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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남북관계전문가 설문조사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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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정책백서목차(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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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용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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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기술인 7월 내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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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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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회보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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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과교습학원 ( 예능계열 ) 및평생직업교육학원의시설 설비및교구기준적정성연구 A Study on the Curriculum, Facilities, and Equipment Analysis in Private Academy and It's Developmental Ta

(012~031)223교과(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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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 통권 700 호 ) 아시아분업구조의변화와시사점 - 아세안, 생산기지로서의역할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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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협력국 대상 국가협력전략 ( 9 개국 ) ᆞ 5 ᆞ 30 관계부처 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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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기본현황 Ⅱ 년도성과평가및시사점 Ⅲ 년도비전및전략목표 Ⅳ. 전략목표별핵심과제 1. 군정성과확산을통한지역경쟁력강화 2. 지역교육환경개선및평생학습활성화 3. 건전재정및합리적예산운용 4. 청렴한공직문화및앞서가는법무행정구현 5. 참여소통을통한섬

소식지수정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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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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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자료 전국초 중 고성교육담당교사워크숍 일시 ( 목 ) 10:00~17:00 장소 : 한국교원대학교교원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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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 O N T E N T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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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목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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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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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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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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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년도사업계획적정성재검토보고서 차세대바이오그린 21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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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별인적자원개발위원회역할및기능강화를위한중장기발전방안연구 한국직업자격학회

한류 목차2_수정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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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인문사회연구회협동연구총서 2000-07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조 한 범 ( 통 일 연 구 원 ) 김 성 철 ( ) 김 규 륜 ( ) 김 형 석 ( 한민족복지재단 ) 통일연구원

머리말 장기간 지속되어온 분단구조는 남북한에 상이한 체제와 생활세계를 형성했다. 따라서 통일은 가시적인 제도적 통합과 아울러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바탕으로한 의식 및 행동체계가 확립되어야 달성되는 장기적 과정이다. 남북한간의 이질화의 극복은 단절과 고립의 해소로부터 시작 되는 것이며, 따라서 통일과정중의 교류 협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남북한 교류 협력과정에서 비정부기구 즉, NGO(Non Governmental Organizations) 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남북한 사회의 이질화 를 극복하고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민간 교류 협력의 활성 화가 필요하고, NGO 는 이를 실현하는 구심점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 이다. 특히 민간의 자율적 교류 협력구도 설정은 남북간의 상호적대감 을 해소하고 주민간의 동질성을 증대시켜 장기적으로 사회문화통합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의미를 지닌다. 최근 NGO 의 역할과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다. 이는 국가와 시장에 대한 새로운 감시세력으로서 NGO 의 역할이 요구 되고 있다는 시대적 특성에 기인한 현상이다. 80 년대 후반이후 한국사 회에서도 시민사회가 점차 성숙되어감에 따라 NGO 의 활동도 활성화되 고 있다. 동시에 통일문제에 대한민간의 참여도 확대되고 있으며, 교류 협력분야에서도 실질적 활동을 증대시키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활발 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NGO 는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한 현실 때문에 남북 교류 협력에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통 일관련 NGO 의 경우 정부와의 효율적 협력관계도 튼튼하지 못한 편이 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반이 매우 취약한상태이다. 민간 교류 협력의 확대를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렴하고 조 직화하는 NGO 의 주도적 역할이 필요하다. 민간분야의 남북 교류 협력 은 정부차원에서 제기되기 어려운 문제 내지는 정부간의 공식적 교섭 - 1 -

으로해소될수없는분야에있어서중요한역할을수행할수있다. 따라서남북화해 협력의구현과이질화의완화및민족공동체형성을위해서는교류 협력과이를위한 NGO 의역할이적극적으로활성화되어야할것이다. 이와같은인식을바탕으로본연구는최근변화하고있는남북관계에서 NGO 를통한남북한사회문화교류 협력증진방안을모색하고있다. 이연구에서제시된정책적제안들이통일관련 NGO 활동의활성화와남북교류 협력의확대에기여할수있기를기대하며, 연구의진행에도움을준분들에게감사의말씀을드린다. 2000 년 12 월 연구진일동 - 2 -

요 약

본보고서는 인문사회연구회 2000년협동연구사업 의일환으로연구회산하 9 개국책연구기관이협동으로수행한연구과제입니다. 본보고서에수록된내용은집필자의개인적인견해이며당연구원의공식적인의견을반영하는것이아님을밝힙니다.

분단이후남북한은 50 여년이상을상호이질적인체제에서존재해왔으며, 최근까지도냉전적대립을지속해왔다. 이와같은과정은필연적으로남북한간의이질화를심화시켜왔다. 이와같은이질화가단기간에해소되기어렵다는사실은독일의경험에서잘나타나고있다. 이질화의해소는긴장과갈등관계의완화라는전제하에남북간의교류 협력의장을넓혀가는과정에서가능할것이다. 지금까지한국문제를분석하는많은학자들은평화를다루는데있어서국가차원을주된관심영역으로삼아왔다. 그들은지속가능한평화를구축하는문제를안보딜레마를해결하는것과동일시하는경향이있었다. 따라서평화체제구축을국가차원의안보에국한하는결과를가져왔다. 그러나한반도문제에는국가, 민간기업, 비정부기구등다양한행위자가관여하고있고, 다양한이슈들이서로복합적으로연계되어있다. 예를들어, 탈북자이슈는탈북자의인권영역에국한되지않고국제법적으로난민지위문제와도중첩되어있을뿐만아니라, 북한 남한 중국등국가간외교관계뿐만아니라비정부기구, 민간기업등다양한행위자가관여하는복합적문제가되었다. 특히비정부기구는남한사회의민주화와함께양적으로팽창하였고, 그역할과기능이단순히국내적인이슈를다루는데그치지않고남북관계에서실질적인행위주체로부상하고있다. 비정부기구는국가차원의관계를단순히보완하는기능을수행하는것이아니며, 그렇다고국가와경쟁또는갈등하는관계를가진것도아니다. 비정부기구는때로는국가와경쟁또는마찰을일으키면서국가차원에서다루어질수없는영역에깊숙이개입해있다. 이러한현상은단지한국문제또는남북한관계에한정되어있지않으며, 이미지구적현상이되고있다고할수있다. 남북한간의상호교류 협력이심화되면될수록비국가차원의행위주체와이슈가더욱중요하게되며, 이들을통해서한반도의평화와안보가보다지속적인것으로발전할수있을것으로전망된다. 최근 NGO 의역할과영향력이증대되고있는것이세계적추세이다. 이는국가와시장에대한새로운감시세력으로서 NGO 의역할이요구 - 1 -

되고있다는시대적특성에기인한현상이다. 80 년대후반이후한국사회에서도시민사회가점차성숙되어감에따라 NGO 의활동도활성화되고있다. 동시에통일문제에대한민간의참여도확대되고있으며, 교류 협력분야에서도실질적활동을증대시키고있다. 통일문제및남북교류 협력에있어최근민간분야의역할이증대되고있으며, 시민사회의요구를조직화하고실천하는 NGO 의활동도활성화되고있다. 여기에는두가지주요한상황적변화요인이자리잡고있다. 첫째, 한국사회의발전에따라점차적으로시민사회의성숙및시민운동이활성화되고있다는것이며, 둘째, 국민의정부 출범후새로운대북정책이마련되었다는점이다. 현단계를화해 협력기로설정한만큼, 남북한의적대감을해소하고상호이해를증진시킬수있는남북교류 협력의활성화가필요하고이경우 NGO 가중요한역할을수행할수있다는것이다. 민간교류 협력의확대를위해서는시민사회의요구를수렴하고조직화하는 NGO 의주도적역할이필요하다. 민간분야의남북교류 협력은정부차원에서제기되기어려운문제내지는정부간의공식적교섭으로해소될수없는분야에있어서중요한역할을수행할수있다. 따라서남북화해 협력의구현과이질화의완화및민족공동체형성을위해서는교류 협력과이를위한 NGO 의역할이적극적으로활성화되어야할것이다. 이를위해서다양한제도적증진방안들이마련되어야할것이다. 우선통일문제및남북교류 협력에관여하는 NGO 의활동에있어서도정부와 NGO 간의협조체제가구축되어야할것이다. 정부는 NGO 의독립성과자율성을보장하는전제위에서사회문화교류의활성화에기여하는 NGO 활동을지원해야할것이다. 또한물질적기반마련도중요한과제이다. 정부는 NGO 의자율성을보장하는다양한형태의지원방안을강구해야할것이다. 현재까지남북협력기금은매우제한된분야에만국한되어집행되었다. 따라서사회문화교류 협력사업을수행하는 NGO 에대해서협력기금을지원함으로써협력사업을다양화, 활성 - 2 -

화시키는방안을강구해야할것이다. 또한민간차원의통일기금을조성하고이를보다유연하게활용하는방안이병행될필요가있다. NGO 의교류 협력활성화를위해서는보안법개정을비롯관련제도의개선이필요한것으로지적되고있다. 또한우편 통신료등각종공공요금의할인과세제혜택방안도모색되어야할것이다. 민간분야의교류 협력활성화및창구다원화는동시에교류 협력에대한과당경쟁과과열, 그리고이로인한부작용들을야기할수있다. 따라서 NGO 의자율적협의체를구성하여상호정보교환및공동협력사업의실시, 그리고교류 협력과정에서발생할수있는부작용을사전에예방할필요가있다. 또한대표성이있는협의체를통해서정부와보다효율적협조관계를유지할수도있을것이다. 민간협의체의구성은전체네트워크구성과분야별전문화를병행할필요가있다. 대부분의 NGO 는전문활동분야를가지고있으므로남북한사회문화교류 협력에있어서도각분야별해당 NGO 의전문성과노하우를바탕으로사업을진행하는것이필요하다. 또한남북관계의특수성에비추어볼때국제 NGO 와의연대는북한측으로부터의거부감을완화하고, 대북사업의성사가능성을높일것이다. 따라서남북교류 협력에서도각분야별국제 NGO 와의연대를강화하고, 협력관계를적극적으로이용해야할것이다. 경협확대과정과 NGO 활동의연계도고려될수있을것이다. 남한기업이대북사업을추진할경우 NGO 의활동과연계해서진출하는방안을모색할필요가있다. 첫째, 남한과북한간경제교류 협력추진의주된주체는기업이될것이지만, 북한경제가정상화될때까지는 NGO 가남한기업과북한측경협파트너간에매개역할을수행할필요가있을것이다. 특히북한의대남한과도의존에대한우려감이나사회주의경제체제의특성상초기에는 NGO 의정신에따라북한에대해서지원성경제협력이많이실현될것이다. 둘째, 대북진출남한기업들은대부분수도권에집중되어있는경향을보이고있으나, 지방의기업들도대북진출을원하는것으로나타나고있으므로, 남한내 NGO 는전국적네트워 - 3 -

크를 통해서 지방자치단체가 요청할 경우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북한은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이려 해도 실질적으로는 시장경제체제의 운용방식을 습득할 기회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남한 내 NGO 는 부문별로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대북한 경제 및 기 술 교육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추진되어야할 교류 협력은 민간의 자율성 확대라는 큰 축을 바 탕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외적 환경변화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며, 이는 단기적인 차원이 아 닌 남북한 이질화 해소와 장기적인 사회통합의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류 협력에 대한 민간분야 참여가 확대되어 야 하며, 특히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NGO 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요구된 다. NGO 를 통한 각 분야에서 민간교류 협력의 확대는 현재 남북관계 를 고려하더라도 현실적인 선택이며, 민간의 자율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남북한 사회통합과정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 이다. - 4 -

차 례 Ⅰ. 서론 1 Ⅱ. 이론적 접근 4 1. 지구화와 한국 4 2. 냉전체제하의 지구화 6 3. 기존이론 ( 레짐이론 ) 의 한계 8 가. 국가 중심적 설명 8 나. 이슈 중심적 설명 9 4. 연구영역의 확대 11 가. 새 개념의 도입 : 가버넌스, 권위의 영역 11 나. 한국문제의 권위의 영역 14 5. 비정부기구연구의 필요성 17 Ⅲ. 남북관계와교류 협력 19 1. 냉전기남북교류 협력 19 2. 7 7 선언이후의남북교류 협력 21 3. 대북포용정책과남북교류 협력 24 Ⅳ. 부문별 남북 사회문화 교류 협력의 전개 29 1. 남북한사회문화 교류 협력 29 가. 학술분야 30 나. 종교분야 35 다. 문화 예술분야 39 라. 언론 출판분야 42 마. 체육분야 44 바. 관광분야 46 - i -

2. 남북한경제교류 협력 48 가. 경제교류 50 (1) 전반적 추세 50 (2) 남북교역 수지 53 (3) 위탁가공교역 현황 54 (4) 북한의 대외무역과 남북교역 비교 분석 56 나. 경제협력 58 (1) 경제협력사업일반현황 58 ( 가 ) 주요조치 58 ( 나 ) 협력사업승인현황 60 (2) 현대추진 대북 경협사업 62 ( 가 ) 추진현황 62 ( 나 ) 성과 및 평가 66 Ⅴ. 남북 교류 협력의 평가 68 1. 사회문화분야 68 2. 경제분야 73 가. 노태우정부 : 대북정책 추종형경협 74 나. 김영삼정부 : 정경연계형경협 74 다. 김대중정부 : 대북정책 선도형경협 75 Ⅵ. 남북교류 협력과 NGO 79 1. N G O 의개념 79 2. 통일관련 N G O 84 3. N G O 의인도지원활동 88 4. 북측의 NGO 에대한인식 90 5. NGO 활동의평가와새로운역할 92 - ii -

Ⅶ. 북한의 사회단체 1 00 1. 북한사회단체의 의미 1 00 2. 북한의 대표적 사회단체 1 01 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1 01 (1) 형성및 변화과정 101 (2 ) 조직 1 04 (3 ) 활동 1 07 나. 조선민주여성동맹 1 09 (1 ) 결성및 조직 1 09 (2 ) 활동 1 12 다. 조선직업총동맹 1 12 (1 ) 형성및 조직 1 12 (2 ) 활동 1 17 라. 조선농업근로자동맹 1 21 (1 ) 형성및 조직 1 21 (2 ) 활동 1 25 Ⅷ. NGO를통한남북교류 협력증진방안 1 29 1. NGO 와정부의상호보완적관계설정 1 29 2. N G O 에대한재정지원 1 33 가. 남북협력기금지원과통일기금조성 1 33 나. NGO 에대한재정지원방식의다각화 1 36 3. 법제도개선및 NGO 에대한기타지원 1 39 4. NGO 협의체구성 1 41 5. 전문 N G O 와국제 N G O 활용 1 45 6. 남북경제교류 협력발전을위한 NGO 의역할 147 가. 기본방향 1 47 나. N GO 의역할 1 52 Ⅸ. 결론 1 57 참고문헌 1 59 - iii -

표차례 < 표 Ⅱ-1> 한국문제의다양한권위의영역 (SOA) 14 < 표 Ⅲ-2> 남북인적교류현황 : 주민접촉 ( 89.6.12 ~ 2000.11.30) 27 < 표 Ⅳ-3> 남북한주민접촉 ( 분야별. 89. 6.12 ~ 2000. 11.30) 30 < 표 Ⅳ-4> 남북한교역의발전추세 : 1989~1999 년 53 < 표 Ⅳ-5> 총교역대비위탁가공교역비중 56 < 표 Ⅳ-6> 북한의대외무역추이 57 < 표 Ⅳ-7> 남북경제협력사업승인현황 61 < 표 Ⅵ- 8 > 시민단체와민간단체의구분 84 < 표 Ⅵ-9> 국제사회의대북지원추이 89 < 표 Ⅵ- 1 0 > 2 0 0 0 년도주요 N GO 의대북지원실적 89 < 표 Ⅷ-11> 시민단체와정부와의관계에대한태도 131 - iv -

그림차례 [ 그림 Ⅶ- 1 ] 조선민주여성동맹조직 1 11 [ 그림 Ⅶ-2] 조선직업총동맹조직 1 15 [ 그림 Ⅶ-3] 조선농업근로자동맹조직 1 24 - v -

서론 1 Ⅰ. 서론 NGO 는새로운시민권력으로서그영향력이지구촌차원에서급속히확대되어가고있으며, NGO 서울세계대회에서나타났듯이통일문제에있어서도상당한관련을맺고있다. 최근 NGO 의역할과영향력이증대되고있는것이세계적추세이며, 이는국가와시장에대한새로운감시세력으로서 NGO 의역할이요구되고있다는시대적특성에기인한현상이다. 따라서통일및남북교류 협력에있어 NGO 의잠재력을적극적으로활용하는방안이모색될경우긍정적효과가기대된다. 80 년대후반이후한국사회의 NGO 활동이점차확대되어왔으며, 동시에통일문제및남북교류 협력에있어최근민간분야의역할이증대되고있다. 또한시민사회의요구를조직화하고실천하는 NGO 의활동도활성화되고있다. 특히남북관계를화해협력단계로정착시키려는국민의정부방침에따라교류 협력에있어 NGO 의참여는향후보다증가할것이다. NGO 를통한민간교류 협력의확대는현재남북관계를고려하더라도현실적인선택이며, 민간의자율성에기반하고있다는점에서향후남북한사회문화적통합과정의중요한밑거름이될것이다. 민간분야는비정치적특성과유연성을가지고있다는점에서정부차원의공식적교섭과경제교류가지니는한계를넘어남북한간의이질화극복과공동체형성에있어중요한역할을수행할수있다. 남북교류 협력에있어민간분야의중요성에도불구하고한국의 NGO 활동은 시민없는시민운동 의문제점을가지고있으며, NGO 의남북교류 협력에있어서도과당경쟁등의문제점들이이미나타나고있는바, 남북교류협력에대한 NGO 참여의의미를질적으로고양시키기위해서는새로운대책이필요할것이다. 이에주목본연구는 NGO 를통한남북교류 협력의활성화의필요성의증대에주목, 남북한교류 협력자료분석및평가와각분야

2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NGO 의실태및요구를수렴, 남북한교류 협력증진을위한 NGO 의참여확대방안을모색하고자한다. 한국사회의경우시민사회가선진국에비해발달하지못하였는바, 시민운동내지는비정부부문에대한학술적연구는축적되어있지못한실정이며, 최근에들어관련연구들이나타나고있으나, 대체로개괄적성격이큰실정이다. 최근의관련연구자료들을보면다음과같다. 한국민간단체총람 ( 시민의신문사, 1997) 은한국의비정부민간단체에대한개괄적소개이며 시민운동의활성화를위한민간단체육성방안연구 ( 정무제1장관실, 1997) 과 시민운동단체활성화방안에대한연구 ( 서울대, 1993) 는한국의비정부민간단체에대한정부의지원방안을모색하고있다. 또한 일본의 NGO 활동연구 ( 세종연구소, 19 9 8), 한국비정부단체의세계화전략연구 ( 국제정치학논집 1997), 세계화와한국 NGO 의발전방안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1997) 등은한국비정부민간단체의세계화전략과관련된연구들이라할수있다. 통일분야의경우민간의통일논의참여가제한되어온바, 전반적으로남북교류협력분야의민간분야참여연구는미약한실정으로, 개괄적소개연구가주종을이루고있다. 통일을준비하는한국의민간단체 ( 경실련통일협회 동아일보, 1994) 는한국의통일관련민간단체를개괄하고있으며, 국제기구및비정부기구의인도적지원사례 ( 민족통일연구원, 1997) 등은대북지원부문관련연구이다. 통일과정에서민간단체의역할 ( 민족통일연구원, 1 9 96. ), 민화협결성을통해본해방후민간통일운동과정부의통일정책.( 현대경제사회연구원, 1 9 98. ), 남북한사회문화적통합과시민단체의역할 ( 연세대 1998) 은통일정책관련민간분야의역할을주제로한연구들이다. -비정부민간분야의주활동영역이라고할수있는남북사회문화분야관련연구의경우 남북문화교류활성화방안연구 ( 민족통일연구원, 19 9 5), NGO 를통한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활성화방안연구 ( 민족통일연구원, 1 9 98 ), 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평가와발전방안 등의연구가있다. 본연구는남북한교류 협력에대한전반적검토와아울러 NGO 의

서론 3 역할을경험적차원에서분석하고전반적인남북교류 협력활성화방안과아울러분야별활성화방안을모색하고자한다. 남북교류 협력에있어민간분야의중요성에도불구하고한국의 NGO 활동은 시민없는시민운동 의문제점을가지고있으며, NGO 의남북교류 협력에있어서도과당경쟁등의문제점들이이미나타나고있는바, 남북교류협력에대한 NGO 참여의의미를질적으로고양시키기위해서는새로운대책을모색될것이다. 이를위해정부와의효율적협력관계설정, 재정지원및기타법제도개선, NGO 협의체구성및효율적활동방안모색등정부차원의지원과 NGO 의노력을결합하는다양한형태의증진방안이모색될것이다.

4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Ⅱ. 이론적접근 1. 지구화와한국 지난 20 세기는두가지점에서일류역사상기록할만한시기였다. 첫째로구소련과동유럽전체주의체제가붕괴함에따라반세기이상동안지속되어왔던자본주의와사회주의간의체제경쟁과갈등이종식되기에이르렀다. 이역사적사건은국가정체성과국가이익에있어서카다란내용변화를불러일으켰다. 그것은국제관계에있어서권력의우위로부터경쟁과협력을통한번영으로의변화이다. 이에따라새로운정치경제적기구들이형성되었는바, 유럽연합 (EU), 세계무역기구 (WTO),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등이그산물들이라고할수있다. 둘째, 전자및컴퓨터과학의발달로인한정보혁명은세계적문제를다루는데있어서시간과공간의근접성을가져왔다. 그결과정보혁명은생활패턴의획일화또는표준화를낳았을뿐만아니라지식의전지구적확산을초래하였다. 그런데지역에따라서이같은변화를수용할의사와능력의차이가크게드러나면서세계적현상의불가예측성은더욱증폭되었다. 이런변화들은새로운밀레니엄이시작되면서더욱가속화되는경향을보이고있다. 우리는이거대한변화를지구화 (globalization) 라는개념으로요약해표현한다. 지구화는미시적차원에서개인생활을구속하는가치와규범을변형시켰으며, 거시적차원에서는국가권위와경계를약화시켜왔다. 지구화는매우복합적인현상이다. 주변에서우리가익숙하지않은현상들이동시다발적으로일어나며, 이들사이의인과관계를밝혀내기힘들게되었다. 주목할것은변화과정이매우신속한까닭에전통적개념과용어들로이같은현상을설명하고처방할수없게되었다는점이다. 이제한국도예외없이이와같은지구화과정에놓여있다. 로즈노

이론적접근 5 (James N. Rosenau) 의개념을통해한반도의지구화과정을살펴보기로하자. 첫째, 영토및법적경계는자본과재화의흐름을제어하는데별로큰의미를지니지못하게되었다. 1997 년외환위기로인해국제통화기금 (IMF) 체제하에들어갔던한국은, 국민의정부 등장이후국내경제의구조조정과과감한개방정책을통해국가신인도를회복하고이제초국적기업 (transnational corporations) 들로부터아시아국가중가장매력있는투자국으로인정받기에이르렀다. 김대중대통령과그의경제관료들은특히외국인투자를유도함으로써기존의시장장벽을점진적으로허무는데많은노력을경주하였다. 급변하는국제적환경변화에대한부적응또는적응지체로발생한외환위기의상황에서 국민의정부 의정책은지구적시장및자본흐름의변화에대한절박한적응과정이었다고할수있다. 물론여야정치엘리트들사이에서외자유치를무한정허용해야하느냐는문제를둘러싸고많은논란이있었다. 그러나정부는지구화로인한무한경쟁시대에국경을초월한자본의흐름을유인하는정책을취하지않을수없게되었다. 둘째, 국경을초월하여확산되는대상에는자본, 상품, 서비스, 사람, 아이디어및정보, 규범적정형, 행위패턴등이포함된다. 한국사회에서상품과서비스는가시적으로드러나는대상인반면, 규범적정형과행위패턴은잘드러나지않는다. 그러나모든대상들은서로밀접하게연관되어있다는점에주목할필요가있다. 예를들어, 한국에서우리는맥도날드햄버거와켄터키프라이드치킨간판을곳곳에서자주볼수있게되었는데, 이런장소는음식취향과행위패턴에있어서부모와세대차를보이는젊은이들이서로교제하는장소가된지오래이다. 이들젊은세대는마이크로소프트사의소프트웨어와인터넷게임을즐긴다. 따라서이들의사고유형, 정보원천, 의사소통방식등은언어나국가공동체또는민족정체성을공유하지않은지구의다른한편에있는젊은이들과매우흡사하다. 셋째, 국가가아직가장강력한권력의실체로남아있지만, 권력이다

6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양한행위주체에게분산되어있는것도사실이다. 다른선진국과마찬가지로한국에서도비정부기구 (NGO) 나초국적기업처럼국가주권에서벗어난행위자들이개인의일상생활을좌우하는중요한역할을행하게되었다. 예를들면, 시민단체들은지난 4월 13 일국회의원선거과정에서총선연대를구성하여정치권에도전한바있다. 이들은부패연루또는병역기피후보들에대해부정적캠페인 (negative campaign) 을벌였다. 물론이들의행위가합법적인것인가그렇지않으면불법적인것인가하는논란이있기도하였다. 그러나시민단체들의총선연대는오랫동안무기력증에걸린유권자들의의식을일깨워주는데기여하였으며, 그결과정부당국으로하여금입후보자들의납세기록과병역기록을일반에공개할수밖에없는상황을만들었다. 2. 냉전체제하의지구화 이상과같이한국은지구화의과정을겪고있는반면한반도상황에서비롯되는특수성도동시에지니고있다. 한마디로냉전체제하의지구화 (globalization under Cold War) 라고할수있는것으로서, 이것은지역적안보딜레마에의해일정한한계를지니고나타나는지구화현상을말한다. 한편으로, 일제식민지지배와민족분단으로인해, 한반도는사회주의가쇠퇴하는전반적인추세속에서도냉전의고도로남아있었다. 남북한모두일반국민들은오랫동안안보위기감에휩싸여살수밖에없었으며, 실제로군사분계선을따라군사적적대관계가지속되어왔었다. 이런안보위기감은북한의핵위기와미사일개발로더욱고조되기도하였다. 다른한편, 국민의정부 출범과함께시작된대북포용정책에힘입어현대그룹은금강산관광사업을시작하여남북한경제협력의시범을보이기도하였다. 또한 1995 년북한지역에일어난대규모의홍수는사회주의경제권의붕괴로어려움에처해있던북한의경제사정을더욱

이론적접근 7 어렵게하였으며, 이로인한극심한식량부족은수백만의북한주민들을기아상태로몰아넣어수많은아사자와탈북자가생겨나게되었다. 1999 년까지수년동안계속된북한의식량란과기아사태는국제사회의이목을집중시켰을뿐아니라 NGO 에게는 북한돕기 가가장중요한이슈가되었다. 이에따라 NGO 는효율적 대북지원 을위해서로간의정보를공유하거나전략적인제휴를하기도하였으며, 수차례의연합모임을통해국제사회에공동으로호소함으로써대북지원의필요성을여론화하였다. 결과 1999 년 5월중국베이징에서제1회 인도적입장에서대북지원을위한국제 NGO 대회 가열렸으며, 이어 2000 년 7월에는일본도쿄에서제2회대회가열리기도하였다. 1) 중국의북한접경지역에서는남한과국제적인도지원단체들이기아에허덕이는탈북자들에대한지원에개입하게되었고, 이것은중국의실정법을위반하면서까지이루어지게되었다. 이같이상반되고모순적인상황은한반도를둘러싼지구화의복합성을반영한다. 남북한이국가차원에서긴장상태에놓여있는가운데, 2000 년 6월에는 1945 년분단이후처음으로김대중대통령과김정일국방위원장사이에정상회담이개최되었다. 또한민간기업들과비정부기구들은국가차원에서보면매우민감한이슈에대해적극적으로개입해활동하게되었다. 한마디로갈등적또는협력적상호작용은국가차원에서뿐만아니라국가와비국가행위자들사이에서도발생하게되었고, 안보이슈는경제및인도주의이슈들과밀접하게연관되어있음을보여주게되었다. 여기서우리는한국문제의복합성 (complexity of Korean problem) 을다음과같이세가지로정리해볼수있다. 첫째, 한국문제에관여하는비국가 (non-state) 행위자들은매우다양해져서남북한국가뿐만아니라한반도와이해관계를갖고있는주변국들이통제할수없는상황이 1) 두차례의국제 NGO 대회를통해효율적대북지원을위한모임의필요성이제기되었고, 이에따라 2001 년의제 3 회대회는서울에서한국 NGO 들의공동주관으로개최를약속하였다.

8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문제와관련한많은행위자들은국가차원의통제를이미넘어서있다. 둘째, 한국문제는남북한국가사이에서뿐만아니라남한의민간기업및시민단체들과북한의국가사이에서의상호작용으로나타나기도한다. 이들은한반도경계를넘어서서중국, 러시아등주변국영토로까지확장되어나타나고있다. 셋째, 한국문제의이슈들은다양할뿐만아니라상호연관성 (interconnectedness) 을지니고있다. 이슈들은한반도의안보문제뿐만아니라경제협력과인적교류를포함하며, 긴장을증대시키거나완화시키는밀접한상호작용을벌이고있다. 요약하자면, 한반도에서의지구화는몇가지일반적의미의지구화속성을지니고있는한편, 아직분단에의한냉전의터널을통과하는과정에서한국적특유의복합적특성을지니고있다고할수있다. 3. 기존이론 ( 레짐이론 ) 의한계 가. 국가중심적설명 오래된개념은새로운문제를이해하는데도움을줄수없다. 지금까지한국문제를분석하는많은학자들은평화를다루는데있어서국가차원을주된관심영역으로삼아왔다. 그들은지속가능한평화를구축하는문제를안보딜레마를해결하는것과동일시하는경향이있었다. 따라서평화체제구축을국가차원의안보에국한하는결과를가져왔다. 이같은한계는지난 20 여년동안국제관계연구를지배해온레짐이론 (regime theory) 의국가중심적설명에서비롯되었던것으로보인다. 레짐이론에서특정한이슈는여기에이해관계를갖고있는국가간의관계로만다루어진다. 다시말해, 어떤이슈의레짐은국가간의밀도높은상호작용이수렴하여형성되는것으로간주된다. 레짐이론의선구자인크라스너 (Stephene D. Krasner) 는레짐을 행위자의기대가수렴하게되는명시적또는묵시적원칙, 규범, 규칙및의사결정절차의집

이론적접근 9 합 2) 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행위자는 국가 또는 기구를 의미한 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제관계에서 기구가 여러 국가들의 합의하에 구 성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레짐을 구성하는 행위주체의 기본 단위는 국가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레짐은 일정한 이슈에 관해서 국가간의 동의에 기반한 다소 복잡한 형태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레짐이론의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이론적 한계를 인정하는 이도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레짐이 론이 국가중심적 명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세계적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는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스토크 (Olav S. Stokke) 는 대부분의 레짐이론이 국가가 단일적 (unitary) 이고 합리적인 행위주체라고 보는 방법론적 가정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민간단체들이 중요한 역할을 행하는 초국가적 상호관계와 연계성을 적절히 밝혀내지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바 있다. 한반도는 50 여 년 동안의 분단으로 인해 아직 긴장과 불안이 지속되 는 가운데 지구화가 진행되는 특수한 지역으로서, 국제비정부기구 (INGO), 한국 비정부기구, 민간기업이 매우 적극적인 행위주체로서 작 용하는 곳이다. 남북한 관계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비국가 행위자들이 점차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 과거의 국가중심적 레짐이론은 한국문제를 분석적으로 요해하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구축 하는데 더 이상 적절한모델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나. 이슈중심적설명 레짐이론은또한이슈중심이론이다. 레짐이론은특정한이해와정체성을가진국가들사이의기대가수렴할수있는일정한이슈영역에 2) Stephen D. Krasner, "Structural Causes and Regime Consequences: Regimes as Intervening Variables," in Stephen D. Krasner, ed., International Regime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3), p. 2.

10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특별한관심을기울인다. 레짐이론의관심영역은안보, 무역, 환경, 인권, 생태, 난민, 등에관한이슈들이다. 또레짐이론은원칙, 규범, 규칙, 의사결정절차등이형성되는과정을설명한다. 그러나레짐이론은다양한세계적이슈들의복합성을탐구할수있는유용한모델이되지못하고있다. 레짐이론이매우포괄적이고중층적인세계적문제들을이해하는데한계를지닐수밖에없다는점은이미이론주창자들에의해서도제기된적이있다. 영 (Oran Young) 은레짐이론이이슈의특수성을과장하여설명함으로써이슈들사이의인위적경계를설정하는문제를낳는다고말한바있다. 실제로현재진행중에있는지구화로인해이슈들사이의상호연관성도급속히증대되고있는바, 특정이슈만을분석하는레짐이론은문제해결을위한처방적또는규범적이론으로서한계를지닐수밖에없을것이다. 한국문제의경우에도마찬가지이다. 탈북자이슈를예로들어보자. 탈북자이슈는이들의인권과수용국의안보및질서문제와밀접하게관련되어있다. 1990 년대중반북한식량난으로인해수많은탈북자들이발생하게되었고, 이들중대부분이중국동북부지역에체류하게되었다. 중국당국은이들에게적절한법적지위, 즉난민지위를부여하지않고북한으로강제송환하였기때문에, 중국체류를원하는탈북자들은인신매매와노동착취등심각한인권침해를당하게되거나이를피하기위해중국의내륙또는변경지역으로잠입해들어가게되었다. 이같은탈북자이슈는인도주의적입장에서보면인권문제는물론이고이들을수용하는중국당국의입장에서보면사회질서및안녕과관련되는문제가되는셈이다. 따라서탈북자이슈는사실하나의이슈영역에국한되지않고다양한영역에중첩되어있음을알수있다. 세계적이슈들이서로불가분의관계에있으며상호연계성을지니고있는만큼, 이들은국가라는행위주체에의해서만해결될수없음은당연한일이다. 다시탈북자문제로돌아가보자. 인도주의를표방하는각종비정부기구들이탈북자지원에관여하고있으며탈북자의난민지위획득을위한 UN 청원운동을공개적으로벌인만큼, 중국과남북한

이론적접근 11 국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행위자는 아니다. 어떤 의미 에서는 이들 국가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오히려 문제해결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중국은 남북한 모두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중국은 때로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혈맹관계를 강조하면서 북한에 치우친 정책을 펴기도 하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동반자로서 남 한에 기우는 정책을 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은 탈북자들을 북한으 로 강제송환하는 반면, 황장엽 남한행과 관련해서는 남한 당국에 호의 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한국문제 특히 탈북자 이슈는 레 짐이론만으로는 적절히 분석될 수 없으며 해결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4. 연구영역의확대 가. 새개념의도입 : 가버넌스, 권위의영역 가버넌스 (governance) 라는개념은국게관계의복합적현상을연구하는데있어서중요한개념으로등장하고있다. 특히레짐이론이많은한계를드러내보이면서가버넌스개념이하나의대안으로간주되기도한다. 특히한국문제의복합성을생각한다면적절한분석의틀이될수있을것이다. 가버넌스는명령기제라기보다는조정및통제의합목적적행위들을말한다. 따라서이것은통치 (government) 와는구별된다. 가버넌스에대해로즈노는다음과같이말한바있다. 가버넌스는통치와동의어가아니다. 가버넌스와통치모두가의도적행위, 목표지향적행동, 규칙시스템을말한다. 그러나통치는공식권위와경찰력을통해입안된정책을집행하는행위를뜻한반면, 가버넌스는법적또는공식적으로명시된책임으로부터도출되거나또는그렇지않을수도있는공유된목표에의해뒷받침되는행위를

12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말하며 따라서 일탈을 막고 순종을 얻어내기 위해 경찰력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달리 말하자면 가버넌스는 통치보다도 포괄적이라고 하 겠다. 3) 이런점에서가버넌스는강제기제를갖춘공식적통치행위와는구분되는행위시스템을말한다고하겠다. 또한가버넌스는공표된의무와책임을지닌위계적통치행위와는구별되는규칙과조정의시스템이라고할수있다. 따라서통치에비해가버넌스는응집력, 결집력, 위계질서등에있어서이완된형태를의미한다고볼수있다. 그러면여기서는가버넌스개념이어떻게한국문제의복합성을분석하는데도움줄수있는가를살펴보기로하자. 첫째, 가버넌스는분명한경계를지니지않고있으며부분들사이의구분이명확하지도않으며특정한인과관계 (cause-and-effect) 체인을가지고있지않다. 반면일반적으로수긍할만한목표와목적을포함하는다양한형태와차원의행위들을말한다. 행위주체들사이에는구체적인결정인자가별도로존재하지않으며매우밀접한상호의존관계에놓여있다. 그관계가충돌하는것이든혹은병존가능한경우이든마찬가지이다. 국가, 민간기업, 비정부기구등이한국문제의역동적흐름에관여하고있다. 이점에서국가가아직도가장중요한부문으로남아있기는하지만, 가버넌스는복합적인한국문제의비결정성 (indeterminacy) 과불확실성 (uncertainty) 의속성을조망해줄수있는개념이라고하겠다. 둘째, 가버넌스는위계질서에의해배열되지않은권위의다양한형태를나타낸다. 조직적순위와명시된권위와책임을요구하는통치와는달리, 가버넌스는통치와는다른권위를지니고있다. 로즈노가논한바있는권위의영역 (sphere of authority: SOA) 은복합적인한국문제에대해서많은함의를준다. 그에의하면, 가버넌스의단위로서 4가지 3) James N. Rosenau, "Governance, Order and Change in World Politics," James N. Rosenau and Ernest-Otto Czmpiel, eds., Governance without Government: Order and Changes in World Polit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 4.

이론적접근 13 유형의 권위의 영역이 있다. 확립된 권위의 영역 (established SOA), 수 용적 권위의 영역 (accommodative SOA), 경쟁적 권위의 영역 (contested SOA), 전이적 권위 (transient SOA) 의 영역 등이 그것이다. (1) 확립된 권위의 영역은 국제기구, 양자적 또는 다자적 관계 등을 통한국가간 관계에서 일상적으로 형성되는 권위의 중심을 말한다. (2) 수용적 권위의 영역은 국가뿐만 아니라 비국가들을 둘러싸고 형 성되는 권위의 영역으로서, 인권을 둘러싼 회의, 학술회의 등을 통해 제 도화를 지향하는 영역이다. (3) 경쟁적 권위의 영역은 국가와 비정부기구 사이에 격렬한 토론과 반목이 진행되는 영역으로서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점차 부상하는 부분이다. (4) 전이적 권위의 영역은 개인과 집단 행동 또는 접촉이 특정한 이 슈에 의해 경계를 넘어선 네트워크로 발전하면서 발생하는 영역을 말 한다. 권위의 영역이란 용어는 가버넌스의 요동을 통한 자기조직화의 속성 을 나타내는 바, 이는 가버넌스의 단위로서 각 권위의 영역이 행위주체 들 간의 협력관계 뿐만 아니라 갈등적 관계를 통해 발생하고 진화한다 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욱이 네 가지 권위의 영역은 전체적으로 이들 사이에서의 동태적 변화가 발생할 때 대규모의 자기조직화를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셋째, 가버넌스는 하나의 이슈가 아니고 권위적 규칙의 포괄적 체계 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속성으로 인해 가버넌스는 레짐의 이슈 중심 적 설명과 차별성을 보인다. 안보, 경제협력, 인권 등의 이슈는 실제 세 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들 사이의 경계는 구분하기 에 매우 힘들게 되어 있다. 이렇게 권위 주체와 영역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세계적 이슈들 특히 한국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전체론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14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나. 한국문제의권위의영역 < 표 Ⅱ-1 > 한국문제의다양한권위의영역 (SOA) 경쟁적 SOA 수용적 SOA 확립된 SOA 안보질서, 대량살상무기문제 제네바합의및 KEDO 남북정상회담 4자회담미 북미사일회담 경제협력, 이산가족상봉 6 15 공동선언문 탈북자및인권문제 NGO 의난민지위인정청원 INGO 의인권보고서및회의 중국 -UNHCR- 남한 인도주의적지원 NGO 의중국체류탈북자지원 INGO 의지원및회의 한국문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뿐만 아니라 비국가 관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보 이슈로부터 인도주의적 이슈까지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달리 말하자면, 한반도에서 지속가능한 평화 (sustainable peace) 를 구축한다는 것은 행위자 측면에서 보나 이슈들 측면에서 보나 매우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특히 이슈들 사이의 상호연관성 정도는 매 우 높아서 한 이슈의 해결은 다른 이슈의 해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 고 있다. 예를 들어,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는 북한의 경제 위기의 완화 와 남한에 의한 흡수통합 우려의 해소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따라서 한국문제를 적절히 분석할 수 있는 틀로서의 가버넌스 개념 그 중에서도 권위의 영역을 중심으로 복합적 속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 표 Ⅱ-1> 에 나타난 바와 같이 확립된 권위, 수용적 권위, 경쟁적 권위 등 세 가지 유형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자 한다. 각 이슈는 하나의 권위의 영역 또는 다수의 권위의 영역에 걸

이론적접근 15 쳐있다. 인도주의적이슈는안보이슈보다도다양한권위의영역에놓여있음에주목할필요가있다. 첫째, 현안문제인평화체제구축과미사일문제는국가권위의영역안에놓여있다. 남북한, 미국, 중국이참여하는 4자회담은평화협정에의한새로운제도형성을위해필요한모멘텀이될수있는데, 이는 1953 년한국전쟁을종식시키는과정에서미국과북한간에체결된정전협정을남북한이주당사자가되는협정으로대체할수있을것이기때문이다. 1996 년한 미양국이 4자회담을제안하기는하였지만, 우리정부는남북한이평화협정의당사자가되고미국과중국이이를보장하는방식을원하고있다. 이에대해서는최근김대중대통령이여러차례언급한바도있다. 한반도에서남북한이긴장또는협력의실질적인파트너이며주역이기때문에, 남북한이협정의당사자가되어야한다는주장은더이상정당화할필요조차없을것이다. 다만문제는북한이 4 자회담에서적극적이지않았다는점인데, 북한은핵문제와미사일문제를계기로미국과의직접적인교섭, 즉북 미간의양자적관계를향상또는발전시키려는데보다많은관심을지니고있기때문이다. 슈뢰더 (Paul Schroeder) 의용어를빌리자면, 북한은개도국의대랑살상무기개발에특별한관심을가지고있는초강대국즉미국과교제 (association) 하려는의도를지니고있는것이다. 북한은대량살상무기이슈에대한선진국수준의기존을지켜주는대신에초강대국으로부터안보를담보받아내려는것이다. 1994 년미 북제네바합의사례를통해본다면미사일이슈에대한해결의실마리도찾을수도있다. 미국은제네바합의를통해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 를구성하고북한에경수로를건설해주기로타협함으로써핵개발을동결시킨바있다. 다시말해, 북한은핵개발의유보대가 (reservation price) 로경수로건설을받아들인것이다. 이와같이북한은미사일개발자체는계속한다하더라도최소한수출에대한유보대가로미국으로부터다른형태의지원을약속받기를원할수있다. 여기서대가는달러와같은경화는

16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불가능할것으로보이며, 경제협력및지원과궁극적으로는관계정상화를통해치러질것으로보인다. 둘째, 경제협력과이산가족상봉이슈도남북한의국가권위의영역에속해있다. 남북정상회담에서택한 6 15 공동선언은두가지이슈를위한가장중요한메커니즘이되었다. 공동선언은남북한협력의중요한기초가될뿐만아니라통일방안의수렴가능성에대해언급하고있다. 만일공동선언문과이를뒷받침하는장관급회담의성과들이충분히실현되기만한다면, 남북한관계는통일의예비적단계로진입할수있게될것이다. 셋째, 인도주의적이슈는경쟁적권위의영역, 수용적권위의영역, 확립된권위의영역등세가지에모두걸쳐있다. 탈북자이슈를예로들어보자. 중국동북부지역의탈북자처리문제는한국과중국양국간외교채널을경유해서또는유엔난민고등판무관 (UNHCR) 을통해서해결될사안이되었다. 북 중간에는탈북자송환원칙이지켜지고있는만큼탈북자들이난민지위를획득하기까지에는많은시간이필요할것으로보인다. 주목할것은탈북자이슈가남북한국가간의관계에의해해결될기미가보이지않기때문에, 남한의비정부기구들은난민지위인정문제에깊숙이개입하게되었다는점이다. 남한의탈북자난민지위인정을위한청원운동단체와중국체류탈북자지원에관여하는종교단체들의활동은민감한외교적문제가되기도하였다. 다시말해, 탈북자이슈에대한국가능력및의지의한계로인해비정부기구의개입주의 (interventionism) 가확산된것이다. 지금까지비정부기구의인도주의적개입주의는국가와비정부기구의반목을낳게되었고, 이런의미에서탈북자이슈는경쟁적권위의영역에놓여있다고할수있다. 그러나다행히국제사면위원회 (Amnesty International) 와미국국무성은북한주민과중국체류탈북자의인권침해문제를다루는보고서를냄으로써이이슈에관심을일깨우기위한정보를확산시키는데기여하였다. 즉, 국제비정부기구와국가가끊임없이이해당사국의정책결정권자들에게영향을미치려는제도화를추구해나가고있다. 더욱이,

이론적접근 17 수용적권위의영역에도놓여있는탈북자이슈는북한과중국이유엔난민고등판무관에의한탈북자의난민지위판정에따를것을요구하는메커니즘으로작용할수도있다. 이점에서인도주의적이슈, 특히탈북자이슈는경쟁적또는수용적권위의영역에놓여있으면서궁극적으로는한반도에지속가능한평화체제의구축에기여할것으로보인다. 5. 비정부기구연구의필요성 좁은의미로는남북한관계와넓은의미로는한국문제를다루는데다양한행위주체와이슈들이중층적으로그리고복합적으로연관되어있음을살펴보았다. 최근남북한관계가급진전되는과정에서도국가또는정부가정치 군사 경제적측면에서주된역할을하고있는것이사실이다. 이는북한체제에서정치적행위주체, 특히김정일국방위원장의역할이대부분을차지한데서비롯되며, 아직도안보이슈가남북한관계에있어서가장첨예한문제로남아있기때문이다. 그러나이미살펴본바와같이민간기업과비정부기구의역할과위상이크게확대된것이사실이다. 특히남한사회의민주화와함께시민사회가팽창하였고, 그역할과기능이단순히국내적인이슈를다루는데그치지않고남북관계에서실질적인행위주체로부상하고있다. 한국문제에있어서비정부기구는국가차원의관계를단순히보완하는기능을수행하는것이아니며, 그렇다고국가와경쟁또는갈등하는관계를가진것도아니다. 비정부기구는때로는국가와경쟁또는마찰을일으키면서국가차원에서다루어질수없는영역에깊숙이개입해있다. 이러한현상은단지한국문제또는남북한관계에한정되어있지않으며, 이미지구적현상이되고있다고할수있다. 인도주의적비정부기구들은코소보사태에개입하여이해당사국가들과갈등관계를빚은바있으며, 국제관계특히인권이슈를다루는많은학자들은이를신개입주의 (new interventionism) 라고칭하면서새로운연구대상으로삼고있다.

18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이제 남한의 비정부기구는 UN 산하 기구 또는 국제비정부기구와 연 대를 가지면서 한국문제와 남북한관계에 개입하고 있다. 이는 지구화의 전반적 현상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물론 아직까지 남북한 국가차 원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행위자이며 이들에 의해 다루어지는 정치 군 사적 이슈가 핵심 사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남북한간의 상호 교류 협력이 심화되면 될수록 비국가 차원의 행위주체와 이슈가 더욱 중요하게 되며, 이들을 통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가 보다 지속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비정부기구에 대한 보고와 분석이 많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보다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없었다. 즉, 대체로 종교단체를 비롯한 대북 지원기구들의 활동을 보고하는데 집중되었으며, 이들이 비국가 차원의 행위자로서 국가와 협력, 경쟁, 마 찰 관계 속에서 새로운 권위의 영역을 어떻게 창출해 나가는가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국문제와 남북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행위주체와 이슈의 다양성과 함께 이들의 상호연관성에 새로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정책적 측면에서 특히 비정부기구들이 어떻게 남북한 관계에 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발견해낼 수 있을 것 이다.

남북관계와교류 협력 19 Ⅲ. 남북관계와교류 협력 1. 냉전기남북교류 협력 남북교류 협력은전체적인남북관계의진전과정과밀접히연관되어진행되었다. 따라서 1980 년대당국간의조심스러운교류 협력논의가시작되기이전에는교류 협력의본질적의미를찿을수없었다. 해방이후 1960 년대까지의남북교류 협력의전개는냉전체제의고착화라는상황하에서매우제한된형태의문제제기혹은정치적인선전의장에머물렀다. 이시기북한은통일전선전략차원에서다양한선전성제안을해왔다. 1957 년남북언론인교류제의, 1958 년의제 17 차올림픽대회를위한단일팀구성제의, 1965 년인민배우박영신의남북공동영화제작및연극경연대회제의, 그리고 1966 년북한언어학자홍기문의기자교류제의와조류학자원홍구의과학자교류등이대표적인사례에해당한다. 이와같은제안들은실질적이고구체적인방안을담지않은채 대남호소문 의형식으로제기되었으며, 북한의일방적인제의로끝나고말았다. 4) 1970 년대의남북한간의교류 협력은적십자회담으로대표되어진다. 1970 년대의남북한간의교류는국제정세의변화가남북한내부의정세판단에영향을미친결과였다. 1970 년대초반미국의 괌독트린 과 닉슨독트린 의천명으로한반도주변에는유동적인정세가조성되었다. 5) 또한한반도주변의국제정세가미소양극구도에서중공과미 일의접근에따른다극화체제로변화했고, 월남전의종전과주한미군의철수문제등이복합적으로작용하여정세가상당히불안정하였다. 이와같은정세변화는남한정부로하여금북한의무력도발을억제하는다양한조치들을강구하게만들었으며, 이의일환으로남북대화가추진되었다. 4) 최대석, 남북한문화교류활성화방안연구, p. 230. 5) 1969 년의괌독트린은아시아인의문제는아시아인의손으로해결할것을내용으로하고있었으며, 1970 년의닉슨독트린은괌독트린의전세계적인적용으로한국정부에주한미군의감축을통보해왔다.

20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반면북한측은월남의공산화에자극받았으며, 미국의일련의태도변화를아시아에서의후퇴로간주하였다. 또한남한내의정치적상황도자신들에게유리하다고판단하여남북대화를통일전선전술에이용할수있다고여겼다. 이와같은상황에서 1971 년최두선대한적십자사총재가남북간가족찾기운동을북한측에제의했고, 북한측의손성필위원장이화답함으로서당해 8월부터공식적인접촉이이루어졌다. 6) 이에따라남북한적십자는 1977 년까지비교적활발한접촉을가졌으며, 정치적인분야에서의교류도이루어졌다. 그러나북한적십자는 1978 년 3 월제 8차본회담을위한제 26 차실무회의를무기연기한다는일방적인통보를끝으로교류 협력을중단하였고, 이후 1984 년남한수재에대한북측의지원제의이전까지실질적인남북적십자간의교류는공백기를맞이했다. 7) 남북고위당국자간의직통전화개설, 7.4 남북공동성명등정치적분야에서의성과에도불구하고남북한적십자간의접촉은의도했던이산가족간의만남이라는실질적인결과를가져오지못한채끝이나고말았다. 따라서 1970 년대의남북한교류는과거에비해비교적활발하게진행되었으면서도주민들간의실질적교류는이루어지지않았다는특징을보였다. 1980 년대의남북한교류 협력은남북한당국차원에서논의되기시작하였으며, 사회문화분야에서는 LA 올림픽단일팀구성등을위한체육회담과적십자회담등이있었다. 또한남북경제회담과국회회담을위한예비접촉등남북간의대화창구가다양화되는양상을보였다. 1984 년수재물자인도인수와 1985 년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단및예술공연단상호교환등이성사되기도했으나이후남북한간의교류 협력이더이상확대되지못했다. 6) 당시대한적십자사의이와같은제의가가능했던것은 1970 년 8월 15 일박정 희 대통령이 평화통일구상 선언 을 통해 대북한 유화제의를 했기 때문이었 다. 박정희대통령은남북한간의장벽을제거해나갈 수있는획기적이고인 도적인 방안들을 제의할 용의가 있으며, 개발과 건설을 통한 선의의 경쟁에 나서자고촉구했다. 7) 남북적십자간의 구체적인 접촉일지와 결과는 남북회담사무국, 적십자회담수 첩, 1994. 참조.

남북관계와교류 협력 21 2. 7 7 선언이후의남북교류 협력 1988 년 모든부문에서남북교류를추진한다 는정부의 7 7 특별선언 으로남북교류의새로운방향이모색되기시작했다. 8) 또한후속조치들로 1989 년 남북교류협력에관한기본지침 이마련되었고, 동년 3월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 가발족되었다. 그러나 1989 년문익환목사와임수경씨의방북과이들의실정법위반에대한한국정부의실형선고, 이에따른북한정부의비난등일련의과정은남북간의교류 협력이민감한정치적영향력을지닌사안일수밖에없다는것을보여주었다. 남북한간경제교류협력은 1988 년 7 7 선언 에의하여남한정부가북한과의경제교류를허용한다는방침을천명함에따라시작되었다. 이에따라남한정부는 1988 년 10 월 7일남북교역개방조치를취하였으며, 1989 년 6월 12 일대통령의특별명령으로 남북교류협력에관한기본지침 을마련하였다. 이후정부는 1990 년 8월 1일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을제정하였으며, 1992 년 2월 19 일에 남북사이의화해와불가침및교류협력에관한합의서 ( 이하남북기본합의서 ) 가남북사이의합의에의하여발효되는등남북관계의진전에따라남북한간경제교류도활발히진행되었다. 그러나 1993 년이후북한핵문제가고조됨에따라남북한간경제교류또한소강상태를보였으며, 1994 년 10 월 21 일미국과북한간핵협상의타결과함께체결된제네바기본합의문에따라북한핵문제가잠정적해결점을찾게되었다. 1994 년의미국과북한간합의는한반도긴장을완화하는데기여하였으나, 1996 년 9월북한의잠수함침투사건이후남한의대북지원및투자가동결되기도하였다. 이러한남북경협의동결상황은 1996 년 12 월 29 일잠수함사건에대하여북한이사과성명을발표함으로써해소되었다. 8) 7 7 선언은남북교류의적극추진, 남북간의신뢰구축및긴장완화를통한관계개선과평화정착을목표로하고있었으며, 구체적인후속조치로공산권자료의일반개방과월북및납북작가들의작품에대한부분적인해금조치를취했으며, 남북교육당국회담등이제의되었다.

22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정부는 1990 년 2월문화교류활성화를위한 남북문화교류5원칙 9) 을발표했으며, 1990 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을제정공포했다. 또한남북교류 협력을지원하기위한 남북협력기금 10) 도조성되었다.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에따라남북교류 협력은법적인근거를갖게되었고, 이는형식적으로는누구든법적절차에따라서북한과교류 협력을할수있음을의미했다. 11) 따라서 1990 년대는제도화된틀내에서의남북한사회문화교류 협력이활성화되는시기로접어들었다고볼수있다. 특히 1991 년남북고위급회담에서채택된 기본합의서 에따라서남북관계제도화의기본골격이마련되었다. 1992 년 5월에는 남북교류 협력공동위원회구성운영에관한합의서 가채택되어, 남북교류 협력공동위원회 가발족되었다. 동년 9월에 교류 협력부속합의서 가채택되었다. 1993 년 3월인도적차원에서이인모노인의방북이허용되었으며, 신경제 5개년계획남북경제교류협력부문계획 수립되었다. 그러나 1993 년 3월북한의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로정부는북한핵문제해결시까지남북경협을유보하는조치를취했으며, 이는전반적인남북교류에부정적영향을미쳤다. 1994 년 10 월미 북한간제네바합의에따라북한핵문제가해결국면에접어들면서대북경수로건설지원체제가갖추어졌으며, 1994 년 11 월에는남북경협의단계적확대를위한내용을담고있는 남북경제협력활성화조치 가발표되었고이에따른법개정이이루어졌다. 1997 년 6월에는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추진에대비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처리에관한규정 을제정했다. 9) 남북문화교류의 5 원칙 의내용은문화교류과정에서분단이전의민족전통문화를우선교류한다는것, 승부및경쟁적분야의배제, 전통문화의원형을변형, 훼손하는표현방식의지양, 쉽고작은일부터시작, 공동실행을위한지속적인노력의경주등이었다. 10) 남북협력기금은남북간의인적, 물적교류협력을지원, 촉진시키기위해서 1990 년 8 월 1 일제정된 남북협력기금법 에근거를두고있다. 이에따라주민왕래자금지원, 문화학술체육분야협력사업자금지원, 민족공동체회복사업지원과교역및경제협력사업에대한지원이가능하다. 11)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의제정이전까지남북한주민간에이루어지는행위는국가보안법체계내에서다루어졌다. 그러나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의제정에따라서교류협력의승인권이통일원으로일원화되고, 순수한목적의남북교류협력은국가보안법의적용대상에서제외될수있었다.

남북관계와교류 협력 23 따라서 1990 년대남북교류가전반적으로제도화되는추세에발맞추어사회문화교류 협력역시과거에비해서비교적 자유롭고 12) 다양한분야에걸쳐서이루어졌다. 특히 1990 년대이후북한이식량난에직면하여국제사회의지원을요청하면서, 인도적대북지원분야에서민간분야의활동이활발하게진행되었다. 이웃사랑회 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각종종교단체를비롯다양한민간단체가대북지원사업을벌였다. 1989 년 6월 남북교류협력에관한지침 이후 1990 년대에접어들면서남북교류는점진적인증가추세를보여왔다. 그러나김일성사망과잠수함사건이발생했던 1994 년과 1996 년의경우남북한주민접촉과남한주민의방북이전년도에비해위축되는현상을보였다. 1996 년 9월발생한북한잠수함침투사건과관련하여당시정부는북한이사과하지않는한모든남북접촉을당분간중단한다는방침을세웠다. 13) 따라서 1996 년의남북교류 협력은전년도에비해위축되었으며, 특히방북은 28 건으로 1995 년 53 건의절반수준에머물렀다. 그러나 1996 년 12 월북한은북한외교부대변인성명을통해잠수함침투사건에대해공식사과하였으며, 이를남한정부가수용함으로써남북관계개선의계기가마련되었다. 14) 따라서이와같은분위기는사회문화교류확대에긍정적으로작용하여, 1997 년의경우전년도에비해사회문화교류 협력이전반 12) 그러나정부는대북접촉및교류에관한허용기준으로 1 대표성이있어야하고, 2 법질서를존중해야하며, 3 교류사안이남북관계를개선시킬수있는것이어야한다는기준을운용하여, 이에부합하는남북교류협력을제도적으로보장하고있다. 따라서기본합의서의 17 조에제시된 자유로운 왕래와접촉은민족구성원의자유로운의사에따른왕래와접촉이라는뜻이며, 당국의허가나신고없이이루어지는것을말하는것이아니다. 김명기, 남북기본합의서개요, p. 192. 13) 따라서 1996 년후반기에예정되어있던남북교류 협력이연기되었다. 96 년 12 월부산에서북한측관계자의참석하에개최예정이던 ' 해운산업의전자자료교환 (EDI) 에관한실무회의 ' 가 97 년으로연기되었으며, 96 년 11 월예정이던국제민간항공기구 (ICAO) 중재의남북한간관제협상 2 차실무접촉도무기연기되었다. 중앙일보, 1996.11.3. 14) 북한당국은평양방송과중앙통신을통해발표한이성명에서 " 막심한인명피해를초래한 1996 년 9 월남조선강릉해상에서의잠수함사건에대해깊은유감을표시한다 " 며 " 그러한사건이다시일어나지않도록노력할것 " 이라며재발방지의사를표명했다. 북한측은또 " 조선반도에서의공고한평화와안정을위해유관측들과함께힘쓸것 " 이라고밝혀한반도 4 자회담에대한긍정적검토용의를시사했다. 중앙일보, 1996.12.29.

24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적으로확대되었으며, 남한주민의방북도증가했다. 3. 대북포용정책과남북교류 협력 1997 년증가추세를보인남북교류 협력은 1998 년신정부의출범과아울러대북포용정책이실시됨에따라양적 질적인측면에서과거에비해크게진전된모습을보이고있다. 대북포용정책의실시는현단계에서무리한통일의추구보다는통일의기초형성에주력하는보다현실적인정책으로의전환을의미한다. 대북포용정책은목표를 평화 화해 협력 실현을통한남북관계개선으로명시하고있으며, 무력도발불용, 흡수통일배제, 화해 협력의적극추진을 3대원칙으로하고있다. 이는현단계에서는평화정착을통한남북간평화공존의실현에주력하겠다는것으로서, 남북한교류 협력을활성화시킬필요성이대두되었다. 남북한교류 협력사업의활성화는대북포용정책을실천하는구체적방법론으로서의의미를가지고있다. 특히교류 협력을통한남북관계의실질적개선과북한스스로변화할수있는여건과환경조성에기여한다는점에서중요성이있다. 또한남북신뢰구축과관계개선에도움이될것이며, 궁극적으로통일의기초를형성할수있다는의미를지니고있다. 새로운대북정책에따라교류 협력활성화를위한조치들이취해졌다. 98년 3월 민간차원대북지원활성화조치 15) 가발표되었으며, 이조치에따라이후실시된적십자의대북지원에 겨레사랑북녘동포돕기범국민운동 등 6개단체 6명이구호물자인도요원으로참여하였으며, 우리 15) 민간차원대북지원활성화조치내용은다음과같다. * 민간단체대북지원참여확대 - 남북적십자간구호물자인도인수시민간단체참여허용 - 대북지원협의 모니터링목적의접촉및방북허용 * 민간의대북지원모금활동규제완화 - 자선음악회 바자회등이벤트성모금행사허용 - 언론사 기업체의모금행사협찬및무기명기탁허용 * 협력사업방식의시범적인대북지원허용

남북관계와교류 협력 25 민족서로돕기운동 등 3개 단체 5명이 대북지원 협의 목적으로 방북하 였다. 또한 북한동포를 위한 국제금식의 날 등의 행사시 언론사 후원 및 ARS 모금이 허용되었고, 북한에 제약공장 합영농장 설립 등 협력사 업이 승인되었다. 정부는 또한남북경협활성화를 위해 정경분리원칙 의 적용을 천명했으며, 구체적으로 98 년 4월 남북경협추진 여건 조성을 기본방향으로 하는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 16) 를 취했다. 이에 따라 대 북경제협력사업자 승인건수가 크게 늘어났다. 금강산관광사업은 교류 협력활성화 정책의 결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북포용정책에 따라 교류 협력은 과거에 비해 큰 폭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1998 년 한해 금강산관광객 10,554 명을 제외하고도 3,317 명이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 수치는 정부가 민간인의 방북을 승인한 1989 년 이후 1997 년까지의 총 방북인원 2,408 명보다 많은 수치이다. 이 와 같은 추세속에서 사회문화분야의 교류 협력도 증가하였다. 1998 년의 경우 사회 문화부문에서 남북한 주민접촉도 전년도에 비해 전반적으로 증가추세를 나타냈다. 1996 년 잠수함 사건으로 위축되었던 남북 경협은 1996 년 12 월 29 일 잠수함사건에 대하여 북한이 사과성명을 발표함으로 써 해소되었으나, 1998 년에는 한국 경제상황의 악화로 인하여 1997 년에 비하여 남북경협이 심각하게 축소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대북포용 정책의 추진으로 1999 년에 이르러 남북경협이 금융위기 이전상황으로 회복되었다. 1999년의 경우 남북한의 경협활성화와 아울러 사회문화 교류 협력도 질적인 면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 통일농구대회를 통한남북 체육선수 단의 서울 평양 상호방문과 남한대중예술인들의 방북공연성사, 그리고 16) 남북경협활성화조치의주요내용은다음과같다. - 방북요건구비시, 승인을원칙 : 대기업총수및경제단체장의방북도허용 - 수시방북제도확대시행및북한주민접촉승인유효기간확대 (1 년 3 년 ) - 승인처리기간단축 : 접촉 (2 0 일 15일 ), 방북 (30 일 20일 ) - 범위내에서 포괄승인품목 확대, 위탁가공교역촉진을위한생산설비의반출제한폐지 - 경제협력사업용물자의반출 입승인절차간소화 - 협력사업의투자규모제한폐지, 투자제한업종의 Negative List 화, 협력사업자 및 협력사업 동시승인제도도입

26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통일농구대회와방북공연의중계방송성사등은남북한사회문화교류 협력의새로운가능성을보여준것이라할수있다. 특히통일농구대회를통한북한관계자및선수단의남한방문은 93 년이후처음이다. 2000 년도에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은상징성이큰대형이벤트를중심으로활성화되는추세를보였다. 특히제 3 국경우가아닌남북한왕래형직접교류 협력이증가하였는바, 남북한주민들의왕래를수반하는행사들이진행되었다. 특히그동안중단되었던북한주민의남한방문이재개되었으며, 이중상당수를사회문화분야의문화예술공연단이차지하였다. 특히북한청소년예술단과평양교예단의서울공연이성사되는등왕래교류를통한이벤트성공연이지속적으로이어지고있다. 17) 2000 년도방북인원은 7,280 명으로 1999 년 5,599 명에비해 30% 정도증가하였다. 이는전반적인남북관계개선과관계된현상으로 1989 년부터 2000 년 12 월 31 일까지방북인원 18,601 명중국민의정부출범이후 (1898-2000) 방북인원이 16,196 명으로총방북인원의 87.0% 에달하고있다. 주목할만한사실은사회문화교류협력의양적인발전과아울러질적인발전이나타나고있다는점이다. 상징성이큰남북왕래성교류 협력들이성사되었으며, 특히북한측공연예술단등비교적대규모방문단의서울방문공연이성사되었다는점에주목해야할것이다. 18) 17) 국민의정부출범이후남한을방문한북한주민은 768 명으로전체방문인원의 57.0% 에달하고있다. 이중사회문화분야의방문인원은 398 명으로다수를차지하고있다. 2000 년도북한주민의남한방문은 706 명으로 1999 년에비해큰증가세를보였다. 이는 1999 년 제 2 차통일농구경기대회 를위한서울방문단 62 명의 10.4 배에달하는수치이다. 이중평양학생소년예술단 (102 명 ), 평양교예단 (102 명 ), 북한교향악단 (132 명 ) 등문화예술분야에서의남한방문인원이 336 명으로이산가족분야의 287 명, 남북회담의 83 명보다많았다. 18) 2000 년북한주민의남한방문의대부분이사회문화분야에서이루어졌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 102 명, 평양교예단 102 명, 북한교향악단 132 명등이서울을방문하여 2000 년 10 월말현재 9 건 570 명의절대다수를문화예술분야가차지하고있다.

남북관계와교류 협력 27 < 표 Ⅲ-2 > 남북 인적교류 현황 : 주민접촉 ( 8 9. 6. 12 ~ 200 0. 11. 30 ) ( 단위 : 건 / 명 ) 연도 신청 승인 불허 철회 처리중 성사 비고 1989 36(70) 21(22) 15(48) - - - 1990 235(687) 206(652) 29(35) - - 62(377) 1991 753(2,195) 685(2,047) 41(70) - - 1992 1993 1994 1995 1996 801 (2,420) 1,172 (2,220) 1,338 (2,864) 1,011 (2,769) 729 (2,338) 744 (2,250) 1,148 (2,182) 1,261 (2,673) 1,007 (2,703) 692 (2,029) 72 (2 3 0 ) 21 (36) 28 (63) 44 (1 0 8 ) 53 (4 0 6 ) - - - - - - - - - - 266(1,17 3) 238 (1,015) 313 (707) 237 (691) 494 (1,222) 465 (1,003) 27(78) 전년이월 12(18) 전년이월 15(20) 전년이월 64(148) 전년이월 24(106) 전년이월 1997 1998 1999 2000 계 1,387 (2,969) 4,628 (6,714) 7,590 (9,198) 2,757 (4,794) 22,437 (39,238) 1,340 (2,850) 4,567 (6,623) 7,616 (8,890) 2,729 (4,687) 22,016 (37,608) 17 (38) 13 (26) 17 (61) 22 (51) 372 (1,172) 2 (4 ) 10 (3 1 ) 5 (320) 7 (1 5 ) 24 (370) - - - 25 (8 8 ) 25 (8 8 ) 516 (1,191) 856 (1,890) 884 (1,698) 1,630 (2,276) 5,961 (13,243) 자료 : 통일부, 월간남북교류협력및인도적사업동향, 11 월호, 2000. 8(9) 전년이월 36(86) 전년이월 74(120 전년이월 26(47) 전년이월 대북포용정책에따라남북교류 협력은지난수년간의실적을능가할정도로활발히추진되었다. 특히금강산관광사업을통해불특정다수의남한주민이비록관광에국한된것이라하더라도북한을다녀옴으

28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로써남북교류 협력의전기를마련한것으로평가되고있다. 남북한교류 협력의활성화는그동안미미한수준에머물러있던협력사업이활발히전개되고있다는점에서도나타나고있다. 사회문화분야협력사업의경우 97 년까지예비단계인협력업자승인과최종단계인협력사업에대한승인이각각 3건에불과했으며, 대부분의협력사업자및협력사업승인은이후에이루어진것이다.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29 Ⅳ.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1. 남북한사회문화교류 협력 전체적으로 1989 년이후사회문화교류는경제교류에비해상대적으로활발하지못하였으나, 국민의정부 출범이후양적 질적인측면에서확대추세에있다. 이는대북포용정책기조가유지됨으로써교류 협력이과거에비해용이해졌고, 민간분야의북한주민접촉요구가크게증가하고있기때문으로풀이된다. 1989 년 6월이후 2000 년 11 월말까지사회 문화부문의남북간주민접촉이분야별로성사된건수는교육 학술 170 건 (2,002명 ), 종교 129건 (976 명 ), 문화 예술 129 건 (865 명 ), 체육 74 건 (585 명 ), 언론 출판 106 건 (389 명 ), 과학 환경 57 건 (310 명 ), 관광 ( 실무분야, 금강산관광객제외 ) 49 건 (152 명 ) 으로집계되었다사회문화부문중에서도학술및종교, 문화 예술분야에서의교류가다른분야보다많은것으로나타났다.< 표 Ⅳ-3 참조 > 특히 1998 년양적인증가세를보인사회문화교류 협력은 1999 년이후남북한농구단의상호방문이이루어지고문화예술분야의이벤트성방북공연들이왕래공연으로성사되는등질적인측면에서진전된모습을보이고있다. 분야별남북한사회문화교류 협력현황은아래와같다.

30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 표 Ⅳ-3 > 남북한주민접촉 ( 분야별. 89. 6. 12 ~ 200 0. 1 1. 30) 분야신청승인불허철회처리중성사 이산가족 15,799 (16,908) 15,798 (16,907) 1(1) - 3,098(3,379) 경제 3,839(9,258) 3,745(9,011) 77(211) 11(27) 6(9) 1,968(3,254) 교육학술 554(3,912) 504(3,254) 42(338) 4(307) 4(13) 170(2,002) 문화예술 398(1,687) 341(1,547) 50(97) - 7(43) 129(865) 체육 223(1,059) 211(1,008) 7(29) 3(11) 2(11) 74(585) 종교 368(1,780) 310(1,618) 55(143) 1(7) 2(2) 129(976) 언론출판 335(968) 296(871) 38(90) 1(7) - 106(389) 관광 ( 실무 ) 173(552) 165(524) 8(28) - - 49(152) 교통통신 82(252) 81(250) - 1(2) - 34(122) 과학환경 231(874) 220(856) 10(14) 1(4) - 57(310) 대북지원 69(316) 68(312) -(2) -(1) 1(1) 55(234) 기타 366(1,672) 277(1,440) 84(219) 2(4) 3(9) 92(975) 계 22,437 (39,238) 22,016 (37,608) 372 (1,171) 24 (3 7 0 ) 25 (88) 자료 : 통일부, 월간남북교류협력동향및인도적사업동향, 11 월호, 2000. ( 단위 : 건 / 명 ) 5,961 (13,234) 가. 학술분야 1989 년 6월이후 2000 년 11 월말까지학술분야에서남북한주민접촉이성사된건수는 170 건 (2,002 명 ) 으로접촉건수및인원에서가장많은빈도를기록하고있다. 학술분야의경우남북한왕래교류 19) 보다는대부 19) 학술분야의남북한왕래교류는 1991 년 11 월 제 2 차아세아의평화와여성의역할서울세미나, 1992 년 9 월 평양동북아경제포럼, 1992 년 9 월 제 3 차아세아의평화와여성의역할평양세미나, 그리고 1993 년 11 월 일본의전후처리문제에관한국제토론회 가있었다. 통일원, 사회문화분야남북교류실무안내, 1996, pp. 46~47. 참조.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31 분중국등제 3국에서의접촉이이루어진것이특징이다. 북한측은이와같이제 3국에서접촉을선호하며, 중국지역이가장많이이용되었다. 20) 중국의연변대, 요녕대, 길림대, 북경대등에소속된연구소와오사까경제법과대, 국제고려학회등이남북한접촉의중개인역할을했다. 학술교류는점차정례화, 다양화되는추세를보이고있으며, 주최측도남북한이되는경우가점차증가하고있다. 그러나학술분야의경우방북을통한교류 협력이미미하다는특징을보이고있다. 이는학술분야의경우대북지원성교류 협력의소지가타분야에비해작다는점에기인한것으로보인다. 분야별로는경제학및통일분야가타분야에비해많았으며, 이는교류 협력을통한실익확보라는북한의전략과관계가있다. 북한은경제분야의학술교류를경제난해소와해외로부터의대북투자유치와연계하는경향을보이고있다. 또한통일분야의학술교류 협력을통해북한측은자신들의주장을적극적으로전개하는등대외이미지개선및통일전선차원에서활용하고있는것으로보인다. 대북포용정책기조가유지된 1998 년도의경우제 3국에서의교류 협력이추진되는가운데협력사업및자매결연사업등이성사됨으로써과거에비해내용이한층더진전된모습을보였다. 정부는 연변과학기술대학후원회 에대해나진 선봉지역과학기술대학건립 운영사업을목적으로협력사업자승인을하였는데, 이는학술분야의협력사업의첫사례이다. 또한성균관대학의정범진총장이방북하여개성의고려성균관과자매결연을맺고기타학술교류를협의하였는바, 이는남북대학간최초의자매결연이다. 또한경남대, 강원대총장등의방북이이루어졌다. 1999 년 7월에는남북한의학자및연변의조선족학자들의참여하에 새천년을향한조선족의현황과미래 라는주제로연변대학창립 50 주년기념학술회의가열렸다. 21) 20) 중국이선호되는이유는연변지역교포들이과거북한과의관계등으로인적인연줄을확보하고있고, 지리적으로북한과가까운점등이작용하여북한측의참가가다른지역보다용이하기때문인것으로판단된다. 21) 통일연구원후원으로연변대학민족문제연구원과한국미래정책학회가주최한이학술회의는종합학술회의형식으로개최되어, 역사, 인문사회, 예술분과

32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학술분야의부문별교류 협력실태는다음과같다. 통일문제분야에서의학술교류 협력은초기부터비교적활발하게진행되었다. 그러나초기의경우대체로국제문제및국제정치차원에서동북아관련국들과의관계속에서한반도의평화구축및통일이논의되었다. 따라서남북한의학술교류는남북한과주변국의전문가들이참여하는학술회의형태를띠고이루어진경우가많았다. 주최측도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등주변국인경우가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이주최한학술회의에남북한의학자들이초청되는형식이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에서주최한 제2차아시아 태평양지역대화 평화 협력에관한국제학술회의 ( 90.9.4~6, 소련블라디보스토크 ), 조지아공대전략연구소와중국세계관찰연구소가공동주최한 동북아안보회의 ( 91.3.23~25, 중국북경 ), UN 군축국주최의 92 상해유엔군축회의 ( 92.8.17~19, 중국상해 ), 말레이지아국민전선주최의 제1차동아시아차세대정치인회의 ( 94.8.3~8, 말레이지아쿠알라룸프르 ) 등이이에속한다. 이외에도캐나다오타와, 일본동경, 영국런던등에서통일문제에대한국제학술회의들이열렸으며, 이를통해남북한학자들간의학술교류 협력이이루어졌다. 그러나 90 년대중반이후남북한의관련당사자들이주최하는형태의학술교류들이나타났으며, 점차정례화, 다양화하는양상을보이고있다. 특히한국통일포럼과북한사회정치학회는 96 년이후 남북해외학자통일회의 22) 등을통해한반도평화와남북한의화해를주제로매년정례적으로교류 협력을실시하고있다. 이외에도남북한이주최한학술회의는남북신뢰회복추진협의회와북한민족문제연구소가주최한 한반도평화와화합을위한모임 ( 97.6.30.~7.1, 중국베이징 ) 등이있으며, 버클리대한인학생회주최의 한반도통일문제심포지움 에서도반 등에서다양한학술교류가이루어졌다. 22) 남북 해외학자 통일회의는 99 년에도 개최되었다 ( 99.10.26~27. 중국 베이징 ). 동아일보 후원으로 열린 이번 회의에는 남측에서 백영철한국통일포럼 회장 과권만학 ( 경희대 ). 김순권 ( 경북대 ) 교수등이, 해외에서는고병철 ( 미국일리노 이대 ). 강희웅 ( 미국하와이대 ). 송두율 ( 독일 뮌스터대 ) 교수 등이 참석했으며 북 측에서는 김경남 통일문제연구소 부소장과 서원철 김형직사범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33 복적인학술교류 협력이이루어졌다. 특히제4차 세계청년학생평화세미나 ( 97.9.13~17, 중국북경 ) 에는 250 여명에이르는남북한대학생 ( 남한학생 167, 북한학생 85 명 ) 들이참가함으로써남북교류 협력의새로운가능성을보여주었으며, 이세미나는 99 년에도개최되었다. 23) 경제학분야에서의남북교류 협력은 90 년대초반에도비교적활발하게진행되었으며, 타분야에비해교류 협력성사건수가많았다. 경제분야의경우학술교류주제는 제3차동북아경제공동체국제심포지엄 ( 90.10.9~12, 중국북경 ), 환동해경제권국제심포지움 ( 91.11.22, 일본오사까 ), 동북아지역경제협력포럼 ( 92.8.25~28, 러시아블라디보스톡 ), 21 세기동북아국제학술회의 ( 95.7.18~21, 중국심양 ), 발해만경제협력의전망학술회의 ( 96.5.8, 중국심양 ) 등남북한을포함하는동북아지역경제권의형성및발전에관한경우가많았다. 학술회의개최장소는주로중국과일본이었으며, 특히중국에서많은교류가이루어졌다. 북한측은경제분야의학술교류를외부투자유치및홍보에이용하는자세를보이고있다. 한국학분야에서의교류 협력은남북한, 일본, 중국의관련학계를중심으로이루어졌다. 특히 제 3차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 90.8.2~5, 오사까 ), 구주한국학회제 15 차학술회의 ( 91.3.22~26, 프랑스듀르당 ) 등을제외하고는 고려학소장학자학술토론회 ( 91.7.29~31, 중국연길시 ), 제4차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 94.2.20~22, 중국북경 ) 등대부분북경, 연변, 연길등중국지역에서이루어지고있는특징을보였다. 역사학의경우도북한지역보다는중국, 러시아, 일본등지에서의제3 국교류가주축을이루었다. 고구려문화국제학술회의 ( 93.8.11~14, 중국접안시 ) 및 제3회고구려국제학술대회 ( 97.7.20~21, 일본동경 ) 와 동북아시아에있어서원시 고대문명의재검토학술회의 ( 95.8.4~6, 일 23) 99 년 7 월남북한청년학생 2 백 3 명 ( 남측 1 백 43, 북측 60) 은베이징에서제 5 차남북청년학생통일세미나를열고 통일조국창건을위한청년의역할 을놓고토론을벌였다. 이세미나에는남측에서세계평화청년연합 - 전국대학원리연구회회원과교수들이, 북측에서는각대학학생들과북한의교수진및조선아시아태평양중앙위원회지도원등이참석했다.

34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본오사까 ) 등고구려및고대사관련학술회의, 러시아연해주발해유적발굴 ( 93.4.15~17, 연변대학 ) 과같은유적발굴등중국, 러시아, 일본등지의인접지역에서의학술교류가주류를이루었다. 특징중의하나는교류 협력분야가주로고구려이전의역사에대한것이대부분이라는점이다. 고대사의경우남북한체제및정치적관계에별다른영향을받지않기때문에교류 협력이비교적수월했던것으로분석된다. 또한주변국학자들의관심이비교적높은편이며, 학술회의가개최되는중국등에관련유적이있는것도한요인이라할수있다. 과학기술분야에서의학술회의등을통해이루어지는남북한학술교류 협력의특징은분야별로는컴퓨터와정보처리분야등이많고, 남북한측의참가자의수가비교적많다는점이다. 91 국제과학기술학술대회 ( 91.8.19~24, 중국연길 ) 에는남한측 87 명과북한측 45 명이참석했으며, 94 년에열린 'Korean 컴퓨터처리국제학술대회 ( 94.8.5~10, 중국연길 ) 에도남한측 24 명, 북한측 25 명등다수의인원들이참석했다. 북한측은과학기술분야의경우다른학술교류와비해다수의관계자들을참석시키고있다. 특히남한의 국어정보학회 와 북한과학기술총동맹, 연변과학기술협회 가주최한 'Korean 컴퓨터처리국제학술대회 ( 중국연길 ) 는 94, 95, 96 년에걸쳐해마다열렸으며, 이를통해남북한학술교류 협력이이루어졌다. 96 년 8월에는한글컴퓨터처리에필수적인기술적차원의공동안을채택합의문으로발표했다. 24) 또한 99 년에는제4차대회가 96 년 3차대회이후 3년만에재개되어컴퓨터용어통일사전을마무리, 연변에서출판기념회를가짐으로써 ( 99,8.15) 학술교류의구체적성과를거두었다는의의를나타냈다. 남북한학술공동연구의시금석으로주목을모았던제4차대회에서남북한학자들은 5년여를끌어온남북한컴퓨터용어통일사전을마무리, 연변에서출판기념회를가졌다. 출간된남북한컴퓨터용어사전은 ISO( 국제표준어기구 )2382 조항을기본으로남북한학자가합의한컴퓨터용어표제어 2500 여개와해 24) 합의문전문및보다자세한내용은한국전산원이발행한 북한의정보화동향분석, 1997. pp. 155~161. 참조.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35 설을담고있으며, 한 중 일 3개국어로색인을마련했다. 초기의경우컴퓨터관련용어의사용에있어남북한간이질화가심했으나, 다년간의협의끝에공공사전을출간했다. 국어정보학회측은 2000 년에연변이외의지역에서 우리말문자의정보화문제 를주제로학술대회를열계획이며, 향후에도지속적인교류 협력을추진할방침으로있다. 분단이후남북한간의언어는상이한체제및문화가형성됨에따라이질화가심화되어왔다. 따라서남북한의언어학자들의교류 협력에있어언어이질화의해소가중심적주제가되어왔다. 다른학술교류와마찬가지로제3국의관련학술회의에서주로교류가이루어져왔다. 서울대이현복교수와북한혜산사범대로길용교수는 1991 년과 1992 년에걸쳐폴란드바르샤바대학에서 남북한언어비교연구 라는주제로남북한간최초의언어공동연구를수행했다. 1993 년에는국제고려학회주최로남북한의학자들이참여하는가운데 통일을지향하는언어와철학학술회의 가베이징 ( 93.8.28~31) 열렸으며, 1995 년에는 KOREAN 규범문제와관련한국제학술토론회 ( 95.8.3~4) 에서남북학자들간에한국어언어규범에관한토론이있었다. 특히국립국어연구원과북한국어사정위원회,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가주최한 한국어언어학자국제학술회의 ( 96.8.5~7, 장춘 ) 에서는향후남북한이맞춤법 띄어쓰기등어문규범을개정하더라도현재의차이를확대하지않도록한다는데합의했다. 나. 종교분야 1989 년 6월이후 1999 년 10 월말현재까지종교분야에서의남북한주민접촉이성사된건수는 111 건 (867 명 ) 으로빈도수에있어학술분야에이어두번째를차지하고있다. 종교계는북한지역동포들에대해종교적관심을가지고있는동시에, 대북지원등인도적차원의관심을가지고있기때문에학술분야에이어북한측과의교류 협력이비교적활발했다. 종교분야의교류 협력도제3국에서이루어지는경우가많았으

36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나, 방북도 상당수 성사되었다. 이는 종교계의 경우 대북지원성 교류가 많고, 북한의 대외 이미지개선 효과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북 한은 순수 종교교류보다는 경제적 실익이 동반되는 종교계의 방문을 선호하고 있다. 남한의 개신교계는 남북 종교 교류 협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 을 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 (WCC), 한국기독교협의회 (KNCC) 등 교 단차원의 협의회들의 역할이 컸다. 1986 년 6월 스위스 글리온에서 개최 된 남북평화통일협의회 를 통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한의 조선기 독교연맹 대표단간의 접촉이 최초로 이루어졌다. 1988 년 11 월 글리온에 서의 2차회의이후 최근까지 양측은 모임을 연례화하고 있다. 1991 년 9 월에는 곽선희 목사 ( 소망교회 ) 가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1992 년에 는 권호경 목사 (KNCC 총무 ) 가 방북했다. 1997 년에는 김동완 ( 한국기독 교교회협의회총무 ) 등이 방북 (9.23) 하여 남북교회간 교류 및 협력방안에 관하여 북한측과 논의했다. 1997 년 9월에는 지덕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 등이 금강산교회 복구 등 협의 목적으로 ( 북경, 9.25~26) 북 한측과 접촉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98 년 이후 전반적으로 종교계 의 방북이 활기를 나타냈으며, 1998 년에도 개신교의 양대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 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북한과 종교교 류를 실시했다. 98 년의 경우 개신교를 중심으로 제3국 공동행사중심의 접촉위주에서 순수 종교교류 목적의 방북이 증가하였다. 1999 년에도 김 명기 은희곤 목사 등 기독교대한감리회 서부연회 대표단 6명이 방북 (5.18~5.25),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평양에 제 3의 교회를 설립 하는 방안 및 평양신학교 지원방안등에 대해 논의했다. 서부연회는 99 년 10 월에도 방북하여 감리회 지원으로 운영중인 봉수국수공장을 방문 하고 재북 기독가족의 생사확인과 평양신학원 건립 등을 논의했다. 또 한 99 년 10 월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산하 한민족통일선교협의회의 주 봉택 목사 등이 방북, 이산가족 상봉과 평양산원 지원 등을 논의한데 이어 서부연회 대표단도 방북했다. 천주교계의 경우 1995 년 5월에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초청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37 으로김상진신부 ( 천주교 성베네딕도수도원 ) 의방북이이루어졌으며, 이는 92 년 1월권호경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KNCC) 총무의방북이후 3 년 4개월만의일이었다. 김신부는김영환 ( 대구가톨릭대학의학부총장 ) 등사제 3명과함께방북하여, 나진선봉지역에 2백병상규모의병원건립문제를협의했다. 김상진신부는 1997 년에도방북하여 (5.28~30) 의료선교문제를협의하고나진병원기공식에참석했다. 1998 년의경우종교분야의교류가크게증가하는가운데천주교민족화해위원회최창무주교등위원 7명이북한조선천주교인협회중앙위원회의초청으로방북, 평양장충성당에서북한신자들이참석한가운데미사를집전했다. 불교계는남북불교교류를위해 1988 년 11 월 남북불교도교류추진위원회 를결성하였고, 1991 년 10 월미국 LA 관음사에서개최된 조국통일기원불교도합동법회 에서최초의남북불교인들간의접촉이성사되었다. 1996 년 4월에는북한조선불교도연맹의초청으로조계종총무부장이방북, 남북한불교계현안과북한수재민에대한지원방안이논의되었다. 1998 년 3월에는남북한불교계의협력방안을논의하기위해남북불교지도자들의실무회담이베이징에서열렸다. 이회담에서양쪽은 98 년 6월미국에서개최되는 제2차남북불교지도자통일법회 의구체적인계획과부처님오신날남북한불교도공동발원문채택, 그리고북한지역사찰현황파악과복원등에관해논의했다. 이회담에는한국조계종에서총무원과미주평불협회장, 북한조선불교도연맹의관계자들이참석했다. 99 년 6월에는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상임추진위원장등한국불교종단협의회산하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회도북한조선불교도연맹의초청을받아방북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차원에서불교계대표가공식방북한것은이것이처음이었다. 99 년 10 월에는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맹교단인대한불교진각종관계자들이북한의조선불교도연맹초청에의해종단대표자격으로방북했다. 이들은방북기간중평안도와황해도등지의불교사찰과복지시설방문및남북평화통일기원합동법회개최를개최하고, 복지시설건립과국제불교성직자연합창설, 21 세기고려대장경공동번역사업등을제의해긍정적인회답을받은것

38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으로전해졌다. 또한 2000 년봄베이징에서남북불교도통일토론회를갖기로실무선에서합의하였다. 천도교의남북종교교류 협력은타종단에비해서뚜렷한성과를나타내지못했다. 1991 년 10 월네팔에서개최된제4차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총회에서남북한천도교대표들사이에최초의접촉이이루어졌으며, 93 년 10 월에는오익제교령 ( 97 년 10 월월북 ) 이북한의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유미영위원장과만나천도교교류를위한공동합의문을발표하였다. 99 년 8월천도교는베이징에서북한의조선천도교측과 남북천도교지도자회담 을갖고동학혁명전적지남북공동조사와남북한천도교공동사업논의를위한상설협의기구를만들기로합의했다 ( 99.8.24~26). 대종교는 1994 년 4월북경에서북한측과접촉개천절공동행사를위한합의문을채택하였으며, 1995 년 4월안호상총전교등이방북하였으나남북종교교류에서두각을나타내지못하고있다. 25) 그러나북한측이기념비적인단군릉을건설하는등최근단군에대한관심을확대하고있으며, 2000 년평양에서남북공동단군학술회의 26) 가예정되어있기때문에천도교와대종교의종교교류는과거와달리점차활성화될가능성을가지고있다. 범종단차원에서는 1997 년북한측제의로 남북종교지도자베이징회의 ( 97.5.30~31) 가개최되어남북종교인의협력강화, 식량지원등이논의되었으며, 1999 년 4월에는남북한과일본종교계대표들이베이징에모 25) 95 년 4 월대종교의안호상총전교 ( 초대문교부장관 ) 와김선적종무원장이당국의허가없이북한에입국함으로써당시큰파장을불러일으켰으며, 이들에게는사법조치가취해졌다. 안총전교일행은북한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류미영위원장명의로단군이승천한어천절 (4 월 14 일, 음력 3 월 15 일 ) 행사참석과단군릉방문을위한초청장을받아북한을방문하도록허가해달라는방북신청을통일원에냈으나, 통일원은시기가적절치않다는입장아래방북허가를내주지않았었다. 이들에게는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위반죄가적용되어각각징역 1 년, 집행유예 2 년씩이선고되었다. 26) 99 년 11 월북한을방문한고려대김정배총장은 19 일 " 방북기간중북의사회과학원과 2000 년개천절에남북의학자들이단군에관한학술교류모임을평양에서개최키로합의했다 " 고밝혔다. 한국일보, 1999.11.19. 따라서이행사가성사될경우이와관련된천도교와대종교의종교교류도활성화될가능성이크다.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39 여 ( 99.4.25~4.27) 한반도의남북통일을위한종교인의역할 을주제로 베이징종교인평화모임 을가졌다. 특히이를통해통일을위한종교인의활동을촉구하는 1999 년베이징선언문 이발표되었다. 다. 문화 예술분야 1989 년 6월이후 1999 년 10 월말현재까지문화 예술분야에서의남북한주민접촉이성사된건수는 87 건 (702 명 ) 이다. 그동안문화 예술분야는북한측의기피와, 공연등의경우상당한준비와비용이소요되는문화 예술분야의특성상교류 협력이활성화되지못했다. 또한 환동해국제예술제 (1991, 일본 ), 통일예술제 (1992, 사할린 ) 등 90 년대중반까지대부분의교류 협력이중국, 일본, 러시아등의해외동포사회에서이루어지는특성을보였다. 1989 년이후 1998 년말까지문화 예술분야교류 협력의경우왕래교류로서남북국악인교환공연인 1990 년평양의 범민족통일음악회 와서울의 90 년송년통일전통음악회 등왕래교류가활발하게진행되었다. 이는정부당국의합의에의한것으로모두상징성이큰공연들이었다. 그러나이후 98 년리틀엔젤스평양공연까지남북왕래교류형태의문화 예술교류는이루어지지않았다. 따라서남북한간의교류 협력은대체로제3국에서개최되는행사와남한인사들의개별적방북을통해서이루어지는경우가대부분이었으며, 98 년리틀엔젤스평양공연이후문화예술분야의교류 협력신청건수가크게증가하고있다. 음악분야는타분야에비해비교적활발한교류 협력이이루어져왔다. 특히정부주도로이루어진 85 년고향방문예술단서울 평양공연, 90 년 범민족통일음악회 평양공연, 송년통일전통음악회 서울공연, 98 년리틀엔젤스예술단의평양공연과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윤이상통일음악회 에참가등왕래교류형태의예술공연이많았다. 특히리틀엔젤스예술단의북한공연은정부주도로이루어진 90 년의왕래공연이후 8년만에성사된것으로순수민간차원의공연으로서는분단이후최초라는

40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의미를지녔다. 한국문화재단 ( 이사장박보희 ) 소속리틀엔젤스예술단 66 명은 98 년 5월 11 일간평양에서세차례의전통예술공연을했다. 1999 년에는빌클린턴미대통령의동생로저클린턴과남북한인기가수가출연한가운데평양의봉화예술극장에서 2000 년평화친선음악회 ( 99.12.5) 가평양에서열렸다. SBS 는코래컴과북한아 태평화위가개최한공연실황을녹화, 방영 ( 99.12.10) 했다. 가수인로저클린턴콘서트형식으로성사된공연에남쪽에서패티김, 태진아, 설운도, 젝스키스, 핑클이참가했다. 27) 또한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주최한제 1 회민족통일음악회가평양봉화예술극장에서열려남북의가수들의합동공연이있었다.( 99.12.20) 공연은 1부남측, 2부북측순서로진행되었으며, 남측에서는사회자인차인태경기대교수와가수현철, 신형원, 안치환, 김종환, 그리고영화배우오정해등이참가했다. 북한측은인민배우주창혁과로용권, 김순희, 김숙녀, 박순복등공훈배우들이출연했다. 이공연은생중계방송은무산됨에따라녹화로남한에방영되었으며, 2000 년금강산과서울에서의공연이예정되어있다. 이외에도 99 년 12 월현재기획사인 SN21 엔터프라이즈의남북대중음악회, 국민회의김경재의원의종합공연형식의통일음악회등이추진되고있다. 따라서음악분야의경우내용면에서과거보다발전된교류 협력이진행되는추세를보이고있다. 영화 연극분야의경우 1990 년뉴욕의 남북영화제 에서남북영화인들간의최초의교류가있었으며, 이후남한의영화사들이미국의교포영화인들을통해남북영화교류를시도해왔으나큰성과를보지못했다. 그러나 1998 년정부의햇볕정책에자극받아방송사들이경쟁적으로북한영화를수입하여방영했다. SBS 는방송사상최초로 안중근이등박문을쏘다 를방영했으며 ( 9 월1일 ), KBS 도 98 년 9월 17 일부터 10 부작 임꺽정 을방송했다. MBC 는문화관광부로부터북한에서제작된흥 27) 행사주최측은북한의청소년들에게한국산 닉스 (Nix)' 청바지 3 만벌과휴대용카세트라디오, 헤드폰각 5 천세트를제공하기로북한측과협의했으며, 북한측은공연장대여료등으로 60 만달러를지원받았다.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41 행작 불가사리 의수입추천을받았다. 그러나방송사들은낮은시청률과판권시비및북한영화의신선감저하등대체로경쟁력이결여되어있다는점때문에방영을확대하지는않았다. 28) 연극분야는 91 년베이징에서개최된 아시아전통연극에관한심포지움 에서최초의남북교류가있었으나이후뚜렷한성과가없었다. 사진분야는연길에서열린 94 년 9월 남 북한 중국사진전 과 97 년 7 월의 9 7 국제한민족사진세미나및사진전 에서의교류등비교적활발한교류 협력이있었다. 특히 98 년남북공동의협력사업으로추진된사진집 백두에서한라까지- 렌즈로본조국 이발간되었으며, 서울에서전시회를가졌다 (5.29~6.11). 한국사진학회와북한조선사진작가동맹의 2년여에걸친작업으로이루어졌으며, 남한작가 20 여명, 북한작가 46 명이참여했다. 양측관계자들은책의출판을위해두차례북경회담을가졌으며, 세차례에걸쳐교정지를교환했다. 미술분야는 91 년 5 월베이징의 남북코리아서화전, 93 년오사카의 코리아통일미술전, 97 년 10 월동경의 남북평화미술전 등제 3 국에서의남북간의접촉이많았다. 1998년이후남북교역차원에서북한미술품의반입도이루어지고있다. 99 년에는등미술계인사 11 명이북한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의초청을받아방북 ( 99.8.31~9.7) 하여금강산묘향산평양등북한산하를방문했다. 이들의방북은원로 중견문화 예술계인사가분단후처음으로대거평양을찾았다는점에서의의가있었다. 그동안금강산관광등을통해북한풍경이일부소개되기는했으나, 정부승인하에대규모화가들이방북한것은처음이었다. 1997 년이후유적및자연경관답사와관련된문화교류도시작되었 28) KBS 가방영한임꺽정의경우평균 13~14% 의시청률로남한의것에비해상당히낮은시청률을기록한것으로알려졌다. 또한임꺽정 은독립프로덕션 IMS 가북한목란비디오사와판권계약을체결한뒤 KBS 에수입을알선했으나우인방커뮤니케이션이통일부의승인을거쳐북한의조선예술영화사 아태평화위원회와정식판권계약을했다고주장해방영일정에차질을빚었다. 불가사리 도북한영화수입사 SN21 엔터프라이즈가판권을북한당국으로부터구입, MBC 측에방영권을팔고문화부가수입추천까지했으나제작자인신상옥감독이국제저작권법과국내관행에비춰자신에게판권이있다고이의를제기했다.

42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다. 1997 년 9월중앙일보측이북한문화유적답사를목적으로방북했다. 중앙일보통일문화연구소는북한문화유적답사를위한협력사업자로지정 ( 97.12.11) 되어북한지역유적공동조사와관련, 언론보도등을포함한협력사업을실시할수있게되었다. 중앙일보는 97 년 3월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처리에관한규정 이제정된이후최초의문화협력사업자이다. 또한문화방송이방송사최초로북한의자연경관및명승고적등에관한 TV 프로그램제작사업추진목적의협력사업자승인을받았다 ( 98.3.13). 라. 언론 출판분야 1989년 6월이후 1999년 10월말현재까지언론 출판분야에서의남북한주민접촉은 53 건 (146 명 ) 이성사되었다. 언론 출판분야의특성상북한실상의공개, 정보의교류와유입등을꺼리는북한측이체제유지에유리하지않다고판단하여, 교류 협력이활성화되지못한면이있었다. 그러나 97 년이후양적, 질적인측면에서활성화되는경향을보이고있다. 특히언론분야교류 협력의경우독립적으로이루어지기보다는동행취재형식으로이루어졌다. 90 년대중반까지한국기자협회와전국언론노조, 한국 PD 연합회가교류를희망했고, 언론사들도북한지역취재를추진했으나성사되지는못했다. 그러나 1997 년이후점차교류 협력이활성화되는추세에있으며그내용도질적으로개선되고있다. 방송분야의경우 1997 년에비로소문화방송의 금강산자연다큐멘터리제작 등사업성이있는교류가이루어졌다. 97 년 10 월문화방송관계자들이북한아태평화위원회초청으로방북하여평양을비롯해백두산, 묘향산, 금강산등을둘러보고북한당국과자연다큐멘터리공동제작에대해사전협의를벌였다. 특히 1997 년 KBS 는남북한당국의허락을받아북한의생활상과백두산자연을촬영한다큐멘터리를제작 방영했다.( 97.9.14) KBS 가기획하고, 북한지역촬영은조선족카메라맨이실시함으로써, 남북한과조선족 3자간의협조가이루어졌다. 1999 년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43 9월 평양에서 거행된 통일농구단의 시합이 녹화 또는 생중계방식으로 남한에 방영되었다는 점에서 방송교류의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비 록 북한이 PAL 방식으로 촬영한 화면을 NTSC 방식으로 전환해 방송했 으나 방송교류가 성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SBS 도 평양의 봉화예술극장에서 개최된 2000 년 평화친선 음악회 ( 99.12.5) 공 연 실황을 북한 조선중앙TV 를 통해 녹화, 방영 ( 99.12.10) 했다. 또한 북 한농구단의 서울경기 ( 99.12.22~15) 에 북한측 방송요원들이 합류한바 있다. 정부가 북한 위성 TV 방송의 국내 시청을 허용한다고 발표 ( 99.10.22) 한 것도 방송교류의 활성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 인다. 29) 1998 년에는 신문사들의 방북이 급증하는 특징을 보였다. 특히 동아 중앙 한겨레 등 최초로 국내 3개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이 실현되는 등 언론교류 협의 및 북한내 문화유적 답사 취재 목적 등의 방북이 성사 되었다.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가 북한지역의 문화유적 답사를 목 적으로 방북하였으며, 경향신문도 대북문화정보화사업 목적으로 사회문 화협력사업승인을 받아 한민족문화네트워크의 구성 협의차 방북하였다. 중앙일보도 남북언론교류 및 문화교류 협의차 방북하였으며, 동아일보 의 언론교류협의 및 문화유적 답사 취재협의를 위한 방북도 성사되었 다. 또한 스포츠아트 의 북한내 역사유물 및 풍물기행관련 방송영상물 제작 목적의 방북이 성사되었다. 출판분야에서의 남북교류는 부진했으며, 특히 비정치적 출판물에 대 한 수요 등 잠재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정식계약에 의한 남북출판교류 는 실현되지않고 있다. 그러나 아태위원회측은 98 년 9월 우리민족서로 29) 이에따라언론사는북한위성 TV 방송을독자적으로수신, 활용할수있게되었고, 일반인들은접시안테나와컨버터를설치하면북한방송을볼수있게되었다. 또통일부산하통일교육원과북한자료센터등에북한방송수신시설을갖추어놓고일반인들에게개방키로했다. 그러나북한 TV 방송내용을녹화해이적목적을갖고유포할경우국가보안법에따라처벌받으며, 언론사들은정부가만든 언론사내북한방송수신및활용지침 에따라북한방송활용을자율적으로규제한다. 북한은난시청해소와체제선전등대외홍보를위해 99 년 7 월 2 일부터태국의타이콤 -3 호위성을이용해조선중앙 TV 의위성방송을시작했다.

44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돕기운동측에의학과과학기술서적등의전문서적을보내주면북한저서를제공하겠다는의사를전달하는등도서교류에적극적인태도를보였다. 이에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한국출판협동조합, 경인여자대학등은 남북한도서교류캠페인추진본부 를결성하여과학기술분야등의전문서적을수집한바있다. 향후역사 문화분야등에서의교류 협력가능성은크다고할수있다. 마. 체육분야 1989 년 6월이후 1999 년 10 월말현재까지체육분야에서의남북한주민접촉이성사된건수는체육 58 건 (518 명 ) 이다. 체육분야의남북왕래교류로는 남북통일축구대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30) 및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단일팀구성등 1990 년대초반왕래교류를비롯비교적활발한교류 협력이이루어졌다. 이와같은초기의추세는남북한당국의적극적지원에기인한면이있으며, 따라서순수민간체육교류라기보다는정부주도에의해성사된면이있었다. 그러나 1991 년 8월북한유도선수의망명으로북한측은체육분야의교류 협력에소극적, 비타협적자세를견지해왔다. 또한북한은경제난을이유로국제적인체육행사에불참하는경우가많아전반적으로체육분야에서의교류 협력이활성화되지못한면이있었다. 그러나 99 년현대와북한의아태평화위원회는남북체육교류의활성화와관련, 평양에실내체육관을건설하기로합의하였고, 현대농구단의방북및북한선수단의서울경기가실현되었다. 이와같은체육교류는현대와북한측간에정례화및향후확대키로합의한상태여서남북체육교류는새로운국면에접어들고있는것으로보인다. 1993 년 10 월평양에서개최된 제7차동아시아경기대회협의회총회 30) 정부는 1991 년 3 월남북탁구단일팀구성및대회참가를협력사업으로승인하여경비일부를남북협력기금에서지원하였다. 이는 남북교류에관한법률 및 남북협력기금법 에의거한남북간최초의협력사업이었다.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45 에 KOC 명예총무등이참석한바있으나대체로방북을통한체육인교류는부진했다. 제3국개최체육행사를통한남북체육인간의접촉은 1995 년 9월의 세계군인체육대회, 1996 년 8월의 윌리암죤스배국제농구대회 등에서지속적으로이루어져왔으며, 최근점차확대되는추세에있다. 1997 년의경우대한산악연맹관계자들이베이징에서북한등산협회암벽등반교육및대회를참관 (7.19~28) 했으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 영국맨체스터, 97.4.24~5.5) 에서남북한여자탁구선수단간의접촉이이루어졌다. 1998 년 9월에는일본에서열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와 12 월태국에서열린아시안게임에북한이참가함으로써남북체육인간의접촉이이루어졌다. 1999 년의체육교류는 90 년이후처음으로왕래교류가이루어지는등내용면에서큰발전을이루었다. 특히현대의남녀농구단이방북 ( 99.9.28~29) 하여평양에서남북친선농구대회인 통일농구경기대회 를가졌으며, 이에대한답방형식으로북한측농구단이서울에서경기를가졌다.( 99.12.22~25) 31) 북한측선수단에는평양교예단이합류하여, 경기막간에공연을가졌다. 남북이상호방문형태의체육교류를가진것은지난 90 년 10 월서울에서남북통일축구를개최한후처음으로체육교류 협력에있어새로운전기를마련한것으로평가되고있다. 남북은이번경기를시작으로농구외에도축구, 배구, 탁구등체육교류종목수를확대해정례적인남북친선교환경기를개최키로했다. 통일농구대회는방북일변도로추진되던남북한의교류 협력이양방교류형태로전환될수있는가능성을열어놓았다는점에서도중요한의미를지니고있다. 또한평양교예단공연및남북한간의중계등체육교류가다른사회문화교류와연계발전될수있는가능성을보여주었다. 남북왕 31) 북측 방문단은 송호경 아 태평화위부위원장을 비롯, 관계자 8명, 우뢰 ( 남자 )- 회오리 ( 여자 ) 농구선수단 38 명, 교예공연단 14 명, TV 중계요원 2명등모두 62 명으로구성되었으며, 남 북혼합팀경기와남 북통일농구대회를가졌다. 북 한측 인사의 서울방문은 93 년 서울에서 열린 두만강개발계획 (TRADP) 자원 환경분야 전문가 회의에 북한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과장이 참가한이후 처음이다.

46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래체육교류의성사에이어남북한간을연계하는국제자동차경주대회가구체적으로추진되어체육교류의새로운가능성을보여주고있다. 32) 체육계간의교류는아니었으나민주노총이평양에서통일염원남북노동자축구대회에참가 ( 99.8.16) 하였는바, 분단이후남북노동자간의첫축구대회를가졌다는점에서의미가있다. 또한정몽준대한축구협회장겸국제축구연맹 (FIFA) 부위원장은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초청으로방북 ( 99.11.15~18) 하여 2002 년월드컵축구북한분산개최와남북축구교환경기및다이너스티컵국제대회를대체할극동 4개국대회창설등주요관심사를논의했다. 월드컵의경우한일공동개최이유중의하나가한반도의긴장완화와평화정착이라는점이고, 북한측에서도경기가열릴수있는가능성이아직남아있기때문에실무적차원의체육교류 협력은지속적으로추진될것으로보인다. 특히남북통일농구대회의경우남북체육교류의중요한전기가될것으로보인다. 현대와북한측은통일농구를 6 개월간격으로정기전형식으로치른다는데합의한데이어타종목으로체육교류를확대키로합의한상태이다. 또양측은농구발전을위해각종기술정보와심판및지도자연수에서도남북한이상호협조키로한것으로알려졌다. 통일농구대회는현대그룹을통한순수민간차원의교류로시작됐지만대한농구협회등체육관련단체도자연히교류 협력과정에참여하게될가능성이높다. 바. 관광분야 1989 년 6 월이후 1999 년 10 월말현재까지금강산관광객을제외한관 32) '99 통일염원금강산국제랠리는 12 월 31 일부터 2000 년 1 월 3 일까지서울, 평창과북한의금강산지역에서열리게되어있었으나, 준비기간등의이유로 2000 년 5 월로연기되었다. 기획사인 우인방커뮤니케이션과한국자동차경주협회는이를시작으로향후 5 년동안금강산랠리를개최키로북한의조선아세아 태평양평화위원회와합의했으며, 통일부는 99 년 11 월이를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으로승인했다. 이대회에는국내와해외팀이참여하는국제대회로치러지게되며, 3 시간시차를두고중계된다. 남측사업자는북측사업자인조선아세아 태평양평화위원회에미화 100 만달러를대가로지불할예정이다.

부문별남북사회문화교류 협력의전개 47 광분야에서의남북한주민접촉성사건수는 47 건 (145 명 ) 이다. 남북한의관광교류는 1998 년 11 월금강산관광이시작되기까지는관광을위한실무차원의접촉이대부분이었다. 이와같은제한된접촉은민간분야간의자율적인교류라기보다는정부차원의제의와조치및이와관련된사항들이었으며, 금강산관광과관련된것이많았다. 남북한간의관광협력이최초로시도된것은 1982년 2월로남한정부가북한측에설악산과금강산을자유관광지역으로조성하자고제의한것이었다. 이후 1989년 1월현대의정주영회장이방북하여북한의대성은행과 금강산공동개발계획 에대한잠정합의를발표했으나구체적인차원에서는진전이없었다.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이제정된것을계기로 1990년 10월에당시교통부는 남북관광교류추진위원회 의구성과금강산및비무장지대를관광지구로개발할것을북측에제의했다. 1991년 3 월베를린국제관광박람회에남북한대표가함께참가한바있으며, 1991 년 7월남북고위급회담시민간기업차원에서외국관광객과해외동포의남북한동시방문을위한관광상품공동개발계획이발표되었다. 1992 년 2 월남한의민간여행사들이남북한간관광상품의공동개발과외국인의북한송출추진계획을수립하였으며, 3월에는북한은평양에본사를둔재미교포합작회사인 금강산국제관광회사 를통해 92 년 5월 1일을기해남한주민에대한백두산과금강산지역관광을개방한다고발표했다. 이에교통부는 1992 년 4월남북한간의기본합의서에따라단체관광을우선적으로허용한다고발표하였다. 그러나이후 1997 년말까지관광교류 협력에관한조치나협상이이루어지지않았으며, 이때까지는순수관광목적상남북한주민의왕래는이루어지지않았다. 33) 다만 1997년이후언론방송계가방북하여관광자원의성격을띤북한의문화유산및자연경관에대한프로그램을제작하거나답사하기시작했다. 1998 년의경우사회문화교류 협력이활성화되는추세속에서 6월정주영현대명예회장이방북하여북한의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33) 김영윤, 북한의관광실태와남북한관광분야교류 협력방안, 민족통일연구원, 1997. pp. 50~53.

48 비정부기구 (NGO) 를통한남북한교류 협력증진방안연구 와유람선을통한금강산관광에합의함으로써금강산관광사업이성사되었다. 1998 년 11 월 18 일첫유람선이출항하면서북한지역에대한일반주민의관광이시작되었다. 1998 년의현대금강호및현대봉래호에이어, 1999 년 5월에는현대풍악호가취항했다. 금강산관광사업의성사는대규모일반주민들의관광목적상방북이사실상무제한적으로이루어짐을의미하기때문에사회문화교류 협력의새로운전기를마련한것으로평가된다. 현대는 1999 년 10 월북한측으로부터금강산관광사업에대한 30 년독점사용권을보장받았으며, 향후종합관광단지조성을위한투자확대를계획하고있다. 1999 년 11 월 18 일로금강산관광사업은 1주년을맞았으며, 14 만명이넘는남한사람들이금강산을관광했다. 이는냉전체제하에서는가능하지않았던천문학적숫자의주민방북이실현된것을의미한다. 특히북한측의기피로당국간대화가부진한상황에서민간차원으로추진된금강산관광사업은남북교류 협력의새로운전기를마련한것으로평가될수있다. 특히중요한사실은서해에서의군사적충돌에도불구하고금강산관광이지속되었다는점이다. 이후관광객억류사건으로 45 일간관광이중단되기는했으나과거와달리사태가비교적단기간에매듭지어졌다. 남한의경우금강산관광이중단될경우초래될정치적타격을원치않았고, 특히북한의경우금강산관광사업의수익성을외면할수없었던것으로보인다. 2. 남북한경제교류 협력 남북한간경제교류협력은 1988 년 7 7 선언 에의하여남한정부가북한과의경제교류를허용한다는방침을천명함에따라시작되었다. 이에따라남한정부는 1988 년 10 월 7일남북교역개방조치를취하였으며, 1989 년 6월 12 일대통령의특별명령으로 남북교류협력에관한기본지침 을마련하였다. 이후정부는 1990 년 8월 1일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