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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國史館論叢 第69輯 즉 斯盧六村說29)로 대별된다. 다시 말하면 赫居世의 建國說話는 辰韓六村說에 입각하면 辰韓지역을 영역으로 하는 국가, 즉 新羅國家의 建國說話이며, 斯盧六村說에 입각하면 경 주지역을 범위로 하는 斯盧國의 建國을 반영하게 된다. 둘째, 가)2와 가)3에도 보이듯이 이들 六部에는 姓氏가 사여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 姓氏, 즉 六部姓은 初期記錄에 보이지 않고,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엽 사이에 비로소 그 중의 하나인 薛氏가 薛罽頭30)라는 인명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7세기대 이전의 기록에서는 朴 昔 金 三姓王室의 기록만 주로 보이고 있다. 즉 가)2와 가)3의 賜姓 기록은 儒理王代 당시에 있었던 사실로 볼 수 없으며, 또한 六村이 六部로 개정된 시기도 儒理王 9년에 일어난 사실로 보기도 어렵다. 셋째, 後三國을 통일한 후 高麗는 太祖 23년(天福 5년: 940)에 투항해 온 新羅의 수도 를 지방행정구획으로 개편한 것이 위의 慶州六部 이다. 가)3에서는 慶州六部의 해당 촌 명까지 자세히 기재하고 新羅 때의 及梁部의 후신인 中興部를 비롯하여 각 部의 방위를 명시하고 있다. 高麗史 에 의하면 高麗初 慶州六部의 영역은 新羅의 王京六部보다 더 넓 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高麗初에 개편된 慶州六部는 新羅가 고려에 투항할 당시에 직접 통할한 지역 범위에 불과하였을 것이며, 高麗의 정치제도가 정비되는 成宗代 이후에 新羅 王京六部의 범위로 환원되는 점에서 新羅의 高麗에로의 투항 당시에 임시적 으로 편제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六部와 六村의 위치비정에 대한 주요 견해들을 검토해 볼 차례이다. 斯盧六村說의 경우 六村에 대한 위치비정의 근거가 문헌기록 상에서는 전혀 제시되지 않아 문제시된다. 즉 六村의 위치를 비정한 지역은 경주지역이 新羅 王京으로 편제된 이 후의 六部의 위치이며, 가)3의 六部祖의 初降處에 근거하여 六村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 28) 末松保和, 앞의 논문(1936) 金哲埈, 앞의 논문 上,下(1952)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上 ( 韓國學報 2, 1976; 古朝鮮史 三韓史硏究, 1989). 29) 今西龍, 앞의 논문(1933) 李丙燾, 앞의 논문(1938 ; 앞의 책, 1976) 李鍾旭, 앞의 논문(1980 ; 앞의 책, 1982) 姜鳳龍, 앞의 논문(1991) 全德在, 앞의 논문(1992 ; 앞의 책, 1995). 최근까지 斯盧六村說은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지지하여 정설화 되다시피 하고 있다. 이러 한 경향은 初期記錄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점을 간과한 채, 그 기록을 시간적 순서에만 치중한 결과이다. 그러나 문헌기록에 대한 엄밀한 비판작업이나 객관적인 지명 비정의 검토는 역사연 구상 기초적인 것으로 한낱 과거의 잔유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최근에 이전의 기초 적인 연구성과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논리적인 합리성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은 연구자의 기본 적인 자세를 잃게 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소박한 소견으로는 과거의 성과를 검토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30) 三國史記 卷47, 列傳 7, 薛罽頭傳에 의하면 薛罽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 燕飮 各言其志 罽頭曰 新羅用人 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 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劍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라 하 여 薛罽頭가 眞平王 43년(武德四年: 621) 唐에 망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9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는 것이다. 반면에 辰韓六村說은 金哲埈과 千寬宇의 견해가 대표적인데, 六村의 위치비정 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거의 대부분 제시하여 두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생각으로도 金 哲埈의 견해와 같이 六村의 지명대로 그 위치를 비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여기에도 약간의 의문이 따른다. <표 2> 六村 論者 末松保和 金哲埈 千寬宇 今西龍 李丙燾 李鍾旭 六村의 위치비정에 관한 제 견해 閼川楊山村 突山高墟村 茂山大樹村 觜山珍支村 金山加利村 明活山高耶村 (及梁部) (沙梁部) (牟梁部) (本彼部) (漢祗部) (習比部) 경 주 상 주? 성 주?? 경 주 옥천-상주 제천-예천? 김천-성주 경주-영천 경 주 상 주 의성-예천 영해-울진 개령-성주 경산-영천 경주읍 남쪽 남천 상류 모량천 남천 하류? 남천 하류 남산북-남천남 남천북-북천남 모량천 인왕리 소금강산 명활산 月 城 오릉-산내면 모량천-서면 외동면 양남 양북면 명활산 金哲埈의 견해에 의하면 六村의 범위를 경북일대를 비롯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충북 일 부지역까지로 보는 점이다. 이 견해의 배경에는 1930년대 전후의 日人 史學者들이 三國 史記 의 初期記錄에 모순이 많은 점을 근간으로 하여 新羅 上古의 王統을 虛構的으로 파 악한 관점31)을 비판하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上古 世系의 紀年을 끌어내림으로써 初期記錄의 史料的 價値를 인하한 연대에 상응하는 사실로 인정하려는 관점32)이 들어 있 다. 특히 初期記錄에 보이는 대외항쟁기사를 인하된 왕통기년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그 지역을 六村의 범위로 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初期 단계의 辰韓六村이 中期 에 이르러 경주세력을 중심으로 大斯盧聯盟을 구성함으로써 高句麗 百濟와의 대외항쟁 을 수행하는 六部組織이 형성되었다33)고 보았던 점이 문제이다. 필자가 이미 검토해 보 았듯이, 初期記錄에 보이는 新羅와 高句麗 百濟 加耶와의 對外關係記事는 객관적인 지 명 비정과 국가의 발전과정에 의거하여 보면 주로 6세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파악되 므로,34) 新羅國家의 중앙지배층의 거주구역인 경주의 王京六部는 대외항쟁과정에서 성립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六部가 단계적으로 성립되었다고 한 시각은 新羅國家 성립과정의 31) 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の名について ( 東洋學報 15-2, 1925). 今西龍, 앞의 논문(1933). 池內宏, 新羅の骨品制と王統 ( 東洋學報 28-3, 1941). 井上秀雄, 朝鮮の建國說話 ( 新羅史基礎硏究, 1974). 32) 金哲埈,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 ( 歷史學報 17 18, 1962; 韓國古代社會硏究, 1975). 33) 金哲埈, 앞의 논문 上 下(1952). 34) 주 18)의 세 논문 참조.

10 國史館論叢 第69輯 단계적 성격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점에서 일단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나 가)2의 기 록을 참조하면 辰韓六村이 바로 王京六部로 이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과정으로 서 辰韓六部의 존재가 개재되어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35) 다음 千寬宇의 견해는 위치문제에서 金哲埈의 견해와 거의 유사하지만, 그 문제점을 보완하고 있다. 六村의 범위를 약간 축소하여 경북일대에 비정하고 있는데, 六村 가운데 觜山珍支村의 경우 金哲埈은 그 위치를 비정하지 않았지만, 千寬宇는 가)1의 珍支村의 細註에서 干珍村이라 하는 지명을 가)2의 지명을 따라 于珍村이라 해석하면서 울진에 비 정하고 있다.36) 그리고 金哲埈의 경우 初期記錄의 기년을 인하하여 보는 修正論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에 千寬宇는 婆娑王代 이후의 기록을 기년 그대로 인정하는 肯定論을 펴고 있다. 이와 같 이 初期記錄을 보는 시각의 차이는 양자가 新羅國家의 성립과정을 전혀 달리 해석하는 관점을 낳고 있는 것이다. 즉 金哲埈이 六村세력의 경주 이주를, 千寬宇가 舊辰韓系(六 村)의 경주 이동을 상정하는 점에서 六村에서 六部로 변화한다는 관점은 서로 유사하다. 그 변동의 시기에 대해서는 전자가 5세기 후반 慈悲王代 이후부터로, 후자는 婆娑王代 이후부터로 보는 것으로써 연대관이 매우 다르다. 어쨌든 辰韓六村說에 의하면 六村의 위 치는 辰韓지역에 해당하며, 初期記錄에는 斯盧國에 의해 복속되는 小國이 이 지역에 위치 하고 있다. 그런데 千寬宇의 移動說은 初期記錄 가운데 高句麗 靺鞨 百濟 加耶 關係記事와 小 國征服記事가 혼효된 부분에 대한 해석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보더라도, 上古 三姓王室 系譜의 모순점이나 倭關係記事와 혼착된 부분에 대한 해명에서는 그 실효성을 잃게 되는 문제가 있다. 특히 昔于老가 小國을 정복하거나37) 高句麗38) 百濟39) 加耶40)와 전투를 수행하는 한편으로 倭와도 전투를 전개하는41) 등의 부분에 대한 해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六村을 辰韓 諸小國과 관련하여 보는 점이다. 이는 新羅國 35)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제Ⅲ장 제2절과 제Ⅳ장 제1절에서 언급하겠다. 36) 千寬宇, 앞의 논문 上, p )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助賁尼師今 2年 7月條, 以伊湌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 地爲郡. 38)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助賁尼師今 16年 10月條,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群心感激. 39) 三國史記 卷45, 列傳 5 昔于老傳,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 滅之. 40)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奈解尼師今 14年 7月條,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41)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助賁尼師今 4年 7月條, 伊湌于老與倭人 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11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家의 성립과정과 그 궤를 같이하는 王京六部의 성립배경을 斯盧國의 小國征服에 두는 것 이며, 또 복속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가는 과정에서 服屬小國의 支配層이 경주로 이주되어 王京六部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42) 王京六部의 성립계기를 대외항쟁이 아 니라 小國征服에서 구하는 점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上古世系의 의문점을 간과하여 初期 記錄의 紀年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 六部의 각 始祖가 初降 한 곳과 六村의 위치는 及梁部를 제외하 면 모두 다른 점, 王京六部로 편제되기 이전에 辰韓에 六村이 존재하였다는 점, 六村과 六部가 동일하다는 설, 즉 斯盧六村說의 경우 六村에 대한 위치비정의 근거가 전혀 제시 되지 않아 문제시되는 점 등을 검토해 보았다. 즉 辰韓六村이나 辰韓六部의 위치는 新羅 國家의 王京六部와 달리 경주지역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 여기서 간취할 수 있는 것은 경주의 斯盧國 세력과 강원 남부동해안지역의 濊 세력을 포함하여 경북일대의 辰韓지역의 세력은 六村에서 六部로 변화하는 과정과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명의 위치비정에 의하면 위 기록의 六村은 경북일대에 분포하므로 경주지역에 위치 하는 斯盧六村이 아니라 경북일대에 위치하는 辰韓六村으로 보아야 한다. 赫居世의 居西 干 추대의 주체인 六部祖는 원래 辰韓六村의 지배세력이지만, 六部祖의 初降處 는 경주 지역에 위치하고 추대를 위한 회의장소 또한 閼川이다. 居西干 추대의 주체인 점에서 국 가의 지배집단으로 되었다. 후대에 賜與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姓氏는 소위 六部姓으 로서 新羅 중앙귀족층이므로, 辰韓지역 六村의 지배세력은 모두 辰韓지역으로부터 경주지 역으로 이주된 것이다. 즉 六部祖에 의해 추대된 居西干의 지위는 辰韓지역을 지배하는 王인 셈이며, 六部祖와 그 집단은 辰韓지역에서 王京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 행과정을 보면 辰韓六村에서 과도기 단계에 존재한 것이 辰韓六部이며, 辰韓六村 지역 가 운데 辰韓六部 지역 이외의 지배집단이 일차적으로 경주지역으로 이주하였으며, 辰韓 전 체의 지배집단에 의하여 赫居世를 居西干으로 추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赫居世의 건국설화는 斯盧六村說과 같이 新羅國家의 모체인 斯盧國의 건국 사 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43) 新羅國家의 건국 사실이다.44) 42) 이에 대해서는 제Ⅳ장 제1절에서 상세히 언급하겠다. 43) 三國史記 의 高句麗本紀나 百濟本紀의 경우에도 그 序頭에 建國說話가 기록되어 있다. 高句 麗의 경우 魏志東夷傳 夫餘傳에 실려 있는 東明說話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夫餘族 이동설화 는 高句麗 건국시조 朱蒙의 이동으로 구성하고 있다. 百濟의 경우도 東明說話에 기초하여 건 국시조 溫祚王의 남하에 의한 百濟 建國을 반영하고 있다. 新羅가 斯盧國에서 기원하여 辰韓 지역을 포괄하였듯이 百濟는 伯濟國에서 기원하여 馬韓지역을 포괄하였다. 특히 溫祚의 建國 說話는 伯濟國의 건국 사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百濟國家의 건국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溫祚王本紀에 馬韓 정복만으로 완결시키고 있으며, 그 후의 기록에서는 馬韓

12 國史館論叢 第69輯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자 하는 것은 新羅 건국의 시조로 나오는 赫居世王에 대하 여 보기로 하겠다. 赫居世의 칭호인 居西干은 辰韓人의 언어로 王을 의미하였는데, 이는 新羅國家 성립 이후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君長을 지칭하는 것이다. 語義상으로 보면 居西 干은 居西 는 크다(大)이고45) 干 은 君長이므로, 큰 干 즉 大君長을 의미한다. 初期記 錄 가운데 音汁伐主陁鄒干 46)이라는 기록에서 音汁伐國王 陁鄒의 칭호를 干 이라 하고 있다. 辰韓 小國의 君長인 臣智 등을 干 으로 기록한 것인데, 干은 6세기의 금석문에는 干支 또는 某干支 으로 분화되어 京位나 外位의 체계상 干群官等의 명칭으로 사용되 었다.47) 干은 辰韓 小國의 君長이 新羅國家 성립 이후에 이전의 斯盧國王 즉 新羅國王을 정점으로 서열화 되어진 것이며, 기록에 의하면 新羅國家의 王인 大首長은 바로 干 중의 干 인 麻立干48)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居西干은 麻立干과 다른 것49)이 아니라 같 은 의미로 이해되어진다. 2. 六部記事의 檢討 初期記錄에는 앞 절의 六村 六部 이외에도 六部에 관한 기사들이 다수 있다. 이를 열 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1 赫居世居西干 十七年(B.C.41)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나)2 南解次次雄 十一年(A.D.14) 倭人遣兵船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內 虛 來攻金城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 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知賊衆 乃止 나)3 儒理尼師今 十四年(37)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나)4 婆娑尼師今 二十三年(102)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謂 金官國 首露王年老 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 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祗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祗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 諸小國의 정복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新羅國家의 경우에는 赫居世의 建國說話가 辰韓지역을 포괄하고 있지만, 辰韓 諸小國의 정복에 대해서는 脫解王代에서 儒禮王代에 걸쳐 기재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44) 이에 대해서는 제Ⅳ장 제1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45) 李丙燾, (國譯)三國史記 上, p )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婆娑尼師今 23年 秋8月條. 47) 이에 대해서는 제Ⅳ장 제2절, 3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48)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謂諴操 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 三國史 記 卷3, 新羅本紀 第3 訥祇麻立干 卽位條 細註). 49) 三品彰英, 麻立干の原義を尋ねて ( 朝鮮學報 13, 1958; 古代祭政と穀靈信仰, 1973) pp

13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 83 汁伐主陀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陀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 王來降 나)5 祇摩尼師今立 (중략) 初婆娑王獵於楡湌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歧部 伊湌許婁饗之 酒 酣 許婁之妻 携少女子出舞 摩帝伊湌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庖 公於此 置盛饌美醞 以宴衎之 宜位酒多 在伊湌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 後云角干50) 나)6 奈解尼師今 十四年(209)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 伐湌利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나)7 沾解尼師今 五年(251) 春正月 始聽政於南堂 漢祗部人夫道者 家貧無諂 工書算著名於時 王徵之爲阿湌 委以物藏庫事務51) 나)1은 始祖王이 王妃와 함께 勸農을 위하여 六部를 순행하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순행이란 왕이 전국을 순회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뒤에서 살펴보겠지 만, 始祖王本紀에는 상징적인 기사들이 많으므로 이 기사 역시 新羅 王者의 이상적인 유 교관념이 투영되어 있을 뿐이다. 나)2 역시 倭人의 침범에 대응하는 新羅에 樂浪이 기습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初期記錄 상에 보이는 倭人 및 樂浪에 관한 기사들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樂 浪 關係記事는 新羅本紀 뿐만 아니라 百濟本紀와 高句麗本紀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百 濟本紀의 경우 모두 樂浪太守 로 기재되고 있으므로52) 樂浪의 실체는 中國 郡縣인 樂浪 郡으로 볼 수 있다. 그와 달리 高句麗本紀의 경우는 두개의 樂浪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 나는 大武神王 15年(32)에 王子 好童이 沃沮에 유람하였을 때 만났다고 하는 樂浪王 崔 理의 樂浪이다.53) 또 하나는 同王 27年 後漢 光武帝가 다시 설치한 이후의 樂浪郡 기사 가 있다.54) 魏志東夷傳 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전자의 경우는 沃沮에 있었던 세력을 高句麗가 초기에 복속한 것을 말한다. 이를 樂浪이라 한 것은 원래 이 지역에 있었던 臨 屯郡이 漢四郡 설치 직후에 폐지되었다가 樂浪郡이 그 중의 일부 지역을 東部都尉로 통 할한 것55)에 연유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후자의 樂浪은 물론 中國 郡縣인 樂浪郡을 가리 키는 것이다. 즉 高句麗本紀와 百濟本紀에 보이는 樂浪은 그 실체가 中國 郡縣인 樂浪郡 과 그 관할 아래 있었던 沃沮지역으로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50) 이상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51) 이상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52)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第1 始祖 溫祚王 4年 8月 8年 7月 11年 4月 13年 5月 17年 春 18年 11月條 및 同卷24, 古爾王 13年 8月條 등에 기재되어 있다. 53) 三國史記 卷14, 高句麗本紀 第2 大武神王 15年 4月條. 54) 三國史記 卷14, 高句麗本紀 第2 大武神王 27年 9月條 및 閔中王 4年 10月條, 同卷 17 東 川王 20年 8月 10月條 및 美川王 14年 10月條 참조. 55) 魏志東夷傳 東沃沮傳.

14 國史館論叢 第69輯 新羅本紀의 樂浪은 始祖王代부터 나타나 樂浪의 멸망으로 新羅에 來投한 나)3의 儒理 王 14년까지 기재되어 있다.56) 그 후에 보이지 않다가 基臨王 3년(300) 樂浪國과 帶方 國이 歸服되었다57)고 하고 있다. 전자의 樂浪 關係記事는 나)3으로 일단락되는 점에서 大武神王 20년에 보이는 沃沮지역의 樂浪58)과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樂浪이 新 羅의 수도인 경주지역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특히 나)3의 기사 에서 高句麗에 복속된 沃沮지역의 樂浪人이 新羅에 투항하였다는 의미는 三國史記 編 纂者가 高句麗의 호전성에 대하여 新羅를 유교적 이상국가로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려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 전후 당시 斯盧國에 불과하였던 新羅가 한강 이북지 역의 樂浪과 충돌한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3의 樂浪 기사는 6세기 중엽 新羅가 함흥지역에 진출한 사실을 高句麗本紀에서 1세기 중엽에 高句麗가 옥저지역 을 영유한 사실에 부회하여 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新羅가 그 지역에 진출하게 되는 시기는 적어도 6세기 중엽 眞興王 代부터로 볼 수 있다. 初期記錄 중에서 함흥지역과 관련있는 기사로는 靺鞨關係記事가 있 는데, 大嶺柵, 泥河, 長嶺鎭 등 일련의 지명에서 보아 沃沮가 위치하였던 함흥부근의 지 역에 해당한다. 즉 初期記錄의 靺鞨關係記事는 6세기 중엽 眞興王代의 高句麗 10郡 영유 이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옮겨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외의 初期記錄에는 6세기 중 엽까지 新羅의 영역에 편입되는 지역들에 대한 기록들이 보이고 있다. 즉 赫居世王 19년 (B.C.39)에 卞韓 내항기사로 설정해 두었던 점과 이어서 赫居世王 5년(B.C.5) 東沃沮의 良馬 헌상, 南解王 16년(A.D.19) 北溟(강릉)人의 濊王印 헌상, 儒理王 17년(47) 華麗縣 (영흥) 不耐縣(안변)의 新羅 공격에 대한 貊國(춘천) 渠帥의 방어 등의 기록59)에서 이들 지역은 6세기 중엽에 新羅가 진출하였던 곳이다.60) 다시 말하면 三國史記 新羅本紀 初期記錄 가운데 脫解王 이전의 기록에는 新羅가 최 대의 판도를 이룩하였던 시기의 영역을 新羅本紀의 序頭 부분에 기재하여 三國史記 라 는 史書의 題名에 합당한 영토관념을 심어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관념적인 기재방식은 百濟本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삼국시대 百濟國家의 위치는 그 이전의 馬韓의 영역과 부 합되는데, 百濟本紀에는 始祖 溫祚王代인 서기 8년에 馬韓이 멸망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61) 그러나 中國正史인 晉書 에 의하면 馬韓은 3세기 말에도 西晉과 교섭하고 있으 56)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始祖 赫居世居西干 30年 4月 38年 2月條와 南解次次雄 元年 7月 11年條. 57)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58) 三國史記 卷14, 高句麗本紀 第2 大武神王 20年 9月條. 59) 이상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60) 宣石悅, 앞의 논문( 釜大史學 17, 1993) pp

15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 85 며,62) 百濟의 경우는 近肖古王 27년(372)에 東晉과 처음으로 교섭하고 있다.63) 특히 赫居世王 19년(B.C.39)에 弁韓 來降記事로 설정해 두었던 점64)은 6세기 중엽까 지 존재하다가 新羅에 병합되었던 加耶를 三國史記 의 本紀에서 배제시키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이 사실에 의거하면 三國史記 의 편찬방침은 各國 本紀의 序頭 부분에 대체로 3세기 말이나 6세기 중엽까지 존속하였던 夫餘 馬韓 卞韓(加耶) 등에 대해 기재 해 두면서도 高句麗 百濟 新羅의 삼국만을 그 대상으로 국한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 나)2의 기록에서 서기 1세기 초엽에 왜인의 침입 규모가 100여 척, 新羅의 낙랑 추격병이 1천인이라 한 것은 斯盧國에 불과한 新羅나 100여 小國으로 존재한 일본열도의 형세에서 보아 동원될 수 없는 규모라고 생각된다. 나)2의 전투 규모로 보아도 初期記錄 의 倭人關係記事는 상당수가 훨씬 후대의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그 외의 기사들도 三國 史記 의 기년 그대로의 사실로 볼 수 없을 것이며, 新羅 上古王統의 紀年을 인하하여 보 면 기록상황과도 부합될 것이다. 나)6은 加耶關係記事로서 勿稽子列傳65)에 의하면 保羅國(전남 나주 영암), 古自國(경남 고성), 史勿國(사천), 柒浦國(창원), 骨浦國(마산) 등 浦上八國이 阿羅加耶를 공격하였다고 하여 新羅本紀의 내용을 보다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新羅가 浦上八國에게 사로잡힌 포로를 阿羅加耶에게 송환한 것이 6천인이라는 점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더라 도 3세기 초 당시의 사실로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浦上八國이 공격한 加耶가 어느 곳인 가에 대해서는 김해의 狗邪國(金官國)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또 그 기년에 대한 관 61)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 第1 始祖 溫祚王 27年 4月條. 62) 晉書 卷3, 帝紀 第3 武帝 太康 7年(286), 是歲 馬韓等十一國 遣使來獻 및 同卷96, 列傳 馬韓傳條의 太熙元年(290) 詣東夷校尉何龕上獻. 63) 晉書 卷9, 帝紀 第9 簡文帝 咸安 2年(372) 正月 辛丑日條에 百濟 林邑王各遣使貢方物 이 라 하는데, 그런데 이 기록은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第2 近肖古王 27年(372) 春正月條 에 遣使入晉朝貢 이라고 하여 위의 중국정사의 기록을 轉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4) 三國史記 新羅本紀 初頭에 보이는 始祖 赫居世 19年條의 弁韓 來降記事도 위의 기사들에서 보면 그 기년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 기사는 法興王 19년(A.D. 532)의 金官國 내 항기사(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第4 法興王 19年條)와 眞興王 23년(A.D. 562: 壬午年)의 大加耶 멸망기사(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第4 眞興王 23年條)에 대비된다. 즉 弁韓 來降記 事와 中古時期의 기사를 대비해 볼 경우 王의 在位年次나 干支年次가 일치하고 있는 것은 흥 미로운 사실이며 初期記錄 중에서 高句麗 百濟 加耶 關係記事의 기년 추정의 기준이 되었다 (주 18의 세 논문). 65) 三國遺事 卷5, 避隱 第8 勿稽子條,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 古自國(細註: 今固 城) 史勿國(細註: 今泗州)等 倂力來侵邊境 王命太子㮈音將軍一伐等 率兵拒之 八國皆降 (중략) (二)十年乙未 骨浦國(細註: 今合浦也)等三國王 各率兵來攻竭火(細註: 疑屈弗也 今蔚州) 王親 率禦之 三國皆敗 (중략) 夫保羅(細註: 疑發羅 今羅州) 竭火之役. 三國史記 卷48, 列傳 8 勿稽子傳,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 (중략)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 國 阿羅使來請救 尼師今使王孫㮈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중략) 後三年骨浦 柒浦 古史浦三國人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16 國史館論叢 第69輯 점은 논자마다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 기년을 신빙하는 시각에서는 기록의 연대 그대로 3세기 초에 일어난 사실로 이해하고 있으며,66) 修正論의 관점에서는 4세기대 中國郡縣의 소멸로 인한 弁韓 辰韓 사회의 분열상을 반영하는 사실로 보았다.67) 한편 初期記錄 자 체를 허구로 보고 불신하는 입장인 일본학계에서는 三品彰英의 주장68) 이래 浦上八國의 亂을 眞興王代의 加耶 평정 이후의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69) 우선 三國史記 에서 加耶나 加羅의 지칭은 포괄적인 경우가 많으며, 勿稽子傳(同卷 48)에 의하면 阿羅國 이라고 明記되어 있으므로 여기서의 加耶란 바로 安羅 즉 阿羅加 耶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浦上八國 가운데 保羅國은 弁韓이나 辰韓 지역의 小國이 아 니라 영산강하류의 나주지역에 위치함에서70) 보아 이들 세력은 남해안 전체에 위치하는 것이며, 4세기대의 弁辰韓 사회의 분열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이다. 또 기록 의 내용 그대로를 인정하지 않고 막연히 加耶 평정 이후의 사건으로도 해석할 수 없다. 즉 기록 그대로를 인정한 위에서 해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532년 김해 金官國이 新羅 에 투항한 이후 야기되었던 사건이었다. 6세기 전반 百濟가 남해안지역 즉 下韓으로 진 출하자71)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게 된 阿羅加耶가 親新羅의 성향으로 돌아서게 되었는데, 이때 百濟의 배후 조종에 의해 남해안의 8개 세력집단이 阿羅加耶를 공격한 사실이라 생 각된다.72) 따라서 이 기사는 6세기 중엽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이므로 3세기 당시에 일어 난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위의 기록 가운데 그 당시의 해당 王代에 일어난 사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나)4 나)5 나)7의 기사이다. 먼저 나)4는 辰韓지역의 두 小國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斯盧國 의 主帥가 해결하기 곤란하여 金官國 즉 弁韓의 狗邪國의 主帥를 초청하여 해결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몇 가지로 나누어 검토해 볼 수 있다. 66) 李鍾旭, 앞의 책(1982) p.89. 李賢惠, 4세기 加耶社會의 交易體系의 변천 ( 韓國古代史硏究 1, 1988). 白承忠, 1 3세기 加耶세력의 성격과 그 추이-수로집단의 등장과 浦上八國의 난을 중심으로 - ( 釜大史學 13, 1989). 67) 李永植, 伽倻諸國의 國家形成問題 -伽倻聯盟說의 再檢討와 戰爭記事分析을 中心으로- ( 白 山學報 32, 1985) 및 金泰植, 加耶聯盟史 (1993) p ) 三品彰英,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 (1962) pp ) 鬼頭淸明, 加羅諸國の史的發展について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 1974). 70) 三國遺事 卷5, 避隱 第8 勿稽子條, 夫保羅(細註: 疑發羅 今羅州) 竭火之役. 71) 日本書紀 에 의하면 百濟가 下韓 즉 加耶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10 여 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日本書紀 卷19, 欽明 4年(543) 11月條, 丁亥朔甲午 遣津守連 詔 百濟曰 在任那之下韓 百濟郡令 城主 宜附日本府 幷特詔書 宣曰 爾屢抗表 稱當建任那 十餘年 矣 ), 이는 繼體 23年(529) 4월에 新羅의 異斯夫가 任那 4村을 공략하자 同年 9월에 百濟軍 이 등장하고 있음을 두고 10여 년이라 하는 것 같다(同卷17). 72) 宣石悅, 앞의 논문( 釜山史學 24, 1993)

17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첫째, 이 사건의 시기가 언제인가이다. 三國史記 의 紀年으로는 서기 2세기 초이지만 믿을 수 없다. 우선 魏志東夷傳 에 의하면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 制御 라 하여 서기 3세기 중엽까지도 삼한의 小國이 소속 읍락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 던 단계에 있었는데, 서기 2세기 초에 小國간의 분쟁이 복잡하게 일어나 이를 주변 小國 의 중재에 의해 해결된다는 상황은 발생하기가 어렵다. 三國史記 에 의하면 婆娑王과 5 세기 초엽에 활동한 朴堤上은 5세대의 차이가 나고 있으므로73) 뒤에서 언급하듯이 婆娑 王의 재위시기는 대략 3세기 말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 분쟁의 해결과정에 대한 문제이다. 辰韓 小國이 인근의 斯盧國에게 그 해결을 요 청한 점은 斯盧國이 주변 小國보다 유력한 小國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斯盧國의 主帥 가 弁韓의 유력 小國의 主帥에게 중재를 요청하고 있는 점은 辰韓의 유력 小國이 弁韓의 유력 小國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셋째, 王命六部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祗部以位卑者主之 라는 기록에서의 6 部의 실체 문제이다. 晉書 의 일련의 교섭기사에 의하면 辰韓지역 단위의 교섭이 이루어 진 사실을 볼 때 3세기 말엽 당시 斯盧國은 辰韓 小國을 대표하여 교섭을 전개한 것으로 생각된다.74) 위의 나)4 사료와 다음 장에서 언급할 上古紀年의 引下를 참조하면 이 교섭 을 주도한 斯盧國王은 바로 婆娑王이라 할 수 있다. 이 배경에는 철 자원의 교역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3세기 중엽에 철을 수출하였던 변진은 弁韓 뿐만 아니라 辰韓지역도 포 함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교역대상이 韓 濊 倭라고 한 점에서75) 동해안지역의 濊가 교섭할 수 있는 대상은 경계를 접하고 있는 辰韓76)이 가장 유리할 것이고, 倭의 경 우도 弁韓지역 뿐만 아니라 동남해안의 辰韓지역에서 철을 구입하였을 것이다. 뒤에서 다 시 언급하겠지만 悉直谷國은 濊의 古國이라는 何瑟羅 부근이므로 辰韓 小國이라기보다 오히려 濊族系統의 小國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동남해안지역에 위치한 斯盧國은 辰韓 과 濊 지역의 교섭관계 상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4의 六部의 존재는 의문이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王京六部의 기원이 되는 辰韓六村이나 辰韓六部는 경주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므로, 斯盧國王인 婆娑王代에 六 部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특히 初期記錄에 漢祗部가 자주 등장하는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脫解가 辰韓지역에 도착하였다는 阿珍浦77)는 가)3에 의하면 高麗 73) 三國史記 卷45, 列傳 5 朴堤上條. 74) 宣石悅, 新羅 初期 斯盧國의 成長과 東夷傳 ( 慶大史論 7, 1994) pp ) 魏志東夷傳 弁辰傳,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76) 魏志東夷傳 濊傳, 濊 南與辰韓 北與高句麗 沃沮接. 77) 三國遺事 卷1, 紀異 第2 第四脫解王條, 脫解齒叱今 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珍浦(細註: 今 有上西知下西知村名).

18 國史館論叢 第69輯 初의 慶州六部 가운데 加德部에 속하는 것으로 新羅 王京六部의 漢祗部이다. 3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漢祗部는 울산지역에 해당하며 석씨집단의 근거지이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金山加利村은 개령-성주지역으로서 甘文國과 半路國이 존재하였으며, 후에 斯盧國에 복속되었다. 따라서 漢祗部와 金山加利村의 양자는 위치 상에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즉 辰韓六村과 王京六部는 서로 직결되는 관계를 설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7의 기사는 뒤에서 언급하듯이 上古紀年을 수정하면 4세기 중엽에 해당하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뒤에서 보듯이 이것은 석씨집단의 근거지인 漢祗部의 유능한 인 물을 南堂에 초치하여 석씨왕실이 지배기반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본 장에서 검토한 바를 종합하면 初期記錄 상의 六部는 기년 그대로의 사실을 반영하 는 것이 아니다. 辰韓六村과 辰韓六部는 경주지역이 아니라 경북일대에 존재하는 것이므 로, 경주지역의 王京六部와는 위치를 달리하고 있었다. 또한 初期記錄의 漢祗部를 예로 살펴보았듯이 辰韓六村 또는 斯盧六村과 王京六部도 기왕의 견해와 같이 서로 대입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따라서 新羅 六部制의 성립에는 어떤 단계성이 개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Ⅲ. 辰韓 六村의 形成 1. 斯盧國의 辰韓 諸小國 征服 三國史記 初期記錄에 의하면 新羅가 초기부터 주변 小國을 정복하고 있는 기록이 보 인다. 그것을 표로 작성하여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도 가장 먼저 유의해야 할 점은 小國을 정복한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즉 新羅인지 斯盧國인지가 문제시된다.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위의 小國들의 지역 분포를 보 면 경주를 제외한 영남 전지역과 강원도 남부의 동해안지역에 해당한다. 그 범위는 6세 기 전반까지의 新羅 강역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경주지역이 제외된 점은 이들 小 國을 정복한 주체는 新羅가 아니라 바로 斯盧國이었음을 방증해 준다. <표 3>에서 보이 듯이 斯盧國은 初期記錄 상의 연대로서는 서기 1세기 중엽부터 3세기 말까지 영남지역의 대부분을 복속하고 있었던 셈이다. 三國史記 初期記錄과 달리 中國正史의 동시대기록에 서는 삼한지역에서 小國征服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표 3> 初期記錄에 보이는 小國征服

19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國 名 于尸山國 居柒山國 屈阿火村 音汁伐國 悉直谷國 押督國 比只國 多伐國 草八國 召文國 骨浦國 柒浦國 古自國 史勿國 保羅國 甘文國 骨伐國 沙梁伐國 古寧加耶 伊西國 河西良 기 록 연 대 脫解王代(57-80) 脫解王代(57-80) 婆娑王代(80-112) 婆娑王 23년(102) 婆娑王 23년(102) ①婆娑王 23년(102) ②祗摩王代 婆娑王 29년(108) 婆娑王 29년(108) 婆娑王 29년(108) 伐休王 2년(185) 奈解王 14년(209)? 奈解王 14년(209)? 奈解王 14년(209)? 奈解王 14년(209)? 奈解王 14년(209)? 助賁王 2년(231) 助賁王 7년(236) 沾解王代( ) 沾解王代( ) 儒禮王 14년(297)이전? 위치 비정 울 산 동 래? 울 산 안 강 삼 척 경 산 경 산 창 녕 합 천 초 계 의 성 마 산 창 원 고 성 사 천 나 주 개 령 영 천 상 주 상 주 청 도 강 릉 典 據 列傳4, 居道傳 同上 地理1, 臨關郡 本紀1 本紀1 本紀1 地理1, 章山郡 本紀1 本紀1 本紀1 本紀2 本紀2 本紀2 本紀2 本紀2 本紀2 本紀2 本紀2 列傳5, 昔于老傳 地理1, 尙州 本紀2 地理2, 溟州 - 89 복속 비 고 형태 정복 정복 정복 정복 내 항 同王 24년 반란 내 항 逸聖王 13(146)년 정 복 반란 정복 정복 정복 정복 격퇴 三國遺事 卷5, 격 퇴 勿稽子條에는 격 퇴 王 17 20년의奈解 격 퇴 일로 되어 있다 격퇴 정복 내항 정 복 百濟귀속 응징 정복 정복 후속? 濊의 古國 즉 魏志東夷傳 에서 기술되고 있듯이 3세기 중엽까지 삼한지역의 크고 작은 小國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小國의 주도집단인 국읍의 지배자 主帥가 주변에 흩어져 있는 小 國 소속의 읍락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78) 小國의 지배력이 결집되지 못 하여 다른 小國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양성되지 않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晉書 에 의하면 3세기 말엽부터 삼한의 小國들 가운데 지배력을 결집한 小國들이 각 지역단위로 세력권을 형성하여 중국의 西晉과 직접 교섭을 전개하였다. 그 후 新羅의 경우에도 武帝 太康 元年(280)부터 太熙 元年(290) 사이에 西晉과 빈번한 교섭을 전개하고 있었다.79) 4 세기 후반 新羅는 북중국의 前秦에 高句麗의 중개로 사신을 파견하여 辰韓지역에서 급부 78) 魏志東夷傳 韓傳. 79) 晉書 卷97, 東夷傳 辰韓傳.

20 國史館論叢 第69輯 상한 점,80) 그리고 百濟가 馬韓지역의 대표세력으로 부각된 점 등은 그간의 변화를 반영 하는 것이다. 즉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 사이에 삼한의 小國들이 자국의 읍락 통제 력을 강화하고 小國 간의 경쟁과 통합이 이루어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81) 이러한 사실과 三國史記 新羅本紀의 初期記錄은 전혀 그 내용을 달리하고 있다. 특 히 앞의 <표 3>에서 제시된 婆娑王 29년의 比只國 多伐國 草八國 정복기사와 奈解王 14년의 浦上八國 격퇴기사는 6세기 전반 新羅가 加耶 諸國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필자는 언급한 적이 있었다.82) 이외에 辰韓지역의 小國征服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엽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 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해결의 실마리는 新羅上古 王統의 紀年을 修正論的인 方法으로 인하해 보면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新羅 上古王室의 3姓 系譜는 각 세대간의 연령 차이가 큰 점에서 의문이 가는 경우가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전승이 확실한 인물을 기준으로 소급하여 추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朴氏王系의 경우 418년에 사망한 朴堤上은 婆娑王 ( 재위)의 5世孫83)이다. 양자의 세대 차이는 5세대이지만 사망년대로 보면 그 차 이는 306년으로 1세대당 60여 년이나 되어 문제가 있다. 昔氏王系의 경우 異次頓( 생존)은 訖解王( 재위)의 曾孫으로 527년 26세의 나이에 佛敎 公認問題와 연루되어 殉敎하였다.84) 양자는 3세대 차이로서 사망년대의 차이가 171년으로 1세대 마 다 57년이나 되어 문제가 된다. 金氏王系의 경우 仇道( 활동)와 味鄒王( 재위), 末仇(291 角干)와 奈勿王( 재위) 사이에 각기 93년, 100여 년으로 연 령 차이가 문제된다. 반면에 金氏始祖인 閼智(65년생85))에서부터 仇道까지의 경우 5세대 차이로서 세대간의 평균 연령차이는 20여 년으로 되어 오히려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初期記錄 가운데 동일인물의 활동연대의 차이가 120년 또는 180년 이상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86)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三國史記 에 보이는 新羅 上古紀年의 편성과정에서 일어난 중대한 실수라고 여겨진다. 80) 通典 卷285, 邊防典 1 東夷 上 新羅傳 및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奈勿尼師今 26年條. 81) 宣石悅, 앞의 논문( 慶大史論 7, 1994) pp ) 宣石悅, 앞의 논문( 釜山史學 24, 1993) pp ) 三國史記 卷45, 列傳 5 朴堤上傳,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阿道葛文王 父勿品 波珍湌. 84) 三國遺事 卷3, 原宗興法 厭髑滅身條, 新羅本記 法興大王卽位十四年 小臣異次頓爲法滅身 粤有內養者 姓朴字厭髑 其父未詳 祖阿珍宗 卽習寶葛文王之子也(分注: 又按金用行撰阿道碑 舍人時年二十六 父吉升 祖功漢 曾祖乞解大王). 85)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脫解尼師今 9年 春三月條. 86) 宣石悅, 新羅 官等體系의 成立 ( 釜山史學 20, 1991) p.6 <표> 및 pp

21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 91 그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順宣이 祇摩王 2년(113) 級湌에 임명된87) 후 儒禮王 14년(297) 沙湌으로 승진한88) 점에서 이들의 기록 사이에는 184년의 차이가 나게 된다. 또 하나는 翌宗이 祇摩王 10년(121) 伊湌에 임명된89) 후 沾解王 9년(255) 伊伐湌으로 百濟와의 전투에서 전사한90) 기록 사이에는 124년의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 두 기록 의 연대차 가운데 180년을 무시하고 나머지 4년을 지마왕 2년에 가산하면 同王 6년이 되며, 이는 儒禮王 14년과 기년이 같은 셈이다. 이와 같이 환산해 보면 후자의 경우는 祇摩王 14년이 沾解王 9년과 같은 연대인 셈이다. 후자에 기준을 두고 朴氏王系의 기년을 조정할 경우 脫解王과 그의 손자 伐休王의 계보관계 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전자를 기준으로 할 경우는 脫解王과 伐休王의 혈연관계가 역 으로 되어 더욱 더 불합리하다. 특히 于老와 그 아들 訖解의 경우 于老가 사망한 해(249 년)91)의 干支年次가 己巳年이고, 訖解王의 즉위년(310년)92)의 干支年次는 庚午年이다. 이들 干支年이 시간적으로는 앞뒤로 연결되어 干支 60년 즉 1周甲은 기년 편성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차이다.93) 이러한 점은 三國史記 편찬 이전에 신라가 上古王室의 紀年을 편찬 하는 과정에서의 실수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脫解王과 伐休王의 경우 계보기록과 같이 祖 孫關係를 인정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후자의 기준에서 60년을 더해야 한 다. 이와 같은 점에 유의하여 新羅 상고 왕실세계의 기년을 재조정하면 <표 4>와 같다.94) 재조정한 기년에 기초하여 보면 于尸山國과 居柒山國은 3세기 후반의 脫解王代에, 屈 阿火村 音汁伐國 悉直谷國 押督國은 3세기 말의 婆娑王代에, 召文國은 3세기 말의 伐 休王代에, 甘文國과 骨伐國은 4세기 중엽의 助賁王代에, 沙梁伐國과 古寧加耶國은 4세기 중엽의 沾解王代에 각각 정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伊西國은 4세기 말에 해당하는 儒禮王 이전 즉 4세기 후반보다 이른 시기에 斯盧國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新羅國家의 모체인 斯盧國이 辰韓지역의 諸小國을 정복한 것이며, 이로써 斯盧國 은 辰韓지역을 통합하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표 4> 新羅 상고 왕실세계의 기년 추정 87)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1, 祇摩尼師今 2年 春2月條, 親祀始祖廟 拜昌永爲伊湌 以參政事 玉權爲波珍湌 申權爲一吉湌 順宣爲級湌. 88) 위의 책 卷2, 儒禮尼師今 14年 春正月條, 以智良爲伊湌 長昕爲一吉湌 順宣爲沙湌. 89) 위의 책 卷1, 祇摩尼師今 10年 春正月條, 以翌宗爲伊湌 昕連爲波珍湌 林權爲阿湌. 90) 위의 책 卷2, 沾解尼師今 9年 秋 9月條, 百濟來侵 一伐湌翊宗逆戰於槐谷西 爲賊所殺. 91) 위의 책 卷2, 沾解尼師今 3年 4月條. 92) 위의 책 卷2, 訖解尼師今 卽位條. 93) 宣石悅, 앞의 논문(1991), p ) 新羅 上古世系의 紀年에 관한 고찰은 1994년 12월 9일(금)에 있었던 제 24회 釜大史學 발 표회에서 언급한 바 있었다.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일일이 열거하여 두지 않고 요점만 언급하 기로 하고 다음 기회에 상세히 제시하겠다.

22 國史館論叢 第69輯 朴 儒理王 婆娑王 祇摩王 逸聖王 阿達羅王 *婆娑王?? 阿道 勿品 朴堤上(? 418) 氏 *356 昔 脫解王 伐休王 奈解王 助賁王 沾解王 儒禮王 基臨王 訖解王 功漢 吉升 異次頓 氏 *437 ( ) 金 (閼智)-勢漢-阿道-首留-旭甫-仇道 味鄒王 奈勿王 實聖王 訥祇王 慈悲王 氏 * 阿達羅王은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에 의하면 재위 31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 으나, 재위 21년에서 재위 31년 사이에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리고 21年條에 2月 기사 까지 기재되고 31年條에는 3月의 사망기사 뿐이다. 21년의 2월과 31년의 3월은 서로 연 결되는 셈인데, 이는 재위기간을 10년 더 연장시키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또한 赫居世王 과 伐休王의 卽位年을 太歲干支의 첫해인 甲子年으로 두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즉 甲子 革命說의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金哲埈, 앞의 논문, 1962; 앞의 책, 1975, p.91). 유사 한 예로 昔氏의 마지막 왕인 訖解王의 경우에도 6년 연장되어 있다. 그런데 잠시 언급해야 할 것은 위의 <표 4>에서 보듯이 경주 斯盧國의 朴氏王室과 昔 氏王室이 거의 같은 시기에 並立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斯盧國이 辰韓 小國을 복 속하게 되는 내부적인 기반과 그 주체는 무엇인가이다. 3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斯盧國은 國邑과 小別邑의 세력이 연계됨으로써 小國의 일반 읍락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즉 小 別邑을 지칭하는 蘇塗 가 王京六部의 하나인 沙喙部의 沙喙 과 音相似한 점에서 小別 邑 세력은 六部가 성립한 이후에 沙喙部로 편제되었고, 國邑세력은 喙部로 되었음을 방증 한다.95) 上古 王室을 구성한 朴 昔 金 3姓 가운데 閼智系의 金氏集團은 小別邑의 天君 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文武王陵碑文에 의하면 金氏始祖인 十五代祖星漢王 의 후예는 祭天之胤 이라 하였는데,96) 金氏集團이 小別邑 즉 蘇塗의 天君으로서 小國의 祭天儀禮 를 주관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金氏集團은 天君 즉 司祭로서 존재하였지만, 斯盧國의 읍락통제력 강화과정에서 정치적 기능을 보유하게 되었다.97) 다음 脫解와 儒理가 尼師今을 다투었다는 점98)이나, 위의 上古紀年의 推定에서 보듯이 儒理王과 같은 시기에 朴 昔 두 왕실이 並立한 이후 朴氏王과 昔氏王이 독자적으로 왕 95) 宣石悅, 앞의 논문(1991), p ) 朝鮮金石總覽 上, p ) 徐永大는 고대의 종교직능자를 샤먼형과 사제형으로 크게 나누고, 그 중 전문지식을 가지며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제형에는 왕 천군 등이 있었으며 이들 사제가 정치적 역할을 가지 게 되는 것은 수장사회부터라고 하였다( 韓國古代 神觀念의 社會的 意味, 서울대 박사학위논 문, 1991, pp ). 필자의 생각으로는 소별읍의 천군은 원래 사회적 기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국읍과 연합한 이후부터는 국읍과 함께 小國내의 읍락들을 통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정치적 기능을 띠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98)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儒理尼師今 卽位條.

23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위를 계승하고 있는 점 등에서 보아 두 왕계는 경주지역과 울산지역에서 각기 세력기반 을 구축하고 있으면서 상호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즉 3세기 중엽 이후의 漢祗部란 바로 석씨 중심의 세력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앞 장의 나)5 기사는 울산지 역과 경주지역 사이에 혼인과 세력 경쟁 등을 통하여 세력이 결집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석씨집단이 박씨집단과 함께 경쟁할 수 있는 세력기반은 脫解를 冶匠 으로 표현하듯이99) 철의 생산과 교역을 통하여 동남해안지역을 장악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 이다. 尼師今 즉위경쟁의 의미는 辰韓지역에서의 주도권 경쟁이며, 南解王이 혼인을 매개 로 脫解와 연계하려 한 것100)도 昔氏集團의 위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小國征服記事 가운데 의아스러운 것은 脫解王代에 居道가 于尸山國(울산)과 居柒山 國(동래?)을 정복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脫解王의 등장 이후 석씨집단이 울산지역을 장악 하여 세력기반으로 삼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101) 그러나 박씨집단과 달리 석씨집단은 세력 변동이 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세기 후반 脫解王의 死後(수정연대 : 275)102) 울산세력은 仇鄒 保齊로 계승되었으나, 婆娑王 23년 ( 284)의 小國 紛爭事件에 연루되어 남해안 해상교역체계 상의 경쟁세력인 김해의 金官 國에 의해 견제당하였다. 앞 장의 나)7에 보이듯이 斯盧國의 婆娑王은 울산세력과의 세 력 연계를 위하여 許婁 摩帝 등과의 혼인이나 許婁를 울산세력의 대표자로 인정하여 울 산지역 내부의 세력 경쟁을 조정하기도 하였다. 4세기 초엽 伐休王代( ) 이후에 는 김씨세력과 연합하여 召文國 甘文國 骨伐國 古寧加耶國 등을 복속하고 이전에 복 속되었던 押督國 沙梁伐國 伊西國 등의 반발을 응징하고 있는 점에서 양 세력의 연계 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小國 복속에서 朴 昔 두 왕실 이외의 세력집단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김씨집단이었다.103) 따라서 斯盧國의 小國征服은 朴 昔 金 3姓集團의 세력 연계에 의해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99) 三國遺事 卷1, 紀異 第2 脫解王條. 100)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南解次次雄 5年 春正月條,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101) 3세기 중엽 脫解王代에 동래의 居柒山國을 정복하였다는 것은 약간의 설명을 요한다. 6세기 초 智證王代에 異斯夫가 加耶를 공취하였다는 기록에서 居道의 술책을 본땄다는 점인데( 三國 史記 卷44, 列傳 4 異斯夫傳), 日本書紀 에서 보면 異斯夫가 金官加耶를 공격한 것으로 되 어 있음에서 동래를 공격하여 金官加耶를 위협하게 된 것은 말한다(卷17, 繼體 23年 4月 是 月條). 그러나 駕洛國記 에서의 首露王과 脫解王의 경쟁은 울산지역을 근거로 하는 脫解王이 주도하여 남해안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辰韓의 斯盧國과 弁韓의 狗邪國(金官 國)의 충돌이라 생각된다. 3세기 말엽의 소국쟁강사건이나 400년을 전후하여 廣開土王의 남 정 및 朴堤上傳의 공물탈취사건을 참고하여 보아도 양국의 해상에서의 세력경쟁은 지속적으로 전개된 것이며, 그 시초는 脫解王의 居柒山國 정복으로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한다. 102) 이하 수정 연대는 로 표시. 103) 예를 들면 仇道의 召文國 복속(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伐休尼師今 2年 2月條), 味鄒 王 竹葉軍의 伊西國 복속(同卷2, 儒禮尼師今 14年條) 등이 있다.

24 國史館論叢 第69輯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初期記錄에 보이는 新羅의 辰韓 小國정복은 1세기 중엽부터 3 세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고 기년을 수정 인하한 연대에서 추정해 보면 斯盧 國이 자국의 지배체제를 강화해 나가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엽 사이에 걸쳐 주변의 小國들을 정복한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初期記錄에 보이는 小國征服記事 는 中國正史의 기록과도 서로 잘 부합되며 初期記錄을 역사적 사실로서 복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辰韓聯盟體와 六村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新羅 상고 기년을 인하하여 볼 경우 斯盧國에 의해 정복되었 다고 할 수 있는 小國은 대부분 그 위치가 영남지역 가운데 弁韓이 아닌 辰韓의 지역에 해당된다. 그리고 六村의 경우에도 辰韓지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 절에서는 이들 服屬 小國과 六村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의 閼川楊山村은 주지하다시피 경주지역에 비정된다. 魏志東夷傳 에 의하면 경주 지역에 위치하는 辰韓時期의 小國은 斯盧國이다. 앞의 사료 가)3에 의하면 이 村의 始祖 가 初降 한 곳을 瓢嵒峯이라 하는데, 이곳은 경주지역으로서 이 村의 위치와 일치한다. 둘째의 突山高墟村은 일반적으로 상주지역과 안동지역에 비정된다. 상주지역에 위치하 는 辰韓時期의 小國은 初期記錄 상의 沙梁伐國과 古寧加耶國이다. 안동지역의 경우 본래 古陁耶郡104)이라 하지만, 그 이전에 小國으로 존재한 시기가 있다고 본다면 古陁耶國으 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村의 始祖가 初降 한 곳을 兄山이라 하여 경주지역에 비정된 다. 셋째의 茂山大樹村은 예천지역과 의성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이 중 예천지역에 위 치하는 辰韓時期의 小國은 잘 알 수 없으나, 麻立干時期의 기록인 朴堤上傳에 水酒村105) 이 보이고 있다. 이는 三國史記 地理志에 醴泉郡의 古名을 水酒郡이라 함106)에서 예천 지역이 일찍부터 新羅와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의성지역에는 召文國이 있었다. 그러 나 이 村의 始祖가 初降 한 곳을 伊山이라 하여 경주부근에 비정된다. 넷째의 觜山珍支村은 울진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울진지역에는 어떤 小國이 있었는 지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앞의 나)4 婆娑王 23년의 小國 爭疆記事에 보이는 悉直谷國과 音汁伐國의 두 小國이 있다. 주지하듯이 실직곡국은 삼척에, 음즙벌국은 안강에 위치하는 104)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 尙州 古昌郡條. 105) 三國史記 卷45, 列傳 5 朴堤上傳. 106)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 尙州 醴泉郡條.

25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것으로 양국 모두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서로 분쟁을 일으킨 지역이 동해안이었다는 사실을 참조하면 지리적으로 보아 당시의 울진지역은 삼척의 실직곡국과 함께 예족세력 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眞興王 22년(561) 건립의 眞興王巡狩昌寧碑107)에 의하 면 隨駕人物 가운데 직명이 于抽悉直何西阿郡行使大等 이라 하여 울진(于抽) 삼척(悉直) 강릉(何西阿) 지역이 하나의 관할구역으로 되었던 점은, 이들 지역이 그 이전부터 하나 의 세력권이었음에서 연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3세기 중엽의 濊는 남쪽으로 辰韓과 경계 를 접한 점108)과, 三國史記 地理志에 新羅統一期 九州의 하나인 溟州를 濊의 古國이었 다109)고 한 점은 3세기 중엽경부터 6세기 중엽까지도 行使大等의 관할구역과 일맥상통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村의 始祖가 初降 한 곳을 花山이라 하여 경주지 역에 비정된다. 다섯째의 金山加利村은 개령지역과 성주지역으로 비정된다. 개령지역에 해당하는 小國 은 3세기 중엽에 魏志東夷傳 에서의 甘路國이 존재하고 있었는데,110) 이는 初期記錄의 甘文國에 해당한다. 성주지역에도 魏志東夷傳 에는 半路國이 기재되어 있다. 성주지역의 경우 5세기 초 내물왕대 이후의 기록인 朴堤上傳에 加利村으로 나타나고 있다.111) 三國 史記 地理志에 星山郡은 古名이 一利郡이고 高麗前期에 이를 加利縣이라 하였다112)고 함에서 加利村이란 명칭은 고려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村의 始祖가 初降 한 곳을 明活山이라 하여 경주지역에 비정된다. 여섯째의 明活山高耶村은 영천지역과 안강지역으로 비정된다. 영천지역에 위치하는 辰 韓시기의 小國은 骨伐國으로 이 지역은 新羅 景德王代에 臨川縣으로 개명하였다.113) 사 료 가)3에서 高麗 初에 新羅의 王京六部를 慶州六部로 재편하였을 때 習比部의 명칭을 統一期의 郡縣名과 같이 臨川 部라 한 점은 明活山高耶村의 위치를 방증해 주는 것이다. 안강지역에는 婆娑王代의 小國爭疆記事에 보이는 音汁伐國이 있었다. 그러나 이 村의 始 祖가 初降 한 곳을 (小)金剛山이라 하여 경주지역에 비정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위의 六村 가운데 閼川楊山村을 제외하면 5개 村은 그 위치 가 각 村의 始祖가 初降 하였다는 장소와는 서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5 개 村에 해당되는 지역 가운데 경주의 斯盧國에 의해 복속된 小國이 관련되는 점도 아울 107) 이하 昌寧碑 라 약칭 108) 魏志東夷傳 濊傳. 109) 三國史記 卷35, 地理志 2, 溟州 本高句麗河西良(一作何瑟羅) 後屬新羅 賈耽古今郡國志云 今新羅北界溟州 蓋濊之古國 前史以扶餘爲濊地 蓋誤. 110) 魏志東夷傳 弁辰傳. 111) 三國史記 卷45, 列傳 5 朴堤上傳. 112)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 康州 星山郡條. 113)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 尙州 臨皐郡 臨川縣條.

26 國史館論叢 第69輯 러 참조될 것이다. 이는 辰韓六村의 각 세력집단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경주지역으로 이 동하게 되는 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근거로 상정된다. 修正論的 觀點에 입각하여 新羅 上古의 紀年을 인하해 보면, 斯盧國이 六村과 관련이 있는 小國들을 정복한 시기는 대체로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중엽 사이에 해당한다. 斯盧 國의 小國征服은 朴 昔 金 3姓集團의 세력 연계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3세기 말엽 婆 娑王代의 小國 爭疆事件을 전후로 小國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어느 정도 해명해 줄 수 있는 기록은 晉書 에 보이는 280년대 西晉과 三韓 諸小國의 교섭기사이다. 이는 辰韓지역의 小國이 斯盧國을 주축으로 하여 西晉과 교 섭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辰韓지역 내부에서는 小國간의 교섭이 전 개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婆娑王代의 小國爭疆記事라 할 수 있을 것이다.114) 서로 대등 한 협력관계에 있었던 辰韓지역의 小國들은 3세기 후반 이후 斯盧國에 의해 복속됨으로 써 斯盧國을 중심으로 상하의 우열관계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辰韓六村이란 위와 같은 관계를 표현해 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小國服屬 단계에서는 斯盧國과 辰韓 諸小國 사이에 직접적인 지배관계가 성립될 수 있 을 만한 지배권력을 구축하지는 못하였다. 즉 복속된 小國이 斯盧國에 대항하거나 그 세 력권에서 이탈하려는 사례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悉直谷國이나 押督國이 복속관계 에 반발하였다가 斯盧國 부근으로 徙民 당하였으며,115) 沙梁伐國은 북방에 인접한 百濟 에 歸服하려 한 점116)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사이에 이루어진 복속관계 는 服屬小國이 斯盧國에 대하여 우월권을 인정한 위에서 연맹관계를 성립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17) 114) 宣石悅, 앞의 논문( 慶大史論 7, 1994) p )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婆娑尼師今 25年 7月條 및 逸聖尼師今 13年 10月條. 116) 三國史記 卷45, 列傳 5 昔于老傳. 117) 이에 대한 연구사적 재검토는 다음의 논고가 참조된다. 李永植, 加耶諸國任那日本府 (吉川弘文館, 1990). 南在祐, 加耶史에서의 聯盟 의 의미 ( 昌原史學 2, 1995). 일반적으로 연맹관계의 성립에 대해 뚜렷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형성과정 상에 연맹체를 상정하기 위해서는 그 內部의 단위사회 내지 小國 사이에 우열관계, 특히 복속관계가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예로서는 高 句麗를 들 수 있는데,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의 初期記錄이나 魏志東夷傳 에는 高句麗가 주 변세력이나 小國들을 정복하여 지배권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新羅의 경우에도 斯 盧國에서 출발하여 辰韓지역을 포괄하는 발전과정에 대해서 완만한 연맹관계로서 이해하는 것 이 대부분이지만, 본고에서 小國征服記事의 기년을 추구해 본 결과 高句麗와 유사하게 그 연 맹관계는 의외로 강력한 상하 우열관계가 드러나고 있다. 百濟의 경우에도 3세기 말 이후의 目支國을 대표로 하는 馬韓지역의 교섭체계가 무너지고, 4세기에 이르러 한강유역의 百濟를 중심으로 마한을 하나의 세력권으로 통합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加耶지역의 경우 大加耶聯盟 圈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6세기 전반에 이르러 각 小國단위로 개별적인 행동을 취하

27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지금까지 검토해 본 것을 중심으로 斯盧國의 小國征服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斯盧國은 3세기 중엽에 이르러 國邑의 박씨세력과 小別邑의 김씨세력이 결합하여 小國내 의 읍락을 통제하였고, 3세기 후반 울산지역을 기반으로 한 석씨세력과 연계하여 辰韓의 유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동남해안을 중심으로 대외교섭을 주도하게 되었다. 赫居世의 建國說話에서는 이를 辰韓六村으로 표현하였고, 新羅 건국의 원래의 영역을 의미하였다. 晉書 와 小國爭疆記事에서 보듯이 辰韓지역을 단위로 한 세력권에서 이탈하려는 경우 그 주도세력인 斯盧國이 강력하게 응징하였으며, 小國征服記事에 보이지 않는 小國들은 斯盧國의 주도권을 계속 인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Ⅳ. 六部制의 成立 1. 六村에서 六部로의 編制 이상 앞 장에서 3세기 말엽부터 4세기 중엽 사이에 斯盧國이 정복한 小國들의 위치는 대부분 辰韓六村의 위치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료 가)1의 건국설화는 辰 韓六村에 해당하는 服屬小國들이 斯盧國의 지배자를 聯盟長으로 추대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斯盧國과 服屬小國 사이의 지배관계는 정복 당시에는 복 속지역에 대해 강력한 지배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행사하 기 위한 전제조건은 服屬小國 지배자의 지배기반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추 진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사료를 통해서이다. 다)1 儒理尼師今 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 部爲漸梁部 姓孫 于珍部爲本彼部 姓鄭 加利部爲漢祗部 姓裴 明活部爲習比部 姓薛118) 위의 기록은 앞서 인용하였지만, 본 절의 전개상 중요한 사료이므로 다시 언급하였다. 儒理王 9년(A.D. 32)에 六部의 명칭을 고쳤다는 것은 서기 1세기 초엽에 이루어진 사실 로 볼 수는 없겠지만, 일단 시기문제를 제쳐둔다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기록의 특징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였다가 新羅에게 쉽게 병합되고 있는데, 大加耶聯盟圈 이외의 경우를 연맹관계로 설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은 하나의 과제로 남겨두겠다. 118)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1 儒理尼師今 9年條.

28 國史館論叢 第69輯 첫째, 개명 이전의 六部 명칭은 六村의 명칭과 동일한 것이지만, 그 六村의 명칭 가운 데 일부를 생략하여 部의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들 부명의 대부분은 두개의 지명이 복합된 六村名 가운데 뒷 부분의 지명을 취하고 있고, 明活部만이 앞 부분의 지명을 띠고 있다. 둘째, 개명 이전의 六部는 그 위치가 여전히 경북일대이지만, 개명된 六部는 경주지역 에 위치하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다)1에서의 개명 이전의 六部는 가)1 사료의 기록에서의 六村과 위치가 동일하면서도 部를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존의 연구 에서 간과해 왔던 부분이다. 즉 辰韓六村에서 王京六部로 이행되는 중간단계에 辰韓六部 로 불리울 수 있는 단계가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六部의 명칭을 개명하면서 각 部에 姓을 하사한 점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六部에의 賜姓 措處는 경주지역의 王京六部가 성립되는 시기에 취하여진 사실로 보 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賜姓 措處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단순히 허구로 치부해 버리는 해석은 무언가 석연지 않은 점이 있다. 제Ⅱ장의 제2절에서도 보았듯이 初期記錄의 序頭에 해당하는 기사 가운데 상당수가 新羅國家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 고 있다는 것이다. 즉 新羅 統一期 이후의 新羅 귀족들은 위의 사료에 보이는 中國風의 姓氏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19) 7세기 말에 이르러 중국식 정치제도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六部制가 소멸하게 되는데, 六部 貴族에 대한 身分 認識의 代案으로서 賜姓 措 處가 취해진 것을 위의 사료에 일괄 기재해 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검토에서 셋째의 賜姓 措處를 제외하면 위의 기사는 新羅 六部制의 성립에 대 한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의 특징을 서로 관련시켜 보면 경북일대의 辰韓六部에 대한 해석은 가능해진다. 辰韓六部가 六村의 복합 지명 가운데 하 나만을 취한 명칭의 지역은 初期記錄상 斯盧國에 의해 복속되지 않은 지역이다. 예천지역의 大樹部와 성주지역의 加利部는 각각 5세기 초 朴堤上傳에 水酒村과 加利村 으로 기록되어져 있는데, 이는 麻立干時期에 이르러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반영 하는 것이다. 안동지역의 高墟部는 古陁耶國이며, 于珍部는 울진지역이다. 경주지역에 위 치하는 明活部는 明活山高耶村의 일부로서 다른 촌과 달리 해당 小國이 모두 斯盧國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骨伐國의 경우 斯盧國에 대항하거나 그 세력권으로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라 助賁王 7년( 346)에 내항한 것이다. 이에 대해 斯盧國王은 骨伐國王을 예우하였 던 점120)에서 그 小國의 지배집단을 강제로 徙民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들을 자신의 小 119) 李基白, 新羅 六頭品 硏究 ( 省谷論叢 2, 1971;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20)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助賁尼師今 7年 2月條, 骨伐國王阿音夫 率衆來降 賜第宅田莊 安之.

29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國에 그대로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항한 小國이 다시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들 복속집단을 다른 지역으로 옮겼을 것이다. 즉 그 대상지역은 明活部로서 가)3의 기록에 서 高麗 初 慶州六部로의 개편시에 新羅 王京의 習比部를 臨川部라 한 것은 新羅 景德王 代의 郡縣개명시의 명칭이 臨川縣인 점121)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辰韓六部는 斯盧國이 복속된 小國 이외의 小國지역이나 내항하여 협력하는 세 력집단을 자신의 勢力圈 아래 두기 위하여 형성된 것이다. 이후 斯盧國은 辰韓六部의 세 력집단도 경주지역으로 이주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반영해 주는 사료가 바로 가)1의 新 羅 건국설화인데, 이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왕으로 추대한 六村집단은 경주지역의 斯盧六村이 아니라 경북일대의 辰韓六村의 지배 집단이므로, 이들에 의해 추대된 왕은 斯盧國王이었지만 그 왕은 이미 斯盧國이 아닌 辰 韓지역을 대표하는 新羅國家의 王으로 보아야 한다. 斯盧國王이 新羅國王으로 추대한 곳 은 斯盧國의 중심지인 閼川이며, 辰韓六村지역의 지배집단이 모두 閼川에 와서 즉위의례 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단 두 종류의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斯盧國에 의해 정복된 服屬小國의 지배집단으로서 이들은 정복과 동시에 경주 지역으로 徙民된 집단이다. 또 하나는 斯盧國에 정복되지 않은 小國의 지배집단으로서 徙 民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小國에 머물러 있었던 辰韓六部의 지배집단이다. 전자의 徙民 된 복속 지배집단은 斯盧國의 지배집단으로 편입되어져 斯盧國이 辰韓지역에 대한 지배 권을 확대 강화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후자의 小國 지배집단은 자신의 지배권력을 유지하면서 斯盧國에 협력하였을 것이다. 4세기 중엽까지 小國들을 정복한 이후에 斯盧國은 원래의 지배집단과 새로이 徙民된 복속 지배집단을 결합하여 지배역량이 증폭되어 갔다. 이를 기반으로 정복되지 않은 小國 들에 대해 보다 강하게 통제해 나갔을 것이다. 斯盧國을 포함하여 기존의 小國을 辰韓六 部로 편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辰韓지역을 지배하는 지위를 확인하는 것이며, 그것 은 가)1과 같이 新羅國王으로의 즉위라 할 수 있다. 이로써 斯盧國王은 小國의 왕이 아 니라 小國의 王들 위에 군림하는 王(干) 중의 王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치에 합당한 칭호는 金大問의 語義 해석과 같이 麻立干122)이며, 이에 해당되는 왕은 新羅國家를 일으 켰다123)는 내물왕이었다. 121)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 良州 臨皐郡條, 臨川縣 助賁王時 伐得骨火小國 置縣 景德王改 名. 122) 三國遺事 卷1, 紀異 2 南解王條,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123) 崔彦撝撰 毗田盧庵眞空大師普法塔碑文(937년)에 의하면 姓金氏 雞林人也 其先降自聖韓 興於那 勿 ( 朝鮮金石總覽 上, p.135)이라 하여 내물왕대에 新羅가 흥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30 - 100 國史館論叢 第69輯 다)2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謂諴操准位而置 則王橛爲主臣橛列於下 因以名之124) 다)3 奈勿尼師今 26年(381) 遣衛頭入苻秦 貢方物 苻堅問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 耶 答曰 亦猶中國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125) 다)2 사료의 麻立 은 머리 즉 정상부를 뜻하는 용어이며, 干 은 한국 고대사회에서 일찍부터 군장을 지칭하는 것이다.126) 즉 麻立干은 新羅國家의 君長(干) 가운데 최고의 지배자를 의미한다. 麻立干이 干계층을 회동시켜 사역케 하고(諴操) 서열화한(准位而置) 점에서 보아 新羅 국내의 지배층을 편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麻立干이라는 왕호가 처음 사용된 시기에 대해 다)2와 같이 三國史記 에서는 訥祇王代로, 三國遺事 에서는 奈勿王代로 보고 있다.127) 다)3의 기록을 참고하면 중국에서 이전의 斯盧國이 新羅國家 로 인식되거나 廣開土王碑에도 新羅寐錦128)이라 한 점 등에서 4세기 말 奈勿王代에 新羅 라는 國號와 麻立干이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六部와 관련하여 언급하 면 麻立干은 辰韓六部를 포함하는 辰韓六村의 군장인 干계층을 경주지역에 소환하여 그 들 六部祖의 합의에 의해 즉위한 新羅國家의 王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三姓 王室集團의 所屬部에 대한 문제인데, 이 를 요약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3세기 중엽 脫解王代부터 斯盧國의 지배세력으로 편제되었던 昔氏王室 집단은 어 느 部로 편제되었는지가 불분명하다. 初期記錄 상에서 보아 昔氏집단은 漢祗部로 기록된 울산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昔氏집단 가운데 왕실집단은 斯盧國의 國邑인 月城지역으로 이주되어 있었으므로, 王京六部 가운데 喙部로 편제되었을 것이다. 왕실 이외의 집단들은 울산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후대의 기록과 같이 漢 祗部로 편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昔氏王室 세력이 金氏王室 세력과의 경쟁과정에서 제 압당하여 王統이 단절된 점을 감안하면, 울산지역의 유력한 세력들은 다른 部에 분산 배 치되었을 것이다. 즉 5세기 초엽 實聖王妃의 父가 昔氏로 명기되어 있는 것129)과 달리 昔氏王統의 단절 이후의 인물인 異次頓의 경우 訖解王 또는 習寶葛文王의 曾孫으로 전승 되고 있으면서도 朴氏라 하여 昔氏를 칭하지 않고 있다. 이는 혈연계보상의 문제라고 보 124)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3 訥祇麻立干 卽位條 麻立干細註. 125)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126) 干은 551년경 건립의 丹陽赤城碑까지 干支 로 표기되었다. 같은 시기의 외국사서에도 梁 書 新羅傳에는 新羅 干群官等의 語尾를 旱支로, 日本書紀 에도 加耶小國들의 군장이나 新羅 官等을 旱岐로 표기하고 있다. 이 干支의 기원은 魏志東夷傳 韓傳이나 弁辰傳에 臣智 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7) 三國遺事 卷1, 王曆 第十七 奈勿麻立干條. 128) 高句麗廣開土王陵碑( 朝鮮金石總覽 上, p.4). 129)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實聖尼師今 卽位條.

31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아두기보다 5세기 중엽 昔氏王統의 소멸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智證王 의 王妃인 延帝夫人의 父는 漢祗部130) 또는 牟梁部131) 소속으로 전하여지는데, 이는 昔 氏王統이 단절된 이후 원거주 지역인 漢祗部에서 牟梁部로 이주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朴氏王室의 所屬部에 대해서이다. 斯盧國 단계에서 朴氏집단은 斯盧國의 지배 邑 落인 國邑세력으로서 존재하였고, 그 지배자인 主帥 즉 斯盧國王은 朴氏王이었다. 初期記 錄에 의하면 斯盧國의 중심지는 月城이었는데,132) 月 은 喙部의 喙 과 음이 같은 것이 다. 즉 朴氏집단은 斯盧國의 왕실세력으로서 존재하였으며 麻立干時期 王京六部가 성립된 이후에도 주로 喙部에 편제되어 新羅國家 중앙지배체제의 핵심세력으로 존속하였을 것이 다.133) 다음 金氏王室 집단은 斯盧國단계에서부터 小別邑 즉 蘇塗의 天君으로서 國邑세력과 결합한 이후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金氏집단은 斯盧國의 小國 복속활동에서 중 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仇道 味鄒王을 전후한 시기에 朴氏와 昔氏 집단에 버금가는 세력 으로 성장하였다. 4세기 중엽 味鄒王代( )에 이르러 斯盧國의 朴氏王室로부터 주도권을 인계받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王京六部 성립 이후에 奈勿王系 왕실집단 가 운데 直系 王室은 喙部로 존재하였으나, 訥祇王代에 신설된 傍系에 해당하는 葛文王系는 喙部에서 분화된 것134)으로서 새로운 喙部 라는 의미135)의 沙喙部로 所屬部를 옮겼을 것이다. 冷水里碑에 의하면 前世二王인 喙斯夫智王乃智王 은 斯夫智葛文王 즉 習寶葛文王과 乃智王 즉 訥祇王이 모두 喙部 소속으로 되어 있음에 반하여, 王京六部 성립 이후에는 至 都盧葛文王이 沙喙部로 되어 있다. 그리고 鳳坪碑에도 牟卽智寐錦王 즉 法興王이 喙部, 徙夫智葛文王 즉 立宗葛文王이 沙喙部의 소속으로 되어 있다. 前世二王이 모두 喙部로 되 어 있었던 점은 訥祇王代에는 아직 王京六部의 편제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특히 아직 喙部가 분화되기 이전임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실은 王京六部 성립 이후에 이르러 新羅國王으로서의 寐錦王은 喙部로, 葛文王은 沙喙部로 편제되었음을 방증한다. 이와 같은 奈勿王系 왕실의 所屬部의 분화는 왕실집단의 分化現象일 뿐 아니라, 新羅 國家 성립 이후로 경주지역의 인구증가로 인하여 거주구역의 분할이 필요한 때문으로 생 130) 三國遺事 卷1, 王曆 第二十二 智訂麻立干條. 131) 三國遺事 卷1, 紀異 智哲老王條. 132)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婆娑尼師今 22年條, 春二月 築城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133) 그러나 朴氏집단도 昔氏집단과 마찬가지로 그 세력의 결집을 방지하기 위하여 王京六部에 분 산시켰던 것은 아닌가 한다. 134) 朱甫暾, 앞의 논문(1992), pp ) 前間恭作, 앞의 논문(1925), p.199.

32 國史館論叢 第69輯 각된다. 王京六部 성립과 함께 경주지역이 喙部와 沙喙部의 2部로 분화되었을 때에 이르 러 金氏王室은 朴 昔 두 集團을 2部에 분산시켜 세력의 결집을 방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新羅王의 所屬部의 변화는 昔氏王統의 소멸 이후에 이르러 金氏王權이 新羅 중 앙 지배층의 거주지역인 王京六部 가운데 핵심지역인 2部를 장악하기 위하여 麻立干을 喙部에, 葛文王을 沙喙部에 소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王京六部 가운데 喙部와 沙喙部에는 斯盧國의 朴氏와 金氏, 그리고 울산지역의 漢祗部에 昔氏 등 3姓 集團이 핵심세력으로서 존재하였다. 이들에 의해 복속된 小國 지 배자들의 경우 王京六部가 성립되기 이전에 斯盧國으로 徙民되었으므로 斯盧國의 지배체 제 아래에 있다가 奈勿王代에 이르러 喙部와 沙喙部 2部에 그대로 편제되었다. 이로써 新羅國家의 지배체제 상에서 2部가 다른 4部보다 우위에 서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 고 奈勿王이 麻立干으로서 즉위할 때 辰韓六部의 지배자들을 王京으로 초치하였는데, 이 들을 편제하여 王京六部를 성립시켰다. 辰韓六部 始祖의 初降處가 경주지역 부근이었던 점은 辰韓六部의 지배자가 이주한 사실과 연관된다. 다시 말하면 2部의 성립과정은 辰韓六部와 王京六部의 관계는 서로 대입되는 것이 아 니라 斯盧國 내부의 지배세력이 편제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양자의 관계를 대입적으로 기록한 것은 辰韓六部에 한정될 뿐이다. 慈悲王 12년에 각 部의 하부단위로서 坊里가 구 획된 것136)은 후대의 명칭이기는 하나, 辰韓六村지역의 지배집단이 계속 유입됨으로써 王京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137) 이를 세부적으로 편제한 것을 의미한다. 2. 麻立干時期의 六部 運營構造 앞 절에서 麻立干이라는 王號를 처음 사용한 奈勿王代에 辰韓六部의 지배집단을 경주 로 이주시켜 王京六部가 성립되었으며, 慈悲王 12년에 그 이주가 완료됨으로써 각 部의 세분화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麻立干時期에 王京六部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보기에 앞서 그 이전 시기의 상황을 약간 언급해 두기로 하겠다. 라)1 婆娑尼師今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謂 金官國首露王 年老 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 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 陀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陀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138) 136)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137) 申東河, 新羅 骨品制의 形成過程 ( 韓國史論 5, 서울대, 1979) pp ) 이상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33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라)1의 기록에서 音汁伐國王의 칭호를 干이라 표기한 것은 魏志東夷傳 에서 小國의 지배자를 臣智라 칭한 것과 서로 통하는 것이다. 물론 臣智는 큰 규모의 小國 지배자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3세기 중엽 이후 小國의 主帥가 소속 邑落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 시킴으로써 小國 지배자인 主帥는 臣智를 칭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을 것이다. 4세기 후 반 新羅의 내물왕을 麻立干으로 칭한 것은 小國 지배자인 干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며, 이는 6세기 중엽 초월적인 존재로서 太王號139)를 사용하기 이전에 신라 국가의 지배자를 지칭하는 칭호이다. 라)2 初婆娑王獵於楡湌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歧部 伊湌許婁饗之 酒酣 許婁之妻 携少女子 出舞 摩帝伊湌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庖 公於此 置 盛饌美醞 以宴衎之 宜位酒多 在伊湌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 後云角干140) 라)3 沾解尼師今 五年 春正月 始聽政於南堂 漢祗部人夫道者 家貧無諂 工書算著名於時 王徵 之爲阿湌 委以物藏庫事務141) 앞서 언급했듯이 라)2의 漢祗部는 麻立干時期에 王京六部가 성립된 이후의 명칭이며 울산지역의 세력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사료는 나)4의 小國 분쟁사건과 연결되는데, 漢祗部主 즉 울산세력의 대표자가 살해된 이후 婆娑王이 그 지역 대표자를 다시 임명하 여 斯盧國의 국읍과 세력 연계를 도모한 것이다.142) 라)3의 漢祗部人 임용기사는 麻立干 時期의 중앙 통치소인 南堂143)에 실무능력을 가진 지배층을 초치한 것으로 麻立干時期에 王京六部를 운영하는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의 검토를 토대로 麻立干時期의 六部 운영구조를 언급해 보기로 하겠다. 麻立干時期 의 지배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는 없지만, 이를 방증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麻立干時 期인 503년에 건립된 금석문인 冷水里碑가 있다. 이 비에 보이는 六部에 관한 부분을 특 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표로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39) 신라에서 太王號를 사용한 증거는 蔚州川前里書石 己未(539)年銘에서 另牟卽智太王 라 하 여 법흥왕을 지칭한 점이 최초이다. 140)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第1 祇摩尼師今 卽位條. 141) 三國史記 卷2, 新羅本紀 第2. 142) 許婁는 婆娑王妃의 父이고, 摩帝는 婆娑王의 아들인 祇摩王妃의 父이다. 즉 울산세력은 탈해 왕 이후부터 경주의 斯盧國과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해온 점이 참조될 것이다. 143) 원래 南堂이 설치된 것은 라)3의 沾解王 5( 358)년이다. 이 시기는 김씨왕실의 味鄒王 재 위 3년에 해당된다. 남당은 당시의 두 왕실이 서로 협력하여 辰韓지역을 통제하는 기구로서 등장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 남당을 설치한 석씨왕실의 세력이 새로이 등장한 김씨왕실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물왕 사후 내물왕 직계세력과 석씨가 지원하는 실성왕 사이에 왕위경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訥祇王의 자립 이후 석씨왕통이 단절되어(437 년) 양 왕실세력간의 경쟁은 김씨왕실이 승리하게 됨으로써 남당을 통한 新羅國家의 지배권 행사는 김씨 麻立干에 의하여 주도되어 갔다.

34 - 104 國史館論叢 第69輯 <표 5> 冷水里碑의 各部關聯人名의 記載順序 王京六部 喙 部 沙 喙 部 本彼部 牟梁部 漢祗部 習比部 본비의 부명표기 喙 沙 喙 本 彼 斯 彼 乃智王 王 號 斯夫智王 ①至都盧葛文王 ④壹干支(2) ②阿干支(6) ⑥干支(1) ⑦干支(1) 官等(京位) ⑤居伐干支(9) ③居伐干支(9) **奈麻(11) **奈麻(11) *, 는 前世二王의 기재순서, ① ⑦은 七王等의 기재순서. ** 奈麻는 典事人. *** ( ) 안의 숫자는 京位 본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葛文王의 所屬部가 沙喙部이고 이전의 前世二王도 喙部 소속으로서 新羅王도 所屬部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麻立干時期의 왕권구조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위의 葛文王은 智證王이며, 乃智王은 訥祇王이고 斯夫智王은 智證王의 父인 習寶葛文王이다. 이 중 前世二王에 대해서는 王 만 표기하여 정확한 王號 를 밝히지 않았다. 524년 건립의 鳳坪碑에 喙部牟卽智寐錦王 沙喙部徙夫智葛文王 이라 하여 6세기 초엽까지도 두 왕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144)을 참조하면 前世二王에 대해서 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즉 鳳坪碑의 두 왕의 기재순서를 참고해 보면 前世二王도 乃智 王(寐錦)王과 斯夫智(葛文)王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鳳坪碑의 두 왕은 소속부가 다른 반면에 冷水里碑의 前世의 두 왕은 소속부가 같다. 이는 奈勿王代에 王京六部가 편제되면서 奈勿王系의 金氏王室이 喙部로 소속되었 고, 그 외의 金氏集團은 대부분 沙喙部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503년 전후 王京六部의 세력구조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王京六部의 운영을 葛文王이 소속한 沙喙部가 국정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며, 冷水里碑를 건립한 다음 달 10월에 정식 국왕으로 되어145) 新羅의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智證王 사후의 건립 144) 日本書紀 卷17, 繼體 23年(529) 4月 是月條에 新羅王 佐利遲 가 보이는데, 529년은 法 興王 16년에 해당한다. 문헌에는 당시의 新羅王은 法興王이고, 그 이름은 鳳坪碑에 의하면 牟卽智 이다. 이는 日本書紀 에 보이는 당시 新羅王의 이름 佐利遲 와는 음운상으로 맞지 않다. 오히려 같은 비문에 나오는 葛文王의 이름인 徙夫智 와 흡사하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 다. 바꾸어 말하면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찬술된 三國史記 에 新羅의 王系가 일원적으로 되어 있는 점과 달리 동시대의 기록인 금석문에서 두명의 王이 동시 존재한다는 사실은 新羅 王權 의 構造와 特性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145) 鄭求福, 앞의 논문(1990), pp 필자는 씨의 견해에 찬동을 표하며, 至都盧葛文王은 그 父인 習寶의 葛文王位를 계승한 것이고 그 子인 立宗葛文王으로 다시 계승하게 되었다(宣 石悅, 앞의 논문(1990), pp )고 보았다. 한편 智證王은 昭知王 사후에 葛文王으로 된 것이 아니라 昭知王 재위 당시부터 이미 葛文王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神宮 설치 에 대한 기록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三國史記 에서 新羅本紀의 경우 昭知王 9年에 신궁이

35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인 鳳坪碑에 보이는 위의 두 왕이 모두 智證王의 아들이었던 점은 그 이후의 왕실을 智 證王系가 독점 세습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146) 다음 위와 같은 김씨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麻立干時期의 중앙지배체제가 어떻게 운영 되고 있는지 冷水里碑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인명기재방식에서 鳳坪碑 이후 中古時期에는 官等 기준임에 반하여 麻立干時期 에는 部를 중심으로 하면서 官等을 부차적으로 하고 있다. 즉 麻立干時期의 경우는 王京 六部 중심의 지배체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둘째, 王京六部 가운데 部간 세력의 우열이나 喙部와 沙喙部의 경우 그 내부에서도 지 배층의 서열화가 보이는 외에 七王等이라는 집단이 주목된다. 喙部와 沙喙部가 다른 부보 다 우세한 배경에는 服屬小國의 지배자들이 王京六部 성립 이전 경주지역으로 徙民되었 으므로 위의 2部로 편제된 점에 있다. 奈勿王代 王京六部의 성립 당시에 경주부근의 初 降處로 이주한 辰韓六部 소속의 지배자들은 新羅에 협조적이었으므로, 2部와 달리 다른 4部의 대표자는 서열화하지 않고 小國王으로서의 칭호는 그대로 인정하였다.147) 麻立干時期의 新羅國家는 아직 복속지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옛 小國 지배자의 재지 적 기반이나 권위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즉 이들 지배층이 王京六部로 이주되면서도 여전 히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新羅는 복속지역의 통치를 위해서는 이 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는 7人의 王들이라 부르듯 설치되었다(同卷 3)고 하고, 祭祀志에서는 智證王이 神宮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인하여 기왕의 논자들은 神宮의 설치시기 및 主神이나 新羅의 제사체계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崔在錫, 新羅의 始祖廟와 神宮의 祭祀, 東方學志 50, 1986; 韓國古代社會史硏 究, 一志社, 1987 참조), 필자의 생각으로는 위의 두 기록은 전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昭知王 9년에 智證王은 이미 父 習寶의 葛文王位를 계승하여 있었고, 葛文王으로서 神宮의 설치를 주도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麻立干時期의 기록조차 부정적 으로 파악하여 智證王代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吉光完祐, 中國郊祀の周邊國家への傳播, 朝鮮學報 108, 1983)은 부당하며, 冷水里碑의 발견으로 智證王의 존재적 성격을 감안하면 기존의 통설처럼 昭知王 9년의 설치기록 대로 보는 것(邊太燮, 廟制의 變遷을 通하여 본 新 羅社會의 發展過程, 歷史敎育 8, 1964)이 타당할 것이다. 146) 眞興王代에는 葛文王이 보이지 않다가 眞平王代에 王弟 2人을 葛文王으로 삼았다( 三國史記 卷4, 眞平王 元年 8月條)는 점은 특이하다. 眞興王의 즉위는 外祖父인 法興王(牟卽智寐錦王) 과 父인 立宗葛文王의 두 지위를 계승한 셈이므로 葛文王制度는 어떠한 변화가 수반되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眞興王은 소속부를 칭하지 않은 점도 참조될 것이다. 葛文王制度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차후로 미루겠다. 147) 일반적으로 新羅의 官等은 干群과 非干群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의 干群은 삼한시기의 小 國 지배자로서 라)1의 干을 의미하며 복속된 小國 지배자는 2部에 편제되었다. 후자의 非干 群은 京位에서는 大奈麻 이하로 분화되었지만, 특히 外位에서 干群 아래에 一伐, 一尺, 彼日, 阿尺로 편제되어 있다. 冷水里碑에서 2部의 干群 官等名이 外位 非干群의 명칭과 같은 점은 新羅王 소속部의 干들이었으므로, 2部 소속의 왕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干支 앞에 접두사로 붙 여진 것이다.

36 國史館論叢 第69輯 이 이들의 합의를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셋째, 각 部 소속의 지배층 가운데 국정을 의결하는 七王等集團 뿐만 아니라, 특히 그 의결사항을 수행하는 典事人集團의 구성원은 喙部와 沙喙部 소속의 지배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3세기 중엽 高句麗에는 諸加의 家臣이 王의 家臣과 같은 반렬에 설 수 없다 148)는 점에서 참조된다. 즉 2部 소속의 지배층은 干群 이외의 경우에도 官等 이 奈麻인 典事人集團으로 국가의 통치업무에 참여케 하였으나, 다른 4部의 非干群은 2 部의 非干群과 같이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고 다만 각 所屬部의 자치업무만 수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典事人集團 가운데 중고시기의 지방통치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인 道使가 있는 점 이다. 이에 관하여 참고되는 기록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마)1 又十一年壬子 高句麗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祇王卽位 思得辯士往迎 之 聞水酒村干伐寶靺 一利村干仇里迺 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質於倭麗二 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三人同對曰 臣等聞歃良州干堤上 剛勇而有謀149) 마)2 訥祇麻立干 2年(418) 春正月 親謁始祖廟 王弟卜好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 秋 王弟未 斯欣自倭國逃還150) 마)3 (後面)典事人 沙喙壹夫智奈麻 喙耽須道使心訾公 此七人 (上面)村主 臾支干支151) 이들 사료에 보이는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辰韓六部 가운데 大樹部와 加 利部가 마)1에 5세기 초엽 訥祇王代에 水酒村과 加利村으로 각각 나타나고 있는 점, 마)3 에서 智證王 6년(505)의 州郡制 시행 이전에 건립된 本碑(503년)에서 珍而麻村이라 하여 新羅 중고시기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로서 村이 보이고 있는 점, 또 그 村과 연관되는 耽須 道使의 官等이 奈麻이고, 마)2에서 歃良州干 朴堤上의 官等이 奈麻인 점, 마)1과 마)3에 서 村에는 村干152)이나 村主가 재지세력으로서 新羅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점 등에서 보아 麻立干時期에 이미 辰韓지역을 통제하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방증한다. 村의 編制 時期는 麻立干의 칭호를 처음 사용하였던 奈勿王代부터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麻立干時期에는 주로 지방의 주요거점에 干支라는 재지지배자를 통하여 중앙의 통치력 이 미치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는 중앙으로부터 관리가 파견되어 통치력을 행사하는 경우 148) 魏志東夷傳 高句麗傳. 149) 三國史記 卷45, 列傳 第5 朴堤上傳. 150)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151) 冷水里碑. 152) 冷水里碑를 통하여 보면 村主의 官等名을 干支라 하고 있는데, 朴堤上傳에 村干이 보인다. 麻立干時期의 村干이란 村主干支 의 약칭일 것이다.

37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도 있었는데, 그것은 官等體系 상의 奈麻이며 지배체계 상의 하급지배층인 道使였다. 道 使는 중앙의 통치소인 남당에서 의결된 정책에 따라 해당 관할지역을 통치하였다. 이러한 지방통치에는 道使 이외에 재지세력이 참여하였다. 4세기 중엽까지 小國征服을 수행한 이후 服屬小國의 지배자는 斯盧國으로 이주되었으 나, 각 읍락에는 그 지배층이 각기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주된 小國 지배 자가 斯盧國에 있으면서 복속지역에 대한 통제권 행사는 해당 小國 지배자인 복속지배자 에 의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斯盧國에 있었던 지배자집단 전체의 의결에 의하였을 것 이다. 반면 辰韓六部의 경우에는 그 小國의 지배층이 모두 온존하고 있었으므로, 斯盧國 과 우열관계를 유지하면서 小國 지배자가 小國통치의 독자성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다만 대외교섭이나 斯盧國과의 관계에서는 斯盧國의 통제력이 미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辰韓六部의 지배층 가운데 麻立干時期에는 王京六部로 이주되거나 필요에 의해 중앙으로 소환된 사실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방통치방식은 麻立干時期에 이르러 유사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村의 설 치이다. 新羅國家의 통치에 필요한 지역이나 복속되었던 지역에는 도사가 파견되었을 것 이다. 도사가 파견되지 않은 지역은 이전의 小國 단계에 같은 범위에 있었던 국읍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중앙의 명령이 하달되어 통치에 협력하였을 것이며, 필요할 경우에는 대개 중앙에서 事人 이 일시적으로 파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축성사업과 같이 국가적인 사 업이면서 지방통치상에 중요한 업무가 수행될 경우 將軍과 같은 중앙의 중요 관리가 파 견되기도 하였다.153) 冷水里碑에서 보듯이 마)3과 같이 중앙에서 파견된 道使는 재지지배층인 村主의 협력 하에 일정지역을 통치하였는데, 여기서 村主는 소속 村 뿐만 아니라 일정 범위내의 지역 에 대한 통치에 그 지역의 대표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는 麻立干時期 초기단계에서부 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5세기 후반 郵驛과 官道가 설치 정비된 이후의 지방통치체계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6세기 초에 건립된 冷水里碑의 耽須道使 가 官等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冷水里碑의 道使는 내마 官等을 띤 典事人의 일원으로서 같은 官等 의 기재를 생략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면 5세기 초 奈麻의 官等을 띠고 있는 朴堤上이 歃良州干 이라 함에서 冷水里碑의 道使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鳳坪碑에서 도 悉支軍主의 官等이 奈麻이다. 다른 예로 智證王 6년 悉直州軍主인 異斯夫를 日本書 紀 에 上臣伊叱夫禮智干岐 라 하고 그 分注에 伊叱夫禮知奈末 이라 함154)에서 麻立干 153)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第3 昭知麻立干 8年 春正月條, 拜伊湌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 千 改築三年屈山二城.

38 國史館論叢 第69輯 時期에 지방관의 기원이 되는 州干 이나 道使 는 官等이 奈麻였으며, 法興王代 초기 鳳 坪碑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체계는 일정 기간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방통치의 정비는 중앙에서 지방에 대한 통치가 보다 확대 강화되어 505년의 州郡制 실시는 鳳坪碑에 보이듯이 軍主를 중심으로 단위지역의 거점에 파견된 道使가 중 앙의 지방통치 대행자로서 확대 개편된 것이다. 재지지배층에서도 村主 이외에 使人 이 라는 하급지배층이 新羅 지방통치체계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州郡制의 시행으로 재지지배 층의 서열화도 아울러 진행되어 村主層을 干群 官等으로 使人層을 非干群 官等으로 편제 한 11等 外位制가 마련되었다. 즉 麻立干時期의 지방통치는 단계적으로 보완 정비되어 州郡制의 시행으로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麻立干時期 六部의 운영구조를 살펴본 바는 다음과 같다. 이전의 小國王이었 던 斯盧國王이 辰韓 諸小國을 정복한 이후 辰韓지역의 대표자로서 新羅國王으로 등장하 여 服屬小國의 지배자였던 干 위에 군림하는 麻立干이 되었다. 麻立干은 小國王이었던 干 層을 斯盧國에 이주시켜 서열화 하고, 辰韓六部에 해당하는 小國 지배자들도 회동시키는 한편 이들도 점차 이주시켜 王京六部를 성립하게 되었다. 王京六部는 新羅國家의 중앙 지 배자집단의 거주지역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자집단인 七王等의 합의에 의하여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였다. 그 의결기관은 바로 南堂이었다. 그런데 중앙지배체제의 핵심은 新 羅王이 소속한 喙部와 沙喙部였으며, 이로써 王京六部는 상호간에 우열이 있었다. 국가의 통치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집단인 典事人은 모두 우세한 2部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이 는 王京六部의 생성과정에서 기인한다. 한편 지방통치는 七王等으로 나오는 王京六部의 대표자집단인 干層이 중앙의 南堂에서 의결된 사항을 토대로 지방에 파견된 道使가 재지 지배층인 村主의 협력 하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麻立干時期 新羅國家의 중앙 통치구조는 王京六部에 의하여 마련되어졌다. 그 특징적인 성격에서 본다면 기존에서 말하듯이 六部라는 단위정치체들의 결합이라기보다 는 喙部 沙喙部 2部가 주축이 된 지배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2部 내의 인적 조직이 그 체제의 핵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律令頒布와 六部制 麻立干時期에 성립된 六部制는 辰韓지역의 諸小國 지배자를 王京에 이주시켜 지방의 통치 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六部制의 성립을 전후로 新羅國家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 154) 日本書紀 卷17, 繼體 23年 4月 是月條.

39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하여 法興王代에 일단락된다. 즉 法興王代 반포의 律令은 麻立干時期에 정비된 지배체제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律令과 六部制를 관련하여 검토하도록 하겠다. 바)1 新羅之初 衣服之制 不可考色 至第二十三葉法興王 始定六部人服色 尊卑之制 猶是夷俗 至眞德王在位二年 金春秋入唐 請襲唐儀 바)2 法興王制 ①自太大角干至大阿湌紫衣 阿湌至級湌緋衣 並牙笏 大奈麻奈麻靑衣 大舍至先 沮知黃衣 ②伊湌迊湌錦冠 波珍湌大阿湌衿荷緋冠 上堂大奈麻赤位大舍組纓155) 위의 바)1은 法興王代의 律令으로써 六部人의 복색을 처음 정하였다고 하고, 바)2에서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상세히 기재하고 있다. 우선 바)1에서 法興王代에 정한 복색은 夷俗 즉 新羅 고유의 습속을 정비한 것이었고, 이는 眞德王 2년(648)에 중국 당의 衣服 制를 수용하기 이전까지 바)2의 내용과 같은 체계로 계승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기존의 견해에는 당의 율령제도가 수용되기 이전에 新羅가 율령을 반포한 사실을 전혀 부정하거 나156) 그 내용이 衣冠制 규정에 한정되는 것으로 보거나,157) 중국 서진의 泰始律令을 받아들인 高句麗 律令의 수용으로 보기도 한다.158) 法興王 7년(520)의 衣冠制 규정과 眞德王 2년 이후의 것을 비교하는데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은 牙笏이다. 바)2에 牙笏을 가질 수 있는 官等의 하한은 京位 제 9위인 級湌까 지 규정하고 있으나, 眞德王 4년(650)의 경우159)는 眞骨신분의 관인에만 한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骨品制에서 각 신분마다 官等의 하한은 없으므로 眞德王 이후의 신분 중심의 牙笏 제한규정과 法興王代의 官等 중심의 규정은 내용상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바)2의 衣冠制 규정은 法興王代에 반포된 律令의 내용 가운데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麻立干時期의 지배체제 정비과정에서 마련된 규정 즉 김씨왕실의 독점적인 왕 위계승체계의 확립과 그에 따른 神宮祭祀 喪服制 제정 등의 제사체계, 南堂의 설치와 王 京六部의 성립을 통한 중앙지배체제의 확립, 新羅 영역 내에서의 村制 실시와 築城 작업 추진 등에 의한 지방통치체계의 수립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官等制는 위와 같은 체제의 정비에 기초한 것이며, 官等制와 표리를 이루는 衣冠制 가 마련되어 法興王 7년(520)의 율령 반포시에 시행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반영하고 있 는 것은 524년 건립의 鳳坪碑이다. 이를 麻立干時期 王京六部의 운영구조와 대조해 보기 위하여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55) 이상 三國史記 卷33, 雜志 2 色服條. 156) 井上秀雄, 古代朝鮮 (1972), p ) 武田幸男, 新羅法興王代の律令と衣冠制 ( 古代朝鮮と日本, 1974). 158) 田鳳德, 新羅律令攷 (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 4, 1956; 韓國法制史硏究, 1968). 159) 三國史記 卷5, 新羅本紀 第5 眞德王 4年 夏4月條, 下敎 以眞骨在位者 執牙笏.

40 - 110 國史館論叢 第69輯 바)3 甲辰年正月十五日 喙部牟卽智寐錦王 沙喙部徙夫智葛文王 本波部 夫智干支 岑喙部美斯 智干支 沙喙部而 智太阿干支 吉夫智阿干支 喙部勿力智一吉干支 沙喙部十斯智奈麻 悉尒智奈麻 等所敎事160) 바)3의 所敎事集團은 新羅國家의 통치소인 南堂에 참여하는 중앙 지배층으로서 王京六 部 지배층의 대표자들이다. 寐錦王 葛文王이나 干支의 경우는 王京六部의 대표자인데, 이들의 표기순서는 部의 우열에 따라 기재되어 있어 麻立干時期 건립의 冷水里碑와 같은 방식이다. 그 이하의 경우를 주목해 보면 冷水里碑에서 소속부 내의 서열에 기준을 둔 것 과 달리, 鳳坪碑에서는 소속부에 관계없이 官等의 서열에 따른 표기순서가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되어 있다. 이는 중앙지배체제가 麻立干時期의 王京六部 중심에서 율령반포 이 후 官等 중심으로 변화하여 감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 중앙지배체제의 의결사항을 수행하는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는데, 그에 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바)4 典事大人 喙部內沙智奈麻 ①(喙部)居伐牟羅道使卒次小舍帝智 (喙部)悉支道使烏婁次小 舍帝智 ②居伐牟羅尼牟利一伐 你宜智波旦 只斯利 一 智 阿大兮村使人奈尒利 杖六十 蔦 尸條村使人奈木利阿尺 男彌只村使人翼條 酉 於卽斤利 杖百 ③悉支軍主喙部尒夫智奈麻161) 바)4는 鳳坪碑에 보이는 지방통치에 관한 기록이다. 이들은 所敎事集團에 의하여 의결 된 사항을 수행하는 집단인데, 그 구조는 典事大人, 道使, 使人, 軍主 등으로 되어 있다. 먼저 典162)事大人은 중앙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파견된 실무자들인데, 이들은 중앙 의 하급 관리로서 해당 지방의 조사를 위하여 지방에 일시적으로 온 것이다. ①의 道使 2인도 이에 참여하여 중앙에서의 지방에 대한 조사를 담당하였는데,163) 이 구조는 冷水 里碑의 경우와 같다. 즉 율령반포 이후에도 新羅國家의 통치구조는 麻立干時期의 경우와 별 다름없는 人的 組織 중심의 지배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변화는 위에서 말했듯이 인명나열의 순서가 部의 우열이 아니라 지위나 官等의 순으로 되어 있음은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官等體系의 등장은 外位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 것은 ②의 경우 다음의 표와 같이 작성된다. 160) 鳳坪碑. 161) 鳳坪碑. 162) 기존에는 鳳坪碑의 제6행 10번째 글자가 판독이 어려워 麥 處 (불명) 등으로 보았 다. 그러나 그 뒤의 글자가 事大人 으로 되어 있는 점, 그 구성원의 官等이 내마 이하로 되 어 있는 점, 또 그들의 역할이 그 다음에 보이는 형벌을 받은 재지지배층과 관련이 있는 점 등에서 보아 冷水里碑의 典事人과 같은 업무를 담당한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事大人 앞의 글자는 의미상 典 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163) 盧泰敦, 蔚珍鳳坪新羅碑와 新羅의 官等制 ( 韓國古代史硏究 2, 1988) p.181.

41 <표 6> 職 名 阿大兮村使人 蔦尸條村使人 男彌只村使人 ( ) 新羅 六部制의 成立過程 鳳坪碑의 官等 생략예 出 身 地 人 名 居伐牟羅 尼 牟 利 ( ) 爾 宜 智 ( ) 只斯利 ( ) 一 智 (阿大兮村) 奈 尒 利 (鳥尸條村) 奈 木 利 (男彌只村) 翼條 酉 ( ) 於卽斤利 官等(外位) 一 伐(8) 波 旦(10) ( ) ( ) ( ) 阿 尺(11) ( ) ( ) 비 고 杖六十 杖百 이들은 어떤 사건에 의하여 新羅 중앙으로부터 처벌대상이 된 재지지배층이다. 이들 가운데 官等 즉 外位를 표기해 두지 않은 인물에 대하여 원래부터 官等을 보유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164) 일반적으로 중고시기의 금석문에서는 관련인물 중에 관직이나 官等이 표기되어 있지 않은 예가 없었음은 주지한 대로이다. 그러나 비문에 外位가 기재 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官等을 보유하지 못한 재지인이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표 6>을 보면 처벌 내용에서 杖 100과 杖 60의 기록은 2人에 게만 한정하여 기재되어 있다. 그것은 居伐牟羅의 尼牟利에서 杖六十 의 기록이 명시된 阿大兮村의 使人 奈尒利까지가 하나의 처벌(杖 60)범위이고, 蔦尸條村의 使人 奈木利부터 杖百 이 명시된 男彌只村의 使人 於卽斤利까지가 또 하나의 처벌 범위라고 해석하는 것 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생략법은 이들의 官等표기에서도 나타난다. 처음에 外位 제8등인 一伐(尼牟利一 伐), 그 다음에 제9등 一尺은 보이지 않고165) 제10등인 波旦 즉 彼日(你宜智波旦), 다시 3人을 지나 제11등 阿尺(奈木利阿尺)이 명기되어 있다. 鳳坪碑가 官等의 서열에 따라 인 명을 표기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보면 官等이 상하로 나열되어야 함에도 중 간 중간에 官等 미보유자가 끼어 있음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外位보유자 사이의 재지인 은 官等 미보유자가 아니라 바로 위의 官等과 같은 外位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기재상에 생략된 것으로 이해해야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처벌 규정에도 外位 阿尺 이상과 그 이하 로 엄격히 구별되어 있음도 이울러 참고될 것이다. 즉 처벌 규정은 아래에 내용을 기재하 여 동일한 규정에 속하는 위의 인명에는 내용을 생략하였지만, 官等 가운데 外位의 표기 164) 盧泰敦, 위의 논문(1988), pp ) 鳳坪碑에서 대개 村主로 이해되는 居伐牟羅의 異知巴下干支 와 辛日智一尺 가운데 후자의 辛日智의 官等이 一尺이므로, 居伐牟羅(순흥) 내의 재지지배층은 下干支 이하 外位體系가 고 루 갖추어져 편제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42 國史館論叢 第69輯 는 동일한 官等을 가진 人名을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첫 인명에만 기재하고 나머지 인명 에서는 생략하였다.166) 이와 같은 방식은 冷水里碑에 典事人集團에도 보인다. 전사인 가운데 맨처음에 나오는 壹夫智에게만 京位 奈麻를 표시하고 나머지 6인 모두 官等을 표기하지 않았다. 이는 麻 立干時期의 官等體系가 麻立干의 語義에서도 참조되었듯이 原斯盧國의 지배층과 이주된 복속지배층을 干群 官等으로 서열화 한 것이 위주였기 때문에, 실무자 집단은 干群에 편 제하지 않고 모두 奈麻라는 官等으로 일원화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麻立干時期는 국 가의 통치업무가 체계화 되지 못한 단계였고, 또한 당시의 급선무가 복속지배층에 대한 편제에 있었던 때문은 아니었나 생각된다. 鳳坪碑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軍主의 존재이다. 麻立干時期에서 마련되기 시작한 지방통치체계는 智證王 6년(505) 州郡制 시행 이후부터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간 것 이다. 麻立干時期에는 南堂-道使-村主라는 체계에서 州郡制 시행 이후 南堂-軍主-道使(使人)-村主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軍主는 州郡制 시행 이후부터 설치된 관직이지만, 그 官等은 麻立干時期의 道使와 같은 奈麻이다. 그런데 州郡制 시행 이후의 道使는 바)4 의 ①에서 보듯이 京位 제13등인 小舍로 되어 麻立干時期보다 官等이 낮다. 물론 冷水里 碑의 의결집단인 七王等이 모두 干群官等임에 비하여 鳳坪碑의 경우 京位 제11등인 내마 로서 非干群 官等도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는 바)2의 衣冠制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분제적 요소가 드러나고 있는 것 임과 아울러 麻立干時期 王京六部 중심의 지배체제에서 官等體系 중심의 지배체제로 전 환되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喙部 沙喙部의 2部가 주축으로 되어 있었음은 麻立干時期 王京六部의 성립과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辰韓六村 지역 가운데 斯盧 國에 의해 복속된 小國의 지배자들은 徙民되어 斯盧國의 지배체계 내에 편입되었고, 王京 六部의 성립 이후 원래의 斯盧國 지배층들이 喙部와 沙喙部로 편제되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2部 소속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麻立干時期 이후 中古時期에도 喙部와 沙喙 部 소속의 지배층이 新羅國家 중앙지배체제 상의 주 구성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2部 이 외에 다른 4部 소속의 지배층이 단순한 干支가 아닌 某干支 나 京位를 띠고 등장하는 것은 眞興王代부터이다167). 이는 新羅國家가 통치영역이 확대되고 그 업무가 분화됨에 166) 宣石悅, 앞의 논문(1990), pp 및 <표 3> 참조. 167) 가장 빠른 예는 551년 건립으로 추정되는 明活山城作成碑에 上人邏頭本波部伊皮尒利吉之 이며, 561년 건립의 昌寧碑에 大等집단 가운데 漢只(伐部)屈珎智大一伐干, 本彼未 智及 尺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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