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번 1 2 문화재명 용덕리오항유물산포지 2 3 소재지 김해시한림면용덕리 370 번지일원 4면적 5시대 6종류 6,946 m2 삼국시대 고분관련유적 7 유적구분 조사의견 기존신규 8 9 10사유의견구분조사면적현장에서유구및유물확인되 표본 조사 6,946 m2 지않았으나, 주변에유적이다 수분포하므로사업시행전에 표본조사필요함 11 비고
ㅇ ㅇ ㅇ ㅇ ㅇ ( 사전조사및보고서작성 2 일, 현장조사 1 일 ) ㅇ ㅇ - 1 -
동강에 합류하고, 용지봉에서 발원한 화포천이 북서부를 곡류하여 낙동강에 합류한 다. 낙동강은 동에서 남으로 곡류하는 과정에서 북쪽의 화포천과 밀양강이 합류하 는 지점에 비교적 넓은 충적대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남해로 흘러 강의 하구에 넓 은 삼각주상의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의 평야지대는 원래 하안 의 배후습지였으나, 근래에 이르러 자연퇴적이 증가하고 제방 축조와 매립 등을 통 해 지금의 넓은 김해평야를 이루게 되었다.1) 한림면은 김해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 하남면과 접하고, 서쪽으로 진례면, 남쪽으로 생림면과 김해시 삼계면, 서북쪽으로 진영읍과 창원시 대산면과 접하고 있다. 지형적으로 해발 100 200m 정도의 야트막 한 소구릉과 넓은 들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사구역 주변 하천의 흐름을 보면, 동 쪽은 면소재지로부터 분기한 낙동강의 지류 용덕천이 소구릉 사이에 형성된 들녘을 관통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은 면소재지로부터 분기한 화포천이 구릉 사이의 들녘을 관통하고 있다. 2) 지질 김해지역의 지질은 중생대의 경상계가 8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경상계는 洛東 統, 新羅統, 佛國寺統으로 구분된다.2) 낙동통은 진주부터 산청 경산 칠곡 선산까지 帶狀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대개 상부 쥬라기에서 형성되어 지반의 침강과 함께 해식이 천천히 진행되어 나타난 결 과로, 편마암 및 화강암의 침식면에 被覆되어 있다. 신라통은 경상남도 東緣部에서 낙동통 西緣部까지 대부분의 지역을 광범위하게 덮 고 있는 지층계통으로 상부 경상누층군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남부 해안선의 침식이 발달된 부산, 통영수도에서는 신라통의 퇴적암이 해수에 침식되어 그 지층 이 판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해 구포 언양 경주 포항방면에 이르는 지역은 곡상협대로 그 방향이 북북동으로 되어 있어 단층선곡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자 색 회색 암회색 등의 泥岩 砂岩 礫岩등과 玢岩 자색 凝灰岩類가 있으며 礫岩 層이 基底를이루고 있다. 전체의 두께는 5,000m이상으로 추정되며 본층군과 불국사 통은 최대의 용암인 흑석 및 규장반암과의 관계는 부정합으로 되어있고 본통의 침 적상태는 낙동통의 적색암층 또는 진주층과 같이 지반의 침강에 따라 최적이 활발 해져 퇴적원지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淺水狀熊에 있다. 가장 이후에 형성된 불국사통은 여러 종류의 산성 분출암을 포함한 지질계통이다. 1) 昌原文化財硏究所 東亞大學校 博物館, 1993, 金官加耶圈遺蹟精密地表調査報告書 115 116쪽. 한국정신문화 연구원,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권, 51쪽.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 -
3) 김해문화원, 1991, 김해지리지 4) 釜山大學校博物館, 1984, 伽倻文化圈遺蹟精密地表調査報告書 昌原文化財硏究所 東亞大學校博物館, 1993, 金官加耶圈遺蹟精密地表調査報告書 5) 釜山大學校博物館, 1965, 農所里貝塚發掘調査報告 金龍基, 1965, 農所里貝塚發掘調査報告 釜山大學論文集 6, 1966, 農所里貝塚의發掘調査槪報 古文化 4 6) 金海市 東亞大學校博物館, 1998, 文化遺蹟分布地圖 - 金海市 - 7) 慶尙南道, 1981, 金海水佳里貝塚發掘調査報告書 釜山大學校博物館, 1981, 金海水佳里貝塚 Ⅰ 8) 釜山廣域市立博物館, 1993, 凡方貝塚 Ⅰ, 1996, 凡方貝塚 Ⅱ 釜山博物館, 2009, 凡方遺蹟 9) 釜山水産大學校博物館, 1993, 北亭貝塚 10) 釜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 加德島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書 11) 釜山廣域市立博物館福泉分館, 1997, 釜山의先史遺蹟과遺物 慶南發展硏究院歷史文化센터, 2009, 부산죽림동유적 12) 釜山廣域市 釜山大學校, 2006, 文化遺蹟分布地圖 - 釜山市 2- - 3 -
저지대로 이어지는 곡간지와 독립구릉 정상부에 취락이 입지해 있으며, 이보다 더 낮은 지대에는 古金海灣연안의 넓은 갯벌과 접하면서 풍부한 수원을 가진 하천 인 근의 하안단구 주변에서 인간생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적의 입지적 특징은 최근 장유면 일대 택지개발로 인한 대규모의 발굴을 통한 고고학적 자료에서 증빙되고 있다. 예컨대, 용지봉에서 비롯하는 독립된 완만 한 구릉 사면에는 靑銅器時代住居址를 비롯한 다양한 복합유적인大淸遺蹟13)이 조사 되었고, 율하천 인근의 하안단구면을 따라서는 대단위 靑銅器時代支石墓群이 열상 으로 분포하고 있음도 확인되었다.14) 또한, 이미 기존에 알려져 있는 무계천 주변으 로는 戊溪里支石墓15)가 위치한다. 이 지석묘는 上石의 크기가 길이 610, 너비 290, 두께130 로 매우 큰 편이며, 지석묘의 하부는 조사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인 근의 戊溪里支石墓와 거의 같은 구조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외 내삼천 인근으로 는 柳下里支石墓가 분포하고 있어 靑銅器時代장유 일원의 율하천, 무계천, 내삼천 상류 일대는靑銅器文化의 입지적 특징을 알려주고 있다. 三韓 三國時代에 이르면 古金海灣의 돌출된 鳳凰臺遺蹟을 거점으로 유적의 분포 는 더욱 많아지는데, 이들은 金官加耶의 성장과 번영을 알려주고 있다. 주목할 점은 김해지역이 신라에 예속되기 전인 3 4세기경 駕洛國으로서의 역할과 영역이다. 주 지하다시피 金官加耶가 前期加耶聯盟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으로 볼 때 그 영역을 정확하게 비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의 김해시 일대 및 부산광역시 일부지역 을 포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古代부터 金官加耶의 고도인 김해는 鐵생산지로 널리 알려져 中國, 日本에 鐵을 수출하였다. 이것은 지리적으로도 洛東江下流에 위치한 관계로 中國郡縣및 日本과 국내의 경상도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리 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金官加耶는 中國郡縣의 선진 文物을 받아들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는 한편, 내륙지역의 諸國과 倭등에 중개무역의 형태로 선진문물을 공급하여 부가 이익과 함께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러한 기반으로 加耶聯盟體를 형성하게 되면서 보다 강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유 지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으로는 良洞里,16) 大成洞,17) 陵 13) 釜山大學校博物館, 2002, 金海大淸遺蹟 우리文化財硏究院 南陽建設, 2010, 金海 大淸里遺蹟 14) 慶南發展硏究院 歷史文化센터, 2009, 金海 栗下里遺蹟Ⅱ 15) 金元龍, 1963, 金海 戊溪里 支石墓의 出土品 東亞文化 4 16) 東義大學校博物館, 2000, 金海良洞里古墳文化, 2008, 金海良洞里古墳群Ⅰ 17) 慶星大學校博物館, 2000, 金海龜旨路墳墓群, 2000, 金海大成洞古墳群Ⅰ, 2000, 金海大成洞古墳群Ⅱ, 2003, 金海大成洞古墳群Ⅲ - 4 -
慶南考古學硏究所, 2006, 金海大成洞遺蹟 東亞細亞文化財硏究院, 2006, 金海伽耶의숲造成敷地內遺蹟發掘調査報告書 18) 蔚山大學校博物館, 2001, 金海陵洞遺蹟 Ⅰ 19) 東義大學校博物館, 1997, 김해내덕리고분군발굴조사현장설명회자료집 20) 釜山大學校博物館, 1985, 金海禮安里古墳群 Ⅰ, 2000, 金海禮安里古墳群 Ⅱ 21) 慶星大學校博物館, 1989, 金海七山洞古墳群 Ⅰ 22) 釜慶大學校博物館, 2000, 金海龜山洞古墳 23) 東西文物硏究院, 2012, 김해유하리후포고분군 24) 成均館大學校博物館, 1989, 金海退來里遺蹟 25) 成均館大學校博物館, 1989, 金海退來里遺蹟 26) 三國志 권 30, 魏書東夷傳韓傳. 27) 三國史記 권 1 의脫解尼師今條와婆娑尼師今條, 奈解尼師今條등 28) 三國遺事 권 2, 駕洛國記 29) 三國史記 권 7 文武王 20 年 30) 三國史記 권 34, 地理 1 金海小京 - 5 -
金州로 개칭하고 防禦使를 두었는데 義安 熊神 合浦등 3縣을 屬郡(縣)으로 삼았 다.31) 文宗32년(1078)에는 東南海都部署本營을 설치하여 동남해역 방비의 중심기지 가 되었다.32) 이후 元宗11년(1270)에는 防禦使金咺이 密陽지역의 亂을 평정하고 三 別抄를 막는데 공이 있었다하여 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33) 이후 忠烈王代에는 麗 元聯合軍의 日本원정기지인 合浦의 領邑으로 중요한 배후가 되었다. 이후 이 원정 이끝나자 義安과 合浦는 독자적으로 승격 분리되었다.34) 김해지역은 지리적으로 日本과 가깝고 해상교통의 要衝地가 되었던 까닭에 일찍부 터 對日교통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지만 倭寇의 침입이 잦아 피해가 컸던 곳이기도 하였다. 禑王代에 朴葳는 이곳 부사로 부임하여 이들을 격퇴하는 한편, 邑城과 盆山 城을 수축해 방비를 강화하는 등의 족적을 남겼다.35) 朝鮮朝에 들어 김해지역은 太宗13년(1413) 金海都護府로 승격되었다.36) 世宗代 김 해부의 인구는 1,290戶, 1만 3,872명으로 파악되며,37) 世祖12년(1467) 지방군제의 개 편으로 慶尙右道兵馬節度使관할의 金海鎭이 설치되었다.38) 壬辰倭亂을 당하여서는 가락면 竹島에 상륙한 제3군에 의해 김해성이 포위된 가운데 부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선비 宋賓 李大亨 金得器 柳湜등이 읍민과 함께 끝까지 싸운 義兵史가 있다.39) 이 전란기간 왜군들은 新畓倭城과 馬沙倭城 등을 구축하였다. 高宗32년 (1895) 지방관제가 개정됨에 따라 金海郡이 되었고, 1918년 左部面과 右部面을 김해 면으로 통합하여 1931년 김해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에 김해읍은 金海市가 되었 다.40) 조사지역에 해당하는 한림면은 고려시대 후기부터 줄곧 하북면이란 행정구역이었 다. 1896년에 上北面과 下北面으로 잠시 분리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국적으로 단행된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두 면이 다시 병합되어 二北面이되었다. 이북 이란 지명은 북쪽에 위치한 두면이 합해졌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지만, 어감 상의 거부감 때문에 1897년 翰林面이란 행정명으로 변경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 다. 龍德里는 본래 김해군 하북면의 지역으로서 용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덕리가 되었다. 용덕리는 신천리에서 발 31) 三國史記 권34, 地理1 金海小京 32) 高麗史 권57, 地理1 金州 33) 慶尙道地理志 金海都護府 34) 高麗史 권27, 元宗 12年 4月 辛丑 35) 高麗史 권57, 地理1 金州 36) 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 37) 慶尙道地理志 金海都護府 38) 世宗實錄 권150, 地理志 金海都護府 39) 大東地志 권10, 金海 沿革 40) 金海府邑誌 人物條 - 6 -
원한 용처럼 생긴 천을 끼고 생겨난 마을이라는 뜻이다. 2. 사업구역 및 주변 문화재 현황 조사지역 경계로부터 1 이내에서 확인된 國家또는 市 道指定文化財는 없다. 조 사지역 주변 유적으로는 300m 이내에 용덕리 고분군, 용덕리 오항 유물산포지가 분 포한다. 300 500m 사이에는 용덕리 유적분포예상지가 분포한다. 500 1000m 사이 에는 김해 안하리 유물산포지, 장원고분군, 김득기 묘, 김해 용덕 일반산업단지 조 성사업부지 내 유적, 용덕리 가영 유물산포지가 존재한다. 41) 1) 조사대상지로부터 300m 내의 문화재 (1) 용덕리 오항 유물산포지 경상남도 한림면 용덕리 330번지에 위치한다. 유적 주변 하천의 흐름을 살펴보면, 동쪽은 면소재지로부터 분기한 낙동강의 지류인 용덕천이 소구릉 사이에 형성된 들 녘을 관통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은 면소재지로부터 분기한 화포 천이 구릉 사이의 들녘을 관통하고 있다. 유적은 용덕리 고분군이 위치한 소구릉의 북쪽 완사면 일대에 해당한다. 2015년 (재)동서문물연구원의 지표조사결과, 조선시대 백자저부, 백자편, 옹기편 등 의 유물이 수습된 용덕리 오항 유물산포지가 확인되었다. 또한 연접하여 용덕리 고 분군 등이 위치하고 있어 이와 관련한 매장문화재가 유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2) 용덕리 고분군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장원마을의 맞은편 야산 돌출부 윗부분에 위치하 고 있으며 그 규모는 비교적 작다. 산중턱에 철탑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랫쪽에 고분 의 개석이 노출되어 있는데 출토유물은 없으며 그 주변에도 1 2기 정도의 봉분이 있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서 토기가 몇 점 출토되었다고 한다. (3) 용덕리 고분군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324-7번지에 위치한다. 유적 주변 하천의 흐름을 살펴보면, 동쪽은 면소재지로부터 분기한 낙동강의 지류인 용덕천이 소구릉 사이에 형성된 들녘을 관통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으며, 서쪽은 면소재지로부터 분 기한 화포천이 구릉 사이의 들녘을 관통하고 있다. 조사지역은 오항마을 북쪽에 형 성된 완만한 능선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2006년 창원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결과 삼국시대 토기편이 다수 채집되어 용덕 리 고분군과 관련된 매장문화재가 유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41) http://intranet.gis-heritage.go.kr/index.do - 7 -
2) 조사대상지로부터 300 500m 내의 문화재 (4) 용덕리 유적분포예상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108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한림면소재지 남쪽에 위치한 용덕리 장원마을 일대로 조사구역 북쪽은 해발 150m의 야트막한 소 구릉이 이어지고 있으며 구릉 끝단의 완경사면에는 장원마을이 자리하며 경지정리 가 이루어지면서 유적을 포함한 경작지 원지형이 일부 훼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013년 (재)동양문물연구원의 지표조사결과, 고분군과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찾지 못했으나 고분군이 자리한 소구릉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천변의 충적지에 이어 지는 하천변 충적지에 해당되어 유적의 분포가능성이 있다. 3) 조사대상지로부터 500 100m 내의 문화재 (5) 김해 안하리 유물산포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안하리 348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낙동강 남쪽 낙 동강에 유입되는 화포천 연결 용덕천과 안하천이 합류하는 지점 북편 구릉 남쪽 사 면부에 해당한다. 경사변환점상에는 안명초등학교와 안하로가 구릉을 감싸고 돌고 있다. 유적은 안명초등학교의 바로 북쪽 뒤편과 서쪽 사면부까지 넓게 해당한다. 이 곳에서는 청동기시대 무문토기편과 반월형석도편을 비롯하여 삼국시대 각종 토기편 과 조선시대 자기편까지 선사에서 조선시대까지의 복합유적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 다. (6) 장원고분군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안하리 장원마을에 위치한다. 용덕리 고분군 맞은편에 있 는 장원마을 뒷산이 모두 고분군이다. 이 뒷산의 主峰은 해발 152m이고, 주봉에서 동쪽으로 마을과 만나는 말단부는 해발 50m 정도의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데 곳곳 에 도굴 흔적이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外地 사람들이 가끔 와서 땅을 파는 것 같다고 하여 최근에 도굴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은 주로 회 청색경질토기이고 간혹 적갈색토기편도 있다. 지표상에 개석들이 노출되어 있는데 대체로 규모가 작은 소형 석곽묘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7) 김득기 묘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낙산마을에 위치한다. 임진왜란때 김해 부사가 진 주성으로 가 버린 후 이곳 유림이던 金得器 등 4인이 왜구를 끝까지 방어하다 순사 하였다. 이묘는 김득기의 묘소로서 단순한 일반 민묘 형태이다. 화강암제의 묘비는 1901년에 개립된 것으로 비 높이 2.1m, 신부높이 1.46m, 폭 0.58m, 두께 0.2m이다. (8) 김해 용덕 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 예정부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산 90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 동쪽에 위치한 - 8 -
저구릉(해발 230m)의 서사면 말단부와 이를 개석한 곡부에 해당한다. 유적 경계 밖 북쪽으로 인접하여 안하농공단지가 입주해 있으며, 남쪽으로 용덕리 가영마을 등이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동쪽 저구릉으로 인해 동고서저형의 지세를 갖고 있다. 2010년 (재)우리문화재연구원의 지표조사결과 여러 구간에서 삼국시대 토기편 다 수와 조선시대 자기편 다수가 확인되었다. 이 구간은 원지형이 유지되고 있으며, 삼 국 조선시대 분묘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9) 용덕리 가영 유물산포지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848-3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 동쪽에 위치한 저구릉의 서사면 말단부와 이를 개석한 곡부에 해당한다. 조사지역 경계 밖 북쪽으 로 인접하여 안하농공단지가 입주해 있으며, 남쪽으로 용덕리 가영마을 등이 위치 하고 있다. 2014년 (재)우리문화재연구원의 지표조사 조사결과 여러 지점에서 삼국 조선시대 유물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삼국 조선시대 생활유적 내지는 분묘유적이 존재할 가 능성이 높다. 3. 현장조사 현장조사에서는 육안으로 지표면을 정밀하게 탐색하여 주변의 문화재와 현재 지 형, 유물과 유구 등의 유존여부 등을 통해 매장문화재의 분포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주민들의 전언을 통한 탐문조사도 병행하였다. 조사대상지의 주변 지형은 해발 100 200m 정도의 야트막한 소구릉과 넓은 들녘 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사구역은 완만한 구릉의 북쪽 사면에 해당한다. 현재 북서 쪽 일부에는 축사가 건립되어 있으며, 이외에 구역은 경작지로 사용 중 이다. 조사대상지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조사대상지 대부분이 1m 이상 복토가 되어 있 어 원지형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문화재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 지 않았다. 4. 사회 민속 자연문화재 해당 사항 없음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 의견 금번의 조사는 이병민씨가 추진하는 김해 한림면 용덕리 370번지 외 2필지 축사 신축부지(면적 6,946 )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대상부지와 주변지역에 대한 유적의 확인 및 보존방안과 보존범위를 파악함과 동시에 개발과 문화유적 보존의 효과적인 조화방안을 수립하기 위함이 조사목적이다. - 9 -
따라서조사대상지전체면적 6,946 m2의대하여표본조사가필요하다고판단된다.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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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조사대상지전경 사진 2. 조사대상지원경 ( 북 남 ) - 16 -
사진 3. 조사대상지원경 ( 동 서 ) 사진 4. 조사대상지근경 ( 서 동, 경작지및축사 ) - 17 -
사진 5. 조사대상지근경 ( 서 동, 경작지 ) 사진 5. 조사대상지근경 ( 북 서, 경작지 ) - 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