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호 (2016.10) 부경역사연구소
지역과 역사 제39호 차 례 특집논문 고려시대 경계의 사회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 강재구 5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 고명수 41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 정은정 75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 정영현 109 연구논문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 유우창 153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 권도경 191 충렬왕대 麗蒙 습합정권 송도가 형성의 역사적 맥락과 쌍화점ㆍ삼장사ㆍ 우물ㆍ술집의 역사적 실체를 통해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 김현라 239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 김보정 275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중심으로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 윤용출 309 1970년대 후반 부산지역 학생운동 연구 / 김선미 343 1978년을 중심으로 연구동향 地域史의 관점에서 보는 倭館 / 양흥숙 375 서 평 신라 왕위계승원리에 대한 서말의 자료를 꿰어낸 저서 / 권영오 391 선석열 지음, ꡔ신라 왕위계승 원리 연구ꡕ, 혜안, 2015 자료소개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農旗 / 윤정은 403 휘 보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5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5~39쪽몽골의 高麗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5 특집논문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1)강 재 구* 머리말 I.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북계 지역의 동향 II. 崔坦 등의 위상과 동녕부의 편제 1. 동녕부 설치 후 최탄 등의 위상과 그 변화 2. 동녕부의 개편 추이와 二元的 지역 편제 맺음말 국문초록 1270년 동녕부 설치는 원종대 전ㆍ후반기를 가르는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임 연의 원종 폐위사건은 최탄ㆍ한신 등 북계 토착세력의 거병에 명분을 제공하였고, 몽골 이 고려 북계를 분리하는 정책을 결정하는 데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 북계는 최탄ㆍ한신 등의 수중에 들게 되었고, 이들이 몽골에 귀부하면서 고려 북계 분리정책을 완수하여 동녕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고려 북계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북계 민들의 민심은 고려로부터 이탈하고자 했던 최탄 등의 의도와는 달랐다. 최탄 등은 원 종 복위와 임연 제거라는 명분에 의지하여, 북계민들을 동참시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반고려 정서로 결집하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최탄 등이 내세웠던 임연 제거라는 명분은 고려와의 강화 합의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고려 북계를 분리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몽골에 의해 승인하면서 고려의 반발 명분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 다. 1275년 동녕부는 로총관부로 승격되었고, 녹사사ㆍ도호부ㆍ정원부의 체제로 편제 되었다. 녹사사는 서경에 두어져 다루가치가 파견되는 등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도호부는 안북대도호부 영주, 그리고 정원부는 정원대도호부 구주의 지역적 토대 *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forcejk@naver.com).
6 지역과 역사 39호 위에 편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경ㆍ의주 등 행정ㆍ교통의 중심지는 몽골이 직할하는 한편, 최탄ㆍ한신 등 북계 토착세력은 그 지위가 강등되면서 주변화되면서 그들의 재지 적 기반인 구주[정원부]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주제어 : 동녕부, 동녕로총관부, 북계, 최탄, 분리정책 머리말 1270년(원종 11), 몽골은 高麗 西京에 東寧府를 설치하여 고려로부터 북계 지역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동녕부는 약 20년간 慈悲嶺을 경계로 고려와 양립하였으며, 1290년(충렬왕 16)에 폐지되고 요동 지방으 로 移置되었다.1) 그간 동녕부를 주제로 한 연구는 수차례 제출된 바 있다. 동녕부의 치폐 경위를 개괄적으로 다룬 방동인의 연구를 선구로,2) 김구진과 이정신에 의 해 심층적으로 검토되었다. 김구진은 고려 서북지방과 요동지방의 역사적 연관관계를 탐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동녕부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 두었다. 특히, 동녕부의 구성과 존재양태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ꡔ元史ꡕ 지리지 東寧路條에 관해 본격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 다.3) 또한 이정신은 동녕부 설치과정에 있어서 최탄 등 북계 반란을 주요한 1) ꡔ高麗史ꡕ에서는 1290년(충렬왕 16) 3월, 몽골이 동녕부를 罷하니 西北諸城이 고려로 다시 돌아왔다고 전한다( 罷東寧府 復歸我西北諸城 ). 하지만 이는 서경 소재의 동녕부가 폐지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녕부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 니다. 이후 동녕부는 요동 지방으로 移置되어 원 말까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 方東仁, 東寧府置廢小考 ꡔ關東史學ꡕ 2, 1984 ; 麗ㆍ元 關係의 再檢討-雙城 摠管府와 東寧府를 중심으로 ꡔ國史館論叢ꡕ 17, 1990. 3) 金九鎭, 元代 遼東地方의 高麗軍民 ꡔ李元涥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ꡕ, 1986 ; 麗ㆍ元의 領土紛爭과 그 歸屬問題-元代에 있어서 高麗本土와 東寧府ㆍ雙城摠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7 사건으로 파악하고, 그 원인과 추이를 밀도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동녕부 의 존재양태에 대해, 동녕부가 몽골의 직접 예속지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몽골에, 경제적으로는 고려에 예속된 기형적인 형태 로서, 동녕부의 처지가 고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4) 이러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녕부의 성립 과정과 그 후의 양상에 관해서는 여전히 해명될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원종 폐위사건이 초래한 정 치 격변의 성격과 그로 파생된 최탄 등 북계 반란의 전개 양상에 관한 섬세 한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이러한 사건들은 동녕부 설치와 직결되어 있음 에도 그 상관관계를 구명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선행 연구에서는 대체로 1269년(원종 10) 북계 지역에서 일어난 崔坦ㆍ 韓愼 등의 반란을 동녕부 설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이 전 시기부터 북계민들에게 잠재한 반항적 성향이나 몽골 영토가 되어 기대 되는 무관세 등의 경제적 이익이 반란의 배경으로 거론되었다.5) 즉, 북계민 들의 전통적인 反고려 정서 내지는 자율적 성향이 여ㆍ몽 전쟁을 거치며 심 화되었고, 결국 최탄 등 반란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고 본 것이 다. 이러한 양상은 몽골의 1차 침공 시, 投蒙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洪 福源이나 雙城摠管府 설치의 계기가 되었던 趙暉ㆍ卓靑의 사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최탄 등 반란도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그 동기가 설명되었고, 북계민들의 민심 역시 그에 준하여 해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탄 등 북계 반란은 여ㆍ몽 간의 강화가 성립하면서 오랜 전란으 로 피폐해진 북계민들에 대한 고려 조정의 按撫 조치가 있은 후에 발발했다 는 점에서 앞선 사례들과는 차이가 있다. 즉, 최탄 등의 반란 당시, 북계민 들의 민심은 반란 주모세력의 동기와 달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결국 최탄 등은 북계민들을 거병에 동참시키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 힘을 바탕 管府ㆍ耽羅摠管府의 分離政策을 중심으로- ꡔ國史館論叢ꡕ 7, 1989. 4) 이정신, 동녕부와 고려의 대원관계 ꡔ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ꡕ, 경인문 화사, 2004. 5) 방동인, 앞의 논문, 1984. 金南奎, 武臣政權期 兩界 地方勢力의 政治的 動向 ꡔ高麗兩界地方史硏究ꡕ, 새문社, 1989. 이정신, 위의 책.
8 지역과 역사 39호 으로 자립하는 것에는 실패하였다. 한편, 몽골이 최탄 등의 귀부를 통해 고 려 북계 분리정책을 완수할 수 있었던 배경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몽골 의 고려 북계 분리정책은 日本ㆍ南宋 경략과 같은 대외 정책에 고려의 참여 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수립되었다.6) 그러나 이는 고려의 반발을 초래하여 재무장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몽골로서는 고려의 반발 명분을 주지 않으면서도 북계 분리라는 정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 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몽골의 고려 북계 분리 시도에 있어서 최탄 등 반 란은 단순히 북계 분리의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몽골의 對고려 관계 운영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동녕부가 설치된 후의 양상에 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ꡔ元史ꡕ 지리지 東寧路條에 따르면, 동녕부는 설치된 지 5년 후인 1275년(충렬왕 1) 東寧路摠管府로 승격되었고, 錄事司ㆍ都護府ㆍ定遠府의 체제로 개편된 것이 확인된다.7) 이러한 체제 개편은 그 주체인 몽골의 의도가 전적으로 반 영되었을 것이므로, 동녕부의 개편 추이를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동녕부의 개편 과정에서 몽골의 고려 북계 분리정책에 협력하여 동 녕부의 지휘부를 구성하였던 최탄 등 주모세력의 위상 변화와 그 양상이 주 목된다. 이를 통해 동녕부의 개편 과정을 통해 동녕부 내 권력 구조를 포함 하는 대대적인 구조 조정이 단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동녕부의 편제 양상을 통해 몽골의 북계 지배가 二元的 지역 편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논하고 자 한다. 6) 강재구, 高麗 元宗代 麗ㆍ蒙 關係와 東寧府 설치,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석 사학위논문, 2015. 7) ꡔ元史ꡕ 지리지 동녕로조는 箭內亙, 김구진, 오기승에 의해 상세히 검토한 바 있 다. 하지만 동녕부의 편제와 그 의미를 도출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9 Ⅰ.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북계 지역의 동향 몽골이 북계 지역에 관심을 보인 것은 여ㆍ몽 전쟁기부터였다. 개전 초, 麟州神騎都領 洪福源의 투몽과 그 행적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8) 전쟁 말기에 몽골의 王萬戶가 10領의 군사를 이끌고 와 西京古城을 수축하 고 屯田을 열어 오래 머물 계획으로 삼으려 했다는9) 것이나 강화 협상을 위 해 파견된 朴希實 등이 西京과 義州의 屯兵 철수를 요청하자, 西京 以外는 이미 우리 병사의 주둔처 라고 한 몽케의 발언에서도10) 짐작할 수 있다. 특 히, 몽골이 西京古城을 수축하고 의주에 성을 쌓는11) 등 북계 지역에 장기 간 군대를 주둔시키려 한 것에서 군사ㆍ교통상의 거점을 장악하고자 했던 의도를 살필 수 있는데,12) 이는 몽골이 북계 장악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계 지역은 전쟁 말기에 이르면, 이미 몽골군의 주둔지로서 사실상 고려 의 통제력을 벗어나 있었다. 따라서 고려가 북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회 복하기 위해서는 전쟁 종식과 함께 북계에 주둔한 몽골군의 철수가 선결되 어야 했다. 이러한 탓에 북계 지역의 몽골군 철수는 여ㆍ몽 간의 강화 협상 에서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13) 결국 쿠빌라이가 고려의 요청에 따라 몽골 8) 홍복원의 投蒙과 그의 附蒙活動은 동녕부 설치 후 최탄 등 반란 주모세력의 위 상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 세히 다루기로 한다. 9) ꡔ高麗史ꡕ 권24, 高宗 46년 2월 更子. 時 王萬戶率軍十領 修築西京古城 又造戰 艦 開屯田 爲久留計 10) ꡔ高麗史ꡕ 권25, 元宗 즉위년 8월 辛巳. 西京以外 嘗爲我兵駐處 11) ꡔ高麗史ꡕ 권24, 高宗 45년 2월. 是月 蒙兵城義州 12) 森平雅彦, 高麗における元の站赤 -ルートの比定を中心に- ꡔ史淵ꡕ 141, 2004, 86쪽. 정요근,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元)의 개입과 그 의미 ꡔ역사와 현 실ꡕ 64, 2007, 169~177쪽. 13) 고려 주둔 몽골군의 철수가 중요 현안이었음은 고려가 이를 조건으로 태자의 입 조를 제안했고, 이를 자랄타이[車羅大]가 수락했다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10 지역과 역사 39호 군의 압록강 이북 철수, 추가적인 고려인의 귀부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것 등을 약속하면서14) 고려는 다시 북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고려가 북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자 한 것은 北界 州鎭 入保 및 出陸 상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15) 이에 따르면, 살리타이[撒禮塔]의 1차 고려 침공이 개시되었던 1231년(고종 18)을 시작으로 많은 수의 북계 주진이 해도로 입보하였음이 전해진다. 전란 와중에 고려 각지에서 해도입 (ꡔ高麗史ꡕ 권24, 高宗 44년 7월). 몽골군의 철수는 1259년(고종 46) 태자 시 절 원종이 쿠빌라이를 예방하였을 때도 요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요구가 수용되어 이듬해인 1260년(원종 1)에 철수 조서가 내려진 바 있고(ꡔ高麗史ꡕ 권 25, 元宗 원년 3월 丁亥), 그 다음 달에도 철군을 약속하였다(ꡔ高麗史ꡕ 권25, 元宗 원년 4월 辛酉). 14) ꡔ元高麗記事ꡕ, 세조 중통 원년 6월. 15) ꡔ高麗史ꡕ 권58, 지리12, 北界에 보이는 북계 주진의 입보 및 출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명 입보 시기 寧州 1256년(고종 43) (安北大都護府) 宣州 1231년(고종 18) 입보 장소 출륙 시기 昌麟島 후에 출륙 - 雲州 1231년(고종 18) 海島 1261년(원종 2) 博州 1231년(고종 18) 海島 1261년(원종 2) 嘉州 1231년(고종 18) 海島 1261년(원종 2) 郭州 1231년(고종 18) 1231년(고종 18) 殷州 병합(고종 44) 海島 1261년(원종 2) 嘉山 西村에 僑寓 延山府에 예속 嘉州에 예속 泰ㆍ博ㆍ撫ㆍ渭州 等 예속 五城兼官을 삼음 隨州에 예속 海島 1261년(원종 2) 安州의 屬縣으로 삼음 孟州 紫燕島 1261년(원종 2) 출륙 후 조치 德州 1260년(원종 1) 安州 蘆島 후에 5번 옮김 撫州 1231년(고종 18) 海島 1261년(원종 2) 泰州 殷州 隨州 昌州 1231년(고종 1231년(고종 1231년(고종 1231년(고종 18) 18) 18) 18) 海島 1261년(원종 2) 海島 후에 출륙 紫燕島 1261년(원종 2) 紫燕島 城邑丘墟 다시 옛 땅으로 돌아감 (충렬왕 6) 成州에 예속 渭州古城에 거처 嘉州에 예속 嘉州에 예속 成州의 屬縣 郭州의 海濱에 僑寓 -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11 보가 수시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참고한다면, 북계 지역 주진의 입보 역시 전황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이뤄졌을 것이다.16) 그리고 이후 여ㆍ몽 관계 가 안정기에 접어든 1261년(원종 2) 무렵에는 해도로 입보했던 주진들을 출륙시켜 안착하게 함으로써,17) 북계 지역에 대한 전란 수습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ㆍ몽골 관계는 講和가 성립됨에 따라 이른바 世祖舊制 라는18) 원칙 이 합의되어 외형적으로는 안정적인 관계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갈등 요 소는 잠재해 있었다. 무엇보다 고려가 몽골에 상시적인 감시ㆍ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면서, 이에 부정적이었던 김준ㆍ임연 등 무신 세력이 반발할 여지 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남송ㆍ일본 경략과 같은 東方政策에 고려를 동원 하려는 시도를 강화했던 몽골과 이에 비판적이었던 무신 세력 간의 섞일 수 없는 이해관계로 인해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졌다.19) 이러한 정세는 1269년(원종 10) 6월,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면서 크게 동 요하였고, 여ㆍ몽 관계 역시 급격하게 경색되었다. 몽골은 원종 폐위사건을 빌미로 임연을 압박하고자 했고, 그 일환으로 수립된 고려 분리정책의 유력 한 정책대상지가 북계 지역이었다.20) 뒤이어 북계 지역에서 최탄 등이 주 16) 윤경진은 여ㆍ몽 전쟁기 북계 지역 주진의 입보가 1232년(고종 19) 청천강 이 북 지역과 1248년(고종 35) 청천강 이남 지역, 2차에 걸쳐 이뤄졌다고 보았다. 그는 ꡔ高麗史ꡕ 지리지가 사건의 개별 단계를 세분하지 않고 인과관계 전체를 하 나의 연혁으로 파악하는 연혁 정리방식을 따르고 있으므로 1231년 살리타이의 1차 고려 침공이 북계 주진의 입보 원인으로 간주하여 북계 주진의 입보 시기가 대개 1231년(고종 18)으로 기재되었다고 분석하였다( 고려후기 北界 州鎭의 海島 入保와 出陸 橋寓 ꡔ震檀學報ꡕ 109, 2010, 123쪽). 17) 북계 지역 주진의 출륙과 교우 양상에 관해서는 윤경진, 위의 논문 참조. 18) 李益柱, 高麗ㆍ元關係의 構造에 대한 硏究 소위 世祖舊制 의 분석을 중심으 로- ꡔ韓國史論ꡕ 36, 1996. 19) 강재구, 앞의 논문, 2015, 6~11쪽. 20) 북계 지역이 분리정책의 유력한 대상지였다는 것은 몽골 사신 脫朶兒의 행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탈타아는 최탄 등의 거병 당시에 대부성에 머물렀다고 전 해진다. 하지만 이에 앞서 탈타아는 明威將軍 都統領으로 쿠빌라이의 조서를 가 지고 고려로 와서 남송ㆍ일본 침공을 위한 병력과 전함을 점검하였다(ꡔ高麗史ꡕ
12 지역과 역사 39호 도한 반란이 일어나고 그 주모세력들이 몽골에 귀부하자, 이내 몽골은 서경 에 동녕부를 설치하면서 고려 북계 분리정책을 완수할 수 있었다. 몽골의 고려 북계 분리정책은 일차적으로 고려 내 무신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향후 전개될 팽창적 대외 정책에 고려의 전략적 가치를 활 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구상되었다.21) 몽골은 임연에게 원종 폐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압박하면서도 고려가 다시 해도로 입보하고, 재무장할 것을 우 려하고 있었다.22) 이러한 때에 북계에서 최탄 등이 거병하였고, 그들의 귀 권26, 元宗 9년 10월 庚寅; 12월 壬午). 이때 그와 함께 왔던 武德將軍 統領 王國昌, 武略將軍 副統領 劉傑은 흑산도를 시찰하였으며(ꡔ高麗史ꡕ 권26, 元宗 9년 10월 己亥), 탈타아는 동년 12월 병신일에 귀국길에 올랐다(ꡔ高麗史ꡕ 권 26, 元宗 9년 12월 丙申). 그 후에 탈타아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북계 대부성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탈타아와 접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ꡔ高麗史ꡕ 권130, 열전43, 崔坦傳). 쿠빌라이의 조서 를 가지고 고려로 와 남송ㆍ일본 침공과 관련한 제반 사항의 점검을 담당했던 탈타아가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북계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점은 당시 분리 정책의 대상지가 북계 지역이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21) 강재구, 앞의 논문, 2015, 24~31쪽. 22) 고려 북계 분리에 대한 몽골 조정에서의 정책 결정 과정은 ꡔ元高麗記事ꡕ 세조 지원 6년 11월 2일조에 자세하다. 그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몽골 추밀원에서 처음 5월(1268년 5월로 추정)에 마형이 고려 정벌론[征高麗事]을 강하게 주장 하였으나, 임연의 원종 폐위사건이 일어나자 1269년(원종 10) 11월에 다시 마 형은 고려 정벌 주장을 번복하였고, 마희기가 고려 분리정책[離而爲二 分治其 國]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때 논의된 정책이 고려에 적용되었음은 고려를 정 벌하는 것 대신에 폐립을 음모한 신하 1명만을 국문하는데 그칠 것[止鞠廢立謀 臣之一夫] 을 제안한 마형의 건의가 이듬해 고려의 요속ㆍ군민에게 보내는 조서 에서 고려로 군대를 파견한 까닭을 오직 임연 한 사람만을 토벌하려는 것[惟林 衍一身是討] 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ꡔ元高麗記事ꡕ 세조 지원 7년 2월 16 일). 이때 마형과 마희기는 고려가 다시 해도로 입보하고, 재무장할 시에는 쉽게 제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고려 정벌에 반대하였다. 다시 말해 몽골은 고 려와의 전쟁에 따른 불필요한 전력 소모를 회피하면서도 고려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여 일본ㆍ남송 경략을 달성하려는 정책적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 서 고려 북계 분리와 동녕부 설치는 어디까지나 고려왕조 체제의 보존을 전제한 1260년 강화 체제(世祖舊制) 위에서 성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강재구, 위의 논 문, 28쪽).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13 부를 계기로 북계 분리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는 고려인의 추가적인 귀 부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강화 합의를 위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23) 고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다. 따라서 몽골은 고려의 이반을 저지하기 위해 고 려와의 강화 합의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고려 북계 분리정책을 완수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24) 한편, 고려 북계 분리정책과 동녕부 설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최 탄 등이 주도한 북계 반란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행 연구에서는 그 원 인으로 북계 특유의 지역적 특수성과 독립적 성향 등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킨 당시의 사료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과연 북계민들 이 최탄 등 주모세력과 같은 목적하에 결집하였는지를 의심하게 하는 정황 을 발견할 수 있다. 西北面兵馬營吏였던 최탄은 營吏 韓愼, 三和縣人 前校尉 李延齡, 定遠都 護府 郞將 桂文庇, 延州人 玄孝哲 등과 거병하여 龍岡縣, 咸從縣, 三和縣의 사람들을 모아 함종현령 崔元을 죽이고, 야음을 틈타 椵島의 軍營을 습격하 여 分司御史 沈元濬과 監倉使 朴守奕, 京別抄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 다.25) 최탄은 서경유수와 용주ㆍ영주ㆍ철주ㆍ선주ㆍ자주 등 안북대도호 23) 이익주는 최탄 등 주모세력의 투몽을 몽골이 받아들이면서 여ㆍ몽 간의 강화 합 의가 파기되었다고 보았다( 高麗ㆍ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6, 48~50쪽). 하지만 필자는 최탄 등의 귀 부를 몽골이 받아들인 것이 강화 합의를 파기한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있 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기로 한다. 24) 고려 북계 분리과정에서 몽골이 고려와의 마찰을 기피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은 최탄 등이 거병하여 북계 지역을 석권하던 시기에, 의주부사 김효거와 인주수령 정신보, 정주수령 한분 등에게 탈타아가 내가 부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최탄이 부른 것이다[非我召之 實坦也] 고 말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ꡔ高麗史ꡕ 권 130, 열전43, 崔坦傳). 최탄 등이 북계를 석권하는 것에는 몽골의 비호 내지는 묵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이정신, 앞의 책, 2004, 192쪽), 탈타아가 김효 거 등에게 위와 같이 말한 것은 북계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의 주체를 최 탄 등에게 미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즉, 몽골은 최탄 등의 거병과 북계 석권을 방조하며, 이를 고려의 내부 문제로 처리하고자 했고, 그렇 게 함으로써 기존 강화 합의의 명분을 해치지 않을 수 있었다. 25) ꡔ高麗史ꡕ 권26, 元宗 10년 10월 乙亥. ꡔ高麗史ꡕ 권130, 열전43, 崔坦傳.
14 지역과 역사 39호 부 관내 여러 성의 수령들을 살해하며 빠르게 북계 전역을 석권했다. 최탄 등은 원종 복위와 임연 제거를 거병 명분으로 내걸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고려에게서 이탈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6) 최탄 등이 빠르게 북계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각 城의 吏屬層이 내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았던 여러 성의 員吏들 이 죽임을 당했고, 成州守 최군이 부하에게 살해당했다고 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27) 따라서 속수무책으로 북계의 방어체계가 붕괴한 배경에는 최탄 등이 이속층을 중심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해 전쟁에 대한 피해가 컸던 북계 민들의 불안감을 선동하여28) 동시다발적인 봉기를 유도했던 것이 주효했다 고 판단된다. 최탄 등의 거병은 임연의 원종 폐위라는 정치 격변이 북계민의 불안 심리 를 자극한 것으로 발화되었다. 최탄 등은 서경을 비롯해 북계 지역 대부분 을 장악하며 기세를 떨쳤다. 하지만 그 협력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어 최탄 ㆍ한신 등 주모세력과 함께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세력, 그리고 위세를 이기 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참여한 소극적 세력까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A-① 김방경이 蒙哥篤과 더불어 서경에 이르니 父老들이 울며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公이 만일 여기 있었다면 어찌 최탄과 한신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 고 다투어 대접하였다.29) 26) 최탄 등은 반란을 일으킨 직후부터 북계 대부성에 머물던 탈타아에게 몽골로의 귀부 의사를 전하였다(ꡔ高麗史ꡕ 권140, 열전43, 崔坦傳). 뿐만 아니라 몽가독 은 김방경에게 최탄 등이 왕경을 범하고자 한다 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ꡔ高麗 史節要ꡕ 권18, 元宗 11년 정월). 27) ꡔ高麗史節要ꡕ 권18, 元宗 10년 10월. 崔坦殺西京留守崔年ㆍ判官柳粲ㆍ司錄 曹英紱ㆍ龍州守庾希亮ㆍ靈州守睦德昌ㆍ鐵州守金鼎和ㆍ宣州守金義ㆍ慈州守 金潤 其餘諸城員吏皆沒於賊 成州守崔群爲其下所殺 28) ꡔ高麗史節要ꡕ 권18, 元宗 10년 10월. 時 蒙古使脫朶兒來在此城 問其事由 坦 詭言曰 高麗卷土 將入海島 盡殺北界諸城人 29) ꡔ高麗史節要ꡕ 권18, 元宗 11년 정월. 方慶與蒙哥篤至西京 父老泣謂方慶曰 公 若在此 豈有坦愼之事 爭來餉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15 A-② 임연은 왕(원종)이 황제에게 아뢰어 그를 제거하고자 군대를 청하여 돌아올 것을 우려하여, 指諭 智甫大에게 夜別抄를 이끌고 黃州에 주둔하게 하 고, 神義軍을 椒島에 주둔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최탄ㆍ한신 등이 그 계획을 알고 비밀리에 배와 노를 갖추고, 정예군사를 모아 몽가독에게 일러 말하길, 임연 등이 장차 官人(몽가독)과 大軍을 살해하고 濟州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청컨대 관인께서는 사냥하러 나간다고 소리 내 말씀하시고, 京軍의 왕래 상황 을 살펴 서로 알리며, 우리 등이 배와 군사로써 甫音島ㆍ末島에 나아가고 관인 이 군대를 이끌고 窄梁에 임하시면 저들이 능히 나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할 것 입니다. 이미 그 정보를 얻었으니, 황제에게 갖춰 알리면 가히 왕경을 취할 것 이니 子女ㆍ玉帛이 다른 이의 것이 아닙니다. 하니, 몽가독이 기뻐하며 승낙하 였다. 寧遠別將 吳繼夫의 아들 吳得公은 최탄의 內廂이 되었는데, (최탄의 음 모를) 알고 몰래 김방경에게 고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길, 어찌 그런 일이 있겠 는가? 하니, 오득공이 말하길,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몰래 정탐하는 것이 옳 습니다.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김방경이 몽가독의 館門에 이르니, 諸軍이 모 두 이르렀고 최탄ㆍ한신 등이 기뻐하는 낯이 있었다.30) 환국 도중에 이 소식을 접하고 되돌아온 세자 諶(훗날 충렬왕)으로부터 원종 폐위 사실을 들은 쿠빌라이는 임연을 압박하기 위해 蒙哥篤을 파견하 였다. 하지만 임연에 의해 몽가독군의 보급이 방해 받을 것을 우려한 몽골 중서성은 세자로 하여금 임연에게 비판적인 인물을 伴行으로 선발하여 몽가 독과 함께 가게 할 것을 요청하였고, 이장용의 건의에 따라 두 번 북계를 진 무한 경험이 있었던 김방경이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르렀다.31) 사료 A①에서 몽가독과 함께 서경에 이른 김방경에 대한 북계민들의 반응을 살펴 30) ꡔ高麗史ꡕ 권104, 열전17, 金方慶傳. 林衍慮王奏帝請兵還欲拒之 令指諭智甫 大 率夜別抄屯黃州 神義軍屯椒島 以備之 坦ㆍ愼等知其謀 密具舟楫 聚銳兵 謂 蒙哥篤曰 衍等將殺官人及大軍 欲入濟州 請官人聲言出獵 察京軍往來狀相報 吾 等以舟師 進甫音島ㆍ末島 官人領兵臨窄梁 彼不能進退 旣得其情 具聞于帝 王 京可取 子女玉帛 非他有也 蒙哥篤喜諾 寧遠別將吳繼夫之子得公 爲坦內廂 知 之密告方慶 方慶曰 豈有此事 得公曰 若不信 可陰偵之 詰朝 方慶詣蒙哥篤館門 諸軍畢至 坦ㆍ愼等似有喜色 31) ꡔ高麗史節要ꡕ 권18, 元宗 11년 정월. 中書省謂世子曰 蒙哥篤 若久在西京 衍 旣背命 必不供給 宜選不與衍者伴行 世子難其人 侍中李藏用等曰 金方慶 再鎭 北界 有遺愛 非此不可 乃以方慶伴蒙哥篤遣之
16 지역과 역사 39호 볼 수 있다. 사료 A-①의 父老 는 과거 김방경이 북계를 진무하였을 때 善 政의 은택을 받았던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사료 A-②에서 최탄ㆍ한신이 임연의 출병을 빌미로 몽가독을 꾀어 대동강을 넘어 고려 내지를 위협하려는 음모를 김방경에게 알려준 寧遠別將 吳繼夫의 아들 吳得公은 심지어 최탄의 內廂이었다. 김방경은 처음에는 오 득공의 첩보를 믿지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 최탄ㆍ한신 등이 기뻐하는 낯 을 보고 난 후에 대동강을 넘지 말라는 쿠빌라이의 명령을 내세워 몽가독의 도강을 저지하는 한편, 최탄ㆍ한신과 몽가독이 渡江할 명분을 제거하기 위 해 황주에 주둔하고 있던 智甫大에게 비밀리에 사실을 알려 철수시키기도 하였다.32) 한편, 최탄 등 주모세력이 북계 지역의 민심을 모두 장악하지 못하였음은 그가 오직 임연을 주살한다[ 誅衍爲名 ]는 명분에만 의지했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B-① 처음에 平章事 洪鈞이 두 번 北界를 鎭撫하였는데, 사람들이 은혜를 품어 아버지로 불렀다. 안경공 창이 북방에 변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홍균의 아 들 洪祿遒로 李信孫을 대신하여 兵馬使로 삼았는데, 홍녹주가 군영에 이른 지 10일 만에 난이 일어났다. 홍녹주는 담을 넘어 도망쳐 나와 바다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하였다. 分道 黃宗諝가 그를 저지하고 말하기를, 제가 變을 정탐하고 자 하니,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고 하였다. 황종서 가 오래도록 오지 않으니 홍녹주는 (황종서가) 해를 입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營主를 죽이지 말라. 라는 것이 었다. 홍녹주가 이에 돌아오니, 최탄이 사람을 시켜 홍녹주에게 말하기를, 前 王[원종]께서 두 번 상국에 입조하여 동방을 편안케 하시어 백성들이 그 은덕을 입었습니다. 林衍은 鎭州의 일개 병졸일 뿐인데, 어떤 공덕이 있어 함부로 國柄 을 마음대로 하여 우리 왕을 폐위하였습니까. 조정에 忠臣이 없으니 우리가 奮 激하여 악의 수괴를 주살하고, 다시 우리 왕을 받들고자 합니다. 앞서 평장사 (홍균)께서 두 번이나 이 지방을 진무하시어 우리 백성의 목숨을 살리셨고, 尙 書(홍녹주)께서 지금 또다시 안무하는데 선친의 풍모가 있으니, 우리는 차마 덕 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고 하였다. 홍녹주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나의 부친을 32) ꡔ高麗史ꡕ 권104, 열전17, 金方慶傳.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17 잊지 않아 後人에게 이어져 미치니, 어찌 이처럼 감동적인가. 만약 진실로 잊지 않았다면 分道와 電吏를 풀어주길 청한다. 고 하니 최탄이 그를 따랐다.33) B-② 최탄ㆍ한신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城守를 살해하였을 때, 오직 博州守 姜份과 延州守 權闡만을 禮로 대우하며 말하길, 金公(김방경)의 恩德을 우리 가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는 강빈과 권천이 김방경의 妹壻이기 때 문이었다.34) 사료 B-①에서는 최탄 등이 내세운 거병의 명분이 잘 드러난다. 최탄 등 은 원종이 위험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몽골에 입조하여 전쟁을 끝내고 편안 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추켜세우는 한편, 그러한 원종을 임연이 함부로 폐 위시킨 것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임연을 주살하여 원종을 복위시키는 것을 거병의 명분으로 삼았다. 특히, 최탄 등이 임연에 의해 옹립된 安慶公 淐이 파견한 洪祿遒를 죽이 지 않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안경공 창이 북방에 변이 생길 것을 우려하였다는 점에서 반란의 기미는 사전에 고려 조정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신손을 대신해 홍녹주를 북계로 파견한 것은 홍녹주의 父인 洪鈞이 북계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계의 수 령들이 도륙을 당하던 와중에도 홍녹주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 역시 父인 홍균의 선정 덕택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사료 B-②에서도 보인다. 역시 최탄ㆍ한신에 의해 북계 33) ꡔ高麗史節要ꡕ 권18, 元宗 10년 10월. 初平章事洪鈞 再鎭西北 人懷其惠 稱爲 父 淐恐北方生變 以鈞子祿遒代李信孫爲兵馬使 祿遒至營 十日而亂作 祿遒踰垣 走 欲投海死 分道黃宗諝止之曰 吾欲偵變 待吾還而死 亦未晩也 宗諝良久不來 祿遒以爲見害 俄聞有人呼 莫殺營主 祿遒乃還 坦使人言於祿遒曰 前王再朝上國 以安東方 民受其賜 林衍鎭州一兵卒耳 有何功德 操弄國柄 擅廢吾王耶 朝無忠 臣 吾等奮激 欲誅首惡 復戴吾王耳 先平章再鎭北方 活我民命 尙書今又再來安 撫 有先公之風 吾等不忍背德 祿遒曰 君等不忘吾父 延及後人 何感如之 請釋分 道及隨使電吏 坦從之 34) ꡔ高麗史ꡕ 권104, 열전17, 金方慶傳. 時崔坦ㆍ韓愼叛 殺諸城守 唯禮待博州守 姜份ㆍ延州守權闡曰 金公之德 吾豈敢忘 以份ㆍ闡方慶妹壻也
18 지역과 역사 39호 의 수령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를 당하던 와중에 최탄 등이 오직 姜份과 權闡 을 禮로 대접한 것 역시 그들이 북계를 두 번 진수하여 선정을 베풀었던 김 방경의 妹壻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정을 통해 최탄 등의 거병 초기 북계 지역의 민심을 짐 작해볼 수 있다. 김방경이 북계에 도착하자 그를 환대하며 최탄ㆍ한신 등 주모세력을 비난했던 父老(A-①)와 몽가독을 꾀어내 고려 내로 진공하려 했던 최탄ㆍ한신 등의 음모를 김방경에게 알려 저지하는데 기여한 오득공 (A-②)의 사례는 최탄 등의 거병에 가담하였으나 강압으로 혹은 소극적으 로 협력하였던 북계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최탄 등이 함부로 하지 못했던 홍녹주(B-①)와 강빈, 권천(B-②) 의 사례에서 홍균ㆍ김방경과 같이 과거 북계 지역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인 물에 대한 북계민들의 호감 내지는 보은의 민심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거병 초기부터 최탄 등 주모세력의 야심과는 달리 고려 조정에 우호적인 민심이 북계 지역 내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 하며, 그러한 사정 때문에 최탄 등 주모세력은 북계민들을 거병에 동참시키 기 위해서라도 원종 복위와 임연 제거라는 명분에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었 던 것으로 보인다. 여ㆍ몽 전쟁기, 고려 각지에서 벌어졌던 반란과 투몽은 전쟁으로 인한 참 상과 고려 조정의 무능함에 따른 것이었다. 특히, 그 양상이 해당 지역의 吏 民이 집단으로 봉기하여 투몽이라는 형태로 전화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조정 에 대한 일종의 저항 행위로 볼 수 있었다.35) 따라서 강화가 성립되며 전쟁 이 종식되자, 고려는 다시금 각지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원종 폐위라는 정변으로 인해, 여ㆍ몽 관계가 경색되면서 다시 전쟁 이 재발할 우려가 높아지자 북계민들은 원종 복위와 임연 제거라는 명분을 내세운 최탄 등에게 가담하였던 것이다. 35) 金光哲, 麗蒙戰爭과 在地吏族 ꡔ釜山史學ꡕ 12, 1987. 신안식, 대몽항쟁기 민의 동향 ꡔ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ꡕ, 민음사, 1994. 이정란, 여ㆍ몽전쟁 기 변경민의 몽골 체험 과 고려 조정의 대응 ꡔ한국사학보ꡕ 61, 2015.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19 원종 복위와 임연 제거라는 거병 명분은, 전쟁에 대한 공포가 깊게 남아 있던 북계민들을 선동하고 전쟁 분위기를 과장함으로써 빠르게 북계 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거병 초기 북계 지역의 동향은 최탄 등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성되어 있었다. 최탄 등 은 북계민들을 反고려 정서로 결집하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최탄 등은 원 종 복위와 임연 제거라는 명분에 스스로 얽매일 수밖에 없었고, 원종이 복 위하자 자연히 한계를 드러냈을 것이다. 하지만 원종이 복위한 이후에도 고려 내에서 임연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36) 국왕을 폐위한 책임이 있었던 임연이 그 벌을 받기는커녕 여전히 건재하였기 때문에 최탄 등의 거병 명분도 유효했던 것이다. 원종 복위 이후의 비정상적인 상황은, 고려로부터 북계를 분리하고자 했던 몽골 이나 그 힘을 빌려 王京을 범하고자 했던 최탄 등 주모세력 모두에게 활로 를 제공하였다. 한편, 원종은 최탄 등 주모세력이 반역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속 수무책이었다. 원종 자신이 속절없이 폐위되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사실 상 고려 내에서 군주가 부재한 상황[ 當今無主 ]37)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탄 등이 上國인 몽골에게 投附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치죄할 명분 도 없었다.38) 즉, 최탄 등은 명분상으로 군주를 폐위시킨 逆臣 임연을 처단 하기 위해 倡義起兵 39)하였지만 도리어 임연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자 上國인 몽골에 의탁한 셈이었다. 최탄 등은 원종의 곤란한 처지를 간 파하고 임연의 위협을 과장하며40) 북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 36) 강재구, 앞의 논문, 2015, 20~22쪽. 37) ꡔ高麗史ꡕ 권130, 열전43, 崔坦傳. 烋至大同江 張蓋踞胡床 俟賊出迎 賊忽擊鼔 而出 列騎江邊 使數人拏舟來言曰 當今無主 宣諭使誰所遣乎 義無迎命 38) ꡔ高麗史節要ꡕ 권18, 元宗 11년 정월. 予早知其叛而不一問罪者 以其投附上朝 故也 39) ꡔ高麗史節要ꡕ 권18, 元宗 11년 2월. 王上表請復西京曰 崔坦李延齡等本非有 怨於國家 因權臣擅廢立 初若倡義起兵 至達于上朝 望屬世子 40) ꡔ高麗史ꡕ 권26, 元宗 11년 정월 辛丑.
20 지역과 역사 39호 었다. 결국 몽골은 최탄 등의 임연 제거 라는 명분을 승인하는 것으로서, 그들 의 귀부를 받아들였다. 비록 최탄 등은 북계민들을 反고려 정서로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지만, 몽골의 비호를 받게 됨으로써 임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쟁의 재발을 두려워했던 북계민들이 끝내 최탄 등에 동조하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몽골은 上國으로써 고려의 逆 臣 임연의 위협에 노출된 고려의 忠臣 최탄 등의 귀부를 수용한다 는 명분을 통해 강화 합의를 훼손시키지 않음으로써 고려의 반발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북계 지역에 대한 몽골과 최탄 등 주모세력 양자의 이해가 일치된 결과, 북계 지역은 고려에서 분리되고 동녕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Ⅱ. 崔坦 등의 위상과 동녕부의 편제 1. 동녕부 설치 후 최탄 등의 위상과 그 변화 1270년(원종 11) 2월에 몽골은 최탄 등이 요청한 3,000명의 병력을 서 경에 진주시키는 한편, 최탄과 이연령에게는 金牌를, 현효철과 한신에게는 銀牌를 주었으며, 서경을 고쳐 동녕부로 삼는다는 것을 고려에 통보했다.41) 이는 원종이 복위하자마자 황급히 親朝에 오르던 와중에 전해진 것으로,42) 원종은 즉시 몽골 조정에 동녕부 설치를 철회하고, 서경을 돌려 달라고 요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3) 이로써 쌍성총관부에 이어 동녕부가 설치되면서 고려는 북방 영토 모두를 상실하게 되었다.44) 41) ꡔ高麗史ꡕ 권26, 元宗 11월 2일 丁丑. 崔坦請蒙古兵三千來鎭西京 帝賜崔坦ㆍ 李延齡金牌 玄孝哲ㆍ韓愼銀牌 有差 詔令內屬 改號東寧府 畫慈悲嶺爲界 42) ꡔ元史ꡕ 권208, 외이1, 고려, 세조 지원 7년 정월. 遣使言 比奉詔 臣已複位 令 從七百人入覲 詔令從四百人來 餘留之西京 詔西京內屬 改東寧府 畫慈悲嶺爲界 以忙哥都爲安撫使 佩虎符 率兵戍其西境 43) ꡔ高麗史ꡕ 권26, 元宗 11년 2월 庚辰.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21 <표> 최탄 등 주요 인물의 지위 변화 崔坦 李延齡 韓愼 西北面兵馬使營記官 三和縣人 西北面兵馬使營吏 營吏 (前)校尉 西北路摠管下吏 桂文庇 玄孝哲 전거 ꡔ高麗史ꡕ세가, 원종 10년 10월 乙亥ㆍ更子 定遠都 延州人 ꡔ高麗史ꡕ지리, 북계 서경유수관 護郎將 평양 연혁 ꡔ高麗史ꡕ열전, 최탄 高麗國 龜州都領???? ꡔ高麗史ꡕ세가, 원종 10년 12월 辛卯 高麗都統領 高麗西京 都統??? ꡔ元史ꡕ본기, 세조 지원 6년 11 월 癸卯, 丁未 摠管(金牌) (金牌) (銀牌)? (銀牌) ꡔ高麗史ꡕ열전, 최탄 東寧府千戶? 東寧府 (東寧府) 東寧府 ꡔ高麗史ꡕ열전, 염승익 千戶 千戶 千戶?? 大將軍 大將軍 大僕尹 ꡔ高麗史ꡕ세가, 충렬왕 16년 3월 ꡔ高麗史ꡕ열전, 최탄 위의 <표>를 통해 최탄 등 주모세력의 직위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최탄 은 거병 당시에 西北面兵馬使營吏 따위로 지칭되고 있지만, 몽골에 귀부할 당시에 高麗國 龜州都領( ) 의 직함을 띄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몽골 측 사료에서도 귀부 당시, 최탄을 高麗都統領,45) 이연령을 高麗西京都統 으 로 적고 있는 것( )으로 볼 때, 이들은 북계 지역에서 제법 유력한 토착세 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靜州別將 康元佐 등 3인이 와서 몽골 황제의 조서를 전하니 조서에서 말하 길, 高麗國 龜州都領 崔坦 등과 西京 54城, 西海 6城 軍民 등에 알린다. 근자 에 최탄이 상주하기를, 고려 逆臣 林衍이 사람을 보내 여러 사람과 그 처자를 유혹하고 협박하여 모두 東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연이) <만일 따르지 않으면 戕害를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 다. 너희는 그 順逆을 잘 판단하여 핍박과 위협을 따르지 않고, 逆黨을 끊어 베 44) 方東仁, 앞의 논문, 1990. 신안식, 고려후기의 영토분쟁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를 중심으로- ꡔ軍史ꡕ 99, 2016. 45) ꡔ元史ꡕ에서 최탄을 高麗都統領 이라고 한 것은 都領 이라는 고려 관직을 오인 하였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22 지역과 역사 39호 고 두 마음이 아님을 밝히고자 하였으니 그 義가 가상하다. 지금 최탄에게는 이 미 勑命을 더하였고, 남은 吏民은 行中書省에 別勅하여 거듭 撫護하게 하였다. 오직 너희 臣庶는 짐의 품은 뜻을 받들어 더욱더 忠節을 다하라. 고 하였다. 왕 이 강원좌 등에게 각각 백금 1斤씩 내리고, 임연 역시 후하게 위로하였다.46) 최탄은 (高麗國) 龜州都領 이라는 북계 토착세력이자 고려 관인의 자격 으로 몽골에 귀부하였다.47) 그리고 동녕부가 설치되자, 최탄은 摠管 직위 를 부여받게 되는데( ), 이는 그가 금패를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연 령 역시 금패를 받았지만, 그도 총관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연 령이 高麗西京都統 이라는 직위를 띄고 있는 점에서 高麗都統領 (혹은 高 麗國 龜州都領)으로서 東寧府 摠管 이 된 최탄과 함께 동녕부의 핵심 지휘 부를 구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최탄ㆍ이연령은 북계 토착세력이자 고려 관인으로 귀부하여 몽골 관인의 지위를 획득하였고, 동녕로총관부로 승격되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동녕부를 총괄하는 위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녕부 설치 이후 최탄 등 의 위상에 대해서는 여ㆍ몽 전쟁 전쟁 초기 홍복원의 행적과 비교해 보았을 때 몇 가지 중요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ꡔ元史ꡕ 洪福源傳에 따르면, 홍복원은 1231년(고종 18) 살리타이의 1차 고려 침공 시 州縣民을 이끌고 率先歸附하여 몽골군의 고려 공략에 적극적 으로 협력했다고 한다.48) 이후 安北城에서 대패한 고려는49) 이내 淮安公 46) ꡔ高麗史ꡕ 권26, 元宗 10년 12월 辛卯. 靜州別將康元佐等三人來 傳蒙古帝 詔 曰 諭高麗國龜州都領崔坦等 洎西京五十四城西海六城軍民等 近崔坦奏 高麗逆 臣林衍遣人 誘脅衆庶及其妻子 俱令東往 且曰 若不從令 當加戕害 你等審其順 逆 不從逼脅 勦誅逆黨 以明不貳 其義可尙 今坦已加勑命 自餘吏民 別勑行中書 省 重爲撫護 惟爾臣庶 仰體朕懷 益殫忠節 王賜元佐等各白金一斤 衍亦厚慰之 47) 都領은 대체로 郎將(정6품), 中郎將(정5품)의 지위를 가진 州鎭軍의 지휘관으 로, 독자적 군사력을 보유한 토착세력을 지칭한다. 兩界 都領에 대해서는 金南 奎, 明宗代 兩界 都領의 性格과 生活, 앞의 책, 1989. 김갑동, 고려시대의 都領 ꡔ한국중세사연구ꡕ 3, 1996. 김유나, 고려 전기 북계민(北界民)의 형성 과 그 집단의식 ꡔ역사와 현실ꡕ 96, 2015 참조. 48) ꡔ元史ꡕ 열전41, 洪福源傳. 辛卯秋九月 太宗命將撒裏答討之 福源率先附州縣之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23 侹을 보내 몽골과의 화친을 모색하였고,50) 1232년(고종 19) 정월 11일에 마침내 몽골군이 되돌아갔는데,51) 화의의 조건으로서 왕경과 북계 諸州郡 에 다루가치 72인이 설치되었다고 한다.52) 이때 홍복원은 附蒙高麗軍民을 거느리고 예수데르[也速迭兒] 휘하의 探馬赤軍과 함께 북계에 주둔했던 것 으로 보이는데,53) 1232년(고종 19) 최우가 전격적으로 江華 遷都를 단행 하고 산성과 해도로 재입보하자54) 북계 40여 성의 유민을 초집하여 大兵 이 오기를 기다렸다 55)고 한다. 이후, 고려의 이반을 진압하기 위해 재차 파견된 살리타이가 처인성에서 죽고, 副將 鐵哥가 군사를 되돌렸을 때 홍복 원만이 남아 북계 지역을 진수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233년(고종 20) 10 民 與撒禮塔並力攻未附者 又與阿兒禿等進至王京 49) ꡔ高麗史節要ꡕ 권16, 高宗 18년 10월. 50) ꡔ高麗史ꡕ 권23, 高宗 18년 12월 丙辰 ; 12월 丁卯 ; 12월 庚辰 ; 高宗 19년 4월 壬戌. 51) ꡔ高麗史ꡕ 권23, 高宗 19년 정월 壬辰. 52) ꡔ元高麗記事ꡕ 태종 3년 9월. 撒里塔火里赤又差阿兒禿與福源赴其王京 招其主 王㬚 㬚遣弟懷安公請和 隨置王京及諸州郡達魯花赤七十二人鎮撫 即班師 53) 윤용혁, ꡔ高麗對蒙抗爭史硏究ꡕ, 일지사, 1991, 54쪽. 주채혁, ꡔ몽ㆍ려전쟁기 의 살리타이와 홍복원ꡕ, 혜안, 2009, 235~236쪽. 54) ꡔ高麗史ꡕ 권23, 高宗 19년 6월 乙丑. ꡔ高麗史節要ꡕ 권16, 高宗 19년 6월. 한 편 ꡔ元史ꡕ 등 몽골 측 사료에서는 이때 고려 주재 다루가치 72인이 모두 살해되 었다(ꡔ元史ꡕ 권208, 외이1, 고려, 태종 4년 6월 盡殺朝廷所置達魯花赤七十二 人 )고 기술하고 있지만, 고려 측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시 윤복창이 다루가치의 무기를 회수하려 하였다(ꡔ高麗史ꡕ 권23, 高宗 19년 7월)거나 서경 순무사 민의와 녹사 최자온이 다루가치 살해를 모의하였다(ꡔ高麗史ꡕ 권23, 高 宗 19년 8월 己酉)는 기사로 볼 때 고려 주재 몽골세력의 축출을 위한 모종의 계획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곧 최자온이 감옥에 갇히고 서경 관원들이 황급히 猪島로 입보하였다(ꡔ高麗史ꡕ 권23, 高宗 19년 8월 壬戌)는 것과 재차 파견된 살리타이에게 천도의 사유와 다루가치 구금 혐의에 대해 항변 하고 있는 것(ꡔ高麗史ꡕ 권23, 高宗 19년 9월)을 볼 때 다루가치의 살해가 실제 로 실행되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55) ꡔ元史ꡕ 권154, 열전41, 洪福源傳. 福源招集北界四十餘城遺民以待. 이에 대해 ꡔ元史ꡕ 권208, 외이1, 고려, 태종 4년 6월조에서는 대병을 기다렸다[以俟大 兵] 고 하였으며, ꡔ元高麗記事ꡕ 태종 4년 6월조에서는 天兵이 와서 구원할 것 을 기다렸다[俟天兵來援] 고 표현하고 있다.
24 지역과 역사 39호 월, 고려가 서경을 공격하자 북계민을 모아 몽골에 來歸하여 遼陽과 沈陽 사이에 머물렀다.56) 이러한 사실은 서경에서 西京郎將 홍복원이 필현보와 함께 정의와 박녹전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최우가 가병 3,000명과 북계병마사 민희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게 하였고 이때 홍복원은 몽골로 도 주하였다는57) ꡔ高麗史ꡕ의 기록과 대체로 부합한다. 주목할 것은 살리타이가 죽고, 철가가 군사를 되돌린 후에도 홍복원이 북 계에 남아 진수를 계속했다는 점이다. 이는 홍복원은 당시 북계 40여 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C-① 원 초에 요동을 평정하였다. 高麗國 麟州神騎都領 洪福源이 西京, 都 護, 龜州 40여 城을 이끌고 와 항복하니 각각 鎭守司를 세우고 官을 설치하여 그 민을 안무하였다. 후에 고려가 다시 반역하자 홍복원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귀순하니 (홍복원에게) 高麗軍民萬戶를 제수하고 항복한 민을 遼陽과 沈州로 옮겨 흩어져 살게 하였다.58) C-② 고종 20년(1233), 홍복원을 西京郎將으로 삼았다. (홍복원이) 畢賢甫 와 더불어 宣諭使 大將軍 鄭毅ㆍ朴祿全을 살해하고, 城에 기대어 배반하였다. 崔怡가 家兵 3,000명을 보내 北界兵馬使 閔曦와 더불어 그를 토벌하게 하니, 필현보를 붙잡아 수도[江都]로 압송하여 저자에서 腰斬하였다. 홍복원은 도주 하여 元으로 들어가니, 이에 그의 아버지 洪大純과 女ㆍ子, 동생 洪百壽를 붙 잡고, 남은 민들은 모두 해도에 옮기니 마침내 서경은 丘墟가 되었다.59) 56) ꡔ元史ꡕ 권154, 열전41, 洪福源傳. (壬辰年) 秋八月 太宗複遣撒禮塔將兵來討 福源盡率所部合攻之 至王京處仁城 撒禮塔中流矢卒 其副帖哥引兵還 唯福源留 屯 癸巳冬十月 高麗悉眾來攻西京 屠其民 劫大宣以東 福源遂盡以所招集北界之 眾來歸 處於遼陽沈陽之間 帝嘉其忠 57) ꡔ高麗史ꡕ 권23, 高宗 20년 5월 ; 12월. 58) ꡔ元史ꡕ 권59, 지11, 지리2, 遼陽等處行中書省, 沈陽路 연혁. 元初平遼東 高麗 國麟州神騎都領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四十餘城來降 各立鎮守司 設官以撫其民 後高麗複叛 洪福源引眾來歸 授高麗軍民萬戶 徙降民散居遼陽沈州 59) ꡔ高麗史ꡕ 권130, 열전43, 洪福源傳. 二十年 福源爲西京郞將 與畢賢甫 殺宣諭 使大將軍鄭毅ㆍ朴祿全 據城反 崔怡遣家兵三千 與北界兵馬使閔曦討之 獲賢甫 送京 腰斬于市 福源逃入元 於是 擒其父大純及女ㆍ子弟百壽 悉徙餘民于海島 西京遂爲丘墟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25 C-③ 高麗降人 麟州探問神騎都領 홍복원에게 금패를 내리고, 원래 降服民 戶를 이끌고 東京에 거주하게 했다.60) 사료 C-①은 ꡔ元史ꡕ 지리지 沈陽路의 연혁 일부이다. 여기서 상기한 北 界 40餘 城 이 西京ㆍ都護ㆍ龜州 40餘 城 으로 적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홍복원이 살리타이에게 투항하던 시점의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61) 북계 40여 성 은 살리타이의 1차 침공으로 공략된 北界 諸城에 대한 통칭으로 보는 쪽이 적절할 것이다.62) 사료 C-①에서 주목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홍복원이 최초 몽 골에 귀부하던 당시, 그의 직위가 高麗國 麟州神騎都領 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유관한 사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최초 귀부 이후에도 북 계에 잔류하여 몽골군에게 협력하고 있었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홍복원이 필현보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시기, 그의 직위가 西京郎將 이었다는 것 (C-②)은 그가 북계에 잔류했던 시기, 몽골에 귀부하였음에도 고려 관인의 직위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홍복원의 직위가 귀부 당시 의 직위인 麟州神騎都領 에서 西京郎將 으로 상승되었음을 보여주는데, 西京郎將 으로 제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몽골에 귀부하였 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홍복원이 최우의 습격을 받고 몽골로 도주하여 高麗軍民萬戶 혹 은 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 이 되기 전, 즉 북계 지역에서 잔류하던 시기에 는 (高麗國) 麟州神騎都領, 西京郎將 과 같은 북계 토착세력이자 고려 관 인의 직위를 기반으로 북계를 장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63) 이는 역 60) ꡔ元高麗記事ꡕ, 태종 6년 5월 1일. 賜高麗降人麟州探問神騎都領洪福源金牌 俾 領元降民戶 于東京居住 61) 주채혁, 앞의 책, 2009, 238쪽. 62) 주채혁, 위의 책, 231~232쪽. 63) 사료 C-①에 따르면, 홍복원이 高麗軍民萬戶 로 제수된 것은 고려가 재차 반역 하여 그가 몽골로 도주한 이후의 일로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주채혁은 홍복원 이 고려가 안북성에서 살리타이에게 대패하여 화친이 이루어진 1231년(고종 18) 12월을 전후하여 이미 高麗軍民萬戶 직을 몽골로부터 받았고, 그 직을 맡
26 지역과 역사 39호 시 홍복원이 몽골로 완전히 도주하였던 때의 직위가 高麗降人 麟州探問神 騎都領 64)이었고(C-③), 그 후에 高麗軍民萬戶가 되었다(C-①)는 것에서 도 잘 보인다. 즉, 홍복원이 최우에게 토벌된 후, 몽골 내지로 귀순하던 당 시까지도 麟州神騎都領 과 같은 북계 토착세력으로서의 위상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몽골이 홍복원의 귀순을 麟州(探問)神騎都 領 의 귀순으로 인식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둘째, 홍복원이 귀부하자 그를 북계에 잔류시키고 북계 40여 성에 각각 鎭守司를 세우고 官을 설치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살리타이의 1차 침공으로 공략당한 북계 지역에 몽골 행정시설이 두어져 살리타이가 사살되어 철가가 군사를 되돌린 후에도 홍복원이 북계에 남아 진수할 수 있었던 행정체계가 아오다가 그가 필현보와 반란을 일으켜 최우에게 토벌되어 몽골로 도주한 이후 인 1234년(고종 21) 5월에 金符를 받고 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 (ꡔ元史ꡕ 권 154, 열전41, 洪福源傳, 태종 6년 5월)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얻었다고 보았다 (주채혁, 위의 책, 242~246쪽). 즉, 홍복원이 서경에 체류하던 시기에, 이미 高麗軍民萬戶 라는 몽골 관직을 보유하고 있었고, 西京郎將 (고려 관직)은 고 려가 그를 달래기 위해 사여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복원은 북계 체류 시 高 麗軍民萬戶 (몽골 관직)과 西京郎將 (고려 관직)을 겸직하였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홍복원이 북계 체류 시 확인되는 관직은 西京郎將 (C-②) 뿐이며, C①에 따르면 高麗軍民萬戶 는 그가 완전히 몽골로 귀순한 후에 제수 받은 것으 로 되어 있으므로, 홍복원이 북계에 체류할 때 이미 高麗軍民萬戶 였다는 주채 혁의 주장과 배치된다. 다만, C-①의 高麗軍民萬戶 와 ꡔ元史ꡕ 洪福源傳의 管 領歸附高麗軍民長官 이 동일한 직위일 가능성도 있다. 즉, ꡔ元史ꡕ 洪福源傳에 서 홍복원이 몽골 내지로 완전히 귀부한 후 제수받은 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 이 C-①에서는 高麗軍民萬戶 로 표기된 것이라면, 홍복원이 북계 체류 시에 西京 郎將 과 高麗軍民萬戶 의 직을 겸직했다는 주채혁의 주장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주채혁은 홍복원이 서경 일대에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배 경이 高麗軍民萬戶 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西京郎將 의 직위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당시 홍복원이 북계 토착세력으로서 西京郎將 의 직위까지 보유하였다면, 꼭 高麗軍民萬戶 를 겸하지 않더라도 북 계 지역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64) 여기서 探問 이 부가된 것은, 그가 고려 북계에서 몽골군에 협조한 역할을 지칭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홍복원이 通事 로서 몽골의 요구를 고려에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실을 보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27 갖추어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에 대한 진위는 더 이상의 사료를 찾 을 수 없어 구체적인 실체를 상고하기는 어렵지만, 살리타이군의 1차 침공 에 이어 여ㆍ몽 간의 화친이 성사된 후에도 고려 주재 다루가치 72인, 예수 데르 휘하의 탐마치군, 홍복원이 거느린 고려군민과 같은 몽골세력이 잔류 하고 있었고, 이들을 위한 행정체계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홍복원의 행적은 동녕부 설치 후 최탄 등의 위상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홍복원은 1231년(고종 18) 몽골에 투항하였을 때, (高麗國) 麟州神騎都領 이라는 직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홍복원이 북계를 진수하던 시기에, 西京郎將 으로의 승진이 확인되며, 몽골로 도주하자 高 麗降民 麟州探問神騎都領 으로 귀순이 받아들여진 점을 보면, 이미 1231년 에 투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계 토착세력이자 고려 관인의 위상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최탄 역시 (高麗國) 龜州都領 이라는 북계 토착세력이자 고려 관 인의 자격으로 몽골에 귀부하였다. 그 후 동녕부가 설치되자, 최탄은 金牌 를 받고 摠管이 되어 북계 지역에 잔류하였다. 이는 앞선 홍복원의 사례와 같이, 몽골이 북계 토착세력(홍복원ㆍ최탄)을 고려 관인의 자격(麟州神騎 都領ㆍ龜州都領)으로서 귀부를 받아들이고, 북계 지역에 몽골의 행정체계 (鎭守司ㆍ東寧府)를 구축하는 동시에 그들을 잔류시켜 관리하게 하는 방식 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즉, 최탄 역시 토착세력의 위상을 바탕으로 동녕부 의 관할을 위임받았고, 몽골이 그 토착적 위상의 大小를 금패ㆍ은패의 형태 로 분별하여 총관ㆍ천호의 직을 부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몽골에게도 동녕부 설치에 따르는 북계민의 거부감을 희석 하는 데 최탄 등의 토착적 지위를 유지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 이다. 또한, 최탄 등의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북계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탄의 직위는 충렬왕 대에 이르면 크게 변화를 겪는 것으로 보인 다. 앞의 <표> 에서도 보이듯이, 최탄은 애초 銀牌를 받아 그 급에 차이가
28 지역과 역사 39호 있었던[有差] 한신ㆍ현효철 등과 같은 千戶 로 강등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탄 등 주모세력의 동녕부 내 입지가 크게 위축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는 것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65) 그렇다면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절을 바꾸어 동녕부의 추이와 편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2. 동녕부의 개편 추이와 二元的 지역 지배 쿠빌라이는 고려에 동녕부 설치를 통보하기 전, 龜州都領 최탄과 서경 54개ㆍ서해 6개 城의 軍民에게 조서를 보내 그들의 귀부를 승인하였다.66) 선행 연구에서는 이를 근거로 동녕부의 관할 범위를 총 60개 성일 것이라고 보았고,67) ꡔ元史ꡕ 지리지 東寧路條에 열거된 다수의 고려 地名이 대체로 조서에 명시된 서경 54개, 서해 6개 성 과 호응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68) 지금으로써는 이들 사료를 근거로 동녕부의 관할 범위를 정확하게 밝혀내기 는 어렵지만, 다음의 사료를 통해 동녕부의 편제 과정과 운영상의 변화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東寧路 : 본래 고구려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元 至元 6年, 李延齡ㆍ崔垣ㆍ玄元烈 등이 府州縣鎭 60城을 거느리고 와서 귀부하였다. (至 元) 8年, 서경을 고쳐 東寧府로 삼았다[改西京爲東寧府]. (至元) 13年, (동녕 65) 이정신, 앞의 책, 2004, 206쪽. 66) 쿠빌라이의 조서를 입수하여 고려조정에 보인 강원좌가 정주별장이라는 직함을 띄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정주에도 반포된 조서가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 다. 따라서 정주별장 강원좌가 쿠빌라이의 조서를 고려 조정에 전하여 정황을 알렸고, 이에 원종과 임연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던 것이다. 67) 일반적으로 서해 6성 은 서해도의 6개 성 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김구 진은 西海 바다 椒島ㆍ椵島 등의 6城 으로 해석하기도 했다(김구진, 앞의 논 문, 1986, 476쪽). 68) 箭內亙, 滿洲に於ける元の疆域 ꡔ滿洲歷史地理ꡕ 2, 1913, 338~344쪽. 방동 인, 앞의 논문, 1984, 77~78쪽. 김구진, 위의 논문, 474~477쪽. 한편, 김구진 은 몽골의 동녕부 지배 방식이 民戶지배를 기반으로 하였다고 하며, ꡔ元史ꡕ 지 리지 동녕로조에 표시된 地名 역시 영역적 의미보다는 民戶의 출신지로 이해하 였다.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29 부를) 東寧路摠管府로 승격하고 錄事司를 두었다. 靜州ㆍ義州ㆍ麟州ㆍ威遠鎮 을 나누어 婆裟府에 예속시켰다. 本路의 領司는 하나이다. 남은 성은 湮廢하여 司를 두지 않았고, 지금은 옛 이름이 그대로 있다.69) 위의 사료는 ꡔ元史ꡕ 지리지 東寧路의 연혁이다. 이에 따르면, 1269년(원 종 10, 세조 지원 6) 이연령ㆍ최탄ㆍ현원렬(현효철) 등이 서경의 府州縣鎭 60城을 거느리고 귀부하였다고 한다. 이는 정주별장 강원좌가 입수하여 고 려 조정에 보인 쿠빌라이의 조서와 같은 내용으로, 이 조서가 최탄ㆍ이연령 등의 귀부를 승인하는 결정을 전한 것이었음이 재차 확인된다. 그리고 이듬 해인 1270년(원종 11, 세조 지원 7), 쿠빌라이는 서경을 동녕부로 고쳤으며, 1275년(충렬왕 원년, 세조 지원 12) 東寧路摠管府로 승격시키고 錄事司를 두었다.70) 이러한 내용을 통해 동녕부의 편제가 최탄 등 반란 주모세력의 귀부와 쿠빌라이의 승인(1269) 동녕부 설치(1270) 동녕로총관부 승격 ㆍ녹사사 설치(1275) 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있음이 확인할 수 있다. 동녕로조에는 연혁에 이어 그 예하 관부 및 부속 지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동녕로총관부는 녹사사와 都護府, 定遠府로 편제되어 있었다. 몽골의 지방행정제도에서 路는 광역구획으로서,71) 그 중심에 총관부를 두 는 한편, 治所로서 녹사사가 두어져 민간행정을 담당하였다.72) 따라서 몽 69) ꡔ元史ꡕ 권59, 지11, 지리2, 遼陽等處行中書省, 東寧路 연혁. 東寧路 : 本高句 驪平壤城 亦曰長安城 元至元六年 李延齡崔垣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 歸 八年 改西京爲東寧府 十三年 升東寧路總管府 設錄事司 割靜州義州麟州威 遠鎮隸婆娑府 本路領司一 餘城堙廢 不設司存 今姑存舊名 70) ꡔ元史ꡕ 지리지 동녕로 연혁에 따르면, 지원 6년(1269) 이연령ㆍ최탄ㆍ현원렬 (현효철) 등의 귀부는 같은 내용의 ꡔ高麗史ꡕ 세가 연대(원종 10년 12월, 1269) 와 일치하지만, 동녕부가 설치된 시기가 지원 8년(1271)으로 기재되어 ꡔ高麗史ꡕ 세가의 연대(원종 11년 2월, 1270)와 ꡔ元史ꡕ 본기의 연대(세조 지원 7년 정월, 1270)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ꡔ元史ꡕ 지리지의 연대가 오기인 것으로 판단된 다. 또한 동녕로총관부로의 승격에 관한 ꡔ元史ꡕ 지리지의 연대(세조 지원 13년, 1276) 역시 같은 책 본기의 해당 연대(세조 지원 12년 12월, 1275)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역시 ꡔ元史ꡕ 지리지의 오기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71) 오타기 마쓰오(愛宕松南), 윤은숙ㆍ임대희 옮김, ꡔ중국의 역사 대원제국ꡕ, 혜 안, 2013, 161~163쪽.
30 지역과 역사 39호 골은 路城의 치소인 녹사사를 동녕로총관부의 전신인 동녕부의 소재지, 즉 서경에 설치하면서73) 직할하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靜州ㆍ義州ㆍ麟 州ㆍ威遠鎭을 婆裟府에 예속시키면서,74) 북계의 행정ㆍ교통상의 거점을 모두 직할하였다. D-① 都護府 : 唐 말부터 땅이 고려에 편입되어 府州縣鎭 60여 城을 두고 이를 都護府로 삼았다. 비록 당의 옛 이름을 그대로 따랐지만, 도호부의 실질은 없다. 지원 6년(1269) 이연령 등이 그 땅으로써 와 귀부하였다. 후에 성의 치 소가 廢毀하여 겨우 그 이름만 남았으므로 동녕로에 속하게 하였다.75) D-② 龜州는 본래 고구려의 萬年郡이다. (고종) 18년에 몽골병이 와서 침략하자, 병마사 朴犀가 힘을 다해 그들을 방어하였다. 힘에 굴하였으나 항복 하지 않았으니, 그 공으로 定遠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뒤에 도호부로 하였다 가 다시 定州牧으로 고쳤다.76) 72) ꡔ元史ꡕ 권91, 백관7 諸路總管府. 錄事司 秩正八品 凡路府所治 置一司 以掌城 中戶民之事 各路에는 총관부가 두어져 소속 州를 지휘하는 한편, 해당 路城의 행정은 녹사사가 담당하여 통할했다(愛宕松南, 위의 책, 163쪽). 73) 1284년(충렬왕 10) 4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세자가 몽골로 향하면서 서경 中和縣에 이르렀을 때 捉鷹使 郎哥歹와 東寧府 達魯花赤가 매와 말을 바쳤다 (ꡔ高麗史ꡕ 권29, 忠烈王 10년 4월 戊戌)는 것으로 볼 때, 당시 동녕부에는 다 루가치가 주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초 다루가치는 점령지의 대민 행정, 재 정, 군사와 같은 지방행정 전반에서 대칸의 지배력을 관철하는 존재였다(趙院, 大元제국 다루가치체제와 지방통치 ꡔ東洋史學硏究ꡕ 125, 2013, 267~271쪽). 또한 ꡔ元史ꡕ 동녕로조에 따르면, 중화현은 土山縣, 鐵和鎭과 함께 녹사사의 부 속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녹사사는 서경에 두어졌으며, 이곳에 다루가치가 파견 되어 쿠빌라이의 정책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74) 이때 靜州ㆍ義州ㆍ麟州ㆍ威遠鎭가 婆裟府에 예속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이들 주 진은 동녕로총관부의 관할에서 벗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278년(충렬 왕 4) 충렬왕이 친조 도중에 義州에 행차하자, 靜州ㆍ義州ㆍ麟州 세 개의 州 만 동녕부에 붙지 않았다 고 한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ꡔ高麗史ꡕ 권28, 忠烈王 4년 4월 己卯). 75) ꡔ元史ꡕ 권59, 지11, 지리2, 遼陽等處行中書省, 東寧路 都護府. 自唐之季 地入 高麗 置府州縣鎮六十餘城 此爲都護府 雖仍唐舊名 而無都護府之實 至元六年 李延齡等以其地來歸 後城治廢毀 僅存其名 屬東寧路 76) ꡔ高麗史ꡕ 권12, 지리3, 北界 龜州. 龜州本高麗萬年郡 至十八年 蒙兵來侵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31 사료 D-①의 도호부는 安北大都護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77) 안 북대도호부는 1256년(고종 43)에 창린도로 입보한 후 어느 시기에 출륙하 였는데,78) 아마도 여ㆍ몽 강화가 성립된 후 다른 주진과 같이 출륙하였으 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여, 출륙 이후 북계의 거점 기능을 상실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같은 府의 격을 가졌던 정원부는 사정이 달랐다. 정원부에는 郭州, 撫州, 黃州 등 총 43개의 州ㆍ縣ㆍ鎭의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79) 사료 D②를 통해 정원부가 定遠大都護府 즉, 龜州를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다.80) 사료 D-②에 따르면, 구주는 고종 18년(1231) 살리타이의 1차 침공 시, 분전한 박서의 공으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승격 시기는 박서가 몽골군의 방어에 성공한 직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 냐하면 살리타이의 1차 침공 시, 大集成이 지휘하던 고려군이 安北城에서 대패하자 고려는 황급히 몽골과의 화친을 추진하였는데, 이때 내륙 침공로 에 위치했던 慈州와 구주 모두 함락되지 않고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다.81) 하지만 자주와 구주는 몽골과의 화친이 성사된 후에도 항복하지 않았고, 자 주에서 항복을 거부하였던 최춘명은 항명의 죄로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 77) 78) 79) 80) 81) 兵馬使朴犀 盡力禦之 力屈猶不降 以功陞爲定遠大都護府 後爲都護府 又改定州 牧 箭內亙, 앞의 책, 1913, 344~345쪽. 森平雅彦, 앞의 논문, 2004, 85쪽. 주 15) 참조. ꡔ元史ꡕ 권59, 지11, 지리2, 遼陽等處行中書省, 東寧路 定遠府. 郭州, 撫州, 黃 州[領安嶽, 三和, 龍岡, 鹹從, 江西五縣, 長命一鎮], 靈州, 慈州, 嘉州, 順州, 殷州, 宿州, 德州[領江東, 永清, 通海, 順化四縣, 寧遠, 柔遠, 安戎三鎮], 昌州, 鐵州[領定戎一鎮], 泰州, 价州, 朔州, 宣州[領寧朔, 席島二鎮], 成州[領樹德一 鎮], 熙州, 孟州[領三登一縣, 椒島, 椴島, 寧德三鎮], 延州[領陽岩一鎮], 雲州 한편, 이들 지역은 모두 북계와 서해도의 지명으로, 최탄 등이 귀부한 이후 추가 로 영토가 편입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실제로 동녕로총관부가 관할하던 전체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김구진, 앞의 논문, 1986, 477쪽. 오기승, 高麗末 東寧府의 形態 變遷과 高麗 流移民 ꡔ역사민속학ꡕ 46, 2014, 98~100쪽). 箭內亙, 앞의 책, 1913, 345~346쪽. 윤용혁, 앞의 책, 1991, 44~45쪽.
32 지역과 역사 39호 였다.82) 따라서 박서가 분전한 당시에 그 공을 인정받아 구주가 정원대도 호부로 승격되었을 가능성은 적다. 짐작건대, 고종 말~원종 초 무렵 북계 지역에 대한 고려의 통제력이 점차 회복되는 과정에서 지난 공을 인정받아 승격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북계의 거점 기능이 영주(안북대도 호부)에서 구주(정원대도호부)로 이동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동녕부가 동녕로총관부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서경 동녕부 동녕로총관부ㆍ녹사사, 영주(안북대도호부) 도호부, 구주(정원대도호부) 정원부 로의 개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동 녕로총관부는 북계의 기존 지역거점 단위였던 서경과 안북대도호부 영주, 정원대도호부 구주의 토대 위에서 편제된 것이다.83) 서경은 북계의 핵심지구로서, 동녕부 설치와 승격의 개편 과정에서 그 중 심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안북대도호부는 전쟁의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면서, 그 거점적 지위가 구주로 옮겨가게 되었으나 여전히 그 명맥이 남아 동녕부의 한 축을 이루었다. 반면, 구주는 정원부로 개편되면 서 서경과 함께 동녕부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따라서 동녕부의 편제 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몽골 은 동녕부를 동녕로총관부로 승격시키면서, 서경에 녹사사를 설치하고 靜州 ㆍ義州ㆍ麟州ㆍ威遠鎭을 파사부에 예속시켜 직할하였다. 이는 북계의 행 정ㆍ교통상의 핵심지구를 직접 관리하고자 한 의도로 풀이된다. 그리고 동 녕로총관부 휘하에 도호부와 정원부를 편성하는 동시에, 정원부에 郭州, 撫 州, 黃州 등 43개의 州ㆍ縣ㆍ鎭을 배속시켰다. 이러한 편제 과정이 기존 고려 북계의 거점 단위인 서경과 안북대도호부(영주), 정원대도호부(구주) 위에서 구현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편제상의 변화는 최탄 등 토착세력이 중심이 되었던 동녕부 82) ꡔ高麗史ꡕ 권103, 열전16, 崔椿命傳. 윤용혁, 위의 책, 50쪽. 83) 箭內亙과 김구진은 동녕로총관부가 총 3개의 府(동녕부ㆍ도호부ㆍ정원부)로 구성되었으며, 동녕로에 소속된 府ㆍ州ㆍ縣ㆍ鎭(3府, 21州, 12縣, 13鎭)을 총 49개 城으로 보았다(箭內亙, 앞의 책, 1913. 김구진, 앞의 논문, 1986, 474~ 475쪽의 표 <東寧路의 府ㆍ州ㆍ縣ㆍ鎭> 참조).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33 의 운영방식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최탄의 직위 변화, 즉 총관에서 천호로의 강등이 일어난 배경이 바로 1275년(충렬왕 1) 동녕로총관부의 승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최탄 등 토 착세력이 동녕부 내의 권력구조 속에서 주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몽골이 동녕부를 편제하는 과정에서 서경ㆍ의주ㆍ정주ㆍ인주와 같은 핵심지구는 직할하는 한편, 그 외곽의 주진은 일괄적으로 정원부의 관 할하에 배속함으로써 二元的으로 지역을 편제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 목이다. 물론 동녕부가 설치된 이후에도 최탄 등은 홍복원의 예와 같이 고 려 관인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홍 복원과는 달리 북계 지역에 대한 대표성 획득에 실패하여84) 끝내 고려와 동일한 격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85) 북계 토착세력에 머물렀던 것이다. 따라서 최탄 등은 동녕부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강등되는 과정에서 구주 에 대한 토착적 위상을 바탕으로 그 토대 위에 편제된 정원부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동녕부가 동녕로총관부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몽골이 직할하는 지역과 최탄 등 토착세력이 주축이 된 지역으로 의 구분이 발생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84) 홍복원과 최탄 등은 모두 북계 토착세력이었으며, 여ㆍ몽 관계의 부침 속에서 북계 지역에서 반란과 투몽을 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몽골은 홍복원이 몽골 내지로 귀순하자 이후 귀부하는 고려인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였고, 홍씨 일가는 요양의 대표적인 고려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장동익, 몽고에 투항한 홍복원ㆍ다구 부자 ꡔ역사비평ꡕ 48, 1999). 이는 홍복원이 몽골로부터 북계민 들을 규합하여 협력한 공로, 즉 북계 지역에 대한 대표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 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최탄 등의 위상 강등은 거병 초기 북계민들 의 민심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고 판단된다. 85) 이정신, 앞의 논문, 2004, 203~207쪽.
34 지역과역사 39 호 맺음말 이상으로몽골의고려북계분리과정에서보이는고려ㆍ몽골간의상호인식과북계지역의동향, 그리고고려북계분리정책의결과로성립한동녕부의추이와편제상의특징에관하여살펴보았다. 1270년 ( 원종 11) 동녕부설치는원종대전ㆍ후반기를가르는중요한정치적사건이었다. 강화성립이후, 고려의정치상황은몽골과의대외관계가대내정치에상수로작용하며큰폭으로요동치게되었다. 여전히대몽강경파가고려내실권을장악하고있었을뿐만아니라새롭게즉위한몽골의대칸쿠빌라이가그의팽창적대외정책에고려를활용하고자하였던의도사이에서자연히고려내정세는불안정하게운영되었고, 1269년 ( 원종 10) 권신임연에의해원종이폐위되면서균형이무너지게되었다. 임연의원종폐위사건은이후최탄ㆍ한신등북계토착세력의거병에명분을제공하였고, 나아가몽골이고려북계를분리하는정책을결정하는데결정적인계기가되었다. 그과정에서고려북계는최탄ㆍ한신등의수중에들게되었고, 이들이몽골에귀부하므로써몽골역시고려북계분리정책을완수하여동녕부를설치하기에이르렀다. 하지만고려북계가분리되는과정에서보이는북계민들의민심은전쟁재발에대한공포심이강하게작용하면서도고려로부터의분리ㆍ독립을꾀했던최탄등의의도와는다르게조성되어있었다. 최탄등주모세력은원종복위와임연제거라는명분에의지하여, 북계민들을동참시키는것에는성공했지만그들을반고려정서로결집시키는것에는실패함으로써결국몽골에의탁하여안위를도모할수밖에없었다. 이러한명분의한계는몽골에게도있었다. 몽골은자신들의대외정책에고려를동원하기위해대몽강경파의축출이필요했고, 그과정에서고려북계분리정책을구상하였다. 하지만명분없이고려의영토를침탈할수없었던것은그들이고려의이반과재무장을두려워하고있었기때문이며, 결국애초고려와의강화합의를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東寧府의 편제 35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고려 북계를 분리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따라서 최탄ㆍ한신 등의 귀부를 고려 관인의 자격으로 승인할 뿐만 아니라 동녕부 가 설치된 후에도 그들의 토착적 지위를 유지시킴으로써, 고려 북계 분리와 동녕부 설치에 대한 고려의 반발을 피할 수 있었다. 최탄ㆍ한신 등 북계 토착세력은 동녕부가 설치된 직후에는 몽골의 정책 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총관ㆍ천호로 제수되어 실제 동녕부의 실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1275년(충렬왕 1) 동녕부가 동녕로총관부로 승격 되면서 그 지위가 강등되었다. 이는 그들이 자력으로 북계민들을 반고려정 서로 결집하지 못했다는 한계에서 기인한 것으로, 몽골이 동녕부를 동녕로 총관부로 승격하면서 서경에 녹사사를 설치하고, 의주ㆍ정주ㆍ인주를 파사 부에 예속시켜 직할지로 삼자 점차 주변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275년(충렬왕 1) 동녕부가 로총관부로 승격되면서, 동녕부는 녹사사ㆍ 도호부ㆍ정원부의 체제로 편제되었다. 로총관부의 민간행정을 담당하는 몽 골 관부인 녹사사는 기존 동녕부의 소재지인 서경에 두어져 다루가치가 파 견되는 등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호부는 안북대 도호부 영주, 그리고 정원부는 정원대도호부 구주가 轉化된 것이었다. 즉, 동녕부는 서경ㆍ안북대도호부 영주ㆍ정원대도호부 구주라는 기존 북계의 지역 거점단위 위에서 편제되었던 것이다. 한편, 동녕부의 편제과정에서 중심지(직할지)와 그 외 지역으로의 구분 이 발생하여 이원적 지역 지배가 관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녕부가 기존 북계의 행정체계 위에 관철되었다는 점과 결부하여 보았을 때 몽골이 서경ㆍ의주 등지를 직할하는 과정에서 강등된 최탄 등의 북계 토착세력이 그들의 재지적 기반인 구주[정원부]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을 가능성 이 높다. 몽골은 그들의 정책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동녕부의 개편을 단행하 였을 것이다. 동녕부의 편제가 이원적 지역 지배로 구현되었다는 점은 추후 몽골의 대외 정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되 며, 이에 대해서는 후고를 기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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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지역과역사 39 호 Abstract Separation of Koryeo Bukgye( 高麗北界 ) and Formation of DongNyeongBu( 東寧府 ) Kang, Jae-Koo The foundation of DongNyoungBu was a remarkable political point that separated the first half and the second half of King Wonjong in 1270. The impeachment of King Wonjong by Im Yeon provided Choi TanㆍHan Sin and Bukgye local politicians with a reason to arouse the military. It was also a turning point for Mongol Yuan Empire to separate Koryeo Bukgye. Koryeo Bukgye fell into the hands of Choi TanㆍHan Sin in the process and Mongol Yuan Empire completed the separation and established DongNyoungBu as Choi TanㆍHan Sin defected to Mongol Yuan Empire. As Dong-Nyoung-Bu got promoted to Lo-ChongKwanBu, DongNyoungBu got organized into NokSaSaㆍDoHoBuㆍJungWonBu. NokSaSa, which dealt with public administration from Dong-Nyoung Lo-ChongKwanBu, which was based in West capital. Darughachi was appointed and NokSaSa played a central role. DoHoBu was in AnBuk DoHoBu Young-Ju and JungWonBu was in JungWon DoHoBu Ku-Ju. In other words, DongNyoungBu was based in the main Bukgye area of West capitalㆍanbuk DoHoBu Young-JuㆍJungWon DoHoBu Ku-Ju. Mongol Yuan Empire was directly in charge of West capitalㆍ Eui-Ju, the center of public administration and transportation as DongNyoungBu was embedded in the existing Bukgye administration system. Whereas, the
몽골의高麗北界분리시도와東寧府의편제 39 Bukgye indigenous force, including the demoted Choi Tan, likely played a certain role in Ku-Ju[JungWonBu], their indigenous foundation. Keywords : DongNyoungBu, DongNyoung Lo-ChongKwanBu, BuKye, Choi Tan, Separation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41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41~74쪽고려 주재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41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86)고 명 수** 머리말 Ⅰ. 다루가치를 둘러싼 외교갈등과 설치경위 Ⅱ. 다루가치의 존재양태 1. 위상 2. 역할 Ⅲ. 쿠빌라이의 다루가치 폐지와 그 요인 맺음말 국문초록 다루가치는 몽골이 건국 초기부터 점령지ㆍ복속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각 지에 파견한 감독관이다. 몽골은 林衍의 원종폐위 사건을 계기로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여 원종 11년(1270) 고려에 다루가치를 설치했다. 원종대 다루가치에게는 고려 지배층보다 높은 위상ㆍ권한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충렬왕이 駙馬 지위를 획득한 후 양 자의 우열관계가 역전되어 다루가치를 능동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몽골 은 고려의 정치적 독자성을 보전하는 本俗主義 방침에 따라 다루가치에게 民政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루가치는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반란사건 처결, 치안유지, 무기관리와 같은 管軍 역할만을 수행했다. 충렬왕 4년(1278) 다루가치 폐지 는 충렬왕이 몽골조정과 교섭하여 이뤄낸 외교적 성취가 아니라 그 존속이 불필요하다 고 판단한 쿠빌라이의 처분 따른 것이다. 이는 당시 그가 고려의 복속에 대한 몽골지배 층의 의심ㆍ불신이 해소되었고, 충렬왕의 지위가 다루가치를 직접 통제할 만큼 신장되 * 이 논문은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B5A07038704). **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사(kohms@korea.ac.kr).
42 지역과 역사 39호 었으며, 駙馬 領地에 대한 다루가치 파견이 몽골의 관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제어 : 다루가치, 몽골, 고려, 충렬왕, 쿠빌라이 머리말 13세기 초 역사의 무대에 홀연히 등장하여 유라시아 대부분을 정복한 몽 골은 점령지 곳곳에 행정관을 파견하고, 별도로 다루가치(達魯花赤)라고 호칭되는 監官을 설치하여 그들의 통치를 감시ㆍ감독케 했다. 이는 소수의 몽골지배층이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속민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고안 한 제도로서 그들의 정복지 통치 방식의 특성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요소라 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찍부터 여러 학자들이 다루가치에 주목하여 활 발하게 연구를 진행했다.1) 몽골은 정복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 뿐 아니라 자발적 혹은 부득이하게 복속한 나라에게도 토착군주의 통치권과 고유한 행정체제를 온존시키는 한 편, 다루가치를 파견해 국정을 감독케 했는데, 그 대상에 고려도 포함되었 1) 다루가치에 관한 주요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箭內亘, 元代社會の三階級 ꡔ蒙 古史硏究ꡕ, 刀江書院, 1930. 丹羽友三郞, 達魯花赤に關する一考察: とくにそ の任務と設置の理由とについて ꡔ三重法經ꡕ 5, 1956. 原山仁子, 元朝の達魯花 赤について ꡔ史窗ꡕ 29, 1971. 札奇斯欽, 說元史中的達魯花赤 ꡔ蒙古史論總 (上)ꡕ, 學海出版社, 1980. 潘修人, 元代達魯花赤用人述論 ꡔ內蒙古民族師院 學報ꡕ(哲社版) 1992-4 ; 元代達魯花赤的職掌及爲政述論 ꡔ內蒙古社會科學ꡕ 1993-6. 趙秉崑, 達魯花赤考述 ꡔ北方文物ꡕ 1995-4. 趙阮, 蒙元時期達魯花 赤制度硏究, 北京大學博士論文, 2012. Elizabeth Endicott-West, Mongolian Rule in China: Local Administration in the Yuan Dynas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43 다. 13세기 초 몽골은 고려와 최초 화친을 맺은 후 고유한 세계관에 입각하 여 고려를 완전한 복속국 으로 규정하고, 줄곧 다루가치를 설치하려 기도했 다. 이에 反蒙정책을 고수하는 고려의 무신정권과 그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 한 외교적 공방을 벌였다. 그리고 1270년 무신정권 붕괴 후 마침내 다루가 치를 파견하여 8년간 고려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몽골조정의 통치력을 전달 케 했다. 그런 점에서 다루가치 설치에 대한 양국의 입장ㆍ정책과 실제 파 견된 다루가치의 위상ㆍ역할은 양국관계의 실제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고려 주재 다루가치에 관한 연구 성과물은 많지 않다. 일찍이 池內宏이 그 관원의 구성ㆍ교체ㆍ활동을 검토한 글이 있지 만, 매우 소략하고, 논의의 수준도 피상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후 주채 혁이 1차 전쟁 직후 몽골의 다루가치 설치와 고려의 대응을 양국의 군사전 략 측면에서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논의의 범위가 특정 시기ㆍ주 제에 고정되어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보인다. 최근 김보광이 다루가치의 置廢과정, 존재양상, 고려의 반응에 주목하여 일 련의 성과물을 내놓았는데, 그동안 논의되지 못한 여러 분야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다분히 고려 측 관점에서 다루가치 설치와 그 활동에 대한 반응에 초점이 맞추어져, 몽골의 입장이 충분히 반 영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또한 여전히 검토되지 않은 영역이 존재하고, 동의하기 어려운 견해도 눈에 띤다.2) 다루가치는 몽골이 종주국 위치에서 양국의 종속관계를 확정ㆍ유지하기 위해 파견한 관원이다. 그러므로 양국관계의 형태ㆍ성격을 균형적으로 파 악하기 위해서는 몽골의 입장에서 그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 2) 池內宏, 高麗に駐在した元の達魯花赤について ꡔ東洋學報ꡕ 18-2, 1929 ; ꡔ満 鮮史研究(中世3)ꡕ, 吉川弘文館, 1963. 주채혁, 撒禮塔 2~3차 침공기의 高麗 內地 達魯花赤 置廢 문제 ꡔ몽ㆍ려전쟁기의 살리타이와 홍복원ꡕ, 혜안, 2009. 김보광, 고려-몽골 관계의 전개와 다루가치의 置廢過程 ꡔ역사와 담론ꡕ 76, 2015 ; 고려 내 다루가치의 존재 양상과 영향: 다루가치를 통한 몽골 지배방식 의 경험 ꡔ역사와 현실ꡕ 99, 2016.
44 지역과 역사 39호 고에서는 몽골 측 자료를 적극 활용하고, 필요에 따라 동시기 安南에 설치 된 다루가치와 비교하여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치폐경위와 존재양태를 총체 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13세기 몽골의 고려정책의 지향ㆍ특성 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Ⅰ. 다루가치를 둘러싼 외교갈등과 설치경위 高宗 5년(1218) 12월 江東城에 입보해 있던 거란족을 토벌하기 위해 카 친(哈眞)ㆍ자라(札剌)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고려에 입경했다. 다음해(1219) 정월 그들은 고려군과 함께 강동성을 협공ㆍ함락하고 5만 거란족의 투항을 받아냈다. 그 직후 양국 사이에 처음으로 화친이 수립되었다. 몽골은 온 세 상을 지배ㆍ복속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전통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이를 고 려의 완전한 복속 으로 간주하고, 이후 철저하게 종주국의 입장에서 고려국 왕의 親朝와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다.3) 주지하듯이 몽골은 정복지ㆍ복속국을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그곳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내정을 감독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강동성전투 종결 후 그들은 복속국 고려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당 시 몽골의 다루가치 설치 정황에 비추어 살필 수 있다. 다루가치는 건국 직 후 몽골이 金을 공략할 때 처음 등장하여 점령지 곳곳에 설치되었다.4) 몽골 과 고려의 최초 화친 시기는 다루가치 등장 초창기에 해당하는데, 그때까지 몽골의 막남ㆍ화북 점령지에 설치된 다루가치 현황은 아래 <표 1>과 같다.5) 3) 13세기 초 수립된 양국의 최초 외교관계에 관해 고명수, 몽골-고려 형제맹약 재 검토 ꡔ역사학보ꡕ 225, 2015 참조. 4) ꡔ집사ꡕ에 1210년 칭기스칸이 西夏를 점령하고 그곳에 監官(sihneh)과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있다(라시드 앗 딘, 김호동 역주, ꡔ부족지ꡕ, 사계절, 2002, 234~235쪽). 趙秉崑은 그 감관을 몽골이 정복지에 파견한 최초 다루가치로 보 았다(趙秉崑, 앞의 논문, 1995, 64쪽). 5) 이 <표>는 趙阮, 앞의 논문, 2012, 31~32쪽 <表一>: 史料中所見成吉思汗時期的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45 <표 1> 1219년 이전 막남ㆍ화북의 다루가치 인명 종족 시기 唵木海 몽골 1214년 札八兒火者 서역 1215년 石抹也先 거란 耶律天佑 거란 치소 직위 출처 隨路炮手達魯花赤 ꡔ元史ꡕ 卷122 唵木海 中都 黃河以北鐵門以南 天下都達魯花赤 ꡔ元史ꡕ 권120 札八兒火者 1215년 北京 北京達魯花赤 ꡔ元史ꡕ 권150 石抹也先 1216년 滄州ㆍ棣州 滄ㆍ棣州達魯花赤 ꡔ元史ꡕ 권193 忠義1 양국의 최초 화친 이전 막남ㆍ화북에 파견된 다루가치는 4인으로 모두 몽골이 금을 공략할 때 점령한 군사 요충지에 설치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처음 등장한 隨路炮手達魯花赤은 공성전을 수행하는 포병의 지휘관을 의미 하고, 여타 3인은 몽골군이 금의 中都(北京), 北京(內蒙古 寧城), 滄州(河 北省 滄州), 棣州(山東省 惠民)를 점거하고 파견한 鎭守官으로 군대를 통 솔하면서 점령지를 진무하고 반란행위를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처럼 몽골 건국 초창기 등장한 다루가치는 오로지 정복지에 설치되었고 그 임무 도 군사적 측면에 한정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몽골에게 직접 투항ㆍ복속하 거나, 고려와 같이 그들이 복속국 으로 설정한 나라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軍政ㆍ民政을 감독케 하는 제도는 미처 마련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몽골의 인식과 달리 고려는 양국의 화친을 중국적 세계질서 이념에 바탕 을 둔 事大관계 정도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이 복속 의 징표로 요구하는 국왕친조와 공물납부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양국 간 갈등이 심화되었고, 마침내 고종 12년(1225) 정월 공물을 수취해 돌아가던 몽골사 신 著古與가 국경 부근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외교관계가 단절되기 에 이르렀다. 고종 18년(1231) 8월 사르타이(撒禮塔)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그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사력을 다해 저 항했으나 그들의 막강한 공세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모든 요구사항을 이행 達魯花赤을 참조하여 작성했다.
46 지역과 역사 39호 한다고 약속하면서 화친을 청했다. 몽골이 이를 수락하여 다음해(1232) 정 월 군대를 돌이키고, 開京ㆍ西京 및 북계 각 처에 처음으로 다루가치 72인 을 설치했다. 몽골이 최초 화친 때와 달리 고려에 다루가치를 설치한 것은 당시 확산되 었던 다루가치 역할 변화 추세와 관련이 있다. 전술했듯이 건국 초기 몽골 은 오로지 막남ㆍ화북 점령지에 군사적 임무만을 담당하는 다루가치를 파 견했다. 이후 그들은 1219년부터 약 7년간 중앙아시아 정벌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광대한 지역을 영토로 편입했다. 그 결과 행정질서가 파괴된 정복 지에서 진수 뿐 아니라 실제적인 통치 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이에 칭기스 칸은 중앙아시아 및 화북 점령지에 처음으로 민정 을 담당하는 다루가치를 파견했다.6) 1229년 즉위한 우구데이는 오랜 전란으로 말미암아 무정부상태에 놓인 화북 점령지를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행정체제를 수립하고, 지방관청 곳곳에 민정 다루가치를 설치했다.7) 1234년 몽골을 견문한 南宋 使臣 徐霆이 사행기 ꡔ黑韃事略ꡕ에서 管民則曰達魯花赤 이라 기재한 것도 그러한 경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에 조응하여 그 시기 처음으로 점령지 뿐 아니라 복속국 에도 다루가치를 파견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추측된 다. 1차 전쟁 종결 후 고려에 다루가치가 설치된 것은 이 같은 정황과 관련 이 있다. ꡔ高麗史ꡕ 世家 에 그 해(1232) 2월 淮安公 王侹이 사행을 마치고 귀국 할 때 몽골사신 都旦과 함께 왔다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서 도단의 직책이 단지 사신 이라 표기되어 있지만, 고려의 國事를 都統하는 임무를 띠고 이 곳에 왔다 라고 자처한 그의 발언에 비춰볼 때 終戰 직후 개경에 파견된 다 6) 유원수 역주, ꡔ몽골비사ꡕ, 사계절, 2004, 274~275쪽. 7) 原山仁子는 본래 다루가치의 임무가 軍政ㆍ民政ㆍ財政 방면에 걸쳐 있었는데, 우구데이 시기 화북 각지에 十路徵收課稅使와 徵收課稅所가 설치되고, 探馬赤軍 이 주둔함으로써 재정ㆍ군정 권한이 상실되고 민정 역할만 남게 되었으며, 금 멸 망 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州縣制度에 조응하여 민정 다루가치가 곳곳에 파견되었 다고 하였다(原山仁子, 앞의 논문, 1971, 37쪽).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47 루가치로 추정된다.8) 都旦은 본래 거란인인데 성질이 매우 간교하여 과거 에 몽골군을 강동성에 이르게 하여 자국의 군대를 전멸시킨 자였다 라는 관 련기사도 승전에 공헌한 현지인을 다루가치에 임명하여 점령지를 관할케 하 는 몽골의 보편적 정책과 상통한다.9) 그는 도성에서 정복자와 진배없는 오 만한 태도로 국왕과 함께 대궐 안에 거처하겠다고 고집하고, 연회에서 국왕 과 나란히 앉으려 하며, 대접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담당관원을 몽둥이로 때 려 살해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했다. 다루가치가 대체로 부임지 행정관보 다 높은 위치에서 한층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행 동을 납득하기 어렵지 않다. 북계 각 처에 배치된 다루가치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10) 승전 후 몽골은 고려에 다루가치를 설치했을 뿐 아니라 막대한 공물과 더 불어 왕족ㆍ고관의 자녀, 장인ㆍ농민, 군사ㆍ전함까지 마련해 보내라고 요 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비록 몽골에 투항했지만 정치ㆍ군사적 자주성과 경 제기반을 크게 훼손하는 그들의 요구를 온전하게 이행할 수 없었다. 그 결 과 다루가치의 횡포와 무리한 요구를 둘러싸고 양국 간 갈등이 증폭되었다. 마침 그 해(1232) 6월 고려사신 宋得昌이 돌아와 몽골이 장차 대군을 이끌 고 침입할 것이라 보고하자, 고려는 즉시 강화도로 천도하고 다루가치를 모 두 살해하여 항전의지를 천명했다.11) 몽골은 어김없이 이를 반역 으로 규 8) ꡔ高麗史ꡕ 卷23, 高宗 19년 2월 丁丑. 그 해 9월 고려가 사르타이에게 보낸 서한 의 또 [장군께서] 다루가치가 죽은 자는 죽었어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자들을 너희가 붙잡아 가두었다 라고 하신 일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 ) 그 상국의 使臣을 잡아 가두었다는 일은 근거가 없으니 후에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문장에서도 다루가치를 使臣이라 칭했다(ꡔ東國李相國集ꡕ 卷28, 答蒙古官人書). 9) ꡔ高麗史ꡕ 卷23, 高宗 19년 3월 丙戌. 10) 동시기 고려가 몽골에 보낸 국서 중 그 변방의 여러 성에 설치된 다루가치를 대 접하는 일도 하나하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구절은 일전에 몽골로부터 북계 각 처 에 배치된 다루가치를 후하게 대접하라는 명을 받고, 이를 충실히 따르겠다고 약속했음을 나타낸다(ꡔ東國李相國集ꡕ 卷28, 國銜行答蒙古書). 11) 14세기 李齊賢은 ꡔ經世大典ꡕ의 太宗 3년(1231) 撒塔(사르타이) 등을 보내 고 려를 토벌하여 그 국왕이 항복하니 京ㆍ府ㆍ縣에 다루가치 72인을 두고 회군했 다. 4년(1232) [고려가] 다루가치를 모두 죽이고 배반하여 海島로 들어가 지켰
48 지역과 역사 39호 정하고, 그 후 수차례 단행한 무력침공의 구실로 삼았다.12) 고종 40년(1253) 11월 몽골의 5차 침공을 지휘하던 예쿠(也窟)가 고려 에 사신을 보내 군대주둔, 강화도성 해체와 더불어 다루가치 설치를 촉구했 다. 이에 고려는 즉시 답서를 보내 지금 대왕의 편지를 보고 군사 1만을 잔 류시키고, 다루가치를 설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렇 게 된다면 어떻게 후환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하고, 옛 도읍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여전히 다루가치 설치를 용인하지 않았다.13) 전쟁 시기 줄곧 화친의 최우선 조건으로 국왕친조를 요구하던 몽골은 고 종 43년(1256)부터 태도를 바꿔 태자의 입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들이 장기간 전쟁을 겪으면서 결사항전하는 고려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 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침 고려에서도 고종 45년(1258) 3월 그간 대 몽항쟁을 주도했던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 로 입지가 강화된 講和派를 중심으로 몽골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친을 맺자 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다음해(1259) 4월 태자 王倎 의 입조가 성사되었다. 몽골에 입경한 그는 陝西지역 六盤山에서 뭉케의 사 망 소식을 접하고 귀환하던 중 汴梁에서 남송정벌군을 이끌고 북상하던 皇 弟 쿠빌라이를 만나 환대를 받고, 고종 사망 후 그의 책봉을 받아 귀국하여 새 고려국왕(元宗)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양국은 오랜 전쟁을 끝내고 화친 다 기록에 대해 다루가치를 모두 죽였다는 기술은 사실과 다르고, 몽골의 고려 침입도 사르타이와 洪大宣이 고려의 공적을 은폐하고 오히려 무고하여 발생했 는데 편찬자 虞集이 이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ꡔ櫟翁稗說ꡕ 前集 1). 주채혁은 이를 이제현이 그 시대 고려의 이해와 자신의 사명 수행을 전제로 아전인수 격으로 창작한 것으로 보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혹평했다(주채혁, 앞의 논문, 2009, 51~55쪽). 12) [고종 19년 8월] 西京巡撫使 대장군 閔曦가 司綠 崔滋溫과 함께 몰래 장교들 에게 다루가치 살해를 모의하게 했다. 西京사람들이 이를 듣고, 그렇게 되면 우 리 西京은 반드시 平州와 같이 몽골군에게 전멸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반란을 일 으켰다 라는 기록은 당시 서경인들이 다루가치 살해가 곧 몽골의 보복을 초래한 다고 예견했음을 알려준다(ꡔ高麗史ꡕ 卷23, 高宗 19년 8월 己酉朔). 13) ꡔ高麗史ꡕ 卷24, 高宗 40년 11월 戊戌.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49 을 재개했다. 원종 원년(1260) 2월 쿠빌라이는 수르다이(束里大)와 康和尙을 다루가 치로 임명하여 왕전과 함께 고려에 파견했다. 이로써 30여 년 만에 다시 고 려에 다루가치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수행한 역할을 살펴보면, 오로 지 고려의 출륙을 독려하고 그 사무를 감시ㆍ감독하는 데 국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월 그들이 원종에게 쿠빌라이 대왕이 우리를 보낸 것은 섬 안에 서 음식이나 축내라는 뜻이 아니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하자, 왕이 문 무양반들과 각 領府로 하여금 개경을 왕래하게 하여 遷都 의지를 내보였다 는 기록과 6월 수르다이가 金寶鼎에게 너희 왕이 환국할 때 황제께 臣이 환국하는 즉시 松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는데, 지금 이미 몇 개 월이 지났는데 왜 태평하게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가 라고 한 발언이 이를 뒷받침한다.14) 또한 3월 수르다이가 크게 노하여 들판에 군영을 차렸다, 4월 수르다이 가 개경에 가기 위해 昇天府 북쪽 교외에 군영을 차렸다, 6월 김보정을 수 르다이의 군영으로 보내 잔치를 베풀게 했다, 7월 왕이 수르다이의 군영에 행차했다 기사는 그들이 고려 주둔군을 통솔하는 군사지휘관이었음을 알려 준다.15) 더욱이 원종 원년(1260) 7월 수르다이가 국왕에게 옛 도읍의 궁실과 민 가가 거의 다 지어졌으니 저는 西京으로 가겠습니다. 만약 永安公이 오면 마땅히 함께 돌아오고, 그렇지 않으면 즉시 귀국하겠습니다 라고 한 언설과 며칠 후 원종이 그의 둔영으로 찾아가 귀국을 만류했을 때 그가 귀국 일정 이 이미 정해졌으니 머무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한 답변은 그들이 고려의 출륙 사무를 감시ㆍ감독하는 임무를 마친 후 귀환하기로 예정된 임시관원이었음 을 추측케 한다.16) 8월 쿠빌라이가 보낸 조서의 가을까지 주둔군을 철수시 키고 이미 설치된 다루가치 보르카바르(孛魯合反兒)ㆍ바투르(拔覩魯) 일 14) ꡔ高麗史ꡕ 卷25, 元宗 원년 3월 乙未 ; 5월 庚戌. 15) ꡔ高麗史ꡕ 卷25, 元宗 원년 3월 甲申 ; 4월 庚子 ; 6월 庚戌 ; 7월 己丑. 16) ꡔ高麗史ꡕ 卷25, 元宗 원년 7월 丁亥 ; 己丑.
50 지역과 역사 39호 행에게도 모두 환국하도록 명했다 문장에도 그들의 소환이 언급되어 있 다.17) 조서 전달 직후 수르다이와 강화상은 몽골로 돌아갔다. 따라서 그들 은 몽골제국 초창기 점령지를 진무하고 반란행위를 방지하는 역할을 담당한 管軍 다루가치와 유사하다. 즉 고려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오직 출 륙사무만을 감시ㆍ감독하고, 임무완수 후 귀환이 예정된 임시적 군사지휘 관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애당초 쿠빌라이가 고려에 장기 주재 민정 다루가치를 설치하려 의도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당시 쿠빌라이는 카안위 계승분쟁을 앞두고 여러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우선 개평에서 측근들만 소집한 채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한 그는 監國 신분으로 수도 카라코룸에서 카안 직무를 대행하고, 뭉케의 장례를 주 관하며, 대다수 황금씨족의 지지를 받는 아릭부케에 비해 정통성에서 열세 를 면치 못했다. 또한 東北諸王, 五部族, 일부 漢人世侯 군대를 제외한 몽 골주력군 전체가 아릭부케 수중에 있었으므로 군사력의 우세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30년 항전을 통해 막강한 군사력이 입증된 고려의 태자가 찾 아와 예를 표하자, 그는 이를 고려의 자발적 복속 으로 윤색하여 자신의 정 통성을 만방에 과시하고, 한편으로 고려를 내전에 대비한 배후세력으로 삼 으려 했다. 이에 따라 종전의 압박정책을 지양하고 고려를 회유하여 충직한 藩國으로 만드는 전략을 채택했다. 일찍이 고려가 기설된 다루가치를 일소 하여 저항의지를 표명하고, 그 후에도 몽골의 설치 요구를 한사코 거부했으 므로, 다루가치가 부임할 경우 그들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되었다. 때문에 불필요한 갈등의 소지를 없애고,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루가치를 두 17) ꡔ高麗史ꡕ 卷25, 元宗 원년 8월 壬子. 이 문장에서 보르카바르(孛魯合反兒)ㆍ 바투르(拔覩魯)는 정황상 수르다이ㆍ강화상을 가리킨다고 추측된다. ꡔ高麗史ꡕ 世家 元宗원년 4월조에 수르다이와 波透가 원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는 기사 가 있는데, 여기에서 강화상으로 여겨지는 波透(바투)는 위 문장의 拔覩魯(바투 르)와 상통한다. 한편 이제현이 찬술한 忠憲王世家 의 본국에서 高王(고종) 의 사망소식을 고하자, 이에 [황제께서] 忽伯反에게 명하여 그를 호위하여 귀국 케 했다 문장에서 忽伯反은 수르다이(孛魯合反兒)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ꡔ益 齋亂藁ꡕ 卷9, 有元贈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 丞相上柱國忠憲王世家).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51 지 않은 것이다. 쿠빌라이는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아릭부케를 효과적으로 공략하여 至元 원년(1264) 7월 그의 투항을 받아 몽골의 유일한 카안 지위를 확립했다. 그 후 선대 정권의 적극적ㆍ공세적인 대외정책을 계승하여 남송정벌과 일본초 유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고려에 대한 회유책도 강경책으로 전환되었다. 원종 8년(1267) 11월 쿠빌라이는 입조한 安慶公 王淐에게 너희나라가 진 실로 투항했다면 마땅히 군사ㆍ군량을 보내 전투를 돕고, 다루가치를 청하 고, 민호 수를 점검해 [보고해야] 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는가? 라고 질책하고,18) 다음해(1268) 3월에도 조서를 내려 다루가치 설치가 조항에 포함된 六事의 이행을 거듭 촉구했다. 이에 고려는 즉시 답서를 보내 다루 가치와 호구조사에 관한 사안은 이제 막 육지로 나와 도성을 건설하는 데 너무 바쁜 터라 공사가 끝나는 대로 마땅히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여 즉각적인 이행의 곤란함을 호소했다.19) 이처럼 내전 승리 후 쿠빌라이가 고려에 대한 정책을 강경 일변도로 전환하자 다루가치 설치를 둘러싼 양국 의 갈등이 다시금 표면화되었다. 원종 10년(1269) 6월 고려의 권신 林衍이 원종을 폐위하고 왕창을 새 국 왕으로 옹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원종과 대다수 신료들은 임연을 두 려워하여 감히 몽골에 진상을 보고하지 못했는데, 마침 입조해 있던 세자 王諶과 사건 직후 파견된 문하시중 李藏用이 쿠빌라이에게 그 전말을 진술 함으로써 몽골의 무력개입을 이끌어냈다. 결국 임연은 그들의 군사적 위협 에 굴복하여 11월 원종을 복위시켰다. 이 사건은 다루가치가 고려에 설치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12월 복 위에 대한 하례를 위해 입조한 원종은 다음해(1270) 2월 쿠빌라이에게 다 루가치와 함께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쿠빌라이는 톡토르(脫朶兒) 를 다루가치에 임명하여 원종과 함께 파견했다. 이로써 10년 만에 또다시 고려에 다루가치가 설치되었다. 원종이 종래 입장을 바꿔 먼저 다루가치 파 18) ꡔ高麗史ꡕ 卷26, 元宗 9년 2월 壬寅. 19) ꡔ高麗史ꡕ 卷26, 元宗 9년 4월 丙戌.
52 지역과 역사 39호 견을 요청한 것은 폐위ㆍ복위를 겪는 과정에서 발휘된 몽골의 막강한 위세 를 실감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王政復古를 이루려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루가치를 통해 몽골과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무 신세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몽골 역시 목전에 둔 남송ㆍ일 본정벌에서 고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반몽 무신세력을 제거하고 철저한 감시를 통해 그 발호 가능성을 근절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같은 양자의 이해 관계가 합치되어 고려에 다루가치가 설치되었다. 원종 11년(1270) 5월부 터 충렬왕 4년(1278) 9월까지 8년간 7명의 다루가치가 고려에 부임했는데 그 구체적 사항을 제시하면 아래 <표 2>와 같다.20) <표 2> 고려 주재 다루가치 인명 종족 脫朶兒 몽골 재임기간 원종11년(1270) 5월 ~ 원종12년(1271) 10월(卒) 焦天翼 한인 원종11년(1270) 5월 ~ 원종14년(1273) 8월 李益 한인 원종13년(1272) 4월 ~ 충렬왕즉위년(1274) 12월 周世昌 한인 원종14년(1273) 12월 ~ 충렬왕원년(1275) 2월(卒) 黑的 몽골 충렬왕즉위년(1274) 12월 ~ 충렬왕원년(1275) 7월 石抹天衢 거란 충렬왕원년(1275) 12월 ~ 충렬왕4년(1278) 9월 張國綱 한인? ~ 충렬왕4년(1278) 9월 직위 達魯花赤 副達魯花赤 達魯花赤 副達魯花赤 達魯花赤 副達魯花赤 達魯花赤經歷 Ⅱ. 다루가치의 존재양태 1. 위상 다루가치는 본래 부임지역 행정관보다 높은 위치에서 그의 통치를 감시 ㆍ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일찍이 도단이 지극히 오만한 자세로 온갖 횡 20) 엄밀하게 말하면, 達魯花赤經歷 張國綱은 다루가치가 아니라 그 屬官이지만, 본 논문이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全貌를 살피는 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그 범주 안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53 포를 자행하고, 수르다이가 왕전과 함께 입국했을 때 어찌 영접이 이렇게 늦은가? 지난번 于琔의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로구나 라고 불평한 사례는 모두 다루가치가 관할구역 최고위 통치자라는 그들의 공통된 인식에서 기인 한다.21) 즉위 초 쿠빌라이는 화북 농경지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중국식 州縣制度를 채택하고, 위상ㆍ권한이 한 층 강화된 다루가치를 각 행정단위 에 고루 설치하여 중앙정부의 통치력을 전달케 했다. 이에 따라 다루가치는 변함없이 부임지 행정관보다 높은 지위ㆍ권한을 발휘했다. 國朝의 官制에 서 路ㆍ府ㆍ州ㆍ縣에 모두 다루가치 1인을 두고 長吏 위에 위치시켜 그 통 치를 감독케 했다 라는 기록이 그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22) 이 같은 그들의 높은 위상은 고려 주재 다루가치에게도 동일하게 보장되 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다음 기록을 통해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충렬왕 원년] 12월 정유. 부다루가치가 개경에 들어오자 왕이 군복을 입은 채로 侍臣을 거느리고 宣義門 밖에 나가 [그를] 맞이하고 沙坂宮에 들어가 조 서를 열어보았다. 다루가치가 공관으로 돌아가자, 백관이 모두 그곳에 가서 알 현했는데, 3품 이상은 계단 위에서 揖禮를 행하고, 4품 이하는 계단 아래에서 拜禮했다.23) 위 기사는 충렬왕 원년(1275) 12월 부다루가치 石抹天衢가 부임했을 때 국왕ㆍ신료들이 그를 영접하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다. 그때 충렬왕은 직접 성문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하는 정성을 보였고, 특히 그가 공관에 들어갔 21) ꡔ高麗史ꡕ 卷25, 元宗 元年 2월 乙丑. 22) ꡔ中庵集ꡕ 卷14, 鄒平監縣布延君去思碑. ꡔ元史ꡕ 百官志 와 ꡔ元典章ꡕ의 행정 ㆍ군사기구 속관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각 행정관과 다루가치는 동일한 관품을 수여받았다. 이에 관해 丹羽友三郞은 비록 품계가 같아도 각 관서의 실제 장관 은 다루가치이고, 행정관이 차관 역할을 맡았다고 보았다(丹羽友三郞, 앞의 논 문, 1956, 30~33쪽). 趙阮도 元初 몽골의 의정 회의제도인 圓署에서 다루가치 가 掌印權을 보유함으로써 封記를 담당하는 행정관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지적 했다(趙阮, 앞의 논문, 2012, 139~143쪽). 23) ꡔ高麗史ꡕ 卷65, 志19 禮7 賓禮 迎大明無詔勅使儀.
54 지역과 역사 39호 을 때 모든 신료들이 그곳에 가서 예를 올렸다는 구절은 그에게 적어도 고 려신료들보다 높은 위상이 부여되었음을 짐작케 한다.24) 다루가치 톡토르 가 마음대로 재상 金鍊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 열병 때 모든 재추에게 군관 에게 지급할 말을 내도록 명했음을 알리는 다음 기록도 고위관원보다 우월 한 그의 위상ㆍ권한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원종 12년 2월] 이 달에 脫朶兒가 반드시 재상 집안에서 며느리를 구하려 하자, 딸을 둔 자들이 두려워하여 앞 다퉈 사위를 맞아들였다. 나라에서 재상집 두세 곳을 적어주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니, 톡토르가 자색을 보고 金鍊의 딸을 며느리로 삼으려 했다. 그 집은 이미 데릴사위를 들였는데, 그 사위가 두려워하 여 집을 나갔다. 김련이 그때 [몽골에] 입조하여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 집에 서 [그를] 기다렸다가 혼례를 치르자고 요청했으나, [톡토르는] 듣지 않았다.25) [원종 12년 5월] 이 날에 脫朶兒가 재추와 함께 교외에서 군사 5백여 명을 열병했다. 그 都領ㆍ指諭에게 말 1필을 지급하고, 군졸 열 명당 말 1필을 지급 했는데, 행군이 시작되자 군졸들이 행인의 말을 다수 빼앗았다. 톡토르가 재추 의 자제 중 종군하는 자가 있는가? 라고 묻자, [누군가]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톡토르는 이에 재추에게 명하여 각자 말을 내어 군관에게 지급하게 했다.26) 다루가치와 고려국왕이 지닌 위상의 우열관계를 명확하게 나타내는 사료 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통상 다루가치가 관할구역의 실제 통치자보 다 높은 위상을 지닌 점에 비추어 고려국왕과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동시기 安南에 파견된 다루가치에 관한 다음 기록이 주목된다. 24) 이에 관해 김보광은 揖이 대등한 품계 사이의 예법이므로 다루가치의 위상이 고 려의 3품 이상 관원과 동등하다고 보았다(김보광, 앞의 논문, 2016, 47쪽). 그 러나 揖禮와 拜禮는 상하관계, 동등관계에서 모두 적용되는 예법이다(ꡔ高麗史ꡕ 卷68, 嘉禮, 朝野通行禮儀). 위 인용문은 모든 고려신료들이 상위의 다루가치 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25)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2년 2월. 26)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2년 5월 癸亥朔.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55 至元 6년(1269) 安南이 제때 입공하지 않아 庭珍을 朝列大夫 安南國達魯花 赤으로 삼아 金符를 차고 吐蕃ㆍ大理의 諸蠻을 지나 안남에 이르게 했다. [ ] [陳光昺이] 곧이어 정진에게 말하기를, 성스러운 천자께서는 나를 가련 히 여기시나, 사신들이 오면 매우 무례하다. 너의 관직은 조열이고, 나는 왕이 다. 서로 동등하게 대하는 일이 예부터 있었는가? 라고 했다. 정진이 말하기를, 있었다. 천자가 파견한 관료는 비록 보잘 것 없어도 제후의 윗자리에 위치한다 라고 했다. 광병이 말하기를, 너는 益州를 지날 때 雲南王을 보고 절했는가 안 했는가? 라고 했다. 정진이 말하기를, 운남왕은 천자의 아들이고, 너희는 오랑 캐 작은 나라다. [천자께서] 특별히 왕호를 사용하도록 허가하셨으나 어찌 운남 왕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천자께서 명을 내려 나를 안남의 수장으로 삼 고 너의 윗자리에 위치하게 했다 라고 했다. 광병이 말하기를, 이미 대국을 칭 했는데 어찌 우리의 무소뿔과 상아를 찾는가? 라고 했다. 정진이 말하기를, 토 산품을 바치는 것은 藩臣의 직무다 라고 했다. 광병이 대응하지 못하고 더욱 부 끄럽고 분해하며 호위병으로 하여금 칼을 뽑고 둘러싸게 하여 정진을 위협했다. 정진이 차고 있던 활과 칼을 내려놓고 침실 안에 누워 말하기를, 네 마음대로 하라 라고 했다. 광병과 신하들이 모두 굴복했다. 다음해(1270) [광병이] 사신 을 보내 정진을 따라 가서 입공하게 했다. 정진이 황제를 뵙고 광병과 대화한 말을 아뢰니, 황제가 매우 기뻐하여 翰林承旨 王磐에게 명해 그것을 기록하게 했다.27) 위 인용문은 至元 6년(1269) 한인관료 張庭珍이 다루가치로서 안남에 부임했을 때 국왕 陳光昺과 대면한 상황을 묘사한 글이다.28) 여기에서 진 광병이 장정진을 포함한 몽골관원이 자신을 무례하게 대한다고 불평하자, 27) ꡔ元史ꡕ 卷167, 張庭珍, 3920쪽. 28) 위 인용문과 관련하여 ꡔ元史ꡕ 安南傳 에 至元 5년(1268) 9월 訥剌丁을 대신 하여 忽籠海牙를 達魯花赤, 張庭珍을 副達魯花赤으로 삼았다, ꡔ安南志略ꡕ 卷3, 大元奉使에 至元 5년(1268) 忽隆海牙를 安南으로 사신 보냈다 기사가 있다. 이에 대해 山本達郞은 본래 至元 5년(1268) 부다루가치에 임명된 장정진이 다 음해(1269) 홀롱해아를 대신하여 다루가치로 승진했다고 추정했다(山本達郎 編, ꡔベトナム中国関係史: 曲氏の抬頭から清仏戦争までꡕ, 山川出版社, 1975, 91쪽). 그러나 ꡔ大越史記全書ꡕ 本紀 卷5, 陳紀 紹隆 12년(1269) 12월조 元 使 籠海牙(忽籠海牙)가 와서 변경의 일을 알려주었다 기사를 긍정한다면, 그가 至元 5년(1268) 다루가치 홀롱해아와 함께 부다루가치 신분으로 안남에 파견되 어 다음해(1269) 도착했다고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56 지역과 역사 39호 그는 철저하게 종주국의 입장에서 천자가 파견한 관료는 비록 보잘 것 없어 도 제후의 윗자리에 위치한다, 천자께서 명을 내려 나를 안남의 수장으로 삼고 너의 윗자리에 위치하게 했다 라고 하여 안남국왕에 대한 자신의 우위 를 내세우면서, 무력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일관 당당한 자세를 견 지했다. 이를 통해 복속국의 다루가치에게 토착군주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 하는 몽골의 정책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해(1270) 쿠빌라이가 그 대화 내 용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뻐했다는 마지막 문장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至 元 12년(1275) 정월 진광병이 다루가치 폐지를 청하기 위해 올린 표문 중 또한 다루가치는 변경의 小國에도 설치할 수 있습니다. 신은 이미 왕으로 봉해져 한 지역의 藩屛이 되었는데, 도리어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감독케 하 니, 어찌 제후국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라는 내용도 다루가치 가 안남국왕의 상위에서 그의 통치를 감시ㆍ감독했음을 증언한다.29) 동시기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인식ㆍ태도 역시 안남의 다루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일부 고려신료들에게 공유되어 다음과 같이 다루가치 앞에서 국왕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기도 했다. [元宗 14년(1273) 8월] 왕이 일찍이 聖節을 하례하는 자리에서 다루가치가 그 속관을 거느리고 오른쪽에 섰는데, 內竪上將軍 康允紹가 다루가치에게 아부 하느라고 역시 일당을 거느리고 몽골복장을 입은 채로 곧장 들어왔다. 자신이 客使인 것처럼 왕을 보고도 절하지 않고, 왕이 절하자 한꺼번에 몽골식으로 절 했다. 왕이 노했으나 제어할 수 없었고, 담당관청에서도 감히 힐책하지 못했는 데, 金坵가 그를 극력 탄핵했다. 다루가치가 노하여, 강윤소가 먼저 머리를 깎 은 것은 상국의 예를 따른 것인데 오히려 탄핵하는가? 라고 하며 그를 위태롭게 했다. 어떤 사람이 이를 알리자, 김구는, 내가 차라리 견책을 받을지언정 어찌 그런 놈을 탄핵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30) 이와 같이 카안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고려신료 康允紹는 다루가 치 李益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몽골식 복장을 갖추고 몽골사신처럼 행동하면 29) ꡔ元史ꡕ 卷209, 安南, 4637~4638쪽. 30) ꡔ高麗史節要ꡕ 元宗 14년(1273) 8월.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57 서 원종에게 절을 올리지 않고, 왕이 절을 하자 그제야 몽골식으로 절하는 무례를 범했다. 다루가치의 지위가 국왕보다 높다는 인식ㆍ판단이 없었다 면 그가 이처럼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대해 국왕과 담당관청이 어떠한 제제도 가하지 못했다는 구절도 다루가치의 우월한 위상이 이미 고 려지배층 사이에 널리 공인되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강윤소에 대한 金坵 의 탄핵이야말로 다루가치의 견책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원종 14년(1273) 2월 이익이 左倉의 녹봉을 금지시키자 원종이 극력 항 의하여 무산시킨 일이 있다. 이는 고려국왕이 스스로 다루가치의 자의적 행 위를 제어한 사례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때 원종은 이익에게 左倉은 신료들의 봉록을 관리하는 곳으로 [몽골의] 관원이 간섭할 수 없다. 내가 장차 [이를] 황제에게 아뢰겠다 라고 하면서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31) 이 언사는 그가 다루가치의 행동을 능동적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반드시 몽골카 안의 권위에 의존해야 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다루가치에게 고려지배층을 능가하는 높은 위상이 보장되었으므 로, 그들이 부임지에서 私益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원종 14년(1273) 3월 이익이 일본사행에서 돌아온 趙良弼에게 선물을 바치자, 그가 이것은 네가 고려를 침탈해서 얻은 것이다 라고 하면서 받지 않고 가 버렸다는 기사가 그 일면을 보여준다.32) 至元 12년(1275) 정월 진광병이 몽골에 올린 표문에서 天朝가 보낸 다루가치는 臣의 나라까지 힘들게 와서 어찌 빈손으로 돌아가겠습니까? 하물며 그 수행인들도 [다루가치를] 믿고 행동하면서 小國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비록 천자께서 해와 달처럼 빛나지 만 어찌 覆盆까지 비출 수 있겠습니까? 라는 내용도 다루가치 일행의 과도 한 사익추구와 방종이 안남을 혼란케 했음을 지적하고 있다.33) 원종 15년(1274) 5월 세자 왕심이 쿠빌라이 딸 쿠툴룩켈미시(忽都魯揭 31)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4년 2월 辛亥. 32)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4년 3월 乙亥. 33) ꡔ元史ꡕ 卷209, 安南, 4637쪽.
58 지역과 역사 39호 里迷失)와 혼인하여 駙馬 지위를 획득하고, 다음 달 사망한 부왕을 계승하 여 즉위한 후 다루가치가 우위를 점했던 양자관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8월 즉위를 명하는 조서를 갖고 온 몽골사신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벌어 진 다음 논쟁에서 양자 우열관계의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어 詔使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사신이 왕이 駙馬이므로 남쪽을 향해 앉 게 하고, 사신은 동쪽을 향해, 다루가치는 서쪽을 향해 앉았다. 왕이 술잔을 돌 리자 사신은 절하고 받아 마신 후 다시 절했으나, 다루가치는 서서 마시고 절하 지 않았다. 사신은 왕은 천자의 부마다. 늙은이가 어찌 감히 이렇게 [무례]한 가? 우리들이 돌아가 아뢰면 그대가 무사하겠는가? 라고 했다. [다루가치는] [이 자리에] 공주가 없고, 또한 이는 선왕 때 예법일 뿐이오 라고 답했다.34) 이와 같이 몽골사신이 부마 충렬왕에게 절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다루가 치 이익의 무례함을 질책하자, 그는 그 자리에 공주가 없고, 원종 때부터 답 습된 관례이므로 무방하다고 항변했다. 이는 그가 충렬왕의 부마 지위를 인 정하지 않고, 복속국 군주를 대하는 종전의 예법을 고수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충렬왕은 비록 몽골황실의 부마가 되었지만, 곧바로 몽골지배층으로부 터 그 지위를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했다. 충렬왕 원년(1275) 5월 중서성 관 원이 駙馬王이 사신을 [나가서] 맞지 않은 사례가 없지 않지만 왕은 외국의 군주이니 조서가 이르면 [나가서] 맞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여 그가 서문 밖으로 나가 몽골사신을 영접했다는 기사도 이를 뒷받침한다.35) 하지만 원 종대 문제되지 않은 이익의 행동이 충렬왕 즉위 직후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 에서 종래 다루가치보다 열세했던 고려국왕의 위상이 부마 지위 획득 후 다 소 상승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36) 충렬왕과 다루가치 黑的의 긴장관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충렬왕 34)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즉위년 8월 己巳. 35) ꡔ高麗史節要ꡕ 卷19, 忠烈王 원년 5월. 36) 충렬왕 2년(1276) 정월 신료들이 신년을 하례할 때 忻都와 石抹天衢가 국왕에 게 말을 바쳤다는 기사도 고려 주둔군 총수와 다루가치가 충렬왕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고 예를 표한 것으로 이해된다(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2년 정월 丁卯).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59 즉위년(1274) 12월 이익이 본국으로 소환되자 일전에 수차례 고려에 사행 왔던 흑적이 후임자로 파견되었다. 일반적으로 고려 주재 다루가치는 임기 중 사망한 톡토르ㆍ주세창을 제외하고 모두 2~3년의 임기를 채우거나, 석 말천구ㆍ장국강 같이 임기를 연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흑적은 부임 7개월 후인 다음해(1275) 7월 돌연 귀국했다. 이에 관해 ꡔ高麗史ꡕ 世家 에 다루가치가 되어 매우 거만했으나 왕이 누차 억제하여 감히 방자하게 마 음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37) 부임 초 다루가치로서 막 강한 위상ㆍ권한을 발휘하려 했으나, 충렬왕의 견제를 받아 뜻대로 되지 않 자 귀국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원종이 다루가치를 능동적으로 제 어하지 못한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다. 10월 쿠빌라이도 조서를 보내 黑的 이 와서 말한 너희 나라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 았으니 네가 그것을 알아두어라 라고 하여 고려에 대한 흑적의 비방ㆍ참소 를 물리치고 충렬왕을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38) 이처럼 부마 지위 획득 후 충렬왕은 스스로 다루가치를 견제할 만큼 위상ㆍ권한이 신장되었다. 아울러 충렬왕 4년(1278) 9월 석말천구가 귀국할 때 충렬왕에게 契由에 칭찬의 말을 써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좋은 일은 한 바 없어 써주지 않았다 는 기록도 주목할 만하다.39) 契由는 契券과 解由의 합칭으로 전자는 일종 의 신분증, 후자는 관원이 임기를 마치고 상부에 올리는 성과ㆍ실적보고서 를 가리킨다. 당시 몽골에서는 상급관청이나 감찰관이 임기만료 관원을 조 사하고 해유를 작성해 중서성에 올리면, 중서성에서 그것을 인사고과에 반 영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석말천구가 충렬왕에게 해유 작성을 요청한 것 은 충렬왕이 다루가치의 성과ㆍ실적을 평가하여 해유를 작성하는 상급자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례 역시 다루가치보다 우월한 그의 위상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40) 37) 38) 39) 40)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원년 7월 甲午.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원년 10월 庚戌.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9월 己丑. 김보광은 위 기사를 고려국왕이 다루가치의 상급자 위상을 확보했음을 나타내는 사례로 주목했으나(김보광, 앞의 논문, 2016, 38~39쪽), 원종 때 확인되지 않
60 지역과 역사 39호 2. 역할 다루가치의 기본 임무는 몽골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아 부임지에서 충실 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충렬왕 4년(1278) 7월 국왕을 수행하여 입조한 朴 恒이 平章政事 카바(哈伯)에게 조정에서 小邦에게 내리는 명은 모두 帥府 와 다루가치에게 하달됩니다 라고 한 언사를 통해 그러한 명령전달 체계의 존재를 알 수 있다.41) 이에 따라 고려 주재 다루가치는 카안과 중서성의 명 을 받아 죄를 지은 洪澤ㆍ于珽을 처형하고, 고려가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백 성들을 돌려받는 데 협조했으며, 중서성의 지시에 따라 동계와 경상도에서 鯨魚油를 구하고, 추밀원의 명을 받아 고려인의 弓矢 소지를 금지했다.42)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임무가 오로지 본국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수동 적ㆍ소극적인 데 한정된 것은 아니다. 여러 사례에서 능동적인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역할이 반란사건을 철저하게 조사ㆍ심문 하여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 또는 석방하는 것이다. 전술했듯이 다루 가치는 임연사건 때 몽골이 고려의 반몽 무신세력을 타도하고 왕권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관원이므로, 그 주된 임무가 반몽세력의 발호를 억제 하는 데 있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톡토르 부임 직후 양국 정부에 대항하여 발발한 三別抄의 봉기는 이 같은 그들의 우려를 더욱 가중 시켰을 것이다. 8년에 걸친 다루가치 주재 시기 고려에서 여러 차례 반란모의와 무고사 건이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다루가치는 사건처리 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주 도적으로 활약했다. 원종 11년(1270) 11월 양국군대가 삼별초를 토벌할 때 潘南人 洪贊이 몽골군 지휘관 아카이(阿海)에게 金方慶이 적군과 내통 한다고 참소하자, 아카이가 김방경을 체포ㆍ수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는 위상이 충렬왕 때 부여된 점에 비춰볼 때 그의 지위 상승을 뒷받침하는 근거 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41) ꡔ高麗史節要ꡕ 卷20, 忠烈王 4년 7월. 42)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2년 4월 乙卯 ; 9월 庚午 ; 元宗 14년 11월 乙卯朔 ; 元宗 14년 12월 癸酉 ; 卷28, 忠烈王 3년 정월 甲寅.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61 가 톡토르에게 사건을 보고하자, 그는 김방경을 조사하여 무혐의를 밝히고 즉시 석방했다. 또한 다음해(1271) 1월 관노 崇謙ㆍ功德이 다루가치와 고 관들을 살해하고 삼별초에게 투항하려는 모의가 발각되자, 톡토르가 그 관 련자를 모두 체포해 처형했다. 아울러 충렬왕 2년(1276) 12월 어떤 이가 석말천구에게 齊安公 王淑과 김방경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로 들어간 다고 참소하자, 그가 연루자 43명을 체포ㆍ심문하고, 다음해(1277) 12월 韋得儒ㆍ盧進義가 다시 김방경이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자, 그를 조사하 여 거짓임을 확인하고 석방했다. 반면 다루가치가 왕에게, 홍찬 등이 한 말은 거짓이니 마땅히 옥에 가둬 야 합니다 라고 하고, 김방경을 석방했다. 왕은 즉시 다루가치에게 요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금 적을 토벌케 하고 上將軍에 임명해 잘 위로하여 보 냈다, 왕이 知樞密院事 李玄原과 上將軍 鄭子璵를 보내 톡토르에게 구원 을 청하니 톡토르가 洪茶丘 등과 함께 재추를 소집하여 숭겸 등 10여 명을 체포해 조사하자, 모두 자복했다 라는 기록과 같이 고려국왕은 반란사건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다루가치에게 요청하는 모습을 보였다.43) 이를 통 해 반란사건을 조사ㆍ심문ㆍ처결하는 우선적 권한이 다루가치에게 부여되 었음을 알 수 있다. 다루가치는 치안과 무기관리를 주관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들은 개경 에 巡馬所를 설치하여 매일 밤 순찰을 돌면서 사람들의 야간통행을 금지하 고,44) 수차례 일반인의 궁시 소지 금지령을 반포하여 군사를 제외한 고려 인의 무장을 불허했다.45) 톡토르와 이익이 부임 직후 강화도에 가서 내부 를 정탐한 사실도 그곳이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재차 활용될 여지를 불식하 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46) 이 같은 조처의 궁극적 목적은 고려를 무장해제하고 철저하게 감시하여 반몽 저항행위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 43) ꡔ高麗史ꡕ 卷104, 金方慶 ; 卷27, 元宗 12년 1월 癸巳. 44)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7월. 45)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2년 10월 甲辰 ; 卷28, 忠烈王 원년 5월 壬辰 ; 忠烈王 2년 11월 丙辰. 46) ꡔ高麗史ꡕ 卷26, 元宗 11년 9월 戊午 ; 卷27, 元宗 13년 9월 丙寅.
62 지역과 역사 39호 하는 데 있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다루가치가 반란사건 처결, 반항행위 방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 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력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침 고려에는 임연사 건 직후 다루가치와 함께 수천의 몽골군이 파견되어 개경과 지방 각지에 주 둔해 있었다. 비록 다루가치에게 실제적인 지휘권이 부여되지 않았지만 그 들은 忻都ㆍ洪茶丘를 위시한 군 수뇌부와 긴밀하게 공조하여 군사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제국 초창기 몽골이 점령지를 진무하 고 반란행위를 방지ㆍ진압하기 위해 군대와 함께 파견한 管軍 다루가치 성 격이 농후하다고 볼 수 있다. 원종 11년(1270) 2월 쿠빌라이가 고려에 보 낸 조서의 다음 내용도 그가 다루가치에게 임연사건으로 인해 혼란해진 고 려를 진무하고 안정시키는 사명을 부과했음을 나타낸다. 짐이 생각건대, 신하가 군주를 섬기는 데 죽어도 두 마음이 없어야 한다. 뜻 밖에 너희 나라의 권신이 갑자기 함부로 나라의 군주를 폐위했다. 그들은 이미 많은 군사를 동원해 장차 너희 백성들을 위태롭고 불안하게 할 것이다. [짐이] 너희 백성을 위해 특별히 군사를 보내 국왕 植을 호송해 환국케 하여 옛 도읍에 거주하게 하고, 다루가치에게 [함께] 가서 너희 나라를 진무하여 안정시키라고 명했다.47) 그렇다면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民政 역할을 어떠했을까? 동시기 몽골정 부는 화북ㆍ강남 곳곳에 管民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지방관과 함께 관할구 역의 실제 통치를 맡게 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戶口, 租稅, 勸農, 水利, 司 法 등 여러 민정 역할을 수행했다.48) 이와 비교할 때 다루가치가 고려에서 수행한 민정 역할은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원종 12년(1271) 2월 톡토르가 고려조정에 남방에 주둔하는 몽골군이 州郡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고통스럽 게 하니 사신을 보내 그들을 다독여야 한다고 건의하고, 충렬왕 4년(1278) 4월 嘉林縣 사람이 석말천구에게 국왕측근이 촌락을 모두 침탈한다고 호소 47) ꡔ元高麗紀事ꡕ 至元 7년 2월. 48) 元代 다루가치의 민정 역할에 관해 趙阮, 앞의 논문, 2012, 125~137쪽 참조.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63 하자, 그가 고려조정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지를 순시할 사람을 보내달라 고 요청한 사례가 확인될 뿐이다.49) 이는 그들이 민정 사무를 직접 처결하 지 못하고 고려조정에 건의ㆍ요청하는 데 머물러야 했음을 나타낸다. 한편 그들이 특별하게 고려내정에 간섭한 사례로서 本俗法 개정 시도를 들 수 있다. 충렬왕 26년(1300) 征東行省 平章政事 고르기스(闊里吉思)가 고려의 노비법 혁파를 시도하기 전에 이미 톡토르가 임기 중 그것을 시도한 바 있고, 흑적도 본국 소환 후 쿠빌라이에게 고려왕실의 족내혼, 관직명, 재 상의 수의 부조리를 고발했으며, 석말천구 역시 충렬왕에게 국왕이 사용하 는 각종 용어의 참월함을 지적했다. 이에 고려는 오직 노비법 혁파만을 저 지했을 뿐, 省ㆍ院ㆍ臺ㆍ部와 같은 관직명과 宣旨ㆍ朕ㆍ赦ㆍ奏와 같은 용어를 제후국 격식에 맞게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루가치의 주된 임무가 고려를 감시하고, 반란행위를 방지하여 궁극적으로 양국의 종속관계를 공고 히 하는 데 있으므로, 이에 걸맞지 않는 불경ㆍ부당한 제도의 존재를 좌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들은 그것을 스스로 개정하지 못 하고 몽골정부에 고발하거나 고려국왕에게 건의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이처럼 그들의 민정 역할이 제한되었으므로, 고려는 몽골정부와 직접 교섭 하여 노비법 혁파를 무산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상 논의를 통해 몽골이 고려 주재 다루가치에게 실제적인 민정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고려정부의 자치권을 인정했다는 견해를 도출할 수 있다.50) 원종 11년(1270) 12월 쿠빌라이가 보낸 조서에서 경의 나라가 비록 작지만 경 역시 일국의 왕이니 黜陟ㆍ威福ㆍ是非를 마땅히 그대가 스스로 결정해 야 한다 문장도 그가 고려국왕의 독자적 통치권을 보장했음을 알려준다.51) 49)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2년 2월 辛亥. ꡔ高麗史節要ꡕ 卷20, 忠烈王 4년 4월. 50) 김보광은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民政 역할로 제도개편 요구, 무기소지 금지, 민 호점검, 징세, 역참을 들었으나(김보광, 앞의 논문, 2016, 41~45쪽), 앞서 지 적했듯이 제도개편과 징세는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요청 에 불과하고, 무기소지 금지는 管軍 역할에 포함되며, 민호점검과 역참 업무를 실제 수행했음을 입증하 는 사료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51) ꡔ高麗史ꡕ 卷26, 元宗 11년 12월 乙卯.
64 지역과 역사 39호 몽골은 고려가 진정으로 복속하고 제후국의 책무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면, 굳이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本俗主義 정책을 채택했다. 그들에게 고려 는 향후 단행될 남송ㆍ일본정벌에서 중요한 지정학적ㆍ군사적 가치를 지닌 존재였으므로 신속하게 복속시켜 전쟁에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고 려에서는 무신정권이 40여 년간 줄곧 반몽 기조를 유지하고, 심지어 카안이 책봉한 국왕을 마음대로 폐위하기도 했으며, 무신정권 붕괴 후에도 그 주요 군사기반인 삼별초가 봉기하여 남해지역에서 반몽활동을 지속했다. 비록 고 려조정이 몽골의 지원을 받아 무신정권과 삼별초를 타도하고 친조ㆍ출륙을 비롯한 여러 책무를 이행함으로써 복속 의지를 표명했으나, 무신세력 발호 와 반몽행위에 대한 그들의 의구심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몽골 은 자치권을 허용하는 한편으로 다루가치와 군대를 파견해 고려를 철저히 감시하고, 반몽저항 가능성을 근절함으로써 양국의 종속관계를 확립할 필요 가 있었다. 이에 따라 고려 주재 다루가치에게 반란사건 처결, 치안유지, 무 기관리와 같은 軍政 역할만을 위임한 것이다. Ⅲ. 쿠빌라이의 다루가치 폐지와 그 요인 충렬왕 4년(1278) 9월 副達魯花赤 石抹天衢와 達魯花赤經歷 張國綱이 전격 소환됨으로써 약 8년간 고려에 주재했던 몽골의 다루가치가 최종 폐지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조처는 2개월 전 김방경 무고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입조한 충렬왕이 고려에 침투한 몽골관원과 附蒙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몽골 지배층과 적극 교섭하여 이루어낸 외교적 성과로 이해된다.52) 귀국하던 장 국강이 그에게 이제 達魯花赤ㆍ元帥 및 군대가 모두 철수하니 한 나라의 복입니다 라고 한 발언과 이번 행차를 통해 무릇 나라의 걱정거리를 모두 [황제에게] 아뢰어 없애니, 나라사람들이 [왕의] 덕을 칭송하고 감격의 눈 52) 이익주, 高麗ㆍ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1996, 59~65쪽.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65 물을 흘렸다 라는 기사에도 그것이 충렬왕이 친조외교를 통해 이룬 빛나는 업적으로 기술되어 있다.53) 그러나 과연 다루가치 폐지가 그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는지 재고할 여지가 있다. ꡔ高麗史ꡕ 世家 에 기재된 양자의 교섭 과정을 면밀하게 검 토하면, 충렬왕이 몽골지배층에게 다루가치 폐지를 요청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카바(哈伯)에게 王京 다루가치의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낭가타이(郞哥歹)가 일찍이 小邦을 왕래했으니 그를 임명한다면 耳目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후 쿠빌라이에게 황제께서 신임하는 몽골인(韃 靼) 한 명을 다루가치로 임명해 주십시오 라고 하여 두 차례에 걸쳐 흑적 귀 국 후 3년간 공석이었던 正達魯花赤 파견을 요청했다.54) 이는 至元 12년 (1275) 정월 안남에서 몽골에 표문을 올려 다루가치의 폐해를 호소하고 그 소환을 강하게 주청한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루가치 폐지가 충렬왕이 아닌 호종신료의 공적으로 서 술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金周鼎墓誌銘 의 戊寅(1278), 임금을 호종 하여 北國에 입조했는데 임금이 심복으로 여겼다. 中贊(김방경)이 무죄임 을 밝히고, 다루가치 衙門을 파하여 돌려보내고 種 (種田軍)도 돌려보냈 다, 趙仁規墓誌銘 의 公은 홀로 말을 달려 황제를 뵙고 직접 사정을 아뢰 어 윤허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루가치와 種田軍을 일거에 모두 파하여 돌려보냈으니 이야말로 萬世의 공적이다 라는 문장이 그것이다.55) 그런데 두 기록 모두 다루가치 폐지가 오로지 자신의 공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그 들 스스로 혹은 충렬왕이 그 건의를 받아 몽골정부에 요청한 사실이 확인되 지 않으므로, 그들이 다루가치 폐지에 기여했다는 위 기록은 인정하기 어렵 다. 당시 고려에서 결과적으로 그것이 큰 외교적 성과로 칭송되었으므로, 묘지명 제작자가 주인공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史實을 개작했 을 가능성이 있다. 53)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9월 丙戌 ; 乙巳. 54)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7월 甲申 ; 戊戌. 55) 김용선 편저, ꡔ高麗墓誌銘集成ꡕ(제5판),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402ㆍ631쪽.
66 지역과 역사 39호 충렬왕과 몽골지배층의 교섭에 관한 ꡔ高麗史ꡕ 世家 기록은 다루가치 폐지가 오직 쿠빌라이의 명에 의한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충렬왕의 두 차례 다루가치 파견 요청에 대해 그는 도대체 낭가타이가 어떤 인물이기에 다루가치로 임명하겠는가? 어찌 다루가치가 필요하겠는가? 그대가 스스로 잘 하면 될 것이다 라고 거절하면서 고려 주재 다루가치를 최종 폐지했다. 그러므로 이는 충렬왕이나 호종신료가 몽골지배층과 능동적으로 교섭하여 거둔 외교적 성취가 아니라 쿠빌라이가 충렬왕의 파견 요청을 물리치고 스 스로 내린 결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견해를 수용한다면, 충렬왕이 몽골에 다루가치 존치를 요청하고 쿠빌 라이가 그것을 폐지한 까닭을 궁구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전자의 요인으로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다루가치가 충렬왕의 왕권강화에 유 용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다루가치는 본래 임연사건 직후 원종이 몽골의 지원을 받아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왕정복고를 이루기 위해 쿠빌라이에게 요 청하여 파견된 관원이다. 그러므로 원종에게 그들은 몽골조정과의 긴밀한 유대를 보증하고, 무신세력 발호를 감시ㆍ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요 한 존재였다.56) 즉위 초반 국내에서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지 못한 충렬왕에게도 이 같은 그들의 존재가치는 여전히 유효했을 것이다. 또한 다 루가치가 종종 원종의 권위를 침해했던 바와 달리, 부마 충렬왕은 상위에서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충렬왕대 다루가치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킨 바 없고, 張國綱은 일처리가 분명하고 공평하여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와 같이 그 활동이 고려에 유익하게 작용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57) 충렬왕이 굳이 몽골에 석말천구와 장국강의 연임을 요청한 사 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58) 56) ꡔ元史ꡕ 世祖本紀 [至元 9년(1272) 12월] 辛丑, 諸王 쿠라추(忽剌出)가 고려 경내에서 逃民들을 약탈하여, 高麗達魯花赤이 그 사안을 상주하니, [황제가] 고 려의 백성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그것을 금지한다고 명했다 기사는 원종대 다루가치가 고려의 권익보호에 기여한 사례로서 주목된다(ꡔ元史ꡕ 卷7, 世祖4, 144쪽). 57)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9월 丙戌.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67 두 번째는 그가 부마 지위를 활용하여 다루가치의 고유 권한을 회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입조 당시 충렬왕은 중서성에 글을 올려 小邦의 어떤 간 사한 자가 품고 있던 감정을 풀고자 거짓으로 무고하거나 익명으로 투서했 는데 심지어 모반까지 언급하자, 管軍官과 다루가치가 [주모자를] 고문하 여 온 나라를 소란스럽게 했습니다. 금후에 만약 이전과 같은 고소자가 있 다면 제가 스스로 사건을 조사하여 상부에 보고하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여 반란사건을 자신이 직접 조사ㆍ심문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59) 귀국 직후 올린 표문에서 앞서 입조했을 때 직접 아뢰었듯이 금후로 죄를 저지른 자가 있다면 臣이 [직접] 다스리겠다고 요청하여 폐하 의 윤허를 받았습니다 문장을 통해 그것이 가납되었음을 알 수 있다.60) 또 한 그는 동일한 건의문에서 小邦은 거리가 매우 멀어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驛馬를 달려 보고하는데, 다루가치에게 箚子를 요청해 [발급받은] 후에 [사신을] 보내면 혹시라도 지체되어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駙馬의 격식에 의거하여 스스로 箚子를 발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여 다루가치의 역마사용 허가증 발급 권한을 부마 격식에 따라 자신 에게 부여해달라고 요청했다.61) 이 역시 귀국 직후 올린 표문 중 또한 앞 서 [제가] 올린 건의들을 편의대로 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구절에 비 추어 허가받았다고 볼 수 있다.62) 이처럼 충렬왕은 다루가치가 자신의 권 위확립에 여전히 유용하고, 상위에서 그들을 통제하고 권한을 회수할 수 있 었으므로 그 존치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가 8년간 고려에 주재한 다루가치를 단번에 58) ꡔ元高麗紀事ꡕ 至元 15년 2월.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9월 丙戌. 札奇斯欽 은 고려가 내란평정과 왕정복고 후 몽골의 위세에 전면 의존하게 되었으므로, 조정을 대표하는 다루가치와의 마찰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보았다(札奇斯欽, 앞의 논문, 1980, 550쪽). 59)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7월 壬辰. 60)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윤11월 癸丑. 61)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7월 壬辰. 62)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윤11월 癸丑.
68 지역과 역사 39호 폐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 요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 째는 그 기간 중 비로소 고려의 복속에 대한 몽골지배층의 의심ㆍ불신이 해 소되었다는 점이다. 몽골이 다루가치를 파견한 목적은 임연사건을 계기로 고려의 이반이 가시화되자, 반몽 무신세력을 제압하고 국왕을 후원하여 고 려를 충직한 번국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실제로 몽골지배층은 1260년 화 친 재개 후에도 出陸과 助軍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는 고려를 끊임없이 의 심ㆍ질책했고, 임연사건을 겪으면서 그러한 불심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는 한인관원 馬希驥가 조정에 올린 다음 진언에 잘 드러난다. 이전의 명을 내려 사신을 보내 일본에 은혜를 내리고자 했으나 [고려가] 음 모를 꾸며 방해했습니다. 백성들을 옮겨 섬에서 나와 육지로 가게 했으나 또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도 지형의 험고함을 쉽게 믿고 스스로 강대하다고 여겼으니 저항의 싹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는] 대체로 신하의 권세가 매우 강했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上國에 청하지도 않고 함부로 [왕을] 폐립했으니 법으로써 마땅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63) 그러나 복위 직후 원종은 곧바로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출륙을 단행하며, 몽골군과 함께 삼별초를 토벌하고, 왕실 간 혼인관계를 맺고, 일본원정에 공동 출정하여 복속의지를 강하게 표명했다. 더욱이 충렬왕은 입조 즉시 쿠 빌라이에게 西北諸王 토벌과 2차 일본정벌에 협조하겠다고 자청하는 적극 성을 보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려의 복속에 대한 몽골지배층의 의구심 이 상당부분 해소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 때부터 고려를 불신하는 언사 가 담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또한 충렬왕 2년 (1276) 김방경이 입조했을 때 담당관원이 그와 亡宋 신하의 좌석 배치를 주문하자, 쿠빌라이가 고려는 義를 흠모하여 스스로 귀부했고, 송은 힘에 굴복해 투항했으니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한 발언도 그러한 인식변 화의 일면을 보여준다.64) 이 같은 현실에서 다루가치 설치의 필요성은 자 63) ꡔ元高麗紀事ꡕ 至元 6년 11월. 64) ꡔ高麗史ꡕ 卷104, 金方慶. 원종ㆍ충렬왕대 고려의 복속에 대한 몽골의 인식변화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69 연스럽게 감소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상술했듯이 부마 충렬왕의 지위가 다루가치보다 상승했다는 점이다. 본래 다루가치는 부임지역 행정관보다 우월한 위상이 보장되어야 감시ㆍ감독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다. 원종대까지 그것이 비교적 순 탄하게 이루어졌으나, 충렬왕의 부마 지위 획득 후 양자의 우열관계가 역전 되었다. 또한 그는 원종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몽골에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 여 쿠빌라이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 이에 쿠빌라이가 그 스스로 반몽행위 를 감시ㆍ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다루가치의 고유 임무인 반란사건 조 사ㆍ심문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고 이해된다. 이처럼 충렬왕이 다루가치 의 상위에서 그들을 능동적으로 통제하고, 그 역할을 대신 담당하게 되자, 다루가치의 존재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65) 세 번째는 부마 영지에 대한 다루가치 파견이 몽골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제국 초창기부터 몽골은 전통적 家産制 관념에 의거하여 정복지의 토지ㆍ인민을 后妃ㆍ諸王ㆍ公主ㆍ駙馬에게 분여하는 分封制를 시행하고, 投下영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취지에 따라 그 영지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지 않았다. 물론 상당수 분봉지에 投下다루가치가 설치되었지만, 이는 행정체 제가 온전하게 수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투하영주가 영지ㆍ영민을 효과적으 로 관리하기 위해 직접 임명한 관원이다. 즉 그들은 투하영주의 권익보호ㆍ 향상을 위해 파견된 존재였으므로, 중앙정부의 통치력을 지방 곳곳으로 전 달하는 임무를 띤 일반적 다루가치와 명확하게 구별된다.66) 에 관해 고명수, 몽골의 복속 인식과 蒙麗관계 ꡔ한국사학보ꡕ 55, 2014, 58~ 65쪽 참조. 65) 蕭啓慶은 몽골의 강한 군사적 압박 아래 놓인 고려정치는 국왕과 공주가 함께 다스리는 형태였고, 쿠빌라이가 공주를 시집보낸 지 4년 후 다루가치를 소환한 것은 그녀가 몽골조정의 이익을 대표하고 고려정치를 감독할 수 있었기 때문이 라고 보았다(蕭啓慶,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與强權政治 ꡔ內北國與外中國ꡕ(下 冊), 中華書局, 2007, 781쪽). 66) 投下다루가치에 관해 李治安, ꡔ元代分封制度硏究ꡕ(增訂本), 中華書局, 2007, 65~85쪽. 趙阮, 앞의 논문, 2012, 88~95쪽. Elizabeth Endicott-West, op.cit., 1989, 89~103쪽 참조.
70 지역과 역사 39호 쿠빌라이는 카안으로서 황실의 부마로 지위가 격상된 충렬왕의 권익을 그 격식에 맞게 보장해줄 책임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부마의 영지에 다루가 치를 설치하지 않는 관습에 의거하여 그것을 폐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조처는 고려에 대한 몽골지배층의 인식이 외연적 속국 에서 내포 적 속령 으로 변모했음을 반영한다. 더욱이 고려에는 고유한 독자적 행정체 제가 온존했으므로, 충렬왕이 직접 투하다루가치를 임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결과 고려는 몽골의 세력권 안에서 어떠한 다루가치도 설치되지 않은 특 별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맺음말 다루가치는 몽골이 건국 초기부터 점령지ㆍ복속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 기 위해 각지에 파견한 감독관이다. 13세기 초 그들은 고려와 최초 화친을 맺은 후 고유한 세계관에 입각하여 고려를 완전한 복속국 으로 규정하고, 줄곧 다루가치를 설치하려 시도했다. 반면 고려는 양국의 화친을 중국적 세 계질서 관념에 바탕을 둔 사대관계 정도로 인식하여 정치적 자주성을 과도 하게 침해하는 다루가치 설치를 용인하지 않았다. 이러한 대외인식ㆍ정책 의 차이는 첨예한 외교갈등으로 표면화되었고, 오랜 전쟁을 촉발ㆍ지속시 키는 기제로 작용했다. 그러나 몽골은 임연사건을 계기로 고려에 대한 영향 력을 대폭 확대하여 원종 11년(1270) 비로소 고려에 다루가치를 설치했다. 원종대 다루가치에게는 고려지배층보다 높은 위상ㆍ권한이 보장되었다. 이에 그들은 상위에서 고려의 내부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때로 사익을 추구 하기도 했다. 그러나 충렬왕이 부마 지위를 획득한 후 양자의 우열관계가 역전되어 다루가치를 능동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루가치 에게는 民政 임무가 부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들은 고려의 내정에 간 섭하지 않고, 반란사건 처결, 치안유지, 무기관리와 같은 管軍 역할만을 수 행했다. 간혹 참월하고 부당하다는 이유로 고려의 본속법을 개정하려 시도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71 했지만, 실제로 그것을 스스로 주도하지 못하고, 몽골조정에 고발하거나 고 려국왕에게 건의하는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 이는 몽골이 고려의 정치적 독 자성을 보전하는 방침에 따라 본속주의 정책을 채택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충렬왕 4년(1278) 다루가치 폐지는 충렬왕이 몽골조정과 교 섭하여 이뤄낸 빛나는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몽골에 다루가치 폐지가 아닌 파견을 요청했다. 다루가치의 존재가 그의 왕권강화 에 유용하고, 그가 그들의 고유 권한을 회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쿠 빌라이는 그의 파견 요청을 물리치고 스스로 다루가치 폐지를 결정했다. 이 는 당시 고려의 복속에 대한 몽골지배층의 의심ㆍ불신이 해소되었고, 충렬 왕의 지위가 다루가치를 직접 통제할 만큼 신장되었으며, 부마 영지에 대한 다루가치 파견이 몽골의 관습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루 가치 폐지는 고려가 몽골을 상대로 거둔 외교적 성취가 아니라, 그 존속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쿠빌라이의 처분 따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고명수, 몽골의 복속 인식과 蒙麗관계 ꡔ한국사학보ꡕ 55, 2014. 고명수, 몽골-고려 형제맹약 재검토 ꡔ역사학보ꡕ 225, 2015. 김보광, 고려-몽골 관계의 전개와 다루가치의 置廢過程 ꡔ역사와 담론ꡕ 76, 2015. 김보광, 고려 내 다루가치의 존재 양상과 영향: 다루가치를 통한 몽골 지배방식의 경험 ꡔ역사와 현실ꡕ 99, 2016. 김용선 편저, ꡔ高麗墓誌銘集成ꡕ(제5판),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라시드 앗 딘, 김호동 역주, ꡔ부족지ꡕ, 사계절, 2002. 유원수 역주, ꡔ몽골비사ꡕ, 사계절, 2004. 이익주, 高麗ㆍ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주채혁, 撒禮塔 2~3차 침공기의 高麗 內地 達魯花赤 置廢 문제 ꡔ몽ㆍ려전쟁기의 살리타이와 홍복원ꡕ, 혜안, 2009. 丹羽友三郞, 達魯花赤に關する一考察: とくにその任務と設置の理由と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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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주재다루가치의置廢경위와존재양태 73 Abstract The Account of the Dispatch and Abolition of Darughachi in Goryeo and the Aspect of Its Existence -in Terms of Mongol s Policies on Goryeo- Koh, Myung-Soo Darughachi is a superintendent dispatched by Mongol to various places in order to effectively manage conquered territories and subjugated countries from the early days of its foundation. Mongol expanded its influence on Goryeo with the affair of dethronement of Wonjong by Lim Yeon as an opportunity, and established Darughachi in Goryeo in the 11th year of Wonjong(1270). A Darughachi during the period of Wonjong was guaranteed to have a higher position and more rights than the ruling class of Goryeo. However, after King Chungryeol obtained the status of a son-in-law of the Qa an, their relations of superiority was turned around, and he could actively control Darughachi. In addition, Mongol didn t invest Darughachi with the duty of civil government according to territorial principle policy to preserve political independence of Goryeo. Accordingly, Darughachi didn t interfere in domestic affairs of Goryeo, but played only the roles of royal forces, such as suppression of rebels, maintenance of public order, and weapon management. The abolition of Darughachi in the 4th year of King Chungryeol(1278) was not a diplomatic achievement that King Chungryeol made by negotiating with Mongol s government, but obedience to Khubilai s decision and judgment that it didn t need to continue to exist any longer. It was because at that time the doubt and
74 지역과역사 39 호 distrust of Mongol s ruling class about the subjection of Goryeo had been solved to some degree, the position of King Chungryeol had been improved to the point of directly controlling Darughachi, and the dispatch of Darughachi to the territory of a son-in-law of the Qa an was judged not to accord with Mongol s customs. Keywords : Darughachi, Mongol, Goryeo, King Chungryeol, Khubilai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75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75~108쪽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75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67)정 은 정* 머리말 Ⅰ. 동북면 영역의 伸縮-변경ㆍ점이지대 형성 Ⅱ. 동북면의 인적ㆍ물적 기반 차이 1. 합란부 변경의 인적ㆍ물적 구성 2. 쌍성총관부, 점이지대의 인적ㆍ물적 구성 Ⅲ. 거래 물자와 참여층 1. 변경, 군수물자 거래 2. 점이지대, 변경 지원과 소상품 거래 Ⅳ. 동북면 분절구조 극복 노력 맺음말 국문초록 元明 교체기 고려의 동북면 전체는 쌍성총관부ㆍ합란부가 관할하였다. 여말 동북면 은 최전선에서 1차 방어라인을 형성하는 합란부 관할의 변경과 그 후방 쌍성총관부 지 역의 점이지대로 나뉜다. 동북면 전체의 변경과 점이지대 모두는 제각기 일원적 국가권 력에서 배제된 경계지대라는 측면에서 공유된다. 그러나 변경과 점이지대는 주민구성과 거래의 대상물자, 이를 둘러싼 유통 참여층에 서 다소 차이 난다. 변경은 여진ㆍ원ㆍ명과 교차하는 최전선이자 문화혼종 구간이다. 고려ㆍ여진인이 혼거한데다 피로인, 유민이 거주의 주류를 이루었다. 군수물자 관련한 軍糧ㆍ馬料의 물 류이동이 두드러지는데다, 일부 여진인과 대상인이 거래에 가담하였다. 변경인구를 중 앙차원에서 편적하거나 강제 쇄환하는 본격적 조치는 조선초 6鎭 개척에 와서이다. 여 말 합란부 관할의 변경은 다국이 긴축하는 공간이자, 일원적 국가권력에서 소외됨으로 써 경계 적 속성을 띤다. * 부산대학교 사학과 강사(coreacity1@naver.com).
76 지역과 역사 39호 점이지대는 원간섭 내내 원의 입김이 강한 정주ㆍ화주 일대, 고려로 환속이 거듭되 는 등주 이북ㆍ덕원ㆍ문주일대로 구분 가능하다. 전체 쌍성총관부 관할은 원간섭기에 원과 고려의 두 층위 권력이 교차한다. 쌍성총관부에서는 여진인ㆍ원인의 투화인을 적 극 동화시켜 고려 公民으로 삼으려 했다. 이곳은 下三道에서 이송해 온 군자곡을 변경 으로 옮기는 중간지대 역할을 한다. 군자곡ㆍ馬料의 수송과, 부분적으로는 소농이 참여 하는 생활물자 거래도 시작되었다. 元明 교체기 동북면 경계지대의 공간분절 양상에 대한 극복방안으로, 중앙정부 차원 에서는 인적 통제와 제도적 개편을 시도하였다. 변경의 인적 통제는 월경 금제조치와 쇄환으로, 점이지대에서는 쇄환보다는 적극적 동화가 추진되었다. 그럼에도 이같은 수 준으로는 동북면 경계지대의 계층적 영역분점을 근절하기 어려웠다. 조선전기 兩界 州 鎭의 개척과 道觀察使制 파견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여말 동북면 변경ㆍ점이지대가 각각 경계를 구성하는 분절 지점을 형성했다면, 조선 에서는 동일 境界 띠 로 파악하여 통합을 지향하였다. 원ㆍ고려의 국가권력이 긴축하던 쌍성총관부 영역과 변경의 신개척지를 광역단위로 엮어낼 수 있던 구심력이 조선에 이 르러 한층 커진 때문이다. 주제어 : 境界, 邊境, 漸移地帶, 分節構造, 거래물자 머리말 근대 국가주의 태동에 따른 국경과 민족개념의 형성을 염두한 스테이티 즘에 입각하면, 전근대 사회에서 국경이라는 관념적 도식을 대입하기 곤란 한 것으로 귀결된다. 국경(border)은 연접하는 두 정치세력이 각자의 영토 적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여 설정한 계선이다. 국경보다 상위 개념인 변경은 정치세력ㆍ사회집단ㆍ각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가 모호한 공간으로 얼 마든 세력 확장의 여지가 있는 유동성이 보장된 지역이다. 보다 명확히는 변경은 공백지의 공간을, 국경은 국가의 法網 안에서 보호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77 되는 선을 뜻한다. 국경ㆍ변경ㆍ경계 가운데 국경이 근대 국민국가의 산물 이라면, 전시대에 걸쳐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 변경ㆍ경계이다. 각자는 경계 변경 국경의 순서로 범주가 좁혀진다. 국경ㆍ변경을 상위 차원에서 망라하는 개념이 곧 경계이다.1) 국가간 타협된 선긋기나 국경선을 중세 고려사회에서 설정하는 것은 어 렵다. 국경보다는 가변적인 변경ㆍ경계ㆍ강역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옳 다. 이때 일방적인 선긋기보다는 영역을 안팎으로 나누는 것이 더 유효할 듯싶다. 안은 국가의 집권력이 미치는 범위, 바깥은 권력에서 소외된 주변 경계지역에 해당된다. 중세사회의 경계 설정과 그 지점의 성격 파악은 국 가장악력 여부가 관건이 되어줄 것이다. 중앙차원에서 국왕주도의 집권력 행사가 쉽지 않은 터에 공권력 외곽에 있는 주변지역은 오히려 권력의 공백상황을 비집고 사적 기반이 틈을 메우 는 교합의 場이기도 하다. 주변부는 자생적이면서 재지차원의 지역 성장을 처음부터 껴안고 있는 셈이다. 고려 안의 자율적 국가권력에서도, 또한 외 부에서 주어진 他者的 공권력에서도 먼 주변의 경계지역은 元明 교체기 동 북면ㆍ서북면 일대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두 방면은 自他의 권력에서 동떨어져, 되려 자율성이 보전된 지역이다. 게다가 국가 중심의 일원적 권 력이 아닌 다원적 권력이 공존하는 중층성을 띤 곳이다 서북면은 원간섭기 동녕부,2) 압록강ㆍ의주ㆍ요양행성, 한중관계사와 결 부된 요동사ㆍ만주사 붐으로 인해 연구의 질량이 풍부하다.3) 내용면에서 1) 김선민, 한중관계사에서 변경사로-여진 만주족과 조선의 관계- ꡔ만주연구ꡕ 15, 2013. 모리스 스즈키 테사, 임성모 옮김, ꡔ변경에서 바라본 근대 서울ꡕ, 산처럼, 2006, 24쪽. 박선영, 국민국가 경계 민족 ; 근대 중국의 국경의식을 통해 본 국 민국가 형성과 과제 ꡔ동양사학연구ꡕ 81, 2003, 120쪽. 2) 강재구, 고려 원종대 려몽관계와 동녕부 설치, 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이정신, 원간섭기 동녕부의 존재형태 ꡔ韓國中世社會의 諸問題-金潤坤 敎授定年紀念論叢-ꡕ, 한국중세사학회, 2001. 3) 김순자, ꡔ韓國 中世 韓中關係史ꡕ, 혜안, 2007. 金惠苑, 고려후기 瀋王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남의현, 元ㆍ明交替期 한반도 북방경계인 식의 변화와 성격-明의 遼東衛所와 3衛(東寧ㆍ三萬ㆍ鐵嶺)를 중심으로- ꡔ한일
78 지역과 역사 39호 는 서북면이 북계로 정비되는 과정, 영역변천이 압도적이다.4) 최근에는 원 간섭기에 원의 강제성과 자율성이 충돌하는 가운데 고려의 국가적 질서가 왜곡된 측면을 강조하려는 입장에서, 요동과 고려 서북면이 물류권역으로 한데 엮여졌음을 논증한 유의미한 성과도 나왔다.5) 서북면 방면은 정치ㆍ 경제ㆍ군현제도의 제 방면에서 거의 손댈 바 없을 정도로 연구결과물이 누 적되어 있다. 동북면은 서북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 관심을 덜 받은 지역이다. 여말 이성계 세력의 성장기반 관련해서 간략히 언급하거나6) 元明 교체기 쌍성총 관부ㆍ철령위 관할지역과 조선초 영토 확정을 검토하면서 윤관의 9성 점령 과 결부지어 소개하는 정도이다.7) 선행하는 성과가 고려의 영토확장에 집 4) 5) 6) 7) 관계사연구ꡕ 39, 2011. 오기승, 몽골제국의 동방 경영과 요동 고려인 세력 ꡔ중 앙사론ꡕ 43, 2016. 오타기 마쓰오 저, 윤은숙ㆍ임대희 공역, ꡔ중국의 역사(대원 제국ꡕ, 혜안, 2013. 윤은숙, ꡔ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ꡕ, 소나무, 2010. 윤재운, ꡔ한중관계사상의 교통로와 거점ꡕ, 동북아역사재단, 2011. 이정신, 忠宣王의 요 동회복 의지와 高麗王ㆍ瀋王의 분리 임명 ꡔ한국인물사연구ꡕ 21, 2014. 최윤정, 몽골의 요동ㆍ고려 경략 재검토(1211~1259) ꡔ역사학보ꡕ 209, 2011. 姜性文, 高麗初期의 北界開拓에 대한 硏究 ꡔ白山學報ꡕ 27, 1983. 강재광, 蒙 古의 제1차 침공과 被陷 北界 14大城의 抗戰 ꡔ韓國史硏究ꡕ 146, 2009. 孔錫 龜, 高麗史 地理志 北界條 沿革記事의 檢討 ꡔ白山學報ꡕ 46, 1996. 김우 택, 11세기 對契丹 영역 분쟁과 高麗의 대응책 ꡔ韓國史論ꡕ 55, 2009. 김유나, 고려전기 北界民의 형성과 그 집단의식 ꡔ역사와 현실ꡕ 96, 2015. 方東仁, ꡔ한 국의 國境劃定硏究ꡕ, 一潮閣, 1997. 송용덕, 高麗後期 邊境地域 변동과 鴨綠江 沿邊認識의 형성 ꡔ歷史學報ꡕ 201, 2009. 梁義淑, 元간섭기 遼瀋地域 高麗人 의 동향 ꡔ동국역사교육논집ꡕ 4, 1996. 윤경진, 고려 현종말~문종초 北界 州 鎭 설치와 長城 축조 ꡔ군사ꡕ 79, 2011. 尹武炳, 高麗北界地理考 ꡔ歷史學報ꡕ 4ㆍ5, 1953. 尹熙炳, ꡔ尹瓘將軍의 女眞征伐史 ; 東北界의 境界 公嶮鎭을 中心 으로ꡕ, 文理社, 1980. 이정신, 앞의 논문, 2001. 허인욱, 高麗 中期 東北界에 대한 考察 ꡔ白山學報ꡕ 59, 2001. 위은숙, 13ㆍ14세기 고려와 요동의 경제적 교류 ꡔ民族文化論叢ꡕ 34, 2006. 이형우, 李成桂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ꡔ韓國史學報ꡕ 16, 2004. 崔在晋, 高麗末 東北面의 統治와 李成桂 勢力 成長 ; 雙城總管府 收復以後를 中心으로 ꡔ사학지ꡕ 26, 1993. 洪榮義, 고려말 李成桂의 婚姻關係와 경제적 기반 ꡔ韓國 學論叢ꡕ 45, 2016. 稻葉岩吉, 鐵嶺衛の位置を疑ふ 和田敎授の明初の滿洲経略 ꡔ靑丘學叢ꡕ 18,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79 중된 것이라면, 동해안과 동북면ㆍ동계의 상호관계를 구명하거나 원간섭기 군현의 교우ㆍ남천을 주시해 조선초 양계지역 정비를 연결짓는 최신 견해 도 나왔다.8) 동북면 역시 서북면과 매한가지로 영토확정ㆍ군현제 연구가 다수이다. 동북면이 영토사ㆍ정치사 연구 위주로 진행된 까닭에 이 일대 경제기반 에서 파생하는 여타 문제는 거의 놓치고 있다. 여말 동북면은 고려ㆍ원ㆍ명 어디에서도 항상적인 수취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권력의 空位를 틈탄 재지세력이 지역자체에서 확보한 각종 이윤을 점유하기가 애초부터 유리했 다. 開京 혹은 元ㆍ明 內地로 수합되어야 할 국가 재정적 물류의 흐름이 차 단됨으로써 사적 유통기구와 유통영역의 거점형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 써 생성되는 경제적 이윤은 국가가 수렴하지 못한 채 오롯이 재지 기득권층 의 몫이 되었다. 私的 유통이 점증해가는 지역사회 안에서 각 계층은 경제기반의 편차에 따라 각자의 영역을 분점하기 마련이다. 소위 분절적 공간론의 입장은 여말 동북면 경계지대에서도 적용 가능하다. 元明 교체기 동북면 전체는 쌍성총관부ㆍ합란부가 관할한다. 합란부는 여말선초 영토수복과정에서 윤관의 9성 점령과 맞물려 늘상 회고되는 변경 으로 여진ㆍ고려ㆍ원이 긴축하는 문화혼종구간이다. 쌍성총관부는 고종 45년 화주ㆍ정주를 몰입하여 귀속한 후 충렬왕 연간ㆍ공민왕 5년까지 관할 영역이 퇴축을 거듭한다. 쌍성총관부 전체는 원ㆍ고려의 두 층위가 중복되 1934. 金九鎭, 麗ㆍ元의 領土紛爭과 그 歸屬問題 ; 元代에 있어서 高麗本土와 東寧府ㆍ雙城總管府ㆍ耽羅總管府의 分離政策을 중심으로 ꡔ국사관논총ꡕ 7, 1989. 박원호, 鐵嶺衛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ꡔ韓國史硏究ꡕ 136, 2007. 方東仁, 雙城摠管府考(上)(下) ꡔ關東史學ꡕ 1ㆍ2, 1982 ; ꡔ韓國의 國境劃定硏究ꡕ, 一 潮閣, 1997. 이정신, 쌍성총관부의 설립과 그 성격 ꡔ韓國史學報ꡕ 18, 2004. 8) 권영국, 고려전기 동북면과 동해안의 방어체제 ꡔ숭실사학ꡕ 30, 2013.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ꡔ전근대 동해안 지역사회의 운용과 양상ꡕ, 경인문화사, 2005. 윤경진, 려말 조선초 東界의 운영체계 변화와 道의 재편 ꡔ한국중세사연구ꡕ 44, 2016. 이정기, 고려시기 동계영역의 변동과 도호부의 이동 ꡔ한국민족문화ꡕ 47, 2013. 한정훈, 고려전기 兩界의 교통로와 운송권역 ꡔ韓國史硏究ꡕ 141, 2008.
80 지역과 역사 39호 는 점이지대적 속성을 강하게 띤다. 여말의 동북면 전체를 영토ㆍ공간 면에서 다층적 권력의 작용 여하에 따 라 변경ㆍ점이지대로 나눠 보고, 주민분포와 물적ㆍ경제적 기반의 편차를 각각 점검할 것이다. 기왕에 형성된 동북면의 영역 분점을 극복하려는 조선 초 일원적 국가권력의 차별화된 전략을, 인구ㆍ물적 기반의 손질이라는 양 축을 중심해서 살피려 한다. Ⅰ. 동북면 영역의 伸縮-변경 점이지대 형성 고려에서 동북면은 경상도 북부, 강원도ㆍ함경도 일부, 더 북방으로 나아 가 두만강 유역까지를 아우르는 긴 벨트형이다. 이 방면은 건국 후의 개척 으로 새로이 고려영토에 편입된 지역으로 일찌감치 방어주ㆍ진이 설치되었 다. 성종대는 동북면을 구성하는 登州ㆍ宜州ㆍ和州ㆍ溟州의 읍호가 개정 된다. 현종대에 이르면 전국 군현차원에서 방어사ㆍ현령관 파견과 군현의 잉ㆍ내속을 통한 주속현체제 수립의 연장선상에서, 동계 속현의 상당부분 이 주속현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정종 7년 定州에 방어사가 파견됨으로써 이곳을 동계의 최북단으로 삼았다.9) 지방제도의 대폭적 개편이 이루어진 성종ㆍ현종대를 거치면서 東北境은 보다 북방으로 영역이 확장된다. 전기부터 동계 영역은 변화를 거듭하면서, 영토의 북방 한계선도 가변적이었다. 함께 도호부도 이동하였다. 동계를 관 할하는 도호부는 안변도호부이다. 성종 14년 화주가 안변도호부 치소였다 가 현종 9년에는 그 치소를 등주로 이전하였다.10) 안변도호부 置所가 동계 의 쇠장에 따라 수차례 옮겨졌지만, 동계가 관할하는 범위와 운영은 몽고침 입 직전까지 그다지 커다란 변화는 없다.11) 9) 邊太燮, ꡔ高麗政治制度史硏究ꡕ, 一潮閣, 1971. 金南奎, ꡔ高麗兩界地方制度史 硏究ꡕ, 새문사, 1989. 10)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東界.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81 몽고와 접촉하게 된 고종대 동진과 전투 끝에 정주ㆍ장주ㆍ화주ㆍ고주 및 주변 鎭을 위시한 동북면 군현 상당수가 피해를 입었다.12) 복구차원에 서 안변도호부 置所 이전을 재감행하였다. 양주ㆍ간성이 임시 도호부 치소 로 역할하다가 명주로 다시 이전하였다.13) 거듭되는 도호부 치소의 이전과 치폐는 직전 시기에 형성된 동계의 형태를 변형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원 간섭기에는 동계 영역의 급감을 촉발하였다. 쌍성총관부 설치가 계기 가 된다. 몽고전쟁 후반 조휘ㆍ탁청이 정주ㆍ화주를 들어 화주 이북이 몽고 에 몰입되었다. 쌍성총관부 설치를 기점으로 등주 이북의 땅 상당부분을 상 실하였다. 그림 고려말 동북면의 변화 11) 이정기, 앞의 논문, 2013, 9~14쪽. 12) ꡔ高麗史ꡕ 권57, 地理2 慶尙道 ; 권94, 列傳27 李周佐. 13)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東界.
82 지역과 역사 39호 쌍성총관부 初置 당시에 관할지역은 전체 등주 이북~정주ㆍ화주를 잇는 선 안에 있다가 충렬왕 16년 전후 축소되어 정주ㆍ화주 만을 관리하였 다.14) 쌍성총관부 관할영역은 고종 45년부터 충렬왕 연간, 공민왕 5년 失 地 회복을 거치는 동안 퇴축이 거듭된다. 정주ㆍ화주 구간은 원간섭 내내 쌍성총관부의 지속적 관할을 받지만, 등주 이북, 덕원ㆍ문천ㆍ고주는 입출 이 반복된다. 원간섭 동안 실질적으로 고려 동북면 영역은 급감하다가 공민왕대 失地 회복을 추진하면서 다시금 원형을 회복하였다. 동왕 5년 7월 쌍성총관부 관 할에서 수복한 지역은 화주ㆍ등주ㆍ정주ㆍ장주ㆍ예주ㆍ고주ㆍ문주ㆍ선 주ㆍ선덕진ㆍ원흥진ㆍ영인진ㆍ정변진이다. 同年 쌍성 땅을 수복한 후 북 상하여 함주지역을 차지하면서는 定州都護府를 곧바로 설치하였다.15) 이 조치는 당시 넓어진 동계영역의 확장과 관련된다. 뒤이어 전체 동계북부를 삭방도, 남부를 강릉도라 칭하고 각각에 도호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16) 쌍성총관부 관할을 제외한 나머지 동북면은 합란부가 관할하였다. 합란 부는 함주ㆍ삼살ㆍ길주ㆍ웅주ㆍ북청ㆍ복주(단천)을 관리하여 실제 쌍성 총관부와 함께 여말 동북면을 통치하였다. 합란부는 공민왕 5년 失地를 수 복하고 지함주사로 하였다가 얼마 후 만호부로 고쳤다. 萬戶營을 설치한 후 동왕 18년에는 함주목으로 승격하였다.17) 실제 쌍성총관부는 함경도 이남 동계북부~변경 안을, 합란부는 동북면 최전선 변경을 통치한다. 쌍성총관부 관할 라인을 기준으로 최전선의 변경 과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라인을 형성하였다. 원 開元路 아래 쌍성총관부 와 합란부가 각기 동북면 전체를 분점한 모양새이다. 14)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安邊都護府 登州, 和州. 이정신, 쌍성총관부의 설립과 그 성격 ꡔ韓國史學報ꡕ 18, 2004, 283~287쪽. 윤경진, 고려후기 東北面의 지방제도 변화 ꡔ한국문화ꡕ 72, 2015, 340쪽. 15)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東界 定州. 16)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東界 沿革, 恭愍王 5년, 9년. 17)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咸州大都督府.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83 Ⅱ. 동북면의 인적 물적 기반 차이 동북면은 고려ㆍ여진ㆍ원ㆍ명 어디에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영역 伸縮과정에서 소외된 지역도 있다. 산생의 출발점은 다 르지만 경계지대를 구성하는 지점 이라는 데는 공유된다. 13~14세기 다원 적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에서도 원ㆍ명의 관리에서도 먼 동북면 지대를 각 각 구간별로 차등화시켜 살필 필요가 있다. 공간 관점에서 경계형성의 단초 가 되는 自他 권력 투입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이다. 우선은 동북면 전체를 크게 쌍성총관부 설치를 기점으로 그 북부의 합란 부 구간과 쌍성총관부 하단으로 나눌 수 있다. 합란부 영역(①)은 동북경으 로 예종대 윤관의 9성 환부 이래 여진ㆍ고려ㆍ원ㆍ명이 긴축하는 구간이 다. 쌍성총관부 관할은 공민왕 5년까지 시종일관 포함되는 정주ㆍ화주의 구간(②), 충렬왕 16년 전후 환속되기 시작하는 등주이북ㆍ문주ㆍ덕원ㆍ 고주의 구간(③)으로 나눠진다. 원ㆍ고려 양 국가권력의 투하 비중에서 편 차가 있으나, 변경과 준남도 지역의 사이 지점에서 중간적 속성을 띤다. ② ③구간 모두는 편의상 점이지대로 칭한다. 동북면 경계지대를 변경, 점이지대로 굳이 쪼개는 이유는 조선초 일원적 국가권력이 양 구간의 주민구성ㆍ물류 흐름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여, 차제 에 넓은 동북면 분절구조를 통합할 차별화된 전략을 수립했을 것이라는 판 단에서이다. 1. 합란부 변경의 인적ㆍ물적 구성 전례없는 세계강국을 건설한 원은 제국말 통치체제의 이완으로 와해되었 다. 원 제국의 동북부에 해당하는 여진지역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던 차 에 뒤이어 반란이 속출하였다. 흑룡강하구 여진지역에는 吾者野人ㆍ女眞水 獺獺이 元朝에 해동청을 포획하고 납부한 대가로 살아갔으나 貢役이 과다
84 지역과 역사 39호 하여 至正 3년(1343)부터는 반란이 발발했다. 요양행성 남부 여진인 사이 에도 소규모 소요가 빈번했다. 여진인은 1358년 말 홍건군과 결합하여 1363년에는 요양행성에 진격하 면서 원 大都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당시 北元은 홍건군을 차단하지 못함으 로써 결과적으로는 요양행성의 행정적 마비를 초래하였다. 이는 오히려 신 흥하는 명이 요동 훨씬 너머의 동북쪽 고려로 진출하는데 수월케 하였다. 명이 본격적으로 고려로 나아가려면 군수품 확보가 관건이었다. 때문에 역참 정비를 서둘렀다. 역참의 신설보다는 이미 원에서 북경과 몽골내지의 곳곳을 연결하기 위해 구축해 놓은 200여 站, 요양행성 남부와 산동반도 사 이에 놓여있던 해운ㆍ내하기구를 활용하는 수준이었다.18) 명이 신설한 참역은 시기적ㆍ지역별로 정비에 차이가 난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홍무 20~21년 사이에는 요동도사와 대녕도사 구간에 참역을 설치 하였다. 영락 7년 이후에야 만주의 노아칸도사 경내에 참역을 신설하였다. 비로소 명대 요동 동북부의 참역은 대녕ㆍ광녕ㆍ요양ㆍ개원ㆍ해서의 5곳 이 추가되었다. 추후 納丹府에서 한개 노선이 증설되어 요동 동북부 방향으 로 뻗쳐 나갔다. 총 167개 노선에 147개 참역이 구축되어 遞運所ㆍ鋪ㆍ鋪 舍가 역참 기능을 보완하기까지는 명 중기를 기다려야 했다. 명이 활용하려던 원의 역참은 기존 고려 驛制를 원의 체제에 맞춰 조정하 려던 의도에서 정비되었다. 원세조 당시 세계제국을 건설하면서 고려 역참 을 정비할 때 거의 서북면에 집중하다시피 하였다. 여말 명에 사행갈 때 사 신이 경유한 요동 8站은 서북면에 한정된 길이다.19) 원제국이 동아시아 해 상교역권을 염두한 水驛 설치도 서북면에 국한되었다.20) 뿐 아니라 각 驛 站간 긴 거리를 보완하려는 차원에서 압록강 방면 서북면에 조성한 이리 18) 吉林文史出版部, ꡔ中國東北史ꡕ 1장, 元王朝封遙陽行省的統轄管理, 1998. 명 건국 후 한참 지나서야 원에서 구축해놓은 요양행성 구간의 站驛과 내하수운을 통하여 요동과 고려 동북부를 연결하려 했다. 명대 육ㆍ수운로는 원대 요양행성 에서 설치한 구간보다 훨씬 짧았다. 19) ꡔ元史ꡕ 권208, 外夷1, 高麗 1269년 7월. 20) ꡔ元史ꡕ 권17, 世祖本紀30, 1293년 2월.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85 칸21) 같은 신생취락도 동북면에는 희소하다. 동북면 변경은 고려 內地의 역도망이 관통하지 않는다. 영토 편입이 진행 되는 과정에서 성곽 구축과 참역 신설을 추진한데다 국초 대동강ㆍ청천강 라인으로 경계 지워졌던 사정을 감안하면, 변경의 함주 부근 역로망은 성길 수밖에 없다. 거기에 건국 직후 驛路網 구축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ㆍ서북면 가운데서는 서북면에 치우쳐 있다. 성종 14년 和州를 안변도호부로 고치고 현종 9년에 和州 防禦使를 本營으로 삼는데22) 和州에 방어사 설치를 계기 로 관할 驛이 정비되었다.23) 和州는 동북면 역도망의 북방 최한계선이다. 和州 이북의 변경은 역도망 관리체계에서 비껴나 상대적으로 중앙관리가 소 홀한 지역이다. 元明 교체 당시 동북면 변경이 원ㆍ명이든 고려든 중앙관할의 교통시설 이 촘촘하지 않다는 것은 인적ㆍ물적 기반 자체도 느슨하다는 의미이다. 인 구를 편적ㆍ편호하여 국가 공민으로 흡수함으로써 부세수취를 하려는 국가 의지 자체가 강고하지는 못한 것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일원적 국가권력 의 허소화는 결국 이 방면을 상당 동안 공백지로 남게 하였다. A-1) (경원도호부) 강포한 부족이 많아서 무마하기에 서생의 솜씨 부끄럽 구나 24) A-2) 권근이 신유정을 전송하는 글에 원 나라 말기에는 사는 사람이 아 무도 없었고, 孔州가 가장 궁벽하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수한 가시덤불로 수 십년이나 내려왔다 25) A-3) 蔓嶺 정평 이북에는 삶과 물화가 서로 통하지 못하자 관군이 토벌하 려 이 고개에 이르렀다 26) 21) 22) 23) 24) 25) 26) ꡔ高麗史ꡕ 권82, 兵2 站驛, 忠烈王 5년 6월.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東界 和州. ꡔ高麗史ꡕ 권82, 兵2 站驛 朔方道.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권50, 咸慶道 慶元都護府 題詠條.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권49, 咸慶道 北靑都護府 題詠條.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권49, 咸慶道 北靑都護府 山川條.
86 지역과 역사 39호 사료가 말해주듯 定州 이북의 변경이 인구ㆍ물화의 왕래가 서로 통하지 못한 것은 한켠으로 당시 중국대륙의 인구문제와 관련정책에 기인한다. 원 말 요동인구의 절대다수는 중원으로 이동하였다. 원말 혼란을 수습하려던 명에서는 빠져나간 인구를 보충할 대책으로 屯田制를 시행했다. 명초 요동 도사 관할 내 주민의 비중은 한인 70% 고려토착인과 귀부여진을 합해 30% 이다.27) 요동 25衛 2州의 호구는 275,115, 寄籍民ㆍ둔전군ㆍ蒸鹽軍ㆍ炒 錢軍은 124,729명이다. 요동의 둔전은 군둔ㆍ상둔ㆍ민둔이 있다. 군둔ㆍ 상둔은 요동의 중간지점에서 서쪽 방면에 투하된 터라 사실상 고려와는 무 관하다. 고려에 직결되는 둔전은 민둔이다. 민둔은 죄수에게 屯種해서 속죄 케 하는 기능이 있다. 이 민둔의 절대다수가 압록강 집안 일대에 집중되어28) 상대적으로 동북면은 개발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변경지대에 몇 차례 유민 쇄환책으로 인해 한때 인구가 늘어난 적도 있었 다. 공민왕 8년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대규모 이주가 있었다.29) 이어 공민 왕 19년에서 21년 사이에 3차례 요동정벌 이후 일대 지역민이 고려에 귀부 해 왔다.30) 요동 정벌로 이 지방에서 고려의 정치ㆍ군사적 영향력이 증대 하자 귀부한 여진족 일부가 동북면 변경의 정평ㆍ함흥 일대로 이주해 왔다. 우왕 11년에는 동왕 8년 胡拔都가 동북면을 침입하자 여진족이 동북면의 남부 해안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31) 고려 중앙정부 차원에서 변경지대 로 인구를 유인하려는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귀부를 허용하긴 했어도, 변방 의 인구추쇄는 제한적 범위에서 이루어졌다.32) 유민은 정치ㆍ경제ㆍ군사상 문제로 본래의 거주지에서 이탈한 부류이다. 국가의 정식 호적에 등재되지 않아 국가에 役 부담도 없다. 동북면 변경의 인구를 중앙차원에서 편적하거나 강제 쇄환하는 본격적 조치는 조선초 6鎭 27) 28) 29) 30) 31) 32) ꡔ遼東誌ꡕ 권1, 地理誌 風俗 ; 권3, 食貨志 武備. 이건재, ꡔ東北史地考略ꡕ, 吉林文史出版社, 1986, 47쪽. ꡔ高麗史ꡕ 권39, 恭愍王 8년 11월 甲辰. ꡔ高麗史ꡕ 권42, 恭愍王 19년 12월 丁巳. ꡔ高麗史ꡕ 권134, 列傳47 禑王 8년. 김순자, 앞의 박사학위논문, 2000, 111~120쪽.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87 개척에 와서이다. 변경은 유민 외에도 원의 피로인, 여진인이 혼거한 구간이다. 여말 변경 에 거주하던 민호를 합란부의 상위기관이 되는 정동행성 초토사에서 별도로 관리하였다. 동북쪽 別十八(連五城) 奴兒干城33)에서는 원의 죄인들에게 정동행성 예하 征東招討司를 설치하여 식량을 공급해 주었다. 정동원수부 가 설치되어 있던 혼동강 하구 일대, 원의 죄인이 유배되는 고려 동북쪽지 역인 別十八(連五城) 奴兒干城의 狗站은 인구가 적어 휑한 모습이다. 인적ㆍ종족적 구성이 다양한 동북면 변경에 처음부터 단일한 집단 공동 체의식을 기대하긴 곤란하였다. 국초 여진인에게 여진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황주량의 견해에 따라 고려ㆍ여진의 이질성이 강조되다가34) 차츰 同流로 인지되기에 이르렀다. 동북면 여진의 무리는 때때로 변경을 침입하는 길잡 이가 되거나, 무리와 교역하면서 혼인하였다. 이 때문인지 여말에는 고려인 ㆍ여진인 사이에 神格이 공유되기도 하여35) 여진인에 대한 경계심이 차츰 허물어졌다. 2. 쌍성총관부, 점이지대의 인적ㆍ물적 구성 합란부의 변경과는 달리 쌍성총관부 관할에서는 여진인ㆍ원인의 투화인 을 적극 동화시켜 고려 公民으로 삼으려 했다. 민호로 충당할 귀화인에게 고려인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적극적 귀화를 추진하였다.36) 賜姓名ㆍ관직 33) 張東翼, ꡔ元代麗史資料集錄ꡕ, 서울대출판부, 1997, 54쪽. 狗站 陶宗儀 南村輟 耕錄 34) ꡔ高麗史ꡕ 권84, 刑法1 公式 殺傷. 35) 조법종, 한국고중세 백두산신앙과 만주명칭의 기원 ꡔ한국사연구ꡕ 147, 2009. 만츄리아 만주의 어원이 불교의 문수보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문수를 음역 하면 만주슈리이다. 36) 귀화란 특정국가의 국적을 취득하여 자국민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적 취득 방법으로서 귀화와 조선의 귀화는 차이가 난다. 전통적 동양사회의 귀화는 聖王의 교화에 귀복 귀부하는 형태이다(이원택, 조선전기의 귀화와 그 성격 ꡔ서울국제법연구ꡕ 8-2, 2001, 225쪽). 귀화를 그 정도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있다. 臣民이 되어 조선영토에 편입되어 호적 군적에 편입하는 경우, 변경에 거
88 지역과 역사 39호 을 수여하거나 投化田을 지급하는 등 각종 시책을 통해서 호구편성을 유도 하였다. 조세ㆍ공부ㆍ요역 의무를 부담지워 국가재정의 근본이 되는 호적 편성에서 투화인도 예외없이 수렴하려 했던 것이다. B-1) 양계의 亡丁과 投化丁에게는 토지 각 4결을 지급한다. 교대하는 자가 이어서 그 토지를 받도록 하며 몽골어와 한어에 능통한 자는 각각 2명을 뽑 아 37) B-2) 동계 高州의 도령 1인 낭장 3인 별장 7인 교위 15인 대정 32인 초군 좌군은 각 1대 우군은 8대 영새는 2대, 投化 田匠은 각 1경이다 38) 점이지대 高州의 투화인을 피로인으로 두기보다는 귀화ㆍ동화정책을 추 진하여 投化田을 지급해주었다. 투화인은 梗弓軍에 편성하여 동계(점이지 대)에 재배치하거나 역참 편성에서도 적극 활용하였다. 이들에게 귀화초기 에 지급하던 투화전 4결을 반납케 하는 조치와 함께 군인전을 지급하면서 통역관도 같이 상주토록 하였다. 쌍성총관부 지역에는 法網에서 벗어난 인구, 주변인 이 자연스레 모여들 었다. 이곳의 민호는 고려의 범죄자나 유리민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 수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예컨대 쌍성은 땅이 매우 기름져 恒産이 없는 동 남민이 많이 들어가 거주했다고 하거나,39) 和州로 도망한 범법자를 송환하 도록 다루가치에게 요청하였으나 쌍성총관은 이를 거절하고 범법자를 돌려 주지 않았다고 한다.40) 또한 쌍성총관부 관할의 덕원이 강요주(꼬막) 주산 지였으나 그 채취가 어려워 縣民 50호가 유리하였을 당시, 동북면 병마사 37) 38) 39) 40) 주하지만 정식으로 군적 호적에 편입되지 않은 형태, 압록강 두만강 유역 여진 세력으로 반독립세력을 구성하는 경우, 독립세력을 형성해서 정치 경제적 내왕 하는 내조의 사례로 구분 가능하다. ꡔ高麗史ꡕ 권82, 兵2 站驛. ꡔ高麗史ꡕ 권83, 兵3 州縣軍 東界. ꡔ龍飛御天歌ꡕ 권4, 제24장, 아세아문화사영인본, 1973, 355쪽. ꡔ高麗史ꡕ 권130, 列傳43 趙暉.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89 유석이 채취령을 금지하여 민생을 도운 일도 있다.41) 다루가치를 통해 범법자 송환을 요청하지만 쌍성총관이 거부하거나, 동 북면 병마사 일임으로 강요주 채취를 금지한 사실은 표층적으로는 지역 세 력이 중앙통치에서 벗어나 막대한 자율권을 행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다 깊숙이는 총관이나 병마사의 입김을 빌어 고려 중앙차원에서 꾸준히 인적 통제를 모색했던 측면을 엿볼 수 있다. 피로인을 상당동안 방치해 두 었던 변경지대와는 자뭇 다르다. 변경 거주인에게 국가장악력이 거의 미치 지 못한데 비하면, 쌍성총관부 관할의 점이지대에는 고려 중앙정부에서 어 느 정도의 통제력을 펼칠 수는 있었던 것이다.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고려가 관리권을 행사하려 꾸준히 노력해 왔지만, 원간섭이라는 근원적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원간섭 아래 고려의 중앙집권 력 발휘가 녹녹치는 않았다. 결국은 지역 자치에 기반한 토착세력의 성장을 초래하였다. 알다시피 쌍성총관부는 원 통치체제의 하부단위로서 개원로 중서성 황제에 직속하였다. 총관ㆍ천호ㆍ다루가치만 두고 고려 중앙정부 차원의 독자적 관부를 따로 설치하지는 않았다. 쌍성총관부에 편입된 동북면은 원 에서처럼 社制가 실시되었다.42) 쌍성총관부의 유민은 정착지에 50戶를 1 社로 편성해 社長을 둠으로써 자치적으로 다스렸다.43) 社를 재지세력이 장 악하면서 그들의 경제기반으로 십분 활용 가능하였다. 게다가 쌍성총관부는 土官制로 운영되었다. 土官制는 동녕부ㆍ쌍성총관 부ㆍ탐라총관부에서만 시행되었다. 土官은 자신이 점유한 토지를 地祿으로 지급받았으며 地稅를 납부하지도 않았다.44) 공민왕 4년 12월 고려는 원의 중서성에 보고한 바, 원과 요양성 고려에서 각각 관리를 파견하여 지역에 대한 호적을 新舊로 구분한 후 三省照勘戶計를 작성하도록 하였다.45) 원에 41)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권48, 咸慶道 德原都護府 土産. 42) ꡔ世宗實錄ꡕ 권155, 咸吉道 嶺興大都護府, 社五. 43) ꡔ新元史ꡕ 권47, 地理2 審陽路. 梁元錫, 려말의 유민문제 ꡔ이병도박사화갑기 념논총ꡕ, 一潮閣, 1956. 44) 이재룡, 조선초기의 토관 ꡔ조선초기 사회구조 연구ꡕ, 一潮閣, 1984.
90 지역과 역사 39호 서도 쌍성총관부 설치 이래 22년 동안이나 여기서 조세와 공물을 부과하지 않았다. 쌍성총관부 관할지에서는 조씨ㆍ탁씨ㆍ이씨 세력이 총관ㆍ천호의 직위 를 각기 다투어 세습한데다 관하 민호를 대대적으로 지배하였다. 토호와 관 하 민호는 私的으로 주종관계에 있었다. 각 호에서는 正軍 1인을 차출시킴 으로서 토호들의 사병(家別抄)으로 삼았다. 나머지 민호는 田地를 경작하 거나 우마를 방목해서 일부를 조세 형태로 호족에게 공납하였다.46) 쌍성총 관부 총관과 천호는 받은 세곡을 일정 정도 부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 로 정치ㆍ경제적으로 자유로웠다. 한편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은 변경에 비해 물류수송을 위한 대동맥이 전 기부터 비교적 잘 갖춰졌다. 원간섭기에 이르면 개경에서 철령, 화주까지 총 16곳에 역참이 편성되어 있었다. 원은 江南 行省과 고려의 물자를 大都 로 원활히 수송하려는 차원에서 고려 역로망 정비와 40驛站 신창을 요구하 였다. 원 大都와 수도 개경 간 이동 경로는 개경ㆍ의주 방면의 기존 노선, 쌍성총관부 요동 개원에 이르는 신설루트의 두 가지이다. 당시는 원 내 지와 가까운 압록강 중류일대의 교통로가 부각되었다. 원종 후반 개창한 40참 중 개경ㆍ의주 간 역로를 제외한 나머지 驛은 개 경ㆍ화주ㆍ정주를 연결하는 간선로이다. 원간섭 초입에 개경 함흥 황초 령 만포 개원로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참역을 설치했을 가능성 이 높다. 충렬왕은 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을 계기로 동녕부와 쌍성총관부 방면으로 분기된 고려ㆍ원 사이의 공적 교통로를 동녕부 한 축으로만 운영 했다.47) 45) ꡔ高麗史ꡕ 권38, 恭愍王 4년 12월 辛未. 46) 김구진, 려말선초의 두만강유역의 여진분포 ꡔ백산학보ꡕ 15, 1973. 47) 정요근,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元)의 개입과 그 의미 ꡔ역사와 현실ꡕ 64, 2007, 170~177쪽. 森平雅彦, 高麗における元の站赤-ル-トの比定を中心にて ꡔ史淵ꡕ 141, 九州大學大學院人文科學硏究院, 2004. 모리히라는 고려에 설치 된 참치가 원의 요구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제된 것으로, 신설역로망의 대부분은 몽골침입으로 피해가 막심한 서경 이북이라 하였다. 정요근은 원간섭기에 서경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91 쌍성총관부와 개경ㆍ원 대도를 잇는 물류이동은 원종후반ㆍ충렬왕대 잠 깐 사이에 이뤄져, 원 대도로 이어지는 교통길로는 줄기차게 활용되지는 못 했다. 결과적으로 원명관계에 연속하는 대외관계의 물류 유통보다는 관할영 역 내 국지적 상품거래의 비중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쌍성총관부 관할지는 일원적 국가권력이 항시 투입되지 못한 형편에서 재지세력의 경제 기반 조성에 유리한 여건이었다. 이 지역이 고려와 원의 어떠한 간섭도 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Ⅲ. 거래 물자와 참여층 1. 변경, 군수물자 거래 동북면 경계지대는 역참ㆍ내륙 수운기구ㆍ인구정책에서 고려ㆍ원ㆍ명 의 국가권력이 침투하기에는 대단히 제한된 영역이다. 遠地에 대한 고려ㆍ 원ㆍ명 통치력 한계는 재지세력의 성장기반에 따른 공간분절 양상으로 확 산되었다. 실제 동북면 변경은 대원울루스 체제의 옷치킨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 여 있었다. 동북면에 앞서 서북면은 옷치킨가에 이미 오래전 예속되었다. 옷치킨 가문은 1258년 원 개원로를 포함하는 요동 동북지역을 손자 타가차 르에 관리를 일임하였다.48) 1278년(지원 15)을 기점으로 고려의 곡주ㆍ수 안성 역시 옷치킨가 타가차르 소속이었다.49) 옷치킨 가문 아래 정치ㆍ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합란부 함주에서 이성 이북의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초부터 요ㆍ금과 교통할 때 사용하던 기 존 역로망을 활용했다고 보았다. 큰 틀에서 원의 대고려정책에 따라 탄력적으로 역참제가 운영된 것으로 이해하는데, 원의 입김을 강조한 모리히라와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48) 윤은숙, 앞의 책, 2010, 214~215쪽. 49) ꡔ高麗史ꡕ 권28, 忠烈王 4년 8월.
92 지역과 역사 39호 계 가문은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성계 가문은 삼척ㆍ영흥 일대로 이동하다 가 금제국 멸망 이후 몽골제국의 황족 宋住의 지휘하에 여진군을 앞세워 국 내로 들어왔다. 이성계의 선대 이안사는 쌍성에 주둔한 몽골 산길대왕에게 고종 41년 김포노 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이안사는 전주에 서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을 거쳐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서 원의 개 원로 소속 남경부근(現 연길)의 오동에 정착했다.50) 오동은 여진지역에 있 었다.51) 고려 정부는 의주를 중심으로 성장한 이안사를 동북면 병마사직에 제수 하였다. 이안사는 독자세력을 키우려 몽고에 투항한 이후 쌍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권을 인정받아, 추후 산길대왕의 도움으로 南京等處 5000戶所의 수 천호겸달로화적이 되었다. 제수받은 수천호직은 후손에게 세습되었다.52) 이성계 부친 이자춘은 화주와 함주를 중심으로 사실상의 동북면 변경을 장 악해 나갔다. 이자춘이 진출할 당시 쌍성총관부 관할선은 북방으로 밀려나 사실상 합란부와 가까웠다.53) 고려의 중앙권력이 배제한 동북면 변경의 정 치세력은 추후 조선 건국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동북면 변경은 원 개원로 관할 아래 여진족이 거주한 구간이다. 원에서는 여진인에게 유목전통 기준으로 주생산의 1/100을 현물세로 납부케 하였다. 공물은 金과 鷹이 할당된데다 출정할 때 지는 軍役을 부담하는 정도였다. 원은 여진족과 마찬가지로 고려유민에 대해서도 동급의 세금을 매겼다. 원 정부에 대한 부세는 소량의 현물세에다 가벼운 공물과 役을 지는 정도였 다.54) 원의 과세체계 내에서 고려유민이 부담해야 할 몫이 그다지 크지는 50)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조선초기의 대외관계-여진과의 관계 ꡔ한국사ꡕ 22, 1995, 330~333쪽. 51) 宋基中, 龍飛御天歌에 등장하는 北方民族語名 ꡔ진단학보ꡕ 67, 1989, 97~ 103쪽. 52) ꡔ太祖實錄ꡕ 권1, 總書. 散吉大王聞于元帝 元爲立東 千戶所 給降金牌爲南京等 處 五千餘所 首千戶兼達魯花赤 53) 왕영일, 李之蘭에 대한 硏究-朝鮮建國과 女眞세력,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2003, 31쪽. 54) 岩村忍, ꡔ몽고사회경제사의 연구ꡕ, 1968, 113~115쪽. 愛宕松男, 요왕조의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93 않았다. 고려ㆍ원의 과세체계에서 비교적 가벼워 재지 토착세력이 강성하다는 것 은 재정적 물류 외곽에서 상품거래망이 私的 형태로 확산될 소지가 있다. 변경은 여진ㆍ고려인이 혼종한 지역인 탓에 여진인도 일정 정도는 경제 적 이윤 확보에 끼어들었다. 여진인 일부는 군수물자 거래에 개입하는가 하 면, 牛馬 거래에도 경쟁적으로 참여했다.55) 한참 지난 뒤의 일이지만, 동북 면 변방지대 검교 한성윤직 최교납(최야오내)은 관하 백성 140여 명을 거 느리고 귀화해서 吉州에 거주하였다가 후일 건주위 사신으로 파견되어 회환 과 무역에 종사하였다.56) 여진 향화인들이 회환과 무역에 동시에 참여해서 재리를 축적한 대표적 사례이다. 오래전부터 동북면 변경에는 고려와 여진 사이에 거래가 있어왔다. 대표 적인 거래품목으로는 화살ㆍ말ㆍ군수물자이다.57) 그 가운데 말은 전기에 는 동북면 변경에 거주하는 여진인에게 주로 수입해오다가 원간섭기에 원이 공물로 요구하자 주요수출품으로 등장하였다. 원래 공납품이던 말이 원간섭 기는 사적인 무역 거래에도 등장하였다. ꡔ老乞大ꡕ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말 의 명칭이나, 군사용으로 긴요하던 牛馬의 많은 수량이 국외로 반출될 것을 우려해서 금지를 건의한 문건은58) 무역에서 말의 비중을 반증한다.59) ꡔ老乞大ꡕ 상인의 이동루트는 개경에서 요동을 거쳐 直沽 山東 北京으 로 향한다. 이때 직접적으로 동북면 변경을 경유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당시 공물납에서 사적 교역이 기생하는 형태가 일반적 관행이라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말의 대외교역 수급망이 갖추어진 동북면 변경지대도 여기에 성립과 국가구조 ꡔ岩波講座 世界歷史ꡕ 9, 1970, 33~34쪽. 55) ꡔ高麗史ꡕ 권111, 列傳24 廉悌臣. 56) ꡔ太宗實錄ꡕ 권11, 太宗 6년 3월 18일 戊戌 ; 권19, 太宗 10년 2월 25일 壬戌. ꡔ世宗實錄ꡕ 권114, 世宗 28년 11월 21일 乙酉. 57) ꡔ高麗史ꡕ 권11, 肅宗 6년 6월 辛丑. 58) ꡔ高麗史ꡕ 권84, 刑法1 職制, 忠烈王 22년 5월 ; 권85, 刑法2 禁令, 禑王 3 년 3월, 5월. 59) 위은숙, 원간섭기 대원무역 ꡔ지역과 역사ꡕ 4, 1997, 64~66쪽.
94 지역과 역사 39호 서 크게 어긋날 리는 없다. 뒤이은 元明 교체기의 명은 內治와 함께 北元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필 요한 말을 몽골ㆍ여진ㆍ고려에 두루 요구하였다. 이후 요동의 개원ㆍ광령 ㆍ무순 3곳에 馬市를 개설하였다. 烏梁海 여진족을 대상으로 布ㆍ絹ㆍ米 를 교역했으며, 西番에서 중국 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茶馬司를 설치하 여 차를 교역하기도 했다.60) 물론 명이 주관하는 馬市 교역은 지방군사기 구인 衛所官의 칙서를 가진 자만을 허락하고 그 외 사적 교역은 엄금하는 형태였다. 정몽주 편에 명에서 보내 온 국서에 의하면 공적 旅券을 가지고 와서 교 역을 한다면야 요양ㆍ산동ㆍ금성ㆍ태창ㆍ협서ㆍ사천까지 왕래를 허락하 겠지만, 포목ㆍ비단ㆍ주단 등 물건을 가지고 가서 탐라에서 말을 구매하는 것 같은 사적 교역은 불허한다고 명시하였다.61) 水路를 이용해야 할 제주 말에 대한 공물요청과 사무역 규제를 담고는 있지만, 실상은 공무역에 수반 해서 사교역이 성행했던 정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62) 직접 전하는 사료가 없어 단정 짓기는 어려우나 동북면 변경지대에 사적 교역이 성행하던 상황이라든가, 이곳이 원 開元路 관할의 馬市 주변이라는 점은 해당지역에 군수물자 뿐 아니라 말 관련한 수급망 조성을 추정하기에 무리는 없다. 이 방면 사적 유통의 활기는 국가차원에서 온전히 환수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재지 토착세력의 경제기반으로 흡수될 소지가 있었다. 2. 점이지대, 변경 지원과 소상품 거래 동북면 변경에서 다소 떨어진 쌍성총관부 관할은 다민족의 각축전에서 60) ꡔ明史ꡕ 권92, 兵4 馬政. 61) ꡔ高麗史ꡕ 권136, 列傳49, 禑王 12년 7월. 62) 원간섭기에 고려의 말이 요동을 넘어 북경에서 거래될 때 상당한 高價로 책정되 는 점을 본다면, 이를 수급할 수 있는 富戶가 말교역에 참여했음은 알 수 있다. 당시 ꡔ老乞大ꡕ 상인이 원 북경에 생활물자를 가져간 점은 소농의 성장이 가능한 때문이다(위은숙, 앞의 논문, 1997).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95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지대이다. 지리적으로는 동계와 변경의 사이 지점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에 원간섭 이전 이른 시기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는 상 당 동안을, 사민이나 물화 수송 측면에서 양 지역을 매개하는 중간기착지 역할을 해왔다. C-1) 의주 통태 평성의 3성과 함주 영주 옹주 길주 복주 공험진을 북계 9성 으로 삼아 남계의 백성을 옮겨 채웠다63) C-2) 고려 때 평안도 평양, 함길도 화주 이북은 모두 남계민을 옮겨 채웠 다64) 조선의 세종은 북방사민을 시행하면서 고려시대 정황을 소급해서 지적하 였다. 남방지역 민의 북방 이주, 사민을 통해 북방지역을 충실시킨 점을 예 시로 들었다. 두만강 유역, 곧 변경의 주민은 북청이북ㆍ길주ㆍ경성인으로 채웠다. 북청ㆍ길주ㆍ경성은 그 남쪽의 고원ㆍ영흥ㆍ문천ㆍ안변ㆍ강원도 하삼도의 백성을 사민하였다. 사민과 마찬가지로 쌍성총관부 지역의 군자곡도 하삼도 남계 동북면 북 부 변경의 순차로 이송되었다. C-3) 충렬왕 16년 2월 합단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족 재추 승지의 반주들 은 각각 쌀 7섬씩 내게 하고 坊里의 서민들은 쌀을 차등있게 내게 하여 동계 방 수군의 군량에 충당하였다. 동16년 9월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동계 주군에 서 운반할 쌀 1천석과 쌍성 근처 및 영덕 흥해 덕원 청하 등 해변 각주에서 금 년에 운반할 쌀을 모두 쌍성에 보내 군량에 충당할 것이며, 쌍성 진수 별초말 250필의 먹이는 금년 10월부터 명년 2월까지 1250섬으로 계산하되 쌍성 근방 의 영덕 장기 덕원 흥해 청하 연일 안강 기계 신광 등 고을에서 근년에 잡공으 로 바치는 겉곡 중에서 떼내어 실어 보낼 것이다 65) 63) ꡔ高麗史節要ꡕ 권7, 睿宗 3년 3월. 64) ꡔ世宗實錄ꡕ 권94, 世宗 2년 12월 己酉 65) ꡔ高麗史ꡕ 권82, 兵2 屯田, 忠烈王 16년 2월.
96 지역과 역사 39호 동북면 남부는 전기부터 하삼도의 조세를 변방으로 운송하여 군수에 충 당하였다.66) 조창이 설치되지 않던 동해안지역의 조세는 동계로 轉運되어 지역 군수에 보충하였다. 문주ㆍ용주ㆍ등주ㆍ진명현ㆍ장평현에 수한이 들 자 춘주ㆍ교주ㆍ동주의 창곡과 종우를 지급하거나,67) 당시 원흥도부서가 관할하는 범위가 동경 근처까지를 망라한다. 우왕대에 이르면 동북계 군사 들의 군량은 옛날 경상ㆍ강릉ㆍ교주의 미곡을 운반해 지급했다 고 하였다.68) 영덕ㆍ흥해ㆍ영일은 동북면 훨씬 남단의 준남도이지만 쌍성근처ㆍ雙城旁 近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경주 주변 州의 皮穀은 집결하여 쌍성으로 운반 되고 있다.69) 쌍성총관부 하단 동북면 남부는 그 북부와 변경지대에 부족 한 인구와 군자곡을 하삼도에서 보충해오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다. 이를 테면 점이지대의 속성을 강하게 띤다. 쌍성총관부 점이지대는 물류구성ㆍ국방재정 조달방식에서 변경지대와는 미세한 차이가 간파된다. 국방재정 조달은 전기에는 군역에 복무하는 군인 에게 군인전을 지급해 그 수입으로 의량ㆍ병기ㆍ무기를 자변하도록 하였 다. 복무 중 필요한 軍裝ㆍ군량은 국가세입에서 지원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원간섭 이후 재정체계가 동요하면서 군인전 지급이 힘들어지자 군수물자 수 급도 수월하지 않게 되었다. 군수재정난을 타개할 목적으로 원간섭기에는 都監을 설치하였다. 여기에 토지를 부속하여 그 수입으로 군수품을 조달하 는 방식으로 국가차원에서 국방재원을 관할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70) 66) 67) 68) 69) 70) ꡔ高麗史ꡕ 권80, 食貨3 賑恤 水旱疾癘賑貸之制, 宣宗 11년 2월, 明宗 18년 8월. ꡔ高麗史ꡕ 권80, 食貨3 賑恤 水旱疾癘賑貸之制, 文宗 8년 4월. ꡔ高麗史ꡕ 권135, 列傳48, 禑王 9년 8월. ꡔ高麗史ꡕ 권82, 兵2 屯田, 忠烈王 16년 9월. 고려말 조선초 국방재정 관련한 연구는 다음이 참고된다(尹薰杓, 高麗末 朝鮮 初期 兵器의 製造 및 管理體系에 관한 硏究; 軍制改編과 聯關해서 ꡔ동방학지ꡕ 77ㆍ78ㆍ79합집, 1993 ; ꡔ麗末鮮初 軍制改革硏究ꡕ, 혜안, 2000 ; 麗末鮮初 軍事訓鍊體系의 改編 ꡔ軍史ꡕ 53, 2004 ; 고려말 이성계의 安邊策 ꡔ學林ꡕ 162, 2013. 吳宗祿, 高麗末의 都巡問使; 下三道의 都巡問使를 中心으로 ꡔ震檀學報ꡕ 62, 1986 ; 高麗後期의 軍事 指揮體系 ꡔ국사관논총ꡕ 24, 1991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97 국가차원의 국방재정 통제의 어려움은 군기제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 말 군기조달의 모순을 개혁하려던 조선초기에 지방에서는 1달 기한으로 군 기를 제조하고 수량을 회계하여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月課軍機制가 시행되 었다. 이 방식은 처음 서북면에서 시작되었는데 군기수요가 큰 鎭ㆍ營 순서 로 발전하였다. 평양ㆍ영흥(和州)에서는 토관제 아래 속아문으로 군기시를 설치했다. 해당방면의 군기조달은 토관이 장악하였다.71) 국가는 이들 토관 의 군기조달을 묵인해 주었다. 중앙정부차원에서 군기조달의 수급체계와 군 수물자의 수송에 관여한 토관을 장악하기란 쉽지 않던 때문이다. 군비 가운데 馬料는 쌍성의 취약한 기후여건상 확보가 용이하지 않았다. 보완 차원에서 타지의 馬料를 운수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72) 그 과정 에서 군량을 임시로 차대하거나, 과렴ㆍ억매행위를 통해서 거래가 형성되 었다. 동북면의 지휘관들은 군사를 사사로이 놓아 보낸 후 그들의 군량을 횡렴하거나, 수령으로 군량을 운반하는 책임이 있어도 중간에서 일부를 盜 用하기도 하였다.73)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군수물자가 부족해지자 원에까 지 무기공급을 요청하는 일이 잦았다.74) 여말 당시로서는 군수물자 조달과 군비 문제에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하 여, 군수전 징수와 운임비 발생이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이 문제는 공민왕 때 동북면을 수복하면서부터 관건으로 떠올랐다. C-4) 근년 이래 군수전에서 농사짓는 자들이 거듭되는 징수와 먼길 운반으 로 인하여 밭갈이를 하지 못하여 묵인 땅이 많으니 군수전에서 받을 양은 그 71) 72) 73) 74) ; 朝鮮初期 兩界의 翼軍體制와 國防 ꡔ한국사학논총ꡕ 상, 수촌박영석교수화 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2 ; 조선초기의 국방정책; 양계(兩界)의 국방을 중 심으로 ꡔ역사와 현실ꡕ 13, 1994 ; ꡔ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ꡕ, 국학 자료원, 2014). 尹薰杓, 고려말 國防財源 조달체계의 개편 ꡔ역사와 실학ꡕ 13, 1999, 360~ 361쪽. ꡔ高麗史ꡕ 권82, 兵2 屯田, 忠烈王 16년 9월. ꡔ高麗史ꡕ 권135, 列傳48, 禑王 9년 8월. ꡔ高麗史ꡕ 권38, 恭愍王 원년 윤3월 丁未, 원년 6월 己酉.
98 지역과 역사 39호 1/3을 줄여 받도록 하라하였다.75) 우왕 원년 2월에 군자곡 수송 관련한 논의이다. 군자곡의 육로수송 비용 이 큰 부담으로, 하삼도에서 육운해서 개경까지 와도 50%의 운송비를 소모 하였다. 水路도 불안하고 海路는 당시 왜구의 준동으로 위험하였다. 동북면 행정체계도 미비한 상황이었다. 道內 田稅로 군자곡을 충당하기에는 더욱 역부족이었다. 전반적으로 군자곡 수송과제가 대두하는 분위기에서76) 우왕 8년 이성계 는 동북면을 위시한 양계지역 군량확보 관련한 안변책을 제시하였다.77) 여 기서는 당시 권문과 승려가 군수물자 거래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 도 권세가 출신이거나, 首領 將帥, 권문과 연계된 상인, 왕실과 친인척, 원 에 의탁한 재지세력이 군수물자 거래에 가담하였다.78) 군수물자 거래 형태는 포백을 억지로 나누어주고 미곡이나 군수품을 거 두어들인 다음 이것을 他地에 유통해서 차익을 남기는 게 태반이다. 일부는 관청이 보유하던 값나가는 물건, 絹 같은 물품을 관료와 민간에게 억지로 분급한 대가로 군량을 매집하기도 하였다. 억매를 통한 軍資 조달방식은 당 장의 생필품을 교환하지는 못했다. 과렴과 유사하게 민을 압박하는 강도가 심했다.79) 수령ㆍ장수 가운데는 서울에서 아는 사람과 짜고 포백을 가져다 가 관할지 민호에게 나누어 미곡을 징수한 후 군수품과 교환하여 轉運하기 도 하였다. 私利를 획득하는 것이 수월했다.80) 미곡을 군용으로 충당하라 지시한 앞선 우왕대 기록은 군수물자 수송을 둘러싼 사적 유통구조의 진전 을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75) ꡔ高麗史ꡕ 권80, 食貨3 賑恤, 禑王 원년 2월 76) ꡔ高麗史ꡕ 권82, 食貨2 屯田, 恭愍王 20년 12월, 禑王 원년 2월 ; 권82, 食貨3 賑恤, 禑王 원년 9월. 77) ꡔ高麗史ꡕ 권135, 列傳48, 禑王 9년 8월 78) ꡔ高麗史ꡕ 권81, 兵1 兵制, 禑王 14년 8월. 79) ꡔ高麗史節要ꡕ 권21, 忠烈王 13년 6월. 80) ꡔ高麗史ꡕ 권85, 刑法2 禁令, 禑王 5년 1월.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99 여말부터 동북면 북부 변경지대로 남계의 인구와 대규모 병력 이동이 이 루어졌다. 동북면 남부는 식량을 매집해서 다시 북부로 이동해야 하는 문제 가 생겨났다. 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조선초에는 여말 쌍성총관부 구간에서 군량수요의 차별이 생겨났다. 특정지역에 병력의 집중 지원을 요구하여 나 타난 현상으로, 국경지대의 몇 개 거점으로 군사와 군량이 몰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81) 여말부터 쌍성총관부 관할에서 군량조달 관련한 유통권역의 생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쌍성총관부 관할, 동북면 점이지대는 군수물자 수송과 관련하여 회환제 가 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원래 회환제는 상인층을 토호로 대체하고 官이 개입해서 쌀의 유통구조를 바꿈으로써 생필품은 통용케 하고, 쌀은 관내에 서만 유출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회환제는 운임문제를 염두하여 지역 자체 내에서 군자곡을 충당하려는 목적에서 시도되었다. 본격적 차원의 회환제는 아니지만, 군량조달 문제가 불거지면서 회환의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동북면 점이지대는 군자곡ㆍ馬料 뿐 아니라 소농이 주로 참여하는 생활 물자 거래도 시작되었다. 조선 세종대 확인되는 거래물품은 말ㆍ갓ㆍ빗ㆍ 면포ㆍ종이ㆍ소금ㆍ의복ㆍ신ㆍ바늘ㆍ화장품이나 기호품이다.82) 앞선 태 종 정부는 이들 물품을 雜物 정도로 인식해 왔지만83) 실제로는 민간에서 절용한 품목이다. 조선 태종ㆍ세종대는 서북면을 위시한 동북면 방면의 개척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태종ㆍ세종대 이 방면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雜物 생활물자 거래 상황을 국가차원에서 인지하는 정도일 테지만, 사실은 여말부터 소상품 거 래가 바탕되어야 기록이나마 남을 수 있는 일이다. 대개 거래되던 생활물자 는 군자곡 수송에 따르는 운송이익보다는, 판매 이윤을 노리는 품목이다. 81) 임용한, 회환제를 통해 본 조선의 상업정책과 딜레마 ꡔ한국중세사연구ꡕ 37, 2013, 380~383쪽. 82) ꡔ世宗實錄ꡕ 권100, 世宗 25년 6월 戊戌. 83) ꡔ太宗實錄ꡕ 권33, 太宗 17년 5월 壬辰.
100 지역과 역사 39호 Ⅳ. 동북면 분절구조 극복 노력 동북면 긴 벨트의 경계를 구성하는 변경ㆍ점이지대는 인적ㆍ물적 시스템 뿐 아니라, 거래 물목도 차이난다. 주민 분포, 물품 거래권역에 대한 손질은 각각 인구통제와 도관찰사제 시행의 두 축으로 진전되었다. 인적 통제는 동북면 변경과 점이지대에서 時差는 물론 각기 다른 방식으 로 이루어졌다. 월경금제와 쇄환ㆍ동화ㆍ귀화정책이 그것이다. 변경은 월 경 금제조치와 쇄환으로, 점이지대는 쇄환보다는 적극적 동화정책을 주로 하였다. 쌍성총관부 관할의 동북면 점이지대에는 원간섭 훨씬 이전부터 여 진 투화인을 동화하고 고려 유민을 쇄환한 시도가 누차 있어왔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여말선초 동북면에 몰린 다양한 유리민ㆍ피로인을 쇄환하여 편 적하려는 정책은 변경에 특정되었다. 元明 교체기 고려의 동서국경에서는 유리민의 왕래 뿐 아니라, 국가 통제 망에서 비껴난 사적 상행위를 의도한 월경이 잦았다. 이러한 월경행위를 국 가권력 안으로 포섭하기 위한 또다른 노력이 착실하게 진전되었다. 다름아 닌 文引의 발급이다. 월경을 하려면 국가에서 발급하는 증명서를 교부받아 야 가능했다. 원 내지에 소상품 판매를 목적으로 왕래하던 老乞大 상인에게 지급한 文引84)은 무역허가증에 해당한다. D-1) 그때 중찬 김방경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이르러 김천의 부 자를 불러보고 칭찬과 감탄을 마지 않았으며 원나라 총관부에 부탁하여 증명서 를 교부하며 원으로부터 식사와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귀국하도록 하였다85) D-2) 조서를 개독한 다음에 고려에도 가십니까? 저도 금강산 선원사 송광사 등지에 분향하러 가는데 형님은 언제 떠나십니까? 이달 스무날 쯤 떠날 것입니 다. 소인도 箚付關字를 얻으면 곧 말을 탈 것입니다. 聖旨를 받았습니까? 받았 84) 鄭光, ꡔ譯註 飜譯老乞代ꡕ, 太學社, 1995. 85) ꡔ高麗史ꡕ 권121, 列傳34, 孝友 金闡.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101 습니다. 나는 어리석고 노둔한 사람이라 그쪽 법도를 알지 못하니 당신이 본국 (고려)에 가거든 저를 좀 보살펴 주십시오 86) D-3) 군민 역조 의복 공악의 인호를 편적하여 부역을 회피해서 도망하고 감 면하려 한 자는 장 80대 형벌에 처한다. 관사에서 거짓 승인하여 판적을 소요케 한 자 각 衛의 군인에 대해서는 장 100대 邊遠에 충원하도록 한다.87) 원과 접촉을 시작할 즈음 위 김방경의 언급처럼 월경 금제조치는 국가에 서 교부증을 발급하는 정도였다. 박통사 얘기는 월경행위에 대한 문건발송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 箚付關字는 도당 총병관이 문서에 있는 사건을 모아서 처리하도록 지시한 서류이다. 關字는 關文이라고도 하는데 여행자 에게 말과 먹을 것을 공급해 주도록 관청에서 발급하는 허가서이다.88) 이 후 명은 월경에 대해 적극적으로 쇄환조치를 강행하는가 하면 통제의 수위 를 높였다. 월경인 쇄환 전례에 따라 명 자국민의 이탈을 방지하고 국법으 로 월경을 처단하였다. 월경인 외에 표류민은 한족ㆍ여진족ㆍ일본인을 구 분하여 한족에 대해서만 송환하고 여진족은 상황에 따라 송환 여부를 결정 하였다. 명이 월경 행위를 적극적으로 금제하는 조치에 수반하여, 여말 중 앙 정부차원에서는 월경을 법령으로 규제하려 하였다.89) 인적 통제보다 한층 적극적으로는 동북면 경계지대의 물류이동에 따른 분절공간을 행ㆍ재정적 차원에서 통제하려 하였다. 제도적 개편은 한계를 지니기는 해도, 원간섭 때부터 전국단위 지방제 정비에 맞물려 착실히 이루 어졌다. 동북면은 본래 속현 없이 防禦州와 鎭으로만 편성되었다. 여말 방어주를 정비 대상으로 삼다가 미처 손대지 못한 지역은 태종 13년에 知郡事로 개편 하였다. 쌍성총관부 점이지대 의주ㆍ문주가 대표적이다. 조선초기에는 고 86) ꡔ朴通事諺解ꡕ, 서울대규장각, 2004. 87) ꡔ大明律集解附例ꡕ 권4, 戶役 人戶以籍爲定戶律. 88) 정승혜 외, ꡔ朴通事-差使가는 길에 원나라 大都를 거닐다ꡕ, 박문사, 2011, 44~ 47쪽. 89) ꡔ高麗史ꡕ 권130, 列傳43 崔暺 ; 권23, 高宗 34년 3월 丁未 ; 권39, 恭愍王 5년.
102 지역과 역사 39호 려시대의 변화에 기초하여, 남아있던 주진을 대상으로 정리하였다. 진은 방 어주에 비해서 소규모였으며 일반 군현체계로의 개편을 지향하였다.90) 동 북면 일대 군현정비가 차등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전임 외관의 파견도 그러 했다. 충선왕은 복위 후 지방제도를 정비하는데 5도에는 제찰사, 양계에는 존무사를 설치하였다.91) 공민왕 5년 이후 쌍성총관부가 혁파되자 동 20년 에는 동북면에 도순문사ㆍ도절제사로 명칭을 개정하였다.92) 공양왕 원년 조준이 양계에도 관찰사 파견을 요청하였다.93) 조선의 태조 2년 10월 7일에는 고려의 전례대로 동북면 일대에 성보를 수축해서 道ㆍ州ㆍ군현의 명칭을 부여했다. 강역도 구분하였다. 동 7년에 는 주부군현의 명칭을 개정하였다. 안변이북에서 청주 이남을 영흥도, 단천 이북은 공주, 이남은 함길도라 하여 모두 동북면도순문찰리사가 통제하였 다. 드디어 태종 13년에는 양계의 명칭이 동북면ㆍ서북면에서 영길도ㆍ평 안도라 개칭되었다.94) 상당기간 동안을 동북면은 도관찰사제 파견에서 제 외되다가 태종 17년에야 前왕조 공양왕 2년 서북면 도절제사가 형식적으로 관찰사를 겸하던 수준을 벗어나,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성곽의 축성과 역참 정비는 동북면 변경과 점이지대는 時差를 달리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태조 2년 이지란을 동북면 도안무사로 삼아 갑 주ㆍ공주에 축성을 단행했다. 홍원ㆍ청주ㆍ단천ㆍ길주ㆍ금성ㆍ경원 소속 역참의 명칭을 새로이 고친데다 경원부에 축성을 단행하였다.95) 남도나 서 북면에 비해 늦어지긴 했어도 여말부터 국가차원에서 해당지역의 제 기반을 수렴하려 노력한 결과, 동북면 일대 정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90) 윤경진, 앞의 논문, 2015, 346~351쪽. 91) ꡔ高麗史ꡕ 권34, 忠肅王 원년 正月 ; 권77, 百官2 外職 按廉使. ꡔ高麗史節要ꡕ 권22, 忠宣王 원년 2월. 변태섭, 앞의 책, 1980, 231~233쪽. 92) 원영환, ꡔ朝鮮時代 漢城府 硏究ꡕ,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0. 이수건, ꡔ조선시대 지방행정사ꡕ, 민음사, 1989. 장병인, 조선초기의 관찰사 ꡔ한국사론ꡕ 4, 1978. 93) ꡔ高麗史ꡕ 권45, 恭讓王 2년 12월. ꡔ高麗史節要ꡕ 권34, 恭讓王 원년 12월. 94) ꡔ太宗實錄ꡕ 권26, 太宗 13년 10월. 95) ꡔ太祖實錄ꡕ 권4, 太祖 2년 8월 乙酉 ; 권12, 太祖 6년 12월 更子, 壬寅 ; 권 13, 太祖 7년 12월 庚辰 癸巳.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103 앞서 지적한 바, 같은 쌍성총관부 관할에서도 공민왕 5년까지 시종일관 원에 속해 있던 정주ㆍ화주 지역은 지속적으로 원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지역이지만 충렬왕 16년 동녕부 상환과 때맞춰 고려에 환속된 등주이북ㆍ 문주ㆍ덕원 일대는 준남도와 가까이 있으면서 동계와 몰입이 빈번한 지역 이다. 이 지점은 원에 직속된 시기가 비교적 짧아 상대적으로 고려적 색깔 이 더 짙다. 원의 영향이 지속되던 구간은 차제에 공민왕 5년 朔方道로 운영되다가 갑주ㆍ길주지역 개척과 동시에 함길도로 재편되었다. 함길도 방면은 변경 에 신개척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잠시 만호부를 두다가, 한시적으로 조선 초 靑海道라는 명칭이 확인되기도 한다.96) 나머지 등주이북ㆍ덕원ㆍ문천 일대는 강릉도로 분리되어 교주도와 함께 운영되다가, 삭방도의 재설정을 계기로 재차 분속되었다. 원간섭기 쌍성총관부 관할은 각각 삭방도ㆍ강릉 도로 분속되어 한동안을 혼동되었다. 조선초에 강원도ㆍ함길도 지방에서만 神布를 거둔 것은 흥미롭다. 함경 북도평사 柳沃은 神布가 함경남북도에만 있는 것이라 거론했으나97) 실제 강원도에서도 음사를 숭상하고 무격이 성행하여 신포를 징수하기에 이르렀 다.98) 전국에서 함길도와 강원도 두 곳만 신포를 징수하는가 하면, 兩道의 명칭이 혼동되기도 한다. 여말 이래 이 방면의 행정적 혼동 像이 잔영으로 남아있는데다, 상호간 인지적 분리가 쉽지 않던 연유이다. 여말의 국가 집권력으로는 동북면 경계 의 인적ㆍ물적 기반차이와 다원 적 권력을 통합하기 어려웠다. 공민왕 5년 강릉삭방도, 동 9년 삭방강릉도 로 혼칭되거나 분합 과정에서 연혁과 명칭이 통일되지 못한 것도 그 연장선 이다.99) 조선전기에 와서야 원의 입김이 강고했던 점이지대와 변경의 신개 96) 윤경진, 고려말 조선초 東界의 운영체계 변화와 道의 재편 ꡔ한국중세사연구ꡕ 44, 2016, 256~260쪽. 97) ꡔ世宗實錄ꡕ 권32, 世宗 8년 5월 戊午. ꡔ中宗實錄ꡕ 권29, 中宗 12년 9월 乙未. 98) ꡔ中宗實錄ꡕ 권20, 中宗 9년 2월 乙未. 김순남, 15세기 중반~16세기 조선 북 방 군역의 폐단과 군액 감소 ꡔ조선시대사학보ꡕ 61, 2012. 99) ꡔ高麗史ꡕ 권58, 地理3 東界 沿革.
104 지역과 역사 39호 척지를 동일시 여겨, 함길도(영길도)의 단일 명칭으로 정리하였다.100) 이상 여말 동북면 경계지대의 분절구조는 조선전기 일원적 국가권력의 수립으로 극복 가능해졌다. 전 왕조의 정주ㆍ화주 이북~변경일대는 조선 초에 역참을 신설 추가하지만, 등주 방면은 기존 역로망을 재정비하는 수준 이었다. 이는 동북면 전체를 통합적으로 정비하면서도, 변경 점이지대 각 구간의 물류 대동맥과 인적ㆍ경제적 기반 차이를 감안하여 효과적으로 통 제를 가했다는 의미이다. 맺음말 元明 교체기 동북면 전체는 쌍성총관부와 합란부가 관할하였다. 쌍성총 관부 퇴축을 기점으로 최전선에서 1차 방어라인을 형성하는 변경지대와 쌍 성총관부 관할의 후방 점이지대로 구분된다. 동북면의 변경과 점이지대는 각각 주민분포와 거래되는 대상물자와 참여층도 달랐다. 합란부 관할의 변경은 여진ㆍ원ㆍ명과 교차하는 최전선이라서 군수물자 관련한 軍糧ㆍ馬料의 물류이동이 두드러진다. 말무역ㆍ馬料ㆍ군수물자 수 송에 따른 운송차익을 노리는 상인이 주 거래층이다. 쌍성총관부 관할의 점 이지대는 하삼도에서 이송해 온 군자곡을 변경으로 옮기는 중간지대적 역할 을 한다. 차제에 동북면 일원에서 군사적 수요가 증가하면 후방에서 변방에 군수물자를 지원할 뿐 아니라 생활물자 수송과 거래도 이루어졌다. 변경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국지적 형태의 소상품 거래도 시도되었다. 주민구성에서도 동북면 경계지대는 강한 분절성을 띠었다. 합란부 관할 의 변경은 고려인ㆍ여진인ㆍ한인이 공존하는 문화혼종의 경계구간이다. 쌍 성총관부 지역은 고려의 국가권력이 항상적으로 미치지는 못한데다 원의 관 리에서도 느슨하였다. 광폭의 동북면을 구성하는 변경ㆍ점이지대의 각 지 100) ꡔ太宗實錄ꡕ 권26, 太宗 13년 10월.
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105 점은 다원적 권력이 공존하거나 혹은 일원적 권력에서 소외된 틈바구니에서 탄생한 경계 지대라 할 수 있다. 元明 교체기 동북면 경계지대의 공간분절 양상에 대한 극복방안으로 여 말 중앙정부는 編籍이나 월경 금지안을 내놓았다. 이같은 수준으로는 동북 면 경계지대의 계층적 영역분점을 근절하기 어려웠다. 조선전기 양계 주진 의 개척과 도관찰사제 파견까지는 실제적인 청산을 기다려야 했다. 조선전기 동북면을 손질하는 과정은 순차적이면서 차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정비의 속도는 영역분점에 따른 인적ㆍ물적 기반의 차이 에서 연원한다. 여말 동북면 변경ㆍ점이지대가 각각 경계를 구성하는 분절 지점을 형성했다면, 조선에서는 동일 경계띠 로 파악하여 이들을 광범위하 게 엮어 대통합을 지향하였다. 원ㆍ고려의 국가권력이 긴축하던 쌍성총관 부 영역과 변경의 신개척지를 광역단위로 엮어낼 수 있던 구심력, 그 함량 이 한껏 키워진 때문이다. 元明 교체기 동북면 일대 영역구분과 다층적 권력의 투입을 통해 전근대 고려사회의 경계지대, 분절적 공간론, 국가론의 입체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본 연구를 제시하였다. 경계ㆍ소수ㆍ타자성이라는 관점에서 고려 시대에 적용 가능한 틀을 만들려다보니 의욕만 앞섰다. 그러다 보니 정치한 분석을 통한 구체적 像을 그려내지 못했다. 큰 주제를 쪼개고 좁히는 작업 은 다음을 기약한다. 참고문헌 ꡔ高麗史ꡕ, ꡔ高麗史節要ꡕ, ꡔ大明律集解附例ꡕ, ꡔ明史ꡕ, ꡔ世宗實錄ꡕ, ꡔ新元史ꡕ, ꡔ新 增東國輿地勝覽ꡕ, ꡔ遼東誌ꡕ, ꡔ元史ꡕ, ꡔ中宗實錄ꡕ, ꡔ太祖實錄ꡕ, ꡔ太宗實錄ꡕ 권영국, 고려전기 동북면과 동해안의 방어체제 ꡔ숭실사학ꡕ 30, 2013. 김선민, 한중관계사에서 변경사로-여진 만주족과 조선의 관계- ꡔ만주연구ꡕ 15, 2013. 김순자, ꡔ韓國 中世 韓中關係史ꡕ 혜안, 2007. 모리스 스즈키 테사ㆍ임성모 옮김, ꡔ변경에서 바라본 근대 서울ꡕ, 산처럼,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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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東北面 경계의 공간분절과 多層的 권력 107 Abstract Spatial Segmentation and Multi-layered(多層的) Power in the Northeastern Border Region(東北面) in the Late Goryeo Dynasty Jeong, Eun-Jeong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the entire Northeastern Border Region(東北 面) were administered by Ssangseongchonggwanbu(雙城摠管府) and Hapranbu(合 蘭府). This region were divided into two areas which had different features in terms of population distribution, commodities for transaction and forms of participation: the frontier zone forming the primary defense line and the tranzition zone(漸移地帶) behind the line under the control of Ssangseongchonggwanbu. First, the frontier zone under Hapranbu at the forefront of the border between Jurchen, Yuan and Ming saw the remarkable flow of provisions(軍糧) and fodders (馬料). On the other hand, the tranzaction zone under Ssangseongchonggwanbu functioned as a middle zone for transporting provisions from the three lower southern provinces(下三道) to the border region. Second, as for the composition of residents, there coexisted Goryeo Koreans (高麗人), Jurchen people(女眞人) and Han Chinese(漢人), while the transition zone, excluded from the control of the government of Goryeo, had freedom from the centralized control of the governments of Goryeo, Yuan and Ming, thereby being developed the private distribution structure, not to mention those who from this region had the leading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Joseon. In order to overcome the spatial segmentation in the late Yuan Dynasty and the early Ming dynasty, the central government forbade the local residents from
108 지역과 역사 39호 legitimizing those who were not belonging to their family(編籍) or crossing the border(越境). However, these restrictions turned out not to be effective to resolve problems in the Northeastern Border Region, which would be dealt by a set of policies in the earlier Joseon Dynasty, such as the establishment of Jujin(州鎭) in the each border(兩界) and the detachment of Dogwanchalsa(道觀察使). The policies on the Northeastern Border Regi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adopted gradually and discriminately, because of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and material bases. Whereas the frontier and transition zones in the Northeastern Border Region formed respectively segmentalized points comprising the boundaries, the Joseon government tried to unify these region as the same border line(境界 띠). This is because the centripetal force of Yuan and Goryeo s government power increased to the extent of covering a wide range of territories including diminished area under the control of Ssangseongchongwanbu and new frontiers at the border. Keywords : Border, Frontier, Transition Zone, Commodities for Transaction, Segment Sstructure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09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109~151쪽여말선초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109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01)정 영 현* 머리말 Ⅰ. 왜구에 의한 납치 양상 1. 납치의 발생과 양상 2. 납치의 목적 Ⅱ. 피로인의 쇄환 1. 쇄환의 배경과 특징 2. 각 세력의 쇄환 양상 맺음말 국문초록 14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창궐한 왜구는 단순한 국지적 활동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았다. 왜구의 약탈물은 미곡과 인신이 대부분이다. 인신의 경우, 왜구에 의해 납치되어 노 예로 사역되거나 轉賣되었다. 왜구가 인신을 납치한 목적은 약탈 행위의 편의를 얻기 위해,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그리고 매매를 통한 재화의 획득을 위한 것이었다. 被虜人의 쇄환의 주체는 日本國王부터 재지세력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었다. 쇄환 의 출발장소는 대체로 九州 일대로 한정되는데, 그 원인은 일본 내에서 전국적인 노예 시장이 활성화되기 않았기 때문이다. 왜구와 관련을 가지는 對馬나 九州의 여러 세력 등에 의해 피로인이 쇄환되는 경우, 그 양상 역시 倭寇的인 특징을 띠었다. 琉球는 왜구 피로인을 매매하는 시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대마도 정벌 이후 위기감 을 느껴 被虜人을 쇄환하고 고려와 외교관계를 시작했다. *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octagram@hanmail.net).
110 지역과 역사 39호 왜구 被虜人은 고려의 民으로 대체로는 토지에 정착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왜구에 의해 납치되면서, 이들의 위상은 인간에서 상품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외교적인 접촉을 통해 일부 피로인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수많은 피로인 들은 이국에 그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쇄환되는 과정을 달리 살펴보면, 조선 정부와 다양한 층위의 일본 세 력의 사이에서 일어난 進上-回賜 무역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결국 被虜人은 외교관계 속에서도 높은 가치의 상품 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주제어 : 왜구, 피로인, 쇄환, 쓰시마, 규슈 머리말 14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창궐한 왜구는 한반도를 비롯하여 중국 연해지 대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이 시기의 왜구는 단순히 국지적인 활동이 아니라, 동아시아 정세와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의 약탈물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피해상황 자체를 분석할 뿐만이 아 니라, 왜구가 무엇을 노리고 한반도를 침입했는지, 왜구의 약탈 방식은 어 떠했는지, 약탈물을 어떻게 처분했는지를 살피는 것은 왜구는 어떤 존재였 는가를 밝혀내는 데 일조하는 중요한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사료를 통해 살펴보면, 왜구는 약탈물을 노리고 한반도에 상륙했으며, 간 혹 살인ㆍ방화ㆍ파괴 행위만이 보고된 사료라고 해도 이것 역시 약탈에 부 수된 행위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약 어떤 이득을 노리지 않았 다면 굳이 바다를 건너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구의 약탈물을 보면 그 대부분은 미곡과 인신이다. 하지만 이 이외에도 가치가 있는 것이 보인다면 모두 약탈해갔을 것이다. 특히 각종 미술품과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11 공예품, 도자기 등이 발견된다면, 미곡에 비해 훨씬 값어치 있는 약탈물이 되었을 것이다. 미곡 피해는 대부분 조운선 혹은 조창, 관청을 공격하여 약탈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조운선 및 조창의 경우, 국가의 조세가 되는 대량의 미곡(및 각종 공납품)이 수로를 따라 대거 이동하는 상황에서, 바다를 건너 약탈행위를 하러 온 왜구들에게 좋은 목표물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왜구의 활동영역이 고려의 조운 루트를 중심으로 하여 점차 확대되어 간 것은 그것 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왜구의 피해로 인해 고려 조정이 조운은 중단하는 시기와 왜구가 내륙까지 침입하게 된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 이 지적되기도 했다.1) 또한 왜구가 미곡을 약탈하고 수송하는 과정에서 동 시에 인신의 납치가 일어나기도 했다는 연구도 있었다.2) 사료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관청 외에도 민가의 피해도 컸을 것이다. 일반 소농민의 뒤주라고 약탈의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특 히 대량의 미곡을 축적한 지주들의 창고는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미곡의 약탈에 대해 기존의 연구에서는 왜구가 미곡의 획득을 의도하고 고려로 건너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왜구가 고려로 건너온 배경에 대해 전 란 혹은 흉년으로 인해 對馬 혹은 九州 지역의 식량이 부족해진 상황을 들 거나, 혹은 南北朝 쟁란기에 九州의 지방 세력이 병량미 획득을 위해 의도 적으로 병력을 파견했다는 연구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3) 실제 왜구의 주요 구성원이 되는 對馬나 九州의 海民들이 漁撈 혹은 밀무역 등의 활동을 통해 고려가 해로를 통해 대량의 미곡을 수송하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 성이 크므로, 미곡 자체의 획득을 의도했을 소지는 다분하다고 보인다. 1) 羅鍾宇, ꡔ韓國中世對日交涉史硏究ꡕ, 원광대학교 출판부, 1996, 146쪽. 李領, ꡔ倭寇と日麗關係史ꡕ, 東京大學出版會, 1999, 256쪽. 정영현, 고려 禑王代 倭 寇의 동향과 성격 변화 ꡔ역사와 세계ꡕ 33, 2008. 2) 太田弘毅, 朝鮮半島における詐術の形成 ꡔ倭寇 - 商業ㆍ軍事史的硏究ꡕ, 春風 社, 2002. 3) 이영, 경인년(1350)~병신년(1356)의 왜구와 규슈 정세 : 쇼니 요리히사(少貳 賴尙)를 중심으로 ꡔ한국중세사연구ꡕ 26, 2009.
112 지역과 역사 39호 이렇게 일본으로 약탈된 미곡이 어떻게 유통되고 소비되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면 왜구가 미곡을 약탈한 배경이나 그들의 주체세력 등의 문제 등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약탈된 이후 미곡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직접적인 단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또다른 대표적인 약탈물인 人身의 경우는 어떠한가. 왜구에 의 해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高麗人에 대해서는 한 단어로 피왜부로(被倭 俘虜)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4) 이는 그렇게 널리 쓰이는 표현이 아니 므로 여기서는 조금 더 보편적인 용어로서 倭寇 被虜人 혹은 被虜人 으로 축약해서 사용하도록 하겠다. 기존에 被虜人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倭寇에 의해 납치된 被虜人의 처우 나 이후 외교적 교섭의 결과 고려로 쇄환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많다.5) 이들은 원래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는 고려의 民이었지만, 왜구의 침략을 맞 아 하나의 약탈물로서 일본으로 끌려가는 운명을 맞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 은 살육을 당하거나 왜구가 해안에 풀어주는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부 분 일본으로 끌려가 각종 노역에 종사하였다. 또한 이곳저곳 팔려 다니다가 琉球까지 흘러들어가기도 했다. 이후 고려 혹은 조선 정부와 일본의 외교적 교섭 결과, 이들 중 운이 좋은 일부는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에도 日本國王(室町將軍)이나 지방 세력, 琉球國王 등이 조선과의 우호를 위해 이들을 수색하여 고려로 돌려보내었고, 조선정부는 피로인 쇄환에 대해 가 능한 최선의 사례로 이에 응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고려 인신의 약탈과 그들의 쇄환과정 등을 통해, 당시 이 를 둘러싸고 양국의 경계 지역에서 일어난 사회적인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 다.6) 그리고 당시 일본 九州의 시대적 흐름이 납치와 쇄환 과정이나 양상에 4) 孫弘烈, 麗末ㆍ鮮初 被倭俘虜의 刷還 ꡔ史叢ꡕ 19, 1975. 5) 秋山謙藏, ꡔ倭寇ꡕによる朝鮮ㆍ支那人奴隸の掠奪とその送還及び売買 ꡔ社會經 濟史學ꡕ 11-8, 1932. 石原道博, 倭寇と朝鮮人俘虜の送還問題(一)ㆍ(二). 朝 鮮學報ꡕ 10, 1956. 孫弘烈, 위의 논문. 關周一, 倭寇による被虜人の性格をめ ぐって ꡔ日本歷史ꡕ 519, 吉川弘文館, 1991. 한윤희, 여말선초 피로인 송환에 관한 한 고찰 ꡔ일본연구ꡕ 36, 2014 등.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13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왜구에 의한 납치 양상 1. 납치의 발생과 양상 ꡔ高麗史ꡕ, ꡔ高麗史節要ꡕ, ꡔ朝鮮王朝實錄ꡕ 등의 사료를 통해 보았을 때, 왜구에 의해 가장 많이 약탈된 물자는 米穀으로 파악된다. 단순히 漕船 혹 은 漕倉을 약탈당했다 는 표현 역시 대체로 米穀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해 석할 수 있다. 그리고 米穀 그 다음으로 많이 약탈된 것이 바로 人身이다. 사료를 통해 보면, 倭寇에 의한 人身의 납치는 다음 사료를 통해 처음으로 나타난다. 2-1. 倭賊이 固城과 漆浦(현재의 함안군 칠원)에 침입하여 漁夫를 사로잡아 갔으므로 대장군 韓希愈를 파견하여 바닷길을 지키게 하였다. 또 忽赤 巡馬 여 러 領府 등에서 2백 명을 선발하여 경상도 전라도로 나누어서 수비하게 하였다. 왜적이 또 合浦(현재의 창원시 마산)에 침입하여 어부 2명을 잡아갔으므로 이 에 대장군 인후, 낭장 지선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7) 이 사료에서는 왜구가 固城과 漆浦, 그리고 合浦 등 경상도 연해 지방을 침입한 정황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물품이 아니라 어부가 납치되고 있는 데, 아마도 해상에서 바로 납치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때 의 倭賊 들은 계획적으로 약탈을 위해 한반도 연해로 건너왔을 수도 있지 만, 기본적으로 高麗 연해에서 釣業 중이던 일본의 海民이 半우발적인 상황 6) 境界 라는 것은 근대의 국경지역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국경지역은 확정된 국경 선을 중심으로 그 부근지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전근대의 境界 란 대 체로는 王京을 중심으로 점차 멀어질수록 경계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는 양상을 띤다. 村井章介, ꡔ日本中世境界史論ꡕ, 岩波書店, 2013. 7) ꡔ高麗史ꡕ 권29, 세가29, 충렬왕 6년(1280) 5월.
114 지역과 역사 39호 에서 고려의 漁民과 그들이 채취한 해산물 등을 함께 약탈했을 가능성도 크 다고 생각된다. 2-2. 왜구들이 會原(현재의 창원시 마산)의 漕船을 群山島에서 약탈하고 戊 子에 또 楸子島 등 섬에 침구하여 老弱男女를 노략하여 갔다.8) 위는 충숙왕 10년(1323)의 기사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왜구들이 群 山島(현재의 선유도)~楸子島에 이르는 서남해안에서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다.9) 이때 왜구들은 老弱男女 를 노략하여 갔다 라고 서술되어 있으며, ꡔ高麗史節要ꡕ 동일 기사에는 老少男女 라고 되어 있다.10) 즉, 적어도 이 왜구는 특별히 성별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고 납치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닥 치는 대로 人身을 약탈해갔던 것이다. 위의 두 사료에 등장하는 왜구가 크게 창궐하기 시작한 것으로 언급되는 충정왕 2년(1350), 소위 庚寅年의 왜구 보다 앞선다. 이 시기는 흔히 왜구 창궐의 배경으로 지목되는 九州 내의 南北朝 쟁란보다 앞선 시대이므로, 별 도의 외적 계기 없이 일반적인 의미의 해적 집단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남해안 지역에서 활동한 것은, 본거지와 지리적으로 가까 울 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물길이나 조운로 등의 정황을 잘 알았기 때 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기존에 오랜 기간에 걸친 해적 경험이 축 적ㆍ공유된 것이 그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실제 倭寇 라는 단어는 廣開土大王陵碑 를 제외하면 高宗 10년(1223) 5월 갑자 조의 倭寇金州 11)라는 사료에서 비롯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이후부터 이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그에 앞 서 宣宗 10년(1093) 7월 西海道按察使의 보고에 따르면, 安西都護府 관 8) ꡔ高麗史ꡕ 권35, 세가35, 충숙왕 10년(1323) 6월 정해. 9) 會原을 출발한 漕船을 群山島에서 약탈한 것 이므로 약탈 지역은 群山島로 보아 야 할 것이다. 10) ꡔ高麗史節要ꡕ 권24, 충숙왕 10년 6월. 11) ꡔ高麗史ꡕ 권22, 세가22, 고종 10년(1223) 5월 갑자.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15 할하에 있는 延平島의 巡檢軍이 海船 1척을 나포하였는데 宋人 12명과 倭 人 19명이 타고 있었으며 弓箭, 刀劍, 甲과 水銀, 眞珠, 硫黃, 法螺 등의 물 건이 있었으니 반드시 양국의 해적이 함께 우리나라의 邊地를 침범하려던 자들입니다. 라는 내용의 사료가 있으므로,12) 고려 전기부터 倭人의 해적 활동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사료에서 이들의 나포된 당 시의 정황이나 지니고 있는 물품을 통해 이들이 일반적인 의미의 海賊 과 큰 차이가 없는, 경계 상에 존재하는 일탈적인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각 사료를 살펴보면, 다수의 기사를 통해 왜구들이 人身을 납치해갔음을 알 수 있다. 2-3. 倭가 密城(현재의 밀양)을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관청을 불사르고 사람 과 물품을 약탈해 갔다.13) 2-4. 倭가 豊川을 불사르고 약탈하여 知州事 柳滋와 按廉 金侃을 죽이고 관 청과 민가를 불사르고 60여 명을 사로 잡아갔다. 元帥 沈德符가 業精江千戶 任 堅과 李吉生이 나아가 구원하지 않으므로 이를 베고 아울러 文化縣安集 凡永富 를 杖刑에 처했다.14) 위 두 기사에서는 각각 虜掠人物, 虜六十餘人 이라고 하여 고려의 民들 이 왜구에 의해 포로(虜)로 납치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 는15) 이 이외에도 사료에서 나타나는 殺掠 이라는 표현을 죽이고 노략했 다 로 해석하여 살인과 납치가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과연 납 치가 병행된 것으로 해석해야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후 被虜人 쇄환 기사를 통해 보면 납치 기사에 나온 것보다 훨씬 다수가 쇄환되고 있 으며,16) 동시에 피로인 중 상당수는 쇄환돼지 못하고 일본에 남았을 것으 12) 13) 14) 15) 16) ꡔ高麗史ꡕ 권10, 세가10, 선종 10년(1093) 7월 계미.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6, 우왕 즉위년(1374) 12월. ꡔ高麗史ꡕ 권134, 열전47, 우왕 5년(1379) 5월. 孫弘烈, 앞의 논문, 1975. 한윤희, 앞의 논문, 2014의 집계에 따르면 최소 3,566명이 외교적으로 쇄환된
116 지역과 역사 39호 로 추측됨을 감안한다면 살육과 납치가 동시에 자행되었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체로 1390년대 이후가 되면 왜구에 의한 人身의 약탈은 크게 줄어드는 데, 이것은 왜구의 약탈 양상이 바뀐 것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왜구의 활동 자체가 크게 꺾였기 때문이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그간 고려 측의 왜구 진 압이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된 것도 들 수 있지만, 일본 규슈 내의 정세가 크 게 변화된 것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는 왜구 창궐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일본 규슈 내의 남북조 쟁란이 마무리가 되는 시기였다. 1370년경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貞世) 은 征西大將軍 가네요시 친왕(懷良親王)이 이끄는 규슈 내의 南朝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九州探題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20년에 걸친 정벌 끝에 이 무렵이 되면 규슈 내의 잔당도 거의 괴멸하고, 1392년에는 南北朝가 合一 되면서 전란이 대개 종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室町幕府와 그 의 대리자인 이마가와 료슌은 왜구 금압과 피로인의 송환을 약속하며 고려 와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던 것이다. 2-5. 일본 승려 信弘이 왜구와 더불어 兆陽浦(현재의 전남 보성)에서 싸워 1 척을 사로잡아 모두 죽이고 잡혀있던 婦女 20여 명을 돌려보냈다.17) 나아가 료슌은 2-5 사례에 보이는 승려 信弘과 군사들을 파견하여18) 고 려 현지에서 직접 왜구를 단속하고 즉석에서 왜구에 사로잡힌 婦女 20명을 돌려보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왜구에 의한 고려 혹은 조선 것으로 파악된다. 17)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6, 우왕 4년(1378) 7월. 18)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6, 우왕 3년(1377) 8월 무오 ; 同 4년(1378) 6월. 우왕 3년에는 외교승으로 등장하지만 우왕 4년부터는 직업 군사 69명을 이끌고 왜구 금압에 나섰다. 信弘은 이 해 11월까지 활동하였다. ꡔ高麗史ꡕ 권133, 열 전46, 우왕 3년(1377) 11월 신사.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17 의 민들이 납치되는 사례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2-6. 忠淸全羅道監戰敬差官 (중략) 韓雍이 아뢰기를, 왜선 14척이 각 浦에 침입하여 兵船을 빼앗고 人物을 노략하였습니다.(후략) 19) 이상을 토대로 보아, 왜구는 일반적으로 약탈에 병행하여 납치를 행하고 있으므로, 사료에 나타난 인신의 약탈 기사만으로 통계화를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특정시기에 갑자기 인신의 납치만이 증 가하는 것이 아니고, 전반적인 왜구 침략의 증가와 함께 납치 역시 동시에 증가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2. 납치의 목적 만약 왜구가 人身을 납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약탈의 양상이라면, 왜구는 무엇을 노리고 재물이 아니고 인신을 납치했을까. 재물에 비해 인신은 많은 적재 공간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며, 나아가 수송 과정에서 최소한의 식량을 소모하기 때문에 다루기 쉬운 약탈물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왜구가 인신을 납치해가는 이유는 ①약탈 행위에 대한 부조, ②성적 욕구를 풀기 위한 부녀자 납치, ③노동력의 확보, ④매매를 통한 재 화의 획득 등을 상정할 수 있다. 이 순서는 납치 이후 被虜人의 용도가 발생 하는 순서에 따라 정리한 것이다. ①약탈행위에 대한 부조라는 것은, 약탈행위 자체를 돕도록 한 것을 말한 다. 자질구레한 수발을 드는 것을 제외하고,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는 배의 노를 젓거나, 현지 특히 육로의 지리를 잘 모르는 왜구를 위해 간첩의 역할 을 맡기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노를 젓는 경우는, 아마 대부분의 남성 被虜人을 납치하여 사역하는 방식 으로 생각되며, 이 점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20) 당 19) ꡔ太宗實錄ꡕ 권15, 태종 8년(1408) 5월 20일 무진. 20) 太田弘毅, 앞의 논문, 2002.
118 지역과 역사 39호 시의 배는 돛으로 풍력을 받아 배를 움직이는 외에는 전적으로 인력으로 노 를 저어 움직여야 했으며, 해상으로 원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노꾼들에게는 매우 고역이었다. 또한 다수의 노꾼들을 동원하고 유지하는 것은 품삯이 많 이 들었을 것이므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온 왜구들에는 고용된 노꾼은 불필요한 비용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에 왜구들은 조운선을 납 치할 때 미리 준비한 수송선으로 짐을 옮겨 실어 돌아가기보다는, 水夫째로 조운선을 납치하여 돌아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 육지의 마을이나 조창 을 약탈하는 경우에도 스스로의 인력을 이용하기보다는 현지의 장정들을 협 박하여 현지에 매어 놓은 선박(조창 등에 소속된 선박 등)에 옮겨 싣게 하고 나아가 이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본국까지 돌아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 다음 약탈 때에는 굳이 본거지의 노꾼을 고용하기보다는 기존에 납치한 고려 출신 被虜人을 그대로 사역하여 고려까지 노를 젓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2-7. 禑가 都堂에 글을 내려 말하길, 이제 듣건대 변방 주민들이 적에게 포 로 되었다가 요행 도망쳐서 귀환해도 모두 적의 간첩으로 지목하여 덮어놓 고 죽인다는데 이것은 심히 옳지 않은 일이다. 고향 떠난 사람마다 제 고향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인정에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부모ㆍ처자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구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다만 죽는 것이 두려워서 도적을 따라갔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적에게서 도망쳐 돌아온 사 람을 반드시 표창할 것이며 비록 실지로 간첩 행위를 한 자라도 죽이지 말고 관청에서 금품과 식량을 주어 그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만약 왜놈을 죽이고 돌 아온 사람이 있다면 상을 주고 등수를 올려 주라. 그리고 이 지시를 변방 고을 들로 하여금 일반에게 게시하게 하라! 그리고 만일 이 지시를 위반하는 자는 처 벌한다. 하였다.21) 위 2-7 사료를 보면 적의 포로가 된 사람이 간첩 활동을 하는 경황이 국 가 수준에서도 인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마 간첩행위 는 대체로 왜구에게 지역의 정세를 알리거나 육로에 어두운 왜구를 嚮導하는 일이었을 21)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6, 우왕 3년(1377) 6월 경술.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19 것이다. 노꾼이나 간첩에 해당한 경우는 기본적으로 강압에 의해 왜구로서 활동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본격적으로(자발적으로) 왜구에 가담하 는 사례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사료2-7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이들은 납 치의 피해자이며 이득을 노려 왜구와 연합하는 세력과는 차이가 있다. ②의 경우, 거의 남성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왜구들이 약탈 과정 에서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한 대상으로 납치된 여성을 겁탈하는 경우를 말한 다.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해 여성을 노려서 납치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무작 위로 人身을 납치한 후에 남자는 노동력으로, 여성은 각종 수발을 들게 하 거나 성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용도로 활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 대의 각종 테러조직 등에서 보이는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성을 겁탈하는 사례가 사료 상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 지만, 여성 被虜人이 겁탈당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8. 왜적이 또 강화부를 침범하니, 만호 金之瑞, 부사 郭彦龍이 摩利山으로 도망하였다. 왜적이 드디어 크게 노략질하여 지서의 처를 사로잡아 갔다. 강화 부 관리의 처녀 세 사람이 적을 만나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서로 끌어안고 강 에 빠져 죽었다.22) 2-8 사료를 통해, 당시 고려인 사이에서 왜구가 납치된 여성은 겁탈 당한 다는 인식이 이미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사례는 ꡔ三綱行實圖ꡕ에도 실려 있으며,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왜구에 대해 절개를 지킨 사례가 다수 등 장하는데,23) 여성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킬 것을 권하는 사례로 들어지 고 있다. 수백 년 후인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러한 사례가 매우 많이 보고된 것을 보아도, 일일이 사료에 나타나지 않을 뿐 당시 포로가 된 여성의 상황 은 짐작할 수 있다. 22) ꡔ高麗史節要ꡕ 권30, 우왕 3년(1377) 3월. 23) 孫承喆, 朝鮮時代 ꡔ行實圖ꡕ에 나타난 日本의 表象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7, 2010, 42~53쪽.
120 지역과 역사 39호 앞서 인용한 사료 2-5를 보면, 일본의 승려 信弘이 왜구에게서 부녀 20 여 명을 탈환하여 고려에 돌려보내주고 있다. 이 여성들이 겁탈을 당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이 상황에서 신체의 안전을 보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 다. 또한 연구를 통해 여성 被虜人이 遊廓 등으로 팔려갔을 가능성도 제기 된 만큼,24) 겁탈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이후 성적인 피해를 겪었을 가능성 은 크다. 특히 1380년을 전후하여 대규모의 왜구가 장기체류하는 상황이 생기면 서, 그들에 의해 납치된 여성들의 고통도 더욱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은 이 중 특히 주목되는 사례이다. 2-9. 倭가 鎭浦(현재의 충남 서천군)에 들어와서 포로로 된 婦女 20여 인을 돌려보냈다.25) 2-10. 왜적이 사로잡은 부녀 25명을 작은 배에 싣고 鎭浦로 돌려주었다.26) 위는 같은 내용을 다룬 사료이다. 즉, 왜구가 납치한 여성 피로인 25명을 鎭浦에 돌려주었다는 기사이다. 왜구가 부녀자들을 일본으로 끌고 가지 않 고 돌려보내주었다는 사실도 눈에 띄지만, 이 여성들을 납치한 왜구 집단의 성격에 대해서도 신경이 쓰인다. 이 여성들을 납치한 왜구 집단은 그 前年인 우왕 9년(1383) 8월 무렵에 1,000명 이상의 대규모의 집단으로 들어와 鷄龍山에 웅거하여 겨울을 난 것으로 보인다. 2-11. 倭賊 1,300여 명이 春陽(봉화)ㆍ寧越ㆍ旌善 등지에 침입하였다.27) 2-12. 왜적 1천여 명이 沃州 報令 등의 고을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開泰寺로 24) 25) 26) 27) 渡邊大門, ꡔ人身売買ㆍ奴隷ㆍ拉致の日本史ꡕ, 柏書房, 2014, 67쪽. ꡔ高麗史ꡕ 권135, 열전48, 우왕 10년(1384) 2월. ꡔ高麗史節要ꡕ 권32, 우왕 10년(1384) 2월. ꡔ高麗史ꡕ 권135, 열전48, 우왕 9년(1383) 8월.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21 들어갔다가 鷄龍山에 웅거하였다. 文達漢 王安德 都興이 나가서 공격하니 적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공주 목사 崔有慶과 판관 宋子浩가 仇岾에서 싸 워 자호는 패하여 죽고, 달한ㆍ사혁ㆍ안덕ㆍ도흥ㆍ안경ㆍ박수년 등은 공주 반 룡사에서 싸워 8급을 베고, 사혁은 목천 흑점까지 추격하여 20급을 베었다.28) 이 전후의 사료를 보면, 같은 시기에 1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왜구 집 단이 여럿이 아닌 이상, 이는 하나의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 1,300인의 대 규모 집단은 첫 사료가 경북ㆍ강원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동해안 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약탈을 일삼으며 내륙을 통해 서진하였고 (2-11), 고려의 병사들과 맞닥뜨리자 公州를 거쳐 鷄龍山에 웅거하였던 것 이다.(2-12) 위 2-11ㆍ12 사료에 나 타난 부녀자의 放還이 이 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것은, 이 대규모의 무리가 6개월간 머물다가 빠져나간 흔적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계룡산의 왜구를 소탕했다는 별도의 기사는 찾을 수 없 고, 진포는 계룡산에 웅거한 왜구가 해로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출구로 서 가작 좋은 위치에 있다. 만약 이 대규모 왜구가 진포를 통해 도망쳤다고 하면, 다음과 같이 추리 가 가능하다. 즉, 동해를 통해 들어온 왜구는 스스로 가져온 배를 통해 탈출 할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진포 일대에 정박된 고려 측의 배를 활용했을 것 이다. 아마 반년이 지나면서 초반의 1,000명이 넘는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최소 수백의 왜구들이 약탈물을 싣고 귀환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과 정에서 被虜人 중 남자들은 노꾼으로 활용하기 위해 데려가고, 여성들은 약 탈지에서 성적 욕구 충족이라는 용도가 이미 다한 상황에서 빠듯한 귀환 길 에 짐을 줄이기 위해 진포에 남겨놓고 떠났던 것이다. 이때 풀려난 25명의 부녀자들은 비록 목숨을 잃거나 타국으로 끌려가는 일은 면했지만, 몇 개 월, 최대 반년에 걸쳐 이미 심한 고초를 겪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8) ꡔ高麗史節要ꡕ 권32, 우왕 9년(1383) 8월.
122 지역과 역사 39호 ③노동력의 확보는 사실 ①, ②에서도 언급되었던 바와 비슷한데, 여기 서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의 노예 노동력만 따로 분리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 왜구에 의해 적지 않은 고려의 民들이 납치되어 일본으로 건너갔 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은 기본적으로 賤人 계층은 있었지만 기본적으 로 奴婢의 매매 등은 금해져 있었다.29) 하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서 사적으 로 下人ㆍ所從 등으로 불리며 장원제하에서 예속된 民들은 존재했다.30) 民 으로서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에 예속되어 사역되고 전 매되는 상황은 奴隸 내지는 奴婢로 밖에 표현한 수밖에 없다. 被虜人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무슨 일에 사역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 지 해석이 있다. 전통적으로는 다수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 분야에서 노예로 사역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근래의 연구에서도 왜구 被虜人이 발생한 주요 원인으로 규슈의 전란으로 토지가 황폐해지고 농업에 종사할 장정이 부족해진 것을 들기도 하는데,31) 이 역시 기본적으로 농업 에 사역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사료나 연구 성과를 통해 살펴보면, 의외로 被虜人이 농업노예로 활용되었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사료는 많지 않고, 오히려 항구 등에서 漁撈나 輸送 등의 일에 사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되고 있다.32) 이외에 일부는 왜구에 남아 水夫로 사역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33) 2-13. 遼東都司에서 金鐵力 등 세 사람을 돌려보내었다. 처음에 船軍 金鐵 力ㆍ派稅ㆍ金莫惠 등 세 사람이 왜인의 포로가 되어 중국의 변경에 이르렀다 가 도망했었다. 요동도사가 황제에게 상주하여 성지를 받들어 하정 통사(賀正 通事) 閔德生에게 부쳐 돌려보내었다.34) 石井良助, 中世人身法制雜考 ꡔ法學協會雜誌ꡕ 56-8~10, 1938. 渡邊大門, 앞의 책, 2014, 7~57쪽. 渡邊大門, 위의 책, 64쪽. 關周一, 倭寇による被虜人の性格をめぐって ꡔ日本歷史ꡕ 519, 吉川弘文館, 1991, 16쪽. 33) 孫弘烈, 앞의 논문, 1975, 118~119쪽. 34) ꡔ太宗實錄ꡕ 권3, 태종 2년(1402) 2월 15일 무진. 29) 30) 31) 32)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23 2-14. 柳廷顯이 보고하기를, 우리나라 夫餘 사람 尹含 등 세 사람이 왜선으 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 말하기를, 처음에 도적이 배 30여 척으로 중국의 지경 을 침범하다가 패함을 당하고 남아 돌아온 수가 10여 척이고, 배마다 살아남은 자가 불과 3, 40명인데, 또 양식이 떨어져서 굶주리다가 겨우 돌아왔다. 고 하 였습니다. 35) 2-13 사료에서는 요동지역에서 탈출한 무리, 2-14는 세종 원년 己亥東 征 당시에 왜구로부터 탈출한 세례이다. 2-13의 경우, 金鐵力 등 被虜人들 을 船軍 출신으로 밝히고 있는데, 아마 船軍으로 조운선과 함께 납치되어 水夫로서 왜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틈을 보아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2-14 역시 마찬가지의 사례일 것이다. 漕運이 약탈될 때마다 일정 수의 水夫도 같이 납치당했다면, 조운의 피해가 막심했던 만큼 이러한 사례는 전체 被虜 人 수 중 상당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대체로 ①에서 언급 된 조운선과 함께 납치된 被虜人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④매매를 통한 재화의 획득이란 납치된 人身을 媒介로서 교환ㆍ매매를 목적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먼저 생각해볼 것이, 직접적인 사료는 나오지 않지만, 납치한 人身을 볼모로 삼아 그 가족과 교섭하여 재물과 교환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2-15. 왜적이 海州를 침범하여 관청을 불사르고 목사의 아내와 딸을 사로잡 아갔다.36) 위 사료의 경우를 보자. 왜구들이 목사의 아내와 딸을 다른 여성 피로인 과 마찬가지로 끌고 다니다가 본국으로 데려가 賣買한다면, 납치한 후 며칠 혹은 몇 달 후에나 여성 奴婢 2명의 몸값 정도를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간의 비용은 납치한 倭寇가 부담한다. 하지만 납치한 대상이 지배층의 가족 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즉석에서 그 가족과 거래하여 2명분의 여성 노동력 35) ꡔ世宗實錄ꡕ 권4, 세종 1년(1419) 7월 28일 신미. 36) ꡔ高麗史節要ꡕ 권29, 공민왕 20년(1371) 3월.
124 지역과 역사 39호 에 해당하는 몸값보다 많은 재화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료 상에 등 장하지는 않지만, 비공식적인/사적인 거래를 통해 被虜人이 본국에서 풀려 났을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거래가 있었다면 중간에 통 역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경우, 위의 자발적이던 비자발적이던 왜구 활동 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고려 내에서 탈출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위 사례와 같이 왜 구가 자발적으로 풀어주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피로인은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건너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 경우, 자신을 납치한 왜구 에게 직접적인 사역을 당하는 경우(즉 ①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리품(곧 상품)으로서 곡물이나 화폐 등의 재화와 교환되었을 것이다. 피로인의 매매와 관련해서는 일본의 학자 아키야마 겐조(秋山謙藏)가 발 굴한 ꡔ老松堂日本行錄ꡕ에 수록된 唐人 이라는 詩와 그 해설이 주목된 바 있다.37) 2-16. 한 倭人이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다가 우리의 배를 보고 와서 고 기를 판다. 내가 보니 배 안에 한 중이 꿇어앉아서 밥을 달라고 빌었다. 내가 밥 을 주고 물으니, 중이 말하기를, 나는 江南 台州(현재 절강성 임해시)의 小旗 인데, 지지난해 사로잡혀 여기 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辛苦를 이길 수 없으니, 원컨대 관인(宋希璟)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하고 울었다. 왜인이 말 하기를, 쌀을 주면 마땅히 이 중을 팔겠는데 관인이 사시겠습니까? 라고 하였 다. 내가 중에게 묻기를, 네가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섬의 이름이 무엇이냐? 고 하였더니 중이 대답하기를 내가 와서 轉賣되어 이 사람을 따라 다니는 것이 2년 되었는데 바다에 떠다니며 살기 때문에 지명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38) 위는 詩의 해설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對馬島 북동쪽의 니시도마리(西 泊) 근처에서 본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중국 절강성 사람으로, 왜 구의 被虜人으로서 중의 행상으로 걸식을 하고 있으며, 宋希璟에게 자신의 37) 秋山謙藏, 앞의 논문, 1932. 38) 宋希璟, ꡔ老松堂日本行錄ꡕ 경자년(세종2, 1420) 2월 17일자 시 唐人 의 해 설 부분.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25 몸값으로 쌀을 지불하여 자신을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실제 승려였다고 보는 해석39)과 노예로서 머리가 깎 인 행색을 僧 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40) 필자는 이 중국 인이 실제 승려는 아니지만 절에 소속되어 승복을 입고 사역되고 있었을 가 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절에서 이 被虜人을 買入했을 수도 있지만, 왜구 들이 전리품으로 사찰에 고려의 공예품이나 예술품 등을 寄進한 사실을 생 각하면,41) 이 被虜人 역시 왜구에 의해 사찰의 일꾼으로서 절에 바쳐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 일화에서 轉賣를 거쳐 그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는 내용을 보 면 일본 내에서 被虜人에 대한 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후술할 내 용이지만,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제도적으로 대량의 노예가 양성적으로 매 매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왜구에 의해 대거 납치된 被虜人 들은 주로 왜구의 본거지인 對馬, 壹岐, 九州 일대에 산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42) 일부는 류큐를 통해 중국 등지로 팔려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Ⅱ. 피로인의 쇄환 피로인의 쇄환에 대해서는 이미 중요한 연구성과들이 축적되어 있고, 그 송환 주체를 통해 피로인의 분포를 확인하고자 하는 시도43) 혹은 송환 사 료를 통계화하여 이를 분석하고자 하는 역시 행해진 바 있다.44) 여기서는 39) 關周一, 앞의 논문, 1991, 13~14쪽. 40) 渡邊大門, 앞의 책, 2014. 62~63쪽. 41) 이영, 쓰시마 쯔쯔(豆酘) 다구쓰다마 신사(多久頭魂神社) 소재 고려 청동제 飯子와 왜구 ꡔ한국중세사연구ꡕ 25, 2008 등. 42) 田中健夫, 倭寇と東アジア通行圏 ꡔ日本の社会史一列島内外の交通と国家ꡕ, 岩波書店, 1987. 43) 田中健夫, 위의 논문. 44) 한윤희, 여말ㆍ선초 피로인 송환에 관한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학과 석
126 지역과 역사 39호 당시 규슈의 사정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1. 쇄환의 배경과 특징 1) 九州의 상황 쇄환 사정을 살피기에 앞서 당시 일본, 특히 규슈의 사정을 간단하게 언 급하고자 한다. 당시 규슈의 상황은 14세기 후반 왜구 창궐기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14세기로 접어들 무렵 일본은 이른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로, 천황 과 귀족[公家]이 중심이 되어 통치하는 율령제가 무너지고 막부를 중심으로 하는 무가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천황은 후계자에게 일찍 황위를 내어주고 본인은 上皇 혹은 法皇 이 되어 황실종친과 불교계의 대표자로서 실권을 쥐게 되고, 정작 천황의 권위는 더욱 약화되었다. 막부 역시 어린 장군이 장군직을 잇달아 계승하면 서 호조(北條) 가문이 攝關이라는 후견인의 위치에서 실권을 쥐는 형태가 되었고, 이로 인해 장군의 권위 역시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13세기 여ㆍ몽연합군의 원정 이후 무사들에 대한 은상이 제대로 이루 어지지 않자, 가마쿠라 막부 말기는 극도의 혼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규슈 지역 역시 방어 일선에 있었던 현지 무사들을 제치고 호조의 측근 무사들 [御内人]에게 영지가 지급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 상황에서 천황이 된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은 장군과 섭관은 물론이 고 상황까지 배제하고 천황에게 실권을 돌려놓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결국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실 권을 쥐게 되며(1334), 연호를 建武로 고치고 개혁정치를 결행하였다. 하 지만 이 개혁 또한 특히 무장들을 중심으로 불만세력을 낳았다. 1336년, 이 틈을 타고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앞장섰던 아시카가 다카우 사학위논문, 2011.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27 지(足利尊氏)가 고다이고 천황을 이반하게 되었다. 처음 기세를 잡았던 다 카우지는 전투에서 패하여 규슈로 도망치고, 쇼니 요리히사(少貳賴尙, 요리 나오로 읽기도 함)가 그를 맞이하였다. 다카우지는 규슈에서 무장 세력을 규합하여 천황측[宮方]에 섰던 기쿠치(菊池)ㆍ아소(阿蘇) 등의 세력과 맞 섰다. 다카우지는 다타라하마(多々良濱, 현재 후쿠오카시 동구)에서 대승 을 거두고 그 여세를 몰아 규슈 무사단을 이끌고 교토로 진격, 고다이고 천 황을 항복시키고 실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 1336년 고묘(光明) 천황을 옹 립하고 1338년 8월 征夷大將軍에 오르면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설 립하였다. 하지만 고다이고는 요시노(吉野)로 도망쳐 건무정권을 부활시키고자 하 였다. 이에 막부에서 세운 고묘 천황은 北朝, 고다이고의 요시노 정권은 南 朝라고 하여 일본은 남북조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1339년 가네요시(懷良, 가네나가로 읽기도 함) 친왕을 征西大將軍의 이 름으로 규슈로 파견하여 그 세력을 규합토록 하였다. 당시 규슈는 기쿠치 (菊池)ㆍ아소(阿蘇) 등 천황파 세력[征西府]이 막부 측에서 파견한 九州探 題 잇시키 도유(一色道猷, 範氏) 세력[探題府]에 맞서 대결을 벌이는 중이 었다. 한편 중앙에서는 막부의 장군 다카우지의 동생 나오요시(直義)와 집사 고노 모로나오(高師直)가 실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다카우지의 아 들이면서 나오요시의 양자로 나오요시 세력에 있던 아시카가 나오후유(足 利直冬)는 고노 모로나오에게 패하여 규슈로 건너가 거기서 자기 세력을 규 합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천황측과 대립하면서도 探題와의 관계 역시 불편했 던 쇼니(少貳) 등의 세력이 여기에 호응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규슈 내에는 가네요시를 중심으로 한 천황측[宮方]과 잇시키 도유를 중심으로 한 막부측 [探題方], 그리고 나오후유측[佐殿方]의 삼파전 양상이 되었다. 이 사태는 1350년 觀應 원년 전후에 있었던 사태이므로 관응의 요란(觀應の擾亂)이 라고 부르며, 왜구 연구자들에게 경인년 왜구의 배경으로 지목되고 있다.45) 1352년 양부인 아시카가 나오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나오후유는 3년여
128 지역과 역사 39호 만에 규슈를 떠나게 된다. 이에 힘을 얻은 가네요시 친왕측은 1355년 探題 잇시키 도유를 공격하여 규슈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어 1361년 쇼니씨를 굴복시키고 다자이후(大宰府)를 점령하면서 규슈 내의 패권을 쥐 게 된다. 이와 같은 동란의 와중에서 규슈 지역의 각 세력들은 자신들이 그간 보유 해왔던 領地에 대한 권리조차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본인 들이 처한 지역의 패권을 누가 갖는가에 따라 하루아침에 소유권을 잃는 일 도 많았고, 이로 인해 본인의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세력을 위해 주인을 바 꾸는 일도 서슴치 않는 상황이었다. 1370년 막부는 아시카가의 일족인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 貞世)을 九 州探題로 파견한다. 규슈의 막부측 무장세력을 규합한 료슌은 1372년 다자 이후를 공격해 기쿠치의 당주 다케미쓰(武光)를 전사시키고 가네요시 친왕 을 패퇴케 하였다. 이어 남조측은 패배를 거듭하여 기쿠치씨의 본거인 기쿠 치(菊池)의 와이후(隈府)에 웅거 하게 된다. 1375년 료슌은 남조 잔당을 궤멸시키기 위해 기쿠치 근처의 미즈시마(水島)에 진을 치고 규 슈의 유력한 무장으로 소위 3인 중(三人衆)으로 불리는 시마즈 우지히사(氏久)ㆍ오토모 지카요 (親世), 쇼니 후유스케(少貳冬 資)를 소환하였다. 하지만 료슌 은 쇼니 후유스케가 지각한 것을 빌미로 연회 자리에서 후유스케 를 살해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마 <그림 1> 1370년대의 규슈 정세 45) 김기섭, 14세기 倭寇의 동향과 고려의 대응 ꡔ한국민족문화ꡕ 9, 1997. 李領, 앞의 책, 1999.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29 즈 등은 군사를 이끌고 본거지로 돌아갔고, 3인중은 료슌과 반목하게 되었 다. 이후에도 료슌은 꾸준히 남조의 잔당을 소탕하여 1390년 무렵이 되면 대 체로 규슈 내의 남북조 대립상황도 마무리가 되게 된다. 이후 료슌이 규슈를 떠날 때까지 고려가 일본에 대해 교섭한 공식적인 창 구는 九州探題府였다.46) 2) 쇄환의 특징 사료를 토대로 送還의 주체를 토대로 일본 내 被虜人의 분포를 살펴보면, 가장 큰 특징은 막부 장군을 제외한 쇄환 주체의 대부분이 규슈로 한정된다 는 점이다. 이것으로 보아 상품으로서의 倭寇 被虜人 은 일본 내에 널리 유 통되지 못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우선 일본이 사적으로 人身을 소유하여 부리는, 요컨대 奴婢制가 상대적이 일반화되지 않은 된 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중세사회(가마쿠라 시대)는 법적으로는 일반 民 뿐 아니라 奴婢까지 도 인신의 매매를 금하고 있었지만, 장원제하의 예속적 성격이 강한 집단이 있었으며, 奴婢의 매매와 관련된 문서도 남아 있다.47) 그렇다면 일본으로 납치된 被虜人 역시 이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고려와는 달리) 노예의 매매가 법의 테두리 밖의 사 정인 만큼, 倭寇 被虜人과 같이 대규모의 인원이 외부로부터 납치되어 매매 가 이루어질 만한 합법적 시장이 형성될 수는 없었다. 또한 납치 자체가 범 죄인만큼 그 매매 역시 더더욱 음성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왜구는 九州에 남게 되고, 피로인을 쇄환한 주체 역시 대부분은 46) 이상 九州의 사정은 다음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川添昭二, ꡔ九州中世史 の硏究ꡕ, 吉川弘文館, 1983. 川添昭二 外, ꡔ縣史43 熊本縣の歷史ꡕ, 山川出 版社, 1997. 松本寿三郞 外, ꡔ縣史40 福岡縣の歷史ꡕ, 山川出版社, 1999. 原 口泉 外, ꡔ縣史46 鹿児島縣の歷史ꡕ, 山川出版社, 2004. 47) 渡邊大門, 앞의 책, 2014, 43~44쪽.
130 지역과 역사 39호 九州 일대에서 활동한 諸세력에 한정되었다. 토지에 대한 권리조차 혼잡스 러웠던 이 시기 九州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상대적으로 규슈 내에서는 노예 를 소유하거나 매매하는 것은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九州 외의 지역의 영주들이 쇄환의 주체로 등장하는 이유 는 무엇일까. 3-1. 이달에 日本 駿州太守 源定이 사람을 보내어 말 2필을 바치고, 잡혀 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博多城 承天禪寺 住持 誾公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 치고 ꡔ大藏經ꡕ을 청구하였고, 또 慈雲禪院 住持 天眞이 사람을 보내어 예물을 바치고, 잡혀간 人口를 돌려보냈다.48) 3-2. 일본의 呼子 遠江守 源瑞芳ㆍ鴨打 三川守 源傅와 一岐州守護代 源賴 廣ㆍ源擧가 각각 포로된 人口를 돌려보내고, 禮物을 바쳤다.49) 3-3. 肥前州 平戶島代官 金藤貞과 駿州太守 源圓珪가 각각 사람을 시켜 붙 잡혀 갔던 사람을 돌려보내고 예물을 바쳤다.50) 3-4. 駿州太守 源圓珪와 日向州 地公河가 각각 사람을 보내어 우리의 被擄 人을 돌려보냈다.51) 위는 쇄환 주체가 九州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대표적인 사료이다. 위 사 료의 駿州, 遠江, 三河 세 지역의 守護가 被虜人을 쇄환하고 있다. 駿州는 駿河國의 별칭인데, 이곳은 현재 일본 静岡縣에 해당한다. 遠江, 三河 역시 그와 이웃한 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왜구와 연관되기에는 지나치게 동쪽 멀 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被虜人이 쇄환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48) 49) 50) 51) ꡔ定宗實錄ꡕ ꡔ太宗實錄ꡕ ꡔ太宗實錄ꡕ ꡔ太宗實錄ꡕ 권5, 정종 2년(1400) 8월 21일 계축. 권12, 태종 6년(1406) 9월 26일 임오. 권14, 태종 7년(1407) 9월 1일 신해. 권16, 태종 8년(1408) 7월 29일 을해.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31 <그림 2> 駿州, 遠江, 三河의 위치 그 이유는 被虜人이 典賣되어 그곳까지 팔려간 것이 아니라, 駿州, 遠江 지역의 守護가 바로 료슌의 일족인 今川氏였기 때문이다. 三河 역시 이 시 기에는 료슌의 前任 探題 중의 한 사람인 一色範氏의 후예들이 一色氏가 守 護職을 세습하고 있었다. 즉, 료슌은 규슈에서 실각하여 駿河, 遠江 두 지역 의 守護를 맡게 되는데, 그 이후에도 규슈 내에 일부 지배력이 있는 땅이 남 아 있었고, 혹은 료슌의 후예 혹은 휘하에 해당하는 今川氏 세력이 九州 지 역의 피로인들을 돌려보내면서 명의 상 本領인 駿州, 遠江의 이름을 쓴 것 이다. 三河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위 사료는 피로 인이 駿州, 遠江, 三河까지 끌려갔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왜 구들은 琉球를 제외하고는 송환주체와는 별개로 규슈 근처에 머물렀던 것으 로 보인다.
132 지역과 역사 39호 2. 각 세력의 쇄환 양상 1) 征西將軍府ㆍ九州探題ㆍ日本國王 쇄환에 대해 첫 사료가 보이는 것은 공민왕 12년(1363) 3월에 피로인 30여구를 돌려보내었다는 기사이다.52) 이 시기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던 주 체는 가네요시 친왕을 위시한 征西將軍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 고려 측과의 교섭은 보통 大宰府와 博多를 통 해 이루어졌는데, 1363년경에는 가네요시 친왕 측이 쇼니 씨를 굴복시키고 다자이후 일대를 차지하였던 무렵이기 때문이다. 당시 가네요시 친왕은 다 자이후를 점하면서 규슈 내의 주도권을 외교관계를 통해 인정받고자 하였 고, 明에서 日本國王으로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53) 이때 고려에 被虜人을 돌려보낸 것 역시 그러한 외교적 전략의 일환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어 1370년경 무로마치 막부에서 九州探題로 파견된 이마가와 료슌(今 川了俊)은 규슈의 南朝側 세력에 대한 경략을 실시하였다. 당시 가네요시 친왕이 구심점이 된 남조측은 기쿠치ㆍ아소 등의 세력을 중심으로 재지 세 력과 연대하여 규슈 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54) 료슌의 선 임인 九州探題 시부카와 요시유키(澁川義行)는 규슈 땅에 발을 들이지 조 차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료슌에 의해 규슈 경략이 진행되었고, 1372년 다자이후를 탈환하면서 본격적으로 양국(고려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간에 본격적인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외교관계의 시작과 동 시에 고려측은 줄곧 왜구의 금압과 피로인의 쇄환을 요구하였다. 우왕 3년(1377) 6월에 고려에서는 判典客寺事 安吉祥을 일본에 사신으 52) ꡔ高麗史ꡕ 권40, 세가40, 공민왕 12년(1363) 3월 기유. 53) 栗林宣夫, 日本国王良懐の遣使について ꡔ文教大学教育学部紀要ꡕ 13, 1979. 54) 남조-기쿠치씨 세력이 병량미 획득 등을 목적으로 왜구를 파견한 것이 1380년 대규모 왜구의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이영, 고려 말 왜구와 남조-경신년(1380)의 왜구를 중심으로 ꡔ한일관계사연 구ꡕ 31, 2008 ; 경신년(1380) 왜구=기쿠치씨(菊池氏)>설에 관한 한 고찰 ꡔ일본역사연구ꡕ 35, 2012.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33 로 보내어 왜구의 금압을 요청하였는데, 安吉祥은 사행 도중 일본에서 병사 하고 만다. 하지만 국서는 제대로 전해졌고, 이에 일본으로부터 報聘使로 使僧 信弘이 오게 된다.55)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信弘은 단순한 使僧이 아 니라 군사를 이끌고 왜구를 제압하기도 하였던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 로,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 무로마치 막부보다는 료슌의 요청으로 움직였을 것으로 보인다. 信弘의 使行에 대해 고려 정부는 答禮使로 鄭夢周를 파견한 다. 3-5. 前大司成 鄭夢周를 답례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보내 또다시 해적 금지 를 요구하는 국서를 전하였다. (중략) 해적들이 이 기미를 정찰하고 틈을 타 침 입하여 민가를 불사르며 사람을 노략질하다가도 관군만 보면 곧 배를 타고 도 망쳐 숨어 버리므로 그 피해가 적지 않다. 이제 대장군의 순순한 말을 들었으며 또 弘長老에게서 귀국의 후의를 잘 들어 알았다. 앞으로 더욱 잘 조처해 주기를 희망한다 라고 하였다.56) 3-6. 鄭夢周가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는데 九州節度使 源了俊이 周孟仁을 동 반시켜 보내 왔다.57) 3-5 사료의 弘長老는 바로 信弘을 말한다. 정몽주는 우왕 3년 9월에 파 견되어 이듬해 7월에 귀국하였다. 정몽주의 귀국길에 딸려온 사신 역시 료 슌이 파견한 인물로 보이며, 이 무렵의 교섭은 상당부분 료슌의 독자적 성 격이 강한 외교행위였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 정몽주가 올린 외교 적 성과 중의 하나가 피로인의 쇄환이었다. 3-7. 귀국할 때에는 九州節度使가 파견한 周孟仁과 함께 왔으며 뿐만 아니 라 포로되었던 尹明, 安遇世 등 수백 명을 놓아 보내게 하였다. (중략) 정몽주 는 왜적들이 우리의 양민 자제들을 종으로 만든데 대하여 가긍히 여겨 그들을 해방시켜 올 것을 꾀하여 여러 정승들에게 힘 써 권고하고 각각 사재 약간씩 거 55)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6, 우왕 3년(1377) 8월 무오. 56)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6, 우왕 3년(1377) 9월. 57)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6, 우왕 4년(1378) 7월.
134 지역과 역사 39호 출하게 한 다음 또 편지를 써서 윤명을 주어 보냈더니 적의 괴수가 그 편지 문 장의 간곡한 것을 보고 감동되어 포로 백여 명을 귀국시켰다.58) 아마도 이때 료슌 측은 국서의 내용과 정몽주의 노력을 통해 고려가 피로 인의 쇄환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료슌은 꾸준히 피로인을 쇄환했고, 그 수는 최대 전체 被虜人의 절반 이상 파악되 기도 한다.59) 3-8. 李子庸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는데 九州節度使 源了俊이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 230여 명을 돌려보내고 槍劒과 말을 바쳤다.60) 3-9. 日本國 사신 妙巴와 關西省探題 源了浚이 사람을 보내와 方物을 바 치고 사로잡힌 215인을 돌려보내고 이로 인하여 藏經을 구하였다.61) 3-10. 通信官 朴惇之가 日本에서 돌아왔는데, 日本國 大將軍이 사신을 보 내어 方物을 바치고 被虜되었던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었다.62) 3-9 사료에서는 日本國 사절에 九州探題을 사절을 더불어 보내어 被虜人 을 쇄환하고 있다. 료슌 외에 위 3-9, 3-10과 같이 大將軍, 日本 ( 倭 혹은 倭國 포함) 혹은 日本國王 의 이름으로 다수의 被虜人이 쇄환되고 있는데, 이는 室町幕府 將軍의 명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幕府의 명의로 피로인 쇄 환이 이루어졌다고 하나, 료슌이 파견된 동안은 피로인 쇄환의 총책임은 규 슈 전체의 守護職를 겸임했던 료슌이 맡았던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우왕 12년(1386) 7월 覇家臺(현재의 하카타博多) 명의로 돌아온 150 명63) 역시 하카타가 소속된 다자이후를 점령하고 있던 료슌이 그 주체인 58) 59) 60) 61) 62) 63) ꡔ高麗史ꡕ 권117, 열전30, 정몽주 우왕 3년(1377). 한윤희, 앞의 논문, 2014, 403~405쪽 <표 1>. ꡔ高麗史ꡕ 권134, 열전47, 우왕5(1379) 7월. ꡔ高麗史ꡕ 권137, 열전50, 창왕 즉위년(1388) 7월. ꡔ定宗實錄ꡕ 권1, 정종 1년(1399) 5월 16일. ꡔ高麗史ꡕ 권136, 열전49, 우왕 12년(1386) 병인.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35 것으로 볼 수 있다.64) 이와 같이 료슌은 총 2,000명이 넘는 被虜人을 쇄환하였는데, 이는 이후 고려ㆍ조선과 일본 간의 관계가 크게 호전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료슌이 직접적으로 지방 호족들을 통솔하는 등 규 슈 내에 독자적인 입지를 다지고, 나아가 조선과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하기 에 이르자, 室町幕府에서는 그의 위세를 경계하게 된다. 그리하여 1395년 7월 료슌을 상경시킨 후 九州探題에서 파면하였다. 료슌 파면 이후에 九州探題를 맡은 것은 시부카와 미쓰요리(澁川満頼)이 며, 이후 澁川氏 역시 被虜人 쇄환을 추진했다. 3-11. 日本國王 源道義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하고, ꡔ大藏經ꡕ을 청하였고, 九州節度使 源道鎭이 사람을 보내어 土物을 바치고 俘虜를 돌려보냈다.65) 3-12. 源道鎭이 客人 而羅三甫羅를 보내어 본국 사람으로서 被虜된 1명을 거느리고 왔으므로, 면포(緜布) 5필을 주라고 명하였다.66) 위 두 사료에서 (源)道鎭 은 곧 시부카와 미쓰요리의 法名이다. 3-11에 서는 3-9의 료슌과 마찬가지로 日本國王使에 더하여 九州探題의 사절을 보 내고 있다. 료슌 이후 探題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음에도, 미쓰요리 이하 규슈탐제를 역임한 시부카와 씨 역시 源道鎭 등의 명의로 조선과 통교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것은 규슈 전체를 통괄하는 입장이자, 전근대 시대를 통 하여 한반도와의 외교를 전담하는 다자이후의 관리자로서 바다 건너의 조선 64) ꡔ高麗史ꡕ 권133, 열전486, 우왕 4년(1378) 11월 사료에 나온 覇家臺 의 사신 과는 명칭은 같으나 그 주체가 다르다. 이때의 覇家臺 사신은 정황상 료슌이 보 낸 信弘과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남조 측의 사신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는 이미 남조 측에서 이미 다자이후를 잃은 이후이지만, 覇家臺의 명의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고려와의 외교를 통해 이를 만회할 방법을 찾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 다. 65) ꡔ太宗實錄ꡕ 권11, 태종 6년(1406) 2월 27일 무자. 66) ꡔ世宗實錄ꡕ 권20, 세종 5년(1423) 6월 15일.
136 지역과 역사 39호 과의 관계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조선과의 합법적인 통 교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권이 많았던 것도 그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료슌이 물러난 이후 조선 측의 요청에 따라 막부 차원에서도 포로의 쇄환을 추진하고 있었음은 일본 측의 사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67) 이들 사료에서는 양국 간의 사신 파견을 통해 교린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 와 함께 大藏經의 구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어 흥미롭다. 2) 對馬島 왜구의 주요한 본거지로 꼽히는68) 對馬의 경우, 중세 이래로 소 씨(宗 氏)가 소위 島主 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왜구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少貳氏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왜구 被虜人 중 상당수가 對馬에 머무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3-13. 이달에 宗貞茂가 사람을 시켜 말 10필을 바치고, 잡혀 갔던 사람 60 명을 돌려보내었다.69) 3-14. 대마도 宗貞茂의 아들 都都熊瓦가 사로잡혀 간 우리나라 사람 두 명 을 고이 돌려보내니, 임금은 예조에 명하여, 전례를 참고하여 후대하게 하고 綿 布ㆍ紬布 각각 10필씩을 주었다.70) 3-13은 對馬 宗氏가 가장 많은 수의 被虜人을 쇄환한 사례이다. 3-14의 都都熊瓦 는 소 사다시게(宗貞茂)를 이어 島主가 된 사다모리(貞盛)를 일 67) ꡔ善隣國寶記ꡕ 卷上, 1392年 11月日 및 同 12月 27日 및 1409年 6月 18日 및 1423年 7月日. ꡔ善隣國寶記ㆍ新訂善隣國寶記ꡕ, 集英社, 1995. 以上 김기섭 외, ꡔ일본 고중세 문헌 속의 한일관계사료집성ꡕ, 혜안, 2005에서 재인용. 68) 孫弘烈, 麗末ㆍ鮮初의_對馬島征伐 ꡔ호서사학ꡕ 6, 1978. 이영, 고려 말의 왜구와 대마도, 부경대학교 대마도연구센터, ꡔ전란기의 대마도ꡕ, 국학자료원, 2013. 69) ꡔ太宗實錄ꡕ 권10, 태종 5년(1405) 12월 29일 신묘. 70) ꡔ世宗實錄ꡕ 권3, 세종 1년(1419) 2월 25일 경자.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37 컫는다.71) 이 외에 對馬島主 명목으로 被虜人을 돌려보낸 사료는 많지 않 다. 대마도를 통해 被虜人 쇄환이 예상보다 많지 않은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선 도주 스스로가 왜구세력 혹은 그 비호세력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규슈 본토에서 被虜人을 쇄환하는 경우 왜구 혹은 그를 준동한 南朝 세 력 등과 대립하는 관계인 경우가 많은데, 대마도의 소 씨의 경우는 오히려 왜구 출신이었으므로 애초 被虜人을 돌려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3-15. 예조에서 아뢰기를, 宗貞盛의 글에 이르기를, 나의 노비 조선인 田 奉, 金衆과 그의 처 都未와 소생 小男, 중국인 昆老ㆍ古甫와 왜인 而知家古 등 이 7월 초4일에 도망하여 16일에 (富山浦에 도착한 것을, 내가 이미 자세히 알 고 있으니 도로 들여보내게 하라. 고 하였으나, 본국인과 왜인 1명은 각기 族親 들과 完聚하였으며, 중국인 2명은 이미 遼東으로 풀어 보냈사오니 우선 조사해 찾겠다고 미봉해 회답하고, 도로 보내는 것은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 대로 따랐다.72) 예를 들어 3-15 사료와 같이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본인 소유의 조선인 노예와 중국인 노예를 돌려줄 것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 측 에서는 이를 賊反荷杖으로 여겼을 법도 한데, 이미 해당 被虜人이 귀환하였 으므로 특별히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미봉책으로 사다모리 측을 달래는 정 책을 취하였다. 그리고 조선인과 함께 탈출한 倭人 而知家古의 경우, 마찬 가지로 사다모리의 奴婢였을 수도 있지만 조선인을 탈출시키기 위한 조력자 내지는 브로커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본인 소유가 된 피로인 노예를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대마도 내에서 이미 소유자(왜구)가 정해진 비슷한 처지의 피로인 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마도에서 쇄환한 왜구 被虜人이 적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 창왕 1년 71) ꡔ世宗實錄ꡕ 권4, 세종 1년(1419) 6월 29일 임인. 72) ꡔ世宗實錄ꡕ 권63, 세종 16년(1434) 1월 22일 경자.
138 지역과 역사 39호 (1389) 朴葳의 대마도 정벌의 영향을 들 수 있다. 3-16. 경상도 원수 朴葳가 對馬島를 공격하였다.73) 3-17. 또 전함 100척을 가지고 對馬島를 공격하여 왜군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거의 불살라버렸다. 원수 金宗衍, 崔七夕, 朴子安 등이 뒤따라 왔으므로 그들과 함께 놈들에게 붙잡혀갔던 우리 사람 남녀 100여 명을 찾아 데려왔다.74) 3-17 사료를 보면 이 때 고려군은 대마도에서 被虜人 100명을 탈환해 오 는 데 성공한다. 이 대마도 정벌의 충격은 상당한 것으로, 대마도 도내의 충 격은 물론이거니와 류큐의 실권자인 中山王 察度가 처음으로 고려에 사신 을 보내어 피로인을 쇄환했던 것도 대마도 정벌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사료에서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75) 이로 인해 왜구들은 더 이상 對馬가 본거지로서, 또는 약탈물(곧 被虜人) 을 보관처로서 안전한 곳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에 왜구들은 피로인 을 다른 지역으로 팔거나, 더 깊이 숨기는 식으로 對馬 내의 被虜人을 처분 했을 것이다. 또한 보복의 위협이 커진 고려를 공격하기보다는 점차 중국 연해 등으로 약탈의 대상을 바꾸었을 것이다.76) 이후 대마도 정벌은 조선 초기까지 2차례 더 행해졌다. 최후의 정벌인 세 종 1년(1391)의 己亥東征 당시, 조선군이 탈환한 本國人은 8명에 불과했는 데, 아마 이러한 정세 변화에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對馬에서 왜구를 쇄환한 세력은 도주 宗氏만은 아니었다. 당시 宗氏는 對 馬島主로서 입지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사실은 여러 유력자들 중에 하나일 뿐으로, 少貳에 의해 守護代로 임명대면서 그 권위를 인정받은 데 지나지 않았다. 73) 74) 75) 76) ꡔ高麗史ꡕ 권137, 열전50, 창왕 원년(1389) 2월. ꡔ高麗史ꡕ 권116, 열전29, 박위. ꡔ高麗史ꡕ 권137, 열전50, 창왕 원년(1389) 8월. ꡔ世宗實錄ꡕ 권84, 세종 21년(1439) 2월 4일 계축.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39 3-18. 左衛門大郞이 사람을 보내어 유황 2천 3백 근, 銅鐵 3백 근, 胡椒 20 근, 蓬朮 17근을 바쳤으므로, 예조 좌랑 成念祖가 답서하기를, 回禮使가 돌아갈 때에 바다를 건너는 데 필요한 식량 30석을 回使에게 주어 가지고 가게 했는데, 회례사가 돌아올 때에 다행히 전하였던가. 전하는 말에, 본국 사람으로서 朴貴山ㆍ金同 등이 일찍이 本州(곧 對馬) 사람에게 잡혔는 데, 足下(곧 早田)에게 팔려 들어가 종이 되어 심부름을 한다. 하는데, 그들의 부모가 밤낮으로 울며 생각하고 있으니, 족하는 반드시 귀산과 김동을 돌려보내 어, 그들로 하여금 부자와 함께 단란하게 살도록 하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토산 물로 正布 4백 70필을 보내니 받아주기를 바란다. 77) 3-19. 對馬島 左衛門大郞이 사람을 보내어 被虜人 1명을 돌려보내고 이내 방물을 바치니, 면포를 회사하였다.78) 3-18 사료에 보이듯이 島主 소씨 외에 소다 사에몬타로(早田左衛門大 郞)도 피로인 쇄환을 놓고 교섭을 행하였다. 소다 사에몬타로는 스스로 대 마도 정벌 때 협력했음을 주장하며 사신을 보내어 왔다.79) 소다는 그 전신 이 바로 왜구였는데, 이 시기에는 쓰시마 도내에서 소 씨를 능가할 정도로 실력을 가지고, 조선에도 왕성하게 사자를 보내고 있던 인물이었고, 왜구의 禁壓도 맡고 있었다.80) 또한 博多의 大商人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한 소킨 (宗金/蘇緊)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인물이다.81) 3-18에서는 朴貴山ㆍ 金同의 買主로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3-19에서는 3-18의 쇄환 요청이 있은 지 1년이 넘은 상황에서 被虜人 1명만을 돌려보냈다고 되어 있다. 게 다가 이 사람이 朴貴山ㆍ金同 중 하나라고 특기가 되어 있지 않는데, 아마 본인의 奴婢인 두 사람은 숨기고 다른 사람을 보내었을 가능성이 큰 듯하 다. 즉, 스스로에게 귀속된 被虜人의 쇄환에 대해서 소극적인 면은 상기한 ꡔ世宗實錄ꡕ 권20, 세종 5년(1423) 6월 15일 갑자. ꡔ世宗實錄ꡕ 권26, 세종 6년(1424) 10월 6일 정미. ꡔ世宗實錄ꡕ 권5, 세종 1년(1419) 10월 17일 무자. 田村洋幸, 対朝鮮貿易における早田一族の特質 ꡔ中世日朝貿易の硏究ꡕ, 三和 書房, 1967. 81) 소킨은 ꡔ老松堂日本行錄ꡕ에서 宋希璟과 동행하고 있으며, ꡔ海東諸國記ꡕ에도 石城府代官 宗金 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77) 78) 79) 80)
140 지역과 역사 39호 宗氏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3-20. 경상우도 절제사가 병조에 馳報하기를, 宗彦七이 보낸 井大郞이 말 하기를, 대마도 왜적 만호 六郞次郞과 三未三甫羅와 汝每時羅와 一岐州 왜적 만호 都仇羅 등이 배 20척을 가지고 중국으로 도적질하러 가고자 하므로, 宗貞 盛이 그것을 금하였지만 宗茂直ㆍ宗大善 등이 정성에게 간청하므로, 정성이 허 락하여서 장차 2, 3월 사이에 풍편을 기다려 도적질하러 갔다가 5, 6월 사이에 야 돌아온다고 그 계획을 이미 정하였습니다. 종대선은 전부터 귀국과 원한이 있었으니 길이 전라도를 지날 때에 혹시 변경을 범할 지도 모르니 불가불 방비 하소서. 하였습니다. 고 하였다. 3-21. 예조에서 경상도 관찰사 牒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대마도 宗貞盛이 보낸 羅斤時老가 와서 고하기를, 六郞次郞이 中原을 침략하고, 본월 15일에 本島로 돌아와서 말하기를, 중원의 연변의 성읍을 공략하여 인민을 많이 죽이 고 錢穀을 약탈하였으며, 또 연변의 남녀와 어린애 아울러 1백여 인을 사로잡 았다. 하였고, 그 사로잡힌 唐人들이 말하기를, 조선 국왕 전하께서 왜인들이 장차 침입할 것이라고 두 번이나 아뢰어, 중국 조정에서 연변을 엄하게 戍禦하 기를 신칙하였는데, 근래에 수비가 조금 해이해졌기 때문에 뜻하지 않는 중에 突入하여 노략질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육랑차랑이 사로 잡은 인구를 장차 조선에 바치려고 하니, 서로 더불어 논의합시다. 고 하였습니 다. 82) 로쿠로지로(六郞次郞)는 소다 사에몬타로의 아들로, 사에몬타로의 사후 그를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다. 통교자로서 조선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온 바 있는 인물이며, 조선에서도 그가 왜구 출신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 다.83) 하지만 소다는 조선에서 왜구 활동을 하지 않는 대신 중국에서는 왜 구활동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3-21 사료에서는 중국에서 被虜人을 약탈하여 조선에 바치려는 계획까지 하고 있었다고 한다.84) 이는 아마 조 82) ꡔ世宗實錄ꡕ 권85, 세종 21년(1439) 5월 28일 을해. 83) ꡔ世宗實錄ꡕ 권53, 세종 13년(1431) 11월 9일 경오에 琉球 사신의 입을 빌어 賊首 라고 등장한다. 84) 한윤희, 앞의 석사학위논문, 2011, 62~63쪽.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41 선과는 교역관계가 성립되어 있지만 중국은 海禁으로 인해 교역이 힘들었기 때문에, 무역 대신 해적 활동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對馬 내의 여러 세력의 被虜人 쇄환 양상을 보았을 때, 이들은 통교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倭寇的인 사고방식으로 행동을 하고 있었음 을 볼 수 있다. 통교관계를 위해 조선의 民을 쇄환하였지만, 어디까지나 被 虜人에 대해서는 본인들의 재산으로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3) 九州 내의 諸세력 왜구를 쇄환한 주체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九州探 題이자 備後, 安芸, 筑前, 筑後, 豊前, 肥前, 肥後, 日向, 大隅, 薩摩國의 守護를 겸했던85) 이마가와 료슌이었지만, 그 외에 료슌이 파견한 守護代, 막부에서 파견한 인접 지역의 守護, 기타 지역 세력 등이 被虜人을 쇄환하여 왔다. 앞서 언급하지 않는 九州의 지방세력 중 가장 많은 被虜人을 쇄환한 것은 현재 사가현 마쓰라(松浦)ㆍ히라도(平戶) 등지에서 세력을 떨치던 마쓰라 토(松浦黨)였다. 특히 壹岐島을 본거로 한 마쓰라토 계열의 諸勢力은 왜구 의 주체로 지목되는 만큼86) 한 번에 많은 수의 被虜人을 보내어왔다. 예를 들어 승려 建哲,87) 源良喜,88) 仇沙殿89), 志佐殿90) 등을 들 수 있다. 후 술하겠지만, 연구자들에 의해 被虜人들의 노예시장으로 지목받기도 한 琉 85) 료슌은 지방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守護職을 박탈하고 자신이 겸하는 정책을 사 용하였다. 86) 이영, 경인년 이후의 왜구 와 마쓰라토(松浦黨) ꡔ일본역사문화ꡕ 24, 2006. 김보한, 東아시아의 經濟 圈域에 있어서 약탈의 주역, 海賊과 倭寇 : 10~13 세기 日本의 海賊과 倭寇를 중심으로 ꡔ중국사연구ꡕ 29, 2004 등. 87) ꡔ太祖實錄ꡕ 권3, 태조 2년(1393) 6월 16일 경인 200여 명. 88) ꡔ太宗實錄ꡕ 권12, 태종 6년(1406) 8월 6일 임진 76명 ; 권15, 8년(1408) 6월 28일 을사 23명 등. 89) ꡔ太宗實錄ꡕ 권15, 태종 8년(1408) 4월 29일 정미 100명. 90) ꡔ太宗實錄ꡕ 권13, 태종 7년(1407) 3월 26일 경진 35명 ; 14권, 7년 12월 16 일 을미 19명 ; 15권, 8년(1408) 5월 12일 경신 28명 등.
142 지역과 역사 39호 球보다도 훨씬 많은 수를 보내어 오고 있다. 물론 이들은 松浦黨으로 왜구 의 주축이 된 세력으로 많은 被虜人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임은 짐작이 가능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對馬의 1/5밖에 되지 않는 壹岐島라는 좁은 지역에 서 이렇게 많은 수의 被虜人을 바친 것은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정도 가설을 세워 보면, 하나는 이 지역은 일본 九州 내에서 노예 시장 혹은 노예 수용소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 가설 은 建哲을 제외한 壹岐島의 諸세력이 태종 6~8년 사이에 갑자기 被虜人을 많이 바친 것을 보아, 이들이 돈을 투자하여 다량의 被虜人을 사들이고, 이 들을 조선에 바침으로써 일종의 무역이득을 취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점 에 대해서는 향후 壹岐지역의 역사와 당시의 상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이 이외에 눈에 띄는 재지세력은 규슈 남부에 해당하는 薩摩ㆍ大隅 지역 의 島津氏일 것이다. 3-22. 일본 薩摩守 總州 藤伊久가 被擄되었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또 中 伊集院太守 藤原賴久가 臣이라 일컫고 글을 올려서 예물을 바치고, 이곳저곳 전해서 온 人口를 돌려보내 왔다.91) 3-23. 日本 薩摩州 藤原賴久가 表를 받들어 예물을 바치고 굶주림을 진휼하 도록 청하고, 藤原賴時가 또한 예물을 바치고 잡혀 갔던 사람을 돌려보내고 ꡔ大般若經ꡕ을 청하였다.92) 시마즈 사다히사(島津貞久)는 후에 무로마치 막부를 열게 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협력하여 고다이고 세력과 맞서 싸운 인물로, 쇼니(少貳)ㆍ오 토모(大友)와 함께 소위 서국 삼인중(西國三人衆) 중 하나이다. 그는 아들 인 모로히사(師久)와 우지히사(氏久)에게 각각 薩摩와 大隅의 수호직을 분 할하여 상속하였다. 3-22의 總州는 모로히사의 분파이며 고레히사(伊久)는 모로히사의 아들 91) ꡔ太祖實錄ꡕ 권7, 태조 4년(1395) 4월 25일 무자 3번째. 92) ꡔ太宗實錄ꡕ 권30, 태종 15년(1415) 12월 13일.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43 이다. 3-22와 23에 보이는 藤原賴久는 川上頼久를 말하는 것으로, 川上 역 시 島津의 분가이며 頼久는 시마즈 사다히사의 아들이자 川上의 초대이이 며, 위 伊久의 庶叔父의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 모두 시마즈의 분파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조선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었고, ꡔ海東諸國記ꡕ에도 薩摩州 항 목에서 島津氏를 다루고 있다. 이들 시마즈의 쇄환기사가 많은 편은 아니지 만, 여러 분파가 각각 규슈 남쪽지역까지 被虜人이 拉致ㆍ輸送 혹은 轉賣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 경로로 被虜人을 노획하게 되었는지는 조금 더 생각 해볼 여지가 있다. 1375년 이마가와 료슌에 의해 규슈 경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삼인중이 水島로 초빙되었고, 여기서 쇼니 후유스케(少貳冬資)가 살해당하면서 삼인중 모두 探題측과 이반하게 된다. 특히 시마즈 씨는 료슌 이 探題에서 파직당한 이후에도 九州探題와 대립을 이어나갔다. 그러므로 우왕 2년(1376) 10월 료슌이 고려의 사신 羅興儒의 귀환길에 良柔ㆍ周佐 를 파견하여 전달한 답서에 언급된 九州亂臣 에는 시마즈 역시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중국 측 사료에서는 薩摩 가 대표적인 왜구의 소굴로 꼽히기도 하는 만큼,93) 시마즈 역시 상황에 따 라서는 남조 측과 관련된 약탈 행위에 가담했을 가능성도 약간이나마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때 少貳氏와의 제휴로 對馬 혹은 松浦黨 등의 세력과 함께 연합하여 被虜人을 노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시마즈 세력이 왜구로 활동을 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찾기 힘들다. 3-22 사료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내용을 보면, 轉賣가 거듭되 는 와중에 薩摩까지 팔려온 피로인을 이 시기에 색출하여 쇄환했을 가능성 이 높다. 혹은 규슈 내의 여타 영주로부터 被虜人 奴隸를 증여받거나, 이전 에 시마즈 세력이 肥後의 菊池氏 세력과 항전하는 사이에 노획한 포로일 가 능성도 있을 것이다. 93) 윤성익, ꡔ명대 왜구의 연구ꡕ, 경인문화사, 2007, 62쪽의 ꡔ籌海圖編ꡕ, ꡔ日本圖 纂ꡕ 등 인용 사료 참조.
144 지역과 역사 39호 ꡔ海東諸國記ꡕ 등을 통해 보면, 이후 이들 九州 내 諸세력은 조선과의 통 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구적인 성향이 강한 이들 세력 은 조선 연해에서의 왜구 활동이 힘들어지고, 조선 측에서 (왜구 방비책으 로서) 진상-회사의 형태로 통교의 길을 열어주자 이에 적극 편승하였던 것 이다. 그리고 被虜人의 쇄환은 조선에 대한 효과적인 성의 표시가 될 수 있 었다고 생각된다. 4) 琉球 류큐(琉球)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바대로 창왕 1년(1389) 朴葳의 대마도 정벌에 소식을 듣고 고려에 첫 사신을 보내어왔다. 3-24. 琉球國 中山王 察度가 玉之를 파견하여 글을 올려 신하로서 자칭하였 으며 왜적에게 포로당하여 간 우리나라 사람들을 귀환시키고 그 지방의 산물인 琉黃 3백 근, 蘇木 6백 근, 胡椒 3백 근, 갑옷 20벌을 바쳤다. 이에 앞서서 전 라도 관찰사가 유구 국왕이 우리나라에서 대마도를 정벌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보내온 사신이 順天府에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였을 때에 도당에서는 이에 대하 여 전대부터 오지 않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접대에 난색을 보였다.94) 3-25. 琉球國 中山王 察度가 사신을 보내와서 聘問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사 로잡혀간 백성 37명을 돌려보냈다.95) 3-26. 해에 琉球國의 中山王 察度가 신하로 일컫고 글을 받들어 通事 李善 등을 보내어 예물을 가져와서 바치고, 아울러 사로잡혔던 남녀 8명을 送還하였 다.96) 류큐가 왜구가 피로인을 매매하는 일종의 노예시장의 역할의 하였을 가 능성이 지적되었고,97) 琉球王國과 왜구와의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을 94) 95) 96) 97) ꡔ高麗史ꡕ 권137, 열전50, 창왕 1년(1389) 8월. ꡔ高麗史節要ꡕ 권34, 공양왕 2년(1390) 8월. ꡔ太祖實錄ꡕ 권2, 태조 1년(1392) 윤12월 28일 갑진. 田中健夫, 琉球に關する朝鮮史料の性格 ꡔ中世對外關係史ꡕ, 東京大學出版會,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45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 만큼,98) 왜구와 琉球는 깊은 관련성을 가질 것이 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일본 국내에서 노예 매매에 한계가 있고, 혼란했던 규슈의 사정이 안정화됨에 따라 어떻게든 왜구가 납치해 온 노예에 대한 수 요가 있는 곳으로 수출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 목적지는 왜구가 새 로이 활동범위로 진출하고 있던 中國沿海이고, 해상에서 그 결절점이자 중 개점이 되는 곳이 바로 琉球였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對馬가 크게 공격을 받은 후 中山王 察度가 처음 고려에 사신을 보낸 것은, 아마도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와 연루된 점에 부담감을 느껴 일종의 사죄의 의미였을 것이다. 이 시기 琉球에서 온 사신은 특별히 대가를 요구하기보다 대체로 우호를 바란다는 뜻을 표시하고 있으며, 심지 어 稱臣하는 등의 저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99) 3-27. 琉球國의 中山王 察度가 사신을 보내서 箋文과 예물을 바치고, 포로 되었던 남녀 12명을 돌려보내고서, 망명한 山南王의 아들 承察度를 돌려보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 나라 세자 武寧도 왕세자에게 글월을 올리고 예물을 바치었다.100) 다만 태조대의 3-27 사료에서는 琉球 내의 권력다툼에 의해 망명한 산남 왕 溫沙道의 아들 承察度를 돌려보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 측에서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이며, 온사도는 조선 땅에서 4년 후에 죽는 다.101) 하지만 察度 역시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琉球國 中山王 思紹가 使臣을 보내어 來聘하고, 咨文하였다. (중략) 1. 遞送에 대한 일. 婦女 吳加의 告稱에 의거하면, 원래 羅州 등 처에 살고 있는 인민인데, 왕년에 왜구에게 노략을 당하여 본국에 유리해 왔 1975, 196쪽. 98) 吉成直樹ㆍ福寬美, ꡔ琉球王国と倭冦ꡕ, 森話社, 2006. 99) ꡔ高麗史ꡕ 권45, 세가45, 공양왕 1년 8월. 100) ꡔ太祖實錄ꡕ 권6, 태조 3년(1394) 9월 9일 병오. 101) ꡔ太祖實錄ꡕ 권15, 태조 7년 10월 15일 정사.
146 지역과 역사 39호 다. 고 하면서, 고향에 돌아가 백성이 되어 살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고한 것을 참조하건대, 먼 곳의 사람들이므로 사리가 마땅히 돌아가야 하겠기에, 지 금 오가 등을 출발시켜 배에 태워 보냅니다. 지금 발송해 보내는 부녀 3명은, 오가ㆍ삼덕과 데리고 있는 소녀 位加입니다. 102) 琉球國 中山王 思紹가 模都結制를 보내어 朝見하고, 또 잡혀 갔던 사람 14 명을 송환하였다.103) 위 사료에 나오는 中山王 思紹는 아들 尙巴志가 察度의 사후 등극한 武 寧을 몰아낸 후 등극한, 소위 제1尙氏王朝의 초대 왕이다. 武寧代에 이미 明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므로 조선과는 대등한 교린관계가 형성되었는데, 思紹王代까지도 被虜人의 쇄환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것은 역시 피로인 쇄환을 통해 교린관계를 다지는 동시에 통상을 통한 이익을 노린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결국 琉球가 왜구에 의 해 九州 지역으로 납치된 被虜人이 중국 등 타지역으로 유통되는 시장 내지 는 루트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다. 맺음말 이상을 통해 드러난 왜구에 의한 被虜人 발생 및 쇄환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고자 한다. ① 왜구에 의한 납치는 특정 시대나 사건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반적인 해적으로서의 행동양식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왜구피해의 증가는 被虜人의 증가와 비례할 것으로 생각된다. ② 왜구가 人身을 납치한 이유는, 약탈 행위상의 부조를 얻기 위해, 성적 102) ꡔ太宗實錄ꡕ 권18, 태종 9년(1409) 9월 21일 경인. 103) ꡔ太宗實錄ꡕ 권20, 태종 10년(1410) 10월 19일 임자.
여말선초 倭寇 被虜人의 쇄환과 그 성격 147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그리고 매매를 통한 재 화의 획득을 위한 것 등이었다. 왜구의 체류가 장기화될 때에는 피로 인 역시 더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③ 피로인의 쇄환의 주체는 日本國王부터 재지세력에 이르기까지 다층적 이었으나, 쇄환의 출발장소는 대체로 규슈 일대로 한정되는데, 그 원 인은 일본 내에서 노예 시장이 활성화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④ 왜구와 관련을 가지는 對馬나 九州의 諸세력 등에 의해 피로인이 쇄 환되는 경우, 그 양상 역시 倭寇的인 특징을 띤다. ⑤ 琉球는 倭寇 被虜人을 매매하는 시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창왕 대 대 마도 정벌 이후 위기감을 느껴 고려에 내조하기 시작하였다. 위 5가지 외에, 被虜人의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원래 이들은 고려의 民으로 대체로는 토지에 정착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 혹은 조선의 정부에게 이들은 기층민으로서 納稅와 役을 부담할 국가 경영의 근본이었다. 그러나 왜구에 의해 납치되면서, 이들의 존재는 人格에 서 物格으로 격하가 일어났고, 奴隸 혹은 奴婢라는 형태로 이국인의 재산으 로 예속되고, 경우에 따라 여기저기 轉賣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외교적 인 루트가 열리면서, 수천에 달하는 被虜人들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물론 귀향을 하지 못한 수많은 被虜人들은 이국에 그 최후를 맞았을 것이 다. 하지만 그들이 쇄환되는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선 정부와 여러 계층의 일본인(즉 일본국왕에서 각 영주, 재지세력 등)의 사이에 일어나는 進上-回賜 무역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당수의 被虜人 쇄환 주체 들은 피로인을 쇄환하는 대가로 교역을 허락받거나, ꡔ大藏經ꡕ을 구하거나, 여타 귀한 대가를 回賜品으로 받았다. 심지어 중국에서 人身을 납치하여 조 선에 바칠 수 있다 는 생각을 가진 왜구 출신의 인물도 있었다. 조선 정부에 서는 被虜人의 쇄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무리한 요구조차도 가급적 상대 측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결국 被虜人은 여전히 倭寇的인 상황하에서, 동시에 조선전기
148 지역과 역사 39호 進上-回賜 무역의 틀 안에서 교환가치가 극히 높은 상품 으로 작용하고 있 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ꡔ高麗史ꡕ, ꡔ高麗史節要ꡕ, ꡔ世宗實錄ꡕ, ꡔ定宗實錄ꡕ, ꡔ太祖實錄ꡕ, ꡔ太宗實錄ꡕ 宋希璟, ꡔ老松堂日本行錄ꡕ. 申叔舟, ꡔ海東諸國記ꡕ. 김기섭 외, ꡔ일본 고중세 문헌 속의 한일관계사료집성ꡕ, 혜안, 2005. 김기섭, 14세기 倭寇의 동향과 고려의 대응 ꡔ한국민족문화ꡕ 9, 1997. 김보한, 東아시아의 經濟 圈域에 있어서 약탈의 주역, 海賊과 倭寇 : 10~13세기 日本의 海賊과 倭寇를 중심으로 ꡔ중국사연구ꡕ 29, 2004. 羅鍾宇, ꡔ韓國中世對日交涉史硏究ꡕ, 원광대학교 출판부, 1996. 孫承喆, 朝鮮時代 ꡔ行實圖ꡕ에 나타난 日本의 表象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7, 2010. 孫弘烈, 麗末ㆍ鮮初 被倭俘虜의 刷還 ꡔ史叢ꡕ 19, 1975. 孫弘烈, 孫弘烈 - 麗末ㆍ鮮初의 對馬島征伐 ꡔ호서사학ꡕ 6, 1978. 윤성익, ꡔ명대 왜구의 연구ꡕ, 경인문화사, 2007. 이 영, 경인년 이후의 왜구 와 마쓰라토(松浦黨) ꡔ일본역사문화ꡕ 24, 2006. 이 영, 고려 말 왜구와 남조-경신년(1380)의 왜구를 중심으로 ꡔ한일관계사연 구ꡕ 31, 2008. 이 영, 쓰시마 쯔쯔(豆酘) 다구쓰다마 신사(多久頭魂神社) 소재 고려 청동제 飯子 와 왜구 ꡔ한국중세사연구ꡕ 25, 2008. 이 영, 경인년(1350)~병신년(1356)의 왜구와 규슈 정세 : 쇼니 요리히사(少貳賴 尙)를 중심으로 ꡔ한국중세사연구ꡕ 26, 2009. 이 영, 경신년(1380) 왜구=기쿠치씨(菊池氏)>설에 관한 한 고찰 ꡔ일본역사연구ꡕ 35, 2012. 이 영, 고려 말의 왜구와 대마도, 부경대학교 대마도연구센터, ꡔ전란기의 대마도ꡕ, 국학자료원, 2013. 정영현, 고려 禑王代 倭寇의 동향과 성격 변화 ꡔ역사와 세계ꡕ 33, 2008. 한윤희, 여말선초 피로인 송환에 관한 한 고찰 ꡔ일본연구ꡕ 3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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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지역과역사 39 호 Abstract The Repatriation and Characteristics of Korean Slaves by Japanese Pirates in the Period of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Jeong, Yeong-Hyeon The Wako, Japanese pirates, being rampant in earnest in the late 14th century, not only were just active locally but also interacted with the situation in Northeast Asia. They mostly plundered grain and drag people away. Especially, kidnapped people by Wako were enslaved or trafficked. There were several reasons that the Wako had kidnapped people: getting advantage of piracy; satisfying their sexual desire; securing labor force; acquiring property through human trafficking. The repatriation of prisoner had many layers of subject from Muromachi Shogun to regional forces, and its area of departure generally was limited around Kyushu region because the slave markets were not activated nationally in Japan. In the case of repatriation by the several forces in the Tsushima or Kyushu connected with Wako, it took on a piratical aspect. Acting as marketplace trafficking slaves kidnapped by Wako, Ryukyu Kingdom had felt so danger after the Raid on Tsushima in 1389 that sent them back to and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with Joseon. The Kidnapped slaves by Wako Would had been people of Goryeo and lived sedentary lives. However, Their status was demoted from the status of human beings to commodity when they kidnapped by Wako. Henceforth, some slaves could back to their home country, but the other people were dead and buried in
여말선초倭寇被虜人의쇄환과그성격 151 a foreign land. Looking at process of their repatriation any other way, however, it was not much different from system of tributary trade which occurred between Joseon government and various Japanese forces. As a result, the kidnapped slaves were treated as high value commodity also in diplomatic relationship. Keywords : Japanese Pirate(Wako), Kidnapped Slaves, Kyushu, Ryukyu Kingdom, Tributary Trade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153~190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53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153 연구논문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04)유 우 창* 머리말 Ⅰ. 6세기 전반 加羅國의 史的 전개 Ⅱ. 駕洛國記에 서술된 加羅國 기사들 Ⅲ. 駕洛國記 좌지왕조와 加羅國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는 ꡔ가락국기ꡕ에 전하고 있는 기록 중에 가라국의 것도 일부 실려 있음에 주목 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가락국의 영역 기사 와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를 ꡔ삼국사기ꡕ 및 ꡔ일본서기ꡕ 등의 사서와 비교, 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이들 기록은 가락국의 史蹟이 라기보다는 가라국의 사적으로 볼 여지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가락국의 영역 기사 는 수로왕의 건국신화 중에 보인다. 하지만 수로왕 건국 무렵의 사실로는 볼 수 없다. 아마 6세기 전반 백제에게 기문지역을 상실한 후의 가라국의 영 역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까닭은 그 영역의 서북쪽이 지리산 혹은 지리산동 을 한계로 한다는 기록 때문이다. 가락국왕 세보 중 좌지왕조는 ꡔ일본서기ꡕ 계체기 23년 3월 첫 번째 시월조의 가라국 기사와 비교해보면 그 내용이나 구성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 좌지왕의 부인 이었던 용녀 와 이뇌왕의 부인 신라왕녀는 모두 추종하는 무리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국내요란, 혹은 변복 등의 사건을 일으키며 각각 반대세력으로부터 견제 를 받아 퇴출되고 있다. * 동서대학교 교양교육원 강사(hismajor@hanmail.net).
154 지역과 역사 39호 본고의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향후 가라국사 연구에 ꡔ가락국기ꡕ도 하나의 자료로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주제어 : 지리산(동), 傭女, 신라왕녀, 女黨, 女從 머리말 ꡔ三國遺事ꡕ에 전해져 오는 ꡔ駕洛國記ꡕ는 온전한 형태의 글이 아니다. 왜 냐하면 ꡔ삼국유사ꡕ의 찬자인 一然이 그 첫머리에서 文宗代인 太康年間에 金官知州事인 文人이 撰한 것인데, 지금 줄여서 싣는다. 1) 하여 원래의 ꡔ가 락국기ꡕ가 있었음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려 문종 대의 태강연간은 1075년~1084년이므로 그 편찬연대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撰進된 ꡔ三國史記ꡕ보다 대략 70년 정도 앞서는 기록2)이다. 그리고 그 기록의 명 칭에서 가락국의 역사기록 임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ꡔ가락국기ꡕ는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풍부하고, 기본이 되는 사료임 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ꡔ가락국기ꡕ는 내용상으로 가락국의 시조 수 로왕의 개국신화 및 허왕후 도래신화와 수로왕에 대한 제의 관련 기록이 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3) 게다가 개국신화로서 수로왕 및 허왕후 신화는 내 1) ꡔ三國遺事ꡕ 권2, 紀異 2, 駕洛國記. 文廟朝 太康年間 金官知州事 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2)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조의 본문 중에 自建安四年己卯始造逮今上御圖三十一載大 康二年丙辰凡八百七十八年 이라는 글월에 주목하여 원 ꡔ가락국기ꡕ의 편찬 시 기를 1076년으로 보는 견해(三品彰英, ꡔ三國遺事考証ꡕ 中, 塙書房, 1979, 315쪽. 李丙燾, ꡔ韓國古代史硏究ꡕ, 博英社, 1985(修訂版), 323쪽), 1075~1076년으로 보는 견해(丁仲煥, ꡔ加羅史硏究ꡕ, 혜안, 2000, 340쪽) 등이 있다. 3) 수로왕ㆍ허왕후 신화와 그와 관련된 후세의 제의 부분이 전체의 8할 이상을 차지 하고 있으며, 말미에 가락국 국왕의 세보가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즉 가락국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55 용의 풍부성ㆍ신이성 및 불교와의 관련성이 매우 농후한 까닭으로 ꡔ가락국 기ꡕ는 종래 역사학보다 신화학, 민속학, 국문학 등에서 많이 다루어졌었다.4)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취급된 ꡔ가락국기ꡕ 역시 수로왕 및 허왕후 신화에 만 주목되었기 때문에 가야사 전체의 맥락에서 연구되어지지는 않았었다. 다만 특정 연구 즉 초기 가야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분석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각을 넓혀 ꡔ삼국사기ꡕ 및 ꡔ日本書紀ꡕ 등 국내외 여러 사서들과 비교해 볼 때, ꡔ가락국기ꡕ가 꼭 駕洛國만의 史實 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그 속에 보이는 영역 문제, 또 그 멸망에 즈음하여 加羅國의 것으로 여겨지는 기록 등도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아마도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첫째, 원 ꡔ가 락국기ꡕ의 편찬 연대를 기준으로 삼으면 그때는 이미 가야가 멸망한지 500 여 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이 많이 흐려진 때문이었을 것이고, 둘째, 그 연 장선상에서 멸망이후 오랜 기간까지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깊이 각 인된 가야는 동류 라는 의식의 소산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미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르는 동안 가야사 관련 연구 성과는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참조하여 제1장에서는 본고의 도론격으로 6세기 전반 加羅國의 史的 전개 양상을 대외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시기 순으로 한 번 개괄해 볼 것이다. 그 리고 제2장에서는 종래부터 지적되어 온 바, ꡔ가락국기ꡕ에 섞여 있는 가라 국 관련 기사들을 추출한 다음, 특히 영역기사 를 중심으로 ꡔ삼국사기ꡕ 및 ꡔ일본서기ꡕ 등 다른 사서와 비교하여 재정리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 장에서는 제2장의 연장선상에서 ꡔ가락국기ꡕ 국왕세보 좌지왕조를 ꡔ일본서 기ꡕ 계체기 23년 3월조의 가라국 관련 기사와 비교한 다음, 멸망하기까지 6세기 가라국의 史的 흐름을 검토해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특히 6세기 가라 기 는 가락국의 개국설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白承忠, 加耶의 地域聯盟史 硏究, 釜山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5, 41쪽). 4) 백승충, 가야 건국신화의 재조명 ꡔ한국 고대사 속의 가야ꡕ, 혜안, 2001, 77쪽.
156 지역과 역사 39호 국사를 재구성하는 데에는 ꡔ가락국기ꡕ도 일정 부분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 는 하나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한다. Ⅰ. 6세기 전반 加羅國의 史的 전개 479년 중국 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왕 荷知가 輔國將軍本國王 에 책 봉되는 등5) 5세기 후반 이래 전성기를 구가하던 가라국은 6세기에 들어서 면서 신라와 백제의 공세에 맞서야 하였다.6) 520년대 말까지 가라국은 때 론 백제의 파상적인 공세에 직면하여 고전하였고, 때론 신라의 혼인동맹 을 빙자한 영역 잠식에 힘겹게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가라국은 점점 쇠락해지기 시작하였는데, 본 장에서는 이와 관련된 사료들 을 검토해보고 본고의 도론으로 삼고자 한다. A-① (509년) 2월, 任那日本縣邑에 있는 百濟의 백성으로 떠돌아다니거나 도망하여 호적이 끊기기 3, 4世인 자를 검속하고 색출하여 모두 百濟로 옮겨 호 적에 附屬시켰다.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紀 3년) A-② (512년) 12월, 百濟가 따로 表를 올려 任那國의 上哆唎ㆍ下哆唎 ㆍ娑陀ㆍ牟婁 4縣을 청했다. 表에 따라 任那의 4縣을 하사했다. (ꡔ日本書 紀ꡕ 권17, 繼體紀 6년) 475년 고구려의 강력한 침공으로 수도 漢城이 함락되자 급히 熊津으로 천도한 백제는 무령왕이 등극하여 실지회복을 위해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 5) ꡔ南齊書ꡕ 권58, 列傳 39, 東南夷 加羅國. 6) 신라의 경우, ꡔ삼국사기ꡕ 이사부 열전에 異斯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 權謀 以馬戱誤加耶[或云加羅]國 取之 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곧 지증왕 재 위 시기(500~513) 중 어느 때에 신라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음을 보여주 는 것이다(白承玉, 新羅ㆍ百濟 각축기의 比斯伐加耶 ꡔ釜大史學ꡕ 15ㆍ16合, 1992, 309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57 지만,7) 여의치 않자8) 본격적으로 그 팽창의 예기를 가야로 돌렸는데, 아마 도 그 첫 시도가 위의 A-① 사건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일단 문제가 되는 것은 임나일본현읍 일 것인데, 주지하는 바와 같 이 임나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전제하에 서술된 문구로 ꡔ일본서기ꡕ 편찬 과 정에서 상투적으로 가해지는 윤색에 지나지 않으므로9) 이를 제거하고 해석 하면 임나, 즉 가야의 어떠한 현읍 에 근 100여 년 동안 떠돌아다니거나 도 망하여 온 백제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성격에 대하여 대외 진출을 활발히 하던 근초고왕 때 가야 지역으로 徙民된 백제인들의 후손으로 보기도 하지만,10) 기근으로 2~3천 명 규모의 백제의 민들이 신라와 고구려지역으로 옮겨갔거나 도망한 예11)가 있기 때문에 가 야지역에도 이와 같은 백제 출신의 주민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12) 어쩌면 4세기 이후 백제의 고구려와의 만성적인 전쟁상태를 피해서 임나, 즉 가야의 땅으로 들어간 백제 출신의 주민을 일컫는 것13)일 것이다.14) 여기서의 임나 는 가라국 자체는 아닌 듯한데, 현읍 이라는 용어로 보아 가라연맹체 내의 한 소국이거나 지역이로되 백제 출신의 주민이 어느 정도 거주하고 있으므로 지리적으로 백제와 가까운 지역일 것이다. 한편 위 사료 에서는 이와 같은 백제인의 후손이 백제 백성 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미 임나 즉 가야에 거주한 지 3~4세대가 지났으므로 이들을 더 이상 백제 백 7) ꡔ三國史記ꡕ 권26, 百濟本紀 4, 武寧王 즉위년 11월조 ; 2년 11월조. 8) 그 승패를 기록을 통해서는 알 수 없으며, 무령왕 7년 10월에는 오히려 고구려로 부터 침공을 당하고 있다. 9) 김현구ㆍ박현숙ㆍ우재병ㆍ이재석, ꡔ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ꡕ (Ⅱ), 일지 사, 2003, 42쪽. 10) 白承玉, 앞의 논문, 1992, 309쪽. 11) ꡔ三國史記ꡕ 권26, 百濟本紀 4, 東城王 13년 7월조 및 21년조 ; 武寧王 21년 8 월조. 12) 白承忠, 앞의 박사학위논문, 1995, 187쪽. 13) 연민수, ꡔ고대한일관계사ꡕ, 혜안, 1998, 178쪽. 14)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표문에 의거하면, 440년대 이후에도 백제를 이탈 한 유민들의 가야 유입이 있었을 것이다(유우창, 6세기 전반 가라와 나제동맹 의 대립 ꡔ역사와 세계ꡕ 41, 2012, 51쪽 참조).
158 지역과 역사 39호 성 으로 볼 수는 없다. 백제가 이들, 즉 백제 출신 가야인들을 자신의 호적에 부속시켰다는 것은 백제가 사실상 그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켰다는 것이 전 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무령왕 대의 백제가 가야 지역에 대하여 본격 적인 군사 침투를 시작했다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 침투에 성공한 백제는 이후 지속될 가야 잠식을 위한 그 첫 작업으로 백제와 연고가 있는 가야인 들을 문자 그대로 백제 백성 으로 만든 것이었다. 가야에 거주하던 백제계 가야인들을 자신의 호적에 편입 시킨 백제는 사 료 A-②에서 보는 바와 같이 512년 12월에 본격적으로 가야지역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A-②는 백제가 임나 즉 가야의 4현 15)을 왜로부터 하 사받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백제가 임나4현 을 왜에 요청했다는 것 또 한 소위 야마토 정권의 임나지배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제거한 다음, 상다리ㆍ하다리ㆍ사타ㆍ모루의 임나4현 이 이 무렵에 이르러 백제의 소속으로 바뀌었으니, 그 이전에는 이 4현 이 가야의 영역이었다는 것16)은 분명한데, 백제가 가야의 이 4현 을 군사적으로 점령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백제의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에 다름 아 닌 것이다.17) 결국 가라국은 가라연맹체의 맹주로서 현읍 을 상실한지 3년 만에 또다시 백제에게 4현 을 잃었던 것이다. 임나4현 의 위치18)는 대체로 섬진강 유역으로 보이는데, 백제와 매우 근 15) 이와 같은 縣 의 용례는 ꡔ삼국사기ꡕ 가야 관련 기사에도 보이는데, 현 으로 표현 한 것이 가야측의 기록에 근거를 두었다면, 이는 연맹소속국을 하나의 縣 으로 취급하려는 가라국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金泰植, ꡔ加耶聯盟史ꡕ, 一潮閣, 1993, 291~292쪽). 한편 ꡔ일본서기ꡕ 속에서도 위의 4현을 포함하여 꾸준히 縣 으로 표현 된 것이 나오고 있는데, 후술할 ꡔ일본서기ꡕ 계체기 23년 3 월 시월조의 諸縣 과 같이 가라국의 어느 지역뿐 아니라 연맹참가국의 영토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김현숙, 6세기 대가야의 발전단계에 대한 一考 ꡔ慶北史學ꡕ 23, 2000, 348쪽). 16) 김태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ꡔ한국 고대 사국 의 국경선ꡕ, 서경문화사, 2008, 21쪽. 17) 백승옥, 安羅高堂會議 의 성격과 安羅國의 위상 ꡔ지역과 역사ꡕ 14, 2004, 26쪽. 18) 임나4현 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 다양한 비정이 있어왔는데, 근년에는 상다리-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59 접한 지역이었음이 명백하다.19) 반면 가라국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였기 때 문에 작정하고 침공해오는 백제의 공세를 맹주국으로서 지켜내기가 어려웠 던 것이다.20) 이 해에 4현 을 상실한 가라국은 향후 백제의 끊임없는 침공 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듬해 백제는 특히 맹주로서의 가라국이 대사 와 함 께 대외교섭 창구로 매우 중시했던 기문 에 대한 침공을 가해왔다. B-① (513년) 6월, 百濟는 따로 奏하여 말하기를, 伴跛國이 臣의 나라 己汶의 땅을 略奪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天恩으로 판단하여 본래의 소 속으로 되돌려주십시오. 하였다. 11월, 朝廷에서 百濟의 姐彌文貴 장군, 斯羅 의 汶得至, 安羅의 辛已奚와 賁巴委佐, 伴跛의 旣殿奚와 竹汶至 등을 줄 세우 고 恩勅을 받들어 선포하였다. 己汶과 滯沙를 百濟國에 하사했다. 이 달에 伴 跛國이 戢支를 보내어 珍寶를 바치고, 己汶의 땅을 청했다. 그러나 끝내 하사하 지 않았다.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紀 7년) B-② (516년) 9월, 百濟가 州利卽次 장군을 보냈는데, 物部連과 같이 와서 己汶의 땅을 준 것에 사례하였다.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紀 10년) 위의 사료들은 513년 6월부터 시작되어 516년 9월 종식된 가라국과 백 제 사이의 기문 지역 쟁탈전을 배열한 것이다. B-①은 기문 지역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반파(이하 가라국이라고 함)가 전쟁을 벌였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백제가 왜에 사신을 파견하여 기문 지역을 본래의 소속으로 돌려달라고 청했다는 등 왜 혹은 일본 과 관련되는 내용은 모두 ꡔ일본서기ꡕ 찬자의 윤색이므로 분석의 대상에서 마땅히 제거해야 할 것이다. 가라국과 백제 사이의 분쟁지인 기문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남원,21) 혹은 여수시, 하다리-돌산읍, 사타-순천시, 모루-광양시에 각각 비정하는 것이 거의 통설시 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앞의 논문, 2008, 22~23쪽 및 백승충, 임나 4현 의 위치 비정 ꡔ역사와 경계ꡕ 85, 2012, 65~86쪽 참조. 19)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紀 6년 12월조. 此四縣 近連百濟 遠隔日本 旦暮易通 鷄犬難別 20) 白承忠, 앞의 박사학위논문, 1995, 189쪽.
160 지역과 역사 39호 임실을 포함한 남원 지역22) 등으로 비정된다. B-①의 문맥대로라면 기문 은 본래 백제의 영토였음이 분명한데, 가라국이 이를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문이 과연 백제의 영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견해가 둘로 나뉘고 있다. 첫째는 위의 기록을 그대로 신빙하여 백제의 주장처럼 가라국 이 본래 백제의 영역이었던 기문을 침공했다고 믿는 경우이고,23) 둘째는 기문은 본래 가야의 영역이었는데, 백제가 기문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그 정당성 확보에 불과한 것으로 ꡔ백제본기ꡕ나 ꡔ일본서기ꡕ적 주장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경우이다.24) 이 점과 관련하여 본고는 전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데, 다만 가라국의 기문 진출이 6세기 전반에 있었다고25) 생각하지는 않으며, 백제가 440년 대부터 고구려와 전쟁에 시달리며 국력이 고갈되고 있던26) 틈을 탔거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475년 고구려의 백제침공27)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 점에 백제의 內訌28)에 편승하여 가라국이 기문을 기습 점령하였고, 그 후 계속 영유하고 있다가 513년 6월, 백제의 공격을 받았던 것으로 본다. 같은 해 11월, 모처에서 이해 당사자인 가라국과 백제는 물론 안라와 신 라까지 참석하는 회담이 개최되었는데,29) 지난 6월에 발생한 전쟁의 사후 21) 李永植, 百濟의 加耶進出過程 ꡔ韓國古代史論叢ꡕ 7, 1995a, 208~211쪽. 22) 金泰植, 앞의 책, 1993, 124쪽. 23) 金泰植, 위의 책, 123~124쪽. 주보돈, 熊津都邑期 百濟와 新羅의 關係 ꡔ古 代 東亞細亞와 百濟ꡕ, 서경, 2003, 193쪽. 24) 李永植, 앞의 논문, 1995a, 211~215쪽. 白承玉, ꡔ加耶 各國史 硏究ꡕ, 혜안, 2003, 203쪽. 이 이전의 연구성과는 백승옥의 책 같은 쪽 주 171)을 참조. 25) 金泰植, 앞의 책, 1993, 125쪽. 주보돈, 앞의 논문, 2003, 193쪽. 26) ꡔ魏書ꡕ 권100, 列傳 88, 百濟國. 延興二年 其王餘慶 始遣使 上表曰 自馮氏 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陵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27) ꡔ三國史記ꡕ 권25, 百濟本紀 3, 蓋鹵王 21년조 및 권26, 百濟本紀 4 文周王 즉 위년조. 28) ꡔ三國史記ꡕ 권26, 百濟本紀 4, 文周王 4년조. 三斤王 2년조. 29) 회담 장소로 안라를 상정하기도 한다(李根雨, ꡔ日本書紀ꡕ에 引用된 百濟三書 에 관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199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61 처리가 그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담의 결과 백제는 기문 영유를 기 정사실화 했는데, 이에 대한 가라국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가라국은 따로 사절을 백제에 보내어 진귀한 보물, 즉 일종의 전쟁배상금을 치르고 서라도 기문 지역을 돌려받기 위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지만, 결 국 실패하였고, B-②에서 보는 바와 같이 516년에 이르러서는 형식적으로 도 기문 지역은 완전히 백제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 쳐 서쪽 영역을 상실한 가라국은 이제 새로운 외교활동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C-① (522년) 3월, 加耶國王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伊飡 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ꡔ三國史記ꡕ 권4, 新羅本紀 4, 法興王 9년) C-② 釋順應傳에 이르기를, 大伽倻國 月光太子 아버지는 異腦王인데 신 라에 구혼하여 夷粲 比枝輩의 딸을 맞아들여 太子를 낳았다. (ꡔ新增東國輿地 勝覽ꡕ 권29, 高靈縣 建置沿革)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위 사료들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만, C-① 의 경우 신라의 입장에서 C-②의 경우 가야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 C①의 伊飡 比助夫와 C-②의 夷粲 比枝輩는 동일 인물이 틀림없으나 C-② 의 이찬 비지배의 딸은 C-①의 이찬 비조부의 누이가 옳다고 여겨진다.30) 그리고 C-①의 가야국왕은 C-②의 대가야국 월광태자의 아버지인 이뇌왕 이므로 C-①의 加耶 란 곧 C-②의 大伽倻 즉 가라국 을 일컫는 것이다. ꡔ삼국사기ꡕ의 기년에 따라 522년 3월, 가라국과 신라 양 왕실 사이에 일 종의 혼인동맹 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에게 기문 지역을 상실 하고, 대사 지역까지 위협받는(B-①) 엄혹한 현실 속에서 가라국은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는 모험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1) 어쩌면 가라 30) 金泰植, 大加耶의 世系와 道設智 ꡔ震檀學報ꡕ 81, 1996, 18쪽. 31)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紀 8년 3월조. 伴跛築城於子呑帶沙 而連滿奚 置烽候邸 閣 以備日本 復築城於爾列比麻須比 而絙麻且奚推封 聚士卒兵器 以逼新羅 駈 略子女 剝掠村邑 凶勢所加 罕有遺類 夫暴虐奢侈 惱害侵凌 誅殺尤多 不可詳載
162 지역과 역사 39호 국 내에서 이에 반대하는 불만세력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가라국의 이뇌 왕은 이들의 불만을 설득해가면서 백제의 침공으로부터 가라국 및 그 세력 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자구책32)이었는지도 모를 청혼 을 신라에게 했던 것이다. 신라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른바 가라신라 혼인동맹 이 체결되었다. 가라국에게 있어서 신라와의 혼인동맹이란 지속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잠 식해오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신라는 가라국 의 청혼을 허락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가야의 내부분열을 일으켜,33) 결국에 는 가야를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34) 그러나 가라국과 신라 사 이의 혼인동맹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 듯한데, 적어도 529년까지는 이어져 갔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의 편의상 제3장에서 다루고, 다음 장에 서는 일단 ꡔ가락국기ꡕ에 서술된 가라국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 냐하면 그 기사들의 내용이 6세기 가라국의 역사적 상황과 꽤 부합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Ⅱ. 駕洛國記에 서술된 加羅國 기사들 고려 문종 대에 만들어진 ꡔ가락국기ꡕ는 찬자인 金官知州事가 ꡔ개황록ꡕ 과 기타 사료들을 가지고 찬술하였다고 한다.35) 그 기타 사료들, 즉 참고 자료는 대개 문무왕 대 만들어진 김유신비문,36) 선덕왕이나 원성왕 대에 32) 33) 34) 35) 기문 지역을 백제에게 상실한 다음 해인 514년 3월에 가라국은 신라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돌발적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가라국 의 신라 공격 이후 8년 만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가라국으로서도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白承忠, 于勒十二曲의 해석문제 ꡔ韓國古代史論叢ꡕ 3, 1992, 471쪽. 白承忠, 앞의 박사학위논문, 1995, 200쪽. 金泰植, 가야의 발전과 쇠망 ꡔ한국사ꡕ 7, 국사편찬위원회, 1997, 348쪽. 金泰植, 駕洛國記 所載 許王后 說話의 性格 ꡔ韓國史硏究ꡕ 102, 1998, 35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63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김장청의 ꡔ김유신행록ꡕ 10권37) 및 고려 문종 대 김양일이 찬한 수로비문 등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38) 이와 같은 참고 자료 중 본고에서는 ꡔ김유신행록ꡕ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는데, 왜냐하면 ꡔ김유신행록ꡕ(이하 ꡔ행록ꡕ이라 함)은 자못 釀辭가 많다. 따 라서 그것을 刪落하고 가히 글로 엮을만한 것을 취하여 그 傳을 삼았다. 39) 는 ꡔ삼국사기ꡕ 찬자의 언급으로 보아 현전하는 김유신열전 의 저본이 되었 기 때문이다. 그러면 ꡔ행록ꡕ에서 산락 되었다고 하는 양사 의 의미는 무엇 일까? 종래의 연구 성과에서는 대체로 이를 김장청이 그의 현조인 김유신의 위 대함을 강조하여 비합리적ㆍ초능력적 으로 서술한 부분일 것이라 하였다.40) 그러나 본고에서는 양사 라는 말의 本義 에 주목하고자 한다. 釀辭 란 釀造 또는 釀成된 말로서, 釀은 謂切雜之也 함과 같이 이것저 것 섞어서 만들어 낸 말 41)이라 한다. 이와 같은 본의 에 주목하면, ꡔ행록ꡕ 의 양사 중에는 김유신의 비합리적ㆍ초능력적 행위뿐 아니라, 시간의 흐 름에 따라 가야는 동류 라는 뿌리 깊은 의식 속에서 김유신의 출신인 가락 국 외에 다른 가야의 역사적 사실 이 찬자인 김장청도 모르게 스며들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된다. 즉 ꡔ행록ꡕ에 들어가서는 안 될 다른 가 야의 역사적 사실 을 또한 양사 라 할 수 있다면, 김유신의 비합리적ㆍ초능 력적 행위와 더불어 김유신열전의 찬자에 의해서는 제거되었겠지만, 그보 다 70년 정도 일찍 만들어진 원 ꡔ가락국기ꡕ에서는 ꡔ행록ꡕ 중의 양사 가 일 36) ꡔ三國史記ꡕ 권43, 列傳 3, 金庾信 下. 咸寕四年癸酉 至秋七月一日 薨于私第 之正寢 享年七十有九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 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 樂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戸 以守墓焉 37) 丁仲煥, 앞의 책, 2000, 361쪽. 38) 丁仲煥, 위의 책, 358~363쪽. 金泰植, 앞의 책, 1993, 71~72쪽. 백승충, 앞 의 논문, 2001, 86쪽. 39) ꡔ三國史記ꡕ 권43, 列傳 3, 金庾信 下. 庾信玄孫 新羅執事郎長清 作行錄十巻 行於世 頗多釀辭 故刪落之 取其可書者 爲之傳 40) 丁仲煥, 앞의 책, 2000, 359쪽. 41) 丁仲煥, 위의 책, 358쪽.
164 지역과 역사 39호 정 부분 참고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42) 본고는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아래에서는 현전하는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조에 보이는 加羅國 의 역사를 추출해보고자 한다. ꡔ가락국기ꡕ는 그 명칭에서 표방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가야제국 중 하나인 가락국 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 왕의 탄강 설화와 시조왕의 비인 허왕후의 도래 설화를 비롯하여 수로왕 부 부 사망 후 가락국인 및 그 후손에 의한 제사 관련 기록을 연대순으로 나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로왕 이후 거등왕부터 마지막 왕인 구형왕까 지 역대 가락국왕들의 세보와 간단한 사실들을 재위 순으로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래부터 ꡔ가락국기ꡕ에는 가라국의 역사로 추 정되는 기록들이 뒤섞여 있음이 지적되어 왔다.43) 그러한 것들을 현전하는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조 및 오가야조에서 뽑아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조 및 오가야조에 보이는 가라국 관련 기록 연번 내용 ①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5가야의 임금이 됨. ② 오가야 아라가야, 고녕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③ 동쪽으로는 황산강, 서남쪽으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쪽 으로는 가야산,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됨. ④ 구형왕 42년인 보정 2년 임오년(562) 9월,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 사를 일으켜 쳐들어옴.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으나, 적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음. 이에 왕은 동기인 탈지이질금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 졸지공 등과 함께 항복 하여 신라로 들어감. 비고 ꡔ삼국유사ꡕ 오가야조 42) 물론 양사 가 ꡔ행록ꡕ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ꡔ개황록ꡕ 등 다른 참고 자 료에서도 분명 존재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43) 李丙燾, 앞의 책, 1985, 317쪽. 丁仲煥, 앞의 책, 2000, 344쪽. 金泰植, 앞의 논문, 1996, 25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65 위의 <표 1>의 ①은 ②의 오가야조 와 함께 종래 이른바 6갸야연맹 의 근거가 되었던 기록이다. 수로왕 탄강 설화에 보이듯이 6개의 황금알이 하 늘에서 내려와 먼저 부화한 수로왕은 가락국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개의 알도 부화하여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ꡔ가락 국기ꡕ에는 가락국을 제외한 다른 다섯 가야의 국명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 만 ②에 열거된 다섯 가야 중에서 이른바 대가야 가 보이기 때문에 일단 가 라국 관련 기록에 포함시켰다. 한편 <표 1>의 ①과 ②의 기록은 이른바 6가야 가 혈연적으로 동일 계통, 즉 가야는 동류 라는 인식을 낳게 하였는데, ꡔ가락국기ꡕ는 세조 이하 9대손 의 曆數에서 다섯은 제 곳 가고 한 분만이 남으시니, 때도 같고 자취 같아 형님 아우 하였다네 44)라고 찬탄하는 운문을 싣고 있다. 이는 그에 대한 강 한 증거로 생각된다. 즉 이를 가라국에 국한하고, 최치원이 정리한 가라국 의 개국설화와 비교해 보면 대가야의 왕 惱窒朱日 과 금관국의 왕 惱窒靑 裔 의 형제 관계 그리고 시조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역수가 520년이라는 데 서45) 그 개국한 해가 가락국과 같다는, 말하자면 가야는 동류 라는 인식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표 1>의 ③은 ꡔ가락국기ꡕ가 주장하는 가락국의 영역 의 범위이다. 본고 의 논지의 원활한 전개를 위하여 원문을 제시하면 다음의 D-①과 같다. D-① 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 國尾46) 에서 동쪽 영역의 경계를 황산강이라 하였는데, 황산강은 낙동강의 하 44) ꡔ三國遺事ꡕ 권2, 紀異2, 駕洛國記. 五歸各邑 一在兹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번역문은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ꡔ譯註 加耶史史料集成ꡕ 1 高麗 以前篇,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2004, 115쪽. 45)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卷29, 慶尙道 高靈縣 建置沿革. 46) 末松保和, ꡔ任那興亡史ꡕ, 吉川弘文館, 1956(增訂版), 227쪽. 李丙燾, 앞의 책, 1985, 313쪽. 丁仲煥, 앞의 책, 2000, 347쪽. 金泰植, 앞의 책, 1993, 71쪽. 대부분의 학자들이 끊어 읽는 방식이므로 통설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166 지역과 역사 39호 류47)로 김해와 양산 사이의 낙동강,48) 즉 지금의 양산시 院洞에서 낙동강 하구인 부산 을숙도 부근까지의 강에 비정되고 있다.49) 따라서 지금의 김 해 지역에 있었던 가락국의 동쪽 경계와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서남쪽 의 경계는 滄海라 하였다. 창해를 동해 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50) 역시 넓은 바다 정도로 해석하면51) 무난하고, 의 國尾 와 결부하면, 바다와 면하고 있는 김해 지역의 지리적 입지와 잘 부합한다. 에서는 서북쪽의 경계를 지리산, 동북쪽의 경계를 가야산이라고 하였 다. 지리산은 그 범위가 매우 넓어, 지금의 경남 함양ㆍ산청ㆍ하동, 전북 남원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가야산 또한 여러 지역에 미치고 있는데, 지 금의 경남 합천, 경북 고령ㆍ성주를 포함하고 있다. 가야산이 미치고 있는 지역의 경우, 경북 고령과 성주는 <표 1>의 ②에 나타나는 이른바 대가야 즉 가라국과 성산가야 의 고지이다. 그런데 위 D-① 사료는 수로왕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대가락 혹은 가야 국 이라고 정했는데, 이는 6가야 중 하나이고, 나머지 다섯 사람이 각각 돌 아가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다52)는 말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문장이 다. 그러므로 ꡔ가락국기ꡕ를 존중하면 AD 42년 즉 1세기 전반의 가락국 영 역의 범위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이와 같은 범위, 즉 D① 사료의 모두가 가락국 자체의 영역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3세기 이전의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고 있었던 정치체의 상황 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ꡔ삼국지ꡕ 위서 동이전 한조와 배치되 기 때문이다. 47) 48) 49) 50) 51) 52) 三品彰英, 앞의 책, 1979, 314쪽. 이병도 역주, ꡔ삼국사기ꡕ 상, 을유문화사, 1996(개정판), 29쪽. 金泰植, 앞의 책, 1993, 70쪽. 三品彰英, 앞의 책, 1979, 314쪽.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앞의 책, 2004, 99쪽. ꡔ三國遺事ꡕ 권2, 紀異 2, 駕洛國記. 其於月望日即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 陵[首陵是崩後謚也] 國稱大駕洛又稱伽耶國 即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為五伽 耶主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67 D-②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弁辰 半路國, 弁[辰]樂奴國, 弁辰彌烏邪馬國, 弁辰甘路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 國, 弁辰安邪國, 弁辰瀆盧國.53) 위의 사료 D-②는 잡거하고 있다는 변진과 진한의 국명 중 변진, 즉 변한 (곧 가야)의 국명만 뽑아 나열한 것이다. 여기서 변진구야국만이 가락국에 해당할 것인데, 가락국의 영역이 수로왕 즉위 후 곧바로 D-①과 같은 범위 를 가질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D-①의 정도만이 수로왕 대 가 락국의 영역과 부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부당성은 종래의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지적되어 온 바였고, 사실이 그렇다면 D-①은 ꡔ가락 국기ꡕ 찬자의 杜撰 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다만 D-①의 모두가 가락국의 영역으로 국한되지 않을 때, 어느 정도 합 리적인 이해가 가능한데, 그것은 바로 이른바 6가야 전체의 영역을 표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54) 그럴 경우 의 가야산은 <표 1>의 ②에서 대가 야, 그리고 성산가야 가 거론되고 있기 때문에 이른바 6가야연맹 의 맹주국 으로서 가락국의 영역 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해한 다고 하더라도, 지리산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표 1>의 ② 에서 지리산과 관련지을 수 있는 국명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병도의 견해에 따라 고녕가야 를 지금의 진주에 비정한다면55) 이 기록과 부합할 가능성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ꡔ가락국기ꡕ의 주석을 존중하면 53) ꡔ三國志ꡕ 권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有 已柢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 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冉奚國 弁辰半 路國 弁]樂奴國 軍彌國 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馬延國 弁辰瀆盧國 斯盧 國 優由國 弁辰韓合二十四國 (中略)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 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竈皆在戶西 其瀆盧國與倭接界 十二國亦 有王 其人形皆大 衣服絜淸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峻 54) 三品彰英, 앞의 책, 1979, 323쪽. 한편 이병도는 뒷날에 대가야 및 성산가야 등 북쪽 2개국의 탈퇴로 인하여 조금 축소된, 즉 4개연맹체의 강역 으로 보기도 하였다(李丙燾, 앞의 책, 1985, 313쪽). 55) 李丙燾, 위의 책, 311~313쪽.
168 지역과 역사 39호 고려시대의 咸寧 즉 지금의 상주시 함창에 비정되므로 지리산과 전혀 관계 가 없는 지역이 된다. 한편 <표 1>의 ③의 원문을 사료 D-①과는 다소 다르게 끊어 읽은 경우 가 있어 흥미로운데, 이를 제시하면 아래의 D-③과 같다. D-③ 東以黃山江西 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東 北以伽耶山南 而爲 國尾56) 처음으로 이와 같이 끊어 읽은 사람은 三品彰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7) 이렇게 끊어 읽을 경우, 동쪽으로는 황산강의 서편, 남쪽으로는 창해, 서북 쪽으로는 지리산의 동편, 북쪽으로는 가야산의 남쪽을 나라의 끝으로 삼았 다. 로 해석된다.58) 三品彰英은 이렇게 끊어 읽은 후, 金官 중심의 이 방위는 모두 45도씩 실제보다 치우쳐 있다. 예를 들면 북은 서북으로, 서북은 서로, 남은 동남으 로, 동은 동북으로 하면 대체로 지금의 방위와 일치한다. 고 하였다.59) 그 렇게 되면, 사료 D-③은 동북쪽으로는 황산강의 서편, 동남은 창해, 서쪽 은 지리산의 동북, 서북은 가야산의 남쪽을 나라의 끝으로 삼았다. 로 변형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변형시킨 후 三品彰英은 滄海 는 日本海 니 朝鮮海峽 이니 혹은 ꡔ삼국지ꡕ 왜인전의 瀚海 니 운운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였 다.60) 그의 주장에 일견 타당성이 아주 없지 않으나, 통설을 인정할 경우 두 번씩이나 원 사료에 변형을 가한 셈이 되어 따르기가 일단 주저된다. 이와 같이 끊어 읽더라도 앞의 D-①의 사료 분석과 별 차이는 없다. 비록 56) 三品彰英, 앞의 책, 1979, 310~311쪽. 이에 대하여 駕洛諸國의 境域을 보면 동은 황산강의 서에 접하고, 남은 창해에 면하며, 서북은 지리산의 동에 미치고, 북은 가야산의 남을 한계로 하는데, 이들이 駕洛諸國의 경계가 되고 있다. 고 해 석하였다(같은 책, 313쪽). 5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ꡔ譯註 三國遺事ꡕⅡ, 以會文化社, 2002, 259쪽 주 19) 참조. 58)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앞의 책, 2004, 99쪽의 주 98). 59) 三品彰英, 앞의 책, 1979, 324쪽. 60) 三品彰英, 위의 책, 324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69 D-①보다는 김해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훨씬 읽기가 자연스러운 것은 틀림 없다 하더라도 D-①과 마찬가지로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의 지리산(동) 이다. 따라서 사료 D-①의 讀法을 채용하든지, D-③식 독법을 채택하든지, <표 1>의 ③은 김해 가락국과 그다지 관련되는 영역의 범위는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표 1>의 ③ 기록을 가락국 자체의 영역 이라든지, 혹은 6가 야 전체의 영역 으로 보기보다 이른바 후기가야연맹 61) 시대의 가라(지역) 연맹 62) 혹은 대가야연맹 63), 즉 그 맹주인 가라국의 세력권 의 반영이 아 닐까 생각한다. D-①과 D-③ 속에 보이는 지리산(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①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下加羅都, 둘째는 上加羅都, 셋째는 寶 伎, 넷째는 達巳, 다섯째는 思勿, 여섯째는 勿慧, 일곱째는 下奇物, 여덟째는 師子伎, 아홉째는 居烈, 열째는 沙八兮, 열한째는 爾赦, 열두째는 上奇物이었 다. (ꡔ三國史記ꡕ 권32, 雜志 1 樂, 加耶琴) E-② 곁의 小國에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 등이 있어서 부용하였다. (ꡔ梁職貢圖ꡕ 百濟國使 圖經) 사료 E-①은 이른바 우륵12곡 으로 대체로 후기가야를 구성하고 있던 지역의 이름을 곡명으로 취하여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작곡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 곡명 상가라도 가 가라국임에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첫 번째 곡명인 하가라도 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에 대한 지명 비정 은 다양하다. 하가라도 를 음운적 측면에서 이해하여 아랫가야 와 같은 것 으로 보고 이를 아시량국, 즉 함안에 비정하기도 하고,64) 지리적 입지와 연 61) 金泰植, 앞의 책, 1993, 88쪽. 62) 白承忠, 加羅ㆍ新羅 결혼동맹 의 결렬과 그 추이 ꡔ釜大史學ꡕ 20, 1996, 1ㆍ 7쪽 ; 加耶의 地域聯盟論 ꡔ지역과 역사ꡕ 17, 2005, 36쪽. 63) 田中俊明, ꡔ大加耶連盟の興亡と 任那 ꡕ, 吉川弘文館, 1992, 77쪽.
170 지역과 역사 39호 관지으면서 낙동강 하류의 김해에 비정하기도 하였다.65) 그러나 근년에는 합천 옥전고분군의 위치나 합천 저포리에서 출토된 下部思利利 명문 토기 를 근거로 합천에 비정하는 설66)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67) 대세론에 따른다면, 상ㆍ하가라도는 합천에 가야산이 있으니, 가야산은 앞의 <표 1>의 ②의 대가야 를 아우르고 있으며,68) <표 1>의 ③ 즉 앞의 사료 D-①과 D-③의 속의 (西)北以伽耶山(南) 과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합천 지역이 옥전고분군의 위용과 거기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로 보아 후기가야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라 여겨진 다. 그러면 지리산은 언제 가야의 영역이 되었을까?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와 같이 지리산은 지금의 경남 함양ㆍ산청ㆍ하동 지역과 전북 남원 지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런데 앞의 <표 1>의 ②에는 지금의 함양ㆍ산청 지역에 비 정되는 가야 의 국명이 없다. ꡔ일본서기ꡕ에는 가야 멸망 당시의 10국69) 중에 乞飡國과 稔禮國이 보인 다. 이들은 각각 산청과 함양에 비정70)되어 지리산을 끼고 있는 함양과 산 64) 梁柱東, ꡔ增訂古歌硏究ꡕ, 一潮閣, 1965, 30~31쪽 및 597~598쪽. 65) 李丙燾, 앞의 책, 1985, 303~304쪽 및 307쪽. 金泰植, 앞의 책, 1993, 292~ 294쪽 ;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ꡔ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ꡕ, (사) 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116~117쪽. 白承玉, 앞의 책, 2003, 75쪽. 66) 田中俊明, 于勒十二曲と大加耶連盟 ꡔ東洋史硏究ꡕ 48-4, 1990, 139쪽. 白承 忠, 앞의 논문, 1992, 469쪽 및 478~479쪽 ; 앞의 박사학위논문, 1995, 211쪽. 李泳鎬, 于勒 12曲을 통해 본 大加耶의 政治體制 ꡔ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 야의 문화ꡕ, 고령군 대가야박물관ㆍ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6, 114쪽. 이 형기, ꡔ大加耶의 形成과 發展 硏究ꡕ, 경인문화사, 2009, 142~147쪽. 67) 金泰植, 앞의 논문, 2009, 115쪽. 68)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권29, 高靈縣 建置沿革. 按崔致遠釋利貞傳云 伽倻山神 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ㆍ金官國王惱窒靑裔二 人 가라국은 가야산신을 조상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로 가야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69) ꡔ日本書紀ꡕ 권19, 欽明紀 23년 정월. 總言任那 別言加羅國ㆍ安羅國ㆍ斯二岐 國ㆍ多羅國ㆍ卒麻國ㆍ古嵯國ㆍ子他國ㆍ散半下國ㆍ乞飡國ㆍ稔禮國 合十國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71 청 지역이 후기가야 를 구성하고 있는 소국의 고지로서 등장한다. E-① 사 료의 넷째 곡에 보이는 達巳 는 達已 로 보아 이를 상다리와 하다리로 보고 전남 여수 지역으로 보기도 하지만,71) ꡔ일본서기ꡕ에 보이는 帶沙 혹은 多 沙와 동일한 곳으로 보아 하동에 비정하는 경우72)가 우세하다. ꡔ일본서기ꡕ 에 의하면 하동은 다사진으로 표현되어 가라국왕이 이 나루는 官家를 설치 한 이래부터, 臣이 조공하는 津涉으로 삼았습니다. 어찌하여 함부로 변경하 여 이웃나라에 하사할 수 있습니까? 원래 封한 바 한계지역에 위배되는 것 입니다. 73)라고 하여 매우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나 루 로서의 기능만을 강조했지만, 아마도 백제와의 경계로서도 의미가 있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 E-①의 일곱 번째의 하기물과 열두 번째의 상기물은 ꡔ일본서기ꡕ에 보이 는 기문 지역으로 남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비정되고 있는 것이 근년의 일반적인 추세이다.74) 사료 E-②의 상기문 또한 E-①의 상기물과 같은 곳 으로 보이므로 대체로 지금의 전북 남원 지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륵12곡 의 작곡 시기는 6세기 1/4분기 무렵으로 추정되며,75) ꡔ양직공 도ꡕ의 제작 시기는 520년76) 혹은 526~536년 사이이므로77) 대체로 가라 국이 백제에게 기문, 즉 지금의 남원지역을 상실한 513년78)(B-①) 내지 516년79)(B-②)과 비교할 때 잘 부합한다. 70) 金泰植, 앞의 책, 1993, 160쪽 및 309쪽. 71) 김태식, ꡔ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ꡕ 2, 푸른역사, 2002, 209쪽. 72) 田中俊明, 앞의 책, 1992, 107ㆍ114쪽. 白承忠, 加羅國과 于勒十二曲 ꡔ釜 大史學ꡕ 19, 1995, 69쪽. 이형기, 앞의 책, 2009, 155쪽. 73)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紀 23년 3월 是月. 74) 金泰植, 앞의 논문, 2009, 104쪽의 <표 1> 참조. 75) 백승충, 문헌을 통해 본 고대 창녕의 정치적 동향 ꡔ고대 창녕지역사의 재조명ꡕ, 경상남도 창녕군ㆍ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29쪽. 76) 金泰植, 앞의 책, 1993, 103쪽. 77)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앞의 책, 2004, 377쪽의 주 1). 78) 李永植, 앞의 논문, 1995a, 217쪽. 백제에 의한 기문의 확보는 이미 513년에 완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79) 남재우, 가야 말기 于勒의 신라망명 ꡔ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ꡕ, (사)
172 지역과 역사 39호 이상을 통해 보았을 때, D-① 및 D-③의 지리산(동)은 400년 한반도 남 부에서 전개된 소위 고구려남정 의 영향으로 급격히 쇠퇴한 가락국의 영역 일 수 없고, 특히 D-③처럼 지리산의 동쪽으로 간주된다면, 이는 곧 가라국 이 백제에게 기문을 완전히 상실하는 6세기 전반 이후의 가라국의 영역(세 력권) 범위를 반영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즉 가라국은 백제와 소백산맥 과 지리산을 자연적 경계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80) <표 1>의 ④는 가락국의 멸망을 전하는 내용으로 ꡔ가락국기ꡕ 중 가라국 과 관련되는 가장 명확한 기사로 알려져 있는데, 가라국의 멸망과 관련되는 내용이 ꡔ가락국기ꡕ에 뒤섞여 들어간 것으로 여겨지는 기록이다. 그러나 연 대의 순서나 본고의 논지 전개상 다음 장 후반부에 서술하고자 한다. Ⅲ. 駕洛國記 좌지왕조와 加羅國 본고는 제1장에서 백제가 가라국의 영역(세력권)을 잠식하는 과정에서 기문 지역을 취하기까지의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였고, 제2장에서는 ꡔ가락국기ꡕ에 표방된 가락국의 영역은 가락국 자체의 영역이 아니라 6세기 전반 백제에게 기문 잠식을 당한 뒤의 가라국의 영역이었을 것으로 상정하 였다. 본 장에서는 그와 같은 논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선 제1장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가라-신라 혼인동맹 성립 후의 가라국의 사적 전개 과정 을 ꡔ일본서기ꡕ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기록을 ꡔ가락국기ꡕ에서 찾아내고 ꡔ일본서기ꡕ와의 비교를 통하 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가라-신라 혼인동맹 의 추이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미 제1장의 사 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154쪽. 대부분의 연 구자들은 516년을 백제의 기문 점령이 공식적으로 완료된 해로 보고 있다. 80) 金泰植, 앞의 책, 1993, 115쪽 ; 앞의 논문, 1997, 340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73 료 C에서 그 혼인동맹 의 결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ꡔ일본서기ꡕ 계체 기는 가라-신라 혼인동맹 의 성립부터 파탄까지의 내용을 ꡔ삼국사기ꡕ나 ꡔ 신증동국여지승람ꡕ보다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F-① 加羅王이 新羅王女에게 장가들어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 신라가 처 음 딸을 보낼 때 100 사람을 아울러 보내 왕녀의 從者로 삼았다. 받아들여 諸縣 에 흩어두고 令을 내려 신라의 衣冠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阿利斯等은 그들의 變服에 성내며 사자를 보내어 불러들였다.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도로 그녀 를 돌아오게 하고자 말하기를, 전에 그대의 聘禮를 받아들여 내가 곧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청컨대 왕녀를 돌려보내시오 하 였다. 加羅의 己富利知伽[미상]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짝을 지워 부부로 합했 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도 있으니, 그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소? 하였다. 결국 지나가는 길에 刀伽ㆍ古跛ㆍ布那牟羅의 3성을 함락시 키고 또한 北境의 5성을 함락시켰다. 위 사료 F-①은 계체기 23년 3월의 첫 번째 是月조로 편의상 2개의 단락 으로 나누어 나열해 본 것이다. 종래부터 이 기사의 문제점으로는 신라왕녀 를 따라온 종자 100인은 어떤 옷을 어떤 옷으로 변복한 것인가? 아리사등 과 가라의 기부리지가는 어떠한 인물인가? 도가 등 3성과 북경 5성의 위치 는 어디이며 그 성들을 함락시킨 주체는 누구인가? 등이 제기되었다.81) 본 고에서 이들 모두를 다룰 여유는 없다. 다만 가라-신라 혼인동맹 의 파탄 과 정에서 핵심 요소가 된 이른바 변복 사건을 중심으로 검토해보고 본고의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F-①의 은 앞 서 제시한 사료 C-①과 ②에 조응하는 내용, 즉 가라신라 혼인동맹 의 성립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여기서 가라왕 은 이뇌왕 이며(C-②), 가라왕이 장가들었다는 신라왕녀는 이찬 비조부의 누이이고 (C-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아이는 C-②의 월광태자이다. F-①의 에는 신라왕녀를 따라왔다는 종자 100인 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변복 에 성을 내는 아리사등 이라는 인물도 출현하고 81) 金泰植, 위의 책, 192~193쪽.
174 지역과 역사 39호 있다. 그 외 의 기록도 국내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 까닭으 로 F-①은 특히 기록 자료가 빈약하기 짝이 없는 가야사 에서 중요하게 취 급되어 오고 있는 사료이다. 먼저 본고의 원활한 논지 전개를 위하여 위 사료 중 부분의 원문을 아 래에 제시하고 이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F-① 加羅王娶新羅王女 遂有兒息 新羅初送女時 幷遣百人爲女從 受而散 置諸縣 令着新羅衣冠 阿利斯等嗔其變服 遣使徵還 F-①의 은 신라왕녀를 따라온 종자들의 변복 과 그들의 변복 에 아리 사등이 성을 내고 있는 모습과 아리사등이 사자를 파견하여 그들을 불러들 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의 사료에서 보듯이 종자 100인에게 신라의 의관을 착용하도록 令 을 내린 사람은 가라왕이다. 왜냐하면 신라왕이 보낸 종자 100인을 받아들여 여러 현에 산치한 주체는 가라왕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만약 굳이 신 라왕을 令 을 내린 주체로 보려면 원문의 受 자를 授 자의 오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가라왕이 가라국에 온 종자들에게 가라의 의관이 아 닌 신라의 의관을 착용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다.82) 가라-신라 혼인동맹 추진 과정에서 먼저 청혼83)하는 등 신라에 대하여 방어적 입장84) 내지 굴종적인 자세85)를 보여야 했던 가라국의 고 82) 그런 까닭에서인지 武田幸男은 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몇 개의 문구 를 보입하고 (가야 측에서는 이들 딸의 종자들을) 받아서 (가라의 복장을 입힌 위에) 여러 현에 散置했다. (그런데 신라 측에서는 몰래 딸의 종자들에게) 신라 의 의관을 입게 했다. 와 같이 해석하고 이를 법흥왕의 공복제정과 관련된 정치 적 억압으로 이해하였다(武田幸男, 新羅法興王代の律令と衣冠制 ꡔ古代朝鮮 と日本ꡕ, 龍溪書舍, 1974, 99~102쪽). 83) 왕실 간 혹은 국가 간의 혼인에서 청혼 당사자는 상대국에게 정치적인 종속성을 띠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白承忠, 앞의 논문, 1996, 9쪽). 84) 金泰植, 앞의 책, 1993, 195쪽. 85) 白承忠, 앞의 논문, 1996, 9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75 육책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아마도 신라에서 파견되어 가라의 여러 현 에 산치될 때부터 신라의관을 했던 것을 가라왕이 마지못해 수용한 것86)으 로 해석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아리사등은 종자들이 변복 하였다고 성을 내고 있다. 여기서 문제 가 되는 것은 종자들이 신라의 의관에서 가라의 의관으로 변복한 것인지,87) 가라의 의관에서 신라의 의관으로 변복한 것인지88) 잘 알 수 없다는 점이 다. 그러나 문장상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라의 의관이고, 그와 같은 모습을 직접 보았거나 혹은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아리사등이 성을 내 었다고 보아야 문맥상 순조로워 보인다.89) 그렇다면 애초에는 신라인이었 지만 가라국에 이미 왔으니 마땅히 가라국인으로서 가라의 의관을 착용하고 활동해야 할 종자들이 신라의 의관을 착용하고 활동하는 행위에 아리사등은 변복 했다고 여기고 성을 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그가 성낸 대상이 종자들인지, 아니면 가라왕인지90)도 잘 알 수 없다. 역시 문맥상 가라왕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그것은 아리사등 이라는 인 물의 성격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종래 아리사등 은 가야 수장 의 위호,91) 탁순국왕 또는 그에 버금가는 유력자92) 대가야 휘하의 각 현 에 소속되어 있는 재지수장층,93) 안라국왕,94) 안라국왕의 이름95) 등 다 86) 白承忠, 위의 논문, 9쪽. 87) 河村秀根, ꡔ書記集解ꡕ 卷中, 1785(國民精神文化硏究所刊, 1937), 240쪽. 末 松保和, ꡔ任那興亡史ꡕ, 大八洲出版, 1949, 132쪽. 이상 金泰植, 앞의 책, 1993, 193쪽에서 재인용. 88) 武田幸男, 앞의 논문, 1974, 99쪽. 金泰植, 위의 책, 193쪽. 89)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신라왕녀는 가라국왕에게 출가했기 때문에 가라국왕의 비 가 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가라국인이 된 것이다. 그녀가 가라국 왕실의 의 관을 착용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그녀를 따라온 종자 100인 또한 가라국의 의관 을 착용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90) 白承忠, 앞의 논문, 1996, 11쪽. 91) 今西龍, ꡔ朝鮮古史の硏究ꡕ, 近澤書店, 1937, 324쪽. 92) 金泰植, 앞의 책, 1993, 194쪽. 白承忠, 앞의 박사학위논문, 1995, 202쪽. 김 현숙, 앞의 논문, 2000, 348쪽. 93) 연민수, 앞의 책, 1998, 194쪽.
176 지역과 역사 39호 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역시 어느 견해를 따르더라도 가야연맹체를 구성하 는 어떤 나라의 지배층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결국 그 정도의 위치를 감안 하면 아리사등은 종자들에게 성냈다기보다 역시 가라국왕에게 성내며 반발 했을 공산이 크다. 한편 사자를 보낸 주체도 문제가 된다. 아리사등의 성냄, 즉 반발에 가라 왕이 마지못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로 하여금 종자들을 불러들이게 했는지,96) 아니면 아리사등 본인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로 하여금 종자들을 불러들이게 했는지97)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 장상에는 아리사등이 사자를 보내어 종자들을 가라로 불러들인 것으로 나와 있다. 이와 같이 徵還 된 종자들은 신라로 돌려보내졌을 가능성도 있고, 아 니면 그대로 가라국에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가라국왕이 신라왕녀에게 장가들어 마침내 아이를 가 졌다. 신라왕이 처음 왕녀를 가라국으로 보낼 때 100사람을 아울러 보내 왕 녀의 從者로 삼았다. 가라국왕은 왕녀와 함께 온 종자들을 받아들여 여러 縣에 흩어두고 신라에 대하여 굴종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어 마지못 해 令을 내려 신라의 의관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장면, 즉 종자들 이 가라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신라의 의관을 착 용한 것을 직접 보았거나 혹은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아리사등은 이들의 신 라의관 착용 자체를 변복 했다고 간주하고 가라국왕에게 성내며 반발하자 가라국왕은 종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여러 현에 사자를 보내어 가라국, 즉 왕이 있는 곳으로 불러들였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F-①의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의 반발이 뒤따랐는 데, 신라는 이 기회에 이미 출가한 왕녀를 돌려달라는 등 강한 불쾌감을 노 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가라의 기부리지가는 이미 아이도 있다 는 것을 94) 李永植, 六世紀 安羅國史硏究 ꡔ國史館論叢ꡕ 62, 1995b, 106~107쪽. 95) 백승옥, ꡔ日本書紀ꡕ에 보이는 阿羅斯等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ꡔ한국민족 문화ꡕ 51, 2014, 135ㆍ156ㆍ161ㆍ164~165쪽. 96) 白承忠, 앞의 논문, 1996, 8ㆍ10쪽. 연민수, 앞의 책, 1998, 191쪽. 97) 김현숙, 앞의 논문, 2000, 348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77 명분으로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다. 기부리지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가라국의 왕,98) 또는 연맹제국의 왕으로 가라국왕을 보좌하는 연맹에서의 실력자99) 등으로 보고 있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신라의 요구에 공식적으로 대응하 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왕녀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가 라국으로부터 거절당한 신라는 이를 명분으로 결국 刀伽, 古跛, 布那牟羅 3 城과 北境 5城을 함락시켰다. 이제 522년 혼인동맹 으로 우호관계를 맺었 던 가라국과 신라의 관계는 529년에 이르러 마침내 파탄되어 전쟁상태로 돌입하게 되었고, 이후 가라국은 대외관계를 친백제로 전환함으로써, 멸망 때까지 신라와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진 사료를 ꡔ가락국기ꡕ 국왕세보의 좌지왕조에서 찾을 수 있어 주목된다. 아래에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F-② 坐知王은 金叱이라고도 한다. 義熙 3년에 즉위하였다. 傭女에게 장가 들고, 그 여인의 무리를 관리로 삼으니 나라 안이 매우 어지러워졌다. 계림국이 꾀로써 정벌하고자 하였다. 한 신하가 있어 이름을 朴元道라고 했는데, 諫하여 말하기를, 시든 풀도 많이 모이면 비를 머금는데, 하물며 사람의 경우야 더 말 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면, 사람이 어느 터전인들 보 존할 수 있겠습니까? 또 卜士가 점을 쳐 解卦를 얻었는데, 그 말에 엄지손가락 을 풀면 벗들이 와서 성의껏 돕는다 고 하였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 소서. 하였다. 왕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옳다 하고, 용녀를 물리쳐서 荷山島 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는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ꡔ三國遺事ꡕ 권2, 紀異 2, 駕洛國記) 위의 기록에 의하면 가락국의 좌지왕이 등극한 해는 의희 3년(407)으로 신라의 왕력으로는 실성왕 6년에 해당한다. 즉 5세기 전반의 상황을 전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ꡔ삼국유사ꡕ에 기록된 가락국의 왕력 과 가락국 기 의 연대는 그다지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100) 따라서 일단 그 연대 98) 金泰植, 앞의 책, 1993, 194~195쪽. 연민수, 앞의 책, 1998, 194쪽. 김현숙, 위의 논문, 348쪽. 백승옥, 앞의 논문, 2014, 152쪽. 99) 田中俊明, 앞의 책, 1992, 152쪽. 白承忠, 앞의 논문, 1996, 6~7쪽.
178 지역과 역사 39호 는 접어 두고, 이 기록에서 반영된 일정한 역사적 사실만 추출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좌지왕이라는 왕호, 좌지왕이 아내로 맞이한 용녀, 용녀를 추종하는 세력의 등용, 이로 인한 국내의 소란, 그 틈을 탄 신라의 침공 기도, 박원도 라는 신하의 존재와 그의 간언, 용녀의 하산도 유배 등의 사건들은 그 내용 의 인과관계가 비교적 치밀하므로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특히 위의 사료에서 좌지왕대 가락국의 상황, 즉 나라 안이 매우 어지러워졌다(國內擾亂). 하는 대목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國內 擾亂의 원인으로 좌지왕이 傭女에게 장가들고, 그 여인의 무리를 관리로 등 용했던 것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용녀 와 관련하여 종래의 연구 성과는 거의 없다.101) 다만 ꡔ삼국유사ꡕ 주석서나 해설서 등에 부리는 여자,102) 품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 103) 등 으로 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傭 자의 사전적 의미는 고용살이하다, 품을 살다 등의 뜻과 함께 비루하다, 천하다 등의 뜻이 있다. 전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주석서 등의 해설에서 볼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를 취하면 천한 여 인 또는 비루한 여인 으로 해석될 수 있다. 모두 좋은 뜻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용녀 의 뜻이 이와 같이 해석될 경우, 일국의 왕인 좌지왕의 부인, 즉 왕 비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락국의 좌지왕이 그 여자의 무리들 을 등용하였다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일이다. 傭女 를 문 자 그대로 품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 혹은 천한 여인 정도로 해석해서는 안 100) ꡔ삼국유사ꡕ나 ꡔ가락국기ꡕ는 기본적으로 전승기사여서 연대에 대해서는 부정 확한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金泰植, 앞의 책, 1993, 213쪽). 101) 용녀 집단 의 성격을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허왕후 계열과 대비되는 존재 로 상정하여 김해 지역의 전통신앙을 배경으로 한 토착세력, 즉 9간의 후손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론한 견해(백승충, 앞의 논문, 2001, 118쪽) 외에 별다른 연구 성과는 없다. 10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ꡔ譯註 三國遺事ꡕ Ⅱ, 以會文化社, 2002, 279쪽. 10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ꡔ 駕洛國記 ꡕ 에보이는加羅國 179 되는대목이라할것이다. 그리고용녀의무리들을등용한대가로가락국은혼란에빠졌다는점도주목된다. 즉용녀와그무리들에의하여좌지왕대가락국의내정이이웃나라인신라가정벌을도모할정도로혼란했다는뜻으로이해할수있다. 이와같은해석은용녀의실체에대하여재검토를요구한다. 즉용녀라는좋지않은의미의용어로표현되고있지만, 그실체가결코 품을팔아살아가는여자 혹은 천한여인 이아니었음을강하게암시하고있는것이다. 위사료도입부에서이미알수있듯이용녀는본래부터천하거나비루한여인은아니었다. 그녀는가락국의왕비였던것이다. 어떠한사건에연루되어나중에 왕비 에서격하되어 용녀 로까지폄하되었던것이다. 그사건은그녀와그녀의무리들로부터기인했는데, 위사료에서언급된내용만으로는구체적으로알길이없으나, 나라안이매우어지러워졌던 결과를야기한사건이었음에틀림없다고생각한다. 한편박원도의존재도허투루넘길수없다. 그는좌지왕의신하로가락국의국정에상당부분영향력을행사하고있음을알수있다. 그는 ꡔ주역ꡕ 의괘를언급하며무언가국왕에게간언하고있다. 간언이란군주에게충고한다는뜻이며, 군주의입장에서는입에쓰기마련이다. 간언을들은좌지왕은그에게사례 ( 죄 ) 하고그의간언을전적으로수용했던것으로보인다. 왜냐하면좌지왕은그의간언을듣고는 왕비 를폐하고 하산도 라는곳으로유배를보냈으며, 국정을쇄신하고있기때문이다. 용녀 라는일종의멸칭도이때폐위된왕비에게부여되었을것이다. 다만그무리의행방은알길이없는데, 아마도왕비가폐위되어유배를가는마당에그들의끝도결코좋지않았으리라추정된다. 이상에서 F-2 사료, 즉 ꡔ가락국기ꡕ 국왕세보에보이는좌지왕조에대하여대략적인분석을가해보았는데, 그결과앞의사료 F-1, 즉 ꡔ일본서기ꡕ 계체기 23년 3월시월조와기사의내용구성이나구조에서상당히유사하다는느낌을받는다. 이를표로제시하면다음과같다.
180 지역과 역사 39호 <표 2> 가락국기 좌지왕조와 계체기 23년 3월조의 가라국 관련 기사 비교 연번 ① ② ③ ④ ⑤ 비교대상 가락국왕 이뇌왕 가라국왕 용녀 비고 가락국왕과 혼인. 폐위되어 용녀로 격하되어 유배감. 신라왕녀 가라국왕과 혼인. 이른바 가라-신라 혼인동맹 결성. 용녀의 무리. 가락국의 관리로 등용됨. 나라 안이 매우 어지러 女黨 워질 정도의 행동을 함. 신라왕녀를 따라온 100인. 신라의 의관으로 변복 하는 등 물 女從 의를 일으킴. 박원도 용녀와 그 무리들의 행동 견제. 간언. 용녀를 유배보냄. 아리사등 女從의 변복 에 성내며, 이들의 소환을 왕에게 요구. 계림국 신라 하산도 ⑥ 내용 좌지왕 하산 가락국의 국내요란을 틈타 가락국 정벌을 시도. 가라연맹체의 3성과 북경5성을 공격하여 함락. 용녀의 유배처. 신라가 해마다 많은 무기를 모아서 안라와 하산을 습격하려고 흠명기 5년 함. 3월조 어쩌면 F-①과 F-② 두 기사는 같은 사건을 사료의 계통에 따라 약간 달 리 표현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유사함을 <표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표 2>의 ①에서 좌지왕과 이뇌왕은 왕명에서 음이 서로 통하지 않으므 로 양자는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ꡔ가락국기ꡕ는 왕계보는 신빙할 수 있으나 연대나 왕호는 ꡔ삼국사기ꡕ의 것으로 수정하여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104)에 따르면, 여기의 좌지왕을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의 것으로 고쳐 이 뇌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뇌왕 때 가라국의 역사적 사실이 ꡔ가락국 기ꡕ에 뒤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가설이 성립될 수 있다면 <표 2>의 ② 이하도 ꡔ가락국기ꡕ의 것을 ꡔ일본서기ꡕ 계체기에 보이는 가라 국의 것으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두 기사를 종합하면 보다 상세 한 연대기가 재구성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②의 용녀와 신라왕녀의 경우는 앞의 왕들과 다르다. 한명은 가락국의 왕 비, 또 한명은 가라국의 왕비이며, 공통적으로 그녀들의 추종자 즉 女黨 과 104) 金泰植, 앞의 책, 1993, 213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81 女從 으로 표현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는 이른바 가라-신라 혼인동 맹 의 결성과정을 보여 주는 내용으로 용녀는 결국 신라의 왕녀이고 용녀의 무리란 곧 신라왕녀를 따라온 종자 100인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③에서 여당 이 신라가 침공을 도모할 정도의 국내요란 을 일으켰다는 것 은 곧 여종 이 가라의 의관에서 신라의 의관으로 변복 하는 등의 물의를 일 으킨 것과 같은 사건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④에서 가락국의 박원도라는 신하가 왕에게 간언하고 있는 데, 박원도는 가라국왕에게 성내며 반발하고 있는 아리사등에 비정된다. ⑤에서 계림국은 곧 신라인데, ꡔ가락국기ꡕ에서는 정벌을 모의하는 단계 에만 머물지만, 계체기에서는 3성과 북경 5성을 점령하고 있다. 이는 신라 에 의한 가야 잠식의 기도 실행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된다. ⑥에서 가락국왕은 박원도의 간언을 채용하여 왕비를 폐위하고 하산도 라는 곳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ꡔ일본서기ꡕ 흠명기 5년 3월조에 신라 의 습격 대상 지역으로 안라와 함께 荷山 이 나온다. 그 위치는 지금의 고령 군 우곡면 포동에 소재하는 하미산에 비정된다고 하는데,105) 출현 시기도 그렇지만 가라연맹체의 중심지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하산도는 역시 가라국 과 관련되는 지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체기의 경우 가라국왕도 아리사등의 반발을 수용하여 사자를 보내 여 종 을 불러들이고 있으며, 신라왕녀는 돌려보내 달라는 신라의 요구를 완곡 히 거절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신라왕녀의 이후 행방은 잘 알 수 없는데, 혹시 ꡔ가락국기ꡕ에서 언급된 용녀 와 같이 신라왕녀는 가라국의 왕비에서 폐위되어 유배 길에 오른 것은 아닐까?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된 신라가 이를 수치로 여기고 그동안 모의 단계에 머물고 있던 가야 잠식계획을 마침내 실 행에 옮겨 3성과 북경5성을 공취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후 가락국은 국정을 쇄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점은 신라에게 3 성과 북경5성을 실함한 가라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105)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앞의 책, 2004, 118쪽, 주 205).
182 지역과 역사 39호 않고 오로지 친백제적 대외관계를 이끌어 가는 모습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 된다. 한편 가라국과 관련되는 기사가 또 한 차례 ꡔ가락국기ꡕ에 뒤섞여 들어간 것이 보이는데, 앞서 제시한 <표 1>의 ④가 그것이다. 편의상 그 전문을 드 러내고, 아울러 ꡔ삼국사기ꡕ에서 그와 관련되는 기록을 뽑아 나열하면 아래 와 같다. G-① 구형왕은 김씨이며, 정광 2년에 즉위하였고, 치세는 42년이다. 보정 2년 임오년(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 다.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으나, 적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왕은 동기인 탈지이질금으로 하여금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상손 졸지공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개황록에 이르기 를 양나라 무제 중대통 4년 임자년(532)에 신라에 항복했다. 고 한다. (ꡔ三國 遺事ꡕ 권2, 紀異 2, 駕洛國記) G-② (532년) 金官國主 金仇亥가 妃 및 세 아들 즉 큰아들 奴宗, 둘째아들 武德, 막내아들 武力과 더불어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 다. 왕이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本國을 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角干에 이르렀다. (ꡔ三國史記ꡕ 권4, 新羅本紀 4, 法興王 19년) G-③ (562년) 9월, 加耶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異斯夫에 명하여 토 벌케 하였는데, 斯多含이 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 서 달려가 栴檀門에 들어가 白旗를 세우니 城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 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한바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ꡔ三國史記ꡕ 권4, 新羅本紀 4, 眞興王 23년)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가락국은 532년에 멸망하였고(G-②), 가라국은 562년에 멸망하였다(G-③). 그러나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조에 실려 있는 G-①은 가락국의 멸망에 가라국의 멸망 기사가 뒤섞여 나오고 있다. 즉 신 라에 의한 가락국 복속 관련 기사에 가라국 정복 관련 내용이 혼재되어 있 는 것이다.106) 그런 까닭으로 종래부터 562년인 보정 2년에 근거하여 ꡔ가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83 락국기ꡕ 찬자가 대가야 의 멸망 연대와 혼동한 오류로 보거나,107) 가야에 대한 진흥왕의 군사행동은 이른바 대가야가 반한 때의 일 108)이므로 결국 ꡔ가락국기ꡕ에 실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아왔던 것이다. G-①에서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에 보이는 바와 같은 구형왕의 42 년이라는 치세 기간이다. 왜냐하면 같은 책 왕력편에서는 구형왕의 통치기 간을 12년이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109) 왕력편의 것보다 30년 더 통치한 셈인데, 일연의 논평에서 지금 두 설을 다 적어둔다 고 하였으므로 원 ꡔ가락 국기ꡕ 찬자의 고의는 아닌 듯하다.110) 개황록 의 왕력111)을 분명히 보았 던 ꡔ가락국기ꡕ의 찬자가( ) 가라국의 멸망연대인 562년 설을 의식하지 않 을 수 없었기에 가락국의 멸망연도에서 그 만큼 더한 고뇌에 찬 기록을 남 긴 것이 아닌가 한다. 과 의 기록은 ꡔ삼국사기ꡕ에 보이는 가락국의 신라 투항 기록(G-②) 과 비교할 때, 약간의 차이가 없지 않지만, 사실상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이 다. 먼저, 인물들 중에서 구형왕의 상손 과 비 가 각각 언급되어 있지만, 의 왕자와 G-②의 국주의 세 아들이, 그리고 항복 주체인 의 구형왕과 G-②의 금관국주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가락국의 신라 항복 연대 인 의 양나라 무제 중대통 4년 임자년과 G-②의 신라 법흥왕 19년은 532년으로 동일한 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은 가락국의 사적인 ꡔ가락국기ꡕ에 실려 있지만, 그 내용으로 보 아 가라국의 사적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가라국의 멸망 기사인 G-③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선 멸망연도인 의 보정 2년과 G-③의 106) 尹星鎬, 新羅의 大加耶 복속 과정에 대한 재검토 ꡔ韓國史硏究ꡕ 155, 2011, 20쪽. 107) 李丙燾, 앞의 책, 1985, 317쪽. 108) 丁仲煥, 앞의 책, 2000, 344쪽. 109) ꡔ三國遺事ꡕ 권1, 王曆 1, 제10대 仇衡王. 辛丑(521)에 즉위하여 12년을 다 스렸다 110) 丁仲煥, 앞의 책, 2000, 344쪽. 111) 金泰植, 앞의 책, 1993, 40쪽.
184 지역과 역사 39호 신라 진흥왕 23년이 562년으로 같은 해이다. 이때 가야 침공의 명령을 내린 왕(G-③)은 당연히 의 신라 제24대 진흥왕이다. 다만, 에서는 침공한 신라군에 대하여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으나, 적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 어서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가락국이 멸망하 고 난 뒤(G-②)의 이야기(G-③)일 뿐이다. 따라서 에서 신라 침공에 저 항한 왕은 당연히 가라국의 왕일 수밖에 없으며, 그 전투의 상황은 G-③에 꽤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또 신라에 항복하러 가는 구형왕이 본국에 동기인 탈지이질금을 남겨두 었다고 하여 흥미롭다( ). 종래부터 여기의 탈지가 가라국의 마지막 왕인 道設智,112) 즉 月光太子113)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되어 왔는데,114) 탈지 는 도설지와 음이 통하고, 월광태자의 월광도 훈독하면 첫 음이 달 이 되고 거기에 존칭 의미 지 를 붙이면 달지 가 되기 때문에 탈지ㆍ도설지ㆍ월광 은 모두 같은 사람의 이름이 된다는 것이다.115)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본고 나름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탈지는 그 위호가 이질금 즉 왕호 를 가진 사람이다.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이미 멸망했는데도 불구 하고 그 아우가 왕호를 칭했다는 것은 일단 모순이다. 혹시 가락국 부흥운 동의 지도자가 탈지였다면 그 위호를 쓸 수도 있겠다고 보이나, 가야사의 전후 사정과 맥락을 고려할 때 그럴 가능성은 퍽 낮아 보인다. 탈지를 가락 국의 중간지배층으로 보는 견해116)도 있지만, 이질금 이라는 최고 위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럴 가능성은 없고, 역시 가라국의 마 112) ꡔ三國史記ꡕ 권34, 雜志 3, 地理 1, 新羅 康州 高靈郡. 本大加耶國, 自始祖伊 珍阿豉王[一云内珍朱智], 至道設智王 凢十六世 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爲大加耶郡 113) ꡔ新增東國輿地勝覽ꡕ 卷29, 慶尙道 高靈縣 建置沿革. 又釋順應傳 大伽倻國 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輩之女 而生太 子 則異腦王 乃惱窒朱日之八世孫也 114) 金泰植, 앞의 논문, 1996, 26쪽. 尹星鎬, 앞의 논문, 2011, 24쪽. 115) 金泰植, 위의 논문, 25~26쪽. 116) 신가영, 대가야 멸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 ꡔ한국고대사연구ꡕ 72, 2013, 159쪽.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85 지막 왕 도설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게 옳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G-①의 은 ꡔ가락국기ꡕ의 원문이고, 은 개황록 에서 인용한 것이며, 또 G-①의 은 가락국에 해당하는 것 이고, 은 가라국에 해당하는 내용이다.117) 왜 이와 같이 가락국과 가라 국의 기사가 뒤섞여 있을까? 결국 ꡔ가락국기ꡕ 찬자는 가락국의 정확한 멸망 연대에 확신이 없었던 것 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562년 설을 본문에 먼저 쓰고, 532년 설의 경 우 개황록 을 인용하여 일종의 주석처럼 말미에 기록했던 것 같다. 아마도 562년 설은 ꡔ행록ꡕ의 이른바 양사 와 같은 류 등을 참고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까닭으로 가라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이 ꡔ가락국기ꡕ에 뒤섞여 기재된 결과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맺음말 필자는 ꡔ가락국기ꡕ 국왕세보의 좌지왕조에 대하여 이미 나름의 분석을 가한 바가 있었다.118) 그 대강의 요지는 좌지왕조의 연대를 그대로 인정하 고, 이른바 고구려남정 직후인 5세기 전반 가락국의 내적 상황을 살폈는데, 역시 용녀 와 그 무리들의 등장에 주목하고, 이들에 의한 국내요란, 그로 인한 신라의 가락국 침공 기도 등의 사실성을 따져보았었다. 그때 이미 필자는 좌지왕조가 ꡔ일본서기ꡕ 계체기 23년조와 상당히 유사 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119) 그 후의 게으름으로 인하여 심 화된 연구는 진행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ꡔ가락국기ꡕ에 대한 발표를 계기 로 본고의 작성에 들어갔던 것이다. 117) 金泰植, 앞의 논문, 1996, 25쪽. 118) 유우창, 고구려 남정 이후 가락국과 신라 관계의 변화 ꡔ한국고대사연구ꡕ 59, 2010, 146~156쪽. 119) 유우창, 위의 논문, 154쪽의 주 81) 참조.
186 지역과역사 39 호 여기서한가지밝힐것은 6세기전반을서술하고있는본고가 5세기전반을서술한이전의글을뒤엎는것은아니라는것이다. 좌지왕조를싣고있는 ꡔ가락국기 ꡕ의특성상시기는유동적이기때문이다. 모두시론적인분석이었지만, 전고는전고대로본고는본고대로나름의의미가있다고생각하기때문이다. 각설하고, 아래에서는본문에서다룬내용을간략히요약함으로써맺음말을대신할까한다. 제1장에서는 6세기전반의가라국사를특히대외관계의측면에서살펴보았다. 가라국은백제에의하여 509년이른바 임나일본현읍 가야인들의백제호적에편입, 512 년섬진강유역의 임나4 현, 513년기문지역의상실과정을연대기순으로살펴보았다. 이와같은지속적인백제의침공에직면한가라국은자신및그세력권을보전하기위하여새로운외교활동을모색하지않을수없었는데, 그것은바로신라와 혼인동맹 을맺는모험을단행한것이었다. 제2장에서는 ꡔ가락국기ꡕ 에서술된가라국관련기사들을추출하여나열해보고, 하나하나검증해보았다. 그중에서가락국의 영역기사 를분석하였는데, 그결과가락국의영역범위가될수없음을알게되었다. 특히서북쪽경계로운위된 지리산 ( 동 ) 은가라국이백제에게기문지역을완전히상실하게되는 6세기전반이후의가라국의영역 ( 세력권 ) 범위를반영한것으로보았다. 제3장에서는먼저계체기 23년 3월첫번째시월조의가라국관련기록을분석하여 522년에 가라- 신라혼인동맹 이결성되었고, 신라왕녀를따라온종자들이신라의의관으로 변복 하자가라국을맹주로하는연맹체소국의지배층이었던아리사등이가라국왕에게성내며반발하자, 가라국왕은사자를여러현에파견하여종자들을불러들인것으로이해하였다. 다음으로좌지왕조를분석하고이를계체기의가라국관련기록과비교하여보았다. 그결과좌지왕조에보이는인물들의행위가계체기의비교대상인물들의그것과상당히유사하다는느낌을강하게받았다. 결론적으로좌지왕조는내용구성이나구조적측면에서계체기의가라국관련기사와
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87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동일한 사건이 계통을 달리하여 전 승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金泰植, ꡔ加耶聯盟史ꡕ, 一潮閣, 1993. 金泰植, 大加耶의 世系와 道設智 ꡔ震檀學報ꡕ 81, 1996. 金泰植, 가야의 발전과 쇠망 ꡔ한국사ꡕ 7, 국사편찬위원회, 1997. 金泰植, 駕洛國記 所載 許王后 說話의 性格 ꡔ韓國史硏究ꡕ 102, 1998. 김태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ꡔ한국 고대 사국의 국 경선ꡕ, 서경문화사, 2008. 金泰植,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김태식 편, ꡔ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ꡕ,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金泰植ㆍ李益柱ㆍ全德在ㆍ姜鍾薰, ꡔ譯註 加耶史史料集成ꡕ 1 高麗以前篇, 駕洛國 史蹟開發硏究院, 2004. 김현구ㆍ박현숙ㆍ우재병ㆍ이재석, ꡔ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ꡕ (Ⅱ), 일지사, 2003. 김현숙, 6세기 대가야의 발전단계에 대한 一考 ꡔ慶北史學ꡕ 23, 2000. 남재우, 가야 말기 于勒의 신라망명, 김태식 편, ꡔ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ꡕ,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ㆍ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白承玉, 新羅ㆍ百濟 각축기의 比斯伐加耶 ꡔ釜大史學ꡕ 15ㆍ16合, 1992. 白承玉, ꡔ加耶 各國史 硏究ꡕ, 혜안, 2003. 백승옥, 安羅高堂會議 의 성격과 安羅國의 위상 ꡔ지역과 역사ꡕ 14, 2004. 백승옥, ꡔ日本書紀ꡕ에 보이는 阿羅斯等의 정체와 그의 외교활동 ꡔ한국민족문화ꡕ 51, 2014. 白承忠, 于勒十二曲의 해석문제 ꡔ韓國古代史論叢ꡕ 3, 1992. 白承忠, 加耶의 地域聯盟史 硏究, 釜山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5. 白承忠, 加羅國과 于勒十二曲 ꡔ釜大史學ꡕ 19, 1995. 白承忠, 加羅ㆍ新羅 결혼동맹 의 결렬과 그 추이 ꡔ釜大史學ꡕ 20, 1996. 백승충, 가야 건국신화의 재조명,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ꡔ한국 고대 사 속의 가야ꡕ, 혜안, 2001. 백승충, 加耶의 地域聯盟論 ꡔ지역과 역사ꡕ 17, 2005. 백승충, 문헌을 통해 본 고대 창녕의 정치적 동향 ꡔ고대 창녕지역사의 재조명ꡕ,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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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駕洛國記ꡕ에 보이는 加羅國 189 Abstract Garaguk Looks to the Garakgukgi Yoo, Woo-Chang This paper was also noted that some of the listed records of garaguk in contact with Garakgukgi(ꡔ駕洛國記ꡕ). Thus, the so-called area article Garakguk and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ed with, such as Samguksagi and Nihonsoki, saw review. As a result, these records have been found the possibility to see the historical facts of Garaguk rather than Garakguk. Area article Garakguk appears in the founding myth of KIng Suro. But the fact of the historical founding of King Suro time to can not see. Perhaps reflecting the greater the likely area of Garaguk after the loss of the Gimun region to the 6th century Baekje. The reason is because that the record Jiri-Mountains or east of Jiri-Mountains in one of the northwest region. King of the Garakguk royal lineage of the King Jwaji comparison with the first article in this month s record Garaguk of Nihonsoki Keitai of 23 years in March is very similar in its content or structure surfaces. For example, there was the King Jwaji wife Hired-Woman and King Inoe wife Silla princess led her flock to follow everyone. And the crowd has been withdrawn causes of the incident, such as domestic disturbances, or changing clothes clothed receive the checks from the opposition, respectively. These results of this paper will be able to find its own means of paper in terms of the history of the future Garaguk, Garakgukgi will also be available as a single
190 지역과역사 39 호 material. Keywords : (East of) Jiri-Mountains. Hired-Woman. Silla Princess. The Crowd of Hired-Woman. The Silla Princess s Servant
쌍화점 에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191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191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191~238쪽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충렬왕대 麗蒙 습합정권 송도가 형성의 역사적 맥락과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의 역사적 실체를 통해 120)권 도 경** 머리말 Ⅰ. 건국신화적 신혼 기원의 충렬왕 왕권신화적 전이와 송도가 출현의 역사적 맥락 1. 충렬왕대 麗蒙 습합정권의 혈통적ㆍ문화적ㆍ경제적 구축과정 2. 려몽습합 고려왕권 구축의 건국신화적 맥락과 송도가 출현 배경 Ⅱ. 몽고계 이주집단의 신성상관물과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의 역사적 실체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는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을 충렬왕대 麗蒙 습합정권 송도가 형성의 역사적 맥락과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의 역사적 실체를 통해 규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부정적 음란욕망론이나 뜬소문 경계론, 풍요민속론 등 쌍화점 에 대한 기존의 주제론들이 해명해 내지 못했던 지점, 즉 남녀음사를 핵심 모티프로 하는 쌍화 점 이 어떻게 궁중의 왕실송도가가 될 수 있었으며, 해당 역사적 배경이 왜 하필 충렬 왕대였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충렬왕대 려몽습합정권의 역사적 신성맥락과 몽고이주 집단의 역사적 산물로서의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이 지닌 신성상징을 통해 해결 해 내고자 한 연구가 된다. * 본고는 동악어문학회 2015년 하반기 전국학술대회(2015.11.27)에서 발표되었던 논문임. **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조교수(dkkwon@sungkyul.ac.kr).
192 지역과 역사 39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연구는 쌍화점 의 직접적인 기원이 민요의 층위에 있던 男女淫事의 민속제의요가 아니라 해당 민속제의요가 건국 주체 집단의 신성왕권 을 합리화하기 위한 건국신화적 神婚歌로 전이된 층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건국신화 적 신혼가 기원이 元 나라 이주세력을 수용함으로써 고려 토착민과 원 이주민 통합왕조 의 개창자가 된 충렬왕의 왕권신화적 왕실의례요로 특수화 되어 실현된 것이 바로 쌍 화점 이라는 이론적 전제를 구축했다. 즉, 민요의 보편적인 무속풍요제의요로 존재하 던 男女淫事謠로서의 쌍화점 이 궁중 예악의 국왕 송축가ㆍ찬양가의 층위로 전이되기 위해서는 민속적 男女神婚이 왕권과 관련된 남녀신혼의 층위로 전환될 수 있는 보편적 차원과 특수적 차원의 인식적 전제기반이 요구된다는 입론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본 연구는 충렬왕이 고려무신집단에 예속되어 있었던 전대 고려 왕실을 동아시아의 정치ㆍ문화적 선진세력인 원나라 지배세력을 의도적으로 도래시킨 후 고려의 토착왕실과 결합시킴으로써 실질적인 高蒙 통합계 고려왕권을 연 中興始祖 가 된다는 충렬왕조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민속적 남녀신혼가 궁중 예악적 국왕 송축가 ㆍ찬양가의 층위로 전이되었다는 건국신화의 송도가적 맥락을 읽어내었다. 다음으로 회회아비ㆍ삼장사주ㆍ우물용ㆍ술집아비가 원나라에서 도래하여 고려 토착집단과 결합 한 몽고계 이주집단의 허구적 신성상관물로서 의도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이 충렬왕대에 몽고로부터 전래된 문예적ㆍ종교적ㆍ군사 적 산물과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적 실체성을 입증하였다. 주제어 : 쌍화점, 삼장사, 우물, 술집, 회회아비, 삼장사주, 우물용, 술집아비, 충렬왕, 려몽 습합왕권, 건국신화, 신혼, 송도가 머리말 쌍화점 은 특이하다. 고소설로 치면 춘향전 처럼 한국인이라면 모르 는 사람이 없을 정도에다 최근엔 동명의 제목으로 된 영화까지 나와서 흥행 을 했는데, 정작 작품의 실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주제ㆍ구조ㆍ기원ㆍ기능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193 ㆍ양식ㆍ향유의식ㆍ배경 등을 밝히고자 한 수많은 연구들이 출몰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영역의 異說들이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 을 뿐 아니라, 어떤 한 이설도 쌍화점 을 둘러싼 제반 이슈들을 총체적으 로 설명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비록 전면적인 논의가 되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어떤 이설의 입장을 선택하든 필연적으로 거론되기 마련인 구조론은 차치해 놓더라도, 한 영역의 이설을 선택할 경우 반드시 다른 영 역의 이설들과 상충하게 된다는 것이다. 혹은 한 이설이 쌍화점 의 총 4개 분연 중 한 연에는 꼭 맞는 옷처럼 적용 가능하다 하더라도 또 다른 한 연의 의미는 필요충분하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행 연구의 꼬리에 꼬 리를 물고 매번 발표되는 후속연구는 쌍화점 연구사의 주도적인 흐름을 전환시킴으로써 논쟁을 촉발시키는 긍정적인 기능은 해왔으나, 그럴수록 쌍화점 의 총체적인 실체는 더욱 모호해지는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수많은 제 설들의 출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쌍화점 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은 영화 <쌍화점>의 대흥행의 기반이 된 부정적인 음란욕망 투영설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ㆍ기능이나 향유의식ㆍ배경이란 것이 주제와 긴밀한 상호관련성 속 에 있으며 주제를 따라가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결국 구조ㆍ기능ㆍ향유의식 ㆍ향유배경이 주제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필연이라고 할 때, 현재까지 쌍화 점 주제론 전개사의 주된 흐름은 忠烈王代 문란한 성풍속도와 元風을 배 경으로 한 淫事慾望의 반영론1)에서 불륜소문 피해 호소를 통한 뜬소문 경 계론2)으로 전환해 있는 상태다. 전자가 음란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1) 송정헌, 쌍화점 연구 ꡔ충북대학교논문집ꡕ 17, 1979. 양주동, ꡔ여요전주ꡕ, 을유 문화사, 1987. 조윤제, ꡔ한국문학사ꡕ, 동국문화사, 1963. 박병채, ꡔ고려가요 어석 연구ꡕ, 선명문화사, 1974. 여증동, 쌍화점노래 연구 ꡔ고려시대의 가요연구ꡕ, 새문사, 1982. 박노준, 쌍화점고 ꡔ한국학논집ꡕ 11, 1987. 여운필, 쌍화점 연구 ꡔ국어국문학ꡕ 92, 1984. 최미정, 쌍화점의 해석 ꡔ한국문학사의 쟁점ꡕ, 집문 당, 1986. 최규성, 고려속요를 통해 본 고려후기의 사회상: 쌍화점에 대한 분석 을 중심으로 ꡔ사학연구ꡕ 61, 2000. 이정선, 쌍화점의 구조를 통해 본 욕망과 그 의미 ꡔ대동문화연구점ꡕ 71, 2010. 2) 정운채, 쌍화점 의 주제 ꡔ한국국어교육연구ꡕ 49, 1993 ; ꡔ악장가사ꡕ의 쌍
194 지역과 역사 39호 주된 기반을 두고 있다면, 후자는 소문의 문화학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이 둘을 좌표축의 양 극단으로 하여 그 사이에 소수의 이설로 존재하는 것이 음란욕망 풍자론3)과 음란욕망 긍정론4)이다. 전자의 음란욕망 비판ㆍ풍자 론이 소문의 문화학에 기반한 뜬소문 경계론과 주제적으로 친연하다면, 후 자의 음란욕망 긍정론은 淫事를 巫俗祭儀 기원으로 보는 무속제의기원론5) 과 주제적인 친연관계에 있다. 엄밀하게 봐서 무속제의 기원론은 주제론이 아니라 기능 혹은 양식론에 해당하지만, 음사를 긍정적으로 규정하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으며 극소수에 불과한 음란욕망 긍정론의 일부가 무 속제의 기원론을 논리적 준거로 전제6)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사를 부정적으 로 보는 부정적인 음란욕망의 반영론, 뜬소문 경계론, 음란욕망 풍자론, 음 란욕망 긍정론과 차별화 되는 주제 범주에 위치한 광의의 주제론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현재까지 쌍화점 연구사를 주제 관련 측면에서 차 별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것은 부정적인 음란욕망 반영론, 뜬소문 경계론, 무속제의 기원론의 세 가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음란욕망 반영론은 쌍화점 의 초기 연구사를 주도한 이론이다. 최 근 히트작인 영화 <쌍화점>의 주제적 배경으로 등장할 정도로 여전히 일반 3) 4) 5) 6) 화점 과 ꡔ시용향악보ꡕ의 쌍화곡 과의 관계 및 그 문학사적 의미 ꡔ인문과학논 총ꡕ 26, 1994 ; 삼장 및 쌍화점 과 서동요 의 관련 양상 ꡔ고전문학연구ꡕ 10, 1995. 김유경, 雙花店 연구 ꡔ열상고전연구ꡕ 10, 1997. 황보관, <雙花 店>의 시상구조와 소재의 의미 ꡔ한국고전연구ꡕ 19, 2009. 최은숙, <쌍화점> 관련 텍스트에 나타난 소문의 구성 양상과 기능 ꡔ동양고전연구ꡕ 39, 2010. 박 상영, <쌍화점>의 담론 특성과 그 문학사적 함의 ꡔ국어국문학ꡕ 159, 2011. 정병욱, ꡔ한국고전시가론ꡕ, 신구문화사, 1984. 이도흠, 고려속요 (高麗俗謠)의 구조분석과 수용의미 해석- 쌍화점 과 동동 을 중심으로 ꡔ한국시가연구ꡕ 1, 1997. 최동국, <雙花店>의 性格 硏究 ꡔ문학과언어ꡕ 5, 1984. 허남춘, 쌍화점의 우 물 용과 삿기광대 ꡔ반교어문연구ꡕ 2, 1990. 윤경수, 쌍화점에 나타난 인간상 에 관한 연구 ꡔ외대논총ꡕ 10-1, 1992. 강명혜, 豊饒의 노래로서의 <雙花店> ꡔ고전문학연구ꡕ 11, 1996. 허남춘, 日本神話와 神語歌를 통해 본 한일 고대시 가 ꡔ비교민속학ꡕ 28, 2005. 윤경수, 위의 논문.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195 인들의 뇌리에 고정관념으로 박혀 있는 바와 같이, 원 지배기 忠烈王 대의 혼란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문란한 성풍속도가 반영되어 있다는 부정적인 음 란욕망 반영론은 쌍화점 의 기원을 자연발생적 유행가로서 원 지배기 혼 란한 시대상과 문란한 성풍속도 향유배경론7)과도 상통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대 유행민요로서의 쌍화점 에만 한정되는 주제론이 된다. 아무리 王政이 혼암해도 엄격한 예악 격식과 엄숙한 풍도 속에서 거행되는 궁중의례에서 향유된 악곡이 음란욕망 추구를 주제로 할 수는 없을 뿐 아니 라, 쌍화점 의 기원으로 거론되어 온 巫俗祭儀謠의 주제적 시원과의 상관 성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뜬소문에 대한 경계론은 비교적 최근에 쌍화점 연구사의 주도적 인 신조류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이론이다. 원 지배기 충렬왕대의 고려사회 상에 대한 실증적 고증을 기반으로 한 텍스트 외재적 연구에 기반 해 있었 던 초기 연구사의 부정적인 음란욕망 반영론을 대신한 이론에 해당한다. 원 지배기 혼란한 시대상과 문란한 성풍속도를 배경으로 한 향유배경론을 무언 의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서의 음란욕망 반영론과 같되, 주된 여 성화자를 소문의 피해자로 봄으로써 당대 향유배경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 서는 원지배기 성풍속도 배경론을 음란욕망 반영론의 정반대편에서 의미화 한 음란욕망 비판ㆍ풍자론의 일부가 되게 된다. 이러한 충령왕정의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주제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기본 전제로 동의하는 바와 같이 쌍화점 이 포함되어 있는 당대 궁중악곡의 親旣得權적 양식 범주와 괴리될 뿐 아니라 음란욕망 반영론과 마찬가지로 무속제의요 기원론과 상충 된다. 또한, 이러한 뜬소문 경계의 주제론은 쌍화점 과 동시대의 한시체 노래 가사인 ꡔ高慮史ꡕ 樂志 ㆍ 烈傳 소재 三藏 8)ㆍ 蛇龍,9) ꡔ及庵先生詩 7) 최규성, 앞의 논문, 2000. 김명준, ꡔ쌍화점ꡕ형성에 관여한 외래적 요소 ꡔ동서 비교문학저널ꡕ 14, 2006. 8) ꡔ高麗史ꡕ 卷71, 樂志 俗樂, 三藏. 9) ꡔ高麗史ꡕ 卷125, 列傳38, 姦臣1, 吳潛.
196 지역과 역사 39호 集ꡕ 소재 閔思平의 악부시 1수,10) ꡔ西浦集ꡕ 소재 金萬重의 악부시 2 수,11) ꡔ時用鄕樂譜ꡕ 소재 雙花曲 ꡔ大樂後譜ꡕ 소재 雙花店 을 모두 충 렬왕대 궁중악곡 <쌍화점>과 동일한 주제적 카테고리 속에 묶고 있는데, 궁 극적인 창작목적과 향유의식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차치해 두고라도 고려속 악 쌍화점 이 충렬왕조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쌍화점 향유배경론들의 특수성과 전적으로 일치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충렬왕 집단의 고려속악 쌍화점 창작목적ㆍ 향유의식과 유교적 士類 집단들의 삼장 ㆍ 사룡 계 한역시ㆍ악부시들이나 조선조 궁중악곡들의 창작목적 ㆍ향유의식이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쌍화점 의 제명이 해당 삼장 ㆍ 사 룡 계 한역시ㆍ악부시로부터 유래하고 있지 않은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 난다. 뜬소문 경계 주제론처럼 상기 악부시들과 조선조 궁중악곡들을 모두 삼장 과 사룡 을 동일한 주제적 범주에 포함시키는 논리적인 설득력을 얻으려면 해당 주제와 관련된 핵심 정보인 三藏史 관련 에피소드가 ꡔ時用鄕 樂譜ꡕ와 ꡔ大樂後譜ꡕ 소재 악곡 이본의 제명으로 내세워져야 한다. 예컨대, 쌍화점 의 제목이 쌍화점 이 아니라 삼장사 같은 식이 되어야 뜬소문 경 계론이 논리적인 정합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쌍화점 의 제목이 삼 장사 가 아니라 쌍화점 인 이유는 뜬소문 경계론의 바램과는 달리 쌍화 점 의 기원이 삼장 ㆍ 사룡 계 주제 범주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라 쌍 화 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전히 쌍화점 의 기원은 삼장 ㆍ 사룡 계 한역시ㆍ악부시의 주제 범주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쌍 화 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속제의요 기원론은 淫事를 생명탄생을 위한 신성행위로 보 는 무속풍요의례론12)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이론이다. 민속 祭神行事의 神讚歌가 宮中讚歌로 수용되면서 신을 찬양하는 神讚 형식이 왕을 찬양하 는 王讚 형식으로 바뀐 것으로 고려궁정악 쌍화점 을 파악하고 있다. 신찬 10) 閔思平, ꡔ及庵先生詩集ꡕ, 卷三, 第四, 樂府詩. 11) 金萬重, ꡔ西浦集ꡕ, 卷二, 樂府. 12) 최동국, 앞의 논문, 1984. 강명혜, 앞의 논문, 1996.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197 가에서 기원한 궁중찬가의 내용이 神聖性이나 英雄性에 있지 않고 쌍화점 과 같은 男女間愛情과 風物 묘사에 있다는 사실을 일본 궁정가요의 경우에 비견하여 설명13)해내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데, 남녀지정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음사욕망 긍정론들과 상통하는 논의가 된다. 부정적인 음란 욕망 반영론이나 음란욕망 풍자론이 설명해 내지 못했던 지점, 즉 애초에 왜 이러한 남녀 간의 성애욕망이 왕에 대한 찬양과 송도를 노래해야 할 궁 정악곡으로 수용되어 있으며, 이렇게 고려ㆍ조선의 궁정악곡으로 수용되어 있는 남녀 간 성적 욕망이 과연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하는 논의로 평가할 수 있다. 동시에 뜬소문 경계론이 설명해 내지 못했던 지점, 즉 충렬왕 집단의 쌍화점 창 작목적ㆍ향유의식과 남녀지정이 어떻게 밀접한 상관체계 속에서 유의미화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해줄 수 있다는 의의도 부 여할 수 있다. 이렇게 무속제의 기원론이 지니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가 쌍화점 연구사의 주도적인 연구로 전면화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남녀의 성적 交 媾라는 무속제의적 기원론이 국왕 송도와 찬양의 의미로 전화하는 원리가 왜 하필 충렬왕과 결부되어 있어야 하며, 회회아비ㆍ삼장사승ㆍ우물용ㆍ 술집아비와 고려여인이 무속제의에 기원한 충렬왕 송도ㆍ찬양가 성립을 위 한 텍스트 내적인 남녀 상관물로 선택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男女淫事가 王權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미 민속 의 풍요제례 층위를 넘어 왕권 정당화를 위한 건국신화적 의미체계에 속하 는 층위의 주요 구성요소로 재편되어 있다는 것이 되는데, 고려 건국 초기 의 왕권 성립기 설화나 기사들에서 국왕과 결부되어 나타나던 남녀음사의 건국신화적 논리가 왜 하필이면 고려 말기의 충렬왕과 관련된 악곡 가사로 재구성 되어 나타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또한, 민속의 龍神信仰所로서의 우물 외에는 텍스트 내부의 각 공간적 상 13) 허남춘, 앞의 논문, 1990 ; 앞의 논문, 2005.
198 지역과 역사 39호 관물들을 민속제의와 관련시키지 못하거나14), 혹은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 ㆍ술집을 불 켜고 먹고 마시는 보편적인 제식공간으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하필 마시는 공간이 우물과 술집으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이유를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한계15)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보편적인 제식공간들과 제 식공간의 男性主들이 충렬왕과 관련된 건국신화적 의미체계의 층위 내부에 서 어떠한 특수한 의미소로 기능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 제식공간에 출몰 하여 남성주들의 성적교구가 되고 있는 여성이나 무속제의의 난장적 어릿광 대 혹은 신성매개물로 규정되어온 삿기광대ㆍ삿기상좌ㆍ드레박ㆍ싀구박 등이 충렬왕과 관련된 건국신화적 의미체계에서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설명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 본 연구는 쌍화점 의 직접적인 기원이 민요의 층위에 있던 男女淫事의 민속제의요가 아니라 해당 민속제의요가 건국 주 체 집단의 신성왕권을 합리화하기 위한 건국신화적 神婚歌로 전이된 층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건국신화적 신혼가 기원이 元나라 이주세력을 수용함 으로써 고려 토착민과 원 이주민 통합왕조의 개창자가 된 충렬왕의 왕권신 화적 왕실의례요로 특수화 되어 실현된 것이 바로 쌍화점 이라는 이론적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즉, 민요의 보편적인 무속풍요제의요로 존재하던 男 女淫事謠로서의 쌍화점 이 궁중 예악의 국왕 송축가ㆍ찬양가의 층위로 전 이되기 위해서는 민속적 男女神婚이 왕권과 관련된 남녀신혼의 층위로 전 환될 수 있는 보편적 차원과 특수적 차원의 인식적 전제기반이 요구된다는 입론이 된다. 먼저, 전자의 보편적 인식기반은 도래한 이주집단과 토착집단의 결합으 로 새로운 국가질서와 문화가 개창되는 것을 정당화ㆍ합리화 한 건국신화 의 神婚話素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후자의 특수적 인식기반은 충렬왕 이 고려무신집단에 예속되어 있었던 전대 고려 왕실을 동아시아의 정치ㆍ 문화적 선진세력인 원나라 지배세력을 의도적으로 도래시킨 후 고려의 토착 14) 허남춘, 위의 논문, 2005. 15) 강명혜, 豊饒의 노래로서의 <雙花店> ꡔ고전문학연구ꡕ 11, 1996.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199 왕실과 결합시킴으로써 실질적인 高蒙 통합계 고려왕권을 연 中興始祖가 된다는 충렬왕조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찾는 것이 가능하다. 남녀음사를 핵 심 모티프로 하는 쌍화점 이 부정적인 음란풍속 반영 혹은 투영한 결과물 이 아니라 궁중의 왕실송도가로 존재로 존재하되, 해당 역사적 존재층위가 왜 하필 충렬왕대로 설정되어 있었던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기원론을 통해 결과적으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 고 있었던 기본적인 의문점들, 즉 왜 남성등장인물이 하필 회회아비ㆍ삼장 사승ㆍ우물용ㆍ술집아비여야 하고, 공간배경이 상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 술집이어야 하며, 신성매개물이 삿기광대ㆍ삿기상좌ㆍ드레박ㆍ싀구박이어 야만 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16) Ⅰ. 건국신화적 신혼 기원의 충렬왕 왕권신화적 전이와 송도가 출현의 역사적 맥락 1. 충렬왕대 麗蒙 습합정권의 혈통적 문화적 경제적 구축과정 忠烈王(1236~1308)의 등극기는 무신군부의 허수아비 고려왕권을 끝내 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원나라 지배세력을 도래집단으로 이주시켜서 기존 고려왕실과 결합시킨 神 고려왕권을 출범시킴으로써 전대 무신군부의 허수 아비 고려왕권을 대체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요약된다. 왕건이 절대적인 神聖 王氏 왕권을 누리고 있었던 고려 건국 초기 때와는 달리, 충렬왕 등극 이전 의 고려의 왕권은 외척정권과 무신정권의 神權에 각각 50년과 100년 동안 잠식당한 상태였다. 고려 지배세력이 왕권을 절대권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16) 본 논고는 제목에서부터 명시되어 있듯이 쌍화점 의 신화적 기원과 역사적 맥 락에 관한 것이지 텍스트 내재적인 내용 분석이 아니다. 내용적 측면에서 송도 ㆍ송축적 특징을 규명하는 연구는 본 논고와 차별화 된 관점에서 접근하는 텍스 트 내재적인 연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 논고의 텍스트 외재적인 연구를 기반 으로 한 후속 논고에서 진행하도록 하겠다.
200 지역과 역사 39호 것이 아니라, 신권이 외척정권에서 무신정권으로 차례로 교체되어 나가면서 왕권과 일종의 二極頂點을 구성하는 형태로 분열된 결과 독자적으로는 존 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무력화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씨정권(崔氏幕 府)을 연 崔忠獻은 1219년에 고종에 왕씨 성을 하사받음17)으로써 왕실의 일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던 바, 최씨정권은 무신들의 신권주의 정치 제도가 아니라 사실상 공동왕권에 해당할 정도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를 대신하여 동아시아 패권국의 지위를 획득한 원나라와 제휴한 결과 탄생한 것은 무신 신권세력이 개국기의 王氏高麗 왕조를 사실상 대체 하여 성립시킨 崔氏-王氏 제휴의 정권고려(幕府高麗) 왕조로, 건국초기의 왕씨고려를 후기에 계승한 일종의 後 왕씨고려 왕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강화도에 최후까지 웅거하며 대몽항쟁의지를 불태우다가 자체 소 멸한 무신정권정권에 대한 평가는 對蒙自主性 유지를 위한 반외세자주의식 의 측면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지만, 기실 무신정권정권이 고려 왕씨집단과 원나라 왕실 보르지긴(Borjigi)씨18) 집단 간의 결탁을 끝까지 저지하고자 한 것은 고려왕권이 崔王 제휴의 정권왕조에서 王氏-孛兒只斤氏 제휴의 원 나라계 고려왕권으로 교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최씨정권 종식이 고려 왕조의 종식이 아니라 단지 최씨정권 왕조의 종식 일 뿐 고려 왕조는 麗元 제휴 정권 성립 이전까지 지속되어 나갔다는 사실 은 최의를 살해하여 최씨정권을 김씨정권(金氏幕府)로 대체한 金俊, 다시 김준을 살해하여 김씨정권을 임씨정권(林氏幕府)으로 대체한 林衍의 사례 에서도 확인된다. 1258년(고종 45)에 高宗과의 연대를 통해 崔竩를 살해함 으로써 최씨정권(崔氏幕府)를 종식19)시켰던 무신 김준은 명분상으로만 고 종의 왕권을 회복시켰을 뿐 충렬왕의 부왕인 元宗 원년에 공신 1등급에 책 17) ꡔ高麗史ꡕ 卷129, 列傳42, 叛逆3, 崔忠獻. 六年, 王賜忠獻姓王 18) 원나라 왕실의 성씨는 한자로 孛兒只斤氏라고 쓰는데, 몽고말로는 보르지긴 (Borjigi)씨라고 한다. 19) ꡔ高麗史ꡕ 卷130, 列傳43, 叛逆4, 金俊. 高宗四十五年, 與柳璥ㆍ松庇等, 誅 竩, 復政于王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01 봉되어 樞密院副使ㆍ御史大夫ㆍ柱國ㆍ太子賓客ㆍ翼陽郡開國伯으로 진봉 되고 食邑 1000호와 食實封 100호를 부여받은 이후 최씨정권의 개창자인 崔忠獻처럼 군복 입은 사병을 구름 같이 거느리고 다녔으며20), 다시 원종 6년(1265)에 侍中 겸 海陽侯로 책봉됨으로써 최충헌의 전례를 직책상 모 두 회복21)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왕실의 王侯 행세22)를 함으로써 金王 제 휴의 김씨정권 고려왕조를 운영한 인물이었다. 한편, 元宗과 연대하에 戊辰 政變을 일으켜 김준을 살해함으로써 김씨정권을 종식시켰던 임연은 1268년 원종과 제휴하여 김준을 살해하고 정권의 수장인 校定別監이 되어 三別抄 와 六番都房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김준의 옛 집까지 차지했으며, 원종을 폐위시키고 安慶公 王淐을 즉위시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사 실상 임씨정권 고려왕조를 운영하였다. 이처럼 최씨정권에서 김씨정권을 거쳐 임씨정권에 이르는 고려왕조의 교 체는 왕씨 집단이 원나라 보르기지씨 집단과 연대하여 보르기지 왕씨 고려 왕조가 탄생시킬 것을 염려한 무신정권이 反蒙 강경노선을 유지하다가 원나 라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고려왕실에 의해 타도된 후, 다시 지배집단만 교체 한 채 복권되는 과정의 반복적인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종에 의해 왕 씨 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왕씨 집단과 국정운영 제휴체를 구성했던 최씨정 권은 1259년 왕씨 집단이 親朝를 통해 親元 노선을 모색함에 따라 대몽항 쟁주의를 명분으로 왕씨 집단과의 연대 해체를 우회적으로 천명했다고 할 수 있으며, 고종과의 교감 속에서 최씨정권을 타도했던 김씨정권은 1261년 원나라에 대한 再親朝를 통해 왕권을 보장받는 동시에 김씨정권의 최씨정권 대체를 저지하고자 한 왕씨 집단에 대하여 1262년 최씨정권의 제2대 수장 20) ꡔ高麗史ꡕ 卷130, 列傳43, 叛逆4, 金俊. 元宗元年, 改策功, 以俊爲第一, 進樞 密院副使御史大夫柱國太子賓客翼陽郡開國伯, 食邑一千戶ㆍ食實封一百戶. 一日, 往水州廣因院, 施酒食於行路, 從者如雲, 皆着戎服 21) ꡔ高麗史ꡕ 卷130, 列傳43, 叛逆4, 金俊. 六年, 拜侍中, 尋冊爲海陽侯, 一依晉 陽公故事 22) ꡔ高麗史ꡕ 卷130, 列傳43, 叛逆4, 金俊. 俊旣封侯, 効宗室, 右奉笏, 每曰, 平 生所未慣, 有時左奉. 人譏之
202 지역과 역사 39호 崔瑀를 衛社功臣으로 彌勒寺에 봉안함으로써 대몽항쟁의 명분을 통한 정권 고려 왕조의 유지와 최씨정권의 계승의지를 천명하였으며, 원종의 배후 조 정에 의해 김씨정권을 전복시켰던 임씨정권은 1269년 원나라에 삼차 입조 한 왕씨 집단이 친몽관계를 기반으로 開京還都를 추진하자 최씨정권의 대 몽강경노선 계승 명분으로 원종을 폐위시킬 정도로 왕씨 집단과의 고려 통 치권 경쟁을 극렬하게 전개해 나갔다. 정권집단과 왕씨집단의 경쟁은 궁극 적으로 고려왕권의 정체성 귀속과 재확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무신정권 고려 왕조를 종식시키고 왕씨고려 왕조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왕씨집단의 초기 정치적 활동은 왕권의 對元 독자성을 유지한 상태에 서 친조를 통한 親元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였는데, 마지막 임씨정권에 의해 폐위되었던 원종이 원의 도움으로 복위한 후 왕권회복을 위해 기존의 방식 대로 근위 무신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서 당대 무신정권을 타도하는 방식을 썼다가 오히려 임연에게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기존의 친 조를 통한 근거리 연대와는 다른 방법이 요구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혼 인을 통한 고려 왕씨족과 원 보르지긴씨족의 혈연동맹이 바로 그것이다. 1274년에 원종의 맏아들 태자 王諶과 원 世祖의 친딸 보르지긴 쿠두루칼리 미쉬(孛兒只斤 忽都魯揭里迷失)의 혼인이 성립됨으로써 비로소 임연정권 은 물론 정권정권 자체가 완전히 종식되고 왕씨 집단의 왕권이 회복될 수 있었다. 이렇게 왕씨 집단의 왕권 회복을 위해 단행된 일련의 정치적 활동 속에 서, 충렬왕은 원나라의 정치적 힘을 빌려와 왕씨 집단에게 매개해 주는 중 간 매개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충렬왕은 1259년에 고종이 김씨정권과 갈등하다가 승하하자 원에 입조한 부왕을 대신하여 태손의 위치에서 임시로 국정을 운영23)하였으며, 김씨정권ㆍ임씨정권에 차례로 대항하기 위해 원 과의 연대를 강화해나간 왕씨 집단의 대표로서 1261년과 1269년에 차례로 원에 입조하였고, 1974년의 려몽 혼인동맹의 당사자가 됨으로써 충선왕의 23) ꡔ高麗史ꡕ 卷28, 世家28, 忠烈王1, 忠烈王 叢書. 四十六年六月, 高宗薨, 元宗, 以太子入覲于元, 王時爲太孫, 受遺詔, 權監國事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03 보르지긴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란 몽고 이름으로 상징되는 보르지긴계 왕씨족을 본격적으로 성립시킨 시원적인 주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교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된 려몽 양국 간에는 지배집단으로 고 려 왕씨족 집단과 원 보르지긴씨족 집단 양자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 니라, 사실상 고려 왕씨족 집단과 고려 무신집단, 그리고 원 보르지긴씨족 집단의 삼자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원칙상 宋元 패권 교체 지점에서 대면하게 된 려몽 양국의 지배집단은 대립구도를 형성해야 맞는 것이지만, 고려 지배집단이 고려 왕씨족 집단과 고려 무신집단의 양자구도 로 팽팽하게 분립하게 됨에 따라 고려 무신집단을 매개로 고려 왕씨족 집단 과 원 보르지긴씨족 집단이 혼인동맹을 통해 보르지긴계 왕씨족을 출범시킴 으로써 고려 왕권집단의 질적 전환이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르지긴계 왕씨 왕조의 출범은 비단 려몽 양국 지배 씨족의 개인 적인 차원이 아니라 해당 지배집단이 이끄는 민족적 차원의 것이었던 동시 에 정치적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 영역에 두루 걸친 대통합이었다는 점에서 이질적인 두 문명의 충돌과 습합 차원에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齊國大長公主 보르지긴 쿠두루칼리미쉬는 혼인과 동시에 대규모의 보르지긴씨족 집단을 이끌고 왔는데, 이들은 제국대장공주 의 수행원 자격으로 고려에 들어온 뒤 대부분이 관직을 제수 받고 고려여성 과 혼인하여 귀화함으로써 고려 사회 내부에서 귀화계 지배층 씨족집단을 형성하였다. 예컨대, 오늘날의 티베트인 河西國 출신으로 齊國大長公主의 개인시종(私屬人)인 케링코우(怯怜口) 자격으로 입국하였다가 將軍이 되어 盧英24)이란 이름으로 개명으로 귀화한 식트르, 몽고 출신으로 역시 제국대 장공주의 케링코우로 입국했다가 檢校政丞을 제수 받은 뒤 대장군 印公秀 의 성을 빌리고 昇平郡을 본관으로 삼아 昇平印氏의 시조가 되면서 印侯란 개명으로 귀화한 쿠라다이(1250~1311),25) 위구르(回回) 출신으로 제국 24) ꡔ高麗史ꡕ 卷123, 列傳36, 嬖幸, 張舜龍. 25) ꡔ高麗史ꡕ 卷123, 列傳36, 嬖幸, 印侯.
204 지역과 역사 39호 대장공주의 케링코우로 입국하였다가 僉議叅理를 지내게 되면서 귀화하여 德水張氏의 시조가 되면서 張舜龍으로 개명한 셍게(三哥:1254~1297)26), 역시 위구르인(回回人)으로 平壤府尹兼存撫使ㆍ大將軍ㆍ大護軍ㆍ上護軍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충렬왕대 대몽 鷹坊 외교를 주로 담당하게 된 이후 귀화한 閔甫,27) 몽고인으로 원 정부에 의해 고高麗金州等處經略使로 파견 되어 원종 이후부터 충렬왕 때까지 東征都元帥府의 都元帥ㆍ征東行中書省 右丞 등을 역임하는 가운데 아들 忻琪와 충렬왕 때 고려 종실 인물 安平公 딸의 혼인을 계기로 고려 왕실의 인척이 되었던 힌두(欣都)28)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노영ㆍ인후ㆍ장순룡ㆍ민보 등이 權臣 범주에 한정된 혼인을 통한 元 귀 화계 씨족 형성에 해당한다면, 힌두의 경우는 원나라에서 이주한 권신의 혼 인을 통한 귀화계 씨족 구축이 왕씨 집단의 종실 층위로 상방확산 된 경우 에 해당한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왕실 혼인을 중심으로 원나라에서 도래한 권신들의 혼인을 통한 범 보르지긴계 고려씨족 형성이 귀족 계층의 상ㆍ하방으로 두루 확산됨으로써 보편화 되어 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국대장공주를 수장으로 한 元 보르지긴계 씨족집단의 도래가 야기한 麗蒙習合은 려몽 국제혼인을 계기로 고려 계층 전반에 새롭게 성립된 보르 지긴계 왕씨족의 새로운 혈통이 문화ㆍ경제적 차원으로 전이되는 형태로 일상화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제국대장공주는 입국 행사에서부터 토쿠 (脫忽)라는 원나라 특파원의 주재하에 몽고 전통의 유목문화 天幕인 穹廬 를 치고 흰 양의 기름으로 복을 구하고 재앙을 물리치는 몽고식 祓除 의식 을 거행29)하는 것을 시작으로 元風의 문화를 고려 왕실의 의례문화 속에 이식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를 맞아들이는 혼인례에 26) ꡔ高麗史ꡕ 卷123, 列傳36, 嬖幸, 張舜龍. 27) ꡔ高麗史ꡕ 卷33, 世家33, 忠宣王1, 忠宣王 2年 戊辰. 戊辰 以閔甫爲平壤府尹 兼存撫使, 甫回回人也 28) ꡔ高麗史ꡕ 卷104, 烈傳17, 金方慶. 29) ꡔ高麗史ꡕ 卷89, 烈傳2, 后妃2, 忠烈王 后妃, 齊國大長公主. 時帝令脫忽, 送公 主, 脫忽先至, 張穹廬以祓白羊膏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05 서부터 辮髮과 胡服을 함30)으로써 제국대장공주로 상징되는 원풍문화를 고려의 전통문화와 융합시킨 일종의 원풍계 고려문화를 보르지긴계 왕씨 왕 조의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문풍 전환의 이면 사정은 충렬왕이 국내적으로는 전국의 속악ㆍ 民間百戱를 수집ㆍ정리하고 전국의 倡優들을 징발하여 宮中別隊로 편성31) 하는 것과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元倡優ㆍ元巫夫들을 공출32)해 들이는 것 을 대대적인 국가사업화 했던 일련의 치적들에서도 확인되는 바, 그 저변에 는 보르지긴계 왕씨 왕조의 정체성을 일종의 麗蒙融合 궁중악의 성립을 통 해 상징적으로 공표하기 위한 의도가 내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ꡔ고려사ꡕ의 시각을 답습한 관점에서 충렬왕대 演戱 문화를 풍기문란과 관 련시켜서 논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기실 국내 속악백희 수집ㆍ정리와 唐樂ㆍ雅樂 수입ㆍ정비란 왕조ㆍ정권의 개창ㆍ교체를 배경으로 新왕조ㆍ 정권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례적으로 실시하는 정치 행위 중에 하나 에 해당한다. 행정ㆍ법률ㆍ역사ㆍ음악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함으로써 舊왕조ㆍ정권을 대체한 신왕조ㆍ정권이 자기 권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입증 한다는 것이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혼인 정책이나 음악정비 정책은 정권 의 안정화 정도에 따라 양가적인 史的 평가를 받기 마련인데, 특히 전대 왕 조ㆍ정권이 해체된 경우에는 후래 왕조ㆍ정권이 자기 권력의 정통성을 입 증하기 위해 전대 왕조ㆍ정권의 상례적인 왕권강화 정책을 부정적으로 사 적 기술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 예컨대, 銅輪계와 金輪계의 권력투쟁 속에 서 후궁을 보기 위해 桃花女에 대한 상례적인 상간을 시도했던 眞智王33)을 30) ꡔ高麗史ꡕ 卷28, 世家28, 忠烈王 卽位年 10月 辛酉 ; 卷28, 世家28, 忠烈王 卽 位年 11月 丁丑. 31) ꡔ高麗史ꡕ 卷29, 世家29, 忠烈王 5年 11月 壬申. 命選州郡倡妓有色藝者, 充敎 坊 ; 卷125, 列傳38, 姦臣1 吳潛. 管絃坊大樂才人不足, 分遣倖臣選諸道, 妓 有色藝者, 又選京都巫及官婢善歌舞者籍置宮 32) ꡔ高麗史ꡕ 卷29, 世家29, 忠烈王 9年, 8月 乙巳 ; 卷29, 世家29, 忠烈王 9年, 8月 己酉 ; 卷29, 世家29, 忠烈王 8年, 7月 庚申. 遣散員高世如元請醫巫 33) 진지왕의 왕권신화적 측면에서 도화녀 비형랑 설화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들을 참조할 수 있다. 권도경,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206 지역과 역사 39호 荒淫無道의 죄목으로 眞智王을 폐위함으로써 동륜계의 왕계를 구축했던 신 라 시대의 反正 사례나 왕권 강화를 위해 의례적인 鄕樂ㆍ당악 진작ㆍ정비 정책을 폈던 燕山君34)이 中宗 반정 세력에 의해 폐위되면서 음악 정책마저 도 황탄한 취향의 일환으로 치부 당했던 조선조의 반정 사례가 동일 왕조 내부에서 이루어진 전대 왕조ㆍ정권의 왕권강화 정책에 대한 폄하에 해당 한다면, 麗ㆍ朝 교체의 정당성을 전대 왕조의 부정적 규정을 통해 구축하고 자 한 ꡔ고려사ꡕ의 기술 태도는 타 계열의 왕조 간에 이루어진 구왕조ㆍ정권 의 왕권강화 정책에 대한 폄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충렬왕대 30 여 년간은 고려가 원나라 동아시아 제국질서의 일부로 편입되어 국가적 정 체성이 재정립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원 제국에 대한 정치적인 연동성을 원 나라의 음악 정책 개편 과정에 발맞춘 속악ㆍ당악ㆍ아악 수용 및 정비를 통 해 실현해 나감으로써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해 나갔다고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35)는 사실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 거꾸로 원 왕실에서는 고려복식이 高麗國樣이란 이름의 최신 트렌드로 유행하고 고려어 학습 열풍이 불었다36)는 점에서 혈통교합을 문화융합을 통해 확산함으로써 麗蒙習合 혹은 蒙麗習合을 시대적 흐름으로 정착시키고 자 하는 움직임은 고려와 원 양국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공히 추진되던 사항 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려ㆍ원 양국의 혈통 매개자이자 문화 매개자 였던 제국대장공주는 잣ㆍ인삼 등의 고려 특산품을 중국에 수출하는 대몽 무역을 독점37)함으로써 문화융합 차원으로 확산된 고려ㆍ원 습합을 경제 34) 35) 36) 37) 텍스트의 적층구조와 진지왕ㆍ도화녀ㆍ비형랑 관련설화의 결합원리 ꡔ한민족 어문학ꡕ 64, 2014 ;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에 나타난 도산도목(桃 山桃木)ㆍ목랑두들(木郞豆豆里) 신화 수용배경과 진지왕 왕권신화 구조 ꡔ구 비문학연구ꡕ 38, 2014. 신대철, 世宗代 以後 燕山君代의 鄕樂과 唐樂 ꡔ한국음악연구ꡕ 29, 2001.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를 참조하기 바람. 이강한, 충렬왕대의 시대상황과 음악정책 ꡔ한국사학보ꡕ 55, 2014. 장동익, ꡔ元代麗史資料集錄ꡕ, 서울대출판부, 1999, 90ㆍ91ㆍ121쪽. ꡔ高麗史ꡕ 卷89, 列傳2, 后妃2, 忠烈王 后妃, 齊國大長公主. 公主嘗以松子人 參送江南獲厚利. 後分遣宦官求之, 雖不産之地無不徵納, 民甚苦之
쌍화점 에나타난건국신화적神婚기원연구 207 적차원에서도주도적으로실현하는주체가되었다. 2. 려몽습합고려왕권구축의건국신화적맥락과송도가출현배경토착ㆍ이주의두문화권충돌지점에서토착문화권의지배집단이두세력으로분열함에따라궁극적으로두개가아닌세개의지배세력이분립하게되고셋중에한토착집단의요청을받은선진이주집단이해당집단과제휴하여습합문화권을새롭게구성함으로써나머지다른토착집단쪽을배제한것으로정리되는보르지긴계왕씨의고려왕조구축과정은충렬왕대의역사적특수성내부에위치해있는것이지만, 보편적인맥락은의외로건국신화로해당기원이소급된다. 바로 단군신화 다. 단군신화 는선진문화를지니고이주해온환웅집단이토착영역에서분열되어있었던웅녀집단ㆍ호녀집단과분립하다가웅녀집단의요청으로습합문화를구성하여단군조선을배태시킴으로써호녀집단을배제시킨건국신화다. 여기서환웅ㆍ웅녀ㆍ호녀집단은각각원의보르지긴씨족집단, 고려왕씨집단, 무신씨족집단에대응되며, 환웅집단과웅녀집단의혼인동맹은보르지긴씨족집단과충렬왕왕씨집단의혼인동맹에, 충렬왕과제국대장공주의혼인결과탄생한충선왕은단군에, 충렬왕에의해성립되어최초의보르지긴계왕씨인충선왕에의해정착된보르지긴계왕씨왕조는고조선에각기대응될수있다. 웅녀집단과고려왕씨집단에해당되는토착집단이스스로의필요에따라환웅집단과보르지긴씨족집단에해당하는이주집단을직접찾아가서습합문화권성립을주체적으로제안하고있다는문화습합의계기까지동일한양상을보여준다. 여기서토착집단이여성으로묘사되어있는건국신화체계의보편성을 단군신화 가그대로따르고있는데반하여, 보르지긴계왕씨고려왕조의구축과정에서는해당토착집단이남성으로설정되어있다는점이양자간의차이가된다. 이처럼토착ㆍ이주집단의성별측면에서 단군신화 와차별화되어있는보르지긴계왕씨고려왕조의구축과정은 수로왕신화 의
208 지역과 역사 39호 건국신화 체계와 공유지점을 보여준다. 주지하다시피 수로왕신화 는 이주 집단이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유일한 건국신화다. 이러한 관점에서 ꡔ고려 사ꡕ 세가 충렬왕조와 후비 열전 제국대장공주조에 수록되어 있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혼인기사를 새삼 들여다보게 되면, 이들 혼인기사들이 수 로왕신화 의 혼인의례에 상당히 유사한 형태로 대응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자료1] ① 10월 무오일, 흰 기운이 태양을 꿰뚫었다. 신유일, 왕이 공주를 맞 이하기 위해 서북면(西北面)으로 행차하는 길에 순안공(順安公) 왕종(王悰),17) 광평공(廣平公) 왕혜(王譓),18) 대방공(帶方公) 왕징(王澂),19) 한양후(漢陽 侯) 왕현(王儇),20) 평장사(平章事) 유천우(兪千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장일(張鎰), 지주사(知奏事) 이분희(李汾禧), 승선(承宣) 최문본(崔文本)ㆍ박 항(朴恒), 상장군(上將軍) 박성대(朴成大),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분성(李 汾成) 등이 호종했다. 왕이 변발[開剃]을 하지 않았다고 이분희(李汾禧) 등을 책망하자 그들은, 저희들이 변발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상례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라고 변명했다. 몽고에는, 정수리부터 앞이 마까지 네모지게 머리털을 깎고 가운데 머리털은 남겨두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 것을 케구르[怯仇兒]라 했다. 왕이 원나라에 입조했을 때 이미 변발을 했는데 본국인들은 아직 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책망한 것이다. (중략) 정묘일, 왕 이 공주를 숙주(肅州)에서 만났다. (중략) 11월 정축일, 왕이 공주와 함께 개경 에 당도해 죽판궁(竹坂宮)에 들었다. 재상(宰相)과 백관들이 국청사(國淸寺) 문 앞에서 왕과 공주를 영접하자 (중략) 왕이 공주와 연(輦)을 함께 타고 입 성하니 부로들이, 뜻밖에도 오랜 병란 끝에 태평시절을 다시 보겠구나. 라며 경 하했다. ( ㆍ 생략) 여름 4월 초하루 갑인일, 왕과 공주 및 세자가 원나라 로 출발하자 원부(元傅)ㆍ이분희(李汾禧)ㆍ박항(朴恒)ㆍ송빈(宋玢)ㆍ강윤소 (康允紹) 등이 호종했다.38) 38) ꡔ高麗史ꡕ 卷28, 世家28, 忠烈王1, 忠烈王 卽位年. 戊午 白氣貫日, 辛酉 幸西 北面, 迎公主, 順安公悰, 廣平公譓, 帶方公澂, 漢陽侯儇, 平章事兪千遇, 知樞 密院事張鎰, 知奏事李汾禧, 承宣崔文本ㆍ朴恒, 上將軍朴成大, 知御史臺事李 汾成從行. 王責汾禧等不開剃, 對曰, 臣等非惡開剃, 唯俟衆例耳, 蒙古之俗, 剃 頂至額, 方其形, 留髮其中, 謂之怯仇兒, 王入朝時, 已開剃, 而國人則未也, 故 責之. 甲子 命李汾成還京, 令妃嬪及諸宮主ㆍ宰樞夫人, 皆出迎公主, 留從臣于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09 ②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는 이름이 쿠투루칼리미쉬(忽都魯揭里迷失) 이며 원나라 세조(世祖)의 딸로 그 모친은 예쉬진카둔[阿速眞可敦]이다. 원종 15년(1274), 세자이던 충렬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원 종이 죽자 충렬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고려로 돌아온 후 추밀원부사(樞密院副 使) 기온(奇蘊)을 보내 공주를 원나라에서 맞아 왔다. 왕이 서북면(西北面) 까지 나가 공주를 맞이하였고 또 비빈(妃嬪)과 여러 궁주(宮主) 및 재추의 부 인들도 나아가 영접하게 했으며 재추와 백관들은 국청사(國淸寺) 문 앞에서 맞 이하였다. 왕이 공주와 함께 연(輦)을 타고 개경에 들어오자 부로(父老)들이 오랜 전란 끝에 다시 태평성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고 말하며 기뻐했 다. 원나라 황제가 토쿠(脫忽)를 시켜 공주를 호송하게 했는데 토쿠가 먼저 와서 궁려(穹廬)를 치고 흰 양의 기름으로 불제(祓除)의식을 거행했다. 이듬 해 정월, 원성공주(元成公主)로 책봉하자 백관이 모두 축하하였다. 궁궐을 경 성궁(敬成宮), 전각을 원성전(元成殿), 부를 응선부(膺善府)이라 하고 관속을 두었으며 안동(安東)과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았다. 9월 이궁(離宮)6)에서 원자(元子)를 낳으니 이 사람이 충선왕이다. 종친과 백관들 이 하례하러 오자 공주의 종자가 문에 있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의 옷을 벗겼는데 이 의식을 설비아(設比兒)라고 불렀다. (중략) 충렬왕 4년(1278) 공주가 아 들을 낳자 신하들이 잔치를 열어 축하하였다. 여름에는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갔다. 왕과 공주가 원나라 수도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는 잔치를 열어 두 사람을 위로하였다.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동남쪽으로부터 들어가 뜰 가운 데 서고, 공주는 작은 홍산(紅傘)36)을 쓴 채로 영녕공(永寧公) 왕총관(王總 管)의 부인과 빈(嬪)들을 거느리고 동북쪽으로부터 들어와 금ㆍ은그릇과 세저 포(細苧布)를 바쳤다. 알현을 마치고 동서쪽에서 전(殿)에 올라가는데 영녕공 과 호종한 신하 원부(元傅)ㆍ이분희(李汾禧)ㆍ박항(朴恒)ㆍ송분(宋玢)ㆍ강윤 소(康允紹) 등이 뒤따랐다. 송분 이하는 동편에 앉았고 호종하던 군사들도 거 기에 끼였다. 공주는 세자와 어린 공주를 데리고 황후를 알현한 후 은 10정(錠) 龍泉驛, 獨與開剃者大將軍朴球等行. 承宣朴恒言於王曰, 史官記人君動作, 不可 一日無也, 乃令直史館李源從行, 丙寅 王至西京, 時西京屬東寧府, 王出銀紵易 糧草, 以給從臣. 丁卯 王會公主于肅州. 西京大興府錄事楊壽等, 請從王以行, 崔坦要而奪之, 十一月 丁丑 王與公主至京, 入御竹坂宮. 先是, 兪千遇謂張鎰 曰, 王若以戎服入城, 國人驚怪, 乃使崔文本ㆍ朴恒, 請王以禮服入, 又使康允紹 ㆍ簡有之再請, 王不聽. 有之賤隸也, 以優得幸, 拜郞將. 宰相百官, 迓于國淸寺 門前, 允紹ㆍ宋玢嗾尹秀ㆍ元卿ㆍ鄭孫琦等, 執扑馳馬, 擊逐禮服者, 侍從失次 分散, 王與公主, 同輦入城, 父老相慶曰, 不圖百年鋒鏑之餘, 復見大平之期, 夏 四月 甲寅朔 王及公主世子如元, 元傅ㆍ李汾禧ㆍ朴恒ㆍ宋玢ㆍ康允紹等從行
210 지역과 역사 39호 과 세저포 20필을 바치니 황후가 세자를 보고 사랑스럽게 여겨 술잔과 칼을 내 려 주었다. 공주가 또 세자를 안고 가 태자비에게 보이니 태자비는 세자에게 이 즈르부카[益智禮普化]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황후는 공주에게 채단(彩段) 한 수레를 내려 주었다. 고려로 돌아올 때, 공주는 왕에게 요청해 개경으로 들어 가는 날 왕과 공주의 견룡군(牽龍軍)들에게는 금꽃을 장식한 모자를 쓰도록 하 고 재상과 문무 백관들은 예복을 입고 마중 나오도록 하였다. 왕이 이습(李槢) 편에 지시를 내렸으나 인공수(印公秀)가 불가하다 하며 시복(時服)을 입도록 간 청하니 왕도 그 말을 따랐다. 다만 견룡군ㆍ순검군(巡檢軍)41)ㆍ백갑군(白甲 軍)ㆍ지유(指諭)ㆍ도장교(都將校)ㆍ악관(樂官)들만 예복을 입고 일행을 맞이 하도록 하였다. 왕과 공주가 개경에 들어서자 백관들과 은퇴한 재추 및 3품 관 직에 있는 각 궁원 부사(副使)들이 반열을 지어 교외와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마중하였다. 왕과 공주는 함께 연(輦)을 탔으며 국학(國學)의 칠관(七館) 학도 들과 동서학당(東西學堂)의 학생들이 송축가를 바쳤다.39) [자료2]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9일, 구간들이 조회할 때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까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지 못하셨 습니다. 청하옵건대,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대궐로 들여 보내 배필로 삼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짐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명이고 짐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하늘의 명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곧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 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다시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서 승점(乘岾)[망산도는 수도 남쪽 섬이다. 승점은 수도 아래에 있는 속 국이다.]에 가도록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부터 붉은색 돛을 달고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북쪽으로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 서 횃불을 올리자 배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앞다 투어 달려오자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 궁궐로 달려와서 아뢰었다. 왕은 이 말 39) ꡔ高麗史ꡕ 卷89, 列傳2, 后妃2, 齊國大長公主. 忠烈王齊國大長公主, 名忽都魯 揭里迷失, 元世祖皇帝之女, 母曰阿速眞可敦. 元宗十五年, 忠烈以世子在元, 尙 公主. 元宗薨, 王嗣位東還, 遣樞密院副使奇蘊, 迎公主于元. 王幸西北面迎之, 又令妃嬪諸宮主, 及宰樞夫人出迎, 宰樞百官, 迎于國淸寺門前. 王與公主同輦入 京, 父老相慶曰, 不圖百年鋒鏑之餘, 復見大平之期. 時帝令脫忽, 送公主, 脫忽 先至, 張穹廬以祓白羊膏. 明年正月, 冊爲元成公主, 百官皆賀, 宮曰敬成, 殿曰 元成, 府曰膺善, 置官屬, 以安東ㆍ京山府, 爲湯沐邑, 九月, 生元子于離宮, 是 爲忠宣王. 諸王百官皆賀, 公主從者在門, 凡入者悉褫其衣, 謂之設比兒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11 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윽고 구간들을 보내어 목란으로 만든 키를 바로 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얼른 궁궐로 모시 려고 하자, 왕후가 말하였다. 나는 그대들을 평소에 몰랐는데, 어찌 경솔히 따 라갈 수 있겠소. 그래서 유천간 등이 돌아와서 왕후의 말을 아뢰었다. 왕은 그 렇다고 여기고는 관리들을 거느리고 행차하였다. 궁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 정 도 떨어진 곳의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궐로 만들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에 있는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산 위에 서 쉬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예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 다. 그밖에 따라온 신하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 었고 이들의 아내는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라고 하였다. 또 종까지 헤아리 면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가져온 수놓은 비단과 옷과 옷감, 금과 은, 주 옥과 옥 등의 장신구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후가 왕의 임 시 궁궐로 점점 다가오자, 왕이 나가서 맞아들여 함께 장막으로 만든 궁궐로 들 어갔다. 왕후를 따라온 여러 신하들도 모두 계단 아래로 나아가서 임금님을 뵙 고는 곧장 물러났다. (중략) (중략) 왕이 대답하였다. 짐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서, 공주가 저 멀리서부터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고 청하였지만 감히 따르지 않았소. 지금에서야 현숙한 분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오. 드 디어 혼인하여 맑은 밤을 두 번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 드디어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냈다. 뱃사공들은 모두 15명이었는데, 각각 쌀 10섬과 베 30 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8월 1일에 대궐로 돌아왔는데, 왕은 왕 비와 함께 수레를 탔고 왕후를 따라온 신하의 부부도 나란히 수레를 탔다. 중국 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왔으니, 물시 계가 정오에 가까웠을 때였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였고 신하 부부와 노비들도 빈 집 두 채에 나누어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밖의 종자들은 20여 칸 되는 집 한 채를 주고 인원 수에 따라 나누어 있게 하였으며, 날마다 필요한 물 건을 넉넉하게 주었다. 그들이 가져온 보물은 대궐의 창고에 보관하고 왕후의 사계절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이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잘 다스려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니, 그 교화가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고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니, 그 공로는 마치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나라를 돕고 당원(唐媛)이 요(姚)를 일으 키는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가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40) 40) ꡔ三國遺事ꡕ 卷第二, 紀異 第二, 駕洛國記.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212 지역과 역사 39호 우선, [자료1]-①ㆍ②는 각각 ꡔ고려사ꡕ 세가 소재 충렬왕 즉위년 혼인 기사와 ꡔ고려사ꡕ 열전 소재 제국대장공주 혼인기사이고, [자료2]는 ꡔ삼국 유사ꡕ 가락국기 소재 수로왕신화 이다. 양자의 서사구조는 거의 상통하 는 바, 거개는 다음과 같다. 영험한 예언 신하를 통한 왕비 친영(親迎) 왕의 직접 친영 국민들의 하례(賀禮) 왕비의 납헌의례(納獻儀禮) 왕비 책봉과 식읍ㆍ전각 사여 왕비의 태자 생산과 국민들의 하례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 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 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 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 國也]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 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 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別浦津 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他侍從媵臣二員 名曰申 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慕良 或臧獲幷計二十餘口 所賚錦繡綾羅 衣裳疋段 金 銀珠玉 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 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遴 集而護之 於是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 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 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 莅家邦 未定匹偶 卿等須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你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螓首敢叨 龍 顔是近 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 淑質自臻 眇躬多幸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遂還來船 篙工楫師共有 十有五人 各賜糧粳米十碩 布三十疋 令歸本國 八月一日廻鑾 與后同輦 媵臣夫 妻 齊鑣並駕 其漢肆雜物 咸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宮 勅賜媵 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 以賓舘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 給豐羨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13 왕비국의 태자 인정과 하례 국민들의 송축 [자료1]ㆍ[자료2]는 도래집단과 토착집단 간의 통혼을 통한 새로운 민족 적ㆍ정치적ㆍ문화적 습합집단의 탄생에 대한 신묘한 예언으로부터 시작하 여 왕비 親迎禮와 토착집단의 賀禮, 왕비의 納獻禮와 왕비 冊封禮, 2세손 생산과 국민들의 제2차 하례로 이어지는 ~ 의 서사구조를 공유하고 있 다. 두 번에 걸쳐 삽입되어 있는 토착집단의 하례는 각각 왕이 직접 친영해 온 이주여성을 왕비로 받아들이고, 태자를 생산한 왕비를 비로소 습합집단 의 한 운영자로 온전히 인정하겠다는 공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다만, [자료2]- 는 특히 건국신화로서의 신성성이 상징적으로 초점 화 되어 있는 부분으로서, 바지를 벗어 걺으로써 여성의 원초적인 생산성을 풍요신앙체계 속에서 과시하는 동시에 직조와 농경을 담당하는 여신의 신직 을 상징하며, 빛나는 흰 천을 통해 천신족과 관련된 여신의 신성성 기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수로왕신화 의 혼례기사에서 확인되는 여성의 신성성 표징은 [자료1]-②의 제국대장공주에게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 지 않는다는 것이 차별적인 지점이 되는데, [자료1]-②- 에서도 확인되듯 이 여신적 신성성을 과시해야 할 납헌례가 이주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현실적인 맥락 속에서만 기술되고 있다. 대신, 주목되는 점은 [자료1]-①- 에 신화적 신성 모티프가 총괄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료1]-②의 ꡔ고려사ꡕ 열전 소재 제국대장공주 혼인기사에는 수로왕신화 에 소재한 [자료2]- 의 영험한 예언이 생략되 어 있는데, 이마저도 [자료1]-①- 의 ꡔ고려사ꡕ 세가 소재 충렬왕 즉위년 혼인기사에 신이한 조짐 예시로 명확히 적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흰 빛이 태양을 뚫는다는 것은 삼족오로 상징되는 열 개의 태양 중 아홉 개 를 활로 쏘아맞춤으로써 인류를 구원한 동이족의 신궁 영웅인 예(夷羿)ㆍ 後羿의 신화와 상통하는 것이다. 고려 건국신화 체계는 하늘에서 내려온 늙 은 天狐 활로 쏘아 맞춰서 서해룡을 구원한 뒤 용녀와 혼인했다는 작제건을
214 지역과 역사 39호 시조 중의 하나로 설정함으로써 동이족 예ㆍ후예의 射陽 신화를 해룡 신화 와 조합해 내고 있는데, 태양의 변형인 천호를 활로 쏘아 맞춰서 해룡족을 구원한 작제건은 예ㆍ후예의 고려형 변이태라고 할 수 있다. 몽골 역시 일 곱 개의 태양 중 여섯 개를 쏘아 맞춰서 인류를 구원했던 메르겡의 신화41) 를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와 원 나라는 동일한 射陽神話의 향유국이 라고 할 수 있는 바,42) [자료1]-①- 는 사양신화의 공유국인 고려와 원이 습합하여 보르지긴계 왕씨 고려 왕조를 건설하게 되었다는 神異事 상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자료1]은 수로왕족과 허황후족의 습합에 의 해 수로왕 왕권이 확립되었음을 神婚 모티프를 통해 형상화 한 [자료2]의 수로왕 왕권신화와 같은 왕권신화의 맥락 속에 있는 것으로 보르지긴계 왕 씨 고려 왕조를 연 충렬왕의 왕권신화 맥락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2]의 수로왕 왕권신화와 다른 점은 [자료2]- ㆍ 의 존재이다. [자료2]- ㆍ 는 [자료1]-①- 의 신이사적의 예징으로 시작된 [자료1] 의 보르지긴계 왕씨 고려 왕조가 2세 계승자 탄생을 계기로 반석 위에 올랐 음을 각각 원의 보리지긴씨족과 고려의 왕씨족에게 공인 받는 절차의례에 해당한다. [자료1]에는 없던 [자료2]- 의 존재는 보르지긴계 왕씨 고려 왕조가 국왕의 토착족에 대한 왕비 이주족 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 사 정거리 내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차이를 드러낸 사례로 보인다. 쌍화점 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자료1]-②- 다. [자료2]-② 는 왕비의 2세 계승자 생산을 계기로 왕비 이주족과 습합된 국왕 토착족 의 왕조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데 대하여 내국인들이 송축가를 올렸다는 것으로, 보르지긴계 왕씨 고려 왕조의 공고한 정착을 찬양한 고려 내국인 관점의 악장적 송도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해당 송도가는 보르 지긴씨족의 이주집단을 받아들인 고려 내국인이 토착집단의 입장에서 서정 화자의 시각이 구도화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바, 제국대장공주의 수행 41) 에르히 메르겡, 데. 체렌소드놈, 이안나 역, ꡔ대산세계문학총서56ꡕ, 문학과지 성사, 2007, 742쪽. 42) 구체적인 비교연구는 후속 논고에서 진행할 예정으로 준비 중에 있다.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15 원으로 입국하여 관직을 봉사 받고 내국인과 혼인하여 토착화 해나갔던 귀 화계 보르지긴계 집단과계가 충렬왕과 제국공주의 왕권신화적 맥락을 고려 토착인들의 관점에서 일상화 한 시상화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자료2]- 의 송도가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적 의 사실 층위대로 토착집단과 이주집단이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자료1]이 원의 보르지긴계 이주집단을 맞이한 고려 내국의 토착집단 의 관점에서 전자의 이주집단을 남성으로 후자의 토착집단을 여성으로 재편 한 형태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2]- 의 송도가에 가장 부합하는 노래가 바로 충렬왕대 고려 궁중속악 쌍화점 이 된다. Ⅱ. 몽고계 이주집단의 신성상관물과 쌍화점 삼장사 우물 술집의 역사적 실체 쌍화점 은 건국신화에 기반한 충렬왕대 보르지긴계 왕씨 왕권신화적 맥 락을 고려 토착인들의 입장에서 일상화 하여 재구성한 작품이다. 쌍화점 의 1~4연을 아우르는 여성화자는 제국대장공주를 매개로 고려에 입국한 귀화인들을 친영하게 된 고려 내국의 토착인들에 대응되고, 매 연마다 교체 되는 상대남성들은 해당 원나라 이주집단의 지배층을 따라 입국한 수행인들 에 대응된다. 토착집단을 여성으로, 도래집단을 남성으로 설정하는 것은 수 로왕신화 를 제외한 한국건국신화의 보편적인 서사문법이다. 여성은 陽을 수렴하여 새로운 생명을 생산해 내는 陰의 地母神에, 남성은 일반적으로 태 양의 발산하는 陽性의 天神에 각기 대응되는 것으로, 지모신인 여성이 토착 집단으로서 천신인 남성 이주집단을 친영해 들여 신혼하는 형태로 한국신화 의 보편체계가 짜여있다. 이러한 한국신화의 보편체계가 새로운 신화생성의 작동원리가 될 때, 고려 내국의 토착집단과 보르지긴계 이주집단은 각각 여 성과 남성으로 재위치화가 되어야 한다. 쌍화점 은 충렬왕의 실제 사적의 역사적 특수성에 기반 해 있는 ꡔ고려사ꡕ 소재 보르지긴계 왕씨 왕권신화를
216 지역과 역사 39호 한국신화의 보편체계에 대응되는 형태로 재편한 왕권신화적 송도가가 되는 것이다. 쌍화점 의 1~4연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화자는 제국대장공주를 수장으로 하여 고려 내부에 특수한 세력 지분을 획득하는데 성공한 도래집 단을 선망하고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자발적으로 소망하는 토착인 집단의 자아가 투영된 허구적 상관물이 된다고 할 수 있으며, 1~4연에서 차례로 회회아비(回回夫)ㆍ삼장사승(三藏寺僧)ㆍ우물용(井龍)ㆍ술집아비(酒家 夫)로 교체되어 출현하는 남성들은 토착인 집단이 상호관계 형성을 소망하 는 원나라 보르지긴계 도래집단을 사회적 직급과 역할에 따라 특수하게 분 화시켜놓은 허구적 상관물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후자의 남성 상관 물들은 도래집단과의 상호교제를 바라는 전자인 여성화자의 소망이 토착집 단 내부에 보편적ㆍ일상적인 것으로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성 립될 수 있다. 다시 전자의 여성화자는 후자의 도래집단이 보유하고 있었던 사회적 영향력과 직급적 특수성이 역사적 실재성을 인정되었다는 전제를 기 반으로 할 때 성립 가능하게 된다. 먼저, 전자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자료3] 원나라에서 온 토번(吐藩)의 승려가, 황제의 스승이 자신을 보내어 공주와 왕을 위하여 복을 빌게 했다고 떠벌리자 재상들이 깃발과 일산(日傘)을 들고 마 중 나갔으며 마을마다 모조리 향을 피웠다. 그 승려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 서, 자기나라의 법에는 술과 고기는 꺼리지 않고 여색만 멀리한다고 변명했 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창녀와 잠자리도 같이 했다. 또한 만다라도량(曼陁羅道場)을 열어 황금과 비단, 안장 딸린 말, 닭ㆍ양을 준비해 달라고 요구한 후 쌀가루로 석자 크기의 인형을 제작하여 제단 중앙에 두었다. 또 쌀가루로 동자상과 등탑(燈塔)을 각각 108개를 제작하여 그 주위에 진열해 놓고 나흘 동안 소라를 불고 북을 치게 하였다. 승려는 화관(花冠)을 쓰 고 손에는 끝에 검은 천을 맨 화살 하나를 쥐고 그 주위를 돌며 이리저리 날뛴 후 그것을 수레에 싣고는 깃발 든 사람 두 명, 갑옷 입은 사람 네 명, 활과 화살 을 잡은 사람 서른 명을 시켜 쌀가루 인형을 끌어다가 성문 밖에 내다 버리게 하였다.43)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17 [자료3]은 원나라로부터 온 한 토번 승려가 원 황제의 스승이 보낸 사자 인 것처럼 가장하자 모든 벼슬아치와 마을의 고려국인들이 깃발과 일산을 앞세우고 향을 살라 맞이하는 친영례를 행하고 온갖 제물과 공물을 올렸다 는 기록이다. 친영례의 격식과 예식의 화려함은 [자료1]ㆍ[자료2]에서 각 각 제국대장공주와 허황후의 도래집단을 맞이하는 고려 토착집단들의 그것 에 방불하다. 원 황제 사자라는 직첩이 사기가 아니라 사실이었다고 가정할 때, [자료3]의 토번 승려는 [자료3]의 보르지긴계 도래집단 지배층에 대하 여 복무하는 수행원이 되는 바, [자료1]에서처럼 보르지긴계 지배층이 직접 이주하지 않고 수행원만 도래해도 고려의 토착인들이 지배층에게 제공하는 것에 방불한 친영례를 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나라 보르지긴계 이 주집단과 우호적인 관계형성을 원하는 토착집단들의 자발적인 소망이 역사 적인 실존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특히, [자료3]에 등장하는 吐藩 승려는 西域계 色目人에 해당하는 바, 이 토번승려가 쌍화점 1연과 2연에 등장하 는 회회아비ㆍ삼장사승과는 각각 인종ㆍ직종 상으로 상통한다는 사실이 주 목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자료3]- 를 보면 친영례 연희에 동원된 고려 토착민 倡優 여성 과 원나라 보르지긴계 이주민 남성 사이의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졌던 사례 가 확인된다. 고려 토착민 여성과 원나라 색목인계 이주민 남성을 각각 지 모신과 천신으로 한 몽고계 고려왕권의 신화적 원리로 전이될 수 있는 역사 적 맥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사적 맥락이 악장적 송도가화 된 허구적 상관물이 바로 쌍화점 에 등장하는 고려 토착민 여성인물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43) ꡔ高麗史ꡕ 卷89, 列傳2, 后妃2, 齊國大長公主. 有吐蕃僧自元來, 自言帝師遣 我, 爲公主國王祈福. 宰樞備旗盖出迎, 閭巷皆焚香. 其僧食肉飮酒, 常言, 我法 不忌酒肉, 唯不邇女色. 無何潛宿倡家. 又請設曼陁羅道場, 令備金帛ㆍ鞍馬ㆍ 雞ㆍ羊, 以爲人長三尺置壇中. 又以作小兒及燈塔, 各百八, 列置其傍, 吹螺擊鼓 凡四日. 僧戴花冠, 手執一箭, 繫皂布其端, 周回踴躍. 車載人, 令旗者二, 甲者 四, 弓矢者三十, 曳弃城門外, 公主施錢甚厚, 其徒爭之訴曰, 僧非帝師所遣, 其 佛事亦僞也. 公主詰之皆伏, 遂黜金郊外
218 지역과 역사 39호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쌍화점 의 1~4연에 각각 등장하는 회회 아비ㆍ삼장사승ㆍ우물용ㆍ술집아비를 후자의 원나라 이주민 남성을 상징 하는 허구적 상관물로 규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쌍 화점 의 1~4연에서 고려 토착민 여성인물이 각각 회회아비ㆍ삼장사승ㆍ 우물용ㆍ술집아비란 남성인물들과의 만남을 이루고 있는 공간인 쌍화점ㆍ 삼장사ㆍ우물ㆍ술집과 원나라 이주민와의 관련성 입증 문제로도 치환될 수 있다. 즉, 쌍화점 1~4연에 등장하는 회회아비ㆍ삼장사승ㆍ우물용ㆍ술 집아비의 등장인물과 원나라 이주민과의 관련성이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해 당 관련성이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의 시적공간과 상응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쌍화점 1의 회회아비로부터 문제를 풀어가 보도록 하자. 회회아비는 西域의 아랍계 色目人44)으로 널리 알려져 왔지만, 실은 이러한 아랍계 색 목 무슬림들은 충렬왕조의 역사적 맥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오늘날의 아라비아에 해당하는 大食國에서 보내온 사신ㆍ상인 교역의 존재가 ꡔ고려 사ꡕ에 확인되는 것이 전부이고, 그 나마 고려 초기의 顯宗(992~1031)~定 宗(945~949)조에 집중45)되어 있다. 고려에 왕래했던 이 아랍계 색목인 사신ㆍ상인들은 충렬왕대에 이루어진 려원 습합정권이란 역사적 배경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랍 색목인계 사신ㆍ상인들이 일회적 인 교역을 넘어서는 이주 정착집단을 구성했는지의 여부가 분명히 역사 기 록에서 실증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회회아비를 아랍계 색목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回回라는 글자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 서역의 무슬림에는 아라비아의 아랍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투르크계도 존재한다. 투르크계 무슬림족으로 현재 중국 대륙 의 신장지구(新疆地區)에 자치구를 구성한 대표적인 소수민족이 위구르이 다. 위구르족의 전통적인 거주지인 신장지구는 중앙아시아의 아라비아 반도 44) 김명준, 앞의 논문, 2006. 45) ꡔ高麗史ꡕ 卷5, 世家5, 顯宗 15年 9月 ; 卷5, 世家5, 顯宗 16年 9月 ; 卷6, 世 家6, 靖宗 6年 11月.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19 와 중원을 매개하는 중국의 서북부 지역으로, 위구르족이 8세기 중반에 위 구르제국을 세워 번성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원한 이슬람교는 이 위구 르족을 통해 중원으로 유입46)되었다. 중국 한족이 전통적으로 이 위구르를 한자로 표현한 한자명이 바로 回回이며, 回鶻ㆍ回紇ㆍ回忽로도 음차 표현 했다. 회회가 비록 元末에는 문슬림 문화권의 전 종족을 일컫는 광의의 용 어로 일반화 되었지만, 宋末元初에는 위구르족을 지칭하는 협의의 용어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47) 아랍계 색목인과 달리 이러한 위구르 회회가 쌍화점 1연의 회회아비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원나라 지배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기득권이고, 두 번째는 충렬왕대 회회 이 주집단의 역사적 존재성이고, 세 번째는 충렬왕대 회회 이주집단의 정치적 기득권이다. 우선, 첫 번째 원나라 지배집단으로서의 정치적 기득권과 관련하여, 위구 르 회회는 4등급으로 이루어진 계급제도 속에서 몽고인에 이어 제2등급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과거시험을 봐도 3등 안에는 못 들고 중앙ㆍ지방 행정관ㆍ군관을 맡아도 副職 이상을 승진할 수 없는 漢人ㆍ南宋人과 달리 몽고인과 동등하게 正職을 맡을 수 있었다.48) 이렇게 위구르 회회가 원나 라의 준지배층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가 국가적 기득권을 대체했 던 전 시대 중원국가의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 외에도, 자체 문자가 없었던 원나라가 국가적 행정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문서 작업을 위구르 문자를 차 용하여 시행했던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구르 회회가 고려 정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점이 바로 충렬왕의 려몽습합정권 개창을 위한 기반을 닦은 元宗 11년인 1270년부터 이다. 46) 신태수, ꡔ위구르와 중국 이슬람ꡕ, 종려나무, 2009. 47) 이희수, ꡔ터키사ꡕ,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48) 이희수, 위의 책. 신태수, 앞의 책, 2009.
220 지역과 역사 39호 [자료4] ①애초 반적들이 반란을 모의할 때 장군 이백기(李白起)가 불응했는데, 이 때 그와 몽고에서 보낸 회회(回回) 사람을 거리에서 참수했으며, 장군 현문혁 (玄文奕)7)의 처와 직학(直學) 정문감(鄭文鑑) 부부도 모두 죽였다. 참지정사 (參知政事) 채정(蔡楨)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련(金鍊),8) 도병마녹사 (都兵馬錄事) 강지소(康之紹)는 난을 피해 교포(橋浦)로 갔는데 적의 기병이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강화를 지키는 병사 중 다수가 도망쳐 육지로 건너갔기 때문에 적들도 더 이상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함선을 모아 관청 과 개인 소유의 재물과 자식들을 모조리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무려 천여 척의 배가 구포(仇浦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구하리 일대)로부터 항파강(缸破江)9)에 이르기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49) ②정유(丁酉)에 원나라가 임유간(林維幹) 및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阿 室迷里)를 보내와 진주(眞珠)를 탐라(耽羅)에서 채취(採取)하였다.50) ③경자(庚子)에 여러 회회(回回)가 왕을 위해 신전(新殿)에서 향연을 열었 다.51) ④대장군 인후(印侯)와 장군 고천백(高天伯)이 타나[塔納]와 함께 원나라 로부터 돌아왔다. 타나[塔納]가 절령참(岊嶺站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당도하자 옹진현(甕津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등 여러 현에서 점심을 대접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타나에게, 우리 고을 백성들은 모조리 응 방(鷹坊)에 예속되었으니 나머지 가난한 백성들이 어떻게 비용을 감당하겠습니 49) ꡔ高麗史ꡕ 卷130, 列傳43, 叛逆4, 裵仲孫. 裴仲孫, 元宗朝, 積官至將軍. 十一 年, 復都開京, 榜示畫日, 趣令悉還, 三別抄有異心不從. 王遣將軍金之氐入江 華, 罷三別抄, 取其名籍還, 三別抄恐以名籍聞于蒙古, 益懷反心. 仲孫與夜別抄 指諭廬永禧等作亂, 使人呼於國中曰, 蒙古兵大至, 殺戮人民, 凡欲輔國者, 皆會 毬庭! 須臾, 國人大會. 或奔走四散, 爭舟渡江, 多溺死者. 三別抄禁人出入, 巡 江大呼曰, 凡兩班在舟不下者, 悉斬之! 聞者皆懼而下. 其或發船, 欲向開京者, 賊乘小艇, 追射之, 皆不敢動. 城中人驚駭, 散匿林藪, 童稚婦女, 哭聲滿路. 賊 發金剛庫兵器, 分與軍卒, 嬰城固守. 仲孫ㆍ永禧, 領三別抄會市廊, 逼承化侯溫 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劉存奕尙書左丞, 李信孫爲左右承宣 50) ꡔ高麗史ꡕ 卷28, 世家28, 忠烈王 丙子 2年 閏3月. 丁酉, 元遣林惟幹及回回阿 室迷里, 來採珠于耽羅 51) ꡔ高麗史ꡕ 卷29, 世家29, 忠烈王 己卯 5年. 庚子, 諸回回宴王于新殿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21 까? 차라리 주기(朱記)11)를 나라에 반납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 다. 라고 하소연했다. 이를 들은 타나가 개경(開京 : 지금의 개성직할시)에 도 착해 재상더러 이렇게 질책했다. 동방의 백성은 천자의 적자가 아니오? 백성들 의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구휼하지 않았으니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문책하면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이오? 이에 재상들이 왕에게 응방의 폐해를 없애 야한다고 건의했으나 노한 왕은 도리어 황제의 신임을 받는 회회(回回)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 각 도의 응방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면서 재상들로 하여금 다시 는 그에 관한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다. 조인규(趙仁規)가 극력 간쟁 하고 공주도 또한 반대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결국 중지되었다.52) ⑤무오일. 원나라에서 중국 남부 사람[蠻子26)] 카야[海牙]를 보내 황제의 칙명을 전달했는데, 중국의 군(郡)과 번국(藩國)에서 도망한 군사와 회회(回 回) 사람들이 제멋대로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53) ⑥신유일. 장군(將軍) 민보(閔甫)7)를 원나라에 보내 새매를 바치게 했다.54) (중략) 무진일, 회회인(回回人) 민보(閔甫)52)를 평양부윤(平壤府尹) 겸 존 무사(存撫使)로 임명했다.55) ⑦장순룡(張舜龍)은 본래 회회(回回)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셍게(三哥)였 다. 부친 장경(張卿)은 원나라의 세조(世祖)를 섬겨 비칙치(必闍赤)가 되었다. 장순룡은 제국공주(齊國公主)의 케링코우[怯怜口] 신분으로 고려에 왔다가 낭 장(郞將)으로 임명된 후 거듭 승진해 장군(將軍)이 되었으며, 그때 지금의 아 름으로 바꾸었다.56) 52) ꡔ高麗史ꡕ 卷29, 世家29, 忠烈王 6年, 庚辰年 三月 壬寅朔. 三月 壬寅朔 大將 軍印侯, 將軍高天伯與塔納, 還自元. 塔納至岊嶺站, 瓮津等數縣, 當供晝食, 有 人告塔納曰, 吾邑之民, 盡隸鷹坊, 孑遺貧民, 何以供億? 欲還朱記於國家, 竢死 而已. 塔納來責宰相曰, 東民, 獨非天子之赤子乎? 困苦至此, 而不之恤, 朝廷馳 一使以問, 何辭以對? 宰相白王, 請去鷹坊之弊, 王怒, 欲請回回之見信於帝者 以來, 分管諸道鷹坊, 抑令宰相, 不敢復言. 趙仁規力諫, 而公主亦言不可, 乃止 53) ꡔ高麗史ꡕ 卷29, 世家29, 忠烈王 6年 庚辰年. 戊申 親醮三界于本關. 庚戌 諸王 ㆍ宰樞, 享王于新殿, 召柳璥ㆍ皇甫琦ㆍ崔瑛ㆍ宋松禮ㆍ邊胤等致仕宰樞, 侍宴 54) ꡔ高麗史ꡕ 卷31, 世家31, 忠烈王 20年 甲午年. 九月 辛酉 遣將軍閔甫如元, 獻 鷄 55) ꡔ高麗史ꡕ 卷33, 世家33, 忠宣王 2年 戊辰. 戊辰 以閔甫爲平壤府尹兼存撫使, 甫回回人也 56) ꡔ高麗史ꡕ 卷123, 列傳36, 嬖幸1, 張舜龍. 張舜龍, 本回回人, 初名三哥. 父卿
222 지역과 역사 39호 ⑧무진(戊辰)에 (중략) 포(布)를 회회가(回回家)에게 주어 그 이(利)를 취 (取)하여 소를 잡아 육(肉)을 날마다 15근(斤)을 바치게 하였다.57) ⑨왕이 회회인(回回人) 김비(金鼻)의 집에 가서 딸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 자 그 아들에게 안장 딸린 말을 하사하고는 머리를 땋고 시종하라는 분부를 내 렸다. 뒤에 또 그 딸을 데려다가 남자 옷을 입히고 자기를 따라 다니게 했다.58) [자료4]-①의 ꡔ고려사ꡕ 기술 내용을 보면, 회회가 고려 역사에 최초로 등장한 1270년은 충렬왕의 부친 원종이 親蒙 외교를 바탕으로 임씨정권과 대립함으로써 려몽습합정권 성립의 기반을 닦은 시기이다. 회회는 일종의 려몽습합정권 성립ㆍ유지를 위한 매개자로서 고려와 원나라 양쪽의 필요에 의해 고려사에 등장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료4]-①에서 확인되는 회회 의 출현이 원나라에서 고려로 파견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면, [자료4]-④에 서는 고려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자료4]-①ㆍ④의 회회 출현이 정치적인 배경하에서 이루어졌다면, [자료4]-②의 그것은 원나라가 고려의 광물 채굴권을 독점하는 형태로 경제적 침탈구조를 위구르 회회를 실무 관 리자로 하여 운영해 나갔다는 산업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위구르 회회가 충렬왕대부터 구축된 려몽습합정권의 실질적 운영 을 위한 중간 매개자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기실 [자료4]-① ㆍ②ㆍ④에서 확인되는 위구르 회회의 기득권은 원나라 지배집단의 일부 事元世祖, 爲必闍赤. 舜龍以齊國公主怯怜口來, 授郞將, 累遷將軍, 改今姓名. 忠烈獵于馬堤山, 時設道場于壽康宮, 大集緇徒, 舜龍曰, 王奉佛飯僧, 又射獵如 此, 有何功德? 元授宣武將軍鎭邊管軍摠管征東行中書省都鎭撫, 王遣舜龍, 如 元獻女, 求買公主眞珠衣, 帝賜舜龍雙珠金牌. 進副知密直. 王與公主曲宴, 內人 迭起獻壽, 贊成事趙仁規, 佯醉不飮, 舜龍曰, 何不飮, 無乃詐耶? 仁規怒曰, 汝輩詐, 我則否. 王與公主入內, 二人詰不止, 舜龍弟三哥欲右其兄, 仁規歐且批 其頰, 三哥攘臂而進, 左右解之., 57) ꡔ高麗史ꡕ 卷36, 世家36, 忠惠王 甲申 後五年 正月. 張舜龍. 戊辰, 給布回回 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 58) ꡔ高麗史ꡕ 卷136, 列傳49, 禑王 13年 丁卯年. 禑如金鼻回回家, 索其女不得, 賜回回子鞍馬, 仍令編髮侍從. 後又取其女, 著男服隨之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23 로서만 한정될 뿐이지 본격적인 고려 이주집단으로서의 그것을 형성하고 있 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료4]-①ㆍ②ㆍ④에서 확인되는 관직은 오직 려 몽 매개외교와 관련된 것에 한정 된 것으로 고려인이 전통적으로 역임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당 위구르 회회가 원나라 정부의 명에 따라 귀국 을 명받은 이후에는 기왕에 제수된 관직에 따른 정치적 기득권이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고려 초기에 집중되어 있는 아라비아 회회가 일회적인 사신ㆍ상인 교역 주체로서만 고려에 출입했을 뿐 고려 이주집단으로서 정착적인 기득권을 획득하지 못했던 것과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구르 회회가 고려로의 일회성 내방이 아니라 영구적인 이주정 착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확인되는 것은 [자료4]-③의 1279년 부터이다. 충렬왕을 위해 새 궁궐 건축 축하연을 개최한 주체가 위구르 회 회였다는 것은 1279년에 가서 [자료4]-①ㆍ②의 일회적인 정치적ㆍ산업 적 활동이 정착적인 것으로 변동되어 경제력을 확보한 일군의 위구르 회회 이주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위구르 회회 이주집 단이 충렬왕을 위한 향연을 주최할 만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기반은 [자료4]-①ㆍ④의 려몽외교정치 매개교섭권, [자료4]-②의 대외 경제교 역권, [자료4]-⑤ㆍ⑧의 내수 산업권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충 렬왕대에 본격화된 정치외교 매개교섭권ㆍ대내외 산업경제권을 기반으로 하여 고려로 이주하기 시작했던 위구르 회회는 [자료4]-⑨의 回回人 金鼻 라는 이름에서 확인되듯 고려 말이면 고려식의 姓氏와 이름으로 개명한 위 구르 귀화 이주집단이 이미 정착적인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쌍화점 1연의 회회아비를 투르크계 위구르로 규정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인 충렬왕대 회회 이주집단의 역사적 존재성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충렬왕대에 이주집단으로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실이 실증되 는 위구르 회회가 쌍화점 1연의 회회아비로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위해서 는 쌍화점 의 여성화자인 고려여인으로 하여금 회회아비와의 결연을 신성
224 지역과 역사 39호 혼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요건, 즉 충렬왕대 회회 이주집단의 정치적 기득권이 세 번째 조건으로 만족되어야 한다. [자료4]-①ㆍ②에서 충렬왕 대 려몽 매개외교 교섭권을 통해 일시적인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위구르 회회가 충렬왕 당대에 이미 귀화를 통해 정착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외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으로서 토착 고려인 지배집단과 동등한 전통적인 관 직체제 내부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자료4]-⑥ㆍ⑦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료4]-⑥의 민보는 원래 고려가 원나라에 새매를 상납하는 려몽 鷹 坊 외교의 담당자인 鷹使로서 려몽 정부의 합의에 따라 일시적으로 고려에 파견된 위구르 회회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미 충렬왕 25년(1299)에는 응 사에 겸하여 고려 정부의 상부 內職인 將軍을 겸직하고 있었다. 충렬왕 27 년(1301년)ㆍ충렬왕 29년(1303년) 1294년(충렬왕 20)에는 응사에 겸한 내직 관직이 각각 大將軍ㆍ 大護軍ㆍ 上護軍으로 승진했고, 충선왕 2년 (1310년)에는 平壤府尹兼存撫使를 역임했다. 한편, [자료4]-⑦의 장순룡 은 원종 25년(1274년)에 제국공주와 충렬왕의 혼례를 위한 사속보좌관인 겁령구로 파견되었다가 충렬왕대에 고려 내직인 郎將에서 장군을 거쳐 僉議 參理로 승진하는 과정에서 귀화하여 덕수장씨 가문을 개창한 것으로 보인 다. 위구르 회회는 충렬왕대에 귀화를 통한 토착화까지 진행되어 되어 고려 내부의 지배집단으로서 기득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쌍화점 1연의 회회아비는 고려 지배집단 내부에 새롭게 편입된 위구르 계 원나라 이주집단과 결연하고자 한 토착집단의 신성혼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아직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았다. 바로 결연공간과 관중이 왜 하 필 쌍화점 과 삿기광대냐는 것이다. 기존의 주류 학설대로 쌍화점을 몽고 만두집으로 해석59)한다면 회회아비의 출신국적과의 상관성은 입증되지만 매개인물이 삿기광대로 설정되어 있는 이유는 해명되지 않는다. 삿기광대가 만두집에 출몰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료4]-③를 보면 위구르 출신의 회회아비와 고려여인의 결연이 쌍화점과 삿기광대를 공간ㆍ 59) 양주동, 앞의 책, 1987. 김형규, ꡔ고가주석ꡕ, 일조각, 1967. 박병채, 앞의 책, 1974.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25 관중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설정되었던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 를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위구르 회회가 충렬왕을 위해 연회를 주최하였다 고 되어 있으니 쌍화점은 연회 관련 용품을 파는 상점이고, 삿기광대는 해 당 演戱用品店에 常居하는 演戱 배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확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어 야 한다. 첫 번째는 해당 연희 관련 용품 판매점의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는 쌍화 와 연희과의 상관성이고, 두 번째는 연희와 상관관계에 있는 쌍화 란 명칭과 위구르 회회와의 관련성이며, 세 번째는 위구르와 상관관계에 있는 쌍화 명칭과 원나라와 연희와의 관련성이다. 그런데 ꡔ元史ꡕ의 樂志 기록들을 살펴보면 한글의 상화 로 읽히는 연희 담당 부서명에 관한 용례들이 확인된다. 바로 祥和署 와 常和署 에 관한 기 록들이다. 해당 내용을 제시해본다. [자료5] ①교방사(敎坊司)는 관직이 종(從) 5품이며, 응인(應人)ㆍ악인(樂人)을 관 장하고 흥화서(興和署) 등의 부서 오백호를 관리한다. 중통(中統) 2년에 처 음 설치되어 지원(至元) 12년에 정(正) 5품으로 올랐다. 17년에 교방사를 다시 검토하여 선휘원(宣徽院) 예속시켰는데 관직은 정4품이다. 25년에 예부(禮部) 에 예속시키고 대덕(大德) 8년에 정삼품으로 올렸다. 연우(延祐) 7년에 정사품 으로 돌렸다. 다루가치(達魯花赤) 1명이 정사품, 대사(大使) 3명이 정사품, 부 사(副使) 4명이 정오품, 지사(知事) 1명이 종팔품이었다. 영리(令吏)가 4명, 역리(譯吏)ㆍ지인(知印)ㆍ주차(奏差)가 각 2명, 통사(通事)가 1명이었다. 그 소속은 세 군데였다. 흥화서(興和署)는 관직이 종육품이었는데, 서령(署令) 이 두 명, 관구(管勾)가 두 명이었다. 상화서(祥和署)는 관직이 종육품으로, 서 령이 두 명, 서승(署丞)이 두 명, 관구가 두 명이었다. 광악고(廣樂庫)는 관직 이 종구품으로, 대사가 한 명, 부사가 한 명이었다.60) 60) ꡔ元史ꡕ 卷85, 志 第35, 百官 第一. 敎坊司, 秩從五品, 掌承應樂人及管領興 和等署五百戶, 中統二年始置, 至元十二年, 升正五品, 十七年, 改提點敎坊司, 隸宣徽院, 秩正四品, 二十五年, 隸禮部, 大德八年, 升正三品, 延祐七年, 復正 四品, 達魯花赤一員, 正四品, 大使三員, 正四品, 副使四員, 正五品, 知事一員, 從八品, 令史四人, 譯史知印奏差各二人, 通事一人, 其屬三, 興和署, 秩從六品,
226 지역과 역사 39호 ② 상화서(常和署)는 처음 명칭이 관구사(管勾司)로, 관직이 정구품이었 고, 회회(回回) 음악인을 관리감독했다. 황경(皇慶) 원년에 처음 설치되었 고, 연우(延祐) 3년에 종육품으로 올랐다. 서령이 한 명, 서승이 두 명, 관구가 두 명, 교사(敎師)가 두 명, 제공(提控)이 두 명이었다.61) [자료5]-①에 등장하는 祥和署 ([자료5]-①- )는 원나라 世祖 2년인 1261년(至元 2년)에 설립된 음악 총괄 기관인 敎坊司의 3대 부속부서 중의 하나이다. 이 祥和署 는 민간의 樂ㆍ舞ㆍ技ㆍ劇을 총괄한 종합예능인 雜把 戱를 담당한 부서62)로서, 宋代 이래로 성행했던 儒敎禮樂 기반의 雅樂에 대비된 散樂을 관장한 부속기관이 된다. 상화 라는 용어는 전대 왕조인 송 나라 지배층의 연희와 대비되어 원나라 개국 초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상대 적으로 몽고식의 藝能戱에 붙여진 명칭이었다는 것으로, 일단 상화 와 원나 라 문예와의 상관성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민간종합연희를 총괄하는 부서가 원나라 행정부서 내부에 설 치된 中統 2년([자료5]-①- )의 1261년이 하필 충렬왕을 원나라에 파견 하여 麗蒙國婚을 추진했던 고려 元宗 2년이다. 원종조부터 기반이 닦여져 서 충렬왕대에 확립된 려몽습합정권의 출범시기와 원나라 민간종합연희 관 장기관의 설치시기가 정확히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료5]-②- 를 보면 [자료5]-①- 의 祥和署 와 비슷한 한역 음을 가진 常和署 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데, 바로 려몽습합정권의 매개자 구실을 했던 위구르 회회음악인(回回樂人)을 관리하는 부서라고 명시되어 있다. 祥和署 가 처음 설치되었다고 하는 [자료5]-②- 의 皇慶 원년은 충 렬왕의 아들인 충선왕 4년인 1312년이다. 원래 중국의 산악이 북방 서역에 서 전례된 연희를 수용하여 형성된 종합예능63)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署令二員, 署丞二員, 管勾二員, 祥和署, 秩從六品, 署令二員, 署丞二員, 管勾 二員, 廣樂庫, 秩從九品, 大使一員, 副使一員 61) ꡔ元史ꡕ 卷85, 志 第35, 百官 第一. 常和署, 初名管勾司, 秩正九品, 管領回 回樂人, 皇慶元年初置, 延祐三年, 升從六品, 署令一員, 署丞二員, 管勾二員, 敎師二人, 提控二人 62) 안상복, ꡔ궁정잡기의 전변ꡕ,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27 려몽습합정권 기반 조성기에 처음 설치된 祥和署 의 祥和 는 서역 유례의 연희 콘텐츠를 관장하는 부서에 부여된 한자어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이 러한 서역 유례 예능 콘텐츠를 직접 창작ㆍ연행하는 회회음악인들을 관리 하는 부서에는 祥和 란 동음이의어가 차별적으로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확 인할 수 있다. 이로부터 추정 가능한 사실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원래 연희를 지칭 하는 위구르 회회말로 상화 가 존재했으며, 이를 원나라에서는 한자로 음차 하여 祥和 혹은 常和 로 표기하는 방식이 두루 존재했다. 둘째, 고려 원종 대에서부터 충렬왕을 거쳐 충선왕대에 이르는 시기에 回回演戱에서 유래한 원나라 散樂雜戱 담당의 회회관리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별도로 관 리하는 부서가 필요해 지게 되었는데, 이 회회 출신 음악관원 관리부서와 回回樂 유래 산악잡희 관리부서의 기원은 밝히되 두 부서의 차별성은 부각 시키기 위해 상화 의 두 한역음차 표현인 祥和 와 常和 를 차별적으로 표기 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쌍화점 의 1연에서 왜 하필 회회아비ㆍ쌍화점ㆍ삿기광대 가 원나라 이주집단의 신성상관물로 설정되었으며, 작품 전체의 시상을 주 도하는 제목이 1연의 신성상관물인 쌍화점으로 선택되어있는지가 해명될 수 있다. 고려의 토착인들이 일상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원나라 이주집단 은 제국공주와 같은 왕실인물이 아니라 해당 인물의 행정적ㆍ종교적ㆍ문 예적 보조인물일 수밖에 없는데 당시 충렬왕대에 행당 역할을 맡은 대표적 인 역사적 인물들은 위구르 회회였으며, [자료3]에서 보듯 도래인물과 토 착인들이 조우할 수 있는 일상적 공간은 연희의 장이었는데 [자료4]-③에 서 확인되듯 위구르 회회는 충렬왕을 위한 연회를 직접 주최하였으니 해당 연희와 관련한 용품점에서 이루어지는 조우야말로 위구르 회회와 고려 토 착인 사이의 일상화 된 신성혼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는 것이다. 63) 김학주ㆍ정범진, ꡔ중국문학사ꡕ, 동화출판공사, 1983. 전경욱 외, ꡔ한국전통연 희사전ꡕ, 민속원, 2014.
228 지역과 역사 39호 다음은 쌍화점 2연의 三藏寺主이다. 삼장사주라고 하면 三藏寺란 절의 스님이 될 것인데, 언뜻 보면 허구적 공간으로 보이기 쉬운 이 삼장사는 사 실 고려조에 실존한 사찰명이다. 충렬왕대 려몽습합정권과의 관련성을 키워 드로 하여 충렬왕대 사료를 검토하다보면 충렬왕ㆍ원나라 양자 모두와 관 계되어 있는 삼장사란 寺名이 ꡔ동문선(東文選)ꡕ에서 확인된다. 제시해 보 면 다음과 같다. [자료6] 국사(國師)의 휘(諱)는 만항(萬恒)이요, 속성(俗姓)은 박씨(朴氏)다. 고 (考)는 진사로서 휘는 경승(景升)이니 웅진군(熊津郡) 사람이다. 스님은 유학 하는 집안의 자제로 중이 되었다. 어려서는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스스로 학 문하는데 힘썼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구산선(九山選) 선종 (禪宗)의 구산(九山)에서 시행하는 국가고시인 중의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뽑히었다. (중략) 이름이 드러나니 충렬왕이 삼장사(三藏寺)에 머무를 것 을 명하였다. (중략) 중국 원(元) 나라의 덕이몽산(德異蒙山)이 그의 글 과 게(偈)를 보고 칭찬을 마지아니하여 열 몇 편을 화답하였다. 이어 편지로 고담(古潭)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64) [자료6]- ㆍ 를 보면 충렬왕이 曹溪山 修禪社의 제10대 國師가 되기 전 단계의 승려 萬恒(고종 36~충숙왕 5)을 주지승으로 임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慧鑑國師 만항은 僧科에 장원급제 한 이후 충렬왕 의 비호 아래 삼장사의 禪主되었는데, 삼장사주로 재임한 기간은 南原 萬行 山 암자를 普賢寺로 개축하기 시작한 1306년(충렬왕 32)년 이전의 어느 시 점까지로 추정된다. 주목할 것은 이 만항이 원나라의 대표적인 禪宗 고승 蒙山 德異(1231~?) 와 깊은 교류를 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덕이화상은 중국 江西省 高安 출신으로 고려 看話禪 禪思想 정립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 히, 조계산 수선사계는 13기 말에 몽산 덕이의 ꡔ六祖壇經ꡕㆍꡔ蒙山和尙法 64) 李齊賢, ꡔ東文選ꡕ 第111卷, 碑銘, 海東曹溪山修禪社第十世別傳宗主重續祖 燈妙明尊者贈諡慧鑑國師碑銘 幷序.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29 語ꡕㆍꡔ直註道德經ꡕㆍꡔ四設ꡕㆍꡔ佛祖三經ꡕ 등의 禪書를 수용하여 유통시 킴으로써 고려 간화선 확립을 주도했다. 몽산화상의 이러한 서적들은 우리 나라에 가장 많이 유통된 중국 고승의 저서에 해당할 뿐 아니라, ꡔ直註道德 經ꡕㆍꡔ四設ꡕ의 판본과 ꡔ佛祖三經ꡕ의 초판본은 우리나라에만 남아있을 정 도로 고려 선종에 미친 영향이 막대했다.65) 이처럼 고려 간화선이 원나라 몽산 덕이와의 교류를 통해 정립된 13세기 말이 바로 공교롭게도 수선사계파에 속하는 만항이 충렬왕의 임명을 받아 삼장사 선주로 재임하던 시기다. 게다가 [자료6]- 에서 확인되듯 몽산 덕 이와 만항과의 관계는 만항과의 서신 교류 도중 덕이화상이 만항의 禪書와 偈頌에 찬탄하다 못해 古潭이라는 아호를 지어줄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다. 충렬왕이 원나라 덕이화상 禪法계 고려 간화선 정립기에 해당 선법 수용의 주체였던 만항을 삼장사 주지로 특별히 임명했다면, 삼장사는 원나라 불교 수용의 메카인 남원의 수선사에 대한 일종의 개경 枝寺로서 설립된 사찰이 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즉, 충렬왕대 려몽습합정권의 종교적 구축을 위해 해당 중앙행정기관이 위치한 개경에 특별히 설립한 원나라 불교의 포 교 전진기지였로 존재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쌍화점 2연의 삼장사주는 충렬왕 당대에 원나라 불교를 가지고 도래했거나 혹은 해당 이주집단과을 종교적으로 매개함으로써 기득 권을 행사한 종교인들을 상징하는 허구적 신성상관물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 해진다. 고려인들이 삼장사주를 충렬왕대 종교적인 이주집단의 대표상징으 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2연의 삼장사주가 원나라 지배권력의 종교적 매개자로서 1연의 예능적 매개자와 상징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65) 몽산덕이와 고려후기 간화선사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의들을 두루 참 조해 주기 바란다. 박재현,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 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5. 허흥식, ꡔ고려에 남긴 휴휴암의 불빛 (몽 산덕이)ꡕ, 창비, 2008. 인경, ꡔ몽산덕이와 고려후기 간화선사상 연구ꡕ, 명상상 담연구원, 2009. 김형록, 고려의 간화선과 현대적 과제 ꡔ불교학보ꡕ 59, 2011. 이점숙, 고려시대 간화선의 수용과 그 특징에 관한 고찰 ꡔ한국선학ꡕ 37, 2014.
230 지역과 역사 39호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쌍화점 3연의 우물용(井龍) 차례다. 기실, 그동안 학계에서 우물 용에 대해서는 각각 市井의 범속인66)과 민속의 우물용신(井龍神)67)으로 보는 견해가 병립해 왔는데, 그 어느 쪽도 우물용의 정체를 적확히 해명해 주지 못한다. 전자의 시정범속인은 여성화자들이 결연을 위해 찾을 만한 존 재가 되지 못하며, 후자의 보편적인 우물 용신론은 충렬왕조의 려몽습합 풍 조와 관련된 존재를 특정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의 우물 용신론에서 거론하고 있는 바, 고려 태조 왕건과 제2왕후인 장화왕후의 우 물물을 매개로 한 결연 역시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에 고려조의 특수성마저도 인정받기 어렵다. 게다가 나주 오 씨에 게다가 양자 모두 1ㆍ2연의 회회아비ㆍ삼장사주로 이어지고 있는 충 렬왕대 元媒介者와 상관성이 없다. 쌍화점 3연의 우물용신이 1ㆍ2연의 회회아비ㆍ삼장사주와 일관된 맥 락 속에 위치하기 위해서는 우물용신이 그저 범박한 민속신앙의 대상이 아 니라 충렬왕대 몽고이주집단의 특수성을 대표하는 상징중의 하나로 인식되 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역사적 단서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1ㆍ2연 의 상화서ㆍ삼장사와 마찬가지로 우물용의 경우에도 해당의 역사적 실체가 존재한다. 바로 蒙古井이다. 몽고정은 오늘날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 구 玆山洞에 있는 우물의 이름이다. 원나라는 日本遠征을 위해 원종 15년 (1274년)과 충렬왕 7년(1281년)의 두 차례에 걸쳐 麗蒙聯合軍의 屯鎭을 마산합포구 일대에 주둔시킨 바 있는데, 해당 우물은 여몽제휴군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68)이다. 원래 이름은 高麗井이었으나 1932년 일제 강점기에 일본계 古蹟保存會 가 蒙古井이란 표석을 세우면서 이름이 바뀌었다69)고 하는데, 여기서 고려 66) 67) 68) 69) 송정헌, 쌍화점의 우뭇龍 에 대한 연구 ꡔ충북대 논문집ꡕ 20, 1982. 김대행, 쌍화점과 반전의 의미 ꡔ고려시가의 정서ꡕ, 개문사, 1985. 몽고정(蒙古井) ꡔ한국지명유래집ꡕ 경상편 지명, 국토지리정보원, 2011. 이학렬, ꡔ개항 90년의 우리 고장 마산ꡕ, 마산 향토사 연구회, 1988.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31 정이란 원명이든 몽고정이란 개명이든 해당 우물에 대한 지역민들의 역사적 인식은 몽고계 고려라는 충렬왕대 려몽습합정권의 범주 속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다. 해당 우물의 원래 이름이 고려정이었다고 하더라도 이때의 고려 란 명칭은 고려 태조가 건국한 왕씨고려왕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고종 때부터 기반을 닦기 시작하여 원종 대를 거쳐 충렬왕 대에 확립 된 직후 첫 번째 대외군사사업인 일본원정을 수행한 몽고습합계 고려왕권 을 의미하는 고려 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마산합포구 일대 지역민들이 해 당 우물의 변경 전의 이름을 고려정이라고 불러도 해당 명칭 속에는 몽고 계 고려 우물이라는 인식이 내재해 있었다는 것으로, 당대의 고려정이란 이름은 몽고정의 이형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몽고정으로의 개칭도 이러한 해당 지역민들의 인식에 근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원나라 주둔지에 여몽제휴군의 軍食水를 공급하기 위해 새로 설치되거나 혹은 기존에 있던 것을 군용으로 轉用하게 된 우물을 여몽습합정권의 대표 상징 중의 하나로 생각하던 인식이 당대에 존재했다는 것인데, 1ㆍ2연의 상화점ㆍ삼장사가 각각 문예적ㆍ종교적 상징이라면 3연의 우물은 군사적 상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몽고정으로 인식되던 고려정은 당대의 몽고군의 대표적인 주둔지마다 신규설치 혹은 전용운영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마 산과 마찬가지로 몽고군 주지가 되었던 안동이나 몽고군 전진기지가 위치해 있었던 제주도는 물론 元軍의 大本堂이 있었던 개성에도 존재했었을 가능 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우물용은 민속의 범박한 水神이 아니라 몽고이주 집단의 군사계 신성상징으로서 쌍화점 3연에서 선택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연의 등장인물인 술집아비의 정체는 논의 자체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2연의 삼장사주의 경우와 비근하다. 다만, 공간배경 인 술집과 관련하여 시정의 범속공간론70)과 祭式의 신성공간론71)이 병립 70) 김명준, 앞의 논문, 2006. 71) 강명혜, 앞의 논문, 1996.
232 지역과 역사 39호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3연의 우물의 경우와 방사하다. 전자의 경우 술집아 비를 시정범속인으로 처리하게 되면 3연의 우물용처럼 여성화자의 신성결 연대상 혹은 훼절뜬소문대상이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있고, 후자처럼 祭式神 聖人으로 파악한 경우는 술집아비가 충렬왕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특정해 내지 못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게 된다. 쌍화점 4연에서 하필이면 왜 술집아비가 출연해야 했던 것인가의 의문 은 고려조의 특정 酒種 중에 충렬왕대에 들어온 원나라 전래품이 있었던 사 실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소주다. 충렬왕대 이전까지 우 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던 증류주는 일본원정을 위해 여몽제휴군에 합류했 던 몽고군에 의하여 충렬왕 3년(1277년)에 고려로 전래72)되었다. 소주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반도에서 발원한 증류주를 몽고군이 1240년에 페르시아 를 정복하면서 중국대륙에 들여온 것73)으로, 소주의 원나라 이름인 아르히 (arkhi)는 페르시아의 증류주 명칭인 아락(arag)를 몽고식으로 음역한 것 이며, 몽고주둔군에 의해 페르시아의 소주를 받아들인 고려에서는 페르시아 의 原名이 아니라 몽고식 발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한자음차로 아라키(阿刺 吉)라고 표기하였다. 소주를 충렬왕대 몽고이주집단이 고려로 들여온 전래품의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가 페르시아의 소주 원명이 아 닌 몽고식 발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겠는데, 이 러한 소주는 쌍화점 3연의 몽고정과 마찬가지로 충렬왕대 려몽습합정권 의 군사적 상징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몽고군 주둔지가 있었던 개 성ㆍ마산ㆍ안동ㆍ제주도 등이 대표적인 소주의 대표적인 명산지74)라는 사실에서도 쌍화점 3ㆍ4연에서 각기 등장하는 우물ㆍ술이 지닌 몽고습 합 상징의 군사적 계열성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이 점에서 술집아비는 민 속신앙의 범박한 祭式主夫로서가 아니라 쌍화점 3연의 우물용과 마찬가 72) 최한석, 생명의 물, 증류주 ꡔ인테러뱅ꡕ 168, 농촌진흥청, 2016. 73) 최한석, 위의 글. 74) 조정형, ꡔ다시 찾아야할 우리술ꡕ, 서해문집, 1989.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 연구 233 지로 몽고이주집단의 군사계 신성상관물로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쌍화점 4연에서 선택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맺음말 본고는 쌍화점 에 나타난 건국신화적 神婚 기원을 충렬왕대 麗蒙 습합 정권 송도가 형성의 역사적 맥락과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의 역사적 실체를 통해 규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부정적 음란욕망론이나 뜬소문 경계 론, 풍요민속론 등 쌍화점 에 대한 기존의 주제론들이 해명해 내지 못했던 지점, 즉 남녀음사를 핵심 모티프로 하는 쌍화점 이 어떻게 궁중의 왕실송 도가가 될 수 있었으며, 해당 역사적 배경이 왜 하필 충렬왕대였던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을 충렬왕대 려몽습합정권의 역사적 신성맥락과 몽고이주집단 의 역사적 산물로서의 쌍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이 지닌 신성상징을 통 해 해결해 내고자 한 연구가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연구는 쌍화점 의 직접적인 기원이 민요 의 층위에 있던 男女淫事의 민속제의요가 아니라 해당 민속제의요가 건국 주체 집단의 신성왕권을 합리화하기 위한 건국신화적 神婚歌로 전이된 층위 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건국신화적 신혼가 기원이 元 나라 이주세력을 수 용함으로써 고려 토착민과 원 이주민 통합왕조의 개창자가 된 충렬왕의 왕 권신화적 왕실의례요로 특수화 되어 실현된 것이 바로 쌍화점 이라는 이 론적 전제를 구축했다. 즉, 민요의 보편적인 무속풍요제의요로 존재하던 男 女淫事謠로서의 쌍화점 이 궁중 예악의 국왕 송축가ㆍ찬양가의 층위로 전 이되기 위해서는 민속적 男女神婚이 왕권과 관련된 남녀신혼의 층위로 전 환될 수 있는 보편적 차원과 특수적 차원의 인식적 전제기반이 요구된다는 입론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본 연구는 충렬왕이 고려무신집단에 예속되어 있었 던 전대 고려 왕실을 동아시아의 정치ㆍ문화적 선진세력인 원나라 지배세
234 지역과 역사 39호 력을 의도적으로 도래시킨 후 고려의 토착왕실과 결합시킴으로써 실질적 인 高蒙 통합계 고려왕권을 연 中興始祖가 된다는 충렬왕조의 역사적 특 수성에서 민속적 남녀신혼가가 궁중 예악적 국왕 송축가ㆍ찬양가의 층위 로 전이되었다는 건국신화의 송도가적 맥락을 읽어내었다. 다음으로 회회 아비ㆍ삼장사주ㆍ우물용ㆍ술집아비가 원나라에서 도래하여 고려 토착집 단과 결합한 몽고계 이주집단의 허구적 신성상관물로서 의도적으로 선택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상화점ㆍ삼장사ㆍ우물ㆍ술집이 충렬왕대에 몽고 로부터 전래된 문예적ㆍ종교적ㆍ군사적 산물과 관련되어 있다는 역사적 실체성을 입증하였다. 참고문헌 ꡔ高麗史ꡕ, ꡔ高麗史節要ꡕ, ꡔ及庵先生詩集ꡕ, ꡔ東文選ꡕ, ꡔ三國遺事ꡕ 강명혜, 豊饒의 노래로서의 <雙花店> ꡔ고전문학연구ꡕ 11, 1996. 국토지리정보원, ꡔ한국지명유래집ꡕ 경상편 지명, 국토지리정보원, 2011. 권도경,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텍스트의 적층구조와 진지왕ㆍ도화녀ㆍ 비형랑 관련설화의 결합원리 ꡔ한민족어문학ꡕ 64, 2014. 권도경,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에 나타난 도산도목(桃山桃木)ㆍ목랑두 들(木郞豆豆里) 신화 수용배경과 진지왕 왕권신화 구조 ꡔ구비문학연구ꡕ 38, 2014. 김대행, 쌍화점과 반전의 의미 ꡔ고려시가의 정서ꡕ, 개문사, 1985. 김명준, ꡔ쌍화점ꡕ형성에 관여한 외래적 요소 ꡔ동서비교문학저널ꡕ 14, 2006. 김성철, ꡔ어럴저뜨, 몽골 인 몽골리아ꡕ, 두르가, 2008. 김유경, 雙花店 연구 ꡔ열상고전연구ꡕ 10, 1997. 김학주ㆍ정범진, ꡔ중국문학사ꡕ, 동화출판공사, 1983. 김형규, ꡔ고가주석ꡕ, 일조각, 1967. 김형록, 고려의 간화선과 현대적 과제 ꡔ불교학보ꡕ 59, 2011. 박노준, 쌍화점고 ꡔ한국학논집ꡕ 11, 1987. 박병채, ꡔ고려가요 어석연구ꡕ, 선명문화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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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점 에나타난건국신화적神婚기원연구 237 Abstract The Origin of the Sacred Wedding Song in <Ssanghwajeom> through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Formation of the Congratulatory Song for the the Korea-Mongol s Fusion Government in the Regin of the King Chungyeol and the Historical Substance of Ssanghwajeom Samjangsa Well Pub Kwon, Do-Kyung This paper is the study to intend to investigate the origin of the sacred wedding in <Ssanghwajeom> through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formation of the congratulatory song for the the Korea-Mongol s fusion government in the regin of the king Chungyeol and the historical substance of Ssanghwajeomㆍ Samjangsaㆍwellㆍpub. To solve this problem, this paper built the theoretical premise that the direct origin of <Ssanghwajeom> is not the folk festival song by the indecent language between man and woman but is the sacred wedding song of the country s birth myth that the nation founding group has rationalized own royal authority by and it is the result that the origin of the country s birth myth of <Ssanghwajeom> was specified as the royal authoritive mythical song of the king Chungyeol who became the progenitor the Korea-Mongol s fusion government by accommondate immigrant group from Yuan dynasty is <Ssanghwajeom>. Under this premise, this paper read the congratulatory lyric context of the country s birth myth that the folklore sacred wedding song changed to the praise song of the court for the king through the historical distinctiveness of the king Chungyeol who combined the royal family of the previous Korea to be subject to
238 지역과역사 39 호 the military government with immigrant group from Yuan and became the progenitor of the the Korea-Mongol s fusion government. Secondly, this paper proved the historical substance of SsanwhajeomㆍSamjangsaㆍwellㆍpub through the fact that HoihoiabiㆍSamjangsajuㆍwell s dragonㆍpub s man was choose on purpose as fictional sacred correlative of the immigrant group affiliated to Mongol came from Yuan and combined with the indigenous group of Korea. Keywords : Ssangwhajeom, Samjangsa, Well, Pub, Hoihoiabi, Samjangsa s Master, Well s Dragon, Pub s Master, King Chungyeol, the Korea-Mongol s Fusion Government, Founding Myth, Sacred Wedding, Congratulatory Song
ꡔ지역과역사 ꡕ 39, 2016.10, 원간섭기 239~274 忠宣王妃쪽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239 薊國大長公主의위상정립과의미 239 원간섭기忠宣王妃薊國大長公主의위상정립과의미 75) 김현라 * 머리말 Ⅰ. 고려와원의혼인동맹의의미 Ⅱ. 계국대장공주의위상 Ⅲ. 계국대장공주의고려장악시도 Ⅳ. 계국대장공주의개가시도사건 Ⅴ. 계국대장공주의상징성맺음말 국문초록 여원관계는기본적으로혼인동맹으로이루어졌다. 쿠빌라이는부마가된고려국왕이동방3왕가를견제하고, 이로써원의중앙집권체제에일조를하리라생각하였다. 충선왕비계국대장공주가고려에들어왔을때, 고려는충렬왕과충선왕이라는두개의세력으로양분되어있었다. 이점은혼인동맹하에있었던계국대장공주의위상이매우중요해졌음을말해주는것이다. 계국대장공주는여원간의혼인동맹의중요성을인지하여자신의위상을드러내고자하였다. 그러나충선왕은자신도원쿠빌라이의외손자로서몽골적자부심도가지고있는인물이므로계국대장공주를혼인동맹으로맺어진대상으로인지하지못하였다. 따라서혼인초부터부부관계는매우좋지못하였다. 이러한상황하에서계국대장공주는자신의입지에위해가될후비군을정리하였다. 원의황후는쿠릴타이회의에서황제를지목할수있으며, 가정내에서는일부다처제로이루어진황후들을엄격하게서열화하여자신의위상을드러내는것이일반적이었기때문이다. 다만여러후비군가운데그대상으로조비가되었다. * 울산대학교역사문화학과강사 (hyeonra@hanmail.net).
240 지역과 역사 39호 공주의 조비무고사건은 충선왕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인데, 이는 혼인 동맹에서 공주의 위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충선왕에 대한 일정한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선왕은 공주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국왕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공주를 통한 혼인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ㆍ활용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의 이러한 도모는 충선왕의 퇴위까지 이르게 되면서 두 부부 사이를 완 전히 갈라놓았다. 이러한 부부관계를 충렬왕 세력이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이것이 계 국대장공주의 개가시도로 나타난 것이다. 공주의 개가 시도는 총 3차례에 이루어진다. 공주는 이 개가시도에 적극 참여하였는 데, 그것은 여원관계의 혼인동맹에서 자신의 위상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러한 의지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개가시도는 주로 원의 상황에 의하여 이루 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이 지지한 원의 무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공주의 바람 은 실패로 끝났다. 계국대장공주는 충숙왕 2년 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자 왕고를 만났으며, 그 해 원 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자신의 조카 내륜공주와 왕고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이 혼인으로 왕고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리고 그 해에 충선왕은 심왕 위를 왕고에게 물 려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고려와 원의 통혼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이며, 그 중심에 있었던 원 공주의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주제어 : 충선왕, 계국대장공주, 개가시도 사건, 충렬왕, 혼인동맹 머리말 麗元關係는 기본적으로 여러 측면에서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가리키는 용어가 駙馬國體制,1) 世祖舊制論,2) 高麗國王府說3) 등이다. 1) 閔賢九, 高麗後期의 權門勢族 ꡔ韓國史ꡕ 8, 국사편찬위원회, 1974.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41 이러한 시각은 이 시기의 국가 통치가 고려 자국뿐만 아니라 몽골 또는 元 의 영향을 받았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여원관계에 대한 연구는 다 양한 측면에서 진행되었는데,4) 특히 고려와 원의 혼인관계에 대한 연구는 여원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므로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5) 이 가운데 고려에 시집온 몽골공주에 대해 여러 논문이 있는데, 주로 충 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에 집중되어 있고,6)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에 대 한 연구는 그녀의 조비무고사건과 개가에 한정되어 다루어지고 있다.7) 계국대장공주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손자인 감말라의 딸이고, 성종 테무 르의 조카이다. 연구사에서 지적하듯이 이 시기 몽골 공주는 단순히 고려국 왕의 妃로서 고려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감시자 역할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계국대장공주가 제국대장공주보다 더 우월한 위 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녀의 남편인 충선왕도 충렬왕과 달리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이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는 충렬왕 부부와 다른 점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이 활 동하는 시기에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重祚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양 국왕을 2) 李益柱, 高麗ㆍ元 관계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1996. 3) 森平雅彦, ꡔモンゴル覇權下の高麗ꡕ, 名古屋大學出版會, 2013. 4) 여원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정리는 이개석, ꡔ고려-대원 관계 연구ꡕ, 지식 산업사, 2013 참조. 5) 정용숙, ꡔ고려시대의 后妃ꡕ, 민음사, 1992. 金惠苑, 麗元王室通婚의 成立과 特 徵-元公主出身王妃의 家系를 중심으로- ꡔ梨大史苑ꡕ 24ㆍ25合輯, 1989. 李命 美, 高麗ㆍ元 王室通婚의 政治的 의미 ꡔ韓國史論ꡕ 49, 2003. 森平雅彦, 高 麗王家とモンゴル皇族の通婚關係に關する覺書 ꡔ東洋史硏究ꡕ 67(3), 2008. 6) 권순형, 원 공주 출신의 왕비의 정치권력 연구-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를 중심으 로- ꡔ史學硏究ꡕ 77, 2005. 김현라, 고려 충렬왕비 齊國大長公主의 위상과 역 할 ꡔ지역과 역사ꡕ 23, 2008. 이정란, 忠烈王妃 齊國大長公主의 冊封과 그 의 미 ꡔ한국인물사연구ꡕ 18, 2012. 7) 계국대장공주를 중심으로 다루는 논문은 다음과 같다. 金成俊, 麗代 元公主出身 王妃의 政治的 位置에 대하여-특히 忠宣王妃를 中心으로- ꡔ한국여성문화논총ꡕ, 이대출판부, 1958. 이정란, 충렬왕대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운동 ꡔ韓國人物史硏 究ꡕ 9, 2008이 있다.
242 지역과역사 39 호 둘러싼세력갈등이첨예하게대립하고있었다. 이러한일련의과정에큰영향을끼친것이계국대장공주의조비무고사건과개가시도이다. 그런데이러한사건이기존의연구에서는충렬왕과충선왕양국왕세력간의갈등에초점이맞추어져있어정작이사건의주인공인계국대장공주가상대적으로조명되지못하거나공주의개가를구체적으로서술하면서도공주의역할을그렇게부각시키지는못하고있다. 계국대장공주는원공주로서살았기때문에매우진취적인삶을지향한인물이었다. 그녀는충렬왕 22년에충선왕과혼인을하면서고려에첫발을디디게되었고, 정치소용돌이속에살다가원에서죽었다. 이러한공주의삶은혼인동맹의실상을잘보여주는것이라고할수있다. 따라서본고에서는계국대장공주의일생을통하여혼인동맹의허점과그에따른고려의위상을구명하도록한다. 이를알아보기위하여먼저원과고려의혼인동맹의의미를살펴보고차례로공주의위상, 그리고그녀가고려를장악하는과정과관련된조비무고사건, 또충선왕과의대결구도로서의개가시도사건등을다루어보고, 공주의죽음직전에이루어진세자왕고의만남등을통하여원공주의위상이가지는의미에대해살펴보도록한다. Ⅰ. 고려와원의혼인동맹의의미 고려와원의혼인동맹은충렬왕이제국대장공주와혼인함으로써성립되었다. 이혼인은양국에여러가지의미를부여하였다. 먼저원의도움으로왕정을복구한원종은원종폐립사건을겪으면서왕권을강화하고, 한편으로무신세력에대한우위를점하고자세자인충렬왕과의혼인을요청하였다. 그리도혼인의당사자인충렬왕도고려의존립을지키고또임연등을진압하기위하여원의판도로들어가겠다는의지를밝힐필요가있고, 자신의지위를확고히하기위하여공주의하가를요청하였다. 8) 한편세조쿠빌라이는처음에원종의청혼요구를그리탐탁하게생각하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43 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자신의 자식 가운데는 고려 세자와 혼인할 자가 없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9) 이는 원의 입장에서도 고려에 대 한 처우를 결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원종의 요청을 수용하기가 어려웠기 때 문이다. 그러나 원의 동쪽에 동방3왕가의 분봉지역과 남쪽으로는 남송, 일 본이 있는 상황에서 원이 고려를 직접 공격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동방3왕가가 지배하는 지역은 징기스칸의 동생들에게 분봉한 곳으 로,10) 이 가운데 옷치긴은 우구데이 칸 즉위 후 원의 황제를 제외한 세력 가운데 가장 강성하였고, 더욱이 그는 金國정벌에 참여하면서 그 세력을 더 욱 확장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원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며, 결국 定 宗인 구육[貴由]시대에 옷치긴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옷치긴을 이어 그의 손자 타가차르가 이 지역을 통합하면서 원의 중앙정부를 위협하였으며, 한 편 이들은 황위쟁탈과정에서 쿠빌라이를 지지함으로써 세력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쿠빌라이가 황제가 된 이후 이들의 지배지역은 요동까지 확대 되었으며, 타가차르를 이은 나얀시대에는 송화강 이북까지 그 세력이 미치 고 있었다.11) 이러한 지배영역의 확대는 결국 고려와 인접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고 려는 요동지역과 함께 원 全軍의 左翼으로서 요동에 근거했던 동방3왕가의 활동 지역이었다. 즉 동방3왕가가 고려정벌에 참여하고 정벌전이 완료된 후 동방3왕가 세력은 고려에 대한 상당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물론 혼인동 맹이 맺어진 이후이지만 충렬왕 4년에 서해도 내의 谷州, 遂安의 성이 옷치 긴 왕가의 타가차르에게 예속되었다는 기록에서 당시 옷치긴 왕가의 치세영 역을 짐작할 수 있다.12) 8) 森平雅彦, 駙馬高麗國王の成立-元朝における高麗王の地位について豫備的考察, ꡔ東洋學報ꡕ 79-4, 1998, 344~351쪽. 9) ꡔ高麗史ꡕ 권26, 원종 11년 2월 갑술조. 10) 동방3왕가에 대한 전반적은 것은 윤은숙, ꡔ몽골제국의 만주지배사-옷치긴 왕가 의 만주 경영과 이성계의 조선 건국-ꡕ, 소나무, 2010 참조. 11) 堀江雅明, モンゴル=元朝時代東方三ウルス硏究序說 ꡔ東方學論集 : 小野勝年 博士頌寿記念ꡕ, 龍谷大學東洋史學硏究會, 1982, 381~386쪽.
244 지역과 역사 39호 한편 쿠빌라이 치세 동안 카이두를 맹주로 하는 서북제왕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카이두는 우구데이칸의 다섯 번째 아들인 카시의 장자로서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의 계승분쟁에서 아릭부케 편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1266년 전후로 본격화된 카이두의 반란은 원제국을 분열케 해 대원제국의 성립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성종 테무르시기까지 대략 30 여 년간 지속된 장기 내전이었다.13) 1269년 카이두는 차가타이왕가의 바 락과 주치왕가의 뭉케 테무르 등 서방왕가를 규합해 반쿠빌라이 정책을 기 조로 하는 탈라스회맹 을 결속했다. 또한 쿠빌라이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불 만을 품었던 원의 옛 귀족들이 카이두 휘하로 들어가자 카이두의 세력은 날 로 확장되었다. 후의 일이긴 하지만 나얀의 반란은 카이두의 군사적 원조를 약속받아 일으킨 것이므로 당시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그를 둘러싼 동방과 서방왕조의 움직임에 대해 견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쿠빌라이는 이러한 상황을 미연에 막기 위하여 일련의 조치를 취 할 필요가 있었다. 쿠빌라이는 타가차르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제한하는 한편 부마국으로서 새로이 제국에 편입된 고려와의 관계를 통하여 이곳을 중앙으로 일원화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쿠빌라이가 남송ㆍ일본 문제와 함 께 고려에게 몽골 공주의 하가를 허락하게 된 배경이었다.14) 즉 고려왕을 황제의 부마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가 친중앙세력임을 분명히 하고 제국 내에 서의 지위를 격상시켜 동방3왕가와의 세력관계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 하게 하여 동방3왕가의 세력 확대에 대한 견제 의도를 분명히 나타낸 것이 라고 한다.15) 12) 13) 14) 15) ꡔ高麗史ꡕ 권28, 충렬왕 4년 7월조. 윤은숙, 앞의 책, 2010, 220쪽. 李命美, 앞의 논문, 2003, 29~31쪽. 李命美, 위의 논문, 50쪽. 김현라, 고려 忠烈王代의 麗ㆍ元關係의 형성과 그 특징 ꡔ지역과 역사ꡕ 24, 2009, 199~200쪽.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45 Ⅱ. 계국대장공주의 위상 계국대장공주의 父는 세조 쿠빌라이의 장자인 짐김[眞金]의 첫 아들 감 말라이고, 母에 대해서는 정확하지는 않지만,16) 김혜원의 연구에 의하면 감말라의 正妃 普顔怯里迷失(옹기라트族)의 소생일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 다.17) 몽골황족의 통혼은 雙分外婚制로,18) 몇 몇 경우를 제외하고 옹기라 트족과 이루어진다. 즉 쿠빌라이뿐만 아니라 짐김, 감말라도 모두 옹기라트 족에서 부인을 맞이하였다. 계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2년(1296)에 충선왕과 혼인하였다. 이들의 혼 인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먼저 고려가 성종 테무르의 강압 적인 태도에 대한 타개책으로 청혼한 것으로 보았다.19) 즉 성종이 즉위한 후 처음에는 충렬왕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즉위 다음해부터 그는 愛 牙赤로 하여금 고려의 儲糧을 핵실하게 하고20) 고려의 몇 가지 청인 세자 의 혼인, 충렬왕의 官爵加授, 公主印章降給, 世子印章改給 등을 거절하였 다. 따라서 고려의 입장에서는 테무르와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형 진왕 감말라의 딸을 맞음으로써 세자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명미는 고려와 원의 혼인동맹의 목적에 부합하듯이 성종치세기 초기에는 여 전히 카이두, 두아 등 서방세력과의 전쟁이 종료되지 않았고 동부의 옷치긴 왕가가 미세하나마 그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종은 고려의 16) 森平雅彦, 앞의 논문, 2008, 375쪽. 17) 金惠苑, 앞의 논문, 1989, 166쪽. 18) 혼인동맹은 몽골족으로는 매우 익숙한 양 씨족의 유대강화 수단이었다. 그것이 바로 雙分外婚制이다. 즉 테무진의 母의 출신인 옹기라트족과 몽골족 사이에는 일찍부터 이러한 동맹관계가 형성되었다(岩村忍, ꡔモンゴル社會經濟史の硏究ꡕ,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1968, 140~146쪽.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ꡔ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ꡕ, 책과 함께, 2012, 34~35쪽). 19) 金惠苑, 앞의 논문, 1989, 176~177쪽. 20) ꡔ元史ꡕ 권19, 성종 원년 윤4월 무진조.
246 지역과 역사 39호 전략적인 의미로써 감말라의 딸인 계국대장공주와의 혼인을 허락하였던 것 으로 보았다. 즉 성종은 고려 세자를 형의 딸과 통혼케 하여 고려를 친중앙 세력으로 안정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성종은 자신의 형인 감말라를 북 변진수의 임무를 맡겨 신임을 보이고 감마라를 자신의 중앙세력으로 포섭하 였던 것이다.21)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혼인은 위에서 언급한 혼인동맹으로 얻어지는 양국의 이점이 반영되어 성사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혼인에는 충선왕의 달라진 위상도 반영되었으리라 본다. 충선왕은 충렬왕 22년에 일어난 나얀 의 반란과 카단의 침입을 父王을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원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원이 고려를 부마국으로 한 목적은 동방3 왕가를 견제하는 것이었는데, 충렬왕은 이러한 역할을 적극 수행하지 못했 던 것이다.22) 이에 충선왕은 충렬왕 21년 8월부터 원으로부터 많은 관직을 하사받고 실력자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즉 충선왕이 고려왕으로서 적합도가 뛰어남을 판단한 성종으로서는 자신의 즉위과정에 갈등으로 부각되었던 감 말라를 중용하고, 그의 딸을 고려에 하가하면서 그들과의 갈등을 줄여보고 자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을 친왕세력으로 끌어들 이고자 하는 성종의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충렬왕의 입장에서는 충선왕의 이러한 변화가 반가운 것은 아니었 을 것이다. 충렬왕은 성종이 추대되는 쿠릴타이에 참여하여 감말라와 성종 의 관계와 그 위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충렬왕을 억압하는 충선왕의 위세가 막강한 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부마의 기반이 허약해진 충렬왕으로서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충선왕과 몽골공주와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세 력을 다시 일으킬 기회를 가지려고 하였던 것이다.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 혼인하고 고려에 들어왔다. 먼저 그녀는 고려 21) 李命美, 앞의 논문, 2003, 52~54쪽. 22) 周采赫, 쿠빌라이칸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카단宗王軍의 항전과 고려 領原山城 討伐戰 ꡔ江原人文論叢ꡕ 8, 2000 참조.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47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여원관계에서 공주의 입지는 단 순히 혼인정책으로 인한 희생물만이 아니라 원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감시하 는 하나의 정치세력이었다.23) 특히 계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왔을 때는 고려국내의 정치상황이 이전과 달랐다. 즉 고려국내의 세력이 충렬왕과 충 선왕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다.24) 이런 시기에 원공주인 계국대장공주의 위 상은 고려국왕을 결정지을 만큼 매우 중요하였다. 더욱이 충선왕은 혼인 초 부터 공주와 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25) 따라서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에 게 자신을 좀 더 드러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특히 원의 경우 궁궐에서 생활하는 황후들의 권력은 정치세력과 연관되 어 나타났다. 예를 들어 성종 테무르의 皇帝位를 결정하는 쿠릴타이의 개최 를 요구한 것도, 첫째 아들 감말라가 아닌 셋째 아들 테무르를 황제로 정한 것도 모두 그들의 모친인 코코진 황후였다. 또한 몽골의 황후는 기본적으로 그 권한이 막강하였다. 이는 징기스칸 대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몽골의 관 습적인 부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26) 12세기 이후 14세기에 이르기까 지 원 내부의 황제권을 둘러싼 내분에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이들이 황후 였음에도 이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성종의 황후인 블루간은 성종 치세 후반 기의 정무를 책임졌고, 성종 사후 아난다와 제휴하여 자신이 권력을 장악 하고자 하였다. 물론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당시 황후의 위상이 얼마나 컸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황후의 위상은 같은 황후 내에서도 서열로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몽골은 一夫多妻를 하며, 특히 황후들은 1인 1오르도를 소유하였다. 그리고 제1황후의 권력이 다른 오르도의 황후보다 지위 또는 권력이 높으며, 이 하 23) 김현라, 앞의 논문, 2008, 87~94쪽. 24) 李命美,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 위상의 한 측면-忠烈~忠宣王代 重祚를 중심으 로 ꡔ동국사학ꡕ 54, 2013, 145~146쪽. 25) ꡔ高麗史ꡕ 권89, 계국대장공주전. 26) 원 황후의 권력에 대한 전반적인 것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바람. 周志鋒, 試論 蒙元時期皇后的政治活動及其影響 ꡔ民族歷史ꡕ 72, 2003. 王鵬, 蒙元后妃生 活考, 西南大學 碩士學位論文, 2008 참조.
248 지역과 역사 39호 나의 오르도에 수명 내지 십 수 명의 비가 모여서 동거하며, 심지어 한 오르 도 내에 있는 제2부인은 제1부인의 使役人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 한 형태로 몽골은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오로도 내의 위계질 서는 매우 철저할 수밖에 없다.27) 계국대장공주의 위상정립은 공주가 받은 后妃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 리라 본다. ꡔ高麗史ꡕ 권89, 계국대장공주전에 공주가 고려에 들어올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즉 공주가 고려에 갈 때 원의 황제 성종은 태자 阿木 罕과 승상 雍吉刺歹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였으며, 충렬왕은 금교까지 나가 마중하였고 백관들은 교외에 나가 영접하였는데 儀仗과 妓樂이 왕을 영접 할 때의 예절과 같았다. 이는 원뿐만 아니라 고려에서의 계국대장공주의 위 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충렬왕의 입장에서는 공주가 자신의 위상을 재고하는데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것처럼 적극적인 환영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8) 그리고 고려는 원공주가 고려왕실에서 불편없이 생활할 수 있게 그 여건 을 마련해 주는데 바로 공주가 거처할 궁전을 마련하고 府를 설치하며 관속 을 두어 왕비의 일상에 필요한 제반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래서 충선왕 즉위년에 공주에게 中和宮과 崇敬府를 주었다.29) 이러한 후비부는 고려전 기에는 太后가 수여대상이 되었지만 원간섭기에는 고려에 시집 온 원 공주 가 왕비가 되면 바로 후비부를 받았다. 또한 이 시기의 후비부는 충렬왕이 나 충선왕대의 관제개편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소속 인 원이 加置 되었다. 그리고 그 관속 가운데 左右司尹을 두어 장관 체제의 大 府 의 특혜를 누렸다. 27) 靑木富太郞, 古代蒙古の婦人の家庭內における地位ㆍ權力 ꡔ內陸アジア史論集ꡕ 第一, 國書刊行會, 1964, 223~225쪽. 28) 이익주는 충렬왕이 황위계승구도에서 성종이 아닌 감말라 측에 섰거나 적어도 성종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李益柱, 앞의 박사학위논문, 1996, 12~103 쪽). 이 점에서 충렬왕과 감말라의 딸인 계국대장공주의 연계를 상정할 수 있다. 29) 고려시기 后妃府에 대한 것은 이정란, 고려시대 后妃府에 대한 기초적 검토 ꡔ한국중세사연구ꡕ 20, 2006 참조.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49 이러한 후비부의 특혜는 이 기관이 원공주의 위상과 관련되어지기 때문 이다. 특히 후비부의 관직은 여타의 관직에 비하여 府主와의 개인적인 친밀 도가 높았다. 즉 후비부는 공적기관이면서도 부주와의 개별적인 주종관계를 맺는 등 여러 면에서 私的 으로 운영될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속한 관리를 다른 관리와 달리 宮官 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숭경부는 경제식리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리라 본다. 계국대장 공주가 元都에서 15년 만에 귀국할 때 함께 가져온 물건이 수레 50량에 가 득 찼는데, 큰 수레는 한 대에 작은 수레 14대를 실을 정도라고 하는 기 록30)에서 그녀의 富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재물이 모두 원에서 마련된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원에서 체류하는 국왕과 왕비에게 필요경비는 조 달되었을 것이지만 이러한 공식적인 것 외에 기본적으로 공주가 치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였으리라 본다.31) Ⅲ. 계국대장공주의 고려 장악시도 계국대장공주는 고려에 들어온 이후 고려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을 취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공주로 살아온 그녀가 새로운 환경에 익 숙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자신의 처신의 향배를 위해서도 모델이 필요 했을 것이다. 이 속에서 계국대장공주의 시모인 같은 몽골공주 출신인 제국 대장공주가 행했던 일련의 과정은 계국대장공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된다. 제국대장공주는 원종 15년(1274)에 충렬왕과 혼인하였는데, 그때 충렬 왕의 나이는 39살이고, 공주는 16살이었다. 그녀가 고려에 입궁하였을 때 제1비로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바로 다른 후비의 견제였다. 충렬왕의 후비 는 제국대장공주 외에 종실녀인 貞信府主(일명 貞和宮主)와 숙창원비 김씨 30) ꡔ高麗史ꡕ 권89, 계국대장공주전. 31) 정용숙, 앞의 책, 1992, 286~287쪽.
250 지역과 역사 39호 이다. 이 중 숙창원비 김씨는 제국대장공주 死後 충선왕이 부왕에게 納妃한 경우이므로 실제 충렬왕에게는 정화궁주 1명만이 왕비로 있었다. 정화궁주 는 원종 원년(1260)에 충렬왕과 혼인하였으므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 어왔을 때 이미 결혼생활이 15년에 이르고 자녀가 있었다. 그리고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지 않았으면 제1비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유력한 비 였다. 특히 제국대장공주의 정화궁주의 견제는 향후 자신이 낳을 아들의 세자 책봉과도 관련되므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몽골의 황후는 오로도에서 생활하며 제1황후와 그 나머지 황후 사이에는 수직적인 서열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국대장공주로서는 황후간의 이러한 서열 의식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온 즉시 정화궁주를 척박하게 대우하였다. 즉 정화궁주가 충선왕의 탄생을 축 하하기 위하여 연회를 열었는데, 이때 연화좌석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 다. 이 연회에 공주는 상석에 앉고 정화궁주는 그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게 하는 등 정화궁주를 하대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그녀는 정화궁주무고사건 을 계기로 확고한 자신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 였다.32) 즉 이 사건은 정화궁주가 총애함을 잃고 무녀로 하여금 공주를 저 주하고, 제안공 왕숙과 중찬 김방경 등의 43인이 불궤를 도모하여 다시 강 화에 들어가려 한다. 는 것이다. 이에 공주는 궁주를 하옥하고 다루가치 石 抹天衢는 齊安公 王淑, 中贊 金方慶을 가두고 정치적 문제로 진행하고자 하 였다. 이에 재상 柳璥은 공주에게 하소연하여 이를 무마시켰으나, 공주는 이 사건 후 정화궁주와 충렬왕을 대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33) 이를 통해 제국대장공주는 후비의 서열화를 확정지었던 것이다. 이후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와의 사이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 32) 이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충선왕비 계국대장 공주의 조비무고사건 등을 볼 때 제국대장공주 측에서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3) ꡔ高麗史ꡕ 권89, 제국대장공주전.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51 었으며, 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인 이듬해 정월 공주의 겁령구에 대한 賜姓ㆍ官職 제수가 일제히 행해지고 있다.34) 또 공주 소생 諶의 세자책봉 도 이루어졌다.35) 세자는 당시 출생한 지 16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건 이 일어난 지 1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것은 정화궁주 소생의 장자 滋를 의식한 것이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고려 를 장악해 나갔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계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 충선왕이라는 고려국내의 세 력양분과 혼인초부터 이어진 충선왕과 불화로 인하여 후비군에 대한 견제를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국대장공주와 달리 그녀 는 상대해야 할 후비군이 많았다. 먼저 충선왕의 후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충선왕의 비는 ꡔ高麗史ꡕ 후비전에 기록된 妃만도 7명이 있다. 이들과 충선왕과의 혼인은 제3비 정비와의 혼인을 처음으로 제2비에서 제5비까지 이르는 4명이 모두 충렬왕 20년 이전에 이루어졌다.36) 가장 먼저 충선왕과 혼인한 자는 3비인 靜妃 王氏이다. 정비는 종실 西原 侯 王瑛의 딸로, 고려의 전통적인 왕실혼인 族內婚이다. 이 혼인은 충선왕 개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정비는 원의 貢女로 끌려 가는 처지였으나 세자인 충선왕이 부왕인 충렬왕에게 고하여 취했던 인물이 다.37) 이때 세자의 나이가 13세였고, 다음해인 14세에 정비와 혼인하였 다.38) 그러나 원은 공식적ㆍ비공식적 석상에서 이 혼인을 同姓婚이라고 비 난하였고, 이후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충선왕 복위년에 왕실의 족내혼이 금지되고,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15개의 귀족가문이 선정되었다.39) 원이 34) ꡔ高麗史ꡕ 권28, 충렬왕 3년 2월 기사조. 첨이부에서 왕에게 진언하기를, 공주 의 怯怜口 및 內僚들이 좋은 땅을 많이 차지하는데 산천으로써 그 경계를 임의 로 정하며 또 賜牌를 많이 받아서 조세를 바치지 아니하니 사패를 회수하여 주 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 하였다. 35) ꡔ高麗史ꡕ 권28, 충렬왕 3년 정월 임인조. 36) 정용숙, 앞의 책, 1992, 234쪽. 37) ꡔ高麗史ꡕ 권89, 후비, 정비전. 38) ꡔ高麗史ꡕ 권30, 충렬왕 15년 2월 임자조. 39) ꡔ高麗史ꡕ 권33, 충선왕 복위 원년 11월 신미조.
252 지역과 역사 39호 이 혼인을 비난한 것은 고려왕실과 몽골과의 관계가 혼인으로 맺어진 것인 데, 종실이 낌으로써 양국관계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왕실의 족내혼을 중단할 필요에서이다.40) 다음은 4비인 順和院妃 洪氏이다. 그녀는 南陽 洪氏 가문으로 洪奎의 셋 째 딸이다. 남양홍씨가 중앙정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武人亂 이전부터 이지만 무인정권에 官人을 배출하면서 성장하였다. 특히 이 집안은 홍진의 아들인 홍규가 집정 임유무를 베고 국정을 왕에게 되돌린 공으로, 또 종형 제인 홍자번이 충렬왕대에 수상이 되면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에 홍 규의 셋째 딸은 충선왕비가 되고 다섯째 딸은 충숙왕비가 된 明德太后이다. 다음은 몽골인인 충숙왕의 母인 懿妃 也速眞이다. 그녀의 가계에 관해 어 떠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원에서의 지위나 신분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선왕과의 혼인은 그의 아들 충숙왕의 생일이 충렬왕 20년(1294)년인 것으로 보아 충선왕이 세자로서 원에 체류하고 있 었던 충렬왕 16년에서 18년 사이일 것으로 보인다.41) 다음으로는 趙妃이다. 조비와 충선왕의 혼인은 충렬왕 18년에 이루어진 다. 조비는 평양조씨로, 그의 집안이 정계에 두각을 드러낸 것은 조비의 父 인 조인규 대부터이다.42) 고종 45년(1248)에 최씨정권이 붕괴되면서 세자 倎(원종)이 몽골에 가서 쿠빌라이를 만나 평화관계를 수립할 것을 약속하고 이어서 고려와 몽골과의 사이에는 복잡한 외교교섭이 전개될 때, 조인규는 몽골어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원종 10년(1269) 세자 諶(충렬왕)이 몽골에 입조할 때 侍從했으며, 후에 제국대장공주의 측근에서 활동하면서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충렬왕이 조인규를 이르기를 공주를 섬기되 언제나 존엄성 있고 부지런했다. 43)라는 것에서 공주에 대한 그의 충성도 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몽골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원 세조 쿠빌라 40) 정용숙, 앞의 책, 1992, 242~243쪽. 41) 金成俊, 앞의 논문, 1958, 167쪽. 42) 조인규에 관한 것은 閔賢九, 趙仁規와 그의 家門(上) ꡔ震檀學報ꡕ 42, 1976 ; 趙仁規와 그의 家門(中) ꡔ震檀學報ꡕ 43, 1977 참조. 43) ꡔ高麗史ꡕ 권105, 조인규전.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53 이와 직접 대면하고 通情할 수 있었다.44) 이러한 조인규의 배경으로 충선 왕과 조비의 혼인이 성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 順妃 許氏와 숙창원비 김씨가 있다. 순비 허씨는 許珙의 딸로, 충렬왕 34년에 맞아들였다가 충선 왕이 복위하자 순비로 봉해졌으며, 淑昌院妃 金氏는 본래 충렬왕의 妃였다 가 후에 충선왕의 총애를 입어 淑妃로 봉해졌다. 충선왕의 비 가운데 계국대장공주의 견제 대상의 일순위는 의비이다. 의 비는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계국대장공주가 충선왕과 혼인하기 이전에 벌써 두 명의 왕자가 있었고, 이 가운데 첫째가 세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비 는 몽골인으로 원에서의 황후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렇기 때문에 제1비가 된 계국대장공주에게 위해가 될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것이 다. 다음은 정비인데, 그녀의 아비인 서원후 왕영은 충렬왕 17년에 사망하 며, 후에 계국대장공주의 재혼 대상자로 거론이 된 瑞興侯 王琠의 아비가 된 다.45) 이에 정비 왕씨는 계국대장공주와 사이가 틀어진 관계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화원비 홍씨는 충렬왕 16년에 충선왕과 혼인하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자료가 없어 충선왕과의 사이를 살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동 생인 명덕태후의 사례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명덕태후는 충혜왕과 공민 왕의 母이지만 충숙왕이 濮國長公主와 혼인한 후 복국장공주가 명덕태후를 질투하자 궁중에서 나와 定安公의 집에 거처하였다.46) 물론 명덕태후의 처 세를 충선왕비인 순화원비 홍씨에게 적용할 수는 없지만, 같은 자매로서 성 장하고 원간섭기 왕비로 출가한 점을 보더라도 당시 순화원비 홍씨도 계국 대장공주의 눈에 벗어난 행동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이 점에서 그녀는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대상에 일단 제외되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계국대장공주의 위상확립에 조비가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어떤 이유인가?47) 먼저 조비는 다른 후비군에 비하여 계국대장공주의 위상에 위 44) ꡔ高麗史ꡕ 권105, 조인규전. 45) ꡔ高麗史ꡕ 권91, 종실2, 襄陽公 王恕條. 46) ꡔ高麗史ꡕ 권89, 명덕태후 홍씨전.
254 지역과 역사 39호 해가 될 소지가 많은 인물이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父인 조 인규가 고려뿐만 아니라 원에서도 상당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48) 따라서 계국대장공주는 조비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 고자 하였다. 이러한 공주의 행적은 그녀가 감말라의 딸로서 세조에게 반감 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점도 들 수 있다. 즉 감말라는 세조의 장손이었지만 그의 두 번째 동생인 테무르에게 황자의 지위를 빼앗겼다.49) 그래서 감말 라의 딸인 계국대장공주는 세조의 총애를 입은 조인규와 그의 딸을 무고의 대상으로 하였을 것이다.50) 다음은 충선왕파의 세력확장과 관련있다.51) 충선왕은 나얀과 카단의 반 란을 적극적으로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대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조인규였다. 조인규는 대표적인 제국대장공주 의 세력이고, 그가 가진 원의 인맥 또한 강력했기 때문이었다.52) 따라서 조 인규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행했던 것이 바로 조비와의 혼 인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정비와의 혼인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충선왕은 스스로 자신의 혼인대상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47) 정용숙, 앞의 책, 236쪽에 왕실에서의 위치나 권위를 둘러싼 대립이라면 족내혼 을 했던 靜妃였을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정비는 고려의 전통왕실혼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8) 조인규는 5남4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1명만 승려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출 사하여 재상의 자리에 오르거나 유력자에게 출가하였다. 특히 장남 趙端의 맏사 위는 원의 재상을 역임하고 安吉王으로 봉해진 也兒吉尼이다(閔賢九, 앞의 논 문, 1977, 5~6쪽). 49) ꡔ元史ꡕ 권17, 세조 지원 31년 4월 임오, 갑오조. 50) 충선왕은 몽골과 고려의 혼혈외손이었으므로 세조 쿠빌라이는 그의 교육에도 남 달랐다. 그래서 충선왕이 원의 궁궐을 방문하면 그는 항상 충선왕이 읽고 있는 책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였다(ꡔ益齋亂藁ꡕ 권9상, ꡔ高麗史ꡕ 권33, 충렬왕 18년 10월조). 이러한 세조의 관심은 결국 계국대장공주의 충선왕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하여 부부사이가 좋지 못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51) 정용숙, 앞의 책, 1992, 236쪽에 조비가 무고의 대상이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조비의 친족들이 충선왕에게 중용되어 조비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 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52) 閔賢九, 앞의 논문, 1977, 21~24쪽.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55 이러한 양상은 조비무고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다음은 조 비무고사건에 대한 사료이다. 공주는 趙妃가 왕의 총애를 독점하는 것을 투기하여 畏吾兒의 문자로 쓴 편 지를 서 수종하는 闊闊不花와 闊闊歹 2인을 원에 보내어 황태후에게 고하도록 하였다.(중략) 그 글에 이르기를 조비가 공주를 저주하기 때문에 왕이 사랑하 지 않고 있다. 고 하였다. (중략) 이때에 어떤 사람이 궁문에 익명서를 붙였는데 말하기를 조인규의 처가 神과 巫를 섬겨 저주하니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미워 하고 그 딸만을 사랑하게 하였다. 고 하였다. 공주는 조인규와 그 처를 옥에 가 두고 또 조인규의 아들 瑞ㆍ璉ㆍ珝와 사위 朴義ㆍ盧穎秀 등과 그 처를 가두었 다. 또 徹里를 원에 보내어 이 榜을 붙인 일을 알리게 하였다. (중략) 활활불화 등은 태후의 사신과 함께 원에서 돌아와서 황제의 명으로 (중략) 조인규를 원에 가게 하고 (중략) 조비와 환자 李溫을 잡아 돌아갔다.53) 위의 조비무고사건은 결론적으로 무고로 판명되었다. 계국대장공주가 조 비를 무고한 이유로 충선왕의 조비의 총애를 들고 있지만 주지하듯 충선왕 은 남색도 즐긴 인물이기 때문에54) 조비가 총애를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무고를 한 시점이 바로 충선왕이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34명에 대한 서임을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이 서임명단에는 조인규가 가장 먼저 거론되고 있다.55) 이러한 점에서 조비무고사건은 조인규를 비롯한 충 선왕 세력의 약화를 의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듯 계국대장공주는 이상의 일련의 과정을 통해 충선왕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고려의 이원화된 세력에 따른 계국대장 공주의 위상이 더욱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또 후에 일어난 것이지만 국왕은 충선왕의 폐위과정을 통해 원에 의해 고려국왕의 폐위가 언제든지 발생할 53) ꡔ高麗史ꡕ 권89, 계국대장공주전. 54) ꡔ高麗史ꡕ 권107, 元傅傳 附 元忠傳에 의하면 원충이 충선왕을 섬겨 龍陽의 寵 愛를 입었다고 한다. 이때 용양의 총애는 남색을 가리킨다. 55) ꡔ高麗史ꡕ 권33, 충선왕 즉위년 5월 신묘조. 충선왕은 그 해 7월에도 홍자번을 비롯한 36명에 대한 관직을 하사하고 있다(ꡔ高麗史ꡕ 권33, 충선왕 즉위년 7월 무술조).
256 지역과 역사 39호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56) 즉 혼인동맹은 고려국왕의 위상 을 높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국왕 폐위까지 이르게 되는 한계도 있었던 것 이다. 이점은 여원간의 혼인동맹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계국대장공주는 원황실에서 父인 감말라와 삼촌인 성종, 그리고 조모인 코코진 황후의 행적을 통해 정치적 교육을 받고 살아온 인물이다. 그리고 원은 일찍부터 혼인동맹을 통하여 인근의 부족이나 왕조와의 관계를 형성하 여 왔기 때문에 공주는 혼인동맹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즉 고 려의 세력이 이분화되어 있는 시기에 자신의 입지 또는 향배가 고려국왕권 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뒤에 언급하는 것이지 만 개가문제에도 이러한 정치적 의식이 적극 반영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충선왕은 혼인동맹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혼인동맹은 쿠빌라이 치세 동안 충렬왕이 이를 통해 국왕권 을 강화할 수 있었지만, 충선왕이 즉위하는 즈음에는 두 개의 세력을 저울 질 할 수 있는 중요한 외교정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충선왕은 이러 한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처음부터 부부관계를 맺지 않았고, 조비무고사건이 처음 발생한 4월에 계국대장공주를 직접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부왕인 충렬왕을 찾았던 것이다.57) 공주는 이러한 충선왕의 행동이 혼인동맹에서 자신의 위상을 배려하지 않은 처사라고 여기고 다음달인 5월에는 조비무고사건을 확대하여 조인규 와 그 아내, 아들 등을 투옥하고, 철리를 통해 원에 이를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충선왕은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강제로 퇴위당하였다. 충선왕의 퇴위의 이유에 대해서 다음의 사료를 살펴보도록 한다. 56) 李命美, 앞의 논문, 2013, 145~146쪽. 57) ꡔ高麗史切要ꡕ 권22, 충선왕 즉위년 4월조.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57 (성종 대덕 3년 정월) 昛(충렬왕)가 사신을 보내 入貢했다. 승상 完澤 등이 말하기를 世祖時에 或者가 말하기를, 고려가 참월하게 省ㆍ院ㆍ臺를 세웠다 하기에 교지를 내려 파하도록 하니 그 나라에서 僉議府ㆍ密直司ㆍ監察司로 고 쳐 세웠다. 지금 謜(역자: 충선왕)이 그 신하인 趙仁規에게 司徒ㆍ司空ㆍ侍中 의 관직을 더해 주었고 거는 조인규에게 九死獎諭文書를 주었다. 또 皇朝의 帝 系를 擅寫하고 歷을 스스로 만들며 그 딸에게 令妃을 더해주었다. 또 자정원을 세우고 崔冲紹를 흥록대부로 삼았다. 또 일찍이 태후의 지를 받들어 공주와 원 (충선왕) 兩 位下의 겁설치를 하나로 합하라고 하는 하였는데 원은 지를 받들 지 않았다. 원은 또 千戶 金呂를 함부로 죽이고 그의 金符를 宦者 朮合兒에게 주었다. 또 인규는 딸로 하여금 원을 모시게 했는데 모함의 일이 있었다.(중략) 거의 행사는 불법이며 원은 연소하여 무고한 자를 妄殺 하였으니 조를 내려 戒 飭하시기를 청합니다. 라고 했다.58) 위의 사료는 ꡔ元史ꡕ 고려전에 실린 것이다. 이 내용은 충렬왕과 충선왕 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전체 내용은 충선왕의 퇴위 이유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충선왕이 자의로 조인규 에게 司徒ㆍ司空ㆍ侍中의 관직을 더해 주었으며, 둘째, 그의 딸을 후비로 맞았으며, 셋째는 조인규의 사위인 최충소를 흥록대부로 삼았고, 넷째, 태 후의 旨인 공주와 충선왕의 겁설을 하나로 합치라는 것을 충선왕이 받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조인규의 지위와 조비의 후비 간택문제에 관한 것으로, 조인규와 직접 연관되는 것이다. 나머지 한 가지 는 코코진 황후가 충선왕과 공주의 겁설직을 하나로 합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충선왕이 거부했다는 것이다. 즉 충선왕 퇴위의 결정적인 것이 바로 조인규와의 관련이다. 물론 이것이 고려 국내에서는 조비무고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원제국의 입장에서도 58) ꡔ元史ꡕ 권208, 고려전, 大德 3년 정월조. 大德三年 正月 昛遣使入貢 丞相完澤 等言 世祖校勘時 或言高麗僭設省院臺 有旨罷之 其國遂改立僉議府密直司監察 司 今謜加其臣趙仁規司徒司空侍中之職 又昛給仁規赦九死獎諭文書 又擅寫皇 朝帝系 及自造曆 加其女爲令妃 又立資政院 以崔冲紹爲興祿大夫 又嘗奉太后旨 公主與謜兩位下怯薛䚟合倂爲一 謜不奉旨 謜又擅殺千戶金呂而以其金符給宦者 朮合兒 又仁規進女侍謜 有巫蠱事 今乞將仁規冲紹發付京兆鞏昌兩路安置 不得 他適 昛行事不法 謜年少妄殺無辜 乞降詔戒飭 帝命杖仁規冲紹而遣之
258 지역과 역사 39호 충선왕이 조인규를 중임하는 것을 싫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특히 세 조와 차별적인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성종으로서는 제국대장공주의 측근이 면서 쿠빌라이의 총애를 입은 조인규의 중임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성종 은 처음에는 충선왕에게 많은 힘을 실어주었고, 결국 그를 국왕으로 즉위시 켰지만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는 충선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하였다. 이 지지철회는 물론 코코진 황후의 힘도 작용하고 있다. 코코진 황후는 충 선왕에게 몽골식 이름인 이지르부카[益知禮普花]를 작명해 줄 정도로 그를 총애하였다. 그것이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와의 혼인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이 이러한 희망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고, 또 더 나아 가 충선왕은 코코진의 旨인 부부의 겁설직 합치를 거부하였다. 충선왕으로 서는 이 겁설직의 합치가 공주 중심으로 편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코코진 황후는 충선왕의 거부로 충선왕의 지지를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이 계국대장공주의 조비무고사건은 궁극적으로 충선왕의 세력약화를 초래하여 혼인동맹에서의 본인의 위상을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계국대장공주는 조비무고사건이 충선왕의 폐위로까지 확대될 것이 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이 국왕의 정비로서의 위 상이 있어야만 그것이 고려국내 또는 원제국 내에서의 위치로 이어지기 때 문이다. 충선왕의 퇴위는 궁극적으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 사이를 결정적 으로 비틀어진 사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적극적으 로 이용한 것이 바로 충렬왕이다. 충렬왕은 충선왕의 부마지위를 빼앗고, 자신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추진하게 된다. 다 음은 계국대장공주의 개가 시도 사건을 알아보도록 한다. Ⅳ. 계국대장공주의 개가 시도 사건 충선왕과 공주의 관계는 부왕인 충렬왕 부부와 크게 달랐다. 충렬왕 부부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59 는 순수한 고려인과 몽골인의 결합이라고 한다면, 충선왕 부부는 고려와 몽 골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과 몽골인의 결합이며, 그들의 혼인과 함께 국왕 의 重祚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충선왕은 쿠빌라이와 코코진황후의 총애를 받은 인 물로, 全生의 상당 기간을 몽골에서 생활하였다. 기존연구에서 충선왕은 제 국대장공주 사후 그녀의 지위와 재산뿐 아니라 정치적 성향과 노선까지 계 승했다는59) 지적이 있을 만큼 충선왕은 지위뿐만 아니라 고려에 대한 인식 도 몽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충선왕이 고려인으로서 뿐만 아니 라 몽골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매우 상당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충선 왕의 계국대장공주에 대한 대우는 충렬왕의 제국대장공주의 대우와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순조로울 수가 없었 다. 특히 국왕의 중조 발생과 여원간의 혼인동맹의 중요성은 계국대장공주 의 위상을 더욱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공주는 충선왕을 버리고 새 로운 인물을 자신의 짝으로 하는 개가에 적극 동참하였던 것이다.60) 이러 한 상황에서도 충선왕은 오히려 계국대장공주에게 퇴위 책임을 돌리고,61) 자신의 위상을 찾기 위한 여러 정치적 공작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의 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필 요가 없다고 보았다. 이때 충렬왕은 아들인 충선왕과 세력각축을 벌이면서 계국대장공주에게 개가문제를 거론했던 것이다.62) 1차 개가 시도는 충렬왕 59) 고명수, 충렬왕대 怯憐口(怯怜口) 출신 관원 ꡔ사학연구ꡕ 118, 2015, 262쪽. 60) 이정란, 앞의 논문, 2008, 114쪽에는 계국대장공주가 자신의 개가에 적극 참여 한 이유로 조비무고사건으로 남편의 폐위초래와 無子 때문이라고만 하였다. 61) ꡔ高麗史ꡕ 권125, 왕유소전에 계국대장공주가 전왕에게 소박맞아 祗候司에 거처 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62)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시도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은 김성준, 앞의 논문에 기술되 어 있다. 다만 이 논문에서는 계국대장공주가 개가시도의 총지휘자라고 하고 있 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공주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한편 李命美,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 위상의 한 측면-忠烈~忠宣王代 重祚를 중심으 로 ꡔ동국사학ꡕ 54, 2013, 146쪽에 공주의 개가는 충선왕이 가지는 인적ㆍ물
260 지역과 역사 39호 27년 5월에 이루어진다. 충렬왕은 원에 가는 민훤으로 하여금 개가표문을 올리게 하였다. 충렬왕이 이렇게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 게 된 배경으로 일차적인 것은 1300년 3월의 코코진 황후의 사망일 것이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코코진은 충선왕을 총애하였고, 충선왕과 공주가 부부 로서 해후하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코코진 황후의 죽음은 충렬왕 측으로서는 호기였다. 그래서 충선 왕의 부마의 위상을 없애기 위하여 코코진 황후의 죽음 다음 해부터 공주의 개가를 적극 추진하였던 것이다. 충렬왕은 이러한 개가표문을 올리기 이전 에 공주의 개가대상으로 서흥후 왕전을 주목하였다. 그리고 충렬왕은 재위 27년 2월에 왕전을 독로화로 원에 보냈다. 원에 온 왕전과 계국대장공주가 서로 면전을 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ꡔ高麗史ꡕ 계국대장공주전에 공주는 평소에 품행이 좋지 못하여 매양 內僚들과 난잡하게 처신한 까닭에 왕이 더욱 그를 좋지 않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그만 왕전에게 뜻을 두게 되 었다. 라고 되어 있다. 이 사료에서 미루어 보면 계국대장공주의 성정은 남 녀관계에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공주는 원에 독로화 로 머문 왕전을 사전에 보고 자신의 개가상대로 결정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 다. 물론 충렬왕과 공주의 이러한 행위는 사전 합의가 있었으리라 본다.63) 즉 충렬왕은 고려에 머물지 않은 계국대장공주의 생일잔치를 치르고 있다. 이는 아들인 충선왕과는 별개로 며느리로서 계국대장공주를 존중한다는 의 미로 비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본 계국대장공주의 입장에서는 충렬왕의 제의를 고민해 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원에서는 이 문제를 표면화시키지는 않았다. 이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는데, 먼저 원의 내부사정을 들 수 있다. 즉 앞서 언급하였듯이 원은 막강한 권력자였던 코코진 황후의 사망으로 불화를 거듭하고 있던 충선왕 부부의 이혼을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주의 적 관계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63) 이정란, 앞의 논문, 2008, 113~115쪽.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61 아버지인 감말라가 실력자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표면 화시키지는 어려웠으리라 본다. 둘째, 고려국왕의 존재이유가 바로 동방3왕가의 견제이다. 그런데 이 시 기에 동방3왕가가 이전보다는 세력이 약화되었다. 즉 나얀반란이 진압된 이 후 계속적으로 카단을 중심으로 동방3왕가의 반란은 계속되었다. 카단의 반 란은 1단계는 만주지역에서 전개되었고, 2단계는 고려에서 진행된 군사행 동이다. 이러한 반란은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하고 1302년 카단의 손자인 토곤이 원정부에 투항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64) 이러한 일련의 과 정으로 동방3왕가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이점은 결국 부마국으로서 고려왕 조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려왕조의 존속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따라서 원으로서는 공주의 개가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고려를 부마국으로서 계속 존속시켜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이 앞섰으리라 본다. 따라서 다음에 언급하겠지만 충선왕 조차 도 충렬왕 28년에 언급되는 입성론에 관심을 표명하였던 것이다.65) 이러한 점이 원에서 공주개가를 즉각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개가 시도는 충렬왕 29년에 발생하였다. 충렬왕은 세자인 충선왕 의 귀국을 저지하면서 한편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추진하였다. 이 시기의 개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이 때 일어난 여러 사건을 알아보도록 한다. 먼저 이 때는 원의 성종 테무르의 정통성이 확인된 시기이다. 즉 1302년 카단의 손자인 토곤이 원정부에 투항하고, 1301년 반성종파의 대표인 카이 두가 죽고, 그의 장남인 차파르가 1303년 7월 막북의 원조 측 제왕 가운데 가장 어른인 아난다를 통해 성종의 조정에 귀복할 뜻을 표시함으로써 쿠빌 라이의 비정상적인 칸위 계승 이래 지속된 막북에서의 분쟁은 비로소 종식 된다. 이로써 원조의 정통성이 전 몽골세계에 승인되어 몽골 고토에 대한 쿠빌라이 왕국의 권리가 비로소 확정되었던 것이다.66) 64) 윤은숙, 앞의 책, 2010, 229쪽. 65) 이정신, 忠宣王의 요동회복 의지와 高麗王 瀋王의 분리 임명 ꡔ韓國人物史硏 究ꡕ 21, 2014, 297~303쪽.
262 지역과 역사 39호 한편 성종이 즉위한 후 帝位를 양보한 晉王 감말라의 권한은 일시 확대된 것처럼 보였다. 원래 진왕은 太祖의 四大오르두와 그 군마 및 韃韃國土를 다스리고, 그 관부는 王府보다 상위인 內史府를 두게 했는데, 성종 즉위를 계기로 막북에서의 감말라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 으로 드러난 것이고, 실제로 성종은 자신의 측근을 파견하여 진왕을 감시하 고 견제하였다. 이러한 성종의 의도는 1302년 사망한 감말라를 이어받은 이순테무르 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어, 감말라가 가졌던 병권을 없애는 등 권 력을 약화시켰다. 요컨대, 이순테무르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막북의 최고 어른도 아니었다.67) 공주의 입장에서는 부친의 사망과 동생 이순테무르의 권력약화 등으로 그녀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흔들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개가를 표면화 하여 이러한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계국대장 공주의 대응은 잘 알 수 없다. ꡔ高麗史ꡕ 계국대장공주전에도 1차와 3차 개 가시도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는 이 때의 개가시도가 계국대장공주의 입장에서는 1차에 비하여 그렇게 중시되지 않았다기보다는 아직까지 그녀 가 움직이기에는 상황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공주의 개가시도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충렬 왕은 공주의 개가상대로 지목되었던 서흥후 왕전을 보필하기 위하여 1303 년에 崔雲을 파견하였다. 최운의 파견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어쨌 든 이는 왕전의 위상의 변화와 관련되었으리라 본다.68) 또한 최운이 1차 개가를 주도했던 송분의 사위라는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원제국에서는 이러한 개가시도를 저지하고 있다. 당시 고려 내에 66) 李玠奭, 14世紀 初 元朝支配體制의 再編과 그 背景,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1998, 14~15쪽. 67) 李玠奭, 위의 박사학위논문, 15쪽. 68) 이정란, 앞의 논문, 2008, 119쪽, 이정란은 2차개가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진 행되었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면 당연 ꡔ高麗史ꡕ 권89, 계국대장공주전에 그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어야 할 것 이다.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63 발생하였던 吳祁사건의 주동자인 오기의 체포를 위하여 고려에 파견된 원사 脫脫帖木兒는 충렬왕에게 국왕의 입조가 황제의 동의를 얻은 것인지의 여 부와 入元의 목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물었다. 이에 대해 충렬왕은 오기 사건의 해명을 위한 것이라고 하자 탈탈첩목아는 충렬왕에게 아들의 환국을 요청하고 소인배를 다스리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하고 있다. 이후 충렬왕은 약속의 이행을 위하여 전왕의 환국요청 표문을 29년 11월 무인일과 30년 1 월 경오일에 각각 올렸다.69) 이렇듯 원제국의 공주개가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는 충선왕의 편을 들어 서 행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당시 원제국의 황제 성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팍스몽골리아가 실현되는 시점에서 굳이 고려의 문제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던 점도 분명하다고 하겠다. 제3차 개가시도는 충렬왕 31년 충렬왕이 원의 입조 허락을 받고 입원하 면서 발생하였다.70) 이때 충렬왕은 개가의 주동자인 宋璘ㆍ宋邦英도 함께 하였다. 이에 대해 충선왕은 이 사절단에 洪子藩ㆍ崔有渰ㆍ金深 등도 포함 시키도록 하였다.71) 충렬왕은 아들인 충선왕의 거처에서 공주의 거처 祇候 司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공주와 함께 개가를 공모하였다. 특히 충선왕 쪽이 정쟁에서 유리하게 되자 공주는 자신의 개가에 적극 참여하였다. 즉 충렬왕 32년 왕유소 등이 황후에게 참소하여 서흥후 왕전에게 공주를 개가시키려 고 하였다. 그런데 왕유소가 하옥되자 공주는 고발을 주도한 김문연에게 곤 장을 치고 종신들의 왕소 출입을 억제하였다. 그리고 충렬왕은 공주와 함께 귀국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계국대장공주가 표면에 나서서 적극 자신의 개가를 주장할 수 있 었던 것은 당시 원의 성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면서 제위를 둘러싼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성종 치세 중반 이후는 음주와 여색 69) ꡔ高麗史ꡕ 권32, 충렬왕 29년 11월 무인조, 30년 1월 경오조. 70) 공주의 개가사건은 충렬왕 32년에 일어났으나 실질적으로는 충렬왕이 입조하면 서 시작된 것이다(이정란, 앞의 논문, 2008, 127쪽). 71) ꡔ高麗史節要ꡕ 권23, 충렬왕 31년 11월 무오조.
264 지역과 역사 39호 등 방종한 생활로 병약해진 성종을 대신하여 블루간 황후가 정사에 간여하 였다.72) 그리고 성종이 사망하자 그녀는 안서왕 아난다의 도움을 받아 稱 帝의 형식으로 政柄을 쥐고자 하였다. 이때 블루간 황후의 정적이 바로 武 宗과 英宗이었다. 충선왕은 이들을 지원하여 향후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 다. 이에 블루간은 충렬왕과 계국대장공주를 지원하였고, 당시 개가문제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73) 따라서 계국대장공주는 자신의 개가시 도에 적극 가담하고 이를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충선왕은 이후 어떠한 행보를 취하였을까? 충선왕은 이상과 같 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동방3가의 견제목적으로 이루어진 양국간의 혼 인이 자신의 의도와 달리 견고하게 지속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간파하였 다.74) 즉 그는 조비무고사건으로 인한 폐위와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시도사 건을 겪으면서 혼인동맹이 고려국왕위를 한편에서 제약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국왕은 국왕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공 주를 통한 혼인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 활용해야 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점은 충선왕의 복위교서에 통혼을 통해 형성되는 원황실-고려왕실의 관 계를 적극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는 부마로서의 지위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 로 동방3가가 물러난 만주지역을 지배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그 는 심양왕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충선왕은 원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스스로 몽골제국의 일원으로 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충렬왕 21년 8월 그는 성종으로부터 高麗國王 世子 領都僉議使司에 책봉되고 兩臺銀印을 하사받고 귀국하였다. 이 때 그 가 가지고 온 皇命에는 我家 출신으로 藩輔가 되고, 先皇을 恭勤하게 섬기 고 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즉 충선왕은 몽골의 후예, 세조의 후예로서 皇家 72) 李玠奭, 앞의 박사학위논문, 1998, 91쪽. 73) ꡔ元史ꡕ 권21, 성종 4년 대덕 10년조. 74) 李命美, 앞의 논문, 2013, 145쪽에 충선왕의 폐위과정을 통해 고려국왕과 신료 들이 고려국왕의 몽골황제의 제후로서의 위상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65 집안 출신으로 제후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본인도 스스로 자신의 충 렬왕 24년 즉위교서에 先帝의 外孫으로 황제와 황태후의 권고를 받아들여 공주와 함께 이르게 되었다. 라고 하여 몽골 황가의 후손임을 내세우고 있 다.75) 따라서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에 의한 자신의 지위변동을 매우 힘들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자 하였 다. 먼저 그는 立省論에 관심이 많았다. 입성론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洪 茶丘의 아들인 洪重喜였다. 그는 충렬왕 28년에 정동행성과 요양행성을 합 하여 하나의 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입성론을 제기하였다. 이 입성론에 대해 서 고려인들 대다수 반대하였지만 일부 찬성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유청신, 박경량이었다. 유청신은 고려가 원의 省이 되면 고려인이 원 나라 사람이 되므로 차별을 받지 않고 원에서의 관직임명이 유리하다고 하 였다.76) 이점은 충선왕의 관심을 이끌 수 있는 것이었다. 충선왕은 충렬왕 24년에 국왕이 되었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퇴위할 수밖에 없었기 때 문에 고려국왕의 지위에 대해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입성 론은 당시 동방3왕가가 어느 정도 위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원으로서도 들 어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이때의 입성론을 계기로 고려의 지배방식에 대한 고민 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선왕이 퇴위된 이후 송분사건, 석주ㆍ오잠 사건 등 여러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충선왕이 주도한 것은 아 니지만 충선왕과 관련된 여러 인물이 직ㆍ간접적으로 연계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담당으로 전자는 관련자가 행성옥에 갇히거나 후자는 원의 중서성에 고발하여 원이 단사관을 파견하였다. 즉 일련의 사건이 모두 원이 직접적인 간섭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선왕과 관련된 세력들이 고려정부를 무력화하여 고려를 원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전단계가 아닌가 한다.77) 75) ꡔ高麗史ꡕ 권33, 충선왕 즉위년 정월 교서. 76) 입성론에 대해서는 이정신, 앞의 논문, 2014 참조. 77) 이정신, 위의 논문, 294~297쪽.
266 지역과 역사 39호 그의 이러한 생각은 충렬왕의 계국대장공주의 개가 시도와 성종의 부인 인 블루간 황후의 집권으로 더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원으로서 도 대고려지배방식의 변화는 바라는 것이었다. 즉 성종대의 팍스몽골리아 시대를 맞이하여 원은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은 심양지방 뿐만 아니라 고려를 원제국에 편제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러한 지배방식에 적합한 인물인 충선왕에게 무종은 심 양왕위를 줌으로써 이러한 지배방식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78) 또한 충선왕은 고려왕위보다 위계가 높은 심왕위를 받음으로써79) 고려 왕위의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충선왕이 고려왕위보다 심왕위를 더욱 중하게 여긴 것은 그가 가진 두 개의 왕위 가운데 먼저 고려왕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양위하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一字王號를 수여받 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부인이 감말라의 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80) 이점 또한 충선왕이 계국대장공주를 끝까지 형식적으로나마 배려한 이유라 고 할 수 있다.81) Ⅴ. 계국대장공주의 상징성 원과 고려의 정국 속에서 계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위상을 세우고자 자신 의 개가시도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 개가시도는 원 武宗이 황제위에 78) 주채혁은 충선왕의 심왕수여를 원종대부터 이어진 고려의 몽골제국의 적극적인 편제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다(周采赫,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 -몽골-고려사의 성격문제 ꡔ국사관논총ꡕ 8, 1989). 79) ꡔ元史ꡕ 諸王表에 의거하면 瀋王은 39위, 高麗王은 41위라고 되어 있다. 80) 一字王號는 짐김계통에만 수여된다(王號수여에 대해서는 野口周一, 元朝世祖 ㆍ成宗期の王號授與について ꡔ中國史における亂の構圖ꡕ, 雄山閣出版, 1986 참조). 81) 李命美, 앞의 논문, 2013, 157쪽에 충선왕과 그 세력들은 충선왕의 폐위과정과 공주의 개가사건을 거치면서 통혼 의 의미가 매우 중요함을 인지하였다고 되어 있다.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67 오르면서 완전히 무산되었다. 즉 무종 즉위의 일등 공신이었던 충선왕의 위 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고려왕위와 함께 심양왕에 이어 일자왕 호인 瀋王에 봉해졌다. 충선왕은 두 개의 왕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고려에 귀국하지 않고 원에 그 대로 머물면서 소위 교지정치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 치는 여러 문제가 발생되기 마련이었고, 충선왕은 재위 5년이 되는 해에 아 들인 충숙왕에게 고려왕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太上王으로서 권력을 행사하 였다. 이런 흐름에서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의 출세와 자립에 의해 한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위상을 유지 또는 높이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 복위 2년에 원으로부터 韓國長 公主로 봉해지고 5년에 충선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 귀국에 그녀는 고려 뿐만 아니라 원에서도 보지 못할 정도로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82) 충선왕 을 비롯한 고려에서 공주에게 이러한 대우를 해 준 이유는 바로 충선왕이 혼인동맹의 중요성을 깨닫고 부마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 일 것이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는 무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충선왕과의 관계를 끊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계국대장공주의 다음의 일련의 행적에서 추측할 수 있다. 공주는 충숙왕 2년에 원나라로 가게 된다. 원 대도로 가는 길인 通州에서 세자인 王暠를 만났다.83) 물론 이러한 만남이 어떠한 내용 으로 이루어진 것은 모르지만 왕고는 다음해에 공주의 조카인 訥倫公主와 혼인하여 부마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즉 왕고는 짐김 계통의 공주를 부 인으로 취했던 것이다. 같은 해에 충숙왕도 혼인하게 되는데, 그 상대는 營 王 也先帖木兒의 딸인 濮國長公主 亦憐眞八剌이다. 영양 야선첩목아는 세 조의 셋째 아들인 무게치의 아들로 원 황제 인종에게는 6촌 재종남매간이 된다. 후에 충숙왕과 혼인하는 조국장공주도 짐김의 둘째 아들인 다루마바 82) ꡔ高麗史ꡕ 권89, 계국대장공주전. 83) ꡔ高麗史ꡕ 권34, 충숙왕 2년 10월 무인조, 世子暠謁公主于通州.
268 지역과 역사 39호 라의 아들인 아무가의 딸로, 무종과 인종의 친조카이다. 조국장공주의 父인 아무가는 원 인종 연간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대청도 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고려왕실과 서로 가까워 질 수 있었다는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84) 이러한 왕고와 내륜공주의 혼인이 그의 위상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 다. 1315년 계국대장공주는 원에서 사망하였다. 다음해에 충선왕은 심왕의 지위를 왕고에게 양위하였다. 이러한 행적이 계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직접적 인 관계를 갖는가는 알 수 없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 에 대한 형식적인 대우가 매우 극진하였으며, 통혼이 갖는 의미에 대해 알 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계국대장공주는 몽골의 공주로서 고려에 들어와 충선왕과 좋은 부부관계 를 맺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러나 여원 관계에서 몽골 공주가 의미하는 위상을 지키려는 그녀의 노력은 몽골의 정 치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맺음말 계국대장공주의 일생을 통하여 여원관계에서 몽골 공주의 위상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는 것으로 맺음말에 대신하겠다. 여원관계는 기본적으로 혼인동맹으로 이루어졌다. 원은 혼인동맹을 통하 여 타국과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다만 원 세조 쿠빌라 이의 입장에서 고려가 그러한 대상으로 적절한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이었으나, 당시 송이나 금 또는 일본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쿠빌라이의 정책의 핵심인 중앙집권화라는 코 드를 고려할 때 만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동방3왕가의 견제는 매우 중 84) 정용숙, 앞의 책, 1992, 251쪽.
원간섭기 忠宣王妃 薊國大長公主의 위상 정립과 의미 269 요한 것이었고, 고려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기대했던 것 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혼인동맹으로 제국대장공주에 이어서 충선왕 의 비인 계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 시기는 충렬왕과 충선 왕의 중조가 이루어져 고려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점은 혼인동맹하에 있었던 고려에서 계국대장공주의 위상이 매우 중요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계국대장공주는 여원간의 혼인동맹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은 자신도 원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몽 골적 자부심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므로 계국대장공주를 혼인동맹으로 맺어 진 대상으로 인지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혼인 초부터 부부관계는 매우 좋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하에서 계국대장공주는 자신의 입지에 위해가 될 후 비군을 정리하였다. 원의 황후는 쿠릴타이 회의에서 황제를 지목할 수 있으 며, 가정 내에서는 일부다처제로 이루어진 황후들을 엄격하게 서열화하여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후비군 가 운데 그 대상으로 조비가 되었다. 이는 조비의 父인 조인규가 세조와 가까 웠으며, 그의 집안이 고려뿐만 아니라 원에서 인맥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또 조인규는 제국대장공주에 이어 충선왕과 매우 깊숙한 관련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러한 공주의 도모는 충선왕의 세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인데, 이는 혼인동맹에서 공주의 위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충선왕에 대한 일 정한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선왕은 공주와 관련된 일련 의 사건을 겪으면서 국왕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공주를 통 한 혼인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ㆍ활용해야 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충선왕은 자신의 복위교서에 통혼을 통해 형성되는 원황실-고려왕실의 관 계를 적극 반영하였던 것이다. 계국대장공주의 조비무고사건은 공주의 바람과 달리 충선왕의 퇴위까지
270 지역과 역사 39호 이르게 되면서 두 부부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강제퇴위 후 충선왕 부 부는 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관계를 충렬왕 세력이 적극 이용 하고자 하였으며, 이것은 바로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시도로 나타나게 된다. 공주의 개가시도는 총 3차례에 이루어진다. 공주는 이 개가시도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여원관계의 혼인동맹에서 자신의 위상의 중요성을 깨 닫고, 이러한 의지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개가시도 는 주로 원의 상황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이 지지한 원의 무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공주의 바람은 실패로 끝났다. 충선왕은 복위 후 공주에 대해 매우 극진히 대접하였다. 이는 충선왕 5년 에 공주가 고려에 들어올 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주는 끝까지 충선왕과의 관계를 끊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물론 그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공주는 충숙 왕 2년 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자 왕고를 만났으며, 그 해 원에서 사망하였 다. 그 이듬해 자신의 조카 내륜공주와 왕고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이 혼인 으로 왕고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리고 그 해에 충선왕은 심왕 위를 왕고에 게 물려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고려와 원의 통혼이 가지는 의미가 어떠한 것이며, 그 중심에 있었던 원공주의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ꡔ高麗史ꡕ, ꡔ高麗史節要ꡕ, ꡔ元史ꡕ 고명수, 충렬왕대 怯憐口(怯怜口) 출신 관원 ꡔ사학연구ꡕ 118, 2015. 권순형, 원 공주 출신의 왕비의 정치권력 연구-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를 중심으로- ꡔ史學硏究ꡕ 77, 2005. 金成俊, 麗代 元公主出身王妃의 政治的 位置에 대하여-특히 忠宣王妃를 中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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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간섭기忠宣王妃薊國大長公主의위상정립과의미 273 Abstract The Meaning and Definition of Status of Princess Gaegookdaejang, King Chungseon Wife, in Won Invasion Period Kim, Hyeon-Ra Through the life of Princess Gaegookdaejnag, the status and meaning were foun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was consisted basically in the marriage bonding. Therefore the marriage bonding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With these background of marriage bonding, the wife of King Chungsun, Princess Gaegookdaejnag came in Goryeo. But the country, Goryeo, was divided into the two powers in charge of having double succeeding the throne King CHungrul and Chungsun. That was suggested that the status of Princess Gaegookdaejnag was very recommended. The princess realized the importance of Won and Goryeo marriage bonding and showed the status of herself. Thus, the wife of King in Won dynasty could point the king in the meeting of Kuriltai and moreover, in the home the many wives in the polygamy stricltly ordered the hierarchy and displayed the status of herself. The princess Gaegookdaejnag systemized the shadow cabinets who was Chobi of the object. Because the Jobi s farther was closed to Sejo and famous for the homan networks. Moreover, Jo In Kyu followed by Jagookdaejang showed the one of close relationship to King Chunsun. The mechanization of the princess Gaegookdaejnag intentionally weakened to
274 지역과역사 39 호 the power of King Chunsun which was against of the false reflection of King Chunsun that he didn t realized precisely the situation related to the princess Gaegookdaejnag. In order to remain of status, the marriage bonding strategy got strong. Therefore, King Chunsun actively reflect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Won and Goryeo formed into the intermarriage in the restoration of himself. The accident of Jobi innocent resulted in the abdication of King Chungsun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of them was completely separated. After the accident, the couple was back to the Won dynasty. The King Chungrul used the couple s relationship and this was attempt to the re-marriage of princess Gaegookdaejnag. The re-marriage was tried to three times in total. The princess attended actively, which she realized the importance of status in marriage bonding between Won and Goryeo and reflected on her will. Conversly, the re-marrigement was failed by the interruption of Won dynasty and Mujong of Won dynasty supported by King Chungsun. After the restoration of King Chungsun, the princess was well treated. This was showed that when the princess visited in Goryeo, she was well treated never happened before. However, she continuously tried to end the relationship to the King Chungsun. That wasn t an apparent incident. On the way back to Won dynasty, She met Simyanggo and next year he got married with her nephew, a princess Naeryun. By this marriage the status of Simyanggo was highly addressed. The princess was dead at the same year. And the following year King Chungsun turned over the throne to Yanggo. Keywords : Princess Gaegookdaejang, King Chungseon, Marriage Bonding, King Chungrul, Attempt to the Re-marriage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275~307쪽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75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275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중심으로 85)김 보 정** 머리말 Ⅰ. 중종대 ꡔ동국사략ꡕ을 통해 본 정몽주 인식 1. 박상의 ꡔ동국사략ꡕ 편찬 2. ꡔ동국사략ꡕ을 통해 본 정몽주 인식 Ⅱ. 명종대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통해 본 정몽주 인식 1.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편찬 2.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통해 본 정몽주 인식 맺음말 국문초록 본고는 조선 전기 성리학 이해과정을 살펴보려는 일환으로써 당대의 사찬사서를 통 하여 중종ㆍ명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본 연구이다. 중종ㆍ명종대는 정몽주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지고, 정몽주의 최초 제향서원인 임고서원이 설립되는 시기이다. 또 한 성종대 ꡔ동국통감ꡕ을 축약한 사찬사서가 사림에 의해 최초로 나오는 시기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이다. 중종대 정몽주 인식은 기묘사림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ꡔ동국 사략ꡕ의 고려 말 정몽주 기사를 살펴보면 ꡔ동국통감ꡕ에 비해 정몽주의 사행 및 공양왕 대 정치활동 기사가 거의 삭제되어 있다. 이는 중종 12년(1517) 문묘종사, 중종 14년 (1519) 기묘사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성종대 ꡔ동국통감ꡕ과는 다르게, 고려 말 이색의 절의를 靖節로 이해하고, 정몽주의 殉節, 길재의 抗節과 함께 동일시하고 있다. * 이 논문는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5B5A07042482).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bojeong@gmail.com).
276 지역과 역사 39호 명종대 정몽주 인식은 을사사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고려 말 정몽주 기사를 살펴보면 ꡔ동국통감ꡕ에서 대의명 분에 따른 포폄이 분명한 기사만을 취사선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박상의 ꡔ동국사략ꡕ 과 달리 이색의 절의를 인정하지 않고, 고려 말 서술체제에서도 공민왕 다음에 공양왕 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기묘사림과 을사사림의 대의명분에 따른 입장 표명의 차이라 고 할 수 있다. 성종대 ꡔ동국통감ꡕ에서 정몽주를 절의지사로서 충신 임을 강조하였다 면, 중종대 기묘사림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에서는 문묘종사의 영향으로 정몽주의 취약점 을 삭제하고, 명종대 을사사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포폄이 분명한 기사만을 취사하여 정몽주를 확실한 성현 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주제어 : 정몽주, 박상, ꡔ동국사략ꡕ, 유희령,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머리말 정몽주는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이다. 중종ㆍ명종대는 정몽주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지고1) 정몽주의 최초 제향서 원인 임고서원이 설립되는2) 시기로써 조선 전기 성리학 이해가 심화되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본 연구는 당대에 편찬된 사서를 통하여 중종ㆍ명종대 사림의 정몽주 인 식을 살펴보려고 한다. 중종ㆍ명종대는 그 이전의 관찬사서와 달리 사림에 1) 중종대 정몽주 문묘종사에 관한 대표적 연구는 다음과 같다. 池斗煥, 朝鮮前期 文廟從祀 論義 -정몽주, 권근을 중심으로- ꡔ釜大史學ꡕ 9, 1985. 李載浩, 鄭夢周 非忠臣論에 대한 檢討 ꡔ釜大史學ꡕ 7, 1983. 김영두, 중 종대 문묘종사논의와 조선 도통의 확립 ꡔ사학연구ꡕ 85, 2007. 2) 조준호, 朝鮮時代 鄭夢周 祭享書院의 建立 推移와 性格 ꡔ圃隱學硏究ꡕ 6, 2010.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77 의해 사찬사서가 최초로 나오는 시기로써, 관찬사서인 ꡔ동국통감ꡕ의 방대 한 양을 축약하여 재정리한 사찬사서인 ꡔ동국사략ꡕ이 편찬되는데, 중종대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 명종대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이 대표적이다.3) ꡔ동국사략ꡕ의 찬자인 눌재 박상에 대한 연구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심도 있게 진척되어 ꡔ눌재 박상의 문학과 의리정신ꡕ으로 정리되어 있다.4) 선행 연구에 힘입어 눌재 박상은 중종 10년(1515) 신비복위상소를 올린 기묘사 림으로서 잘 알려져 있으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찬자인 유희령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편이다.5)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모두 서문 혹은 발 문이 없기 때문에 두 사서의 편찬 동기 및 편찬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 다 보니 선행연구에서 16세기 사찬사서 ꡔ동국사략ꡕ과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은 15세기 관찬사서 ꡔ동국통감ꡕ을 그대로 축약한 사서로 알려져 있다. 하 지만 15세기 ꡔ동국통감ꡕ과 16세기 ꡔ동국사략ꡕ 및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서술 체제나 내용에서 시대적 차이가 드러나며, 또한 16세기 ꡔ동국사략ꡕ과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역시 상호간의 서술 체제나 내용에서 사뭇 다르다. 특 히, 고려 말 인식에서는 편찬자의 입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즉,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첫째,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의 행적을 두고 15세기 ꡔ동국통감ꡕ과 16세기 ꡔ동국사략ꡕ이 다른 입장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견해이나6)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의 행적에 대 3) 鄭求福, 16~17세기의 私撰史書에 대하여 ꡔ全北史學ꡕ 1, 1977. 韓永愚, 16 세기 士林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ꡔ東洋學ꡕ 10, 1980 ; ꡔ朝鮮前期史學史硏究ꡕ, 서울대학교출판부, 1981, 재수록. 김항수, 동국여지승람ㆍ동국사략 ꡔ한국의 역 사가와 역사학ꡕ 상, 창작과 비평사, 1994. 4) 光州直轄市鄕土文化開發協議會 편, ꡔ訥齋 朴祥의 文學과 義理精神ꡕ, 1993. 그 외 박상에 관한 연구는 고영진의 논문( 호남 유학사상사에서의 박상의 위치 ꡔ역 사학연구ꡕ 28, 2006, 94~95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5) 朴光錫, ꡔ標題音註東國史略ꡕ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ꡔ歷史敎育論集ꡕ 32, 2004. 6) 한영우는 성종대 ꡔ동국통감ꡕ을 편찬한 김종직 계열의 영남사림에 비해 ꡔ동국사략ꡕ 은 김굉필 계열의 기호사림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ꡔ동국통감ꡕ에 비해 ꡔ동국 사략ꡕ에서 고려 말 절의 숭상과 이단 배척에 대해 좀 더 유연하며, 그 저변에는
278 지역과 역사 39호 한 구체적인 인식의 차이는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16세기 사찬사서인 ꡔ동국사략ꡕ과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서술체제가 다른 점은 인정하지만, 두 사서 모두 16세기라는 시대적 틀 속에 한정되어 이해 하다 보니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의 행적에 대한 두 사서의 차이가 드러나 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사찬사서인 ꡔ동국사략ꡕ은 사학사 관점에서 연 구되었으며 반면에 편찬자인 박상은 호남사림의 인물 연구에서7) 강조되다 보니,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의 행적을 두고 ꡔ동국사략ꡕ의 사학사 관점과 그 편찬자인 박상의 고려 말 인식이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중종ㆍ명종대 사찬사서의 고려 말 기사를 통하여 고 려 말 절의파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 정몽주에 대한 중종ㆍ명종대 사림의 인식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한다. 먼저,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을 통하여 중종대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고, 다음, 유희령의 ꡔ표 제음주동국사략ꡕ을 통하여 명종대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려 한다. 이 과정에 서 박상의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에 대한 인식 즉, 節義에 대한 개념을 살펴 볼 것이다. 그러면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에 대한 두 사서의 차이가 드러날 것이며, 아울러 성종대 ꡔ동국통감ꡕ과의 구체적인 인식 차이도 살펴볼 수 있 을 것이다. 그들이 처한 시대적, 지역적, 문화적 배경의 차이가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韓永 愚, 앞의 논문, 1980, 62쪽). 김항수는 ꡔ동국사략ꡕ은 고려 말 사대부들의 행적을 ꡔ동국통감ꡕ과는 다른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사림의 사상적 출자의식과 관련되는 것이며 충절과 지조를 중시하는 사림들의 도학의식이 심화 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김항수, 앞의 논문, 1994, 173~174쪽). 7) 고영진, 앞의 논문, 2006, 94~95쪽.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79 Ⅰ. 중종대 ꡔ동국사략ꡕ을 통해 본 정몽주 인식 1. 박상의 ꡔ동국사략ꡕ 편찬 17세기 김휴의 ꡔ해동문헌총록ꡕ 및 18세기 이덕무에 의하면 ꡔ동국사략ꡕ 은 모두 5부로서 권근, 박상, 이우, 유희령, 민제인 등의 것이 있다고8) 전 한다. 그 가운데 16세기 사서로서 현존하는 것은 박상(1474~1530)의 ꡔ동 국사략ꡕ과 유희령(1480~1552)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이다. 필자는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으로9) 저본을 삼아 살펴보았다. 박상이 ꡔ동국사략ꡕ을 저술하였다는 기록은 선행연구에서도 이 미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10) 그런데 문제는 언제 저술하였는지가 명확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상의 문집인 ꡔ눌재집ꡕ에 수록된 연보 에 의하면 박상이 충주목사로 있던 중종 17년(1522)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ꡔ눌재집ꡕ의 간행과 정을 <표 1>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표 1>을 보면 ꡔ눌재집ꡕ은 다섯 차례 간행되었고, 현재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ꡔ눌재집ꡕ은 헌종 9년에 간행된 것으로써, ꡔ눌재집ꡕ의 연보 는 고 8) ꡔ청장관전서ꡕ 권54, 앙엽기 1. 9)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은 규장각에 소장된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는 판본이 다른 것으로 6권2책(한貴古朝 50-142)과 6권6책(일산貴211-19)이 있다. 전자는 갑진자본을 복간한 목판본으 로, 내용 가운데 권6의 공민왕 9년~공민왕 11년 일부분, 공민왕 23년 일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반면, 후자는 갑진자본인 금속활자본으로 일산 김두종이 기증한 일산문고 완질이며, 권1의 첫 장에 訥齋撰 이라 필사되어 있다. 10) 선행연구에서 박상이 ꡔ동국사략ꡕ을 서술한 시기를 두고, 정구복은 중종 9년에 서 중종 23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으며(鄭求福, 앞의 논문, 1977, 59쪽), 김항수 는 박상의 연보 에 의거하여 중종 17년으로 언급하고 있다(김항수, 앞의 논문, 1994, 171~172쪽). 이후 연구자들은 김항수의 견해를 따라서 중종 17년으로 보고 있다(고영진, 앞의 논문, 2006, 112쪽. 도현철, 목재 홍여하의 역사서 편 찬과 고려사 인식 ꡔ한국사상사학ꡕ 43, 2013, 67쪽).
280 지역과 역사 39호 <표 1> ꡔ눌재집ꡕ의 간행과정 간행연도 간행 관련자 지역 수록 내용 비고 명종 2년(1547) 박우 임억령 금산 원집(구본) 서(박우) 숙종20년(1694) 김수항 이사명 이유 完營 원집 속집 발(김창협) 정조19년(1795) 서정수 完營 원집 속집 정조 전교 헌종 9년(1843) 조철영 광주 권수 권수별편 원집 속집 별집 부록 신본 고종12년(1875) 박원대 권수 권수별편 원집 속집 별집 부록 부집 세계 연보 연보서(송근수) 연보후 종 12년(1875) 10월 중간될 때 연보 의 序, 後와 함께 새롭게 수록된 것 임을 알 수 있다. 고종 12년 중간본에서 박상의 연보 를 자세히 살펴보면, 중종 17년(1522) 기사 말미에 두 절(ꡔ동국사략ꡕ의 찬술과 ꡔ매월당김시습 문집ꡕ 간행)은 연대가 확실하지 않아서, 잠시 여기에 붙여두며 ꡔ사략ꡕ은 산 실되었다. 라고 세주를 쓰고 있다.11) 그러므로 ꡔ동국사략ꡕ의 편찬시기를 중종 17년(1522)으로 단정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한편, 선행연구에서 박상의 ꡔ동국사략ꡕ 서술동기를 중종 9년(1514) 꿈 에서 이색을 만났다는 사실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역시 중요한 의미이지만 박상의 행적과 관련시켜 본다면 연산군, 중종대의 정치적 사안 들과 더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박상은 조광조와 더불어 기묘사림의 한 사람으로서,12) ꡔ눌재집ꡕ에는 그 의 행장 이 전하고 있다. 문인인 귤정 윤구가 박상이 죽은 이듬해 중종 26 년(1531)에 쓴 행장으로써,13) 이를 보면 자는 창세이고, 호는 눌재이며, 본관은 충주이다. 아버지 박지흥과 서종하의 딸인 어머니와 사이에서 3남 가운데 차남으로서 성종 5년(1474) 5월 18일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1) ꡔ눌재집ꡕ 부록 권4, 연보. 壬午世宗皇帝嘉靖元年 (중략) 此二節 年條未詳 姑附于此 史略佚 12) ꡔ대동야승ꡕ 기묘록보유 卷上, 朴祥傳. 13) ꡔ눌재집ꡕ 부록 권1, 行狀.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81 성종 19년(1488) 1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인 박정에게서 글을 배워 연산군 2년(1496) 23세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한다. 2년 뒤 연산군 4년(1498) 6월 형 박정마저 죽고 연산군 7년(1501) 28세에 문과 급제한 다. 하지만 박상의 불행은 문과 급제 2년 뒤 연산군 9년(1503) 장녀가 죽 고, 중종 원년(1506) 여름에 전염병으로 차녀와 삼남이 죽고, 동짓달에 부 인 유씨도 죽는 등, 연이어 일어났다. 박상은 자신의 불행을 한나라 성제의 총애를 받았던 반첩여가 쓴 哀悼賦 를 따라서, 중종 2년(1507) 자서전에 가까운 擬自悼賦 를 서술할14) 만큼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연산군 7년(1501) 문과 급제 이후 관로에 들어서니, 교서관 정자를 시작 으로 승문원 교검, 시강원 사서, 병조좌랑, 전라도도사 등을 두루 거치는 동 안,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중종반정 이듬해 사 간원 헌납으로 제수되고, 임피현령,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 관, 홍문관 부응교 등을 역임한다. 이후 담양부사, 의빈부 도사, 장악원 첨 정, 순천부사, 의빈부 경력 등을 거치는 동안, 중종 14년(1519) 또 한 차례 기묘사화를 겪게 된다. 중종 12년(1517) 10월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일 어난 기묘사화를 다행히 피할 수 있었지만 이후, 강릉부사, 선공감 정, 상주 목사, 충주목사, 사도시 부정,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중종 16년(1521) 신사무옥, 중종 19년(1524) 작서의 변이 일어난다. 중종 24년(1529) 사직 하여 광주 향리로 내려가 지내다가 그 이듬해 중종 25년(1530) 57세의 나 이로 4월 11일에 죽는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대표적 정국공신인 박원종(1447~1510), 성희안 (1461~1513), 유순정(1459~1512) 등이 모두 죽고 난 이후, 중종 초기 홍문관원 등 대간으로 등장하는 사림들에 의해 성리학 이해가 심화되어 가 는 과정에서, 박상 역시 중종 6년ㆍ7년 홍문관원이자 경연시독관으로서15) 14) ꡔ눌재집ꡕ 권1, 擬自悼賦 幷序. 15) ꡔ중종실록ꡕ 권14, 중종 6년 12월 경인(14) ; 권15, 중종 7년 1월 을축(19) ; 권16, 중종 7년 윤5월 병자(3).
282 지역과 역사 39호 활동하고 있었다. 이 시기 김정, 소세양, 홍언필, 황여헌 등과 호당에서 사 가독서하면서 교유를 가졌다. 중종 5년(1510) 4월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이 죽자, 그 다음 달 5월 李耔가 정몽주ㆍ길재의 사당 건립을 청하며,16) 10월 정언 이여가 정몽주 문묘종사를 상소하고,17) 중종 7년(1512) 11월 조강에서 소세양이 소릉복 위를 거론하게18) 된다. 한 달 뒤 유순정이 죽고 그 이듬해 중종 8년(1513) 3월 소릉이 복위되어19) 5월 종묘에 부묘되니,20) 먼저 왕실로부터 대의명 분이 바로 서게 된다. 다음으로 중종 12년(1517)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되고21) 중종 13년 경 연에서 이자가 용인에 있는 정몽주의 묘를 수축할 것을 아뢰며,22) 예조에 서 정몽주의 제문 짓기를 청하는 말이 나옴으로23) 인해, 그해 10월 용인의 정몽주 묘에 치제하며 그 제문을 남기니,24) 이제는 사대부에게 까지 대의 명분이 바로 서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 중종 10년(1515) 당시 담양부사이었던 박상은 동생 박우의 처남인 순창군수 김정과 함께 請復故妃愼氏疏 을 상소하게25) 된다. 이는 당시 중종의 구언교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중종 8년(1513) 소릉이 복 위되고 중종 10년(1515) 계비인 장경황후 윤씨가 죽고 중전의 자리가 비게 되자, 반정공신에게 의해 억울하게 폐출된 신씨를 중종의 비로 다시 복위하 자는 상소였다. 그 근본에는 성리학의 의리명분 가운데 부부의 의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명분이었으나, 차츰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중종반정 당시 반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ꡔ중종실록ꡕ 권10, 권10, 권17, 권18, 권18, 권29, 권32, 권34, 권34, 권22, 중종 중종 중종 중종 중종 중종 중종 중종 중종 중종 5년 2월 정해(1). 5년 10월 신축(18). 7년 11월 임진(22). 8년 3월 신사(12). 8년 5월 계유(6). 12년 9월 경인(17). 13년 3월 병오(7). 13년 10월 기축(23). 13년 10월 임진(26). 10년 8월 임술(8).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83 정공신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정치적 사안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이 는 중종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므로 당시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으로 써 박상과 김정은 유배를 가게 된다.26) 하지만 경연에서 지속적으로 박상 과 김정의 일은 언로를 막는 일임을 거론하게 되어, 그 이듬해 박상과 김정 의 죄는 용서되고27) 석방되어 서용되었지만,28) 중종 14년(1519) 조광조 등의 기묘사림들은 이에 대한 무죄를 다시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정국공신의 위훈삭제와 함께 빌미가 되어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즉, 이미 중종 원년(1506)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 잡으려는 중종반정, 중 종 5년(1510) 정언 이여의 정몽주 문묘종사 상소, 중종 7년(1512) 소세양 의 소릉복위 상소, 중종 8년(1513) 소릉 복위, 중종 10년(1515) 폐비신씨 복위상소, 중종 12년(1517) 정몽주 문묘종사, 중종 13년(1518) 정몽주의 묘 치제, 소격서 혁파, 중종 14년(1519) 현량과 실시 및 위훈삭제 등 대의명 분에 따른 성리학 이해가 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 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조광조 사사, 현량과 폐지, 중종 16년(1521) 신사무옥 등은 중종 초반 등장한 사림들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켰다. 이 무렵 박상은 중종 15년(1520) 선공감 정으로서 간교한 무리들이 불법 으로 양민을 점유하는 바람에 양호가 줄어듦을 개탄하는 상소를 아뢰기 도29) 하며, 중종 16년(1521) 충주목사를 역임할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한 림수찬 당고가 조선으로 오게 되자 제술관으로 뽑혀서30) 당고와 화답하는 많은 시를 남기고 있다. 중종 19년(1524) 충주목사로서 청백리에 포상되어 향표리를 하사받고,31) 중종 21년(1526) 문과 중시에서 장원으로 선발되 는32) 등 명성이 드러날 무렵, 정국은 중종 19년(1524) 작서의 변이 일어나 ꡔ중종실록ꡕ 권22, 중종 10년 8월 무인(24). ꡔ중종실록ꡕ 권25, 중종 11년 5월 무자(8). ꡔ중종실록ꡕ 권26, 중종 11년 11월 경인(13). ꡔ중종실록ꡕ 권41, 중종 15년 12월 을유(1). ꡔ눌재집ꡕ 속집 권1, 華使翰林修撰唐皐 兵科給使史道 奉新皇帝詔來 文聲首至 本國選作者 余亦辱數 自中原赴京城 辛巳. 31) ꡔ중종실록ꡕ 권51, 중종 19년 9월 계유(12). 26) 27) 28) 29) 30)
284 지역과 역사 39호 서, 중종 22년(1527) 경빈 박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복성군의 작호를 삭탈하게 된다.33) 그리고 2년 뒤 박상은 사직을 하고 향리로 내려온다. 그러므로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에는 관로에 들어선 이후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를 비롯하여 중종대의 정치적 여러 사안들이 모두 반영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성종대 ꡔ동국통감ꡕ의 내용을 축약한 사서이지만 편찬자의 입장이 다른 만큼 단순한 축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상이 죽기 한 해전 중종 24년(1529)에 쓴 이문호공34)의 신도비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략) 삼가 동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의 말에 호걸이 봉기하여 각기 토 지를 점거하고 군장이 되어 그 지역을 호령하였다. 고려의 태조가 통합하여 州 府郡縣의 吏와 其人으로 分屬시키니 본조에 이르러서도 그 제도를 그대로 따랐 다. (중략) 35) 여기서 박상은 고려의 其人을 언급하고 있다. 중종 당시 동국의 역사라 함은 ꡔ삼국사기ꡕ, ꡔ고려사ꡕ, ꡔ고려사절요ꡕ, ꡔ삼국사절요ꡕ, ꡔ동국통감ꡕ 등 을 들 수 있다. ꡔ고려사ꡕ 선거지에서 고려 초기 향리의 자제를 선발하여 개 경에 인질로 두는 한편, 그 향리의 사정에 대해 물어보려고 대비한 이를 일 컬어 기인이라고36)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ꡔ고려사절요ꡕ, ꡔ동국통감ꡕ은 고 려 고종 43년 2월 기사에서 고려 초기 주군의 향리 자제를 선발하여 개경에 인질로 두었는데 이를 기인이라 일컫는다는37) 내용이 있다. ꡔ동국사략ꡕ 역 시 고려 고종 43년 기사에서 ꡔ고려사절요ꡕ, ꡔ동국통감ꡕ과 같은 내용이 있 32) ꡔ중종실록ꡕ 권57, 중종 21년 10월 무진(18). 33) ꡔ중종실록ꡕ 권58, 중종 22년 4월 정묘(21). 34) 문호공은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 이양중의 현손인 이점(1446~1522)이다. 자는 숭보이다. 성종 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갔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되었다 가 중중반정으로 석방된 인물이다. 35) ꡔ눌재집ꡕ 별집 권1, 李文胡公神道碑銘 幷序. 36) ꡔ고려사ꡕ 권75, 선거지 3, 기인. 37) ꡔ고려사절요ꡕ 권17, 고종 43년 2월. ꡔ동국통감ꡕ 권33, 고종 43년 2월.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85 다.38) 그러므로 선행연구에서 박상이 언급한 동국의 역사를 ꡔ동국사략ꡕ으 로 보고, 적어도 중종 23년(1528) 이전에 ꡔ동국사략ꡕ이 편찬되었다고 하는 것은39) 무리가 따른다. 중종 24년(1529) 박상이 언급한 동국의 역사는 ꡔ고려사ꡕ, ꡔ고려사절요ꡕ, ꡔ동국통감ꡕ 등일 것이며, 이 시기 ꡔ동국사략ꡕ을 편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 다. 그리고 이는 ꡔ동국사략ꡕ이 ꡔ동국통감ꡕ을 단순히 축약한 사서가 아니라 다른 사서도 참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반증이다. 한편, ꡔ동국사략ꡕ의 고려 말 기사를 보면 ꡔ동국통감ꡕ과는 달리 박상의 개인적인 견해를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박상의 절의에 대한 개념 이 성종대 ꡔ동국통감ꡕ 편찬자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ꡔ눌재집ꡕ을 살펴보면 고려 말 인물로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이행 등이 언급되고 있 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권2, 驪江長短歌 贈玄穆上人歸彌勒寺 ② 권2, 錦南贈仲野行二十韻 ③ 속집 권1, 友人投書乞舟歸漢州 以詩爲答 ④ 속집 권1, 宿驪州神勒寺留別靈運 ⑤ 속집 권2, 表大博斌告忙請行走筆贈之 ⑥ 속집 권3, 書烏林驛 ⑦ 속집 권4, 麟齋集跋 ⑧ 별집 권1, 夢牧隱李先生 ⑨ 별집 권1, 觀察使李公墓碣銘幷序 이 가운데 ③에서는 정몽주의 시를 언급한 구절이 있고, ⑤에서는 물맛 을 분별할 줄 아는 기우자 이행을 언급하고 있다. 그 외 나머지 모두 이색과 이숭인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박상은 갑술년 즉 중종 9년(1514) 9월 28일 목은 이색을 꿈에서까지 만나고, 그 감흥을 시로 남기고 있다.(⑧) 그리고 충주목사로 있을 당시, 이색의 후손인 음애 李耔(1480~1533)가 찾아와서, 38) ꡔ동국사략ꡕ 권4, 고종 43년. 國初 選州郡鄕吏子弟 爲質於京 謂之其人 39) 鄭求福, 앞의 논문, 1977, 59~60쪽.
286 지역과 역사 39호 고조 이종학의 문집에 붙일 발문을 청하여 ꡔ인재집ꡕ의 발문을 서술하였으 며,(⑦) 또 이자의 형인 李耘(1469~1535)에게도 시를 증정하고 있다.(②) 이렇듯 목은 이색의 후손들인 이예견, 이운, 이자 부자들과는 당대에 교 유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충주목사 역임 당시 지리적으로 한산과 가까우 며, 또한 여주 신륵사와도 가까워서 목은 이색을 기릴 여건이 많은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색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다고 생각된다. (중략) 대저 할 수 있는 것을 알고 하는 사람은 시세의 변화에 편승하는 사 람이고, 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하는 사람은 한결같은 사람이다. 바야흐로 오 백년의 국운이 다함에 사람과 천명이 이미 사라졌는데도 인재 부자의 본조(고 려)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소용돌이치는 파도 속에서도 끄떡없고, 무서운 형벌 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황량한 죽을 곳에 버려졌어도 그 분한 심정을 떨치고 말 로 드러낸 것은 스스로 송백과 같은 단단한 절개를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것이었 다. 폐하고 흥하는 것은 원래 數가 있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은 어찌 처음부터 할 수 없는 일임을 몰랐겠는가. 그리고 북산에서 장차 고사리를 캐리라. 라고 한 것은 역시 그 지조가 있었음을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내가 전에 담양 부사로 있을 때, 꿈에 목은선생을 뵙자 책을 주시어 그 반을 삼켰던 일이 있다. 이제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 백 여 년에 우연히 꿈속에서 만나니 그것이 무슨 징조인지를 몰라서 그 일을 시로써 대충 적어 두었다. 지금 충주에 있는 때에 이르러 차야(필자주; 李耔의 자)로부터 부탁을 받아 인재의 글에 발문을 쓰게 되었으니 전날의 꿈은 오늘을 위해 있었던 것 같다.(중략) 40) 박상은 고려 말 이색ㆍ이종학의 부자가 고려의 국운이 무너져 할 수 없음 을 알고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고려의 국운을 지키려 하였던 절의를 칭 송하고 있다. 이는 ꡔ동국통감ꡕ에서 이색에 대한 평을 지조와 절의가 굳지 못해 크게 드러난 것이 없고 학문이 순일하지 못해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바가 되었다. 라고41) 하는 것에 비해, 박상은 ꡔ동국사략ꡕ에서 그 구절을 대신하여 정몽주와 더불어 시종일관 같은 마음 40) ꡔ눌재집ꡕ 속집 권4, 인재집발. 41) ꡔ동국통감ꡕ 권56, 공양왕 4년 4월. 然志節不固 無大建白 學問不純 崇信佛法 爲世所譏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87 으로 신하의 절의를 변치 않았다. 라고42) 서술하고 있다. 참으로 대조적인 평이다. ꡔ동국통감ꡕ에서 정몽주의 순절이나 길재의 항절과는 다르게 이색ㆍ이종 학 부자의 절의를 말하고 있다. 박상이 ꡔ인재집ꡕ 발문을 저술하기 한 해 전, 중종 17년(1522) 도연명의 문집인 ꡔ靖節陶徵士詩集ꡕ의 발문을 쓰고 있다. (중략) 아아, 그 시를 암송하고 그 책을 읽고서도 그 사람됨을 모를 수 있겠 는가. 그 때에 할 수 없음을 알고서 고답적으로 멀리 물러나니, 이는 현자가 세 상을 피하는 뜻이요. 종주국이 바뀌어서 죽음을 맹세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이 는 충신이 두 성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대저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는 것 은 서산에서 고사리를 캔다는 뜻이고, 옷이 젖고 진나라의 삼랑을 노래한 것은 임금을 배반하고 원수를 섬기는 것을 풍자한 깊은 뜻이 있고, 荊軻에게 마음을 기대다는 것은 목욕재계하고 나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칠 도끼를 청한 뜻이 있다. 이른바 풀 속에서 유기노가 나올까 두렵고, 버들개지가 떨어질 때 장강 물결치는 동쪽으로 가는 것만 못하다. 라는 말이 있다. 선생은 관리들에게 아부 아첨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 점을 살피지 못하고 깊이 숨어서 세상을 도피하는 것이라 여기니, 이는 그 거친 자취만을 본 것일 뿐이다. 그러 한 즉 선생을 이해한 사람은 오직 주자뿐이니, ꡔ강목ꡕ에서 선생을 높이 존중하 지 않았는가. 바라건대 류령이 酒德頌을 읊은 마음으로 모두 (도연명처럼) 돌 아가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면 한다. 이 점이 내가 애써 그 시문을 구해 판각해 널리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여 감회를 일으키고자 한 까닭이다. (중략) 43) 도연명은 관리들에게 아부 아첨하지 않으려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현자의 모습을 보이며, 진나라가 망하고 남조의 송 문제가 그를 불렀을 때 나아가 지 않는 충신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도연명이 귀 거래사를 읊으며 향리로 돌아가 지내는 것에 대해 세상을 등지고 현실을 도 피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주자만이 도연명의 참 뜻을 알고 ꡔ강목ꡕ에서 그를 높이 존중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박상은 이색 부자의 절의를 도연 명의 출처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42) ꡔ동국사략ꡕ 권6, 공양왕 4년. 與鄭夢周 同心終始 不變臣節 43) ꡔ눌재집ꡕ 속집 권4, 정절도징사시집발.
288 지역과 역사 39호 일찍이 도연명은 고려ㆍ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는 인물로서, 본명은 잠이며, 자는 원량이고, 호는 오류선생이라 칭하기도 한 다.44) 도연명이 일찍이 팽택령을 역임할 때, 督郵가 현으로 행차하자, 현의 아전이 도연명에게 속대를 매어 보여주어야 한다고 전하니, 도연명은 내가 어찌 (현령의 녹봉) 五斗米를 받자고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냐. 하고는 귀거래사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고, 그 날로 관직을 그만두고 떠나 버렸다. 그 후에 유유가 왕위를 찬탈하여 진나라의 국운을 바꾸려하자 두 성을 섬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다시 출사하지 않았다. 송 문제(유 유)가 특별히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죽어서 靖節徵士라는 시호 를 얻었다라고45) 한다. 그러므로 주희는 도연명의 진나라에 대한 절의에서 정절징사의 의미를 찾고 있다. 그러므로 박상이 ꡔ동국사략ꡕ에서 이색의 절의를 강조한 것은 주자가 도 연명을 현자와 충신으로 칭송한 뜻을 이어받아, 정몽주의 殉節, 길재의 抗 節과 마찬가지로 이색의 靖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46) 이는 성종대 ꡔ동국 통감ꡕ에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절의의 개념이다. 2. ꡔ동국사략ꡕ을 통해 본 정몽주 인식 중종대 정국은 소릉복위에서 정몽주 문묘종사에 이르기까지 대의명분에 따른 기묘사림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박상은 중종대 기묘사림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중종 10년(1515) 폐비신씨 복위상소를 올리고, 소릉의 기일이 44) ꡔ진서ꡕ 권94, 열전 64, 도잠. 45) ꡔ초사후어ꡕ 권4, 귀거래사. 歸去來辭者 晉處士陶潛淵明之所作也 潛有高志 遠識 不能俯仰 時俗嘗爲彭澤令 督郵行縣至 吏白當束帶見之 潛歎曰 吾安能爲 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耶 卽日解印綬去 作此詞以見志 後以劉裕將移晉祚 恥事 二姓 遂不復仕 宋文帝時特徵不至 卒諡靖節徵士 46) 조선후기 간행된 기우자 이행의 문집인 ꡔ기우집ꡕ에서 두문동 72현을 거론할 때 순절, 항절, 정절 모두 그 절의는 한 가지 의미라고 한다(김보정, 조선초기 절 의파 사대부의 정치적 성향과 사상,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Ⅱ장 1절 참조).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89 라 하여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는47) 등 대의명분에 따른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 ꡔ동국사략ꡕ의 편찬 역시 대의명분에 따른 입장의 표명과 동시에 그에 따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ꡔ동국사략ꡕ은 기묘사림의 입장을 대변 하는 사찬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박상은 ꡔ눌재집ꡕ에서 이색, 이숭인의 문장과 그 학문을 칭송한데 비해, 정몽주에 대한 언급은 신륵사는 여흥강에 있고 청심루에는 포은의 유명한 시가 있다. 라고 세주를 쓰고 있는 것이48) 전부이다. 친구가 배를 빌어 타 고 한양으로 돌아간다고 편지를 보내왔기에 시로써 화답을 한 것인데, 그 내용 가운데 流頭에는 가흥창에 배를 정박하기가 어려우니 여주강에 있는 청심루 아래 배를 정박하기 좋다고 일러주면서, 정몽주의 시 한 구절 回首 滄波白鳥雙 을 인용하며 그 세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시구는 박상 당대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絶唱이라는 점이 다.49) 그리고 流頭는 고려 사람들이 夏季望 즉 음력 6월 보름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것을 말하며, 禮成江曲은 고려시대 정절을 지킨 여자의 일이라고 또한 세주를 쓰고 있다. 여기서 고려의 풍속인 유두와 고 려의 가요인 예성강곡을 언급하면서 정몽주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 은 정몽주는 이미 고려를 상징하는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를 염두에 두고 그의 말년에 저술한 ꡔ동국사략ꡕ을 통하여 기묘 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ꡔ동국사략ꡕ에 보이는 정몽주 관련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47) ꡔ눌재집ꡕ 권4, 送石川. 48) ꡔ눌재집ꡕ 속집 권1, 友人投書乞舟歸漢州 以詩爲答. 49) 정몽주 시의 전체 원문은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 권7, 여주목. ꡔ포은집ꡕ 권2, 제여흥루. ꡔ동문선ꡕ 권22, 제여흥루 등에서 전하고 있다. 鞍馬東西底事成 秋風汲汲又南行 驪江一夜樓中宿 臥聽漁歌長短聲 煙雨空濛萬一江 樓中宿客夜開窓 明朝上馬衝泥去 回首滄波白鳥雙
290 지역과 역사 39호 <표 2> ꡔ동국사략ꡕ의 고려기 에 실린 정몽주 관련 내용 연도 ꡔ동국사략ꡕ의 고려기 에 실린 정몽주 관련 내용 史臣曰 (중략) 문충 정몽주는 제문을 지어 애도하기를, 태산과 같은 공으로 하여 공민11 금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다. 고 하니, (중략) 공민16 우1 우3 우4 우9 (중략) 또 경술지사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을 뽑아 서 모두 학관을 겸하게 하였다. (중략) 이색은 매우 칭찬하기를, 정몽주의 논리가 횡설수설 하나, 이치에 합당 하지 않음이 없다. 하고, 동방 이학의 비조로 추대하였다. (중략) 성균대사성 정몽주 등 역시 원의 사신을 영접하는 것은 불가하다 고 상서하였다. (중략) 또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임효선, 염정수, 염흥방, 박형, 정사 도, 이성림, 윤호, 최을의, 조문신 등이 자기를 해치려고 꾀하였다 하여 아 울러 귀양을 보내었다. 전 대사성 정몽주를 일본으로 보냈다. 그때 조정에서 정몽주를 시기하였던 고로 일본으로 보냈다. 정몽주가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정당문학 정몽주를 경사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고, 또 (공민왕의) 시호와 왕위 승습을 청하게 하였다. 이때에 본국에서 명나라 조정과 틈이 많이 생겨, (중략) 임견미가 즉시 정몽주를 천거하니, (중략) 드디어 출발하였다. 정몽주가 김유, 홍상재, 주겸 등과 더불어 경사에서 돌아왔다. 우11 처음에 정몽주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틀 길을 하루에 가서 節日에 미쳐 표문 을 올리니, (중략) 우12 또 정몽주를 경사에 보내어 세공을 견감해줄 것을 청하였다. 정몽주가 奏對하기를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여 5년 동안의 바치지 않은 것과 증액해 정한 세공의 常數를 삭제하였다. 우가 매우 기뻐하여 衣帶와 鞍馬를 내려 주었다. 공양1 신종 7대손 瑤를 정창부원군에 봉하고 우리 태조가 심덕부, 정몽주 등과 더불어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는데, 4년간 재위하였다. 정몽주가 진언하기를, 유자의 도는 (중략) 공양2 (중략) 당시에 왕이 승려인 찬영을 맞아들여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므로, 정 몽주의 말이 여기에 미친 것이었다. 성헌과 형조에서 아들 창을 세우고 신우를 맞이하려고 했던 것을 열거하 며 김종연, 윤이, 이초, 왕익부의 당을 논핵하여 아뢰니, 왕이 정몽주 등을 공양3 불러 의논하였는데, 정몽주가 말하기를, (중략) 정몽주가 왕에게 아뢰어 令을 만들었는데, (중략)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91 태조가 황주에 나아가 세자를 맞이하러 나갔다가 마침내 해주에서 사냥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중략) 유독 정몽주만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 는 기색이 있었다. 정몽주는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중외의 민심이 (태조 에게) 돌아가는 것을 꺼렸는데, (중략) 정몽주가 집으로 돌아가기에 이르 자, 태종이 조영규 등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격살하고 집 을 적몰하였다. 공양4 정몽주는 영일현 사람이니, 인품이 호매하고 절륜하며,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성리학을 정밀히 연구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고, 강설이 고상하여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뛰어 넘었다. 우리 태조 가 평소에 그를 중히 여겨 매양 출전할 때마다 반드시 그와 함께 갔으며, 여러 번 추 천하고 발탁하여 함께 올라 재상이 되었다. 당시 나라에 사고가 많아 기무가 광범위 하고 번거로웠는데, 정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큰 문제를 해결함에 말소리와 얼굴 빛이 동요됨이 없었고, 좌우에서 말을 응답함이 모두 그 적당함을 얻어서 많은 업적 을 세웠으니, 당시 사람들은 왕을 보좌할 인재라고 일컬었다. 당시 풍속이 삼년상을 시행하지 않았는데 정몽주가 삼년 여묘살이를 하고 비로소 사서인들로 하여금 ꡔ주자 가례ꡕ를 본받아 가묘를 세우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또 도성 안에는 5부에 학당을 세우고 도성 밖에는 향교를 설립하여 유학을 일으켰으며, 이외에도 의창을 세우고 수참을 건설한 것은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다. 그가 저술한 시와 문장은 호방 하고 준결하였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조준의 충성과 공로를 논찬하고 정몽주의 죄를 극 렬하게 진술하고 (중략)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에서 細字의 附註로 표기된 부분은 작은 글씨로 씀.)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은 연도 표기에서 年만 표시되어 있고, 月ㆍ日 등의 표시가 없어서 ꡔ동국통감ꡕ과 비교해 보면 시기가 더러 바뀐 경우도 있으나, ꡔ동국통감ꡕ의 연도를 참조하여 두 자료의 고려기 에 있는 정몽주 관련 기 사 항목을 비교하여 보았다.50) 50)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 ꡔ동국통감ꡕ의 정몽주 관련기사 항목 비교 연도 공민왕 11 공민왕 16 공민왕 22 우왕 1 우왕 3 우왕 4 ꡔ동국사략ꡕ 3월 6월 1월, 5월, 7월 9월 7월 ꡔ동국통감ꡕ 2월, 3월 6월 7월 1월, 5월, 7월 9월 7월
292 지역과 역사 39호 그 결과, 명나라 사행을 갔었던 기사 일부가 삭제되기도 하였지만,51) 특 히 ꡔ동국사략ꡕ의 공양왕대 정몽주 관련 내용들이 다른 시기에 비해 현저하 게 축소되거나 삭제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공양왕 2년 1월 경연에서 儒道에 대해 진언한 기사, 공양왕 3년 8월 창왕을 세우는데 동조한 이색을 변론한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 축약되거나 삭제되었다. ① 공양왕 1년 5월 도평의사사에서 전제를 의논하는 기사. ② 공양왕 1년 6월 예문관대제학으로 임명된 기사. ③ 공양왕 1년 9월 창왕이 정몽주의 건의에 따른 기사. ④ 공양왕 1년 12월 9공신 충의군으로서 전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은 기사. ⑤ 공양왕 2년 1월 지경연사로 임명되고 정관정요의 서문을 강론하게 한 기사. ⑥ 공양왕 2년 7월 찬성사 정몽주의 뜻에 따라 대사면령을 내린 기사. ⑦ 공양왕 2년 8월 헌부와 형조에서 윤이 이초당의 죄를 요청하데 대해 반대 하는 기사. ⑧ 공양왕 2년 11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된 기사. ⑨ 공양왕 2년 12월 김종연의 옥사 관련 기사. ⑩ 공양왕 3년 1월 ꡔ통감강목ꡕ에 의거하여 본조의 역사 편수를 건의한 기사. ⑪ 공양왕 3년 7월 구언교지 함에 따라 올린 김초의 글을 용서하라는 정몽주 의 상소. ⑫ 공양왕 3년 7월 공양왕대 5죄에 대한 재심사를 요구하는 정몽주의 상소. 우왕 8 우왕 9 우왕 10 우왕 11 우왕 12 우왕 13 공양왕 1 공양왕 2 공양왕 3 공양왕 4 우왕 10년 7월로 대신 4월 2월, 7월 1월 8월 3월, 4월, 5월 4월, 11월 1월 7월 4월 2월, 7월 12월 5월, 6월, 9월, 12월 1월, 7월, 8월 11월, 12월 1월, 7월, 8월, 12월 3월, 4월, 5월, 6월 51) 정몽주는 명나라 사행을 6번 간다. 그 가운데 우왕 8년, 9년, 13년의 사행은 요 동에서 입경하지 못하고 돌아온다(김보정, 포은 정몽주의 사상 성리학 이해와 관련하여- ꡔ한국사상과 문화ꡕ 39, 2007, 163~165쪽).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에 서는 공민왕 22년 사행과 입경하지 못한 우왕 8년, 9년, 13년 사행은 모두 삭제 되어 있다.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93 ⑬ 공양왕 3년 12월 안사공신의 칭호가 더해진 기사. ⑭ 공양왕 4년 4월 조준, 정도전 등의 처벌을 요구한 김진양 등의 요청에 대 한 기사. ⑮ 정몽주가 피살되는 전후 정황 기사. ⑯ 정몽주의 머리가 저잣거리에 효수된 기사. ⑰ 공양왕 4년 5월 정몽주의 죄를 구체적으로 극간한 사헌부의 상소. ⑱ 공양왕 4년 6월 정몽주의 죄를 다시 말한 헌부의 상소. 이 가운데 ①, ②, ③의 기사는 공양왕 즉위 이전, 창왕 때의 일이라서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⑮의 정몽주가 피살되는 전후 정황 기사와 ⑰의 기사 는 상당히 축약된 반면, 나머지는 모두 삭제된 기사들이다. 공양왕대는 정 몽주가 사행과 종군으로 점철된 생활에서 벗어나 예문관대제학, 찬성사, 수 문하시중, 충의군 및 안사공신 등 가장 왕성하게 정치활동을 하는 시기이 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정몽주의 활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기인데, 왜 박 상은 ꡔ동국사략ꡕ에서 공양왕대 기사를 거의 다 삭제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중종 12년(1517) 정몽주의 문묘종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당시 정몽주의 문묘종사 논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前史에서 직접 僞辛을 섬 겼으니 크게 흠이 있다. 라는52) 구절이었다. 이에 대해 기묘명현 조광조 (1482~1519)는 조강에서 정몽주의 절의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신우의 일은 당시 사람들도 신씨인지 왕씨인지 분간하지 못하였으며, 정몽 주는 신우에게 벼슬하여 부귀공명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니 선유의 말에도 과연 잘못이 있습니다. 공양왕을 책립한 뒤에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으니, 정몽주가 어질다는 것은 대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중략) 53) 또한, 박상과 친분이 있는 기묘사림인 김정, 이자 역시 정몽주가 위신을 섬긴 사실 여부보다도 고려 왕씨를 위해 절의를 지킨 사실을 더 강조하고 있다.54) 52) ꡔ중종실록ꡕ 권29, 중종 12년 8월 신유(18). 53) ꡔ중종실록ꡕ 권29, 중종 12년 8월 갑인(11). 54) ꡔ중종실록ꡕ 권29, 중종 12년 8월 을묘(12) ; 권29, 중종 12년 8월 신유(18).
294 지역과 역사 39호 그러므로 정몽주가 공양왕의 책립에 참여하고 정치 활동하는 것은 우ㆍ 창왕이 신씨임을 알고도 섬겼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므로, 이미 문묘종사 논 의에서 문제가 된 빌미를 차후에도 논란거리를 주지 않으려고 한 의도가 아 닌가 싶다. 후일, 박상은 선조대 서인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박상의 조카 박순(1523~ 1589)은 선조대 영의정을 역임한 서인의 영수였음을 감안할 때,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은 선조대 이후 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서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조대 이후 서인들의 사서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Ⅱ. 명종대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통해 본 정몽주 인식 1.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편찬 17세기 김휴의 ꡔ해동문헌총록ꡕ 및 18세기 이덕무에 의하면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모두 12권으로써 먼저 綱을 제시하고 뒤에 그 사실 을 서술하였으며, 중국과 동국(우리나라)의 전수도 전부와 역대의 國都, 分 理, 세계 등의 圖와 세년가를 卷頭에 배치하였다고55) 전하고 있다. 필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저본으로56) 하 55) ꡔ청장관전서ꡕ 권54, 앙엽기 1. 56)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권5, 9-11(한貴古朝50-183)과 11권4책(古211-62-1-4)이 있다. 전자는 초판본으로 권5, 9, 10, 11 등만 전해지고 있는데, 권9의 첫 부분과 권11의 마지막 부분은 없고 전반적으로 훼손된 부분이 많았다. 반면, 후자는 일본 동경 존경각문고 소 장본을 복사한 영인본으로, 역시 초판본이나 천지미분삼황오제, 역대국도지도, 역대분리지도, 범례, 총목, 권1~권11 등의 순서로 서술되어 있다. 1985년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국내외에 현존하는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삼판본을 저본으 로 하고, 초판본과 재판본을 참조하여 ꡔ교감 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간행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95 여 살펴보았다. 현재까지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범례 앞부분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본 동경 존경각문고에 소장된 ꡔ표제음주동국 사략ꡕ에서 天地未分三皇五帝, 歷代國都之圖, 歷代分理之圖 등이 확인되고 있다.57) 현존하는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초판본, 재판본, 삼판본 등 세 차례 개정 증보하면서 간행되었는데, 초판본과 재판본은 모두 11권이나, 삼판본은 권 6의 내용이 권6과 권7로 분권되면서 권차 수가 차례로 밀려 모두 12권이 되 었다.58) 그러므로 김휴, 이덕무가 말하는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삼판본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희령이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편찬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 으나, 현존하는 판본으로 간행된 시기를 살펴보면 초판본은 중종 15년(1520) 부터 중종 17년(1522)까지 개성부도사를 역임하던 때에서 중종 19년(1524) 부터 중종 24년(1529)까지 영천(지금의 영주)군수를 역임하던 때에 이르 는 시기에서 편찬 간행되었으리라 보고, 재판본은 중종 28년(1533)부터 중 종 33(1538)까지 5년간 대구부사를 역임하던 시절 개정되어 간행되었으리 라 보며, 삼판본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명종 즉위년에서 명종 7년 죽을 때 까지의 유배생활 당시 개정 증보되어, 그의 사후 명종 후반에서 선조 13년 이전의 시기, 지방이 아닌 중앙에서 간행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59) 한편, 유희령은 박상과는 달리 선행연구가 거의 전무한 편이다. 다만,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살핀 사학사 관점에서 부수되는 정도이다.60) 유희 령의 문집인 ꡔ몽암집ꡕ이 있으나 개인소장으로 인해 그의 행적을 살펴보기 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57)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ꡔ해외전적문화재조사목록: 일본 존경각문고 소장 한국본ꡕ, 2006, 45쪽. 58) 정구복, 해제 ꡔ교감 표제음주동국사략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7~12쪽. 59) 천혜봉,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권5, 9-11(한貴古朝50-183) ꡔ선본해제ꡕ Ⅴ, 국립 중앙도서관, 2003, 214~217쪽. 60) 鄭求福, 앞의 논문, 1977, 64~65쪽. 韓永愚, 앞의 논문, 1980, 158~159쪽. 정구복, 앞의 책, 1985, 4~6쪽. 朴光錫, 앞의 논문, 2004, 239~242쪽.
296 지역과역사 39 호 유희령은진주유씨유문통 (1438~1498) 의손자이며, 아버지유인귀 (1463~1531) 와어머니이장생의딸사이에서성종 11년 (1480) 에태어났다. 자는원로, 자한이고, 호는몽암, 몽와, 몽로, 몽초, 기와등다양하다. 연산 7년 (1501) 22세에진사시를합격하고, 중종 11년 (1516) 37세의나이로별과문과에급제하여관직으로나아가게된다. 이후, 예문관검열, 봉교, 정언, 61) 병조좌랑을거치면서승승장구하나, 중종 14년 (1519) 40세에기묘사화를만나관직을그만두고문의로은거한다. 이듬해중종 15년 (1520) 사간원정언으로발탁되어, 다시정계로돌아온다. 당시중종대정국은기묘사화이후, 중종 16년 (1521) 신사무옥, 중종 19 년 (1524) 작서의변등으로혼란한정국가운데기묘사림들이위축된시기이다. 이시기유희령은개성부도사, 영천군수등외직으로나가있다가, 중종 22년 (1527) 경빈박씨를폐하여서인으로삼고, 복성군의작호를삭탈함으로써 62) 중종대정국도다소소강상태일무렵영천군수의임기를마치고, 중종 24년 (1529) 사섬사첨정, 중종 25년 (1530) 교서관교리등내직으로돌아온다. 이후중종 28년 (1533) 5월경빈박씨와복성군이사사되고 63) 중종 32년김안로가사사되는 64) 정국에서다시대구도호부사로나가있다가, 중종 33 년 (1536) 기묘사화의관련자들이서용될 65) 무렵, 유희령역시내직인성균관사성을역임하고있다. 66) 그리고 4년뒤중종 37년 (1540) 나이 63세에공조참의로서명나라성절사로가서 67) 그해 11월돌아온다. 68) 61) ꡔ 중종실록 ꡕ 권 34, 중종 13 년 11 월계축 (17). 62) ꡔ 중종실록 ꡕ 권 58, 중종 22 년 4 월정묘 (21). 63) ꡔ 중종실록 ꡕ 권 74, 중종 28 년 5 월을축 (23) ; 권 74, 중종 28 년 5 월무진 (26). 64) ꡔ 중종실록 ꡕ 권 85, 중종 32 년 10 월계유 (27). 65) ꡔ 중종실록 ꡕ 권 87, 중종 33 년 2 월갑자 (20) ; 권 87, 중종 33 년 2 월을축 (21) ; 권 87, 중종 33 년 2 월무진 (24) ; 권 87, 중종 33 년 2 월기사 (25) ; 권 87, 중종 33 년 2 월계유 (29). 66) ꡔ 중종실록 ꡕ 권 88, 중종 33 년 8 월신축 (1). 67) ꡔ 중종실록 ꡕ 권 98, 중종 37 년 5 월정미 (27).
중종 명종대정몽주인식 297 그러나인종의외삼촌인윤임과명종의외삼촌인윤원형과의갈등이명종즉위년 (1545) 을사사화로표출되게되고, 여기에서윤임과인척이었던숙부유인숙 (1485~1545) 이역모자로연루되면서, 유희령역시화를면치못한다. 당시나이가연로한점을감안하여유배의부당함을신하들이 6일동안여러차례간언하나 69) 결국섬으로유배되고, 이후금산으로옮겨져명종 7년 (1552) 73세의생을마감한다. 그는생애동안네차례의사화를겪게되는데, 특히, 중종대기묘사화, 명종대을사사화는숙부유인숙에게연좌되어직접그화를입게된다. 이러한과정에서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을세번이나편찬한것을보면거의 10 년마다개정한셈이된다. 특히, 삼판본은의미가있다고본다. 63세의나이로성절사를다녀오면서중국문묘에모신선성, 선현의위차를적어왔는데그배열차서가조종의차서와달라서분분한논의가있었다. 70) 결과는예전의차서를따르는것으로결정되었지만, 유희령은 ꡔ표주음주동국사략 ꡕ 을편찬하는데그영향을받았을것이라생각된다. 또한, 명종즉위년 (1545) 을사사화는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의삼판본을편찬함에많은영향을주었으리라생각한다. 초판본및재판본과는달리삼판본에는 ꡔ동국통감 ꡕ의사론을훨씬많이인용하고있음이그반증이다. 2.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을통해본정몽주인식중종 14년 (1419) 기묘사화로조광조가사사되고, 현량과가폐지되는등정국내에서기묘사림의위상은약해지고, 이를더불어성리학이해의심화는다소주춤하게된다. 그러나중종 33년 (1539) 기묘사림들이중종말기 68) ꡔ 중종실록 ꡕ 권 99, 중종 37 년 11 월갑자 (18). 69) ꡔ 명종실록 ꡕ 권 2, 명종즉위년 9 월을해 (15) ; 권 2, 명종즉위년 9 월병자 (16) ; 권 2, 명종즉위년 9 월정축 (17) ; 권 2, 명종즉위년 9 월무인 (18) ; 권 2, 명종즉위년 9 월기묘 (19) ; 권 2, 명종즉위년 9 월경진 (20) ; 권 2, 명종즉위년 9 월신사 (21). 70) ꡔ 중종실록 ꡕ 권 99, 중종 37 년 12 월경자 (1) ; 권 101, 중종 38 년 11 월계묘 (3).
298 지역과 역사 39호 정국에 다시 서용되면서, 정몽주의 자손을 찾아 서용하라는 전교가 내려지 고,71) 중종 34년(1540) 유인숙은 전조의 정몽주가 처음 이학을 제창하였 는데, 근자의 학자들도 이학에 힘쓸 것을 아뢰는72) 등 차츰 성리학 이해를 심화시켜 나간다. 그로 인해 중종의 적장자인 인종이 대의명분에 따른 정통 성을 이어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미 왕위계승을 두고 중종 말기부터 시작된 인종을 지지하는 윤 임 중심의 대윤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윤원형 중심의 소윤과의 갈등은 인 종이 왕위에 오른 지 일 년도 채 안되어 승하하고,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 위하면서 을사사화로 표출된다. 명종 즉위년(1545)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 숙은 을사사화의 주모자로 몰려 화를 당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유인 숙은 유희령의 막내 숙부이다.73) 유인숙은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기의 모함을 받고 사사되며, 유인숙의 아들 네 명도 모두 연좌되어 참형을 당하였다.74) 당시 유희령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숙부 유인숙에게 연좌되어, 명 종 7년(1552) 유배지에서 억울하게 죽게 되는 을사사림이라 할 수 있다. 명종은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명종 초기는 문정왕후의 수렴 청정으로 인해 윤원형 등 소윤 중심의 정국이라 할 수 있다. 명종 8년(1553) 명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정국의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이는 정몽주의 서 원 건립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종대 정몽주의 문묘종사는 이루어졌지 만, 사당 건립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산되고 말았는데, 명종대 영천지방의 유생들이 정몽주의 제향서원을 건립하면서 사액을 요청 하게 된다. 명종 9년(1554) 6월 경상도 관찰사 정언각의 장계에서 시작된 정몽주 제향서원의 편액 하사와 서책, 노비, 전결 등의 요청은 11월에 가서 야 이루어지니, 안유의 소수서원의 예에 따라 지급되고, 임고서원 이라는 편액을 하사받게 된다.75) 임고서원의 설립은 선조대 이후 각 지역에서 설 71) 72) 73) 74) 75) ꡔ중종실록ꡕ 권87, 중종 33년 7월 정해(16). ꡔ중종실록ꡕ 권91, 중종 34년 9월 갑인(20). ꡔ명곡집ꡕ 권22, 贊成柳公神道碑銘. ꡔ명종실록ꡕ 권2, 명종 즉위년 9월 신미(11). ꡔ명종실록ꡕ 권16, 명종 9년 6월 계미(14) ; 권16, 명종 9년 6월 갑신(15) ; 권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299 립되는 정몽주 제향서원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한편, 유희령은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편찬을 통하여 대의명분에 따른 입장 표명과 그 나름 실천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유희령의 ꡔ표제음 주동국사략ꡕ은 을사사림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찬사서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통하여 명종대 을사사림의 정몽주 인식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고려기 에 수록된 정몽주 관련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3>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고려기 에 수록된 정몽주 관련 내용 연도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의 고려기 에 수록된 정몽주 관련 내용 (중략) 또 경술지사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을 뽑아서 모두 학관을 겸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관생이 불과 수십 명이었는데 (중 공민16 략) 이색은 매우 칭찬하기를, 정몽주의 논리가 횡설수설 하나, 이치에 합당 하지 않음이 없다. 하고, 동방 이학의 비조로 추대하였다. 우3 전 대사성 정몽주를 일본에 보내어 보빙하고, 또 왜적을 금할 것을 청하였 다. 이번 사행에서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조금도 어려 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중략) 돌아오게 되자 그곳에 사로잡혀 있던 윤명, 안우세 등 수백 인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또 삼도의 침략을 금하게 하였다. 왜인들이 칭송하고 사모하기를 마지않았다. 정당문학 정몽주를 경사에 보내어 성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이때에 본국에 우 10 서 명나라 조정과 틈이 많이 생겨, (중략)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틀 길을 하루에 가서 마침내 節日에 미쳐 표문을 올렸다. 처음으로 경연관을 두어 심덕부와 우리 태조를 영경연사로 삼고, 정몽주와 정도전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왕이 ꡔ정관정요ꡕ를 보고자 하여 정몽주에게 그 서문을 강론하도록 명하니, 강독관 윤소종이 나아와서 말하기를, 전하께 공양1 서 중흥하셨으니, 마땅히 이제 삼왕으로 법을 삼을 것이고, 당 태종은 족히 취할 것이 못됩니다. 청컨대 ꡔ대학연의ꡕ를 읽으시어 제왕의 도리를 넓히소 서.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겼다. 17, 명종 9년 7월 기유(11) ; 권17, 명종 9년 11월 기해(2).
300 지역과 역사 39호 당시 정몽주는 우리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날로 성하여 중외의 민심이 (태 조에게) 돌아가는 것을 꺼렸는데, (중략) 정몽주가 돌아가기에 이르자 이에 조영규 등을 보내어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쳐서 죽였다. (중략) (4) 정몽주의 머리를 저잣거리에 효시하였다. 정몽주는 사람됨이 호매하고 절륜 하며,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우리 태조가 평소에 그를 중히 여겨 매양 공양4 출전할 때마다 반드시 그와 함께 갔으며, 여러 번 추천하고 발탁하여 함께 올라 재상이 되었다. 당시 나라에 사고가 많아 기무가 광범위하고 번거로웠 는데, 정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큰 문제를 해결함에 말소리와 얼굴빛이 동 요됨이 없었고, 좌우에서 말을 응답함이 모두 그 적당함을 얻어서 많은 업적 을 세웠으니, 당시 사람들은 왕을 보좌할 인재라고 일컬었다.(4)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연도 표기에서 年ㆍ月만 표시되어 있 고, 日의 표시가 없으나, 더러 月 조차 표시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래서 ꡔ동국통감ꡕ의 연도를 참조하여 두 자료의 고려기 에 있는 정몽주 관련 기 사 항목을 비교하여 보았다.76) 이를 보면 ꡔ동국통감ꡕ에 비해 전체적으로 정몽주 관련 내용이 많이 소략 76)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과 ꡔ동국통감ꡕ의 정몽주 관련기사 항목 비교 연도 공민왕 11 공민왕 16 공민왕 22 우왕 1 우왕 3 우왕 4 우왕 8 우왕 9 우왕 10 우왕 11 우왕 12 우왕 13 공양왕 1 공양왕 2 공양왕 3 공양왕 4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ꡔ동국통감ꡕ 2월, 3월 6월 6월 7월 1월, 5월, 7월 9월 7월 4월, 11월 1월 7월 4월 2월, 7월 12월 5월, 6월, 9월, 12월 1월, 7월, 8월 11월, 12월 1월, 7월, 8월, 12월 3월, 4월, 5월, 6월 9월, 우왕 4년 7월로 대신 7월 공양왕 2년 1월로 대신 4월
중종 명종대정몽주인식 301 한편이다. 유희령은 ꡔ동국통감ꡕ 의 고려기 에서정몽주에관련내용가운데어떠한내용을취사선택하였는지살펴보도록하자. 1 공민왕 16년 6월정몽주가성균관학관으로활동한기사. 2 우왕 3년 9월정몽주가일본사행을다녀온기사. 77) 3 우왕 10년 7월정몽주가명나라사행을간기사. 4 공양왕 1년정몽주가지경연사가된기사. 78) 5 공양왕 4년 4월정몽주가격살된기사및정몽주에대한평. 이를보면고려말정몽주의가장대표적인선정, 즉사관들에의해포폄을분명히한기사만을서술하고있다. 특히, 공양왕 4년 4월정몽주에대한평을보면, 이는유일하게정몽주와이성계와의관계를보여주는중요한대목이다. 유희령의대의명분에따른강한포폄의발로를엿볼수있다. 비단이뿐만아니라고려말서술체계에서도드러나고있다. 유희령은고려말서술에서공민왕다음에바로공양왕으로서술하고, 우ㆍ창왕의기사를따로떼어서공양왕뒤에 신우 로부기하고있다. 이는 ꡔ고려사ꡕ 의개수과정에서기전체로바뀌면서, 우ㆍ창왕이세가에실리지못하고열전에신우ㆍ신창으로실리는것과유사하다. 이를반증하듯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내용가운데신우의총서를보면 ꡔ고려사 ꡕ에만보이는 우왕의나이가열살이었다. 라는기사를인용하고있다. 이러한점은박상의 ꡔ동국사략 ꡕ과는커다란차이를보이고있다. 박상의 ꡔ동국사략 ꡕ에서는고려말공민왕다음에신우를서술하고그다음에공양왕을서술하여신창을공양왕에포함시키고있다. 이는 ꡔ동국통감 ꡕ의서술체계를그대로수용하고있는것이다. 또한, 고려말절의파사대부인물인정몽주, 이색, 이숭인세사람의평을비교해보면더욱잘드러나고있다. 정몽주의경우는 < 표 2> 에서보면 77) ꡔ 동국통감 ꡕ 과박상의 ꡔ 동국사략 ꡕ 에는우왕 4 년 7 월기사내용의일부가서술되어있다. 78) ꡔ 동국통감 ꡕ 과박상의 ꡔ 동국사략 ꡕ 에는공양왕 2 년 1 월기사이다.
302 지역과 역사 39호 박상은 ꡔ동국통감ꡕ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반면, 유희령은 <표 3>에서 보다시피 ꡔ동국통감ꡕ 내용의 일부만 인용하고 있다. 이색의 경우는 박상은 ꡔ동국통감ꡕ 내용과는 다른 평을 하고 있으며,79) 유희령은 ꡔ동국통감ꡕ 내 용 가운데 세상 사람으로 부터 비난받는 바가 되었다. 라는 한 구절만 삭제 하고 있다. 이숭인의 경우는 박상은 ꡔ동국통감ꡕ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 지만, 유희령은 그 내용을 완전히 삭제하였다. 특히, 공양왕 4년 7월 신묘일 가장 마지막 구절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에서는 고려가 멸망하니 歷數가 진짜 주인에게로 돌아갔 다. 임신년 즉위. 라고80) 서술되어 있고,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에 서는 고려가 멸망하였다. 라고만81)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ꡔ동국통감ꡕ 에는 전혀 없는 내용이다. 이렇듯 이러한 차이점은 중종대 기묘사림인 박상과 명종대 을사사림인 유희령의 대의명분에 따른 입장 표명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맺음말 이상으로 조선 전기 중종ㆍ명종대 사림들의 정몽주 인식을 박상의 ꡔ동국 사략ꡕ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중종대 정몽주 인식을 보면 첫째, 중종대 대표적 사찬사서인 박상 의 ꡔ동국사략ꡕ은 중종 24ㆍ25년 무렵 편찬된 사서로 짐작되며, 박상은 중 종대 대표적 기묘사림으로써, ꡔ동국사략ꡕ 편찬에서 중종대 정몽주의 문묘 종사, 기묘사화 등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성종대 ꡔ동국통감ꡕ 과는 다른 절의의 개념으로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 이색을 靖節의 의미에서 해석하고 있다. 즉, 정몽주의 순절, 길재의 항절과 함께 이색의 정절을 강조 79) 주 43) 참조. 80) ꡔ동국사략ꡕ 권6, 공양왕 4년. 高麗亡 歷數歸于眞主 壬申年卽位 81)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권11, 공양왕. 高麗亡
중종 명종대 정몽주 인식 303 하고 있다. 셋째,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에서 고려 말 정몽주 기사를 살펴본 결 과, ꡔ동국통감ꡕ과 비교해 볼 때, 사행 및 공양왕대 활동 기사가 거의 삭제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중종 12년(1517) 정몽주의 문묘종사와 관련이 있 는 것으로써, 이때 논란되었던 위신을 섬겼다는 말을 의식하여 차후에도 논 란거리가 되지 않게 삭제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로써 중종대 기묘사림은 정 몽주를 성종대 충신 에서 중종대 성현 의 반열로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 다. 다음, 명종대 정몽주 인식을 보면 첫째, 명종 초기 대표적 사찬사서인 유 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은 중종 후기부터 시작하여 세 번의 개정을 통 하여 삼판본까지 간행되었다. 유희령은 막내 숙부 유인숙에 연좌되어 을사 사화의 화를 입는 을사사림으로써, ꡔ표제음주동국사략ꡕ 삼판본을 보면 명 종 초 을사사화의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유희령의 ꡔ표제 음주동국사략ꡕ에서 고려 말 정몽주 기사를 살펴본 결과, ꡔ동국통감ꡕ에서 포 폄이 분명한 기사만을 취사선택하였다. 이는 고려 말 서술체계에서도 공민 왕-공양왕으로 서술하고 우ㆍ창왕을 공양왕 뒤에 신우로 부기하는 등 대의 명분에 따른 포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셋째, 고려 말 절의파 사대부 정몽 주, 이색, 이숭인에 대한 평을 박상의 ꡔ동국사략ꡕ과 비교해 볼 때 그 차이점 이 분명히 드러난다. 정몽주의 경우는 이성계와의 관계를 중시하였으며, 이 색의 경우는 ꡔ동국통감ꡕ의 내용을 따르면서 이색의 절의를 인정하지 않았 고, 이숭인의 경우는 아예 삭제하고 있다. 특히, 공양왕 4년 7월 辛卯 기사 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이러한 차이점은 중종대 기묘사림 박 상과 명종대 을사사림 유희령의 대의명분에 따른 입장 표명의 차이라고 생 각한다. 그러므로 성종대 ꡔ동국통감ꡕ에서 정몽주를 절의지사로서 충신 임을 강 조하였다면, 중종대 기묘사림 박상의 ꡔ동국사략ꡕ에서는 문묘종사의 영향으 로 정몽주의 취약점을 삭제하고, 명종대 을사사림 유희령의 ꡔ표제음주동국 사략ꡕ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포폄이 분명한 기사만을 취사하여 확실한 성현 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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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지역과역사 39 호 Abstract Recognition for Jeong Mong-Ju in Jungjong and Myungjong Period Kim, Boe-Jeong This research is about recognition of Jeong Mong-Ju in Jungjong and Meongjong period, to know the process of understanding confucianism in early Chosun dynasty. Jungjong and Meongjong s period is when Moonmyojongsa of Jeong Mong-Ju was performed. It is also a period when Jeong Mong-Ju s Imgo seowon was established. By the way also history books which is the summary of Donguktongam was revealed by Sarim. The most known one is Park Sang s Donguksarak and Yui Hee-Ryung s Pyojeeumjudongguksarak. Jeong Mong-Ju s recognition could be well seen by Park Sang s Donguksarak. By looking at its article about Jeong Mong-Ju in late Koryeo, almost all of Jeong Mong-Ju s work and political act in Gongyang King s period. This happening could be answered as Munmyojongsa and Kimyosahwa. Jeong Mong-Ju s recognition can be explained by Yui Hee-Ryung s Pyojeeumjudongguksarak. In its article, the choices of article is very specific with its opinion. Thus, it doesn t admit Lee Saek s royalty and describe Koryeo history system as Gongyang King right after Gongmin King. Difference of perspective could be described as difference between KimyoSarim and YulsaSarim s thought of justification. For example, in Donguktongam, they emphasize Jeong Mong-Ju as royalty Julyuijisa. Furthermore, Park Sang s
중종 명종대정몽주인식 307 Donguksarak erased week part of Jeong Mong-Ju as effect of Munmyojongsa. Also in Yui Hee-Ryung s Pyojeeumjudongguksarak, it describe Jeong Mong-Ju as saint by using article that has strong opinion. Keywords : Jeong Mong-Ju, Park Sang, Dongkuksaryak, Yui Hee-Ryeong, Pyojaeumjudongkuksaryak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309~342쪽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09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309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82)윤 용 출** 머리말 Ⅰ. 평지읍성 축조론의 실현 Ⅱ. 물력ㆍ노동력의 조달 Ⅲ. 城役文書의 작성 Ⅳ. 축성을 둘러싼 논란과 대응 맺음말 국문초록 全州府城은 1734년(영조 10) 전라감사 趙顯命(1691-1752)의 주도 아래 축조되었 다. 이 성곽은 무신란 직후에 건설된 여러 평지읍성 가운데 하나로서, 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탕평파 관료들이 지방관으로 부임해서 단기간에 건설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전주부성 축성역은 지방관아에서 주관한 축성역으로서 많은 募軍을 고용하는 募立 制 고용노동을 적용했다는 점,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해 다량의 수레를 제작하고, 석재 운송 등의 분야에 투입했다는 점에서, 이 무렵의 다른 축성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적 면모를 보였다. 전주부 축성역의 전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城役文書를 작성하 였던 점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축성역의 기획ㆍ평가ㆍ참조를 위해서 매우 필요한 작업이 시도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몇 가지 점에서 의미있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조현명은 자신이 마련한 재물로써 축성역의 물력을 삼았음을 과시했다. 그는 두가지 방도를 취했다. 첫째, 아전들의 부당한 축재를 환수한 것, 둘째, 곡식을 사고 파는 과정 에서 이득을 취하는 料辦取利 의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한 것이다. 재용을 절약하는 방 *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기본연구지원사업(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yoonyc@pusan.ac.kr).
310 지역과 역사 39호 도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력을 절약하는 일[省力]이었다. 그 일환으로 전주부성 축 성역에서는 많은 수레를 활용했다. 동거는 모두 458대가 투입되었다. 유례 없이 많은 수레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실험적인 면모를 보였다. 적극적인 수레 보급론자이기 도 했던 조현명은 동거를 이용함으로써, 동래부 축성역 등과 비교해 볼 때, 노동력을 큰 폭으로 줄일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전주부 축성역은 조선후기 지방관부에서 주관한 축성역으로서는 처음으로 많은 임 노동자인 募軍을 고용하였다. 또한 상세한 城役文書를 남겼다. 영조는 전주부성 축성역 의 전모를 이해기 위해서, 조현명 등이 작성한 전주부 축성 문서를 직접 열람하기도 했 다. 축성역의 전모를 이해하려는 영조의 적극적 관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울러 축 성 문서가 통치의 자료로서 활용된 사례를 보여주는 바라 하겠다. 주제어 : 築城役, 戊申亂, 城役文書, 料辦, 童車 머리말 全州府城은 1734년(영조 10) 전라감사 趙顯命(1691-1752)의 주도 아 래 축조되었다. 이 성곽은, 1728년(영조 4)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ㆍ남인계 세력이 영조와 노론 세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일으켰던 戊申亂이 지난 뒤, 남부 지방 여러 곳에 새로 세워진 성곽들 가운데 하나였다. 전주부성은 특히 축조의 과정을 기록한 城役文書 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점이 많다.1) 축성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력과 물자의 조달 1) 자료가 처음 학계에 소개된 것은, 2003년 강원대 유재춘 교수가 풍양조씨가의 문 서를 재조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발표 논문을 통해서, 자료의 작성과 보관 경위, 수록된 주요 내용 등이 처음 밝혀졌다. 1734년의 전주부성 축조의 상세한 공사내 역을 통해서, 축성술, 인력 동원, 물자조달에 관해서, 다른 사례와 비교할 수 있다 는 점을 주목했다. 당시 호남지방에 기근이 들어 있었고, 재정 상태가 열악한 조 건에서 공사가 추진되었기 때문에, 사역 인원과 재원 절감을 위한 방안이 강구된 점을 지적하였다(유재춘, 18세기 全州府城 축성 기록 築城啓草 연구 ꡔ사학연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11 이 따랐다. 조선후기 축성역, 부역노동의 운용에 관한 많은 사실들이 그 안 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주부성 축성역이 건축사적 측면에서 차지하 는 의의 또한 크다.2) 당시 전주부성의 축성역은 몇 가지 점에서 이채로운 특성을 보여 주었다. 첫째, 조현명ㆍ정언섭 등 탕평파에 속한 관료들이 영호남의 중요 지방에 외 관으로 부임해서 읍성 건축에 열중했던 점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읍성 축조에 힘을 기울였다. 무신란에 대한 반성과 평가 분위기 속에서, 지역 방 어의 허술함을 보완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도 북한산성보 다는 도성 중심의 수비체계를 확립했던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이 깊다. 둘째, 당시 조선 사회는 군역 등 부역노동의 폐단이 극심한 지경에 도달 해 있었다. 특히 군역은 최고의 민폐가 되어, 사회 불안의 큰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축성역은 민간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문제와 떼어 놓을 수 없 었다. 부역노동을 감면하면서 축성역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이같 은 문제가 새로운 현안이 되었다. 양역을 포함한 역제 개혁의 방향을 전주 의 축성역에서 엿볼 수 있다. 셋째, 기록을 중시했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성역문서를 작성하는 일 은 축성역의 기획, 평가, 뒷날의 참조 등을 위해서 매우 필요한 절차가 될 것이다. ꡔ東萊府築城謄錄ꡕㆍꡔ全州府城築城錄ꡕ3) 등이 그러한 성역문서이 다. 이 같은 문서 작성의 전통은, 18세기 말엽 정조 때의 ꡔ華城城役儀軌ꡕ처 구ꡕ 81, 2006). 2) 전주부성 축조의 건축사적 의의를 조명한 연구성과를 볼 수 있다. 영조의 지방 통 제, 유형원의 새로운 城論과 공역 절감 방안의 적용, 평지읍성 중심의 방어전략의 채택, 料辦取利 에 의한 지방관의 재원 마련, 소형 수레인 동거의 활용과 伍長 책 임의 공사 방식에 의한 노동력 절약 등, 여러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조형래ㆍ서치상, 英祖初年 全州와 大邱邑城 築造工事 硏究 - 새로운 城制 및 공사방식을 중심으로 - ꡔ대한건축학회논문집 : 계획계ꡕ 21-3, 2005. 서치상ㆍ 조형래, 英祖初年의 全州邑城 改築工事에 관한 再考察 ꡔ건축역사연구ꡕ 55, 2007). 3) ꡔ全州府城築城錄ꡕ은 역주본으로 간행되었다(이희권ㆍ이동희 역주, ꡔ전주부성 축성록ꡕ, 전주역사박물관, 2010).
312 지역과 역사 39호 럼 방대한 성역문서를 체계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본고는 이 같은 점에 유의하면서 주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전주부성 축성 역의 역사적 의의에 관해서, 위와 같은 몇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Ⅰ. 평지읍성 축조론의 실현 전주부성 축성역을 주도했던 전라감사 趙顯命은 영조대의 정치사에서 중 요한 비중을 차지한 인물이다. 영조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延礽君으로 봉해졌고, 일찍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정치 세력 간 갈등의 한 가운 데 놓여 있었다. 당시 영조의 측근에서 활동한 신료 가운데 소론계의 조현 명이 있었다. 그는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었을 때 世子侍講院 說書가 되 어,4)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했던 왕세제의 보호에 힘썼고, 그것으로 오 랜 인연이 시작되었다.5)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서 연잉군은 어느 결에 노론의 지원을 받으며 왕위 계승권자인 王世弟로 책봉되었고, 소론에 의한 노론 대숙청 사태인 辛壬士 禍 때에는 절대 위기의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다. 1724년 경종에 이어 왕위 를 계승하였지만, 정치적 불안 상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급기야 4년 뒤에 戊申亂을 겪게 되었다. 그 뒤 영조는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점 차 정국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탕평은 당파간의 정치세력 에 균형을 꾀하려한 정책이었다. 신임사화에서 무신란으로 치닫는 정치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은 극도의 정치 불안, 사회 동요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탕평책을 추구한 뒤에 살륙하는 걱정 이 없어진 것은, 탕평의 효험이라 할 만 했다.6) 정치적 안정을 찾는 과정이었다. 4) ꡔ景宗實錄ꡕ 卷4, 景宗 元年 8月 癸未. 5) ꡔ歸鹿集ꡕ 卷20, 自著紀年 辛丑, 三十一日歲, 8月. ꡔ英祖實錄ꡕ 卷76, 英祖 28 年 4月 丁巳, 趙顯命 卒記.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13 조현명은 탕평파의 일원이었다. 영조대 전반기 탕평책을 이끌었던 金在 魯ㆍ宋寅明 등과 더불어 蕩平主人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7) 그는 탕평정 치의 이론가로서, 영조 전반기 탕평정치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8) 그의 탕평론은 숙종대 소론계를 이끌던 문신 학자 朴世采의 논의를 계승ㆍ 발전시킨 것이다.9) 붕당을 깨고, 탕평을 이루는가 여부는 나라의 安危와 흥망성쇠가 달린 일이라고 주장했다.10) 무신란 직후에 탕평을 통한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일은, 지방 통치의 안정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중앙의 요직을 떠나서 외직인 경상감사ㆍ전라감사의 일을 거듭 맡은 데에는,11)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었다. 조현명은 뒷날 균역법의 개혁을 주도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지방관 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그는 군역의 폐단, 지방 재정 운영의 문제점들을 실 감했을 것으로 보인다. 균역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중요한 역할을 수 행한 점을 감안하면,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무신란 이후의 형세는 비단 지배층 관료 내의 균형과 타협만 필요 한 것이 아니라 피지배층 일반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눈을 돌리고 조절과 타협의 정신이 적용될 필요성을 키우고 있었다.12) 조현명은 裕國과 便民 6) ꡔ英祖實錄ꡕ 卷75, 英祖 28年 1月 丙寅. 신임사화 이후 영조는 黨論이 살륙의 근본이 되고, 살륙이 망국의 근본이 된다 는 것을 깊이 실감하였다고 한다(ꡔ英祖實錄ꡕ 卷127, 英祖大王行狀). 7) ꡔ英祖實錄ꡕ 卷94, 英祖 35年 10月 壬辰. 8) 조현명은 分等說, 兩非說, 互對說 등 구체적 이론으로 탕평의 이론을 제시했다 (鄭萬祚, 英祖代 초반의 蕩平策과 蕩平派의 활동 - 蕩平基盤의 성립에 이르기 까지 - ꡔ震檀學報ꡕ 56, 1983 참조). 9) 鄭萬祚, 위의 논문, 129쪽. 조현명은 경삼감사로 재직 중에 朴世采의 문집 간행의 일에 적극 나선 일이 있 다. 처음 조정에서 전라감영과 같이 시행하도록 명했으나, 진행이 부진하였다. 결국 조현명의 경상감영이 刊板의 일을 시작하여, 독자적으로 담당하기 시작하 였다. 뒤에 사실을 알게 된 영조는 전라ㆍ충청감영에서 인쇄의 종이를 분담하도 록 명하였다(ꡔ承政院日記ꡕ 39冊, 英祖 7年 1月 10日). 10) ꡔ歸鹿集ꡕ 卷20, 自著紀年 庚申, 五十歲. 11) ꡔ英祖實錄ꡕ 卷26, 英祖 6年 6月 庚子 ; 卷34, 英祖 9年 4月 辛未.
314 지역과 역사 39호 쌍방을 고려한 양역제 개혁을 구상하게 되었다.13) 무신란 전후, 최대의 민폐는 군역, 곧 양역에 있었다. 양역은 어느새 망국 의 폐단이 되어 있었다.14) 신분제가 동요하던 시기에 신분적 차별을 전제 로 한 양역제의 운영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下戶ㆍ殘民으로 불리던 하층 농 민의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15) 조현명은 지주제가 확대되던 시기에 양역을 폐지하고 결포를 시행할 것을 주장했지만,16) 여의치 않은 현실에서 丁役을 고르게 하는 방법을 추구했으며,17) 減匹 조치에 따른 부족한 給代를 채우 고자 지방 군현의 은결ㆍ여결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18) 조현명이 추진한 균역법은, 민생의 안정을 도모한 개혁사업의 중심이 되었다.19) 조현명은 무신란 직후 경상 및 전라감사를 역임하여, 난리가 지난 뒤끝의 지방 민심을 수습하고, 군역을 비롯한 민간의 폐단을 살펴보는 데에도 힘썼 다. 아울러 아직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안정적인 지방 통치를 전제로 한 군사적 방어체계 점검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경상감사로 재직하던 중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주도한 동래부성 축성역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다시 전 라감사로 이임한 뒤에는 직접 전주부성 축성역을 기획하고 주관하였다.20) 12) 김형자, 朝鮮後期 趙顯命의 政治ㆍ經濟思想 ꡔ실학사상연구ꡕ 9, 1997, 59쪽. 13) 이근호, 趙顯命의 現實認識과 國政運營論 ꡔ韓國思想史學ꡕ 32, 2009, 350~ 351쪽. 14) ꡔ英祖實錄ꡕ 卷71, 英祖 26年 5月 戊午 ; 卷73, 英祖 27年 5月 丁酉. 15) ꡔ英祖實錄ꡕ 卷73, 英祖 27年 5月 丁酉. 16) ꡔ英祖實錄ꡕ 卷71, 英祖 26年 5月 戊午. 17) ꡔ英祖實錄ꡕ 卷71, 英祖 26年 8月 乙亥. 18) ꡔ英祖實錄ꡕ 卷71, 英祖 26年 8月 乙亥 ; 卷76, 英祖 28年 5月 己丑 ; 卷127, 英祖大王行狀. 19) 그는 전라감사로 재직 중에 지역의 잡역세 운영방식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고, 營門에서 거두는 漁稅를 복구하는 문제 등을 모색하였다(ꡔ備邊司謄錄ꡕ 95冊, 英祖 10年 1月 6日 ; 96冊, 英祖 10年 8月 9日). 이 같은 일을 통해서, 균역법 의 급대책과 관련되는 구체적 정보를 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0) 조현명뿐 아니라, 동래부성 축조를 주관한 동래부사 鄭彦燮, 대구부성 축성을 주도한 경상감사 閔應洙 등이 모두 무신란 당시 반란 진압에 참여했으며, 이후 왕권을 강화하고 탕평정치를 추구했던 탕평파에 속했다(윤용출, 18세기 초 東 萊府의 築城役과 賦役勞動 ꡔ韓國文化硏究ꡕ 2, 1989. 조형래ㆍ서치상, 앞의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15 축성사업은 안정적인 지방 통치를 통해 왕권의 강화를 추구했던 탕평파 관 료들의 구상이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전주는 호남과 영남의 도회처[湖嶺都會]이며, 호서로 들어서는 길목인 까닭에 유사시에 반드시 지켜야 할 요지였다. 그러나 당시 전주부성은 얼마 전까지 동래부성이 그러했듯이, 마치 위급할 때에 버릴 곳[棄地]처럼 허물 어진 성곽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과 논의하지 않고 단호히 개축의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듬해(1734) 1월에 옛 성을 철거하는 것으로 축성역을 시작하였다.21) 그러나 동래부 축성역을 비 롯한 이 시기 일련의 주요 읍성 축성역은 조현명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것만 은 아니었다, 영조의 구상과 조현명을 비롯한 탕평파 관리들의 기획ㆍ실천 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 공조참판이 된 조현 명은, 동래부ㆍ전주부 축성은 小臣이 모두 담당 한 일이라 표현했고,22) 영 조는 특히 전주부성 축성역에 관해, 처음부터 내가 결심하여 한 것[當初予 決意爲之] 이라고 피력했다.23) 축성은 國之大事 라고 표현될 만큼 중요 사 업이었다.24) 특히 요충지를 방어하는 축성역은 더욱 그러했다. 1734년(영조 10) 새로운 전주부성은 둘레 2,618보, 雉城 11개소의 규모 로 조성되었다.25) 이렇게 지어진 전주부성은 평지읍성이었다. 임진왜란 당 시 각지에 산성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방어의 보루로서 수축되거나 새로 축조한 일이 많았다. 예컨대 선산 금오산성은 임진왜란 직 후에 축조되어, 오랫동안 영남 지역의 보루 가운데 하나로 평가될 수 있었 다.26) 이처럼 인근에 믿을 만한 산성이 유지되고 있다면, 읍성이 부서지고, 21) 22) 23) 24) 25) 26) 논문, 2005, 82~83쪽. 서치상ㆍ조형래, 앞의 논문, 2007, 28쪽 참조).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明見樓記. ꡔ承政院日記ꡕ 44冊, 英祖 10年 11月 25日. ꡔ承政院日記ꡕ 44冊, 英祖 10年 11月 23日. ꡔ承政院日記ꡕ 52冊, 英祖 19年 11月 8日.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月 日 啓草. ꡔ正祖實錄ꡕ 卷6, 正祖 2年 7月 丁未. 1606년(선조 39) 수성장 鄭邦俊이 상주진관ㆍ안동진관ㆍ진주진관의 속오군을 징발해서 축성역을 진행하였다. 당시의 기록 ꡔ築城金烏時日記ꡕ가 남아있다(장
316 지역과 역사 39호 기능을 상실한 채 보수가 미뤄지는 사례가 많았다. 동래부와 金井山城, 대 구부와 架山山城, 전주부와 威鳳山城의 관계가 대체로 그러했다. 축성역 당 시 전주부 성첩의 절반 이상이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27) 전주부에서 혹 위 급할 때에는 위봉산성을 대피처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전주부성을 수축하지 않아도 문제될 일이 별로 없는 듯이 여겼다.28) 임진왜란을 거치 면서 산성 위주의 방어 개념이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무신란은 이같은 산성 위주의 방어 관념에 균열을 불러 일으켰다. 평지읍 성이 제대로 유지 운영되지 않았던 고을들이 적은 병력의 반란군에게 쉽사 리 제압당하는 일이 벌어졌고,29) 그 때문에 급격하게 반란군 대오가 강화 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평지읍성에는 군량이 있었고, 거주하던 농민들 이 있었다. 평지읍성을 차지하는 측이 농민을 전투병력으로 활용될 수 있었 다. 무신란을 겪은 뒤의 조선 정부는, 무신란 때와 같은 반란군의 활동을 염 두에 둔 방어 개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30) 산성 만으로는 방어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산성이란 마치 비겁 한 자들의 도피처인 듯이 치부되기도 했다. 조현명은 전주부성 축성에 관해 처음 영조에게 보고한 글에서, 읍성이 없는 산성[無邑城之山城] 은 곧 不 忠한 자들에게 몸을 편안히 할 수단과 방법을 제공할 뿐 이라고 했다. 읍성 이 우선적으로 갖춰진 뒤에 비로소 산성의 방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 27) 28) 29) 30) 필기, 임진왜란 직후 축성역 동원체계의 한 형태 - 금오산성 수성장 정방준의 축성일기를 중심으로 - ꡔ古文書硏究ꡕ 25, 2004).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癸丑年 12月 日 ; 甲寅年 1月 日.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明見樓上樑文, 明見樓記. 조형래ㆍ서치상, 앞의 논문, 2005, 85쪽. 고수연, 1728년 湖西地域 戊申亂의 叛亂軍 성격 ꡔ歷史와 實學ꡕ 44, 2011, 129쪽. 예컨대 숙종대에 북한산성을 쌓고 도성과 사이에 蕩春臺城까지 쌓은 바 있다. 영조는 무신년의 일로 봤을 때, 반군이 만약 북한산성을 점거한다면, 이는 京城 의 목구멍을 차지하는 일이니 緊重하지 아니한가? 라 하여 무신란 반군의 동태 에서 큰 위협을 느꼈던 자신의 경험을 내비치며, 방어태세를 점검하고자 했다 (ꡔ承政院日記ꡕ 45冊, 英祖 12年 5月 25日).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17 라고 보았다. 산성이 금성탕지와 같은 견고함을 갖추더라도, 일단 산성으로 피해 들어선 뒤에는, 산성 바깥의 요충지를 지키고, 왕실을 보호하며, 사람 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여러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읍에 읍성을 쌓기도 곤란한 형편임을 감안할 때, 중요한 거점 지역에 읍성을 고쳐 쌓는 일은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다.31) 백성을 적의 칼끝 과 화살촉[鋒鏑] 에 버려두지 아니하고,32) 함께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방어 체계를 모색한다는 것이다. 영조대 이후 도성을 방어하는 체계가 전환되고 있었다. 숙종대에 축조된 북한산성보다는 도성을 떠나지 않고 총력을 기울여 수비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더욱이 군사적 방어시설이 외적의 침입에 대한 것 뿐 아니라 국내 의 반란세력에 대한 대응이란 관점에서도 정비될 필요가 있었다. 무신란을 계기로,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기보다 도성민과 함께 지킨다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33) 남ㆍ북한산성 등 주변의 산성보다는 도 성 자체를 수비하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지방 군현에서도 평지 읍성을 정비 하면서 방어체계의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 동래부에서의 관방시설이 금정산성에서부터 동래읍성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게 된 것도 이 같은 도성의 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동래부사 정언섭 이 주도한 동래부성 축성역이 끝난 뒤 영의정 洪致中은, 동래부에 금정산성 이 존재하지만, 유사시에 주민의 긴급한 대피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인명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큰 단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영조에게, 동래부 새 성곽의 城築制度가 매우 完固할 뿐 아니라, 은연중 믿을만한 형세를 이룬다 31)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癸丑 11月 20日, 築城啓草. 유재춘, 앞의 논문, 2006, 49쪽. 32) ꡔ承政院日記ꡕ 51冊, 英祖 18年 10月 14日. 33) 李泰鎭, 三軍門都城守備體制의 確立과 그 變遷 ꡔ韓國軍制史ꡕ 近世朝鮮後期 篇, 1977, 184~188쪽. 윤용출, 앞의 논문, 1989, 96~100쪽. 유재춘, 앞의 논 문, 2006, 47쪽. 柳馨遠의 城論을 적극 수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조형 래ㆍ서치상, 앞의 논문, 2005, 81ㆍ84쪽. 서치상ㆍ조형래, 앞의 논문, 2007, 35~36쪽 참조.
318 지역과 역사 39호 는 평가를 전했다. 이때 영조는 동래의 읍성터가 평지인지[其城址爲平地 耶]를 물었으며, 이에 홍치중은, 배후에 높은 산이 있는 평지성[野城]으로 평원을 굽어본다고, 자신이 전해 들은 말로써 보고했다.34) 이들의 대화에 비치듯이, 평지읍성을 복원하고 건설하는 일을 중시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35) 당시 전주부에도 가까이 위봉산성 있었으나, 평지읍성인 전주부성의 필 요성은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실제 임진왜란 때에도 李廷鸞이 이 성을 지 킨 공로가 있는데, 지형상의 유리한 형세에 힘입은 바 컸다는 것이다.36) 다 시 쌓은 전주부성은 남쪽지방의 보루와 같다고 했다.37) 그러나 평지읍성은 그 자체 만으로는 장기간 방어하기 힘든 지형적 조건을 안고 있었다.38) 그 럼에도 평지읍성은 유사시에 방어태세를 정비하고 민심을 진정시킬 수 있다 는 면에서 큰 장점이 있었다. 평지읍성은 산성의 방어기능으로 보완될 때, 스스로 掎角之勢를 이루어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39) 조현명은 전주부성 축조과정에서 城制의 개선에도 유념했다. 특히 雉城 을 설치하는 것이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40) 그 결과 새로운 전 주부성에서는 치성이 크게 증가하였다.41) 높은 지형에서 상대를 내려다보 는 산성과 달리, 평지읍성에서는 침투하는 적군이 성밑으로 근접할 때 적절 히 방어하기 어려운 약점이 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치성을 중히 34) ꡔ承政院日記ꡕ 40冊, 英祖 8年 1月 10日. 35) 경삼감사 민응수가 1736년(영조 12) 대구부 축성역을 일으킬 때에 좌의정 金在 魯가 대구가 평지에 놓여 있음에도 성곽이 없는[大丘處於平地而無城] 처지임 을 지적한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ꡔ承政院日記ꡕ 45冊, 英祖 12年 1月 22日). 36)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癸丑 11月 20日, 築城啓草. ꡔ宣祖實錄ꡕ 卷30, 宣祖 25年 9 月 己巳. 37)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明見樓上樑文. ꡔ歸鹿集ꡕ 卷19, 明見樓上樑文. 38) 영조 23년 지중추부사 元景夏는 전주부성은 평지에 쌓아서 지키기 어렵다고 평 한 바 있다(ꡔ承政院日記ꡕ 56冊, 英祖 23年 10月 18日). 39) ꡔ肅宗實錄ꡕ 卷49, 肅宗 36年 10月 甲子. 40)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擧行稟目 中軍. 41) 서치상ㆍ조형래, 앞의 논문, 2007, 33ㆍ39쪽 참조.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19 여기고 실제 축성과정에 반영하였다. Ⅱ. 물력 노동력의 조달 조현명은 1733년(영조 9) 4월 전라감사로 임명되었다.42) 이미 두 해 거 듭된 흉년을 겪은 뒤라서, 많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해야 하는 다급한 시 점[辛壬大賑]이었다.43) 전라감사 조현명이 보기에, 각읍 향리들이 많은 돈 과 곡식을 돌려쓰는[那移] 과정에서, 연줄을 타며, 훔치고 농간을 부린 것 이 엄청나게 많다고 했다. 어느만큼 조사하고 정리해서 찾아 모은 곡식 수 량이 거의 1만 3천여 석이었으며, 그 위에 다른 계통으로 변통하여 팔아 모 은 것[變通貿置]이 또한 수천 석이었다. 그는 이 수입으로 전라도 연해 지 역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 구휼곡을 무상으로 나눠주었고, 파종하는 데 드는 종자곡도 형편에 맞게 배포하였으며, 그 나머지 수량으로 축성의 물력을 장 만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이 마련한 재물[所辦財力]로써 축성역을 마치기 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쌀 4천석, 돈 1,400량, 베 50同, 쇠 25,000근, 숯 3천 석, 회 3천 석, 칡 600同, 童車 250대 등을 구입하거나 조달해서[貿 辦], 判官에게 맡겨, 축성역의 물력으로 삼게 했다고 보고하였다.44) 조현명은 탐관오리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私利를 추구해서 미곡을 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잉여를 취한 바[作錢取剩]를 낱낱이 조사해서 환수 처분하 42) ꡔ英祖實錄ꡕ 卷34, 英祖 9年 4月 辛未. 43)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3月 7日. 44)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2月 日, 啓草. ꡔ歸鹿集ꡕ 卷6, 疏, 辭職兼陳築城形止 疏.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3月 7日. 이 과정에서 전라감영은 關西에서 돈 2만 량을 빌려 쓰고, 채 갚지 못했다거나, 禁衛營에서 빌린 군포를 갚지 못했던 일 등이 추후 보고되었다. 이무ㆍ작전을 거쳐서 빌린 원금을 상환하는 절차가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ꡔ備邊司謄錄ꡕ 95冊, 英祖 10年 2月 7日 ; 95冊, 英祖 10年 4月 29日 ; 96冊, 英祖 10年 7月 7日 ; 96冊, 英祖 10年 9月 17日).
320 지역과 역사 39호 였다. 그것으로 우선 진휼의 재원을 삼고, 남은 액수로 城役에 보태 쓸 수 있었다.45) 조현명이 진휼과 축성의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방 략을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전라감사의 권한으로 각읍의 불량한 아전[奸吏]들의 부정을 조사하고, 여기서 막대한 재원을 확보했으며, 나아 가 변통하여 팔아 모은 것이 그 다음으로 많은 액수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 서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 없이 전주부성 축성역을 시행할 수 있었다. 첫째 방략이 아전들의 부당한 축재를 환수한 것이라면, 두 번째의 방략은 곡식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이득을 취하는 料辦取利 의 방식이었다.46) 1716년(숙종 42) 북한산성 蕩春臺에 토성을 쌓는 문제를 둘러싸고, 병 조판서 李光佐, 한성판윤 閔鎭厚 등이 주창자인 判中樞府事 李濡의 축성론 에 반론을 제기한 바 있었다.47) 그러자 이유는 재정적 부담 없이 성역을 수 행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곧 요판의 방도로써 축성역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料辦이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축적한 것을 쓰지 않는 대신 돈으로 官穀을 사거나 혹은 곡식을 돈으로 바꿔서 남는 것을 취하는 것[國 有大役 而不用蓄積 以錢換取官穀 或以穀貿錢 取其些小贏餘] 이라 정의했 다.48)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축조되고, 이듬해 관리기구로서 經理廳이 설립되었다.49) 경리청은 요판을 통한 재정 조달 방식을 널리 시행하였고, 그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간원 正言 柳復明에 의하면, 백성들과 이 익을 다투고[與民爭利], 게다가 일을 맡은 무리들이 모두 거간꾼[駔儈之 類]이어서 防納에 관여하는 등, 백성에 폐해를 끼치며, 사리를 도모하는 경 우가 많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요판을 빙자해서 오히려 나라의 재물을 45)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9月 17日. 46) 윤용출, 조선후기 동래부 읍성의 축성역 ꡔ지역과 역사ꡕ 21, 2007, 32~36쪽. 서치상ㆍ조형래, 앞의 논문, 2007, 40쪽. 47) ꡔ承政院日記ꡕ 26冊, 肅宗 41年 10月 30日. 48) ꡔ肅宗實錄ꡕ 卷57, 肅宗 42年 1月 庚申. 料辦[料販]에 관해서는 윤용출, 앞의 논문, 2007 참조. 49) ꡔ承政院日記ꡕ 25冊, 肅宗 38年 9月 21日 ; 25冊, 肅宗 38年 10月 3日.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21 소모시키고 가난한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폐단이 많다고 했다.50) 지방에서도 요판을 통해서 토목공사의 경비 조달을 강구한 일이 많았다. 예컨대 1731년(영조 7) 동래부 축성역에서, 동래부사 정언섭은 公作米의 요판을 중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삼았다. 경상감사 조현명의 협조하에 왜인 에게 지급할 공작미의 移貿ㆍ作錢을 거쳐서 차익을 얻을 수 있었다. 公作 米料販, 公作米作錢 이었다.51) 1737년(영조 13) 이조판서의 직에 있던 조현명은, 동래부에서 공작미 요판을 금지시키면 雜稅 부담이 늘어날 것이 고, 그로 말미암아 邊民의 민심을 잃을 뿐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게다가 500~600명 씩 상주하는 왜관의 왜인들의 귀에 나라가 궁핍해서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일[國貧捧民之事] 이 혹 들리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쇠약하 게 보일 염려[見疲之慮] 가 있다고 하였다.52) 동래부의 경우, 지방재정 궁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貿販 곧 상품 화폐경제의 발전에 편승하여 감영과 연결한 미곡 거래, 이를 통한 잉여전 획득을 효과적인 재정 충당책으로 활용하는 일이 많았다. 조현명이 경상감 사 재직 시, 환곡을 반분하여 보류하는 법[還穀半留之法]을 어기고 지나치 게 많은 양을 분급한 것이 문제로 지적된 것을 보면,53) 환곡을 활용한 미곡 거래를 중요시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1734년(영조 10) 전라감사 조현명이 주도한 전주부 축성역을 중도에 중 지하자는 건의가 있었지만, 조현명이 적극적으로 축성역을 지속할 의사를 보여서, 지체됨이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이때 조현명은 소요 物力이 전주 50) ꡔ肅宗實錄ꡕ 卷61, 肅宗 44年 6月 癸未 ; 卷62, 肅宗 44年 閠8月 戊申. ꡔ肅宗 實錄補闕正誤ꡕ 卷62, 肅宗 44年 閏8月 辛亥. ꡔ承政院日記ꡕ 27冊, 肅宗 44年 閏8月 3日. 그 때문에 가장 대표적인 경리청의 요판 행위는 금지되기도 하였다(ꡔ肅宗實錄ꡕ 卷63, 肅宗 45年 4月 壬子. ꡔ承政院日記ꡕ 27冊, 肅宗 45年 4月 13日. ꡔ景宗實 錄ꡕ 卷6, 景宗 2年 1月 丙申). 51) 윤용출, 앞의 논문, 2007, 32~36쪽. ꡔ承政院日記ꡕ 41冊, 英祖 8年 8月 20日 ; 41冊, 英祖 8年 9月 4日 ; 47冊, 英祖 13年 12月 25日. 52) ꡔ承政院日記ꡕ 47冊, 英祖 13年 12月 25日. 53) ꡔ英祖實錄ꡕ 卷29, 英祖 7年 6月 辛亥.
322 지역과 역사 39호 감영에서 독자적으로 마련한 것임을 크게 강조하였다. 기근의 시절이라 해 도 재정 압박 없이 진행할 수 있음을 과시한 것이다. 아울러 성 쌓는 일은 판관 具聖弼과 전 현감 中軍 崔德中에게 맡겼음을 지적했다. 구성필과 최덕 중은 실무에 능해서, 성역 전반의 관리 뿐 아니라 재정에 관한 운영, 곧 요 판취리를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54) 축성역을 수행하는 감독기구에는 責應이라는 직임이 있었다. 전주성역에 서는 責應監官의 직함으로 전 權管 朴致文과 한량 朴來後가 있었다, 책응감 관은 전주부 축성역에서 구성필ㆍ최덕중을 도와서 요판취리의 실무를 맡았 을 것으로 보인다. 1731년(영조 7)의 동래부 축성역에서는 多大浦僉使 權 順性이 差使員의 직함으로 여러 부류의 자원부역군을 동원하는 일을 맡았 는데,55) 그가 1736년(영조 12) 대구부성을 축조할 때에는 責應都廳으로 축성역에 관여하였다.56) 당시 지방 관부의 축성역에서 責應의 직책은 재원 염출을 위한 料辦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다.57) 권순성은 대구부성 축성역에 서 요판의 일을 총괄했던 책임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의 토목공사에서 요판취리ㆍ요판식리의 재정 조달 방식을 채택 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자, 이 일을 맡았던 실무자들, 예컨대 책응의 일을 맡 은 料販軍官에게 어떻게 시상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謀利之 輩 에 불과한 자들이 오직 軍門의 財貨를 많이 받아다가, 殖利해서 납부할 뿐인데, 이들에게 품계를 올리는 加資의 賞典은 지나치다는 등의 논란이 일 기도 했다.58) 54)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明見樓記. 전라감사 조현명은 자신의 幕裨인 崔德中과 더불어 물력을 잘 헤아리고 다스린 [經紀財力] 뒤에, 비로소 축성의 장계를 올렸다(ꡔ歸鹿集ꡕ 卷20, 自著紀年 甲寅, 四十四歲, 正月). 최덕중은 그의 측근이자 재정에 밝은 실무자였음을 알 수 있다. 55) ꡔ東萊府築城謄錄ꡕ 本府各處扶助軍赴役記. 56) 조형래ㆍ서치상, 앞의 논문, 2005, 88~89쪽. 57) 동래부 축성역에서, 一責應 채덕홍, 二責應 이익태 등이 한 해가 지난 뒤 加資 의 상전을 받았다. 이때 두 사람의 責應은 바로 料販助役之功 을 인정받았다 (ꡔ東萊府築城謄錄ꡕ 築城時差任. ꡔ承政院日記ꡕ 40冊, 英祖 8年 1月 11日).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23 당시 관부의 토목공사에서는 재정 지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 였다. 건축 자재를 줄이는 일도 그러하다. 축성역에서 옛 성의 성돌을 재활 용할 수 있다면, 석재를 새로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었 다. 전주부성의 축성역에서는 옛 성을 허물면서, 그 성돌[舊城熟石]을 다시 거두어 썼다.59) 노동력을 절약하는 것은 가장 큰 재정 절약 방안이었다. 따라서 전주부성 축성역에서 많은 수레를 만들어 썼던 점을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 축성역에서 童車 458대 등, 유례없이 많은 수량의 수레를 투입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실험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60) 1747년(영조 23) 약방도제조 조현명은 우의정 閔應洙 등과 함께 藥房 진찰의 자리에서, 영조에게 수레의 사용에 관한 의견을 피력했다. 전주부성 축성역에서 많은 동거를 활용했던 조현명은, 수레를 나라에 널리 보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경상감사 직에 있던 민응수는 1736년(영조 12) 대구부성 축성역에서도 10여 대의 수 레를 처음 만들어 쓴 경험을 술회했다. 처음에는 축성의 역소에 적응하지 못해서 엎어지는 일도 많았으나, 곧 큰 힘을 보태었다고 했다.61) 58) ꡔ承政院日記ꡕ 18冊, 肅宗 18年 6月 3日. 59)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築城節次. 서치상ㆍ조형래, 앞의 논문, 2007, 44쪽. 그는 스스로 작성한 自著紀年 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옛성의 돌과 새 돌을 섞 어서 개축했다[參新舊石改築]고 표현했다(ꡔ歸鹿集ꡕ 卷20, 自著紀年 甲寅, 四 十四歲, 正月). 60) 조현명의 전주부 축성역에는 모두 458대의 동거가 쓰였다(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2月 9日 ; 甲寅 2月, 鐵物木物役丁分定各邑數, 曳石節次). 전주부성 축성 역에 투입된 인력은 연인원 173,625명에 달했다(유재춘, 앞의 논문, 2006, 70~71쪽). 그에 비해 비슷한 규모의 동래부성 축성역에서는 연인원 27만 명이 동원된 바 있다. 조현명은 전주부에서 이처럼 적은 인원으로 역사를 마칠 수 있 었던 것은, 동거를 써서 노동력이 절약되고, 일이 간편해졌기 때문[力省事簡故 也] 이라고 판단했다(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2月). 축성역에서 수레를 개량한다든지, 다양한 수레를 적극 활용한 예는, 18세기 말 엽 수원 화성 축성역에서 보인다. 정약용이 설계하고 제작한 游衡車가 각종 수 레와 함께 투입된 것이 그러하다. 역시 노동력 절약[省力]의 움직임이라 볼 수 있다. 전주부성 축성역에서 보였던 수레 활용의 구상이 계승ㆍ발전한 사례이다. 61) ꡔ承政院日記ꡕ 55冊, 英祖 23年 4月 25日.
324 지역과 역사 39호 조현명은 전라감사의 일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수레 보급의 중 요성을 다시 강조하였다. 그는 경상감사 재직 시에 하나의 작은 수레를 시 험적으로 만들어서 양곡을 운반할 수 있게 했고, 나아가 성곽 앞에서 적의 기병들을 저지하는 데 쓰는 방책, 곧 拒馬作[拒馬筰]으로도 대체해서 쓸 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거마작은 성곽을 지키는 데 매우 긴요한 시설이 었음에도, 무신란 때 부족한 것이 한탄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전주부성 축성역 당시 많은 동거를 제작하여, 석재를 실어나르는 데 효험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응지상소에서도 영조에게 동거의 車制를 각 군문에 도입해 서 짐 싣는 말[卜馬]의 폐단을 줄이는 데 활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다. 아 울러 적군 마병대를 저지하는 거마작의 방책시설로 전환해 쓸 수 있는 수레 의 효용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62) 조현명이 전주부성 축성역에서 많은 동 거를 제작해 쓴 일은, 이처럼 석재 운송의 노동력을 줄이고, 그에 따른 재정 지출을 절약하고자 하는 데 일차적 목표가 있었다. 아울러 거마작으로 전환 할 수 있는 용도에도 주목했다. 노동력을 조달하는 일은 축성역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 분 중 하나였다. 전라감사 조현명이 전주부성 축성의 정당성을 피력할 때, 돈ㆍ곡식ㆍ베, 기타 각종 물자로 구성된 물력의 출처 및 수량 뿐 아니라, 얼마 만큼의 일꾼이 적절하게 동원되고 쓰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 다.63) 조선후기 축성역 분야에서는 募立制 고용노동의 도입이 늦은 편이었 다.64) 그런 중에 전주부성 축성역은, 지방관부에서 주관한 공역으로서는 조현명의 수레 보급론에 관해서는, 윤용출, 조선후기 수레 보급 논의 ꡔ한국민 족문화ꡕ 47, 2013, 298~300쪽 참조. 62)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9月 18日. ꡔ歸鹿集ꡕ 卷20, 自著紀年 甲寅, 四十四歲, 正月. ꡔ備邊司謄錄ꡕ 95冊, 英祖 10年 1月 6日. 63)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明見樓記. 64) 축성역은 조선전기 민간의 요역 노동에서도 중요한 노동 분야로 지목되었다. 役 民式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노동력을 끌어 쓸 수 있는 別例調發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ꡔ成宗實錄ꡕ 卷9, 成宗 2年 3月 壬辰). 조선후기 부역제도가 점차 쇠퇴하던 시기에도 가장 오랫동안 부역노동이 적용되던 분야에 속했다. 군인ㆍ 농민ㆍ승군의 부역노동이 투입되곤 했다.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25 처음으로 많은 품팔이 노동자인 募軍을 고용한 특별한 사례였다.65) 고용노 동의 노동력을 적극 도입한 것이다. 그것이 흉년이 거듭되던 시기의 빈민을 구제하는 방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축성역의 정당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아울러 기왕의 부역노동을 활용하는 방식도 함께 적용했다. 烟戶軍[烟 軍]은 농민으로 구성된 요역의 부역노동 담당자들이었다. 다음으로 승군이 있었다. 이들은 승역의 부역노동 담당자로서 도내 각 사찰에서 징발되었다. 이 같은 부역노동만으로도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자원역군이 동원되 었고, 여러 형태의 범죄를 지은 이들을 贖罪의 구실로 축성역에 동원하기도 했다.66) 다양한 노동력 동원방식이 주목된다. 이 가운데 연군ㆍ승군ㆍ자 원역군의 징발 방식은 직전에 수행된 동래부 축성역에서도 활용된 전례가 있었다.67) 전주부 축성역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노동력 동원 방식의 하나 는, 전국의 석수를 불러 모은 일이다. 축성역을 신속하게 진행하고자 했던 65)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築城節次, 甲寅年 月 日 啓草. 동래부 축성역에서는 소수의 募軍[私軍]이 고용되었으나, 축성역이 끝난 직후 에 작성된 節目 에는, 차후의 수리공사에서 반드시 모군을 고용할 것을 규정하 였다(ꡔ東萊府築城謄錄ꡕ). 이보다 앞선 임진왜란 직후의 선산 금오산성 축성역 은, 속오군, 숙종대 금정산성 축성역에서는, 烟軍과 승군, 평안도 귀성부에서도 연군과 승군의 부역노동으로 수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ꡔ築城金烏時日記ꡕ. ꡔ備 邊司謄錄ꡕ 60冊, 肅宗 36年 6月 20日. ꡔ龜城城役誌ꡕ 丙戌 9月 4日 ; 己丑 10 月). 66)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擧行稟目 中軍,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年 2月 日 ; 甲寅年 3月 29日. 범죄자를 뽑아 축성역에 동원한 사례는, 인조 초, 남한산성의 수축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李适의 난 때 도망한 訓鍊都監 砲手를 동원해서 贖罪築城 케 할 것을 결정한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ꡔ仁祖實錄ꡕ 卷5, 仁祖 2年 3月 己未, 癸亥). 67) 예컨대 동래부 축성역 당시 속오군의 巡點을 정지하여 축성역에 농민으로 구성 된 烟軍을 징발한 사례를 활용해서, 대구부 축성역에서도 순점을 덜고, 연군을 동원한 일이 있었다(조형래ㆍ서치상, 앞의 논문, 2005, 84쪽. ꡔ承政院日記ꡕ 45冊, 英祖 12年 2月 6日 ; 45冊, 英祖 12年 2月 30日. ꡔ備邊司謄錄ꡕ 99冊, 英祖 12年 2月 7日, 3月 1日).
326 지역과 역사 39호 전라감사 조현명은, 부족한 석수를 충당하기 위해서 장계를 올려 중앙 여러 아문에 속한 석수를 내려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결국 영조의 승인하에, 선공감 및 각 아문에 속한 석수를 뽑아 내려보내는 조치 가 취해졌다.68) 1731년(영조 7) 동래부 축성역에서는 동소ㆍ서소ㆍ남소ㆍ북소의 네 부 분으로 담당 구역을 나누어 성곽 축조를 진행하였다. 동래부성 축성역은 주 로 부역노동으로 수행하였으나 담당 구역을 정해서 책임감을 부여하고 경쟁 을 재촉하는 방식을 취했다.69) 이와 비슷하게 전주부 축성역에서도 體城 2,616보를 4개의 담당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左一所ㆍ左二所ㆍ右 一所ㆍ右二所의 구역 구분이 그러하다. 각기 1인의 都監 아래 色吏ㆍ差使 를 한 사람씩 두고. 10인의 牌將을 통솔하는 도패장을 두었다.70) 전주부성 축성역에는 고용노동의 노동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역시 담당구역을 설정해서 책임과 경쟁의 방식을 적용한 것은 노동력을 절 약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71) Ⅲ. 城役文書의 작성 전라감사 조현명이 주도한 전주부성 축성역은 상세한 城役文書를 남겼다 는 점에서도 특징적 면모를 보인다. 이 문서는 明見樓記 에 ꡔ築城謄錄ꡕ이 라 지칭되었다.72) 전주부의 築城謄錄, 築城啓草 또는 ꡔ全州府城築城錄ꡕ 68) 69) 70) 71) ꡔ備邊司謄錄ꡕ 95冊, 英祖 10年 3月 21日. ꡔ東萊府築城謄錄ꡕ 築城時差任. ꡔ全州府城築城錄ꡕ 各所差役. 서치상ㆍ조형래, 앞의 논문, 2007, 33~34ㆍ36쪽. 전주부 축성역에서 4개의 담당구역 가운데. 左二所ㆍ右二所의 두 구역에만 募 軍이 작업에 투입되었다. 다른 두 구역과 마찬가지로 僧軍과 烟軍도 함께 작업 에 임했다. 4개 구역에서의 작업량은 비슷했지만, 승군ㆍ연군ㆍ모군의 구성비 는 모두 달랐다. 이들의 작업 효율성을 비교ㆍ검토하거나, 경쟁심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ꡔ全州府城築城錄ꡕ 築城節次).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27 이 그것이다.73) 조현명 등이 축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긴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 된다. 전주부성 축성역이 벌어지기 3년 전,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에서 부사 정언섭의 주도하고 경상감사 조현명이 적극 후원했던 축성역이 전개되 고, 이어서 ꡔ東萊府築城謄錄ꡕ이라는 이름의 성역문서가 작성된 바 있다. 이 문서는 지휘계통을 따라 경상감사였던 조현명에게 보고되었을 것으로 보 인다. 곧이어 전개된 전주부 축성역은 전라감사로 옮겨 부임한 조현명의 주 도 아래 시행되었다. 조현명은 그 무렵 ꡔ東萊府築城謄錄ꡕ을 참조했을 가능 성이 크다. 새로 축조한 동래부성은 특별히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 영의정 洪致中 은, 동래부의 성역에는 다른 異論을 제기하는 이가 없으며, 특히 城制와 형 세의 두 가지 면에서 우수하다고 평했다.74) 그러나 동래부 축성역을 두고 집중적으로 많이 거론했던 장점은 재정 조달 문제였다. 나라 살림에 부담을 끼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시행한 점이 강조되었다. 예컨대 동래부 읍성은 동 래부에서 스스로 감당한 것[東萊之城 本府當之]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곤 했 다. 당시 경상감사였던 조현명은, 정언섭이 축성을 위한 재원 조달을 요청 하지 않고 스스로 미리 마련 한 점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이 같은 사항을 고려하여, 동래부 읍성을 축조한 직후, 영조 또한 정언섭의 공적을 크게 치 하하였다.75) 그런데 ꡔ東萊府築城謄錄ꡕ에는 이 같은 物力의 조달 방식이나 내역, 심지어 재정 지출과 수입에 관한 대체적인 서술조차 포함되지 않았 72) 유재춘, 앞의 논문, 2006, 44쪽. 이희권ㆍ이동희, ꡔ전주부성 축성록ꡕ 해제, 이희권ㆍ이동희 역주, ꡔ전주부성 축성록ꡕ, 전주역사박물관, 2010, 26ㆍ30쪽. 73) ꡔ全州府城築城錄ꡕ의 명칭은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역주본을 발행하면서 결정한 것이다. 앞서 자료가 처음 발굴되었을 때에는 ꡔ築城啓草ꡕ로 명명되기도 했다 (유재춘, 위의 논문, 40쪽). 74) ꡔ承政院日記ꡕ 40冊, 英祖 8年 1月 10日. 75) 영조는 동래부사에서 돌아온 정언섭을 이듬해에 충청감사로 임명하였다. 동래부 에서의 그의 치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ꡔ承政院日記ꡕ 40冊, 英祖 8年 1月 10日 ; 42冊, 英祖 9年 6月 11日 ; 42冊, 英祖 9年 10月 1日 ; 44冊, 英祖 10年 11月 25日 ; 50冊, 英祖 17年 4月 29日).
328 지역과 역사 39호 다.76) 그보다는 노동력 동원과 감독 인원의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조현명의 전주부 성역문서에서는 이 같은 기록 편중의 문제점을 보완하게 되었다. 전주부성 축성역이 채 완료되기 전에 조정에서 중지를 요청하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조현명의 적절한 대응으로 쉽사리 무마되었다. 전라 감사 조현명은 축성역의 배경으로부터, 소요된 재물 출처 및 규모, 일꾼의 동원 방식과 규모 등에 관해서 매우 신속하게 해명함으로써, 축성역의 타당 성을 논리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77) 조현명 등이 준비한 성역문서는 축 성을 둘러싼 시비 논쟁이 발생하더라도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자료적 근거로 기능했을 것이다. 조선시기 축성역에 관한 자료로서 ꡔ華城城役儀軌ꡕ를 첫 손에 꼽을 수 있 다. 1794년(정조 18)부터 1796년(정조 20)에 걸친 화성 축조에 관한 방대 한 기록을 수집ㆍ정리한 의궤 형식의 방대한 책이다. 각종 왕래 공문을 분 류하여 정리하고, 장인과 募軍 등 일꾼의 동원방식과 품삯에 이르기까지 공 역의 각 부문을 망라해서 서술하였다. 전주부 축성역의 ꡔ築城謄錄ꡕ, 곧 ꡔ全州府城築城錄ꡕ은 지방관부에서 주 관한 축성역을 기록한 문서를 모아 정리한 책이다. 조선시기 성역문서로서 남아있는 예가 많지 않다. 1606년(선조 39) 수성장 鄭邦俊이 善山 금오산 성을 쌓으면서 기록한 ꡔ築城金烏時日記ꡕ,78) 숙종대 평안도 龜城府의 축성 역을 기록한 ꡔ龜城城役誌ꡕ,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의 축성역 을 기록한 ꡔ東萊府築城謄錄ꡕ, 1869(고종 6)~1871년(고종 8)의 동래부의 76) 동래부성을 완성한 뒤에 수시로 보수할 때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과거에 修築之穀 을 두었던 사실이나, 당시의 개축과 함께 새로 마련한 守城倉穀 의 운 영 방식 등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ꡔ東萊府築城謄錄ꡕ 舊節目, 本府節目). 축성을 기념하여 세운 萊州築城碑 에 따르면, 공역에 든 경비는 쌀 4,500여 섬과 베 1,550필, 돈 13,400여 량이었으며, 이는 모두 정언섭이 조정의 지원을 받지 않 고 스스로 마련한 것이라 했다(ꡔ부산금석문ꡕ 萊州築城碑記, 부산광역시, 2002). 77)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2月 日. ꡔ歸鹿集ꡕ 卷6, 疏, 辭職兼陳築城形止疏. ꡔ承 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3月 7日. 78) ꡔ金烏山城築城日誌ꡕ(龜尾文化院, 1996). 장필기, 앞의 논문, 2004, 77ㆍ97쪽.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29 축성역과 관아 수리의 역사를 기록한 ꡔ城役及各公廨重修記ꡕ79) 등이 그것 이다. ꡔ全州府城築城錄ꡕ은 특히 구체적 자료로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녔 다.80) ꡔ華城城役儀軌ꡕ의 상세함에 이르기 전에 비교적 잘 갖춰진 축성에 관한 기록이라고 보아도 좋다. ꡔ華城城役儀軌ꡕ로 나아가는 중간단계인 셈 이다. ꡔ全州府城築城錄ꡕ은 몇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종 왕래 공문, 물자 및 役丁의 분정, 축성 절차, 포상 요청, 전체 물력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왕래 문서에는, 축성 추진 과정에서 전라감사가 중앙에 진달한 문서, 각 군현에 보낸 문서, 전주부에서 거행한 사항들, 철물ㆍ목물 등 물자와 역정 등을 각 고을에 분정한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왕래 공문의 체계적 정리는 그 이전 다른 축성기록류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뒷날 축성역 의 실태를 돌아보고, 참고하는 데에 매우 긴요한 자료로 활용될 터였다. 축성공사의 전 과정의 기록, 예컨대 숯 굽는 절차, 伐石 절차, 曳石 절차, 毁城 절차, 築城 절차, 門樓 건축 절차 등을 상세히 기록한 점도, 후일에 참 고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 밖에 공사 진행과정에 따르는 제사의 제 문과 제물 내역, 축성역을 완료한 뒤에 참여한 감독 인원 등 유공자에 대한 포상 요청의 장계를 그대로 기록했다. 축성에 들어간 전체 물력을 별도로 정리한 것도 주목된다.81) ꡔ全州府城築城錄ꡕ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ꡔ東萊府築城謄錄ꡕ과 비 교해 볼 때, 우선 양적으로 3배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82) 상당 부분을 차 지하는 왕래 공문의 쳬계적 정리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왕래 공문이 중 요하게 다루어지는 사례는, 뒤에 간행된 ꡔ華城城役儀軌ꡕ에서 관련 공문을 계통별로 구분하여 낱낱이 수록하고 있는 데서 잘 볼 수 있다. 이 같은 공문 모음은, 공역 체계, 공역의 진행과정에 따른 제반 논의, 협조, 지시의 사례 79) 80) 81) 82) 윤용출, ꡔ城役及各公廨重修記ꡕ 해제 ꡔ항도부산ꡕ 24, 2008. 유재춘, 앞의 논문, 2006, 42ㆍ43ㆍ79쪽. 이희권ㆍ이동희, 앞의 글, 2010, 31~33쪽. 유재춘, 앞의 논문, 2006, 79쪽.
330 지역과 역사 39호 등을 이해하는 데 큰 보탬이 된다. 또한 자료 보존의 의미도 담겨 있다. 영조가 전주부성 축성역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서, 조현명 등이 작성 한 ꡔ全州府城築城錄ꡕ을 직접 열람한 일이 있다. 전주부 축성역을 마치고 포상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던 참이었다. 次對의 석상에서 전주부 축성 역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善山府 축성역, 두 곳의 유공자를 포상하는 데 지나침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영조는 승정원 注書를 시켜 전주와 선산의 城役文書 를 가져 오라고 명하였다. 포상을 위한 근거자료를 첨부했기 때문 인지, 곧 두 문서는 제출되었다. 영조는 이를 열람할 수 있었다. 이때 승정 원 주서는, 東萊文書 는 외지에 있어서[在外] 지참하지 못했다고 보고하였 다. 문서를 열람한 것은 축성역의 전모를 이해하려는 영조의 적극적 관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83) 차대의 자리에서 거론된 성역문서 ㆍ 동래문서 는 곧 ꡔ全州府城築城錄ꡕㆍꡔ東萊府築城謄錄ꡕ이다. 성역문서가 통치의 자료로 서 활용된 사례를 보여주는 바였다. Ⅳ. 축성을 둘러싼 논란과 대응 전라감사 조현명은 1734년(영조 10) 2월 한때 파직 처분되었다. 당시 조 현명은 호남 연해지방의 흉작을 이유로 전세와 軍保米를 停退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국왕의 윤허를 얻기 전에 임의로 시행한 점이 큰 문제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靈城君 朴文秀를 비롯하여 여러 관료들이 이 문제의 사후 처리 를 둘러싸고 논의를 벌였다. 결국 재해를 심하게 입은 고을의 전세와 군보 미 가운데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곳은 특별히 탕감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 다. 조현명은 이 일로 파직 처분되었다. 그러나 불과 이틀 뒤, 우의정 金興 慶의 건의로 파직의 명은 철회되었다.84) 83) ꡔ承政院日記ꡕ 44冊, 英祖 10年 11月 25日. 84) ꡔ英祖實錄ꡕ 卷37, 英祖 10年 2月 辛亥 ; 卷37, 英祖 10年 2月 癸丑. ꡔ備邊司 謄錄ꡕ 95冊, 英祖 10年 2月 6日 ; 95冊, 英祖 10年 2月 8日.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31 그 며칠 뒤, 조현명이 주관한 전주부성 축성역의 중단을 요구하는 청원이 조정에서 제기되었다. 사간원 헌납 趙漢緯가 전주부성 축성의 중단을 제안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계속된 흉년으로 재정이 고갈되고 민생이 곤궁하며 [財竭民窮], 그중에도 호남이 가장 심하다고 했다. 그러한 때 전주부성을 쌓는 일은, 비록 미리 방비하는 일[未雨之備]이라고 하지만 때에 맞지 않다 는 것, 일꾼을 사고도 부족하여 승군을 징발하는 등 소란스러움을 면치 못 한다고 했다. 축성역을 미루고 풍년 오기를 기다려야 하며, 지금의 일꾼 사 는 재물[雇丁之財]로 진휼에 돌려 쓴다면 실로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우선 공사를 중지시키고, 民力을 쉬게 하고, 농사철을 뺏 지 말게 하자는 주장이었다.85) 조한위의 지적이 있었을 때, 우의정 김흥경은, 외방에서의 여론[外議]은 혹 잠시 중단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는 듯한데, 자신은 어느 편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김흥경이 지적한 바 축성역에 부정적 인 외의 는 지방 수령, 토호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축성의 물력을 확보하는 초기 과정에서부터, 축성역에 따른 많은 물자와 노동력의 分定과 부과에 이 르기까지 많은 불만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영조는 축성역 정지 논의에 제동을 걸었다. 당시 전주부 축성역이 한창 진행 중인데, 중도에 그 치게 하면, 방해를 면치 못하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일단 비변사로 하 여금 전라감사에게 물어보게 한 뒤 다시 품의하도록 지시하였다.86) 조현명이 다시 유임된 것은 조정의 체통을 구차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비판이 대 사간 任守迪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유임 처분을 번복시키지는 못했다(ꡔ英祖實 錄ꡕ 卷37, 英祖 10年 2月 丙寅). 85)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2月 21日.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2月 20日. 사간원 헌납 조한위의 문제 제기는, 전라감사 조현명이 다시 유임된 것을 문제 삼은 대사간 임수적의 지적과 같은 날에 이루어졌다(ꡔ英祖實錄ꡕ 卷37, 英祖 10 年 2月 丙寅). 86)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2月 20日. ꡔ備邊司謄錄ꡕ 95冊, 英祖 10年 2月 20日. 비변사의 공문은 그대로 ꡔ全州府城築城錄ꡕ에 수록되어 있다(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2月 21日).
332 지역과 역사 39호 비변사의 공문을 접한 조현명은 상세한 내역을 담은 장계를 올렸다. 축성 반대론의 부당함을 여러 부면에서 지적하였다. 그가 작성해 두었던 성역문 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을 취하기에 적합한 자료로 활 용되었다. 조현명은 전라감사로 부임한 뒤 진휼에 힘쓴 내역과 더불어 축성의 물력 을 확보한 사정을 제시하면서, 전주부성의 축성의 노동력으로 승군을 징발 하되 役糧을 지급한 점, 농민을 요역 징발한 연군[烟戶軍]은 하루 동안의 단기 부역에 동원한 사실, 수레인 동거를 도합 458대나 투입해서 노동력을 크게 절약하였다는 것, 연호군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농사철을 뺏지 않았다는 점, 게다가 축성역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 등을 보 고하였다. 조한위가 제기한 진휼 대상 지역은 8개 고을이 해당되는데, 이미 무상으로 곡식과 종자를 지원하였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준비한 물력은 쌀 4천 석, 돈 1,400량, 베 50同 등이었다. 이제 큰 역사를 한번 중지하면 사 실상 다시 시작하기 어렵다는 것, 보장의 땅이 위급할 때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을 얻게 하면, 나라의 행운이 될 것이라는 점 등을 역설하였다. 국왕 영조 는 부디 이 같은 떠도는 논의[浮動之義]에 흔들리지 말 것을 청했다.87) 조 현명은 축성의 財用, 役夫와 공사 기일 문제를 들어서 공역의 중지가 불가 함을 강조한 것이다. 앞서 우의정 김흥경이 外議 라고 암시하였듯이 축성 반대 논의는 호남지 방의 유력자들 가운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같은 일부 여론이 조한위 를 통해서 조정의 논의에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조현명은 전주 지역에서 전해오는 설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수백 년 전에 축성을 논의할 때 수십 명 토호들이 비방하며 저지하였고, 그때 전주의 수령이 하루에 12명의 목을 베 고서 드디어 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설화였다. 조현명이 전라감사로 부임 한 뒤에 진휼곡을 확보하는 과정이나 축성의 물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각 읍 수령, 향리층을 비롯한 지역 토호들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87) ꡔ全州府城築城錄ꡕ 甲寅 2月 日, 啓草.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3月 7日. ꡔ歸鹿集ꡕ 卷6, 疏, 辭職兼陳築城形止疏. ꡔ英祖實錄ꡕ 卷37, 英祖 10年 3月 癸未.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33 이 점이 축성역 진행과정에서 논란을 야기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 조한위는 자신의 축성 중지론이 수용되지 않자, 다시 상소를 올려 반대 의사를 거듭 밝혔다, 기근이 참혹한 시기에, 한편으로 진휼을 베풀고 한편 으로 백성을 사역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또 전주는 서울에서 멀지 않으므로, 남쪽 사대부들이 민간의 일을 목격하고, 이로써 자연히 알게 된 일이지, 호남 지역의 吏胥輩들의 준동에 영향을 받아 문제를 제기한 게 아 니라고 주장했다.88) 外議의 실체에 관한 해명이다. 지역 사대부를 포함한 지배층의 반대 여론이 있다는 정황을 암시한 것이다. 전주부성 축성 반대의 논의는 더 이상 제기되지 못했다. 축성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영조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영 조는 논란 과정에서 전주부의 축성역을 보는 자신의 특별한 관점을 보여주 었다. 전주는 豐沛舊鄕, 곧 조선왕조 발상지여서 事體가 남다른 곳으로 여 겨졌다.89) 영조는 전주부성 축성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 에 중도에 그칠 수 없다는 조현명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조현명의 시 선으로 보았을 때, 영조의 뜻은 동요하지 않았으며, 마치 먼 지방 일을 훤히 보듯 해서[明見萬里], 축성역의 순조로운 진행을 성공적으로 도운 셈이었 다. 전주부성 남문 누각의 이름이 明見樓로 정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90) 전주성역이 완성되어 조현명이 장계를 올렸을 때,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뜻이 있는 자는 일을 끝내 이룬다[有志者 事竟成] 고 표현하여, 자신의 호 의적 평가를 그대로 드러내었다.91) 영조의 태도는 賞典에 관한 논의 과정에서도 표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완료된 선산부와 전주부 축성 유공자들에 대한 후한 시상을 둘러싸고 조정 에서 반론이 일부 제기되었다. 성곽을 수리하는 일 등은 수령의 직분 내의 일일 뿐[守令職分內事]인데, 수상자가 과도하게 많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88) 89) 90) 91)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3月 20日. ꡔ承政院日記ꡕ 44冊, 英祖 10年 11月 25日. ꡔ全州府城築城錄ꡕ 明見樓上樑文. ꡔ歸鹿集ꡕ 卷19, 明見樓上樑文.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6月 2日.
334 지역과 역사 39호 영조는, 전주축성의 일은 처음부터 내가 결의하여 한 일[全州築城事 當初 予決意爲之] 이라고 밝혀, 자신의 판단을 그대로 드러냈다. 결국 이례적으 로 많은 대상자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시상에 포함시키게 되었다.92) 영조 는 그 뒤에도 전주 축성을 회고하며, 豐原君[조현명]이 힘써 주도했으며, 나 역시 들뜬 논의[浮議]에 움직이지 않아서, 마침내 완성된 것 이라고 표현 했다.93) 전주부 축성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논란이 일었듯이 두 해 지난 1736년 (영조 12) 대구부 축성역에서도 반대 논의가 제기되었다. 사간원 正言 金聖 澤은 상소를 통해서, 농번기에 농민을 사역해서 농사일을 방해하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했다. 부역의 괴로움에 더하여 농사 절기조차 어긋나게 한다면 크게 민심을 잃을 것이라 하였다. 지금은 태평의 시기이고 적이 침입할 걱 정도 없으니[非有暴客之虞], 농한기를 기다려서 공역을 얼마간 멈추자는 제의였다.94) 비변사에서는 이에 대해 몇 가지로 의견을 정리했다. 첫째, 감 영이 있는 곳에 성곽이 없을 수 없다는 점, 둘째, 지금 경삼감사 민응수가 조정에서 財力을 빌려오지 않고 축성역을 잘 경영하고 있으며, 셋째, 공역 이 거의 끝나가는 단계이며, 넷째, 속오군의 사역은 거의 그쳤고, 승군에 이 어서 募軍을 쓰게 되었으므로 농민의 농사일을 방해할 일은 없을 것, 끝으 로, 지난번 조현명의 전주부 축성역에서 보았듯이, 이 같은 큰 역사는 들뜬 논의에 흔들려서는 안될 것이므로 妨農 여부는 경상감사에게 물어야 할 것 이라는 등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영조도 비변사의 손을 들어주었다.95) 전라감사 조현명은 전주부의 성역이 끝나갈 무렵, 영조에 의해 조정으로 불러 들여졌다. 호조판서 宋寅明은 이같은 인재를 지방관에 머물게 하는 일 은, 외직을 중히 여기고 京職을 가볍게 여기는 일[重外輕內] 이어서, 바람 92) ꡔ承政院日記ꡕ 44冊, 英祖 10年 11月 23日 ; 44冊, 英祖 10年 11月 25日. 93) ꡔ承政院日記ꡕ 50冊, 英祖 17年 6月 23日. 94) ꡔ承政院日記ꡕ 45冊, 英祖 12年 4月 5日. ꡔ備邊司謄錄ꡕ 99冊, 英祖 12年 3月 27日. 95) ꡔ備邊司謄錄ꡕ 99冊, 英祖 12年 4月 7日. ꡔ承政院日記ꡕ 45冊, 英祖 12年 4月 5日.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35 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병조판서 尹游도, 인재가 부족한 시기에 오랫동 안 지방에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 고 했다.96) 그러나 조현명이 축성역을 수 행하면서 外議, 곧 지역의 일부 지배층 여론과 충돌했던 점을 불안하게 보 는 시선들이 많았던 점도 감안한 인사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영조는 조정으 로 돌아오는 조현명을 위해 비변사 당상 자리를 비워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으므로, 비변사의 영남 당상을 맡기기에 적합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97) 그는 경삼감사로 재직한 중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주도한 동래부성 축성 역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전라감사 재직 중에는 직접 전주부 축성역을 기획 하고 주관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는 경상감사 민응수가 주도한 대구 부 축성역을 후원하였다. 그는 무신란 직후 남부 지방 중요 거점에 평지 읍 성을 건설하는 데 힘을 기울인 셈이다. 그는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지방의 조세제도 및 재정 운영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탕평파에 속하는 영조 측근의 관료들은 양역의 개혁 방안을 모색 하고 있었다. 조현명의 관찰사 재직 경력은 이 같은 개혁사업의 기초 자료 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신란 이후 지역의 민심을 살 피고, 양역을 중심으로 한 세제 개혁사업을 구상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 다. 96) ꡔ承政院日記ꡕ 43冊, 英祖 10年 7月 5日. 영조는 이조판서 金在魯에게 조현명의 임기를 물었고, 내년 3ㆍ4월까지 8개월 여 남았다는 답을 들었다. 대신들은, 그가 외방에 나간 지 오래이고, 전주부 축 성역도 마쳤으므로 교체하고 들어와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ꡔ備邊司謄錄ꡕ 96冊, 英祖 10年 7月 6日). 97) ꡔ備邊司謄錄ꡕ 96冊, 英祖 10年 7月 15日.
336 지역과 역사 39호 맺음말 1734년(영조 10) 전라감사 조현명은 전주부성을 축조하는 일을 주관했 다. 이 성곽은 무신란 직후에 건설된 여러 평지읍성 가운데 하나로서, 특히 큰 비중을 차지했다. 탕평파 관료들이 지방관으로 부임해서 단기간에 건설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무신란 이후 민심을 수습하던 시기에, 민폐 를 덜 끼치면서 축성역과 같은 공역의 경영을 합리적으로 하는 방법에 관해 서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전주부성 축성역은 지방관아에서 주관한 축성역으로서 많은 募軍을 고용 하는 募立制 고용노동을 적용했다는 점, 노동력을 절약하기 위해 다량의 수 레를 제작하고, 석재 운송 등의 분야에 투입했다는 점에서, 이 무렵의 다른 축성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적 면모를 보였다. 전주부 축성역의 전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 城役文書를 작성하였던 점도 큰 의미를 지닌다. 이 는 축성역의 기획ㆍ평가ㆍ참조를 위해서 매우 필요한 작업이 시도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몇 가지 점에서 의미있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조현명은 무신란 직후 경상 및 전라감사를 역임하여, 지방 민심을 수습하 는 일, 민간의 폐단을 살펴보는 일 등에 힘썼다. 아울러 군사적 방어체계 점 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동래부ㆍ전주부ㆍ대구부 등 남부 지방 여러 곳의 축성사업은, 안정적인 지방 통치를 통해 왕권의 강화를 추구했던 탕평파 관 료들의 구상이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무신란을 거치면서 산성보다는 평지읍 성 중심의 방어체계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영조대 이후 도성 중심의 방어체 계가 중시되던 사실과도 깊이 관련된다.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도성 혹은 평지읍성에서 민심을 진정시키고, 군사력과 비축물자로서 백성들과 함께 지 키겠노라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조현명은 전주부성 축조과정에서 城制의 개선에도 유념했다. 평지읍성에서는 특히 雉城을 설치하는 것이 방어에 유 리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전주부성에서는 11개소의 치성을 설치하였다. 조현명은 자신이 마련한 재물로써 축성역의 물력을 삼았음을 과시했다.
1734년 전주부성의 축조와 조현명 337 그 재원으로 쌀 4천 석, 돈 1,400량, 베 50同, 쇠 25,000근, 숯 3천 석, 회 3천 석, 칡 600同, 동거 250대 등을 조달 혹은 구입해서 물력으로 삼았다. 그는 두 가지 방도를 취했다. 첫째, 아전들의 부당한 축재를 환수한 것, 둘 째, 곡식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이득을 취하는 料辦取利 의 방식으로 재원 을 마련한 것이다. 재용을 절약하는 방도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력을 절약하는 일[省力]이었다. 그 일환으로 전주부성 축성역에서는 많은 수레를 활용했다. 동거는 모두 458대가 투입되었다. 유례 없이 많은 수레를 활용했 다는 점에서 매우 실험적인 면모를 보였다. 적극적인 수레 보급론자이기도 했던 조현명은 동거를 이용함으로써, 동래부 축성역 등과 비교해 볼 때, 노 동력을 큰 폭으로 줄일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전주부 축성역은 조선후기 지방관부에서 주관한 축성역으로서는 처음으로 많은 임노동자인 募軍을 고 용하였다. 그러나 전주부 축성역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민 (연호군)ㆍ승군의 부역노동이었다. 특별히 범죄자를 사역한 일[贖罪築城] 은 드문 예라 볼 수 있다. 축성역을 신속하게 진행하고자 했던 전라감사 조 현명은, 장계를 올려 중앙 각아문에 속한 석수를 내려 보내도록 했다. 역시 전주부 축성역에서 볼 수 있는 전례없는 조치들 가운데 하나였다. 전라감사 조현명이 주도한 전주부성 축성역은 상세한 城役文書를 남겼 다. 이 문서는 뒤에 ꡔ築城謄錄ꡕ이라 기록되었으며, 오늘날 ꡔ전주부성 축성 록ꡕ의 이름으로 역주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 자료는 몇 부분으로 구성되 었다. 각종 왕래 공문, 물자 및 役丁의 분정, 축성 절차, 포상 요청, 전체 물 력 등이 그것이다. 특히 왕래 공문의 체계적 정리는 그 이전 다른 축성 기록 류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뒷날 축성역의 실태를 돌아보고, 참 고할 때 매우 긴요한 자료로 쓰일 수 있었다. 이같은 공문 모음은, 공역 체 계, 공역의 진행과정에 따른 제반 논의, 협조, 지시의 사례 등을 이해하는 데 보탬을 줄 것이다. 영조는 전주부성 축성역의 전모를 이해기 위해서, 조 현명 등이 작성한 전주부 축성 문서를 직접 열람하기도 했다. 전주부 축성 역을 마치고 포상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던 次對 석상에서 영조는 전주 와 선산의 성역문서 를 직접 열람한 것이 그것이다. 축성역의 전모를 이해
338 지역과 역사 39호 하려는 영조의 적극적 관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울러 축성 문서가 통치 의 자료로서 활용된 사례를 보여주는 바라 하겠다. 조현명이 주관한 전주부성 축성역을 두고, 한때 중단을 요구하는 청원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간원 헌납 趙漢緯는 흉년으로 재정이 고갈되고 민생이 곤궁한 것을 문제삼았다. 축성역을 일단 멈추고, 지금의 일꾼 사는 재물로 진휼에 돌려 쓸 것을 주장했다. 우선 공사를 중지시키고, 民力을 쉬게 하고, 농사철을 뺏지 말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조한위의 반론은 매우 원칙적인 주 장을 담고 있었다. 흉년의 농번기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농본의 정치 원리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조현명은 상세한 내역을 담은 장계를 올렸다. 축성을 위한 물력의 준비, 부역노동의 제한적 사용, 고용노동의 채택 등을 열거하며, 축성 반대론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영조는 논란 과정에서 전주 부의 축성역을 지지하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 보였다. 조현명은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 지방의 조세제도 및 재정 운영에 큰 관 심을 기울였다. 탕평파에 속하는 영조 측근의 관료들은 양역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조현명의 지방관 경험은 이 같은 개혁사업을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이었다. 무신란 이후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지역 민심을 살피고, 양 역을 중심으로 한 세제 개혁사업을 구상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재정의 파탄과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랜 논의 과정 중에 있 던 양역변통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뒤따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ꡔ景宗實錄ꡕ, ꡔ歸鹿集ꡕ, ꡔ龜城城役誌ꡕ, ꡔ東萊府築城謄錄ꡕ, ꡔ備邊司謄錄ꡕ, ꡔ城役及 各公廨重修記ꡕ, ꡔ肅宗實錄ꡕ, ꡔ承政院日記ꡕ, ꡔ英祖實錄ꡕ, ꡔ全州府城築城錄ꡕ, ꡔ正祖 實錄ꡕ, ꡔ築城金烏時日記ꡕ, ꡔ華城城役儀軌ꡕ 고수연, 1728년 湖西地域 戊申亂의 叛亂軍 성격 ꡔ歷史와 實學ꡕ 44, 2011. 김형자, 朝鮮後期 趙顯命의 政治ㆍ經濟思想 ꡔ실학사상연구ꡕ 9, 1997. 서치상ㆍ조형래, 英祖初年의 全州邑城 改築工事에 관한 再考察 ꡔ건축역사연구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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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지역과역사 39 호 Abstract Construction of Fortress of Jeonju District in 1734 and Governor Jo Hyun-Myung of Jeolla Province Yoon, Yong-Chul In 1734(10th year of King Yeongjo s reign), Jo Hyun-myung, the governor of Jeolla Province, commanded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of Jeonju District. The Jeonju Fortress was regarded to have considerable significance regarding defense, among a few provincial fortresses on the plain land of its kind in Korea, which were built after Musin Revolt(an unsuccessful revolt in 1728). Most of such construction projects were done in a short time, under the leaderships of local magistrates appointed from the pool of King Yeongjo s favorite subjects. Jo s project had a few significant differences from other local governmental construction projects of its time. First of all, unlike other construction projects of a local government, which requisitioned its local people, Jeonju hired wage earners, and mobilized handcarts in order to maximize the labor efficiency. The fact that Jeonju even kept detailed records of the entire procedure of the construction adds much more to the historical importance of this project. Such documentation of the construction implies that they tried to systemize the planning, evaluation, and reference of this construction project. As Jo was appointed as a governor of Gyeongsang and Jeolla provinces right after the Musin Revolt, his duty was to improve the public sentiment and study malpractices of the locals. During this period, many fortresses in the southern districts of Dongnae, Jeonju, and Daegu were built, under the plans of the
1734 년전주부성의축조와조현명 341 governors appointed by Yeongjo, which put defense and military on the top of their agenda. Jo also considered local defense as important.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the defense plan of the capital was about reorganizing the defense system with the central fortress in the core of the military leadership, which can relieve the public sentiment, maintain and distribute the accumulated military provisions, and make the local people fully committed to defending the area from the invaders. In the documentation of the construction of the Jeonju Fortress, Jo bragged about using the resources that he procured, which were equivalent to 4,000 seoms of rice, 1,400 ryangs of money. There were two ways to collect the money: to charge penalty from the corrupt officials who were caught profiteering, and to yopan, or trading the grain. He also made remarkable efforts to save the cost, and the biggest part was about saving the labor cost. Mobilizing unprecedented amount of handcarts, including 458 of donggeo s(a handcart pulled by 4 people), was an innovative way for such a goal. He boasted about having saved labor cost significantly compared to other construction projects of that time, including that of Dongnae District. The Jeonju Fortress project also has historical significance as the first local government project of Joseon Dynasty that hired a lot of mogun s, or wage earners. The entire procedure of Jo s construction project was recorded in a very specific document which remains until now and deserves analysis. The contents of the document can be divided into a few parts: sent and received official documents, distribution of resources and labor, the procedure of the construction, requests for awards, and the complete list of the resources. Collecting and recording all the official documents that were received and sent was unprecedented systemic effort which was hardly found in other projects of that time of Joseon Dynasty. Since such a detailed document was kept, it might have had very useful data that a successor can recall and refer to. King Yeongjo himself read such
342 지역과역사 39 호 documents in order to understand the construction process. There were pleas from scholars who demanded that construction of Jeonju Fortress must be stopped. Cho Han-wie was one of them, who criticized that it is not appropriate to command the construction when people are suffering and the finance of the local government is not sound because of poor harvest. He demanded that the resources for the construction must be transferred to famine relief. Cho s rationale was based on a reasonable logic, which puts agriculture on the top priority and says it is unjust to start construction during the busy season for farmers. In order to rebut the criticism as the governor of Jeolla Province, Jo wrote a detailed report on the use of the resources. King Yeongjo also indirectly implied that he supports the construction. During his time as a governor, Jo s special attention was in the local taxation system and financial management of the local government. What he did as a governor was the beginning of the economic reform that he rooted for. Keywords : Construction of Fortress, Musin Revolt, the Documentation of the Construction of Fortress, Yopan, Handcarts
ꡔ지역과역사 ꡕ 39, 2016.10, 343~374 쪽 1970http://dx.doi.org/10.19120/cy.2016.10.39.343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43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 -1978 년을중심으로 - 98) 김선미 ** 머리말 Ⅰ.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민주세력의재편 Ⅱ. 유신반대운동의전개와확산 1.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2. 부산대페인팅사건 Ⅲ. 학생운동의형성과확산 1. 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 2. 노동야학, 진보적개인맺음말 국문초록 부마항쟁은학생들의가두시위로촉발되었다. 이연구는그러한학생시위가어떻게가능했는지, 그실마리를찾기위한노력의일환이다. 이를위해이논문에서는부마항쟁이벌어지기한해전인 1978 년부산지역학생운동의부활에주목했다. 1978 년부산에서는유신에반대하는학생시위를촉발하기위한시도가연속적으로벌어졌다. 부산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과 부산대페인팅사건 이그것이다. 이는부산에서본격적인유신반대운동이시작되었음을의미했다. 두사건은비록학생시위를이끌어내는데는실패했지만, 동일방직해고노동자의선거법위반사건과함께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을통해, 진보적청년학생층을결집시키고학생운동의확산을초래했기때문이다. 이러한상황은부산지역의민주지형을기반으로전개되었다. 1970 년대후반부산에서는다양한방면에서민주적거점이생겨났고, 이들이유기적으로결합하 * 이논문은 2015 년정부 ( 교육부 ) 의재원으로한국연구재단의지원을받아수행된연구임 (NRF-2015S1A5B5A07042951). ** 부산대학교사학과강사 (kimssinai@hanmail.net).
344 지역과역사 39 호 면서새로운민주지형을구축하고있었기때문이다. 노동야학이생겨나고, 진보적개인이성장하는것도이무렵의특징적양상이었다. 그결과 1978 년부산은지역사회의민주역량과, 그를기반으로하는진보적학생운동의역량이유기적으로결합하면서이듬해부마항쟁을위한에너지를축적하고있었다. 주제어 : 1978 년, 유신반대운동, 부산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부산대페인팅사건, 학생운동, 부마항쟁 머리말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산에서발생하여 18일마산으로확산되면서, 대학생의가두시위에부산과마산의지역주민이대거합류하여전개한, 최대규모의유신반대대중투쟁이다. 이를통해부마항쟁은 4월혁명이후대중적궐기의전통을복원시켜 1980년대시민항쟁의거대한흐름을매개했고, 권력층내부의갈등을증폭시켜유신체제를안으로부터붕괴시켰다. 1) 부마항쟁에대한관심은 1984년부산대민주화추진위원회의 올려라! 부마항쟁의새깃발을! 을기점으로시작되어, 2) 1987년 6월항쟁이후 1990 년대를거치면서본격화되었다. 2000년이후연구가양적으로확대되어, 현재까지적지않은연구성과를축적하기에이르렀다. 그결과유신말기부산경제의침체상황과 1970년대후반부산지역민주역량의축적양상에대한분석이진행되었고, 지역노동자와도시하층민 1) 유영국, 부마항쟁과유신체제의붕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엮음, ꡔ 한국민주화운동사 ꡕ 2, 돌베개, 2009, 354~356 쪽. 2) 부산대민주화추진위원회, 올려라! 부마항쟁의새깃발을! ꡔ 새벽함성 ꡕ 창간호, 1984.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45 등광범한지역주민들이부마항쟁에주도적으로참여한것등이확인되었다. 그리고이러한연구는부마항쟁이민주화운동사에서차지하는위상을둘러싼다양한논의로이어졌다. 3) 그럼에도기존의부마항쟁연구는가장기본적인의문을해소하지못하고있다. 그것은 왜부마항쟁은 1979년에발생했는가? 왜최대의유신반대투쟁이부산에서일어났는가? 라는것이다. 이런의문은오랫동안학생시위의불모지로여겨지던부산에서, 최대규모의유신반대투쟁이발생한원인을설명하는데적지않은어려움을던져주고있다. 이에이논문에서는 1970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의형성과정을분석함으로써, 부마항쟁의원인에대한의문의일단을해소하려한다. 대학생자체가희소하던그시절, 1만명의대학생이운집한대규모학생시위장면이지역주민에게준충격은대단한것이었다. 이는부산이생겨난이래처음으로맞닥뜨리게되는초유의상황으로, 학생과지역주민이혼연일체를이룬거대한대중투쟁을촉발하는결정적인계기가되었기때문이다. 특히이연구에서는 1970년대후반부산에서학생운동이본격화되는시기로 1978년을주목하려한다. 1978년부산에서는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과 부대페인팅사건 등학생시위를격동하는두차례의움직임이연속하여시도되었고, 두번모두실패하였음에도학생운동은오히려확산되었다. 또한청년학생들의사회과학학습이본격화되었고, 노동야학이개설되었으며, 진보적학생들이곳곳에서형성되고있었다. 1970년대후반의부산지역학생운동에대한최초의기록은 1985년부산대총학생회가간행한 ꡔ거역의밤을불사르라-10월부마민중항쟁사ꡕ 에서찾을수있다. 여기서는부산대에서학생운동이확산되면서조직화되는과정을부마항쟁의직접적전사로주목하고, 그것을같은시기에부산지역의민주역량이축적되는것과연관시켜서술하고있다. 4) 이러한관점은 ꡔ부마 3) 2010 년까지의연구성과에대한정리는홍순권, 부마민주항쟁연구의현황과과제 ꡔ 항도부산 ꡕ 27, 2010 참고. 4) 부산대학교총학생회, ꡔ 거역의밤을불사르라 -10 월부마민중항쟁사 ꡕ, 1985,
346 지역과역사 39 호 민주항쟁 10 주년기념자료집 ꡕ, ꡔ 부산민주운동사 ꡕ, ꡔ 부산민주항쟁연구논총 ꡕ, ꡔ한국민주화운동사ꡕ 2 등이후의부마항쟁서술에기본적으로수용계승되었다. 5) 하지만그간의연구에서 1978년의학생운동에대한평가는그리높지않은편이었다.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이나 부산대페인팅사건 은 개별인자의고립된외침으로끝나버리고만처참한실패 에 6) 불과한것으로서, 일회적이고고립분산적인사건 으로 7) 평가되었다. 노동야학이학생운동사에서차지하는위상에대해서도적극적인분석이진행되지않았고, 학내조직에서도언더서클이외의학내이념서클이나그룹또는진보적개인의등장에대해서는본격적인분석이이루어지지않았다. 이는 1970년대후반의학생운동에대한주요관심이, 학생운동의재생산기반구축이었던것과무관하지않다. 그럼에도이러한평가는 1990년대이후상당한변화를보이고있다. 두사건을 민청학련사건이후부산지역대학가에서최초로발생한유인물살포사건 이고, 엄혹한유신체제에대한부산지역의몇년만의항거 로서깊은의미를지닌것으로, 서술한것이다. 8) 그럼에도여전히 1978년학생운동의다양한양상에대한포괄적인분석은이루어지지않았고, 이런양상이부마항쟁시기학생운동과어떻게유기적으로연관되어있는지에대한인식은낮은실정이다. 따라서이연구에서는 1978년의학생운동양상이비록 일회적이고고립분산적인 시도였지만그것이거듭반복되었다는점, 이전의시국사건과달리기도회와방청투쟁이라는새로운형태의민주화운동으로이어져학생운 35~39 쪽. 5)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ㆍ부마민주항쟁십주년기념사업회, ꡔ 부마민주항쟁 10 주년기념자료집 ꡕ, 들샘, 1989.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ꡔ 부산민주운동사 ꡕ, 부산시, 1998. 민주공원, ꡔ 부산민주항쟁연구논총 ꡕ, 2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ꡔ 한국민주화운동사 ꡕ 2, 2009. 6) 부산대학교총학생회, 앞의책, 1985, 37 쪽. 7)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책, 1998, 399 쪽. 8)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위의책, 313 쪽. 이후의저작은대체로이관점을유지하고있다.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47 동의결속력을강화시켰다는점, 노동야학이곳곳에서확산되고있었다는점, 이과정에서조직화되지않은진보적청년학생이합류하면서학생운동의외연이확장되고있었다는점등에주목하려한다. 특히이무렵폭발적으로발생한노동자인권문제는학생들의현실인식을벼리게했고, 양서협동조합의소모임활동이나시국강연회등은청년대중의정치학습에고무적인환경을조성했다. 이러한안팎의상황은부산의학생운동에서는전례가없는일로서, 1979년부마항쟁의발발을이해하는데필수적인전제조건이라고본다. 따라서이논문에서는 1978년을중심으로, 1970년대후반부산지역의학생운동의양적확대와질적고조과정을추적하고자한다. 이를통해 1979년에최대의유신반대투쟁이가능했던원인을규명하는데기여할것이다. Ⅰ.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민주세력의재편 1970년대중반박정희정권은한편으로긴급조치 9호라는억압기제를, 다른한편으로월남공산화와판문점도끼만행사건으로조성한안보위기를통해, 극단적인통제권력을구축하는데성공한듯보였다. 하지만 1977년부터유신반대운동은다시불붙기시작했고, 이듬해인 1978년에들어서면서더욱확산되었다. 특히 1978년은대통령선출과이를위한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선거및국회의원선거가한꺼번에실시되는해로서, 유신헌법의반민주성에사회적관심이집중되고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이대통령을선출하는소위 체육관선거, 그리고국회의원의석의 ⅓을대통령이지명하는유신정우회의원지명등이목전에다다랐기때문이다. 1978년은스캔들의해이기도했다. 소위 3대스캔들 로불린현대아파트특혜분양사건, 경북도교육위원회교사자격증부정발급사건, 성낙현의원성
348 지역과역사 39 호 추문사건이그것이다. 서민의상대적박탈감을자극하고, 사회적부조리에대한염증을불러일으켰으며, 사회지도층인사들의도덕불감증을유감없이보여준이사건들로, 박정희의장기집권에대한비판여론이더욱높아졌던것이다. 이에학생들의유신반대운동이다시재개되었다. 긴급조치 9호로한동안잠잠했던학생운동은 1977년초부터재개되었고하반기에접어들면서대규모시위가잇달아발생했다. 1978년에접어들면서서울대와이화여대를시작으로반정부유인물이살포되고, 교내시위를거쳐대규모연합가두시위가전개되기에이르렀다. 9) 재야의민주화운동도본격적으로분출했다. 이에분산된역량을하나로모아체계적인활동을전개하자는논의가대두되면서, 각계의민주세력을총망라한범국민적연합전선을구축하기에이르렀는데, 1978년 7월 5일발족한 민주주의국민연합 이그것이다. 10) 한편으로 1970년대후반은누적된노동자농민문제가격렬하게터져나온시기였다. 특히 1978년 2월의동일방직똥물투척사건과 4월의함평고구마사건등은대표적인인권탄압과생존권유린사태였다. 이제노동자들은더이상산업근대화의일방적희생물이되기를거부하고나섰다. 하지만유신정권의보도통제로이런현실은제대로보도되지않았고, 이때문에노동자들은노동절행사장, 부활절연합예배현장, 기독교방송국등에난입하여생존권의확보와인권의보장을호소하기에이르렀다. 11) 9) 1977 년과 1978 년의학생운동에대해서는허은, 긴급조치 9 호시기반독재민주화투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앞의책, 2009, 230~234 ㆍ 246~248 쪽참고. 1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 ꡔ1970 년대민주화운동 ꡕ Ⅳ, 1987, 1716 쪽. 11) 3 월 10 일동일방직여성노동자 80 여명은장충체육관에서열린노동절행사장에플래카드를들고들어가, 김영태는물러가라, 우리는똥을먹고살수없다, 동일방직문제해결하라 등의구호를외쳤다. 3 월 20 일동일방직, 원풍모방, 방림방적, 진로주조, 해태제과등의노동자 30 여명이기독교방송국에몰려가반인륜적탄압을받는노동자의현실을보도하지않은언론에강력히항의했다. 3 월 26 일동일방직, 삼원섬유, 원풍모방, 방림방적, 남영나일론에서모인 6 명의여성노동자는여의도광장에서개최된개신교교단의부활절연합예배의단상을점거하고, 동일방직사건을해결하라, 방림방적체불노임즉각지불하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49 이러한노동자농민의절규는재야민주세력에커다란자극제가되었으며, 대학의반유신투쟁에서도노농운동탄압의중지와민중권익의보장등민중문제에대한인식이고조되었다. 이후민중현장은민주화운동의주요원동력으로서, 핵심적이슈가되었던것이다. 이무렵부산에서도유신반대투쟁을위한움직임이가시화되고있었는데, 그기반은 1970년대후반에마련되고있었다. 1970년대후반부산에서는다양한방면에서민주화운동의새로운거점들이생겨났다. 종교계의현실참여로교회가민주화운동의센터로되었고, 노동현장에대한산업선교가본격적으로시작되었으며, 인권운동을표방하는양심적지식인의결집이표면화되었고, 양서협동조합을통한새로운형태의진보적실천이큰반향을불러일으켰던것이다. 종교계의현실참여에는기독교장로회를비롯한일부개신교계와천주교부산교구의정의구현사제단이양대축을이루었다. 특히보수동의중부교회는진보적성향의최성묵목사가부임한이래부산지역민주화운동의센터이자, 부산지역민주운동의숨결이전국과호흡하는숨통과같은존재였다. 12) 가톨릭교회는제도적폭력에맞서는인권의버팀목이자민주세력의피난처로서역할을다하였다. 1970년대초부터시작된부산의산업선교는이무렵에는가톨릭노동청년회 (JOC. 제오세 ) 와부산도시산업선교회 (1977 년창립. 회장최성묵 ) 를중심으로자못활기를띠었다. 그결과노동조합의결성, 노동자생존권의확보, 노동현장의인권개선을지원하는활동에서적지않은성과를거두었다. 13) 1976년에는국제사면위원회 (Amnesty International) 14) 부산지부 ( 위 라, 노동 3 권보장하라, 가톨릭노동청년회와산업선교회는빨갱이가아니다 등을외쳤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ㆍ한국교회산업선교 25 주년기념대회, ꡔ1970 년대노동현장과증언 ꡕ, 풀빛, 1984, 496 ㆍ 600~603 쪽. 12)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책, 1998, 329 쪽. 13) 민주공원, ꡔ 민주공원과함께하는부산민주운동사 ꡕ, 2003, 93~96 쪽. 14) 1961 년설립된국제사면위원회는국가권력에의해구금된양심수의구제를목
350 지역과역사 39 호 원장김광일 ) 가설립되었다. 엠네스티부산지부는유신반대운동으로구속된학생과민주인사의법정투쟁과옥바라지를지원하는활동을통해, 부산지역인권운동의기반을더욱확산시켰다. 1978년설립된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 ( 약칭 양서조합, 양협. 이사장이흥록 ) 은협동서점을근저지로수십개에이르는다양한소모임을운영하고, 민중생존권투쟁과민주화운동소식을전파하는전도체였다. 이에진보적청년학생뿐아니라지역주민이대거조합원으로참여하여, 양협은민주세력의외연을확장하는데큰성과를거두었다. 이로써양협은민주화운동의새로운모델을제시하면서, 부산지역민주세력의또하나의산실이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후반부산에서는진보적종교계, 양심적지식인그룹, 민중부문을중심으로광범한지점에서민주적구심이형성되고있었다. 여기에는원로그룹과장년층및청년층등다양한연령과계층이포괄되었으며, 이들요소들은유기적으로결합하여서로지원하고격동하면서부산의민주지형을구축해나가고있었던것이다. 이러한현상은부산에서는실로 1960년 4월혁명이후처음으로나타난양상이었다. 이러한민주세력의지형을기반으로, 그와유기적으로연관되면서 1978년부산지역의학생운동은되살아났던것이다. Ⅱ. 유신반대운동의전개와확산 부산지역의학생운동은 1974년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 ( 민청학련사건 ), 1975년 김오자사건, 1976년 ꡔ책방골목ꡕ 사건으로큰타격을입었다. 15) 적으로하는국제인권단체로, 비영리비정부기구이다. 한국에서는 1972 년국제사면위원회한국지부가설립되었고, 부산에서는김정한이회원이었다. 15) 민청학련사건은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의조종을받아공산정권수립을추진했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51 특히김오자사건은간첩단사건의일부로조작된까닭에, 이제막부산대에서형성되고있던진보적학생그룹의성장을크게왜곡시키고말았다. 하지만유신체제가말기적증상을드러내고, 노동자농민의생존권투쟁이부패권력을바닥부터뒤흔들기시작하면서, 부산의학생운동도그동안의침체를딛고회복되기시작했다. 1.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부산지역학생운동의부활을알리는첫신호탄은 4월혁명 18주년에즈음하여솟아올랐다. 1978년 4월 19일부산대에는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 가배포되었다. 16) 선언서에는반민주적탄압중지, 긴급조치해제와민주헌정실시, 구속된우국학생과인사석방, 언론탄압중지와자유로운의 다는혐의의, 긴급조치 4 호와국가보안법위반사건으로, 부산에서는부산대김재규, 이병철, 김해룡등과중부교회의조성삼등이연루되었다 (2009 년재심결과인민혁명당재건위와민청학련사건은고문으로조작한인권유린으로판결났다 ). 김오자사건은부산대사학과에유학중이던재일교포학생김오자가반정부유인물을배포하자, 이를서울등지의유사사건과한데엮어 재일교포간첩단사건 으로조작한사건이다. 이일로김오자와친분이있던부산대노승일, 박준건, 김준홍, 김정미등이곤욕을치렀다. 책방골목사건은 1976 년 2 월중부교회의대학생부회지인 ꡔ 책방골목 ꡕ 에실린반정부적내용으로, 김영일 ( 부산대 3 년 ), 조태원 ( 부산대 3 년 ), 이태성 ( 동아대 2 년 ) 등이구속된사건이다. 이상은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책, 1998, 286 ㆍ 302~303 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 ꡔ1970 년대민주화운동 ꡕ Ⅲ, 1987, 990~992 쪽참고. 16) 그간이유인물의배포일자는 4 월 17 일로, 제목은 부대자율화민주투쟁선언서 로알려져왔다 (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위의책, 312 ㆍ 313 쪽. 긴급조치 9 호철폐투쟁 30 주년기념행사추진위원회, ꡔ30 년만에다시부르는노래 ꡕ, 자인, 2005, 536 쪽. 유영국, 앞의글, 2009, 247 쪽 ). 하지만필자가전중근의항소심판결문을검토한결과, 유인물을배포한일자는 4 월 19 일이고, 제목은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 였다. 필자는이를전중근에게확인한바, 판결문의기록이정확하다는것을확인했다 ( 대구고등법원, 전중근판결문, 1978. 전중근구술, 김선미면접, 2016 년 7 월 25 일, 카페봄 ). 다만조갑제, ꡔ 유고 ꡕ 1, 한길사, 1987, 224 쪽에는 4 월 19 일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 를배포한것으로되어있다.
352 지역과역사 39 호 사표시허용, 노동자농민의권익투쟁방해와인권침해중지, 북괴의민족적각성을요구하는결의문과 4월 19일오전 10시시계탑에모여궐기할것을촉구하는내용이빼곡히들어있었다. 17) 이날의선언서사건은 1974년 10월이후무려 4년만에, 부산지역의대학에서처음으로발생한유신반대운동이었다. 18) 선언서를배포한것은정외영 ( 부산대사학과 4년 ), 이성동 ( 부산대의예과 2년 ), 전중근 ( 무직 ), 서연자 ( 부산대미술교육과 2년 ) 였다. 이들은모두중부교회청년부회원이었다. 당시중부교회는진보적인청년학생들이모여드는대표적인공간이었고, 이때문에긴급조치위반자를다수배출한곳이기도했다. 19) 1977년들어중부교회청년회는 민족지성의좌표 라는주제로, 김정한, 황석영, 백기완의초청강연회를개최하고한동안중단되었던 ꡔ책방골목ꡕ 4호를복간하는등, 보수적인교계풍토를전환하고청년운동에활기를불어넣는활동을전개했다. 이때 ꡔ책방골목ꡕ 의복간을주도한것이정외영이었다. 20) 정외영을중심으로이성동, 전중근, 서연자는 1976년부터그룹스터디를진행해왔다. 이들은이영희, 조용범, 박현채, 모리스돕, 폴스위지, 폴바란등의저작을읽으며인식을공유했다. 21) 이과정에서한국자본주의의 17) 현재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 의내용은긴급조치 9 호철폐투쟁 30 주년기념행사추진위원회, 앞의책, 2005, 536 쪽에수록되어있다. 다만내용일부가누락되어있다. 누락된부분은전중근의항소심판결문을통해확인할수있다. 18) 1974 년 10 월 14 일부산대, 30 일수산대 ( 현부경대 ), 11 월 7 일동아대에서유신반대학생시위가벌어졌다 (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책, 1998, 286~ 287 쪽 ). 즉 1975 년김오자의유인물배포는김오자의독자적인행동으로, 부산대학생운동의맥락과는별개의일로보아야할것이다. 19) 민청학련사건으로구속된조성삼, 차선각, 황대봉과책방골목사건으로구속된김영일, 조태원, 이태성등긴급조치위반자가그들이다. 20) 조성삼, 부산중부교회민주화운동, 고최성묵목사 10 주기추모사업준비위원회, ꡔ 고최성묵목사추모집그의부활을기다리며 ꡕ, 2002, 223 쪽. 21) 이영희의 ꡔ 전환시대의논리 ꡕ(1974, 창작과비평사 ), 조용범의 ꡔ 후진국경제론 ꡕ (1978, 박영사 ), 박현채의 ꡔ 민족경제론 ꡕ(1978, 한길사 ) 은이시기운동권의대표적입문서였고, 자본주의세계체제에대한인식이깊어지는것과함께돕, 스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53 현실을자각하고, 박정희정권의성장중심경제정책에대한비판의식을키워갔다. 또한동일방직사건, 함평고구마사건등 1970년대후반노동자농민운동의격렬한발생을목격하면서민중문제에대한관심을강화시켜나갔다. 22) 그결과이들은유신말기의한국은외세에굴종하고매판자본과결탁한독재세력이, 소수의특권층에부를집중하고노동자농민을착취하는사회라고보았다. 23) 따라서학생들이앞장서서 부정, 부패, 불의의온상이던독재권력을타도 하고 민족의민주역량을증언했던 4월혁명 은이들에게각별한의미를갖는것이었다. 더욱이이무렵서울에서재개된유신반대운동으로이들은한층고무되었다. 보도통제때문에학생시위는언론에보도되지않았지만, 중부교회를통해이소식은부산의진보적청년학생들에게빠르게전해졌던것이다. 4월 19일이다가오자, 그냥이대로있을수없다 는공감대가스터디그룹구성원사이에서자연스럽게형성되기시작했다. 4ㆍ19를일주일앞둔 4월 13일즈음이들은드디어시위를결의하고, 구체적인준비를진행했다. 선언서를작성하고인쇄장비를갖추는것과함께시위에적극참여할학생을확보하기시작했다. 격문의제목은부산대의 자율화를위한민주실천, 즉 학원민주화운동 을위한선언서로했다. 권력의억압과통제속에서자율성을잃고병영화된대학을정상화하기위해, 학원의민주화를출발점으로삼았던것이다. 또한학원의민주화는정치경제사회부문의민주화와본질상동일한것으로, 유신반대투쟁의일부이기도했다. 24) 위지, 바란의저작이많이읽혔다. 이기훈, 1970 년대학생반유신운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ꡔ 유신과반유신 ꡕ, 2005, 503~504 쪽. 22) 1977 년말에복간된중부교회청년대학부회지 ꡔ 책방골목 ꡕ 4 호에는도시빈민의이주촌으로형성된북구만덕동에거주하면서철거이주민의실상을파헤친현장보고서가실렸는데, 이는당시중부교회청년부의분위기를반영하고있다. 조성삼, 앞의글, 2002, 223 쪽. 23)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 긴급조치 9 호철폐투쟁 30 주년기념행사추진위원회, 앞의책, 2005, 536 쪽. 24) 특기할만한것은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 에는당시문교당국이추진하고있
354 지역과역사 39 호 완성된선언서는가로 27.5cm세로 39.5cm의시험지용 8절지크기의등사지에, 이틀에걸쳐 500여장을인쇄했다. 이가운데 70장은부산대합창단, 사학과, 동고등학교졸업생, 그외 77학번가운데진보적성향을지녔다고판단되는부산대재학생에게우편으로보냈다. 25) 나머지는이성동과전중근이직접살포했는데, 18일자정이가까운시각에부산대학생들의하숙집이밀집한장전동일대의주택가에일부를뿌리고, 대부분은 19일이른아침에부산대본관 ( 현인문관 ) 과도서관 ( 현건설관위치 ) 등학내의강의실과복도, 화장실등지에모두뿌렸다. 선언문을우송한것은나름대로용의주도한일이었다. 당시교내에는사복경찰이상주했고학생들을사찰하는상담지도관실이있어서, 감시를피해수십명의학생에게시위계획을전파하기란어려운일이었다. 이때문에시위에반드시동원해야할학생들은우편으로계획을알리는방법을선택한것이다. 26) 그리고만약의경우를대비해선언서제작자는 부산대학자율화민주학생단부산대학민족학생연구회 명의로해두었던것이다. 우편물을받은 70명가운데상당수가적극적으로나서고, 현장에서선언서를접한학생들이호응한다면시위가성공할것으로판단한것인데, 학생운동권의조직률이매우낮았던당시부산대상황으로본다면이는매우기발한데가있었다. 하지만동시에위험이따르는방법이었다. 우편물의도착시각도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선언서를확인한상대방의반응이문제 던 공대특성화정책 에대한비판이포함되어있다. 이는대학이관료제적시스템에부합하는부품으로서의인간, 즉기능인양성소로변모될것을경계한것이다. 같은시기의다른시국선언서와비교하면독특한측면이곳, 오늘날대학의모습을생각하면생각할지점이있다하겠다. 25) 정외영은사학과였고이성동은동고출신이었다. 또한경찰에압수된증거물가운데, 부산대합창단원명단, 부산대 77 학년도수강편람, 부산대사학과학생주소록, 부산동고등학교앨범등이확인된다 ( 대구고등법원, 앞의글, 1978, 83~ 84 쪽 ). 26) 부산대아카데미회장이었던김종세 ( 수학과 3 년 ) 의경우우편으로유인물을배송받았는데, 이런사례라고할수있다. 김종세구술, 김선미면접, 2016 년 7 월 31 일, 부산민주공원관장실.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55 였기때문이다. 실제로유인물을배포하기시작하자득달같이달려온경찰에의해이성동은현장에서체포되고말았다. 시위는시작도되기전에막을내렸던것이다. 얼마지않아전중근과서연자도체포되었고, 도피했던정외영도 8월 16일전주에서열린기장청년회전국연합회교육대회에참가했다가시위도중에체포되었다. 27) 이날경찰의재빠른대응으로볼때, 경찰은사전에시위정보를입수했을가능성이높았다. 더욱이경찰은우송된선언서 18장을재판과정에서증거물로제시했는데, 28) 이는개인소유물이어서우편물수령자가제출하지않으면확보하기곤란한것이었다. 또한경찰은선언서를 329장이나수거했는데, 이가운데우편으로우송된 18장을빼면교내에서수거한것은모두 311장이었다. 이는전체 500장가운데우편으로우송된 70장과주택가에배포한 90장을제외한, 교내에살포된 340장의거의모두였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이는경찰이유인물이배포되는것을미리알고, 일찌감치출동했음을보여주는대목이다. 즉경찰은우편물수령자또는장전동주민가운데누군가의신고를받고, 유인물이배포될것을미리알고있다가유인물이배포되기시작하자즉시이를수거한것이다. 이것이시위를좌절시킨원인이었을것이다. 이렇게하여 4년만에시도된유신반대학생시위는실패로끝나고말았다. 워낙조기에진압되었기때문에선언문이교내에살포된사실을아는학생은많지않았다. 사건의파장도그리크지않았다. 하지만몇몇학생에게이사건은매우심각한영향을미치거나, 또다른유신반대투쟁을고무했다. 27) 조갑제는앞의책 225 쪽에서, 전중근이이성동과함께현장에서체포되었다고기술하고있지만, 이는사실과다르다. 전중근은유인물을배포하면서확인한학생들의반응이미온적인데다, 두시간이다되도록시위가형성되지않는데실망하고집으로돌아갔다가, 10 시 30 분경자택에서체포되었다. 전중근, 앞의구술, 2016. 28) 대구고등법원, 앞의글, 1978, 85 쪽.
356 지역과역사 39 호 이성동의고교친구인이진걸 ( 부산대기계설비학과 2년 ) 이바로전자의경우였다. 이듬해인 1979년 10월 15일이진걸은부산대에서학생시위를격동하기위해 민주선언문 을살포하게되는데, 이는다음날시작되는부마항쟁의일부가되는사건이다. 이진걸이현실문제에관심을가지게되는직접적인계기를제공한인물이바로이성동이었고,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이었던것이다. 29) 또한사람은이제갓부산대에입학한이상경 ( 인문사회계열 1년 ) 이었다. 대학의최대가치는불의한권력에항거하는것이라여기는그에게, 이사건은부산대학생으로서자긍심을안겨주는무척인상적인장면이었다. 또한자신과동일한신념을가진타자를확인한사건이기도했다. 그는선언서사건의이후진행과정을유심히지켜보았다. 그리고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의여진이채가라앉기도전인 7월초, 자신만의방법으로독재정권에대한저항을실천했던것이다. 2. 부산대페인팅사건 1978년 7월 3일밤 11시 50분. 자정이임박한시각부산대에는, 날이밝으면부산대와동래경찰서를발칵뒤집어놓을사건이벌어지고있었다. 부산대정문을들어서면정면으로마주치게되는대운동장의한가운데있는본부석, 그벽면에, 유신철폐 교련반대 박정희물러가라 라는구호가대문짝만한크기로페인팅된것이다. 30) 글자하나의높이가 1미터가넘고전체길이는 10미터가넘는대형벽서가, 본부석의하얀바탕색과격한대조를이루는초록색깔로, 넘실거리듯벽면을가득채우고있었다. 유인물도아니고, 현수막도아닌, 페인트로쓴 29) 이진걸구술, 노기영면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인사구술사료수집사업, 2002. 조갑제는앞의책, 1987, 229 쪽에서, 이진걸이이성동의고교후배라고쓰고있지만, 이는사실과다르다. 두사람은동기이다. 30) 1987 년 6 월항쟁이후대운동장은 넉넉한터 로불린다. 운동장스탠드중앙에있던본부석은현재없어졌다.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57 반정부벽서라니! 부산대페인팅사건 으로불린이기발한사건은 1970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의부활을알리는두번째사건이었다. 페인팅벽서를주도한이상경은이미고교시절에 ꡔ창작과비평ꡕ 에몰두하는 창비키드 였고, 유신을비난하는시를써문예반학예발표회에제출할정도로, 남다른정치의식으로청소년기를보냈다. 31) 여기에는그의가족사도한몫했다. 중학교 2학년때그는좌익항일운동의경력을지닌친척아저씨가간첩사건의희생양이되는것을목격했고, 32) 고교 1학년때에는친형인이상석 ( 동아대국문과 2년 ) 이유신반대시위로구류되는일을겪었던것이다. 33) 두사건을목격하며그는 신문에났다고모두사실은아니 라는생각과함께공권력의정당성에회의를품게되었다. 34) 대학에들어온뒤에그는고교선배의지도하에동문서클인영목의스터디그룹에서사회과학공부를하면서비판의식을벼리었다.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의관련자 4명이구속되었다는소식에격분한그는선배, 친구와함께부산대상담지도관실직원의자택번호를알아내서협박전화로분풀이를하기도했다. 그리고동일방직사건관련유인물을학내에은밀히배포하기도하는등의활동으로, 자연스럽게부산대학생운동의일부가되어갔다. 한편으로그는이제막창립된양서협동조합에조합원으로드나들고, 중부교회를출입하면서현실속의민주화운동을접하기시작했다. 35) 이런이상경에게느닷없이공표된제9대대통령선거는, 차라리참담함 31) 이상경, ꡔ 갈팡질팡하더라도갈만큼은간다 ꡕ, 양철북, 2011, 238~241 쪽. 32) 이상경의친척인양진면이관련된사건은 1972 년 3 월 27 일보안사가발표한고정간첩사건이다. 관련자대부분은 8 ㆍ 15 직후남로당활동을하던인사들과 4 월혁명시기통일운동에참여한청년들이었다. ꡔ 경향신문 ꡕ 1972.3.27.7 면, 17 년간잠복활동고정간첩망 22 명타진. 33) 이상석은해직교사출신으로, ꡔ 사랑으로매긴성적표 ꡕ( 친구, 1988) 의저자이다. 1974 년 11 월의동아대의유신반대학생시위에참여하여, 한달동안구금되었다. 34) 이상경, 부산대페인팅사건전말기, 긴급조치 9 호철폐투쟁 30 주년기념행사추진위원회, 앞의책, 2005, 자인, 481~483 쪽 ; 앞의책, 2011, 161~164 쪽. 35) 이상경구술, 김선미면접, 2016 년 7 월 28 일, 카페베네동래교대점.
358 지역과역사 39 호 과치욕으로느껴졌다. 7월 1일통일주체국민회의 ( 이하국민회의 ) 는대통령선거일정을발표했는데, 선거에나설후보자는 7월 1일부터 5일사이에 국민회의 사무처에등록하고, 6일 국민회의 는개회식에이어토론없이투표로대통령을선출한다고공표한것이다. 36)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기상천외한기구는물론, 박정희단독입후보에 99.9% 의찬성률로대통령에당선되는것마저도, 유신헌법이정한규칙이었으니, 더이상놀라운일은아니었다. 37) 하지만한나라의대통령을뽑는일정이고작 6일간이고, 후보등록을마친바로다음날에선거를실시하는것이며, 출마의변도없고찬반토론도없는투표라니! 초등학교반장선거조차이렇지는않을진대 아무리국민을만만하게보아도이럴수는없다 는생각에격분하게된것이다. 비록계란으로바위를치는격이되더라도그조차아무도않는다면, 이사회가그런현실을인정하는격이되고말리라는판단, 누군가는나서야한다는생각이, 그의몸과마음을온통지배했다. 그러나갑작스레닥친일이고보니, 학내에서동조자를구하기는어려웠다. 이때선뜻가담하고나선것이단짝친구인이희섭과김승영이었다. 38) 세사람은이희섭의부친인이주학목사의자택 ( 남부민동, 뒤에는연산동남부교회 ) 에서함께성장기를보냈다. 감리교목사인이주학은자신의노동 ( 삯바느질 ) 으로생계를꾸리며청빈한목회자의삶을실천하는종교인으로, 개방적이고소탈한성품으로존경을받는인물이었다. 39) 이때문에남부교 36) ꡔ 경향신문 ꡕ 1978.7.1.1 면, 제 9 대대통령 6 일선출. 37) 실제로 7 월 6 일박정희는자신이단독입후보한이선거에서, 1 표의무효표이외의모든유효투표를획득하며, 9 대대통령에선출되었다. ꡔ 동아일보 ꡕ 1978. 7.6.1 면, 박정희후보, 9 대대통령당선. 38) 이희섭은이상경의중앙고동문이다. 목원대를중퇴하고, 1983 년부산대심리학과에진학했다. 김승영은이상경의동의중동문으로, 뒤에연세대영문과에진학했다. 이상경, 앞의책, 2011. 39) 이주학은황해도가고향인실향민이었다 ( 이상경, 앞의책, 2011, 206 쪽 ). 이주학의고향이충남이라고한조갑제의서술은잘못된것이다 ( 조갑제, 앞의책, 1987, 231 쪽 ).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59 회는오랫동안이들의아지트였고, 함께지낸기간만큼세사람의사회의식은일치성이높았다. 이희섭과김승영역시유신헌법하의대통령선거가다가오면서주권자로서의자부심이극도로손상한상태였던것이다. 40) 하지만세사람에게는조직도없고, 유인물제작도어려운일이었다. 이들가운데유일한대학생인이상경은 1학년이었고, 유인물을제작하기에는시간이턱없이부족했기때문이다. 다급한상황에서가장효과적으로타격을줄수있는방법으로, 이들이선택한것이페인팅벽서였다. 페인팅벽서라는전례가없는방법을생각한것은이상경이었는데, 그는프랑스영화의한장면에서영감을얻었다. 41) 페인팅장소는등교할때누구나마주하는운동장스탠드본부석으로했다. 대문짝만한페인팅격문이학생들의가슴깊은곳의의분을격동시켜준다면, 이를불쏘시개로시위를전개할수도있으리라생각했던것이다. 42) 짧은시간에격문을쓰고현장을빠져나오려면분무형페인트가필요했 40) 그렇다고세사람의의기투합이사회과학학습을기반으로한것은아니었다. 조갑제는세사람이 경제, 사상과역사와사회및문학서적을읽었다. 고하면서당시학생들이주로읽던비판적서적들을열거하고토론내용을서술하고있는데 ( 조갑제, 위의책, 231 쪽 ), 이는사실이아니다. 이상경, 앞의구술, 2016. 또한 1978 년 6 월에접어들자이들세젊은이는 무엇을해야겠다 는조바심을갖게됐다. ( 조갑제, 위의책, 232 쪽 ) 는것도오류이다. 이들의결심은 7 월 1 일대통령선거가공고된이후의일이기때문이다. 41) 이상경에게영감을준영화는이브몽땅주연의 라미너스 였다. 학생운동으로머리속이가득차있던시절이영화를본그는 언젠가나도실현해보리라 고, 그장면을가슴속에새겨두었던것이다 ( 이상경, 앞의구술, 2016). 그런데부산대페인팅사건이일어난바로다음날인 7 월 4 일광주조선대에서도페인팅사건이발생한다. 하지만이상경은최근까지도조선대페인팅사건을알지못했고, 조선대의경우부산대페인팅사건소식을들었다고하더라도바로당일실행에옮긴다는것은어려운일이기때문에두사건사이에직접적인교감은없었다고생각된다. 42)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책, 1998, 315 쪽의 잉거숄의 ꡔ 용서받지못할자의죽음 ꡕ(ꡔ 아무도미워하지않는자의죽음 ꡕ 의착오 ) 이라는책을보고, 나치에저항하는벽보, 벽서투쟁방식에상당한시사를받게된다. 는구절은오류이다. 이상경, 앞의구술, 2016.
360 지역과역사 39 호 는데, 이를해결한것은이희섭이었다. 멀리서망을보는두사람이벽서를하는이상경에게연락하는데필요한무전기도, 오디오에해박하던이희섭이무선마이크와 FM라디오의주파수를일치시켜만들었다. 43) 이들은첨단장비를갖추고사전답사를통해시간을체크하고퇴로를확보하는등사전점검도잊지않았다. 만반의준비를마친세사람은밤 11시 50분야음을틈타학교로올라갔다. 마침기말시험기간이라학교는조용했고, 이상경은팔을있는대로뻗어, 쓸수있는최대한의크기로또박또박격문을써갔다. 하지만페인팅벽서는다음날일찍경찰에발견되었다. 쉽게지울수없도록페인트로벽서했지만, 전지를붙이고페인트로덧칠하니, 벽서는쉽게가려지고말았다. 결국시위는불발에그치고말았던것이다. 이에이상경은학생들사이에벽서사건의소문을내면서, 파장을일으켜보려애썼다. 하지만그것은도리어경찰의추적에단서를제공하는일이되고말았다. 사건이있고약보름뒤에세사람은경찰에체포되고말았던것이다. 1978년에들어서전개된부산지역학생운동의부활의몸짓으로나타난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과부산대페인팅사건, 두차례의시도는모두학생시위를유발하는데실패하고말았다. 현상적으로본다면파장도그리크지않았다. 하지만한차례의실패에도불구하고얼마지않아다시시위를기도하는양상은이전과는확연히다른모습이다. 또한두사건은 1970년대중반의민청학련사건이나김오자사건과는발생사적으로다른원류를가지고있다. 즉민청학련사건은서울지역학생운동의주도하에전국단위학생운동의일부로참여한것이다. 또한김오자의유인물배포는김오자의독자적인행동으로, 부산대학생운동의맥락과는별개의일이었다. 또한두사건에서학생운동은공안당국의사건부풀리기에수세적으로대응하는입장이었다. 반면 1978년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과부산대페인팅사건은부 43) 이상경, 앞의책, 2011, 278 쪽. 조갑제, 앞의책, 1987, 232 쪽의 워키토키 를사용했다는서술은잘못된것이다.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61 산지역청년학생층의자발성과주도성에기반을둔공세적인유신반대투쟁이라는점에서, 확실히새로운양상이라할수있다. 특히 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 은수년에걸쳐함께진행한사회과학학습을통해공유하게된현실인식을바탕으로시위를시도한경우이다. 페인팅사건의세사람도사회과학학습을함께하지는않았지만, 유신정권에대한태도로볼때공통된사회의식을가졌음을확인할수있다. 즉두사건모두오랜기간함께공유해온정치인식을바탕으로실천에나섰다는점에공통점이있다. 이는부산지역의학생운동에서처음으로확인되는현상이라고할수있다. 이로미루어 1978년은부산의학생운동이유신반대운동의새로운진원지가되고있음을보여주는해였다고할것이다. Ⅲ. 학생운동의형성과확산 1. 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과부산대페인팅사건은시위를일으키는데실패했다. 경찰은두사건을조기에발견하고관련자를체포함으로써사건의파장을차단하는데성공한듯보였다. 이때문에선언서사건과페인팅사건은지역사회는물론, 학내에서조차이사건을아는이들은극소수에불과했다. 하지만예상치못한후폭풍이경찰을기다리고있었다. 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이그것이다. 선언서사건으로정외영을제외한전중근, 이성동, 서연자가구속되자지역사회는바쁘게움직였다. 가장먼저나선것은엠네스티 ( 국제사면위원회 ) 부산지부였다. 부산지부회장인김광일변호사가사건변호를맡았고, 44) 44) 김광일은뒤에체포된정외영의변론도함께담당했다. 다만관련자가운데이성동은가족이주선한다른변호인 ( 이영호변호사 ) 을기용했다. 대구고등법원, 앞의글, 1978, 74 ㆍ 79 쪽.
362 지역과역사 39 호 구속자의경찰신문에는처음부터엠네스티부산지부의노경규가동석했다. 45) 본격적인지원활동은중부교회의시국기도회로시작되었다. 중부교회는즉각구속학생대책위원회를꾸리고, 매주화요일마다 구속학생을위한기도회모임 을개최했던것이다. 46) 기도회는형식상일반예배와마찬가지였고, 순서도노래와설교, 예배와헌금순으로진행되었다. 하지만내용적으로본다면민주화운동으로구속된이들을지원하고, 이를통해민주세력의결의를다지는, 일종의정치집회였다. 기도회에서부르는가스펠송은 우리승리하리라 흔들리지않게 등의대표적인 운동권가요 였다. 목사의설교와예배내용도궤를같이하는것이었다. 구속자들이처한상황을성서속의고난받는이들에빗대어설명함으로써이들의실천에정당성을부여하고, 구속자의이름을일일이부르며사회적관심을촉구했다. 또한이날모인헌금은기도회를알리는전단지인쇄비, 구속된이들의영치금, 변호사비용등투쟁기금으로사용되었다. 47) 따라서시국기도회는종교행사의외피를빌린, 사실상의민주화운동집회였다고할수있다. 하지만형식상교회의종교행사였고, 관련자전원이중부교회소속이었기때문에경찰도특별한제재를가하기란어려웠다. 48) 하지만시국기도회가개최되는날이면중부교회주변에는어김없이경찰이떼로몰려들었다. 이사건은시위가시작되기도전에조기에진압되었고, 교내에살포된유인물대부분이경찰에수거되었기때문에사건진상이 45) 전중근, 앞의구술, 2016. 46) 구속학생을위한기도회모임 ( 전단지 ), 고최성묵목사 10 주기추모사업준비위원회, 앞의책, 2002, 493 쪽. 47) 김종세구술, 김선미면접, 2013 년 7 월 5 일, 부산시민교육원 ( 나락한알 ). 48) 그런데이런행사에는어김없이부산대상담지도관실의직원이참석했다고한다. 운동권학생을색출하고감시하기위함인데, 교회에서도기도회라는형식때문에이들을내보낼수없었으니, 감시하는자와감시받는자가같은장소에나란히앉아함께행사를치르는진풍경이연출된것이다. 더욱이기도회가끝날무렵헌금통을돌릴때면이들도헌금을했다고하니, 본의아니게민주화운동에참여한셈이었다. 시국기도회양상에대해서는김종세, 앞의구술, 2013.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63 잘알려지지않았다. 따라서사건전모가알려진것은사실상시국기도회를통해서였던것이다. 49) 이때문에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의경과를보고한것이문제가되어, 5월 13일최성묵목사가불구속입건되는수난을겪기도했다. 50) 5월 16일에는동일방직노동자의선거법위반사건이발생했다. 이는동일방직해고노동자들이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으로출마한김영태의비위사실을알리는유인물을배포하다가체포된사건이다. 김영태는섬유노조위원장으로서동일방직의민주노조를파괴하고, 해고된노동자 126명의블랙리스트를만들어재취업을방해한주범이었다. 51) 김영태의출마소식이알려지자, 해고노동자 15명은김영태의선거구인부산으로와서전포동과부전동의주택과공장및학교등지에 인권을유린당한노동자들의호소 문을살포했던것이다. 52) 하지만해고노동자의일부가현장에서적발되면서추송례등 5명의노동자와이를지원했던제오세회원 2명이구속되었다. 살포한유인물은대부분회수되었고, 김영태의당선을저지하는것도실패했다. 그럼에도이사건은부산지역의진보적인청년학생들에게 동일방직똥물투척사건 의진상을알리는계기가되었다. 53) 또한이사건은제오세부산 49) 부대페인팅사건 을주도한이상경역시이시국기도회에두차례참석했다. 이상경구술, 김선미면접, 2016 년 7 월 28 일, 카페베네부산교대점. 50)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ꡔ1970 년대민주화운동과기독교 ꡕ, 1983, 335 쪽. 51) 1978 년 1 월 22 일김영태는섬유노조규약의사고지부수습절차에관한조항을, 산하분회나지부가사고지부로규정되면본조에서위촉한수습위원에게지부장의권한과업무일체를인계하도록바꾸었다. 이를근거로섬유노조본조는 2 월 23 일동일방직을사고지부로규정, 민주노조의집행부를해산시켰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한국교회산업선교 25 주년기념대회, 앞의책, 1984, 451 ㆍ 495~496 쪽. 52)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ꡔ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 ꡕ, 돌베개, 1985, 94 ㆍ 124 쪽. 53) 이진걸, 김종세의경우양서조합에서운영하는협동서점을통해동일방직노동자의호소문을접하고엄청난충격에휩싸였다고한다. 또한이호소문을학내로가져와부산대학생들에게유포한이상경에역시, 다른어떤사건에비할수없을정도로파장이컸다고진술했다. 이진걸, 앞의구술, 2002. 김종세, 앞의구술, 2013. 이상경, 앞의구술, 2016.
364 지역과역사 39 호 연합회, 부산도시산업선교회, 엠네스티부산지부가적극적으로지원하고나서면서, 1978년부산지역노동운동의최대현안이되었다. 54) 그리고 7월 3일에는부산대페인팅사건이발생했던것이다. 이에기도회의제목은처음시작되었을때는 구속학생을위한시국기도회 에서 구속학생및근로자를위한연합기도회 로, 다시 구속노동자학생성직자를위한연합기도회 로바뀌어갔다. 55) 기도회의횟수또한늘어났다. 시국기도회를개최하는일은상당한부담이되었지만, 중부교회이외에다른교회의참여도늘어나기시작했다. 광복동의동광교회, 동대신동의제일감리교회, 연산동의남부감리교회, 전포성당등에서도시국기도회가열렸던것이다. 56) 재판이시작되면서방청투쟁이라는새로운투쟁방식도생겨났다. 기도회와전단지등을통해공판일정이알려지면서학생들이재판에참관하기시작한것이다. 57) 이전에도시국사건이있었지만, 학생들이집단적으로재판을참관하는일은부산에서는처음있는현상이었다. 당시로서는시국사건의방청만으로도문제학생으로찍혀서대학당국의감시관리의대상이되었기때문이다. 58) 54) 사건변론은김광일변호사가맡았는데, 대구고법의항소심에서고노무현변호사 ( 전대통령 ) 가투입되었다. 추송례 ( 동일방직노조지부장직무대리 ) 구술, 김선미면접, 국사편찬위원회구술사료수집사업, 2013 년 5 월 28 일, 추송례자택. 이사건은노무현변호사의첫민변활동이라고생각되는데, 7 월에부산대페인팅사건이발생하면서, 갑작스레시국사건이늘어난탓에조력자가필요했던때문으로보인다. 55) 민주공원, ꡔ 민주공원과함께하는부산민주운동사 ꡕ, 인쇄골, 2003, 93 쪽. 56) 동광교회는김정광목사가, 제일감리교회는임기윤목사가, 전포성당은천주교정의구현부산사제단의송기인신부가이를주도했다. 57) 전단지에는부산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문사건, 동일방직노동자선거법위반사건, 부산대페인팅사건등 3 건의공판일자와담당판사명그리고법정호수가기재되어있다. 때로는 착취당하고억압받는이땅에노동자들은겨레입니다. 수많은구속학생과성직자문인민주인사들은민족의횃불입니다. 이들을위하여함께기도하고성원을보내는일은일하는만큼민족의자유와정의민주의터전이넓어지고굳어질것입니다. 다모입시다. 그리고기도합시다. 라는문구가기재된전단지도있다. 민주공원, 앞의책, 2003, 94 쪽. 58) 이호철 ( 부산대법학과 2 년. 참여정부청와대민정비서관 ) 은재판참관을권유하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65 하지만막상학생들의방청을금지할법적근거는없었고, 이때문에경찰이나서서제지할수는없었다. 대신이일에는학내의학생사찰기구인상담지도관실직원들이나섰다. 이들은법정입구에버티고서서신원을조사하는방법으로학생들을겁박하고, 낯익은얼굴을가려내서추궁했다. 59) 그럼에도이를피해수백명에이르는학생들이공판방청에참여했다. 시국사건의재판을방청하는것은또하나의투쟁이되었던것이다. 10월 19일동일방직노동자선거법위반사건공판에서는재판과정의부당함에항의하는방청객과경찰이공판정에서충돌하기도했다. 그결과엠네스티부산지부박점룡간사등방청객이연행되었고, 부산도시산업선교회박상도총무가구속되기도하는등격렬한방청투쟁이벌어지기도했던것이다. 60) 이렇게하여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은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이후부산지역의민주세력이시국사건에대응하는방법으로자리를잡았고, 그자체로민주화운동이되었다. 기도회와방청투쟁은재판을받는당사자는물론참여자의민주역량을성장시키고, 민주세력을결속시키는데큰효과를거두었다. 61) 여기에는종교계와노동계, 청년학생과지식인등의민주인사들이동참했는데, 이처럼각계각층의민주인사들이동일한사안을두고연대활동을벌인것은부산에서는최초의일이었다. 62) 는쪽지를주변에돌렸다는이유로, 부친과함께학생처장에게호출되어추궁을당했으며, 이후관리학생이되어출석체크등학내의일상을감시당했다. 이호철구술, 차성환면접, 2013 년 12 월 23 일, 부산민주시민교육원 ( 나락한알 ). 59) 김종세는법원앞에서맞닥뜨린장모 ( 뒤에부산대국문과교수 ) 의집요한방해로끝내방청을포기해야했다. 김종세, 앞의구술, 2013. 60)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앞의책, 1983, 353 쪽. 61) 부산최초의노동야학인성안야학의학생으로강학의안내로중부교회의시국기도회에참석한박주미 ( 부산시제 4 대시의원, 민주노동당 ) 에게, 이사건은노동운동에눈뜨는계기가되었다고한다. 이성홍, 70~80 년대부산지역노동야학운동사개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민주주의사회연구소, ꡔ 성찰과전망 ꡕ 4, 2009, 112 쪽. 62) 민청학련사건으로지학순주교가구속되었을때천주교정의구현부산사제단을중심으로시국기도회가개최되기도했으나, 학생운동과노동문제로시국기도회
366 지역과역사 39 호 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의경험은지역의진보적인청년학생들로하여금, 현실인식을심화시키고상호간의결속력을높이는계기로작용했다. 63) 하지만이런상황은학생운동의역량만으로가능한것은아니었다. 그것은지역사회의민주역량을기반으로, 유기적연관관계속에서전개되었다. 즉 1970년대후반부산의학생운동은지역사회의민주화운동을자기환경으로가지게되었던것인데, 이는그이전시기의학생운동이누리지못한것이었다. 2. 노동야학, 진보적개인이무렵부산지역의진보적인청년학생의움직임가운데주목할만한것으로노동야학이있다. 노동야학은노동자의계급적각성과현실인식을통해, 이들이인격적으로자립하고노동현장의활동가로성장하는것을지원하기위한것이다. 노동야학의설립자나강학 ( 교사 ) 은대부분대학생또는대학출신의청년으로, 이러한현상은 1970년대후반에민중문제가민주화운동의핵심적이슈로자리잡게된것과관련되어있다. 즉민중부문이민주화운동의일부로들어오면서학생운동에서도노농현실에대한자각이높아졌던것인데, 노동야학의설립은이러한흐름을반영한결과이자그일환이라고할수있다. 부산에서처음으로노동야학이설립된것은 1977년 12월로, 당감동의성안교회를장소로개설된성안야학 ( 뒤에가야야학 ) 이었다. 64) 성안야학은부 와방청투쟁이전개되고여기에각층의참여가확산된것은처음있는일이었다. 63) 당시양서협동조합의김형기 ( 현경주팔복교회목사 ) 이사는진보적인인식을가진학생들에게, 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참여를통해사회의식을진작시키는계기를삼도록적극권유했다. 이상경, 앞의구술, 2016. 64) 성안야학은 1979 년부마항쟁에강학들이참여한일로경찰의침탈을받게되자교회의요구로정리하고, 졸업생박주미가속한가톨릭노동청년회 [ 지오세 ] 의도움을받아가야성당으로야학을옮겼다. 이후야학의이름도가야성당야학으로바꾸었다. 이성홍구술, 차성환면접, 2013 년도국사편찬위원회구술자료수집사업.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67 산공전의박욱영 ( 전부산해운대구의회의원 ) 과서울대휴학생인신기엽, 박순성, 유대기등의주도하에부산대의허천호 ( 화공과 1년 ) 등이합류하면서설립되었다. 이후부산대학생들이강학으로다수참여했다. 성안야학은최초의야학인탓에노동야학의성격에걸맞은교과과정을갖추지는못하고, 수학영어음악등학생들의요구를반영하여교과목을구성했다. 하지만성안야학의경험은이후의노동야학설립에기반으로작용했다. 1979년부산에서는밀알야학, 청야야학, 사상야학이설립되었는데, 여기에는성안야학의활동가들이직간접으로관련되었던것이다. 밀알야학의경우성안야학과친밀히교류하던허종석 ( 부산대공대 2년 ) 이주도하여, 부산지역의대학연합서클인성아회를중심으로강학을구성했다. 청야야학은성안야학의강학이었던강병철 ( 부산대공대 3년 ) 을중심으로부산대아카데미회원들로강학이구성되었다. 사상야학은 1979년중순설립되었다가 1981 년 5월에다시개설했는데, 이때강학구성을주선한것이성안야학의박욱영이었고, 여기에는가야야학의강학출신들이합류했다. 65) 노동야학은신발, 섬유산업계통의사업장이밀집한당감동, 사상, 영도등지에설립되었는데, 대부분해당지역의교회나성당을근거지로운영했다. 66) 노동야학의설립과운영에는부산대학생을비롯하여부산공전과수산대 ( 두학교는부경대로통합 ) 학생도다수참여했다. 성안야학의경우처럼서울지역대학생이설립을주도한경우도있고, 사상야학처럼 JOC( 제오세. 가톨릭노동청년회 ) 멤버들이주축을이룬야학도있었다. 노동야학은그자체가학생운동을위한조직은아니었지만, 노동야학의설립자나강학들은대부분학생운동과직간접적으로관련되어있었다. 67) 65) 이상 1970 년대말부산지역노동야학에대해서는이성홍, 앞의글, 2009, 109~ 115 쪽. 66) 성안야학은당감동, 밀알야학과청야야학은영도, 사상야학은사상에있었다. 67) 심지어생활야학이나검정야학이라고해서학생운동관련자가없는것도아니었다. 금정구의문성새마을야학도그런경우이다. 문성야학의강학은부산대언더서클의멤버인노재열이었다. 노재열구술, 차성환면접, 2006 년도부마항쟁관련인사구술사료수집사업. 다만이경우해당야학은학생운동, 나아가민주화
368 지역과역사 39 호 또한제오세를비롯한노동청년이강학또는학생으로참여함으로써, 초보적이지만노동계와학생운동의연대활동이이루어졌다. 68) 즉이시기의노동야학은아직적극적으로민주화운동에참여하는단계는아니었지만, 다양한요소들과연대하는활동을통해학생운동의외연을확장시키는역할을수행했던것이다. 그밖에이시기부산에는조직화되지않고개별적으로존재하는진보적청년학생들이다수존재하고있었다. 부마항쟁의불발탄이된이진걸그룹과신재식그룹, 학생시위를재점화하여항쟁의불씨를제공한정광민, 이들에앞서부산공전의시위를기도한신홍석그룹등은대표적인사례이다. 69) 이진걸은고교동창인이성동이참여한 4ㆍ19부대자율화민주실천선언서사건에크게영향을받고, 동문서클인 동녘 을사회과학학습조직으로변화시키려기도했으나성공하지못했다. 이에양서협동조합이주최하는시국강연회등을통해혼자문제의식을키우던중황선용과남성철을만났다. 황선용은서면서림의직원으로일하면서진보적서적을통해현실인식을벼리고있던청년으로, 서적을매개로이진걸과의기투합했다. 남성철은함석헌을사숙하면서진보적관점을키워오던청년으로, 우연한기회에지인의소개로이진걸과합류했다. 70) 세사람모두어떤조직에속하지않은개인으로존재했다. 세사람의관계역시인격적신뢰와현실인식의동질성을바탕으로했지만, 그관계가조직적인성격을가지는것은아니었다. 신재식 ( 사회복지학과 3년 ) 도혼자사회과학서적을접하면서사회의식을 운동과의관련성이매우약하다. 68) 성안야학의학생들은강학들의안내로동일방직노동자선거법위반사건으로개최된중부교회의시국기도회에참석하기도했다. 박주미, 앞의구술, 2006. 69) 이진걸그룹과신재식그룹은 1979 년 10 월 15 일학생시위를위해유인물을살포했으나시위를일으키는데실패했다. 이에격분한정광민 ( 경제학과 2 년 ) 이다음날인 16 일상과대학우들과함께 선언문 을뿌리면서학생시위를촉발하는데성공했다. 이에앞서 9 월 17 일부산공전에서는신홍석, 김맹규, 서석권이유인물을살포하고시위를시도했으나실패했다. 70) 이진걸, 앞의구술, 2002. 황선용구술, 차성환면접, 2011 년 4 월 29 일. 남성철구술, 차성환면접, 2013 년도국사편찬위원회구술자료수집사업.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69 성장시킨경우에속한다. 그는한때아카데미서클에속했으나, 1978년하반기에제대한뒤로는서클과무관했다. 이듬해복학한뒤로는소속단과대 ( 법정대 ) 학생들과느슨하게결합하고있었는데, 조직적구속력을가지지못한것이었다. 71) 독자적으로사회의식을키웠다는점에서정광민 ( 경제학과 1년 ) 도마찬가지였다. 72) 그는개인적학습과문학강연회등을통해비판의식을심화시키고, 학과친구들과현실인식을소통하며지냈다. 73) 부산공전의신홍석 ( 기계과 2년 ), 김맹규 ( 토목과 2년 ), 서석권 ( 토목과 2년 ) 그룹의경우에도, 학내에조직을가졌다고볼만한근거는확인되지않는다. 74) 이들은모두학생운동조직에속한이들이아니었고, 다른어떤조직적기반을가지지않은상태였다. 그럼에도부마항쟁의뇌관을당긴것은이들이라는점은주목할만한일이다. 동시에이사실은당시학생운동권과비조직청년학생들의사회인식이매우유사했다는것을보여준다. 이는이듬해의부마항쟁에청년학생들의참여가폭발적으로이루어졌던사실을이해하는데시사점이있다. 이들에게관심을가져야하는이유가될것이다. 71) 신재식그룹의경우는시위예정일이다가오자신재식외구성원이모두이탈할정도로결속의강도가낮았다. 신재식구술, 차성환면접, 2009 년 8 월 11 일, 부마항쟁 30 주년기념부마항쟁관련구술사료수집사업. 72) 따라서정광민을경제사학회소속이라고기술한 ꡔ 부산민주운동사 ꡕ 의서술 (406 쪽 ) 은적절치못한것이다. 정광민, 이행봉교수에게묻는다, 부마민주항쟁계승사업회, 2016 년 5 월 7 일, 4 쪽. 73) 특히그는 불의에타협하거나굴복하지않고맞서투쟁하는것이사람답게사는길 이라는김정한의말을신념으로간직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ㆍ부마민주항쟁십주년기념사업회, 앞의책, 1989, 108 쪽. 74) 조갑제에따르면, 신홍석등은부산공전내에 15 명정도의이념서클을만들어토론회와세미나를가졌다고한다 ( 조갑제, 앞의책, 1987, 243 쪽 ). 하지만신홍석등이이들과함께시위를도모하지않았다는것은그들간의결속력이강고하지않았음을보여준다. 따라서이서클을구속력있는조직으로보기는어렵다.
370 지역과역사 39 호 맺음말 부마항쟁은수만명의학생들이참여한가두시위로촉발되었다. 그러한학생시위는어떻게가능했는가. 이를해명하는것은부마항쟁연구의오랜과제였다. 이연구는그실마리를찾기위한노력의일환이었다. 이를위해이논문에서는부마항쟁이벌어지기한해전인 1978년학생운동의부활에주목했다. 1978년부산은자신이속한사회의민주적진보를꿈꾸는청년학생들이마그마처럼모여들고분출하는현장이었다. 이들은대학과중부교회및양서조합과노동야학등의용광로를거쳐하나가되었다가다시흘러, 부마항쟁이라는거대한활화산을향하고있었던것이다. 따라서 1978년의부산을이해한다는것은, 부마항쟁의발생과정을거슬러탐사하는것과도같다. 이를위해이연구에서는 1978년부산에서벌어진두차례의유신반대학생운동과그것이시국기도회와방청투쟁으로확산되어나가는과정, 그리고이와는다른방식으로부마항쟁을준비하고있었던노동야학과진보적청년학생의개인적지향을통해 1978년학생운동의지형을재구성했다. 그결과 1978년부산에서는아직꿰어지지않은구슬들이, 곳곳에서폭발의조짐을만들어가고있었다는사실을확인했다. 이러한학생운동의전개양상은이전과는달라진모습이었으며, 그것은 1970년대후반부산지역민주세력의강력한뒷받침속에서가능한것이었다. 이는이전의학생운동이가지지못했던환경이었다. 즉 1970년대후반의부산은지역사회의민주역량과, 그를기반으로하는진보적학생운동의역량이한데어우러져, 거대한분출을위한에너지를축적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럼에도 1978년학생운동은학생운동의조직화, 이를통한지속적인민주역량의재생산이라는과제를남겼다. 한국사회에대한구조적인식을바탕으로하는이념서클의형성이라는이후의과정은, 1978년하반기에시작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71 되어 1979년봄부산대에서결실을맺게된다. 이과정을분석하는일은다음논문으로이어가려한다. 참고문헌 ꡔ경향신문 ꡕ, ꡔ동아일보ꡕ 대구고등법원, 전중근판결문, 1978. 고최성묵목사 10주기추모사업준비위원회, ꡔ고최성묵목사추모집그의부활을기다리며 ꡕ, 2002. 긴급조치9 호철폐투쟁 30주년기념행사추진위원회, ꡔ30년만에다시부르는노래ꡕ, 자인, 2005.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ꡔ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 ꡕ, 돌베개, 1985. 민주공원, ꡔ민주공원과함께하는부산민주운동사ꡕ, 2003. 민주공원, ꡔ부산민주항쟁연구논총ꡕ, 2003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ㆍ부마민주항쟁십주년기념사업회, ꡔ부마민주항쟁10주년기념자료집ꡕ, 들샘, 1989. 부산대민주화추진위원회, ꡔ새벽함성ꡕ 창간호, 1984. 부산대학교총학생회, ꡔ거역의밤을불사르라 -10월부마민중항쟁사ꡕ, 1985.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ꡔ부산민주운동사 ꡕ, 부산시, 1998. 유영국, 부마항쟁과유신체제의붕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ꡔ한국민주화운동사ꡕ 2, 돌베개, 2009 이기훈, 1970년대학생반유신운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ꡔ유신과반유신ꡕ, 2005. 이상경, ꡔ갈팡질팡하더라도갈만큼은간다 ꡕ, 양철북, 2011. 이성홍, 70~80 년대부산지역노동야학운동사개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민주주의사회연구소, ꡔ성찰과전망ꡕ 4, 2009. 정광민, 이행봉교수에게묻는다, 부마민주항쟁계승사업회, 2016. 조갑제, ꡔ유고ꡕ 1, 한길사, 1987.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인권위원회, ꡔ1970년대민주화운동ꡕⅠ~Ⅴ, 1987.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ㆍ한국교회산업선교 25주년기념대회, ꡔ1970년대노동현장과증언ꡕ, 풀빛, 1984. 허은, 긴급조치9 호시기반독재민주화투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ꡔ한국민주화
372 지역과역사 39 호 운동사 ꡕ 2, 돌베개, 2009. 홍순권, 부마민주항쟁연구의현황과과제 ꡔ 항도부산 ꡕ 27, 2010. 이진걸구술, 노기영면접, 2002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관련인사구술사료수집사업. 김종세구술, 김선미면접, 2013년 7월 5일, 부산시민교육원 ( 나락한알 ). 이호철구술, 차성환면접, 2013년 12월 23일, 부산민주시민교육원 ( 나락한알 ). 추송례구술, 김선미면접, 2013년국사편찬위원회구술사료수집사업. 이성홍구술, 차성환면접, 2013년국사편찬위원회구술자료수집사업. 전중근구술, 김선미면접, 2016년 7월 25일, 카페봄. 이상경구술, 김선미면접, 2016년 7월 28일, 카페베네동래교대점. 김종세구술, 김선미면접, 2016년 7월 31일, 부산민주공원.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2016.08.15 2016.09.19 2016.10.21
1970 년대후반부산지역학생운동연구 373 Abstract A Study on the Student Movement in Busan in the Late 1970s -Centering on 1978- Kim, Sun-Mi Busan-Masan Uprising sparked by street demonstrations that university students led. How could the student protests be possible? This study is an effort to find the clues of it. In this paper for the demonstration, a present writer pays attention to the revival of the student movement in Busan in one year ago (1978) when Busan-Masan Uprising happened. In 1978 in Busan, there was continuous attempts to trigger for university student protests against Yushin(the Revitalizing Reform). They were Pusan National University Declaration for Autonomy and Democratic Practice Event and Pusan National University Painting Event. They mean in Busan that the protests against Yushin began in earnest. They have led the rally of the progressive youth and students, and the spread of the student movement through the prayer meeting for the situation and the audience struggle with the violation of election law case of fired workers of Dong-Il Corporation, even if, two cases, they were the student demonstration failed to lead. This situation was developed based on the democratic condition in Busan. Because the democratic foothold began to emerge in a variety of ways in Busan in the late 1970s, these were organically to bond and was building a new democratic condition. Labor s night school to open and progressive individuals to
374 지역과역사 39 호 grow are also characteristic aspects of the around this time. As a result, in Busan and in 1978, there was joined organically the democratic ability of the community with the competence of the student movement based on it. Thus the energy for the following year Busan-Masan Uprising had been accumulated steadily. Keywords : 1978, Protest Against Yushin, Pusan National University Declaration for Autonomy and Democratic Practice Event, Pusan National University Painting Event, Student Movement, Busan-Masan Uprising
ꡔ 지역과역사 ꡕ 39, 2016.10, 375~389 쪽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375 地域史의관점에서보는倭館 375 연구동향 地域史의관점에서보는倭館 75) 양흥숙 * Ⅰ. 지역사에대한관심과필요성 Ⅱ. 왜관연구성과 Ⅲ. 부산지역의왜관연구 Ⅳ. 지역에서호명되는왜관 Ⅰ. 지역사에대한관심과필요성 우리가배웠던역사, 익숙하게암기되어있는역사는대부분역사교과서에서배운것들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고려, 조선등국가단위의역사를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으로구분하여서술한역사에길들여있다. 중앙조정의정치적전개, 생산력증가와사회의발달, 문화융성등한국사의발전적전개에대해서술하는것이주류를이룬다. 그러므로국가적관점의역사적전개에포함되는것은꼬박꼬박포함된다. 즉국가사, 민족사의일부로서등장할때지역은드러난다. 예를들면산동반도로건너간 진취적인 신라인을서술할때장보고와완도가드러난다거나, 조선시대상품화폐경제의발달을강조할때전국에퍼져있는중요장시가지도에그려진다. 반대로조선을국난에빠뜨린임진왜란이발발했을때각지의전투가칭송된다. 모두국가사적인관점에서필요한사건들이 * 부산대학교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 교수 (yangyang1513@pusan.ac.kr).
376 지역과역사 39 호 며, 국가에의해인식되는지역이다. 동래 ( 부산 ) 가교과서에등장하는것도같은맥락이다.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를보면대부분삼포왜관, 국제무역편에동래가언급된다. 고려를흔들고조선건국후에도국가적문제로남아있던왜구, 그왜구를통제하기위한삼포왜관설치, 조선의경제적성장을강조하기위한무역상, 동래상인의등장등이그것이다. 그러므로조선시대에들어왜관이설치되면서동래란지명이등장할뿐이전시기에는교과서에서동래를찾아보기란어려운일이다. 즉국가적역사전개에포함되지못하는것은쌀조리개에걸러지지않은잡겨처럼아래로가라앉게된다. 그럼국가의역사가전개되는동안드러나지않은지역에는역사가없었는가? 이들지역의역사는가라앉아도되는가? 잊혀도되는가? 또는국가적대사건인임진왜란과병자호란은모든지역에있었는가? 온국민이알만한사건인삼일만세운동은전국적으로일어났는가? 대답은모두 아니다 이다. 국가적사건이라도전체지역에서겪은경험이아니었기때문에지역에남겨진기록과기억이다르다. 남아있는유물, 유적도크게다르다. 지역마다구성원의차이가있고, 지역에내재한동력이각각다르므로상이한역사적전개를보인다. 즉지역을구성하는인문환경과자연환경이각각다르므로지역사회는달라질수밖에없다. 그러므로각지역의역사를국가사의틀속에서범주지울수없다. 역사는국가의시선에서써지기도하고, 지역의시선에서써지기도하는균형을이루어야한다. 그렇다고해서지역의역사는국가사의일부, 국가사를지역에맞추기위해써지는것이아니다. 지역에따라서는국가사의일부로서역사를구성하려는곳도있을수있다. 역사는 그때여기 라는시간과공간에의해구성된다. 그러므로 여기 의사람들에의해그들의인식하에지역사쓰기를해나가는것은그장소에서, 그장소의사람들의시선으로바라볼때가라앉은것들이살아날수있다. 이러한관심을실제의역사쓰기로옮길수있는방안들이많이제시되었
地域史의 관점에서 보는 倭館 377 다. 1990년대 이후 포스터모더니즘 역사이론이 확산되면서 미시사, 생활 사, 일상사 방법론이 유행하였다.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역사쓰기의 대상에서 배제된 사람(개인), 일상, 마을, 개별적인 사건 등에 대해 서술을 해 나갔다. 국가사적 관점에서 인식되고 구획되는 지역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어우러져, 구성원 간의 다양한 관계들을 형성하는 인간이 삶 의 터전으로의 지역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사회관계, 인간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의 관계,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에 대한 연구로서 지역사 연구가 필요하며, 이는 기존의 역사학 방법론 에 대해 보충적인 지점을 전개하였다.1) 지역사의 관점에서 역사쓰기를 한다면 역사라는 그릇에 담겨진 내용이 훨씬 풍부해지며, 다양해진다. 거대한 국가의 틀, 구조를 제거하였을 때 가 려져 써지지 않았던 역사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즉 일국 사적인 관점에서는 빠져나가던 것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에 걸러진 돌 보다, 채를 통과한 모래에 의미를 두는 것처럼. Ⅱ. 왜관 연구 성과 부산의 역사를 쓸 때 많은 史料에 갑자기 놀라울 때가 있다. 조선시대 이 후의 동래(부산)를 고찰할 때가 그때이다. 출토된 유물과 유적으로써 역사 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관찬사료, 사찬사료, 일본 측의 사료까 지 망라된 사료를 기반으로 역사쓰기를 시도한다. 조선시대 동래를 기록한 사료가 갑자기 증가하는 것은 對日관계, 倭館과 관련된 것이다. 고려시대에 對日교류의 창구는 김해 지역이었기 때문에, 동 래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적고 다만 倭寇가 출몰할 때 피해 지역으로 언급 된다. 1) 차철욱, 지방사 연구와 로컬리티의 모색 ꡔ로컬리티,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ꡕ, 혜 안, 2009.
378 지역과 역사 39호 조선 초기 왜관이 세 포구-제포, 부산포, 염포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중앙 조정으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것이 기록 폭증의 원인이다. 왜냐 하면 왜관은 조선 초기에 왜구를 소멸하기 위한 회유책으로 설치되었고, 국 내로 들어오는 일본인을 특정 장소에 거주하도록 하여 통제에 용이하도록 한 방안이었다. 즉 왜관은 조선 내에서 일본인이 거주하는 일본인 마을이었 다. 또한 왜관의 항구에는 朝日무역을 위한 일본의 무역선이 들어오므로 왜 관은 무역의 공간이었다. 조일외교를 담당하는 일본 사절이 머무는 공관이 있었으므로 외교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왜구, 외교, 무역, 통 제, 회유 등 왜관의 필요성은 국가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한 국 측의 왜관 연구는 초기에 왜관 형성, 왜관 제도, 왜관 기능 등에 대한 제 도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삼포왜관 체제는 1544년 사량진왜변 이후 크게 달라졌다. 왜변 뒷수습을 하는 1547년 丁未約條 체결 이후에는 가장 규모가 컸던 제포왜관은 폐쇄되 고 부산포왜관은 유일한 왜관으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 국교 再開를 의미하는 己酉約條가 다시 맺어지기 전에도 조-일 사이의 교류는 부 산에서 진행되고 있어 절영도왜관이 생겨났다. 국교를 재개하는 즈음에는 단일 왜관 체제가 유지되어 부산에만 유일하게 왜관이 존속하게 되었다. 이 렇게 해서 조성된 것이 두모포왜관이다. 70년 이후 왜관의 기능을 강화하 고, 통제를 한층 더하기 위해 초량에 새로운 왜관을 다시 만들었다. 이것이 1876년까지 유지된 초량왜관이다. 왜관이 변화하는 이유 또한 왜변, 왜란, 국교, 통제 강화 등이었다. 따라서 조정의 통제책, 왜관의 외형적 변화, 왜 관을 옮기는 정치적ㆍ관방적인 이유들이 연구의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반면 왜관이 만들어진 이유와 왜관의 기능, 일본인 마을이란 점에서 왜관 연구의 출발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먼저 시작되었다. 변호사 高橋章 之助가 쓴 ꡔ宗家と朝鮮ꡕ(1920)에 실린 和館設置と其經營 이란 글에서 和館 즉 왜관이 처음 정리된 듯하다. 이 책에 실린 國分象太郞의 서문을 보 면 高橋章之助가 對馬藩主 宗氏의 교린과 관련한 事蹟이 많아, 이를 세상 에 알리고자 두루 옛 문헌을 섭렵하여 저술했다 고 한다. 왜관 연구의 시작
地域史의 관점에서 보는 倭館 379 은 이처럼 왜관이 일본인의 공간이고, 대마도가 對朝鮮 관계 업무를 담당했 던 지역이었음을 고증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후 일본 학자들에 의한 왜관 연구가 진행되면서 왜관의 기능, 변천, 규모 등이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왜관은 조선과 일본, 동래와 대마도의 관계 속에서 양국의 관 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100 년이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왜관을 소재로 한 한국 측 연구성과만 하더라도 저서 29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159편, 석사학위논문 8편, 박사학위논문 5편, 일본어로 작성된 논문 12편에2) 이른다. 최근 발표된 왜관 연구의 회 고와 전망 이란 논문은 왜관을 소재로 한 연구성과를 시기별로 구분하여 그 특징들을 정리하였다. 왜관 연구는 수량적인 면에서, 관점의 다양화라는 면 에서 조선후기 왜관 연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왜관 제도의 변천, 왜관 통 제와 관리, 경관, 의례, 주변 지역과의 갈등, 경제 및 문화 교류, 상호인식과 소통 등으로 다양화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는 왜관 연구 주제의 확장 으로, 2000년대 이후에는 왜관 연구의 새로운 경향 으로 의미가 부각 되었다.3) Ⅲ. 부산 지역의 왜관 연구 다각도에서 연구대상이 된 왜관은, 왜관이 있었던 현장인 부산에서 1960 년대부터 연구가 진행되었다. 부산이 지닌 입지적 조건을 고려하여 한일관 계의 역사적 전개를 학술적으로 정리하려는 작업이 기획되면서 임진왜란 관련 사료집 국역사업을 착수하였다.4) 그 후속작업으로 ꡔ한일문화ꡕ라는 2) 이훈, 왜관 연구의 회고와 전망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4, 2016, 5쪽. 3) 이훈, 위의 논문. 4) 發刊辭 ꡔ징비록 上ꡕ, 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 1960. 1960년 6월 부산대학 교 한일문화연구소의 설치 규약이 통과되면서, 연구소의 사업이 활기를 띠게 되 어 임진왜란, 왜관 등 한일관계사와 관련된 여러 성과가 발표되었다.
380 지역과 역사 39호 학술지를 만들었고, 1962년 제1집 1권(9월), 2권(12월)에 수록된 것이 김 용욱의 釜山租界考 와 釜山倭館考 이다.5) 釜山倭館考 序言에는 李 朝時代 韓日 外交의 一面을 倭館外交라 할 수 있다면 이것은 곧 釜山倭館 이 그 中心이 되었다고 하여도 過言이 아니다. (중략) 倭館의 歷史가 釜山 을 基底로 하였기에 三浦ㆍ豆毛浦ㆍ絶影島ㆍ草梁 등의 倭館으로 變遷하 였고, 그러면서도 倭館을 꿰뚫고 있는 諸問題는 바로 當時의 韓日關係를 左 右할 수 있는 敏感한 指針이 될 수 있었다 라고 하였다. 왜관에 대한 관심은 부산이 조일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특별한 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작업 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부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학계의 관심은 부산시 차원의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부산시사편찬위원회 가 편찬하는 학술지 ꡔ港都釜山ꡕ 제1호(1962)의 발간사에도 釜山은 三韓 以來의 由緖 깊은 땅이요, 釜山浦以來의 韓國關門이다. 이 關門을 通하여 韓國의 近世史가 이루어졌고, 韓國全般의 興衰가 定해져왔다 라고 하였다. 부산포가 한국 근세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부산發 국가사의 전개를 이끌 어내고자 한 의도가 나타난다. 제2호(1963)의 卷頭辭에는 이 史料集은 釜山市史編纂에 直接 間接으로 資料가 될 수 있는 硏究論說이나 文獻史料等을 繼續 紹介하겠습니다 라고 하여 부산 관련 연구성과를 수록한다고 하고, 같은 호에 東萊府 및 倭館의 行政小考 (이완영), 釜山貿易考 (박인석) 등의 성과가 수록되었다. 이완 영은 序言에 東萊ㆍ釜山地方이 찾이 하고 있는 歷史 地理的인 特殊性으로 말미암아 일쯕 부터 이 地方에서는 一般行政과 特殊行政이 銳敏하게 交錯 되어 行政特殊史를 硏究하는데 퍽이나 適好한 地域이라 할 수 있겠다 라고 하여 왜관이 동래 지역에 있으면서 발생하는 특별한 행정 체계에 대해 주목 하였다. 왜관과 동래의 관계 속에서 왜관, 동래를 고찰하는 연구였다. 박인 석은 序言에 釜山의 歷史는 곧 釜山港의 貿易史라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 이다. 地理的으로 日本 特히 對馬島와 가장 近接해 있는 釜山港은 高麗時 5) 김용욱, 釜山租界考 ꡔ韓日文化ꡕ 1-1, 1962 ; 釜山倭館考 ꡔ韓日文化ꡕ 1-2, 1962.
地域史의 관점에서 보는 倭館 381 代부터 對日貿易의 中心地가 되어 李朝末葉부터는 우리나라 對外 貿易의 中心港이 되었던 것이다 라고 하여 대일무역항으로서의 부산 및 왜관에서의 公私貿易을 고찰하였다. 또한 같은 호부터 이후에 발간되는 호까지 朝鮮 王朝實錄釜山關係抄存 을 수록함으로써 조일관계의 현장으로서의 동래(부 산)를 강조하고, 아울러 왜관 연구에 대한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 논문을 중심으로 한 연구성과 외 부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는 釜山史料叢 書 를 1963년부터 출판하였다. ꡔ東萊府事例ꡕ(1963), ꡔ接待倭人事例ꡕ(1963), ꡔ東萊府啓錄 上ꡕ(1964) 등의 조선시대 동래와 왜관을 알 수 있는 사료집을 출판함으로써 보다 많은 연구성과를 내는데 기여한 바 있다. 이러한 연구는 조일관계의 현장인 부산 이라는 전체적인 조망 아래 왜관 을 고찰하는 의도였다. 그리고 유일한 왜관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역사를 가진 지역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 최초로 개항된 곳이 초량왜관을 계승하는 곳이므로 부산의 근대화 및 식민도시로의 건설과 왜관이 직접적으로 연결되기에 더욱 왜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김의환이 쓴 釜山開港의 硏究 上ㆍ中ㆍ下 6) 가 부산 개항의 중요성 때문에 그 前史에 해당하는 왜관을 언급한 경우이다. 1970~1980년대에는 왜관에 관한 연구성과가 증가하는데 왜관 설치와 변천, 왜관의 규모, 왜관 업무에 종사한 조선인과 일본인, 왜관에서의 수행 된 조일교류 등에 대한 구체적으로 왜관을 고증해 나가는 연구성과들이 나 왔다. 김의환에 의해 많은 연구가 나왔는데 일본에서 발표한 연구도 많았 다. 대부분의 연구들이 왜관의 제도와 구성과 관련되어 있고 부산이 단일왜 관으로 성립되는 배경에 대한 연구도 발표되었다.7) 김용욱은 移館考 에 6) 김의환, 釜山開港의 硏究 上ㆍ中ㆍ下, ꡔ항도부산ꡕ 3ㆍ4ㆍ5, 1963ㆍ1964ㆍ 1966. 또한 開港後 釜山日本專管居留地 設定에 關한 論文-釜山市 形成에 미친 影響을 中心으로 ꡔ한일관계ꡕ 2, 1973 ; ꡔ釜山近代都市形成史硏究ꡕ, 연문출판 사, 1973도 같은 맥락이다. 7) 김의환, 李朝時代に於ける釜山の倭館の起源と變遷 ꡔ(帝塚山短期大學) 日本文 化史硏究ꡕ 2, 1977 ; 釜山倭館の職官構成とその機能について ꡔ朝鮮學報ꡕ 108, 1983 ; 釜山倭館貿易の硏究 ꡔ朝鮮學報ꡕ 127, 1988 ; 부산 단일 왜관 성립
382 지역과 역사 39호 서 조일외교의 한 단면으로서 왜관외교 를 강조하고 왜관이 옮기지는 이유 를 왜관의 통제책과 관련지었다.8) 이원균은 왜관과 동래 지역의 관계를 보 다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왜관이 있는 부산과 왜관 관리기구인 東軒이 있 는 동래, 동래 지역의 군영과의 관계를 고찰한 것이다. 문관인 동래부사와 무관인 경상좌수사와 다대포 첨사의 교체 실태를 다른 지역의 관리와 비교 ㆍ분석하면서 해당 관직의 교체가 동래부의 關防ㆍ對日關係와 상당한 관 계가 있음을 밝혔다.9) 이를 통해 왜관이 부산 지역에 있으면서 행정과 관 방, 재정 시스템이 다른 지역과는 차별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 다.10) 1990년대는 기존의 왜관 연구 방식에 따른 왜관의 전모를 밝히는 연 구11)와 함께 왜관의 무역과 관련된 연구성과가 많이 발표되었다. 김동철의 연구가 독보적인데 왜관에서 진행된 무역과 무역품, 무역유형, 무역상인, 무역세 수취와12) 관련된 연구이다. 왜관에서는 공무역, 개시무역(사무역), 밀무역이 진행되었고 각 무역의 특징과 무역 유형 마다 다른 무역품의 거래, 무역품의 종류와 공급, 무역시장의 변화, 무역에 참여한 무역상인 등이 연 의 연구 ꡔ봉산고승제박사고희기념논총ꡕ, 1989. 8) 김용욱, 移館考 (상, 하), ꡔ국회도서관보ꡕ 97ㆍ98, 1974. 9) 이원균, 朝鮮時代의 守令職 交遞實態-東萊府使의 경우- ꡔ부대사학ꡕ 3, 1979 ; 朝鮮後期 地方武官職의 交遞實態- 慶尙左水營先生案 과 多大浦先生 案 의 分析- ꡔ부대사학ꡕ 9, 1985. 10) 김강식, 17ㆍ18세기 부산의 행정과 관방 ꡔ항도부산ꡕ 10, 1993. 정이근, 17 ㆍ18세기 부산지방(동래부)의 재정 ꡔ항도부산ꡕ 10, 1993. 11) 이원균, 조선후기의 부산왜관에 대하여 ꡔ부산수산대 인문사회과학논문집ꡕ 48, 1992. 12) 김동철, 19세기 牛皮貿易과 東萊商人 ꡔ韓國文化硏究ꡕ 6, 1993① ; ꡔ東萊 府商賈案ꡕ을 통해서 본 19세기 후반의 東萊商人 ꡔ한일관계사연구ꡕ 창간호, 1993② ; 17ㆍ18世紀 對日 公貿易에서의 公作米 문제 ꡔ항도부산ꡕ 10, 1993③ ; 17세기 日本과의 交易ㆍ交易品에 관한 연구-密貿易을 중심으로 ꡔ국사관논총ꡕ 61, 1995 ; 조선후기 倭館 開市貿易과 東萊商人 ꡔ민족문화ꡕ 21, 1998 ; 朝鮮後期 倭館 開市貿易과 被執蔘 ꡔ한국민족문화ꡕ 13, 1999 ; 양흥숙, 17 18세기 譯官의 對日貿易 ꡔ지역과 역사ꡕ 5, 1999.
地域史의 관점에서 보는 倭館 383 구 대상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 동래상인, 무역에 종사하는 역관 등 왜관이 란 현장에서 무역을 실제로 운영한 사람들이 부각되었다는 점, 무역 이후의 지역사회의 변화 등이 고찰된 것이 큰 수확이다. 왜관과 동래 지역의 위계 적인 역할 관계뿐 아니라 외교와 무역 이후의 사회 변화에 대한 고찰이었다. 그동안의 왜관 연구가 연혁, 규모, 외교, 무역, 행정 등 왜관의 외형과 제 도에 주력하였는데, 김성진의 연구를 통해 왜관의 생활과 문화, 조선인과 일 본인의 왕래 등 왜관 안팎의 사람과 문화가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앞서 서 술한 바대로 왜관 연구 주제의 확장 이라는 연구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 것과 아울러 역사 전공자가 아닌 문학 전공자에 의한 왜관 연구가 시작되었 다. 그러므로 ꡔ조선왕조실록ꡕ, ꡔ비변사등록ꡕ, ꡔ승정원일기ꡕ, 법전집, 등록 류를 중심으로 하는 관찬사료가 아니라 부산과 인근 지역에서 직접 생활한 사람이 쓴 文集을 통해 왜관을 고찰하였다. 왜관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일본 문화와 이를 향유하는 조선인, 조선의 지역사회를 고찰하고 있다.13) 이후 왜관을 오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왜관이 오래도록 부산에 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다양해지고 증가함에 따라 각종 사건사고도 따랐 다. 왜관 일본인의 교류 속에서 마찰과 갈등이 발생하여 왜관이 사회문제화 된 것이다.14) 2000년대 이후 부산 지역에서의 왜관 연구는 구체적, 개별적, 미시적인 연구방법론과 일상적 공간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왜관 연구의 새로운 경 향 이라는 연구경향에 걸맞게 주목되는 바는 왜관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 졌다는 것이다. 이미 일본에서 건축공학 연구자가 왜관 건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부산에서도 왜관 건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들이 진행 되었다. 왜관 규모와 건물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기반으로 건축과 관련 13) 김성진, 李學逵의 <金官竹枝詞> 硏究 ꡔ國語國文學ꡕ 26, 1989 ; 釜山倭館과 韓日間 文化交流 ꡔ한국문학논총ꡕ 22, 1998 ; 朝鮮後期 金海의 生活相에 미 친 日本文物 ꡔ人文論叢ꡕ 52, 1998 ; 19세기 초 金海人의 生活을 침식한 倭 風 ꡔ지역문학연구ꡕ 3, 1998. 14) 손승철, <倭人作拏謄錄>을 통하여 본 倭館 ꡔ항도부산ꡕ 10, 1993을 시작으로 제임스루이스, 이훈, 김강일, 장순순 등의 연구성과가 주목된다.
384 지역과 역사 39호 한 논문도 다수 나왔다. 조선 측의 왜관 관련 공사, 일본 측의 왜관 건축물 수리 때의 특성에 대해 연구하였다. 특히 건축기술 및 건축도구에 대해 고 찰함으로써 왜관이 가지는 건축사적 의미를 더하였다.15) 한편 왜관이 있는 공간에 관심이 더해지면서 조선전기 왜관 또는 조선 후기 왜관 등으로 일반화되어 연구되던 왜관이 각각 조성된 왜관마다, 개별 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전기 삼포왜관은 제포왜관, 부산포왜관, 염포왜관 등으로 나누어 연구되는 것과 아울러 왜관의 모든 것 을 고찰하는 연구 방법이 아니라 특정 시기, 특별한 대상, 주변 지역과의 관계 등을 고찰 하였다.16) 왜관이 놓인 공간에 대한 고찰인 것과 동시에 왜관 안팎의 사람 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로 조성되는 왜관을 바라본 것이다. 조선후기 왜관 또한 분리되어 연구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 재개의 필 요성에 따라 조성된 절영도왜관의 위치를 밝힌 연구는 기존에 알려진 관찬 사료, 사찬사료만 동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관이 있었던 부지와 지형에 대한 접근, 관련된 지명, 현지에서 전승되어 오는 구전, 일제강점기의 왜관 터의 변화 등 왜관이 있던 이곳 으로의 밀착된 연구들이 수행되었다. 부산 지역 내에서 왜관이 옮겨지는 과정, 정치적 타협과 협상내용, 진행과정에서 의 문제점, 이관 협상 타결까지의 구체적인 진행상황을 분석하였다.17) 15) 김숙경, 朝鮮後期 東萊地域의 官營工事에 관한 硏究,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정예정, 草梁倭館의 造營에 관한 硏究, 부산대학교 건축 학과 석사학위논문, 2001 ; 1774년 草梁倭館 修理의 日本 職人과 道具 및 建 築材料에 관한 연구 ꡔ한국민족문화ꡕ 31, 2008 ; 草梁客舍 造營에 관한 硏究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7, 2010. 김순일ㆍ정예정, 草梁倭館의 創建, 修理 및 重 修에 관한 硏究 ꡔ건축역사연구ꡕ 26(10-2), 2001. 정예정ㆍ서치상, 1727년 草梁倭館 修理의 日本 匠人과 道具에 관한 연구 ꡔ건축역사연구ꡕ 16-5, 2007. 16) 김동철, 15세기 부산포왜관에서 한일 양국민의 교류와 생활 ꡔ지역과 역사ꡕ 22, 2008. 이종봉, 조선전기 薺浦의 倭人과 활동 ꡔ지역과 역사ꡕ 22, 2008. 이정 수, 鹽浦의 倭人과 경제활동 ꡔ지역과 역사ꡕ 22, 2008. 17) 윤용출, 17세기 중엽 두모포 왜관의 이전 교섭 ꡔ한국민족문화ꡕ 13, 1999. 김 재승, 絶影島倭館의 存續期間과 그 位置 ꡔ동서사학ꡕ 6ㆍ7합집, 2000. 양흥 숙, 17세기 두모포왜관의 경관과 변화 ꡔ지역과 역사ꡕ 15, 2004 ; 17세기 두모포왜관 운영을 위한 행정체계와 지방관의 역할 ꡔ한국민족문화ꡕ 31, 2008.
地域史의 관점에서 보는 倭館 385 왜관 연구의 주제가 다양해지고 새로운 방법론들이 제기되면서 일본 문 헌을 분석하여 균형 잡힌 왜관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미 김의환에 의해 對馬島宗家文書인 ꡔ和館事考ꡕ가 분석된 바 있다. 최근 왜관 연구자들 이 대마도종가문서를 분석하는 경향에 따라 ꡔ館守每日記ꡕ를 통해 초량왜관 의 생활, 특정 사건에 대한 구체적 사실 확인 및 사건을 보는 양국의 인식, 왜관의 변화 등을 고찰하였다.18) 왜관이 일본인 마을인 것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 살아간 일본인의 생활과 조선인과의 교류도 일본인이 쓴 기록을 고찰하여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본인 역시 왜관을 의미 있는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왜관에서의 경험과 기억은 후대까지 도 남아 도시 경관에 영향에 미친다는 연구도 발표되었다.19) 왜관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에 대해 관심이 크게 높아진 것은 200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왜관은 양국인이, 양국의 풍속이, 양국의 문화가 만나 고 부딪치는 장소였다. 때로는 사회문제가 되고, 외교 사안으로 확대도 되 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래부가 왜관을 운영해 나가는 방식과 왜관을 바라 보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왜관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특히 왜관이 외교의 공 간이며, 외교 업무를 수행하는 동래와 부산의 역할을 일본 사절의 접대와 관련하여 분석하였다. 문헌자료 외 회화자료를 분석하여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한 의미도 가지고 있다.20) 최근에는 남아 있는 회화를 통해 왜관의 한 18) 김의환, 對馬島宗家文庫本 중 ꡔ和館事考ꡕ에 대하여 ꡔ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ꡕ, 1985. 박화진, 왜관관수일기를 통해 본 초량왜관의 생활상 -1860년대 일기를 중심으로 ꡔ동북아문화연구ꡕ 33, 2012 ; 전근대 부산포 사 건을 통해 살펴본 한일양국 자타인식 ꡔ동북아문화연구ꡕ 37, 2013 ; 명치초 기 초량왜관의 변화에 대한 분석 연구-ꡔ왜관관수일기ꡕ를 중심으로- ꡔ동북아문 화연구ꡕ 39, 2014. 19) 김동철, 기억과 표상으로서의 倭館, 津江兵庫 追慕碑의 건립과 古館公園의 조 성 ꡔ한국민족문화ꡕ 31, 2008. 20) 심민정, 동래부사접왜도 를 통해서 본 倭使 접대-연향을 중심으로- ꡔ동북아 문화연구ꡕ 11, 2006 ; 18세기 倭館에서의 倭使 접대음식 준비와 양상 ꡔ역사와 경계ꡕ 66, 2008 ; 조선시대 倭使 接賓茶禮에 대하여 ꡔ동북아문화연구ꡕ 17, 2008 ; 조선 후기 日本使臣 접대절차와 양상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0, 2015 ; 두모포왜관시기 差倭 接待例 변화와 정비 ꡔ동북아문화연구ꡕ 46, 2016.
386 지역과 역사 39호 측면, 왜관과 관련된 부산 지역을 분석하고자 하는 연구도 있다.21) 또한 왜관이 무역의 공간이었다는 것과 무역상인과 무역품에 대한 연구 는 오래되었다. 조선에서 대일무역을 위해 구축한 시스템, 무역 이익을 수 렴하기 위한 동래부의 收稅 시스템, 무역 변화와 동래부 재정의 변화 등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조일무역이 실제 그 현장인 동래부에 미치는 영향에 대 해 고찰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22) 가장 많은 연구성과를 나타낸 것은 왜관이 통제와 교류가 공존하는 공간 이란 점이다. 통제와 교류는 국가적인 사안일 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왜관 운영의 두 축이었다. 일반 민은 교류라고 실행한 것이 통제의 그물이 걸려 불법이 되고 일탈 사건이 되어 버렸다. 양국인 모두에게 통제된 공간, 일본인을 가둬둔 공간, 약조에 의해 제한 된 공간, 그 통제 내용은 발생한 사건사고에 따라 조항이 첨삭되어 강하게 유지되었다는 이러저러한 사유로 왜관은 크게 제한되어 버릴 우려가 있다. 또한 통제를 강조하면 부산에 있는 왜관을 국가사 또는 제도사의 틀 속에 묶어 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일본인과 조선인의 만남은 대체로 불법적 인 것이고, 사회문제시하는 爲政者의 시선, 중앙의 시선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또한 왜관은 양국 사람들이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이며, 장기간 존속했던 시간의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불법 행위라고 여겨진 것들이 생활적인 측면 에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 생겼다. 田代和生의 ꡔ倭館-鎖國時代 の日本人町ꡕ에서도 일본인의 왜관 밖 자유로운 생활과 왜관 내 조선인과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면서 왜관이 더 이상 통제의 공간만은 아님을 강조하였 다. 통제와 교류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또한 왜 관의 무역상황이나 구성원의 변화 등에 의해서는 통제되던 것들이 허용되기 21) 김동철, 倭館圖를 그린 卞璞의 대일 교류 활동과 작품들 ꡔ한일관계사연구ꡕ 19, 2003 ; 동래부사접왜도 의 기초적 연구 ꡔ역사와 세계ꡕ 37, 2010. 양흥숙, 조 선후기 영도의 공간적 특성과 경관의 조성 ꡔ한국민족문화ꡕ 56, 2015. 22) 김영록, 조선후기 대일공무역과 公木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2, 2012 ; 17~18 세기 대일무역 收稅와 동래부 재정 ꡔ민족문화연구ꡕ 66, 2015.
地域史의 관점에서 보는 倭館 387 도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왜관을 동래(부산)와 철저하게 관계시켰다. 동래부 관아 는 동래부 관아대로, 동래부 소속의 관속은 관속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관 계가 형성되었으므로 다층적인 관계망에 의한 교류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지 적하고 있다. 왜관 무역에 참가하는 상인을 연구하더라도 왜관과 동래부의 연계, 무역을 위한 동래와 다른 지역과의 연계, 동래상인이 가진 동래의 기 반 등에 주목하였다.23) 이러한 다층적 관계에 대한 고찰이 이어지면서 그 동안 가리어졌던 것이 부각될 수 있었다. 왜관을 대상으로 연구할 때 잘 드 러나지 않았던 왜관 주변 및 동래부의 武任, 하급 관속, 화가, 기녀, 노비, 일반 민들이 왜관 구성원으로 등장하였다. 왜관과 관련한 이들의 동향 관련 연구가 그것이다.24) 왜관 조성 이라는 사건이 생기면 주변 지역사회는 어 떻게 변화하고 그 지역민들은 어떠한 대응을 보이는가에 대해 주목한 연구 도 있다.25) 이로써 왜관이 통제에 갇힌, 닫힌 공간이 아니라 지역민과 지역 23) 김동철, 조선후기 통제와 교류의 장소, 부산 왜관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7, 2010 ; 17~19세기 부산 왜관의 開市와 朝市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1, 2012 ; 조선 후기 왜관 개시무역 상인의 구성과 활동 ꡔ역사와 세계ꡕ 46, 2014 ; 19세기 후반 동래상인의 존재와 활동 ꡔ지역과역사ꡕ 38, 2016. 24) 김동철, 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와 부산의 譯官 건물 ꡔ항도부산ꡕ 16, 2000 ; 17 19世紀の釜山倭館周邊地域民の生活相 ꡔ年報 都市史硏究ꡕ 9, 都市史硏 究會, 2001 ; 倭館圖를 그린 卞璞의 대일 교류 활동과 작품들 ꡔ한일관계사연 구ꡕ 19, 2003 ; 17 19세기 東萊府 小通事의 編制와 對日活動 ꡔ지역과 역사ꡕ 17, 2005 ; 동전 8냥 과 바꾼 초량왜관 주변 지역민의 운명-1859년 6월 5일 밤의 매매춘[交奸] 사례- ꡔ지역과 역사ꡕ 35, 2014. 양흥숙, 조선후기 東萊 지역과 지역민 동향-倭館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학 교 박사학위논문, 2009 ; 조선후기 왜관 통제책과 동래 지역민의 대응 ꡔ역사 와세계ꡕ 37, 2010 ; 조선후기 倭館 운영을 위한 東萊府民의 役 부담과 왜관 접촉 ꡔ민족문화논총ꡕ 45, 2010. 양흥숙ㆍ김동철ㆍ조강희ㆍ김경미, 대마도 역지통신과 역관, 그 의례적 관계 와 은밀한 교류의 간극 ꡔ한일관계사연구ꡕ 50, 2015. 25) 양흥숙, 볌죄 를 통해 본 조선후기 왜관 주변 지역민의 일상과 일탈 ꡔ한국민 족문화ꡕ 40, 2011 ; 조선의 對日關係와 동래 사람들 ꡔ한일관계사연구ꡕ 49, 2014.
388 지역과역사 39 호 사회와지속적으로관련이된관계의공간이란것을강조하였다. 관계는지역민들에게는경험이되었고, 시간이지나면서습관이되었다. 습관은 1876년개항이라는국면을접하더라도일시에사라지는것이아니라전관거류지가조성되고, 새로운관계가형성될때에도개입되는것이었다. 26) 즉왜관부지가개항후일본전관거류지로계승될뿐아니라그곳에담긴경험과습관도전승되었다. Ⅳ. 지역에서호명되는왜관 1980년대부산지역의대학에는지역문화연구를목적으로하는연구소들이설립되어 27) 지역사연구에대한기반을마련하였다. 뿐만아니라부산시사편찬위원회가설립되고 1960년대부터지금까지위원회주도하의왜관관련사료총서사업, 사료국역사업에힘입어부산지역에서의연구는왜관에대한다각도의접근이용이하였다. 또한왜관이있던현장이었기때문에왜관과관련한유물과유적이도시경관으로등장하고, 왜관과관련한기억이남아있으면서지명으로상징되기도한다. 또한문헌화되지못한역사자원들도남아있다. 더욱이 1995년지방자치제이후에는시단위뿐아니라관광객을직접만나는구, 동에서의관광자원을개발하고그것을도시경관화하는작업을활발하게진행시키고있다. 왜관도예외없는역사ㆍ문화자원이다. 이미문화콘텐츠로응용되고관광자원화하고있다. 이와함께왜관이가진유일함과지속됨이라는특성을살려이지역을특별한공간으로삼는데많은이들이동의하고있다. 부산에서왜관을어떻게이해하고활용할것인가를두고부 26) 양흥숙, 개항후초량사람들과근대공간의형성 ꡔ 한국민족문화 ꡕ 44, 2012. 차철욱ㆍ양흥숙, 개항기부산항의조선인과일본인의관계형성 ꡔ 한국학연구 ꡕ 26, 2012. 27) 홍연진, 부산의지방사연구현황 ꡔ 항도부산 ꡕ 8, 1991.
地域史의관점에서보는倭館 389 산에는민간단체도생겨났다. 지역에서왜관을연구하는것은전근대동래 ( 부산 ) 지역이한국내에서특별한사적전개를보인지역임을아는계기가됨이분명하다. 또한왜관과동래, 동래와다른지역과의관계속에서동래 ( 부산 ) 는국가사의일부로서구성되기도하지만국가사에서비껴나가는지역사를전개하기도한다. 일본인이거주하는왜관이었지만, 조선과일본이라는국가차원의관계가아닌개인과밀접하게연관된생계ㆍ생활차원의관계가많이형성되었다. 국가를경유하지않고개인과개인이연결되었으며동래와대마도가연결될수있었다. 그러므로다양한시선, 다양한층위가존재하는왜관을통해역사를보는다양한관점을제시할수있기도한다. 무엇보다왜관이일본인마을이기는하지만, 현재에이르러서는국가적, 민족적사고를벗어나게한다. 방법 으로의왜관은현재부산이란도시를만들어나가는과정에서부산의시각에서부산을재구성할수있다. 근대식민도시라는부산의출발을지울수없는현실에서 왜관 의존재방식은해항도시의네트워크의의미로해석되며, 해항도시가가진국가의틀에서부터벗어날수있는가능성, 창조적인문화를구성할수있는가능성을제시하기도한다. 28) 가장긴시간동안, 유일하게왜관이있었던부산에서의왜관연구는, 역사현장에서의당사자의연구이기도하다. 왜관은보편적이고일방적인국가사쓰기를깨뜨릴수있는방법이고, 다양한지역을고찰할수있는방법이기도하다. 국가사에서비껴나가는사람들의존재는지역이가진에너지를표출하는것으로볼수있다. 지역의역동성을고찰할수있는방안이며, 동일한사적전개를지속적으로깨뜨려나가는힘으로작동하는지역의단면을찾을수있다. 28) 구모룡, 방법으로서의부산 - 해양문화도시로가는길 ꡔ 한국학연구 ꡕ 19, 2008.
ꡔ지역과역사 ꡕ 39, 2016.10, 신라 391~402 왕위계승원리에쪽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391 대한서말의자료를꿰어낸저서 391 서평 신라왕위계승원리에대한서말의자료를꿰어낸저서 - 선석열지음, ꡔ 신라왕위계승원리연구 ꡕ, 혜안, 2015-29) 권영오 * Ⅰ. 신라왕위계승원리에대한새로운연구의전환점 전근대왕조국가에있어후계왕위계승은왕조의연속으로인식할만큼중요한정치활동이었다. 그렇지만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신라왕위계승에대한사례연구가축척되면서도그에기반하여신라전시기의왕위계승에대한만족할만한거시적인연구성과를내어놓지는못하였다. 학계에서이에대한논의가없었던것은아니지만, 56명의국왕이재위하는천년이란긴시기를관통하는왕위계승의원리를찾아내기는쉽지않았고, 무엇보다사료상의한계와초기기록들의사료비판문제가해결되지못한불가피한점도없지않았다. ꡔ삼국사기ꡕ 초기기록을비판적으로검토하고이를바탕으로신라상고시기정치사를복원한 ꡔ신라국가성립과정연구ꡕ( 혜안, 2001) 를발간한바있는저자가자신의오랜신라사연구와자료의천착을바탕으로신라전시기의왕위계승원리에대한연구서를세상에내어놓았다. 기존의연구에서도인류학이론등에입각하여왕위계승의법칙을규명하려는연구등이있었지만, 각연구자들마다개념규정이명확치않아혼란이있기도하였 * 대저중학교교사 (stonenest@hanmail.net).
392 지역과역사 39 호 다. 그리고신라사전시기에걸쳐구체적인사료에근거한검증으로이어지지못하고자의적이며피상적이해에머물거나, 기존연구의재론에그친것도많았다. 최근의신라왕위계승에대한연구는다양한시각과주제의논고들이나오고있으며, 혈연적측면관련연구보다는왕위계승의정치적측면이나역사적인배경을추구하는연구들이점차늘어나고있는추세이다. 1) 이에대해저자는기존연구들이왕위계승원리에대해서는그다지구체적으로추구하지않고있으며, 혈연적성격이나왕실과의변동을중심으로추구해왔다고아쉬움을표했다. 저자는저서에앞서신라왕위계승에대해적자에의한직계계승을비롯하여방계계승과여서계승이라는세가지원리를적용하여개관한연구들을발표한적이있다. 2) 그때는전반적인흐름을간단히언급한것으로, 왕실계보에대해본격적인검토를제대로시도하지못했던점을이책을통해보완하고체계화한것으로볼수있다. 저자가지적한것처럼신라왕위계승에대한기존의연구들은특정시기에한정하여분절적으로검토되었으며, 정치집단간의역관계에초점을맞추었다. 이에대해저서에서저자는신라사회의발전과정속에서신라왕위계승원리가신라의전시기를통해어떻게이행되어졌는가를전체적으로조망하고있다. 저자는왕위계승이단순히부자계승이라는측면보다이것이어떤구체적인원리에입각하여이루어져갔을것으로상정하고, 이를통해신라왕위계승원리에대해합리적인접근을시도했다. 저서는기존연구와는차별되는저자의이러한문제의식을바탕으로신라왕위계승원리에대한새로운연구지평을연전환점이될것으로보인다. 1) 최의광, 신라하대왕위계승양성과성격, 고려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14, 4~ 5 쪽. 2) 선석열, 신라의왕위계승원리 ꡔ 역사와세계 ꡕ 32, 2007 ; 신라상고의왕위계승원리와삼성왕통의실재성 ꡔ 역사와세계 ꡕ 33, 2008.
신라왕위계승원리에대한서말의자료를꿰어낸저서 393 Ⅱ. 내용구성과논쟁점 1. 내용구성서론과결론을제외하고이책의목차를살펴보면대략다음과같다. 각장은상고시기를박씨이사금ㆍ석씨이사금ㆍ마립간시기김씨왕통의왕위계승으로구분하였고, 중고ㆍ중대ㆍ하대시기의왕위계승을언급하여여섯시기의왕위계승을검토하였다. 각장은먼저왕실계보를살펴보고왕위계승의유형을각사례별로고찰하였는데, 왕실계보는 Ⅱ. 상고시기박씨이사금의왕위계승에서는유리왕계와일지갈문왕계, Ⅲ. 상고시기석씨이사금의왕위계승에서는초기의탈해왕계ㆍ이매계ㆍ골정계, Ⅳ. 마립간시기김씨왕통의왕위계승에서는내물왕계와실성왕계, Ⅴ. 중고시기의왕위계승에서는지증왕계와진흥왕계, Ⅵ. 중대시기무열왕계의왕위계승에서는무열왕직계와성덕왕계, Ⅶ. 하대시기원성왕계의왕위계승에서는원성왕계와박씨왕계로구분하였다. 그리고다시각장의왕위계승은 1) 직계계승, 2) 방계계승, 3) 여서계승, 4) 여왕계승으로분류하였다. 목차에서보듯저서는신라전시기의왕위계승을연구대상으로하고있어 ꡔ삼국사기ꡕ 의삼대나 ꡔ삼국유사 ꡕ의삼고의한시기로한정된기존연구들에비해거시적인전망을제시하고있다. 이것은광범위한자료검토와연구축적이이루어지지않았더라면쉽게접근할수없는주제이다. 앞에서언급한대로저자는이책에서신라의왕위계승원리를적자계승ㆍ방계계승ㆍ여서계승으로파악하여, 3) 이를신라전시기에걸쳐적용하고있다.
394 지역과 역사 39호 저서에서 저자의 논지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상고시기의 왕위계승을 언급한 부분이다. 저자는 신라 초기 이사금시기의 왕위계승에 대해서는 초 기 기록의 신빙성 문제와 기년 문제 등이 아직 논란이 되고 있어 왕위계승 원리에 대한 사례의 제시는 내물왕 이후에 한정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 다.4) 저서는 그때 미진하였던 석씨, 박씨 이사금의 왕위계승을 보완하여, 저서의 체제에 맞는 신라 상고기 왕위계승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ꡔ삼국사기ꡕ 초기 기록에 대해 불신론(허구론)과 긍정론, 수정론이 제기 되어 있다. 그간 6세기 초 이래의 금석문이 속속 발견되고 그와 함께 고고학 적 발굴 성과가 축적됨에 따라 신라본기 초기 기사에 대한 전면적 긍정론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5) 학계의 대세는 수정론에 기울고 있 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가 흔쾌하게 동의할 수 있는 수정 론이 제기되었다고 보기 어렵다.6)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온 저자는 신라의 상고 기년과 삼성왕통 에 대해 교립론보다는 병립론에 입각하고 있다. 신라 상고 왕실의 계보를 전하는 ꡔ삼국사기ꡕ와 ꡔ삼국유사ꡕ의 기록7)은 때로 상이할 뿐 아니라 계보 상의 혼돈도 보이고 있어 연구자들마다 사료를 취사선택하는 등의 혼란이 있어왔다. 때문에 신라 상고 왕실 계보를 복원하려는 작업은 다각도의 신중 한 접근이 요구된다. 두 史書의 차이가 출처가 다른 기록의 인용에서 연유 하는지, 아니면 혼돈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사료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실제로는 여왕계승까지 넣어 4개로 분류하고 있으나, 여왕계승을 원리에 벗어난 탈법, 불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4) 선석열, 앞의 논문, 2007. 5) 노태돈, ꡔ한국 고대사ꡕ, 경세원, 2014, 82쪽. 6) 전덕재, ꡔ삼국사기ꡕ 신라본기 상고기 기록의 원전과 개찬 ꡔ동양학ꡕ 56, 2014, 1~2쪽. 7) ꡔ삼국유사ꡕ의 왕력과 기이편 이하 본문의 기록 사이에도 서로 다른 내용이 보여, 일연이 왕력을 직접 집필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김상현, 삼국유사 왕력편 검토 ꡔ동양학ꡕ 15, 1985. 박미선, 일연의 신라사 시기구분 인식 ꡔ역 사와 현실ꡕ 70, 2009, 149쪽).
신라 왕위계승원리에 대한 서말의 자료를 꿰어낸 저서 395 저자는 이사금과 다르게 칭한 혁거세거서간과 남해차차웅은 특정 인물의 왕위계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혁거세와 남해는 신라국가의 모 체인 사로국 국왕의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라 왕권의 기원적 특징이 祭ㆍ政을 공유하는 것임을 명시해 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박사학위논 문 이래의 저자의 주된 논지이며,8) 본서의 신라 왕실 시조인식도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이에 따라 신라왕통의 기년은 3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처 음에는 박씨와 석씨 두 왕통이 병립되었는데, 4세기 중엽에 미추왕이 즉위 함으로써 김씨왕통이 박씨왕통을 이었으며, 이후 김씨왕실 세력은 석씨왕실 세력과 경쟁하다가 눌지왕의 자립에 이르러 석씨왕통이 소멸됨으로써 신라 왕권은 김씨왕통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보았다. 단절적인 왕계 변천이 아니라 병립적인 입장에서 저서는 각 시기 왕계를 구분하고, 그에 따른 왕실계보를 복원하였다. 상고시기 박씨 이사금의 왕위 계승은 유리왕계와 일지갈문왕계로 구분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유리 라는 명칭은 사로국의 왕위계승의 전통을 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박씨왕통 의 왕위계승에 대해서는 유리왕 이후부터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곧 기 록상으로 전해지는 사로국의 실재한 왕은 유리왕부터라고 하고 있다. 저자는 석씨 집단을 동해안으로부터 유이한 세력으로서 우시산국을 정복 하여 이를 기반으로 삼고 세력을 확고히 하면서 사로국의 지배집단인 박씨 세력과 경쟁하다 눌지왕의 자립 이후 왕통이 소멸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석씨 왕실을 벌휴왕의 아들 골정계(조분왕ㆍ첨해왕ㆍ유례왕ㆍ기림왕)와 이매계(내해왕ㆍ흘해왕)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석씨왕실의 왕위계승에 대해 저자는 첨해왕을 경계로 나누어 볼 때 전반 기의 왕위계승은 적자계승과 여서계승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었다고 하였다. 첨해왕 이후 후반기에는 주로 방계계승의 원리가 작용하였으나, 골정계와 8) 선석열, ꡔ삼국사기ꡕ 신라본기 초기기록의 문제와 신라 국가의 성립, 부산대학 교 박사학위논문, 1996, 36~37쪽 ; ꡔ신라국가 성립과정 연구ꡕ, 혜안, 2001, 52~ 53쪽.
396 지역과 역사 39호 이매계라는 혈통의 기반이 내재되어 있었다고 본다. 초기의 박씨왕실이 다 른 국의 왕실과 족외혼을 한 것과 달리 석씨왕실은 전반기에 근친혼을 행하 여 왕실의 결속을 꾀하고 있었으나, 후반기의 왕위계승이 방계화 경향을 보 이는 것은 왕권 약화의 경향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후 저서의 신라 왕위계승 과정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4세기 중엽에 박씨왕통을 이어 등장한 김씨왕통은 미추왕 이후에는 내물왕의 후손 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마립간 시기의 왕실은 내물왕계라고 하고 있다. 그 후 신라의 왕통은 지증왕계가 중고의 왕통을 열고 법흥왕 이후 진흥왕 계가 분화되었으며, 무열왕이 중대의 왕통을 열고 성덕왕계로 분화되었으 며, 원성왕에 의해 하대왕통이 열리고 경문왕계가 성립되어 갔다고 파악하 고 있다. 저자는 신라는 왕위계승의 원리라는 점에서 보면 직계계승 내지 적자계 승ㆍ방계계승ㆍ여서계승의 순서로 왕위가 계승되어 왔다고 보고, 하대에는 여왕과 서자의 즉위로 인해 그 원칙조차 무너지면서 박씨 왕실이 등장했다 고 보고 있다. 저자는 父系 혈통만이 아니라 딸의 남편이나 여서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여서 계승의 원리를 강조하였다.9) 저서에 의하면 석씨왕통 의 조분왕, 김씨왕통의 내물왕과 실성왕, 중고시기 진흥왕, 중대시기 선덕 왕, 하대시기 경문왕ㆍ신덕왕ㆍ경순왕이 여서계승을 하였다고 보았다. 저서에서 저자의 논지로 주목되는 것은 갈문왕에 대한 것이다. 이기백은 눌지마립간 이후 김씨 왕가의 왕위 계승 현상을 설명하면서 형제 상속의 원 칙은 무너져서 왕제는 왕위계승자의 지위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우로서 왕제를 갈문왕에 책봉한 것 으로 보아, 갈문왕을 왕이 될 수 없는 존재로 이해하였다.10) 세부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갈문왕에 대한 연 구는 이기백의 이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다가 최근 잇달아 발견된 신 라 금석문에 의해 재검토가 불가피해 졌다. 영일 냉수리비에 의하면 지증왕 9) 이재환은 사위의 왕위계승권 인정을 신라 정치 운영의 특징으로 보았다( 신라 진골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176쪽). 10) 이기백, ꡔ신라정치사회사연구ꡕ, 일조각, 1974, 16~22쪽.
신라 왕위계승원리에 대한 서말의 자료를 꿰어낸 저서 397 이 갈문왕으로서 왕위에 오른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갈문왕에 도 왕위계승권이 주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발표되었고,11) 저자도 새로 발견된 신라 금석문의 내용을 토대로 갈문왕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크게 진 전시켰다. 저자는 눌지왕 대부터는 추봉 갈문왕 외에 王弟를 갈문왕에 책봉 하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부자관계로 계승되었다고 보았다. 책봉된 갈문왕은 국왕의 유고가 있을 경우 왕위에 즉위할 수도 있었다고 하여, 이 기백과 견해를 달리 하였다. 신라가 왕과 갈문왕 二重의 왕이 다스리는 二元體制 왕국이라는 주장12) 에 대해 저자는 마립간 시기에는 마립간과 갈문왕이 왕권을 분장하였는데, 마립간이 정치ㆍ군사권을 장악한 반면 갈문왕은 주로 제사권을 관장하였다 고 하였다. 지도로갈문왕의 즉위를 예로 들어 마땅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때 에는 갈문왕이 왕위계승 1순위였을 것으로 보고13) 이에 따라 습보갈문왕의 아들 지증왕과 입종갈문왕의 아들 진흥왕이 즉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향 후 이에 대한 논의의 진전이 기대된다. 왕위계승과 상대등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도 주목된다. 적장자에 의한 왕 위계승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경우 기존의 연구에서는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 가 없을 경우 상대등은 왕위를 계승할 제1의 후보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라 는 이기백의 주장14)을 추종하여 하대의 왕위계승을 이해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지만15) 본격적인 논쟁으로 진행되지는 않 았다. 저자는 상대등은 귀족세력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한 것이 아니라, 귀 11) 문경현, 영일 냉수리비에 보이는 부의 성격과 정치운영문제 ꡔ한국고대사연구ꡕ 3, 1990. 12) 문경현, 울주 신라 서석명기의 신 검토 ꡔ경북사학ꡕ 10, 1987. 13) 박남수( 신라 화백회의에 관한 재검토 ꡔ신라문화ꡕ 21, 2003, 20~27쪽)와 서 의식( 신라 상대 갈문왕의 책봉과 성골 ꡔ역사교육ꡕ 104, 2007)도 이러한 주 장에 동조하였다. 14) 이기백, 앞의 책, 1974, 99쪽. 15) 김창겸, 신라하대 왕위계승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권영오, 신라하대 왕위계승과 상대등 ꡔ지역과 역사ꡕ 10, 2002.
398 지역과 역사 39호 족회의를 주재하여 왕권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견해16)를 수용하였 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없는 경우 상대등이 왕위계 승의 제일 후보자로 이해한 견해가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는 수긍할 수 없 다고 단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원성왕계는 대부 분 세 가지의 계승원리를 준수하면서 국왕이 후사가 없을 경우 미리 태자 또는 부군으로 지명하는 경우도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혜공왕대 상대등 김양상은 혜공왕의 시해자가 아니라 왕권을 보좌하는 여서 적인 존재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이러한 선례는 이후 하대의 왕위계승 에서 적용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대 왕통의 경우에는 전체 20왕 중에서 11왕이 방계계승으로 가 장 많고, 직계계승이 5왕, 여서계승이 3왕, 그리고 여왕계승이 1왕으로 분 류하고 있다. 이러한 분류나 연구 방법은 이 책이 기존의 연구들17)과 차별 되는 점이고, 앞으로도 활발한 논쟁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헌덕왕대 태자의 존재문제는 사료의 해석 차이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 어 왔다. 저자는 김충공의 딸 흔명부인이 김균정과 혼인하여 신무왕과 헌안 왕을 낳았고 정교부인은 헌덕왕의 태자와 혼인하여 태자비가 되었으므로, ꡔ삼국사기ꡕ 녹진 열전의 기록과 달리 헌덕왕은 후사로서 태자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자는 이에 대한 근거를 ꡔ삼국사기ꡕ에서 헌 안왕을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라 한 것보다 ꡔ삼국유사ꡕ에서 헌안왕을 신무왕 의 동생이라고 한 것18)을 신빙하여 새롭게 해석하려 하였다. 저자의 기존 주장19)을 수정한 것으로, 앞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좀 더 진행되어 연구의 심화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20) 16) 이영호, 신라 귀족회의와 상대등 ꡔ한국고대사연구ꡕ 6, 1992, 96~99쪽. 17) 김창겸, ꡔ신라 하대 왕위계승 연구ꡕ, 경인문화사, 2003. 권영오, ꡔ신라하대 정 치사 연구ꡕ, 혜안, 2011. 최의광, 신라하대 왕위계승 양성과 성격, 고려대학 교 박사학위논문, 2014. 18) ꡔ삼국유사ꡕ 권1, 왕력. 第四十七憲安王 金氏 名誼靖 神虎王之弟 19) 선석열, 앞의 논문, 2007에서는 헌안왕을 신무왕의 이모제로 파악했었다. 20) 이에 대해서는 선석열, 신라 헌덕왕대의 정치 과정과 정교부인의 혼인 문제 ꡔ신
신라왕위계승원리에대한서말의자료를꿰어낸저서 399 2. 논쟁점과제언저서를통해저자는기본적으로신라의왕위계승은적자계승, 방계계승, 여서계승의세가지원리를통해이루어져갔으며, 왕위계승을둘러싼분쟁도그원리속에서이루어졌다고보고있다. 저서를관통하는이러한일관적인논지가이저서의연구사적장점이기도하지만, 왕위계승당시정치적상황에대한보완이아쉬운점은있다. 눌지왕이실성왕을이어왕위에오른점은여서계승이라고볼수있겠지만, 저자는내물왕의적자라는점을보다중요한요인으로본다. 여기서도저자는왕위계승원리를언급하여 눌지왕은고구려의지원이있든없든그에관계없이왕위를계승할수있었던것 이라고하였다. 그러나고구려의지원이없었다면눌지왕의즉위가가능했을지는의문이다. 21) 왕위계승원리를단선적으로강조하기보다는정치적이유, 골품제적운영, 혈연적기반등을포괄적으로검토하는것도필요해보인다. 저자는왕위계승의원리에초점을맞추어선덕왕은성덕왕의외손으로서무열왕계의방계인성덕왕계의왕으로볼수있으며, 중대는선덕왕까지지속된것이라고하였다. 그렇지만이러한자의적인중대의소급, 또는연장은 ꡔ삼국사기ꡕ 의의도와어긋나는것이다. 곧중대라고한이상 ꡔ삼국사기 ꡕ 의편찬자들은무열왕에서혜공왕까지의시기를의미하는것으로이와어긋나는경우삼대와는다른시기구분을설정해야할것이다. 22) 라문화 ꡕ 48, 2016 참고. 21) 이는 ꡔ 삼국유사 ꡕ 에 ( 실성 ) 왕은전왕의태자눌지가덕망이있음을꺼려죽이고자했다. 고구려사람이눌지가어진행실이있음을보고이에창을돌려왕을죽이고눌지를왕으로세우고돌아갔다 (ꡔ 삼국유사 ꡕ 권 1, 실성왕 ) 는기록을통해짐작할수있다. 22) 상대ㆍ중대ㆍ하대의구분은 ꡔ 삼국사기 ꡕ 에의한것인만큼 ꡔ 삼국사기 ꡕ 가왜혜공왕대까지를중대로, 선덕왕대부터를하대로구분하였는가하는자체에중점을두어야지, 그입장을떠나하대의기점운운하는것은 ꡔ 삼국사기 ꡕ 의본래의의도와는거리가있는발상 이라는이영호의지적 ( 신라혜공왕대정변의새로운해석 ꡔ 역사교육논집 ꡕ 13 ㆍ 14, 1990, 334 쪽 ) 을염두에두어야한다.
400 지역과 역사 39호 저자는 신라 상고 왕실세계의 기년에 대해 수정론에 입각하여 왕위계승 을 분석하고 있다. 신라 상고 왕통의 기년에 대해 허구론ㆍ수정론ㆍ긍정론 이 있어 왔는데, 그에 대한 가장 큰 요인이 왕위계승에 있어 해당 왕들의 수 명이나 세대 간의 연령 차이에 대한 의문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매우 적절한 지적으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사료가 부족하고 그나마 누락되고 상 반되는 사료들의 사실관계 확인에 있어 당대 인물의 연령 추정은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다만 헌강왕의 두 딸 의성부인과 계아부인을 언급하면서, 의성부인은 헌 강왕 때에 박경휘와 혼인하였고, 계아부인은 진성여왕 때 즉 897년 이전에 김효종과 혼인하였다라고 한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저서에서는 인용 표 시가 없으나, 저자의 다른 논문23)에 의하면 이는 김창겸의 견해24)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경문왕이 860년에 혼인하였고, 그 아들 헌강왕이 875년 10 대 초반으로 즉위하여 재위 12년 7월에 대략 20대 중후반의 나이로 사망했 다고 한다면,25) 그 딸인 의성부인이 헌강왕 생전에 박경휘와 혼인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이다. 사료 비판에 있어서도 약간의 논쟁이 있다. 기존의 연구26)를 인용하여 김주원을 무열왕의 아들인 문왕의 후손으로 보아 문왕 - 대장 - 사인 - 유정 - 주원으로 이어지는 世系로 파악하였는데, 조선시대 족보를 이용한 논지 전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ꡔ강릉김씨세보ꡕ는 20세기에 들어와 새로 이 편찬된 것으로, 그 내용은 후대에 부회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7) 저자는 1814년(조선 순조 14년)에 건립된 신라경순왕전비 의 내용을, 23) 선석열, 신라 하대 효공왕의 헌강왕 서자설 재검토 ꡔ석당논총ꡕ 62, 2015, 156쪽. 24) 김창겸, 앞의 책, 2003, 79~80쪽 주 124). 25) 이에 대해서는 권영오, 신라하대 인물들의 정치 활동과 연령 ꡔ지역과 역사ꡕ 31, 2012, 146쪽 참고. 26) 김정숙, 김주원가계의 성립과 그 변천 ꡔ백산학보ꡕ 28, 1984. 27) 전덕재, 서평 : 김창겸 저 ꡔ신라하대 왕위계승연구ꡕ ꡔ한국사연구ꡕ 123, 2003, 391~392쪽.
신라 왕위계승원리에 대한 서말의 자료를 꿰어낸 저서 401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후대의 과장된 표현이 없는 점에서 볼 때 사료적 가치는 높은 편으로 보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경순왕을 문성왕의 아들인 김안의 4세손이라 하거나,28) 문성왕의 아들 김안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이유를 문성왕의 첫 왕비 박씨의 소생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서평자는 신라경순왕전비 의 世系는 그대로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보고 있다.29) 당시 신라가 대외관계(특히 중국과의 외교)상 혈족결혼의 사실을 감추기 위해 假姓을 써거나30) 책봉용 改姓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31) 중 국에서의 책봉문을 근거로 문성왕의 왕비를 박씨로 보는 것도 논란의 여지 가 있다. Ⅲ. 후속 연구를 기대하며 저자는 이미 신라 상고의 왕실계보 기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들 을 발표하였다. 특히 수정론에 입각한 ꡔ삼국사기ꡕ 상고시기 기년 연구 성과 는 이 책의 곳곳에 녹아들어 저자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저서를 통해 우리는 ꡔ삼국사기ꡕ 초기 기록에 대한 재검토가 더 절실히 요구된 반면, 신 라 상고 왕실계보의 합리적 해석에 좀 더 다가서게 되었다. 저서는 이렇게 뚜렷한 문제의식으로 상고시기 뿐 아니라 신라 전 시기의 왕위계승 문제에 대해 검토하고, 왕위계승 원리를 새롭게 조명하려 하였다. 28) 신라 경순왕전비 의 사료적 가치를 일정 부분 인정하는 연구자도 김안이 문성 왕의 아들이라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이기동, ꡔ신라 골품제사 회와 화랑도ꡕ, 일조각, 1984, 169쪽). 김안을 문성왕의 또 다른 아들로 인정하 는 견해(김창겸, 신라하대의 왕위계승과 유조 ꡔ백산학보ꡕ 56, 2000, 201쪽) 와 이를 부정하는 견해(권영오, 앞의 책, 2011, 193쪽. 최의광, 앞의 논문, 2014, 57쪽)가 있다. 29) 신라경순왕전비 의 사료 비판에 대해서는 권영오, 앞의 논문, 2012, 143쪽 참고. 30) 이병도 역주, ꡔ삼국사기ꡕ 상, 을유문화사, 1983, 216쪽. 31) 문경현, 신라 박씨의 골품에 대하여 ꡔ역사교육논집ꡕ 13ㆍ14합, 1990, 229쪽.
402 지역과역사 39 호 천년왕국신라의역사에서왕위계승의원리는그시대의정치사회적성격을규정할만큼의중요한정치이념이었다. 기존의단편적인신라왕위계승연구성과들이있었지만, 이러한성과들을정리, 종합하여신라전시기를아우르는원리를밝히거나체계를세우려는작업은학계의오랜연구과제로남아있었다. 시간적으로천년에걸친사료검토가있어야하고, 또한초기사료의혼란과착종을보정해야하는어려움이연구를가로막는주요원인이되었다. 그리고시조혁서세거서간부터 56대경순왕까지천년왕국신라의왕위계승원리를찾아내는거시적인안목과기존의서말같은연구성과를꿰어내는집요한노력이요구되어, 누구라도선뜻뛰어들지못하는과제였었다. 저서에서저자는기존연구를비판적으로재검토하고사료의누락된점을보완하였으며, 새롭게발견된금석문과파른본 ꡔ삼국유사ꡕ 등의자료를활용하여기존의연구보다진전된이해로나아갔다고평가할수있다. 저자의지적처럼왕위계승원리가신라의전시기를통해준수되어있었는가는매우중요한사실이며, 신라정치사연구의기본과제라할수있다. 때문에적지않은신라왕위계승사례에대한논의가이루어진상황에서신라전시기의왕위계승원리에대한연구서는이미오래전에나왔어야했었다. 그런의미에서이번저자의저서는기존연구성과들의한계점을검토하고새로운연구방향을제시하는적절하고의미있는시도였으며, 신라왕위계승원리연구의거시적이해에디딤돌을놓았다고할수있다. 이한권의책으로천년왕국신라의왕위계승원리가충분히밝혀졌다고볼수는없으며, 적극적인논쟁이진행되어야할연구과제와연구방법론적문제에대한고민도남아있다. 그러나늦었지만중요한신라왕위계승원리에대한연구에저서가새로운전환점이될것임은틀림없을것이다. 저자의심화된후속연구성과를기대하며, 후학들의분발도촉구한다.
ꡔ지역과 역사ꡕ 39, 2016.10, 403~410쪽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農旗 403 http://dx.doi.org/10.19120/cy.2016.10.39.403 자료소개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農旗 32)윤 정 은* 농기는 농촌에서 한 마을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기를 일컫는 말로, 지역에 따라 농상기ㆍ덕석기ㆍ大旗ㆍ龍당기ㆍ龍旗ㆍ서낭기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농기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 있는 글귀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근래 에는 주로 폭이 좁고 긴 농기에 農者天下之大本 이라는 글귀를 많이 쓰고 있으나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반화된 형태이며, 오래된 형태의 농기 에는 神農遺業 이나 龍 이라고 쓰거나 神農氏나 용 등을 그렸다. 신농씨는 농업의 신이며, 용은 水神ㆍ龍神의 상징으로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관장하 는 존재로서 항상 농사와 결부되었다. 이러한 상징을 지닌 농기는 농촌에서 農神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모든 두레행사의 앞에 농기가 세워졌고, 두레 농사를 지으러 가기 전 농 기 앞에서 풍물을 울려 두레 고사를 올렸다. 두레를 시작하거나 참이 들어 올 때에도 농기에 우선 막걸리를 한 잔 부어 올렸으며, 항상 논둑에 농기를 꽂아두고 논농사를 지었다. 작업이 끝난 후에는 기를 앞세우고 농악을 치면 서 돌아왔다. 모든 행사가 농기를 중심으로 집결되고 마무리될 만큼 농기는 마을과 농민들의 자긍심이자 마을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농기는 장대목(깃대), 꿩장목, 기폭, 그 외 기방울과 기수염, 기 * 국립해양박물관 학예연구실 유물관리팀(jey227@knmm.or.kr).
404 지역과 역사 39호 끈, 기망 등으로 구성된다. 장대목은 기폭을 묶는 지지대로 주로 대나무로 만든다. 보통 길이가 7~8m에 달하며, 보관할 때는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의 처마에 매달아 놓는다. 장대목의 꼭대기에는 꿩장목을 다는데 꿩의 꽁지깃 을 모아 묶어서 만든 것으로 장목 또는 꿩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장목은 길 이 60~80 정도로 꿩 깃털 25~30개로 밑부분을 묶어 만들며, 지역에 따 라 싸리나무나 갈대로 대신하기도 하였다. 꿩장목은 장대목으로 쓰이는 대 나무에 여러 겹으로 칼집을 내어 갈라 고정시키고, 그 아래에는 기수염과 기방울 등을 매달기도 하였다. 기수염은 칡이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사용하 여 실처럼 늘어뜨려 펄럭이는 모양새를 좋게 하였고, 기방울은 흔들릴 때 소리가 나게 하였다. 장대목에는 기를 땅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기끈(버레 줄)이라는 끈을 세 방향으로 묶어 이동시에나 기를 고정시킬 때 활용하였 다. 기폭은 기의 연력을 나타내는 年條, 가장자리를 감고 있는 지네발, 끝단 을 길게 늘어뜨린 용꼬리로 구분된다. 기폭은 무명으로 만들며 천이 낡으면 다시 제작하였다. 기폭의 연조는 기의 제작 내력과 역사를 나타내며 호적과 같은 역할을 하 였다. 기의 최초 제작 시기나 새로 제작한 시기, 제작자, 두레 구성원, 마을 이름 등을 기록하였으며 기폭이 상하더라도 연조는 그대로 남겨둔 채 기폭 만 새로 덧대어 기의 나이를 이어간다. 연조에 쓰여있는 座上(두레의 총책 임자)이 살아있는 동안에 기를 다시 제작할 경우 기존의 연조를 오려서 새 로 제작한 기폭에 붙여 연륜을 이어가도록 하며, 좌상이 작고했을 경우에는 제작 시점의 좌상 이름을 명시해 연조를 다시 쓰기도 하였다. 기폭 둘레에는 천을 세모난 모양으로 잘라 만든 지네발을 달아 너풀거리 도록 하는데, 보통 흑색, 적색, 황색, 청색 등 기폭과 다른 색을 사용한다. 기폭 끝에는 보통 50~60 내외, 대형일 경우는 1m가 넘는 용꼬리 천을 길게 덧대기도 하였다.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한 농기는 현재 기폭만 남아있다. 기폭은 가로 3.7m, 세로 2.5m로 가로로 긴 형식을 가지고 있다. 기폭은 약 35 폭의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農旗 405 천 7장을 손바느질로 꿰매어 연결한 것으로 재질은 무명으로 추정된다. 이 렇게 연결한 기폭의 둘레에는 청색(추정)으로 염색한 천을 연결하였으며, 하단 일부분에는 길이가 약 25 의 지네발이 남아있다. 기폭을 살펴보면 좌측에는 기의 연력을 나타내는 年條가 묵서로 적혀있 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韓光武九年乙巳正月十五日造成 避暗里 施主邑內晉宣殿必琪 座上崔 奉學 公員金漢洙 畵工池士凡 대한 광무 9년 을사 정월 15일 조성, 피암리, 시주 읍내 진선전 필기 좌상 최봉학, 공원 김한수, 화공 지사범 이를 통하여 이 농기는 광무 9년(1905년) 정월 15일에 제작되어, 전라북 도 임실군 신평면 피암리에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피암리는 청웅면의 청주 한씨들이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온 곳이라 하여 피할 避와 어두울 暗 를 써서 避暗마을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지명을 바꾼 이후로 皮岩 으로 쓰여지고 있다. 시주는 읍내에 있는 진선전에서 하였으며,1) 두레의 총책임자이자 마을 전체의 우두머리인 座上은 최봉학, 좌상을 도와서 지시사항을 두레꾼들에 게 전달하고 두레 공동체 조직을 관리하는 公員은 김한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농기의 그림은 지사범이 그렸다. 연조 옆에는 앞, 뒷면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뒷면은 앞면의 그림이 비친 것을 따라 그렸다. 앞면에는 용과 잉어, 거북이가 그려져 있으며 그 주 변에는 구름이 있다. 그림을 살펴보면 활발한 필치로 그려진 용은 발톱이 5 개인 五爪龍으로 머리 앞쪽에는 기운이 뻗어져 나오는 붉은 如意珠를 가지 고 있다. 용의 비늘은 묵선으로 그린 후 붉은 선과 파란 선으로 섬세하게 채 색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용의 발아래 쪽에는 물에서 살며 장수를 상징하 는 잉어와 거북이 그려져 있다.2) 1) 施主邑內晉宣殿必琪 는 읍내 진선전에서 시주하였다고 해석하였으나 이는 정확 하지 않으며 향후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406 지역과 역사 39호 농기에 그려진 용, 잉어, 거북은 모두 물과 관련된 상징물이며, 특히 용은 민간신앙에서 비를 가져오는 雨師이자 물을 관장하는 水神으로 잘 알려져 있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온 옛사람들에게 비는 한 해의 풍흉을 결정짓는 중요한 열쇠이므로, 비를 내려주는 용과 잉어, 거북 등을 농기에 그려 한 해 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함께 기원했을 것이다.3) 마을마다 있었던 농기는 두레가 소멸되면서 함께 사라져 현재 전국적으 로 약 20~30여 점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적은 수의 농 기가 남은 이유는 공동체의 물건으로 소유 주체가 불분명하여 관리가 잘 이 루어지지 않았으며, 농기의 크기가 커 관리가 어렵고 재질이 무명천으로 손 상을 쉽게 입었기 때문이다.4) 농기는 과거 공동체 조직인 두레의 상징으로, 대대로 농업을 생업으로 삼 아왔던 우리에게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두레에 대한 연구와 함께 남 아있는 농기에 대한 인문학적ㆍ과학적 조사연구를 통하여 남아있는 농기에 대한 많은 정보가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2) 주강현, 박물관, 3) 김광언, 4) 주강현, 농민의 상징인 두레의 농기 ꡔ농민의 자부심 농기ꡕ, 농협 중앙회 농업 2009, 63~64쪽. 농기, 위의 책, 73~75쪽. 위의 책, 65쪽.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農旗 407 농기, 광목에 채색(372.5 258.5 )
408 지역과 역사 39호 부분 용 부분 발톱(오조룡)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農旗 409 부분 거북 부분 잉어
410 지역과 역사 39호 大 韓 光 避 武 暗 九 里 年 乙 巳 正 月 十 五 日 造 成 施 主 邑 內 晉 宣 殿 必 琪 公 員 金 漢 洙 畫 工 池 士 凡 座 上 崔 奉 學
휘보 411 휘보 (2016 년 4 월 30 일 ~2016 년 10 월 31 일 ) Ⅰ. 연구소인적현황 1. 임원구성 (2016 년 10월 31일현재 ) 소장 : 이정수 ( 동서대교수 ) 연구실장 : 김현라 ( 울산대강사 ) 기획실장 : 하유식 ( 부산대강사 ) 사무국장 : 김량훈 ( 부산대강사 ) 출판국장 : 김경미 ( 부산대강사 ) 감사 : 남재우 ( 창원대교수 ) 최연주 ( 동의대교수 ) 2. 연구원 (119 명, 2016 년 10 월 31 일현재 ) Ⅱ. 연구소주요활동 1. 심포지엄 주제 : 고려시대경계의사회사 일시 : 2016년 7월 8일 ( 금 ) 14:00~17:30 장소 : 부산대학교인덕관대회의실 주최 : ( 사 ) 부경역사연구소, 부산대학교한국민족문화연구소
412 지역과역사 39 호 - 일정 - 등록 : 14:00~14:20 제 1 부 : 개회식 (14:20~14:30) 사회 : 김현라 ( 부경역사연구소연구실장 ) 개회사 : 이정수 ( 부경역사연구소소장 ) 제2 부 : 주제발표사회 : 이종봉 ( 부산대 ) 14:30~15:10 몽골의분리정책과동녕부의구조형성발표 : 강재구 ( 가톨릭대 ) 토론 : 정용범 ( 부산교대 ) 15:10~15:50 고려주재다루가치의치폐경위와존재양태발표 : 고명수 ( 고려대 ) 토론 : 이정희 ( 부경대 ) 15:50~16:10 중간휴식 16:10~16:50 고려말동북면경계의공간분절과다층적권력발표 : 정은정 ( 부산대 ) 토론 : 신은제 ( 동아대 ) 16:50~17:30 여말선초왜구피로인의쇄환과그성격발표 : 정영현 ( 부경역사연구소 ) 토론 : 김현라 ( 울산대 ) 2. 연구발표회 * 제92회월례연구발표회개최 (2016년 5월 27일, 부경역사연구소 ) 고대사연구부 : 가락국기 의편찬과그배경 ( 발표 : 유우창 / 동서대, 토론 : 이연심 / 부산시사편찬위원회 )
휘보 413 중세 1 연구부 : 傳仇衡王陵 연구 (발표: 주영민/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토론: 정용범/부산교대) 제93회 월례연구발표회 개최(2016년 9월 23일, 부경역사연구소) 중세 2 연구부 : 18~19세기 신분 변화 양상에 대한 재이해: 호적대장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발표: 장경준/부산박물관, 토론: 이정수/동서대) 근현대 연구부 : 수기로 본 강우건의 독립운동 (발표: 성강현/동천고, 토론: 정계향/울산대)
414 지역과역사 39 호 부경역사연구소편집위원회규정 제1조 ( 목적 ) 이규정은부경역사연구소편집위원회의조직과운영에관한제반사항을결정하는데그목적이있다. 제2조 ( 구성 ) 편집위원회의구성목적과조직은다음과같다. 1) 편집위원회는학회지의심사및편집업무를담당하기위해구성된다. 2) 편집위원회는 10명내외로한다. 3) 편집위원에는편집위원장을둔다. 4) 각편집위원의임기는 2년이며연임할수있다. 5) 편집위원장 : 편집위원회에서호선하여소장이위촉한다. 편집위원회의회의를주재한다. 학회지의편집과간행에관련된제반사항을총괄한다. 6) 편집위원 : 본연구소의각분과에서학문적역량이뛰어나다고인정하여추천한이를연구위원회의심의를거쳐소장이위촉하되, 박사학위를소지하고대학의전임교원이거나이와동등한자격을갖추어야한다. 제3조 ( 활동 ) 편집위원회의심의 의결사항은다음과같다. 1) 본연구소에서간행하는 ꡔ지역과역사ꡕ( 이하 학회지 라약칭 ) 의편집 2) 학회지에게재할논문의기획과심사 1 투고문에대한 1차심사 2 투고문에대한 2차심사를맡을심사위원의위촉 3 2차심사를거친투고문의게재여부확정 3) 학회지에게재할연구동향, 자료소개, 지역인물소개, 서평등의기획과심사 4) 기타필요한사업
휘보 415 제4조 ( 회의 ) 편집위원회의회의절차와방식은다음과같다. 1) 연 4회정기적으로개최함을원칙으로한다 ( 필요시수시로개최가가능하다 ). 2) 개회선언, 위원장인사, 전회회의록낭독, 업무보고 ( 논문신청상황, 편집기획및기타연구회활동상황 ), 토의사항, 폐회선언순으로회의를진행한다. 3) 편집위원회의회의록을작성하여보관한다. 제5조 ( 의결 ) 편집위원회는편집위원이과반수이상참석할시성립하고, 참석인원의과반수이상으로의결한다. 유, 무선통신수단을이용한회의도같은효력을발휘한다. 제 6 조 ( 기타 ) 본규정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관례에따른다. 제7조 ( 부칙 ) 이규정은 2016년 4월 1일부터시행된다. 제정 : 1995년 7월 1일제1차개정 : 1999년 2월 15일제2차개정 : 2002년 4월 1일제3차개정 : 2002년 12월 1일제4차개정 : 2005년 12월 1일제5차개정 : 2006년 1월 1일제6차개정 : 2011년 4월 1일제7차개정 : 2012년 4월 1일제8차개정 : 2016년 4월 1일
416 지역과역사 39 호 ꡔ 지역과역사 ꡕ 간행및심사규정 제1조 ( 목적 ) 이규정은부경역사연구소에서발간하는 ꡔ지역과역사ꡕ( 이하 학회지 라약칭 ) 의간행및심사에관한제반사항을결정하는데그목적이있다. 제2조 ( 간기및매수 ) 1) 학회지는매년 4월 30일과 10월 31일총 2회발간한다. 2) 학회지는매호 300쪽내외의분량으로간행한다. 단, 특집호는예외로한다. 제3조 ( 투고 ) 1) 연구소의연구원및회원은학회지에논문을투고할수있다. 2) 논문을게재하고자하는자는투고문 ( 지면 e-mail) 을간행 2개월전에편집위원회에제출해야한다. 3) 투고문은학회지의 원고작성원칙 을따라야한다. 4) 다음과같은글을학회지에투고할수있다. 1 연구논문 2 비평논문, 논단, 연구동향및학술정보, 지역인물소개 3 서평 4 기타학술및학회활동에관한글 5) 논문을게재하고자하는자에게일정한심사료와게재료를요구할수있다. 6) 논문의매수초과시추가조판료를요구할수있으며, 논문의분량은 200자원고지 180매로제한한다. 다만심사위원이초과게재가필요하다고인정할때는예외로한다.
휘보 417 제4조 ( 심사목적과방법 ) 1) 학회지의적정수준을유지하기위해투고문은두차례의심사를거친다. 단, 비평논문, 논단, 연구동향및학술정보, 지역인물소개, 서평, 기타학술및학회활동에관한글은예외일수있다. 2) 투고문에대한 1차심사는편집위원회에서담당한다. 3) 1차심사를거친논문은별도로위촉된심사위원에의해 2차심사를받는다. 4) 편집위원회는 2차심사결과를받고편집회의를열어재심사와게재여부를결정한다. 5) 편집위원회는재심사대상으로판정된논문을투고자에게보내수정하게하고, 수정된논문을다시심사위원에게보내재심사를받도록한다. 단, 동일논문의재심사는 1회에한한다. 6) 학회지에게재하는논문은심사에서통과된투고문에한정한다. 7) 논문의심사과정에관한구체적상황은대외비로한다. 제5조 ( 심사위원 ) 1) 투고문의 2차심사를위해심사위원을위촉한다. 2) 심사위원은해당분야의전문연구자로편집위원회에서위촉한다. 단, 필요한경우편집위원도심사위원이될수있다. 3) 심사위원은 3인으로한다. 4) 심사위원은투고문의내용및수준에대해심사서양식에따라심사하고, 심사결과를지정된기간이내에편집위원회에제출해야한다. 5) 심사위원은편집위원회의요청에따라재심할수있다. 6) 심사위원의위촉은대외비로한다. 제6조 ( 심사기준 ) 1) 편집위원회는다음의항목에대해심사한다. 1 논문의분량및투고규정적합성여부
418 지역과역사 39 호 2) 심사위원은다음의항목에대해심사한다. 1 논문제목의적절성 2 논문의형식및체제의적절성 3 논지의일관성및명료성 4 논문의학술적가치및독창성 5 표현과용어및개념의정확성 6 인용자료및참고문헌활용의적절성 3) 심사위원은수정없이게재 (A), 수정후게재 (B), 수정후재심사 (C), 게재불가 (D) 의 4등급으로심사결과를판정한다. 게재불가로판정한경우에는별도로그사유를명시한다. 제7조 ( 논문게재판정 ) 편집위원회는심사위원의심사결과를종합하여다음과같이논문의게재여부를판정 처리한다. 심사위원 1 심사위원 2 심사위원 3 최종판정 1 A A A 게재 2 A A B 게재 3 A A C 수정후게재 4 A B B 수정후게재 5 B B B 수정후게재 6 A A D 수정후게재 7 A B D 수정후재심사 8 A B C 수정후게재 9 A C C 수정후재심사 10 B B C 수정후재심사 11 B C C 수정후재심사 12 A C D 수정후재심사 13 A D D 게재불가 14 B B D 수정후재심사 15 B C D 게재불가 16 B D D 게재불가 17 C C C 게재불가 18 C C D 게재불가
휘보 419 19 C D D 게재불가 20 D D D 게재불가 * 수정후재심사의경우, C 판정의경우는기존의심사위원에게수정후재심사를받고, D 판정을받은건은심사위원을교체하여재심사한다. ** 재심의결과가심사위원한명이라도 C 판정을내리는경우는 게재불가 로처리한다. 제8조 ( 심사결과통보 ) 1) 논문의심사결과는투고자를제외하고외부에공개하지않는다. 2) 편집위원회는논문투고자에게심사결과를통보한다. 3) 게재가결정된논문투고자는편집위원회의수정또는보완요구를존중해야한다. 제9조 ( 이의신청과처리방법 ) 1) 학회지에논문을투고한자는심사와논문게재여부에관해이의를신청할수있다. 2) 본연구소의이의신청서양식에따라신청서를작성하여편집위원회에보내야한다. 3) 심사결과가통보된날로부터 2주일이내에이의를신청해야한다. 제10조 ( 저작권 ) 학회지에게재된모든글은부경역사연구소에그저작권이있다. 제 11 조 ( 기타 ) 본규정에명시되지않은사항은관례에따른다. 제 12 조 ( 부칙 ) 이규정은 2016 년 4 월 1 일부터시행된다. 제정 : 1997년 3월 21일제1차개정 : 1999년 2월 15일
420 지역과역사 39 호 제2차개정 : 2002년 4월 1일제3차개정 : 2003년 6월 1일제4차개정 : 2005년 12월 1일제5차개정 : 2006년 1월 1일제6차개정 : 2011년 4월 1일제7차개정 : 2012년 4월 1일제8차개정 : 2016년 4월 1일
휘보 421 부경역사연구소연구윤리규정 제1조 ( 목적 ) 본규정은부경역사연구소의 ꡔ지역과역사 ꡕ에게재한연구성과의연구부정행위에대한취급규정을정하는데목적이있다. 제2조 ( 정의 ) 연구부정행위란 ꡔ지역과역사ꡕ 에게재된연구성과가위조, 변조, 표절, 중복게재, 부당한논문저자표시등에해당되는경우를말한다. 1. 위조및변조는연구자료를근거없이저자의임의대로작성하는경우 2. 표절은다른사람의연구성과를적절한출처를명시하지않고사용하는경우 3. 중복게재는자신의기존연구성과를그대로게재하는경우 4. 부당한논문저자표시는연구성과에공헌한사람에게정단한이유없이논문저자자격을부여하지않거나, 반대로연구성과에전혀기여하지않은사람에게예우등을이유로논문저자자격을부여하는행위 5. 기타역사학계에서통용되는범위를벗어난행위 제3조 ( 접수 ) ꡔ지역과역사ꡕ 발간후연구부정행위로판단되는연구성과에대한제보는본연구소와편집위원회로할수있다. 제보된안건은편집위원회가접수한다. 제4조 ( 제보자보호 ) 1. 제보자란부정행위를확인한사실또는관련증거를본연구소에알린자를말한다. 2. 제보자는다양한방법으로제보가가능하며, 실명제보를원칙으로한다. 만약부득이한이유로익명제보를한경우편집위원회에서사실여부를확인하여처리방침을결정한다. 3. 제보자의신원은절대공개하지않으며, 만약편집위원회가이를위반
422 지역과역사 39 호 하였을때는제보자가입은무상 유상의피해를보상해야한다. 4. 제보내용이허위이거나사전에허위임을알면서제보한경우제보자를보호할책임은없다. 제5조 ( 판정절차 ) 1. 편집위원회는접수된안건에대해해당분야전공자 3인이상의심사위원을선정하여조사위원회를구성한다. 2. 조사위원회는제보내용에따라연구부정행위의종류및내용을구체적으로밝혀야한다. 3. 조사위원회는부정행위의내용을해당연구자에게보내, 사실여부를확인한다. 4. 조사위원회는검토결과를 60일이내편집위원회로회송하여야한다. 5. 조사위원회의결정내용을토대로편집위원회는부정행위에대한최종심의를하여공개여부와공개수준을결정한다. 제6조 ( 담당조직및책임자 ) 연구부정행위에대한조사총괄은편집위원회가선정하는조사위원회가담당하고, 그내부에서책임자를선정한다. 제7조 ( 부정행위자에대한질의 ) 1. 조사위원회는심의결과연구부정행위가있다고결정한경우, 이내용을해당연구자에게질의서를보낸다. 2. 해당연구자는질의서를수령한후 15일이내에조사위원회에답변서를제출해야한다. 그렇지못할경우질의서내용을모두인정하는것으로판단한다. 제8조 ( 부정행위자징계 ) 1. 편집위원회는이와관련한내용을회의록은물론연구소홈페이지, 다음호 ꡔ지역과역사ꡕ 에공개한다.
휘보 423 2. 편집위원회는부정행위자가투고한웹상의논문을삭제한다. 3. 해당부정행위자는향후 10년간 ꡔ지역과역사ꡕ 에투고할수없도록한다. 제 9 조 ( 시행 ) 이규정 ( 지침 ) 은발령한날로부터시행한다. 제 10 조 ( 기타 ) 본규정이외의사항에대해서는일반적인관례에따른다. 제정 : 2007 년 3 월 20 일
424 지역과역사 39 호 ꡔ 지역과역사 ꡕ 원고작성원칙 부경역사연구소에서간행하는 ꡔ지역과역사ꡕ 에논문을게재하고자할때는다음의원고작성원칙을지켜주시기바랍니다. 1. 논문의분량은본문, 목차, 그림, 도표, 국문초록, 국문주제어, 영문초록, 영문주제어, 참고문헌을포함하여 200 자원고지 150 매를원칙으로한다. 원고매수가 200 자원고지 200 매를넘을경우, 원고지 5매당 5,000 원을저자가부담한다. 2. 논문의체제는, 논문제목- 필자명 ( 각주 : 소속 (e-mail 주소 ))-차례 -국문초록- 국문주제어-본문-참고문헌- 영문초록- 영문주제어로한다. 3. 논문은아래와같은방식으로작성한다. 1) 논문은한국어로작성함을원칙으로한다. 한자와한글이동음일경우한자와한글을병기하지않는다. 2) 공동집필의경우에는제1저자와공동저자, 교신저자등의구분을명확히한다. 3) 논문의구성은제목, 목차, 본문순으로하고, 장과절및항의배열은 Ⅰ 1 1) (1) 1 ᄀ a 순서로한다. 단목차에는장과절만표시한다. 4) 머리말과맺음말에는기호를붙이지않는다. 5) 논문에는국문과영문초록을첨부한다. 초록의분량은 200 자원고지 3~4 매이내로제한하며, 국문과영문주제어는각 5단어로한다. 6) 제목, 본문, 인용문, 각주의형식은 글문서프로그램의기본형식에따라다음과같이규정한다. (1) 글꼴은신명조, 1줄 70칸, 줄간격 180% 를기본으로한다. 단인용문과주석은줄간격 150% 이다.
휘보 425 (2) 글자크기와문단정렬방식 1 본문 : 글자크기 10, 들여쓰기 2 2 인용문 : 글자크기 9, 왼쪽 2, 들여쓰기 2 3 각주 : 글자크기 9, 내어쓰기 (shift tap 사용 ) 4 < 표 1> < 그림 1> 제목 : 글자크기 10, 중간정렬 8) 각주의처리는다음과같은예시의형식으로통일한다. (1) 논문명과저서명의기호는모두겹낫표를사용하고, 각주맨끝에는마침표를찍는다. (2) 논저인용 1 저서 : 번호 ) 저자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 서양서의경우 : 저자명, 저서명, 출판지역 :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논문 : 번호 ) 저자명, 논문명 ꡔ학술지명ꡕ 권 호, 발행연도, 0~00 쪽. 번호 ) 저자명, 논문명, 편자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 서양서의경우 : 저자명, 논문명, 학술지명, 출판지역 : 출판사, 출판년도, 0~00 쪽.) 학위논문 : 저자명, 논문명, 수여기관학위구분, 학위수여년도, 0~00쪽. 2 동일저자의책이나논문이등이두번이상인용될때바로위에서인용된것인경우번호 ) 저자명, 위의책 ( 위의논문, 위의박사학위논문 ( 서양서의경우 : Ibid.)), 0~00쪽. 바로위에서인용된것이아닌경우번호 ) 저자명, 앞의책 ( 앞의논문, 앞의박사학위논문 ( 서양서의경우 : Op. cit.)), 출판년도, 0~00쪽. 3 번호 ) 주 00) 참조.
④ 주석을 붙일 때 번호) 저자명, 논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0 00쪽. 주석내용. ⑤ 인용논고가 여러 편일 때(동일 저자는 ;로 연결) 번호) 저자명, 논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 논 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명, 논문명 ꡔ저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⑥ 번역서일 경우 번호) 저자명, 역자명, ꡔ서명ꡕ, 출판사, 출판년도. (3) 사료 인용 : 원문 혹은 국역문을 그대로 인용할 때는 를 사용 한다. 원문내용 에는 띄어쓰기만 하고 다른 부호는 사용하지 않는다. ① 번호) ꡔ三國史記ꡕ 권4, 新羅本紀 4, 法興王 11년 9월조. ② 번호) ꡔ高麗史ꡕ 권1, 太祖 5년 11월조.(혹은 11월 辛巳.) 번호) ꡔ高麗史ꡕ 권111, 列傳 24, 洪彦博傳. ③ 번호) ꡔ太祖實錄ꡕ 권1, 원년 8월 庚戌. 原文 번호) ꡔ太祖實錄ꡕ 권13, 7년 3월 辛亥. 국역 번호) ꡔ太祖實錄ꡕ 권13, 7년 3월 辛亥. 국역(原文) ④ 번호) ꡔ日本書紀ꡕ 권17, 繼體天皇 23년 3월조. ⑤ 번호) ꡔ釜山日報ꡕ 1925.11.5(면)단, 기사제목. 제정 : 1999년 2월 15일 제1차 개정 : 2002년 4월 1일 제2차 개정 : 2004년 9월 24일 제3차 개정 : 2006년 1월 1일 제4차 개정 : 2011년 3월 17일 제5차 개정 : 2016년 4월 1일
부경역사연구소 사단법인부경역사연구소는우리터전의역사를올바르게연구하고그성과를대중과함께함으로써우리역사와지역문화의발전에기여하고민족사에대한자긍심을높이는데튼튼한밑거름이되고자합니다. 연구소활동안내 사단법인부경역사연구소는 1994년출범이후 ꡔ시민을위한가야사ꡕ 와 ꡔ시민을위한부산의역사ꡕ, ꡔ한국사와한국인ꡕ( 전근대 근현대편 ), ꡔ10세기인물열전ꡕ 등대중교양서를발간하는한편그외에도다음과같은활동을하고있습니다. 1. 연구발표회 ( 연 4회 ) 2. 학술심포지엄 ( 연 1회 ) 3. 초청강연회 ( 연 2회 ) 4. 역사기행 ( 연 4회 ) 5. 공동연구와학습 6. 회지 ꡔ지역과역사ꡕ 발간 7. 기타 연구원회원가입안내 1. 연구원연구원은연구소의연구활동및사업에참여하는사람들로소정의절차를거쳐가입할수있습니다. 자격은한국사를전공하는대학원재학이상의전문연구자와중등학교교원이상입니다. 2. 특별회원 1) 후원회원 : 본연구소의사업에관심을가진분은누구나가입이가능하며, 그권리는연구소가발간하는각종자료의구독과행사에있어특별대우를받습니다. 연회비는 5 만원이상입니다. 2) 일반회원 : 본연구소의사업에관심을가진분이면누구나환영하며연회비는 2 만원입니다. 일반회원에게는연구소가발간하는자료의구독및각종행사의참여시우선권을드립니다. 주소 : (609-839) 부산광역시금정구장전 3동 293-29번지사단법인부경역사연구소전화 : (051) 514-6401 팩시밀리 : (051) 514-3963 homepage : http://www.pkh.co.kr *E-mail : pkh6401@hanmail.net 온라인번호 : 부산은행 059-01-025811-6 ( 사 ) 부경역사연구소농협 948-01-137865 ( 사 ) 부경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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