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함께하는국회소식지 SINCE 1949 07 2018 vol. 620 국회는 우산 이다 장맛비막아주는우산처럼민생을지키는국회로거듭나겠습니다
국민과함께하는국회소식지 2018 JULY VOL.620 SINCE 1949 표지이야기국민우산없이누구나외출할열수있고없는, 국민장마철입니다모두에게. 열려장맛비를있는소통의막아주는창이우산처럼될수있도록민생을노력하는지키는국회가국회로되겠습니다거듭나겠습니다.. 04 42 04 지금국회에서는 4당원내대표후반기원구성회동 대중음악으로돌아보는헌정사 70년 음악회국가미래연구전담기구 국회미래연구원 출범임박 특별기획 _ 제헌 70주년, 헌법의과거와현재그리고미래 08 1948년 5 10총선의의의 _ 고문현 10 제헌헌법의의미 _ 문재완 14 대한민국임시정부와제헌국회의관계 _ 한시준 16 제헌헌법과유진오박사의역할 _ 이영록 18 제헌국회의원유족회회장조기상전의원인터뷰 22 대한민국헌법 70년개헌사 _ 음선필 26 제9차개헌관련현경대전의원인터뷰 30 국회에서의헌법개정논의경과와향후논의방향 _ 한공식 34 제헌 70년, 우리국회의나아갈방향 _ 박찬표 38 통일헌법, 어떻게준비할것인가 _ 장영수 42 길에서길을찾다 _ 김한정의원 활력넘치는젊은 생태도시 남양주 46 칭찬합시다 _ 서형수의원 우리사회불평등과소득분배해결주력 48 나의애송시 _ 이완영의원 방문객 50 나의인생나의정치 _ 이태규의원 일하는국회, 새로운정치문화조성에일조할것 52 일하는국회공부하는국회 56 법률시대를읽다 민간임대주택에관한특별법 _ 김승기 58 주재관리포트 일본의회의일하는방식개혁관련법안심의와시사점 _ 오웅
간행물발간등록번호 31-9710176-000680-06 ISSN1975-7581 발행일 2018 년 7 월 2 일발행인김성곤국회사무총장편집인김병관홍보기획관국회홍보출판위원회진정구위원장 ( 입법차장 ), 한공식위원 ( 국회운영위원회수석전문위원 ), 박수철위원 ( 법제사법위원회수석전문위원 ), 권기원위원 (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수석전문위원 ), 석영환위원 ( 보건복지위원회수석전문위원 ), 장대섭위원 ( 기획조정실장 ), 임재주위원 ( 법제실장 ), 이상묵간사 ( 미디어담당관 ) 편집실무위원회윤상은 ( 보좌관 ), 장은덕 ( 서기관 ) 편집실무진김종해 ( 취재보도사무관 ), 김현아, 고영선, 박민선사진김지범 ( 촬영사무관 ), 임진완, 김진원, 유윤기주소서울시영등포구의사당대로 1 Tel.02)788-2058 book@assembly.go.kr 디자인 인쇄 ( 주 ) 이팝 02)514-7567 이책의우측상단에는시각장애인을위한음성변환바코드가삽입되어있습니다. 국회보는콩기름잉크인쇄로친환경을실천하고있습니다. 46 50 62 법시행현장을가다 자원순환기본법 64 만화 66 국회의숨은이야기 국회의사당여름사용설명서 68 국회뉴스 74 헌법읽기 비상사태와친구 _ 이국운 76 취재수첩 정치 1 번지 런던에서돌아본국회의미래 _ 박종필 78 4 차산업혁명바로알기 4 차산업혁명을둘러싼계시록적담론 _ 김희철 80 명품장인을찾아서 혼심은글자를나무에새기다 _ 채희숙 82 역사의길, 사람의길 김삿갓방랑길 _ 유성문 86 쉽게읽는과학이야기 잠을태워빛을얻다 _ 이은희 8 생활속우리말글 가장기본적인언어생활의지침 _ 김미형 90 그때그사건 일본의독도침범에대한국회의첫대응 91 정치관련주요일지
지금국회에서는 4 4 당원내대표후반기원구성회동 평화와정의의의원모임장병완, 더불어민주당홍영표, 자유한국당김성태, 바른미래당김관영원내대표 ( 왼쪽부터 ) 가 6 월 27 일국회에서열린후반기원구성을위한교섭단체원내대표회동에서손을맞잡고있다. 4당교섭단체원내대표가 6월 27일국회의원식당별실에서제20대국회후반기원구성을협의했다. 홍영표더불어민주당원내대표는회동을마친뒤 원내수석부대표들간실무협의를하기로했다 며 원구성에대한합의가이뤄진뒤 7월임시국회날짜를잡아야하는데명확하지않으니어렵다 고말했다. 김성태자유한국당원내대표는 오늘은세부적인논의는하지않았다 고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의석수를고려해 18자리인상임위원장을 8 7 2 1( 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평화와정의의의원모임 ) 비율로배분해야한다고주장하고있다. 특히제20대국회전반기원구성당시여당이었던자유한국당이야당이된만큼국회운영위원장과정보위원장을요구하고있다. 반면김성태원내대표는이날 마지막남은국회권력과입법부기능마저도민주당이독식해버린다면제대로된비판과견제를할수없다 며쉽게내줄수없다는입장을분명히했다. 바른미래당과평화와정의의의원모임도여당을견제했다. 김관영바른미래당원내대표는 여당이책임감을갖고임해줄것을부탁한다 고말했고장병완평화와정의의의원모임원내대표는 과거바람직하지못한관행을뛰어넘어국민눈높이에맞게원구성이이뤄지길바란다 고말했다.
5 국회보 2018. 07 대중음악으로돌아보는헌정사 70 년 음악회 대중음악으로돌아보는헌정사 70 년 공연에참석한김성곤국회사무총장과가수김세환. 국회는제헌70주년을맞아 6월 21일국회의원회관대회의실에서 대중음악으로돌아보는헌정사 70년 공연을개최했다. 1948년 7월출생한제헌둥이가수김세환을비롯해, 강균성, 김희진, 박혜신이출연해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격동의헌정사와그속에서국민과희로애락을함께했던곡들을소개했다. 이자리에참석한김성곤국회사무총장은 유신헌법으로국회가해산되고민주주의가후퇴했던 1972년당시저는대학생으로학생운동을하다고초를겪기도했다. 암울했던사회적분위기에서청년들의문화적해방구는김세환씨로대표되는통기타였다 며청년시절을회상했다. 이어 어려웠던시절을겪으면서도우리국민들은헌법과함께민주주의를지켜온지가 70주년이된다 며 이제는국회와함께현재와미래의삶을담아내자 고강조했다. 이번공연에는전쟁의상흔을달래준 이별의부산정거장, 4 19혁명의도화선이되었던 유정천리, 표현의자유가제한되었던시절금지곡이었던 아침이슬 등시대를상징하는곡들은물론, 1970년대김세환의포크송부터 2000년대강균성의 청혼 등많은국민의사랑을받았던노래가함께연주됐다. 또한, 대중가요전문가인장유정단국대교수가출연해시대의풍경, 국회와헌법의숨은이야기도소개했다.
6 특별기획 제헌 70 주년, 헌법의과거와현재 그리고미래 올해는헌법이제정된지 70주년이되는해입니다. 1948년 5월 10일총선에서뽑힌 198명의제헌의원들이제헌국회를구성하고헌법제정에돌입해 7월 17일마침내제헌헌법이탄생했습니다. 그후아홉차례개정된헌법은대한민국이오늘날정치적안정과경제적번영을이루는근간이되었습니다. 7월호특별기획에서는제헌헌법의탄생과아홉차례의개정과정, 최근국회에서진행된개헌논의등을돌아보면서헌법의의미와대한민국국회의나아갈방향을다시한번되새겨보고자합니다. < 편집자주 >
7 국회보 2018. 07 1948년 5 10총선의의의 제헌헌법의의미 대한민국임시정부와제헌국회의관계 제헌헌법과유진오박사의역할 제헌국회의원유족회회장조기상전의원인터뷰 대한민국헌법 70년개헌사 제9차개헌관련현경대전의원인터뷰 국회에서의헌법개정논의경과와향후논의방향 제헌 70년, 우리국회의나아갈방향 통일헌법, 어떻게준비할것인가 고문현문재완한시준이영록편집부음선필편집부한공식박찬표장영수
특별기획 8 자유로운국민의사에따라국민대표선출한첫선거 - 1948 년 5 10 총선의의의 고문현교수숭실대법학과한국헌법학회회장 일본제국의무조건항복으로광복의날을맞이한지약 3년만인 1948년 5월 10 일대한민국헌정사상처음으로보통 평등 직접 비밀원칙에입각해자유롭게국회의원을뽑는국회의원총선 ( 이하 5 10 총선 ) 이실시됐다. 5 10 총선으로일컬어지는이선거는 단독선거 단독정부반대 라는명분으로, 남북협상에참가한상해임시정부계로서우파민족주의자인김구와중도파지도자인김규식등민족진영의일부인사들에의해거부되고, 공산당을비롯한좌익계열의방해공작이있었음에도불구하고, 6개선거구를제외하고는순조롭게진행됐다. 바로이 5 10 총선에서선출된 198명의의원들로제헌국회가구성됐다. 여기에서는우리나라헌정사상최초로주권재민원칙을제도화한한국민주주의의출발점인 5 10 총선의의의에대하여살펴보고이에대한지속가능한계승방안을제시하기로한다. 등록유권자의 95% 가투표에참여미군정은유엔 (UN) 소총회의결의와유엔위원단의결정에따라 1948년 5월 10 일남한의단독정부를수립하기위해유엔감시하에제헌국회의원선거를실시했다. 5 10 총선은해방후 3년동안국가형성을둘러싸고전개되었던국내외정치세력들간의격렬한대립과갈등을해결하고대한민국의탄생을가져온한국현대사의획기적인전환점이었으며, 한반도에점령군의군정을종식시키고독립국가를건설하는첫단계였다. 5 10 총선당시의선거법은 1947년 9월 3일공포한남조선과도정부법률제5호 입법의원선거법 을골자로제정됐다. 이선거법의주요내용은 1선거권연령 21세 2피선거권연령 25세 3선거구는 1구 1인의소선거구제 4선거인명부는선거인의
9 국회보 2018. 07 자진등록으로작성 5국회의원의임기 2년등이다. 선거법을기준으로판단하면 5 10 총선은보통 평등 직접 비밀원칙에입각한선거였다. 5 10 총선에대한통계는현재두개가존재한다. 여기에서는 1948년의인구통계에기초한유엔위원단의통계를사용하기로한다. 이통계에따르면 1948년 3월 1일현재총인구는 1천 994만 7천명이고유권자수는 983만 4천명, 유권자중등록인은 783만 7천 504명으로유권자대비등록률은 79.7%, 등록유권자대비투표율은 95.5% 였다. 이통계에따르면선거인으로등록한사람들은대부분투표에참여했지만총유권자대비투표율은 71.6% 였다. 5 10 총선결과의특징은 200명의국회의원중에무소속이 85석이되어전체의석의 42.5% 라는높은비중을차지한것에반해, 5 10 총선을주도한양대정치세력인한민당과이승만의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각각 29 석 (14.5%), 55석 (27.5%) 밖에차지하지못했다는점이다. 더나아가한민당과이승만의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석을합치더라도 84석 (42%) 에불과해과반수확보에실패했다. 5 10 총선당시의특수한상황을고려할때, 유권자의선거인명부등록과정에서상당한관권의개입이있을수있었다고추정된다. 그러나선거에참여하는유권자에게후보선택의자유가보장됐고, 5 10 총선결과무소속이최대의다수를차지한점등을고려하면특정후보를당선시키기위한투 개표부정행위가별로없었다고추정할수있다. 따라서 5 10 총선은대한민국에서최초로실시된선거이고초창기여서일부어색한부분이있어서모범적인선거라고단정할수는없지만, 민의를현 저하게왜곡한선거라고할만한근거도없다고하겠다. 요컨대 5 10 총선은비록남한만의단독선거에의하여분단체제를공식화한한계가있지만헌정사상처음으로보통 평등 직접 비밀원칙에입각해자유로운국민의의사에의한국민대표를선출한선거였다는데그의의가크다고할수있다. 국민의다원화된의견반영할선거제도개혁나서야새로운이념이나제도가뿌리를내리고제대로기능하려면상당한시간이소요된다. 강남의귤을추운지방에심으면탱자가되듯이외국의아무리좋은제도라고하더라도한국의토양에접목되지않으면그이념이나제도는겉돌게된다. 금년은 1948년총선거가실시된지 70주년이되는뜻깊은해이다. 민주주의는선거를먹고산다는말이있듯이선거를통해국민의의사를정확하게반영할수있는제도적기반을마련해야하는데 5 10 총선당시의선거제도와유사하게소선거구다수대표제를규정하고있는현행 공직선거법 은다수를점한기득권정당에는유리하나소수자의의사를대변할수있는후보의당선이어렵다는점에서한계가있다. 제20대국회의여야정치권은이러한한계를직시하고역지사지의자세로기득권을과감히버리고국민의다원화된이익을제대로반영할수있는선거제도의개혁에제로베이스에서적극적으로임해주기바란다. 국민도이러한선거제도의개혁을더이상정치권에만맡겨놓을것이아니라두눈을부릅뜨고입을활짝연주권자로서지속적인비판과감시를통해 5 10 총선의정신을계승 발전시켜나가야할것이다.
특별기획 10 제헌헌법은우리국민이자주적으로내린결단 - 제헌헌법의의미 한헌법학자는 1948년 대한민국헌법 의제정을 하나의기적 이라고평가했다. 제헌헌법에관한다양한견해가있지만, 그중백미는 기적 이라는평가다. 일제강점의형극을겪고정치적혼란과경제적빈곤속에서건립된대한민국이오늘날정치적안정과경제적번영을누릴수있게된것은그첫단추를잘꿰었기때문이다. 우리처럼근대화에뒤진국가중제2차세계대전후독립해경제발전과민주정치를동시에이룬국가의사례는많지않다. 이를기적이라고부른다면, 그기적은제헌헌법, 즉 1948 년 대한민국헌법 에서시작된다. 문재완교수한국외대법학전문대학원 절차와내용모두정당성확보한제헌헌법제헌헌법은절차와내용면에서정당성을확보하고있다. 해방후남과북에미군과소련군이각각진주하면서사상적대립과사회적혼란이극심한상황을극복하고, 민주적절차에따라민주적내용을담은헌법이제정되어대한민국정부의출범이가능해진것은한반도역사의새장을연사건이다. 해방정국에서헌법제정을주도해흔히 대한민국헌법의아버지 라불리는유진오는제헌헌법을 현대민주주의국가의기본법으로서손색이없는훌륭한헌법 이자 당시우리의정치문화적수준에비해월등히전진적인헌법 이라고평가한바있다. 제헌헌법의정당성은 1948년 5월 10일제헌국회를구성할의원을뽑기위한총선거와그후진행된헌법제정과정에서찾을수있다. 당시통일정부수립을주장하는중도세력과좌익세력의불참이라는흠이있었지만, 우리나라최초의민주선거가실시되었으며, 국민의전폭적인참여가있었다는점에서제헌의시작은성공이었다. 198명의제헌의원들은 5월 31일제헌국회를구성하고헌법제정작업에들어갔다. 6월 3일헌법기초위원 30명과전문위원 10명으로헌법기초위원회가구성됐다.
11 국회보 2018. 07 헌법기초위원회는유진오와행정연구위원회가합작해서마련한안 ( 일명유진오안 ) 을원안으로하고, 사법부법전편찬위원회안 ( 일명권승렬안 ) 을참고안으로하여헌법초안을마련해 6월 23일국회본회의에제출했다. 국회본회의는 3차례독회를마치고 7월 12일헌법제정안을통과시켰다. 이승만국회의장은 7월 17일 대한민국헌법 에서명하고공포했다. 그후 8월 15일대한민국정부가수립됐으며, 12월 12일유엔총회는대한민국정부를승인했다. 헌법제정과정에미군정은헌법초안작성등을통해서영향을끼쳤지만, 노골적인간섭은없었다. 제헌헌법은대한민국국민이자주적으로내린결단의산물이다. 제헌헌법이국회구성후 1개월반이라는짧은기간에입헌주의내용을담아제정된것은기적같은일이기는하지만, 사실기적은아니다. 1919년 3 1 운동과임시정부수립이후축적된입헌주의헌법제정의경험과자주독립국을건립하고자하는오랜국민의열망이합쳐졌기때문에가능한일이었다. 제헌헌법은전문에서 기미삼일운동으로대한민국을건립하여세계에선포한독립정신을계승 한다는점을분명하게밝히고있다. 이는현행헌법에 3 1 운동으로건립된대한민국임시정부의법통 을계승한다는문구로이어진다. 1919년 4월 11일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을비롯해일제강점기임시정부의헌법제정을주도한인물은조소앙이며, 제헌헌법역시조소앙의영향력아래에있다. 해방정국에서다양한정치세력들은이념을정립하고세력을확산하기위해경쟁적으로헌법안을만들었다. 그렇기때문에제헌헌법은제헌국회라는무대에등장한위인들의창조물이아니라, 일제강점기와해방정국에서 독립된민주국가를건립하려고노력한수많은사람들이행한집단지성의산물이라고보아야한다. 제헌헌법은내용면에서도정당성을확보하고있다. 국민주권, 민주공화국,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대의제, 권력분립등현재대한민국을이끌고있는원리와이를실현하는제도의틀이모두제헌헌법에기초하고있다. 18세기말서구에서등장한근대입헌주의, 즉헌법에의해권력을제한함으로써시민의권리를보장한다는이념은제헌헌법에확실하게자리잡았다. 당시헌법제정권자는국민주권과민주공화제에대한이해의정도가깊었다. 제헌헌법의원형이라고일컬어지는 1919년 4월 11일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민주공화제로함 이라고했으며, 그해 9 월 11일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법 제2조는대한민국의주권이국민에게있음을규정했다. 한헌법학자의표현을빌리자면, 국민주권과민주공화국은 1948년헌법제정의최소조건이었다. 여기서제헌헌법은하늘에서떨어진기적같은선물이라기보다국민주권과민주공화제로운영되는자주독립국가의건설을위해오랫동안진행된축적의산물이란것을다시알수있다. 국가민족만년대계의기초를정하는기본법안 헌법은제정당시정치적공동체가처한현실을반영해만들어지지만, 여기에그치는것이아니다. 헌법에는정치적공동체를통합하고, 국가의미래를제시하는청사진으로서이념과제도가담겨있다. 제헌의회헌법기초위원장서상일은헌법이 우리나라국가민족의만년대계의기초를정하는기본법안 이라고평가했다. 제정된헌법은청사진의실현을위해현실을이끄는규범력
특별기획 12 을갖는다. 제헌헌법역시마찬가지다. 제헌헌법은해방공간이라는열악한현실에서제정됐지만, 제정된헌법은자유롭고정의로운국가라는미래를실현하기위한현실적인힘을지녔다. 제헌헌법은처음부터최고규범으로국민에게인식됐다. 제헌헌법은근대입헌주의헌법의자유주의이념을대부분담으면서동시에경제에있어서균등화와정의로운국가를지향하고있다. 전문, 총강, 국민의권리의무, 국회, 정부, 법원, 경제, 지방자치, 헌법개정으로이어지는제헌헌법의구조는현행헌법과거의같다. 내용에있어서도경제조항과정부형태의차이가눈에띌뿐이다. 기본권조항을국가기관의구성조항보다앞세워서국가기관은국민의권리를보장하기위해존립하고이를위해권한을부여받았다는점을알려준다. 제헌헌법제5 조는개인의자유와평등을존중하고보장한다는점을명시했다. 제28조는제1 문에서국민의모든자유와권리가헌법에열거하지아니한이유로경시되지아니한다고명시해기본권의자연권성을밝혔고, 제2 문에서국민의자유와권리의제한은법률로써필요한경우에한한다고규정함으로써법치주의를천명하고있다. 이익균점조항은정치공동체통합에기여제헌헌법의큰특징은경제에있어서균등을중시했다는데있다. 경제질서는모든사람에게경제적자유를인정하지만, 그자유는사회정의의실현과균형있는국민경제의발전이라는두가지원칙아래인정됐다. 이를두고유진오는 이헌법의기본정신은정치적민주주의와경제적 사회적민주주의와의조화를꾀하려고하는데있다 고설명했다. 제헌헌법은다른나라에서유사한사례를찾아보기힘든, 근로자의이익균점권도규정하고있다. 이익균점권 은헌법제정과정에서정부형태다음으로논란이많았던부분이다. 이러한조항들은북한에서시작된토지개혁을의식하고, 노동자와농민이인구의 80% 를차지하고있는저개발된당시경제상황을반영한것이었다. 균등을중시하는경제조항들은제헌헌법이정치공동체를통합하는기능을수행하는데크게기여했다. 하지만제헌헌법의경제조항을실현할수있는여건이마련되지않아헌법현실과헌법규범사이에괴리가발생했다. 그후본격적인경제발전단계로들어가면서헌법상경제조항은균등보다자유를존중하는방향으로개정됐다. 1954년개헌과 1962년개헌을거치면서제헌헌법의경제조항들은시장경제질서를중시하는방향으로전환됐다. 그럼에도불구하고제헌헌법에담겨있는사회적시장경제질서, 즉사회정의의실현을위해국가의규제와조정을허용하는경제질서의정신은현행헌법에까지이어지고있다. 특히경제민주화가명목이아닌현실적과제로떠오른오늘날제헌헌법의경제조항들은향후개헌에시사하는바가크다. 1948년 대한민국헌법 의제정과정이나내용을자세히살피면아쉬운점도많다. 가장아쉽다는평가를받는것은제헌헌법이남한단독정부를전제로만들어진헌법이라는점이다. 제4 조에서대한민국의영토는 한반도와그부속도서로한다 고명시해대한민국이한반도의유일한합법정부라고선언하고있지만, 통일정부를전제로제정된것은아니었다. 통일국가를바라는국민의염원이나기대에못미치는것이었다. 하지만당시시대정신이민족통일과민주국가를실현하는완전국가의건립하나만은아니었다. 자유롭고정의로운정부의조속한수립도통일국가의건립못지않게중요한시대정신이었다. 당시국회의장이승만은 헌법이잘못
13 국회보 2018. 07 1948 년 5 월 31 일제헌국회개원을축하하며꽃으로꾸민전차 됐으면나중에라도고칠수있는것 이라며조속한헌법제정을당부했다. 내각제에서대통령제로의변경은 오점 제헌헌법을제정하는과정에혼란도있었다. 헌법기초위원회가본회의에상정한헌법초안의정부형태는의원내각제와양원제였으나, 본회의독회에서대통령제와단원제로변경됐다. 당시정치인김성수의표현에따르면 대통령으로모셔야될단하나밖에없는후보자 로인식되던이승만이정계은퇴까지시사하며강력하게대통령제를주장했다. 명분은정치적안정과신속과감한행정이었다. 민주정부를실질적으로운영해본경험이전혀없던시절이어서특정정부형태가우리에게적합하다고단언하기는어렵다. 대통령제를택한것자체가문제일수는없다. 하지만특정인물의선호에따라정부형태가손바닥뒤집히듯바뀐것은제헌헌법성립과정의커다란오점이다. 갑작스러운변경으로대통령제요소와의원내각제요소는무분별하게혼재되어제헌헌법은체계의완결성면에서문제가있다. 또한제헌과정에서대통령권력남용의위험성을지적하는목소리가컸음에도불구하고제헌헌법은대통령에대한국회의통제권한이약해견제와균형이이루어지지않았다. 정부출범후이승만대통령의 12년장기집권과 4 19 의거에의한대통령사임의불씨역시제헌헌법에있었던것이다. 이러한약점에도불구하고 1948년 대한민국헌법 은대한민국정부의초석을튼튼하게놓았다는점만으로도최대의찬사를받을만하다. 아쉬움을해결하는일은후대의몫이다.
특별기획 14 대한민국은임시정부에뿌리두고, 그것을계승 재건한나라 - 대한민국임시정부와제헌국회의관계 한시준교수단국대사학과동양학연구원장 남의집에서셋방살이하던사람이어느날갑자기돈을벌어고래등같은집을지어살았다. 백수를맞아자신의삶을회고하면서, 고래등집에서생활한 70년이자신의삶의전부인양자랑한다. 30년동안의셋방살이는생각하지않는다. 이것이우리의모습이아닌가생각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존재를부정하고, 1948년에대한민국이건국됐다고주장한것이대표적사례라할수있다. 제헌국회가성립된지 70주년을맞는다.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10일 198명의의원을선출하고, 이들이국회를구성하여 5월 31일개원했다. 여기서헌법을제정하고, 대한민국정부를수립했다. 고래등같은집을지었고, 이집에서 70년동안번영된삶을살았다. 생각해볼문제가있다. 국회 헌법 대한민국정부는 1948년에새롭게만든것인지, 아니면그뿌리가있었는지하는문제이다. 우선 국회 ( 國會 ) 에대한문제이다. 각국에서사용하는입법기구의명칭은 의회 ( 議會 ) 의원 ( 議院 ) 인민대표회의 ( 人民代表會議 ) 등다양하다. 우리는 국회 라고한다. 1948년 5월 31일개원식때 국회개원식 ( 國會開院式 ) 이라했고, 이승만의장은개회사를하면서 우리는공선 ( 公選 ) 에의 ( 依 ) 하야신성 ( 神聖 ) 한사명 ( 使命 ) 을띠고국회의원 ( 國會議員 ) 자격으로이에모여 라고해, 국회 라는용어를사용했다. 국회 라는용어를사용했지만, 그것을누가언제어떻게정했는지에대해서는알려진것이없다. 임시정부와더불어입법기구로역할한임시의정원 국회 라는용어를사용한것은대한민국임시정부다. 1919 년 4 월 11 일공포한헌 법 대한민국임시헌장 제 10 조에 임시정부 ( 臨時政府 ) 는국토회복 ( 國土恢復 ) 후만 1
15 국회보 2018. 07 개년 ( 滿 1 個年 ) 이내에국회 ( 國會 ) 를소집함 이란내용이있다. 임시정부와더불어입법기구로역할을한것은임시의정원이었다. 당시는임시의정원이라했지만, 독립이되면임시의정원은국회가된다는말이었다. 의정원의역할과기능은지금의국회와같다. 1919년 9월개정된헌법에 대한민국의입법권은의정원이, 행정권은국무원이, 사법권은법원이행사함 ( 제5조 ) 이라하여, 의정원은입법기구였다. 의정원의조직과운영은 의정원법 에따랐다. 1919년 4월 25일 13장 57개조로된 임시의정원법 을제정했다. 여기에의원의자격과선출기준등조직에관한것을비롯해, 헌법제정및개정, 법률안심의의결, 대통령선거, 예산결산의결, 국무원및주외대사임명동의, 국무원출석답변요구, 대통령과국무원탄핵, 관리의위법행위조사, 의원징계등이상세히규정되어있다. 지금의 국회법 과크게다르지않았다. 의정원은해방후환국한이후에도임시정부와더불어활동을계속했다. 미국이임시정부를인정하지않았지만, 임시정부와의정원인사들은국내에서조직을유지하며활동을이어갔다. 의정원은 1946년 2월 1일명동천주교회당에서국내각계인사 195명이참가한가운데명칭을비상국민회의로, 1947년 3월에는다시국민의회로바꾸었다. 명칭을변경하면서, 의정원의역할과활동을계속한것이다. 비상국민회의 국민의회라는명칭을주목할필요가있다. 이를약칭하면 국회 가된다. 다음은제헌헌법에대한문제이다. 제헌헌법은 1948 년 7월 17일공포됐다. 제헌헌법에대해서는그동안헌법학자들에의해많은연구가이루어졌다. 기초자인유진오박사는대한민국임시정부의헌법을참조하였던것 으로밝혀져있고, 임시정부헌법과제헌헌법의구조와내용도크게다르지않다고한다. 임시정부는 1919년 4 월 11일헌법을제정공포한이래 1944년 4월까지모두 5차례에걸쳐헌법을개정했다. 개정은행정수반명칭의변경등임시정부조직과관련이있지만, 개정할때마다새롭게창작한것으로볼것이냐하는점을생각할필요가있다. 제헌국회에서국호를대한민국으로하고, 이승만을대통령으로선출해대한민국정부를수립했다. 이를 대한민국 이란국가를새롭게건국한것으로이해하거나주장하는일이적지않다. 30년전인 1919년에국호를대한민국으로결정하고임시정부를수립한적이있었다. 제헌국회에서이를모르지않았다. 의장이승만은개원식개회사를통해 기미년에수립한임시정부를계승재건하자 고제안했고, 제헌헌법은전문을통해 기미삼일운동으로대한민국을건립하여 라고해, 대한민국은 1919년에건립되었음을밝혀놓았다. 제헌국회에서새롭게대한민국을건국하지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계승재건하여, 대한민국정부를수립한것이다. 제헌 70주년을맞으면서뿌리에대해생각해보았으면하는바람이있다. 국회의뿌리는임시의정원이다. 임시의정원 비상국민회의 국민의회 국회로이어진것으로보아야한다. 제헌국회에서헌법을새롭게창작하거나대한민국이란국가를건국한일도없다. 이전에있었던대한민국임시정부에뿌리를두고, 그것을계승 재건한것이다. 고래등같은집은하루에지어지지않았다. 그것을짓기위해수없이많은피땀이있었다. 흘린피땀을잊지않고, 뿌리를생각하는 70주년이되었으면한다.
특별기획 16 제헌헌법과유진오박사의역할 - 제헌헌법의 주도적 기초자 이영록교수조선대법학과 제헌 70주년을기념하는특별기획에한개인의역할을조명하는글로현민유진오박사가선택된것은흥미롭다. 이런기획은그가제헌헌법의기초자로서제헌헌법에큰영향을끼쳤다는오랜통념에서비롯되었을것이다. 그런데사실을말하자면, 최근 10여년사이의연구경향은이런통념에심각한의문을제기한다. 유진오의창안으로생각된제헌헌법이실은임시정부헌법이래의전통을그대로이어받은것에불과하다는것이다. 이들연구는제헌헌법을 헌법텍스트의자체진화 혹은 장기간에걸친집단적의사의결정물 로이해해야한다고주장한다. 더나아가서는유진오를과연제헌헌법의기초자라고부를수있는지에대한의문이제기되기도한다. 제헌헌법에대한유진오의역할과영향은과연어디까지인가? 헌법기초위원회의 공동안 은 유진오안 을토대로한것제헌헌법의기초자라는영예가유진오에게주어졌던것은그가헌법기초위원회 ( 이하 기초위 ) 의주심의안이었던소위 공동안 의작성자로알려져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엄밀히말해공동안은그와행정연구회인사들이함께작업한것이기때문에, 종종유진오과대평가론이비화되는원인이되기도했다. 그렇지만오늘날실증적연구결과에따르면, 공동안은유진오가그전에작성해놓았던소위 유진오안 을토대로한것임이밝혀졌다. 한편공동안은기초위의심의를거치면서유진오의원래구상과달리권력구조부분이크게변경됐다. 그렇기때문에제헌헌법을순전히유진오의구상으로만설명할수없는것도사실이다. 그렇지만이점이제헌헌법과유진오사이의특별한관계를부정할정도로과장되어서는안된다. 나머지부분은유진오의구상에서크게벗어나지않을뿐더러, 변경된권력구조부분에서도뒤에서보듯그의역할이전혀무의
17 국회보 2018. 07 미한것은아니었기때문이다. 이렇게볼때유진오에게최소한제헌헌법의 주도적 기초자라는이름을부여하는것이무리는아닐것이다. 유진오의역할을예증하는또다른중요한사실로일개전문위원에불과했던그가기초위를대표하여본회의에서헌법제안이유를설명했다는점을들수있다. 이것은헌법안의부분적인변경에도불구하고, 여전히그가 이헌법의전문권위가 로서그내용적타당성을보증하는위치에있었다는점을공식적으로확인해주는사건이다. 이헌법제안이유는제헌헌법을이해하는가장기본적인공식문서가될것이다. 유진오의전문가적의견은본회의심의과정에서도수정논의때마다크게영향을미치곤했다. 이런점에서전문가로서의유진오의권위와역할은특별하게조명될필요가있다. 제헌헌법에나타난유진오구상의독창성이처럼유진오의역할을인정한다해도그것이실은이전헌법문서들의연장에불과한것은아닐까? 그주요한논거중하나로드는것이흔히경제질서에관한규정이다. 제헌헌법은경제적균등과통제경제에대한지대한관심을표명하고있는데, 이는실은건국강령이래헌법문서들에서여러차례확인된내용에불과하다는것이다. 그러나최근에는제헌헌법의경제조항이경제성장을위해자유경제의방향으로도발전할가능성을열어놓았다는점이새롭게주목되고있다. 이전의헌법문서들도경제성장의측면을완전히무시한것은아니다. 그러나이전에는국가의통제를통한균등과성장의선순환관계만을염두에두었다. 유진오역시단기적관점에서는그런전통을이어받았지만, 장기적관점에서는균등과 성장이서로충돌할수있다고도보았다. 따라서당장은강력한통제경제를원칙으로하면서도, 어떤입법례보다도광범위하게통제와자유의범위를법률로정할수있도록융통성을부여했다. 헌법은시세의변천에적응할수있어야한다는유진오의헌법관과그의의회중심주의가영향을미친것이다. 권력구조부분은유진오구상이가장빗나간부분이다. 주지하듯이기초위에서는유진오가구상한의회다수당기반의국무총리가중심이되는내각책임제와대통령중심의이승만구상이정면으로부딪쳤다. 그과정에서유진오원래의구상을급하게변경해결과적으로는혼합적형태의권력구조모습을띠게되었다. 그러나본회의에서유진오의노력에의해대통령의국무총리단독임명이국회의동의를통한임명으로추가수정되었고, 이로써남아있는다른원안의규정들과함께유진오의구상은제헌헌법권력구조이해에일정부분영향을끼쳤다. 규범학적해석과는별개로이영향은헌정사의관점에서중요한의미를갖는다. 제헌직후바로내각책임제개헌운동이일어나고, 결국 1962년의의원내각제헌법이출현한데대한배경이자동력이되었기때문이다. 이외에도헌법위원회제도라든가, 체제면에서경제질서에관한장을기본권과분리해규정한점, 헌법문장을일제강점기의공문체에서오늘날과같은평서체로개혁한점등에서유진오의독특한기여를지적할수있을것이다. 이모든점들이결론적으로유진오라는렌즈를통하지않고서는제헌헌법을제대로이해할수없다는유진오역할론을지지한다. 비록그것이유일한렌즈는아니겠지만말이다.
특별기획 18 제헌국회의 애국심 본받아야 조기상제헌국회의원유족회회장제 11 12 대국회의원, 정무제 1 장관 올해는제헌 70주년을맞는해다. 인간사로치면고희 ( 古稀 ) 가되는짧지않은시간이다. 제헌의출발은 1948년 5 월 10일, 사상처음으로보통, 평등, 비밀, 직접선거를치르면서부터다. 유권자들은첫총선에높은관심을나타냈다. 총유권자중 96.4% 가선거인명부에등록했고, 그중 95.5% 가투표에참여했다. 선거권은만 21세이상의모든남녀국민에게부여됐고, 피선거권은만 25세이상에이른모든국민에게인정됐으나친일부역자는제외됐다. 북제주군을제외한전국에서선출된 198명의제헌국회의원은 5월 31일, 당시국회의사당이었던광화문중앙청에서첫회의를열며제헌국회가문을연다. 이렇게시작된제헌국회는 1948년 7월 17일헌법을제정 공포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수립될때까지국호결정과대통령선출등숨가쁜일정을보내게된다. 70년의세월이흐른지금당시밤을새워헌법을다듬고나라를걱정하며노심초사했던제헌국회의원은 2008년마지막제헌의원이던김인식옹이별세하며제헌에대한 육성 ( 肉聲 ) 을잃었다. 국회보에서는대한민국민주주의토대를마련한제헌국회의원들을기리고유훈을받들기위한유족들의모임인 제헌국회의원유족회 의회장을맡고있는조기상전의원을만나아버지곁에서지켜본제헌국회총선모습과제헌국회의의의, 제헌국회의원유족으로서국회에바라는점등을들어보았다.
19 국회보 2018. 07 조기상전의원의부친은조영규제헌의원 ( 제헌 3 4 5 대국회의원 ) 으로부자 ( 父子 ) 의원이고, 장인 ( 丈人 ) 이박병배전의원 (4 5 7 8 9 대국회의원 ) 이다. 조영규제헌의원은 1948년 5 10 총선때 35세의나이로전남영광군에서출마해무투표로당선됐다. 당시초등학교 5학년이었던조기상전의원은 영광에서병원을운영하던부친과여러예비출마자들이체화정 ( 棣花亭 ) 이라는정자에서누가출마할것인가를두고얘기하던모습을지켜봤다 며가족사에대해설명했다. 고향인영광은법성포가있어굴비로도유명하지만고대로부터중국과교역을시작했고조선시대에는전라도의세곡을조정으로실어나르던조운선이집결했던곳입니다. 그래서신문물이일찍부터들어왔지요. 호남의부유한집안에서태어난부친께서는경성제일고등학교를졸업한후일제의침탈이시작되자일본이아닌중국북경대학으로유학을떠나항일운동에가담했습니다. 1940 년경형제가모두의사시험에합격해고향에서의료활동을했지요. 조영규전의원은 1946년남조선과도입법의원선거에서영광군에서당선되어정계에진출했다. 그후 5 10 총선에서조영규전의원이택한정당은자주독립국가와민주주의수립, 근로대중의복리증진등을정강 ( 政綱 ) 으로채택한한국민주당 ( 약칭한민당 ) 이었다. 조영규제헌의원은한민당발기인이기도했으며한민당을이끌었고부통령을지냈던인촌김성수씨와교우가깊었다고했다. 5 10 총선이다가오자영광군에서는예비출마자들이체화정에모였고여기서부친께서출마선언을하자다들출마를포기하고양보했습니다. 병원을운영했던부친께서는주민들과접촉이많았고의사로서인심을얻다보니다른후보들이출마를거둬들이게된것이지요. 그래서치열한선거전없이무투표로당선됐습니다. 이승만 신익희 김준연의원등 12명의무투표당선자중한명입니다. 선거과정에관권이개입하거나금권선거는전혀없었 1948년 5 10총선당시투표모습. 기표소앞에후보자의명단이붙어있다. 다고해요. 5 10 총선결과무소속이 85명으로가장많았고이승만이이끌던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명, 한민당이 29 명, 대동청년단 12명등의순이었다. 한민당은제헌헌법때내각책임제를추진했으나이승만의장이대통령중심제를고집해헌법이바뀌면서이승만과대립했다. 가난하고청렴했던제헌의원조기상전의원은거처를서울로옮겨부친과함께생활하며제헌국회의활동을지켜볼수있었다고했다. 가끔제헌국회에방청을가의원들의의정활동을지켜보기도했고, 신문의정치면을보다의문이생기면아버지께물어보곤했다 면서당시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부친께서는 어린나이에정치에관심을갖는다고나무라지않고응대해주었다 고기억했다. 조영규제헌의원은제헌국회때연락위원 ( 원내부총무 ) 을맡았다. 제헌국회의원들중거의대부분은가난했다고한다. 세비는사무관급이었고위원장이나부유한의원들은자가용이있었지만일반국회의원의출퇴근은미군트
특별기획 20 럭을개조한통근차량으로할정도였다 고했다. 조영규제헌의원은그후 3, 4, 5대국회의원에당선되어전남최초의 4선의원이됐다. 4선의원을지냈지만부친의의정활동기록물들은거의없다고했다. 자택을병원으로사용할정도로저택에살았지만 6 25 전쟁때인민위원회사무실로사용하면서모든자료들이소실되었다고했다. 반공투쟁에도적극적이어서한민당의원이면서도철기이범석씨가창단한조선민족청년단에가입해반공전선에나서기도했다. 영광군은 6 25 전쟁으로인한인명피해가컸던지역중하나다. 아버지의영향으로어린시절부터정치에관심가져조기상전의원은제6대국회총선에서약관 26세의나이로부친의지역구를물려받아출마했으나낙선했다. 젊은나이에출마해낙선했지만 아버지를국회의원으로만든아들 이란말을들을정도로대중연설을잘했고학생때부터전남지역타선거구찬조연설에나서기도했다 며 아버지의후광도있었겠지만어려서부터정치에소질이있었던것같다 고웃었다. 그후조기상전의원은제11대총선에출마해첫등원한데이어제12대국회때재선의원이되었다. 소선거구제였던제13대국회때는김대중총재가이끄는평화민주당의 황색바람 에밀려낙선했다 며 지역주의가극심했던시절이었다 고회고했다. 의정활동중기억에남는일로는제12대국회때인 1986 년 6월에열린임시국회본회의대정부질문에서 내각제책임제개헌 을주장해당안팎에서큰파문을일으킨적이있다고했다. 당시전두환대통령의 4 13 호헌조치로개헌주장이금기시되던때였습니다. 본회의발언을앞두고병원에입원중인부친을찾아 이번대정부질문에서내각책임제개헌문제를다루려고한다 고했더니 정치적으로어려움 1984 년 7 월 17 일서울국립중앙극장에서열린제 36 주년제헌절기념식에함께한조영규제헌의원 ( 오른쪽 ) 과조기상전의원. 을겪겠지만참좋은생각 이라고반겼습니다. 본회의발 언을녹화해부친께보여주자 내각책임제는내가못다 이룬꿈인데오늘발언은너의정치활동을지켜본것중 가장장한일 라며 이제죽어도여한이없다 고흐뭇해하 시더군요. 제헌헌법을만들때한민당이내각책임제를추진했지만 이승만대통령과의의견차이로좌절됐었기때문에내각책 임제선봉자인부친은못다이룬한 ( 恨 ) 이있다고했다. 그는 지금까지대통령제는선거과정에서지역감정과 흑색선전, 선동정치등으로문제가많았다 며 내각책임 제는정당정치가활성화되고국회가정치의산실이되는 제도 라는점을역설했다. 애국심으로나라를세운제헌국회본받아야 조기상전의원은제헌국회의원유족회장을맡아제헌 정신을알리는데힘쓰고있다. 제헌국회의원유족회는제 헌의원들의후손들이광복후사회혼란을겪으면서헌법 을제정하고나라를세운그분들의뜻을기리기위해만든 단체다. 이응선전의원, 김현욱전의원, 김진현전과학기
21 국회보 2018. 07 술처장관, 나종일전국정원차장등이회원으로있다. 올해는제헌 70주년을맞는해여서감회가새롭습니다. 해마다제헌절이되면국회를찾는데국회의사당중앙홀에세워진이승만대통령과신익희국회의장동상, 그리고벽면에설치된제헌의원부조상과제헌헌법전문 ( 前文 ) 을보면서유족의한사람으로서가슴뿌듯합니다. 건국의주역들에게감사의마음을표할수있는공간이있어다행이라고생각합니다. 제헌국회는오직나라를세운다는일념으로불철주야회의를열었다 면서 밤늦게까지회의하는게다반사여서자정이넘어가면회의진행이안되니까시곗바늘을 11 시로거꾸로돌려놓고회의를계속하기도했다 는얘기를들었다고했다. 우리가자유민주주의헌법아래서전쟁의고통과가난을물리치고번영과복지의나라를만든데에는제헌의원들이있다 며 건국의주역들인이분들이만들고자했던나라는아마꿈을이루는기회의나라가아닐까 한다고했다. 제헌국회는임기 2년을마치며 1950년 6월 2일, 폐회식을갖는다. 신익희국회의장은식사 ( 式辭 ) 에서 우리국회는지난 2년동안회기 640일가운데 290일간을개회하였고국회법과헌법및정부조직법을위시한 482건의주요의안을처결했다 면서 이는어느나라의회사에서도찾을수없는기록으로대한민국의터전을닦은것 이라고회고했다. 제헌국회의원유족회는국회가제헌의원들이생존해있을때제헌의원들이사랑방으로사용했던서울종로구통의동의 제헌회관 을 대한민국제헌국회의원기념관 으로보존해준것에대해감사를표했다. 대한민국제헌국회의원기념관 으로꾸며진후 2016년에는정의화전국회의장에게감사패를전달하기도했다. 그나마잊혀가는제헌국회를기념할수있는공간이있어다행이라고했다. 조기상전의원은 지금도가끔제헌헌법을읽어본다 며 제헌헌법에는대한민국이걸어가야할미래가새겨져있다 고했다. 특히이승만대통령에대해서는세간의평이엇갈리지만 이승만대통령이건국과정에서미국과의외교강화로한반도를대륙의끝이아니라해양세력의전진기지로만들었다는점은누구도부인할수없다 고했다. 강대국사이에있는우리나라가생존하려면이승만대통령의외교적감각과혜안을본받을필요가있다고역설했다. 한인물에대해서는잘못을탓하기보다성과를인정해줘야한다 며등소평이모택동의행적을평가하면서그의공이일곱가지이고과가세가지라고한 공칠과삼 ( 功七過三 ) 을인용하기도했다. 중국에는있는데한국에는없는것이 공칠과삼 의문화 라며 국민들도이승만대통령의건국에대한공 ( 功 ) 과리더십에대해포용의지혜를가져달라 고당부했다. 제헌의원유족회원들은해마다제헌절행사를마치면초대국회의장이자초대대통령인이승만박사가살았던이화장에모여총회를겸해서로의안부를묻는다. 조기상전의원은 유족들이제헌의원들의뜻은선양하고받들어야하지만, 국회나정부에신세지지는말자며오히려도움을주어야한다고말하는분들이많다 고했다. 인터뷰를마치며조기상전의원은한가지아쉬움을토로했다. 다름아닌제헌절이공휴일에서제외되어갈수록제헌의뜻이퇴색되어가는것같아안타깝다는것이다. 과거에는제헌절기념식을도 ( 道 ) 단위까지했다고말했다. 제헌절이국경일이지만공휴일이아니어서대단히가슴아픕니다. 공휴일은노는날이아니라하루를쉬면서제헌절을기리는날입니다. 공휴일이아니어서출근을하니제헌절이그저그런날인가보다합니다. 제헌 70주년을맞아 삼천만한결같이지킬언약 이자 국민이나라의주인 임을선포한제헌절의의미가국민의마음에새겨지길바랍니다. 노정객의마지막소원입니다. 글. 김종해사진. 김지범
특별기획 22 대한민국의갈망과염원, 회복과성취보여주는 70 년 - 대한민국헌법 70 년개헌사 음선필교수홍익대법학과 유구한역사와전통에빛나는우리들대한국민은 민주독립국가를재건함에있어서 우리들과우리들의자손의안전과자유와행복을영원히확보할것을결의하고. 헌법을제정한지올해로 70주년이됐다. 1948년헌법제정의감흥을간직한세대, 그자녀들과그들의자녀들이한자리에모여 70년의헌법역사를논한다면무슨얘기를할수있을까? 모두알다시피, 헌법은국가를구성하는국민들의합의다. 헌법은제정이후의세대에대해서도규범으로서효력 ( 구속력 ) 을갖는다. 후속세대들은이러한구속력을수용하면서헌법에대한합의를갱신하거나, 아니면이에반발하며새로운합의의형성을요구할것이다. 이과정에서헌법은크고작은변동을겪게된다. 문서화된헌법은그효력을뒷받침하는국민의상충하는요구에따라때로는개정, 때로는수호의대상이된다. 이런까닭에 70년의헌정사는대한국민의갈망과염원을, 시도와좌절을, 회복과성취를그대로보여준다. 70년간 9차례개정된헌법지난 70년동안헌법은아홉차례개정됐다. 작은규모의개정은네차례 ( 제1차 제2차 제4차 제6차개헌 ), 큰규모의개정은다섯차례였다 ( 제3차 제5차 제7차 제8차 제9차개헌 ). 큰규모의개정은 4 19, 5 16, 10월유신, 12 12, 6 10 으로상징되는정치적격변의산물이었다. 이중세번은정치군인을중심으로한소수세력에의한하향적변화였으며, 나머지두번은대다수국민에의한상향적변화 (4 19 및 6 10) 였다. 정치권력의비민주적행태에대해대한국민은분명하게저항의의사를표시했다. 아홉차례헌법변동을겪는동안, 대한민국은국가의보존및복구, 근대화및산
23 국회보 2018. 07 업화, 민주화의시기를거쳤다. 그결과대한민국이각종지표에서세계상위권에속하는국가적역량을갖추게된것은상찬 ( 賞讚 ) 받기에합당하다. 헌정사를통해헌법이어떠한변동을겪었는지를살펴보는것은헌법변동주도세력의의지또는야망을알게해주며, 또한그것의문제점을보여준다. 헌법의변동내용을쉽게확인할수있는방법은전문 ( 前文 ) 과통치구조를비교해보는것이다. 전문에는헌법변동의계기 주체 대의명분이드러나며, 통치구조에는주도세력의 권력에의의지 (Wille zur Macht) 가잘나타나있다. 이승만정권당시헌법개정 ( 제1차및제2차 ) 은주로대통령지위를강화하기위함이었다. 전쟁중에이뤄진제1차개헌 (1952.7.4.) 은대통령을국회간선에서국민직선으로선출하는것을주된목표로했으며, 양원제국회 국회의국무원불신임제 국무위원임명에있어서국무총리의제청권등을골자로했다. 위헌성제기된제1차 2 차개헌제1차개헌은 발췌개헌 의형태로이뤄졌기에절차상위헌이문제됐다. 약 2년후, 대통령의 3선제한철폐를주된내용으로한제2차개헌 (1954.11.27.) 도 사사오입 ( 四捨五入 ) 개헌이라는명칭처럼절차상의위헌성을지녔다. 제2차개헌의골자는초대대통령에한하여무제한입후보를허용하며, 주권의제약 영토변경을위한개헌은국민투표에부치고, 국무총리제를폐지하고국무위원에대한개별적불신임제를채택하며, 대통령궐위시에부통령이그지위를승계하고, 경제체제를자유시장경제체제로전환하는것이었다. 그러나개헌으로대통령지위를강화하려는시도와는달리, 대통령에대한국민적지 지는오히려떨어지고말았다. 1960년 3월 15일정 부통령선거에서자행된부정선거에대한국민적저항은급기야 4 19 혁명으로연결됐고, 제3차개헌으로이어지게됐다. 제3차개헌 (1960.6.15.) 은기존헌법체제에대한반발로서기본권의확대 강화, 의원내각제채택, 복수정당제보장, 헌법재판소설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헌법기관화, 경찰의중립성규정, 지방자치단체장의직선등을내용으로했다. 이는신헌법의제정이라할정도의변동이었다. 그로부터약 5개월후인 1960년 11월 29일에부정선거의주모자들과부정선거에항의하는군중을살상한자를처벌할헌법적근거를마련하기위해간단한부칙조항이신설됐다 ( 제4차개헌 ). 그런데 1960년헌법은국민적열망을제대로수용하지못한정치세력의퇴영적 ( 退嬰的 ) 행태로말미암아단명에그치고말았다. 1년여지속된정치적혼란은민주주의의과잉으로이해됐고, 정치적안정을바탕으로 새로운민주공화국을건설함 을명분으로내세운군인세력의등장을초래했다. 그결과제 5차개헌 (1962.12.26.) 이이뤄졌다. 채 3년도되지않은기간에대한국민은대통령제권력구조에서의원내각제권력구조로, 다시대통령제권력구조로전환하는전혀다른두가지정치적선택을한셈이됐다. 이로인해대한민국은결과적으로 민주화 보다는 산업화 의길에먼저들어서게됐다. 제5차개헌은헌법상개정절차를따르지않고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이규정한국민투표에의해개정됐다는점에서절차상문제점이있다. 그주요골자는극단적정당제국가를지향하고, 국회를단원제로하며, 대통령제를다시채택하고, 헌법재판소를폐지하며, 헌법개정은국
특별기획 24 제 9 차개헌으로이끈 6 10 항쟁당시시민들이명동성당앞에서시위하는모습 회의의결을거쳐국민투표로확정하도록했다. 1962년헌법의권력구조는역대헌법상가장미국형에근접한것으로평가되고있다. 그러나헌법자체에서극단적정당제국가를지향함에따라국회의원이정당지도부, 특히총재인대통령에게부종 ( 附從 ) 하기에이르렀고, 이에따라대통령과국회의관계가사실상우열 ( 優劣 ) 관계로정립되기에이르렀다. 제7차개헌으로 유신헌법 제정박정희정권하에서는 3선금지규정의완화를핵심내용으로하는제6차개헌 (1969.10.21.) 과대통령의중임이나연임제한에관한규정을두지않음으로써 1인장기집권을가능케하는것을주요내용으로하는제7차개헌 (1972.12.27.) 이이뤄졌다. 제7차개헌은이른바 유신헌법 의제정을의미했다. 그주요골자는기본권보장의전반적인약화, 통일주 체국민회의설치, 사전적 사후적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 국회의원정수 3분의 1의추천권등대통령의절대권력인정, 대법원장을비롯한모든법관인사권의대통령보유, 헌법위원회의설치등이었다. 유신헌법은국론통일을통해효율적인국정운영을가능케하는 한국적민주주의 의토착화를명분으로내세웠으나, 실은 1인장기집권체제의수립이그실제목표였다. 약 7년에걸친유신공화국에서대통령의법적 권한 은강해지고정치적 권력 은집중됐으나, 규범적 권위 는오히려추락했다. 산업화의성공으로물질적기반을갖춘대한국민은점차국가주도의계도보다는개인의자유로운선택을우선하기시작했다. 그결과박정희정권에대한민심의이반 ( 離反 ) 은부마항쟁등으로나타났고, 마침내유신정권의내부적몰락으로이어졌다. 그런데정작유신헌법을대체한것은신군부세력이주
25 국회보 2018. 07 도하는 제5민주공화국의출발 을뒷받침한 1980년헌법이었다. 제8차개헌 (1980.10.27.) 으로탄생한 1980 년헌법은국회에대한우월적지위를가진대통령제를바탕으로해통일주체국민회의폐지 선거인단에의한대통령간선제 대통령임기 7년단임제 국회의국정조사권신설 대법원장의일반법관임명권등을근간으로한권력구조를마련했다. 1980년헌법은유신헌법에비해상대적으로대통령의권한을약화시켰지만, 여전히권위주의적인대통령제를취하고있었다. 이에따라 7년동안존속한권위주의체제는민주화노정 ( 路程 ) 의장애물또는우회로 ( 迂廻路 ) 에해당한 과도기적단계 였다. 이기간동안대한국민은민주화의열망을 1985년국회의원선거로, 1987년길거리투쟁으로강력하게표출했다. 이에비례해신군부권위주의체제는불가역적인쇠락 ( 衰落 ) 의길로들어섰다. 민주화열기속제9차개헌 1980년대후반전세계에걸친 제3의민주주의물결 처럼, 1987년헌법이민주화열기가운데제9차개헌 (1987.10.27.) 으로 조국의민주개혁과평화적통일의사명에입각하여 탄생했다. 이헌법은헌정사상최초로평화적이고민주적인절차에따라국민적여망을최대한으로수용한합의개헌의형태로이뤄진것으로서대한민국헌정사의분수령 ( 分水嶺 ) 이라할것이다. 제9차개헌은직선대통령의 5년단임제, 헌법재판소설치, 국회권한의회복등을핵심으로했다. 대한국민의헌법 70년은크게 1987년헌법전과후로나눌수있다. 1948년헌법제정이후여덟차례개정이이뤄졌던불안정한약 40년의기간과제9차개헌이후상대적으로안정적인 30여년의기간이좋은대조를 이룬다. 1987년헌법전까지는 1인장기집권과민주헌정수호운동의대결로말미암아정국불안정이지속됐다. 한편 1987년헌법체제는상대적으로안정적이라는평가를받고있는데, 이는이에대한불만이부분적이나마해소되고있거나아니면개헌욕구의체계적인결집이부족한까닭이라고볼것이다. 1980년대이래대한민국의국가과제는민주, 복지, 통일세가지였다. 문제는이러한국가과제를수행하는데현행헌법이그리효과적이지않다는점이다. 현행헌법은민주체제의기능부전 (malfunction) 을야기하는제도적부적합성을지니고있다. 즉민주체제를구성하는제도및국가기관간의관계가정교하게정비되지못함으로인해기능상충돌또는부작동의문제가내재돼있다. 불완전한정당제도, 선거제도및국회제도와맞물려서 승자독식 또는 분점정부 로운용되는대통령제의구조적문제를지혜롭게극복할필요가있다. 현행헌법에대한국민의사확인해야새로운시대는새로운의무를부과한다. 이를자각 ( 自覺 ) 하는것이역사의식이다. 그런점에서현행헌법에대한국민의의사를분명하게확인할필요가있다. 국가과제를민주적으로또효율적으로수행할수있는헌법체제의구축은훗날을위한시급한과업이다. 국민적합의를통해헌법을고치는일은세대에걸쳐영향을주고받는역사적과업이다. 옛길에새걸음으로 발맞춰갈수있는지혜, 냉철한열정과한마음이현재대한국민에게더없이필요하다. 아울러일찍이역사를위해수고했던과거세대에게감사를표하며, 자칫힘겨울수있는미래세대에대해서는축복하는마음가짐이필요하다.
특별기획 26 국민의사가충분히반영된현행헌법 - 제 9 차개헌의과정과시사점 현경대전의원제 11 12 14 15 16 대국회의원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위원장 70년의헌정사에서아홉번의개헌이이루어졌다. 산술적으로보면 8년에한번씩개헌이이루어진셈이다. 하지만현행헌법은올해로개헌 31년째를맞으며오랜기간동안국민과함께하고있다. 1987년제9차개헌당시여야 10명으로구성된헌법개정안기초 ( 起草 ) 소위원회위원장을맡아개헌안을다듬고정리했던현경대전의원은 국가의기본법인헌법은당시의시대상황을고려해미래의프로그램을설정하는것 이라며 완벽하거나지고지순한헌법은아니지만국민의의견이충분히반영되고여야가합의한헌법 이라며의미를부여했다. 현전의원은 당시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위원장이라는공적역할에도충실했지만법률가로서권력구
27 국회보 2018. 07 조보다는국민의기본권등에관심을많이가졌다 고회고했다. 국가의비전을제시하는국가대사 ( 大事 ) 의하나인개헌이라는업무가나에게주어진것은행운이자감사한일 이라며 원없이일했고최선을다했기에부끄러움은없다 고했다. 개헌작업에시간이부족하지않았는가하는질문에는 국회와정부, 각정당과학자들사이에이미많은연구가이루어져있었고청원과진정, 민원등을통해각계의의견도충분히반영됐다 며 가치선택 의문제만남아있는상황이었다 고했다. 다만 제5 공화국헌법하의대통령임기내에개헌을마무리하려면 1987년 12월에대선이치러져야한다는시간표에맞추어개헌안발의와국회의결, 국민투표까지역산하다보니다소쫓기는감은있었다 고술회했다. 현재법무법인 우리 대표변호사인현경대전의원은넥타이를매지않은편안한옷차림에온화한어조로인터뷰에임했으나당시의중요한결정사항을증언할때면단호한목소리로거듭확인하는등꼼꼼함을보였다. 현경대전의원은지난 4월 30여년간보관해오던제9차개헌당시의자료등 386점을국회도서관에기증한바있다. 제9차개헌의탄생과정을설명해주십시오. 1985년에치러진제12대국회총선에서야당이던신민당이돌풍을일으켰고개원협상에서개헌문제가논의됩니다. 여당인민주정의당 ( 민정당 ) 은제5화국헌법으로헌정사에처음있는평화적정권교체라는역사적과업을이루자는의견이먼저였고개헌은 88서울올림픽을성공적으로치른뒤에하자는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개헌에대한국민의욕구가워낙강하다보니국회에헌법개정특별위원회 ( 개헌특위 ) 를만들게됩니다. 민정당은내각제개헌안을, 신민당과민한당, 국민당은대통령중심제개헌안을제안합니다. 개헌특위에서각당은개헌안에대한제안설명을했고 3개의소위원회구성까지마쳤지만야당이구속자석방과사면복권, 공청회의 TV생중계를제기하면서개헌특위활동은잠정중단되고야당은장외투쟁으로나서게됩니다. 이런가운데신민당이민우총재가 민주화조치가이루어진다면내각제를받아들일수있다 고하자야당의실질적리더였던양김씨 ( 김대중 김영삼 ) 가이에반대하면서이른바 이민우파동 도겪었습니다. 이과정에통일민주당이창당했지요. 제9차개헌이본격화된것은 6 10항쟁에이은 6 29선언에서민정당노태우대표가개헌의가장큰이슈였던대통령직선제를받아들이면서였습니다. 우리헌정사는 4 19 혁명이후내각제를했던 1년남짓의시기를제외하고는대통령직선제를유지해왔기때문에당시국민들은심정적으로대통령은내손으로뽑아야한다는요구가강했습니다. 현행헌법의가장큰의미는무엇입니까. 개헌문제의가장큰쟁점이었던대통령선출방식이 6 29선언으로해결되자 1년여간중단됐던개헌특위가다시가동되고여야협상이진행됐습니다. 현행헌법의가장큰의미는국민들의민주화요구를정치권이받아들였다는점과국회가중심이되어개헌안을발의하고여야가합의해통과시켰다는점에서 국회중심의개헌 이라고하겠습니다. 과거의개헌은주로현직대통령의집권연장수단이거나정치적변혁으로인한새로운헌정질서를구축하기위한것이어서개헌때마다정치적무리와개헌후유증이따랐습니다만현행헌법은지금까지일곱명의대통령을탄생시킨헌법입니다. 30년이넘는긴생명력은정치권
특별기획 28 의합의와국민동의가있었기에가능했습니다. 개헌특위구성이후개헌을둘러싼여야간의주요쟁점은무엇이며대통령 5년단임제협상과정을설명해주십시오. 대통령선출방식이직선제로결정되자나머지부분은속도감있게진행됐습니다. 민정당은평화적정부이양의기틀을마련한제5공화국헌법의 대통령단임제 를유지한다는게확고한입장이었습니다. 단임제가되어야대통령이다음대선을생각하지않고국정에만전념할수있다는것이지요. 7년단임제는임기가너무길어 6년단임을주장했습니다. 4년임기의국회의원총선이대통령에대한중간평가라는정치적의미도가질수있다고본것입니다. 야3당은 4년임기의중임제를제안했습니다. 그러나여야는협상막바지인 8월말에임기 5년의단임제로합의했습니다. 야당에서는강력한차기대통령후보자인양김씨가있었고, 대통령중임제가될경우두사람중한사람이당선되어연임할경우 8년간대통령직을수행한다는점도 5년단임제로의합의에작용했으리라고봅니다. 공식적인문서로남아있지는않지만개헌협상을주도했던 8인정치회담대표들은물론정치권에서도대체로동의하고있는사항입니다. 정치권에서대통령의 4년중임제나연임제로개헌을주장하고있습니다. 단임제에대한견해는무엇입니까. 대통령단임제는잘한선택이라고봅니다. 헌법은제정당시의현실을고려하여결정하게됩니다. 출발점은언제 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위원들과헌법개정초안을마련한뒤기념서명을하고있는현경대위원장 나현재인만큼정치적상황이변하면그에맞게대응해야한다는데동의합니다. 그러나개헌이선거전략차원이나정치세력의이합집산의도구로이용되면국민의지지를받지못할것입니다. 우리헌정사의가장큰불행은 1인장기집권에있었습니다. 단임제는대통령이정권재창출이라는부담을버리고평가는훗날의역사에맡긴다는신념으로국정을수행하면더욱소신껏일할수있다는장점이있습니다. 어떤제도든장단점은있게마련이며결국선택은현실과경험의문제입니다. 1987년당시의가장중요한과제는헌정사상단한번도헌법절차에따라평화적정권교체의길을마련지못한것을바꿔보자는의미가컸습니다. 8인정치회담이개헌협상을주도하면서일부에서는 밀실협상 이라는비판을하기도합니다. 이에대한견해는무엇입니까. 8 인정치회담이국회기구가아니어서속기록등자료가
29 국회보 2018. 07 남아있지않아그런것같습니다만 밀실협상 이라는견해에는동의하지않습니다. 8인정치회담은국회의공식기구가아니고교섭단체간에개헌안에대한이견을조율하기위해모인협의체였습니다. 일반적으로회의에앞서기조발언은공개를하지만실질적인협상테이블은공개하지않습니다. 그리고 8인정치회담이끝나면회의내용을언론에공개했습니다. 8인정치회담에서는큰쟁점만합의하고제가위원장으로있던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가이를바탕으로조문정비를했습니다. 여야 10명으로구성된소위원회도비공개회의운영을원칙으로했으며회의결과만요지로남겼습니다. 제9차개헌으로탄생한헌법재판소 ( 헌재 ) 에대해말씀해주십시오. 헌법재판소에관해서는개헌특위에제출한각당의개헌안을볼필요가있습니다. 민정당안에는헌법재판소신설이있었고야당안에는대법원에위헌법률심사권을, 탄핵은탄핵심판위원회에서다루도록되어있었습니다. 개헌협상막바지에저를비롯한민정당의원들이청남대에서전두환대통령에게개헌안요강을보고한일이있습니다. 위헌정당해산권을대법원이갖게된다고보고하자전두환대통령이그렇게되면대법원이 정치시위장 이된다며반대했습니다. 제가 그렇다면헌재를신설해야한다 고했고대통령이후속조치를취해줌으로써헌재가탄생하게된것입니다. 헌재는민정당의개헌안이었고개헌협상과정에서전두환대통령의헌법재판은대법원이아닌헌법재판소에부여해야한다는입장에대해야당이합의해탄생하게된것입니다. 제9차개헌이후개헌논의가있었음에도불구하고현행헌법이 30여년간유지된이유는무엇이라고보십니까. 제9차개헌이이루어졌던 1987년은미국헌법제정 200 주년이되는해였습니다. 미국헌법의초안자인벤저민프랭클린은 나는이헌법안에전적으로찬동할수는없지만이보다더좋은헌법을기대하지않습니다. 이헌법이올바로운용되도록앞으로우리의사유와노력이경주되기를바랍니다 라는요지의연설을했습니다. 저도현행헌법을읽다보면아쉬움이있습니다. 그러나현행헌법보다더나은헌법을만들기는쉽지않으리라봅니다. 헌법개정은당시의시대상황을고려해미래의프로그램을설정하는것입니다. 헌법은국가와민족의비전을제시하고국가의나아갈방향이무엇인가에관한큰그림을그리는것입니다. 현실적으로헌법조문은헌법개정당시제 ( 諸 ) 정치세력간의타협의산물입니다. 개헌문제와관련해여든야든개헌을정쟁의도구로삼아서는안됩니다. 정치적잘못을헌법탓으로돌리는것은공동의선을저버리는행위입니다. 글. 김종해사진. 김지범현경대전의원약력 1939년제주도출생검사, 제11 12 14 15 16 대국회의원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위원장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국회운영위원회위원장민자당원내총무, 한나라당당무위원 ( 사 ) 평화문제연구소이사장, 새누리당제주도당위원장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수석부의장법무법인우리대표변호사
특별기획 30 개헌특위와헌정특위활동통해개헌위한정보와자료충분히축적 - 국회에서의헌법개정논의경과와향후논의방향 한공식수석전문위원국회운영위원회헌법개정및정치개혁특별위원회 1987년헌법체제이후변화된대내외환경과시대정신을반영하는 21세기의새로운헌법을만들기위해제20대국회에서본격적인개헌논의가시작됐다. 정세균국회의장은제68주년제헌절경축사 (2016.7.17.) 에서 새로운헌법질서를통해낡은국가시스템을혁신해야한다는국민적공감대가조성되어있으므로여 야지도부가국가개조를위한구체적인개헌논의를시작할필요가있다 고밝혔다. 이에국회는 2016년 12월에헌법개정특별위원회 ( 이하개헌특위 ) 를구성했고, 올해 1월에는개헌특위와 2017년 6월에출범한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하나로통합해헌법개정및정치개혁특별위원회 ( 이하헌정특위 ) 를구성해 6월말까지운영했다. 지난 1년 6개월동안개헌을위한논의가국회에서계속됐지만개헌시기나개헌주요쟁점에대한여 야의입장차이로인해국회차원의헌법개정안을만들지못했고, 대통령이발의 (3.26.) 한개헌안도국회의결과정에서투표불성립 (5.24.) 되면서개헌작업이잠정중단된상태이다. 하지만지난 5월 29일에열린국회개원 70주년기념식에서여 야대표는한목소리로제20대국회내에개헌이성사되어야함을강조해개헌에대한희망은여전히살아있는상태이다. 이하에서는개헌특위및헌정특위의논의경과와대통령개헌안의처리경과등국회의개헌논의과정을살펴본후향후개헌논의의방향과과제에대해살펴보고자한다. 개헌특위는 2016년 12월 29일에여야의원 36명 ( 위원장이주영의원 ) 으로구성되어 2017년 12월 31일까지활동했다. 개헌특위는분야별개헌쟁점의효율적심
31 국회보 2018. 07 사를위해기본권등을논의하는 1소위원회 ( 소위원장김관영의원 ), 정부형태등을다루는 2소위원회 ( 소위원장이인영의원 ) 로나누어운영했다. 개헌특위의활동경과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첫째, 개헌특위는 23차례전체회의를통해전문가공청회, 시민단체 헌법기관및정부부처등의개헌의견청취, 대통령후보의개헌의견청취및개헌쟁점분야별집중토론을실시함으로써각계각층의개헌의견을최대한수렴했다. 구체적으로살펴보면 2017년 1월과 2월에공청회와경제 노동 여성 장애인등 24개시민단체, 대법원 감사원등 12개헌법상독립기관및정부부처의견청취등을실시했고, 4월 12일에는우리헌정사상처음으로원내정당대통령후보 5인을초청해개헌에대한입장을청취했다. 2017년 11월과 12월에는기본권, 정부형태, 지방분권, 경제 재정, 사법부등분야별쟁점을중심으로 6차례의 개헌집중토론을위한전체회의 를열었다. 이는소위원회별로논의된개헌쟁점을다른소위원회위원이정확하게파악할수있도록하고개헌특위전체위원이개헌쟁점에대해폭넓고심도있게의견을개진할수있도록하려는취지였다. 둘째, 개헌특위는 18차례소위원회를개최해각소위원회가담당하는분야별쟁점을중심으로논의를진행했다. 1소위원회는헌법전문및총강, 기본권, 지방분권, 경제 재정분야를중심으로, 2소위원회는정부형태 ( 입법부, 집행부 ), 정당 선거, 사법부분야를중심으로개헌쟁점을정리했다. 특히제4차 1소위원회회의 (3월 14일 ) 와제6차제2소위원회회의 (3월 15일 ) 는개헌특위자문위원회와합동연석회의로진행해개헌쟁점에대한개헌특위위원과자 문위원간토론이이뤄졌다. 셋째, 개헌특위는각계각층의전문가로구성된자문위원회를운영해 1년동안의논의결과를담아보고서를발간했다. 개헌특위자문위원의추천은국회홈페이지를통한공개모집절차를통해공정하게이루어졌고, 개헌활동을지속해온 80개의단체및기관으로부터추천된 296인중에서 53인을최종적으로선정해각분야의전문가가균형있게포진될수있도록했다. 자문위원회는개헌특위논의분야와연계되어논의할수있도록 2개의소위원회로나누어활동했으며, 총 136차례회의를통해개헌쟁점에대해심도있게연구했고그결과를 2018 년 1월에발간된한권의보고서에집약했다. 넷째, 기본권보장강화, 정부형태 ( 권력구조 ) 개편, 지방분권강화를중심으로개헌에대한국민의견을폭넓게수렴하기위해 8월 29일부터 9월 28일까지 16개광역지방자치단체와공동으로 헌법개정국민대토론회 를지역별로실시했다. 국민대토론회는지난 9차례개헌과정에서실시하지않았던것으로서 국민과함께하는열린개헌 이라는취지에맞춰현장의국민목소리를개헌논의에반영하기위해추진됐다. 국민대토론회는 11차례실시되었고총 5천600여명이참석해개헌에대한국민들의높은관심을확인할수있었다. 국민대토론회에서제시된의견은 개헌집중토론을위한전체회의 심사자료에수록해개헌특위위원들에게전달됐다. 다섯째, 국회개헌발언대 및 찾아가는개헌발언대, 개헌특위홈페이지및모바일홈페이지등을통해온 오프라인에서최대한국민의견을수렴했다. 국회개헌발언대 는국회경내에서개헌의견을청취하기위한것으로 2017년 9월부터 11월까지 3개월간운영해총 6천 240명이방문했고, 찾아가는개헌발언대 는개헌트럭
특별기획 32 ( 인구밀집지역 ) 및개헌바이크 ( 장애인복지관등기관이나단체 ) 를이용해민생현장을방문해개헌의견을청취했다. 또 2017년 9월에개헌특위홈페이지와 2017년 11월에모바일홈페이지를열어개헌논의진행상황과핵심쟁점을실시간으로국민들에게전달했고, 온라인개헌의견역시지속적으로수렴했다. 다음으로여야의원 25인 ( 위원장김재경 ) 으로구성된헌정특위는올해 1월 1일부터활동을시작했다. 헌정특위는개헌의핵심인정부형태 ( 권력구조 ) 를우리나라실정에가장적합한형태로설계하기위해그전제조건으로선거 정당제도가국민의민의를제대로반영할수있는시스템을갖출필요가있다는여 야의공감대에따라개헌과정치개혁의제가큰틀에서하나의특위에서논의될수있도록한것이다. 헌정특위의활동경과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먼저헌정특위는헌법개정소위원회와정치개혁소위원회로 2개의소위원회를구성했고, 소위원회에서논의한개헌쟁점을전체회의에보고한후전체위원의의견을수렴하는방식으로진행됐다. 교섭단체별개헌안시안이마련되기전에는개헌특위와정개특위의논의경과보고를시작으로개헌특위논의과정에서쟁점사항으로다루었던정부형태 ( 권력구조 ) 개헌의방향성, 정부형태유형별논의, 대통령과국무총리의권한배분, 양원제 예산법률주의도입등국회권한변경, 6 13 지방선거를위한선거제도개편및개헌시기등에대해집중적으로논의했다. 그리고교섭단체별개헌안시안이헌정특위에제출된후에는해당안건을중심으로개헌논의가진행됐다. 특히각교섭단체에서제시한정부형태인 4년연임대통령 중심제, 분권대통령 책임총리제를중심으로집중적으로논의했으나국회공전에따라합의된결론을내지는못했고, 6월말로헌정특위의활동시한이종료됐다. 국회공전중에도원내대표단을중심으로수차례회담을통해개헌논의를이어갔으나역시최종합의에는이르지못했다. 여야가개헌필요성에공감, 논의계속될듯대통령개헌안에대한처리경과를살펴보면, 올해 2월 18일에구성된대통령자문기구인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에서마련한개헌안초안을토대로 3월 26일에대통령이개헌안을국회에제출했다. 개헌안발의주체 ( 국회또는대통령 ), 개헌시기 (6.13 지방선거와동시실시여부 ), 정부형태 ( 대통령 4년중임제여부, 국무총리권한및선출방법등 ) 등주요쟁점에대한여 야간이견으로첨예하게대립했고, 국민투표법 이위헌상태에서개정되지못해개헌안이국회에서의결되더라도국민투표를할수없는상황적제약으로인해대통령개헌안이추진동력을받을수없는상황이었다. 결국대통령개헌안은헌법이정한국회의결시한인 5 월 24일국회본회의에서개헌의결정족수인재적의원 3 분의 2(192명 ) 를채우지못하고투표불성립으로사실상부결됐다. 그러나개헌쟁점에대한이견에도불구하고, 개헌필요성에대해서여야간공통된목소리를내고있으므로개헌에대한논의는제20대국회후반기에도계속될것으로보인다. 향후국회개헌논의의구체적인방향과과제는 1위헌상태인 국민투표법 개정 2개헌안마련을위한헌정특위재구성 3개헌시기단계별추진일정공표등에대한여야간합의에따라추진될것으로예상되며,
33 국회보 2018. 07 구체적으로살펴보면다음과같다. 첫째, 개헌안은국민투표 ( 국회의원선거권자과반수투표및과반수찬성 ) 로최종확정되므로위헌상태인 국민투표법 을개정할필요가있다. 헌법재판소는주민등록이되어있지않은재외국민을투표인명부작성대상에서제외하는 국민투표법 제14조제1항에대해재외국민의국민투표권을침해하는것으로헌법불합치결정 (2009 헌마 256, 2014.7.24.) 을내려해당조항은 2016년 1월 1일이후효력을상실했으나현재까지개정되지못해위헌상태가지속되고있다. 투표인명부는국민투표관리에핵심적인사항으로재외국민의국민투표권을인정하는방향으로투표인명부작성조항을개정하지않는다면국민투표가불가능하므로조속한시일내에개정될필요가있다. 둘째, 개헌동력을살릴수있도록 6월말로종료된헌정특위를재구성하는방안을고려할필요가있다. 대통령개헌안은헌법이정한국회의결시한을경과해이를다시표결할수는없다. 따라서개헌안은국회에서새롭게마련될필요가있다. 교섭단체별개헌안시안이이미기존헌정특위에제출되어있으므로이를바탕으로합의된개헌안을마련하기위해헌정특위를재구성하는방안을고려할필요가있다. 여 야원내대표단에서개헌핵심쟁점에대한논의와합의후새로구성되는헌정특위에서이를반영한헌법조문안을마련하는방안도가능할것이다. 셋째, 개헌시기는개헌에대한선결문제로서중요한쟁점이므로여 야가합의한개헌추진일정을사전에공표하는방안을검토할필요가있다. 이를통해개헌여부나시기에대한소모적인논쟁을줄이고개헌내용에집중하게하는효과를거둘수있을것이다. 개헌안은국민 투표로최종확정되므로 50% 이상의국민이참여할수있는투표시기를고려하는것이중요하다. 이번개헌은비례성을높이기위한선거제도개혁과연계되어있어개헌에따라새로도입될선거제도를언제부터실시 ( 가령, 차기제21대국회혹은차차기제22 대국회부터실시 ) 할것인지도중요한쟁점으로부각될수있다. 시대정신반영된새로운헌법기대그동안개헌논의과정에서개헌을 6 13 지방선거와동시에실시하자는의견과 6월에국회에서개헌안을합의해 9월까지국회의결과국민투표를마무리하자는의견이있었으나 6 13 지방선거가끝난현재의정치상황을고려할때모든것이어려운실정이다. 이러한점을종합적으로고려하면여야가개헌안마련을위한구체적인협상에들어가기전에제20대국회에서는개헌을완성한다는전제하에개헌시기에대한조율을마친후단계별추진일정을공표하는것을검토할필요가있다. 87년개헌이후 30년만에구성된개헌특위와헌정특위의활동을통해개헌을위한정보나자료가충분히축적되어있고, 교섭단체별개헌안시안이마련되어있는만큼여야간지혜를모은다면개헌논의를계속해나가는데어려움이없을것이다. 우리시대에개헌은국정운영의패러다임을대결과반목에서대화와타협으로획기적으로전환하고변화된시대정신을반영하기위한핵심과제이다. 여야가열린마음으로개헌안마련에노력한다면제20대국회후반기에는개헌작업이성공적으로마무리되어 21세기를위한새로운헌법이만들어질것을기대해본다.
특별기획 34 의회가정치의중심이고토론에의한공적결정이뤄져야 - 제헌 70 년, 우리국회의나아갈방향 박찬표교수목포대정치언론홍보학과 올해는제헌 70주년이자국회개원 70주년이되는해이다. 우리가근대적입헌주의와대의민주주의를제도화한지 70년에이른것이다. 해방이후의첨예한좌우갈등과남북분단의혼란속에서제도화된한국의민주주의는사회경제적기반이나정치적여건이미성숙한상태에서제도만주어진측면이없지않았고, 이후권위주의정권에의해훼손되고형해화되는수난의역사를겪지않을수없었다. 그결과, 4 19 혁명에서 87년 6월민주항쟁에이르기까지 40여년에걸친민주화운동을통해서야우리는비로소민주주의의제도적실천단계에진입하게됐다. 그렇다면민주주의의초기제도화이후 70년, 민주주의의본격적인실천이후 30 여년에이르는한국의입헌주의와대의민주주의의현주소는어떠한가? 개인의자유와권리의보장, 이에필요한제한정부의실현, 자치의이상과국민주권의실현등그것이지향하는가치를충분히담보하고있으며, 이를통해국민으로부터신뢰와지지를받고있는가? 이에결코긍정적으로답하기어려운것이오늘의현실이다. 지난정부하에서우리는민주화이후최대의헌정위기를맞았다. 이는한마디로정치권력의남용을막는제한정부의기본메커니즘인입헌주의가제대로작동하지않은결과였다. 특히촛불시위에서시민들은권력농단의주범인집행부권력뿐만아니라대의민주주의제도전반에대한불신을표출했고, 그대안으로직접민주주의의제도화를요구하기도했다. 결국민주화이후 30년이넘었지만, 입헌주의나대의민주주의는국민들의정치적
35 국회보 2018. 07 실천과의식속에뿌리내리지못하고있다고보인다. 뿐만아니라정당과국회등대의민주주의의제도적주체들은한국민주주의의질적도약을가로막는장애물로까지지목되고있다. 이러한국민적비판앞에서국회는어떻게스스로를혁신해야할것인가? 대의민주주의의성숙을위해국회가지향해야할변화의방향은무엇인가? 이에대해서는권력구조문제에서부터국회제도, 선거제도, 정당체제, 시민의식등다양한측면의검토가필요하겠지만, 한정된지면이기에변화의기본방향두가지만을지적하고자한다. 대의정부에대한새로운인식필요그첫째는대의정부에대한새로운인식의필요성이다. 과거권위주의정권하에서민주주의는 민주대반민주 라는대립구도안에서인식되어왔다. 소수권위주의세력의독재가극복과제였고, 그주체는민주적시민사회또는민주주의를바라는대다수국민으로설정되었다. 운동의목표는자유선거를통해 국민 의의사를진정으로대변하는민주정부를수립하는것이었고, 이를통해과감한사회경제적개혁을실현하는것이민주화프로젝트의핵심이었다. 87년민주화운동의핵심요구가대통령직선제였던것에서드러나듯이, 민주정부의핵심은직선대통령에있었다. 민주화이후에도이러한인식의기본구조는변하지않은듯하다. 한국민주주의의핵심문제로대통령으로의권력집중이지목되고, 대통령권력의분산이요구되고있지만, 다른한편에서국민들은직선대통령이국민으로부터위임받은시대적과제 그것이경제살리기이든사회경제적개혁이든 를속시원히해결해주기를바라는듯하다. 대통령은국가이익을수호하고시대적과제를 실현하는국민의사의구현체로표상되는반면, 국회는부문이익혹은정파적이익의대변체로서표상된다. 국회는대통령의개혁드라이브를발목잡는걸림돌로비판받기일쑤였고, 이에맞서대통령은대의민주주의의제도적통로를우회하여대중과직접소통하고호소하는전략을동원했다. 이러한현상은보수정부와진보정부를가리지않고되풀이되는듯하다. 전국민에의해선출된, 한사람의구체적인격으로표상되는대통령이민주주의와개혁의상징으로, 국민의일반의사의구현체로간주되는이러한민주주의를우리는일원적민주주의라부를수있을것이다. 문제는그러한민주주의관이, 민주화과정에서는대립구도와목표를선명히제시함으로써유용했을지모르지만, 민주화이후에민주주의를제도적으로실천하는데있어서는큰걸림돌이되고있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일원적민주주의혹은국민투표식민주주의는대의민주주의원리와배치되기때문이다. 대의정부는, 인민이선택한어떤한명의개인에게권력이위임되는제도로제안되지도설립되지도않았다. 대표성이란한명이누리는특권이라고상상할수없다. 대의정부는다양성에대한수용과연관되기때문이다. 대표기관은사회의다양성과다원성을반영하는집단적인것이어야하고, 이를실현할수있는곳이의회다. 대의민주주의의기초를놓은존로크가 의회주권 을주창한것은이때문이다. 그에의하면한정치공동체의구성원들이합쳐지고, 하나의일관된생명체로결합되는것은바로입법부내에서다. 로크에의하면정치권력은곧법을만드는권력이며, 법제정이곧정부의기능이다. 따라서국민의동의를통해권력을위임받은대의정부는일차적으로의회를의미한다. 단일의개인즉대통
특별기획 36 령이국민의의사를대변한다는것은대의민주주의의본질과배치된다. 우리는이중요한원칙을놓치고있다. 국민의의사가형성되는곳은의회이며, 대통령권력은이를집행하는권력으로제한된다는, 대의민주주의원칙을다시확인해야한다. 우리는대통령소속정당과국회다수당이다를경우를 여소야대 라고부른다. 국민다수의지지를바탕으로정부를장악한여당 (government party) 을판단하는기준이대통령권력의소재에있기때문이다. 반면대통령제의원형인미국의경우, 그런상황은두정당이입법부와집행부를분점한상황, 즉분점정부 (divided government) 가된다. 원내에는여당과야당이아니라, 다수당과소수당이있을뿐이다. 대의민주주의실현위해대통령중심사고벗어나야그동안우리가무심히사용해왔던그용어는민주화이후에도우리가얼마나대통령권력중심으로대의정부를생각해왔는지를잘보여준다. 대의민주주의의실현을위해서는권위주의정부하에서, 민주화운동과정에서관습화된대통령중심의사고에서벗어나야한다. 이러한인식전환의주체는당연히국회가되어야할것이며, 국회운영의주요행위자인원내정당이되어야할것이다. 국회의원및원내정당들은, 집행권력과의관계이전에국민의대표기구라는집단적정체성을확립해야한다. 대통령소속정당은, 대통령의제의일방적통과를추구할것이아니라, 반대당과의협상과타협을기꺼이수용해야한다. 다양한시민들에의해선출된, 서로상이한의견을가진대표들에서단일의의사를만들어내기위해서는토론과설득, 타협의과정이필수적이다. 원내타협의과정은 원칙의포기가아니라시민사회의다원성을반영하는과정이며, 갈등적부문의사를단일의국민의사로수렴해내는과정과다름없다. 다른한편으로, 대통령과당파를달리하는원내세력역시대통령의제의반대에주력하는태도에서벗어나야한다. 그로인한의회마비는곧대의정부의마비이며, 대통령에게국회를우회할명분을만들어줄뿐임을인식해야한다. 소수당은다수당의제의저지가아니라, 다수당과의타협을통해자신들이대표하는부문의사를공적결정과정에반영하는데주력해야할것이다. 다른한편으로, 대의민주주의의도약을위한제도적개혁과제로서개헌이필요하다면, 그근본적지향점은단지대통령권력의분산이아니라, 대통령과의회관계의근본적변화여야한다. 이를위해서의회중심제또는대통령제와의회중심제의혼합형권력구조로의변화가필요할수도있겠지만, 그것이불가능하다면현행의대통령제하에서도개선의여지는많아보인다. 입법권의국회전속 ( 행정부의법률안제출권불인정 ), 예산법률주의도입등은그구체적사례가될것이다. 대의민주주의의기능 장점인식해야한국민주주의의질적발전을위한두번째과제는, 대의민주주의의기능과장점에대한보다적극적인식이다. 흔히직접민주주의주창자들은정치를 시민대정치엘리트 의구도로바라보면서, 직접민주주의하에서는정치가엘리트간권력투쟁의장이아니라시민들의집단지성이발현되는장으로전환될것이라기대한다. 하지만국민이나시민은동질적집단이아니라지역, 계층, 계급, 세대, 성, 이념등에따른갈등과대립이존재하는다원적존재이다.
37 국회보 2018. 07 직접민주주의는이러한갈등과대립을통합함에있어중대한약점을드러낸다. 대의민주주의의장점은이지점에서나타난다. 갈등적이고상호대립하는다원적이익과의사를단일의사로결집하여권위있는결정을도출해내는데에대의제의장점이있는것이다. 이를가장적극적으로주창한자는미국헌법의아버지로불리는제임스메디슨이다. 그는대의민주주의를자치의한형태로평가했고, 대표를통해시민들의의견이 정제되고확대 됨으로써인민들에의한직접결정보다더나은결정에이르게됨을강조한다. 또한광대한공화국에서대표의수를확대함으로써특정분파의지배를막고다원적민주사회를실현할수있음을역설했다. 대의민주주의의장점에대한이러한적극적인식에따를경우, 국회의개혁과제는분명해진다. 국회가대표하 는사회적이견의폭을넓히고, 원내의석과국민의의사분포간의비례성을높이는것이그것이다. 이와함께원내에수렴된, 확대된이견과갈등을설득하고타협할수있는능력의제고역시필수적이다. 그관건은의사절차에대한준수에있을것이다. 민주주의의핵심은이견을다루는절차에있기때문이다. 결국제헌 70주년을맞는국회의과제는, 대의민주주의를뛰어넘는어떤새로운민주주의, 또는어떤특별한새로운제도의모색이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본래적원리와장점을충실히실현하는데에있다고생각된다. 선출된대표들의집합체인의회가정치의중심이되고, 의회내에서자유로운집합적토론에의해공적결정이이루어지는대의정부의기본원칙을어떻게하면충실히실현할수있는가에지혜가모아져야할것이다.
특별기획 38 통일헌법, 통일에관한다양한쟁점해결의기준점돼야 - 통일헌법, 어떻게준비할것인가 급변하는환경, 통일은어디까지다가왔는가? 장영수교수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 최근남북정상회담과북미정상회담을계기로통일환경에상당한변화가예상되고있다. 일각에서는과거두차례남북정상회담이큰성과없이끝났던것을반추하며, 이번경우에도실질적성과를기대하기어려울것이라는비관적전망을내놓고있지만, 북미정상회담이라는새로운변수가개입하면서남북관계의새로운변화와발전에대한기대가과거어느때보다도높은것이사실이다. 그로인해일각에서는한반도평화체제의구축과더불어통일이성큼다가온것으로말하지만, 다른한편으로는남북관계의향후전망에대한우려도적지않다. 과연북한을얼마나신뢰할수있을지도문제이고, 북한의체제를보장하는것이전쟁의위협은줄일수있으나통일로부터오히려멀어지는것일수있기때문이다. 물론남북관계의발전내지통일에대한막연한기대와낙관적인전망이오히려남북관계의발전에걸림돌이될수있다는우려에도귀를기울일필요가있다. 과거의북한경수로지원이나금강산관광, 개성공단등과관련한실패의경험을되풀이하지않아야할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어떤시각을갖건통일에대한준비를소홀히할수는없다. 준비되지않은상태에서의통일은독일의예에서보듯이적기의합리적대응을놓치고시행착오를반복함으로써통일비용의부담을배가시킬뿐만아니라, 자칫예멘의경우처럼사회통합에실패함으로써통일의기반을붕괴시키고내부갈등이증폭해새로운분리, 독
39 국회보 2018. 07 립움직임까지나타날수도있기때문이다. 과연언제통일이될것인지는누구도정확하게예측하기어렵다. 10년후가될수도있고, 당장 2~3년후가될수도있다. 그렇기때문에통일에대한치밀한준비가더욱요구된다. 정치적통일만으로통일이완성되는것은아니며, 통일이후의진정한사회통합의완성을위해서도통일에대한치밀한준비가필요한것이기때문이다. 당위로서의통일, 현실로서의통일준비우리에게통일은당위이다. 어려서부터우리의소원은통일이라고노래부르며자랐기때문만이아니라, 분단국가의아픔을치유하기위해통일이필요하다고믿기때문만이아니라, 21세기대한민국의발전을위해통일이되어야하기때문만이아니라, 인류의보편가치인인권을북한주민들을포함한우리모두가더불어누리기위해서도통일이요청되기에통일은우리모두의당위인것이다. 그러나통일이당위라고해서쉽게성취될수있는것이아닐뿐더러통일의의미를제대로살리기위해서어떤방식으로통일을할것인지, 이를위해어떤준비가필요한지에대해서도심사숙고가필요하다. 독일의통일과통일이후의사회통합과정에서알수있듯이통일은당위임과동시에현실이기때문이다. 통일을위한준비는세가지측면에서동시에진행되어야한다. 첫째, 통일의의미와필요성에대한국민적공감대가확대, 강화되어야한다. 통일의주체인국민의통일에대한인식과의지가통일의가장중요한전제조건임은누구도부정할수없을것이다. 둘째, 통일의현실적조건을정확하게분석해야한다. 특히북한의경제적, 사회적현실에대한정확한정보와통일이후의사회통합과남북한균형발전을위해어떤조치들이필요하며, 어느정도의비용이들어갈것인지에대해정확한정보가필요한것이다. 셋째, 독일이나예멘의통일경험을참고해통일의마스터플랜을마련해야한다. 크게는통일의원칙과기준을담아통일의준비과정, 진행과정, 정치적통일이후의내부적통합과정을어떻게엮어나갈것인지에대한거시적고찰과각분야별통일실무작업에대한미시적준비가유기적으로연결되어최상의시너지효과가나타날수있어야할것이다. 통일헌법의필요성과최근의개헌논의통일을위한준비의중심이되어야할것은통일헌법의제정이라할수있다. 통일에대한준비는새로운국가형성전반에관한것이라할수있으므로매우방대한분야에서다양한검토를요할뿐만아니라, 이들의유기적연계가필수적이라할수있다. 그렇기때문에각분야에서의통일준비가서로모순내지충돌될경우에는그준비의의미가반감될수밖에없다. 이와관련하여아무리강조해도지나치지않을정도로중요한것이통일의기본적성격과방향에대한국민적합의를확인하고발전시키는것이라고할수있다. 이를전제로국민적합의에기초한통일정책이수립 추진될수있을뿐만아니라, 통일에관한여러준비과정도중복이나충돌의문제를최소화할수있을것이기때문이다. 이러한통일의기본적성격과방향에관한국민적합의를규정하고있는것이현행헌법제4조의 자유민주적기본질서에입각한평화적통일 이다. 그리고이를통일이후에어떻게구체화할것인지의문제는결국통일헌법
특별기획 40 문재인대통령과북한김정은국무위원장이 4 월 27 일판문점에서 판문점선언문 에서명한뒤맞잡은손을높이들고있다. 을어떤절차와방식을통해, 어떤내용을담아서제정할것인가의문제로나타나게된다. 따라서현재국내질서에관한문제들이현행헌법을기준으로체계적일관성을가지고해결될수있는것처럼통일에관한수많은쟁점들도통일헌법을기준점으로하여해결되어야하는것이다. 따라서통일헌법의문제는단순히통일에관한여러쟁점들중의하나로서가아닌, 이러한쟁점들이해결되기위해서전제되어야할가장중요한기초로이해되어야한다. 즉, 통일헌법의성격과내용이어떻게정해지느냐에따라서통일에관한다른쟁점들의해결방향자체가달라질수있기때문에, 다른쟁점들에우선하여통일헌법의기본적방향과내용이결정되어야할필요가있는것이다. 이러한통일헌법의준비와연결될수있지만, 또한구 분되어야할것이최근의제10차개헌에대한논의이다. 제10차개헌의방향과관련해 분권과협치 라는화두가중심이되어국가권력구조를합리화하고, 인권보장을강화해야한다는것에더하여통일을준비하는것에도신경써야한다는점에서통일헌법과의연결점을찾을수있지만, 현재의상황에서통일을위해제3조영토조항의삭제를주장할경우에는오히려심각한남남갈등을야기하여개헌이무산되고, 통일의준비조차후퇴할수도있다는점을간과해서는안될것이기때문이다. 예컨대차별금지법의제정이동성애에대한반대로국회를통과하지못하는상황에서최근의남북관계의변화를근거로헌법제3조영토조항을삭제하여북한을국가로인정하려고시도할경우에는매우심각한이념적갈
41 국회보 2018. 07 등을야기하여강력한반대에부딪히게될것은분명하다. 국회개헌특위자문위원회의개정시안과대통령이발의했던개헌안에서도영토조항을존치하는것으로결론내렸던이유가이러한고려에있다는점은남북정상회담과판문점선언이이루어진이후인현재의시점에서도크게달라진것으로볼수없는것이다. 통일을위해지금우리가해야할일은무엇인가? 통일의의미와중요성은그것이우리민족의삶의조건에, 나아가삶의중요부분에결정적인영향을미칠것이라는점에있다. 통일이되면국가발전의새로운계기가만들어질것이라는전망이나개인의삶에도다양한긍정적인변화가일어날것이라는기대는이와맞물려있다. 그러나다른한편으로는통일비용의부담등통일에대한우려도없지않다. 이런상황에서과연통일은어떠한절차와과정을거쳐야할것인지에대해서도논란이많다. 통일의여건조성에대해서도다양한의견들이있는가하면, 통일의단계내지통일의방식에대해서도이견이적지않은것이다. 이러한의견들을조율하는가운데통일의방향과방법에대한공감대를형성하는것도통일의준비과정에서겪게되는중요한과제라고할수있다. 그러나보다중요한것은통일에대한확고한의지이며, 이를갖추기위한전제는통일의주체, 통일을통해우리역사의새로운장을열어나가는주체는국민이라는점에대한인식이다. 국민스스로가역사의주체이며, 통일의방향과방법을결정할수있는결정권자라는자각 은곧통일의완성에대한책임과도맞물려있는것이다. 20여년전베를린장벽이무너지고독일통일이사실상확정되던때에독일인들이거리에나와서 우리가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라는구호를외쳤던것은의미심장하다. 통일이후동서독의통합과정에서의갈등이적지않았지만, 그러한공동체의식및통일의주체로서의책임의식이장기간에걸친사회적통합의성공에중요한밑거름이되었던것이다. 향후우리의통일과정에서도정부의역할, 국제사회의태도에못지않게, 아니그이상으로중요한의미와비중을갖게될것은국민들이통일의주체로서의자각을가지고자기몫을다하고자하는자세를갖는것이라할수있을것이다. 그바탕위에서비로소통일과정에서의어려운문제들이합리적으로해결될수있을것이며, 통일의장기적인비전이곧민주주의의실질화로연결될수있을것이다. 과연언제통일의그날이올것인지는아직알수없다. 그러나준비된자만이기회를최대한활용할수있다는것은개인의경우나국가의경우나다를바없다. 국민들의통일에대한강한의지와통일을준비하는정부의노력, 정당과시민단체들의뒷받침, 그리고다시금국민적지지가한데어우러져 통일헌법 의비전을중심으로통일한국의큰그림을조화롭게그려낼수있을때, 통일이한걸음더다가오게될것이며, 준비된통일을통해통일의효과를최대화하고, 부담을최소화하는것이가능하게될것이다.
길에서길을찾다 42 김한정의원더불어민주당, 경기남양주시을 활력넘치는젊은 생태도시 남양주
43 국회보 2018. 07 봄이오나싶더니어느덧여름을맞이하는 6월. 1년중낮이가장길다는하지를앞둔어느날, 아침부터불볕더위가찾아왔다. 서울을벗어나남양주로향하니온통푸르름으로물든풍경과마주한다. 김한정의원과함께지역구남양주곳곳을돌아보았다. 경기동북부에자리한남양주는서울면적의 75% 에달한다. 67만남양주인구는지역개발로인해꾸준히늘어나고있다. 특히남양주는취업자중거의절반이상이서울로출퇴근을하고있는 베드타운 이기도하다. 그렇다보니이지역최대현안은바로교통문제다. 김한정의원은가장먼저지하철 4호선을남양주진접까지연결하는진접선 ( 당고개 ~ 진접 ) 공사현장을찾았다. 공사중인 1~4공구가운데 2공구는두차례유찰로인해공사착수가 21개월지연됐다. 현재는 2020년말개통을목표로공사가진행되고있다. 김한정의원은지하공사현장을둘러보고 공사중발생하는발파소음민원때문에주민간담회도열었는데, 소음문제는어떤지, 2020년말까지공기는맞출수있는지, 주민안전에문제는없는지 등을꼼꼼하게점검했다. 현장에답이있다 4 호선진접선공사현장찾아 김한정의원은공사관계자들을격려하면서 지하공사현장에올때마다느끼지만우리가무심코타는지하철에이렇게무수한사람들의노력이있었구나싶다. 지난 3월말김현미국토교통부장관과협의도했는데, 혹시라도도울일이있다면기탄없이말해달라 고당부했다. 7년전쯤 곧지하철이생긴다 는말만믿고아파트에입주했던남양주주민들이교통때문에큰불편을겪고있습니다. 그분들이출퇴근때겪는고통만이라도덜어드리고싶습니다. 교통도복지아닙니까. 김한정의원은남양주를 팔도사람들이다모여사는 미니대한민국 이라고소개했다. 남양주주민의 80% 이상이전국각지에서이곳에정착하신분들 광릉수목원에서 입니다. 대통령선거를하면, 남양주선거결과가대한민국표본과똑
길에서길을찾다 44 광릉수목원어린이정원 ( 광릉수목원제공 ) 남양주지역주민과함께 같습니다. 그만큼대한민국의바로미터가되는지역이지요. 특히젊은분들이많은지역이기도합니다. 전국에서모인분들이오손도손이웃이되는곳이바로남양주입니다. 김한정의원은또 남양주의절반이그린벨트, 상수원보호지역이다보니상대적으로살기에는쾌적하지만, 도시가넓고분산돼집중적으로발전하기에는어려움이있다 면서 그래서지하철, 철도교통확충과더불어 GTX( 수도권광역급행철도 ) 노선사업을추진하고있다 고밝혔다. 교통체계시스템을바꿔야출퇴근고통도줄고, 시간도절약하고, 비용도줄이며도시의쾌적함도유지할수있는 1 거 4 득 이라는것이다. 김한정의원은이어 남양주의자랑 이라는광릉숲으로발길을돌렸다. 남양주와포천에걸쳐있는광릉숲은여의도면적의약 8배에달한다. 이곳은조선제7대왕세조가생전에즐겨찾던사냥터라고한다. 지난 2010년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으로지정됐다. 광릉숲에 1987년개원한광릉수목원은 540여년간훼손되지않고잘보존돼 6천여종의식물 과 4천400여종의동물이서식하는국립수목원이다. 광릉수목원을둘러보기위해서는예약이필요하지만김한정의원은 광릉숲을가꾸고애써온남양주시민들에게광릉숲을돌려드리고자 산림청과협의해남양주시민에한해예약없이수목원에입장할수있도록했다고한다. 광릉수목원내에있는전나무숲을천천히걸으면서김한정의원이말했다. 교통체계를개선하고나면, 서울접근성이좋아지게돼지역경제가타격을입는것이아니냐는고민도많습니다. 그래서생각한것이서울사람들이남양주를찾아오게만들자는것입니다. 진접선이완공되면역에서 5분거리에광릉숲이위치하게됩니다. 남양주를서울근교생태관광지로더욱발전시키고싶습니다. 숲을산책하던중인근남양주시별내면에있는한초등학교학부모들이김한정의원을알아보고반갑게인사를건넸다. 김의원은어느초등학교냐고묻더니 학교시설이너무낡아서올해특별교부금을받아온그학교! 라고기억해냈다.
45 국회보 2018. 07 특유의친화력으로가는곳마다한동안발걸음이멎었다. 김한정의원은남양주시진접읍장현리에위치한상가를돌며지역주민들과이야기꽃을피웠다. 이곳에서는 2일과 7 일마다장현5일장이서지만, 마침이날은장이열리지않는날이었다. 김의원은 좋은정치란사람들이안심하고살아갈삶의터전을일구는것 이라고했다. 좋은정치 를위해그는매일같이남양주에서사람들을만나고있다. 무한정책임으로남양주를위해뛸것 경남함안에서태어난김한정의원은서울대재학중민주화운동으로옥고를치르기도했다. 그는 1987년대선에서김대중후보와인연을맺으며정치의길로들어섰다. 그는이후 야당총재비서, 청와대제1부속실장등을거치며김대중대통령을가까이서보좌했다. 문재인대통령후보수행단장, 민주통합당인재영입위원회부위원장을지냈다. 김한정의원은 이번 6 13 지방선거에서더불어민주당이전국에서고른지지를받았고, 선거결과도지역주의의영향에서많이벗어난것을볼수있었다 며 국민들이평화에대한염원을투표로보여주신것 이라고말했다. 저희가잘해서라기보다일부정당에대한실망감때문에지지했다는시민들의말씀에정신이번쩍났습니다. 민심은언제든바뀔수있는것입니다. 무한정책임 으로남양주를위해뛰겠습니다. 군림하지않고봉사하는정치만이살아남을수있다는사실을늘마음에새기겠습니다. 경기남양주시 / 글. 박민선사진. 유윤기 4 호선진접선지하공사현장에서
칭찬합시다 46 우리사회불평등과소득분배해결주력 노회찬원내대표 지난달 칭찬합시다 의주인공이었던노회찬정의당원내대표는다음칭찬주자로서형수의원을추천했다. 노회찬원내대표는서형수의원에대해 미래산업과일자리문제에관심이많은분이다. 서민경제에대한애정, 노사문제의올바른해결책에대한고민, 사회적일자리문제에대한생각과고민이있다 고말했다. 알면알수록국민세금이전혀아깝지않은국회의원, 밥값하는의원, 당은다르지만아끼고존경할만한분 이라는칭찬을받은서형수의원을만나봤다. 미래일자리등정책개발에고민서형수의원은노회찬원내대표의칭찬에 같은지역, 비슷한시기에학창시절을보내서그런지비슷한점이많다. 미래산업과좋은일자리연구모임 에서같이활동하면서사회문제와노동에대해많이배우고있다 고말했다. 서형수의원은한겨레신문대표이사사장, 경남도민일보대표이사사장을지낸언론인출신으로제20대국회초선의원이다. 현재환경노동위원회와국회 4차산업혁명특별위원회에서활동하고있다. 서형수의원은환경노동위원회에서여야간합의로노동시간단축과최저임금산입범위중간합의안도출역할을했다. 최저임금제도는노동자의임금수준을높이고임금체계를정상화하도록운영돼야합니다. 갈수록우리사회가불평등이심화되고저성장이계속되고있는데그원인과결과를고민하고있습니다. 현재자본과노동사이의불평등, 기업사이의불평등, 노동자사이의불평등문제해결, 일자리문제등정책개발이중요한데하루빨리국회를정상화시켜야이러한논의들을시작할수있습니다. 서형수의원은노동문제뿐만아니라환경분야에서도활약이돋보인다. 서의원은환경운동연합이선정한 2017 국회환경우수의원 ( 물관리분야 ) 으로뽑혔는데, 2016년에이어 2017년연속환경우수의원으로선정되는영예를안았다. 서형수의원은 낙동강수질및수생태계복원을위한특별
47 국회보 2018. 07 서형수의원 더불어민주당, 경남양산시을 법안 을대표발의한이후상임위, 국정감사등에서낙동강의수질오염문제를분석하고그대안을마련할수있는활동을펼치고, 국회물관리일원화협의체의여당간사로활동하며협의체를원활하게이끌었다. 또공공수역녹조발생대응을위한예산 54억원, 4대강회복을위한수질및수생태계측정조사예산 16억원을증액하는등 4대강및녹조문제해결을위한각종예산을확보하며, 입법, 예산등물관리와관련된다양한분야에서그성과를거뒀다. 서형수의원은 물관리분야의환경우수의원으로 2년연속선정된것에대해막중한책임감을느낀다 며 앞으로도환경부로의물관리일원화뿐만아니라 4대강복원, 녹조문제해결등을위해노력하고, 이를바탕으로건강한수생태계환경을조성할수있도록최선을다하겠다 고말했다. 한편서형수의원은이번 6 13 지방선거와지난대통령선거에서경남지역선대본부장을맡아당을승리로이끌었다. 지방선거전 양산시장선거에서지면 2020년총선불출마도적극검토하겠다 며배수진을치기도한서형수의원의바람대로민주당은양산시장은물론도의원 4석가운데 3석, 시의원 17석가운데 9석을확보했다. 시장이더불어민주당으로바뀌고시의원도처음으로더불어민주당소속이과반을차지한것이다. 양산시는일반행정상으로는경남도에소속돼있지만, 울산과부산이라는대도시와접해있는지리적특성때문에부 울 경경계도시의특성을보이고있다. 서형수의원은 이번선거로양산의동 서간소지역구도를해소했다 고강조하며 앞으로부산, 울산등민주당당선인들과함께양산의교통과교육문제를광역단위로접근해해결하겠다 고말했다. 송희경의원송희경의원을칭찬합니다서형수의원은다음칭찬주자로송희경의원 ( 자유한국당, 비례대표 ) 을추천했다. 송희경의원은 4차산업혁명특별위원회에서제 2소위원장 ( 공정거래 규제개혁 사회안전망 ) 과당간사를맡고있다. 송희경의원은자유한국당의여성비례대표 1번의원으로정보기술 (IT) 전문가다. 서형수의원은 송의원은국회에들어오자마자여야비례대표의원들과 제4차산업혁명포럼 을구성했을정도로열정이강하다. 초선의원이지만 IT 산업구조의변화트렌드를정확하게꿰뚫으며관행을버려야한다고강조한다. 산업정책규제개혁에신념을갖고추진하는모습을옆에서지켜보면서많이배우고있다 고소개했다. 집중력, 설득력, 추진력이있는의원입니다. 송희경의원은 4차산업혁명시대에걸맞은새시대의새로운의원입니다. 글. 고영선사진. 임진완
나의애송시 48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온다는건실은어마어마한일이다. 그는그의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미래와함께오기때문이다. 한사람의일생이오기때문이다. 부서지기쉬운그래서부서지기도했을마음이오는것이다 - 그갈피를아마바람은더듬어볼수있을마음, 내마음이그런바람을흉내낸다면필경환대가될것이다. 정현종 1939년서울생이다. 연세대재학시절발표한시가박두진교수의눈에띄어 현대문학 추천을받았다. 1966년에는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등과함께동인지 사계 를결성해활동했으며언론사기자로도일했다. 그후서울예전과연세대교수로재직하다 2005년정년퇴임했으며연암문학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등을수상했다.
49 국회보 2018. 07 오늘도 어마어마하게다가오는 사람을맞이합니다 이완영의원자유한국당, 경북고령군성주군칠곡군 6 13 지방선거가막을내렸습니다. 승패에따라환호와비탄이있게마련이지만선거의본질은사람을만나고마음을얻는것에서출발한다고여기며정치를해왔습니다. 나의초심은지켜지고있는지, 다가간유권자에게온전히마음을다바쳤는지 선거는나를뒤돌아보는계기였습니다. 정현종님의시 방문객 은사람을대하는마음가짐을보여주는시가아닌가합니다. 나와만나는사람들에게나는배려와환대를다했는지, 만남이베풂과기쁨이되었는지, 나의편견과오만은없었는지를일깨우는죽비같은시입니다. 특히대구 경북노동청장을지내던때부터 방문객 은하루를시작하며마음을다잡던시입니다. 25년간노동부에서체득한경험을바탕으로노사관계의현재와미래를제시하면서쓴책 노사달인이완영의노사형통 의첫페이지에실었을정도입니다. 노사관계는사람의문제를사람이푸는과정입니다. 노사관계는처음출발단계에서는분명대립적관계를전제로합니다. 그래서자칫 너부터바꾸라 고강요하거나 너부터양보하라 고소리치기십상입니다. 이러한이해관계가치열하게부딪치는노사관계를풀자면 부서지기도했을마음이오는것 을이해해야합니다. 가장애착이가는구절은 사람이온다는건어마어마한일이다. 한사람의일생이오기때문이다 입니다. 읽을때마다마치자신을낮추라는가르침으로다가오기도하고마음을다해서로를이해하라는경구로읽혀추수하는농부처럼저절로허리가굽혀집니다. 저의사무실에는두개의족자가걸려있습니다. 말하자면 방문객 표레시피로만든 배나감사 와공자님말씀 덕불고필유린 ( 德不孤必有隣 ) 입니다. 배나감사 는 배우겠습니다,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의첫글자입니다. 덕불고필유린 은 덕을베푸는사람은외롭지않고반드시알아주는이, 뜻을같이하는이가있다 는말이지요. 누군가와의인연이라는것은마음이이어져야합니다. 내가만난방문객과는결코끊어지지않는 어마어마한사건 이고싶습니다. 과거와현재, 미래가공존하는인연이부디아름답기를기도합니다. 오늘도저는사람을맞이합니다. 누군가의갈피를더듬는바람처럼방문객을맞겠습니다.
나의인생, 나의정치 50 이태규의원바른미래당비례대표 일하는국회, 새로운정치문화조성에일조할것 국민의당비례대표로제 20 대국회에입성한이태규의원은이명박전대통령과안철수대표의대선캠프에서 선거기획을도맡았던 전략가 로이름이높다. 이태규의원을만나그의인생과정치에대한이야기를들었다. 경기도양평이고향인이태규의원은농사를짓는부모님밑에서 6남매의막내로태어났다. 중학교까지양평에서다녔던그는고등학교때어머니가돌아가시면서형이살던천안으로전학을가게돼고등학교는천안에서마쳤다. 찌들게가난하지는않았지만그리넉넉하지도않은평범한가정에서자랐습니다. 아버지는완고하고권위적이셔서대화가어려운분이었고어머니는자식들에대한애정이남다른분이었습니다. 항상성실하게살아서남에게인정받으라며자식들을위해갖은고생을다하신어머니를생각하면
51 국회보 2018. 07 그리움과안쓰러운생각이먼저떠오릅니다. 초등학교와중학교에서는반장과학생회장을도맡았을정도로모범생이었던이태규의원은갑작스럽게어머니가돌아가시면서방황도많이했다. 위로해줄사람도없었고위로받을공간도없었던그는선생님이건네주신실존주의철학책을읽으며마음의안정을찾아갔고, 고등학교 3학년여름방학이되어서야누나의권유로대학에가겠다는결심을했다. 대학다닐때는광주항쟁의영향으로시국에대한관심이컸습니다. 우리사회의구조적인모순이나불공정에대해서도눈을뜨기시작했지요. 1980년대대학생이라면누구나겪었던고민을하면서보냈습니다. 두번의대선에서전략기획맡아 1991년 3당합당에반대한노무현전대통령과이기택총재, 조순형의원등이이른바 꼬마민주당 을창당하면서이태규의원은공채 1기당직자로정치권에첫발을디뎠다. 그후국회보좌진과당대표정책특보등을거쳤고, 여의도연구소재직당시이명박후보를돕던의원의요청으로 2007년대선전략기획을맡게됐다. 이명박대통령집권초기대통령실연설기록비서관으로청와대에몸담기도했던이태규의원은 2012년지인을통해안철수후보를만나게됐다. 안철수의원과도특별한인연은없었습니다. 당시기성정치가제역할을못하는상황을보면서새로운후보가나왔으면좋겠다고생각하고있었는데마침 안철수현상 이일어났습니다. 저런분이대통령으로당선되면정치 경제의모순을해결할수있겠다 는생각을하던중지인의소개로안대표를만나게됐습니다. 한시간가량이야기를나누었고, 이인연으로안철수후보진심캠프미래기획실장을맡아선거전략을세우고책임지게됐습니다. 비례대표 8번으로국회에입성한이태규의원은한국주재 15개국대사관을방문해인바운드 (inbound) 외교를펼치는등중진의원들이대거포진한외교통일위원회에서초선의원으로서눈에띄는활동을해왔다. 한국에와있는외국대사들을만나양국현안에대해대 화하고토론하면서이들의한국에대한생각을들어보고싶었습니다. 각국대사들은한국국회의원이대사관을방문하는건처음이라며매우놀라워했고또반겨주었죠. 덕분에 30분정도예상했던예방이 2시간을넘기기도했습니다. 간단한애로사항은외교부에이야기해해결할수있도록도와주었더니많이좋아하더군요. 의원외교가중요하다고늘강조하는데큰돈과시간을들이지않고도할수있는일이라더욱보람있었습니다. 이태규의원은지난국감당시스텔라데이지호침몰사고에대한국가의미흡한대응, 외교안보라인혼선등에대해지적하고신 ( 新 ) 한미동맹의필요성과북핵해법을제시하는등심도있는질의와대안제시로 2016, 2017년 NGO 시민단체가선정한국정감사우수의원에연속으로선정됐다. 또 채용절차의공정화에관한법률일부개정법률안 을발의해고용세습금지를위한제도마련에도나섰다. 청년실업이사회적인문제로대두되면서채용의공정성확보에대한사회적요구가어느때보다높아지고있는상황이지만장기근속자, 정년퇴직자의자녀등을우선 특별채용하도록하는조항이포함된노사단체협약이남아있는곳이많습니다. 이를개선해채용의공정성을확보하려는것이개정안의내용입니다. 현재환경노동위원회에계류중인이법안이통과될수있도록좀더적극적으로활동할작정입니다. 이태규의원은후반기국회에서두가지의정활동목표를제시했다. 우선국회가국민들로부터일안한다는비판을많이받고있는데밥값하는정치, 일하는국회가되도록구성원으로서최선을다할것입니다. 이와함께새로운정치문화조성에도일조하고싶습니다. 앞으로의정치는진보도보수도아닌중도의정치가되어야한다고생각합니다. 합리적이고객관적으로사물과현상을바라보고판단하려면경계인의삶을살아야합니다. 경계에확실하게서있어야양쪽의좋은점과부족한점을모두파악하고대안을제시할수있기때문입니다. 반대에머물지않고대안제시로새로운길이열리도록정치문화를바꾸는데일조하고싶습니다. 글. 김현아사진. 김진원
일하는국회공부하는국회 52 방사능대책, 알뜰폰등주제로토론회열려 라돈공포, 생활제품속방사능안전대책은? 토론회 신용현 김삼화의원 ( 이상바른미래당 ) 은 6월 4일국회에서한국과학기자협회와공동으로 라돈공포, 생활제품속방사능안전대책은? 을주제로토론회를열었다. 이날토론회에서조승연연세대라돈안전센터장은 라돈관련정책이원자력안전위원회 ( 이하원안위 ), 환경부, 보건복지부등여러부처에흩어져있어문제 라고지적했다. 부처별로관리하면자문전문가도다를수밖에없고최신라돈연구동향도반영하기어렵다는것이다. 조센터장은 라돈정책관련전문가시스템일원화가필요하며, 이를위해여러부처를통괄하는 생활방사선 ( 유해물질 ) 통합자문운영위원회 ( 가칭 ) 구성과더불어국가라돈통합DB가구축돼야한다 고말했다. 이날토론회에서고서곤원안위방사선방재국장은 원안위는우선매트리스수거, 안전성확인, 소비자지원에집중할것 이라며 이과정에서나타난문제점과제도개선사항에대해전문가, 소비자단체등의의견을수렴하고관계부처와협의해제도개선을추진해나가겠다 고밝혔다. 이종만한국표준과학연구원방사선표준센터책임연구원은 반드시신뢰성있는측정결과와전문적인원인규명에근거해조치가이뤄져야한다 고지적했다. 김진두과학기자협회회장은 11년전의료용온열매트에서기준치를초과한방사능이검출된사건을언급하며 이번사태를통해침대매트리스이외에도다른유사제품의유해성점검으로이어져야할것 이라고강조했다. 김철한고려대안산병원핵의학과교수는 대진침대는문제가된제품에대해교환 수거 폐기등조치에최선을다하고원안위는모나자이트대량구매업체에대해신속한조사를실시해야한다 고주장했다.
53 국회보 2018. 07 미래사회를위한수학의역할, 수학교육의방향 포럼 변재일 박경미의원 ( 이상더불어민주당 ), 송희경의원 ( 자유한국당 ), 신용현 오세정의원 ( 이상바른미래당 ) 은 6월 14일국회에서한국수학관련단체총연합회와공동으로 미래사회를위한수학의역할, 수학교육의방향 을주제로토론회를열었다. 이향숙한국수학관련단체총연합회장은 교육과정이개정될때마다 쉬운수학 을중심으로이뤄졌는데, 이것이맞는방향인지고민해볼필요가있다 며 시대적인고찰과함께본질적인수학교육의목표와철학을담은정책적변환을이뤄야한다 고지적했다. 전문가들은수학교육의중요성을강조했다. 김강태포항공대수학과교수는 수학교육과수학연구는뗄수없는존재 라면서 수학교육에변화가있으면, 그시점부터 10~15년정도후에그효과가수학연구에나타난다 고했다. 그는 과학의어머니가수학 이라며 과학을지탱하려면수학연구가필요하다 고말했다. 이향숙회장도 싱가포르, 미국, 영국, 일본등교육과정개정을추진해온나라들을보면 4차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배경 을고려해수학교과의교육내용을강화하고있다 며 국경없는세상에서학생들이글로벌경쟁력을갖추려면수학교육이중요하다 고강조했다. 조완영대한수학교육학회장은현재이뤄지는객관식평가로는학생들이가진역량을충분히평가할수없기때문에서술형평가가도입돼야한다고주장했다. 그는 교육부에서수학교육정책을결정할수있는전담부서가없다고생각한다 며수학교육계내부에서정책을교섭할수있는창구를만들어야한다고말했다. 통합물관리 의안착을위한정책토론회 국회물관리연구회 ( 대표주승용의원 ) 는환경부와공동으로 6월 18일 통합물관리의안착을위한정책토론회 를열었다. 국회는지난 5월 28일본회의에서이른바 물관리일원화 3법 으로불리는 물관리기본법안, 정부조직법일부개정법률안, 물관리기술발전및물산업진흥에관한법률안 을의결한바있다. 주승용의원은 우리나라의물관리정책은물관리일원화와함께통합물관리체제로바뀌면서획기적인대전환을맞이하게됐다 고말했다. 그는 우선국토교통부산하홍수통제소,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수자원조사기술원등의조직에서 5천여명의인원이환경부로이관됨에따라적절한업무분장이논의
일하는국회공부하는국회 54 돼야한다 며 여러부처및지방자치단체의물관리관련계획의기초가되는 국가물관리기본계획 과 유역물관리기본계획 도수립돼야한다 고말했다. 김은경환경부장관은 우리는기후변화와생태계파괴, 지역간첨예한물갈등까지기존 물관리체계 로는해결할수없는여러가지도전에직면해있다 면서 수량과수질, 재해예방을하나의일관된체계에서종합적으로고려하는 통합물관리 는거스를수없는시대적흐름 이라고말했다. 최동진국토환경연구소장은 물관리기본법 에따라신설되는 국가물관리위원회 가위원회로서역할을제대로할수있도록 물관리기본법 의시행을위한예산과조직이조속히정비돼야한다 고주장했다. 그러면서 물관련사업통합 정비, 중앙정부사업지방이양등은 국가물관리위원회 의주도로추진하는것이적절하다 고말했다. 알뜰폰시장의현재와미래, 그리고활성화방안 토론회 6월 21일김성수 고용진의원 ( 이상더불어민주당 ) 은 알뜰폰시장의현재와미래, 그리고활성화방안 을주제로토론회를열었다. 이날토론회에서는이동통신 3사가자회사를통해알뜰폰시장의경쟁을저해하고있다는지적이제기됐다. 알뜰폰은이동통신 3사보다저렴한통신서비스를제공한다는취지로지난 2011년출범했다. 가입자는올해 4월기준 774만명으로전체이동통신가입자의 12.2% 를차지했다. 하지만영세한사업구조로인해지난 6년 (2012 2017년) 간누적적자는 3천500억원에달했다. 현재이통사자회사 3곳 (SK 텔링크, KT엠모바일, U+ 알뜰모바일 ) 의알뜰폰가입자점유율은 30% 에달한다. 또한, 2015년 6월부터올해 5월까지 3년간알뜰폰번호이동순증가입자의 70% 를이들세회사가차지했다. 김용희숭실대교수는 이동통신 3사의자회사가알뜰폰시장에들어오면서경쟁제한이발생하고있다 며 퇴출도고려할필요가있으나현실적으로어려운만큼제도개선을통해 3사합산점유율을모니터링할필요가있다 고말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전성배통신정책국장은이동통신사자회사들이장기적으로시장에어려움을주기에공정경쟁이나이용자차별방지차원에서사후관리가필요하다. 심도있게들여다보겠다 고말했다. 김경환상지대교수는 알뜰폰유통구조를개선해기존의인터넷과우체국에서농협과편의점까지늘려야한다 며 일정한가입자가확보돼협상력이생겨야도매대가협상이가능하고상품구성의다양화도가능하다 고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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