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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Ⅳ. 三國文化의 發展 1. 古代의 文化意識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教受容 3. 科學 4. 音樂 舞踊 5. 文學 6. 建築과 美術 7. 三國文化가 日本에 끼친 影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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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1. 古代의 文化意識 (1) 古代國家體制 整備와 文化複合 韓國 고대사회의 공동체적 전통은 강잉하여 新羅下代까지 계속 되었다.1) 그것은 그 사회가 대개 族的 編制로 이루어졌기 때문이 다. 최초의 政治세력이 성립 되어가는 과정에서, 역시 氏族이 중 요한 단위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이들은 몇개의 聚落集團으로 이루어 져서, 그것이 통합되면서2) 현재의 郡 단위 정도의 국가를 성립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國家를 성립 시키는데 절대적 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북쪽으로부터의 우수한 靑銅器 기술을 가 진 部族의 등장이었다. 이 때의 靑銅器는 주로 武器나 祭器였고, 그리하여 靑銅器를 가진 部族과 가지지 못한 部族 사이에 지배와 복속의 과정이 나타나게 되고, 部族 내부에서도 변화가 나타나 氏 族員 사이에 支配와 被支配의 관계가 확립되었다.3) 鐵製 武器의 등장은 보다 큰 聯盟國家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 1) 崔致遠이 帝王年代曆 을 지어 新羅 고유의 王名을 중국식으로 고쳤다고 했음은 그 이전까지 新羅사회에 族的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었음을 알려 준다. 이보다 시대는 이르지만 三國 통일과정에서 丕寧子와 그 아들 舉眞과 家奴인 合節이 百濟와의 싸움에서 함께 戰死하고 있음도 같이 파악될 수 있다. 2) 尹容鎭 大邱의 初期國家 形成過程 考古學的 資料를 中心으로 東洋文化 硏 (1974) 韓國史論文選集, 古代篇 (1976) p.40 大邱의 경우 그 土着사 究 회는 石棺墓를 조성할 段陪에 이르러 4개의 政治的 세력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石槨墓 造成期에는 3개의 세력 집단으로 줄고, 다시 石室墓 造成期에 이르면 다시 하나의 세력 집단으로 統合된 地方國家의 형태를 갖춘다. 3) 李基白 部族國家時代 法俗에 나타난 社會와 思想, 韓國民族思想史大系 2 古代 篇(1973) p.93 Ⅰ Ⅱ

4 Ⅳ. 三國文化의 發展 고, 鐵製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新 石器時代 末期에 이르면 이미 農耕이 시작되었고, 인간은 채집이 나 수렵을 하지 않게 되므로써, 남아도는 인력을 바구니를 짜거나 쟁기 바퀴의 제작이나 冶金 등에 사용했다. 그러나 靑銅器時代에 이르기까지 農耕이 행해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石器가 農耕에 쓰이고 있었다. 1927년 平北 渭原郡 龍淵洞 積石塚에서, 다수의 明刀錢과 함께 鐵製武器 數種과 鐵製의 괭이 낫 따비 등이 출 토 되었다.4) 鐵製 농기구의 출현은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큰 원인이었다. 농업경제의 발전에 의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이 聯盟 國家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南韓 地域에서는 初期鐵器時代에 이미 稻作이 행해지고 있었다. 摘徳用 半月形石刀의 출토는, 樂浪 이전에 華北 龍山文化의 稻作 이 陸路를 통해 전래되었을 가능성을5) 짐작하게 한다. 이와 별도 로 有溝石斧는 B.C. 3세기 이전에 華南 지방의 稻作이 海路를 통 해 들어와, 南韓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었음6)을 알려 준다. 魏志 東夷傳에 의하면 弁辰에는 五糓 외에 稻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 나라 남쪽의 州郡에 비 로소 稻田을 행한다 고 했고, 古爾王 9년(242)에는 國人으로 하여금 南澤에서 稻田을 행하게 한다 고 했다. 金海 貝塚에서 炭 거니와, 百濟에서는 多婁王 6년(33)에 化米粒塊와 함께 鐵斧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三國時代 초기까지 麥類가 主作物이었을 것이다.7) 三國史記에 傷麥 嘉禾 麥連岐 觀麥 등이 누누이 보이고 있음은 이를 알려 준다. 초기에 전래된 稻裁는 원시적 방법으로 경작되었을 것이며, 역 Ⅲ 4) 李春寧 韓國 農業技術史, 韓國文化史大系 (1970) P.26 5) 金元龍 韓國 栽稻起源에 대한 一考察, 震檀學報 合輯(1972) P.308 6) 上同 7) 李春寧 前揭論文 P

5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사시대에 들어 오면서 규모있는 水田으로 개량되었다.8) 이에 따 라 灌漑나 治水工事가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사실이 古代國家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을 것이다. 水利시설은 部族단위로만 이루 어지기 힘든 공사이며, 많은 人力을 동원할 수 있는 專制王權의 성립과 無關하지 않다. 水利시설로 벼농사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 왔고, 이것은 古代國家를 유지시키는 수많은 군대나 왕권에 복속 된 貴族群을 부양시킬 수 있게 했다. 新羅의 경우 水利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시기는 5세기 이후지만9), 逸聖尼師今 11년(144) 에 堤防을 수리한 기록이 있고 보면, 三國時代 초기에 水利에 의 한 벼농사가 행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訖解尼師今 21년 (330)년의 碧骨池 기사는 부정될10) 것이 아니라, 百濟의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11) 오히려 稻作의 기록을 많이 남기고 있으 며, 新羅 보다 古代國家體制를 더 일찍 성립시켰던 百濟는, 보다 일찍 벼농사를 위한 水利시설을 갖추었을 것이다. 高句麗의 경우 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聯盟國家는 部族國家 내지 城邑國家12)의 族的 기반을 그대로 흡수하였다. 魏志 東夷傳에 나타난 高句麗 聯盟國家의 官制는, 이 전 城邑國家의 長이 王의 臣下인 相加로 등장되었음을 알려 준 다. 王이나 相加는 모두 使者 皀衣 先人을 거느렸다는 점에서 8) 金元龍 前揭論文 P.308 9) 李基白 永川 靑堤碑 貞元 修治期의 考察, 考古美術 102(1969), 新羅 政治社會史 硏究(1974) P ) 今西龍 全羅北道 西部地方 政行雜記, 百濟史研究(1934) PP 및 李光 麟 李朝 水利史 硏究(1961) P.3 11) 李春寧 上記論文 P.33 12) 城邑國家는 部族國家와 크게 구별되는 意味로 쓰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部族 國家라 했을 때 보다 더 地緣性이 강한 意味로 城邑國家가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城邑國家라 했을 경우에도 部族國家의 血緣的인 意味를 否定하지는 않기 때문 에 城邑國家는 部族國家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졌다. 따라서 다음부터는 城邑國家로 統一하겠다

6 Ⅳ. 三國文化의 發展 같은 城邑國家의 기반을 가졌다.13) 그러므로 魏志 東夷傳에 보이 는 諸加 는 相加로 보아야 될 것이고, 聯盟 내에 포함되는 城 邑國家의 長은 아마 相加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三國史記에 太祖王은 桓那部의 沛者 薛儒를 보내어 朱那部를 정벌하고, 그 나라 王子 乙音을 사로잡아 古雛加로 삼았다(三國史記 高句麗 太祖王 22年條) 고 하였다. 곧 정벌된 朱那部가 解體당함이 없이 그대로 高句麗 聯盟에 편입 되고 있음을 알려 준다. 聯盟國家의 이와 같은 社會 編制 방법은 古代國家體制의 정비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高句麗 五部는 각기 宗廟 靈星 社稷을 가졌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新羅 六部는 모두 天降說話를 가졌을 뿐 아니라 각기 伊飡을 가졌다.(三國史記 娑婆尼師今 23 年條) 곧 高句麗 五部나 新羅 六部는 모두 城邑 國家로서의 전통 을 가졌다. 高句麗 太祖王 百濟 古爾王 新羅 奈勿尼師今은 실질적인 그 국가의 시조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 王代에 古代國家로의 개편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百濟는 古爾王 27년 (260)에 六佐平과 16官等 및 百官의 服色을 정하였다. 이때의 官 制가 너무 세련되어 후대에 침삭된 점은 있겠으나 古爾王과 無關 하지는 않을 것이다. 新羅는 儒理尼師今 9년(32)에 6部의 개정과 17官等이 설치되지만,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오히려 奈 13) 相加와 王의 기반을 비교할때, 王은 相家에 비해 對盧 沛者 主簿 優台를 더 가지고 있다. 그런데 主簿는 宮庭의 일을 맡은 특수 관직일 것으로 판단된다. 優台는 乙支와 같은 意味로 族長을 가리킨다. 또 魏志 東夷傳에는 對盧를 두었을 경우 沛者를 두지 않으며, 沛者를 두었을 경우 對盧를 두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 게 되면 王이 相加와 특별히 다른 성격의 官職을 가진 것은 沛者와 對盧 중의 하나이다

7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勿尼師今代에 官制整備가 있었을 것이다. 奈勿尼師今이 사신 衛 頭를 前秦에 파견하자 符堅이 그를 접견하여 다음과 같이 문답하 였다. 卿이 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것 이 무슨 뜻이냐 하고 물었다. (衛頭가) 마치 中國의 시대 변 혁이나 名號의 改易과 같은 것이니, 어찌 옛날과 같겠읍니까 라 고 답했다. (通典 邊防門 東夷新羅條 三國史記 奈勿尼師今 26 符堅은 年條) 奈勿尼師今代에 있었던 시대 변혁은 이때에 제도의 정비가 있 었음을 알려 준다. 太祖王代에는 특별히 제도정비를 알려 줄 만한 기사는 없지만 前代 왕들과 크게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우선 그 는 慕本王이 살해된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前代의 왕 이 解 氏였음에 비해, 太祖王代부터 高 氏로 된다. 이것은 高句麗 지배세력의 교체를 뜻하며, 아울러 이에 상응한 체제정비 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 무방하겠다. 이들 王代의 제도정비는 古代國家로의 개편을 의미 한다. 그것 은 聯盟國家 내에 편입된 城邑國家의 기반을 해체하면서, 확대된 聯盟國家를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聯盟國家의 長이 일정한 部族에서 나오지 못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일정한 部 族이 영도권을 가지면서 王位世襲權을 확립시킨다. 그런 과정에 서 이전 城邑國家의 長은 왕밑의 貴族으로 등장된다. 魏志 東夷傳 에서는 일찍 강력한 王權을 성립시킨 扶餘나 高句麗의 경우, 族 長인 諸加는 邑落을 떠나 王 밑의 貴族으로 등장되고 있다. 강력 한 王權이 성립되지 못한 三韓 地方의 渠首는 邑落에서 族員들과 雜居하고 있다. 곧 聯盟長의 權力이 강화될수록 城邑國家의 長은 그들의 族的 기반에서 떠나, 聯盟國家의 王權에 복속되어 貴族化

8 Ⅳ. 三國文化의 發展 된다. 古代國家로의 개편 이후에도 聯盟조직은 그대로 존속되었 다. 그러나 그것은 독립된 그러면서도 단순한 연합에 불과했던 이 전의 성격과는 달리, 聯盟國家의 영역과 그 안의 住民을 통합하기 위한 수단에서 유지되었다.14) 百濟나 新羅의 경우 古爾王이나 奈勿尼師今 이후 정복 기사가 줄어 들고 있으며, 高句麗의 경우 太祖王代는 상당한 정복 기사 가 보이지만, 그 이후는 초기에 비해 월등하게 감소된다. 이것은 三國이 이들 王代에 聯盟國家로의 팽창이 일단락되고, 이후는 그 것을 유지하려는 제도 개편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그러므로 이들 王代 이전의 정복 기사와 이후의 그것은 그 성격을 달리 보아야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들 王代 이전의 정복 기사는 城邑國家가 聯盟體制에 편입됨15)을 반영한 것이지만, 이 들 王代 이후의 그것은 임시 약탈적인 전쟁이 아니라, 部族聯盟 내지 古代國家가 상호 토지와 인민을 획득하고자하는16) 정복전 쟁이었다. 新羅는 炤知麻立干代에 六部의 개편을 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 다.17) 이러한 개편은 城邑國家로서의 기반을 갖추고 있던 六部 가 古代國家로의 체제정비 과정에서 城邑國家的인 기반이 해체 당함을 의미한다. 古代國家로의 개편이 시작된 이후라 할 수 있 14) 千寬宇編 韓國上古史의 爭點 一潮閣(1975) P ) 예를 들면 高句麗의 경우 松讓國 荇人國 梁貊國 海頭國 蓋馬國 句茶 國 등의 여러 城邑國家가 5대 慕本王代에까지 復屬되어지는 반면, 7대 次大王 이후부터는 城邑國家의 복속은 나타나지 않으나 征服戰爭이 행해지고 있다. 16) 千寬宇編 前揭書 P ) 三國史記에는 六部에 대한 개편이 儒禮尼師今 9년에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믿을 수 없다. 炤知麻立干 10년(488) 6월에 六眼龜를 헌납하였는데, 이 六眼龜의 출현은 곧 新羅 古代專制國家 體制 정비에 따라 六部 의 개편이 이루어진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또 이러한 추측을 더욱 믿을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炤知麻立干 이후 新羅 王權의 專制化가 시도 되기 때문이다

9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는 智證麻立干 때에 오면, 국호인 新羅 는 德業이 날로 새로 와져서 四方을 網羅한다 는 의미로 표방된다. 德業이 날로 새로 와 졌음은 新羅 社會가 前代와 달라진 것을 특별히 나타내고자 함 이었고, 곧 그것은 四方을 網羅할 수 있는 古代國家의 성립을 뜻 한다. 이 경우 이전의 城邑國家의 長들은 그들의 地盤을 거의 상 실당하고 中央 貴族化되지만, 그들의 族長的 전통은 그대로 유지 되었고 여전히 그 사회는 族的 編制로 이루어졌다. 優勢部族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選民思想을 체계화시킨 文化意 識이 說話형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檀君神話는 城邑國家가 형성 되었던 시기의 世界觀을 反映시키고 있다. 그것을 구성시키는 주 된 두 요소는 토템신앙과 優勢部族 중심의 選民思想이다.18) 토 템신앙은 대개 新石器時代의 氏族 共同體 生活에서 나온 思惟方式 이다. 토템을 조상으로 숭배하는 경우 토템과 氏族員은 같은 피를 가진 血族意識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토템신앙이 존재할 경우 그 에 따른 血族集團이 있게 된다.19) 檀君神話가 형성될 시기에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이 있었을 것이고, 이들은 토템祭儀를 통 해 공동체 의식을 강화해 갔을 것이다. 桓雄族은 우수한 靑銅器 文化를 가진 流移民 집단으로 파악된다. 그들이 靑銅製武器를 들고 土着族을 정복 동화시키면서, 그들의 세계관을 성립시킨 것이 選民思想이다. 그것은 靑銅器를 가진 征服族이, 이를 갖지 못한 種族을 지배하던 때의 우월감이 반영된 것이다. 桓雄族은 여러 土着세력 중 곰 토템족과 결합하면서 등장하였다. 이것은 桓 18) 千宽宇編 前揭書 P.71 19) 토템신앙이 조상숭배와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릴 경우 토템신앙으로 血緣集團을 상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오스르렐리아대륙의 토템신앙의 경우 氏 族 조직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토템신앙을 가진 민족이 있다. 그러나 檀君神話의 곰 호랑이, 新羅의 닭 말 등은 個人信仰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른 血族集團이 存在한 것으로 생각된다

10 Ⅳ. 三國文化의 發展 雄族의 등장으로 곰 토템족은 被支配者의 위치로 떨어졌다기 보 다 桓雄族 보다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支配者의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결론적으로 檀君神話는 新石器社會에 靑銅器文化가 流 入되면서 일어나는 文化複合 과정을 반영한다. 靑銅器時代에 鐵器文化가 들어오면서 選民思想은 英雄傳說이나 神聖族說話로 나타났다. 鐵器時代의 가장 전형적인 英雄傳說은 朱 蒙神話이다. 古代人의 생활방식 내지 세계관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은 신화라 할 수 있기 때문에, 朱蒙神話를 전대 사회의 신화와 비교해 봄으로써 당시의 문화의식을 추출할 수 있을 줄로 안다. 朱蒙神話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天帝子인 解慕漱와 河伯女인 柳花 사이에서 朱蒙이 탄생된 다. ② 解慕漱가 하늘로 올라간 후 柳花는 金蛙王과 婚姻하였다. ③ 金蛙王子에게 쫓기는 朱蒙에게 柳花는 神의 使者인 비둘기 로 하여금 보리종자를 전하였다. 우선 朱蒙神話를 檀君神話와 비교해볼 때 상당한 類似性이 있 다. 桓雄과 解慕漱 및 熊女와 柳花는 같은 성격으로 파악되고 있 다.20) 그렇게 된 이유는 두 신화가 모두 우수한 기술문화를 가 진 部族이, 土着社會에 流移하여 들어오면서 생기는 문화복합 과 정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신화는 그것을 형성시 킨 사회 상황의 차이로 말미암아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 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朱蒙神話에는 전대의 신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農業神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朱蒙에게 보리 종자 20) 李丙燾 韓國史 古代篇(1959) P.218에 雄 과 漱 는 다 같이 男性을 뜻하 고 桓은 明, 解慕는 日의 뜻이라 했다. 그러므로 桓雄과 解慕漱는 같은 성격으로 파악된다. 熊은 虎와 같은 동굴에 거주하였다가 桓雄과 結婚하고, 柳花는 解慕漱 와 相關하였다가 金蛙와 婚姻한다. 그러므로 熊女와 柳花는 같은 성격으로 파악 된다

11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를 건네 준 柳花는 地母神이다.21) 柳花는 일단 解慕漱와 相關하 였다가 다시 金蛙와 婚姻하였다. 초기 농경사회는 주로 女性을 중 심으로 정착생활에 들어가게 되지만 아직도 父權的 목축사회는 정착 생활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성의 對偶婚은 초기 농 경사회를 반영한 것이다. 熊女의 경우도 이와 같은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朱蒙神話 에 토템적 요소가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金蛙 등이 토템적 표현 이기는 하나 檀君神話의 그것과 큰 차이를 이룬다. 적어도 朱蒙神 話에서 新石器時代의 思惟方式은 청산되고 있는 셈이다. 朱蒙神話는 초기 鐵器時代에 鐵器를 가진 部族이 등장하여, 土 着社會를 동화 흡수 정복하여 가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鐵 製 무기나 농기구를 가진 朱蒙族은 扶餘族의 일파로 생각되며, 이들은 토착사회의 가장 유력한 세력집단인 柳花族과 결합하여 지배자 집단으로 군림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두 部族의 의 식구조나 세계관이 얽히면서 朱蒙神話로 나타났다. 우세 部族인 朱蒙族은 天神族으로 관념하게 됨에 대해, 柳花族은 地神族으로 서 河川과 연결되었다. 일반적으로 天神族은 정복족인 流移民集 團이지만 地神族은 土着族이다. 天神族이 하늘과 연결되어 天降 과 같은 垂直的인 사고형태를 가졌음에 비해 地神族은 땅과 연 결을 가지고 水平的인 사고형태를 가졌다. 예를 들면 天神族 系 統의 桓雄은 下降하지만, 地神族 系統의 許王后는 멀리 印度의 阿踰陁國에서 배를 타고 加耶地方으로 들어오는 水平的인 이동 된 반면, 地神族說話에서는 강늪습지우물동굴 등이 숭 을 하였다. 天神族說話에서는 산이나 나무 숲 등 高地가 숭배 배되었다. 21)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 柳洪烈博士華甲記念論叢(1971) 韓國 古代社會硏究 (1975) P

12 Ⅳ. 三國文化의 發展 鐵製 武器의 등장은 靑銅製의 그것과는 달라서 단순한 위엄의 표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복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朱蒙 의 英雄的 성격은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檀君이 祭政一致的 인 君長이었다면, 朱蒙은 武士集團을 이끄는 政治的 君長으로서 의 성격이 더 강하였다. 그런데 柳花族은 朱蒙神話를 통하여 地 神族으로서의 觀念體系를 갖추었다. 이 점은 檀君神話 속의 熊女 와 성격을 달리한다. 祭政이 분리되면서 朱蒙族이 政治的 支配者 로 등장하면서 성립시킨 의식구조가 天神族 觀念으로 체계화 되 었다면 柳花族은 祭祀 담당자로서 地神族 觀念을 가졌을 것이다. 朴赫居世神話 중의 閼英도 柳花와 같은 農業神으로 파악될 수 있 고,22) 閼英族도 柳花族과 비슷한 관념체계를 형성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祭政이 분리되면서 祭祀를 담당하는 蘇塗信仰이 馬韓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魏志 東夷傳 韓傳條에 國邑이 各各 一人을 세워 天神을 祭祀지내게 하는데 이를 天君 이라 한다. 또 諸國에는 각각 別邑이 있어 이를 蘇塗라 부르는 데, 大木을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鬼神을 섬긴다. 모든 逃亡 者가 그 안에 이르면 이를 잡아 내지 못한다. 고 했다. 이 기록과 거의 일치되는 農耕文靑銅器가 1970년 國立博 物館에 입수 되었다.23) 이 靑銅器의 後面은 農耕儀禮에 관한 文樣 이지만, 前面은 나무가지에 새가 앉은 蘇塗文樣이다. 이것은 蘇塗 信仰이 靑銅器文化의 소산이지만,24) 農耕社會에서 행해졌음을 시 사한다. 그러나 따비의 경작이 보임은 상당히 발전된 農耕이 행해 22) 上同 P.41 23) 韓炳三 先史時代 農耕文 靑銅器에 대하여, 考古美術 112 (1971) P 12 24) 韓柄三 上同 P

13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蘇塗信仰이 존재한 시기는 初期 鐵器時代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靑銅器보다 우수한 鐵製 무기나 농기구를 가지고 등장한 우세 부족의 支配秩序에 대한 반항이, 蘇塗信仰으로 나타났을 것 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鐵器를 가진 部族이 天神族의 觀念으로 정치적 支配者로 등장 되었다면, 土着部族은 이전 靑銅器文化의 전통을 고수하므로써 祭 祀長層으로 등장하였을 것이다. 다만 이들이 柳花나 閼英처럼 地 神族으로서의 관념체계를 성립시키지 못하였음은, 이들 土着部族 文化의 특수성에서 찾아 져야 될 것이다. 漢郡縣에 의한 심한 식 민지적 수탈을 당해 왔던 馬韓 지역에, 강력한 土着勢力이 형성될 수 없었고, 북쪽에서 우수한 鐵器文化를 가지고 등장한 部族이 일 방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자연 土着部 族이 성립시킨 蘇塗信仰은 이러한 일방적인 정치적 지배권에 대 한 반항적 성격을 띄게 되고, 그리하여 정치적 權力 행사를 제동 시키는 역할을 했다.25) 이 점은 朱蒙神話나 朴赫居世神話에서 가 장 유력한 土着部族이 스스로의 의식 구조나 세계관을 갖추고 우 세 部族인 流移民部族의 그것과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神話體系 를 형성시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高句麗나 新羅 社會에서는 土着部族이 상당한 세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 중심 의 사고체계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英雄傳說이 支配部族 중심으로 세련되면서 神聖族說話를 탄생 시켰다. 그것은 聯盟國家의 형성에 필요하였던 英雄傳說이 古代國 家體制로 개편되어 나갈 때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聯盟長 部族이 25) 金哲埈 三國時代의 禮俗과 儒敎思想, 大東文化硏究 6 7合輯( ) P.115 韓國古代社會硏究 (1975) P

14 Ⅳ. 三國文化의 發展 성립시킨 세계관이다. 聯盟國家의 유지에 필요한 설화는 加耶 계 통의 전설에 나타나고 있다. 崔致遠이 撰한 釋利貞傳에 의하면 天神인 夷毗詞之와 加耶山神인 正見母主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어, 한 아들인 惱室朱日은 大加耶王이 되고, 또 한 아들인 惱室 靑裔는 金官加耶王이 되었다.26) 이 전설은 天神族과 山神으로 표 현된 地神族과의 결합을 통해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시킨 神話체 계를 가진 上 下 兩加耶가, 동등한 입장으로 다시 결합됨을 나 타내 준다. 그것은 高句麗나 百濟 계통의 신화와는 달리, 한 부족 이 중심이 된 聯盟國家의 결합을 위한 신화는 아니다. 이같은 현 상은 낙동강 중류의 大加耶(上加耶)와 하류의 金官加耶(下加耶) 가 六加耶 중 가장 강성하여 저마다 영도권을 주장하게금 된 데 서 비롯된다.27) 神聖族說話는 오히려 聯盟國家 내의 한 部族이 영도권을 쥐면 서, 다른 部族의 신화나 전설을 통합하든가 아니 면 보다 우월한 것으로 발전시킨 세계관이다. 新羅의 開國神話는 단순하지가 않 아 朴 昔 金 三部族이 각각 시조전설을 가지고 후대에까지 전 승시켰다. 新羅 六村은 각기 天降說話를 가졌다. 이것은 六村이 본래 각각 開國神話를 가진 城邑國家였음을28) 추측케 한다. 朴赫 居世神話는 高句麗 朱蒙계통의 英雄神話와 같은 구조를 가진다. 朴部族은 天神族으로 流移民 集團이며, 地神族인 閼英部族(金氏 部族)은 土着部族이다. 이 두 部族의 의식구조나 세계관이 체계 화되어 朴赫居世神話로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신화 내에 六村傳 說이 편입되고 있음은 중요하게 생각된다. 이것은 聯盟長 部族이 중심이 되어 다른 部族의 신화나 전설을 통합하고 있음을 반영한 26) 東國輿地勝覽 卷 29 高靈縣 建置沿革條 27) 金哲埈 韓國古代國家發達史, 春秋文庫 1(1975) P ) 上同 pp

15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다. 昔氏部族은 冶匠說話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昔氏部族이 보다 우세한 鐵器 기술문명을 가졌음을 나타낸 것이고, 그들은 朴氏部 族을 대신하여 支配者로 등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29) 다만 新羅 國家 초기에는 金氏部族 보다 朴氏나 昔氏部族이 더 유력했기 때 문에 朴氏나 昔氏가 王이 되었으나, 奈勿尼師今 이후 金氏王權의 세습이 이루어졌다. 金氏部族이 중심이 되어 古代國家體制를 확립시켜 가려고 할 때, 자연 다른 部族보다 우월한 관념체계를 모색하게 된다. 여기 에 神聖族說話가 등장하게 된다. 地神族으로서의 관념체제를 성립 시킨 金氏部族이, 뒤에 다시 天神族 계통의 閼智說話를 성립시키 고 있음은 이와 연관시켜 생각하게금 한다. 古代國家로의 개편 이 후 우세 부족 중심의 종적인 支配體制를 확립시키고자 할 때, 新 羅에서와 같은 骨品制度를 만들게 되고, 神聖族說話는 骨品制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神聖族說話는 크게 두 가지 특징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그들의 설화를 기록할 때, 中國文化의 영향을 많이 받은 어휘가 사용되어 졌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娥利英井 곁에 鷄龍이 나타나 그의 왼쪽 옆구리에서 閼英이 태 어 났다. 고 했다. 그러나 같은 三國遺事에서 上記 기사의 원모습을 찾아 적어 보면, 閼英井 곁에 龍이 나타나 죽으므로, 그 배를 갈라 閼英이 태어 나게 된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閼英井이 娥利英井으로 바뀜은 閼英과 堯임금의 二女인 娥英과 女英을 연결시키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29) 脫解가 朴氏인 瓠公宅을 빼앗음은 昔氏가 朴氏를 대신해서 支配者보 등장 했음을 시사한다

16 Ⅳ. 三國文化의 發展 中國 帝室의 공주가 신선이 되어 東方으로 와서 東國의 시조인 赫 居世를 낳았다는 仙桃聖母信仰도 같은 성격으로 이해된다. 다만 仙桃聖母는 閼英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30) 龍이 죽고 그 배를 갈라 閼英이 태어남은 고대인의 再生觀念을 표현한 것이다. 이를테면 뱀이 껍질을 가는 것을 再生觀念과 연결 시킨 셈이다. 그러나 뒤에는 閼英이 龍의 옆구리로 태어나고 있 다. 이것은 佛敎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것이다. 왜냐하면 釋迦나 彌勒이 옆구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閼英說話는 中 國文化나 佛敎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변모 는 閼英部族이 다른 部族에 비해 우월하다는 관념을 만들기 위해 서였다. 高句麗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解慕漱가 天王郞으로 표현 되었다. 다만 이것은 神話가 文字로 정착되면서, 이러한 用語의 漢字를 빌려 권위를 붙인데 불과한 것이고, 神話體系 다시 말하면 그들의 의식구조나 세계관이 급격하게 변한 것은 아니다. 또 하나는 新羅 왕실의 眞種說話를 들 수 있다.31) 三國遺事 卷 三 皇龍寺九層塔條에 慈藏法師가 西學하였다. 그는 五臺山에 이르러 文殊의 感應를 받고 法戒를 받았다. 文殊가 이르기를 너희나라 國王은 인도의 刹利種王으로 이미 佛記를 받아 특별한 因緣이 있기 때문에 東 夷의 오랑캐족과는 같지 않다. 고 하였다. 新羅王의 이름을 佛敎에서 따 왔으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印度의 釋迦族이 윤회에 의해 新羅 王族으로 태어났다는 30) 高句鹿의 경우 母神인 柳花와 朱夢이 받들어진다. 新羅에서도 神聖族 思想이 가미됨에 따라 閼英이 母神으로 등장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仙桃聖母는 地母神的 성격을 갖추고 있는 점으로 보아, 金氏部族과 연관된 神으 로 파악해도 좋을 것이다 ) 金哲埈 新羅 上代의 Dual Organizaiton, 歷史學報 2 (1952) PP

17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것이다. 그리하여 23대 法興王으로 부터 28대 眞德王에 이르는 王들의 이름을 모두 佛敎에서 따 왔다. 그 중 眞平王의 이름은 釋 迦의 父名인 白淨이요, 眞平王의 부인의 이름은 釋迦의 母名인 摩 耶夫人이다. 또 眞平王弟인 眞正葛文王과 眞安葛文王의 이름은 釋 迦의 三寸名인 伯飯과 國飯이다. 특히 善德女王의 利天을 主宰者인 善德 은 㣼 帝釋 의 상징이다. 三國遺事 卷一 善德王 知 幾三事에 의하면 善德王은 자신이 죽어 㣼利天 중에 장사지내질 것이라 예언 하였는데, 과연 善德王이 죽고 10년 후에 그 무덤 밑 에 四天王寺를 건립하게 됨으로 그 예언이 들어 맞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四天 바로 위에 㣼利天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善 德王名은 專制王權의 상징인 㣼利天에 대한 신앙에 의해 나타났 다. 결국 이와 같은 眞種說話는 金氏王室이 자기 部族을 다른 部 族보다 우월하게 만들려는 관념체계였다. (2) 三國文化의 特性 三國文化가 統一新羅 이후 민족문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 서, 그 각 문화의 개성이나 차이성이 밝혀지기에 앞서, 그것의 同 質性이 추구되어야 한다. 鐵器文化의 유입과정에서 衛滿朝鮮사회 가 漢族에게 굴복당했지만, 결국 漢四郡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三國文化가 성립하게 되었다. 三國文化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여기에 있다. 당시 주위의 여러 민족이 漢族에게 포섭 동화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隋 唐과의 거듭되는 전쟁을 통해 自戚 하게 된 高句麗와 百濟 영토의 대부분을 新羅가 아우르게 되었음 은 주목되어야 한다. 이 이후 성립된 민족문화가 국제관계에서 그대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족문화

18 Ⅳ. 三國文化의 發展 를 전승시키는 힘은 마땅히 三國文化 속에서 찾아져야 될 것이다. 萬里長城으로 中國文化와 塞外民族文化가 구분되게 되고, 塞外 民族은 中國의 三國時代나 五胡十六國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활 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동북아시아에서 中國과는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中國文化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漢族에 대항하고 있었 다. 三國人들은 中國民族과는 다른 塞外民族과 동질적인 역사 경 험을 가졌을 것이다. 특히 高句麗는 中國民族과 빈번히 투쟁해 왔 고, 塞外民族과는 대개 동맹관계에 있었다. 처음 靑銅器文化의 유 입과정에서 고대 韓國 사회는 北中國系나 스키토 시베리안系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후기의 細形銅劍은 中國의 白銅文化와 塞外 民族文化가 혼합되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樂浪 이후에는 순 漢 式의 鐵器文化가 들어오고 있었다. 三國文化는 塞外民族文化와 동 질적이면서도 이와 같이 中國文化에 대해 외면하지 않은 데서 독 자성을 찾아도 좋을 것이다. 三國社會는 분열된 것 같지만 사실상 연결되어 있었다. 三國은 대개 종래 城邑國家의 長을 중앙의 貴族으로 編制하였기 때문에 그 社會는 族長이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상당한 양과 수준에 이르지만 그 무덤의 크기는 公州 宋 山里의 다른 古墳과 비슷하다. 武寧王陵이 많은 부장품을 간직하 면서도 다른 古墳과 비교하여 크기와 규모가 같다는 것은, 그것이 百濟 王族의 家族墓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廣開 土王陵은 종래의 族長墓인 北方式 支石墓의 계승발전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三國社會는 親族共同體를 기반으로 이루어 졌고, 이를 통한 聯盟이 가능한 사회였다. 三國의 開國神話에 말(馬)이 많이 등장한다, 朱蒙이 말을 기르 고 골랐으며, 馬鞭이 등장하고, 朴赫居世神話에도 말이 등장한다

19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그 외에 馬形帶鉤나 馬具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慶州 155號 古墳에서는 天馬圖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三國文化를 형성시킴 에 騎馬民文化가 크게 작용되었음을 알려 준다. AD 5세기 경이 되면 日本에서도 갑자기 馬具 武器가 늘어난다. 이러한 변화는 韓半島에서 대거 移住한 騎馬民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32) 그들이 土着民을 평정해서 야마또(大和)朝廷을 세웠다.33) 騎馬 民文化가 日本으로 건너가기 전 韓半島나 滿洲에 시베리아系의 鐵器文化를 급속도로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騎馬民들 은 문화의 전파나 이동을 빠르게 하여 여러 요소의 문화를 합류 시킴으로써, 문화가 국제성을 띄게 했다. 騎馬民文化로써 성립하 게 된 三國文化는 塞外民族文化와 연결되어 국제성을 띄게 되었 고, 三國의 각각에 국한된 폐쇄적인 문화가 아니라 서로 연결이 가능한 것이었다. 원래 三國史는 韓國史의 발전과정에서 통합의 한 단계이었고 분립과정은 아니었다.34) 三國은 각기 다른 민족으로 구분해야 될 만큼 혈연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서로 달랐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言語에 있어 方言的인 차이35) 정도를 가졌고, 특히 政治 的인 소속이 달라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했지만 三國史記나 기타 그 시대를 서술한 문헌에, 그들의 생활습속이 다르거나 통역을 통해서만이 대화가 가능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구절은 없다.36) 오히려 百濟人 都彌는 蓋婁王의 박해를 받고 高句麗에 들어가 32) 千宽宇篇 上揭書 P ) 江上波夫 騎馬民族國家 中公新書 147(1967) P ) 洪以燮 百濟史의 性格과 그 文化的 特質, 韓國思想 9 韓國思想叢書 古代人의 文化와 思想 (1973) P ) 가령 地名에서 高句麗의 경우는 끝에 怱 이 붙고, 新羅의 경우는 伐 이, 百供의 경우 夫里 가 붙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三國文化의 연결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36) 千寬宇編 前揭書 P Ⅰ

20 Ⅳ. 三國文化의 發展 살았으며, 三國이 서로 첩자를 보내어 그들이 상대국에서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기사나, 百濟人 阿非知가 新羅에 들어가 佛敎美術에 큰 공적을 남긴 것 등은 三國이 하나의 생활무대로 연 결됨을 뜻한다. 뒷날 王建이 高句麗의 再建이라는 뜻으로 高 麗 를 칭하게 되는데, 이는 王建이나 당시의 사람들이 高句麗가 자기들의 조상의 나라라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37) 三國 사이의 전쟁은 통합을 지향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38) 三國史記에는 三國이 건국 초기부터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고 기 록 되어있다. 그러나 高句麗와 百濟의 전쟁은 樂浪 帶方이 공략 당하는 A.D.3세기 초부터 가능했을 것이다. 百濟와 新羅의 전쟁은 A.D.4세기 후반,39) 新羅와 高句麗의 戰爭은 A.D.5세기 초부터 행 해졌다. 이미 百濟와 高句麗의 전쟁은 같은 조상의 후예로서의 패 권 다툼임이 지적되었으며,40) 사실 이 당시 東北亞의 패권은 高 句麗 百濟의 決戰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百濟는 高句麗와 투쟁하면서도 温祚의 아버지인 朱蒙을 받들어, 歷代王은 대부분 東明廟를 알현하였다. 또 百濟는 高句麗와 같이 扶餘族의 일파임 扶餘 로써 王室의 姓氏를 삼기도 하였다. 三國统 一의 기운이 커져가는 시기의 관념이긴 하지만, 新羅에서는 三 韓을 一家 로 한다는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安弘이 撰한 東 을 강조하여 41) 37) 上同 P.33 38) 洪以燮 前揭論文 P ) 洪以燮은 A.D. 4세기 후반인 阿莘王代 이후부터 百濟와 新羅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나 三國史記에는 百濟 多婁王(新羅 昔脫解尼師今) 이후부 터 두 나라 사이에 전쟁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이전 城邑國家나 聯盟國 상태로 편입된 城邑國家를, 兩國이 서로 攻奪한 사실을 뒷날 兩國의 전쟁기사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0) 洪以燮 前揭論文 P ) 三韓을 一家 로 한다는 기록은 金庾信傳 등에 보인다. 文武王이 죽어 護國龍이 되어 三韓을 鎭護한다는 것도 같은 觀念이다. 이와 관련하여 崔致遠이 馬韓을 高句麗, 卞韓을 百濟, 辰韓을 新羅로 본 것은, 三韓 및 후의 三國이

21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都成立記에 新羅 善德女王이 이웃나라들을 복속시키려는 목적으 로 皇龍寺의 九層塔을 세웠다. 그런데 그 9개의 隣國名을 기록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日本 中華 吳越 托羅 鷹遊 靺鞨 丹 國 女狄 穢貊이다. 여기에 高句麗와 百濟가 빠져있다.42) 善德 女王 때에 新羅國家가 가장 빈번하게 전쟁을 치루었던 대상국은 高句麗와 百濟였음에도 그들이 빠졌다는 것은, 新羅가 麗 濟 兩 國을 단순한 복속의 상태로 머물러 두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이를 테면 新羅는 兩國을 통합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던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三國 중 가장 일찍 古代國家 體制를 이룬 국가는 高句麗라 할 수 있다. A.D.2세기 초에는 이미 古代國家體制를 갖추어 가고 있 었다. 초기 高句麗는 漢族과의 투쟁과정 속에 성립 되었다. 그러 므로 高句麗는 中國과 韓半島의 교통로를 장악하면서 등장하였 다.43) 魏志 東夷傳에는 高句麗 사람들의 성격이 성격은 强勇하고 急하고 凶하며 도적질하기를 좋아 한다 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高句麗와 같은 계통인 扶餘人의 謹厚하며 도적이 없다 고 기록되었다. 이것은 中國人들이 그들과 동맹관계에 있었던 扶餘人 보다 그들과 투쟁하고 있었던 高句麗人에 대해 잘 기록할 리가 없 기 때문에서다. 高句麗는 일찍부터 部族 단위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다. 高句麗의 경우 生業 자체가 전쟁일 수 있다. 征服地의 토 민족문화의 母體임을 시사한다. 42) 穢貊이 高句麗와 百濟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드라도 高句麗와 百濟를 갈라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또 穢貊 내에 新羅까지 包含 시킬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43) 高句麗가 通溝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中國과 韓半島의 東海岸과의 교통로를 장악하였고, 西安平을 점령하면서 中國과 韓半島의 西海岸과의 교통로를 장악 하였다

22 Ⅳ. 三國文化의 發展 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44) 초기 고구려의 군사력은 三國文化를 형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 을 담당해 왔을 것이다. 高句麗는 中國 민족의 침입에 대한 방파 제 역할을 했고, 그러므로써 남쪽의 百濟와 新羅가 温存하게 성립 되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대륙 북방의 선진문화에 일찍 접할 기 회를 가졌던 高句麗는 대륙을 통해 받아들인 문화를 百濟와 新羅 에 전수하여 다시 日本에 까지 移植시켰다.45) 高句麗는 강건한 北方的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中國文化와 부단한 접촉을 해왔던 것이다.46) 中國民族과 北方民族 사이에 경제적 문화적 중계역할 을 하므로써 中國文化와 北方文化를 조화하는 면에서, 高句麗文化 의 독자성이 형성되어 졌다. 高句麗의 住民은 대개 土着 濊貊族과 流移한 扶餘族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扶餘族은 물론 濊貊族도 일찍부터 北方文化와 中國 文化의 양쪽과 접촉한 경험을 가졌다. 이를 테면 流移民이나 土着 民이 서로 큰 문화 경험의 차이를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두 세력 의 결합은 애초부터 비교적 용이했고, 별로 큰 사회의 변화를 가 져오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곧 城邑國家 때의 族長 세력 이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高句麗 官 職體系 속에 兄 이 붙은 官職이 중심을 이루는데, 이 兄 官職은 族長과 연결된다. 또 大對盧는 왕에 의해 임명되지 않고 3 년마다 교대로 部族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그리하여 淵蓋蘇文은 44) 百濟 新羅와는 달리 高句鹿 初期에 담당하였다. 後漢書 東夷傳 東沃沮條에 使者 가 있었는데. 정복지의 수탈을 其土迫小 介於大國之間 遂臣屬句驪句 驪復置其中大人 遂爲使者 以相兼領責租稅라 하였다. 高句麗는 정복지의 族長에 게 使者 라는 官職을 주고는 이들로 하여금 조세를 거뒤 들이게 하였다. 45) 供以燮 高句麗人의 文化와 思想, 韓國思想 7 韓國思想叢書 古代人의 文化 와 思想(1973) PP ) 上同, P Ⅰ

23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그 아버지의 벼슬인 大對盧를 계승하기 위해, 東部人들에게 다시 자기를 선출해 줄 것을 빌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高句 麗 사회가 族的 編制로써 이루어졌고, 종래의 族長이 그 지배세력 으로 등장해 갔음을 알려 준다. 小獸林王 때에 다시 律令이 반포되고 太學이 섰으며, 佛敎가 공 인 되는 등 체제의 개편이 행해진다. 이 때의 체제개편은 太祖王 때의 그것과 달라서 정복국가를 이룩한 古代國家體制의 완성을 의미하게 된다. 高句麗는 산간을 이용한 소규모의 유격전쟁에서는 실패한 적이 적으나, 진을 설치한 대규모의 장기전에서는 대개 패 하였다. 故國原王이 慕容氏에게 패했고, 결국 百濟와의 전쟁에서 는 戰死하게까지 된 사실은, 이를 말해 준다. 이것은 高句麗의 군 사력이 약해서였다기 보다는, 部族別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었 다. 故國原王이 죽은 다음 小獸林王 때는 이러한 高句麗 전기 사 회에 대한 반성이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반성이 곧 小獸林王 대 의 체제 개편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넓게는 종래의 族的 조직을 해체시키면서 中央의 專制王權을 강화시키는 개혁이겠지만, 그것 의 주된 목적은 部族別로 흩어진 군사력을 중앙의 조직 속에서 파 악하는 것이다. 小獸林王 대의 개혁은 高句麗 국가의 확대를 위한 조직 정비이 었기 때문에, 廣開土大王의 정복사업을 수행할 수 있게끔 한 밑 바탕이 되었다. 이후 高句麗는 中國의 南北朝 세력을 견제하고 조절하는 면에서 발전을 계속하였다. 長壽王이 南齊에 朝貢하고 곧 이어 魏에 朝貢한다거나, 安蔵王에 대해 梁이나 魏에서 서로 封職을 내림은, 高句麗가 中國의 南 北朝에 대해 각각 외교 관 계를 수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오히려 高句麗는 두 세 력을 조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長壽

24 Ⅳ. 三國文化의 發展 王 15년(472) 百濟의 蓋鹵王이 北魏에 보낸 國書에는 高句麗는 義롭지 못하며 造作함이 하나 뿐만이 아닙니다. 겉으로 는 中國의 藩邊임을 외치지만 안으로는 흉측하여 저돌적인 행동 을 합니다. 그리하여 高句麗는 南宋과 통하고 혹은 북쪽으로 몽 고인과 맹약을 맺어 서로 脣齒의 관계를 만들고는 王을 도모하 고자 합니다 三國史記 卷25, 蓋鹵王 18年條 고 하였다. 이 기록은 高句麗가 北方民族은 물론 中國의 南北朝에 대해 모두 외교 관계를 가졌음을 알려 준다. 그런데 北魏는 이 國 書에 대한 답장에서 은근히 百濟를 꾸짖으면서 高句麗가 上記와 같은 사실이 없음을 말하였다. 이것은 北魏가 高句麗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서 취해진 행동이었음을 周知하게 한다. 中國의 南北朝가 통일된 이후에 唐高祖가 侍臣에게 高句麗는 隋에게 臣下로 稱했지만 결국 煬帝에게 항거했으니 이 를 어찌 臣이라 할 수 있겠는가? 朕은 萬物로 부터 敬拜받지만 驕貴하려고는 않는다. 다만 世上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平安하게 끔 하는데만 힘쓰고자 하니 어찌 臣下로 칭하게끔 명령할 필요 가 있겠는가? 이제부터 스스로 尊大하고자 한다. 고 하였다.47) 결국 唐은 高句麗에 대해서는 다른 변방민족과는 달리, 동등한 외교 관계를 표명한 셈이다. 당시 唐이 高句麗에 대 해 事大를 강요하지 않으므로써, 다른 변방 민족에게 미칠 영향 이 클 것임48)에도 불구하고, 唐 高祖는 高句麗를 동등한 입장으 로 대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高句麗文化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47) 舊唐書 東夷傳 高麗條 48) 舊唐書 東夷條에 裴矩 溫彥博進曰 若以高麗抗禮 西夷心當輕漢 하였다 이라

25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高句麗의 건축 내지 미술문화는 雄渾함을 보여 준다. 대표적 으로 將軍塚이 그러하다, 廣開土王陵碑 는 높이가 22尺인 큰 자 연석에 1800餘字의 小篆體와 비슷한 漢字가 새겨져 있다. 그 글자 모양은 小篆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 될 수도 있지 만 오히려 高句麗의 독자적인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北方民 族 내지 中國民族을 조절하면서 滿洲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경 험이 이와 같은 高句麗의 미술 문화를 갖게하였을 것이다. 그러 나 高句麗文化 는 기본적으로 산간에 흩어진 部族 단위로 영위 되었다. 古代國家 체제로 개편되면서, 이들 山間文化 는 수도에 집중되게 되었다. 高句麗文化 가 일찍 百濟文化 에 영향을 주고, 다시 新羅文化로 꽃을 피우게 되면서도 그 자체의 유산은 많이 남기고 있지 못하다. 그 주된 이유가 수도에 집중된 문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異民族의 침입이나 혹은 高句麗國家 가 멸망당 한 후, 首都文化 는 대개 모조리 파괴되어 버리는 것이 常例이 다. 오히려 高句麗文化 는 百濟나 新羅文化 속에 융해되어 버린 데서 그 맥락을 찾아내야 될 것이다. 百濟는 高句麗보다 1세기 정도 뒤져서 古代國家 體制로 바뀌 어 가고 있었다. 百濟文化는 高句麗文化와 新羅文化를 이어 주는 교량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것의 정확한 복원 없이 三國文化 의 복원은 어렵다. 그런데 사실상 百濟文化는 강성했던 高句麗文 化나 三國統一을 행한 新羅文化와 대조해서, 역사에서 逸失되기 쉬웠다.49) 統一新羅가 민족문화를 정리할 때 百濟와 高句麗文化 에 대한 취사선택이 행해졌을 것이다. 民族의 再統一 이후 高麗 는 이념적으로 新羅를 계승하고 영토상으로는 高句麗를 계승했 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 정리되는 민족문화 속에서 49) 洪以燮 前揭論文 P

26 Ⅳ. 三國文化의 發展 도 역시 百濟文化는 취사선택되었다. 이와 같이 두번의 인멸과정 을 거친 百濟文化는 그 본 모습으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日本 측의 百濟 관계 기록도 대부분 日本 古代史의 날조를 위해 왜곡된 것이었고, 여기에 기초한 日本人 학자의 연구 또한 日帝시대 그들 의 경제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이었다.50) 이러한 사정은 百 濟文化의 복원이 상당히 어려운 사실임을 알 수있게 한다. 百濟는 高句麗나 新羅에 비해 地方에 세력 근거를 가진 族的 전통이 약한 사회를 형성했다. 百濟의 지배층은 中國에서 渡海한 세력도 있지만, 주로 扶餘族이었으며 滿洲 지역에서 南下하였다. 이들은 塞外民의 北方文化와 中國文化에 모두 접촉할 기회를 가 졌었다. 그러나 被支配層은 土着 韓族이며 이들은 오랫 동안 漢 郡縣의 식민수탈에 시달리었다. 魏志 韓傳의 廉斯鑡說話는 이 지 역이 漢郡縣의 경제적 수탈지로 되었음을 알려 준다. 三韓의 下 戸라 하여라도 郡縣에 朝貢하고는 衣册과 印綏를 받은 자가 千餘 人이나 되었다. 이것은 漢郡縣의 식민지 分離統治 정책이 성공적 으로 행해진 百濟지역에서, 강력한 族長勢力이 형성되지 못했음 을 시사한다. 百濟末期에 八姓의 貴族이 등장하고 있으나 이들은 族的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라 王權에 기생한 중앙 貴族으로서의 배경을 가졌음을 유의할 것이다. 百濟文化는 기층사회에 뿌리박 고 있는 주체세력의 성립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형성되었다. 그 리하여 그것은 일찍부터 漢文化의 영향을 받아 그 세련미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전통적 문화기반이 약했고, 그 뒤에 와서 그로 인 한 南朝文化에의 의존도가 높아져서, 개성이 약한 문화가 성립되 었다.51) 韓國古代社 50)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 武寧王陵發掘 調査報告書(1973) 會研究(1975) P

27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土着民의 문화수준이 낮아, 예를 들면 牛馬는 탈 줄 모르고 食 用으로만 사용되었다. 土着民에 비해 流移民이 훨씬 우월한 기술 문화를 가진 百濟에서는 보다 일찍 專制王權이 성립될 수 있었 다.52) 한편 百濟國家가 隣近 土着社會의 城邑國家를 征服한다든 지 聯盟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53) 百濟는 일찍부 터 古代征服國家 체제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百濟의 遼西점령은 宋의 요청에 의한 것이겠지만 東北亞에 있어서 패권을 겨루던 高句麗의 遼東점령에 대한 견제책으로 취해 진 것이다.54) 近肖 古王 24년 (369)에 百濟는 倭王에게 七支刀를 下賜하므로써, 騎 馬民族이 日本 지역에 진출하여 수립한 식민국가들을 확실히 통 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漢江 유역이라는 지리적인 이 점을 이용하여 極東의 古代 상업세력을 형성 하였다.55) 百濟는 外的인 古代 상업세력의 발전에 충실한 나머지, 자체 내의 주체 세력을 중심으로 사회를 編制하는 문화 활동에 弱하였다. 더우기 後期에 와서는 八大姓 세력의 대립으로, 그 文化의 발전을 비정 상적으로 만들었다. 百濟의 官制 정비과정은 古爾王 때 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聯盟 國家를 유지시키는 면에서 古代國家의 성립을 위한 개혁이다. 오 히려 古代國家 體制를 完備한 제도 개편은 枕流王을 전후한 시기 에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佛敎 公認이 이 王代에 이루어 졌고, 佛敎 公認은 古代國家의 체제 정비와 無關한 것이 51) 上同 P.50 52) 全體的으로 볼 때 百濟社會에서는 王族勢力이 강하였다. 宋書 百濟傳에 의하 면 蓋鹵王 4년 (458) 宋에 論功行賞을 청한 11名의 姓氏를 보면, 王族인 餘氏가 8名이고 他姓이 3名이다. 53) 金哲埈 上揭論文 P.48 東方史論叢(1974) 54) 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對하여, 白山學報 3 (1967) P ) 金哲埈 上揭論文 P

28 Ⅳ. 三國文化의 發展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枕流王을 전후한 시기의 百濟國家의 제도 개편은 고구려의 그것과는 달라,56) 近肖古王 때의 넓혀진 領土를 유지하는 면에서의 개혁이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대외적 팽창의 길이 막히고 난 뒤에 이루어 지는 제도의 정비나 문화의 세련은 귀족들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 미한다.57) 그러므로 이때의 百濟의 제도개혁은 정치 사회의 모순 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현상유지를 위 한 것이었다. 百濟의 漢江유역 占有는 후에 王建의 그것과는 달리, 靺鞨族의 침입을 방어해야 되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靺鞨族은 陸路가 아닌 강줄기를 타고 침입하여 왔기 때문에, 百濟는 漢江 전역을 방어하 여야 했고, 이로 인한 필요 이상의 국방비를 부담했다. 이 점은 沃 沮지방을 확보하고 對 漢族과의 투쟁에서 후방 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던 高句麗와 대조된다. 漢江유역을 占有하여 韓半島의 東西를 가로 지른 百濟國家는 上記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高句 麗와 新羅 세력의 협격을 받고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다. 이 이후 의 百濟文化는 이전의 그것과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지만,58) 百濟 의 後期文化도 前期文化의 성격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임은 틀림 없다. 百濟 초기의 積石塚이나 三田渡 부근의 高句麗 양식의 古墳이 公州 宋山里 古墳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扶餘 陵山里 古墳으로 발 전하면서, 구조면에서 위축되나 세련미를 보여주는 古墳 벽화가 56) 高句麗 경우 小獸林王代에 제도정비가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廣開土大王 의 征服事業이 이루어 진다. 그러나 百濟의 경우 近肖古王代의 征服事業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것을 유지하는 면에서 枕流王代의 제도 정비가 따른다. 57) 金哲埈 上揭論文 P.63 58) 洪以燮 百濟史의 性格과 그 文化的 特質 P

29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등장된다. 公州 大通寺 石蓮池의 소박성에 나타나는 웅건한 기질 이 扶餘의 石蓮池에 가서는 없어지고, 극도의 세련미만 남게 되었 다. 이것이 脆弱性을 내포한 百濟文化의 발전 방향이었다. 百濟文 化는 南朝文化의 수입으로, 소박한 族長的인 성격이었다기 보다는 세련된 貴族的인 것이어서 三國文化의 전체적인 성장에서 볼 때, 불가결한 문화 분야를 개척한 것이다.59) 新羅는 百濟보다 약 1세기 정도 뒤져서 古代國家 체제로 바뀌 어가고 있었다. 결국 三國 중 가장 後進인 셈이다. 그런 新羅가 三 國을 統一하고, 高句麗 百濟文化를 계승하여 三國文化의 꽃을 피 우게 된다. 慶州 지방에서는 平壤 다음가는 鐵製 유물이 나오고 있다. 鐵製武器를 받아들임으로써 古代征服國家 체제로 바뀌어 가 는데 뒤늦었던 新羅가 후에 鐵製 유물을 많이 남기게 된 것은, 일 단 새로운 鐵器文化를 접촉하고 난 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진 취적이었음을 알려 준다. 그런데 新羅가 새로운 鐵器문화를 받아 들임에 늦었다는 것은, 초기 鐵器문화의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서 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전통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 기 鐵器時代의 중요 중심지에 大邱 慶州 지역이60) 포함되고 있 으며, 특히 新羅 三姓 중 昔氏는 冶匠說話를 가진 이른 바 鐵器文 化의 배경을 가졌다. 新羅는 土着族의 세력이 강한 사회를 이루었다. 新羅國家의 서 쪽과 북쪽이 각각 험준한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대륙 으로부터 파문져 오는 민족이동의 물결이 대개 이 산맥에서 그쳐 59) 金哲埈 上揭論文 P.64 60) 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一考察, 東亞文化 7 (1967)에서 韓國의 初期 鐵器時代에는 3개의 中心地가 있다. 그 하나가 大邱 慶州 地區요, 둘째가 靈岩 光州地區, 그리고 세째가 洛東江地區이다. 이들 3개의 중심지는 소위 三 韓의 각각의 중심지이거나 代表的 地域이다 라고 했다

30 Ⅳ. 三國文化의 發展 버린다. 이 산맥을 넘어서까지 이동해 들어오는 流移民은 소수여 서 그 세력이 크지 못했다. 이들은 장기간에 걸쳐 대륙으로부터 민족이동의 파동이 있을 때 마다 조금씩 조금씩 들어 온 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上着세력에게 흡수 융화되었던 것이다. 新羅 三 姓 중 가장 일찍 이동하여 와서 土着化된 金氏세력이 가장 강성하 여, 결국 王位의 세습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테면 新羅 사회에 서는 先住한 土着勢力이, 소수의 流移民을 그때 그때 흡수하여,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다. 土着세력은 지방에 근거를 가진 族長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 다. 高句麗 百濟와는 달리 新羅에서는 族長 세력이 강했다.61) 上 代의 新羅 사회는 貴族聯合的인 성격으로 생각되어 지는데, 이것 은 族長的 세력의 성장을 토대로 한 것이다.62) 新羅사회는 이러 한 族長의 編制로 이루어 졌으며, 族的 기반과 族的 전통의 강잉 성은 新羅 下代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新羅의 문화에 강한 영향을 준 것은 이러한 族長중심의 이데올로기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 므로 그 문화는 族的 전통이 강한 성격을 가졌다. 그 극단적인 예 로 천년 國都가 변하지 않은 사실을 들 수 있다. 통일 후 新羅의 판도가 꽤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國都는 여전히 동남쪽에 치 우친 慶州에 있었다. 新羅文化의 강한 族的 전통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 들이는데 심 한 마찰을 일으키고 보수적 경향을 띄울 수 있다. 新羅의 古代國 家로의 체제정비는 法興王代에 행해진다. 그것은 眞興王代의 정복 국가 체제를 위한 조직의 통합이었으며, 門戶 별로 흩어져 있던 61) 金哲埈 新羅 貴族努力의 基盤 人文科學 7 (1962) 韓國古代社會研究(1975) PP ) 李基白 新羅 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 社食科學 2(1958) 新羅政治社會史硏 究(1974) P

31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군사력을 중앙의 조직 속에 집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新羅의 체제 정비는 高句麗의 그것과 비슷해서, 貴 族文化의 유지를 위한 개혁이 아니라 정복국가 체제로의 확대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新羅는 高句麗보다 더 族的 전통이 강한 사 회였기 때문에 高句麗와는 달리 그 개편의 과정이 완만하였다. 法興王代에 제도 정비에 따른 律令이 만들어 지면서도, 각 門戶 별로 흩어진 靑少年 집단을 중앙의 군사력 속에 통합시키는 花郞 徒의63) 개창은 眞興王代에 나타났다. 처음 源花로의 개편이 실 패하는 과정은 新羅의 國家제도 개편이 순조롭지 못함을 알려 준다. 新羅는 자기 문화의 族長的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새로운 제도로의 개편이나 새로 들어오는 문화에 대한 마찰이 심하게 일어난다. 佛敎가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高句麗나 百濟에 비해 심한 사회적 진통을 겪어야 했다. 결국 왕실의 측근인 異次頓의 순교를 겪으므로써, 왕실과 귀족의 타협하에 佛敎는 공인되기에 이르렀다.64) 新羅文化가 族長的 전통으로서의 개성이 강하였 기 때문에 새 제도나 문화를 받아 들이는데 후진일 수 있고 심한 마찰이 예상된다. 그러나 일단 새 제도나 文化를 접촉하고 난 후의 新羅文化는, 저절로 그 진전 방향이 뚜렷해 져서, 새 문화 를 포용하는데 진취적이었다. 佛敎가 공인되고 난 후 수많은 學 僧이 배출되어 佛敎文化의 꽃을 피우는 것은 그 좋은 예가 될 것 이다. 특히 花郞徒의 改創 이후 국가나 공동체를 위해 殺身保 國하는 수많은 젊은 花郞을 배출시키고 있다. 國家共同體를 우 선하는 花郞徒의 정신은, 族長的 전통을 가진 新羅文化의 진전 63) 李基白 高句麗의 扃堂 韓國 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 集會의 一遺制 歴史學報 35 36合輯 (1967) 64) 李基白 新羅 初期佛敎와 貴族努力 震檀學報 (1975) P.28

32 Ⅳ. 三國文化의 發展 방향이었을 것이다. (3) 古代國家意識의 成立과 國史編鑽 聯盟國家에서 古代專制國家 체제로 바뀌면서 지배이념이나 의 식구조가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古代專制國家에서는 왕 귀 족 일반백성으로의 신분질서가 확립되어 갔다. 이 때에 등장된 骨品制度는 族長세력을 編制하여 중앙귀족화 하거나 병합된 국가 의 지배세력을 編制하여65) 貴族國家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族的 編制원리는 新羅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高句麗나 百濟에도 유 사한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66) 三國이 모두 정복국가 체제로 개편되면서, 이러한 신분질서는 왕실의 專制化를 위해 작용되었다. 古代의 국가의식은 당시의 새 로 編制된 신분질서를 합리화하는 사회윤리인 것이어야 하며, 전 통적 族長 윤리를 강조하므로써, 國家共同體 의식을 강조하여 왕 실의 專制政治를 뒷받침하여야 했다. 三國時代 말기에 이르면 阿彌陀造像이 성행되는데, 한결 같이 國王을 奉하고 있다. 통일 직후의 사실이긴 하지만 文武王 13년 (673) 癸酉年 4월 15일에 正乃末과 金氏 등이 僧侶와 더불어 國王大臣七世父母 모든 衆生을 위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절짓기를 바란다 고 하였다.67) 같은 해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三尊千佛碑像 李基白 新羅 骨品制度의 形成, 韓國古代史論 (1975) P.54 金哲埈 三國時代의 禮俗과 儒敎思想, 大東文化硏究 6 7合輯( ) P.11 韓國古代社會硏究 (1975) P.191 癸酉銘 全氏 阿彌陀佛三尊石象銘에 癸酉年 四月十五日 兮 首 道 發願敬 供爲 彌次乃 正乃末 金 等 五十人智識 共國王大 臣及七世父母 含靈 發願敬造寺 智識名記 라 하였다. 65) 66) 7 67)

33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에서도 國王 大臣 七世父母 法界衆生을 위하여 造像한다68)고 하였다. 또 甘山寺 阿彌陀如來造像記에 重阿飡 金志誠이 67세로 致仕한 후 誠沙門玄度亡妻古路里亡妹古寶里妻阿好里 등을 위하여 國主大王 伊飡愷元 亡考 (仁章 吉飡) 亡妃 亡弟 小舍梁 彌陀像을 만든다 고 하였다. 阿彌陀佛의 造像이 金志誠의 경우, 선조인 愷元이나 亡考 亡妃 등 심지어 妻 阿好里에 이르는 그의 가문을 위해서 였 고, 癸酉銘 두 佛像의 경우도 구체적으로 造像者들 자신의 亡世 父母를 위해서 였지만, 형식상 가장 먼저 國王을 위해서 임을 밝 히고 있다. 造像銘의 이와 같은 기입형식은, 당시 모든 국가 권력 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國王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癸酉銘 두 佛像의 경우 造像者 들의 七世父母 외에 위로는 國王貴族百姓으로 생각될 수 있는 신분질서가 佛像銘에 반영 國王 大臣과 아래로는 모든 백성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른바 된 것이다. 그러한 身分秩序는 당시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 이었고, 그 전대의 聯盟國家的 사회에서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佛像銘에까지 의도적인 기록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왕실은 專制權 을 확립하기 위해 신분질서를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儒敎經 典에 나오는 天 의 관념이 표방되고 있음은, 왕실의 專制化 과 정과 연결시켜 생각될 수 있다. 眞興王 磨雲嶺碑에 朕이 歷數를 타서 太祖의 基業을 이어 王位를 계승했고, 스스로 몸을 삼가하여 乾道를 어길가 염려했다. 또한 天恩을 입어 運記 를 보여 주니 陰으로 神의 도움을 받아 상서러운 符笇을 받은 68) 癸酉銘三尊千佛碑像 黄壽永編著 韓國金石遺文(1976) P

34 Ⅳ. 三國文化의 發展 바 되었다. 因하여 四方을 託境해서 民土를 넓혔다 고 기록되었다. 여기의 天恩 이 中國의 帝國的인 의미로서의 天의 의미와는 다르겠지만, 新羅 王室의 族的 집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졌다. 더우기 金氏 王의 세습이래 王位의 계승을 儒敎經 典의 乾道 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본다. 곧 乾道는 王을 頂上으 로 하는 신분질서라 보아 크게 무리일 수는 없을 것이다. 三國史記 金庾信傳에는 우리나라의 王은 위로 天意를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人心을 잃 지 않았다. 고 하였다. 여기의 天意 나 天道 는 高麗시대 儒學者의 관 념으로 첨삭된 점이 없지 않겠지만, 上記한 磨雲嶺碑의 기사와 연 결시켜 秩序의 유지라는 조촐한 뜻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三國遺 事의 表訓大德條에서 表訓이 하늘에 오르내리면서 天機를 누설하 天과 人은 서로 범할 수 없는 기 때문에, 天帝가 그를 불러서 이후부터는 다시 하늘에 오를 수 없게 했다. 결국 왕 실이 天 의 관념을 표방하는 것은 人 과의 질서임을 명백 것이므로 히 했다. 聯盟國家 때에 우세부족 중심의 영웅설화에서 표방된 개념과는 달리, 이 때의 天 의 天 은 部族神的인 성격에서 벗어나서, 여러 부족을 포용할 수 있는 권위를 가졌다. 그렇지만 그러한 天 의 질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專制君主 자신 의 덕인 仁 이 강조되는 범위 내에서 의 질서였다. 眞平王 69) 때의 實兮는 비록 王의 말이라도 그의 뜻에 맞지 않으면 분개하여 따르지 않 는다(三國史記 卷 48, 列傳 第 8, 實兮傳) 7合輯 P ) 金哲埈 上記論文 大東文化硏究

35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고 하였다. 또 高句麗 烽上王 때의 國相 倉助利는 여러번 王의 役事를 諫하였으나 王이 조금도 뉘우칠 뜻이 없음을 알고 물러나 와 群臣들과 더불어 王을 폐하였다고 한다. 實兮가 王의 뜻을 따 르지 않는 것이나 倉助利가 王을 폐한 것은 곧 王들이 仁 에 서 벗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하여야 될 것 은 仁 이란 유교경전에서 표방된 의미와는 달리, 聯盟國家 때 의 族長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專制君主의 능력이었다고 생각 된다. 王은 身分制上 절대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일반 서 민과는 그 궤도를 같이 할 수 없었다. 三國遺事 卷一 射琴匣條에 는 다음 기사가 보인다. 炤知王이 연못 중의 老翁으로 부터 奉書를 받았는데, 그 奉書의 겉면에,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다는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庶民이고 한 사람은 王이라는 日官의 아룀에 따라, 봉서를 뜯어서 王은 살고 두 사람이 죽게 되었다. 王의 身 分制上의 권력은 貴族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러나 王의 전제권은 신분상의 특권에서 유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王室은 國家共同體意識을 통해서 專制權을 행사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을 묶어 표기하였다. 엄격한 신분질서를 형성시키면서도 國王貴 族平民 심지어 奴婢까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관 上記한 癸酉銘의 두 佛像이 모두 國王 大臣 七世父母 百姓 념적인 紐帶가 남아있었다. 말하자면 왕실은 이러한 國家共同體와 의 歸一을 의도했다. 新羅王室은 文武王이 죽어 東海龍이 되어 邦 家를 守護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왕실과 國家共同

36 Ⅳ. 三國文化의 發展 體는 구별 되었으나, 文武王이 邦家를 수호하는 護國龍으로 되는 관념은 왕실과 그것을 일치시킴에서 나을 수 있었다. 왕실과 國 家共同體를 일치시키려는 기도는 보다 일찍부터 있어 왔을 것이 며, 아마 古代專制國家로의 체제개편 이후 왕실은 줄곧 이러한 관념을 표명했을 것이다. 奈勿尼師今 때 朴提上이 尼師今의 두 아우인 寶海와 美海를 高句麗와 倭로 부터 구출했음이 이를 짐작 하게 한다. 寶海와 美海의 구출은 엄밀히 말하면 왕실 내지 왕국 의 일에 불과한 것이지만 國事로 취급되었고, 이를 구출한 朴提 上은 충신으로 관념되었다. 古代專制國家가 族的 編制로써 이루어졌으므로, 종래 聯盟國家 의 共同體的 기반을 완전 해체시키면서 등장된 것이 아니다. 이러 한 기반 위에서 왕실은 國家共同體의 관념을 쉽게 형성시킬 수 있 었을 것이다. 國家共同體를 위해서 殺身保國하는 花郞徒의 정신은 古代의 國家意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花郞徒는 國家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三國史記에는 國家 를 위해 戰死한 花郎의 이야기를 많이 전한다. 꼭 花郞이라 할 수 없는 자들도, 예를 들어 沈那와 그 아들 素那도 戰死하는데, 國事 를 위해 힘을 다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國家共同體를 위해서라면 僧侶인 圓光도 기꺼이 隋 나라에 乞師表를 올렸다. 殺 生과는 인연이 먼 僧侶라 할지라도 國家共同體를 위해서는 乞師 表를 올려야 했다.70) 圓光이 貴山 箒項 두 청년에 준 世俗五戒는 고대의 국가의식과 연결시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 국가 체제의 질서유지를 위해 忠 이 강조되었다. 이 시대의 忠 70) 李基白 儒敎受容의 初期形態, 韓國民族思想史大系 2 古代篇(1973) P

37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은 國家共同體 관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71) 國王은 절대적인 권력자라기 보다는 國家共同體의 대표자였다는 데서72) 專制權을 행사했다. 이런 점에서 忠 의 윤리는 王權의 專制化를 위한 것 이다. 朴提上은 임금이 근심이 있으면 臣下는 욕을 당해야 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 (三國遺事 卷一, 奈勿王 金提上條) 고 했음은 이를 알려준다. 世俗五戒의 忠 이외에 信 은 花郞徒와 같은 집단생활에서 필요하였던 것이다. 개인을 國家共同體로 묶어 一體感을 불어 넣었 信 의 관념이다. 그러므로 信 이 橫的인 紐帶를 위한 것이 라면 이를 從的인 끈으로 한 곳에 연결시켜 주는 것이 忠 이다, 花郞徒에서 忠 과 信 이 가장 강조된 의미가 여기에 있다. 던 壬申誓記石에 의하면 壬申年 8月 16日 두 사람이 함께 하늘 앞에 맹서하고 기록하 니,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까지 忠道를 執持하고 過失이 없기 를 맹서한다. 만약 이 일을 저버리면 大罪를 입을 것을 맹서한 다. 만일 나라가 편안치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우면 可히 모 름지기 行할 것을 맹서한다. 信 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공동목표가 忠 이 당시 忠 은 이 두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 고 하였다. 곧 었다.73) 이 다 같이 가졌던 관념이었으며, 儒敎的 관념을 받아들이면서 더 세련되게 되었다. 그 이외에 世俗五戒에 나타나는 관념으로 孝 가 있다. 이것은 家父長的 가족제도의 발달에 따라 나타난 것이며 71) 上同 P ) 上同 P ) 李丙燾 壬申誓記石에 대하여,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 5 (1957) P

38 Ⅳ. 三國文化의 發展 忠 의 기본이 되었다. 그러므로 專制王權이 성립되어 가던 新 羅 中代에서는 정작 忠 의 관념이 필요했던 것이고, 孝 의 관념은 新羅下代에 이르러 강조되었다. 예를 들면 孝女에 대한 褒 賞이 下代 사회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었다. 臨戰無退의 관념은 정 복전쟁의 수행에 필수적인 것이다. 三國이 서로 정복국가 체제로 되면서 이러한 관념이 반드시 요구되어졌을 것이다. 왕실은 忠 과 信 을 강조하므로써, 古代專制國家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게 하여 왕권의 專制化를 의도 했다. 이에 따라 왕 실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이 아울러 행해졌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왕실 중심의 歷史의 편찬이다. 三國은 각 각 다음과 같이 歷史를 편찬하였다. ① 高句麗 嬰陽王 11년(600)에 太學博士 李文眞이, 古史인 留 記 百餘卷을 줄이어 新集 5卷을 만들었다. ② 百濟 近肖古王 30년(375)에 博士 高興이 처음으로 書記를 편찬하였다. ③ 新羅 眞興王 5년(544)에 大阿飡 居柒夫가 넓게 文士를 모아 國史를 修撰했다. 百濟와 新羅에서는 古代專制國家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시기에 歷史가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百濟 温祚의 開國이 近肖古王 即位年을 기준으로 약 360 년이 된다. 당시의 歷史서술이 360년 마다 국가의 興運을 맞는 다는 漢나라 楊雄이 撰한 太元經(太玄經) 계통의 사상에 서74)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곧 百濟 書記의 출현은, 近肖古王代를 그 전대의 사회와 구별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古代專制國家 체제를 확립한 百濟 왕실의 專制 74) 金哲埈 百濟社會와 그 文化, P

39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化를 합리화 하기 위함일 것이다. 金官加耶의 坐知王代의 개혁 은75) 古代專制國家 체제의 확립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坐知王의 即位年은 首露의 開國 이후 360년이 된다.76) 坐知王代의 사회가 前代의 그것과 다름은 六甲法에 의한 새시대로 표현되었다. 그런 데 坐知王代의 卜士筮得 解卦 其辭曰 과 같은 조출한 歷史 서술이 행해졌음은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三國의 歷史편찬은 古代專制國家 體制의 확립과 무관하 지 않을 것이다.77) 新羅의 國史 편찬도 古代專制國家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유독 高句麗의 歷史 편찬이 이와 무관 할 수는 없다. 아마 小獸林王을 전후한 시기에 歷史가 편찬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留記 百餘卷은 이때 編纂된 歷史書 였다고 추측해서 크게 무리일 수는 없다. 오히려 嬰陽王 때에 편 찬된 新集은 百濟의 書記나 新羅의 國史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歷 史書로 보아야 될 것이다. 三國의 古代專制國家 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편찬된 歷史書의 성격은, 당시의 국가의식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왕권의 專制化를 위한 왕실의 전통성이 강조되었을 것이고, 자연 이러한 전통성을 내세울 수 있는 설화가 역사서술의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다. 三國史記에서 新羅 王의 稱號에 居西干이 一名 尼師今이 十六名 麻立干이 四名이었는데, 新羅末의 名儒 崔致遠이 帝王年代曆을 지으면서 모두 王이라 稱했고 居西干 등의 新羅 固有王名을 사용하지 않 75) 三國遺事 卷二 駕洛國記條에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라 되어 있다. 76) 이것은 王의 代數를 늘이지 않고 360년에 맞추려는 데서 나타났다. 各王의 在位 기간은 首露가 158년 居登이 55년 麻品이 32년 居比彌가 55년 伊品 이 60년이며 합계 360년이 된다 77) 李基白 百濟 王位 繼承考, 歴史學報 11(1959) P

40 Ⅳ. 三國文化의 發展 았다. 아마 그 말이 野鄙하여 부르기에 足하지 않다고 생각한 때문이다(三國史記 卷四, 智證麻立干) 國史 에서는 居西干 등의 신라 固有王名이 使用되어 졌음을 알려준다. 이 점은 國 史 가 王의 稱號에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면을 그대 고 하였다. 이는 帝王年代曆 이전 史書인 로 반영한 歴史書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히려 加耶國에서 점을 쳐서 그 掛를 풀이하여 적은 方式이 곧 歷史서술이었고, 이것은 三國의 초기 歷史서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高句麗의 新集은 전해오는 古史를 줄인 것이다. 國初에 비로소 문자를 사용하면서 서술 되어진 歷史가 留記 百餘卷인데, 이것이 줄여져서 新集 5卷 으로 되었다. 물론 新集과 留記의 單卷의 분량이 꼭 같다고는 말 할 수 없을지라도, 卷數만으로 생각한다면, 留記는 新集의 20배에 이른다. 말하자면 三國의 歷史書가 처음 編慕될 때에, 文化의 취 사선택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왕실의 전통에 관계된 자료를 수집 하는데 역점이 두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新羅 眞興王代에 國史 를 편찬하면서 國史는 君臣의 善惡을 기록하여 萬代에 그 褒贬을 보이는 것인 데, 歴史를 修撰하지 않으면 後代에 무엇으로 보이겠는가? (三 國史記 卷四, 眞興王 六年條) 라고 하였다. 곧 歷史의 편찬이 王政의 德失을 논하기 위함이라 했다. 이것은 高麗 儒學者들의 史觀이 반영된 것으로 眞興王代의 역사편찬이 꼭 그와 같은 성격이라고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러나 古代專制國家 때의 專制王權이 성립되었으면서도, 王者의 德으로는 仁이 강조되었다. 古代專制國家체제에서도 王의 德治 를 위한 관념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이 儒學이나 中國 史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王政의 德失을 논하는 歷史 의식으로 발전될

41 1. 古朝鮮의 靑銅器文化 수는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眞興王代에 王政의 德失을 논하는 성 國史 에 나타난 것이라기 보다는, 그 후의 史 書 예를 들어 高句麗의 경우 留記 가 아닌 新集 과 연결시 격의 歴史편찬은 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帝王年代曆에서는 이러한 歷史 의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三國의 歷史편찬이나 그 후의 歷史의식의 세련에 中國 史書가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三國에 전해진 中國 史書 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高句麗에는 書籍으로 五經三史三國志晋陽秋가 있다. 周書 高句麗傳 ② 百濟의 風俗이 騎射를 좋아하고 兼하여 墳史를 좋아 했다. 그들 중 뛰어난 자는 屬文과 陰陽五行을 해독한다. 周書 百 羅傳 ③ (新羅의) 春秋가 唐의 國學에 이르러 釋尊과 講論을 觀參하 였다. 唐 太宗은 자신이 지은 温陽 및 晋祠碑文과 아울러 新 撰晋書를 賜하니, 春秋는 이를 받아 歸國하였다. 舊唐書 新 羅傳 百濟나 新羅에 전해진 구체적인 歷史書名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대개 高句麗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겠다. 三國志에는 高句麗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월한 문화의 입장에서 주위의 야만민족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 에, 이에 대처하기 위한 자기 전통을 살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高句麗 關係 기록이 없는 史記나 前 後漢書는 그와 같은 필요에 서 요구되어졌을 것이다. 특히 晋人 孫盛이 撰한 晋陽秋는 史官의 直筆로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晋春秋로78) 불리워지기도 한다. 三 晋場秋 로 기록되었으나, 같은 기사인 舊唐書 高句麗 晋春秋 로 기록되었다. 78) 周書 高句麗傳에는 傳에는

42 Ⅳ. 三國文化의 發展 國의 歷史편찬이 자기 문화의 전통을 내세우려 할 때 中國 史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면서 歷史의식이 저절로 세련되어 新 集에서는 그 서술체계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三國이 모두 征服國家 체제를 갖추고 난 후 國際관계에 나타난 國家意識을 잠깐 살펴 보기로 하자. 百濟 七支刀銘文에 다음과 같 은 기록이 있다. ① (前面) 泰 四年 (九)月十六日 丙午 正陽(日中)에 百練鋼 鐵의 七支刀를 만들었다. 이는 나아가 百兵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마땅히 倭王들에게 供給할 만하다. 듯)가 製作하였다. ② (後面) (人名인 先世 以來로 아직 이 칼이 없었던 바, 百濟王世 (子) 奇生聖音이 짐짓(故 일부러) 倭王旨를 위하여 만들었 으니 後世에 (길이) 傳하여 보일지어다. 百濟에서는 侯王을 위하여 七支刀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銘文은 倭王도 侯王과 같이 취급되어, 百濟가 倭王에게 七支刀를 下賜하 는 형식으로 되어있다.79) 高句麗의 長壽王은 北燕王 馮弘을 龍城王 馮君이라 불러 候王 의 禮로 대하였다. 물론 馮弘이 後魏의 압력을 받아 長壽王 당시 에는 高句麗의 보호아래 있긴 하지만 한 때 中國 北朝의 지배자였 던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테면 高句麗가 馮弘을 候王으 로 대함은 中國人들의 中華思想에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다. 그렇지만 高句麗가 馮弘을 압송해 달라는 北魏의 청까지 거절 하면서 계속 그를 보호 아래 두었던 것은, 高句麗의 자주적 국가 의식의 발로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三國統一 직후이긴 하지만 79) 李丙燾 百濟 七支刀銘文, 韓國古代史硏究(1976) P

43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唐이 新羅 太宗의 廟號를 고치라고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한 新羅 도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新羅는 統一戰爭을 수행하 는 과정에서 安勝을 報德王으로 封하여 候王으로 대우하였다. 三 國이 古代專制國家 체제를 갖추면서 歷史가 편찬되었고, 征服國家 체제 하의 이러한 歷史의식이 곧 自主的인 國家意識을 갖게 하였 을 것이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三國이 서로 年號를 제정하여 사 용하고 있음은 이와 관련시켜 생각해야 될 것이다. 金杜珍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1) 三國의 土着信仰 삼국시대의 土着信仰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 꼬집어 내기 는 막연한 느낌이 없지 않다. 다만 佛敎受容 이전의 신앙을 土着 信仰이라 보고 그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될 것은 巫敎信仰 이라 생각된다. 新羅 王號인 次次雄이 巫를 의미하는 말이고1) 보면, 巫敎信仰이 그 사회 내에서 가지는 비중은 대단히 컸을 것이다. 三國遺事에서는 세상 사람들은 巫가 鬼神을 받들고 祭 祀를 모시기 때문에, 이를 敬畏하는 뜻에서 尊長 칭호를 次次 雄이라 한다고 했다. 祭政一致사회에서 巫가 神에 대한 祭祀를 1) 三國遺事 卷1 南解王條에 金大問云 次次雄 方言巫也 라 하였다

44 Ⅳ. 三國文化의 發展 받들므로써, 그 사회를 지배하던 유풍이 新羅王의 칭호를 次次雄 이라 부르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巫敎信仰은 당시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으며, 迷信的인 것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巫는 豫知者 내지 豫言者로서의 기능을 가졌다. 高句麗 山上王 의 小后는 酒桶村女이다. 그 어머니가 小后를 잉태하였을 때 巫가 점쳐 말하기를, 반드시 王后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예언 자인 巫는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豫知하는 占卜的인 기능을 가졌 다.2) 巫는 국가 사회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도 를 제시하였고, 天變地異 등 자연적 징후로써 길흉을 점쳐, 다음 에 나타날 사태에 대처할 능력을 가졌다. 百濟 温祚王 25년(서기 7)에 王宮의 물이 갑자기 불어 올랐으며, 漢城 人家의 말이 一首 二身의 소를 낳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日官은 우물물이 불은 것은 大王이 勃興할 징조요, 一首二身의 소는 大王이 隣國을 병합 할 징조라 했는데, 과연 温祚王이 馬韓을 병합하였다. 또 溫祚王 43년(서기 25)에 鴻鴈 百餘 마리가 王室에 몰려든 일이 있었다. 日官이 이는 먼 곳 사람들이 來投하여 올 징조라 했는데, 한 달 후 南沃沮 仇頗解 등 20餘家가 투항하여 왔다. 百濟 温祚王 때의 馬韓并合 기사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 하더 라도 馬韓의 중심 세력이 百濟에게 밀려 남쪽으로 이동되는 사 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 된다. 温祚가 이와 같은 병합을 도모 하고자 했다면, 이 일은 사전에 충분히 협의가 되었어야 할 것이 다. 이를테면 협의의 과정이 一首二身 의 소에 대한 해석으로 나타났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巫는 國事에 깊이 관여 하여 이를 처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봄이 마땅하다. 三 國史記 瑠璃王 29년 條에 茅川 上流에 검은 개구리가 있었는데 2) 任東權 韓國 原始宗敎史 (一) 韓國 文化史大系 Ⅳ 宗敎哲學史(1970) P.50

45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붉은 개구리 떼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였다. 이를 논 의하여 말하기를 검은 색은 北方을 가리키는 색이기 때문에 이 는 北扶餘가 破滅될 징조라 하였다. 이것은 高句麗 瑠璃王이 신 하와 더불어 北扶餘 토벌을 논의한 기사라 할 巫敎信仰이다. 적 어도 瑠璃王은 北扶餘를 토벌하는데 巫의 자문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國家 중대사의 결정에 巫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三國史記 瑠璃 王 21년의 기록에 祭祀에 사용될 돼지가 달아났으므로 王이 犠牲을 主祭하는 薛 支에게 命하여 이를 좇아가 잡도록 했다. 薛支는 國内城 尉那巖 에서 돼지를 잡을 수 있었다. 돌아 와서 王에게 말하기를 臣이 돼지를 따라 國內城 慰那巖에 이르렀는데 그 山水가 깊고 험하 며, 땅은 五穀이 잘 됨을 보았고, 아울러 麋鹿과 魚鱉이 풍부함 을 보았읍니다. 만약 이 곳으로 移都하시면 어찌 民利의 無窮함 이 없겠읍니까? 아울러 兵革의 害로 부터 벗어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고 하였다. 犠牲祭를 主管하는 薛支는 巫임에 틀림 없다. 瑠璃王 의 國內城 遷都에는 薛支의 의견이 강하게 작용되었다. 또 山上王 12년(208)에도 祭祀에 쓰일 돼지가 달아났으므로, 主祭者가 이를 잡으러 갔다. 그는 酒桶村에 이르러 돼지를 잡지 못하고 한 여자 를 만났다. 이가 곧 小后가 되었다. 곧 王妃의 選定에도 巫가 깊이 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巫는 국가 중대사의 결정에서 뿐 아니라 재난을 방지하거나 그 것이 일어 났을 경우 제거하는 기능을 가졌다. 善德王은 궁월의 서쪽 玉門池에 개구리가 모여 운다는 것을 듣고, 百濟軍이 쳐들어 올 것을 알아 이를 막았다. 善德王이 巫는 아니었을지라도 巫의

46 Ⅳ. 三國文化의 發展 기능을 가진 君長임에는 틀림 없다.3) 또 寶藏王 4년(645)에 唐 太宗이 쳐들어 와 遼東城이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巫가 말 하기를 城 안에는 朱蒙祠가 있으므로 美女를 婦神으로 配하면, 朱蒙이 기뻐하여 반드시 城이 보전되리라 했다. 이때 巫는 神을 달래는 과정을 통해 城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 었을 것이다.4) 그러나 중요한 것은 巫가 國難을 극복하는 전쟁 에 참가하여 戰術을 맡으므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점이 다. 전쟁에서 뿐 아니라 政事에 있어서까지 巫는 자문 역할을 했고 王의 政事가 잘못 되었을 경우 이의 시정을 諫하기도 하였다. 三 國史記 炤知麻立干 22년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王이 捺己郡人 波路의 딸 碧花를 보기 위해 그 집에 微行하기 세 번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古陁郡의 老嫗 집에서 묵게 되었다. 王 이 老嫗에게 嫗가 지금 國王이 어떻게 다스리는가 라고 물었다. 老 모든 사람들이 國王을 聖人이라 하나, 妾만 혼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읍니다. 왜냐하면 王이 微服으로 가만히 捺己郡의 여 인 집에 다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또 三國史記 瑠璃王 28년(9)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다. 扶餘王 帶素가 高句麗王 瑠璃에게 사신을 보내어 事大의 禮 를 강요했다. 瑠璃가 사신을 보내어 지금 여기에 계란을 쌓았 는데 만약 大王이 그 계란을 헐지 않으면 장차 大王을 섬기겠 을 신하에게 물었는데, 한 老嫗가 계란을 쌓은 것은 위험함을 으나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겠다 고 답했다. 扶餘王이 이 뜻 3) 善德王은 太宗이 보낸 꽃씨가 향기 없는 꽃을 피우게 될 것을 미리 알았거니와, 자신의 葬地가 㣼利天이라함으로써 葬地 바로 밑에 四天王寺가 세워질 것을 예언하였다. 말하자면 善德王은 巫的 능력을 갖춘 君長이었다. 4) 金光日 굿과 精神治療. 文化人類學 5 (1972) P

47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뜻하므로 계란을 헐지 않은 즉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그 글의 뜻은 大王이 위험함을 모르고 사신을 보내 온 것이므로, 위험 을 안전으로 바꾸어 스스로 다스림만 같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 했다. 여기의 老嫗는 巫로 생각된다.5) 帶素가 政事를 행하는 자리에 서 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老嫗는 巫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炤知王이 古陁郡에서 묵은 老嫗의 집도, 王과 아무런 關聯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上記한 두 기 사는 王이 政事의 자문을 巫에게서 구했으며, 巫의 諫言이 王의 政事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려 준다. 巫는 대체로 豫言者 내지 豫知者로서 자연의 징후에 대해 해석 을 내림으로써 天變地異나 국가의 중대 사태에 대비해 왔고, 중 요 국사나 정사의 자문을 담당해 오기도 했다. 그 外에도 巫는 더 많은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6) 이러한 巫의 기능을 생각할 때, 그것은 당시 사회를 이끌어 가던 지배이념인 동시에 그 사회를 다스리는 통치 수단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巫는 呪 術을 사용하는데 呪術의 효용은 강제적이라서7) 일방적인 통치 에 이용되어 졌을 것이다. 三國史記 東川王 8년조에 다음과 같이 5) 三國史記에는 老嫗 가 상당히 많이 나타나는데 그 하는 일들이 대개 巫와 비슷하다. 赫居世王條에는 老嫗가 閼英을 기르고 있다, 閼英은 地母神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老嫗는 閼英을 모시는 巫라고 추측해서 크게 무리는 아닐 줄 안다. 昔脫解를 발견한 阿珍義先은 赫居世의 海尺之母 라 했는데, 昔脫解 를 발견한 것이 吉兆인지 凶兆인지를 알려는 행동은, 阿珍義先이 巫임을 시사 한다 6) 任東權 上揭論文 P.45에서 巫의 職能을 司祭菩 醫巫 豫言者의 셋으로 구 분하였다. 韓國 古代의 巫도 醫巫나 司祭者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나타난 다. 7) 예를 들면 三國遺事 卷二 駕洛國記에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 놓아라. 만약 내 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 라고 하였다. 거북의 머리를 나오게 하는 呪術은 강제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안 할 경우는 죽음으로 위협 당함을 보여준다

48 Ⅳ. 三國文化의 發展 기록되어져 있다. 太后 于氏가 돌아가면서 山上王陵 옆에 묻어 줄 것을 請하였으 므로 그 말대로 장사지냈다. 巫가 國壤이 나에게 降臨하셔서 말하 기를, 어제 于氏를 川上에서 보았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다투기까지 하였다. 물러나와 그것을 생각하니 얼굴이 두터워져 감히 國人을 볼 면목이 없으므로 네가 朝廷에 告하라고 말했다 한 다. 이에 陵 앞에 소나무를 겹으로 심었다. 이 기사는 山上王의 王妃族과 故國川王系 사이의 대립 반목을 알 려 준다. 이 대립반목을 이용하여 東川王이 于氏 세력집단에게 압 력을 가했다. 그것이 7겹의 소나무를 심은 이른바 呪術 행위로 나 타났다. 말하자면 東川王은 巫敎信仰으로써 于氏 勢力집단에 대한 압력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巫는 그 신분이 낮은 일반 백성이었을 리는 없다. 三 國사회는 族長編制로 이루어졌는데 族長들은 古代專制國家 체제 의 중앙 귀족으로 등장되기 전에는 巫의 기능을 가진 祭司長이었 을 것이다. 중앙 귀족으로 등장되고 난 후에도 그들은 祭司長의 기능을 그대로 가졌을 것이다. 聯盟國家의 王도 族長과 같은 기반 을 가져서 祭司長的 성격을 가졌다. 伐休尼師今이 風雲을 점쳤다 는 것은 또 자신이 巫와 연결될 수 있음8)을 시사한다. 그러한 유 풍은 그대로 전해져서 王의 누이가 祭祀를 주관하거나 혹은 知幾 三事를 보여준 善德王은 巫的 능력을 가졌다. 王도 族長도 모두 族的 기반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祭司長的 인 성격인 巫이었다고 해서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실 王도 族長도 모두 巫敎 신앙을 가졌을 것이다. 이를 알려 줄 만한 기사 가 三國史記 瑠璃王 19년조에 나온다. 金庾信傳을 中心으로, 震檀學報 43 (1977) P.89 8) 金烈圭 巫俗的 英雄考

49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秋 8월에 犠牲에 사용될 돼지가 도망갔는데, 王이 託利 斯卑 를 시켜 이를 좇게 했다. 이들은 長屋의 연못 속에서 이를 잡아 칼로써 그 다리를 잘랐다. 王이 이를 듣고 노해서 祭天에 犠 牲될 물건을 어찌 상하게 할까보냐 고 했다. 드디어 두사람을 구덩이에 빠뜨려 죽였다. 9월에 王이 疾病이 났는데, 巫가 託 利 斯卑로 말미암았을 것이라 했다. 王이 사신을 보내어 그들 에게 사과하니 病이 나았다. 우선 託利 斯卑는 祭祀者인 巫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三國史記 瑠璃王 21년조의 기사에는 도망간 돼지를 찾아 간 薛支가 犧牲을 맡아 보는 主祭者였으므로 託利 斯卑의 경우도 같이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託利 斯卑는 王과 利害가 일치되는 입장에 있었던 巫는 아닐 것으로 파악된다. 그들이 王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것이 이를 말 해 준다. 다만 王의 病을 치료해 준 巫는 王과 친밀한 관계에 있 었을 것으로 보아 무방하겠다. 그는 王의 입장을 대변하는 巫라 해서 좋을 것이다. 託利 斯卑가 죽음을 당하는 이유는 犧牲에 쓰 일 돼지의 다리를 끊은 죄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다리를 끊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들이 돼지의 다리를 끊음은 祭祀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곧 巫로서의 직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 사실은 託利 斯卑의 巫敎신앙이 王의 그것과 맞지 않 아서 그들이 去勢됨을 알려 준다. 그런데 王이 託利 斯卑를 받들 어 그들의 魂에게 사과하였다. 그렇게 되는 실질적인 원인은 託 利 斯卑의 族的 세력배경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王의 巫敎信仰 과 대립되었던 그들의 巫敎信仰이 인정받고 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族長들이 저마다 祭司長인 巫의 성격을 가졌던 巫敎信仰 사회

50 Ⅳ. 三國文化의 發展 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巫敎信仰의 성격을 해명할 필요가 있 다. 三國史記 高句麗 太武神王 3년조에 冬10月에 扶餘王 帶素가 一頭二身의 赤鳥를 보내 왔다. 처음 扶餘人이 이 까마귀를 잡아서 王에게 바치니 或者가 까마귀 는 검은 색인데 지금 변하여 붉은 색으로 되었고, 一頭二身은 二國을 병합할 징조이니, 王이 고구려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고 말했다. 帶素가 기뻐하며 이를 高句麗로 보내고 겸하여 或者가 말한 내용까지 전했다. 太武神王과 群臣이 상의하여 흑색은 北方의 色인데 지금 변하여 南方의 색으로 되었으며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동물인데 君이 얻어서 가지지 않고 이 를 나에게 보냈으니 兩國의 존망을 어찌 모른다 하겠는가 라고 답하였다. 帶素가 듣고 크게 놀라고 후회하였다. 고 기록되었다. 붉은 까마귀에 대한 帶素와 大武神王의 해석이 달랐다. 帶素는 그것으로써 扶餘가 高句麗를 병합할 징조로 해석 하였으나, 大武神王은 오히려 고구려가 扶餘를 병합할 징조로 해 석하였다. 이것은 帶素가 가진 巫敎신앙과 大武神王이 가진 그것 은 전혀 별개의 독립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巫敎信仰 내 용이 같다 할지라도, 때에 따라 그것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음 을 시사한다. 다만 國家가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巫敎신앙이 다를 수는 있 다. 그러나 三國史記 高句麗 次大王 3년조의 다음 기사는 高句麗 내에서 같은 사실에 대한 巫敎신앙이 달리 해석되었다. 王이 平儒原에 사냥갔는데, 白狐가 따라오며 울므로 王이 이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師巫에게 이 사실을 물으니, 그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여우는 요망스런 짐승으로서 吉祥이 아니며, 白色이었으니 더욱 怪異합니다. 아마 하늘이 순순히

51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말하지 않으나 妖怪를 보여서, 人君으로 하여금 두려워 하고 修省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스스로 새로와 져야 될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德을 닦으면 가히 禍가 福으로 될 것입니다. 王은 凶한 즉 凶한 것이고 吉한 즉 吉한 것인데, 너는 어찌 妖怪로 써 福이 된다고 하니 어찌 誣하지 않느냐 고 말하고 드디어 그를 죽였다. 白狐의 출현에 대해 師巫는 요망한 일이지만 福으로 바꿀 수 있다 고 해석했음에 대해, 王은 요망한 것은 요망한 것이라 했다. 그리 하여 王은 師巫의 해석을 반박하여 그를 去勢시켰다. 또 次大王 4 년에는 日食이 나타났지만, 日官은 王의 노여움을 생각해서 日食 의 원인을 바로 아뢰지 않고 임금의 德이요, 國家의 복이라했다. 그와 같은 사례는 많이 나타나고 있다. 百濟가 망할 즈음에 百濟 는 보름달이요 新羅는 초생달이라는 讖諱에 대해 新羅가 흥할 징 조로 생각한 巫도 있었지만 百濟가 번성을 누리리라는 해석을 한 巫도 있었던 것이다. 巫가 서로 해석을 달리 할 수 있음은 그들이 각각 다른 조직체 계, 예를 들면 각각 다른 族的 기반을 가지고, 독립된 신앙권을 가 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巫는 다른 巫의 해석을 반박하 기도 하고, 巫敎信仰과의 내용과는 달리 말하기도 했던 것이다. 巫敎신앙의 내용은 경우에 따라서는 달리 해석될 때도 있었다. 上 記한 次大王은 凶즉 凶하고 吉즉 吉하다고 했지만, 太祖王은 凶이 변해 吉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음의 기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 준다. 太祖王은 豹가 호랑이 꼬리를 무는 꿈을 꾸고 吉凶을 물었는 데, 이는 王族 중의 한 사람이 大王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라 해석 하므로 大王이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나 高福章이 말하기를

52 Ⅳ. 三國文化의 發展 善을 행하지 않으면 吉도 변하여 凶이 되고, 善을 행한 즉 災가 변하여 福이 되므로 지금 大王이 나라를 제집 같이 걱정하고 백 성을 자식 같이 사랑한다면 비록 조그만 이상한 일이 있을지라 도 어찌 傷하는 바가 있겠읍니까 라고 하였다.(三國史記 卷I5, 太祖王 90年 條) 이 기사에서도 巫가 해석을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高福章은 太祖王 때의 右輔였는데, 여기서는 그가 巫의 성격을 가졌다. 太 祖王은 高福章의 의견을 좇아 凶이 변해 吉이 될 수 있다는 태도 였다. 이것은 次大王의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次大王과 太祖王의 巫敎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巫敎信仰은 祭政一致 시대의 윤리가 체계를 이루면서 형성되어 진 것이고, 巫는 族的 공동체의 기반을 가진 族長이었으며, 祭司 長으로서의 기능을 가졌다. 聯盟國家가 성립되면서 族長들은 聯盟 王의 臣下로 등장되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族的 기반을 그대로 가 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王과 동등한 巫敎信仰을 가졌다. 巫教信仰 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없다. 王이 표방하는 巫敎信仰이라 해서 다 른 族長들의 그것보다 특별히 우월하지 않다. 이 점은 巫教信仰이 聯盟國家가 성립하기 까지는 族長的인 윤리로서 유지될 수 있을 지 몰라도, 古代專制國家가 성립된 후 강력한 전제왕권의 이념으 로서는 부족함을 알려 준다. 王室이 族長들을 중앙의 귀족으로 편 제하면서 강력한 전제권을 수립하려고 할 때, 巫敎信仰과는 다른 관념이 필요했을 것이다. (2) 初期 佛教의 性格 初傳 佛敎의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 성립 당시의 佛敎나 印度 사

53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회에 대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佛敎 성립 이전의 印度에서는 브라만교가 행해졌다. 그것은 아리안족 중심의 카스트제도를 배경 으로 성립되었다. 四姓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였 는데, 브라만교는 브라만 계급을 옹호하는 종교였다. 사실 인도가 조그만한 城邑國家를 이루고 있었을 祭政一致의 사회에서는 그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祭祀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브라만은 가장 높은 계급이었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印度가 몇 개의 큰 國 家로 통합되어 古代專制國家가 성립되었을 경우, 征服사업을 담당 한 크샤트리아 계급이 브라만계급보다 우세해지게 된다. 결국 印 度가 몇 개의 강대국으로 통합되면서 실질적으로는 가장 우세하 였던 크샤트리아계급과 브라만계급의 우월을 내세우는 브라만교 와는 서로 맞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크샤트리아계급은 브라만 교가 아닌 스스로를 위한 종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불교가 성 립되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초기 佛敎는 王者계급을 위한 宗敎였다. 釋迦 자신이 크샤트리 아 계급이었고 브라만교에서 佛敎로의 종교개혁은, 당시 印度 사 회의 실력자인 크샤트리아 계급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성공될 수 있었다. 釋迦 당시의 인도 사회는 16개의 강대국으로 통합되고 있었 으며, 그 중 摩竭陀國과 憍薩羅國이 가장 廣大하였다.9) 당시 摩 竭陀國은 鴦伽를 비롯한 跋耆 末羅 등의 群小國家를 정복해 가 는 기세이었고, 憍薩羅國은 迦户國 등을 점령하였다. 이와 같은 빈번한 정복전쟁이 브라만계급보다는 크사트리아계급을 우세하 게 만들었다. 釋迦가 四姓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계급의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브라만계급에 대한 크샤트 李載昌 佛敎의 國家政治思想 研究, 佛敎學報 10 (1973) 9) 金東華 洪庭植 PP

54 Ⅳ. 三國文化의 發展 리아 계급의 우월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10) 佛敎 經典에 자주 나타나는 刹利 婆羅門 毗舍 首陀羅의 四姓 배열순서11)는 곧 이러한 것을 반영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초기 佛敎는 정복국가에 필요한 종교였다. 原始佛敎 經典에 잘 나타나는 轉輪聖王 사상은, 당시 강대국을 중심으로 통일 사 업을 진척시키는 정치 이념이었다. 釋迦는 四姓經에서 지금 나 의 親族인 釋種도 역시 波斯匿王을 받든다고 하였다. 그의 敎說 은 親族이지만 약소국인 이상 강대국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憍薩羅國 摩竭陀國 兩國의 압박을 받아 날 로 쇠퇴해 가던 釋迦種族이 강대국에 병합됨을 인정하는 것이 다. 실제 釋迦 생존 당시에 憍薩羅國의 毘瑠璃가 카필라성을 攻 略하여 釋迦族의 나라는 멸망 당하였다. 摩竭陀國의 阿闍世王이 跋祗國을 정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 可否를 大臣 雨舍를 시 켜 釋迦에게 자문한 일이 있다. 이것은 佛敎교리가 정복국가를 합리화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佛敎는 釋迦 당시의 두 강대국의 수도인 王舍城과 舍衛城을 중심으로 성행하였고, 그 뒤 護法 君主인 阿育王 迦腻色迦王 戒日王 등이 모두 정복국가를 이루어 全印度에 君臨하고 있었다. 佛敎에서 法의 보편성이 가장 강조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佛敎의 10) 長阿含經 卷6 第2分, 四姓經 第1에서 法 의 이념은 바로 時彼一人 復以善言 慰勞衆人 衆人聞 已 皆大歡喜 皆共稱言 善哉大王 善哉大王 於是世間 便有王名 以正法治民 故名 刹利 라 하였다. 正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자로 刹利種을 삼았기 때문 에, 佛敎는 刹利階級의 正法統治 이념에 합당한 것이다. 또 釋迦가 婆悉吒와 婆羅墮의 두 婆羅門에게 한 四姓에 대한 說法은, 四姓의 평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고, 刹利 階級의 우월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釋迦는 世俗의 種姓을 버리고 출가하면 모두가 다 沙門 釋迦族의 사람이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11) 예를 들면 長阿含經 卷13. 大般涅槃經 卷23. 長阿含經 卷6 第2分, 四姓經 第1 등에 보인다

55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王權과 직결되었다. 즉 法 은 權力의 權力 이며, 이것은 王 權과 다른 것이 아니다.12) 결국 法의 보편성을 내세우면서, 정복 왕조는 통합된 小國을 묶어 古代專制國家 체제를 성립시킬 수 있 었다. 초기 佛敎는 이른바 王即佛 의 사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 이며 이것이 中國 北朝를 통하여 韓半島에 전래되었다.13) 韓半島 에 佛敎가 처음 公認되는 때는 高句麗 小獸林王 2년(372)이다. 前秦王 符堅이 사신과 僧 順道를 보내어 佛像과 經文을 전해 주었 다. 374년에는 僧 阿道가 들어오고, 다음 해 375년에는 肖門寺와 伊佛蘭寺가 낙성되어 각기 順道와 阿道가 거주하게 되었다. 百濟 에서는 枕流王 원년(384)에 佛敎가 公認되었다. 晋으로 부터 胡 僧 摩羅難陀가 들어 오자, 王이 그를 宮內에 모시고 禮敬하였다. 385년에는 漢山에 佛寺가 이룩되고 僧侶 10人이 濟度되었다. 新 羅에 佛敎가 公認되는 때는 高句麗 百濟보다 훨씬 늦어 法興王 14년(527)이다. 異次頓의 殉敎가 계기로 되어 佛敎는 국가 종교 로 인정되어 그 후 찬란한 발전을 가져왔다. 삼국 사회는 이미 公認 이전에 佛敎를 접촉하여 알고 있었다. 新羅의 訥祗麻立干이나 炤智麻立干 때의 墨胡子나 阿道전설은 이 와 같은 사정을 알려 준다. 高句麗에서도 372년 이전에 이미 佛 敎는 알려지고 있었다. 梁高僧傳이나 海東高僧傳의 釋亡名傳은 晋나라 僧 支遁이 高句麗 道人에게 편지를 전한 사실을 알려 준 다. 물론 高句麗 道人은 僧侶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格義佛敎의 우두머리였던 支遁은 366년에 죽었기 때문에 高句麗에서는 366 년 이전에 佛敎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삼국 사회에 언제 처음으 12) 高崎直道 古代 インドにおける身分と階級, 古代史講座 7 第4章 古代 專制國 家 成立期의 階級構造 참조 13) 金哲埈 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 下, 歷史學報 2 (1952) P

56 Ⅳ. 三國文化의 發展 로 불교가 전해지게 되었는가를 적확히 말하기는 어려울지라도, 그것이 公認되는 시기는 삼국이 모두 古代國家 체제를 정비하던 때였다. 이것은 적어도 佛敎의 전래가 古代國家의 성립과 밀접 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初期 佛敎의 수용은 王室에 의 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또 王室에 의하여 佛敎가 발전되었다. 이렇 듯 불교는 高句麗나 百濟에서는 처음부터 王室에 의하여 환영받 았고 순조롭게 수용되지만, 新羅에서는 그 사정이 달랐다.14) 族長 세력이 강했던 新羅 사회에서는 王室의 佛敎 수용에 대한 심한 반 발이 있었다. 삼국 사회에 初傳된 佛敎의 성격을 그 說話를 분석함으로써 밝 혀 보기로 하자. 다만 高句麗나 百濟의 경우 佛敎 전래전설이 전 해지지 않았으므로, 자연 新羅의 그것을 분석할 수 밖에 없다. 먼 저 墨胡子와 阿道의 전설을 분석하고자 한다. 三國遺事나 三國史 記를 중심으로 두 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訥祗麻立干 때에 沙門 墨胡子가 高句麗로 부터 一善郡에 이 르렀는데, 郡人 毛禮(혹은 毛祿)가 집 가운데 堀屋을 만들어 安置하게 했다. 이 때 梁에서 의복과 서적 香을 보냈는데, 君臣은 그 香이 어디 쓰이는지를 몰랐다. 이에 사람을 보내 어 그 香이 쓰이는 바를 나라 안에 물으니, 墨胡子가 이를 이는 香이라 부르는데, 불에 태우면 몹시 향기로와 神 聖에게 정성이 통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神聖이란 三寶를 보고 말한다. 만약 이를 태우면서 發願하면 반드시 靈應이 있을 것이다. 이 때 王女가 병이나서 위독하였는데, 墨胡子를 불 러 香을 피우면서 기도하니 王女의 病이 나았다. 王이 기뻐 하여 후히 예물을 주었는데, 갑자기 그의 간 곳을 알 수 없었 14) 李基白 三國時代 佛敎傳來와 그 社會的 性洛, 歷史學報 6 (1954) P

57 2. 古代人의 信仰과 佛敎受容 다. (金大問, 鷄林雜傳 三國史記 卷4, 法興王 15年條 ; 海東 高僧傳 ; 三國遺事 卷3, 阿道基羅條) ② 未雛尼師今 2년 (263)에 阿道가 高句麗로 부터 鷄林에 와서 王城西里에 寓居하였다. 阿道가 대월에 들어가서 行敎하기를 청하니,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려하고 심지어 죽 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에 續林(지금 一善郡)의 毛祿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에 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巫醫의 효험이 없으므로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醫師를 구 하였다. (阿道)法師가 문득 대궐로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王이 대단히 기뻐하고 소원을 물었다. 阿道가 대답하되 天鏡 林에 佛寺를 창건하여 邦家의 福을 비는 것이 소원 이라 하 였는데, 王이 허락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未雛尼師今이 세상 을 떠나니, 國人들이 法師를 해치려 하거늘, 法師가 毛祿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나오지 않았 다. (三國遺事 卷3, 阿道基羅條 阿道碑銘) ③ 毗處麻立干 때에 我道和尚이 侍者 3人과 더불어 毛禮의 집 에 있었는데 모양이 墨胡子와 비슷했다. 수년을 머물다가 그 는 병도 없이 죽었다. 그 侍者 3人이 머물면서 經律을 강독하 니, 信奉하는 사람이 가끔 있었다. (三國遺事 卷3, 阿道基羅條) 이 설화에 나타난 初傳佛敎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佛敎의 전래 시기가 古代國家가 성립되어져 가는 시기였 다. 墨胡子가 들어온 訥祗麻立干 때는 金氏王權의 세습이 이루어 진 때이다. 阿道가 들어온 炤智麻立干 때를 전후하여, 古代國家가 형성되어져가는 시기였다. 다만 阿道本碑에는 阿道가 未雛尼師今 때에 들어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一然은 이 때의 鷄林은 文物과 禮敎가 갖추어 있지 않았고 國號도 정해

58 Ⅳ. 三國文化의 發展 져 있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阿道가 와서 佛敎를 받들었겠는 가? (三國遺事 卷3, 阿道基羅條 라고 하였다. 이미 一然은 未雛尼師今 때에 阿道가 들어 온 사실 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佛敎가 傳來되기 위해서 國家의 國 號라든가 文物制度 가 갖추어져야 됨을 들고 있음은 중요한 사 실이다. 이것은 佛敎의 전래가 古代國家의 성립과 無關하지 않음 을 시사한다. 未雛尼師今 때에 阿道가 들어온 사실이 믿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정한 歷史的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왜 냐하면 未雛尼師今은 金氏로서 처음 王位에 올랐으므로, 未雛尼師 今 때에 阿道가 왔다는 사실은 佛敎 初傳이 金氏王權의 세습과 연관됨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사실 金氏王權의 세습은 高句麗 세 력을 등에 업고 이루어진 것이고 당시 高句麗 세력이 新羅로 들 어왔을 때 佛敎도 같이 전래 되었을 것으로 보아 무리는 아닐 것 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初期 佛敎가 정복국가의 이념에 합당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眞興王代의 장군 居柒夫가 장군으로 되기 이전 에 중이었다는 것이나, 또 그가 高句麗에 갔을 때, 高句麗 僧 惠亮 이 그를 알아보고 장차 장수가 되어 병정을 이끌고 왔을 때는 나 를 해치지 말라고 부탁한 것 등은, 佛敎와 정복왕조의 이념이 상 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新羅史에 자주 나타나는 外敵을 진압하기 위하여 創寺한다는 것이나 圓光의 乞師表는 같 이 생각 될 수 있다. 결국 王室은 佛敎를 받아들이면서 정복을 합 리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를 이루어 갔다. 둘째 初傳 佛敎는 專制王室에 유리한 종교였다. 반면 그것은 族長이었던 貴族에게는 불리하였다. 墨胡子나 阿道는 國王과 밀 접하게 결합되어 있었지만 國人들은 그들을 해치려고 했다. 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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