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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문예비평연구 제 29 집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2 * 이 학술지는 2008 년도 정부재원 ( 교육과학기술부 ) 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판되었음.

3 차 례 특집 / 다문화시대와 텍스트의 변모양상 Ⅰ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김명석/ ,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최강민/ 31 딕테 에 나타난 디아스포라 의식이덕화/ 61 아시아 문화콘텐츠 모색 현황과 가능성곽효환/ 85 김영랑 시의 낭만주의적 특성 연구박호영/ 113 진달래꽃 의 다중성에 관한 연구이상호/ 139 혁명가요 가사의 정서통합과 선동성박선영/ 165 현대소설에 나타난 젊음 의 발현 양상안남연 / 193 이문열의 창작론 연구김정진/ 213 염상섭 초기 단편소설 연구김도경/ 239 한국과 영국의 여성소설과 여성소설가의 등장배경 비교연구이현진/ 263 모던 경성( 京 城 ) 과 감각의 공간송효정 / 293 이문구 소설과 고흐 그림에 나타난 까마귀 의 형상성주영숙 / 321 김남천 등불 에 나타난 서사 전략정소영/ 351 셀픽션 (selfiction) 의 서사전략강현구 / 371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회칙 / 401 한국문예비평연구 심사 규정 / 405 편집위원회 운영 규정 / 408 한국문예비평연구 투고 규정 / 409 한국문예비평연구 발간 규정 / 412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윤리 규정 / 414 임원 명단 / 417

4 특집논문 다문화시대와 텍스트의 변모양상Ⅰ

5 특집/ 다문화시대와 텍스트의 변모양상 Ⅰ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1) - 김훈의 남한산성 론 - 김 명 석 차 례 1. 역사소설의 팩션화 2. 다문화주의 담론과 역사소설 다시 읽기 3. 병자호란의 문학적 형상화 4. 남한산성 작품 분석 1) 말의 성, 글의 길 2) 역사 속의 개인 발견 3) 탈역사화와 다문화주의 5. 결론 < 국문초록 > 이 논문은 김훈의 팩션 남한산성 을 텍스트로 최근 소설에서의 역 사 읽기 방식의 변화를 살펴본다.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남한산 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조선 시대의 전쟁영웅소설에서부터 민족주의 역사소설, 민중적 역사소설의 단계를 거쳐 최근의 팩션에 와 서는 다문화 시대의 새로운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그 첫 번째 특징은 말의 성 남한산성이 보여주는 공백 과 독백 의 역사 읽기이다. 바로 이 역설적 지점에 김훈의 소설 작법이 있으며, 작 품의 대화성이 가진 특징과 한계가 있다. 수많은 인물들의 말의 노래 에서 드러나는 공백의 공간, 그리고 작가가 보여주는 독백의 자유가 이 * 이 논문은 2007 학년도 성신여자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 지원에 의하여 연 구되었음.

6 6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처럼 독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다문화주의 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입증한다. 둘째는 역사 속 개인의 발견이다. 다성 적인 인물 구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태도는 말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주체들에 대해서 냉정한 태도를 보이며, 반대로 몸으로서 자신을 증명 하는 이들을 옹호한다. 이 소설은 백성도 하나의 개인이라는 사실을 환 기시키며,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문화적 태도로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셋째는 탈역사화와 다문화주의와의 관계이다. 탈역사주의 적 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민족주의 시대의 역사관으로 이야 기하는 반면 다문화적 맥락에서는 남한산성에서의 경험이 주는 교훈도 다르게 해석된다. 남한산성 은 탈역사화된 망각의 서사가 아니라 무 시당하고 묻혀버린 기록의 발굴로서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밟고 지나 가야할 글 이자 그것은 동시에 다문화 시대 역사문학이 가야할 길이 된 다. * 핵심어 : 남한산성, 병자호란, 김훈, 다문화, 역사소설, 팩션 1. 역사소설의 팩션화 이 논문은 최근의 역사소설 중 독자들의 큰 반응을 일으킨 김훈의 남한산성 분석을 통하여 다문화 시대 한국 소설의 역사 읽기, 특히 팩션에 나타난 역사 인식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는 데 연구 목적이 있 다. 역사소설이 문학의 위기 의 타개책으로 부각된다지만, 사실 역사소 설의 유행은 우리 문학사에서 1930 년대 이래 반복된 현상으로 이 시대 만의 특징은 아니다. 역사소설은 일제 말 문인들의 글쓰기를 위한 최소 수단이었고, 이후에도 파시즘적 시대에 발언권을 제한받는 상황에서 작 가들의 우회적인 현실 대응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쟁적 관계에 있 는 새로운 장르와 매체의 출현 앞에 대중으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정통 문학의 대안으로서 오늘날의 역사소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역사소

7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7 설은 대중의 흥미를 모으기 위해 새롭고도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사실 과 허구를 결합한 새로운 양식임을 강조하는 이른바 팩션이 등장했고, 원 소스 멀티 유즈 라는 예술 작품의 새로운 생산 방식에 따라 곧바로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영상물이나 게임으로 개발되고 있다. 역사학계에 서도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여 탈근대 팩션 시대 에는 역사영화나 역사 소설처럼 역사를 앞세운 장르 대신에 영상역사 와 소설역사 같은 새로 운 장르가 출현하는데 역사소설이 유사 역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면, 소설역사 에서 역사는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라 의미전달의 수단이 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1) 소설역사 라는 개념이 낯설기는 하지만 이는 오늘날 소설가들이 역사를 이용하는 방식을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역 사 자체가 목표가 아니고 작가의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던 것이 이 시대 소설만의 특성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역사의식이 앞선 것은 리얼리즘 시대의 역사소설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목 표가 아니라 수단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아닌 역사에 대한 접근방식의 구체적 특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김훈의 남한산성 이라는 작품을 통해 팩션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양한 양상으 로 표현되는 역사인식의 특성을 특정 작가 한 명만으로 대표하기는 무 리가 따르지만 김훈의 남한산성 에 주목하는 이유는 발표된 지 삼년 이 채 안 되어 문학사적 평가는 이르다 해도 팩션의 유행이라는 하나의 문학적 현상 가운데서 기존 역사소설의 관점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2) 그리고 다른 팩션과는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알아보는데 유의미하리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흔히 팩션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 해체 3) 라면 역사 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력의 경계가 문제가 되는데 김훈의 경우는 다른 1) 김기봉,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프로네시스, 2006, 12 면. 2) 역사소설이 역사의 기록 에 문학적 상상력 을 결합한 것으로 규정하면 팩션과 역사소설의 차이는 사라진다. 역사소설이 현재의 전사 라면 팩션은 실제 역사의 조작과 상업적 이미지 로 요약된다. 문흥술, 역사소설과 팩션, 문학과 환경 6, 면. 3) 김성곤, 팩션 환상과 현실의 경계 해체, 기획회의 136 호, 한국출판 마케팅연구소, , 14 면.

8 8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한국형 팩션 과는 달리 환상성보다는 역사에 대한 작가만의 독특한 관 점을 위한 극사실적 상상력에 의존한다고 보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진 지한 태도는 상업주의로 비판받는 여타의 팩션과는 거리가 있다. 작품 이 단기간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상업적 의도로 독자를 유혹하는 출 판사의 마케팅 전략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 간의 상호공감 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그 배경에는 다문화 시대라는 사회적 상황 이 작용한다는 것이 이 연구의 전제이다. 그러면 왜 독자들은 역사소설에, 그리고 김훈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 일까? 한편으로 그것은 작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독자의 문제이다. 김훈 은 칼의 노래 에 이어 남한산성 을 발표함으로써 작가적 위치를 보다 확고히 했다. 남한산성 은 출간 2주 만에 5 만 부, 한 달 보름여 만에 10 만 부의 판매부수를 올렸다. 주요 독자의 성별과 연령층을 파악 한 결과에 따르면, 남성 독자가 여성 독자보다 두 배나 많고, 전체 독자 중 30대가 30~40 퍼센트 정도로 집계 되었다. 4) 따라서 남한산성 의 독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층은 반응과 주독자층이 30 대 남성 독자이다. 독자들의 폭발적 30대 남성 직장인이라는 분석이 김훈의 작가적 특성 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평론가 사이에서 다양한 진단이 나왔으나 여기 서는 다문화 라는 코드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작품 분석에 앞서 이 글이 사용하는 다문화 의 개념, 다문화 사회와 새로운 역사 인식 또는 역사적 태도 에 대해서 살펴본다. 2. 다문화주의 담론과 역사 인식 우리는 한국인으로 태어났는가, 아니면 한국인으로 되었는가? 국사 시간에 학생들이 교사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대답을 할 것 인가? 5) 단일한 혈통과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문화로 단일민족으로서의 4) 차미령, 남한산성 리포트, 문학수첩, 가을, 32 면. 5)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편, 다문화 사회와 국제이해 교육, 동녘, 2008, 40 면.

9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9 정체성을 삼아온 한국인에게 다문화 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 다. 이성적으로는 인정한다 해도, 정서적으로 혹은 몸 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민족을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 로 규정하는 주장이 나오고, 단일민족 이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주장6)이 더해지면서 혼란은 커 진다. 역사가 과거의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현재와의 관계, 나아가 미래의 전망과 관련된 하나의 기술이라면 다문화사회로의 추세를 직시하고 한 국사 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탈식민주의의 등장과 최근의 역사적 흐 름은 특히 침묵과 은폐에 의해 왜곡된 과거를 재구성하고, 주변화 되고 억압되었던 하위 주체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역사란 집 단적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종의 사회적 기억장치 7) 라고 할 때, 지 나간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시키고 혹은 망각시키는 역사의 기술 방식 은 역사 바깥의 기록들, 특히 문학적 기술의 도움과 도전을 동시에 받 는다. 역사소설 중에서도 어떤 작품은 독자들에게 기존의 역사관을 재 생산하는 장치로 쓰이며, 반대로 일군의 작품들은 정사가 말하지 못한 새로운 역사 읽기와 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면 단일민족신화는 한국 현대사에서 어떠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문학사에서는 역사소설의 형성과 분화 과정에 어떻게 관계하고 있을까. 작품은 고립된 산성에서 청나라에 포위된 채로 명나라를 향해 신년의식 을 드리는 조선의 태도를 통해 중화의식의 극단을 보여준다. 조선이 오 6) 단일민족 이란 표현은 손진태의 국사대요 (1948) 에 처음 등장한다. 족 보상의 혈통으로 보면 단일민족이란 성립할 수 없음에도 단일민족 신화를 만들어 낸 이유는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이룩한 신생국가의 내적 통합을 위 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통합과 분단 극복 및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제의 이념적 기초로 작동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단일민족주 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이것을 원리로 해서 국사(National History) 가 구성되었다. 단일민족임을 기억하게 만드는 과거만을 역사로 서술하고, 다 른 과거는 망각하는 방식으로 국사 를 서술했다. 위의 책, 면. 7) 김기봉, 앞의 책, 26 면.

10 10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랑캐를 무시한 것은 혈통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은 조선 시대까지는 화 이의식 ( 華 夷 意 識 ) 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과 더불어 스스로를 문명 이 라 생각하고 주변의 여진족이나 일본을 야만이라 간주해왔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인종 이나 민족 개념보다는 문명의 성취여부가 중시되었 다. 8) 구한말에 언어문화역사와 함께 혈통을 강조하는 독일의 민족 개념이 일본을 통해 들어오고, 전통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상실하고 일 본의 병합과 내선일체론 등 민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사상적 공세에 직면하면서 우리도 혈통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형성된 단일민족 주의는 분단과 625, 그리고 냉전을 거치면서 강화된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나 강대국 불신과 원망은 단일민족 개념이 재생산되는 배경을 마 련했고, 권위주의적 정권은 대내외의 도전에 대해 얼마나 민족주의적인 가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려했다. 9) 민족주의적 역사소설은 이와 같은 단일민족 신화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민족적 영웅을 중심으로 한 단결과 희생으로 파시즘적 논리를 내면화하는 은밀한 기능까지 수행 했다. 황석영의 장길산 을 비롯한 민중적 역사소설 역시 지배자 중심 의 역사 기술에서 벗어나 민중을 주체로 한다는 시각의 전환에 기여했 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영웅적이며 민중은 추상적이고 도식적이었다. 비 슷한 시기 북에서 출간된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은 작가의 세밀한 묘사력을 통해 민중의 일상을 표면적으로 반영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 나 이들 소설도 여전히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까 닭에 개인의 삶, 미시적인 역사를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민족이나 민중 이라는 절대적 존재 앞에서 개인은 한없이 작아지거나 소멸된다. 그리 고 다른 목소리, 다른 문화는 무시된다. 10) 큰 목소리로 소리 높여 외쳐 8) 비교적 폐쇄적이었던 조선시대에도 한국인과 외국인의 경계는 유교적 보 편가치를 습득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화적 가치였지 인종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경기도다문화교육센터 편, 다문화교육의 이론과 실제, 양서원, 2009, 22 면. 9)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편, 다문화 사회의 이해, 동 녘, 2008, 면. 10) 하나의 국가 공동체 내에는 과연 하나의 문화만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

11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11 지는 문화가 있다면 낮은 목소리로 숨죽여온 문화가 존재한다. 11)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 는 이주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려는 시도로서 세계화의 진전이나 이주의 시대 가 도래함에 따라 나타난 현 상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다문화주의는 현대 사회가 평등한 문화 적정치적 지위를 가진 상이한 문화집단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서구에서는 현대 사회의 생활이 점점 더 복잡한 성격을 띤다 는 인식 아래 여성 문화, 소수파 문화, 비( 非 ) 서구문화 등에 대한 논의 로 확장시켜 바라보기도 한다. 12) 이 글도 다문화주의를 한 사회 내 다 양성을 인정하는 관점으로 폭넓게 이해하고자 한다. 이는 동화의 관점 을 비판하며, 다양한 집단 간의 차이점이나 공통점보다는 개성과 독특 성에 관심을 두는 입장이다. 본론에서는 역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 이 최근 역사소설, 특히 팩션의 역사인식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 작품 분석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3. 병자호란의 문학적 형상화 병자호란 시기 남한산성에서의 역사적 사실을 다룬 기록들은 매우 해야 하는가? 국가 문화 혹은 공유된 문화를 큰 문화, 즉 거시문화 (macroculture)라 칭한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보다 작은 문화를 미시문화 (micriculture) 라 칭할 수 있다. James A. Banks, 다문화교육 입문, 모경환 외 역, 아카데미프 레스, 2008, 84 면. 11) 역사는 민족의 기억, 국가의 자랑스러운 공적 기억으로 전승되면서 사회 성원들에게 소속감을 부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과 통제의 기제이 기도 했다. 그러나 대문자로서의 역사 가 쇠락한 지금의 현실에서 역사는 사실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탈근대의 역사의식은 무엇보다 국민국가 또 는 민족의 서사를 표방해온 역사소설의 관습과 결별한다. 유임하, 기억의 귀환과 역사의 분화 : 최근 역사소설의 경향, 문학 수첩, 여름, 40 면. 12)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편, 다문화 사회와 국제이해 교육, 동녘, 2008, 면.

12 12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풍부하다. 먼저 공식기록인 인조실록 에는 인조 14 년 즉 병자년 (1636) 12월부터 다음해인 정축년 1월까지의 매일 매일의 사실이 실록 33권에 서 34 권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13) 최명길의 병자봉사 ( 丙 子 封 事 ) 와 김상헌의 남한기략 ( 南 漢 紀 略 ) 에서 척화와 강화 양측 대표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남한산성에서 수난을 직접 겪은 사람 들의 실기가 다양하게 전한다. 나만갑의 병자록 ( 丙 子 錄 ) 역시 항복 에 이르게 된 사정을 날짜별로 기록하면서 척화와 강화 양파의 움직임 을 소상히 부각시켰다. 석지형의 남한해위록 ( 南 漢 解 圍 錄 ) 은 하급관 리 입장에서 남한산성에서 포위 당했다가 풀려난 전말을 목격한 대로 다루면서 군사들의 지휘부 불신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종9품 말직에 종 사하던 남업의 병자일기 ( 丙 子 日 記 ) 에서는 군사들이 들고 일어나서 고담준론만 일삼는 문사들이 적병을 막아보라고 임금에게 들이닥치는 장면이 나온다. 한편 산성일기 는 국문본 실기로서 실감나는 묘사로 척화파를 옹호하고 주화파를 비난하였다. 14) 이러한 자료들은 남한산 성 에서 묘사하는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의 밑바탕이 되며, 소설과 역 사적 기록간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15)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남한산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선택한 소 설들로 먼저 우리 고전의 박씨전 과 임장군전 을 들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실제 역사적 인물들에 허구를 섞어 청나라에 당한 굴욕을 소설 을 통해 복수하고 있다. 박씨전 은 병자호란 때 수어사를 지낸 실제 인물 이시백의 가정을 중심으로 박 씨라는 가공인물을 설정하여 역사적 사실과 환상성을 결합해 임병양란 후 국가를 보위해야겠다는 대각성과 13) 인조실록 15, 민족문화추진회, )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 제3 판, 지식산업사, 1994, 면. 15) 최근의 자료로 윤용철이 엮은 남한산성 굴욕의 47 일 ( 서울교과서, 2007) 은 조선왕조실록, 병자록 및 정약용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자료가 야사를 배제하고 기록을 통한 사실 의 재구에 초점을 맞췄다면 주돈식의 조선인 60 만 노예가 되다 ( 학고재, 2007) 는 남한산성에서의 47일뿐만 아니라 이후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 의 수난사까지 다루며, 민중의 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김분남과 길영복 같은 가공인물을 창작하여 역사적 기록의 팩션화 경향을 보여준다.

13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13 함께 무능한 사대부에 대한 민중의 원한과 분노를 보여줬고, 임장군 전 역시 인조 때 명장 임경업을 민족적 영웅으로 부각시킨 역사소설로 전란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저항 혹은 승리를 임경업의 철수군 기습을 통해 부분적 전과로 가구하여 상처받은 민중의 공감대를 확보하 고 대청적개심을 극대화하였다. 16) 박 씨가 가공의 인물인데 비하여 임 경업이 실제인물인 만큼 허구적 요소의 차이는 있으나 두 작품이 지닌 역사적 사실에서의 굴절소가 양란 후 민중들의 민족감정이요,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형성된 역사의식 내지 영웅적 형상화이다. 17) 이와 같이 당 대 사대부들의 기록은 주로 척화와 강화의 논리의 잘잘못을 논한다면, 하급관리들은 병란의 실상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민중들은 영웅의 창조 를 통해 민족적 굴욕을 극복하고자 한다. 현대문학에서는 우선 역사소설의 대가들이 이 역사적 소재를 놓칠 리 없다. 박종화의 대춘부 ( 待 春 賦 ) 나 유주현의 통곡 이 그것이다. 특히 대춘부 는 1937년에서 1938 년까지 매일신보 에 연재되고, 해 방 후 1949 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된 박종화 역사소설의 대표작으로 임경업이라는 이상적 인물을 제시하여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민족적 자 부심을 고취 18) 하였다고 평가된다. 하근찬은 남한산성 (1979) 에서 주 화파와 척화파가 서로 대립은 하지만 결국 애국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는 주제로 중도적이고 정반합적인 역사 해석을 보여준다. 19) 신 봉승의 남한산성 (1985)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주인공 인조가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삼전도의 치욕을 묘사했다. 20)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한 전작들과 달리 홍성암의 남한산성 (1992) 은 민중적 관점에서 병자호란을 형상화하고 있다. 21) 이들은 작품이 창작되던 시기 16) 김기현 역주, 박씨전 / 임장군전 / 배시황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5, , 면. 17) 소재영, 임병양란과 역사의식, 한국연구원, 1980, 309 면. 18) 방인석, 대춘부 해설, 박종화, 대춘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8, 20 면. 19) 최일수, 본격성을 갖춘 역사소설, 하근찬 외, 민족문학대계 14-남한 산성, 1979, 510 면. 20)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 34- 남한산성, 금성출판사, 1985.

14 14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의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을 반영하면서 차이를 보이나 기본적으로 역사 소설이 가져야 할 특성들은 공유하고 있다. 정호웅은 한국 근현대 역사 소설 일반의 공통된 미학적 특질로 인물 성격의 강렬성과 불변성, 무 시간성, 윤리적 이분법, 이야기성우연성초현실성, 장식성 등을 들 수 있음을 밝혔다. 22) 그런데 김훈의 남한산성 은 이상의 역사소설 문법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김훈의 역사소설이 보여주는 새로움에 대해 작품의 인기만큼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각도에서 적지 않은 평론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김 영찬 23) 은 김훈 소설이 역사소설의 외양을 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역사의 옷을 빌려 작가가 생각하는 세상의 이치와 자아의 자리를 되새 기는 자의식적 소설로 본다. 이런 독백적 역사소설 에는 인물 각자의 성격화나 극적인 서사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인물들의 내면은 그가 누구이든 작가의 내면을 크건 작건 나누어 갖고 있어 딱히 갈라 구분되 어야 할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뒤에 숨어 상황을 섭정하고 인물의 내면에 투사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삼인칭의 서사적 틀을 무력하게 만든 다. 따라서 그것은 모두 세상의 길 위에서 선 나 의 이야기다. 24) 그런 21) 홍성암의 남한산성 은 정권욕으로 암투하던 왕실 사대부들의 실상과 반민족적 굴욕 외교를 비판적으로 묘사하며 동시에 조선민중은 이 땅을 지 키기 위해 일어나 싸워 나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개의 우리나라 역사소 설의 주인공들이 임금, 장수와 같은 역사적 인물, 혹은 의적과 같은 영웅화 된 인물이 대부분이었으나 남한산성 은 민중적 삶을 살고 있는 비정사 적, 민중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하귀천의 많은 신분군상들과 동시에 이귀, 이시백 등 역사적 삶의 현장을 객관적으 로 조명시켜 주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중도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는 기 존 역사소설의 한계를 극복해 역사적 대사건을 통해서 오늘날의 삶의 자리 에 대한 의미망을 드러내 주고 민중적 시각을 통해 닫혀져 함몰되어 있던 역사를 문학적으로 발굴, 복원시켜 주었다. 김재남, 대하 민중 역사소설 남한산성, 홍성암, 남한산성 1, 태학 사, 1992, 면 참조. 22) 정호웅, 한국의 역사소설, 역락, 2006, 36 면. 23) 김영찬, 김훈 소설이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 창작과 비평 137, 가, 390 면. 24) 신예 평론가 정여울 역시 김훈 소설을 팩션의 정의 자체를 변성시킨 소

15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15 데 김훈의 소설은, 어쩌면 다양한 입장과 취향에 따라 갈리는 저 수다 한 규정들에 제 몸을 내맡겨 그 입장과 취향이 교차하고 논란하며 경합 하는 격전지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일종의 공백의 기표(empty signifier) 와 같은 것 25) 이라는 김영찬의 주장은 이 작품을 해석하는데 생각할 문제를 제공한다. 작품은 공백의 기표 인가 작가의 내면적 독 백 인가. 본론에서는 바로 이 공백 과 독백 의 역사 읽기의 모순적 구도 가 작품 형성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겠다. 4. 남한산성 작품 분석 1) 말의 성, 글의 길 전하, 지금 성 안에는 말[ 言 ]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 馬 ] 먼지 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 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적에게 닿는 저 하얀 들길이 비 록 가까우나 한없이 멀고, 성 밖에 오직 죽음이 있다 해도 삶의 길은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뻗어 있고 그 반대는 아닐 것이며, 삶은 돌이킬 수 없 고 죽음 또한 돌이킬 수 없을진대 저 먼 길을 다 건너가야 비로소 삶의 자리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길을 다 건너갈 때까지 전하, 옥체 를 보전하시어 재세在 世 하시옵소서. 세상에 머물러주시옵소서.(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면) 설사적 성취로 보면서도 그가 역사를 통해 발화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철 학뿐이며 어떤 자료를 줘도 김훈적 철학으로 스스로를 오마주한다고 보았 다. 김훈이 그린 우륵과 이순신과 김상헌의 상동성을 발견하는 것이 칼과 가야금과 붓을 들고 있는 차이를 찾기보다 쉽다는 주장이다. 정여울, 팩션적 글쓰기와 미디어 친화력, 문학과 사회 79, 가 을, 302 면. 25) 김영찬, 앞의 글, 388 면.

16 16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남한산성은 작가의 비유에 따르자면 돌이 아니라 말로 쌓은 성이요, 고립된 산성에서의 40 일간의 기록은 말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를 형상 화한 이 책 역시 말의 책이다. 작품에서는 김상헌과 최명길, 이른바 척 화파와 주화파의 입장뿐만 아니라 왕 인조의 입장, 영의정 김류의 입장, 직접 군사들을 지휘하는 이시백의 입장이 말로써 경합하며, 여기에 이 름 없는 나루터 뱃사공과 대장간 서날쇠의 침묵의 말이 교차한다. 어떻 게 보면 말의 성 의 주민들인 인조, 김상헌, 최명길, 서날쇠, 사공 등은 살아있는 작중 인물이라기보다는 기호 26) 와 같은 존재이다. 27) 여기서 말에 대한 냉소적 시각과 달리 이 텍스트를 하나의 대화적 소설로 해석 해 볼 여지도 있다. 28) 역사 속에서 그랬듯이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대화하고 다투고 싸우고 지쳐가고 있지만 작가는 어느 하나의 입장에도 손들어 주지 않 는다. 날마다 그 말들의 전쟁을 겪은 마지막을 왕은 성안에 있었다라고 사관은 담담히 기술하고 있듯이 작가는 그저 책상 앞에 있다. 김훈이라 는 새로운 사관은 그동안의 역사에서 강변하는 사실에 구애받지 않고 26) 장석주는 그들을 살과 피를 가진 구체적 현존의 실감이기보다는 사물적 존재성을 수행하는 익명의 기호로 본다. 장석주, 김훈 소설, 혹은 그 이마고에 대하여, 문학의 문학, 가을, 349 면. 27) 한편 작품에는 여성이라는 기호는 등장하지 않는다. 남한산성에는 많은 말 이 난무하지만 여성의 말은 은폐되어 있다. 단지 사공이 남기고 간 딸 나루가 있을 뿐이다. 전쟁 이야기에는 흔히 남자들만 나오지만 실제로 전 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부녀자과 아이들이다. 병자호란의 문학적 형상화중 남자들의 전쟁이 여성과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여성 작가 이남희의 단편 허생의 처 ( 또 하나의 문화 3, 1987)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병자호란을 직접적 배경으로 하지 않지만 허생전의 전사로서 다루면서, 주변부의 삶에 속박되어 상처받아왔 던 여성의 삶을 전경화 함으로써 다문화주의적 시각에서도 의미 있는 성취 를 거두었다. 28) 차미령에 의하면 말에 대한 회의는 작가의 주요한 주제 ( 앞의 글, 28 면)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이라는 인간 그 자체가 일반인을 대화와 논쟁의 장으로, 또 그가 쓴 책으로 유인하는 문제적 텍스트 (30 면) 이기도 하다. 즉 텍스트 내부의 대화성은 작가를 통해 외적으로 확대된다.

17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17 상상력으로 채워 쓴 남한산성 이야기를 일지 형식으로 담담히 기술하면 서 이것을 역사로 오해하는 독자들에게 소설로 읽어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사관처럼 작가는 겉으로 아무런 개입 없이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철저히 삼인칭으로 기술하는 기록자에 불과한 듯한 태도를 취하 지만, 작품을 통해서 남한산성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독자들에게는 결국 작가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다. 작가는 보이지 않지만 작가의 목소리만 남는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공백 이면서 독백 인 바로 이 모순적 구도가 바로 김훈의 역사소설 작법의 특징이다. 작 품은 공백의 기표로서 담론의 장을 제공하고 있으나 화자는 분명히 자 신의 독백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대화성이 가진 특징과 한계 가 있다. 한편 대화적 소설은 작품 내적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놓음으로 써 기본적으로 다문화주의적 접근을 허용하며, 작품 바깥에서는 기존의 역사 소설이 보여주는 거시적 접근법과 다른 소수자의 시각을 보여준다 는 점에서 다문화적이다. 그런데 김훈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커다란 반 향을 보면 이 시대에는 그것이 단지 소수자의 시각이 아닌 오히려 묻혀 있는 다수임을 상기시킨다. 현대 독자들에게 남한산성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오래된 전쟁은 역사가 아니라 이야기일 뿐이다. 독자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전쟁, 자신들이 날마다 살고 있는 전쟁을 본다. 작가는 독자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비루함을 토닥여 줌으로써 위로 를 제공한다. 이점이야말로 30대 남성 직장인들이 이 작품에 호응하는 이유라는 지적이 나온다. 역사 앞에서 희생은 당연시 되고 민족의 이름 이든 민중의 이름이든 이견을 제시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담론의 분 위기를 애써 무시함으로써 이 소설은 자유롭다. 작가가 보여주는 독백 의 자유가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다문화주 의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2) 역사 속의 개인 발견 하상일 29) 은 지금 독자들이 역사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

18 18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의 확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격변을 몸소 체험했던 그 시대 인 물들의 내면의 고뇌와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적 진실의 복원에 있으며, 최근 역사소설의 방향이 팩션화로 기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독자들이 역사소설을 통해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 의 확인이 아니라 그동안 전혀 역사화 되지 못한 개인성의 영역을 들여 다보는 것이다. 장석주 30) 역시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이 다 같이 천 하의 지배권을 다투는 영웅호걸을 다루지 않고, 개별자와 개별자가 수 행하는 말과 행위들, 너른 세상에 떠도는 작은 주체들의 이야기를 풀어 낸다고 보았다. 그동안의 역사 속에는 개인은 없었다. 영웅이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십여 합에 쓰러지거나 하루 밤새 일만 병력을 잃거나 단지 숫 자, 그것도 신뢰할 수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굳이 전쟁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평범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칼의 노래 에서 성웅만 있고 인간은 없던 이순신에게 사람을 찾아주 었던 김훈은 역사책 속의 김상헌, 최명길에게 척화파, 주화파라는 추상 적인 인물이 아닌 개인의 모습을 찾아주었다. 개인 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이니 당시의 백성들, 그리고 척신들조차도 개인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역사소설은 그들에게 개인 을 찾아준 것이다. 혹자는 작품에서 김상헌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나루터 뱃사공이나 그의 어린 딸에 주목하고, 대장간 서날쇠에 주목한다. 김상헌은 똥국물에 시선을 박은 채 중얼거렸다.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 라고 김상헌은 읽은 적이 있었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121 면) 29) 하상일, 남한산성 을 통해 본 한국소설의 가능성, 기획회의 210, , 47 면. 30) 장석주, 앞의 글, 면.

19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19 노비 출신으로 전란 중에 공을 세워 정이품 통정대부에 이른 서흔남 을 실존 모델로 형상화 31) 한 서날쇠는 말의 역사에서 몸의 역사로 가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모든 인물과 대비된다. 그는 몸과 노동에 대 한 김훈의 평소 생각을 형상화한 인물이다. 32) 말의 허망함에 비하여 일 과 몸과 사물은 서로 일치하며 살아있다. 따라서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 립이 아니라 김상헌과 서날쇠 사이의 대립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 장 33) 도 나온다. 말이 몸, 관념이 아닌 사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민중 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다만 적 을 잡는 초병이오 라고 대답하는 수어사 이시백 역시 같은 부류의 사람 이다. 끝으로 또 한 명 독자들이 주목할 안타까운 인물이 이름조차 주 어지지 않은 무명의 뱃사공이다.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로.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31) 김훈, 남한산성 - 또 하나의 이야기 ( 비매품 ), 학고재, 24 면. 서흔남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에 전하기를 직업 이 없이 때로 무당 노릇을 하거나 대장장이를 하다가 임금의 유지를 들고 각 도를 돌면서 정세를 파악하고 온 공로로 일약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 다. 윤용철, 앞의 책, 170 면. 32) 김훈은 이제마의 글이 몸과 마음의 구획을 허물고 인간의 몸을 삶의 변 두리에서 삶의 핵심부로 밀어올린다고 했다. 삶과 시간이 몸속에서 합일되 면서 역사를 이룬다는 것이다. 또 책을 덮고 몸의 소리를 들어보자고 했다. 손은 언어보다 위대하여 세상과 타인을 움켜잡고, 쓰다듬고 깨우고 재우고 변형시킨다 했다. 김훈, 김훈 세설- 너는 어느 쪽이냐 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생각의 나무, 2004, 면. 33) 김인환, 말과 길, 사회비평 37, 2007, 가을, 163 면.

20 20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 중략)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김상헌은 허리에 찬 환도 쪽으로 가려는 팔을 달래고 말렸다. 김상헌은 울음 대신 물었다. 너는 어제 어가를 얼음 위로 인도하지 않았느냐? 어가는 강을 건너갔고 소인은 다시 빈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소이다.(44 면) 위 인용문은 백성은 누구인가 에 대한 작가의 답으로서, 김상헌과 사 공의 대화는 실제 백성과 지배계층이 마음대로 생각한 백성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장면은 일차적으로 과거 지배계층 현 실인식의 비현실성에 대한 비판이나 또는 현재의 정치세력에 대한 우회 적 비판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서날쇠와 같은 인물을 통해 우직하고 끈 끈한 민중이야말로 숨어 있는 민족의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하는 독자들 의 기대와 달리 사공은 청병과 어가를 가리지 않는 한 척 나룻배와 같 다. 양반 앞에서 당돌한 대답을 감추지 않는 사공의 솔직함이 사실적일 까 싶지만 이것 역시 민중에 대한 추상적 인식의 비현실성을 비판하는 작가의 관점을 보여준다. 어차피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사관을 이야기 할 뿐이라면, 이러한 작가의 냉소적 묘사가 이번에는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 것인가 생각해보자. 독자들은 작품 읽기 과정에서 사공의 태도를 백성의 실제 모습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이 겪은 삶과 일치되는 느낌 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곧 독자들에 대한 변명 이기도 하다. 근현대사의 위기의식이 이념에서 비롯된 갈등을 반영한다 면, 이 시대에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갈등이 현실적 위기이다. 이 념 대립에도 명분이 필요하듯 현실적 갈등에도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는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명분이 필요하다. 나루터 대화에서 민족이란 좁쌀 한 줌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삶의 궁핍함과 위기의식은 나아가 배신마저도 합리화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세습노비 출신으로 고향을 버 리고 청나라 통역관이 된 정명수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민족주의적 역사소설에서 정명수를 부끄러운 매국노로 묘사한 것과 달리 김훈은 칸 의 대리자로서의 정명수의 입과 말에서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조선 조정 과 신료들이야말로 부끄러운 모습으로 묘사한다.

21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21 그러면 왜 다시 개인인가? 개인은 작품의 배경인 조선 중기의 인간 형은 전혀 아니다. 전근대사회에서 개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왜 작품은 개인을 말하는가. 여기에는 개인은 1990 년대 이후의 생산물로서, 팩션의 유행은 개인주의의 산물이며 현실사회주의 몰락 후 출판계는 역 사성이라는 담론을 단번에 포기하고 개인주의를 추구했다는 한 출판인 의 지적 34) 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작가 김훈은 병 자호란의 기록을 역사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주의를 표현하는 하 나의 알레고리로서 이용한 것이다. 35) 여기서 알레고리가 추구하는 정치 적 의미는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36) 작품의 정치적 전략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3) 탈역사화와 다문화주의 평론가 박진은 남한산성 은 정치사전쟁사의 전형적인 영웅이야 기( 대문자 역사) 를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병자호란이라는 사건의 역사 적 의미마저 해체하였다고 보았다. 부딪쳐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 34) 한기호, 왜 팩션인가, 오늘의 문예비평, 여름, 282 면. 35) 최근의 역사소설이 직접적으로 지금- 이곳 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 지만, 대타자가 붕괴된 상황 속에 처한 현대인의 곤경과 그로부터 비롯되 는 여러 가지 삶의 방식들을 에둘러서 말한다는 분석과 맥을 같이 한다. 이경재, 2000 년대 역사소설의 새로운 모습, 문학수첩, 봄, 63 면. 36) 남한산성 의 인기는 한동안 신문 칼럼에 좋은 글감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백성들의 삶과 유리된 주전론과 주화론의 허망한 논쟁은 책이 출간된 2007 년 봄 여권의 대선전선과 유사하다는 지적( 김정열, 대선에서 바람직 한 전직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 소설 < 남한산성 > 과 여권의 대선전 선, 데일리안, ) 이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다면, 박정희를 작중 뱃사공에 비유해,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어떠한 치욕 도 감내하고 자존해야 한다는 논리가 IMF의 치욕을 겪은 비참한 사람들의 심리적 기반이자 한국자본주의의 현재 모습이라는 지적( 김헌식, 남한산성 현상 과 박정희 현상, 데일리 서프라이즈, ) 은 독자들의 반응 과 연결된다.

22 22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나 ( )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 갈 수밖에 없을 것 이라는 이 소 설의 허무주의는 말 들의 무의미와 공허함만이 아니라 역사 자체의 허 망함을 암시한다. 독자들이 느낀 비장함은 조국의 무참한 운명 때문이 아니라, 굴욕적이고 참담할지라도 하루하루를 절박하게 살아 내고 살아 남아야만 하는 우리 자신의 초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에 서 역사는 현재화되고 탈역사화된다. 독자들이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일 수 있게 한 것은 우리 시대에 와서 확산된 역사에 대한 관점의 전 반적인 변화였을 것이다. 김훈의 남한산성 은 정치사나 전쟁사의 영 웅적이고 사건 중심적인 경향을 탈피하고 민족- 국가주의와 진보의 이 데올로기를 해체하는 역사소설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37) 이와 같은 주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역사소설을 바라보는 작가 의 새로운 시각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시각 변화이다. 왜 독자들이 남 한산성 을 읽느냐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준다. 작품의 해체적 전략을 정치적 허무주의로 비판한다면 그것은 작가를 넘어서 당대의 독자들에 대한 비판이 된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탈역사성도 또 하나의 역사적 태도이다. 탈역 사성 에서 말하는 역사 의 개념에 대해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이 등장하였다. 탈역사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민족주의 시대 의 역사관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반면 다문화적 맥락에서 바라보면 남한 산성에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교훈도 달라진다. 괴이하구나. 저것이 싸우려는 성이냐? 정명수가 대답했다. 견디자는 것이지요. 견디어? 견딜 수가 있겠는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자는 것입니다. 저 안에 들어가서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겐가? 안에서 저희끼리 싸우고 있을 겁니다. 견디어야 하는 놈들끼리의 37) 박진, 역사소설이라는 이름의 혼종지대 - 팩션시대의 역사소설, 대중서 사장르연구회 편,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 2. 역사허구물, 이론과실천, 2009, 면.

23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23 싸움일 테지요. 그래도 저들에게 무슨 계책이 있을 것 아닌가.(75 면) 오늘날 병자호란의 원인은 인조를 옹립한 서인들의 무모한 친명정책 과 청 배척으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의 유연한 외교정책이 당시로선 우 리가 취할 수 있는 차선책이었다. 그러나 외교정책은 단순히 국가 간의 이해관계나 명분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서도 결정 된다. 작금의 대북 정책이나 동아시아 정책도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기도 하다. 집권 초 철저한 반공정책을 취했던 박정희 정부가 1970 년대 에 남북회담을 주도했던 사실처럼 외교 관계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남한산성 의 30대 남성 독자들은 유신 때 태어나 80년대에 초중등학 교에서 국사 를 배운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뇌리에 처음 각인된 김상헌 과 최명길의 이름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척화와 주화의 논리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시각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남한산성 이 표면적으로 척화파의 논리를 비판하고 주화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아 니다. 김훈은 말 들의 싸움을 경계하고 길 을 잃은 말 들이 보여주는 모든 행로를 비판하고, 척화의 주화의 이분법적 논리를 넘어서고자 했 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역사적 무관심과 정치적 허무주의를 가져온다고 비판한다면 그것은 다문화주의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문화 간의 경계를 허무는 다문화주의는 비역사적이고 비정치적으로 보인다. 그러 나 현실 속의 다문화주의는 실제 매우 적극적인 정치적 태도이다. 역사 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이어지는 선상에서 구축되는 것이 라면, 과거에 의해 현재와 미래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거가 재해석되어야 한다. 다문화사회를 지향하는 시점에서 역사 소설은 고쳐 써야 한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전쟁의 기억을 환기하며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존한 감동 만 자아내기에 급급한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과거처럼 호응하지 않을 것 이다. 역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을 배제하여 망각시킨다고 한다. 그

24 24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렇다고 새로운 역사소설이 망각의 역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붉은색 페인트로 덧칠해진 삼전도비가 여전히 송파에 남아 있다. 아무도 말하 지 않으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 이 작품은 말의 역사 에서 외면된 몸의 역사 에 관한 작은 진실이기도 하다. 최명길이 말했다. 상헌은 제 자신에게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적들 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온데, 상헌이 말하 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옵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 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 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伯 夷 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 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주소서. 김상헌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소리쳤다.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 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면) 소설은 사실이 아닌 진실을 다룬다. 역사의 지식이 엄밀한 의미의 과학 이 아니라 믿음 에 근거한 것 38) 이라면 역사소설도 예외는 아니 다. 진실은 사실이 아니므로 따져 물어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보이지 않 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굳이 역사소설에서만이 아니라도 우리는 소설 에서 길을 묻는다. 소설은 길의 시작이다. 다문화주의 시대의 역사소설 은 망각보다는 오히려 기억의 회복에 있고, 과거와의 새로운 대화의 시 작이다. 남한산성 은 탈역사화된 망각의 서사가 아니라 무시당하고 묻혀버린 기록의 발굴이다.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밟고 지나가야할 글 이자 길 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부끄럽고 고통스런 길이 바로 다문화 시대 역사소설의 길이다. 38) 박진, 우리는 왜 팩션에 열광하는가, 문학과 사회 72, 겨울, 221 면.

25 다문화 시대 우리 소설의 역사 읽기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연구는 이 시대를 다문화 시대 라 전 제하고, 김훈의 팩션 남한산성 을 다문화 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분석 하여 우리 소설에서의 역사 읽기 방식을 살펴보았다. 첫째는 말의 성 남한산성이 보여주는 공백 과 독백 의 역사 읽기이 다. 그런데 작품이 공백의 기표 이자 작가의 내면적 독백 이라는 주장 을 다시 생각해 보면 공백 이면서 독백 인 바로 이 역설적 지점에 김훈 의 소설 작법의 특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 인물과 화자를 구별할 때 이 작품은 다양한 인물을 위해 담론 공간으로서 공백의 기표 를 제공하고 있으나 화자는 분명히 자신의 독백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 서 작품의 대화성이 가진 특징과 한계가 있다. 수많은 인물들의 말의 노래 에서 드러나는 공백의 공간, 그리고 작가가 보여주는 독백의 자유 가 이처럼 독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이 사회가 그만큼 다문화 주의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입증한다. 둘째는 역사 속 개인의 발견이다. 그런데 개인 이 역사에 등장한 것 은 근대 이후이니 당시의 백성들, 그리고 척신들조차도 개인일 수는 없 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역사소설은 그들에게 개인 을 찾아준 것이다. 작품에서 김상헌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나루터 뱃사공이나 그의 딸, 그 리고 대장장이 서날쇠의 등장에 주목해야 한다. 다성적인 인물 구도에 도 불구하고 작가의 태도는 말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주체들에 대해서는 냉정한 태도를 보이며, 반대로 몸으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이들을 옹호 한다. 백성의 존재감이 무시되던 영웅주의적 역사소설이나 민중적 주체 로서만 인정받을 수 있던 민중적 역사소설에 비해 이 소설은 백성도 개 인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이는 근대적 개인의 자각이라기보 다는 소수자의 존재 인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다문화적 변화의 흐름에서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셋째는 탈역사화와 다문화주의와의 관계이다. 탈역사성도 또 하나의

26 26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역사적 태도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해체적 전략이 정치적 허무주의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이는 작가에 대한 비판을 넘어 당대 독자들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탈역사성 에서 말하는 역사 의 개념에 대해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탈역사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민족주의적 시대의 역사관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반면 다문화적 맥락에서는 남한산성에서의 경험이 주는 교훈도 다 르게 해석된다. 남한산성 은 탈역사화된 망각의 서사가 아니라 무시 당하고 묻혀버린 기록의 발굴로서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밟고 지나가 야할 글 이자 그것은 동시에 다문화 시대 역사문학이 가야할 길이 된 다.

27 < 참고문헌 > 경기도다문화교육센터 편, 다문화교육의 이론과 실제. 양서원, 김기봉,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프로네시스, 김기현 역주, 박씨전 / 임장군전 / 배시황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김성곤, 팩션 환상과 현실의 경계 해체, 기획회의 136, 김영찬, 김훈 소설이 묻는 것과 묻지 않는 것, 창작과 비평 137, 가을. 김인환, 말과 길, 사회비평 37, 2007, 가을. 김훈, 김훈 세설- 너는 어느 쪽이냐 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생각의 나무, 2004., 남한산성, 학고재, 대중서사장르연구회 편,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 2. 역사허구물, 이 론과실천, 문흥술, 역사소설과 팩션, 문학과 환경 6, 민족문화추진회 역, 인조실록 15, 민족문화추진회, 박종화, 대춘부, 지식을 만드는 지식, 박진, 우리는 왜 팩션에 열광하는가, 문학과 사회 72, 겨울. 소재영, 임병양란과 역사의식, 한국연구원, 신봉승, 조선왕조 500년 34- 남한산성, 금성출판사,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편, 다문화사회와 국제이해교 육, 동녘,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편, 다문화사회의 이해, 동 녘, 윤용철, 남한산성 굴욕의 47 일, 서울교과서, 이경재, 2000 년대 역사소설의 새로운 모습, 문학수첩, 봄. 장석주, 김훈 소설, 혹은 그 이마고에 대하여, 문학의 문학, 가을. 정여울, 팩션적 글쓰기와 미디어 친화력, 문학과 사회 79, 가 을. 정호웅, 한국의 역사소설, 역락, 2006.

28 28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 제3 판, 지식산업사, 주돈식, 조선인 60 만 노예가 되다, 학고재, 차미령, 남한산성 리포트, 문학수첩, 가을. 하근찬 외, 민족문학대계 14- 남한산성, 하상일, 남한산성 을 통해 본 한국소설의 가능성, 기획회의 210, 한기호, 왜 팩션인가, 오늘의 문예비평, 여름. 홍성암, 남한산성 1, 태학사, James A. Banks, 다문화교육 입문, 모경환 외 역, 아카데미프레스, 2008.

29 <abstract> Reading of the History of our Novels in the Multi-Cultural Environment - <Namhan-San Fortress> by Kim Hoon - Kim, Myung-Seok (Sungshin Women's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Korean history can be learned through Korean novels, such as 'Namhan-San Fortress', with emphasis on the code of multi-culturalism under the assumption that Korea is entering the Age of Multi-culturalism. First, the novel 'Namhan-San Fortress' can be regarded as a fortress of words that provides historical information with 'vacancy' and 'soliloquy'. It can be understood that Kim Hoon's writing style embraces the paradox of 'vacancy' and 'soliloquy' by considering the assertion that a literary work is an expression of the 'vacancy' and internal 'soliloquy' of the writer. In the novel, the author expresses vacancy as space for conversations among various characters while the speaker leaves his own soliloquy to allow the reader to differentiate between characters and the speaker. In this respect, there are features and limits of conversation in the work. The fact that readers respond greatly to the space of vacancy shown in the 'Song of Words' by numerous characters, and the freedom of soliloquy by the writer proves that the Korean society is becoming Multi-cultural. Second, since the 'individual' has only started to appear in recent literature, people and even the royal family and the king were not allowed to be individuals in old books and stories. However this new historical novel has found 'individuality' for those people and makes it possible for the reader to witness the discovery of individual personalities in history. In the novel, it is important to pay attention to the appearance of the boatman who was killed by Kim Sang Heon's sword at the ferry, the boatman's daughter, and the blacksmith Seo Nal Swe. Despite the assignment of diverse

30 30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figures, the writer is cold towards the characters who prove themselves with words and protective towards characters who prove themselves with actions. Compared the historical novels that focused on heroes and ignored the ordinary people, or the novels that acknowledged people as only subjects of history, this novel reminds us that people are also individuals. This novel draws the readers through the trend of change into multi-culture that enables recognition of the existence of minorities rather than by the self-consciousness of individuals. Third is the relationship between anti-historism and multi-culturism. Anti-historism is another attitude toward history. If the destructive strategy of this work should be criticized as political nihilism, this could be a criticism against the current readers rather than against the writer. But there are people who do not agree with the concept of 'history' as it is described in 'anti-historism'. People who criticize anti-historism still talk with a nationalistic view of history while the lessons in 'Namhan-San Fortress' are translated in another aspect by the people who accept multi-culturalism. 'Namhan-San Fortress' is not a epic about history that was forgotten by anti-historism, but an excavation of records that were buried and ignored. Though sometime shameful and painful, the story and lessons should be deeply considered, and it is the way historical literature should be written in the age of multi-culturalism. * key words : Namhan-San Fortress, Byeongjahoran, Kim Hun, Multi-culturalism, Historical novel, Faction * 이 논문은 2009 년 6월 30일에 투고되어 2009 년 7월 31일까지 심사위원이 심 사하고 2009 년 8월 6 일 편집위원회를 통해 게재가 결정된 논문이다. 소 속 :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이메일 : mskim528@paran.com 연락처 : 주 소 :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3가 성신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1 특집/ 다문화시대와 텍스트의 변모양상 Ⅰ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 다문화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 최 강 민 차 례 1. 서구중심주의와 다문화주의 2. 언어의 불통과 인종주의적 편견 3. 민족 주체성과 미국의 우월주의 4. 비국민인 혼혈인과 단일민족의 신화 5. 소통의 가능성과 환상의 실체 6. 민족주의 담론과 시대적 한계 < 국문초록 > 1950, 60 년대에 한국에서 미국문화가 주류이고, 한국문화가 비주류가 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생한다 년대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압축 적 조국 근대화는 서구중심주의의, 미국화의 내면화 과정이었다. 이 시 기에 반공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는 조국 근대화를 위한 사상적 토대로 활용되었다. 또한 양공주와 혼혈인은 단일민족의 신화를 허물어뜨리는 위험 요소로 규정되어 비국민, 비민족, 비인종으로 배제되었다. 1950년 대의 한국소설에서 미국은 동경과 두려움, 구원자와 지배자라는 양가적 대상이었다. 1960년대의 한국소설에서 민족적 주체성이 강조되면서 미 국인들은 일방적 동경과 신비의 대상에서 벗어나 비판과 성찰의 대상이 된다. 양자는 작품에서 상호 대립하는 이원적 서사 구조의 형태로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한국적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특수 상황에서 다

32 32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문화주의적 시각은 제3세계 내지 후진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보 편성의 오류로 해석될 수 있다. 제1세계에서 민족주의가 다문화주의와 상호 충돌 관계라면, 제3세계와 후진국에서 양자는 한시적으로 상호 보 완적 관계를 형성한다 년대의 민족주의적 시각은 미국문화에 비판 적 입장을 취하면서 저항적 주체를 구성해 다문화로 나아가기 위한 기 초적 작업을 했다. 이 시기에 이영우, 김동립, 김용익의 소설은 다문화 주의적 텍스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 핵심어 : 다문화주의, 인종주의, 혼혈인, 양공주, 주한미군, 열등콤플렉 스, 우월주의, 비국민, 민족적 주체성, 조국 근대화, 단일민족 1. 서구중심주의와 다문화주의 근대국가는 민족과 국민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거대한 자본 시장을 형성한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자국의 시장에만 만족하지 못한 채 더 많 은 이익을 위해 국제교역을 하고 식민지를 개척하는 팽창의 길을 걸었 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제1 차, 제2세계대전 속에 식민지의 내적, 외적 모순이 겹쳐 붕괴된다. 전후의 자본주의는 영토를 점령하는 방식을 청산하고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이익의 확대를 꾀한 다. 특히 세계화 내지 지구화로 대변되는 후기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의 깃발을 내세우며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극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전세계적으로 대규모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탄생한다. 한국 은 1980 년대까지 노동수출국이었지만, 1990년대 들어 노동수입국으로 변모한다. 한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이주노동 자들을 통해 보강했지만 노동자 이민은 거부하는 폐쇄적 태도를 취했 다. 산업연수생이라는 꼬리표를 단 이주노동자들은 제한된 기간에만 한 국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년대에는 기존의 이주노동자 외에 도 동남아시아 출신의 결혼이민자 등이 추가되어 한국의 다인종, 다민

33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33 족 경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한국은 2007 년에 외국인 100만명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렇게 한국의 인적 구성원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일민족의 신화를 앞세운 한국인의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 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2000 년대에 들어 자국의 문화에 외국인들을 동화시키는 다문화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다문화를 1990 년대 들어 처음 경험했을까? 그 것은 아니다. 한국은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일제문화와, 해방 이후에는 서구문화 ( 특히 미국문화 ) 와 접촉한 경험이 있다. 한국에서 이질적 문화 이면서도 현재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서구문화로 대변되는 미 국문화이다. 미국문화가 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전후에 주한미군이 남한에 본격적으로 주둔하면서부터이다. 용산, 동두천, 평택 등에 위치한 주한미군은 한미간의 군사적,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 루어진 대규모의 이주라 할 수 있다. 다른 나라로의 이주는 인구현상 임과 동시에 지역 간의 경제격차와 관계된 경제현상이며, 이주자의 출 신지역과 이주지역 양쪽의 사회조직이나 문화체계에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때로는 정치적 경계를 넘나들기에 법적, 국제적 분쟁을 야기하기 도 하는 복합적 사회현상 1) 이다. PX물품 GI문화 AFKN 방송으로 대 변되는 주한미군의 존재는 전후의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한국 인들은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문화 내지 서구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 60년대에 미국문화는 한국이 배우고 따라야 할 선진 모델 로서 시대의 주체였고, 전통적인 한국문화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로서 시대의 타자였다. 한국인은 이 땅의 주인이면서도 오히려 미국인과의 관계 속에서 타자였다는 사실은 양자가 지닌 권력의 불평등성을 말해준 다. 한국은 1945 년 해방부터 계산한다면 벌써 60년 넘게 미국과 대규모 적인 교류를 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긍정적인 형상의 미국인을 주 인공으로 한 한국소설이 거의 없다. 그 동안 미국인들은 한국소설 속에 1) 유명기,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문화, 노동연구 노동문제론집 13 집, 고 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1997, 69 면.

34 34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서 보조적으로 등장하거나 부정적 양상을 노출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친근하면서도 낯선 상호 모순된 존재임을 암시한다. 한국소설에서 미국인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미군부 대를 배경으로 한 기지촌 소설이다. 그 동안 문학 연구자들은 민족 주 체성과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기지촌 소설을 조명해왔다. 2) 본 연구자는 이 글에서 1950 년대와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내국인인 한국인과 외 국인인 미국인을 다문화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기존의 논 문들은 한국인을 희생자 내지 약자로, 미국인을 가해자 내지 강자로 이 분화시켜 조명하다 보니 다문화주의적 입장을 전면화시키기 어려웠다.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 란 여러 이질적 문화를 동등한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포용해 공존하려는 문화적 입장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 의 사회 내부에 복수문화의 공존을 인정하고 문화의 공존이 유발하는 긍정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문화주의를 말한다. 3) 이러한 다문 화주의는 자민족중심주의에 중독된 극우적 민족주의를 비판한다. 제3세 계의 민족주의는 개별적 민족의 자존감을 확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때로 그것이 지나쳐 다른 민족이나 인종에 배타적 태도를 2) 이것과 관련한 주목할 만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심금애, 현대소설에 나타난 대미의식 연구, 기전어문학, 수원대학교 국어국문학회, 박훈하, 기지촌 소설의 계보와 남성성의 확립과정, 한국문학논총 19 집, 한국문학회, 김연숙, ' 양공주 ' 가 재현하 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 페미니즘 연구 3 집, 동녘, 김은하, 탈식민화의 신성한 사명과 ' 양공주 ' 의 섹슈얼리티, 여성문학 연구 10 호, 한국여성문학회, 박선애, 기지촌 소설에 나타난 매춘 여성의 문제, 현대소설연구 24 호, 한국현대소설학회, 최강민, 단일민족의 신화와 혼혈, 어문론집 35 집, 중앙어문학회, 김미덕, 한국 문학에서 기지촌 성매매 여성과 아메라시안에 대한 연구, 아세아여성연구 46집 2 권, 숙명여자대학교 아세아여성문제연구소, ) 구견서, 다문화주의의 이론적 체계, 현상과 인식 90 호, 한국인문사회 과학회, 2003, 30 면.

35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35 드러내기도 한다 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보여준 제3세계 출신 외국 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타적 편견과 차별은 미국문화에 대한 피상적 모방과 단일민족의 신화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다. 다문화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텍스트 분석은 다문화를 지향한 텍스트만이 아니라 다문화를 제 대로 보여주지 못한 텍스트도 함께 포함된다. 다문화적 정체성이 결핍 된 텍스트는 어떤 지점에서 다문화의 결핍이 발생했는지를 보여줌으로 써 바람직한 다문화를 위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950, 60 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을 언어, 인종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다문화적 가능성의 측면에서 논의할 것이다. 1950, 60년대의 소설을 다문화주의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논한 글들은 아직 없다. 따라서 이 논문은 문학적인 면에서 다문화의 통시론적 연구를 심 화시키는 데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2. 언어의 불통과 인종주의적 편견 한국소설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은 이국적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그들 을 불러낸 것은 외국 작가가 아니라 한국작가이다. 당대 한국작가들은 당대에 유통되던 외국인들의 다양한 이미지를 평균적으로 조합해 형상 화한 것이다. 한국소설에 등장한 외국인들은 실제의 외국인이라기보다 작가와 한국인의 눈에 비친 외국인들이다 년대에 대다수의 한국작 가들은 다른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외국인과 친밀하게 지속적으로 교 류를 가질 기회가 없었다. 특히 영어에 능통해서 외국인과 자유롭게 대 화할 수 있는 작가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1950 년대의 한국소설에서 외 국인들은 심층적으로 그려지지 못한 채 주변인물로 잠시 등장하거나 피 상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 외국인에 대한 정보 부족과 언어의 한계는 외국인에 대한 내국인의 편견과 선입관을 낳게 한다. 이것은 한국만 아 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보면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약소국이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의 만남은 쌍 방향의 소통보다 일방향성으로 흘렀다고 봐야 한다.

36 36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거대한 체구, 파란 눈, 머리칼, 피부색, 생 활 방식, 종교, 언어 등 다양한 차이를 지닌 미국인과 대규모로 조우하 면서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질성의 인식은 상대방 문화에 대한 신비감과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 들은 이질적 외모의 외국인에게서 공포와 두려움을 먼저 떠올렸다. 문 화와 종교, 언어와 피부색이 다른 이질적인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나타 나는 원초적 반응은 일단은 공포이며 자기 방어 4) 인 것이다. 자신과 다 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었다면 외국인에 대해 느끼는 공포 와 두려움은 일시적으로 그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한국 인과 미국인 모두 상대방의 언어에 무지했다는 사실이다. 이동하의 전 쟁과 다람쥐 (1966) 는 언어의 소통 단절로 인한 비극적 사건을 그린 작 품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초등학생 소년 욱은 깜빡 잊고 학교에 다 람쥐가 든 주머니를 놓고 집에 온다. 미군이 학교를 주둔지로 쓰면서 욱은 다람쥐를 찾지 못한다. 다람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에 욱 은 학교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병사와 조우한다. 욱은 높다란 코, 파란 눈알, 전봇대만한 키 의 백인 병사를 보고 겁을 먹지만 그의 호의적인 웃음에 용기를 내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제 지당하고 만다. 다음 날 다시 학교에 간 욱은 이번에 흑인 병사와 조우 한다. 욱의 눈에 비친 흑인 병사는 백인 병사보다 좀더 공포스러운 존 재로 다가온다. 욱은 자신의 입장을 영어로 설명하지 못한 채 무작정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흑인 병사에 의해 총상을 입는다. 영어를 알았다 면 손쉽게 끝날 일이 영어에 대한 무지 속에 비극적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소통수단으로서의 언어 부재는 불필요한 오해와 위협적 상황을 유발시킨다. 한국과 미국은 상대방 문화에 대해 학습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시스템의 미비 속에 상당 기간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 었던 것이다. 하근찬의 왕릉과 주둔군 (1963) 에서도 언어 소통의 부재와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의 미흡 속에 오해와 갈등이 증폭한다. 이 4) 정수복, 한국인의 인종주의, 철학과 현실, 봄, 면.

37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37 소설에서 박 첨지는 가난한 농민이지만 과거 자신의 조상이 임금이었다 는 자부심 속에 조상의 왕릉을 돌보며 살아간다. 이 왕릉은 박 첨지가 지키고자 하는 전통적 지배질서이자 자신의 한국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어느 날 왕릉 옆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왕릉의 안전성은 심대 하게 위협받는다. 이때 주한 미군 주둔지는 서구적 근대성을 상징한다. 소설의 서사는 왕릉과 미군 주둔지의 이원적 대립 구도 속에 갈등이 점 차 확대되는 형태로 전개된다. 박 첨지의 눈에 처음 비친 백인 미군 병 사의 모습은 노란 머리칼, 고양이 눈깔같은 노란 눈, 큰 코, 짧은 인중 과 합죽한 입, 뾰족한 턱을 지닌 괴물로 인식된다. 기존의 익숙한 세계 에 길들여진 박 첨지는 낯선 외국인에게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던 것 이다. 이러한 공포와 두려움은 왕릉에서 음주가무를 하거나 성행위를 하는 미군의 모습을 보면서 부정적 미국인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박 첨지는 미군을 비윤리적인 야만성의 괴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렇 다면 미군의 시선에 비친 한국인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근대적 기계를 활용하는 주한미군은 수작업으로 담쌓기를 하는 한국 농민들을 전근대 적 야만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양자는 소통의 실패 속에 적대적 상호 갈등이 도드라지게 증 폭한다. 박 첨지는 왕릉 위에서 성행위를 하는 흑인 미군병사를 꾸짖지 만 미군병사가 분노해 달려오자 서둘러 도망친다. 이 모습에서 주한미 군과 한국인의 지배/ 피지배 의 상하 권력 관계가 명맥하게 드러난다. 주한미군으로 대표되는 서구적 근대성 앞에서 왕릉으로 대변되는 전통 적 지배질서는 주변부의 타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전 통적 지배질서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에릭 홉스봄은 통상 낡은 것처 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들 (traditions)' 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5) 라고 말한다. 박 첨지가 지키고자 한 전통질서도 영구불변의 자명한 진리가 아니라 조선시대 유교주의의 산물이다. 전통이란 시대적 5) 에릭 홉스봄 외, 만들어진 전통, 박지향 장문석 역, 휴머니스트, 2004, 19 면.

38 38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상황에 따라 새롭게 재구성된다. 작가 하근찬은 박 첨지와 주한미군을 모두 비판하고 있지만 옛것을 단순하게 지키려고만 하는 박 첨지의 수 구적 태도를 상대적으로 더욱 비판하고 있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자신 만의 문화만을 고수해서는 곤란하다. 상대방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 는 자세와 실천적 과정 속에서 다문화의 가능성은 확대될 수 있다. 불 행하게도 박 첨지로 대변되는 수구적 전통주의자들은 나 이외의 문화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표출함으로써 다문화적 가능성을 원천봉쇄시켰다. 다문화적 소통의 단절은 철조망과 담이라는 공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상원의 황선지대 보수 와 김동립의 주인 없는 성 에서 는 철조망이, 하근찬의 왕릉과 주둔군 에서는 철조망과 담이 함께 등 장한다. 주한미군 기지는 한국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말하고 made in USA 제품이 가득한 일종의 환상적인 섬이다. 한국인들은 보 안상의 이유로 마음대로 그곳을 왕래할 수조차 없다. 철조망을 기준으 로 안쪽은 미국적 정체성이, 철조망 바깥은 한국적 정체성이 지배한다. 양자의 차별화 된 풍경은 오상원의 황선지대 (1960) 에서 잘 나타나 있 다. 주한미군 기지 대 한국인들이 사는 마을은 햇볕/ 어둠, 깨끗하고 아 름다운 곳/ 더럽고 추한 곳, 질서 정연한 도시/ 넓은 폐허로 가득한 변두 리 로 차별화 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대비적 공간의 형상화 속에 주한미 군 기지의 OFF LIMITS YELLOW AREA( 노란색 금지 지역) 라는 표지 는 오히려 궁핍한 한국인들을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근대성의 유토피아 환상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초강 대국 미국의 시민만이 가능하다. 주한미군을 보조하는 일부 한국인들은 제한적으로 머물 수 있을 뿐이다. 일등 시민인 주한미군은 주기적으로 철조망 바깥으로 나와 초강대국 미군의 우월적 위용을 과시한다. 미군 주변의 기지촌은 주한미군의 우월적 지배 권력을 일상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주한미군은 기지촌에서 달라를 소비하면서 타자인 한국인보다 우 월한 자신들의 신분을 물질적으로 확인하면서 내부적 동질성을 더욱 강 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주한미군 기지의 철조망은 단순한 물리적 표시 만이 아니라 한국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우월적 상징 기호이다. 서구 백인의 인종주의적 서열화는 미군의 오만함과 하우스 보이 내

39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39 부의 갈등을 그린 박순녀의 외인촌 입구 (1964) 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 한다. 사십 전후의 미군 장교 커널 빌은 한국을 모두 도둑놈으로 생각 하는 편견과 선입관을 지닌 존재이다. 그는 백인 여성이 한국 남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종주의자이기도 하다. 커널 빌이 보기에 한국인은 인종주의적 서열에서 최하층에 속하 는 인종이다. 커널 빌은 미국 이민을 꿈꾸는 하우스 보이 김순배에게 흑인들조차 같은 격으로 생각하지 않는 푸에르토 리코 출신의 여자가 한국인들에게 적합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서열화에 대해 작가 박순녀는 권투선수이자 국문과생인 민족주의자 김찬우를 등장시 켜 커널 빌과 맞서 싸우게 한다. 김찬우는 대미 저자세를 보이는 김순 배에게 미국인 앞에서 움츠려들지 말고 떳떳하게 살라고 따끔하게 충고 하기도 한다. 1950년대에 서구에 대한 열등콤플렉스에 시달렸던 한국작가들은 1960년대에 들어 민족 주체성의 자각 속에 미국의 배타적 우월주의에 대해 점차 맞대응하기 시작했다. 이때 한국과 미국이 지닌 뚜렷한 권력 차이와 반공이데올로기의 작동 속에 한국인들의 불만은 노골적으로 거 의 등장하지 못했다. 한국작가들은 미국의 지배층인 백인보다 피지배계 층인 흑인을 희생양 삼아 민족적 열등감을 상쇄하려고 했다. 그 결과 한국소설에서 문명화 된 백인과 야만적인 흑인이라는 차별화된 인종주 의적 형상화가 종종 등장한다. 인종이란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 니라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생겨나는 주관적인 범주에 지나지 6) 않다. 문제는 이러한 인종의 구분이 한국에서 특정 인종의 우월성과 열등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인종주의는 생물학적 특징 에 따라 계급이나 민족 사이의 불평등한 억압과 지배를 합리화하는 비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인종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의 작동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소한 차이를 엄청난 결함인 것처럼 과장하고 열등하 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차별 행위까지 6) 고자카이 도시아키, 민족은 없다, 방광석 역, 뿌리와이파리, 2007, 면.

40 40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정당화하기 때문에 특히 문제가 된다. 7) 우승열패의 진화론적 사고와 접목된 인종주의는 특정 인종의 우월성을 합리화시키는 기만적 담론에 불과하다. 백인 중심의 서구문화를 수입한 한국인들은 흑인들을 멸시하 는 인종주의적 편견도 그대로 수입했던 것이다. 한국소설에서 백인의 긍정적 형상화와 흑인의 부정적 형상화는 미국 인종주의의 한국판이다. 1950, 60년대의 한국소설에서 흑인은 대개 지적인 이성의 능력이 부 재한 채 본능적 성에 집착하는 성욕주의자이거나, 술 먹고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인물로 등장한다. 송병수의 쑈리 킴 (1957) 은 양 공주와 미군을 연결시키는 호객꾼 ( 일명 펨푸) 인 소년 쇼리 킴을 중심으 로 기지촌을 그린 소설이다. 쑈리 킴의 눈에 비친 미군은 초강대국 미 국에 걸맞는 문명화의 수준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변태성욕자, 성격 파탄자, 충동적 인간에 가깝다. 이 소설에서 미국문화의 부정성은 주로 흑인 병사 불독 을 통해 드러낸다. 양공주 따링은 불독의 거대한 체구 를 이유로 불독과의 성행위를 거부한다. 이것은 한국 독자들에게 흑인 과 성적 접촉을 갖고 싶지 않다는 인종주의적 의사 표시로 해석된다. 쑈리 킴은 따링의 거절에 대해 분노한 불독이 미군기지를 무단으로 들 어가려는 자신을 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독자들에게 불독이 폭력적, 본능적 인간임을 무의식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발산한 다. 이러한 흑인 폄하의 시각은 이동하의 전쟁과 다람쥐, 하근찬의 왕릉과 주둔군 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들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흑인 병사들의 폭력성과 본능적 성욕의 이미지이다. 이 것들은 한국 독자들에게 흑인을 향한 인종 차별을 정당화, 합리화시키 는 근거를 제공한다. 흑인 폄하의 부정적 상상력은 흑인보다 한국인이 우월하다는 인종주의와 미국을 전면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안보 상황이 상호 맞물려서 발생한 현상이다. 또한 흑인 폄하의 문학적 상상력은 미국에 대한 한국의 열등 콤플렉 스가 낳은 보상 심리의 욕망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정양은에 따르면 열 등 콤플렉스는 자조적이고 자기멸시의 자아관념을 자아내는 경향 뿐만 7) 박경태, 인종주의, 책세상, 2009, 10 면.

41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41 아니라 반전하여 우월의식으로 전환하는 비정상상태를 초래한다. 8) 한 국인들은 백인을 상층에 자신들을 중층에 흑인들을 하층에 놓는 계급적 서열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과 패배주의를 희석화 하는 방어기제를 작동 시켰던 것이다.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중화주의에 대해 소중화주 의를 내세워 민족적 자존심을 위안 받은 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 체험 이 동일하게 인종주의적 편견의 형태로 흑인에게 작동되었던 것이다. 인종주의 이념이 가져오는 한 가지 결과는 타자를 배제하고 훼손함으 로써 일종의 민족적 동질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9) 흑인에 대한 인종주 의적 형상화는 일시적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 만 궁극적으로 백인종 우월과 황인종 열등이라는 기만적 담론 구조에 포박되는 자승자박의 자충수이다. 흑인은 한국인의 적이 아니라 서구의 백인중심주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연대적 동지이다.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민족이나 인종을 희생양 삼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심화이거나 연장일 뿐이다.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과 차 별은 다문화 사회의 실현을 가로막는 대표적 걸림돌인 것이다. 3. 민족 주체성과 미국의 우월주의 한국전쟁은 한국의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전후의 한국 은 미국의 원조물자가 없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궁핍 그 자체였다. 이 시기에 물질문명의 거대국가, 미국은 한국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한국민들의 민족적 자존심의 좌절과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한 상대적 빈 곤감을 느끼는 시기 속에서 주둔 10) 하기 시작한다. 기브 미 쵸콜릿으로 대변되는 1950 년대는 미군부대에서 버린 쓰레기를 끊여서 만든 꿀꿀이 죽도 감지덕지하게 먹던 시절이었다. 절대빈곤의 한국과 절대풍요의 미 8) 정양은, 한국인의 열등의식론, 사상계, , 46 면. 9) 존 맥클라우드, 탈식민주의 길잡이, 윤교찬 역, 한울, 2003, 121 면. 10) 김현숙, GI와 PX문화를 통해 본 미국문화 년대 소설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18 집, 상허학회, 2006, 146 면.

42 42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국이라는 상반된 위치는 미국 것이 최고라는 식민지적 위계 의식을 강 화시켰다. 전후의 궁핍 속에 미국= 풍요= 가진 자= 시혜자 = 지배자, 한국= 빈곤= 못 가진 자= 수혜자 = 피지배자 라는 고정관념은 확고불변의 진리가 되었다. 미국에 대한 동경을 넘어 숭상으로까지 발전한 전후의 숭미주 의( 崇 美 主 義 ) 는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시대의 패러다임을 형성한 다. 이러한 흐름은 4 19혁명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의 주술에서 벗어나 면서 일부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년대에 일부 작가들은 민족적 주체성을 자각하면서 미국의 우월주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였던 것 이다. 미국은 숭상의 대상에서 점차 비판의 대상으로 격하되기 시작한 다. 이것은 양자의 갈등이 1950 년대와 달리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한국에서 미국의 우월적 위치는 변함 없었다. 한국소설에서 초강대국 미국의 우월성과 한국의 열등성을 대표적으 로 보여주는 것은 한국인의 PX 도둑질과 양공주의 성매매이다. 한국인 들은 미군 병사들의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생존하기 위해 미군부대의 철조망을 뚫고 PX 물품을 훔쳤다. 김성일의 흑색 시 말서, 오상원의 황선지대 보수, 김동립의 주인 없는 성, 오영수 의 안나의 유서 에서 한국인들은 미군 부대에 침투해 물자를 훔치는 도둑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PX 도둑질은 부의 축적보다 당장의 생계를 해결할 수단이 막막한 상태에서 저지른 생계형 범죄가 많았다. 미군은 자신들의 물건들을 허락없이 도둑질하는 한국인을 향해 경멸적 시선을 던졌다. PX물품 유출은 한국인 도둑에 의한 것이 많았지만 미군 병사 가 사적 이익을 위해 빼돌리기도 했다. 작가 오상원은 난영 (1956) 에서 주한미군이 술과 계집을 사기 위해 군부대 물건을 밀매하고서 오히려 한국 노동자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장면을 형상화한다. 이 소설에 서 주한미군은 정의를 지키는 초강대국 미국이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군인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주인공인 한국인 노동자는 진실과 정의를 수호하는 작중인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역할의 전도는 미국이 자신들 이 내세우는 미국적 정체성에 걸맞지 않는 모습으로 한국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작가는 초강대국 미국에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

43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43 게 생활하는 한국인을 등장시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키려고 했던 것 으로 보인다. 1950, 60년대의 소설에서 주한미군과 접촉하는 인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소년과 양공주이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성 인 한국 남성들이 미군과 동등한 주체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 음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미군은 거대한 거인으로, 반면에 한국인들 은 소년과 같은 키가 작은 난쟁이 이미지로 형상화 되는 것도 이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거인 미국 대 난쟁이 한국의 대립적 형상화는 지배/ 피지배 라는 당대 권력의 지형도가 소설 속에 적극 투영된 결과이 다. 이러한 소설의 형상화에 변화가 온 것은 1960 년대부터이다. 이 시기 에 한국작가들은 주한미군을 상대로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지닌 성인 한 국 남성을 등장시켜 대립하는 구도를 설정한다. 이영우의 암호 (1966) 는 서구 미국인의 우월감과 동양 한국인의 열 등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통역장교 김 중위는 상사 로 미군 스미스 소령을 모신다. 스미스 소령은 한국인을 액면 그대로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만을 최고로 치는 주체성이 강한 미국 남성 이다. 반면에 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김 중위는 서구 미국 인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다. 이때 미군 스미스 소령은 미국의 엘리 트층을, 김 중위는 한국의 엘리트층을 각각 대표로 하는 인물이다. 김 중위는 외인부대에서 근무할 때에 속이 불편해 불가피하게 외국인 전용 변소를 이용한 적이 있다. 이것을 발견한 외국군인은 김 중위를 향해 갓뎀 이라는 욕을 한다. 이에 대해 김 중위는 철저한 위생관리를 하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 당연한 항의로 간주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김 중위의 행동은 미국 군인= 깨끗한 위생= 문명, 한국 군인= 불 결한 위생= 야만 이라는 고정관념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장실의 위생을 통한 한미 양국의 권력적, 문화적 위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서 구 우월의 위계성은 계급으로도 그대로 드러난다. 상명하복이 지배하는 군대사회에서 최고 계급이 항상 미군이라는 사실은 미국의 우월적 지배 권력을 반영한 것이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스미스 소령의 오만한 우월주의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뜻밖에 무너져 내린다. 작가는

44 44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죽음 앞에서 미국인과 한국인은 똑같다라는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통해 서구 우월 대 동양 열등이라는 편협한 오리엔탈리즘을 해체시킨다. 이 부분에서 이 소설은 다문화적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가 해소되면 스미스 소령은 다시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미국 인이라는 주체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국과 미국의 수평적 소통 관계는 다음의 지문에서 보듯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김중위는 김중위대로 낯을 찡그리며 날감자를 씹던 스미스소령의 무 엇이 대단하다고 콧마루가 시큰하도록 감격했던 자신이 우습기 짝이 없 는 것이다. 하기야 그로선 그때의 그 감격을 퍽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였 고 그런 기분을 연장하여 스미스소령에게 별다른 친근감을 느끼려 했었 다. 그러나 다시 원대로 돌아온 스미스소령은 옛날 그대로의 군인으로 환원했다. 냉엄하고 자신에 넘치는 태도, 명령적인 대화가 있을 뿐이었 다. 그러한 그의 거동이 거슬려서 비뚤어지게 판단했는지는 모르나 그에 게 어떤 우월의식 같은 것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여겨지기 도 했다. 그것을 반대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면 김중위 자신이 먼저 열등 감에서 범상한 사태를 비꼬이게 확대해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11) 1960년대에 민족 주체성의 메시지를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 작품은 남정현의 분지 (1965) 이다. 이 소설은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해체하고 민족 자존의 길을 한껏 내세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홍길동의 10대손 인 홍만수의 어머니는 일제 식민지를 해방시킨 미군을 환영하러 나갔다 가 미군에게 집단 강간을 당해 실성했다가 숨지고, 누이 동생 분이는 주한미군 스피드 상사의 현지 첩이 되어 밤마다 성적 학대를 당한다. 스피드 상사는 분이의 하반신이 본국에 있는 마누라 것보다 열등하다며 욕설, 폭언, 폭행을 일삼는다. 이것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문화 중심주의라는 획일적 잣대로 대상을 평가하면서 나온 것이다. 오빠인 홍만수가 보기에 분이의 풍만한 하반신은 전혀 하자가 없는데 왜 스피드 상사가 분이를 못 살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스 피드 상사의 본 부인인 비취가 한국에 오자 홍만수는 그녀를 향미산으 11) 이영우, 암호, 한국대표단편문학전집 25, 정한출판사, 1975, 330 면.

45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45 로 유인해 강제로 그녀의 하반신을 조사한다. 이러한 홍만수의 행위는 다문화적 소통이라기보다 일차원적 복수의 방식이다. 서구의 오리엔탈 리즘에서 서구는 남성으로, 동양은 여성으로 비유되었다. 가부장제 사회 에서 강력한 힘을 소유한 남성이 약한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자연스러 운 도리로 유통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가 동양을 지배하는 것은 침 략이 아니라 문명화의 거룩한 사명으로 호도되었다. 남정현은 백인 여 성을 강간하는 홍만수를 등장시켜 서구= 남성, 동양= 여성 이라는 이분법 적 오리엔탈리즘을 해체한다. 그렇지만 남정현의 분지 에서 홍만수의 행동이 과연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분이로 상징되는 한국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스피드 상사의 횡포에 대해 홍만수가 당사자에게 항의하 지 않고 약자인 여성을 힘으로 강간한 것은 대응적 폭력에 불과하다. 이것은 다문화적 소통보다 갈등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높다. 작품에서 미국의 펜타곤과 홍만수가 한판의 전쟁을 벌이는 모습에서 다문화적 소 통의 실패가 낳은 비극적 결말을 확인할 수 있다. 홍만수가 보여준 일 차원적 대응은 문제의 해결보다 더욱 확대시키는 자충수였던 것이다. 이처럼 1960 년대 소설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표출한 작품들은 미군 남성과 맞서 싸우는 한국 남성을 등장시켰다. 남정현의 분지, 박순녀 의 외인촌 입구, 김동립의 주인없는 성 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민족 적 한국 성인 남성의 출현은 미국이라는 주체에 의해 한국이 일방적으 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주변부의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년대의 일부 소설들은 민족주의적 주체를 통해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와중에 저 항적 주체를 강조하다 보니 미국의 다양한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 했다. 민족적 주체성의 강조 속에 미국문화의 긍정적 부분이 축소되거 나 무시되었던 것이다. 다문화가 기본적으로 상대방 문화의 긍정적 가 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1960 년대 민족 적 주체가 지닌 다문화적 한계는 명백했다. 상실된 민족적 주체를 회복 하려는 데에 골몰한 나머지 거대타자인 미국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 신 경 쓸 여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46 46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비국민인 혼혈인과 단일민족의 신화 1960년대에 박정희 군사정권은 압축적 근대화라는 속도전의 형태로 미국 따라잡기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이것은 서구에 대한 동경과 민족 주체성의 자각이 함께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당시의 조국 근대화 라는 담론은 모든 국민들을 민족과 국가라는 집단적 표상으로 수렴시킨 다. 노동자들의 집단적 희생은 애국 애족이라는 미명 아래 합리화 되고, 생존권을 확보하려는 노동쟁의는 조국 근대화를 방해하는 빨갱이로 내 몰린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조국 근대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 적인 이데올로기 통제 기구였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착된 상명하복식 군대의 방식을 조국 근대화 담론과 반공이 데올로기를 통해 한국사회에 그대로 접목시켰다. 그래서 경제성장 추진 은 일종의 적과 싸우는 전투로 인식되었다. 개인은 집단을, 국민은 국가 를, 민족은 민족국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 되었다. 이때 한국사회는 외국인, 타민족. 인종 심지어 한국 혼혈인과 한국 영토 밖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그리고 권력의 밖에 있는 일반양민, 반공주의자가 아닌 자 또 여성을 배제하거나 상대적으로 주변화시켰다. 반면에 남성, 군인, 반공주의자 중심으로 국민을 통합하여 왔다. 12) 이 처럼 한국의 국민 형성 통합과정은 억압적, 폭력적, 배타적 속성을 띤 국가주의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시 하는 남한의 국가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호도시키면서 파시즘적 집단주의 성격을 보였다. 이것은 개인에 기반한 서구의 근대 화와 다른 반쪽만의 근대화로 치달으면서 비판적 지식인 및 대학생과 지속적 갈등을 유발시킨다. 집단주의를 강조하는 조국 근대화는 단일민 족의 신화와 결합되어 강력한 자기 동일성의 신화로 발전한다. 한국은 12) 김현선, 국민, 반국민, 비국민 - 한국 국민형성의 원리와 과정, 사회연 구 통권12 호, 2006, 100 면.

47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47 서구적 근대성에 재빨리 도달하기 위해 국가 구성원의 내부결속용으로 단일민족의 신화를 강력하게 작동시켰다. 단일민족의 신화에 기반한 순 수혈통주의는 우리 라는 집단적,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국가적 단결을 이룩하는 강력한 지배담론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순혈주의에 기반한 단일민족의 이데올로기는 양공주와 혼혈인에 대 한 배타적 차별로 구체화 된다. 작가 최정희는 미군과의 국제결혼을 그 린 장편 끝없는 낭만 (1955) 에서 양공주가 허영심 때문에 미군 등에게 몸을 팔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은 당대 사회의 일반적 인 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최정희의 언급처럼 대다수의 양 공주가 허영심 때문에 외국 군인과 매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영수 의 안나의 유서 (1963) 에서 보듯 젊은 여성과 전쟁 미망인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창녀가 되어야 했다. 양공주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구성원들이 고마워야 할 대상이었 지만 또 한편으로 단일민족의 신화를 훼손시키는 집안의 망신거리였다. 이러한 이중성 속에 양공주는 혈통적으로 한민족의 구성원이면서도 한 민족과 국가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는 대표적 타자로 분류된다. 최정 희가 끝없는 낭만 에서 양공주를 허영심과 연결시키려고 했던 것은 민 족의 치부를 은폐하려는 가부장적 당대 사회의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년대에 민족의 치부로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었던 양공주는 년대의 민족주의 서사에서 민족의 식민화된 현 실을 환기시키는 표상으로 13)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역할 은 제한적이었을 뿐 양공주는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타자의 굴레를 벗어 나지 못했다. 양공주와 서구인 ( 대표적으로 주한미군 )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도 양 공주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범주에서 배제된 타자였다. 특정 민족의 순종이라는 개념은 허구적으로 고안해낸 기만적 거대서사이다. 100% 순수한 혈통이란 존재하지도 존재한 적도 없다. 순종은 잡종을 차별과 13) 김은하, 말식민화의 신성한 사명과 양공주 의 섹슈얼리티, 여성문학 연구 10 호, 한국여성문학회, 2003, 160 면.

48 48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배제하기 위해 고안된 허구적 범주에 불과하다. 이러한 순혈주의가 기 승을 부리는 곳에서 잡종으로 분류되는 혼혈인들은 단일민족의 신화를 근본에서부터 허물어뜨리는 위험 요소로 취급되었다. 양공주에게서 태 어난 혼혈아들은 아예 한국 호적에 오르지 못하거나 친척의 호적에 겨 우 올라야 했다. 혼혈아들은 제대로 된 교육이나 문화적 혜택도 받지 못한 채 배제와 차별 속에 사회부적응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 부도 혼혈인들을 같은 민족 구성원으로 간주하지 않고 가급적 재빨리 외국으로 송출해야 할 비국민인 외국인으로 취급했다. 1950, 60년대 한 국소설에서 혼혈아들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유아기의 연령대로 흔 히 등장한다. 이들 혼혈아들은 성인들이 아니기에 자신의 주체적 권리 를 주장할 수조차 없었다. 유주현의 태양의 유산, 박순녀의 엘리제초, 하근찬의 왕릉과 주둔군 에서 보듯 단일민족의 신화 속에서 혼혈아 들은 국가에 대한 권리도 의무도 없는 비국민, 비민족이었던 것이다. 특 히 흑인 혼혈아는 한국인들의 인종주의적 편견 속에 백인 혼혈아보다 더욱 천대를 받는 이중적 고통의 대상이었다. 혼혈아의 열악한 처지는 정한숙의 어느 동네에서 울린 총소리 (1963) 에서 잘 나타난다. 고아 출신인 26세의 간호원 미숙과 주한미군으 로 한국에 온 35 세의 마아크는 서로 사랑을 해 국제결혼을 한다. 신혼 을 외인주택에서 시작한 부부는 몇 년이 지나자 그곳을 떠난다. 마아크 는 외인 주택의 서구 여성들이 미숙을 얌전한 창녀 라고 호명하며 멸시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종과 문화의 다름은 다원적 가치로 존중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멸시와 차별의 원인 제공자 역할을 한다. 외인 주택에서 한국인 마을로 이사왔지만 이번에는 단일 민족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한국인들이 미숙을 양갈보라 손가락질 한다. 미숙은 외인주택과 한국인 주거지 양자 모두에서 경멸과 저주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마아크와 미숙 부부가 경험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 는 혼혈인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된다. 어린 남매는 동네 아이들이 튀 기라고 놀리는 집단적 따돌림에 격분한다. 하지만 이들의 개별적 분노 로는 우리 라는 집단적 범주로 똘똘 뭉친 단일민족의 신화를 해체시키 지 못한다.

49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49 야이 튀기 튀기! 잡아라 튀기! 미숙은 벌떡 일어섰다. 몇몇 쪼무라기들에게 몰려 어린 남매가 쫓겨 들어왔다. 어린것들은 말이 서투르다. 격해진 남매는 볼이 불그락거렸다. 동생이 영어로 욕지거리를 먼저 퍼부었다. 그제서야 오빠가 서투른 우리말로 맞서고 나섰다. 14) 어느 동네에서 울린 총소리 에서 당대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인종주 의적 배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한국인 좀도둑이다. 마아크와 미숙의 집은 좀도둑으로 대변되는 위협에 여러번 무방비로 노출된다. 마아크는 이 사실에 격분해서 자위적 수단으로 총을 든다. 우리 에 포 함되지 않은 소외된 그들 이라는 자각은 남편 마아크를 폭력적으로 내 몰았던 것이다. 미숙은 총이라는 물리적 힘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 아크의 대응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 과정에서 미숙은 오발 사고 속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마아크와 미숙의 가족이 직면한 위기는 다양 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편협한 자문화 중심주의가 낳은 비극이다. 순 수한 인종, 민족,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의 민족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상상화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상상화 된 허구를 자 명한 실체로 상정하고 집단 구성원에게 획일적으로 강요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피의 순수성에 기초한 민족주의는 우리 의 집단적 범주를 강 화시키면서 소외된 그들 의 대타적 집단의식과 피해의식을 함께 강화시 킨다. 그 결과 양자의 갈등과 긴장은 더욱 증폭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 와 다른 타인의 문화를 이해하며 다문화적 소통 관계를 구축하기는 힘 들다.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의 신화를 강조하면서 양공주와 혼혈인을 차별 함으로써 다른 민족 구성원의 잡종적 행동을 단속하는 효과를 얻었다. 또한 민족적 순수성과 동질성을 지킨 존재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우월감 14) 정한숙, 어느 동네에서 울린 총소리, 현대문학, , 43 면.

50 50 한국문예비평연구 제29집 을 부여해 집단적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때 내부의 동질성과 외부의 이질성은 끊임없이 강조된다. 그러면서 내국인과 외국인의 공통 점보다 차이점이 극단적으로 강조된다. 이제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점은 끊임없이 은폐되고 삭제된다. 반면에 차이는 확대 재생산된다. 차이가 없으면 차이는 만들어져야 한다. 거대한 차이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 다면 이제 보다 작고 미묘한 차이들이 강조되어야 한다. 15) 따라서 양 공주와 혼혈인이라는 타자를 귀환시키려면 차이보다 공통점을 강조하 는 전략이 요구된다. 민족주의는 제국의 억압과 탄압에 대응하는 저항 적 주체를 생산하지만 동시에 민족의 순수성과 동질성 강조를 통해 이 질적 타자를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민족주의의 이질성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내부로 향할 때 혼혈아와 양공주와 같은 존재들은 민족과 국민 의 범주에서 배제되고, 외부로 향할 때 제국주의적 미국에 대해 민족주 의적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딜레마에 봉착한다. 서구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애쓰던 1960년대의 한국작가들 은 민족적 자존감의 회복에 골몰한 나머지 민족 내부와 외부의 다양한 차이를 선별해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1960 년대의 민족적 주체는 저항적 주체였지만 다문화적 주체로까지 성장하지 못했 다. 5. 소통의 가능성과 환상의 실체 다문화가 기본적으로 다양한 주체의 동등한 관계에서 출발한다고 본 다면, 1960 년대의 민족적 주체는 서구 주체와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단계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족적 주 체성을 강조하는 한국작가들은 미국문화의 부정적 측면인 물질문명과 쾌락주의만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옥시덴탈리즘을 보여준다. 미국은 15) 천선영, ' 다문화사회 ' 담론의 한계와 역설, 한 독사회과학논총 14권 2 호, 겨울, 370 면.

51 1950, 6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성 51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과 쾌락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건국 정신 중의 하나는 청교도에 기반한 금욕주의이다. 또한 실용주의, 자유 민주주의, 개인주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 인권사상 등도 미국을 있게 한 중요 사상적 토대이다. 하지만 한국소설 속에서 이러한 것들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채 주한미군들의 폭력적, 성적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주한미군의 일부 모습을 통해 미국 전체를 규정하 는 일반화의 오류로 볼 수 있다. 한국작가들은 미국문화의 긍정적 측면 을 강조하다 보면 미국문화에 일방적으로 한국문화가 흡수될 수밖에 없 다는 불안감과 위기 의식을 느꼈고, 이것이 미국문화의 부정적 형상화 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방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이해 하려는 다문화주의의 관용성과 다양성 존중은 존재하기 힘들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면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동립의 중편 주인 없는 성 (1961) 은 주한 미군과 한국군 카투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민족주의적 시 각에서 그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한미군을 보조하는 카투사 지휘관 인 김 대위는 민족적 주체로 등장한다. 법률상으로 주한미군과 한국군 은 동등하지만 실제 현실은 이와 다르다. 어떠한 미군의 졸병도 김 대 위의 계급장을 보고 경례를 붙이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 카스메룬 중사 는 김 대위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상급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은 채 그대로 누워 있다. 백인 미군 중사의 큼직한 체구에서 발산되는 것은 후진국 장교가 개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미국의 선민의식이다. 김 대 위는 이것에 대해 분노하지만 주한미군 중사를 징계할 만한 권력이 그 에게 부재하다. 이 소설에서 미군과 한국의 카투사는 한국 방어라는 같 은 목적으로 모여 있지만 서로 융화되지 못한 채 사사건건 대립한다. 철조망을 경계로 산 위에는 점령군처럼 존재하는 정돈되고 규율 있는 주한미군의 세계와 산 아래에는 카투사가 거주하는 지저분한 세계가 수 직적으로 서열화 되어 있다. 미군 주둔지가 영주의 성이라면, 카투사 주 둔지는 영주의 성을 떠받들고 있는 노예의 성이다. 주한미군과 카투사의 첨예한 갈등은 독서가인 화이트헤드 일등병이 한국말을 배워 한국말로 한국인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화해의 가능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