동해 난국을 수습하려다 실패하면서 공화국의회는 해산되고 새로 실시한 총선 에서 폭력과 선동이 난무하는 속에 공산당과 독일노동당이 부상합니다. 정치권들은 서로 자신들이 집권하면 모두가 잘살 수 있다는 거짓말로 다중들을 속 이며 선거를 실시해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출범한 브뤼닝 내각은 공황을 해소하지 못하고 대 은행들이 연속 도산하며 1931년 초 실업자 수가 600만 명이 됩니다. 실업자가 넘치는 혼란 중에 대통령임기가 만료되어 선거를 실시하자 86세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1,935 만 표를 얻어 히틀러(1,341 만표) 를 누르고 당선되며 출범한 파펜내각은 로잔회담에서 유럽 부흥기금으로 30억 마르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세 계 1 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 보상해야 했던 배상의무를 완전히 해소합니다. 1932년 선거에서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NSDAP, 일명 나치)이 230석을 차지하자 히틀러가 9월 내각 불신임의결을 주장하며 정권을 엎으려해 파펜내각은 의회를 해 산하고 긴급권을 발동하며 비상정국을 선언했지만 파펜과 함께 통치책임을 분담했 던 슐라이허가 중도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므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집니다. 파펜내각은 11명의 장관 중 독일노동당 소속 장관은 3명뿐이기 때문에 히틀러와 정권을 나눠도 큰 문제가 발생되지 않고 오히려 히틀러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독일노동당에 접근해 연립내각구성을 제안하자 히틀러가 흔쾌히 승낙하므 로 총리가 된 것입니다. 1933년 의사당에 화재가 발생하자 히틀러는 공산당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방화 했다고 음해하고 여론을 조장하면서 헌법에 보장된 긴급권을 부여받고 돌격대의 폭 력과 게슈타포와 경찰의 통제와 감시 속에 공포선거를 진행했음에도 나치당이 과반 수 의석을 얻지 못하자 긴급권을 남용해 ' 수권법'( 授 權 法 ) 을 통과시킵니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시장경제를 살리려고 사회간접자산인 아우토반을 건설하며 건 설노동으로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고 소비를 촉진시키려 노력했으며 그래도 넘치 는 실업자들은 자신을 옹호하는 경찰이나 자신이 만든 나치부대 친위대로 고용하고 돌격대를 구성하며 군비확충으로 실업을 해소합니다. 무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국가재건 법을 비롯한 일련의 법규제정에 착수, 주 의회를 폐지하고 지방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으며 노동조합을 폐지하고 나치당 이외의 정당을 탄압하다가 불인정하는 국방군과 나치 돌격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돌격 대장 에른스트 룀을 처형하며 국방군을 달래고 독재 권력을 강화시킵니다. 대통령인 힌덴부르크가 서거하자 히틀러는 선거 없이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겸무하 면서 최고사령관직까지 차지해서 총통에 오르고 게슈타포 친위대 돌격대 등의 테러 조직을 동원 독일( 제3 제국)을 전체주의 경찰독재국가로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교육 예술 보도매체 등과 주요 국가기관들을 나치당이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히틀러는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잃어버린 조국 땅을 되찾 은 후 유럽을 포함한 러시아까지 강력한 군대의 무력으로 합병시킨다는 유겐트이념 을 강조하면서 경찰과 게슈타포를 동원해 선전하기 시작하자 이 사상이 젊은이들에 게 교조적으로 주입되면서 시장자유주의 역시 핍박의 대상이 됩니다. 타인보다 조금 뛰어난 분석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이 특출하다는 우월주의에 정 신병적으로 집착하는 자들이 기득권이 되고 권력을 잡으면 타인을 무시하면서 독선 적인 독재정치를 하는 것이며 기업을 차리면 노동자를 인간이하로 취급하면서 인간 평등을 무시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분배를 부정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면서 유지되는 시장자유주의 정치체제는 필연적으로 공황이 발생하고 분배불균등을 해소할 길 없는 기득권들은

139 말잘 듣는 로봇으로 무장시킨 병사들의 무력으로 학살전쟁을 일으켜 과잉 생산된 물질을 파괴하고 재건하는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러시아는 노동자집단독재, 유럽은 파시스트 1인 독재가 권력을 장악해 인민들을 억 압하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발명가이자 전기공학자인 베어드(John Logie Baird)가 1922년부터 연구해 1926년에 공개실험을 마친 텔레비전을 발명해 1929년 처음으 로 비비씨(BBC) 방송국에서 방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비전은 최초로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공개적으로 선보이게 되면서 1940 년 영국의 CBS가 처음 컬러 TV 시험방송을 했으며 1946년에 상용방송국이 방송을 개시하면서 미국 내에 대의 TV가 보급됐고 1950년대 초 FCC의 검토를 거쳐 1953년 NTSC표준으로 채택되면서 지금의 칼라 TV 로 발전합니다. 1934년 미국의 대공황과 독일의 무한정적인 화폐발행으로 금본위제화폐제도는 정 지되고 안방에서도 영상으로 정치나 사법권을 행사하는 권력들의 비리가 알려지면 서 여론을 형성하자 언론이 권력이 되고 권력을 차지한 언론은 기득권이 되어 온갖 거짓을 유포하며 다중들을 속이고 세뇌시키는 바보상자 첨병이 됩니다. 언론이 기득권들의 부정부패와 불평등한 원인에 대해 보도하면서 다중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자 기득권들은 양심 있는 언론인을 해직하며 탄압하고 언론계종사자들 이 고액의 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근거인 광고수수료로 압박해 언론종사자들을 굴 복시키고 기득권의 나팔수로 만듭니다. 이렇게 굴복해서 기득권이 된 언론은 진실을 알리고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요건인 경제원칙이나 인간평등과 본질적인 자유에 대한 내용은 은폐하고 착취 와 갈취로 유지되는 기득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3S( 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치의 첨병으 로 모든 것이 착취로 이뤄지는 시장과 화폐를 선전하며 다중을 세뇌합니다. 아무런 물질도 생산되지 않는 화폐가 경제인양 왜곡하고 돈을 빌리면 그만큼 이자 라는 명분으로 땀 흘린 노동결실을 착취당하는 것임에도 상품과 대출만 선전하고 어떤 물질도 생성할 수 없는 스포츠나 드라마에 많은 개런티를 지급하면서 허영의 식을 불어넣어 국민들이 진실을 볼 수 없게 시간과 정신을 빼앗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 방송되기 전엔 연극이나 예능이라는 것은 노동을 기피하거나 토지가 없 는 사람끼리 광대나 사당패라는 무리를 만들고 전국을 떠돌며 기득권 앞에서 연극 과 소리를 공연하며 잠자리를 하고 수입을 얻어 생활하다가 점점 발전하면서 양반 들의 횡포를 연극을 통해 민중들에게 알려내면서 저항의지를 키우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즐기면서 삶에 대한 의미를 각성하도록 하는 연극이나 예능 또는 음악을 영 화나 드라마 또는 쏘라는 명분으로 거액의 출연료를 지급하면서 착취와 갈취로 억 압받는 대중들이 현실을 판단할 수 없도록 시간을 빼앗고 연예인들의 생활을 공개 하면서 허영심을 부추겨 국민을 우민으로 세뇌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TV 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나 스포츠 그리고 노래나 춤, 그 무엇이든 단 한 가지라도 인류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물질도 생산되지 않는데도 그들은 생산노동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호화롭게 살도록 수입을 보장하고 허영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공개 하며 선전 선동하므로 경제의 실체를 왜곡하는 용병으로 활용합니다. TV가 발명되기 이전 피지배계급들이 착취와 갈취 그리고 억압과 통제에 견디지 못 해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며 저항했던 인류역사와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수많은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잔혹 한 진실들은 은폐하거나 단편적인 흥밋거리로 전락시켜 왜곡하는 것입니다. 1930년 1월 스페인에선 군주제에 의해 억압받고 통제당하면서 착취당하던 인민들 이 공황으로 발생된 빈곤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불만이 폭발하면서 학생과 노

140 동자들이 적기와 공화 국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는데 5월 마드리드에서 경찰들이 무 자비하게 진압하자 시위대도 무장하고 전투를 벌입니다. 12월 군 장교들이 군주제에 반대하며 반란을 준비하다 주동자들이 처형되고 1931 년 자치선거에서 바쿠닌주의(FAI)와 통합사회당(PSUC), 스페인공산당(PCE)이 도시지 역을 휩쓸며 당선되니 임금 알폰소13 세가 도망가므로 사회주의노동자당(PSOE)과 결합한 연합정권을 결성하고 스페인이 공화국이 됐음을 선포했습니다. 제2 공화국은 헌법으로 지방자치와 평화주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내용으로 수정됐으나 초대대통령 알칼라 사모라는 사유 재산을 인정한다는 가톨릭신도로 스페인의 소수 지배계급이었던 지주와 로마가톨릭 교회 입장을 옹호했지만 부자들이 저항합니다. 대지주들과 가톨릭교회의 저항을 진압하지 못하는 사이 미국의 대공황으로 양극화 가 가중되면서 굶주린 노동자와 농민들은 바쿠닌의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집단,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노동자집단주의, 독일과 이태리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노동 자당이란 파시즘 극단집단으로 나뉘며 극도로 불안정해집니다. 교회가 평등과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사상이라는 거짓에 세뇌된 군부가 노 동자집단주의나 평등한 사회로의 발전을 거부하고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무리가 되 어 정권을 지지하자 제2 공화국 총리 아나샤가 토지개혁을 미적거리면서 노동자들 에게 비난받고 공황의 경제위기로 기득권에게도 비난받습니다. 1933년 1 월 스페인 카사스 비에자스(Casas Viejas)에서 농민들은 노동도 하지 않는 자들이 생산물을 갈취하는 토지의 개인소유를 몰수하고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사 용하는 사회로 바꾸자면서 일어나자 연립 정권이 군을 동원해 잔혹하게 진압하므로 사회당내부에서 비난하는 여론이 높아져 분열되면서 새로운 선거가 실시됩니다. 새로운 선거가 시작되자 공화-사회주의정권의 농민진압 보복차원으로 전국노동연맹 (CNT)은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기권할 것을 촉구했고 대중들도 여론에 동참하면서 압도적으로 투표하지 않았음에도 선거는 성립되고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성직자와 군주제주의자들만 당선됩니다. 당선된 성직자와 왕당파 그리고 군부독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각에 합류하도록 초청 받자 1934년 10월 스페인 전역에서 총파업이 발생하고 사회주의노동자당원이 많은 광산노동자노동조합이 중심인 아수트리아스노동자들이 경찰막사들을 공격하자 봉기로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은 군수공장까지 장악하고 무기를 획득합니다. 군수공장을 장악하고 무기를 획득한 노동자들은 파업을 선언하고 동참하는 노동자 들에게 기관총과 소총을 분배했으며 무기로 무장한 노동자들은 수도 세비야와 스페 인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하고 우리는 독일노동자들이 실패한 경험을 반복하지 말자 면서 착취와 억압 없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고 결의합니다. 정치꾼들은 노동자와 농민 등 다수 인민들을 다수결 선거선출주의로 세뇌하며 사회 주의노동자당(PSOE) 통합 맑스주의 노동자당(POUM) 스페인공산당(PCE) 통합사회당 (PSUC) 전국노동연맹(CNT) 이베리안 무정부주의자 연맹(FAI) 중도주의 노동자와 농 민연합 [Workers and Peasants Bloc](BOC)을 만들며 분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노동자 농민은 제 1공화국시기 바쿠닌의 영향을 받아 모든 억압과 착취를 부정하고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집단, 서로자기 세력이 많다며 양분돼 노 동자권력을 강조하는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집단, 독일과 이태리의 지 원을 받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란 파시즘집단으로 나뉘며 극도로 불안정했습니다. 1936년 2 월 총선에서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공화당, 스페인공산당 등이 구성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하며 의회를 장악한 인민전선

141 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정책들을 시행하자 지주 상공인 교회성직자들이 불만을 품고 1936년 7월 17 일 모로코에 머물고 있던 군부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군부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영향을 받아 상공인들이 착취와 갈취로 축적한 재산도 보호받아야 하며 평등과 분배보다는 시장자유주의를 해야 한다는 교회목회자들과 상공인 그리고 지주 등 부를 축적한 집단들이 지원하는 폭력자금으로 무기를 구입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선거로 정권을 획득한 공화파 정부는 쿠데타의 징후를 사전에 포착하고도 초동진압 에 실패함으로 반란군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됐으며 군이 역할을 못하자 시민들 이 자체방위군을 결성하고 반란군에 맞서 싸웠으며 많은 희생을 치러내면서 몬타나 요새를 빼앗기고 마드리드를 지켜냅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시민자치방위군이 조직되어 반란군과 결전을 치러 승리하고 발레 아레스제도에서 진군한 요피스를 체포하여 처형했으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군이 아라곤과 카탈리나 전역을 점령하자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2년 동안 고립당해 코뮌을 구성하고 자치로 운영하게 됩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스페인공화국정권은 반란군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도 사고도 없었 으며 오히려 노동자와 시민들이 무장하고 반란군에 맞서자 반란군보다는 시민군을 더 두려워했으며 항구에 정부군함이 있었지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고 무장한 노동자군대가 반란군에 밀려도 방관하다 정권을 반란군에게 빼앗깁니다. 공화파는 소련, 멕시코, 국제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된 국제여단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지원받았으며 중심세력은 노동자, 소작농, 도시서민, 인텔리겐치아 등이었으 나, 공산주의나 아나키즘혁명을 지지하는 일부 기업인들도 끼어있었으며 정부군은 스스로 " 충성파", " 인민전선", " 공화파", " 정부파" 등으로 불렀습니다. 반란군에 가담한 세력으로 카를리즘 정통주의와 같은 왕당파, 로마가톨릭 및 보수 주의자와 왕정을 지지하는 시장자유주의 같은 가톨릭성직자, 지주, 기업가, 유산자, 파시스트군대에 병력을 제공한 바스크지방 외곽지역의 가톨릭신자들 등 반공주의를 공통분모로 착취와 갈취로 재산을 축적한 집단의 연합입니다. 1인 독재체제를 갖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포르투갈은 반 란군을 지원했으며 소련과 국제코민테른은 공화파를 지원하고 미국은 정부군과 반 란군에 비행기와 가솔린연료 등을 팔면서 양쪽에서 이익을 챙겼고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조약을 지킨다며 스페인정부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평등과 정의나 진리, 양심은 없고 봉건영주들과 로마가톨릭사제들로부터 착 취와 수탈을 당하던 무리들이 산업과 시장이 발달하면서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소비 자를 갈취해 재물을 축적하고 개인의 재산을 보호되며 인정해야 된다는 개신교정신 으로 무장한 시장자유를 주장하는 집단입니다. 스페인내전은 50만 이상의 반란군과 시민군이 사상당하고 1939년 4월1일 공화파정 권이 마드리드에서 반란군에게 항복하므로 끝났으며 반란에 앞장섰던 프랑코는 반 군들과 성직자와 상공인의 지원으로 1975년까지 독재자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인민 전선을 색출 학살합니다. 분배불균등 때문에 생기는 공황은 유럽의 전쟁승전국들에도 발생해 프랑스에서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실업자가 늘어나고 극소수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수 입 없는 다중들이 소비를 하지 못해 공장에서 자동화로 생산되는 물질은 넘치지만 팔지 못한 상품들이 길거리에 적치되는 현상이 발생됩니다. 굶주린 대중들의 불만이 높아지면 기득권들은 독재왕조를 찬양하며 주체성과 자주 성을 상실하고 권력의 특혜를 받으며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기적인 관제( 官 制 ) 보수

142 를 이용해 여론을 조작하면서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다중을 무력으로 억압할 수 있는 파시즘독재를 강화하고 전쟁분위기를 조장합니다. 유럽은 1936년 일자리를 나눈다며 주 40시간 노동제를 실시했지만 빈부격차가 해 소될 수 없어 전쟁을 벌입니다. 엄청난 인명살상 2차 대전 목 록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를 빌미로 불 만을 표현하면서 국제연맹을 탈퇴했으며 1935년 3월 재군비를 선언하면서 군력을 증강하고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를 점령하면서 로카르노조약을 파기하고 실업률 해소를 위해 병사를 늘리며 군부를 확장했습니다.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측근을 요직에 임명해 나치체제를 강화했으며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군사 력을 바탕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이 자치를 요구할 때 무솔리니와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포위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승 인하도록 요구합니다. 히틀러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회담 후 체코슬로바키아 주 데텐란트 거주 독일인의 민족자결허용을 권고하게 되고 프랑스도 이에 동의하므로 독일은 동부 중부 유럽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게 됐으며 국제연맹을 탈 퇴해버리므로 다른 국가들이 더 이상 독일을 제재할 수 없게 됩니다. 1939년 6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한 것을 빌미로 1939년 8월말 독일은 소련 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고 9월 1일 폴란드의 서쪽국경을 침공하자 이에 동조한 소 비에트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국경을 침공했으며 1937년 7월 7 일 일본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하면서 세계 2 차 대전으로 발전합니다.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침공에 항의하며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하지만 폴란드는 동서 양쪽에서 준비하고 쳐들어온 독일과 소련에 쉽게 점령당했으며 히틀러는 곧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군비가 약한 국가들을 공격해 쉽게 점령하고 영국, 프랑스와 대치하며 대 학살극을 벌입니다.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침공하고 대서양연안까지 진출하여 영국군과 프 랑스군을 차단하자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잇달아 항복한 것에 힘입은 이탈리아가 전 쟁을 선포하고 참전했으며 히틀러는 자신이 주장했던 유겐트사상에 따라 1941년 6 월 22일 약 300 만의 병력과 기갑사단을 앞세워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중화민국의 장개석을 지지하던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ABCD 포위망을 구축하고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와 철광의 수출을 제 한하며 일본을 고립시키기 시작하므로 일본은 항공모함을 동원해 미국 태평양함대 본거지인 하와이진주만을 기습폭격하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세계 1차 대전은 약 2천만의 군인과 3천 5백만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독일 유태 인수용소와 일본 731군부대에서 사람에게 온갖 고문과 사지를 절단해 약품을 실험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참혹한 살상을 거치며 의학을 발전시키고 과잉생산으로 넘쳐 나던 물질과 공장을 부수고 약소국을 식민지시장으로 확장하며 끝났습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하고 게르만민족우월주의를 주장하면서 민족주의가 확고하 게 자리 잡지만 인류가 발전하면서 수많은 침략과 약탈전쟁을 거쳐도 여성들은 크 게 동요하지 않았으나 독일여성들은 소련군이 들어와 강간당하면 순수혈통을 낳지 못한다는 웃지 못 할 거짓에 세뇌되어 도망 다니다 많이 자살합니다.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침략과 약탈전쟁을 거치며 각종

143 인종들이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으므로 순수혈통을 가진 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고 현실에서도 인류들이 여행이나 이민으로 서로 교류하고 있기 때문에 순수민족이란 기득권자들이 애국을 강요하며 충성을 요구하는 수단일 뿐 있을 수 없습니다. 1943년이 되자 이탈리아는 바티칸과 런던의 라디오를 들으며 무솔리니가 주장하는 선전술은 거짓이라고 간파하므로 더 이상 사람들을 속일 수 없게 됐으며 3월이 되 자 이탈리아 북부공업도시에서 최대파업이 시작되고 밀라노와 토리노는 공습을 피 해 노동자들이 생산을 멈추며 독일을 묵인하는 무솔리니를 반대했습니다. 7월 24 일 파시스트 대의회는 전쟁을 시작한 후 최초로 " 두체" 를 소환한 자리에서 그란디가 무솔리니의 불신임을 요청하고 대의회가 19대 7로 가결하자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의회는 자문 기관일 뿐 어떤 결정도 무효라며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보는데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 세가 무솔리니의 해임을 통고합니다. 무솔리니를 해임한 국왕은 후임자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내정하고 무솔리니 가 왕궁을 나서다 근위대에 체포됐지만 대중의 불신을 받고 있었으므로 반발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행방을 독일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아브 루초 주의 산악지대인 캄포 임페라토레에 격리시켜 구금했습니다. 새로 출범한 바돌리오 총리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을 의식해 " 이탈리 아는 여전히 독일의 우방" 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속이려 했지만 출범 이틀 만에 국가 파시스트당을 해산시켰고 1943년 9월 3일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자 이 탈리아 전역이 분노하며 들끓어 총리와 국왕은 로마를 떠나 피신합니다. 총리와 국왕이 없는 이탈리아는 무정부 상태로 자체적인 질서유지를 준비하고 있었 는데 바돌리오총리가 10월 13일 몰타에서 나치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하면서 권력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지만 상당수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파시스트가 장 악하고 있었으며 대중이 인정하지 않는 총리명령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수 천 명의 병사들만이 지지하는 바돌리오정부는 이탈리아파르티잔과 연대하며 독 일에 맞서고 캄포 그란사소 호텔에 연금되었던 무솔리니를 나치독일공수부대와 무 장친위대가 구출했으며 이탈리아로 진군한 독일군은 왕가와 내각인사를 체포하며 무솔리니의 권력을 회복시키려고 했으나 다중이 인정하지 않아 실패합니다. 무솔리니는 1943년 9월 23일 살로에서 이탈리아 사회주의공화국수립을 선포하고 정부수반이 되지만 이 망명정부는 실재적인 정부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명분으로 세운 괴뢰 정부였음에도 정권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자신을 배반했다며 파시스트 대의회의 요인들을 처형했습니다. 1945년 4월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자 무솔리니는 연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와 독일 장교로 변장하고 독일군으로 위장한 병사들과 함께 탈출, 스위스를 거쳐 스페인으 로 가던 길에 4월 27일 공산주의계열파르티잔에게 발각되어 코모 호 인근의 동고 마을에서 체포됩니다. 무솔리니와 페타치는 메체그라로 이송되어 처형됐으며 1945년 4월 29일 무솔리니 와 페타치, 그리고 함께 처형된 파시스트들의 시체는 일전에 파시스트당에 의해 반 파쇼 운동을 한 사람들을 처형하던 밀라노의 피아차 로레토에 위치한 주유소에 버 려졌고 분노한 민중들이 시체를 짓밟다가 지붕에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같은 날 한때 " 무솔리니가 신이다" 라고 칭송하면서 1인 독재를 찬동하고 아첨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던 파시스트 왕당파 아실레 스타라체가 붙잡혀 피아차 로레토로 잡혀왔으며 파르티잔들은 곳곳에서 저항하거나 숨어있는 파시스트들을 붙잡아 처형 하고 그 시체들은 주유소지붕에 거꾸로 매달았다고 합니다. 독일은 1945년 8월 8일 베를린에서 패전한 히틀러가 자살하자 무조건 항복했으며

144 일본은 1945년 9월 2일 전권대사였던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와 미국 측의 맥아더 원수가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해 있던 미 해군 미주리호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 에 조인하면서 그 참혹했던 세계 2 차 대전은 막을 내린 것입니다.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벌인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인류나 동족을 학살하는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을 구국영웅인 양 애도하며 다중을 세뇌하고 민족주의를 강화시켜 절대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면서 평등을 부정하고 반공을 강조하며 내부를 분열시키고 통치하는 도구로 삼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은 2천만 명의 병사들과 3천 5백만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전쟁이 종결되고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게 된 것은 유럽강대국들이 아니라 1차 대전과 2 차 대전에 크게 참전하지 않고 무기와 물자만 팔면서 부를 축적한 미국과 독일과 한편이 되어 전쟁을 시작한 소련에게로 돌아갔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히틀러의 직속부관이었던 히믈러가 체포돼 세계전범재판소에 회부됐을 때 세계전범재판관들이 히믈러에게 너는 육백만이라는 유태인을 학살하였 으므로 사형이다. 라고 선고하자 히믈러는 나는 독일제국이 건설한 법을 집행했을 뿐 죄인이 아니다. 라며 자기변론을 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했던 법 철학자이자 형법 학자였던 라드브르흐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천부권( 생존권, 자유권, 평등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데 너는 법이라는 핑계로 육백만을 학살했으므로 사형이다. 라고 선고했습니다. ( 서 울대법대 최종고교수님의 법학통고에서 발췌) 법이란 모두가 공정하게 지켜져야 할 규범이 아니라 온갖 비양심적이고 파렴치한 행위로 기득권을 차지한자들이 피억압자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억압하면 서 자신들이 강탈한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다중들로부터 착취하거나 갈취한 재물을 지키면서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기득권끼리 만드는 것입니다. 독일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종전 후 국민들이 광부나 간호사 등 위험하거나 힘들고 더러운 작업들을 기피하므로 외국의 노동력을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됐으며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육아양육노동에서 탈출하고 몸매를 유지하기위해 출산을 거부하므로 인 구가 줄어들자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이민을 받습니다. 타국에서 온 타 민족이라도 자국 내에서 자녀를 출산하면 자국민으로 인정하고 양 육비와 교육비까지 지불하기 때문에 세 명의 자녀만 출산하면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주만큼 생활이 보장되므로 자녀만 낳는 사람도 있으나 이런 행위는 자녀를 인 간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자신의 삶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조선에 설치한 조선신궁에서 16 일 오후 승신식( 昇 神 式 ) 이 라는 폐쇄행사를 갖고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 철거를 마치자 이 튿날 나머지는 그들의 손으로 소각하고 철수했으며 미국태평양지역총사령관 맥아더 는 9월 9일 미군은 조선의 점령군임을 선포하는 포고령1 호를 발표합니다. 조선 인민에게 포고함 태평양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리 편 여러 나라 군대의 오래 계속되어 온 무력투쟁을 끝마쳤다. 일본 천황의 명령에 따라서 그를 대표하여 정부와 대본영이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이 지휘하는 전승군은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했다. 본관은 조선 인민이 오랫동안 노예처럼 지내온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 려는 연합국의 결정을 명심하고 있다. 조선인은 우리가 조선인을 점령하는 목적이 항복 문 서를 이행하고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에 나는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

145 다. ( 제1 조)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 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 제2 조) 정부 등 모든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무급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중요 한 제반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 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 제3 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으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질서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 제4 조) 주민의 재산권은 이를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적인 직무에 종사하라. ( 제5 조) 군정 기간 동안 영어를 모든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고용어로 한다. 영어 원문과 조 선어 또는 일본어 원문 사이에 해석 또는 정의에 관하야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 不 同 ) 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 제6 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또는 나의 권한 아래 나올 것으로, 제군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출처 : 시사연구소, < 광복 30 년사> 일본이 자신들의 사상으로 세뇌하기 위해 설치했던 조선신궁이 사라지고 정의나 양 심과 진리는 없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착취와 갈취로 재물만 축적하면 기득권이 되는 미국의 시장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가 물밀 듯이 들어와 산골짝 구석구석까지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의 조선장악 목 록 미리 조선에 들어와 있었으며 자신들의 언어로 대화가 가능한 선교사와 목사들은 조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친일파들이 국민들을 지배하고 통치한 행정경험 이 있다며 매국노들을 요직에 앉히므로 매국행위의 징치를 금지하고 은폐하면서 지 배질서를 강화한 것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조선을 장악하자 협동하는 공동체사상은 말살되고 노동착취와 갈취가 합법인 시장자유주의와 소수가 다수를 지배 통제하는 선거선출제도, 관료주 의계급사회를 형성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만 축적하면 된다는 철저한 개인이기주의로 세뇌되어 우민으로 길들려집니다.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전국으로 전파되자 진실과 진리 그리고 정의는 사라지 고 거짓과 허구가 활개 치며 재물을 차지하기 위한 사기와 절도 도박 강도 살인 등 온갖 범죄가 늘어나고 믿음이 사라졌으며 의심과 권모술수가 자리하게 됩니다. 과학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속일 수 없다고 강조하며 선량한 양심의 정곡을 찌르고 무엇이든 회계하고 기도하면 용서받 는다는 거짓말로 헌금을 강요해도 선량한 사람들은 단지 회계하는 기도만으로 자신 의 양심에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종교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양심을 속이는 위선과 착취나 갈취로 삶이 유지되는 사회에서 살다보니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종교지도 자들은 사람이 양심을 속일 수는 없다는 마음을 이용해서 종교를 믿게 하고 헌금을 강요합니다. 사기와 위선 그리고 거짓으로 유지되는 체제에서 직장을 놓치지 않거나 성공하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므로 항상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듯 감언이설로 꾀어 편안한 듯 착각을 일으키도록 현혹 해서 갈취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노동자 농민 어민들이 창출한 물질을 판매라며 대량으로 구매해서 상 중 하로 분리해

146 이윤을 남기기도 하고 손님의 분실물까지 주워 부를 축적하는 상인들과 직장에서 상사라며 아랫사람의 재능이나 노력을 가로채 자신의 성과인양 내세우며 관리자직 책을 유지하는 무리들은 매일같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임금을 지급한다는 명분으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기업인 이나 혈세로 살며 혈세 내는 국민을 억압하는 무리들과 다중을 속이며 지지를 획득 해 기득권을 누리는 정치꾼들은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들에게 종교를 믿도록 하기 위해 신비주의까지 강조하는 것입니다. 집단이나 무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은 집단이나 무리가 책임져야 함에도 로 마가톨릭이나 개신교는 전 세계에서 거둬들이는 헌금과 감세 그리고 기득권들의 후 원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극 소액을 불우한 이웃을 위한 자선기금이라며 내 놓 는 행위로 집단이나 무리의 책임을 개인 탓으로 변질시킵니다. 종교의 자선행위 선동으로 열심히 일하고도 빈곤하거나 장애를 가지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집단이나 무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듯이 개인문제로 치부하 는 것이며 마치 종교만이 구원자인양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희생하면서 자원 봉 사활동을 하므로 자신도 모르게 무리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봉사나 자선사업이 선행으로 선전되면서 노숙자나 거지를 돕는 것이 선행인양 착각 을 일으켜 동전 몇 푼 동냥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집단이 나 무리가 책임져야 할 복지를 개인 탓으로 왜곡하며 기득권들의 착취와 갈취행위 로 빈부격차가 발생되는 원인은 은폐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판단부족 때문에 종교에 매달린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종교인들은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매달리도 록 하기 위해 전쟁을 조장하거나 있지도 않는 악마나 사탄 또는 종말론 같은 괴 소 문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종교 때문에 비양심적인 행동들을 하고도 교회에 가서 회계하고 기도하면 죄를 사 함 받는다는 거짓에 속은 신자들은 오히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비양심 적이거나 비이성적인행동을 하면서 타인을 속여 사회혼란을 가중시키며 인간을 존 중해야 하는 가장기본적인 진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가족제도를 강조하므로 부모가 자녀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한 자들이 자녀의 장래를 위한다며 자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녀의 재능이나 기호와 동떨어진 특정 교육을 강조하며 자주성을 박탈하고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 가정의 자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교육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주장하는 가족주의 혈육( 혈통)주의 때문에 대물림 하는 상속이 이어져 자신이 축적한 재물이나 획득한 지식을 자신의 자녀에게 물려 주는 것이며 가난한 사람의 자녀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 있어도 양심을 속이는 범죄 말고는 재산을 축적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자녀들은 부모의 고혈을 짜내면서 기를 쓰고 공부해 대학까지 나와 도 모두에게 균등하게 일자리를 보장할 수 없는 체제에서는 고학력실업자로 전락할 뿐 절대로 기득권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통제받고 지배에 익숙하게 길들여 지는 것은 자유의 권한이 없는 노예나 생산기계 또는 로봇이나 애완용으로 기르는 짐승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지 자신의 의사를 가지고 판단력과 결정권을 행사하며 평 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는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들이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라고 강조하면서 정의와 진실은 사라지고 잘못이 있 어도 무조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양 왜곡되면서

147 진리는 은폐되고 가족단위로 분열을 조장하는 편 가르기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믿던 안 믿던 자신이 선량하고 순박하게 살아가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온갖 위선자들에게 속아 착취당하고 갈취당하면서도 선량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고가 위선자들과 갈취자 착취자들에게 저항해야 할 권리 를 억눌러 기득권을 유지시킵니다. 종교에 세뇌된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하냐면 신의 뜻이라며 사람을 학살하는 전쟁참 여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전쟁에서 기도나 부적만 붙 이면 보호받는다는 거짓에 속아 목숨을 잃고 평생노동으로 마련한 주택도 사후에 천국 가는데 방해가 된다며 교회에 헌납하라면 현금으로 내 놓습니다. 교회를 지은 장로들은 교회재산은 교회에 귀속되고 장로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 하고 목사들은 자신이 설교로 신도들이 교회에 재산을 헌납했으므로 목회자 공로라 면서 재물강탈의 권리를 주장해 교회목사와 장로들 간 재산분쟁이 끊이지 않고 발 생되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존중하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임에도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누리고 사는 신부나 목사들은 자유와 평등을 주장 하며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한다고 거짓을 세뇌시키며 악선전하고 있습니다. 우월의식에 젖은 자들이 기득권이 되면 타인을 통제하고 군림하기 위해 상명하복의 명령계통 계급을 만들어 인간평등을 부정하고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므로 지배질서 를 만들어 피 착취자들이 단결해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분열시키고 모든 인간은 평 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진실과 진리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평등과 자유에 대한 혁명이 많았던 프랑스는 공항천정에 대형흡입기를 만들어 공항 에서 담배를 피워도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므로 흡연자의 자유를 보장하 지만 인간평등을 부정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통제하는 국가들은 타인들의 제재와 통 제를 당연하게 받아드리도록 길들이기 위해 단속규정을 만듭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면 자연스럽게 배설현상이 발생하므로 배설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시설을 만들어야 하지만 평등과 자유를 부정하고 통제와 억압하는 틀을 유지 하려는 자들은 배설할 권리를 박탈하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노상방뇨라 는 단속법을 만들어 통제를 길들이고 범칙금이라며 수탈까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을 가진 환경의 동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가정을 강조하므로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통제당하는 환경으로 길들이고 교육이라며 학교에서 통제당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국방의 의무라면서 군에서 통제당하고 기초적인 통제를 벗어나면 수입을 위해 회사에서 통제당하고 혈세로 사는 경찰에게 법이라는 핑계로 통제당합니다. 철저하게 평등과 자율을 부정하고 통제하는 행위를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기 위해 가 정을 강조하므로 인간존중을 상실한 자들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부모를 살해하거 나 제대로 양육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부모를 살해하기도 하고 분배불균등이라는 체 제모순 때문에 빈곤해지면 자녀를 살해하고 자살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사상 말살과 시장자유주의 확산 목 록 세계 1~2차 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전쟁 물자를 팔며 이익만 챙긴 미국은 1929년 전 세계를 빈곤과 전쟁으로 내몬 공황의 실체를 은폐하고 노동자들이 억압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시장자유를 위한 자율생산기조를 고수하다 농산물과 전쟁물자가 과잉생산 돼 넘쳐나는 공황이 닥칩니다. 1947년 생산물이 넘치자 농민들의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농산물을 정부가 수매해

148 서 태평양바다에 버리다가 넘치는 농산물과 공업생산물을 유럽부흥계획(European R ecovery Program, ERP)이라면서 시장자유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한해서 식량이 부 족하면 지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마셜플랜이라고 불리는 이 선언은 노동력 착취로 생산한 물질을 굶주리는 노동자에 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을 부정하고 착취와 갈취로 부를 축적하는 시장을 형 성한 국가들을 지원하므로 착취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무리들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 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이념갈등의 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의회에서 미국 외교정책에 관한 원칙이라며 트 루먼 독트린( 영어: Truman Doctrine)을 선언하는데 그 내용은 평등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고 착취와 갈취가 합법적인 시장을 형성하는 나라에 군사적 경제적 원 조를 제공한다면서 그리스와 터키 등 반공을 내세우는 정부들을 원조했습니다. 공황이 발생하면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수 인민들이 인간평 등과 경제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각종 거짓 학문을 퍼트리고 흥미위주의 프로스 포츠와 잡기 연예인을 만들어 수입을 보장하면서 선전하므로 생각하는 시간을 빼앗 아 우민으로 길들이는 것입니다. 훈련이 잘됐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원숭이나 개 등 애완동물처럼 고분고분 명령 에 복종하도록 잘 길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교육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하는 체제에서 양심도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할 수 있게 길 들여지는 세뇌를 많이 당한 것이지 학문이나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혈세로 살면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무리들은 혈세 내는 국민에 봉사할 줄 모르고 지 배자인양 기득권을 차지한자들이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해도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비호하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 노예로 길들이기 위해 업무방 해라며 구속( 억압 통제) 합니다. 관료들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시간에 맞춰 출근해야 하고 상사가 내리는 명령이 아 무리 부당해도 지시에 복종하며 자신의 자유와 양심도 없이 근무시간 안에 맡은 업 무를 처리해야 하는 임금노예이면서 노예관리자로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착취질서 를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억압 통제하며 충성하는 로봇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군사력증강에 노력하기 때문에 군수산업이 발달했으나 모든 생산은 소비되 지 않으면 쌓이고 쌓이면 생산하던 계층이 실업자가 되고 수입이 없어 소비를 못하 면 기업이 아무리 물질을 생산해도 팔지 못해 주변 기업도 망하게 됩니다. 군수산업의 과잉생산을 가져온 미국은 무기를 소비하기 위해 약소국들을 침입하거 나 내분을 일으켜 전쟁을 하도록 부추기고 무기소비시장을 만들어 자국의 과잉생산 을 해소할 뿐 아니라 전쟁으로 폐허된 국가를 돕는다며 건설이나 의료 또는 공산품 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침투해서 자연스럽게 산업을 장악합니다. 종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나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신을 위한 순교라거나 종교 에 대한 박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빈부격차는 신으로부터 시험받는 고난이라고 왜 곡하며 목숨 걸고 타국에 침투하여 의료라거나 자국에서 버려야 할 정도로 넘치는 공산품, 식품 등을 지원하면서 시장자유주의를 세뇌하는 것입니다. 1950년 혈육 간에 학살하는 동족상쟁의 전쟁이 발생되자 인간평등을 부정하고 종 교를 빙자하며 신의 권리를 내세워 특권을 누리는 목회자와 성직자들은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평등과 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빨갱이 사상이라며 신도들 을 세뇌하므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정신세계를 가지게 됩니다. 교육이란 나타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의구심이나 탐구심을 유발하므로 객체가 창 의성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연구( 탐구)하고 경험한 결과를 논의하며 발전시켜 생활

149 속에 실천( 적용 활용) 하는 것으로 누구나 평등한 관계 속에 자율성이 보장돼야 가능 하므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장기 식민지배계획인 억압과 통제만 배운 매국노들이 각 분야와 교육수장이 되어 개인의 자율적 탐구심이나 주체성과 창의성, 그리고 상대방을 존 중하는 사상을 말살하는 목적을 가진 교과서를 강제주입하고 누가 잘 외우냐 로 점 수를 매기며 경쟁시키므로 공동체를 훼손하며 우민화하는 것입니다. 교사라는 우월주의로 학생의 자율성을 말살하고 정해놓은 사상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상대방이 깨달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거부감을 나타내며 반항하거나 순종하는 로봇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어려서부터 반골인가 아닌가를 파악하고 분류해 도태시키려는 목적으로 봐야합니다. 진리 없는 교육을 받고 학벌이 높다는 것은 착취와 갈취, 사기와 위선으로 유지되 는 체제에서 주체성을 상실하고 살아남거나 출세하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지배 통 제하며 복종시키는 능력을 배워 얼마나 비양심적이 됐는가의 척도를 나타내는 것이 지 진리와 학문을 많이 깨달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타인을 학살한 사람들 중 일부는 폭력에 중독되어 폭력을 합리화 하며 타인을 억압하는 폭력행사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정신병자가 되어 자칭 우익이 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일부는 타인을 학살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을 고뇌하면서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장자유주의와 구소련의 스탈린집단주의를 겪은 국민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 생이 불가피하다는 다중 폭력주의가 정당화되면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고를 상실하므로 평등이나 자유에 대한 이해도 없이 자신이나 무리의 이익을 위해 타인 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억압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종교가 반공과 개인이기주의로 세뇌시키며 대중들을 분열시키고 국가라는 집단이나 또는 무리공동체가 전체의 세금으로 보장해야 할 필수공공제인 전기, 가스, 수도, 의료, 교육 등을 시장자유주의 논리에 의해 적자란 명분으로 사유화를 강요하면서 대중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장악합니다. 필수공익사업을 장악하면 국가기관 산업인 철도와 공항, 고속도로 등을 적자라는 명분으로 사유화하도록 강제하므로 인민들이 수탈당하는 식민지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도록 은폐하고 반공을 강조하며 평등한 공동체나 분배와 평등을 요구하는 사 람들을 빨갱이나 간첩으로 몰아 학살하며 대중을 분열시킵니다.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며 불평등한 분배체제로 빈부격차가 발생해 공황 이 닥치자 통제당하는 저항세력을 분열시키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세력을 확보하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알선소와 소개소를 만들어 수입을 보 장하며 노동자를 관리하는 여론선봉대로 사용합니다. 미국은 세계전쟁으로 강대국이 됐지만 모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공 황이 발생하자 닉슨대통령은 군사력과 생산력을 바탕으로 1971년 금본위제를 폐기 하고 달러본위로 바꾸며 약소국에게 시장개방을 요구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신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시장자유주의 국가 들로 만들고 노동생산물이 경제가 아니라 화폐와 시장이 경제인양 왜곡하기 시작했 으며 화폐를 취득하는 관광이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질이 생산되는 산업인양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환율이 1달러 1000원이라면 1000달러 하는 물질을 수입할 때 100만원이지만 환율 을 조작해 수입할 때 1달러를 1100원으로 하면 110만원이라는 금액을 지불해야 하

150 고 반대로 수출할 때 1달러에 900원이 된다면 100만원 받던 것을 90만원에 판매해 야 하기 때문에 많은 물량을 거래할수록 엄청난 노동력을 갈취당하는 것입니다. 신용카드와 대형마트 출현 목 록 미국은 생산된 무기를 소비( 판매)하기 위해 전쟁을 유도하거나 도발시켜 무기를 판 매하고 내수를 살리기 위해 시카고 사업가 ' 프랭크 맥나마라(Frank McNamara) ' 가 1949년 저녁식사를 위해 최초로 만들었던 신용카드를 발행하고 수입 없는 다수들 이 신용이라는 외상으로 물건을 소비하도록 합니다. 신용카드는 최초에 ' 다이너스 카드(Diners card) ' 라 불렀는데 프랭크 맥나마라가 뉴 욕에 출장 갔다 호텔방에 지갑을 두고 나와 저녁을 먹고 식대를 지불하지 못하는 곤경에 처했는데 자신과 같은 경험이 많을 거라는 사실에 착안해 친구인 변호사 ' 랄프 슈나이더 (Ralph Schneider) ' 와 함께 만듭니다.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다이너스 신용카드 회원은 자신들의 친구들로 구성해 2백 명 이었으며 의미는 'Diners club card'라는 글자 그대로 디너(Dinner)에서 유래된 'Diner ' 와 친구 또는 멤버십을 의미해서 ' 클럽(Club)'이라 칭했으며 초기에 다이너스 카드 를 받아준 식당은 14 개에 불과했던 것이 신용카드의 원조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모든 국가들은 파괴된 주택과 공장을 건설하고 수많은 노동자와 노동자를 관리하는 노동자들을 만들어 임금을 지불하므로 소비가 활성화되고 과학 발달로 가전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들이 생겨나면서 창출되는 재화가 넘쳐 분배되 므로 다중은 주택도 구입하며 행복한 생활을 만끽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뿐 분배불균등으로 발생하는 빈부격차는 해소되지 못하고 다시 심화되 자 1962년 미국 로저스에서 샘월튼이 월마트라는 대형 매장을 만들면서 자신의 이 익을 위해 물건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 물건을 판매하는 노동자를 만들어 일자리를 창출했는데 대형마트의 출현은 소형 상점들을 몰락시킵니다. 대형마트가 출현하면서 주변의 소형 상점들만 몰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은 경 제원칙이 노동자 농민 어민이 땀 흘려 생산한 물질이 아니라 상품을 판매하는 시장 인양 곡해해 물건을 판매하는 창업열풍이 불었으며 노동자라는 개념이 물질을 생산 하는 노동뿐 아니라 임금을 지급받으면 노동자라며 저항을 시작합니다. 1천명이 사는 마을에 10개의 구멍가계가 100명씩에게 물건을 판매하며 생계를 이 어가는데 대형슈퍼마켓( 대기업)이 들어서고 납품업체에 상품의 대량구입을 이유로 납 품단가를 낮추라고 요구하며 여러 가지 상품을 구색 갖춰 진열하고 구멍가계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면 주변의 구멍가계는 망하게 돼있습니다. 작은 점포들을 삼키며 성장하고 존치되는 경쟁 때문에 유통 분야 대기업이 많은 물 질을 구입한다는 구실로 가격을 낮추라면 상품인 원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생산하는 공장이나 농촌 노동자들의 생산노동은 더욱 혹독해지면서 임금은 낮아지고 중간기 득권들도 축소됩니다. 지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것이고 국가란 그 국가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의 것으로 유럽은 국가라는 집단이 관리하지만 시장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체제 에서는 개인소유를 인정하므로 주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주거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으로 획득한 재물을 강탈당하는 부동산투기가 넘칩니다. 기업들은 한 번에 튼튼한 제품을 생산하면 다시는 팔수 없고 팔지 못하면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어 기업의 이윤을 확대할 수 없기 때문에 고장이 잦은 상품들을 만들 며 아까운 지구자원을 고갈시키는 것이고 부동산의 개인소유를 인정해 개발이라며 재물을 차지한 소수가 지구를 파괴하고 환경을 망치는 것입니다

151 건설사들의 이익과 부동산투기를 위해 재개발이나 재건축이라는 명분으로 주택을 부수므로 자연에서 채취한 물자를 허비하고 재건축의 폐자재들이 지구환경을 오염 시키면서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로 지구에 존재하는 전체 생명체 공동소유인 지구를 망치면서 인류가 존재할 수 없도록 파괴하고 있습니다. 건설사들이 존재해야 하고 생산계통에 종사하는 다중에게 소득을 보장하며 소비를 유도해야 체제가 유지되기 때문에 주택비율이 거주민의 120% 가 넘어도 건물은 계 속 지어야 하고 분배불균등으로 극소수는 몇 백 채, 천 채가 넘는 주택을 보유하지 만 정작 건설한 노동자들은 소유하지 못합니다. 상품가격이란 공장을 건설한 비용과 원재료 그리고 상품을 만들어낸 노동자의 인건 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주와 노동자를 관리하는 관리자, 상품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상품을 운송한 운수노동자와 상품을 선전하는 모델, 그리고 물품을 진열 하고 보관하는 가계소유주와 판매자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결정되는 것입니다. 기업이 넓은 토지를 보유해 공장을 짓고 원재료를 쌓아 놓아도 원재료를 가지고 상 품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가 없으면 기계는 녹슬고 원재료는 썩어 악취를 풍길 뿐 아무런 이윤이 창출되지 않는 것이며 원재료를 가지고 기계를 가동시키며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가 있어야 상품이 생산되고 이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운수업이란 회사를 만들어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많은 차량을 보유해도 운전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차량들은 녹슬어 고철이 되고 아무런 이윤이 창출되지 않음에도 기업을 관리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회사를 설립하고 운전자를 고용해서 일자리가 창 출됐으므로 자신들에게 고마워하라며 왜곡합니다. 상품을 판매하는 유통업이란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자신이 물품을 판매 관리 할 수 없어 종업원을 채용하므로 고용원이 이윤을 남기는 노동을 제공해야 유지되 는 것이지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면 가계를 유지할 수 없어 노동자를 해고하고 자신 이 먹고살지 적자를 보면서 고용하지 않습니다. 생산로봇의 출현 목 록 1934 년 샌프란시스코 뉴욕에서 개최된 국제박람회에서 웨스팅하우스사가 걷고, 말 하고, 윙크하며 색깔을 식별하는[ 윌리]라는 로봇을 출품하고 세계 2차 대전을 치르 면서 곡사포의 명중률을 위해 연구한 컴퓨터로부터 1960년대에 기계를 제어할 수 있는 집적회로(IC) 가 개발되면서 과학발달은 로봇을 생산하게 됩니다. 생산기계의 자동화 시스템과 노동자를 대신해 생산을 담당하는 로봇( 팔이 상하 전후 좌우로 곧게 움직이는 직교좌표형 로봇, 팔 전체가 기둥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원통좌표형 로봇, 받침점으로 하여 치켜 올리거나 내리며 용접하는 극좌표형 로봇 등)이 도입되면서 공장에서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줄어들어 수입 없는 다수가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중소기업이 공장을 만들고 자신이 개발한 물질을 생산하며 이익을 내면 대기업이 대량구매라며 원가를 낮추고 생산 공정의 자동기계화와 비인격적인 노무관리로 노 동자를 생산기계취급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대량으로 생산해 싸게 판매하면 중소 기업은 상품을 개발하고 생산했어도 팔지 못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재물을 많이 축적해야만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끝없이 소기업을 삼키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니 재물은 한쪽으로 쌓이게 되는 것이며 분배 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중이 빈곤해지면서 대중의 저항을 억제하기 위해 복권과 경 마 카지노 등 도박을 조장하면서 일확천금에 정신을 빼앗기도록 합니다. 타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강탈해 기득권을 차지하거나 아부하며 타인위에 군림하려 는 자들이 상사나 고용주가 되어 노동자를 고용하며 타인의 아이디어나 능력을 강 탈하는 도적질로 기득권을 유지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152 IC가 개발되면서 시장자유주의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컴퓨터를 생산하고 컴 퓨터가 개인에게 보급되자 인터넷이 발전하며 개인들은 종이소식지나 구전으로 전 달되는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빠른 전파로 고급정보들을 취득할 수 있게 되자 흥미위주로 정신과 시간을 빼앗기 위해 각종 게임이 활개 칩니다. 기득권을 차지한자들이 정보를 독점하고 특권을 행사하던 시대에서 정보가 공유되 면서 특권을 행사할 수 없자 다중들이 접속해도 정보에 신경 쓰지 않고 흥미위주의 게임에 몰두시키기 위해 개발자의 수입을 보장해서 소비를 촉진하고 다중을 우민으 로 길들일 수 있는 각종 도박 사이트와 게임을 개발합니다. 기득권들은 인류가 생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질인 의 식 주를 해소할 수 있는 그 어떤 물질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컴퓨터 게임이 인류가 생존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용 되는 물질이라도 만들어 내는 양 일확천금을 제공하며 IT산업이라고 선전하며 컴퓨 터게임 개발에 정신을 빼앗기도록 하므로 불평등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숙련된 노동 없이 소수 노동으로도 물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며 누리고 사는 기득권은 노동자가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거나 저항하면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공장을 옮기고 굶주린 실업자와 노점상들을 고용해 물질을 생산하므로 소수 노동자만의 저항으로는 변혁이 요원해집니다. 현 체제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저항해도 기득권을 차지한 자들이 인민을 관리하면 서 노동조합은 빨갱이라고 악선전하기 때문에 조직률이 저조할 뿐 아니라 소수만으 로도 생산이 가능하니 조합원 모두가 무장하고 저항하면 피 착취자들끼리 피 흘리 게 싸우며 분열될 뿐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건설되지 않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된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모두에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해 수입 없는 다수가 늘어나게 되면서 소비를 못하자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 공황이 발생됩니다. 일본은 화폐가 극소수에게만 집중되어 유통되지 못하자 다수에게 화폐를 나눠주며 소비를 유도해 내수를 살리려했는데 수입 없는 다수는 미래가 불안해 소비하지 않 고 은행에 예치하는 상황이 발생하므로 패전국임에도 미제국과 손잡고 해외시장을 개척하며 군국주의복원을 위해 자위대를 강화합니다. 분배불균등으로 수입 없는 다수가 빈곤해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 공황은 상품을 팔 지 못해 상인이 존재할 수 없고 기업은 팔리지 않는 물질을 생산할 수 없어 결국 모든 인류가 빈곤해지면 저항이 극심해지기 때문에 기득권을 유지하는 시장을 살리 려고 대출을 시작합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는 시장을 살리기 위해 주택을 보유하거나 구입할 사람들에게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명분으로 장기 저리로 화폐를 대출해주자 부동산투기가 기 승을 부렸고 화폐가 통용되면서 소비를 촉진하고 신용카드 발행으로 외상제도를 만 들어 유지했지만 변제기를 맞아 대공황이 발생됩니다. 일자리도 없고 이윤을 낼 수 없는 다수가 대출받은 모기지변제기가 도래했는데 변 제를 못해 대출해준 은행들이 도산했으며 은행들의 도산을 저지하기 위해 담보 잡 은 주택을 공매하고 건설사가 살기위해 주택을 지으므로 주택가격이 하락하면서 부 동산버블이라는 주택가격 폭락사태가 옵니다. 신용카드 남발로 자신의 수입보다 많은 소비를 하면서 외상으로 먹고살던 봉급생활 자들이 여러 장의 카드를 사용하며 돌려막기로 간신히 이어왔지만 사용하던 카드도 일확천금이 생기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어 증권이나 각종 도박이 흥행하면서 신용 불량자가 늘어나고 은행도산을 가중시킵니다. 신자본주의라는 명분으로 약소국에 시장을 확보하므로 전 세계를 시장자유주의로

153 만들었지만 모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된 빈부격차로 극소수는 지구를 덮을 만큼 화폐를 보유했지만 수입 없는 다수는 빈곤에 허덕이며 소비를 못해 금융공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극소수는 화폐를 무한정 보유하고 있어 1개월에 1억씩 소비해도 1년이면 12 억, 10 년이면 120 억, 100년이면 1,200 억, 1,000년이면 1조2,000 억, 10,000년이면 12조 를 사용할 수 있고 보유한 생산수단과 부동산으로 인해 줄어들지 않고 몇 백대를 누리고 살 수 있지만 다수는 수입이 없어 굶어죽어야 합니다. 그러자 기계문명이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면서 컴퓨터 텔레비전 전자제품 등 현대생 활에 필수적인 전자제품들을 사용하지 않고 문명을 거부한 채 외진 곳으로 은둔하 거나 출퇴근 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이용하며 산업화의 산물 인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고 슬로푸드를 먹는 사람들도 늘어납니다. 첨단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소극적 레오 러다이트족( 族 ) 이라고 하는 데 미국의 카진스키(T.J. Kaczynski)는 1978년부터 18 년 동안 유나보머(Una Bomber) 라는 가명으로 " 모든 공장은 파괴되어야 하고, 모든 기술서적은 불태워져야 한다." 고 선동했고 실제로 우편물 폭탄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체코혁명과 금융대공황 목 록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 혈세로 먹고사는 경찰의 무력으로 1당 독재로 인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하고 착취가 없이 노력한 만큼 분배받을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하라면서 학생들이 평화롭게 시 위를 하는데 혈세로 사는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무력으로 억압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체코의 벨벳혁명( 체코어: sametová revoluce) 또는 신사혁명( 체코어: n ežná revolúcia)은 11월 19일 20 만이 참석하는 대중시위로 발전했으며, 11월 20일 에는 50 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11월 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든 시민이 참여 하고 노동자들이 2 시간 총파업을 결행했습니다. 시위에 참석하는 국민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11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 당 제도의 권력을 포기하고 다당제를 선언했으며 12 월초 오스트리아, 서독과 체코 슬로바키아 국경에 설치해 놓았던 철조망과 여타 장애물을 철거하고 12월 10일 구 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이 사임하고 다당제에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합니다.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면서 기득권이 되고 권력을 획득한 자들은 자신 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중을 학살하는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지만 모든 사 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고 집하지 않고 다중이 거부하면 평화롭게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질을 생산하고도 학살과 착취로 기득권을 차지한 무리들이 만든 규칙인 법과 관습이라는 명분으로 억압 통 제당하는 속에 짓눌리고 빈곤해져 헐벗고 굶주리던 다중들의 분노가 폭발해 불평등 한 규칙과 제도들을 깨트리며 평등한 사회로 발전했습니다. 불평등한 규칙과 제도들이 청원운동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지키고 유지 하려는 무리들의 폭력을 다중의 위력이나 더 큰 무력으로 굴복시켰을 때 억압과 통 제의 틀을 깨트리고 평등을 위한 사회로 발전한 것입니다. 우월주의에 빠져 조직을 강조하며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무리들은 체코는 타 인을 지배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권력을 빼앗 겼다고 해석하겠지만 조직을 구성한다는 것은 종파를 형성하고 새로운 권력을 만드 는 것이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154 금융공황은 개개인들의 능력부족이 아니라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 재물을 축적하는 시장자유주의라는 체제와 제도 때문에 발생되 는 것임에도 많은 서민들은 먹고 살길이 없어서 또는 부채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거 나 죄 없는 자신의 자녀들까지 학살하고 자살하는 행위들이 생깁니다. 수입이 없어 굶주린 남성과 여성들은 자신의 성( 性 ) 을 매개로 생존하기 위해 매춘을 선전하기도 하고 허황된 환상에 사로잡힌 여성들까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가세하므 로 수단과 방법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자들이 인간존중을 상실하고 노예상인처럼 사람을 돈으로 사고파는 행위가 판을 칩니다. 가난한 서민의 아들 딸들은 해외유흥가로 부인들은 노래방이나 유흥가를 맴돌며 먹 고 살기위해 발버둥 칠수록 가정은 파탄나면서 가족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들은 국가와 민족에 관계없이 자신의 재산( 기업)을 해외로 확장하며 국적 없 이 재산을 늘리고 소비하며 결혼이란 굴레에 갇혀있지 않고 자유로운데 피 기득권 들은 국가와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가족( 혈육)주의에 매몰되어 정조와 가족을 고집하 므로 착취체제를 옹호하는 것입니다.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줄이면 유지될 수 있는 듯이 거짓을 퍼트리고 구조조정이라며 해고하지만 이런 행위는 수입 없는 다수를 가중시키므로 소비를 축소시켜 시장기능을 마비시키므로 가계를 열었지만 물건을 못 파는 상인들은 가계 세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이 속출합니다.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수입을 보장할 수 없는 분배불균등으로 발생된 공황을 기득권들은 모든 원인이 노동자의 임금이 높아 발생된다며 노동자를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로 쫓아냅니다. 기득권의 이런 행위는 굶주린 인민들이 많을수록 그들의 여론을 무기로 현직노동자 들의 저항을 억압하며 독재를 강화시키려는 의도로 강행하지만 해고로 수입이 없어 진 노동자들이 자영업이나 노점상을 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하기 때문에 시장질서의 붕괴를 가속화시킵니다. 실업자 양산은 상인들의 폐업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팔지 못하는 상인들 은 조금 팔아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상품가격이 폭등하고 기업이 아무리 좋은 물질을 생산해 저렴한 가격에 팔아도 수입 없는 다수가 소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기업도 망하는 산업사회 인류의 종말을 가져옵니다. 처음에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직업 없는 빈곤층부터 굶어 죽고 실업자가 된 노 동자들이 굶어죽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면서 결국 기득권을 누리던 중 소기업 인 그리고 전문지식으로 누리고 살던 지식인들이 굶어죽고 끝내는 모든 상공업분야 에서 살아가던 인류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황은 유럽에서 의료와 교육 그리고 주택을 무상으로 공급하며 실업수당까지 지급 하는 복지국가나 모든 인민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보장하지 못하고 착취와 갈취로 재물을 축적하면 기득권이 되는 시장자유주의를 선택한 국가나 가리지 않고 빈부격 차가 존재하는 모든 나라에 해당됩니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일자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분배불균등 때문에 빈부격차가 발생 되는 체제에서 다수의 선거선출주의로 기득권을 차지한 정치꾼들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새빨간 거짓말로 대중들을 속이고 지지를 얻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혈안이지 진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금융공황으로 이제 인류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가지고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생존할 것이냐 착취와 갈취 그리고 온갖 거짓이 난무하는 시장자유주의를 유지하면서 억압 당하고 통제되는 체제 속에 인류를 학살하는 끔찍한 전쟁을 되풀이 하면서 잠시 기

155 득권들을 유지시켜 줄 것이냐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엄청난 생산력을 보유한 인류는 파시즘독재로 인류를 학살하는 전쟁을 치러도 생산기계가 발달해 세계 2차 대전 당시처럼 오랜 복구기간이 걸리지 않고 시장을 확보할 약소국도 존재하지 않아 오래가지 못합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국민과 소통을 거부하는 독재정권에 맞서 촛불집회가 발생하 고 2009년 유럽과 캐나다에서 그리고 2010년에는 구소련의 키르기스스탄과 유럽에 서 2011년 독재자 튀니지 대통령의 야반도주와 터키 그리고 아랍을 통틀어 발생되 고 있는 억눌린 민중들의 저항은 끝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8년에 발생된 촛불집회는 빈부격차와 빈곤이 어떻게 발생되며 불평등을 깨트린 후 새로운 질서는 어떤 형태인가에 대해 논의한적 없는 사람들이 자치적으로 해방 구를 만들고 논의하며 자리를 잡아갈 때 기회주의적으로 명망을 얻으려는 무리들이 대책위라며 나타나 광우병으로 협소화 시키고 통제하므로 분열됐습니다. 거기에 혈세로 먹고 살며 국민에게 감사하며 봉사할 줄 모르고 지배자인양 기득권 의 주구( 走 狗 ) 가 되어 법질서라는 명분으로 국민위에 군림하며 통제하는 무리들이 폭력을 행사하며 구속하고 벌금을 남발하며 수탈이 한창일 때 명망 있는 정치꾼들 이 나타났다 쫓겨나고 언론이 광우병으로 축소 왜곡하므로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인류는 재물을 축적한 자들이 선거자금을 뿌리면서 기득권이 되는 유산자민주주의, 명망을 얻은 자들이 기득권이 되는 위선자 민주주의인,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통 제하는 거짓 민주주의나 구소련이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들어 관 료독재가 다중을 지배했던 거짓 민주주의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혈세로 살아가는 무리들이 사법권 행사라며 국민의 자유를 억압 통제하며 육신을 속박하고 정신을 통제당하며 살아왔던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하고 해고걱정 없이 노동하고 노동한 만큼 물질을 분배받아 빈곤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원합니다. 인류는 타인을 학살하며 재물을 강탈하고 통제와 억압으로 기득권을 행사하는 모든 압제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권한을 행사하며 어떤 이유로도 억압 통제당하거나 착취 또는 갈취당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평화 로운 세상이 됩니다. 평등한 사회 목 록 인류는 원시시대를 넘어 침략자들에 의해 짐승이하로 취급받던 노예제에서 봉건제 를 거쳤으며 봉건제에서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해서 소수가 누리고 사는 산업사회, 시장자유주의와 노동자전체주의를 경험하고 이제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발전할 것이냐 전쟁으로 멸망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새로운 사회는 온갖 거짓이 난무하며 진실과 진리 그리고 정의와 인간존중은 은폐 되고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면서 통제하고 지배하며 소수가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누구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로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모든 거짓의 허물을 벗겨버리고 누구나 솔직하고 진솔해지며 진실과 진리가 통하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낸 것이며 경제란 화폐나 시 장이 아니라 땀 흘린 노동생산물이고 다수가 선택하는 선거선출제도란 모두가 공정 하게 권한을 행사하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다수는

156 권한만 박탈당하는 거짓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각성해야할 것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하며 기득권을 유지하 기 위해 유통했던 화폐나 부동산과 생산수단의 개인소유 그리고 평등과 자유를 부 정하고 통제하며 억압하기 위해 만든 모든 법률과 기구들을 폐기하고 모든 사람에 게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갈취 억압금지법 같은 것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타인을 억압하거나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법( 규칙)을 만들면 만들수록 법을 만든 기득권도 인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당하는 족쇄가 되므로 최대한 간단하면서 도 명쾌하며 모두가 공정하게 지키도록 가장 엄밀한 사항만 명시하면 됩니다. 규칙들이 만들어지면 집행은 수단방법 안 가리고 뇌물이나 인맥으로 합격해 직장이 라며 철 밥통이 되어 권한을 행사하는 관료가 아니라 평소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 중 집행력이나 행정력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추천하고 다중이 인정하면 생산노동 을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역할을 맡아 즐거운 마음으로 능력을 발휘 하면서 업무를 집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간을 보장하며 권한을 부여하면 권한을 이용해 새로운 부작용을 가져오므로 선출 이나 시험 없이 평소 생활하는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성에 맞도록 추천해서 임무를 맡기므로 특권이 주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기간 있는 선출과 달리 추천 을 취소하면 자격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에 특권이 형성될 수 없다고 봅니다. 거짓민주주의인 선거선출주의와 시험위주의 임명 제도를 폐지하고 다수 인민들이 직접 추천으로 행정이나 사법 그리고 전체를 위한 회의업무를 집행하도록 하는 것 이며 업무규칙은 계급이 없고 모두가 평등하게 논의하며 스스로 결의하고 결의한 것을 책임지고 집행하므로 보다 적극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집행한다고 타인의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며 억압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 라 본인이 스스로 결정했으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 있게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말하며 신분보장 없이 언제든지 자격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에 권한을 남용하 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추천이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한 특정기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회관이나 공 장휴게실 그리고 인터넷에 연결된 대형멀티 스크린을 설치하고 원터치 형식으로 누 구나 쉽게 어느 지역에서 어떤 직에 대해 충원을 요구했고 무엇 때문에 자격이 박 탈되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공유하게 됩니다. 또한 생산노동에 소요되는 인력과 수량파악, 노동을 보조하는 행정요원이 몇 명씩 배치되는 가도 확인가능하며 누가 얼마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기 때 문에 특정인들이 특정하게 많이 노동을 강요당하는지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권한을 행사하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평등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중앙 집중 시스템은 모든 정보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산하는 물질에 대 해 전국에서 요구하는 량이 얼마고 자신들과 동종의 노동생산지에서 창출되는 물질 의 량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주문식 생산이 이루어 질수 있어 아 까운 지구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과잉 생산되는 물질도 없어집니다. 노동자 농민 어민의 노동생산물을 유통이라며 자신의 이익을 포함시켜 판매하면서 타인의 노동력을 갈취해서 부를 축적하던 시장을 폐기하고 물품공급은 개인의 이익 을 남기는 상인이 아니라 공급하는 노동자를 만들어 양심 있는 분배노동으로 공급 하도록 해야 합니다. 생산과 분배 목 록 모두가 평등하다면 그 어느 누구도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갈취할 권한이 없

157 으므로 모두가 노동을 해야 하며 인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땀 흘린 노동생산물 이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필수노동의 범위를 명쾌하게 규정해야 합니다. 인류가 생존하면서 필수적으로 사용하거나 섭취해야 할 음식물과 산 공업용품인 신 발 의류 등 필요물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건설노동, 생산된 물질을 운반하는 운수노 동, 물품을 나눠주는 공급노동,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교육노 동과 건강과 질병을 책임지는 의료노동은 당연히 필수노동입니다. 모두가 필수노동에 종사하면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무위도식으로 누리고 살던 무리들이 없어질 것이고 소수노동으로 생산하던 물질을 다수가 생산하면 노동 강도 와 노동시간도 줄어들며 모두에게 일자리가 보장되므로 분배불균등이 발생되지 않 고 노력한 만큼 분배받아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 되는 세상이 됩니다. 노동한 만큼의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물질의 가치단위를 시간으로 바꾸며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출 퇴근카드와 신용카드를 사용하 듯이 자신이 노동한 시간을 출 퇴근카드 같이 체크해 시간을 축적하고 필요한 물질 을 취득하면 물질만큼 시간을 공제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시간단위는 공장에서 몇 명의 노동으로 몇 시간을 생산했는데 얼마만큼의 물질을 생산됐는가를 기준으로 가령 1명이 기계를 가동시켜 5시간 동안 10만개의 종이컵을 만들어 냈다면 10 만개 5 시간(18,000 초)= 5.55초가 되는데 여기에 운 반노동 시간과 분배노동 시간을 포함시켜 물질의 가치시간을 산출하면 됩니다. 노동시간은 똑같은 시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위험한 작업이나 고도의 숙련이 필요한 노동은 그만큼 많은 노동시간을 축적시켜야 하며 손쉽게 가정에서 분배노동을 하는 구멍가계 같은 곳은 시간을 가감해서 인정하므로 실제로 힘든 노 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물질을 소유할 권한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노동시간과 노동 강도의 측정은 함께 노동하는 사람들이 논의해서 결정하도록 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노동을 기피하거나 잡담으로 시간만 보내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을 가감하고 힘들게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노동시간은 증감하므로 지시하거나 통 제함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며 자유의사로 즐겁게 노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을 취득하는 방법이 생산노동에 복무한 시간으로 취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 지면 기존의 착취제도에서 권력에 아첨하며 부를 축적했던 도시에서는 노동을 할 수 없으므로 노동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자연스럽게 전국토가 골고루 아름답게 발 전하고 향락도시는 사라지며 공업지대, 농업지대, 산업지대 등으로 바뀌게 됩니다. 논과 밭, 하우스단지 등 농지는 다중이 자동생산에 필요한 모든 기계 기구를 사용 하여 공동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농산물 생산에 필요한 모든 농기구와 필 요품들은 필요품의 생산지대로부터 필요량을 공급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므로 농 업지대와 공업지대간의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모든 인민들에게는 자신의 취향과 성격에 맞는 생산노동을 찾아 노동할 권리가 있 고 노동의 권리는 그 어떤 이유로도 박탈할 수 없으며 생산노동에 종사할 공장이 없으면 자신들이 하고 싶고 원하는 노동과 생산방식을 원터치 스크린에 입력하고 많은 경험자들의 조언을 듣고 함께하겠다는 동료를 모아 공장을 지으면 됩니다. 기존 질서는 화폐가 공장을 짓는다고 속였지만 자연에 맺힌 열매하나도 노동으로 채취하듯 화폐로 구입할 수 있는 모든 물질이 땀 흘린 노동으로 창출된 것이므로 원터치 스크린에 입력하면 생산 공장에서 필요한 물질들을 만들고 만들어진 물질을 운수노동으로 옮겨 공장을 짓고 필요한 원료도 가져와 생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공동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되면 모든 물질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받기 때문에 개인의 기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든 사람

158 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된다고 해서 모든 물질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이 선호하는 카메라나 자동차 등의 물질은 개인소유지 공유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생산하게 되면 상품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다시 판매하기 위해 지구 자원을 낭비하면서 견고하지 못한 상품을 만들던 시기에서 고장 없이 자신이 계속 사용할 튼튼한 물건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지구자원도 아낄 수 있으며 자신의 취향 에 맞고 선호하는 물건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사회시스템이 바뀌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호존중을 무시한 온갖 범법행위와 불량 식품을 만들어 타인에게 피해를 주며 돌로 만든 고추 가루나 사람들이 섭취하면 해 로운 항생제를 사료로 사용해 닭이나 계란을 생산하는 행위 또는 광우병 위험이 있 는 소를 키우는 행위도 사라지고 사람 사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필수생산인 물질운송과 대중을 수송하는 차량을 정비하는 정비사와 직접적인 생산 활동은 아니고 생산노동보다 위험성과 육체적인 무리가 없지만 기술을 필요로 하는 필수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미용사들의 노동시간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책정할 것인 가는 다중이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산 노동은 아니지만 음악 소설 연극 촬영 등 여가활동에 필요한 예술분야는 먹고살 아야 하는 경제적 사정 때문에 재능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짧고 여가시간이 늘어나면 우후죽순처럼 늘어날 수 있으므로 노 동시간을 인정할지 한다면 언제까지 얼마나 인정할지도 논의돼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생산에 적합한 장소가 정해지면 자신이 거주할 주택을 공급받 으면 되는 것이며 마땅한 주거지가 없으면 건설노동을 통해 새롭게 주택을 건설하 고 실생활에 필요한 전기와 가스, 수도와 인터넷 그리고 의료와 대중교통( 버스와 기 차)은 숨 쉬는 공기처럼 집단이 책임지고 무료로 공급해야 합니다. 남여의 평등 목 록 여성이나 남성이나 모두가 평등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노동할 권리가 있으며 가사노동도 당연히 남성과 공동으로 분담하고 부엌노동에서 벗어나기를 원 하는 경우에는 공동급식소( 밥 공장)를 설치해 일자리를 늘려도 될 것이고 부부가 공 동으로 취사하며 같이 즐거움을 향유할 수도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양육노동에서 벗어나고 자녀는 인간으로서의 자유로운 권리를 위해 공동탁아소를 설치하고 어려서부터 공동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자신의 재 능과 소질을 발견하고 개발시켜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교 육은 자신이 원할 때 까지 집단이 의무적으로 보장하는 것입니다. 남성( 부계) 우월주의를 강조하면서 혈육으로 계승되는 상속제를 폐지하고 남녀의 평 등을 보장하기 위해 일부일처제라거나 결혼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유 롭게 결혼하고 자유롭게 이혼할 수 있도록 하므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 회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모든 규정과 족쇄를 없애야 평등한 사회가 됩니다. 잘못 세뇌되고 길들여진 가족제와 정조관념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혹은 남성이 여 성과 한 번 육체관계를 했다고 상대방이 자신의 소유물인양 족쇄로 묶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서로 마음이 맞으면 성 욕을 억제당하지 않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사랑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성이 출산으로 노동생산을 할 수 없는 기간에 대해서는 종족번식과 사회노동력의 생산이기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시간만큼 당연히 영아의 육아시간으로 인정해야 하 며 일정기간 시간이 지나면 탁아소에서 양육할 것인지 자신이 가정에서 양육할 것 인지는 여성이 판단하는 것입니다

159 여성이나 남성이 자녀를 위해 또는 남성이 여성을 위해 타인과 다르게 많은 시간을 노동하면서 여성을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현재의 체제에서는 정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사회에서는 여성이 평등하게 노동할 권리를 남성이 우월 주의에 빠져 박탈하면서 여성의 자율성을 훼손하며 예속하려는 행위가 됩니다.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면 현 체제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 해 서두르다 타인을 살해하는 교통사고도 사라질 것이고 멀리 있는 지인을 만나 여 흥을 즐기다 늦어지면 악착같이 주거지로 귀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준비되어 있는 휴게시설( 모텔)에서 쉬어가면 되므로 시간에 쫓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인류를 학살하고 재물과 토지를 강점해서 권력을 차지하고 군주로 행세하는 국가가 유럽엔 영국 네덜란드 등 10개국 아프리카엔 모로코 등 3개국 중동엔 사우 디아라비아 등 6 개국 아시아엔 일본 타이 등 5개국 있는데 이들 국가의 군주들이 기득권을 지키려 전쟁을 도발한다면 국방의무를 규정하면 됩니다. 국방의 의무라고 해서 지금의 군 체계처럼 계급을 형성하고 상명하복의 명령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를 위해 결성되었던 시민군처럼 장교와 졸병이라는 개념 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토론하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맡아야 할 부분 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결의해서 집행하도록 자율을 보장해야 합니다. 특정 기간( 나이)은 국방을 위한 의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직업군인 식으로 국방을 담당하도록 할 것인가는 추후논의의 대상일 것이며 군이라고 해서 무한적으로 살상 을 위한 훈련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생산노동 분야를 공동 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업군대, 산업군대, 공업 군대 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민이 생산노동을 할 수 있게 되면 극소수가 1일 8시간 혹은 12시간씩 산업 재해로 불구가 되거나 사망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산하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1주일에 1일 혹은 1주일에 4시간이나 2시간만 노동해도 누구나 풍 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집니다. 지금까지 타인의 노동력과 재물을 착취하고 갈취하면서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만들 어놓은 모든 조직과 특권이라는 거짓을 벗어던져야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라거나 시의회, 국회의원 등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모 든 기득권들을 폐기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가 건설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혁명가의 교리니 뭐니 하며 이상한 말들을 많이 하는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인식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인류의 진보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사 람이고 착취와 갈취로 유지되는 틀 속에서 기득권을 획득했다며 자신의 권리만 고 집하는 사람들은 평등을 부정하는 위선자들입니다. 직장에서 혹은 지역에서 친밀한 사람끼리 철엽계모임을 하거나 단풍계모임 같은 것 을 하면서 계주를 지명하는 것은 계주가 모든 계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파악하고 수 렴해서 올바른 모임으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지 계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계주가 마음대로 전횡을 저지르며 특권과 독선을 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 체제에서는 모임을 만들고 회원이 많이 모이면 큰 이권이 생기기 때문에 자신의 이권( 권력이나 재물 등)을 지키거나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비리를 은폐할 수 있는 권 한이 있는 대표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중을 억압하는 폭력을 행사하면서 모임의 조직원들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입니다. 가장 소단위라는 가정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억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며 지배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가족이라는 형 태를 유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는 노예를 원하는 것이므로 가족이라는 조직형 태를 깨트리자는 행위이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160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 끼리끼리 분열시키고 정의와 진실은 간곳없이 무조건 자기편이면 지지하고 자기편이 아니면 아무리 바른 말을 해도 반대하고 비방하는 거짓 활동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서로 타인을 존중하며 진리가 인정되는 기본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 점점 더 발달해 로봇이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질을 생산한다면 노동자와 수많은 인민들은 생존수단을 잃어버리게 되고 로봇의 무력으로 사람까지 통제할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고민해 봐야 합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은 기득권이 유지되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타인을 학살하는 전쟁에 참여한 인민들을 구국영웅인양 칭송하며 폭력과 분열을 조 장했는데 그나마 이성이 있는 제복 입은 임금노예가 아니라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 봇을 조종한다고 생각하면 끔찍스러운 결과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저절로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과 통제 속에 착취당하고 핍박받으며 살아가는 모든 피 착 취자들이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 경우와 같이 억눌린 분노가 화산처럼 일시에 폭발 하는 저항 속에 쟁취할 수 있는 것이지 저절로 건설되지 않습니다. 인류가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면서 저항하는데 혈세로 살면서 무력으로 통제하고 억 압하는 기구나 무리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상실한 자들이므로 인간으로 볼 수 없어 소멸시켜야 하며 자신의 권리인 투쟁을 하지 않고 기피하는 자들은 평등과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으므로 처벌받아야 합니다. 긍정이란 무엇일까요? 긍정이란 수긍한다는 것으로 수긍하기 위해서는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남이 하는 말이 뻔히 거짓말로 규명되는데도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드려야 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나는 거짓말로 당신을 속이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사기를 칠 테 니 당신은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것이지 올바른 판단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가 이 책을 준비하자 지인들 중에는 과거에 언제 그런 나라나 정치체계가 있었 느냐고 반문하기도 하고 더러는 꿈을 꾸는 것이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필자는 인류가 경험칙만 놓고 따진다면 지금의 문명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아직도 원시시대를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인류가 꿈을 꾸지 않았다면 현재같이 문명이 발전한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우리 모두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존중받고 평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 드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치겠습니다. 끝으로 이글을 완성하기 까지 오랜 시간을 토론하며 많은 시간을 항상 함께 해준 두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시는 분들은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은행 : 하나은행 :

<B3EBB5BFC0DA20B4ABC0B8B7CE20BABB20C0CEB7F9BFAABBE728BDC5B1B9292E687770>

<B3EBB5BFC0DA20B4ABC0B8B7CE20BABB20C0CEB7F9BFAABBE728BDC5B1B9292E687770> 대학에서도 못 배우고 인류는 어떻게 평등사회로 발전해 왔는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고 하며 진실을 외면합니다. 역사와 정치 경제란 무엇인가? 서문 필자는 1956년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에서 태어나 철암국민 학교를 다니다 1968년 부친을 여의고 이용소 머리감는 꼬마 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70년부터는

More information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기획 감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대표 저자 장규태 이지사이언스 시리즈 19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인쇄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발행 저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기획 미래창조과학부 발간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기획 감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대표 저자 장규태 이지사이언스 시리즈 19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인쇄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발행 저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기획 미래창조과학부 발간 이지사이언스 시리즈 Easy Science Series 19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기획 감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대표 저자 장규태 이지사이언스 시리즈 19 인류의 가족, 인간의 동반자 영장류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인쇄 2015년 3월 31일 초판 1쇄 발행 저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기획 미래창조과학부

More information

e01.PDF

e01.PDF 2119, -., 4.25-40 4 km -.. km,, -,.,,,,,,,,,,,..... . 90%..,.., 20 1 - -.,.. 2172,. - 3 - < > 1.! 6 2.. 10 3.? 18 4. 22 5. 26 6.. 32 7. 36 8.. 44 9.. 49 10.. 61 11. 65 12. 76 13.. 80 14. 85 15.. 90 16..

More information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초기 도읍은 위례성( 慰 禮 城 )이다. 위례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책에 실려 있는데, 대부분 조선시대에 편 찬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 도 백제가 멸망한지 고대 동아시아의 왕성과 풍납토성 - 풍납토성의 성격 규명을 위한 학술세미나 - pp. 46-67 한국의 고대 왕성과 풍납토성 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고대의 왕성 1. 평양 낙랑토성 2. 집안 국내성 3. 경주 월성 4. 한국 고대 왕성의 특징 Ⅲ. 풍납토성과 백제의 한성 1. 풍납토성의 현황 2. 한성의 풍경 Ⅰ. 머리말 각종 기록에

More information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진단, 표시 광고법 시행 1년 표시 광고규제 법규는 통합되어야 한다! 정은종 호텔롯데 경영지원실/지적재산권법 석사 표시광고법 시행 1년 입법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표시광고법이 제정되어 시행( 99년 7월)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공정거래법 23조1항6호의 부 당표시광고 규정이 분가하여 탄생한 표시광고법은 기존 공정거래법이 부당표시광고(허위 과장, 기만,

More information

5. 회 의내용 < 제 1호 안 : 2011학년도 법 안 회 제 철 산(안 )> 법인 사무국장의 성왼 보고에 이이 의장이 이사회 개회 용 선언하고 회계판려부장에 게 제 l 호 안인 20 11 학년도 입인 회계 결산(안)에 대한 성명융 지시함 회계판리부장이 2011 학년

5. 회 의내용 < 제 1호 안 : 2011학년도 법 안 회 제 철 산(안 )> 법인 사무국장의 성왼 보고에 이이 의장이 이사회 개회 용 선언하고 회계판려부장에 게 제 l 호 안인 20 11 학년도 입인 회계 결산(안)에 대한 성명융 지시함 회계판리부장이 2011 학년 학교법언한성학원 2012학년도 제 2차 이사 회 회 의 록 구 ss 01 사 감사 일원징수 8인 2인 재적잉윈 7인 2인 참석잉원 5인 인 1. 연 시 : 2012년 5월 22일(화) 10:30 11:10 (회의소집 상보일 : 2012.5.10.) 2. 장 소 경성대학교 정보판 10충 회의실 3. 엄원 출 결 사항 참석임웬 (5명) : 김대성, 이동철, 김순칭,

More information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3. 은하 1 우리 은하 위 : 나선형 옆 : 볼록한 원반형 태양은 은하핵으로부터 3만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 2 은하의 분류 규칙적인 모양의 유무 타원은하, 나선은하와 타원은하 나선팔의 유무 타원은하와 나선 은하 막대 모양 구조의 유무 정상나선은하와 막대나선은하 4. 4탄 지학 정복하기 1. 빅뱅 우주론 빅뱅과 동시에 시공간 및 물질 생성 물질 : 쿼크와 경입자 양성자와 중성자 헬륨원자핵 원자 생성[38 만년 이후] 자연계의 존재하는 힘 : 중력, 강한핵력, 전자기력, 약한핵력 빅뱅우주론의 증거 1 수소와 헬륨의 질량비가 3:1 2 우주 배경 복사 발견 2. 별의 탄생과 진화 1 별의 탄생과정 성간운 형성 원시별과 원반

More information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개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인 천 광 역 시 의 회 인천광역시의회 의원 상해 등 보상금 지급에 관한 조례 일부개정조례안 의안 번호 179 제안연월일 : 2007. 4. 제 안 자 :조례정비특별위원회위원장 제안이유 공무상재해인정기준 (총무처훈령 제153호)이 공무원연금법 시행규칙 (행정자치부령 제89호)으로 흡수 전면

More information

<C1A4B4E4B9D7C7D8BCB32E687770>

<C1A4B4E4B9D7C7D8BCB32E687770> 2003학년도 3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정답 및 해설 제 1 교시 언어 영역 정 답 1 2 2 1 3 3 4 4 5 4 6 2 7 2 8 5 9 3 10 1 11 3 12 2 13 5 14 5 15 3 16 1 17 2 18 3 19 4 20 4 21 2 22 4 23 1 24 5 25 1 26 5 27 4 28 3 29 2 30 4 31 1 32 2 33

More information

05.PDF

05.PDF ODD JOHN / ....?,. ( ), ( ).. < > 4 12 19 24 31 36 42 49 57 70 76 80 87 92 99 108 115 128 130 4. ",?", ' '. ".",. ".?.".., 6.,...,. 5 4.,...,. 1,..,. ",!".,.. ' ".,. "..",. ' '. 6 7.,.. 4,,.,.. 4...,.,.,.

More information

대표이사 K, L 4. 주식회사 동진여객 대표이사 M 피고보조참가인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N 법무법인 O 제 1 심 판 결 부산지방법원 2014. 6. 12. 선고 2014구합20224 판결 변 론 종 결 2015. 5. 8. 판 결 선 고 2015. 8. 21

대표이사 K, L 4. 주식회사 동진여객 대표이사 M 피고보조참가인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유한) N 법무법인 O 제 1 심 판 결 부산지방법원 2014. 6. 12. 선고 2014구합20224 판결 변 론 종 결 2015. 5. 8. 판 결 선 고 2015. 8. 21 부 산 고 등 법 원 제 1 행 정 부 판 결 사 건 2014누21387 여객자동차 사업계획변경 인가처분 취소청구 원고, 항소인 1. 경원여객자동차 주식회사 대표이사 A 2. 대한여객자동차 주식회사 대표이사 B 3. 신흥여객자동차 주식회사 대표이사 C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D 법무법인 E 피고, 피항소인 부산광역시장 소송대리인 변호사 F 피고보조참가인

More information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종사연구자료-이야기방2014 7 18.hwp 차례 1~3쪽 머리말 4 1. 계대 연구자료 7 가. 증 문하시랑동평장사 하공진공 사적기 7 나. 족보 변천사항 9 1) 1416년 진양부원군 신도비 음기(陰記)상의 자손록 9 2) 1605년 을사보 9 3) 1698년 무인 중수보 9 4) 1719년 기해보 10 5) 1999년 판윤공 파보 10 - 계대 10 - 근거 사서 11 (1) 고려사 척록(高麗史摭錄)

More information

表紙(化学)

表紙(化学) 수험 번호 성 명 2013년 일본 공과대학 학부 유학생 파견 선발 시험 화 학 (90분 100점) 주 의 1 시험시작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열지 마시오. 2 해답은 해답용지의 지정된 난 안에 알아보기 쉽게 기입하시오. 3 해답에 한글이 포함되면 채점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경우, 아래의 값을 사용하시오. 원자량 H 1.0, C 12, N 14, O 16, Cu

More information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 목 차 국회 1 월 중 제 개정 법령 대통령령 7 건 ( 제정 -, 개정 7, 폐지 -) 1. 댐건설 및 주변지역지원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 1 2. 지방공무원 수당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1 3. 경력단절여성등의 경제활동 촉진법 시행령 일부개정 2 4. 대도시권 광역교통관리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 일부개정 3 5.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일부개정 4

More information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3) 지은이가 4) ᄀ에 5) 위 어져야 하는 것이야. 5 동원 : 항상 성실한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해. 에는 민중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고,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 는 (가) 2) (가) 학년 고사종류 과목 과목코드번호 성명 3 2009 2학기 기말고사 대비 국어 101 ( ) 염창중 말할 수 있게 되어 어머니가 다시 주시거든 나에게 갚 아라. ꋯ먼저 답안지에 성명,학년,계열,과목코드를 기입하십시오. ꋯ문항을 읽고 맞는 답을 답란에 표시하십시오. ꋯ문항배점은 문항위에 표시된 배점표를 참고하십시오. (가) 우리 중에는 전쟁으로

More information

2014학년도 장학자료 초등학교 과학과 탐구학습 지도를 위한 교사용 길라잡이 - 5~6학년군 - 발 간 사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오늘날처럼 과학이 우리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시기는 없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천연자원이 부족한 국가가 세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과제는 과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육과정

More information

교통사고합의금 도둑 안 맞기

교통사고합의금 도둑 안 맞기 교통사고합의금 도둑 안 맞기 손해사정사 변운연 소개글 교통사고 발생시 초동조치 요령, 자동차보험 약관의 상세한 해설, 교통사고보상금 산출 방법, 민사합의 및 형사합의 요령, 공탁방법, 손해배상 청구소송 제기 요령 등을 알기 쉽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목차 1 머리말 5 2 자동차사고의 종류 8 3 자동차사고 발생 직후 초동조치 및 합의 요령 10 4 경찰에서의

More information

............

............ 제2장 1. 모월곶, 석곶, 서곶, 개건너 검단지역이 편입되기 전, 인천의 서구 전체는 지난날 서곶으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 모월곶면과 석곶면을 통합되어 서곶 면이 되었다. 서곶이라는 지명은 군 소재지인 부평에서 서쪽 해안에 길 게 뻗어있으므로 그렇게 지어졌다. 이 지명은 반세기 이상 사용되었다. 그래서 인천시가 구제( 區 制 )를

More information

마음_2012._2월_진하게LLkk-777 - 복사본.hwp

마음_2012._2월_진하게LLkk-777 - 복사본.hwp 마 음 바다는 웅장하다. 넓은 바다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귀퉁이가 없다. 하늘과 맞닿은 수 평선이 나타난다. 어둠을 서서히 뚫고 일어서는 거대한 용솟음이 이어진다. 철렁철렁, 넘실 넘실 거리는 파도는 새벽의 햇볕을 굽이굽이 반짝거리게 한다. 붉은 덩어리가 야금야금 제 모습을 나타낸다. 수평선의 직선이 둥그런 곡선으로 바뀌는 듯이 동그랗게 올라오는 신비의 물체에

More information

취업규칙

취업규칙 취업규칙 제13차/개정 2015-10-21 제1장 총칙 제1조 (목적) 이 규칙은 주식회사 강원랜드(이하 회사 라 한다.)의 직원의 취업조건과 복무규율에 관한 사항을 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적용범위) 직원의 취업조건 및 복무에 관하여 다른 규정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규칙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 제3조 (직원의 정의) 이 규칙에서

More information

<C1D6BFE4BDC7C7D0C0DA5FC6EDC1FDBFCF28B4DCB5B5292E687770>

<C1D6BFE4BDC7C7D0C0DA5FC6EDC1FDBFCF28B4DCB5B5292E687770> 유형원 柳 馨 遠 (1622~1673) 1) 유형원 연보 年 譜 2) 유형원 생애 관련 자료 1. 유형원柳馨遠(1622~1673) 생애와 행적 1) 유형원 연보年譜 본관 : 문화文化, 자 : 덕부德夫, 호 : 반계磻溪 나이 / 연도 8 연보 주요 행적지 1세(1622, 광해14) * 서울 정릉동貞陵洞(정동) 출생 2세(1623, 인조1) * 아버지 흠欽+心

More information

untitled

untitled 년도연구개발비 년도매출액 년도광고선전비 년도매출액 년도 각 기업의 매출액 년도 산업전체의 매출액 년도말 고정자산 년도말 총자산 년도연구개발비 년도매출액 년도광고선전비 년도매출액 년도 각 기업의 매출액 년도 산업전체의 매출액 년도말 고정자산 년도말 총자산 년도연구개발비 년도매출액 년도광고선전비 년도매출액 년도각기업의매출액 년도 산업전체의 매출액

More information

정 관

정         관 정 관 (1991. 6. 3.전문개정) (1991. 10. 18. 개 정) (1992. 3. 9. 개 정) (1994. 2. 24. 개 정) (1995. 6. 1. 개 정) (1997. 3. 14. 개 정) (1997. 11. 21. 개 정) (1998. 3. 10. 개 정) (1998. 7. 7. 개 정) (1999. 8. 1. 개 정) (1999. 9.

More information

시편강설-경건회(2011년)-68편.hwp

시편강설-경건회(2011년)-68편.hwp 30 /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경건회 (2011년 1학기) 시편 68편 강해 (3) 시온 산에서 하늘 성소까지 김헌수_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교장 개역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 로다 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 거니와 21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More information

???? 1

???? 1 제 124 호 9 3 와 신시가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면 제일 먼저 이 도시에서 언제나 활기가 넘 쳐나는 신시가지로 가게 된다. 그 중심에 는 티무르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을 중심으 로 티무르 박물관과 쇼핑 거리가 밀집돼 있다. 공원 중심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영 웅, 티무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우즈베 키스탄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도시에서나 티무르의 동상이나

More information

untitled

untitled 첨 부 보고서 Ⅰ. 조사 개요 1. 조사 배경 및 목적 o 문화적 여유가 생기면서 만화영화 주인공이나 연예인 등의 캐릭터를 넣어 개발한 캐 릭터상품이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 앞으로 도 계속해서 신세대의 소비문화 를 창출해 나갈 것으로 예상됨. - 그동안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캐릭터로는 미키마우스, 세일러문, 아기공룡 둘 리, 바비, 헬로키티,

More information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세미나-1101-이양재.hwp 새만금지역의 합리적인 행정구역 결정방안 이 양 재 원광대학교 교수 Ⅰ. 시작하면서 행정경계의 획정 원칙은 국민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결정 되어야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의 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모 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신생매립지의 관할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간 분쟁(경기도 평택시와 충청남도 당진군, 전라남도 순천시와 전라남도 광양시

More information

<BACEBFA920C8ABBBEAB8E920BBF3C3B5B8AE2020C1F6C7A5C1B6BBE720BAB8B0EDBCAD28BCF6C1A4292E687770>

<BACEBFA920C8ABBBEAB8E920BBF3C3B5B8AE2020C1F6C7A5C1B6BBE720BAB8B0EDBCAD28BCF6C1A4292E687770> 목 차 Ⅰ. 조사개요 1 Ⅱ. 조사지역과 그 주변환경 2 1. 자연 지리적 환경 2 2. 고고 역사적 환경 9 Ⅲ. 조사내용 31 1. 조사지역 일대의 문화재 현황 31 2. 조사지역 일대의 민속 지명분야 39 3. 조사지역 일대의 고고 역사학적 분야 41 (1) 조사방법 41 (2) 조사지역의 현황 및 변화상 41 (3) 조사내용 46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More information

사상체질의학회지

사상체질의학회지 T 사상체질의학회지 J. o f S a s a n g C o 띠 t. M e d V o l. 1 2. N o. 2. 2 0 0 0 韓 國 A 男 女 5 0-6 0 代 의 四 象 體 質 別 觀 面 形 態 에 關 흔t 標 準 i t 冊 究 내 i 글굽감 十 윤종현.. 이수경.. 이의추.. 고병희 * *. 송일병 * M o r p h o l o g i c a l

More information

<C8ADB7C220C5E4C3EBC0E52E687770>

<C8ADB7C220C5E4C3EBC0E52E687770> 하동 화력 7 8호기 건설부지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보고서 2005. 01. ( 재) 우리문화재연구원 하동 화력 7 8호기 건설부지 문화재지표조사 결과보고서 Ⅰ. 조사개요 1. 조 사 명 : 하동 화력 78 호기 건설부지 문화재지표조사 2. 조사지역 : 경남 하동군 금성면 가덕리 1336답 일원 3. 조사 면적 : 134,204m2 4. 조사 목적 한국남부발전(

More information

빈면

빈면 용역보고서 2 0 0 4-0 3 한국의 스수자집단의 사회경제적 싱태와 복지증진방안 연구 최협 정근식 윤형숙 검은실 서통진 김철주 김형수 이태진 김찬호 오정진 보 건 복 지 부 한국문화인류학회 빈면 머리맏 지난 수십년간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였 다 국내적으로는 1 9 6 0 년대 이후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이 추진되면서 숨가쁜

More information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하 출 입 시 설 형태 및 특징 제2차 시기 : 건물 4면 중앙에 각각 1개소씩 존재 - 남, 서, 북면의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 위치 - 동서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 유인 계단우석( 階 段 隅 石 ) 받침지대석이 발견 - 계단너비는 동측면에서 발견된 계단우석 지대석의 크기와 위치를 근거로 약 2.06m - 면석과

More information

<B3EDBCFABDC7B7C2BDD7B1E22E687770>

<B3EDBCFABDC7B7C2BDD7B1E22E687770> 독서 훈련과 함께하는 논술 실력 쌓기 목 차 Ⅰ부 1. 문단 만들기 연습 5 가. 중심 문장과 뒷받침 문장 구별하기 7 나. 통일성을 적용하여 문단 쓰기 13 다. 일관성을 적용하여 문단 쓰기 19 2. 요약하기 연습 29 가. 중심 문장이 드러난 글 요약하기 30 나. 중심 문장이 드러나 있지 않은 글 요약하기 47 다. 재진술을 통한 요약문 쓰기 64

More information

기사스크랩 (160504).hwp

기사스크랩 (160504).hwp 경향신문 / 2016.05.03(화) "갈등없는 성과연봉제 도입" 홍보하던 동서발전, 부당노동행위 정황 성과연봉제 노사합의안 찬반투표 당시 동서발전 울산화력본부 기표소 모습 공기업 발전회사 중 처음으로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에 대한 노사합의가 이뤄진 한국동서발전이 직원 들의 찬성 투표를 유도하기 위해 부당노동행위를 벌인 복수의 정황이 나왔다. 직원들에게 동의서를

More information

DBPIA-NURIMEDIA

DBPIA-NURIMEDIA 정신문화연구 2001 겨울호 제24권 제4호(통권 85호) pp. 75 96 企劃論文 退溪學派의 經濟的 基 : 財産 形成과 所有 規模를 중심으로 1) Ⅰ. 머리말 Ⅱ. 財産 形成 문 숙 자* Ⅲ. 財産 所有 規模 Ⅳ. 맺음말 Ⅰ. 머리말 退溪學派 는 지역, 당색, 학문상의 이론적 배경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용어이 며, 시기에 따라서 지칭하는 의미에 차이가

More information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4. 신문 방송의 보도내용 등 제6 조( 조사지역) 제5 조에 따른 발생조사는 다음 각 호의 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사한다. 1. 특정지역 : 명승지 유적지 관광지 공원 유원지 및 고속국도 일반국도 철로변 등 경관보호구역 2. 주요지역 : 병해충별 선단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산림병해충 방제규정 [ 시행 2015.9.9] [ 산림청훈령 제1262 호, 2015.9.9, 일부개정] 산림청( 산림병해충과), 042-481-4038 제1장 총칙 제1 조( 목적) 이 규정은 산림보호법 제3 장 " 산림병해충의 예찰 방제 에서 위임된 사항과 산림병해충( 이하 " 병 해충 이라 한다) 의 예방 구제를 위하여 병해충의 발생조사와

More information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김기중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의 위헌 여부.hwp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인터넷 내용심의와 그 위헌 여부에 관한 소론 - 서울고등법원 2011.2.1.자 2010아189 위헌법률심판제청결정을 중심으로 한국정보법학회 2011년 5월 사례연구회 2011. 5. 17.발표 변호사 김기중 미완성 원고임 1. 서론 헌법재판소는 2002. 6. 27. 99헌마480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등 위헌확인사건에 서 불온통신 의 단속에

More information

02 채널경남 종합 4.13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강석진 당선자 미래와 희망을 위해 함께 나아갑시다 거 함 산 합 군민의 마음을 모으는 소통과 화합, 상생의 정치를 이룩하겠습니다! 산청 함양 거창 합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된 새누리당 강석진

02 채널경남 종합 4.13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강석진 당선자 미래와 희망을 위해 함께 나아갑시다 거 함 산 합 군민의 마음을 모으는 소통과 화합, 상생의 정치를 이룩하겠습니다! 산청 함양 거창 합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된 새누리당 강석진 (주) 채널경남 경남 창원시 의창대로 18번길 46 313호 대표전화 : 055)255-5103 채널경남 챕터스 채널경남 스쿨 Book 검색 채널경남 을 검색하시면 채널경남인터넷 방송ㆍ신문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전화 (055) 945-5100~1 F.945-5102 www.chgn.co.kr 2016년 04월 18일 월요일 제 93호 거창 함양 산청 합천

More information

Ⅰ- 1 Ⅰ- 2 Ⅰ- 3 Ⅰ- 4 Ⅰ- 5 Ⅰ- 6 Ⅰ- 7 Ⅰ- 8 Ⅰ- 9 Ⅰ- 10 Ⅰ- 11 Ⅰ- 12 Ⅰ- 13 Ⅰ- 14 Ⅰ- 15 Ⅰ- 16 Ⅰ- 17 Ⅰ- 18 Ⅰ- 19 Ⅰ- 20 Ⅰ- 21 Ⅰ- 22 Ⅰ- 23 Ⅰ- 24 Ⅰ- 25 Ⅰ- 26 Ⅰ- 27 Ⅰ- 28 Ⅰ- 29 Ⅰ- 30 Ⅰ- 31 Ⅰ- 32 Ⅰ- 33 Ⅰ- 34 Ⅰ- 35

More information

제운의 블로그북

제운의 블로그북 제운의 블로그북 제운 소개글 목차 8 나도 이런 남자 갖고싶다. 9 10 순간 낚인 광고 11 범프리카 이것이 미션먹방? 12 백현국(피터팬)선생님의 모델수업 놀이 13 1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15 ㅋㅋㅋ 이때로 돌아가고 싶다. 대한민국이라면 어땟을까... 게임폐인이란이런것이구나 여대생의

More information

중등2단계(최종)-PDF용.hwp

중등2단계(최종)-PDF용.hwp 이해와 배려, 공감을 꿈꾸며... 꿈의 학교, 모두가 행복한 서울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서울교육은 장애, 다문화 등의 차이가 차별과 소외를 낳지 않도록 다문화가정, 탈북학생, 장애학생 등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탈북학생은 우리나라 아픈 역사의 결과라는 점에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같은 외모와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서 관심의

More information

충남도보 제2072호

충남도보 제2072호 충 청 남 는 공문서로서의 효력을 갖는다 제2072호 2010. 03. 22.(월) 1961년 7월 12일 선 기관의 장 람 고 시 ㅇ 제2010-71호 : 하천공사시행(변경)계획 고시 7 (이면계속) 게재를 의뢰한 각급 행정기관에 알려드립니다. 충 청 남 에 서 는 2 0 0 9 년 1 월 2 0 일 부 터 전 자 를 발 행 합 니 다. 본 전자 는 충청남

More information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래를 북한에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다든지, 남한의 반체제세력이 애창한다 든지 등등 여타의 이유를 들어 그 가요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한다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될 수 없는 반민주적인 행동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 노래가 두 가지 필요조 건을 충족시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제2 발제문 임을 위한 행진곡 의 문제점 임 과 새 날 의 의미를 중심으로 양 동 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어떤 노래가 정부가 주관하는 국가기념식의 기념곡으로 지정되려면(혹은 지정 되지 않고 제창되려면)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그 가요(특히 가사)에 내포된 메시지가 기념하려는 사건의 정신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

More information

교육정책연구 2000-특-28 지식기반사회의 교육이념과 교육정책 연구책임자 : 정범모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공동연구자 : 박영식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교육정책연구 2000-특-28 지식기반사회의 교육이념과 교육정책 연구책임자 : 정범모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공동연구자 : 박영식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교육정책연구 2000-특-28 지식기반사회의 교육이념과 교육정책 대한민국학술원 정 범 모 교 육 인 적 자 원 부 교육정책연구 2000-특-28 지식기반사회의 교육이념과 교육정책 연구책임자 : 정범모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공동연구자 : 박영식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이 연구는 2000년도 교육인적자원부 교육정책 연구과제에 의해 연구되었음. 이 연구는 교육인적자원부

More information

(72) 발명자 장종산 대전 중구 수침로 138, 103동 204호 (태평동, 유등 마을쌍용아파트) 박용기 대전 유성구 어은로 57, 119동 302호 (어은동, 한 빛아파트) 황동원 경기 안양시 만안구 양화로147번길 7, 102동 403호 (박달동, 박달동동원베네스

(72) 발명자 장종산 대전 중구 수침로 138, 103동 204호 (태평동, 유등 마을쌍용아파트) 박용기 대전 유성구 어은로 57, 119동 302호 (어은동, 한 빛아파트) 황동원 경기 안양시 만안구 양화로147번길 7, 102동 403호 (박달동, 박달동동원베네스 (19) 대한민국특허청(KR) (12) 공개특허공보(A) (11) 공개번호 10-2015-0069268 (43) 공개일자 2015년06월23일 (51) 국제특허분류(Int. Cl.) B01J 20/10 (2006.01) B01D 53/62 (2006.01) B01J 20/282 (2006.01) (21) 출원번호 10-2013-0155502 (22) 출원일자

More information

<C3CA3520B0FAC7D0B1B3BBE7BFEB202E687770>

<C3CA3520B0FAC7D0B1B3BBE7BFEB202E687770> 1. 만화경 만들기 59 2. 물 속에서의 마술 71 3. 비누 탐험 84 4. 꽃보다 아름다운 결정 97 5. 거꾸로 올라가는 물 110 6. 내가 만든 기압계 123 7. 저녁 노을은 맑은 날씨? 136 8. 못생겨도 나는 꽃! 150 9. 단풍잎 색깔 추리 162 10. 고마워요! 지렁이 174 1. 날아라 열기구 188 2. 나 누구게? 198 3.

More information

2008.3.3>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2001.2.10>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2008.3.3> 1. 법 제34조제1항제3호에 따른 노인전문병원 2. 국민건강보험법 제40조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요양기관(약국을 제외한다) 3. 삭제<2001.2.10> 4. 의료급여법 제2조제2호의 규정에 의한 의료급여기관 제9조 (건강진단) 영 제20조제1항의 규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시행 2010. 3. 1] [보건복지가족부령 제161호, 2010. 2.24, 일 보건복지가족부 (노인정책과) 02-2023-85 제1조 (목적) 이 규칙은 노인복지법 및 동법시행령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1조의2 (노인실태조사) 1 노인복지법 (이하 "법"이라 한다)

More information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노인복지법 시행규칙 [시행 2012.2.5] [보건복지부령 제106호, 2012.2.3, 타법개정] 제1조(목적) 이 규칙은 노인복지법 및 동법시행령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1조의2(노인실태조사) 1 노인복지법 (이하 "법"이라 한다) 제5조에 따른 노인실태조사의 내용은 다음 각

More information

140319_138억년 전 '빅뱅' 비밀 … 남극 망원경이 풀었다.hwp

140319_138억년 전 '빅뱅' 비밀 … 남극 망원경이 풀었다.hwp 제 목 출 처 보도일자 138억년 전 '빅뱅' 비밀 남극 망원경이 풀었다 중앙일보 2014. 03. 19(수) 하버드 스미스소니언 센터 발표 우주 급팽창의 증거 중력파 패턴 워낙 미미해 못 찾다 남극서 관측 남극 아문센 스콧기지에 설치돼 있는 망원경 바이셉(BICEP)2 의 모습. 뒤로 찬란하게 빛나는 오로라와 은하수가 보인다. 미국 하버드 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센터는

More information

.... ...... ....

.... ...... .... 17 1516 2 3 3 027 3 1516 13881443 028 1 1444 26 10 1458 4 029 15 14587 1458 030 10 1474 5 16 5 1478 9 1 1478 3 1447 031 10 10 032 1 033 12 2 5 3 7 10 5 6 034 96 5 11 5 3 9 4 12 2 2 3 6 10 2 3 1 3 2 6 10

More information

I. 현대적 명승의 개념 및 관련 법규 01. 문화재보호법과 명승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재관광학과 대학원장 김창규 - -------........... 7 02. 명승의 개넘과 용어해설 흔μ국전통문화대학교문화재관광학과대학원장 - 김호딴 ----- ---- --- -----------------...... 13 03. 명승관련법규의 적용과 해석 한국전통문화대학교문화재관광학과대학원장

More information

제 호 년 제67차 정기이사회, 고문 자문위원 추대 총동창회 집행부 임원 이사에게 임명장 수여 월 일(일) 년 월 일(일) 제 역대 최고액 모교 위해 더 확충해야 강조 고 문:고달익( 1) 김병찬( 1) 김지훈( 1) 강보성( 2) 홍경식( 2) 현임종( 3) 김한주( 4) 부삼환( 5) 양후림( 5) 문종채( 6) 김봉오( 7) 신상순( 8) 강근수(10)

More information

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4. 역사, 신정일 교수님의 글모임4 초보산꾼 소개글 신정일 교수님의 매일로 온 편지를 모아논 글입니다 목차 1 펀치볼 둘레길과 동해 두타산 아래의 무릉 계곡 길을 걷는다. 8 2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12 3 함양의 용추계곡과 화림동계곡을 거닐다 14 4 천삼백 리 한강 여섯 번 째를 걷는다.원주 흥호리에서 에서 여주 이포나루까지 16

More information

..........

.......... 통권 제101호(2007년 10월호) 특허가족 건강길라잡이(비만 시리즈4) 특허가족 건강길라잡이 (비만 시리즈 4) 변리사 김 일 성 킴스국제특허법률사무소 2. 비만과 영양소 4. 무기질(Minerals) 무기질은 단백질, 당질, 지질들과 달리 에너지를 낼 수 없고, 비타민류와 달리 조리과정에서 파괴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에 용해되므로 조리 중의 용액을 버리

More information

<4368616E6736652033C0E520C8ADC7D0BEE7B7D02E687770>

<4368616E6736652033C0E520C8ADC7D0BEE7B7D02E687770> 제3장 화학양론 3.1 원자질량 (Atomic Mass) 원자질량: 실제로 매우 작아 상대질량으로 표시 Atomic mass is the mass of an atom in atomic mass units (amu). 기준 원자=탄소-12, 탄소-12 원자 1개 질량 = 12.00000 amu 로 정의 amu : 원자질량 단위 ( atomic mass units)

More information

소사벌 25호

소사벌 25호 명택 문뺑l 황?빠 담0배{는 훌활문얘지 혈훨명택문확원 .._ j ~ 납 十 E과 I ~at~ 를.... 색 촌솟 u발강셔 l n키울마 7.! nt셔냐는 7...& I c 닙 ""'C" j 슬 I 7 十 들 을딴셔! 처녁 켠 71 건떡셔 를}고 딩녁 ~ t내수 배 l 효 7 十 ~I운 고_7 서 n품 벌 E 펴 스 j 발겨 l l L. 논뱉파 :it I ""

More information

?읜춎킴잖?

?읜춎킴잖? 口 특집/갑오경장 100 년 기념 캅오경장기의 문법 우 교수) 1. 서 론 개화기싼 팍써사얘서는 정흉서1 국어와 근대국어에서 현대픽써 단계효 넙써가는 중요한 과도기작 성쩍윷 밀 썩 q 그동안 중세국어와 현대꽉어쩌11 엽꾸어l 비해서 근 대국어에 대한 연구는 상대척으로 소흘하였으며 특히 개화기 시대는 과도기로 취급되 어 독자적인 연구대상으로 주목율 크게 받지

More information

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4) 이 이 6) 위 (가) 나는 소백산맥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삼국 통 일을 못마땅해하던 당신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나라에 내주기로 하고 이룩한 통 일은 더 작아진 것이라는 점에서, 1) ᄀ 2) 지은이가 3) (라)에서 학년 고사종류 과목 과목코드번호 성명 3 2009 2학기 기말고사 대비 국어 101 ( ) 일신여자중 ꋯ먼저 답안지에 성명,학년,계열,과목코드를 기입하십시오. ꋯ문항을 읽고 맞는 답을 답란에 표시하십시오. ꋯ문항배점은 문항위에 표시된 배점표를 참고하십시오. (가) ᄀ환도를 하고 폐허가 된 서울에 사람들의 모습 이 등장하던

More information

LEET 추리논증 29번 유사 적중 - 기본교재 -P.144 29. 다음 글로부터 추론한 것으로 옳은 것만을 에서 있 는 대로 고른 것은? 번역사 P는 고객 A, B, C로부터 문서를 의뢰받아 번역 일을 한 P는 하루에 10 쪽씩 번역한 모든 번역 의뢰는 매일 아침 업

LEET 추리논증 29번 유사 적중 - 기본교재 -P.144 29. 다음 글로부터 추론한 것으로 옳은 것만을 에서 있 는 대로 고른 것은? 번역사 P는 고객 A, B, C로부터 문서를 의뢰받아 번역 일을 한 P는 하루에 10 쪽씩 번역한 모든 번역 의뢰는 매일 아침 업 LEET 추리논증 2번 기본과정 강의에서 한강변에 애완동물금 지 푯말과 애완돼지를 예를 들어 포함여 추상적 단어와 구체적 단어 의 포함여부 판단 문제 부를 묻는 강의를 실시 [ 법- 추상적/ 사건- 구체적] 유사 적중 - 기본교재 -P.210 유사 적중 - 기본교재 -P.257 모순 찾기 LEET 추리논증 4번 약점극복 심화추리논증-실전모의고사 [핸드폰 대화

More information

목 록( 目 錄 )

목 록( 目 錄 ) 부 附 록 錄 목록( 目 錄 ) 용어설명( 用 語 說 明 ) 색인( 索 引 ) 목 록( 目 錄 ) 278 고문서해제 Ⅷ 부록 목록 279 1-1 江 華 ( 內 可 面 ) 韓 晩 洙 1909년 10월 11일 1-2 江 華 ( 內 可 面 ) 韓 晩 洙 洪 元 燮 1909년 10월 2-1 江 華 ( 府 內 面 ) 曺 中 軍 宅 奴 業 東 고종 18년(1881) 11월

More information

17대 과제.hwp

17대 과제.hwp 1 -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17대 과제 2014. 5. 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법률지원 특별위원회 2 - 인사말 세월호 참사로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실종자들의 귀환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난 4. 25.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세월호

More information

대학연합교회 샤인 강단 문서답같은 대답을 제자들에게 주 었던 것은 사실 숨겨진 칭찬이었습 무식하고 가난한 제자들이었 생활, 사회생활 등 말씀대로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많습 특별 히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주일예 신앙인 것입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경고하시는 부분이

대학연합교회 샤인 강단 문서답같은 대답을 제자들에게 주 었던 것은 사실 숨겨진 칭찬이었습 무식하고 가난한 제자들이었 생활, 사회생활 등 말씀대로 하지 않는 모습이 너무 많습 특별 히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주일예 신앙인 것입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경고하시는 부분이 2015년 교회 구호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두가 복을 받자! 샤인스토리 VOL.3 JANUARY 대학연합교회 3대비전 샤인랜드 패치코리아 북한선교 발행인 대학연합교회 담임목사 김형민 발행처 샤인랜드프레스 편집인 전기훈 홈페이지 WWW.UCC.OR.KR 연락처 02)463-5271 새벽예배의 열기가 뜨겁다! 1월은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는 달입니다!

More information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주지스님의 이 달의 법문 성철 큰스님 기념관 불사를 회향하면서 20여 년 전 성철 큰스님 사리탑을 건립하려고 중국 석굴답사 연구팀을 따라 중국 불교성지를 탐방하였습 니다. 대동의 운강석굴, 용문석굴, 공의석굴, 맥적산석 굴, 대족석굴, 티벳 라싸의 포탈라궁과 주변의 큰 불교학과반(1년 과정) 기초교리반(6개월 과정)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 저녁 7시 5월 5일 5월 12일 5월 19일 5월 26일 어린이날 휴강 인도불교사 2 / 이거룡 교수님 인도불교사 3 / 이거룡 교수님 중국불교사 1 / 이덕진 교수님 5월 7일 5월 14일 5월 21일 5월 28일 백련암 예불의식 및 기도법 / 총무스님 성철

More information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B9E9B3E2C5CDBFEFB4F5B5EBBEEE20B0A1C1A4B8AE20B1E6C0BB20B0C8B4C2B4D92E687770> 2011 어르신 생활문화전승프로그램 柯 亭 里 義 兵 마을 백년터울 더듬어 가정리 길을 걷는다 주관 춘천문화원 후원 한국문화원 연합회 문화체육관광부 -차 례- 제1장 구술 자료의 가치 1. 역사적 측면 2. 문화적 측면 3. 미래 삶의 터전 제2장 지명으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제3장 구술로 전하는 생활문화전승 1. 의암제를 준비하는 사람 류연창 2. 고흥 류

More information

SG프랜-한남점 지노영수정.QXP

SG프랜-한남점 지노영수정.QXP REDESIGN YOUR BODY doterra - Healthy Life Guide Book 본 책자의 내용은 교육용 자료이며 일반적인 건강정보로 특정 제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무단 복제, 임의변경 및 배포를 금지합니다 1. 나에게 가장 적정한 몸무게는 무엇일까요? 체중 측정을 통한 적정 체중의 판정방법 비만 지수 = 현재 체중 표준 체중 100

More information

1 원자와 분자, 그리고 이온 3 불꽃 반응, 분광계 원소는 다소 왜곡해서 원자라고 이해하자. 원소는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불꽃에 넣으면 고유의 색을 띤다. 예를 들어 불꽃 속에서 나트륨은 노란색, 구리는 청록색을 띤다. 이를 불꽃 반응이라고 한다. 또한 각

1 원자와 분자, 그리고 이온 3 불꽃 반응, 분광계 원소는 다소 왜곡해서 원자라고 이해하자. 원소는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불꽃에 넣으면 고유의 색을 띤다. 예를 들어 불꽃 속에서 나트륨은 노란색, 구리는 청록색을 띤다. 이를 불꽃 반응이라고 한다. 또한 각 1 원자와 분자, 그리고 이온 1 원자, 이온, 분자 원자는 원자핵과 그 핵 주위를 원 궤도에 따라 움직이는 전자로 구성돼 있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돼 있는데, 양성자의 개수는 원자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전자는 전기적으로 음성(-)을 띠는 반면, 원 자핵은 1(양성자, 중성자)로 인해 양성(+)을 띤다. 이 둘의 힘은 서로 상쇄되어 일반적으로

More information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C3D6BFECBCF6BBF328BFEBB0ADB5BF29202D20C3D6C1BE2E687770> 본 작품들의 열람기록은 로그파일로 남게 됩니다. 단순 열람 목적 외에 작가와 마포구의 허락 없이 이용하거나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시 저작권법의 규정에 의하여 처벌받게 됩니다.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구 분 내 용 제목 수상내역 작가 공모분야 장르 소재 기획의도 용강동 정구중 한옥과 주변 한옥들에 대한 나의 추억 마포 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공모전 최우수상

More information

죄형법정주의2 20문 및 해설.hwp

죄형법정주의2 20문 및 해설.hwp 1. 다음은 성폭력특별법상 친족등강간죄의 주체에 관한 판례이다. 판례에 의할 경우 유추석에 당하는 여부를 또는 로 표시하라.(배점 2) ㄱ. 피자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고 단지 피자의 어머니와 사실상 부부로서 동거하는 관계에 있는 자(의붓아 버지)를 (1997. 이전의 구)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자보호등에관한법률 제7조 제4항에서 규정하는 사실상의 관 계에 의한

More information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zb 2)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운다. 그러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 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정 - ( ᄀ ) - ( ᄂ ) - 국군 - 방백 - 황왕 (나)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이지, 무슨 목민관이 있 었던 zb 1) 중 2013년 2학기 중간고사 대비 국어 콘텐츠산업 진흥법 시행령 제33조에 의한 표시 1) 제작연월일 : 2013-08-21 2) 제작자 : 교육지대 3) 이 콘텐츠는 콘텐츠산업 진흥법 에 따라 최초 제작일부터 5년간 보호됩니다. 콘텐츠산업 진흥법 외에도 저작권법 에 의하여 보호되는 콘텐츠의 경우, 그 콘텐츠의 전부 또는 일부 를 무단으로 복제하거나

More information

<C8B2BCBABCF62DB8D4B0C5B8AEBFCDB0C7B0AD2E687770>

<C8B2BCBABCF62DB8D4B0C5B8AEBFCDB0C7B0AD2E687770> 먹거리와 건강 황성수 인도주의실천의협의회(humandoctor.org) 황성수 의사님의 글 http://humandoctor.org/technote/main.cgi?board=whang 서적 곰탕이 건강을 말아먹는다 로도 출판되어 있음. lightworker.kr 편집 1.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황성수의 먹거리와 건강 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인사드립니다.

More information

握 t H I K 재적경제잉작과 귀하 본 보고서를 r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닥 유 형 및 대처방안 연구 에 관한 연구용역의 최종보고 서로 제출한니다. 2 0 0 2 년 9 월 홈흩 를툴 E임 훌홈

握 t H I K 재적경제잉작과 귀하 본 보고서를 r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닥 유 형 및 대처방안 연구 에 관한 연구용역의 최종보고 서로 제출한니다. 2 0 0 2 년 9 월 홈흩 를툴 E임 훌홈 죄증감 Z 서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탁 유형 및 대처방안 연구 2 O O 2-9 握 t H I K 재적경제잉작과 귀하 본 보고서를 r 국제금융거래를 통한 자금세닥 유 형 및 대처방안 연구 에 관한 연구용역의 최종보고 서로 제출한니다. 2 0 0 2 년 9 월 홈흩 를툴 E임 훌홈 쯤 f g g 陣 폼 究 좋 f E 홉 對 外 經 濟 政 策 昭 究 院 昭

More information

12-bbcosmology2

12-bbcosmology2 Special Topics in Nuclear and Particle Physics Astroparticle Physics Lecture 12 Cosmology II Nov. 24, 2015 Sun Kee Kim Seoul National University ( ) ( ) ( 3 ) : (38 ) ( Big Bang Nucleosynthesis) 1948 Ralph

More information

<C6EDC1FD20B0F8C1F7C0AFB0FCB4DCC3BC20BBE7B1D420B0B3BCB120BFF6C5A9BCF32E687770>

<C6EDC1FD20B0F8C1F7C0AFB0FCB4DCC3BC20BBE7B1D420B0B3BCB120BFF6C5A9BCF32E687770> . - 54 - - 55 - - 56 - - 57 - - 58 - - 59 - - 60 - - 61 - - 62 - - 63 - - 64 - - 65 - - 66 - - 67 - - 68 - - 69 - - 70 - Ⅰ 추진 배경 ISO 26000 등 사회적 책임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발전하고 윤리 투명 경영이 기업경쟁력의 핵심요소로 부상하면서 단순한 준법경영을

More information

o 등산ㆍ트레킹ㆍ레저스포츠ㆍ탐방 또는 휴양ㆍ치유 등의 활동을 위하여 산림에 조성하거나 사용하는 길

o 등산ㆍ트레킹ㆍ레저스포츠ㆍ탐방 또는 휴양ㆍ치유 등의 활동을 위하여 산림에 조성하거나 사용하는 길 - 3 - - 5 - - 6 - 2013년 숲길의 조성 및 운영ㆍ관리 매뉴얼 1.1 숲길의 정의 등산ㆍ트레킹ㆍ레저스포츠ㆍ탐방 또는 휴양ㆍ치유 등의 활동을 위하여 산림에 조성하거나 사용하는 길(이와 연결된 산림 밖의 길을 포함) * 산림문화ㆍ휴양에 관한 법률 제2조제6항 1.2 숲길의 종류 * 산림문화ㆍ휴양에 관한 법률 제22조의2 숲 길 숲길유형 등산로

More information

연구보고서 2013-01 The Center on Philanthropy at The Beautiful Foundation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 2013년 기획연구 보고서 2013. 12. PART.1 성실공익법인 지정확인제도 도입에 따른 대응연구 박 훈 PART.2 국내 민간공익재단에 대한 세법적 규제의 변화 및 기본방향 이상신 PART.3 기존 나눔

More information

ISSN 2288-7660 현장교사와 동부도서관이 선정한 서평자료집 2015 중ㆍ고등학생을 위한 추천도서 맛보기 제12집 대구광역시립동부도서관 D A E G U M E T R O P O L I T A N D O N G B U L I B R A R Y 발 간 사 현대사회를 이끌고 지배하는 것은 정보와 창의적 기술입니다. 그 중심에 오랫동안 책이 자리해 왔으며,

More information

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망되지만,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광주지역 민주화 운동 세력 은 5.18기념식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받은 데 이어 이 노래까지 공식기념곡으로 만 들어 5.18을 장식하는 마지막 아우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걱정스러운 건 이런 움직임이 이른바 호남정서 제1 발제문 임을 위한 행진곡 은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노래다 -정부의 5 18 공식기념곡 지정에 반대하는 다섯 가지 이유- 조 우 석 (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 기자) 운동권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을 둘러싼 시비로 한국사회가 다시 소모적 논 쟁에 빠져든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노래를 5 18 광주민주화운동(이하 5 18 광주 혹은 광주5 18)의 공식기념곡으로

More information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015 판례.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hwp 2015 판례 기출 증보판 테마 형법 추록본 편저자 조충환 양건 p.27 첫째줄 유사판례 교체 유사판례 1동일한 형벌조항이 과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하여 합헌으로 선언된 바 있으나 그 후의 사정변경 때문에 새로 위헌으로 결정된 경우에도 위헌결정의 소급효를 종전의 합헌결정시점까지로 제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대판 2011.4.14, 2010도5606).

More information

<B4EBBBF3202DB3F3C3CCC0FCC5EB35C0CFC0E520C0E7B0B3C0E5B0FA20B3AABEC6B0A520B9E6C7E22DB9DAC0CCB3DD20BFDC2035B8ED2E687770>

<B4EBBBF3202DB3F3C3CCC0FCC5EB35C0CFC0E520C0E7B0B3C0E5B0FA20B3AABEC6B0A520B9E6C7E22DB9DAC0CCB3DD20BFDC2035B8ED2E687770> : 농촌 전통오일장의 재개장과 나아갈 방향 춘천 샘밭장을 중심으로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학술동아리 강원지역문화연구회 전찬혁 ( 학부 4 학년 ), 김경뢰 ( 학부 4 학년 ), 김미연 ( 학부 4 학년 ), 김지나 ( 휴학생 ), 박이넷 ( 학부 4 학년 ), 이성희 (2005 년 졸업생 ), 이순하 ( 대학원 3 학기 ) 목 차 I. 서론 1. 2. 3.

More information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랑 이야기 ------------------- 소개글 뻔한 이야기이지요. 그렇지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있는 위대함에 견주어보면..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진실함과 내면을 볼수있다면 우리 모두도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써내려 갈수있다고 봅니다.. - 어느 소개글에서 목차 1 그 여자와

More information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진행과정 후쿠시마 제1원전(후쿠시마 후타바군에 소재)의 사고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방 을 강타한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1~3호기의 전원이 멈추게 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에 후쿠시마 제1원전의 총 6기의 원자로 가 한국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 201211307 임형주 다니엘 1. 들어가는 글 -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일본은 물론 주변의 많은 국가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원전피해의 영향은 고농도 오염지역으로부터 시작해서 점 점 가시화되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그 범위 또한 점차적으로 넓어질

More information

요 약

요  약 Chung Buk Vision 2013 선비의 충북화 방안 연구 김양식 선임연구위원 (사회문화연구부) 2013. 06. 요약 본 연구는 선비을 충청북도의 지역화 하여 체성을 확립하고 올곧은 지역 을 세워나가기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데 목적이 연구목적이 있음 선비을 충북의 핵심 으로 승화하고 그것을 지역화 하는 것은 단지 지역 체성의 확립 차원을 넘어, 현재

More information

PDF법보110102

PDF법보110102 관세음보살님이시여! 보시 바라밀 로써 따뜻한 세상을 지계 바라밀 로써 정의로운 세상을 정진 바라밀 로써 성숙된 세상을 선정 바라밀 로써 맑은 세상을 반야 바라밀 로써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1 2 월 인욕 바라밀 로써 평화로운 세상을 불기2555(2011)년 지극한 마음으로 서원하오니 불기2555(2011)년 불기 2555년 신묘년 한 해 기도로 안락함을

More information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2014-4호 (2월) 5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2014-4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2014-4호 (2월) 5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2014-4호 (2월) 6 겨울이 되면 1-4 박지예 겨울이 되면 난 참 좋아. 겨울이 되면 귀여운 눈사람도 만들고 겨울이 되면 신나는 눈싸움도 하고 겨울이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2014-4호 (2월) 1 2015년 2월 12일 사랑의 동삭교육 제 2014-4호 (2월) 2 제2014년 - 4호 ( 2월 ) 펴낸이 : 안 승 렬 교장선생님 도운이 : 박 명 덕 교감선생님 편집인 : 정 경 순 선생님 Tel. (031) 618-9671 학부모회장님 글 1 2월 동삭 교육활동 1.13 신입생 예비소집

More information

<32303130B3E220BFB5C8ADBCD320C0CEB1C720B5E9BFA9B4D9BAB8B1E22E687770>

<32303130B3E220BFB5C8ADBCD320C0CEB1C720B5E9BFA9B4D9BAB8B1E22E687770> 줄 거 리 ㅡ 탈 북 청 소 년 제 1 강 배낭을 멘 소년 우여곡절 끝에 탈북에 성공한 열아홉 소년 현이와 같은 또래 소녀 진선. 진선은 학교에서는 동급생들에게 북한에 대한 곤란한 질문으로 시달림을 당하고, 아르바이트 가게 주인에게는 돈을 때이며,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혼자이다.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사는 현이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모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More information

<33C6E4C0CCC1F620C1A63139C8A320B8F1C2F72E687770>

<33C6E4C0CCC1F620C1A63139C8A320B8F1C2F72E687770> 종친회 순례 ④ 忠節과 禮의 名門 : 김녕김씨(金寧金氏) 高興 貫祖墓 奉安으로 金寧史를 새로 쓰다 金寧金氏中央宗親會 篇 金鍾彬 중앙종친회장 VS 김녕김씨중앙종친회가 지난 2013년 4월 6일 전남 고흥(高興)에 새로이 조성한 김녕김씨(金寧金氏) 관조(貫祖) 김녕군(金寧君) 시호(諡號) 문열공(文烈公) 휘(諱) 시흥(時興)님의 묘역을 봉안(奉安)함으로써 김녕종사(金寧宗史)에

More information

1면~24면

1면~24면 남양주뉴스비전 www.nnv.kr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 573-2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주간 제 10 호 남양주뉴스비전 www.nnv.kr www.nnv.kr 발행인 : 김양호, 편집인 : 김영렬 070-8716-6885 남양주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취임 총회장 이정근목사 Contents 02 정부는 전월세 상한제 즉각 수용해야 박기춘 의원

More information

006 007 007 009 012 012 012 013 013 013 018 019 033 045 051 052 060 066 067 077 083 084 099 108 117 118 122 135 140 141 141 142 143 143 145 148 154 01 006 007 007 009 " # $ % 02 012 012 012 013 013 013

More information

640..

640.. 제640호 [주간] 2014년 12월 25일(목요일) http://gurotoday.com http://cafe.daum.net/gorotoday 문의 02-830-0905 구로구 새해 살림살이 4,292억 확정 구의회 제242회 정례회 폐회 2015년도 세입 세출예산안 등 13건 처리 의원사무실 설치 예산 전액 삭감, 교육 복지 분야에 쓰기로 구로구의회(의장

More information

제 - 줄 픔 외교통상부 장관 귀하 본 연구보고서를 용역과제언 환경관켠 국제무역규제 가 국내 산업에 마치는 엉향 및 대응 전략 즈사 왜 칙종 보고서로 제출합니다. 연구 책염자 : 연구 창여자 : 한거주 연구위원 앙몽숭 연구위원 2 8 0 φ 4. 산업연구원강

제 - 줄 픔 외교통상부 장관 귀하 본 연구보고서를 용역과제언 환경관켠 국제무역규제 가 국내 산업에 마치는 엉향 및 대응 전략 즈사 왜 칙종 보고서로 제출합니다. 연구 책염자 : 연구 창여자 : 한거주 연구위원 앙몽숭 연구위원 2 8 0 φ 4. 산업연구원강 흐 l 흩보펙 환경관련 국에딛역규씨가 국내 $ 이시는 영양 때응 서략 죄 } - 다자간 흔병혐약 밍 흔H경관련 무역 규제를 증싱으로 - 2 0 0 4. 4. 측? 쫓 ; N S T l 쫓O R l 켰 f A L E 뚱 I C S 한E 제 - 줄 픔 외교통상부 장관 귀하 본 연구보고서를 용역과제언 환경관켠 국제무역규제 가 국내 산업에 마치는 엉향 및 대응 전략

More information

IAEA

IAEA 1 '구호천사' 한비야의 이라크에서 보낸 편지 "수돗물 5 일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학교엔 화장실 없어 아무데나 '볼일' "외국인 떠나라" 구호단체도 공격대상 오지 여행가로 유명한 한비야(45)씨는 6 월 16 일부터 이라크 모술에서 2 개월여 구호활동을 벌였다.바그다드 유엔 사무실 폭파사건에 이어 모술에서도 대규모 총격사태가 벌어지자 지난달 말 예정을 2

More information

09. 정덕배-중국생활체험기.hwp

09. 정덕배-중국생활체험기.hwp .,?.,,, (?),.,, 3,.,.. 1..,.? 1).,., 1,,, ( )..,...,,..,.,..(, , 1997,, p.17- p.18) 205 ,,,,.,. ( ).....,.,,...,.,.,,.,,. 2.,, 1.,.,,.,.,,.,.,,., 10, 208 ...,,.. 1/ 3. 50%.,, ( ), 1/ 3., 1 ( : 0.1

More information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지 생각하고,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이 작업을 3번 반복 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 그들이 제작진에게 투쟁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다.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겨를이 없다. 이 땅은 헬조선이 아니다. 일단 진짜 헬(hell)은 자유의지 가 용납되지 않는 곳 김 다 인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회나 성당을 다니지 않는 사람도 빨간 글씨로 적힌 12월 25일을 즐긴다. 일본인, 중국인 친구들이 한국은 왜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냐고 묻는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 봐도 답이 안 나온다. 석가 탄신일도 공휴일이어서 공평하다는 말 만 되풀이한다. 느닷없이

More information

145x205_향토사자료집책자_내지0121.indd

145x205_향토사자료집책자_내지0121.indd 대구 동구의 대구 동구의 김기현 지음 대구 동구의 발행일 2013년 1월 21일 지은이 김기현 발행인 김성수 발행처 대구동구팔공문화원 주소 701-400 대구시 동구 백안동 656-8 전화 053-984-8774 팩스 053-984-8771 전자우편 [email protected] 홈페이지 http://www.palgong.or.kr 편집디자인 제작 도서출판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