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耶古墳 硏究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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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철

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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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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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朝鮮後期의 閑良과 그 地位 李 俊 九* Ⅰ. 序 言 Ⅱ. 閑良槪念의 變動 1. 閑良의 意味範畴와 槪念 2. 閑良의 職役化 3. 閑良과 閑散 Ⅲ. 閑良의 地位 1. 法制的 地位 2. 社會的 地位 Ⅳ. 結 語 Ⅰ. 序 言 高麗末에 비로소 용어출현을 보게 된 閑良은 高麗와 朝鮮의 양대에 걸쳐 특정 계층을 지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량이 이처럼 장기간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1)는 다만 麗未鮮初의 한량을 대상으로 하였을 뿐 通時的인 고 찰이 결핍되어 있으며, 특히 조선후기 한량에 대한 연구업적은 全無한 형편이다. 기실 한량은 개념 규정이나 성격 규명에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명확한 史料가 발견 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조선후기는 용어의 빈번한 노출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관성을 결 핍하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므로 기왕의 업적들이 한량에 대한 직접적 사료보다는 부차적인 사료들을 원용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며, 필자의 연구자료 역시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필자는 기존의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조선후기의 한량을 고찰함으로써 한량에 대한 통시적 인 이해를 돕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위하여 먼저 조선후기 한량의 意味範畴와 개념 그리고 직역화 과정 등을 조선전기와 비교하여 살펴보고, 아울러 한량의 의미범주와 직역화 과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혼용되어 온 한량과 閑散의 개념을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또한 役과 叙用문제를 중심으로 한 이들 한량의 법제적 지위와, 帳籍上의 家系事例를 통하여 사회적 지위를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한량과 그 지위를 규명해 보기로 한다. * 啓明專門大學 副敎授. 1) 麗末鮮初의 閑良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論稿들이 있다. 千寬宇, 麗末鮮初의 閑良 ( 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1956; 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浜中昇, 麗末鮮初の閑良について ( 朝鮮學報 42, 1967). 韓永愚, 麗末鮮初 閑良과 그 地位 ( 韓國史硏究 4, 1969 朝鮮前期 社會經濟史 硏究, 乙酉文化社, 1983).

Ⅱ. 閑良槪念의 變動 1. 閑良의 意味範疇와 槪念 本章에서는 기존의 여말선초 한량의 개념에 관한 연구들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하여 조선후기 한량이란 용어의 의미범주와 그 語義的 개념이 어떠한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량에 관한 효시적 연구인 麗未鮮初의 閑良 에서 千寬宇氏는 여말선초 한량의 개념과 특징을 첫째, 前銜品官 및 그 신분에 속하는 자로서 비단 武人만이 아니라 文人도 이에 포 함되며, 둘째, 所任이 있는 자와 소임이 없는 자가 있으나 무릇 軍田을 분급받은 자는 馬兵 으로서 일정기간 赴京宿衛의 의무를 가지며, 셋째, 이리하여 지방의 유력자로서 비록 형식적 이나마 국가의 중대사에는 중의를 대표하는 계층의 하나를 이룬다2)고 결론지었으며, 浜中昇 氏는, 한량은 전함관 및 그와 등등한 신분에 속하며 添設官도 여기에 포함된다3)고 하였다. 그리고 韓永愚氏는 千寬宇氏의 연구와 浜中昇씨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분석 수용하고 독자적 인 연구로 이를 보충하였다. 그는 이 시기 한량의 실태를 前銜官檢校官 등 職牒만 있고 職 事가 없다는 점에서 閑散官閑良官添設官散官 등으로도 불리어진 閑良(A)와 士族 내지 부 유한 양인자제로서 군역을 기피하여 호적과 군적에 등재되지 않은 무리, 즉 職役이 없다는 점에서 閑散子弟閑良子弟閑人閑役人無役人 등으로도 불리워진 閑良(B)의 두 부류로 분류 하였다. 그리고 한량에 대한 都試에의 허락으로 말미암아 한량은 더욱 무예를 익히게 되었 으며, 이러한 경향은 활(弓)을 잘 쏘는 武士 내지 정예무사로 관념화 되었는데, 특히 中宗朝 부터는 한량에 대한 과거 응시가 공인됨으로써 武科 응시자를 한량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리하여 한량은 武人으로서의 성격을 더욱 굳혀 가게 되었다4)고 하였다. 이상에서 여말선초의 한량은 그 용어출현의 의미범주에서 볼 때, 전함관첨설관검교관한 량관한산관산관과 한산자제한량자제한인한역인무역인 등을 포괄하는 범주의 개념으로 통용되어 왔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용어라고 할지라도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 개념 은 시간의 경과로 인한 사회적 법제적 변화에 따라 개변되기 마련이므로, 여말선초의 이처 럼 포괄적 범주를 가진 한량이 조선후기 사회에서도 과연 여말선초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 을까가 의문시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후기 한량개념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여 말선초 한량의 범주에 해당하는 부류들이 과연 조선후기 한량의 의미범주에 포함되고 있는 가에 관한 用例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술한 바 여말선초의 한량(A)는 결국 전함관과 한산관으로 집약된다. 우선 벼슬을 그만 둔 사람에게 붙여진 일반적 칭호인 전함관이, 과연 조선후기 사회에서도 여말선초와 같은 한량의 범주개념으로 통용되었을까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朝鮮初에도 한량은, 세종실 록 의 其餘時行及前銜各品 至於閑良白身, 성종실록 의 皆閑良及前銜官, 以閑良及前 銜官抄送, 其閑良及前銜官 등5)과 같이 전함관과 구별되는 경우가 있었으나 소수에 불과 하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한량은 전혀 전함관을 포괄하는 범주개념으로 통용된 것이 아니라, 전함관과 완전히 구별되는 별개의 의미로만 쓰여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用例들을 보면, 2) 千寬宇, 앞의 논문 참조. 3) 浜中昇, 앞의 논문 참조. 4) 韓永愚, 앞의 논문 참조. 5) 韓永愚, 앞의 논문 pp. 40 41. 引用文 참조.

가) 無論前銜朝官出身業武武學閑良品官儒林校生軍官驛吏平民雜色有軍役人 並許抄爲白乎矣 6) 나) 勿論前銜朝官出身閑良品官儒林校生 各樣將校軍官及折衝兼司僕業武武學 並爲許抄 7) 다) 京中及各道各邑所在前銜出身閑良軍官段 減去 8) 라) 今番南征之松都馬兵 皆是精兵健騎 此辈半是出身前銜 半是武學閑良 而編於行伍9) 마) 訓鍊都監 軍官一百五十員 依前例 皆以前啣及出身帶率 而其中閑良 則只存三額 以爲勇力超衆 者入屬之地10) 바) 訓鍊都監 軍官十二(有薦出身及前啣人 每朔十七日試射 優等十人付料 兵房及掌務不試 閑良之 六兩一百三十步俱入者 亦付一窠)11) 사) 左列親軍衛 初次居首 或沒技者 嘉善則衛將除授 折衝與無薦出身並加資 將校前啣中閑良 直赴 殿試12) 등의 자료에서 가), 나)의 前銜朝官은 출신업무무학한량품관유림교생장교군관 등과 함께, 그리고 다) 바)의 前銜, 前銜人은 출신한량군관무학병방 등과 함께 각각 별개의 칭호로 쓰이고 있으며, 사)의 將校前啣中閑良 은 현임장교와 전함 중에서 원래 한량 신분인 사람을 뜻하고 있어, 결국 전함조관전함전함인은 한량과 별개의 칭호로 쓰여졌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의 전함조관전함전함인은 한량으로 불리워 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 은 곧 여말선초의 전함관에 대한 別稱이 한량한량인한산인 등으로 불리워졌으며, 때로는 한량관한량품관품관한산관산관 등으로도 불리웠던 사실13)과 비교할 때 한량의 범주개념 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閑散의 경우에 있어서도 현임 및 전함으로서의 한산은 다만 閑職 現任官 및 前銜 官으로서의 한산한 처지에 있는 한산관임을 의미할 뿐 조선후기 한량과 구별되는 별개의 것 이며, 無役無職 閑遊者로서의 한산은 조선후기 한량과 같은 의미범주로 상정되는 바 3절 에 서 상술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여말선초의 한량은 한산한 처지에 있는 전함관 및 한산관 등 을 의미하는 호칭으로 쓰여 졌으나, 조선후기의 한량은 전함관 및 한산관과 구별되는 별개 의 호칭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한량은 전함관 및 한산관에 대한 별칭이 아님을 살필 수 있 으므로 역사적 실체로서의 한량(A)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족자제 내지 부유한 양인 자제로서 군역을 기피하여 호적과 군적에 등재되지 않은 무리, 즉 무예를 익혀 활(弓) 잘 쏘 는 武士 내지 武科 응시자로 관념화하여 武人으로서의 성격을 굳혀 간 한량(B)의 존재는 조 선후기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良役확보 와 같은 국가시책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 제로 대두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6세기 중엽의 軍布制 실시 이후에는 군포부담이 兩 班과 良人身分을 확연히 구분짓는 기준이 되었는 바, 良役化된 군역부담은 곧 양인으로서의 身役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閑 과 良 이 뜻하는 한량의 語義的 이해는 한량 개념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된다 하겠다. 효종 4년에 檢討官 金始振은, 한량이 가지고 있는 良 의 의미를 특히 강조하여 한량이 賤 6) 備邊司謄錄 38책, 肅宗 10년 8월 8일조 咸鏡道親騎衛抄擇節目別單. 7) 備邊司謄錄 74책, 景宗 3년 11월 19일조 黃海兵營別武士節目. 8) 備邊司謄錄 37책, 肅宗 9년 2월 13일조 移鎭山城應行節目. 9) 備邊司謄錄 83책, 英祖 4년 4월 19일조 監護使尹淳所啓. 10) 增補文献備考 권116, 兵考 衛兵조 顯宗 甲寅 各衙門軍官定額別單. 11) 萬機要覽 軍政編 2, 訓鍊都監 員額조. 12) 正祖實錄 권38, 17년 10월 辛巳조 壯勇外營軍制節目. 13) 韓永愚, 앞의 논문 p. 36.

人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어,14) 한량의 良 은 賤 에 대한 대칭 개념으로서 혈통이 良 한 양 신분임을 시사하고 있다. 良 을 호칭 하는 양인은 그들의 身役인 良役 곧 軍役을 부담해야 하였다. 즉 인조 27년에 평양감사의 書目에 대해 兵曹는, 옛부터 擧子들은 모두 保人이라고 칭하고 감히 良 을 호칭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병조에서 군역에 충정할 것을 두려워함이다. 지금은 나라의 기강이 엉망이 되어 곧장 閑良이라고 기록하여도 병조에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 증거를 덧붙여서 답하고 있다.15) 원래 良 을 호칭하게 되면 군역에 충정하는 것 이 마땅하지만, 국가기강이 엉망이 되어 국가적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곧장 한량을 칭하게 되어도 병조가 탓하지 못하는 그간의 실정을 설명하고 있는 이는, 곧 양인을 의미하는 良 이 閑 字와 결합하여 한량을 호칭함으로써 役과 관련된 의미 변화를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곧 身役으로서의 양역인 군역을 부담해야 할 양인이 군역을 謀避하여 한가롭게 한유함을 뜻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군역에 대한 有資格 閑遊者로서의 의미를 지닌 한량은 良丁閑丁閑良丁 등과 혼 용되기도 하였다. 인조 21년에 忠翊府가, 良과 賤의 부류들이 신역을 모면하기 위해 충익위 에 투속하였고, 투속한 뒤에는 宿衛하는 것도 벗어 날 꾀를 내어서 단속을 받지 않으려고 함으로 한량은 군역에 정하고 公私賤은 本役에 도로 정할 것 을 啓하였지만 왕의 批答을 얻 지 못한다.16) 이로써 보면 良 은 양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身役인 군역을 부담해야 마땅하지 만, 충익위에 투속함으로써 군역을 모피하여 한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맥락을 지닌 良 이 閑 字와 결합된 한량 역시 양인이 무역 내지 헐역에 투속함으로써 한유하는 자임을 뜻한다 고 하겠다. 또한 숙종 25년에 영의정 柳尙運은 外方의 閑良丁을 찾아 얻기가 어렵기 때문 에 京司에서 歇役으로 濫屬하는 부류와 외방의 각 營門과 각 邑의 한량으로 남속한 부류를 闕額에 보충할 것 을 건의하고 있다.17) 여기에서 良丁 에 閑 자가 결합된 閑良丁 과 良 에 閑 자가 결합된 閑良 을 비교할 때, 그 어의적 관점에서 두 경우가 모두 한유하고 있는 양정 을 의미하고 있어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점은 良丁 閑丁 이 곧 閑良 으로 이해된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숙종 9년에 좌의정 閔鼎重은 陸地 고을의 良丁을 모집하여 軍官을 삼음의 부당함을 지적하 고, 지금부터는 육지 고을의 한량으로써 군관을 삼지 못하도록 건의하고 있는데,18) 여기에서 민정중은 良丁 을 곧 閑良 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숙종 28년에 좌의정 李世白은, 충순위충찬위충장위 등은 閑丁이 투입하는 소굴이 되었으며, 이들의 歇役이 이미 20년이 지났음을 지적하고, 차후에는 한량으로서 충장위에 보충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는데,19) 여기 14) 承政院日記 128책, 孝宗 4년 8월 27일조 備邊司啓曰 檢討官金始振所啓 臣忝爲守禦使從事 近聞守禦廳閑良軍官別作名號事 似未妥當 若汰定軍役則已 旣已仍置 則不可降其名號 以失歡心 盖所謂良者 非賤人 如庶孽輩多矣. 15) 承政院日記 105책, 仁祖 27년 4월 16일조 平安監司書目 病重乞遞上疏上送事 答兵曹粘連 曰 自古擧子 皆稱保人 而莫敢稱良 實畏該曹之定軍也 今則國綱板蕩 直書閑良 而該曹不以爲怪. 16) 承政院日記 85책, 仁祖 21년 8월 7일조 忠翊府啓曰 原從功臣之稱以忠翊衛者 盖爲宿衛而 設也 大槪屬名忠翊衛之輩 京中則皆是各司書吏 公私賤豪勢之徒 外方則多是兩班子枝 於良於 賤之類當初投屬之時 百計鑽圖 謀免身役 (旣?)入之後 便生脫免之計 不受鈐束 尤極痛憤 自今以 後 別立事目 尤甚謀避 累次稱頉者 自本府入啓 閑良則定軍役 公私賤則還定本役 傳曰 定軍 還賤等事 似未妥當矣. ( )안의 旣 字는 필자가 첨입한 것임. 17) 備邊司謄錄 50책, 肅宗 25년 7월 26일조 領議政柳尙運所啓 累年飢荒癘疫之餘 良役物故者甚多 外方閑良丁 捜得尤難 京司歇役濫屬之類 爲先汰定 則外方各營門 及各邑閑良濫屬之類 亦當自各其 營邑 盡數捜出 充補闕額 18) 備邊司謄錄 37책, 肅宗 9년 2월 13일조 左議政閔鼎重曰 募得陸邑 良丁五十人 作爲軍 官 事渉不當 即今見帶者固不可移定他役 而今後則使之不得 更以陸邑閑良 定爲軍官 宜矣.

에서의 閑丁 은 곧 閑良 을 뜻하고 있다. 이처럼 閑良이 良丁閑丁閑良丁 등과 혼용되었으나, 인조 4년(1626)부터 시행된 號牌事 目 의 單字式에는 平民無屬處者 書良丁, 士族無屬處者 書閑良 이라고 明記하여20) 良丁과 閑良을 신분개념에 있어서 구분하였다. 이로 보면 良丁과 閑良은 제도적으로 구분된 개념이 지만 속처없이 한유한다는 동일한 성질에 근거하여 혼용되기도 하였으며, 아울러 良丁이 閑 良을 호칭함으로써 신분상승의 階梯的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속처없이 한 유하는 閑良의 신분범주는 꽤 다양하였던 듯하다. 영조 6년에 藥房提調 尹淳이 왕에게 아뢴 바에 의하면, 한량과 같은 의미로 쓰여진 閑散操弓者는 양반도 있고 中庶도 있고 양민도 있 어 천민 이외의 다양한 신분층을 포함하고 있으며, 軍案에 入錄되지 않아 屬處도 없이 한유 하면서 弓術을 習行하는 武士的 존재였다.21) 또한 효종 5년에 全州營將 權大德은, 한유인으 로 조금 實한 자는 모두 향교서원향소청사마소장관청에 들어가 있었고, 특히 향소청은 온통 閑良無役之人으로 가득 차 있었음 22)을 지적하였으며, 효종 8년에 賛善 宋浚吉은, 武 科 錄名者는 거의 한량이라고 單子를 기록하니 이로써 더욱 鄕民의 한유자가 많음을 알 수 있다 23)고 지적하였고, 현종 13년에 左副承旨 崔逸은, 무과 擧子로서 役이 없고 品階가 없 는 자는 으례 한량으로 적어야 함 24)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지적에서도 한량은 無役之人 鄕民之閑遊者 武擧子之無役無階者 로 인식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한량은 속처가 없이 한유한다는 의미의 閑 과 군역에 대 한 有資格을 지칭하는 良 이 결합함으로써, 한유하는 군역 유자격자라는 어의적 개념을 지 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량의 의미 범주는 良丁閑良丁閑丁과 閑散操弓者를 포함하고 있었 다. 특히 조선후기 한량은, 그 범주에 있어서 조선전기에는 포함되었던 전함관 및 한산관이 제외되어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으나, 여전히 양반中庶양민 등 천민 이외의 다양한 신분층 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범주와 신분층을 포함한 조선후기 한량은 軍案에 입록되지 않아 원래 屬處가 없는 한유자로서 군역에 대한 有資格 閑遊者 또는 無役無階의 閑遊者로 槪念지어지는 한편, 주로 弓術 등 武藝를 익혀 무과에 응시하기도 한 武士的 성격의 소유자 였다. 19) 備邊司謄錄 52책, 肅宗 28년 3월 17일조 左議政李世白所啓 忠順忠賛忠壯等 皆以功臣 戰亡有蔭子孫應屬者 不定敷 以爲閑丁投入之藪 此輩歇役 已過二十餘年 今雖移定他役 似 無不可以此分付施行 此後則亦勿令以閑良 充補忠壯衛似當矣 上曰 依爲之. 20) 號牌事目 (奎章閣圖書, 12344). 이 호패사목 은 仁祖 3년(1625) 7월 28일에 左副承旨 徐景雨에 의하여 작성되었고, 그 이듬해인 仁祖 4년 정월 初 1일부터 本 事目에 근거하여 호 패법을 시행할 것을 明記하고 있다. 21) 備邊司謄錄 87책, 英祖 6년 4월 6일조 藥房提調尹淳所啓 頃因廣州試才 御史柳儼所達 有 本州閑良入錄軍案之命矣 大抵廣州 地廣人衆 而良役最少 境內閑散操弓者甚多 而無所入屬 故今 番試才時 不勝其呼訴 今若一併入錄於案中 則試才可以許赴 守城可以得力 事甚便好 而此輩 或 有兩班 或有中庶 或有良民 今若入錄於軍案 則必有驚擾之患. 22) 承政院日記 133책, 孝宗 5년 12월 17일조 全州營將權大德所啓 前任南方守令時見之 則閑 遊人稍實者 皆投入於鄕校書院鄕所廳司馬所將官廳 至於鄕所廳 則都是閑良無役之人. 23) 주 47) 참조. 24) 주 48) 참조.

2. 閑良의 職役化 本節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은 한량이 직역화로의 이행과정과 제도화된 직역명으로의 확정 시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사료를 통해 볼 때 조선전기의 한량이란 용어는 閑良人民閑良人口閑良儒臣閑良品官閑 良耆老 등과 같이 형용사적으로 쓰인 경우가 흔히 있었다.25) 그러나 이처럼 한유함을 의미 하는 형용사적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한편 한량은 제도적 職役化 이전에 이미 두 가지 사항에서 직역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먼저, 다음에서 처럼 人 이나 者 字와의 결합이다. 點考諸節制使所領軍官及閑良人受田者 26) 其騎船軍 擇年壯閑良人 加定 27) 今考下三道閑良人之數28) 試取軍士及東西班從三品以上若閑良人29) 更無閑良者 可以充補30) 令兵曹漢城府 悉刷京中閑良者 錄籍31) 즉 한량이 閑良人 閑良者 등의 형태로서 閑遊者를 지칭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형태로 의 사용이 빈번해짐에 따라 의미는 동일하게 지속하면서 人 이나 者 가 자연스럽게 탈락하 여 직역화로의 이행을 유도하였다고 여겨진다. 둘째로, 類似職役으로의 사용이다. 세종 12년에 兵曹가 충청도 都節制使의 牃呈을 근거로 왕에게, 本營은 放射軍이 단 1명뿐이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익히는 자가 없으니, 청컨대 경상도 合浦 本營의 例에 의거하여 한량과 營鎭 屬軍의 가합한 자 10인을 뽑아 미리 익히게 하여 32)라고 한 啓文과, 세종 19년에 왕이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漏挟戶內의 한 량이 스스로 試才하기를 원하는 자가 몇 사람이며, 한량이 지원하여 入格한 자가 이미 賞職 을 받았으면 正軍이 되었는가. 본래 軍案에 실리지 않은 사람이니 비록 상직을 받았으나 그 대로 한량이 되어 호적에 실리지 아니했는가 등에 대해 자세히 상의하여 확정한 것을 갖추 어 啓達할 것 33)을 命한 傳旨, 성종 23년에 李克均이 왕에게, 지금 軍官 20명을 초록하여 보내니 모두 한량과 전함관인데, 이미 祿을 받지 못하고 또 防戍하는 데에 나아가게 되면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고르지 못합니다 34)라고 한 언급, 중종 23년에 特進官 尹希仁이, 처음 25) 韓永愚, 앞의 논문 p. 41. 26) 世宗實錄 권5, 3년 2월 乙丑조. 27) 世宗實錄 권87, 21년 10월 甲午조. 28) 世祖實錄 권15, 5년 3월 甲辰조. 29) 經國大典 兵典 都試조. 30) 世宗實錄 권5, 元年, 10월 壬午조. 31) 世祖實錄 권12, 4년 4월 庚申조. 32) 世宗實錄 권48, 12년 6월 己丑조 兵曹據忠淸道都節制使牒呈啓 獨本營則放射軍 只有一 人無他傳習者 請依慶尙道合浦本營例 擇閑良及營鎭屬軍 可者十人預習. 33) 世宗實錄 권76, 19년 3월 辛卯조 傳旨咸吉道監司都節制使 漏挟戶內 閑良自願試才者 幾人乎 閑良自願入格者 已受賞職 則以爲正軍乎 本是軍案不載之人 雖受賞職 仍爲閑良而不載戶 籍乎 細商確啓達. 34) 成宗實錄 권266, 23년 6월 戊申조 李克均來啓曰 今抄送軍官二十 皆閑良及前銜官 旣不食 祿而又赴防戍 勞逸不均.

에는 定虜衛로서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庶孽도 얻어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 금은 비록 한량이라도 또한 모두 과거에 나아간다 35)라고 한 언급 등에서 이미 직역과 유사 한 용도로 한량이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く武科榜目 이나 功臣錄券 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즉 선조 17년(1584) 에 시행된 무과방목에 의하면 2명이 한량으로 錄名36)되어 있으며, 선조 38년(1605)의 靖 難原從功臣錄券 에 6명,37) 광해군 6년(1614)의 亨難原從功臣錄券 에 19명이 각각 한량 으로 녹명38)되어 있다. 이처럼 제도적 직역명으로 수용되기 이전의 이러한 자연 발생적인 유사 직역으로서의 사용은 제도화로의 이행에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살펴 본 바처럼 직역화로의 접근 및 유사직역으로 관용되어 온 한량은 인조 4년 (1626)의 호패법 실시를 계기로 작성된 號牌事目 原案에서 일단 제도적 직역명으로 대두 된다. 즉 品官으로부터 公私賤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직역에 따라 各樣 호패의 佩持 규정을 마련한 인조 3년 7월의 호패사목 원안에서는,39) 忠順衛訓導學生校生武學生士族中閑良 典樂 用小木牌 (只書年歲居住疤記) 幼學京則書某學學生 館下齋則書成均學生 外則書校生或額外校生 武學則書武學生 容貌疤記 上同 (凡儒生必名屬學校雖初試入格 亦屬學校 不入者 雖儒生以閑良書之) 士族無屬處者 書閑良 姓名容貌疤記(上同) 라고 한량을 직역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량은 사족 중에서 속처가 없는 자의 직역으로 규정하였으며, 비록 儒生이라 하더라도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자이면 한량으로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량은 일단 제도화된 직역명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제도적 직역명으로 법제화된 한량은 곧 이어 號牌事目 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한량 자체를 규정하는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인조 3년 8월 8일에 號牌廳에서 왕에게 아뢰 기를, 또한 童蒙으로서 나이 15세가 되어 入學하지 않은 자도 모두 한량이라고 호칭하여 容貌疤 記하는 가운데 포함이 되니 매우 타당치 않다고 여깁니다. 士族과 有蔭子孫으로서 입학하지 않은 자는 業儒라고 칭하여 호패를 새길 때에 용모파기하지 말고 다만 單子에만 기록하여 두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는 사목에서 고쳐 付標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從之)40) 라고 하여 허락을 얻게 됨으로써 결국 한량은 호패사목 원안에서 士族無屬處者, 士 族不入學者 를 한량으로 규정하던 근거가 상실되고, 業儒가 士族과 有蔭子孫으로서 入學하지 않은 자의 직역명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이틀 뒤인 8월 10일에는 다시 호패청에서 京中의 兩班子枝로서 業武者에 대한 직역명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즉 右副承旨 李植은 35) 中宗實錄 권63, 23년 10월 丙寅조 "特進官尹希仁曰 初則以定虜衛 許赴科擧 故使無庶孽不 得爲之 今則雖閑良 亦皆赴擧. 36) 萬曆十二年甲申文武科榜目 (啓明大學校中央圖書館 所藏, 117184) 참조. 37) 靖難原從功臣錄券 萬曆33년(啓明大學校中央圓書館 所藏, 129974) 참조. 38) 亨難原從功臣錄券 萬曆42년(啓明大學校中央圖書館 所藏, 129973) 참조. 39) 號牌事目 (奎章閣圖書, 12344). 40) 仁祖實錄 권9, 3년 8월 甲申조 號牌廳啓曰 且童蒙之年滿十五 未及入學者 皆以閑良稱 號 則亦當在容貌疤記之中 似甚未妥 士族有蔭子孫 未及入學者 稱以業儒 而牌刻中 並勿書容貌 疤記 只於單子中 開錄宜當 此兩件事目中 改付標何如 從之.

호패청의 말로써 왕에게 啓하기를, 事目 중에 兩班子枝로서 武를 業하는 者를 武學이라고 칭하였으나 京中에는 武學之院이 없습니다. 이 경우도 다만 業武라고 칭하여 牌를 차게 한 다음 外方의 무학을 試才할 때를 기다려서 함께 시재하여 편의를 도모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하니, 지금 付標할 때에 業武의 한 항목을 添入하기를 감히 아룁니다 41)라고 하여 허락을 얻었다. 여기에서 業武는 지방의 武學42)에 상응하는 京中의 兩班子枝로서 武를 業하는 자의 직역명으로 채택되었다. 이리하여 이제 士族의 無屬處者 가운데에서 士族과 有蔭子孫으로 서 入學하지 않은 자는 業儒 를 직역명으로 확정하였고, 京中 兩班子枝의 業武者는,業武 를 직역명으로 확정하였다43) 따라서 당초 호패사목 의 원안에서 한량자체를 규정하였던 근 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 한량은 제도화된 직역명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량이 비록 제도화된 직역명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여전히 종전처럼 유사 직역으로서 관행되고 있었음이 다음과 같은 사료에서 확인된다. 조선조에는 閥閱子弟의 業 武者라도 實役이 없으면 과거에 임할 때 반드시 保人이라고 칭하는 것이 立法의 本意44)였 으나, 實役도 없는 처지의 한량들이 무과에 임할 때 곧장 한량을 칭하여 錄名하고 있다. 인 조 27년에 兵曹가, 옛부터 擧子들은 모두 保人이라고 칭하고 감히 良을 칭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곧장 한량이라고 기록한다 45)라고 한 언급, 효종 7년에 特進官 尹履之가 일찍이 先 朝(仁祖)에서 무과 試官이 되었을 때, 校生의 무리들이 무과에 錄名한 자가 1천이나 되고 한 량은 2천이나 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국법에 한량은 감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므로 한량으로 녹명한 자는 부당할 것 같습니다46)라고 한 언급, 효종 8년의 賛善 宋浚吉과 王의 대화에 나타난 擧子들의 閑良錄名에 관한 기록47) 등에서 무과거자들이 한량으로 녹명한 것 은 부당하지만, 여전히 종전처럼 제도화되지 않은 유사직역으로서의 한량이 통용되고 있었 41) 承政院日記 3책, 仁祖 3년 8월 10일조 右副承旨李植 以號牌廳言啓曰 但事目中 兩班子 枝業武者 稱以武學 而京中則曾無武學之院 此則姑以業武稱之 使之佩牌 待外方武學試才時 一樣 試才從便處置宜當 今此付標時 業武一款添入之意 敢啓 傳曰知道. 42) 武學에 대해서는 李俊九, 朝鮮後期의 武學 攷 ( 大丘史學 23, 1983) 참조. 武學은 中宗朝의 武學別設 論議를 거쳐 宣祖朝에와서 임진왜란 이후 武備의 필요성을 통감하 고 各道大都護府에 중앙의 訓鍊院과 같은 武學設立의 실현을 보게 된다. 이 무학은 서울을 제 외한 지방에서만의 교육기관이었으며 養兵鍊業이 그 목적이었다. 지방에 무학이 별설된 이후 에는 武學之案에 소속된 자를 무학이라고 호칭하게 되었고 이로부터의 무학은 하나의 役名으 로서 職役化되었다. 직역으로서의 무학은 당초 兩班子枝가 入屬한 兩班職役의 하나였으나 顯 宗朝 이후로 오면서 班常의 中間存在로서의 지위로 저하되고 있다. 43) 業儒業武에 대해서는 李俊九, 朝鮮後期의 業儒 業武,와 그 地位 ( 震檀學報 60, 1985) 참조. 業儒業武는 본래 儒業武業의 연마를 지칭하던 일반적인 용어 및 類似職役으로서 사용되다가 仁祖 4년의 호패법 실시와 함께 제도화된 직역명으로 수용되었다. 당초의 업유는 士族과 有蔭 子孫으로서 入學하지 않은 자의 직역명이었고 업무는 兩班子枝로서 武를 業하는 자의 직역명 이었지만 점차 그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어 왔고,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계층에 대한 직역명으 로의 전환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肅宗 22년에는 드디어 업유업무가 庶孽의 文武之稱으로 확정되어 庶孽職役化함으로써 종전과는 그 신분개념이 크게 달라졌다. 44) 光海君日記 권125, 10년 3월 庚申조 右副承旨朴鼎吉啓曰 國朝閥閱子弟 必有屬處 有蔭 者爲忠順衛 業文者入於四學 業武者非有實役則赴擧時 必稱保人 立法本意 據此可知. 45) 앞의 주 15) 참조. 46) 承政院日記 241책, 孝宗 7년 7월 21일조 特進官尹履之曰 曾於先朝爲武科試官時 目見 校生輩 錄名於武科者 多至 千 閑良則二千 國法 閑良不敢赴擧 而以閑良錄名者 似爲不當. 47) 承政院日記 146책, 孝宗 8년 9월 5일조 賛善宋浚吉曰 科時 一二所錄名者 (缺字)人 而 幾以閑良書其單子 以此尤知鄕民之閑良者多矣 (缺字) 以閑良不得赴科 故雖大夫之子 必以保人書 之矣 上曰 五千餘人中 閑良者過半乎 積曰 然.

음을 알 수 있다. 현종 13년에 左副承旨 崔逸은 兵曹의 말로써 아뢰기를, 평안도 淸南榜目 중에 甫川에 거주하는 安光潤은 幼學으로 기록하였는데, 武科擧子로서 役이 없고 品階가 없 는 자는 으례 한량으로 적어야지 유학이라고 적을 수 없습니다 48)라고 하여 無役無階의 無 科擧子는 당연히 한량으로 錄名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역시 제도화되지 않은 類似 職役으서의 관행이었던 것이다. 이 같이 유사직역으로 관행되어 오던 한량은 숙종 22년에 드디어 제도화된 직역명으로서 확정을 보게 된다. 즉 이해 9월 27일의 承政院日記 에 의하면 吏曹判書 崔錫鼎이 嫡庶를 분별하는 호칭을 왕에게 건의하여 批答을 얻었다. 庶孽을 일컫는 호칭은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外方에서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많이 業儒로 서 호칭을 삼으며 무과에는 곧 응시자들이 혹은 閑良을 호칭하기도 하고 혹은 業武를 호칭하기도 하니 儒生의 幼學業儒와 武士의 閑良業武가 처음에는 분별없이 모두 통용되었으나, 지금에 서얼 이 합당한 호칭이 없으므로 만약 유학과 한량으로 兩班文武의 호칭을 삼고 업유와 업무로서 庶孽 文武의 호칭을 삼는다면 곧 비록 달리 호칭을 만들지 않더라도 嫡庶가 저절로 구분 될 것이니 어 떨지 모르겠습니다(上曰依爲之).49) 위의 인용문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처럼 종래에는 무과 응시자들이 閑良 또는 業武를 호 칭하여 武士의 한량업무가 분별없이 모두 통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숙종 22년 (1696)부터 한량은 양반의 業武者를 지칭하는 것으로 규정되고, 업무는 서얼의 업무자를 지 칭하는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비로소 한량이 제도화된 직역명으로 확정되었다. 3. 閑良과 閑散 전술한 바 여말선초 전함관의 별칭이 한량한량관한산한산관 등으로 불렸음을 감안할 때, 閑良과 閑散은 한가롭게 閑遊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칭호로서 비슷한 의미를 가진 동일 범주의 것으로 이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한량과 한산은 의미범주를 달리하고 있다. 조선후기 한량의 범주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閑散으 로 쓰여진 다양한 用例를 살펴 볼 필요가 있으며, 역사적 실체로서의 한산이란 용어가 의미 하는 다양한 의미범주를 밝히는 것은 곧 한량의 범주개념을 이해하는 데에 선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선 한산으로 쓰여진 용례를 통하여 그 용어의 의미범주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다음에서처럼 現任으로서의 閑散으로 쓰여진 용례들이다. 가) 行判中樞宋時烈在懷德上疏辭職曰 臣之職名 雖是西樞閑散 而以此醜辱之身 自同於元輔例受 之列 誠有所僭猥 盖時烈嘗遭李世直誣吿之變 故疏語如此50) 나) 前縣令柳信男 都監郞廳啓下 而方在閑散中 時無職名 依近例該曹付軍職 冠帶常仕何如.51) 48) 承政院日記 230책, 顯宗 13년 10월 13일조 左副承旨崔逸 以兵曹言啓曰 平安道淸南榜 目中甫川居安光潤 以幼學書之 武擧子之無役無階者 例以閑良書之 而不得以幼學書之. 49) 承政院日記 367책, 肅宗 22년 9월 27일 吏曹判書崔錫鼎曰 庶孽所稱之號 有所思量矣 外方赴擧 儒生 多以業儒爲稱 武科則擧子 或稱閑良或稱業武 儒生之幼學業儒 武士之閑良業武 初無分別 擧皆通 用 而即今庶孽 無可合稱號 若以幼學閑良爲兩班文武之稱 業儒業武爲庶孽文武之稱 則雖不別立名號 而嫡庶自可區別 未知何如 上曰依爲之. 50) 顯宗實錄 권19, 12년 정월 辛巳조.

다) 近來訓正新資 亦多擬之於內將 而副末望 則俱以堂下閑散備擬 間有蒙點者 訓正之內將陞資爲 不僭 而若凡閑散之以此陞資 終涉僥冒.52) 위에서 사료 가)의 行判中樞府事 宋時烈은 자신의 職名을 西樞閑散이라고 한 것이다. 여 기에서의 서추한산은 문무 당상관으로서 任職이 없는 자를 우대하는 의미로 두었던 西班中 樞府에 속한 現任官이지만 일정한 사무없이 閑遊하는 한산한 처지에 있음을 뜻한다. 사료 나)의 前縣令 柳信男은 都監의 郞廳으로 임금의 裁可롤 받았지만 당시 직명이 없으므로 한 산한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한산도, 도감의 郞廳이면서 한산한 처지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료 다)의 訓鍊院 正은 內禁衛 將에 陞資할 수 있으나 훈련원 副正과 그 이하 관원의 천거는 堂下閑散으로 취급하는데, 만약 한산이 뽑혀서 陞資(정 3품의 품계에 오름)하면 분수에 넘치게 요행을 바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한산은 승자하는 데에 별로 擬望(후보로 추천)할 바가 못되는 현임 당하관을 의미한다. 이상의 용례에서 한산 은 당상관과 당하관을 물론하고 현임관으로서 일정한 직무도 없고 실권도 없는 한산한 처지 에 있거나 의망할 바가 못되는 처지에 있음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러한 한산은 現任閑 散의 부류로 분류된다. 둘째로, 現任의 한산한 처지에 있는 한산과 같은 의미로 쓰여진 前銜으로서의 한산에 관 한 용례들이다. 가) 領議政金瑬 素有才望 功存社稷 國之元老也 丙子之亂 身爲首相 誤事之責 叢集于身 其子旣巳 伏法 其身廢置閑散 殆將十年 53) 나) 前兵曹參議尹墀 有可用之才 而在閑散之中 叙用.54) 다) 祖宗朝 天使時 文翰之人 雖在散地 必收叙而用之 今者 詔使先聲已到 恐無以周旋應對 且在前天使 例問前度遠接使存否 似不可以閑散爲答 李好閔柳根 迎接皇華 名聞中朝 緣接 待重事 敢此申禀 答曰 從當量處(李好閔以獄事被誣 柳根以廢母庭請不參 皆在待命中 故有是請 ).55) 위에서 사료 가)의 한산은 영의정이었던 金瑬가 병자호란 때 仁祖를 남한산성에 扈從, 이 듬해 환도 후 和議를 주장한 陳疏가 잘못되었다는 兩司의 論劾으로 削職되어 한산한 처지에 있음을 의미하며, 사료 나)의 閑散도 前兵曹參議 尹墀가 현재 한산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료 다)의 한산은 李好閔柳根이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위한 遠接使였지만 현재 파 직당하고 죄를 기다리는 待命 중에 있는 한산한 처지임을 뜻한다. 이처럼 전함으로서 한산 한 처지에 있는 부류는 실제 前銜閑散文武蔭近千人,56) 前銜閑散之自參上以下57) 등과 같 이 前銜閑散 이란 용어로도 호칭되었다. 이상의 용례에서 한산은 前銜으로서 현재 한산한 처지에 있음을 뜻하는 용어로 쓰였으며, 이러한 한산은 前銜閑散의 부류로 분류된다. 셋째로, 無役無職 閑遊者로서의 한산에 관한 용례들이다. 이 경우는 전함과 한산이 구별되 는 별개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51) 承政院日記 74책, 仁祖 18년 5월 21일조 右副承旨金堉 以訓鍊都監言啓曰. 52) 備邊司謄錄 214책, 純祖 26년 7월 5일조 右議政沈象奎所啓. 53) 仁祖實錄 권45, 22년 10월 癸巳조 大司憲洪戊積掌令任善伯等上箚曰. 54) 仁祖實錄 권19, 6년 9월 己丑조 上下敎曰. 55) 光海君日記 권161, 13년 2월 戊申조 三公啓曰. 56) 景宗實錄 권15, 4년 7월 丙申조 吏曹判書李肇 因藥房入診啓言. 57) 正祖實錄 권19, 9년 정월 壬申조 御春塘臺 親臨禁军試射 論諸禁軍曰.

가) 禁衛營敎鍊官旗牌官 合二十五窠內 禁軍取才五窠 行伍升差四窠 前已定額矣 餘存十六窠內 出 身七人 前銜閑散幷九人式 定額爲白齊.58) 나) 凡於閑散窠 雖作行伍 必以前啣中 曉暢軍旅人 或閑散中出入軍門人收用.59) 등에서 사료 가)의 前銜閑散并九人 은 전함과 한산을 합쳐서 9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 전함한산은 전함으로서의 한산이 아니라, 전함과 한산이 각각 구별되는 별개의 호칭임을 시사하고 있으며, 各軍門執事窠節目 의 금위영에 나타난 이러한 용례는 어영청수어청에 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 있다. 또한 사료 나)의 閑散窠에는 전함과 한산이 별개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서의 한산은 前에 직함을 가졌던 전함과 구별되는 無職閑散임을 분명 히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한산은 현임한산도 아니고 전함한산도 아닌 무직한산으로서 無役 閑遊者를 지칭하였다. 즉 숙종 16년에 參賛官 李聃命은 한산이 庶孽과 더불어 閑遊하고 있 음60)을 지적하고 있으며, 숙종 37년에 判中樞 李頤命은 한산이 士族 品官 軍官校生과 더불 어 閑遊之輩임61)을 지적하고 있어 한산은 무역한유자임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이 같은 한산 은 無役無職 閑遊者로서의 한산으로 분류된다. 이상에서 한산은 현임으로서의 한산, 전함으로서의 한산, 무역무직 한유자로서의 한산 등 그 용어의 의미범주가 다양함을 볼 수 있다. 前節에서 이미 논술한 바 조선후기 사회에서의 한량은 전함관과 한산관에 대한 별칭이 아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이처럼 다양한 의미 범주를 가진 한산 중에서 어떤 부류가 한량과 같은 범주의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은 前節의 논술을 통해 자명하지만, 다음과 같은 史料가 무역무직 한유자로서의 한산을 한량과 같은 의미범주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영조 6년에 藥房提調 尹淳이 왕에 게 아뢴 바에 의하면, 요즈음 廣州 試才에 관해 御史 柳儼이 진달한 바로 인하여 本州 한량을 軍案에 入錄시킨다는 命 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보아 광주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으나 良役은 가장 적습니다. 境內의 閑散 操弓者가 심히 많으나 入屬할 곳이 없으므로 이번 시재할 때에 이를 하소연함이 무척 많았는데 이제 만약 모두 군안 중에 입록하게 되면 시재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할 수 있고 城을 지키는 데 에 도움될 수 있으니 일이 심히 편하고 좋습니다62) 라고 하였다. 本史料가 영조 연간의 한 고을의 사례이긴 하지만, 한량은 종래 군안에 입록 되지 않음으로써 속처 없이 한유하고 있었다. 역시 군안에 입록되지 않고 있던 閑散操弓者 는 곧 한량을 의미하고 있으며 属處가 없는 무역한유자로서 弓術을 習行하는 武士的 존재였 다. 여기에서 한량과 한산은 그 용어를 달리 표현하고 있을 뿐 그 의미는 동일하며 한량이 곧 한산이요 한산이 곧 한량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량과 무역무직 한유자로서의 한산은 같 은 의미 범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의미의 한산은 무사란 용어와 결합된 閑散武士 라고도 표 58) 備邊司謄騰 112책, 英祖 19년 정월 19일조 各軍門執事窠節目. 59) 承政院日記 1504책, 正祖 6년 2월 27일조 右承旨李在學 以備邊司言啓曰. 60) 備邊司謄錄 44책, 肅宗 16년 3월 21일조 參賛官李聃命所啓 在昔盛時 則土夫子弟 皆有 布役 而即今則國綱解弛 兩班之外 閑散庶孽 尙皆閑遊. 61) 肅宗實錄 권50, 37년 8월 甲戌조 判中樞李頤命 以良役變通事 承詢問之命 上箚言 欲加 敎良布於曾前閑遊之輩 則國俗人多差等 有士族焉 有品官焉 有閑散焉 有軍官校生焉 未知限以何 等 方可適宜乎. 62) 앞의 주 21) 참조.

기하고 있으며, 그들 한산무사들은 종래 春秋別試才를 통해서 拔身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것이 廢却된 뒤로는 원래의 武業을 버리고 儒業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戰馬와 軍裝을 갖추 어 親騎衛에 입속하기도 하였다.63) 그들 한산에 대한 처우는, 현종 14년의 觀試才 初試에 한산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심히 埋沒시키는 것이란 이유로 응시토록 허락하고 있으며,64) 전술한 바처럼 춘추별시재에 응시 하기도 하여 발신하는 啓制로 삼기도 하였다. 숙종 24년에는 한산무사 가운데 山陵領役部將 에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使役하는 일에 差定토록 하였고,65) 영조 28년에는 均役事目 에 서 閑散之類를 選武軍官에 抄定토록 하고 있다.66) 또한 정조 2년에 司直 尹冕東이 지금 幕 府를 돕는 類가 八路를 통해서 520餘窠가 되는데, 그 가운데에서 150여 과는 前에 의거하여 한산으로써 帶去하여 이 무리로 하여금 소망에 결함이 없도록 할 것 67)을 상소하고 있음을 볼 때, 비록 節度使 등이 집무하는 곳인 막부의 執事일지라도 150여 과에 달하는 閑散窠가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武科에 등과하지도 아니한 한산이 僉使에 除授되기도 하였으며,68) 摠 戎使에서 御營大將까지 역임69)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산은 본래 제도화된 직역명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용어가 의미하듯이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한유하던 한유자로서 다양한 신분층을 포함하고 있었다. 영조 6년 藥房提調 尹淳이 지적한 바와 같이 閑散操弓者는 양반도 있고 中庶도 있고 양민도 있었다.70) 또한 그 들 한산에는 有蔭閑散과 無蔭閑散이 있었다. 그들 중에 有蔭閑散의 경우, 文蔭閑散者 71)나 有蔭閑散人 72)은 곧 유음자손으로서 한산한 처지에 있음을 상정하여 볼 때 일단 양반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無蔭閑散의 경우, 영조 때의 均役事目 에서 選武軍官은 사족도 아니고 유음도 아닌 閑散之類를 액수에 抄定한다 73)에서의 非士族非有蔭閑散 은 양반이 아니며, 軍 保에 포함시키기에는 아까운 類74)로서 반상의 중간존재를 뜻한다. 63) 備邊司謄錄 186책, 正祖 21년 7월 16일조 備邊司啓曰 即見北兵使鄭観采狀啓 別試才廢 却之後 閑散武士 薦進無路 擧皆捨弓從儒 今又以春秋別試才 作爲閑散武士抜身之階 則孰肯 捨此捷徑 自備戰馬軍裝 入屬於親騎衛乎. 64) 承政院日記 233책, 顯宗 14년 3월 11일조 同副承旨李世翊 以兵曹言啓曰 旣有觀武才初試 時 今番則閑散 (缺字)赴初試之類 何以爲之 敢禀 傳曰 今此觀武才 設行於五年之後 不許閑散 亦甚埋沒 此類則取抜許赴可也. 65) 承政院日記 382책, 肅宗 24년 12월 4일조 兵曹啓曰 在前山陵領役部將 例以禁軍差送 而亦 或有閑散武士可合人 差定使役之事矣. 66) 英祖實錄 권77, 28년 6월 戊午조 均役事目 選武軍官名號 以非士族非有蔭閑散之類 抄 定額數. 67) 正祖實錄 권6, 2년 7월 丁未조 司直尹冕東上疏曰 見今佐幕之類 通八路合爲二百五十餘 窠 其中一百五十餘窠 則依前以閑散帶去 毋使此輩缺望. 68) 正祖實錄 권3, 원년 정월 丁丑조 正言鄭志儉上䟽曰 西銓初仕之不擇 已是聖鑑之所悉 而久勤折衝之降補權管 閑散游手之直除僉使 武士失望 物望未允. 69) 承政院日記 1504책, 正祖 6년 2월 26일조 上曰 李時輔旣是禮輔之同生 則安可置之於軍門 甚可駭然 自摠使之爲御將時 所謂閑散 全昧軍務之如何 徒費廩料 此後則雖是閑散窠 必以習熟兵 書者差出 可也. 70) 앞의 주 21) 참조. 71) 仁祖實錄 권4, 2년 2월 辛卯조 都體察使韓浚謙啓 請館學儒生自願宿衛者 屬于鄭嘩 文蔭閑 散者 屬于趙察使 或令侍衛 或令守堞 從之. 72) 萬機要覽 軍政編 2, 兵曹各掌事例, 有廳色조 有廳軍 若實預差俱爲不足 則知委五部 以 有蔭閑散人 給價應役. 73) 앞의 주 66) 참조. 74) 萬機要覽 財用編 3, 軍官布 總例조 特設選武軍官名號 以六道(西北無)閑散中 可合者擇定 (非士族非有蔭 可惜於軍保之類).

한편, 한산은 사회계층적 집단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한산을 하나 의 신분층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17세기 중엽의 실학자 柳馨遠은 得參官序와 校生之類를 俗 稱中人 또는 閑散方外 라고 지적하고 있는데,75) 俗稱 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비 록 법제적으로 명백하게 규정된 규범으로서의 중인신분이 아닐지라도 17세기 중엽에는 이미 사회 통념상 하나의 신분층으로서 中人 이 보편화되었으며,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중 간 신분층으로서의 이들 중인은 고급기술 관원에 관한 호칭에서 한산방외 곧 지방의 한유 자도 포함하는 용어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76) 한산은 班常의 중간존재인 중인신분층 에 불과한 집단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18세기 전반기의 실학자 李重焕은 擇里 志 에서 당시 신분(人品層級)을 크게 양반중인하인의 셋으로 나누고, 方外閑散人 을 庶 孽將校譯官算員醫官과 함께 중인층으로 분류하고 있다.77) 따라서 사회계층적 범주로서의 한산의 신분적 지위는 법제적 규범으로서 명백하게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관변측과 실학자들의 인식 내지 신분규정을 볼 때 이들 한산은 有蔭도 있고 無蔭도 있으며, 양반도 있고 中庶도 있고 양민도 있으나, 대체로 반상의 중간존재인 중인신분층으로 인식되었다. 이상과 같이 한산이란 용어출현의 의미범주에서 보면, 무역무직 한유자로서의 한산이 한 량과 같은 의미범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한산은 속처가 없는 한유자로서 儒業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弓術을 習行하는 무사적 존재였으며, 춘추별시재나 관무재 를 통하여 발신하기도 하였고 幕府의 執事가 되거나 간혹 武弁으로 薦望되기도 하였다. 또 한 그들은 外方의 한유자를 대변하는 사회계층적 집단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 그들 중에 는 천민 이외의 다양한 신분층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학자들에게는 반상의 중간존재인 중인 신분층으로 인식 되었다. Ⅲ. 閑良의 地位 1. 法制的 地位 숙종 22년에 비로소 제도적 직역명으로 확정된 한량은 이미 조선전기부터 유사직역으로 사용되어 왔음이 확인되었다. 여기서는 그러한 한량에 대한 조선후기 국가시책과 관련하여 법제적 지위를 살펴보고자 하며, 아울러 王命이나 王의 裁可를 얻은 朝議의 의결사항 등 專 制王朝에서 法的 근거를 지닌 諸規定들도 法制와 同軌로 간주하여 고찰의 대상에 포함시키 기로 한다. 本節에서는 주로 役과 叙用의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한량에 대한 처우 및 계층적 지위 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먼저 役의 문제에 있어서, 前章에서 언급한 바 한량은 그 어의적 개 념에서 볼 때 한량의 良 이 의미하는 바 身役인 良役 즉 軍役을 부담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 었지만, 閑 字와 결합됨으로써 군역에 대한 有資格者로서 한가롭게 한유하고 있는 존재였으 75) 磻溪隨錄 권9, 敎選之制 12 庶族 本庶人之族 而得參官序及校生之類 俗稱中人 又謂閑散方 外. 76) 李俊九, 朝鮮後期 身分構造 理解의 諸間題 檢討 ( 大丘史學 34, 1988) p. 8. 77) 擇里志 總論條 我朝開運以名分立國 至今士大夫之名甚盛 以衆用人專取門閥故也 人品層級 甚多 宗室與士大夫爲朝廷瑨紳之家 下士大夫則爲鄕曲品官中正功曹之類 下此爲士庶及將校譯官 算員醫官方外閑散人 又下者爲吏胥軍戶良民之屬 下此爲公私賤奴婢矣 自奴婢而京外吏胥爲下人 一層也庶孽及雜色人爲中人一層也 品官與士大夫同謂之兩班 然品官一屬也 士大夫一層也.

며, 또한 無役無階의 한유자이기도 하였다. 한량이 바로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良役확보와 같은 국가시책과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는 바, 그것은 곧 한량을 군 역에 充定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실제 屬處와 군역의 有無는 班常을 구분짓는 기준이 되었음을 감안할 때 한량의 법제적 지위를 이해하는데 관건이 된다 하겠 다. 한량은 원래 役부과의 기본 대장인 軍案과 戶籍에 入錄되지 않고 한유하고 있던 부류인 만큼, 이들에 대한 朝廷의 군역 充定策과 이에 대한 이들의 계속적인 避役企圖가 한량의 役 문제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歇役인 軍官入屬, 충장위 등의 衛屬投入 등 피 역을 목적으로 한 冒屬이 성행하였고, 이에 대해 조정은 軍役汰定의 강경책과 군관입속에 대한 定額制限許容 등의 회유책을 함께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한량의 지위가 점차 법 제적으로 규정되어 갔다. 良役 闕額의 한 요인인 한량의 한유를 막기 위하여 조정은 고심하였으며, 이 때문에 조선 후기 諸王들은 한량을 양역에 충정하라는 원칙적인 명령을 내리곤 하였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 一例이다. 特進官李曙曰 號牌實是良法 宜先立三條之令 其三 凡京外閑良各令自處其身 皆屬相當軍役上曰 此言是矣 (仁祖 원년).78) 領議政柳尚運所啓 京司歇役濫屬之類 爲先汰定 則外方各營門及各邑閑良濫屬之類 亦當自各其 營邑 盡數搜出 充補闕額 (肅宗 25년).79) 그러나 朝廷의 이러한 원칙적인 방침으로 인하여 한량들이 전혀 속치없이 한유하기가 어 렵게 되자 이들은 군관에 투속하였는데, 당시의 군관은 1년에 한 두 차례 관청에 얼굴을 내 비치고는 종신토록 군역을 면제받는 헐역이었다.80) 避役의 수단으로써 한량들의 軍官冒屬이 심해지자, 조정은 또한 원칙적으로 이들을 단속하는 한편, 무제한이 아닌 일정비율의 액수를 이들 한량들에게 배분하여 試才를 통해 충액하고, 落試者는 군역에 汰定함으로써 이들의 한 유를 합법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인조 8년에, 종래 出身과 閑良을 구분하지 않고 自願入屬을 허락하였던 雇衛廳 군관에 대 하여 기존 입속한량을 그냥 두고 이후로는 한량의 자원입속을 엄금한 것81)이나, 효종 4년에 역시 호위청 군관의 한량 자원입속을 금한 傳敎,82) 현종 55년 11월에 閑遊輩들의 군관모속 을 통한 면역도모에 대해 영의정 鄭太和의 變通 건의로 인하여 각 衙門 한량군관의 군역 충 정을 명한 사실83) 숙종 26년의 각 廳 한량군관을 200명으로 한정하고 在鄕者는 모두 汰去 하기로 한 결정84)을 통하여 군관에 모속하는 한량에 대한 조정의 기본 입장과 조치들을 확 78) 仁祖實錄 권2, 원년 5월 丙申조. 79) 備邊司謄錄 50책, 肅宗 25년 7월 26일조. 80) 備邊司謄錄 43책, 肅宗 15년 4월 4일조 廣州留守李沆所啓 各衙門軍官則一歲之中 問安 一度而已 終身得免軍役. 81) 承政院日記 29책, 仁祖 8년 2월 26일조 鄭基廣以屋衛廳言啓曰 扈衛廳軍官 當初則勿論 出身閑良 井爲自望 而近日則閑良之自初帶率者外 雖內地閑良 切不自望. 82) 備邊司謄錄 16책, 孝宗 4년 6월 21일조 右議政李時白所啓 往年臺諫 請勿以閑良爲軍官 自上以新自望者 勿以閑良爲之 前自望則仍存事 傳敎矣. 83) 承政院日記 186책, 顯宗 5년 11월 23일조 領議政鄭太和曰 至如良役偏苦之弊 人多言之 不可不大段變通矣 其中閑遊之輩 冒屬於各衙門軍官 圖免軍役者 多有濫雜之弊 如此之類漸多 爲 先變通矣 上曰 今後則各衙門閑良軍官 使之充定於軍役 而勿定額數可也.

인할 수 있다. 한편 숙종 28년의 비변사등록 에 의하면, 좌의정 李世白이 忠壯衛 등 諸衛가 閑丁投入 의 소굴이 됨을 지적하고, 차후 한량의 충장위 充補를 금할 것을 건의하여 왕의 裁可를 얻 었는데,85) 이로써 보면 각 廳의 군관뿐만 아니라 諸衛 역시 한량들이 피역의 수단으로 입속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叙用에 있어서, 한량은 出身과 함께 관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다. 純祖代 우의정 南公轍은 次對에서, 무예로써 승진하는 것도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출신과 한량은 宣傳官이나 部將에 천거되는 것 을 가릴 것 없이 모두 6개월 간 禁軍으로 근무한 뒤에 비로소 初仕에 擬望되는 것이 법제이니, 이 것은 저들로 하여금 弓馬를 익히고 軍制에 통달시키도록 하고자 하는 뜻입니다.86) 라고 하였는데, 이로 보면 한량은 출신과 함께 추천을 통하여 初仕에 의망될 수 있었다. 文治 위주의 朝鮮王朝는 인재의 추천에 있어서도 학행을 기준으로 한 文學之士에 편중되었 으며, 이러한 기풍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將才가 부족함에 따라 武備에 관심을 가진 諸王들 은 추천의 책임을 진자에게 武才를 천거하도록 독려하였다. 여기서 피추천자의 직역은 출신 과 함께 한량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이들의 법제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는데, 몇 건의 자료를 시기의 선후에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兵曹判書閱鼎重曰 在前武才則絕無薦聞者 今則雖業武閑良 亦令薦聞 似當 上允之(顯宗 13 년).87) 藥房都提調崔錫鼎所啓 頃者吏曹判書李寅燁陳達榻前 以爲學行人才別薦 朝家旣已各令薦 進 而至於草野閑良出身及行伍間人才 曾無擧薦之事 其所陳達 誠爲得宜 答曰知道 (肅宗 32년).88) 將才薦目 以智慮超衆膂力過人二條爲定 五軍門大將及諸道兵水使薦主 別單啓下 而草野中閑 良出 身及行伍間抜萃者 極擇論薦 答曰允 (肅宗 32년).89) 이처럼 천거를 통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는 있었으나, 出仕의 正路인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이들 한량은 당연히 陞次에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효종 8년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지금 外方의 將官도 (직무가) 한가롭지 않으므로 前規에 의거하여 20개월이 된 자는 參下官의 경우 6品으로 승진시키고 이미 6품을 벗어났으면 승진서용하되 또한 근무연한이 오래된 것만 가 지고 正 3품의 직임까지 승진시킬 수는 없으며, 출신과 한량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므로 출신의 경우는 僉正까지 한량의 경우는 判官까지로 제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니 규정을 정하여 시행 84) 備邊司謄錄 51책, 肅宗 26년 2월 16일조 領議政徐文重所啓 當此閑良查正之日 不可無 變通之道 減其額數 各廳 定以二百名 汰其在鄕者 皆以在京之人 充定似當云 故敢達 上曰 扈衛 廳外方軍官 實爲無用矣 在郷者 盡爲汰去各廳 定以二百名之說 似好 依此爲之 可也. 85) 앞의 주 19) 참조. 86) 純祖實錄 권21, 18년 7월 辛丑조 次對 右議政南公轍啓言 武枝陞遷 亦有階梯 出身閑良 無 論宣部薦 皆經禁軍六朔然後 始擬於初仕 自是法典 此欲使肆習弓馬 通諳軍制之意也. 87) 顯宗改修實錄 권25, 13년 3월 癸丑조. 88) 備邊司謄錄 57책, 肅宗 32년 7월 13일조. 89) 備邊司謄錄 57책, 肅宗 32년 7월 23일조.

함이 어떻겠습니까 (答曰 依啓)90) 라고 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출신은 從 4品 僉正까지 한량은 從 5品 判官까지 서용되었음 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한량은 원칙적으로 군역을 부담하여야 하였으나, 출신성분에 있어 兩 班中庶良民이 혼재되어 있었으므로 避役을 기도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歇役인 군관에 冒 屬이 성행하였다. 또한 朝廷도 이들의 군관입속을 限品許容함으로써 班常의 중간 존재로서 의 한량의 지위를 법제적으로 인정하였다. 아울러 이들 한량이 무과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薦擧를 통하여 出仕할 수 있었으며, 종 5품 判官까지 限品叙用될 수 있도록 규정 됨으로써 비록 출신과는 차별이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반상의 중간존재로서의 지위를 확보 하였던 것이다. 2. 社會的 地位 軍案에 入錄되지 않아 군역에 대한 有資格 한유자 또는 無役無階의 한유자였던 한량은 무 과거자들이 科時에 한량을 錄名하거나 각종 군관의 한량군관을 호칭하는 등 類似職役으로 사용되어 왔다. 業武와 이러한 유사직역으로서의 한량은 천민이외의 양반중서양민 등 다양 한 신분층을 포함하였고, 業武와 더불어 거의 통용되어 오다가 숙종 22년에 양반의 業武者 를 한량으로 규정하면서 제도화된 양반직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役문제 및 閑良叙用 등 과 관련지어 본 그들의 법제적 지위는 여전히 양반과 같은 처우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반상 의 중간존재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한량은 본래 군안뿐만 아니라 戶籍에도 入籍하지 않은 漏籍閑遊者였다. 세종 19년 에 왕이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漏挾戶內의 한량이 自願試才한 자가 몇 명이며, 한량 이 본래 군안에 실리지 않은 사람이니 비록 試才에 자원 入格하여 賞職을 받았으나 그대로 한량이 되어 호적에 실리지 아니했는가 등에 대해, 자세히 상의하여 확정한 것을 갖추어 啓 達할 것을 命한 傳旨91)에서 漏戶漏籍하고 있던 한량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한량은 조 선후기 사회로 접어들면서도 마찬가지의 상태였다. 효종 7년에 特進官 尹履之가, 仁祖時 武 科試官이었을 때 무과에 閑良錄名者 2천이나 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한 언급,92) 효종 8년 에 宋浚吉許積 등이 王과의 대화에서, 무과 녹명자 5천여인 중 한량이 過半이었다고 한 언 급93)등에서 많은 한량이 확인되지만, 1606년(선조 39)과 1630년(인조 8)의 경상도 山陰帳 籍 94)에서 閑良入籍者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는 곧 17세기 전반까지도 한량이 漏籍閑遊 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말부터는 한량이 소수이긴 하지만 호적에 入籍되고 있다. 丹城帳籍 의 경우, 1678년(숙종 4) 호적에서 한량이 호주로 입적된 자가 전혀 없으나, 그 末尾의 都合統 計에는 35명을 파악하고 있다. 그 이후 18세기 중반의 영조 연간까지도 閑良入籍이 全無하 90) 承政院日記 146책, 孝宗 8년 9월 1일조 備邊司啓曰 今則外方將官 亦不閑歇 依前規准 五十朔者 參下則六品遷轉 已出六品者則陞叙 而亦不可只計日月之久 遷至於正三品之職 其中出 身閑良在所當別 出身則限僉正 閑良則限判官 似爲宜當 依此定規施行何如 答曰 依啓. 91) 앞의 주 33) 참조. 92) 앞의 주 46) 참조. 93) 앞의 주 47) 참조. 94) 慶尚道山陰帳籍 (奎章閣圖書, 14640, 14820) 참조.

거나 극소수일 뿐이던 것이 18세기 후반의 정조 연간에 오면 전체 호수의 1% 정도가 한량 으로 入籍된 경우도 있다.95) 물론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이같은 한량의 數는 당시 전체 호수에 대한 對比, 각종 군관에 濫屬한 많은 한량군관, 그리고 영조 5년의 五家統法 申明舊制節目 에서 한량을 속이고 숨긴 자는 里任을 刑推하여 定配하도록 한 규정96) 등을 고려할 때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국가가 한량을 捜得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한량의 수가 적은 현상은 여전히 役부과의 기본대장인 군안과 호적에 漏籍閑遊 함으로써 피 역하는 良丁,97) 곧 한량이 많은 데에 연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本節에서는 이상과 같은 한량에 대한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였는가를 帳籍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帳籍은 관찬문서라는 측면에서 법제적 의미를 띠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러나 장적작성의 기초가 되는 戶口單子는 그것이 비록 里任, 面任 또는 色吏의 확인과 舊戶 籍과의 대조를 거쳐야 할지라도 각 戶에서 올리는 戶口申吿書이고98) 또 호구단자에 기재된 戶主家族의 身分表示(戸主 및 率子의 職役, 婦女子의 號稱)와 호주의 四祖職役 등이 곧 사회 적 지위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本節에서는 同一地域의 累代 式年戶籍을 통해 家系를 추적할 수 있는 丹城帳籍 을 대상으로 하였다. 단성장적 이 전술한 바와 같은 한량의 數的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량을 중심으로 작성한 家系는 累代 式年호적을 통한 호주 및 그 先後世代의 職役과 婦女子의 號稱 등에 주목하여 작성하였고, 이를 통해 한량이 제도 적으로 양반 직역화한 숙종 22년(1696) 이후의 사회적 지위에 주목하였다. 累代 式年戶籍을 통해 閑良戶主의 家系事例를 詳考할 때, 丹城지역의 한량은 확고한 양반 또는 그 자제로 확인되는 가계를 발견할 수 없고, 다만 한 두번의 식년호적에서 양반직역을 冒錄했거나 同 人의 직역 변동에 의한 상승현상일 뿐 대체로 班常의 중간존재로 파악된 다. 그 사례를 보기로 한다.. 표 1 의 사례는 1786년(정조 10) 호적에서 한량을 직역으로 한 權聖民의 가계이다.99) 95) 慶尚道丹城縣戶籍大帳 上下(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史學硏究室, 1980)에 入籍된 閑良戶數는 다음의 표와 같다. 1717년 1720년 1729년 1732년 1735년 式年戶籍 1678년 肅宗 4 肅宗43 肅宗46 英祖 5 英祖 8 英祖 11 總戶數 2113 2514 2570 2925 2584 閑良戶數 1 百分比 0.03 1750년 1789년 1759년 1762년 1780년 1783년 1786년 英祖 26 正祖 11 英祖 35 英祖 38 正祖 4 正祖 7 正祖 10 3012 2941 2944 3001 3006 4 42 4 3 28 4 30 0.8 0.14 0.1 0.13 1 ㄱ) 總戶數는 각 式年戶籍 末尾의 都合統計에 準함. ㄴ) 閑良戶數는 筆者가 확인한 수이다. 그러나 閑良人口는 각 식년호적 말미의 도합통계에서 1678년의 경우만 한량 35명을 파악하고 있을 뿐, 그밖의 식년호적의 경우 전혀 파악하지 않고 있다. ㄷ) 百分比는 총호수에 對比한 것임. 96) 備邊司謄錄 86책, 英祖 5년 7월 15일조 五家統法申明舊制節目 閑良欺隱者段 里任刑推 定配 摘發者 終身免役爲白齊. 97) 英祖實錄 권39, 10년 12월 辛亥조 副司果李濟上䟽略曰 良役變通 實爲當今急務 而良丁 本非不多 避役之所多 故難得也 漏籍閑遊八也 至於備局餘丁 其數亦不啻累百 良丁之難得 皆 以此也. 98) 崔承熙, 戶口單子准戶口에 대하여 ( 奎章閣 7, 서울大學校 圖書館, 1983), pp. 81 82.

1780년 호적에서 권성민은 幼學을 직역으로 하였고 그의 四祖가 모두 學生임으로 직역상 양 반가계임이 분명하나, 그의 妻는 中人 婦女子를 지칭하는 姓 을 호칭하고 있어100) 身分內婚 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림제목] 閑良 權聖民家系 [그림제목] 閑良 黃龍澤家系 1783년 호적에서 권성민과 그의 三祖는 모두 業武를 직역으로 하고 있으며, 1786년 호적 에서 권성민은 閑良을, 그의 四祖는 모두 業武를 직역으로 하고 있어 반상의 중간존재인 中人家系를 이루고 있다. 또한 く표 2 의 사례는 1780년(정조 4) 호적에서 한량을 직역으로 한 黄龍澤의 가계101)이다. 1780년과 1783년 호적에서 한량 황용택의 四祖는 모두 양반직역 인 유학과 학생이었고, 그의 妻와 母의 호칭도 모두 양반 부녀자를 지칭하는 氏 를 호칭하 고 있어 분명히 양반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1786년 호적에서 황용택의 四祖직역이 등 99) 앞의 戶籍大帳 下, p. 360, 498, 636, 758. 참조. 이후, 각 표의 숫자표시는 本表에 제시된 各 式年戶籍 例示에 準하며, 각 표외 ( )는 직역이 등재되지 않은 경우이다. 100) 17세기 후반에 대두하기 시작한 姓 호칭은 대체로 18세기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기에 中人身 分에 부합하는 부녀자의 호칭으로 일반화되었다. 婦女子의 號稱構造 에 관한 연구는 歷史學會 編으로 인쇄 중에 있는 朝鮮後期鄕村社會硏究 에 所收된 李俊九의 17, 18세기 丹城縣民 의 身分構造 참조. 101) 앞의 戶籍大帳 下, p. 300, 437, 578. 참조

재되지 않아 양반가계로서 瑕疵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의 妻와 母도 姓 을 호칭하고 있 어 中人 이하의 가계임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표1 표2 의 가계는 양반에서 중인으로 그 지위가 格下하고 있지만 본래 반상의 중간존재였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한편 위의 사례와는 달리 중인에서 양반으로 그 지위를 상승시키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림제목] 閑良 權汲家系 750년(영조 26) 호적에서 한량을 직역으로 한 權汲의 가계인 표 3 의 사례102)를 보면, 1732년 호적에서 권급과 그의 父와 祖는 업무, 그의 曾祖는 학생이었으므로 중인가계였지만, 1750년1759년1762년 호적에서 권급은 한량, 그의 三祖는 모두 학생으로서 1732년보다 상승 된 양반가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同一人이 업무에서 한량으로의 직역변동에 따른 가계 변동임을 감안한다면 확고한 양반가계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권급의 妻는 前妻와 後妻가 있는데, 권급이 업무일 때 그의 처는 姓 을, 권급이 한량일 때 그의 처는 氏 를 호칭하고 있 어 부녀자의 호칭이 의미하는 신분적 지위에서 보면 양반으로 상승하고 있으며, 한량이 업 무보다 상위의 직역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동일인의 직역변동에 따른 부녀자 의 호칭변동임을 감안한다면 확고한 양반가계라고 할 수 없다. 또한 1786년(정조 10) 호적에 서 한량을 직역으로 한 李弘瑞의 가계인 표 4 의 사례를 보면,103) 1735년 호적에서 淡과 그의 父는 업무를, 담의 祖와 曾祖는 武學을 직역으로 하였고, 담의 妻는 召史를 호칭하였으 며, 1783년 호적에서 담의 손자 弘瑞는 업무를 직역으로 하였으므로 분명히 반상의 중간존 재로서의 중인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홍서는 1786년에 한량을, 1789년에 유학을 각각 직역으로 하면서 그의 四祖와 率子가 양반직역을 나타내고 있으나, 그의 妻와 率婦의 호칭 은 오히려 姓 을 호칭하고 있다. 이는 중인층에서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의 一段을 시사하고 있으나 일시적인 冒錄에 불과하므로 양반가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표3 과 표4 에서 의 한량은 유학으로의 상승을 위한 階梯的 성격을 시사하고 있다. 위의 사례에서 한량가계는 확고한 양반이 아니라 대체로 반상의 중간존재로 확인되었다. 한량의 이같은 신분적 지위는 同一人의 직역변동을 통해 더욱 분명히 확인된다. 표 1 의 權聖民은 유학⑩ 업무⑪ 한량⑫ 업무⑬으로 식년마다 변동된 직역을 나타내고 있으며, 표 3 의 權汲은 업무⑤ 한량⑦⑧⑨로, 표 4 의 李弘瑞는 업무⑪ 한량⑫ 유학⑬으로 직역변동을 나타내고 있다. 102) 앞의 戶籍大帳 上, p. 597, 849. 下, p. 22, 163. 참조. 103) 앞의 戶籍大帳 上, p. 777. 下, p. 97, 519, 655, 782. 참조.

[그림제목] 閑良 李弘瑞家系 [그림제목] 閑良 卞昌和家系 또한 표 5 의 卞昌和104)는 한량⑧ 업무⑨ 유학⑩ 업무⑪ 한량⑫⑬으로, 표 6 의 金聖業105)은 업무⑧⑩ 良軍官⑪ 한량⑫ 업무⑬으로, 표 7 의 李春成106)은 選武軍官⑧ 禁衛保⑨ 한량⑩ 업무⑪ 한량⑫⑬으로, 표 8 의 姜再良은 한량⑩ 업무⑪ 한량⑫ ⑬으로 각각 직역변동을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이 동일인의 직역 변동에서 한량은 주로 업무 와 더불어 先後를 달리하면서 변동하고 있는데, 이는 位階上의 동등성 내지 동질성을 시사 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한량을 양반의 業武者로, 업무를 庶孽의 업무자로 각각 규정한 숙 종 22년의 법제와는 달리 한량 업무가 분별없이 실제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지위가 대체로 반상의 중간 존재로 위치함으로써 常民이 幼學으 104) 앞의 戶籍大帳 下, p. 122, 265, 401, 541, 677, 803. 참조. 105) 앞의 戶籍大帳 下, p. 75, 360, 497, 635, 758. 참조. 106) 앞의 戶籍大帳 下, p. 23, 171, 318, 458, 597, 719. 참조.

로 상승하기 위한 階梯的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한량이 곧 閑遊者였고 또 신분상승의 계제적 성격도 아울러 지녔기 때문에 有役下層民의 閑良冒稱을 유도하였을 것이다. 이는 다음의 사례에서 확인된다. 표 8 은 1780년(정조 4) 호적에서 한량을 직역으로 한 姜再良의 가계인데,107) 1678년(숙종 4)부터 1세기를 거치는 동 안 正兵에서 閑良으로 신분상승하고 있는 사례이다. 1678년 당시 호주 姜延文은 黃店匠人이 었고, 그의 父와 祖는 직역명을 등재하지 않았으며, 그의 曾祖는 정병이었는데, 이로 보면 분명히 상민신분이었다. 그러나 이후 1세기가 지난 1780년 호적에서 호주 姜再良은 한량을 직역으로 하였고, 그의 父는 通政大夫, 그의 祖는업무, 그의 曾祖는 納嘉善大夫, 그의 外祖는 업무, 그의 率子는 모두 良軍官으로서 반상의 중간존재였다. 이러한 사례는 納栗할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한량의 지위로 성장하고 있음을 시사 하고 있는데, 강재량이 한량 ⑩ 업무⑪ 한량⑫⑬을 거듭하면서 은연중에 중인층화하고 있다. [그림제목] 閑良 金聖業家系 [그림제목] 閑良 李春成家系 [그림제목] 閑良 姜再良家系 107) 앞의 く戶籍大帳 上, p. 60, 206, 621. 下, p. 50, 335, 475, 613, 735. 참조.

[그림제목] 閑良 張鹏擧家系 또한 표 9 는 1780년(정조 4) 호적에서 한량을 직역으로 한 張鹏擧의 가계인데,108) 1678 년(숙종 4)부터 1세기를 거치는 동안 私奴에서 正兵을 거쳐 閑良으로 신분상승하고 있는 사 례이다. 1678년 당시 호주 生伊는 직역이 私奴로서 그의 父系母系妻系는 물론이고 그의 아 들 士龍까지 모두 姓없이 이름만 표기된 奴婢家系였다. 그러다가 1717년의 호적에는 士立 (生伊의 子)의 姓은 張으로, 직역은 (納)通政大夫로 기록되었고, 그의 父와 祖도 정병으로 기 록되었다. 다시 1780년 호적에서 士立의 孫子代인 鹏擧에 이르면 閑良으로 나타나므로 1세 기 동안에 姓이 표기되고, 직역도 노비에서 정병을 거쳐 한량으로 신분상승된 가계를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사례도 가계상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납속할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량의 지위까지 성장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1762년 호적에서 禁衛軍이었던 張鹏擧 가 1780년 호적부터 계속 한량⑩⑪⑫⑬을 거듭하면서 은연 중에 중인층화하고 있다. 108) 앞의 戶籍大帳 上, p. 131, 279, 413, 553, 684, 800. 下, p. 271, 406, 546, 682, 808. 참조.

이상에서 살펴 본 바 閑良은 양반가계로 상승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확고한 양반이 아니었으며, 숙종 22년에 庶孽직역화한 業武와 분별없이 통용되고 있어 대체로 반상의 중 간존재로서의 중인층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한량이 곧 한유자였고 또 반상의 중간존재였 기 때문에 신분상승의 계제적 성격도 아울러 지녔으므로 有役下層民의 한량모칭을 유도하였 을 것이고, 이는 실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유역하층민이 한량을 호칭함으로써 은연중에 중인층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단성지역의 이같은 현상이 곧 당시 전국적인 실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은 史料와 더불어 附記해 둔다. 영조 연간의 기록에 한량은 武弁家의 자제로서 당 나귀를 타고 射場에 왕래하기도 하였으며,109) 정조는 慶科에 入格한 武士 가운데 士夫閑良 으로 家閥이 현저한 자가 적지 않음을 지적110)하고 있어 양반한량이 실재했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영조 연간의 한량 鄭仁은 고려충신 鄭夢周의 後裔였으며,111) 정조 연간의 한량 李 齊年은 孝寧大君의 12세손이었다.112) 이로 보면 한량은 武弁家子弟 士夫閑良 忠臣後裔 王 子後裔 도 있었다. 그리고 前章에서 언급한 바, 영조 6년에 藥房提調 尹淳이 왕에게 아뢴 것 처럼 한량은 양반도 있고 中庶도 있고 양민도 있었음을 아울러 附記해 둔다. Ⅳ. 結 語 閑良은 高麗와 朝鮮의 양대에 걸쳐 특정계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대체적으로 麗末鮮初의 한량은 前銜官과 閑散官 등 광범위한 계층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조선후기에 와 서는 의미가 축소되고 지위가 격하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술된 本稿의 내용을 결론적으 로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후기 한량은 屬處가 없이 閑遊한다는 의미의 閑 과 군역에 대한 有資格을 지칭 하는 良 이 결합함으로써 한유하는 군역 유자격자라는 어의적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의미 범주에 있어서 전기에는 포함되었던 전함관 및 한산관을 제외한 良丁閑良丁閑丁閑散操弓 者를 포함하고 있으며, 신분계층적 측면으로는 양반中庶양민 등 천민 이외의 다양한 신분 층을 포함하고 있었다. 둘째, 조선전기에 類似職役으로 사용되던 한량은 인조 3년 7월에 작성된 號牌事目 原 案에서 士族無屬處者 士族不入學者 를 지칭하는 제도적 직역명으로 일단 수용되었으나, 事 目의 검토과정에서 사족의 未入學者를 한량이라고 호칭하여 容貌疤記하는 부당성이 지적되 어 삭제되었다. 이후 다시 유사직역으로 통용되던 한량은 숙종 22년 崔錫鼎의 건의로 인하 여 양반 業武者의 직역으로서 확정되었다. 셋째, 여말선초의 한량과 閑散은 한가롭게 한유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칭호로서 109) 英祖實錄 권53, 17월 3월 辛巳조 右議政趙顯命奏曰 昇平日久 任便成習 閑良之習藝者 亦 或騎驢往來於射場 臣所目見 朝家所取於武臣 以氣力也 如此閑良 雖僥倖登第 將安用哉 請令兩 局 査出停擧 上可之 時武弁家子弟 多驕溢 出入率着幅巾驕驢而行 往往不知弯弓 而有代射登第 者 故顯命之言如此. 110) 正祖實錄 권18, 8년 11월 己巳조 敎曰 今番册封慶科 武士入格 至於二千六百七十六人之 多 而士夫閑良家閥表表者 亦甚不少. 111) 英祖實錄 권77, 28년 9월 甲子조 修撰南泰會奏曰 茂山居閑良鄭仁 即高麗忠臣鄭夢周之後 裔也. 112) 正祖實錄 권49, 12년 10월 壬寅조 敎曰 閑良李齊年 孝寧大君十二世孫 令兵曹 先付內禁 衛使之待令.

비슷한 의미범주의 것이었으나, 조선후기의 한산은 閑職 現任者, 전함관, 無役無職 한유자의 세가지 의미범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중에 무역무직 한유자라는 의미로서의 한산이 한량 과 동일 범주임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무역무직의 한산은 속처가 없는 한유자로서 儒業에 종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弓術을 習行하는 武土的 존재였다. 그들은 外方의 한유자를 대변하는 사회계층적 집단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천민 이외의 다양한 신분 층을 포함하고 있으나, 實學者들에게는 中人身分層으로 인식되었다. 넷째, 한량은 원칙적으로 군역을 부담해야 하였으나 避役을 도모하거나 歇役인 軍官에 冒 屬하기도 하였는데, 朝廷이 이들의 군관 입속을 限額許用하였다. 또한 이들 한량은 천거를 통하여 出仕할 수 있었으며 從 5品 判官까지 限品叙用될 수 있었다. 한량이 비록 出身과 차 별이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班常의 중간존재로서의 처우를 받았다. 다섯째, 帳籍을 통해 閑良家系를 분석하여 본 결과 한량은 확고한 양반이 없었고, 常民은 물론 私奴까지도 1세기를 거치는 동안 納栗할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량을 호칭하기 도 하였다. 그러나 庶孽 직역화한 業武와 더불어 분별없이 통용되고 있어 대체로 반상의 중간존재로서의 中人層으로 파악되었다. 한량이 곧 한유자였고 또 반상의 중간존재였기 때 문에 신분상승의 階梯的 성격도 아울러 지녔으므로 有役下層民의 피역과 신분상승을 유도하 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 閑遊하는 良役 有資格者라는 의미의 한량은 조선후기에 비로소 직 역화하였고, 그것이 비록 양반의 業武者로 확정되었더라도 여전히 양반中庶양민 등 다양한 신분층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班常의 중간존재로서의 법제적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