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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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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51 창화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1018) 양주에 예속시 키고 후에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조선) 태조 6년 (1397)에 양주에서 치소를 이곳 견주로 옮겼다가 뒤 에 지금의 치소로 옮겼다. 지금의 古 州 內 이다. 라고 하여 두 기사간에 다소의 차이점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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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계자조금29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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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3권1-265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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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朝鮮後期 水利기구와 經營문제 최 원 규* Ⅰ. 머 리 말 Ⅱ. 水利政策과 수리시설의 발전. 堤堰의 발전추세. 洑의 발전추세 Ⅲ. 水利시설의 소유와 경영. 水利시설의 소유와 수축. 水利시설의 관리. 水税징 수 체계 Ⅳ. 水利紛爭과 처리방향 Ⅴ. 맺 음 말 Ⅰ. 머 리 말 우리나라 전근대사회는 농업사회이다. 농업위주의 국가경제체제 아래서 水利는 국 가경제의 흥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리하여 古代부 터 국가는 농업정책의 하나로서 수리정책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대처해왔 다.) 이러한 관심은 조선후기 移秧法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가장 커다란 현안문 제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 水稻作에서 移秧法은 종전의 水田直播法이나 乾播法의 경 우와 달리 수리시설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목표한 바 농업생산력의 중대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최대의 농학자 徐有榘는 我東農術之鹵莽 莫有 甚於水利 라 언급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정책당국자나 농촌지식인들이 주로 논의 대상으로 떠올린 수리시설은 洑 堤 堰 水車 등이었다. 그러나 水車는 조선의 지리적 조건과 관련하여 대체로 논의 수 준에 그치고 실제 성과는 대단히 미미하였다.) 正祖 년(798) 洪州 幼學 申在亨이, 盖近於山而有堤 堤者所以貯水也 近於野而有洑 洑者所以引水也 近於海而有堰 堰者 所以貯水也 堤洑堰三者所以興水功 備旱災者也 我國大國也 山野之郡如繡之錯 湖海之 縣如碁之布 而昔人之所築無處無之 * 延世大學校 講師. ) 李光麟, 朝鮮水利史硏究 (96) pp.. ) 楓石全集 金華知非集 권6, 農對(保景文化社 영인본) p. 69. ) 李光麟의 앞의 책 p. 와 李泰鎭, 朝鮮時代 水牛 水車 보급시도의 농업사적 의의 ( 韓國社 會史 研究, 986) 및 金容燮, 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 移秧과 水利問題 ( 增補版 朝鮮後 期農業史硏究, 99) pp. 7 참조.

- - 라) 하듯 농촌사회에서는 주로 洑 堤 堰 등을 각각의 입지조건에 맞도록 설립하였다. 이 가운데 본고에서는 防水시설로서 의미가 짙은 堰은 제외하고 灌槪시설로서의 洑 와 堤에 주안점을 두고 검토하고자 한다. 기존 수리사연구도 주로 堤堰과 洑을 집중 적으로 검토하였다. 그간의 水利技術史 연구동향을 수리시설의 성립시기와 발전, 설립과 경영주체 등 에 관하 여 살펴보기로 하자. 전자의 연구동향은 제언과 보를 동시적 발전으로 보는 견해와 단계적 발전으로 보는 두 계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洑가 古代이래 로 堤堰과 함께 우리의 농업에 이용되어 왔으나, 堤堰과 같은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본격적으로 발전된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라는 것이다.5) 또 하나는 河川水를 灌 槪水로 활용하려는 본격적 시도가 세기 후반에 대두되었다는 사실로 볼 때, 5세 기 후반 6세기경 洑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移秩法이 보급될 수 있었다고 전망하는 견해였다.6) 한편 후자적 측면에서는 첫째, 제언의 성립과 발전을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련아래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 견해의 공통점은 논자가 파악하는 국가권력의 수준정도 에 맞추어 제언의 쇠퇴와 발전과정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특히 9세기 중엽 이후에 는 국가권력이 약체화 되었으며, 이에 따라 堤堰이 지역을 불문하고 廢堤化되어 갔 다는 견해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7) 둘째는 5,6세기 洑의 확대 보급을 士林派가 정치 적으로 實勢化되는 경제적 배경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또한 이 견해는 조선중기 이후 堤堰보다 洑가 우세하였음을 지적하면서도 조선후기는 아직 大川이나 江水의 이용은 거의 없었다는 洑 발전의 한계성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8) 또한 개 간과 관련하여 조선후기 水利史 발전을 검토한 연구도 있다.9) 본고는 이러한 여러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면서 조선후기 堤堰과 洑의 數理的 고찰 을 통하여 기존연구사를 검토하고 조선후기 수리발전의 일단을 살펴보는 한편, 朝鮮 後期 수리발전이 농촌사회의 제계층에 어떠한 이해관계로 반영되어 현실적으로 표출 되었는가를 검토하고자 한다. 나아가 일제침략기 日本帝國主義의 농촌수탈의 하나의 ) 日省錄 정조 년 월 6일 5) 李光麟, 앞의 책과 金容燮, 앞의 책이 이러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6) 李泰鎭, 6세기 川防(洑)灌觀의 發達 土林勢力擡頭의 經濟的 背景一端 ( 韓國社會史研 究, 986). 7) 이광린, 이태진의 앞의 책과 宮嶋博史, 李朝後期の農業水利 ( 東洋史硏究 -, 98) 등 이 그것이다. 한편 일제의 조선침략을 위한 기초조사서인 水利에 關한 舊慣 ( 朝鮮總督府 月,-,5,6,7,9, 9)도 이와 같은 견해인데, 여기서는 中宗 이후 폐제언화되기 시작했다고 언급 하였다. 8) 李泰鎭, 6세기 川防(洑)灌漑의 發達 林勢力擡頭의 經濟的 背景一端 과 朝鮮時代 水 牛 水車 보급시도의 농업사적 의외 ( 韓國社會史硏究, 986) 등이 그것이다. 9) 宋護燮, 7 8세기 新田開墾의 확대와 經營形態 ( 韓國史論, 985)가 그것이다.

- - 매개체였던 水利組合과는 기술사적 측면과 농촌사회 제관계적 측면에서 어떠한 역사 적 연관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전망을 해보고자 한다. Ⅱ. 水利政策과 수리시설의 발전. 堤堰의 발전추세 經國大典 戶典 田宅條에 堤堪은 수령이 매년 봄 가을에 관찰사에 보고하고 수 축하라 고 규정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전기 정부는 水利의 핵심을 堤堰에 두고 철저히 관리하였다.) 물론 川防도 정부차원에서 끊임없이 개발정책과 관심을 가지 고)지속적으로 장려하고 설립해 갔으나, 당시 水稻作 기술수준에서 볼 때 大川防까 지 개발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시기 水田농법은 물의 有無에 따라 水播 흑은 乾播하는 直播法이 거의 전부였 기 때문이다. 물론 水田直播法이 乾播法보다 유리한 방식이었지만,)당시 水田直播時 필요한 물은 주로 溪水를 이용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농법상으로도 移块法만큼 관 개가 절박한 문제는 아니었다. 朝鮮前期 洑개발사업은 정부에서 주관하였다. 이 작업에는 농민이 부역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농민의 노동력이 대단히 많이 소모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성과 또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하천관개는 규모는 대체로 자연촌락을 동원 축조할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였으며, 개발의 여지도 곳곳에 산재한 형편이었다고 판 단된다.) 조선후기 洑와는 기술상 규모상 차이가 있었다. 조선전기는 河川灌漑 개발 정책을 적극 실시했으나 아직 수리시설의 중추는 堤堰이었다. 6세기말과 7세기초에 걸친 외국의 침략은 동아시아질서의 재편을 가져왔으며 조 선왕조도 經國大典 적인 질서체계와 農事直說 적인 농업체계에 커다란 변동을 가져왔다.5) 이것은 기존의 水利체계에도 커다란 변동을 가져왔다. 기나긴 전쟁의 와 ) 大典會通 (朝鮮總督府 中樞院 校註本) p. (이하 모두 이 本에 따름). ) 太宗實錄 권5, 태종 8년 정월(책 p. ), 世宗實錄 권, 세종 즉위년 월 (책 p. 7) 등에서 川防堤堰의 수축과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명하였으며, 成宗實錄 권5, 성종 년 월 丙午( 책 p. 556), 忠淸慶尙全羅道 堤堰敬差官賚去事目 如有新川防堤堰堰及 海澤可耕處 聽民申吿 審便否啓聞 라는 조치를 취하였다. ) 金容燮 주 ) 논문 참조. ) 世宗實錄 권5, 세종 년 6월 (책 p. ), 農民赴而役之防築 或有水至而決潰則亦如 之其民力之勞 誠多矣. ) 文宗實錄 권, 문종 원년 월 (6책 p. 5), 我國自來 亦有防貯水 而有利之處多 故若 遇水旱 民散流亡. 5) 이 시기 農學과 農業體制 변동에 대하여는 金容燮, 朝鮮後期農學史硏究 (988)과 朝鮮後

- 5 - 중에서 堤堰은 폐허화되었다. 더구나 당시 각 궁방들과 권세가들은 收租權的 토지분 급질서가 무너짐에 따라 所有地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堤堰內 冒耕도 이들이 토지확보를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6) 조선정부로서는 폐기되어 가는 堤堰을 원상 복구하는 일이 대단히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조선후기 歷代王들은 제언의 설치와 복구를 위한 각종 정책을 세워 실시해 나갔 다. 첫째, 제언의 전담관리기구인 堤堰司를 부활하고 전담관리를 임명하는 등 조직을 강화해갔다. 둘째, 堤堰司를 備邊司 산하기구로 편재하여 실권을 강화시켰으며, 各道 都事에게 堤堰규찰의 임무를 맡겼다. 셋째, 備邊司의 郞廳 宣傳官 暗行御史를 각지에 파견하여 제언에 대한 감시와 조사작업도 철저히 시행하였다.7) 正祖는 暗行御史 封書 나 八道御使賚去事目 을 통하여 冒耕하는 奸細之徒 를 적발하도록 명하였 으며, 관찰사가 보고한 疏濬堤堰을 실지에 내려가 조사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8) 또 한 續大典 에는 洑堤의 新築處는 수령이 살펴서 民이 이로운 곳은 出力助役하여 설치하라는 신축조치도 추가하였다.9) 이러한 노력의 결과 제언은 표 에서 보듯 8세기 단계에 오면 戰前수준을 훨씬 상회하게 된 것이다. 堤堰水利政策은 正祖대에 들어와 수리시설의 확대강화책을 시행하면서 또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正祖 년(778) 월 堤堰節目 )이 마련되고 년 (798) 求農書輪音 이 발표된 것이다. 堤堰節目 을 마련한 목적은 그동안 토지의 지질이 비옥하여 宮家 勢家들이 다 투어 선호 하던 堰內의 冒耕을 중지시키고 疏鑿之道 와 補築之政 을 강구하여 小民 灌漑移秩秧之功 을 다하려 한 것이다.)즉 堤堰의 수축은 冒耕때문에 피해를 당하여 관개에 부심하던 소민들에게 移秧의 이익을 주기 위한 조처라 인식하고 각종 제언정 책을 강구하였다. 그 방안은 첫째, 주위에 나무를 심어 제언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둘째, 堤堰수축 에 관한 제반사항을 장부에 기록하여 항시 堤堰의 실태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셋째, 堤堰 관리 기술의 보급이다. 이것은 堤堰疏鑿法과 水門設置法의 개선에 관한 것이었다. 전자는 종전에 저수지내에 진흙을 섬처럼 쌓아 수면이 漸縮되던 것을 방 期農業史硏究 (增補版, 99) 을 참조. 6) 備邊司謄錄 책, 인조 년 월 6일 (책 p. 9), 國綱解弛 私意横流 處處堤堰 盡入於勢 家之占 破壤耕種. 7) 조선왕조의 堤堰담당기구와 官吏의 변천에 대하여는 增補文獻備考 (古典刊行會편) 권 6, 堤堰과 度支志 堤堰(정조 년)및 朝鮮總督府, 水利에 관한 舊慣 ( 朝鮮總督府月報 -,5,6,7,9,9) 등을 참조. 8) 暗行御史賚去事目 湖南 關西조, 정조 7년(78)과 弘齋全書 권, 封書. 9) 大典會通 戶典 田宅 p. 6, 凡洑堰新築處 許民來訴 守令觀審果是 衆民蒙利處 論報堤堰 司 設邑守令 出力助役. ) 備邊司謄錄 59책, 정조 년 월 일 辛丑(5책 p. 55). ) 堤堰節目 序(이하 備目 으로 함).

- 6 - 지하기 위하여 둑에 쌓도록 한 것이며, 후자는 전에는 없었던 水桶을 설치하여 득이 많이 무너지거나 물이 세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넷째, 堤堪과 洑를 결합하 여 수리시설의 이용도를 극대화하려 한 새로운 수리시설 이용방안을 제시하였다. 堤 堰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어도 물이 없으면 소용이 없으므로 하천수를 끌어들여 灌漑 水를 저장하여 필요한 때에 대비 하자는 것이다. 堤堰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방향의 제시인 것이다.) 이는 또 한편으로 그동안 주종을 이룬 山谷型堤堰) 이외 에 洑와 같이 하천유역에도 堤堰이 건설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이같이 節 目 에는 최고도의 제언 이용수준이 제시되고 있는 반면, 堤堰新築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節目 은 당시 堤堰개발이 한계에 부딪힌 것을 전제로 제시되 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堤堰新築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이용의 극 대화를 이루려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水利技術論은 당시 농촌지식인이 정조의 求農書論音 에 응하여 올린 應 旨進農疏 의 인식과도 궤를 같이 하였다. 첫째, 堤堰疏鑿論이다. 大邱 幼學 柳東範은 古今의 堤堰의 차이를 深淺으로 나누고, 深濬 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였다. 그 방법은 所濬之土 增築其防如鑿隍而爲域 則堰安得不深 水安得不多旱安得爲蓄乎 라 는 것이었다.5) 둘째, 水門桶에 대한 설치문제이다. 堰畓을 지탱하는 것은 水門桶이 가장 중요한 데 松禁이 지엄하여 改備에 어려움이 많으니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야 한다는 것이다.6) 이 제안은 불과 년전의 節目 때와는 논의수준에서 차이가 있었다. 節目 단계는 水門桶의 보급이 과제였는데, 지금은 수문통이 제언의 당연한 구조로 자리잡고 있음을 전제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현재 이용하고 있는 水門桶 을 어떻게 유지 관리할까라는 차원에서 수문통자재의 확보방안 등이 주로 논의되었 다. 예컨대 水門桶木은 禁養山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데 松禁이 지엄하니 風落木 중 에 쓸만한 것을 골라 廢堰을 수축하면 公私가 편리하다는 등이었다.7) 표 에서 조선후기 水門桶의 실태를 살펴보자. 이 표는 88년 5월에 작성된 京畿各邑堤堰都結成册 을 도표화한 것이다. 節目 과는 약간의 時差가 있지만 節目 에서 추진한 정책적 효과가 잘 나타나 있다.8) ) 節目 제,,,,5조. ) 節目 제조, 即當始堤堰之役 而假令鑿深築之高 若無貯積之水 可以浸潤堰下之畓 如溪澗 則可以引水而注堰 如無浸潤 則雖衆民 所築之洑水亦可引入 使流滿後 還級舊洑主. ) 堤堰에는 山谷型 堤堰과 平野型 堤堰의 종류가 있다. 朝鮮總督府, 앞의 책 -, pp. 9 참조. 5) 承政院日記 제8책, 正祖 년 월 (95책 p. 5). 6) 承政院日記 제8책, 正祖 년 월(95책 p. 5), 前忠義衛 張志瀚疏 堰畓之所持者 及 水門桶也 夫水門桶者 非連抱之木 初不堪用 私養之山 元無可合之材 故欲改其桶 今則不 然 松禁至厳 道臣帥臣 必防塞爲主 百不許ー 故當年失農. 7) 日省錄 정조 년 월 일 前忠義衛 張志瀚疏. 耳溪 洪良浩도 合德池疏濬 작업시 이러 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耳溪 洪良浩全書 下(민족문화사) 권6, pp. 955 957.

- 7 - 표 88年度 京畿道 各 堤堰의 實態 平均 平均 株 今 植 平均蒙 구 분 水 深 水 桶 舊(株) (株) 利面積 (尺) (庫) (石落) 加平 高陽 果川 喬桐 交河 金浦 馬田 富平 朔寧 始興 安山 安城 楊根 陽城 楊州 陽智 陽川 呂州 龍仁 陰竹 利川 仁川 長瑞 積城 竹山 抵平 振威 通津 坡州 抱川 합계. 7.......5 6..8 7..8..8..9.7..8.5..5.6..5.9. 5..5. 89.. 7. 55.9,55 5.,59 9.,88 9.,. 95 9.5 65. 7.,576.,65.,79.7 66 8. 779. 5,. 8 88.,675 7.8,,5.,9. 9.,7,5.,89.,695,.,6. 5,79. 5.,65 7.. 55. 9 7.8 6, 7,8. 6...5 8. 5...8 5...8. 6.5 7..8.8 6. 5..6.9.6.6 9.6..5 8.7.5 8. 7.. 6.8 6. 堤堪數 現 廢 總 9 9 6 5 5 5 9 9 7 8 6 6 5 5 6 9 5 8) 이 자료의 기재양식을 보면 먼저 邑 面 堤 字堪의 형식으로 소재장소와 제어 의 字號가 기재되어 있으며 그 다음 항목의 실태를 기재하고 있다. 조사항목은 周回 尺, 長 尺, 廣 尺, 水深 尺 寸, 水桶 廤, 舊木 株, 今植 株, 蒙利畓 石落 只라는 형식이었다. 여기에는 폐제언도 기록함으로써 제언의 실태를 자세히 보여 주고 있다.

- 8 -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제언의 궤결화의 주원인으로 節目 에서도 설치를 강 조한 바있던 水桶이 거의 모든 제언에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水桶이 없는 제 언은 드물었다. 水播이 이제 제언의 常設 구조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개씩 설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수통이 없어 뚝이 무너지는 일이 줄어들어 농민 들의 노력부담이 경감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조사서는 堤 堰의 보호를 위한 식목의 실태를 기존 나무와 새로 심은 나무의 실태를 각각 기록하 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새로 나무를 심지 않은 지역도 있지만 절반 이상의 제언 에서 나무를 심고 있었다. 지속적인 제언관리 노력을 엿볼 수 있다.9) 이 밖에 冒耕 禁止 嚴松禁을 통한 수원확보책, 濯漑水의 均分문제 등 여러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 다. 이들의 水利論에서도 新築은 거론되지 않고 있다. 다만 堤堰節目 과 같이 시 급한 현존 堤堰시설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 당면한 수리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堤堰數는 9세기 중엽 최고수준에 도달하였다( 표 ). 그러 나 이것은 바로 堤堰개발의 한계가 극에 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는 숙종때의 廢堤堰정책의 변환에서부터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때부터 종전의 폐제언을 무조건 복구하는 방식을 수정 하여 수축할 수 있더라도 몽리가 가 능하지 않은 堤堰은 경작을 허락하여 收税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廢堰를 경 작지로 활용하는 방안을 채택한 것이다.) 그 원인은 제언수축처의 자연적 조건이 변화한 것, 그리고 堤堰축조기술과 활용 유지기술이 한계점에 달한 데에 있었다. 이 러한 이유로 堤堰政策의 기본방향을 疏築과 補築으로 정했으며, 곳에 따라 陳廢와 折受起墾을 허용하기도 한 것이다.) 이리하여 正祖는 778년 堤堰節目 을 반포함 으로써 앞으로의 堤堰정책에 대한 기본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며 78년에는 堤堰數를 전국적으로 置簿하여 決潰 填塞 冒耕을 막을 수 있게 명시함으로써 국가 주도에 의 한 堤堰정책은 일단락되었다.) 어쨌든 당시 최대의 급선무인 水利문제에서 堤堰이 차지하는 비중은 移秧倍多者 9) 제언의 보호를 위한 식목과 나무보호에 대하여는 일찍이 經國大典 에 諸邑堤堰內外面 多 植雑木 勿令決毀 堤堰及裤補所林藪內 伐木耕田者 杖八十追利沒官 라고 법제화하였으나 ( 大典會通 p. 5) 그 실상에 대한 자료는 제시된 바 없다. ) 承政院日記 제8잭, 同年 월(95책 pp. 56 58), 前參奉 李尙熙, 前郡守 尹弘心, 前守 衛官 尹薄疏와 日省錄 正祖 년 월 일 洪州 幼生 李光漢 疏 참조. ) 備邊司謄錄 7책, 숙종5년 8월 일 (7책 p. 9), 各其廢堰 而蒙利民田 量捧若干水税 其中 凐塞已久 水道變遷 雖或修築 終不可蒙利處 則許民耕墾 仍收其税 如足措道 則設合爲 民興利之道 而歲可收數千石穀物矣. ) 英祖實錄 권9, 英祖 5년 6월 (책 p. 6), 特進官 尹容啓 京畿則最多陳弊 嶺南則或有 新築 處 兩西則往往有折受起墾者 或專賣爲民田 不可不稟處矣 知事 趙顯命曰 堤堰之政 守 令憚於作爲 至於罷堰作畓 多出奸民豪族之所爲 이하 구절의 예 참조. ) 이 광린의 앞의 잭 pp. 7과 이태진의 앞의 책 pp. 7 8 참조.

- 9 - 莫非向來申筋堤堰之效也 )라 하듯 移秧法보급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일부 지 역에서는 언답이 과반이라고 할 정도5)였다. 堤堰은 國內堤堰無邑無之 정도로 설립 되었으며 제언의 효과 또한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제언의 신축은 한계에 부딪혔으며, 기존제언 또한 계속적인 보수가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水源枯渴 로 물이 말라버리기도 하였다.6) 이리하여 제언의 수축과 효율성의 극대화 등으로 이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한편, 또 다른 방향으로 대책을 강구하였다. 水 車와 洑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水車는 제조기술상의 문제, 조선의 지리적 특성 등 여 러 요인으로 말미암아 제안수준에 그치고, 이 문제는 주로 洑를 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갔다.7) 이상 제언변동의 추세를 각종 통계수치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표 는 각 시기별 제언통계수치이다. 이 표에서 8세기까지 전라도와 충청도는 별 변동이 보이 지 않으나 경상도는 8세기 전후기에 제언수가 크게 증가하여 정조 말 순조년간 최 고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이 수준은 9세기말기 단계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 표 三南地方 堤堰數 變動 구 분 5 세기후반① 6세기초② 7 세기후반③ 9세기초④ 895년⑤ 慶尙道 7 8 5 765(99) 78(8) 全羅道 9여 9 96() 忠淸道 5여 5 55(7) 자료 ① 慶尙道績撰地理志 ② 中宗實錄 권6, 中宗 8년 정월 (6책 p. 8) ③ 增補文獻備考 6, 田賦考 6 ④ 萬機要覽 財用編五堰堤 ⑤ 慶尙道內各邑堤堰防洑庫數成册 (895). 비고 : ( )안은 폐제언. 이러한 변동추세를 각 군별로 살펴보면8) 모두 일률적으로 중감을 보이는 것은 아 ) 正祖實錄 권5, 정조 년 6월 (7책 p. 85). 5) 承政院日記 제8책, 同년 월(95책 p. 58), 前忠義衞 張志瀚疏 我國之兩湖二西堰畓過半, 6) 日省錄 正祖 년 월 9일 尙州儒學 李齊華疏. 7) 承政院日記 제5책, 철종 년 5월(책 p. 98), 至大堤之荒廢作畓處待明春 期於澈底開 滌 裨復古址 하는 시도를 하였으나 대세는 毁堪築洑 였다. 8) 본고에서 이용한 자료는 각 地域 邑誌 와 조선정부의 조사자료이다. 이들 자료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닌다. 첫째, 조사시점마다 廢堤堰을 판단하는 기준의 일관성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둘째, 여기에 개인이 축조한 제언은 포함되지 않은 듯하다. 예컨대 朝鮮總督府, 水利 에 關한 舊慣 에 등장하는 個人所有堤堰이 邑誌에는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있지만 이들 자료를 통해서 대 강의 추세, 적어도 국공유수리시설의 추이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地主制가 발달되어 가는 朝鮮後期의 수리발달 실태는 본고에서 확인하는 것보다 더 활발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각종 도표에서 사용한 邑誌 는 별표시가

- - 니었다. 표 은 慶尚道 各郡제언의 시기별 변동의 모습을 도표화한 것인데, 지역 별 편차가 매우 다양하였다. 표 慶尙道 各郡 堤堰數 경북 興海 玄風 咸曰 河陽 漆谷 淸河 靑松 淸道 眞寶 慈仁 仁同 義興 義城 龍宮 醴泉 寧海 永川 迎曰 盈德 安東 新寧 星州 善山 尙州 比安 聞慶 大邱 金山 軍威 高靈 慶州 慶山 開寧 慶北 7 767 78 8 895 폐 경 남 7 767 78 8 895 폐 9 頉 9 蔚 山 7 56 7 7 5 昌 寧 5 5 7 9 7 9 7 6 9 5 9 晋 州 6 7 7 7 5 5 5 東 萊 6 9 9 6 6 5 彥 陽 5 8 5 6 6 6 6 6 8 8 熊川 5 5 5 5 5 金 海 7 5 5 5 6 密 陽 6 9 6 6 靈 山 6 9 丹 城 7 7 7 7 7 7 咸安 6 8 8 9 9 9 9 昌 原 7 9 7 9 9 5 88 9 8 草溪 5 6 8 7 8 9 機張 7 7 7 7 9 6 居昌 6 6 7 7 7 5 6 6 宜寧 6 5 6 6 6 7 87 7 89 6 三嘉 5 6 6 6 6 6 9 昆陽 7 6 6 6 6 6 5 陕 川 6 6 6 5 5 7 8 9 7 河東 5 5 5 5 5 7 8 6 陜川 5 5 7 7 固城 5 5 7 6 59 8 69 漆原 6 7 5 5 5 5 山淸 6 8 咸陽 7 安義 9 9 7 慶 南 66 95 8 8 5 7 8 8 8 8 8 5 6 7 7 7 8 8 9 57 5 6 8 7 7 9 67 97 7 7 68 총 계 7 5 5 86 78 88 없는 것은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한 9세기 전반과 후반의 읍지이다.

- - 자료: 慶尚道續纂地理志, 邑誌 (慶尙道), 輿地圖書, 增補文獻備考, 慶尙 南道各郡堤堰防川蒙利杳都總 (9), 慶尙道內各邑堤堰防洑庫數成册 (895). 비고. 제언이 없거나 자료가 소략한 군현은 제외하였다.. 폐는 895년도이고, 頉은 폐제언도 있지만 몽리면적이 장부상 면적과 차이가 나는 제언 수이다. 표 에서 경상도는 9세기경에는 완만한 중가를 보였으나, 표 에서 제언 이 발달하지 못한 지역을 제외하니 증가폭이 표 보다 더욱 컸다. 그것은 제언이 발달하지 못한 지역은 제언수가 정체 흑은 감소의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제언의 선 진지역은 계속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각 군별로 보면 다음과 같 다.9) 경남의 경우, 태화강 유역의 蔚山 彥陽지역과 東萊 지역은 堤堰이 전시기를 일 관하여 지속적으로 제언이 중가하고 있다. 남강의 晋州, 낙동강 하류의 金海 昌原 등 지는 5세기부터 이미 상당한 정도로 제언이 발달하였으나 후기에도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 이외의 지역은 제언의 수가 얼마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후도 별다른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양강의 密陽, 남강 상류의 丹城, 낙동강 중류의 靈山 機張 등은 적은 수이지만, 큰 비율로 중가하고 있다. 반면 慶北지역은 續纂地理志 단계에는 慶州 尚州 星州 善山 등지가 가장 선진지 역이었다. 경주를 제외하고는 낙동강 상류지역이었으며 이후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 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錦湖江유역의 大邱 永川 慶山 慈仁 등지, 밀양강 유역 의 淸道, 위천유역의 義城 比安 등지, 영산강 유역의 慶州 延日 仁同지역과 그 위의 興海 등 낙동강 중류의 지류부근지역에 堤堰이 발달하고 있다. 낙동강 본류에 속한 지역은 속찬지리지 단계에서 발달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후기에 들어와서도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대체로 낙동강 동쪽 평야지대에서 제언이 발달하고, 서쪽 산간지대는 전후기 통털어 커다란 변동을 볼 수는 없었다. 즉 산간부는 별 변동이 없지만, 대하 천 유역의 평야부는 시대의 진전에 따라 제언의 발달이 현저하였다. 9세기단계까지 낙동강 하류의 저습지를 제외하고는 상당한 정도로 개간이 진전되고, 제언도 발전하 였다고 판단된다. 이상, 堤堰數로 본 발달정도는 지역에 따라 발달정도에 커다란 편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체된 지역이라도 개별 제언별로 존재유무를 살펴보면 또 하나의 특징을 살 펴볼 수 있다. 그것은 표 에서 살펴보듯 한번 설치된 제언은 고정 불변한 채 그 모습 그대로 후대까지 유지 존속한 것이 아니라 폐기와 복구 신축이 빈번히 일어난 다는 점이다. 예컨대 堤 堰數가 전시기를 일관하여 별변동이 없는 晋州 지역도 개별 제언의 추이를 보면 신축과 폐기가 빈번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晋州 뿐 아니 9) 三南지방의 각 군별 堤堰변동에 대하여는 宮嶋博史가 이미 앞의 논문에서 검토한 바 있으나 재검토하고자 한다. 본고에서 堤堰의 발달지역을 강과 관련하여 설명하였으나, 강이 제언의 발달과 직접 상호 관련성을 갖는다라는 의미보다 지역표시일 뿐이다.

- - 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특히 제언이 많은 지역은 신축과 폐기도 그만큼 빈번히 일어났다. 경상도지역이 산지가 많이 경사가 급하여 쉽게 궤결된다는 지리적 특성에도 연유한 바 있지만, 그 내면에는 몽리민들의 끊임없는 생산력중진의 욕구에 따라 개간을 진전시켜 나가면서 堤堰處를 再調整한 결과라 생각된다. 표 慶尚道 期間別 堤堰의 新廢 狀況 구 분 7 767 767 8 8 895 895 9 총 폐 신 폐 신 폐 신 폐 신 폐 신 東 萊 7 8 9 7 固 城 6 5 草 溪 晋 州 8 7 7 9 57 7 彥 陽 8 宜 寧 5 昌 原 9 5 9 9 河 東 5 7 陕 川 丹 城 7 7 8 8 靈 山 8 9 熊 川 6 咸 安 6 8 6 金 海 8 7 5 9 密 陽 7 7 蔚 山 8 5 57 6 昌 寧 7 9 漆 原 6 河 陽 開 寧 慶 山 9 9 5 5 慶 州 9 8 7 軍 威 7 9 8 5 9 金 山 5 大 邱 8 9 6 58 9 9 6 比 安 9 5 5 尙 州 6 7 합 차이 5 9 5 5 5 5 5 8 5 7

- - 善 星 新 安 梁 迎 永 寧 醴 龍 義 義 仁 慈 淸 淸 漆 興 山 6 5 8 8 5 57 州 5 8 7 66 寧 7 7 8 東 5 6 9 山 6 曰 5 5 6 川 59 7 8 6 6 9 海 5 5 7 泉 6 9 宮 6 7 8 城 78 7 8 9 興 7 9 同 8 5 5 7 仁 7 8 55 道 7 6 5 8 6 5 5 河 7 9 谷 6 海 9 8 합 7 76 85 7 56 6,,7 비고 : 제언이 없거나 자료가 소략한 곳은 제외. 6 9 9 8 6 5 7 5 7 69 표 5 麽尚南道 各郡 堤堪 蒙利畜 (단위 : 斗落) 堤瑕數 蒙 利 면 적 得 + 冒耕 實④=①+③ ② 货 蒙利度 郡 ③ (④/①) 총 탈 총① 탈② 熊 宜 晋 彥 靈 蔚 昌 河 咸 川 寧 州 陽 山 山 寧 東 安 陕 川 昌 原 5 6 7 6 7 9 5 9 5 9 8 5,5 6,9,87 9,79,6,55 5,8 5,96,,6 6,69,88,, 5, 8,,87 66,7 7,56 8,75,5 6,55 6,95 5,56,8 6 8.(%).9 5. 89. 69. 8. 6..6 86.5. 7.6

- - 草 溪 漆 原 丹 城 固 城 昆 陽 金 海 東 萊 三 嘉 洒 川 密 陽 합 7 7 5 6 5 6 5 7 5 58, 8,,, 8,69,6,,68,6,85,59 7,,56 77,6,7 97, 6 6, 5 6 비고 : 居昌 등 일부지역은 제외, 得은 추가된 몽리면적 자료 : 慶尙南道各郡堤堰防川蒙利畓都總成册. 5 88 6,769,6,56 5,76 77,8 5... 6..8 8.9 8. 5..7 8. 55(%) 다음에는 제언의 운영실태를 표 5 의 경남지역을 통하여 그 일단을 살펴보기로 하자. 慶南堤堰의 蒙利度는 丹城 등 % 미만인 지역에서부터 彥陽의 9% 수준까지 천차만별이었다. 몽리도평균치는 55.6%수준으로 대단히 불안정하였다. 주원인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대체로 자연조건에서 연유하였다. 그 중 水淺沙覆 으로 제언의 貯水 量이 감소하여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 제일 많다. 다음은 水根絕乏 이다. 水源이 자연적 조건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끊어져 堤堰은 궤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 장할 물이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堤堰內가 乾畓이 되거나 끝내는 형태조 차 없어져 버리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외에 제방이 무너져 수축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거나, 수축당시 자연적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수 원자체가 부족하거나, 산곡의 급류아래 설치되 어 파괴되는 등 여러 원인으로 蒙利 渡가 불안정하게 되었다. 대부분 자연적 조건과 관련하 여 제언이 주어진 역할 충실 히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인위적 원인으로 頉이 된 제언은 日人開金鑛人家基 로 쓸모없게 되버린 昌原의 西面 伊淵堤뿐이었다. 冒耕의 비중은 대단히 적었다.) 이렇게 제언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이러한 제언은 경작지로 전환 시켜 세를 받거나 궁방이 절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冒耕의 경우도 무조건 금 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형적 조건으로 회복이 불가능할 경우는 농민들에 경작시키 고 세를 거두었다.)이러한 이유로 볼 때 폐제언화는 단순한 관리문제라기 보다는 ) 이상의 서술은 慶尙南道各郡堤堰防川蒙利杏都總成册 각 군현 堤堰항 참조. ) 宮房折受의 예는 무수히 많다(이광린의 앞의 책과 조선총독부의 앞의 책이 참고가 된다). 各 邑誌에도 散見되는데 邑誌 (아세아영인본), 京畿道편의 振威지역의 제언을 보면, 訥里 제언과 五斤川제언은 水乾波堰으로, 전자는 인조대 崇善君房에 賜給되어 작답되었으며, 후자 는 康熙丙午(666년)에 淑徽公主房에 折受되었다(p. ). ) 邑訪, 慶尙道 晋州의 官栗제언은 今弊爲民田 이 되었다(p. 6). 全羅北道 萬頃郡 各堤

- 5 - 당시 기술 수준이 자연조건을 극복할 만큼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결과이거나 새로 제언을 축조함으로써 효용성에 문제가 발생하여 제기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지주제의 발달은 이러한 수리조건위에서 전개된 것이다. 경상도 지역의 뚜렷한 제언의 발달에 비하여 忠淸 全羅道 지역은 표 에서 보 듯 전기에 비하여 대단히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이러한 堤堰변등은 洑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 堤堰에 한정 하여 京畿道부터 살펴보 기로 하자. 京畿道는 조선전기와의 비교자료는 없다.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표 6 에서 堤 堰이 덜 발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체 (혹은 약간 감소)의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러 나 이 지역도 신축과 폐가과정은 되풀이 되고 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경상도만큼 빈번하게 일어지는 않았다( 표 7 ).) 경기도 제언의 군별상태는 전반적으로 경상 도 지역에 비하면 발달정도가 상당히 미약하지만, 각군별로 보면 安城川의 安城, 天 民川의 陰竹 竹山 등이 가장 발달하였으며, 福河川 유역의 利川 呂州, 臨津江 유역의 長湍과 仁川 江華 廣州 등 지역이 비교적 발달하였다. 시기별 발달모습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安城부근의 대하천유역과 長湍지역이 지속적으로 개발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표 6 京幾道 각군 연도별 堤堪數 변동 지 陰 水 安 呂 長 竹 仁 명 竹 原 城 州 瑞 山 川 765 78 8 88 87 5 9 (8) ( ) 7 7 8 9 7 7 6 9 6 9 지 安 坡 富 振 積 喬 抵 명 山 州 平 威 城 桐 平 765 78 8 88 87 堰執賭小名成册 (광무 년)에는 萬頃郡 堤堰의 冒耕畓 實態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堤堰總數가 곳, 실수는 5곳, 이 중 冒耕畓이.5두락이었는데, 작인 8명으로부터 租 기두를 징수하였다. 또한 全羅北道 益山의 黃登堤는 오래전에 폐제언되어 모두 개인소유지 화되었는데 9년대 일인들이 임익수리조합을 건설하면서 이를 冒耕으로 간주하여 강제수 용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 臨益水利組合重要書類綴 ). ) 호남지역도 신축 폐기가 늘상 있는 일이었다. 萬頃郡의 실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구분 總 實 陳 廢 新 비고 新 6곳 중 5 곳 陳으로 화함. 輿地圖書 96년의 자료는 96년 5 9 6 6 成册 에서 작성. 주 )의

- 6 - 廣 陽 果 楊 陽 龍 交 抱 始 馬 州 城 川 州 智 仁 河 川 興 田 9 9 9 6 6 5 5 5 5 5 ( ) 6 6 () 9 9 9 9 9 6 6 6 5 5 5 5 5 () 加 通 楊 高 朔 南 利 金 陽 총 平 津 根 陽 寧 陽 川 浦 川 합 () () () 7 5 (5) 5 55 5 자료 : 輿地圖書, 京畿道邑誌, 京畿各邑堤堰都結成册, 私撰邑誌 (京 畿道), 增補文獻備考 비고 : ( ) 안의 제언수는 추정치다. 일부 군은 자료제약으로 제외. 이러한 경향은 忠淸道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충청도 각군을 보면 稷山 淸州 등 미 호천 유역과 달천 유역의 충주, 배곡천 유역의 진천 등 남한강 상류지대와 금강 중 류의 대하천 유역에 제언이 발달했다. 금강하류 일부지역에서도 제언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표 7 京嫂道 各郡 期間別 堤堰의 新廢實態 8 87 88 87 765 8 8 87 88 87 지 명 765 8 新築 廢棄 新築 廢棄 新築 廢棄 지 명 新築 廢棄 新築 廢棄 新築 廢棄 加 江 廣 喬 交 馬 安 安 楊 陽 楊 陽 抱 平 華 州 桐 河 田 山 城 根 城 州 智 川 5 6 8 6 6 呂 龍 陰 利 仁 長 積 竹 抵 振 通 坡 州 仁 竹 川 川 瑞 城 山 平 威 津 州 7 7 7 9 9 6 6 5 6 8 6 6

- 7 - 표 8 忠淸道의 시기별 堤堰數 지 淸 忠 稷 尼 鎭 保 恩 懷 韓 公 石 鴻 洪 林 합 명 州 州 山 山 川 舒 津 德 山 州 城 山 州 川 계 76 78 (정조) 87 895 (전후) 6 6 6 6 6 6 59 59 6 6 7 7 7 7 () 9 9 9 9 6() 7 7 6 7 7 6 7(6) 5 5 5 5 7 5⑴ () () () 55( 5 5(6) 9(7) 지 禮 天 鎭 燕 保 牙 猶 瑞 堤 藍 連 結 沃 新 비 명 山 安 岑 岐 寧 山 山 山 川 浦 山 城 川 昌 고 76 78 (정조) 87 895 (전후) (5) (5) 6() 6() 8() 8 9 9 9 9 9 9 9 9 9 9 9() 9() 8 8 8() ⑵ 5 8 8 8 7 8 7 7 7() 7 9 9 7 7 7 6 7 6⑵ 6 6⑵ 8⑵ 8() 6 6 6 6 6 6 6 6 6 6 6 6 6 6 6 5곳 이하 지역 제외함. 자료 : 邑誌 (忠淸道), 輿地圖書, 增補文献備考. 비고: ( )은 폐제언수이다. 호남지역은 어떠할까? 이 지역은 羅州 咸平 務安 光州 등 영산강 유역일대, 金堤 泰仁 益山 咸悅 全州 등 萬頃江 중상류지대, 그리고 扶安 古阜 高敞 등 동진강 유역 중상류지대에 제언이 발달했다. 결론적으로 각지 제언은 대부분 대하천 유역의 평야지대에 발달해 있었다. 山郡지 대는 물론 큰강 하류지대는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제언이 발달하지 못 했다. 이 점은 각지의 공통점으로 조선조 제언발달의 한계이기도 하다.) ) 금강하류, 낙동강하류같은 지역은 대체로 일제강점하에 개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 지역의 개간 간척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투자의 결과 얻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농 민들의 수탈의 과실로 진척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추후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 8 - 표 9 全羅道의 시기별 堤堰數 지 羅 金 茂 扶 光 全 靈 泰 咸 興 益 咸 南 靈 萬 古 高 명 州 堤 長 安 州 州 巖 仁 平 德 山 悅 平 光 頃 阜 敞 76 78 8 87 895 96 6 6 6 6 6 6() 6() 6() 5 5 55 55 9 9 5 5 6 6 56 5 (5) 57 7 8 8 6 8 7 7 7 5 7 6 6 6 (8) (6) 6 5 5 () 지 臨 金 務 沃 玉 井 錦 勵 長 海 南 康 潭 淳 順 계 명 肢 溝 安 溝 果 邑 山 山 城 南 原 津 陽 昌 川 76 78 8 87 895 6 8 6 6 7 8 7 7 5() 5 7 9 9 8 5 5 () () () ( 9 9 9 () 9 9 8 9 9 9 9 9 5 5 5 5 568() 89 8 8 858 비고 : -= 任實 麗水 突山 莞島 智島 光陽 龍潭 同福 和順 珍山 谷城 樂安 九禮. -6= 長興 長水 高山 興陽 鎭安 綾州. 7-8= 雲峰 珍島 寶城 昌平 茂州 龍安. 자료 : 邑誌 (全羅道), 輿地圖書, 增補文獻備考.. 洑의 발전추세 堤堰이 조선후기 移秧法에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 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볼때 여러가지의 문제점이 제기된다. 첫째, 제언발달이 상대적 으로 미미한 忠淸 全羅 지역에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둘째, 경상도는 문제 는 없을까? 경상도는 농업기술의 선진지역으로, 강원도와 함께 經濟六典 에 금지 령이 실릴 정도로 移秧法이 시행되었던 지역이었다.5) 그런데 이곳은 표 에서 보듯 6세기초 까지만 하더라도 全羅道보다 堤堰 발달이 상당히 낙후되었을 뿐 아니 라 山多野小 한 지역임을 고려하여 보면, 堤堰이외의 다른 水利시설로 이 문제를 해 5) 世宗實錄 권68, 세종 7년 월 (책 p. 6), 禁慶尙江原人民苗種之法載在六典.

- 9 - 결했을 것이다. 그것은 洑 그 가운데에서도 山多野小한 지역에 적합한 洑가 자연스 럽게 떠오른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하천수를 이용하여 관개를 해왔다. 이미 新羅代부터 洑를 막 아 관개하는 등 하천수를 이용해 왔다.6) 하천수는 시대의 진전에 따라 개발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점차 이용도를 높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高麗에도 하천수 이용은 그 시대의 조건에 맞추어 이용하여 왔다.7) 하천수 이용은 같은 시대라 하더 라도 하천과 田의 위치, 하천의 크기 등에 따라 이용수준이 결정되었다. 堤堰도 산과 들에 발전하는 것처럼, 洑도 크기에 따라 大 中 小로 나눌 수 있으며8) 들에만 발전 하는 것이 아니라 雪水를 저장하기 위한 계곡에도 洑는 설치되었다.9) 堤堰과 洑는 당해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적합하도록 설치한 것이다. 또 이 洑는 하천을 막아 이 용하는 기술적 특성상 궤결이 문제가 되나 적은 규모의 洑는 그만큼 건설하기도 쉬 워 노동력 을 대량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하천관개는 점차 하류지대의 개간이 진전됨에 따라 규모도 커지게 되었다. 주 ) 의 기사에서 보듯 5세기에는 수령이 관장할 정도의 상당한 규모의 洑가 등 장하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는 쉽게 궤결되어 버려 농민의 노력이 많이 든다는 洑 수축의 기술이 문제시되었다. 시설 관리문제가 해결의 급선무였다. 이리하여 국가는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수축을 장려했을 뿐 아니라 수축한 뒤에도 지속적인 관심아래 洑를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洑에 대한 제반사항을 문서화시켜 관리하였 으며, 관리상태에 따라 수령을 출척하도록 했다.5) 6) 新羅대의 洑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사료인 貞元十四年 戊寅 四月十三日 替堤治記文謂 洑堤 復 故所內使 以見令賜矣 (원성왕 년 : 798 ; 李基白, 永川 菁堤碑 貞元銘의 考察 考 古美術, 969)에 대한 해석은 洑로 보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가 있다. 우리나라 지형과 기후조건상 洑와 堤堪과의 관계가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고, 상호 이동관계가 발생할 여지가 많다. 앞에 이용한 각종읍지에 종종 발견되고 있다 晋州의 洪景浦防川의 경우 후에 는 洪景浦防川堤로 변화되고있다. 邑誌 (경상도) p. 65에서는 堤堰으로, 邑誌 (경 상도 ) p. 6에서는 川防灌槪로 나와 있다. 이 밖에 곳곳에 산견되는 OO洑堤堰이라 칭하 는 경우는 이러한 연유에서 발생된 것이라 생각된다. 7) 高麗조의 사료에는 洑라는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李光麟의 앞의 책 pp. 6 에 인용된 각 종기사는 河川水의 이용을 짐작케 해준다. 특히 高麗史 권79, 食貨志 農桑(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 소 영인본) p. 76, 恭愁王 十一年 密直提學 白文實上箭子 吾東方人治水者 必引溝澮 不解水車之易注 故田下有渠 曾不足尋丈之深 의 기사가 참조된다. 8) 世宗實錄 권5, 세종 년() 6월(책 p. ), 工曹參議朴瑞生上言 臣生長外方嘗觀 築川灌槪之難矣 守令以時差遣色吏 各率農民 赴而役之防築 大則必用數百人之力 中則用數十 人 小則用十餘人 累月乃成 或有水至決潰 則亦如之 其民力之勞 誠多矣. 9) 太宗實錄 권5, 태종 8년(8) 월 (책 p. ), 雪水 五穀之精 每年九月水凍前 洑堤 堰加築 貯水雪水 自今守令遞代之際 解由文字內 某守令 某年某節 舊基加築幾處 貯水幾尺 灌漑幾結 開具施行 以報監司. 그리고 朝鮮總督府, 앞의 책에는 常設洑와 冬築春缺의 湺로 구분하였다. 5) 世宗實錄 권, 세종 즉위년(8) 월(책 p. 7), 又令諸郡俱錄 堤堰及灌漑之數爲籍ー

- - 洑는 큰 것은 수백명, 중간 것은 수십명, 적은 것은 여 명이 여러 날 힘들여 만 들었다 는 표현에서 보듯5) 규모는 다양하였다. 이러한 洑 크기의 차는 일차적으로 하천의 크기와 함수관계를 갖는다. 소규모는 상류, 중간 규모와 큰 규모는 중하류지 역이나 소 중 대하 천에 각각 설치되었다. 또한 이는 단순히 하천의 크기에만 좌우되 는 것이 아니라 기술수준 과도 짝하는 일이어서 동시 병렬적인 발전이라기보다 기술 수준의 발전정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개발되어 간 것이다. 중 소규모의 洑는 堤堰의 발달과정과 거의 때를 같이한다고 생각된다. 5 6세기 경상도 일부지역에 실시된 移秧法은 溪水를 이용한 灌漑, 즉 계곡에 설치 된 堤 堰과 중소규모의 洑를 배경으로 실시되었으리라 생각되며, 이러한 종류의 洑 가 5 6세기에 국가의 정책적 배려속에서 개발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5) 그러나 당시의 河川灌漑는 국가의 移秧法 禁令과 관련하여 볼 때 移秧法보다는 直播法, 그 가운데서도 乾播보다 유리한 水田直播法으로 수도작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국가적 대 책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大川川防도 수축되어겠지만, 雪水 즉 溪流를 이용하기 위한 중 소규모의 洑가 이 시기 洑의 주된 형태였으리라 생각된다. 大洑의 건설은 임진 병자의 양란을 겪은 뒤 전후경제를 복 구하는 과정에서 이 시기의 경험 을 바탕으로 적극 검토되고 시행되었다고 판단된다. 戰後 移块法은 三南지 방에서 전면적으로 적극 보급되어 갔다. 孝宗 6년 (655) 公 州牧使 申風이 편찬한 農家集및) 을 정부차원에서 널리 배포했는데, 이 農書는 移 块法에 관한 부 분을 크게 중보함으로써 移块法을 水稻作의 주축으로 삼은 것이었 다. 水稻農法의 기본방향이 移秧法의 확대보급으로 크게 전환된 것이다.5) 이 移秧法 의 보급은 기본적으로 현존 水利시설을 바탕으로 실시하면서도 안정적인 확대 보급 을 위해서는 기존수리체계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 기서 당시 주 관개시설인 堤堰을 재정비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했지만, 당시 개간의 급속한 진전과 관련하여 볼 때5) 洑 개발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置戶曹一置大內 每年懲考修治 하는데, 守令의 解由내용에 샅샅이 기록하여 수령 출척의 중 빙으로 삼도록하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해 禹希烈은 또 한걸음 나아가 戶曹와 宮中에 장부를 두어 매 년 堤堰과 灌槪(洑) 修治의 증거 자료로 삼도록 하자고 제언하고 있다. 이에 왕은 從之하고 있다. 그러나 世宗實錄 권8, 성종 6년 월 (책 p. 59), 議政府 陳言 第 八條曰川防之利 甚於堤堰 大典只載修築堤堰 不錄川防 故守令曾不用心 하는 사정을 보아 보수축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5) 世宗實錄 권5, 세종 년 6월 (책 p. ). 5) 주 6)의 이태진의 논문 참조. 5) 金容资, 朝鮮後期農業史硏究 97) pp. 5 55 참조. 明宗實錄 권9, 명종 년 7월 (책 p. 88)에서 6세기 단계에 移秧法 실시예를 본다. 그러나 이 시기는 지역적으로 慶尙 江原道 일부 등에 한정되었을뿐 아니라 한발시 無水根之杏 并皆焦枯 하여 經濟六典 에서 禁令을 내리는 등 水利의 제약으로 보급은 철저히 제약되었다. 이는 7세기경에도 마찬가지 였다.

- - 이미 5 6세기에 경험한 바 있던 河川濯漑시설, 洑개발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농 업생산력의 중대라는 일대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간 몇 몇 곳에서 시행하여 일 정한 효과를 거둔 大川개 발을 적극 시도하였다.55) 振恤廳堤堰事目 (이하 事目)은 이러한 목적아래 현종 년(66) 월에 復設한 堤堰司의 업무규정이었다.56)이 事目은 제조에서 堤堰司의 職制를 규정하고, 제 조 에서는 현재의 사회적 조건이 수리 사업을 대단히 시급히 실시 해야할 과제라는 당 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즉 현재의 우리 사정은 잇단 大侵과 旱災 때문에 饑饉이 극 심하여 民을 구하기 위하여 관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당면과제를 해결 하기 위하여 水利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시 행방법론을 조목 조목 제시하고 있다. 여 기서 주목되는 바는 당시 水利事業이 戰後 朝鮮王朝의 再造라는 관점아래 시행되었 다는 점이다.57) 이 일환으로 饑民을 救濟할 목적으로 수리사업을 실시 할 것을 강조 하기도 했다.58) 이들을 水利사업에 동원시켜 수리시설을 확보해 나감과 동시에 賑濟 穀物을 나누어 줌으로써 이들의 유리를 방지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두 가지 목적 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朱子의 賑恤이념을 충실히 따르려한 것임 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59) 이렇게 당시의 大川개발정책은 移秧法보급의 현실적 필요, 그리고 현실에 당면한 진휼문제를 朱子學的 理念에 따라 해결함으로써 농촌사회를 안정화시켜 조선왕조의 질서를 재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水利시설의 주역은 堤堰이었기 때문에 堤堰을 적극적으로 복구 개발 할 것도 당연히 목표로 내세웠지만 당시의 사회적 조건상 이 사업에는 현실적 어려 움도 내재하고 있었다. 事目 제 조의 표현대로 法禁이 解弛되어 오래된 堤堰이 파괴되어 버리고 宮家가 折受하거나 鄕曲土豪가 堤內를 冒耕하여 다 乾堤로 돌아가 灌槪의 利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堤堰수축사업을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권력으로 이들을 제압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지만 전쟁을 치른 직후인 당시 국가 5) 이경식, 7세기 농지개간과 지주제의 전개 ( 韓國史硏究 9, 97)과 송찬섭외 앞의 논 문이 참고 된다. 55) 朝鮮總督府, 朝鮮河川調査書 (99) pp. 7 9. 於之屯洑가 仁祖 년(66)에, 金自點은 沙 里院瑞興江 지역에 5리에 이르는 洑를 건설하였다. 조선총독부, 수리에 관한 舊慣 에 6년경 창설된 거대한 景祐宮洑가 소개되어 있다. 또한 6 7세기 사찬읍지에 대규모의 洑 를 볼 수 있다. 56) 備邊司謄錄 책, 顯宗 년 월 6일 (책 p. 79). 57) 국가재조론에 대하여는 金容燮, 朝鮮後期農學史硏究 (988)와 朝鮮後期 農業史研究 (增 補版, 99) 및 金駿錫, 7세기 國家再造論의 擡頭와 그 展開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99) 등이 참고된다. 58) 賑恤廳堤堰事目 제8조, 役軍則稍實之邑 自當依例調發 使之赴役 而其尤甚赤地飢餓之民 則必須官給口食 如此之處乙良 除出賑濟穀物 隨令饋食 要使賑政堤役 并行兼濟. 59) 賑恤廳堤堰事目 제8조, 朱子於荒政條件中 亦有條築大坡堤爲饑民就食之地者 今亦依此擧 行爲白濟.

- - 권력사정을 고려하면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6) 물론 국가도 堤堰수축 자체가 현실적으로 지배계층과 이해관계측면에서 상충된다 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여기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 방안은 수령권을 활용하여 궤결된 堤堰을 수축하고 堤內를 측량하여 宮家의 折受나 土豪의 冒耕을 모두 還陳토 록 한 뒤 이를 위반한자가 있으면 처벌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나아가 수령이나 鄕所 邑吏들이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처벌하는 조항도 채용하였다.6) 그러나 事 目 의 대부분 조목들이 하천관개에 두고 있는 점으로 보아 지배계층과 이해관계가 상충될 堤堰을 수습하기 보다는 하천개발정책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堤堰 折 受는 왕실재정적 차원에서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事目 이 지향한 하천관개사업 중 大川개발은 규모 등 여러면에서 한계를 갖는 것이지만 大川개발의 유리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것이 堤堰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 고 평가하고 있다.6) 그리고 이것은 大川주변의 넓은 평야를 개간할 수 있고 陳災에 대비할 수 있는 방책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실정은 大川을 막지 않아 귀 중한 물을 다 홀려 내버려 잠깐 旱災를 만나도 흉년을 당하게 되니 防川에 힘써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천관개는 大川유역의 넓은 들을 개간하여 농업생 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일환으로서 제안 된 것이었다.6) 事目 에서는 이러한 목적아래 각 조항에서 구체적인 시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 다. 첫째, 적당한 개발후보지 선정 작업이다. 그것은 모든 川澤을 대상으로 하여 洑를 쌓아 관개할 수 있는 곳을 民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수령이 스스로 살펴본 뒤, 監司 에 보고하고 감사는 여러邑에서 조사 보고한 바를 한데 모아 堤堰司에 보고하여 개 발을 하도록 한 것이다.6) 둘째,노동력 동원문제이다. 필요노동력은 규모에 따라 계 산하여 ①本土田夫 ②本邑烟軍 ③隣邑烟軍 순으로 役軍을 定數調發하고 軍役으로 계 산해 줄 것을 지시하고 있다. 이외에 僧軍과 僧人을 度牒을 주는 대가로 동원하기도 하였다. 役軍이 飢餓之民일 경우 賑濟穀物을 지급하여 水利役에 동원하도록 지시하 기도 했다. 셋째, 재료의 구입문제이다. 木石은 坊市를 열어 장보러 오는 사람들을 활 용하여 구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며, 물을 대는 도랑이 통과하여 손해를 입은 田主에 게는 蒙利之土소를 계산하여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65) 넷째, 축조기술문 6) 이러한 기조는 이후로도 존속되어 국가에서는 이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였다. 이리하여 續大 典 권, 戶典 田宅條에 堤堰雖內司 無得折受 라 규정하면서도 단서에 先朝折受處는 해 당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大典會通 p. 6) 6) 賑恤廳堤堰事目 제 조. 그리고 이는 후에 續大典 戶典조에 규정을 더 엄하게 하여 수 록되었다 ( 大典會通 p. 6). 6) 賑恤廳堤堰事目 제 조. 6) 賑恤廳堤堰事目 제 조. 6) 賑恤廳堤堰事目 제 5조 및 續大典 戶典 田宅조에도 凡狀堰新築 許民來訴 守令親審 果是民衆民蒙利處論洑堤堰司後 該邑守令出力助役 라 규정하였다( 大典會通 p. 6).

- - 제의 해결방식이다. 大川이기 때문에 泥土로 인하여 潰決되기 쉬운 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다섯째, 水利를 담당할 전문가를 양성하거나 인재를 구하여 일을 맡김으로써 민력을 낭비함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前朝官 生員 進士를 막론하 고 선발하여 실효를 현저히 거둔 자는 실직을 주도록 하였다.66) 결국 事目 은 江南農法의 핵심인 移秧法을 보급하면서 근본토대가 되는 水利문 제를 宋代水利學으로 大川을 개발 이용함으로써 해결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 동원 문제를 朱子的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점은 農家集成 이 목표한 바의 經濟論 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하겠다. 즉 小農安定策으로서의 田夫동원과 賑恤정책의 시행, 그리고 地主佃戶制의 확대발판으로서의 水利시설과 개간지 확보에 주안점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후기왕조의 水利 경책의 기본방향이 설정되었으며, 이 이후 하천관 개는 水利개발사업의 중요한 한 부문을 담당하면서 전개되어 갔다. 大川개발의 성과는 8세기 이후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大川을 개발하고 灌 漑水로 이용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역사적 대세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7세기 事目 단계 에는 大川灌漑의 이익이 상당히 크다고 강조하였으나 그 이익은 堤堰 에 비하여 절대적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非小小堤堰之比 라는 상대적이고 제한적 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8세기(英 正祖)에 접어들면서 각종 築洑(大川 江) 사업의 경험, 그리고 정부차원의 大川개발과 大江 연안의 築防공사, 疏濬사업을 실시 해 나간 결과 이제는 川防灌漑가 堤堰에 비하여 유리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67) 節 目 이 발표되고 그 안에 防川引水之利 此堤堰尤大 라고 한 말은 이러한 수리기술사 의 진전을 잘 보여 준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節目 이 堤堰을 수축하는 일에 주 안점을 둔 것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방향인 하천관개의 유리성에 대하여 언급한 점을 고려할 때 현재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水利사업에 대한 방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특히 正祖년간은 농업의 급선무로 水利문제의 해결이 하나의 커다란 과제로 등장 하고 있었다. 水利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移秧法의 확대보급이 원인이었다. 三南은 물론 黃海道新溪縣도 過半이 移秧을 할 정 도로 이앙법은 중부이남 지방의 보편적인 농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68) 이때가 되면 정부로서도 수리시설의 불비때문에 발 생하는 移秧法의 불안정성을 내세워 확산되어가는 이앙법을 금지할 수 없는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이제 생산량의 중대를 가져오는 이앙법의 채용을 단순히 이앙법금지 65) 賑恤廳堤堰事目 제 9 조 및 續*典 戶典 田宅조에 법 조문화되 어 있다( 大典會通 p. 6). 66) 賑恤廳堤堰事目 제 조. 67) 이광린, 앞의 책 pp. 6. 68) 石泉遺集 後集, 新溪縣農書條對 및 金容燮 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 ( 朝鮮後期農業 史硏究 -農業과 農業論의 變動, 增補版, 99) 참조.

- - 만을 대책으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 보다는 수리의 불안정성에서 야기되는 失農 을 막기 위하여 水利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移秧法의 유리성 때문에 以田作畓 함으로써 水利가 매우 불안정한 反田이 今南北水 田什三皆反田 69)일 정도로 확산되는 농촌현실속에서, 수리문제해결은 더욱 시급히 해 결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기된 수리시설이 洑 堰 水車의 가지 방식이었다. 大川灌漑와 관련하여 이용될 수 있는 것은 洑와 水車로 요약되나 水車는 이미 지 적된 바와 같이 우리의 조건에 적당한 시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正祖 년 (798) 李宇炯은 築洑가 대단히 많으나 광릉의 大川은 洑를 쌓을 수가 없어 水車 를 쓸 수밖에 없다7)고 水車이용을 제안하였다. 大川개발에서 水車 이용은 불가피하 다는 것이다.7) 또한 이 기사는 이 지역의 경우 大川築防은 그렇게 커다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水 利문제는 築洑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築洑의 어려움은 茶山도 防洑之難甚於海 堰 7)라 할 정도였으나 堤堰의 확대 수축이 어려운 사회적 지리적 여건속에서 洑灌漑 는 현실적 대안이었다. 正祖년간은 開洑의 시기였다. 이때는 開洑築防 를 先務로 인식하고, 물이 있는 곳 이라면 鳩財開洑 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에 開洑하여 저수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빈번히 축조되는 상황이었다.7) 大抵畓之品有上中下三等 所謂上等者 以其引水生水之謂也 所謂中等者 雖有引水之道 而源流不長 或値小旱 則勢不及長 易致枯渴之謂也 所謂下等者 本無生水引水 而高燥奉 天之謂也 라 하듯7) 灌漑능력여부가 답의 品을 결정하는 척도까지 된 것이다. 水利시설을 갖 춘다는.것은 필연의 일이었다. 이러한 추세속에서 築洑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자 물의 확보를 둘러싸고 爭訟이 非一非再하게 일어났다. 동일 하천에 洑를 잇달아 수축하여 수량 부족이 벌어짐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이에 先築下洑者 와 水上新設者 69) 林園經濟志 本利志 田制 反田 (책 p. 59). 7) 承政院日記 제8책, 正祖 년 월(95책 p. 56), 今歲之築洑者 甚多 本郊廣陵 豪帶 大川 不可築洑者 水車不可無也. 7) 주 )의 논문 참조. 邑誌 (경상도 ) p. 6. 晋州 蓮潭에서는 皆水田用 结槹蒙利 라 하듯 植槹를 이용하는 수준이었다. 7) 與猶堂全書 (경인문화사 영인본) 책 p. 95. 7) 承政院日記 제8책, 正祖 년 월, 前참봉 李尙盟 疏(95책 p. 58). 또한 李宇炯은 今 歲築 洑者 甚多 하다고 하였다( 正祖實錄 권5, 정조 년 월, 7책 p. ). 7) 위의 책 제8책, 同년월, 前군수 尹弘心 疏(95책 p. 59).

- 5 - 즉 舊洑와 新洑사이에 물이용에 대한 원칙을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당시 목민관의 지침서에는 所志 를 올려 面任이 洑水분쟁을 해결하도록 하 는 방안을 제시해 놓기도 했다.75) 洑의 활발한 수축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여 준 자료 이기도 하다. 이러한 開洑의 성황에 따른 분쟁은 소규모의 洑에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지 역에 따라서 大川 大洑도 밀집됨으로써 舊洑와 新洑사이에 爭利를 다투게 됨에 따라 毀破되는 일도 벌어지고 있었다.76) 萬機耍覽 財用篇(순조 8년 ; 88)에 제시된 표 의 洑數는 開洑 전성기를 거치면서 大川에 축조된 大洑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77) 표 88년 道別洑教78) 道 慶尙道 全羅道 忠淸道 平安道 黃海道 咸鏡道 江原道 계 비 고 洑 數,9 6 97 9 7 6,65 이러한 洑기술의 발전과 보급에 대한 성과를 당시 최대의 농학자인 徐有榘의 林園 十六志 를 통하여 살펴보자. 그는 洑田은 引川而灌田 하는 것인데 우리의 灌田은 대 부분이 법을 따른다 고 하면서79) 지형에 따른 설치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田이 높고 川이 낮은 경우이다. 그것은 障塞上流 使水旁洄 開渠而引之 하는 것이다. 둘째는 田이 낮고 川이 높은 경우도 이곳은 沿邊築岸하여 田段를 둘러막고 75) 先覺追錄, 田畓爭洑水等 所志 則題以 彼此曲直 各別詳細摘奸牒報 填以面任 ( 朝鮮 民政資料 p. 5). 76) 承政院日記 제8책 (95책 p. 58). 長湍 芬泥川과 陽城의 火山坪에 새로 만들어진 大洑 가 毁撤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77) 그 이유는 朝鮮總督府 土地改良部 朝鮮의 土地改良事業)(98) p. 7에 98년 현재 堤堰 6,여, 洑, 7여에 달한다고 조사보고하고 있다. 萬機要覽 과 비교하면 거의 배에 달하는 숫자로 파악된다. 거기에 일제강점 직후 수리조합사업 등으로 인하여 파괴된 숫자까 지 포함한다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지기 때문에 大洑로 상정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곤란하다. 중앙조사는 대부분 大洑라 판단된다. 일제강점직전 통감부 에서 조사한 충북 沃川 懷仁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韓國忠淸北道一般,99년). 지 명 구 분 몽리면적 크 기 개 인 공 동 堤 堰 두락 평 懷 仁 洑 8 8 9m 堤 堰 77두락 79평 沃 川 洑, 5 7m 78) 89년 慶尙道의 洑는,곳이었다. 그 중 경남지역이 곳이었는데 ( 慶尙道內各邑堤堰 防洑 庫數成册, 895), 9년 단계는 8(頉 곳)곳이었다( 慶尙道各郡堤堰防川蒙利畓 都總 ) 79) 徐有榘, 林園經濟志 本利志 권, 水利 論障川 (책 p. 7).

- 6 - 구멍을 뚫어 灌漑하는 방식이다. 灌漑거리는 먼 것은 여 리에 이르고, 가까운 것은 수십백畝 라는 것이다. 규모는 수천경을 灌漑할 수 있는 커다란 것도 있으나, 수십 수백 畝를 관개할 정도로 적은 규모도 있다고 하였다. 이 洑田에 대하여 서유구는 거리와 규모에 관계없이 弓 泄 熇 潤이 가능하기 때문에 災와病에 강하여 水田에서는 上乘이다 라는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8) 徐有榘가 我東用江水灌田者絕罕 南北灌漑之水 大抵皆川渠耳 라 지적한 바와 같이8) 당시 狀灌漑 수준은 江水를 이용 하는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없겠지만 川은 大小를 막론하고 이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8) 한편 이 시기에는 洑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수준을 향상시켜 나가자는 제안과 실천이 뒤따르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 시기 이앙법의 보급과 하천의 하류지 역의 개간이 괄목할만하게 진척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8세기 후반이 되면 移秧期에 들이 넓고 잇닿은 곳은 洑만으로 관개하기에 물이 부족하여 약간 가뭄만 들어도 물 이 끊기는 문제가 발생한 것 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였다. 여기서 전술한 堤堰과 洑를 결합한 형태의 수리시설을 수축할 것이 제안되고 실천 에 옮겨졌다. 이것은 洑渠부근의 閑曠地에 堤堰을 만들어 가을과 겨울에 물을 저장 하였다가 移秧期에 사용하면 水源이 무궁하리라는 것이다.8) 洑에 堤堰기능을 결합 시켜 상호보완하는 방식 을 채용할 정도로 기 술수준이 발전하였다. 大川개발과 開洑사업은 正祖期에 기술이 최고도에 도달했으며, 이 이후에는 기술 상의 발전을 토대로 하천관개사업을 추진해 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말 여러 邑誌 에 산견된 洑가 그것을 말해주는데, 이 洑중에는 몽리면적이 堤堰보다 우위에 있는 洑도 적지 않았다.8) 이것은 大川 築洑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開洑가 활발히 전개된 데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또 한편으로 작동하고 있었 다. 洑는,국가 혹은 향촌공동체가 주체가 되어 설립하기도 했지만, 개인소유 洑도 괄 목할 만큼 설립 되었다. 이 洑는 移秧法을 확대 보급시키는 한편, 너른 들판을 개간 할 수 있게 한 기술적 전제조건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주들은 수리시설을 수축하여 토지를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 또한 일부계층은 수리시설을 축조하여 수세를 징수함 으로써 자본을 축적시켜 나가기도 했다.85) 또한 사적사유가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8) 徐有榘, 위의 책 권, 田制 洑田(책 p. 59). 8) 徐有榘, 위의 책 권, 水利 論灌田江不如湖 (책 p. 68). 8) 거리가 멀고 규모가 큰 洑는 大川에 존재하는 大洑(田)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8) 日省錄 正祖 년 월 일, 公州生員 柳鎭稷疏, 每當移秧之節 野廣田連 而洑流甚細 水 不得遍沾 如遇小旱 輒患斷流 臣意則獻洑渠傍閑曠地 別築一大堰 冬春受水 夏節添洑 則水 源無窮. 8) 邑誌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편을 조사한 결과였다. 이 邑誌는 대 체로 8년경과 895년경 두 시기에 출간된 것이다. 이 외에 慶尙道各郡堤堰防川蒙利畓都 總成册 을 비교검토하였다.

- 7 - 매매도 가능하여 理財에 밝은 자들이 수리시설에 눈을 돌리기도 했던 것이다.86) 이러한 사회 경제적 조건은 開洑를 확대 발전시켰고, 또한 이것은 地主制확대의 중 요한 매체로서 기능하였다. 즉 移秧水稻作에서 水利수단은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으로서 洑主들은 이를 빌미로, 흑은 이것을 이용하여 財富를 축적, 토지를 확대시 켜 간 것이다. 그결과 왕성한 開洑는 9세기 후반 농촌사회에 여러가지 문제를 발생 시켰다. 자기 畓에 물을 대기 위하여 타인의 田을 파괴 하거나,87) 다른 洑를 상류에 서 막아 失農하게 하거나88)水稅를 과다하게 징수하는 등89) 다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築洑자체를 금지시키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築洑를 일정하게 규제하는 법규를 만들 었다.9) 이것은 전단계와 비교하면 엄청난 사태의 진전이다. 水利시설이 不備하여 발 생되는 失農을 걱정하기 보다는 築洑때문에 발생하는 갈등문제를 더 염려한 것이 다9)이것은 洑시설의 괄목할만한 발전의 결과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洑발전의 실태를 구체적인 성과를 통하여 검토하기로 하자. 표 에서 9세기초 萬機要覽 단계와 895년의 양년을 비교하면 경상도 지역의 洑數 는 거의 비슷하였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살펴보면 변동의 추세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표 慶尙道 各地의 年別洑數 지 명 767 8 895 9 9 大邱 86 慶山 6 증 감 5 85) 黃海道 平山 下而峰面 沙坂坪所在 龍洞宮洑契節目 의 大川에 築洑하여 개간 수세를 받고 있다. 節目 (宮船坪)의 경우도 大川에 開洑하여 수세를 징수하는 사례였다. 위는 8년 의 일이고 아래는 88년의 일이었다. 즉 正祖 이후도 大川 開洑는 지속적으로 시행되어 갔 고 수세의 문제가 계속 야기되어 이 시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86) 周藤吉之, 朝鮮後期 田畓文記에 관한 연구 ( 歷史學硏究 7-9, 97.9)와 李樹健, 慶北 地方古 文書集成 (98)에 소개된 田畓明文 5, 596, 689가 예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총독 부, 水利에 關한 舊慣 에도 매우 다양한 예가 소개되어 있다. 87) 承政院日記 제5책, 철종 년 5월 (책 p. 98), 所謂開洑 爲弊甚多 而此亦憑藉 夤緣 於 各官各衙門 如有川原梢曠之處 則看作利竇 恣意行臆 諉之於開拓水道 他人田畓 無難到破 不給準價 此己農民切骨之寃 而及其成洑作畓 不較引漑之遠近多少 年形之豊歉與否 而必以高 摠定税 準捧乃已. 88) 承政院日記 제5책, 철종 년 5월(책 pp. 98), 雖或有下洑水利 橫斷上流 不得灌漑 擧皆失農因其一人射利 至使衆人被害怨謗喧騰 極其愁添 而營邑莫之禁断. 89) 遠齋集 권6, 雜著 洑税爲弊, 洑稅 列邑之巨瘼也 或稱導堂或稱舍音 而貪餐 成風化弄成 習 其定税也 無論地品之原簿 例以多而成案 其踏驗也. 9) 주 5) 참조. 9) 統里軍局事務衙門, 農課規則, 農務規則 (88), 下洑禁斷之弊 另察遠近輕重之別 平分 水利 無或有厚彼薄此之患.

- 8 - 咸安 永川 彥陽 仁同 晋州 慈仁 安義 迎曰 河陽 淸河 계 경상도 합 5 8 79 5 5 8 6 7 5 8 9 85 8 9(88년) 표 에서 大邱 慶山은 대폭 감소하는 데 비하여, 河陽은 대폭 중가, 安義는 증가한 상태에서 9세기 후반 약간 감소하였다. 이를 다시 표 에서 慶南지역에 한정하여 검토하여 보자. 9세기 후반기의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변동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지만, 昌寧 固城 昆陽은 증가하는 데 반하여 漆原 機張 宜寧 咸安 등은 감소하 고 있다. 특히 昆陽은 곳에서 곳으로 크게 중가하고 있다. 대략 낙동강유역은 별 변동이 없으나 대구 중심지대가 크게 감소하고 있고 그 외에 평야보다 낙동강 서쪽 산간지대에 발달하고 있는 특이한 양상을 보여준다. 표 慶尚南道 年度別 洑數 地名 金海 昆陽 東萊 彥陽 咸陽 蔚山 洒川 昌寧 晋州 密陽 河東 漆原 靈山 陕 川 8 895 9 日帝 5 5 8 5 5 5 7 8 8 8 8 5 5 7 9 증감 地 名 居昌 + 熊 川 安義 + 固 城 宜寧 三嘉 草溪 +5 鎭 海 昌原 咸安 山淸 -5 機 張 계 8 895 9 日帝 5 9 8 8 6 6 5 7 8 증감 - +9 - + -6

- 9 - 이렇게 변동폭이 적기는 하지만 표 에서 보듯 洑도 堤堰과 마찬가지로 신축 과 폐기가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9년경 경남지역은 이 밖에 靈山, 昌原, 昆陽, 鎭海, 草溪, 三嘉, 宜寧6, 陕川6, 河東7, 南海8곳이 새로 축조되어 89년에 곳에서 9년은 8곳으로 洑數가 증가하였다. 수는 적지만 堤堰미발 달지대인 낙동강 서쪽지역에 洑발달이 확연하였다. 각 지역 공히 생산력확보를 위하 여 자연을 극복해 나가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표 慶尚道 年度別 洑의 신축 폐기 구분 767 8 8 895 895 9 폐 신 폐 신 폐 신 永川 8 7 9 9 河陽 迎曰 淸河 晋州 6 大邱 구분 767 8 8 895 895 9 폐 신 폐 신 폐 신 順興 安義 8 固城 6 5 咸安 彥陽 5 이러한 洑는 堤堰과 비교하여 관개능력에서 어떠한 양상을 보여줄까? 표 5 와 표 를 통하여 경남지역에서의 堤堰과 洑를 비교하여 양자가 이 지역의 수리에 각각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확인해 보자. 표 慶尚南道 各部 防川 蒙利畓(단위 : 落) 地 晋 熊 靈 昌 彥 宜 蔚 昌 河 咸 名 州 川 山 原 陽 寧 山 寧 東 安 陕 川 草 溪 數 8 8 8 () 탈 7 6 蒙 利 5,8,7, 6,6 8, 6,578 5,58,76,7,756,8 탈, 6,8 6,6,,5,,77,7 得 冒 耕 實,57,7,8 8,8,8,578,9,6,,79 795 % 79.. 99..7 75.6.6 8.9 7. 9..9 9..6

- 5 - 漆 原 固 城 東 萊 金 海 昆 陽 密 陽 三 嘉 安 義 洒 川 보 합 제언합 9 5 8 5 6 5 9 5,76,5 7, 5,5 9,69,86,87,57, 7 7,56 58,85 5,69 6, 8,7,,78 6,5,,6 57, 6,,67 6, 8,7,5 5,9,6,7 6,7 6,67 5,85 6 77,8 8 6 8. 5. 5. 9.5 5. 8.5 5. 59. 66.5 67% 55% 참고 : 咸陽 鎭海 機張 居昌 山淸 丹城 巨濟 南海는 제외함. ( ) 는 得. 첫째, 한곳당 평균몽리면적은 堤堰은 59두락인데 반하여 川防은 9두락으로 천 방이 더 넓다. 둘째, 전체 곳수와 몽리면적은 川防이 훨씬 많다. 셋째, 몽리안 정도도 川防이 높다. 넷째, 咸陽이나 安義같은 예외도 있지만 堤堰이 많은 곳에 川防도 많고, 또 산지보다 평야지대, 즉 강연안지대에 灌漑시설이 발달하고 있다. 영남지역 전체를 볼 때도 堤堰이 많은 지역에 洑도 많이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경남지역은 洑灌漑가 우위를 점하는 현상을 보여 주었다. 湖南지방의 洑數는 표 에서 볼 때 嶺南지역에 비하여 훨씬 적다. 이는 지리적 조건의 차 이로 말미암아 洑의 구조와 규모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지 호남지역이 洑가 발달하 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표 5 9)은 9년대 전북의 全益水利組合 창립시 활용한 기존의 洑시설이다. 여기서 보듯이 洑의 시설은 상당한 규모이다. 표 5 全州, 益山지역소재 犢走項洑 실태 (99년 월) 소재지 春浦面 長淵前後 文宗前 佛堂前後 柴田前 德實前後 沙川後 洑 종목 泉 防築 면적 大水道 비고 9) 全益水利組合重要書類綴 土地賣買契約書, 이 犢走項洑는 원래 閔泳翊의 소유였는데 99년 월 日人 大地主들이 全益水利組合을 설립하기 위하여,원에 사들인 것이다.

- 5 - 板門前後 新湖後 回化後 東一面 大長後 新坪前後 潤里後 半月後 新月後 九潭後 昌德面 上新里後 源泉 松井里前 源泉 柳里後 高分所 瓦里前 陽支湺 三禮前 改湺 奸西面 海田前 防築 湺 后上前 湺 后丁前 於田前 防築 합 계 5 洑 곳, 防築 곳, 泉 곳을 포함한 대규모의 洑시설로 이곳의 관계면적은,두락에 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몽리지역에 관개하고 남은 물을 임익수리 조합에 대줄 정도였다. 이러한 洑는 인근 익옥수리조합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삼례면 에 곳, 오산면에 곳, 봉동면에 곳 등 5곳의 재래의 旣存洑를 大雅里저수지를 水源으로 하는 益沃水利組合 설립시 이용하고 있었다.9) 이러한 예로 보아 전북지역 의 洑는 보의 숫자는 적지만 하나의 大洑에 여러개 혹은 수십개의 洑가 하나의 조합 으로 구성된 複合洑로 발달한 것으로 파악 된다. 忠淸道도 자료 부족으로 단정할 수 는 없지만, 주 77)의 懷仁의 경우와 표 6 과 주 9)의 鎭岑의 洑실태를 통하여 洑 의 발달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9) 이와 같이 朝鮮後期 삼남지역에서 洑의 발달이 확인되며, 이 발달은 단순한 숫자 9) 全北農地改良組合, 全北農地改良組合7年史 (978) pp.. 9) 9세기 鎭岑의 洑실태 營報洑名 蒙利面積 營 報 外 小 名 洑 上 洑 石落 中洑 上洑 大洑 東面 胎峯洑 5. 下面 高岩洑 8. 蓮池洑 大洑 水面洑 中山洑 元亭洑 德洞洑 小洑 西面 豆磨洑.5 鳳凰洑 松亭洑 小洑 자료 : 邑誌 (충청도) 鎭岑縣邑誌, p. 5 의 川防秩.

- 5 - 상의 증가만이 아니라 기능면에서도 제언에 비하여 우위에 있다고 짐작된다. 바로 이 발달이 朝鮮後期 生産力과 地主制 발달의 기초로 작용한 것이다. Ⅲ. 水利시설의 소유와 경영. 水利시설의 소유와 수죽 조선후기 수리시설은 소유에 따라 國有 흑은 共有, 個人소유로 나눌 수 있다. 국 가기관 이나 궁방은 수리시설을 축조하거나 折受 등의 방법으로 많은 수리시설을 소 유했다.95) 개인지주들도 생산력 증대와 소유지확대를 목표로 수리시설 축조에 적극 나섰다. 또한 수리시설은 私的 所有가 인정되고 토지같이 매매나 상속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축조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었다.96) 수리시설의 설립주체를 보면, 堰堤은 국가나 향촌공동체가 대부분 축조한데 반하 여 洑는 국가권력이 주체가 되어 대규모 시설을 하기도 했지만.97) 조선후기 지주제 95) 국가소유 수리시설의 예 도명 군 수리시설 소속관청 출 전 江華 船頭浦 屯田 備 58책, 숙종 년 월 9일 (5책 p. 7) 全羅 益山 板門筒 賑恤廳 萬機要覽 財用編 賑恤廳事例 金堤 碧滑堤 國有 太宗實錄 권6, 태종 8년 9월 (책 p. 5) 忠淸 沔川 合德堤 宮家 孝宗實錄 권9, 효종 년 월 (5책 p. 58) 黃海 延安 南大池 宮家 孝宗實錄 권9, 효종 년 월 (5책 p. 58) 蒜山 大也筒 訓鍊都監 備 57책 숙종 년 월 일 (5책 p. 76) 慶尙 密陽 淸溪院坪 成均館 備 6책 영 조 9년 8월 9일 (책 p. 7) 慶尙 永川 淸實洞 築筒 延齡君 備 59책 숙종 년 월 일 (5책 pp. 88 889) 漆原 苧浦坪 築筒 金淑媛房 平安 龍岡 赤筒 明善公主 博川 浮筒 張氏宮 定州 其蔣筒 金淑儀房 定州 松池筒 淑嬪房 定州 看花筒等筒 巡營 郭山 牛筒等 5筒 管餉 永柔 德池洞 管餉 備 65책 숙종 9년 월 일(6책 p. 58) 肅川 保民筒 訓鍊都監 備 65책, 정조 6년 월 5일(6책 p. 6) * 備 는 備邊司謄錄. 96) 수리시설의 매매의 예는 朝鮮總督府, 앞의 글 참조. 그 중 평양의 柳哥浦洑는 86년경 權座 首가 축조하고 나서 9년까지 5여 년동안 所有主가 5번이나 바뀌었다. 매우 빈번한 매매 상을 보여 주었다. 97) 產章閣도서 중 各道 生土文績에 궁방수축의 洑문서가 상당수 있는데, 金容變, 司宮庄土외

- 5 - 와 상품화폐유통 경제의 발달에 따라 등장한 계층들이 설립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 다. 宮房이나 兩班 土豪 등 권세가들이 주류였으나, 신분과 관계없이 富를 축적한 京 鄕의 재력가들, 상인이나 역관들이 재력을 바탕으로 상당수 참여하였다.98) 8세기이 래 조선농촌사회는 이같이 다양한 계층들, 그 중에서도 富商들이나 庶民地主 흑은 經營地主, 富農들이99) 수리사업에 참여하였으며, 농민들도 契를 조직하여 자치적으로 수리시설을 축조 관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였는가? 7세기 이전에는 대체로 국가의 부역동원체제를 이용하였다.) 堤堰事目 단계도 이 방식이 이용되었다. 堤堰事 目 제5조에 築洑할 때 堤堰司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은 뒤 규모에 따라 소요노동력 을 계산하여 本土田夫 本邑烟軍 隣邑烟軍 등을 定數를 調發하도록 했으며 승군 승인 들도 도첩자에게는 입역일을 제하여 주고 無도첩자에게는 도첩을 주어 동원하도록 하였다. 8세기후반의 堤堰節目 제6조에서도 軍丁 校 院 驛 牧 屬 등을 戶籍에 따라 부여하도록 했으며, 吏鄕들도 水利役을 부담했다. 이러한 赴役 동원체제는 국가가 수 리사업을 주관하고 농민의 身役부담의무를 법체계안에 규정하는 한, 계속 존속하였 다. 부역동원은 국가의 역에만 동원하도록 규정하였으나 궁방이나 권세가 등 특권권 력층은 수령에 압력을 가하거나 결탁하여 농민들은 동원시킴으로써 농민들은 수리役 을 커다란 부담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상품화폐유통경제의 발달과 농촌사회의 분화에 따라 無田無佃 농 민층이 증가하게 되자 국가의 부역등원체계에 일정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雇軍 募 軍의 형태가 도입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농민들은 자신에 부과된 수 리역을 타인에게 代價를 지급하고 代役시키거나, 役所에 정해진 역가를 지급하는 防 雇 등을 통하여 수리역 부담을 해결하기도 했다. 국가도 수리부역동원 체제 아래 발 생하는 제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여러 조치를 강구하였다. 첫째, 烟軍調發의 금 지와 규제이며,) 둘째, 給價雇軍방식의 채용이었다.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중앙의 佃戶經營과 그 成長 ( 朝鮮後期農業史研究, 97)에 몇 예가 예시되어 있다. 98) 宋讚變, 7 8세기 新田開墾의 확대와 經營形態 ( 한국사론, 985) 참조. 99) 經營地主에 대하여는 金容燮, 朝鮮後期 양반층의 농업생산 자작경영의 사례를 중심으로 ( 朝鮮後期農業史硏究 (增補版, 99). 그리고 서민지주에 대하여는 허종호, 조선봉건달기의 벙작제연구 (965)를 각각 참조. ) (堤堰)契成册 (규장각도서)와 朝鮮總督府, 앞의 책 -6의 沃溝府 米面米堤堤堰册 참조. ) 이에 대하여는 田川孝三, 李朝貢納制의 硏究 (96)가 참고됨. 6,7세기 이전 대부분의 수 리역은 부역동원에 의거하였다. 예컨대 江華島 船頭浦新堰節目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備邊同謄錄 58책, 숙종 년 월 9일, 5책 pp. 7 7) ) 정약용, 牧民心書 戶典 平賦 조. ) 이 시기 국가의 부역체계 변동에 대하여는 尹用出, 7,8세기 徭役制의 변동과 募立制 (서울대박사학위논문, 99) 을 참고. ) 大典通編 戶典 田宅조, 諸宮房各衙門 稱以築堰修筒 請調發烟軍者 一切嚴防犯者重勘 ( 大典會通 p. 7).

- 5 - 재정적 지원, 大同米 大同木 등의 이용, 空名帖 판매 등 각종 조처를 통해 마련하였 다.5) 각급관청6)은 물론 궁방에서도 이 방식을 점차 확대 채용해 나갔다.7) 당시 궁방에서는 수리역의 대부분을 雇價지 급방식으로 처리 하였다. 수리시설 관리책임 자인 導掌들도 雇軍을 동원하여 수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부역민들을 동원할 힘이 없는 일반민은 대가를 지불하고 노동력을 동원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級價형 태는 일반적으로 화폐를 지급했는데, 때로는 수세를 감면해주거나 수리시설축조로 개간된 토지를 분급하여 주기도 했다. 수리시설을 신축하는 데는 여러 절차가 필요하였다. 거존 토지에 대한 所有權 변 동을 가져오지 않으면서 共有 혹은 國有로 수리시설을 수축할 때는 비교적 절차가 간단하였다. 그러나 私有水利施設을 축조할 때는 이와 차이가 있었다. 無主地開墾을 위하여 수리시설을 수축할 때, 또는 기존 경작지위에 수리시설을 수축할 때 등은 소 정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立案이나 折受라는 과정을 필요로 했다. 이것은 無主陳荒地나 山林 川澤 海岸 水利施設 등 共有地를 분할 소유하기 위한 법적 절차였다.8) 각 宮房과 各 官廳 그리고 權門勢家들은 이 과정을 통하여 無主地에 대 한 일정한 권리를 획득하고 토지를 개간 하고 수리시설을 축조한 것이다. 물론 농민 들도 지방관청이 발급하는 立案을 통하여 이 과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이 조치 는 농민들의 토지 소유의 확대과정으로 기능하기보다 지주들의 토지확대과정 으로 나타났으며, 수리 시설은 이를 촉진하는 중간매개고리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立案 者 (혹은 折受者)와 개간주체인 농민들사이에 耕作權, 所有権, 水利權을 둘러싼 분쟁 도 빈발하였다. 한편 후자의 경우도 소정의 절차가 필요했다. 이것은 共有인 물을 私的 支配關係 로 전환 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수리시설과 이해관계를 가진 향촌민들의 동의를 필 요로 하였다. 그들은 水利施設 이 용자이며 費用負擔 의무자가 될 몽리지역내의 지 주들이 주대상이었으나 때 로는 경작인의 동의도 필요하였다. 그 이유는 기존경작지 가 수리시설에 포함됨으로써 경작지를 상실하거나, 수리시설 수축자가 자본투자의 대가로 관계 지주로부터 토지를 할양받음으로써 소유권변동이 일어나 경작관계가 바 뀌는 경우도 있지만, 作人 水税부담의 경우, 작인이 동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5) 이 시기 水利役체계에 대하여는 송찬섭의 앞의 논문 참조. 6) 시기가 늦기는 하지만, 西耤田早坪川川防築潰決處新築及補垌下記册 (895년) 開城府에서 西耤田早坪川川防築潰決處를 신축하면서 인력을 동원하고 비용,96兩 5錢 分을 지불 한 내역인데, 雇軍과 赴役軍을 동시에 역에 종사시키고 전자에는 雇價를 후자에는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한 편 別赴役軍에게는 水税를 영구히 革罷하기도 했다. 7) 甲寅(85) 月 日 安邊洑所所入記 咸鏡南道 安邊郡 培養社庄土 景祐宮提出圖書文績 類 에 보시설 수축시의 雇軍동원내용이 적혀있다. 표 참조. 8) 이 시기 공유지 분할에 대하여는 박준성, 7,8세기 宮房田의 확대와 소유형태의 변화 ( 韓國史論, 98)와 남원우, 6세기 산림천택 의 折受에 대한 硏究 (연세대 석사 학위논문, 988) 가 참고된다.

- 55 - 관련 당사자 이외에 몽리지역내 향촌질서유지 책임을 맡은 鄕任들, 各里의 面任 執 綱이나 面의 都執綱 등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9) 이렇게 수리시설의 수축은 당시 사회의 사적 소유제를 배경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수리 시설소유자는 水税수입 뿐 아니라 이를 매개로 지주지를 확대하여 재정이나 자 본을 축적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들은 수리 시설을 설치함으로써 無主陳荒地를 개 간하여 지주지로 편입시키는 한편, 몽리자들로부터 水税조로 몽리자들의 소유지를 지급받기도 하였다.) 토지의 분할비율은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리시설 설 치는 지주제 발전의 불가결한 일환으로 자리하였다.) 지주들은 획득한 토지를 경작 민에 대여하여 지대를 징수하는 한편, 이들을 동원하여 수리시설을 수축하기도 하였 다. 때로는 수리시설에 대한 보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수세를 징수하거나 개축할 때 새로운 비용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수리시설 축조자들은 資本과 官権, 法的규정 등을 통하여 수리시설을 수축하고 지주지를 확대 강화해 간 것이다.) 堤堪과 洑에서의 冒耕도 地主地의 확대에 기능하였다. 宮房이나 權門勢家들이 堤 堰을 폐제 언화시키거나 폐제언을 折受하여 작답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堤堰의 폐허화현상은 인위적인 冒耕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자 연조건의 변화에의한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형성된 廢堤堰은 수리시설로서 기능은 할 수 없더라도 堤堰敷地는 비옥한 토지로 農事조건이 좋은 토지였다. 국가에서는 명목상 堤堰으로 남기기 보다 民田化하여 세를 징수하는 편이 유리하였다. 冒耕禁止 9) 조선총독부, 앞의 책 -7, pp. 에 인용된 完文(5년 월 6일 작성)은 제언을 건설하 면서 작인 명이 회의를 거쳐 매년 斗落當 斗식 지불할 것을 약속한 예이다. 여기에 堤 堰主와 洞長과 尊位가 서명하고 있다. 다음 주 )의 예는 토지를 할급할때 작인의 동의 를 얻는 경우이다. ) 다음은 洑를 건설하면서 토지를 할급받는 예이다. 咸豊 9년 (859) 正月 7日 洑主 徐益山宅奴元石前明文 右文爲事役 今此矣宅開洑於本郡東面龍洑坪而開畓 5石 7斗落是遺 本田主則 例 斗落 斗落式割給之意 成文記納上爲去乎 日後諸作人中若有是非之端是去等持此文吿官憑考事 洑主 徐益山宅奴 元石. 洞長 朱錫楊 田主 各作人 名 執綱 朴 道 元 尊位 金 淸 ー 所任 鄭 學 吉 조선총독부, 앞의 책 -9, pp.. 또 앞의 책 -7, pp. 6 7 忠淸道 泰安縣 玫文東 面柴 谷築堰文(5) 은 作人들이 돈을 각출하여 토지를 구입 수리시설을 축조하는 예였 다. ) 개간지에 대하여는 大典 에 정한바 있지만, 水輪院章程 規則 제-8조에 수리시설과 관련하여 개간지에 대한 처리문제를 구체적으로 확정하였다. ) 宮房이나 권세가들은 官과 결탁하여 民을 동원하여 築洑하면서도 토지를 빼앗거나 私稅를 징수하는 폐단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經世遺表 권8, 地官修制 井田. ) 農課規則, 下洑之人 怙勢作鬧 或新墾之民 乘機盡奪 則各施重勘可也.

- 56 - 명령은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 내려졌지만 이 조치가 지주제의 확대를 저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주들은 법전에 정한 바 개간규정을 이용하여 지주지를 확대해 가는 한편, 수리제 발전에서도 지주가 점차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여 갔다.). 水利시설의 관리 수리시설의 관리기구는 수리시설이 만들어진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국공유 수리시설은 堤堰이나 洑를 막론하고 堤堰司가 관할하였으며, 각 지방수령이 관리책임을 맡았다. 수령은 鄕吏나 面任을 勸農官으로 임명, 책임을 맡겨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각 수리 시설에는 전담하는 監官과 監考를 두고 일을 처리하였다.5) 監官 은 鄕廳에서, 監考는 作者중 에서 勤幹者를 향중논의를 거쳐 차출하였다. 감관은 향촌 사회에 영향력있는 지주등이 선발 되었으며, 심부름을 담당하는 監考는 작인 중에서 선발하였다.6) 이들 양자는 地主와 佃戶 관계를 배려하여 선발했다. 수리 시설의 관 리에서도 地主佃戶制的 질서가 반영되도록 함으로써 수리시설의 수축에서의 부역동원 이나 제 부담관계, 나아가 농업경영에 차질이 없도록 한 것이다.7) 이들의 임무는 물 의 분배시기와 분배방법의 결정, 수축 등 이었으며, 시설유지를 위한 수세를 징수하는 등 수전농업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리시설 관리자 는 물의 이용혜택이나 수세징수를 통하여 재부를 축적하여 토지소유를 확대시켜 나가 는 방편으로 삼기도 했다.8) 官주도아래 설립된 수리시설은 지방수령에 대한 중앙정 부의 감사대상이어서 관권의 직접적 예속아래 운영되었으나 실제 운영은 향촌사회의 자치운영에 맡겨졌으며, 지주가 점차 주도권을 행사하여 간 것으로 보인다.9) 宮房소유의 경우, 각 宮房은 官監(=京監, 宮差) 등의 관리인을 파견하여 수리시설을 ) 冒耕에 관한 처분은 水利에 關한 舊慣 -에 예시된 것에서 보듯 그 처리는 경우에 따 라 달랐다. 특히 續大典 戶典 田宅조에, 凡閒曠處 以起耕者爲之 (p. 6)에 따라 廢堤가 처리되어 사유지로 되기도 하였다. 5) 居官大要 와 牧民大方 ( 朝鮮民政資料, 9 수록)에 수령의 관리요령이 설명되어 있다. 京畿道의 경우 각 제언은 감관과 감고를 두어 이를 관리하였다( 京畿各邑堤堰都結 成册 ) 洑도 각 洑마다 洑監官과 監考를 인씩 差出하여 관리토록 하였다. 邑誌京畿道 振威 p. 57에 各面 防洑每年春 監官監考 洑主差定 領率蒙利田夫及時修築 한다고 하였다. 靈巖郡 所志謄書册 道光 9년 월 昆ー 龍反 張曰卜等 狀 참조. 6) 堤堰節目 과 商山邑例 (규장각도서) 戶房色 및 朝鮮總督府, 앞의 책 沃溝府 米面米堤堤 堰契成册 참조. 光陽縣各所事例册 (85), 戶房 各面各坪洑主 以有實勤農作者中 擇定差出. 7) 久間健一, 合德百姓ー揆의 硏究 ( 朝鮮農業의 近代的 樣相, 95)에 소개된 兩班 李廷 挂의 예 참조. 8) 조선총독부, 水利에 關한 舊慣 -6, 제 5 장 감독과 관리 참조. 9) 수리시설이 피폐화 어 失農을 할 때 地主의 타격은 심대하여 지주는 수리시설 설치와 관리 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공유인 경우도 관리의 주체는 대체로 지주였다. 지주가 토지 등 자 금을 담당하고 작인 부역을 부담한 것이다( 沃溝府米面米堤堤堰册 節目).

- 57 - 축조 관리하거나 수세를 징수했다. 관리는 수령권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導掌을 선정 하여 관리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도장관리방식은 수리시설의 시설투자나 수세 징수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수리시설을 축조하거나 보수할 때 궁방이 자금이 부족할 경우 투자자들에게 水税징수에 대한 일정한 권리(導掌權)를 주 고 투자를 유도하는 방식, 한 개인이 몽리지역 을 대표하여 각궁에 정해진 租石을 납 부하고 몽리자로부터 수세를 징수하는 방식 등이 있다.) 이들 도장은 投資의 대가 로서 水税徵收權을 宮房으로부터 허가받은 것이다. 導掌權은 매매와 상속이 가능한 일종의 物權的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이들은 蒙利民으로부터 水税를 징수할 책임 과 동시에 시설을 補修할 의무가 있었다. 특히 수리시설을 설치하여 募民開墾한 곳에 는 導掌이 더욱 필요하였다. 이 지역은 수리시설의 築造, 보수관리, 作畓起耕하는 과 정에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을 뿐 아니라 募民들은 경제적 능력도 거의 없어 관리가 더욱 어려웠기 때문이다. 개간주체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와 수리시설의 보수관리에 일 정한 부담을 강요하였다. 이 부담은 대단히 컸기 때문에 반대급부로 토지에 대한 일 정한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地代를 낮게 하거나 농사비용을 제공한다든지 조세 부담의 감면조처 개간수축자가 궁방이나 관청 또는 권문세가일 경우 등이 그것이 다. 이들은 대부분 不在地主로 導掌을 두고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導掌은 단순한 관 리인이 아니라 투자자로서 수익에 대한 일정한 권리를 가진 자였다. 이들이 궁방에 납부하는 세액은 대부분 定額이었기 때문에 징수액이 많으면 수익도 늘어나는 만큼 이들은 수세를 남징하는 장우가 많았다. 이리하여 宮房 導掌 耕作者라는 자관계 가 所有權 收益權 使用權을 둘러싸고 대립 갈등할 여지가 내재하고 있었다.) 導掌은 현지에 관리인을 두고 시설을 관리하고 수세를 징수했다. 현지 管理人은 洑 시설을 총괄하는 都監官이 있으며 직속 예하에 書記나 使令 등을 두고 행정적 실무를 담당하도록 했으며, 그 아래 지역별로 監官이 배치되어 해당 洑를 관리하였다. 監官밑 에는 監考 및 洑시설을 관리하는 水橋直 水門直 등이 배치되었다. 監官은 축보를 감 시하고 수세를 징수 하여 洑主나 導掌에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수리시설소유자가 토 지를 동시에 소유한 경우에는 作人이나 舍音이 수리시설을 관리하기도 했다. 導掌이 없는 경우에는 행정기구를 이용했는데, 총책임은 地方官이 담당하였다.) 9년대 ) 이 밖에 洑소유권자가 자기 개인의 힘으로는 租石을 徵收하기가 곤란하여 궁방에 일정한 租石을 납부하고 各宮의 名義를 假用하는 경우 등 유형으로 구별된다. 이른바 투탁도장이 다( 水利組 合設立에 關한 件 付洑税 참조). ) 導掌에 대하여는 金容燮, 司宮庄土의 管理一導掌制를 중심으로 ( 朝鮮後期農業史硏究, 97) 참조. 安邊 培養社 景祐宮洑(85)의 도장가는,兩이었으며 그 뒤 다른 사람 에 계속 매매되었다( 咸鏡南道 安邊郡 培養社景祐宮 提出圖書文績類 안의 明文). ) 淑善翁主房의 官船坪 개간답의 收税는 法典例에 따라 분의 을 년간, 5분의 을 년간, 6 년 이후에는 民이 원하는 바에 따라 분급하도록 하였다( 官船坪節目, 8). ) 金容燮의 朝鮮後期農業史硏究 수록의 앞의 논문과 宋讚燮의 앞의 논문 및 愼鋪廈 이 조말기의 도지권과 일제하의 영소작의 관계 ( 경제논집 -, 967) 을 참조.

- 58 - 英親王宮에서 건설한 淸州鳳林坪洑가 그러한 경우인데 관리 조직은 다음 표와 같다. 표 6 淸州郡 北江內一面 鳳林坪 新洑 管理人과 賃金 구 분 上有司 명*석 花升上狀 명*석 花升洞 立北 立上 立東 外下 外坪 外南 儉谷 梧東 梧南 風停 梧竹 金川 梧升 沙飛龍 합 명*5석 水門直 監 官 水門直 洑所任 監 考 洞 長 兼監官 所 任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석 명*7석 9명*석 5명*석 명*석 명*석 명*석 監官은 일반적으로 임명제였으나 농민들의 저항이 심한 곳에서는 농민들이 會議하 여 선정 보고하도록 했으며, 때에 따라 궁방과 관청은 간섭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기 도 했다.5) 管理人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洑의 관리수축과 수세의 징수와 상납이었다. 監官은 수리시설을 매년 수축할 의무가 있었다. 修築費는 洑税수입가운데 일정액을 할당하였는데 농업경영의 기후적 특성상 대체로 先修築 後請求방식이었다. 궁방에서 직접 현지에나가 조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6) 監官들은 이를 이용하여 水税징수 와는 별도로 자기 부담의 수축비용이나 부역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관 리인은 수리시설의 수축과 수세징수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였다. 관리인의 보수는 鳳林坪洑의 경우 수세액의 5.7%이고, 景祐宮洑의 경우는 %를 차지하였다. 관청관리 방식이든 도장관리 방식이든 관계없이 시설형성과정이나 업무 의 성격, 일의 輕重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7) 한말재정정리시에는 監官이나 舍音料 ) 淸州郡 北江面 內一面 鳳林坪新洑水税成册. 5) 節目 庚子(9) 월»(安邊 德源所在 景祐宮洑畓水稅節目). 6) 洑说에 關한 書類綴 (99) 隆熙 년 월 洑垌修築備에 關한 件. 7) 清州郡 鳳林坪洑 (수령관리) 景祐宮洑 洑稅用途(도장관리) 내 역 石數(석 두) % 납부처 금액 % 各洑畓 合捧梯 9- 景祐宮 6兩 8 都監官 - 釋王寺 位祝費 兩

- 59 - 를 / 5/으로 정리했으며,8)導掌이 존재한 洑와 導掌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하였다. 도장들은 투자에 대한 대가, 수세징수에 대한 대가로 정해진 바 역가를 지급 받도록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궁방과 계약을 맺고 궁방과 합의한 상납분만을 납부하 면 의무가 끝났다. 현지에서의 이들의 권한은 상당히 강력하였다. 이들은 관권의 지 원을 받아 水税를 징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부역동원도 거리낌없이 하였다.9) 또 한 수리시설과 토지를 동시에 소유할 경우는 토지관리인인 舍音料가 별도로 책정되 었다. 이것도 현지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公州堤堰 洑畓에서는 일률적으로 소작료 의 /을 舍音料로 책정하였다.) 표 7 各宮 所有洑와 租石 宮號 소재지와 명칭 英親王宮 平山 大川里 鐵原 葛末面 海州 東面 秋伊坪 海州 御史川 海州 花陽坪 高城 北面 淸州 沙飛龍 交河 葛視坪 襄陽 島 坪 內 需 司 永柔 元唐筒 善 禮 宮 高陽 沙里 明 禮 宮 密陽 國農沿狀 交河 (金城里, 金繩里, 傑萬里) 坡州 (竹院里, 絞岩) 於 義 宮 信州 魚尺坪 安岳 順風屯 上坪 面積 田畓 石 水税田畓 8石 租額 石 6石 5石 6, 石 6 石,8 石 7,5 5 石 9 石 6 6 石 9 9 원 6 石 9,5 정액 원 정액 원 9石 石5,8 감관과 사옴 丁世焕 金鍾錫 羅東陽 崔來黨 林錫禹 朴 淵 李鶴九 朴勝洙 金重協 金聖之 金舜基 朴翼來 金相麟 金載憲 舍音 - 納 兩 花升梬竹 留糧 - 監官 人 料下 5兩 監官食債未報除給 5-7 石築修補費 兩 8 인건비 6- 합 75兩 實上納 -7 75 출전 : 앞의 주와 節目 (安邊)德源所在 景祐宮 狀密水稅節目. 8) 監官 또는 舍音의 下料는 租石을 石 이상, 石 이상, 5 이상으로 나누어 각각 /, /, 5/의 비율로 지급되었다고 하였다 洑稅에 關한 書類綴 ). 9) 大典通編 에서 宮房衙門이 烟軍을 調發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규정한 것은 이의 빈발한 성행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 大典會通 p. 7) 또한 앞의 景祐宮庄土文績이나 景祐宮 洑税節目 을 보면, 官廳에서 傳令을 발하여 水税납부를 독려하는 한편, 문제 발생시에는 官이 뒷처리를 담당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 公州郡所在各堤堰洑屯畓章程 (광무,년).

- 6 - 景祐宮 龍洞宮 毓祥宮 安岩 順風屯 下坪 載寧 海倉 安邊 培養社 德源 龍五里 延安 鏞川面 海州 花陽五里 扶安 月岩里 陽城 石灘洑 順安 岩門 石,5 石 7원 6원 5원 원 원 자료 : 洑税 (총무처). 申賢求 裵泰和 作導掌主 釋王寺 수리시설을 둘러싼 이러한 제권리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더불어 커다란 변동을 초래하였다. 일제는 사적 개인소유이외의 모든 수리시설에 대한 국유화조치를 취한 뒤 일인 지주위주의 수탈적 수리정책을 추진하였다. 여기서 중간관리인이 배제되고 면장이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한편, 나아가 수리시설에서 성장하여 오던 농민 들의 諸權利도 박탈하였다.). 水税징수 체계 수리시설은 토지의 부속시설이라 할 수 있으나, 권리행사는 토지소유관계와 달리 수리시설의 소유관계에 따라 地代와는 별도로 수세로 반영되었다. 수리시설 소유자는 수세징수권을 갖고 몽리자들로부터 사용수익료를 징수하였다. 수세징수는 농촌관행이 었으며, 국가에서도 인정한 바이기도 했다.) 대부분 수리시설에서는 국유이든 사유 이든 소유관계에 관계없이 시설을 유지 관리하기 위하여 수세를 징수하였다. 수리 시 설은 토지소유자가 직접 설치하기도 했지만, 수세징수만을 목적으로 설치하는 곳도 상당하였다. 개인뿐 아니라 宮房 혹은 각급관청도 수세징수를 목적으로 수리시설을 설치하였다. 賑恤廳같은 곳은 수세수입이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였으며, 宮 房이나 대지주도 농업경영수입 중 수세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다.) ) 洑는 宮에서 度支部로 이관되고 監官은 철폐하는 형식을 밟게 된다. 토지와 더불어 소유한 경우는 東拓으로 이관되었다. 龍洞宮이 소유한 扶安의 月岩堤같은 경우이다( 水利에 關한 舊慣 -5, p. 7과 全羅北道 扶安郡 所在 庄土龍洞宮提出圖書文績類 참조). ) 備邊司謄錄 7책, 숙종 5년 8월 일 (7책 p. 7), 提調 閔鎭遠所啓 臣竊見外方 多有 廢堤盖祖宗朝 最重水利 坊坊曲曲 多築堤堰 以爲農民蒙利之地矣 今此量田時 各其廢堰 一 一他量 且察其修築當否成册移送於本廳後 修築而可以蒙利處 則自本廳分付該道諸邑 調發民 丁 使之修築 以爲蒙利之地 而蒙利民田 量捧若干水稅 其中凐塞已久 水道變遷 雖或修築 終 不可蒙利處 則許民耕墾 仍收其稅. ) 표 8 에서 英親王宮의 수세징수는 海州지역만 하더라도 9년,6여 석이 된다. 영 친왕궁의 수입은 각종 경비를 제외하더라도 상당한 액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각 궁방은 이

- 6 - 收税額은 수리시설수축비용, 수리시설의 효용성, 이용정도에 따라 각각 차이가 났 다. 수세액의 시기적 추세는 잘 알 수 없으나 한말의 수세실태를 중심으로 한 단면 을 살펴보기로 하자. 표 8 英親王宮 各地의 水稅微收狀況 세 지역 洑 名 연도 수 두락당 平 山 大 坪 洑 9 두 95 두 海 州 秋伊坊洑 9 두 海 州 花陽坊洑 9 두 海 州 御史橋洑 9 두 花陽洑 平 山 大 坪 洑 9 두 海 州 御 史 川 9 두 9 95 수세합 석 두 승 5-7-9 면 적 --6 --5 59--7 비 고 畓主當納作人勿論 9,5년 6,57석 除 8석 除 9-9- 5-9-6 586-8- 9-- 98-- --7 --6 -- 자료 :각 지역 소재 水稅成册(奎章閣). 표 8 에서 두락당 수세액은 9년경 대체로 斗落當 斗가 보통이었다. 英親 王宮만이 아니라 황해도 함경도에 소재한 궁방소유 수리시설도 대체로 이 수준이었 다.) 그러나 수세율이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 도 몽리의 효과 등에 따라 달랐다. 安邊 景祐宮洑는 5升, 斗5升, 斗 등 종류로 차 등 적용되었으며 ( 표 ), 淸州郡 鳳林坪의 水税징수원칙도 답의 등급에 따라 차 등을 두었다 ( 표 9 ). 토지의 비옥도가 낮은 소유지의 경우 打租의 일반적인 원 칙에 따라 절반으로 계산하면 斗落當.5 斗 정도의 수확이 고, 分打租로 하면 5. 두의 수확으로 생 산량이 매 우 낮았다. 그런데 水税는 舊洑는.과이고 新洑는.7斗로, 水税도 상대적으로 낮으나 수확량에 비하면 높은 편이다. 대체로 수세는 斗 落당 斗에서 斗가 일반적이었다. 러한 수리시설을 소유하였으며, 여기서 나오는 水税는 궁방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 黃州地域 內藏院의 水稅徵收實態 수세 수세합 지 명 연도 두락당 면적 비고 자료 석 두 승 龍水坪 899 두 - -,두락 석=5두 규 9658 朴山坪 899 두 77-6- 778두락 규 9659 備邊司謄錄 책, 숙종 년 6월 일 江華島 船頭浦 節目 두세 上畓 조두, 中畓 조 두, 下畓 조두로 되어 있다.

- 6 - 표 9 忠北 清州 北江內 面 沙飛龍 新洑 水稅징수 실태 (英親王宮) 지역(A) 종별 소유지 鳳 林 坪 鳳林坪舊洑 수 세 지 지목 전 답 답 지 역(B) 지 상 중 하 鳳林坪新洑 종 별 목 답 답 수세지 답 합 溝 면세지 탈 수세면적 이 상 합 합 두락 9 9. 55.8 두 락 6. 8. 9. 8.6 9 7. 56. 7986. 合棒(두) 두락당 77.88 6..7 55.8. 상 납 내 역 액 수 비 율(%) 전제 합봉 586두 留糧, 食債 7 5 人件費 9 지출합 7 實上納 7 76 두락당수세 전체 합봉/수세 면적=.7 표 公州郡 堤堰洑屯 田畓別 水税狀況 (內藏院) 구 분 田 畓 몽리답 下畓 9. 中 畓. 洑 上畓.5 中畓. 堤 堰 畓 7.5 堤堰 堤堰畓.65 자료 : 公州郡 所在各堤堪洑屯畓章程 (899). 수 세.... 5. 7. 수세합 9.. 6.5. 7.5.55 이같이 水税額의 차등화는 蒙利에 따른 생산량의 차이에 연유하였다. 公州郡 堤堰 洑屯의 수세징수액은 田畓別로 상당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洑는 대개 上 中 下 별로 斗, 斗, 斗이었으나 堤堰畜은 5斗 7斗로, 두에서 최 고 7斗까지의 다양한 분포를 보여준다. 면적별로 보면 下畓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수익면에서는 上畓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다. 堤堰畓은 洑의 상답보다는 수세 액이 배가 넘었다.5) 수리시설의 기능이 확대되거나 저하되었을 때는 이에 상응하여 5) 이는 堤堰畓의 생산성이 洑보다 상당히 우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6 - 수세액도 변동되었다.6) 水稅는 토지소유자와의 계약에 따라 징수방식이 결정되었다. 그 방식은 토지의 일 부를 할양하거나, 자금의 상환과 관련하여 처음에는 부담액을 많게 하였다가 차차 그 액을 감소시키는 경우, 처음부터 일정한 액을 징수하는 경우 등이 있다.7) 세번 째 방식이 일반적인 형태이며, 9세기 후반경 수세징수는 대체로 정액세였다.8) 농 업생산은 기후적 조건에 따라 흉풍의 차이가 상당히 크나 수리시설을 설치함으로써 생산량이 안정화되기 때문에 정액화의 전제조건이 마련되고, 또한 소유주가 부재지 주인 경우 관리기구를 마련하고 정액수세 화하여 수세징수상 발생하는 문제를 방지 하려는 경우도 많았다.9) 이 정액화는 수세권자의 수입의 안정화를 의미하는 것이 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수세부담자들의 권리의식의 일정한 반영이었다.) 그런데 수세징수권자와 토지소유자, 작인이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할 때 수세는 어 떠한 방식으로 실현되는가? 일반적으로 토지소유자가 세납을 책임지는것이 당연하지 만, 납부 과정자체는 작인이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수세부담의 현실적 운영은 지 대납부방식에 따라 결정되었다. 不在地主 특히 궁방의 경우 지대는 /支定으로 하 고, 모든 세납을 작인이 담당하였으며, 水税도 작인이 부담하였다.) 竝作半收인 경 우는 수세를 징수한 뒤 나머지를 반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 경우 제반부역의 부담은 보통 作人들이 졌으나 농민이 부담하기 힘든 큰 부담은 지주부담으로 하였 다. 이러한 수세징수방식은 모든 私有 수리시설에서 적용되었다. 그러나 작인이 수세 를 담당할 경우 水税權者는 水税를 징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더구나 抗 租運動 등 拒納운동이 사회적으로 만연화되면서 답주가 담당하도록 하기도 하였 다.) 6) 英親王宮 管轄 海州 花陽坊洑의 경우 수세성책에 청부된 보고서에서 洑都監은 금년에 비 로소 筒役을 했기 때문에 洑水가 미치지 않는 곳이 많아서 수세가 零星하지만 明年에는 몇배가 될지 알 수 없다. 명년 봄에 다시 踏驗執税計料할 것이다 라 기술하고 있다( 海州 郡 東面 花陽房洑坪 水稅捧上册, 9). 7) 朝鮮總督府, 앞의 책 -9 참조. 8) 水税는 수리시설소유자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달랐다. 龍洞宮의 경우 道光 년(8) 임진 월 일 黃海道 平山 下西峯面 沙坂坪所在 龍洞宮洑契節目 에 洑水税는 隨起隨稅하였다. 官船坪 道光 8년(88) 節目 에서는 每石落只 租6石式 捧上하라는 定額방식이었다. 9세 기에는 이렇게 定率이 아닌 경우도 있었으나 정액이 일반적이었다. 9) 각 궁방의 洑税는 토지의 등급을 상답, 중답, 특별상답으로 나누고 두락당 각각 두, 두, 두 5두(監官 見積)를 징수하였다( 洑税에 關한 書類綴 ). ) 물론 이 경우 중간관리자의 수익의 중대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양자간의 갈등을 불러 일으켜 끝내는 수세부담자들의 납부액의 감소로 나타난다. ) 黄海道 鳳山郡 所在 嵋山沙院舍人 三屯畓 打作定式節目, 一今此 束三分打作 一依淸衍 君主 房例 從民願爲之 一分打納宮房 二分出給作人 而水稅種子作人全當是遣. ) 朝鮮總督府, 從來의 小作慣行과 調査資料 ( 朝鮮의 小作慣行, 9) 참조. ) 英親王宮이 관할하는 平山 大坪洑의 경우 95년 수세시 密主當納作人勿論 에서 보듯 점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