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강의 1- 역사
민주주의강의 1- 역사 펴낸곳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펴낸이 함세웅펴낸일 2007년 12월 31일주소 (100-785) 서울시중구정동 34-5 배제정동빌딩 B동 1~3층전화 (02)3709-7654 팩스 (02)3709-7640 http://www.kdemocracy.or.kr 유통 도서출판오름 (02)585-9122, 3 인쇄 서진인쇄 * 잘못된책은교환해드립니다.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편
책머리에 민주주의란무엇인가? 일상에서우리는 민주적 이라든지 민주주의 라든지하는용어를수없이많이사용한다. 그러나일상에서사용하는이같은용어들에대해설명하기란쉽지않다. 그만큼민주주의의의미는매우다의적이면서포괄적이다. 또한그것은매우논쟁적이기도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에서준비하고있는민주주의강의시리즈 < 민주주의강의 1: 역사 >, < 민주주의강의 2: 사상 >, < 민주주의강의 3: 제도 >, < 민주주의강의 4: 현대적조류 > 기획은여기에서출발하고있다. 즉, 우리에게매우익숙한그러나정작그구체적내용에대해서는잘알지못하는민주주의에대해이제는제대로이해하고자하는문제의식에서이같은기획이이루어진것이다. 그리고그첫결실로서 < 민주주의강의 1: 역사 > 와 < 민주주의강의 2: 사상 > 을발간하기에이르렀다. < 민주주의강의 1: 역사 > 는 2,500년에걸친민주주의의역사를크게근대이전과이후로나누어살펴보고자했다. 우선서장 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은이후각장에서서술되는근대이전과이후민주주의역사에대한요약인동시에그것을전체적으로정리한것이다. 이어제1부 근대이전의민주주의와공화정 에서는민주주의의고향이라할수있는고대그리스민주주의와고대로마공화정그리고고대
로마공화정과근대민주주의의길목에있는이탈리아도시국가들의공화정의역사를살펴보고자했다. 다음으로제2부 근대이후의민주주의 에서는 17~18세기의주요시민혁명과이를통한근대민주주의의탄생, 시민혁명이후로부터제1차세계대전에이르기까지전개되었던 19세기의서구민주주의, 제1차세계대전이후지금에이르기까지의 20세기민주주의의역사를살펴보고자했다. 또한제2부는서구에비해민주주의발전이뒤늦게이루어졌던제3세계의혁명과민주주의의현실도살펴보고자했다. 민주주의의기본적인내용에대한연구, 특히해외로부터유입된연구들은매우많다. 그러나국내에서일관성있게추진된민주주의기초연구는생각처럼많지않다. 4권으로이루어지는민주주의강의시리즈는이같은국내연구의필요성에부응하고자한다. 물론연구결과에나타난한계와문제점은전적으로연구소와필자들의책임이다. 독자들의많은관심과질정을바란다. 2007년 12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차례 책머리에 _ 5 서장 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정해구 _ 11 제 1 부 근대이전의민주주의와공화정 제1장 고대그리스민주주의 나종석 Ⅰ. 들어가는말 _ 31 Ⅱ. 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융성과발전 _ 33 Ⅲ. 펠로폰네소스전쟁과고대아테네의쇠퇴 _ 57 Ⅳ. 고대그리스도시국가의쇠퇴 _ 66 Ⅴ. 고대아테네민주주의의한계 _ 72
제2장 고대로마공화정 나종석 Ⅰ. 들어가는말 _ 81 Ⅱ. 고대로마공화정의이념과초기공화정 _ 84 Ⅲ. 고대로마공화정의전성기 _ 98 Ⅳ. 고대로마공화정의위기와몰락 _ 105 Ⅴ. 고대로마공화정의한계 _ 128 제3장 이탈리아도시국가와공화정 김종법 Ⅰ. 들어가는말 _ 137 Ⅱ. 도시국가의형성과꼬무네 (Comune) 의의미 _ 143 Ⅲ. 르네상스와도시공화정 _ 152 Ⅳ. 이탈리아도시공화정의완성 : 베네치아의사례 _ 161 Ⅴ. 이탈리아도시공화정의민주주의적의미 _ 165
제 2 부 근대이후의민주주의 제4장 시민혁명과근대민주주의의탄생 고원 Ⅰ. 들어가는말 _ 177 Ⅱ. 영국혁명과근대민주주의 _ 181 Ⅲ. 미국의독립혁명과근대민주주의 _ 197 Ⅳ. 프랑스시민혁명과근대민주주의 _ 204 Ⅴ. 시민혁명이근대민주주의발전에미친영향 _ 220 제5장 19세기서구민주주의 김동택 Ⅰ. 들어가는말 _ 225 Ⅱ. 프랑스혁명이후서구민주주의의이론적과제들 _ 230 Ⅲ. 19세기서구민주주의의형성 _ 235 Ⅳ. 사회주의와보수화된서구 _ 251 Ⅴ. 제도화된민주주의 : 정당과대의제 _ 261 Ⅵ. 보수주의의정치공학과민주주의 _ 265 Ⅶ. 부르주아민주주의의모순과한계 _ 269
제6장 20세기의민주주의 김윤태 Ⅰ. 들어가는말 _ 273 Ⅱ. 제1차세계대전이후민주주의 _ 275 Ⅲ. 제2차세계대전이후민주주의 _ 293 Ⅳ. 남유럽의민주화 : 뒤늦은민주주의혁명 _ 313 Ⅴ. 러시아와동유럽의민주화 : 공산주의의몰락 _ 320 Ⅵ. 민주화의긴여로 _ 328 제7장 제3세계의혁명과민주주의 박은홍 Ⅰ. 들어가는말 _ 339 Ⅱ. 중동정치의분열상, 아프리카사회주의의종언 _ 345 Ⅲ. 사회변혁을향한라틴아메리카의길 _ 355 Ⅳ. 아시아의다원성, 혁명의다원성 _ 364 Ⅴ. 20세기 제3세계민주주의 성찰 _ 376 색인 _ 381 글쓴이소개 _ 389
서장 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정해구 성공회대학교 I. 들어가며 20세기가끝나가면서민주주의는다시한번전세계로확산되는모습을보여주었다. 그것은이기간에비민주적체제라할수있는권위주의체제와전체주의체제들이붕괴하면서대거민주주의체제로전환되었기때문이다. 우선 20세기의 4사분기동안군부독재등다수의권위주의체제들이민주화되었는데, 1970년대중반남유럽의민주화로부터시작되어이후남미와동아시아등의다른지역으로확산되었던민주화의물결이그것이었다. 다음으로 1980년대말부터전개되었던탈냉전에즈음하여소련과동구의사회주의권이붕괴하면서국가사회주의의전체주의체제들은대거민주화되었다. 그러나민주주의의이같은세계적확산에도불구하고, 아직도민주주의체제보다더많은비민주적체제들이존재한다. 로버트달
(Robert A. Dahl) 에의하면, 1990년의시점에서전체 192개국가중다두제 ( 多頭制 : polyarchy) 의민주주의체제라할수있는국가는 65개국가에그치고있다. 물론 37개국가중 1개의국가만이다두제의민주주의체제에도달했던 1860년의현실과비교한다면, 그로부터 130년만에민주주의체제가이만큼확산된것도장족의발전이라할수있을것이다. 그런점에서민주주의는현재확산중에있는것으로보인다. 이와같은민주주의의발전과관련하여우리는민주주의의역사가근대시민혁명이후불과수백년에불과한것으로생각하는경향이있다. 현재우리가경험하고있는민주주의가그로부터시작되었기때문이다. 그러나지금과는그형태가달랐을지라도근대이전의민주주의를민주주의역사에포함시킨다면, 그역사는매우길다. 그경우 BC 5세기경그리스의도시국가에서등장했던민주주의를그첫출발로본다면민주주의역사는약 2,500년의연륜을갖고있다. 물론당시로부터지금까지민주주의가줄곧계속되었던것은아니다. 일정한기간동안발전했던고대그리스민주주의와로마공화정은이후몰락했고, 그것이새로운형태로다시등장했던것은근대에들어서였기때문이다. 우선근대이전의민주주의는고대그리스에서는민주주의 (democracy) 의이름으로, 로마에서는공화정 (republic) 의이름으로등장했고, 그것은일정기간동안그꽃을피웠다. 1) 그러나그것이몰락한이후 1) 어원상인민 (demos) 과지배 (kratia) 의합성어인민주주의 (democracy) 는말그대로 인민에의한지배 를의미한다. 이에비해 물건 이나 일 을의미하는레스 (res) 와 공공의 또는 공적인 것을의미하는푸블리크스 (publicus) 의조합어인공화정 (republic) 은 공공의일 이나 공공에속하는것 을의미한다. 이와관련하여양자의의미가동일한것은아니다. 그렇지만우리는근대이전의민주주의를살펴볼경우이두형태의정체를민주주의의맥락에서같이살펴볼필요가있을것이다. 12 민주주의강의 1- 역사
근대이전의민주주의는오랫동안그모습을감추었다. 그러나 11세기경부터이탈리아중북부에서는도시국가들이새롭게등장했는데, 그들은도시공화정의또다른모습을보여주었다. 아무튼, 근대이전의민주주의는근대민주주의와는상당히다른모습을보여주었다. 그럼에도우리는그것이정치공동체의운영에자유로운시민들의참여를보장하고그럼으로써시민스스로가통치한다는이념을발전시켰다는점에서광의의민주주의속에포함시킬수있을것이다근대이전의민주주의가대체적으로이상과같은궤적을보였다면, 근대이후의민주주의는 17~18세기에걸쳐영국과프랑스에서의시민혁명그리고미국의독립혁명등을통해그모습을드러냈다. 그러나이같은근대민주주의는그것이자본주의의발전과함께신흥계급으로등장했던부르주아에의해주도되었다는점에서자유주의적민주주의가되지않을수없었다. 이후근대민주주의의발전은기본적으로이같은자유주의적민주주의의연장선상에서일정한자격을갖춘모든시민들에게그시민권을확대하면서지금의상황에이르렀다. 물론그사이근대민주주의에위기가없었던것은아니다. 20세기에들어근대민주주의는제1차세계대전직후파시즘의도전에, 그리고 1917년러시아혁명이후확산된국가사회주의의도전에직면하지않을수없었기때문이다. 그러나그것은그러한도전을극복해냈고, 그결과그것은지금에상태에이르렀다고할수있다. 그런점에서볼때민주주의란, 비록단속적이기는했지만, 그역사는매우오래되었다고할수있다. 그런점에서민주주의의역사를살펴보고자하는이책은 2,500년의기간동안민주주의가어떻게전개되었고발전해왔는지를대략적으로살펴보고자한다. 이를위해이책은우선근대이전의민주주의와관련, 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역사 ( 나종석 ) 와고대로마공화정의역사 ( 나종석 ) 를살펴보는한편, 11세기이후발전한이탈리아중북부의도시국가들의공화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13
정 ( 김종법 ) 을살펴보고자했다. 다음으로이책은근대민주주의와관련, 17~18세기의영국과프랑스의시민혁명과미국의독립혁명을통해새롭게등장한근대민주주의의모습 ( 고원 ) 과, 이후제1차세계대전에이르기까지전개되었던 19세기서구민주주의의역사 ( 김동택 ), 그리고제1차세계대전이후지금에이르기까지의 20세기민주주의의역사 ( 김윤태 ) 를살펴보고자했다. 그리고마지막으로이책은근대민주주의의또다른모습으로서제3세계의혁명과민주주의의모습 ( 박은홍 ) 을살펴보고자했다. II. 근대이전의민주주의와공화정 지금으로부터약 2,500년전인 BC 5세기경부터근대이전의민주주의가그첫모습을드러냈는데, 고대그리스도시국가들의민주주의가그것이었다. 이와관련하여제1장의나종석의글은그리스도시국가중민주주의가가장번성했던아테네를중심으로그역사를살펴보고있다. 우선 BC 594년경솔론의개혁이있은후 BC 500년경부터약 1세기동안그꽃을피웠던아테네의민주주의는클레이스테네스 (Cleisthenes) 의개혁을거쳐페리클레스 (Pericles) 시대에들어그절정에이르렀다. 당시에아테네민주주의가이처럼발전할수있었던것은여러차례에걸친개혁조치를통해시민들이아테네의공적활동, 즉정치에적극참여할수있게되었고그럼으로써아테네통치에대한그들의자결권이강화될수있었던데에서그원인을찾을수있었다. 뿐만아니라 BC 490년대와 480~479년에두번에걸쳐치러졌던페르시아전쟁에서의승리는아테네의발전과번영을가져왔었는데, 그것은 14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시민들의정치참여를촉진시킬수있었던경제적기반을제공해주었다. 그런점에서아테네시민들의적극적인공적활동참여, 즉정치참여는아테네민주주의에서결정적으로중요한의미를지닌다. 따라서그것을가능하게만들었던주요한개혁조치들을살펴보면그것은다음과같다. 우선시민들의정치참여를결정적으로강화시켰던것은기존의 4부족을 10부족의인위적행정단위로개편했던클레이스테네스의개혁조치였다. 도시와평원그리고해안의주민들을하나의부족으로재편했던이같은행정단위개편을통해클레이스테네스는귀족과부자등명문가문들의정치적영향력을약화시켰고일반시민들의영향력은크게강화시킬수있었다. 다음으로페리클레스는아테네의공무를맡는자들에게공무수당을제공케했는데, 이같은개혁은가난한시민들이정부의공적활동에적극참여하게만드는결과로이어졌다. 또한시민배심원단제도의도입을통한사법제도의개혁도재판에대한그들의영향력을증대시켰다. 한편일련의개혁조치들을통해아테네민주주의가이같이발전하면서아테네민주주의의기본적인제도들도구축되었다. 나종석이설명하고있듯, 민회, 평의회, 장군, 집정관, 시민법정등이그대표적제도들이었다. 그러나이들제도중가장핵심적인제도는민회와이를뒷받침했던평의회였다. 민회의의제를결정하고민회소집권을가진평의회의준비하에주기적으로개최되었던민회는여기에참석한시민들의다수결에의해아테네의주요정책들을결정했기때문이다. 그런점에서민회는직접민주주의의형태로아테네의주요정책들을결정하는최고의결기구라할수있었다. 또한 10개부족에서 600명씩추첨에의해선발된 6,000명의배심원단에서그배심원을선발했던시민법정도아테네민주주의의주요한제도중의하나였다. 이와같은아테네민주주의에있어그장점은무엇보다도먼저권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15
력이자유로운시민들의손안에있었다는점, 따라서그통치에있어다수지배의원칙이관철되고있었다는점이다. 아테네민주주의를특징지었던또하나의장점은시민들이아테네의공적활동에적극참여하고, 이를통해형성된정치공동체와의일체감속에서그들이강한자부심과애국심을지니고있었다는점이다. 따라서공적인삶에대해아테네시민들이보여주었던이같은시민적덕성은아테네민주주의를지탱해주었던정신적원동력이었다. 그러나이같은장점에도불구하고아테네민주주의는그자체의한계도보여주었다. 우선아테네민주주의의시민권의범위가제한적이었다는점이다. 여성과노예그리고외국인거류민들은시민권을가지지못했다. 일정한나이에이른성인남성들만이시민권을가질수있었다. 아테네민주주의가보여주었던또하나의한계는그것이아테네도시국가의범위를넘어서도적용할수있는보편성을가지지못했다는점이다. 오히려아테네의민주주의는그발전과정에서아테네의제국화에힘입은바컸고, 그들보다열등한외부인에대한우월감에기초하고있었다. 이처럼근대민주주주의첫모습을보여주었던아테네민주주의는근 1세기에걸쳐활발하게전개되었다. 그러나그것은아테네가그리스도시국가의또다른맹주였던스파르타와전면적으로충돌했던펠로폰네서스전쟁 (BC 431~404) 이후쇠퇴하기시작했다. 그러나그무렵이탈리아반도에서는공화정의정체를갖춘로마가새롭게부상하고있었다. 이후로마의발전은이탈리아반도의정복으로, 나아가지중해연안의패권의장악으로이어졌다. 그과정에서로마와카르타고사이에는 3차 (BC 264~241, 218~201, 149~146) 에걸친포에니전쟁이치러졌는데, 포에니전쟁에서의로마의승리는로마의지중해제패의결정적인계기가되었다. 나종석은제2장의글에서이같이급속한발전의모습을보였던로마공화정의역사를살펴보고있다. 16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민주주의와관련하여우리가로마공화정의발전에있어주목할필요가있는것은그발전과정을통해귀족 (Patrici) 에대한평민 (Plebs) 의지위가점차강화되었고, 그것은일련의법들을통해평민의시민권확대로제도화되었다는점이다. 이와관련하여원래로마공화정은귀족중심의공화정이었다. 그러나주변세력과의전쟁을통해이루어졌던로마의확대는그전쟁에요구되는병력의대부분을제공했던평민의역할에의존하지않을수없었다. 귀족과의투쟁에있어평민이그들의지위를강화시킬수있었던것은평민이수행했던바로이같은역할때문이었다. 또한상공업방면에진출하여귀족들에버금가는경제력을갖춘부유한평민들의등장도평민의지위향상에기여했다. 그러나평민의지위가강화되어그시민권이확대되었다할지라도, 로마공화정이보여주었던또하나의장점은그것이혼합정적인성격을띠고있었다는점이다. 즉나종석이적절히지적하고있듯, 로마공화정은왕정적요소인집정관과귀족정적인요소인원로원과민주정적인요소인민회및호민관간에상호견제와균형을통해그안정을도모했던정체였다. 뿐만아니라로마공화정의이같은혼합정적안정성은로마공화정의또다른특색들이었던법에의한통치에의해, 그리고개인의사적이익보다로마의공적이익을더우선시했던시민적덕성에의해보완되었다. 따라서로마공화정은그내부의귀족과평민의갈등에도불구하고그갈등을넘어통합을이루수있었던공화정의장점을지니고있었다. 그러나로마공화정이보여주었던이같은장점은포에니전쟁이후약화되었다. 그것은다른무엇보다도전쟁의결과급속히악화되었던귀족과평민의갈등때문이었다. 즉장기간에걸친전쟁은로마의자영농들을몰락시키고도시의빈민들은증가시켰던데반해, 그사이귀족들은노예를이용한대농장경영을확산시켰던것이다. 따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17
라서이제귀족과평민의이해는정면으로충돌했는데, BC 133년과 BC 123년에걸쳐감행되었던그라쿠스 (Gracchus) 형제의개혁시도와이에대한귀족들의반발로인한그실패는그것을단적으로보여주었다. 그러나사태는이에그치지않았다. 명문귀족들의과두체제가지속되는가운데점차격화되었던귀족과평민의갈등은결국개인적야심을가진군벌을등장시켰기때문이다. 사병적성격의강력한군대를갖춘그들의내란과권력장악은결국로마공화정의몰락과제정의등장으로이어졌다. 그리스민주주의와로마공화정의몰락이후민주주의는이후오랫동안그모습을감추었다. 그리고그로부터천년이넘는세월이흐른 11세기경이탈리아중북부에서는도시국가들이형성되기시작했는데, 그들은도시공화정의또다른모습을보여주었다. 제3장의김종법의글은이들도시공화정의구체적인모습을살펴보고있다. 이시기이탈리아중북부에서도시국가들이등장할수있었던것은중세의질서가해체되면서점차도시가발달하기시작했기때문이다. 특히십자군전쟁 (1096~1291) 의영향으로상업과무역이발달하고이로인해새로운상공업계층이등장하면서경제적인번영을구가할수있었던이탈리아중북부에서그러한현상은더욱두드러졌다. 그러나정치적으로분열되어있던당시의상황에서이탈리아의중북부의도시들은각각독립된도시자체가독립적인국가를이루는, 즉도시국가들의등장으로이어졌다. 그리고이같은도시국가들은그들나름의공화정을선보였던것이다. 이탈리아도시국가들의공화정을민주주의로볼수있는지는확언하기어렵다. 어떤점에서그공화정들은, 공화정들마다정도의차이는있었겠지만, 부유하고유력한소수의가문들이통치했던과두정에더가까웠는지도모른다. 그렇지만당시이탈리아의도시공화정들은적어도다음과같은점에서는민주주의와관련이있었다. 우선그들 18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은당시의기준으로본다면가능한한많은시민들을통치에참여시키고자했다. 또한그들은공화정의공적인삶에대한시민들의참여와그긍지를확산시켰다. 그러나다른무엇보다도당시이탈리아도시공화정들이보여주었던가장두드러진특징은그들이권력분립의혼합정의모습을보여주고있었다는점이다. 예를들어, 이탈리아도시공화정의가장대표적인사례였던베네치아의경우도제 (Doge) 는집정관에, 상원(Seneto) 은원로원에, 그리고대평의회 (Maggior Consiglio) 는민회에해당되는것으로볼수있다. 그러나몇세기동안그모습을드러냈던이탈리아도시공화정들은결국군주국들과외국의지배로살아남지못했다. 그럼에도당시이탈리아의도시공화정의전통은이후근대시민혁명발생의한배경을제공했던계몽사상에큰영향을미쳤다. 또한이탈리아도시공화정의혼합정사상은근대민주주의의권력분립론에영향을미쳤다. 몽테스키외는그대표적인사상가였다. 그런점에서과거로마공화정의맥을이었던이탈리아도시공화정은과거의그것을미래의근대민주주의로연결시켜주는역할을수행했다고할수있을것이다. III. 근대이후의민주주의 앞에서살펴보았던근대이전의민주주의가우리가현재경험하고있는민주주의와직접적으로연결되었던것은아니다. 현재의민주주의는시민혁명을통해새롭게등장했던근대민주주의의연장선상에있다. 그렇다면구체적으로근대민주주의는어떻게등장했고전개되었는가? 그것은다음과같이나누어살펴볼수있을것이다. 첫째, 근대민주주의를탄생시킨 17~18세기의주요한시민혁명은어떻게발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19
생했는가? 둘째, 시민혁명이래제1차세계대전에이르기까지서구민주주의는어떻게전개되었는가? 셋째, 제1차세계대전이후현재에이르기까지의 20세기민주주의는어떻게전개되고발전했는가? 넷째, 서구에비해민주주의의발전이뒤늦었던제3세계의혁명과민주주의의현실은어떠한가? 우선근대민주주의에관한첫글인고원의제4장은시민혁명을통해근대민주주의가어떻게탄생했는지에대해살펴보고있다. 이에따르면 17~18세기에발생했던유럽의시민혁명은다음과같은원인에의해야기되었다. 즉봉건제가해체되는가운데이루어졌던자본주의경제의발전은부르주아의신흥계급을부상시켰고, 이렇게부상한그들은그들의주도하에절대군주제의구체제에대항하는시민혁명을일으키기에이르렀던것이다. 물론영국과프랑스시민혁명의구체적인양상은당시두나라가처한역사적조건에따라달리나타났다. 그럼에도불구하고양국에서시민혁명을발생시켰던기본적인구조는위와같은것이었다. 구체적으로, 17세기청교도혁명 (1640~1660) 과명예혁명 (1688) 의두차례의혁명을거친영국혁명의경우그것은다음과같은모습을보여주었다. 첫째는, 농업과상업등자본주의발전이유럽의그어느나라보다도일찍이루어졌던영국에서는이에따라신흥시민계급이일찍부상했고, 그들은의회를기반으로왕과대립하게되었다는점이다. 그리고의회와왕의이같은대립은, 여기에종교적인갈등이중첩되면서청교도혁명과명예혁명의두번에걸친시민혁명으로발전하게되었다. 둘째, 혁명의결과영국의절대군주제는입헌군주제로변화되었고, 이를통해그권력을강화할수있었던의회는이후영국민주주의발전의중심이되었다는점이다. 이같이일찍이혁명의과정을거쳤던영국에비해당시프랑스의절대군주제는오히려더강화되는모습을보였다. 그런가운데루이 20 민주주의강의 1- 역사
16세는당면한재정위기를타개하기위해일백년이상이나개최되지않았던삼부회를소집했는데, 여기에서제3신분의대표들이반발하면서그것은프랑스혁명의발발로이어졌다. 그리하여 1789년에발발한프랑스혁명은그전개에있어다음과같은특징적모습을보여주었다. 첫째는, 입헌군주제의온건혁명으로부터시작된프랑스혁명은점차공화정의자코뱅 (Jacobin) 독재로까지급진화되었고, 또한이에대한반발로서테르미도르의반동을수반했다는점이다. 다음으로, 프랑스혁명은이후총재정부와집정정부를거쳐마침내는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제정으로까지이어졌다는점이다. 프랑스혁명의이같은특징을반영하듯, 이후프랑스의역사는상당기간동안입헌왕정과공화정그리고보나파르티즘사이를넘나들었다. 한편프랑스혁명직전미국에서는독립혁명이발생했다. 즉영국정부의중상주의적식민지배정책에반발하여야기되었던미국의독립전쟁 (1775~1783) 은이를통해근대민주주의체제를등장시킴으로써그혁명적성격을보여주었던것이다. 이와관련하여당시에헌법제정을둘러싸고연방론과주권론간에대립이있었는데그것은, 고원이잘지적하고있듯, 공공선을강조하는공화주의철학과개인의자유를강조하는자유주의철학간의논쟁을반영하고있었다. 결국그대립은양자를절충하는선에서타협되었지만, 그것은이후에도연방과주간에권한배분을둘러싼미국특유의문제를남겨놓았다. 새롭게등장한미국민주주의의또하나의특징은그것이철저한권력분립의구조를띠고있었다는점이다. 그들은입법부와행정부그리고사법부를분립시켜그들간의상호견제와균형을도모했을뿐만아니라의회권력조차하원과상원으로분리시켰다. 이상과같이전개되었던 17~18세기의시민혁명은다음과같은내용을갖춘근대민주주의를등장시켰다. 그하나는시민혁명을통해절대군주의권한이제한되거나폐지됨으로써근대민주주의가이제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21
의회주권이나인민주권에바탕하여작동하도록만들었다는점이다. 다른하나는시민혁명을통해무엇에의해서도침해될수없는인간의기본적권리, 즉인간의존엄성과평등, 신체의자유, 재산권의신성함등이천명되었고, 따라서그것들은근대민주주의의기본적인이념과가치로서점차인정받게되었다는점이다. 다른한편, 정치제도적인측면에서도시민혁명을통해등장한근대민주주의는자신의새로운제도들을선보였다. 입헌군주제, 공화제, 의회, 그리고권력분립등이그것이었다. 그러나영국과프랑스그리고미국에서근대민주주의를탄생시킨시민혁명이발발했다해도그것은아직시작에불과했다. 따라서그것은이후더욱확산되지않을수없었고, 특히프랑스혁명은유럽에서의혁명의확산에강력한영향을미쳤다. 이와관련하여 19세기전반기에는유럽에서여러차례에걸친혁명의물결이분출되었다. 바로그런점에서그마지막물결이되었던 1848년에이르기까지 19세기의이시기는홉스봄 (Eric Hobsbawm) 이말하듯 혁명의시대 라할수있었다. 그러나혁명이확산되면서, 또한그확산속에서혁명세력의한축을이루었던급진적인노동빈민의영향력이커지면서지금껏혁명세력으로서그연대를유지해왔던부르주아와노동빈민은서로분열되지않을수없었다. 점차지배세력화되었던부르주아의입장에서급진적노동세력의성장은그만큼그들의두려움을증대시켰기때문이다. 이후 19세기는그들의지배권을유지시키고자했던부르주아등의지배세력에대해점차정치무대에진출하기시작했던대중들의압박이증대되었던시기라할수있었다. 그결과그러한압박에직면한지배세력은선거권확대의양보를통해그들을체제내화하고자했고, 따라서이를통해양자의절충이이루어졌던시기였다. 이와관련하여프랑스혁명이후제1차세계대전에이르기까지 19세기의서구의 22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민주주의를살펴보고자하는김동택의제5장의글은부르주아의자유주의와대중들의민주주의요구가절충되면서 19세기의민주주의가자유주의적민주주의, 즉자유민주주의가될수밖에없었던당시의현실을분석하고있다. 우선시민혁명을통한근대민주주의의출범에도불구하고 19세기전반기의상황에서일반시민들의선거권은매우제한적이었다. 영국의차티스트운동등대중들의운동에의해선거권이부분적으로확대되었다할지라도그것은일정한재산을가진사람들에게만선거권을제한적으로허용되었던 세금납부자선거체제 (régime censitare) 였다. 그러나그것은 19세기후반에들어더이상버티기어렵게되었다. 대중들의진출과그들의급진화의가능성에직면하여지배세력은대중들에게선거권을대폭확대해주지않을수없었기때문이다. 뿐만아니라이같은선거권확대는그들의지지를획득하기위한정당정치를강화시켰다. 그결과 19세기후반근대민주주의는보다대의민주주의적모습을갖추게되었다. 선거권확대를통해대중들을체제내화하고자했던이같은시도와더불어 19세기후반에는노동계급의사회주의운동도확산되었는데, 독일의경우그것은 1875년독일사회민주당의결성으로까지이어졌다. 당시비스마르크에의해행해졌던사회정책은이같은사회주의운동의확산에대해대중들을회유하기위한방책이라할수있었다. 그러나대중의진출과더불어그들의관심을끌었던또하나의중요한운동은민족주의운동이었다. 그리고그것은 19세기말제국주의의강화와더불어대중동원의주요한수단이되었다. 결국유럽강대국들의이같은제국주의적경쟁은 1914년제1차세계대전의발발로이어졌다. 이상에서살펴본바와같이 17~18세기시민혁명을통해등장했던근대민주주의는이후제1차세계대전에이르기까지의 19세기를거치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23
면서자유민주주의화된모습을보여주었고, 이에따른선거권의확대에바탕하여대의민주주의의정치제도를구축하기에이르렀다. 그러나제1차세계대전이후의자유민주주의는그것을붕괴시킬지도모를위기와도전에직면하지않을수없었다. 우선그것은제1차세계대전이후대공황의발생속에서등장한파시즘의도전에직면했다. 다음으로그것은제1차세계대전중발생한러시아혁명과제2차세계대전을계기로확산된국가사회주의체제의도전에직면했다. 이와관련하여김윤태의제6장의글은이같은위기와도전에직면한 20세기의민주주의가어떻게그위기와도전을극복하고그발전을이룩해낼수있었는지를살펴보고있다. 우선김윤태는제1차세계대전직후민주주의의물결이전유럽을흔들었음에도불구하고, 그로부터 20년이지난시점에서볼때왜유럽의민주정부들이대거붕괴하고그것들이독재정부나군사정부로교체되었는지를묻고있다. 그리고그러한민주주의의위기가일어난이유로서전후처리의후유증, 경제위기의충격, 사회계급의분열, 민족주의의갈등등을들고있다. 이와더불어, 그는당시의위기에도일부국가들에서민주정부가생존에성공할수있었던원인으로서국가기구와정치제도의정당성에대한평가, 경제성장과안정, 정당과정치엘리트들이대중의지지를얻을수있는능력, 다양한사회세력의균형을통한정치적안정등을제시하고있다. 당시에파시즘의부상과보수적우파세력들의도전에의해유럽의다수의민주정부들이붕괴하게되었던데에는당연히위의원인들이복합적으로작용했을것이다. 그러나문제는보다근원적인것으로보인다. 즉, 당시의민주정부들은 17~18세기시민혁명의자유주의의전통위에있었다. 그러나여기에도전했던파시즘이나보수적우파세력들은공히반자유주의적인성격을보여주고있었다. 전자의파시즘은제1차세계대전패전과대공황으로인한경제위기속에서자신 24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의사회적지위를박탈당한중간층또는중간하층의강력한대중운동을수반했던, 따라서근대적이었지만, 그성격에있어서는반자유주의적인운동이라할수있었다. 후자의보수적우파세력들은강력한대중운동을갖지못한, 그러나기존의질서를유지코자했던전통적반자유주의적세력들이었다. 따라서당시의위기는, 홉스봄이 극단의시대 에서지적하고있는것처럼극심한경제위기의상황에서파시즘과보수적우파세력들의반자유주의적도전에의해야기되었던자유주의의위기라할수있었다. 자유주의전통이강했고경제위기의정도가덜했던나라들에서비교적민주정부의붕괴가일어나지않은것은그점을증명해주고있었다. 그러나아무튼, 제2차세계대전에서연합군의승리는파시즘의도전을극복할수있는결정적계기가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에걸쳐서유럽과미국등서방세계는급속한경제발전을이루었다. 그리고그것은무엇보다도케인즈주의에따른국가의경제개입속에서이루어졌다. 또한케인즈주의에의한경제발전은자본과노동간계급타협을가능하게만들었고이에따른복지국가의구축을가능하게만들었다. 특히후자의복지국가의구축에는점진적이고온건한사회주의로서사회민주주의의역할이매우컸다. 그런점에서제2차세계대전이후의 20세기민주주의는 19세기의자유민주주의에비해상당정도케인즈주의적이고사회민주주의적인요소를수용한민주주의라할수있다. 파시즘의도전을극복하고전후상당한발전을이룩한 20세기의민주주의가직면한또하나의도전은소련을위시한국가사회주의체제의도전이었는데, 그것은미국을위시한자유민주진영과소련을위시한공산진영간의첨예한냉전적대결로나타났다. 그러나그러한대결역시 1980년대말이후소련을위시한국가사회주의체제가붕괴함으로써해소되었다. 이와관련하여사회주의권의국가사회주의체제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25
가붕괴될수밖에없었던것은경제발전이일정한수준에도달했을때더이상발전을이룰수없는계획경제의비효율성과그로인한경제의장기적인침체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냉전대결로인한과도한군비경쟁의부담도그붕괴에영향을미쳤다. 결국 20세기민주주의는제1, 2차세계대전의사이에발생했던위기에도불구하고살아남았을뿐만아니라, 파시즘의패배로인해그리고국가사회주의체제의붕괴로인해대안적인경쟁체제와의대결과경쟁에서유일한승리자가되었다. 나아가그승리는 1970년대중반에이루어졌던스페인과포르투갈의남부유럽의민주화에의해, 그리고이에뒤이어이루어졌던제3세계군부독재체제의민주화로인해더욱값진것이되었다. 이상에서우리는 17~18세기의시민혁명이후의민주주의가, 특히자유민주주의가지속적으로전개되고그발전을이루었던유럽및서방세계를중심으로근대민주주의의현황을살펴보았다. 이지역은대체적으로제1세계에속하는지역이라할수있는데, 이에비해과거사회주의권의제2세계를제외한제3세계의민주주의현실은어떠한가? 그러나제3세계가제1, 2세계의잔여범주인한, 제3세계의공통점을확인하는것은쉽지않다. 공통점이있다면그것은대체적으로다음과같은점들일것이다. 즉과거에대체적으로제국주의강대국에의한간섭이나식민지배의경험을가졌다는점, 천연( 遷延 ) 된근대화로국민국가형성과산업화그리고민주화가뒤늦게시작될수밖에없었다는점, 그리고탈식민이후제1, 2세계의냉전적경쟁속에서각국은자신의특정한진로를선택해야했다는점등이그것이다. 그런만큼제3세계를하나의범주로묶기는어렵다. 이와관련하여박은홍의제7장의글은제3세계의혁명과민주주의현실을각지역별로살펴보고있다. 26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여기에서우리가주목할것은우선제3세계다수국가들이그들의반제국주의성향때문에탈식민이후친사회주의적인혁명적민족주의의길을선택했다는점이다. 그러나바로그점으로인해그들의민주주의발전이제대로이루어지지않았을수도있다는점이다. 혁명적민족주의와민주주의는상호모순적일수있기때문이다. 더구나그들을지원했던소련을위시한사회주의권의국가사회주의체제의붕괴로인해그들의선택과그진로는방향성을상실할가능성도없지않을것이다. 다음으로우리가주목할또하나의문제는제3세계국가들에서의군부독재정권의등장과그민주화의문제이다. 탈식민이후다수의제3세계국가들에서는군부독재정권이등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이래의민주화의추세속에서그들의민주화도상당정도진행되었다. 따라서우리는이들국가들과관련, 군부독재의권위주의체제의등장과그민주화에따른민주주의의문제에보다천착할필요가있을것이다. IV. 나오며 이상에서이글은 2,500년에달하는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을간략하게살펴보았다. 그러나이같이긴역사에비해그것이실제로시행되었던기간은그리길지않다. 길어봤자그것은근대이전과이후에각각수백년을넘지않을것이기때문이다. 더구나우리가경험하고있는현재의민주주의와직접적으로연결되어있는근대민주주의의등장은 3~4백년을조금넘었을뿐이다. 이에비한다면오히려민주주의의역사속에서민주주의가시행되지않았던기간이훨씬더 서장민주주의역사와그궤적 27
길다. 그러나민주주의가시행되었던기간이길지않다할지라도, 특히근대민주주의가시행되었던기간이그리길지않더라도그발전은매우빨랐다. 17~18세기시민혁명을통해근대민주주의가등장한후그것은 19세기에자유민주주의의모습을갖추었고, 20세기에들어와서는대안적인경쟁체제와의경쟁에서승리하기에이르렀기때문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근대민주주의는그것이완성된것이라기보다오히려발전도상에있는것으로보인다. 그것은우선양적인측면에서지금도민주주의체제보다훨씬더많은비민주적인체제들이존재하기때문이다. 뿐만아니라질적인측면에서도근대민주주의는그내부에많은문제점들을지니고있기때문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세계화의추세속에서민주주의는시장과보완적이기도하지만동시에모순적이기도하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따른시장영향력의확대속에서과연민주주의가제대로발전을이룰수있을것인가? 근대민주주의는이같은문제에대해곧대답을내놓아야할것이고, 그런점에서그것은발전도상에위치해있다고할수있다. 28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제 1 부 근대이전의민주주의와공화정 제 1 장 고대그리스민주주의 나종석 제 2 장 고대로마공화정 나종석 제 3 장 이탈리아도시국가와공화정 김종법
제 1 장 고대그리스민주주의 나종석 연세대학교 I. 들어가는말 고대그리스의역사는현대인들에게도여러모로흥미를자아내는영역이다. 고대그리스문화는유대-기독교문화와더불어서구의역사를가장크게규정해왔다. 예컨대헤겔 (Hegel) 은그리스를서구인의고향으로묘사함으로써서구문화에서고대그리스가차지하는위치를분명하게표현한바있다. 1) 그리고정치, 예술, 철학등의각분야에서고대그리스가이룩한업적들은여전히많은사람들에게그매력을상실하고있지않다. 특히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역사는현대민주주의를이해하기위해서없어서는안되는분야다. 그렇다고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역사가갖고있는의미가단지현대민주주의의역사적기원이라는사실에한정되어있는것은아니다. 우리는고대아테네의민주주의역사에서현대민주주의의기원만을인식할수
있는것이아니라현대민주주의를비판적으로성찰할수있는폭넓은시야를제공받는다. 달리말하자면아테네를중심으로진행된고대민주주의의역사속에서등장하는민주주의에대한찬성과비판의입장들은민주주의를지속적으로발전시키고자하는사람들이반드시참고해야만하는수많은논쟁점들을보여준다. 그러므로고대아테네민주주의의역사는현대민주주의를보다풍요롭게만들려는데관심있는사람들의생생한대화상대자이다. 이글은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탄생과발전그리고쇠퇴및몰락의과정을서술하고있다. 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역사를살펴보는데주로아테네의민주주의역사에주목하고있다. 아테네에서그리스민주주의가가장전형적인방식으로발전되었을뿐아니라, 그에대한정보가상대적으로풍부하기때문이다. 고대민주주의의역사를살펴보면서아테네인들이민주주의의원리를어떻게이해하고있었으며그런원리들을구체적으로실현시키기위해어떤제도적장치들을형성하고자노력했는지도검토할것이다. 그리고마지막단락에서는아테네민주주의의몰락과정을간략하게다룰것이다. 이글은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문제점과한계를도외시하지않으면서도민주주의의주체인인민내지평민에대해널리유포되어있는관점에대해서비판적거리를취하고있다. 인민대중은탐욕스럽고부패하기쉬우며무능하고때로는권력욕에사로잡힌선동가들에의해쉽게조정될수있는변덕스러운존재라는입장이과거에서부터현재에이르기까지존재하고있는데, 이런입장은수용되기힘들다는것이다. 그렇다고이글의목적이인민대중이신적인무오류의존재로서무조건적으로옹호되어야한다는관점을입증하는데있는것도아니다. 아테네의일반시민이결코대중적인선동정치가가제공하는아첨에의해농락당하고그들이제공하는빵과재미있는흥밋거리에만관심을기울여결국에는국가와정치질서를파멸로이끌어가는 32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어리석은존재라는관념이일면적인것과마찬가지로, 인민이바라고그들이결정한것이바로정의로운것이라고보는관점역시일면적임을보여주고자할것이다. II. 고대그리스민주주의의융성과발전 1. 아테네민주정의발전과기본제도 1) 그리스문명의지리적조건민주주의라는말은원래고대아테네에서유래한것이다. 그럼에도다른도시국가는말할것도없이아테네의중대한정치적발전과정에대한정확한자료도많이남아있지않다. 따라서어떻게그리고언제아테네가민주정을발전시켰는가를정확하게확인하는작업은대단히어려운일이다. 토머스마틴 (Th. Martin) 은기원전 7세기후반에아테네가남자시민들에의해서이루어지는제한된형태의민주정부를확립했다고생각한다. 2) 윌리엄포레스트 (W. Forrest) 에따르면기원전 750년과 450년사이에전체그리스에서 개별적인인간의자율에대한관념, 즉한정치적사회의모든구성원들은자유롭고평등하며또누구나자신이속한사회의구조와활동들을결정하는데동등한발언권을가진다는관념 이점진적으로발전하였고, 아테네민주정은이런관념을가장완벽하게현실세계에적용하려는노력의산물이다. 3) 소수에의한지배가아니라다수에의한지배가더좋다는생각이점점더분명하게발전하게됨에따라그리스의여러도시국가들에서정치질서의커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33
란변화가발생하였다. 간단하게말하자면오랜옛날부터소수의귀족이나과두지배자들, 왕이나참주등과같은사람들에게만통치의특권을부여하였던정치질서로부터도시국가에서시민이라고불리던꽤많은수의자유로운남자성인이통치에직접참여하고통치에대한주권을행사하는체제로변화가발생했던것이다. 이런과정속에서발생한일련의새로운정치생활과행위를나타내는표현으로데모크라티아 (demokratia) 라는말이사용되었다. 이말은주지하다시피인민을뜻하는 demos 와힘이나지배를의미하는 kratia의합성어로 인민에의한지배 를뜻한다. 이런새로운정치적신념과이를실현할제도적장치들에대한모색이가장활발하게발생하였던곳은고대그리스의아테네였다. 아테네가속해있는그리스지역에는다수의도시국가들이독립적으로존재하면서다양한문화를꽃피웠다. 4) 이렇게다수의독립적인도시국가들로고대그리스문화가발전하게된이유중하나로지리적환경을꼽을수있다. 지리적조건및자연환경으로부터영향을받지않은문화는없다. 그리스지역은많은사람들이살기에는아주척박하긴하지만그렇다고극단적으로생활하기에나쁜곳은아니다. 사람들이열심히일을하면부족하지만나름대로풍족하게살수있는곳이다. 그래서인지고대그리스인들은억척스럽고강인했으며자신에게불리한자연환경을극복하기위해지적인능력을계발하는노력을게을리하지않았다고한다. 또한고대그리스인들의주된활동무대는그리스반도, 지중해주변지역및그인근의많은섬들이었다. 유럽대륙의남동쪽에위치하고있고삼면이바다로둘러싸인지형적특성으로인해, 고대그리스는해상으로부터의침략을제외하면오랫동안외부로부터의침략이나공격으로부터보호되었다. 특히그리스가본격적으로발전하는시 34 민주주의강의 1- 역사
기인기원전 8세기와 7세기에아시아로부터의대대적인침략은없었다. 이는고대그리스문명의발전을위해대단한행운이었다. 그당시아시아제국들은그리스도시국가들보다훨씬큰국가였지만이들은서로전쟁을하느라그리스로쳐들어올엄두를내지못했다. 또한발칸지역에서북부그리스로들어오는길은대단히험했기에이지역을정복하는것은대단히어려웠다. 그리스지역은발칸반도를따라북서쪽에서동남쪽으로뻗어있는험준한산맥들로인해각지역이서로분리되어있을뿐아니라내륙지역도만과해협등으로서로분리되어있어자연스럽게소규모지역공동체가발달하였다. 이지역에서경작가능한땅이약 20~30% 에지나지않았고, 이마저도밀과같은곡물을경작하기에는토질이비옥하지못했다. 그래서그리스인들은주로올리브와포도를재배하였고곡물은부족하여밖에서수입해야만했다. 그리스인들이일찍부터바다로눈을돌려해외시장및식민도시를개척한것도이런지리적조건의결과였다. 해외지역과의빈번한접촉으로그들은더발달한지역의문물, 새로운기술및사상등을받아들일수있었다. 그리하여해안지역에위치해있고해양지향적인도시국가들은그렇지못한지역보다개방적인정치제제를발전시키기좋은유리한조건들을갖추고있었다. 그렇다고고대그리스도시국가들모두가해양지향적이진않았다. 후에아테네와더불어그리스지역의대표적국가로성장한도시국가스파르타는전형적으로내륙지향적이었다. 해양지향적인도시국가의표본인아테네와내륙지향적인도시국가의표본인스파르타는여러점에서차이가있다. 스파르타는라코니아평원에자리잡고있었다. 라코니아평원은펠로폰네소스반도남동부에위치한험준한산맥들사이에남북으로비좁게펼쳐져있다. 스파르타지역사람들이라코니아인들로불리는것도그때문이다. 그런데그지역에사는사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35
람들중에서스파르타사람들만을가리킬때는라케다이모니아사람이라고했다. 왜냐하면스파르타지역을가리키는말이라케다이몬 (lacedaimon) 이었기때문이다. 스파르타도항구를갖고있긴했으나, 해류가거칠고바람도거셌기때문에해상으로적이침투하는것은거의불가능했다. 스파르타는해상활동으로부터멀어졌고육지에만관심을갖게되었다. 더구나그들은정복한사람들에게모든생산활동을떠맡김으로써스파르타시민들은전적으로군사훈련에몰두할수있었다. 그결과스파르타는그리스세계에서가장잘조직된뛰어난군대를발전시키게되었다. 그럼에도스파르타는전통적으로전쟁에나서는것을주저했다. 전쟁으로인해군대가스파르타를떠나다른지역에장기간주둔하는공백을이용하여스파르타사회의또다른주춧돌인예속민들이반란을일으킬것을매우두려워했기때문이다. 스파르타와여러점에서차이가있는도시국가아테네는그리스지역중에서도중부에서남동쪽으로뻗은작은삼각형반도인아티카지역의중심도시였다. 고대의아티카지역은상당부분이산악지대였고경작할땅이부족하여그리스지역내에서도비교적가난했다. 이는역설적으로외부침략자들이관심을갖지않게하여아테네발전에긍정적요인으로작용했다. 예를들어스파르타는노예의위치로전락한피정복민의불만이라는커다란사회 정치적문제를안고있었던데반해아테네는그렇지않았다. 물론아테네에도노예가많이존재했지만스파르타의피정복민과정복민사이의관계처럼첨예한갈등적요인을안고있지않았다. 이처럼아테네의지역적환경은외부의침략과내부갈등에서벗어나게했다. 이런요인들로인해초기아테네는비교적혼란과폭력적변화를겪지않고독립적인도시국가로성장할수있었으며, 급기야기원전 5 세기에는민주주의를활발하게발전시킬수있었다. 5) 아테네는펠로 36 민주주의강의 1- 역사
폰네소스반도지역의내륙을터전으로삼고있던스파르타와는달리일찍부터바다에대한관심이높았다. 아테네인들은경작할만한비옥한땅을많이갖고있지는않았지만, 해안을통해여러지역과교류할수있는지리적이점을갖고있었다. 아테네는지중해연안에수없 스파르타와피정복민 스파르타는라코니아지역에두종류의복속민을두고있었다. 하나는페리오이코이 (perioikoi) 라고불리는정복민들로 주변에사는사람들 이라는뜻을갖고있다. 이들은신체적으로는자유로웠지만, 스파르타인들을위해물품을제조하고교역을담당했다. 또한그들은군대에복무해야만했고세금도납부해야했지만시민권을가질수는없었다. 헬로트(helot) 라불린또다른복속민들은스파르타의노예나다름없었다. 헬로트라는말은 포로 를의미하는그리스어 heilotai 에서유래된것이다. 이들은스파르타공동체전체에소속된노예로스파르타인들을위해토지를경작하고그들에게식량을제공해야만했다. 그들의처지는대단히나빴던것으로알려져있다. 스파르타인들은해마다감독관인에포로스를통해헬로트를향해전쟁을선포하게하고이들을닥치는대로구타하고심지어죽이기까지했다. 헬로트는자연스럽게강렬한분노와적개심에불타있었다. 그들이잦은반란을일으킨것도무리가아니었다. 이렇게스파르타는내부적으로잠재적인위험을안고있었다. 더구나헬로트의숫자는스파르타인보다약 7배나되었다. 스파르타는국가의존립을위협하는헬로트들의반란의가능성에항상휩싸여있었다. 스파르타인들이마음껏착취할수있었던헬로트의경제적활동이스파르타의존립에필수조건이었기에스파르타시민들은헬로트의반란으로부터국가를지키기위해개인보다는공동체를위해생활하는독특한집단적생활방식을만들어냈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37
이산재해있던여러도시국가들과의해상교역을통해점점경제적번영을구가하게되었다. 아테네인들은해상활동을통해진취적이고개방적이고독립적인심성을발전시켜나갔다.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에활발하게해외식민지를개척했으며, 이시기에아테네는올리브와포도주를중심으로지중해지역의상업교역에서상당한지위를획득했다. 이는아테네가그리스에서가장위대한민주적정치체제를건설하고발전시키는데크게기여했다. 2) 아테네민주정의발전사고대그리스의역사를시기별로구별하면대략다음과같다. 선사시대를제외하면청동기시대를대표하는크레타섬의미노아문명과그리스본토의뮈케네문명이다. 뮈케네문명이기원전 1200~1000년사이에도리아종족의이동으로철저히파괴된후에그리스세계는암흑시대 (Greek Dark Age) 라고불리는시기에이른다. 이시기는기원전 750년에시작되는상고시대 (Archaic Age) 의개막과더불어끝난다. 상고시대는기원전 750년경에서기원전 500년경까지를포괄한다. 상고시대의뒤를잇는시기가바로그리스고전시대라불리는고대그리스문화의절정기이다. 이시기는기원전 500년경에서부터알렉산더대왕이사망한해인 323년까지를일컫는다. 그이후시대는헬레니즘시대라고불리며, 이는기원전 30년까지의그리스와근동 ( 近東 ) 의역사를가리킨다. 이시대는이집트의마지막통치자인클레오파트라의비극적죽음과함께종말을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의하면드라콘의법이제정되기이전에는중요한관직들을재산과출생을기준으로선출했다. 아테네에서의민주주의는솔론의개혁에의해본격적으로시작되었다. 솔론의개혁을시발로시작된아테네에서의민주주의제도가완성된모습을갖추었던시기는,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의개혁이시작되었던기원전 38 민주주의강의 1- 역사
508년에서부터페리클레스가시민권에대한법안을민회에서통과시켰던기원전 451년을거치는대략기원전 400년한세기동안이었다. 시민들이스스로를통치하는질서가바람직하다는이념을발전시킨것은고대아테네인들이인류에선사한위대한업적중하나이다. 고대아테네인들이지녔던민주정에대한이상이아주매혹적이라할지라도그것을그리스정치생활의실제와혼동해서는안된다. 그럼에도고대아테네인들이민주정의이상을진지하게받아들였고, 그와어울리는정치제도를완전하게구현하고자노력했다는점은잊어서는안된다. 실제로그리스인들은민주주의의원칙과이상을구체적인삶의영역에서실현시키려는지난한노력의과정을통해여러가지독창적인제도적장치들을고안해냈다. 이하에서는고대그리스민주정의기본제도들을그역사적인전개과정을통해살펴보고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기록에의하면아테네는그가아테네헌정에대한역사를기록할때까지총 11번의헌정변화를겪었다. 이온(Ion) 과그동료들이사람들을공동체로묶어네개의부족으로나눈것을출발로테세우스 (Theseus) 6) 의헌정개혁과드라콘의개혁을거쳐가난한사람과부유한사람들과의내전의소용돌이속에서등장한솔론의개혁은세번째헌정의변화에속한다. 솔론의개혁은그리스아테네가민주정으로변하는중대한출발이었다. 그후참주 (tyrannos) 인페이시스트라토스의변화를거쳐, 클레이스테네스의다섯번째의헌정개혁이단행되었다. 암흑시대를거쳐상고시대에이르러아티카의인구는급속하게팽창했고, 이와더불어빠르게성장한자유농민의사회적위상이높아졌다. 또한경제발전이지속적으로진행되면서신흥부유층이새로이등장했다. 영향력이신장된자영농민들과새로운부유층들은아테네의정치적결정에참여할수있는보다많은권한을요구하기시작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39
했다. 이는기득권을갖고있었던귀족들과의갈등으로분출되었다. 이과정을통해아테네는점차민주정으로의길을걷게된다. 안타깝게도어떤경로를통해아테네가민주주의로이행하게되었는가에대한구체적경위는알려져있지않다. 고대아테네민주주의발전의중요한분수령으로평가되는솔론의시기이전에있었던드라콘의개혁을통해우리는그당시의아테네의일반농민들이부자들에게예속된상태였음을알수있다. 당시의아테네사람들은예속노동을견디기힘들고참을수없는것으로간주했다. 단지그들이경제적으로어려웠기때문만은아니었던것같다. 그들은부자와자신들이평등하다는의식을예전에비해강하게갖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즉그당시돈과힘을갖고있었던소수의귀족들이주도하는정치체제에염증을느끼고있었다. 기원전 594년경솔론의개혁이시작되던아테네는부자와빈자사이의갈등이누적되어폭발직전에있었다. 솔론은이를극복하기위해일련의개혁을단행했다. 개혁의목적은부자와빈자간의균형과공평달성이었다. 부채탕감조치를통해채무로인해노예가되는것을금지시킨조치는솔론의중도노선을잘보여주는예이다. 이를통해재산에서의우월적지위를유지하려는기득권세력의요구와대지주들의땅을재분배해야한다는가난한사람들의요구를절충시켰기때문이다. 그리고솔론은양진영사이의권력균형을위해재산에따라주민을 4계급으로분류했다. 첫번째계급은자신의토지에서연간곡물소득을 500메딤노이 (medimnoi) 이상얻거나, 그에상응하는소득을올릴수있는시민으로구성되었다. 두번째계급은기사계급으로 300에서 500메딤노이의상당의소득을올리는시민이속했다. 이들은말을보유하고기병근무를위한무장을스스로갖출수있었다. 세번째는보병무장을스스로갖출수있는계급으로, 여기에속하는시민은연간소득이 200 40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메딤노스 (medimnos) 고대아테네에서사용된곡물측정단위. 대개 1메딤노스는곡물이 52.5리터정도의양인것으로알려져있다. 기원전 460에서기원전 400년경에연간곡물소득이 500메딤노이인경우그수입은대략 1,500드라크메 (drachmae) 정도로추정된다. 당시에 1드라크메는건강한기능인이받는 1일임금이었다고한다. 에서 300메딤노이정도였다. 연간소득이 200메딤노이이하인시민들로이루어졌던마지막계급은경제적으로최하위계층으로토지를소유하지못한사람들로이루어졌다. 집정관직이나국가감옥의감독을책임지는 11인위원회같은국가의주요한공직들은최상위계급에속하는시민들만이향유할수있었고, 최하위계급에속하는시민들은어떤공직도맡을수없었으나다만민회와재판에참여할수있는권리만은인정받았다. 솔론의개혁중사법제도의개혁도주목할만하다. 범죄가발생했을때아테네남자시민이면누구나피해자를대신하여고발할수있게하였을뿐아니라, 집정관이부당한판결을내렸다고생각하는사람은누구나민회에이를고소할권한을부여받았다. 솔론의개혁은아테네민주정의진전과정에서중요한한국면을이루었다. 그러나이개혁이아테네에민주주의를가져왔다고해석하는것은무리이다. 그의개혁은부자와빈자사이의정치적긴장을미봉시키는데그쳤다고볼수있다. 이두계층사이의이익의균형을꾀하려는솔론의개혁은양자모두를만족시킬수없었다. 솔론의개혁이후에아테네에서의정치적갈등과긴장은줄어들지않고오히려증가했다. 그가은퇴한지몇년도지나지않아시민들은분열되었고, 이는집정관을선출할수없을정도로심했다. 이런갈등이참주정의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41
등장을유리하게하였다. 대표적인참주는페이시스트라토스 (Peisistratos) 였다. 참주의등장은고대아테네사회의전반적변화와궤를같이한다.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에걸쳐진행된해외식민도시건설은화폐경제의확대와그리스의총인구및통상의급격한증대를가져왔다. 교역의확대로전통적귀족출신이아닌신흥부유층이발생했고, 인구증가및화폐경제의발달로초래된도시국가의변화는농촌의가난한계급의사회적불만을야기시켰다. 즉 농촌지역의아래로부터의불만과위로부터의신흥부유층의재력의결합은도시의귀족지배의비좁은테두리를깨뜨리고나왔다. 이런정치적긴장의소용돌이속에서바로참주정이등장하였던것이다. 7) 페이시스트라토스는아테네도시국가의정치적긴장을이용해새로운부유층과가난한사람들의지원을등에업고권력을장악하려고시도했다. 그는두번에걸친추방후에마침내기원전 546년에권력을장악하는데성공하였고, 기원전 527년에죽을때까지권력을유지하였다. 그가한일은아테네도시국가의틀의형성이라는측면뿐아니라농민의경제적자립의측면에서볼때도중요한것이었다. 도로개량공사나거대한제우스신전의건립등과같은건설사업을통해도시의직인과노동자들에게일자리를마련해주고피레우스 (Piraeus) 항을거점으로해상교통의발전을도모하기도하였다. 이외에도공공대부를통해아테네농민에게직접재정지원을단행하였는데, 이는 고전적폴리스의성립전야에그들의자율성과안정을최종적으로다져놓았다 고평가된다. 8) 페이시스트라토스가기원전 528년에죽은후아들히피아스 (Hippias) 가참주의지위를이어받았으나, 그는권력투쟁의소용돌이속에서헤어나오지못했다. 마침내히피아스의정적인알크마이온가문의사람들이스파르타와접촉하여그를권력에서축출하였다. 이로인해 42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도편추방제 (ostraksmos) 영어로는 ostracism. 위험인물을시민들의비밀투표로 10년간국외로추방한제도. 이에의해추방당한사람은 10년후에귀국할수있었다. 기원전 487년혹은 485년경에클레이스테네스가도입했던것으로전해온다. 이제도는아테네에만있었던것은아니고아르고스, 밀레토스그리고시라쿠사등지에서도시행되었다. 매해이른봄민회에서도편추방을할지여부를거수로확인한후에, 필요하다고결정될경우민주국가에위험을초래할인물의이름을도편 ( 陶片 ), 즉깨어진도자기조각에기입하는비밀투표의방식으로추방자를결정했다. 부서진도자기조각이라는단어는그리스어로오스트라콘 (ostrakon) 이었는데, 여기에서도편추방이라는제도의이름이나왔다. 가령총투표가 6천명을넘고그중가장많은표를얻은자는아테네에서추방되었다. 추방된사람의가족이나재산은전혀피해를보지않았다. 이제도의본래취지는아테네민주주의에대단히위험한사람을국외로추방함으로써민주주의를보호하기위한것이었으나, 정치투쟁의수단으로악용되어유능한정치가들이피해를보는경우도있었다고한다. 그러나이제도로인해실제로추방되었던사람은수십명에지나지않을것으로추정되며, 기원전 416년에폐지되었다. 발생한권력의공백기간동안에가장대표적인정치가는알크마이온가문의클레이스테네스와그의가장강력한정적인이사고라스 (Isagoras) 였다. 이사고라스는기원전 508년에집정관이되어스파르타와손을잡고클레이스테네스의개혁을저지하려고하였으나, 클레이스테네스와아테네시민들은이를극복하였다. 이렇게권력을확고히장악한클레이스테네스는아테네의민주적제도개혁에앞장섰다. 9) 클레이스테네스가아테네에민주주의를확고하게정착시키기위해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43
시한개혁중에서중요한것은, 우선이전의행정구역을폐지하고새로운행정단위를설정한것과기존의 400인평의회를 500인평의회로만든것그리고도편추방제 (ostraksmos) 의도입등이다. 400인평의회는솔론이아레오파고스 (Areopagos) 위원회에대한견제를위해각부족에서백명씩선출하여구성했던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는솔론의개혁이후에지속되어온혈연에기반을둔 4부족을인위적행정단위인 10부족으로변화시켰다. 부족은필레 (phylē) 라고불리었다. 새로운부족들의이름은아테네의영웅들의이름을부여받았다. 그결과재산이나귀족적특권에기반을둔명문세도가문들의정치적영향력이발휘될터전이상실되었고, 민중들의정치적참여의폭이확대될수있는기반이조성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의하면행정구역의인위적설정이의도한것은이전의부족에속한사람들을서로혼합시키고이렇게해서시민의정치적참여의몫이더확대되는것을확실하게보장하는것이었다. 행정구역의새로운설정으로오늘날의구 (ward) 나교구 (parish) 혹은읍면 (township) 에해당된다고볼수있는지역행정단위인데메스 (demes) 가등장했는데, 그수에대해서는확실한정보가존재하지않는다. 고대아테네민주정의발전에서결정적의미를지니는것으로평가되는클레이스테네스가행한행정구역의변화조치에대해좀더자세히살펴보자. 종래의혈연에기반을둔 4부족은인위적행정단위인 10부족으로그성격이바뀌게되었고, 각부족은다음과같은방식으로구성되었다. 아테네를혈연과아무관련이없는도시지역, 내륙지역그리고해안지역으로나누고, 이세지역을또각각열개로나눈뒤에이렇게해서형성된 30개지역을 트리티스 (trittys) 라불렀다. 트리티스는원래 3분의 1이라는뜻으로부족의 3분의 1을의미한다. 이 30개의지역중세개를추첨에의해골라각각의부족을만들었기때문에각부족은아테네의해안, 내륙그리고도시지역에일정한 44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몫을갖게되었다. 즉도시부근의 10개트리티스에서하나, 해안지역의 10개중에서하나그리고내륙지역의 10개중에서하나를추첨에의해선택하여 10개의부족이형성되었다. 각부족은세개의 트리티스 ( 한부족의 1/3) 를지니게되었고, 트리티스 는여기에속하는가장큰부락 (dēmes) 의이름을따라불리게되었다. 10개부족및그하부조직으로재편된아테네의행정체계는이후의아테네군편제를포함한모든공공생활의기반이된다. 클레이스테네스이후에페리클레스는아테네민주정을절정에이르게하였다. 그는클레이스테네스의조카인어머니와저명한지도자인아버지를둔명문가문에서태어났다. 그가행한민주적개혁조치들로는배심원제도, 500인평의회의원, 기타추첨에의해임명된공직자등에게국가수입으로공무수당을제공하는법안을통과시킨것등이있다. 공무수당지급으로가난한시민들도정치활동에더욱적극참여할수있는기회와계기가주어졌다. 공직에대한수당지급은아테네민주정의확대와유지를위해요구된것이기도하다. 10) 이외에도페리클레스는기원전 451년에부모가모두아테네인인자녀만이시민권을획득할수있다는법률을제안하고통과시켰다. 비록아테네여성들이정치에직접참여하는권리를얻지는못했으나, 페리클레스의시민권법률안의통과로시민권을얻기위해여성들의시민권은남성의그것못지않게중요한것으로인정받게되었다. 그는아테네의정체성을굳건히했을뿐만아니라, 아테네여성의권한도새롭게인정하였다. 3) 아테네민주정의기본제도아테네민주주의에서핵심적기능을담당했던대표적제도들은아리스토텔레스가활동하던시대의정치제도로서클레이스테네스와페리클레스의시기를거치면서기본적틀이확정된것이다. 아테네민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45
주주의의핵심적통치기구는 500인평의회 (boulē) 와시민들로구성된배심원으로운영되는법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그의저서 정치학 에서엄격한의미에서의시민을정의하면서시민의가장고유한특징을 재판운영과공직을공유하는것 에서구한것은아테네민주정의경험을반영한것이라고보아야한다. 11) 즉고대그리스아테네의민주정에서살아가는시민들은정치적영역에서공동체에중요한영향을미치는사안들에최종적의사결정권을행사하는것과동시에재판업무에참여하는것을그들의권한의본질적영역으로여겼다. 이외에도중요한것으로민회, 10명의집정관과장군들그리고 11인위원회등이있었다. (1) 민회민회에대해알아보자. 모든남자시민은일종의총회, 즉민회를구성하였고, 아테네의남자시민들은 20세가되면이총회에참가할자격을부여받았다. 12) 그리스어로민회는에클레시아 (ekklēsia), 민회에참석한의원들은에클레시아스타이 (ekklēsiastai) 혹은에클레시아존테스 (ekklēsiazontes) 라한다. 민회는아테네의최고의결기구이다. 뒤에서살펴보는바와같이 500인평의회는커다란권력을행사하였으나, 그것역시민회에의하여지지되어야만했다. 평의회를통과한안건은민회에서대체로거수투표에의한다수결로의결되는데, 이를프세퓌스마 (psēphysma, 다수표에의해통과된법안, 곧법령 ) 라한다. 외교문제, 재정, 선전포고와군사작전등나라의중대사와관련된문제를의결하며, 장군들의선발, 심지어나라의안위와관련된범죄에대한재판까지담당한기구이다. (2) 평의회 500인평의회는클레이스테네스의행정구역개혁으로정착된 10개 46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부족에서선출된다. 각부족에서 30세이상인남자시민대표 50여명씩을매년추첨에의해선출하는데, 한부족에속하는각부락은규모에따라적게는 3명에서많게는 22명을선출하게된다. 그러나같은사람이두번이상평의회의원으로선출될수는없었다. 이렇게해서도합 500명의평의회의원들이뽑히게되는데, 이들은 1년을 10으로나눈각분기동안한부족의의원들 50명이평의회의운영 ( 실무 ) 위원회 (prytaneis) 를구성한다. 당시에는음력을공식달력으로썼기때문에, 추첨에의해먼저평의회운영을맡게되는 4부족은 36일씩, 나중의 6부족은 35일씩맡게된다. 이기간 (prytaneia) 동안이들은톨로스 ( 둥근지붕의원형건물 ) 에머물며, 국가의비용으로식사도하고, 평의회와민회의업무및외교업무등을주관하게된다. 그리고그들가운데서매일한사람의대표를추첨에의해선발하게되는데, 이사람은자기가선택한한 트리티스 출신의의원들의도움을받으며 톨로스 에서 24시간당직을서고, 그날열리게되는평의회나민회의의장이되는가하면, 국세와국고및국가문서의보관업무도책임을지게된다. 평의회의원으로서의장이되는것은일생에한번뿐이다. 평의회는자체적으로어떤의안결정권을갖고있는것이아니라, 민회의투표에붙일의제또는의안들을협의하고민회의소집권을갖는기구이다. 한부족이평의회운영을맡는기간 (35~36일) 동안네차례의정규적인민회가소집된다. 물론특별한안건이있을경우에는특별민회가소집된다. 평의회의권한행사는민회의호의에의존하고있기는했으나, 평의회는자체적으로재판권을행사하여시민들을투옥시키기도하고범법자들을일반법원에기소시킬수도있었으며, 함대와병기창을자신의통제하에두었을뿐아니라, 국가재정과공공재산의관리및과세에관한통제권한을지니는등커다한권한을행사하는기구였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47
(3) 장군기원전 501/500년에새로운행정단위인 10개부족에서각기 1명씩스트라테고스 (stratēgos), 즉장군을해마다선출케했다. 이들은각기자기부족의중장비보병단과기병대를지휘하는장군들이었으며, 모두대등한지위를누렸다. 따라서전략협의는함께하고, 결정은다수결에의해확정됐던것같다. 이때만해도집정관들 (archontes) 중의한사람이었던 폴레마르코스 (polemarchos, 전쟁을지휘하는총사령관 ) 가적어도명목상으로는주도권을행사한편이었으나, 기원전 487/486 이후에는집정관들을비롯한나머지관직들이대개추첨에의해결정되었는데반해, 이들장군들은전문적능력이인정되어선거에의해선출되었으므로정치적영향력도행사하게된다. 13) 기원전 480년살라미스해전에서페르시아의대함대를격파한테미스토클레스도장군으로선출된사람이었고, 페리클레스또한기원전 443년부터 429년에전염병으로사망할때까지무려 15번이나연달아장군으로선출되었다. (4) 집정관 10명의집정관들혹은아르콘테스 (archontes) 는수석아르콘 (archon), 왕이라는뜻을지닌바실레우스 (basileus), 폴레마르코스, 6명의테모스테테스 (themosthetes) 라고불리는재판과관련된관리그리고한명의서기로이루어졌다. 14) 서기를둔이유는우선 10개부족에게동등한권한을부여하기위함이었다. 이들은모두각부족에서한명씩선출되었다. 수석아르콘은디오니시아제전과타르겔리아제전에출연할남자어른과아이들을위한부족별로뽑힌무창단지휘자들을총괄한다. 델로스제전을위한무창지휘자들을임명하고젊은이들을수송하는 30개노를가진함선의장도임명한다. 또한공적재판과사적재판도접수하여예심을한뒤재판소로넘긴다. 48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바실레우스는시민이공개투표를통해선출한감독관들과함께제식을주관한다. 신성모독과관련된고소사건및모든살인재판을접수하는일도맡는다. 15) 폴레마르코스는사냥의신인아르테미스와전쟁의신인아레스에게제사를지내고전쟁에서죽은사람들을위하여장례를주관한다. 재판과관련된 6명의아르콘은언제재판이열릴것인지를예고할권한을지닌다. (5) 시민법정아테네의재판제도는시민들로구성된배심원에의한것이었다. 즉아테네의배심원은행정단위인 10개부족에서 600명씩추첨에의해선발된 6,000명의배심원들중에서지명되었다. 배심원이될수있는자격은 30세이상의아테네남성시민들이었다. 배심원은주로 200 (201) 명또는500(501) 명으로구성되었다. 오늘날의민사소송과유사한개인간의소송사건의경우에는 200(201) 명의배심원으로구성된법원이일반적이었고, 오늘날의형사소송과유사한공소 (graphē) ( 또는 dēmosia dikē라고도함 ) 의경우에는 500(501) 명의배심원으로구성되었다. 재판에참여한사람은 3오볼로스 (obolos) 의일당을각기받은것으로알려져있다. 이는건강한사람의하루품삯에미치지못하는금액인것으로전해진다. 법원은집정관들을통제할수있는수단을지니고있었는데, 그방법은주로다음세가지였다. 첫째로법원은어떤후보자가공직에임용되기전에그를심사할권한을갖고있어, 부적절한후보자라고여겨지는경우그를결격으로판결할수있었다. 둘째로공직자는임기가끝나는무렵에그가행했던모든조치들에대한보고서를법원에작성하여제출해야했다. 마지막으로법원은모든집정관들의임기가끝난후에그들의공금운용내역에대해심사및특별회계감사를할수있었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49
그리고법원은집정관들에대한통제수단뿐아니라법에대해서도통제권을행사하였기때문에법원의지위는사실상민회와동등했다. 즉평의회나민회가내린어떤결정에대해서도그것이법률에위배된다고기소하여폐기시킬수있었다. 이렇듯평의회의활동에대한법률적판단의책임과권한을인민전체에부여하는민주적개혁조치에대해기본적으로민주정에대해회의적이고비판적인아리스토텔레스조차현명한변화라고긍정적으로평가했다. 조그만단체는큰단체에비해돈이나영향력에의해서더부패하기쉽기때문에전체인민을부패시키는것이상대적으로어렵다는것이아리스토텔레스가법원의민주적개혁조치에대해긍정적인평가를내리는이유였다. 16) 나아가시민들역시각종법률에대해법원에제소할수있었고, 제소된법률의시행이나집행은법원이판결을내릴때까지보류되었다. 2. 아테네민주제도의기본이념 그렇다면고대아테네인들은민주주의를어떤것으로이해했던것일까? 이단락에서는우선그들이이해했던민주주의의이상과연관된원칙들을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고대그리스도시국가중에서아테네의민주주의를중심으로살펴보는데에는여러이유가있다. 그중에서우선꼽을수있는점은우리가아테네의민주주의에대해비교적상세히알고있다는점이다. 다른도시국가들의정치적 사법적제도들에대한자료는아주단편적이어서전체내용을파악하기가어렵다. 또다른이유는아테네에서고대그리스인들이민주주의에대해지녔던이상과원칙들을순수한형태로만나볼수있기때문일것이다. 아테네민주주의에초점을맞춘다해도그리스인들이만들었던민 50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주주의제도의구체적인모습과민주주의를정당화시키는정치이론을연구하는작업에많은어려움이존재하는것은분명하다. 고대그리스에서민주주의가만발했던페리클레스시기와현재우리가살고있는시기사이에는 2400년이상이라는엄청난시간적간격이있기때문이다. 더중요하게지적되어야할사항은고대그리스의민주주의를옹호하는글이나저서들이거의남아있지않고, 현재우리가참고할수있는것들은대체로민주주의에비판적인태도를지녔던사상가들이남겨놓은민주주의에대한기록들뿐이라는사실이다. 고대그리스의민주주의에대한이상과원칙들에대한가장유명한주장은투키디데스 (Thucydides, BC 460~399) 의 펠로폰네소스전쟁사 에재구성되어있는페리클레스 (Pericles) 의연설과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에나오는민주주의에대한설명에서찾아볼수있다. 페리클레스의연설내용에서고대아테네시민들이자신의민주주의제도에대해어떤생각을갖고있는지에대해우리는중요한논점들을파악할수있다. 페리클레스는아테네의민주정의고유성을강조한다. 다른곳에서나온것이아닌아테네인들의창안이라는것이다. 그런창조성으로인해아테네민주정은다른국가의모델이되고있다. 다음으로그가강조하는것은민주주의의특징을아테네의모든시민들이아테네정치공동체의운영에참여할수있다는점이다. 민주주의는권력이소수에게있는것이아니라, 전체인민의손에있다는것이다. 그리고그리스시민들은개인의사생활을즐기면서타인의사생활도존중하는관용적태도를지닌다고그는강조한다. 여기에그리스아테네인들이생각하는자유에대한관념이압축적으로표현되어있음을알수있다. 자유는구체적으로무엇을의미하는가? 이에대한대답은페리클레스의연설에서보다아리스토텔레스의그리스민주주의핵심적인특징들에대한분석에서찾아볼수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고대그리스의민주주의의원칙을자유와평등에서구하면서,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51
그의미를보다상세하게다음과같이말한다. 민주적국가의기초는자유이다. 사람들의공통된견해에의하면이는오직민주적인국가에서만향유될수있을뿐이다. 이것을그들은모든민주주의의위대한목표라고단언한다. 자유의한원칙은모든사람이지배하고다시지배받는것이며, 그리고실제로민주적정의란비례적인평등이아니라수적평등의적용이다. 이로부터다수가최상이어야만한다는점과다수가승인하는것은무엇이든최종적인것이며정의로운것이어야만한다는점이결과로서나온다. [ ] 또다른자유의원칙은사람은자기좋은대로살수있어야한다는것이다. 그들[ 모든민주주의자들 : 옮긴이주 ] 은말하기를이것이자유로운사람이지니는특권인데, 왜냐하면다른한편으로어떤사람이자기뜻대로살지못하는것은노예상태의표시이기때문이다. 이것이민주주의의두번째특징이고, 여기서부터가능하다면사람들은어느누구에게도지배받지않아야하고, 이것이불가능하다면지배하면서동시에이번에는지배되어야한다는주장이나타난다. 그러므로그것은평등에기초를둔자유에기여한다. 17) 위인용문에서아리스토텔레스는지배와피지배의동일성을민주주의에서의자유의한원칙으로규정하면서, 이런자유와수적인평등관념이밀접하게연관되어있음을강조한다. 즉아리스토텔레스에의하면민주주의는민주주의적인정의관념에기초하는데, 이때의민주적정의는궁극적으로수적인평등을의미하는것이다. 즉수적인평등이존재하지않는한, 다수의지배라는관념은공허한것이다. 어떻게보면이런평등이야말로자유를가능하게하는조건이라고도볼수있다. 이런점에서페리클레스역시자신의연설에서법앞에서의모든시민들의평등을강조한후에공직임용의조건에어떤계급적 52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인차이를허용하지않고다만능력에따라결정한다고말한다. 그리고시민들이정치생활에참여할때신분이나재산상의차이에의거한어떤차이나차별도받지않는것이아테네민주주의의특성이라고강조한다. 민주주의기본원칙과이와연관된근본규정들을설명한후에페리클레스는계속하여정치활동의적극적인의의를강조한다. 정치적삶의고유성과중요성을지적한후에정치적결정에이르는방법으로서시민들의공개토의내지토론을강조한다. 시민의평등한주권적지위는민회에서의동등한발언권, 즉이세고리아 (isegoria) 의보장을통해확보된다. 달리말해시민들은민회나각종회의에서동등한발언권에의거한자유로운토론을통해서정치적사안들에대해최종적인구속력이있는결정을내린다. 자유롭고평등한시민들이토론을통해집단적구속력을지니는결정, 즉정치적결정을한다는페리클레스의신념은아테네의민주주의가일반대중의정치적능력에대한신뢰속에작동하고있음을잘보여준다. 이는아테네민주주의의특징뿐아니라, 민주주의의전제와연관해서도깊이있게고찰할필요가있는것이기도하다. 정치공동체에서시민으로서의삶이가장좋은것이고, 자신의본성을가장잘구현할수있다는아테네시민들의정치적공동체에대한참여와헌신의정신은바로정치공동체가대중들의정치적참여속에서가장잘작동할수있으며, 나아가시민의참여속에서비로소정치질서는정당성을획득할수있다는믿음을전제하는것이다. 그리고이믿음은궁극적으로일반대중이스스로를통치할수있는정치적결정능력을지니고있다는가정과연관되어있다. 민주주의가성립된이후아테네시민들에게외부의적으로부터국가를방위하는것, 내부의적으로부터법률을보호하거나법률에복종하는것, 전통적인종교의식을따르는것은권리이자의무이기도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53
했다. 폴리스, 즉도시국가의활동에서벗어난개인들의삶은원칙적으로의미가없었다. 여기에서아테네시민들에게폴리스가어떤존재였는지를좀더잘이해하게된다. 폴리스는우선공간적통일성을의미했다. 즉폴리스는시민들이거주하는영토내지영역을뜻했다. 고대그리스에서폴리스는현대의국가와비교하면아주작은도시에지나지않는다. 그래서폴리스를도시국가라고도번역한다. 소크라테스가살았던아테네는고대그리스의도시국가들중에서스파르타와더불어가장유명하다. 폴리스는공간적통일성만을의미하는것이아니라정치적공동체를의미한다. 달리말해폴리스는자유로운시민들로구성된국가라는의미를지닌다. 따라서비자유민인노예나여성들이살고있었다고할지라도엄밀하게말하면이들은폴리스의진정한구성원이라고할수없다. 하여튼폴리스가이상으로삼은것은모든자유로운시민들이통치하는민주주의였다. 그러므로폴리스의진정한의미는완전한자유와권리를갖고있는시민들의정치적활동의영역이다. 아테네인들은정치적공동체에속해서살아가는삶, 즉정치적삶을시민으로서자유인만이누릴수있는최고의가치로여겼다. 나아가정치적활동의공간인폴리스를인간의참다운본성이실현될수있는유일한영역으로간주했다. 달리말하자면정치적으로활동할자유를갖지못한인간은인간답지못한삶을살아가는존재라는것이아테네인들의생각이었다. 이런생각을가장잘표현한것이바로 인간은본성적으로정치적동물이다 는유명한아리스토텔레스의주장이다. 이주장은당시의아테네사람들이생각한인간의본성에대한믿음을가장압축적으로보여준다. 공적인생활과전적으로분리되어자신만의사적인삶을산다는것은인간에게가장중요한무엇인가가결여되어있는것으로생각했다. 18) 물론정치활동을하지않는다고그들을강제로민회나법정에참여 54 민주주의강의 1- 역사
하도록하는법률이아테네에존재했던것은아니다. 19) 그렇지만대다수의아테네인들은그런사람들을대단히경멸적인태도로대했다. 페리클레스가스파르타와의전쟁에서사망한아테네시민용사들을추도하는유명한연설에서말한것처럼, 그런사적인인간들은아무런 쓸모가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적인삶에무관심하고민회나법정에참여하여자유시민의권리이자의무를다하지않고개인의사적인활동에대해서만관심을쏟는사람을지칭하는단어가바로 이디오테스 (idiotēs) 인데, 이단어는현재영어로백치나바보를가리키는 idiot 로살아남아있다. 아테네시민들은민회나법정과같은공적인영역에참여하여자신의탁월함을발휘하는삶을최상의가치로인정했다. 그처럼시민의덕성을최상의것으로간주하는한, 선하고훌륭한시민이된다는것을선한인간이되는지름길로여겼다. 간단하게말해선한시민과선한인간은동일한의미를지닌것으로그들은생각했다. 그래서정치생활은아테네시민들에게시민생활의핵심영역이었다. 이런가치관에서자연스럽게도출되는것은정치적공동체와의일체감, 즉애국심에대한강조였다. 아테네시민들은공적책임과의무를다해국가를훌륭하게만들려는노력이개인에게는더할나위없는명예를획득하기위한노력이라는점을공유했다. 아테네인들에게시민으로서의명예로운삶을영위하는것은유한한삶에서오는죽음에대한공포를넘어서신과같은영원한불멸의삶을획득하는길이기도했다. 국가를위해헌신하고커다란공을세운위대한영웅들을신과같은존재로숭상한것은그들이지녔던가치관의자연스런표현이었다. 페리클레스는아테네인들에게 매일아테네의힘과위대함 을바라보면서 아테네에대한사랑에완전히빠질 것을권고한다. 조국에대한강한애정이없이는조국의영광을자신의영광으로생각하는것은불가능할것이기때문이다. 이렇듯아테네시민들의가치관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55
에서정치적생활에서의명예를추구하는것은조국에대한강한애정과결부되어있다. 따라서아테네시민들의도덕관에서조국애는시민들의덕들의궁극적인기초의역할을담당한다. 20) 삶과죽음에대한아테네인들의전형적인태도를페리클레스의추도연설에서엿볼수있다. 그러므로여기에모인전몰자의부모가되는사람에게애도의말씀을드리지않겠습니다. 그보다나는위로의말씀을드리겠습니다. 수많은갖가지사건을경험하며성인이된그들은지금저피안에서초연해있기때문입니다. 그리고이전몰자들처럼최상의영광으로가득찬최후를맞이하고, 여러분이바치는것과같은애도를받을수있으며, 게다가그풍요로운생애의종말도충실했던사람들이야말로행복하다고말할수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내가여러분의깊은슬픔을모르는것은아닙니다. 특히여러분의예전의자신들의기쁨을오늘이후로는남들의손안에서찾아내야할때, 여러분은수없이그추억에슬픔을느낄것입니다. 행복을모르는사람은불행도쓰라리지않지만, 오랫동안익숙했던행복을빼앗기는것은고통입니다. [ ] 요컨대내자식의생명을나라에바치지않고평등과권리를주장할수는없는것입니다. 여러분가운데나이가든분들은행복했던인생을인과응보로보고, 슬픈날이많이남지않았음을깨닫고, 죽은사람들의명예에서마음의안식처를찾기바랍니다. 다시말하면명예를사랑하는마음만이늙을줄모르기때문입니다. 누군가도말했듯이은퇴연령에있는사람은사리사욕을따르지않고명예를누리는데서오는즐거움을느낍니다. 21) 페리클레스의연설은조국에헌신하며살아가는삶에서얻는명예의충족이바로인간의삶을최고의행복으로이끈다는생각을아주잘표현하고있다. 그가말하듯이아테네인들은 명예를사랑하는마음 이영원한젊음을보장해줄것이라고생각했다. 명예에대한추구는물질적부나그로인해오는행복이나쾌락그리고궁극적으로는 56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생명에대한애착을넘어설것을요구한다. 그것들을부차적인것으로여기고자신의생명을오로지조국의영광을위해바치는삶보다더큰명예는없다고페리클레스는말한다. 이렇게영광과명예를추구하는개인들의경쟁은오로지국가의성공과결부되어있을뿐이었다. 아테네의역사가보여주듯이명예에대한추구는국가내에서의시민들사이의경쟁에국한되어있지않았다. 국가들사이에서조국의우월성을확인하는것역시조국과시민의명예에필수적인것이었다. 즉국가의성공은내적인번영뿐아니라외부세계에서의우월성의확인이었다. 그리하여고대그리스세계에서다른도시국가들보다우월하다는점을확인하기위하여국가들사이의전쟁을정상적인일로간주했다. 22) III. 펠로폰네소스전쟁과고대아테네의쇠퇴 페르시아전쟁과펠로폰네소스전쟁은아테네에게영광과몰락을가져왔다는점에서아테네의운명을결정짓는중요한사건이라고할수있다. 페르시아전쟁은당대아시아의강대국인페르시아와그리스의여러도시국가들사이의전쟁이었다. 페르시아전쟁은두번에걸쳐일어났다. 제1차전쟁은기원전 490년대그리고제2차전쟁은 480~ 479년에있었다. 전쟁의과정에서당시만해도무명이었던아테네는그리스지역의맹주로등장하게된다. 페르시아와그리스사이의전쟁은코끼리와모기떼의싸움에비유될정도로페르시아의경제력과군사력은압도적으로우세했다. 전쟁은보나마나페르시아의승리로끝날것처럼보였다. 그러나아테네를중심으로한그리스군은페르시아군에맞서용감하게싸웠다. 특히아테네인들은기원전 490년마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57
라톤전투에서결정적승리를거두어페르시아인들을퇴각하게만들었다. 불가능한것처럼보였던승리를얻은아테네는커다란자부심을갖게되었다. 페르시아가기원전 480년대규모의병력을이끌고다시그리스본토를침략했을때아테네와스파르타는서로힘을합해서페르시아군을물리치는데성공했다. 스파르타와아테네는페르시아와의전쟁에서여러도시국가들로구성된연합군을지도하는역할을번갈아가며맡았다. 그러나협력관계는페르시아전쟁이후에는지속되지못했다. 이제아테네와스파르타는그리스본토에대한주도권을확보하게위해사활을걸고경쟁하는상대가되었다. 아테네는델로스동맹이라고불리는여러국가들사이의동맹을맺어, 동맹국들사이에서지배권을형성했다. 강대해지는아테네와이에두려움을느낀스파르타의사이는점점악화되어적대적으로변해갔다. 여러좋지않은사건들을통해양국사이의긴장관계가높아져가다가기원전 431년에아테네와스파르타사이에전쟁이일어났고, 그전쟁은기원전 404년아테네의패배로끝날때까지 27년이나지속되었다. 스파르타와아테네는그리스의도시국가이고그리스지역에존재한다는공통점을갖고있지만여러가지점에서상이한국가였다. 아테네는민주주의를발전시킨대표적인도시국가인데반해스파르타는전형적인과두지배체제를정착시켰다. 원래과두제 (oligarchy) 라는용어는그리스어올리가르키아 (oligarchia) 에서파생된것으로 소수에의한지배 를뜻한다. 스파르타는종신직인두명의왕이군대를지휘하고종교적 사법적기능을행사하는등막강한영향력을행사했으나그들의권한이무제한적인것은아니었다. 스파르타에는 60세이상의노인 28명으로이루어진위원회가두왕과함께구성하는 원로회의 ( 게루시아, gerousia) 가있었다. 원로회의에서민회에제출되는정책이입안되었다. 자유로운성인남자들로이루어진민회는원로회의에서제출된정책 58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을부분적으로만수정할수있는권한을갖고있었다. 민회는원로회의가결정한정책들을그대로승인하는것이일반적이었다. 아테네와는달리민회에서토론은거의이루어지지않았으며발언자는대개 델로스동맹 (Delian League) 기원전 479년에페르시아전쟁에서승리한그리스동맹이페르시아의재침공에대비하기위해형성한해상동맹으로델로스에본부가있었기에델로스동맹이라고불리게되었다. 이동맹에는소아시아및트라키아그리고에게해의그리스도시대부분이참여했다. 처음에이동맹의지휘를맡은나라는스파르타였는데, 스파르타출신의지휘자가오만하여기원전 477년에는아테네인이동맹군사령관을맡게되었다. 그후델로스동맹은아테네에의해지도되었다. 델로스동맹국들은이론상으로는공동으로결정권을갖고정책을수립하는평의회에참여할수있었으나그것은허울에불과했다. 각동맹국은함대와선원을직접제공하거나동맹기금을분담했다. 모든동맹국대표자들이동맹금고가보관되어있는아폴론의성지델로스섬에모여해마다회의를열었다. 동맹금고는기원전 454년아테네로옮겨졌다. 기원전 449/ 448년에맺어진평화조약으로페르시아의위협이사라진뒤에도아테네는동맹유지를위해분담금을강요했고, 동맹을탈퇴하는국가에대해서는군사적인보복조치를취하기도했다. 이렇게동맹은점점아테네의제국으로변질되어갔다. 아테네가동맹국의내정에개입하여민주정을강요하고군대를주둔시키고사법권까지간섭하게되자, 동맹국들의불만이고조되었다. 기원전 404년아테네가스파르타와의전쟁에서패배한뒤동맹은해체되었다. 델로스동맹에비견되는동맹은스파르타가주도한것으로역사학자들은이동맹을 펠로폰네소스동맹 이라부른다. 이동맹에는페르시아의공격에많이노출되어있지않았던펠로폰네소스지역의도시국가들이주로참여했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59
왕이나원로회의위원들이었다. 표결은구두표결과같은환호를통해이루어졌다. 다섯명으로구성된감독관, 즉에포로스 (ephoros) 역시커다란권한을행사했다. 이들은매년선출되었고원로회의와민회의회의를주재했고혐의가있을경우왕을기소할수있었다. 이렇게성인남자들에의해민회에서선출되는감독관들은왕과게루시아의전횡을막을수있는제도적장치였다. 왕정의성격, 원로회의의귀족정의소수과두적성격그리고민회및민회에서선출되는감독관의경우처럼민주적요소를갖고있었기때문에스파르타의정치질서는흔히혼합정 (mixed constitution) 으로도간주된다. 그러나앞에서보았듯이스파르타에서민회의역할은미미했기에스파르타를소수의영향력있는귀족들이정책결정에서주도적역할을했던과두정사회라고보는것이타당할것이다. 정치체제의상이함이외에도아테네는해상을중심으로활동하는민주국가였던데반해스파르타는육지에터전을둔폐쇄적인국가였다. 도식적이긴하지만아테네는여러나라에대해개방적이었고이런개방성에대해높은자부심을갖고있었다. 반면에외국과의접촉을대단히꺼려했던스파르타는외국인과의접촉으로타락하는것을방지할목적으로스파르타인이외국에나가사는것을금지했을뿐아니라외부인들이스파르타로들어오는것을막는법률을만들었을정도였다. 23) 펠로폰네소스전쟁은그리스전역에커다란영향을끼쳤다. 당대의그리스인들에게아테네와스파르타와의전쟁은세계대전으로인식될정도로그리스전역에있는국가들이원하든그렇지않든연루될수밖에없었다. 이전쟁을통해아테네는이전에누렸던영광을상실하였을뿐아니라, 사회전반에엄청난손실을입었다. 이전쟁은아테네뿐아니라당시그리스지역의결정적전환점이되었다. 위대한역사 60 민주주의강의 1- 역사
가인투키디데스는이전쟁의의미를아주잘인식하고있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발발하자마자그는전쟁의의미가남다르다는점을인식했기에그전쟁에대한역사를쓰기시작했다고한다. 이전쟁이이전에벌어졌던모든전쟁들보다더거대하고주목할만한것이라고믿었다. 그것은당시에양쪽세력이모든면에서전쟁준비가최고로잘되어있었다는사실에서나온추론이었다. 나는나머지그리스인들이이쪽또는다른쪽편에, 즉시참여하거나혹은장차참여할계획인것을보았다. 이는이전쟁이전에그리스인들을뒤흔들었던그어떤것보다더거대한동란이자일부이방인들에게또는인류의매우많은부분에까지확장된것이었기때문이다. 24) 펠로폰네소스전쟁의원인 투키디데스에의하면아테네와스파르타와의전쟁을불가피하게만든것은아테네의힘의증가와이에대해스파르타가느끼게된두려움이었다. 그당시아테네의힘이스파르타가공포를느낄정도로현저하게성장했는지에대한역사가들의입장은다르다. 어찌됐든스파르타는아테네의힘과영향력이지속적으로성장하는것을억제할필요성을절감하고있었다. 아테네를그냥둔다면결국스파르타의동맹에위협이될것이고나아가동맹국들사이에서스파르타의주도권과영향력을약화시킬것이라고스파르타인들은생각했다는것이다. 이는스파르타가누리고있었던동맹국들사이에서의위신과명예를실추시키는것으로그치지않고스파르타의이익까지크게해칠것이라고판단했다. 이렇게공포심, 명예에대한존중그리고이익에대한관심등세가지가복합적으로작용하여스파르타는아테네와의전쟁을결정하게되었다. 투키디데스가분석하여우리에게전해주는스파르타가전쟁에돌입하게된동기인공포, 이익그리고명예는국제관계를지배하는근본동기라고해석될수있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61
투키디데스의추측은결코틀리지않았다. 이전쟁으로인해무수히많은사람들이목숨을잃었을뿐아니라, 전쟁에연루된거의대다수의도시국가들은심각한내분과내전에휩싸이게되었다. 그리스인들은그들이쌓아올린문명들을파괴하였고, 정신적으로엄청나게황폐해져갔다. 오늘날투키디데스및펠로폰네소스전쟁연구가로세계적명성을얻고있는도널드케이건은펠로폰네소스전쟁을 비극적사건이자역사의거대한전환점으로그리고그리스문명에서진보, 번영, 자신감, 희망의시대가끝이나고더어두운시대의시작 을알리는것으로평가한다. 25) 오랜전쟁을통해아테네도시국가가어떻게타락하는지는투키디데스의기록에잘나타나있다. 전쟁이얼마나인간성을타락시키는지를투키디데스는다음과같이묘사한다. 분별없는만용이충성스런용기처럼간주되었고비겁한자는심사숙고한다고둘러댔으며, 중용은사나이답지않은약자의도피처였고, 모든것을안다는자는기실아무것도할수없는자였다. 광포한힘이사내다움으로여겨졌다 [ ] 폭력예찬자가언제나신임을받았고 [ ] 파당적결속이동포적결속보다더강하였으며 [ ] 신의의맹세는신의법을지키기위해서가아니라범죄의공모를위해서였다. 26) 위에서인용된투키디데스의기록이웅변적으로보여주는것처럼전쟁은해당국가의정치적 경제적파산뿐아니라, 도덕적, 정신적파탄까지도불러온다. 국가가아무리정의롭고훌륭하다할지라도지속되는전쟁의와중에서타락하고부패하지않는국가는없다. 마찬가지로아테네는전쟁을수행하면서자신이그토록자랑하던민주주의의원칙과시민들의덕성을유지하는데점점어려움을겪게되었다. 예를들어아테네시민들의분별력은전쟁속에서점점약화되어갔고, 그에따라그들의결정은때로는대단히자의적이고즉흥적이었고때로는지나치게흥분에휩싸여내려졌다. 아테네가지속적으로 62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스파르타와전쟁을벌이면서몰락하는과정을극적으로보여주는것이미틸레네사건과멜로스사건에보여준아테네인들의대조적인반응이다. 미틸레네사건은기원전 428년에서 427년에걸쳐일어났다. 이때아테네의정치를주도한인물은니키아스 (Nicias) 와클레온 (Cleon) 이었다. 두사람은기원전 429년에죽은페리클레스의뒤를이어새롭게아테네의지도자로떠오른인물들이었다. 특히클레온은전쟁을강력하게옹호하는강경파이자선동적인정치가로알려져있다. 미틸레네는당시에부유하고인구가많은레스보스섬의주요도시였다. 미틸레네는아테네동맹국이었으나특이하게도과두정을채택하고있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이발발하기전부터아테네동맹에서탈퇴할뜻을갖고있었던미틸레네의의도는스파르타가동맹국으로받아들이는것을거부함으로써좌절되었다. 아테네와스파르타사이에전쟁이본격적으로시작되자미틸레네는레스보스섬에있는여러도시국가들을선동하여아테네에반란을일으켰다. 아테네는즉각미틸레네에군대를파견했으나미틸레네인들역시상당한군사력을갖추고있었기에쉽게진압할수없었다. 그다음해, 즉기원전 427년에아테네는미틸레네로부터항복을받아내는데성공한다. 미틸레네의반란이성공적으로진압된후인기원전 427년여름에아테네인들은미틸레네의운명을결정해야했다. 미틸레네의운명을결정하기위한민회에서중요한역할을한사람은클레온과디오도투스 (Diodotus) 였다. 첫번째민회는클레온의뜻대로진행되었다. 반란소식에대단히흥분한아테네인들은다시는다른도시국가들이아테네에반란을일으킬마음을먹지못하도록공포감을주기위해미틸레네를완전히파괴할것을주장하는클레온의제안에동의했다. 민회는미틸레네의모든남자성인들을죽이고여자와아이들은노예로삼기로결정했다. 민회의결정이내려진직후에아테네인들은미틸레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63
네에있는아테네장군에게그결정을실행에옮길것을명령하는배를보냈다. 그러나아테네인들은그결정에대해곧바로후회했고, 온건한시민들은그다음날전날내린결정을다시검토하기위한특별민회를열것을요청하였다. 다시열린민회에서디오도투스는반란을일으킨사람들뿐아니라모든성인남자들을죽이는것은민주파와과도파을구분하지않는우둔한결정이며보다온건한방법을사용하는것이아테네제국의유지에도도움이된다는요지의연설을통해극적으로민회의결정을번복하게만들었다. 민회는실제로반란을일으킨사람들만을사형시키자는제안을채택했다. 그러나문제는이미전날에미틸레네를파괴하라는명령을받고레스보스로떠난배를어떻게따라잡느냐는것이었다. 앞서내린결정을무효화하기위해아테네인들은다시삼단노선을파견했다. 하루먼저출발한배를따라잡기위해선원들은먹고자는기본적휴식도마다하고온힘을다해노를저어갔다. 그결과미틸레네인들은구사일생으로위기에서벗어날수있었다. 이이야기는아테네인들이전쟁초기에는온건했으며어느정도현명한정치적분별력을갖고있음을보여주는표본이다. 더구나미틸레네가반란을일으킨때에아테네는끔찍한재앙에직면하고있었다. 전쟁으로아티카지역은황폐해졌으며, 설상가상으로전염병때문에엄청난고통을겪는상황이었다. 페리클레스가죽은것도이전염병때문이었다. 전염병으로인해많은아테네인들이죽었고, 이과정에서심리적으로도대단히위축되어갔다. 너무나많은사람들이죽어갔지만엄청난재앙이언제사라질지모르는상황에서그들은어쩔줄몰랐다. 미래에대한모든희망을잃어버린아테네인들은죽은사람들에게보여줄최소한의인간적예의인장례식마저도제대로마련해줄수없 64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을정도로정신적으로피폐해있었다. 그들은전염병으로인한엄청난재앙속에서도시국가의법과신에대한존경심과두려움을상실해갔다. 신은무기력해보였다. 신을믿는사람이나, 그렇지않은사람이나, 선한사람이나악한사람이나, 아무차별없이죽어갔기때문이다. 미틸레네사건을처리하던시기의어려움을감안하면, 아테네인들이미틸레네인들에게보여준모습은보기드물게합리적인것이었으며그들의명성에도걸맞는것이었다. 그러나기원전 416년에멜로스인들을대할때의아테네의모습은아주달라졌다. 이때보여주었던야만성은전쟁이사람들을어떻게폭력적으로만드는가를웅변해준다. 아테네인들은힘의정치, 즉강자의이익이정의로운것이라는점에기대어아테네동맹에합류하기를거부한멜로스인들을철저하게응징한다. 아테네가주도하는델로스동맹에가입하지않고독립을유지하고있었던멜로스는펠로폰네소스남동쪽에위치한조그만도시국가였다. 정치적으로는과두정이었고아테네와스파르타와의전쟁시기에는중립을유지했다. 아테네는기원전 426년에멜로스섬을공격했으나실패한적이있었다. 10 년후, 즉기원전 416년에아테네는다시멜로스섬을포위하고, 아테네와연합할것인지아니면몰살당할것인지양자중하나를선택할것을강요했다. 그러나멜로스는항복하지않고계속하여중립을지키겠다고했다. 그러자아테네는한겨울내내멜로스섬을포위했고, 멜로스인들은굶주림과내부의배신으로인해아테네에게항복을해야만했다. 아테네는멜로스의모든성인남자들을죽이고여자들과아이들을노예로만들었다. 이후그곳에아테네인들이이주하여살게했다. 아테네는정의가곧이익이라는입장으로자신들이벌인대량학살을정당화하려고노력했다. 그러나멜로스사건은전쟁과무자비한권력정치를통해서제국의위용과이익을지키고자아테네인들이저지른야만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65
적사건으로기록되고있다. 아테네의몰락을촉진시킨것은전쟁의와중에도반복해서등장한귀족파와민주파의대립과갈등이었다. 두세력사이의긴장과대립은대단히격렬했고, 이과정에서도시국가의영광과명예그리고공동선을위해헌신하는미덕보다는파벌과개인의이익을더우선시하는심성과태도가아테네인들에게독버섯처럼번져갔다. 이렇듯아테네시민들은전쟁에지치고그과정에서현명한분별력을상실해갔을뿐아니라, 민주적인제도의원칙들을부패하게만들어그결과스파르타와의전쟁에서패배하게되었다. 아테네인들은더이상조국의생존과자유를스스로의힘으로지켜낼수없는상황에처하게되었던것이다. IV. 고대그리스도시국가의쇠퇴 펠로폰네소스전쟁이후의아테네의역사는아테네뿐아니라그리스의여러도시국가들의쇠락의역사라해도무방하다. 27) 페르시아전쟁이후그리스지역의패권을놓고서로경쟁했던아테네와스파르타는장기간지속된펠로폰네소스전쟁을벌이다가일단스파르타가패권을장악하게된다. 그러나스파르타의패권역시얼마가지못하고테베 (Thebes) 가그리스의강자로떠오른다. 테베는스파르타의패권에대해반대하는여러도시국가들의힘을결합시켜스파르타와전쟁을벌이는데, 이는코린토스전쟁 ( 기원전 395~388/7년 ) 이라불린다. 이전쟁에서스파르타는페르시아왕의지원을등에업고서야승리할수있었으나, 기원전 371년레욱트라전투에서테베에패배하여그리스의패권은테베로넘어간다. 테베의영광 66 민주주의강의 1- 역사
과패권은약 10여년동안지속되지만, 앙숙관계였던스파르타와아테네의연합군에의해기원전 362년만티네이아전투를기점으로패권국의지위를상실한다. 만티네이아전투에서힘겹게승리한테베는위대한지도자에파미논다스를잃었기때문에사실상패배한것이나다름없었다. 그뒤에도그리스에서아테네, 스파르타그리고테베등을중심으로여러도시국가들이패권을장악하기위해서로전쟁을벌이지만, 그어떤나라도주도적인강대국으로등장하지못했다. 그리스의대표적도시국가들은이런혼란상황을극복할수없었다. 도시국가들사이의패권투쟁은뚜렷한승자없이끝없이진행되었고, 각도시국가의내부역시당파투쟁으로혼란과갈등속에빠져헤어나오지못하였다. 한국가의승리는다른국가의두려움과반감을불러일으켰고, 승리한나라를견제하기위해서로협력하다가도상황이바뀌면협력은깨졌다. 각도시국가에서의내부분열역시치유불가능할정도로악화되어갔다. 승리한파벌은패배한파벌을추방하기가일쑤였고추방당한세력은권력을다시찾기위해조국의적과내통하여조국에칼을들이대는일이자주일어났다. 도시국가들사이의분열을스스로의힘으로종식시키고내부의단결과평화공존의질서를형성할수없는상황에서그리스의도시국가들은서서히몰락해갔다. 도시국가들사이의무질서와혼란이지속되는상황은외부세력의등장을유리하게해주었고, 이들의등장은다시도시국가들이오랫동안존중해온국가의독립과자치의이념을스스로의힘으로유지할수없는상황을가져왔다. 도시국가들이서로다투는좋은기회를틈타, 그리스지역에서의혼란에종지부를찍고안정과질서를가져다준세력은마케도니아였다. 기원전 359년필리포스 2세가 22세의나이로마케도니아의왕으로등극한다. 기원전 350년대에필리포스 2세는그리스의맹주로등장하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67
고, 기원전 340년대후반에그리스북부와중부의국가들을마케도니아의세력에편입시킨다. 그리스지역을평정하고마케도니아와그리스의힘을모아페르시아제국을침공하려는야심을갖고있었던필리포스 2세에대항하여아테네와테베가동맹을형성한다. 그러나기원전 338년에필리포스와그리스동맹군은카이로네아전투에서아테네와테베의연합군을물리친다. 그결과아테네와테베는자신들의내적자유를존중한다는조건으로필리포스를맹주로하는코린토스동맹에강제로가입할수밖에없게된다. 카이로네아전투는그리스역사에서아주중요한전환점으로평가된다. 그전투이후그리스국가들은외부세력의눈치를보지않고서는독자적으로대외정책을펼수없게되었기때문이다. 이전투는그리스지역에서독립국가로서활동했던도시국가들이더이상존립할수없다는점을보여주는상징적사건이되었던것이다. 이렇게그리스도시국가의역사는서서히종말을맞이하게된다. 카이로네아전투이후고대그리스의여러도시국가들은독립적지위를완전히상실하지는않았지만마케도니아의동맹국으로서의역할을수행하게되었다. 기원전 336년필리포스 2세가암살된후에그의아들알렉산더가왕위를계승하였다. 필리포스왕의사망소식에고무되어코린토스동맹을탈퇴한그리스남부국가들은알렉산더에의해다시강제로동맹에편입되었다. 마케도니아의지배에복종하지않는대가가무엇인가를보여주기위해알렉산더는기원전 335년반란을일으킨테베를멸망시켰다. 기원전 334년마케도니아와그리스의연합군을이끌고알렉산더는아나톨리아로진군했고, 그다음해에는페르시아제국전역을정복하기시작했다. 기원전 333년페르시아왕다리우스를패배시킨후이집트를정복하고기원전 331년알렉산더는나일강서쪽의해안에자신의이름을딴새로운도시를건설했다. 기원전 331년에 68 민주주의강의 1- 역사
메소포타미아북부지역에서페르시아왕의주력부대를패배시킨후에알렉산더는자신을페르시아왕을대신하는아시아의왕으로선포했다. 그는인도까지진출했다가페르시아에되돌아온후에그리스지역을군주의입장에서다스릴것이라고선언했다. 이로써그리스도시국가들의내부적인자유와외적독립은무너지게되었다. 10년이라는짧은시기에지중해를비롯하여소아시아의거의모든지역과이집트그리고북인도에걸친대제국을건설한알렉산더는기원전 323년에 33세의젊은나이로죽었다. 그러나그의뒤를이어거대제국을이끌후계자가존재하지않았다. 대제국은그를따르던장군들에게분할되었고, 그결과세개의강력한왕조가탄생했다. 안티고노스왕조는마케도니아지역을지배했고, 시리아의셀레우코스왕조는옛페르시아제국의대부분을지배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이집트와에게해의여러섬등을지배했다. 이들의위력에는미치지못했지만페르가몬왕조와로도스섬은상당히영향력있는국가들이었다. 필리포스 2세와알렉산더대왕이후그리스에는여전히아테네, 스파르타그리고테베가옛명성에는미치지못하지만표면적인독립을유지하였다. 그럼에도기원전 277년에서 225년시기의헬레니즘세계의작은국가들의독립은이집트, 시리아그리고마케도니아라는세강대국의세력균형에의해유지되는상황이었다. 헤겔이적절하게지적하고있듯이이시기의고대그리스역사에서사람들의관심을끄는것은무너져내려가는부패한국가의운명과재앙들에맞서모든노력과능력을다바쳐투쟁한인물들이다. 비극적이지만그들의온갖노력에도불구하고고대도시국가의몰락의흐름을되돌릴수없었다. 이런세계사적변화과정속에서조국의평화와질서와자유를회복하려는희망은속절없는것이었으나, 위대한개인들은큰명성을후세에남기지도못하면서투쟁속에사라져갔던것이다. 이제역사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69
의중심은그리스에서로마로흘러가는상황이었고, 고대그리스도시국가들역시로마와의접촉을피할수없었다. 흥미롭게도고대그리스와접촉할때로마가내건명분중의하나가 그리스의해방 혹은 그리스의자유와독립 이라는점이다. 고대그리스가로마와적극적으로만나게되는시점은제2차포에니전쟁시기였다. 한니발전쟁이라고도불리는로마와카르타고의제2차포에니전쟁은기원전 218년에서 201년까지지속되었다. 한니발전쟁에서마케도니아이외의그리스도시국가들은로마의동맹국들이었다. 기원전 216년칸나이전투에서로마가한니발에게대패하자마케도니아왕필리포스 5세는한니발과동맹을맺고로마와싸우기로결정한다. 로마는필리포스 5세에대항하여아이톨리아동맹및그밖의여러국가들과동맹을맺어반마케도니아연합을주도한다. 필리포스는그리스연합을분쇄하기위해네차례나전쟁을일으켰으나, 목적을달성하지못했다. 더구나그리스에서의지속적인전쟁으로인해한니발과함께이탈리아를공략하려는그의원래목적을수행할수없게되었다. 이는결국로마가한니발과의전쟁에서보다유리한위치에서게되는계기로도작용한것이다. 기원전 201년에로도스와페르가몬왕국은힘이커진필리포스 5세의마케도니아에위협을느낀나머지로마에사절단을보내자신들을도와줄것을청한다. 로마는마케도니아와전쟁을벌일것을결정하고군대를그리스지역에파견한다. 기원전 198년집정관이된티투스퀸크티우스플라미니누스 (Titus Quinctius Flamininus) 가군의지휘권을맡은후에로마군은승승장구를하고기원전 197년에테살리아의키노스케팔라이전투에서결정적승리를거둔다. 마케도니아는로마와강화조약을맺을수밖에없었고, 필리포스는그리스인들의독립과자유를승인하게된다. 그해 7월에플라미니누스는로마원로원의이름으로그리스국가들에게 영토와법률과자유를되찾아주기로결정 70 민주주의강의 1- 역사
했음을선포했다. 28) 마케도니아와평화조약을맺은후에로마는그리스지역에서철수한다. 그러나마케도니아와로마의전쟁은완전히끝난것이아니었다. 필리포스 5세의뒤를이은그의아들페르세우스 (Perseus) 가마케도니아를통치하던기원전 171년에서부터 167년에로마와마케도니아는다시전쟁을벌이게된다. 전쟁의승부를가르는전투는피드나에서있었다. 기원전 168년피드나에서대승을거둔로마는마케도니아왕국을없애고네개의독립된공화국을세웠으며왕소유의광산과영토를국유화했다. 그러나이런지배방식역시실패로돌아갔다. 기원전 149년에페르세우스의아들로자처하는안드리스쿠스 (Andriscus) 가나타나왕정의부활을선언하고나섰다. 그를제재하기위해파견된로마부대가안드리스쿠스에게패배하자로마는대규모군대를파견하여기원전 148년에마케도니아를속주로만들어마케도니아의독립을종식시켰다. 기원전 146년에코린토스와그의동맹세력들은로마에반란을일으켰고, 이를응징하기위해로마는군대를파견하여코린토스를완전히폐허로만들었을뿐아니라수많은주민을학살하고많은사람들을노예로내다팔았다. 그후로마는독립을찾으려는그리스인들의희망을완전히없애기위해아카이아동맹과대다수그리스동맹을강제해산시켰으며, 민주정을폐지하고허약한왕정이나과두정으로대체시켰다. 결국그리스는한세기뒤에로마의초대황제인아우구스투스에의해로마의속주로편입되어로마사의일부가된다. 앞에서살펴본것처럼고대그리스도시국가들은서로싸우지않고협력하여외부의적에맞서그리스의자유와독립을유지해야하는상황에서단결하지못했고끝없이외부세력을끌어들여제각기이익을추구하는행태를보여주었다. 역사가폴리비오스가지적하는것처럼그리스인들은전쟁이냐평화냐를결정할수있는권리를서로갖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71
기위해투쟁했으나, 그런내부분열의결과전쟁과평화를결정할권리는그리스민족의손에서빠져나가게되었다. 이처럼아테네를비롯하여고대도시국가들은서로의갈등을조율하여외부의적에맞서통일국가를수립하는능력을보여주지못하고, 외부세력에의해자신들이이상으로삼았던독립과자유를상실하게되는비운을맞이하게되었다. V. 고대아테네민주주의의한계 아테네민주주의는장점만을갖고있었던것은아니다. 그것은여러한계들도드러냈다. 첫째, 20세이상의아테네자유시민인성인남성만이시민권을향유했을뿐이고노예와여성그리고외국인거류민들은그런권리를부여받지못했을정도로제한적이었다. 아테네민주주의의전성기로간주되던페리클레스시기의경우노예와자유시민의비율은대략 3:2로추정되며노예인구는대략 8~10만을헤아린다. 외국인이주민혹은메틱스 (metics) 라고불리는도시국가시민과외국인사이에서태어난사람들로구성된집단도노예나여성과마찬가지로도시국가의시민권을전혀가질수없었다. 둘째, 대중들에게거의무제한적으로결정권한을부여했으나, 이로인해불가피하게발생할여러폐단을교정할수단은갖고있지않았다. 그러나우리는소수의혹은한사람에게권력이독점되는상황을염려하는것처럼인민대중에게모든권력이독점되는것도경계해야한다. 절대권력은절대부패한다 는유명한격언은권력이소수나일인에집중되었을때에만적용되는것은아니다. 기원전 406년에아테네함대를지위했던장군들의재판은일반시민이어떻게권력을남 72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용할수있는지를보여주는사례다. 그해에아테네는레스보스섬근처의아르기누사에 (Arginusae) 에서스파르타해군과의전투를벌였다. 전투에서아테네함대는승리했다. 아테네는 25척의함선을잃었지만스파르타의함선 70척을포획하거나파괴하는전과를올렸다. 그러나함대를지휘했던장군들은강한풍랑때문에아테네병사들을제대로구조하지못했을뿐아니라사망한군인들의시체를거두어오지못하는잘못을범했다. 이로인해장군들은집단으로재판에회부되었다. 재판을둘러싸고정당하지못하다는반론이제기되었다. 사실장군들을집단으로재판에회부하여그들을단죄하는것에는문제가있었다. 장군들은각자책임을지는영역에서구체적으로행동한것에의거하여재판받을권리가있었다. 시민들이흥분하고분노한상태에서장군들을한꺼번에재판할것을결정했을때, 어느한시민이그런재판은불법이라고반대하였다. 이의제기가있으면장군들의재판을연기하고우선그런재판이과연공정하고합법적인가를다시논의하고이에대한시민들의판결이나오기까지기다리는것이당시아테네법제도를따르는것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아테네시민들은재판의정당성과합법성의유무를따지는절차를거치지않고장군들을모두함께재판하자고결정했다. 장군들을한꺼번에재판에회부하는것이위법이라는주장에대해민회에참석한흥분한시민들은어느한사람의반대로 인민대중 ( 시민들 ) 이원하는것 을하지못한다는것은있을수없는것이라고소리를질러댔다고한다. 흥분상태에서위법여부를따지지않고즉석에서장군들을한꺼번에재판에회부할것일결의하고, 그결과장군들은모두처형되었다. 이는스파르타와전쟁중에있는아테네의운명에치명적인결과를가져왔다. 유능한장군들을한꺼번에처형함으로써아테네는전력에서큰손실을입었기때문이다. 셋째, 아테네민주주의는다른민족이나국가들에대해지나치게배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73
타적이었고, 우월의식을지니고있었다. 다른문화권에대한그리스인들의독선적태도는그들이외의모든사람들과문명을야만인내지야만으로간주하는것에서아주극명하게드러난다. 타문화권에사는사람들에대한그리스인들의우월의식은민주주의자냐귀족주의자냐에관계없이널리퍼져있었다. 예를들어헤로도토스 (Herodotos) 는페르시아전쟁을서술한그의책 역사 에서전제군주에게복종하여살아가는이방인에비해그리스인들은자유인이라는점에서우월하다고강조한다. 이런우월의식을우리는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에서도발견할수있다. 그는야만인과노예를본질적으로동일한것으로간주하면서, 그리스인들이야만인들을지배하는것은당연하다고강조한다. 또 정치학 제3권에서그는야만인들은성격에서헬라스인들에비해더노예적이기에전제정의상태에서살아가면서도아무런굴욕을느끼지않는다고말한다. 간단하게말해그리스인들이외의다른이방인들, 그들에게야만인이나다름없는이방인들은본성적으로노예들에지나지않는다고생각했다. 넷째, 아테네민주주의의성공이제국으로의팽창과밀접하게연결되어있다는점이지적되어야한다. 아테네민주주의의상징인페리클레스또한아테네제국을 독재 ( 참주 ) 로부르면서아테네가제국으로의길을걷게된것이잘못인지모른다는후회의말을남긴것으로알려져있다. 아테네의역사를이해할때, 정치적안정의필연적조건으로서제국으로의팽창이요구되었다는사실을간과해서는안된다. 가난한시민들의정치적참여로아테네민주주의를절정에이르게한시기에가장가난한계층에속하는시민들은국가가부여하는수당을받으며주로수병으로활동했다. 이렇게하여그들은정치활동에참여할수있게되었고, 이는시민들사이의긴장요소를줄여시민들의화합에도긍정적기여를하였다. 그런데이를위해서요구되는막대한경제적비용은바로아테네의해외팽창으로충당되었던것이다. 74 민주주의강의 1- 역사
그래서스파르타와의전쟁중에아테네민회에서페리클레스는아테네가제국의길을걷게된것이도덕적으로올바르지않을수도있다는말을하면서도아테네가그리스에서누리는주도권을상실한다는사실또한아테네에대단히위험한결과를초래할것임을덧붙일수밖에없었던것이다. 아테네의민주주의가안고있었던문제점들에도불구하고아테네시민이이상적으로간주했던 정치적삶 의중요성이부정되어서는안될것이다. 아테네인들이훌륭한삶의전형으로생각한 훌륭한시민의이상 은현대사회에서도중요하다. 시민이자신의삶과공동체에영향을미치는공적사안들을스스로결정한다는민주주의적자치의이상은매우소중한것이다. 물질적풍요나소소하고안일한쾌락만을추구하거나, 시장의논리와효율성에대한거의맹목적신앙에사로잡혀있는오늘날의많은사람들에게공적인생활에대해아테네시민들이부여한중요성은커다란귀감이될만한것이다. 시장의무차별적논리가판을치는지금시장의가치만이아니라민주주의적가치와민주시민의덕성도매우소중하다는점을우리들은항상기억해야할것이다.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75
주 1) 헤겔 역사철학강의, 김종호옮김 ( 삼성출판사, 1990), 206쪽참조. 2) 고대그리스역사및아테네민주주의역사를설명하면서참조한책은토머스 R. 마틴의 고대그리스의역사, 페리앤더슨의 고대에서봉건제로의이행, 윌리엄포레스트의 그리스민주정의탄생과발전 그리고아리스토텔레스의 Athēnaiōn Politeia( 이하 아테네헌법 ) 등이다. 앞으로직접내용을인용하거나사건에대한특정한판단과관련된경우를제외하고역사적사실들을설명하면서는이들책의어디를참조했는지구체적으로언급하지않을것이다. 3) 윌리엄포레스트, 그리스민주정의탄생과발전, 김봉철옮김 ( 한울아카데미, 2001), 57쪽이하. 4) 기원전 6세기중엽그리스본토와해외에는약 1,500여개의그리스도시들이세워졌던것으로추정된다.( 페리앤더슨, 고대에서봉건제로의이행, 유재건 한정숙옮김 ( 창작과비평사, 1990), 28쪽참조 ). 5) 아테네의발전과지리적요인에대한설명을하면서참조한책은도널드케이건, 펠로폰네소스전쟁사, 허승일 박재욱옮김 ( 까치, 2006); 빅터에렌버그, 그리스국가, 김진경옮김 ( 민음사, 1991) 그리고세실모리스바우라, 그리스문화예술의이해, 이창대옮김 ( 철학과현실사, 2006) 등이다. 6) 아리스토텔레스는이온에의해형성된아테네폴리스의헌정질서를최초로개혁한인물로테세우스를꼽는다. 그러나아테네의전설에의하면테세우스는아티카의정착민들을정치적으로단결시켜아테네폴리스를창건한사람으로알려져있다. 테세우스는크레타섬에살고있었던괴물미노타우로스를패배시킨영웅으로도알려져있다. 7) 페리앤더슨, 고대에서봉건제로의이행, 앞의책, 29쪽이하참조. 8) 같은책, 31쪽. 9) 아테네에서민주주의가다른도시국가에비해확대되고유지될수있었던요인들중군사적요인역시중요했던것으로알려져있다. 예를들어나중에아테네에서중무장보병으로서스스로를무장할경제적수단이없었던시민들중최하층을이루었던계층인 테테스 (thetes) 역시해군으로복무할수있었다. 그리고아테네함대의수병을구성한테테스계층은국가로부터수당을받았다. 이런군사적역할에서차지하는하위계층의중요성은바로그들의 76 민주주의강의 1- 역사
정치적지위를상승시키는데기여하였고, 이는다시아테네민주주의를꽃피우게하는결과를가져왔다. 10) 가난한시민들의정치참여를쉽게하기위한조치인정무수당과다른재정적혜택들에대해플라톤과아리스토텔레스와같은민주정에호의적이지않은사상가들은페리클레스가아테네정부와사회를부패로이끄는첫번째조치를취했다고생각하였다. 플라톤의페리클레스에대한비판에대해서는 고르기아스 515e 참조. 페리클레스가배심원들에대한정무수당지급제를도입한것에관해아리스토텔레스역시이로인해배심원제도의질이저하되었고, 유리한판결을가져오기위해배심원에게뇌물을주는관행이발생했다고비판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헌법, chapter 27). 그러나민주정에호의적이지않았던투키디데스는페리클레스가행사한영향력의근거를그가보여준정치적판단의신중함과깊은통찰력그리고성품의청렴함에서구하고있다. 그는대중들의변덕에휩싸여그들에의해이끌리지도않았고, 또권력을유지하기위해대중들의환심을사는행위를하지도않았다고한다. 그는대중들이잘못판단할경우에그들에게경고하고그들을설득하여올바른정치적판단을내리도록하였던것이다 ( 펠로폰네소스전쟁상, 박광순옮김 ( 범우사, 1993), 198 쪽참조 ). 플라톤역시페리클레스의지도력을부인하지는않았던것으로보인다. 그는 파이드로스 에서페리클레스를모든웅변가들중에서가장최고의완전성의단계에이른사람으로묘사한다 (269e 참조 ). 11)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5a22 이하. 12) 아리스토텔레스에의하면아테네인부모에게서태어난아이들은 18 세가되어야시민명부에등록될수있다. 이시민명부에등록되는과정을그는다음과같이묘사한다. 등록시에는같은구역 ( 데메 ) 에속한사람들이선서를한후투표를했다. 첫째로이들의연령이법에의해정해진연령에도달했는가하는것이었다 ( 그렇지않은경우에는다시아이들로되돌아가게하였다 ). 둘째로입후보자가자유인신분이며법이요구하는그런부모밑에서태어난사람인지를투표했다. 그들이자유인이아니라고결정하면, 법원에항소할수있었으며, 그가속한데메는원고로서행동할 5 인을지명하였다. 만약에법원이시민명부에등록될어떤권리를지니고있지않다고결정하면, 그는국가에의해노예로팔려졌다. 그러나이소송에서승리하면, 더이상문제없이데메의일원으로등록되었다. 그리고이렇게시민명부에등록된후 2 년간의군사훈련등을거쳐 20 세에정식으로시민으로서정치적공동체에참여하여자신의권리를행사할수있게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헌법, chapter 42 참조 ) 13) 아리스토텔레스에의하면장군, 기병대장그리고그외의군사직은민회에서시민들이결정하는방식에따라서선출된다. 다른곳에서는군사직에관련된모든공직은공개투표에의해서선출된다고말한다 ( 같은책, chapter 44, 61 참조 ). 제 1 장고대그리스민주주의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