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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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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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월호(최종2)

내지 뒷

S - O I L M A G A Z I N E 2016 April Vol

Transcription:

국어순화의비판적대안 김하수 1. 글을시작하며 2. 세상은언어에왜순결을요구하는가?

세계가 언어에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직 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언어를 어떻게든 바꾸거나, 고치거나, 다른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시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 세상이, 혹은 이 역사가 그들로 하여금 언어를 뜯어고칠 수밖에 없게 몰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들은 현재의 언어가 무언가에 오염되어 있고, 지저분하며, 이전 시대의 순수함 을 잃고 있다고 분개한다. 또한 그들은 어떤 개인들이기도 하고, 어떤 집단이기도 하며, 종종 국가 혹은 종교라 고 하는 거대 규모의 사회 조직이기도 하다. 언어 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지역과 시대를 꿰뚫으며 지나가는 특이한 공통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대개의 경우 민족 국가가 형성되고 현대화 과정에 들어서는 사회에서는 자신들의 오염된 언어를 정화하자는 운동이 강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때 공격의 대상이 되는 오염된 언어 는 그 이전 시기에 중세 문화를 일구어 왔던 중세기적 보편 언어 였다. 유럽에 서는 라틴어였고, 동아시아에서는 한문이었으며, 중동에서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였다. 어느 면으로 보나 전혀 오염된 언어가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문화와 지혜를 담뿍 담아냈던 언어들이다. 이러한 언어들이 새로 운 시대의 담지자들에게는 적 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염원으로 낙인찍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시기에 공격받은 오염된 언어 는 더러워진 언어 가 아니라 새 시대에 참여하기 어려운, 배제 대상의 언어였다고 보는 것 이 올바를 것이다. 민족 국가 시대에는 라틴어가 못마땅했고, 현대화를 지향하던 터키에서는 아랍어나 페르시아어가 현대화를 거부하는 반동의 언어였으며, 뒤늦게 서양을 따라잡으려 했던 동아시아에서의 한문은 급 진적 개혁론자들에게는 배제의 대상이었으나 현대화와 서구화의 구별을 도모했던 온건한 세력은 동반과 제한이라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저함과 좌고우면하던 기색을 드러내 주고 있다. 결국 언어의 순결은 하나의 이념이자 선동의 구호였고, 실제로는 누구 은 124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새 시대에 참여시키고 누구를 배제할 것이냐 하는 정치 투쟁의 무대 였다. 당연히 참여 대상은 추상적, 도덕적 관념이 아닌 구체적 실체와 세 속적 이익을 만인이 알아듣기 쉽게 말로 표현해 주며, 이를 통해 누구든 지 평등하고 공정하게 이익 분배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는 새로운 경기 규칙을 받아들이는 새 세력들이었다. 그리고 전통적 관념과 추상적 도덕론, 그리고 세속이 아닌 성스러움을 기초로 사유하던 옛 세력들은 배 를 제되었다. 새로운 소통 방식을 아주 단순 명료하게,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짧은 말로 표현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언어, 대대로 물려받은 순수한 민족의 언어 라는 구호들이다. 하나의 민족은 곧 하나의 공화국을 가지며 또한 하나의 언어를 가진 것을 이상적인 상태로 보는 이념이 프 랑스 혁명 이후 독일로 퍼져 나가 수많은 지역과 문화권에 하나의 모델 로 자리 잡았다. 다음 그림은 그러한 운동의 전개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러한 (Thomas, 1991: 200). 언어 정화 운동의 전개(유럽어의 경우) 족 국가의 성립과 현대화의 길목에서 보편적으로 부딪치는 일반적 현상이 되었다. 단지 그 운동은 대개 한 시기 에 생겨난 다. 그래서 자신들의 계승어를 공용어의 지위에 올려놓고, 규범화 혹은 표준화를 이룩한 다음에는 언어 문제에 대해, 나라마다 일정한 편차는 있 이후 언어 정화는 민 특집 국어 순화 방법론 모색 125

으나, 비교적 대범해진다. 정치적 목적을 일단 성취한 다음에는 그리 예 삼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특징은 이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결정적 시기에 결정적 승리를 얻어 내지 못하고 오랫동안 시간을 끌면서 지속적인, 혹은 단속적 인 언어 정화의 욕구가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이었다고 생각되는 이른바 개화기와 광복 직후는 결정적으로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데 실패 해 버렸다. 그 결과로 언어 정화 반대론자들에게는 다행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화 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볼 수 있게 된 것이고, 정 화론자들에게는 오히려 두고두고 계속해서 이 문제를 재론할 수 있는 장 민한 문제로 치를 가지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 체 는 언어 순화론을 구 적으로 규정하는 조건이 된다. 3. 정직한 호명을 제안하며 혹은 언어학의 문제를 논하면서 언어 사용자 집단을 언중 이라고 일컬어온 지가 퍽 오래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 사용의 주체가 누구이고 누구의 의지와 의식이 언어의 모습을 구현하는가를 좀 구체적으로 이야 기하려면 이 개념을 더욱더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언중이라는 말은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말하는 군중 이라고 해석되지만, 사실 언어 와의 연계에 초점을 맞추며 호명을 하다 보니 그 사회적 실체에 대한 지 칭이 허술해졌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찍어 말한다면 언중은 사실 대중 의 또 딴 이름이다. 그 대중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고군분투하고 있 고, 늘 가족 문제나 직장 문제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종종 타인에 대한 인간애를 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 자신 혹은 가족까지의 범위 내에서 유대감과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다. 그 런 사람들에게 종종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말은 무언가 한가한 사람들의 언어 126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처럼 들리기도 한다. 전문 용어 살아가는 모습이 지워져 있다. 오로 지 삶 속에서 언어하고 연동될 때만 호명되고, 그 밖의 문제로는 전혀 언 급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언어학자들에게 호명당하기만 하는 피 동적인 존재가 과연 언어 사용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언어의 내적 구 조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려면, 일단 일상적인 삶에 매몰되어 있는 대중이 곧 언어의 주인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논의를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 이다. 그래서 나는 언어 대중 이라는 말로 그 주인을 일컫고자 한다. 언어 대중은 일터에서 일하고 일터를 벗어나서는 쉬거나 놀고, 또 가족 이나 친구들과의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왕이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하고 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 고 존경을 받으면 무척 만족스러워한다. 대단히 추상적인 가치, 앞에서 말한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말은 평소에는 부담스러워하지만, 일단 위기 가 닥쳤다고 생각되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경우에 언중이라는 말에는 이같이 사람이 언어 대중은 말을 한다.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사용한다. 든 언어 대중이든 그들이 언어의 소유주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참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대중은 말없이 뒤편에 서서 역사와 사회의 소도구 노릇만 해 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성 실히 일하는 것과 착한 규범뿐이었고, 종종 위기가 닥치면 병사의 몫도 마다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다스림 의 대상일 뿐이지 무언가의 주인이라 는 것은 당치 않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민주주의를 외치며 표 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탕발림으로 늘어놓는 화려한 언사처럼 보이 언중이 기도 할 것이다. 퍽 오랜 세월 동안 백성, 양민, 천민, 유민, 난민, 이재민 등의 신세 사 나운 역할만 맡아 온 대중은 대략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스스 로도 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점점 주인의 역할을 조금씩 조금씩 하게 특집 국어 순화 방법론 모색 127

렇 든 것은 대중 스스로이기도 했겠지만 다른 면에 서는 과학 기술의 힘이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시장이기도 했다. 바로 대 중문화의 탄생이다. 비록 똑바로 투표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 었지만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도 생겼고, 시장에서 대중문화의 가치가 퍽 중요해졌다.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음반 등에서 대중의 역할이 상당히 강해졌고, 그들이 문자를 알게 되면서 신문, 잡지, 문학 등의 규모가 달라 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우아함을 자랑하는 시민 문화보다는 좀 거칠 고 투박하고 좀 야했다. 그래서 만화, 춘화, 통속 소설, 대중가요 등 우아 함과는 거리가 먼 형상물들이 대중의 호감을 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 비 규모는 시장의 크기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할리우드 가, 디즈니랜드가, 대도시에는 극장, 음악 연주장, 경기장 등의 문화 소비 장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방송의 중요한 부분을 하나하나 장악해 나갔다. 대중의 이러한 극적인 등장은 프랑스 혁명 전후 시민 사회의 등장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유럽의 시민들은 주로 카바 레와 카페 등에서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또한 의식적으로 가꾸어 나 갔다. 신문과 잡지의 주요 소비자들이었으며, 연극과 토론을 즐겨 했다. 곧 말과 글, 그리고 예술을 이용하여 (하버마스가 분석해 낸) 공론장을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귀족의 예술을 계승하여 시민의 예술로 만들었다. 오페라와 발레가 그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통속 문화를 갈고 다듬어 세련 된 예술로 만들기도 하였다. 왈츠와 같은 춤은 남녀가 지나치게 달라붙어 추어서 문란하다고 지탄을 받는 것이었는데, 슈트라우스와 같은 작가에 의해 품위 있고 우아한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시민들은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예술을 즐길 줄 알았으며 언어와 예술 에 품격과 질서를 자리매김하였다. 언어에는 문법과 사전을 규격화하여 질서를 잡았고, 예술은 장르에 따른 독해법와 미학적 기준을 제시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표준어 를 형성해 냈고, 전 국민 (민족 국가 구성원)에게 학습시켰다. 그 표준어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 되었다. 그들을 그 게 만 128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색 짙은 방언을 사용하는 무리들을 한 단계 낮은 문화 향유자 로 낙인찍기도 했다. 그래서 대중이 즐겨 쓰던 말은 어느새 통속어, 비속 어, 유행어, 상말, 육담, 시쳇말 등의 주변적인 명칭을 얻게 됐다. 거나 지방 4. 한국어, 대중의 언어에서 시민의 언어로 올라서다 설명을 달 필요 없이 우리가 쓰는 일상 한국어는 퍽 오랫동안 사회의 공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도화되지 못한 입 말, 규범화가 불충분한 문자 사용, 문헌 생산의 빈곤 등은 우리의 일상 한 국어를 기껏 마을의 언어 수준에 머무르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초라하던 상태의 언어가 19세기 말에 가서 다른 지역보다는 매 우 늦게, 몇몇의 각성한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이 당시 한국 사회 를 주도하기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그 양과 질이 미약하여 큰 성과는 내 지 못하고 끝내는 타율적 사회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으나 이 당시 초기 계몽주의자들의 역할은 두고두고 우리를 다시 각성시킬 수 있는 훌륭한 자취로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주시경은 그의 짧은 생애가 안타까울 정도로 중요한 문제의식을 드러냈고, 그것을 후계 집단에 물려주었다. 그것은 언 어의 근대화라는 소명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의, 소박하고 초라하고 그리 세련되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 추상화된 개념을 실 어 냈다. 그의 행위는 세종보다 훨씬 모험적이었고 도전적이었다. 전근대 사회의 군주라는 신분보다 시대 전환기의 선구자답게 과격한 면도 있었 다. 세종은 한국어가 문헌을 생산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면, 주시경은 더 나아가 언어의 외부적 간섭을 차단하고 공동체 내부적 능력을 동원할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곧, 못난 언어적 자원이지만 시대적, 사회적 한 계를 무시했다. 제대로 된 성공을 당대에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지루하게 일일이 특집 국어 순화 방법론 모색 129

계 집단들에게 하나의 분명한 전범을 제시했다. 우리의 일상 언어가 좀 투박하지만 못할 것은 없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작가들이 한국의 현대성을 문학 속에 구현해 내기 시작하여 대략 1930년대에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곧 현대 한 국어의 미학적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새로 들어온 종교였던 기독교, 그 리고 당시의 사회적 욕구를 반영한 천도교 및 대종교 등도 그들의 경전 과 각종 선교 문서에 일상 한국어를 반영하였다. 그리고 대중 매체 역시 초기 단계이지만 현대 한국어의 형성에 일정한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각 분야가 영역별로 나뉘어져서 개별적으로 발전하기에는 기본적인 언어 제도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해 낸 것이 바로 1933년의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1936년의 표준어 사정이다. 언어의 제도화, 곧 표 기의 규범과 어휘의 표준화 등이 계몽적 지식인들과 그들을 지지한 대중 들에 의해서 처음 제대로 규정되고 힘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시대적 한계는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제도화가 모든 구 성원에게 관철되기 위한 사회 문화적 지배력이 이 주도 세력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적인 한계 못지않게 안타까운 것은 이 표준어 사정의 내용이 한국어의 미래 지향적인 발전을 언약하기에는 여러 가지 후 부실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표준어 사정은 지나치다고 할 만큼 토착어의 형태적 기준을 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한자어는 극히 일부만 다루었다. 그 결과로 수많은 토 착 어휘와 관련된 언어 자원은 몇 가지 규정 때문에 비표준이 되었고, 대 부분의 한자어는 아무런 규제 없이 표준어가 되었다. 한자어의 특징은 상 대적으로 자유로운 조어력에 있다. 결국 당대의 어휘만이 아니라 미래의 어휘에도 한자어 어휘가 무한한 무비자 입국 이 가능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제대로 하려면 그 시기에 한자어에도 분 명히 표준 어휘와 비표준 어휘를, 더 나아가 비한국어 어휘를 규정했어야 했다. 그 이후 우리의 토착어 자원은 항상 서울 지방의 것인지, 중류 계층 130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혹 ( 은 교양 있는 사람)의 것인지의 심문을 받아야 했음에 반하여, 한자어 통 든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어휘든 아무런 통제 없이 한국어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든 이 시기에 일상 한국어가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각종 문 헌에 공식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조건 을 갖추게 되었고, 그 이상의 발전 은 훗날로 미루게 된 것이다. 이때 훗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언어에 대 한 의식적 행위 들은 북에서는 말 다듬기와 어휘 정리, 남에서는 한글 전 는 그것이 전 적인 것이 용 운동과 국어 순화 운동 등으로 지속된다. 일정한 기간 내에 언어를 개 혁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여러 사례가 있지만 한국(남과 북)처럼 이렇게 질기고 질긴 언어 운동이 완급과 강약을 달리 하면서 거의 한 세기 이어 가고 있는 곳은 참 보기 드물다고 생각한다. 워낙에 장구한 기간 동안 한 자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온 문헌어의 강고한 형태적, 의미적 지배력이 끈질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1930년대의 미완의 숙제로 말미암은 현상이 라고 생각한다. 5. 언어 순화의 방향 문제 언어 순화에 대한 일정한 방향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초기 주로 한자어에 대한 순화 작업이 대세였지만 최근 들어 주로 영어 를 중심으로 한 서구어 쪽으로 그 초점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드나드 는 어휘의 성격이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과거에는 서구 어 어휘가 일본에서 한자어로 번역된 이후 한국에 수입되었는데 요즘은 일본어에서도 굳이 한자어로 번역을 하지 않고 일본식으로 음독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국어 자체가 서구 어휘 직거래 를 하는 경우가 많아져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언어 순화의 대상 어휘가 서구어(주로 영어)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에는 특집 국어 순화 방법론 모색 131

될 수도 있다. 사실 지난날에는 한자어에 과거보다 전략의 방향이 좀 정리 강하다 보니 이미 언어 대중에 의해 수용된 부분까지 손질하려는 과잉 순화 사태도 종종 있었다. 차제에 한자어에 대한 우리의 과민 반응을 좀 조절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대한 비판 의식이 순화 운동의 동기는 한자어에서 비롯했었지만, 사실 한자어가 가지고 괜찮은 기능이 그동안 외면당해 온 점도 있었다고 본다. 사실 한자 어, 아니 한자음은 우리가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다. 역사적으로 딴 언어 의 음운 체계를 이렇게 철저하게 자국어화한 언어도 보기 드물다. 다시 말해 중국어 전체를 모두 한국식으로 발음할 수 있게 만든 것이 바로 한 자음이다. 물론 이것은 과거에 우리말의 발전을 도외시하고 무조건 중국 어 혹은 일본어의 한자어를 일괄 수입해 버리던 악습의 통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자음의 최대 장점은 거의 완전하게 한국어 음운에 적응했다 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원 따위를 잘 모르면 토착 한국어로 오해하기도 쉽다. 우리가 언어를 보는 눈을 조금 조절하면 한자어의 상당 부분은 우 리의 토착어 못지않은 대중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한자로 표기하지 않고 그냥 쓰면 굳이 순화 대상으로 거론할 필요도 없는 경우 가 흔하다. 예를 들어 치매(癡 )의 한자 뜻과 필순을 정확히 아는 사람 이 도대체 몇이나 되며, 반대로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 자로 적어 놓지 않으면 그것이 한자어인지 무언지 알 턱도 없고, 그 한자 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할 여지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 언어 대중의 요구가 아니겠는가? 서구어에서 한국어 음운 체계에 이처럼 완전히 적응했다고 할 수 있는 남포 나 가방 등을 원래 언어에서 어떻게 적는지가 언어 대중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쟁(戰爭), 의회(議會), 공화국(共和國), 태풍(颱風), 대통령(大 統領) 등의 어휘는 한자가 없어도 언어 대중 모두 잘 아는 말들이다. 거 의 동음이의어도 없고 일상적으로 누구든지 이해하는 말들이다. 너무 당 연해서 순화 대상 어휘에 넣기도 민망한 말들이다. 이제 이런 말들은 한국 있는 呆 132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표기를 사전에서 지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자 시험에서도 출제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다. 교육부의 한자 제한 조치와 마찬가지의 정신이다. 단지 전문적인 한자어 사전이나 옥편을 편찬할 때만 넣을 수 있게 하고, 국어사전 에는 한자 사전이나 옥편을 찾아보라 는 기호 만 표시해 두는 게 더효율적이지 않겠는가? 그 어휘를 한자로 어찌 적는지 는 교육 과정에서 제외해 버리면 아마도 그 한자 표기를 알아내려 하는 사 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자어를 지속적으로 한국어화하는 과 정에 올려놓아야 제대로 순화 가 된다. 한자를 쓰지 말아야 종종 형태도 달 라지고 의미도 달라지면서 굳이 한자어 범주에 넣게 되지 않으면, 그리고 대중들이 여전히 애용하면, 바로 그것을 순화했다고 하자는 것이다. 어휘 하나하나를 일일이 각개 격파하듯이 하는 순화도 경우에 따라 필 요할 것이다. 그러나 더 우선적인 것은 우리가 미처 제대로 성취하지 못 했던, 한국어의 현대화 과정에서 미흡했던 것을 뒤늦게나마 성취하자는 것이다. 필경 국어사전에서 한자를 빼 버리자는 말을 듣곤 그건 북한에 서도 실패한 일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북한의 경우 는 모든 한자를 빼 버린 것이다. 따라서 상당한 불편이 있기는 했을 것이 다. 여기서의 주장은 언어 대중이 받아들이는 부분에 대해서 빼자는 것 이다. 북한의 입장 문제를 말한다면 꼭 덧붙여야 할 말이 있다. 북한에서 국어사전에 한자를 다시 표기하기로 하면서 내건 명분이 있었다. 그것은 남조선에서는 아직 한자를 많이 쓴다. 따라서 서로의 소통을 위해서 였다. 따라서 우리가 한자어의 상당 부분을 국어사전에서 제외한 다면 북에서도 곧 제외되지 않을까 한다. 이 부분이 정책적으로 섬세하게 다루어지기만 한다면 우리 언어 순화 의 대단히 큰 국면 하나가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어 순화 는 더욱더 지향할 본격적인 지점인 언어 발전 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전 어화되었다고 보고 한자 개되어야 할 것이다. 특집 국어 순화 방법론 모색 133

6. 언어 발전으로서의 말 다듬기 퇴보하기도 한다. 독일어는 분명 루터와 괴테 덕분에, 러시아어는 푸시킨 덕분에, 그리고 영어는 셰익스피어 덕분에 큰 발전을 이룩했다. 이 문호들의 업적은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 못 하는 것 이 없을 정도의 광범위한 세계를 담아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언어 대중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무한히 아름답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더 나아가 마을이나 고장의 언어인 줄 알았던 자신의 언어가 한 나라의 공통어에 무척 가깝다는 확신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 좋은 전범의 언어로 많은 문헌과 문서를 만들어 내었다. 작가들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들도 전문 용어를 자신들의 일상 언어에 가깝게 만들어 내게 되었다. 물론 초창기의 전문 용어는 대개 라틴어나 그리스어에 기초한 경우가 태반이었으나 세월이 감에 따라 점점 토착어 용어가 늘어났다. 특히 새로 생긴 전문 분야인 정보 통신 기술에서는 라 틴어나 그리스어는 눈에 띄질 않는다. 오히려 통속 영어가 적지 않게 나 타난다. 그 까닭은 이미 이 영역의 지배자가 과학자라기보다는 소비자 대 중이 되었기 때문이다. 분야에 따라 성격이 다르겠지만 대중의 성향에 영 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통신, 언론, 연예, 의료, 교육, 종교 등의 영 역에서는 전문가의 어휘보다는 대중의 어휘가 더 강력해질 것이다. 우리의 언어는 중국 문명의 주변부에 기생하게 됨에 따라 퇴화된 면이 적지 않았다. 특히 조어 능력이 쇠퇴하여 중국어화되었고 이에 따라 순화 의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어의 경우엔 이 기나긴 순화 의 대장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분 단과 재통일 문제이다. 한국어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통일된 지역 내 에 공통된 기호로서의 언어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중세어 내지는 중세 후 기 언어를 쓰다가 식민지가 되었고, 거기서 벗어나면서 분단이 되었다. 이제 다시 서로를 하나로 만들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통일 언어는 분명 발전하거나 134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될 것이다. 바로 이때 우리의 언어는 그 비용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해야 한다. 언어를 통하여 효율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고 갈등 을 줄이고 새로운 삶의 전범을 창안해 나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언어에 대한 의식적인 활동 이 될 것이다. 그 활동의 이름은 순화가 될지 개혁이 될지 아니면 정리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100여 년 전 사회와 문화 의 혁신에 실패한 이후 오랜 시간 누적되어 온 언어와 의식 간의 모순을 최대한 해소하는 언어 역사의 대단원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한국어는 아직 발전의 여지가 여러 면에서 대단히 많다. 그 발전의 길 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언어 순화에서 지속적으로 나와 줄 필요가 있 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제는 이미 전문가들끼리만 주도하는 언어 운 동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요구와 향유의 주인은 언어 사용자 대중이 항상 중심에 서야 하고 또 그래야 성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비용 이 문제가 특집 국어 순화 방법론 모색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