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行日記 는 경남 함양의 유학자였던 安孝鎭이 1917년에 중국 曲阜를 다녀오며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국문요약 작성한 중국 여행기이다. 이 일기는 한국의 공교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비중 있게 검토되어야 할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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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書閣35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박진성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박사수료 Ⅰ. 머리말 Ⅱ. 화행일기 의서지및저자정보 1. 서지사항및주요여정 2. 안효진의생애와교유관계 Ⅲ. 화행일기 의특징과가치 1. 문예미를갖춘성지순례기 2. 국내최초공교지회의설립과정기록 Ⅳ. 맺음말 178

華行日記 는 경남 함양의 유학자였던 安孝鎭이 1917년에 중국 曲阜를 다녀오며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국문요약 작성한 중국 여행기이다. 이 일기는 한국의 공교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비중 있게 검토되어야 할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이에 따 라 이 글에서는 저자의 생애 및 일기의 체제와 내용적 특징을 고찰하였다. 안효진은 1914년에 진주 도통사에서 지역 유림들과 함께 공자 주자 안자[安珦]의 연보를 合刊하였는데, 이후 연보의 서문과 안향의 신도비문을 공자의 후손에게 받고 자 하여 중국 곡부로 떠났다. 안효진은 1917년 2월 14일에 서울 남대문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하여 윤2월 7일에 곡부에 도착하였다. 곡부에서 공자의 후손인 孔令貽와 孔祥霖을 만나 교유하면서 공자 유적지를 구경하고, 孔敎總會를 방문한 뒤 귀국길에 올라 3월 18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안효진은 곡부에 있는 동안 공상림으로부터 도통 사에 공교지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받았다. 안효진의 중국 여행은 학술적 교류에 주목적을 두고 있었기에 그의 작품 또한 문 예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화행일기 는 1910년대 곡부 여행기들과 비교했을 때 문학 성이 뛰어나고, 성지순례기라 이를 만큼 곡부의 풍경에 대해서도 자세하다. 화행일기 는 1917년 진주 도통사에 국내 최초 공교지회가 설립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유일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를 지닌다. 안효진은 유교의 위상을 부 흥시키려는 국내 유학자들의 노력을 중국 측에 잘 전달하여 도통사 공교지회가 설립 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일기는 일제강점기 혼란한 사회 속에서 유학적 도리를 지키고 뿌리 를 보존하려 한 경남지방 유학자들의 노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당시 한국과 중국 양국 유학자들의 교류 양상을 파악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주제어 安孝鎭, 華行日記, 安珦, 曲阜, 문예미, 孔敎運動, 道統祠, 孔敎支會 투고일자 2016년 2월 29일 심사일자 2016년 4월 5일 게재확정일자 2016년 4월 12일 179

藏書閣 Ⅰ. 머리말 35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중국 여행은 누구나 바라던 희망사항 같은 것이었다. 하지 만 표류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연행의 기회가 아닌 이상 개인적으로 중국을 여행하 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는 19세기 말 대청사행이 종료될 때까지 유효했고, 조 선인의 중국 여행 기록 역시 연행록 하나로만 귀결되어왔다. 그러나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일본의 강제적 근대화로 교통망이 확충되고 철도 및 증기선이 도입됨에 따라 중 국으로의 개인 여행이 가능해졌고, 그 목적과 여정도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1) 1910년대에 들어 조선 지식인의 중국 여행은 보다 빈번해지고 복합적 양상을 보이 고 있다.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국내의 독립운동가와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 사이의 비밀연락을 돕거나, 독립운동의 근거지 혹은 이주지를 답사하거나, 공자 유적을 방문하여 유교 정신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중 국을 찾았던 것이다.2) 이들 가운데 유림들은 전통적 사회질서의 유지 및 유교의 존립 을 모색하기 위해 유교의 성지였던 곡부를 목적지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중국 은 조선과 비슷한 정세 속에서 康有爲와 陳煥章의 주도 아래 북경과 곡부를 중심으 로 유교부흥운동인 공교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조선 유림들은 그들의 공교운동에 1) 일례로 毅庵 柳麟錫이 1896년 을미의병 실패 후 중국의 곡부로 망명을 시도하면서 그의 제자 李弼熙를 보내 곡부 의 衍聖公 孔令貽로부터 孔子畵像을 얻어 오게 한 일이 있었다. 또 이에 앞서 개성 문인 李莘田이 1895년에 상해 를 거쳐 江蘇지방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와 南遊吟稿 라는 시집을 내기도 하였다. 2) 서동일, 1910년대 韓中儒林의 교류와 孔敎運動,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7집,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152~157쪽 참조. 1910년대 대표적인 중국 여행 기록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서동일 논문 참조 보완함). 여행인물 張錫英 여행시기 여행기록 遼左紀行 봉천, 하얼빈, 밀산 1912.1.19~1919.4.28 李承熙 북경 1913.4.16~1913.6.25 북경, 곡부 1913.12.10~1914.5.29 芮大僖 북경, 곡부 1913.12.10~1914.2.30 伊山文集 권5, 燕城紀行 伊山文集 권8, 行狀 李炳憲 북경, 곡부, 상해, 홍콩 李炳憲全集 上, 中華遊記 李鉉德 1914.1.13~1914.5.28 1916.6.7~1916.10.6 봉천, 곡부 趙貞奎 丁敦燮 安孝鎭 180 여행지 북경, 곡부 곡부 1915.2.19~1915.9 1915.2~1915.12 1917.2.14~1917.3.18 西川集 권3, 北征日錄 韓溪遺稿 권7, 年譜 晶山文集 권4, 北征日錄 陶庵文集 권6, 先府君家傳 華行日記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華行日記 3)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중국 여행기로 경남 함양의 유학자 安孝鎭이 1917년에 중국 곡부를 다녀오며 기록한 것이 다. 안효진의 중국 여행은 진주 도통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 유림의 유교부흥운동 차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깊은 관심을 보이며 중국의 유림들과의 연대를 통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다. 원에서 계획되었고, 그해 도통사에 국내 최초의 공교지회가 설립되는 데 결정적 계기 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화행일기 는 바로 그 과정이 잘 나타나 있어 당 시 국내 공교운동 관련 연구나 공교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으며, 일제강점 기 한 중 유림들의 학술적 교류를 살피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일기는 중국 여행기로서의 기본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의 이 색적 체험 및 인상, 대외인식 등을 절실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으며, 시문 또한 풍부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학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화행일기 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 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0~1920년대 한국의 공교운동과 관련한 연구에서 도통사 공교지회의 설립을 다루며 화행일기 여정을 간략히 살피거나,4) 도통사 공교지회의 운영을 주도한 惠山 李祥奎(1847~1923)에 대한 연구에서 부수적으로 검토된 것이 전부였다.5) 기실 화행일기 를 비롯한 당시의 중국 여행기들은 대체로 한국과 중국의 공교운동과 연계된 차원에서만 검토되어왔고, 해당 작품이 지닌 본연의 특징이나 가 치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비록 여행 목적이 공교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하더라도, 엄연한 여행기이자 문학작품으로서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보다 다양 한 시각에서 작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소개하는 화행일기 가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생각한 다. 화행일기 는 일제강점기 경남 지역 유림들의 시대의식과 공교운동을 기저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대 중국 여행기로서는 드물게 많은 시문과 상세한 묘사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에 그 학술적 가치가 보다 제고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 3) 화행일기 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고 연행록 전집 (동국대학교출판부)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1937년에 함양 보인당에서 목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이 글의 저본은 장서각 소장본(B15IC-6)이다. 4) 이종수, 1910~1920년대 한인 공교운동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5) 이종수, 李祥奎와 道統祠 孔敎支會, 대동문화연구 85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4; 이정희, 일제시 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도통사 孔敎支會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를 중심으로, 남명학연구 46집, 경상대 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181

藏書閣 35 식에 따라 이 작품의 중국 여행기로서의 문학적 성과와 한국 공교운동사적 가치를 함께 구명해보고자 하였다. 연행록 이후 근대 중국 여행 기록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처럼 역사적 문학적 가치를 함께 지닌 작품을 본격 소개하고, 특징을 살피는 작업 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Ⅱ. 화행일기 의 서지 및 저자 정보 1. 서지 사항 및 주요 여정 장서각 소장 화행일기 는 1책 56장의 목활자본으로 권두에 서문 3편과 권말에 발 문 3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기 본문은 대략 49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서문은 이 상규(1921년)와 鄭琦鉉(1922년), 閔致琮(1933년)이 썼는데, 세 인물 모두 회헌선생 실기 및 연보 편찬과 도통사 창건에 직 간접적으로 관계하였던 인물들이다. 권말의 발문은 안효진의 사촌 동생 안광진(1922년)과 조카 安源德(1920년), 三從孫 安明植 (1934년)이 각각 작성한 것이다. 책의 판권지에는 昭和十二年十一月十日發行 이라는 간행시기와 慶南咸陽郡輔仁堂發行 이라는 간행처가 기록되어 있어 1937년 11월 10일 경상남도 함양의 輔仁堂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행일기 의 기록방식은 일반적인 일기 형태로 날짜와 기사 순으로 작성하였는데, 3월 18일 기사를 끝으로 일기식 기술은 끝나고, 이후에는 중국이나 국내 인물들과 주고받은 글과 서신 등을 모아서 수록하였다. 일기 본문은 안효진이 곡부를 가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선조이신 文成公 晦軒 선생께서 태어나신 지 661년 己酉年(1909) 봄에 경상도의 사림들과 본손인 나는 진주 연산재에서 선생의 실기를 중간하였다. 3년 뒤인 임자년 (1912)에 나는 長湍 大德山에 있는 선생 선영의 儀物들을 다시 정비하면서 병풍, 상, 비갈 등 여러 품목 일체를 새로 하였는데, 신도비와 내가 세운 비석은 예전과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사림들이 또 하나의 큰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기에 옥돌을 자르느라 182

추모하고 본받아 연산재 뒤에 사당을 세워 성인의 초상을 받들고, 주자를 배향한 다 음 선생께 제사를 지냈는데, 편액하여 걸기를 道統祠 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자편년 과 주자연보, 선생연보 를 함께 간행하면서 오른쪽 큰 비석의 비명과 세 연보의 서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애를 썼다. 1년 지나 癸丑年(1913)에 사림들과 나는 선생께서 정사를 세우신 옛일을 문을 유가의 대가에게 구할 것을 생각하였다. 모두가 말하기를, 중국 궐리에 성인의 冑孫인 衍聖公 燕庭 孔令貽 선생과 성인 집안의 학자이자 원 로인 少霑 孔祥霖 선생께서 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薌友 尹憲燮을 추천하여 방문 인원으로 삼았다. 대개 향우는 학사 尹公集의 아들이자 徵士 蘇輝冕6) 공의 뛰어난 제자였다. 일찍이 부사와 승지를 지내고 중도에서 선뜻 물러나 중국 봉천부로 떠나 머문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京會의 여러 회원들이 앞에서 말한 뜻을 가지고서 향우에게 다녀와 그 승낙을 받았 다. 또 내가 선생의 본손으로서 방문원이 되길 추천하기에 나는 감히 사양할 수 없었 다. 漣川의 친척인 어린 承一군도 함께 가길 청하여 회원들이 모두 승낙하였다. [ ] 나는 이에 모포 1장, 면 이불 1채, 벼루 1개, 붓 1개, 먹 1개를 사서 柳笥에 넣고 남 대문 정거장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니, 공자 2468년 정사년(1917) 2월 14일 戊申, 이른 아침 일이었다.7) 위 기록에 따르면 안효진은 1909년에 선조 안향의 實記를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경남 진주 연산재에서 重刊하였다. 회헌실기 의 중간은 경남 산청의 李道默 (1843~1916)이 선현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사업을 통해 일제강점기 민족의식을 고취 하고 正學을 고수하여 조국의 불행한 현실을 타개하려던 노력이었다. 회헌은 고려시 6) 蘇輝冕 (1814~1889)은 조선 말기의 학자로 본관은 진주, 자는 純汝, 호는 仁山이다. 익산 출신으로 20세 이전에 문 명을 떨쳤으며 洪直弼을 사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仁山文集 17권이 있다. 7) 화행일기 1b~3a(날짜 기록이 없는 원문에 한하여 페이지 표시함), 先祖文成公晦軒先生作六百六十一年, 己酉春, 嶠南士林與本孫重刊先生實記於晉州硯山齋. 越三年, 壬子, 本孫重修長湍大德山先生塋儀, 而屛 床 碣諸品一體維新, 至於神道碑, 本孫所立碑, 依舊存焉, 而士林亦欲建一大碑, 致力以伐珉. 越一年, 癸丑, 士林與本孫追體先生精舍故事, 建祠於硯山齋後, 奉至聖像, 配以朱子, 而後祀以先生, 揭扁曰 道統祠, 合刊孔子編年 朱子年譜 先生年譜, 擬徵右大 碑銘與三譜序文於斯文大家, 僉曰: 中華闕里至聖冑孫衍聖公孔燕庭令貽, 聖府大方元老孔少霑祥霖先生可也. 遂薦尹 薌友憲燮, 爲謁員, 蓋薌友學士尹公集肖孫, 徵士蘇公輝冕高弟. 曾經府使承旨, 而勇退乎中流, 去住于中華奉天府, 已 有年矣. 京會僉員以右文謁意, 往復于薌友, 承其欽諾, 又推余爲先生本孫謁員, 余不敢辭. 漣川族少承一請與偕行, 僉 員皆諾焉. [ ] 余乃買取毛褥一 綿衾一 硯一 筆一 墨一納于柳笥中, 發向南大門停車社, 卽孔子二千四百六十八年, 丁巳二月十四日戊申, 早朝也. 183

藏書閣 35 대 불교의 성행과 폐단에 맞서 유학을 도입을 주장하고 부흥을 이끈 장본인이었기에 異敎가 滔天하고 紀常이 墜地하는8) 당시 현실에 좋은 귀감이 되었다. 이도묵은 1904 년 진주의 樂育齋의 齋長이 되어 영남에 소장된 판본들을 중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 하여 1905년 주자어류 와 미수기언 을 중간한 것을 시작으로 1909년에 회헌선생 실기 를 중간하기에 이렀다. 이 사업에는 회헌 후손 安孝鎭과 지역 유림 李道黙, 李祥 奎, 趙鎬來, 鄭圭錫 등이 참여하였고, 퇴계의 종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響山 李 晩燾(1842~1910)에게도 지지를 받았다.9) 유학이 위기를 맞은 시대였던 만큼 그 사업 의 의미와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1912년 長湍의 대덕산에 있는 회 헌의 산소를 정비하고 새 신도비를 세우는 등 회헌 추숭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1913년 에는 安氏齋室인 진주 연산재에 도통사를 건립하고 안향이 만년에 공자와 주자를 모 신 고사를 援用하여 공자 주자 안향을 함께 봉헌하였다. 그리고 이어 공자편년 주자연보 안자연보 를 合干하면서 안향의 새로운 신도비명과 함께 三聖賢 연보의 서문을 유가의 대가에게 구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연산재에 모인 유림들은 그 글 을 청탁할 사람으로 공자의 후손이 적합하다고 결론짓고, 중국 곡부에 파견할 사람 으로 중국 봉천에 머물고 있던 尹憲燮과 안향의 본손인 안효진을 추천하였다. 파견의 목적이 공자 후손으로부터 문장을 구하는 데 있었으므로, 학문적 소양이 높고 문장 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을 선발해야만 했다. 그 적임자로 안효진만 한 인물이 없었다. 그는 벼슬자리도 사양한 채 오랫동안 학문을 연마하였고, 지역 문인들과 詩會를 가지 는 등 학문적 소양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선조와 직접 관련한 일이었 기에 마다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윤헌섭은 일찍이 北靑郡守를 지낸 적이 있고, 중 국 봉천부에 거주하여 누구보다 북방과 중국 현지 사정에 밝았으므로 안효진의 동행 자로 적격이었다. 그리고 두 노장을 보조할 인물로 친척인 안승일이 참여하면서 마침 내 곡부로 파견될 세 사람이 확정되었다. 이렇게 안효진 윤헌섭 안승일 세 사람이 2월 14일 남대문에서 출발하면서부터 일 기는 본격 시작하고 있다. 주요 여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 安明植, 道統祠誌, 道統祠誌序, 아 顧今異敎가 滔天에 綱常이 墜地하니 嗚乎라 其孰能救之哉. 9) 李晩燾, 響山集 권9, 晦軒先生實紀重刊序, 實紀者, 紀其實而欲溯其本也, 溯其本, 而欲學其道也. 吾知是紀之行, 必有感發興起, 而吾道將自此復明也.(실기란 사실을 기술하여 그 본원을 소급하고, 그 본원을 소급해서 도학을 배 우려는 것이다. 나는 이 (회헌)실기가 간행되면 반드시 사람들이 감동하고 흥기하여 우리의 도가 이로부터 다시 밝아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184

날짜 2월 14일 주요 여정 남대문 역 출발 2월 20일 압록강 도강, 중국 安東縣 도착 2월 22일 봉천부 도착. 윤헌섭 합류. 윤 2월 3일까지 체류 윤 2월 5일 산해관, 천진 윤 2월 6일 연주부 도착 윤 2월 7일 곡부 도착 윤 2월 9일 衍聖府 방문 請序, 請銘, 폐물 헌납 윤 2월 10일 孔祥霖 집 방문. 아들 孔令侃 응접 윤 2월 11일 공상림과 만남. 회헌실기 및 연보 회람 윤 2월 12일 윤 2월 14일 윤 2월 15일 윤 2월 17일 聖廟 聖林 聖府 관람 顏子의 종택, 顏子廟 방문 孔令貽 만남 孔敎總會 방문 윤 2월 18일 孔祥霖의 三聖賢編年年譜合刻序 와 晦軒神道碑銘 초고본 회신 윤 2월 20일 귀로에 오름 공상림으로부터 孔敎支會의 설립 요청 孔子聖像 聖門禮樂誌 聖府古蹟 總會雜誌 등을 받아옴 3월 18일 이후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표 1 화행일기 주요 여정 함양의 자택에 도착 공상림의 도통사 공교지회의 설립 동의 편지 도착 도통사 공교지회 창립. 공상림이 공교지회 會歌를 전송. 공상림과 윤헌섭의 부고. 주자 의 후손과 교류 추진. 이상의 여정을 살펴보면 당시 중국행은 애초 계획했던 연보 서문과 신도비명 청탁 의 임무를 완수한 것 말고도 도통사 공교지회 설립이라는 또 다른 업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전개된 공교운동과 맞물려 유학의 도리를 지키고 뿌리를 보존 하려한 조선 유림들의 노력이 잘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화행일기 에는 1910년대 한 중 공교운동의 일면과 양국 유림의 교류 정보 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정 중간중간에는 이국 풍물에 대한 묘사와 저자 의 시문을 기록하여 기행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정서를 환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 자세한 내용은 Ⅲ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185

藏書閣 2. 안효진의 생애와 교유관계10) 35 안효진은 본관이 順興이며, 자는 敬元, 호는 芝山이다. 文成公 安珦의 후손으로 조 부는 安克文이고, 부친은 安在一이며, 모친은 林川 趙氏 學成의 딸이다. 1855년(철종 6) 경상남도 咸陽郡 柳林面 獐項里에서 태어났는데, 조부 때부터 진주에서 함양으로 이사하여 학당을 열고 지역 선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안효진은 안동 김씨 金弘潤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31세 되던 해 喪妻하였고 재령 이씨 李在善의 딸과 재 혼하였다. 아들은 安源晟이다. 함양군지 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안효진은 천성적으 로 재주와 품격이 뛰어났고, 기상이 활달하였다. 현인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좋아하여 經史를 널리 섭렵하였다고 한다.11) 1901년(광무 5) 員外郞에 처음 제수되고, 그해 11월 충청북도 관찰부 主事에 임명 되었지만, 바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從弟인 安光鎭12)과 함께 밤낮으로 학문을 닦았다. 이후 1909년 南川 李道默 등 지역 유림과 함께 晦軒先生實記 를 重刊하여 진주 硯山齋에 소장하고 이어서 도통사를 건설하여 공자와 주자, 안향을 함께 봉헌 하려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4년 도통사 건물이 준공되고 硯山齋會가 소집되 었을 때 안효진은 道廳幼學에 선출되었고, 용인에 있던 공자의 성상을 模寫하여 왔 다.13) 1917년 도통사에서 공자 주자 안향의 三聖賢編年年譜 서문과 안향의 신도비명 을 공자의 후손에게서 받고자 하였는데, 이때 안효진이 안향의 본손이라는 이유로 유 림의 추천을 받았다. 안효진은 당시 63세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2월 중국 곡부 궐리에 가서 孔令貽와 孔祥霖을 만나고 晦軒神道碑文 과 三聖賢編年年譜序 를 받아서 돌아왔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도통사에 공교지회가 설립되자 副約正의 직책을 맡았고, 1930년에는 경기도 鹿洞書院에서 중국 곡부가 전란으로 병화를 입 은 일에 대해 慰安師를 파견하려 했을 때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인 10) 안효진의 생애는 順興安氏直長公派譜 (순흥안씨직장공파보편찬위원회, 1991)와 道統祠誌 (안명식, 1964), 咸 陽郡誌 (함양군, 1956) 등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고, 활동 및 교유관계는 남명학고문헌시스템(www.nmh. gsnu.ac.kr) DB와 이상규의 惠山集, 李道默의 南川先生文集, 沈相福의 恥堂文集 등의 함양 및 주변에 거 주하던 유학자들의 문집에 실린 안효진 관련 기록들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11) 咸陽郡誌, 學行, 安孝鎭, 號芝山, 姓克文孫, 才品出倫, 氣像豁達, 好賢嗜書, 博涉經史. 12) 安光鎭 (1860~1935)은 일제강점기 성리학자로, 자는 致亨이며, 호는 瀶川이다. 당형 안효진과 함께 학문을 닦고 산수를 소요하면서 시를 지어 성정을 다스렸다고 한다. 문집으로 임천선생문집 이 있다. 13) 용인의 공자성상은 1892년에 畫員 蔡龍臣이 중국 궐리에 가서 모사해 온 것이다. 186

한 화행일기 를 간행하였고, 이후 1943년에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안효진의 죽음을 애도하던 자들은 그가 노년의 몸으로 중국을 다녀온 행적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生東遊北氣魁梧 認是高標出百夫 難道芝山乘化盡 華行筆色薄靑區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1937년에는 함양에서 사촌동생 안광찬 등과 함께 1917년 중국 여행의 시말을 정리 동방에서 태어나 북방을 노니는 기상 크고 장대하니 모든 사내 가운데 우뚝 빼어나다는 것을 알겠네. 지산의 섭리에 따른 죽음 말하기 어려워라 화행의 필색 청구에 얕아지는구나.14) 이 작품은 산청의 유학자 李敎宇(1881~1944)가 안효진을 위해 지은 挽詩이다. 여 기에서 안효진의 중국행이 그의 남다른 기상을 드러낸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그가 남 긴 화행의 필색이라는 말은 곧 화행일기 를 가리킨다. 그 필색이 점차 얕아진다는 말 로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그가 죽음에 맞이하였음을 비유하였는데, 저자의 안타까 운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중국을 오가면서까지 유학의 정도를 바로세우고자 했던 안효진의 노력은 양국 유 자들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안효진의 부고 소식을 접한 공자의 77대손 孔德成 (1920~2008)이 그를 애도하며 斗山望重 네 자를 써서 보내준 일 또한 그 공을 인 정하였기 때문이다. 안효진의 문집은 화행일기 외에도 芝山集 이라는 5권의 유고가 전한다고 하는 데, 아직까지 그 전모는 확인할 수 없고,15) 다만 沈相福(1876~1951)의 문집에 수록 된 지산집 의 발문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그 발문 가운데 안효진의 인물됨을 가늠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잠시 소개해본다. 아! 이는 安芝山 공의 남겨진 말씀이다. 공은 평소 經綸의 뜻을 품고 일찍이 출사 하여 세상에 약간 그 뜻을 시험하였으나 세상이 상전벽해처럼 급변함에 이르러 다시 는 이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문을 닫고 스스로 조용히 지내며 의관도 갖추지 않 14) 李敎宇, 果齋先生文集 권21, 挽安芝山孝鎭. 15) 안효진의 유고 정보는 순흥안씨족보 에 따른 것이다. 필자가 순흥안씨 종친회와 안효진의 후손가에 문의한 결과 유고 5권이 있다는 사실을 구두로도 확인하였지만, 현재 정확한 소장인이나 소장처는 알 수 없었다. 187

藏書閣 35 고 교유도 끊었는데, 임금을 걱정하고 도를 근심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매번 말하고 시를 짓는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 진실하고 위대한 덕행은 또한 가릴 수가 없는 것 이 있었으니 너무 꼿꼿하지 않은 것으로 강직함을 삼아 절로 풍모가 있었고, 말이 많 지 않음을 변론으로 삼아서 절로 조리가 있었다. 몸과 마음을 닦는 것에 있어서는 단 정하고 어질어 굳세고 깨끗하였으며, 바른 도리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간절하고 돈독 하여 두루 다함이 있었다. 후학을 권장하여 끌어줄 때에는 천천히 순서를 따라 사람 의 마음 깊이 새기어 사람의 마음이 젖어들게 하였다. 한 시대의 어진 자들이 그의 문 하에서 많이 나왔으나 先烈을 사모함에 더욱 두텁게 하였다.16) 발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안효진은 근대 한국의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출사의 뜻을 포기하고 평생 동안 고향에서 지방 유림들과 교유하며 학식과 덕행을 닦았다. 또한 선대의 유업을 이어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가 주로 교유한 인물들은 심상복 외에 李道默, 李道樞, 李祥奎, 姜龍夏, 鄭 圭錫, 權道溶 등이 있다. 이들은 주로 산청과 함양 일대에서 활동하던 학자와 문인들 로 도통사 설립에도 함께 참여하였던 자들이다. 이도묵과 이도추는 형제지간으로 近 畿實學의 학맥을 이은 性齋 許傳(1797~1886)의 문하에 적을 두고, 남명 조식의 학 통을 이어받았다. 강용하는 율곡과 우암의 학통을 계승한 鼓山 任憲晦(1811~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을 위기지학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권도용은 경남일보 2대 주필로 언론계몽운동에 힘썼으며, 독립운동가로서도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안효진은 이들의 문집에 서 발문을 써주거나 시를 수창하며 교유하였는데, 함께 汶上唱酬詩 라는 수창집을 간행할 정도로 문학적 교유가 매우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7) 교유한 인물 가운데에서는 이상규와 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상 규는 일찍이 性齋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함안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인재양성에 힘썼 던 인물이다. 1910년대에는 도통사 및 공교지회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안효진과는 도통사의 창립을 계기로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16) 沈相福, 恥堂文集 권5, 芝山文集跋, 嗚呼! 此芝山安公咳唾之遺也. 公素抱經綸之志, 嘗出而薄試於世, 及夫世 變滄桑, 無復斯世意. 杜門自靖, 廢巾櫛, 息交遊, 戀君憂道之誠, 每發於言談吟詠之間. 實德偉行, 又有不可掩者. 不 觥觥以爲直, 而自有風裁 不啑啑以爲辨, 而自有條理. 修之身心者, 端良而介潔, 處之彝倫者, 懇篤而周盡. 奬進後學, 循循有序, 入人深而使人心醉, 一時賢流, 多出其門, 尤篤於慕先. 17) 이 사실은 이도묵의 남천선생문집 에 수록된 汶上唱酬詩序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안효진의 문집이 확 보되지 않아 안효진이 수창한 문인들과 시작품은 차후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188

련하면서 증서와 송별시를 지어주는 등 각별한 마음을 기울이기도 했다. 당시 지어준 송별시 한 수를 잠시 살펴본다. 百計卸輈欲挽行 同文同會是同聲 夢中不識中州路 無限東風萬里情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이상규는 안효진이 중국으로 가기 전날 밤에 자기 집 앞의 강가에서 전별연을 마 갖은 방법으로 짐수레 풀어 가는 길 만류하고프니 동문동회 사람 모두 같은 말을 한다네. 꿈에서도 중국 가는 길은 모르겠으니 끝없이 부는 동풍에 만리의 정 부친다네.18) 이 시는 李白이 知己였던 汪倫과 이별할 때 지어준 시를 차운하여 만리타향으로 벗을 보내는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여행 당시 안효진의 나이는 63세였고, 이상 규도 70세였다. 많은 나이에 떠나는 먼 길이라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감과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심정이 함께 담겨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둘의 교류는 중국 여행 이후 더욱 돈독해졌다. 안효진은 중국을 다녀온 후 화행일 기 초고를 작성하였고, 가장 먼저 이상규를 찾아가 서문을 구하였다. 안효진은 평소 이상규의 학문과 문장을 본받고자 하였는데, 혜산집 발문에서 그의 시문 수백여 편이 담백하고 깨끗하면서도 부유하며 아름답고, 넓고 크며 깊고 박식하여 참으로 대 가의 풍류와 운치가 있고, 사특함을 물리치고 바름을 지키는 덕을 갖추었다 19)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상규 역시 화행일기 의 서문을 써주면서 옹이 많은 것을 본 것으로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나의 안목을 꺼내어주어 사해의 무궁한 지역에서 노닐도록 하고 聖府 의 이끄는 방도를 좇게 해주었다 20)고 하면서 그의 여행이 자신을 비롯한 주변 유림들 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음을 말하고, 화행일기 의 기록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둘은 이처럼 서로의 문장을 교류하며 교학상장의 관계를 지속하였고, 공교지회의 창립 후에는 임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안효진에게 이상규는 일생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순간에 누구보다 많은 것을 나누고 교감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8) 李祥奎, 惠山集 권4, 記夢次李白別王倫詩送安敬元之中州. 19) 李祥奎, 惠山集, 惠山集跋[安孝鎭], 我惠山先生李公之所著詩文, 至爲數百餘篇, 而沖澹富豔, 灝噩淵博, 實有大 方家風韻, 而斥邪扶正之德備焉. 20) 화행일기 序, 以翁之大觀, 援出余坐井之觀, 使遊心於四海無窮之域, 而遵聖府之導迪. 189

藏書閣 Ⅲ. 화행일기 의 특징과 가치 35 1. 문예미를 갖춘 성지순례기 1910년대의 곡부여행기는 당시 중국에서 성행한 공교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 다. 20세기 초 중국은 유교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공교운동이 한창이었다. 이 운동 은 중국 근대 사상가인 康有爲(1858~1927)와 陳煥章(1881~1933)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서세동점으로 중국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국력이 쇠퇴해감에 따라 이를 극복 하기 위해 유교의 종교화 운동을 제창하였다. 강유위는 동아시아에서 전통을 이어온 유학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유교를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로 보고 혼란의 시대 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는 서양의 기독교를 참조하여 공자를 교주로 하고, 六經을 성경으로 삼아 孔敎 라고 명명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상해에서 진환장과 함께 공교회를 공식 창립하고 공교를 국교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공교운동을 전개하였다.21) 이 당시 곡부는 공자의 출생지이며 유가의 발생지였기에 자연스럽게 공교운동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곡부에 거주하던 공자의 후손들은 공교회 주요 인사가 되었고 곡부에서는 매년 공교총회가 열렸다. 공교운동은 근대 중국사회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한인 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 만주에 망명해 있던 한인 유학자들은 중국의 공교운동에 적극 관심을 보였는데, 그 중심에는 만주지역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李承熙 (1847~1916)가 있었다. 이승희는 중국 안동현에 머무는 동안 중국 공교운동 소식을 접하고 이를 한인사회 에 도입하여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가는 정신적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3년 12월 직접 공교회 본부와 인사들이 있던 북경과 곡부로 걸음하였고, 마침내 중국 공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아 안동현에 東北三省韓人孔敎會를 창설하였다. 이승희 는 이후로도 이현덕, 정돈섭, 이병헌 등의 인물을 곡부에 파견시키고 중국 인사들과 의 만남도 적극 주선하였다. 공자의 후손을 비롯한 중국의 학자들은 자신과 뜻을 나 눌 수 있는 한국 유학자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렇게 한 중 유학자의 정서적 21) 중국에서의 공교운동 전개과정은 이종수의 논문(2010)을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190

부여행기도 탄생하였다. 1910년대의 곡부 여행기들은 대체로 근대화와 일제 침탈로 암울해진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보이고 있으며, 곡부라는 장소의 특성에 맞게 성지순례기적인 면모도 가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공감과 연대 아래 공교운동에 관한 논의는 점차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곡 지고 있다. 안효진의 화행일기 역시 양국 공교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양산된 작품으로 유가 성현을 추숭하고, 정도를 고수하자는 시대적 요구가 동일한 기저로 작용하고 있다. 하 지만 작품의 성격이나 기록방식,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작품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효진의 중국 여행은 시기적으로 가장 늦지만 다른 인물들처럼 중국 공교운동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여행은 중국에서 공교회가 성립되기 이전부 터 진행되어왔던 경남지역 유림들의 자체적인 유교 부흥 사업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 다. 여행 목적 역시 한인공교회의 설립 허가나 공교운동에 대한 자문을 얻으려 했던 것과는 상관없었다. 결과적으로 도통사에 공교지회를 설립하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애초의 목적은 문장 구하는 일을 통해 유가 성현 추숭 사업을 완성하는 데 있었다. 즉, 다른 인물들이 정치 사회적 교류의 목적으로 곡부를 여행했다면, 안효진은 학술 적 교류에 주목적을 두고 곡부를 찾은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의 차이 때문인지 그의 작품 또한 문예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학술 교류의 주체자로서 문학적 역량 은 어쩌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데, 화행일기 를 통해 그 역량을 어김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보면, 보다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당대 곡부여행기를 살펴 보면, 대부분 작품들은 곡부까지의 노정을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다루고 곡부에서의 활동만 집중 서술하고 있다. 25일. 아침에 일어나 7시 차를 타고, 唐山에 도착해 조금 쉬었다. 天津에 도착하여 묵었는데, 대도시였다. 26일. 앞의 거리로 나가 황하 지류를 건너며 그 장려함을 구경 하였다. 12시 차를 타고 밤에 황하를 건너 곧장 곡부에 도착하였다.22) 22) 이현덕, 晶山文集 권4, 北征日錄, 二十五日. 朝起, 乘七點車, 至唐山小憩, 抵天津宿, 大都會也. 二十六日. 出前街, 渡黃流, 畧觀其壯麗, 乘十二点車, 夜渡黃河, 直至曲阜. 191

藏書閣 35 이 글의 저자인 이현덕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스승 이승희를 만나기 위해 1915년 2월부터 9월까지 중국 남만주 일대와 곡부를 방문했다. 당시 여정을 기록하여 北征 日錄 이라 하였는데, 봉천부를 중심으로 남만주 일대의 유람 내용이 작품의 절반을 차지하고, 곡부에서 공자 유적지 일대를 묘사한 내용이 약간 포함되어 있다. 위 인용 문은 이현덕이 봉천에서 곡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것인데, 보이는 것처럼 노정을 몇 글자로 정리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에 비해 안효진은 화행일기 에서 곡부 까지의 여정 동안 감회를 시로 표현하거나, 중국 대도시의 이국적 풍경과 풍속을 자 세히 묘사하였다. 저물어질 무렵에 天津에 도착하였다. 중국의 아이들이 손에 표딱지를 들고서 기차 안으로 올라와 손님들에게 표를 나눠주었다. 대체로 표의 모양은 반 척쯤의 천을 竹 策에 매단 것 같았는데 목책의 끝에는 천의 겉면에 객잔의 이름을 써놓았다. 객잔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여관이었다. 우리 세 사람에게는 悅來棧 이라 쓰인 표를 주기 에 이유도 모르고서 그것을 받고 객실에 있다가 기차에서 내려 인력거를 탔다. 그가 태우고 가는 데로 따라서 여관에 이르렀더니 열래잔이었다. 이것은 곧 객잔에서 손님 을 구하는 방법이었으며 여러 객잔에서 모두 이와 비슷하게 하였다. 객잔 주인이 王 殿 이라고 말하며, 나를 2층 누각으로 오르게 하였다. 누각의 건물형태는 사방 벽을 목판으로 만들고 판자 가운데는 네 창문이 있었으며, 네 창문에 거울을 붙이고 반쯤 공중으로 열어두었는데 또한 아름다웠다. 그러나 앉는 곳이 나무 바닥이고 기장피로 만든 자리를 깔아두어서 잠시만 앉아 있어도 금방 냉랭한 기운이 뼈까지 스며들었다. 마침내 가져온 모포를 깔았더니 냉기가 조금 사라졌다. 앉은 지 오래지 않아 객잔 주 인이 일하는 아이에게 명령하여 온수를 올려 세면을 하도록 하고, 또 뜨거운 차를 올 려 목마름을 풀도록 하였다. 이것은 원래부터 있던 객잔의 관례였다. 객잔문을 나와 난간을 둘러보며 멀리 누옥의 성대함과 풍물의 번화함을 바라보았 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바다의 한 굽이는 들판 가운데로 파고들어 간 것이 거의 100리쯤이었고 도시는 언덕 위에 있었다. 여기부터 북경까지의 거리는 200리로 곧장 이어지기에 경성의 중요한 지역이다. 그렇기에 北洋鎭將 李鴻章이 성을 장대하 게 증축하였다고 한다.23) 23) 화행일기 윤2월 5일, 將暮抵天津. 華之童兒輩手持旗標, 而登車內, 給標於諸客. 蓋標樣則懸半尺布於竹策, 木策 192

잔에 묵게 된 과정과 이국적 감회를 서술한 것이다. 일행은 천진에 도착하자마자 새로 운 풍경을 맞이한다. 여관에서 여행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자기 숙소의 명함을 나눠주 며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몰랐던 일행은 기차 안에서 그 명함을 받아들고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위 기록은 안효진 일행이 봉천에서 기차를 타고 천진에 도착하여 열래잔이라는 객 영문도 모른 채 앉아 있다가 안내하는 아이를 따라 인력거에 올랐고 결국 열래잔이 라는 건물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접한 객잔이라는 공간은 너무도 낯설었다. 누각의 형태는 우리나라와 달리 아름다웠지만 우리나라처럼 온돌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냉기가 가득했다. 중국의 숙소에 온돌이 없어 추위로 고생하는 장면은 과거 연 행록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던 모습인데, 시대가 바뀌었어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후 안효진은 객잔 밖으로 나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그 독특한 지형과 도시 의 번화함에 감흥이 절로 일어났다. 黃潮通朗巨郊斜 挾岸棧連十萬家 繁物欲收難盡記 누런 물결 거대한 들판 굽이지며 맑게 빛나고 언덕을 끼고서 객잔과 십만 가옥 연달아 있네. 번화한 풍물 모아보려 해도 모두 기록하기 어려우니 心神卻似夢中過 심신은 도리어 꿈속을 지나는 듯하구나. 三人獨臥二層樓 세 사람 중 나 홀로 이층 누각에 누웠는데 萬物皆踈起遠愁 慣顔惟有東溟月 夜尋孤客照悠悠 모든 것이 생소해 멀리 온 나그네 시름 자아내네. 눈에 익은 것은 오직 동해바다의 달 뿐이니 밤중에 찾아와 외로운 나그네 유유히 비춰주네.24) 첫 번째 시에서 안효진은 바다와 넓은 들판을 끼고 발달한 천진의 독특한 지형에 처음 놀라고, 눈에 가득한 도시의 번화한 풍물에 두 번째로 놀랐다. 이처럼 낯설고도 之端而書棧名於布面, 棧卽東國所謂館也. 給余三人以悅來棧標, 故莫知其由, 而取之及室, 下車乘人力車, 任其往而 至館, 卽悅來棧也. 此乃棧之請客法也, 而諸棧皆類是也. 棧主曰, 王殿 使余登二層樓. 樓之爲屋也, 四壁以木板, 而 四牕於板中, 付鏡於四牕而向開半空, 亦美好也. 然而坐以木廳, 而布以秫皮茵, 乍坐輒冷冷透刺骨. 遂布所帶毛褥, 冷 稍謝焉. 坐未久, 棧主命傭童供溫水, 使之洗面, 又供熱茶, 使之解渴, 此固棧之已例也. 出棧門巡欄, 而放眺樓屋之盛 大風物之繁華, 殆不可盡記. 海一曲衝入野央, 幾許百里, 而府在岸上. 此距北京二百里直通, 而要重於京城, 故北洋 鎭將李鴻章增制以壯大云也. 24) 화행일기 윤2월 5일. 193

藏書閣 35 놀라운 풍광이 마치 꿈을 꾼 듯하다고 그는 말한다. 두 번째 시에서는 모든 것이 낯 선 가운데 유일하게 익숙한 달빛에 기대어 旅愁를 풀어내고 있다. 중국의 번화한 도 시 풍경에 놀라고 이방인의 외로운 심정을 느끼는 것은 과거부터 중국을 여행했던 자 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은 감정이었다. 안효진은 이처럼 이방인이자 여행자로서의 감수성을 발휘하며 곡부로 향하였다. 도중에 황하를 건너거나 광활한 들판을 지나는 등 낯설고 진귀한 풍경을 만날 때마 다 그 감수성은 재차 발현되고 있다.25) 안효진은 양국의 역사가 서린 지역을 지날 때는 고토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野無涯障宇全空 萬戶中央作府雄 扶竪天綱三學士 凜人千載尙餘風 負嶽臨溟大陸平 八方工賈雜農兵 二千餘載垂癡想 尙有秦皇萬里城 끝없는 벌판에는 가로막는 집 하나 없고 만호의 중앙에는 웅장한 관부를 지었다네. 삼학사는 하늘의 강령 붙들고 일으켰으니 늠름한 위인의 기풍 천년이 지나도 아직 남아 있다네.26) 산악을 뒤로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평평하게 들판 뻗었는데 전국의 工商農兵이 뒤섞여 있다네. 2천여 년 넘도록 어리석은 생각 드리우고 있으니 여전히 진시황의 만리장성 남아 있다네.27) 심양은 과거 병자호란 직후 효종과 소현세자, 삼학사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이 볼 모이자 포로로 잡혀와 곤란을 겪고 순절하였던 곳이다. 이로 인해 많은 조선의 연행 사들은 심양을 지날 때마다 항상 그 일을 떠올리곤 했다. 안효진 또한 심양을 지나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떠올렸다. 첫 번째 시를 보면, 안효진은 봉천부 누각에 올라 조선과 물색이 너무도 다른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순절한 삼학사를 떠올렸 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지어 그들을 위로하였다.28) 일본에 나라를 강탈당하 25) 화행일기 윤2월 7일, 千里無涯岸, 一望野色虛, 樹如天畔立, 村似海中居. ; 윤2월 6일, 黃河曾耳識, 今日見黃河, 塵愁滿吾腹, 試滌借渠何. 26) 화행일기 2월 23일. 27) 화행일기 윤2월 5일. 28) 화행일기 2월 23일, 攜同李永宰, 登府西門樓, 俯瞰府落, 物色殊異, 起人愁慘, 而憶昔三學士之殉義, 實不禁寒泫 之承臉也. 194

그 감회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심양이 과거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린 곳이라면 두 번째 시에서 산해관은 중국의 아픔이 서린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산해관은 동쪽 관문이자 만리장성과 닿은 군사적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여 선조들처럼 먼 타국을 떠돌고 있는 현재의 처지가 과거와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요충지이며, 만리장성은 2,000년 중화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그런데 19세기 말 중국이 외세에 잠식당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패함으로서 산해관과 만리장성은 과 거의 위용을 잃고 허물어진 채 폐쇄되고 말았다.29) 안효진은 과거 중국의 찬란했던 역사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무너진 만리장성과 폐쇄된 산해관을 통해 실감하였다. 이상 안효진이 여정 내내 보여주고 있는 여행자 특유의 감수성과 역사의식, 세밀한 묘사력은 여행기로서의 높은 문예미와 완성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 문학적 역량은 곡부에 도착했을 때에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곡부 곳곳을 머리와 가슴에 새기겠다는 생각으로 곡부의 지세와 거리의 모습, 성묘 성림 성부의 구조와 생김새, 성상의 형태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두었다. 담장을 돌아 서쪽으로 수백 보를 가서 길을 꺾어 북쪽으로 가니 담장 너머에 돌을 쌓아 문을 만들어 가로로 石門에 洙水橋 라 써놓았다. 수백 보를 가니 웅장한 전각 이 있었는데 享殿이었다. 전각 앞에는 官人石과 羊馬石을 좌우에 설치하였다. 전각을 지나 수백 보쯤을 가자 흙으로 된 봉분이 있었는데, 堂처럼 돌로 만든 상과 화로를 앞에 설치하고 짧은 비석을 床石 뒤에 세워두었는데 비갈에는 단지 至聖先師孔子之 墓 라는 패방만 써두었다. 蔡草가 위로 길게 자라 있었고, 옆에는 해나무가 크게 자라 있었으니 채풀은 자르고 해나무는 자르지 않았다. 대개 중국의 풍속에 숲에 혼이 숨 는다고 여겨서 장례를 할 때 반드시 숲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墓 라 하지 않고 林 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묘를 또한 성림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 ] 성전은 마당의 북쪽에 있었는데 대개 열 칸 정도 되었다. 섬돌은 돌을 갈아서 깔았 고, 툇간 기둥은 옥을 다듬어 세웠는데 높이가 4~5장은 되었고 크기는 한 아름 남짓 보다 더 되었다. 기둥에 용을 새기고, 쇠를 주조하여 난간을 만들었는데, 난간은 동서 로 드리워 있었고, 푸른 벽과 붉은 문, 주황색 서까래, 황색 기와가 반쯤 공중에 빽빽 29) 화행일기 윤2월 5일, 惟城址頹破, 猶在山上, 是所謂秦始皇所築萬里長城也, 而關乃城之東門也, 城廢之日, 關亦 廢之. 195

藏書閣 35 이 서리어 있었다. 바깥문의 편액에 生民未有 라 쓰여 있었고, 안쪽 문에는 大聖殿 이라 쓰여 있었다. 전각의 계단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린 뒤 마침내 전각으 로 들어가 살펴보았다. 중앙에는 5성이 안치되어 있고, 공자는 북쪽에 모셔져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안연과 자사는 동쪽에 짝하여 서쪽을 향했고, 증자와 맹자는 서쪽에 짝하여 동쪽을 향했다. 또 12철이 동서로 나뉘어 짝지어 있었는데 6철은 안연과 자 사의 뒤쪽에 안치되어 있었고, 다른 6철은 증자와 맹자 뒤에 안치되어 있었다. [ ]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몸이 공중에 기댄 듯하였다. 만가의 기와지붕이 빽빽 하게 성을 가득 채웠고, 공부하는 소리가 넘실거리며 서로의 집에 전달되었다. 마을 에는 십자 모양의 거리와 乙자 모양의 거리, 丁자 모양의 거리가 있었는데, 십자 거리 는 동서남북의 문으로 곧장 통했다. 乙자 거리와 丁자 거리는 십자 거리로 이어져 있 었고, 거리에는 상점이 설치되어 교역하는 사람들이 또한 어깨를 서로 부딪칠 만큼 많았다. 북쪽을 바라보니 태산이 구름 밖으로 아득하였고, 동쪽과 서쪽, 남쪽에는 먼 곳까지 산색이 없이 오직 문수가 서쪽으로 흐르고 사수는 동쪽으로 흘렀다. 유유히 흘러가는 물빛이 천리대야의 가운데에 떠서 빛났고 무한한 풍광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30) 위 내용은 안효진이 윤2월 12일에 곡부에서 劉文燦이라는 인물의 안내를 받아 聖 廟와 聖林, 奎文閣 등을 구경하고 기록한 것이다. 성묘와 성림의 내력 및 주요 정경을 묘사하고, 대성전에 모셔진 공자와 12哲의 성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였다. 그리 고 규문각의 내부구조와 외부에서 조망한 곡부거리의 풍경도 일기 속에 생생하게 재 현하였다. 그가 이날 기록한 공자유적지에 관한 기사는 화행일기 전체 일기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 경건한 마음가짐과 세밀한 현장 묘사는 단순 여 30) 화행일기 윤2월 12일, 循墻西行數百武, 而路折轉北, 跨墻築石門, 橫書楣石曰, 洙水橋, 行數百武, 有傑閣曰, 享 殿, 殿前立設官人石羊馬石於左右, 過殿行百武許, 有土封, 若堂設床石爐石於前, 建短碣於床石之後, 碣面只書牓字 曰, 至聖先師孔子之墓, 蔡[筮草]長於上, 楷大於側, 蔡斬而楷不斬. 蓋華俗以爲藏魄於林, 而葬必貴林, 故不曰墓而 曰林, 聖墓亦曰聖林是也. [ ] 聖殿持在於場北而凡十間也. 階砌以石磨鋪, 退柱以玉裁建, 高可四五丈, 大過一抱餘, 雕龍於柱身, 鍊金爲欄, 欄垂於東西, 翠壁丹楣朱椽黃瓦盤鬱於半空, 題扁於外楣曰, 生民未有. 題內楣曰, 大聖殿. 行三拜九叩禮於殿階, 遂入殿, 奉審則中妥五聖, 而孔子北奉向南. 顔思東配向西, 曾孟西配向東, 又十二哲分配於東 西, 而六哲妥於顔思後, 六哲妥於曾孟後. [ ] 倚欄而放眺, 身如憑虛也, 萬家瓦屋比密滿城, 而絃誦之聲洋洋相傳, 府有十字街 乙字街 丁字街, 十街則直通于東西南北門, 乙街丁街達於十街, 街鋪商廛, 交易之人, 亦可摩肩也. 北望 則泰山縹緲於雲外, 東西南杳無山色, 而惟汶水西流, 泗水東流, 穩流之光, 浮暎於千里野央也, 無限風煙, 不能盡收. 196

안자묘와 주공묘, 맹자묘를 차례로 방문하여 그 웅장하고 신성한 전경을 전부 기록해 두었다. 안효진은 안향의 후손이자 유학자로서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으로 곡부를 대하였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행기의 차원을 넘어 성지순례기로서의 면모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날 이후로도 다. 곡부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안효진에게 유학자로서의 본분과 사명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그런 장소였다. 다음 시를 통해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聖神如日月 不在賴林寧 列植又繁植 성신께서는 해와 달 같으시니 숲에 의지해 편하게 깃들지 않으신다네. 나무를 가지런히 심고 또 무성히 심는 것은 護靈是慕靈 신령을 보호하고 사모하는 마음이라네. 直任瑞條靑 그저 상서롭게 뻗은 푸른 가지에 내맡긴다네. 豈容凡木秀 燁燁光千載 莫敎風雪經 어찌 凡木의 아름다움만 받아들이리오 빛나는 풍광 천년을 이어오니 바람과 눈이 지나게 하지 말아야지.31) 이 시는 공자의 무덤인 聖林을 방문한 날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성림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그는 천년을 이어온 이곳이 바람과 눈 같은 시련을 겪지 않도록 해 야 한다고 말하였다. 유교를 국교로 삼은 漢代 이래로 공자의 고향인 곡부는 유교의 성지로 인식되어 역대에 걸쳐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공자의 사당인 孔廟 와 공자의 종택인 孔府, 공자의 묘소인 孔林은 성지로 추앙되어 시대와 왕조가 바뀌 어도 유교 지배층의 구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32)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국교로 삼 아 공자를 문묘에 모셔 추앙하였고 공자의 유적에 대해서도 많은 학자들이 알고 있었 다. 하지만 곡부까지 가서 공자 유적지를 직접 살핀 경우는 거의 없고, 공자 후손과 학술적으로 교류한 경우 역시 찾아볼 수가 없다. 이처럼 곡부와의 빈약한 교류사로 볼 때 화행일기 의 곡부 관련 기록은 보다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31) 화행일기 윤2월 12일. 32) 김항수, 朝鮮 儒林의 曲阜 孔廟 방문, 한국사상과문화 16집, 한국사상문화학회, 2002, 426쪽. 197

藏書閣 2. 국내 최초 공교지회의 설립과정 기록 35 도통사 공교지회는 1913년에 창설된 墾島孔敎會, 東北三省韓人孔敎會와 함께 1910년대 조직된 대표적인 한인 공교회이며, 중국 동북지역에 설립된 다른 공교회와 달리 한국 국내에 설치된 최초의 공교회였다. 도통사 공교지회는 경남 진주 산청 일 대의 유림들이 도통사에 공자 주자 안향을 봉송하는 사업을 진행하던 가운데 안효 진 등을 곡부에 파견하면서 공교회 총리였던 공상림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설립하게 되었다. 이후 초대 회장으로 李祥奎를 선출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결성하였다. 초대회 장 이상규는 공교지회 설립 이전부터 이도묵을 비롯한 성재학파 명유들과 함께 안향 이 고려 말 공자와 주자를 숭배하면서 불교를 물리친 사실을 귀감으로 삼아 유교부 흥운동을 일으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려 하였다. 당시 불교[竺敎]가 동방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자와 주자의 학문을 오래도 록 모르고 있다가 안자에 이르러서야 진실로 창명하였다. 이에 사람의 본성이 일변하 여 도의 기틀이 되었다. 우리의 聖朝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운 眞儒들이 배출되어 문명 의 다스림이 열리게 되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異敎가 떠들썩하여 오히려 안자의 시 대보다 심해졌다. 경남의 많은 선비들은 이것을 매우 걱정하여 안자의 옛일을 본받아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연산에 모시고 안자를 제사 지냈다.33) 도통사 공교지회의 설립은 이처럼 안향을 위시한 유교부흥사업의 명분과 명성이 알려지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후 안향을 추모하는 사업을 활발히 전개함으로 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立國을 실현하고자 하였다.34) 비록 1920년에 도산서원의 견 제로 인해 그 지위를 상실하였지만,35) 중국 공교총회의 지도를 받으며 정통성을 확보 33) 李祥奎, 惠山集 권13, 三聖賢編年年譜跋, 是時竺敎懷襄東士之人, 不知有孔朱之學久矣. 至安子而實倡明之, 於 是天衷以位一變至道式, 至我聖朝, 休眞儒輩出, 以啓文明之治. 降及近世, 異敎之喧豗, 猶有甚於安子之世, 南州多士 是之大懼, 倣安子故事, 奉孔子朱子像於硯山, 以安子從祀. 34) 이종수, 앞의 논문, 2014, 344쪽. 35) 도산서원은 1918년 도통사의 성현 봉안을 문제 삼아 진주 향교 및 각 서원에 통문을 보냈다. 도통사에서 성현을 봉안하며 顏子와 曾子, 孟子, 子思를 제외하고 주자와 안자만 배향한 것이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도통사 가 안향의 사당인지 문묘인지 불분명하다는 점, 공자는 성인이므로 年譜 가 아니라 世家 라 이름해야 한다는 점, 三聖賢年譜序文 에서 안향 이전 인물을 거론하지 않고 이후 학자들이 모두 안향의 학맥이 아니라는 점 등 을 추가로 들어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도산서원의 통문을 계기로 도통사 공교지회는 중국 곡부와 경상지역 198

화행일기 에는 이처럼 한국공교운동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통사의 공교지회 설 립에 관한 일련의 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살펴보면 공교지 회 설립에 누구보다 안효진의 공로가 컸음을 알 수 있다.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한 국내 최초 공교회로서 향후 국내 공교운동을 촉발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안효진은 공식적 업무 외에도 개인적으로 글을 바쳐 도통사 유교부흥사업의 본 취 지를 설명하였고, 침체에 빠진 유학이 구원되길 바라는 간절한 심정을 전달하였다. 四溟漁利日煩喧 사해가 이익을 다투느라 매일 시끄러운데 今到昌平觀道氣 지금 창평에 이르러 도의 기운 바라보니 誰抱麟經獨掩門 누가 춘추[麟經]를 지키며 홀로 문을 닫고 있겠는가. 大方惟有聖人孫 大方은 오직 성인의 자손뿐이구려. 東方宗學亦文宣 동방의 宗學 또한 문을 숭상하여 禮義堂堂六百年 誰識聖宮春草恨 예의가 당당하게 6백 년을 이어져 왔다네. 그 누가 성궁에서 이별하던 한을 알리오 又如吾祖賦詩天 또한 우리 선조가 시를 짓던 날이 있었지. 萬里求文苦未休 만리 밖에서 문장을 구하는 일 쉴 틈 없이 고달프고 只緣同道又同憂 願分衢燭餘光借 照我沈昏海外區 다만 같은 도를 추구하기에 또한 같이 근심한다네. 원컨대 궐리 거리의 남은 불빛을 빌려 우리 내 沈昏한 해외까지 비추었으면.36) 위 세 편의 시는 안효진이 공상림에게 개인적으로 전한 것이다. 첫 번째 시는 외세 의 침입으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가운데 오직 이곳 곡부에만 도의 기운이 남아 있다 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성인의 자손이 아직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곡부 가 도를 간직한 희망의 공간이라는 말에서 道氣와 敎訓을 받고자 하는 조선 유림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유림들로부터 지지를 잃으면서 결국 1920년 해체되고 만다. 36) 화행일기 윤2월 11일. 199

藏書閣 35 두 번째 시에서는 조선 유학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면서 정서적 유대를 찾고 있 다. 동방의 유학이 문을 숭상하여 600여 년 동안 예의를 당당하게 잘 지켜왔다는 말 에서 그 자부심이 느껴진다. 동방 유학이 자신의 선조인 안향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 에 그 자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는 성궁에 자란 봄풀을 보면서 안향이 공자묘 에서 지었던 시37)를 생각하였지만 그 심정은 결코 편치 않았다. 성궁의 봄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지만 지금은 옛날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동방의 유 학의 오랜 역사와 선조의 과업을 칭송하면서 과거와 달라진 현재의 시대적 아픔을 우 회적으로 표현한 수법이 탁월하다. 세 번째 시에서는 좀 더 솔직한 심정이 묻어난다. 육체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고달픈 여정임을 토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행하는 이유는 궐리의 빛을 해외까 지 전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중국이나 조선 모두 같은 도를 추구하기에 근 심 또한 같다는 말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들의 도움을 간곡히 바랐다. 그의 간절한 심정은 시와 함께 전한 편지에도 담겨 있다. 아! 지금은 이교가 楊朱 墨翟보다 성행하는데, 우리는 보통사람인지라 감히 亞聖 을 따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고 목을 움츠리고 귀를 막고 눈을 닫을 수 없기에 단지 천장만 바라보며 탄식을 하면서 우리 고장에서 종횡무진하고 짓 밟아 모두 휩쓸려 가도록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마침내 연산에 도통사를 짓고 또 대 덕산에 신도비를 세운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대략 이미 여러 유생 들이 올린 글에 진설되어 있으니 이미 자세히 살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만히 생 각하건대 선생은 연성공과 매우 가까운 지위에 계시고 성인의 마을에 거주하시며 성 인의 도를 행하시고 천하의 대가를 지어 천하의 큰 징표로 삼아 이로써 천하 만방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진실로 한 터럭이라도 성인의 도에 밝음이 있다면 분명 미약한 사 람과 천근한 말이라고 하여 멀리 버려두는 바가 있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회헌선생을 존중하는 것은 부자를 존중하기 때문이고, 부자를 존중하는 것은 우리의 도를 존중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도를 깨달은 안목으로 한 말씀이라도 기록해주는 바가 있다면 비단 동방에 부자의 도를 부지시켜줄 뿐만 아니라 천하의 배와 수레가 다니는 나라 37) 安珦, <有感>, 香燈處處皆祈佛, 絲管家家競祀神. 惟有數間夫子廟, 滿庭秋草寂無人. 200

편지 첫머리에서 그는 자신을 조선의 遺士라고 소개하였다.39) 비록 일제에 의해 나 라는 빼앗기고 말았지만 조선시대부터 600년을 이어온 유학의 전통과 정신을 아직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들 또한 변하여서 우리 부자를 높일 것입니다.38) 계승하고 있음을 遺士 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편지에서 안효진은 동방 유학의 소중한 역사와 이를 지켜야 할 당위성에 대해 진심으로 피력하였다. 인용한 부분을 보면, 이단이 성행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경남의 유림들이 도통사를 지어 성현을 추모한 사실을 거듭 알리면서, 이러한 노력들을 가상히 여기어 道義가 담긴 글을 지어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안효진의 진심은 이내 공자 후손들의 인정을 받는다. 공상림이 안향 신 도비문의 초고 안에서 회헌실기 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보고는 천여 년 동안의 異敎를 변화시키고 성인의 도를 600여 년 동안 밝힌 일은 실로 우리 회헌 안자가 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40)라고 감탄한 사실이나, 공영이가 三聖賢編年年譜合刻序 를 지어 보내면서 그 편지에 총회에서 회헌 安先生을 安子로 고치기로 결정하였기에 자 신이 보낸 글에서 안선생이라 쓰인 것을 모두 안자로 고쳐달라 41)고 요구한 일은 그러 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한국 유학사에서 성인이나 대학자에만 허여되는 子 자 칭호를 가진 위인은 安子(安 珦), 李子(李滉), 宋子(宋時烈) 셋뿐이다. 이 가운데 李子와 宋子는 그 성리학의 업적 을 존숭하는 의미에서 후학들이 칭호한 것이고, 安子는 공자의 직계 후손과 직할 단 체인 공교총회에서 직접 승인해준 것이다. 당시 곡부가 유학 부흥의 중심지였고, 공자 후손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그들이 安珦의 호칭을 安子로 바꾸길 제안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의 시초가 깃든 곳에서 38) 화행일기 윤2월 11일, 噫! 今異敎, 熾於楊墨, 吾輩以凡人, 不敢追乎亞聖. 然不可垂頭縮頸塞耳閉目, 只發仰屋之 吁, 而任他縱橫蹂躙盡漂乎吾黨也. 遂刱硯山之道統祠, 又竪大德山之神道碑, 是也事實大略, 已陳於諸儒上書, 想已 燭徹矣. 竊惟先生處衍聖公至親之位, 而居聖人之里, 行聖人之道, 作天下大家, 而爲天下大表, 以模楷乎天下萬邦. 苟有一髮有光於聖道, 則必不以人微言淺而有所遐棄矣. 蓋尊晦軒, 所以尊夫子也, 尊夫子, 所以尊吾道也. 如有道筆 之一言所讚, 則非但扶吾夫子道於東方也, 凡天下舟車所通之國, 亦將變化, 而尊吾夫子. 39) 화행일기 윤2월 11일, 朝鮮遺士安孝鎭, 謹齊沐再拜, 獻書于孔少霑老先生閤下. 40) 화행일기 윤2월 18일, 按實記而三復之, 乃恍然於能變千有餘年異敎, 而明聖道至六百餘年者, 實爲我晦軒安子 也. 41) 화행일기 40b, 晦軒安先生以總議已改稱安子, 則文撰自應一律, 卽請將敝序中晦軒安先生改爲晦軒安子, 其稱安 先生及先生處, 皆改安子. 201

藏書閣 35 동방 유학 시조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측에서 도통사 유림들이 전개한 유교부흥사업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 다. 그리고 안효진은 이처럼 양국 간 공교운동의 이해가 진척되는 데 가교 역할을 충 실히 수행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안효진이 편지와 시를 전하고 며칠 뒤 공상림은 아들을 시켜서 안효진에게 공교총 회를 보여주도록 하였다. 17일 병진. 令侃이 나에게 공교총회에 가자고 청하였다. 회의는 곧 南海 康有爲 선 생과 소점공이 개최하는 것이었다. 회의 본부는 皇城에 설치하였는데 대중들이 황성 은 곧 중국의 종주가 되는 곳이지만, 곡부는 오직 至聖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성묘와 성림이 있는 곳이니 곧 천하만국의 종주가 되는 곳이라고 하여 곡부로 옮겨 설치하였 다. 황성과 상해에는 사무소를 설치하고 큰 주와 도시에 지회를 설치하였고, 군현 및 여러 마을에 분회를 설치하도록 했으니, 대개 그 종교가 장황하였다. 총회 본사는 성 묘 오른쪽에 있었고 문 겉에는 四氏學 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學 은 곧 공자, 안자, 증 자, 맹자 네 명의 학문이다. 그리하여 四氏學 이라고 편액한 것이다. 건물의 생김새가 매우 커서 수천 명은 수용할 수 있었다. 뒤에는 사당 하나가 있었는데 북쪽 벽에 두 신위를 모셔두었다. 동쪽에 모셔진 신위에는 昊天上帝神位 라 되어 있고, 서쪽에 모 신 신위에는 至聖孔子神位 라고 되어 있었다. 이는 공자를 상제에 배향한 것이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뒤에 사씨학으로 돌아 나왔다. 孔祥蘩과 孔祥藻 및 여러 공이 모두 모여 있었다.42) 안효진은 공교총회 본부를 방문하여 공교총회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본부를 곡부에 설치하게 된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공자가 태어나고 공교 가 시작된 곳이 바로 곡부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에 서이다. 42) 화행일기 윤2월 17일, 十七日, 丙辰. 令侃請余往孔敎總會, 會乃康南海有爲與少霑公之所設也. 會本設置於皇城 矣, 衆議以爲皇城乃中華一國之所宗, 曲阜惟至聖發祥, 而聖廟聖林所在, 則乃天下萬邦之所宗也. 移設於曲阜, 使皇 城上海設事務所, 使雄州巨府設支會, 使郡懸諸部設分會, 蓋張皇其宗敎也. 總會社在於聖廟右, 門外 四氏學, 學乃孔 顔曾孟四氏之所學, 故扁曰, 四氏學 也. 屋制甚宏, 可容數千人. 後有一廟, 而奉兩神位於北壁, 東奉位曰, 昊天上帝 神位, 西奉位曰, 至聖孔子神位, 此以孔子配于上帝也. 行三拜九叩禮, 退還于四氏學, 孔祥蘩孔祥藻諸公咸會. 202

이와 같은 공교회가 만들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의도는 안효진이 귀국에 오 르던 날에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공상림이 도통사에 공교지회가 설치되길 바라면서 귀국 후 그 성립 여부에 대해 회답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43) 조선에 공교지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이날 공상림이 안효진에게 공교총회의 본부을 보여주도록 한 것은 바로 한국에도 회를 설립하는 일은 공교운동을 널리 확산 발전시키려 했던 공교총회의 취지에도 부 합하는 일이었다. 또한 조선의 유학이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곡부에서도 알고 있었기 에 異敎가 판치고 正道가 사라져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동반자 차원에서 손을 맞잡 을 필요가 있었다. 1917년 중국 공교총회는 회장 강유위의 주도 아래 공교를 헌법에 편입하여 공자에 게 배알하고 제사 지낼 것을 의무화하는 등 공교를 국교로 삼기 위한 청원운동이 한 창이었다.44) 특히 중국 곡부는 공상림이 공교총회의 총리로 있으면서 전국공교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등 공교운동 중심지로서 위상이 확고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슷 한 시기 중국의 신문화운동이 본격화됨에 따라 반전통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조선 유림과의 만남은 한 중 유학자의 연대를 강화하고 공교운동을 확산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1913년에 이승희가 곡부를 방 문하여 한인 공교회의 설립을 허가받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병헌을 비롯한 많은 한인유학자들이 곡부를 방문해 공교운동에 대한 자문을 얻어 갈 수 있었던 것도 바 로 그러한 사정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교류가 쌓여 온 상황 속에서 조선 국내의 유림 들이 자체적으로 유교부흥사업을 일으켜 곡부를 방문하였기에, 그들에게 자연스레 공교지회 설립을 제안한 것이다. 결국 공상림의 의도대로 안효진에게 공교총회를 구경시켜준 일은 결국 도통사 공 교지회 설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날의 공교지회 설치에 관한 논의는 안 효진이 귀국한 뒤 도통사 유림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면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공교지 회 설립에 대한 양국 간 교류 사항 역시 화행일기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효진 선생 보시오. 편지의 내용은 모두 알겠습니다. 탁월한 식견과 훌륭한 논의 를 어찌 이루 다 가슴에 새기겠습니까. 聖敎를 보존하는 것이 지금 이때에 가장 중요 43) 화행일기 윤2월 20일, 以後可通音信, 道統祠孔敎支會成立, 卽報告爲要. 44) 湯志鈞 編, 康有爲政論集 下冊, 致北京書, 以孔子爲大敎, 編入憲法, 復祀孔子之拜跪命令. 203

藏書閣 35 한 일이지만 제가 부족한 재주에 욕되게 총리를 맡아보면서 몸까지 아픈지라 전혀 일 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깊이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들께서 진주 도통사에 공 교지회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참으로 좋고 잘된 일입니다. 본회의 章程에 위배 되지 않은 선에서 모두 자유롭게 조직하실 수 있으니 본회에서는 대체로 간섭하지 않 겠습니다. 다만 지회가 성립된 다음에 회의가 열리면 회원의 수와 회장 성명 및 운영 정황을 기록하여 본부 총회에 보고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여기 총회 장정 몇 장과 지 난해 총회 보고서 한 본이 있어 보내드립니다.45) 위 공상림의 편지는 진주 도통사에서 공교지회 설치를 결정한 일에 대해 그 축하 의 말을 전하고 향후 조직에 관해 도움의 말을 전한 것이다. 그는 도통사 공교지회는 孔敎章程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으며, 또 총회에서도 불간섭한다 고 하면서 도통사 공교지회의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해주었다. 다만 공교지회가 성립 된 후 회원 수와 회장의 성명 및 공교지회 운영 정황을 보고해주길 바랐다. 이처럼 공교총회 총리로부터 공식적인 설립 허가를 받고 지도를 받게 되자 도통사 유림들은 적극 환영하였다.46) 그들은 곧바로 공교지회 설립에 대한 유림들의 찬반 투 표를 실시하였는데 수천 명이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7년 8월 27일 진주 연산재에서 공교대회를 개최하여 이상규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주요 임원을 확정하였 으며, 공교지회규례 를 반포하여 팔도에 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도통사에 공교지회가 공식 설립되자 공상림과 공영이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공상림은 도통사 공교지회 會歌인 <道統祠孔敎支會頌>을 지어 보냈다. 공영이는 도 통사 편액에 이어 同文堂 편액과 친필로 쓴 昌平日月 紫陽江山 을 지어 보냈으며, 孔 子聖像 및 闕里大成殿圖 와 聖門禮樂誌 등 공자에 관한 도서들도 보내주었다. 그 후에도 공교지회는 공상림의 喪事에 만사와 뇌문, 부의금을 내어 위문하는 등 중 국 공교총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47) 45) 화행일기 37b~38a, 安孝鎭先生大鑒. 手書謹悉, 卓識偉論, 佩服曷勝. 聖敎之保存, 爲當今第一要務, 弟不才忝任 總理, 兼以衰痛, 一切未克進行, 殊深悚懼. 尊意擬開支會於晉州道統祠, 甚善甚善. 但不悖本會章程, 儘可自由組織, 本會槩不干涉. 惟俟開成立會後, 將會員名數會長姓名及辦理情形, 以一紙報告于本總會, 可也. 玆有總會章程數張及 去年大會報告一本, 送上. 46) 화행일기 39b, 孔敎支會以函丈命義, 歸報於本祠, 諸儒咸曰: 天不欲喪斯文, 冥詔於老先生 俾扶垂墜聖道于吾 東. 一齊奮厥神氣. 47) 이종수, 앞의 논문(2010), 100~101쪽. 204

발전하는 전 과정이 기록된 유일한 기록물로서 가치를 지닌다. 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이상에서처럼 화행일기 는 1917년 진주 도통사에 국내 최초 공교지회가 설립되고 Ⅳ. 맺음말 이 글에서는 그동안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화행일기 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저자 안효진의 생애를 고찰하고 이어서 화행일기 의 내용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안효진은 안향의 후손이자 유학자로서 일제강점기 유학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선현의 문집을 다시 간행하고, 성현들의 연보를 편찬하는 일들 이 모두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가 노년의 나이에 먼 여정을 떠난 것도 시대가 어려울수록 正學을 고수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의 중국 여행 은 단순히 유교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진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근대의 곡부 여행과 관련한 연구는 대부분 한 중 공교운동과 관련하여 검토해왔다. 하지만 화행일기 만큼은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검토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여정을 마칠 때까지 꾸준히 창작되고 있는 시작품과 공자 유적지에 대한 상세 한 묘사는 이 작품의 문예미를 보여준다. 본문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했지만, 저자의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시작품도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이는 평생에 걸쳐 학문을 연마하고 지역사회에서 여러 문인과 교유하면서 키워온 저자의 문학적 역량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행록 이후 중국을 대상으로 한 해외 체험 기록에 관한 연구가 미진한 상황에서 화행일기 의 문학적 성과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화행일기 는 국내 최초 공교지회의 설립 배경과 과정, 근대시기 양국 유학자 들의 교류 사항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 공교운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화행일기 는 한국의 공교운동이 1900년대에 이미 중국과 별개로 국내 자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한국의 유학자들은 600년을 이어온 유학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혼탁한 시대 안에서 유학의 위상을 회복하기위 205

藏書閣35 해투철한사명감을발휘하였다. 그런점에서도통사공교지회의설치는국내유학자들의시대정신이반영된결과라고할수있다. 그리고안효진은국내유학자들의의지와노력을중국측에잘전달하여공교지회의설립제안을이끌어냈기에공교운동사차원에서공로가크다고할수있다. 이처럼 화행일기 는근대중국여행기로서문예미를갖춤과동시에일제강점기유학적전통을지키려했던한 중유림들의노력을잘보여주고있다. 향후근대한문학및한국공교운동사연구에서보다다각적인검토가이루어지길기대한다.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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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孝鎭의 華行日記 연구 Abstract A Study on Hwahengilgi of An Hyojin Park, Jin-sung Hwahengilgi( 華行日記 ) is a travel essay written by An Hyojin(安孝鎭), who was a Confucian scholar in Hamyang, Gyeongnam, when he visited Qufu(曲阜), China, in 1917. Despite its importance in historical research of gong gyo movement(孔敎運動; Confucius religion movement) in Korea, the journal has not been properly studied yet. Therefore, this study discussed the life of the author and system and content of the journal. An Hyojin was born in 1855 in Hamyang and studied in his hometown throughout his life while exchanging his knowledge with local Confucian scholars. In 1914, in Jinju Dotongsa(道統祠), he compiled and published the chronology of Confucius, Zhu Xi, and Ahn Hyang, with local Confucian scholars. Later, he left for Qufu, China, in order to have Confucius descendants write the introduction of the chronology and epitaph. Ahn Hyojin boarded a train departing from Namdaemun, Seoul, on February 14, 1917, arrived in Qufu on the leap month February 7. In Qufu, he met with Confucius descendents, Kong Ling-yi(孔令貽) and Kong Xiang-lin(孔祥霖), and looked around the sites and visited the Gonggyochonghoe(孔敎總會). And then, on March 18, he returned home. Later, he was offered Gonggyojihoe(孔敎支會) built in Dotongsa, Jinju. This journal has the beauty of literature. While other journals recorded mostly the journey or activities, Hwahengilgi contains poems about the author s feelings and detailed description of the exotic landscape. 209

藏書閣 35 And this journal is valuable as the only record of establishment of Domestic first Gonggyojihoe. Establishment of Gonggyojihoe at that time implies Korean Confucian scholars interest in Confucius religion movement and restoration of Confucianism. Ahn Hyojin has made more contribution than anyone else to delivering such effort and will of Korean Confucian scholars. In conclusion, this journal reflects the effort of Gyeongnam Provincial Confucian scholars who tried to preserve Confucian values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lso, it is helpful for understanding exchange of Korean and Chinese Confucian scholars at that time. Key Words An Hyojin(安孝鎭), Hwahengilgi ( 華行日記 ), Anhyang(安珦), Qufu(曲阜), The beauty of literature, Gong gyo movement(孔敎運動), Dotongsa(道統祠), Gonggyojihoe(孔敎支會).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