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濟史에서 보는 韓國近現代史問題 趙 璣 濬* Ⅰ. 經濟史에 있어서의 近代의 槪念 1. 18세기의 近代指向的 經濟發展의 Ⅱ. 開拓期의 韓國社會經濟史學 諸樣相 1. 日帝 官學者들의 植民地史觀 2. 18세기의 經濟發展에 대한 評價 2. 東洋社會 停滞史觀 Ⅴ. 韓國近代史의 展開 3. 마르크스의 唯物史觀 1. 開化期의 時代的 性格 Ⅲ. 解放後 韓國經濟史學 2. 植民地支配下의 韓國近代史의 位相 Ⅳ. 韓國史 展開에서의 資本主義萌芽에 Ⅵ. 韓國現代史의 問題 관한 問題 Ⅰ. 經濟史에 있어서의 近代의 槪念 經濟史學에서는 근대를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된 시기를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란 재화 의 생존, 流通, 消費 등의 경제활동이 自由市場經濟原理에 따라 운영되는 社會經濟體制 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회경제체제 속에서 企業이 발생하고 技術革新이 진행되며, 그 과정에서 자본을 축적하고,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한 새로운 市民계층이 성장하여 領 主지배체제하의 봉건적 전통사회를 대체하여 시민적 질서의 사회를 실현시켰고, 자본주 의 경제문화를 창출해낸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문화는 서구에서는 16세기경부터 싹터 성장하여 왔고, 18세기 이후 產業革命과 市民革命을 이룩하면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대륙에서 근대적 사회경제체제를 형성시켰다. 서구의 歷史學 社會科學에서는 이렇게 하여 출현된 자본주의 시대를 近代라 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문화가 동양에 전파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였고 이에 접한 동양의 전통 사회는 큰 격변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동양의 전통사회 내부에서 싹터 성장하여 오던 근대적 시민계층은 자본주의 문화를 갖고 들어온 새로운 침략세력에 부딪치게 된 것이 다. 開港후 서구제국으로부터 유입된 多量의 근대 공장제 상품은 동양의 舊來의 수공업 생산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농촌 家內手工業과 17, 8세기 이래 발생 성장하던 매뉴팩 * 學術院 會員.
- 144 - 國史館論叢 第50輯 처도 괴멸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수공업자 중에는 서구로부터 근대 기술을 도입하여 공장공업을 일으킨바 있었으나, 서구로부터의 값싸고 질좋은 상품과 경쟁이 되지 못하고 또 資本力에 밀려 폐업 또는 서구자본에 예속된 경우가 많았다. 서구자본주의의 自由民 主體制는 동양의 舊來의 封建的 지배체제를 붕괴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었으나, 또 한편 침략자본은 봉건적 경제질서를 강화시키는 일면도 있었다. 이들 침략자본은 동양에 와서 資源을 값싸게 얻기 위하여 봉건세력과 야합하여 노예적 강제노동을 이용하고 있은 것 이다. 이와 같이 서구의 자본주의는 동양에 들어와서 근대 시민계층의 성장을 가로막는 작용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세 후기부터 성장하여 오던 시민계층은 한편으 로는 舊封建세력과 대항하고 또 한편은 자본주의의 침략세력과도 싸워 나가면서 근대적 改革을 진행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脫封建 反侵略的 近代改革은 동양사회에 있어서의 근 대적 발전을 指向하는 시민계층의 課題이며, 이를 실현시키는 過程이 동양근대사 전개의 實像이다. 한국근대사도 開港 이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개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동양에 있어 서와 근대의 實像을 머리에 두면서 한국근대사의 전개와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Ⅱ. 開拓期의 韓國社會經濟史學 韓民族의 社會經濟史가 근대 서구에서 발달한 歷史學 및 社會科學의 시각에 따라 연 구되고 서술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였다. 이 기간은 이 학문의 연구에 대해서 대단 히 중요한 시기였다. 韓國社會經濟史學은 이 시기에 개척되었고 그 연구 결과는 그 후 한국에 관심을 갖는 국내외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왔다. 해방 후 대학에서 韓國社會經濟史의 강의를 담당하고 또 연구에 종사한 학자들의 가 장 큰 그리고 공통된 고민은 이 개척기의 연구성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였 다. 개척기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이어 받기에는 독단과 오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 면 이 개척기의 韓國經濟史學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으며, 해방 후의 한국사회경제사학은 개척기의 연구에서 무엇을 물려받았고, 그 후 어떻게 이를 극복 전개시켜 나갔는가. 개척기의 韓國社會經濟史의 연구는 대체로 보아 다음의 세 가지 큰 思潮의 영향을 받 아왔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일본 官學者들에 의하여 주장된 植民地史觀이고, 둘째는 비트포오겔로 대표되 는 동양사회의 침체론이며, 셋째는 마르크스 및 그 후계자들의 唯物史觀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 思潮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개되어온 韓國社會經濟史의 연구사조를 고찰하여 보기로 하자. 이 개척기의 한국경제사학계의 主流를 이루고 있었던 역사인식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45-1. 日帝 官學者들의 植民地史觀 식민지사관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創案된 韓國植民地史論이며, 일본 官學者들은 거의 모두가 이 歷史認識 밑에서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사를 서술하여 왔다. 韓國社會經濟史를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 植民地史論을 이끌어 들인 최초의 학 자로는 明治 大正年間에 일본의 대경제학자로 지목되어온 福田德三이었다. 그는 1902년 에 2週間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 1904년 11월부터 다음에 3월에 걸쳐 일본 內外論 叢 에 한국에 관한 논문을 연재한 바 있다. 그 논문의 제목은 經濟單位 發展史上 韓 國의 地位 라는 것으로 한국의 전통사회를 서구의 전통사회와 비교하면서 그 발전단계 의 低位性을 논증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韓國社會經濟史를 이해함에 있 어 그가 독일에서 배워온 역사학파의 經濟發展段階論을 도입하여 그의 식민지사론을 만 들어냈다. 그는 람프리히트(Karl Lamprecht)의 인류경제사회에 대한 발전단계를 제시하 면서 한국은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중세사회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하 면서 일본의 발전과 비교하더라도 鎌倉幕府 시대의 발전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고 본 것이다. 그 이유로서는 그는 한국은 自足經濟를 벗아나지 못하고 봉건화라는 예 비시대를 갖지 못하고 1) 있었다고 본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첫째로 한국에서는 근 세에 이르기까지 土地의 私有化가 달성되지 못했다고 하며, 개항이 되는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도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 독립 自營의 手工業의 分 化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조직은 共同體를 모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상태의 한국은 自力으로 근대화할 수는 없고 외부로부터의 유력한 힘 이 작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植民地史論을 피력하는 것이다. 福田의 한국에 대 한 이상과 같은 이해는 한국에 대한 깊은 연구에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한 국에서 보고 들은 사실에서 그 나름으로의 결론을 이끌어내고 이것으로 한국침략의 이 론을 창출해 냈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당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책 에 대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福田德三의 植民地史觀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했을 뿐만 아니라 乙巳條約 이후 일본의 對韓政策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었다. 宮房田 정리에서 시작하여 한국 전역에 걸쳐 실시된 土地私有權 認定에서 광대한 토지를 國有地에 편입시킨 것을 비롯하여 재 정금융제도의 개편, 鑛工業정책, 行政제도의 개혁, 교육정책의 수립에도 그의 식민지史論 1) 福田德三, 經濟學硏究 前篇(1915) pp. 128 129.
- 146 - 國史館論叢 第50輯 은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의 식민지사론은 또 일본 官學者들에게 계승되었다. 和田一郞, 河合弘民, 鹽川一太郞 등 식민지 한국의 정책과 실무를 담당한 관리와 四方博, 鈴木武雄, 森谷克己 등 대학교 육에 종사한 학자들의 이론구성에도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2) 2. 東洋社會 停滞史觀 韓國社會經濟史연구에 깊은 영향력을 미친 또 하나의 역사 인식은 비트포오겔 등의 東洋社會 停滞論이었다. 그의 이론을 한국사회경제사에 적용시킨 대표적인 학자로는 森 谷克己를 들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마르크스의 아시아的 生產樣式 논쟁에 참가한 사람 으로서 마르크스의 唯物史觀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唯物史觀에는 원 래 두 가지 측면이 강조되어 왔다. 그 하나는 역사과정에 있어서의 繼起的인 발전이론이 며, 다른 하나는 아시아的 생산양식론에서 표명된 停滞性이론이었다. 白南雲이 韓國經濟 史 연구에서 도입한 것은 前者의 발전 이론이며, 그가 한국사 이해에서 정체론을 추방한 이론적 거점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森谷은 後者인 停滞性論을 취하면서 여기 에 비트포오겔의 자연환경론을 가미하여 이를 韓國社會經濟史 연구에 도입했던 것이다. 무릇 한사회의 발전과 정체의 문제 또는 사회의 특질은 사회적 생산의 제특징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비로소 근본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라고 전제하고, 조선의 경제 사회가 현세기 초까지 오래 정체되어 온 것이 현저한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결국 舊來외 조선사회의 生產諸力에 대 한 분석에서 천명될 수 있다. 이하의 서술은 이러한 生產諸力의 여러 因子중 자연적 여 러 조건, 특히 외적 자연 제조건의 분석이다. 물론 이 분석을 가지고서는 조선사회의 정 체의 원인이 곧 해명될 수는 없다고 하겠으나 어느 정도의 조명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3) 2) 和田, 河合, 鹽川 등은 韓末에 도래하여 통감부의 관리로 있으면서 한국에 대한 경제정책에 직접 관여한 사람이었다. 특히, 和田은 토지조사사업을 직접 立案 지휘한 바 있었으며, 四方, 鈴木, 森谷 등은 당시의 경성제대 교수로 있으면서 일본의 식민지정책을 이론적으로 지도해온 사람이었다. 해 방전의 국내외의 학자들은 한국에 관한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3) 森谷克己, 舊來의 朝鮮經濟 社會의 外的 自然條件 (京城帝大法文學部 編, 朝鮮社會經濟史, 1933) p. 305.
- 147 - 라 하였다. 이상은 森谷의 논문 舊來의 朝鮮經濟 社會의 外的 自然條件 의 결론에서 한국의 자연조건이 한국사회의 침체를 초래했다는 근거를 삼은 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비트포오겔의 동양사회 停滞論을 한국사회경제사 연구에 도입한 경로를 알 수 있다. 日 人學者들의 한국사회에 대한 植民地史論과 비트포오겔의 동양사회 침체이론은 개척기의 韓國社會經濟史 연구에 종사한 많은 학자들을 미혹시켰다. 이리하여 개척기의 韓國經濟 史 연구는 일본 官學者들의 식민지史論 뿐만 아니라 일부 民族史家 등의 韓國社會 停滞 史論에도 깊이 침투되고 있었던 것이다. 3. 마르크스의 唯物史觀 福田를 비롯한 일본 官學者들의 植民地史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학자는 여럿이 있었으나 社會經濟史의 측면에서 이를 공박하고 나선 학자로는 특히 白南雲을 들지 않 을 수 없다.4) 그는 한때 세계의 학계를 풍미한 마르크스 및 그 후계자들에 의하여 제창 된 唯物史觀을 韓國史 및 韓國社會經濟史 연구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白南雲은 우 선 韓民族의 역사과정에서 봉건사회의 결여를 지적하면서, 韓國史 발전단계의 저위성을 주장한 福田를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朝鮮經濟史의 영역에 착안한 최초의 학자는 본인이 아는 한에서는 先師 福田博士라 하겠다. 그러나 福田博士는 조선에 있어서 封建制度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한 점에서 그에게 승복할 수 없다. 莊園制度를 封建制의 유일한 표시로 본다면 그것은 부르주아 史學의 형식론에 불 과하다. 따라서 만일 조선에 莊園이 있었던가 없었던가의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직 封建制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莊園의 유무를 갖고 半島의 봉건사회를 규정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과학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으로 볼 수 없다.5) 白南雲은 또 朝鮮特殊事情 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韓國史의 停滞性 을 주장하 는 일본 官學者들을 논박하면서 特殊性은 朝鮮史學의 영역의 개척을 위해서는 정력적 으로 배격되어야 할 현실적 대상이다 6)라고 강조한 것이다. 唯物史觀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韓國社會經濟史의 개척에 나선 白南雲의 논박은 비단 日人官學者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民族史家에 대해서도 화살을 던졌던 것이다. 4) 日人學者들의 植民地史觀을 실증적으로 논박하면서 民族主體性을 강조한 國史學者도 많이 있었다. 申采浩, 朴殷植, 鄭寅普, 文一平, 安在鴻 등 여러 학자는 그 대표적인 학자라고 하겠다. 5) 白南雲,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卷(1937) p. 2. 6) 위의 책 p. 7.
- 148 - 國史館論叢 第50輯 최근의 우리 선배는 朝鮮史學을 위하여 얼마만큼 공헌을 한 것일까. 그들은 혹은 文獻 고증을 위하여 또는 古蹟답사 및 遺物수집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물론 그 모두가 필요 한 작업이기는 하다. 他面 우리 史學의 영역에 하나의 새로운 그러나 불행한 각인으로 서 特殊史觀 이란 舶來品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것도 우리의 선배들인 것이다 이들 은 적어도 관념적으로 朝鮮文化史의 독자적 小宇宙(Micro-Kosmos)로서 특수화하려는 기도는 비교적 깊이 뿌리 박혀 습관화되고 있다.7) 이러한 특수성도 일본 官學者들의 朝鮮特殊事情이란 이데올로기와 한가지로 배격받아 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白南雲은 한국사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종래의 견해를 대담하게 일축하 면서 难物史觀에 입각한 一元論的 歷史법칙을 韓國史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의 전 과정은 비록 지리적 조건, 人種學的인 骨相, 문화 형태 의 외형적 특징 등 다소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으나, 외관적인 소위 특수성은 다른 文 化 民族의 역사적 발전법칙과 구별될 수 있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世界史的 一般論的 역사 법칙에 의하여 다른 제 민족과 거의 같은 제도의 발전과정을 거쳐온 것이다 조 선민족의 發展史는 그 과정이 여하히 아시아的 일이라도 사회구성의 내면적 발전으로는 세계적인 것이며, 三國時代의 奴隸制의 社會, 新羅統一期 이래의 東洋的 封建社會, 移植 資本主義社會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朝鮮歷史의 기본적 총 발전 단계를 표시해주는 普遍 的인 특징이며 각각 특유의 법칙을 갖는 것이다.8) 白南雲은 이러한 史觀에 입각하여 1933년에 朝鮮社會經濟史 를 발간했고 1937년에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卷을 간행했다. 그는 이어 그 下卷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연 구에 착수하여 거의 완료되었다고 들었으나 발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Ⅲ. 解放後 韓國經濟史學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경제사 연구는 활기를 띠었다. 각 대학에서 한국경제사의 강좌가 개설되었고, 韓國歷史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진 것이다. 해방직후 수년간 韓 國經濟史 분야에서는 다수의 저작물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들은 1930년대 전 7) 위의 책 pp. 6 7. 8) 위의 책 p. 9.
- 149 - 후의 연구 성과들을 모아 발표된 것으로서 개척기의 韓國經濟史 연구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고 새로운 史觀에 의한 연구라고 볼 수는 없었다. 1946년에는 朴克采 등 4명의 共著로서 李朝社會經濟史 가 발간되고, 1947년에 李基 洙 등 3명의 共著로 日帝下의 朝鮮社會經濟史, 同年에 崔虎鎭의 近代朝鮮經濟史硏 究 第一卷, 1948년에 全錫淡의 朝鮮史敎程, 同年에 李北滿의 李朝社會經濟史硏 究, 1949년에 全錫淡의 朝鮮經濟史 등이 연속적으로 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간된 저작들은 개척기의 韓國經濟史연구에서 보아온 이론적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朴克采 및 全錫淡 등의 저서는 개척기의 한국경제사 분야에서 다루지 못하였던 조선시대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學界에 대한 공헌은 인정되나 이 시기 를 해명하는 歷史認識에서는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하겠다. 그들의 저서에서 는 부분적으로는 白南雲의 역사인식을 반박하고 있었으나, 역사를 보는 視角에서는 마르 크스의 역사이론을 극복한 것은 못되었다. 그 반박들은 결국 마르크스 엥겔스의 이론을 누가 충실히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논쟁에 불과했고 거기서는 아무런 새로운 史觀에 의한 극복의 노력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또 한편 李北滿의 李朝社會經濟史硏究 는 여전히 아시아的 停滞性理論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시아的 생산양식에 대한 朝鮮的 해결, 환언하면 조선 역사가 경험한 정체성의 본질 구명이 없이는 朝鮮社會의 후진성을 해명할 수 없다9) 라고 하면서 그의 한국경제사연구는 이 정체성의 원인 구명에 두고 있었음을 명백히 하 고 있다. 崔虎鎭의 朝鮮近代經濟史硏究 는 1942년에 日文으로 발간했던 저작을 개필 한 것으로서 전쟁전의 연구와 같은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 해방 직후의 韓國經濟史 저서들은 개척기의 한국경제사연구에서 보여준 歷史認識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하겠다. 한국경제사연구에서 새로운 氣風이 조성되는 것은 195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즉 개 척기의 한국경제사연구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수렴하면서 새로운 視角에 입각하여 한국 경제사의 발전적인 양상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난 것이다. 1950년대에 들어오면 한국경제사의 연구 人口가 크게 증대한다. 해방 후 대학을 나온 신진학자들이 이에 가담했고 또 다수의 국사학자들이 韓國經濟史 특히 한국경제의 근대 적 전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957년에는 한국경제사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모여 한국경제사 연구회 가 발족했고 다시 이를 확대 개편하여 1963년에는 한국경제사학회 가 결성되었다. 이 學會에는 당시 9) 李北滿, 李朝社會經濟史硏究 (1948) 참조.
- 150 - 國史館論叢 第50輯 경제사학자들 뿐만 아니라 국사학자들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부문의 학자들이 가담하여 韓民族의 歷史, 특히 근대사 부분의 再照明이 시도되었다. 이 시기의 연구에서 주력을 기울인 것은 개척기의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의 主流를 이루고 있던 한 국사회 경제의 침체론 및 그 亞流인 식민지사론을 극복하고, 또 한편 마르크스의 역사인 식에서 탈출하려는 데 두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기 이후 조선후기 사회, 특히 17, 8세기 이후의 사회경제에 나타나는 변 화에 관한 연구와 이 시기의 新사상 조류인 실학자들의 사상에 관심과 연구를 집중시킨 것은 침체사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에서였던 것이다. 또 한편 마르크스의 唯物史觀에 대해서도 이 시기의 경제사학에서는 재조명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등 下部構造의 변화에서만 설명될 것이 아 니라, 그러한 역사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이를 담당하고 있는 인간 개개인 또는 그 집단 적 意志에서도 찾아 보아야 할 것이라는 역사認識이 대두되는 것이다. 막스 베버나 좀바 르트 및 슘페터의 발전이론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시기의 한국사학회의 새로운 기 풍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학계는 개방되어 세계학계의 신사조를 받아들였고 제 2차세계대전 중 폐쇄되었던 학문적인 고아에서 탈출하게 된 것 도 한국경제사학계의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겠다. 한국경제사학계에 戰後 미국경제사학계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경제발전에 있어서 의 인간의 문제가 중시된 기업인 연구가 소개된 것도 1950년대 말이었다. 미국의 경제사 학계에서는 1950년대 초에 기업인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었다. 1952년에 미국학 계에서는 企業家史硏究所가 하바드大學에서 개설되었고,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경제사가 들이 가담하여 인류의 경제발전의 과정에 있어서 그 주역을 담당하였던 企業人 및 기업 인 계층의 활동과 기여도를 연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는 물론 이때에 시작된 것은 아니고 독일 후기 역사학파에 속하는 좀바르트에 의하여 독일 근대 공업화과정에 있어 서의 사회계층 분석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었으나, 제 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지 속적인 발전을 시도하고 있던 미국에서 다시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분석에서 인류의 발전을 설명하려는 역사인식에 도전하고 나온 또 하나의 학자로서는 로스토우를 들 수 있다. 로스토우는 1959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 학에서 反共產黨宜言(A Non Communist Manifesto)이라는 연제로 二週간에 걸친 강연 을 한 바 있었으며, 이는 마르크스의 唯物史觀的 역사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온 것 이었다. 로스토우는 인류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인간의 意志라던가 국가의 역할이라던가 발전을 모색하는 인간집단의 思想 또는 民族主義 등 비경제적 요인이 주요한 역할을 담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마르크스 史觀을 비판하고 있었다.10) 이러한 사조가 10) W.W. Rostow,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1960).
- 151 - 우리나라에도 1960년대 초에 소개되어 한국경제사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마르크스의 역사인식에 있어서도 1950년대 이후 새로운 경향이 소개되었다. 마르 크스의 역사인식에서 동양사에 대한 아시아的 共同體이론은 과거 刊行된 그의 저서에서 는 분명치 않아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간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우리도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遺稿가 1939년에 소련학계에서 발표됨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낳게 하고 있다. 이 마르크스의 遺稿라는 것은 그가 1857년에서 58년에 걸쳐 작 성된 草稿였으며, 이 초고는 소년 MEL연구소에서 1935년부터 부분적으로 발표되어 오 다가 그 초고의 일부인 資本制生產에 先行하는 諸形態 라는 부분이 1939년에 발표되 었다. 이것은 아시아的 공동체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분명히 표명한 것으로서 종전 에 不分明했던 그의 아시아的 생산양식론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 었다. 이 논문이 일본에 소개된 것은 제 2차대전후인 1949년이며, 한국학계에서는 1950 년대 초에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遺稿인 草稿의 全文은 政治經濟學 批判 의 綱要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의 書題로 간행되었고, 그 全文이 우리나라에 입수된 것은 1953년 베를린의 DIETZ출판사판이었다. 이 마르크스의 遺稿가 한국경제사학계에도 소개됨으로써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새로운 진 전을 볼 수 있었다. Ⅳ. 韓國史 展開에서의 資本主義萌芽에 관한 問題 1. 18세기의 近代指向的 經濟發展의 諸樣相 50년대 이후 한구사회경제사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많은 성과가 나타나 과거 연구에서는 파묻혀 있었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 하여 조선사회는 그 全時期를 통하여 발전이 거의 없는 정체된 사회였다는 과거의 주장 과는 달리 발전적 변화가 있었으며, 특히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사회경제의 각 부문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의 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찾아냈던 것이다. 조선후기 사회경제 부문의 변화로는 우선 시장경제의 확대 및 번성을 들 수 있다. 漢 城의 상거래는 17세기 중엽 이후 크게 성행하여 전통적인 市廛街 뿐만이 아니라 그 외 곽에서도 새로운 군소市廛이 발생한다. 江商을 통한 지방의 물화가 한성에 대량으로 유 입되면서 마포를 비롯한 5江의 나루터에는 신흥 상가지대가 형성되고 이곳에 객주, 여 각,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도매업, 숙박업, 창고업, 금융업 등이 번성하였다. 常設店舖도 한성 뿐만 아니라 지방의 행정도읍 및 물화유통의 요지인 浦, 津에서도 설
- 152 - 國史館論叢 第50輯 립되어 상업도읍의 모습도 갖게 된다. 또한 농민들의 물화유통을 매개하는 市場도 곳곳에 서 발생하며, 지방鄕市의 발달은 자급자족적 농촌경제를 시장경제와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시장경제의 확대 발전은 화폐경제를 정착시켰다. 鑄貨는 17세기 이후 보급이 확대되어 17세기 말기는 이미 상거래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通用이 급속화 하였다. 그리하여 숙 종 4년에는 당시의 주화인 常平通寶가 法貨로 지정되기도 한다.11) 이 시기에 들어오면 화폐의 鑄造量은 이미 화폐의 需要를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즉 화폐는 백성들의 일상 경제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침윤되었고, 백성들이 다량의 鑄貨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화폐의 수요에 대하여 공급이 따르지 못하여 일어난 錢 慌현상은 이미 심화되고 있었다. 18세기 정부의 화폐정책은 과거의 화폐유통의 촉진책에 서 銅錢의 부족으로 일어나는 錢慌의 해소책으로 옮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화폐 輸 入論, 高額錢 발행론의 대두도 화폐유통량이 늘어서 이러한 화폐의 수급에서 인간의 화 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租税金納 地代金納도 市場經濟의 발달, 거기에 따른 화폐경제의 정착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18세기에 들어오면 시장경제는 더욱 발전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財富를 축적 한 巨商들도 상당수 등장하게 된다. 또한 商去來가 이 문을 남기고 재화를 축적할 수 있 게 되자 농민이나 일부 몰락한 양반 중에서도 상업계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 亂 廛도 급격히 늘어난다. 18세기 중엽 이래 漢城에서 特權市廛과 亂廛의 싸움이 치열해진 것도 상업의 번성으로 자유상인인 난전이 특권상인의 영역에까지 진출했기 때문이었다.12) 17, 8세기에는 농업부문에서도 발전적 변화가 일고 있었으며, 특히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하였다. 이 시기의 農業生產力의 증대는 農事法의 改良, 農業技術의 발달 및 農業經 營關係의 변화에 연유된 것이다. 농사법의 개량에 대해서는 정부는 國初부터 관개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農書를 간행하여 농민들에게 새로운 農法을 권장해 왔다. 農書 간행은 太 宗年代에 元의 農桑輯要 를 간행하여 牧民官에게 반포하여 勸農에 참고케 한 바 있 으나, 이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점이 많아 世宗年間에 들어와서 農事直說 을 다시 편찬 간행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가장 오랜 農書로서 당시 우리나라 의 기후 풍토에 맞추어 농사하는 방법을 제시했고 독농가들의 실제 경험을 참고하여 官 撰한 것으로서 조선 초기의 농사법 개량에 크게 도움을 준 農書였다. 그 후 孝宗 6년 (1656)에 農家集成 (申洬 編)이 간행되어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주요 한 지침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조선후기의 농업은 그 이전의 농사법을 크 게 개량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증대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농사개량법에서는 품종의 개량, 有畜農業의 보급, 농기구의 개조 등에 의한 11) 元裕漢, 貨幣經濟의 發達 (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76) pp. 4 8. 참조. 12) 劉元東, 朝鮮後期商工業史硏究 (1968) 참조.
- 153 - 深耕 및 施肥 農法의 도입 등으로 단위면적의 생산증대가 괄목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 었다. 水稻栽培에 移秧法이 보급되고 또 稻作은 麥作과 연결하여 二毛作을 가능케 했고 밭농사에서도 조(粟)와 콩(大豆)을 연결한 輪作이 이루어지면서 지력의 회복도 이룰 수 있었다. 稻作의 발전은 수리시설의 확충에 힘입은 바 컸다. 18세기의 한국농업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은 농업생산물의 多角化를 들 수 있다. 감자, 옥수수, 고구마, 담배(남초) 등 작물은 16세기에 도입되었고, 고려말에 도입 재배하 기 시작한 棉作도 16세기에 이미 중부와 남부지방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人蔘재배도 경 기도, 충청도, 황해도에 널리 보급되었다.13) 이와 같이 농업생산물이 다양화함에 따라 농산물도 지방 鄕市에서의 상품거래의 대상 이 되었으며, 漢城을 비롯한 지방 都邑의 주변 농촌에서는 商品農業이 성행하였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농업소득이 증대됨에 따라 토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토 지매매가 더욱 성행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商工人 중에서도 재산의 증식 수단으로 써 토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농업소득이 증대됨에 따라 農業經營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하였 다. 즉 經營農, 企業農 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14) 18세기의 경제분야에서 나타난 변화는 수공업부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들어 오면 民間手工業이 특히 발달하여 공업생산에 있어서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즉 官營手工業은 점차 축소되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중요한 工業品은 市場에서 조달 충당 하게 된다. 정부는 비효율적인 관영수공업을 더 이상 유지 운영할 필요가 없게 되어 민간 에 맡기기 어려운 특수한 수공업장을 제외하고는 관영수공업장을 폐지함에 이르렀다. 따 라서 종래 京工匠, 外工匠의 匠籍에 편입되었던 많은 장인들이 풀려 났고, 그들의 일부는 스스로 수공업장을 차리고 자영 수공업자가 되었다. 또 이 시기에 농민의 家內手工業도 크게 발달하여 지방 시장에서는 농촌에서 생산되는 수공업 제품이 다량으로 거래되고 있 었다. 이러한 농민 수공업자 중에서도 점차 專業的인 수공업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15) 이 와 같이 민간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수공업 부문에서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수공업 공장을 건설하고 다수의 수공업 기술자를 고용하여 工場制 생산을 기도한 자도 등장하였 다. 이러한 工場制 수공업장에서는 生產工程에서의 分業이 발달했다. 이와 같은 民間經營 의 工場制手工業(매뉴팩처)은 鍮器工業, 製紙工業, 陶磁器工業 등에서 볼 수 있었다.16) 민간수공업 공장은 또 한편 정부의 工產品을 조달하던 貢人이나 商人들에 의해서도 건설되고 있었다. 이들 貢人 또는 상인 자본가들은 京工匠, 外工匠에서 배출된 수공업 13) 李春寧, 朝鮮農業技術史 (1964) 참조. 14) 金容受, 朝鮮後期農業史硏究 Ⅰ(一潮閣, 1970) 참조. 15) 宋賛植, 李朝後期手工業에 관한 硏究 (1973) 참조. 16) 權丙卓, 李朝末期의 農村織物手工業硏究 (1969) 참조.
- 154 - 國史館論叢 第50輯 기술자를 고용하여 수공업장을 차리고 제조업에도 투신하고 있었다. 이것은 商人資本이 產業資本으로 전환하는 先例가 된 것이다. 반면에 商人資本 중에는 영세수공업 생산자에 게 자본 및 원료를 대여하고 그 제품을 독점 공급받는 先貸制度도 발생시키고 있었다.17) 2. 18세기의 經濟發展에 대한 評價 조선후기, 특히 18세기의 조선사회경제 부문에서 나타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찾아 낸 것은 60년대 이래 한국경제사 연구에서의 큰 성과라고 하겠다. 다만 이 시기의 사회경 제적 변화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갈라지고 있었다. 70년대의 韓國資本主義 萌芽論爭과 近代史의 起點論爭은 이러한 학계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18 세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은 봉건적 위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한국 자본주의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환한다는 견해가 70년대 초 한국경제사학계 일부에서 대두된 일이 있었다. 즉 18세기를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近代의 起點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들은 이 시 기의 발전을 전환기의 양상 즉 封建社會에 대체하는 近社代會의 형성과 전개로 보아야 한다는 주 장에서였다. 그러나 한편, 18세기는 전통사회 내부에서 움터나온 큰 변혁의 시기임은 틀림없으나, 이 시기의 변혁은 봉건적 사회경제 체제를 붕괴시키고 근대 자본주의적 체제로 전환시 키는 역사적 과업은 달성하지 못한 과도기에 불과했다는 견해도 있다. 즉 영, 정조 시대 는 물론이고 그 후의 순조, 철종대에 이르기까지도 조선사회의 봉건적 지배체제는 엄존 하였고, 그 속에서의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는 정착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중시한 견 해이다. 필자도 이 後者의 견해에 동조하는 바 몇 가지의 예를 들어 그 이유를 살펴보기 로 한다. 첫째로 농업부문에서 나타나는 經營農의 등장 문제를 살펴보자. 오늘날까지 밝혀진 바 로서는 조선후기의 耕作관계는 並作制가 지배적이었고, 借地經營 즉 地代經濟에 의한 농 민경영 관계는 일반화되어 있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地主의 토지인 私田에서의 並作은 農奴的 경작을 기축으로 한 봉건적 地主 관리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地代를 매개로 한 농민적 地代經營은 일반화되어 있지 못했다. 이러한 경작관계는 국가소유지인 民田에 있 어서의 국가와 농민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학자들이 18세기 중엽 이 후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經營農 또는 企業農이 발생하여 이러한 과정에서 농민들 의 中農層으로의 성장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으나, 이 시기의 企業的 農地경영은 일부 在 村地主층의 농업경영에서 볼 수 있었고,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는 民田農民이나 地主의 토지를 경작하는 私田의 並作農民 중에서 일반화된 현상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18 17) 金泳鎬, 朝鮮後期 手工業의 發展과 새로운 經營形態 ( 19세기의 韓國社會, 1972 收錄) 참조.
- 155 - 세기의 농촌에서는 농민측에서의 中農계층으로의 성장은 볼 수 없었고, 농민의 일반적 몰락이 보편화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은 地代金納化 문제를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의 地代 수취관계에서는 地代金納化 가 미흡했고 정착되어 있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정부가 수납하는 租税에 있어서도 그 일부만이 金納으로 대체되었고, 그 절대량을 차 지하는 田税부분은 19세기 말기까지도 現物로 수납되고 있었다. 농민이 국가에 바치는 稅에는 田税(地税), 三手米, 大同稅, 均役税 기타 雜税가 있는 바, 그 중에서 金納이 허용 된 税는 大同税, 三手米, 均役税, 기타 雜税였고, 田税부분은 現物로 납부하여야 했다. 다 만 田稅부분에서의 金納이 허용된 것은 漕運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예외로 인정되었을 뿐이다. 高宗 2년(1865)에 편찬된 大典會通 에서는 田稅의 金納을 許한 郡邑으로서 黃海道 山郡의 4邑, 長山 이북의 11邑, 慶尙道 嶺底에 있는 7邑과 竹嶺 5邑, 黃海道 兎 山, 江原道 伊川 등 5邑, 忠淸道 延豊 등 5邑을 인정하고 있다.18) 田税의 現物 수납이 金 納으로 전면적으로 바뀐 것은 甲午改革 이후였다. 이때부터 국가가 수납하는 모든 稅는 金納化하였다. 국가의 세입 세출 예산표가 화폐 단위로 편성된 것은 高宗 32년(1895)부 터였다. 토지소유자가 私田을 併作시켜 경작농민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병작료의 金納化는 특수 한 경우에 일어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조선후기의 기록에서 私田税를 화폐로 받아들 였다는 사실도 가끔 보게 되기는 하나, 그러한 산발적인 기록으로서 화폐地代의 일반적 인 성립을 결론하기는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貨幣地代는 우선 賭地制에서 발생하였음을 볼 수 있다. 賭地稅는 賭地錢, 돈도지 혹은 錢賭地로 불려진 점에서도 賭地制에서는 화폐지대가 널리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賭地制에서도 永賭地에서는 광범위하게 화폐지대가 성립되고 있었다. 물론 일반 並 作地에서도 화폐지대가 전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有土宮房田이나 驛屯土, 그 밖에 소유토지가 각지에 산재해 있는 不在地主의 토지에서는 화폐지대가 실시되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現物地代는 여러 가지로 번거로운 점이 적지 않았고, 즉 遠隔地에 소재 하는 토지에서는 打租한 税糓의 운반이 용이하지 않고, 많은 비용이 들었으므로 이러한 지역에서는 화폐지대가 발생한 예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賭地가 아닌 일반 並作地에서의 화폐지대로의 전환은 매우 소극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9) 賭地制에서의 화폐지대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화폐지 대는 현물지대를 기초로 한 것이므로 田主는 米糓의 시장가격에 따라 賭地錢을 매년 결 정하고 있었다. 田主는 賭地계약을 어기고 현물로 받는 것이 유리하면 현물지대를 받고, 화폐로 받는 것이 유리하면 화폐로 받아들이는 사례도 허다했다. 18) 大典會通 戶典 收稅條. 19) 허종호, 조선봉건말기의 소작제연구 (1965) 참조.
- 156 - 國史館論叢 第50輯 농촌에서 現物地代가 지배적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농업의 근대화와 농촌에서의 중산 계층의 성장을 크게 저해했다고 하겠다. 서구 농촌사회에서 중세 후기에 중산계층이 성 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貨幣地代의 정착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점은 어느 정도 수긍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13세기에 들어오면, 借地농업 이 발달하며, 이 借地農業에서는 固定地代가 성립되고, 이것이 화폐경제의 발달과 더불 어 貨幣地代로 정착한 조건속에서 농촌 중산계층이 성장할 계기를 찾게 된 것이다. 地代가 貨幣地代로 고정되면 농산물 가격의 변동에서 오는 리스크는 경작농민이 짊어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16세기에 물가의 전반적인 상승, 즉 가격혁명이 일어났고 이것은 농촌에서의 중산계층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물가가 상승하게 되면 現物을 갖고 있는 생산자로서의 농민, 수공업자 및 이 유통부분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富 를 축적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16, 17세기의 서구사회에서는 이러한 계기 에서 농촌에서는 농민 중에서 中農層, 도시에서는 商工人層이 성장하여 이들이 近代市民 社會의 주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농촌에서는 現物地代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糓價의 상승은 그 이 득을 항상 현물을 갖고 있는 지주 계층 및 정부에게 돌아갔다. 糓價등귀는 지주계층을 부하게 하고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망을 더욱 크게 하며 現物 地代를 근간으로 하는 並作制를 유지하면서 농촌에서의 小農民의 몰락을 촉진하고 있었 던 것이다. 다음 商工業부문을 보면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상공업부문의 근대적 발전도 미흡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商業은 조선후기에 들어오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사실이나 이 시기에 있어 서도 封建的 특권상업 질서는 청산되어 있지 못했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은 정착되어 있 지 않았다. 漢城에 있어서는 六矣廛의 특권은 엄존했고, 六矣廛 이외의 자유로운 상인들은 이 지 역에서 상업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고, 그들은 외곽지역에서 새로운 商街를 이루고 있었 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이 건설된 商街로는 종로 4가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베오개, 七牌 로 불리는 남대문 이남 지역, 서소문에서 아현을 넘어 마포 서강에 이르는 지역 등의 商 街는 六矣廛의 特權 지역을 벗어나 건설된 新商街 지역이었던 것이다. 大同法 실시 이후 정부로부터 貢價米를 받아 貢物을 납부하고 있던 貢人들도 정부로 부터 특권을 받은 상인들이었으며, 對外貿易에 있어서의 歲貢使를 뒤따랐던 상인들도 특 권 상인들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도 商去來에서 재화를 축적한 富商大賈는 특권상 인층에서 배출되고 있었다. 이들 특권상인들은 漢城이나 지방 鄕市에 있어서도 市場을 통제하며 군소 상인들의 상업활동을 制約하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말기에 나타난 亂 廛紛爭은 이러한 자유 소상인들과 특권상인과의 이해 충돌로 야기된 것이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정부에서도 자유로운 소상인의 亂廛 보호책을 강구해야 될 만큼 백성들의 경
- 157 - 제 생활에 있어서 商業의 중요성이 이해되었다. 그리하야 政府도 富商大賈들의 禁亂廛行 爲를 억제하고 亂廛도 자유로이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 한 通共令을 발포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정부의 通共令에서도 六矣廛의 특권은 배제할 수 없었고, 富商大賈들의 商去 來에 있어서의 특권 행위도 현실적으로는 일소된 것은 아니었다. 정부가 辛亥通共令을 발포하고 이어 甲寅通共令을 발하게 된 것도 이러한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20) 이와 같이 특권상업이 존속했던 것은 조선후기에 와서도 시장개방이 충분히 이루어지 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手工業부문에 있어서의 변화도 역시 과대평가 할 수는 없다. 官匠制내에 있어서의 노 동조직의 변화, 즉 專屬匠人制에 대체하는 私工賃用制의 채택이라든지 官工匠制 자체의 革罷는 확실히 독립수공업자의 배출과 성장의 길을 터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8세 기에 나타난 수공업자의 성장을 보면 당시의 수공업자들이 반드시 自營工業場을 마련하 고 스스로 상품을제작 판매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확대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 축적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官工匠制의 개편 내지 폐지된 후 匠人들의 취할 길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었다. 그 하 나는 스스로 수공업장을 차리고 제품 생산에 종사하는 수공업 경영자가 되는 것이며, 둘 째는 자본이 부족하여 自營手工業場을 차릴 수 없는 匠人들은 수공업장에 고용되어 임 금노동자가 되는 길이며, 셋째는 商人으로부터 先貸資本을 이끌어 들여 商人資本에 예속 된 수공업장을 운영하는 경우이다. 조선후기의 수공업자들은 자본축적이 미약하여 독립 自營手工業場을 경영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18세기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수공업 부문 에 있어서의 商人資本의 수공업 침투는 先貸資本의 성격을 가진 것들이 태반이었다. 상 인이 자본을 투하하여 수공업장을 건설하고 수공업 기술자를 고용하여 스스로 수공업 경영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러한 예는 많지 않았다. 조선후기의 市廛商人들은 정 부로부터 물품조달을 위탁받으면 시장에서 이를 구입하기 보다는 特定 匠人들에게 자본 및 원료를 대여하고 물품을 제작케 하여 이를 독점 매수하여 정부에 납품하여 온 것이 다. 이는 商人資本의 영세 수공업장의 지배를 뜻한 것으로서 자유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 하기 보다는 저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商人資本의 수공업자 지배 형태는 조선후기의 정 부 需要의 각종 물종에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수공업 및 상업 관계는 상공업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크게 저해하고 있는 것이 다. 서구사회에 있어서도 商人資本의 先貸資本的 지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와 같이 先貸資本의 지배가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시장개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여 需要 를 供給이 독점할 수 있는 경제구조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供給을 독점 하려고 한 길드의 특권이나 先貸資本의 발로가 지속될 수 없게 된 것은 국내 상업이 개 방되고 對外貿易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생산품에 대한 需要가 무한정하게 증대된 데 연 20) 姜萬吉, 都賈商業體制의 形成과 解體 ( 19세기의 韓國社會, 1972) 참조.
- 158 - 國史館論叢 第50輯 유한다. 이런 경제환경 속에서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매뉴팩처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국내시장의 개방도 미흡했고 對外貿易은 정부의 규제때문 에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18세기 후기에 들어 와서도 對外貿易은 淸國과 日本과만 허용되었으며, 그 무역도 독점상인에게만 허용되어 物貨의 교역량은 크게 증대되지는 못 하였다. 自由商人의 對外貿易은 밀무역으로 규정되어 엄격한 벌칙으로 규제되고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서구상인이 내도함에 이르러 정부는 쇄국정책을 엄히 지킴으로써 物貨流通의 길이 막히게 된 것은 조선후기의 상업과 수공업의 근대적 발전을 막아 놓은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다음 사회 문화 및 사상면에서 나타난 변화도 전근대적인 요소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 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7, 8세기에 實學이 발생 성장하였다는 것은 韓國思 想史에서 확실히 특기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實學도 필경에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18세기의 實學의 개혁사상은 전통적 질서 내에서의 개혁을 논한 것이며 아직도 전통사회 자체의 부정에까지는 이르지 못했 다고 보겠다. 18세기의 實學은 상공업의 필요성을 역설하나 그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대변하 고 있지는 못하였다. 商工業者들의 시민의식, 이에 대한 대중의 가치관의 변화라는 점에도 한계가 있었다. 상공업자들은 전통세력과 결탁하면서 財貨의 축적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정 권에 참여하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기도는 하지 않았던 것 이다. 상공업자가 축적한 재화는 궁핍한 양반의 선망의 대상은 되었으나 상공업자에 대 한 전래의 賤視사상은 완전히 拂拭되지는 못했다. 상공업자들도 신분적인 지위향상을 納 粟授職의 방법으로 양반으로의 지위상승을 꾀하고 있었으나 상공업자 즉 市民階層으로 서의 지위상승을 지도하지는 못했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18세기에 商業, 手工業 및 농업면에서 근대지향적인 발전상 을 보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근대 企業에까지는 성장하지 못하였고 또 사회 및 문화면에서도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음에도 전통사회를 부정하고 近代市民社會를 건설하 지 못한 것은 당시로서는 여건의 미성숙이라는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18 세기 및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수공업의 기술적 분화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메뉴 팩처에 의한 대량생산 조직은 확대 전개되지는 못했다. 大量生產을 촉구할만한 需要 확 대가 일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농촌수공업의 활발한 전개를 보지 못한 것도 農業 生產物이 需要面에서 자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사회 경제 및 문화면에 나타난 발전상을 韓國近代史의 起點과 결부시켜 평 가하려면 그 발전의 지속성도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여건의 변동으로 중단되고 마는 발 전이라면 그것을 새로운 시대의 기점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이룩할 수 있는 발전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 파급되면서 加速的 확대현상을 일으켜 나가야 하는 것
- 159 - 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18세기의 발전상을 평가해 보더라도 그것이 바로 近代로 전개되 는 기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8세기에 나타난 발전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지속되지 못하고 鈍化되고 있었지 않았 나 생각된다. 1801년에 純祖가 등장하면서부터 政界는 난국에 부딪쳤다. 외세의 來侵이 점차 빈번하여짐에 따라 民心은 불안해지고 정부의 실권을 담당한 세도정치는 보수주의 를 고수할 뿐 새로운 정세에 대처할만한 식견과 능력을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國防수비 를 위한 재정지출의 증대는 租稅부담을 가중시켰고 세도정치하의 관료는 부패하여 백성 에 대한 苛歛誅求는 더욱 심하여졌다. 이러한 여건의 변동으로 18세기에 성장추세를 보 였던 경제는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발전을 지속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축 현상까지 나타 내고 있었다. 농업 부문에서는 地主經營이나 小農經營을 막론하고 18세기의 경영규모를 크게 확대시키지 못했고, 수공업 부문에서의 技術分化도 새로운 자극을 받지 못하여 18 세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농민에 대한 과중한 조세부담으로 농민의 離農 현상이 심하게 나타나 농업생산은 감소되고 있었다. 상공업부문에서도 정부의 통제가 심 하여 발전은 침체되었다. 先貸資本에 예속되었던 수공업의 경영관계는 19세기에 와서도 별로 개선되지 못했고, 對淸貿易이 줄어들어 시장이 협소하여졌으므로 수공업자는 기술 의 확대 및 기술개량의 자극을 받지 못하고 매뉴팩처를 일으켜 대량생산 조직으로 개편 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본축적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상업에 있어서는 都家의 독점이 강화되고 군소상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이로 말미암아 크게 저지되었다. 이렇듯 19세기 전반기에는 사회 경제 및 문화면에서 발전의 지속 및 확대 경향보다는 침체경향이 더 뚜 렷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純祖부터 哲宗에 이르는 약 60년간을 封建的 反動期로 보고자 한다. Ⅴ. 韓國近代史의 展開 1. 開化期의 時代的 性格 開港은 한국민족사의 전개에서 결정적인 전환기가 되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韓國近代史가 진행된다고 보는 주장은 경제사학계에서도 많은 동조자를 얻고 있으며, 필 자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開港후 서구자본주의 문화가 유입된 이래 한국의 사회경제는 큰 격변을 맞게 되었으 며, 이 문화를 받아들여 개혁이 진행되었고, 한국의 전통적 사회경제체제가 붕괴되어 가 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개항의 시기를 한국 근대사의 起點으로 보는 견해에는 反對理論이 없는 것
- 160 - 國史館論叢 第50輯 은 아니다. 특히 경제사학자들 중에서는 이 시기를 韓國 資本主義의 起點으로 볼 수 없 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開港후 서구자본주의 문화가 유입되고 한국사회의 일각에서 자본주의적 개혁이 시도되고 있었으나, 開化期에는 자본주의가 한국의 사회경제체제 속 에 정착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主된 이유이다. 이와 같은 반대주장의 논거에는 一理가 있다고 할 수 있다. 開港 이후 정부는 각종 개 혁을 시도하였으나, 봉건적 지배체제는 붕괴되지 않았고, 이 지배체제는 내부에서 일어 난 혁신적 시민세력에 의한 것이 되지 못하고 일본 軍國主義의 침략세력에 의해 國權 自體가 붕괴되고 식민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開港 이후의 경제관계에 있어서도 商工業部門에 있어서의 근대적 개혁이 활발하게 일 고 있었으나, 자본주의적 경제관계는 定着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농업부문에 있어서 는 봉건적 並作의 변형인 小作制下에서 現物地代를 바탕으로 경영되고 있었으니 이는 농업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는 볼 수 없다는 것도 수긍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서만 開港이후의 한국근대사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보다 주요한 것은 開港 이후 우리 사회에서 일어 난 近代化의 風潮가 얼마나 거세게 진행되고 있었는가 하는 歷史過程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開港후 서구자본주의에 접하면서 우리사회에서 일고 있던 開放과 改革의 風潮를 경시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1876년의 江華條約으로 일본과 수교 했고 1880년대 초에 와서는 서구제국과도 通商을 맺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開化의 물결 은 사회의 각 계층에 펼쳐지고 政治, 經濟, 社會, 文化의 각 분야에서 開化의 바람은 크 게 일고 있었다. 우선 정부측의 각종 정책에서 改革의 시도는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開港당시의 집권층은 舊封建 지배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들 중에도 서구자본주의 문화에 대 한 긍정적인 평가와 그 受容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고 甲申政變이 실패한 후 급진적 개혁 파는 물러났으나 이에 자극받은 정부는 改革政策을 밀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1880년 대 초 이래 정부에서 시도한 각종 근대적 경제개혁의 例를 보면 당시 정부의 開化意志 를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1883년에 機器局, 典圜局, 博文局 등을 정부내에 설치했다. 機器局은 무기 제조를 관장하는 部署로서 1883년에 三淸洞에 機器廠을 건설하고 西歐技 術을 도입하여 총포 등 근대무기를 제조해 왔다. 典園局은 화폐주조를 위한 조폐공장을 관할하는 부서로서 정부는 당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빙하여 서구식 화폐모양을 본 딴 신식 화폐주조 사무에 착수하였다. 정부는 또 1883년에 博文局을 설치하고 일본에서 인쇄기기를 수입하여 정부의 각종 문서를 인쇄하는 한편 그해 10月 1日부터 漢城旬 報 를 인쇄 발간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었다. 이 漢城旬 報 는 1884년 8월 21일부의 제36호로 중단되었다가 1886년 1월에 다시 명칭을 漢城 周報 로 개칭 발간했다. 이 漢城周報 는 漢城旬報 가 純漢文신문이었던 데 비하 여 國漢文 혼용으로 간행된 것이다. 漢城周報 는 1888년에 博文局이 폐쇄됨과 더불어
- 161 - 폐간되고, 이후 1890년대에 各種 民間紙가 발간된다. 이와 같이 정부는 신문을 발행함으 로써 서구제국의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情報를 국민에게 홍보하였다. 정부는 또 1885년 이래 정부 부서내에 織造局, 造紙局, 鑛務局 등을 설치하고 근대적 제 조공장을 설립한 바 있었으며, 1887년에 설치된 鑛務局에서는 미국으로부터 광산 기술자 를 초빙하여 전국의 광산을 답사 조사케 하고 채광 기계를 구입하여 채광을 시작하는 한 편 민간인에게 광산회사 설립을 종용하여 서구식 채광법에 의한 광산 개발을 촉구하였다. 정부는 철도 및 해운에 있어서도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여 수송부문에 대한 외국 자본 의 침략을 방어하는 노력도 계획한 바 있었다. 철도부설에 관해서는 일본과 서구 열강에 서 그 부설권을 둘러싸고 맹렬한 경합이 전개되어 일부 철도노선에 대해서는 그 부설권 을 외국인에게 특허한 바 있었으나, 이는 국가경제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1900년 4월에 宮內部에 철도원을 두고 철도부설을 정부에서 직접 계획하고 마포를 기점 으로 한 義州에 이르는 京義線의 노선 공사를 착공시킨 바도 있었다.21) 정부는 1896년에 조선은행 을 설립하고 이에 중앙은행의 업무를 담당시키려고 했으나, 이 은행은 설립 후 1년도 못되어 폐점되고, 다시 1903년에 中央銀行 條例를 발포하고 이 에 따라 중앙은행을 설립하였으나 다음해의 露日戰爭의 발발로 운영을 보지 못하였다. 정부는 재정개혁의 일환으로 地稅 金納化를 단행한 바 있었으며, 근대적 토지측량법을 도입하여 量田事業을 실시하기 위하여 1898년에 量地衙門을 설치하고 미국으로부터 측량 기사를 초빙하여 量田技術을 전습시키는 한편 일부 지역에서 量田을 실시한 바도 있었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開港 이후의 우리 정부가 계획 실시하고 있었던 근대 개 혁의 실태를 例示하였는데, 이 밖에도 당시 정부가 시도한 개혁사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러한 改革시도는 資本, 技術, 경험의 부족 및 日帝의 침략 세력에 의한 방해 공작 등으로 소기의 성과를 이룩하지 못한 것도 적지 않았으나, 당시 정부 내에서의 改 革 意志는 이미 막을 수 없는 큰 흐름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開港 이후 經濟界에서 일고 있던 근대적 改革의 바람은 더욱 컸다. 외국으로부터 商人 과 상품이 대량으로 유입된 開港場과 이러한 물품이 유통되고 있던 漢城을 비롯한 각 도읍에서는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서구 근대상업방식을 도입하는 개혁 활동도 거 세게 일고 있었다. 188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 상인들간에는 근대적 회사 설립과 商人組合인 商業會議所 가 도처에서 결성되었다. 상인들은 자본을 규합하여 合資會社를 설립함으로써 外商과 경 쟁하면서 효율적인 상업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각 지방의 상인들은 商業會議所를 결성 하여 상업 情報의 교환 및 상업 조직의 개편과 상업활동의 개선을 촉구하고 있었다. 근대적 기업회사의 설립은 1880년대에는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상품의 流通 부분을 담 당하는 商事會社가 대부분이었으나 1890년대 이후에는 공업 부문을 비롯하여 모든 경제 21) 趙璣濬, 韓國資本主義成立史論 (大旺社, 1973) 참조.
- 162 - 國史館論叢 第50輯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근대적 企業會社가 설립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기업회사들 은 그 조직에 있어서나 기능에 있어서 근대적 기업회사로서 손색이 없었다. 1890년대 이 후 설립된 商工人에 의한 근대적 기업회사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회사들이 있었다. 금융업 부문에서는 漢城銀行, 大韓天一銀行, 韓一銀行 등을 들 수 있겠고, 철도, 汽船 기 타 운수업 부문에서는 釜 下鐵道會社, 大韓鐵道株式會社, 仁川郵船會社, 大韓協同郵船會 社, 利運社, 鐵道用達會社 등이 있었다. 광업부문에서는 海西鐵礦會社, 江原道煤礦合資會 社, 그 밖에 제조업 부문에서는 大韓織造會社, 苧麻製絲會社, 鍾路織造社, 金德昌織造工 場, 九成水鐵會社, 沙器製造會社 등을 예시할 수 있다. 商工人의 모임인 商業人會議所는 1880년대 초부터 결성되어 1900년대 초에는 한성, 부 산, 인천, 원산, 목표, 군산, 대구 등 전국의 17개 주요 도읍에서 결성되었고, 그 중에서 특히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會議所로서는 漢城商業會議所, 仁川紳商協會, 釜山客主會, 大 邱商議所 등이었다. 仁川紳商協會에서는 인천에 들어온 서구상인들로부터 상업 情報를 수집하여 전국 상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상업개선을 위한 상업활동을 도와왔고, 漢城商 業會議所는 商工月報 를 발간하여 경제統計, 物價動向 등 국내 경제 실태에 대한 情 報를 제공하는 한편 實業論說을 게재하여 새로운 경제 지식의 보급에 힘써왔다. 開港후 근대적 개혁 운동에는 지식계층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開港을 전후한 시기에 외국 사정에 밝은 일부 지식인들은 개방과 改革을 적극 주장하고 나섰으며, 그들은 漢 城旬報 와 漢城周報 가 발간되자 이를 통하여 근대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 다. 漢城旬報 에는 內國紀事 와 各國近事 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內國紀事 에서는 每 旬의 市中 물가동향을 소개하였고 各國近事 에서는 서구의 정치 및 사회제도와 화폐 등 경제사정을 소개하고 있었으며, 漢城周報 에는 集錄 항을 두고 해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제 문제를 수록하여 왔다. 이 밖에 旬報와 周報에는 社說 란을 두고 당시 朝野에 서 알고 시행해야 할 많은 경제 문제들을 거론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會社說(旬報 제 3 호), 電氣論(旬報 제 4호), 保險論(旬報 제 6호), 運輸論(旬報 제 12, 13호), 織布局集服說 (旬報 제 15호), 博覽會說(旬報 제 15호), 富國說(旬報 제 22호), 國債論(旬報 제 27호), 貨幣論(周報 제 4호), 鑛山開發論(旬報 제 22, 28호), 統計說(周報 제 27호) 등을 每號에 게재했다. 이 논설들을 보면 당시 우리 정부나 상공업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 가를 서구의 예를 들면서 논술하고 있는 것이다.22) 漢城周報 가 폐간된 이후 7, 8년 동안은 언론 매체가 없는 시대가 되었으나 지식계 층의 개혁의지는 중단됨이 없었고 1890년대 이후에는 民間紙의 발간이 계획되어 이를 통하여 개혁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1896년에는 독립신문 이 발간되었고, 1898년에는 일신문, 同年 8월에는 데국신문, 동년 9월에는 皇城新聞 이 발 간됨으로써 언론 매체를 통한 지식계층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다. 22) 漢城旬報 1884년, 漢城周報 1886년 참조.
- 163 - 독립신문에는 서구 근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 실태에 대한 소개와 논설이 다수 게재되었고 그 밖에 많은 경제개혁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요지는 공업과 상업도 과학 적으로 운영할 것을 권장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각종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해외로부터 근대 기술을 도입 하여 국내 청소년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밖에 독립신문 에서 주장한 경제개혁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는 바 즉, 백성은 그의 능력에 따라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케 하고 농업, 공업, 상업을 과학화 할 것이며, 교육에서는 실무교육을 확충하고 국내 자원을 개발하고 외국과의 通商의 길을 터놓고 국내 교통시설을 확장해야 한다. 또 독립신문의 사회개혁론에서 특기할 점은 나라가 부하고 강하려면, 공정한 법 과 맑 은 정치 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무릇 어느 나라고 부강하려면 제일 商務가 흥왕해야 할터인데 상무를 흉하게 하는 도 리는 비단 돈 한 가지 뿐이 아니라 법률이 공정해야 할지라 법률이 공정해야 백성이 그 나라의 법을 믿고 商理를 경영한다 고 했고, 또 나라가 부강하기는 토지의 넓음과 인민의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가 맑으 며 교육하는데 있다 고 했다.23) 皇城新聞 에도 경제에 관한 기사와 논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황성신문 은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유학자들이 경영해 온 신문이었으므로 기사의 선택이나 논 설의 전개에서도 실학자들의 논조를 따르고 있다. 皇城新聞 에서도 가장 강조한 것은 역시 商工의 촉구요, 경제의 과학화이며, 상공을 위한 교육의 장려였다. 또 공업 건설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논설을 폈으며 技術改革을 특히 강조하면서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 성을 촉구하고 富國之本은 在乎敎育農工商 임을 상기시켰다. 황성신문 의 경제기사에서는 경제利權과 국내자원의 外人에 의한 침탈을 고발하는 내용이 연일 게재되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자력에 의한 국토개발의 필요성을 논설로서 촉구하고 있다. 외인의 자원침탈에 관한 기사 중 가장 많은 것이 토지의 침탈과 광산의 불법채굴을 고발한 것이었다.24) 23) 獨立新聞 光武 3년 5월 15일 및 그 以後論說 참조. 24) 皇城新聞 光武 2년 및 그 이후 記事 및 論說 참조.
- 164 - 國史館論叢 第50輯 지식계층은 언론매체를 통한 사회경제개혁론을 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뜻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근대적 교육기관의 설치를 종용하였다. 1890년대 말부터는 경 향 각지에서 다수의 사립학교가 설립된다. 이러한 사립학교는 근대적 개혁사상을 가진 有志들의 모임에서 재정적 후원을 얻어 설립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구적 근대교육기관이 설립되는 것은 1880년대 중반부터이며 이 초기에 는 宣敎의 목적으로 서구 종교단체에서 설립하였으나, 1890년대에 와서는 정부에서 소학 교, 중학교의 수준으로 근대교육기관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서는 국민 교육의 보급에 크게 미흡했던 것이므로 1890년대 후반기 이후 지식계층의 종용에 의하여 각급 사립학교가 지방 有志들의 재정적 후원에 의하여 다수 건립을 보게 되었다. 1890년대 이후의 근대적 사회경제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결성된 民間人의 모임은 각 지방에서 결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모임으로는 獨立協會, 大韓自强會, 大韓協會, 西北學 會, 湖南學會, 畿湖興學會, 嶠南敎育會, 大韓俱樂部, 咸北興學會, 關東學會 및 일본 유학 생들의 모임인 親睦會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학회를 통하여 지식계층은 정치, 경제, 사 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근대적 교육기관의 창설에 힘써왔던 것이다.25) 1905년에는 민간인 설립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經濟學, 商學, 法律學의 전문교육기관인 普成專門學校 가 창립되었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開港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脫封建 의 개혁운동이 사회 각 계층 및 경제의 각 분야에서 큰 風潮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의 풍조야말로 한국 근대사를 특징짓는 성격이라고 하겠다. 한국근대사의 전개에서 개혁풍조의 흐름을 경시 하고서는 이 시대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開港 이후 일어난 脫封建의 개혁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물론 아니다. 개혁의 진 행 과정에서는 각 분야에서 舊來의 봉건세력에 부딪쳐 왔다. 정부의 집권층에도 봉건 질 서속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던 사람들은 급진적인 개혁에 제동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東 道西器의 사상이 당시 이러한 보수세력의 改革理念이 되었고, 開化期의 정부시책이 革命 的改革이 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商工人들의 근대적 개혁활동에서도 한계가 있었다. 特權 市廛人들은 초기에는 서구자 본주의 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매우 보수적이었다. 종로 六矣廛 상인이 개혁에 가담하는 것은 1890년대 이후부터였다. 또 商工人들의 근대적 개혁활동에서 큰 걸림돌이 된 것은 자본의 부족이었다. 開港 직후 서구 상품의 輸入路는 자본력이 풍부한 外商이 장악하고 있었고 민족계 상인들은 海外 무역에는 직접 진출할 수 없었다. 1890년대 이후 근대적 會 社설립이나 공장건설에 있어서도 商工人들은 地主자본과 합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開港 이후 개혁정책에서 소외된 곳은 농촌경제 분야였다. 정부는 농촌 경제분야에 대 해서는 地税金納化를 단행한 이외에 아무런 개혁도 하지 않고 있었다. 토지소유 관계에 25) 金根洙 編, 韓國學資料叢書 第 1輯(1973) 참조.
- 165 - 있어서의 농민적 토지소유를 확립시키는 개혁은 물론이고 농업경영관계에 있어서의 並 作制度나 現物並作料의 貨幣地代로의 개혁은 시도조차 한 일이 없었다. 이는 당시 大地 主 계층이었던 지배세력의 개혁意志의 限界性에서 온 것이다. 開港후 對外貿易의 전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계층은 농민이었다. 서구 근대 공장제 품의 유입으로 농촌수공업은 괴멸되기 시작했고 米糓의 대량 수출은 米價를 앙등시켰으 나 이는 現物併作料로 대량의 미곡을 갖고 있던 地主계층을 富하게 하였을 뿐 농민층의 자본축적의 기회는 되지 못하고 더욱 가혹하게 농민수탈이 감행되었다. 농촌에서는 春窮 期의 식량 부족과 영농자금난으로 立稻先賣도 관행처럼 되고 있었다. 甲午농민봉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발발된 것이다. 開港 이후 서구 근대문화가 들어옴에 있어 사회의 각 계층 및 경제의 각 부문에서 개혁의 바람이 일고 있었으나, 농촌경제는 봉건적 질서에서 탈출할 기회가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甲午농민봉기는 脫封建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民衆革命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이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려하자 봉건적 지배층은 外軍까지 불러들여 이를 진입하였다. 일본군 국세력의 조선에 대한 영토침략기도는 이후 거세게 밀려왔다. 2. 植民地支配下의 韓國近代史의 位相 日帝가 한국을 병탐하고 식민지 통치를 펼쳐온 36년간의 시기를 한국민족사의 전개에 서 어떻게 位相지워야 할 것인가. 통치권이 침략자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나라(大韓帝國) 가 소멸하였으니 민족사의 단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主權은 국민이 갖고 있 는 것이니 이러한 주권 국민이 反侵略勢力, 脱封建질서의 민족 근대개혁의 의지와 투쟁 이 단절됨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한국 근대사는 連綿하게 전개되어 왔다고 볼 것인 가. 이 시기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한국근대사 이해의 주요한 과제이다. 민 족사의 단절론은 침략자의 視角이고, 민족사 連綿性 주장은 민족사의 시각에서 보는 역 사 인식이다. 日帝통치하에서도 사회 각분야에서 韓民族의 反帝, 脫封建의 의지와 활동은 지속되고 있었으니, 이 시기는 결코 屈從의 역사로 채색될 수는 없다. 反帝, 脫封建의 역사진행은 19세기 이후 植民地, 半植民地下에 있던 동북아시아 민족의 근대사의 실상이고 특징이기 도 했다. 日帝 식민지하의 한국민의 근대사는 이러한 민족사의 視角에서 보아야만 그 올바른 역사 位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日帝의 식민지 지배는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의 시기는 1910년대이며, 日帝는 韓民族을 봉건적 질서에 묶어놓고 일본 자본주의에 奉仕시키고자 하였다. 그 시책으로서 농업부문에서는 봉건적 地主制를 法的 으로 인정하고 現物小作制를 유지하여 왔으며, 상공업 분야에서는 근대적 상공업의 성장
- 166 - 國史館論叢 第50輯 을 억제하려는 의도 하에 朝鮮會社令을 발포 실시했다. 그 둘째 시기인 1920년대에는 일 본의 食糧基地化와 低賃金을 바탕으로 하는 資源의 개발 및 경공업 분야에 대한 일본자 본 진출의 길을 터놓은 것이다. 그 시책으로서는 米糓 單作農業을 장려하고, 朝鮮會社令 을 철폐함으로써 日人資本이 조선에 들어와 경공업 분야에 투자할 것을 정책적으로 지 원하였다. 그 셋째의 시기는 1930년대 이후로서 日帝는 만주침략을 감행하고 그곳에 괴 뢰정권을 수립하면서 중국 본토 진출을 감행하고자 한반도를 그 前哨基地로 삼아 일본 經濟圈의 境界를 압록강까지 연장시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지하자원과 人力자 원을 활용하여 중화학공업 등 軍需產業을 건설한 시기였다. 이러한 日帝의 식민지 지배의 여건하에서 反帝, 脫封建의 근대적 개혁이 진행되어온 것이다. 1910년대의 민족경제의 근대 개혁활동에서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색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민족계 地主 및 商人資本에 의한 지방은행의 설립이다. 한일합방후 지방의 大地主와 巨商들이 우선 착안한 것은 지방은행의 설립이었다. 光武년간에 근대적 금융기관이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을 보았으나, 거의 모두가 漢城에서 개점되었고, 乙巳 條約 이후 農工銀行 및 지방금융조합이 설립되었으나, 그것은 일본 統監府가 금융통제를 목적으로 설립을 강요한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금융기관은 민족계 기업인의 활동기반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방의 지주 및 상인들은 지방의 민족계 기업인의 금융을 담당하는 은행을 자기들의 힘으로 설립하고자 한 것이다. 구포에 설립된 龜浦貯蓄株式會 社는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최초의 민족계 지방금융기관이었다. 구포은행에 뒤이 어 1913년에는 湖西銀行과 大邱銀行이 설립되었다. 경남지방에서는 1918년에 부산 草梁 에 主一銀行이 설립되고, 동년 8월에는 東萊銀行이 설립되었다. 경북지방에서는 1920년 에 대구에 慶一銀行이 설립되었고, 호남지방에서는 1920년 8월에 湖南銀行이 창립되고, 전북지방에서는 1919년에 전주에 三南銀行이 설립되었다. 北鮮地方에서는 平壤銀行이 1920년 3월에 설립되었고, 함흥에서는 1918년 6월에 北鮮商業銀行의 설립을 보았다. 그러나 합방 직후에 日帝는 憲兵統治로 민족의 再起를 억압하고 민족자본의 활동을 극도로 억제하였으므로 이 시기에는 소수의 지방은행이 설립되었을 뿐 그 밖의 활발한 기업활동은 볼 수 없었다. 1921년 현재 조선내에서 영업하고 있는 회사조직을 갖춘 민족 계 기업체의 총수는 131社였으며, 이를 업종별로 보면 은행 9社, 농업회사 3社, 제조회사 6社, 무역 및 상업회사가 114社로서 1910년대에 활동한 민족계 기업회사의 절대다수는 여전히 商事會社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방에서 다수의 민족은행이 설립되게 된 데에는 당시 금융업이 기업으로 서 收支가 맞았기 때문에 설립될 수 있었다는 조건도 있었으나, 또 하나의 주된 요인으 로 합방 후 식민지 官府로부터 금융지원을 받지 못하는 민족기업을 민족금융기관을 통 하여 육성하고자 하는 뜻도 작용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초기 식민지 시대의 민족기업 활동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는 郡小工業의 전개를 들 수 있다. 자본력이 미약한 민족기업인들은 노동집약적 공업분야에서 활로를
- 167 - 개척하여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17년말 현재 조선내의 공장수는 1,358개소이 며, 그중 日人공장은 736개소로서 여기서도 조선인 공장이 열세를 보이고 있으나 앞에서 살펴본 會社企業의 경우와는 달라서 민족계 기업인의 소규모공장 공업계의 진출은 괄목 할 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공장은 영세자본으로도 경영할 수 있는 製綿, 染 織, 製紙, 皮革, 窯業, 金屬加工業 등으로서 영세한 민족자본으로서는 이러한 중소공업분 야에서 활로를 개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주요한 사실은 합방후 서민계층에 서 근대기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열의가 높아졌다는 점이라 하겠다. 1920년대는 민족기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이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1920년 4 월 11일을 기하여 朝鮮會社令이 철폐된 데 있었다. 조선회사령의 철폐는 일본내에 발생 한 遊休資本 및 시설을 조선에 방입하여 그곳에서 활로를 개척토록 하는 데 있었다. 그 러나 이 회사령철폐는 동시에 민족기업인의 근대기업 활동을 억제하고 있던 정책을 완 화하는 것이 되어 민족자본의 기업계 진출의 활로를 열어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에 민족기업의 활성화는 이 會社令 철폐라는 외부적인 여건변동에만 연유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3 1운동 이후 경제적 자립에 대한 민족의 각성이 더 큰 동인이었 다. 한일합방후 10여 년간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義兵투쟁을 전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였 으나 일제는 이를 武斷統治로 탄압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경작농민의 절대다수가 봉건적 소작료에 얽매인 영세농으로 전락하였으며, 日商의 급격한 진출로 민족의 經濟權 이 침탈되어 민족전체가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은 실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태 에 직면하여 抗日투쟁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방향의 하나는 교 육보급에 의한 민족계몽운동이며, 둘째는 시민적 의식개혁을 통한 民權투쟁이며, 셋째는 경제적 노예상태를 탈피하기 위한 경제近代化운동이었다. 이와 같이 민족의식이 크게 전 환하고 있는 시기에 조선회사령이 철폐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1920년대에 근대기업건설 이 활성화되게 된 것이다. 민족경제의 근대화는 당시 우리 사회의 두 계층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하나는 지방 의 大地主 및 巨商들의 근대기업계 진출이며, 다른 하나는 일제의 진출로 생활의 터전을 박탈당한 토지 없는 小作농민 그리고 商權을 잃은 영세상인이 生存權투쟁의 일환으로 전개한 것이다. 봉건적 小作地代에 기식하던 지주계층에서도 새로운 시대적 思潮에 눈뜬 다수의 지주들이 상인과 합작하여 기업회사를 건설하면서 근대적 기업인으로 변신하는 현상은 1920년대의 우리 사회에서 나타난 거센 風潮로 전개된 것이다. 1920년 이후 민족 기업회사의 급진적인 성장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1920년말 현재 조선인 설립의 기업회사는 99社였으나 1929년말 현재는 207社로 증가 되고 있어 조선인의 근대회사 설립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1929년 당시 조선 내의 전체 기업회사에 대해서는 겨우 20.5%를 차지하고 있어 민족기업회사의 열세는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 지주 및 상 인계층에 의해서 설립된 기업회사는 지방금융기관 및 상업회사가 大宗을 이루고 있었고
- 168 - 國史館論叢 第50輯 제조업 분야에서는 일부 대규모회사를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것이 없었다. 이 시기에 건 설된 근대적 회사로는 商業부문에서는 大昌貿易株式會社, 東洋物產株式會社 등 비교적 큰 회사로 볼 수 있으며, 운수업 부문에서는 共興株式會社, 北鮮交通株式會社 등이 자본 금 100만원대로 건설되고 있었다. 제조업부문에서는 京城紡織株式會社, 朝鮮絹織株式會 社, 高麗窯業株式會社, 朝日石䶨(비누)株式會社, 咸興고무株式會社 등이 비교적 대규모 기업회사로서 설립되고 있었다.26) 1920년대의 민족기업건설의 활성화는 이러한 地主 및 巨商에 의한 회사 설립보다도 오히려 영세자본에 의한 공장건설이 주도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1931년 현재 조선에 건 설된 공장수는 4,656개소(외국인 공장 50개소 포함)이며 그 중 일본인 소유 공장은 2,182 개소이고 조선인 소유공장이 2,424개소로서 일본인 공장에 비하여 조선인 공장수가 약간 많았다. 당시 조선인의 공장은 극히 소수의 대규모공업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영세자본이 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1920년대의 민족기업의 활발한 건설은 서민출신의 영세 기업인 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공장은 대도시의 변두리에 건설되고 있 었으며, 업주들은 대체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한 일념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었다. 그들은 근면과 성실로서 기업을 개척하였으며, 의지력이 강하고 계산이 분명한 기 업인들이었다고 하겠다. 그들 중에는 종교적 신념이 두터운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평양 의 기업인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았고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새로운 생활을 개척해 나가 는 진취성을 갖고 있었고, 노력은 항상 그만한 보상을 수반한다는 종교적 신념으로 기업 활동에 임하고 있었다. 1920년대 한국인의 기업이 급성장을 이룩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의 변 동에 힘입은 바 컸다. 첫째로는 지주 및 상인계층에 있어서 자본동원의 능력이 높아졌다 는 점, 둘째로는 국내시장의 확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농촌의 自給自足經濟의 붕괴와 국민생활양식의 변화에 의해 촉진되었다. 농촌의 자급자족경제의 붕괴는 특히 합방 이후 일본 공장제 상품의 대량유입으로 가속화 되었으며, 국민생활양식의 변화는 특히 衣料생 활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셋째로 근대교육의 훈련을 받은 경영자, 기술자 및 기능공의 대량배출을 들 수 있다. 1900년대 초 이래 구한국정부 종교단체 특히 합방 이 후는 京鄕각지의 有志에 의한 私立學校 설립과 국민교육열이 고조되었고 해외유학생도 급증하여 고급 기술인력이 크게 늘어났다. 이리하여 근대교육을 받은 새로운 경영자가 企業界에 진출하였고 기술자 및 기능공도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1920년 대의 민족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27) 26)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7) 참조. 27) 여기서 民族系 資本 또는 民族企業으로 지칭한 것은 일본식민지하 조선의 공업화 과정에서 우리 민족 기업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이 어떤 분야에 어느 만큼 몫을 점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한 것 이다. 자본기능에 따른 개념에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민족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민족자본 또는 민 족경제발전을 저해하는 反民族的 買辦資本 등의 개념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논급하겠다.
- 169 - 또한 1920년대의 민족계 기업은 당시 조선민족의 절대적인 성원 밑에서 육성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계 기업에 대한 민중의 성원과 기대는 3 1운동 이후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것이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이 1920년대초의 朝朝物產獎勵運動이었 던 것이다. 1920년대의 민족운동을 우리가 경제적 민족주의로 지칭하는 것은 바로 이러 한 민족기업운동이 기업인과 더불어 전체 민중운동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침략후 일본 자본주의의 외연적 확대와 더불어 조선의 공업화도 급진적으 로 시작되었다. 1931년에 일본의 만주침략과 더불어 日本資本主義의 外廓地帶로의 확대 가 급진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조선의 공업화도 크게 진전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의 공업 화가 정책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1930년대의 전반기에는 한국인의 기업계 진출도 과거 그 어느 시기보다도 활발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조선 공업화의 자본 系譜를 따져 보면, 크게 세 개의 계열로 구분할 수가 있 다. 하나는 民族系 자본이고, 둘째는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여 정착한 日人系 자본이며, 셋째는 日本 在籍의 大財閥 자본이다. 조선인계 민족자본은 일제의 정치적 보호밖에서 악전고투하면서 쌓아 올린 서민의 영세자본과 토지조사사업 이후 기업계에 진출한 대지 주 자본 및 토착상인자본이 중심이 되었다. 조선에 정착한 일인자본은 개항후 조선에 상 륙하여 정치적 비호하에서 축적 비대해진 자본이었다. 조선의 공업화과정에 있어서의 民族系 資本과 日人系 資本이 차지하는 몫을 보면 1938년말 현재 조선내의 회사 총수는 5,413社이며, 그 중 조선인 회사수는 2,278社로서 전체 社數의 42%이며, 일본인 회사수는 3,135사로서 58%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를 자본 면에서 보면 전체 拂入 자본액 10억 9,039만 3천원 중 조선인 소유는 1억 2,266만 1천원 으로 11.2%이며, 日人소유는 9억 6,773만 3천원으로 88.8%였다. 日人 소유회사의 회사당 평균 拂入 자본액은 30만 5천원이 되는데 비해 조선인 소유회사의 평균 拂入 자본액은 5만 3천원으로서 자본규모에서 보면 겨우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28) 1937년에 일본이 중국 本土 침략전쟁을 감행함과 더불어 모든 기업활동을 戰時經濟體制 로 개편했으며 1940년에 접어들어 戰勢가 불리하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國策會社를 설립 하고 민간기업체를 이에 통합하는 방침을 세웠다. 1942년에 발표된 中小企業整理令은 특 히 조선인 기업체를 정리대상으로 함으로써 민족기업의 위축은 더욱 현저하게 나타났다. 1942년 현재 민족계 회사 중에서 자본금 50만원 이상의 기업회사는 겨우 50여 사에 불과 했다. 물론 1942년이면 일본이 太平洋戦爭을 시작한 시기로서 기업의 통제와 정리를 감행 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많은 민족계 회사가 정리의 대상이 되어 강제통합을 당한 뒤였다는 점을 고려에 넣더라도 민족자본이 조선기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미미하였던가 를 충분히 알 수 있다. 公稱 자본금 50만원의 회사라면 당시 조선내 기업회사의 평균자본 액의 수준에서 겨우 중위에 속하는 것이며, 결코 대규모 기업회사에 속하지는 못한다. 28)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39) 참조.
- 170 - 國史館論叢 第50輯 대지주 및 巨商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小地主 小商人을 포함한 서민출신의 군소기업 인들이었다. 그들은 영세 자본금으로서 소규모 기업체를 건립하고 식민지 당국으로부터 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반면에 자본력이 강한 일본인 기업과 경쟁하면서도 성실 과 노력으로 자신의 기업을 육성한 서민적 기업인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식민지치하에서 는 몰락 道程을 밟아야 했던 小農출신의 사회계층으로서 새로운 생활터전을 기업활동에 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서민 출신의 中小企業的 民族企業은 戰時 중에 기업정리 과정에서 많은 수가 몰락하였으나 이러한 서민계층 출신의 광범위한 출현과 그들이 근 대기업에서 얻은 체험이 해방 후의 한국의 근대적 발전의 기반이 된 것이다. Ⅵ. 韓國現代史의 問題 제 2차대전의 종결과 일본 식민지지배체제로부터의 해방으로 韓民族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기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경제사에서도 이 시기 이후를 現代史의 전 개로 보고 있다. 이 시기 이후 韓民族은 자주적으로 민족의 意志에 따라 공업화를 추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韓民族의 현대사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됨으로써 두개의 서로 다른 사회경 제체제와 經濟運用原理에 따라 경제건설이 진행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 남한에서는 自由民主體制下의 市場經濟원리에 따라 경제건설이 진행되었고, 북한에서는 共產독재지 배체제하에서 국가管理經濟원리에 의해 경제를 운영하여 왔다. 이 양체제는 현대 인류사 회가 추구하는 理想인 국민적 大衆福祉社會의 건설이라는 공통된 과제를 표방하고 있었 으나 兩體制의 사회경제의 건설은 1960년대 말을 전후하여 경제발전단계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즉 한국의 경제는 開放체제하에서 세계자본주의 제국과 자본 및 기술의 교 류를 이룩함으로써 지속적인 발전을 전개하고 있는 반면, 북한의 경제는 폐쇄적인 경제 정책으로 발전이 둔화되어 再生產의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폐쇄적인 경제체제하 에서의 국가의 獨占管理 방식으로는 경제발전의 限界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드러 냈다고 하겠다. 물론 과거 식민지 또는 半植民地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低開發 민족국가에서의 市場 經濟原理에 따른 工業化의 성격에 대해서는 從屬理論에 의한 비판적 視角도 있다. 종속 이론의 歷史認識에서는 한국경제에 있어서의 1945년 이후의 시기를 새로운 시대로 보지 않는다. 해방후 전개되는 한국 자본주의는 日帝下의 예속적 식민지 경제가 변형된 종속 적 新植民地 성격의 시대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경제는 미국經濟圏에 편입되었고, 1960년대 이후에는 미국, 일본 및 그 밖의 先進資本主義圈에 편입되어 그 주변부의 역할
- 171 - 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후 한국자본주의의 전개를 종속이론의 시 각에서 올바로 이해될 수 있는가는 문제가 있다. 종속경제 혹은 주변부 자본주의 이론은 역사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발전적인 要因이 무시된 비역사적 이론에 서 있다고 하겠다. 인류의 역사는 흐르는 강과 같다. 역사의 강 은 험난한 지대를 힘차게 격류를 이루는 때도 있고, 탄탄한 평야를 흐르는 때도 있으나, 그 흐름을 멈추지는 않는다. 종속이론에 입각한 社會構成體論은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는 경직된 사회침체론이며, 발전을 향하여 개척하고 노력하는 인간의 意志를 경시한 침체사 론에 불과하다. 종속 및 주변부 자본주의론은 제 2차세계대전 이후 과거 低開發상태에 있던 민족국가들의 경제발전과정을 보면 그 이론적 근거는 점차 상실하고 있는 것이 오 늘의 실정이다. 한국자본주의는 주변부적 종속이론에서 볼 것이 아니라 국제 분업적 관계에서 이해해 야 한다는 견해가 오늘에는 많은 동조자를 얻고 있다. 즉 한국경제는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세계경제의 分業체계 속에서 선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한국현대사의 진행에서 韓民族이 달성해야 할 과제로는 우선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그 첫째는 기술교류를 과감히 하면서 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서 자본을 축적하고 국 제경제에서의 높은 단계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국내경제에서 자본의 族閥적 집중을 막고 경제력과 경제활동의 기회를 공평하게 하여 대중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자유 개방적 경제관계를 넓혀 나가 궁극적으로는 시민사회 경제체제를 싱취시키는 일이다. 한국현대사는 이러한 목표를 향하여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