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연구 72호(2016.08.3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pp.175-201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05) 김만태* 목 차 1. 머리말 2. 조선 전기 이전 사주명리의 유입 과정 3. 조선왕조실록 의 사주명리 연루 역모사건 4. 조선사회의 변화와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5. 맺음말 국문초록 오늘날 사주명리의 근간을 이루는 신법사주(新法四柱)는 고려 말부터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하나로서,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당시 신흥 관료, 지식인들에 의해 원(元)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이후 조선조에 와 서 역사의 양지와 음지를 넘나드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주명리는 한국 사회의 기층문화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학(官學)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던 다른 제학(諸學)과 달리 명리학은 비록 높고 부귀한 지위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성품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님을 암시하 는 정명론(定命論)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해 사주명리는 한미(寒微)한 가문 이나 중소 지주층, 주변 지식인층의 입장을 대변하고 기존 사회체제에 대해 비판 의 메시지를 표출하였다. 16세기 조선 중기 이후 주자학(朱子學)이 교조화 독선화 되고, 국정 운영과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조선 왕조체제에 대한 불만이 노정 됨에 따라 명리학의 반체제적 성향도 더욱 심화되었다.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미래예측학과 조교수
176 민족문화연구 72호 명리학과 같은 시기에 전파된 성리학은 도덕적 이상(理想) 유교사회를 지향하 는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하였으나 명리학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한 상황으로 볼 때 정명(定命)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주명 리학과 새로운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도참(圖讖)사상이 결합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하였다. 이에 따라 명리학을 비롯한 술수학 전반이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주제어: 사주명리(四柱命理), 사주(四柱), 팔자(八字), 명리학(命理學), 명과학(命課學), 기층문화(基層文化). 1. 머리말 사주명리는 일월오성 28수 등 천체의 운행을 포함한 자연의 질서와 그 질서에 상응하는 인사 관계를 음양의 소식(消息)과 오행의 생극제화(生剋 制化)를 통해 해명하려는 음양오행론을 정립하고 간지력(干支曆)을 창조했 던 중국과 그 주변국가(한 일)에서,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간지(干支)로 치 환한 후 [일간(日干)1)을 중심으로] 그 상호관계를 해석하여 인간 삶의 길 흉과 관련된 요수(夭壽) 빈부 귀천 성패 등의 차별함을 추리하기 위해 만 들어진 예언 체계이다.2) 이처럼 사람이 태어난 사주팔자(四柱八字)를 가지고 인간 운명의 길흉 화복을 예지 판단하는 사주명리는 인간의 행 불행을 결정짓는 빈부 귀천 요수 길흉 화복(禍福)의 원인을 찾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행 불 행은 인간이 능동성 주체성을 발휘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 는 영역은 아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는 문제 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 순간 인간은 운명을 감지한다. 그래서 동서양 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운명은 형이상화(形而上化)되어 종교와 철학의 주 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1) 사람이 태어난 날의 천간(天干). 신법사주(新法四柱)에서는 사주팔자의 주인공으로 여겨 일 주(日主)라고도 부른다. 2) 김만태, 명리학의 한국적 수용 및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2005, 12면.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77 세조실록 과 중종실록, 서거정(徐居正, 1422-1492)의 동문선(東文選), 채수(蔡壽, 1449-1515)의 나재집(懶齋集) 등 여러 문헌에서 사람에게 미리 정해진 운명은 없다는 논거로서 주로 언급되는 것이 옛사람이 운명에 대 해 논하며 이르기를 남양(南陽)의 귀한 선비들3)이 어찌 모두 꼭 육합(六 合)에 맞은 것이며, 장평(長平)에서 학살된 군사들4)이 어찌 꼭 모두 삼형 (三刑)에 걸린 것이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확실한 논리입니다. 5)라는 내용 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육합과 삼형이란 말도 바로 십이지(十二支)의 상호 작용 관계에 따른 쓰임새를 의미하는6) 사주명리의 용어이다. 사주명리가 어느 시기에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전해졌는지는 확실 하지 않다. 중국에서는 동진(東晉)의 곽박(郭璞, 4C초), 당대(唐代)의 원천 강(袁天綱, 7C초)과 이허중(李虛中, 9C초) 등에 의해 사주명리의 이론적 토 대가 마련되었고, 오대(五代) 말에서 남송(南宋)에 걸쳐 서자평(徐子平, 10C中), 서대승(徐大升, 13C中) 등을 통해서 현대 사주명리의 체계가 거의 완성되었다. 사주명리가 체계화된 당대(唐代) 이후 중국과 인적 문화적 교 류가 지속적으로 활발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남북국시대에서 고려 후기까 지는 어떤 형태로든 당시 지식인들을 통해 한국으로 사주명리가 유입되 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유입된 사주명리는 지식인과 지배층에서 먼 저 활용되다가 점차 민간에까지 유포되어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7) 즉 사주명리는 늦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문화전파 작용으로 당시 지식인들 에 의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유입 활용되어져 왔다고 추정된다. 3) 중국 남양(南陽)의 제갈근(諸葛瑾)과 그 동생 제갈양(諸葛亮), 그 종제(從弟) 제갈탄(諸葛誕) 이 다함께 등용된 것을 말한다. 4)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와 조(趙)나라가 싸우다가 조나라의 장수 조괄(趙括)이 패하자 진나 라 장수 백기(白起)가 조나라의 포로 40만 명을 장평(長平) 땅에 산 채로 묻어 죽였다는 고 사를 인용한 것이다. 5) 中宗實錄 卷26, 中宗 11年 10月 23日 辛未, 古人論談命者以謂 南陽貴士, 何必俱當六合. 長 平坑卒, 未必共犯三刑. 此確論也. 6) 김만태, 십이지(十二支)의 상호작용 관계로서 충(衝) 형(刑)에 관한 근원 고찰, 정신문화 연구 36-3,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135면. 7) 김만태, 조선 전기 이전 四柱命理의 유입 과정에 대한 고찰, 한국문화 5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0, 161면.
178 민족문화연구 72호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주명리는 명과학(命課學)이라는 과거(科擧) 음양과 (陰陽科) 및 취재(取才) 시험과목으로 편입되어 관학(官學)으로서 활용되며 국가와 왕실의 대소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사주명리가 내포하고 있는 정명(定命)사상과 당시 사회변혁의 필요성, 반체제적 반왕조적인 지식인 등 에 의하여 반골지학(反骨之學) 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모 든 학술 중에서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사술(邪術)로 매도를 당하기도 하였 다. 이런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주명리는 한국사회의 기층문화를 이루어 온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 내용의 진가(眞假)를 막론하 고 한국인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관념체계가 되었다.8) 한국인은 자신의 운명이 좋지 않다고 느껴지면 운명이 나쁘다 고 말 하기 보다는 팔자가 사납다 고 말한다. 이처럼 사주명리는 오랫동안 한 국사회 기층문화의 근저에 깊이 자리해오고 있다.9) 그러나 사주명리가 공식적으로 논의된 경우는 거의 없고 사주명리를 주제로 다룬 원전(原典) 또한 거의 없다. 그렇다보니 한국 사주명리 문화를 이해하는 필수요건으 로서 사주명리와 관련된 자료들도 각종 사서(史書) 문집(文集) 전지(傳志) 등에서 찾아야 한다. 이렇게 산재(散在)된 자료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거(典據)는 바로 조선왕조실록 이다. 따라서 본 고찰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에 등장하는 사주명리의 여러 양상들, 즉 사주명리학에는 개인의 운명에 대한 관심과 국가와 왕조의 운명에 대한 관심 그리고 반체제적 논리 모두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반체제적 성향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해봄으 로써 조선조에 행해진 사주명리의 성격을 이해하고 나아가 오늘날도 성 행하고 있는 한국 사주명리 문화를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로 삼 고자 한다. 8) 위의 글, 160면. 9) 위의 글, 162면.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79 2. 조선 전기 이전 사주명리의 유입 과정 우리나라에서 신법(新法)사주는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14세기 초 고 려 말부터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하나로서, 체제 변 화를 요구하는 당시 신흥 관료, 지식인들에 의해 원(元)으로부터 본격적 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성리학이 원(元)으로부터 도 입되던 시기와도 비슷하다. 예를 들면, 이제현(李齊賢, 1287-13 67)10)이 그의 장인 권보(權溥, 1262-1 己 己 壬 壬 346)를 위해 지은 비문(碑文)이 그의 巳 未 子 戌 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 에 수록되 어 있는데, 그 중에 以中統三年仲冬 <그림 15> 권보의 사주 명조 十有一日日將晡而生公, 壬子己未, 虛拱壬己之祿, 而互衝發之, 天機之妙如此. 11) 라는 구절이 나온다. 해석해보면 중통[中統, 원(元) 세조의 연호] 3년(1262, 壬戌) 11월(壬子) 11일 신시(申時)와 일장[日將: 지지 육합(六合)과 비슷한 개념]이 되는 사시(巳時)에 공(公)을 낳았는데, 壬子, 己未가 壬의 祿(亥), 己 의 祿(午)을 (亥, 午가) 없는 가운데서 갖고 있는데(십이지지의 순서상 戌亥 子, 巳午未순이므로 亥, 午가 없어도 子, 未 바로 옆에 亥, 午가 있다고 보 았다), (壬의 祿인 亥와 시지의 巳, 己의 祿인 午와 월지의 子가) 서로 충 (衝)하여 발복했으니 천지조화의 기밀이 이처럼 오묘하다. 는 뜻이다. 이는 1253년 남송(南宋)의 서대승(徐大升)이 저술한 자평삼명통변연원(子平三命 通變淵源) 에 수록된 공록(拱祿) 과 공록격(拱祿格) 의 설명12)을 응용한 것 10)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고려 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 를 간행해 성리학 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權溥)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 이색 (李穡)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볼 때도 성리학에 있어 그의 위치는 지대한 것이었다. <이제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11) 李齊賢, 益齋亂藁 권7, 碑銘 推誠翊祚 同德輔理功臣 三重大匡 脩文殿大提學 領都僉議使司 事 永嘉府院君. 贈諡文正公權公墓誌銘. 12) 徐大升, 子平三命通變淵源 권上, 拱祿 ; 권下, 拱祿格. 이 격은 단지 5일 5시(丁巳일 丁未시, 己未일 己巳시, 癸丑일 癸亥시, 癸亥일 癸丑시, 戊辰일 戊午시) 뿐이다. 채워지는 것
180 민족문화연구 72호 이다. 공록(拱祿) 은 사주의 지지(地支)에서 건록(建祿)에 해당하는 글자가 실제 없는데도 지지 순서상 사이에 끼고 있기에[공협拱夾] 있는 것으로 여 기는 것을 말하며, 공록격(拱祿格) 은 공록 이 일정한 규격(規格)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색(李穡, 1328-1396)의 문집인 목은집(牧隱集) 은 현재 팔자(八字) 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나고, 사주명리에 관한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등장 하는 최초의 문헌이다. 수록된 시구 중에 이색이 앞날의 운수를 알려고 성 관(星官)이나 역옹(歷翁)에게 자신의 팔자 를 물어보고, 태어난 날짜인 생 신(生辰) 을 적어서 자신의 장차 운수를 물어보고 싶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난 운수 분명하여 참된 술수 징험했는데(數往明明驗術眞) ( ) 성관이나 역 옹에게 팔자를 물어보나니(星官歷翁問八字).13) 우연히 병세가 찾아와 사람을 어 지럽히니(偶然病勢來相擾) 태어난 날을 적어서 역옹에게 묻고 싶구나(欲把生辰問 歷翁).14) 이런 사실을 미뤄볼 때 14세기 중엽 고려 말에는 관료 학자 등 지식인 들이 사주명리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거나 전문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5) 그리고 사주명리서인 궁통보감(窮通寶鑑) 의 원명(原名)인 난강망(欄 江網) 에 관한 기록이 조선 초기인 1430년(세종 12)에 명과학의 취재(取 才) 시험과목으로 등장한다.16) 즉 세종 통치 이전에 이미 사주명리 책인 난강망 이 중국에서 조선으로 유입 활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난강 [塡實]을 가장 꺼리며 日時의 拱挾하는 자리를 冲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또한 사주 중 에서 日干을 손상하는 것도 두려워한다. 七殺이 모든 공협을 安住하지 않게 하면 분수가 감 소된다. 歲君(太歲)과 大運도 또한 마찬가지이다(此格只有五日五時. 大忌塡實, 最怕衝了日時拱 位. 又怕四柱中有傷日干. 七煞皆拱不住則減分數. 歲君大運亦然). 13) 李穡, 牧隱集, 牧隱詩藁 권8, 有感. 14) 李穡, 牧隱集, 牧隱詩藁 권9, 卽事. 15) 김만태, 앞의 글, 2010, 176면. 16) 世宗實錄 卷47, 世宗 12年 3月 18日 戊午, 詳定所啓諸學取才經書諸藝數目: 陰陽學: ( ) 星命卜課, 周易占 六壬占 星命書 大定三天數 範圍數 紫微數 皇極數 袁天綱 五行精紀 前定易數 應天 歌 五摠龜 三辰通載 欄江網 觀梅數. 從之.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81 망 은 명대(明代)에 신원미상의 인물이 지은 사주명리 책으로 수백 년간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오자와 누락된 구절이 많이 생겨 그 뜻을 이 해할 수가 없었는데, 청대(淸代)에 여춘태(余春台)가 이를 보완해 다시 간 행하면서 궁통보감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17)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남송 말 1253-1258년간 남송의 수도 전당(錢塘)에서 간행되었던 서대승(徐大升)의 자평삼명통변연원 이 1466년(세조 12년)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에서 서자평(徐子平) 이란 명칭 으로 명과학의 시취(試取)과목으로 채택 시행되었다.18)19) 나아가 세조(世祖)의 왕명(王命)에 의해 1458년(세조 4)에 서거정(徐居正) 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주명리서로 추정되는 오행총괄(五行摠括) 을 저술 하였고20), 천문(天文) 역수(曆數) 측후(測候) 각루(刻漏)에 관한 일을 맡아 보 기 위해 고려 건국 초기부터 설치되었던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 서운관(書雲觀) 등의 소임 중에 사주명리와 관련된 기능이 계속 없다가 조 선 초기 관상감(觀象監)의 기능으로 점산(占算)이 추가로 포함되었다.21) 지금까지의 여러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하면 오늘날 사주명리의 근 간을 이루는 신법사주는 유학생 사신 귀화인 신흥사대부 국경지역(평안 함 경도)의 지식인 등을 통해 13세기 말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14세기 초에 원(元)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려 말 까지 좀처럼 문헌에 등장하지 않던 사주명리에 대한 기록이 조선 초에 이 르러 갑자기 문헌상에 빈번히 등장하는 배경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22) 17) 余春台 원편, 徐樂吾 평주, 窮通寶鑑(欄江網), 臺北: 武陵出版有限公司, 1996, 4면, 原序: 余於搜輯詩文之暇, 亦頗涉獵命學諸書. 乃友人持欄江網繕本, 謂余曰某欲著簡易確切之說, 以爲後學 之楷, 此本秘之行篋久矣. ( ) 余披閱一過, 審其議論精詳, 取舍恰當, 實有得五行生剋 八卦錯綜之 妙. 因不揣剪陋, 細加編輯. 視其繁者汰之, 略者增之. 去其魯魚亥豕之訛, 使閱者瞭若諸指掌. 此眞命 學之指南, 子平之模範也. 乃更其名曰窮通寶鑑. 18) 經國大典 禮典 諸科 陰陽科初試; 經國大典 禮典 取才. 19) 김만태, 조선조 命課學 試取書 徐子平 에 관한 연구, 藏書閣 28,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0) 成宗實錄 卷222, 成宗 19年 12月 24日 癸丑. 戊寅年(1458),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서거 정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도 유자(儒者)가 궁리하는 일이니, 경(卿)이 가령(假令)을 지 어서 올리라 하니, 이때에 오행총괄(五行總括) 을 지었다(戊寅, 一日, 世祖從容謂居正曰: 祿 命書亦儒者窮理之事, 卿爲作假令以進. 於時著五行摠括). 21) 經國大典 吏典 京官職 正三品衙門 觀象監, 掌天文 地理 曆數 占筭 測候 刻漏等事.
182 민족문화연구 72호 첫째, 1270년 몽고(元)와의 강화 이후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바뀌는 격동적 과도기(13C말-14C말)에 원(元)과 10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매우 활발한 문화적 인적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이 시기에 원을 통해 새롭게 전파된 사주명리는 이미 사회적 모 순을 개혁할 능력을 상실한 고려 왕조에 의해서는 새롭게 채택될 가능성 이 거의 희박하였다. 셋째,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인 신흥사대부의 특성이다. 이들은 능문능 리(能文能吏), 즉 학문적 교양이 높고 행정실무에 밝은 학자적 관료로서, 유교적 지식이 부족한 고려 무신정권에 대하여 학문과 행정의 능력을 보 충하여 주기 위해 기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무신정권이 붕괴된 이후 더욱 활발히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커다란 사회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신 흥사대부는 권문세족과 달리 그 가문이 한미(寒微)하였고, 지방의 향리출 신이 많았으며, 이미 중앙정계에서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보수적 권 문세족과 대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고려 말 개혁운동을 주도하 지만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의 반대로 실패하며, 이후 이성계를 중심으 로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신흥사대부 중에는 학문적 교 양으로서 사주명리에 대한 식견을 갖춘 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 이후 천문 복서 음양 술수 등에 정통하였거나 식견을 가졌다고 고려사 등에 기록된 인물로는 한취(韓就)23) 정안(鄭晏)24) 이장용(李藏 用)25) 오윤부(伍允孚)26) 박전지(朴全之)27) 최성지(崔誠之)28) 우탁(禹倬)29) 등 22) 이하 내용은 김만태, 앞의 글, 2010, 184-185면을 근간으로 기술하였다. 23) 高麗史 卷99, 列傳12, 諸臣, <崔惟淸>, 有刑部尙書韓就者, 湍州人也. 工術數能言人禍福, 亦 以智保全官至中書侍郞平章事. 24) 高麗史 卷100, 列傳13, 諸臣, <鄭世裕>, 晏初名奮, 性聰慧少登第, 陰陽筭術醫藥音律無不精曉. 25) 高麗史 卷102, 列傳15, 諸臣, <李藏用>, 博覽經史, 陰陽醫藥律曆靡所不通. 26) 高麗史 卷122, 列傳35, 方技, <伍允孚>, 允孚精於占候, ( ) 又善卜筮, 元世祖召試之益有 名. ( ) 嘗自圖天文以獻, 日者皆取法焉. 27) 高麗史 卷109, 列傳22, 諸臣, <朴全之>, 及長, 通經史究術數, 誨人不倦. 28) 高麗史 卷108, 列傳21, 諸臣, <崔誠之>, 崔誠之尤邃陰陽推步法. 忠宣留元, 見太史院精曆數, 賜誠之內帑金百斤, 求師受業. 盡得授時曆術, 東還, 遂傳其學, 至今遵用之. 29) 高麗史 卷109, 列傳22, 諸臣, <禹倬>, 倬通經史, 尤深於易學, 卜筮無不中. 程傳初來東方, 無能知者. 倬乃閉門月餘叅究乃解, 敎授生徒. 理學始行.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83 이 있다. 다양한 학문적 교양과 개혁사상을 지닌 신흥사대부가 조선의 건 국 주체세력이 되면서 이들에 의해 조선 초기부터 사주명리가 관학(官學) 으로서 새롭게 도입되고 활용될 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넷째, 사주명리의 사상적 구성요소의 하나인 정명론(定命論)의 특성 때 문이다. 정명론은 역사적으로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 또는 불만의 표 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미한 가문이나 중소 지주층, 비판적인 소지식 인층의 의식을 대표하는 이론 체계라고 할 수 있다.30) 이런 정명론적 특 성을 내포하고 있는 사주명리는 당시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과 대립하 던 신흥사대부에게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당시 국제정세는 원 명의 교체기로서 매우 급변하였으며, 고려 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왕조의 교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 경 제 사회 사상 등 모든 면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새로 운 시대를 이해하고 경영할 수 있는, 이에 걸맞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 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사상 분야에서는 성리학(性理學)이, 술 수 분야에서는 명리학(命理學)이 새로운 제도와 이념으로 채택되었던 것 이다. 국교(國敎)가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고, 고려조에서 채택한 과거(科 擧) 고시과목이 모두 새로운 과목으로 대체되고, 관상감의 소관업무로 지 리 점산이 새롭게 추가된 사실에서도 이런 경향을 알 수 있다. 3. 조선왕조실록 의 사주명리 연루 역모사건 조선왕조실록 에서 사주명리가 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등장하는 불 충(不忠) 역모(逆謀) 사건의 주요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에서 사주명리는 왕실의 혼사와 관련하여 혼인 당사자 간의 운명의 길흉을 추론하는데 주로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에서 팔자(八字) 에 관 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1417년(태종 17) 궁중의 혼사(婚事)와 관련하여 이속(李續)이 태종을 속인 사건이다. 이속은 왕실과의 혼인을 꺼린 불충한 사 건으로 인해 결국 관노(官奴)로 폐해지고 가산(家産)은 적몰(籍沒)되었다. 30) 중국철학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예문서원, 1994, 139-142면 참조.
184 민족문화연구 72호 임금이 점치는 맹인 지화(池和)에게 정해년(丁亥年) 이전에 출생한 남자의 팔 자(八字)를 구하여 추산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지화가 이속의 집에 가서 이 속의 아들의 팔자를 물으니, 이속이 무슨 까닭으로 묻는가? 하였다. 지화가 이것은 왕명을 받은 것이다 하니, 이속이 말하였다. ( ) 나는 이렇게 연혼(連 婚)하고 싶지는 않다. 31) 임금이 말하였다. ( ) 이속에게 아들이 있으므로 내가 궁인(宮人)의 소생을 출가시키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그 생갑(生甲)32)을 물으니, 이속이 말하기를 내 아들은 이미 죽었다. 만일 권궁주(權宮主)의 소생이라면 내 자식이 살아날 수 있다. 하고, 생갑(生甲)을 써서 바치지 않았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보인가? 한 쪽은 비록 천하지마는 한 쪽은 인군(人君)인데, 이속이 왕실과 관계하지 않 으려고 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사헌부에 명하여 추문한 것이다. 33)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은 자신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권람 한명회 등 과 밀모(密謀)하여 단종의 보위 세력인 황보인 김종서 등 중신을 살해하 고,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도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 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으로 임금께 아뢰어 사사(賜死)하는 계유정난 (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반발로 함길도절제사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조선조 최초의 반란으로 민심을 크게 자극시켰다. 계유 정난의 명분으로 안평대군 등이 저질렀다는 25가지의 죄목들이 단종실 록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죄목이 모두 팔자 (八字)를 가지고 추명(推命)을 하였다는 내용이다.34)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이용(李瑢, 안평대군)이 역모한 죄상을 백성들이 알지 를 못하니, 청컨대 조목을 자세히 열거하여 조정과 민간에 알리어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1) 太宗實錄 卷34, 太宗 17年 9月 2日 甲寅, 上命卜者盲人 池和, 求丁亥以上生男八字, 推算以 聞. 和到續家, 問子八字, 續曰: 何故問之? 和曰: 是承命也. 續曰: ( ) 吾不欲如此連婚也. 32)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말한다. 33) 太宗實錄 卷34, 太宗 17年 9月 2일 甲寅, 上曰: ( ) 續有子, 予欲嫁宮人之出, 使人問其 生甲, 續曰: 吾子已死矣. 若權宮主之出, 則吾子生矣. 不書生甲以入, 是何心哉? 一邊雖賤, 一則人 君, 續欲不干王室之心何哉? 是以命司憲府推之. 34) 이하 조선왕조실록 의 사주명리 연루 역모사건은 김만태, 앞의 글, 2005, 127-136면을 근간으로 기술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85 1. 이용의 역모는 하루아침 하루저녁이 아니라, 세종 문종 때에 있어, 맹인 지화(池和)가 이용의 운수(運數)를 보고 망령되게 군왕의 운수 라고 말하였고, 이현로가 또한 말하기를, 귀하기가 말할 수가 없어서 국군(國君)의 팔자 라 하 고, 또 참서(讖書)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하원갑자(下元甲子)에 성인(聖人)이 나 와서 목멱산(木覓井)의 물을 마신다 고 하였는데, 백악 북쪽이 바로 그 곳이어 서 참으로 왕업(王業)을 일으킬 땅이니, 그 곳에 살면 복을 받을 수 있다 고 하였다. 이용이 그것을 믿어 그 곳에 집을 짓고 무계정사(武溪精舍)라고 칭하 여 부참(符讖)에 응하려고 하였으며, 또 여러 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끝내 대군(大君)만 되고 말 사람이 아니다 고 하였다. 1. 지화가 주상의 성산(聖算, 임금의 생년월일시)과 의춘군 이우직(李友直, 안 평대군의 아들)의 팔자를 비교하여 추명을 하였다.35) 위 내용의 진위(眞僞)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단종실록 에는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이 황표정사(黃標政事)36)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 들의 세력을 끌어들여 붕당을 조성했으며 끝내는 종실(宗室)을 뒤엎고 성 상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단종 실록 이 세조 때 어용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오히려 그 반대 상황이며 김종서 안평대군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무참하게 죽인 것도 수양대군 일파가 이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정 권을 잡기 위해 조작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평가 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기록들도 계유정난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조작되 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계유정난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사주(四柱) 와 팔자(八字) 는 본의 아니게 역모사건에 연루 되었다. 그리고 사주 와 팔자 가 지니고 있는 반체제성(反體制性) 의 위 35) 端宗實錄 卷8, 端宗 1年 10月 25日 戊申, 議政府啓曰: 瑢等謀逆情狀, 大小人民, 容或不知, 請詳悉條列, 以諭中外. 從之. 一, 瑢之逆謀, 非一朝一夕. 在世宗, 文宗朝, 盲人池和卜命, 妄言君王之命. 李賢老亦說, 貴不可言, 國君八字. 又據讖言: 下元甲子: 聖人出, 飮木覓井水. 云云, 白岳之北, 正是其處. 眞興王之地, 可以 居而受福. 瑢信之, 乃造家, 號稱武溪精舍, 欲應符讖. 且屢言於人曰: 我終不止爲大君者也. 一, 池和以主上聖算與宜春君友直八字, 比方占卜. 36) 단종 때 이조 병조에서 의정부 대신들과 상의하여 제수(除授)를 하려는 관직당 3배수인 삼망(三望)으로 후보자를 추천하면서 제수자를 미리 정해 그 이름 위에 황점(黃點)을 찍어 올리면 임금이 형식적으로 이를 낙점하던 일을 일컫는다.
186 민족문화연구 72호 력도 여실히 보여 주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에는 왕실의 외척인 소윤(小尹,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 명종 옹립)이 대윤(大尹, 장경왕후 아우인 윤임 일파, 인종 옹립)을 탄압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였다. 그 여파는 이후 5-6년간에 걸 쳐 계속되었는데, 윤임(尹任) 등을 찬양하였다는 등의 갖가지 죄명으로 유 배되는 등 죽은 자의 수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런 가운데 사화 이듬해인 1546년(명종 1)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陳 復昌)이 전옥서(典獄署)에서 부역하는 정흥종(鄭興宗)과 왕의 지친(至親)인 남기(南沂)가 사화로 희생된 유관(柳灌)과 유인숙(柳仁淑)의 명(命)을 추론 하고, 또한 자전(慈殿)과 대전(大殿)의 오주(五柱)37)까지 기록해 놓고는 공 공연히 추명(推命)을 했다며 무고하여 이들을 참하고 가산을 몰수하는 사 건이 발생하였다.38) 그 후 1550년(명종 5) 경상도관찰사 구수담(具壽聃)이 유관과 정흥종 남기 등의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전옥서의 도역 정흥종은 본시 서얼신 분으로 복서술(卜筮術)을 약간 터득하여, 그의 음양책에 사대부의 팔자(八字)를 적어 놓았고, 또 자전과 대전의 오주까지 아울러 기록해 놓고는 공공연히 운 수를 점치며 선분(先分)이니 후분(後分)이니 하는 말로써 부도한 말까지 서슴 지 않게 되었으니 해괴할 뿐만이 아니라 그 추명(推命)하는 설이 너무도 흉참 합니다. 그가 비록 미천한 출신이지만, 사대부의 집에 왕래하면서 사설(邪說)을 선동하여 소문을 의혹시켜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니 삼성교좌(三省交坐)39) 로 낱낱이 추국하게 하소서 하니 ( )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40) 정흥종 남기와 비슷한 사례가 1549년(명종 4) 이홍윤(李洪胤)41)의 옥사 37) 생년월일시의 사주(四柱)와 입태월(入胎月)을 합하여 오주(五柱)라고 한다. 38) 明宗實錄 卷4, 明宗 1年 8月 13日 丁酉. 사림의 사관(史官)들은 정흥종이 성(城) 안에 소유하고 있는 대지를 진복창이 매입하려다가 정흥종이 선선히 응하지 않자 진복창이 분개 하여 이런 옥사를 일으켰다고 말한다. 39) 형조 사헌부 의금부가 함께 국문(鞠問)하는 것을 말한다. 40) 明宗實錄 卷4, 明宗 1年 8月 10日 甲午, 憲府啓曰: 臣等聞典獄署徒役鄭興宗, 以庶孼之人, 粗解卜筮之術, 乃於陰陽冊中, 列書士大夫八字, 其間又幷錄, 慈殿大殿五柱, 公然推占, 以先分後分 之說, 至發不道之言, 非徒駭愕, 且其推占之說, 至爲兇慘. 此雖微賤之人, 往來士大夫之家, 鼓動邪 說, 疑惑人聽, 所關甚重, 請於三省交坐處, 窮極推鞫. ( ) 答曰: 皆如啓.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87 에서도 나타난다. 이홍윤의 형 이홍남(李洪男)의 고변(告變)으로 시작된 이 옥사는 이후 한 달간 계속되었다. 이 때 김의순(金義淳)이 명종과 재상 조 신들의 오주(五柱)를 가지고 추명을 하는 한편, 이홍윤 배광의 최대관 이휘 등과 함께 충청도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기로 하였다는 혐 의로 능지처참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이후 충청도는 청홍도(淸洪道)로 개 명되었으며, 충주목(忠州牧)은 유신현(惟新縣)으로 강등되었다. 이홍윤을 다시 추문하여 장(杖) 30대에 이르자 공초(供招)하기를 어느 달 어 느 날인지는 기억할 수 없고 3년 전쯤이라 생각됩니다. 음죽에 사는 김의순이라 는 자가 신(臣)의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가 가진 책을 보았더니 거기에 조정 의 재상(宰相)과 조사(朝士)들의 팔자가 가득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병신생 (丙申生) 3인의 팔자는 이미 점을 쳐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신이 그 길흉을 물 었더니 김의순의 말이 병신생인 정승 3인의 팔자는 다 좋다 고 했습니다. 42) 김의순이 공초하기를 명 태조와 가정(嘉靖)황제 및 그 태자, 우리나라의 중종 과 인종의 팔자는 기록한 적이 있지만, 금상(今上)의 팔자에 관해서는 을사년에 상경해서 이홍남의 집에 갔을 때 이홍남이 갑오생(甲午生) 팔자를 가지고 와서 이 팔자가 어떠냐? 고 묻기에 처음엔 금상(今上)의 팔자인지 모르고 이 팔자는 매우 귀하다 고 말하였습니다. 인하여 누구의 팔자냐고 물었더니, 이홍남이 이 것은 금상의 팔자라고 답하기에 신은 책에 베껴 놓기만 하고 그 후로 점은 치 지 않았습니다. 전순인(全舜仁)이 임금의 팔자는 책에 기록해서는 안 되니 속히 지워 없애라 고 하기에 즉시 없애 버렸을 뿐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43) 위의 안평대군과 지화, 정흥종과 남기, 이홍윤과 김의순의 예를 종합해 볼 때, 당시에는 주상(主上)의 사주를 가지고서 추명을 하는 것은 곧 반역 41) 을사사화 때 희생된 윤임의 사위이자, 을사사화의 여파로 1547년(명종 2)에 일어난 정미 사화에서 대윤의 잔당으로 지목되어 죽임을 당한 이약빙(李若氷)의 아들이다. 42) 明宗實錄 卷9, 明宗 4年 4月 21日 庚申, 李洪胤更推, 訊杖三十度, 供曰: 日月不記, 退計三 年間. 陰竹居金義淳稱名者, 來到臣家, 見其所持冊, 則滿朝宰相朝士八字, 無不書之, 其中丙申生三 八字, 已爲推卜而書之. 臣問其吉凶, 則義淳曰: 丙申生政丞三人, 八字皆好. 云. 43) 明宗實錄 卷9, 明宗 4年 4月 29日 戊辰, 金義淳, 刑訊二次. [供曰: 大明太祖及嘉靖皇帝太子, 我中宗仁宗八字, 曾已記錄, 而今上八字, 則乙巳年間, 上京到李洪男家, 洪男以甲午生八字問曰: 此八 字何如? 臣初不知爲主上八字而言曰: 此八字甚貴. 因問 此誰八字也, 洪男曰: 此今上八字也. 臣 只傳書于冊, 其後不爲推卜. 全舜仁曰: 人君八字, 不可記錄于冊, 宜速削去. 卽時割去, 他無情由 ].
188 민족문화연구 72호 의 죄에 해당되며,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즉시 고변하지 않으면 불고지죄 (不告知罪)에 해당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재상(宰相) 조신(朝 臣)의 사주를 가지고서 추명하는 것도 금기시되었다. 이는 사대부들이 명 과학을 천대시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사주명리학의 내용에 그만큼 신뢰 성을 두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일부 있지 만 당시에는 더더욱 사주로 추명하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앞을 보지 못하고 글을 적어 기록할 수도 없는 맹인(盲人)들에게 추명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1561년(명종 16)에는 윤원형(尹元衡)이 국복(國卜) 김영창 등과 몰래 짜 고 황대임(黃大任)의 딸의 생년월일을 흉한 사주에서 길한 사주로 바꾸어 세자빈으로 간택되도록 모의한 사건도 있었다. 윤원형이 임금의 은총이 점점 쇠해지고 문정왕후가 하루아침에 승하하면 다 시 더 의지할 세력이 없다고 여겨, 황대임 및 그와 친한 국복(國卜) 맹인 김영 창과 함께 몰래 모의, 황대임의 딸의 생년월일을 길한 사주(四柱)로 고치고, 또 반드시 황대임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라는 뜻을 은밀히 문정왕후에게 고해 서 결정지었다. 상(上)과 중전은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았지만 자전(慈殿)의 분 부에 눌려 할 수 없이 그대로 하였다.44) 주군(主君)의 사주를 갖고서 추명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앞서 살펴본 것 과 같은 사례를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에서도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현종 8년(1667) 겨울에 계습(戒習)이란 중이 그의 생년월일을 가지고 수원 어느 마을에 있는 진씨(陳氏) 성의 점치는 맹인에게 묻기를, 나와 임금의 사 44) 明宗實錄 卷27, 明宗 16年 1月 15日 丙子, 元衡, 自以恩眷漸衰, 文定王后, 一朝賓天, 則更 無可倚之勢, 與大任及其所厚國卜盲人金永昌, 潛謀改大任之女生年日月, 變凶爲吉, 又以必聘大任之 女之意, 密告于文定王后以定之, 上及中殿, 皆非其意, 而迫於慈敎, 不得已而爲之. 明宗實錄 卷31, 明宗 20年 8月 27日 辛卯. 전연사 별제 黃大任은 자기 여식이 본래 배앓 이 병이 있는 줄을 알면서도 동궁 빈을 간택할 당시 음흉하고 간사한 尹元衡의 계략을 순순 히 따라 넌지시 서로 모의하여 병이 있는 것을 숨겼을 뿐만 아니라 五柱까지 고쳐가며 속여 選에 들게 하여 사람들이 몹시 분개하고 있으니, 귀양을 보내어 그 죄를 징계하소서(典涓司 別提黃大任, 知其女子本有腹病, 而當其爲東宮擇嬪之時, 承順元衡陰邪之計, 潛相謀議, 非徒諱疾, 至改五柱, 欺罔選入, 國人痛憤. 請命黜謫, 以懲其罪).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89 주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하였는데, 수원군수가 그 일을 듣고 계습을 잡아 가두고 감사에게 보고하여 감사가 장계(狀啓)하였다. 임금이 상당히 놀라서 밤 중에 문을 열고 대신과 여러 재상을 긴급히 불러들여 여러 가지로 다스릴 때 에 임금의 자매와 여러 공주가 궁중에 있다가 늙은 궁인 구씨(具氏)에게 묻기 를 중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부도한 말을 한 것 뿐이니 천천히 죽여도 될 것인데, 어찌 밤중에 국청(鞠廳)을 차리는가? 하니, 구씨가 대답하기를, 귀주께서는 알지 못하십니까? 예로부터 임금은 보위에 있 는 몸이므로 항상 남에게 빼앗길까 하여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비록 나무꾼이 나 목동이라 하더라도 역적질을 한다고 하면 또한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45) 조선왕조실록 에 사주(四柱) 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열 군데이 며 여섯 종류의 모의사건에 연루된다.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아 래와 같다. 첫째, 1632년(인조 10년) 1월 맹인 이후성(李後晟)에게 성천부사 경기수 사 등을 지낸 동지(同知) 유응형(柳應泂)이 4대장(大將)의 사주와 국운(國 運)의 장단에 대하여 물었다면서 이후성이 승정원에 와서 급변을 올렸다. 그러나 유응형은 그런 사실이 전혀 없으며 역모를 꾀한 일도 없다고 끝 내 불복을 하다가 옥사하였다.46) 둘째, 1632년(인조 10년) 10월 임해군의 궁노(宮奴)의 아내인 어현(於玄) 이 개인적인 앙심으로 임해군의 양자이자 경창군의 둘째 아들인 양녕군 45) 公私見聞錄 前158, 國譯 公私見聞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찬, 동방미디어 제작, 2001, 顯廟丁未冬間, 有僧戒習者. 以其生年月日, 問于水原村盲陳姓卜者曰, 我之四柱與上命孰勝? 水原聞其事拘戒習, 報方伯. 方伯狀聞之. 上頗驚動, 夜半開門牌召大臣諸宰, 雜治之時, 上之妹諸主 在宮中, 問於老宮人具氏曰, 僧非稱兵犯闕者, 只是語言不道徐當戮之, 何至夜半設鞫耶? 具氏曰, 貴 主不知耶? 自古人君身居大寶, 常恐爲人所奪. 故雖指牧童樵夫以爲爲逆, 亦不能無疑. 46) 사건의 전모 중에서 四柱가 언급되는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仁祖實錄 卷26, 仁祖 10年 1月 24日 壬戌. 이신은 공초하기를, 臣이 前年 7월, 유응형을 가서 보았더니 자리에 앉은 지가 오래지 않아 맹인이 들어왔습니다. 유응형이 말하기를 이 는 유명한 점장이다 하여 臣은 단지 四柱만 묻고는 일어나 왔습니다. (李愼供云: 臣前年七月, 往見應泂, 則坐未久, 盲人入來. 應泂曰: 此是名卜. 臣只問四柱而起來矣 ). 민람이 공초하기를, 유응형이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도 역시 어려운 인물이다 하였는데, 그때 옆에 작은 종이를 두고 그 사람의 四柱를 적었습니다(閔冬供云: 應泂曰: 以吾所見, 亦 是罕得人物耳. 其時, 坐傍置小紙, 記人之四柱 ).
190 민족문화연구 72호 의 사주가 지극히 좋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요즘 경창군이 주씨(朱氏) 성을 가진 맹인 술사를 얻어 양녕군을 위해 거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대 비전의 교서도 비밀히 받았다 고 거짓 소문을 낸 것을 회은군 이덕인(李 德仁)이 전해 듣고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국청 끝에 다른 사람들의 무 고함은 밝혀지고 어현만이 참수를 당하였다.47) 셋째, 1646년(인조 24) 4월 이천현감 이유직(李有植)이 보낸 사람이 맹 인 박시현에게 와서 주상과 똑같은 사주의 명운을 묻고 불순한 언동을 하였다면서 박시현이 고변하였다. 이 때문에 이유식은 장을 맞다가 죽었 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이번 옥사는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48) 넷째, 1697년(숙종 23) 1월 이영창(李榮昌)이 자신의 스승으로 천문 지 리 인사에 두루 통달하여 재주가 공명(孔明)과 유기(劉基)49)에 뒤지지 않 는 승려 운부(雲浮)가 있는데 장길산의 무리들과 결탁을 하고 한편 진인 (眞人) 정 최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으로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려 하는데, 운부는 정묘생이고 진인의 사주는 己巳년 戊辰월 己巳일 戊辰시이다. 그리 고 3월 21일에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을 유선 47) 사건의 전모 중에서 四柱가 언급되는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仁祖實錄 卷27, 仁祖 10年 10月 16日 庚辰. 어느 벼슬아치의 첩이 臨海君의 종 아내와 대단히 서로 친한데, 종 아내가 말하기를 우리 宮의 養子는 바로 慶昌君의 둘째 아들인데, 사람들이 그 四柱가 지극히 좋다고 한다. 요사이 朱氏 성을 가진 術士를 얻어 바야흐로 모반 을 도모하면서, 스스로 대비전의 교서를 비밀히 받았다 한다 고 했다(有一朝官之妾, 與臨海君 奴妻, 甚相善, 仍言: 吾宮養子, 乃是慶昌君次子也. 人稱其四柱極吉. 近得術士朱姓者, 方圖不軌, 而自云密奉大妃殿敎書. 云). 48) 사건의 전모 중에서 四柱가 언급되는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仁祖實錄 卷47, 仁祖 24年 4月 6日 壬午. 오늘 두 사람이 와서 점을 치겠다고 청하기에,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이천현감 이유식이 보내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점칠 일이 무엇이 냐고 물었더니, 乙未生인 사람의 命運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月日과 生時가 主上의 四 柱와 서로 합치되기에 (今日有二人, 來請問卜, 問其所自, 則曰自伊川縣監李有植所來. 問其所 卜, 則乃乙未生人之命也, 而月日及生時, 與主上四柱相合, ) 49) 유기(劉基, 1311-1375): 원말 명초의 浙江省 靑田 사람이며 자는 伯溫이고 시호는 文成이 다. 명나라의 개국공신으로 經史에 능통했고 아울러 術數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훗날 明太祖 가 된 朱元璋이 그의 명성을 듣고 예를 갖춰 초빙하자 <時務十八策>을 개진해서 천하를 차 지하는 계책을 올림으로써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우는 데 공훈을 세웠다. 四柱命理書인 滴天髓 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91 기(兪選基) 등이 고변하였다. 심문을 한 결과 이영창이 허황되게 꾸며낸 말이 많았다고 한다.50) 다섯째, 1785년(정조 9) 2월 정감록(鄭鑑錄) 51)의 예언을 신봉하는 홍 복영(洪福榮) 이율(李瑮) 양형(梁衡) 문양해(文洋海) 주형채(朱炯采) 등이 경 남 하동을 근거지로 지리산의 이인(異人)이란 사람과 내통하면서 내년 이 후에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장차 나라가 셋으로 갈라지니 가족을 데 리고 일찌감치 난리를 피해야 한다. 신병(神兵)이 바다를 건너온다는 등의 참위설을 퍼뜨렸다. 그리고 피난처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집을 지 었다. 또한 삼도(三道)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정을 꾀할 때 안에서 호응할 대장과 관련자들의 운명이 좋은지 여부를 알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사주 를 보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러한 사실을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 고 변함으로써 정감록 과 직접 관련된 조선 최초의 옥사가 일어난다. 이듬 50) 사건의 전모 중에서 四柱가 언급되는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肅宗實錄 卷31, 肅宗 23年 1月 10日 壬戌. 이익화가 雲浮 및 眞人의 四柱를 물으니, 이영 창이 말하기를, 운부는 丁卯生이고, 眞人은 己巳年 戊辰月 己巳日 戊辰時에 태어났다 하니 (翊華問, 雲浮及所謂眞人四柱, 則榮昌 曰: 雲浮丁卯生, 而所謂眞人, 則己巳戊辰己巳戊辰. 云 ), 51)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이다. 여러 鑑訣類와 秘訣書의 집대성이며 異本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저자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으나 조선 초 부터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일어난다는 참언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사람의 저술이 혼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외적의 침입에 의하여 사회 혼란이 극심하였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로 보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의 조상이라는 李沁과 조선 멸망 후 들어설 鄭氏의 조상이라 는 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각종 豫言說 讖謠 易數의 풀이와 風水地理說에 의한 해석 등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사상적으로도 儒敎 의 外道나 道敎 및 讖緯說 陰陽五行說 등의 다채로운 배경을 가지고 있다. 표현기법상의 특 징은 직설적 표현을 피하고 隱語 寓意 詩句 破字를 많이 써서 해석이 어렵고 애매한 표현이 많다. 반왕조적이며 현실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亂世에는 풍수설에 따라 卜定된 피난 처에서만 至福을 누릴 수 있으며, 鄭氏 성을 가진 眞人이 나타나 이씨왕조가 멸망하고 새로 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이 중심으로 易姓革命사상과 미래에 다가올 멸망에 대비한 피난처로서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 연산군 이래 국정의 문란, 임 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으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이래 금서에 속하였으나 민간에서는 새로운 사회변혁 을 갈망하는 사회심리가 반영되어 은밀히 전승되어왔다. 광해군 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과 19세기 민중운동 동학농민운동을 기점으로 속출한 민중항거 대부분이 정감록 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식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192 민족문화연구 72호 해 12월 병조판서 구선복(具善復)의 반정역모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삼도 수군통제사 좌포도대장 시위승지를 지낸 구명겸(具明謙)이 1785년의 옥사 와 연루되었음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옥사가 계속된다. 이 옥사와 관련해 서 사주에 관한 기록이 다섯 군데에서 나타난다.52) 여섯째, 1826년(순조 26) 정상채(鄭尙采)와 청주진영의 아전을 지낸 박형 서(朴亨瑞) 등이 홍경래(洪景來)는 죽지 않았다느니, 병화(兵禍)가 해도(海島) 에서 일어났는데 진인(眞人)은 바야흐로 홍하도(紅霞島)에 있으며 이름은 정 재용(鄭在龍)이라느니 등의 말을 지어내고 이를 청주진영에 투척한 혐의로 옥사를 당한다. 이때 오한경(吳漢京)이란 인물이 백로를 변화시켜 호랑이를 52) 사건의 전모 중에서 四柱가 언급되는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正祖實錄 卷19, 正祖 9年 2月 29日 己酉. 이율이 말하기를, 四柱를 잘 보는 이상한 사람 이 있다 라고 하였기 때문에, 또한 臣의 사주를 가서 물어보라고 이율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율이 말하기를, 術者가 말하기를, 이 四柱는 마땅히 事業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 였다 고 하면서 術士가 평한 그의 四柱를 내보였습니다. 그 가운데 10년 동안 쭈그리고 고 생하다가 하루아침에 제후로 봉해지게 된다. 흉악한 害가 사방으로 이를 것이니, 南方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 라는 말이 있었는데 (瑮云: 有異人, 善觀四柱. 故亦以臣之四柱, 托瑮 往問矣, 其後瑮曰: 術者言此四柱, 當有事業. 云矣. 出示渠之四柱, 術士所評者, 其中有十年蹇屯, 一 朝封侯. 凶害四至, 利往南方之語, ) 正祖實錄 卷19, 正祖 9年 3月 12日 辛酉. 이율이 四柱를 香嶽에게 가져다 보이니, 논평 하기를, 지금은 비록 빈궁하지만, 앞으로 누리게 될 부귀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라고 하였 습니다(瑮之四柱, 轉示香嶽, 則評曰: 今雖貧窮, 將來富貴, 不可勝言. 云云). 正祖實錄 卷22, 正祖 10年 12月 7日 丙午. 이율이 어떤 術客이 너의 四柱를 보았으면 한다 고 하기에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瑮謂: 有術客, 要見四柱, 果爲書送矣). 正祖實錄 卷22, 正祖 10年 12月 9日 戊申. 역적 李瑮로 하여금 文洋海에게 四柱를 보내 지리산의 異人과 내통하여 三道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에 안에서 호응할 大將의 운명이 좋은 지의 여부를 묻게 하였는데, 그와 왕복한 편지가 역적 이율의 문서에서 발각되기까지 하였 고 또 이 일이 문양해의 공초에서 나왔다(而況使賊瑮, 送示四柱於洋海, 要通知異山異人, 質問 三道擧兵時, 內應大將數命之好否, 往復書札, 至發於瑮賊之文書, 此事又出於洋海之援告). 正祖實錄 卷22, 正祖 10年 12月 9日 戊申. 乙巳年(1785) 봄 文洋海, 李瑮의 옥사 때 三道 에서 군사를 일으키기로 날짜를 이미 정하고 안에서 호응할 大將은 제가 맡았습니다. 그런 데 저의 身數가 어쩐지 몰라서 역적 이율에게 四柱를 써서 주어 文洋海에게 보이라고 하였 습니다. 이른바 지리산 異人에 대해서는 이번 逆變을 조사할 때에 四柱 보낸 것을 제가 또 낱낱이 자복하였습니다. 흉악한 마음을 고쳐먹지 않고 역적 종실과 내통하는 비밀 통로의 구실을 하였고 망측한 저의 숙부(具善復)의 逆謀에 참여하였으니 (乙巳春, 洋瑮之獄, 三道擧 兵, 期日已定, 內應大將. 屬於身, 而未知身數之如何, 書給四柱於瑮賊, 使之送示於洋海. 所謂智異山 異人, 今番逆變究問之際, 送示四柱一款, 身又箇箇自服. 而罔悛凶心, 爲逆宗交通之密蹊, 參伊叔罔 測之逆謀, )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93 만들고, 능히 사주를 풀이할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53) 심문 결과 지 어낸 말임이 밝혀진다. 이 흉서(凶書)사건으로 청주목(淸州牧)은 서원현(西原 縣)으로 강등되고, 충청도(忠淸道)는 공충도(公忠道)로 개명되었다.54) 4. 조선사회의 변화와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성리학의 수용으로 인간에 대한 인식도 바뀌게 되는데 인간은 모두가 순수한 인간적 본성을 지녔다고 보았기 때문에 노비 같은 천인도 지배층 과 같은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불평등한 신분을 갖게 된 것은 육체를 이루는 기(氣)가 혼탁해 지배층보다 인간의 올바른 본성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아55) 이들의 도덕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교화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성리학의 궁극 목표는 도덕 원리의 확립 과 정당화이다. 따라서 조선 유학의 지향점도 개인적으로는 군자나 성현 이 되고, 사회적으로는 군자와 백성이 본연의 역할 수행을 통해 조화를 이루는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56) 그러나 성리학과 달리 명리학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과 인간의 타 고난 운명은 무관하며, 인위적인 교화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상승 시켜서 명(命)을 바꿀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명리학의 주요 구성원리인 정명론(定命論)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명(命)을 받는다. 부모가 기(氣)를 주고 있을 때 이미 길흉이 정해지는 것이다. 무릇 성(性)과 명(命)은 서로 53) 사건의 전모 중에서 四柱가 언급되는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純祖實錄 卷28, 純祖 26年 11月 2日 己卯. 吳漢京이 백로를 변화시켜 호랑이를 만든다고 한 말은 모두 박형서와 신계량의 진영에서 공초한 데에서 나왔는데, 지난번 鞫庭에서 박형서 는 다만 그가 능히 四柱를 풀이 하는데 보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고 말하였고 (吳 漢京化鷺作虎之說, 俱出於亨瑞及季亮鎭營所供, 而頃於鞫庭, 亨瑞只言其能解四柱, 不見已久, ) 54) 純祖實錄 卷28, 純祖 26年 10月 27日 乙亥. 55) 장재(張載)와 이정(二程)의 인성론(人性論)을 계승 총결한 주희(朱熹)는 전적으로 리(理)에 의한 천명지성(天命之性)과 리(理)와 기(氣)가 섞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분하면서 사람이 비록 만물 가운데서 가장 영묘하지만 하늘로부터 품부하여 받은 기의 혼명청탁(昏明淸濁) 등 에 따라 부귀 빈천 현우(賢愚)와 같은 차이가 없을 수는 없다고 말하였다. 김만태, 서거정의 命理觀 연구 오행총괄 序와 필원잡기 를 중심으로, 국학연구 22, 한국국학진흥원, 2013, 283면. 56) 위의 글, 293면.
194 민족문화연구 72호 다르다. 어떤 사람은 성품이 선하지만 운명은 흉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 람은 성품이 악한데도 운명은 길한 사람이 있다. 품행의 선악은 성(性)이 고 길흉화복은 명(命)이다. 57)라고 본다.58) 여기에서 성(性)이란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의미하며, 명(命)이란 도덕 자주성의 각성으로서의 천명(天命)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 는 불가항력적인 운명(運命)을 의미한다. 새의 암컷과 수컷의 구별이 이미 알 속에서 결정되는 것과 같이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기(氣)를 통해 성 (性)과 명(命)이 주어지고 나면59)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이 되고 만다. 또한 인간의 선한 행위가 반드시 복(福)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 악한 행위가 반드시 화(禍)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60) 관학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던 다른 제학(諸學)과는 달리 명리학은 비록 높고 부귀한 지위에 있는 좋은 운명의 사람일지라도 성품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님을 암시하는 이러한 정명론적 특성 때문에 기본적으로 기 존 체제에 대한 비판 또는 불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명리학은 한미한 가문이나 중소지주층, 비판적인 주변(marginal) 지식인층61)의 입장 을 대변하는 이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논리적인 판단과 직관력에 의한 결단이 요구되면서 동시에 재야성(在野性)과 반체제성을 함께 내포하고 57) 王充, 論衡, 命義, 凡人受命, 在父母施氣之時, 已得吉凶矣. 夫性與命異, 或性善而命凶, 或 性惡而命吉, 操行善惡者, 性也, 禍福吉凶者, 命也. 58) 본래 자연계의 사물과 현상으로부터 시작된 음양오행설은 형이상학의 옷을 입으면서 사 람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간의 차별성을 설명하는데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오직 사람 만이 기의 올바름을 얻어서 만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존재라고 하였다. 나아가 사람들 간의 차이, 예를 들면 성인(聖人)과 범인(凡人), 상지(上智)와 하우(下愚), 복(福)과 화(禍), 부귀와 빈천, 장수와 요절 등의 차이도 모두 사람들이 부여받은 기(氣)의 차이 때문이라고 인식되었 다. 김만태, 사시(四時) 월령(月令)의 명리학적 수용에 관한 고찰, 정신문화연구 37-3, 한 국학중앙연구원, 2014, 94-95면. 59) 王充, 論衡, 初稟, 稟命定於身中, 猶鳥之別雄雌於卵殼之中也. 60) 백호통의(白虎通義) 는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은 세 종류가 있는데(三命), 한도를 지키며 사는 수명(壽命), 억울한 불행을 당하는 조명(遭命), 한만큼 상응하게 받는 수명(隨命)이라고 했다( 白虎通義 夀命 命者, 何謂也, 人之壽也, 天命已使生者也. 命有三科, 以記騐, 有壽命以保 度, 有遭命以遇暴, 有隨命以應行習. ). 61) 통일신라 말의 6두품 세력,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 계층, 고려 말-조선 초 역성혁명에 참여하 지 않고 억압을 피해 국경으로 이주한 지식인 계층, 조선 말의 동학운동 세력 등이 그 예이다.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95 있는 사주명리학은 양날의 칼처럼 조선조 내내 왕조체제를 위협하는 각 종 모의사건에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연루되었다.62) 북송 이래 형성된 정주학(程朱學)의 사상과 이론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 성리학은 근원적 실체나 자연법칙의 탐구[所以然]도 궁극적으로는 도덕원 칙의 확립과 정당화[所當然]에 있었다. 그러므로 음양오행의 기를 받고 태 어난 사람은 인의예지의 성즉리(性卽理)에 의해 만물 중에서 으뜸이 되는 존재였다. 따라서 성리학에서는 도덕 자주성의 주체적 자각을 의미하는 천 명을 주된 개념으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외재적 필연적인 한계로서의 운명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도덕 인과율과 무 관한 불가항력의 운명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부정하지는 않았다.63) 여말에 전래된 성리학은 인간 내면에 관한 주체적 성찰과 동시에 구체 적인 현실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 새로운 경향의 사상 체계였다. 그 리하여 신진 사류(士類)는 성리학을 당대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 경제적 피폐, 사상적 혼란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했으며 불교를 비롯한 기타 사상과 종교는 이단 사교로 철저히 배격되었는데 이런 교조 화(敎條化) 경향은 갈수록 심화되었다.64) 16세기 이후 주자학이 교조화 독선화 되어 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 서 왕조체제에 대한 불만이 불거져 나옴에 따라 명리학의 반체제적 성향 도 더욱 심하여졌다. 이로 인해 명리학은 점차 반골지학(反骨之學) 으로 인식되어졌다. 원나라를 통해 세계문물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명리학과 거 의 같은 시기에 전파된 성리학, 즉 주자학은 군주와 가부장이 중심이 되는 수직적인 유교사회를 건설하는 이론적 기초가 되어 조선왕조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역할을 하지만 명리학은 그렇지를 못하고 재야와 관학, 역사 의 어두운 이면과 화려한 외면의 경계선을 수없이 넘나들게 되었다. 사주명리학은 조선 건국 초기 치세(治世) 수단으로 학자들의 연구대상 62) 이하 조선사회의 변화와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은 김만태, 앞의 논문(2005), 125-126, 136-137면을 근간으로 기술하였다. 63) 김만태, 앞의 글, 2013, 294면. 64) 위의 글, 279면.
196 민족문화연구 72호 이었다가 이후 왕조체제가 안정되면서는 주로 관학으로서의 명과학(命課 學)과 맹인(盲人)들이 호구지책으로 하던 술업(術業)의 범주 안에서만 머 물러 왔다. 그러나 왕조체제가 심각한 변화를 겪은 후 17세기 말부터는 점차 왕조체제에 비판적이고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소지식인(小知識人)들 에 의해 필수적으로 탐구되는 반골지학(反骨之學) 반왕조적(反王朝的) 관 념체계 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사대부가의 개인적인 역모에만 연루되던 사주명리학 은 17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민중의 심리가 반영되어 당시 크게 유행하던 정감록 등 각종 참위설과 결합되기 시작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697년(숙종 23)에 일어난 이영창의 옥사와 1785년(정조 9)에 일어난 홍복영의 옥사이다. 조선 중기 이후 계속되는 사화와 당쟁, 연이은 왜란과 호란 등으로 사 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주자학이 통치이념으로서 한계를 드러내자 민중과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조선 초부터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목자(木子: 李氏)가 망하고 전읍(奠邑: 鄭氏)이 일어난다는 참언(讖言)을 바탕으로 새 로운 사회가 도래하기를 희망하며 역성혁명을 꿈꾸는 도참설이 크게 유 행하는데,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이런 경향은 점차 조직화되면서 민중의 식을 변화시키고 민중봉기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시대적 상황 하에서 소지식인층의 사회 비판적인 정명(定 命)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사주명리학과 새로운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도참 (圖讖)사상이 결합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주명리학이 이 처럼 반체제적 반왕조적 학문으로 변모하고 전승되어 온 것은 사주명리학 이 내포하고 있는 정명사상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변혁의 필요성과 반체 제 반왕조적인 지식인들에 의하여 가능하였다. 즉 사화와 당쟁, 외세의 침 입, 국정의 문란 등 사회 변동의 와중에서 몰락한 양반들이 음양오행론과 천문역법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조 교체와 사회 변혁을 꿈꾸 며 도참사상과 더불어 사주명리학을 궁리하였다고 하겠다. 종합해보면 구한말까지 조선의 사주명리학은 왕실의 혼사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97 길흉을 추론하는 추명(推命)의 수단으로 주로 활용되거나 국가나 왕실의 길일(吉日)을 가리는 추길(諏吉)을 주로 하는 관학으로서의 명과학으로 자 리매김을 해왔다. 그리고 명통시(明通寺) 맹청(盲廳) 등을 통해 구전(口傳) 으로 수학되고 계승되는 맹인 복술업자(卜術業者)들의 영역으로도 제 기 능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 초부터 본의가 아니게 직 간접적으로 각종 역 모 및 불충한 사건들에 연루되는, 반체제적 반왕조적 학문으로도 채색되 어지며 각종 참위설과 연계되어 금기시(禁忌視)되는 학문으로도 여겨졌다. 이런 경향은 조선 중기 이후 조선 사회체제에 내재된 모순의 노정(露 呈)이 본격화되고, 이단을 허용하지 않는 조선 주자학의 교조화 독선화 등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에 서는 지금까지도 사주명리학에 대한 학문적 논의와 성과는 매우 미미한 실정이다. 게다가 구한말 개신유학자의 계몽활동, 일제 강점기의 우민화 (愚民化) 정책, 광복 이후 근대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면서 술수학(術 數學) 전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사주명리학의 실체가 더욱 왜 곡되기도 하였다.65) 5. 맺음말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간지로 치환한 후 그 상호관계를 해석하여 인간 삶의 길흉화복 빈부귀천 등의 차별함을 추론하기 위해 중국에서 만들어진 예언 체계인 사주명리는 늦어도 고려시대부터는 문화전파 작용으로 유입 되어 당시 지식인들에 의해 활용되어져 왔다. 즉 오늘날 사주명리의 근간 을 이루는 신법사주는 고려 말부터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패러 다임의 하나로서, 체제 변화를 요구하는 당시 신흥 관료, 지식인들에 의 해 원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사주명리는 명과학의 시취과목으로 채택되어 관학으로서 활용되며 국가와 왕실의 대소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사주명리가 내 포하고 있는 정명사상과 당시 사회변혁의 필요성, 반체제적 반왕조적인 65) 김만태, 앞의 글, 2005, 188면.
198 민족문화연구 72호 지식인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반골지학 으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주명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기층문화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사주명리가 직 간접적으로 조작내지 연루되는 불 충 및 역모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453년(단종1) 계 유정난, 1546년(명종1) 정흥종의 옥사, 1549년(명종4) 이홍윤의 옥사, 1561 년(명종16) 윤원형의 기만(欺瞞), 1632년(인조10) 유응형의 옥사, 1697년(숙 종23) 이영창의 옥사, 1785년(정조9) 홍복영의 옥사, 1826년(순조26) 정상 채의 옥사 등이다. 조선조에서 관학의 범주 안에 있던 다른 학술과 달리 명리학은 비록 부 귀한 지위에 있는 길한 운명의 사람일지라도 성품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 님을 암시하는 정명론의 특성으로 인해서 중소지주층과 주변 지식인층의 입장을 대변하고 기존 사회체제에 대해 비판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16세기 조선 중기 이후 주자학이 교조화 독선화 되어 가고 국정이 문란해지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조선 왕조체제에 대한 불만 이 드러남에 따라 명리학의 반체제적 반왕조적 성향도 더욱 심화되어졌다. 명리학과 같은 시기에 전파된 성리학은 군주와 가부장이 중심이 되는 수직적인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했지만 명리학은 그렇지를 않고 관학과 재야, 역사의 주류와 주변의 경계 선을 수없이 넘나들게 되었다.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한 상황으로 볼 때 정명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명리학과 새로운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도참사 상이 결합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는 사주명리학을 비롯한 술수학 전반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채색되어져 오늘에까지 이 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199 참고문헌 經國大典, 高麗史, 公私見聞錄, 論衡, 端宗實錄, 明宗實錄, 牧隱詩藁, 白虎通義, 成宗實錄, 世宗實錄, 肅宗實錄, 純祖實錄, 益齋亂藁, 仁祖實錄, 子平三命通變淵源, 正祖實錄, 中宗實錄, 太宗實錄 김만태, 명리학의 한국적 수용 및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김만태, 조선 전기 이전 四柱命理의 유입 과정에 대한 고찰, 한국문화 52, 서울대 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0, 159-187면. 김만태, 조선조 命課學 試取書 徐子平 에 관한 연구, 藏書閣 28, 한국학중앙연구 원, 2012, 266-293면. 김만태, 서거정의 命理觀 연구 오행총괄 序와 필원잡기 를 중심으로, 국학연구 22, 한국국학진흥원, 2013, 267-298면. 김만태, 십이지(十二支)의 상호작용 관계로서 충(衝) 형(刑)에 관한 근원 고찰, 정신 문화연구 36-3, 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133-164면. 중국철학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예문서원, 1994.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편찬, 동방미디어 제작, 國譯 公私見聞錄, 200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余春台 원편, 徐樂吾 평주, 窮通寶鑑(欄江網), 臺北: 武陵出版有限公司, 1996. 국사편찬위원회, http://www.history.go.kr/, 朝鮮王朝實錄 검색.
200 민족문화연구 72호 Abstract Study on the Underground Tendency of Sajumyungri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66) Kim, Man-tae* The new way Saju(Sinbeobsaju, 新法四柱), which is the basis of Sajumyungri(四 柱命理) today, was regularly introduced from the Yuan dynasty(元) by the new government officials and intellectuals since late Goryeo, who required system change, as a paradigm to understand a new era. Later, during the Joseon dynasty, Sajumyungri has remained as the basic culture of Korean society, forming the basic culture thereof, going through Joseon dynasty undergoing ups and downs process of sunny and shady spot of history. Differently from other various studies, which had stayed within the range of official scholarship, Myungri science has a characteristic of fatalism that implies the point that those who are not necessarily good-natured, even though they are in high-class and rich position. Due to this, Sajumyungri represented the position of meager family, small and medium landlord, and surrounding intellectuals, expressing critical message of the existing social system. Since the mid Joseon in the 16th century, as the doctrines of Chu-tzu became dogmatic self-contented, also, government operation and society became confused, underground tendency of Myungri science became more intensified as dissatisfaction about Joseon dynastic system became exposed. Neo-Confucianism, distributed in the same period as Myungri science, took a role as the dominant ideology of Joseon which aimed for a moral Confucian society, however Myungri science was different. During that time, considering the situation that the Joseon society faced, it was very natural that Sajumyungri science, based on the idea of fatalism, and the idea of stratagem, which longed for social revolution, were combined. Accordingly, a result that the overall divining science was negatively recognized including Myungri science. * Assistant Professor, Dept. of Future Anticipation, Dongbang Culture Graduate University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사주명리의 반체제적 성향 201 Key Words: Sajumyungri, Saju, Palja, Myungri science, Myunggwa science, Basic culture. 접수일: 2016.06.10, 심사일: 2016.08.12, 게재확정일: 2016.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