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 김병륜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05 서영교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71 최형국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87 최형국 17세기 朝 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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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 예 지 제 17 집 우리나라의 전통기병 2010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 목 차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 김병륜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05 서영교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71 최형국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87 최형국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07 장원주 부 록 2010육군박물관 연보 231 학예지 제1집~제16집 게재논문 목차 239
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창기병과 궁기병을 중심으로 김 병 륜* 목 차 Ⅰ. 머리말 Ⅱ. 기병 병종의 기본 개념 1. 전통적인 기병 병종 분류 2. 운용무기에 따른 기병 병종 분류 Ⅲ. 기승문화 도입과 한국 고대 기병 병종 1. 한국 고대 기승문화의 최초 도입 과정 2. 한반도 남부지방의 기승문화 수용 과정 3. 한국 고대 기병 병종의 분화와 그 기반 4. 한국 고대 마구와 기병 병종 5. 운용무기로 본 기병 병종의 분화 양상 Ⅳ. 삼국시대 중장기병 1. 중장기병의 세계사적 기원 2. 고구려 중장기병 도입에 대한 연구사 3. 백제 신라 가야의 중장기병 4. 중장기병의 운용 전술과 진형 5. 중장기병의 한계 Ⅴ. 고려시대 기병의 병종 구성 1. 고려시대 궁기병과 창기병 2. 고려시대 중장기병의 존재 유무 3. 원 간섭기 몽골식 궁기병의 영향 Ⅵ. 조선 전기 기병 병종과 변화 추이 1. 조선 전기 문헌으로 본 2중 병종체제 2. 기사 우위 체제로의 전환과 그 추이 3. 전기 기병 병력 규모와 말 수급 기반 4. 조선 전기 기병의 전술적 운용과 진형 Ⅶ. 조선 후기형 기병 1. 근접전 능력 강화 노력과 후기형 기병 2. 조선 후기형 기병의 전술과 진형 3. 조선 후기 기병 규모 축소와 그 편제 Ⅷ. 맺음말 Ⅰ. 머리말 1) 전근대 군대에서 기병은 전쟁의 양상을 좌우하는 핵심적인 병종 중에 하나였다. 전근대 기병 *국방일보 취재기자 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객원연구원
4 2 학예지 제17집 은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친 핵심적인 존재였던 만큼 한국사에서도 각각의 기병 병종들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변천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 같은 연구 는 단순히 기병의 실상을 밝히는데 한정되고 않고 한국의 전근대 무기체계, 편제, 전술을 복원 하는데 기초 자료로 이용될 수 있으며 나아가 개별적인 전투와 전쟁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도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이 분야 선행연구 중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다양한 그림 유형을 통계적으로 정리해 기병을 포함한 병종별 무기체계 특성을 세밀하게 분석한 연구 사례는 의미가 크다. 1) 최근에는 삼국시대 기병 병종을 구체적으로 분류하려한 시도가 있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2) 또한 조선 후기 기병 전술에 관해서는 보병 전술과의 연계 하에 그 변화 추이를 밝혀낸 탁월 한 연구성과나 3) 마상무예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기병의 전술 변화를 살펴본 연구성과도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4) 하지만 이 같은 연구 외에는 기병 병종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제한적이었다.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말 관련 문화가 처음으로 도입된 시기는 청동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지역에서 기승문화가 어떤 과정으로 도입되었는지 포괄적으로 접근한 연구는 아직 전무하 다. 삼국시대의 경우에도 주로 연구가 중장기병 분야에 치우쳐 있어 전반적인 기병 병종의 모습 을 복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5) 동일한 기병이라는 대상을 두고 시대별로 연구자들의 접근방 법이 지나치게 상이하다는 점도 문제다. 삼국시대 기병 관련 연구에는 다수의 고고학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6) 고고학자들의 연구도 기병의 운용상 특성이나 전술 문제를 일부 다루기 1)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 류창환, 삼국시대 기병과 기병전술, 제33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논문집, 한국고고학회, ) 노영구, 병학통에 나타난 기병전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 해석사, ) 최형국, 조선시대 기병의 전술적 운용과 마상무예의 변화, 역사실학 38, ) 삼국시대 중장기병에 대한 우리 학계의 주요 연구성과는 아래와 같다. 이인철,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군사 33호, 국방군사연구소,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서영교, 고구려 중장기병에 관한 제 문제, 학예지 13,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정동민, 고구려고분벽화에 나타난 중장기병의 변화와 운용형태, 한국외국어대 석사학위 논문, 조필현, 고분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 중장기병, 전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고고학계의 관련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강유신, 한국 고대의 마구와 사회, 학연문화사, 이난영 김두철, 한국의 마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김두철, 삼국시대 전단구성과 전투형태, 고대의 전쟁과 무기 학술발표회 논문집, 부산복천박물관, 2001.
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3 는 하지만, 학문적 방법론상 마구류의 분류와 그 변천에 연구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의 경우 전쟁사를 중심으로 기병 전술의 큰 흐름에 관심을 기울인 연구가 있다. 7) 하 지만 기병의 무장 방식 등 기병 병종 문제 자체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아직 없다. 조선 시대의 경우 문헌사학자를 중심으로 마정( 馬 政 )에 대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 8) 이 같은 연 구는 기병의 존재 기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고는 할 수 있으나 기병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마상무예의 경우 무예수련가 혹은 전통무예 연구자들이 다수의 연구성과를 남겼다. 9) 하지만 이 분야의 뛰어난 연구성과와는 별 개로 군 조직의 일부로서 기병의 존재 양상 그 자체에 대해 접근하는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무엇보다 고고학, 문헌사학, 미술사, 전통무예, 군사사 분야 등 각 분야 연구자들의 접근 방 법과 관심의 초점이 다를 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연구성과를 학제적으로 긴밀히 연계하고 수 렴하는 차원의 연구는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해 기승 문화의 최초 도입 이후 삼국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에 걸쳐 기병이 어떤 무기로 무장했고, 이것을 어떤 범주의 기병 병종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같은 각 병종이 어떤 운용 특성을 지녔는지는 살펴보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고대부터 조선시대에까지 비교적 긴 시간을 통시적으로 다룬 이유는 위에서 언급 했듯이 한국군사사 연구에서 학문간 단절성을 극복하고 통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기병의 역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선결요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Ⅱ. 기병 병종의 기본 개념 1. 유럽의 전통적인 기병 병종 분류-중기병과 경기병 기병은 무장이나 운용양식에 따라 몇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유럽권에서 사용한 가장 일반적인 기병 분류법은 중기병( 重 騎 兵 : Heavy Cavalry)과 경기병( 輕 騎 兵 : Light Cavalry)으 이상율, 삼국시대 마구의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류창환, 가야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홍두, 고려-거란전쟁과 기병전술, 사학연구 80, )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 정형호 임동권, 한국의 마상무예, 한국마사회, 1995.
6 4 학예지 제17집 로 구분하는 것이다. 중기병은 기본적으로 진형을 형성한 상태에서의 전투에서 정면 공격, 다시 말해 충격력을 중시하는 기병 운용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정면 공격을 중시할 경우 적의 공격에 의해 부 상 입을 확률이 높아지므로 승마자도 갑옷을 갖춰 입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갑옷에 의한 보호 를 중시하면서 정면 공격에 의한 충격력을 중시하는 기병은 중기병이라고 할 수 있다. 중기병 의 대표적인 무장은 창이지만 경우에 따라 칼, 도끼를 주무기로 운용하는 경우도 있다. 10) 중기병이 극단화된 형태로 말에까지 갑옷을 입하는 중장기병( 重 裝 騎 兵 :Extra Heavy Cavalry)도 있다. 11) 캐터프렉트(Cataphract)라고도 불리우는 중장기병은 속도를 희생하면서 방 호력을 최대한 강화시키고, 그에 따른 정면 공격에 따른 충격 효과를 극대화시킨 병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기병의 특성과 대척점에 서 있는 기병 병종이 경기병이다. 경기병은 방호력을 중시하기보 다는 속도와 기동력을 가장 중시하는 기병이다. 진형을 갖춘 쌍방이 직접 격돌하는 전투 제일 선에서 주로 운용되는 중기병과 달리 경기병은 전투 제일선뿐만 아니라 정찰, 병참선 보호, 적 병참선 공격, 아군 측방 보호 등 다목적으로 운용될 수 있다. 12) 경기병은 갑옷을 입지 않거 나, 혹은 갑옷을 입더라도 중기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고 얇은 갑옷을 입는 것이 보통이며 무기로는 주로 활이나 투창, 칼 등을 사용한다. 하지만 주로 유럽에서 발달한 이 같은 전통적인 기병 분류 개념을 우리나라 역사에 일률적으 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말에까지 갑옷을 입은 중장기병은 비교적 구분 기준이 명백하지만 중기병과 경기병은 운용무기나 갑옷 무장의 정도, 운용 전술이나 승마에 사용되는 말의 특성, 훈련 수준, 신분별 특성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분류법이므로 역사 속 특정한 기병의 병종을 구분할 때 일률적으로 적용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중기병과 경기병의 구별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13) 물론 아예 갑옷을 입지 않은 기병이라면 쉽게 경기병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경기병이 10) Louis Edward Nolan, Cavalry, its History and Tactics, Westholme Publishing, p38. 초간본은 1853년에 나왔지 만 본고에서 인용한 판본은 Westholme Publishing의 2007년판이다. 이하 모두 2007년판 기준의 페이지수를 표시한다. 11) 국내에서 중장기병 논의를 본격화한 이인철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중장기병 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엄격한 개념 정의는 하지 않고 있으나, 말까지 갑주로 무장하였던 사실 이란 표현을 통해 그가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란 개념이 서구권의 Extra-Heavy Cavalry 나 Cataphracts, 혹은 Armoured Horse 와 유사한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 Louis Edward Nolan, Cavalry, its History and Tactics, Westholme Publishing, 2007, p ) J.Roemer, Cavalry-its history, management, and uses in war, 1863, p.342.
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5 란 용어 자체는 단순히 갑옷을 입지 않은 기병뿐만 아니라 중기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고 얇은 갑옷을 입은 경우도 일부 포함한다는 점이 문제다. 전근대에 세계 각국에서 사용한 갑옷 의 무게는 시대나 종류에 따라 3~40kg으로 편차가 매우 큰 편이다. 14) 기병들이 이처럼 다양한 갑옷을 입었을 때 어디까지를 경기병으로 분류하고, 또 어떤 것은 중기병으로 분류할 수 있을 지는 논쟁의 소지가 많다. 우리나라 역사 문헌에도 경기( 輕 騎 )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15) 경기라는 표현은 의미상 경기 병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분류 기준의 상대성 때문에 경기라는 것이 구체적으 로 어느 정도의 갑옷을 입고, 어떤 무기를 보유한 기병 병종이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어렵다. 이 같은 전통적인 중기병과 경기병이라는 분류법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기병 역 사를 분석할 때 나름 유효한 분석 틀로 이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분류하는데 따른 실익은 별로 없다. 이미 언급했듯이 기본적으로 경기병은 진형을 포진한 상태에서의 전투보다는 정찰, 추격, 병 참선 보호, 적 병참선 차단 위주로 운용되는 기병이다. 경기병은 진형 전투에 참가한다해도 단순한 정면돌격보다는 측방 공격이나 우회, 차단 등 좀 더 유연한 운용이 가능하다. 이런 임무 라면 휴대하기에 제한점이 많은 창보다는 활과 칼을 조합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기사( 騎 射 ) 문화 가 발달한 동아시아 군사문화 속의 경기병이라면 기본적으로 활을 주무기로 칼을 보조무기로 선택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때 활과 칼을 휴대한 기병은 갑옷을 입을 수도 있고, 갑옷을 아예 입지 않는 경우를 모두 상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는 유럽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갑옷이 많았고, 이런 가벼운 갑옷을 입는다고 해도 경기병적인 운용에 어떠한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에서의 경기병이라면 기본적으로 궁기병을 상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런 상 황이라면 의미가 애매한 경기병이란 표현보다는 직접적으로 궁기병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14) 김병륜, 조선시대 두정갑에 대한 군사사적 검토, 학예지 16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9, p ) 삼국사기 에는 경기( 輕 騎 ) 라는 표현이 단 한 차례만 나온다. 경기( 勁 騎 ) 라는 표현은 다수 산견되지만 단순한 정예기 병이라는 의미이므로 병종 분류 차원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려사 에는 경기( 輕 騎 ) 라는 표현이 다섯 차례 나오는데 궁기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무장 방식을 구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보충 자료 는 전무하다. 이밖에 삼국사기 나 고려사 에 나오는 정기( 精 騎 ) 라는 표현도 단순한 정예기병을 의미하므로 병종 구분에는 의미가 없다. 삼국사기 와 일부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보이는 철기( 鐵 騎 ) 라는 표현은 중장기병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중장기병 항목에서 후술하겠다.
8 6 학예지 제17집 병종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더 적확한 용어가 될 것이다. 2. 운용무기에 따른 기병 병종 분류-창기병과 궁기병 이런 점을 고려해 본고에서는 기병 병종을 분류할 때 중기병과 경기병보다는 창을 주무기로 한 창기병( 槍 騎 兵 :Lancer)과 활을 주무기로 쓰는 궁기병( 弓 騎 兵 :Horse Archer)으로 나눈 후 살 펴보려 한다. 이 같은 창기병과 궁기병의 구분은 단순한 주력 운용 무기의 차이에서 그치지 않고, 기병 운용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로 연결되기 때문에 군사사적인 의미가 크다. 창기병은 특성상 적진에 대한 정면 돌격을 중시하는 병종이다. 이에 비해 궁기병은 정면 돌격보다는 기 병의 기동성을 바탕으로 좀 더 유연한 전술적 운용이 가능한 병종이다. 창기병과 중기병은 동 의어가 아니지만 중기병의 주무기가 주로 창이라는 점에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궁기병은 경기병과 동의어가 아니지만 궁기병의 경우 정면 돌격보다는 말 특유의 속도에 바탕 을 둔 운용을 중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일정 부분 경기병과 유사한 측면이 존재한다. 기병 병종에 대한 여러 가지 분류법 중에 본고에서 중기병과 경기병대신 궁기병과 창기병이 란 분류를 주로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권 기병을 분석하 는데 좀 더 유용한 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종실록 을 시작으로 조선 전기 문헌 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병 무예 분류법인 기창( 騎 槍 )과 기사( 騎 射 )는 원래 마상에서 창과 활을 사용하는 무예를 의미하지만 병종 개념으로서의 창기병과 궁기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 다. 다시 말해 창기병과 궁기병으로 기병을 분류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병 병종 분 류법에 좀 더 근접하는 것이다. 다만 본고에서는 창기병과 궁기병의 구별에 더해 말에도 갑옷 을 입힌 기병인 중장기병이란 병종 개념도 사용하려 한다. 중장기병은 중기병이나 경기병과는 달리 그 의미가 명확하고 전술적 특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16) 한편, 기존의 국내 연구 중에는 운용 무기로 기병 병종을 나누지 않고, 갑옷 착용 여부를 기준으로 사람과 말 모두 갑옷을 입은 중장기병, 사람만 갑옷을 입은 갑주기병, 사람과 말 모두 갑옷을 입지 않은 경장기병으로 분류한 사례가 있다. 17) 최근에는 이 같은 기병 병종 분류를 16) 화약무기, 특히 머스캣이 출현한 이후 유럽에는 전투 시에는 말에서 내려 사격을 하고, 이동과 추격 시에는 승마 상태 로 작전하는 용기병(Dragoon)도 있었다. 이 같은 용기병은 중기병( 中 騎 兵 :Medium Cavalry)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 다. 이밖에 근세이후 유럽에는 중기병의 일종인 흉갑기병(Cuirassier)도 대량으로 운용했다. 하지만 용기병과 흉갑기병 에 상당하는 기병 병종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뚜렷하게 식별되지 않으므로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 기병 중 일부는 용기병적 성격이 있다는 점은 후술하겠다.
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7 약간 변형해서 갑옷을 입지 않은 경장기병을 기사( 騎 射 )형 기병과 장창무장형 기병으로 나누 고, 갑주기병을 갑주무장형 기병, 개마무사를 개마무사형 기병으로 분류한 연구도 있다. 기사 형 기병은 갑옷을 입지 않는 궁기병을 의미하고, 장창무장형 기병도 갑옷을 입지 않는 기병인 데 역사 속의 창기병을 의미한다는 것이 연구자의 설명이다. 또한 갑주무장형 기병은 운용 특 성상 중장기병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18) 이 같은 기병 병종 분류는 그 기준이 명확하다는 점에서는 유용한 분석 틀로 활용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병종 분류의 기준이 되는 것은 고구려 벽화이고, 그 같은 벽화가 그려진 고분 중 대표적 사례인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피장자에 대해 논란이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들 고분에 고구려 영토 내에 위치했던 것은 분명하나 피장자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학계의 논란이 심하므로, 벽화에 묘사된 기병 병종의 모습이 과연 어느 나라의 언제 상황을 묘사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 묘사된 총 284건의 그림 유형 중 행렬도에 해당하는 경우가 145 건이고 수렵도가 59건에 달한다. 19) 각 병종들의 무장 양상을 연구할 때 기본적으로 의장행렬 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하고, 비전투 장면인 수렵도를 배제하고 해석해야하므로 분석을 시 도할 때는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따라서 고분 벽화를 토대로 한 병종 구분법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20) 특히 전반적으로 활을 중시하고, 유럽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갑옷을 많이 사용했던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위와 같은 기병 병종 구분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도 의문이 다. 21) 17)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1999, 한편 여 박사는 개마무 사, 중장기병 이란 용어를 혼용하면서 개마( 鎧 馬 ) 란 갑옷을 입힌 말( 馬 )이란 의미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 박사에 따르 면 개마 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대략 서진( 西 晉 )~남북조 시대부터 사용한 용어이며, 고구려 개마총의 명문인 塚 主 着 鎧 馬 之 像 을 근거로 볼 때, 고구려에서도 개마 란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가 장 널리 사용되는 용어인 중장기병 을 말에도 갑옷을 입힌 기병 의 의미로 사용하겠다. 18) 류창환, 삼국시대 기병과 기병전술, 제33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논문집, 한국고고학회, 2009, pp.152~ )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1999, p.45. 본고에서 제시한 수치는 여 박사의 논문에 실린 도표를 토대로 재환산한 수치다. 20) 이런 점 때문에 본고에서는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 벽화를 토대로 고구려 기병 병종의 특성과 그 시대별 변화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21) 우리나라처럼 활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군사 문화를 가진 지역에서 적과 근접해야만 전투를 시작할 수 있는 창기병이 갑옷 을 전혀 입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조선시대 두정피갑의 무게를 고려할 때 가죽제 찰갑의 경우 무게 가 10kg 내외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런 가벼운 갑옷마저 아예 입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말의 기동력을 높이는데는 별 실익이 없다. 또한 말의 경제적 가치와 가죽제 찰갑의 상대적 가치를 고려할 때 더 가치가 높은 말을 구비하면서 가죽제 찰갑을 구비할 수 없는 상황을 상정하기도 힘들다. 즉 안악3호분 벽화 등에 나오는 형태처럼 창으로 무장하면서 아예 갑옷을
10 8 학예지 제17집 조선시대의 사례를 보면 주무기로 활을 사용하는 궁기병도 갑주로 무장할 수 있고, 창을 사 용하는 창기병도 갑주로 무장할 수 있으므로 갑주무장형 기병이란 것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 대까지 통시적으로 기병 병종의 운용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분류 기준이라고는 불 수 없다. 정리하자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기병 병종은 갑주 무장 여부에 상관없이 경기병적 운용특성을 지니면서 활을 주무기로 칼을 보조무기로 휴대하는 궁기병, 사람만 갑주로 무장하 고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면서 중기병적인 운용특성을 지닌 창기병, 사람과 말 모두 갑주로 무 장하고 주로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중장기병이라는 삼대 기본 병종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 에 칼을 사용하는 기병이나 투창 기병의 존재 가능성도 검토 대상에 올려 놓을 수 있겠지만 그 중요성은 기본 병종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Ⅲ. 기승문화의 도입과 한국 고대 기병 병종 말은 단순히 교통수단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인류의 군대와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동물이 다. 말이 가진 기동력과 역동성은 인간의 신체가 지닌 내적 한계를 벗어나 전장의 공간적 범위 를 극단적으로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특유의 충격력으로 전장의 양상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말을 군사적 수단으로 이용하게 과정 중 최초 단계에서는 말이 끄는 전차( 戰 車 : War chariot)를 이용한 시기가 먼저 존재했다. 몽골에서도 기원전 14~8세기 대 카라수크문화 시기에 전차를 묘사한 암각화가 확인되었다. 22) 중국에서도 이미 기원전 1300 년경의 상 후기 은허를 중심으로 분포된 무덤에서 무기와 함께 전차가 출토되어 전차 운용 사 실이 확인되었다. 23) 한반도 초기 청동기문화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는 중국 허베이 성 북부의 유병식 동검문화 입지 않은 기병은 의장 병력으로서는 그 존재를 고려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의 실전형 기병으로는 상정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경기병으로 운용할 기병이 필요하다면 무갑주 창기병보다는 갑주 유무에 상관없이 궁기병이 보다 적합한 병종이 될 것이다. 22) 정석배, 선사시대 유라시아 대륙의 말 사육과 기마술의 발전에 대해, 국제아시아민속학회 국제학술대회 논문집, 1999, pp.102~ ) 楊 泓, 古 代 兵 器 通 論, 紫 金 城 出 版 社, 2005, p.41.
1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9 (동남구문화), 내몽골 동남부의 공병식 동검문화(하가점상층문화), 요서지역의 비파형 동검문 화에는 공통적으로 말이 끄는 수레에 이용했던 거마구 내지 초기 마구가 발견되고 있다. 24) 특 히 요서 남산근 유적에서는 전차를 묘사한 골판이 발견되고 있어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에 전차 를 사용했음을 확인되었다. 이와 관련, 예맥족 거주 지역으로 추정되는 요동 심양 지역에 남겨진 유적으로 우리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정가와자 M6512호묘에서 재갈과 재갈멈추개 등 수레용 거마구( 車 馬 具 ) 내지 초기 마구가 발견된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25) 이 유적에서는 청동제와 골제를 포함한 재갈과 재갈멈추개, 말머리 장식용으로 보이는 나팔형 동기 등이 출토되었다. 26) 정가와자 M6512호묘 의 절대 연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이를 통해 요동지역에서 청 동기시대에 이미 거마구 내지 초기 마구류가 도입되었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7) 특히 정 가와자 유적군은 요서지역 비파형동검문화와 관련이 있으므로, 이 유적 출토 거마구는 단순한 수레 부속이 아니라 군사용 전차의 부속으로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28)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후기 중심부 지역으로 추정하는 평양 지역에서도 수레 부속이 다수 발 견된 사례가 있다. 특히 낙랑군 관련 유적에서 출토된 거마구 내지 초기 마구 관련 유물 중 일부가 한나라 양식과는 다른 고조선 식으로 파악되고 있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29) 이는 한 군현 설치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 거마구 내지 초기 마구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30) 하지만 아직까지 고조선에 군사용 전차가 있었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릴만한 뚜렷한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영남권 유적에서도 서기 1세기 대의 대구 평리동뿐에서 수레 부속구인 입형동기가 나왔고, 24) 한국동북아역사재단 중국내몽고문물고고연구소 공편, 하가점 상층문화의 청동기, 동북아역사재단, 2007, pp.47~48. 이들 유적에서 출토되는 초기 마구가 모두 말이 끄는 수레의 부속 즉, 거마구( 車 馬 具 )라고는 단정하기는 힘드나 영성 소흑석구 M8501호 무덤에서 출토된 수레 멍에를 보면 이 지역에 거마구가 전파된 것은 분명하다. 25) 오강원, 비파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전개과정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2, pp.30~31. 26) 김원룡, 심양 정가와자 청동시대묘와 부장품-예맥 퉁구스의 청동전기문화, 동양학 6, 1976, pp.17~18. 27) 국내 학계의 연구(오강원, 비파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전개과정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2, p.283.) 에 따르면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 유적에서는 요동지역보다 훨씬 이른 비파형동검문화 전기 단계에서부터 수레용 거마구를 중심으로 한 초기형 마구가 출토되고 있다. 하지만, 요서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형성 주체가 예맥족이라는 견해와 동호 혹은 선비계 종족이라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상론을 피한다. 다만 앞으로 요서지역 청 동기문화의 종족적 성격에 대한 연구 동향에 따라 이 지역의 거마구와 초기 마구를 한국사와 보다 밀접하게 연계시켜 이해할 여지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자 한다. 28) 정가와자 유적군에서 직접 말을 타는 기승문화가 존재했는지 여부는 앞으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 29) 영남대학교박물관 편, 고대의 말, 영남대박물관, 2002, p ) 북한 학계에서는 평북 염주군에서 기원전 8~7세기대의 수레바퀴 살의 일부가 출토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공반 유물이 없어 연대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12 10 학예지 제17집 2세기 대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경주 사라리 130호분에도 거마구 성격의 마구가 나왔다. 31) 광 주 신창동 유적의 경우 재갈은 출토되지 않았지만 수레바퀴 일부와 함께 수레를 끄는 말의 등 에 올리는 가로걸이대( 車 衡 )가 발견되어 기원 전후 시점의 한반도 남부지역에 2륜 마차가 존재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2) 하지만 한반도 남부지역 출토 유물 중 인원-물자 수송용 수레가 아 니라 전쟁에 사용하는 전차임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은 아직 없다. 이후 기승문화에 기반을 둔 기병이 출현 과정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략 기 원 전후시점부터 일단 모습을 드러낸 기병은 한반도의 전쟁 추이와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국력 확장의 원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한 요인으로 말과 기병이 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구려는 이미 2세기 초에 국왕이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했을 정도로 매우 이른 시기부터 탄탄한 기병 운용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33) 이후에도 단일 전투에 5000명 이상의 기병을 동원한 사례가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3세기 중엽 동천왕도 국왕이 직접 철기 5000명으로 위나라 모구검의 침략군에 대항했다. 34) 비슷한 시기 중천왕도 국왕이 직접 정기 5000명을 뽑아 전투를 수행했다. 35) 광개토대왕도 백제군 침입에 맞서 정기 5000명으로 격퇴했 으며, 안원왕도 정기 5000명으로 백제군의 침공에 대항했다. 백제의 경우 보병과 구별해 기병 숫자만 별도로 기록한 문헌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36) 다만 649년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패했을 때 신라측 전과기록을 통해 백제군의 기병 동원 규모를 가 늠해 볼 수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신라군은 백제 달솔 1명과 사졸 100명을 포로로 잡고 병졸 8980인과 좌평급 등 고위급 10명을 죽였으며, 획득한 말이 1만 필, 획득한 갑옷(개갑)이 1800령으로 되어 있다. 37) 백제가 단일 전투에서 동원한 1만 여필의 말에는 전투에 사용하는 말 외에도 수송용 짐말까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백제도 최소 수천 명 단위의 기병 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음은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진흥왕 23년 이 가야를 공격했을 때 사다함이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진격한 사례 38) 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 31) 이상율, 삼한시대 표비의 수용과 획기, 한국상고사학보 62호, 한국상고사학회. 2008, p ) 조유전, 한국사 미스터리, 황금부엉이, 2004, p )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태조왕 69년 12월조. 34)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8월조. 35)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중천왕 12년 12월조. 36) 고구려, 신라의 사례와 달리 백제의 경우 기병 200명이나 800명을 동원한 일부 기록을 제외하면 보병과 기병의 총수가 아닌 기병만으로 병력을 계산한 사례가 많지 않아 순수한 기병의 운용 규모를 추산하기가 쉽지 않다. 37)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왕 3년 8월조.
1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1 려 못지않은 기병 운용 역량을 축적했다. 39) 이처럼 삼국시대에 기병을 대규모로 운용했다면 그에 걸맞는 기병부대 편제도 존재했을 것 이나 현재 남아있는 사료가 극히 드문 상황이다. 다만 신라 9서당에는 영마병 대대감, 영기병 소감, 영기병 화척이 편성되어 있었고, 이들 기병 계열 지휘관의 숫자가 각 단위별 보병 계열 지휘관 숫자보다 많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40) 이는 9서당이 기본적으로 기병을 매우 중시한 부대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국시대 이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국가 군사력의 중요 구성부분이었던 기병이 언 제 어떤 형태를 거쳐 한국사에 처음으로 도입되고, 분화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 그 병종 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41) 1. 한국 고대 기승 문화의 최초 도입 과정 한국사에서 사람이 직접 말을 타는 기승 문화가 처음으로 출현한 상한 연대를 추정하는 작업 도 쉽지 않다. 전차나 수레가 아니라 말에 직접 탈 때만 사용하는 등자나 안장 등 안정용 마구 가 확인될 경우 기승 문화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분명히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초창기 안장은 후대의 경식 안장과 달리 금속을 사용하지 않는 단순 유기질제가 많아 온전히 보전될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서 유기질제 안장이 발굴된 경우가 있으나 산성 토양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유기질제 안장이 확인된 사례가 없으므로, 안장만으로 기승문화가 존재했는지 입증하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또한 금속 제 등자는 여러 마구 중에서 비교적 늦은 4세기 이후에야 출현한 했으므로 기승 문화의 최초 전래시기를 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초창기 마구는 주로 재갈이나 재갈멈추개(재갈멈치), 즉 비( 轡 )만 남아있 38)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 9월조. 39) 김성태의 연구( 삼국시대 병기의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9, p.124.)처럼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아달라왕 대에 기병 8000명을 동원했다는 기사를 사실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으나,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임에도 기병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에서 이 숫자를 사료적 근거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사료 비판과 검토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40)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하 무관조. 41) 신라는 당나라와의 연합작전으로 661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기병 기반을 꾸준히 강화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통일신라 시기의 기병 역사를 소상히 밝히기에는 전반적으로 관련 사료가 부족한 한계가 있다. 발해의 경우도 9세기 안녹산의 난 때 발해 측에 4만 기병 원군 요청을 해온 사례가 있고 명마가 산출된다는 기록도 보여 상당한 기병 운용 기반을 확보한 것으로 보이지만 관련 사료 부족으로 깊이 있는 연구에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문제점 때문에 통일신라 기병과 발해의 기병에 대해서는 후고를 기약하며, 본고에서는 상론을 피한다.
14 12 학예지 제17집 는 경우가 많다.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역의 초기 마구에서 수레용이나 기승용 등 용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형식의 재갈과 재갈멈추개를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보고 있다. 42) 이처럼 재갈과 재갈멈추개는 직접 승마뿐만 아니라 전차 혹은 마차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공통 마구이고 용도 차이에 따른 구조상의 차이점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이를 토대로 기승 문화의 존재 여부를 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완전한 수레 부속이 발견되지 않고, 그렇다고 등자나 안장 등 안정 마구도 확인되지 않으면서, 재갈과 재갈멈추개만 발견되는 경우 이것을 기승문화의 산물로 보아야할지 아니면 초기 마차 혹은 전차 문화의 일부로 보아야할지는 매우 조심스러운 해석을 요한다. 이 같은 문제는 요동지역의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 유적 뿐 아니라 기원전 3세기 대에서 기원후 4세기까지의 평양 등 한반도 서북지역의 유적이나 같은 시기 대구와 경주 등 영남지역의 유적 에서 출토되는 초기 마구의 용도를 해석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경우 기록상 전국시대인 기원전 307년 이후에서야 직접 승마에 기반을 둔 기병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43)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이미 은나라시대부터 수레나 전차가 아닌 직접 승 마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적이 확인되었다. 44) 중국에서 기병이 전장에서 독립된 병종으로서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낸 것은 전국시대 후기지만 실제로 기승 문화와 기승문화에 기반을 둔 기병의 상한 연대는 기록보다 훨씬 더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기승 문화의 기원 자체가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갖는다면 요동지역이 나 한반도 서북지역, 영남권 지역에서 출토된 재갈과 재갈멈추개 중 일부는 단순히 거마구의 일부가 아니라 직접 승마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 한반도 서북지역의 경우 위만조선이 우거왕 때 한나라에 말 5000필을 제공 했다는 기사 45) 를 토대로 이미 기원전 2세기에 기승문화의 보급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나아가 위만조선이 대규모의 기병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간주하는 주장도 있다. 46) 하지만 말은 마차 혹은 전차를 끄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위만조선이 국가 차원에서 5000필의 말을 중국에 제공하려 했다는 기록만으로 추가적인 검토 없이 이 시기 기승문화 내지 기병의 존재 42) 諫 早 直 人, 제작기술로 본 부여의 비와 한반도 남부의 초기 비, 영남고고학보 43호, 영남고고학회. p ) 史 記, 趙 世 家. 44) 영남대학교박물관, 고대의 말, 영남대박물관, 2002, pp.7~8. 45) 漢 書, 卷 九 十 五 西 南 夷 兩 粤 朝 鮮 傳. 46)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1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3 여부까지 언급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위만조선 시대에 대량의 말을 공납할 수 있을만큼 체계적인 말 공급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로 비추어 볼 때 위만조선 시대에 기승 문화나 기병의 존재 여부를 언급하는 것은 아직 이르지만 이 시기에 조직화된 말 공급 기반이 갖추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말 공급기반이 존재했고 주변국 인 한나라와 흉노에도 모두 기병을 운용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기 위만조선에 기병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앞으로 적극 탐색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47)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군현이 설치지역에서 기승 문화가 수용되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도 학계의 의견이 일치되지는 않고 있다. 낙랑 유적에서 마구는 전 시기에 걸쳐 부장되지만 주로 거마구와 함께 출토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비해 안정구나 전마구( 戰 馬 具 )가 거의 전하고 있지 않으므로 당시 말이 기승용이나 전투용으로는 이용되지 않았고 주로 수레를 끄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48) 반대로 낙랑 고분에서 출토되는 행엽 등은 거마구의 일부가 아니라 승마용 마구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례도 있다. 49) 이는 해당 시기 이 지역에 이미 말에 직접 타는 기승문화가 도입되었을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주장이다. 사실 한나라는 중국에 기승문화가 도 입된 이후에 해당하고, 이 시기에 중국 본토에서 군사적으로 기병을 운용한 사례도 광범위하게 확인되므로, 한의 군현이었던 낙랑에 기승문화가 보급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낙랑 유적 에서 기승용이나 전투용으로 사용된 마구의 존재가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것은 마구의 사회 적 위상, 매장의례와 매장문화의 특성 차원에서 이해할 문제일 것이다. 문헌 기록을 토대로 볼 때 한국사에서 기병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나마 뒷받침하는 보다 분명 한 기록은 기원 49년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되는 맥인이 한나라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약탈했다는 후한서 의 기사다. 50) 요동 외곽의 맥인이 태원 같은 중국 대륙 중심부까지 약탈하 려면 사실상 기병으로만 가능하며 보병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기록을 볼 때 결국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나 나아가 부여의 경우 늦어도 기원 전후 시점에는 직접 말을 47) 성정용, 삼국시대 기병과 기병전술에 대한 토론문, 제33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논문집, 한국고고학회, 2009, pp.169~ ) 오영찬, 낙랑 마구고, 고대연구 8, 고대연구회, 2001, p.7. 49) 최국희, 낙랑고분출토 금속공예품에 관한 연구-석암리 9호분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 後 漢 書, 卷 一 下 光 武 帝 紀.
16 14 학예지 제17집 타는 기승문화와 승마술이 보급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또한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사료 는 아니나 기원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이미 말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고구려 초기 말의 공급 체계나 말의 사회적 위상과 관련해서 주목할 대목이다. 정리하자면 정가와자 유적에서 나온 유물로 볼 때 한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동 지역 일부에서는 이미 청동기시대에 거마구 내지 초기 마구가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이 시점에서 부터 말을 사회적으로 이용했음이 분명하다. 기원전 2세기대의 위만조 선 시대에도 이미 5000필의 말을 타국에 제공할 만큼 체계적인 말 공급기반을 가지고 있었으 나 이 말이 군사용 전차나 기승문화에 활용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부 여에서는 늦어도 기원 전후 시점에는 기승문화가 도입되고 그에 기반을 둔 기병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2. 한반도 남부지역의 기승문화 수용 과정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최초로 사람이 직접 말을 탄 시기를 밝히기 위한 연구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학계에서는 한반도 남부지역에도 기승문화 도입 이전에 말이 끄는 수레를 사용하 는 단계가 먼저 존재했다고 본다. 한반도 남부지역 중에서도 삼한시대 혹은 원삼국시대로 거슬 러 올라가는 이른 시기의 거마구 내지 초기형 마구들이 주로 출토되는 지역은 영남지방이다. 이 영남지방의 거마구 내지 초기형 마구들은 기본적으로 낙랑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낙랑 지역 마구의 주용도를 수레용으로 본다면 여기에 뿌리를 둔 영남권 초기 마구도 기승용 마구라 기보다는 수레용 거마구의 일부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51) 이와는 달리 영남지역의 초기 마구 전체를 모두 수레용 거마구의 일종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기승용일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삼한시대 영남권 마구가 기승용일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우에도 당시 기승문화의 수준에 대해서는 다소 제한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즉 영남지역 삼한시대 마구가 해당 지역에 재지화된 이후에 비록 1인 기승용으로 사용되었다 하 더라도 삼국시대의 마구와 비교한다면, 승보용( 乘 步 用 )과 질주용( 疾 走 用 )과 같은 기능적인 차 이는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52) 하지만 이 두가지 견해는 모두 재검토의 필요성이 있다. 우선 거마구가 동반된 일부 유적을 51) 이상율, 삼한시대 표비의 수용과 획기, 한국상고사학보 62호, 한국상고사학회. 2008, p )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p.194~195.
1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5 근거로 삼한시대 영남권 마구를 모두 기본적으로 거마구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는 논리적 비약 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한반도 초창기 마구에서 가장 흔한 재갈과 재갈멈추개는 수레용이냐 아니면 직접 말에 타는 기승용이냐에 따라 형태상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재갈과 재갈멈추개만 출토된 유적도 기본적으로 기승문화의 산물일 가능성을 배 제할 수 없다. 또한 삼한시대 영남권 마구의 기능을 제한적으로 보는 견해도 재검토의 여지가 있기는 마찬 가지다. 이 같은 견해는 기본적으로 4세기 삼국시대 이후에 출토되는 등자와 경식 안장 등 안 정용 마구를 본격적인 실용마구로 보고, 이를 기승문화의 확산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석하는 시각과 연결되어 있다. 53)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세계사적 차원이나 혹은 중국사를 포함한 동아시 아 역사 차원에서 볼 때 경식 안장이나 등자가 바로 기승 문화의 존재 여부를 좌우하는 핵심 마구는 아니기 때문이다.당장 중국에서도 경식안장이나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전국시대에 이미 호복기사 라는 문구를 통해 상징되는 궁기병이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경식안장이나 등자 가 없었던 진나라 시대의 경우에도 진시황릉의 기병 토용을 통해 기병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 다. 한나라의 경우에도 역시 경식안장이나 등자가 확인되지 않지만 산시성 함양 양가만 출토 기병용 등 토용이나 화상석을 통해 기승문화와 창기병의 존재를 명백하게 식별할 수 있다. 54) 뿐만 아니라 허난성 정주에서 출토된 기원 전 1세기 전한의 기사상 화상전을 통해 등자 같은 안정용 마구가 없던 시대에도 기사( 騎 射 ) 문화가 존재했음을 명시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심지 어 중국 산둥성 기남현에서 출토된 마상재상을 보면 등자 같은 안정마구 없이도 매우 복잡한 마상 곡예인 마상재가 가능했음을 볼 수 있다. 55) 이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의 사례를 통해 보아도 더욱 분명해진다. 유럽에서 금속제 등자 는 7세기에 등장했지만, 그 이전에도 기승문화와 기병의 존재는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서구권 학계에서도 한때 경식 안장이나 등자를 본격적인 중기병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마구라고 주장한 사례가 있었으나 경식 안장이나 등자를 기승 문화의 존재 유무를 판별하는 기준점으로 삼는 경우는 전혀 없다. 그런 점에서 4세기 말 이후 영남지역 고분에서 마구 부장이 늘어나고 등자와 경식 안장이 53) 김두철, 영남지방의 기승문화 수용과 발전, 영남고고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4집, 영남고고학회, 1995, p ) 郭 物, 国 之 大 事 - 中 国 古 代 战 车 战 马, 四 川 人 民 出 版 社, 2004, pp.115~ ) 홍선표, 고대동아시아의 말 그림,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01, p97, p.123.
18 16 학예지 제17집 출현하는 현상을 마구의 개선 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는 있지만 이를 말에 직접 타는 기승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결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고고학적으로 삼한시대 영남권 유 적에서 수레용 거마구가 동반되지 않고 순수하게 재갈과 재갈멈추개만 출토되는 사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중국 측 문헌기록인 삼국지 에서도 3세기대 무렵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변진에 서는 소와 말을 탄다 고 기록한 이상 삼한시대에 영남권에서 말에 직접 승마하는 기승문화가 존재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과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이처럼 재갈과 재갈멈추개가 출토되는 분묘에서 무구류가 동반되는 것으로 보아 이 같은 기승문화가 군사적 운용으로 연결될 개연성, 다시 말해 기병의 존재 가능성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4세기 이전 영남권 마구도 기승 문화의 산물로 본다면, 3세기대 영남권 일부 마구에서 보이는 비실용적이고 의장 지향적인 특성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학계 일부에서는 삼한 시대 내지 원삼국시대 영남지역의 마구는 대부분 수레부속구일 가능성이 높고 그나마 시기가 흐르면서 실용품의 기능을 상실한 순수한 의례용품이 출현했다고 본다. 특히 3세기 후반대의 영남지역 마구 중 표비는 완전히 의기화된 비실용품으로 본다. 표 1쌍에서 규격이 불일치하는 현상이 확인되고, 표비를 구성하는 부속 중 3연식 재갈도 마디가 짧아 말에 장착할 수 없는 기형적인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또한 경주 황성동 2호묘의 표비처럼 표 1쌍의 규격이 일치하 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표의 크기, 재갈의 굵기나 구멍 수 등에 비추어 실제로 기능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56) 그러나 이 시기 마구에 비실용품이 일부 확인되는 것은 매장문화의 특수성 측면에서 해석할 여지도 있으므로 앞으로 좀 더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리라 본다. 57) 영남권에서 낙랑계 거마구를 최초로 수용한 시점과 나아가 영남권에서 기승문화를 최초로 도입한 시점을 밝히는 과정도 여전히 추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낙 랑군현 설치 이전에 이미 연나라 혹은 기타 중국 북방계 철기문화가 영남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마구의 일종인 표비도 같이 전파되었다고 본다. 58) 이에 비해 보다 보편적인 견해는 한 군현의 설치를 계기로 영남지방에도 거마구를 중심으로 한 마구가 전파되었다고 본다. 59) 이 경우 영 56) 이상율, 삼한시대 표비의 수용과 획기, 한국상고사학보 62호, 한국상고사학회. 2008, p ) 김성태는 그의 연구( 삼국시대 병기의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9, p.152.)를 통해 삼한시대의 비실용적 표비 가 부장되는 것은 기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라기보다는, 유기질제의 실용적 표비가 존재하고, 부장 시에만 그것을 모방한 비실용적 철제 표비를 매장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58) 이창희, 영남지방으로의 철기문화 유입에 대한 재고-표비를 중심으로, 고고광장, 창간호, ) 한 군현 설치가 영남지방으로 초기 마구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한다면, 같은 시기 영남지역 이외의 타 지역
1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7 남권 마구의 상한연대는 대략 기원전 1세기 대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한반도 남부 지역의 기승문화 도입 과정에서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마구의 기술적 수준보다는 말의 수급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여나 고구려처럼 말 사육 에 적합한 초원지역 내지 그 인접지역을 보유한 국가가 아닌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어떤 방식의 말 사육과 공급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급할 수 있는 말의 양은 어느 정도였는지, 혹은 필요하다면 외부로부터 말을 도입할 수 있는 통로를 갖고 있었는지 여부는 이 시기의 기 병의 역사를 해명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적어도 삼국 정립기 이후에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사육체계와 마찬가지로 국가 단위의 공적 사육체계와 사적 사육체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통일 직후인 669년 신라는 174개에 달하는 목장을 재분배했다. 60) 174개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 목장의 수는 조선 시대의 목장 수와 비교해도 오히려 많은 수치다. 조선 전기에 국가에서 관리하는 목장의 수는 159개였으며, 조선 후기인 1663년(현종 4년) 사복시 책임자 허목(1592~1682)의 책임 아래 편 찬된 목장지도 에 실린 목장의 수는 138개였다. 조선시대 문헌 중 가장 많은 목장 수를 기록 한 증보문헌비고 에는 총 171개의 목장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에 기록된 174개의 목장은 재분배 대상이 된 목장의 수치일 뿐 통일신라의 전체 목장 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통일신라 전체 목장의 수는 이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다. 61) 통일신라의 영토는 조선시대의 영토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 면 통일신라의 목장 밀도는 조선시대보다 더 높았을 개연성도 있다. 각 목장별 사육두수를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조선시대와 획일적으로 비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재분배 대상이 된 목장이 174개에 달했다는 사실은 통일신라시대 말 사육기반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케 한 다. 통일신라에는 목장 외에 촌락 단위 혹은 개인이 직접 관리하는 말 관리체계도 당연히 존재했 을 것이다. 이 같은 말 사육체계의 존재는 신라장적 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 신라장적 을 보면 총 462명이 거주하는 4개 촌락의 말 사육두수가 61마리에 달했다. 거주민 중 노비를 제외 에서 거마구 혹은 초기 마구가 드물게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만 이 문제는 삼한의 성립이나 초기 철기 문화 수용 과정 등 보다 큰 주제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검토의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60)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9년조. 61) 서영교, 신라통일기 기병 증설의 기반, 역사와 현실 45, 2002, p.129.
20 18 학예지 제17집 한 평민 남성의 수는 194명이므로 대략 남성 3명당 1마리의 비율로 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 다. 신라장적 에 나오는 촌락이 통일신라의 평균적인 촌락 형태를 대변하는지는 확실하지 않 지만, 목장을 제외한 촌락 혹은 개인 단위의 말 사육체계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같은 통일신라의 말 사육체계는 통일이후 신라기병의 급격한 증가를 뒷받침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에서 목장 재분배 조치가 결정됐던 669년은 통일 직후이므로, 174개에 달하는 목장 의 수효는 원래의 신라 소유 목장뿐만 아니라 구 고구려, 백제에 속했던 목장 중 신라에 새롭게 편입된 목장의 수까지 합산한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다. 통일전쟁 전 구 신라영역 안에 무려 174개에 달하는 목장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고 전쟁 직후 신라가 단기간에 목장을 신설했다고 해석하기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구 백제 영역인 서남해안 지역의 도서지대에 통일신라시대 목장이 많았던 점을 고려하면, 백제도 멸망 이전 목장을 이용한 조직화된 말 사육 공급체계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에 마정을 전담하는 조직으로 보이는 마부( 馬 部 )가 존재했다. 62) 마부라는 행정 조직 은 국가 차원 말 사육 공급 체계의 존재를 짐작케 한다. 즉 통일신라 이전 삼국시대에도 이미 한반도 남부에는 목장을 이용한 대량 사육체계와 개인 혹은 촌락 단위 말 사육체계가 확립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 이전 신라와 백제가 수천 명 단위의 기병을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조직적인 말 사육체계가 있었기 때문 에 가능했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이 같은 대규모의 조직화된 말 사육체계가 언제 어떤 경로로 발달되었 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백제 마부( 馬 部 )의 존재가 중국 사료에서 확인되는 6세기 중엽경, 신 라 승부( 乘 部 )가 설치되는 584년경에는 이미 고도로 조직화된 말 사육체계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목사회가 아닌 정주농경사회였던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대규모 말 사육기반을 갖추기 위해 서는 목장을 이용한 조직적인 말 사육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같은 조직화된 말 사육기반을 갖추는 일은 고대국가의 발전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62) 남도영의 그의 연구( 삼국시대의 마정, 동국사학 7, 1963, p.68.)에서 백제 마부가 마정을 전담하는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남도영은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 중에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다 고 설명한 것도 수사적 표현이긴 하지만 이미 시점에 백제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간주하고 있다.
2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9 4세기 이전 시점 한반도 남부지방의 기승문화가 그 이후 시기에 비해 두드러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4세기를 거쳐 5세기를 기점으로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기승문화가 폭발적으로 확 산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마구의 실용성의 높아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시기 고대국가 체제의 정비와 함께 말을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는 말 사육체계가 점차 갖추어졌기 때문일 가 능성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원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의 기승문화가 삼국시대에 비해 상대 적으로 빈약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마구의 실용 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말을 대규모로 공급할 수 있는 조직적인 말 사육 공급체계 가 미흡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3. 한국 고대 기병 병종의 분화와 그 기반 삼국시대 기병 병종을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각 기병 병종의 분화의 가능하게 했던 물질 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합성궁의 기원 문제와 기병용 창, 말의 품종 문제, 마구 문제를 우선 살펴보자. 1) 궁기병용 활 중국에서 전차 중심에서 기병 중심으로 전환되는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구가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이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말타고 활을 쏘았다는 호복기사( 胡 服 騎 射 ) 다. 기사라는 표현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승마술이 군사적으로 확산되는 단계에 서 나타난 초기 기병은 기본적으로 활을 주력 무기로 한 궁기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궁기병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장비는 무엇보다 활이다. 일본의 기마무자처럼 직궁-장궁 계열 의 활로 무장한 궁기병이나 중국 한나라의 일부 기병처럼 쇠뇌로 무장한 기병도 존재했지만, 몽골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스텝지역의 유목문화에 기초한 궁기병은 기본적으로 길이가 짧은 단궁( 短 弓,) 형태상 굽어있는 만궁( 彎 弓 ), 제작기법상 나무와 뿔과 힘줄을 사용한 합성궁 (Composite Bow) 계열의 활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직궁-장궁 계열의 활은 지나치게 큰 크기 때문에 마상 운용에 제한점이 많고, 쇠뇌의 경우 재장전이 매우 불편해 마상 운용에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고
22 20 학예지 제17집 고자 끝이 반대쪽으로 꺾여있으며 여러 가지 복합재료로 만들어진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 은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 말 위에서 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으면서도 강한 탄성을 기초로 크기에 비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63) 중앙아시아 지역의 합성궁은 기본적으로 나무, 뿔, 힘 줄 등 세 가지 재료로 결합해서 만든다. 조선시대 흑각궁처럼 뽕나무와 대나무, 쇠뿔, 힘줄 등 을 사용해서 만든 활이 바로 전형적인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이라고 할 수 있다. 합성궁 계열의 활이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을 곧 궁기병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물로 볼 수는 없지만 양자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합성궁 계열의 활이 출현한 시 기는 궁기병의 출현 시기내지 당시 궁기병의 효용성을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광주 신창동 유적지 등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에서는 장궁-직궁-단일궁 계열의 활이 발견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처음부터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만 사용했던 것은 아님 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른 시기의 합성궁 계열 활 관련 유물로는 평양 영화24년명 전 축분 64) 에서 출토된 골제 고자나 경산 임당 고분 65) 에서 출토된 골제 고자를 들 수 있다. 조선시 대 활에서 고자는 뽕나무 계열의 목재로 처리하지만 이 유형은 고자가 칼모양의 기다란 뼈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식별점이다. 뼈가 두터운 쪽에 활 시위를 걸 수 있는 홈이 있고 반대편은 매우 가늘고 매끈하게 가공되어 있어 활의 몸채 부분과 접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같은 방식의 활은 중국 한나라 대를 전후한 시기 신강-알타이-내몽골 등 중국 외곽의 유목민 거주 지역 유적에서 출토 예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화 9년명 고분과 경산 임당 고분을 통해 볼 때 우리나라 고대에서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외곽 지역 출토 사례를 본다면 활채 자체는 나무이며 좌우에 골제 고자를 접합시킨 후 활채 밖에 힘줄도 덧대고 활채 안쪽에는 뼈를 덧댄 방식의 합성궁이다. 66) 다시 말해 나무, 뼈, 힘줄을 조합한 합성궁의 일종이 분명하다. 서남아시아와 동유럽 지역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골제 고자만 남아있는 출토 사례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 같은 유형의 활은 조선시대 각궁 형태 의 보다 발전된 합성궁이 출현하기 이전에 서남아-중앙아-한국으로 이어지는 지역에서 광범위 63)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무기를 최초로 연구했던 북한 학자 전주농은 1958~1959년의 연구(고구려 시기의 무기와 무장-고분벽화 자료를 주로 하여, 1/2, 문화유산 /1959-1)를 통해 만궁은 기병에 적합한 활이라고 주장했 다. 64) 朝 鮮 總 督 府, 昭 和 7 年 度 古 蹟 調 査 報 告 第 1 冊 - 永 和 九 年 銘 塼 出 土 古 蹟 調 査 報 告, 朝 鮮 總 督 府, 1932, 4장 pp.12~13. 65) 영남대박물관, 경산 임당지역 고분군 발굴보고서 Ⅳ - 조영 CI, Ⅱ호분, 영남대박물관, 1999, p ) 于 志 勇, 未 央 宫 遗 址 出 土 骨 签 之 名 物 考, 考 古 与 文 物, 2007 年 02 期.
2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21 하게 사용한 초기형 합성궁의 한 모델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오는 형태상 단궁-만궁 계열의 활도 이와 유사한 제작방법으로 제작한 초기형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화 9년명 전축분은 서기 353년에 축조된 고분이고, 경산 임당 C-1-1호분도 등자 등 안정마 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고학계의 일반적 견해대로 보자면 4세기 이후의 고분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 9년명 전축분은 무덤의 구조상 망명객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낙랑군이 철폐된 이후의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에 조성된 고분인 만큼 아무리 늦어도 4세기 고구려에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이 존재했다는 점은 고고학적으로 분명하다. 하지만 위 두 유적에서 확인된 초기형 합성궁 외에도 마상에서 간편하게 운용 가능한 여러 가지 활 종류를 생각해 볼 수 있으므로 궁기병용 활의 상한선을 4세기대로 한정한 필요는 없다 고 보인다. 삼국사기 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모두 굽은 활, 다시 말해 만궁을 사용했다 는 기록이 확인된다. 67) 특히 고구려에서는 이미 1세기대인 모본왕대에 만궁을 사용했다는 기 록이 있는 이상 고구려에서 궁기병을 운용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갖춰졌 다고 할 수 있다. 영화 9년명 전축분이나 임당 고분에서 출토된 초기형 합성궁과는 제작기법이 약간 다르지만 역시 단궁-만궁 계열로 볼 수 있는 활도 고대에 존재했다. 이 유형의 활은 골제 고자가 달린 것은 마찬가지이나, 고자의 길이가 매우 짧고 속이 비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로 보자면 활의 활채 끝 부분에 속이 빈 고자를 꼽는 방식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골제 고자만 단독 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아직 활채 부분과 함께 출토된 사례가 없어 구체적인 형태를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이 같은 유형의 고자는 형태상 굽어 있다는 점 때문에 단궁-만궁 계열의 활 부속으로 간주되고 있다. 68) 이 같은 형태의 고자는 삼한시대의 유적인 사천 늑도에서도 출토 되고 있다. 69) 따라서 이런 양식의 만궁은 시기적으로 평양 영화 9년명 전축분 방식의 활보다는 시기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밖에 한반도 인접지역인 요동 심양의 청동기시대 정가와자 유적군에서도 골자 고자가 출 67) 삼국사기 를 보면 고구려의 경우 고구려본기 모본왕 4년조, 백제의 경우 백제본기 무왕 7년조, 신라의 경우 열전 관창조에 각각 만궁( 彎 弓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단일궁 계열의 활로 굽은 형태의 활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 으로 만궁은 단궁-합성궁 계열의 활을 뜻한다. 68) 김기웅, 삼국시대 무기 소고, 한국군사사논문선집 Ⅰ, 국방군사연구소, 1996, p ) 부산복천박물관, 또 하나의 도구-골각기 특별전도록, 부산복천박물관, 2007, p.101.
24 22 학예지 제17집 토된 사례가 있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활의 특징에 대해서는 궁자형( 弓 子 形 )의 양장궁( 兩 張 弓 )이었다 는 설명이 있다. 70)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가 아니라서 정확한 형태를 알기는 어려우 나 궁자형이었다면 일종의 만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런 만궁이라면 마상에서도 간편 하게 운용 가능한 활 종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뿔로 된 고자를 사용하는 초기형 만궁은 이미 청동기시대 심양 정가와자 유적군 에서 보이며, 형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골제 고자를 사용하는 초기형 만궁은 우리나라 삼한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구려의 경우 이미 1세기 대의 문헌기록에 만궁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므로 한반도 북부지역과 그 이북지역에서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궁기병을 적극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뿔로 된 고자와 나무로 된 활채 그리고 힘줄을 조합하는 좀 더 발전된 형식의 초기형 단궁-만궁-합성 궁은 아무리 늦어도 4세기 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도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창기병용 창 계열 무기 한편, 중국 한나라 고분에서 창 계열의 무기를 보유한 기병 도용이 출토되는 사례 71) 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중국에서는 승마술의 군사적 확산 과정을 거친 후 늦어도 한나라 단계부터는 궁기병과 창기병이 동시에 존재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 경우 초기형 마구와 함께 창 내지 넓은 의미의 창 계열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극, 과, 모, 삭이 출토된다면 창기병의 존재를 증명 하는 자료로 삼을 수 있겠지만 실제 고구려 고분이나 삼한시대 영남권 유적은 물론이고 백제, 신라, 가야 고분에서도 재갈, 재갈멈추개와 함께 철촉이나 철도, 철모가 동시에 출토되는 경우 가 대부분이어서 고고학적 증거만으로 기병 병종을 식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삼국시대에 기병용 창과 보병용 창이 길이나 형태 양 측면에서 확연히 구별된다는 견해 가 있어 주목된다. 우선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기병용 창은 말에 탄 기마무사와의 상대적 크기 비교를 통해 볼 때 그 길이가 짧아도 250cm 이상인데 비해, 보병용 창은 안악2호분 삼 실총 제2실 서벽 장천 1호분 전실 북벽 수산리 고분 연도 동벽 등의 벽화를 토대로 볼 때 2m 정도 내외로 짧았다는 것이다. 72) 실제 삼국시대 고분에서도 백제권의 천안 청당동 22호분 70) 김원룡, 심양 정가와자 청동시대 묘와 부장품-예맥 퉁구스의 청동전기문화, 동양학 6, 1976, p.9. 71) 楊 泓, 古 代 兵 器 通 論, 紫 金 城 出 版 社, 2005, p.138.
2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23 이나 신라권의 경산 임당 E-132호분에 남아있는 창 자루의 흔적을 측정해본 결과 추정 길이가 각각 148~214cm, 207cm인 것으로 나타나 길이 2m 급인 보병용 단창의 존재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학계에서는 삼국시대에 마상용 창인 삭( 槊 )이 보급되었다고 보면서 동래 복천동 11호 분, 창녕 교동 3호분, 합천 옥전 23호분, 함안 백천리 1호분 등에서 출토된 창이 바로 삭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에 따른 마삭의 추정 길이는 동래 복천동 11호분의 경우 3.5~4m, 합천 옥전 23호분이 4m, 함양 백천리 1호분이 3.8m 전후로 보고 있다. 73) 부산 지역의 유적에 한정해서 창(철모)의 추정 길이를 산출, 유사한 결론을 도출한 연구 사례도 있다. 즉 부산 지역의 고분 중 복천동 4호 4m, 복천동 11호분 3.5~4m, 복천동 53호 3.2m, 당감동 9호 3.6m, 반여동 21호 3.3m 등 3m 이상 급의 철모가 나온 고분 중 3개 고분에서 마구가 같이 출토되었다는 점을 소개하면서 이 고분에서 나온 철모는 중국의 삭과 같이 기병전에서 강력한 살상력을 발휘하는 중장무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74) 이 같은 주장의 연장선장에서 기병용 창은 형태상 창날이 좁고 예리하며, 창날과 자루가 결 합하는 봉부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긴데 비해 창날은 상대적으로 짧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시 말해 삼국시대 창 중에서 중형( 中 型 )의 연미유관형( 燕 尾 有 關 形 ) 장공 식( 長 銎 式 )이 기병용 창이고, 대형기의 직기유관형 단공식이 보병용 창일 가능성이 높다고 간 주한다. 75) 삼국시대 창 계열 무기의 변화 양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고, 특히 삼한-삼 국시대 창 계열의 무기는 계통이 매우 복잡하므로 어떤 일원적인 변화양상을 제시하기는 힘드 나 영남권 지역의 경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창날이 길고 넓은 형식에서 창날이 짧고 좁은 형식 으로 점차 바뀐 것은 분명하다. 이 같은 변화 양상은 당시 창 계열의 무기가 기본적으로 찌르 는 기능과 베는 기능이 복합된 방식에서 찌르는 기능 위주로 발전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 한 공부가 길어지는 경향이 확인되는 점도 찌를 때의 강력한 충격으로 창날과 목제 자루가 결 합하는 부위가 구부러지거나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역시 72) 김성태, 삼국시대 병기의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9, pp.148~ ) 김성태, 삼국시대 병기의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9, p ) 이현주, 삼한-삼국시대 부산지역 군사체제의 고고학적 연구, 부산대박사학위논문, 2005, p ) 김성태, 삼국시대 병기의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9, p.149. 이밖에 김성태는 그의 연구를 통해 삼국시대 고분에서도 출토되는 철준은 기병용 마상창의 부속이라는 점에서 철준도 기병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보고 있다.
26 24 학예지 제17집 찌르기 기능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창날 형태의 변화와 함께 마구와 동반되는 길이 4m급 전후의 장창이 확인된 것은 찌르는 용도의 장창을 주력무기로 하 는 전형적인 의미의 창기병이 삼국시대 영남권에 출현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고고학적 증거 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중장기병 연구자 중에서도 중국의 삭에 대한 문헌 자료 검토를 통해 우리나라 삼국 시대 기병용 삭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견해가 있다. 중국 후한 말에 집필된 석명( 釋 名 ) 은 모 ( 矛 ) 중에서 길이가 1장8척인 것을 삭이라고 하는데 말 위에서 휴대한다 고 설명한다. 76) 도 남 북조시대에 가면 길이가 2장4척인 삭도 나타나게 된다. 77) 이것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삭의 길이는 대체로 4m이미 긴 것은 5~6m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면서 고구려의 삭도 비슷했을 것이 라고 보는 연구결과도 있다. 78) 3) 한국 말의 품종과 기병 병종 말은 통상 어깨뼈의 높이에 따라 체고 150cm급의 아랍종 말은 대형마, 체고 123~136cm급의 몽골마는 중형마, 현존 제주마와 중국의 사천마 등 체고 100~120cm급의 말은 소형마로 분류한 다. 이 같은 체고에 따른 말의 분류나 말의 품종은 기병의 운용 방식이나 전술과 밀접한 관련 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구석기시대 유적층에도 여러 종의 말 화석이 발견되고 있으나 역사시 대 이후의 한국말과는 계통이 다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밖에 함북 송평동 패총, 평양 미림 리 유적, 제주 한림읍 한들굴 등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도 말뼈가 출토된 사례가 있으나 구체적 인 마종 분석이 시도되지도 않아 구체적인 말의 크기나 품종을 추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79) 또한 이들 유적의 경우 마구가 같이 출토되지 않아 말을 수레용이나 혹은 직접 승마용으로 사 용했다고 볼 수 있는 직접적 증거도 불충분하다. 마구와 공반되지는 않았으나 기원후 1세기 경의 유적으로 알려진 강릉 강문동 유적에서 말 뼈가 나온 사례도 있다. 80) 이 사례는 삼한시대 초기 마구 도입시기와 근접한 시기의 말뼈라는 76) 釋 名, 釋 兵 조. 77) 梁 書, 券 59 列 傳 羊 侃 조. 78) 조필현, 고분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 중장기병, 전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9, p )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pp.44~46. 80) 영남대학교박물관 편, 고대의 말, 영남대박물관, 2002, p.18.
2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25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남한 지역에 한정할 경우 초기 철기시대 이래 통일신라시대까지 말뼈가 나온 유적은 2000년을 기준으로 총 21개소에 달한다. 81) 그 이후 경기도권의 고구려 보루 유적 등에서도 말뼈가 추가로 출토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체계적인 계측치를 토대로 말의 종류나 품종을 규명한 연구는 사례는 극히 드문 편이다. 남한 지역의 경우 삼국시대 김해 대성동과 예안리 유적에서 출토된 말뼈에 대해 중형마라고 보고한 사례가 있으나 다른 연구자들은 그를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며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 다. 82) 유전자 기법을 동원한 연구 사례로는 제주 곽지동굴에서 나온 7~8세기 말뼈를 연구한 사례 가 대표적이다. 83) 이 연구에 따르면 제주 곽지동굴에서 나온 말뼈의 mtdna를 분석한 결과 현존하는 제주마나 일본 쓰시마마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84) 이 같은 연구결과로 볼 때 소형마로 분류되는 현존 제주마를 토대로 삼국시대 마종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보이며, 앞으로 체고 계측치와 유전자 분석 연구 결과가 더 축적 되어야 할 것이다. 문헌기록상으로 볼 때 고구려 건국신화에 과하마라는 키가 작은 말 품종이 등장하고, 85) 3세 기 경의 상황을 기록한 삼국지 에도 고구려의 말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 편하다 는 기록 86) 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토종마는 기본적으로 체고가 작은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 濊 )가 후한 환제 때 한나라에 과하마를 헌상했다는 기록 87) 이 있고 배송지의 주에 과하마 는 높이가 3척인데, 말을 타고서도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고 설명 하고 있다. 백제에서도 621년 무왕이 중국 당나라에 과하마를 보냈다는 기록 88) 이 있고, 신라의 경우에도 당나라 개원연간에 과하마를 헌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89) 따라서 이처럼 크기가 작은 과하마는 고구려 뿐 아니라 동예와 백제, 신라에까지 널리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90) 81) 김건수, 한국 고대의 말, 마사박물관지 2000년, 2000,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pp.4~10. 82) 김건수, 우리나라 고대의 말, 고대의 말, 영남대박물관, 2002, p ) 오문유 외, Genetic Characterization of Horse Bone Excavated from the Kwakji Archaeological SIte, Jeju, Korea, Mol Cells Vol 14 No 2, 2002, p ) 비교 수치상 가장 가까운 것은 서러브레드(Thoroughbred horse)종의 말이었다. 85) 魏 書, 四 夷 傳 高 句 麗 조. 86) 三 國 志, 魏 書 烏 丸 鮮 卑 東 夷 傳 高 句 麗 조. 87) 三 國 志, 魏 書 烏 丸 鮮 卑 東 夷 傳 濊 조. 88) 新 唐 書, 列 傳 百 濟 조. 89) 新 唐 書, 列 傳 新 羅 조. 90) 三 國 志 는 부여에 대해서만은 명마( 名 馬 )가 산출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과하마와는 다른 좀 더 체고가 큰 말을
28 26 학예지 제17집 하지만 삼국시대에 실제로 운용했던 말 중에는 과하마 외에도 체고가 좀 더 큰 말도 존재했 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말들 중에는 사람과의 크기 비례로 볼 때 소형 마라기보다는 중형마에 가까운 형태로 묘사된 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신당서 에서 (신라에는) 말이 많은데, 비록 체고가 높고 덩치도 크지만 잘 달리 지는 못한다 고 기록한 기사는 주목할 만하다. 91) 일반적으로 창기병 혹은 중장기병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말의 체형이 큰 것이 유리하다. 창기병과 중장기병은 적의 진형에 정면 돌격하여 그 충격력과 심리적 위압감으로 진형의 흩트리는 것이 핵심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신라에 체형이 큰 말이 존재했다는 것은 삼국시대에 창기병 내지 중장기병에 적합한 말도 존재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92) 4. 한국 고대 마구와 기병 병종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등자와 경식 안장으로 대표되는 4세기 대 이후의 안정용 마구 도입을 실용적 마구의 수용으로 해석하며, 이를 계기로 1인 기승이 가능한 본격적인 기승 문화가 확산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해석한다. 93) 하지만 한반도 남부지방의 기승문화 수용 과정을 살펴 보면서 이미 언급했듯이 그 같은 해석은 무리한 것이다. 등자와 고정 기능을 갖춘 경식 안장의 출현 이전에도 기승문화는 범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말을 타는 승마법에는 자연적인 방법과 인공적인 방법이 있는데 목소리, 다리, 손, 몸을 사용 하는 자연적인 승마방법은 고대 세계에 광범위하게 전파됐다. 말은 민감한 동물이어서 사람의 목소리나 자세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이 같은 말의 특성을 말의 기억력과 결합할 경우 충분히 잘 길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다리로 말의 배를 누르는 것만으로 말에게 앞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고, 누르는 압력을 조절해 말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했다. 한쪽 발만 누르거나 혹은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해서 전진 방향을 바꾸거나 회전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하마 중에 명마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다. 91) 新 唐 書, 列 傳 新 羅 조. 92) 이처럼 덩치가 큰 말과 그보다 작은 말이라는 말 품종의 2원적 구조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로도 계승된다. 증보문헌 비고 에 따르면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은 동방의 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호마( 胡 馬 )는 북쪽에서 온 것이며, 향마( 鄕 馬 ) 는 나라 안에서 나는 것인데, 나라의 말( 國 馬 )은 나귀와 같아 양마( 良 馬 )로는 족하지 못하다 고 설명하고 있다. 국산 토종마인 향마는 나귀와 같아 좋은 말이 아니라고 간주됐으며, 외국에서 수입한 호마가 더 좋은 말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93)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202.
2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27 몸의 자세 변화로도 말에게 앞으로 전진하라는 신호를 주거나 점프에 대비하게 할 수도 있었 다. 재갈 등 인공적인 승마법이 도입된 이후에도 활을 쏠 때 두 손의 사용이 동시에 제한되는 궁기병에게 다리와 몸을 사용한 자연적인 승마법은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또한 목소리를 사용 한 승마법도 매우 유용한 기술이었다. 94) 인공적인 승마법은 재갈(Bit)과 고삐(Reins), 박차(Spurs), 채찍(Whips) 등을 사용하는 승마 방식을 의미한다. 재갈과 고삐는 가장 이른 시기부터 사용한 마구 중의 하나다. 특히 재갈의 경우 초창기에는 금속제가 아닌 뿔 등 유기질제를 사용하기도 했다. 요동 심양의 정가와자 유 적군에서도 뿔을 사용한 재갈이 확인되어 재갈의 최초 사용 시기가 금속제 재갈의 출현 이전으 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의 재갈( 轡 )은 다시 말의 입속에 들어가는 좁은 의미의 재갈(함: 銜 ) 95) 과 재갈이 말의 입속에서 빠지지 않게 재갈의 양끝에 붙이는 부속인 재갈멈추개(재갈멈 치: 銜 留 )로 구성된다. 여기에 고삐와 연결하는 부속인 고삐이음쇠(인수: 引 手 )라는 부속이 추가 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좁은 의미의 재갈( 銜 )의 경우 마디 수에 따라 2연식과 3연식으로 구분하나 그 같은 차이가 어떤 기능적 차이가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출토되는 초기 형 표비에서 2연식은 주로 고조선식 유물과 같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으며 3연식은 한계 유물과 같이 출토되는 경향이 많다는 점이 확인된 정도다. 96) 삼국시대 이후의 재갈에서는 압도적으로 2연식이 많으며 3연식은 드물다. 동아시아권의 재갈( 轡 )을 나누는 보다 일반적인 기준은 재갈멈추개의 모양에 따른 분류다. 재갈멈추개는 그 형태에 따라 봉의 형태인 표비, 고리 모양인 원환비, 판 모양인 경판비로 나뉜 다. 학자에 따라서는 경판비를 판비라고 부르고, 과거 경판비로 분류하던 비 중 일부를 원판비 로 분리해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97) 표비는 기원전 7~3세기의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족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한 재갈로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부터 한나라까지 수레용과 기승용으로 동시에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 에서도 낙랑군현 설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한반도 서북지역과 삼한시대 영남권 유적에서 광범 94) Louis A. Dimarco, War Horse, Westholme, 2007, p ) 이렇게 좁은 의미의 재갈( 銜 )을 재갈쇠 라고 부르기도 한다. 96) 이상율, 삼한시대 표비의 수용과 획기, 한국상고사학보 62호, 한국상고사학회. 2008, p )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p.35~42.
30 28 학예지 제17집 위하게 발견되고 있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 유적에서도 출토된다. 표비의 재갈멈추개는 봉 모양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직선이라기보다는 다소 굽어있는 모양인 경우가 많다. 고조선식의 표비는 흔히 프로펠러 모양이라고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며 한계 표비 는 S자형인 경우가 많다. 표비는 동아시아권 재갈 중에서 비교적 말에 강한 압박을 가하는 유 형에 속한다. 판비는 말 그대로 재갈멈추개가 판 형태로 생긴 재갈이며 다시 그 형태에 따라 원형, 심엽형, 내만타원형, 타원형, f 자형 판비 등으로 세분하기도하나 이 같은 형태 차이가 뚜렷한 기능적 차이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판비는 구조상 말의 입술 양끝을 자극하는 정도여서 그 제어력 이 다른 재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8) 원판비는 판 모양으로 생긴 재갈멈추개의 중앙에 난 구멍에 함외환이 끼워지는 판비와 달리 재갈멈추개의 중앙에 위치한 절대 에 함외환이 끼워지는 구조의 재갈을 의미한다. 원판비는 판비에 비해 재갈멈추개가 말의 뺨에 가하는 압박이 가장 적으며 함과 인수의 유동성도 큰 것 으로 알려져 있다. 99) 이 같은 특성을 근거로 원판비가 가장 실용적인 비라고 보는 견해도 있 다. 100) 재갈멈추개가 하나의 독립된 원형의 환으로 된 구조의 재갈도 있는데 이것이 원환비다. 원환 비는 사르마티아에서는 기원전 4세기, 북프랑스의 켈트족 묘지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서 확인 되며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이후에 나타난다. 101) 이밖에 함( 銜 ) 양쪽 끝이 판상의 재갈멈추개 가운데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의 재갈도 있다. 이런 방식을 알비라고 하는데 서남아시아지역에서 기원전 1000년기 이전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중국에서도 은주시대에 흔한 방식의 재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 마구 중 에서도 표비와 함께 부분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방식은 재갈멈추개가 확실히 고정되지 않아 서 말에 대한 제어력이 다소 떨어지며 주로 수레의 부속, 즉 거마구의 일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02) 한국 마사회의 승마훈련원 교관의 평가에 따르면 S자형이나 I자형 재갈은 고삐와 재갈멈추 98)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 ) 김두철, 삼국시대 비의 연구-비의 계통연구를 중심으로, 영남고고학보 13호, 영남고고학회, 1993, p ) 류창환, 가야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p )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p.39~ )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41.
3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29 개가 말의 입을 강하게 압박해서 말의 입에 큰 자극을 줄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원형과 판형의 재갈멈추개는 말의 입에 큰 자극을 주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103) 다시 말해 삼한 시대부터 널리 사용되었던 표비가 보다 제어력이 강한 재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무리 빨라 도 4세기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보이는 판비 원판비 원환비는 상대적으로 제어력이 약한 재 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제어력이 약한 재갈이 출현한 이유에 대해, 승마 기술이 우수할수록 제어 력이 강한 재갈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제어력이 약한 재갈로도 충분히 말을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기마술에 능숙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에서 경판비나 원 판비를 많이 사용한데 비해 상대적으로 기마술에 미숙한 한 군현지역에서 S자형 표비를 사용 한 것은 곧 승마기술의 격차 때문이라는 것이다. 104) 하지만 표비는 스키타이는 물론이고 흉노 고분으로 추정되는 몽골 아르항가이 호드긴 톨고 이 1호묘에서도 출토된 재갈 양식이란 점을 고려해보면 이 같은 해석은 너무 단편적으로 보인 다.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 국가에서 왜 이처럼 여러 양식의 재갈이 복합적으로 동시에 사용되었는지 이유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 같은 재갈 양식의 변화가 말에 대한 제어 력 강화라는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점에서 이 시기 재갈 양 식 변화에 어떤 기능적 의미를 부여하기는 아직 이르다. 105) 삼국시대 재갈에 붙은 고삐 이음쇠(인수)가 무척 긴 경우가 많은데 이 같은 형태의 인수는 북방 기마민족들이 중원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중장기마술에 적합하게 개발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106) 하지만 중국 진시황릉 기병용이나 아시리아 부조 상처럼 중장기병이 존재하 지 않은 시기에도 이 같은 긴 인수가 확인되므로 이런 형태의 인수가 어떤 기능적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밝히기 위해선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비나 인수와 달리 등자 같은 안정구는 분명한 기능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등자는 말에 103) 이희관, 고신라시대 재갈과 적석목곽분의 축조자들, 동아연구 17, 서강대 동아연구소, 1989, p7. 104) 이희관, 고신라시대 재갈과 적석목곽분의 축조자들, 동아연구 17, 서강대 동아연구소, 1989, p7. 105) 서구권의 연구결과(Louis A. Dimarco, War Horse, Westholme, 2007, p.26.)에 따르면 유럽 등 서구권에서는 재갈 을 수륵식 재갈(snaffle bit)과 대륵식 재갈(curb bit)로 나누고 있다. 수륵식 재갈은 말의 방향과 속도를 모두 조절할 수 있으나 커브 재갈에 비해 말의 입에 가해지는 압력은 다소 약한 편이다. 대륵식 재갈은 주로 수직 방향으로 말의 입에 압력을 가하며 승마자가 정지와 후퇴를 원할 때 즉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대륵식 재갈은 목 고삐(neck reins)와 결합될 경우 한 손으로도 말을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사용한 전통적인 재갈은 대부분 수륵식 재갈 내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106) 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동의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p.214.
32 30 학예지 제17집 탄 승마자의 자세를 안정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졌다. 등자가 없던 시대에도 궁기병과 창기병 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등자 출현 이후에 궁기병과 창기병은 좀 더 안정적인 자세를 토대로 무기 운용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물론 등자는 기병 전투의 본질을 원천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또한 등자의 출현은 승마 기술을 개선시켰을 뿐 승마 기술에 혁명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자가 기마 전사의 전투능력을 전체적으로 향상시킨 것 또한 사실이었다. 107) 이 같은 등자의 기원에 대해서도 여전히 논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기질제가 아닌 금속제 등자의 경우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에서 4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최초로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최초의 금속제 등자는 1개로만 구성되어 승마용 안정구라기 보다 는 말에 보다 쉽게 탑승하기 위한 발판 역할에 가까웠다. 하지만 2개 한 쌍으로 구성된 등자가 출현하면서 안정구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지니게 됐다. 이 같은 등자는 고구려에 큰 시차 없이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도 아무리 늦어도 4세기 후반 대에는 등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08) 경식 안장 내지 승마자의 자세를 고정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안장의 중요성도 과소 평가 할 수 없다. 등자가 없더라도 전륜과 후륜을 갖춘 방식 등 적절한 형태를 갖춘 안장을 사용할 경우 독자적인 안정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적절한 형태의 안장은 승마자가 경사지를 오르 내리거나, 점프를 할 때 등 장애물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켜 준다. 109) 로마시대의 안장 중 네 모서리에 뿔형 안정구가 부착된 안장(Four-Horned Roman Framed Saddle)의 경우, 뿔형 안정구의 길이가 길수록 말에 탔을 때 편안한 느낌은 줄어들었지만, 문자 그대로 승마자를 말 위에 안정적으로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같은 형식의 안장은 승마자 가 의도하지 않게 말에서 떨어지는 방지할 수 있었다. 이런 안장이 출현한 이후에는 유목민족 출신 기병 등 어려서부터 기마풍습에 익숙한 이민족 출신을 이용하지 않아도 정착농경민을 대 상으로 한 기병 충원이 보다 용이해졌다. 또한 적에게 창이나 칼을 좀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107) Louis A. Dimarco, War Horse, Westholme, 2007, p ) 참고로 국내 고고학계에서는 등자의 병부 길이에 따라 장병계 등자와 단병계 등자로 구분한 후 주로 시기적 선후관계 를 분석할 때 이 같은 구분법을 이용한다. 하지만 등자의 병부 길이는 승마 자세, 특히 승마시 발의 자세에 차이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마상 무기 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럽 학계에서는 마상 무기 운용시에 앉는듯한 자세보다는 서는 것과 유사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창 등 장병 무기 운용에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기능적 특성을 우리나라 등자 형태 연구에도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 109) Louis A. Dimarco, War Horse, Westholme, 2007, p.60.
3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31 무기 운용 능력도 향상시켰다. 110) 이 같은 로마 안장의 기능적 특성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전후륜 수직안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장창으로 무장한 중세기사가 마상 창술 토너먼트를 하려면 등 자가 있는 것이 매우 바람직스럽지만, 좋은 안장은 더욱 필수적인 조건 이라는 평가도 안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본적으로 창기병 내지 중장기병은 승마자를 고정시키는 기능을 가진 안장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111) 무엇보다 금속제 등자가 없었던 시기에 로 마나 서남아 지역에 중장기병이 존재했던 역사적 사례는 등자보다는 경식 안장 내지 이와 유사 한 고정 기능을 갖춘 안장이 중장기병의 필수적 전제조건임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12) 물론 등자와 고정 기능을 갖춘 안장이 조합이 될 경우 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으며 특히 중장기병이나 창기병의 창 운용 능력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장기병이나 창기병이 창을 겨드랑에 낀 상태로 적진을 향해 빠른 속도로 기병 돌격(Cavalry Charge)을 감행해 적과 부딪 혔을 때 등자와 안장의 후륜(Cantle)은 충격에 따른 불안정성을 줄여주는 효과를 거뒀다. 113) 만약 말이 공포를 느껴 적진 앞에서 갑자기 멈추는 경우에 적절한 안정구가 없는 상태라면 말 에 탄 승마자는 앞으로 튕겨나갈 수 있다. 경식 안장, 특히 안장 앞부분이 수직으로 솟아오른 전륜(Pommel)을 갖춘 경식 안장의 경우 이처럼 말이 갑자기 멈출 때에 승마자가 말 앞으로 튕겨나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안장 뒷부분에도 수직으로 된 판, 다시 말해 후륜을 갖출 경우 말이 급선회할 때도 뒤로 밀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승마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다. 114) 특히 매우 긴 장창을 보유한 중장기병이나 창기병의 경우 승마자가 균형을 잡기 쉽지 않다는 110) Louis A. Dimarco, War Horse, Westholme, 2007, p ) Philip Sidnell, Warhorse-Cavalry in Ancient Warfare, Hambledon Continuum, 2006, p.317~ ) 이런 점에서 최병현이 그의 연구( 고신라등자고, 숭실사학 1, 1983, p.44.)를 통해 중국 남북조시대 미술품에 다 른 마구는 모두 묘사하고도 등자를 묘사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중국에서 등자의 보급은 느리고 점진적이었다고 지 적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또한 서영교도 그의 연구( 고구려의 기병과 등자, 역사학보, 2004, pp.42~49.)를 통해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 묘사된 중장기병에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며, 등자 없이도 중장기병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의 중장기병 그림에서 등자 묘사가 단순히 누락된 것인지 아니면 등자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를 묘사한 것이지는 장담하기 힘들지만 등자가 없어도 중장기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 자체는 세계사적인 차원에서 중장기병의 확산 과정을 고려할 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113) Philip Sidnell, Warhorse-Cavalry in Ancient Warfare, Hambledon Continuum, 2006, p ) 하지만 경식 안장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식 안장은 그 형태에 따라 승마자와 말의 물리적 접촉을 제한할 수 있으므로 다리와 몸을 이용한 자연적 승마법을 사용하는데 제약을 준다. 이 점은 팔 대신 다리에 많이 의존하는 고전적 스타일의 궁기병의 승마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점은 삼국시대 경식 안장, 특히 높이가 높은 고교안 ( 高 橋 鞍 )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고려해야할 요소 중 하나다.
34 32 학예지 제17집 점에서 등자와 고정식 기능을 가진 안장의 도움은 매우 유용했다. 전후륜이 모두 수직으로 된 안장은 전후륜 수직안은 승마자의 안정성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안장 형식이라는 점에서 전쟁, 특히 중장기병이나 창기병의 위력 증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본적으로 창기병 위주로 운용 됐던 1세기대 로마 기병의 안장에 이 같은 전륜과 후륜이 식별되고, 11세기 대 노르만족의 전 쟁용 안장이나 15세기의 영국의 전쟁용 안장 등이 모두 전륜과 후륜이 수직으로 된 구조를 취하는 것도 이 같은 전후륜 수직안의 특수성을 잘 보여준다. 즉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4세기 이후 출토되는 등자와 전후륜 수직안 방식의 경식 안장은 전형적인 의미의 창기병의 존재를 강하게 뒷받침하는 마구라고 할 수 있으며, 나아가 같은 무기 운용 방식을 지니는 중장기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15) 다만 중국에서 6세기 대 이후 후륜을 경사진 형태로 만든 후륜경사안이 출현한 이유나 그 같은 안장이 우리나라에서 확산된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당나라시대 처럼 중장기병에서 경기병 위주로 기병 운용의 주안점이 변경된 시대라면 전후륜수직안에서 후륜경사안으로 안장의 방식이 바뀐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후륜경 사안이 최초로 출현한 시점은 중장기병이 여전히 기병의 주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6세기 무 렵이다. 116) 때문에 전후륜 수직안에 대비되는 후륜경사안의 기능적 특성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후륜경사안이 전후륜 수직안에 비해 마상에서의 활동이 더 자유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7)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후륜경사안이 도입된 이 후에는 전후륜 수직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18) 5. 운용무기로 본 한국 고대 기병 병종의 분화 양상 삼국이 뚜렷하게 정립하는 4세기 이후에는 기병의 병종을 식별할 수 있는 보다 다양한 자료 115) 이미 국내학자의 선행 연구 중에도 막연하게나마 경식안장과 창기병과의 관련성을 거론한 사례가 있다. 김두철은 그의 연구(김두철, 영남지방 기승문화 수용과 발전, 제4회 영남고고학회 학술발표회 논문집, 영남고고학회, 1995, p.36.)에서 후륜수직안은 기본적으로 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마전에 적합한 구조 라고 언급하고 있다. 116) 중국의 연구성과( 郭 物, 国 之 大 事 - 中 国 古 代 战 车 战 马, 四 川 人 民 出 版 社, 2004, pp.147~169.)를 보면 북위시대의 분묘 에서 나온 말갑옷 없는 말 토용에 후륜경사안이 식별되며, 이밖에도 돈황 285호분묘의 벽화에 묘사된 중장기병이나 북주 무제 효릉 중장기병 토용이나 당나라 의덕태자묘 출토 중장기병 토용에도 후륜경사안에 가까운 안장 형태가 식별된다. 117) 김두철, 신라마구 연구의 몇 과제, 신라문화 15, p ) 조선시대의 안장에서도 전후륜 수직안과 후륜 경사안과 유사한 안장이 모두 확인된다. 또한 후륜 경사안과 유사하면 서 전륜이 뚜렷하지 않은 구조의 안장도 확인된다. 이 같은 조선시대의 안장을 삼국시대 안장과 비교해 그 기능성 특성을 분석하는 작업도 향후 연구 필요성이 있다.
3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33 가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고구려 벽화라고 할 수 있으며, 4세기 이후의 기사에서는 삼국사 기의 사료적 신뢰성도 높아지므로 문헌기록도 기병 병종 식별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에도 고분에서는 철촉 철도 철모가 복합적으로 동시 출토되는 경우가 많아 궁 기병과 창기병을 명시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문헌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그 개요 는 확인할 수 있다. 또 말갑옷이나 마주가 출토되는 유적에 한해 중장기병의 존재만은 분명하 게 식별할 수 있다. 1) 중장기병 고구려 고분벽화를 토대로 보면 고구려에서 말까지 갑옷을 입힌 중장기병이 존재했다는 점 은 분명하다. 신라의 경우 경주 황오동 솔샘지구 유적 119), 가야의 경우 함안 마갑총 120) 에서 출토된 마갑을 볼 때 중장기병의 존재 자체는 의심의 여지없이 실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121) 백제의 경우에도 중장기병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 가능한 백제기병선각와가 2006년에 발견되 고, 2010년에는 마갑의 일부로 추정할 수 있는 철제 소찰이 화천 원천리 백제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되어 중장기병의 존재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는 사료가 늘고 있다. 122) 삼국시대 전체 전력에서 중장기병이 차지한 비율을 구체적으로 특정하기는 힘드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말이 등장하는 사례 151건 중에서 수렵 장면을 묘사한 57건을 제외한 94건 중에 서 57건이 말과 사람 모두 갑옷을 입고 있다. 123) 결국 기병 중 중장기병의 비율이 60.6%에 달하는 셈이다. 124) 사실 이 시기에 중장기병이 중시됐던 것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학계에서도 남북조시대와 수나라 때에 기병은 기본적으로 중장기병 위주였다고 본다. 125) 119)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황오동 솔샘지구 출토 말 갑옷 보도자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함안 마갑총,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 이처럼 존재가 뚜렷하게 식별되는 삼국시대 중장기병의 도입 시기와 그 특징에서는 아래 III장에서 후술하겠다. 122) 다만 백제의 경우 중장기병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문헌적 근거들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빈약하다는 점에 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궁기병을 더 중시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관련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언급하는 선에서 멈추고자 한다. 123)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1999, pp.43~45. 본고에서 제 시한 수치는 여 박사의 논문에 실린 표에서 제시하고 있는 수치를 토대로 본 논문에 필요한 값을 재계산한 것이다. 124) 물론 이 같은 수치는 단순한 참고용 이상의 의미는 없으며 고구려의 기병 중 중장기병의 실제 비율을 그대로 보여주 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같은 우리나라 삼국시대라도 중장기병의 실제 비율은 시기별, 국가별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25) 王 援 朝, 唐 初 甲 騎 具 裝 衰 落 與 輕 騎 兵 興 起 原 因, 歷 史 硏 究 1996 年 4 期, 歷 史 硏 究 雜 志 社, 1996.
36 34 학예지 제17집 당나라 시대 이후에야 다시 경장기병이 중시되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중장기병이 단순히 의장용 병종이 아니라 실제 전투에 투입된 병종이었다는 점을 확 인시켜 주는 문헌적 근거도 있다. 황산벌 전투 때의 관창(645~660)의 전사는 대중적으로도 널 리 알려진 역사적 일화 중 하나다. 관창의 전사 순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본기와 열전에 모두 기록이 남아있는데 삼국사기 열전에 남아있는 기록은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적진에 직접 뛰 어들었다고 되어 있어 단순히 창기병적인 전투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본기에서는 여기에 더해 말에도 갑옷을 씌웠음을 의미하는 갑마( 甲 馬 ) 라는 기록 126) 이 보여 관창이 창을 주무기로 하는 기병 중에서도 중장기병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같은 중장기병의 주력무기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중국의 토용 등을 통해 볼 때 길이 2.5~6m급에 달하는 상대적으로 자루가 긴 장창, 마삭 계열의 창이라고 할 수 있다. 중장기병의 주력 무기는 창이지만 창 외에 보조무기로 칼을 같이 휴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통구12호분을 보면 중장기병용 마면주를 말머리에 씌운 말 앞에서 갑옷을 입은 고구려 무사가 적의 머리를 베고 있다. 중장기병용 장창은 기본적으로 적 진형에 대한 돌격용으로 사용하는 무기이고, 길 이가 매우 길어 적 신체에 관통하다 걸리게 되면 재사용이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 쉽다. 이럴 경우 보조적인 호신무기로 칼을 휴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27) 이밖에 중국 남북조시대 토용이나 화상전 중에 중장기병이 화살통을 휴대하거나 활을 휴대 하는 모습을 묘사한 사례가 발견되는 점을 볼 때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장기병이 활을 보조무기 로 휴대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허난성 등현 출토 회채화상전에 중장기병이 활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산서성 기현 출토 북제 갑기용 중에도 중장 기병이 화살통을 휴대하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게 식별된다. 128) 이 같은 유물을 근거로 중국 남북조~수나라대의 중국 기병 모습을 재현한 현대 중국 학계의 복원도에서도 중국 중장기병이 나 창기병이 창을 주무기로 활을 보조무기로 휴대한 것으로 묘사한 사례가 있다. 129) 이처럼 중장기병이 활을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고 있지만 무거운 갑옷과 마갑 때문에 전형적 인 궁기병처럼 치고 빠지는 식의 기동에 바탕을 둔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방어 때나 분산되어 126)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 127) 여호규 박사는 고구려의 무기체계를 분석한 연구(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 군사연구소, 1999, p.56)에서 4~5세기 고구려에서 칼은 창 등 장병기를 사용하는 창수와 활같은 원거리무기를 사용하 는 궁수의 보조무기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128) 刘 永 华, 中 国 古 代 车 舆 马 具, 上 海 辞 书 出 版 社, 2002, pp.142~ ) 刘 永 华, 中 国 古 代 车 舆 马 具, 上 海 辞 书 出 版 社, 2002, p.144.
3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35 후퇴하는 적을 추적할 때 등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으므로 중장기병의 집단 전술에서 활 사격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30) 이밖에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투창과 방패를 휴대한 중장기병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동아시권에서는 투창 사용 사례가 많지 않지만 서남아시아 지역의 경우 일반적인 중기병은 물 론이고 중장기병의 경우에도 투창을 사용한 사례가 흔히 식별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중 장기병이 자루까지 금속으로 된 투창의 일종인 연( 鋋 )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는 견해가 있다. 특히 경주박물관 소장 기마인물형 토기에 묘사된 중장기병이 투창을 들고 방패를 든 모습이라 고 해석하는 견해 131) 도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투창을 사용하는 중기병 내지 중장기병이 존재했 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 창기병 기본적으로 중장기병은 창을 기반으로 한 중기병에서 방호력과 충격력을 극대화시킨 병종이 므로 중장기병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창기병을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장기병 이 존재했던 국가는 창기병이 존재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이점은 약수리 고분 등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중장기병과 함께 말 갑옷이 없는 일반 말에 창을 들고 있는 창기병이 동시에 그려져 있다는 점을 봐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중장기병의 존재가 확인된 고구려 신라 가야의 경우 창기병이 존재했다고 가정해도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가정은 신라의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비령자(?~647)의 전사 관련 기록을 보면 말을 채찍질하여 삭을 비켜들고 적진에 돌격해 적을 찔러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 고 되어 있다. 132) 삭( 槊 )은 기병용 창의 일종이고 말을 채찍질하여 돌격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의 전사 장면은 창기병의 전형적인 운용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655년 낭당대감으로 백제 조천성 공격 전투에 참가했던 김흠운(?~655)도 삼국사기를 보면 전투 순간 말을 가로질러 타고 삭을 들고 적을 기다렸다 고 되어 있으므로 창을 주된 무기로 하는 창기 병이었음을 보여준다. 133) 중장기병이면서 창을 휴대한 관창의 사례까지 고려할 경우 신라의 130) 임용한, 전쟁과 역사 -삼국편, 혜안, 2001, p.25. 이 같은 주장을 조필현의 연구( 고분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 중장 기병, 전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9, p.21.)에서도 수용하고 있다. 131) 조필현, 고분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 중장기병, 전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9, p ) 삼국사기, 권47 열전 비령자조. 133) 삼국사기, 권47 열전 김흠운조.
38 36 학예지 제17집 기병 관련 전투 기록 4건 중 3건이 창을 주무장으로 한 경우여서 신라의 기병전에서는 무엇보 다 창에 중점을 두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34) 백제의 경우 국내 문헌에서는 말을 탄 상태에서 창을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으나 일본서기 에 기록된 백합야새 전투 장면에서 백제 측이 모(창)로 찔러 고구려 용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고 묘사한 장면이 주목된다. 135) 이 기록에서 전투 초반 양측의 주요 인물들이 진전에 나와 서로 이름을 확인하는 등 지휘관급의 1대1전투를 연상시키는 기록에 뒤이어 문제 의 대목이 묘사되는 점을 볼 때 백제측도 말을 탄 상태에서 전투를 수행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경우 이 기사는 백제측 창기병의 존재를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말과 관련된 그림 유형 151건 중에서 동물을 수렵하는 상황을 묘사한 55건과 무기를 뚜렷하게 식별할 수 없는 24건을 제외한 72건 중에서 창을 휴대한 사례 가 64건이다. 136) 즉 고구려 고분벽화상으로 볼 때 기병 중 창을 주무기로 하는 창기병 내지 중장기병의 비율이 88.8%에 달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모든 그림을 대 상으로 할 경우 고구려 기병의 주력 무기는 창의 일종인 모( 矛 )와 활 두 종류의 무기지만, 전투 와 관련된 그림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모( 矛 )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므로 고구려 기병의 가장 중요한 개인무기는 모( 矛 )라는 주장도 제시되었다. 137) 이 같은 모든 사료들을 조합할 경우 4세기 이후 7세기까지도 삼국시대 기병들의 가장 중요 한 무기는 창계열의 무기라고 할 수 있으며, 창을 주력무기로 하는 창기병 내지 중장기병의 위상과 역할,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국내의 선행 연구에서도 고구려 중기( 中 期 )인 4세기 이후 무기체계 개편과정에서 궁수를 제외하고는 보병과 기병 모두 창을 주력무기 로 하는 창중심의 무기체계가 성립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사례가 있다. 138) 참고로 중국 후한부터 위진 시기까지 창기병들은 그 이후의 창기병과는 운용 무기가 조금 달랐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전형적인 창기병들은 모 내지 삭으로 대표되는 찌르는 기능 위주의 자루가 긴 창을 주로 보유했다. 이에 비해 후한부터 위진 시기의 중국 기병들은 마극( 馬 戟 ) 134) <표1> 참조. 135) 日 本 書 紀, 卷 十 九 欽 明 紀 14 年 9 月 조. 136)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1999, pp.43~45. 본고에서 제 시한 수치는 여 박사의 논문에 실린 표를 토대로 재계산한 것이다. 137) 최종택, 벽화와 유물의 통해 본 고구려의 군사체계, 제33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논문집, 고고학회, 2010, p )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1999, p.57.
3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37 혹은 과( 戈 ) 같은 찍어 내리거나, 끌어당기는 기능까지 갖춘 창을 널리 사용했다. 139) 즉 중국에 서는 대략 4세기대 초기를 경계점으로 창기병의 주력무기가 마극에서 마삭으로 바뀌었다. 고 구려에서도 4세기 이전에 이처럼 마삭이 아닌 마극 내지 과 계열의 창을 사용하는 창기병이 있었는지 여부도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지만 현재로선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 이상의 적극적 입론은 어려운 상황이다. 140) 3) 궁기병 화약무기 개발 이전 시대에 궁기병의 마상 사격(Horseback Archery)은 그 어느 것보다 가장 효과적인 전투기술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에 잘 발달된 행정체계를 갖춘 부유한 국가가 군사적 우위를 달성한다. 그러한 국가가 군사들을 잘 훈련시키고,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체계적인 보 급도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예외였다. 유목민들은 단순히 말과 활의 결합만으로도 강력한 정착민의 제국들을 위협했다. 이른바 유목민의 패러독스(Nomad Paradox) 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반이 바로 궁기병이었다. 141) 삼국시대에 궁기병의 기반이 되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 騎 射 ) 문화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는 증거는 매우 많다. 무용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동물을 수렵하는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말을 탄 상태에서 동물에게 활을 쏘는 장면을 묘사한 신 라의 수렵문전 142), 혹은 백제에서 기사 를 중시했다는 중국문헌의 기록 143) 을 볼 때 기사 문화 139) 郭 物, 国 之 大 事 - 中 国 古 代 战 车 战 马, 四 川 人 民 出 版 社, 2004, p ) 삼국사기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봉상왕 2년조)에는 293년 고구려 북부대형 고노자가 500명의 기병을 이끌 고 왕을 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 자체로는 고노자가 사용한 무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고노자 가 곧 고자묘지명의 고밀 이라는 학계 일부의 견해(한국고대사회연구회편, 역주 한국고대김석문 Ⅰ, 1992.)를 긍정 한다면 고노자=고밀이 사용한 무기를 과( 戈 )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존재해 눈길을 끈다. 고자묘지명 을 보면 고밀 이 과를 들고 홀로 뛰어들어 목을 벤 것이 심히 많아 마침내 연나라(전연)군대를 격파하고 나라(고구려)를 보존했다 는 대목이 있다. 고노자와 고밀의 기록을 연계시켜 이해할 경우 고노자는 말을 탄 상태에서 과(창)를 사용해 적을 공격했을 개연성이 있다. 이는 곧 고구려에서도 과 혹은 마극을 사용한 초기형 창기병이 존재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굳이 양 기록을 연계하지 않아도 고밀처럼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인물이라면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인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고, 이 경우 보병보다는 기병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때 고밀은 과(창)를 운용한 초기형 창기병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141) Hugh Kennedy, Mongols, Huns & Vikings - Nomads at War, Cassell, 2002, pp.16~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143) 周 書, 卷 49 列 傳 第 41 百 濟 조. 같은 기록이 北 史 와 隋 書 에도 보인다. 기사( 騎 射 )는 기사는 사전적으로 말 타기와 활쏘기 라는 병렬적 의미와 말을 탄 상태에서의 활쏘기 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지만, 고대 중국 문헌에 보이는 기사는 대부분 후자의 의미로 생각된다. 특히 史 記 흉노열전의 故 其 急 則 人 習 騎 射, 隋 書 철륵열전의 善 於 騎 射, 新 五 代 史 사이부록 거란조의 善 騎 射 같은 기록들은 유목민족 특유의 말 타면서 활쏘기 문화를 설명한 것이 분명하다.
40 38 학예지 제17집 삼국 모두에 보급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문헌기록을 봐도 신라의 경우 화랑 관창이 나이 16세에 만궁을 가지고 말 타며 활쏘기에 능했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밖에 고구려의 평원왕이나 백제의 계왕도 기사( 騎 射 )에 능했다 는 기록이 삼국사기 에 남아 있다. 또한, 궁기병의 물질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을 삼국 모두에서 사용했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영화9년명 전축분이나 경산 임당고분군의 골제 고자를 통해 고구려나 신라에서 초기형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말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단궁-만궁 계열의 활이 식별된다. 또한 삼국사기 에 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모두 굽은 활, 다시 말해 만궁을 사용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144) 이처럼 풍부한 기사와 관련된 유물과 관련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 정립기 이후 궁기병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대부분 일상복 차림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수렵 장면이 다. 145) 전투 순간에 어울리는 복장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적을 공격하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146) 신라 수렵문전도 동물에 활을 쏘는 수렵 장면일 뿐 전투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평원왕이나 백제 계왕이 기사에 능했다는 기록도 이것이 전투 때의 능력을 의미하 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수렵 능력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서 궁기병의 존재 유무를 따질 때의 사료적 가치는 제한적이다. 화랑 관창은 이미 어려서부터 기사에 능했던 인물 이지만, 그가 막상 국가의 운명을 건 서기 660년의 황산벌전투에서 손에 들었던 무기는 활이 아니라 창이었다. 147) 144) 삼국사기 를 보면 고구려의 경우 고구려본기 모본왕 4년조, 백제의 경우 백제본기 무왕 7년조, 신라의 경우 열전 관창 조에 각각 만궁( 彎 弓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직궁-단일궁 계열의 활로 굽은 형태의 활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만궁은 단궁-합성궁 계열의 활일 가능성이 높다. 145) 여호규 박사는 그의 연구(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1999, p.45.) 에서 고구려 벽화에서 말타고 활 쏘는 사례를 총 60건으로 집계한 후 이중 55건이 수렵도이고, 2건은 행렬도, 3건은 기타로 분류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말타고 활 쏘는 사례 중 91.6%이 수렵 차원에서 활을 쏘는 장면인 것이다. 146) 이 때문에 일본학자 掘 田 啓 一 은 1983년 발표했던 그의 논문( 高 句 麗 壁 畵 古 墳 にみる 武 器 と 武 裝 - 特 に 安 岳 3 號 墳 と 藥 水 里 壁 畵 古 墳 を 中 心 に )에서 고구려에서 활은 수렵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보병의 무기 라는 다소 극단적인 결론 을 내리고 있다. 147) 삼국사기, 권47 열전 관창조. 그 점에서 국내 일부 학자(서영교,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전술과 무기, 고구려연구 17, 2004, p.357.)들이 중장기병은 기사 숙련도가 저하되었을 때 생겨나는 것 이라고 주장한 것은 재 검토의 여지가 있다. 신라의 관창은 기사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임에도 실전에서 활을 든 궁기병이 아니라 창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으로 출전했다.
4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39 이처럼 고구려에 궁기병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유물이나 문헌적 기록이 매우 희 귀하므로 고구려에서 활은 수렵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보병의 무기였다 고 주장하는 극단 적 견해도 있다. 148) 그렇다면 과연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시대에 궁기병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활은 보병이 주로 이용하고, 기사 는 오로지 수렵 차원에서만 시행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그렇 게 보기는 쉽지 않다. 우선 661년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수송부대가 평양을 공격중인 당나라 군대에 식량지원을 할 때 열기가 군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활과 칼(검)을 가지고 말을 달려가니, 고구려인이 바 라보기만 했다 는 기록은 주목된다. 149) 보조무장 성격이 강한 칼의 특성을 고려할 때 열기는 기본적으로 활을 주무장으로 하는 궁기병으로 볼 수 있다. 열기의 임무는 고구려 영토 내부를 신속하게 이동해 당나라 측에 신라 수송부대의 접근 사실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통신- 연락 임무는 최대한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는 전형적인 경기병의 영역에 해당 한다. 다시 말해 열기의 기사는 삼국시대에도 경기병적인 임무를 수행할 필요가 있을 때 활을 주무기로 하는 궁기병을 운용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도 기사 가 단순히 수렵 문화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중국 역사서에서 백제는 그 풍속에 기사를 중시했다 는 기록이 무기로는 활과 화살, 칼(도)과 활(삭)이 있다 는 기록 150) 에 뒤이어 나온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기사 가 단순 히 귀족 계급의 유희 차원이나 국가 예제적 차원이 아니라 백제의 군사 문화 차원에서 전반적 으로 기사 를 중시했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사 는 군사와 관련 된 모종의 중요성이 있는 풍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51) 이런 전반적인 사료를 종합해보면 삼국시대에 궁기병이 창기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중요 성이 떨어지고 위상이 약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궁기병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148) 堀 田 啓 一, 高 句 麗 壁 畵 古 墳 に 見 れた 武 器 の 武 裝 - 特 に 安 岳 3 號 墳 と 藥 水 里 壁 畵 古 墳 を 中 心 にして, 疆 原 考 古 學 硏 究 所 論 集 4, ) 삼국사기, 권47 열전 열기조. 150) 周 書, 卷 49 列 傳 百 濟 조. 151) 백제의 기사 중시와 관련해서 앞으로 일본식 중세 궁기병의 뿌리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하다. 일본 학계( 近 藤 好 和, 騎 兵 と 步 兵 の 中 世 史, 吉 川 弘 文 館, p41)에서는 활을 핵심 무기로 하는 일본 중세 기병의 뿌리가 6세기 기병 성립기로 소급된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의 무기와 마구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밀접하게 연동된다는 점에서 이 같은 일본 학계의 견해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궁기병의 위상과 관련해 비교사적 검토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42 40 학예지 제17집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152) 이렇게 삼국시대 기병 병종의 양상을 해석한다면 궁기병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기사 문화의 광범위한 보급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 궁기병의 위상이 상대 적으로 약했던 이유는 또 무엇이라고 보아야할까. 우선 백제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사 는 군사훈련의 한 수단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 로 보이지만 그 같은 군사적 필요성을 떠나 기사를 통한 수렵이라는 형태로 귀족 계층이나 고 위 관인들이 즐길 수 있는 하나의 유희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인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기사를 통한 수렵이 왕과 귀족들의 제사와 관련된 중요한 국가적 대사로 예제적 차원의 상징성이 컸기 때문에 더욱 기사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기제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53) 두 번째로 철제 갑옷의 대량 보급에 따라 활의 역할이 제한됨에 따라 활 운용은 보병이 주로 맡고, 기병은 적 진형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창기병의 역할에 주력했을 가능성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나아가 같은 이유로 궁기병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삼국시대 창기병이나 중장기 병이 보조무기로 활을 휴대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궁기병이 보조무기로 창을 휴대 하는 것은 창이 휴대에 너무도 불편한 무기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창기병의 경우 창을 주 력무기로 휴대하면서 비교적 가벼운 활을 유사시에 대비한 보조무기로 휴대하는 것에 불편함 이 상대적으로 적다. 154) 세 번째는 이 시기에 사람이 입는 갑옷이 발전했으나 당시 유행했던 갑옷의 구조가 활 사격 에 일정한 장애 요소가 되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고려해 볼 수 있다. 활을 쏠 때는 팔을 많이 움직이게 되는데, 갑옷에서 팔과 어깨, 흉부에 적절한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활을 쏘는데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 무기의 관통력이 증가함에 따라 기병들도 갑옷으로 무장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활 쏘기에 적합한 갑옷 구조를 고안하지 못함에 따라 일 시적으로 궁기병의 위상이 약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네 번째 가능성은 신분 차이에 따라 창기병과 궁기병의 분화 현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다. 유럽군대에서 중기병과 경기병을 동시에 보유하는 경우 중기병은 상대적으로 신분이 높고 훈 련을 많이 받은데 비해, 경기병은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고 훈련 수준이 낮은 경우가 많았다. 152)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무기체계가 중국과 밀접하게 연동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나라 이후 중장기병의 상대적 위상 저하와 궁기병을 포함한 일반 갑주기병의 위상 강화 흐름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153) 홍선표, 고대동아시아의 말그림,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2001, p ) 조선 후기 무예도보통지 의 기창 그림에도 기병이 창과 동시에 활로 무장하고 있다.
4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41 이를테면 삼국시대에도 무덤에 고분벽화를 남기거나 문헌기록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인물은 중장기병 내지 창기병으로 종군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에 속했던 이들이 경무장으로 궁기 병으로 종군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155) 4) 칼을 사용하는 기병 약수리고분 등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일부에는 말에 탄 상태에서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 묘사 된 경우가 있다. 문헌기록을 봐도 신라 김유신(595~673)의 전투기록 중당당주로 참전했던 629 년의 낭비성 공격전에서 말을 타고 칼(검)을 빼어 들어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했다 고 기록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156) 이미 언급한 김흠운도 전사 순간에는 따르던 자들이 말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흠운이 칼(검)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 고 그도 전사했다 고 기록한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157)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칼을 사용하는 기병이 식별되고, 신라의 문헌기록에서도 칼 그 중에 서도 검을 사용해 교전하는 장면이 2회가 확인되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좀 더 고찰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창기병이나 궁기병이냐에 상관없이 단병접전에 대비한 호신무기 로 별도로 칼을 보조무기로 휴대하는 것은 세계 기병 역사에서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궁기병의 경우도 활로는 근접전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응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칼이 필요하다. 또한 창기병들도 칼이 없다면 창이 적병의 몸을 관통해 재사용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거나 혹은 난전 상태에서 길이가 긴 삭만으로는 대응하기 힘든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 이처럼 칼은 기병 병종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휴대하는 보조무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투 순간 창(삭)을 들고 적을 기다리고 있던 김흠운이 전사 순간에는 칼을 들고 있었 던 것은 이처럼 칼이 보조무장으로 운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유신 이 낭비성 전투에서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며 돌격했던 사례는 창에 대한 언급이 없어 해석이 쉽지 않으나, 김유신이 18세 때 홀로 보검을 들고 수련에 들어갔다는 기록 158) 등을 볼 때 최소 한 그가 검술 연마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임을 알 수 있고, 그의 그 같은 취향이 전투 양상과도 155) 다종족국가였던 고구려의 경우 종족에 따른 병종의 분화 현상이 발생했을 개연성도 있다. 특히 고구려 후기에 말갈족을 군사적으로 활용했던 시점에 말갈족이 주로 경기병 내지 궁기병으로 종군했을 가능성도 앞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156)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조. 이 시대에는 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성태 삼국시대 병기의 연구, 성균관 대 박사학위논문, 1999, p.165.)의 주장처럼 이 시대 기록상의 검은 외날 칼인 도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가 보편적이다. 157) 삼국사기, 권47 열전 김흠운조. 158) 삼국사기, 권41 열전 김유신조.
44 42 학예지 제17집 연결된 사례로 보인다. 혹은 등급이 높은 지휘관의 경우 번거로운 창보다는 간편하게 칼 위주로 무장하는 경우도 생 각해 볼 수 있다. 이점은 신라가 661년 9월27일 백제 옹산성을 함락한 후 문무왕이 각간과 이찬 으로서 총관인 사람에게는 검을 주고, 잡찬, 파진찬, 대아찬으로서 총관인 사람에게는 창을 주었 으며, 그 이하는 각각 관등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는 기록으로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 다. 159) 창보다는 칼이 각간과 이찬 등 최고위급 인물에게 더 어울리는 포상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삼국시대에도 칼을 사용하는 기병이 부분적으로 존재했으나 이 경우는 보조무장 이거나 아니면 지휘관 내지 기타 특수한 임무를 맡아 경무장이 필요했던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4세기 자루 길이가 긴 장창-마극계열의 무기를 사용하는 기병이 출현하기 이전 단계에는 그 이후 시기에 비해 기병의 무기에서 칼이 차지하는 중요성이 상대적 으로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160) 무장 방식 추정 병종 운용특징과 무장 시기 소속 국가 김유신 검? 跨 馬 拔 劒, 向 敵 陣 直 前, 三 入 三 出, 每 入 或 斬 將 或 搴 旗. 629년 비령자 창(마삭) 창기병 鞭 馬 橫 槊, 突 賊 陣, 格 殺 數 人 647년 신라 김흠운 창+검 창기병 橫 馬 握 槊 待 敵 655년 신라 관창 활(만궁) - 能 騎 馬 彎 弓 7세기 중반 신라 관창 <표 1>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삼국시대 기병의 존재 양상 창 창기병/ 중장기병 - 上 馬 橫 槍, 直 擣 敵 陣, 馳 殺 數 人 - 以 甲 馬 單 槍, 徑 赴 敵 陣, 660년 열기 활+검 궁기병? 661년 신라 고노자/고밀 과? 창기병 - 3세기말 고구려 평원왕 활 - 善 騎 射 6세기 후반 고구려 계왕 활 - 善 騎 射 4세기 전반 백제 (부여창) 창(모 鉾 ) 창기병? 百 濟 以 鉾, 刺 嶞 高 麗 勇 士 於 馬 6세기 중반 백제 신라 신라 159)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1년조. 160) 여호규 박사는 고구려의 무기체계를 분석한 연구(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 군사연구소, 1999, p.67~68.)에서 중국에서 도( 刀 )는 출현 초기에 한 대까지만해도 내리쳐서 베는 고유한 기능 때문 에 기병이나 이를 방어하는 보병의 주력무기로 사용되었다 고 주장하고 있다.
4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43 Ⅳ. 삼국시대 중장기병 161) 한국사 연구에 있어 중장기병의 존재를 최초로 주목한 국내 학자의 연구는 1990년대 중후반 으로부터 시작된다. 162) 한국사에서 중장기병의 존재와 그 의미를 최초로 본격 고찰한 이 연구 자는 갑주로 중무장한 개마장창기병이야말로 상대편에 커다란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적군의 살상력을 현저히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당시의 전쟁양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을 것이라고 헤 아려진다 고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연구는 한국 문헌사학자 중에는 처음으로 삼국시대 중장기병의 존재와 그 의의를 평가해 중장기병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또한 과거 한때 유럽은 중기병 위주의 기병 문화를 가진데 비해 아시아는 경기병 위주의 기병 문화를 가 졌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장기병에 대 한 연구는 군사사적으로도 또 다른 의미가 크다. 이런 점을 고려해 세계사적 차원에서 중장기 병의 역사를 우선 살펴보고 삼국 중에서 중장기병을 가장 먼저 도입했을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의 중장기병 수용 과정을 연구사적 차원에서 검토해 보겠다. 그리고 그 운용상의 특성과 한계 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1. 세계사적 차원에서 본 중장기병의 기원 영어에서 중장기병을 의미하는 Cataphracts 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Cataphractii 에서 유래 했다. 163) Cataphractii 는 Covered over 즉, 완전히 감싼 것이란 의미이다. 164) 그리스인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스키타이-이란계 종족들의 기병들을 Cataphractii 라 고 불렀다. 이 같은 계열의 중장기병을 보유한 국가나 종족들은 아르메니아(Armenia), 파르티 아(Parthia), 페르시아, 사르마티아(Sarmatia) 등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3~2세기부터 이러한 중 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65) 161) 이 장은 필자가 2000년 10월 war.dfence.co.kr을 통해 이미 공개한 글인 고구려 중장기병과 Cataphracts의 비교사적 검토 를 기초로 집필했다. 필자가 이 논문을 인터넷에 공개한 이후 다른 저자들이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필자의 주장 과 논지를 사실상 인용 혹은 차용해 왔다는 점을 밝혀둔다. 162) 이인철,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군사 33호, 국방군사연구소, ) Kataphraktos 등 다른 표기법도 사용되었다. 164) 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 ) 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52.
46 44 학예지 제17집 이러한 중장기병은 특히 기원후 3세기 시점부터는 고대 이란계 종족의 국가 중 하나인 파르 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제국 등에서 엘리트 병종으로 자리를 잡았다.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 시아제국의 중장기병은 약 4m 정도의 창(Lance)과 활, 칼 등을 장비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당시 중장기병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지 않아 정확한 갑옷 의 형태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두라 에우로포스(Dura Europos)에서 출토된 말갑옷( 馬 甲 )이 출토되어 어느 정도 그 형태를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유적은 기원전 4세기 무렵 건설되 고, 기원후 256년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파괴된 곳이다. 따라서 마갑( 馬 甲 )의 하한선은 대략 기원후 3세기 정도로 볼 수 있고, 그 이전으로 소급시킬 여지도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마갑은 전형적인 찰갑 형태의 갑옷이며, 안면부, 목, 몸통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66)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몸통 갑옷은 말 전체를 감싸는 것이 아니라 안장의 앞부분 말 몸통의 절반 만 감싸고 있는 형태다. 167) 말갑옷은 아니지만 말갑옷의 뿌리로 생각되는 형태는 기원전 7~6세기의 아시리아(Assyria) 기병처럼 말에는 천을 쓰운 사례나 기원전 5~4세기 무렵 페르시아 제국의 기병의 말에 부착된 청동제 Apron 같은 장착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68) 이 기원전 5~4세기 무렵의 페르시아 기병은 창으로 무장하고 정면 돌격하여 충격효과를 노리는 전형적인 중기병과는 달리 그리스 식 단검과 자루가 짧은 투창인 재블린(Javelins)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169) 이러한 전통 하에 기원전 3~2세기, 보다 확실하게는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 사이에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에 전형적인 중장기병이 출현한 것이다. 170) 한편, 유럽에서 최초로 중장기병을 보유한 국가는 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 중장기병은 로마 인들이 주축이 된 병종은 아니었고, 사르마티아(Sarmatia)인 식민지 병사 혹은 용병들이 주축 이 되었다. 최초로 사르마티아 기병이 로마군에 포함된 시기는 기원 1세기 중엽 무렵이다. 171) 이러한 로마제국의 중장기병은 뒷날 동로마제국의 중장기병인 Klibanophoros 로 계승되어 10 세기까지 명맥이 이어진다. 172) 이후 14~15세기의 고딕 중장기병을 비롯한 유럽의 중장기병은 166) Peter Wilcox, Osprey Men-at-Arms 175 Rome's Enemies (3) Parthian & Sassanid Persians, Osprey Press, 1986, p ) 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p.52~ ) Peter Wilcox, Osprey Men-at-Arms 175 Rome's Enemies (3) Parthian & Sassanid Persians, Osprey Press, 1986, p ) 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p.52~ ) Peter Wilcox, Osprey Men-at-Arms 175 Rome's Enemies (3) Parthian & Sassanid Persians, Osprey Press, 1986, pp.40~ ) John Warry, Warfare in the Classical World, Salamander Book, 1980, p ) 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62.
4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45 판갑(Plate Armour)계열의 갑옷을 쓰기 때문에 찰갑 계열의 갑옷을 쓰는 페르시아 계열의 로마 중장기병과는 뿌리가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중장기병은 후한 말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장기병과 관련 해 가장 빠른 기록은 175년경 채옹이 유주와 기주는 옛날부터 개마가 산출되는 곳 이라고 주 장한 대목이다. 173) 두 번째로 오래된 중장기병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 사료는 188년 후한 영제가 군사를 사열할 때 개마를 타고 군진을 돌았다는 기사가 수록된 자치통감 이다. 174) 서 기 200년 조조와 원소가 대결한 관도전투 당시 원소군의 기병 가운데 개마는 300필, 조조군의 기병 가운데 10필 정도에 불과했다. 175) 적어도 이 시점에선 말갑옷이 상급자의 신분 과시용이 거나 측근 호위부대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세기 이후가 되면 중국에서 중장기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한다. 예를 들어 진서( 晉 書 ) 나 자치통감 을 보면 312년 후조의 석륵이 선비 단부를 격파할 때 개마 5천 필을 노획했 다. 176) 316년에는 기담을 격파하면서 개마 1만 필을 노획했으며, 서기 400년경에는 후진 요흥 이 선진 걸복건귀를 격파할 때는 개마 6만 필을 노획했다. 또한 선비단부를 격파했을 때의 기 록에도 5천 필의 개마를 노획하고, 화친을 청구하면서 금은과 함께 개마를 보냈다. 177) 한 가지 관심을 끄는 점은 서기 312년 석륵이 선비단부를 공격했을 때에 선비 단부가 이미 개마 5천 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 시점에는 선비 단부를 비롯한 유목민족 과 북중국의 경계지대에는 중장기병이 일반화된 것임 분명하다. 이처럼 4세기 이후가 되면 중 국에서도 중장기병을 대량으로 운용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이는 고고학적인 증거 로도 확인된다. 전연의 수도가 있었던 중국 조양 근처에서 최근 300년대 초로 추정되는 마갑용 장식품이 출토된 적이 있다. 대략 370년경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중국 조양 원대자 벽화고분에 도 중장기병이 등장한다. 또한, 중국 남북조 시절의 벽화나 화상석에도 고구려 벽화와 비슷한 차림새의 중장기병이가 많이 등장한다. 수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주력부대인 24개 군에는 각 군마다 기병부대 인 기병단 4개가 편성되어 있었다. 수서 에 따르면 기병1단과 3단은 철구장( 鐵 具 裝 ), 기병 2 173) 後 漢 書, 券 60 列 傳 蔡 邕 列 傳. 174) 資 治 通 鑑, 券 59 孝 靈 皇 帝 下 中 平 5 年 조. 175) 太 平 御 覽, 卷 356 引 魏 武 軍 策 令. 176) 資 治 通 鑑, 券 88 晋 紀 永 嘉 6 年 조. 177) 通 典, 券 155.
48 46 학예지 제17집 단과 4단은 수문구장( 獸 文 具 裝 )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78) 철구장은 철제 말갑옷을 입은 중장 기병, 수문구장은 가죽제 말갑옷을 입은 중장기병을 의미한다. 179) 결국 당시 수나라의 침략부 대 기병은 중장기병으로만 편성된 셈이다. 이 같은 중국의 중장기병이 서남아시아 지역의 중장기병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독자 적인 발전계통을 밟은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중국에서 중장기병의 상한 시점은 3세기 초지만, 중장기병의 필수적 전제조건인 말갑옷 자체는 그보다 훨씬 더 연대가 올라가기 때문이 다. 포산 초묘에서 출토된 전차용 마갑이 복원된 지금 중국 마갑의 기원은 춘추전국시대로까지 올라가는 것이 확실해 졌다. 180) 춘추전국시대의 마갑은 전차용 마갑임은 분명하지만 그 계통 적 연결고리를 중장기병의 유행한 시대로까지 연결시켜 볼만한 증거들이 연이어 발견되고 있 다. 2002년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전차용 석제 마갑의 복원도가 공개됐다. 181) 한나라 영시 4년 (기원전 13년)에 작성된 윤만한간에서도 마갑이라는 구절이 확인된다. 182) 결국 중국의 마갑은 전차전-승마전이라는 변화의 흐름에 관계없이 춘추전국시대-진-한-삼국 시대 초기로 연결되는 계보가 분명하게 확인되는 셈이다. 중국에서 중장기병의 출현을 후한 말-삼국시대 초기 이전으로 소급시키기에는 여전히 부담스럽긴 하지만 적어도 마갑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에서 중장기병이 출현하기 위해 새삼스럽게 마갑 자체를 개발할 필요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전차용 마갑을 승마용 마갑으로 전환시키는 발상의 전환 그 자체만 필요했던 것이다. 그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 계기 내지 필요성에 대해서는 계속 검토해 볼 가치가 있지만 적어 도 중장기병용 찰갑 구조의 전신 마갑 자체로만 볼 경우 동아시아 국가의 영역 밖, 이를테면 서아시아에서 직접적인 기술적 계보를 추적할 필요는 줄어든 셈이다. 물론 중국에서 가죽제가 아닌 철제 마갑의 기원 문제는 여전히 추적해볼 가치가 있지만 철제 찰갑이 이미 전국시대로까 지 소급되는 이상 철제 마갑 제작에 있어서 기술적 어려움을 고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83) 178) 隋 書, 券 8 禮 儀 志. 179) 楊 泓, 古 代 兵 器 通 論, 紫 金 城 出 版 社, 2005, p ) 楊 泓, 古 代 兵 器 通 論, 紫 金 城 出 版 社, 2005, p ) 楊 泓, 古 代 兵 器 通 論, 紫 金 城 出 版 社, 2005, p ) 이성규, 한제국 중앙 무고( 武 庫 ) 수장목록의 발견-윤만한간 무고영시 4년 병차기집부의 정체, 역사학보 170호, ) 중국내지 그 주변에서 중장기병이 출현한 이유에 대해 쇠뇌 등 對 기병무기의 발전에 따른 대응이라고 해석하거나 양모 교역권과 관련한 분쟁 때문에 유목민족이 실크로드상의 교역 도시를 점령해야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그 같은 특수한 전쟁 환경 때문에 중장기병이 출현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중장기병이 출현한 이유에 대해 구체적 사료 를 근거를 제시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근거 제시 없이 막연한 추정을 다시 한 번 제시하는
4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고구려 중장기병의 도입과정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국내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고구려가 4세기 이래 활발한 대외정복전 을 수행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면 중장기병의 출현 시기와 도입과정도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국내의 한 연구자는 삼국사기 동천왕조의 철기( 鐵 騎 ) 가 중장기병(Cataphracts)을 의미한다고 간주했다. 184) 다시 말해 이 연구자는 고구려 중장기병이 최소한 서기 3세기 중엽 경에는 출현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논문에서 해당 연구자는 다소 다른 뉘앙스의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연구자는 동수 등 전연으로부터의 망명객을 통해 무기와 무장의 제작기술이 고구려로 전래되었을 가능 성과 함께 낙랑 대방 유민들의 제철제련기술이 고구려의 무기와 무장 제조에 이용되었을 가능 성도 고려하고 있다. 즉 고구려에서 3세기 중엽 이미 중장기병의 출현했지만 본격적인 수용이 라고 할 수 없으며, 낙랑 대방유민을 흡수하여 선진 기술을 소화한 광개토왕대 이후에 본격적 으로 중장기병이 대량 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화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4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안악3호분의 행렬도는 5세기 초로 추정되는 약수리 고분의 행렬도에 비해 등장인물 숫자가 많 고 화려한데 이는 안악3호분에 묻힌 사람이 약수리 고분에 묻힌 사람보다 고위급임을 의미한 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장기병의 숫자는 안악3호분이 8명인데 반하여 약수리 고분 은 14명으로 두 배 가까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서기 4세기 후반 ~ 5세기 초 사이에 고구려 병종구성에 본질적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85) 나아가 이 연구자는 고구려가 중장기병을 수용한 이유에 대해 중국에서 후한 말~삼국시대까 지 쇠뇌의 보급이 대폭 확대되었는데, 이는 기병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쇠뇌에 제압되지 않기 위해 기병의 갑옷이 강화됨에 따라 중장기병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고구려도 한족의 쇠뇌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과 말( 馬 )이 철제갑주로 무장했을 것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186) 한편, 중장기병의 기원을 보다 직접적으로 북중국에서 찾는 연구결과도 있다. 187) 이 연구자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므로 본고에서는 일단 결론을 유보하려한다. 184) 이인철,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군사 33호, 국방군사연구소, ) 이 같은 해석법을 최초로 제기한 학자는 掘 田 啓 一 이다. 186) 이인철 씨의 이 같은 결론은 일본학자 篠 田 耕 一 의 주장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187) 여호규, 고구려 중기의 무기체계와 병종구성, 한국군사사연구 2, 국방군사연구소, 1999.
50 48 학예지 제17집 는 3세기 중엽 대에 5천의 개마를 보유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주장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천왕대의 철기가 중장기병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대신 고구려 중장기병 기원을 탐색하 면서, 고구려가 4세기 초에 선비 단부와 접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즉 319년 고구려는 이미 개마를 보유하고 있던 선비 단부와 함께 전연의 극성을 포위한 적이 있으므로 빠르면 319년의 극성 포위전 시점부터, 늦어도 342년의 對 전연 전쟁 시점까지는 최소한 중장 기병의 존재를 인지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나아가 이 연구자는 336년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를 비롯한 북중국, 선비계열 망명객들이 고 구려에 중장기병을 전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동수는 전연 모용황의 사마 ( 司 馬 )였으므로 북중국에 유행하던 개마를 고구려에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새로운 연구자가 이 문제를 다시 연구하면서 삼국사기 의 철기 라는 단어만으로 중장 기병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해 주목된다. 이 연구는 동천왕대 고구려를 침략한 관 구검의 본거지인 중국 유주가 전통적으로 개마의 산출지였다는 점에서 당시 전투과정을 통해 고구려가 처음으로 중장기병의 존재를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319 년부터 338년을 전후한 시점 후조를 통해 중장기병 관련 기술이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다. 188) 이 연구자는 338년 후조가 전연을 공격하는 과정을 보면 고구려 와 후조의 동맹관계가 강력했다고 전제하면서 후조가 중장기병을 상당히 보유하였다는 점, 모 용 씨를 견제하겠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후조가 고구려의 중장기 병 도입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중장기병용 마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된 우산하 992호분이 338년에 건조된 것으로 보는 중국길림성 고고문물연구소와 집안시박물관의 연구결과를 제시한다. 189) 나아가 이 연구자는 고구려 초기무덤으로 추정되는 산성하 159호분에서 출토된 소찰이 마갑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서, 이 고분의 연대 비정에 따라 동천왕대 철기 관련 기록도 재음미할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 세 연구자의 주장은 모두 고구려 중장기병의 기원을 4세기 대 북중국내지 그 주변 정치체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중 두 연구자는 3세기 대 동천왕의 철 기 관련 기록도 고구려 중장기병의 기원과 관련해 검토할 여지가 있는 기록으로 보고 있다는 188) 정동민, 고구려 중장기병의 모습과 도입시점에 대한 소고, 전통문화연구 Vol.6, 2007, p ) 吉 林 省 文 物 考 古 硏 究 所, 集 安 市 博 物 館, 集 安 市 高 句 麗 王 陵, 文 物 出 版 社
5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49 점에서 또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만 문제는 그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제냐는 것이다. 필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한 바와 같이 철기( 鐵 騎 ) 라는 용어 자체는 사전적으로 용맹한 기병 내지 정예기병 이라는 뜻과 철갑을 입은 기병 등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0) 국내 의 연구자도 최근 연구를 통해 중국 사료에 보이는 철기의 용례를 분석해, 철기라는 용어 자체 를 중장기병으로 볼 수 있는 적극적 증거는 없다고 보고 있다. 191) 그렇다면 삼국사기 동천왕대 의 철기 관련 기록은 고구려의 중장기병 논의와 관련해 어떤 결정적 사료라고 보기는 어려워진 다. 결국 북중국내지 그 주변집단의 중장기병 확산과정을 토대로 고구려 중장기병의 도입 시기 를 역으로 추정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고구려 중장기병의 도입 시기에 대해 동천왕 재위시기, 319~338년, 336년, 광개토대왕 재위 등 특정한 시점을 굳이 특정하기 보다는 2세기 말부터 5세기 초반에 걸쳐 점진적으로 중장기병이 고구려에 인지 전파 확산되었다고 보고, 최소한 4세기 중후반부터는 고구려에 중장기병의 분명하게 도입되었다는 정도로 이해하 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3. 백제 신라 가야의 중장기병 백제의 경우 중장기병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2005년 이 후 중장기병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유물이 증가하고 있어 주목된다. 2010년 강원도 화천군 원천리 백제 주거 유적에서 중장기병용 말에 착용하는 마갑의 일부로 보이는 철찰이 출토되었다. 192) 이밖에 2006년 10월30일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고부구읍성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백 제기마병선각와 도 백제에서 중장기병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다. 193) 전 북문화재연구원이 발굴한 이 기와에는 찰갑 형식으로 보이는 갑옷을 입은 무사와 중장기병용 말갑옷의 일부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발굴팀의 강원종 책임조 사원은 말머리 뒷부분과 말 등을 묘사한 기와 왼쪽 아래에 격자문 양식이 보이는데 이 문양은 중장기병용 말갑옷을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고 주장하고 있다. 유적의 시기에 대해 발굴 190)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년 10월1일 검색. 191) 정동민, 고구려 중장기병의 모습과 도입시점에 대한 小 考, 전통문화연구 Vol.6, 2007, pp.16~ ) 예맥문화재연구원, 화천 원천리 유적 현장설명회 리플렛, ) 문화재청, 백제기마병선각와 보도자료, 2006년 10월29일자.
52 50 학예지 제17집 팀은 정읍 고부구읍성은 백제 지방 통치의 5대 중심지 중 하나인 중방 고사부리 성터일 가능 성이 높다 며 대체로 사비시대(538~660)의 유물 이라고 추정한다. 신라의 경우 2009년 경주 황오동고분군(사적 제41호)내 쪽샘지구에서 중장기병용 말갑옷이 발굴되어 중장기병의 존재가 명확하게 증명되었다. 194) 가야의 경우에도 1992년도에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조사된 함안 마갑총( 馬 甲 塚 )에서 말갑옷이 발굴되어 중장기병의 존재가 명확하게 확인된 상황이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중장기병 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와 가야에도 전파되었고, 백제에도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신라와 가야에서 중장기병의 최초 도입 시기는 4세기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 기 위해 5만의 원정군을 파견했던 때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195) 다만 그 이전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빈번하게 전투를 벌였고, 신라 또한 교류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 이 있으므로 최초 도입 시기를 4세기말로 한정할 이유는 없다고 보인다. 문헌기록 측면에서는 신라 화랑 관창이 660년 벌어진 유명한 황산벌전투에 말갑옷을 의미하 는 갑마 를 타고 출전했다는 기록한 삼국사기가 주목된다. 196) 이 기록은 전투에서 중장기병의 역할과 함께 7세기 중엽에도 여전히 중장기병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가치 가 있다. 다만 한반도 남부지역 국가들의 중장기병 운용 규모는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을 수 밖에 없으며, 특히 소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가야에서 대규모 중장기병을 운용하는 것은 기본적 으로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197) 4. 중장기병 운용 전술과 진형 중장기병의 전투방법은 기본적으로 길이가 긴 창 계열의 무기(모, 삭, 장창)로 적진에 돌입해 194) 문화재청, 베일 속의 신라 중장기병, 1600년 만에 그 완전한 실체를 세상에 드러내다 보도자료, 2009년 6월2일자. 195) 물론 이 같은 주장을 검증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것도 하나의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늦어도 4세기 중엽에 중장기병이 출현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같은 중장기병이 대백제전에 투입되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도 이미 이 무렵에 중장기병의 존재를 인지하고, 중장기병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6) 삼국사기 열전 관창 조에서는 卽 上 馬 橫 槍, 直 擣 敵 陣, 馳 殺 數 人 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같은 책 신라본기 태종무열 왕조에서는 以 甲 馬 單 槍, 徑 赴 敵 陣, 爲 賊 所 擒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나오는 갑마는 말에도 갑옷을 입힌 개마를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7) 신라와 달리 가야권에서 최고위층의 분묘에 중장기병용 마구들이 집중 매납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가야의 중장기병 운용 기반이 신라에 비해 약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중장기병의 한계를 논하면서 후술하겠다.
5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51 적의 진형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삭이나 이와 유사한 유럽의 기병용 장창은 일반 보병용 창에 비해 길이도 길 뿐만 아니라 무게도 2~4배 정도 더 나갔으며 그 같은 무게 때문에 휘두르기보다는 두 손으로 들고 찌르거나, 창을 든 한 손을 옆구리 혹은 겨드랑이 에 고정시킨 상태에서 말의 달리는 힘으로 찌르는 경우가 많았다. 198) 하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겨드랑이에 창을 끼고 찌르는 장면을 묘사한 경우는 없고 주로 두 손으로 창을 사용하는 장면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중장기병이나 창기병은 두 손으로 창을 잡고 적을 찌르는 방식으로 주로 사용했으며 유럽 중세 기사처럼 겨드랑이에 창을 끼고 돌진하는 공격 방법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199) 그러나, 조선시대 경국대전 기창 규정을 보면 겨드랑이에 창을 끼고 찌른다는 구절이 명 시되어 있다. 200) 무예도보통지 에도 겨드랑이에 창을 끼고 돌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 다.180) 이처럼 겨드랑이에 창을 끼고 돌격하는 방법이 조선시대에는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신라의 관창이나 비령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 중장기병이 진형을 갖춘 상호 전투 에서 적진에 돌입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중국 남북조시대에 삭을 사용하는 방법을 기록한 마삭보( 馬 槊 譜 ) 가 별도로 존재했었 던 것으로 볼 때 당시 우리나라 삼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 중장기병 내지 창기병의 마삭 운용 법은 겨드랑이에 삭을 끼고 적진에 돌입하는 단순한 사용법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 기병 과 겨루는 동작, 다시 말해 기창교전( 騎 槍 交 戰 ) 내지 기창교봉 을 포함한 보다 복잡한 운용법 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장기병의 진형에 대한 기록은 드문 편이다. 일반적인 중기병과 경기병의 진형에 대한 기록 은 세계 각국 역사에서 흔히 발견되지만, 순수한 중장기병의 진형에 대한 기록은 흔하지 않다. 비잔틴제국 중장기병인 Klibanophoros 의 전투대형은 쇄기형(Wedge)형태이다. 쇄기형 진형 은 알렉산더 제국의 중기병 Companion 등 중기병 계열에서 전투대형으로 흔히 사용하는 형 태다. 첫째 줄에는 20명이 서고, 열마다 4명씩 추가하여, 둘째 줄에는 24명, 셋째 줄에는 30명 식으로 증가하여 열두 번째 줄에서는 64명이 서게 된다. 또한 네 번째나 다섯 번째 병사는 창 이 아닌 활을 소지했다. 201) 이들 궁병들은 전투대형에 섞여 있다가 돌격 시에 후방으로 약간 198) 조필현, 고분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 중장기병, 전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9, p ) 조필현, 고분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 중장기병, 전북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9, p ) 경국대전, 병전 기창조.
54 52 학예지 제17집 빠져나와 쐐기의 후방에서 지원사격을 실시한다. 실제 전투대형에서 이 표준대형이 항상 지켜 진 것은 아니고 10열 384명으로 구성된 대형도 사용하였다. 근위대 내에는 2~3개의 Klibanophoros 부대가 존재하여 총 병력은 1000~1500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시아권 국가의 경우 요나라와 금나라의 중장기병 관련 진형 자료가 남아있다. 요나라에서 는 제1선에 갑옷을 입지 않은 경장기병이, 제2선에는 사람만 갑옷을 입은 갑주기병(Armoured Cavalry)이, 제3선에는 중장기병(Man on Armoured Horse)이 포진해 있었다고 한다. 202) 금나 라에서는 좌우익의 날개에 중장기병을 배치하였다. 금군은 이들 중장기병을 이용해 양익포위 전술을 주로 구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구려를 포함한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장기병의 진형 형태를 살펴 볼 수 있는 어떠한 직간접적인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중장기병은 커녕 일반 기병이나 보병의 전투대 형 중에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다만 학자들의 자문에 따라 제작한 방송 다큐에서는 고구려 중장기병의 진형 내지 전투대형을 추정한 사례가 있다. 203) 이 다큐에서는 병종별로 중장기병 1열, 경장 창기병 2열, 보병 창수 3열, 보병 환도수 4열, 보병 부월수 5열, 보병 궁전수 6열로 포진하는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진형은 안악 3호분이나 약수리 고분 등 고구려 벽화고분의 행렬도를 기초로 병종을 결정한 후, 병종별 특성을 고려하여 만든 추정 복원안이다. 하지만, 의장 병력이 분명한 행렬도가 실제 병종구성을 대변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고 제시한 대형이 전술적으로 타당한 지도 의문이 남는다. 204)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장기병의 운용방법과 관련해 당나라대 중국과 주변 유목민족의 창기병 내지 중장기병의 하마전투 전술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5) 당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이정 (571~648)은 그의 병법에서 적과 싸우는 모든 경우에 도탕 기병 마군 등의 모든 대( 隊 )는 모름지기 말에서 내려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고 강조하고 있다. 206) 이정이 제시한 201) 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 ) C.J Peers, Osprey Men-at-Arms 295 Imperial Chinese Armies Part , Osprey Publishing, 1996, p ) KBS 편, 역사 스페셜-고구려 철갑기병,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2002년 7월 13일자 방송. 204) 기병과 보병을 좌우, 혹은 중앙과 양익형태로 포진하든가, 아니면 보병의 후면에 기병이 포진하는 형태는 몰라도 기병 을 전후로 배치하는 것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의 포진은 아니다. 더구나 애당초 중장기병 일부가 적의 배후나 측면 공격을 위해 운용된다면 처음부터 진형의 양익에 배치하는 게 당연한데, 굳이 제1 2선에 배치하여 적에게 측면 을 노출하면서 기동한다는 설정은 추가 검토가 필요한 주장이다. 처음부터 측면공격을 위해 운용되는 부대라면 정면 1 2선보다는 본대의 좌우 측위에 배치하는 것이 보다 정상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205) 중국 당나라대의 하마 전투 관련 사료는 서영교의 연구( 당대 기병의 보전, 중국사연구 66, 2010.)에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본고에서 하마 전투와 관련해 인용한 사료도 기본적으로 이 연구에서 이미 제시한 것을 재인용했다. 206) 通 典, 券 157 兵 典.
5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53 병법에 따르면 모든 대( 隊 )는 하마 전투 때 말을 지키는 사람을 따로 정해 놓아야하며, 적이 후퇴하더라도 도보로 30보 이상을 추격해서는 안되고, 일단 아군이 하마를 하면 적이 퇴각하는 것이 확실해지고 요란하게 두려워할 때만 말을 다시 타고 추격할 수 있었다. 실제 당나라의 또 다른 명장인 이적은 기병을 보병으로 전환 한 후 기병용 창인 장삭( 長 槊 ) 수백으로 나란히 대열을 형성해 역시 장삭으로 대항한 설연타군을 격파한 사례가 있다. 207) 이 같은 당나라 기병의 하마 전투 전술은 당나라뿐 아니라 주변 국가 집단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당나라대 토번 기병은 사람과 말이 함께 쇄자갑을 입은 중장기병이었다. 이 토번 중장기병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대열을 형성한 후 진을 쳐서 전투를 수행했다. 208) 당나라 기병의 하마 전 투에 패한 적이 있는 설연타도 이미 641년에 하마 전투 전술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 설연타는 기병 5명을 한 조로 만들어 4명이 말에서 내려 보병 전투방식으로 싸울 동안 1명은 뒤에서 말을 지키게 했다. 209) 이 같은 당나라대 창기병과 중장기병의 하마 전투 전술을 고구려 백제 신라 혹은 통일신 라와 발해에서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당시 이 같은 하마 전투 전술이 당나라를 벗어 나 그 주변집단에도 널리 파급되어 있었던 점을 볼 때 우리나라에도 어느 정도 전파되었을 가 능성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의 기록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 함길도 지역의 기병이 5명 1개조로 하마 전투를 하면서 1명이 말을 지키게 한 사례 210) 가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중장기병의 한계 연구자들 중 일부는 5세기 이후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의 남진 정복이 가능했던 원동 력은 중장기병 덕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전에서 중장기병이 무적이라고 단정할 수 는 없으며 그 현실적 한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고대처럼 철이 희귀하던 시절에 사람의 갑옷뿐만 아니라 말갑옷을 갖추는 것은 비용 측면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중장보병 Hoplite 의 갑옷 한 벌을 사는데 드는 207) 冊 府 元 龜, 券 ) 通 典, 券 190 邊 方 吐 藩 傳. 209) 舊 唐 書, 券 199 鐵 勒 傳. 210) 세종실록, 세종 17년 6월 16일조.
56 54 학예지 제17집 비용은 현대인의 자가용 1대 가격에 해당한다고 비유한 사례가 있다. 211)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분에도 철제 갑주가 부장된 고분은 일부 에 한정되고 있어 전투에 참가하는 모든 전투요원이 철제 갑주로 무장할 수는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식적으로 중장기병용 철제 말갑옷은 사람이 입는 갑옷보다 훨씬 많은 철소재가 투입되어 야한다. 중국의 연구에 따르면 철제 말갑옷의 무게는 대략 40 50kg에 달했으며 이보더 많이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212) 이는 사람이 입는 갑옷 중 가장 무거운 갑옷보다 더 무거운 편에 속하고 당연히 당연히 제작에 더 많은 철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나라 삼 국시대를 포함한 전근대 세계에서 중장기병 장비를 보유하는데 경제적 부담이 만만하지 않았 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삼국시대에 각 국가들이 중장기병을 일정 병력 규모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 해서는 중장기병을 양성하기 위해 국가의 집중적인 자원 지원이 이루어지거나, 혹은 중장기병 스스로가 이 같은 장비를 확보 유지할만한 경제적 능력을 보유해야한다. 유럽국가에서 중장 기병이 귀족적 전사계층에 한정되었던 것은 중장기병에 수반되는 경제적 부담을 고려할 때 당 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중장기병들도 스스로 중장 기병용 말갑옷과 갑주를 보유할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왕족 내지 귀족적 전사층과 상대적으 로 소수에 불과한 의장 병력에 한정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장기병이 일부 지휘관급 인물의 무장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부대 로의 작전했을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국가별, 시대별로 보다 치밀한 검증이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한때 중장기병과 관련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면 서 중장기병이 널린 운용되었다고 알려진 가야의 경우, 대규모 중장기병대가 운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왕, 최고지휘관, 지휘관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의 중장기병이 운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 도 최근 제기되었다. 213)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소국으로 분리되어 있던 가야의 경우 지배 집단의 절대 규모 자체가 작을 수 밖에 없고, 그 같은 한계 때문에 부대 단위로 중장기병을 운용하기에는 한계가 많았을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중장기병 자체의 전술적 한계점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연구자들도 중장기병의 한계에 대해 서는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실제 전투에서 중장기병은 적이 쏘는 화살에 과감하게 대응하 211) John Warry, Warfare in the Classic World, saramanda press, 1995, p ) 王 援 朝, 唐 初 甲 騎 具 裝 衰 落 與 輕 騎 兵 興 起 原 因, 歷 史 硏 究 1996 年 4 期, 歷 史 硏 究 雜 志 社, ) 류창환, 삼국시대 기병과 기병전술, 제33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논문집, 한국고고학회, 2009, pp.164~165.
5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55 면서 적진을 향해 돌진할 수 있으나 경무장의 기병에 비해 질주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퇴각할 시기에 적의 경무장 기병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고 설명한 것이 전형적 사례다. 214) 사실 중장기병이 제공하는 유일한 실질적인 효과는 말에게도 방호력을 제공했다는 점에 있 다. 말 위에 탄 기병이 아무리 갑옷으로 중무장했다해도 말이 노출되어 있다면 화살 몇 발에 기병의 말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전투 직전까지는 기병의 효과를 살릴 수 있지만 전투 순간에 는 커다란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 기병이다. 중장기병은 그러한 약점을 어느 정도 보완해 주는 효과를 거둔다. 하지만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많다. 사산조 페르시아 중장기병들도 그 무거운 무게 때문에 돌격 시에도 빠른 속도로 돌입하지 못하고 속보 내지 그보다 느린 정도의 속도를 의미하는 느 린 트롯(Slow Trot)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15) 중기병은 경기병에 비해 속도를 덜 중시하지만 정면 돌격을 통한 충격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속도는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중장기병은 기병의 중요한 이점인 속도를 희생한다. 국내 연구자 중에서도 속도를 중시하는 경주마의 한계중량(Pivotal Point) 은 말체중의 13%라는 견해를 소개하면서 400kg의 말이라면 승마자 몸무게의 한계중량은 52kg이라고 예시한 사례가 있다. 216) 말 품종에 따라 한 계중량은 다르지만 이 같은 한계를 넘어설 경우 말은 최고속도를 내지 못하게 된다는 점은 분 명하다. 사람이 착용하는 갑옷은 10~40kg 정도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217) 철제 말갑옷도 최소 40kg 이상이므로 결국 중장기병용 말의 경우 사람 2~3명내지 그 이상 인원을 태우고 전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연히 중장기병은 말의 한계중량을 초과할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른 전투 속도 저하는 피할 수 없다. 또한, 중장기병은 장거리 기동에 제한이 따른다. 몽골족들이 기본적으로 경무장 궁기병이었 음에도 장거리 원정 시에는 여러 필의 말을 끌고 다녔다. 말의 지구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 다. 무거운 갑옷과 말갑옷을 동시에 운반해야 하는 중장기병의 경우에는 장거리 기동에 제한사 항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중기병은 경기병에 더 크고 힘센 말이 필요하며, 중장기 병은 중기병보다 더 크고 강한 말이 필요하다. 218) 214) 이인철, 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 군사 33호, 국방군사연구소, 1996, pp.10~ ) 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 ) 서영교, 고구려 중장기병에 관한 제 문제, 학예지 13,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2006, pp.7~8. 217) 김병륜, 조선시대 두정갑에 대한 군사사적 검토, 학예지 16, 육군사관학교 군박물관, 2009, p ) 그런 관점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삼국시대에 중장기병용으로 적합한 말 품종이 있었는지 여부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삼국시대 병종 분화의 기반에서 살펴보았듯이 과하마를 비롯한 한국의 전통마는 체고가 높은 말이 아니었
58 56 학예지 제17집 이처럼 중장기병은 많은 한계가 있다. 실제 전사를 보아도 바투와 수보타이가 인솔하는 몽골 군에는 일부 중장기병이나 상당수가 중기병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경무장 궁기병이 다수였다. 이러한 몽골군과 유럽의 중기병, 중장기병들이 대결했을 때 몽골군이 압승을 거둔 바 있다. 또한, 그리스의 중보병들도 주변의 중장기병을 상대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 다. 비잔틴제국 정예 중장기병(Klibanophoros)도 1071년 투르크계의 셀주크 경기병과의 전투 에서 완패를 당한 바 있다. 219) 이런 모든 요소를 감안하고도 경제적 비용까지 많이 드는 중장기병을 선택하는 것은, 방호력 과 충격력의 결합이라는 중장기병의 기본 가치 못지않게 시각적이고 심리적인 효과, 귀족적 무사계층의 특별한 욕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지형과 중장기병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전통적 인 도로 사정은 악명이 자자한 편이다. 삼국시대 도로 사정과 조선시대 도로 상황을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조선 말기 전근대 한국 도로를 접한 러시아인들은 도로가 이처럼 원시적인 상태 로 머물러 있는 나라는 한국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고 평했다. 220) 1894년 한국을 다녀간 영국 인 비숍은 여름에는 먼지가 자욱하고 겨울에는 눈 녹은 진창길이 되는데 그나마 보수하지 않 아 표면이 거칠고 돌이 튀어오를 때가 많았다 는 말로 한국의 도로사정을 총평하면서 말을 타거나 걷거나 한 시간에 4.8km 이상은 갈 수 없다 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문제는 산이 많은 한국의 지형적 특성 자체가 기본적으로 도로 발전에 근본적인 제약 요소였다는 점이다. 221) 즉 삼국시대의 도로 관리가 조선시대의 도로 관리에 비해 더 조직적이 었다고 가정해도 산이 많은 한국의 지형 조건을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수많 은 산과 함께 계곡 사이의 좁고 험준한 통행로, 더구나 변변한 다리조차 없는 수많은 중소하천 을 가진 한국의 지형에서 중장기병을 운용하려면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설사 전투전 갑옷을 말에서 분리하여 별도로 수송한다해도 전반적인 부대기동에는 적지 않은 부담 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경우 평원이 많은 만주에도 영토가 많았으나 산악지역이 많 다. 이 같은 말은 활을 기반으로 하는 궁기병에는 크게 무리가 없지만, 말까지 갑옷을 입힌 중장기병에 적합한지 여부 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에서도 과하마 외에 중장기병을 위한 말을 서역지역에서 수입했다는 주장이 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신라의 경우에도 대형마가 존재했다는 신당서 등 중국 사료의 기록을 감안을 할 경우 중장기병들은 이처럼 체고가 높고 덩치가 큰 별도의 말을 사용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219)V.Vuksic 外, Cavalry the History of a Fighting Elite 650 BC-1914 AD, Cassell Group, 1993, p ) 정연식, 조선시대 도로에 관하여, 한국사론 41 42, 1999, p ) 정연식, 조선시대 도로에 관하여, 한국사론 41 42, 1999, pp.568~570.
5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57 은 對 신라전이나 대백제전, 혹은 광개토왕대의 가야원정 같은 전투에서 중장기병이 가지는 효 과는 의외로 제한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거리 기동을 동반하는 전투가 아닌 어느 정도 정적인 성곽전투라면 중장기병이 효 과를 거둘만한 부분이 있다. 각자 성곽에 거점을 둔 군대가 가까운 거리 내에서 제한적인 교전 을 실시한다면 중장기병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을 것이다. 수성( 守 城 ) 전투 시에 성문 주변에서 의 제한적인 추격전이나 교전이라면 중장기병의 이점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문 주변에서의 공성( 攻 城 ) 전투도 속도보다는 방호력이 요구되는 경우다. 이런 성곽전에서 중장기 병은 나름대로의 역할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진형들이 전통적으로 유럽 에 비해 밀집도가 떨어졌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들판에서 벌어지는 형태의 전투 때도 20~50명 정도의 소규모 중장기병 그룹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중기병, 경기병, 중보병, 보병을 정교하 게 조합한다면 적의 진형을 붕괴시킬 때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장창을 보유한 숙련된 중보병이나 Hit and Run 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궁기병이 존재 하지 않는 군대라면 중장기병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동예에서 장창을 능숙하게 운용했다는 중국 측의 기록 222) 을 보거나, 신라의 쇠뇌 관련 기록과 장창당, 백제의 구겸(갈고 리창), 신라나 가야의 가지극(가치창) 등을 보면 고대 한반도의 국가들도 기병을 상대하는데 상당히 능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대기병 방어책은 고구려의 중장기병과 상호작 용을 거치면서 더욱 정교하게 발달했을 것이므로 그러한 상호작용의 미묘한 균형이 무너지는 시점에서는 전투의 승패를 넘어서서 국력의 성쇄와도 연결되었을 것이다. 223) V. 고려시대 기병 병종의 구성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최종적으로 통일하는 단계에서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전투는 일선군에서 벌어진 일리천 전투였다. 일리천 전투 당시 고려군은 중군에 마군 2만, 좌 강에 마군 1만, 우강에 마군 1만, 중군에 제번경기 9500명, 삼군원병에 기병 300명 등 총 4만 9800명의 기병을 보유했다. 224) 222) 三 國 志, 魏 書 烏 丸 鮮 卑 東 夷 傳 濊 조. 223) 광개토왕대의 폭발적인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이러한 미묘한 상호작용의 균형이 무너진 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224) 고려사, 권2 세가 태조 19년 9월조.
60 58 학예지 제17집 이에 비에 보병은 삼군원병 중 제성군 1만4700명을 모두 보병으로 본다해도 3만7700명에 불과했다. 고려는 국운의 건 결정적인 전투에서 보병보다 더 많은 기병을 투입했을 정도로 기 병을 중시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고려가 통일하는 과정에서 기병은 규모면에서 보병보다 더 비중이 높은 병종이었다. 225) 그뿐만이 아니다. 고려의 통일 전쟁에서 실제 기록에 이름을 전할 정도로 활약이 컸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등 주요 무관들은 거의 대부분 기병장군 내지 마군장군 출신이 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규모상 기병이 보병보다 더 컸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할 때 고려 통일 기 중앙군의 주력은 마병, 다시 말해 기병이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226) 통일 이후 평화시기가 도래하자 보병에 비해 유지 비용이 큰 기병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병병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 인다. 북방민족과의 전쟁에서도 고려 기병은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고려-요와의 전쟁에서 고 려군이 동원한 총병력 규모는 약 40만으로 그 중 5만 명이 기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227) 1018 년 발발한 고려-요 3차 전쟁에서 고려군이 성동대천에서 수공을 계획을 때도 계곡에 복병으로 대기한 것은 보병이 아니라 기병 1만2000명이었다. 228) 요나라 침략군이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 려군 주력부대를 따돌리고 개경을 목표로 깊숙이 진입했을 때 추격임무를 맡았던 병마판관 김 종현 휘하의 군대 1만 명도 기병이었으며, 이때 동북계의 기병 3300명도 지원하기 위해 출전했 다. 이처럼 고려-요 전쟁에서 고려군은 1만 명 단위의 대규모 기병부대를 단일부대로 출전시켜 전장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했다. 주력부대의 정면 회전이 아닌 개별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만 명 이상의 기병을 동원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만큼 고려시대 기병 역량이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정종 대에 여진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병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별무반( 別 武 班 )이 창설되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별무반을 편성할 때 말을 가진 자는 신기군에 편성 229) 했으므로 신기군이 바로 별무반의 핵심 기병 전력에 해당한다. 무신정권 집 225) 일리천전투 당시 투입된 고려군 병력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 점을 긍정한다해도 기병의 상대적 우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정확한 병력 규모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보병보다 더 많이 기록된 기병의 숫자는 그 자체로 기병을 그만큼 중시하는 의식 구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226)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편, 고려군제사, 육군본부, 1983, p ) 이홍두, 고려-거란 전쟁과 기병전술, 사학연구 80호, 2005, p ) 고려사, 권94 열전 강감찬조. 229) 고려사, 권96 열전 윤관조. 신기군 내지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는 기병부대는 인종,의종,명종을 거쳐 이후 몽골 과 처음으로 접촉하는 고종 시기까지 기록에 산발적으로 나타나므로 창설 이후 상당기간 고려군 기병부대의 핵심으로
6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59 권기에도 마별초( 馬 別 抄 )라는 기병부대가 존재했던 사례도 유명하다. 원 간섭기 이후 고려군 기병부대의 편제는 불확실하나 고려말기 공민왕 19년 1월에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고안위를 공격했을 때 전체 병력 1만5000명 중에 기병 병력의 규모는 5000명에 달해 전체 병력의 1/3이 었다. 230) 이처럼 고려 전 시대에 걸쳐 기병은 고려 군사력의 중요한 한 구성 부분이었다. 231) 고려시대 기병의 전체 규모를 산출하기는 쉽지 않으나 몇가지 단서를 토대로 추정할 수는 있다. 고려 중앙군인 2군6위에는 각 1000명으로 구성된 총 45개 영 ( 領 )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중 16개령을 차지하는 정용령( 精 勇 領 )이 바로 기병부대라는 주장도 있다. 232) 고려 전기의 중앙군인 2군6위와 지방군인 주현군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중앙군과 주현군을 완전히 별개로 보고 정용이 기병이라는 주장을 일단 사실로 간주한다면, 주현군 소속 정용군 1만9754명도 기병 부대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주진군의 1만2000기 를 합하면 고려군의 전체 기병 규모는 5만 명을 상회하는 것이 된다. 233) 하지만 정용이 기병부대를 의미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고 보이므로 보다 상세한 편제 기록이 남아있는 북계 주진군을 토대로 기병부대의 규모를 추론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 된다. 북계 소속 부대중 정용 451대( 隊 )중에 61대가 마대, 초군 134개 대 중 마대가 17대, 좌군 483개 대 중에서 마대가 59개 대, 우군 93개 대 중에서 9개가 마대였다. 234) 이를 합산하 면 마대( 馬 隊 ) 즉 기병소대로 볼 수 있는 부대는 총 146개 대다. 고려시대 1개 대는 평균 25명 으로 구성된다. 235) 결국 북계 정용 초군 우군 좌군 소속 기병부대의 총병력은 3650명이 된 다. 236) 여기에 신기( 神 騎 ) 1138명도 기병으로 보고, 최소 교위 이상 지휘관들도 승마 상태에서 전투를 수행했다고 보면 그 숫자는 1234명이 된다. 이 병력을 합치면 북계 소속 추정 기병의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230) 고려사, 권42 세가 공민왕 19년 1월조. 231) 이처럼 많은 기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말 사육 관리체계를 보유해야만하다. 원 간섭기에 제주도에 원나라가 관할하는 목장이 설치된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밖에도 고려의 자체적인 목장도 많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고려시대 목장 수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 사료는 드물지만 마정 분야의 전문연구자 는 고려시대의 마정을 연구(남도영, 한국의 마정, 제 3 회 국제아세아민속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 1999, p.68.)하면서 대략 100개소의 목장이 있었다고 보는 의견을 제시했다. 232)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편, 고려군제사, 육군본부, 1983, p.41. 하지만 고려사 병지를 보면 북계 창주의 정용 16대 중에서 마대는 2개라고 되어 있으므로 정용=마대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용을 모두 기병으로 간주하는 견해에 대해서 긍정하기는 어려우며 앞으로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33) 이기백, 고려병제사연구, 일조각, 1968, p.51, p.211.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용을 모두 기병으로 볼 수 없다면 이 같은 기병 규모 계산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34)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편, 고려군제사, 육군본부, 1983, p )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편, 고려군제사, 육군본부, 1983, p ) 고려사 에 인용된 고려식목형지안 에 기록된 서동계 41성의 총군액 중 마대는 184개 대 4600명이다.
62 60 학예지 제17집 숫자는 6022명이 된다. 이것이 고려의 전체 기병 규모가 아니라 북계, 그것도 좀 더 정확하게는 북계에 소속된 기병 규모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전체 고려군에서 기병의 숫자는 수만 단위에 육박했을 개 연성이 매우 높다. 이 같은 고려시대의 기병 병종과 관련한 논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삼국시대처럼 활을 주력무기로 하는 궁기병과 창을 주력무기로 하는 창기병이 동시에 존재했는지 여부를 가장 먼 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중장기병이 고려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는지 여부다. 세 번째로 원나라 간섭 기에 몽골식 궁기병이나 기사 풍습이 고려의 기병 병종에 어떤 영향을 미 쳤는지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237) 1. 고려시대의 궁기병과 창기병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고려시대 기병에도 기본적으로 활을 주력무기로 하는 궁기병과 창 을 주력무기로 하는 창기병이라는 두 가지 기병 병종이 동시에 존재했을 개연성이 높다. 우선 고려사 열전에 입전된 인물 중 기사( 騎 射 )에 능하다 고 표현한 사례가 다수 있다는 점 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38) 고려사 열전에서 선기사 능력을 보유한 인물로 거론된 인물로는 서희의 현손으로 의종과 명종 대에 관직에 있으면서 평장사와 양계병마사를 역임한 서공 239), 평양공 왕기의 후손으로 고종 때의 인물인 영령공( 永 寧 公 ) 왕준 240), 충렬왕대 인물로 장군을 역임했던 이병, 241) 역시 충렬왕 때 대장군과 장전만호 등을 역임했던 한희유 242), 공민왕 때부 237) 논점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기병 병종들이 전장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보다는 병종의 존재 여부나 그 특성 을 살피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각 전투기록에서 기병의 무장 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238) 기사라는 용어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 기사는 승마 상태에서의 활쏘기(Horseback Archery) 를 의미한다. 고려사 에 기록된 기사가 승마 상태에서의 활쏘기를 의미한다면 이는 고려시대에도 궁기병이 존재했 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간접적 정황 증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둘째로 기사라는 용어는 말 타기와 활쏘기 (Horsemanship and Archery) 를 아울러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사를 이런 뜻으로 사용한 경우라면 기 사에 능했다( 善 騎 射 ) 는 기록만으로 궁기병의 존재 가능성을 바로 끌어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경력 이 있으면서 열전에 입전될 정도의 인물이면 기본적으로 전장에서 말을 타는 지휘관급의 인물로 봐야하고, 그처럼 기본적으로 승마 상태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인물이 칼이나 창이 아니라 활을 잘 쏜다고 표현할 정도라면, 해당 인물 이 승마 상태에서 활쏘기에 능하다는 뜻으로 봐도 사실상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고려사 에 기록된 선기사 라는 표현은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이던 간에 승마 상태에서의 활쏘기에 능한 인물이 다수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고려사 에는 사어( 射 御 )라는 문구도 자주 식별된다. 이 문구도 활쏘기와 말타 기를 의미하지만 무예 수련의 상징적 표현으로 중국 고전에서 흔히 사용하는 문구라 궁기병과 직접 연계시킬 수 있을 지 여부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239)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조. 240) 고려사, 권90 열전 종실 평양공 기 등.
6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61 터 관직을 역임해 우왕 때 경상도 원수를 역임한 윤가관 243), 공민왕 때의 인물인 유실 244) 등이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 때 승마상태에서의 활쏘기에 능했던 사례를 보면 고려 전기에서부터 후기 까지의 인물을 포괄하고 있다. 245) 즉 고려왕조 전 시기에 걸쳐 기사 풍습이 존재했고, 그 같은 승마 상태에서의 활쏘기에 능했던 인물이 장군이나 기타 군과 관련된 관직에서 활약했다. 다시 말해 고려시대에도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기사 문화는 어느 정도 폭넓게 보급된 상황 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열전 뿐 아니라 고려사 세가의 수록 내용 중에서도 선종과 현종 때 관직 을 역임해 중추원사를 지낸 이자가 반란을 기도하기 위해 무뢰배들을 모아 기사를 일삼았다는 기록 246) 이나 1102년 9월 국왕 숙종이 장경사로 행차해 기사를 사열했다는 사례 등도 기사 문 화가 폭넓게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기록이다. 247) 이 같은 기사 문화는 실제 궁기병의 존재와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고려사 에 따르면 동북계의 군사력을 충당하기 위해 효용한 자를 뽑아 궁마( 弓 馬 )를 가르쳐 익히게 하라 고 되어 있다. 248) 궁마 라는 용어도 기사 와 마찬가지로 활쏘기와 말 타기 라는 의미와 말 타면서 활쏘기 라는 중의적 용어이기는 하나, 가장 중요한 무예로 궁마 를 지칭한 것은 당 시 군대의 훈련 시스템이 활쏘기와 말 타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 대의 기사 문화는 실제 군대의 무예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궁기병의 존재를 간접적이나 마 뒷받침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도 금위용호친위기의 기두, 영병상장군, 영군낭장 이 모두 기병인데 활과 화살을 가졌고 칼을 찬다 고 기록해, 고려시대 궁기병의 존재를 분명하 게 보여준다. 249) 241) 고려사, 권124 열전 폐행 이정조. 242) 고려사, 권104 열전 한희유조. 243) 고려사, 권113 열전 윤가관조. 244) 고려사, 권112 열전 유숙조. 245) 다만 고려사 열전에 선기사 로 묘사한 인물 6명 중 4명이 원 간섭기(1259년~) 이후의 인물이란 점은 원 간섭기 이후 궁기병의 위상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 증거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한편, 원 간섭기인 충숙왕 때의 인물인 유돈의 묘지명에도 기사를 훈련했다는 대목이 있다. 정확한 추계치를 제시할 수 없지만 고려시대 금석문에서 도 기사 관련 문구가 등장하는 사례가 다수 있어 앞으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246) 고려사, 권127 열전 반역 이자의조. 247) 고려사, 권11 세가 숙종 7년 시월 임오조. 248) 고려사, 권81 병지. 249) 宣 和 奉 使 高 麗 圖 經, 권24 절장.
64 62 학예지 제17집 참고로 고려시대 궁기병용 활도 기본적으로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일 가능성이 높다. 최이가 집권하던 무신정권 시절 송나라 상인으로부터 수우각, 즉 물소뿔을 구입해 활을 만들려 했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250) 수입 물소뿔은 조선시대 각궁의 대표적 재료 중 하나였으므로 고려시대에도 활 재료로 물소뿔을 사용한 것은 당시 활이 조선시대 각궁과 계통적으로 유사한 활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 군기감에 소속된 장인 중에 각궁장( 角 弓 匠 )이 존재하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251) 각궁, 다시말해 뿔을 사용해서 만든 활도 기본적으로 단궁-만궁-합 성궁 계열의 활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궁기병 또한 칼을 보조무기로 휴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 서 활로 싸웠던 이성계는 1383년 9월 호발도와의 진전 1대1 전투에서 검으로 서로 치며 싸움을 벌이다, 다시 무기를 교체해 활을 쏘는 전투 방식을 보여준다. 252) 궁기병적인 전투 성향이 누 구보다 강했던 이성계조차도 칼을 휴대한 것은 당시 궁기병도 기본적으로 칼을 보조무기로 휴 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53) 고려시대에 창을 주력무기로 한 창기병이 존재했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기록도 존재한다. 무 신정권 시절 최이가 양성했던 기병인 도방 마별초 들이 격구( 擊 毬 ), 농삭( 弄 槊 ), 기사( 騎 射 ) 를 일삼았다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254) 격구 는 기본적으로 승마술을 뒷받침하는 무예다. 농삭 은 창의 일종인 삭을 부리는 기술을 의미하는데, 마별초들이 기본적으로 기병이라는 점을 고려 하면 농삭 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창기병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 지로 기사 도 고려시대 궁기병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충렬왕 때 대장군과 장전만호 등 최고위급 무관으로 활약했던 한희유의 열전에서도 전투에 서 말을 타고 창을 운용한 기록, 다시 말해 창기병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 255) 이 있다. 합단 세력이 고려에 침입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한희유가 창의 일종인 삭( 槊 )을 가지고 적진에 250) 고려사, 권129 열전 반역 최충헌조. 251) 고려사, 권90 식화지 봉록조. 252) 고려사절요, 권32 우왕 9년 8월조. 253) 익재난고 에 실린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 증시 위열공 김공 행군기 를 보면 김취려 장군이 거란 유족과의 전쟁 (1216~1218)에 참전했을 때 개평역에서 거란 유족과 전투를 벌이면서 말을 타고 칼을 빼들고 적진에 돌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칼을 주무장으로 하는 기병의 전투 사례를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궁기병 혹은 창기병이면서 칼을 보조무기로 한 기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기병무기로서의 칼의 존재를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 라고 할 수 있다. 또 금석문인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자 판병부사 대자대부 정평공 김씨 묘지명 에 도 영남지역 초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말을 타고 칼(검)을 휘두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254) 고려사, 권129 열전 반역 최충헌조. 255) 고려사, 권104 열전 한희유조.
6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63 돌입, 뛰어난 활솜씨를 가진 적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전투기록은 적진에 정면 돌격에 창으로 적을 공격하는 창기병의 운용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으로 가치가 적 지 않다. 한편, 궁기병과 창기병은 편제상 별도로 분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과 관련해 주목할 기록은 고려시대 의장 병력인 법가의 구성 방식이다. 고려 의종 대에 정한 법가의 구성 중에 청유대 병사 200명은 화집을 휴대하면서 말을 타도록 되어 있고, 금오절충도위장군의 지 휘를 받는 군사 8명도 활집을 휴대하면서 말을 타도록 되어 있다. 또한 방패대의 군사 100명은 갑옷을 입고 작은 기창을 들고 말을 타도록 하고 있다. 256) 일반적인 기병 부대의 편제에 관한 기록은 아니나 고려시대 의장 병력은 궁기병이나 창기병이 편제상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주 는 기록인 셈이다. 이런 모든 기록을 고려한다면 고려시대에 궁기병과 창기병이 모두 존재했 고, 양자는 편제상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2. 고려시대 중장기병의 존재 가능성 현재까지 국내에서 중장기병과 관련된 연구는 모두 삼국시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역사에서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남북조 수 당 시대뿐 만 아니라 요 금과 북송의 대립기에도 중장기병이 존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삼국시대 이 후, 특히 고려시대의 중장기병 존재 가능성은 충분히 고찰할 필요가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대표적인 기록이 바로 문종 4년(1050년) 10월 도병마사 왕총지의 건의 내용이다. 257) 왕총지는 마군( 馬 軍 )은 모두 단련하지 않았으니 선봉 마병을 뽑 아서 1대( 隊 )마다 마갑( 馬 甲 ) 10벌씩을 주어서 달아나고 쫓는 법을 익히게 하고, 이어 어사대와 병부육위( 兵 部 六 衛 )가 그 교열을 맡게 하자 고 국왕에게 건의하고 있다. 마갑 은 중장기병용 말갑옷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단순히 말과 갑옷 을 의미할 수도 있는 중 의적 용어다. 258) 하지만 원문에서 마갑 을 헤아리는 단위로 갑옷의 헤아리는 단위인 부( 副 ) 만 사용한 것을 볼 때, 이 마갑 이 말 10필과 갑옷 10부 가 아니라 말갑옷 10부 를 의미할 가능성 256) 고려사, 권72 지 여복 위의 법가의장조. 257) 고려사절요, 권4 문종 4년조. 258) 갑옷과 말 을 뜻하는 것인지, 갑옷을 씌운 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여말선초의 승려였던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금석문인 보인탑기 에도 갑마( 甲 馬 )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66 64 학예지 제17집 이 높다고 보인다. 즉 왕총지의 건의 내용은 고려 전기에도 중장기병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사료라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 삼국시대를 끝으로 우리나라에서 중장기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고려 전 기인 11세기까지도 중장기병이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변국에서도 이 시기까지는 중장기 병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까지 고려에 중장기병이 잔존했던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기보 다는 당시 동아시아권 군사 문화의 일반적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아야할 것이다. 259) 특히 이 기록은 고려 전기의 중장기병 운용방식의 일단까지 어느 정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군사사적인 측면에서 음미할 가치가 높은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왕총지는 마갑, 다시 말해 중장 기병용 말갑옷을 마군 선봉, 즉 기병부대 선봉부대에 지급할 것을 주장했다. 즉 중장기병의 방호력이 높은 점을 고려해 전투의 최일선에 배치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 같은 건의 내용이 당시 고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중장기병 운용방식인지, 아니면 왕총지의 개인 적 의견인지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있는 추가적인 사료적 근거가 없으나 우리나라 중장기병 전 술의 한 편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추가로 연구할 필요가 높은 대목이라고 판단된다. 숙종 9년(1104년)에 동여진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척준경이 평장사 임간에게 병기와 개마 ( 介 馬 ) 를 청한후, 적진에 돌입해 적장 1명을 베고 포로 2명을 되찾아온 사례가 있다. 260) 개마 는 말갑옷을 입힌 말을 뜻하므로 역시 고려시대에 중장기병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기 록 중 하나다. 특히 척준경이 적진에 돌입한 사례는 고려시대에도 적진에 정면 돌격하는 것이 중장기병의 운용방법 중 하나였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 전술적 운용 외에 의장 병종으로서의 중장기병의 생명력은 더 길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위에서도 언급한 고려 의종대의 법가 병력 구성 중에 갑마 8필이 등장하고 있는 점도 그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261) 하지만 중장기병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격감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중 장기병은 삼국시대의 중장기병만큼 비중 있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장 병력의 경우 실전부대에 비해 중장기병이 좀 더 긴 생명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느 경우라도 259) 중국에서는 요 금대에까지 중장기병이 뚜렷이 식별되며, 특히 북송대인 1044년에 완성된 무경총요 에는 중장기병 용 말갑옷의 그림까지 실려 있다. 몽골-원 시기에도 중장기병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서도 일종의 의장용 말갑옷이 전국시대에까지 사용되었다. 260) 고려사, 권127 열전 반역 척준경조. 261) 고려사, 권72 지 여복 위의 법가의장조
6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65 13세기 이후부터는 관련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중장기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 어도 하나의 독립 기병 병종으로서 위상이 저하되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3. 원 간섭기 몽골식 궁기병의 영향 고려 말 이성계의 개인 전투기록은 시종일관 활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고려사, 고려사절 요, 조선왕조실록, 용비어천가, 동국병감 에 보이는 고려말기 이성계의 전투기록을 살 펴보면 이성계의 개인 무용에서 칼이나 창을 부각시킨 대목은 거의 없다. 대신 철저하게 이성 계가 승마 상태에서의 활쏘기, 다시 말해 기사에 매우 능했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 이성계는 상대방이 근거리에서 창으로 공겨해 올 때도 칼 등 단병무기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활쏘기로 대응했다. 262) 이성계의 집안은 몽골 옷치킨가의 고려인계 군벌 가문이었다. 263)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이 같은 이성계의 궁기병 지향적 특성이 혹시 궁기병을 핵심으로 하는 몽골의 군사적 전통과 연관 성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264) 이 점과 관련해 고려사 열전에서 말 타고 활쏘기(기사) 에 능하다고 표현한 인물 6명 중 4명이 원 간섭기 이후의 인물이란 점은 원 간섭기 이후 궁기병의 위상 강화로 해석할 여지가 있어서 의미심장하다. 265) 또한 원 간섭기 이후 고려사 기록에 전반적으로 경기( 輕 騎 ) 라는 표현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266) 경기 는 경기병을 의미하고 이것이 곧 궁기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경무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궁기병과 밀접한 관련 이 있다. 고려사 를 기준으로 원 간섭기 이후에는 김부식 열전에 단 1회만 보이는 경기 라는 262) 고려사, 권40 공민왕 11년 7월조. 263) 윤은숙, 蒙 元 제국기 옷치긴 가의 동북만주 지배, 강원대 박사학위논문, ) 고려사, 권107 열전 한강조에 따르면 이성계의 사위로 구 몽골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잔존한 여진족 지역에서 거주했던 고려계 인물인 김삼선 김삼개 형제도 역시 기사, 즉 승마상태에서의 활쏘기에 능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런 기록도 이성계의 궁기병 지향적 특성이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흐름의 결과임을 뒷받침해 주는 간접적 사료라고 할 수 있다. 265) 고려사 열전에서 선기사 라고 표현한 인물 중 서공, 영령공( 永 寧 公 ) 왕준은 원 간섭기 이전의 인물이고, 이병, 한희유, 윤가관, 유실 등은 원 간섭기 이후의 인물이다. 물론 좀 더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앞으로 고려사 열전 수록 인물이 시대 별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등 좀 더 입체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266) 고려사 에는 경기( 輕 騎 ) 라는 표현이 총 5회 등장한다. 김부식 열전을 제외하면 유요전, 지용수전, 안우전, 신우전 등 4회 모두 원 간섭기 이후의 인물의 행적을 설명할 때 경기 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밖에 고려사 에는 경기( 勁 騎 ) 라 는 용어도 나오지만 이것은 정예 기병을 의미하므로 본론과는 상관이 없다. 고려사절요 에는 경기( 輕 騎 ) 라는 표현이 2회 나오는데 하나는 김부식이 서경 반란 진압 때의 기록이므로 고려사 김부식 열전과 같은 사건 때를 기록한 것이 고, 하나는 이성계의 동령부 정벌 때 경기 3000명에 대한 기록인데 고려사 지용수 열전의 내용과 동일하다.
68 66 학예지 제17집 표현이 간섭기 이후에는 4회나 보이는 것은 의미심장하며 이 시기 경기병 내지 궁기병의 위상 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생각된다. 또한 원 간 섭기 이후인 우왕 3년(1377년) 7월 개성부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고 용감한 자는 마병으 로 삼자 고 보고한 것도 당시의 주력 기병 병종이 궁기병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67) 물론 원 간섭기 이전에도 고려에 궁기병 내지 궁기병적 운용 방식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는 점은 이미 상세히 논한 바 있다. 즉 원 간섭기 몽골식 궁기병의 영향이란 것은 고려에서 그 이전에 없던 궁기병 운용술을 완전히 새롭게 도입했다는 뜻이 아니라 원 간섭기 이후 전체 기병 운용에서 궁기병 내지 궁기병 운용술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졌을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부분적으로 몽골식 궁기병의 운용술이나 장비 중 일부를 새롭게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몽골식 궁기병의 영향은 이성계 가문 등 원나라 관직을 수여받았던 특정 가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고려사를 보면 무신정권 시절 최이의 집권기에 도방 마별초들이 안마, 의복, 궁시( 弓 矢 )를 달단( 韃 靼 ) 풍속을 모방하였으며 호상 그 미관을 경쟁하고 과시하였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268) 아직까지 몽골의 침략에 저항했던 시대에 이미 고려에서 몽골 양식의 안 장과 의복, 활과 화살이 유행했다는 것이다. 즉 원 간섭기를 전후한 시기에 몽골식 궁기병과 관련된 문화는 단순히 이성계 등 원나라 관직을 받았던 특정한 가문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 니라 고려 사회 전반에 파급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원 간섭기에 고려의 제주도에 원제국이 관리하는 목장이 들어서면서, 고려의 마정이나 목마 풍습에 몽골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점은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하다. 이에 더해 궁기병을 매우 중시하는 몽골식 군사적 전통이 원 간섭기의 고려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이처럼 원 간섭기를 전후한 시기 고려의 궁기병 지향적 기병 문화 내지 기병 운용술은 조선시대로 계승된다는 점에서 한국 군사사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Ⅵ. 조선 전기 기병 병종과 변화 추이 조선 전기만 해도 기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선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조선 전기 기본 267) 고려사, 권81 병지 병제 오군조. 268) 고려사, 권192 열전 반역 최충헌조.
6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67 병서인 진법( 陣 法 ) 은 기병과 보병을 동일한 비중으로 편성하도록 하고 있다. 각 부( 部 에)는 반드시 기병 2통과 보병 2통을 두게 되어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병력의 절반은 반드시 기병으로 편성되도록 하고 있다. 269) 기병은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보병보다는 비용이 많이 드는 병종임에도 기병과 보병을 1:1로 편성하게 한 것은 그만큼 기병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기병이 기본적으로 동수의 보병보다 전투력이 우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만큼 조선군의 전 체 전력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수차례 단행된 對 여진 정벌전에서 조선군의 주력은 사실상 기병이었다는 점도 조선 전기 군대에서 기병의 위상을 보 여준다. 1. 조선 전기 문헌으로 본 2중 병종체제 조선 이전에도 김해병서 등 고유의 병법서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병법서들 중 가장 오래된 병법서는 대부분 조선 초기의 서적들이다. 이들 서적에는 진형과 함 께 병종별 배치 순서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기병을 주력 무기의 운용방식에 따라 기사( 騎 射 )와 기창( 騎 槍 )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때의 기사는 승마 상태에서의 활쏘기를 의미하 는 것이 분명하므로 곧 궁기병을 지칭하는 것이고, 기창은 승마 상태에서의 창술을 의미하므로 곧 창기병을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하경복 진서 는 기사대 와 기창대 같은 기병 편제 단위 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2중적인 기병 병종체제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 병조 진도지법 (1412년)의 병종 세종3년 7월 9일 병조는 진도지법( 陣 圖 之 法 ) 을 제정, 국왕 세종에게 보고했다.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병법서적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온 진도지법 의 내용은 실록에 전해져 오고 있다. 270) 진도지법 은 모든 진의 각 면( 面 )에는 방패를 연이어 배치하고, 다음은 창( 槍 )-장검( 長 劒 ), 그 다음은 화통-궁노( 弓 弩 ), 그 다음은 기창( 騎 槍 ), 그 다음은 기사( 騎 射 )가 진( 陣 ) 안에 포열된 다 고 규정하고 있다. 즉 진도지법 에 따른 조선 전기 군대에는 방패와 창-장검, 화통-궁노, 기창, 기사 등 5종류 269) 노영구, 조선 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2, p ) 세종실록, 세종3년 10월9일조.
70 68 학예지 제17집 의 병종이 존재한다. 271) 진도지법 에 따른 병종에는 창 운용병과 장검 운용병이 동일한 범주 로 간주되며, 화약무기 운용병(화통)과 활 운용병(궁노)도 별개로 구분하지 않고 동일 범주의 병종으로 간주한다. 보병은 크게 방패와 창-창검, 화통-궁노 등 3종류로 구분되는 셈이다. 기병 은 기본적으로 창을 보유하는 기창과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사 등 2종류로 구분된다. 이들은 방패, 창-장검, 화통-궁노, 기창, 기사 순으로 배치된다. 물론 진형에 따라 외곽에 별 도의 기병이 운용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전투대형은 이 순서에 따랐을 것이다. 각 병종별 구체적인 병력 비율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2) 계축진설의 병종(1424년) 세종 15년(1424년) 7월4일 판중추원사 하경복( 河 敬 復 ) 형조 판서 정흠지( 鄭 欽 之 ) 예문 대 제학 정초( 鄭 招 ) 병조 우참판 황보인( 皇 甫 仁 ) 등이 왕명을 받들어 진서( 陣 書 ) 를 편찬했다. 이 진서 는 훗날 계축친설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경복은 다른 집필자와 달리 무신 출신이다. 그 때문인지 계축진설 은 다른 조선 전기 병 법보다 구체적이고 실전적인 색체가 강한 것이 특징이다. 계축진설 에 나오는 병종은 기본적 으로 진도지법 에 나오는 병종 구성과 일치한다. 다만 각 병종을 지칭하는 용어는 조금씩 차 이가 있다. 계축진설 을 보면 한 대열을 50인씩으로 하되, 먼저 방패 든 군사가 한 사람, 다음에 창이 나 장검을 든 한 사람, 다음에 화통이나 궁수( 弓 手 ) 중의 한 사람으로 차례를 정하여 보졸 30인 이 앞서고, 말 탄 창잡이와 말 탄 활잡이 20인이 뒤서서 간다 고 규정하고 있다. 272) 진형에서 기병의 포진 위치에 대해서는 무릇 진 치는 데는 각 진형의 바깥쪽에 방패를 연이 어 배치하고, 다음에 창과 장검이요, 다음에 화통과 궁수, 다음에 창 가진 기병과 활 가진 기병 이 진 안에 벌려 서는데, 안팎의 진이 다 그리한다 고 규정해 기병이 진형의 가장 안쪽 내지 뒤쪽에 포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계축진설 은 행군 항목에서 좁거나 험한 길을 행군할 때 방패, 창-장검, 화통-궁 수 각 1명씩 보졸 30명, 기창과 기사가 20명씩 총 50명이 순서대로 배치되는 행군대형을 제시 271) 방패를 연이어 배치하고 의 원문은 실록 규장각 소장본을 기준으로 住 隊 連 排 로 되어 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해석 은 쉽지 않으나 주석을 보면 현재의 방패( 卽 今 防 牌 )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방패를 운용하는 부대가 제1선에 배치 되는 것은 분명하다. 272) 세종실록, 세종 14년 7월14일조.
7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69 하고 있다. 이러한 병종별 배치순서는 행군 외에 교전 때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 보병과 기병으로 나눈다면 보병이 60%, 기병이 40%가 된다. 기창과 기사의 병력 비율은 직 접적으로 명시하지는 않고 있으나 총 50명에 5개 병종이므로 방패, 창-장검, 화통-궁수, 기창, 기사가 모두 동일 비율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경우 각 병종별 비율은 20%가 되므로 기창 과 기사의 비율은 전체 병력의 각 20%가 된다. 273) 이와 별도로 하경복은 병종별 깃발도 제시하고 있다. 계축진설 은 무릇 적구에 응전할 때 에는 대( 隊 )마다 기를 달리 하는데, 기사대( 騎 射 隊 )는 푸른 기를 잡고, 기창대( 騎 槍 隊 )는 검은 기를 잡고, 화통궁수대( 火 筒 弓 手 隊 )는 백기를 잡고, 보창장검대( 步 槍 長 劒 隊 )는 붉은 기를 잡는 다 고 설명한다. 창-장검 운용병은 보창장검대, 화통-궁수는 화통궁수대, 기창은 기창대, 기사는 기사대라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기창과 기사를 포함한 각 병종은 별도의 부대로 편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 같은 계축진설은 문종 1년 신진법 이 나올 때까지 실제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74) 3) 제1차 함길도진법에 따른 병종 구성 세종 16년 4월26일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가 함길도에 적용하는 진법에 대해 조정에 보고 한다. 그 이전에 논의된 진법들이 중앙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라면, 이 진법은 실제 전투가 가장 빈번하게 치러지던 함경도 국경지대의 전투경험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높다. 병 조 진도지법 이 기본적으로 훈련을 가정한 이론적 진법이라면 함길도 진법은 철저하게 실전 진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편의상 제1차 함길도진법이라고 부르겠다. 세종실록 에 따르면 3인이 1오( 伍 )가 되게 하되, 1인은 방패( 防 牌 )를 잡고 검을 차며, 1인 은 창을 잡고(아울러 궁검을 차도 좋다), 1인은 궁시( 弓 矢 )를 차고 검을 찬다 고 되어 있다. 275) 이와 별도로 대( 隊 ) 사이마다 화통 하나씩을 두고 3인으로써 오를 지어 방패에 1인, 화통에 273) 병조 진도지법 에서는 방패라는 병종을 직접 표기하지는 않고 각주에서 처리하지만, 계축진설 에서는 제1선에 서 는 병종이 방패임을 명시하고 있다. 화약무기와 궁수에 대해서는 화통-궁노라는 표현대신 화통-궁수로 표기하고 있다. 274)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10월21일조를 보면 황수신이 기존진도( 陣 圖 )도 보졸 운용을 중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졸이 너무 적다면서, 기병을 줄이고 보졸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국왕은 방패와 섭육십으로 하는 것이 가하다고 답변한다. 이때 황수신은 병종별 배치 순서에 대해 바깥에는 방패( 防 牌 )이고 다음이 보졸( 步 卒 ) 창( 槍 ) 장검( 長 劍 )이고, 다음이 화포( 火 砲 ) 궁수( 弓 手 )이고, 다음이 기병( 騎 兵 )이다 고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상에 보이는 진도에서 병종별 배치순서는 방패, 보졸창-장검, 화포-궁수, 기병인 셈이어서 계축진설 와 일치한다. 275) 세종실록, 세종 16년 4월26일조.
72 70 학예지 제17집 2인씩으로 한다 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제1차 함길도 진법은 기본적으로 3명을 1오로 하고 있어, 5명을 1오로 하는 중앙 조정의 진법과 다르다. 또한 기본적으로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중앙 조정의 진법과 다르다. 3명 단위 각 오는 지방패대검( 持 防 牌 帶 劍 ), 지창( 持 槍 ), 패궁시대검( 佩 弓 矢 帶 劍 )으로 구성된다. 지방패대검은 방패와 칼을 보유한 기병이고, 지창은 창을 보유한 기병, 패궁시대검 은 활과 칼을 보유한 기병이다. 지창은 활과 칼을 아울러 보유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276) 이같은 보유 무기 설명은 주력무기 외에 보조무기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훈련지향적인 다른 병법서와 구별된다. 즉 조선 전기 창기병과 궁기병도 기본적으로 칼을 보조무기로 휴대하 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화통은 기본 오에 편성되지 않고 별도의 화약무기 전문부대인 화통 오에 편성된다. 화통오도 3명으로 구성되는데 방패 1명과 화통 2명으로 구성된다. 방패 1명이 단병접전 능력이 취약한 화통 2명을 보호하는 셈이다. 화통 오는 일반적인 대 3개당 1개 비율로 편성된다. 277) 화통 오는 기병인지 보병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없으므로 화통 오 소속 병력을 제외하면 전체 병력 의 1/3이 칼과 방패로 무장한 기병, 1/3이 창을 주무기로 하는 기병, 1/3이 활과 칼을 주무기로 하는 기병인 셈이다. 4) 제2차 함길도진법에 따른 병종 구성 이 같은 제1차 함길도진법에 대해 국왕 세종은 불만을 표시했다. 5명을 1오로 편성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병법의 기본인데, 3명을 1오로 편성한 것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의견을 표명 한 것이다. 약 1년 후인 세종17년 6월16일 함길도에서는 5명을 1오로 하는 진법을 다시 조정에 보고한다. 2차 함길도 진법은 편제에 대해서 다섯 사람이 항오가 되어 한 사람은 방패를 가지고 칼을 차며, 한 사람은 궁시를 차고 창을 가지며, 세 사람은 궁시를 차고 칼을 가지고, 만일 걸으면서 276) 함길도진법에 나타나는 검은 장검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서례에 규정한 패검, 다시 말해 환도로 생각된다. 지창의 경우 창과 아울러 검과 활을 보유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창과 장검을 동시에 보유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때의 검은 환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277) 화통은 그 이름에서 화약무기 운용병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실록 본문에도 구체적인 휴대무기에 대해 설명이 없으며, 보병인지 아니면 기병인지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설명이 없다. 화통 오에 편성되는 방패의 경우 일반 오와 다르게 단순히 방패 로만 표기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방패만 휴대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지방패대검처럼 검도 휴대하는지는 명시적인 설명이 없다.
7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71 전투하게 되면 한 사람이 네 사람의 말을 지키는데, 장수는 말 지키는 사람을 적당히 더한다 라 고 설명하고 있다. 278) 결국 5명으로 구성된 기본적인 오( 伍 )는 방패와 칼을 휴대한 지방패대검( 持 防 牌 帶 劍 ) 1명, 창과 활을 보유한 패궁시지창( 佩 弓 矢 持 槍 )이 1명, 활과 칼을 보유한 패궁시지검( 佩 弓 矢 持 劍 )이 3명이 된다. 비율로 보자면 지방패대검이 20%, 패궁시지창이 20%, 패궁시지검이 60%가 된다. 제1차 함길도진법의 지창은 주무기가 창이고 필요에 따라 검과 활도 휴대할 수 있는 병종이 었으나 제2차 함길도진법의 패궁시지창은 병종 개념 자체에 활과 창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어 창기병도 활을 반드시 휴대할 것을 명시한 점이 주목된다. 세종실록 에는 이 같은 기병의 전투방법도 설명되어 있다. 북이 울리면, 방패를 가진 사람 이 말에서 내리고, 활과 창을 가진 네 사람이 또한 말에서 내려 방패 뒤에 선다 고 한데 이어 북이 급히 울리면 방패를 가진 사람이 빨리 달려 앞으로 나아가고, 뒤에 있는 세 사람도 역시 빨리 달려 앞으로 나아간다 고 규정하고 있다. 북이 울리면 말에서 내린다고 언급한 것은 결국 전투 순간에는 기본적으로 말에서 내려 하마 전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말을 지키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 다만 세 사람 이 활과 창을 번갈아 쓰면 나무와 돌에 의지하여 굳게 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규정한 것도 결 국 전투 순간에는 말에서 내리므로 말을 지키는 사람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한 대목이 다. 또 적이 패하여 달아나거든 좌우가 일제히 앞으로 나아가서 급히 치되, 적이 만일 말을 타고 달아나거든 우리도 또한 말을 타고 쫓는다 고 언급, 필요시 말을 타고 추격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5명이 한 조를 이뤄 1명이 말을 지킬 동안 나머지가 말에서 내려 전투를 수행하고 적이 후퇴하면 다시 말을 타고 추격하는 전투방법은 당나라대 하마( 下 馬 ) 전 투 전술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제1차 함길도 진법과 마찬가지로 제2차 함길도 진법도 기본적인 오 3개마다 화통 오 1개가 추가되는데, 그 편제에 대해서는 매양 3대( 隊 )마다의 사이에 화통( 火 桶 ) 부대를 두되, 역시 다 섯 사람으로 항오를 만들어서 방패를 가진 한 사람은 칼을 차고, 화통을 가진 네 사람은 칼을 차며, 말을 지키는 사람은 위에서와 같이 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화통 오는 제1차 함길도진법과 마찬가지로 3개 일반 대당 1개 화통 오 비율로 편성된다. 화 통오도 5명으로 편성되며 방패 1인과 칼과 화약무기를 동시에 휴대하는 대검화통 4명으로 편 278) 세종실록, 세종 17년 6월16일조.
74 72 학예지 제17집 성된다. 화통오의 방패가 일반 오의 지방패대검과 동일한 무장을 하는지는 역시 구체적인 언급 이 없다. 다만 화약무기 운용병인 화통의 경우 검을 휴대한다는 점을 명시하여 대검화통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화통오도 모두 기병임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된다. 결국 제2차 함길도 진법에 따른 함경도 병력은 일반 대는 물론이고 화통오도 기본적으로 기병으로 편성되는 병력 인 셈이다. 5명을 1오로 수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함길도진법의 병종구성은 중앙 조정의 진법과는 차이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 세종은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다시 말해 중앙조정 의 진법을 지방에 강제적으로 적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5) 신진법에 따른 병종 구성과 전투대형 (1450년) 문종 1년 6월19일 이른바 신진법 이 반포된다. 279) 이 신진법 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 군이 문종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것이다. 신진법 에서는 1개 부( 部 )마다 각 4개 통( 統 )을 보유 하는데, 그중 2개 통이 기병이고 나머지 2개 통은 보병이다. 통 자체의 병력이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기병과 보병의 병력 수는 유동적이지만, 통의 수를 동일하게 한 것은 기본적으로 보 병과 기병을 1대1의 비율로 편성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으로 판단된다. 신진법 오위연진 항목을 보면 기병( 騎 兵 )의 2통( 統 )안에는 사( 射 )와 창( 槍 )을 갖추는데, 대개 5분의 3을 사( 射 )로 하고, 5분의 2를 창( 槍 )으로 한다 고 명시하고 있다. 280) 다시 말해 기사에 해당하는 병력이 60%, 기창에 해당하는 병력이 40%인 셈이다. 다만 사람의 장기( 長 技 )에 따라야 하므로 반드시 미리 정할 것은 아니다 라고 하고 있어 기사와 기창의 상대적 비 율에 대해 융통성 있게 정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또한 기병이 검을 휴대할 수도 있다고 설명하지만 구체적인 장비 조합의 예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기병 혹은 마병이라는 표현과 기, 사 등 임무에 대한 설명은 있으나 다른 조선 전기 진법 279) 단종 2년에 신진법 을 요약한 약초진법 이 간행되고, 세조 원년(1455년)에 신진법 을 재편집해서 크기가 작은 활자로 인쇄한 소자진법 이 간행됐다. 이를 다시 큰활자로 바꾸어 인쇄한 것이 대자진법 으로 세조3년(1457년)에 간행됐다. 소자진법 과 대자진법 은 일부 내용에 차이가 있는데 이를 하나로 합친 것이 성종 23년(1492년)에 간행 된 진법 이다. 성종시대에 간행된 진법은 국왕 세조가 지은 책이라는 의미에서 어제진법 으로 부르며, 혹은 오위 진법 으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병장도설 로 부르기도 했다. 신진법 과 약초진법 의 경우 실록에 그 내용의 일부가 실려 있으며 진법 은 각종 그림까지 첨부된 완전한 서적 형태로 전해오고 있다. 이들 신진법, 약초진 법, 소자진법, 대자진법, 진법, 어제진법, 오위진법, 어제오위진법, 병장도설 등은 모두 유사한 내용을 수록한 같은 계열의 병서이거나 혹은 사실상 동일한 병서의 별칭들이다. 280) 문종실록, 문종 1년 6월19일조.
7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73 서적과는 달리 기창, 기사, 기창대, 기사대 같은 구체적인 병종 명칭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병종별 배치순서에 대해서는 보병의 경우 팽배, 총통, 창, 검, 궁수 순으로 배치한다 고 되어 있으나 기병에 대한 언급은 누락되어 있다. 281) 6)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 대열의(1452년)로 본 병종 세종실록 오례의에는 일종의 열병식인 대열의( 大 閱 儀 ) 행사 시의 병종구성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대열의 자체는 세종 재위 중에도 이미 관련 규정이 나오지만 당시 기록상에는 병종 구성에 대한 언급이 분명히 없다. 1452~1453년경에 편찬이 완료된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 대열의 조에는 구체적인 병종구성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세종실록 오례의에 따르면 전후의 기병대( 騎 兵 隊 )와 보병대( 步 兵 隊 )가 각각 무기와 제복을 갖춘다 고 하고 있고, 본문이 아닌 주 에서 무릇 군사들은 모두 같이 하는데, 창대( 槍 隊 )는 창을 쥐고, 검대( 劍 隊 )는 장검( 長 劍 )을 쥐고, 사대( 射 隊 )는 궁시( 弓 矢 )를 가진다 고 설명하고 있다. 대열의 행사 시의 군대는 기본적으 로 기병대와 보병대로 나누고, 다시 보유 무기별로 창대, 검대, 사대로 나뉘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이런 구별이 보병대에만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보병대와 기병대에도 공통적으로 적용 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82) 7) 조선 전기 기병 병종 이상 조선 전기 문헌에 나오는 기병 병종과 그 비율, 편제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위 표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조선 전기 기병은 기창-창기병과 기사-궁기병이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구 분된 이원적인 기병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미 조선 초기부터 창기병과 궁기병의 비율에 대해 조정의 여지가 가능하다 는 유보적 입장을 취한 점은 주목된다. 조선 초 전기 진법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진법-오위 진법 계열의 병서들은 기병은 대개 5분의 3을 사( 射 )로 하고, 5분의 2를 창( 槍 )으로 한다 고 281) 참고로 신진법 은 다른 조선 전기 진법과 비교해서 화약무기 운용병을 화통대신 총통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이를 궁수와 분리해서 별도의 병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한 총통 배치순서에 대해서도 다른 병법과 달리 팽배(방패) 다음 제2열로 표시하고 있어 화약무기 운용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신진법 에는 창-장검이란 표현이 없으며 창과 검으로 구별하고 있다.신진법에 나오는 검은 환도(패검)라기 보다는 장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 다. 1452년 기준의 검대( 劍 隊 )가 패검(환도)을 보유한 부대가 아니라 장검을 보유한 부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신진법 의 검은 패검(환도)이 아니라 장검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282) 특히 눈여겨 볼 점은 검대가 환도가 아닌 장검을 보유한 부대라고 명시한 점이다.
76 74 학예지 제17집 명시하면서도 반드시 미리 정할 것은 아니다 라고 규정, 이와 다른 기병 병종 비율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궁기병과 창기병의 상대적 비율이 6:4라는 신진법-오위진법 계열의 규정이 실제 병력 규모면에서 지켜졌는지는 미지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424년에 편찬된 계축진설 이 궁기병 과 창기병의 비율이 1:1을 규정하고 있으면서도 지방에서 실제로 적용되었던 전술로 보이는 1 2차 함길도 진법에서 창기병의 비율이 훨씬 낮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1차 함길도 진법에서 방패를 휴대한 병력을 제외하고 창기병(지창)과 궁기병(패궁시대검)의 상대적 비율은 1:1이지만, 지창을 패궁시대검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했으므로 창기병을 실제로 운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차 함길도 진법에서도 방패를 휴대한 병력을 제외하면 궁기병(패궁시지검)과 창기병(패궁시지창)의 비율은 3:1이다. 이상의 사료를 조합해 보면 이미 조선 초 전기부터 궁기병이 창기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 더 높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표 2> 조선 초~전기 문헌에 보이는 기병 병종과 그 편제 연도 병조 진도지법 1412 계축진설 차 함길도 진법 차 함길도 진법 1435 신진법 (오위진법) 1450 병종구분과 비율 (전체 기병중 비율) 騎 槍 騎 射 騎 槍 (50%) 騎 射 (50%) 持 防 牌 帶 劍 1/3 持 槍 (패궁시대검 가능) 1/3 持 弓 矢 帶 劍 1/3 持 防 牌 帶 劍 20% 佩 弓 矢 持 槍 20% 佩 弓 矢 持 劍 60% 槍 (2/5) 射 (3/5) 편제? 기창대 기사대 대-오 대-오 기전통-여-대-오 기주통-여-대-오 2. 기사 우위 체제로의 전환과 그 추이 임진왜란 시기의 실록을 보면 우리나라의 장기인 궁마( 弓 馬 ) 283), 우리나라는 궁마의 재주
7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75 가 능하다 284), 기사( 騎 射 )는 우리나라의 장기( 長 技 ) 285), 우리나라 궁마는 천하에 제일 286) 처 럼 기병의 활쏘기 능력, 다시 말해 궁기병의 전투 기술에 대해 자부심을 표하는 기록을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다. 즉 임진왜란 시점에서 기병의 주된 전투 기능은 궁기병의 영역인 궁마- 기사로 대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단순히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점은 무예제보 를 통해서도 재확인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에 편찬된 무예제보 에서 저자 한교가 말 위에서 창을 쓰는 것은 비록 무과시 험장에선 쓰이지만 그 방도가 상세히 갖추어지지 않아 창과 칼이 버려진 무기가 된지 이미 오 래다 라고 설명한 것은 이 무렵에 기창-창기병이 몰락한 상황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287) 특히 임진왜란 당시 기병이 투입된 대표적인 전투인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의 공격 순간을 묘사하면서 기병의 돌격을 의미하는 치돌 ( 馳 突 ) 대신 궁기병의 돌격 사격을 의미하는 치사 ( 馳 射 )라고 표현 288) 한 것은 당시 조선 기병이 주로 활로 무장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기 문헌에서 기사와 기창이라는 2중 병종체제를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임진왜란 발발 시점에는 이미 기사-궁기병 위주의 체제로 실질적으로 전환된 상태였던 것이다. 전장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이미 조선 초 전기부터 궁기병은 창기병에 비해 비율상 더 많이 편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 같은 궁기병의 상대적 우위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 어 창기병의 기반이 매우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교가 말한 것처럼 조선 전기 무과 식년시에 기창 종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 라 도시나 내금위 별시위 갑사 여수 대정의 시취에서도 기창 종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을 토대로 조선 전기에 기창-창기병의 존재 기반이 탄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국대전 을 보면 당번인 정병의 연재 종목에 기사만 있을 뿐 기창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289) 갑사나 소부대 지휘관인 여수 대정을 뽑을 때는 기창 종목이 있지만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병의 경우 훈련 수준 평가에 해당하는 연재 규정에 기사 종목만 있을 뿐, 기창이 없는 것이 283) 선조실록, 선조25년 5월23일자. 284) 선조실록, 선조25년 11월25일자. 285) 선조실록, 선조29년 2월16일자. 286) 선조실록, 선조30년 1월16일자. 287) 무예제보. 288) 도순변사신공전. 289) 경국대전, 병전 시취.
78 76 학예지 제17집 다. 이미 경국대전 성립시기인 1485년부터 일반 병사들의 무예로서 기창은 사실상 존재 기반 이 매우 약했던 것이다. 1493년에 작성된 대전속록 도 출직한 군사는 훈련원에 나가 습사한다 고 되어 있어 오직 활쏘기를 기준으로 한 훈련 규정만 명기하고 있다. 입직 군사의 경우에도 적중한 수와 궁품의 상중하를 본조에 보고한다 고 규정하고 있어 역시 활쏘기로 입직 군사들의 능력을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양에 상번하는 군사들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대전속록 을 보면 지방의 각 진 장의 경우에도 적중 수와 궁품의 상중하를 갖추어 기록해 절도사에게 이문하고, 절도사는 이 문을 첨부하여 본조에 이송한다 고 되어 있다. 290) 이처럼 조선 전기 지방군들도 기본적으로 활쏘기를 기준으로 훈련성적을 평가했다. 이처럼 대전속록 장권 조항은 철저하게 활쏘기로 군사들의 훈련 수준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포상하는 절차만 기록되어 있을 뿐 창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다. 1543년에 작성된 대전후속록 도 마찬가지다. 대전후속록 에 실린 무신당상관과 당하관의 시사 규정을 보면 활쏘기 성적에 따라 포상과 처벌 규정이 명기되어 있다. 291) 활쏘기 성적이 나쁘면 근무인정일수를 삭감했고, 두 차례 활쏘기 시험에 불참할 경우 품계를 강등하기까지 했다. 1555년에 편찬된 경국대전주해 를 봐도 내금위의 무예 평가가 기본적으로 활쏘기로만 이 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진급과 평가시스템이라면 무관들도 기본적으로 활쏘기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292) 요약하자면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식년시와 도시, 내금위 별시위 갑사 등 특수병종과 여수 대 정 등 초급 지휘관의 채용 시험에 비록 기창 과목이 있기는 했으나 정기적인 훈련 평가는 기본적 으로 활쏘기를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양적으로 병력의 핵심인 정병의 경우에도 훈련 성적 평가는 오직 활쏘기를 기준으로 실시됐다. 이런 상황이라면 창을 주력무기로 하는 기병이 대규모 로 유지되고, 그 같은 훈련 수준을 유지한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교가 창과 칼이 버려진 무기가 된지 이미 오래다 라고 평가한 것은 조선 전기 법전의 훈련 관련 규정을 고려할 때 자명한 결과 라고 할 수 있다. 290) 대전속록, 병전 장권. 291) 대전후속록, 병전 장권. 292) 경국대전주해.
7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77 당연한 이야기지만 궁기병을 중시하는 흐름에 반비례해서 기창과 관련된 훈련 기록은 조선 왕조실록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조선 전기 기창을 연습하는 대표 적인 훈련방법 내지 평가방법으로는 갑을창 과 삼갑창, 그리고 추인 을 꼽을 수 있다. 기창과 관련된 최초의 관심은 태종대에 시작된다. 1411년(태종11년) 3월10일 병조는 허수아비 (추인)를 창으로 찌르는 종목을 무과시험 종목으로 제안했다. 293) 3일 뒤인 3월13일에는 허수아 비가 아니라 사람 2명이 창으로 교전하는 마창지법을 무과시험 종목으로 보고해 국왕 태종의 허락을 받는다. 이처럼 사람 2명이 창으로 교전하는 방식을 갑을창 이라고 하는데, 갑을창 이라는 용어 자체 는 세종실록 에 처음 보인다. 1433년 3월10일 무과의 기창 시험 방식이 허수아비를 찌르는 방식인 추인 으로 다시 바뀌었지만, 훈련방식으로서의 갑을창 은 그 이후에도 계속 사용됐다. 갑을창 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 1회, 문종실록 2회, 세조실록 7회에 달하지만 예종실록 2회를 끝으로 그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삼갑창 은 사람 3명이 말을 타고 쫓고 쫓기면서 창 끝으로 상대방 등에 붉은 표시를 많이 남기면 승리하는 일종의 모의 교전 및 훈련법이었다. 삼갑창 은 1460년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 하며, 세조실록 4회, 성종실록 6회 등으로 점차 증가하다 그 이후에는 관련 기록이 중단되며 중종실록에 2회, 선조실록 1회를 끝으로 사라진다. <표 3> 조선 전기 기창 관련 무예 기록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 중중 명종 선조 갑을창 삼갑창 계 이를 연도별로 따져보면 15세기에 해당하는 세종 즉위년인 1418년부터 1500년까지 82년 동 안 갑을창 과 삼갑창 과 관련된 기록이 수록된 회수가 총 22회에 달하는데 비해 16세기 시작에 해당하는 1501년부터 선조가 재위하던 1608년까지 107년 동안 갑을창 과 삽갑창 과 관련된 기 록이 등장하는 회수는 단 3회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을창 과 삼갑창 293) 태종실록, 태종11년 3월10일자.
80 78 학예지 제17집 관련 기록이 급감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이 시기에 조선왕조에서 기창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성종실록에 삼갑창과 관련된 마지막 기록이 등장하는 시 점은 1480년이므로, 이미 성종 재위(1469~1494) 후반기부터 기창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추 세가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기사 와 관련된 실록의 기사 수가 세조 38건, 성종 40건, 중종 43건, 명종 10건 등으로 꾸준히 유지되는 경향과는 극명하게 상반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성종 재위 후반기부터 점차 창기병의 무예인 삼갑창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고, 그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성종 때 완성 된 경국대전 에서도 일반 정병의 연재 규정에 기창과 관련된 훈련 규정이 누락되었다. 이후 후속 법전에서 활쏘기를 중심으로 하는 무관-군인들의 평가시스템이 더욱 확산되면서 기창-창 기병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조선 전기 기병의 병력 규모와 말 수급 기반 병서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론적인 병종 구성 비율은 기병과 보병이 각각 1:1이었다. 이 같은 기준은 실제로도 어느 정도 지켜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기병이 더 많았던 경우도 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은 전쟁 중 1594년 국왕에 올린 차자를 통해 기병 중 상번자의 숫자 2만3700명이고, 보병 중 상번자의 숫자가 1만6200명이었다 고 언급하 고 있다. 294) 상번군 중에서 기병이 보병보다 병력이 더 많은 것이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보병보다 기병이 더 많이 편성된 사례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1509년 함경도 관찰사 고형산은 병력 현황에 대해 보고하면서 북도의 길성 이북의 아홉 고을에는 갑 사( 甲 士 ) 2400명, 기병( 騎 兵 )이 3240여 명, 보병이 1060여 명으로, 보인까지 아울러 계산하면 원액이 2만3870명인데, 현재 있는 것은 단지 8313명이고 감손된 것이 1만5550명이다 며 남도 의 단천 이남 무릇 열 세 고을의 갑사는 1000명, 기병은 3288명, 보병은 936명으로 보인까지 아울러 계산하면 원액이 1만 6736명인데, 현재 있는 것은 1만 2394명이고 감손된 것이 4342명 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295) 유성룡의 차자와 마찬가지로 16세기 초의 함경도에도 보병보다 기병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갑사도 기본적으로 기병이 주류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함경도 북도 아홉 고을의 기병과 294) 서애집, 권5 시무차자. 295) 중종실록, 중종4년 8월3일자.
8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79 보병의 비율은 5.6대1에 가까우며, 함경도 남도 열 세 고을의 기병과 보병 비율은 4대1에 가깝 다. 한편, 임진왜란 직전의 경상도 육군과 수군 편제를 보여주는 고문서 296) 를 보면 경상도 기병 이 1만744명, 보병이 1만1760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기병과 보병의 숫자가 거의 대등하게 나온 다. 하지만 육군으로 전환된 경상좌수영 및 그 예하 영진의 병력 수를 기록한 문서를 보면 기 병이 압도적으로 많다. 즉 동래가 기병 800명, 보병 200명이며 기장도 기병 800명에 보병은 200명이다. 부산포도 기병 485명에 보병은 372명으로 기병이 더 많다. 함경도와 경상좌수영 지역의 병력 현황을 보면 국경지역이나 해안지역 등 적의 침입 가능성이 노아 전략적 중요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기병 위주로 부대를 편성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거론한 유성룡의 시무차자 중 정병( 正 兵 ) 상번( 上 番 ) 병력은 전체 조선군의 일부이므 로 이 기록이 당시 국가단위 전체 기병의 규모를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상번군만으로 기병 정원이 2만 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 조정이 상당한 규모의 기병을 보유하고자하는 강 력한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병을 중시했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 정병 보병(정보병)들이 일정한 경제적 대가를 치르고 병역의무를 면제 받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정병 기병(정기병)은 방군수포대신 실제 근 무를 서도록 했다. 또한 보병은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대리근무, 즉 대립( 代 立 )을 허용하면서도 기병의 대립은 금지되었다. 또한 서울에 근무하는 상번 정병 보병이 사실상 노동부대로 변질되 는 와중에도 정번 상번 기병은 궁궐에서 실제 숙위 근무를 하도록 하는 등 군사력으로서의 존 재 가치를 유지했다. 297) 조선 전기 군대의 핵심 정예 병력이었던 갑사( 甲 士 )도 일부 보갑사( 步 甲 士 )를 제외하면 병력 의 대다수가 기본적으로 기병이었다. 또한 모든 무관들도 기본적으로 무과시험을 통과하는 과 정에서 승마 능력을 습득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조선 전기 기병의 기반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다. 이처럼 기병을 중시했던 만큼 기병의 사회적 지위도 일정 부분 보장됐다. 비록 산계에 불과 했지만 복무의 대가로 정3품까지 가계될 수 있었고, 입역기간 중 도시에 응해 직업군인에 가까 운 갑사나 무반으로 진출할 기회도 주어졌다. 같은 이유로 기병은 보병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 296) 김병륜, 한국의 병서-경상좌도병영수첩, 국방일보 2010년 7월28일자. 297) 김종수, 조선 후기 훈련도감의 설립과 운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p.42.
82 80 학예지 제17집 유하고 신체가 강건한 자들 위주로 선발되었다. 설사 보병으로 편성된 이라도 장실한 자들은 기병으로 병종을 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298) 이 같은 기병에 대한 높은 관심을 고려하면 기병에 대한 국가의 무관심이나 홀대가 기병 전력 강화에 장애 요소가 될 가능성은 낮았다. 오히려 기병들이 얼마나 말을 안정적으로 확보 할 수 있는지 여부가 기병 전력 강화의 관건이었다. 조선시대 기병들은 원칙적으로 자기 부담 으로 말을 확보해야했기 때문에 말 공급기반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조선 전기 상번 정 병 기병들은 말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기보다는 서울에서 말을 빌리는 것을 선호했다. 말을 가지고 이동하는데 따른 불편함이 컸기 때문이다. 성종대인 1473년 대사간 정괄이 이른바 기 병( 騎 兵 )이라는 자들은 말이 없다 며 시위할 때에 남에게 빌어서 창졸간에 준비하는데, 구하지 못하면 걸어서 따른다 고 말한 것은 그 같은 사정을 보여준다. 299) 중종 대에도 지방 군사들이 번을 서러 올 때 서울에서 말 기르는 것이 어렵다며 기마와 복마를 돌려보내고 말을 탈 일이 있으면 말 주인에게 빌려서 탔다 는 기록이 보여 상번 기병들의 말 임대가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300) 한편, 중종 대에는 예전에는 말을 탄 군사가 1000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경우 40~50명에 불 과하다 거나 말을 가지고 있는 군사가 백에 하나 둘이 안된다 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301) 이 같은 현상은 기본적으로 말 임대 문제 그 자체를 거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특히 중종 대의 대대적인 인플레이션에 따른 말 가격 폭등으로 말을 빌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 던 현상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의 말 가격은 태조에서 성종 대에 걸쳐 대략 면포 6~35필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 만 연산군 재위 이래 말 가격이 계속 올라 중종 대에 가서는 면포 100~2500필에 달할 정도로 기록적인 폭등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1593년에는 말을 빌리는데도 면포 35~40필이 들어 그 이전 시기의 말 매매 가격에 해당하는 면포를 임대료로 지급해야 했다. 302) 이 같은 인플레이션 현상은 말 가격에만 한정되지 않고 물가 전반에 걸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303) 하지만 말 값의 폭등은 전반적인 인플레이션 현상과 별개로 말 공급 부족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었다. 298) 김종수, 조선 후기 훈련도감의 설립과 운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pp.39~ ) 성종실록, 성종4년 10월2일자. 300) 중종실록, 중종14년 6월22일자. 301) 김종수, 조선 후기 훈련도감의 설립과 운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p ) 이정수, 조선 전기의 물가변동, 국사관논총 68, 1996, pp.64~ ) 이정수, 조선 전기의 물가변동, 국사관논총 68, 1996, pp.70~74.
8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년 고형산은 성종 대에 4만 필이 말이 있었지만 지금(중종 대)은 2만 필의 말 밖에 없다 고 주장했다. 1600년 좌의정 이항복 역시 조선 초기에는 7만 필, 중종 대는 3만 필, 명종 대에 는 1만 필로 줄어들었다고 회고한다. 304) 이 같은 말의 보유량은 민간 소유를 제외하고 국가 차원에서 사육 관리하는 말 위주로 계산한 것으로 보이지만 부분적일망정 이 시기에 말 공급 기반이 다소 약해진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시기 기병의 전투력 약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조선의 기병은 전투용 말인 기마( 騎 馬 )와 짐말인 복마( 卜 馬 ) 등 2필의 말을 동시에 보 유해야 했다. 하지만 1583년 병조판서 이이(1536~1584)는 복마 휴대 규정을 철폐했다. 305) 이 는 말 부족 현상을 국가 차원에서 인정하고 그에 따른 기병 전투력 약화를 감수했음을 보여주 고 있다. 학계 일부에서는 이 같은 16세기 후반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조선 기병이 보병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306) 하지만 임진왜란 때 실제 기병의 출전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기병 전력이 그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기병의 존재 유무를 논할 정도로 기병의 기반 자체가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4. 조선 전기 기병의 전술적 운용과 진형 조선시대 기병의 전술적 운용과 관련해서는 무과시험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전기 기사의 무과시험이나 취재 과목인 기사는 기본적으로 근거리에서 여러 개의 표적을 대상으로 신속하게 표적을 전환하면서 연속사격을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1433년에 정해진 무과 기사 시험 방법을 보면 좌우 양쪽에 위치한 표적의 상호 거리는 5보, 앞뒤로 배치된 표적 5개의 상호 거리는 30보로 되어 있다. 1451년에 확정된 기사 시험 방법은 좌우 상호 거리 5보, 앞뒤 사이 35보로 떨어진 표적들을 사격하도록 하고 있다. 307) 이 같은 무과시험 과목이 조선시대 기병의 일반적인 전투양상을 대변하는 것인지는 단언하 기 힘들지만, 무과시험 과목에서 원거리 마상 사격이 아니라 근거리 마상 사격에 주안점을 두 304) 김종수, 조선 후기 훈련도감의 설립과 운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p ) 선조실록, 선조16년 2월16일자. 306) 김종수, 조선 후기 훈련도감의 설립과 운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p ) 최형국, 조선시대 기병의 전술적 운용과 마상무예의 변화, 역사실학 38, 2009, pp.39~41.
84 82 학예지 제17집 고 있었던 점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다. 이는 당시 궁기병이 승마 상태의 활 사격 정확도가 떨 어지는 한계 때문에 근거리 사격에 주안점을 둔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시대 기병이 원거리 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승마상태라 할지라도 말을 정시 시켜 놓고 사격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혹은 말에서 내려서 사격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지역인 함길도 지역의 진법에서 하마( 下 馬 ) 상태의 전투를 전제하고 있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함길도 진법에서 말을 지키는 병사를 별도 로 두도록 것은 기본적으로 하마 상태의 전투를 일상적인 상황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다. 한편, 조선 전기 창기병의 전투방법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경국대전 에서 찾아볼 수 있 다. 경국대전은 좌우 겨드랑이에 창을 끼운 후 추인(허수아비)을 찌르는 방식의 기창법을 제안 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창기병은 개인 무예를 기반으로 말위에서 복잡한 창술을 구사하는 방 식이라기보다는 기병의 충격력 자체를 극대화시키는 운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겨드랑 이에 창 자루를 끼운 후 표적에 돌격하는 방법은 유럽의 창기병 운용법에서도 보이는 전형적인 돌격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기병의 진형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근거 자료는 매우 부족하다. 다만 병조 진도 지법 이나 하경복 진서 를 보면 기병을 진형의 제일 안쪽 내지 제일 뒤쪽에 배치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같은 기병 중에서도 창기병이 앞에 서고, 궁기병은 그 뒤가 된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병법서인 신진법 내지 오위진법 의 경우 기병의 포진 순서에 대해서는 따로 명기하고 있지 않으나 보병이 담당하는 진형 외벽 안쪽에 기병부대인 기전통( 騎 戰 統 )과 기주통 ( 騎 駐 統 )이 주둔하게 되므로 기병은 진형 내부에 포진하는 것이 기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오위진법 을 대표로 하는 조선 전기 진법에 대해 전면에는 보전통( 步 戰 統 )을 배치하고 좌 우의 날개에는 기전통을 배치해 빠른 돌격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고 평가하는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가 있다. 308) 이 연구자는 보전통과 기전통 사이에 번갈아 가며 보주통( 步 駐 統 )과 기주통 을 배치하여 후방의 안위를 보호하게 했다 며 만약 전투가 발생하면 주통( 駐 統 )들은 진영을 지키고 전통( 戰 統 )들이 각 방면에 따라 돌격 하에 전투에 임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설명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오위진법 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의 일부라는 점에서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연구자가 근거로 제시한 오위진법 방진도 308) 최형국, 조선시대 기병의 전술적 운용과 마상무예의 변화, 역사실학 38, 2009, p.16.
8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83 의 진형 그림은 해당 연구자의 설명과는 다소 다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실제 진형도에서 윗부분을 앞이라고 간주할 경우 진형의 제일선에 배치되는 것은 보주통이며 그 뒤 진형 외벽 내부에 기전통 보전통 기주통 등 3개 통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보주통이 진형 외벽을 담당하고 그 뒤에 기전통, 보전통, 기주통 등 3개 통이 배치되 는 것은 진형의 전후좌우 4개 면에서 동일하다. 그 내부에는 다시 기전통, 기주통, 보전통, 보 주통 등 4개 통이 지휘부와 유군을 감싸며 원형으로 주둔한다. 이 같은 실제 그림의 형태는 보전통이 전면에 서고, 좌우에 날개에 기전통을 배치했다 는 연구 결과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 다. 다시 말해 오위진법은 전체 20개 통 중에서 전후좌우 진형의 각 외벽에 4개 통씩 총 16개 통을 배치하고 그 내부에 4개 통과 유군을 주둔시키는 것이 기본 포진 방법이다. 이밖에 원 진 예진 곡진 진직 등 오위진법 상의 오행진들은 진벽 형태만 다를 뿐 그 기본적인 배차 방법은 방진과 동일하다. 모두 기 보병 혼성부대를 기초로 전통과 주통으로 임무를 구분한 부대를 4주 방어 형태로 배치한다. 이처럼 복잡한 진형에서 기병 기동부대에 해당하는 기전통이 진형 외부로 출진할 경우 진형 외벽을 담당한 보주통 병력과 섞여서 혼란을 야기하지 않도록 진문을 통해 진형 외부로 진출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좁은 진형 내부에 많은 병력이 밀집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기병의 진출입 방법은 매우 불편한 것이다. 일단 진문 외부로 진출한 기전통은 진벽을 형성한 방진의 기본 대형과는 별개의 대형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데, 이 때 기전통이 취할 수 있는 구체 적인 진형 형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사료도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처음부터 기병 단독으로 전투를 수행할 때 적용할 수 있는 진형에 대해서도 명시적인 자료는 없다. 309) 오위진법 오행진에 따른 방진 등 각 진형의 배치 방법 자체도 너무 복잡하고, 좁은 면적의 진형 내부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밀집시키면서도 진형 전방 제일선에 배치되는 병력은 너무 적어 전력을 사실상 분산시키는 것도 문제다. 310) 또한 4면에 모두 병력을 배치할 정도로 지나 309) 이런 경우에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진형은 학익진과 장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신립이 탄금대전투에서 사용했다는 반월형 진형도 학익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310) 총 20개 통에서 외벽에 배치되는 것은 4개 통에 불과하다. 적이 4면 중 1개 면에 공격할 경우 아군은 전체 병력 중 1/20만이 일선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하게 된다. 측방과 후방에 대해서도 동일한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장점이 지만 기본적으로는 전력 분산의 소지가 많다. 더구나 1개 여로 1개 통을 구성할 경우 약 125명의 보주통 1개에서 25명만이 제1선에 배치된다. 이때 각 병사의 좌우거리가 2m라고해도 1개 변이 약 48m인 좁은 정사각형 안에 20개 통, 2500명의 병력이 포진해야 한다. 더구나 이 같은 진형에 투입된 병력의 절반가량이 기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현실적으로 실전에서 거의 적용 불가능한 포진 형태다. 만약 좌우거리를 4m로 늘리면 1개 변이 약 96m로 늘지 만 이 때는 제1선의 병사 사이 폭이 너무 넓어 사실상 진형으로서는 의미가 없는 산개대형이 된다.
86 84 학예지 제17집 치게 방어지향적인 진형이라는 점에서 숙영대형으로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야전에서 적 주력과 격돌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야전전투대형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처럼 오위진법 중 오행진 계열의 진형은 지나치게 복잡한 형태 때문에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진형이다. 이 점은 조선 전기 군대의 전투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는 기병의 운용에도 제약사항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Ⅶ. 조선 후기형 기병 갑사와 정병 기병을 중심으로 수만 단위의 기병을 보유했던 조선 전기와 비교해 후기에는 기병의 양적인 규모 축소 추세가 뚜렷해졌다. 조선 전기 상번이 점진적으로 형식화되던 시기부 터 이미 기병 수준의 질적 저하와 실질 병력 규모 축소가 부분적이나마 시작되었다. 그 후 임 진왜란을 계기로 지상에서의 조선군 관군 운용 기반이 사실상 파괴된 이후 전력 복원 재건 과정에서 기병보다는 보병의 강화에 노력이 집중되면서 실질적으로 기병 운용 기반은 급격하 게 악화됐다. 전력 복원 노력이 보병에 집중된 이유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군의 전술이 기 병 중심에서 보병 중심 전술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311) 1592년 4월25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도순변사 신립이 지휘하는 기병부대 위주의 조선군 은 보병이 주력인 일본군과 충주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참패했다. 1593년 1월27일 벽제관 전투에서 역시 기병을 주축으로 한 명군은 주로 보병으로 구성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조 명군 기병이 일본군을 상대로 뚜렷한 활약을 거두지 못하자, 유성룡은 일본군을 상대하는 데는 기병보다는 차라리 보병이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312) 이 같은 인식은 조선 전기 에 비해 후기에 들어와 기병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출발점이 됐으며, 나아가 결과 적으로 조선 전기에 비해 후기 기병이 규모면에서 줄어드는 계기가 됐다. 조선 후기 기병도 기본적으로 활을 주무기로 하는 궁기병이 주류였다는 점에서는 16세기 이후 조선 전기 기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다만 조선 후기 기병은 활과 칼이라는 조선 전기 궁기 병의 무장에 더해 편곤을 추가로 보유한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기병과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 311) 노영구, 군사혁명론과 17-18세기 조선의 군사적 변화, 서양사연구 36, 2007, p ) 선조실록, 선조28년 7월8일자.
8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근접전 능력 강화 노력과 조선 후기형 기병 조선 기병이 편곤으로 무장한 사례가 기록상 처음으로 확인되는 시점은 인조 대이다. 313) 1624년 국왕 인조는 이서와의 대화에서 단병으로 접전할 때는 궁시를 쓸 수 없으니 편곤을 가르쳐야 할 것 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314) 이에 대해 이서는 포위를 뚫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데에는 편곤만한 것이 없다 고 답하는 등 국왕의 평가에 동조하고 있다. 특히 이서는 이번에 역적 이괄의 마군( 馬 軍 ) 7백 인이 모두 편곤을 썼는데, 이 때문에 당할 수 없었다 는 말도 한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기병들이 편곤을 추가로 무장한 이유는 궁기병의 단병접전 능력을 보강 하기 위해서이고,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의 기병도 이미 편곤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조 재위 시점이 되면 금군과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기사들이 모두 편곤으로 무장한 다. 315) 정조대인 1790년에 완성된 무예도보통지 는 무예의 하나로 마상편곤을 명시하고 있 다. 316) 나아가 순조 대에 완성된 만기요람 에는 훈련도감 기병 기본 무장 중에 하나로 편곤을 제 시하고 있다. 만기요람 에 따르면 (훈련도감) 마군은 갑주ㆍ환도ㆍ통아ㆍ편곤을 각 1개씩, 화살은 장전 20발과 편전 15발을, 활은 교자궁과 후궁( 帷 弓 ) 각 1개씩을 보유한다 고 되어 있 다. 317) 조선 전기 이래 국왕 경호부대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 후기 용호영의 기병들도 갑주, 환도, 편곤, 교자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어 훈련도감 기병과 유사한 무장 양상을 보여준다. 용호 영의 기병들 중 내금위 소속 기병은 통개와 통아, 장전 20본, 편전 15본, 교자궁 등 활과 관련 된 장비와 함께 환도, 편곤을 지급 받았다. 318) 이처럼 활을 주무장으로 하는 궁기병이 편곤을 추가로 보유해 근접전 능력을 보강한 것이 조선 후기형 기병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편곤을 보조무장으로 채택한 조선 후기형 기병의 전투방법은 적군이 100보 이내로 들어오면 정지한 상태에서 활을 쏘고, 적군은 50보 이내로 접근하면 달려 나가 편곤을 가지고 근접 육박전을 행하는 것이었다. 319) 313) 앞으로 사료 검토 과정에서 인조 대 이전 편곤의 사용 사례가 확인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조선 기병들이 편곤을 처음으로 널리 사용하게 된 시기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조선군 기병의 무장 방식 변화를 촉발시킨 것은 임진왜란이므로, 조선 기병들이 편곤을 처음으로 대량 운용한 시기도 임진왜란 개전 이후라는 큰 틀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14) 인조실록, 인조 2년 3월9일자. 315) 영조실록, 영조 43년 5월16일자. 316) 무예도보통지, 마상편곤조 317) 만기요람, 군정 훈련도감조. 318) 만기요람, 군정 용호영조.
88 86 학예지 제17집 이처럼 병학통 에서 제시한 기병 전투방법은 100보 거리에서만 활을 쏘고 그 이후에는 편 곤으로 교전하는 것이므로 학계 일부에서는 조선 후기 기병은 활보다는 편곤을 주무기로 운용 했다고 본다. 조선 후기 기병은 적군과의 근거리 육박전을 주요 전투형태로 상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병학통 에서도 기병이 비록 활을 쏘기는 하지만 돌 격하기 전에 활을 쏘고 나서는 더 이상 쏘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마상무예를 다룬 무예도보 통지 에 조선 전기 기병이라면 반드시 요구되던 기사 가 누락되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320) 조선 후기 기병에게 편곤은 단순한 보조무기 수준을 넘어서는 기본 무장이었다는 점에서 편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지적은 일견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용호영 기병으로 근무 하는 금군을 선발할 때 시험과목이 활쏘기였다는 점 321) 등을 고려할 때 후기 기병도 그 기본 성격은 궁기병 내지 근접전 능력을 강화한 특수한 성격의 궁기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22) 조선 후기 정조 대에 와서 군대용 무예를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 를 1790년에 편찬했다. 이 책에 실린 기병용 무예는 기창, 마상쌍검, 마상월도,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 등 6종이다. 이중에서 전투 시에 사용 가능한 기병용 무예는 기창, 마상쌍검, 마상월도, 마상편곤 등 4종이 다. 323) 하지만 이 같은 기병용 무예 중에서도 실제 널리 사용한 것은 마상편곤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병부대인 용호영의 보유 무기 중 교자궁과 착극편곤, 환도 각각 642자루를 난후군과 금군에게 각 1개씩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월도는 8자루, 쌍검은 10쌍, 장창은 4자루에 지나지 않는다. 324) 이 같은 무기 보유량을 보면 용호영의 기본 무장은 활과 편곤, 환도임을 알 수 있으 며 마상월도나 마상쌍검, 기창 등 다른 마상 무예를 위한 장비 들은 단순히 상징적인 수준으로 만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84년에 창설된 함경도의 친기위나 1710년에 창설된 평안도의 별무사도 기본적으로 활을 주무장으로, 편곤을 보조무장으로 하는 기병이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이들이 1년에 4차례 있는 시취에서 시험했던 5개의 과목 중에서 철전 유엽전 편전 등 3개 과목이 궁술과 관련되 319) 노영구, 병학통에 나타난 기병전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 해석, 2000, pp.183~ ) 노영구, 무예도보통지의 마상무예,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 해석, 2000, p ) 만기요람, 군정 용호영조. 322) 그 점에서 무예도보통지 에 기사 가 누락된 이유는 기사 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굳이 따로 그 방법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할 것이다. 무예보도통지 에는 보병 의 활 사격인 보사 는 물론이고 조선후기에 가장 중요한 기본 전투기술인 조총 사격법 도 누락되어 있다. 323) 무예도보통지. 324) 만기요람, 군정 용호영조.
8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87 어 있다는 점은 이들이 기본적으로 활을 주력무기로 하는 궁기병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는 편추도 시험과목에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편곤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별무사 의 경우 1719년부터 편추대신 조총을 시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325) 이 같은 변화는 별무사는 기병이지만 상황에 따라 성을 지키는 수성군의 역할을 할 때도 있으므로 그에 대비해 사전에 조총 사격술을 익혀두어야한다 는 전 평안병사 조이중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326) 결국 평안도 의 별무사는 승마 상태에서는 활을 주력무기로 유사시 하마 전투 때는 조총을 주력무기로 하는 특수한 기병 병종으로 발전해 나간 셈이다. 327) 2. 조선 후기형 기병의 전술과 진형 조선 후기형 기병도 근접전 능력을 보강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궁기병인 속성을 가진 병 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활 쏘는 거리 측면에서 다소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전기 기병은 기본적으로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활을 쏘았다. 무과시험 방식을 살펴보면 조선 전기 궁기병은 대체로 표적에서 22~45m 떨어진 거리에서 활을 쏘았을 가능성이 있다. 328) 무 과시험에서 이렇게 근거리 사격을 강조한 것은 실전에서 그 같은 사격이 가장 보편적인 사격방 식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든 1651년 국왕 효종은 병조판서 구인후에게 기사 방법은 가까운 곳에서 쏘지 말고 기추를 멀리 세워 놓고 강한 활로 쏘게 해야 한다 고 지시하고 있어 근거리 사격이 아닌 원거리 사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효종이 이 같은 지시를 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1777년 편찬된 병학통 은 궁기병이 적과의 거리가 100보일 때 활을 쏘도록 하 고 있다. 329) 이 같은 사거리는 조선 전기 무과시험의 기사 혹은 기추 때 적용하는 상대적으로 짧은 사거리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새선은도 등 조선 후기 활쏘기 모습을 기록한 그림이나 기타 문헌기록을 보면 325) 비변사등록, 권72 숙종45년 1월2일조. 326) 강석화, 조선 후기 평안도의 별무사, 한국사론 41 42, p ) 궁기병과 용기병이 결합된 기병 병종은 세계사적으로도 흔하지 않다. 이밖에 조선 후기의 실물 유물 중에 마상총으로 추정할 수 있는 길이가 짧은 형태의 총도 발견된다. 이 같은 총을 기병들이 어떻게 운용했는지에 대해서도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로 마상재의 그림 중에도 삼혈총으로 보이는 소형화기를 손에 든 모습을 묘사한 사례가 있다. 328) 최형국, 조선시대 기병의 전술적 운용과 마상무예의 변화, 역사실학 38, 2009, p ) 병학통, 권1 간하첩퇴 용호영조.
90 88 학예지 제17집 조선 후기의 기사 혹은 기추 때의 사격 거리는 조선 전기 무과시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에도 무과시험 측면에서는 여전히 근거리 사격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1799년에 평안감영에서도 인쇄하는 등 조선 후기에 국내에서 널리 보급되었던 사 법비전공하 330) 를 보면 대개 말 타고 쏠 때에는 10보나 20보 안에 들지 않으면 화살을 쏘지 않는다 고 규정하고 있어 근거리 사격법이 기병의 전형적인 활쏘기 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시험 평가 훈련 체계에서 여전히 근거리 사격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점을 고려 한다면 조선 후기 기병이 전적으로 원거리 사격 위주의 활쏘기 방법만 사용했다고 보기엔 어려 움이 있다. 이처럼 활의 시험 평가 훈련방법에서 근거리 사격이 강조되는데 비해 병학통 으로 대표되 는 전술적인 운용방법에서는 편곤 보유에 따른 근접전 능력 강화와 함께 활의 원거리 사격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평가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 기병 전술 중에 기병 진형 분야는 보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이 느렸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층진( 層 陣 ) 331) 은 기본적으로 보병 위주의 진형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 전기의 진법이 실전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영의정 유성룡과 국 왕 선조의 주도 아래 명나라의 진법을 수용했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층진이다. 조선 의 층진은 중국 명나라의 척계광(1528~1588)이 지은 기효신서 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보다 구 체화시키고 조직화시킨 진형이다.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 에는 층진과 유사한 개념이 일 부 언급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진형도가 없을 정도로 체계화되지 않는 개념인데 비해 기효신 서 를 기초로 조선에서 제작한 병서인 병학지남 에는 이미 매우 구체화된 진형도가 첨부된 진형 개념이 설명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병학지남 은 기효신서 를 단순히 요약한 것으로 알 려져 있지만 실상은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332) 층진은 조총을 주력무기로 한 포수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살수 등 두 종류의 병사들을 전후 4개의 층으로 차례로 배치하는 방식의 진형이다. 병학통 에서 사용한 층진의 기본 개념은 제 일 앞 전층에 조총병을 5열로 가로로 길게 배치해서 연속사격(5차 윤방)이 가능하도록 하는데 330) 사법비전공하, 마사법조. 331) 조선 수군의 진형에 대한 선행 연구(김병륜, 조선 수군의 진형과 함재 무기 운용, 군사 74호, 2010)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층진이란 용어 자체는 기효신서는 물론이고 이를 조선화시킨 병학지남이나 병학통 등 조선의 병서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공식적인 진법 명칭은 아니라는 점은 유의해야한다. 층진이란 용어 자체는 조선 후기 진법 그림 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층( 層 )이란 개념을 기초로 필자가 임의로 부여한 진형 명칭이다. 332) 김병륜, 조선군사전략, 진법의 계보를 밝히다, 고대신문 2008년 9월28일자.
9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89 이들이 바로 전층총수다. 그 다음은 칼과 창으로 무장한 전층살수, 다음으로 후층포수와 후층 살수를 차례대로 가로로 배치하는 것이다. 333) 구체적인 층의 수는 조선 후기의 병법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가로로 열을 지어 배치된 사수와 살수를 여러 층으로 배치한다는 점에선 공통적이다. 조선 전기의 진형과 비교해 정면에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 특징이어서 병학통 훈련도감 기준으로 각 층에 총 보병 26개 초, 26개 중대를 배치한다. 334) 병학통 의 훈국총도에 실린 진형 그림을 보면 마병을 지휘하는 좌별장 과 우별장은 진형의 좌우 측면에 배치하므로 6개 초에 달하는 훈련도감의 기병 병력은 진형의 측방을 방호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35) 다시 말해 조선 후기의 기본 진형에서 기병의 역할은 주로 보병으로 구성된 진형의 측방을 방호하는 제한적이고 보조적인 것이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마병 학익진, 마병 봉둔진 등의 기병 전용 진형도 있었다. 336) 마병 학익 진의 경우 유목민족 출신 궁기병들이 흔히 사용하는 진형인 초승달형 진형과 유사한 형태라는 점에서 활을 주무기로 하는 조선시대 기병 진형으로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중앙군이 운용하는 기병의 절대 규모가 작았다는 점에서 기병 단독 진형이 전시에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공식 진형인 층진은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에 걸맞은 새로운 진형이었지만 활 을 쏘는 사수( 射 手 )나 말을 타는 기병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방안이 빠진 것이 약점이었다. 337) 다만 국가에서 공식적인 진형으로 채택된 진형은 아니지만 개인한 제안한 진형 중에는 궁기병을 좀 더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있다. 정온(1569~1641)이 제시한 삼첩진( 三 疊 陣 )은 개인의 아이디어라는 점에서 층진보다는 그 역 사적 중요성이 덜하지만 사수와 기병까지 아우르는 전투 개념을 제시한 점이 주목된다. 병력 배치 형태 그 자체에 중점을 둔 조선 전기 진형과 달리 삼첩진은 병사들이 보유한 무기에 따른 배치 위치를 정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점이 특징이다. 338) 333) 병학통, 권2 진도. 334) 병학통, 권2 진도. 335) 김병륜, 조선군사전략, 진법의 계보를 밝히다, 고대신문 2008년 9월28일자. 336) 병학통, 권2 진도. 마병학익진에 대해서는 필자의 선행연구(김병륜,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과정과 그 운용, 학 예지 15집,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p21)에서도 그 존재를 언급한 적이 있다. 337) 병학지남 에 묘사된 층진에는 기병이 아예 누락된 경우도 많아 층진 자체는 기본적으로 보병 위주의 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병학통 단계의 층진에서는 기병을 후방 좌우 측방에 배치하지만, 전체 전투 수행 과정에서 기병의 역할은 수동적이고 제한적이다. 338) 정온도 문관 출신이기 때문에 그가 창안했다는 삼첩진의 기원은 다소 애매한 점이 있다. 삼첩진의 정확한 창안 과정 은 알 수 없으나 그의 지방관 복무 경험 과정에서 삼첩진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92 90 학예지 제17집 정온의 삼첩진은 제일 앞에 조총을 든 병사인 방포대 3000명을 가로로 벌려 세우는 것이 기본이다. 그 바로 뒤에 방포대 1000명을 추가로 배치해 중앙을 보강한다. 그 뒤에는 다시 활 을 쏘는 사대 3000명, 칼과 창으로 무장한 살수 1000명, 편곤을 든 기병인 편군 1000명, 활을 쏘는 기병인 기사 3000명을 차례로 세운다. 339) 전투를 시작하면 제일 먼저 사격하는 것은 방포 대이고, 적이 45보까지 접근하면 사대가 활을 쏜다. 조총과 활의 연속사격으로 적 공격이 저지 되면 편군이나 기사 같은 기병을 출동시켜 후퇴하는 적을 추적하도록 되어 있다. 근접전투에 대한 방어력 측면에서는 층진보다 열세라고 할 수 있만 활을 쏘는 보병 사수와 궁기병을 진법 의 테두리 안에 소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진형이다. 340) 3. 조선 후기 기병의 규모 축소와 그 편제 조선의 정병 기병은 원래 전투용 말인 기마( 騎 馬 )와 짐말인 복마( 卜 馬 )를 개인 비용으로 동 시에 갖추는 것이 원칙이었다. 1583년 병조판서가 이이가 기병의 복마를 폐지한데 이어, 임진 왜란 발발 이후에는 기병의 기마마저 혁파했다. 341) 기병이 말이 없다면 이미 그것은 기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치로 사실상 조선 전기 기병 중 양적으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던 정병 기병은 사실상 역사의 무대로 사라지게 됐다. 조선 전기 기병 중 정병 기병 다음으로 숫 자가 많았으며 질적 전력 측면에서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갑사( 甲 士 )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 위주로 중앙군의 전력을 재건하면서 갑사도 사실상 폐지되었다. 342) 이로써 조선 전기 기병의 전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조선 후기의 중앙군, 특히 직업군인으로 구성되는 핵심부대인 훈련도감의 경우 기본적으로 보병 위주의 군대였기 때문에 최초 창설 당시 아예 기병이 없었다. 하지만 1604년 선조의 지시로 원칙적으로 기병 설치가 결정되었다. 343) 선조는 옛날에 용병( 用 兵 )하던 자들은 기병과 보병을 함께 썼으므로, 상황에 따라 적절히 운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며 왜적들도 기마가 없지 않은 데 도감에서 보졸만 훈련시키는 것은 너무도 미흡하다 는 논리로 기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339) 증보문헌비고 병고. 같은 내용이 정온의 문집인 동계집 이나 경남 유형문화재 제320호 거창초계정씨종가소장고 문서( 居 昌 草 溪 鄭 氏 宗 家 所 藏 古 文 書 ) 에도 보인다. 340) 김병륜, 조선군사전략, 진법의 계보를 밝히다, 고대신문 2008년 9월28일자. 341) 광해군일기, 광해군8년 8월1일자. 342) 조선 후기 지방군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평안도 지역 지방군 중에 여전히 갑사가 보인다. 이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지만 정예 핵심 병종으로서의 조선 전기 갑사와는 위상에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343) 선조실록, 선조37년 12월17일자.
9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91 하지만 실제로 이때 훈련도감에 기병이 설치되지는 못했고, 광해군도 50명 규모의 기병을 훈련도감에 편성하려 했지만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훈련도감에 실제로 기병이 편성된 것은 인조 때였는데 최초 병력은 2개 령( 領 ), 약 200명 규모였다. 1634년에는 5개 초, 500명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효종 대에 1개 초가 추가 편성되어 6초가 되었다. 344) 조선 후기 군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는 순조 대의 만기요람 을 보면 당시 훈련도감의 마병은 7초 833명에 불과했으며 이중에서도 실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전형적 의미의 기병에 해당하는 마군은 784명이었다. 345) 이후 금위영, 어영청 등 다른 중앙 군영들도 훈련도감처럼 기병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그 규모면에서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머물렀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만기요람 에 수록된 편 제를 기준으로 보면 금위영의 별무사 30명, 별기위 32명, 기사( 騎 士 ) 150명과 해서 향기사 700 명 등이 바로 기병이었다. 어영청도 별무사 30명, 기사 150명, 향기사 700명 등의 기병 병력이 정원으로 잡혀 있었다. 이밖에도 국왕경호를 맡은 용호영도 원칙적으로 기병으로만 구성된 부 대였다. 만기요람 을 기준으로 용호영 소속 병력 중 금군 700명이 바로 전력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겸직자가 많아 용호영은 기병부대로서 완전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대라기보다는 국왕 경호와 기타 특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병종들의 집단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방군에 기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은 문제였다. 이 같은 지방군 기병 기반 붕괴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되는 시점은 1684년이었다. 이 무렵 대만의 명나라 유민세력들이 조선을 공격할 우려가 있다는 소문이 조선에 전해지자 우의정 남구만은 함경도와 평안도에 기 병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46) 그의 건의에 따라 1684년 함경도에 기병부대인 친기위가 탄생했다. 347) 창설당시 친기위의 병력 규모는 600명 수준이었으나 1713년 1200명, 1725년 1800명, 1735년 2400명, 1750년에는 3000명 수준으로 증가했으며 1814년 7월에는 4100명으로 까지 증가했다. 친기위는 상비 병력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별도의 급료도 지원되지 않았으며 병역을 강제 적으로 이행해야하는 의무를 가진 병력도 아니었다. 무예에 능숙한 무사층이 자발적으로 참여 344) 김종수, 조선 후기 훈련도감의 설립과 운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pp.68~ ) 만기요람 훈련도감 군총조. 마병 외에도 훈련도감에는 신분상으로 조금 더 높은 정예기병에 해당하는 별무사가 있었지만 그 병력은 만기요람 을 기준으로 68명에 불과했다 346) 강석화, 조선 후기 평안도의 별무사, 한국사론 41 42, 1999, pp.605~ )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의 친기위, 한국학보 89, 1997, p.86.
94 92 학예지 제17집 해 1년에 4차례에 있는 평가 때 좋은 성적을 거둘 약간의 포상과 관직 진출의 특혜를 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348) 다시 말해 친기위는 국가가 최대한 경제적 부담을 적게 들이면서 군사 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변칙적인 부대였다. 이처럼 친기위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부담으로 유지되는 기병부대였지만 함경도가 전통적 으로 궁마지향( 弓 馬 之 鄕 )으로 불릴 정도로 기사( 騎 射 )를 중시하는 상무 문화가 있었다는 점, 이 지역이 북마( 北 馬 )라고 불리는 좋은 품질의 말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는 점 때문에 부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49) 이처럼 적은 비용으로도 기병 부대를 창설할 수 있음을 인지한 조정은 1710년 평안도에도 함경도의 친기위와 유사한 기병부대를 창설했다. 그것이 바로 별무사다. 별무사도 창설 초기에 는 600명 정도로 소수 정예를 지향했으나 비용대비 부대의 전투력이 우수하다는 평가가 나오 자 꾸준히 부대 규모를 증편, 1727년에는 2500명으로 늘어났다. 함경도 친기위와 평안도 별무사가 효과를 거두자 1718년에는 황해도별무사절목을 제정, 황 해도에도 평안도 별무사에 준한 기병부대가 만들어졌다. 350) 또 수원에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기병부대인 별기위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창설된 친기위와 별무사, 내지 그와 유사한 기병부대 들은 창설 초기 상당기간 지방에서 운용 가능한 유일한 실전적 전력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이들 도 점차 한계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원병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별도의 급료가 지급되지 않 는다는 한계가 있었다. 유일한 보상은 훈련 성적 우수자에게 포상으로 주어지는 관직 등용 뿐 이었다. 소수정예를 지향하던 초창기에는 이 같은 보상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친기위와 별무사를 합친 병력이 6000명을 초과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불과 10명 내외 의 인원에게만 혜택이 주어지는 관직 등용책의 의미가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351) 또한 평안도 와 함경도에도 점차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친기위와 별무사를 구성하 는 무사 층의 사회적 자부심도 점차 저하되었다. 결국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물들은 친기위와 별무사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친기위와 별무사의 위상 저하로 이어졌다. 특 히 1781년 일반 기병인 마병에게도 도시를 거쳐 관직 등용의 기회를 제공하기로 결정함에 따 348)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의 친기위, 한국학보 89, 1997, p ) 강석화, 조선 후기 함경도의 친기위, 한국학보 89, 1997, pp.44~ ) 강석화, 조선 후기 평안도의 별무사, 한국사론 41 42, 1999, p ) 친기위의 경우 4100명의 병력 중에 변장에 등용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은 연간 8명에 불과했다.
9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93 라 친기위와 별무사에게 주어지던 유일한 실질적인 보상책도 그 특별한 의미를 상실하게 됐 다. 352) 임진왜란 이후 기병의 기마가 폐지되면서, 정병 기병은 전투 병종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으나 그 제도적 흔적은 조선 후기에도 남아있었다. 그 흔적이 바로 이른바 병조 번상 기병이다. 조선 후기 순조대의 만기요람 에 따르면 기병 총수는 1만5993호로 기록되어 있다. 기병은 1호당 4명이므로 규정상의 기병 총병력을 의미하는 기병총수는 6만3972명이 되고, 그 중에서 실수는 5만7794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53) 여기서 실수 5만7794명을 실제 병력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이 병력에 대해 다른 대목에서 정번( 停 番 )이라고 표기 354) 하고 있으므로 이들 대부분도 실제로는 근무를 서지 않은 방군수포 대상 병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실제 근무를 서는 병력 중에서도 연락병 임무를 맡은 파 발꾼과 왕릉 경비 업무를 맡은 수총군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제외한 진짜 기병은 상번군 5472명(1368호)이 된다. 355) 이들을 총 6번으로 나눠 6교대로 근무를 하게 하면서도 상번자 1 호 4명 중 1명만 실제 복무를 하고 나머지 3명은 또다시 방군수포 대상이었다. 356) 최종적으로 1368명이 6교대 근무를 하므로 기병으로 실제 동시에 근무하는 병력은 단지 228명에 불과했 다. 이들 병조 상번 기병은 전기 정병 기병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전기 기병 병력의 주류였던 정병 기병이 후기에 들어와 사실상 공중분해되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조선 후기 기병의 규모를 연구할 때 앞으로 추가로 규명해야할 대상이 있다. 전국 각지 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 계통의 지휘를 받는 기병부대로 추정되는 마병( 馬 兵 )이 그들이다. 마 병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이 많지 않아 이들의 전체 실병력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부분적 으로 남아있는 지방군의 편제 자료를 보면 마병 내지 이와 유사한 형태의 지방군 기병의 전체 병력 규모는 서류상으로 수만 명에 육박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언제 처음으로 창설되고 어 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정조대에 이들을 위해 마병도시를 실시한 것을 보면 이미 그 이전에 하나의 부대 내지 병종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 352) 강석화, 조선 후기 평안도의 별무사, 한국사론 41 42, 1999, pp.629~ ) 만기요람, 군정 병조 이군색 기보병총수조. 354) 만기요람, 군정 병조 이군색 수포총수조. 355) 하지만 이들 병력도 실제 기병으로 복무했는지는 의문이다. 만기요람 축당고립조를 보면 예번에는 기병을 궁궐 내외의 각 개소에 당번을 배정해 청소, 급수, 수직 등의 사역을 맡겼다 고 설명하고 있어, 병조 상번 기병들이 실제로 는 전투 병력으로 기능하지 못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이 분번을 하면 실제 동시 근무 병력 규모는 번수로 나눈 숫자만큼 더욱 줄어든다. 356) 만기요람, 군정 병조 이군색. 징번조와 육번 기병총수조.
96 94 학예지 제17집 인다. 특히 1781년 마병절목 반포 때에 군제에 마병( 馬 兵 )과 보병( 步 兵 )이 있는 것은 수레에 바퀴가 양쪽에 달려 있고 새의 날개가 양쪽에 붙어 있는 것과 같아서 한쪽을 폐기할 수 없는 것 이라고 선언 357) 한 것은 마병의 필요성에 대해 조선 조정 차원에서 분명한 인식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같은 지방군 기병은 그 훈련 수준이 매우 낮고 전투력도 훈련도감 마군이나 친기위, 별무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1781년 마명절목 반포 때 근래 마병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 극심하다 고 표현한 것은 마병의 무장 수준이나 훈련 수준, 전투력에 대한 불신감을 표명한 것이다. 마병들에게 마병도시 3과목 중 2과목에 입격하 면 관직을 내려주는 조치를 시행했지만 2과목에 합격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기록은 실제 마 병의 훈련 수준이 매우 낮았음을 보여준다. 358) 같은 해 1781년에 평안도 지역의 마병의 5000 명을 넘지만 그 중 절반이 말이 없어 장비 점검 때면 말을 세내서 응하니 유사시 쓸모가 없다 며 좌우별무사와 갑사 등 실제 말을 보유한 3000여명이 있으니 마병은 폐지하자 는 주장이 나온 것을 볼 때 타 기병에 대비해 지방군 마병의 질적 열세를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다. 359) 같은 해에 마병 폐지 문제가 재론 360) 되는 것도 마병이 내재적 한계를 지닌 부대였음을 보여주 는 사례다. 심지어 백성들이 마병에 소속된 사람과는 결혼하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까지 있어 마병들의 열악한 실태를 보여준다. 1814년에 평안도관찰사 정만석은 마병 상황을 보고하면서 감영 소속 의 마병의 정원은 12초인데, 마병은 보군( 步 軍 )과 달라서 군장과 마필 등 비용이 적지 않으므 로 (중략) 마병의 집안과는 혼인하려 하지 않는다 고 한 것은 지방 마병의 실태를 잘 보여준다. 또한 평안도관찰서 정만석은 입방할 때에 보면 지극히 궁색하고 잔열하여 말을 세내지 않은 자가 없으며, 비록 수효는 채웠다고 하지만 위급할 때에 믿을 수가 없다 고 말해 마병들이 대부 분을 돈을 내고 말을 빌려서 근무하는 실정임을 말하고 있다. 361) 참고로 훈련도감 마군이나 용호영의 내금위, 우림위, 겸사복은 국가에서 말을 지급해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친기위는 말을 국가에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켜지지 않았 357) 정조실록, 정조 5년 12월6일자. 358) 비변사등록, 정조 6년 10월27일자. 359) 비변사등록, 정조 5년 3월7일자. 360) 정조실록, 정조 5년 윤5월23일자. 361) 순조실록, 순조 14년, 2월26일자.
97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95 고, 별무사와 마병초 소속 마병은 자신이 직접 말을 조달해야만 했다. 이 같은 조선 후기 기병들의 부대 편제 단위는 조금 독특했다. 조선 후기 군대의 기본 편제 는 부-사-초-기-대-오 체제였지만 일부 기병부대들은 이 같은 편제를 따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별무사는 지휘관인 장-정-령을 기초로 하는 편제를 가지고 있었다. 기병들은 150명을 한 단위 로 장( 將 )이 지휘를 했으며, 그 밑에 30명을 지휘하는 정( 正 ) 5명과 10명을 지휘하는 령( 領 ) 15명이 있었다. 이중 정 5명은 령을 겸했고, 장은 정과 령까지 겸했으므로 실제 지휘부는 15명 이고 나머지 135명이 일선 기병이었다. 362) 금위영의 기사나 용호영도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으나 기본적으로 별무사처럼 장-정-령급 지 휘관을 기초로 한 기병 부대 고유의 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후기 기병 중 최고 정예 라고 할 수 있는 훈련도감은 한때 좌 우 령( 領 )을 기초로 하는 편제를 사용한 적이 있으나 이후 별장-초관이 지휘하는 초 위주의 편제를 사용했다. 이처럼 기병이 보병처럼 정형화된 편제가 아니라 다소 특이한 편제를 사용하는 현상은 조선 후기 지방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영병제총록( 東 營 兵 制 摠 錄 ) 에 따르면 강원도 각 지역 의 기병부대에는 영장이 지휘하는 1개 열( 列 )에 119명의 원군과 복마군 9명이 편성되어 있다. 열이라는 편제 단위도 독특하지만 짐말을 담당하는 복마군이 열에 편성된 것이 특징이다. 363) 황해도의 경우에도 기병부대는 영장( 領 將 )이 지휘했는데 영장이 지휘하는 병력 규모는 110명 정도였다. 364) 충청도는 기병부대 소대급 지휘관을 기총 대신 정장, 분대장급 지휘관을 대장 대신 영장이라고 불렀다. 365) 함경도 국경지역 진 보의 경우 기병인 마군과 포수군이 혼성 편 성되어 있었다. 함경남병영총수성책( 咸 鏡 南 兵 營 摠 數 成 冊 ) 에 따르면 가을파진은 마군 16명과 포수군 48명으로 편성돼 있다. 366) 이처럼 지방군 소속 기병들의 편제가 지역마다 차이가 심한 것은 이 같은 지방군 기병들이 중앙 조정 차원의 어떤 일원적 절제에 의해 창설 관리되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362) 강석화, 조선 후기 평안도의 별무사, 한국사론 41 42, 1999, p ) 강원도군정도수성책. 364) 해서군병총록성책. 365) 청영병제총록. 366) 함경남병영총수성책.
98 96 학예지 제17집 Ⅷ. 맺음말 한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동의 청동기시대 정가와자 유적군에서는 수레용 거마구 내 지 초기형 마구가 출토되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말의 사회적 이용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대의 위만조선이 군사용 전차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미 시대에 5000필의 말을 타국에 제공할 만큼 체계적인 말 공급기반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목 된다. 고구려와 부여를 기준으로 볼 때 늦어도 기원 전후 시점에는 기승문화가 도입되고 그에 기반을 둔 기병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등자와 경식안장 같은 안정용 마구들이 출현한 것은 서기 4세기 이후 부터이나 그 이전에도 재갈, 재갈멈추개 같은 초기형 마구들이 발견되고 있다. 외국 사례와 비교해 볼 때 등자와 경식 안장이 출현하기 이전의 마구를 모조리 수레용 거마구로 보거나 비 실용품으로 보는 견해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기승문화가 점차적으로 확산되면서 4세기 삼국 정립기 이후에는 삼국 모두 수천 명의 기병 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기병 운용 기반이 강화되었다. 또한 궁기병이 사용하는데 적합한 단궁-만궁-합성궁 계열의 활이 보급되고, 창기병에 적합한 장창-마삭 계열의 창이 보급되면서 기병의 병종 분화도 뚜렷하게 진전되었다. 특히 등자와 고정 기능을 갖춘 경식 안장의 보급으 로 창기병의 운용 기반이 강화되면서 4세기 이후 창기병이 삼국시대 전장에서 기병의 주력으 로 활약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 말에도 갑옷을 입힌 중장기병도 뚜렷한 군사적 위상을 차지했 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 문화는 삼국시대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지만, 그에 기반을 둔 전문적인 병종인 궁기병은 상대적으로 전장에서의 역할과 비중이 작았다. 전쟁에서 만 명 단위 이상의 기병을 동원했을만큼 고려시대 군대에도 기병의 비중은 컸다. 고려시대 기병에는 창기병과 궁기병, 그리고 중장기병이라는 3대 병종이 모두 존재했을 가능성 이 높다. 하지만 중장기병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들이 격감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 대의 중장기병은 삼국시대의 중장기병만큼 비중 있는 존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 간섭기에 고려는 정치 문화적으로 원나라의 큰 영향을 받았다. 기병과 관련된 문화도 예외가 아니어서 몽골식 마구와 활이 고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몽골의 고려계 군벌 출신 가문에서 출자한 이성계의 전투 기록은 주로 활을 주력무기로 하는 궁기병적인 전투 양상 에 수렴되는 경향이 농후하다. 원 간섭기 이전에도 고려에 궁기병이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하지
99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97 만, 궁기병 위주의 전투 수행 방식을 매우 중시하는 경향은 고려 자체의 전통이라기보다는 원 간섭기 몽골식 군사문화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조선 전기 군사문헌에 따르면 조선 전기 기병은 그 출발점부터 궁기병과 창기병이라는 2원 적 병종 구성 원리에 충실했다. 하지만 조선 전기 무과의 선발시스템과 군인들의 훈련평가시스 템은 기본적으로 창보다는 활에 초점을 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활 지향적인 군인 선발 평 가 시스템 때문에 15세기 말 이후 점진적으로 창기병의 위상과 비중이 점차 낮아졌다. 그 결과 조선 기병은 사실상 점차 궁기병 위주로 단일화 되었다. 이처럼 기병이 궁기병 위주 로 단일화 되면서 다양한 전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은 저하되었다. 특히 조총 같은 소 구경 화약무기의 대량 보급은 전장에서 기병의 위치를 매우 약화시켰으며 이는 기병 병력 규모 의 축소를 불러왔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이후 조선은 전반적인 편제, 전술, 장비의 개편을 시도했으며 그에 따라 조선의 기병도 활이라는 주무장과 환도라는 기존의 보조무장 외에 편곤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개편된다. 이 같은 개편의 출발점이 언제인지는 불확실하나 편곤을 사용하는 궁기병은 이미 인조 대에 존재했다. 활을 주력무기로 하면서도 편곤을 추가로 무장해 근접전투능력을 보강한 것이 바로 조선 후기형 기병의 특징이다. 활과 편곤으로 무장한 조선 후기의 궁기병은 적과의 거리 100보에서는 활을 쏜 후, 적이 50보까지 접근하면 출격해 편곤으로 근접전투를 벌이는 것이 기본 전술이었다. 조선 후기의 기본 전투대형이었던 층진에서 기병은 양익에 포진해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 주 력부대의 양 측방을 엄호하는 제한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전투 수행과정에서 기병의 역할은 크 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도 기병이 단독작전을 할 때는 봉둔진이나 학익진 같은 대형을 이용했 지만 중앙군 차원의 기병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쟁에서의 실효성면에는 제한점이 많 았다. 조선 후기에도 삼첩진처럼 궁기병을 보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운용하자는 아이디어 가 존재했지만 국가 단위에서는 기병보다는 보병에 중점을 둔 군사체제가 정착되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중앙군의 핵심 부대였던 훈련도감을 비롯한 전체 전력에서 기병은 양적으로나 전술 적 비중으로나 그 위상이 높지 않았다.
100 98 학예지 제17집 부록 <그림 1> 한국 고대 재갈과 재갈멈추개의 구조 367) 367) 諫 早 直 人, 제작기술로 본 부여의 비와 한반도 남부의 초기 비, 영남고고학보 43, 2008, p.8.
101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99 <그림 2> 삼국시대의 마구 368) 368)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p.56.
102 100 학예지 제17집 <그림 3> 삼국시대 중장기병 복원도369) 369) 부산복천박물관 편, 고대전사와 무기, 부산복천박물관, 1999, p.67.
103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01 <그림 4> 조선 전기 창기병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무예도보통지의 기창 장면
104 102 학예지 제17집 <그림 5> 오위진법의 일위방진도
105 한국사에 있어서의 기병 병종 103 <그림 6> 조선 후기형 기병의 모습을 보여주는 무예도보통지의 마상편곤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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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05 新 羅 騎 兵 과 牧 場 徐 榮 敎 * 목 차 Ⅰ. 머리말 Ⅱ. 중고기의 騎 兵, 步 騎 幢 Ⅲ. 통일기 騎 兵 增 設 과 그 기반 Ⅳ. 하대 장보고의 騎 兵 과 島 嶼 목장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 신라 중고기에 기병은 빈약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시기의 六 停 의 군관조직을 보면(<표 1>) 신라의 왕경주둔 大 幢 에 6개의 步 騎 幢 이있고, 경북 상주주둔 貴 幢 ( 上 州 停 )에 4개, 서울주 둔 漢 山 州 停 에 6개, 전북 전주주둔(통일 후) 完 山 州 停 에 4개, 牛 首 停 에 4개가 있다. 강원도 강 릉주둔 河 西 停 에는 그것이 없다. 유일한 기병관계조직인 步 騎 幢 그 자체도 보병이 포함되어 있어 순수한 기병이라 할 수도 없을 지도 모른다. 산악이 많은 한반도 남부 그곳도 소백산맥 동쪽은 말을 생산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물 론 평지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병에 대한 수요도 그렇게 많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 라 중고기에 보기당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자연환경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통일기에 가서 신라의 기병조직은 급속히 증강된다. 기병을 통솔하는 군관 少 監 火 尺 과 著 衿 騎 幢 이 등장한다. 통일전쟁기 당제국과 신라의 연합은 신라의 군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군수운용체계는 물론이 작전에도 당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통일 전쟁기 나당연합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신라가 당을 상대로 전쟁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 *중원대학교 박물관장
108 106 학예지 제17집 되었다. 세계사 속에서 때로 어느 국가라는 것이 후세에 상상을 불허하는 기적 같은 일을 연출하는 수가 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전쟁에서부터 나당전쟁에 걸친 16년 동안의 신라만한 기적을 연출한 국가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당제국의 팽창은 그들의 본능이었다. 당나라만큼 음모와 전쟁으로 일관했던 나라는 없었다. 모략만이 타국에 대한 의지였으며, 침략만이 당제국의 욕망이었다. 중국은 이 시대만큼 화려했 던 적은 없었다. 당제국은 어금니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육식동물이었다. 주변의 나 라들에 대한 탐욕스러운 식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죽은 고기 덩어리이고 식용이 될 수밖 에 없으며 거기에는 앞뒤 따위는 없다. 칼을 들이 되면 되는 것이다. 돌궐, 토욕혼, 고창국과 실크로드의 오아시스국가들, 파미르고원 넘어 사산조 페르시아령 중앙아시아 제국가 등이 당 의 입속에 들어갔다. 당은 세계 최대의 부국이기도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품도 많았고, 밖으로 배출할 상품 도 많았다. 무력적인 팽창과 무력의 우위만이 상품의 흐름을 방해하는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전쟁은 어느정도 시장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쟁자체가 이익이 되는 일이 되면 전쟁은 끝이 나지 않는 법이다. 신라는 고도로 발달된 군사조직을 가진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양면 공격을 받고 고사직전에 이른 신라는 당제국과 손을 잡았다. 자진해서 당 제국을 불러들였던 신라가 당의 이러한 성격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동맹을 모색한 것은 당이 아니라 고구려와 왜국이었다. 신라의 근친왕족이었던 김춘추 (무열왕)가 고구려에 가서 수모를 당해가며 그 위정자 연개소문을 설득해보기도 했고, 왜국 여 왕에게도 손을 벌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다. 멀리 내다볼 여유도 없었다. 현재 당장 생존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었다. 백제를 점령한 당은 1만에 이르는 백제의 고위 엘리트집단을 모두 당으로 포획해 갔고, 신라 가 얻은 것은 백제주둔 당군을 먹이고 입히는 막대한 하중과 신라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백제 부흥군이었다. 663년 백제의 부흥군이 평정된 이후에 백제 땅은 당이 차지했고, 신라는 당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듯 했다. 신라는 도저히 당제국과 싸울 수 있는 나라가 되지 못했다.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막대 한 보급을 신라에게 요구했다. 겨울에 육상보급은 죽음의 행군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병력
109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07 도 지속적으로 강청했다. 실력이 없는 신라는 당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백제멸망전쟁 단계에서 신라에 기병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숫자가 소수였고, 몽골지방에서 잘 훈련된 말을 사용했던 당나라군들에게 신라의 말은 소와 같이 우둔한 것이었다. 신라인들은 농사 짖고 물건을 운반하는데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말의 어깨 근육은 발달했지만 속력을 도대 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통일전쟁이 시작된 10년 후 신라인들은 당군과 공동작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내용은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군의 조직형태와 운용능력은 당군과 비슷해졌고, 열세인 기병력 의 공백을 매울 수 있는 보병전술과 기병을 운용하는 능력도 배웠을 것이다. 양군은 손발이 맞아야 했었다. 신라군을 이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당은 효율적으로 신라 군을 부리기 위해서 전술상 새로운 군사기술을 이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고유의 군사기술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당의 군사기술이 신라의 그것과 융합되었다. 본문 Ⅱ장 신라중고기의 기병, 보기당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보기당의 성 격을 파악하기 위해 그것이 통일기의 신라기병조직과 어떠한 차이와 공통점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당전쟁( )은 이전까지 신라가 경험하지 못한 초유의 것이었다. 당에 이끌려온 말갈 기병 4만이 현재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지역을 휩쓸었다. 기병이 열세인 신라가 그것을 기병으 로 막아 낼 수 없었다. 신라는 對 기병 장창보병인 長 槍 幢 을 창설하여 여기에 맞섰다(672년). 하지만 장창보병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해 8월 황해도 석문에서 신라 장창당이 초반에 선 전하여 수천명의 포로를 잡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당기병의 공격을 받고 신라중앙군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기병의 절대열세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장창보병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1) 본문 Ⅲ장에서 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에서 여기에 대해서 다루었다. 나당전쟁 직전인 669년 문무왕은 말 목장을 174개를 官 과 所 內 그리고 진골귀족들에게 재분배했다. 2) 통일기 신라의 기병증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라하대에 가서 중대의 병제는 와해되었다. 3) 유지비용이 많이 드는 기병조직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신라에서 기병은 바다를 주름잡던 상업영주 장보고에 의해 부활된다. 1) 서영교, 新 羅 長 槍 幢 에 대한 新 考 察 慶 州 史 學 17, 1998; 羅 唐 戰 爭 史 硏 究 아세아문화사, ) 삼국사기 권6, 문무왕 9년 겨울조. 3) 李 基 白, 新 羅 私 兵 考 ) 新 羅 政 治 社 會 史 硏 究, 일조각, 1974.
110 108 학예지 제17집 진골왕족들의 왕위쟁탈전의 내전기에 장보고의 기병이 사료에 포착되는 것이다. 839년 달구벌 에서 장보고의 병력 5천(기병3천과 보병2천)이 민애왕의 정부군 10만을 격파한다. 1대 20의 병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장보고가 승리했다. 장보고는 어떻게 전마를 구입할 수 있었고, 기병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는지 본문 Ⅳ장 하대 장보고의 騎 兵 과 島 嶼 목장에서 다루었다. 이 글을 통해 신라기병이 어떠한 성격을 가졌고, 그것의 증설기반인 목장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밝히는 작업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먼저 신라 중고기의 기병 관계조직인 보기당은 보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러한 형태는 통일 기에 완성된 신라 五 州 誓 와 下 代 의 장보고의 기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신라중고기에서 하대 까지 이어진 맥을 가지고 있는 보기결합은 신라기병을 성격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 다. 다음으로 669년에 재분배된 목장은 대부분 진골귀족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신라통일기에 급격한 기병증강에 진골귀족들의 협조 없이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병제가 어떻게 신라진 골귀족사회와 결합되어 있는지 윤곽을 짐작하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4) Ⅱ.중고기의 騎 兵, 步 騎 幢 661년 12월 고구려는 혹한이었다. 그것은 평양성을 포위한 당군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 대동강은 평양성의 해자 垓 字 기능을 했다. 그것의 동결은 해자가 사라진 것을 의미하며, 성벽 에 운차와 공성기의 접근을 용이하게 했다. 5) 그렇지만 그것은 당군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앞서 8월에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이어 마읍산을 점령한 후 평양성을 포위하는 형세였다. 9월 계필하력의 수만의 유목민 돌궐기병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빠르 게 오고 있었다. 고구려의 멸망이 눈앞에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고구 려에 있는 계필하력의 유목 기병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몽골고원 서쪽에서 구성철 륵이 당에 대하여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러 가야 했다. 4) 이 글은 필자의 다음 논고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新 羅 步 騎 와 步 騎 幢 大 邱 史 學 101, 2010, 11월 발간예정 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 역사와 현실 45, 2002 ; 장보고의 기병과 서남해안 목장 震 檀 學 報 94, )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즉위 전(661) 12월 조 12월, 고구려는 혹한이었다. 대동강 貝 水 이 동결됐다. 이 때문에 당군 은 운차 雲 車 나 충차 衝 車 ( 輣 -원문)를 연 連 하고 북과 징을 울리며 진격해갔다.
111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09 평양 부근에는 당의 보병이 남았다. 유목민 기병이 없는 당군은 너무나 무력해졌다. 가령 당의 유목 기병이 돌격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당 보병과 고구려 보병이 싸운다고 가정해 보자. 고구려 보병은 당의 유목 기병이 언제 덮칠지 모르기 때문에 당 보병에 대해 공격을 함 부로 할 수 없다. 당의 유목 기병은 고구려군의 대열이 흩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목민 기병은 존재 그 자체로 고구려 보병에 공포를 주고 경직시킨다. 좌효위장군 방효태 龐 孝 泰 가 당군의 원활한 철수를 위한 총알받이 희생 군단으로 남았다. 평 양성 앞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고구려가 마음 놓고 기병이 부재한 방효태 의 군단을 공격했다. 방효태가 이끄는 당나라군이 전멸했다. 6) 측천무후가 신임했던 정계의 거 물 임아상도 전사했다. 그들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소정방의 군단은 안전하게 철 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정방과 그의 군단의 무사귀환에는 신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의 군량(쌀 4천 섬 租 2만 2천 2백 5십 섬)이 그들의 餓 死 를 막았다. 661년 12월 10일 신라는 평양성을 포위하 고 있는 당군에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해 고구려 경내로 들어갔다. 겨울에 행해진 이 보급작전 은 죽음의 행군이었다. 삼국사기 권47, 裂 起 전에서 仇 近 의 표현처럼 不 測 之 地 의 행군이었 다. 한파로 식량을 운반하던 수많은 병사들과 짐승들이 동사하고 지쳐서 쓰러졌고, 고구려군의 급습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신라군의 행군을 지체시켜 약속한 보급 기일을 넘겼을 공산이 크다. 평양부근에 있는 소정방의 군단과 3만여 步 떨어져 있는 현재 황해도 수안에서 보급의 대열이 멈추어 섰다. 고구려군은 신라 보급대를 철통 같이 막고 있었다. 김유신은 당군에게 신라보급대가 가까이 와 있음을 애써 전하려고 했다. 신라의 보급을 기다리다 지친 당군에게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철통같이 막고 있었다. 고구려군대의 진영 한 복판을 통과해야했다. 그들은 낼 수 있는 한 최대의 속력으로 질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步 騎 監 열기와 軍 師 구근 등 15인이 차출되었다. 신라의 15인의 특공대는 활을 쏘고 장검을 휘둘면서 고구려의 군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비장한 그들의 기세에 눌려 고구려군의 진영에 구멍이 났다. 그들은 멍하니 바라보며 특공대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7) 그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상상된다. 기마를 한 그들은 대열을 5명 5명 5명 3개의 삼각형으로 만들어 고구려 군대의 대열로 6) 삼국사기 권22, 보장왕 21년(662) 정월 조는 방효태의 군대의 처절한 종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월에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 蛇 水 에서 싸워 전군이 전사하고, 그 아들 13명도 모두 전사했다. 7) 삼국사기 권47, 열기전.
112 110 학예지 제17집 질주해 들어갔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말이다. 고구려군의 진영에 좀 더 가까워 졌을 때 15인은 고구려 진의 어느 지점에 일제히 화살을 연이어 발사했고, 고구려군의 진에 틈이 생기자 그곳을 뚫고 들어갔다. 너무나 예측할 수도 없었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고구 려 군들은 멍했고, 그 사이에 15인은 고구려진영을 돌파하였다. 소정방에게 서신을 전하고 답 장을 받아 돌아오던 때에도 똑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으리라. 이 기록이 신라 보기당의 전투 장면을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8) 655년 양산 조천성 전투 에서 전사한 보기당주 寶 用 那 와 685년 보덕성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전한 황금서당의 보 기감 김영윤의 기록이 전하지만 전투장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적진에 뛰어 들어 싸우다 전사 했다 라고 하는 정도이다. 9) 그들의 영웅담은 보급 작전에 참가한 신라군들을 통해 전 신라에 알려졌고, 너무나 깊은 인 상을 남겼다. 당시 절박했던 위기 상황에서 고구려 진영을 돌파한 열기의 영웅적 행동은 극적 인 것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 김유신전 열기전 구근전 등 4곳에 중복기 록이 남아 있다. 662년 2월 어느 날 당군에게 식량을 수송하고 돌아온 金 庾 信 은 문무왕을 알현하러 王 宮 으 로 향했다. 유신이 문무왕에게 고하기를 열기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편의에 따라 級 湌 직위를 내렸으나 功 勞 를 세운 것 보다 낮으니 沙 湌 을 더하기 청하나이다 하므로 왕이 사찬의 官 品 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하였다. 유신이 다시 再 拜 하고 아뢰기를 爵 과 祿 은 公 共 한 그릇으로서, 功 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오니 어찌 과하다 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허락하 였다. 10) 김유신은 그의 생질 문무왕에게 2번이나 절을 하면서 열기와 구근에게 沙 湌 의 지위를 줄 것을 강청했고 이를 관철 시켰다. 보기 부대라면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보병이 기병과 함께 작전을 구사한 것으로 여겨진 다. 열기전에는 보병의 역할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적진을 순식간에 돌파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하게 보기당 내부에서도 기병만 선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진정 보기당의 전투 모습을 제대 로 복원할 수 없다. 8) 신라 보기당은 총 63개가 있었다. 삼국사기 권40 職 官 下 武 官 步 騎 幢 主, 王 都 一 人, 無 衿. 大 幢 六 人,< 漢 山 > 六 人, 貴 幢 四 人,< 牛 首 州 > 四 人,< 完 山 州 > 四 人, 碧 衿 幢 四 人, 綠 衿 幢 四 人, 白 衿 幢 四 人, 黃 衿 幢 四 人, 黑 衿 幢 四 人, 紫 衿 幢 四 人, 赤 衿 幢 四 人, 靑 衿 幢 四 人, 白 衿 武 幢 二 人, 赤 衿 武 幢 二 人, 黃 衿 武 幢 一 人, 共 六 十 三 人, 位 自 奈 麻 至 沙 湌 爲 之. 9) 삼국사기 권47, 열기전 김영윤전. 10) 삼국사기 권47, 열기전.
113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11 신라사에서 열기와 구근 등 2명의 전쟁영웅과 김영윤과 보용나 등 2명의 장렬한 전사자를 낳은 步 騎 幢 은 도대체 어떠한 군사조직인가. 11) 步 騎 幢 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보병과 기병이 혼합된 부대였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기당의 군사 활동을 전하는 기록은 앞서 예시한 것 외에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중국이나 서양의 기록을 참고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병에 보병 이 혼합된 군 조직이 하나의 명령체계에서 행동함으로써 어떠한 전력의 상승을 가져오며, 기병 속에 보병을 포함하여 작전하는 步 騎 부대가 전세계에 걸쳐 보편적으로 존재해 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步 騎 幢 에서 보이는 步 騎 의 결합된 부분의 모습은 어쩌면 신라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보병과 기병을 결합함으로써 효율성을 발휘하는 그 자체가 말이다. 步 騎 幢 이라는 작은 구조가 신라군의 전체구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 을 프랙탈(Fractal) 구조라고 한다. 필자는 먼저 신라의 가장 유서 깊은 六 停 十 停 九 誓 幢 에 배속된 騎 兵 의 비율을 검토했다. 기병의 비율이 올라갈수록 작전의 수행형태가 프리즘처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기병 부대 五 州 誓 에 부속된 보병조직에 대하여 주목했다. 기병대장의 지휘를 받는 보병의 역할은 어떠한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으로 게르만 로마 몽골 등에 존재했던 步 騎 兵 의 사례에 알아보았다. 이러한 검토 과정에서 신라보기당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될 것 이다. 1. 十 停 과 九 誓 幢 의 步 騎 合 同 兵 種 戰 術 군대란 출동시 보병과 기병이 혼합된 형태로 출정하는 것이 일반적 형태이다. 광개토왕비 문 에 왜국에 침탈당하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고구려군대의 규모가 步 騎 5 萬 으로 나와 있다. 삼국사기 권41, 김유신전을 보면 王 遣 庾 信 步 騎 一 萬 挋 之 라 하여 왕이 유신에게 보병 기병 一 萬 을 주어 적을 막게 했다고 한다. 步 騎 某 名 에 관한 기록은 이외에도 삼국사기 11) 위의 세 가지 사례로는 보기당이 어떠한 기능을 가진 군부대였다는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인철은 열기가 唐 將 소정방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답장을 받아오는 임무를 수행한 것을 근거로 하여 부대사이의 연락을 맡은 부대였다고 보았다(이인철 著 신라 정치경제사 연구 2003, 일지사.). 지금까지 보기당에 대하여 이인철 외에 자신의 견해를 피 력한 연구자는 없었다.
114 112 학예지 제17집 에 적지 않게 보인다. 군대가 전장으로 가는데 있어 순수한 보병이나 삼으로 구성된 것은 거 의 없다. 대개 보병을 주력으로 하고 소수의 기병이 동행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六 停 의 軍 官 조직을 보자. 部 隊 名 軍 官 職 名 少 監 火 尺 大 幢 貴 幢 - 上 州 停 <표 1> 六 停 軍 官 組 織 表 漢 山 停 完 山 停 河 西 停 - 悉 直 停 牛 首 停 - 比 列 忽 停 設 置 年 代 官 等 規 定 將 軍 眞 骨 上 臣 - 上 堂 大 官 大 監 隊 大 監 ( 領 步 兵 ) 眞 骨 (6)-(13) 次 品 (6)-(11) (6)-(11) 弟 監 (10)-(13) 監 舍 知 (12)-(13) 屬 大 官 領 步 兵 屬 大 官 領 步 兵 (12)-(17) - (12)-(17) 軍 師 幢 主 (7)-(11) 大 丈 尺 幢 主 (7)-(11) 步 騎 幢 主 (8)-(13) 黑 衣 長 槍 末 步 幢 主 (9)-(13) 軍 師 監 (11)-(13) 大 丈 尺 監 (10)-(13) 步 騎 監 (11)-(13) 위의 조직을 보면 기병을 통솔하는 대대감과 그 휘하의 기병 소감 화척이 없고, 보병의 그것 만 존재하고 있다. 장창보병인 흑의장창말보당이 가장 많고, 기병에 해당하는 것은 보기당이 6개 에서 4개만 존재하고 있다.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보기당 내부에도 보병이 소속되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육정의 각 사단은 극소수의 기병만 보유하고 있으며, 여기서 기병의 역할은 미미
115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13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중고기 부터 증설되어 오다가 통일 후 신라 전국에 배치된 10개의 부대 十 停 의 경우를 보면 기병이 일정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 무관조에 十 停 의 소속 군관을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十 停 軍 官 組 織 表 十 停 10개 部 隊 軍 官 構 成 同 一 隊 大 監 少 監 火 尺 三 千 幢 主 三 千 監 三 千 卒 領 馬 兵 領 騎 兵 領 騎 兵 着 衿 着 衿 - 십정의 군관조직은 열 개 부대가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井 上 氏 는 진흥왕 5년에 설치된 삼천당의 성격을 보병중심의 大 幢 을 보완하는 騎 兵 부대로 보았다. 12) 하지만 십정의 1개 부대 에서 기병군관이 5명, 보병군관이 27명으로 보병의 비율이 확실히 높다. 기병 1에 보병이 5.4 의 비율이다. 따라서 10정을 기병조직으로 볼 수 없다. 보병이 주력이며 기병은 그것을 보조하 는 역할에 머물고 있다. 무엇보다 三 千 幢 은 기록상 무열왕대 까지 독립된 군사조직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었음이 확 인된다. 13) 삼천당은 무열왕 2년(655)에 백제와 助 川 城 을 둘러싼 공방전에 郎 幢 등 여러 군사조 직과 더불어 하나의 군사조직으로 출정했다. 여기서 삼천당이 기병부대였다는 증거를 전혀 찾 을 수 없다. 무엇보다 삼천당 계열의 군관조직에는 기병을 영솔한다는 단서가 없다. 따라서 삼천당을 기병부대로 볼 수 없다. 아무런 단서가 없는 것은 삼천당이 보병부대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14) 그렇다면 십정 10개의 각 부대에는 領 馬 兵 隊 大 監 1명- 領 騎 兵 少 監 2명- 領 騎 兵 火 尺 2명의 대대감계열의 기병과 三 千 幢 主 6명- 三 千 監 6명- 三 千 卒 15명으로 이루어진 삼천당계열의 보병 이 있었다. 위의 <표2>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은 十 停 의 군관조직이 영기병 대대감 계열과 삼천당 주 계열로 2분되어 있다. 十 停 이 변화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두 개의 군관직 체계가 12) 井 上 秀 雄, 新 羅 兵 制 考 新 羅 史 基 礎 硏 究 東 出 版, 東 京. 13) 三 國 史 記 卷 47, 驟 徒 傳. 14) 李 文 基, 三 千 幢 의 成 立 과 그 性 格 新 羅 兵 制 史 硏 究, pp.130~3.
116 114 학예지 제17집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5) 그렇다고 해서 삼천당주계열이 領 馬 兵 隊 大 監 의 명령 을 받지 않은 완전히 분리된 군 조직으로 볼 수 있을까. <표 3> 十 停 軍 官 官 等 表 관직 6) 阿 湌 7) 一 吉 湌 8) 沙 湌 9) 給 湌 10) 大 奈 麻 11) 奈 麻 隊 大 監 小 監 火 尺 三 千 幢 主 三 千 監 三 千 卒 12) 大 舍 13) 舍 知 14) 吉 士 15) 大 烏 16) 小 烏 17) 造 位 비고 관등규정을 보면 대대감은 삼천당주와 삼천감 그리고 삼천졸과 상호 관등이 교차할 가능성 이 있다. 그러나 領 騎 兵 少 監 火 尺 과는 교차되지 않으며, 관등 상 상하관계가 뚜렷하다. 따라 서 十 停 의 領 馬 兵 隊 大 監 은 삼천당주계열을 통솔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16) 그러나 영마병 대대감은 1인이고 삼천당주는 6인이다. 기존의 지적대로라면 삼천당주 6명은 누구의 통솔도 받지 않고 각각 작전에 임해야 한다. 그렇다면 영마병 대대감계열과 삼천당주계 열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십정의 조직에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다. 군대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는 우선 하나로 통일된 지휘계통이 필요하다. 확립된 지휘계통이란 통일된 훈령을 필요로 하 며, 그렇게 되어야만 부대에 소속된 병사들이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십정의 각부대가 일률적 인 작전을 하려면 보병인 삼천당 6개 조직은 영마병 대대감 1인의 명령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십정은 기병부대라기 보다는 기병을 포함하고 있는 보병부대이다. 행군 시 영마병 대대감과 그 예하 기병들이 앞서 가고 삼천당주 예하 보병들이 따라가는 형태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지하다시피 통일 후 완성된 十 停 은 신라지방의 주요 10개 지역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 15) 李 文 基, 三 千 幢 의 成 立 과 그 性 格 新 羅 兵 制 史 硏 究, pp.130~3. 16) 李 文 基, 三 千 幢 의 成 立 과 그 性 格 新 羅 兵 制 史 硏 究, pp.130~3.
117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15 다. 17) 일정규모의 군사조직을 전국에 깔아놓은 것은 신라중앙정부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사건에 대비한 것이었다. 십정의 기병과 보병인 삼천당의 陣 배치를 추측해 보면 다음과 같다. 領 馬 兵 대대감은 총 지휘자로서 보병인 삼천당의 대열 뒤쪽 한가운데 서서 총지휘를 한 다. 18) 전쟁터에서 陣 을 칠 때 기병은 대체로 보병 대열의 좌측면에 배치된다. 상대방 기병은 공격 대상 보병대열의 약한 좌측면을 항상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진은 항상 우측이 강하다. 창병의 대열에는 항상 힘이 오른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있다. 왼손에 방패를, 오른 손에 창을 든다. 앞으로 나아가 1열의 창은 허공으로 나가지만 2, 3, 4열의 경우 각 열의 병사들의 간격만큼 뒤로 포개진다. 동시에 각각 바로 앞 대열의 병사 오른손 팔뚝 두께만큼 더 우측으로 창을 내밀게 된다. 대열은 자연스럽게 우측으로 기울어지는 사선이 형성된다. 19) 고대 그리스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이룩한 군사적 변혁은 기존의 팔랑스(Phalanx- 陣 )가 왼 쪽 우익에 힘이 쏠리는 특이한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주목한데 있다. 이 현상은 깊은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병사들이 오른팔로 창을 들고 왼팔로 방패를 드는 사실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이로 인해서 보통은 우익이 승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때로는 양측 우익 모두가 승리할 때도 있었다. 에파미논다스는 테베군의 본래 강한 우익을 억제시키고 종심을 강화한 좌익을 먼저 밀고 나 가게 했다. 그는 좌익만 공세적 충격을 가하게 했고, 우익은 전진을 자제하면 최대한 전투를 회피하고 위치를 고수하면서 상대방을 붙들고 늘어져 고착시키려 했을 뿐이다. 이러한 우익의 견제 임무 수행은 적은 병력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추가병력이 없이도 공세를 취하는 좌익을 보강해서 그곳에서 절묘한 병력 우위를 이룰 수 있었다. 아군의 좌익이 우세한 병력으로 상대 방의 우익을 제압하고 나면 어떤 경우이든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의 좌익은 저절로 무너져버렸다. 17) 1) 音 里 火 停 -경북 상주, 2) 古 良 夫 里 停 -충남 청양, 3) 居 斯 勿 停 -전북 임실, 4) 三 良 火 停 -대구광역시 현풍, 5) 召 三 停 -경남 함안, 6) 未 多 夫 里 停 -전남 나주, 7) 南 川 停 -경기도 이천, 8) 骨 乃 斤 停 -경기도 여주, 9) 伐 力 川 停 -전남 나주, 10) 伊 火 兮 停 - 경북 청송. 18) 隊 大 監 의 명칭이 領 騎 兵 대대감 아니라 領 馬 兵 이었다는 것은 이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領 馬 兵 을 領 騎 兵 과 직결시킬 수 없다. 말을 타는 병사들 중에서도 말을 탈수 있지만 말위에서 활, 창, 劍,을 사용할 수 없거나 사용하지 않은 것도 있다. 부대간의 연락병의 경우 그러하다. 그들은 말탄 步 兵 인 것이다. 19) 윤일영, 신라가 대백전시(서기660) 투입하였던 부대 수, 병력 수, 부대편제, 전투대형 군사학연구 5, 대전대학교 군사연구원, 2007, 쪽, 앞 논문의 저자에게 설명을 직접 들은 것이다.
118 116 학예지 제17집 에파미논다스는 왼쪽의 종심을 깊게 할 경우 정면축소에 따라 노출되는 측면을 기병이 엄호 하게 했다. 그는 기병과 보병의 효과적인 혼성조직을 만들었다. 이제 좌익은 정면이 축소되기 는 했지만 적에게 포위되지 않았고, 종심강화에 따른 충격력을 이용해서 적의 우익의 공격에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도 있었다. 스파르타의 강철 팔랑스( 陣 )는 이 렇게 테베에 의해 돌파되었다. 20) 삼천당계열의 6개 보병조직이 좌측에 강화된, 종심이 깊은 陣 을 치고, 노출되는 좌측면을 영기병 화척 2인과 소감 2인이 거느리는 기병대가 지키게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십 정의 각 부대에 소속된 기병은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고, 보병과 기병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것은 소수의 기병을 동반한 보병으로 기록에 步 騎 某 百 步 騎 某 千 步 騎 某 萬 이라 표현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평탄한 지면에서 전체 군병력의 1/6이 기병으로 구성되어도 문난 하며, 산악지방의 경우에 1/10정도로도 충분하다. 21) 하지만 신라의 군관조직 중 가장 발달된 구서당 군관 조직표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軍 官 職 名 部 隊 名 綠 衿 誓 幢 진평 5 (583) 신라인 紫 衿 誓 幢 진평 47 (625) 신라인 白 衿 誓 幢 문무 12 (672) 백제인 長 槍 幢 문무 12 (672) 신라인 黃 衿 誓 幢 신문 3 (683) 고구려인 黑 衿 誓 幢 신문3 (683) 말갈인 碧 衿 誓 幢 신문6 (686) 보덕성민 赤 衿 誓 幢 신문6 (686) 보덕성민 靑 衿 誓 幢 신문8 (688) 백제 殘 民 將 軍 大 官 大 監 隊 大 監 <표 4> 九 誓 幢 軍 官 組 織 表 官 等 規 定 眞 骨 角 干 - 級 湌 眞 骨 6-13 次 品 6-11 ( 領 馬 兵 ) ( 領 步 兵 ) 弟 監 監 舍 知 ) 델브뤼크 著, 민경길 譯, 兵 法 史 1권 한국학술정보, 2009, pp.183~ ) 앙투안 앙리 조미니 著, 이내주 譯, 전쟁술, 책세상, 1999, p.372.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은 참고된다. 자치통감 권196, 당기12 정관15년 11월 조 癸 酉, 上 命 營 州 都 督 張 儉 帥 所 部 騎 兵 及 奚 ㆍ ㆍ 契 丹 壓 其 東 境 ; 以 兵 部 尙 書 李 世 勣 爲 朔 州 道 行 軍 總 管, 將 兵 六 萬, 騎 千 二 百, 屯 羽 方 ; 右 衛 大 將 軍 李 大 亮 爲 靈 州 道 行 軍 總 管, 將 兵 四 萬, 騎 五 千, 屯 靈 武 ; 右 屯 衛 大 將 軍 張 士 貴 將 兵 一 萬 七 千, 爲 慶 州 道 行 軍 總 管.
119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17 軍 官 職 名 少 監 火 尺 部 隊 名 綠 衿 誓 幢 진평 5 (583) 신라인 紫 衿 誓 幢 진평 47 (625) 신라인 白 衿 誓 幢 문무 12 (672) 백제인 長 槍 幢 문무 12 (672) 신라인 黃 衿 誓 幢 신문 3 (683) 고구려인 黑 衿 誓 幢 신문3 (683) 말갈인 碧 衿 誓 幢 신문6 (686) 보덕성민 赤 衿 誓 幢 신문6 (686) 보덕성민 靑 衿 誓 幢 신문8 (688) 백제 殘 民 官 等 規 定 ( 屬 大 官 ) ( 領 騎 兵 ) ( 領 步 兵 ) ( 屬 大 官 ) ( 領 騎 兵 ) ( 領 步 兵 ) 軍 師 幢 主 大 匠 尺 幢 主 步 騎 幢 主 著 衿 騎 幢 主 黑 衣 長 槍 末 步 幢 主 軍 師 監 大 匠 尺 監 步 騎 監 著 衿 騎 監 구서당에서 장창당(비금서당)을 제외한 8개 부대는 모두 기병(영기병 소감 화척, 저금기당 주 저금감)과 보병(영보병 소감 화척 흑의장창말보당주 군사당주 군사감 등)이 혼합된 조 직형태를 가지고 있다. 보기당 또한 구서당의 예하부대이다. 보기당주 보기감은 구서당의 8개 부 六 停 의 경우에 보병부대가 주 병종이었다. 기병에 해 당되는 것은 육정의 5개 부대에 4-6인씩 배치된 그것뿐이었다. 기병으로서 步 騎 幢 은 보조적 요소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라가 아마도 구서당 완성 당시(688년)에 이룩한 발전은 병종들을 하나의 통일된 협조체제를 갖추도록 조직적으로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신라의 기병 대대감은 보병대 대감 숫자의 비율이 3대 2, 기병 화척과 소감의 경우 보병의 그것과 역시 6대 4로 3대 2의 비율이며, 기병의 주력인 저금기당은 보병의 주력인 흑의장창말 보당과 대개 18대 20으로 9대 10의 거의 같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기병 병종이라
120 118 학예지 제17집 할 수 있는 步 騎 幢 4개를 더 한다면 22대 20으로 11대 10의 비율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의 기병대는 통일 후 서남해안 지역의 174개의 다도해 목장을 대거 확보하면서 그 규모가 팽창하 였다. 22) 신라군의 급속한 기병의 증설은 전술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신라군에게 기병은 보병을 보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적의 기병대와 기병전을 벌이고, 적 보병부 대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보병에 버금가는 병종이 된 기병은 오히려 더 결정적인 타격을 적에게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의 보병들의 陣 은 공세적인 기병대가 먼저 적의 본대를 측면으로 공격하여 적의 한 측익 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적에게 접근하지 않을 수도 있을 정도였을 수도 있으며, 신라 보병 陣 의 임무는 기병대가 승부를 결정지을 때까지 전투를 유지하면서 적이 돌파하지 못할 방벽을 형성 시키는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구서당의 각 사단은 步 兵 陣 의 右 强 左 弱 이라는 구조적인 제약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지형 조건을 고려하여 어느 곳이건 보다 적절한 쪽에 기병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병 대대감 휘하의 소감과 화척 그리고 군사당 등의 보병과 보병 陣 의 주력인 장창 보병 흑의장창말보당이 모두 승리를 위한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기병대 는 보병의 지원을 받으며 전투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보병 대대감 휘하의 소감과 화척의 보병 병력과 그리고 군사당 등이 투창, 활 그리고 투석 등을 무기로 공격의 발판을 마련 하면서 기병대를 일반적으로 지원했을 것이다. 신라 구서당 조직의 장점은 9개 사단 휘하의 기병과 보병 부대들의 긴밀한 통합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기병과 보병의 각기 다른 부대가 통합되어 있는 구조와 같은 부대 내부에 보병과 기병이 존재하는 구조는 다르다. 특히 오주서 군관조직을 보면 군관숫자상 기병의 비율이 보병 보다 2배 이상 많다. 보기당이 막연히 보병과 기병이 혼합된 부대였다라고 보아서는 그것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2. 五 州 誓 의 步 騎 一 體 兵 種 戰 術 기병과 보병이 한 개의 군단 내에 공존하는 것은 구서당 각부대의 군관조직에서 알 수 있다. 22) 서영교 신라 통일기 기병증설의 기반 역사와 현실 45, 2002.
121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19 그것은 신라군조직에서 일반화 된 것이다. 하지만 오주서는 기병대장(영마병 대대감)의 통솔을 받고 있다. 部 隊 軍 官 隊 大 監 ( 領 騎 兵 ) 少 監 ( 領 騎 兵 ) <표 5> 五 州 誓 軍 官 組 織 表 少 監 ( 領 步 兵 ) 火 尺 ( 領 騎 兵 ) 著 衿 騎 幢 主 菁 州 誓 完 山 州 誓 漢 山 州 誓 牛 首 州 誓 河 西 州 誓 著 衿 監 오주서 군관조직표에서 알 수 있듯이 각 부대의 군관은 領 馬 兵 隊 大 監 1명 領 騎 兵 少 監 3명 領 步 兵 少 監 9명-- 令 騎 兵 火 尺 2명 그리고 衿 騎 幢 主 6명 著 衿 騎 監 6명으로 이루어져 있 다. 물론 여기에는 軍 卒 들의 숫자는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군관조직만으로도 오주서의 각 부대 의 조직 형태는 알 수 있다. 기병군관이 =18명으로 전체의 2/3이고 보병군관(소감) 9명 으로 1/3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는 오주서 가운데 한산주서 청주서 완산주서 등 3개 부대 에 해당된다. 오주서의 각 군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관등 제한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권40, 武 官 조 를 보면, 令 騎 兵 대대감은 신라 17관등 23) 중 6위 阿 湌 에서 13위 舍 知 까지 임명될 수 있고, 보 병이나 기병 관계없이 소감과 화척은 12위 大 舍 에서 16위 小 烏 까지, 착금기당주는 8위 沙 湌 에 서 13위 舍 知 까지 착금기감은 11위 奈 麻 에서 17위 造 位 까지 임명될 수 있다. 해당 군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상한 관등을 기준으로 본다면, 오주서의 각 부대의 長 은 기병 대대감이다. 기병대장(영기병 대대감) 1명의 통솔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병 소감 9명도 기병대장(영기병 대대감)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한편 오주서 5개 부대는 서울, 춘천, 강릉, 전주, 진주 등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5개 중 23) 1) 伊 伐 湌, 2) 伊 湌, 3) 迊 湌, 4) 波 珍 湌, 5) 大 阿 湌, 6) 阿 湌, 7) 一 吉 湌, 8) 沙 湌, 9) 級 伐 湌 10) 大 奈 麻, 11) 奈 麻, 12) 大 舍, 13) 舍 知, 14) 吉 士, 15) 大 烏, 16) 小 烏, 17) 造 位.
122 120 학예지 제17집 漢 山 州 誓 靑 州 誓 完 山 州 誓 3개 부대는 체계적인 군관조직을 갖추고 있는 것에 반해 牛 首 州 誓 와 河 西 州 誓 는 단지 저금기당주-저금감으로 이루어진 단촐 한 조직이다. 領 騎 兵 隊 大 監 1명- 領 騎 兵 少 監 3명- 領 步 兵 少 監 9명- 領 騎 兵 火 尺 2명 등 총 15명의 군관이 빠져 있는 것이다. 末 松 保 和 씨는 이를 당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한산주서 완산주서 청주서 등 3개 부대는 주체적이고, 우수주서 하서주서 등 2개 부대는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24) 末 松 씨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궁색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박하는 연구 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소재지의 주명으로 보아 문무왕 12년 경에 두어졌을 가능성이 큰 河 西 州 誓 는 부수적이며, 보다 후대에 두어진 靑 州 誓 와 完 山 州 誓 가 주체라는 의미로 쉽게 수긍되지 않는다. 이러한 군관구성의 차이는 사료의 불비에서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25) 이러한 언급은 末 松 씨가 오주서 각부대의 설치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그러한 궁색한 설명을 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하지만 末 松 씨가 청주서와 완산주서가 보다 후대에 두어진 것일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모르고 주체 부수의 언급을 한 것이 아니다. 末 松 씨는 앞서 靑 州 나 完 山 州 가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청주서나 완산주서가 부대명으로 보아 문무왕 12 년에 설치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언급한 바 있다. 26) 문제는 한산주서 청주서 완산주서와 우수주서 하서주서 사이의 군관조직의 현격한 차이 를 사료상의 不 備 로 결론짓고 있다는데 있다. 실증사가로서 너무나 파격적인 결정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삼국사기 무관조의 기록을 부인하는 것은 쉬우며, 사료 상 불비로 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완벽한 논리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기록을 사실로 보고 왜 그러한 기록이 남았는지 탐구하는 것이 진정한 실증일 것이다. 末 松 씨도 우수주서 하서주서에 15명(기병대대감1-기병소감3-보병소감9-기병화척2)의 군관 이 왜 빠져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는 기 록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던 것이다. 그것은 末 松 씨 자신도 만족하지 못 하는 고민에 찬 견해 표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지만, 末 松 씨는 체계적인 군관조직을 가진 한산주서 청주서 완산주서는 주체적 인 것이고, 3개 부대에 비해 15명의 군관이 배치되어있지 않은 우수주서 하서주서는 부수적 24) 末 松 保 和, 新 羅 幢 停 考, 新 羅 史 の 諸 問 題, 東 洋 文 庫 ) 李 文 基, 三 國 史 記 職 官 志 武 官 條 의 內 容 과 性 格, 新 羅 兵 制 史 硏 究, 일조각, 1997, p.33, 註 ) 末 松 保 和, 新 羅 幢 停 考, 新 羅 史 の 諸 問 題, p.368.
123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21 인 것으로 보았다. 아주 단순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씨의 이러한 차이의 설정은 중요한 그 무엇 을 담고 있다. 기병이 산악보다 평지에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27) 우수주서(춘천) 하서주서(강릉)가 소재한 위치는 산악이 많은 강원도지역이다. 여기에 반해 한산주서(서울) 완산주서(전주)의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평탄한 지역이며, 청주서가 위치한 경남 진주지역도 강원도보다는 산악 이 적고 완만하다. 같은 기병부대일지라도 평탄한 지역에 더 많은 숫자가 배치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당연하다. 사료 상 불비로 보는 견해의 바닥에는 오주서의 5개 부대가 모두 균일한 군관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선입관이 깔려있다. 지역이나 지형에 따른 병력과 병종의 배치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도표 상에 군관 숫자로 남은 조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과거에 살아 움직였 던 일종의 유기체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편 오주서에 領 步 兵 少 監 의 존재는 삼국사기 무관조의 기록을 신빙하는 필자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평탄한 지역에 위치한 한산주서 청주서 완산주서에 영보병 소감 9인이 각각 존재하고, 반대로 산악이 많은 강원도지역에 위치한 우수주서 하서주서에는 그것이 없 다. 보병은 기병보다 산악지대에 용이하다. 28) 필자의 논리대로 본다면 우수주서 하서주서에 기병군관이 빠져있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양 부대에 각각 영보병 소감 9명의 부재는 이 해하기 어렵다. 기병부대 오주서 중 평원에 위치한 3개(한산주서 청주서 완산주서) 부대에 보병소감이 존 재하고 반대로 산악에 위치한 2개(우수주서 하서주서)에 그것이 부재한 것을 어떻게 이해야 할까. 문제의 핵심은 오주서 영보병 소감의 성격파악에 있다. 군조직이란 국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승리를 지향하기에 지극 히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특정 군 조직이, 전투에서 어떠한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동하고 있었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672년 騎 兵 부대 五 州 誓 의 창설을 신라의 주력군단 六 停 에 騎 兵 의 빈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작업으로 보고 있는 견해가 있다. 末 松 保 和 씨의 지적대로 오주서와 六 停 의 군관조직은 중복되 는 것이 없으며, 兩 조직을 합치면 九 誓 幢 의 그것과 거의 같은 모습이 된다. 29) 井 上 秀 雄 는 여기 27) 한서 권49, 晁 錯 傳 兵 法 曰 : 土 山 丘 陵, 曼 衍 相 屬, 平 原 廣 野, 此 車 騎 之 地, 步 兵 十 不 當 一. 28) 한서 권49, 晁 錯 傳 兵 法 曰 : 丈 五 之 溝, 漸 車 之 水, 山 林 積 石, 經 川 丘 阜, 屮 木 所 在, 此 步 兵 之 地 也, 車 騎 二 不 當 一. 29) 末 松 保 和, 新 羅 幢 停 考, 新 羅 史 の 諸 問 題, 東 洋 文 庫, 1954.
124 122 학예지 제17집 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六 停 중 王 京 에 주둔한 大 幢 을 제외한 지방의 5개의 停 은 五 州 誓 의 주둔지와 거의 일치하며, 이보다 앞서 太 宗 武 列 王 元 年 (654)에 창설된 罽 衿 幢 도 그 주둔지가 王 京 이므로 바로 大 幢 을 지원하는 騎 兵 部 隊 라 한다. 30) 步 兵 위주의 신라주력군단 六 停 이 騎 兵 部 隊 계금당과 오주서로 보완된 것이다. 오주서의 창설시기가 말갈기병이 대규모로 쇄도하던 나당전쟁기인 점을 고려해 본다면 兩 氏 의 지적은 필자에게 귀중한 암시를 주고 있다. 唐 騎 兵 에 대항하기 위해 기병증강도 요구되었 다. 672년 기병부대 오주서 창설은 漢 山 州 誓 牛 首 州 誓 河 西 州 誓 에 국한된 규모였다. 혹자의 지 적대로 菁 州 와 完 山 州 는 문무왕 12년(672) 이전에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672년 당시 菁 州 誓 와 完 山 州 誓 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31) 또한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河 西 州 誓 나 牛 首 州 誓 는 令 騎 兵 隊 大 監 系 列 (대대감-소감-화척)이 부재한 각각 6명과 7명의 기병군관의 증설에 그쳤다. 오주서 3개 부대에 보이는 영보병 소감 9인은 기병대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보병은 속전속결의 기병에 비해 고정적이며 움직임은 완만하다. 보병 대대감의 명령권 안에 있어야할 보병 소감 9인이 왜 의도적으로 기병 대대감의 명령권 안에 배치되어 있는 것인가. 騎 兵 대대감의 통솔을 받는 步 兵 소감의 기능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신라의 오주서는 기병위주로 편성된 부대이고, 기병대장인 영기병 대대감이 지휘하는 조직 이다. 기병과 기병이 대적할 때 다음과 같은 상황이 흔히 발생한다. 마주보고 있는 양측의 기 병대가 서로를 향해 돌격해 오다가 충돌할 때 대열이 뒤엉키면서 급속히 속도가 떨어진다. 이 때부터는 기병들의 백병전으로 돌입한다. 속도가 죽은 기병대 기병의 승부는 개개인의 전투력과 말의 우수성에 판가름이 난다고 볼 수 있다. 기병은 서로 밀려 미쳐 날뛰는 말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이 상태에서는 보병을 보유 한 기병대가 유리하다. 밀집되어 있는 혼전 상태에서 상대편 보병이 정면으로 접근하면 상대편 기병은 효율적인 대 처가 힘들다. 기병에게 말의 긴 목이 사각이라는 것도 그러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보병은 후 30) 井 上 秀 雄, 新 羅 兵 制 考 新 羅 史 基 礎 硏 究 東 出 版, 東 京.(계금당은 著 衿 騎 幢 主 를 포함한 令 騎 兵 隊 大 鑑 - 少 監 - 火 尺 등의 군관조직을 가지고 있다. 저금기당주와 영기병 대대감 계열은 구서당의 기병조직에 그대로 나타난다. 罽 衿 이라는 명칭 은 기병이 특수한 존재였다는 것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31) 李 文 基, 三 國 史 記 職 官 志 武 官 條 의 內 容 과 性 格 新 羅 兵 制 史 硏 究 일조각, 1997, p.32.
125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23 퇴 시에도 진가를 발휘한다. 보병이 없는 기병대가 밀려 후퇴한다면 등을 보인 그들은 추격을 당할 것이고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다. 차가 밀리듯 속도가 없어진 상태의 기병이란 보병보다 유리한 것이 별로 없다. 보병은 고정 된 땅을 딛고 있지만 기병은 서로 밀려 미쳐 날뛰는 말 위에 앉아 있을 뿐이다. 이 상태에서는 보병을 보유한 기병대가 그렇지 않은 그것보다 유리하다. 기병부대 오주서에 부수적으로 소속된 步 兵 은 기병과 하나의 전투단위가 되어 움직이는 보 병으로 보고 싶다. 정확히 말해 신라 오주서의 군조직은 기병대에 보병을 보조로 첨가하여 對 기병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 步 戰 을 위한 용도는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해명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과연 보병의 도보 속도가 말의 질주 속도 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기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질주하는 상태의 이미지 를 떠올린다. 하지만 기병은 대열을 유지하기 위해 질주( 疾 走 )보다 속주( 速 走 )를 더욱 선호했 다. 기병도 질서가 잡힌 상태에서 효율성을 발휘한다. 六 韜 에 의하면 기병이 조직적인 대열을 이루고 평지에서 전투를 할 경우 1 騎 의 전력은 步 兵 8 人 의 전력에 필적하며 산악지형이라 하더라도 1기는 보병 4인에 필적한다.라고 한다. 이어 기병대가 조직적인 대열을 이루지 않고 되는 데로 흩어져 싸운다면, 한 騎 의 힘은 보병 한 사람의 힘조차 당하지 못한다. 라고 하고 있다. 32) 기병에게 질서 잡힌 대열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구절이다. 질주는 기병대의 대오를 무질서하게 할 우려가 있고, 상황이 너무나 급속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휘관이 병력을 통제하기 곤란해진다. 신라기병의 경우 활이나 刀 보다 槍 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에서 騎 兵 刀 인 굽은 칼이 출토된 적이 없으며, 직도가 출토되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양은 아니다. 무기 가운데 창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말 위에서 활을 쏠 만큼 뛰어난 기량을 가진 騎 手 가 신라에는 많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사냥이 생계의 일부인 유목민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능력이 있지만, 농경민들은 그렇지 않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움직이는 목표물에 활을 쏘아 적중하려면 아주 어린 시절에 말을 타야하고 10살이 되면 질주할 수 있어야 하며, 그 후에도 10년 가까이 지속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33) 32) 조강환 譯, 六 韜 三 略, 자유문고, 1995, pp.217~-218. 徐 榮 敎, 張 寶 皐 의 騎 兵 과 西 南 海 岸 의 牧 場, 震 檀 學 報 92, 2002, p ) 庭 訓 格 言 (출판연도 불명. 1730년에 쓴 옹정제의 서문이 실려있다), pp.106b~107(조너슨 스펜스, 사냥과 원정,
126 124 학예지 제17집 기마가 생활이 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騎 射 는 불가능하다. 槍 騎 兵 은 대열을 맞추어 전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창은 혼전에서 거의 무용지물에 가깝 기 때문이다. 34)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의 몸이나 말에 걸려 제대로 사용할 수 없고, 그것 은 거추장스런 짐이 되는 것이다. 창기병은 대열을 유지하게 위해 속주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 속주 시간도 상당히 짧았다. 속주는 보통 상대방 활의 최대 사정거리를 약간 벗어난 지점 부터 시작되며, 對 陣 한 양측 기병이 상대방을 동시에 향해 속주해 온다면 그 거리는 거의 반으 로 줄어든다. 훈련된 장정은 화살의 사정거리의 절반을 속주 하는 말을 따라 뛸 수 있다. 기병 대에 부속된 보병의 기능은 완만한 진법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기동적인 흐름에서 그 기능 을 발휘한다고 생각된다. 오주서의 보병은 완만한 陣 法 을 구사했다기보다 속전속결의 기병과 한 팀이 되어 움직이는 병력이다. 그들은 고정된 陣 地 나 요새 城 을 지키는 일반 보병이 아니라 공간에서 기동하는 기병의 부속물이었다. 기병대에 보병을 보조로 첨가하여 對 기병전의 효율을 높인 것이다. 오주 서의 보병은 매끄러운 공간을 통해 움직이는 기동의 주체이다. 3. 騎 兵 隊 附 屬 步 兵 의 세계보편성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는 냐얀(Naian)과의 내전에서 步 兵 를 사용했다. 나얀은 諸 王 들인 시 두르( 勢 都 兒 : 조치 카사르의 후예)와 카단( 哈 丹 :카치운의 후예) 등과 연합하여 1287년( 至 元 24) 봄에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마르크 폴로의 동방 견문록 의 R 本 (G. Ramusio의 년 인쇄본)을 보자. 쿠빌라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1만 명씩의 사수들로 이루어진 30개 부 대의 기병을 셋으로 나누어, 좌익과 우익으로 하여금 나얀의 군대를 아주 멀리서 포위하여 포진하도록 했다. 각 기병 부대의 전방에는 짧은 창과 칼을 든 步 兵 500명씩을 배치했는데... 35) 동방견문록 R 本 의 기록대로 본다면 1만 명씩의 騎 射 들로 이루어진 30개 기병부대는 중간 강희제, 이산, 2001, 58쪽에서 재인용); 徐 榮 敎, 張 寶 皐 의 騎 兵 과 西 南 海 岸 의 牧 場, 震 檀 學 報 94, 2002, pp.66~67. 34) 앙투안 앙리 조미니 著, 이내주 譯, 전쟁술, 책세상, 1999, p ) 마르크 폴로 지음, 김호동 역주, 동방견문록, 사계절, 2000, p.223의 註 18.
127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25 에 10개 기병부대 10만 좌우에 각각 10개 10만씩을 배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 1만의 기병부 대에 전방에 위치한 보병은 500이다. 비율 상 1/20에 불과하며, 으로 1만 5천이 된다. R 本 의 기록대로 본다면 기병대 내에 너무나 소수의 보병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기병대 안에 보병배치의 의미를 상실할 정도의 비율이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동방견문록 의 F 本 (프랑스 지리학회본)은 이와 판이하다. F 本 의 78장을 보자. 이 두 반역자와 불충한 자들을 죽음으로 응징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절대로 왕관을 쓰지도 영토를 소유하지도 않을 것이라 말했다. 여러분은 대카안이 22일 만에 모든 계획을 완료했으며, 각료들을 제 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은밀히 추진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거의 36만의 기병과 10만의 步 兵 을 소집했다. 36) 위의 기록에서 나얀을 정벌하기 위해 쿠빌라이는 거의 10만의 보병을 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병이 36만이니까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3.6대 1이다. 쿠빌라이의 기마군단 내에 보병 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 에서 숫자란 상당히 부정확한 것이 많다는 것이 일반적 인 지적이다. 위의 기병 36만도 바로 이어지는 같은 기록에서 26만으로 되어있다. 37) 따라서 여기서 숫자나 비율을 따지는 노력의 효과는 반감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떻든 쿠빌라이 군대 내에 보병이 존재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며, 그것 도 기병이 다수이고 보병이 소수였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주목되 는 것은 보병의 구체적인 기능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기병대 전방에 배치된 보병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앞서 제시한 동방견문록 의 R본을 다시 보자. 각 기병 부대의 전방에는 짧은 창과 칼을 든 步 兵 500명씩을 배치했는데 즉 기병이 앞으로 달려나 가기만 하면 말 엉덩이에 잽싸게 올라타서 같이 가고, 기병이 정지하면 말에서 뛰어내려 창으로 적을 찔러 죽이곤 했던 것이다. 38) 36) 마르크 폴로 지음, 김호동 역주, 동방견문록, p ) 마르크 폴로 지음, 김호동 역주, 동방견문록, p ) 마르크 폴로 지음, 김호동 역주, 동방견문록, p.223의 註 18.
128 126 학예지 제17집 위의 기록은 기병 내에 배치된 보병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어떻게 기병과 속도를 맞추는지 말해주고 있다. 위의 R본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보병은 기병단의 선두에 자리 잡고 있다. 기 병이 앞으로 달려나갈 때 말 엉덩이에 올라타 같이 나아간다. 보병은 기병대열에 함께 섞여 전투를 한다. 기병과 보병은 하나의 전투단위가 되며, 함께 움직이는 관계였던 것이다. 말이 정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상대편을 향해 질주해 오는 기병대들이 충 돌했을 때 뒤엉키면서 속도가 죽는 순간부터 보병의 임무는 시작된다. 이는 기병이 정지하면 말에서 뛰어내려 창으로 적을 찔러 죽인다 는 위의 기록과 부합된다. 기병대가 소수의 보병을 동반하면 후퇴 시 유리하다. 이는 케사르가 저술한 갈리아전기 1권 48절에서 확인된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이 며칠 동안 부대를 진지에 주둔시켜둔 채 매일같이 기병전을 펼쳤다. 게르마니 인이 수행하는 전법은 다음과 같았다. 6000의 기병과 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全 軍 가운데서 한사 람씩 뽑은 같은 수의 민첩하고 용감한 보병이 있었다. 보병은 기병을 따라 전투에 나갔으며, 기병이 퇴각할 때나 다른 위험이 닥쳤을 때에는 前 列 에 포진했다. 평소보다 멀리 나아가거나 신속히 퇴각해야 하는 경우에는 훈련했던 대로 재빨리 말의 갈기에 매달려 기병과 속도를 맞추었다. 39) 위의 기록의 기병이 퇴각할 때나 다른 위험이 닥쳤을 때에는 前 列 에 포진했다 라는 표현에 서 알 수 있듯이, 보병은 기병이 퇴각할 때 전열에 포진하여 그것을 보호했다. 보병이 있는 기병과 없는 기병이 서로 충돌하여 엉켜있다고 생각해 보자. 기병이 없는 쪽이 밀려 후퇴한다 면 그들을 추격을 당할 것이고 많은 수의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다. 후퇴하면서 만들어진 도움 닫기 공간이 추격하는 측의 기병이 탄력을 붙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병이 있는 측이 후퇴할 때 상황은 달라진다. 보병이 앞에 나아가 대열을 지어 적기 병을 막아 그들이 탄력을 붙일 수 있는 공간(도움닫기)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기병은 후퇴할 때나 공격을 하고 돌아설 때 가장 취약하다. 이때 보병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지만 갈리아전기 의 이 기록은 유목형 보병의 기능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주고 있다. 역시 생존을 위해 만들어지는 군조직이란 어디까지나 합리적이며, 세계적으 로 보편성을 띠고 있다. 더구나 이는 갈리아(프랑스)에서 케사르가 게르만 유목형 보병을 목격 39) 카이사르 저, 박광순 역, 갈리아전기, 범우사, 1990, p.67.
129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27 한 현장기록이어서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앞서 쿠빌라이의 몽고군과 비교했을 때 다음의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기병대 기병의 전투를 했다는 점, 다음으로 보병이 기병대의 전열에 포진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보병이 기병 과 속도를 맞추는데 있어 말에 올라탄다거나 갈기에 매달린다는 점이 그것이다. 고도로 훈련받은 경보병은 짧은 시간 동안 순간 속도를 낼 수 있으며, 말의 갈퀴를 잡는다거 나 기병의 말 엉덩이에 올라타기도 한다. 그야말로 步 騎 一 體 兵 種 戰 術 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갈리아 전기 의 이 기록을 본 애드워드 기본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알레마니족의 전투양태는 주로 기마전이었으며, 그들의 기마대는 경보병대를 동반함으로써 한층 강화되었다. 이들 보병대는 가장 용맹한 장정 중에서 추려내어 편성된 자들로서 평소에 끊임없는 훈련에 의하여 어떠한 장도의 행군에도 기마대에 뒤떨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또 어떠 한 기습이나 급한 퇴각에도 낙오되는 일이 없게끔 훈련되어 있었다. 40) 보기일체병종전술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병의 효용성을 잘 알고 있었던 보이오티아(Boeotia)인들은 하미펜(hamippen)이라 불리던 발 빠른 경보병을 기병 에 배속시키는 混 成 전투 개념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41) 로마의 케사르도 보기부대의 효율성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게르만(알레마니족) 보기병 대한 인식이 있었던 케사르는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에서 그것을 응용했다. 42) B.C 48년 8월 9일 그리 스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 결전은 토인비의 지적대로 로마의 보병전법이 개량을 거듭하여 절정에 달해 있는 상태에 서 43) 치러진 것이었기에 주목된다. 이 싸움에서 케사르는 기병에 있어 엄청난 수적 열세였다. 그의 기병은 1천인 것에 반해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7천이었다. 44) 기병이 최대한 기동성을 발 휘할 수 있는 평야지역에서 7배나 많은 적군의 기병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 케사르의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7천기와 1천기가 정면으로 맞붙으면 결과는 뻔하다. 한편 폼페이우스는 기병의 절대적인 우위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기병을 격멸한 후 케사르 40) 에드워드 기본, 로마제국쇠망사 Ⅰ(김영진 옮김), 대광서림, 1990 p ) 투키디데스, 펠로포네소스전쟁사 Ⅴ,57. 2절; 크세노폰, 그리스인Hellenica Ⅲ, 5. 24절(한스 델브뤼크, 병법사 Ⅰ [민병길 譯 ], 한국학술정보 2009, 167쪽에서 재인용) 42) CAESAR'S WAR COMMENTARIES-De Bello Gallico & De Bello Civili, Edited and Trans by John Warrington, London, , p.289 It was after a successful cavaly action at about this time that one of the two Allobrogian deserters was found among the dead. 43) 토인비 著, 洪 思 重 譯, 역사의 연구 1.(축약본), 동서, 1978, p ) CAESAR'S WAR COMMENTARIES De Bello Gallico & De Bello Civili, p.289.
130 128 학예지 제17집 步 兵 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45) 이점을 케사르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 는 폼페이우스의 기병과 정면으로 승부를 하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고, 대항수단으로서 기병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하는가에 골몰하게 되었다. 46) 먼저 케사르는 경보병들 중에서 가장 젊은 자들을 뽑아 騎 兵 隊 에 배치시키고, 보병과 기병이 어우러진 상태에서 충분한 예행 훈련을 시켰다. 젊은 자들을 선발한 것은 기병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체력과 민첩함을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젊은데다 중무장을 하지 않았기 때 문에 민첩하게 말 엉덩이에 올라 타거나 말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다. 경보병의 지원을 제대 로 받는다면 1천 기병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어려움 없이 7000의 적기병과 대항할 수도 있다고 케사르는 생각했다. 47) 기병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기병에 특수한 훈련을 시킨 보병을 투입했던 것이다. 또한 케사르는 장창보병부대를 48) 조직했다. 49) 경험이 많은 고참병들로 구성된 그의 장창보 병은 적의 기병이 달려들 때도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50) 장창을 앞으로 세우고 있는 인간 벽이 었다. 말이 달려들 때 인간은 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기병이 공격해 올 때 보병이 도망가지 않고 버티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며, 동시에 말은 전열이 갖추어진 보병대열에게는 감히 접근 하지 못한다. 51) 보병이 창을 세워 대열을 갖추고 당당히 버티고 있으면, 기병은 감히 달려들 수 없으며, 차가 밀리듯이 정체되고 만다. 케사르는 장창부대가 수적 우위를 믿고 밀려드는 적의 기병을 가로막았다. 폼페이우스 기병 의 기동성이 제거되자 케사르의 기병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정체된 폼페이우스 측의 기병 45) F.E Adcock, The Roman Republic The Civil War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9,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2, p ) CAESAR'S WAR COMMENTARIES De Bello Gallico & De Bello Civili, pp.289~ ) CAESAR'S WAR COMMENTARIES De Bello Gallico & De Bello Civili, p.289 My cavalry dispositions, however, followed a plan adopted once before: being heavily out-numbered in this respect, I chose a body of youngsters from among my light-armed shock troops, who had in turn been picked for accuracy of their fire, and ordered them to fight in cavalry ranks. Daily practice perfected their skill in this method of attack and defence: so much so, that, when supported by these units, a thousand of our cavalry were prepared, if necessary, to engage an enemy force of 7,000 mounted men in the open field without being much troubled by the numerical odds. 48) 로마군에게 長 槍 (long, pikelike spears)은 보병밀집대형(Phalanxes)의 기본병기였으며, BC 4세기 對 켈트(Gauls)전투 이전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J. M. Robert, History of World, New York, p.203.) 49) John Buchan, Julius Caesar, Morrison and Gbb LTD, London and Edinburgh,? p ) CAESAR'S WAR COMMENTARIES--De Bello Gallico (and) De Bello Civili, pp.293~ ) John Keegan, The Face of Battle. pp.95~96.; Arther Ferrill, The Origin of War, London, 1985: 이춘근 譯 전쟁의 기원 1990, pp.108~109; 정토웅, 전쟁사 101장면 1997, p.25에는 Arther Ferrill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131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29 배후에 步 騎 兵 을 투입시켜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52) 케사르의 보기병들은 정체된 적기병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장창보병의 벽에 가로막힌 순간에 보기병의 공격을 받았다. 케사르의 장창보병이 모루라면 보기병은 망치였다. 폼페이우스 기병들이 흩어 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가 가장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기병의 궤멸은 그의 패배로 이어졌다. 케사르는 보기병의 신참과 장창부대의 고참병들에게 그의 모든 것을 걸었고, 53) 그들은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으며, 파르살루스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 되었다. 4. 결핍의 창조물 步 騎 幢 신라 육정 십정 구서당 오주서 등의 기병비율에 대하여 살펴본 결과 다음의 결론에 도달 할 수 있었다. 기병의 비율이 점점 많아지면서 전술도 그에 따라 바뀌었다. 기병이 보병의 약 한 좌측대열을 보호하는 보조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오주서의 경우 기병의 비율이 보병을 초과하면서 부대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기병대에 부속된 보병 은 완만한 진법이 아니라 기동적인 흐름에서 그 기능을 발휘했다. 십정은 기병군관이 5명, 보병군관이 27명으로 육정보다 많은 기병의 비율을 가지고 있지만 기병이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고 말았다. 하지만 기병의 비율이 거의 반에 가까운 구서 당은 달랐다. 보병에 버금가는 병종이 된 기병은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步 兵 陣 의 右 强 左 弱 이라는 구조적인 제약에 집착 할 필요도 없었다. 지형 조건을 고려하여 어느 곳이건 보다 적절한 쪽에 기병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기병군관이 보병군관 보다 2배가 많은 오주서는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기병을 동반한 보병이 아니었다. 보병의 보조를 받는 기병이었다. 오주서에 부수적으로 소속된 보병은 기병과 하나의 전투단위가 되어 움직였다. 보병이 步 戰 을 위한 용도가 아니라 기병과 함께 기 동했으며, 기병대에 보병을 보조로 첨가하여 對 기병전의 효율을 높였던 것이다. 물론 기병대 오주서에 부속된 보병들은 속주하는 말과 함께 뛸 수 있게끔 훈련된 젊은 장정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2) F.E Adcock, The Roman Republic-The Civil War,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9, p ) F.E Adcock, The Roman Republic-The Civil War.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9, p.665.
132 130 학예지 제17집 기병부대에 소수의 보병을 부속시킨 오주서의 조직은 유서 깊은 보기당의 그것에서 복제된 것일 수도 있다. 보병과 기병의 혼성조직인 보기당은 신라중고기 영토팽창의 주역이었던 六 停 군단 예하에 배치된 유일한 기병관계 군조직이다. 당시 신라의 전체 군조직에 기병의 비율은 극소수였다. 보기당은 전마의 결핍이 낳은 창조물이었다. 신라에 초원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고, 목장이 많았다고도 볼 수 없다. 풀이 귀한 겨울철에 말은 엄청난 곡물을 소비하며, 유지비용이 증가한 다. 말은 하루에 기본적으로 먹는 풀을 제외하고도 콩( 末 豆 ) 2-4승( 升 ), 피( 稗 ) 3승-1두( 斗 )씩을 먹으며, 여기서 콩만 계산하더라도 1년에 말 1필이 먹는 양은 적어도 콩 7석이 된다고 한다. 54) 곡물의 지속적인 확보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안장 과 재갈 등자 등 마구 또한 고가의 장비이다. 1마리의 전마를 유지하는 비용으로 보병을 얼마 나 많이 양성할 수 있는 알 수 있지만, 10배 이상의 숫자일 것이다. 漢 書 卷 69, 趙 充 國 傳 을 보면 軍 馬 1마리의 1개월 식량이 병사 1인의 1년 식량에 해당된다고 한다. 말 한 마리는 사람 의 12배의 식량을 먹는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중에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말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말이란 전쟁의 와중에서도 정 기적인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풀을 뜯을 수 없다면 많은 수가 죽는 것이 일반적이며, 병참선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55) 가령 몽골군 기병의 경우 전장에 병사 1인당 5필의 말 을 끌고 나갔다고 한다. 말을 계속 갈아타기 위해서이다. 5필의 말이 싱싱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30필의 예비 말이 있어야 한다. 전쟁 중에 말을 혹사시키지 않기 위해 여러 번에 걸 쳐 새로운 말로 교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56) 전형적인 농경 지대였던 신라에서 목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장 주위의 농경 지는 가축들로부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 말의 생산과 사육은 상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말을 군마로 훈련시킬 수 있는 인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말이란 짐승의 능력을 수준급으 로 높이는 기술이란 전문성을 요한다. 57) 신라 중앙 官 이 전마를 생산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54) 李 仁 哲, 新 羅 村 落 社 會 史 硏 究, 일지사, 1996, pp.277~ ) 존키건 著,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 까치, 1996, p ) 티모시 메이 지음, 몽골병법 (신우철 옮김) 대성닷컴 2009, p ) Chauncey S. Goodrich, 1984 Riding Astride and the Saddle in Ancient Chin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133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31 충분한 수의 조련들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말을 훈련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인력의 확충은 일반인을 일정기간을 징발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유능한 조련사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유목사회라는 문화 속에 서 어린 시절부터 가축을 다루며, 생활 속에서 말을 조련하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농경사회인 신라에서 조련사는 인위적으로 양성해야 하며, 그 인력을 지속적으로 官 이 부양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소수의 기병을 가질 수밖에 없던 신라로서는 그것의 효율을 배가시키기 위해 고심하였을 것 이다. 신라인들은 발 빠르고 날렵한 젊은이들을 뽑아 기병대에 배치하여 말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고, 그러한 보기일체병종전술이 보다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 이다. 육정군단에 배치되었던 보기당이 통일기에 완성된 구서당군단 8개 사단예하에도 배치되 었다. 구서당군단은 육정군단 보다 훨씬 많은 비율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그것은 분명히 보기당이 효율성이 있는 군조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신라의 육정군단 예하 사단 군관조직에 각각 보기당 4-6개( 幢 )와 흑의장창말보당 개 부대가 동시에 존재한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58) 장창보병인 흑의장창말보당은 대보병전 을 수행할 수 있는 군 조직이었지만, 태생적으로 대기병작전도 수행할 수 있었다. 59) 하지만 장창보병부대는 수동적이고 기동성이 떨어진다. 60) 따라서 기병 없이는 어떠한 실질적인 공격 이 불가능했고 적을 실질적으로 제압하기 어려웠다. 61) 보기당과 흑의장창말보당은 긴밀하게 결합하여 작전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숫자상 가 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신라군의 주력 흑의창창말보당은 적을 막아내는 벽이었고, 62) 기동성 이 있는 보기당은 적의 대열을 깨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보기당은 순수 기병보다 속도는 느릴 수도 있지만 더 범용성이 있는 군 조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 Harvard-Yenching Institute Cambridge Massachusetts, pp.279~-304. 참조. 58) 삼국사기 권40, 무관조, 黑 衣 長 槍 末 步 幢 主, 大 幢 三 十 人, 貴 幢 二 十 二 人, 漢 山 二 十 八 人, 牛 首 二 十 人, 完 山 二 十 人, 紫 衿 二 十 人, 黃 衿 二 十 人, 黑 衿 二 十 人, 碧 衿 二 十 人, 赤 衿 二 十 人, 靑 衿 二 十 人, 綠 衿 二 十 四 人, 共 二 百 六 十 四 人, 位 自 舍 知 至 級 湌 爲 之. 黑 衣 長 槍 末 步 幢 은 幢 主 가 총 264명으로 신라의 군관 가운데 가장 숫자가 많다고도 볼 수 있다. 신라군에 는 長 槍 步 兵 의 비중이 단연 높았다. 264개의 黑 衣 長 槍 末 步 幢 이 존재했으며, 그것은 특수부대가 아니라 군 조직 편제 의 근간을 이루는 주력병력이었다. 59) 徐 榮 敎, 新 羅 黑 衣 長 槍 末 步 幢, 軍 史 74, 국방부 군사연구소, ) R. Ernest Dpuy & Trevor N. Dupuy,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Harper & Row Publishers, New York, 1970, pp.406~ ) Max Weber, Economy and Society, Bedminster press, Vol. 3, New York, 1968, pp.1151~ ) 徐 榮 敎, 新 羅 黑 衣 長 槍 末 步 幢, 軍 史 74, 국방부 군사연구소, 2010.
134 132 학예지 제17집 신라인들은 보병과 기병을 하나로 결합시킨 보기일체병종전술의 효율성을 후대에도 잊지 않 고 있었던 것일까.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839년 윤 정월 대구 달구벌 평지에서 장보고의 군대 5천과 민애왕의 정부군 10만 63) 이 대치했다. 정부군은 20배의 병력 우 위에도 불구하고 절반이 넘는 전사자를 남기고 패했다. 64) 장보고의 병력은 보병 2천의 보조를 받는 기병 3천이었다. 65) Ⅲ. 통일기 騎 兵 增 設 과 그 기반 삼국사기 무관조( 武 官 條 )를 보면 나당전쟁기에는 물론 전후에도 신라가 급진적인 기병증 강을 단행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점 쓰에마스( 末 松 保 和 )와 이노우에( 井 上 秀 雄 )에 의해 이미 지 적된바 있다. 쓰에마스는 나당전쟁기인 672년 기병( 騎 兵 )부대 오주서( 五 州 誓 )의 창설을 신라의 주력군단 육정( 六 停 )에 기병의 빈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작업으로 보았다. 씨의 지적대로 오주 서와 육정의 군관조직은 중복되는 것이 없으며, 양조직을 합치면 구서당( 九 誓 幢 )의 그것과 거 의 같은 모습이 된다. 66) 이노우에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육정 중 왕경( 王 京 )에 주둔한 대당 ( 大 幢 )을 제외한 지방의 5개의 정( 停 )은 오주서의 주둔지와 거의 일치하며, 이보다 앞서 태종무 열왕( 太 宗 武 列 王 ) 원년( 元 年 654)에 창설된 계금당( 罽 衿 幢 )도 그 주둔지가 王 京 이므로 바로 대 당을 지원하는 기병부대( 騎 兵 部 隊 )라 한다. 67) 보병( 步 兵 )위주의 신라주력군단인 육정이 기병 부대 계금당과 오주서의 창설로 보완된 것이다. 특히 오주서의 창설시기가 나당전쟁기인 점을 고려해 본다면 양씨의 지적은 귀중한 암시를 주고 있다. 사실 나당전쟁기에 당은 대규모 기병을 동원했다. 671년과 672년에 황해도 평야지대에 나타 난 당장( 唐 將 ) 고간( 高 侃 )은 기병대장 출신이었으며 68) 당에 이끌려 남하했던 말갈족도 상당한 63) 삼국사기 권44, 김양전. 64) 삼국사기 권10, 민애왕 2년 윤 정월 조. 달구벌 전투에 대해서는 필자의 상세한 논고가 있다( 徐 榮 敎, 張 保 皐 의 騎 兵 과 西 南 海 岸 의 牧 場 震 檀 學 報 94, 2002). 65) 삼국사기 권10, 민애왕 원년 조. 66) 末 松 保 和, 新 羅 幢 停 考 新 羅 史 の 諸 問 題, 東 洋 文 庫, ) 井 上 秀 雄, 新 羅 兵 制 考 新 羅 史 基 礎 硏 究, 東 出 版, 東 京 (계금당은 著 衿 騎 幢 主 를 포함한 令 騎 兵 隊 大 鑑 - 少 監 - 火 尺 등의 군관조직을 가지고 있다) ) 舊 唐 書 卷 194, 突 闕 傳 侃 率 精 騎 追 車 鼻 獲 之
135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33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675년 9월 신라군이 매초성에 주둔한 이근행( 李 謹 行 )의 말갈군 에 승리한 후 3만필의 말을 노획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당( 唐 )이 거란( 契 丹 )을 동원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거란은 유목민족으로 당에 말을 공급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69) 신라의 기병증강은 당의 대규모 기병 내습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70) 그러나 기병증강은 그것이 절실하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목지( 牧 地 )와 말을 훈련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인간조 직이 필요하다. 과연 신라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현실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을까. 쓰에마스 이노우에는 이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고, 그 결과 말( 馬 )의 생산과 재생산의 현실적 토대와 관련된 중요한 기록을 간과해 버렸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9년 (669) 조에 보이는 174개의 목장 재분배 기사가 그것이다. 71) 재분배된 목장이 피분배자들의 배타적인 소유지가 되었는지 그 여부를 떠나,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목장의 재분배 비율에 있다. 174개의 목장은 왕실( 王 室 )이 22개, 관 ( 官 )이 10개, 대아찬 이상의 진골귀족이 68개 그 이하의 관등 소지자들에게 74개가 재분배되었 다. 왕실과 관( 官 )을 공적인 기구로 본다면 그것의 목장 수는 32개이며 나머지 142개는 모두 신라지배층의 것이다. 물론 174개의 목장이 당시 신라의 모든 목장이라 할 수 없다. 그래도 이는 백제점령 후 이루어진 것이기에 가장 큰 규모의 재분배였던 것이 확실하며, 그 중 왕실과 관의 분배비율은 전체의 18% 미만에 해당된다. 지속적이고 규모가 있는 기병증강은 범국가적 총력 집중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관과 왕실의 목장만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 이에 본고에서 먼저 신라의 기병증강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겠 69) 말이란 전쟁의 와중에서도 정기적인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풀을 뜯을 수 없다면 많은 수가 죽는 것이 일반적이며, 병참선을 통해서 공급받아야 한다(유병진 옮김, 1996 세계전쟁사, 까치, p.274 ; John Keegan, 1993 A History of Warfare). 70) 나당전쟁기에 당의 대규모 기병의 쇄도는 신라병제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신라는 唐 騎 兵 에 대항하기 위해 672년 對 騎 兵 長 槍 步 兵 인 長 槍 幢 을 조직했다. 六 停 九 誓 幢 13개 부대 예하에도 대기병 장창보병 黑 衣 長 槍 末 步 幢 을 어김없 이 설치하였다. 長 槍 戟 弩 弓 으로 무장한 長 槍 步 兵 은 지형에 따라 다양한 陣 을 구사하며, 원거리에서 질주해 오는 적 기병에 대하여 먼저 弩 나 弓 으로 사격을 가하여 그 숫자를 줄이고, 근접해 왔을 때 땅에 고정한 長 槍 으로 그 기동성 을 제거한 후 반격에 들어간다. 밀집되어 정지된 적 기병을 극으로 끌어내려 백병전에 돌입하는 것이다( 徐 榮 敎, 1998 新 羅 長 槍 幢 에 대한 新 考 察 慶 州 史 學 17). 그러나 長 槍 步 兵 에는 치명적이 약점이 있다. 기동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움직일 때 그 대열이 흩어지기 쉬워 이때 역습을 받으면 치명적이다. 장창보병부대는 수동적이고 기동 성이 떨어진다(R. Ernest Dpuy & Trevor N. Dupuy, 1970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Harper & Row Publishers, New York, pp.406~407. 참조.). 따라서 기병 없이는 어떠한 실질적인 공격이 불가능했고 적을 실질적으로 제압하기 어려웠다( Max Weber, 1968 Economy and Society, Bedminster press, Vol. 3, New York, pp.1151~1152. 참조). 나당전쟁기에 長 槍 步 兵 의 증강과 騎 兵 증강은 병행되었던 것이다. 71) 三 國 史 記 卷 6, 文 武 王 9 年 條.
136 134 학예지 제17집 다. 중고기의 기병규모에 대한 검토를 통해 672년 이후 신라의 기병증강이 얼마나 급진적이었 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촌락문서( 村 落 文 書 )에 보이는 말의 사육에 대하여 주목하고 이어서 174개의 목장 재분배에 대하여 검토했다. 그 내용은 신라촌락 각 연( 烟 )의 말 사육의 의미와 174개 목장의 위치 분배 대상 진골귀족의 가정조직에 등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과 정을 통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669년의 재분배가 어떠한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1. 기병( 騎 兵 )증강 과정 그러면 먼저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기병활동에 대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기록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중고기 신라의 기병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선행작업이라 생각된다. 1) 겨울 10월 백제가 또 구양성을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쫓아 보냈다( 삼국사기 권1, 탈해이사금 8년). 2) 봄 2월 가야의 적이 마두성을 포위함으로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천을 이끌고 공격하여 쫓아냈다 ( 삼국사기 권1, 파사이사금 15년). 3) 가을 7월에 몸소 가야를 정벌하였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 黃 山 河 )를 건넜다( 삼국사 기 권1, 지마이사금 4년). 4) 가을 8월에 일길찬 흥선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이끌고 그들(백제)을 치게 하고, 왕 또한 기병 8천명을 거느리고 한수로부터 그곳에 왔다(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14년). 5)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을 에워쌌다. 왕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가므로 가볍게 무장한 날랜 기병을 보내 그들을 추격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권 2, 조분이사금 3년). 6)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 風 島 )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삼국사기 권2, 흘해이사금 37년). 탈해이사금 8년(64) 겨울 10월의 대백제( 對 百 濟 ) 전투에 기병 2천을 동원했고, 파사이사금 15년(94) 봄 2월 대가야전( 對 伽 倻 戰 )에 1천, 지마이사금 4년(115) 가을 7월 대가야전에 보병과 기병( 騎 兵 )을 함께 동원하고 있다. 또한 조분이사금 3년(232) 여름 4월에 대왜( 對 倭 )전투에 기
137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35 병을 동원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고 있다. 삼국사기( 三 國 史 記 ) 초기 기록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신라가 이사금시대부터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하기 힘 들 것이다. 그러나 한편 아달라이사금 14년(167) 가을 8월에 군사 2만을 이끌고 그들(백제)을 치게 하 고, 왕 또한 기병 8천 명을 동원하여 한수( 漢 水 )에 진입했다는 기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2만의 병력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이토록 이른 시기에 8천 규모의 기병을 신라가 보유하고 있었 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다음의 기사는 참고된다. 7) 여름 4월에 왜의 군사들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되돌아 갔다 그러나 왕은 좌우의 말을 듣지 않고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뒤쫓아가 싸우다가 ( 삼국사기 권3, 눌지마립간 28년(444)). 신라가 어느 정도 국가의 모습을 갖춘 눌지왕 28년(444)에 이르러 신라는 수천의 기병을 보 유하고 있었던 것이 포착된다. 따라서 아달라이사금 시기(2세기)에 신라가 8천의 기병을 보유 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기록이 상당히 정확해진 진흥왕대에 와서야 신라는 5천 규모의 기병을 동원하고 있는 기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8)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이 되었 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 삼국사기 권4, 진흥왕 23년(562). 사다함은 562년 9월 대가야 정벌 시 기병 5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있 다. 당시 신라가 한강유역과 동북의 원산지역까지 확보하여 방어해야할 국경선이 늘어난 것을 감안한다면 기병 5천이 신라의 모든 기병 수를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그 이상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를 마지막으로 신라의 기병활동에 대한 기록은 신라본기( 新 羅 本 紀 )에서 사라진다. 진흥왕 이후 신라의 군대는 보다 확장되고 조직화된 것이 분명하며, 여기에 수반하여 기병의 증강도 충분히 상정할 수 있지만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72)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삼국사 72) 三 國 遺 事 卷 2, 紀 異 孝 昭 王 代 竹 旨 郞 條 에서 述 宗 公 이 朔 州 都 督 으로 부임해 가는데 騎 兵 3천이 호위했다. 물론 이는 죽지랑이 탄생하기 직전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중고기의 사실을 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138 136 학예지 제17집 기 무관조를 보면 진흥왕대 십정( 十 停 )의 창설을 출발점으로 하는 기병부대의 군제화가 진행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무관조에서 기병부대 설치와 증설과정을 살펴보자. 신라본기에 산견 되는 그것보다 기병부대의 창설 시기와 군관조직 그리고 군관의 구체적인 수를 전하는 무관조 가 오히려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물론 조직의 형태나 군관의 구체적인 숫자는 알 수 있지만 군관이 거느린 기병의 수는 모른다. 그러나 시기별 기병증강의 대체적인 추세는 알 수 있다. 십정은 순차적으로 설치된 것 같다. 삼국사기 권40, 직관지( 職 官 志 ) 무관조에 십정이 진 흥왕 5년에 모두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쓰에마스의 지적대로 당시 십정 모두가 설치 된 것은 아니었다. 73) 진흥왕 5년(544) 10정 창설은 당시 신라의 영토를 감안한다면 음리화정 ( 音 里 火 停 경북 상주) 삼량화정( 參 良 火 停 경북 달성) 소삼정( 召 參 停 경남 함안) 이화혜정 ( 伊 火 兮 停 경북 청송) 등 4개의 정이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74) 남천정( 南 川 停 경기 이천) 골내근정( 骨 內 斤 停 경기 여주) 벌력천정( 伐 力 川 停 강원 홍천) 등도 신라가 한강유역과 동해안의 함경남도지역을 차지한 진흥왕 14년(553) 이후에 설치되었 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과적으로 진흥왕대 만들어진 것은 7개의 정이었다. 십정의 1개 부대는 삼천당 조직을 제외하면 기병 대대감( 隊 大 監 ) 1인 기병 소감( 少 監 ) 2인 기병 화척( 火 尺 ) 2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술적으로 본다면 진흥왕 당시 신라의 기병군관은 35인이 된다. 물론 여기에 대하여 이론( 異 論 )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래의 <표2>를 보면 십정의 군관조직 은 령기병( 領 騎 兵 ) 대대감계열( 隊 大 監 系 列 )과 삼천당주계열( 三 千 幢 主 系 列 )로 이분( 二 庾 )되어 있다. 이노우에는 삼국사기 무관조에서 十 停 或 云 三 千 幢 이라 하여 십정의 부대들이 삼천당으 로 호칭된 것을 근거로 진흥왕 5년은 십정과 구별되는 삼천당의 설치연대로 보고 있다. 75) 이문 기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그는 십정이 변화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두 개의 군관직 체계가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보았다. 삼천당은 문무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그 성격 변화가 일 어나고 확대 발전되어 10곳의 지방에 주둔하게 되면서 십정군단으로 재편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기는 십정의 기병조직을 7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등장한 군조직으로 보고 있다. 76) 73) 末 松 保 和, 新 羅 幢 停 考 新 羅 史 の 諸 問 題, ) 金 崙 禹, 新 羅 十 停 과 所 在 地 名 變 遷 考 慶 州 史 學, 1988, 7, p ) 井 上 秀 雄, 新 羅 兵 制 考 新 羅 史 基 礎 硏 究, 1974, pp.191~192.
139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37 이노우에와 이문기의 견해를 따른다면 기록이 정확해진 진흥왕대의 사다함 5천 기병의 행방 이 묘연해진다. 진흥왕 당시 신라가 상당한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동왕대 영 토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지방의 군사적 거점에 기병부대 십정의 설치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 이다. 십정이 진흥왕 5년에 설치된 것으로 기록한 삼국사기 무관조의 기사를 부인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오히려 여호규의 지적대로 보병중심의 육정이 기병부대 십정 관련부대들을 군령권 속으로 포섭을 하면서 작전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77) <표1>를 보면 육정은 지극히 보병위주의 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정에 유일한 기병관계 군관인 보기당( 步 騎 幢 )도 일부 보병이 포함된 기병이었다. 이후 100년이 지난 태종무열왕 원년(654)에 가서 기병부대 계금당이 왕경에 창설되었다. 계 금당은 제감( 弟 監 ) 1인과 감사지( 監 舍 知 ) 1인에 기병 대대감 1인 기병 소감 1인 기병 화척 7인 저금기당주( 著 衿 騎 幢 主 ) 6인 저금감( 著 衿 監 ) 6인으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기병군관은 총 21인이었다. 기존의 십정 군관조직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기병증강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서 진평왕 13년(591)에 기병부대 사천당( 四 千 幢 )의 창설이 있었다. 하지만 저금기당주 3명과 그 부관인 저금감 3명으로 6인의 기병군관으로 구성된 점을 감안한다면 대규모 기병증강은 아니 다. 그런데 672 年 에 창설된 기병부대 오주서의 군관수는 총 67명으로 10정 35인, 사천당 6인 계금당 21인을 모두 합친 61인을 상회하고 있다. 우선 <표5>을 보자. 물론 이문기의 지적대로 청주( 菁 州 )와 완산주( 完 山 州 )는 문무왕 12년(672) 이전에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청주서( 菁 州 誓 )와 완산주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78) 672년 기 병부대 오주서 창설은 한산주서( 漢 山 州 誓 ) 우수주서( 牛 首 州 誓 ) 하서주서( 河 西 州 誓 )에 국한 된 규모였을 것이다. 또한 하서주서나 우수주서가 령기병 대대감계열(대대감-소감-화척)이 부 재한 각각 6명과 7명의 기병군관의 증설에 그쳤다. 그래도 삼국사기 무관조에 보이는 기병 군관의 증설과정을 감안했을 때 672년 오주서 창설은 기존의 기병 그것에 비해 파격적인 증설 이다. 나당전쟁 후 신문왕대의 기병증설은 더욱 급진적이다. 청주와 완산주가 완성되는 동왕대 청 76) 李 文 基, 三 千 幢 의 成 立 과 그 性 格 新 羅 兵 制 史 硏 究, 일조각, 1997, pp.130~ ) 1999년 2월 12일 숭실대 개최 한국고대사학회 약정 토론문( 한국고대사연구 16, 1999, p.221.) 78) 李 文 基, 三 國 史 記 職 官 志 武 官 條 의 內 容 과 性 格 新 羅 兵 制 史 硏 究, 1997, p.32.
140 138 학예지 제17집 주서와 완산주서가 설치되었을 것이고, 이 시기에 와서 구백제 영역에 위치한 십정의 고양부리 정( 古 良 夫 里 停 충남 청양) 거사물정( 居 斯 勿 停 전북 임실) 미다부리정( 未 多 夫 里 停 전남 나주) 등도 설치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9개 부대 중 7개가 672년 이후에 완성된 구서당은 각 부대에 령기병 대대감 3명 소감 6명 화척 6명, 저금기당주 18명 저금감 18명이 배치되어 있 다. 이는 총[( ) 8=408+장창당( 長 槍 幢 ) 기병 소감 3]= 411명의 규모로 오주서의 6 배 이상이다(<표4>). 79) 여기서 672년 이전에 창설된 록금서당과 자금서당의 그것을[( ) 2=102] 제외하 고 그 후에 증설된 기병 군관직을 계산해 보면 구서당 7개부대 306명의 기병군관이 증설되었 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오주서의 67명, 구백제 지역에 설치된 십정의 3개부대의 15명 등을 합산하면 총 452명에 이른다. 물론 452명은 기병군관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아래에 배속된 기병졸( 騎 兵 卒 )들을 고려해 본다면 엄청난 기병 수가 될 것이다. 실로 672년 이후에 신라의 기병증강은 가히 급진적이라 할 수 있겠다. 보병 위주로 이루어진 신라군은 기병에서 수적 양적으로 당군에 열세였다. 더구나 보병은 움직일 때 그 대열이 흩어지기 쉬워 이때 기병의 역습을 받으면 치명적이다. 보병은 수동적이 고 기동성이 떨어지며, 기병 없이는 어떠한 실질적인 공격이 불가능했고 적을 실질적으로 제압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672년 이후의 신라의 급진적인 기병증강을 가능하게 한 현실적 기반은 무엇인가. 물론 668년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많은 말을 노획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675년의 매초 성 전투에서는 노획된 3만여 필의 말이 신라 기병증강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던 것도 생각해 보 아야 한다. 매초성에서 말갈군을 지휘한 이근행은 당의 유주 출신이고 그의 병력들도 이 지역과 가까운 곳의 말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주지역의 말이 질이 좋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나당전쟁기에 참전한 기마민족 거란족의 말도 대규모로 동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시에 말 이란 소모품이며, 병참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아야 전쟁이 가능하다. 물론 거란 말의 질 79) 그렇다면 문제는 진평왕 5년(583)과 47년(625)에 창설된 九 誓 幢 의 綠 衿 誓 幢 과 紫 衿 誓 幢 이 그 당시( 中 古 期 )에도 騎 兵 軍 官 ( 令 騎 兵 隊 大 鑑 - 火 尺 - 少 監 과 著 衿 騎 幢 主 와 著 衿 監 )을 보유하고 있는지의 여부이다. 우리는 신라 최정예 군단 六 停 에 전문적 騎 兵 軍 官 ( 令 騎 兵 隊 大 鑑 - 火 尺 - 少 監 과 著 衿 騎 幢 主 와 著 衿 監 )이 전무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따라서 <표4>에 서 보이는 九 誓 幢 에 기병군관들이 문무왕 12년(672) 이전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 구서 당의 4개 부대는 六 停 과 거의 같은 보병위주의 편제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41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39 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관리하고 지속적으로 생산 보급할 수 있는 재생산 구조 없이는 말 노획이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신라 촌락문서에 보이는 말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 면 촌락문서에 보이는 말은 군용이며, 국가에서 각 호에 배정하여 사육시켰을 가능성을 타진하 는 견해 80) 가 일찍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문서는 최근에 695년에 작성된 것으로 판명된 바 있어, 81) 나당전쟁 후 신라의 말 사육 상황을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2. 촌락문서에 보이는 말 지금까지 촌락문서에 보이는 우마( 牛 馬 )의 수가 연( 烟 )과 인( 人 )의 수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 는 것이 지적이 있어 왔다. 사실 문서의 소 말의 촌락별 보유는 평균 13두를 넘는다. 4개 촌락 에 모두 우마가 사육되고 있다. 특수촌의 것인지 일반촌의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촌락 문서가 당시 신라사회가 마의 생산과 관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을 까. 문서에 보이는 말에 관한 기록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A촌. 말은 모두 25마리인데, 옛부터 있었던 것이 22마리이고, 지난 3년 사이에 加 한 말이 3마리이 다... 없어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보고하는 말은 모두 2마리인데, 모두 죽은 것이다. B촌. 말은 모두 18마리인데, 옛부터 있었던 것이 16마리이고, 지난 삼년 사이에 加 한 말이 2마리이다. C촌. 말은 모두 8마리인데, 옛부터 있었던 것이 4마리이고, 지난 삼년 사이에 加 한 말이 4마리이 다... 없어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보고하는 말이 모두 4마리인데 매여( 賣 如 )했다고 보고한 말이 3마리 이고, 죽었다고 보고한 말이 1마리이다. 80) 旗 田 巍, 新 羅 の 村 落 歷 史 學 硏 究, , pp.226~ ) 尹 善 泰, 新 羅 統 一 期 王 室 의 村 落 支 配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pp.19~47.
142 140 학예지 제17집 D촌. 말은 모두 10마리인데, 옛부터 있었던 것이다... 없어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보고하는 말이 3마리인데, 매여했다고 보고한 말이 1마리, 죽었다고 보고한 말이 1마리, 돌아가 버린 烟 이 가져갔다는 말이 1마리이다. 신라촌락문서에 보이는 말에 대하여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은 하타다 타가시( 旗 田 巍 )이다. 그는 말이 호구 다음의 순서로 전답 수목보다 더 중요시되었으며, 군용 외 교통 운수의 용도 를 가졌을 것이라는 점, 그 보유 상황이 과도한 감을 준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말의 소유관계 에 대해서도 D촌에 보이는 회연마( 廻 烟 馬 ) 등의 기록을 근거로 사유( 私 有 )의 가능성을 배제하 지 않았으나 모두를 사유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때 말은 군용이며, 국가에서 각 호에 배정하여 사육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82) 이점 明 石 一 紀 도 찬동하고 있다. 특히 明 石 에 의하면 말은 정수( 丁 數 )와 밀접한 비례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국가가 각 연에 사육시킨 것 다름 아니라 했다. 말의 용도는 군사 역역( 力 役 ) 에 한정되며, 회연마는 일단 사유마( 私 有 馬 )로 보고 이런 일부의 사유마도 사육 의무로 규정되 는 말의 수에 포함시켜 처리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말은 관마( 官 馬 )였으며 사유마가 있다고 해도 극히 소수였다는 것이다. 83) 하타다와 明 石 양씨의 견해는 695년에 작성된 것으로 확인된 신라촌락문서에 과도한 말 사육이 나당전쟁 후 신라의 급진적인 기병증강과 결코 무관 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필자의 추측과 부합된다. 여기에 반해 타께다( 武 田 幸 男 )는 촌락문서에 보이는 우마를 모두 사유로 보고 있다. 그는 문서기록상 말이 일방적으로 매출만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매수( 買 收 )의 주체를 국가기 관( 國 家 機 關 )으로 보고 加 馬 는 단순한 자연증가의 결과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에 의 한 장려정책이 그 이면에 있는 것으로 상정해 볼 수도 있다고 한다. 84) 씨는 여기서 더 이상의 상세한 검토는 하지 않았다. 타께다의 사유설에 대하여 전적으로 찬동하고 있는 연구자는 이희관이다. 그는 말들이 촌민 들의 역( 役 )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것은 역역과 군역( 軍 役 ) 어느 쪽과 관련이 있는지 또는 양자 모두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촌민들은 자신들에 부과된 역과 82) 旗 田 巍, 新 羅 の 村 落 歷 史 學 硏 究, , pp.226~ ) 明 石 一 紀, 新 羅 の 村 制 について 日 本 歷 史, 1976, 322, pp.28~29. 84) 武 田 幸 南, 新 羅 村 落 の 支 配 朝 鮮 學 報, 1976, 81, pp.106~109.
143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41 관련하여 국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만일 군역과 관련이 있다면 그 촌민들은 마병( 馬 兵 )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았다. 85) 이희관의 지적대로 말을 소유한 촌민들이 군역을 수행했다면 마병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탄 보병이지 마병은 되지 못한다. 대부분 농민이란 달리는 말 위에서 칼 창 활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아도 좋다. 그들은 말을 타고 이동 할 수 있을 뿐 말 위에서 전투할 능력이 없다. 기사( 騎 射 )란 어릴적부터 지속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이나 가능하다. 말을 가지고 역역을 수행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말을 다룰 줄 아는 기술은 농경사회에서 습득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그렇겠지만 지금도 젊은 馬 는 전문적 조련사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86) 농민들이 말 사육은 할 수는 있지만 말을 이용한 역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한편 이인철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수의 우마가 촌장적의 기재양식을 벗어나서 유출되거나 촌락장적에 파악되지 않는 듯 하다고 한다. 그는 A촌의 전식년의 말의 수가 22필로, 그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14필의 말이 성년 말이고, 다시 그 절반이 암컷이라고 가정을 한 후 다음 과 같은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말은 3살 이상이 되면, 매년 새끼를 낳으며, 따라서 매년 7필의 새끼 말이 증가하며, 그럴 경우 3년 동안 말의 증가수는 21필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촌락장적에는 감소 2필의 말을 더하더라도 증가한 수는 7필밖에 되지 않으며, 결과적 으로 감소한 사정을 기록한 말을 제외하고도 14필의 말이 행방불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행방불 명으로 파악된 우마는 국가에 공납으로 바쳐진 숫자가 아닐까 추측을 하고 우마의 징발은 6년 단위로 이루어졌고, 촌에 우마 증가율이 낮은 까닭은 전식년에 많은 수의 성년 우마들이 공납 으로 바쳐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소는 잡조( 雜 調 )로 바쳐지고, 말은 군마 혹은 역마( 驛 馬 )로 바쳐지거나 왕실에 바쳐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인철은 촌락에서 생산된 말은 농민들의 사유 인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국가 군마 혹은 역마로 국가에 조( 調 )로 바쳐진 것으로 보았다. 87) 촌락문서에 보이는 마가 잡마( 雜 馬 )가 아니고 군마나 역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엄선되 고 훈련된 동물이어야 한다. 따라서 숫말은 소수의 종마만 남기고 거의 대부분이 거세되며, 85) 李 喜 寬, 統 一 新 羅 土 地 制 度 硏 究, 一 潮 閣, 1999, pp.52~56. 86) 조선 숙종대 제주목사를 지냈던 李 衡 祥 의 증언을 들어보자. 山 馬 는 성질이 사나와서 巡 點 할 때에 4-5길 되는 큰 나무 를 역어서 울타리를 치고 5천명의 軍 卒 로 에워싸 몰아 넣었지만, 그 중 몇마리는 극히 사나워서 그 포위망을 무너뜨리 고 5길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 여러차례 순점하여 몰아넣어도 끝내 잡아 순점하지 못하니 이 말을 馬 王 이라 한다( 李 衡 祥, 南 宦 博 物 誌 牛 馬 ). 87) 李 仁 哲, 新 羅 村 落 社 會 史 硏 究, 일지사, 1996, pp.277~280.
144 142 학예지 제17집 좋은 암말만이 교배에 선택될 뿐이다. 암내를 풍기는 모든 암말을 임신시켰다고 보아서는 안된 다. 끊임없는 선택교배 없이는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양마를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A촌에 14마리의 말이 성년 말이고 그중 7마리의 암말이 해마다 임신을 해서 망아지를 놓았다고 보는 기계적이고 산술적인 가정은 명백한 오류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당전쟁기에 대륙의 대규모 양마 유입이 신라 말의 질을 상승시켰다 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신라는 양마의 질을 유지하기 위하여 본국의 키가 작은 토종마와 교배를 피했을 것이다. 촌락은 선택교배의 장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혈통이 좋은 종마와 교배 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목자들이 상주하는 목장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문서에 보이는 말의 경우 3년 동안 加 한 것을 말이 망아지를 출산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88) 촌락문서에서는 사람이 출산한 것을 三 年 間 中 産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89) 말이 망아지를 출산했다면 加 가 아니라 産 으로 표현해야 한다. 따라서 말의 加 했다고 한 것은 외부 에서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죽은 말이 4개 촌에서 4마리이고 매( 賣 )한 그것이 4마리이며, D촌에서 돌아가버린( 廻 去 ) 연 ( 烟 )이 1필을 가져가 버렸다. 문서에서 증가한 말은 모두 9필이지만 감소된 말 또한 9필에 달 한다. 3년 동안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제로다. 자연감소가 4마리이고 인위적 감소가 5마리이 다. 말을 인위적으로 유출시킨 것은 아마도 4개 촌락에서 말을 부양할 인력과 토지의 적정 수 준을 고려해서가 아닌가 한다. 4개의 촌에서 항상 52마리의 말을 사육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 된다. 한편 이태진은 문서의 촌락들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일찍부터 제기되었 기 때문에 669년의 목장 재분배 조치에서 왕실의 마거가 22개나 설정된 것은 문서의 촌락들의 말을 마거제도와 연관시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문서의 촌락들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木 村 誠 과 타께다 그리고 김기흥에 의해 일찍이 제기되었으며, 이러한 견해들을 일단 취하게 되면 의외로 많은 수의 말은 왕실 소유였다는 자연스러운 이해가 서게 된다는 것이다. 단 이러한 가정은 목마장과 촌락의 관계를 밝히거나 목마장 제도가 어느 시기 에 촌락별 사육방식으로 바뀌어갔는지에 대한 해명이 따라야 한다고 한다. 90) 88) 필자는 문서에 보이는 加 馬 를 망아지 출산을 통한 자연증가로 보는데 회의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말 그대로 촌락 외부에서 馬 가 들어와 加 해진 것으로 보고 싶다. 또한 賣 如 도 馬 가 외부로 나간 어떠한 정해진 형태로 보고싶다. 89) 가령 A촌의 경우 合 人 百 四 十 七 比 中 古 有 人 三 年 間 中 産 幷 合 人 白 四 十 五. 90) 李 泰 鎭, 新 羅 村 落 文 書 의 牛 馬 民 族 史 의 展 開 와 그 文 化 上 (이우성정년논총), 1990, pp.134~135.
145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43 이태진에 의하면 신라통일기 목마장은 해도에 많았다는 기존의 편견이 촌락내의 집단적인 말 사육을 누구도 상정하지 않게 했다고 한다. 고려사 병지 2, 마정 조를 근거로 하여 고려 중기까지도 해도보다 내륙에 목마장이 많았으며, 충열왕 이후에야 해도의 그것이 증대한다고 한다. 신라 통일기에 해도에 목마장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내륙 그것에 비해 소수였으며, 특히 공적인 인력에 의존하는 왕실마 관마 등의 경우는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원거리에 있는 해도보다 훨씬 유리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태진은 왕실의 목장이 처음부터 문서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형태였는지 아니면 당초 에는 별도의 목마장을 두었다가 나중의 어느 시점에 촌락내의 목마장 형태로 바뀌었다고 보았 다. 한마디로 말해 목마장은 해도 보다 내륙의 촌락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왕실직 속 촌락의 과다한 마 보유에 대한 그의 원인 해명이었다. 91) 그러나 이인철의 지적대로 문서에 보이는 촌락에 말이 많다고 하여 그곳을 목마장으로 보기 는 힘들다. 목마장이라고 하기에는 우마의 수가 너무 적다. 따라서 이들 촌의 말은 개별연이 사육했다고 보아야 한다. 92)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말은 정수와 밀접한 비례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국가가 각 연에 사육시킨 것 다름 아니라고 본 明 石 의 지적은 정당하다. 촌락을 목마장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장적에서 알 수 있듯이 문서에는 조련사를 염두에 둘 어떠한 인간에 대한 기록도 보이지 않으며, 촌락에 그러한 조련사가 있을리 만무하 다. 촌락에 있는 농민들이 말을 특히 전마( 戰 馬 )로 훈련시킬 수 있는 조련 기술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다. 농민들은 방목보다는 수확을 위해서 땅을 사용하기 때문에 말의 건강을 돌보고 살을 찌워 근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93) 촌락은 말을 먹이는 사육장에 불과한 것이다. 가까운 중국에서도 촌락에서 이루어진 관마의 의무적 사육은 보편적으로 존재했지만 대개의 경우 촌락 자체가 말을 생산하고 훈련시키는 목장의 역할은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문서에 보이는 말에 대한 기재상황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을 기록하는 항과 변동상황을 기록 하는 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마가 본래 얼마 있었으며, 후에 그것의 숫자가 어떻게 변동되었 91) 이태진이 촌락문서에 보이는 우마에 주목한 것은 촌락이 왜 그것의 과다한 수를 보유하고 있는지 해답을 얻기 위해서 였다. 그에 의하면 등급연( 等 級 烟 ) 당 소와 말이 각각 두 마리에 가까운 보유량은 어느 시대에도 일반적인 것이 되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되며, 이러한 실태는 특수한 것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이태진 앞의 논문). 92) 李 仁 哲, 新 羅 村 落 社 會 史 硏 究, 일지사, 1996, p ) 충열왕 2년(1276) 기마민족인 몽고가 일본정벌을 위하여 제주에 목마장을 건설하고 몽고의 말과 조련전문가인 목호( 牧 胡 )를 보내와서 목장을 운영한 후 고려의 말 조련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한다( 南 都 永, 朝 鮮 牧 子 考 東 國 史 學, 1965, 8, pp.32~33.).
146 144 학예지 제17집 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놓았으며, 그것은 일일이 보고되었다. 말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고체계는 보고를 받는 쪽의 강한 소유의식에 따른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말의 사육은 농민들에게 의무로 부과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94) 그것도 외부의 목장에서 이미 훈련된 말을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목장에서 훈련된 말이 촌락으로 옮겨져 그야 말로 단순히 사육되었고,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철저히 관리되었던 것이다. 문서에 보이는 말은 군용이며, 국가에서 각 호에 배정하여 사육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 하타다와 明 石 의 지적은 정당하다. 무엇보다 필자는 하타다의 선입관 없는 통찰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당전쟁이후 급진적인 기병증강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촌락민들에 대 해 馬 의 위탁사육을 시켰을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목장에서 생산된 말이 신라국가의 기병부대에 배치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모두 사육하고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현 대의 기름을 먹는 기계장비들은 격납고에 보관할 때 기름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있는 짐 승은 죽을 때까지 계속 먹는다. 따라서 국가는 일반 촌락의 농민들에게 말 사육의 의무를 부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태진은 문서의 촌락이 의외로 많은 수의 우마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직속촌락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이점에 대해서 반대할 의사가 전혀 없으며, 문서에 보이는 말들이 왕실의 소유라는 점을 인정해 주고 싶다. 하지만 당시 신라에서 왕실 직속촌만이 많은 수의 우마를 소유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신라 전 국토에는 통일기에 급진적으로 증강된 오주서, 십정 등의 기병부대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기병을 유지하기 위한 말 사육 역시 신라 전 국토 에 있는 신라 일반촌민들 부담을 요구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왕실직속 촌락의 말 보유와 왕실 목장 22개를 상호 연관지어 본다고 해도 95) 그렇다. 669년 목장재분배기사를 보면 신라에는 왕실직속의 목장 22곳 외에 신라지배층에게 속한 그것이 152 개나 더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촌락문서가 왕실목장에서 생산된 전마나 역마가 왕실직속 촌락에서 사육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왕실목장보다 절대다수가 많은 다른 목장들이 존재 하는 한 신라 일반 촌락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부에서는 상당수의 말이 사육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94) 旗 田 巍, 新 羅 の 村 落 歷 史 學 硏 究, , pp.226~ ) 李 泰 鎭, 新 羅 村 落 文 書 의 牛 馬 民 族 史 의 展 開 와 그 文 化 上 (이우성정년논총), 1990, pp.134~135.
147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45 촌락의 말 사육과 목마장에서의 말 증식 훈련 양자의 관계를 밝히는데 있어 669년 174개의 목장( 馬 阹 ) 재분배 기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의 재생산 구조는 통일기 급진적인 기병증강 은 물론 그것을 유지시키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통일 후 신라의 대규모 기병증강과 목장의 확 대 그리고 촌락의 마 사육은 서로 무관하다고 생각 할 수 없다 년 목장재분배와 진골귀족의 가정조직 1) 목장의 위치 앞장에서 신라의 기병증강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말이 재생산되는 목장( 馬 阹 )의 위치, 마 거의 재분배 대상, 나아가 나당전쟁 이후 급진적인 기병증강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고찰해보 자. 669년의 목장 재분배기사는 다음과 같다. 領 馬 阹 凡 一 百 七 十 四 所, 屬 所 內 二 十 二 官 十 賜 庾 信 太 大 角 干 六 仁 問 太 角 干 五 伊 湌 五 人 各 二 蘇 判 四 人 各 二 波 珍 湌 六 人 大 阿 湌 十 二 人 各 一 以 下 七 十 四 所 隨 宜 賜 之 ( 三 國 史 記 卷 6 文 武 王 9 年 ) 여기서 174개의 목장은 적어도 지금의 남한 지역의 도서지방을 모두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수의 목장 분포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증보문헌비고 에도 총 171곳이 보인다. 이것도 서남해안 거의 모든 도서를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96) 신라의 174개 목장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97) 174개의 대규모 목장의 확보는 백제지역의 점령이 가져다 준 결실이 아니고 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일승 엔닌( 圓 仁 )의 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846년 9월 일승( 日 僧 ) 엔닌( 圓 仁 )은 무주( 武 州 전남) 도서( 島 嶼 )지역에서 신라 제3 재상( 宰 相 )과 내가( 內 家 )의 목장을 목격한 바 있다. 9) 오전 6시 경에 무주 남쪽 황모도 개펄에 배를 대었는데, 이곳은 구초도( 丘 草 島 )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신라의 제3 재상이 말을 키우던 곳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 847년 9월 6일). 96) 물론 조선시대 목장은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를 포함하는 것이며, 이렇게 볼 때 문무왕대 분배된 목장의 수가 너무 방대한 느낌도 준다. 그러나 당시 분배된 174개소의 목장이 서남해안 島 嶼 는 물론 신라본토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무리도 아니다. 97) 南 都 永, 韓 國 馬 政 史, 한국마사회, 1996, p.229.
148 146 학예지 제17집 10) 오전 6시 경에 안도에 머물러 잠시 쉬었다. 이곳은 신라의 남쪽지방으로서 왕실( 內 家 )의 말을 기르는 산이다( 입당구법순례기 847년 9월 8일). 9년간 당에서 체류한 일승 엔닌은 재당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엔닌 일행의 출발지는 산동반도의 적산포였고, 몽고에서 늦가을에 불어오는 북서풍을 타고 신 라의 서남해안을 지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중대말( 中 代 末 )의 사실을 전하는 98) 신당서 권220 을 보아도 신라재상가( 新 羅 宰 相 家 )는 축목해중산( 畜 牧 海 中 山 ) 이라하여 신라 도서지방 목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초원에서 목축하는 것을 봐왔던 당나라 사람들에게 다도해( 多 島 海 ) 지 방의 목축이 특이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특기했을 것이다. 신라가 서남해안의 섬을 목장으로 사용한 증거는 또 있다. 삼국사기 권43, 김유신전( 金 庾 信 傳 ) 하를 보면 성덕왕( 聖 德 王 )이 김유신의 적손( 嫡 孫 ) 윤중( 允 中 )에게 절영산( 絶 影 山 ; 釜 山 影 島 )의 말 한 필을 하사한 기록이 보인다. 부산시( 釜 山 市 ) 영도구( 影 島 區 )가 신라 왕 실의 목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 669년 목장 재분배는 신라가 백제지역을 병합한 후 이루어졌다. 사실 통일 이전 신라의 서해 안 도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치라 목장으로 사용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절영산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경상도지역의 남해안 도서지역에는 신라가 목장 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와 같은 대규모 목장의 확보는 백제지역의 점령이 가져다 준 결실 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며, 이 목장들은 주로 무주(전남 도서)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해안에 위 치해 있었을 것이다. 2) 재분배 대상 그 사여 내용을 보면 소내( 所 內 )에 22개소, 관( 官 )에 10개소, 김유신과 김인문을 비롯한 대아찬 이상의 진골귀족들에게 68곳이 부여되었고, 나머지 74개소는 수의사지( 隨 宜 賜 之 ) 되었 다. 그렇다면 74개소의 목장은 어떤 사람들에게 분배되었을까. 669년의 목장( 馬 阹 ) 재분배( 再 庾 配 ) 기사에서 분배의 기준이 관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아찬 이상에게 68곳이 부여되었다. 나머지 74개소는 아찬 이하의 관등 소유자에게 분배되었을 공산이 크다. 그들의 신분은 6두품 98) 今 西 龍, 新 羅 骨 品 考 新 羅 史 硏 究, 1933, p.198. 李 基 東, 新 羅 金 入 宅 考 新 羅 骨 品 制 社 會 와 花 郞 徒, 한국연구원, 1980, p.203.
149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47 이하의 귀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33, 잡지2 옥사( 屋 舍 )에 마구간의 크기에 대한 규정을 보면 6두품 이 하의 귀족들이 목장을 소유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육두품( 六 頭 品 )은 말 5마리, 오두품( 五 頭 品 )은 말 3마리, 사두품( 四 頭 品 )에서 백성( 百 姓 )까지는 말 2마리 이상을 넣을 수 있는 마구간을 지을 수 없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진골( 眞 骨 )귀족에 대한 제한규정은 없다. 이는 하대의 기록이지만 진골귀족 만의 독점적 목장 소유와 관련하여 귀중한 단서가 된다. 다시 말 해 나머지 74개의 목장도 아찬 이하의 진골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는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 주 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진골귀족만이 목장사여의 대상이 되었을까? 목장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가 그 사여 대상을 결정했던 것은 아닐까.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가장 많은 목장이 분배된 내성( 內 省 )의 경우 공봉승사 供 ( 奉 乘 師 )나 본피목숙전( 本 彼 苜 蓿 典 ), 한지목숙전( 漢 祗 苜 蓿 典 ) 등 말을 관리하는 조직이 있었 기 때문이다. 또한 10개의 목장을 분배 받은 官 의 경우도 그 관리부서 승부( 乘 府 )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중고기( 中 古 期 )의 녹읍( 祿 邑 ) 사여 대상을 진골귀족으로 한정해서 본 노태돈 의 지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중앙에 고위관등을 가진 귀족관료들은 자신의 독자적인 수취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한다. 99) 이는 전덕재에 의해 보강되었다. 그는 고 려사 권2, 태조 17년조의 녹읍기사를 근거로 들어 녹읍을 지급받은 관리들은 가신( 家 臣 )이나 노비( 奴 婢 ) 등 그와 사적( 私 的 )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 수취하였으며, 이러한 조건을 구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진골귀족에 한정된다고 했다. 100) 녹읍에 관한 것이지만 이점 목장 운용과 관련하여 필자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앞서 잠시 언급한 다음의 사료를 다시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중대말의 상황을 전하는 신당서 권202의 기사 101) 를 보자. 는다.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고 노동( 奴 童 )이 3천 명이며 갑병( 甲 兵 ), 소, 말, 돼지의 숫자도 이에 맞먹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서 목축하고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잡는다. 99) 盧 泰 敦, 統 一 期 귀족의 經 濟 基 盤, 韓 國 史, 3, ) 全 德 在, 新 羅 祿 邑 制 의 性 格 과 變 動 에 관한 연구 역사연구 1, 구로역사연구소, 1992, pp.20~ , 2000 新 羅 時 代 祿 邑 의 性 格 韓 國 古 代 史 論 叢 10, 한국고대사회연구소, ) 李 基 東, 新 羅 金 入 宅 考 新 羅 骨 品 制 社 會 와 花 郞 徒, 한국연구원, 1980, p.203.
150 148 학예지 제17집 여기서 말하는 재상가는 이기백의 지적대로 진골 이상 중앙의 대귀족을 가리키는 것이 며, 102) 이 자료에서 목장과 이것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인간조직 그리고 여기서 재생산되는 가 축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노동( 奴 童 ) 3천은 진골귀족의 가정에 예속된 노동력임에 틀림 이 없다. 진골귀족이 목장을 소유하고 있는 한 노동 가운데는 말을 훈련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 권82, 병지3을 보면 고려의 목장조직은 목감( 牧 監 ) 노자( 奴 子 )의 구조로 되어있 는데, 노자( 奴 子 ) 1명은 4필의 말을 생산 관리하고 훈련시키는 책임이 있었다고 한다. 남도영 의 지적대로 고려의 목감제는 당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다. 구당서 권44, 직관3을 보면 목감이 상중하 3개로 나뉘어 지고 있고, 상목감은 5천필, 중목감은 3천필 이상, 하목감은 1천필 이상의 말을 책임지고 있었다. 4필 단위로 奴 子 1인을 배정한 것을 고려한다면 제( 諸 )목감은 1250명에서 250명에 이르는 노자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03) 신라의 경우 목장이 진골귀족에게만 사여된 것은 그들만이 그것을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규모의 인간조직( 奴 童 )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목민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사육하는 가축 외에도 말과 낙타와 개를 기르고 있 다. 이들의 역할은 양이나 소처럼 식량이나 의류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고 목축 일을 돕는 것이 다. 이 보조적인 동물은 유목민의 걸작품이다. 말, 개, 낙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유목민의 놀라운 재주는 발휘되지 않는다. 양이나 소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다만 길들이기만 하면 되지만, 말, 개, 낙타는 길들일 뿐만 아니라 훈련을 시켜야 한다. 비인간적 협력자를 길들 일 뿐만 아니라 훈련시키는 기술의 개발은 유목민의 최대의 업적이다. 104) 이 유목민의 기술을 정주사회에서 소유하고 있는 계층은 최상층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 105) 669년 신라국왕은 왕실 관 신라지배층에게 말의 재생산 기반인 174개의 목장을 재분배했 다. 106) 목장이 피분배자들의 배타적인 소유지가 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여기서 문제의 핵심 은 그 재분배 비율에 있다. 후술한 바와 같이 174개의 목장은 왕실이 22개, 관이 10개, 대아찬 102) 李 基 白, 新 羅 私 兵 考 歷 史 學 報 9, 李 基 白, 新 羅 政 治 社 會 史 硏 究, 1974, p.256. 金 哲 俊, 新 羅 貴 族 勢 力 의 基 盤 人 文 科 學 7, 서울대, 金 哲 俊, 韓 國 古 代 社 會 硏 究, 1975, pp.223~ ) 南 都 泳, 朝 鮮 時 代 濟 州 道 牧 場 韓 國 史 硏 究 4, 1969, p ) 토인비 著, 길현모 외 옮김, 歷 史 의 硏 究 3, 동서문화원, 1974, pp.46~ ) John Ellis, CAVALRY-The History of Mounted Warfare, G. P. Putnam`s Sons, New York, 1978, pp.19~21. 참조. 106) 三 國 史 記 卷 6, 文 武 王 9 年 條.
151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49 이상의 진골귀족이 68개 그 이하의 관등 소지자들에게 74개가 재분배되었다. 왕실과 관을 공 적인 기구로 본다면 그것의 목장 수는 32개이며 나머지 142개는 모두 진골귀족의 것이다. 672년 이후 신라의 452명에 해당되는 기병군관조직의 급진적인 증강은 말을 재생산할 수 있는 다수의 목장을 가진 진골귀족들의 기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452명은 기병조직을 이끄는 군관들의 숫자만 해당되는 것이고 일반 기병 병졸로 환산한다면 엄청난 숫 자가 될 것이다. 말이란 그것을 사육 생산하는데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며, 훈련기간도 상당 하다. 107) 말이란 짐승의 능력을 수준급으로 높이는 기술이란 전문성을 요한다. 108) 신라 중앙 官 이 통 일 후 엄청난 규모의 기병증강에 필요했던 전마를 생산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충분한 수의 조 련사 조직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말을 훈련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인력의 확충 은 일반인을 일정기간을 징발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목축은 물론 말을 조련하는데 몸이 단련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능한 조련사란 하 루아침에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기능을 가진 인력을 지속적으로 官 이 모두 부양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문제다. 진골귀족이 소유하고 있었던 전문기술집단에 대한 이성시( 李 成 市 )의 견해를 들어보자. 그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진골귀족은 풍부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수요를 위한 공방을 소 유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그들은 각각 가정기관을 갖추고 많은 사람을 거기에 예속시켰다 고 한다. 또한 그는 그 가운데는 어떤 특정 진골귀족은 왕실의 내정( 內 廷 )에 견줄 수 있는 기구 를 보유하기도 했다고 보고 있다. 그 가정기관에는 국가적 사업에 참여할 정도로 유능한 공장 ( 工 匠 )이 소속되어 있었고 관영 혹은 공적 공방( 工 房 )에 결코 뒤지지 않은 역량을 갖추고 있었 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종 조를 보면 황룡사의 범종을 이상택( 里 上 宅 )의 하전( 下 典 )이 주조했음을 전해준다. 이찬 효정( 孝 貞 )의 공장( 工 匠 )이 국가적 대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 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109) 이는 물론 공방에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107) Chang Chun-Shu, 1966 Military Aspect of Han Wu-Ti`s Northern and Northwestern Campaigns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26, Harvard-Yenching Institute Cambridge Massachusetts, p.168. 참조. 108) Chauncey S. Goodrich, 1984 Riding Astride and the Saddle in Ancient Chin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4. 2, Harvard-Yenching Institute Cambridge Massachusetts, pp.279~304. 참조. 109) 李 成 市 著, 김창석옮김,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청년사, 1999.
152 150 학예지 제17집 3) 나당전쟁의 여진( 餘 震 )과 군비확장 필자는 신라의 174개 목장을 분배받은 왕실 관 진골귀족 등이 전마의 생산과 재생산을 공 유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싶다. 진골귀족들이 기른 말들이 군사용 말로 활 용된 직접적 증거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통일 후 단행된 급진적인 신라국가의 기병증강과 대규모 목장의 확충이 상호 무관하다고 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통일전쟁기에 신라가 자국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징수한 재원은 말할 것도 없고, 당군에 대한 엄청난 물자보급은 신라국 부( 國 富 )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의 참여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했다고 생각되 며, 나당전쟁 이후의 급진 기병증강 또한 그러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던 총력전 수행과정에서 이미 배태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후에도 신라가 왜 급진적인 기병증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당전쟁의 종 결은 휴전에 불과했다. 결코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약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당의 재침의 우려는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여기서 나당전쟁의 여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당전쟁 후 당의 재침은 결코 없었다. 따라서 당시를 긴장이 없는 평화기로 상정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를 놓고 본 편견의 결과이다. 당은 당시 어디까지나 세계 최강국으로 건재해 있었고, 당이 신라조정에 가한 압력으로 상당시 간 동안 신라전체가 떨었고, 두려워했다. 나당전쟁이 결코 재발되지 않았다고 해서 나당전쟁 후 바로 평화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그 결과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후세의 관점만 내세우면 잘못 판단하 기 쉽다. 결과만을 보고 그것에 맞는 것만 찾는 것은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거의 25년에 걸쳐 서 신라조정과 당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은 약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볼 때 아슬아슬한 것이었 다. 당 고종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678년 9월에 其 後 新 羅 外 叛, 高 宗 將 發 兵 討 除 라 한 구당서 권85, 장문관전( 張 文 瓘 傳 )의 기록은 이를 단적 으로 말해준다. 그 이듬해인 679년에 나당전쟁의 정신적 귀의처였던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 이는 당의 재침 우려가 신라사회에 팽배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110) 신문왕 3년(683)에 고구려인으로 황금서당, 말갈인으로 흑금서당을 창설했고, 동왕 5년(685) 110) 田 村 圓 澄, 文 武 王 と 佛 敎 黃 壽 永 古 稀 美 術 史 學 論 叢, 통문관, 1988, pp.457~462.
153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51 에 경남 합천 주둔 하주정을 완산주정으로 개칭해서 백제지역인 전주로 전진 배치했으며, 이듬 해인 동왕 6년에 적금무당을 설치하고, 보덕성민(고구려인)으로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을 창설 하였다. 동왕 7년에는 황금무당을 설치하였고, 백제 잔민( 殘 民 )으로 청금서당을 창설했으며, 동왕 9년에 지금의 서울, 춘천, 강릉지역에 삼변수( 三 邊 守 )를 두어 북변의 방어를 강화했고, 개지극당( 皆 知 戟 幢 )을 설치하여 對 기병 방어체제를 보강했다. <표4>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문왕 당대 5년 사이의 구서당 5개 부대(황금, 흑금, 적금, 벽금, 청금서당)의 증설은 군관 숫자만을 놓고 보더라도 신라의 주력군단 육정( 六 停 ) 전체의 그것과 맞먹는 규모이다. 이는 당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신라지배층사회의 의지가 없이는 불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대규모 기병증강도 그 일환의 하나였다. Ⅳ. 하대 장보고의 騎 兵 과 島 嶼 목장 836년 후사가 없던 흥덕왕이 왕위계승에 대한 아무런 유언도 없이 죽자, 왕위를 놓고 근친왕 족 간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김우징의 父 인 김균정은 왕위계승의 유력한 후보자였지만 왕궁 에서 벌어진 분규 과정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왕위는 김재륭( 僖 康 王 )에게 돌아갔고, 김우징은 837년 2월에 패잔병을 이끌고 청해진에 망명했다. 838년 1월에 김명이 희강왕을 자진케 하고 閔 哀 王 으로 즉위하자 장보고는 군사를 일으켜 838년 12월에 왕경으로 진격하였으며, 다음 해 1월에 달구벌에서 민애왕의 정부군을 격파하였다. 그런데 달구벌 전투에서 주목되는 것은 장보고의 군대가 민애왕의 정부군에 비해 현격하게 적은 숫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는 점이다. 111) 즉 장보고의 병력은 5 千 이었고, 민애왕의 정부군은 10만이었는데, 장보고군이 절대 다수의 정부군을 격파한 것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병력 숫자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즉 김주 성은 장보고의 군대 규모가 너무 적게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고, 권영오는 민애왕 정부군의 숫자가 사실보다 너무 많게 기록된 것으로 생각했다. 서륜희도 정부군의 숫자에는 약간의 과장 이 있다고 보았다. 112) 111) 三 國 史 記 卷 44 金 陽 傳 ( 從 兄 弟 昕 ).
154 152 학예지 제17집 권영오는 장보고의 군대가 아무리 잘 훈련되었다고 하더라도 10만의 군대를 궤멸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달구벌 전투에서 민애왕이 동원할 수 있었던 군대는 公 兵 인 신라 전체 병력 10만이 아니라 자신의 측근과 사병이었을 것이고, 그 숫자는 장보고의 병력 (1만)을 상회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한다. 113) 반면 김주성은 10만의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상식이라 한다. 지휘관의 역량을 감안하더라도 상대방에 비해 병력이 형편없이 적다고 하면 중과부적으로 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떨어지는 것이며, 공격을 하는 쪽은 방어를 하는 쪽에 비해서 군사학상 3배의 전력을 가지고 있어야 승리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는 828년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 당시 1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지만 839년에는 10여 만으로 증가하였을 것으로 논단하고 있다. 114) 김주성의 지적대로 방어는 상대방 병력의 1/3로도 가능하며, 공격하는 측은 방어하는 측의 3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또한 권영호의 언급대로 10만이 5천의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면 누 구나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 가진 無 知 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역사학자는 기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능한 기록을 사실로 보고 현재의 상식을 의심하면서, 그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역사학의 정도일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장보고가 보유했던 騎 兵 3천 에 주목하고 싶다. 장보고의 기병 3천은 삼국사기 권10, 민애왕 2년(839) 정월 조와 동서 권44 김양전에 보 인다. 하지만 그 존재에 대하여 지금까지 주목한 연구자는 없었다. 그것은 장보고를 생각할 때 바다의 모습이 상기된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항상 해적을 소탕한 영웅이며 상업제국을 경영 한 무역왕으로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사실 장보고는 9세기 전반기에 청해진을 본거지로 하여 해상에 밝은 現 地 人 들을 결집 훈련 시켜 해상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山 東 半 島 일대와 淮 河 유역의 여러 도시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신라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해양의 패자라는 강한 이미지는 그의 112) 서륜희는 이점 청해진이 군대가 그 만큼 강력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에 의하면 騎 兵 3천의 존재는 청해진이 단지 해상활동만을 위한 곳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徐 侖 希, 淸 海 鎭 大 使 張 保 皐 에 관한 연구, 震 檀 學 報 92, 2001, p.20.). 113) 權 英 五, 新 羅 下 代 왕위계승분쟁과 閔 哀 王, 한국고대사연구 19, 2000, pp.290~ ) 김주성, 張 保 皐 세력의 흥망과 그 배경, 韓 國 上 古 史 學 報 24, 1997, pp.164~170.
155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53 기병을 망각케 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삼국사기 권44, 김양전을 보면, 839년 1월 장보고의 반정부군이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경 에 입성하여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영( 徇 )을 내렸다. 그것을 직접 집행한 것은 김양의 명을 받 은 기병( 左 右 將 軍 領 騎 士 )이었다. 장보고의 기병은 승리한 점령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 실체 였던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훈련이 잘 된 기병의 위력을 새삼 알게 되었다. 전근대 세계에서 훈련된 기병은 單 騎 라도 그 위력은 대단하였고, 더욱이 百 騎 千 騎 萬 騎 로 편재되 면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115) 839년 장보고의 달구벌 전투 대승은 이러한 기병의 위력을 고려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먼저 839년 달구벌 전투의 상황을 복원하고, 이어 서남해안 다도해지역의 환경과 장보 고가 기병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에 대하여 고찰해 보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전히 베일에 가려졌던 장보고 초년의 생애가 해명될 것이며, 나아가 청해진 군사력의 구체적 부양 형태가 밝혀질 것이다 년 達 丘 伐 전투 민애왕 정권의 몰락 본장의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달구벌 전투에 참가한 장보고 군대의 숫자와 그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라 정부군과 장보고 군대의 전력 비교를 보다 정확히 하기 위해서다. 838년 12월 장보고는 친구 정년에게 강병 5천을 나누어주어 민애왕 정부를 타도케 했다고 한다. 강병 5천 은 삼국사기 권10, 민애왕 원년조, 동서( 同 書 ) 권44, 김양전 장보고전에도 동일하게 기록되 어 있다. 장보고 군대의 기병보유 숫자는 삼국사기 권44, 김양전에 3천으로 나와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838년 12월 신라의 州 大 監 김민주가 철야현 북쪽에서 장보고의 군대를 저지하려 하자 (장보고의) 장군 낙금 이순행이 馬 兵 3천으로 저쪽의 軍 中 에 돌격해 들어가 거의 다 살상하였다 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839년 왕경으로 진군한 장보고의 병력은 5천이며, 그 중 3천이 기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정부군의 구체적인 숫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44, 김양전의 부 김흔에 명기되어 115) 杉 山 正 明 著, 이진복 譯, 유목민이 본 세계사, 학민사, p.34.
156 154 학예지 제17집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개성 기미년 윤정월에 (김흔은)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전하였다 고 하여 민애왕 정부가 동원한 병력이 10만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장보고군 5천과 정부군 10만이 격돌한 839년 閏 正 月 달구벌로 시야를 돌려보자. 그것 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10, 민애왕 2년 조와 동서 권44, 김양전에 나와 있다. 2년 윤정월에 김양의 군이 주야를 행군하여 19일에 달구벌의 땅에 이르렀다. 왕은 병사가 닥침을 듣고 이찬 대흔, 대아찬 윤린, 억훈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게 함에 김양의 군은 또 이와 한 번 싸워 크게 이기니 王 軍 의 죽은 자가 반수 이상이었다(민애왕 2년 조). 개성 4년 정월 19일에 군사가 대구에 이르니, 왕이 군사로써 맞이하고 항거함으로 이를 역습하여 이기니, 왕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고 생포와 참획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김양전). 위의 내용으로 전투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10만의 정부군은 수적인 절대우세 에도 불구하고 장보고의 강병에게 한번의 결전에 괴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 까. 六 韜 에 의하면 騎 兵 이 조직적인 대열( 陣 )을 이루고 평지에서 전투를 할 경우 1 騎 의 전력 은 步 兵 8 人 의 전력에 필적하며, 산악 지형이다 하더라도 1 騎 는 步 兵 4 人 에 필적한다 고 한 다. 116) 달구벌 전투의 무대가 평지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장보고 기병 3천은 정부군 2만 4천 을 필적할 수 있는 전력이 된다. 그렇다면 8만 6천의 정부군은 장보고의 보병 2천이 상대했다 는 말인가? 산술적으로 계산할 때 장보고의 군대는 도저히 중과부적으로 정부군을 당할 수 없 다. 권영호의 지적대로 10만 이란 숫자 자체에 의심을 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농민들을 동원 한다면 10만 규모의 군대를 징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통일 후 163년의 평화는 신 라의 인구 증가를 담보했다. 117) 무엇보다 당시 신라정부는 농민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 116) 조강환 譯, 六 韜 三 略, 자유문고, 1995, pp.217~ ) 838년 3월 장보고 군대가 남원을 함락시킨 직후부터 민애왕 정부가 경상도 일원에 있는 농민들을 징발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들을 징발하고 대구에 집결시키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며, 농민들은 훈련을 받을 시간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민애왕과 그 휘하의 귀족들이 가진 사병들은 전투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은 소수였다.
157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55 다. 永 川 菁 堤 碑 貞 元 修 治 記 를 보면 元 聖 王 정부는 798년 菁 堤 修 治 時 전국의 法 功 夫 14,140명 을 동원한 바 있다. 118) 그렇다면 육도 에서 말하는 1기는 평지에서 8인의 보병에 필적한다는 산술적인 계산에 대 하여 재검토해 보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병이 조직적인 대열( 陣 )을 이루었다 라는 표현 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어떠한 필요 조건이 내재되어 있다. 사실 육도 에는 기병대가 조직적인 陣 을 쳐 싸우지 않고 되는대로 흩어져 싸운다면, 한 騎 의 힘은 步 兵 한 사람의 힘조차 당하지 못한다 라 하고 있다. 119) 육도 에서 말하는 기병은 훈련이 된 그것이다. 오히려 훈련이 잘된 보병의 陣 法 활용은 그 수에 필적하는 騎 兵 을 전멸시키기까지 한다. 삼 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5, 동천왕 20년(240) 8월 조를 보자. 가을 8월에 魏 나라에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만 여명을 거느리고 현토로 나와서 침입하였다. 왕이 보병, 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 강가에서 맞받아 싸워 그를 쳐부수고 적군 3천 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인솔하여 양맥 골짜기에서 싸워 또한 적군을 쳐부셔 3천 여명을 죽이고 붙잡았 다. 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사가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 같지 못하 며 관구검은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아귀 속에 있구나 하고 곧 鐵 騎 5천 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쳤다. 관구검이 方 형으로 陣 을 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1만 8천 여명이었다. 왕이 1 千 餘 騎 를 이끌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위의 사료에서 알 수 있듯이 관구검의 위나라 군대 1만 여명은 비류수에서 3천, 량맥에서 3천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 것을 감안하면 方 陣 을 펴서 싸울 당시 5천이 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方 陣 을 치고 조직적으로 저항한 魏 의 군대가 고구려 기병 4천과 보병 1만 4천을 전멸시켰다. 魏 軍 은 陣 法 에 의해 철저히 훈련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陣 法 이란 본래 보병이 기병을 제압하는 기술이 담겨 있다고 한 다. 120) 그렇다면 장보고 기병과 민애왕 정부군의 승패의 원인은 양군의 훈련상태 차이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정부군 10만은 陣 法 훈련을 받은 정예병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기백의 지적대로 118) 李 基 白, 永 川 菁 提 碑 貞 元 修 治 記 의 考 察, 考 古 美 術 102, 1969: 新 羅 政 治 社 會 史 硏 究 일조각, 1974, pp.293~ ) 조강환 譯, 六 韜 三 略, pp.217~ ) Ralph D. Sawyer, The Seven Military Classics of Ancient China (Westview Press Boulder), pp ~490; 徐 榮 敎, 羅 唐 戰 爭 期 唐 兵 法 의 導 入 과 그 意 義, 韓 國 史 硏 究 116, 2002, p.42.
158 156 학예지 제17집 신라 하대에는 이미 停 幢 의 國 軍 조직이 무너져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121) 신라정부는 10만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이 신라의 정규군은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며, 조직 적인 훈련을 받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민애왕의 전략적 감각에서도 어느 정도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장보고 군대와 일대 결전 장소로 그가 달구벌(대구)을 선택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민애왕의 병력이 장보고의 군 대보다 20배가 많다고 해도 훈련이 되지 않은 보병으로 기병을 평지에서 막아내겠다는 생각은 상식 이하이다. 민애왕은 궁정의 음모와 암투에는 능했지만 불행하게도 전략과 전술을 필요로 하는 전쟁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던 것이다. 신라정부의 이러한 실책은 이전에도 있었다. 838년 초두로 돌아가 보자. 838년 1월 희강왕 이 상대등 김명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장보고가 희강왕 피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켰던 것 은 838년 3월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남원에서 행군이 중단되었고 군사들은 청해진으로 회군했다. 삼국사기 권44, 김양전을 보자. 개성 3년(838) 2월에 (김양은) 海 中 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 뵙고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强 兵 5천으로써 武 州 를 습격하여 城 下 에 이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다시 내치어 南 原 에 이르러 신라군과 마주 싸워 이겼으나, 우징은 군사들이 오래 피로하였으므로 해서 다시 淸 海 鎭 으로 돌아가 휴양시켰다. 838년 3월 무주를 수중에 넣은 장보고의 군대는 남원으로 진군하여 승리했지만 철수했다. 군사들이 오래 피로하였으므로 라고 하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남원에서 전투는 완벽한 승 리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인철은 앞서 남원에서 장보고의 군대가 정부군의 강력한 저지를 받았다고 추측한 바 있다. 122) 남원을 점령한 장보고의 군대가 왕경 경주를 향했다면 다음 목표는 운봉이다. 123) 운봉은 남 121) 李 基 白, 新 羅 私 兵 考, 新 羅 政 治 社 會 史 硏 究, 일조각, 1974, p ) 李 仁 哲, 新 羅 支 配 體 制 붕괴와 군사조직, 新 羅 政 治 制 度 史 硏 究, 一 志 社, 1993, p ) 대감 김민주를 격파한 장보고 군대의 행군로는 지형을 고려해 본다면 현재 광주와 대구를 이어주고 있는 88고속도로 나 이와 나란히 달리고 있는 국도와 흡사하지 않나 추측된다. 장보고 군대가 청해진에서 출발하여 나주를 지나 광주 에 도착한 후 남원을 거쳐 대구로 향했다면 지리산 중턱의 운봉을 넘어야 한다. 운봉을 넘어서면 함양이다. 함양읍에 서 수동면으로 나오면 두 갈래길이 나온다. 하나는 남강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진주에 이르는 길이고 하나는 남강을 거슬러 북상하여 안의면으로 가는 길이다. 거기서 대구로 가는 가장 단거리 코스는 안의를 경유하여 거창읍으로 가서 황강을 따라가다가 합천 묘산을 거처 고령 쌍림으로 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7세기 초반 백제군의 서부경남 공략과정 은 하나의 참고가 된다. 602년 백제군은 남원을 출발기지로 하여 아막성(운봉)을 끈질기게 공격하였으며, 지리산의
159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57 원에서 지리산을 종단하여 함양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다. 이곳은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한 지역으로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여 싸울 수 있는 지형이다. 김우징은 남원에서 피로해진 장보고의 군대가 운봉을 지나 지리산을 넘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장보고의 주력은 기병이었으며, 산악에는 그 효율성이 떨어진다. 838년 12월 州 大 監 김민주가 무주 철야현 북쪽(나주군 남평면)에서 장보고의 군대를 저지하 려고 했다. 장보고의 군대가 武 州 (광주)를 지나기 전에 나주에서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 다. 결과적으로 장보고는 지리산 중턱에서 싸움은 피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당시에도 나주가 평야지대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김민주와 신라정 부의 분명한 전략상의 실책이었다. 신라 정부는 무주와 남원을 포기하고 장보고의 군대를 지리 산의 중턱 운봉에서 저지했어야 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다시 삼국사기 권44, 김양전을 보자.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쪽에 이르니 州 大 監 김민주가 군사를 이끌고 역습하였다. 장군 낙금 이순행이 馬 兵 3천으로 저쪽의 軍 中 에 돌격해 들어가 거의 다 살상하였다. 김민주의 신라정부군은 나주평야에서 장보고의 3천 기병을 만나 전멸했다. 즉 낙금과 이순 행의 기병은 신라군의 軍 中 을 깨고 들어가 치명타를 가했던 것이다. 당시 전투의 장면은 다음 과 같이 상상된다. 장보고의 기병은 신라정부군의 대열을 깨고 그들을 흩어지게 했다. 김민주 가 이끄는 정부군은 모두 도주했으며, 그들은 추격하여오는 장보고의 3천 기병에게 순식간에 도륙 당했다. 그렇다면 대구에서 장보고의 군대를 맞이한 신라정부군 10만도 이러한 수순을 밟았을 가능 성이 높다. 장보고의 군대는 치밀하게 조직화되고, 지속적인 훈련을 받은 질서 있는 군대였지 만, 10만이란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민애왕의 군대는 대부분 급하게 징발된 농민들이었을 공 산이 크며, 무엇보다 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근친왕족 사이의 骨 肉 相 爭 과 잦은 왕위의 교체는 백성들이 국왕에게 가지는 존경심을 손상 시켰을 것이 확실하다. 누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즉위한다 하더라도 그들과는 상관이 관문 운봉을 돌파한 뒤 624년 속함성(함양) 등 6성을 함락한 바 있다. 이는 백제가 642년 신라의 서부전선의 지휘본부 인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신라 조야를 일대 위기국면에 몰아넣었던 서막이 되었다. 대야성이 함락 당한 후 신라는 낙동강 서쪽에서 철수하여 왕경의 지척인 경산에 신라서부전선의 지휘본부를 설치해야 했다.
160 158 학예지 제17집 없었다. 다시 말해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이 명분 없는 政 爭 에서 그들은 목숨을 던지고 싶 지 않았을 것이다. 달구벌에 집결한 농민들은 한달 전에 州 大 監 김민주가 이끄는 官 軍 이 장보고의 기병에게 전 멸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장보고가 군사를 일으켰다 는데, 흥덕왕 사후 2년이 되지 않아 2명의 왕이 교체된 지금 민애왕도 언제 권좌에서 밀려날지 알 수 없다. 한편 달구벌전투에서 민애왕의 정부군의 陣 이 지나치게 넓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깃 발과 소리신호로 명령을 전해야 하는데 당시로서 벅찬 규모였다. 병력의 규모가 클수록, 훈련 상태가 저조할수록, 명령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훈련을 받은 군대라 하더라도 한 곳에 집중된 필요 이상의 과잉병력은 오히려 그 운용의 탄력성과 순발력을 죽인 다. 병력과잉이 패배의 원인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민애왕은 10만이란 대규모 병력에 너무 과신을 했던 것 같다. 이는 삼국사기 권10, 민애 왕 2년 정월 조에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라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민애왕은 측근들과 전쟁을 여유 있게 관람하기 위해 높은 지대의 나무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민애왕의 정부군은 초전에 무너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권10, 민애 왕 2년 정월 조를 보면 한 번의 싸움에 크게 이기니 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정부군은 최후의 한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운 것이 아니라 최초의 충돌 이후 陣 의 대형이 무너졌거나 돌 파 당했을 때까지 싸웠던 느낌이 강하다. 그것도 삼국사기 권44, 김양전의 王 以 兵 迎 拒 逆 擊 之 王 軍 敗 北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애왕 정부군이 먼저 장보고 군대를 막으려고 하다 가 逆 擊 을 당했다. 보병이 바라보기에 자신을 향해 질주해오는 기병이란 너무나 높고 빠르다. 전쟁터에서 항상 엄습하는 공포, 정신적 공황이란 정서를 억제하고 판단을 내리는 습관을 형성시키지 못한 상태 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평소에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서만이 제거된다. 훈련은 전장에서 병사 그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알게 하기 때문이다. 124) 훈련이 안된 雜 卒 로 구성된 민애왕 의 정부군들은 기병이 질주해 올 때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자신의 자리를 이탈했을 가능성이 높 다. 장보고 기병의 공격에 정부군은 단숨에 그 대열이 흩어졌다. 죽은 자가 반수요 생포한 자가 124) 徐 榮 敎, 羅 唐 戰 爭 期 唐 兵 法 의 導 入 과 그 意 義, 韓 國 史 硏 究 116, 2002, p.52.
161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59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흩어져 도망하는 보병이란 기병에게 학살의 대상에 불과하지 않다. 반면 훈련이 잘 된 騎 兵 의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보다 후대의 일이지만 예를 들어 보자. 北 宋 欽 宗 靖 康 원년(1126년) 정월에 여진의 금이 開 封 을 공격하고 이어 송과 금 사이에 講 和 가 맺어진 직후의 일이다. 즉 동년 2월, 송에 온 금의 강화사절단은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 17기( 騎 )로 하여금 급히 본국으로 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서를 가지고 河 北 의 磁 州 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河 北 路 兵 馬 鈴 轄 李 侃 이 禁 軍 과 民 兵 2,000명(보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았다. 17기병이 자신들은 강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이라고 하 였지만, 이간은 듣지 않고 공격하려 하였다. 그것은 조정의 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금의 17명의 기병은 즉시 좌 중 우 3대로 분열하고 활을 쏘며 돌진하였으며, 순간적 행동에 놀란 송군 2000명은 동요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과는 송군의 거의 반이 전사한 것이었 다. 그러나 金 의 17기는 단 1기도 죽지 않았다. 이것은 北 宋 측의 기록에 있는 실화이다. 125) 2. 서남해안 多 島 海 지역의 목축환경 장보고는 기병의 위력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杜 牧 에 의하면 장보고는 말을 타고 槍 을 쓰는 데는 신라 본국에서는 물론 중국 徐 州 에서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126) 당시 서주에는 유목출신이 사람들이 상당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다. 어떻든 이기동의 지적대로 그는 徐 州 節 度 使 牙 軍 에서 槍 騎 兵 부대를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127) 귀국 후 청해 진에 자신의 常 備 騎 兵 을 창설한 것도 이 같은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장보고의 성장 환경이 진골귀족과 왕실의 목장이 밀집한 서남해안의 다도해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669년에 행해진 목장 재분배 기사를 보자. 125) 三 朝 北 盟 會 編 卷 36, 靖 康 원년 2월 조, 河 北 路 兵 馬 鈐 轄 李 侃 以 兵 二 千 與 金 人 十 七 騎 戰 敗 績. 和 議 己 定 金 人 遣 十 七 騎 持 文 字 報 其 國 中, 經 由 磁 州. 李 侃 以 身 爲 兵 官, 且 承 掩 殺 之 旨. 乃 率 禁 軍 民 兵 二 千, 往 擊 之, 與 十 七 騎 相 遇. 金 人 曰, 不 須 用 兵, 令 城 下 己 講 和 矣. 我 乃 被 太 子 郞 君 差 往 國 中 幹 事. 侃 不 信, 欲 與 之 戰. 十 七 騎 者 庾 位 三, 以 七 騎 居 前, 各 庾 五 騎 爲 左 右 翼, 而 稍 近, 後 前 七 騎 馳 進, 官 軍 少 郤. 左 右 翼 兩 勢 掩 之, 且 馳 且 射, 官 軍 奔 亂 死 者 幾 半 ( 文 淵 閣 四 庫 全 書 350 冊, 史 部 108, 臺 灣 尙 務 印 書 館, 1983, pp.280~281); Jing-shen Tao, The Jurchen in Twelfth-Century China,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Seattle, 1976, pp.22~23; Paul J. Smith, Taxing Heaven`s Storehouse Horse, Bureaucrats and Destruction of the Sichuan Tea Industry( ),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ssachustts, 1991, pp.14~15; 杉 山 正 明 著, 이진복 譯, 유목민이 본 세계사, p ) 杜 牧, 樊 川 文 集 卷 6, 張 保 皐 鄭 年 傳 騎 而 揮 槍, 其 本 國 與 徐 州, 無 有 能 敵 者 127) 李 基 東 張 保 皐 와 그의 海 上 王 國, 新 羅 社 會 史 硏 究, 일조각, 1997, p.205.
162 160 학예지 제17집 領 馬 阹 九 一 白 七 十 四 所, 屬 所 內 二 十 二, 官 十, 賜 庾 信 太 大 角 干 六, 仁 問 太 角 干 五, 伊 湌 五 人 各 二, 蘇 判 四 人 各 二. 波 珍 湌 六 人 大 阿 湌 十 二 人 各 一 以 下 七 十 四 所 隨 宜 賜 之 ( 三 國 史 記 卷 6, 文 武 王 9 年 ) 그 재분배 내용을 보면 왕실에 22개소, 관( 官 )에 10개소, 김유신과 김인문을 비롯한 대아찬 이상의 진골귀족들에게 68곳이 부여되었고, 나머지 74개소는 대아찬 이하의 귀족들에게 지급 되었다. 669년 신라의 목장 재분배는 백제 지역을 병합한 후 이루어졌다. 이는 지금의 남한 지역의 도서지방을 모두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수의 목장 분포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증보문헌비고 에도 총 171곳이 보인다. 이것도 서남해 안 거의 모든 도서를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128) 신라의 174개 목장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사실 통일 이전 신라의 서해안 도서는 고구려 백제에 양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치라 목장 으로 사용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경상도지역의 남해안 도서지역에는 신라가 목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상정해 볼 수 있지만 그래도 174개의 대규모 목장의 확보는 백제지역의 점령이 가져다 준 결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일승 圓 仁 의 현장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846년 9월 日 僧 圓 仁 은 무주(전남) 島 嶼 지역에서 신라 제3 宰 相 과 內 家 의 목장을 목격한 바 있다. 오전 6시 경에 무주 남쪽 황모도 개펄에 배를 대었는데, 이곳은 丘 草 島 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신라의 제 3 宰 相 이 말을 키우던 곳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 847년 9월 6일). 오전 6시 경에 안도에 머물러 잠시 쉬었다. 이곳은 신라의 남쪽지방으로서 內 家 (왕실)의 말을 기르 는 산이다( 입당구법순례기 847년 9월 8일). 9년간 당에서 체류한 日 僧 圓 仁 은 재당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아 日 本 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圓 仁 일행의 출발지는 산동반도의 적산포였고, 몽고에서 늦가을에 불어오는 북서풍을 타고 신 라의 서남해안을 지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中 代 末 의 사실을 전하는 129) 신당서 권220을 보아 128) 물론 조선시대 목장은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를 포함하는 것이며, 이렇게 볼 때 문무왕대 분배된 목장의 수가 너무 방대한 느낌도 준다. 그러나 당시 분배된 174개소의 목장이 서남해안 島 嶼 는 물론 신라본토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무리도 아니다.
163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61 도 신라 재상가의 도서지방 목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신라의) 宰 相 家 는 祿 이 끊이지 않고 奴 僮 이 3천 명이며 甲 兵, 소, 말, 돼지의 숫자도 이에 맞먹는 다.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서 목축하고 필요할 때 잡아먹는다. 초원에서 목축하는 것을 보아왔던 당나라 사람들에게 多 島 海 지방의 목축이 특이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宰 相 家 는 이기백의 지적대로 진골 이상 중앙의 大 貴 族 이다. 130) 3천의 奴 僮 은 진골귀족에 예속된 인력 조직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진골귀족의 가정에 소속된 조직화된 인력이며, 진골귀족의 가산경제를 운영하는 손 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수한 소 말 돼지 등은 그들에 의해 관리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33, 잡지2 屋 舍 에 마구간의 크기에 대한 규정을 보면, 육두품은 마 5마리, 오두품은 마 3마 리, 사두품에서 백성까지는 마 2마리 이상을 넣을 수 있는 마구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골에 대한 제한 규정은 없다. 家 政 機 關 131)을 소유한 진골귀족만이 목장을 소유했다 고 볼 수 있다. 말이란 그것을 사육 생산하는데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을 사용 가능하게 하는 데도 상당한 훈련기간이 소요된다. 말을 생산하고 그것을 戰 馬 로 훈련시키는데 전문적인 조직이 필 요한 것이다. 장보고는 海 島 人 으로서 진골귀족의 목장에서 사역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 성이 높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보고가 말을 타고 槍 을 쓰는 데는 신라 본국에서는 물론 중국 徐 州 에서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장보고가 어린 시절부터 말을 다루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 가능한 것이다. 최소한 기수와 말이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렇 다. 132) 129) 今 西 龍, 新 羅 骨 品 考, 新 羅 史 硏 究, 1933, p.198. 李 基 東, 新 羅 金 入 宅 考, 新 羅 骨 品 制 社 會 와 花 郞 徒, 한국연구원, p ) 李 基 白, 新 羅 私 兵 考, 歷 史 學 報 9, 1957; 新 羅 政 治 社 會 史 硏 究, p.256. 金 哲 俊, 新 羅 貴 族 勢 力 의 基 盤, 人 文 科 學 7, 서울대, 1962: 韓 國 古 代 社 會 硏 究, 1975, pp.223~ ) 李 成 市 는 진골귀족들의 金 入 宅 은 풍부한 경제적 기반위에서 각각 家 政 機 關 을 갖추고 많은 사람을 거기에 예속시켰다 한다. 또한 그에 의하면 그 가운데는 왕실의 內 廷 에 견줄 만한 기구를 보유하기도 했으며, 그 가정기관에는 국가적 사업에 참여할 정도로 유능한 工 匠 이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은 관영 혹은 궁정공방에 결코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추 고 있었다 한다( 李 成 市 지음, 김창석 옮김,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청년사, 1999, p.78.). 132) Colonnel D. H. Gordon, Swords, Rapiers and Horse-riders Antiquities Vol. 27, No.106, Newbury. Berks., June 1953, pp.76~78 參 照 ; Chauncey S. Goodrich, Riding Astride and the Saddle in Ancient China, Harvard Journal
164 162 학예지 제17집 唐 代 의 詩 人 高 適 의 營 州 歌 에 胡 兒 十 歲 能 騎 馬 란 구절을 보듯이, 133) 유목사회에서 자라난 아이는 10세만 되면 말을 타고 질주할 수 있었다. 이는 아래에 보이는 庭 訓 格 言 (pp.106~107) 의 내용과 부합된다. 말을 잘 타지 못하면 말 위에서 활을 잘 쏠 수 없다. 적당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훈련 을 해야되고 겁을 없애는 것도 배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 말을 능숙하게 다루려면 열살 정도에 이미 말을 타고 질주 할 수 있어야 한다. 134) 아주 어려서부터 승마에 대한 겁을 없애고, 열살 정도에 가서 질주를 할 수 있어야 성인이 되어 말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말에 대한 숙련도는 장보고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닐 것이다. 대구에서 정부군 10만을 궤멸시킬 정도로 능숙했던 장보고의 3천 기병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들 구성원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암시를 주고 있는 삼국사기 권10, 흥덕왕 3년 4월의 기사를 보자 여름 4월에 청해 대사 궁복이 성은 장씨인데 당나라 徐 州 에 들어가서 군중소장이 되었으며, 뒤에 본국으로 돌아와 왕을 만나 뵙고 1만 명을 거느리고 청해를 지키게 되었다. 장보고의 세력 기반이 된 군졸 1만의 성격에 대해서는 일찍이 김상기에 의해 지적된 바 있 다. 그에 의하면 장보고가 신라 국왕으로부터 현지 완도의 邊 民 1만을 규합할 수 있는 양해를 받아내어 조직한 民 軍 이라 한다. 135) 장보고가 암살된 후 일본으로 도피한 於 呂 系 등이 그의 所 攝 島 民 이라 한 것은 136)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서남해안에 집중된 진골귀족의 목장을 고려해 볼 때 완도의 邊 民 들은 목축의 경험이 있었으 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장보고의 기병 구성원들도 말을 다루어 본 경 험이 없었다면 정예기병이 되기는 불가능했다. 부유한 자들만이 탈 수 있는 말을 해도인들은 of Asiatic Studies 44. 2, Harvard-Yenching Institute Cambridge Massachusetts, 1984, pp.279~304 參 照. 133) 全 唐 詩 卷 44, 營 州 歌. 134) 조너선 디.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사냥과 원정, 강희제, 이산, 2001, p.58에서 재인용. 135) 金 庠 基, 古 代 의 貿 易 形 態 와 羅 末 의 海 上 發 展 에 對 하여, 東 方 文 化 交 流 史 論 攷, 乙 酉 文 化 社, p.32 金 光 洙, 張 保 皐 의 政 治 史 的 位 置 張 保 皐 의 新 硏 究, 완도문화원, 1985, pp.72~ ) 續 日 本 後 紀 卷 11, 仁 明 天 皇 9 年 (642) 正 月 그 후 於 呂 系 등이 귀화하여 와서 우리들은 장보고가 다스리던 섬의 백성입니다. 장보고가 작년 11월중에 죽었으므로 평안하게 살 수 없었던 까닭에 당신 나라에 온 것입니다
165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63 목축을 통해서 체험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海 島 人 이란 명칭에 대하여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목한 것은 해도의 海 였다. 島 란 목축지에 대해서 간과했던 것이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次 妃 로 맞이하려 했을 때 귀족 신하들은 장보고는 海 島 人 이라며 신분상의 이유로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여기서 해도인이란 바닷가에 사는 평민 백성 또는 그 이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생각되며, 그들이 바닷가에 살기 때문에 하층계급이 된 것이 아니라 섬에 있는 진골귀족의 목장에서 목축을 하는 목동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해도인이란 표현이 평인 백성과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며, 해도인은 곧 賤 民 을 의미한다고 한 蒲 生 京 子 의 지적은 타당하다. 137) 농경사회에서 목동은 천시되었던가? 어린 시절 양을 치던 衛 靑 도 노예취급을 받았다. 그러 나 그는 장성하여 騎 射 에 뛰어난 것을 인정받아 侯 家 의 騎 郞 이 되었고, BC 130년 車 騎 將 軍 으 로 출전하여 匈 奴 를 격파했다. 나아가 3회에 걸친 성공적인 출격으로 그는 漢 帝 國 이 오르도스 를 확보하여 匈 奴 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점하는 견인차가 되었다. 138) 對 匈 奴 戰 에서 탁월한 기 량 발휘는 위청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밑천이 되었으며, 그가 거느린 기병들도 목축의 경험이 있는 북쪽 변경출신이었다고 한다. 139) 이점 장보고의 기병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장보고의 병력부양과 진골귀족의 牧 場 田 莊 장보고의 기병 조직과 창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음의 몇 가지 요소로 집약될 수 있다. 먼저 말을 정기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이는 고가의 비용이 드는 것임에 틀림이 없으며, 안정된 공급지가 절대 필요하다. 다음으로 길들이지 않은 말은 實 戰 에서 사용할 수 없다. 그것 을 戰 馬 로 훈련시켜야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적지 않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140) 張 春 樹 에 137) 浦 生 京 子, 新 羅 末 期 の 張 保 皐 の 擡 頭 と 反 亂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16, 필자는 이전의 논고에서 장보고를 평민 출신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서영고, 청해진과 서남해안의 전장 목장 STRATEGY21 8, 2001 가을 겨울호, 한국 해양전략연구소[2002, 3], 96쪽 8째 줄 97쪽 7째 줄 13째 줄).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138) 史 記 卷 111, 衛 將 軍 驃 騎 列 傳 ; Yu Ying-shih Han foreign relation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1,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6, pp ) Chang Chun-Shu, Military Aspect of Han Wu-Ti`s Northern and Northwestern Campaigns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26, Harvard-Yenching Institute Cambridge Massachusetts, 1966, pp.167~ ) Lynn White, Jr. Medieval Technology and Social Change,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1962, pp.57~69 參 照.; John Ellis, CAVALRY-The History of Mounted Warfare, G. P. Putnam`s Sons, New York, 1978, pp.19~21 參 照 ; Karl F. Friday, Hired Swords-The Rise Private Warrior Power in Early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1992, p.39 參 照.
166 164 학예지 제17집 의하면 漢 武 帝 당시 馬 사육에 男 女 奴 婢 30만이 동원되었으며, 말들은 흉년에도 곡물을 먹는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141) 마지막으로 기병을 보유하고 유지하는 비용은 막대하다. 漢 書 卷 69, 趙 充 國 傳 을 보면 軍 馬 1마리의 1개월 식량이 병사 1인의 1년 식량에 해당된다고 한다. 말 한 마리는 병사 12배의 식량을 먹는다고 할 수 있다. 말과 곡물의 지속적인 확보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장보고의 대외무역이 그 재원 마련의 기반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외래사치품이 왕경의 신라귀족사회를 휩쓸었던 것은 장보고와 진골귀족 사이의 거래를 입증하고 있다. 834 년 흥덕왕은 사치 제한령을 반포했다. 삼국사기 권33, 잡지 2에 보이는 이 규정은 옥사 색 복 거기 기용( 屋 舍 色 服 車 騎 器 用 ) 등 일상생활 전반에 광범위한 제한령이다. 그 의도 는 당시 진골귀족 이하 귀족층 사이에 만연되고 있던 사치풍조를 규제하려는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 이 제한령에 보이는 외래상품 가운데는 그 원산지가 타슈겐트지방 알랄 海 東 岸 인 瑟 瑟 을 비 롯하여 羊 毛 를 주성분으로 하여 만든 페르시아의 좌구( 坐 具 )용 모직물인 毬? 㲮, 캄보디아 산 翡 翠 毛, 보르네오 자바산 玳 瑁, 자바 수마트라산 紫 檀, 캄파 수마트라가 주산지인 沉 香 등이 보인다. 이러한 사치품은 장보고의 무역선단에 의해서 신라에 들어온 것이 분명하며, 그 것은 진골귀족에게 판매되었을 것이다. 142) 그렇다면 장보고의 안정적인 말의 구입처가 된 곳은 어디일까? 완도 앞의 다도해에 있는 진 골귀족들의 목장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것도 상정되지 않는다. 장보고의 외국산 사치품은 진골귀족의 말과 상호 교환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장보고가 그의 말을 먹이고, 그의 병력을 부양하는 데 소요되는 곡물도 마찬가지다. 진골귀족들의 재지 토지지배는 거의 전국적 규모였다. 그 중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구 백제 지역에 존재한 그것이다. 개선사 석등기를 보면 전남 담양에 진골귀족의 농장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890년에 건립된 이 석등은 개선사의 토지문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 줄을 보면 동쪽은 영행의 땅, 북쪽도 영행의 땅, 남쪽은 池 宅 의 땅 이라는 기록 이 보인다. 143)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池 宅 이다. 141) Chang Chun-Shu, Military Aspect of Han Wu-Ti`s Northern and Northwestern Campaigns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26, p ) 李 基 東, 長 保 皐 와 그의 海 上 王 國, 新 羅 社 會 史 硏 究, 일조각, 1997, p.218.
167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65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삼국유사 에는 신라 전성시대 왕경인 경주에 존재했던 35개의 金 入 宅 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 지택의 명칭이 보인다. 금입택은 진골귀족들 각 가문의 호화저택으로 그 소유자는 일반 진골 가문 가운데서도 극히 유력한 계층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경에 있는 지택은 전남 담양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의 비문에도 금입택의 宅 號 가 보인다. 敎 下 望 水 里 南 等 宅 共 出 金 一 百 六 十 庾 租 二 千 斛 助 充 裝 飾 功 德 寺 隸 宣 敎 省 동 비문에 의하면 헌안왕은 즉위 후 금입택의 가운데 하나인 望 水 宅 과 里 南 宅 宅 主 에게 하교 하여 금 169 庾 과 租 2,000 斛 을 보림사에 기진케 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租 2 千 斛 이다. 양 금입택이 보림사에 기부한 조곡 2천곡은 畓 1,333결의 소출량에 해당하는 것이다. 144) 문제는 망수택과 이남택이 기부한 조곡 2천곡이라는 막대한 량의 곡물의 운반이다. 그것이 왕경 경주에 있는 망수택과 이남택의 창고에서 전남장흥으로 운반되어온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헌안왕이 보림사에 희사를 하는데 있어 망수택과 이남택을 지목한 것은 망수택과 이남택의 田 莊 이 전남 장흥 현지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동은 보림사 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던 장사현 부수 金 遂 宗 이 長 沙 宅 이 친정인 景 明 王 妃 의 조부인 金 水 宗 과 동일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장사택의 택호도 그가 부수로 재직한 바 있 는 무주 長 沙 縣 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근친왕족으로 생각되는 김수종이 국가로부터 식읍 내지 녹읍을 받았을 것이 틀림이 없고, 그 곳은 김수종이 지방관으로 재직하여 연고지가 된 장사현 지방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145) 고창 무장은 바다와 인접한 곳이다. 김수종이 보림사 경내에 있는 비로자나불 조성(858)과 삼층석탑 건립(870)에 막대한 사재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장흥과 해로로 연결되는 그 자신의 전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장흥 보림사의 불사에는 고창 무장에 있는 김수 종의 전장에서 생산된 곡물이 배를 통해 장흥 보림사에 보내졌을 가능성이 높다. 143) 東 令 行 土 北 同 土 南 池 宅 土 西 川 奧 沓 十 結 八 畦 東 令 行 土 西 北 同 土 南 池 宅 土 144) 李 基 東, 新 羅 金 入 宅 考, 新 羅 骨 品 制 社 會 와 花 郞 徒 일조각, 1984, p ) 李 基 東, 新 羅 金 入 宅 考, 앞의 책, p.190 같은 쪽 註 20); 그의 지적대로 경주 都 內 지역으로 생각되는 鄕 에 郡 縣 名 과 일치하는 鄕 名 이 8개가 보인다.
168 166 학예지 제17집 서해안에 무열계 가문의 전장도 확인된다. 金 昕 이 충남 보령에 있는 자신의 사찰(성주사)을 낭혜에게 희사할 때 그 부근의 토지도 함께 희사했다. 무열계 김종기의 손자인 김흔은 충남 보령지역에 원찰과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聖 住 寺 朗 慧 和 尙 碑 文 을 보자. 寺 刹 하나가 熊 川 의 坤 隅 ( 西 南 間 의 南 浦 )에 있는데 이는 나의 조상 臨 海 公 이 예맥(고구려)을 정벌한 공으로 封 을 받았던 곳인데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金 田 이 반쯤 재가되었으니 자비심이 어진 이가 아니 고서는 누가 능히 없어졌던 것을 일으켜 존속시킬 수 있겠는가? 대사가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으면 가서 있겠노라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무열계 김인문 가문의 대규모 토지가 충남보령에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흔은 민애왕대 伊 湌 相 國 까지 오른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김흔의 사촌 金 陽 (= 魏 昕 )이 성주사 에 희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김양이 성주사 개창에 중요한 후원자가 될 수 있 었던 것은 그의 토지가 충남보령부근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46) 왕경 소재 대사찰의 장원( 莊 園 )도 남해안에 있었다. 圓 仁 의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 847년 9월 8일 조에는 안도 가까운 동쪽에 黃 龍 寺 의 莊 園 이 있다 라 하고 있다. 구 백제 지역은 그야 말로 왕실 진골귀족 왕경의 大 寺 刹 의 재산이 집중된 곳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신라가 백 제를 정복하면서 획득된 지역이고, 전술한 삼국사기 권7, 문무왕 9년 조의 목장재분배기사 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지배층들에게 재분배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생산된 잉여물의 상당량은 서해를 통해 왕경으로 운반된 것으로 생각되며, 수로를 장악한 장보고의 청해진을 경유했을 것이다. 따라서 서남해안에 산재한 진골귀족의 농장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상당량이 그들의 사치품 구입 대금으로 사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청해진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보고가 서남해안을 장악하는데 보유했던 병력을 부양하는데 상당한 물자가 소요되었던 것 은 확실하고, 그것은 장보고가 수입한 사치품이 현지에 있는 신라지배층의 전장과 목장의 수익 과 교환되는 형태로 조달되었을 것이다. 834년 흥덕왕이 제한령을 반포할 만큼 극에 달했던 신라지배층들의 사치품수요는 특히 장보고의 잘 훈련된 3천 기병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재원 146) (결락) 金 殿 歎 無 佛 像 頓 捨 家 財 (결락) 租 稻 充 入 鑄 像 工 價 魏 昕 伊 湌 (결락) 奉 鑄 丈 六 世 尊 像 (결락) ( 金 入 之 撰 聖 住 寺 碑 ); 曹 凡 煥, 朗 慧 無 染 과 聖 住 寺 의 創 建 新 羅 禪 宗 史 硏 究 一 潮 閣 ( 西 江 大 人 文 科 學 硏 究 所 人 文 硏 究 傳 刊 第 44 輯 ), 2001, pp.49~55.
169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67 획득의 원천이었다. 청해진 설치 이전에 서남해안의 군소 해상세력들이 해적행위와 불법적인 노예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면, 147) 그들을 철저히 단속하고 해상에 질서를 부여한 장보고는 당으로부터 사 치품 수입을 독점하여 진골귀족들에게 판매했다. 그 상업적 巨 利 는 장보고의 병력을 부양하는 재원으로 전환되어 서남해안에 질서를 유지시켰다. 전자가 신라의 인력을 중국으로 유출하고 신라지배층의 수익을 사장시키는 縮 小 再 生 産 의 역할을 했다면 후자는 전자가 가진 폐해를 막 고 신라지배층의 생산과 수익운반을 보장하고 나아가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839년 신무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재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과적으로 청해 진은 반정부세력의 유용한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무력적 기반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해상세 력의 번영이 국가의 존립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 마르크 브로크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해상세력은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奸 計 를 획책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을 축적 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한다. 148) Ⅴ. 맺음말 이상으로 신라보기당의 성격, 통일기 기병의 급진적인 증강과 669년에 행해진 174개의 목장 사여의 상간관계, 통일기의 서남해안 도서목장이 하대에 가서 장보고 기병의 양성기반이 되었 다는 점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본문을 요약하는 것으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보기당은 신라중고기 영토팽창의 주역이었던 六 停 군단 가운데 하서정을 제외한 5개 사단(대 당, 한산정, 상주정, 우두정, 완산정)예하에 배치된 유일한 기병관계 군조직이었다. 그 명칭에 서 알 수 있듯이 그것도 보병과 기병의 혼성조직이었다. 그렇다면 신라의 전체 군조직에 기병 의 비율은 극소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에 초원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었고, 목장이 많았다고도 볼 수 없다. 풀이 귀한 겨울철에 말은 엄청난 곡물을 소비하며, 유지비용이 증가한다. 안장과 재갈 등자 등 마구 또한 고가의 147) 청해진 설치 이전 해적의 창궐은 서남해안 진골귀족의 전장 목장에서 생산되는 수익물을 왕경으로 운반하는데 큰장 애를 주었을것이다(서영교, 청해진과서남해안의 전장 목장, STRATEGY 21 8). 148) 마르크 브로크 著, 한정숙 譯, 봉건사회 Ⅰ, 한길사, 1986, p.70.
170 168 학예지 제17집 장비이다. 1마리의 전마를 유지하는 비용으로 병사를 10명 이상 양성할 수도 있다. 전쟁 중에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말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가령 몽골군 기병의 경우 전장에 병사 1인당 5필의 말을 끌고 나갔다고 한다. 말을 계속 갈아타기 위해서이다. 5필의 말이 싱싱 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30필의 예비 말이 있어야 한다. 전쟁 중에 말을 혹사시키지 않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새로운 말로 교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기당은 전마의 결핍이 낳은 창조물이었을 수도 있다. 아주 적은 소수의 기병을 가질 수밖 에 없던 신라로서는 그것의 효율을 배가시키기 위해 고심하였을 것이다. 신라인들은 발 빠르고 날렵한 자들을 뽑아 기병대에 배치하여 말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고, 보기일체병 종전술이 보다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무관조의 기록을 보면 六 停 군단에 배치되었던 보기당이 후대에 만들어진 구서당군단 8개 사단예하에 순차적으로 배 치된 것도 그것이 효율성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형적인 농경 지대였던 신라에서 목축을 하는 것은 생태 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장주위 의 농경지는 가축들로부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에서 말의 생산과 사육은 상당히 제한적인 환경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백제를 차지한 후 그 서남해안 다도해 지역 섬에 목장을 설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삼국사기 무관조의 기록을 그 근거로 삼아 통일기 신라의 기병군관 증강을 산술적으 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5년(544) 십정은 그 영토를 고려해볼 때 그것은 통일 후 백제 지역에 설치된 3개 부대를 제외한 7개의 정이었다. 이는 군관으로 계산해 볼 때 (기병 대대감 1+소감2+화척2) 7=35인에 해당된다. 그후 진평왕 13년(591)에 저금기감 3명, 저금감 3명으로 구성된 기병부대 사천당( 四 千 幢 )이 창설되어 기병군관 6명 증강되었다. 태종무열왕 원년( 元 年 654)에 기병부대 계금당( 罽 衿 幢 )은 기병 대대감 1인 기병 소감 1인 기병 화척 7인 저금기당주 6인 저금감 6인으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기병군관은 총 21인이었다. 이는 기존의 십정 군관조직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기병증 강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672년에 창설된 기병부대 오주서의 군관수는 총 67명으로 십정 35인, 사천당 6인, 계금당 21인을 모두 합친 61인을 상회하고 있다. 신문왕대 완성된 구서당의 기병증강은 더욱 급진적이다. 9개 부대 중 7개가 672년 이후에 완성된 구서당은 각 부대에 령기병 대대감 3명 소감 6명 화척6명, 저금기당주 18명 저금감 18명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총 [( )
171 新 羅 騎 兵 과 牧 場 169 8=408+장창당 기병 소감 3=]411명의 규모로 오주서의 6배 이상이다. 여기서 672년 이전에 창설된 녹금서당과 자금서당의 그것[( ) 2=102]을 제외하 고 그 후에 증설된 기병 군관을 계산해 보면 구서당 7개 부대에 306명이 증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672년 이후에 창설된 오주서의 67명, 구백제 지역에 설치된 십정의 3개부대의 15명 등 을 합산하면 총 452명에 이른다. 물론 이는 기병군관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아래에 배속된 기병들을 고려해 본다면 엄청난 기병 수가 될 것이다. 신라의 급진적인 기병증강을 가능하게 한 것은 669년 신라국왕이 전쟁승리의 결실인 목장을 왕실 관 진골귀족들에게 재분배하여 말을 생산하고 훈련시키게 함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의 급진적인 기병증강은 174개의 목장 중 142개를 분배받은 진골귀족의 참여를 상정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승리 후 신라국왕의 재분배는 특권층 진골귀족들에게 권위를 세우는 원동력이었으 며, 신라 국가보위를 위한 전쟁에 그들을 참여시킬 수 있는 실질적 명분이었을 것이다. 재분배 의 순환구조를 도식화해보자. 1. 국왕을 비롯한 진골귀족들의 정복전쟁. 2. 전쟁의 결실로서 島 嶼 획득. 3. 국왕의 권위로서 진골귀족들에게 도서 목장 재분배--( 官 等 이 분배의 기준) 4. 진골귀족의 각 가정기관에서 목장관리와 馬 재생산구조 확립 5. 생산된 馬 의 국가자원으로 이용-( 騎 兵 증강과 신라국가의 戰 力 강화) 6. 새로운 결실 획득을 위한 전쟁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재분배된 목장에서 생산된 馬 가 신라 국가체제 수호를 위한 전쟁의 도구로서 다시 변신한다는 점이다. 재분배란 그 자체의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재분 배를 위한 결실의 획득이나 기존의 그것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구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실로 여기서 우리는 신라의 최상층의 재분배구조 안에 웅크리고 있는 합리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 는 전쟁에 체질이 굳어진 신라국가체제의 결과물에 다름 아닌 것이다. 846년 9월 日 僧 圓 仁 은 무주(전남) 도서지역에서 신라 제3재상과 왕실( 內 家 )의 목장을 목격 한 바 있다. 中 代 末 의 사실을 전하는 신당서 권220을 보아도 신라 재상가의 도서지방 목축
172 170 학예지 제17집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진골귀족들은 목장을 운용하는데 있어 서남해안의 해도인들을 노동 력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장보고는 海 島 人 이었다. 그는 진골귀족의 목장이 집중된 서남해의 다도해에서 자랐다. 그가 목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杜 牧 에 의하면 장보고는 말을 타고 槍 을 쓰는 데는 신라 본국에서 는 물론 중국 徐 州 에서도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서주절도사 牙 軍 에서 槍 騎 兵 부대를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귀국해서 5천의 보기단을 창설한 것도 이 같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보고의 군대 5천은 기병 3천과 보병 2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고기 보기당의 보기일체 전술을 그대로 이어 받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양자는 각각 步 騎 合 同 작전을 했던 것이 아니라 一 體 가 되어 함께 움직였을 것이다. 보병이 기병대의 전열에 포진하고 보병이 기병과 속도를 맞추는데 있어 말에 올라탄다거나 갈기에 매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훈련받은 장보고의 경보병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속도를 낼 수 있으며, 말의 갈퀴를 잡는 다거나 기병의 말 엉덩이에 올라타기도 했으리라. 장보고의 기마대는 경보병대를 동반함으로 써 한층 강화되었을 것이며, 경보병대는 기마대에 뒤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퇴각 할 시에도 낙오되지 않도록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839년 1월 달구벌에서 목동들로 이루어진 장보고의 보기 5천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장보고의 병력은 한 번의 공격으로 민애왕의 10만 정부군을 단숨에 흩어놓았다. 정부군은 마치 혼란에 빠진 짐승 무리와 같았고, 장보고의 병력은 그들을 양떼를 몰듯이 요리했다. 장보고의 기병은 다루기 쉬운 구역 안으로 정부군을 갈라 넣었고, 측면으로 돌아 쳐서 혼란에 빠뜨려 흩어져 도망치게 한 다음 정부군 부대 중에 주력을 고립시켜 궤멸했다. 그들은 적을 어떻게 위협을 가해야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선택 한 일부를 죽일 때에도 다른 무리가 반항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통제에 따르도록 만들었다.
173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최 형 국* 목 차 Ⅰ. 머리말 Ⅱ. 壯 勇 營 革 罷 과정과 騎 兵 해체 Ⅲ. 中 央 軍 營 弱 化 와 地 方 騎 兵 位 相 低 下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 19세기 前 半 朝 鮮 은 상품경제발달에 따른 신분제변동과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勢 道 政 治 의 출 현이라는 혼란기의 시작이었다. 특히 국가 권력의 중추였던 軍 事 力 부분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 는데 朝 鮮 前 期 부터 핵심 병종이었던 騎 兵 1)의 변화가 가장 극명하게 대두된다. 이는 騎 兵 이 갖 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는데, 보통 騎 兵 과 步 兵 의 전투력의 차이는 騎 兵 1 騎 가 步 兵 7명을 상대 할 정도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기병을 운용하는 비용의 과중함 이다. 현재나 전통시대나 國 防 費 의 비율은 사회전체의 경제력에 따라 증감이 이뤄진다. 특히 戰 爭 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거나 혹은 준전시체제의 긴장감이 발생할 정도의 국제정세가 변화한다면 國 防 費 의 증가는 여타의 비용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국내 상 황에서도 전통시대의 내부반란을 비롯한 사회분열의 요소가 발생했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군사력의 비용증강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騎 兵 의 경우는 전투력이 우수 한 반면 유지비용이 일반보병의 3배 이상이 소요되기에 기병의 숫자를 함부로 늘릴 수 없었던 *무예 24기 연구소 연구소장 1) 騎 兵 은 騎 馬 兵 의 略 字 로 史 料 에서는 騎 兵 과 馬 兵 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현재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騎 兵 이라는 명칭을 騎 兵 과 馬 兵 을 통칭하는 用 語 로 사용하였다.
174 172 학예지 제17집 것도 위정자들의 고민이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騎 兵 에 대한 인식변화는 壬 辰 倭 亂 을 거치면서 騎 兵 無 用 論 까지 제기되었다가 이후 丁 卯 丙 子 胡 亂 을 거치면서 淸 騎 兵 에 대한 전략적 방어를 위하여 다시금 기병증강 추이가 계 속되었다. 2) 그리고 前 代 인 正 祖 代 에는 國 王 權 강화라는 인식하에 진행된 壯 勇 營 의 창설과 더 불어 五 衛 制 復 舊 論 의 핵심인 기병증강이 이뤄져 있었던 상태라 19세기의 군사적 변화 중 騎 兵 의 변화를 살피는 것은 당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19세기 전반의 군사적 변화를 中 央 軍 營 과 地 方 軍 營 의 기병변화를 통해서 확인하고자 한다. 그 시작은 正 祖 代 國 王 친위부대로 만들어져 기존의 五 軍 營 보다 더 비중이 높게 운영된 壯 勇 營 에 대한 革 罷 과정을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특히 혁파과정 중 騎 兵 의 변화를 중심적으로 살펴보고 壯 勇 營 와 아울러 禁 軍 騎 兵 에 대한 변화도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中 央 軍 營 의 변화에 따라 騎 兵 의 증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中 央 軍 營 의 변 화 뿐만 아니라 肅 宗 代 부터 급격한 증강 양상을 보인 地 方 騎 兵 의 位 相 부분을 살펴봄으로써 中 央 軍 에 국한되는 연구가 아니라 地 方 軍 까지도 포괄하는 연구를 하고자 한다. 현재까지의 주 된 연구 경향이 中 央 軍 營 에 집중되는 경향이 많아 地 方 軍 營 의 실질적인 변화를 추적하지 못하 는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인데, 地 方 軍 의 경우 親 騎 衛 를 비롯한 기병부대를 중심으로 살필 것이다. 여기서는 정치사적인 부분도 조금은 언급은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군사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한다. 이는 政 治 史 적인 부분에 매몰되어 자칫 군사적인 핵심을 놓 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Ⅱ. 壯 勇 營 革 罷 과정과 騎 兵 해체 正 祖 代 에 일어난 중앙군영의 변화 중 壯 勇 營 의 설립은 전대의 扈 衛 廳 과 龍 虎 營 중심의 국왕 친위부대 뿐만 아니라 訓 練 都 監 을 필두로 한 五 軍 營 의 군사력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五 軍 營 중 수도외곽지대를 방위하였던 摠 戎 廳 과 守 禦 廳 의 군세약화는 正 祖 代 에 제기된 이 兩 營 의 혁파론과 맞물려 가장 많은 군비의 축소가 이뤄졌다. 3) 이중 守 禦 廳 은 1793년 壯 勇 營 이 2) 壬 辰 倭 亂 期 騎 兵 戰 術 변화에 대한 연구는 졸작, 朝 鮮 時 代 騎 兵 의 戰 術 的 運 用 과 馬 上 武 藝 의 변화 역사와 실학 38호, 2009.가 가장 자세하다. 3) 金 俊 爀,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硏 究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pp.137~153. 참조.
175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73 外 內 營 制 를 갖추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인적 물적 자원을 흡수당했다. 서울의 京 廳 이 없어지 고 廣 州 府 에 소재한 南 漢 山 城 만을 지키는 극소규모의 형태로 축소 변화하였다. 그리고 扈 衛 廳 은 통째로 壯 勇 營 에 흡수되었으며, 龍 虎 營 과 訓 練 都 監 역시 전대에 비해 군비가 축소되었다. 4) 이러한 중앙군제의 개편은 國 王 인 正 祖 가 각종 黨 色 에 물든 기존의 五 軍 營 의 한계를 극복하 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正 祖 의 친위 군영이었던 壯 勇 營 의 군세 강화에 따른 기존 五 軍 營 및 핵심 禁 軍 조직의 약화는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따라서 正 祖 의 뒤를 이은 純 祖 代 에 발생한 壯 勇 營 의 혁파는 단순한 한 軍 營 의 혁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中 央 軍 營 의 전체적인 조직재편으로 직결되었다. 壯 勇 營 의 혁파과정은 壯 勇 營 의 재정을 축소시키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5) 먼저 正 祖 의 國 葬 과 山 陵 과 관련하여 만든 三 都 監 에 들어간 비용 전부와 勅 使 의 使 行 에 들어간 戶 曹 의 경비 가 과대하다고 하여 1년간 戶 曹 에서 사용할 비용전부를 壯 勇 營 에서 책임지게 하였다. 동시에 兩 西 소재의 壯 勇 營 穀 의 代 錢 을 모두 兩 西 의 民 庫 에 붙이도록 하였다. 6) 당시 권력의 실세였 던 노론 辟 派 의 입장은 처음에는 壯 勇 營 의 재정을 압박하여 군권을 약화시키고 이후 이를 흡 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려는 辟 派 의 입장 때문이었다. 壯 勇 營 의 혁파 자체는 그들 스스로의 권위를 허무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 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7)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재정압박을 통한 壯 勇 營 의 군권 장악은 辟 派 에게 실효성이 없었다. 이는 壯 勇 大 將 의 당색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純 祖 가 즉위한 해 7월에는 김대비의 수 렴청정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時 派 의 핵심인물인 金 祖 淳 이 장용대장직을 맡았고 이후 兵 曹 判 書 로 자리를 옮길 때에는 그와 협력관계였던 朴 準 源 이 장용대장직을 이은 것으로 확인된다. 8) 그 런데, 이런 상황에서 내 시노비 혁파에 따른 재정 부담을 원래는 壯 勇 營 에서 모두 부담하기로 결정하였으나, 辟 派 의 입장과는 다르게 壯 勇 營 이 부담할 8만냥 가운데 5만냥을 다른 부서에서 4) 李 泰 鎭, 朝 鮮 後 期 의 政 治 와 軍 營 制 變 遷, 韓 國 硏 究 院, 1985, pp.275~282. 참조. 5)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의 시기에 발생한 壯 勇 營 의 혁파 사건은 초기에는 혁파가 아닌 壯 勇 營 의 체제를 유지하 면서 그 실질을 무력하게 만들려는 조치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핵심세력이었던 벽파가 壯 勇 營 의 군권을 장악하 지 못하자 이후 완전한 혁파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壯 勇 營 혁파에 관한 정치사적인 고찰은 오종록,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하), 청년사, 1990.에서 자세히 다뤘다. 6) 純 祖 實 錄 卷 1, 純 祖 卽 位 年 12 月 庚 申. 大 抵 當 初 壯 勇 營 設 置 之 聖 意 有 在 一 則 爲 民 二 則 爲 民 如 是 之 故 今 番 三 都 監 物 力 皆 自 壯 營 擔 當 矣 又 勅 行 及 使 行 往 來 爲 屢 次 戶 曹 及 兩 西 經 費 應 必 不 少 寧 不 憫 然 自 辛 酉 正 月 至 十 二 月 戶 曹 一 年 所 用 令 壯 勇 營 劃 送 戶 曹 歲 入 則 儲 置 本 曹 兩 西 所 在 壯 營 穀 代 錢 一 幷 付 之 該 道 民 庫 令 壯 勇 提 調 代 撰 綸 音 以 爲 布 諭 之 地. 7) 심승구, 19세기전반 군영의 변동과 수도방위체제의 변화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p.204. 참조. 8) 純 祖 實 錄 卷 1, 純 祖 卽 位 年 8 月 壬 子.
176 174 학예지 제17집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이 관철되자 辟 派 의 壯 勇 營 재정 압박노력은 무산되고 만다. 9) 또한 이 과정에서 김대비의 친동생인 金 觀 柱 를 兵 曹 判 書 에 기용하여 軍 權 의 변화를 꾀하려던 辟 派 의 의도는 제대로 정국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10) 이러한 辟 派 의 壯 勇 營 財 政 및 軍 權 압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辟 派 는 그 핵심인물인 領 議 政 沈 煥 之 의 壯 勇 營 혁파상소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이로써 時 派 의 주요 軍 權 기반이었던 壯 勇 營 은 혁파되고 만다. 11) 당시 심환지의 상소내용을 보면, 壯 勇 營 의 설치 과정에 서 말한 정조의 나의 이 조처는 부득이한 것이다. 지금 左 右 에서 나를 가까이 호위하게 하는 것은 모두가 일시적인 방편에서 나온 것이니 후세에는 이것으로써 법을 삼을 수 없다 라고 한 발언을 근거로 후대에 이를 계승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특히 상소문 중 華 城 을 방어하던 壯 勇 營 外 營 에 대하여 內 外 營 이라 하지 않고 外 內 營 이라 하고 營 司 라 하지 않고 衛 部 라 한 것 을 굳이 언급하며 국왕의 과도한 친위세력에 대한 경계를 표출하였다. 이후 辟 派 의 의도는 김대비에게 전달되어 이틀 뒤인 1월 22일에 장용영 혁파가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12) 그런데 혁파과정에서 반대세력이었던 시파를 비롯한 비주류세력은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큰 반발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時 派 의 領 袖 였던 蔡 濟 恭 의 관직이 추탈된 직후였던 만큼 辟 派 를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13) 壯 勇 營 혁파와 관련하여 실질적인 조치는 < 壯 勇 營 撤 罷 別 單 >과 < 外 營 軍 制 釐 正 別 單 >을 통해 서 발표되었다. 14) 이 혁파별단에는 관원, 장교, 군병, 원역 등의 항목을 나눠 혁파에 따른 변동 사항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壯 勇 營 의 지휘부에 해당 되는 官 員 秩 이다. 壯 勇 營 직제하의 직명과 인원수의 減 下 그 리고 타부서로의 이동 여부 등의 관원의 재배치 사항을 기록하여 都 提 調 提 調 使 는 없애고 從 事 官 1명은 減 下 한 후 史 曹 로 하여금 자리가 나면 등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특히 壯 勇 營 의 9) 裵 祐 晟, 純 祖 前 半 期 의 政 局 과 運 營 政 策 의 推 移 奎 章 閣 14, 1991, pp.66~67. 참조. 10) 純 祖 實 錄 卷 3, 純 祖 1 年 5 月 癸 巳. 11) 純 祖 實 錄 卷 4, 純 祖 2 年 1 月 壬 辰. 命 罷 壯 勇 營 領 議 政 沈 煥 之 啓 言 惟 我 先 大 王 以 天 縱 聖 智 之 姿 政 令 施 措 動 法 前 聖 制 作 云 爲 自 合 天 則 至 若 壯 營 之 創 設 厥 有 深 意 之 攸 寓 不 煩 大 農 而 財 用 自 裕 不 擾 平 民 而 營 制 儼 成 及 夫 園 寢 遷 奉 之 後 作 新 大 邑 制 置 衛 府 以 爲 內 外 拱 禦 之 資 ( 中 略 ) 觀 於 華 城 行 宮 未 老 閒 亭 之 扁 聖 意 所 寓 孰 不 仰 認 而 不 曰 內 外 營 而 曰 外 內 營 不 曰 營 司 而 曰 衛 部 者 皆 所 以 開 視 言 外 之 意 義 庶 幾 國 人 之 領 會 而 不 幸 天 不 假 壽 竟 使 千 載 一 有 之 宏 籌 大 略, 不 得 施 焉 每 念 及 此 不 覺 心 肝 摧 裂 記 昔 淸 燕 之 暇 諄 諄 下 敎 若 曰 予 之 此 擧 非 得 已 也 今 左 右 暬 御 皆 出 一 時 權 宜 後 世 不 可 以 此 爲 法 筵 臣 拜 稽 承 聆 至 于 今 玉 音 在 耳. 12) 純 祖 實 錄 卷 4, 純 祖 2 年 1 月 甲 午. 13) 오종록, 앞의 책, 1990, pp.428~429. 참조. 14) 備 邊 司 謄 錄 卷 193, 純 祖 2 年 1 月 23 日 < 壯 勇 營 撤 罷 別 單 > ; 純 祖 2 年 1 月 25 日 < 外 營 軍 制 釐 正 別 單 >.
177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75 실질적인 운영 직위였던 別 將 ( 一 員 ) 把 摠 ( 三 員 ) 善 騎 將 ( 二 員 )의 자리를 모두 없애버리고 다 른 곳으로 이동 또한 막아 버려 혁파 후 혹시 모를 壯 勇 營 의 움직임을 근원적으로 차단하였다. 대신 哨 官 14명은 吏 曹 와 兵 曹 의 비준을 받아 차례로 등용하고, 정원외의 장용위 22명은 모두 정원 이외의 禁 軍 에 이속시켜버림으로써 지휘부를 완전히 분해하는 방식을 취했다. 둘째, 將 校 秩 은 監 官 ( 四 員 ), 知 彀 官 ( 十 一 員 ), 別 付 料 ( 二 員 ), 敎 鍊 官 ( 十 六 員 ) 등의 직명과 명수 를 적어 놓고 壯 勇 營 설치 이전의 전임직을 중심으로 재이동하는 것을 명기하였다. 셋째, 軍 兵 秩 은 각 편제별, 병과별로 還 屬 處 를 밝혀 놓았다. 넷째, 員 役 秩 은 23개의 원역의 직명별로 各 營 으로 분속하는 것을 명시하였다. 이렇게 壯 勇 營 이 혁파됨에 따라 각 군영에 되돌려진 관원과 군사력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분 류 訓 練 都 監 禁 衛 營 御 營 廳 摠 戎 廳 龍 虎 營 官 員 한강별장 (별장) 將 校 교련관 등 47명 별무사 9명 軍 兵 <표 1> 壯 勇 營 에서 되돌려진 官 員 과 軍 事 力 1) -1802년 1월- 선기대 등 5 哨 노량별장 임진별장 액외장용위 21명 아병 70명 별무사 9명 기타 標 下 軍 752명은 소속처가 분명하기 않음 장용위 92명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壯 勇 營 혁파 결정 이후 그해 1월에 각 군영에 환속된 된 군사는 약 1,600명 정도였으며 그 중 대부분의 인원이 標 下 軍 이었다. 그런데 壯 勇 營 혁파 직전의 군액 총액은 內 營 에 3 哨 병력과 향군 좌우사에 각 8 哨 등 전체 19 哨 의 병력이었으며, 壯 勇 營 의 실질 적인 핵심 군영인 外 營 의 경우 수원부의 약 2만명의 병력이었다. 15) 따라서 그해 1월에는 대규 모의 분속조치 보다는 핵심적인 인원의 분산을 통해 壯 勇 營 을 먼저 분해시키는 방법을 취했음 을 알 수 있다. 이는 壯 勇 營 의 재정이 설치시기부터 워낙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만들어 졌기에 이를 효과적으로 분산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이러한 이유로 1802년 9월에는 남은 壯 勇 營 15) 심승구, 앞의 논문, 1998, p.206. 참조.
178 176 학예지 제17집 의 군사와 재정이 각 군영을 비롯하여 선혜청과 호조 등으로 분산되어 壯 勇 營 은 완전히 소멸되 게 된다. 16) 이때 각 軍 營 에 분속된 재정과 군사력은 朔 料 를 계산하여 각각의 분속된 자원을 나누는 방식을 취했다. 가장 많은 자원을 되돌려 받은 訓 練 都 監 은 執 事 8 員, 將 校 중 別 武 士 및 漢 旅 16명, 馬 兵 220명, 兼 司 僕 ( 無 馬 者 포함) 214명, 閑 良 6명이고 步 軍 은 850명, 米 九 斗 를 받는 兼 司 僕 316명, 閑 良 334명이며 書 牌 書 字 的 牌 頭 등 標 下 軍 77명 등 총 2,041명의 병력을 환속받게 된다. 이렇게 訓 練 都 監 에 되돌려진 병력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7) <표 2> 壯 勇 營 에서 訓 練 都 監 으로 환속된 병력 구분 官 員 將 校 步 軍 標 下 軍 계 執 事 8 8 別 武 士 漢 旅 2 2 馬 兵 兼 司 僕 閑 良 步 軍 標 下 軍 총계 ,041명 그리고 訓 練 都 監 을 제외한 나머지 軍 營 은 비교적 적은 인원을 환속 받는데, 扈 衛 廳 은 陪 旗 手 만 30명, 御 營 廳 은 標 下 軍 인 吹 皷 手 30명, 兼 司 僕 14명, 閑 良 16명으로 총 60명 마지막으로 禁 衛 營 은 吹 皷 手 30명, 兼 司 僕 6명, 閑 良 23명, 書 字 的 1명, 牙 兵 70명, 兼 司 僕 ( 步 軍 ) 29명, 閑 良 ( 步 軍 ) 40명, 書 字 的 ( 步 軍 ) 1명 등 총 200명의 인원을 되돌려 받았다. 위와 같이 訓 練 都 監 을 제외한 나머 지 軍 營 에 적은 인원이 되돌려 진 것을 보면 壯 勇 營 창설당시 주력인원이 주로 訓 練 都 監 에서 차출되었던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장용영 혁파의 원칙을 세울 때 혁파된 壯 勇 營 의 군 사 및 재정 중 새롭게 신설된 부분은 폐지하고 다른 군영에서 흡수해온 부분은 해당 군영에 환속 16) 純 祖 實 錄 卷 4, 純 祖 2 年 9 月 庚 辰. 備 局 言 壯 勇 營 撤 罷 後 錢 穀 木 布 屯 土 軍 器 公 廨 區 處 移 屬 軍 兵 接 濟 戶 曹 內 司 各 衙 門 奴 貢 給 代 措 處 之 方 各 具 別 單 以 入. ; 備 邊 司 謄 錄 卷 193, 純 祖 2 年 9 月 2 日 < 壯 勇 營 錢 穀 木 布 來 歷 及 區 處 別 單 >, < 壯 勇 營 廨 宇 器 械 軍 物 區 處 別 單 >, < 各 營 移 屬 軍 兵 接 濟 次 磨 鍊 別 單 >, < 壯 勇 營 屯 土 區 處 別 單 >. 17) 備 邊 司 謄 錄 卷 193, 純 祖 2 年 9 月 2 日 < 各 營 移 屬 軍 兵 接 濟 次 磨 鍊 別 單 >.
179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77 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壯 勇 營 의 재정 또한 환속된 관원과 군사들의 朔 料 에 따라 각 군영에 환속되었다. 특히 다음의 <표 3>을 보면 正 祖 代 새롭게 창설된 壯 勇 營 의 기병부대를 살펴 볼 수 있는데, 환속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 중 상당수의 騎 兵 이 해체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표 3> 壯 勇 營 의 騎 兵 편제 구분 기병 부대명 핵심 방어지역 소속인원 창설시기 壯 勇 內 營 善 騎 隊 漢 城 府 前 哨 名 中 哨 名 後 哨 名 1788년 壯 勇 外 營 親 軍 衛 18) 水 原 府 508 名 1793년 正 祖 代 당시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壯 勇 營 전체 騎 兵 숫자는 853명으로 당시 中 央 軍 營 인 五 軍 營 의 騎 兵 숫자 중 가장 많은 편성인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병확대 노력은 五 衛 制 복구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正 祖 의 왕권강화 노력이 기병강화라는 형태로 군 제상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었다. 특히 壯 勇 內 營 의 기병부대인 善 騎 隊 의 경우 대장을 善 騎 將 혹은 善 騎 別 將 이라로 하여 모두 3명를 뽑았는데, 中 央 軍 營 을 비롯하여 변방지역까지 두루 재임 한 將 帥 를 선별하여 國 王 에게 직접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임명하는 등 운영에도 신중을 기하였 다. 19)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壯 勇 營 革 罷 과정 중 가장 핵심적인 자원인 기병부대에 대한 해체가 별다른 대안없이 진행되면서 정예기병의 해체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2천명이 넘는 대규모의 인원이 訓 練 都 監 에 환속되었으나 이 인원은 元 額 의 증가로 이 어지지는 않았고 대부분 예비군액화하여 결원이 생길 때 이를 보충하는 방식으로 자원이 배분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는 실질적인 군사력 증강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20) 이 는 壯 勇 營 혁파로 인해 핵심 군영이 다시 訓 練 都 監 으로 변화하였지만, 辟 派 에서 훈련대장직을 장악하지 못하자 정치적 부담감으로 인해 예비군액화 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壯 勇 營 혁파 초기에는 완전한 혁파가 아닌 재정적 압박을 통한 군사력의 약화를 18) 親 軍 衛 는 壯 勇 外 營 설립초기에는 壯 別 隊 로 불렸다가 이후 親 軍 衛 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 壯 勇 營 大 節 目 卷 1, 差 除. 20) 裵 祐 晟, 앞의 논문, 1991, pp.71~72. 참조.
180 178 학예지 제17집 추구하다가 갑자기 壯 勇 營 철파로 辟 派 의 입장이 선회하면서 생긴 변수로 그들이 中 央 軍 營 의 軍 權 을 쉽게 장악할 수 없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린 바 있었다. 즉, 이러한 판단에 따라 訓 練 都 監 의 강화를 수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1) 다만 壯 勇 營 혁파이후 5년이 흐른 뒤인 純 祖 7년 에 당시 訓 練 大 將 이었던 金 祖 淳 의 건의로 그때까지 陞 實 되지 않고 예비군액으로 남아있던 壯 勇 營 의 馬 步 軍 을 원액으로 추가하게 되었다. 다음의 사료는 당시 어떠한 과정으로 訓 練 都 監 의 원액이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本 局 에서 관장하는 壯 勇 營 에서 옮겨 온 馬 步 軍 은 지금은 거의 다 실직으로 승진했고, 아직 실직으 로 승진하지 못한 자는 馬 軍 이 1백 5명, 步 軍 이 1백 18명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本 局 의 원래 馬 兵 은 6 哨 로서 매번 行 幸 때를 당하면, 別 隊 1초 및 塘 馬 와 각종 公 私 잡탈을 제외하면, 陣 에 참여하는 수는 얼마 되지 아니하니, 구차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원래의 보군은 26 哨 로 그 중에서 武 藝 廳 의 門 旗 手 가 30명인데, 각초의 元 額 안에서 뽑아 취하므로, 평상시 항상 闕 伍 의 한탄이 있습니다. 지금의 사세 로는 비록 新 兵 을 많이 증설하는 데는 의논이 이를 수 없겠습니다만, 그대로 둔 1백여 명의 현존하는 군사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체통에 심히 손상됨이 없고, 戎 政 에 실로 이익됨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실직으로 승진하지 못한 馬 兵 으로 따로 1 哨 를 만들어 哨 官 을 설치해 다른 馬 兵 哨 의 예와 같이 원액으 로 永 作 하고, 步 軍 은 적당히 헤아려 궐오된 哨 에 채워 넣는다면, 아마도 편의에 합당할 듯 합니다. 22) 위의 사료를 보면 앞서 純 祖 2년 1월과 9월에 壯 勇 營 에서 환속된 訓 練 都 監 몫의 군사가 대부 분 5년 사이에 訓 練 都 監 의 결원에 채워졌으며 나머지 馬 兵 1백 5명은 새로운 별대마병 1 哨 의 元 額 을 추가로 해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步 軍 의 경우는 원액의 증가 없이 그대로 결원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訓 練 都 監 元 額 의 증가는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純 祖 가 親 政 을 함에 따 라 國 王 의 장인이었던 金 祖 淳 을 위시한 安 東 金 氏 일파가 정계에 대거 진출하면서 辟 派 를 정치 적으로 고립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 이듬해인 1805 년에 세상을 뜨자 辟 派 세력은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21) 오종록, 앞의 책, 1990, p.432. 참조. 22) 純 祖 實 錄 卷 10, 純 祖 7 年 7 月 乙 丑. 本 局 所 管 壯 勇 營 移 來 馬 步 軍 今 則 幾 盡 陞 實 而 未 及 陞 實 者 馬 軍 爲 一 百 五 名 步 軍 爲 一 百 十 八 名 矣 竊 念 本 局 原 馬 兵 爲 六 哨 而 每 當 行 幸 之 時 除 別 隊 一 哨 及 塘 馬 與 各 樣 公 私 雜 頉 則 參 陣 之 數 無 幾 苟 艱 如 此 原 步 軍 爲 二 十 六 哨 而 其 中 武 藝 廳 門 旗 手 爲 三 十 名 抄 取 於 各 哨 元 額 之 內 故 時 常 有 闕 伍 之 歎 以 今 事 勢 雖 不 可 議 到 於 多 增 新 兵 至 於 仍 置 百 餘 名 見 存 之 軍 無 甚 損 於 國 計 實 有 益 於 戎 政 未 陞 實 之 馬 兵 別 爲 一 哨 設 爲 哨 官 如 他 馬 兵 哨 例 永 作 元 額 步 軍 量 宜 塡 補 於 闕 伍 之 哨 恐 合 便 宜.
181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79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 訓 練 都 監 원액의 증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壯 勇 營 의 혁파와 함께 中 央 軍 營 의 군세는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壯 勇 營 의 혁파 원칙에 있어서 새롭게 늘어 난 부분에 대해서는 전부 폐지하는 방식을 취했기에 기존 壯 勇 營 의 강화를 통해 비축했던 군사 력이나 재정이 모두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완전히 분해됐기 때문이다. 특히 都 城 방어의 경 우 기존의 三 軍 門 도성방위체계가 正 祖 代 에 壯 勇 營 을 통한 일괄적인 체제로 전환되었다가 다 시 訓 練 都 監 을 비롯한 三 軍 門 체제로 회복되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의 궁핍의 문제로 군비가 축 소된 부분은 당연한 순서였다. 대표적으로 純 祖 代 에 국왕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는 騎 兵 중심의 禁 軍 역할을 담당한 龍 虎 營 은 壯 勇 營 혁파후 종전 군액인 700명을 확보했으나 王 權 의 약화와 함께 다시 600명으로 축소되었다. 23) 또한 나머지 中 央 軍 營 의 군사력 감축 또한 비록 수는 많지 않지만 모두 비슷한 상황이었다. 禁 衛 營 과 御 營 廳 의 지방에서 番 上 하는 鄕 軍 각 5 哨 가 국가 재정을 보완한다는 명 분아래 각 3 哨 로 감축된 대신 訓 練 都 監 처럼 給 料 兵 京 軍 1 哨 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24) 결과 적으로 이 두 營 의 경우 鄕 軍 3 哨 와 京 軍 1 哨 등 1 司 에 해당하는 약 500명의 병력에 標 下 軍 800명의 소규모 부대로 감축되어 버린 것이다. Ⅲ. 中 央 軍 營 弱 化 와 地 方 騎 兵 位 相 低 下 壯 勇 營 의 혁파이후 中 央 軍 營 중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곳은 禁 衛 營 과 御 營 廳 이다. 특히 禁 衛 營 과 御 營 廳 의 핵심 군사자원들은 지방의 鄕 兵 들이 番 上 을 중심으로 관리되기에 給 料 兵 과 長 番 의 성격이 강한 訓 練 都 監 과는 운용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御 營 廳 과 禁 衛 營 은 국왕의 호위 및 도성방의 핵심 군영으로 訓 練 都 監 과 함께 都 城 을 중심으로 三 軍 門 방어체제 를 형성했던 것이 肅 宗 代 이후의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25) 이 두 軍 營 에 대한 정비는 肅 宗 代 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는데, 모두 5 部 25 司 125 哨 의 총 16,300명으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番 上 의 규정과 관련해서는 한번 番 을 설 때 10개의 哨 가 동시에 바뀌는 방식에서 5개의 哨 가 2개월씩 연장 근무하여 番 을 바꾸는 것으로 바뀌었다. 26) 이는 과도한 양역부담에 따른 해소 조치의 하 23) 萬 機 要 覽 軍 政 篇 2, 龍 虎 營, 取 才. 24) 萬 機 要 覽 軍 政 篇 3, 禁 衛 營 設 置 沿 革 ; 御 營 廳 設 置 沿 革. 25) 車 文 燮, 朝 鮮 時 代 軍 事 關 係 硏 究, 檀 國 大 出 版 部, 1996, pp.40~52. 참조.
182 180 학예지 제17집 나로 北 伐 을 추진하여 과도하게 군사력을 증강시켰던 孝 宗 代 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었다. 이러한 番 上 의 변화는 해당 軍 額 의 감소보다는 실질적으로 都 城 에 상주하는 인원이 늘어 나면서 訓 練 都 監 과 유사한 常 備 軍 의 숫자가 늘어나 都 城 방위에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純 祖 집권 초기에 番 上 兵 의 수를 줄이는 대신 都 城 안에 두 營 의 京 軍 을 상주군화시 켜 각 1 哨 씩 두는 변화가 일어났다. 27) 이는 正 祖 代 의 華 城 건설의 경비마련을 위하여 御 營 廳 과 禁 衛 營 의 停 番 수를 1 哨 씩 줄여 收 布 로 대신 납부하게 된 것에서 연유하였다. 28) 당시 華 城 건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이러한 停 番 收 布 는 1808년까지 운영하기로 하였고, 御 營 廳 은 각초마 다 27명씩 총 135명, 禁 衛 營 은 각초마다 25명씩 125명이 이에 해당하였다. 그런데 1802년에 壯 勇 營 이 혁파된 후에도 이러한 수포방식은 계속 유지되었는데 이는 화성건설이 완료된 후에 도 지속적으로 軍 營 의 재정난이 지속되어 兩 營 의 番 上 을 재개하기보다는 布 를 징수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御 營 臺 長 이었던 李 堯 憲 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다 음의 사료를 살펴보면 이러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先 王 ( 正 祖 ) 18년 갑인(1794년)에 화성에 성을 쌓기 위한 물자를 각처에서 貸 付 한 것을 還 報 하기 위하여 본청 5개 초의 지방군이 番 에 들어오는 가운데서 매초에 각각 27명씩을 제하여 합계 135명 의 번을 줄이고, 그의 身 布 및 資 裝 保 錢 을 거두어서 연도를 배정하여 감제해 가던 것이 지금은 벌써 환보를 끝내었으니, 금년 11월부터는 番 을 복구하여 들여 세움이 옳겠습니다만,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방군으로서 番 을 든다는 것이 민간 및 지방 관청의 가장 큰 폐단이어서 비록 약간 명의 번드는 것만 감제하더라도 폐해를 제거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다시 복구하여 불러 올린다면 15년 동안 番 을 해제하여 편안히 지내던 나머지에 다시 폐단이 되는 것이 새로 창설하는 것이 나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군병의 인원수로 말하면 번을 감제한 뒤에 그 동안 올라온 자가 명목은 비록 5개 초라 하지만 실제의 수자로 따진다면 4개 초의 군병에 불과하며 그 가운데서 만일 질병 등 각종 사고가 생긴다면 각 처의 입직 및 行 陣 에 언제나 대오가 불비되는 폐가 있으니, 신의 의견으로는 지금 이미 번을 면제한 자들에게는 그대로 番 을 면제하고, 현재의 지방군 5개 초의 인원수를 가지고 합쳐서 4개 哨 로 편성하고, 서울에서 새로 용감하고 씩씩한 자를 모집하여 중앙의 1개 초를 따로 만들 어서 5초의 제도를 완비하면 지방에 있어서는 番 을 복구하여 폐해를 증가하는 문제가 없고, 軍 制 에 있 어서도 대오의 불비를 면할 수 있으며, 간혹 전원이 番 에 드는 것을 정지하는 때가 있다 할지라도 1개 哨 의 군대는 언제나 都 下 에 있게 되므로 여러 가지 번을 배정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소홀할 염려가 거의 26) 肅 宗 實 錄 卷 40, 肅 宗 30 年 12 月 甲 午. 27) 純 祖 實 錄 卷 11, 純 祖 8 年 8 月 己 亥. 28) 李 泰 鎭, 앞의 책, 1985, pp.309~314. 참조.
183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81 없을 것입니다. 또 서울의 標 下 諸 色 軍 이 원래부터 수가 적어서 언제나 부족을 느끼고 있으니, 50명만 더 늘여서 그 번을 면제한데 대하여 수납하는 보포 保 布 로 새로 모집하는 1개 초 및 標 下 軍 50명의 급료 로 배정한다면, 경비에 있어서도 또한 잉여가 생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5초의 제도에 아무런 손실이 없고, 標 下 軍 은 증원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두 가지가 모두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29) 이러한 주장에 대해 禁 衛 大 將 李 得 濟 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京 軍 의 정예화와 경비의 절감 을 이유로 모두 찬성하여 이후 鄕 軍 除 番 作 隊 式 의 규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 만들어진 규정을 살펴보면, 매번 5 哨 의 군병 652명 가운데서 135명은 종전대로 上 番 을 면제하고, 실제수 517명을 전 좌 우 후의 4개 초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또한 4초의 대오 편성하는 규례를 만 들어 部 의 標 下 軍 9명, 司 의 標 下 軍 8명, 每 哨 의 군병이 120명으로 하고 그 가운데서 기총 3 명 隊 長 9명 정군 90명 화병 9명 복마군 9명을 배정하였다. 이러한 번상규정과는 따로 새 롭게 도성에서 상비군의 역할을 담당할 兩 營 의 1초 135명을 모집하였다. 이들에 대한 구성은 127명은 지방 초군의 대오규례에 따라 中 哨 를 만들고 남는 군병 8명은 지방군 4개 哨 에서 감소 되는 標 下 軍 의 수를 옮겨서 충원하고, 京 軍 의 標 下 軍 50명을 더 설치하는 가운데서 牢 子 ㆍ 巡 令 手 각 20명과 燈 籠 軍 10명을 증원하여 상비군화 하였다. 30) 위와 같은 御 營 廳 과 禁 衛 營 의 상비군화는 표면적으로는 군의 정예화와 재정에 대한 효율적 운용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군액 숫자에서 番 上 軍 의 경우는 총 5초의 군사를 비록 番 上 의 형태라도 유지하지 못하고 전부 소멸시키는 한계를 가지 고 있다. 31) 다시말해 1 哨 의 京 軍 常 備 軍 을 보유하는 대신 나머지 4 哨 의 番 上 軍 의 병력을 영원 히 收 布 軍 化 시켜 전체적인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도성방위에 대하여 지나치게 訓 練 都 監 만을 중심으로 운영하려했던 중앙군영의 쏠림현상의 연장이라고도 볼 수 있 으며, 兩 營 의 임무를 國 王 의 扈 衛 나 入 直 등의 역할로 한정시키려했던 勢 道 政 治 期 의 시작을 29) 萬 機 要 覽 軍 政 篇 3, 御 營 廳, 鄕 軍 除 番. 御 營 大 將 李 堯 憲 啓 言 曾 於 先 朝 甲 寅 以 華 城 城 役 物 力 之 各 處 貸 下 還 報 次 本 廳 五 哨 鄕 軍 上 番 中 每 哨 各 除 二 十 七 名 合 一 百 三 十 五 名 减 番 收 其 身 布 及 資 裝 保 錢 以 爲 排 年 計 减 者 今 已 畢 報 自 今 十 一 月 爲 始 當 爲 復 番 徵 立 而 第 有 區 區 愚 見 盖 鄕 軍 上 番 最 是 民 邑 之 痼 瘼 雖 略 干 名 之 减 番 除 弊 不 些 今 若 復 舊 徵 上 則 十 五 年 安 於 除 番 之 餘 其 所 爲 弊 無 異 新 刱 又 以 軍 額 言 之 除 番 後 其 間 上 來 者 名 雖 五 哨 以 實 數 論 之 不 過 四 哨 之 軍 而 其 中 如 有 病 故 等 雜 頉 則 各 處 入 直 及 行 陣 每 有 隊 伍 不 備 之 弊 臣 意 則 今 此 除 番 者 仍 令 依 前 除 番 以 今 鄕 軍 五 哨 之 額 合 作 四 哨 自 京 新 募 勇 健 別 作 中 一 哨 以 備 五 哨 之 制 則 在 民 邑 無 復 番 增 弊 之 嘆 在 軍 制 可 免 隊 伍 之 不 備 而 或 値 全 數 停 番 之 時 一 哨 之 軍 恒 在 都 下 諸 般 排 番 之 道 庶 不 疎 虞 且 京 標 下 諸 色 軍 自 來 數 少 每 患 不 足 限 五 十 名 加 出 而 以 其 除 番 收 布 較 量 其 新 募 一 哨 及 標 下 五 十 名 料 布 則 接 濟 之 需 優 可 分 排 亦 有 剩 餘 矣 於 五 哨 之 制 無 損 而 標 下 有 增 額 之 效 恐 合 兩 便. 30) 萬 機 要 覽 軍 政 篇 3, 御 營 廳, 除 番 作 隊 式 京 軍 新 募 秩. 31) 李 泰 鎭, 앞의 책, 1985, pp.316~318. 참조.
184 182 학예지 제17집 보여주는 단상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禁 軍 의 핵심군영인 龍 虎 營 또한 700명에서 600명으로 줄어든 상황이 이어졌기에 中 央 軍 營 의 약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中 央 軍 營 의 약화와 더불어 지방의 군사력도 상당히 저하되었는데, 肅 宗 代 淸 에 대한 軍 事 的 압박을 방어하기 위해 증강시켰던 지방 騎 兵 에 대한 位 相 低 下 는 純 祖 代 에 이르러 급속 히 확대되었다. 대표적으로 弓 馬 之 鄕 이라 불렸던 咸 鏡 道 32)와 平 安 道 의 騎 兵 에 대한 위상 저 하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 兩 道 에는 肅 宗 代 親 騎 衛 와 別 武 士 라는 특수 기병부대가 가장 먼저 만들어져 朝 鮮 後 期 지방 기병강화의 흐름이 시작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먼저 咸 鏡 道 의 親 騎 衛 의 경우는 純 祖 14년에 南 兵 使 李 石 求 의 제안으로 南 兵 營 친기위의 원액이 500명이 증설되고, 북관지역에도 6백명이 증액되는 숫적 증원을 이뤘다. 33)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증원 은 기병이 갖는 정예 병력적 속성을 잃게 하여 무예수준의 질적 저하와 위상 저하를 동반하게 되었다. 34) 이는 親 騎 衛 의 원액 증가가 뛰어난 무사를 다수 확보하는 차원이 아니라, 咸 鏡 道 지역의 무사들에 대한 위무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예실력을 통한 親 騎 衛 입적이 아니라 軍 役 을 대체하기 위하여 이름만 걸어 놓는 형태의 불법이 만연해져 親 騎 衛 의 位 相 低 下 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親 騎 衛 의 내부적 상황은 修 撰 金 在 元 의 상소에 잘 드러나 있 다. 당초에는 모두 고을 사람 중 문벌이 있고 몸과 힘이 건장한 자로 충정하여, 이로 인해 과거에 오르 고 드러난 벼슬에 올라서 수령과 곤수에 이른 자가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근년 이래로 軍 役 을 기피하려는 불량배들이 어려움 없이 불법으로 뽑히는 바람에 지금은 친기위 명부에 편입된 고 을 사람이 없습니다. 수년 전에 남 북 병영에 또다시 각각 6백 명을 증원하였으므로 전과 합하면 3천 2백 명이나 되지만 두 병영에서 수용한 것은 도내의 쇠잔한 鎭 두 자리로 매년 都 試 때에 우등한 자를 취하여 자체에서 불러 쓸 뿐이고 아직 오래 근무했다고 하여 채용된 자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家 産 을 다 팔아서 스스로 군사 장비를 갖추었지만 먼 경우는 4, 50년, 가까운 경우는 2, 30년이 되도록 벼슬을 얻지 못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늙어 죽도록 벼슬을 얻지 못하는 자도 있으므로 인정이 억울해 합니다. 35) 32) 肅 宗 實 錄 卷 49, 肅 宗 36 年 11 月 更 子. 33) 純 祖 實 錄 卷 17, 純 祖 14 年 7 月 癸 丑. 34) 姜 錫 和, 朝 鮮 後 期 咸 鏡 道 의 親 騎 衛 韓 國 學 報 89호, 1997, pp.52~55. 참조. 35) 純 祖 實 錄 卷 23, 純 祖 20 年 7 月 丁 丑.
185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83 그런데 위의 상소내용 중 親 騎 衛 장기복무자 자들에 대한 특별혜택을 추가하자는 의견이 이 후 받아 들여져 親 騎 衛 에 오래 동안 복무한 사람의 경우는 武 藝 의 실력에 상관없이 邊 將 자리가 주어져 무예 실력을 쌓아 都 試 를 볼 필요성이 없어져 근무경력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심각한 무예실력의 퇴화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親 騎 衛 의 무예실력 저하가 계속되면서 신분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軍 役 을 쉽게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친기위에 지원하자 해당 지방관들은 무예실력을 높이기보다는 단순한 卜 馬 軍 으로써 짐을 수송하는 부대로 친기위의 위상은 저하되 었다. 특히 정예 기병대에서 卜 馬 軍 으로의 위상 저하에 따라 기존의 무예실력이 뛰어난 사람들 이 친기위에 입속하기를 꺼려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여 친기위의 위상은 더욱 저하되었다. 36) 이러한 親 騎 衛 의 위상저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각 監 營 이나 都 試 에서 몰기한 사람들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다시 한군데 모아 점수를 비교하여 가장 성적이 뛰어난 자에게 直 赴 殿 試 의 자격을 주는 방법이 실행되기도 하였다. 37) 그러나 해당 監 營 을 비롯해 都 試 에서 몰기한 사람 들이 直 赴 殿 試 의 자격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자 이에 대해 반발을 하면서 지속적인 실행이 어려 워졌다. 38) 이렇게 親 騎 衛 의 위상과 무예실력 저하가 지속되면서 親 騎 衛 은 단순한 軍 役 의 대체 로만 여겨지는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咸 鏡 道 의 親 騎 衛 와 짝을 이뤄 편성된 平 安 道 의 別 武 士 의 경우도 純 祖 代 에 이르러 무예실력 의 및 위상 저하가 나타났다. 이러한 위상저하의 바탕에는 무예를 천시하고 유학을 중시여겼던 조선후기 사회전반적인 분위기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北 方 과 인접한 兩 道 의 경우는 正 祖 代 부 터 馬 兵 都 試 를 비롯한 다양한 武 士 들의 사기 증진책이 제시되었지만, 양반가의 자제들은 武 藝 를 수치로 여기는 자가 없을 정도로 무사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39) 특히 親 騎 衛 와 관련 해서 咸 鏡 道 의 鄕 任 은 모두 親 騎 衛 에서만 차출하도록 규정하는 등의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었 음에도 이러한 位 相 低 下 는 계속되었다. 40) 그리고 平 安 道 의 別 武 士 의 경우는 해당 別 武 士 釐 正 36) 北 行 隨 錄 卷 2, 北 略 擬 議 下 軍 制. 37) 備 邊 司 謄 錄 卷 215, 純 祖 27 年 3 月 11 日. 38) 각 監 營 과 軍 營 에서 都 試 를 치를 때 단순한 우등자에 대한 부정은 쉽지 않았지만, 각 개인의 몰기는 여러 가지 부정이 나타났다. 이는 都 試 우등자의 경우는 경쟁자가 있기에 서로 감시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개인의 沒 技 경우는 비교 혹은 경쟁이 없이 숫자만 확인하기에 여러 가지 무예시험에서 지속적으로 부정사건이 발생하여 沒 技 者 들이 다수 양산 되었다. 그러나 邊 將 자리의 숫자는 한정되어 이러한 과다한 沒 技 者 양산은 승진지체의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키기도 하였다. 강석화, 朝 鮮 後 期 咸 鏡 道 의 地 域 發 展 과 北 方 領 土 意 識,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참조. 39) 正 祖 實 錄 卷 34, 正 祖 16 年 4 月 丁 巳. 40) 備 邊 司 謄 錄 卷 178, 正 祖 15 年 4 月 5 日. 統 制 使 李 潤 慶 所 啓 北 關 軍 政 以 儒 風 之 極 盛 簽 丁 之 艱 辛 在 在 皆 然 不 可 不 稍 變 軍 制 而 往 在 丁 卯 年 間 連 値 歲 荒 人 民 零 星 果 有 改 軍 制 之 擧 而 今 則 實 非 人 民 之 不 足 專 由 於 儒 弊 之 滋 多 乃 以 親 騎 衛 之 素 稱 驍 健 者 今 不 免 疲 殘 以 臣 愚 淺 之 見 則 北 土 俗 習 無 論 鄕 武 爭 任 成 風 若 使 大 小 差 任 一 從 親 騎 衛 案 中 差 出 則 豪 富 健 兒 必 爭 願 入 軍 籍 始 可 釐 正 宿 弊 恐 不 如 前 矣 上 曰 大 臣 旣 經 北 伯 使 之 稟 處 可 也.
186 184 학예지 제17집 新 節 目 을 만들어 都 試 와 관련해서 입상자 전원에 直 赴 殿 試 의 자격을 내려주는 등 다양한 혜택 을 지원하였으나 純 祖 代 에 들어서면서 경제적 발달로 인하여 武 士 보다는 文 士 에 지원하는 경 향이 강해졌다. 이는 앞서 咸 鏡 道 親 騎 衛 의 한정된 邊 將 자리와 유사한 문제로 平 安 道 의 경우도 邊 將 자리가 한정되었기에 비록 鄕 任 을 비롯한 향촌지배 세력 유지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實 職 이 없었기에 別 武 士 를 지원하려는 양반가 자제는 갈수록 줄어 들었다. 심지어 別 武 士 에 입속 되어 군장을 갖추고 試 才 에 참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賤 卒 로 취급하거나 집안이 어려워 의지 할 곳 없어 어쩔수 없이 軍 役 을 대체하는 사람들의 무리 41) 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別 武 士 의 위상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이러한 位 相 低 下 문제로 입속된 사람의 집안과의 결혼까지도 꺼 려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平 安 監 司 鄭 晩 錫 의 上 疏 에는 이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馬 兵 은 步 軍 과 달라서 軍 裝 馬 匹 등 비용이 적지 않으므로 도망치고 죽는 등 탈이 생길 경우 반드시 親 族 이 대신하게 되어 인척에게까지 미쳐서, 이 때문에 馬 兵 의 집안과는 혼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42) 이러한 위상저하 문제는 단순히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나타난 문제로 文 士 들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武 士 들의 지위가 내려감에 따라 발생한 일이다. 특히 조선후기 北 方 地 域 의 경우는 北 關 開 市 를 비롯한 使 行 貿 易 이 활발해짐에 따라 부의 축적 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으로 경제성장에 걸맞는 사회적 위상을 높이려는 인식이 확대되 어 武 班 織 보다는 文 學 之 士 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팽패해졌기 때문이다. 43) Ⅳ. 맺음말 勢 道 政 治 의 시작이었던 19세기 前 半 期 의 軍 制 史 的 변화 중 가장 크게 부각되는 것은 壯 勇 營 혁파와 中 央 軍 營 의 지속적인 약화였다. 前 代 인 正 祖 代 에 國 王 權 강화라는 명목하에 기존의 五 軍 營 을 능가하는 壯 勇 營 이라는 단독군영을 만드는 등 군비확장세가 지속되었으나, 갑작스런 正 祖 의 죽음으로 더 이상의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政 治 史 的 으로 보면 純 祖 의 즉위와 동시 41) 別 武 士 釐 正 新 節 目. 別 武 士 之 戎 裝 赴 試 者 親 作 行 伍 賤 卒 抄 名 付 案 無 非 至 窮 無 依 之 類 身 手 才 藝 己 無 可 論 眼 巴 器 械 莫 能 自 辨. 42) 純 祖 實 錄 卷 17, 純 祖 14 年 2 月 戊 午. 馬 兵 與 步 軍 有 異 軍 裝 馬 匹 所 費 不 些 逃 故 有 頉 必 以 族 代 及 於 姻 戚 是 故 馬 兵 之 家 不 與 之 婚 娶. 43) 吳 洙 彰, 朝 鮮 後 期 平 安 道 民 에 대한 人 事 政 策 과 道 民 의 政 治 的 動 向,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참조.
187 19 世 紀 前 半 期 朝 鮮 騎 兵 弱 化 의 背 景 硏 究 185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老 論 의 시파와 벽파가 壯 勇 營 에 대해 재정적인 압박을 가해 세력을 축소시키려 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革 罷 라는 커다란 변동을 가져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병의 변화를 살펴보면, 순조대 장용영 혁파와 함께 핵심 기병대였던 선기대와 친군위가 해체되었다. 이를 필두로 中 央 軍 營 에 속해있던 騎 兵 들까지도 19세기를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갔음 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한 地 方 騎 兵 의 경우는 肅 宗 代 부터 확장세를 유지했던 親 騎 衛 와 別 武 士 에 대한 현실적 처우개선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예실력이 갈수록 떨어져 갔고, 虛 設 化 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허설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방 騎 兵 에 대한 각종 혜택이 부여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운영의 한계로 인하여 이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이러한 지방 기병의 位 相 低 下 문제는 단순히 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나타난 문제 였다. 이는 지방 경제력이 발달함에 따라 文 士 들의 위상이 높아진 반면 상대적으로 武 士 들의 지위가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前 半 期 에 일어난 中 央 과 地 方 의 騎 兵 약화는 곧 조선전체 군사력의 수준저하를 발생 시켰다. 여기에 勢 道 政 治 의 지속으로 인하여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기존 中 央 軍 營 의 실질적인 운영에도 많은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후 각종 民 亂 이 발생하고 異 樣 船 의 출몰을 비롯한 다양한 제문제가 발생하면서 조선의 국방 력은 회복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본 논문은 19세기 전반 조선의 군사적 변화를 騎 兵 이라 는 한 병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다만 필자의 능력부족으로 인하여 다양한 사료에 대한 복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점이 한계로 작용한다. 앞으로 이러한 中 央 과 地 方 에 대 한 균형적인 연구와 騎 兵 을 비롯한 다양한 細 部 兵 種 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188 186 학예지 제17집 참고문헌 1. 肅 宗 實 錄 2. 正 祖 實 錄 3. 純 祖 實 錄 4. 備 邊 司 謄 錄 5. 壯 勇 營 大 節 目 6. 萬 機 要 覽 7. 北 行 隨 錄 8. 姜 錫 和, 朝 鮮 後 期 咸 鏡 道 의 親 騎 衛 韓 國 學 報 89호, 金 俊 爀,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硏 究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裵 祐 晟, 純 祖 前 半 期 의 政 局 과 運 營 政 策 의 推 移 奎 章 閣 14, 심승구, 19세기전반 군영의 변동과 수도방위체제의 변화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오종록,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하), 청년사, 李 泰 鎭, 朝 鮮 後 期 의 政 治 와 軍 營 制 變 遷, 韓 國 硏 究 院, 車 文 燮, 朝 鮮 時 代 軍 事 關 係 硏 究, 檀 國 大 出 版 部. 15. 崔 炯 國, 朝 鮮 時 代 騎 兵 의 戰 術 的 運 用 과 馬 上 武 藝 의 변화 역사와 실학 38호, 2009.
189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87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최 형 국* 목 차 Ⅰ. 머리말 Ⅱ.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騎 兵 强 化 Ⅲ. 正 祖 代 馬 上 武 藝 의 訓 練 및 戰 術 的 特 性 Ⅳ. 맺음말 Ⅰ. 머리말 1) 전통시대 騎 兵 은 현대의 탱크나 장갑차와 같은 빠른 돌파력으로 인해 戰 場 의 핵심병종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이유로 壬 辰 倭 亂 이전까지 朝 鮮 軍 戰 術 의 핵심은 騎 兵 이 담당하였다. 1) 이는 조선을 건국한 太 祖 李 成 桂 의 출신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성계는 북방의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과의 전투를 통해 많은 戰 果 를 얻었으며 이 과정 속에서 얻은 군사세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건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건국한 후에도 북방 이민족의 위협은 끊 이지 않아 조선초기의 主 敵 은 당연히 이들이었고 이에 대한 방어 및 공격을 중심으로 조선군의 편제가 이뤄졌다. 2) 특히 여진족의 경우는 騎 兵 을 이용한 빠른 전술로 국경지대에 지속적으로 약탈과 침략을 일삼아 북방변경의 최대 위협세력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초기 핵 심 兵 書 인 陣 法 에는 騎 兵 을 중심으로 한 전략 전술들이 주를 이뤘으며, 步 兵 은 騎 兵 과 동일 한 비중으로 편성하였지만 그 실질적 공격 및 방어의 핵심은 騎 兵 이었다. 3) 심지어 남쪽의 왜 구를 방어하는 데에도 騎 兵 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화포를 이용한 방포법과 더불어 騎 兵 은 조선 *무예 24기 연구소 연구소장 1) 심승구, 朝 鮮 時 代 의 武 藝 史 硏 究 - 毛 毬 를 중심으로- 軍 史 38호, 1999, p.126. 참조. 2) 河 且 大, 朝 鮮 初 期 軍 事 政 策 과 兵 法 書 의 發 展 軍 史 19호,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1989, p.101. 참조. 3) 盧 永 九, 朝 鮮 後 期 兵 書 와 戰 法 의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17. 참조.
190 188 학예지 제17집 의 군사 공격 및 방어체제에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壬 辰 倭 亂 이라는 사상 초유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초기 騎 兵 위주의 전법은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으며, 이후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단병접전과 화기술을 포함한 砲 手 射 手 殺 手 를 비롯한 三 手 兵 과 戰 車 등 다양한 형태의 전법 변화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조선초기 騎 射 와 騎 槍 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騎 兵 의 馬 上 武 藝 또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과정 중 발생한 碧 蹄 館 戰 鬪 는 급기야 騎 兵 無 用 論 까지 일게 하였지만 4), 이후 稷 山 戰 鬪 를 비 롯한 몇몇 전투에서 기병의 유용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사례가 발생하여 기병은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丙 子 胡 亂 당시 淸 騎 兵 의 빠른 속도전에 밀려 南 漢 山 城 에 포위된 仁 祖 가 三 田 渡 의 굴욕을 겪으면서 조선군 기병의 역할은 다시한번 역사의 전면에 부각 된다. 이러한 기병에 대한 인식 변화는 正 祖 代 에 이르러 국왕친위군으로 편성된 壯 勇 營 의 창설과 함께 騎 兵 확대노력으로 이어지는데, 당시 제기된 왕권 강화를 위한 五 衛 制 복구론에는 기병강 화의 필연적인 요소가 담겨있다. 그리고 馬 上 武 藝 의 경우는 조선후기 기병들이 필수적으로 휴 대하였던 단병무기인 馬 上 鞭 棍 을 중심으로 전술적 특징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기병 근접전에서는 馬 上 還 刀 나 騎 槍 그리고 馬 上 月 刀 등이 함께 사용되었으나 이 들의 경우는 적을 찌르거나 벤 후 회수하는 시간이 있어 鳥 銃 이 전장에서 상용화되는 시점에서 빠른 돌격전에 사용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馬 上 鞭 棍 5)은 그 핵심 특성이 도리 깨와 같은 회전식 打 擊 武 器 이기 때문에 회수력 부분에서 칼이나 창보다 빠르게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6) 또한 母 鞭 과 子 鞭 을 합칠 경우 일반 장병기와 비슷한 길이로 사용할 수 있으며, 鞭 棍 의 子 鞭 은 평상시 접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에 휴대가 간편하여 조선후기 騎 兵 들에 게는 필수 지참무기로 보급되었다. 7) 4) 宣 祖 實 錄 卷 65, 宣 祖 28 年 7 月 己 卯. 成 龍 曰 戚 繼 光 陣 法 大 槪 間 花 疊 而 動 靜 相 隨 專 爲 防 倭 而 設 也 防 倭 則 步 兵 勝 於 騎 兵 前 日 碧 蹄 之 戰 遼 兵 騎 兵 故 倭 人 以 步 兵 急 趨 遼 兵 見 敗. 5) 馬 上 武 藝 의 일종인 馬 上 鞭 棍 은 달리는 말 위에서 鞭 棍 을 사용하는 무예를 말한다. 鞭 棍 은 일종의 도리깨형태의 무기이 며, 긴 母 鞭 과 짧은 子 鞭 으로 구성되어 모편을 잡고 자편을 휘둘러 적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타격무기 및 무예이다. 보통 마상무예서는 그 무기를 지칭하는 것이 무예를 설명하는 것으로 함께 사용된다. 6) 기병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무기인 還 刀 나 騎 槍 의 경우는 적을 찌른 후 다시 뽑아야 재사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화약무기의 재장전 속도를 감안하여 볼 때 馬 上 鞭 棍 의 타격방식은 적의 표면을 공격하는 무기이기에 회수력이 뛰어나다 고 볼 수 있다. 특히 還 刀 나 槍 의 경우는 甲 冑 를 입은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 어려우나 馬 上 鞭 棍 은 갑주착용의 유무와 상관없이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전장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7) 현재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武 器 에 대한 제원 중 길이 문제에 대하여 약간의 이견이 있다. 대표적으로 周 尺 과 營 造 尺 으로 구분되는데, 營 造 尺 의 경우에는 주로 兵 器 및 船 舶 의 건조, 건축, 특히 성곽의 축조 등에서 많이 사용하였지만 환산단위 에서 약 31cm 에 해당되 무예도보통지상의 무기제원으로 보기에는 한계점이 많다. 따라서 필자의 경우는 馬 上 鞭 棍 의
191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89 조선후기 騎 兵 과 馬 上 武 藝 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文 獻 中 心 의 연구가 주를 이뤘다. 8) 물론 武 藝 史 또한 歷 史 學 의 지류이므로 文 獻 硏 究 를 통해 일정한 흐름을 읽을 수 있지만, 이와 더불어 신체의 움직임과 실제 군사들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부분이 함께 연구된다면 기존의 문헌연구 위주의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정조시대에 훈련된 馬 上 武 藝 의 일종인 馬 上 鞭 棍 의 實 技 史 的 인 입장을 추가하여 朝 鮮 後 期 馬 上 武 藝 의 특성을 짚어 보고자 한 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正 祖 時 代 國 王 親 衛 軍 으로 편성된 壯 勇 營 의 創 設 배경과 기병강화를 五 衛 制 복구론적 입장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馬 上 武 藝 의 경우는 전 투 현장의 변화와 함께 馬 上 武 藝 의 實 技 훈련방법의 자세까지 면밀히 분석해 보고, 이후 이러 한 내용을 바탕으로 正 祖 時 代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특징까지 확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正 祖 時 代 에 편찬된 개인무예 훈련서인 武 藝 圖 譜 通 志 의 馬 上 鞭 棍 을 중심으로 그 실제적인 자 세 비교와 騎 兵 들의 무장상태를 통해 馬 上 鞭 棍 의 특징과 전술적 가치를 실제 자세를 통해 분석 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正 祖 代 壯 勇 營 이라는 특수부대가 만들어지면서 戰 場 의 변화와 맞물려 馬 上 武 藝 를 통한 전술이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騎 兵 强 化 英 祖 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正 祖 는 生 父 思 悼 世 子 의 문제로 인하여 등극초반부터 신하들 과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壬 午 禍 變 당시 ( 思 悼 ) 世 子 의 不 德 을 책망하는 입장이었던 老 論 僻 派 길이를 周 尺 으로 환산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무기의 도량형에 대한 부분은 추후 논문에서 다룰 예정이다. 조선 후기 병서인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馬 上 鞭 棍 의 제원을 살펴보면, 鞭 長 六 尺 五 寸 子 鞭 長 一 尺 六 寸 五 分 으로 周 尺 으로 환 산할 경우 편은 약 130cm이고 자편은 약 35cm이다. 일반적으로 마상에서 사용했던 자루가 긴 무기인 騎 槍 이나 月 刀 의 경우 전장 길이가 길어 마상에서 휴대하기 불편하였다. 그래서 비록 騎 槍 이나 月 刀 를 마상에서 사용할 지라도 馬 上 鞭 棍 은 함께 안장에 휴대하도록 하였다. 8) 현재까지 조선시대 마상무예와 관련한 연구 중 朝 鮮 時 代 의 武 藝 史 硏 究 - 毛 毬 를 중심으로- 軍 史 38호, 1999, 심승구 의 논문이 대표적이며 이 논문에서는 마상무예 중 騎 射 훈련과 관련한 毛 球 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무예사를 다뤘다. 또한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학예지 10집, 육사박물관, 2000.에서는 무과시험에서 활용되었던 步 射, 騎 射 를 살펴보아 조선시대 무예사 연구에 대한 많은 연구를 남겼다. 특히 노영구의 경우는 무예도보통지와 마상무예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 해석사, 2000.에서 조선후기 개인무예 병서인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마상무예를 전반적 으로 고찰하였다. 또한 임동권 외, 한국의 마상무예 마문화연구총서 Ⅱ,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7에서는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마상무예 전반을 다뤘다. 필자 또한 騎 射 의 실기사적인 측면을 주목하여 조선시대 騎 射 시험방식의 변화와 그 실제, 中 央 史 論 24, 韓 國 中 央 史 學 會, 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외에도 騎 兵 에 대한 연구로는 노영 구, 18세기 騎 兵 강화와 지방 武 士 層 의 동향 한국사학보 13, 2002 등이 있다.
192 190 학예지 제17집 세력의 핵심이었던 金 龜 柱 일파는 물론이고 반대 입장을 취했던 老 論 時 派 역시 正 祖 에게는 정 치적 대립자였다. 특히 당시 五 軍 營 을 이끌고 있는 각 軍 營 大 將 의 경우 婚 禮 나 정치적인 거래 를 통하여 기득권층인 老 論 과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어 正 祖 에게 당시의 五 軍 營 의 군사력 은 믿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9)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尊 賢 閣 侵 入 事 件 을 빌미로 正 祖 는 기존의 禁 軍 체제에 대한 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五 軍 營 전체의 군사개혁을 가속화하였다. 10) 이를 위하여 먼저 宣 薦 內 禁 衛 取 才 入 屬 法 등을 통해 대대적인 禁 軍 체제에 대한 정비를 시작하였고, 11) 闕 內 禁 軍 의 淸 要 職 이었던 別 軍 職 과 宣 傳 官 등 近 密 侍 衛 職 에 대한 개편작업을 통해 기존의 扈 衛 廳 을 개혁 하였다. 12) 이러한 禁 軍 조직 개편은 洪 國 榮 을 宿 衛 大 將 으로 하는 宿 衛 所 의 건설로 일단락되었 다. 이로써 禁 軍 의 모든 실질적인 軍 權 을 正 祖 가 통제하게 된다. 이후 도성을 방어하는 三 軍 門 에 대한 정비작업과 동시에 도성외곽을 방어하는 摠 戎 廳 과 守 禦 廳 의 혁파 및 통합을 진행하여 기존의 五 軍 營 에 대한 완전한 군제개혁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갔다. 13) 그러나 이러한 軍 營 개혁 논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文 閥 과 武 閥 의 정치적인 유대관 계에서 비롯된 다양한 방해 움직임들로 인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다. 당시 正 祖 의 五 軍 營 에 대한 개혁의지는 정조의 下 敎 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兵 曹 에 명하여 閱 武 하는 의절을 釐 正 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치를 함에 있어 옛날을 본받지 않으면 모두 구차스런 방법인 것이다. 治 兵 과 治 禮 가 무슨 다를 것이 있겠는가? 대저 五 衛 法 을 회복시 키지 않고 五 營 의 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비록 힘써 뜻을 따르고 좋은 법규를 얻었다 하더라도 이미 근본을 바룰 수 없을 것이니, 또한 말단을 다스린 것으로 귀결됨에 불과한 것이 된다. 14) 위의 사료에서 언급한 것처럼 正 祖 는 조선후기 정착된 五 軍 營 의 제도를 조선전기의 五 衛 體 制 로 회복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개혁작업을 지속했 던 것이다. 五 衛 體 制 하에서는 兵 曹 判 書 가 五 衛 의 將 이 되어 직접적인 통제를 할 수 있었으나 9) 張 弼 基, 朝 鮮 後 期 武 班 家 門 의 閥 閱 化 와 그 性 格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正 祖 實 錄 卷 4, 正 祖 元 年 7 月 辛 卯. 11) 正 祖 實 錄 卷 4, 正 祖 元 年 7 月 戊 子. 12) 承 政 院 日 記 1413 柵, 正 祖 2년 戊 戌 2 月 5 日 丙 申. 13) 金 俊 爀,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硏 究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正 祖 實 錄 卷 4, 正 祖 2 年 8 月 庚 午. 命 兵 曹 釐 正 閱 武 儀 節 敎 曰 治 不 師 古 皆 苟 道 也 治 兵 與 治 禮 奚 異 哉 大 抵 五 衛 之 法 未 復 五 營 之 制 未 革 雖 欲 務 循 古 意 求 得 良 規 旣 不 得 正 其 本 則 亦 不 過 治 末 之 歸 而 已.
193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91 五 軍 營 體 制 에서 兵 曹 判 書 는 禁 衛 營 만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즉, 군영체제의 변화는 곧 王 權 과 臣 權 과의 대립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특히 正 祖 는 先 王 인 英 祖 代 에 재발간한 兵 將 圖 說 에 대한 의미를 곧 五 衛 體 制 의 복구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 말로 후세에 길이 남을 만 한 일이라 추켜세우기도 하였다. 다음의 사료를 보면 正 祖 가 인지한 五 衛 體 制 와 王 權 과의 관계 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兵 將 續 圖 說 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병조 판서는 大 中 軍 으로서 三 軍 의 司 令 임무를 띄고 있는 몸인데, 그의 관할 아래 있는 中 營 將 과 訓 鍊 大 將 이 허리춤에다 三 軍 司 命 旗 를 꽂고 있고, 기껏 手 旗 將 이 대중군의 절제를 받고 있으니, 만약 功 罪 를 가려야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그것이 대단히 불합리하고 모순된 일이다. 兵 將 續 圖 說 이 印 行 된 초기에는 거둥 때 동원될 군대의 동원 標 信 을 대중군에게 내리면 대중군이 令 箭 으로 隨 駕 大 將 에게 분부를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한 將 臣 이 그 분부를 따르지 않았다가 준엄한 견책을 당한 일이 있은 후로 그 영전을 곧 환수하도록 명하 여, 그후로는 대중군이 영전으로 지휘를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兵 將 續 圖 說 의 제도가 아마 선왕 때 이미 고쳐졌던 모양이다. 우리 선대왕께서 세조의 御 製 五 衛 陣 法 에 序 를 써서 중외에 반포하시면서 하교하시기를, 京 軍 門 이 설치되면서 兵 과 農 이 둘로 갈라졌는데, 五 衛 의 節 制 와 약속을 경군문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것 이다. 식자들이 五 衛 를 부활시키고자 한 지 오래인데, 지금 重 刊 하여 널리 반포하는 것은 그 제도를 만세에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뜻이다. 하셨으니, 아, 너무나 훌륭하도다. 후세 嗣 王 들이 두고두고 이 어 나아가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五 營 의 제도를 고치는 것은 바로 更 張 이 아닌 紹 述 인 것이다. 15) 이러한 五 衛 體 制 로의 복구론은 오위체제의 핵심 전술 복구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따 라서 朝 鮮 前 期 의 핵심전술이었던 騎 兵 戰 術 의 복구는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16) 그러나 五 軍 營 개혁작업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宿 衛 大 將 겸 都 承 旨 의 역할을 담당한 洪 國 榮 의 과도한 권력욕으로 인해 폐단이 발생하자 17) 正 祖 는 宿 衛 所 를 혁파 18) 하고 새로운 방향모색을 15) 弘 齋 全 書 13 卷, 序 引 6, 翼 靖 公 奏 藁 軍 旅 類 叙, 軍 制 引. 大 抵 兵 將 續 圖 說 合 有 商 量 處 兵 曹 判 書 以 大 中 軍 身 爲 三 軍 司 令 之 任 而 管 下 中 營 將, 訓 鍊 大 將 則 腰 揷 三 軍 司 命 手 旗 將 受 節 制 於 大 中 軍 若 當 査 功 罪 時 又 將 如 何 爲 之 此 爲 十 分 掣 肘 之 端 是 以 續 圖 說 印 行 之 初 動 駕 時 行 陣 去 就 標 信 只 下 於 大 中 軍 則 大 中 軍 以 令 箭 分 付 隨 駕 大 將 矣 一 將 臣 不 從 令 而 被 嚴 譴 旋 命 還 收 其 後 大 中 軍 不 得 以 令 箭 指 揮 以 此 仰 度 則 續 圖 說 制 度 之 釐 改 已 在 於 先 朝 矣 况 我 先 朝 序 光 廟 御 製 五 衛 陣 法 遂 印 頒 中 外 而 敎 曰 京 軍 門 設 而 兵 農 作 二 五 衛 之 節 制 約 束 其 可 擧 而 措 之 於 軍 門 識 者 之 欲 復 五 衛 其 來 蓋 久 今 重 刊 廣 布 者 蓋 永 垂 萬 世 之 意 於 乎 盛 哉 是 豈 非 後 嗣 王 紹 述 之 一 端 乎 然 則 改 五 營 之 制 非 更 張 卽 紹 述 也. 16) 朝 鮮 前 期 五 衛 體 制 의 핵심전술인 騎 兵 戰 術 은 최형국, 朝 鮮 時 代 騎 兵 의 戰 術 的 運 用 과 馬 上 武 藝 의 변화 역사와 실학 38호, 2009.에서 상세히 다뤘다. 17) 弘 齋 全 書 卷 31, 敎 2, 已 奉 朝 賀 洪 國 榮 歸 還 田 里.
194 192 학예지 제17집 통해 친위군영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실각한 洪 國 榮 의 從 弟 인 洪 福 榮 의 역모사건 19) 이 발생하자 正 祖 는 昌 慶 宮 明 政 殿 西 月 廊 에 주둔하고 있던 訓 練 都 監 의 武 藝 出 身 들을 차출하 여 새로운 호위기구를 만들게 된다. 이때 새롭게 구성된 武 藝 出 身 들에 대한 호칭은 원래 親 軍 衛 壯 勇 衛 武 勇 衛 를 놓고 大 臣 들의 의견을 구하여 壯 勇 衛 으로 그 이름을 확정하게 된다. 20) 이후 國 王 호위병력 증강이라는 명분으로 30명에서 50명으로 인원을 확대하여 正 祖 가 주로 기 거했던 昌 慶 宮 明 政 殿 을 중심으로 이들을 배치하였다. 21) 새롭게 만들어진 正 祖 의 친위부대인 壯 勇 衛 는 이후 규모를 늘려 壯 勇 廳 을 거쳐 1788년에는 壯 勇 營 으로 승격되어 기존의 五 軍 營 을 능가하는 병력규모로 확대된다. 이러한 親 衛 軍 營 확대과정 중 대신들의 직접적인 반대 의견 22) 도 있었으나 正 祖 는 國 王 扈 衛 문제를 거론하며 壯 勇 營 을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후술하겠지만 中 央 軍 營 인 訓 練 都 監 을 비롯한 禁 軍 의 騎 兵 을 대폭 壯 勇 營 으로 이관하여 壯 勇 外 營 에는 親 軍 衛 를 설치하고 壯 勇 內 營 에는 善 騎 隊 라는 騎 兵 部 隊 를 따로 편성하여 騎 兵 을 강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五 軍 營 에 대한 세력이 급격하게 壯 勇 營 으로 흡수되었다. 먼저 禁 軍 의 핵심인 內 三 廳 700명의 정원 중 100명을 壯 勇 營 으로 이관시키고 闕 內 핵심 방어지역인 建 陽 門 과 銅 龍 門 등의 禁 軍 宿 衛 지역에 壯 勇 營 을 배치시켰다. 23) 그리고 訓 練 都 監 의 別 技 軍 과 攔 後 哨, 軍 器 寺 의 別 破 陣 등을 감액하여 壯 勇 營 에 移 屬 시켜 조선후기 가장 핵심군영이었던 訓 練 都 監 의 역할을 축소시켜갔다. 24) 특히 도성 외곽의 방어 병력인 경기의 지평 양근 가평등 동쪽 지역과 장단 마전 적성 등 서쪽지역의 屯 兵 을 중심으로 한 壯 勇 營 新 定 鄕 軍 節 目 을 작성하 여 守 禦 廳 이 통제하고 있는 15 哨 의 병력 중 매초마다 25명을 줄여 壯 勇 營 의 左 右 後 哨 를 만들어 기존 五 軍 營 의 세력을 직접적으로 흡수하였다. 25) 이렇게 규모가 확장된 壯 勇 營 은 1793 년에 內 外 營 制 를 갖춰 都 城 은 물론 경기지역 상당부분을 담당하는 대규모 단독 軍 營 으로 발전 하게 된다. 18) 正 祖 實 錄 卷 8, 正 祖 3 年 10 月 戊 午. 19) 正 祖 實 錄 卷 19, 正 祖 9 年 3 月 戊 寅. 20) 壯 勇 營 故 事 卷 1, 乙 巳 7 月 2 日, 命 親 軍 以 壯 勇 衛 稱 號 敎 曰 親 軍 武 勇 之 稱 俱 無 不 可 而 壯 勇 以 膽 自 今 以 壯 勇 衛 稱 號 事 分 付 訓 局. 21) 弘 齋 全 書 13 卷, 序 引 6, 翼 靖 公 奏 藁 軍 旅 類 叙, 軍 制 引. 22) 正 祖 實 錄 卷 25, 正 祖 12 年 1 月 丙 戌. 臣 聞 用 財 有 道 必 先 量 入 蓄 財 有 術 莫 如 省 費 今 邊 上 絶 飛 輓 之 役 域 中 少 曠 廢 之 土 生 財 之 路 實 廣 於 前 而 每 歲 經 費 輒 患 不 足 國 家 糜 費 本 在 冗 兵 禁 衛 之 宜 屬 兵 曹 守 摠 之 當 罷 京 營 前 後 朝 臣 固 多 言 者 今 又 設 壯 勇 衛 計 其 料 布 豈 云 少 哉 殿 下 內 則 有 禁 軍 武 藝 外 則 有 五 營 將 卒 環 衛 不 缺 綢 繆 甚 固 乃 爲 此 冗 長 之 物 以 廣 糜 費 之 路 歟. 23) 萬 機 要 覽 軍 政 編 2, 附 龍 虎 營 設 置 沿. ; 壯 勇 營 故 事 卷 1, 戊 申 9 月 11 日. 24) 正 祖 實 錄 卷 25, 正 祖 12 年 1 月 乙 酉. 25) 正 祖 實 錄 卷 26, 正 祖 12 年 7 月 己 卯.
195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93 正 祖 는 壯 勇 營 內 外 營 制 를 수립하면서 조선초기 都 城 과 太 祖 의 고향인 關 北 의 땅을 지켰던 五 衛 體 制 를 그대로 따랐는데, 壯 勇 衛 라는 명칭과 華 城 을 방어하던 親 軍 衛 및 新 豊 長 安 八 達 蒼 龍 華 西 衛 등의 명칭에서도 확인 된다. 26) 이는 과거 太 祖 때 關 北 의 자제들이 호위하였 듯 正 祖 의 정치적 고향인 華 城 의 壯 勇 營 의 군사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여 지킬 것을 강조한 五 衛 體 制 의 핵심내용이기도 했다. 27) 그리고 五 衛 體 制 에 대한 正 祖 의 바램은 단순한 충성심 발 로의 형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兵 農 일치를 통한 皆 兵 制 였기 때문에 군역을 담당하는 良 人 이 따로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신의 군역의무기간을 이행하면 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안정을 이룩 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五 衛 體 制 복구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28) 壯 勇 營 이 內 外 營 이중 구조의 營 으로 성장한 후 軍 制 의 상황을 보면 內 營 은 크게 馬 步 軍 이 騎 兵 인 善 騎 隊 의 左 中 右 3 哨 와 步 軍 인 五 司 의 각 5 哨, 牙 兵 의 6 哨 를 합한 34 哨 와 各 標 下 軍 이 83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중 3 哨 의 善 騎 隊 는 모두 345명으로 각 哨 당 115명으로 구성되었 다. 그리고 京 軍 은 615명이며 鄕 軍 2,540명, 伺 候 軍 52명, 工 匠 牙 兵 26명, 輜 重 卜 馬 軍 40명, 拜 峯 牙 兵 245명, 古 城 牙 兵 439명, 露 梁 牙 兵 144명으로 壯 勇 營 전체 군사의 수는 5,245명으로 訓 練 都 監 에 버금가는 병력규모를 이뤘다. 29) 이때 편성된 壯 勇 營 의 騎 兵 편제를 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壯 勇 營 의 騎 兵 편제 구분 기병 부대명 핵심 방어지역 소속인원 창설시기 壯 勇 內 營 善 騎 隊 漢 城 府 前 哨 名 中 哨 名 後 哨 名 1788년 壯 勇 外 營 親 軍 衛 30) 水 原 府 508 名 1793년 위의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壯 勇 營 전체 騎 兵 숫자는 853명으로 당시 中 央 軍 營 인 五 軍 營 의 기병 숫자 중 가장 많은 편성인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병확대 노력은 오위제 26) 壯 勇 營 創 設 에 대한 정치적인 배경과 실제 규모 등은 金 俊 爀, 앞의 논문, 2007.이 가장 자세하다. 27) 弘 齋 全 書 29 卷, 綸 音 4, 壯 勇 外 營 軍 制 變 通 綸 音. 28) 백기인, 朝 鮮 後 期 國 防 論 硏 究 도서출판 혜안, 2004, pp.121~ ) 壯 勇 營 大 節 目 卷 1, 軍 制. 30) 親 軍 衛 는 壯 勇 外 營 설립초기에는 壯 別 隊 로 불렸다가 이후 親 軍 衛 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 194 학예지 제17집 복구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壯 勇 內 營 의 기병부대인 善 騎 隊 의 경우 대장을 善 騎 將 혹은 善 騎 別 將 이라로 하여 모두 3명를 뽑았는데, 中 央 軍 營 을 비롯하 여 변방지역까지 두루 재임한 將 帥 를 선별하여 國 王 에게 직접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임명하는 등 운영에도 신중을 기하였다. 31) 그리고 壯 勇 營 內 營 의 재정적인 기반은 병농일치의 뜻에 따라 鄕 軍 구성을 통해 충족시켰다. 內 營 의 鄕 軍 병력은 본래 都 城, 水 原 의 前 司 5 哨 와 中 司 5 哨 및 高 陽 坡 州 砥 平 楊 根 - 加 平 楊 州 의 後 司 5 哨 등 모두 3 司 15 哨 로 구성되었다. 이후 5 司 체계로 규모를 확대하면서 前 司 는 수원의 5 哨, 後 司 는 양근 가평 지평 양주 장단의 5 哨, 中 司 는 京 軍 의 5 哨, 左 司 는 광주 용인 진위 양성의 5 哨, 마지막으로 右 司 는 시흥 과천 안산 고양 파주의 5 哨 를 소속시 켜 규모를 확대하였다. 32) 그런데 壯 勇 營 은 內 營 보다 外 營 이 보다 중시되었다. 이는 園 寢 을 위해 外 營 을 세웠으며 外 營 을 위해 內 營 을 세웠다는 正 祖 자신이 술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3) 특히 正 祖 18년 이후 行 宮 을 보호하는 華 城 의 축조를 통하여 정치적, 경제적인 효과가 더해졌기 때문에 壯 勇 營 外 營 의 역할은 內 營 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만들어진 外 營 은 기존의 馬 步 軍 兵 의 정비를 시작으로 水 原 附 인근지역의 移 屬 을 계기로 入 防 軍 - 協 守 軍 체제의 정비를 꾀하게 된다. 마지막 으로 인근 5읍의 軍 總 이속을 계기로 5 衛 로의 편성으로 마무리하였다. 먼저 壯 勇 營 의 內 外 營 制 가 성립되기 이전에 摠 戎 廳 外 營 의 中 營 이었던 水 原 附 가 壯 勇 外 營 으로 편성되면서 馬 兵 4 哨 는 壯 別 隊 로 개칭된 후 다시 親 軍 衛 좌 우열 200명으로 개편되었고, 步 軍 26 哨 는 13 哨 를 正 軍 하 고 나머지 13 哨 는 資 保 로 정하여 실질적인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34) 이러한 壯 勇 外 營 의 정비는 기본적으로 壯 勇 營 外 內 營 新 定 節 目 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조련에 참가하는 군사는 別 驍 士 2초, 馬 兵 4초, 束 伍 軍 26초, 각종의 標 下 軍 5백 47명, 輜 重 軍 2백 명으로 편성 하였다. 35) 이것은 訓 練 都 監 의 군제를 본뜬 것으로 더 이상 가감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둔다고 하였다. 그리고 入 防 軍 - 協 守 軍 체제의 경우는 華 城 行 宮 을 교대로 番 上 하여 방어하는 주력부대 로 正 軍 이라는 이름으로 入 防 軍 을 편성하였다. 이때 편성된 각 읍의 소속과 哨 는 前 司 5 哨 -수 31) 壯 勇 營 大 節 目 卷 1, 差 除. 32) 正 祖 實 錄 卷 42, 正 祖 19 年 5 月 乙 亥. 備 邊 司 進 華 城 協 守 軍 制 節 目. 33) 弘 齋 全 書 13 卷, 序 引. 34) 正 祖 實 錄 卷 38, 正 祖 17 年 10 月 辛 巳. 35) 正 祖 實 錄 卷 38, 正 祖 17 年 1 月 己 未. 參 操 軍 兵 則 別 驍 士 二 哨 馬 兵 四 哨 束 伍 二 十 六 哨 各 色 標 下 五 百 四 十 七 名 輜 重 軍 二 百 名 此 則 旣 倣 訓 局 軍 制.
197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95 원남변, 左 司 5 哨 -용인, 진위, 수원 용인 접계 지역, 右 司 5 哨 -안산, 시흥, 과천, 수원 서변지역, 後 司 5 哨 -수원 북변 소재로 정하였다. 36) 또한 유사시 지역 방어군격인 協 守 軍 은 長 安 門 -시흥현 령, 八 達 門 -진위현령, 華 西 門 -안산군수, 蒼 龍 門 -용인현령, 新 豊 樓 -과천현감 등으로 각각 편성하 였다. 37) 이러한 入 防 - 協 守 軍 이외에도 華 城 에는 守 成 軍 또는 城 丁 軍 이라 불리는 별도의 병력이 배치 되었다. 수원부 판관 겸임의 營 城 將 아래 4대문 담당의 城 將 4 員, 雉 摠 8 員, 그리고 哨 官 16 員 아래 守 堞 軍 官 47인, 垜 長 180인(5 垜 1 長 ), 城 丁 軍 8,620명이 있었다. 특히 城 丁 軍 은 매 성첩에 5명씩 도합 4,565명이 垜 長 아래 배치되었으며, 나머지 1,620명은 예비 병력으로 삼았다. 38) 이후 壯 勇 外 營 의 마지막 정비는 水 原 을 둘러싼 郡 縣 이 마치 물고기 비늘 같고 머리 빗같 이 39) 되어 수원 중심의 환상협수체계가 이루어지게 한 것이다. 40) 이는 正 祖 22년에 外 營 부근 의 五 邑 軍 兵 合 屬 節 目 에 의하여 五 衛 - 屬 五 衛 체제의 완성을 말하는데, 良 丁 으로 편성된 長 樂 隊 五 衛 와 수원을 둘러싼 인근의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 등의 郡 縣 에서 이속된 屬 五 衛 의 城 丁 軍 으로 편성하였다. 41) 華 城 을 방어하는 壯 勇 外 營 은 長 樂 隊 라는 이름의 五 衛 體 制 를 유 지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長 樂 隊 라는 명칭은 華 城 行 宮 내에 있는 長 樂 堂 의 이름을 딴 것인데, 正 祖 가 水 原 陵 行 시 長 樂 堂 을 침전으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호위하게 하기 위한 의도로 長 樂 隊 五 衛 를 사용하였다. 42) 이와 같이 壯 勇 外 營 은 직접적으로는 華 城 과 華 城 行 宮 및 顯 隆 園 을 방어하였고, 園 幸 시에는 약 6,200여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인원들을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하 였다. 그리고 간적접적으로는 華 城 건설을 계기로 正 祖 의 親 衛 軍 營 으로서 기존의 五 軍 營 을 훨 씬 능가하는 정예의 군사력을 확보하여 正 祖 의 왕권강화책과 부국강병의 의지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43) 36) 正 祖 實 錄 卷 47, 正 祖 21 年 12 月 乙 丑. 華 城, 進 軍 制 協 守 追 節 目 及 守 城 節 目. 本 境 南 邊 所 在 五 哨 屬 之 前 司 龍 仁 二 哨 一 旗 振 威 一 哨 二 旗 本 境 振 威 龍 仁 接 界 所 在 二 哨 合 五 哨 屬 之 左 司 安 山 一 哨 一 旗 始 興 一 哨 果 川 二 旗 本 境 西 邊 安 山 接 界 所 在 二 哨 合 五 哨 屬 之 右 司 本 境 北 邊 所 在 五 哨 屬 之 後 司. 37) 또한 束 伍 牙 兵 壯 抄 등 각 읍 병력 총 27 哨 중 入 防 軍 7 哨, 欄 後 牙 兵 5초, 協 守 軍 10 哨, 駐 隊 와 遊 兵 5 哨 가 화성방어 를 위하여 壯 勇 外 營 에 새로 편제 중에 있었다. 38) 金 俊 爀, 앞의 논문, pp177~ ) 正 祖 實 錄 卷 51, 正 祖 23 年 4 月 戊 戌. 環 華 城 四 五 郡 縣 之 移 管 於 外 營 如 鱗 比 而 毛 櫛. 40) 장필기, 정조대 화성건설과 수도방위체제의 재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참고. 41) 正 祖 實 錄 卷 49, 正 祖 22 年 10 月 己 酉. 42) 金 俊 爀, 앞의 논문, pp.182~183. 참조. 43) 李 泰 鎭, 朝 鮮 後 期 의 政 治 와 軍 營 制 變 遷, 1985, pp.295~296. 참조.
198 196 학예지 제17집 Ⅲ. 正 祖 代 馬 上 武 藝 의 訓 練 및 戰 術 的 特 性 조선후기 騎 兵 의 필수무기로 정착된 馬 上 鞭 棍 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자료는 正 祖 14년에 완 성된 武 藝 圖 譜 通 志 이다. 武 藝 圖 譜 通 志 는 그 동안 많은 연구 성과물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만들어진 무예서중 가장 많이 알려진 무예서이다. 44) 이 책은 壬 亂 과정에서 韓 嶠 에 의해 만들어 진 武 藝 諸 普 의 六 技 와 思 悼 世 子 의 대리청정 시절에 만들어진 武 藝 新 譜 의 十 八 技 에 마상무 예 여섯 가지가 추가되어 전체 二 十 四 技 로 완성된 조선 군사무예의 결정판이다. 45) 정조의 경 우는 이 책을 편찬함에 있어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담았는데, 그 첫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추증사업의 일환으로 武 藝 新 譜 의 十 八 技 를 그대로 수록하였고 46), 둘째 는 당시 騎 兵 들이 활용할 마상무예에 대한 적극적인 보급과 각 군영의 표준무예체계 확립을 위해 이 책을 편찬하게 된다. 47) 특히 마상무예 六 技 가 더 추가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당시 기병 이 익혀야 했던 馬 上 武 藝 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鞭 棍 은 크게 地 上 에서 익히는 ( 步 ) 鞭 棍 과 馬 上 에서 익히는 馬 上 鞭 棍 등 두 가지가 함께 실려 있다. 그런데 ( 步 ) 鞭 棍 의 경우는 일반적인 투로의 형태가 아니라 棍 棒 과 鞭 棍 이 맞부딪혀 交 戰 하는 형태로 실려 있으며, 馬 上 鞭 棍 은 말 위에서 일정한 투로를 행하 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馬 上 鞭 棍 의 자세를 살펴보면 첫 번째 자세인 霜 鶻 奮 翼 勢 는 서리매(흰매) 가 날개를 떨치듯 시작하는 자세로 왼손으로 말의 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편곤을 잡아 높 이 쳐 올리는 자세를 말한다. 이 자세는 일종의 시작하는 자세로 자신의 용맹함을 알리듯 편곤 을 번쩍 쳐 올리는 자세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자세인 靑 龍 騰 躍 勢 는 청룡이 뛰어 오르는 자세 로 고삐를 놓고 두 손으로 편곤을 잡아 이마를 지나도록 높이 쳐드는 자세( 兩 手 高 擧 過 額 )를 말한다. 이 자세는 공격하기 직전의 자세로 상대의 위치에 따라 전후좌우를 모두 공격할 수 44) 朝 鮮 後 期 새롭게 정착된 馬 上 武 藝 인 馬 上 鞭 棍 의 導 入 背 景 과 戰 術 的 特 性 에 대하여는 최형국, 朝 鮮 後 期 騎 兵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軍 史 70호, 2009 참조. 45) 새롭게 추가된 馬 上 武 藝 6 技 는 騎 槍, 馬 上 雙 劍, 馬 上 月 刀, 馬 上 鞭 棍, 擊 毬, 馬 上 才 인데, 이중 擊 毬 와 馬 上 才 의 경우는 실질적인 武 藝 가 아니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擊 毬 나 馬 上 才 의 경우도 비록 실제 무예 자세는 아니지 만 무예를 익히기 위한 좋은 기예이며, 특히 馬 上 才 의 경우는 일반적인 馬 上 武 藝 보다도 훨씬 어려운 기예였기에 그 무예적 속성을 들어 馬 上 武 藝 六 技 라고 부르는 것도 타당하리라 본다. 46) 현재까지 武 藝 新 譜 ( 武 器 新 式 )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지 思 悼 世 子 ( 莊 祖 )의 문집인 凌 虛 關 漫 稿 와 정조대에 완성된 무예서인 武 藝 圖 譜 通 志 등을 비롯한 몇몇 기록에서 武 藝 新 譜 에 실린 기예의 종목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를 살펴 보면 武 藝 新 譜 에는 정조대에 완성된 武 藝 圖 譜 通 志 중 지상에서 익히는 十 八 技 를 담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47) 배우성, 정조시대의 군사정책과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배경 진단학보 91호, 참조.
199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97 있는 자세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자세인 春 江 掃 雲 勢 는 봄철 강물에 뜬 구름을 휩쓸고 지나가는 자세 를 말하며 자신 의 왼쪽으로 鞭 棍 을 크게 휘둘러 방어하는 자세( 左 顧 一 揮 防 身 )를 말한다. 이 자세는 馬 上 月 刀 의 사용법과도 유사하며 편곤을 말 왼편 뒤쪽으로 비스듬히 내린 후 아래서 위로 걸쳐 올리듯 두 손으로 쳐 올리는 자세로 볼 수 있다. 네 번째 자세는 白 虎 炰 烋 勢 로 흰 호랑이가 기세등등 한 모습 을 말하며, 두 번째 자세인 靑 龍 騰 躍 勢 와 거의 유사한 움직임( 兩 手 高 擧 過 額 )이라 보면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자세는 秋 山 御 風 勢 로 가을 산이 바람을 막아내는 듯 한 자세로 세 번째 자세인 春 江 掃 雲 勢 와 한 짝이 되는 자세를 말한다. 다시 말해 春 江 掃 雲 勢 가 자신의 왼편 아래로 편곤 을 내렸다가 들어 올리며 방어했다면 秋 山 御 風 勢 는 자신의 오른편 아래로 편곤을 내렸다가 들 어 올리며 방어하는 자세( 右 顧 一 揮 防 身 )로 볼 수 있다. 여섯 번째 자세는 霹 靂 揮 斧 勢 로 벼락이 쳐서 그 빛이 도끼에 빛나게 하는 자세 로 편곤을 위로 치켜들었다가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이 며 왼편 앞쪽을 내려치는 자세( 向 左 一 擊 )를 말한다. 마지막 자세는 飛 電 繞 斗 勢 로 날으는 번개가 말( 斗 )을 둘러싸듯 움직이는 자세로, 앞의 자세 인 霹 靂 揮 斧 勢 와 한 짝이 되는 자세를 말한다. 다시 말해 霹 靂 揮 斧 勢 는 왼편 앞쪽을 내려치는 자세인 반면에 飛 電 繞 斗 勢 는 똑같은 상황에서 오른편 앞쪽을 내려치는 자세( 向 右 一 擊 )를 말한 다. 그런데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일곱 가지 勢 와 두 가지 움직임을 포함하여 전체 9가지 세 부자세로 구성된 마상편곤의 세는 武 藝 圖 譜 通 志 가 완성되기 이전에 이미 기병들이 수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48) 이는 續 大 典 兵 典 의 試 取 鞭 芻 條 를 살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말을 달려 나간 후에 오른손으로 鞭 棍 을 잡고 뒤를 향해서 들고, 또 두 손으로 앞을 향해서 들며, 이어서 좌우를 향해서 각각 한 번씩 휘두른다. 한 번씩 친 후에는 갑자기 좌우로 한번 휘두른다. 〇 馬 路 를 벗어나 옆길로 달리거나 정해진 시간 내에 치기를 마치고 원위치에 되돌아오지 못한 경우에는 騎 芻 의 경우와 같이 점수를 주지 아니한다. 〇 표적인 6개의 허수아비는 각각 28 步 씩 서로 떨어져 있고 좌우의 거리는 馬 路 로부터 3 步 떨어져 있다. 49) 48) 나영일, 무예도보통지 의 무예 진단학보 91호, 참조. 49) 續 大 典 兵 典, 試 取, 鞭 芻 條. 新 增 〇 出 馬 後 以 右 手 執 向 後 擧 又 以 兩 手 向 前 擧 因 向 左 右 各 一 揮 每 一 擊 後 輒 左 右 一 揮 〇 橫 走 者 不 及 漏 水 者 同 騎 芻 〇 六 芻 相 距 各 二 十 八 步 左 右 相 距 自 馬 路 三 步.
200 198 학예지 제17집 위의 사료를 武 藝 圖 譜 通 志 의 실제 자세와 비교해 본다면, 먼저 말을 달려 나간 후에 오른 손으로 鞭 棍 을 잡고 뒤를 향해서 드는 자세는 霜 鶻 奮 翼 勢 이며, 두 번째로 두 손으로 앞을 향 해드는 것 은 靑 龍 騰 躍 勢 ( 兩 手 高 擧 過 額 )와 白 虎 炰 烋 勢 로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좌우를 향해서 각각 한 번씩 휘두른다. 의 경우는 왼쪽은 春 江 掃 雲 勢 ( 左 顧 一 揮 防 身 )이며, 오른쪽은 秋 山 御 風 勢 ( 右 顧 一 揮 防 身 )로 볼 수 있다. 네 번째 한번 씩 치는 은 霹 靂 揮 斧 勢 ( 向 左 一 擊 )와 飛 電 繞 斗 勢 ( 向 右 一 擊 )이며, 마지막 갑자기 좌우로 한번 휘두른다. 는 세 명칭에서는 빠진 左, 右 顧 防 身 이라 고 볼 수 있다. 이를 살펴보기 쉽도록 표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武 藝 圖 譜 通 志 馬 上 鞭 棍 자세와 續 大 典 시취과목인 鞭 芻 자세 비교 연번 1 구분 續 大 典 鞭 芻 武 藝 圖 譜 通 志 馬 上 鞭 棍 말을 달려 나간 후에 오른손으로 鐵 鞭 을 잡고 뒤를 향해서 드는 것 2 두 손으로 앞을 향해드는 것 3 좌우를 향해서 각각 한번씩 휘두른다 4 한번 씩 치는 霜 鶻 奮 翼 勢 靑 龍 騰 躍 勢, 白 虎 炰 烋 勢 ( 兩 手 高 擧 過 額 ) 春 江 掃 雲 勢, 秋 山 御 風 勢 ( 左 右 顧 一 揮 防 身 ) 霹 靂 揮 斧 勢, 飛 電 繞 斗 勢 ( 向 左 右 一 擊 ) 5 갑자기 좌우로 한번 휘두른다 左, 右 顧 防 身 특히 시험방법 중 일종의 규칙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당시 마상편곤의 훈련방법을 추 측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馬 上 鞭 棍 을 훈련 할 때에는 말 고삐를 완전히 놓고 훈련 하므로 말이 옆으로 달려 나가기도 하는데,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강한 몸 扶 助 50)를 사용했을 것이다. 특히 左 右 芻 人 의 간격이 3 步 로 약 3m 60cm 정도로 떨어져 있으며, 馬 上 鞭 棍 중 鞭 의 길이가 鞭 長 六 尺 五 寸 으로 약 1m 30cm 이므로 상체를 좌우로 크게 비틀면서 마상편곤을 훈련했을 것이다. 또한 해당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 안에 말을 몰아 통과해야 했기에 50) 보통 乘 馬 法 에서 扶 助 라고 하면 말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삐를 이용한 扶 助 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마상무예의 경우는 고삐를 완전히 놓고 무기를 사용하기에 고삐부조는 원래부터 사용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마상무예에서는 일반적인 부조방식(고삐, 채찍)이 아닌 자신의 체중을 이용하여 좌우로 방향을 바꾸는 신체부조 혹은 몸부조가 필수적 이다.
201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199 말의 걸음 중 가장 빠른 驅 步 혹은 襲 步 중심의 마상무예 훈련을 했을 것이다. 51) 이러한 馬 上 鞭 棍 의 훈련과 관련하여 비교할 수 있는 것이 騎 射 의 훈련법일 것이다. 騎 射 의 경우 또한 말 고삐를 놓고 좌우의 芻 人 을 쏘는 방식으로 시험을 보았기에 馬 上 鞭 棍 과 유사한 훈련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騎 射 의 경우는 遠 射 武 器 이므로 鞭 棍 보다는 조금 더 떨어진 거리에서 시험을 보았다. 52) 射 法 秘 傳 攻 瑕 騎 射 訓 練 의 순서 53) 를 發 馬 에서부터 收 馬 까지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發 馬 須 隨 着 馬 力 顚 開 如 馬 2 馳 驅 之 法 宜 踞 坐 不 宜 跕 坐 3 馳 馬 宜 以 身 才 業 向 于 前 不 宜 直 挺 在 上 4 馬 已 馳 圓 方 可 取 箭 從 容 5 馬 之 扯 手 不 宜 離 早 恐 馬 6 射 近 前 手 須 低 於 後 手 7 扯 手 宜 短 不 宜 長 8 必 以 雙 手 近 鬃 用 力 分 而 收 之 可 54) 이러한 내용을 馬 上 鞭 棍 과 대입해서 훈련법을 살펴본다면, 먼저 馬 上 鞭 棍 을 한손으로 뽑아 들고 몸을 안장에 밀착시켜 말을 출발시킨 후, 말이 일정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면 몸을 앞으로 숙여 馬 上 鞭 棍 을 사용했음을 추측할 수 있 다. 특히 騎 射 의 경우는 양손을 모두 사용하여 활을 쏴야 하므로 고삐를 완전히 배제하고 부조 를 사용해야 하지만, 馬 上 鞭 棍 의 경우는 한 손을 사용하여 무기를 다룰 수 있기에 유사시 신속 한 대응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무기가 근접전시에 필수 무기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朝 鮮 時 代 騎 兵 전술을 크게 구분할 때에는 前 期 와 後 期 로 구분해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壬 辰 倭 亂 이라는 전대미문의 큰 전쟁을 거치면서 군사체제는 물론이고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朝 鮮 前 期 의 기본전술을 陣 法 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적군을 맞이했을 때 중군에서 북을 한번 치면, 각 군의 遊 軍 이 먼저 사방으로 나아가 상대편 적군 을 정탐한 다음, 나팔로 자기 군에 보고하며, 그 군은 나팔로 중군에 보고한다. 중군에서 나팔을 불고 적색 휘를 올렸다가 내리면, 전충이 적군을 맞아 방어태세를 취하며, 흑색 휘를 앞으로 指 하고 북이 울리면, 후충이 먼저 나가 적을 맞아 싸우며, 청색 휘와 백색 휘을 앞으로 指 하고 북이 울리면, 좌군과 우군이 측면에서 협공하여 후충이 구원한다. 55) 51) 소선섭, 승마와 마필 공주대학교출판부, ) 世 宗 實 錄 권133, 嘉 禮 儀 式, 武 科 殿 試 儀. 53) 射 法 秘 傳 攻 瑕 馬 射 法. 54) 최형국, 앞의 논문, p.54~55. 참조. 55) 陣 法 癸 丑 陣 設, 應 敵 篇.
202 200 학예지 제17집 위의 사료에 의하면 적을 만났을 경우 척후병을 통해 먼저 정탐을 한 후 중군의 지휘에 따라 기본 전술이 펼쳐지는데, 먼저 적색 휘의 움직임에 따라 보병인 槍 隊 와 長 劍 隊 가 방어태세를 취하고, 흑색 휘의 움직임에 따라 騎 槍 隊 가 적을 맞아 싸우며, 마지막으로 청색과 백색휘의 움직임에 따라 騎 射 隊 와 火 熥 隊 및 弓 手 隊 가 좌우에서 공격을 돕는 방식이다. 56) 또한 전투 시 적군이 패하여 달아나면, 북과 나팔이 울리면서 기병이 가장 먼저 추격하고, 이후 보병은 대열을 벌여 騎 兵 을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조선전기의 기병전술에서 사용되는 핵심 무기가 騎 槍 과 騎 射 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조선전기의 무과시험과목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말 위에서 시험 보는 것은 騎 射, 騎 槍, 擊 毬 세 과목 이었다. 이 중 擊 毬 의 경우는 실제 무예훈련은 아니지만, 그 본질적 속성이 馬 上 武 藝 를 위한 기초적인 기예였음으로 무과시험과 목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57) 다시 말해 조선전기의 기병전술은 騎 槍 이 돌격작전을 감행하고, 騎 射 가 원거리에서 쫓아가며 좌우 측면을 지원하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후기 騎 兵 의 기본 전술에는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馬 上 鞭 棍 이 핵심무예로 등장하게 된다. 이는 조선후기 正 祖 代 에 武 藝 圖 譜 通 志 와 한 짝이 되어 편찬된 兵 學 通 에 가장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兵 學 通 은 조선후기 새롭게 만들어진 중앙 군영의 진법 훈련 통 일성을 갖추고 이를 통해 각 군영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진법 훈련서 였다. 58) 兵 學 通 에 실린 진법을 가장 잘 운용하기 위해서는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개인 기예를 얼마 나 잘 연마하느냐에 따라 진법의 위력이 결정된다. 이러한 내용은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대개 일찍이 논하기를 兵 學 通 은 營 陣 의 綱 領 이고 武 藝 圖 譜 通 志 는 技 擊 하는 樞 紐 라고 하였는 데, 通 이라는 것은 밝다는 것이요 해박하다는 뜻이니 體 와 用 이 서로 상응하고 本 末 이 서로 연결되 어야 합니다. 兵 을 논하는 자들이 이 두 通 ( 兵 學 通, 武 藝 圖 譜 通 志 )을 버리고 무엇을 쓰겠습니까? 이를 의술에 비유하면, 運 氣 를 미루어 증험하고 經 脈 을 진찰하는 것은 陣 法 에 해당되고, 草 木 과 金 石 은 무기에 해당되고, 약재를 삶고 굽고 조제하고 가는 것은 擊 刺 에 해당합니다. 59) 56) 조선전기의 군사신호체제에서 騎 射 隊 는 청색 기를, 騎 槍 隊 는 검은 기를, 火 熥 및 弓 手 隊 는 백색 기를, 步 兵 의 槍 및 長 劍 隊 는 붉은 기를 잡는다 하였다. 陣 法 癸 丑 陣 設, 57) 최형국, 조선시대 騎 射 시험방식의 변화와 그 실제, 中 央 史 論 24호, 韓 國 中 央 史 學 會, 참조. 58) 현재 兵 學 通 에 대한 연구는 노영구에 의해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특히 兵 學 通 에 나타난 기병 전술 정조대의 예술과 과학, 문헌과 해석사, 2000을 중심으로 기병전술에 대한 기본 연구가 이뤄졌다. 59) 武 藝 圖 譜 通 志 卷 首, 兵 技 總 敍.
203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201 위의 내용을 馬 上 鞭 棍 에 대입하면, 兵 學 通 에 나타나는 기병전술 중 마상편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병종의 위력은 곧 武 藝 圖 譜 通 志 의 馬 上 鞭 棍 내용을 연마한 정도에 따라 그 공격력 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兵 學 通 에 수록된 다양한 진법들 중 馬 兵 이 펼치는 진법을 살펴본다면 조선후기 마상편곤의 전술적 운용가치 및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兵 學 通 의 경우에는 단순히 글 로써 진법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1권에는 場 操, 別 陣 號 令, 分 練, 夜 操, 城 操, 水 操 등의 다양한 상황에 따른 진법에 대해 설명 하고 2권에는 이에 해당하는 陣 圖 를 하나씩 그려 넣어 각 군사 들의 움직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이 陣 法 들 중 場 操 의 경우 가장 일반적 인 군사훈련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평시에는 한강 근처의 노량진을 비롯한 너른 모래사장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펼쳤던 것이다. 兵 學 通 의 진법들 중 騎 兵 ( 馬 兵 )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陣 法 은 좌우마병각방진, 좌우마병 합방진, 이마병추격마병, 이마병추격보군, 이보군추격마병, 마병봉둔진, 마병학익진, 마병삼초 방영 도, 기사봉둔진도, 기사학익진도 등이다. 이렇게 兵 學 通 에서 馬 兵 의 진형이 독립적으로 다 뤄진 것은 당시 기병을 중시했던 상황을 반영한 일종의 증표로 볼 수 있다. 60) 다양한 기병진법 중 兵 學 通 에 실린 가장 보편적이었던 馬 兵 鶴 翼 陣 을 살펴보면 [그림 2]와 같다. 특히 馬 上 鞭 棍 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龍 虎 營 의 작전전개 부분을 살펴보면 보다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龍 虎 營 은 英 祖 31년에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던 禁 軍 廳 을 개칭한 것으 로 원래 內 禁 衛, 兼 司 僕, 羽 林 衛 등을 묶어 內 三 廳 으로 부르던 것을 변경한 禁 軍 이다. 특히 이 들 중 兼 司 僕 의 경우 임금이 타는 御 馬 의 조련을 비롯하여 말과 관련된 특수한 禁 軍 으로 마상 무예가 출중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물론 나머지 禁 軍 들도 기본적으로 武 科 試 驗 을 통과하여 배 치되었기에 馬 上 武 藝 는 기본적으로 익혀야만 했다. 그러하기에 龍 虎 營 은 騎 兵 의 전술훈련과 관련된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부대이기도 하다. 60) 정해은, 한국전통병서의 이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p.211. 참조.
204 202 학예지 제17집 [그림 2] 兵學通 에 실린 馬兵鶴翼陣圖61) 龍虎營은 작전을 펼칠 때 적이 100步 밖에 있으면 각각의 병사들이 上馬(말에 올라 탐)하고 신호 포 소리가 나면 一, 二羽旗62)를 세우고, 點鼓 點旗63)하면 後層이 나와 前層 앞에 일자로 벌여 선다. 적이 100步 안에 이르면 명령에 따라 弓矢를 한꺼번에 발사하고, 적이 50步에 이르면 북을 빠르게 치며 天鵝聲을 분다. 이때 (騎兵은) 鞭棍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적을 추격한다. 적이 패하여 물러 나면 징을 울리고 북이 멈추면 각 병사들은 제자리에 선다. 징소리가 세 번 울리면 즉시 몸을 돌리고 신호포 소리에 따라 해당 番旗를 세우고 안쪽을 향하여 깃발을 點하면 原地로 되돌아온다. 또다시 적 61) 馬兵鶴翼陣을 펼칠때 군사 배치는 左 右 別將은 중앙에 자리잡고, 左馬兵의 3哨는 別將의 좌편에 별려 서고, 右馬兵 의 3哨는 別將의 우편에 벌려 서서 학의 날개 모양을 형성한다. 62) 龍虎營 中 羽林衛를 상징하는 깃발을 의미한다. 63)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군사신호에서 點 한다라는 의미는 깃발의 경우는 깃발을 지면에 대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움 을 뜻하고, 북의 경우는 북을 천천히 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205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203 이 오는 상황이 되면 신호포를 쏘고 一, 二 兼 旗 64)를 세운다. 북을 點 하고 깃발을 點 하면 前 層 이 일자 로 늘어서고 적이 100 步 안으로 들어오면 활을 쏘고 추격하고 물러나기를 앞의 상황과 동일하게 한다. 또 다시 적이 오는 상황을 만들어 신호포를 쏘고 一, 二 內 旗 65)를 세우고 북을 點 하고 깃발을 點 하면 中 層 이 前 層 앞으로 나가 일자로 벌려서고 활을 쏘고 추격하기를 모두 전과 같이 한다. 66) 위 사료를 보면 아군의 騎 兵 은 적이 100 步 바깥에 있을 때 말에 올라타 공격준비를 하고, 100 步 이내로 적이 올 경우 遠 射 무기인 弓 矢 를 일제히 발사하고, 50 步 이내로 들어 올 경우 ( 馬 上 ) 鞭 棍 67)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때 주목할 것은 騎 兵 또한 上 馬 한 상태에서 활을 쏘고 이후 돌격용 馬 上 鞭 棍 을 뽑아 들고 출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데로 조선후기 騎 兵 은 還 刀, 弓 矢, 鞭 棍 을 기본 무기로 갖췄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궁시를 발사하고 무기를 바꿔 鞭 棍 으로 돌격전을 펼쳤을 가 능성이 높은 것이다. 특히 騎 兵 이 활용한 弓 矢 중 片 箭 은 통아에 걸어 쏘는 것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과정에서 편전을 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에 上 馬 한 상태에서 片 箭 을 쏘고 이후 鞭 棍 으로 무기를 교체하여 작전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68) 물론 기병의 빠른 돌파력은 기병의 존재이유이기도 하지만, 조선후기 기병의 경우 강력한 화포와 개인 화기의 발달로 기존의 빠른 돌파력 보다 더욱 빠른 돌파력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 었다. 69) 이는 火 器 의 재장전시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적이 初 彈 을 발사한 후 재장전에 임하는 시간의 간격 안에 기병이 돌진하여 적진을 유린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해야 하였기 때문 이다. 보통 기병들이 말의 전속력인 襲 步 로 달릴 경우 시속 약 65km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었 64) 龍 虎 營 中 兼 司 僕 를 상징하는 깃발을 의미한다. 65) 龍 虎 營 中 內 禁 衛 를 상장하는 깃발을 의미한다. 66) 兵 學 通 場 操, 間 花 疊 退. 龍 虎 營 作 戰 賊 在 百 步 之 外 各 兵 上 馬 放 砲 立 一 二 羽 旗 點 鼓 點 旗 後 層 出 前 層 之 前 一 字 擺 列 賊 到 百 步 之 內 聽 今 弓 矢 齊 發 賊 到 五 十 步 擂 鼓 吹 天 鵝 聲 拔 鞭 棍 吶 喊 追 擊 賊 敗 鳴 金 鼓 止 各 兵 立 鳴 金 三 下 卽 回 身 放 砲 立 該 番 旗 向 內 點 退 回 原 地 又 作 賊 來 狀 放 砲 立 一 二 兼 旗 點 鼓 點 旗 前 層 一 字 擺 列 賊 在 百 步 之 內 射 矢 追 擊 退 兵 俱 如 前 又 作 賊 來 狀 放 砲 立 一 二 內 旗 點 鼓 點 旗 中 層 出 前 層 之 前 一 字 擺 列 射 矢 追 擊 俱 如 前. 67) 萬 機 要 覽 軍 政 篇 2, 龍 虎 營, 軍 器 條 를 보면 着 筋 鞭 棍 669자루, 仁 老 里 鞭 棍 1,036자루, 鞭 棍 22자루 등 鞭 棍 으로 보이 는 무기가 3종류가 등장한다. 현재로서는 관련 사료가 부족하고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아 이들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착근편곤의 경우는 가후군 및 금군에게 주며, 인노리편곤은 100자루는 내삼청 수직소에 나머지는 戰 陳 練 習 에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착근편곤의 경우는 두정이 박혀 살상력이 강화된 마상편곤이며, 인노리편곤은 훈련 때 사용하므로 살상력이 떨어지는 두정이 없는 것이라 추측되어진다. 그리고 鞭 棍 은 ( 步 ) 鞭 棍 일 가능성이 높다. 추가로 명칭상의 혼란이 있는 馬 鞭 의 경우는 단순한 말채찍이다. 68) 과거시험에서도 片 箭 은 騎 射 의 형태가 아닌 步 射 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木 箭 나 鐵 箭 과는 다르게 거리로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에 정확히 적중하는 것이 핵심이었기에 기병이 사용한 片 箭 은 달리는 상태에서 쏘는 것이 아니라 그냥 上 馬 한 상태에서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 69) 노영구, 조선후기 城 制 변화와 華 城 의 城 郭 史 的 의미 진단학보 88, 1999, pp.298~299.
206 204 학예지 제17집 다. 조선후기의 기병들은 이때 발생하는 돌파력으로 적진을 무너뜨려야 하였는데, 당시 個 人 火 器 의 경우는 정확도가 떨어져 적 기병이 일제돌격을 감행할 경우 아예 다음 사격을 할 여유가 없어 기병의 빠른 돌파력은 馬 上 鞭 棍 이라는 간편하면서도 강력한 무기의 도입으로 편곤을 사 용하는 군사들이 더욱 강력한 병종으로 부각되게 되었다. 70) 이러한 騎 兵 의 마상편곤 돌격 장면은 武 藝 圖 譜 通 志 의 馬 上 鞭 棍 그림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조선후기 기병의 기본 武 裝 상태는 자신의 오른편 허리춤에 還 刀 와 弓 袋 ( 弓 ) 그리고 왼편 허리춤에 화살통인 시복에 長 箭 및 片 箭, 통아를 넣어 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여타의 馬 上 武 藝 그림을 확인해 보면 馬 上 鞭 棍 을 말안장에 끼워 넣고 다니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1) 이렇듯 조선후기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의 特 徵 은 빠른 돌파력을 감행하기 위해 여타의 무기들 보다 타격성과 회수성이 뛰어나며, 휴대하기 간편한 무기인 馬 上 鞭 棍 을 중심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기병만의 단독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다양한 陣 들이 개발된 것을 통해 볼 때 조선전기와 비교하여 보다 빠른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기병전술이 일반화 되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경우 길이가 긴 騎 槍 이 전면에 나가 적을 공격하는 전술과 마상무예가 중심 이 되었다고 한다면 조선후기의 경우는 騎 槍 보다 휴대하기 간편하고 사용에 용이한 鞭 棍 이 기 병들에게 더 효과적인 무기로 인식되어 각 군영에서 널리 보급되고 사용되어 졌던 것이다. Ⅳ. 맺음말 朝 鮮 은 壬 辰 倭 亂 을 거치면서 사회, 문화, 정치 등 거의 사회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겪어 야 했다. 이는 군사체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듯 기존의 기병중심의 五 衛 陣 法 을 벗어나 일본군들 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短 兵 接 戰 의 기예가 가미된 砲 手, 射 手, 殺 手 라는 三 手 兵 체제 가 채택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체제 변화를 통해 7년 전쟁이라는 임진왜란은 넘어 갈 수 있었으나, 또 다시 북방세력에 대한 방어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丙 子 胡 亂 때에는 70) 노영구, 전게서, p ) 일반적으로 馬 上 鞭 棍 을 제외한 나머지 武 藝 圖 譜 通 志 의 다른 馬 上 武 藝 그림에서 그 형태의 유사함으로 인해 통아를 두 개 넣고 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馬 上 鞭 棍 그림을 확인해 보면 그것이 통아가 아니라 鞭 棍 임을 확인할 수 있다.
207 朝 鮮 正 祖 代 壯 勇 營 創 設 과 馬 上 武 藝 의 戰 術 的 特 性 205 청 기병의 빠른 돌파력에 의해 조선의 국왕이 南 漢 山 城 에 갇혀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였고, 마침내는 淸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최악의 상태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이 후 李 适 의 亂 때에는 반란군의 선봉부대가 馬 上 鞭 棍 을 휘두르며 도성까지 빠르게 진군하여 仁 祖 는 또 다시 궁궐을 버리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기병에 대한 빠른 돌파력이 壬 亂 을 겪으면서 완성된 보병 중심의 戰 法 에 다시금 기병전법을 추가 혹은 확장하는 방식으로의 변화 를 야기하게 된다. 특히 正 祖 代 의 경우 國 王 의 親 衛 軍 인 壯 勇 營 의 창설 배경에 五 衛 制 복구론이라는 國 王 權 의 강화를 위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五 衛 制 복구론을 戰 術 的 관점에서 살펴봤을때 기병전 술의 강화는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正 祖 代 에 壯 勇 營 의 기병부대였던 親 軍 衛 와 善 騎 隊 의 강 화는 五 衛 制 복구론을 위한 근원적인 처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正 祖 時 代 騎 兵 의 필수무기였던 馬 上 鞭 棍 의 경우 그 훈련법 및 전술적 특징을 통해 당시대의 전술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핵심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馬 上 武 藝 는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馬 上 鞭 棍 의 자세를 실기사적 입장에서 하나씩 확 인해 보며 그 자세를 분석하여 어떤 방식으로 기병들이 馬 上 鞭 棍 을 훈련했었는가와 더불어 그 특징을 분석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적에게 깊숙이 접근하여 근거리에서 빠르게 적을 타격하는 기법이 핵심자세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조선후기 平 壤 監 營 에서 발간한 射 法 秘 傳 攻 瑕 의 馬 射 法 과 관련하여 馬 上 鞭 棍 의 훈련법을 유추 해 볼 때 馬 上 에서 오히려 두 손을 동시에 사용하 는 弓 矢 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馬 上 武 藝 의 전술적 측면은 조선후기 간행된 兵 學 通 의 陣 法 들 중 騎 兵 들로 구성된 龍 虎 營 의 진법과 전투시 騎 兵 의 전술을 살펴 보았으며, 馬 上 鞭 棍 이 조선후기 기병들이 핵심 돌격무기 로 인정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기존 陣 法 書 에는 보이지 않았던 기병 단독의 진법들 이 兵 學 通 에 다양하게 수록된 것을 살펴볼 때 騎 兵 이 조선후기에도 여전히 전략의 중요부분 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논문은 正 祖 時 代 騎 兵 强 化 를 위한 騎 兵 부대 창설의 배경 당시 활용한 馬 上 武 藝 의 일종인 馬 上 鞭 棍 을 통해 당시 기본적인 기병전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특 히 단순히 문헌적인 연구 뿐 만 아니라 武 藝 圖 譜 通 志 에 실린 실제 기예들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한 실기사적인 접근을 추가하였다. 그래서 일정 부분 보완해야할 점이 많다. 다만 이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문헌중심 武 藝 史 연구의 한계를 벗어나 실기사적인 고민을
208 206 학예지 제17집 추가하여 논문을 전개하였기에,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을 더하여 武 藝 史 를 접근하는 방식을 제 시하였다. 특히 軍 制 史 부분에서는 壯 勇 營 의 창설배경과 기병강화의 움직임을 살펴보았으며 馬 上 武 藝 의 경우는 馬 上 鞭 棍 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중 實 技 史 에 해당하는 馬 上 鞭 棍 은 지 극히 작은 무기를 통해 조선후기 기병전술 전체를 살펴본다는 것에 사실상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비록 작은 무기의 도입과 발전을 확인해 보며 전체를 읽어나가는 것 또한 미시사적인 접근의 하나로 생각되며 앞으로 이러한 소재의 내용들이 많이 연구되어 좀 더 다각적인 역사연 구가 이뤄졌으면 한다.
209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장 원 주* 목 차 Ⅰ. 머리말 Ⅱ. 朝 鮮 의 馬 政 과 官 用 馬 具 의 사용 Ⅲ. 國 役 자원 확보 노력과 馬 具 의 收 給 Ⅳ. 丙 子 胡 亂 과 馬 具 收 給 의 한계 Ⅴ. 맺음말 Ⅰ. 머리말 1)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인간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말( 馬 )은 곧 인간생활에 깊숙이 침투하여 전근대 사회의 지배체제 유지라는 측면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 하여 왔다. 말은 속도 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이용하면서 진화한 騎 兵 의 전술과 무예는 수천 년간 최고의 전술과 전투무예로 인식되었다. 고대는 물론 조선왕조에 서도 기병은 전투력의 핵심으로 역할하고 있었다. 또, 조선은 이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가 지배체계 속에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연결망으로 驛 制 를 이용하였으며, 공물을 운반 하는 데에 말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戰 馬 와 驛 馬, 그리고 卜 馬 의 이용은 馬 政 이 국가유지에 있어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말이 인간의 삶으로 들어오면서 부터 인간들은 기나긴 시간동안 말을 부리는 여러 가지 馬 具 들을 개발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馬 具 들은 騎 兵 전투용으로, 신분에 따른 각종 장식용 으로, 그리고 물건과 사람의 운반과 같은 일상생활용으로 사용되는 등 각종 부분에서 종합적으로 *한국무예연구소 연구원
210 208 학예지 제17집 발전하게 된다. 朝 鮮 時 代 에 들어와서도 말은 민간은 물론 宮 闕 과 軍 營, 驛 館 을 비롯한 수많은 官 衙 에서 다양 하게 이용되었다. 따라서 많은 양의 馬 具 가 제작되고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시 대의 馬 政 이나 驛 制, 馬 上 武 藝, 馬 畵, 馬 醫 學 등 말과 관련된 연구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馬 具 에 관해서는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1) 지금까지 조선시대 마구 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기록의 소략함과 유물의 광범위한 分 散 및 유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마구는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는 보편적인 도구였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되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조선전기의 역사기록에서 마구에 대한 기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조선시대 마구의 실물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 역시 근대사의 풍랑 속에서 대부분 유실되어 현전하는 양이 많지 않은 실정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물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수 량은 물론 소재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보전되어 오는 조선시대 마구의 현황에 대한 정리와 선행연구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광범위한 유물조사와 민속자료의 수집이 요구되 는 조선시대 마구 전반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은 시간을 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조선시대 官 用 馬 具 의 수급문제에 관한 기록이 17세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점 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마구에 관한 연구의 작은 시도로 17세기 조선의 馬 具 收 給 에 관하여 주목하고자 하였다. 당시 조선은 壬 辰 倭 亂 이후 급격한 북방정세의 변화와 대규모 胡 亂 및 빈번한 자연재해 등으로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 란의 타격이 미처 회복되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한 계속되는 전란으로 조선의 인적 물적 자원 전반이 크게 소모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개간 장려책을 통하여 농업생산력을 회복시키는 한 편 광범위한 군정수괄을 통하여 국역자원의 확보를 꾀하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관용마구의 수급과 관련한 마구 제작과 공급 주체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조선시대 중 마구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집중적으 1) 우리나라의 馬 具 硏 究 는 주로 일본의 騎 馬 民 族 說 을 극복하기 위한 계통론적 접근에 집중하여 이루어져왔다. 따라서 연 구의 흐름은 주로 고고학적 유물을 중심으로 고고학 연구방법을 통해 고대 마구 그 자체를 검토하고 계통을 찾아가는 방식의 연구에 치우쳐 왔다. 삼국시대에 여러 騎 乘 用 마구가 다양하게 사용된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은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 중 각 지역집단이 지배체제를 어떻게 확립 유지하며 확대시켜 나갔는지를 밝혀 주었다. 古 代 馬 具 연구자들은 고대 국가의 형성 및 체제유지와 맞물려 각종의 다양한 마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다른 유물에서는 살필 수 없는 정치 사회 문화적 제반 사항을 거시적인 면에서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마구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사 정리는 이상률(2006), 馬 具 硏 究 의 傾 向 과 騎 馬 民 族 說, 마문화연구총서 완간기념 학술대회-한국 마문화 연구의 현대 적 조명, 마사박물관. pp.64~75 참조.
211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09 로 나타나고 있는, 仁 祖 代 를 중심으로 그 구체적인 양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朝 鮮 의 馬 政 과 官 用 馬 具 의 사용 朝 鮮 은 건국 초에 군사체계를 정비하고 각종 관제와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軍 馬 驛 馬 擺 撥 馬 駄 馬 를 비롯한 官 馬 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조선정부는 馬 牧 場 을 운영하는 데에 많 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馬 政 은 국정의 大 政 으로 여겨졌다. 2) 말의 이용은 국가체제의 유지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마정기구는 經 國 大 典 에서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兵 曹 아 래에 정3품 衙 門 인 司 僕 寺 를 설치하고 마정에 관한 실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마정의 최고 정책에는 議 政 府, 六 曹, 承 政 院, 司 憲 府, 經 筵 등이 참여하였고, 이 외에 특수한 업무를 위하여 內 司 僕 寺, 兼 司 僕 을 두었으며, 한성부도 일정 부분 업무를 담당하였다. 지방에는 각 도의 관찰 사 예하에 監 牧 官 을 설치하고, 각 목장에는 群 頭, 群 副 및 牧 子 를 두었다. 3) 官 馬 의 수급과 배정 그리고 各 官 에 대한 보급의 실무를 맡은 기관은 마정을 총괄하였던 司 僕 寺 였다. 사복시에는 구체적인 실무에 따라 馬 籍 色, 牧 場 色, 軍 色, 戶 房 色, 工 房 色 등 5개의 屬 司 가 설치되었다. 4) 이 중 군적색이 駕 轎 馬, 騎 卜 馬 등 국왕이 타는 말에 관련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목장색이 지방 목장의 토지와 우마 등을 관리하면서 각종 관아의 말에 대한 수 요를 충족시켰다. 한편, 軍 營 을 비롯한 官 衙 에서 말을 이용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馬 具 였다. 그러나 말을 이용하는 빈도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밖에 없는 마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얼 마나 사용되고 수급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구체적인 실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軍 馬 의 보급과, 驛 馬 擺 撥 馬 의 운용, 왕실교통으로 御 乘 馬 駕 轎 馬 의 조달, 그리고 공무수행 도중 물건의 운송을 위해 駄 馬 輓 馬 卜 馬 등이 이용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러 한 官 用 馬 의 조달과 함께 다양한 마구가 함께 보급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馬 具 는 일반적으로 사용목적과 용도에 따라 크게 制 御 具, 安 定 具, 裝 飾 具, 戰 馬 具 ( 防 護 具 )로 2) 남도영, 韓 國 馬 政 史, 마사박물관. 1996, pp.215~277. 3) 남도영, 앞의 책, pp.220~230 ; 남도영(2006), 韓 國 馬 文 化 발전과 現 代 的 照 明, 마문화연구총서 완간기념 학술대회- 한국 마문화 연구의 현대적 조명, 마사박물관. pp.13~14. ; 남도영(1996), 앞의 책. 1996, pp.216~220. 4) 조병로, 조선시대 司 僕 寺 財 政 運 營 연구 (I), 사학연구
212 210 학예지 제17집 나누어진다. 5) 그런데, 조선시대의 경우 마구관련 용어들이 세부적으로는 거의 기록되지 않고 있다. 군영을 비롯한 관아에서 사용했던 마구는 국가의 주요 기록물인 王 朝 實 錄, 備 邊 司 謄 錄, 承 政 院 日 記 등에 나타나는 각종사건들의 기록 속에서 단편적인 기록들로 남아있다. 이 러한 양상을 살펴볼 때 당시 여러 가지 용어가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6) 조선시대의 마구와 관련된 명칭들은 대부분의 기록들 속에서 소략하게 나타난다. 조선시대 역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든 마구를 통칭하는 馬 具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뜻으로 馬 粧 을 사용하고 있는데, 馬 裝 은 장신구라는 의미가 강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한편, 군용장비를 통칭하는 軍 裝 이라는 용어에 마구까지 포함시켜 한 단어로 표기하기도 하였 다. 또, 鞍 裝 을 대표적인 마구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각종 마구를 모두 통칭하는 용어로 鞍 具, 鞍 子 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편, 마구를 통칭하는 용어로 안장과 고삐를 함께 표현한 鞍 轡 가 등장하기도 하며, 마구를 갖춘 말이라는 뜻으로 鞍 馬, 鞍 具 馬 등을 쓰고 있어 이러한 용어들은 모든 마구를 포함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각종 세부 마구의 용어는 대부분의 기록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재갈은 대체적으로 銜 으로 표기되고 있으며, 고삐를 뜻하는 轡 가 굴레인 勒 과 재갈을 포함하면서 사용되기도 한 다. 편자는 馬 蹄 7) 馬 鐵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등자의 경우는 재료에 따라서 鐵 鐙, 木 鐙 등으 로 표기되고 있다. 안장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는 鞍 子, 騎 鞍, 卜 鞍, 馬 鞍, 小 鞍, 驢 鞍 등으로 다 양하게 나타난다. 이외에도 三 繫 를 표현한 듯한 三 巨 里 가 나타나며, 안장 밑에 까는 언치( 下 鞍 ) 는 於 赤, 馬 韉, 鞍 枝 등으로 표기되며 馬 索, 大 小 索, 馬 於 叱 非, 卜 索, 三 甲 卜 索 凶 巨 里 勒 子, 衣 纓 子, 周 里 兀, 於 叱 赤 등도 나타난다. 8) 이렇게 史 書 속에서 각종 馬 具 의 용례가 나타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문집과 같은 다양한 기록들에서도 馬 具 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 나타난다. 즉, 각종 마구의 세부 용어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諸 馬 具 를 포함하는 馬 具, 馬 裝, 馬 粧, 鞍 具, 鞍 子, 鞍 轡 와 같은 포괄적인 용어로 모든 마구들을 일괄하여 한꺼번에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마구를 軍 裝 과 같이 모든 軍 用 裝 備 를 통칭하는 용어에 포함시켜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 5) 그런데 각각의 마구에 대한 용어는 시기별, 국가별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아직 용어가 통일 되지 않아 여러 가지 용어들이 병기되면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마구의 종류와 용어에 대한 자세한 정리는 이난영, 김두길, 韓 國 의 馬 具,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9, pp.7~55. 참고. 6) 학계에서도 아직까지는 조선시대의 각종 마구에 해당하는 용어를 뚜렷이 정리하지는 못하고 있다. 7) 星 湖 僿 說 萬 物 門 馬 蹄. 8) 이상의 馬 具 관련 용어들은 王 朝 實 錄, 備 邊 司 謄 錄, 承 政 院 日 記 등에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213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11 로 미루어 당시 사람들에게는 마구가 매우 보편화된 일상의 도구였고, 그 때문에 그 것을 별도 로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조선의 馬 政 과 官 用 馬 具 의 사용은 倭 亂 과 胡 亂 을 거치며 그 양상이 달라진다.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다른 시대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고 있는 馬 具 들의 마련과 지급 등의 문제 와 관련된 기록들이 이 17세기의 史 書 에서만 유독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도 당시 마필 과 마구를 수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壬 辰 倭 亂 으로 인하여 전 국토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이전처럼 마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임란 도중 기병의 잇따 른 패배에 따른 騎 兵 無 用 論 의 등장은 마정이 해이해져 가는 상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9) 이 후 조선후기 전 기간 동안 목장과 마필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가게 되었다. 10) 한편, 임진 왜란 이후 북방에서는 여진족인 後 金 이 흥기하여 그 정세가 급격히 변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仁 祖 反 正 과 李 适 의 亂, 丁 卯 胡 亂 으로 이어지는 빈번한 전란은 국정운영 뿐만 아니라 조선사회 전반을 피폐한 상황으로 만들어갔다. 전란에서 소요되었던 많은 인적 물적 자원에는 다량의 馬 匹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일어났던 丙 子 胡 亂 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Ⅲ. 國 役 자원 확보 노력과 馬 具 의 收 給 國 役 자원의 확보는 국가를 유지하고 지배체재를 공고히 하는 근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이미 16세기 후반부터 정치의 紊 亂 과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으며 賦 稅 制 度 전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동요하던 賦 役 制 는 임란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붕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와 인명의 손실은 곧, 국역자원의 감소와 생산력 저 하를 가져왔다. 이는 국가재정의 감소와 사회질서의 혼란으로 이어져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 하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급격한 북방정세의 변화와 대규모 胡 亂, 빈번한 자연재해 등으로 17세기 조선 9) 임진왜란 당시의 기병무용론은 최형국(2009), 朝 鮮 時 代 騎 兵 의 戰 術 的 운용과 馬 上 武 藝 의 변화, 역사와실학 38.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10) 남도영, 앞의 글, 1996, pp.215~216.
214 212 학예지 제17집 은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개간 장려책을 통하여 농업생산력 을 회복시키는 한편 광범위한 군정수괄을 통하여 국역자원의 확보를 꾀하고 있었다. 役 을 지는 대상이 대폭 감소한 17세기 조선정부는 병농일치적인 前 期 의 軍 役 制 를 지양하고 병농분리적인 방향으로 전개시켜 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앙군영 중 長 番 給 料 制 를 체택한 訓 練 都 監 은 임란 이전에 존재했던 給 價 代 役 制 의 발전된 형태로 나아갔다. 또, 정부는 전기의 경우처럼 영세한 保 人 에게만 군인의 경제적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給 保 와 더불어 군인에게 立 役 활동시 급료를 주어 안정된 경제적 기반위에 군역 의무를 수행하게 하였 다. 이로서 給 保 給 料 制 라는 후기 군역제가 성립하게 되었다. 11) 그러나 17세기 군영제의 성립이 조선전기 군역제의 전면적인 폐지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비록 조선전기의 군사조직인 五 衛 制 는 무너졌지만, 전기의 개병제적 군역제는 계속 존속하였 고, 이에 덧붙여 5 軍 營 이 점차 신설되어 가고 있었다. 조선전기의 軍 額 은 임란 이후 병조로 이속되어 전기 군역제와 마찬가지로 戶 首 와 保 人 으로 구성된 軍 戶 制 에 의해 군역의 의무를 수 행하게 된다. 12) 한편, 병자호란이후 기병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17세기에 새로운 기병부대를 증설하게 된 다. 그러나 당시에는 馬 政 전반에 걸쳐 심각한 문제점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壬 辰 倭 亂 을 거는 도중에 주로 해안이나 섬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국영 말 牧 場 중 폐목장이 늘어갔으며, 이후에 도 계속 복구가 지연되면서 戰 馬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13) 늘어나는 군마의 수요에 대응하 지 못한 조선의 기병부대에서는 無 馬 기병이 속출하고, 기병이 말이 없어 보병으로 전과하거나 타인의 말을 빌려 점고를 받는 사태가 빈번히 벌어졌다. 심지어는 빈한한 보병에게 자비로 戰 馬 와 軍 裝 ( 馬 具 포함)을 갖추도록 하여 가산을 탕진케 하였다. 이후의 기록이지만 18세기인 正 祖 代 에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정조5년(1781) 李 柱 國 은 馬 兵 을 유지하기 어려운 폐단을 들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馬 兵 은 스스로 戰 馬 와 軍 裝 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형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이를 일족 등에게 책임지어 징수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잔약하고 말은 병약하여 다시 믿을 수 없는 것은 물론, 한번 馬 兵 으로 들어가는 것을 死 地 에 드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14) 11) 金 鍾 洙, 17세기 軍 役 制 의 推 移 와 改 革 論, 韓 國 史 論 22, 1990, pp.134~ ) 金 鍾 洙, 앞의 글, 1990, pp.134~ ) 남도영, 앞의 책, 1996, pp.210~245. 참조.
215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13 이렇게, 18세기까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던 軍 馬 의 수급문제는 17세기에 더욱 심 각한 상황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마정에서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戰 馬 수급의 핵심이 되는 말 목장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光 海 君 代 에 혁파하였던 監 牧 官 제도의 부활을 불러왔다. 또, 말의 번식률과 효과적인 관리를 위하여 馬 醫 書 의 간행과 보급이 널리 이루어지는 등, 15) 馬 政 의 복구 에 대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조선정부의 국역자원 확보노력과 함께 마정과 관련하여, 관용마구를 수급하는 문제는 우선, 병자호란 직후에 발생한 청에 공물을 보내는 일에 대한 기사에서 그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병자호란 직후인 인조16년(1638)에 淸 에 資 裝 (군량) 器 械 를 보내는 일로 일시에 卜 馬 1천 5백 필, 견마군 5천명을 동원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일의 형편이 매우 급박( 今 日 事 勢 萬 分 悶 迫 ) 하고 우리나라의 물력으로는 전혀 이것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以 本 國 物 力 萬 無 辦 出 之 路 ) 라고 표현될 정도였으니, 조선의 말 동원능력이 심각한 상황 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 당시 동원하는 복마에 소요되는 마구에 대한 기사는 그 다음 날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전교하시기를 외방에 분정한 말은 안장을 갖추어 올려 보내는 것이 온당하니 이 뜻을 비국에 말하 라 고 하셨습니다. 당초에 계사를 올릴 때에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가 지금 하교( 下 敎 )를 받고 서야 비로소 이 물건이 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더 자세히 생각해 보니, 이번에 소용되는 말은 이른바 복마( 卜 馬 )에 불과한 것으로 시가( 市 價 )로 따지면 50필이면 충분 합니다. 그런데 이번 명령이 내려진 뒤에 말 값이 폭등하여 구입이 쉽지 않고 본도에서 평안까지 말을 끌고 갈 인부의 가목( 價 木 )도 반드시 전결( 田 結 )에서 마련해야 하는데 복안( 卜 鞍 ), 마색( 馬 索 ), 마철( 馬 鐵 ) 등의 물품까지 모두 백성들의 전결에서 마련하게 한다면 그 값이 반드시 두 배로 오를 것입니다. 이것을 말한다면 3백 40결에서 복마 1필을 마련하는 것이 쉬운 일인 것 같지만 결국에는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매우 많을 것이니 이것이 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처음에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양서( 兩 西 )에 책임 지웠으니, 만일 이 때 사용하는 말이 건장하다면 나중에 군량을 운반할 때에도 여러 차례 운반해 갈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실( 宗 室 ) 사대부( 士 大 夫 ) 감사 병사 수사 등이 바치는 말도 14) 正 祖 實 錄 卷 11, 正 祖 5 年 5 月 甲 辰. 15) 당시 이러한 관심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馬 醫 書 는 馬 經 이 대표적이며 이후 실질적으로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 중 漢 字 에 어두운 목장관리인들을 위하여 諺 解 로 풀이한 馬 經 諺 解 를 전국적으로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남도영(2004), 新 譯 馬 經 諺 解, 마사박물관. 16) 承 政 院 日 記 인조 16년 8월 13일.
216 214 학예지 제17집 반드시 쓸모없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 외방에 나누어 정한 1천 5백 필의 원수( 元 數 )를 지금 우선 1천 필로 줄여 정한다면 백성들의 힘이 종전보다 다소 완화되어 편리할 듯합니다. 이에 감히 다시 아뢰는 바입니다 17) 이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동원되는 복마에게 卜 鞍 과 馬 索, 馬 鐵 등의 마구들을 갖추어 淸 으로 보내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卜 馬 는 물론 인부의 假 木 과 말에 소요되는 馬 具 까지 兩 西 즉, 황해도와 평안도 백성들의 民 結 을 통하여 收 給 하고 있다. 이때 수급 받게 된 종실, 사대부, 감사, 병사, 수사 등이 바치는 말들은 모두 마구를 갖추어 바치게 했던 것 같다. 이것은 며칠 뒤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사대부들의 마필( 馬 匹 )도 차츰 수납되었고 사복시의 마필도 들여보내야 하는데, 끌고 갈 사람을 구 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서 4도( 道 )에 마필을 분정 할 때에 경기는 남김없이 피폐되었다는 이유로 복정 ( 卜 定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말을 끌고 가는 일은 하도( 下 道 )에서 마부( 馬 夫 )의 임금을 만들어 전 것과 비교한다면 훨씬 쉬운 일이니 경기 가운데 다소 완전한 몇 고을의 전결( 田 結 )에서 인부 2백 명을 뽑게 하여 평양까지 가서 교부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장목( 資 裝 木 )은 선척으로 운반하기가 쉽지 않으며, 관향소( 管 餉 所 )에서 청포( 靑 布 )로 지급하라는 명이 있으셨으나 부족할 듯하니 이번 말이 내려 갈 때에 자장목을 적당하게 실어 보내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지급되는 양은 비록 적더라도 제 날짜에 주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또한 사대부들이 납부한 말은 모두 안장이 있는데 사복 시의 말은 안장이 없으니 안장 1백여 부( 部 )를 해조로 하여금 수매하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고 한편으로 경기감사에게 알림이 어떻겠습니까? 18) 이 기록에서 사대부들이 납부한 말은 모두 안장을 갖추고 있었으나 사복시의 司 僕 馬 는 안장 이 없어서 안장 1백여 部 를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수매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17) 備 邊 司 謄 錄 仁 祖 16년 8월 14일. 傳 曰 外 方 分 定 之 馬 具 鞍 上 送 宜 當 此 意 言 于 備 局 事 傳 敎 矣 當 初 啓 辭 時 計 未 及 此, 今 因 下 敎 始 知 此 等 物 件 眞 不 可 闕 也 第 因 此 細 加 思 量 今 此 所 用 之 馬 不 過 所 謂 實 卜 馬 以 市 價 言 之 五 十 匹 足 矣 而 令 下 之 後 馬 價 翔 貴 買 得 不 易 自 本 道 至 平 壤 牽 馬 人 夫 之 價 亦 必 出 於 田 結 至 於 卜 鞍 馬 索 馬 鐵 等 物 雖 不 關 而 出 於 民 結 則 其 價 必 倍 以 此 言 之 三 百 四 十 結 買 下 馬 似 乎 歇 役 而 要 其 歸 則 其 貽 弊 民 間 甚 多 矣 此 極 可 慮 初 運 軍 糧 旣 責 於 兩 西 則 後 巡 運 糧 若 得 健 馬 可 以 屢 次 運 入 而 宗 室 士 夫 監 兵 水 使 等 所 納 之 馬 想 必 不 至 些 少 今 此 外 方 分 定 之 馬 元 數 一 千 五 百 匹 內 今 姑 只 定 一 千 匹 則 民 力 比 前 稍 寬 似 或 便 當 敢 此 申 稟. 18) 承 政 院 日 記 仁 祖 16년 8월 16일. 士 大 夫 馬 匹, 稍 稍 來 納, 司 僕 寺 馬, 亦 當 入 送, 而 牽 去 之 人, 覓 得 爲 難, 前 日 四 道 馬 匹 分 定 時, 京 畿 道 則 以 其 殘 敗 無 形, 故 不 爲 卜 定 矣, 今 此 牽 馬 之 事, 比 諸 下 道, 馬 夫 價 齎 出 之 役, 苦 歇 懸 殊, 京 畿 稍 完 若 干 邑, 田 結 調 發 人 夫 二 百 名, 至 平 壤 交 付, 而 資 裝 木, 船 運 甚 不 易, 雖 有 自 管 餉 靑 布 題 給 之, 今 似 有 不 足 之 患, 此 空 馬 下 去 時, 資 裝 木 量 宜 載 送, 分 給 軍 人, 則 所 給 雖 少, 猶 勝 於 後 日 而 無 及 矣, 且 士 大 夫 所 納 之 馬, 皆 有 卜 鞍, 而 司 僕 馬 則 無 卜 鞍, 卜 鞍 百 餘 部, 令 該 曹, 給 價 貿 得 亦 當 以 此 意 分 付 該 曹, 一 面 行 會 于 京 畿 監 司 何 如.
217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15 당시 마필을 몰고 갈 인부들이 부족하여 경기도의 고을 가운데 다소 상황이 좋은 몇 고을의 民 結 에서 인부 2백 명을 골라서 뽑아 쓰고 있다. 즉, 이 사건을 통해 말을 끌고 가는 일을 할 役 夫 를 마련하는 일에서 부터 卜 馬 의 수급에 이르기까지 해당 관아의 물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호란 직후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卜 馬 는 국가에서 생산하던 말들로 충당이 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말에 소요되는 馬 具 역시 官 에서 온전히 수급하지 못하고, 민간의 것을 통해 수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3년 뒤인 인조19년(1641)에는 下 三 道 에서 火 兵 2백 명을 뽑으면서 군사들의 奴 僕 族 屬 까지 給 價 하여 화병에 속하도록 하려 하는 한편, 將 官 의 노복들 까지 군사들의 숫자에 포함시 키고 있다. 당시에는 노복들 까지 군액에 포함 시킬 정도로 軍 役 자원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런 데, 같은 기사에서 어영군의 마병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조달해야 할 司 僕 馬 와 運 糧 馬, 運 卜 馬 등의 숫자를 조율하는 논의가 진행된다. 이때 馬 兵 의 안장을 모두 騎 鞍 으로 하면 마련하기가 어려우니, 4백 필은 卜 鞍 으로 갖추고 각 도에 나누어 정한 6백 필은 기안으로 하여 절반씩 들여보내기로 한다. 19) 騎 鞍 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말을 탈 때 쓰는 안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말을 타고 전투를 행하는 馬 兵 의 안장까지 짐을 싣는 안장인 卜 鞍 으로 대체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은 당시 안장의 수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같은 날의 다른 기사에는 해당 馬 兵 들의 말에 기안을 마련 하면서 鞍 枝 나 鐙 子 는 대략 마련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대부분의 마병들이 마구를 제 대로 갖추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0) 한편, 3일 후에서 해당 馬 兵 의 말에 소용되는 편자를 수급하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 논이 오가고 있었다. 이번에 1천 필의 말이 수 천리의 길을 가게 되었으므로 마철( 馬 鐵 )을 준비하여 보내지 않을 수 없으 나, 철물( 鐵 物 )을 따로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훈련도감( 訓 鍊 都 監 )이 주조( 鑄 造 )한 철물 중에 지금 황 해도에 있는 것에서 3천 근( 斤 )을 공제하여 본도로 하여금 서둘러 5천 부( 部 )의 마철을 만들어 말 1필 에 마철 5부씩 지급하여 보내게 한 다음, 3천근의 철물 값은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일일이 값을 쳐서 19) 備 邊 司 謄 錄 仁 祖 19년 1월 20일. 火 兵 二 百 名 抄 出 事 分 付 于 下 三 道 而 軍 士 中 或 渠 之 奴 僕 族 屬 自 願 帶 去 者 自 公 家 給 價 以 送 爲 宜 如 此 者 更 加 募 得 如 何... 予 意 欲 除 司 僕 馬 匹 運 糧 馬 百 匹 前 分 定 運 卜 馬 二 百 匹 送 之 其 餘 六 百 匹 則 分 定 四 道 禁 軍 所 養 之 馬 百 餘 匹 云 百 匹 外 餘 數 調 送... 將 官 奴 僕 皆 入 於 火 兵 五 百 之 數 可 也... 馬 兵 具 鞍 皆 以 騎 鞍 則 難 可 辦 得 四 百 匹 以 卜 鞍 送 之 各 道 分 定 六 百 匹 則 以 騎 鞍 爲 之 折 半 入 送 可 也. 20) 備 邊 司 謄 錄 仁 祖 19년 1월 20일. 分 定 各 具 騎 鞍 而 略 備 鞍 枝 鐙 子
218 216 학예지 제17집 훈련도감에 상환하도록 함이 온당할 것입니다. 21) 이 기록에 따르면 재료인 鐵 物 을 따로 마련할 길이 없지만, 馬 鐵 (편자)은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마구였기 때문에, 훈련도감에서 주조한 철물을 급히 이용하고, 나중에 이 철물의 값을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상환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해당 마구들을 전담 부서에서 모두 마련하지 못하고 변통하여 마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마구를 수급하는 체계가 물자의 부족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사안을 의논하는 다음 달의 기사에는 앞서 언급했던 司 僕 馬 의 卜 鞍 을 수급하는데 문제 가 발생하여 대책을 마련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어영군이 가지고 가는 말 1천 필 중 4백 필은 복안( 卜 鞍 )을 갖추어 보내도록 전일 탑전에서 이미 결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다시 상의해 보니 군중에 복안이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수많 은 군마를 이미 징발하면서 다시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저들에게 불만을 품게 한다면, 애초에 정비해 서 준비해 보내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른바 기안( 騎 鞍 )은 다 갖출 필요가 없을 것이나, 각종 안지( 鞍 枝 ) 및 삼거리( 三 巨 里 ) 언치[ 於 赤 ]등의 물품은 대략 제 모습을 갖추어야 하나 피물( 皮 物 )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마색( 麻 索 ) 면포( 綿 布 )로 대신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등자( 鐙 子 )는 중국 사람들이 하는 예에 따라 나무 등자( 木 鐙 子 )를 만들어 써도 무방할 것이니 이렇게 하자면 복안을 만들 어 쓰는 것과 공역( 功 役 )이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먼저 운반할 군마의 출발 날짜가 이미 박두해 있으니, 사복마 1백 필을 종전과 같이 단자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공조( 工 曹 )로 하여금 서울에 있는 장인( 匠 人 )을 모아 밤낮을 가리지 말고 계속해서 만들게 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요포( 料 布 )는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적당량을 지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22) 결국 軍 中 에 복안이 남아있지 않아 기안은 물론이고 복안마저도 다 갖추지 못하고, 三 巨 里 와 언치[ 於 赤 ]만을 대략 갖추게 되는데, 가죽( 皮 物 )으로 마련해야 되는 것을 麻 索 과 綿 布 로 대체하 21) 承 政 院 日 記 仁 祖 19년 1월 23일. 今 此 一 千 之 馬 行 步 數 千 里 之 途 則 馬 鐵 不 可 不 備 送 而 鐵 物 他 無 措 辦 之 路 訓 鍊 都 監 所 吹 之 鐵 見 在 黃 海 道 者 除 出 三 千 斤 令 本 道 急 急 打 造 五 千 部 每 一 匹 各 給 五 部 以 送 而 三 千 斤 之 價 令 戶 兵 曹 一 一 計 價 准 數 還 償 于 都 監 宜 當. 22) 備 邊 司 謄 錄 仁 祖 19년 2월 2일. 御 營 軍 持 去 馬 一 千 匹 中 四 百 匹 則 以 卜 鞍 備 送 事 前 日 榻 前 已 爲 定 奪 矣 臣 等 更 爲 商 議 則 軍 中 卜 鞍 所 見 埋 沒 許 多 軍 馬 旣 無 免 調 送 而 回 此 一 事 若 有 不 滿 之 意 則 初 不 如 整 齊 備 送 之 爲 愈 所 謂 騎 鞍 不 必 盡 備 諸 具 鞍 枝 及 三 巨 里 於 赤 等 物 略 爲 成 形 而 皮 物 辦 得 不 易 則 代 以 麻 索 綿 布 至 於 鐙 子 則 依 唐 人 例 以 木 鐙 子 造 用 無 妨 此 與 卜 鞍 之 造 功 用 不 甚 懸 殊 先 運 軍 發 送 日 期 已 迫 司 僕 馬 一 百 匹 鞍 子 依 前 磨 鍊 令 工 曹 收 聚 在 京 匠 人 罔 夜 造 作 而 所 入 及 料 布 令 戶 兵 曹 量 數 題 給 何 如.
219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17 고 있다. 등자 또한 鐵 鐙 을 마련하지 못하고 제작이 보다 용이한 木 鐙 을 마련하기로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마구를 제작한 기관은 工 曹 이며 제작과정에 서울의 장인( 京 匠 )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제조한 나무 등자는 부족한 시간과 인력, 물자 때문 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튼튼하게 제작되지 못하여 먼 길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제작되고 말았다. 어영군이 타는 말의 소안( 小 鞍 )의 등자( 鐙 子 )는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대개 중조 ( 中 朝 )의 사람들은 여안( 驢 鞍 )의 등자도 모두 나무로 사용하고 있는데, 견고하고 편리하여 철등( 鐵 鐙 ) 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그 제도를 모방하여 쉽게 만들 수 있게 하고 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조한 나무 등자를 오늘 가져다 보니, 중조의 제도에 미치지 못하여 먼 길을 견뎌낼 수 없을 듯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호조에 물었더니, 철등도 이미 반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합니 다. 이번에는 그 철등을 우선 지급하여 보내고 앞으로도 모두 철등으로 개조하여 보내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23) 이 기록에 따르면 나무로 제작한 등자는 모두 시간을 두고 철 등자로 대체하기로 결정되었 다. 이 때 등자는 戶 曹 와 兵 曹 의 해당 관청에서 분담하여 제작되고 있다. 그런데 인조 19년 (1641) 5월 15일에 마련된 御 營 軍 事 目 과 12월 23일의 啓 目 에 따르면 복안은 반드시 말 주인의 안장을 사용하여 官 에서 파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조치하고 馬 鐵 역시 1필당 5 部 씩 마련하고 布 馬 槽 나 網 太 卜 索 腹 道 스스로 마련하여 가지고 오도록 규정하고 있다. 24) 이 조목들은 인조 22년(1644)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데, 25) 이를 통해 마구의 조달이 어려웠던 조선정부가 점차 마구의 조달을 말의 주인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23) 承 政 院 日 記 仁 祖 19년 2월 10일. 御 營 軍 所 騎 小 鞍 中 鐙 子 欲 以 木 鐙 子 造 用 蓋 中 朝 之 人 驢 鞍 之 鐙 皆 用 木 鐙, 而 堅 靭 便 利 無 異 於 鐵 鐙 故 令 戶 兵 曹 欲 效 此 制 俾 得 容 易 造 作 矣 今 日 取 見 所 造 木 鐙 則 大 不 如 中 朝 之 制 所 見 似 不 堪 致 遠 問 于 戶 曹 則 鐵 鐙 亦 已 分 半 造 作 云 令 番 則 以 其 鐵 鐙 爲 先 給 送 而 此 後 竝 以 鐵 鐙 改 差 爲 當. 24) 備 邊 司 謄 錄 仁 祖 19년 5월 15일. 御 營 軍 事 目 中. 卜 鞍 必 用 其 馬 主 之 鞍 俾 無 背 破 之 患 馬 鐵 每 馬 五 部 布 馬 槽 或 網 太 卜 索 腹 道 等 竝 爲 備 來 爲 白 齊. 備 邊 司 謄 錄 仁 祖 19년 12월 23일. 啓 目 中. 擇 買 卜 鞍 則 必 用 其 馬 主 之 鞍 俾 無 背 破 之 患 馬 鐵 每 馬 五 部 式 布 馬 槽 或 細 太 卜 索 腹 帶 等 物 竝 爲 備 送 一 依 前 例 施 行 爲 白 齊. 25) 備 邊 司 謄 錄 仁 祖 22년 12월 28일.
220 218 학예지 제17집 Ⅳ. 丙 子 胡 亂 과 馬 具 收 給 의 한계 官 用 馬 具 의 收 給 이 점차 어려워지고 마구의 조달을 말의 주인에게 전가시켜가는 당시의 상 황은 戰 亂 이 연이어 일어났던 17세기 전반기의 상황과 큰 관계가 있다. 주지하다 시피 임진왜 란 당시와 그 직후의 朝 鮮 騎 兵 은 그 無 用 論 까지 제기되면서 대접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기병은 보통 보병에 비해 약 3배 이상의 유지 관리비가 소요되는 값비싼 존재였고, 임란직후의 총체적인 국가 위기 상황에서 騎 兵 의 군액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재정적으로 크 게 부담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6) 하지만 光 海 君 代 에 明 의 군사적 원조를 위하여 보병으로 편성되어 파병된 조선군은 深 河 戰 鬪 에서 대패하였고, 仁 祖 代 에 들어와서는 丁 卯 丙 子 胡 亂 을 통해 조선의 보병부대가 淸 의 기 병을 감당해내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騎 兵 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孝 宗 代 부터는 北 伐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다시금 騎 兵 이 부각되어 갔다. 기병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편제의 개편 외에도 戰 馬 의 확보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사회에 내재된 인적 물력 동원력은 임진왜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어 있는 상 황이었다. 仁 祖 反 正 을 개기로 後 金 과 적대관계로 돌아선 仁 祖 정권의 초반에는 적국인 後 金 에 대비하여 군사적 변화가 일어났다. 27) 仁 祖 의 집권 초에 발생한 李 适 의 亂 와중에 이괄의 휘하 에 있던 정예기병을 잃은 조선은 바로 다음해에 일어난 정묘호란 때에 제대로 된 방어전을 수 행할 수 없었다. 정묘호란 때 또다시 타격을 입은 조선은 후금군과 후속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 을 염두에 두고 主 敵 의 방향을 御 倭 가 아닌 防 胡 로 전환하였다. 28) 당시 보병인 三 手 兵 위주로 운영되던 訓 練 都 監 에서도 5 哨 에 해당하는 左 領 200명, 右 領 300명의 騎 馬 兵 부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29) 지방의 속오군 또한 단순한 보병편제가 아닌 기병편제를 포함 시켜 갔다. 30) 그러나 기병수급을 위한 戰 馬 의 확보 및 편제의 개편에도 불구하고 丙 子 胡 亂 시에 조선은 패배 할 수 26) 騎 兵 들의 경우 戰 馬 를 유지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 步 兵 보다 保 人 이 1명 더 추가되어야 하고, 給 料 에서도 말 먹이 를 위해 콩 6-9 斗 를 추가로 지급해야 했다. 또한 步 兵 의 경우 皮 甲 을 사용하는 반면, 騎 兵 의 경우는 값이 비싼 鐵 甲 을 지급해야 했다.( 承 政 院 日 記 孝 宗 3 年 9 月 20 日 ; 孝 宗 4 年 8 月 4 日 ) 27) 崔 孝 軾 (1995), 朝 鮮 後 期 軍 制 史 硏 究, 신서원. pp 참조. 28) 仁 祖 實 錄 卷 19, 仁 祖 6 年 9 月 丙 戌. 29) 顯 宗 改 修 實 錄 卷 10, 顯 宗 4 年 11 月 戊 寅. 後 至 四 千 又 置 馬 兵 左 右 領 其 數 二 百 餘 人 申 景 禛 爲 大 將 加 馬 兵 三 百 餘 人 分 作 五 哨 且 加 步 軍 一 司 五 哨 合 爲 三 十 五 哨 馬 步 軍 都 數 五 千 餘 人. 30) 仁 祖 實 錄 卷 16, 仁 祖 5 年 4 月 丙 辰. 一 敎 鍊 用 鍊 兵 實 記 兵 學 指 南 兵 使 巡 行 時 考 講 將 官 不 通 者 決 棍 連 五 次 不 通 兩 朔 自 備 糧 罰 防 三 次 能 通 者 復 其 戶 役.
221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19 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 淸 騎 兵 이 사용한 전술적 우위와 수적인 우세가 朝 鮮 軍 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병자호란에서도 조선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은 상황에 더하여 후금에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했다. 또 다시 타격을 받게 된 조선정부에게 마필과 마구를 수급하는 문제는 결 코 쉽지 않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軍 務 를 수행할 때 필요한 마필과 마구는 점점 관에서 마련 해 주는 것이 아니라 公 務 時 말을 직접 운용하는 개인이 개인의 재량으로 직접 마련하는 방향 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은 사복시의 마구 조달 量 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마정을 총괄하던 司 僕 寺 에서는 마필뿐만 아니라 官 用 馬 具 역시 收 給 하고 있었다. 사복시에 서 거두어 들여 관용으로 지급하던 마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보 다 後 代 인 高 宗 代 의 자료 太 僕 定 例 類 의 기록들에서 그 일면을 확인 할 수 있다. 마구의 조달과 관련된 사복시의 屬 司 는 工 房 色 이었다. 高 宗 代 정리된 太 僕 定 例 橫 看 工 房 條 와 太 僕 定 例 工 房 都 錄 條 에는 공방의 세입물목 중 마구와 관련하여 1년 應 下 (경상비)로 勒 所 116 巨 里 31)를 거두어들인 것으로 나타난다. 륵소는 麻 田 등 22개 읍에서 각각 1거리, 安 城 등 7읍에서 2거리, 禮 山 등 38읍에서 1거리, 韓 山 등 9읍에서 2거리, 洪 州 등 1읍 3거리, 충주 등 2읍에서 4거리씩 수납하고 있다. 또, 매년 제주에서 年 例 納 으로 騎 鞍 을 거두어들이면서 式 年 마다 紅 鞍 6부, 進 上 法 鞍 3부, 騎 鞍 3부씩 10부를 內 寺 에 납부한 것이 확인된다. 32) 같은 기록의 稅 出 물목에서는 馬 具 에 소용되는 비용은 四 邊 의 마필에 쓸 卜 鞍 의 값으로 각각 의 邊 에서 3 部 씩 每 部 1냥 1전 6푼씩, 총 13냥 9전 6푼이 지출되고 있으며, 大 小 索, 馬 於 叱 非, 卜 索, 凶 巨 里 勒 子, 衣 纓 子, 周 里 兀, 於 叱 赤 등에 소용되는 熟 麻 1,236근에 15냥을 사용하고 있 고, 勒 所 는 거두어들인 수와 같이 116거리를 지급하고 있다. 또, 1년 別 下 (특별지출비)로 熟 麻 198근 9냥이 지출되고, 1년 遺 在 (잔액)로 熟 麻 494근 9냥이 남았다. 33) 앞에서 살펴 본 高 宗 代 의 물목은 17세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그 물량이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인조 26년(1648)에 다양 31) 勒 所 는 굴레나 고삐와 관련된 물목으로, 그 단위로 巨 里 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가죽으로 된 끈을 지칭하는 용어로 추정된다. 32) 太 僕 定 例 橫 看 工 房 條. ; 太 僕 定 例 工 房 都 錄 條. (조병로(2007), 조선시대 司 僕 寺 財 政 運 營 연구 (Ⅱ), 사학연구 85. pp.19~22재인용) 33) 위의 기록. (조병로, 앞의 글. 2007, pp.22~27재인용)
222 220 학예지 제17집 한 공물의 수납에 대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사복시에서 수급하였던 마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복시의 경우 제주도 3개 읍에 있는 각년( 各 年 )의 고실마( 故 失 馬 ) 가목( 價 木 : 그 값에 해당하는 무명 )이 자그마치 60여 동이나 되며 난리를 치른 이후 불의에 쓸 기복마( 騎 卜 馬 )의 여러 도구를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기안( 騎 鞍 ) 50부( 部 )와 복안( 卜 鞍 ) 1백 50부, 기타 삼갑복색( 三 甲 卜 索 : 짐 실을 세겹 끈 ) 마철( 馬 鐵 : 말의 편자 )과 길에서 쓰는 작도( 斫 刀 ) 겸자( 鎌 子 ) 동로구( 銅 爐 口 ) 등의 물건을 말의 숫자에 따라 준비하여 위급한 사태에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부( 馬 夫 )가 쓸 것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제주의 총전립( 總 戰 笠 ) 값을 물었더니, 1부의 값이 상목( 常 木 ) 3필이라 하였습니다. 관가에서 사들일 때 물건 값을 넉넉히 주면 백성들은 반드시 선뜻 따를 것입니다. 본주 ( 本 州 )에 있는 마가목( 馬 價 木 )을 덜어내어 총전립 1부에 각자 4필의 무명을 지급하여 연전에 사들인 것이 1백 70부입니다. 마피( 馬 皮 )는 천리 바다 밖에서 실어 나르려면 폐단이 있으므로 예부터 상납하 지 않았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안으로는 사오지 말아 도민( 島 民 )의 병폐를 제거하라. 하였 다. 34) 이 기록에 따르면, 위급한 사태에 대비하여 騎 鞍 50 部 와 卜 鞍 1백 50부, 기타 짐 실을 때 사용하는 세 겹의 끈인 三 甲 卜 索, 馬 鐵 과 길에서 쓰는 斫 刀 鎌 子 銅 爐 口 등의 물건을 말의 숫자에 따라 사복시에서 구입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현종 12년(1671)에는 제주의 세 고을 공물을 1년을 한하여 임시 감하게 한 별단 중에 서 사복시에 바치는 공물로 다음과 같은 물목이 등장한다. 御 乘 馬 20 匠 과 연례마 8필에 부착할 毛 紅 勒 28 部, 毛 衫 帳 28부, 毛 五 郞 28부, 毛 甘 之 5부, 山 麻 勒 28부, 番 兎 多 曷 28부, 鐵 椎 암수 모두 5부, 채찍( 䥜 ) 4자루, 걸개( 巨 乙 介 ) 4자루. 三 名 日 (설날 동지 임금탄신일) 진상마 60필에 부착할 홍모륵( 紅 毛 勒 ) 60부, 초삼장( 草 衫 帳 ) 60부, 모알감지 6부, 산마루 60부, 채찍 3자루, 철퇴 암수 모두 3부, 나무빗( 木 梳 )15개, 초성( 草 省 )15개, 삭도 ( 削 刀 ) 3자루, 걸개[ 巨 乙 介 ] 3자루. 차비마( 差 備 馬 ) 80여필에 부착할 산마륵( 産 麻 勒 ) 80부, 모알감지 2부, 세공마( 歲 貢 馬 ) 2백필에 부착 할 산마륵 2백 부, 산마알감지( 産 麻 알 甘 之 ) 12부, 매년 상납하는 삼명일 진상마( 進 上 馬 ) 60필과 연례마 34) 備 邊 司 謄 錄 仁 祖 26년 12월 11일. 而 但 司 僕 寺 則 以 爲 濟 州 三 邑 所 在 各 年 故 失 馬 價 木 多 至 六 十 餘 同 而 經 亂 之 後 騎 卜 馬 意 外 諸 具 不 可 無 預 備 故 騎 鞍 五 十 部 卜 鞍 一 百 五 十 部 其 他 三 甲 卜 索 馬 鐵 路 用 斫 刀 鎌 子 銅 爐 口 等 物 一 從 馬 數 措 備 以 爲 緩 急 之 用 馬 夫 所 着 亦 不 可 無 故 問 於 濟 州 驄 戰 笠 之 價 則 一 部 之 價 常 木 三 疋 云 官 家 所 買 優 給 價 物 則 民 必 樂 從 本 州 所 在 馬 價 木 除 出 驄 戰 笠 一 部 各 給 四 疋 之 木 年 前 貿 來 者 一 百 七 十 部 馬 皮 則 千 里 海 外 輸 運 有 弊 故 自 古 不 爲 上 納 矣 敢 啓 答 曰 知 道 今 後 勿 爲 貿 來 以 除 島 民 之 弊.
223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21 ( 年 例 馬 ) 8필에 부착할 모홍륵( 毛 紅 勒 ) 68부, 모삼장( 毛 衫 帳 ) 8부, 마철( 馬 鐵 ) 8부, 채찍 4자루, 모오랑 ( 毛 五 郞 ) 8부, 모알감지 8부, 초삼장( 草 衫 帳 ) 68부, 산마록 68부, 삭도( 削 刀 ) 4자루, 철퇴 암수 모두 5부, 걸개 4자루, 나무빗 20개, 초성( 草 省 ) 20개, 흉구마( 凶 咎 馬 )와 노태마( 駑 駘 馬 ) 모두 1백 30필에 부착할 산마륵 1백 13부. 35) 이 물목 중 毛 紅 勒, 毛 衫 帳, 毛 五 郞, 毛 甘 之, 山 麻 勒, 番 兎 多 曷, 紅 毛 勒, 草 衫 帳, 모알감지, 산마루, 채찍 등은 마구에 해당하는 물건들이다. 이 외에도 木 梳, 草 省, 削 刀, 巨 乙 介 는 마필을 관리하기 위한 물품이었다. 이 두 기록에서 등장하는 마구관련 물목은 앞서 살펴본 高 宗 代 의 물목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물량 기재하고 있다. 특히, 안장의 경우는 인조대에 사복시에서 마련하고 있는 안장의 물량이 훨씬 많은 양을 보이고 있다. 비록, 17세기와 19세기라는 다소 큰 시차가 존재하고, 물건의 항목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사복시에서 공급한 마구들에 대한 다른 기록들을 찾을 수 없는 시점에서 이 기록들만을 통해서 섣불리 판단할 수 는 없다. 그러나 이를 통해 사복시의 세입과 세출에서 후대로 갈수록 마구와 관련된 물량이 줄어들고 있었던 상황의 단편은 확인할 수 있다. 마구를 지급하거나 賜 與 하는 일에 대한 기사를 검토하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인조 12년(1634)에는 다음해인 1635년에 일본의 馬 上 才 人 요청으로 파견하게 되는 馬 上 別 隊 에 게 말과 마구를 특별히 준비하게 하면서, 말은 훈련도감에서 마련하도록 하고, 鞍 轡 와 盤 纏 該 曹 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고 있다. 36) 또, 인조 3년(1625)과 1634년에는 후금의 사신에게 줄 鞍 子 등의 마구는 사복시 내의 德 應 房 에 비축된 것을 쓰거나, 工 曹 에서 조달하고 있다. 37) 인조 13년(1635)에는 정월 초하루 날에 진상하는 鞍 子 를 工 曹 에서 수급하고 있으며, 실무는 郎 廳 즉, 堂 下 官 급의 신료가 맡아 보고 있었다. 38) 인조 14년(1636) 丙 子 胡 亂 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35) 備 邊 司 謄 錄 顯 宗 12년 8월 18일. 濟 州 三 邑 供 物 權 減 別 單 中. 司 僕 寺 御 乘 馬 二 十 匹 年 例 馬 八 匹 所 着 毛 紅 勒 二 十 八 部 毛 衫 帳 二 十 八 部 毛 五 郞 二 十 八 部 毛 甘 之 五 部 山 麻 勒 二 十 八 部 番 兒 兎 多 曷 二 十 八 部 鐵 椎 雌 雄 竝 五 部 䥜 四 柄 巨 乙 介 四 柄 三 名 日 馬 六 十 匹 所 着 紅 毛 勒 六 十 部 草 衫 帳 六 十 部 毛 甘 之 六 部 山 麻 勒 六 十 部 䥜 三 柄 鐵 椎 雌 雄 竝 二 部 木 梳 十 五 介 草 省 十 五 介 削 刀 三 柄 巨 乙 介 三 柄 差 備 馬 八 十 匹 所 着 山 麻 勒 八 十 部 毛 甘 之 二 部 歲 貢 馬 二 百 匹 所 着 山 麻 勒 二 百 部 山 麻 甘 之 十 二 部 每 年 上 納 三 名 日 進 上 馬 六 十 匹 年 例 馬 八 匹 所 着 毛 紅 勒 六 十 八 部 毛 衫 帳 八 部 馬 鐵 八 部 䥜 四 柄 毛 五 郞 八 部 毛 甘 之 八 部 草 衫 帳 六 十 八 部 山 麻 勒 六 十 八 部 削 刀 四 柄 鐵 椎 雌 雄 竝 五 部 巨 乙 介 四 柄 木 梳 二 十 介 草 省 二 十 介 凶 咎 駑 駘 馬 竝 一 百 十 三 匹 所 着 山 麻 勒 一 百 十 三 部. 36) 備 邊 司 謄 錄 仁 祖 12년(1634) 12월 14일. 日 本 入 送 馬 上 別 隊 衣 巾 鞍 馬 各 別 備 給 俾 不 至 埋 沒 有 傳 敎 矣 馬 則 令 都 監 擇 給 別 隊 所 騎 馬 以 送 而 衣 巾 鞍 轡 盤 纏 等 物 令 該 曹 磨 鍊 整 備 以 給 速 爲 入 送 宜 當. 37) 承 政 院 日 記 仁 祖 3년 2월 24일. /인조 12년 3월 26일. /인조 12년 3월 26일. /인조 12년 4월 23일. /인조 12년 4월 30일. 38) 承 政 院 日 記 仁 祖 13년 1월 1일. 正 朝 進 上 鞍 子 看 品 則 其 中 馬 皮 鞍 甲 制 造 麤 劣 所 見 埋 沒 請 工 曹 當 該 郞 廳 推 考.
224 222 학예지 제17집 監 軍 에게 줄 騎 鞍 子 역시 인조 3년의 경우와 같이 德 應 房 에 소장되어있는 三 名 日 (국왕 탄신일, 정월 초하루, 冬 至 )에 進 上 한 안장으로 조달하고 있다. 39) 그런데 호란 직후인 인조 15년(1637)까지는 勅 使 에게 줄 鞍 子 는 工 曹 에서 상어가죽인 大 浪 皮 로 만들기도 한다. 40) 그러나 칙사의 馬 具 를 값비싼 대량피로 만든 것은 물자가 넉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패전직후 황제의 칙사를 맞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성격을 띄고있었기 때문에 무리하면서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례로 인조 21년(1643)에는 淸 에서 鄭 命 守 가 勅 使 로 오자 앞의 경우처럼 鞍 子 를 下 送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미리 마련하고 있는 물건이 없어 해당관청에서 급박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41) 그리고, 인조 23년(1645)에는 淸 의 大 通 官 인 韓 巨 源 이 조선의 鞍 子 에 욕심을 내어 한 部 를 얻어가려하였으나 인조가 不 可 함을 천명하여 실패하 기도 하였다. 42) 그런데 마구의 수급체계와 관련한 孝 宗 代 이후의 기록에서는 鞍 子 匠 을 동원하여 馬 鞍 을 제 작하는 기록과, 43) 通 信 使 가 사용할 鞍 子 를 工 曹 에서 造 作 한다는 기록, 44) 그리고 對 馬 島 에서 요구한 鞍 子 諸 具 를 마련하는 기록 등 단지 몇 건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그치고 있어 仁 祖 代 이 후의 마구 수급체계를 엿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병자호란 이전에는 先 代 부터 있어 왔던 관례대로 마구를 갖춘 말 즉, 鞍 具 馬 를 공이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賜 給 하고 있었다. 45) 그러나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이후 효종이 즉위 할 때 까지 신하들에 대해 안구마를 사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기록으로는 鞍 具 를 빼고 마필만 사여하는 경우가 1건 나타나기도 하는데, 46) 이것으로 보아 仁 祖 代 馬 具 收 給 이 병자호란을 계기로 큰 차질을 빚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조선은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39) 承 政 院 日 記 仁 祖 14년 8월 10일. 梁 監 軍 之 行 已 久 而 勅 使 之 行 纔 經 一 年 中 朝 隨 來 之 人 必 以 勅 使 接 待 之 事 較 其 異 同 所 騎 鞍 子 似 當 下 送 而 卽 今 事 勢 萬 無 及 造 之 理 三 名 日 進 上 鞍 子 如 有 藏 在 德 應 方 [ 房 ] 者 一 部 下 送 爲 當 惶 恐 敢 稟. 40) 承 政 院 日 記 仁 祖 15년 11월 23일. 勅 使 所 贈 鞍 子 以 何 物 造 作 乎 傳 敎 矣 問 于 工 曹 則 以 大 浪 皮 造 作 云 矣. 41) 承 政 院 日 記 仁 祖 21년 9월 25일. 迎 接 都 監 啓 曰 卽 接 遠 接 使 狀 啓 鄭 譯 以 三 勅 使 出 來 云 灣 上 所 用 鞍 子 一 部 令 該 曹 急 急 造 作 下 送. 42) 承 政 院 日 記 仁 祖 23년 5월 23일. 都 監 啓 曰 護 行 將 例 給 鞍 子 一 依 勅 使 之 規 今 方 以 請 求 造 作 而 至 於 大 通 官 則 曾 無 鞍 子 造 給 之 事 矣 卽 者 韓 巨 源 使 其 差 備 譯 官 懇 請 曰 欲 得 鞍 子 一 部 願 蒙 造 惠 云 渠 亦 非 敢 援 例 而 言 乃 是 別 爲 求 請 峻 辭 防 塞 亦 甚 落 莫 不 得 已 依 其 言 施 行 何 如 傳 曰 無 前 之 事 到 今 創 開 不 可 也. 43) 承 政 院 日 記 孝 宗 원년 4월 21일. 44) 承 政 院 日 記 孝 宗 6년 1월 15일. 45) 承 政 院 日 記 仁 祖 5년 9월 17일. 承 政 院 日 記 仁 祖 7년 5월 21일. 承 政 院 日 記 仁 祖 8년 1월 9일. 承 政 院 日 記 인조 10년 5월 8일. 46) 承 政 院 日 記 인조 21년 4월 4일.
225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23 국역자원의 확보와 마필의 보급, 그리고 마구의 수급에 이르기 까지 총체적인 난항을 겪고 있 었던 것이다. Ⅴ. 맺음말 이상과 같이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官 用 馬 具 의 수급문제에 관한 기록이 17세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점에 주목하여, 현재까지 전해지는 馬 具 의 수급과 관련된 기록들을 종합하여 살펴보 았다. 17세기 國 役 을 담당할 인적자원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 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경주해야했다. 馬 政 의 해이까지 겹친 조선에 있어 仁 祖 代 의 관용마구 수급은 청에 공물을 보내는 문제와 중복되면서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마필 수급의 난관과 함께 큰 어려움에 처하였다. 먼저 조선정부의 국역자원 확보와 마정 복구에 기울인 노력들과 관련하여, 馬 具 를 수급하는 문제는 우선, 병자호란 직후 수행해야 했던 청에 공물을 보내는 일에 대한 기사에서 그 모습을 엿 볼 수 있었다. 청에 보내야 하는 군량과 여러 가지 기기들을 운송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짐을 옮기는 복마에 사용되어질 마구를 수급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부의 수급이나 마필의 수급에서 마구의 수급에 이르기까지 民 結 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에서 주목 되는 현상은 안장과 등자, 편자 등 여러 가지 마구들의 제작이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재료 를 바꾸거나 수급 대상을 몇 번에 걸쳐 바꾸면서 변통이 이루어진 점이다. 이를 통해 당시 정 부의 마구 수급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마정을 총괄하던 司 僕 寺 에서의 馬 具 收 給 양상을 후대인 고종대의 기록과 비교하는 작업 을 통해 사복시의 세입과 세출에서 후대로 갈수록 마구와 관련된 물량이 줄어들고 있었던 상황 의 단편은 확인할 수 있었고, 수많은 관아에서 사용되었던 官 用 馬 具 들이 기본적으로는 사복시 에서 수급되고 대체적으로는 상황에 따라 말과 마구가 소요되는 공무를 맡았던 해당관청에서 수급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편, 仁 祖 代 에 마구를 지급하거나 賜 與 하는 일에 대한 기사를 검토하면서 마구 수급의 한계 에서 오는 마구 지급 양상의 변화를 단편적으로 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록이 소략하
226 224 학예지 제17집 여 당시의 전반적인 마구 소요에 대한 현상은 살펴볼 수 없었고, 더구나 마구 수급체계와 관련 한 孝 宗 代 이후의 기록 단지 몇 건에 그치고 있어 仁 祖 代 이후의 마구 수급체계를 엿볼 수는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 仁 祖 代 馬 具 收 給 은 병자호란을 계기로 큰 차질을 빚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국역자원의 확보와 마필의 보급, 그리 고 마구의 수급에 이르기 까지 총체적인 난항을 겪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당시 마구의 수급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재정을 통하여 해결되고 있었고, 이러한 수급체계는 기본적으로 관련 업무를 맡은 해당관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 한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17세기에는 점점 말의 주인이나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마구의 수급을 전가해 가는 양상 띄게 되었던 것이다. 본 연구는 기록과 유물자료정리의 부족에 기인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세부 마구 명칭의 뜻을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으며, 그 계통에 대한 정리역시 시도하지 못하였다. 또, 17세기 마구 수급에 관한 보다 깊이 있는 자료를 구하지 못하여 당시 마구 수급체계를 명 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점은 기록의 소략함으로 인해 17세기 이전과 그 이후의 마구 수급체계의 현황역시 살펴보지 못한 점이다. 다만 조선시대의 마구관련 기록 중 17세기를 제외한 기간에서 마구 수급에 관한 기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현상은 그만큼 17세 기의 조선이 마구 수급을 위한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향후 기회가 된다면 보다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이 부분들을 밝혀내고자 한다. 앞으로 조선시대 마구에 대한 연구가 더욱 구체적으로 진행되려면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광 범위한 유물의 조사, 그리고 馬 具 와 관련된 민속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조선 시대의 馬 具 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적지 않은 시간을 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만, 조선 정부의 馬 具 收 給 이라는 주제를 미시적으로 다룬 이번 연구의 성과가 급변하고 있었던 17세기 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조선사회를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바라보는데 미약하나마 기여가 되었으면 한다.
227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25 참고문헌 1. 仁 祖 實 錄 2. 顯 宗 改 修 實 錄 3. 正 祖 實 錄 4. 承 政 院 日 記 5. 備 邊 司 謄 錄 6. 星 湖 僿 說 7. 崔 孝 軾, 朝 鮮 後 期 軍 制 史 硏 究, 신서원 金 鍾 洙, 17세기 軍 役 制 의 推 移 와 改 革 論, 韓 國 史 論 남도영, 韓 國 馬 政 史, 마사박물관 이난영, 김두길, 韓 國 의 馬 具,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남도영, 韓 國 馬 文 化 발전과 現 代 的 照 明, 마문화연구총서 완간기념 학술대회-한국 마 문화 연구의 현대적 조명, 마사박물관 이상률, 馬 具 硏 究 의 傾 向 과 騎 馬 民 族 說, 마문화연구총서 완간기념 학술대회-한국 마문 화 연구의 현대적 조명, 마사박물관 조병로, 조선시대 司 僕 寺 財 政 運 營 연구 (I), 사학연구 조병로, 조선시대 司 僕 寺 財 政 運 營 연구 (II), 사학연구
228 226 학예지 제17집 [부록] 마구의 명칭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전근대시대 마구의 명칭 [그림 1] 마구의 세부명칭 (이난영, 김두길, 한국의 마구, 마사박물관, 1999.) 조선시대 사료에 나타나는 마구의 명칭 [그림 2] 조선시대의 사료에서는 세부 마구의 명칭보다는 모든 마구를 통틀어 馬 具, 軍 裝, 馬 裝, 馬 粧, 鞍 具, 鞍 子, 鞍 轡 로 표기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229 17세기 朝 鮮 의 馬 具 收 給 에 관한 연구 227 조선시대 마구 유물 [그림 3] 재갈( 馬 銜 ) / 조선시대 / 전쟁기념관 [그림 4] 철등자( 鐵 鐙 )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그림 5] 철등자( 鐵 鐙 )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그림 6] 철등자( 鐵 鐙 ) / 조선중기 / 마사박물관 [그림 7] 가죽안장( 鞍 裝 )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그림 8] 안장 / 조선시대 / 전쟁기념관
230 228 학예지 제17집 [그림 9] 은상감안장( 鞍 裝 )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그림 10] 안장깔개( 下 鞍 )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그림 11] 마름쇠( 鐵 疾 藜, 菱 鐵, 藜 鐵, 藜 鐵 )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그림 12] 안장 덮게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그림 13] 행낭( 行 囊 ) / 조선시대 / 마사박물관
231 1 7 세기 朝鮮의 馬具 收給에 관한 연구 229 개인소장 마구 [그림 14-1] 고리형 어피안장 / 조선시대 / 최형국소장 [그림 14-2] 고리형 어피안장 밑면 [그림 14-3] 고리형 어피안장 앞면
232 230 학예지 제17집 [그림 15-1] 은상감박쥐문양주칠어피안장(鞍裝) 및 철등자(鐵鐙) / 조선시대 / 최형국소장 [그림 15-2] 은상감박쥐문양어피안장 옆면 [그림 15-3] 은상감박쥐문양어피안장 밑면 [그림 15-4] 은상감박쥐문양어피안장 뒷면 [그림 15-5] 철등자(鐵鐙)
233 2010육군박물관 연보 231 부 록 2010 육군 박물관 연보 ( ~ ) Ⅰ. 학 술 활 동 1. 강원도 원주시 횡성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1) 조사기간 : (예비조사 : , 본조사 : / , 보완조사 : ) (2) 대 상 지 : 영원산성, 해미산성, 금두산성, 견훤산성, 태기산성, 갈풍리산성, 운무산성, 봉화산 봉수(원주), 소군산봉수, 봉화봉봉수, 봉화산봉수(횡성) (3) 조 사 자 : 강신엽, 이두원 2. 대 외 활 동 (1) 한국박물관협회 정기총회 참석 - 일자/장소 : / 국립중앙박물관 - 인 원 : 박물관장 이내주 (2) 한국대학박물관협회 춘계학술발표회 참석 - 일자/장소 : / 경기대학교 - 인 원 : 학예사 안재한, 권소영 (3) 울산대곡박물관 유물구입 자문위원 회의 참석 - 일자/인원 : / 박물관 부관장 김성혜
234 232 학예지 제17집 (4) 한국대학박물관협회 정기총회 및 추계학술발표회 참석 - 일자/장소 : / 군산대학교 - 인 원 : 학예사 권소영, 보존처리사 이두원 3. 교 육 (1) 군 문화재 관리 교육 참석 - 일자/장소 : / 국립중앙박물관 - 내 용 : 국방부 주관 군 문화재 관리 교육 - 대 상 : 부관장 강신엽, 학예사 안재한 (2) 2010 전국 박물관 미술관 전문인력 전문교육 - 일자/장소 : / KOBACO 연수원(경기 양평) - 내 용 : 학예사 전문인력 교육 - 대 상 : 학예사 권소영, 보존처리사 이두원 4. 간행물 발간 (1) 육군박물관, 6 25전쟁과 육사의 특별한 이야기 (2) 육군박물관, 강원도 원주시 횡성군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3) 육군박물관, 학예지 17 (우리나라의 전통 기병 특집) 5. 일반 행정 (1) 육군박물관 현대화사업 기본조사설계 추진 - 기본조사설계연구보고서 발간 :
235 2010육군박물관 연보 233 Ⅱ. 전시 보존 및 시설관리 1. 육군박물관 (1) 박물관 상주 자원봉사자 제도 운영 - 기 간 : 1. 6 계속 - 내 용 : 신경애 등 20명 - 전시해설 교육 : (4회) (2) 박물관 군 관 합동 소방훈련 - 기 간 : 5. 12, 내 용 : 청헌당, 박물관 (3) 박물관 실무연수자 실무연수 - 기 간 : (60시간) - 내 용 : 서울여대 4년 오미현 등 10명 (4) 박물관 전시 보존 환경 개선 - 박물관 외벽 도색 / 포토죤 설치 : 청헌당 화재 안전시설 설치(불꽃 감지기, 소화전) : 전시 보조자료 제작 / 활용(유물 스템프) : (5) 군사사학과 국사 과목 박물관 현장수업 지원 - 일자 : 4. 26, 대상 / 시간 : 1학년 이과생도 3개반 / 08:00 15:00 (6) 박정희대통령 의전차량 복원 완료 및 전시 - 전 시 : 2. 11(목) / 복원식 개최 3. 19(금) - 내 용 : 박정희대통령 의전차량 전면 보수(M&M 지원)
236 234 학예지 제17집 (7) 군사문화재 산책 코너 신설 - 기 간 : 진행중 - 내 용 : 매월 요 군사문화재 육사신보 연재 (8) 서울시 지정문화재 선정 - 수문장계회도 (제303호/ ) - 장양공 정토시전부호도 (제304호 / ) (9) 근대 등록문화재 지정 - 한국 광복군 군복 (제460호/ ) - 대한민국 육군기 (제461호 / ) (10) NEW 육군 군사재 관리시스템 시험운영 - 기 간 : (진행중) - 내 용 : 자료 시험 입력(육군 군사재 50점) / 운영 (11) 다중이용시설 실내공기질 측정 - 기 간 : 내 용 : 제1, 2전시실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실내공기질 측정(미세먼지 외 9항목) (12) 소장유물 보존처리 - 자 체 : 광복군 유품, 등자 2건, 서적류 (70점) 탈산처리 - 위 탁 조준 유묵 : / 국가기록원 세총통, 불랑기자포 회수 : 1. 28( ) / 서울역사박물관 (13) 박물관 홈페이지 학술자료 보강 탑재 - 학예마당 학술자료 탑재(연구논문 / 도서 pdf 전환) (14) 국립중앙박물관 대여유물 위탁 보존처리 - 일시 / 기관 : 월 예정 / 국립중앙박물관 - 대상 : 조선시대 갑주류 7점
237 2010육군박물관 연보 육사기념관 (1) 기념관 전시환경 개선 - 순직자 명단 및 재구상 심일상 수상자 명단 부착 : 자랑스런 육사인상 및 기별 동기회 명칭 부착 : 졸업생도 사인패널 선정 : 전망대 학교 전경패널 교체 및 관람객 의자 설치 : 기념관 포토존 추가 설치 : 유물 구입 : 15건 62점 Ⅲ. 유물 및 자료 수집 순 번 유 물 명 수량 (점) 계 62 1 고총통 1 2 수선전도 1 3 김용배장군앨범 1 4 민종렬해유문서 1 5 진설 1 6 절도사정공행록 1 7 수성습조절목 1 8 서상익유서 1 9 서상익 문중교지 삼반예식 1 11 조총 1 12 뇌관식소총 1 13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복제) 1 14 수문장계회도(복제) 1 15 두정갑옷(복제) 1
238 236 학예지 제17집 2. 유물 수증 : 11건 54점 기증번호 기 증 일 기 증 품 수량 (점) 계 81 기 증 자 년 맹호장교 구락부 메달 1 박은호 독일 육군장교 정모 1 최필영 백두산천지 사진 액자 1 육사(학교장실) 당시 일기장 등 4 최원규 독일 육군장교 모자, 계급장 AK-58소총 탄피 국제평화지원단 특수임무단 정기 1 김태영 (국방장관) 손한명 (교수부) 백선재 (평화지원단장) 이봉상 원수 갑주 1 김경렬 대한민국 상밀지도, 신문예 창간호 2 유성철 윤용남 육군총장 정모, 명패 2 윤용남 (육군총장) 바이킹 장궁과 화살 3 Jurgen Junkmanns 베트남 국방차관 방한 기념패 등 3점 3 육사 비서실 수차모형, 풍속계 3 교수부 6급 김춘엽 육사 방명록( ~ ) 1 육사 비서실 육사 66기 졸업앨범 2 66기 동기회 자랑스런 육사인상 상장 등 2점 2 생도2기 동기회 국유재산 관리전환 결정서 서석봉 육사교수 앨범 1 시설대장 중령 조철규 육사 서석봉 교수 생도 교환방문 기념패(호주) 1 생도대 정작과 백석주장군 만찬복(상하) 등 13점 13 25대 학교장 백석주
239 2010육군박물관 연보 237 Ⅳ. 홍보활동 1. 소장품 대여 (1) 단기 대여 - 울산 대곡박물관 기획전(조선시대 무관 흉배 등 5점) :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권총 2점) : 제3군사령부 임진강전투 기념행사 (현대 군복류 11점) : 제7군단 지평리전투 상기행사 (현대 군복류 11점) : 제17보병사단 호국보훈의 달 (현대 군복류 11점) : 수원화성박물관 개관1주년기념전(화성부성조도 등 4점) : 경기도박물관 특별전(인도장교복장 등 5점) : 성신여대박물관 특별전(철모 등 4점) : 한양대박물관 신선 특별전 (사인검 등 3점) : 제102기갑여단 38선 돌파 재연행사 (현대 무기류 13점) : 육본 군사연구소 화령장전투 재연행사 (현대 무기류 17점) : 실학박물관 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 특별전(조천도 1점) : 육사 교수부 군사사학과 연구용 (북한군 교범류 70점) : 육본 군사연구소 육군 전시관 (PKO자료 등 16종 20점) : 보병 제5사단 역사관 전시용 (5사단 정기 1점) : (2) 장기 대여 - 강화역사관(조총 2종 2점) : 독립기념관(일본도 등 4종 4점) : 육군 기무학교(방첩부대기 1종 1점) : 육본 군연소(마제석검 등 10종 10점) :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미군우의 등 21종 21점) : 화천군 베트남파병용사 만남의 장(권총 등 61종 61점) : 전쟁기념관(광복군 모자 등 3종 4점) : 해사박물관(신제총통 3종 3점) : 육군 기록정보관리단(신태영지휘봉 등 4종 4점) :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김백선 유묵병풍 등 2종 2점) :
240 238 학예지 제17집 (3) 유물 자료 사용 승인 번호 내 용 일 자 1 (주)도서출판 청솔 이야기 조선왕조사 출판용 : 동래부순절도 사진자료 제공 평생교육방송 찬란한 유산 촬영 지원 (주)아이세움 만화교과서 한국사3 출판용 : 화차등 7점 (주)유로크레온 어린이 미래지식온북 출판용 : 동래부순절도 국방일보 취재 지원 EBS 극한 직업 촬영 지원 (주)도서출판 책과함께 엄마의 역사편지 출판용 : 부산진순절도 (주)플래닛미디어 조선 역사서 출판용 : 편전 등 5점 충주시청 전시 보조자료 제작용 유물 복제 : 환도 등 30점 MBC 고종의 꿈 13년의 대한제국 촬영 지원 SBS 그것이 알고싶다 촬영 지원 (주)도서출판 청년사 문화로 만나는 우리역사 출판용 : 궐장노 (주)도서출판 책과함께 한국과학사 출판용 : 평양성기성도 (주)계림북스 교과서 속 구석구석 우리인물 출판용 : 소총통 등 5점 (주)파라다이스티앤앨 매거진하우스 : 박물관 외관사진 (주)도서출판 책과함께 규장각에서 보물찾기 출판용 : 동래부순절도 서울디자인쎈터 서울디자인전콘텐츠 제작용 : 조선국봉수도 (주)아이세움 감동 한국사4 출판용 : 면갑, 피갑 부산교통공사 패널 제작용 : 패도, 환도 (주)휴머니스트 출판 그룹 도서 출판용 : 동래부순절도 일본 성곽연구회 왜성의 연구 출판용 : 부산진순절도 관람인원( 재개방 이후 ~ ) : 33,503명 Ⅴ. 인사이동 1. 전 출 (1) 김성혜(박물관 부관장 육군본부) : (1) 강신엽(박물관 부관장 군수사령부) :
241 학예지 제1집 ~ 제16집 게재논문 목차 239 학예지 제1집 ~ 제16집 게재논문 목차 제 1 집 ( 1989 ) 창간사 육군박물관 보물 10점 승자총통계 실태소고 - 현존유물을 중심으로 - / 이강칠 다관식 고대화기 / 김순규 육군박물관소장 주요 고화기 / 모동주 조선시대 궁시의 발달 / 박윤서 자료소개 / 권영란 육군군사박물관소장 현대총기류 목록 제 2 집 ( 1991 ) 조선전기의 화약병기 대외급비책 / 허선도 호준포의 실태소고 / 이강칠 노 / 김순규 조선전기의 병역제도 / 이현수 고려 무인정권기의 병제운용 / 김대중 소개 철제유물 과학적 보존처리 / 박윤서
242 240 학예지 제17집 제 3 집 (1993, 정하명 교수 정년기념 특집) 정하명 교수 근영 발간사 약력 저작목록 1406년 조흡의 사령장에 대하여 / 정구복 조선시대 환도의 기능과 제조에 관한 연구 / 강성문 임오군란후 친군제도와 군복에 대한 소고 / 이강칠 조선말기의 군적 - 육군박물관 소장 군적문서의 분석 - / 이현수 삼군부 설치와 변천에 대한 연구 / 이대숙 고려전기 중앙군의 군역제도 소론 / 정경현 고려말기의 백정 대전 / 이경식 조선시대의 양반 - 개념과 연구동향 - / 이태진 충무공 이순신의 하옥죄명 전몰상황 자살론 순국론에 관한 검토 / 장학근 만주국 시대 일제의 대만 조선인 농업이민정책사 연구 / 김기훈 군사작전에 있어서 지형의 영향 - 주요 전례를 중심으로 - / 이충진 한의 고조선 침공시 패수 왕검성의 위치에 관한 소고 / 김광수 한국전쟁시 일본의 군사적 역할에 관한 고찰 / 양영조 한국전쟁시 육군의 교육 및 훈련체계, ~ / 박일송 20세기초 영국 육군 개혁 - 남아프리카전쟁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 - / 원태재 루소의 평화사상 -초기저작을 중심으로- / 박영준 통합이론과 통합전략의 연구동향 / 박기수 Preliminary Report on the Archaelogical Survey in the Eastern Mongolia / 최복규 임진강 유역의 군사유적 지표조사 보고 / 이재 강성문 김기훈 <부록> : 육군박물관 소장 군적문서
243 학예지 제1집 ~ 제16집 게재논문 목차 241 제 4 집 (1995, 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운촌 이강칠 선생 고희기념 특집) 이강칠 선생 근영 발간사 이강칠 선생 연보 특별기고 육사박물관이 군사문화재의 보고가 되기까지 / 이강칠 박물관학류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의 발전방향 / 이재 공 사립 박물관의 과제와 발전방안 / 신도근 철제 판갑의 과학적 보존처리 / 이오희 복식류 고려복식양식 / 유희경 군복, 관모에 관한 연구 / 강순제 원의 군복, 융복에 관한 연구 / 김미자 답호와 전복재고 / 박성실 조선시대 군복에 관한 연구 / 이현숙 비천복식에 관한 연구 / 임영자 대한제국시대 육군장병 복장제식과 대원수 예 상복에 대하여 / 이미나 무기류 조선시대 편전에 관한 연구 / 강성문 동서양 전장의 도와 검 / 김순규 노해번역 / 김기훈 임란기 조선수군의 무기체계 / 정진술 임진왜란기 화약병기의 도입과 전술의 변화 / 박재광 한국의 쇠뇌 / 유세현
244 242 학예지 제17집 기타류 한국의 예사상과 예학의 역사적 고찰 / 남상민 광개토대왕의 내치와 외치 / 이형구 빙고제의 고찰 / 손영식 18세기 말 경상도 현풍현의 군비실태 / 이현수 민화는 가시화된 우리 문화의 원형 / 김만희 평산신씨 무변고 / 김재갑 무구에 상감된 문양에 대한 소고 / 이경자 육군군기에 관한 소고 / 이대숙 부록 육군박물관 연보 제 5 집 (1997, 육군박물관 창립 40주년 기념) 양대박의 운암전 고찰 / 강성문 동아시아 삼국의 화기제조와 교류 / 박재광 삼국시대의 성곽전투와 운제의 운용 / 김대중 육군박물관 소장 양계지도 해설 / 강석화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공포에 대한 고찰 / 이덕부 불랑기 실태 고찰 / 이강칠 조선시대 도검의 실측과 분석 / 김성혜 박선식 고대 군사유물의 과학적 보존처리 / 임선기 조선중기 이일의 관방정책 / 강신엽 궁인위궁에 대한 고찰 / 유세현 부록 1. 자료소개 훈국신조군기도설 훈국신조기계도설
245 학예지 제1집 ~ 제16집 게재논문 목차 243 부록 2. 연보 육군박물관 40주년 연보 제 6 집 (1999) 제 1 부 무구편 정익공 이완 장군 유물에 대하여 / 이강칠 도검의 기능성 연구 / 김성혜 김영섭 Weapons of the 1871 US Korean Campaign (Shinmiyangyo) / THOMAS DUVERNAY 제 2 부 군사편 조선초기 화기 방사군의 실상 / 강성문 임진왜란 해전시의 함포운용술 연구 / 최두환 임진왜란 초기 전투 연구 / 서영식 김기훈 강신엽 나종남 클라우제비츠 중심 이론의 현대적 적용 / 나종남 제 3 부 박물관 운영편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의 박물관의 역할 / 박재광 육군 부대역사관의 실태 분석 / 모동주 제 4 부 부록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행통정대부남원도호부사임공행장초 / 강신엽 군사(무구류 성곽 봉수)관련 논저 목록 / 권소영 제 5 부 육군박물관 연보
246 244 학예지 제17집 제 7 집 (2000, 국궁 문화 특집) 발간사 삼국시대 궁의 연구 / 김성태 조선시대 활의 군사적 운용 / 강성문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 심승구 조선시대 활의 제작과 궁재의 확보 / 우다가와 다케히시 저 서영식 역 국궁에 반영된 철학사상 / 강신엽 한국 고전문학에 나타난 국궁 / 정재민 우리나라의 궁장 시장에 대한 보고 / 유세현 국궁의 과학적 분석 / 최진희 부록 나의 국궁 체험기 / 담도성 글 학예지편집실 역 사료 조선왕조실록의 대사례 향사례 관련 기사 녹취 한국 역사 속의 국궁 문화 세미나 육군박물관 연보 제 8 집 (2001, 관방유적 특집) 경기 서울 인천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 / 백종오 김병희 김주홍 강원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과 과제 / 유재춘 대전 충남지역 관방 연구의 현단계 / 서정석 충청북도의 관방유적 / 현남주 경남지역 관방유적의 연구 현황과 과제 / 나동욱 경상북도의 관방유적 / 이희돈 전남의 관방유적 연구현황 / 박준범 전북지역의 관방유적 현황과 연구 현황 / 강원종 제주도 관방시설에 관한 연구와 실태 / 김명철
247 학예지 제1집 ~ 제16집 게재논문 목차 245 육군박물관 연보 제 9 집 (2002, 화약 병기 특집) 한국의 화약병기 / 이강칠 고려말 조선초 화약병기 연구의 현황과 과제 / 김대중 15 ~ 16세기 조선의 화기 발달 / 박재광 조선후기 화기 발달사 연구 현황과 이해의 방향 / 노영구 조선의 역대 화차에 관한 연구 / 강성문 대원군 집권기 무기개발과 외국기술 도입 - 훈국신조군기도설 과 훈국신조기계도설 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 / 연갑수 임진왜란기 무기류 발굴의 고고학적 성과 - 용인 임진산성 출토품을 중심으로 - / 백종오 훈국신조군기도설(번역) / 강신엽 육군박물관 연보 제 10 집 (2003, 사서화류 특집) 육군박물관 소장 동래부순절도 연구 / 권소영 육군박물관 소장 조천도 연구 / 정은주 당포전양승첩지도 에 대한 일고찰 - 노씨본과 신씨본을 중심으로 - / 이상훈 임진왜란기 조총의 전래와 제조 - 철포기 를 중심으로 - / 이왕무 해동지도 의 봉수표기형태 고찰 / 김주홍 말갈문제 를 통해 본 6세기말 요서 정세의 변화 / 이성제 The Archery Tradition of Korea / 김기훈 훈국신조기계도설(번역) / 강신엽 육군박물관 연보
248 246 학예지 제17집 제 11 집 (2004, 조선의 도검 특집) 조선시대 도검 연구의 현황과 과제 / 박재광 조선시대 도검의 유형 분석 - 칼몸의 슴베와 자루의 종합구조 - / 이석재 애자문 연구 - 조선검의 고동, 그 명칭의 오류 - / 이석재 칠성검 연구 / 김미경 조선시대 도검에 나타난 문양과 매듭장식에 관한 연구 / 이승해 조선시대 운검 별운검 보검 연구 / 강신엽 조선왕조실록 을 통해 본 환도의 의미와 기능 / 강순애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도검의 모습 / 안재한 육군박물관 연보 제 12 집 (2005, 무구류 제작법 특집) 고대 철 제련에 대한 일고 / 박현욱 여말선초의 화약 화기 제조에 대한 일고찰 / 박재광 조선초기 군기감 무기제조의 변화 추이 / 김일환 조선시대 도검 모극의 결합구조 연구 / 이석재 조선시대 각궁과 교자궁의 제작실태 / 유세현 승자총통에 대한 과학적 연구 / 이재성 조선시대 갑주의 제조 / 박가영 조선시대의 군사 교육 기관에 관한 연구 / 김기훈 숙종대 국방개혁안에 관한 일고찰 / 노영구 육군박물관 연보
249 학예지 제1집 ~ 제16집 게재논문 목차 247 제 13 집 (2006, 육군박물관 개관 50주년 특집) 고구려 중장기병에 관한 제문제 / 서영교 최충헌 정권과 중방 도방 교정도감 / 김대중 연산군대 서정논의과 대여진정책의 변화 / 김낙진 조선시대 화약무기 운용술 / 김병륜 미이라를 통해 본 조선시대 한 무관의 삶과 행적 / 심승구 문경새재 어류산성에 대하여 / 이재성 조선시대 갑주의 제조 / 박가영 왜성연구를 위한 예비적 검토 / 김기훈 김태산 김인욱 이정빈 한국전쟁 중 한국군의 재편성에 관한 연구, 1951 ~ 1953 / 나종남 육군박물관 개관 50주년 연보 제 14 집 (2007, 관방유적 축조법 특집) 한성 백제시대 산성 축조방식에 대해서 / 김호준 신라 성곽 성문의 특징과 변천과정 검토 / 김병희 고려시대 성곽의 축성법 / 고용규 조선시대 도성축조와 성랑 / 신영문 화성 건설의 물자 조달 / 이달호 한국 성곽유적의 문화자원 활용방안 연구 / 백종오 한국 내지봉수의 구조 형태 고찰 / 김주홍 경남지역 지방봉수대 고찰 / 홍성우 사법비전공하 연구 시론 / 김기훈 육군박물관 연보
250 248 학예지 제17집 제 15 집 (2008, 군사 신호체계 특집) 조선 후기 군사 깃발 / 노명구 조선 후기 군사 신호체계 연구 / 최형국 조선수군의 전술신호 체계 / 정진술 육군 군기 개관 / 안재한 성문 출토 확쇠 현황 / 김병희 백영종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 과정과 그 운용 / 김병륜 정사론 / 김세현 육군박물관 연보 제 16 집 (2009, 전통 군사복식 특집) 삼국시대 판갑의 특징과 성격 / 송정식 조선시대의 군복에 관한 연구 - 구군복을 중심으로 - / 최영로 조선시대 두정갑에 대한 군사사적 검토 / 김병륜 경기도박물관 소장 헌종가례진하계병의 군복류에 관한 연구 / 정미숙 남경미 육군박물관 소장 망수의 에 관한 소고 / 최은수 말갑옷 연구 시론 / 장경숙 특별기고 <세계의 군사박물관 탐방> 일본의 박물관 - 도쿄국립박물관, 에도도쿄박물관,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을 중심으로 - / 강신엽 영국 제국전쟁박물관 / 이내주 프랑스 군사박물관 소개 / 김진찬 부록 2010 육군박물관 연보 수증도서 학예지 제1집 ~ 제15집 게재논문 목차
251 육군박물관 학예지 제17집 편집위원장 : 이내주 편 집 위 원 : 강신엽, 안재한, 권소영 학 예 지 제 17 집 우리나라의 전통기병 2010년 12월 24일 인쇄 2010년 12월 30일 발행 발 행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사서함 77-1호 우 : ) ~4 편집 제작 : 황금알 [email protected] Tel 02) Fax 02) (비매품)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출처를 명시하면 자유로이 인용할 수 있습니다. 무단 전재하거나 복사하면 법에 저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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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KR000****4 설 * 환 KR000****4 송 * 애 김 * 수 KR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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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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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Year History of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of Korea 제4절 조선시대의 감사제도 1. 조선시대의 관제 고려의 문벌귀족사회는 무신란에 의하여 붕괴되고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족이 지배층으 로 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새로이 신흥사대부가 대두하여 마침내 조선 건국에 성공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조선양반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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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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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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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구 http://www.kbc.go.kr/ 텔레비전의 폭력행위는 어떠한 상황적 맥락에서 묘사되는가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낳는다. 본 연구는 텔레비전 만화프로그램의 내용분석을 통해 각 인 물의 반사회적 행위 및 친사회적 행위 유형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를 둘러싼 맥락요인들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는지를 조사하였다. 맥락요인은 반사회적 행위 뿐 아니라 친사회적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몸이란? 자 기 반 성 유 형 밀 당 유 형 유 레 카 유 형 동 양 철 학 유 형 그 리 스 자 연 철 학 유 형 춤이란? 물 아 일 체 유 형 무 아 지 경 유 형 댄 스 본 능 유 형 명 상 수 련 유 형 바 디 랭 귀 지 유 형 비 타 민 유 형 #1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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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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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041~084 ¹®È�Çö»óÀбâ
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2017. 6. 22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구위원송대성박사前 ) 세종연구소소장방효복예 ) 중장前 ) 국방대학교총장남성욱박사고려대행정전문대학원장이원우박사前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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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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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도서관총서 1 경기도 도서관 총서 경기도도서관총서 1 지은이 소개 심효정 도서관 특화서비스 개발과 사례 제 1 권 모든 도서관은 특별하다 제 2 권 지식의 관문, 도서관 포털 경기도 도서관 총서는 도서관 현장의 균형있는 발전과 체계적인 운 영을 지원함으로써 도서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간되 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를 통해 사회전반의 긍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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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도입에 따른 금융업종별 대응전략 2005.11 남 재 현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 목 차 1) 미국의 경우 1875년에 American Express가 퇴직연금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 : 大 和 總 硏 2) 종업원의 근무에 대해서 퇴직 시에 지불되는 급부(퇴직금) 및 퇴직 후의 일정기간에 걸쳐 지불되는 급부(퇴직 연금) 중 계산시점까지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 대상자의속성 -. 연간가수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평균 ( 만원 ) 전 국,........,. 지 역 도 시 지 역 서 울 특 별 시 개 광 역 시 도 시 읍 면 지 역,,.,.,.,.,. 가주연령 세 이 하 - 세 - 세 - 세 - 세 - 세 - 세 세 이 상,.,.,.,.,.,.,.,. 가주직업 의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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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비계획의 기본구상 5.1 유적 및 유구 정비 복원 사례연구 5.1.1 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는 삼국유사 백제 무왕조에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길에 용화산 밑의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에 의하여 이곳을 메우고 3개의 불당과 탑, 회랑 등을 세웠 다는 기록이 있으며, 미륵사의 배치는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진 의학 지식과 매칭이 되어, 인류의 의학지식의 수준을 높 여가는 것이다. 하지만 딥러닝은 블랙박스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는 단지 결과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의학지 식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는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제로 의학에서는 인공지능을 사용하게 될 때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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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구 http://www.kbc.go.kr/ 방송 콘텐츠는 TV라는 대중매체가 지닌 즉각적 파급효과에도 불구하고 다 양한 수익 창출이라는 부분에서 영화에 비해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최근 드라마 이 엄청난 경제적 파급 효과를 창출해 내 면서 방송 콘텐츠의 수익 구조에도 큰 변화가 오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드라마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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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06 Vol. 01 CONTENTS 02 Special Theme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Beautiful Huneed People 03 04 Special Destiny Interesting Story 05 06 Huneed News Hun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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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호리 48호분(계층3/ 馬 刀 모선 形 ) 2 다호리 32호분(계층4/ 刀 모선 形 ) 3 다호리 18호분(계층4/ 刀 모 形 ) 4 다호리 37호분(계층4/ 唯 刀 形 ) 5 다호리 47호분(계층5/모선 形 ) 6 다호리 67호분(계층6/ 唯 선 形 ) 그림1. 다호리 고분군의 계층성 1 다호리 25호분(계층5/ 唯 모 形 ) 2 임당 A-Ⅰ-145호분(계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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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5 291
1 2 3 4 290 5 291 1 1 336 292 340 341 293 1 342 1 294 2 3 3 343 2 295 296 297 298 05 05 10 15 10 15 20 20 25 346 347 299 1 2 1 3 348 3 2 300 301 302 05 05 10 10 15 20 25 350 355 303 304 1 3 2 4 356 357
untitled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2) 2호 주거지 주거지는 해발 58.6m의 조사지역 중앙부 북쪽에 3호 주거지와 중복되어 위치하고 있다. 주거지는 현 지표층인 흑갈색사질점토층(10YR 2/3)을 제거하자 상면에 소토와 목탄이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VOL.13 No.4 2011 08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CONTENTS XXXXXX XXXXXX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3 XXXXXXXXXXXXXXX XXXXXXXXXXXXXX 4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5 6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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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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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5 86 87 88 89 1 12 1 1 2 + + + 11=60 9 19 21 + + + 19 17 13 11=60 + 5 7 + 5 + 10 + 8 + 4+ 6 + 3=48 1 2 90 1 13 1 91 2 3 14 1 2 92 4 1 2 15 2 3 4 93 1 5 2 6 1 2 1 16 6 5 94 1 1 22 33 55 1 2 3 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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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01 16 22 28 32 36 40 44 50 54 58 02 62 68 90 94 72 98 76 80 102 84 03 04 106 142 110 114 118 122 126 130 134 148 154 160 166 170 174 138 05 178 182 186 190 194 200 204 208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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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s p x f p (x) f (x) VOL. 46 NO. 12 2013. 12 43 p j (x) r j n c f max f min v max, j j c j (x) j f (x) v j (x) f (x) v(x) f d (x) f (x) f (x) v(x) v(x) r f 44 r f X(x) Y (x) (x, y) (x, y) f (x, y) V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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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150805.hwp
15-27호 2015.08.05 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 - 국민의 절반 동참시 1조 3,100억원의 내수 진작 효과 기대 Executive Summary 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 개 요 정부는 지난 4일 국무회의에서 침체된 국민의 사기 진작과 내수 활성화를 목적으로 오는 8월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에 최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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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0 http://www.homeplus.co.kr 11 http://www.homeplus.co.kr 12 http://www.homeplus.co.kr 13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4 http://www.homeplus.co.kr Interview 15 http://www.homeplus.co.kr
*) α ρ : 0.7 0.5 0.5 0.7 0.5 0.5-1 - 1 - - 0.7 (**) 0.5 0.5-1 - (**) Max i e i Max 1 =150 kg e 1 = 50 g xxx.050 kg xxx.050 kg xxx.05 kg xxx.05 kg Max 2=300 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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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전문용어의국어화 강현화 1. 들어가기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 사용의 전형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전문 용어의 사용자가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포 될 수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시작으로 과연 전문 함 용어의 국어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전문 용어 연구의 쟁점 2.1. 전문 용어
10월추천dvd
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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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캠퍼스 문화 조성을 위하여... 고려대학교 양성평등센터 는 2001년 6월에 제정된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에 의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설치된 성희롱및성폭력상담소 를 2006년 10월 개칭한 것입니다. 양성평등 센터 로의 개칭은 교내에서 발생하는 성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상담 제공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양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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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우주 이야기 항공기에 숨어 있는 과학 및 비밀장치 항공기에는 비행 중에 발생하는 현상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과 학이 스며들어 있다. 특별히 관심을 갖고 관찰하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 없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객실 창문에 아주 작은 구멍이 있고, 주 날 개를 보면 뒷전(trailing edge) 부분이 꺾어져 있다. 또 비행기 전체 형 상을 보면 수직꼬리날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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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국사관논총103집(전체화일)
기원 전후 樂 浪 郡 의 支 配 勢 力 에 관한 일연구 吳 永 贊 * Ⅰ. 머 리 말 Ⅴ. 기원 1세기 전반 王 調 亂 과 Ⅱ. 樂 浪 古 墳 의 被 葬 者 에 대한 諸 論 議 支 配 勢 力 의 추이 Ⅲ. 기원전 1세기대 木 槨 墓 와 支 配 勢 力 1. 土 人 의 성장과 王 調 亂 Ⅳ. 기원전 1세기 중후반 墓 制 의 변천 2. 지배세력의 추이 1. 귀틀묘의
기본소득문답2
응답하라! 기본소득 응답하라! 기본소득 06 Q.01 07 Q.02 08 Q.03 09 Q.04 10 Q.05 11 Q.06 12 Q.07 13 Q.08 14 Q.09 응답하라! 기본소득 contents 16 Q.10 18 Q.11 19 Q.12 20 Q.13 22 Q.14 23 Q.15 24 Q.16 Q.01 기본소득의 개념을 쉽게 설명해주세요. 06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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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vol.126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 vol.126 www.fsb.or.kr 20163 + 4 Contents 20163 + 4 vol.126 www.fsb.or.kr 26 02 08 30 SB Theme Talk 002 004 006 SB Issue 008 012 014
토픽 31호(2016.3.7).hwp
절실히 묻고 가까이 실천하는 선진 산림과학 3.0 시대를 열겠습니다! 01 03 05 05 06 07 08 08 10 10 11 임업인에게는 희망을, 국민에게는 행복을 带 NIFoS 1 중국 닝샤회족자치구() 중국 무슬림 인구 주요 분포도 중국 닝샤의 회족 자치구 3 중국 무슬림 인구 Top 11 지역 순위 지역( 省 ) 인구(만)
단양군지
제 3 편 정치 행정 제1장 정치 이보환 집필 제1절 단양군의회 제1절 우리는 지방자치의 시대에 살며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주민의 복지증진을 꾀 하고 있다. 자치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5년에 불과하고, 중앙집권적 관행이 커 서 아직 자치의 전통을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으며, 앞으로의 과제 가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지역 지방자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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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40242-000001-08 2013-927 2013 182 2013 182 Contents 02 16 08 10 12 18 53 25 32 63 Summer 2 0 1 3 68 40 51 57 65 72 81 90 97 103 109 94 116 123 130 140 144 148 118 154 158 163 1 2 3 4 5 8 SUMMER
지발홍보책_도비라목차_0125
남북교류 접경벨트 서 해 안 동 해 안 내륙벨트 신 산 업 벨 트 에 너 지 관 광 벨 트 남해안 선벨트 Contents Part I. 14 Part II. 36 44 50 56 62 68 86 96 104 110 116 122 128 134 144 152 162 168 178 184 190 196 204 Part I. 218 226 234 240 254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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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북한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통일교육원에서발간한교재입니다. 각급교육기관등에서널리활용하여주시기바랍니다. 차례 Ⅰ. 북한이해의관점 Ⅱ. 북한의정치 차례 Ⅲ. 북한의대외관계 Ⅳ. 북한의경제 Ⅴ. 북한의군사 Ⅵ. 북한의교육 차례 Ⅶ. 북한의문화 예술 Ⅷ. 북한의사회 Ⅸ. 북한주민의생활 차례 Ⅹ. 북한의변화전망 제 1 절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Ⅰ. 북한이해의관점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 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
A Time Series and Spatial Analysis of Factors Affecting Housing Prices in Seoul Ha Yeon Hong*Joo Hyung Lee** 요약 주제어 ABSTRACT:This study recognizes that the factors which influence the apartment price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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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는 선 5 월 월말 성취도 평가 국어 2쪽 사회 5쪽 과학 7쪽 자르는 선 학년 5 13 4 47 1 5 2 3 7 2 810 8 1113 11 9 12 10 3 13 14 141 1720 17 15 18 19 1 4 20 5 1 2 7 3 8 4 5 9 10 5 월말 성취도평가 11 다음 보기 에서 1 다음 안에 들어갈 알맞은 말을 찾아 쓰시오. 각 나라마다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A000-008목차
1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및 대도시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 고교를 설립하여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겠습니다.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등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고교를 설립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기숙사비는 학생의 가정형편을 반영한 맞춤형 장학금으로 지원하여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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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등록건수 120000 100000 80000 60000 40000 20000 0 63 66 69 72 75 78 81 84 87 90 93 96 99 180000 160000 140000 120000 100000 80000 60000 40000 20000 0 특허출원건수 내 국 인 에 의 한 특 허 등 록 건 수 내 국 인 에 의 한 특 허 출 원 4000
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email protected]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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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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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2. 3. 4. 제2장 아동복지법의 이해 12 4).,,.,.,.. 1. 법과 아동복지.,.. (Calvert, 1978 1) ( 公 式 的 ).., 4),. 13 (, 1988 314, ). (, 1998 24, ).. (child welfare through the law) (Carrier & Kendal, 1992). 2. 사회복지법의 체계와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Story Story 2012. 9. 13. Story 16호 STORY Korean Wave Story 2012 STORY STORY 12 호 2012 한류동향보고 Korean Wave Story 2012 Korean Wave Story 2012 (2012년 1/4분기) 12 호 12 호 2012. 4. 9. 2 3 4 5 轩 辕 剑 之 天 之 痕 我 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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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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像 氣 名 刹 希 望 曰 術 技 藝 道 技 年 月 日 0 5, 1 2 3 4 5 45,000 40,000 39,534 35,000 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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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리-내지(6장~8장)최종 2007.8.3 5:43 PM 페이지 168 in I 덕수리 민속지 I 만 아니라 마당에서도 직접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장팡뒤의 구조는 본래적인 형태라 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가 점차 개방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인 안뒤공간에 위치하던 장항 의 위치가 개방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이동해가는 것이 아닌가 추론되어진다.
**09콘텐츠산업백서_1 2
2009 2 0 0 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M I N I S T R Y O F C U L T U R E, S P O R T S A N D T O U R I S M 2009 발간사 현재 우리 콘텐츠산업은 첨단 매체의 등장과 신기술의 개발, 미디어 환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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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목표 Finance Lectue Note Seies 파생금융상품의 이해 화폐의 시간가치(time value of money): 화폐의 시간가치에 대해 알아본다 제강 화폐의 시간가치 연금의 시간가치(time value of annuity): 일정기간 매년 동일금액을 지급하는 연금의 시간가치에 대해 알아본다 조 승 모 3 영구연금의 시간가치(time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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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 송재룡 / 편집장 : 박혜영 / 편집부장 : 송영은 경희대학교 대학원보사 1986년 2월 3일 창간 02447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전화(02)961-0139 팩스(02)966-0902 2016. 09. 01(목요일) vol. 216 www.khugnews.co.kr The Graduate School News 인터뷰 안창모 경기대학교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www.koroad.or.kr E-book 10 2016. Vol. 434 62 C o n t e n t s 50 58 46 24 04 20 46 06 08, 3 3 10 12,! 16 18 24, 28, 30 34 234 38? 40 2017 LPG 44 Car? 50 KoROAD(1) 2016 54 KoROAD(2), 58, 60, 62 KoROAD 68
감사회보 5월
contents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동정 및 안내 상장회사감사회 제173차 조찬강연 개최 상장회사감사회 제174차 조찬강연 개최 및 참가 안내 100년 기업을 위한 기업조직의 역 량과 경영리더의 역할의 중요성 등 장수기업의 변화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윤정구 이화여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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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업중분류, 조직형태 및 동별 사업체수, 종사자수 단위 : 개, 명 금정구 서1동 서2동 서3동 Geumjeong-gu Seo 1(il)-dong Seo 2(i)-dong Seo 3(sam)-dong TT전 산 업 17 763 74 873 537 1 493 859 2 482 495 1 506 15 519 35 740 520 978 815 1 666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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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102 103 104 105 혁신 17과 1/17 특히 05. 1부터 수준 높은 자료의 제공과 공유를 위해 국내 학회지 원문 데이 >> 교육정보마당 데이터베이스 구축 현황( 05. 8. 1 현재) 구 분 서지정보 원문내용 기사색인 내 용 단행본, 연속 간행물 종 수 50만종 교육정책연구보고서, 실 국발행자료 5,000여종 교육 과정 자료 3,000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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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quality news for professionals www.withbuyer.com 2 Highquality news for professionals Highquality news for professionals 3 4 Highquality news for professionals Highquality news for professional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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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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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ssue 04 / 46 VOL. 46 NO. 4 2013. 4 47 Special Issue 04 / 48 VOL. 46 NO. 4 2013. 4 49 S pecial Issue 04 / IHP 7단계 연구사업 구분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연최대 강우량 침수면적 인명피해 재산피해 그림 4. 시군구별 연 최대 강우량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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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44 45 2012 46 47 2012 48 49 추억의 사진 글 사진 최맹식 고고연구실장 죽음을 감지하고 미리 알아서 죽은 미륵사지 느티나무 이야기 느티나무가 있던 자리 미륵사지는 가장 오랫동안 발굴 작업이 이뤄진 곳 미륵사지는 발굴 종료 당시,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오랫 동 안 발굴했던 유적이다. 1980년 7월 7일 발굴을 시작해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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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nce Lecture Note Series 사회과학과 수학 제2강. 미분 조 승 모2 영남대학교 경제금융학부 학습목표. 미분의 개념: 미분과 도함수의 개념에 대해 알아본다. : 실제로 미분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본다. : 극값의 개념을 알아보고 미분을 통해 어떻게 구하는지 알아본다. 4. 미분과 극한: 미분을 이용하여 극한값을 구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사용설명서 의료용 진동기 사용설명서는 언제나 볼 수 있는 장소에 보관하세요. 사용전 안전을 위한 주의사항 을 반드시 읽고 사용하세요. 사용설명서에 제품보증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제품은 가정용 의료용 진동기이므로 상업용 또는 산업용 등으로는 사용을 금합니다. BM-1000HB www.lge.co.kr V V V V 3 4 V V C 5 6 주의 설 치
(연합뉴스) 마이더스
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2012. 04 Vol. 98 Cover Story April 2012 _ Vol. 98 The monthly economic magazine www.yonhapmidas.co.kr Contents... 14 16 20 24 28 32 Hot News 36 Cover Story 46 50 54 56 60
더바이어102호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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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학발달06-7/8/9장
3 1 7 17 95101G 421d 221 2 3 4 1971 34 12 1804 1866 1972 31866 4 1 5 33 1866 3 6 31866 3 1803 1877 1804 1866 2 02333 318 4 51 633 3 6 2022 222 31866 1955 1931 3 916 7 1925 1925 10 9 1862 65 8 7 2 1931
1. 2. 3. 4. 5.
1. 2. 3. 4. 5. 1 10 11 12 13 14 부여는 그 도장에 예왕지인( 濊 王 之 印 : 예왕의 인장)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 濊 城 )이라 고 한다. 본래 예맥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1 15 16 17 18 19 20 1 2 21 2 22 1 2 23 24 1 2 25 26
Art & Technology #5: 3D 프린팅 - Art World | 현대자동차
Art & Technology #5: 3D 프린팅 새로운 기술, 새로운 가능성 미래를 바꿔놓을 기술 이 무엇인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답은 한 마치 한 쌍(pair)과도 같은 3D 스캐닝-프린팅 산업이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이유입니 가지는 아닐 것이나 그 대표적인 기술로 3D 스캐닝 과 3D 프린팅 을 들 수 있을 것입니 다. 카메라의
와플-4년-2호-본문-15.ps
1 2 1+2 + = = 1 1 1 +2 =(1+2)+& + *=+ = + 8 2 + = = =1 6 6 6 6 6 2 2 1 1 1 + =(1+)+& + *=+ =+1 = 2 6 1 21 1 + = + = = 1 1 1 + 1-1 1 1 + 6 6 0 1 + 1 + = = + 7 7 2 1 2 1 + =(+ )+& + *= + = 2-1 2 +2 9 9 2
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03-교통이야기
Traffic talk03 01 Traffic story 02 101 02 103 03 105 107 109 04 111 113 115 05 117 119 121 묵묵히 100년을 달려온 철길 위의 기관차 증기기관차 _1899년 서울~인천 간을 최초로 달린 미국 브룩스사의 모걸형 탱크기관차를 시작으로 양적인 증가를 계속하여 1945. 8. 15 해방 당시 166량,
(012~031)223교과(교)2-1
0 184 9. 03 185 1 2 oneclick.law.go.kr 186 9. (172~191)223교과(교)2-9 2017.1.17 5:59 PM 페이지187 mac02 T tip_ 헌법 재판소의 기능 위헌 법률 심판: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면 그 효력을 잃게 하거 나 적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탄핵 심판: 고위 공무원이나 특수한 직위에 있는 공무원이 맡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5월전체 2005.6.9 5: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개 지역지식재산센터 를 통해 발명가와 중소기업들에게 기술개발에서 선진국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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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전 : 25 (14%) 기계화 : 24 (14%) 전차 : 15 (9%) 총170여개 사/여단 미사일/포병 : 30여개 (17%) 보병 : 80 (45%) (단위 : 명) 해병대 : 76 해군 : 396 공군 : 8,459 육군 : 28,100 경상운영비
(지도6)_(5단원 156~185)
1 _ 2_ 3_ 4_ 01 158 159 참고 자료 160 161 162 163 02 164 165 참고 자료 166 167 168 169 활 동 지 03 170 171 172 173 활동의 결과이다. 신경 세포와 신경 세포 간에 화학 물질을 방출하여 전기 신호를 전달해 주는 시냅스 활동은 우리 뇌가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변한다. 기분 나쁜 경험을 하면
미술00부속(001~007)2ee
8. 124 9. 148 124 1 1 2 3 4 1 2 3 4 125 1 1 2 3 2 3 126 같은쓰임,다른모양 현대의 안경은 멋쟁이들의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발랄하고 활동적인 성격을 돋보이게 하는 색상과 형태의 안경으로 시력 교정의 기능과 패션 소품의 기능을 함께 가진다. 조선 시대의 안경은 일부 양반 계층과 지식인들 의 전유물이었다. 쇠뿔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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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7 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78 2. 1 2 3 4 5 6 7 8 9 10 11 12 79 80 II 81 82 II 83 84 II 85 86 II 87 s t r e t c h i n g 88 II 89 90 II 91 d a n c e s p o r t s 92 II 93 ;4#; 94 I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