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고서는 2007 년통일부의 남북사회문화교류중장기로드맵설정및추진전략연구 에관한학술연구용역사업의일환으로연구되었음 남북사회문화교류 중장기로드맵 설정및추진전략연구 2007.11. 연구기관 :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통일부
남북사회문화교류 중장기로드맵 설정및추진전략연구 연구용역보고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제출문 통일부장관귀하 본보고서를통일부위탁연구과제, 남북사회문화 교류중장기로드맵설정및추진전략연구최종보고서 로제출합니다. 2007 년 11 월 30 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장백학순
< 연구진 > 연구책임자 : 백학순세종연구소수석연구위원 연 구 원 : 이우영북한대학원대학교교수전영선이화여대통일학연구원객원연구위원정현곤민화협사무처장 보조연구원 : 이현희민화협정책홍보팀부장 홍진옥민화협정책홍보팀간사
< 목차 > 요약문 v. Ⅰ. 서론 1 Ⅱ. 사회문화통합이론과사례연구 4 1. 사회문화통합의이론적검토 4 2. 사회문화통합사례와시사 : 독일통합과정분석 11 가. 유럽통합의경우 11 (1) 유럽통합의과정 11 (2) 유럽통합과문화정책 14 나. 독일과베트남의사회문화통합 20 (1) 통합의과정 20 (2) 독일과베트남의사회문화통합비교 22 (3) 독일과베트남 : 사회문화통합의전망 27 다. 독일의사회문화교류사업의특성의시사점 28 (1) 문화분야 31 (2) 청소년교류 46 (3) 언론 방송분야 49 (4) 체육분야 52 (5) 종교분야 55 Ⅲ. 남북사회문화교류현황과문제점 61 1. 남북사회문화교류현황과특성 61 가.2000 년이후사회문화교류현황 61 (1)6.15,8.15 민족공동행사 61 (2) 부문단체별교류와공동행사 65 (3) 언론, 방송교류 70 (4) 문화교류 74 (5) 체육교류 76 - i-
(6) 학술, 출판교류 79 (7) 과학기술, 환경분야 80 (8) 지방자치단체교류 84 나. 특성과변화 90 (1) 사회문화교류의특성 90 (2) 민간차원의남북공동기구형성유형 94 2. 남북사회문화교류성과와문제점 101 가. 남북사회문화교류의성과와문제점 101 나. 사회문화교류의개선과제 106 Ⅳ. 사회문화교류의추진환경과방향 110 1. 사회문화교류추진환경 110 가. 사회문화교류의국제적환경 110 (1) 동북아의정치적지형변화 110 (2) 관련국의대한반도정책 112 (3) 동북아평화체제와남북사회문화교류 117 나. 사회문화교류의남북환경 118 (1)2007 년남북정상회담과사회문화교류 118 (2) 남북관계변화전망 121 (3) 사회문화교류의촉진요인과저항요인 125 다. 사회문화교류의국내적환경 129 (1) 남북관계의전면화 130 (2) 사회문화교류의내진 ( 耐震 ) 구조강화 133 2. 사회문화교류추진방향 136 가. 사회문화교류발전을위한정책과방안 136 (1) 기본방향 136 (2) 남북사회문화교류각영역의발전 140 (3) 법 제도의정비 148 나. 남북사회문화교류추진체계형성방안 153 (1) 남북사회문화협력공동위원회의구성 153 (2) 사회문화교류진흥법률제정등제도마련 156 (3) 남북사회문화교류진흥원검토 159 - i-
(4) 사회문화교류진흥원의대안검토 :( 가칭 ) 남북사회문화교류협회 162 (5) 민관협력기구의구성 166 Ⅴ. 사회문화교류의단계별추진전략 167 1. 사회문화교류통합과정과기본내용 167 가. 남북통합과정과시나리오 167 나. 사회문화교류의기본내용 170 (1) 사회문화교류를위한토대구축 170 (2) 사회문화분야별교류내용 173 (3) 민관사회문화교류관리기관 176 2. 단계별추진전략 178 가. 협력단계 : 남북관계공식화단계 178 (1) 사회문화교류환경 178 (2) 사회문화교류방안 180 (3) 분야별교류프로그램 182 (4) 중점추진사업과추진전략 187 (5) 민간과당국의협력과역할방안 191 (6) 고려해야할환경 : 디딤돌과걸림돌 194 나. 평화공존단계 : 통일초기단계, 경제통합단계 196 (1) 사회문화교류환경 196 (2) 사회문화교류방안 197 (3) 분야별교류프로그램 199 (4) 중점추진사업과추진전략 202 (5) 민간과당국의협력과역할방안 206 (6) 고려해야할환경 : 디딤돌과걸림돌 207 다. 남북연합단계 : 사회문화통합단계 208 (1) 사회문화교류환경 208 (2) 사회문화교류방안 210 (3) 분야별교류프로그램 210 (4) 중점추진사업과추진전략 217 (5) 고려해야할환경 : 디딤돌과걸림돌 218 - i-
Ⅵ. 결론 221 참고문헌 224 - iv-
< 표목차 > < 표 1> 전쟁에서평화로의스펙트럼 6 < 표 2> 유럽통합과정과문화의정책화 16 < 표 3> 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관련법적개념규정 31 < 표 4> 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관련동서독 기본조약 (1972.12.21) 및추가의정서 35 < 표 5> 동서독 문화협정 (1986.5.6) 37 < 표 6> 동서독 과학 기술협정 (1987.9.8) 44 < 표 7> 동서독 체육협정 (1974.5.8) 55 < 표 8> 남북정상회담전후의남북언론교류현황 71 < 표 9> 남북정상회담이후남북체육교류현황 77 < 표 10> 1999 년이후추진된남북과학기술분야협력사업 ( 정부지원중심으로 ) 82 < 표 11> 남북한분야별왕래현황 91 < 표 12>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위원회성원 97 < 표 13> 남북관계발전전망 124 < 표 14> 남북관계발전의긍정적요인과부정적요인 128 < 표 15> 국민적합의도출을위한목표와과제 135 < 표 16> 남북관계변화와사회문화 169 < 표 17> 남북사회문화교류프로그램 183 < 표 18> 평화공존단계의남북사회문화교류프로그램 200 < 표 19> 통합단계남북사회문화교류프로그램 212 < 그림목차 > < 그림 1> 남북관계진전구도 7 < 그림 2> 남북인적왕래현황 91 - v-
< 요약문 > 본연구는 2000 년남북정상회담을계기로확대되고있는사회문화교류의성과를비판적으로검토하고, 상호접촉을통해이끌어온남북한체제내의변화와남북관계의변화, 그리고국제적환경변화의맥락속에서사회문화교류발전을위한중장기로드맵과추진전략을모색하는것을연구의목적으로두고진행하였다. 2장 사회문화통합이론과사례연구 에서는사회문화통합이론을살펴보고, 유럽통합의사례연구를통해한반도통합의시사점을파악해보았다. 현재의남북관계는 적대적대결 의시기에서 적대적협력 의단계에접어들고있다. 남북간의정치 군사적문제가남아있기때문에당장 평화공존 의단계라고할수는없지만, 지난시기에비해남북관계가진전된것만큼은사실이다. 이에더하여국제적인차원에서의 한반도냉전구조의해체 및 한반도평화체제구축 의구상이수면으로떠오르고있다. 이와같은남북관계의발전단계를염두에두고해외의사회문화통합사례를살펴보고, 이것이남북사회문화교류활성화를위한정책설정에있어서시사하고있는바를모색해보았다. 유럽의경우, 유럽연합을형성하는데에중요한영향을미친문화정책에주목한다. 다양성속의단일성 을핵심으로하는문화정책은상상으로만존재하던유럽통합의이미지들을구체적인정책들로실현하고있다. 그리고독일과베트남의사회문화통합사례를살펴본다. 사회문화통합은사회제도의통합, 의식및생활양식의측면, 그리고생활수준격차의측면에서살펴볼수있다. 두국가는자본주의와사회주의라는상이한사회경제체제의통합이자한체제로의일방적통합이라는점에서서로유사하다고하겠다. 한쪽체제에의해일방적으로통합되는것이체제구성원들에게많은혼란을가져왔다는것을동독및북베트남의사례에서발견하게된다. 특히, 동서독간의문화분야, 청소년교류, 언론 방손분야, 체육분야, 종교분 - vi-
야의사회문화교류사업의내용들은남북한간에창조적으로응용할수있는시사점들을보여준다. 독일이분열되어있던동서독주민들간의갈등과반목을극복하기위한문화 정서적측면의교류정책의필요성을보여주고있다면, 베트남은억압과강제를통해서라도남북베트남주민들간의분열을막고통합상태를이루어안정을찾을수있도록하는사회 정책적차원의접근방식을제시한다. 3장 남북사회문화교류현황과문제점 에서는 2000 년 1차정상회담이후로부터 2007 년 2차정상회담까지의사회문화교류의현황을살펴그특성을찾아내고문제점도짚어보았다. 2000 년남북정상회담이후사회문화교류는부분적인단절을경험하면서도지속적인상승흐름을타고왔다.2000 년에사회문화교류의일환으로방북한인원은 476 명이었지만매년늘어나 2005 년에는 10,777 명에이르렀다.2 차남북정상회담이개최된올해의경우 10 월까지의통계로도이미 2005 년의수준을넘어섰다. 지난 7년간의사회문화교류현황이보여주는특성은다음의 7가지로요약할수있다. 1 6.15,8.15 공동행사가안정되면서노동, 농민, 여성, 청년, 교사, 문인, 종교인, 언론인부문별교류가증가되었다. 2 역사와문화재분야의협력사업이성장하고이를매개하는방송, 종교교류가서로얽혀포괄적인증가추세를이끌었다. 3 지방자치단체의경우처럼사회문화교류와인도지원단위와의사업연계성이높아지면서교류의확대에기여했다. 4 비록평양지역으로한정되기는했지만공연활동등문화교류가매우활발하게움직였다. 5 체육교류역시남북교류의효자종목답게여전히좋은기억들을남북국민들에게심어주었다. 6 상주취재, 채널개방등언론과방송교류의본류가여전히지체되면서 - vi-
남북상호간전체적교류의깊이는매우미흡하다. 7 통일의주역이될청소년교류분야를비롯하여일반인이참가하는교류로가지그폭과깊이가확대되지는못했다. 정상회담이후남북사회문화교류는다양한교류의정착을통해남북상호간의이해를증진시키고불신을해소하는데기여했다는평가를받는다. 2002 년의서해교전이후북한의사과를촉구하면서 8.15 서울통일대회와부산아시안경기대회대표단참가를이끌어낸것이나,2004 년부터시작된 10 여월여의경색국면을 6.15 평양대축전행사를통해풀어낸경험은사회문화교류가정치적군사적긴장완화를이끄는기억에남는사례이다.2007 남북정상선언과 1차총리회담을거쳐남북사이에사회문화교류협력공동위원회구성이합의됨으로서이분야교류도이제제도화단계로진입하고있다. 그러나사회문화교류의제반분야가늘밝은면만있는것은아니다. 2001 년 8.15 평양대회를통해드러난갈등요소는지금도깊게드리워져있다. 여전히외부정치환경을핑계로합의한사항을번복하는북한의태도는계속되고있으며이는사회문화교류가정치에종속되는현상에다름아니다. 이러한불안정성이빚어내는남남갈등또한만만치않다. 사회문화교류의고비용구조도대중화를방해한다. 평양한번가는데 200 만원을훌쩍넘는비용을지불해야하니쉽게대중화되지못한다. 육로방북이이문제를해결하는단초지만이또한군사적긴장속에서잘풀리지않는것이다. 4장 사회문화교류의추진환경과방향 에서는사회문화교류에영향을미치고있는국제적, 국내적, 남북간의환경변화를살펴보고, 사회문화교류정책과방안, 추진체계형성방안등사회문화교류의방향을제안하고있다. 우선 4장 1절에서는환경분야를살펴보았다. 남북사회문화교류추진을둘러싼국제적인환경의가장큰변수는한반도평화체제의구축여부이다. 한반도평화체제의구축이중요한이유는사회문화교류가풍부한내용과안정성을갖추기위해서는주변관련국들과의국제적이해가절실하기때문이다. 한반도의불안정성은남북관계발전의전반에걸쳐부정적인영향을미칠것이며, 이는사회문화교류에도영향을미칠것이기때문이다. - vi-
동북아지역의역동성은기존의질서관계에서새로운질서관계로전환되는과정속에서겪는변화라고할수있다. 한반도주변국들의국내정치및경제시스템은근본적인변화를겪고있다. 동북아지역국가의변화방향과결과는 21 세기의국가생존과번영을추구하는한국의진로에지대한영향을미칠것이다. 또한남북의통일역시한반도와주변국가들의관계에서근본적인변화를의미하는중대변수가되고있다. 사회문화교류를위해서는기반으로서동북아의안정적시스템을구축해야할것이다. 한반도를둘러싼복잡다양한국제적협력관계속에서남북사회문화교류가충실히이루어지기위해서는남북관계개선과통일은냉전체제의완전한청산이라는시대적이며, 국제적인공감대를형성해야한다. 한반도와주변관련국들은문화교류와협력을통하여자국의위상을높이기위한정책들을적극추진하고있다. 이는한반도관계를둘러싼국제질서의변화에대해서각국이어떤이해관계를마련하고관계를형성할것인지에대한문화적대응전략이필요하다는점을시사한다. 이런점에서 2007 년의남북정상회담은남북관계발전의불안정성을제거하고사회문화협력의틀을당국차원에서이루어지게되었음을의미한다. 한반도의정치적안정은남북사이의경제협력과사회문화분야의협력을높여줄것이다. 물론정치적환경개선이곧북한의정책변화로즉각적으로나타나지는않을것이지만예측가능성이높아진만큼장기적인협력이가능해질것이다. 반면남북관계발전의걸림도많다. 통일의저항요인으로는오랜냉전체제로인한상호불신감, 군사안보분야의불안감등의정치적요인이가장크다. 여기에통일에따르는통일비용에대한부담감과대북지원에따른경제침체에대한우려감, 상이한문화체제속에서형성된심리적배타성, 남한내사회소외계층의반발, 북한의일방적흡수통일에대한저항감, 정치제도와방송언론등의민주화과정, 정치적양보의지, 근대화된이후의통합경험부족등이걸림돌이될것이다. 또한남북관계발전에도불구하고해결되지않은국군포로, 납북자문제, 열악한북한인권등도사회문화교류의피로감을누적시킬가능성이높다. 내부적으로남남갈등을해소하고통 - ix-
일에대한올바른가치관을형성할수있는정책도필요하다. 4장 2절에서는사회문화교류의추진방향에대해사회문화교류의방향과각영역의발전, 법, 제도의문제그리고추진주체의형성방안을중심으로연구하였다. 우선사회문화교류의기본방향은 2000 년이후부터현재까지의경험을반추하여다음과같이다섯가지의방향에입각하여진행되어야함을제안했다. 1 사회문화교류를통해남북사이의이질성을극복하고동질성을회복하면서민족공동체의식을함양해가야한다. 2 남북상호간에이해와신뢰형성과정의축적이라는관점에서사회문화교류, 협력을추진해야한다. 3 남북관계의전반적발전과더불어사회문화교류의경우도제도화단계로들어가야한다. 4 남한사회내에서민주주의를확대하고평화문화를정착시키는노력속에서남북사회문화의전반적인발전을이끌어가는과정이되어야한다. 5 사회문화교류의추진에서점진적, 단계적통합이라는방향하에민 ( 民 ) 과관 ( 官 ) 의협력을모든영역에서실현해가야한다. 이러한기본방향하에이미성장분야로발견된사회문화교류의각영역은더욱심화시켜가야하며동시에새롭게싹이트고있는분야에대해서도관심을기울일것을제안하고있다. 연구에서제안한신규분야는연수, 체류등이결합된왕래성인적교류, 지방단위로보존되고있는민족전통문화및의식주생활문화분야교류, 인도지원분야의사회문화교류로의확장, 청소년들의인적교류,IT 기술력이결합된애니메이션, 게임, 프로그램개발등문화산업분야,DMZ 생태평화공원화등과같은환경협력분야, 해외동포와연계한민족정체성확립사업등이다. 법 제도개선방향과관련해서는이미 남북관계발전법 의제정을통해남북관계를규정한조건에서국가보안법등상호충돌하는남북관계법령체계를현실에맞게정비해야하며, 이를위해서는헌법 3조영토조항의개정문제를전향적으로검토하는것을전제로북한과 ( 가칭 ) 남북법률실무협의 - x-
회를운영할것을제안하였다. 더불어남북협력사업의영역이다변화되어가는조건을반영하여, 남북교류협력법 체계에총괄되어있는남북관계협력분야를단행법체계로확산시켜, 사회문화교류분야를활성화해나가기위한사회문화교류진흥법과지원협력의제도화를위한 ( 가칭 ) 북한사회개발협력단법등을제정할것을제안하였다. 사회문화교류추진체계와관련해서는총리회담에서합의한남북사회문화협력공동위원회구성을적극추진함과동시에, 국내적으로도사회문화교류를담당하는특수법인 ( 사회문화교류진흥원 ) 설립을제안하였다. 사회문화교류진흥원설립과관련해서는이미지난 2005 년국회에서의원들에의해제기된바있지만, 남북관계여건의미성숙을이유로지체되었던바, 이제남북사이의사회문화교류협정을준비하는단계까지가고있는조건에서는이기구의설립이필요함을제기하고있다. 사회문화교류진흥원의인적구성과재정등지나치게과대했다고지적되는문제들에대해서는사회문화교류의성장정도와교류주체의능력등을감안한단계적추진방안을제안하였다. 여전히진흥원설립이과도하다고판단된다면특수법인이아닌법정기구보장만을구비한 ( 가칭 ) 사회문화교류협회도하나의대안으로검토하고있다. 사회문화교류진흥원체계의구비와더불어정부와민간의정책협의기구도구성해야함도제기하였다. 이는대북지원단체의경우대북지원민관정책협의회를운영, 민관협력이제도화에이르고있는데비해사회문화교류가뒤쳐져서는안된다는것을지적하는것으로이를통해남북관계의균형적발전을추구하자는것이다. 마지막으로 5장 사회문화교류의단계별추진전략 에서는남북통합단계를남북협력단계, 평화공존단계, 남북연합단계로나누어교류환경및교류방안, 분야별교류프로그램및진흥방안에대해살펴보고있다. 남북사회문화교류는남북관계의변화와통일과정에따라서적절한프로그램이만들어지고방향이설정되어야한다. 사회문화교류가활성화되기위해서는남북관계가개선되어야하며, 동시에앞에서이야기한바와같은 - xi-
제도적정비를포함한다양한노력들이필요하지만보다효과적으로사회문화교류프로그램을구성할필요가있다. 사회문화교류가상황에부합하여야하고, 화해협력에기여할수있어야한다. 남북관계발전단계별사회문화교류내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남북협력단계에서는실현가능성이높은분야부터시작하여구체적인성과를이어가야한다. 교류의내용이화해협력과평화정착에도움이된다고하더라도실현이불가능한교류는의미가없다. 사회문화교류의개념을확대하여다양한형태의교류가이루어질수있도록해야하며, 남북사이의대결단계를극복할수있는교류내용을만들어가야한다. 내적기반구축을위한과정도중요하다. 북한의예술진흥을위한지원으로부터시작하여남북의교류를넘어민족문화의우수성을해외에알리고남북화해의상징적효과를높이기위한남북문화의해외교류행사를공동으로진행하거나참여하는것으로확대해나가야한다. 남북협력단계에서이루어질수있는사회문화분야의주요사업은상징적이거나실질적인교류사업을추진하는것도중요하지만 ' 국제대회공동참여 ',' 교류전문가양성 ',' 교류프로그램구축 ',' 북한문화연구기반조성 ' 등을추진해나가야한다. 평화공존단계에서는한편으로는남북한적대감을해소하는등분단구조를청산함으로써대결구도로복귀하려는시도를미연에차단하는데기여하여야할것이며, 또다른한편으로는통일을대비하여남북한주민의공동체의식함양과통일문화구현에대비하는방향으로추진되어야할것이다. 이단계에서사회문화교류는광범위하게실시할수있을것이며, 인적교류와공동작업에초점을맞추는것이필요하다. 사회문화교류사업과함께상실되었던전통문화를복구하는과정이병행되어야하고, 진정한의미에서공동제작, 청소년어린이교류프로그램을통하여통일문화를만들고공유해나가야한다. 남북연합단계에서는일차적으로사회문화관련공동조직에초점을맞추어야한다. 남북연합의의의에부합하기위해서는남북이고유의기구나조직을유지하면서동시에남북이공동의참여하는단체가기구를구성하여야 - xi-
한다. 사회문화와관련된공동조직을구성하여본격적으로사회문화적통합에대한실질적준비를하여야한다. 사회문화관련공동의조직은남북이공동으로설립하고구축하여운영하여야한다. 법이나제도면에서도사회문화관련법령및제도전면적정비하여통합을준비해야한다. 남북이문화적우열관념에서벗어나미래지향적이고창의적인문화정책의기조를유지해나가야한다. 복지적차원에서사회문화교류정책이마련되고, 통합의과정에서제기될갈등을해소할수있는방향으로추진되어야한다. 지역별문화적격차를해소하고, 문화산업의부흥을통한국부창출의원천으로서사회문화정책방향이만들어져야할것이다. - xi-
남북사회문화교류 중장기로드맵 설정및추진전략연구
Ⅰ. 서론 사회문화교류는내적통합을위한기반을조성하고, 화합의실마리를만들어나감으로써통합의진정성을살릴수있다는점에서중요한의미가있다. 지금까지의남북관계에서사회문화교류의내용을보면남북의정치적관계에영향을받아왔다. 현재남북통합을저해하는요인가운데중요한것은현재남북한의사회문화체제이다. 반세기에걸친남북한대치상황은북한에대한적대감을확대시켜왔고, 남북한사회문화교류는거의이루어지지않았다. 이와같이사회문화교류가일천하다는것은무엇보다도사회문화교류를활성화하는데가장큰걸림돌이라고할수있다. 사회문화교류는지금까지의이러한현황을직시하면서장기적인정책을통해교류프로그램을만들어나가야한다. 남북사이에화해분위기가고양되면사회문화교류가활성화되고남북관계가경색되면사회문화교류도위축되었다. 이러한상항은현재에도유효하다. 근본적으로사회문화교류가활성화되기위해서는남북사이의화해협력의분위기가정착되는것이필요조건이다. 그러나남북사이의협력적인분위기형성이사회문화교류의충분조건은아니다. 사회문화교류는남북관계에일방적으로종속되거나부차적인문제가아닌통일의당위성을홍보하고내적추동성을얻는지름길이기때문이다. 사회문화교류가통일에서의미를갖는것은무엇보다통일이단순히체제나제도의통합으로완성되는것이아니기때문이다. 궁극적으로통일의완성은사회문화공동체의형성이며, 사람들간의통합이라고할수있다. 이를위해서는사회문화교류가통일을위한필요조건가운데하나가된다. 이는사회문화교류가활성화되지않는다면통일이후많은사회문화적갈등이야기될수밖에없다는것을의미한다. 또한사회문화교류의활성화자체가남북관계개선이나평화정착에기여한다는점이다. 중국과미국의관계개선의출발점이 핑퐁외교 였다는점을상기할필요가있다. 즉적대적인관계를개선하는데상대적으로정치적영향력이적은 - 1-
분야의교류가중요한의미를가진다는것이다. 따라서상호적대감을약화시키고, 평화를정착하는데사회문화교류가기여할바가많다는점을인식할필요가있다. 2000 년이후남북은남북교류가진행되면사회문화적통합이자연스럽게진행될것이라고생각하기도하였다. 다시말해사회문화교류의양적증가는자연스럽게질적변화로이어질것이라고생각하였다. 그러나이런예상과달리사회문화교류는양적인증대에도불구하고질적으로크게개선되지않았다. 이는사회문화교류가목적하는것처럼남북사이의통합은자연스럽게이루어질수있는문제가아니라, 남북사이의통합저해요인을제거하고안정성을구축하기위한노력이있어야한다는것을의미한다. 이러한대북정책에대한국민적합의가도출되어야한다. 남한정부의대북정책의관건은향후정권의향배와통일에대한국민간의합의를어떻게이끌어낼것인가의문제이다. 또한통일과정에따르는부정적인현상들을얼마나잘해소하면서국민적합의를이끌어낼것인가에따라서남북관계발전방향과속도가좌우될것이다. 북한문제로남북의교류가경색된 2004 년의경우에도개성공단과금강산관광사업은별다른영향을받지않고추진되었지만, 북한의핵실험이있었던 2006 년의경우에는사회문화교류가상당한위기를맞았다. 이러한변수는남북관계전반에걸쳐특히사회문화교류에있어부정적인영향을미친다. 2007 년의정상회담과총리회담으로남북관계발전을위한제도적장치는만들어졌다. 현재의방향과발전이라면장기적측면에서남북관계는체제이념의대립을해소해가면서평화공존상태에서통일의전단계로서진행되어갈것이다. 그러나이과정은남북의문제로해결될수있는과정이아니다. 남북관계에서사회문화공동체형성전략은사회문화교류의긍정적인측면과부정적인측면을고려하여추진되어야한다. 사회문화교류가주는긍정적인영향도크지만교류과정의지연이나교류실패로인한통일피로감이누적될수있으며, 이는장기적으로남북관계개선에서부정적인영향을미칠것이기때문이다. 본연구에서는 2000 년남북정상회담을계기로확대되고있는사회문화교류의성과를비판적으로검토하고, 상호접촉을통해이끌어온남북한체제내의 - 2-
변화와, 남북관계의변화, 그리고국제적환경변화의맥락속에서사회문화교류발전을위한중장기로드맵과추진전략을모색하는것을연구의목적으로두고있다. 이와같은맥락에서본연구는다음의차례로진행될것이다. 첫째, 사회문화교류와평화정착의관계를이론적으로검토하고, 유럽의통합의사례연구를통해한반도통합과정에주는시사점을찾아볼것이다. 두번째로 2000 년정상회담이후활발해진남북사회문화교류의특성과현황을면밀히검토하고, 사회문화교류가미친영향을살펴볼것이다. 세번째로사회문화교류의국제적, 국내적, 남북관계환경을살펴보고, 사회문화추진방향을법, 제도적측면과추진체계형성을중심으로살펴볼것이다. 마지막으로사회문화교류의단계별추진전략을협력단계, 평화공존단계, 통합단계로살펴보고, 단계별실현가능한사회문화교류프로그램과추진전략을예시할것이다. - 3-
Ⅱ. 사회문화통합이론과사례연구 1. 사회문화통합의이론적검토 최근까지의남북관계는남북이이념,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등사회전차원에서전면적으로대결하였던 적대적대결 의시기로특징지을수있다. 서로간에체제비난과유형적, 무형적인적대성이표출되었던반면, 교류나협력은철저히단절되었던시기였다. 그러나햇볕정책으로상징되는대북화해협력정책을바탕으로, 정경분리원칙아래남북간화해와협력을추진하고있는국민의정부가출범한이후한반도의남북관계는이념적으로, 정치 군사적으로는적대적인대립의상태가완전히해소된것은아니지만, 경제적으로그리고사회 문화적으로는부분적으로교류와협력이형성되는 적대적협력 의 초입단계 에들어서게되었다. 잠수정의침투, 서해에서의무력충돌과같은적대적인대립이사라지지않은가운데서도금강산관광사업과같은남북한경협이추진될뿐만아니라, 예술단이나체육 종교단체의방북이실현되는등사회 문화분야에서도교류와협력이형성되었던것이다. 만약이러한적대적협력이서로간의이해에의해확대되고심화될경우에는이념적으로는체제의성격을달리하더라도정치 군사적측면에서도부분적으로협력할수있는 평화공존 의시대가남북관계에도래할수있다. 자본주의와사회주의를지향함으로써이념적으로는상이하더라도경제, 사회, 문화분야에서의상호간전면적인교류와협력이이루어짐은물론정치, 군사적측면에서도남북한이부분적으로합의하여당국간의관계가정상화되고군사적으로도긴장이완화되어상호신뢰를구축하는상황으로남북관계가발전하게되는것이다. 나아가평화공존이본격화되고그과정에서남북간에커다란정치적합의가이루어질경우에는우리가염원하는민족통일의궁극적형태인 1 민족 1국가 1체제 로향하는도정에서 1 민족 2국가 2체제 형식의 남북연합 이가시화되어 사실상의통일 이이루어질수있는가능성도열리게된다. 남북연합의단 - 4-
계에서는남북한이이념적으로서로다른체제를유지하기는하나사회모든분야에서전면적인교류와협력이이루어지게되는것이다. 그리고궁극적인한반도통일은이러한과정을통해사회의전반적영역에서남북한상호간에통합의수준이서서히높아지는가운데민족합의에의해평화적으로이룩될수있다. 이와같은남북관계의진전구도에더하여남북관계에국제적차원이고려된 한반도냉전구조해체 및 한반도평화체제구축 구상간의상관관계는다음과같다. 일반적으로평화체제구축은전쟁상태를청산하는 평화의회복 ( 소극적평화 ) 과평화상태를지속적으로관리하는 평화의유지 두가지모두를포괄하는개념 ( 적극적평화 ) 이다. 1) 따라서한반도냉전구조해체는평화의회복에중점을두어남북관계를 적대적협력 단계에서 평화공존 단계로진입시키는것을의미하며, 한반도평화체제구축은적극적평화의개념으로서한반도냉전구조해체를포함함은물론평화의유지를항구화하기위해남북관계를 평화공존 단계에서 남북연합 단계로진전시키는전과정을의미한다. 전쟁에서평화로의다양한단계를 < 표 1> 과같이구분하여살펴볼수있다. 이때분쟁이란 엉클어져다투는것 으로정의되며전쟁, 승부다툼, 논쟁을포괄한다. 전쟁은 무력에의한국가와국가간의투쟁 으로서가장강도가강한상태의분쟁이며, 승부다툼은합리적인통제를전제로하는분쟁이다. 논쟁은어떤쟁점을두고상대방을비판 공격하고논리적으로공박하며자신의입장을변호하는분쟁이다. 이렇게볼때최근까지한반도는 ( 국지적 제한적 ) 전쟁, 승부다툼, 논쟁이동시에전개되고있는분쟁의상태에놓여있었다. 따라서 한반도평화체제구축 에서 평화 의내용은무력적충돌즉 ( 국지적 제한적 ) 전쟁이존재하지않는 평화의회복 (Restoration ofpeace) 이란소극적평화가아니라, 전쟁상태에서승부다툼상태로, 승부다툼상태에서논쟁상태로, 논쟁상태에서분쟁이해소되고평화가유지 관리되는 평화의회복 + 평화의유지 (MaintenanceofPeace) 란적극적평화의개념이다. 여기에더하여한반도평화체제는민족분단이란특수성으로인해민족의통일을지향하고기여할 1) 평화 의개념은 특정한시기와장소에서무력적충돌이존재하지않는상태 의소극적개념과 특정한시기와장소에서무력적충돌이존재하지않을뿐만아니라, 무력적충돌의원인이되는분쟁요소가해소되고, 새로운분쟁의발생시무력적충돌로표출되지않도록관리되는상태 의적극적개념으로나눌수있다. - 5-
수있는체제여야한다. 따라서한반도평화체제구축방안은ㄱ. 한반도평화의 회복을위한체제구성방안, ㄴ. 한반도평화의유지를위한체제구성방안, ㄷ. 민족통일에기여하는체제구성방안등을포괄한다. < 표 1> 전쟁에서평화로의스펙트럼 분쟁 (Conflict) 평화 전쟁 승부다툼 논쟁 (Peace) (Fights) (Games) (Debates) 소극적평화의대상 적극적평화의대상 다. 2) 이러한남북관계의발전방향에대한기대는 < 그림 1> 과같이표현될수있 2) 손기웅, 베를린선언의의의와과제, 통일연구원, 베를린선언과남북관계 ( 서울 : 통일연 구원,2001),8-12 쪽참조. - 6-
< 그림 1> 남북관계진전구도 한반도평화체제구축 ( 적극적평화 ) 평화회복 + 평화유지 한반도냉전구조 해체 ( 소극적평화 ) 평화회복 적대적대결 적대적협력 평화 공존 남북 연합 통일 따라서적대적협력이막움트기시작한지금우리가국가적으로온국민이힘을기울여야할과제는남북한간에교류 협력을더욱활성화하여상호이해와관심의폭을넓히고심화시켜신뢰감을형성하고이를토대로정치 군사적측면에서도남북한이협력하는 평화공존 의시대를여는것이다. 그러나한반도에있어서냉전구조가지속되는한적대적협력이진정한평화공존으로진전되기에는대내 외적차원에서한계가주어질수밖에없다. 결국남북한교류 협력을더욱활성화시키면서, 한편으로국내 외적수준에서, 남북한관계및다자적차원에서한반도냉전구조의해체를위한작업을동시에추진해야하는것이우리의당면과제이다. 한반도냉전구조해체라는포괄적구도내에서적대적협력의심화가명실상부한평화공존으로진전되어갈수있도록종합적이고도단계적인전략을통해남북한교류 협력을추진하여야한다. 한편남북한교류 협력의폭과규모를더욱심화, 활성화시켜나가는국가적노력가운데특히남북한간사회 문화적이질성을극복하고민족공동체형성이라는장기적목표에기여할수있는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의중요성이부각되고있다. 현재남과북의문화는다르다. 그것은다른체제하에서서로다른외국문 - 7-
화의영향을받은데서오는당연한결과이다. 그러나남한문화에비해북한문화가혹은북한문화에비해남한문화가어떤기준에비추어더이질화되었다는발상은옳지않다. 통일은분단이전상태로의원상회복이아니다. 단순한재결합이아니라, 새로운한민족 ( 韓民族 ) 을창조하는것이다. 이질화된문화의동질성회복이라는명제는자칫동질적문화라는절대기준을정해놓고서로다른문화의융합이가져올역동성을부정하게될가능성이있다. 장기적측면에서이러한상황을가정한다면현단계의남북사회 문화교류 협력은이질성의확인이우선이다. 그런후에융합을거쳐새로운통일된문화를어떻게형성할것인가를고민해야한다. 남북의통일은궁극적으로문화의통일에서, 즉통일된남북이하나의국가단위를이루고그바탕위에서형성되는통일문화를이룰때비로소완성된다. 정치적통합이주로권력배분이나정치체제의조립을대상으로하는것이라면, 사회 문화적통합은사회구성원들이어떻게함께잘살아가느냐하는공동체의식을함양해가는과정이다. 사회 문화적통합은 분단상태로부터의통일 이라는결과적측면보다는 분단상태의극복과해소 라는과정적측면을중요시한다. 사회 문화적교류 협력은정치 경제등다른분야들에비해당사자끼리의논의가가능하여저변으로부터의파급효과가상당히크다. 3) 따라서평화공존으로향하는과정에서남북사회 문화교류는그기반을닦는일이라할것이다. 이러한의미에서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처리에관한규정 (1998.5.12) 의제3조는 사회 문화분야협력사업 을 남한과북한의주민이합의또는계약에의하여공동으로행하는문화, 체육, 학술등에관한제반활동으로서민족의동질성회복과사회 문화공동체형성을위해남한, 북한또는제3국에서 행하는일련의행위로규정하고있다. 구체적인남북한문제와관련된사회문화통합개념은분단국통합사례를연구하면서등장하며또한학자에따라상이한강조점을가지고있다. 우선남북한, 독일의통일의연구에서사회문화통합이란분열되어있던두주민집단이 3) 통일은설사제도적통합 ( 체제통합 ) 을이룬다고해도이념적으로같은반열 ( 이념통합 ) 에서있지않으면겉모양만의통일이기쉬우며, 통일이열린사회와닫힌사회의생활차이를극복 ( 생활통합 ) 함은물론사회심리적간극의극복 ( 가치통합 ) 까지두루포괄해야의미를가지게된다. - 8-
갈등과반목을극복하고더불어사는상황이라는의미로어떤사회의이상적통합상태를뜻한다. 그러나베트남통일사례연구에서는억압과강제를통해서라도남북베트남이분열하지않고통합상태를이루어안정을찾고있는상태를의미하고있다. 사회문화통합을이상적차원에서설정한경우에도강조점이서로다르다. 일부학자는사회문화통합과관련하여다른문제들을제기하면서도, 문제핵심으로서남북한문화 정서적이질성과그극복을상정하고있다. 이에대하여사회문화통합에서문화 정서적차원보다는사회 정책적차원을중요시하는입장이존재한다. 한편화폐와권력의체계규제적구조가생활세계의상호이해와합의의사회문화통합적구조를무력하게만드는것으로궁극적으로 내적식민지 가되는것으로말하면서, 체제통합만몰두하는경우결국북한을남한의내부식민지로만들것이라고경고하고있다. ㄱ. 문화적차원의통합방식 : 역사, 언어, 문화와종교에의해논증되어있는것으로간주되는해당사회의통일성에대한 ( 때로는매우국수주의적 ) 관념에의한사회통합. ㄴ. 정치적차원의통합방식 : 헌법규범의강력한구속력, 억압적인 ( 경우에따라매우억압적인 ) 정치제도, 그리고이들이정치갈등을조절하고집권화시킬수있는능력등에의한사회통합. ㄷ. 경제적차원의통합방식 : 투자, 생산, 소비의상호관련이당장은아니더라도미래에, 사회의모든부분에대하여복지와안전의상식적기준을충족시켜줄것이라는기대에의한사회통합. 분배관련갈등은그종류와처리방식에따라, 통합에이바지할수도해를끼칠수도있다. 정책적제안에대해서주목하면서특정이론보다는이미시행중인사회문화통합정책을참고하여야한다는점에서캐나다의다문화주의정책을주목할필요가있다. 캐나다는초기건국과정부터영국계와프랑스계주민들로연합된연방주의국가이기때문에사회문화통합을이루기위한이중문화적인정책이국가차원에 - 9-
서실천된사회이다. 특히 1970 년대이후로세계각지에서다양한인종 민족집단들의이민이가속화되면서캐나다사회는모자이크와같이복합적인사회로변해갔다. 이러한시대적, 인구학적변화를반영하면서사회문화통합을모색하는과정에서다문화주의가출현하였고, 지금은캐나다모든국민과정부의지지속에사회문화통합의가치와이념으로발전해가고있다. 이러한정책을민족적모자이크 (EthnicMosaic) 라고하는데, 이것은 1971 년에연방정부가문화적다원주의 (culturalpluralism) 에기초한다문화주의를공식적인사회문화통합의이념으로제창하면서출현하였다. 다문화주의는대체적으로다음과같은서로관련된세가지의현상을지칭한다. 캐나다의다문화주의는단지문화적다양성의가치를수동적으로인정하는것에그치는것이아니라정부차원의적극적인지원으로나타난다. 캐나다인들의문화적자유를보장하는가장확실한수단으로써다음과같은네가지정책을공식적으로구체화한다. 첫째, 정부는캐나다사회의발전에지속적인노력과열망을보이는모든집단에대한자원지원을위해노력한다. 이와같은지원은집단의크기나세력과는무관하게이뤄진다. 둘째, 정부는사회에대한참여를가로막는문화적장벽을극복하기위해상이한문화집단에대한지원에차이를두지않는다. 셋째, 정부는캐나다국가전체의이익을위해서, 상이한문화집단간의상호교류를적극적으로장려한다. 넷째, 정부는새로운이민자들에대해그들이완전한캐나다사회의구성원이될수있도록최소한하나이상의공식적인언어를습득할수있도록지원한다는것이구체적인정책내용들이다. 또한이같은다문화주의정책을실행하기위해연방정부는문화행사를위한지원금을증액하고, 캐나다대학내에민족학연구 (ethnicstudies) 과정을개설하고, 영어또는불어교육프로그램을강화하고, 다문화주의프로그램전담기구를설치하였다캐나다의다문화주의는한편으로는인구학적, 사회문화적으로다양화되어가는캐나다사회의현실을직시하고기존질서를방어하려고하기보다는오히려적극적으로개방된사회로나아가려는노력으로해석할수있다. 그러나보다근본적으로는영국계와프랑스계로양분된캐나다사회가분리되지않고하나의통합된체계로존속하기위해서는필연적으로선택할수밖에없는방안이라고볼수있다. 서로다른인종 민족집단들의가치관, 사고방식, 생활양식등을인 - 10-
정하고존중하는개방적이고관용적인자세, 모든개인들이성, 인종, 민족, 국적, 종교등의차이로인해차별받고배제되지않고기회의형평성을보장받을수있다는신념, 그리고정부가적극적으로이러한사회이념을보호하고실현하려는노력이캐나다사회가다양성속에서통일성 (unity in diversity) 을이루어갈수있는토대를마련하였다고볼수있다. 2. 사회문화통합사례와시사 : 독일통합과정분석 가. 유럽통합의경우 (1) 유럽통합의과정 유럽의통합논의는장모네와로베르슈망이라는두프랑스인의손에이끌렸다. 그리고그결정체로석탄과철강을공동으로관리하여전쟁을방지한다는취지에서 유럽석탄철강공동체 를결성하였고이것이오늘날유럽연합의전신이되었다. 유럽통합의역사를알리는로마조약은그중심에위치하고있었다. 이때유럽통합의방식을결정한것은 기능주의 였다. 기능주의는기술이나경제부문과같이정치적으로덜민감한영역에서우선국가간협력관계를체결할것을주장한다. 이렇게처음협력관계를맺게되면시간이지나협력파트너간에협력하고자하는의지가저절로생겨다음단계에서는정치적으로민감한사안영역에서도협력관계를맺게된다는순진한논리를추종한다. 4) 유럽인들은곧닥칠세계대공황과 1970 년대를강타한두차례의오일쇼크를예상치못했다.1960 년대말부터평화를외치며공동체를건설하고자했던유럽인들은경제적어려움에직면하게되자그만협력관계를잊고자기나라의 4) 양오석, 경제에서정치까지유럽통합의역사 50 년, 월간말 8월호,(2007),169 쪽. - 11-
경제안보에온정신을쏟았다. 유럽인들은협력하고자하는의지가자동으로생겨서로다른사안영역으로타고넘어가는것이아님을똑똑히지켜보았다. 오히려협력하고자하는새로운 정치적의지 가필요했다. 어쨌든경제적어려움은유럽통합을지향하는의지의발목을잡았고경제회복기가돌아올때까지유럽통합은멈춰서고말았다. 세계경기순환의주기속에유럽통합의역사도그생명을같이해왔다. 경제적살림이좋아지자멈추어섰던유럽통합의흐름도다시재기되었다. 이제는아예기능주의원리의중심을이루었던경제부문에서의협력이시장통합을향한구체적인안으로제시되었다. 노동과자본의자유이동은아직이른단계이지만상품과서비스의자유이동은반드시이루어야하는당면과제였다. 그리고그절정은 1987 년 유럽단일의정서 를통해구체화되었다. 유럽연합이서른살의나이가된때였다. 흔히말하는유럽연합의주요정책영역은세개의기둥으로묘사된다. 첫번째기둥은유럽시장협력부문이고, 두번째기둥은유럽안보협력부문이다. 그리고마지막세번째기둥은내무및사법분야협력부문이다. 이들기둥가운데유럽단일의정서를통해첫번째기둥에있어서는이미유럽연합의초국가적권한이작동하고있고, 두번째와세번째기둥은아직정치적민감성으로인해협상과정을거치고있다. 유럽연합은몇몇전쟁을겪기도했다. 어떤것은의심받는정의전이었고, 또어떤전쟁은수상의정치적생명을위협하는모험이었다. 이런전쟁들을거치면서흥미롭게도유럽연합회원국들은 전략문화 가서로닮아가는수렴현상을보여주었다. 여기서말하는 전략문화 란전쟁이라는무력사용을위해국내수준에서요구되는공식절차상의까다로움과여론의영향력등을의미한다. 이러한전략문화에있어서회원국들은상당한차이를보여왔다. 5) 로마조약에명기된노동의자유이동은이제사람의자유이동으로표기가바뀌었다. 그만큼교육과시민권의개념이중요한자리를차지하게된것이다. 교육은학위를공동으로인정하고어디서나교육받을자유를인정하고있다. 한편시민권은거주이전의자유뿐만아니라투표권, 일자리를구하는자유를인정하고있다. 국적이나인종에따른비차별을생명으로하고직급이나임금에있어서차별을받지않을권리를인정한다. 하지만시민권보장은아직까진현실과 5) 위의글,170 쪽. - 12-
소원하다. 오히려프랑스는이민의자유를제한하고더욱엄격한기준을적용하고있다. 다문화주의의성공으로평가받아온유럽인들의문화공존정책은꾸준히이어져온테러와인종및종교적갈등으로얼룩져있다. 공동사회정책을마련하기로합의하였음에도불구하고개별회원국들은여전히자유재량을지닌채정부간주의를따르고있다. 이모든불일치는유럽연합의국가성부족에서비롯된다. 6) 로마조약 50 주년기념행사에서채택된 베를린선언 만으로는유럽의가치를실현하기가어렵다. 좋은거버넌스, 법치그리고인권존중등의유럽적가치는또다른정치적의지를기다리고있다. 아니그이상의노력이필요한지도모른다. 제도적통합을외쳤던생시몽도말년에는기독교정신에입각한정신적통합이야말로진정한유럽통합을이루는길이라고역설하였다. 발칸지역을중심으로퍼져있는민족주의와이민에대한규제강화, 외국인에대한일방적적대감그리고외국자본의기업인수합병을반대하는경제민족주의와같은기존구조적폐해들이유럽통합이가속화하는데발목을잡는다. 7) 긴문명사적맥락에서보면, 유럽통합은하나의거대한문화적프로젝트로서의의미를지닌다. 유럽연합의문화정책은문화적유럽시민의양성을통해 유럽의유럽화 를지향한다. 이런점에서유럽통합은상상의공동체 (imagined community) 를만들어가는과정이라고볼수있다. 8) 유럽공간내에서의정체성과소속감은대중문화등을통해자발적으로생성되기도하지만국가와유럽연합사이의복합적상호작용에의해움직이는각종제도적노력에의해서영향을받는다. 유럽연합은새로운사회구성이요구되는 상상의공간 으로서의유럽을형성하는데있어가장큰영향력을행사하는행위자이다. 아래에서는유럽국가들사이에존재하는문화적갈등을해소하고, 상호교류 협력을촉진하기위한유럽연합의제도와정책을살펴보고자한다. 이는다름아닌유럽연합차원에서통합의심화와확대를위해수단적인차원에서추진되고있다고평가되는유럽의정체성을재발견하고재발명하기위한정책들이어떻게전개되고있 6) 위의글,172 쪽. 7) 위의글,173 쪽. 8) 김명섭 홍익표, 문화적프로젝트로서의유럽통합과독일의문화정책, 21 세기정치학회보제16 집 1호 (2006).172 쪽 - 13-
는가를규명하는것을의미한다. (2) 유럽통합과문화정책 1992 년체결된마스트리히트조약제2조에의하면, 유럽공동체는 조화롭고균형있는경제발전, 환경을고려한지속적이고안정적인성장, 높은수준의통합성을보이는경제업적, 높은고용수준과사회보호수준, 높은생활수준과삶의질, 그리고회원국간의경제 사회적결속과연대를증진함 을목적으로한다고명시하고있다. 9) 1992 년에제정되어 1993 년 11 월 1일에발효된마스트리히트조약은유럽공동체 (E.C.) 를유럽연합 (E.U.) 으로개편한중요한조약이면서, 유럽연합차원에서처음으로문화를공식적으로언급하고문화정책의기본방향을명시하고있는조약이기도하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의 128 조는유럽연합의문화통합정책의방향을다음과같이제시하고있다. 10) ㄱ. 공동체는국가적이고지역적인다양성을존중하며공동의문화유산을강조함으로써회원국의문화유산을꽃피우는데기여한다. ㄴ. 공동체는회원국사이의협력을권장하고, 필요하다면다음과같은분야에서회원국의활동을지원하고보완한다. - 유럽민족들의문화와역사의보급그리고그에대한지식의증대 - 유럽차원에서중요한문화유산의보존과보호 - 비상업적문화교류 - 방송분야를포함한예술과문화창작ㄷ. 공동체와회원국은제3국과문화분야관련국제기구그리고특히유럽평의회 (Council of Europe) 와의협력을권장한다. 9) 문진영, 유럽통합과정에서나타난사회적차원의발전과정에관한연구, 한국사회복지학 회, KoreanJournalofSocialWelfare Vol.21(1997),26 쪽. 10)htp:/europa.eu.int./en/comm/dg10/culture/art128._fr.html 참조 - 14-
4) 공동체는문화의다양성을존중하고장려하기위하여, 본조약 의다른조항들에근거한활동에서문화적측면을고려한다. 따라서유럽연합이제시하고있는문화통합정책의근간은각회원국의다양한문화를존중하고진흥시키면서유럽연합차원의문화적공감대를정립시켜나가는것이라고할수있다. 문화적다양성의존중은마스트리히트조약의제3 조에서도언급된바있다.( 공동체의활동은회원국의문화를꽃피우는데기여한다 ). 다문화주의 또는 다양성속의통일 이라는개념으로요약될수있는유럽연합의문화정책은문화전분야에서지원정책을표방한다. 위조약 92 조에서도 문화를촉진하고문화유산을보호하기위한지원은, 공동체내부에서의교역과경쟁조건을공동의이익을저해하는방향으로변질시키지않는범위에서이루어진다 라고명시하고있다. 마스트리히트조약발효이후집행위 commission européenne 가유럽의회와유럽연합이사회에제출한 < 문화를위한집행위원회의활동에관한보고서 > 11) (1994 년 7월 27 일자 ) 는다음과같이문화정책의방향을목표, 영역, 방식으로구체화하여설정하고있다. ㄱ. 문화정책의목표 - 국가적이고지역적인다양성을존중하며회원국의문화만개에기여하는동시에공동의문화유산을강조한다. - 현대의문화적창작을장려한다. - 회원국사이, 제3국그리고유관기구와의문화협력을권장한다. ㄴ. 문화정책의영역 - 유럽민족들의문화와역사를보급하고그에대한지식을증대한다. - 유럽차원에서중요한문화유산을보존하고보호한다. - 문화교류와예술과문학창작을지원한다. 11)<Commuication de la Commission au Parlementeuropéen etau Conseilde lúnion européenne>. 송기형, 유럽연합의문화정책, 유럽통합에대한학제간 ( 역사, 문화, 정치, 경제, 과학기술 ) 연구, 한국학술진흥재단기초학문육성지원연구결과보고서,118 쪽에서재인용. - 15-
- 국제문화협력을장려한다. ㄷ. 문화정책의방식 - 공동체는회원국사이의협력을권장하지만, 법과규정의일치를요구하지는않는다. 공동체의활동은보충성원칙을준수해야한다. - 공동체는모든정책의문화적차원을고려해야한다. - 문화를위한공동체활동의주요수단은재정지원과기술보조이다. 또한이보고서는문화유산, 책과도서, 예술창작을세가지우선과제로선정하고구체적인문화실험을위한정책들을제시했다. 이들은각각예술과문학창작의협력활동지원사업인 만화경 (1986-1998), 책과독서분야의지원사업인 아리안 (1997-2000), 문화유산보존분야지원사업인 라파엘 (1997-2000) 로서현시점에서이사업들은이미종료된프로젝트라고할수있다. 현재시행중인문화사업으로는제1차유럽연합문화촉진프로그램인 Culture2000 (200 0-2004) 과, 유럽시청각산업지원사업인 e-content (2001-2005) 등을꼽을수있다. 이와같이유럽연합은최근 10 년사이에유럽문화의다양성고취와문화유산의보호라는기치를내걸고막대한예산을들여다양한문화정책들을입안하고실험하고있다. 유럽통합과정에서문화의중요성을인식한것은사실유럽연합이탄생하기훨씬이전부터라고할수있다. 아래의도표는유럽연합의탄생이전부터현재까지체계적으로진행되어온유럽차원의문화정책화과정들을요약정리한것이다. 12) < 표 2> 유럽통합과정과문화의정책화 1973 코펜하겐각료이사회에서문화가 문화적정체성 의근간을이루는요소임을인정 12) 표는소도영 이호영 조헌영, 프랑스문화산업체계 ( 지식마당,2000),304 쪽을참조. 오정 숙, 프랑스사례를통해본유럽연합의문화통합정책, 비교문화연구 221-224 쪽. - 16-
1974 유럽의회가문화재와관련된공동체차원의정책필요성을가시화 유럽문화재의보존을위한결의안채택 1977 집행위원회가소규모문화사업을실시 1982 문화관련각료부처들의공식적인첫회담 1985 유럽문화도시 지정사업시작 로메 Lomé 협약에문화협력포함 1990 유럽문화의달 지정사업시작 1991 유럽영상산업발전을위한 MEDIA 프로그램 (1991-1995) 실시 TEU의제3조에 회원국들의문화번영에대한공헌 을명시 1992 128조는특별히문화에관한내용을담은조항 1995 바르셀로나회담-문화영역에서유럽-지중해협력관계의출발 1996 1997 공동체사업에문화영역을포함시키는데관련된첫번째보고서출간만화경프로젝트실시 MEDIA Ⅱ 프로젝트실시아리안프로젝트실시라파엘프로젝트실시 1998 유럽연합문화포럼개최 1999 2000 Culture 2000 프로젝트준비실험 Culture 2000 중점프로젝트채택을위해 55개의프로젝트지원 Culture 2000 프로젝트실시 Media Plus 프로젝트채택 다양성의통일 이라는원칙이민족이나국가라는경계를넘어서그다양성과이질성의정도가비교할수없을정도로큰유럽에도성공적으로적용될수있는지, 과연 다문화주의적통합 이라는이상이실현될수있는지다시한번문제를제기하지않을수없다. 각국가유지해온문화적전통, 다른회원국들과의이해관계, 국제관계속에서차지하고있는위상에따라개별회원국들이견지하는문화적입장은통합의표피속에서지속적인갈등과충돌을야기할수 - 17-
있기때문이다. 경제적으로유럽연합재정의 1/3 을부담하고있는독일은 1차,2차대전, 나치독일과동서독체제라는역사적경험을통해문화정체성의혼란과갈등을경험하였고, 이러한정신적부담을유럽공통의문화적전통에기대어극복하고자하는심리적측면이있다. 마스트리히트조약에근거해유럽연합은막대한예산을들여문화예술전분야에걸쳐문화사업을시행해왔고, 십여년사이에이미완료된사업도있고현재진행중인사업도다양하다. 그러나국내의연구는이들사업의성격을간략히언급하고소개하고있을뿐, 각문화사업의구체적인내용과이들이실제각나라의문화예술생산과보급에어떤긍정적인혹은부정적인영향을미쳤는지에대해별로관심을보이지않았다. 즉유럽연합의문화정책과문화사업을국가별, 장르별로현장연구를통해중간점검을해볼때가되었다는것이다. 기존의연구가유럽연합의문화정책소개차원에그치고있는점을보완해, 유럽통합과정에서문화가갖는다양한의미들을추적하고문화의정책화가빚어낸새로운문화정치 (culturalpolitics) 의현주소를지역적, 장르적특수성을살려분석해볼필요성이제기되는시점이다. 13) 유럽통합과관련된문화정책의사례로서독일을생각할수있다. 독일은독특한문화개념을가진국가로서문화정책의체계역시이를반영하고있다고평가된다. 역사적으로교양시민계층 (Bildungsbürgertum) 의제한된활동범위에서유래된고유한문화개념은 1차세계대전과바이마르민주주의, 제3개국등으로이어지는격변을거치면서보다광범위한내용을지닌것으로그의미가확대되었고이에따라문화와관련된정책도변화하였다. 이중에서도극단적인중앙통제체제하에서문화가대중조작의수단으로전락하고다원주의와자유로운문화활동이부정되었던제3제국시기의경험은전후에이에대한반성으로독일이문화권을기본법에명시하고교육과학문등을포함한고아의의문화분야에서문화수행주체의자유보장과문화진흥을위한국가의책임을핵심내용으로하는문화정책을실시하게하였다. 14) 물론문화에대한독일의특수한전통에서볼수있듯이독일의문화정책이 13) 위의글,222 쪽. 14) 김명섭 홍익표, 문화적프로젝트로서의유럽통합과독일의문화정책, 21 세기정치학회보제16 집 1호,180 쪽. - 18-
원래부터민주주의에입각한것은아니었다. 독일에서문화는18 세기말과 19 세기초에정치참여와경제실천에서소외되어사적영역이나반공적영역에서아름다운활동에만전념한교양신계층의제한된개념및활동범위에서유래한것이었고이는문화정책에도그대로반영되었다. 이에따라문화에대한협의적인개념에입각해다수가아닌소수의계층, 관객보다는전문예술가에초점을맞추고이를일반대중들에게보급하자는문화의민주화정책이실시되기도하였다. 그러나고급문화는대중적보급이한계가있으며, 다원적인문화욕구를단순한예술지원 (Kunstpflege) 을통해서만충족시키는것이어렵다는인식이확산되면서 1970 년대부터는많은사람들이실제로즐기고있는문화에초점을맞춘문화민주주의에입각한문화정책을추구하게되었다. 민주주의가독일의문화정책이기반하는일반적인원칙이라면 협력적문화연방주의 는독일의문화정책구조와매커니즘을틀지우는핵심개념이라할수있다. 다른서유럽국가들과는달리독일의문화정책은주정부와기초자치단체가수립과집행에있어독자적인권한을행사한다. 주정부는주차원에서문화기관과프로젝트의진흥을관장하는데비해연방정부는문화적대외정책과문화관련입법업무를관장하며, 각수준에서는 보충성원칙 에따라정책의조화로운운영을지향한다. 즉문화적전통과조화를위해연방은명확히정의되고한정적인권한만을소지하고, 주정부간에는 문화장관회의 를통해문화정책을조정하며, 주정부는분권화원칙에따라관련업무대부분을기초지방자치단체에이양하도록되어있다. 15) 유럽적차원에서전개되고있는문화정책의핵심은 다양성속의단일성 이라고할수있다. 공동의정체성에입각한연대의식을강화하기위해유럽연합차원에서제도화하는노력이행해지고있는문화정책은마스트리히트조약을거쳐문화 2000 프로그램, 문화협력을향한통로프로젝트, 유럽문화수도프로그램, 뉴미디어분야에서의문화정책등구체적인정책들을통해실현되고있다. 이러한정책의추진은문화적영역에서 유럽의유럽화 를통해유럽의시민을형성하려는것을뜻한다고할때유럽통합은새로운상상의공동체를만들어가는과정이라고도볼수있다. 유럽연합이추진하는여러정책들역시내재적한계를지니고있다. 즉유럽연합의정책들이횡적으로분산되다보니공동의목표 15) 위의글,181-182 쪽. - 19-
를실현하기위한집중적인노력의강도는자연히약할수밖에없으며, 유럽연 합차원과각국민국가차원의정책수행에서일어나는갈등을조정하고자도입 한보충성원칙역시경계가불명확한한계를노정하고있다. 16) 나. 독일과베트남의사회문화통합 (1) 통합의과정 독일과베트남의통합사례는무엇보다도자본주의와사회주의라는상이한사회경제체제의통합이자한체제로의일방적통합이다. 상이한사회경제체제의통합에서제기되는사회문화적측면은사회제도, 생활양식, 생활수준등의변화이다. 그리고두사례모두일방적통합이라는측면에서흡수당한체제의구성원들이이변화를강요받게된다. 이와아울러일방적통합에서는흡수당한체제의구지배층의처리문제가당연히발생하게된다. 사회제도라는측면에서독일의통일은서독제도의동독이식으로나타났다. 노동조합의경우동독지역으로의관할범위를확장하고, 동독지역의노조가여기에개별가입하는형태였으며, 상이한사회복지제도의통합은일정정도의경과기간이후서독식제도로변형되었다. 농업부문이지배적인베트남의경우핵심적인문제는남부농촌의집산화이다. 통일이후남베트남의사회주의전환에대해서일정정도의논란이있었던것으로보이기는하지만,1977 년이래남부의농촌지역의집산화가강력하게추진되었다. 그러나그과정은순조롭지못했다. 이는북부의촌락공동체적전통과소규모토지소유구조가상대적으로집산화에유리한구조였던반면, 식민지적착취가보다심했던남부의경우보다시장경제와깊은관련을맺으면서, 촌락공동체적전통으로부터단절되어있었기때문이다. 사회주의로의전환에따른행정적 이념적강압에도불구하고, 실제로남부의농촌집산화는더디게진행되었다. 따라서남베트남의사회주의전환은동독 16) 위의글,188-189 쪽. - 20-
의자본주의전환에비해매우느리게진행되었으며,1980 년을전후한베트남공산당의경제적실용주의의대두및 1980 년대중반도이모이정책의등장에따라그과정은역전되기도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독과남베트남구성원들은기존의사회체제와는다른생활양식에의적응을강요받았으며, 초기남베트남의경우이강요는물리적 이념적강제와함께했다. 다른한편동독의구성원에게독일연방가입은생활수준상승에대한기대를의미하는것이었다. 물론자본주의체제로의통합속에서고용문제를비롯한다양한문제가발생한것은분명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통합을전후한동독의경제상황 17) 을고려한다면독일연방가입은최소한생필품부족등당면한악순환으로부터의탈출을의미하는것이었다. 반면미국원조에기생한식민경제구조와베트남전쟁으로인한파괴를고려한다면, 베트남의경우생활수준의상승은장기적인과제일수밖에없었다. 아울러남부의사회주의전환과정에서발생한농업생산량의악화 18) 등의문제를고려한다면, 통합이후생활수준상승뿐아니라생활수준상승에대한기대조차도어려웠다. 독일과베트남과같은일방적통합에서는흡수당한체제의구지배층의처리문제가존재한다. 평화적인방식으로통일된독일의경우에도동독지배정당인사회주의통일당 (SED) 간부, 슈타지로불린국가안전부 (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 관련자, 공공기관종사자, 법조인, 외교관, 군장교, 경찰등의국가기구뿐아니라이데올로기적재생산과관련된지식인및교사의처리는통합사회가자리잡기위해불가피한것이었다. 전쟁의방식으로통일된베트남의경우구남베트남정권의정치인, 관료, 군인, 경찰, 법조인, 외교관, 교사등과함께자본가처리 19) 문제가당면과제였다. 일방적통합에서불가피했던이과정 17) 물론여타의사회주의국가와비교할때동독의경제수준이높았던것은사실이지만, 서독과는상당한격차를가지고있었으며, 기본적인생활필수품의부족이나품질수준의문제등사회주의계획경제에서일반적으로나타났던문제들을갖고있었다. 18)13.5 백만톤이던 1976 년베트남의식량생산량은 77 년과 78 년각각 12,6 백만톤,12.4 백만톤으로감소했다. 물론 70 년대후반의자연재해의요인이작용했던것은사실이지만, 주생산활동인농업의부진은 79 년의신경제정책채택의배경으로작용했다. 이수훈, 베트남발전노선에관한연구, 한국과국제정치 10(2)(1994),116-117 쪽. 19) 점령이후이른바 매판자본가 는재산몰수와함께숙청되었다. 아울러 1975 년 9월남부에서화폐개혁이이루어졌다. 이과정에서가족구성원의수에따라신화폐로의교환상 - 21-
은독일과베트남에서상이하게전개되었다. 독일의경우대부분위원회제도를통해서구지배층의처리가결정된반면, 베트남의경우에는사상개조수용소 (Traicaitao) 를비롯한개조학습과신경제지구로의이주라는방식으로구지배층처리문제를해결했다. 20) (2) 독일과베트남의사회문화통합비교 사회문화통합은사회제도의통합, 의식및생활양식의측면, 그리고생활수준격차의측면에서살펴볼수있다. 먼저, 사회제도는통합사회의사회경제체제와밀접하게관련된것이며, 대체로통합초기정치적 법적구속력을갖는제도의형성으로마무리된다. 문제는이제도의변경이구성원들의삶에지대한영향을행사하게된다는점이다. 그러나이로인한문제들은독일과베트남체제통합의상이성에의해다르게나타난다. 자본주의사회로전환된동독의경우무엇보다도심각한문제는실업이었다. 공공기관종사자의실업및신탁청을통한기업의사유화과정에서발생한실업등동독지역의실업은심각한상황이었다. 통합이전 1989 년까지평균 974 만명이던취업자수는 1994 년에는 630 만명으로감소했으며, 실업자수가가장많았던 1991 년의경우그수는동독노동인구의 1/3 에달하는 300 만명이상으로추정된다. 21) 통합 5년이지난 1995 년의경우실업자수는 200 만명을넘는수준으로감소했다. 그러나고용청에등록된공식실업자의수는 1990 년대초반과비슷한 100 만명수준을계속유지하고있다. 22) 이들실업자의생활은적극적고용정한이정해짐으로써재산의상한이결정될수밖에없었다. 20) 보트피플로알려진베트남의난민의탈출또한통일베트남의구지배층문제를해결하는한방안이기도했다. 21) 김영탁, 독일통일과동독재건과정 ( 서울 ; 한울,1997),353 쪽, 22) 김영탁은통일이후실직한 360 만명의분포가실업 110 만명, 조기퇴직 50 만명, 적극적고용정책으로고용된자 70 만명, 서독이주및통근노동자 100 만명, 기타신규고용및완전은퇴 30 만명으로되어있다고추정한다. 위의글,356 쪽. 여기에서보듯통일이후동독지역에서발생한실업이전직이나신규고용을통해동독지역내에서해소된비율은지극히낮다. - 22-
책, 실업수당과실업보조금등사회정책에의존할수밖에없었다. 사회주의로전환된남베트남에서두드러진사회제도의변화는공업및상업의국유화, 그리고농촌의집산화였다. 이러한자본주의에서사회주의로의전환은시장의강제였던동독과는달리, 상당한물리적, 이데올로기적강제를통해이루어졌다. 자본가계급의숙청, 개조학습과신경제지구로의이주, 강제적농촌집산화등이바로그것이다. 사상개조학습은일상생활의차원과특별프로그램인강제수용소로나누어볼수있다. 여기에서일상생활차원의사상교육은여타의사회주의국가와마찬가지로공산당산하의조직에의한진행되었으며, 강제수용소는주로남베트남정권의지배층과협력자를대상으로한것이었다. 이프로그램은군하사관과사병, 하위직정보원과경찰, 하급공무원, 국영회사및공공병원과학교종업원등을대상으로한 3일간의단기과정과구정권고위직, 군대및경찰간부, 선출직관리, 판사와고위관료, 정당인, 전문가, 종교지도자와교육자등을대상으로한특별교육과정으로나누어시행되었다. 단기과정의경우대체로정해진학습기간이후풀려났지만, 남베트남구지배층과물리적 이데올로기국가기구종사자를대상으로한특별교육과정 23) 의경우정해진기간없이강제수용소에서정치학습과자아비판을주로한재교육과육체노동에종사했으며, 강제수용소로부터석방된경우에도시민권을곧바로회복하지못했으며, 특별감시의대상이되었다. 이러한개조학습은전쟁을통한통일이라는점에서일정정도불가피한측면이존재한다. 그러나강제수용소수용자는수용기간은말할것도없고, 석방이후에도사회공동체로부터제외됨으로써사회불만층의강화와더불어, 새로운사회주의정권에대한남베트남구성원의불신을증폭시키는결과를가져왔다. 24) 베트남이추진한신경제지구는기본적으로전쟁기간동안황폐화된농촌에서유입된도시의잉여노동력을집단이주시켜사회주의적집산농장을건설하게하고, 그과정을정부가지원하는프로그램이다. 이점에서본다면신경제지구프로그램또한최소한남베트남구성원들의사회통합에부정적인영향을미친것으로판단된다. 농촌의사회주의적개조또한남베트남의상황에서순조롭 23) 전국의강제수용소에구금된인원은적게는 10 만명에서많게는 40 만명정도로추정된다 (Piere,2000; 조재현,2002:110; 서병철 전경수,1995:175). 24) 조재현, 베트남의남 북통합 : 그한계와방향, 통일연구 6(1)(2002),112 쪽. - 23-
게진행되지못했다. 이러한상황에서사회주의화의목표는당연히강제를수반하는것이었고, 이또한사회문화통합뿐아니라경제적측면에부정적인영향을미칠수밖에없었다. 이처럼형식적사회제도의통합은그구성원에게상당한영향을미치는것이었고, 독일이나베트남의경우처럼통합과정이급속하게진전된경우그영향은더욱클수밖에없었다. 다른한편의식및생활양식의차이는형식적통합이후에도상당한기간동안지속될수밖에없다. 특히나다른사회경제체제사이의통합에서이문제는보다심각하다. 의식및생활양식의측면에서자본주의와사회주의체제의구성원리의차이와그와관련된사회화과정의차이로인해각체제구성원의삶의세계는차이를갖게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개인은경제적인측면에서는개인주의적시장인간으로, 정치적측면에서는자유민주적시민으로존재한다. 반면사회주의체제에서구성원은공동체적연결망속의인간이자, 복지관료적신민으로존재한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일반적으로개인주의적가치가사회주의사회에서는집단주의적가치가우선시되며, 자유민주주의체제하에서개인은정치적으로동등한권리를가진시민인반면, 대체로한정당에의한권력독점상황의사회주의에서구성원은국가에대해자유민주주의체제와는다른의무와권리를갖고있다. 25) 상이한사회경제체제의사회문화통합은바로이러한상이한의식및생활양식, 즉 삶의세계 의통합과정이라할수있다. 삶의세계 의통합에서서독식, 북베트남식삶의세계로의통합이일방적으로강요되었다는점에서독일과베트남의일방적통합은동일하지만, 통일의방식이나통합이후의사회경제체제의차이로인해그구체적인양상은다르게나타난다. 평화적인방식으로, 그리고동독구성원의자본주의수용으로진행된동서독통일의경우에도의식이나생활양식의변화와관련된혼란은상당한것으로보인다. 26) 동독지역의청소년세대의경우상이한사회문화의통합이얼마나어려 25) 물론남베트남의경우자본주의경제체제를채택했던것은분명하나, 정치적측면에서통합이전남베트남체제를자유민주주의체제라고하기는어렵다. 26) 통일이후동독구성원의혼란은인구통계측면에서도나타난다.1989 년에서 1992 년까지동독의출생율은 60%, 결혼율은 65%, 이혼율은 81% 감소했다. 이러한인구측면의급변은통일이동독구성원의삶의양식에얼마만큼의혼란을가져왔는지를보여주는지표이 - 24-
운것인가를잘보여준다. 그에따르면 1980 년대의젊은세대는서독대중매체의수용과더불어동족의문화개방과함께성장한세대 라는점에서동독의기성세대와는차이를갖고있다. 이러한세대적특성에서본다면동독지역의청소년세대는상대적으로약한사회주의적사회화과정을거친것으로볼수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들에대한그의연구는동독청소년이 개인주의적생활양식의급속한확산과업적과경쟁으로상징되는자본주의사회에대한적응 과정에서가치관과삶의양식의혼란이불가피함을보여주고있다. 청소년의상황이이러하다면, 상대적으로강한사회주의적사회화과정을거친기성세대의적응문제는보다심각할수밖에없다. 27) 남베트남의경우사회주의로의전환은상당한물리적 이데올로기적강제를수반하는것이었으며, 이과정에서남베트남구성원의적응문제는이른바 보트피플 로상징된다.1977 년에서 1982 년까지베트남에서탈출한난민은 70 만명을넘는규모였으며, 특히 78 년과 79 년에가장많은수의난민이발생했다. 이러한난민의규모, 그리고시기적변화등을고려한다면남베트남의사회주의화가상당한강제를수반하는것이었음을알수있다. 이와아울러남베트남구성원의적응문제는앞서언급한것처럼남베트남농촌집산화의진전속도에서도나타난다. 이처럼남베트남의사회주의로의전환에서남베트남구성원의생활양식변화는강제에도불구하고쉽사리이루어지지못했으며, 이는한편으로는사회문화통합에다른한편으로는경제생산에부정적인영향을미치게되었다. 이는이후도이모이로의정책전환을추동하는한요인이되었다. 마지막으로생활수준의격차라는문제를살펴볼수있다. 동서독통합은경제력우위체제로의통합인반면, 베트남통합은상대적으로경제력열위체제로의통합이었다. 여기에서동독의경우상대적으로경제력수준이높은서독으로통합됨으로써, 생활수준상승의가능성을갖게된다. 물론급속한체제전환 다. 27) 이영란, 통일이후동독대학생의가치관변화, 경제와사회 63 호,(2004). 이를보여주는간접적인지표는동독을연상시키는민주사회당에대한지지정도의차이이다.2002 년연방선거에서동독통일사회당의후신인민주사회당은동독지역에서 17.3% 의득표율을보여주었는데, 연령이높을수록민주사회당에대한지지정도가높은것으로나타났다. 이영란, 통일이후동독지역주민의상대적박탈감, 한국사회학 39(1) 호,(2005). - 25-
과정에서앞서언급한것처럼실업을비롯한생존의문제가심각하게제기된것은사실이며, 서독의생활수준과의상대적격차또한상당하다. 이러한문제는동독구성원들이스스로를독일인이라기보다는동독인으로정체화 28) 하거나, 이른바오스탈지아 (Ostalgia) 로표현되는동독시절에대한향수로나타나기도하며, 정치적으로는사회주의통일당의후신인민주사회당에대한지지로나타나기도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서독사이의임금수준격차는점차줄어들고있으며, 동독구성원의일반적생활만족도는꾸준히상승하는경향을보여준다. 이점에서본다면동서독통일의경우동독구성원의생활수준의현실적상승또는최소한상승가능성이라는동의기제가존재하는것으로볼수있다. 사회제도의통합, 의식및생활양식의측면, 생활수준의변화등과아울러특히베트남의경우다종족사회라는특성, 그리고베트남애국주의가사회문화통합에미치는영향또한고려할필요가있다. 독일과는달리베트남사회는다종족사회라는특징을갖고있다. 물론킨 (Kinh) 족이 87% 로인구의대다수를차지하지만, 킨족이외의소수종족의수는 50 여개를넘는다. 이러한인종적다양성외에도베트남사회는지역적으로상이한문화권으로나누어볼수있다. 트란낙뎀은베트남의문화권을서북문화지역, 북베트남문화지역, 북부평야문화지역, 중부해양문화, 서부고원지역, 남부문화지역으로분류하고있다.1,650 킬로미터에달하는남북으로긴국토의영향이라고할수있는데, 역사적으로도현재와같은통일베트남의형성은경족이남부를점령한 300 여년전으로거슬러올라갈뿐이다. 따라서북베트남의점령과사회주의화는역사적, 문화적맥락에서남부에대한북베트남의지배를의미하는것일수있으며, 이점에서볼때남베트남통합의어려움이존재한다. 반면베트남의통일은식민지배에대한민족해방투쟁의결과이며, 여기에서베트남애국주의는사회문화통합에서중요한이데올로기적기능을수행할수가능성을갖고있다. 물론민족해방전쟁시기및통일초기에비해통합 30 년을지난지금의상황에서베트남애국주의의역할은제한적일수밖에없다. 28)1996 년의여론조사에의하면동독구성원의 16% 만이자신을통일독일국민으로생각하 고있으며,80% 의동독구성원은스스로를 2 등국민으로느끼고있다 (Thumfart,APuZ 30-40/2001,S.9. 프롭스트,2003:87-88 에서재인용 ). - 26-
(3) 독일과베트남 : 사회문화통합의전망 독일통일과베트남통일의사례는상이한체제사이의일방적통합이었다. 이과정에서동독및북베트남구성원의 삶의세계 의혼란은불가피했다. 문제는이혼란을관리하면서사회문화통합이어떻게진전될수있는가라는것이다. 독일의경우사회문화통합은무엇보다도동독구성원이 이등국민 이라는인식을어느정도극복할수있는가의문제라고할수있다. 이 이등국민 이라는정체감은두측면에서살펴볼수있다. 먼저생활수준과관련된측면이다. 서독지역에비해상대적으로높은실업률등의문제에도불구하고, 동독지역의경제상황은과거에비해향상되고있으며, 동서독사이의격차또한줄어들고있다. 순가계소득이나가처분소득으로볼때동독지역의평균은이미서독지역의각각 80%,85% 의수준에달하고있다. 앞서언급한동독구성원의생활만족도의증가는이를반영하는것이라고할수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여전히지속되고있는동서독사이의격차라는문제, 그리고생활수준의향상을향유하기위해서는자본주의체제에의적응이필요하다는문제등이존재한다. 다음으로동독구성원의상대적박탈감이라는측면이다. 이상대적박탈감은동독구성원이스스로를독일인으로정체화하지못하는가장중요한요인으로작용한다. 동독구성원에대한인터뷰에기반한이영란 (2005) 의연구는동독구성원의상대적박탈감이경제적측면에서노동에대한의미의변화, 소비자본주의에대한적응의문제, 사회적측면에서사회적불평등과자신의과거에대한평가절하, 문화적측면에서공동체문화의와해와사회적관계의상실이라는요인에기인하는것임을보여준다. 즉자본주의체제로의전환에서, 동독시절의가치관, 생활양식의변화가강요되었을뿐아니라그것이부정적으로평가되는상황이동독구성원의상대적박탈감의근거인것이다. 이러한상대적박탈감은일방적통합에따른불가피한결과이며, 이점에서이상대적박탈감의해소는쉽지않은과제이다. 베트남의경우문제는사회주의경제개혁에얼마나성공할수있는가라는측면에서사회문화통합을전망할수있다. 물론의식이나생활양식의차이또 - 27-
한사회문화통합에중요한요인이다. 그러나도이모이정책의추진에따라통일초기의일방적통합과는다른생활양식이남북양쪽에요구되고있다는점, 베트남통일이이미 30 년의역사를갖고있다는점, 인구구성에서전쟁이후출생자가더많다는점을고려한다면의식이나생활양식의차이는독일만큼심각한요인이아닌것으로판단된다. 아울러다인종사회라는특성또한문화적차이라는요인의중요성을감소시키고있다. 따라서베트남의경우사회주의경제개혁의문제가보다중요하다고할수있는데, 여기에는개혁을통한전반적인생활수준의상승뿐아니라북부에비해남부의경제적성장속도가빠르다는점을고려해야한다. 앞서언급한것처럼,1970 년대말의정책변화, 그리고 1980 년대중반도이모이의공식적추진속에서남부의경제력과북부의권력사이의평형추가형성된것으로판단된다. 아울러도이모이추진이후식량생산을비롯한베트남의경제사정은호전되고있으며, 이에따라베트남구성원의생활수준은상승하고있다. 이점에서본다면사회주의경제개혁은사회문화통합에유리한요인으로작용하고있다. 문제는이러한과정이얼마나지속될수있는가라는것이다. 한편으로사회주의경제의유연화는사회주의정치체제에대한문제제기를가져올가능성을가지고있으며, 다른한편으로는남부와북부라는지역간격차의확대및계층간격차의확대가능성을가진것이기때문이다. 다. 독일의사회문화교류사업의특성의시사점 독일사례에서중점적으로분석될주요내용은다음과같다. 29) 29) 동서독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의전반적실태에관하여는 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n Beziehungen, Die Entwicklung der Beziehungen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der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Berichtund Dokumentation (Bonn,1973);Bundesministerium fürinnerdeutschen Beziehungen,Zehn Jahre Deutschlandpolitik. Die Entwicklung der Beziehungen zwisch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d der Deutschen Demokratischen Republik 1969-1979: Bericht und Dokumentation (Bonn, 1980); Ernst Martin, Zwischenbilanz. Deutschlandpolitikder80erJahre(Stutgart,1986);Joachim Nawrocki,DieBeziehungen - 28-
첫째, 서독과동독의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에대한입장이다. 서독과동독은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에대하여기본적으로어떠한입장을가졌으며, 정책의추진은어떠하였는가, 신동방정책의구도아래서독은대동독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에대하여어떻게입장을재정립하였으며, 정책에는어떠한변화가있었는가, 이에대한동독의대응입장과정책은어떻게정립되었는가등을분석한다. 둘째, 서독의대동독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관련협정이다. 서독의대동독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은동독과맺은관련협정에의해크게영향을받았는바, 신동방정책추진이후서독이동독과체결한 우편협정 (1970), 베를린협정 (1971), 통행협정 (1972), 기본조약 (1972), 체육 보건협정 (1974), 문화협정 (1986), 과학 기술협정 (1987), 방송협정 (1987) 등과관련하여각협정체결시서독과동독의입장, 협정의내용, 협정이동서독교류 협력에미친영향등을분석한다. 셋째, 동서독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현황이다. 동서독이추진했던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의현황을신동방정책추진전후의특징을중심으로분야별로구분하여살펴본다. 넷째, 동서독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에대한평가와시사점이다. 신동방정책아래동서독이추진하였던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이전반적인교류 협력, 동서독간전반적관계, 통일대비등에미친공과를평가하고, 우리에게주는시사점을도출한다. 한편이글에서는동서독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을문화 학술, 청소년, 언론 방송, 체육, 종교등을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그이유는이글의의도가동서독간교류 협력을분석, 남북한간에창조적으로응용될수있는시사점을도출하는데있음을고려하여현재남북한관계에서규정되고있는사회 문화분야의개념에충실하고자하기위함이다. 남북한관계의전반을규율하고교류 협력 zwischen den beiden Staaten in Deutschland. Entwicklungen, Möglichkeiten und Grenzen(Berlin,1988); 통일원, 10 년간의독일정책 :1969-1979 년간동서독관계발전중심 ( 서울 : 통일원,1992); 통일원, 동서독관계발전에관한보고및문서 ( 서울 : 통일원,1992); 통일원, 동서독교류협력사례집 ( 서울 : 통일원,1993); 민족통일연구원, 통일독일의분야별실태연구 ( 서울 : 민족통일연구원,1992) 등을주로참고하였다. - 29-
의바탕이될수있는 남북기본합의서 가운데사회 문화분야의교류 협력에관한내용을담고있는제16 조는 남과북은과학, 기술, 교육, 문화 예술, 보건, 체육, 환경과신문, 라디오, 텔레비젼및출판물을비롯한출판 보도등여러분야에서교류와협력을실시한다 라고규정하고있다. 30) 한편 남북기본합의서 에서약속한내용들을보다구체화하고이를실천해나가기위해남북교류 협력분과위원회가채택한 남북교류협력부속합의서 제9조는 남북기본합의서 제 16 조에포함되었던 과학 기술 과 환경 이그성격상경제분야에포함되므로남북교류 협력부속합의서제1장 경제교류 협력 부분으로이관시켰다. 따라서이글에서도과학 기술과환경부문은제외하기로한다. 다만 기본합의서 제 16 조가사회 문화분야의여러부문을예시적으로나열한것임을고려하고, 동서독간에중요한사회 문화분야의교류 협력의하나로추진되었으며, 현재남북한관계에서도중요성이큰 종교 부문을여기에추가하여함께다루었다. 31) 이글에서사용하는 교류 협력 의개념은동서독주민과남북한주민간의접촉, 왕래, 협력사업등을포괄하는개념이다. 접촉은쌍방간에특정내용의의사가교환되는것을, 왕래는상대방의지역을방문하는것을, 협력사업은해당분야에서상대방지역이나제3국에서당사자간의합의에따라공동으로행하는일련의연속성이있는행위를말한다. 32) 30) 통일원, 통일백서 1997 ( 서울 : 통일원,1997),385 쪽. 31) 사회문화공동위수첩 ( 서울 : 남북회담사무국,1995) 은사회 문화분야의남북교류추진사례를열거하면서주요분야로출판 보도, 학술, 예술, 종교, 체육분야를, 사회문화분야남북교류협력실무안내 ( 서울 : 통일원,1996) 도사회 문화분야로학술, 문화 예술, 종교, 체육, 언론 출판분야를열거하면서종교부문을포함하고있다. 32)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2 조및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처리에관한규정 참조. - 30-
< 표 3> 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관련법적개념규정 남북기본 합의서 ( 91.12.31) 남북교류협력 부속합의서 ( 92.9.17) 제 16 조 : 남과북은과학 기술, 교육, 문화 예술, 보건, 체육, 환경과신문, 라디오, 텔레비젼및출판물을비롯한출판 보도등여러분야에서교류와협력을실시한다 제 9 조 : 남과북은교육, 문화 예술, 보건, 체육과신문, 라디오, 텔레비젼및출판물을비롯한출판 보도등여러분야에서교류와협력을실시한다. 제3조 : 이규정에서 사회 문화분야협력사업 이라남북사회함은남한과북한의주민이합의또는계약에의하여문화협력사업처리에공동으로행하는문화, 체육, 학술등에관한제반활동으로서민족의동질성회복과사회 문화공동체형성관한규정을위해남한, 북한또는제3국에서다음각호의 1에 ( 98.5.12) 해당하는사항을기획 실시및사후처리하는일련의행위를말한다.* 주 : 개정전 남북사회 문화협력사업처리에관한규정 은제3조에서 이규정에 서 사회 문화분야협력사업 이라함은법제 2 조제 4 호의 협력사업 중남한과북 한의주민이공동으로행하는교육, 문화, 예술, 보건, 체육, 출판, 보도등에관 한제반비영리적활동으로서민족의동질성회복과사회 문화공동체형성을 위해상대방지역이나제 3 국에서당사자간의합의및계약에따르는계획, 준 비 실시및사후처리등의계속성을지니는다음각호의 1 에해당하는행위를 하는것을말한다 고규정되어 1 사회 문화교류 협력의분야를구체적이고폭 넓게정의하였으며,2 협력사업을비영리적활동에국한하였다. (1) 문화분야 동서독사이의문화교류는 1961 년 8월 13 일베를린장벽의설치와더불어거의단절상태에이르게되었다. 동독은국가적차원에서의대서독문화교류차단정책을 1950 년대부터시작하였는데이는서독주민과분단이전공통의문화와문화의식을가졌던동독주민이교류를통해서독측의영향을받을것을우려하였기때문이다. 서독문화의침투가사회주의체제를유지 고수하는데크게역작용을할것이라고판단하였던것이다. 동독측의주요제한수단은문화인들의 - 31-
출 입국허가였다. 서독의경우국가적차원에서의대동독문화교류제한정책은취해지지않았지만, 냉전기간동안동독으로부터의바람직스럽지못한문화유입에대해서조심스런자세를취했다. 예를들어 1960 년대서독출판사에의한동독작가작품의서독출간은공개적인논란을불러일으켰다. 1970 년대에접어들면서동독의대서독문화교류차단정책에는이데올로기적인이유가추가되었다. 동독은서독이주장하는 공동의민족문화 를거부하고, 서독의문화를 제국주의적문화 로비난하면서자국의이른바 사회주의적민족문화 와의차별성을강조하였다. 동독공산당 (SED) 의견해에따르면동서독문화는전혀공통성이없으며, 독일전통문화유산중동독측에의해승계될가치가있는 진정한문화적, 인간적인독일전통 만이동독의문화라고하였다. 동독은서독과의문화교류를외국과의문화교류로간주했으며, 이러한문화교류는사회주의적동맹체제의결속을강화하고적극적으로제국주의와의이념투쟁에이바지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유럽안보협력회의 (CSCE) 의 - 1995 년 1월 1일부터유럽안보협력기구 (OSCE) 로개칭 - 헬싱키최종의정서 (1975) 에규정된서명국들간의문화교류이행과관련하여동독은서독과의문화교류불이행을비난받곤하였으나, 동독은국가적차원에서서독과문화협정이체결되지않은것을구실삼아변명하였다. 동독문화정책의전략적목표는동독공산당제9차당대회의결정에서나타나는데그것은ㄱ. 문화정책의객관적원칙인정치 경제 문화의단일한사고방식형성, ㄴ. 문화정책을통해동독이라는발전된사회주의국가의형성, ㄷ. 공산주의에로의점진적이행을위한원칙적인전제조건의조성, ㄹ. 소련과기타사회주의국가와친선 협력의지속적강화, ㅁ. 사회주의와제국주의간의격렬한계급투쟁의필요성강화등이었다. 33) 반면서독은동서독간에존재하는인위적인국경을초월하는 하나의문화민족 (einekulturnation) 개념으로부터양독간의문화교류를추진하고자하였다.1973 년 1월 18 일브란트수상은 분단에도불구하고언어, 예술, 문화, 일상생활과정신문화유산의공통성에기초한민족은영원하다 라고언급하였으며, 33) Klaus-Eberhard Murawski, Die Kulturbeziehungen zwischen der BRD und DDR, Erika Lieser-Triebnigg (ed.),kulturim geteileten Deutschland (Berlin,1984),45-58 쪽 참조. - 32-
서독정부의독일정책은이러한전제에기초하였다.1982 년 10 월 13 일헬무트콜 (HelmutKohl) 수상이 독일인의민족국가는분열되었지만독일민족은계속유지되어왔으며, 앞으로도지속될것이다 라고밝힌것도이러한연장선상에놓인것이다. 이러한견해차이로동서독은 기본조약 제 7조와이에관한추가의정서 7항 (< 표 4> 참조 ) 에서문화적인협력관계를증진시키기로합의하였음에도불구하고문화분야교류 협력의활성화를위한협상은진척을보지못하였다. 기본조약 의후속협상으로 1973 년 11 월 27 일개시된문화협상은 13 년이지난 1986 년 5 월 6일에야비로소결실을보았다. 문화협정 (< 표 5> 참조 ) 의체결이다른분야후속협정체결에비하여늦어졌던이유는동독이서독문화의침투가사회주의체제를유지하는데크게역작용을할것이라고판단하였기때문이다. 동서독간에체결된협정을일별해보면이러한동독지도부의의도를잘알수있다. 가장자기체제에부담이적고유익한경제교류를 1948 년부터시작한이래우편 (1970 년 ), 통행 (1972), 체육 보건 (1974) 을거쳐 1986 년에야문화교류를국가적차원에서합의하였다. 이러한상황속에서도서독이동독과 문화협정 을추진한것은그것이독일정책추진의주요한수단으로서양독주민간의문화적공통성을유지 보존시키고, 문화적측면에서주민생활의질을향상시키고자하기위함이었다. 문화협정 을통해문화분야공동협력을계기로상대편체제의사회 문화생활에대한상호이해를증진시켜서로다른군사동맹체제에소속되어있고, 상이한정치 경제적인구조하에서살고있더라도양독주민간에평화적인관계를유지시키자는것이다. 34) 서독이주장하는문화의공통성을부인하며사회주의문화의독창성을내세웠던동독이 문화협정 을체결했던주요동기는세계적문화수준을가진서독과의협정체결을통해국제적으로동독의문화수준을과시하고문화수준면에서서독과대등한관계임을알리려는데있었다. 다른한편으로동독내에서문화분야종사자, 이른바 문화창조일꾼 들이외부세계, 특히같은언어권인서독과의 34) 이장희, 통독정책으로서동서독간문화협정, 국제법학회논총,33 권 2 호 (1988),91-98 쪽 ; 최정호, 분단국의통일과문화예술및문화예술인의통합에관한연구 ( 서울 : 한국문 화예술진흥원,1991) 참조. - 33-
접촉제한으로고립감과정신적인소외감이증대되어이들의불만이체제유지에역기능으로작용할우려가있어, 문화협정 을통한서독과의문화교류증대를이를해소시켜주는배출기능 (Ventilfunktion) 으로활용하고자하였다. 다양성과자유분방함을속성으로하는문화의본질상, 중앙집권적인통제사회하의동독문화수준과자유민주주의체제하의서독문화수준간의격차는시간이흐를수록더욱벌어질수밖에없었고, 이에동독은문화인들의불만을서독과국가적차원에서의제한적인접촉허용으로해소하려하였다. 즉동독은 문화협정 체결시문화행사개최와관련하여국가가주관하는공식적인접촉에한정하려했던반면에, 서독은문화활동을전적으로개인적인소관으로주장하여누구나접촉할수있도록하자는입장이었다. 상호문화행사개최회수도서독은많을수록좋다는입장이었으나, 동독은일정한회수의접촉만을원하였다. 신동방정책의산물인 기본조약 부터 문화협정 체결이전까지동서독간에제한적으로이루어졌던문화교류를요약하면다음과같다. 연극과오케스트라방문공연은양독간문화교류중가장활발했던분야였다. 기본조약 체결이후 1973 년부터점차늘기시작한상호방문공연은주로동독에의한서독지역에서의공연형태로이루어졌다. 동독은서독에서의문화행사개최를정치적인선전의일환으로간주하여그내용의대부분은국제적이면서도정치적인성격을가졌다. 반면서독의동독지역공연의성사는동독의기관으로부터출 입국허가를획득하는여부에달려있었다. 따라서교류에있어서상호성의원칙은무시되었다. 특히서독의유명한극단, 오케스트라, 발레단의공연은매우제한을당해베를린필하모니는불과두번 (1978,1981) 밖에동독을방문할수없었다. 그외 1975 년에처음으로동독조형미술협회의작품이함부르크에전시되었으며,1977 년에역시처음으로동서독출판사간의협력이이루어져독일예술및문화유적안내에관한책자가동독에서저술 인쇄 판매되는동시에서독에서도출판사를통해판매되었다. 또한이해에처음으로 7명의동독미술가가서독을방문하였고, 동베를린에서는서독의 과학과기술에관한사진전 이최초의공식적인전시회로개최되었다.1980 년에는양독도시간에 영화주간 이개최되었다. 35) 35)ManfredJäger,KulturundPolitikin derddr (Köln,1982);GesamtdeutschesInstitut (ed.), Merkblat 21: Ausfuhr von Kunstwerken, Dokumenten und Antiquitäten - 34-
< 표 4> 사회 문화분야교류 협력관련동서독 기본조약 (1972.12.21) 및추가의정서 기본조약전문 : 조약국은평화유지에대한그들의책임에유념하고, 유럽에서의긴장완화와안정보장에기여하려는노력에서현유럽의국경내의모든국가에대한불가침, 영토보전, 그리고주권존중이평화를위한기본조건임을인식하며, 따라서양독일국가는그들의상호기관에서무력행사나위협을억제해야함을인정하고, 역사적사실에기초해서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간의민족문제를포함한근본적인문제에있어서그들의견해차에도불구하고, 양독일국가국민의복지를위해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이상호협력할수있는여건을조성할것을희망하면서다음과같이합의하였다. 제7조 :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그들의관계를정상화하는과정에서실제적이고인도적문제를논의할용의가있음을선언한다. 쌍방은본조약의원칙에입각해서상호이익을위하여경제, 학술, 기술, 교통, 사법, 우편, 전신업무, 보건, 문화, 스포츠, 환경보호등의분야의협력을발전시키고촉진시키기위해협정을체결할것이다. 세부사항은추가의정서에규정한다. 추가의정서 Ⅱ. 제7조에대하여 1. 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간의교역은기존협정의원칙에입각하여전개된다.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경제관계의계속적인발전을촉진하며지금까지의규제를조정하고교역구조를개선하는것을목적으로하는장기적협정을체결한다. 2.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경제와기술분야에서쌍방의이익을위하여협력을촉진하고이에요구되는조약을체결할의사가있음을표명한다. 3.1972 년 5월 26 일자의조약과더불어시작된교통분야에서의협력은확대, 강화된다. 4.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법적구조를필요로하는사람들의 ("Kulturgut")ausderDDR (Bonn,1989) 참조. - 35-
이익을위하여특히민법과형법분야의법률공조관계를가능한한간소하게그리고합리적으로조약상규제할의사가있음을표명한다. 5.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만국우편연맹및국제전신조약의원칙에입각하여우편및전신협정을체결하기로합의한다. 쌍방은동협정을만국우편연맹 (UPU) 과국제통신연맹 (UIT) 에통고한다. 동협정에는현존의합의사항과쌍방에게유리한절차가포함된다. 6.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보건분야에서협조할것에대한관심을표명한다. 쌍방은조약에의거하여허용된범위내에서의약품과특수병원및진료소의치료방법의교류에대해서도규제할것에합의한다. 7.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문화분야에서의협조를발전시킬의사를표명한다. 이목적을위해쌍방은정부간의협정체결에관한협상을시작한다. 8.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이조약이서명된후체육관계를증진하기위한협정을통해체육관계기관을지원할의사가있음을강조한다. 9. 환경보호분야에서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상호간의손해와위험을방지하기위해협정을체결해야한다. 10.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서적, 잡지, 라디오및텔레비젼제작물의상호간구입을확대할목적으로협상을진행한다. 11. 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은당사자의편의를위해비상업성지불및청산거래를규제하기위한협상을시작한다. 쌍방은상호간의이익을위해사회적관심에서최단기간내에협정을체결할것을우선적으로고려한다. - 36-
< 표 5> 동서독 문화협정 (1986.5.6) 독일연방공화국정부와독일민주공화국정부는, - 1972 년 12 월 21 일에체결된독일연방공화국과독일민주공화국사이의관계에관한조약의토대위에서, - 상호간에문화적 사회적생활에관한인식을심화시키고보다나은상호이해에기여한다는목적을갖고, - 그럼으로써평화정착과긴장완화에기여한다는인식속에서, - 유럽안보협력회의에서합의된규정들을마드리드에서합의된사항들과관련시켜, 적절하게고려함으로써실행한다는결심하에, - 문화협력을증진시키고발전시키려는희망에따라이협정을체결하기로합의를보았다. 제 1 조협정당사국들은그들의가능한테두리내에서양측의이해에기초하여문화, 예술, 교양, 학문분야에서의협력이나이것들과연관된다른분야에서의협력을촉진시킨다. 협력이해당기관이나관청, 단체들사이에서, 또한 ( 이협력이그때그때마다자국의법질서에상응하고조약의실현을위한것과관계되며 ) 각조직체들, 연합체들및문화분야에서활동하는사람들사이에서이루어진다. 협력은그때그때마다자국의법률규정과조화시켜서, 또한쌍방이나여러측면의법률규정과조화시켜서, 특히이협정에서거론된협정당사국들의의무에관한전문 ( 前文 ) 에서완성된다. 협정당사국들은이러한테두리내에서협정을실현시키기위해요구되는전제조건들을승인한다. 제 2 조협정당사국들은학교교육, 직업교육, 성인교육및고등교육, 전문교육등을포함한교육분야나, 학문분야에서의협력을촉진시키고다음의내용을장려한다. 1. 경험의교환, 학문상정보, 회의나회담에의참여를목적으로하는학자들및전문가들로구성된대표단을파견한다. 2. 강연, 연구및학업을목적으로체류하려는학자들을교환한다. 3. 학생들의교환, 특히대학원생들이나학업을목적으로체류하려는젊은학자들을교환한다. 4. 전문문헌, 강의자료, 전시자료및교수도구등을교환한다. 제 2 호및제 3 호에서제기된활동들의실천을위해서는장학금이지급될 - 37-
수있다. 제 3 조협정당사국들은조형미술, 연극, 영화, 음악, 문학, 언어발달, 박물학및기념물보호등의분야나이와인접한분야에서의협력을촉진시키고다음의내용들을장려한다. 1. 문화, 예술등상이한영역에있어서여러동기에따라, 예술가들및문화창조자들로구성된대표단들이서로접촉하고교류한다. 2. 문화나예술분야에있어양측의행사준비및다양한행사개최에전문가들이참여한다. 3. 문화단체나예술단체들사이에있어출판물이나정보자료들을교환한다. 4. 갖가지종류의행사개최를통한예술활동및문화활동의교류 5. 영화상영, 중요한영화제나국제적인영화제에의참가, 이런맥락에서의영화제작에의참여, 또한영화잡지분야에서해당기관들사이의협조등, 이런활동들을포함하여영화분야에있어서각단체들, 기업및조직체들사이의협력과교류 6. 박물학분야에서의협력, 전시회의교류및유물 ( 대여 ) 의허용 7. 고고학적인기념물보호를포함한기념물보호단체들사이의협력 제 4 조협정당사국들은그들의가능한테두리내에서당사자들사이에협의된예술가들및악단들의상업적인초청공연을장려하고그들의가능한테두리내에서영화부문에서의상업적협력및제작활동을포함하여예술과문화의보다광범위한분야에서의상업적관계를촉진시킨다. 제 5 조협정당사국들은그들의가능한테두리내에서출판분야의협력을촉진시키고다음의내용들을장려한다. 1. 상업적인문헌교류의테두리내에서출판물보급및수입확대 2. 어느한쪽이나, 쌍방간에있어중요한정보상의이익및학문상의이익이되는출판물의간행 3. 인가에대한양측의위탁확대 4. 서적견본시장개최에의참여 제 6 조협정당사국들은도서관분야에서의협력을촉진시킨다. 협정당사국은이점에있어서다음내용들에대한가능성을시험한다. 1. 국제적인출판물교류의확대 2. 다양한협력의테두리내에서독일어권국가들을위해문헌목록을작성하는규칙을세우고또그것을개정하는데대한협력확대 협정당사국들은다음의내용들을통한협력을촉진시킨다. 1. 대출교류의확대 - 38-
2. 참고서지및그밖의정보자료들의교환 3. 도서관분야에있어서비상업적전시회의교류 4. 정보자료교류, 특히국제관계의전문회의에참여 제 7 조협정당사국들의문서분야에서의협력을촉진시키며다음사항들을장려한다. 1. 자국의법률규정에근거한공개적인문서자료의교류 2. 문서담당행정기관을통한문서복사물의교류 3. 전문문헌의교류와문서자료에관해알리는것에대한승인 4. 우선적으로복사물의형태로, 기록문서의준비를통한전시 5. 정보교류, 특히국제관계의중요한전문회의에참여 제 8 조협정당사국들의해당국가기관들은중요한회의나회담, 토론회, 축제, 기념행사 ( 기념축제행사 ) 및학술회의등에대해상호간에정보를교환하며기존의이해에기초하여학자들, 예술창조자들, 전문가들로하여금그와같은종류의행사에참여하도록장려한다. 제 9 조협정당사국들은라디오나텔레비젼부분에서협력을촉진하고해당기관들에대해이러한목적의협정을해결할수있도록주선한다. 제 10 조협정당사국들은체육분야에서의협력을촉진시킨다. 제 11 조협정당사국들은그들의가능한테두리내에서성인이나학생들을포함한청년들의교류발전을장려한다. 제 12 조협정당사국들은협정의이행을위해서재정적인규정들을포함하여그때그때마다 2 년동안의사업계획에합의를본다. 그러나협정의목표에는일치함에도불구하고그성격상문화사업계획속에포함되지않는다른조치들에대한장려가배제되지는않을것이다. 제 13 조 1971 년 9 월 3 일의 4 대국협정에대응하여, 문화협정은결정된처리규정에합의함으로써서베를린까지연장, 적용된다. 제 14 조이협정은 5 년동안유효하다. 협정당사국들중어느한쪽이라도최소한협정만기 6 개월전에문서로통고하지않으면이협정의유효성은그때마다 3 년씩연장된다. 제 15 조협정을합의하는시점에대해상호통첩의교환이있어야한다는내독간의전제가있는이후에그효력이발생된다. 문화협정 의주요내용과각조항에대한쌍방의입장은다음과같다. 동서 독은 문화협정 체결시 문화 (Kultur) 의개념을좁게해석하지않고연극, 문 - 39-
학, 음악, 미술분야를포함하여교육, 학문, 출판, 도서관, 역사적인문서, 대중매체, 체육, 청소년분야까지확대하여교류 협력의대상으로취급하였다. 문화협정 의의의가기술된전문에서동독은전문의삽입을통해 문화협정 이다른양독조약과구별되는독창성을강조하려한반면, 서독은 기본조약 의후속협정으로서이를실천하기위한조치임을강조하였다. 특히 CSCE 의제규정을실행하기위한조치의일환으로 문화협정 이체결됨을언급하였다. 문화협력의주체를언급한제1조에서는서독측의주장으로국가기관, 문화단체에한정하지않고문화분야에종사하는각개인들의활동도포함시켰다. 협력분야와관련하여대학과대학인들간의교류 ( 제2조 ), 문학 예술 영화 박물관분야의교류 ( 제3조 ), 방문공연과서적교류등상업적활동으로서의문화교류 ( 제4,5 조 ), 도서관분야및역사적기록문서교류 ( 제6,7 조 ), 학술 문화행사 ( 제8조 ), 그리고서독이강력히요구하였던라디오와텔레비전분야의협력및해당기관간협정체결문제는제9조에, 그외체육분야 ( 제10 조 ) 및학생 청소년교류 ( 제11 조 ) 가규정되었으며, 제12 조에서는 문화협정 내용을구체적으로실천하기위한 2 년간의사업계획 (Arbeitsplan) 을양독이작성하기로하였다. 즉양측이각각 50 개씩 100 개의사업을선정하여 2년동안추진하기로합의하였다. 36) 특히동독의경제적여건을감안하여문화분야교류 협력을통해동독이경제적실리를획득할수있도록제4조에협력당사자는가능한한예술가와연주가들의상업적초청공연분야에서도장려조치를하고, 또한가능한한문화 예술 영화제작분야에서도상업적관계조성을위해노력한다고규정한것은눈여겨볼만하다. 문화협정 에따라 1986/87 년도첫동서독공동협력사업으로 22 개의프로젝트가합의되었으나, 초기임을감안하여상호부담이적은전시회나방문공연이주류를이루었다. 그러나 1988/89 년도의두번째사업계획에는동서독양측의학자와학술당국의지대한관심에힘입어학술분야에서광범위하게교류프로그램이포함되었다. 사업계획에따른행사개최시비용처리는각지역에서발생한비용은해당지역에서지불하는것을원칙으로하였다. 그러나서독은동독과의교류사업선정시동독측의재정부담과동독정부혹은동독주민의우선적인관심 36)Bundesministerium fürinnerdeutschebeziehungen,daskulturabkommen(bonn,1990), pp.35-40 참조. - 40-
분야를고려하였다. 동독예술인이서독을방문하였을경우서독은이들에게일비를지불하였고, 서독은교류에따른재정부담을연방정부와지방정부가각각 50% 씩담당하였다. 문화협정 을통해가장획기적인진전을이루었던분야는동서독대학간의자매결연이었다.1986/87 년도첫사업계획에서독자아르브뤼켄대학과동독의칼-맑스대학간에,1988 년에는뮌헨대학과칼-맑스대학, 아아헨공대와드레스덴공대, 그리고슈투트가르트대학과칼-맑스대학간에자매결연이맺어졌다. 37) 문화협정 을바탕으로양독간학술교류 협력은확대되었다. 강사초빙또는학술회의참가등의형태가주종을이루었으며, 연방차원의지원없이관련민간단체 기구들의재정부담아래수많은교류가이루어졌다. 또한국제행사를통해맺어진양독간교류활동이점차적으로동서독간의협력사안으로발전된경우도있었다. 동독은수백여개의학술분야국제민간단체에, 그리고유엔기구등국제기구에회원으로가입하여적극적으로활동하였다. 따라서이들단체 기구들을통해서쌍방간의교류를확대할수있는계기가마련되었다. 한편전쟁전에추진된, 심지어는 19 세기에최초로시작되었던일부편집사업들이부활되어이른바 공동체계획 (Gemeinschaftsvorhaben) 이라는이름하에통일직전까지계속되었다. 그가운데가장대표적인사업이 그림독일어사전 (Grimms Deutsches Wörterbuch) 편찬으로, 이것은분단된독일이함께일구어낸대표적학술활동이란점에서뿐만아니라언어및문화보전작업에큰기여를하였다는점에서타협력사업의모범이되었다. 동독과학술분야교류 협력을촉진하기위해서독정부는 문화협정 의체결이전부터연방내독관계성을중심으로재정및행정지원을추진하였다. 문화협정 이후본격적으로추진된재정지원의경우ㄱ. 학술접촉을위한직접지원, ㄴ. 양측의합의에따른사업계획에대한지원, ㄷ. 독일학술교류재단 (DAAD) 이관장하는대학생 학자의교환과동독행연구여행및자료수집여행지원등으로분류되었다. 38) 연방내독관계성의자료에따르면 1988 년중약 400 명의서독학자들이동독여행시, 약 250 명의동독학자들이서독여행시에재정지원을받았다. 사 37) 동독의대학수가서독에비해현저하게적었기때문에자매결연에있어서동독의몇몇대학이서독의많은대학과접촉을가질수밖에없었다. 38)BundesministerfürinnerdeutscheBeziehungen,Information,Nr.12(1988.6.24),p.2. - 41-
업계획에포함된동서독대학생및소장학자의교환은 DAAD 가수행하도록위임되었으며, 이를위해 DAAD 는외국만을대상으로규정된기존회칙을변경하였다. 학술분야교류가이루어지는동안동서독양측이발견한사실은이분야에서의교류가장기적으로지속되기위해서는양측이초창기의단순한접촉증대라는목표를넘어상호상대편의전문분야연구성과물에대한인정과전문분야에대한관심이있어야한다는점이었다. 서독측학자들은너무국제적인학술교류에만익숙해져있었고, 또동독의수준을비하하는자세마저보이기도했으나, 문화협정 에의한교류를통해차차서독에서연구가이루어지지않았던분야가동독에서연구되고있는영역을발견할수있었다. 특히서독의학자들은동독이연구한독문학과역사학분야에서의성과물에큰관심을가졌다. 동독이요구한자연과학분야교류와관련해서는군사전략적인차원에서의기술이전과관련되지않는한동독과의학술교류는정부의독일정책추진의틀내에서적극적으로이루어져야한다는공감대가형성되었다. 39) 한편세계적인긴장완화의분위기와서독의신동방정책추진을배경으로동서독은 1972 년 기본조약 을체결하여과학 기술분야에서도교류하겠다는의지를밝혔고, 이를근거로 1973 년 11 월 30 일과학 기술분야교류 협력에관한회담을개최하였다. 동분야의교류 협력은 1986 년 5월 6일 문화협정 이체결됨에따라가능성이더욱커졌고, 마침내 1987 년 9월 8일양독간에 과학 기술협정 (< 표 6> 참조 ) 이체결되었다. 과학 기술협정 은학술분야교류 협력과관련하여 문화협정 과일부중복이되면서도그협력분야는달랐다. 우선 과학 기술협정 은학술교류를자연과학및기술분야에중점을두었으나, 문화협정 은인문 사회과학에중점을두었다. 다음으로 과학 기술협정 의협력대상기관은대형연구기관이나, 문화협정 의협력대상기관은대학교가중심이었다. 40) 또한 문화협정 의교류 협력사업 39)Manfred Ackermann, Die Kulturbeziehungen seitabschluß des Kulturabkommens, MariaHändcke-Hoppe,40JahreinnerdeutscheBeziehungen(Berlin,1989),pp.141-152; OskarAnweiler, InnerdeutscheBeziehungen im Bereich von Bildung und Erziehung, VergleichvonBildungundErziehungBRD/DDR(1990),pp.671-675 참조. - 42-
은일정한학술분야에서학술적인성공을목표로하는연구 기술정책적측면에서보다는학술분야에서동서독주민간의접촉을증대시키는문화정책적, 독일정책적인측면에서추진되었다. 한편서독의경우 과학 기술협정 에의한교류 협력사업은연방연구기술성이, 문화협정 에의한교류 협력사업은연방내독관계성이각각주관하였다. 41) 동독은 기본조약 을통해양독관계를서로간에정상적이고선린적관계로발전시키겠다고분명히확약했음에도불구하고계속해서동독을서독과는엄격히구분되는독립국가로보았으며, 이에상응하는독자적인과학 기술체계의확립을원했다. 이러한동독이과학 기술분야교류 협력에합의한이유는서독으로부터과학 기술상의기술및 know-how 를도입하여동독경제를건설하여사회주의경제체제를고수하기위함이었다. 서독의경우, 특히기업들은과학 기술분야교류 협력과관련하여응용기술부문에서동독콤비나트와의협력강화에큰관심을보였다. 즉동독이동구권과의산업기술협력분야에서교두보역할을하고있다는점에서양독간과학 기술협력의제도화를환영하였다. 특수시설생산업자들은 과학 기술협정 체결이후양독이협력차원에서환경보호, 원자로안전, 재생에너지, 오물제거, 리사이클링등의문제를다루게될경우자신들의사업이더욱활성화될것으로보았다. 서독기업들은동독과의협력관계가장기적으로동독의경제력을증진시키는데기여할것이며, 이로써서방시장에서의동독제품판매기회가개선될것이고, 이는다시동독과사업관계를맺고있는서독기업에도긍정적인영향을미칠것이라고판단하였다. 다른한편으로서독경제계는과학 기술분야에서의긴밀한협력관계가서독기업에대한동독지도부의신뢰감을강화시켜줄수있을것이며, 이러한밀접한협력관계가서방에종속될우려에서비롯된동독의불신과소극성을해소시켜줄수있다고보았다. 42) 40)Press-undInformationsamtderBundesregierung,Buletin,Nr.83/5(Bonn,1987.9.10) 참조. 41)InstitutfürGeselschaftund Wissenschaft(IGW),IGW-Report,Heft11(1987),pp.3-4, 6-13 참조. 42)GernotGutman Siegfried Mampel(eds.),Wissenschaftund Forschung im geteilten Deutschland(Berlin,1988) 참조. - 43-
< 표 6> 동서독 과학 기술협정 (1987.9.8) 독일연방공화국정부와독일민주공화국정부는,1972.12.21 동서독기본조약을근거로,1975.8.1 유럽안보협력회의최종선언을상기하면서, 양독간과학 기술분야의협력이상호이익이며, 인류복지를개발 촉진시킬수있도록하는소망에서, 또한이를통해과학 기술분야의국제적협력에기여할수있도록다음과같이이협정을체결함에합의하였다. 제1조독일연방공화국정부와독일민주공화국정부는상호이익이될수있도록과학 기술분야의협력을촉진하고그에부응하는계획과대책을협의하고그수행을지원한다. 제2조 1 협력은자연과학과공학및정신과학과사회과학전분야를포함하며전자의경우특히자연과학과공학에관련된제문제를포함한다. 2 양국정부는학술적, 기술적연구및개발의결과에대한정보와출판물을교환할것과그와같은목적하에자료보관센터간의협력을규정할것에합의한다. 3 양국정부는과학 기술협력의수행상서독당사자와동독당사자가상업적소유권보호및그권한집행을위한필요규정이국가간입법의범위내에서조화있게제정될수있도록합의하였다. 이때당사자들은제4조제1항에의하여, 구성된위원회가작성한권고사항을근거로한다. 제3조 1 개별분야또는개별계획에관한협력을결정하기위하여양국정부로부터당사자로지명된당해기구간개별적합의가이루어져야한다. 2 양국정부는서로개별적합의발효에관한동의여부를통보하며, 그개별적합의사항수행을지원한다. 제4조 1 이협정의수행을위해위원회가구성되며그위원은각국정부가임명한다. 2 위원회는특히다음과같은임무를수행한다. 가. 협력분야및협력주제선정나. 협력당사자임명다. 제3조에의거한개별합의의수행을지원하고그내용구성에대한 - 44-
총체적조언및과학 기술협력상의상업적권리보호조언라. 학자교환을포함한협력의조직상방법과재정적세부사항을조화있게설명마. 진행중인협력업무의수행을지원하고조정바. 협력의현황과진행사항에관하여보고 3 위원회는개별문제에대하여소위원회를구성할수있고전문감정인단을동원할수있다. 4 위원회는어느일방정부의요구하에최소 1년 1회, 각사절단장이합의한장소에서회동한다. 5 위원회는운영세칙을작성한다. 제5조과학 기술분야의협력은다음과같은형태를취할수있다. 가. 정보교환나. 심포지움, 회의, 전시회와같은학술행사의조직과그수행다. 자료수집, 연수, 교수, 연구목적의학자및전문감정인의교환라. 연구계획의합의및그수행마. 과학기자재를비롯한연구자료의상호비치제6조 1 협력국의실정법규와기타규정의일치하에수행된다. 2 전제1항에열거한전제조건의범위내에서양국정부는기구, 연구소, 기업체, 공장, 학자간의접촉을고무하고그발전을지원한다. 3 합의된분야의협력수행을위해각국정부는실정법규와기타규정과의일치하에가능한범위내에서필요한전제조건을조성한다. 제7조 1971 년 9월 3일의 4대국협정에준하여이협정은확정된방법과함께서베를린지역에확대, 적용된다. 제8조 1 이협정은조인된날로부터그효력을발생한다. 이협정의유효기간은 10 년간이며, 그이후협정유효기간종료 6개월전에서면해약이없는한 1년씩연장된다. 2 이협정의효력상실과그때까지체결된개별합의는무관하다. 이와같은개별합의의수행상필요한경우에는이협정의규정은계속적용된다. - 45-
(2) 청소년교류 동서독청소년단체의조직과그사회적역할은매우달랐다. 동독의청소년단체는철저한국가통제하에놓인공산당후보자당원의교육장이었다. 동독에서사회주의적인간의형성을위한사회주의의식화교육은탁아소 소년개척자 (Junge Pionier, 초등학교중심 ) 독일청소년자유연맹 (Freie Deutsche Jugend: FDJ, 중 고등학교 ) 체육 기술협회 (Geselschaft für Sport und Technik,18-21 세 ) 군대등의과정을통해이루어졌다. 이들단체에의가입은명목상자발성을전제로했으나, 이런단체에서열성적인활동을한자들만이공산당원으로발탁될수있었고, 또사회적 경제적지위가보장되었으므로반강제적이었다고볼수있다. 반면서독에는각기다른정치적인이념, 세계관에따라또는전문이익집단의산하에 40 개이상의청소년단체가존재했는데가입은전적으로자유의사에맡겨졌다. 이들청소년단체의활동은국가에의해재정적으로지원되었으나, 국가가정한목표를수행하는기구는아니었다. 43) 동서독의청소년대책은독일문제와관련된각각다른정치적인목표설정때문에상이하였다. 서독은상반된체제하의분단된독일에서자라나는세대에게정치사회화과정에서적정한대책을마련해주지않으면상호소외현상이일어나민족적인동질성을상실해갈뿐만아니라, 장래의독일통일에장애요소가된다고판단하였다. 긴장완화, 상호대화등양독관계개선을위한노력들이각분야에서펼쳐지고있는상황에서미래를짊어진청소년들의접촉이향후독일문제해결에중요하다고보았다. 이에양독청소년들간에사적교류, 여행, 정치적논쟁을벌일수있는단체들간의공식적모임등다양한관계가형성되고, 이로부터개인적친분관계가맺어지도록노력하였다. 양독청소년들간에서로를보다잘알수록그리고서로간에보다많은대화가오고갈수록상대방에대한선입견, 적대감등이효과적으로제거내지해소될수있으며, 이로써서로를이해할수있는여건이마련될수있다고판단하였다. 44) 43)MartinHülsmann,Drübenbeiuns.EineBegegnungmitderDDR (Würzburg,1986) 참조. 44) Ulrich Bunjes, Normalität stelt sich nur langsam ein. Zur Entwicklung des deutsch-deutschen Jugendaustausches, Außerschulische Bildung(1989), pp. 27-230; - 46-
1972 년동서독 통행협정 은양독간여행교류의기본원칙을설정하였으나관광여행과개인여행만을취급하였을뿐청소년교류에관한명확한규정은없었다. 청소년교류에관한동서독간의구체적협정은서독청소년연맹 (Deutscher Bundesjugendring:DBJR) 과동독 FDJ 간에 1980 년 9월 20 일체결된 청소년여행에관한합의, 서독청소년여행알선기관인 Jugendherbergwerk 와동독청소년여행전담사 Jugendtourist 간의 1987 년 9월 1일자 단체여행에관한협약, 1986 년 문화협정 등이었다. 서독의연방정부와주정부는이러한동독과의합의를토대로대동독견학여행을장려하였다. 서독의교사들과학생들의관심은계속늘어나서독청소년동독여행의 75% 가수학여행형태로이루어졌으며, 나머지 25% 는청소년단체, 협회및기타사회단체들에의해이용되었다. 서독정부는청소년여행을교통비및체류비지원이란형식으로지원하였다. 지원을받기위한조건은참가자들이여행에앞서국경에서동독의정치 사회적인상황에대해충분히사전교육을받아야하며 ( 교육용교재는전독문제연구소나정치교육센터에서제공 ), 여행자의수는동독으로의장기여행의경우최소한 7명, 그외의경우는최소 20 명-최대 60 명이어야하고, 여행그룹에미성년자가끼어있을경우교사나청소년지도자등성인이동행해야한다는것등이었다. 45) 서독청소년단체중동독청소년단체와가장활발한접촉을벌였던단체는신교청소년단체였다. 신교청소년단체간교류는동독의신교단체가국가의통제하에있어많은접촉을꺼렸기때문에거의서독에서동독으로방문하는일방통행식접촉이었다. 반면구교청소년단체는동독지역에적당한대화의상대를갖지못해접촉이거의없었다. 서독의연방내독관계성은신교단체의접촉에대해조건없이재정지원을하였다. 접촉의방법과대상선정에대해서는신교측의재량에맡겼고, 이를장려하기위해신교측의요청이있을경우재정적으로지원했다. 46) Gerhard Kiersch,Die jungen Deutschen.Erben von Goethe und Auschwitz(Opladen, 1986) 참조. 45) Gisela Helwig, Jugendaustausch zwischen beiden deutschen Staaten, Deutschland-Arkiv,8(1984),pp.804-806; Paul-Ludwig Weinacht (ed.),mit ofenen AugenindieDDR.AnregungenfürKlassenfahrten(München,1986) 참조. - 47-
동독정부가신교청소년단체에대해서독과의접촉을허용한이유는이러한접촉을통해서독으로부터물질적인도움을받았고, 교회를통해서만비공개적으로진행될수있었기때문이다. 이와더불어종교활동의테두리내에서동독사회에대해가질수있는동독청소년의불만을해소시킬수있는탈출구로이용함과동시에, 동독청소년들이서독의체제와접함으로써그에대해부정적인판단이부각되도록유도하려는의도도내재되어있었다. 이러한신교청소년단체간의교류는접촉이공개되면될수록동독측이거부반응을보이고차후의접촉회수를제한하였기때문에거의공개되지않아정확한통계가없다. 한편서독을방문한동독청소년의대부분은 FDJ 의간부들이고 20-30 세가주류를이루었으며, 기혼자는부부가운데한명이꼭동독에남아있어야여행이허용되었다. 동독은서독으로부터재정적, 경제적인반대급부를의식하여서독측의청소년교류제의에마지못해응하면서도동독청소년의사상적인오염을우려하여여러형태의차단조치를취했다. 동독정부는동독청소년의서독여행을체제맹종을조건으로한일종의포상으로체제순응을위한교육적수단으로활용하고자하였으며,FDJ 는국가의통제하에양독간청소년들의만남을감시하였다. 동독은 2개민족,2 개국가론에의거하여철저한이데올로기로무장된동독청소년을다른체제와접촉케함으로써동서독분리화를가속화하는데중점을두었다. 한편서독청소년의동독여행은동독에존재하는독재체제와서독의자유민주주의체제를직접적으로체험을통해서비교해볼수있는생생한정치교육이되었다. 따라서연방정부가양독관계를심화시키고민족적공통의식을유지하는데기여하도록추진했던의도와는달리청소년교류는상호이질감만이확인되는계기가되었다. 또한동독도정치적인목적, 즉청소년단체핵심간부에게서독에서의현실체험을통해자본주의의부정적인요소를체감시키려던목적은이루지못했다. 오히려동독이라는국가의정통성이내부적으로붕괴되는데영향을미치는결과를초래하였다. 46)DeutscherBundesjugendring (ed.), Die unbekannten Nachbarn - Deutsch-deutscher Jugendaustausch, Jugendpolitik,7(1986),pp.3-7,19-20 참조. - 48-
(3) 언론 방송분야 동독언론인은 1950 년대에이미서독에서다른외국언론인과같은조건아래에서활동할수있었으나, 서독언론인은 1972 년까지동독에상주하며활동할수없었다. 서베를린에상주하는서독언론인은 1972 년까지동베를린에서행해지는외신기자회견에가끔초청되기도하였으나, 취재허용대상과취재가능언론인의선발기준은항상모호하여동독정부의결정에전적으로따를수밖에없었다. 기본조약 이체결된이후에야서독언론인이상주취재활동을할수있었으며, 상주특파원외에도문화 체육행사, 전당대회, 박람회등을취재하기위한단기취재여행언론인의동독방문도가능해졌다. 47) 1987 년 5월 6일동서독은상대방프로그램매입, 공동제작, 상대방프로그램내용의일부편집 사용, 정보제공등과같은방송협력을규정한 방송협정 에서명하였다. 서독은언론 방송분야교류 협력을추진하면서다음과같은입장을견지했다. 첫째, 동독 동독정부에관하여국제적으로널리보도함으로써동독정부가언론 방송분야에서스스로폐쇄성을극복할수있도록유도하고자하였다. 둘째, 동독정부가모든정보를독점하고있었지만동독이란획일적인사회내에서도자신들의목소리를대변하기위해서독의언론인과접촉을시도하려는이익집단이존재한다고보고이들과의교류를추진하였다. 셋째, 서독의언론인에게정부와는다른독자적인시각으로동독체제를소개하고비판할수있는가능성을부여하고자하였다. 48) 언론 방송교류에관한양독간의합의에도불구하고그러나실질적인교류 협력에는많은어려움이따랐다. 그이유는동서독이언론의자유와대중매체의역할에대해상반된견해를가졌기때문이다. 서독은국가로부터독립된언론기관에의한자유로운의사표현과여론의전파를정치적의사형성의기본전제조건으로파악한데반해, 동독은언론의자유또한마르크스-레닌주의정당의목표 47) Jean PaulPicaper, Westliche Korespondenten in der DDR, Deutschland-Archiv, 12(1974),pp.1285-1288;JürgenDöschner, ZehnJahrebundesdeutscheKorrespondenten inderddr.einezwischenbilanz, Deutschland-Archiv,8(1984),pp.859-861. 48)Elisabeth Noele-Neumann Jürgen Wilke(eds.),Publizistik und Massenkommunikation (Frankfurt/M.,1989),pp.84-98 참조. - 49-
에봉사해야하는것으로파악하였다. 이러한언론 방송의역할에대한근본적으로다른견해때문에서독언론인은취재에많은어려움을겪었다. 상주특파원은군사시설과민간인통제구역을제외하고는동독의전역을여행할수있었지만국가기관, 인민공유기업과콤비나트, 협동농장을취재하거나인터뷰를할때는반드시사전허가를받았다. 단기취재여행자의경우에는자유로운여행이허용되지않았다. 동독상주서독특파원의보도에의거한서독언론 방송을통해동독주민들이자국내에서일어나고있는일들에관한정보를취득하는경우가많았다. 이에대응하여동독지도부는특정사안에관한보도에대해서그영향이체제에악영향을미친다고판단될경우내정간섭이란이유로많은제재를가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서독언론 방송이동독문제에대해관심있게, 상세하게보도하였기때문에서독텔레비젼을거의시청하였던동독주민에게동독상주서독특파원의보도는많은영향을미쳤다. 한편동독에서는모든정보를국가와당이독점하고있었으므로서독과관련해서는대중매체를통해객관적인보도를하지않거나아니면아예보도자체를하지않는경우가많았다. 49) 양독간국경은인적 물적교류를물리적으로차단하였지만서독으로부터동독으로향하는전파매체는국경을초월한의사소통을가능하게하였다. 양독간에구조적으로형성된장벽에도불구하고이러한전파매체를통해동서독주민간문화 언어 역사적인공통성이보존될수있었다. 대부분의동독주민은동독의텔레비젼이나라디오보다서독의텔레비젼과라디오를시청했다. 동독주민은 SECAM 방식인텔레비젼수상기에 PAL 방식의서독프로를시청할수있는장치를설치하였고,1970 년대초부터는대형공동안테나를설치할경우케이블을통해위성수신까지가능하게되었다. 통계에의하면 1985 년에는전가정의 40% 가, 1990 년에는전가정의 2/3 가이러한대형공동안테나에연결되었던것으로나타났다. 50) 49)Erich Böhme,Deutsch-deutsche Pressefreiheit(Hamburg,1978),pp.14-20;Anthony John Goss, Die Darstelung des deutsch-deutschen Verhältnisses in der Fernsehberichterstatung beider deutscher Staaten, Deutschland-Archiv,4(1980),pp. 403-405. 50)ChristophWild, Fernseh-undHörfunknutzunginderDDR im Frühjahr1990, Media - 50-
동독주민의서독방송시청은항상동독내에서정치적논쟁거리였으며, 다양한방법으로시청을막아보려는시도가있었다. 서독측으로향하는안테나를철거하는운동을벌이거나, 대형공동안테나의사용을금지하는규정을설정하기도했다. 또한형법규정을임의로적용하여이를단속하기도하였다. 즉방송의시청그자체를처벌하지는않았으나시청한정보를퍼트리거나공동으로모여서시청하는행위를처벌하였다. 이때적용된주요동독형법조항은 전쟁선전 선동 (89 조 ), 반국가적선동 (106 조 ), 공공활동비방 (220 조 ), 공무집행방해 (214 조 ) 등이었다. 아울러방해전파를발사하여기술적으로서독방송의시청을방해하려고도하였다. 동독주민이서독방송, 특히텔레비젼을의식적으로선호하면서지속적으로시청하였다는사실은동독지도부가국내적 국제적여건상마땅히방지할만한대책이없었기때문에이를묵인할수밖에없었던사정과관련된다. 아울러정보와전파의자유로운이동을규정한국제법적제규정과국제사회에서독자적인국가성을인정받으려는동독의입장이동서독간정보 전파의차단을어렵게만들었다. 동독이정보의자유로운이동을규정한국제협약 51) 에서명을하고서도이를지키지않았을경우국제법적인제재는현실적으로어려웠지만, 국제사회의일원으로서동독의정통성을인정받기위하여노력해온동독이노골적인전파방해라든가, 동독주민의수신방해조치를취할수는없었기때문이다. 52) 이러한여건속에서동독주민의지속적인서독텔레비젼의시청은양독관계에서정치적인의사형성의중요한수단이되어분단극복과양독주민간의공통적인의사형성의통로를마련하는데크게기여했다. 이러한영향력은동독주민이서독텔레비젼프로그램중정치적인사건을특집으로다루는보도특집을주로선호했다는점에서입증된다. 53) 아울러서독텔레비젼의현란한상업광고는동독주 Perspektiven,9(1990),pp.558-572 참조. 51) UN 인권선언 (1948.12.10), 인권과기본권보호에관한유럽협약 (1950.11.4), 시민적 정치적권리에대한국제협약 (1966.12.16), CSCE 헬싱키최종의정서 (1975.8.1), UNESCO 미디어선언 (1978.11.28) 등이여기에해당된다. 52)IlseSpitmann, Dieneuejournalistenverordnung-HoneckerbetreuertVertragstreue, Deutschland-Archiv,3(1972),pp.228-230. 53) 동독주민에대한설문조사에서가장선호했던서독텔레비젼프로그램은동서독문제주요쟁점에관한보도특집인 Kennzeichen D (ZDF) 와보도특집인 Monitor (ARD) 로나타났 - 51-
민의물질적인욕구를자극하여풍요한서독사회를동경하게만들었다. 한편서독라디오방송의경우동독의전지역에걸쳐독일방송 (DLF), 바이에른방송 (BR), 헤쎈방송 (HR), 북독일방송 (NDR), 자유베를린방송 (SFB) 을비롯하여미국측에편성권이있던베를린소재 Rias 방송등이청취가능했다. 전반적으로서독라디오방송의청취율은매우높아동독에서서독으로넘어온이주민 (Übersiedler)250 명을대상으로한 1985 년서독의설문조사결과조사대상자의 87% 가자기집에서옆에누가있건말건서독라디오를들었으며, 자기집이외의지역에서는 74% 가상관없이서독라디오를청취한것으로나타났다. 54) 또한동여론조사에서이주민들은서독텔레비젼방송이제공하는정보에대하여높은신뢰도를표시하였다. (4) 체육분야 양독간체육분야교류 협력의과제와목표는동서독이추구하는독일정책에따라각각상이한모습을보였다. 서독의기본입장은 연방내독관계성은독일의분단을극복하고양독간의관계를정상화한다는기본방침에입각하여체육교류를지원한다 는 1978 년 8월 3일의제4차연방정부체육보고서내용을통해분명하게알수있다. 서독정부와서독체육연맹 (DeutscherSportbund:DSB) 은양독간의동질감을강화하기위한만남의장을마련해줄뿐만아니라, 평상시에도국민단합에효과적인역할을하는체육분야교류 협력에큰의미를부여하였다. 반면민족이라는개념을사회주의계급이론에입각하여이해한동독은동독고유의민족의식을창출, 이를확립시키고자하였고이러한기본방침은양독체육관계에대한동독정부의과제와목표설정에도큰영향을미쳤다. 동독체육은서방진영의구축과서독의서방에로의편입등을반대하는캠페인으로서양독체육교류의장을동독측의정치적선동과선전의무대로이용하였다. 즉양독관 는데, 이프로그램은서독공영방송인제2텔레비젼 ZDF 와제1텔레비젼 ARD 가대동독용으로각각제작한것이었다. 54)KurtR.Hesse, Nutzung und Images des Westfernsehens beiddr-übersiedlern, MediaPerspektive4(1986),pp.265-272 참조. - 52-
계측면에서보았을때동독체육은서독차단정책의일환에불과하였다. 이러한동독체육의정치성은동독체육단체의조직및구조를살펴보면명확해진다. 동독의체육, 정당, 국가는밀접한연관관계를맺고있다. 맑스-레닌주의에입각한동독의체육문화는어린이 청소년체육, 체육특기자양성, 근로자의여가및휴양활동으로서의체육, 그리고훈련 연습 경기전반을모두포괄하여국가가펼치는범국민적사업으로서당의지도하에운영 감독되었다. 동독공산당정치국과당중앙위원회산하체육부가국립체육협회및일반사회체육단체들에대해직 간접적인영향력을행사하였다. 55) 한편동독은특기종목체육 (Leistungssport) 을특별분야로취급하여동독공산당산하특기종목체육중앙위원회가관할하도록하였다. 이위원회는동독체조 체육연맹 (DeutscherTurn und Sportbund:DTSB) 의직속상부기관이기도하였다. 체육및체육특기자에대한동독정부의재정및사회보장정책역시체육과정치간의연관성을잘보여준다. 지원에필요한재정은국고로부터뿐만아니라, 체육관련단체인동독자유노조연맹 (FreierDeutscherGewerkschaftsbun d) 과 FDJ 로부터도염출되었다. 56) 한편동독에서체육의또다른주요과제는조기군사교육으로서의기능으로이를통해동독은군사력강화를의도하였다. 체육의정치성을강조하는동독이양독간체육교류를통해노렸던효과는무엇보다도국제적으로우수한성적을보이고있으며동독주민으로부터높은인기를누리고있는, 특히서독보다우위에있는체육분야에서교류하여동독주민에게는자의식과장긍심을불어넣어주고, 대외적으로는동독국가의우월성을선전하는데있었다. 이러한이유로동독은양독간체육교류에서승리하는데큰집착을보였다. 체육분야에서우수한능력을인정받았던동독이실제로이를통해국제적 55) Wili Knecht,Wege nach Olympia - Entwicklungen des Sports in Deutschland (Dortmund,1980);Bundesministerium fürinnerdeutsche Beziehungen,DDR Handbuch (Köln,1985),pp.1250-1261 참조. 56) 동독공산당이체육을정치적수단으로이용한것은에리히호네커 (Erich Honecker) 가 FDJ 위원장이었던시절행하였던 체육은그자체에목적이있는것이아니다. 체육은목적을위한수단일따름이다 란발언,1957 년 4월 28 일 DTSB 의창립선언문에 DTSB 는회원들에대해사회주의적사고와행동교육을실시하며, 순수체육정신및정치적중립성등과같은반동주의적 -부르조아적사상을단호하게배격한다 고밝힌데서잘나타난다. - 53-
명성을획득할수있었으나, 양독간체육교류를통해서는동독이달성하고자한동독고유의민족의식확립계획은성공을거두었다고할수없다. 이는서독체육선수단에대한동독주민의반응에서잘나타나는데많은동독인들이동서독간경기에큰관심을보였으며, 서독과사회주의우방국간의경기에서는서독팀을 우리팀 으로부르며서독을응원하는등체제와이념을초월한민족적유대감을보였기때문이다. 동서독은 기본조약 에서체육분야에서도협력관계를개발 육성해나가기로하였으며, 추가의정서제7조 8항에서는각체육단체들간의교류를지원하기로합의하였다.1974 년 5월 8일양독은 체육협정 (< 표 9> 참조 ) 에서명하고매년체육교류와관련된연간체육계획서를작성하기로, 상호간의체육관계를 IOC 및국제체육기구의결정에의거처리하기로하였다. 이밖에양독은 1986 년 문화협정 제10 조에체육분야에서의교류 협력을지원하기로합의하였다. 동독정부의동서독차단정책에따라체육교류역시많은어려움이따랐으나 1974 년 체육협정 체결이후양독간체육교류는행사규모와참석자수면에서증가하는추세를보였다. 그러나대부분의체육교류가우승에만역점을둔동독의방침에의해특정분야의정상급선수들간에만이루어져교류종목은극히제한되었다. 또한청소년들간의체육교류역시 DTSB 가 FDJ 의관할사항으로돌리는바람에거의이루어지지못하였다. 일반주민간의관계를긴밀하게하는지역체육단체간의교류도동독이이를체제위협적이고파괴적인요소로파악함에따라활발히이루어지지못하였다. 다만정상급선수들간의시합을제외한일부중하급단체차원에서의교류는다소이루어졌다. 동독이체육교류를제한한또하나의이유는국민들의모범으로인정되는우수체육인의서방탈주에대한우려였다. 실제양독간체육교류시동독의유명선수들이서독으로탈주한사건이종종발생하였다. 체육협정 을통해양독간체육분야협조체계의토대는이루었으나, 체육교류를통해주민간의유대관계를강화시켜민족화합에기여하고자한서독의의도가크게성과를거두었다고보기는힘들다. 동독의차단정책으로양적인측면에서활발히진행되지못하였고선수간의만남또한극히제한되었기때문이다. 양독간체육교류에서유의해서고려해야할사항은서독이기타사회주의국가들과의체육분야교류 협력을강화한것이중 장기적인측면에서양독간체육 - 54-
교류에자극적인역할을했다는점이다. 실제서독은동독보다다른사회주의국가들과보다활발한체육교류를가졌다. 또하나는서독의방송매체가동서독체육교류에대해큰관심을가지고보도한것이동독정부에대해체육교류를강화하게하는중요한역할을하였다는점이다. < 표 7> 동서독 체육협정 (1974.5.8) 독일체육연맹과독일체조체육연맹은다음사실을확정한다는데합의하였다. 1. 쌍방은매년양체육단체로부터위탁받은대표자들이수립하고독일체육연맹회장과독일체조체육연맹회장이확인하는체육행사개최계획에합의한다는데의견일치를보았다. 2. 쌍방은체육관계를국제올림픽위원회와국제체육단체의규정과관계에따라서, 그리고서베를린에관해서는 1971 년 9월 3일자 4대국협정의규정과일치하도록규정할것이다. 3. 쌍방은재정문제조정에대하여다음과같이확정한다. a) 피초청국은행사장까지의여행에소요되는왕복여비및수하물과체육기재를수송하는데드는경비를부담한다. b) 초청국은합의된참가자수에대하여체재일동안의호텔경비와식비를부담하여 1인당매일 10 독일마르크 (DM) 혹은 10 마르크 (M) 의용돈을지급한다. 수차에걸친행사의경우초청측은처음부터마지막행사장소까지의국내수송비를부담한다. (5) 종교분야 동서독의신교교회는분단되기이전에하나의교회조직, 즉독일신교연합회 (EKD) 로존재했으며, 공동의예배의식, 공동의성서번역전통을가지고있어형 식적인분리에도불구하고동서독간다른분야의조직체분리와같은상호이질 - 55-
화현상은일어나지않았다. 또한신학적측면에서상이한국가및사회체제아래에서도모든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하나 (EinsinChristus) 였기때문에신자나교회지도자들의상호의견교환 방문 물질적지원등은국경을초월하여이루어질수밖에없었다. 이러한이유로 EKD 는 1969 년동독신교연합회가설립되어분리되어나갈때까지동독에도전권위임자를위임해놓고전독일을관할하는신교연합단체였다. EKD 는분단초기부터민족통일문제에관심을가지고독일통일이곧동서독교회의소망이라고주장하면서동서독정부간의견차이를해소하는데중개역할을하고자하였다. 여기에는동독주민의대부분이신교도였고,EKD 만이동서독주민으로부터공히신뢰를받았으며, 동서독의지도층과접촉을유지하고있었던사정이작용하였다. 이당시교회는공식문서에서서독이의식적으로동독을인정하지않기위해사용한용어인 소련점령지역 또는 중부독일 이나국호에따옴표를사용하는대신동독의정식국호를사용했으며, 서독정치권의전독일단독대표권주장과는거리를두는등동서독정치권양측에신중함을기했다. EKD 의활동은베를린장벽이구축되기전까지는동서독의분단에도불구하고어느정도거주이전의자유가있었기때문에별다른지장을받지않았다. EKD 는분단극복의일환으로동서독이참가하는종교대회 (Kirchentag) 를 1949 년부터매년혹은격년으로동서독을번갈아가며개최했다. 그러나 1961 년베를린장벽이구축되기직전서베를린에서동서독합동종교대회가마지막으로개최된후더이상독일전체의만남은불가능하게되었고이후서독지역에서만종교대회가열렸다. 동서독교회간의접촉과동서독목회자간의여행은동독신교연합회가 1969 년 EKD 로부터분리된후에서야비로소확대될수있었다. 서독에서만개최된제한된종교대회에서민족통일문제는거의거론되지않았다.1980 년대초에들어서청소년들이대거참여하는가운데평화운동집회형식의종교대회는다시동서독인들이참석하는독일인의대화의광장이되었고 1985 년뒤셀도르프 (Düsseldorf) 종교대회는대성황을이루었다. 이때부터종교대회는민족통일의문제가아닌평화문제를주제로하여상당히국제정치적성격을띠고동서독간의안보정책적경직성을해소하는데기여하고자하였다. 57) 57) Helmut Zander, Zur Role der Kirchen in den Friedensbewegungen der beiden deutschenstaaten.einvergleichfürdiejahre1978-1983(bonn,1984) 참조. - 56-
한편동독에서도종교대회개최가끊임없이시도되었는데비록전국적인신교도모임은없었지만지역차원에서많은사람들이참석한가운데개최되었다. 이러한배경에는호네커가집권한 1970 년대이후부터동독정부가교회세력을이념적으로더이상극복할수없는시민사회의잔재라고규정하고교회의사회체제내에서의역할을인정한것과관련되었다. 신도수는 1977 년기준으로신교도가 790 만명, 구교도가 120 만명으로신교도가월등히많았으며,1980 년대중반서독의추정에의하면신도수는동독주민의 50% 미만인것으로나타났다. 한편카톨릭교회간교류 협력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동독의카톨릭은동독체제에서교회의구조가바뀌기는했지만로마교황청의감독과보호아래기존서독의관구에소속되어있어상대적으로원래의공통귀속성을보존할수있었다. 로마교황청은동서독분단이후정치적인상황에따라교구의운영과주교회의개최문제에대해탄력적으로대응하였다. 분단직후첫조치는동독이라는국가의탄생에부응하여베를린주교에게동독지역주교회의, 즉 베를린교구회의 를개최할수있는권한을부여하였다.1976 년 4월 10 일에는이를 베를린주교회의 로개칭하고이동독지역주교회의를서독지역주교회의와동급의회의체로인정하였다. 동독카톨릭교회는서독으로부터의분리를위해바티칸을상대로외교적인노력을전개하였으며어느정도독립적인역할을하기는하였다. 그러나바티칸은국가단위의관구설정에는반대의사를분명히했으며, 관구설정의기준은어디까지나성서가동일하게번역되어읽히는동일언어지역이어야한다는입장을고수하였다. 동독카톨릭교회지도자들은교회내정치참여그룹의정치적인활동으로인해교회자체의활동마저도할수없게되지않도록매우보수적이고, 소극적으로대서독접촉을하였다. 이들은현존하는사회주의질서에적극적으로반대하거나적극적으로찬성하지않는다는기본원칙을지키며동독정부와타협을했다. 따라서서독카톨릭교회와의지속적이고조직적인접촉과교류는동독정부의의구심을자극하여오히려접촉에득보다실이많다는판단아래단기적이고간헐적이며개인적인접촉을주로진행하였다. 서독카톨릭교회역시목회자의동독자유왕래가동독당국에의해제한을받았기때문에동독보다도제3세계나기타동유럽국가에서더많은활동을했던것도사실이다. 58) 58)Giesela Helwig (ed.),kirchen und Geselschaftin beiden deutschen Staaten (Köln, - 57-
서독교회의동독교회지원현황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서독교회의동독교회에대한연대의식에기초한물질적인지원은이미분단직후부터시작되었다. 서독의교회는자체재원과헌금을통해, 서독정부의위임을받아정부예산으로동독의교회, 나아가동독주민에게지원을행하였다. 신 구교단체공히추진한대동독지원은동독교회및교회기관유지에절대적으로긴요한것이었다. 동독정부는목회자의봉급지불및교회와부속건물의유지를위하여서독의지원을묵인하였다. 동독의 76 개교회부속병원은서독의지원덕분에국가가운영하는병원보다훨씬양호한의료수준을유지할수있었다. 서독교회의지원으로동독의교회, 부속병원, 양로원및기타기관의수백만에달하는주민들이분단에따른고통을실질적으로줄일수있었으며, 물질적인혜택과더불어복음이전파되어무신론적인체제에서교회가생존할수있었다. 또한주민들이실생활에중요한지원을얻을수있게됨으로써동독내체제저항세력양성의밑거름이되었다. 동독공산당정권의안정에일시적으로기여한듯한이와같은지원이오히려동독정권의안정을붕괴시키는역할을한것이다. 한편서독교회의동독교회지원은기독교적연대의식을통해특이한방법으로추진되었다. 59) 첫째, 현물을통한물질적지원형태이다. 재화를직접적으로공급하는것으로동독교회단체의회원들에게자애의선물소포, 의료및기타생활용품이우편을통해, 그리고교회단체에게는건축자재및실내장식이, 병원에게는대량의현대적의료기구가현물로전달되었다. 신교의지원은후견지원및자매지원을맺은교회및단체간에서독의교회단체나 EKD 산하사회구호복지기구인 Diakonie 의중앙공급 (Genex) 60) 에의해이루어졌으며,1957-1990 년간현물이전총액은약 18 억마르크에달하였다. 그중자매지원형식을띤지원이가장많은 13 억 970 만마르크를차지하였다. 구교의지원역시신교와비슷한 1982);Bundesministerium fürinnerdeutschebeziehungen,ddr Handbuch,pp.715-728 참조. 59)AminVolze, KirchlicheTransferleistungenindieDDR, DeutschlandArchiv,1(1991), pp.62-66 참조. 60)Genex 유한회사는 1957 년동독정부에의해동독주민을위한선물용역회사로설립되어원래동독에서생산하였으나, 이후주로서방측상품을공급하면서외환을벌어들였다. Diakonie 는 Genex 의해외지사를통해대동독교회지원용물품공급을발주하여 Genex 가물품을동독으로반입하도록하였다. - 58-
방식으로자매지원이나재화의직접공급,Genex 발주로이루어졌다. 구교의지원에는사회구호복지기구인 Caritas 가주로활동하였다.1990 년까지구교의현물지원액은 5-10 억마르크로추정된다. 둘째,A 형교회사업 : 동독교회지원목적의원자재공급을통한재정이전형태이다. 동독의교회나교회기구는현물지원만필요로하였던것이아니라, 목회자와직원의봉급과교회사업수행상기타지불에필요한돈도서독교회에의존해야했다. 그러나동독의외환관리법상서독마르크의동독직접이전은불가능하였다. 이를타개하기위해 1957 년서독신교지도자와동독대외무역성장관간에 혼합이전, 이른바 A 형교회사업 (KirchengeschäftA) 이합의되었다. 이방식에의하면동독의대외무역상독점적인권한을갖고있던대외무역성은서독으로부터마르크화를받는것이아니라원자재를공급받고, 그대신에물가의현시세만큼을동독마르크로환산하여동독의교회기구회계장부의대변에기입하여, 이범위내에서동독교회가운영자금을조달하도록허용하였다. 재화공급의규모와방법에관해서는서독교회의대표자가동독의대외무역성과상담을진행하였으며, 동독에서 1966 년대외무역성내외환확보전담회사인 KoKo 가신설된이후부터는이기구와상담하였다. 서독의신 구교는 A형교회사업을통해총 28 억마르크에상당하는원자재를동독으로공급하였으며, 그중 21 억마르크를신교가,7 억마르크를구교가담당하였다. 셋째,B 형교회사업 : 인도주의목적 ( 정치범석방, 이산가족재합류 ) 을위한원자재이전의형태이다. 서독은국가적차원에서동독의정치범석방과이산가족의재합류를추진하면서대가로교회를통한물자지원방식, 이른바 Freikau f 61) 를택하였다. 서독정부는인신매매에정부가직접개입한다는인상을주지않고또한외환을동독에직접지급할수없었던점을감안하여교회를통한이러한물자공급방식을택하였다. 이사업은연방내독관계성의위임을받아 EKD 가 특별사업 으로참여하였는데실무는슈투트가르트소재 Diakonie 가관장하였다.B 형교회사업도 A형교회사업방식과동일하게진행되었으나전적으로연방내독관계성의예산을통해, 철저한보안하에수행되었다. 동독측은공급제품결정시 1965 년부터소비제품보다는외환절약효과가크고국민경제전체에파급효 61)Ludwig A.Rehlinger,Freikauf:Die Geschäfte derddr mitpolitischen Verfolgten 1961-1989(Berlin,1991) 참조. - 59-
과를줄수있는산업용원자재, 예를들어원유, 다이아몬드, 수은, 구리, 은, 주석, 팔라듐등을선호하였으며, 비밀협상에서서독측이응하지않으면정치범석방을하지않겠다는압력을가하였다.1970 년대에들어서는산업용원자재중국제현물거래시장에서중개인을통해즉시상품화될수있는물자, 예를들어원유, 다이아몬드, 수은등의비중이커졌다. 독일연방은행의추계에의하면 1963-1990 년간서독정부가동독정부에정치범석방을위해지불한대가는총 34 억 6천만마르크에이른것으로나타났다. - 60-
Ⅲ. 남북사회문화교류현황과문제점 1. 남북사회문화교류현황과특성 가. 2000 년이후사회문화교류현황 남북사회문화교류는사회통합이라는본질상두가지방향을두루살피는것이필요하다. 하나는 남북교류 이며이는남북사이의관계망과그내용을살피는것이다. 다른하나는 교류 의남쪽주체들사이의관계로서중심주체인민 ( 民 ) 과지원자인관 ( 官 ), 또는민 ( 民 ) 과민 ( 民 ) 의관계를살피는것이다. 이두가지방향의탐구속에서사회문화교류의수준은가늠된다. 사회문화교류의발전속에서다양한방식의분류가가능하겠으며그중하나는 교육환경, 문화예술, 체육, 종교, 언론출판, 과학환경 등으로구분하는것이다. 그런데사회문화교류의성장이빚어내는현상은조금다른각도에서의분류를생각해볼수있게한다. 예컨대, 6.15,8.15 공동행사, 언어, 문학, 역사학등남북공동기구를구성한교류, 대북인도지원과결합한사회문화교류, 노동, 농민, 여성, 청년 대학생, 교사, 언론인, 작가, 종교인등부문간교류 등을위의교류영역과결합하는것이다. 여기서는이두가지분류를모두활용하고자한다. (1) 6.15, 8.15 민족공동행사 민간차원의남북공동행사는긴역사를가지고있다. 사업의형식으로만본다면 1989 년남한민간단체에서먼저제안되고북의국가기관이받아들인 범민족대회 가시초이겠으나통일정책을둘러싼정치세력의각축이라는면까지확장해서본다면이분야는분단이래로지속적으로제기되어온영역일것이다. 사실분단과더불어지리적으로갈라진모든분야의만남들이단절되었고, 그로부 - 61-
터다시잇는교류의노력이계속되어왔기때문이다. 그런연장에서 90 년대초반시기조차도 범민족대회 개최를요구하는민간세력과창구단일화논리로이를봉쇄해온정부는갈등과대결의장 62) 에서늘만나게된다. 민간차원의공동행사는 2000 년에남북의정상이만나 6.15 공동선언을발표하고공존과평화의남북관계를합의한이후에야성사의길이열리게된다. 공동행사는 2001 년 6월 15 일에금강산에서 민족통일대토론회 라는이름으로처음시작되었다. 당시정부는민간교류의첫프로그램에조심스럽게이를승인하였다. 금강산행사에는노동, 여성, 청년, 교육, 문예, 언론, 학술등의부문과단체에서도함께참가하여토론을벌였고, 이때부터부문별상봉모임도시작 63) 되었다. 2001 년금강산의민족통일대토론회의성공에서는두가지의미를찾을수있다. 첫째,6.15 남북공동선언의경우, 정부에서추진하고그결실을맺었음에도그기념행사를민간에서맡아했다는점이다. 이는민간분야역할의존재를부여하는것이다. 정부가하기어려워하는일을풀수있다는의미이다. 두번째는행사의성공이라는측면이다. 당시정부는이행사의승인여부를놓고고심했는데, 그이유는과연민간이북한의전문적대남일꾼들과상대하여자기독자성을지킬수있겠는가하는의구심이었다. 행사의성공 64) 은정부로하여금민간을통한 62)1990 년 8.15 를계기로범민족대회가성사될번한적이있었다.1989 년 12 월 9일북한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우리측의범민족대회제안에대한지지를표명하고정부가이를승인하게되면서대회성사가능성이생겼던것이다. 그러나 90 년 8.15 대회는대회장소를놓고정부와민간이양보없는대치를계속하는바람에무산되고말았다. 당시정부는회의장소로인터콘티넨탈호텔을지정했고민간은아카데미하우스를고집했다. 합의가지연되면서판문점까지와있던북한대표단이돌아가버렸고대회는결국무산되었는데, 당시의모습에서정부와민간의불신은매우깊었다고할수있다. 63) 공동행사의첫물꼬는노동계가먼저텄다. 남북의노동계는 2000 년 12 월에이미 조국통일을위한남북노동자통일토론회 를열었고 2001 년에금강산에서 5.1 절통일대회 를개최했기때문이다. 64) 2000 년남북공동선언으로남북민간교류가활성화되면서,2001 년에는처음으로남북민간 300 여명이금강산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기념행사를가졌지요.10 개분과로나누어서토론을했는데, 민간교류의가능성에대한일종의시험대였습니다. 그런데우리민간단체들이자신감있게아주잘해냈습니다. 그러면서이행사를성공적으로평가했고, 그자신감으로같은해평양에서개최된 8.15 민족통일대축전을허가하게되었지요. 그런데일부에서돌출행동을하고, 일부언론에서이들의행동을과장보도하면서결국통일부장관을 - 62-
남북관계개척의가능성을넓혀준셈이었다. 남북공동행사가남북민간차원의교류협력에있어중심축이되느냐하는점에서보자면 2001 년 8.15 평양행사가분기점이된다. 만경대방명록파문으로나타난일종의해프닝이언론에의해크게부각되면서 8.15 행사를승인한통일부장관이탄핵되고행사참석자들일부가구속되는등그피해가막대했던것이다. 그런점에서 2001 년 8.15 평양대회는남북관계가보유하고있는긴장과폭발성을확인시켜준중요한경험이라할것이다. 2002 년도 8.15 민족공동행사는우여곡절끝에서울에서개최되었고, 북은 100 명의대표단을처음으로서울로파견하였다. 당시 8.15 를앞두고남쪽에서는월드컵열기가무성했고최초의 4강진출신화로들썩였다. 그와중에서해에서는남북군인들사이에교전이있었고, 남북의군인다수가목숨을잃는사태가벌어졌다. 특히이사건은북한에서먼저공격을해온탓에사망한군인가족은물론이고국민들사이에서도북에대한분노가쌓였다.7 월 17 일남북의민간대표들이 8.15 행사를협의하는시기까지도북은어떤조처를결정하지못하고있었다. 남쪽의민간대표들은북의사과를촉구했고, 그와더불어 8.15 대표단파견약속을지켜화해의남북관계를이어갈것을강하게요구하였다. 서해교전에대해서는정부도북한의사과를받아야한다는강한입장을내놓고있었다. 북은고심끝에서해교전에대해유감을표명함과동시에민간대표단을서울로파견하게된다. 2002 년 8.15 서울대회는민간대표단의최초서울방문이라는점과답방약속의이행이라는점에서공동행사가교류협력의중요한상징으로인식되는기회를주었다. 당시언론의관심은폭발적이어서취재등록인원만 700 명이상을육박하였다. 공동행사에서북이남쪽에내놓은예술작품은가요가배제된무용이었는데, 체제선전적요소가없어북한무용의예술적가치를비교적잘보여준공연으로평가되었다.2002 년서울대회는무난히끝났고,9 월들어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북한선수단과응원단이참가하면서북한에대한국민들의마음도많이누그러졌다. 그리고 2003 년 8.15 에다시평양을찾아공동행사를열었 맡고있던제가책임지고물러나게되었습니다. 하지만후회는안합니다. 남북민간수백명 이분단이후처음만났는데, 시행착오는있을수있거든요. 그러면서발전하는것이지요. 임동원, 민족화해통권 12 호,(2005),5 쪽. - 63-
을때, 북은정치구호가전혀없는능라도정원과대성산남문을개막식과폐막식장소로내놓았다.2001 년에 평양어디에구호없는곳이있냐 면서 3대헌장기념탑이그나마부담없는장소라던북한은이제구호없는장소를찾아내었다. 2001 년 6월 15 일로부터 2003 년 8월 15 일까지의공동행사는북한의실상에대해많은것을알려주었다. 진통도있었지만, 과정에서민간주체들이나정부, 언론그리고국민들사이에는이모든것이오랜분단을극복하는과정임을이해하는마음이생겨났다. 만남의지속이야말로교류의본질이라는점에서, 공동행사는사회문화교류의상징이될수있었고공동행사는정례화의단계로진입하였다. 남북공동행사는 2005 년들어 6.15 통일대축전과 8.15 민족대축전을평양과서울에서정부와민간합동으로개최하게된다. 평양의 6.15 통일대축전의경우, 정동영통일부장관과김정일위원장과의회담이이루어지고 6자회담재개약속이표명되었고,8.15 민족대축전에서북한당국, 민간대표단은국립현충원을방문하였다. 이두행사를거치면서공동행사는정부-민간합동틀로발전했고남북관계의상징이되었다. 그러나공동행사는 2006 년 6.15 광주행사에이르러정부간대화단절에영향받으면서 2007 년 6.15 행사는정부의불참속에민간단독으로치러졌다.2007 년 6.15 행사는평양에서개최되었는데, 한나라당인사의단상배열문제를놓고북이행사직전에거부함으로써, 이틀에걸쳐행사가지연되는초유의사태 65) 를맞게되었다. 이러한북의태도는국민들로하여금민간차원의공동행사를정치적으로이용하는것으로인식되었다. 그리고 8.15 부산행사는 2차남북정상회담에밀려개최되지못했다. 공동행사는그형식에서개 폐막식, 통일대회, 연회, 체육대회, 부문단체별상봉, 문화공연, 참관등 6개구성을가지고있다. 이중에서가장중요한것이바로통일대회이며, 그런점에서공동행사는정치대회의성격을가지고있음을확인하게된다. 북은늘반미와선군노선을표현하고이를인정받으려했고, 남 65) 당시북한은한나라당모의원의단상인사배열을놓고혼선을거듭했다.6.15 공동선언의주역임을자처하는북한이고보면, 행사의핵심인기본대회의단상좌석에자신들을비난했다고판단하는정당인사를허용하는문제를놓고내부에서조차의견이갈렸던것이다. 결국북한은대회초반에내린 불가 판단을끝까지가지고가게된다. - 64-
은대회의정치색을빼는데온힘을기울인다. 공동행사 7년은남북관계의고비마다에서민간교류가중요한역할을해왔음을확인시켜준다.2002 년 8.15 의서울대회와 2005 년 6.15 의평양대회의경우, 막혀있던당국간교류를풀어내는견인차역할을했음은물론이다. 남북교류가늘어나면서왠만한남북행사는이제거들떠도보지않게되었지만 6.15,8.15 공동행사는아직도관심이쏠린다. 그것은이공간에서남과북의정서가표출되고있기때문이다.2007 년 6.15 평양대회에서의남북의심한마찰도각자가갖고있는정서의극적인표현이기에역사성을갖는다고할수있다. 공동행사는그시기남과북에모여사는사람의정치성과정서가교차하는공간인것이다. 그럼에도공동행사는정치적외풍속에영향받는존재이기도하다.2004 년 8.15 대회는베트남탈북자들의대거입국에대한북한의반발로장관급회담이무산된뒤끝에그외풍으로무산되었으며,2006 년 6.15 광주대회의경우도당국간철도협상의결렬에따른북한의반발정서가반영되어결국북한대표단이남한정부를비난하는성명을두차례나내는등정치바람을입었던것이다. (2) 부문단체별교류와공동행사 부문단체별교류는각부문의특성과성격에따라교류의시기가조금씩다르지만대체로남북공동행사가시작되고정례화되어가는과정에서점차자리를잡아가게되었다고할수있다. 현재부문, 단체별교류는노동계, 농민단체, 여성계, 청년과대학생, 교사, 작가, 언론인, 종교인등에서이루어졌지만교류의수준과내용이균질하지는않은편이다. 남북의노동계는 2000 년 12 월에공동행사형식으로는처음으로 조국통일을위한남북노동자통일토론회 를개최하면서부문교류의선두주자로성장했다.2001 년금강산에서의 5.1 절통일대회 개최이후매번 5월 1일노동절행사를진행해왔고,2004 년에이르러서는평양에서기념대회를개최하였다. 노동계의교류가비교적안정적으로진행될수있었던것은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등남한의양대노총이노동정책과관련한사업에서의차이 - 65-
에도불구하고통일문제에대해서는대체로보조를잘맞추어왔기때문이다. 이는교류에대한사회적합의의좋은예이다. 이들양대노총은북의조선직업총동맹과더불어대표자회의와같이책임있는단위의협의도정기적으로개최하고있다. 노동계교류는점차산업별, 업종별로도분화되어접촉이시도되고있기도한데, 산업별특성에따른협력사업을협의하고있는것은아니며아직은 통일 이라는주제에한정되어있는편이다. 남북의노동계는 2007 년 5.1 절을남한지역창원에서진행하였다. 부문, 단체별공동행사로는남한지역에서개최한첫공동행사다. 남북노동교류는대북지원분야도신경써서챙겨왔다. 백두산삼지연공항을개보수하기위한도로포장용피치의공급은남쪽노동계의지원으로이루어졌다. 그러나남북노동교류는통일문제와포괄적대북지원외에아직노동대중교류에까지나아가고있다고보기는어렵다. 그러자면서로의생활현장에대한방문이더열려야하는데, 북은선택적으로그현장을공개하는수준이며남의산업현장방문은북에서계속미루고있다. 그런점에서남북노동교류는노동자들의생활, 기술, 문화등으로확산되기에는여전히많은과제가남아있다고볼수있다. 남북여성교류는 1991 년에반핵평화를의제로하는토론회를계기로하여시작되었다. 아시아의평화와여성의역할 이라는주제로열린토론회는 1993 년까지계속되었으며이공간에서북을만나게되었다. 당시교류사업을이끌었던남쪽주체들이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를만들었다. 남북여성들은 2001 년금강산민족통일대토론회에서다시만나여성부문의교류의제를발전시켰다. 그결과 2002 년 9월에금강산에서 500 명규모의남북여성통일대회를성사시킬수있었다. 남북여성교류에는남한의여성계대부분이참가한다고볼수있는데,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단체협의회등양대연합단체를포함하여천도교, 원불교,NCC 등종교여성회, 대한YWCA, 여성민우회, 여성의전화연합등전통적인여성단체와진보여성계가참가하고있다. 북한에서는조선민주여성동맹이중심이다.2005 년 9월에이르러 130 여명의남한여성대표들이평양을둘러보며남북여성연단을열고,2006 년 3월과 2007 년 5월에남북여성대표자회의를개최하게되면서남북의여성계는공동행사와대표자회의형식을정착시켰다. 이러한교류속에서여성들이육아와가사, 사회노동의이중적역할에도불구하고그권익은충분히보장되고않고있다는공감을이루어오고있다. 그러나남북여성교류 - 66-
는초기의출발점이었던평화의실천문제를놓고는여전한이견을갖고있다. 미국의침략위협에맞선자위권을주장하는북한여성들과비핵화원칙속에서평화적방법으로평화를이루어야한다는남한여성들의주장사이에서아직남북여성들은논쟁중이다. 청년과대학생들의경우는 6.15,8.15 등주로는공동행사의공간에서이루어진 상봉모임 에서의교류에머물러있다가 2002 년 9월에대중적이면서도독자적인교류형식을만들게되었다. 당시금강산에서 남북청년학생대회 라는형식의교류모임이있었다. 청년과대학생모임은매우정치적인의제를다루었는데, 대체로북의주장이거부감없이받아들여지는공간이기도하다. 남북청년학생교류는 2003 년 9월부터북한역사유적방문행사형식을띄면서평양지역의방문이있었다. 여기서역사유적방문이란, 우리의젊은이들이북의정치활동에노출된다는국민들의우려에대해고심하여내놓은형식으로, 역사와문화소통적인접근이라할수있다.2005 년 5월과 7월에걸쳐 남북대학생상봉모임 이금강산에서개최되면서청년학생분야에서대학생교류가분화되기시작했다. 2006 년 5월에는대학생대표자회의가열렸다. 노동계와여성계에서도보이는형식이지만청년부문에서도공동행사외에대표자협의모임형식이정착되고있다. 남북청년, 대학생교류는의제제한성으로인해아직대중적교류로발전하고있지는않은편이다. 청년층에서도참여자는제한되어있고대학생의경우도그러하다. 남북대학생교류는대학사회의다양한전공분야를살린공동조사나사회현실에대한공동체험등이따라갈필요가있을것이다. 남북의교육교류는 2002 년북한어린이교과서지원사업과 2003 년 130 명규모의전교조소속교사들의평양방문으로첫교류가시작된이래 2004 년 7월에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그리고북한의조선교육문화직업동맹이공동으로주최한남북교육자통일대회로정착되었다. 남북의교육계는 2006 년에 6.15 공동수업 이라는새로운교류형식을실행해본바가있는데, 당시교육내용에대해남북사이에어떤합의가있었던것은아니다.6.15 공동수업은 6.15 공동선언발표6돌기념민족공동행사의일환으로광주에서진행되었는데이때북한의교사들도수업을참관하였다. 당시교총과전교조는서로의차이에도불구하고최소한의합의점속에서공통수업을만들어냈다.2007 년 8월에교총과전교조를포함한교사 100 여명은평양을방문하는행사를진행했다. 더불어북 - 67-
한의교육자들의남한방문을추진하고있다. 남북의교육교류의중요한주제중하나는교육기자재의지원이며, 이는북한교육의발전을위해필요한일이다. 남북교육교류는과학과기술분야교육의공동교재마련을위한교사들의공동모임같은것을개발해낼필요가있으며아울러청소년들의교류를매개해야한다. 그런점에서아직교육교류도대중적교류로는성장해있지않다고할수있다. 남북농민교류는주로는농업용비닐지원운동속에서성장하면서농민대회도만들어가는형식을띄고있다.2001 년 7월에금강산에서남북농민통일대회를개최했고이는부문교류에서매우빠른시점이라할것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등양대농민조직과낙농육우협회, 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가톨릭농민회, 환경농업단체연합회등 13 개전국규모의농민단체가참가하고있으며북에는조선농업근로자동맹이파트너이다. 남북농민교류에대해서농업계는대체로긍정적이다. 남북농민교류는 2004 년에금강산에서다시한번대회를연이후 2007 년 9월에이르러 6.15 공동선언실천을위한남북농민연대모임 을평양에서개최하였다. 그리고 2007 년에는전국농민회총연맹을중심으로 통일농사운동 을시작했다. 논의일부를확보, 북한에보내는쌀을재배하는공간으로정하고, 종교, 시민사회단체들과더불어경작하며판매하자는계획으로올해총 30 여만평에농사를지어수확량 300 여톤을 12 월 5일에북으로보낼예정이다. 남북농민들은북한지역시범영농단지를추진중에있기도하다. 농민교류는다른부문에비해빠르게생활에접근하고있는셈이다. 언론인교류는 2006 년 11 월 28 일과 29 일양일에걸쳐금강산에서열린남북언론인토론회가처음이다.2000 년에언론인사장단의방북이있었고그결과남쪽에서남북언론교류협력위원회를구성하기도했지만실행되지못했다. 그러다가한국기자협회와방송프로듀서연합회, 인터넷기자협회, 그리고전국언론노조등이주축이되어다시북의언론인과교류를시작했고그결실로토론회를열게된것이다. 당시의언론인토론회의경우도 1945 년 10 월에개최된 전조선기자대회 이후처음이라할수있다. 언론인교류는 2007 년 11 월에 30 여명규모의언론인의평양방문으로좀더나아가고있다. 이행사는원래언론인의평양취재요청에대해북이언론인들의방문과참관으로바꾼것인데, 그것이취재형식을띄지는않더라도의미가적지는않은것이다. - 68-
남북작가들은 2005 년 7월에이르러 130 여명의문인들이백두산에서남북문인대회라는이름으로만나면서교류가시작되었다.1945 년 12 월에한설야와이기영으로대표되는북한지역문인들의서울방문이남북문인들의마지막만남이고보면, 백두산문인대회는무려 60 년만의만남이다. 남북문인대회는다른부문에비해늦은형식이지만백두산에서대회를열었다는점에서의미가남다르다. 대개의경우금강산을거쳐평양으로가는발전방향을취해온데다가백두산에서의공동행사는모든부문, 단체들의희망사항이었다는점에서더욱남다르다. 이는물론북한의관심이매우높다는반증이기도한데그런연유인지남북문인들의교류는또 6.15 민족문학인협회라는공동기구결성으로바로나아가게된다.6.15 민족문학인협회는남북문인들의두번째만남인 2006 년 10 월에금강산에서이루어졌다. 이기구에는남한에서민족문학작가회의와한국문인협회가, 북한에서는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와통일문학편집부등이참가하였다. 6.15 민족문학인협회는 6.15 통일문학상 제정과기관지 통일문학 을발행하기로합의하고있는데이또한남북교류에서의미가크다. 남북이공히인정할문학인은누구인지, 또남북이각각다른독자에게내놓을작품이무엇이될지많은이들의관심이높다.6.15 민족문학인협회는세계문인들과의교류에도문을열기로합의를하여, 그간남북만의교류를주창해온여러부문들에게민족교류를국제사회와더불어진행하는모습을보여주고있기도하다. 남북종교인들사이의교류는초기에는대개제3국에서이루어졌다. 개신교 (1986 년, 스위스. 제1차글리온회의 ), 불교 (1991 년 10 월. 미국 LA. 남북불교대표자회의 ), 천도교 (1991 년 10 월. 네팔. 제4차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 천주교 (1995 년뉴욕. 조선가톨릭교회협회와접촉 ) 등이모두그러했다. 종교계의대북교류는주로는대북인도지원사업에서출발했고점차로종교활동으로자리를잡아가고있다. 종교계의교류는종교시설복원에서두드러진성과를내고있다. 처음에조계종에서는북한소재사찰의단청불사를지원하였고곧금강산신계사복원사업을일으켰다. 개성영통사는천태종이복원불사했다. 복원불사의경우, 이는불교교류로서의의미만이아니라전통사찰건축의복원이라는점에서역사문화재복원에대한남북교류의의미도동시에갖고있다. 신계사와영통사는각각금강산과개성에위치하고있어관광객들의방문지가되고있다. 남북교류에서관광사업은대중적교류의중요형식이라는점에서불교계사업은여러모 - 69-
로확장가능성이크다. 유사한경우로북한이 2007 년 6월 24 일에금강산내금강을열었는데이곳에는불교계가중시하는사찰들이소재하고있다. 수려한경관과전통사찰이관광객을끌어모으고있는것이다. 개신교에서는평양제일교회와봉수교회개관사업을진행하고있다. 제일교회는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맡아하고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교육관과평양신학원을신축하고있고성경과찬송가제작도지원하고있다. 평양신학원의운영은대한감리회서부연회가맡아하고있다. 천주교서울대교구민족화해위원회는평양장충성당주일학교건립을지원하고있다. 개관사업과더불어종교인들의공동예배나예불행사도늘어나는추세다.2005 년 5월에남북기독교인들의공동기도회가금강산에서있었으며, 부활절공동기도문의경우남북개신교공동명의로매년발표되고있다. 천도교등민족종교는북한의단군민족통일협의회와더불어 2002 년부터개천절남북공동행사와단군학술토론회를진행하고있기도하다. 남북종교간교류는특히북한사회내적으로종교인들의활력을높여줄뿐아니라, 종교인들의역할에대한적극적인의미부여를가능하게하고있다. 북한의사상체계와충돌하지않으면서도종교인들의활동이보장될수있는좋은길이닦여가고있는것이다. (3) 언론, 방송교류 80 년대말탈냉전이후부터언론계의북한관심은높았으나 66) 본격적인교류는주로방송사들을중심으로 2000 년이후에야성사되었다.2000 년 7월평 66)1989 년언론노련의 남북언론교류특별위원회 1990 년기자협회의 남북기자교류특별위원회 결성이있었고,1988 년 12 월부터서울, 조선, 중앙, 한국, 경향등신문사가북한부혹은전담기자를도입했다.1989 년 3월에 KBS 의 [ 남북의창 ],MBC 의 [ 통일전망대 ] 등프로그램신설뿐아니라통일문제연구소 (KBS), 남북협력국 (MBC) 등방송사내의전담기구가설립하기도한다. 국민의정부들어언론사의방북도잦아지는데,1998 년에는 5월의리틀엔젤스평양공연동행취재등을포함하여 11 건이진행되었다. 북한영상물의경우도 98 년에 SBS 의 < 안중근이등방문을쏘다 > MBC < 온달전 > KBS < 임꺽정 > 등이국내에방영되었다. 통일노력60 년발간위원회편, 하늘길땅길바닷길열어통일로 ( 통일부,2005). - 70-
양통일탁구대회취재를시작으로다양한언론교류가이뤄졌다.8 월에는언론사사장단 46 명이방북하여김정일위원장을면담하고, 남북언론사들간언론교류등공동합의문을발표하기도했다.10 월에는판문점연락소를통한남북신문교환이이루어졌다. 특히방송분야에서상징적인교류활동이활발하게이루어졌다고볼수있는데,2000 년도에만이뤄진남북간의언론교류현황을살펴보면당시의상황을짐작하기어렵지않다. < 표 8> 남북정상회담전후의남북언론교류현황 행사명일시및기간행사내용 평양통일탁구대회취재 2000.7.26-30 -MBC 에서방영 ( 제작진규모 6 명 ) 이산가족상봉방송물제작 2000.8.5-12 -MBC 에서방영 ( 제작진규모 5 명 ) 언론사사장단방북 2000.8.5-12 - 모든언론과방송이보도 현미, 남보원이본평양 2000.8.14 -MBC 에서방영 ( 제작진규모 5 명 ) 금강산랠리 2000.8.15 -MBC 에서방영 ( 제작진규모 28 명 ) 남북교향악단합동연주회 2000.8.20-22 북한현지생방송백두에서한라까지 한민족특별기획백두에서한라까지 2000.8.26-9.16 2000.9.12 남북신문교환실시 2000.10.2-5 SBS8 시뉴스평양뉴스 2000 다큐멘터리 < 러시아원동지방에사는조선범 (1)> 2000.10.9-14 2000.11.3 -KBS 에서방영, 서울에서개최 - 공연단 ( 북 132, 남 106) - 추석명절에백두산, 한라산, 서울을연결하여 KBS, 북 조선중앙방송위 와공동방송백두산, 서울, 한라산 3 원방송 ( 제작진 22 명 ) -KBS 에서방영. 남북공동제작 ( 제작진 22 명 ) - 판문점연락사무소를통한남북신문교환 -SBS ( 제작진 29 명 ) - 노동당창건기념행사, 남포고속도로, 노벨평화상관련반응등보도 - 제작 EBS, 방영조선중앙 TV - 최초의 TV 남한프로그램북한방영 - 71-
행사명일시및기간행사내용 남북인터넷바둑대회 2000.12.23-24 - 남북한및중국, 일본, 러시아등 5 개국에서 12 명참가한인터넷실시간바둑게임 - 남한홍맑은샘 (20) 아마 7 단이북한의박행운 (15) 아마 6 단을꺾고우승 주 : 박영정 오양열 이우영, 남북문화교류채널의제도화방안연구 ( 서울 :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2005),34-35 쪽. 언론및미디어분야에서는주로남한기자및제작진들의행사방북취재가주를이루었고, 방송의경우조선중앙텔레비전과공동제작하는경우도눈에띤다. 행사취재와별도의기획취재가상당히많이제작되고있는데이는북의협조가있었기에가능한일이기도하지만그보다는방송사들의높은의욕이더크게작용한것으로보인다. 언론이나방송매체들이만들어내사업들을살펴보면다음과같다. 2001 년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을맞아 KBS 는북한의조선중앙TV 스튜디오에서 9시뉴스의일부를생방송하였다.8 월에는자연다큐 백두고원을가다 를제작했으며 10 월에는 북의 10 대민족문화유산 이라는제목의 역사스페셜 을제작하였다. 이같은기획취재는 여기자북한방문기평양 10 박 11 일 이라는제목으로 MBC 에서도 2001 년 3월에제작한바있다. 2002 년의경우, 행사취재로는 KBS 가방영한 9월의남북통일축구대회나추석맞이남북교향악단연주회,MBC 가이미자와윤도현을출현시켜만든평양특별공연 우리는하나 가있지만, 통일축구방영을제외하고는사실상각방송사가기획한공연물이라는점에서기획취재의일종이라할것이다. 본격적인기획취재는 KBS 역사스페셜고인돌편과 MBC 의 통일염소의대장정 - 남북농업교류 1년의기록 과북한의아시아경기대회준비상황위성생방송이있다. 대하드라마 제국의아침 1,2 회가 KBS 에의해백두산에서촬영되었다. 이러한기획취재는 2003 년에도이어졌다.KBS 의 남북경협현장- 평양, 남포그리고개성 이 10 월에제작, 방영되었다.2004 년 1월에 MBC 가제작한 북녘의음식제작 - 72-
이나그해 6월에방영한 고구려는살아있다 의경우도마찬가지이다. 대중가수의평양공연은 2002 년이후에도계속이어졌는데,2003 년에류경정주영체육관개관기념통일농구대회와더불어열린남북합동공연에서가수이선희와조영남이출연한바있으며,2005 년에 SBS 는조용필평양공연을성사시키기도했다.2003 년에 KBS 가성사시킨평양노래자랑은프로그램자체가서민적이기에평양을더가깝게만들어주었다. 방송이만들어낸남북교류의두드러진성과라할만하다. 그밖에인터넷매체인오마이뉴스가 2005 년에만든평양마라톤대회와월간지민족21 이 2007 년에성사시킨평양-남포통일자전거경기대회는제 3매체가남북교류에참여하는사례이다. 이러한방송교류프로그램의성사는남북사이에첨예한주제를피하면서도대중공연, 문화유적등민족공통의주제들을잡아가는데서성공하고있다. 이러한프로그램들은남한사회에서남북관계를긍정적으로바라보게하는기회를제공한다. 다만, 남북상호간의방송청취나취재기자의상주등방송을통한문화소통의확대는여전히요원하다. 현단계에서는방송프로그램제작에서현지로케나북한방송사와의공동제작의형태를주를이루고있다.KBS 가 2005 년부터새롭게시도하여 2007 년에방영한드라마 사육신 의북한주문제작의경우, 방송교류를한단계높이는기회라할만하다. 한편, 한국방송위원회가 2004 년과 2005 년에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아테네올림픽, 동아시아축구대회등을중계, 지원한것은사업적으로는스포츠에대한북한주민들의기호를충족시키는좋은계기가되었고방송기관과기관간의협력가능성도넓혀주었다. 방송위원회는 2005 년에제2회남북방송인토론회를개최하고북과더불어방송영상물소개모임도가졌다.2006 년에는독일월드컵경기를평양에위성으로중계했다. 한편 2000 년 8월언론사사장단의방북과더불어구성된 남북언론교류협력위원회 의경우, 남북언론교류의제도화측면에서주목받았으나답보상태에있다. 개별적으로는 2002 년부터연합뉴스가일본의조선신보를통해조선중앙통신사기사자료를제공받고있다. 조선신보는북한이자신의정책을대외적으로설명하는창구이기도해서정보소통에도움이된다. 조선신보와의기사교류는월간지 민족21 에서도추진하고있다. 민족21 은평양의통일신보와의기사교류를 - 73-
성사시키면서방북취재 (2007.9) 를이루어내기도했다. 2007 년에인터넷매체인통일뉴스가북한에관한기사나사진, 동영상등콘텐츠교류를추진하고있는데, 이는남북사이의문화산업이형성되고있는추세를반영하는것이다. (4) 문화교류 ➀ 공연과전시행사남북정상회담이후공연행사분야남북교류는 2001 년상반기에만창극 < 춘향전 > 방북공연, 창극 < 황진이 > 공연, 제19 차 4월의봄친선예술축전, 김연자공연, 민족옷전시회, 남북공동사진전 등매우활발하게진행되었다. 특히김한길문화관광부장관의방북은최초의 남북문화장관회담 을성사시키는등의미가있었다. 또한개인차원의초청에의한방북공연이나방남공연, 제3국에서의공연 전시가대폭증가하여본격적인남북문화교류의시대가열렸다고할수있다. 공연분야는앞에서도논의된것처럼주로방송사와연계되어있다.1 회성행사라는점에서북이받아들이기에도부담이없고, 수익도올릴수있어무난한편이다. 이러한공연은주로평양에서이루어지는데, 평양시민의경우문화수준이높은편이다. 북한으로서도충분히소화할수있다는것이다. 북한이남한에내려와공연한것으로는 2000 년 평양소년예술단서울공연 (2000.5), 평양교예단서울공연 (2000.6), 조선국립교향악단서울공연 (2000.8) 이있었고 2002 년에는 8.15 행사의일환으로무용을중심으로하는북한공연이 SBS 생방송을탔다. 북한문화예술인의남한공연에서보듯이교예단과같은분야는강점이며, 무용은독특한자기세계를구축하고있다. 교향악단의경우도남북공동공연이가능한수준이다. 북한의윤이상음악연구소의경우는난해하다고알려진윤이상음악을소화하고있다. 북한으로서도경쟁력이있는분야이다. 종합예술이라할수있는가극이나오페라의경우는 2005 년에야성사되었다. - 74-
2005 년 6.15 민족통일대축전행사의일환으로북한은 춘향전 을, 남한은 가극금강 을공연하였다. 가극금강 은갑오농민전쟁을시대적배경으로하고있어북에서도호응이높았다. 반일독립운동이나민중을소재로한작품은비교적접근이쉬운분야로분류할수있다. 뉴서울오페라 의 아, 고구려- 광개토대왕 도 2005 년에평양에서공연하였다. 가극과같은공연형식은북한의수준이매우높다고평가되고있어북에서도적극적이다. 역시경쟁력이있다. 전시의경우 2002 년 1월에 북한그림소장작품전시회 가미국뉴저지주뉴욕개럴리에서개최된바있다. 북한미술계의최고영예인계관화가김성근, 인민예술가정창모, 공훈예술가김기만등의북한미술작품 60 여점이전시되었다. 또한북한국적의작가손국연이국내초청되어실험적인성격의퍼포먼스공연이개최되기도하였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2002 년 12 월과 2004 년 4월에개최한 특별기획전-평양에서온무덤벽화, 국립중앙박물관의 북한국보유물전 (2006. 서울 ) 등은주로고대역사문화재를소재로한것이다.6.15,8.15 공동행사의공간에서도미술과사진등전시회가열려왔었는데,2002 년 8.15 당시의북한미술전은북한미술을종합적으로처음선보이는자리여서수준있는다양한작품이선보였다. 북의대외전람총국이참여한남북전통공예전 (2005) 의경우생활문화에접근한다는점에서의미가있다. ➁ 영화 영상 1990 년대말까지답보상태에있던남북한영화교류는 2001 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에서남북한영화가각 6편씩상영되면서진전을보이기시작했다. 북한영화 < 달려서하늘까지 >,< 살아있는령혼들 >,< 푸른주단우에서 >, 남한영화 < 단적비연수 >,< 세기말 >,< 유령 > 등이상영되었다. 2002 년에는이두용감독의 < 아리랑 > 이시오리엔터테인먼트주관으로평양국제영화회관에서영화관계자를대상으로 1차시사회를개최하여열띤호응을얻어냈다. 이어 2003 년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대학, 김형직사범대학, 음악무용대학등 4개대학생과북한문화예술인들을대상으로 2차시사회를개최하였고, 영화종료후북한영화 < 살아있는령혼들 > 도동시상영되어좋은반응을얻어냈다. - 75-
2003 년 4월 25 일부터 5월 4일까지개최된 전주국제영화제 에서는북한영화 5편의상영이시도되었으나통일부의부분삭제요구로 < 살아있는령혼들 > 만이상영되었다. 같은해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북한영화 < 내고향 >,< 신혼부부 >, < 대동강에서만난사람 >,< 우리렬차판매원 > 등을비롯한 6편이상영되었다. 애니메이션부분에서는 하나로텔레콤이 6억여원을투자하여 3D 단편애니메이션 < 게으른고양이딩가 > 를완성하였고, 이어삼천리총회사와 3D 단편애니메이션 < 뽀롱뽀롱뽀로로 > 를제작하였다. 또한 에이콤이 4 26 아동영화촬영소와극장용장편애니메이션 < 왕후심청 > 을완성하였고,2005 년도에국내극장에서개봉하였다. 한편, SKY-CK 가 2002 년 8.15 공동행사당시서울을찾은북한무용수조명애를모델로 2005 년에광고촬영을성사시킨것은문화사업의확장가능성을보여주는사례라하겠다.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가영상물로준비하고있는 조선요리 100 선 의경우,MBC 의 북녘의음식 에이은것으로많은이들에게교류의묘미를알릴수있는기획이었다. 남북간만남에서가장많이화재에오르는소재가바로음식이다. 이는세상사전반을나누지못하는북한의정보소통체계에서비롯되는것이지만그런여백을음식문화로채워줄수있다. (5) 체육교류 체육분야에서는국제대회에서의남북단일팀구성을위한접촉이가장많았다.1964 년도쿄올림픽단일팀구성을위한남북체육회담이개최되었지만결렬된바있다.1991 년의제41 회세계탁수선수권대회와제6회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의단일팀구성이성공적으로마무리되면서하얀바탕의하늘색한반도지도가그려진새로운깃발이만들어졌다. 이깃발은지금도통일민족의상징적의미를담고있다. 체육교류가남북교류에서끊이지않고이어지는분야로자리잡고있는것은각종목별국제대회가끊이지않는데다가남북이공통으로좋아하는축구같은종목이있기때문이다.2002 년 9월의남북통일축구는유럽상공회의소가, - 76-
2003 년남녀통일축구는제주도가,2005 년 8.15 경축남북통일축구는 6.15 남측위원회 가맡아진행하였다.2007 년 4월에는북한의 17 세이하청소년대표가제주도를비롯한남한지역에서전지훈련을하고돌아갔으며 5월 1일에는남북노동자축구대회가있었다. 체육분야는개최지가중요한만큼지방자치단체가남북교류에나서게하는기회를주기도한다.2002 년부산아시안경기와 2003 년의대구유니버시아드, 2005 년의인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는각자치단체가국제대회를유치하면서북한선수를부르는경우이고 2003 년의제주평화축전에서의축구, 마라톤, 태권도등경기나 2006 년 3월춘천의남북아이스하키친선경기는자치단체고유의사업이었다.2006 년에북한여자축구가세계 1위를하면서북한주민들의사기가무척높아졌는데, 북한으로서도경쟁력을키우고싶어하는의지가있다. 태권도의경우도동일한데, 세계태권도연맹을남한이맡고있고, 국제태권도연맹을북한이맡고있을만큼상호간종주국의자존심이있다. 아래의표에서활발한교류의현장을살필수있다. < 표 9> 남북정상회담이후남북체육교류현황 행사명일시및기간행사내용 제 2 차금강산랠리대회 2001.7.29-31 남북통일축구경기 2002.9.5-8 태권도시범단교환 ( 평양 ) 2002.9.14-17 태권도시범단교환 ( 서울 ) 2002.10.14-17 부산아시아게임북한선수단및응원단파견 - 차량 56 대 ( 경기차량 23 대 포 함 ),241 명참가 - 서울에서 개최. 북한 선수단 49 명참가 - 제7차남북장관급회담실무회 의에 따라 조선태권도위원회 ( 황봉영 위원장 ) 의 초청으로 남 35 명, 북 30 명참가 -평양행사의답례행사 - 62 명 ( 남한 41 명, 북한21 명 ) 참가 -선수단및응원단 668 명참가 2002.9.22-10.15 -북한방문단중최대규모 - 77-
행사명일시및기간행사내용 아오모리동계아시안게임 개폐회식공동입장제22 회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북한선수단및응원단참가 류경정주영체육관개관식및통일농구대회 제주민족통일평화 체육문화축전 2003.2.1-8 2003.8.20-9.1 2003.10.6-9 2003.10.23-28 - 일본아오모리에서개최 - 남 110 명, 북 40 명참가 - 총 527 명참가 ( 선수, 임원 197 명, 응원단 303 명, 기자 24 명, 장웅 IOC 위원일행 3 명 ) 참가 - 1,072 명의남한측인원이 75 대의차량으로경의선임시도로육로방북 - SBS 평양에서통일농구대회중계 -북한선수단 190 명참가 - 축구, 탁구, 마라톤종목의체육경기, 씨름, 그네, 널뛰기종목의민속경기, 태권도시범등 7 개종목참가 아테네올림픽공동입장 2004.8.14 8.15 민족대축전남북남녀통일축구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평양오픈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북한참가오마이뉴스평양마라톤대회남북강원도아이스하키친선경기대회 2005.8.14 -미술, 수공예품전시회개최 -남한 136 명, 북한 50 명참가 - 단가 < 아리랑 >, 단기한반도기 -남자 A매치. 서울상암경기장 - 여자 A 매치. 파주공설운동장 2005.8.26 - 남한여자골프 30 명참가 2005.9.1 제 4 차남북프로권투대회 2006.6.1 독일월드컵위성중계지원 - 북한선수단과응원단 140 명참가 2005.11.24 - 남한 144 명참가. 평양 - 남포 2006.3.2 - 춘천과강릉경기 2006.6.12 - 밴턴급챔피언김광옥 ( 북 ): 멕시코의토네스 -오수현( 남 ): 장성애 ( 북 ) - ( 남 ) 방송위원회-조선중앙방송위원회 - 78-
행사명일시및기간행사내용 태국차야퐁컵국제친선청소년축구대회남북단일팀참가 남북유소년축구단상호교환경기 2006.10.22-2007.6.1-2007.11.8 -( 남 ) 남북체육교류협회 -( 북 )4.25 체육단 - 4.15 축구단선수 25, 임원 8 명강진방문 - 인천유소년축구단평양방문 (6) 학술, 출판교류 한국학관련학술행사에서주목되는것은국어분야의남북학술행사이다. 1990 년대중반이후 10 여년을지속하고있고, 그주제가더욱심화되고있기때문이다. 이중에서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을빼놓을수없다.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의경우는남북의언어학자들이참여하는문화통합사업으로남북당국에서도적극지원에나서고있어문화사업으로는성공적사례다. 이밖에민족어의정보처리를위한표준화문제, 전문용어처리문제, 자료교환을위한문자코드처리문제, 효율적인자판활용문제등이논의되고있다. 역사분야의학술행사역시남북정상회담이후에꾸준히진행되고있다. 고대사분야는문화와학술분야에서남북이쉽게접근할수있는매개라할수있다. 대표적학술교류단체인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는주로일본문제와고구려문제를통해교류를이어갔다. 일제약탈문화재반환공동학술토론회 (2004.2. 평양 ), 고구려고분군세계문화유산등재기념학술토론회 (2004.9. 금강산 ), 고구려고분군남북공동전시회 (2005.9), 그리고개성의세계문화유산등재지원을위한공동학술회의 (2006.4) 등이대표적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이 2006 년부터진행해온평양안악궁터발굴조사사업도북과쉽게접근할수있는분야이다. 문화재청은유네스코를통해고구려고분군보전을위한재정지원을계속해오고있다.2005 년 10 월에는일본이약탈한북관대첩비를반환받아 2006 년 3월에북한에인도하기도했다. 개성의만월대발 - 79-
굴조사도 2007 년 11 월현재진행중에있다. 안중근의사유해발굴사업이남북사이에합의되면서과거일제시기징용, 징병으로끌려간동포들의유해발굴사업도 2007 년에이르러조사연구에서부터시작되고있다. 남북사이에저작권관련협의가진행되어, 이문제도점차제도화단계에들어서고있다.2005 년 3월에 반갑습니다 와 휘파람 등가요, 홍명희의 임꺽정 과홍석중의 황진이, 그리고 고려사 등서적의저작권을인정하는협약이있었다. 홍석중의 황진이 는남한에서판권을사들여영화로제작하였다. 북한의가요를남한의대중가수들이불러음반을만드는일도 3년에걸쳐진행되어 2007 년 5월에첫발을내디뎠다. 저작권관련협의는남한의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북의내각산하기구인저작권사무국과협의를진행하여일을처리하고있는데, 아직당국간협의는진행하지않고있다는점에서본격적인사업확대에대해서는부담을갖는다고판단할수있다. 또한북한문화물의남한이전문제로만협의가진행되고있어쌍방향소통을고려할때이또한지체되고있다. 저작물출판관계는 2001 년에평화문제연구소와북한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북한향토지리정보를담은조선향토대백과의공동출판계약이후 2004 년까지평양, 함경남도지역을포함한 17 권 ( 총 20 권 ) 을출간한것이눈에띤다. 그리고한국학술진흥재단이추진하고있는 남북학술용어집 공동연구나황토출판사의 북한역사유적유물총람 편찬과같이접근성이쉬우면서도향후교류의질을높일수있는주제들이속속발굴되고있다. 특히기술분야의경우전문서적을상호간에나누고, 필요하다면학술토론회와같은형식을구사하면서출판사업까지진행한다면서로에게도움이되는방향이라하겠다. 김책공대전자도서관에는남한의컴퓨터서적이상당수비치되어있는데, 이것은기술서적의북한수요를이해하는단초이다. (7) 과학기술, 환경분야 그동안정부차원의협력채널이미흡했기때문에민간과의협력을통한 우 - 80-
회적인협력방법 으로추진되어온과학기술분야의교류역시북한의대내외정책및환경변화에따른불확실성에도불구하고현재까지많은진전을이루어왔다. 남북간의과학기술교류는 1990 년 9월제1차남북고위급회담을계기로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주축이되어민간협력차원으로시작하였다. 67) 하지만그실적은상당기간동안미진해왔다. 다른어느분야보다도실질적인성과가기대됐음에도본격적인협력이이뤄지지못한것이다. 이후 1997 년 3월에는 남북과학기술국제학술회의 가개최되었고,2000 년정상회담이후부터이분야에민간의첫투자 68) 가이루어졌다그간남북과학기술협력사업은민간차원이협력에따라북한의협력의지와반응이있을때만가능하였다. 현재까지는정부간협력보다는기관간협력경로를통하여극히제한된분야에서의협력활동만이지원되고있는실정이다. 주된협력분야에있어서도첨단기술분야에서의공동연구보다는씨감자, 옥수수등북한의식량난해결, 자생식물개발, 과학용어사전개발등기초적인수준에머물고있는것도사실이다. 하지만남북과학기술협력사업은과학기술의비이념적 비정치적특성을가지고있기때문에앞으로남북협력의활성화기대및통일기반구축에일조를할수있으리라평가된다. 더욱이 2007 남북정상회담을계기로과학기술분야교류는더욱늘어날것으로전망된다. 정상회담을통하여 2005 년 7월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이후진전되지못해왔던남북과학기술실무협의회를구성, 정례화되리라본다. 뿐만아니라 1999 년이후부터수행해온남북과학기술교류협력사업을더욱확대하여공동연구사업, 인력교류및학술회의개최, 북한의과학기술정보및동향분석제공, 식량 질병등의현안과제해결을위한과학기술적해결방안을모색하는한편, 폭넓은범위에서민간협력사업에대한정부차원의지원도대폭강화될것이다. 69) 67)1980 년대말 북한과학기술용어조사연구 등북한관련연구가시작되었으며, 제3국에서의남북공동학술대회개최및일부분야에서의공동연구가수행되기도하였다. 68) 경북대학교가 북한적응형슈퍼옥수수남북공동연구개발 과제를추진하는과정에민간차원에서 1억원이투자되었다. 69) 과학기술부는향후남북과학기술실무협의회구성을위해통일부와협의하는동시에, 남북과학기술협력센터를설치하려는계획을가지고있다. - 81-
< 표 10>1999 년이후추진된남북과학기술분야협력사업 ( 정부지원중심으로 ) 추진년도내용추진기관 1999 년도 2000 년도 2001 년도 북한적응형슈퍼옥수수남북공동연구개발남북한인공씨감자생산, 재배기술교류협력연구북한지역농작물의병충해구제용농약시험연구남북공동연구및컴퓨터요원양성시범협력사업북한의최근과학기술동향조사분석연구북한과학기술정보전용웹사이트구축및운영 2002 년도남북공동과학기술용어비교조사연구 2003 년도 2004 년도 자생식물분야남북공동연구협력을위한기반조성사업남북한과학기술협력과제도출및북한과학기술연구회운영북한의풍력자원및풍력기술개발조성을위한공동연구 경북대학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포항공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 박택규 )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인하대학교 1/100 만한반도수치지질도작성연구한국지질자원연구원 2005 년도 2006 년도 남북도로교통건설기술공통시방서작성 백두산천지지질기록을이용한동북아시아지구환경변화에대한남북공동연구타당성조사북한주민생필용정밀화학제품생산시험연구 북한 IT 네트워크에대한연구 남북협력우선과제발굴을위한북한과학기술분헌동향분석 자연사박물관전시물과교육프로그램의남북교류사업 국제협력을통한해양과학기술기반구축사업 교통개발연구원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고려대학교 청운문화재단 / 계룡산자연사박물관 - 82-
추진년도내용추진기관 2007 년도 북한산림생태계복원을위한과학기술협력 남북환경협력은 2007 남북정상선언에서의 환경협력 이명시되면서 2003 년국제기구 UNEP(United Nations EnvironmentProgramme. 국제연합환경계획 ) 와북한국토환경보호성이공동으로작성한환경생태보고서의 16 개환경개선우선사업이점차추진력을갖게될것으로기대한다. 여기서 16 개환경개선우선사업은산림분야 3개사업 ( 지속가능한산림관리를위한전략수립, 땔감지역관리시범사업, 산림관리정보센터시범사업 ), 수질분야 4개사업 ( 대동강통합수질오염모니터링시스템구축, 물보전워크샵, 도시폐수및순환처리시스템시범사업, 압록강오염방지사업 ), 대기분야 3개사업 ( 통합대기환경모니터링시스템구축사업, 평양열발전소집진설비도입사업, 주요도시대기보전워크샵 ), 토지분야 2개사업 ( 토양오염조사와모니터링을위한능력배양사업, 토양보전워크샵 ), 생물다양성분야 4개사업 ( 생물다양성자원목록작성및평가사업, 생물다양성조사및관리사업, 산림복원사업, 해양보전지역관리증진사업 ) 이며, 이사업에는 UNEP 가국제신탁기금 124 억원, 환경부와통일부에서출연한 40 억원이이미출연되어있는상태이다. 남북사이의환경협력은주로는산림분야에서비교적뚜렷한성과를내고있는편이다. 지난시기 평화의숲 이추진해온양묘사업과조림산업이금강산육묘장 (2007 년기준 78 만본생산 ) 과밤생산단지 (30 만평규모 ) 로정착되어있고,2007 년부터는평양의순안양묘장 ( 민화협.10 정보.4 월준공 ), 평양상원군양묘장 (12 월착공.10 정보 ), 개풍양묘장 (10 월. 경기도.5 정보규모 ) 등이마련되었다. 병해충방제사업의경우도남북강원도의협력사업일환으로금강산병해충방제사업이 2001 년부터추진되어지금까지진행중에있고,2007 년들어서는평양의동명왕릉지구와용악산, 대성산지역에서솔잎혹파리 1,400 정보, 잣나무넓적잎벌 1,000 정보규모로방제사업이진행된바있다. 2006 년 5월 19 일에진행된남한의녹색연합, 환경연합, 환경정의, 녹색교통과북한의 6.15 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환경분과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간의접촉 - 83-
은환경전문단체의본격적인교류라는점에서의미를부여할수있다이회의에서남한은백두대간보전과백두대간생태보고서편찬사업, 대동강수질개선사업, 황사방지를위한남북공동모니터링과예, 경보시스템구축등 3개사업을제안한바있다. 환경분야사업은정부-민간사이에 지속가능한개발 개념에서공감이형성되어, 개성공단등북한지역개발분야의환경영향평가를출발로남북협력사업전반으로확대되는추세이나, 당분간은평화문제와결부되어 평화환경생태 의포괄개념으로접근되리라본다. 한강하구개발문제나 DMZ 보존의경우가중요한사례가될것이다. (8) 지방자치단체교류 지방자치단체의대북사업은대북지원사업에서형성된관계에기초하여사회문화교류분야에서도영역을넓혀가고있다는점에서남북관계의한측면을반영한다. 지방자치단체의대북사업은 1998 년제주감귤 100 톤을지원한제주도가처음으로시작했으며 2000 년에강원도가그뒤를이었다.2007 년 10 월현재, 광역시도중에서는경기도와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인천시, 서울시, 부산시가협력사업을진행하고있으며기초자치단체로는충북제천시가사업에참여하고있다. 이중사업범위가넓고활발한곳으로강원도와경기도를꼽을수있다. 두지역모두접경지역을끼고있다는점에서남북교류협력은자연스러운사업이다. 강원도는금강산병해충방제사업 (2001 년-현재 ) 에서부터연어공동방류 (2001 년-2004 년 ) 와연어부화장건설 (2003), 남북강원도민속문화축전 (2005.9. 금강산 ), 북쪽아이스하키선수단초청친선경기 (2006.3) 등사회문화교류와인도지원, 협력분야에서공동사업을진행중에있다.2014 평창동계올림픽유치를위한공동의노력 (07.1-7) 도진행했으며남북조선협력단지가들어설안변지역에서연어사료공장건설을추진하고있다. 남강원도의설악산과북강원도의금강산 - 84-
연계관광의경우, 장기계획속에넣고검토해온사업으로남북관계가좋아지면현실화될가능성이매우높다. 개성지역의통행, 통신, 통관절차가개선되고 DMZ( 비무장지대 ) 의평화 환경구상이논의에오르게되면설악-금강연계관광지구발전도현실화될것이다. 강원도와더불어접경지역 2대축의하나인경기도는 농업협력및농촌지구사회개발협력사업 을특징으로한다.2005 년첫해벼농사시범농장 ( 평양시룡성구역 ) 을대략 9천평정도로시작했고, 수확성과가좋아그이듬해에장소를옮겨 30 만평 ( 평양강남군당곡리 ) 으로대폭늘였다. 벼농사와더불어농촌개발사업이따라갔고주택, 탁아소, 진료소, 소학교등에대한지원이추가되었다. 전형적인농촌분야사업형식이다. 산림조성사업의경우는남쪽에서접근성이좋은개풍군지역을선정 (2007.8),10ha 규모의양묘장을건립하고있다. 여기서대략 100 만본수준의묘목을생산할수있다. 산림조성의경우남북사이에긴요한사업으로확인되고있는만큼지방자치단체들이사업에참여하기는유력한분야이다. 경기도의사회문화사업은아직초기단계다.2005 년에임진각일대에서세계평화축전을개최하였고이기간에북쪽과공동으로윤이상음악회를개최하고자했으나성사되지는못했다. 남북관계에서비약적발전이있었던 2005 년에평양의 6.15 통일대축전 당시우리의공연작품이었던가극 금강 소요비용을지원하였다. 경기도는 2007 남북정상선언 이후후속방향으로경기북부지역신종합발전구상수립, 한강하구공동개발, 개성공단협력단지조성,DMZ 평화, 생태공원조성, 경제특구건설참여를통한남북경협사업추진, 남북교통인프라연결 통합등을설정했다. 중앙정부차원의남북관계의발전계획속에지방정부의구상이연결될수있으리라짐작할수있다. 경상남도는경기도의경우와유사하다고할수있다. 우선평양강남군장교리에벼육모공장 (600 평 ) 과채소비닐온실 (2000 평 ) 시범재배를시작했다. 사업이성과를내면서육묘장규모를늘리고종자의공동개발연구등사업을확장했고뒤이어장교리소학교건립을지원하고있다. 농업에서농촌을포괄하는사회개발사업방향을추진하고있음을알수있다. 전라남도와전라북도는농도 ( 農道 ) 로서농업분야에지원, 협력사업을진행해왔다. 전라남도는못자리용비닐, 모내기자재, 비닐온실 (4000 평 ) 과저온창고 (80 평 ) 를지원했다. 전라북도의경우주로농기계와농업용비닐등농자재지원에중점을두고있다가 2007 년에이르 - 85-
러평양남포시대대리지역에양돈장건립을지원하기위해종돈 500 두를수송했다. 전북도는지원사업의영역을축산뿐아니라채소, 유실수지원쪽으로늘릴계획을가지고있다. 사회문화교류사업이매개되어협력사업에참여한단위로는인천과부산을들수있다. 인천은 2004 년에개최된 6.15 공동선언발표 4돌기념우리민족대회 를유치하면서대북사업의첫물꼬를텄다. 당시인천행사는 6.15 기념행사에서는처음으로개방형행사를개최했기때문에, 인천시의참가폭이비교적큰편이었다. 북측, 해외측대표단환영연회가인천시청사에서열렸는가하면 6.15 기념마라톤에서는남북이함께달렸으며,SK 야구장을개방하여인천시민들이남북합동공연예술을관람할수있었다. 우리민족대회 이후인천시는페인트와도로포장용피치등대북지원에나섰고그인연으로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북한선수단과응원단을초청 (2005.9) 하게되었다. 대북사업에대한인천시의구상은개성과인천의연계구상이다. 초기에인천은북쪽개풍군내에 2천만평규모의인천시전용공단을만들고물류수송로로강화군과북한개풍군고도리사이의 1.4km 바다를잇는교량의건설을계획한바있다. 이러한구상은 2007 남북정상회담에서는해주특구개발합의와해주항활용으로나타났는데, 인천시로서는이에맞춘설계변경이충분히가능할것이다. 부산의경우그출발은 2002 년에개최된아시아경기대회이다. 당시북한의선수단과응원단이부산으로대거내려오면서부산은활력있는남북관계의대명사로언론에보도되었다. 부산시는아시아경기대회이후 2003 년경별도의남북교류협력단을꾸려방북, 원산항과남포항등지의해운항만사업, 다시마분말공장, 수산물가공공장등수산협력사업, 신발과섬유등의투자사업을협의한바있으나결실을보지는못했다. 부산시의대북사업은 2007 년 7월 11 일에남북교류협력조례가제정되고, 부산시장과시의회의장등이참여하는남북협력위원회가구성되면서가시화되었고, 첫사업으로 8월 4일김일성대학생명공학부내에 80 만캡슐을생산할수있는항생제시설건립이있었다. 부산시는 2008 년에부산에서열리는세계사회체육대회와부산국제연화제에북쪽의참가를요청하고 2007 정상회담이후의 SOC 지원및조선협력단지사업에부산지역조선기자재업체의투자와항만관련투자를추진할계획이다. 경상북도는 2004 년북녘유적답사용 33 인승버스지원이후도자체로대 - 86-
북사업을추진하지못했지만 2007 정상회담이후부터는대북사업의단계별참여방안을내놓는등사업준비에들어갔다. 경상북도의계획에따르면우선안동하회탈춤과북청사자놀이의상호교류, 신라 고구려사공동연구, 경주 개성왕조유적발굴조사, 전통민속 민요대회개최등민간중심의문화, 관광, 체육, 학술, 인도주의차원의만남을추진하고,2 단계로북한산림을복구하는사방사업과벼육묘공장설치기술지원, 우수한약재생산가공단지를조성한다는구상이다. 중장기사업계획으로는포항을거점으로한동해안철강벨트를조성하거나동해안해양크루즈개발과두만강지역개발참여등주로는경제 산업분야협력사업이다. 기초자치단체의남북협력사업으로는충북제천시가통일농수산사업단과함께하는북고성군삼일포과수원조성사업이있다. 과수원 1만평소요비용 1억 3천만원중 1억원을시민모금했으며, 삼일포농장관리동비용 6천만원은교류협력기금을사용하였다. 시예산은 3천만원을들였다. 이사업은시행정당국이나섬으로공신력을키우고, 이를바탕으로시민모금을원활히함으로서시민참여형대북사업을만들어냈다. 제천시는 2004 년에과수원을세웠다. 지방자치단체의대북사업은사업내용에서의다양성과복합성, 예산의안정성, 시민사회와의결합과시민의참여, 기업의공동투자등향후대북교류의지향을전체적으로수용할수있는형식으로성장하고있다. 현재의위치나미래의방향을놓고볼때살필수있는특성으로다음과같은것들이있을수있다. 우선첫째로는남북협력사업이인도지원, 사회문화교류, 경제협력등을포괄하는종합구상으로발전한다는것이다. 여기서경제협력이특히주목되는데, 이는지방자치단체의행정목표중지역경제활성화가매우중요한지표로되기때문이다. 그런점에서지방자치단체의남북관계는지방성장전략의일환으로포착되기도한다. 경기도와강원도는물론이고인천시와경남, 경북의경우, 도내부의특성화된산업영역을기초로북과협력하려는구상을가지고있다는점에서이러한경향은향후에는더욱뚜렷이드러날것으로보인다. 둘째로는지방자치단체대북사업은적정규모의대북사업을감당할수있는수준에서예산을안정적으로확보한다는데있다. 이는지방자치단체들이교 - 87-
류협력에대한조례를제정하고이에맞게기금을마련하는제도를속속수립하고있기때문에가능하다. 한마디로지방자치단체의대북교류는제도화단계로진입하고있으며그기반이탄탄해지고있다는것이다. 이미남북협력조례를제정한광역시도단위로는강원도와경기도, 전라남도, 서울시, 인천시, 경상남도, 부산시가있다. 전라북도의경우는그간에조례없이별도예산을세워대북지원사업을펼쳐왔는데, 향후사업의안정성을위해조례를제정하고남북교류협력위원회도구성하기로했다. 경상북도의경우도그간논의해오던조례제정건을 2007 년이내에처리할수있을것이라자신한다. 그것은 2007 년남북정상회담의영향도있겠으나지방자치단체의대북사업이지역사회에서이미공인받고있는점이더크게작용하고있다. 셋째로는지방자치단체협력사업이농업분야에서출발하여농촌개발로확장되면서남북사이의신뢰를높이고있다는점이다. 대개의지원사업이북쪽주민에게좋은인상을주게마련이지만농업은특히흘린땀만큼그실적이나오는분야라는점에서특정의이념이개입할여지가상대적으로약하다는것이강점이다. 게다가농민의정서가작용하는신뢰의정도도다른사업과비교해서높은편이다. 이러한기초위에서아이들의교육문제, 의료환경의개선문제등복지분야에서의사회개발은남북을더좋은유대관계로발전하게한다. 넷째로는지방자치단체지원대상지역이상호간연관이높도록근접거리로집결하고있는점도눈에띈다. 경기도와경상남도가지원하는평양의강남군의경우, 당곡리와장교리등근접지역으로남북협력사업단지가조성되고있다. 전라북도가돼지종돈을지원한남포지역의경우도정부의영유아지원사업대상지역이면서시관내에조선협력단지가건립될곳이다. 이러한현상은남북협력에대한북의구상이특별지구의개방이라는기조를유지하면서도, 사안별로규모를조절하여집중하는방식으로전개하고있음을보여주는것이다. 지원대상지역의연계는지원주체들사이의연계필요성을확인해준다. 이제지방자치단체들도대북사업에서협의틀이필요할때가되었다. 다섯째로는시민사회단체와의결합속에서시민의참여가이루어진다는점이다. 초기에이시민사회단체는대북단체였고, 주로는지원단체들이안내하였다. 지방자치단체들의대북사업안내에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역할은지대했다. 대부분의지방자치단체들은사업의초기에이단체의도움을받았다. 그런데점 - 88-
차로현지에서시민사회가움직였다. 강원도의 남북강원도협력협회 는조례가규정하는민관협력기구지만 경남통일농업협력회 나 전남도민남북교류협의회, 남북협력제주도민운동본부 등은지방자치단체들과긴밀히협력하는현지의민간단체이다. 이러한민간단체구성원들이조례에입각한의결구조인남북교류협력위원회의위원으로참가하는것이또한일반적인현상이다. 현지의시민사회가기구구성에나서고모금운동을한다는것은시민참여운동을가능하게하는조건이된다. 여섯째는남북지역간교류와협력은, 북한의입장에서본다면중앙정부의재정지원기능을남쪽의지방자치단체가일부대체하는효과를갖게된다는점이다. 이는필연적으로북쪽에서도지역의자율성을점차로강화하게만들것이다. 그럼에도중앙의통제가강한북쪽사회와의충돌가능성은높지않은데, 그것은지역간교류, 협력이정치문제로비화하지않도록조절할수있는능력을구비하고있기때문이다. 북쪽내기업이나단체들의독립채산제운영처럼지방의운영도충분히가능하다는얘기이다. 남북관계에서의지방자치단체사업의위상과역할은타국의사례와비교할때좀더선명해질것이다. 그런점에서독일의경우가비교될수있다. 우선독일의경우통일되기 5년정도이전인 1985 년말에야도시간자매결연형식으로협상을진행하고있다. 우리보다는늦은편이다. 도시선정은동독의중앙정부에의해정해져서통상적으로동독측대표단이먼저서독측상대도시를방문하고, 이후몇주내서독대표단이조약문의내용을확정짓기위해답방하는과정을밟았다. 교류 협력사업들은모두지방정부의자력으로추진되었고, 사업의종류는전문가교류, 체육교류, 청소년교류, 평화문제관련모임, 문화적교류 협력, 신문교환등으로분류될수있다. 양적인측면에서성과가많지는않았던모양이다.1986 년부터 1989 년 11 월까지자매결연사업에참여한동서독주민의숫자는, 분단이후동서독주민들의상호방문수에비교하면, 극히미미한것이었다. 질적성과역시정확하게평가하기는어렵다. 이는자매결연사업이점차확대되기시작하던시점에서급작스럽게통일이이루어졌기때문에더욱그러하다. 독일의도시간자매결연사업에서동독은사업의확대에주저하는경향을 - 89-
보였다. 접촉을가능한한차단하려고했고서독과상대할수있는대상단체도제대로세우지않았다. 서독의경우도중앙정부와자치단체간에갈등이많았던모양이다. 독일의도시간자매결연사업은오히려통일이후에이루어졌다. 이는구동독의행정체계재건을위한서독지자체들의도움에서볼수있다. 독일은통일이후통합과정에서동독의행정구조와규정들이새롭게구성되거나, 경우에따라과거에없었던새로운기구가창출되어야했다. 이러한재건과정은매우빠른속도로진행되어야했으나, 구동독지역에는업무를감당할인력과재정이결핍되어있었다. 따라서서독측자매결연도시들은통일이전부터동독측파트너도시에자문관파견, 세미나개최, 인력파견등을통해행정개편을도왔다.1990 년대중반에이르면동독도시들의약 65% 가서독측자매결연도시로부터행정개혁을위한각종의지원을받았던것으로알려졌다. 독일의도시자매결연사업은통일을대비한교류협력, 공동성장을위한교류협력에대한관점이부족했고, 따라서동서독공동의지혜를모우는데는실패한것으로보인다. 이에반해남북의경우는협력사업의관점이분명하다. 중앙정부와의협조도비교적순조로운편이며점차로현지시민사회와의결합도높아져가는추세이다. 나. 특성과변화 (1) 사회문화교류의특성 2001 년이후남북사회문화교류에서나타나는특성을대략적으로기술하면다음과같다. 우선남북관계의일반적인흐름에따라단절과재개를반복하면서도사회문화교류는지속적으로확대되고있다는점이다. 아래의표는이러한증가지표를잘보여준다. 특히당국간교류가재개되고당국사이의협력사업이많이논의되던 2005 년에는사업건수가 367 건에달하여전년 3년을합친수치에육박하고 - 90-
있다. 연도구분 89-'97 '98 '99 '00 '01 '02 '03 '04 '05 '06.8 계 교육 2 (19) 6 (21) 1 (1) 2 (5) 13 (76) 15 (68) 22 (360) 19 (797) 32 (273) 27 (290) 139 (1,910) 학술 문화 1 예술 (17) 6 (87) 7 (106) 3 (25) 10 (134) 19 (513) 11 (34) 12 (784) 19 (286) 21 (9) 107 (2,078) 방북 방남 체육 6 (187) - - 14 (163) 51 (446) 37 (310) 37 (326) 19 (1190) 4 (5) 27 (79) 29 (220) 222 (3,639) 종교 8 (9) 10 (51) 9 (39) 9 (47) 11 (86) 15 (165) 22 (584) 24 (376) 68 (1231) 45 (635) 211 (3,136) 언론 3 (11) 10 (48) 2 (4) 12 (143) 11 (82) 9 (84) 21 (253) 21 (107) 69 (122) 42 (292) 195 (2,123) 출판 과학 4 환경 (12) 8 (31) 4 (16) 2 (8) 2 (13) 5 (37) 6 (51) 13 (121) 12 (53) 9 (34) 65 (376) 기타 10 (446) 1 (1) - (1) 21 (476) 23 (2215) 15 (1308) 24 (923) 39 (1367) 140 (7066) 65 (1,261) 333 (15,023) 계 34 (701) 41 (239) 37 (330) 100 (1,150) 107 (2,916) 115 (2,501) 125 (3,395) 132 (3,557) 367 (10,777) 238 (2,831) 1,272 (28,285) 교육학술 1 (18) 4 (41) 2 (21) 7 (80) 문화 1 예술 (33) 3 (336) 1 (141) 5 (510) 체육 2 (148) 1 (62) 1 (1) 4 (765) 3 (717) 1 (78) 1 (4) 13 (1,775) 종교 언론출판 3 (60) 3 (60) 과학환경기타 4 (353) 4 (68) 2 (31) 3 (172) 4 (206) 4 (98) 10 (537) 1 (16) 39 (1,733) 계 7 (534) 0 (0) 1 (62) 7 (404) 3 (32) 7 (937) 8 (941) 9 (280) 14 (675) 4 (41) 67 (4,158) ( 출처 : 통일부 ) < 표 11> 남북한분야별왕래현황 < 그림 2> 남북인적왕래현황 건수 ( 괄호안은방문자수 ) 주 : 금강산관광객 (2007.10 월말까지총 1,668,115 명 ) 제외 -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