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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교사용) 4-6부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Transcription:

조선초기 중앙집권제론의 검토 남 지 대* Ⅰ. 머리말 Ⅱ. 개설서의 검토 1. 國史大觀 2. 國史槪論 3. 韓國史新論 4. 韓國史 近世前期篇 5. 韓國通史 6. 한국사 9 10 7. 조선통사 Ⅲ. 과제와 제언 1. 시 각 2. 토지생산력과 토지제도 3. 戶口의 파악과 役制 4. 신분제 5. 정치제도 Ⅳ. 맺 음 말 Ⅰ. 머 리 말 조선초기 사회는 중앙집권적인 사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초기 사회의 중앙집 권적인 면모 자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 글은 지금까지 논의된 중앙집권 제설의 내용을 주요 개설류를 중심으로 검토함으로써 앞으로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에 대 한 구체적인 연구의 작은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기존의 개설서에서 조선초기에 대한 정치적인 설명들 가운데서 중앙집권적인 성 격을 지적한 내용을 뽑아 정리함으로써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에 대한 통설적인 견해를 살 펴보려 한다. 개설서를 택한 것은 뚜렷한 개별적인 연구성과가 없는 데도 이유가 있지만, 개설서의 내용이 연구자의 상식적인 인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대중의 역사인식 일반을 제 약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일본인의 연구와 저술은 검토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그것들이 한국사연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필자의 관심은 조선 초기 중앙집권제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에 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제에 대한 통설을 검토하는 준거로는 정치사라는 분야사적인 것보다는 사회를 전체로서 하나의 구성체로 보는 관점을 준거로 삼으려 한다. 이는 조선초기의 중앙집권제 가 고려 이래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의 결과물로서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발전의 단계에 조 응하여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관점에 섰을 때 조선초기 중앙집권제가 당 * 서울大 奎章閣 學藝硏究士.

- 116 - 國史館論叢 第26輯 시 사회의 발전에 작용한 면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체제를 전체로서 하나의 구성 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한편으로 지배체제를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면만을 중심으 로 다루어 분야사적인 시각에 갇히는 한계를 벗어나는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준거에서 기왕의 중앙집권제설이 지니는 문제점을 살펴보고, 조선초기 지배체 제로서 중앙집권제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밝혀져야 할 문제들을 중심으로 가설적인 검 토를 덧붙이려 한다. 검토되어야 할 과제의 중심은 중앙집권제의 구조적 토대와 중앙에 집중된 정치권력을 담아 실현하는 제도적인 틀이다. 따라서 이 글은 새로운 내용을 찾아 내기보다는 기왕의 연구성과로 알려져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 중앙집권제의 성 격 또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초보적인 검토가 될 것이다. 작업과정에서 무리한 추론이 나 억단으로 기왕의 성과에 누를 끼칠까 두렵다. Ⅱ. 개설서의 검토 개설서가 끼친 영향을 염두에 두고 몇몇 개설을 임의로 뽑아 검토하였다. 먼저 여기서 검토한 개설의 전체적인 경향은 정치사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있다 는 점이다.1) 개설서들에서는 정치제도의 여러 실상은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해석 은 거의 없는 셈이며, 있다고 하여도 중앙집권적 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다. 따 라서 개설서의 내용을 검토하여 조선초기의 중앙집권적 인 체제의 성격이나 본질에 접근하 는 것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조선초기 사회가 중앙집권적 이라는 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이면서도 그 구조적인 기능이나 성격에 대한 인식은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을 살펴보 기 위한 전제작업으로서 개설서의 검토는 필요할 것이다. 몇몇 개설서들을 초판이 간행된 차례를 따라 중앙집권적 인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2) 1. 國史大觀 3) 1) 다만 진단학회에서 펴낸 韓國史 近世前期篇(을유문화사, 1962)의 경우 필자가 사회학에 대한 조 예가 있었음인지 베버의 家產官僚制 이론을 수용하여 해석을 가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며, 북한 에서 나온 조선통사 상(과학원출판사, 1963)은 사적 유물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점에서 남쪽의 역사서술과 기본틀이 다르다고 하겠다. 2) 각 개설서에서 중앙집권의 내용에 대하여 느슨한 연관을 가지고 설명한 부분은 설명의 편의상 되도록이 면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원문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漢字로 서술된 것을 가능한대로 한글로 바꾸었다. 3) 이 책은 1948년에 朝鮮史大觀 으로 간행되었다가 1955년에 新修國史大觀 으로 바뀌어 普文 閣에서 간행되었다.

- 117 먼저 조선 의 총설 에서 근조선의 모든 기구와 조직이 중앙집권적인, 귀족(양반)중 심적인 점은 고려조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 4)고 전제하고 있다. 정치를 설명하는 본문에 서는 중앙집권의 실상보다는 왕권의 확립을 언급하고 있다.5) 예컨대 사병혁파는 이씨왕 권의 확립과 집권정치수립의 과정을 의미하는 일 중요사항이었던 6) 것이며, 당시 제도 의 정비는 왕권의 확립을 의미하는 동시에 근조선적인 성격과 골격을 표현하는 용모가 된다 7)고 한 것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국초의 신제도의 정신은 사전의 개혁, 공전의 확 대에 의한 재정적 기초 위에서 급봉 군자를 지출하여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를 확립하려 하였던 것이다 8)고 하여 중앙집권의 경제적 기초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국사대관 의 조선초기 중앙집권에 대한 인식은 아직 구조적인 데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일반 독자는 물론 연구 자에게도 50년대를 중심으로 상당 기간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2. 國史槪論 이 책에서는 조선을 집권적 봉건국가시대(제2부)로 설정하여 유교적 관료집권적 봉건 국가 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조사회가 집권적 봉건체제로 재편되어 가는 중에도 그것이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관료체제로 확립 완성되어간 점에서 麗代사회와 구별되며 또한 사회의 역사적 진전을 의미하는 것 9)으로 설명하고 있다. 태종과 세종을 집권체제 를 강화한 군주로 설명한 데 이어, 경국대전 의 편찬으로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확립되고 제반 사회제도가 고정되어진 셈으로, 이조사회의 본질은 실로 경국대전의 분석 이해에서 파악되어질 수 있는 10)데, 그것은 이조사회의 구조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으 로 이조사회를 유교관료적인 집권봉건체제로 제약하여 사회의 정체, 경화를 면할 수 없게 한 법적 규범이 되어진 것이다 11)고 하였다. 이어 이조의 관료조직은 대체로 고려말기의 제도를 참작하여 그것을 재편한 것이나, 세조로부터 성종대에 이르는 동안 경국대전 4) 이병도, 신수국사대관 (1955년판) p. 321. 5) 그런데 한편으로 조선의 왕권에 대해 왕이 최고 절대의 지위에 있어 형식상 군주전제의 정체로 되 어 있으나 실제운용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아 왕권은 극히 축소된 느낌이 있다고 하였다 (위의 책, pp. 342 343). 6) 위의 책 p. 327. 7) 위의 책 p. 341. 8) 위의 책 p. 369. 9) 김철준 한우근, 國史槪論 (明學社, 1954) p. 256. 10) 위의 책 p. 268. 11) 위의 책 p. 269.

- 118 - 國史館論叢 第26輯 의 완성과 더불어 집권적인 관료체계가 완비되어진 것 12)이라 하였으며, 토지국유의 원 칙하에 사전의 확대와 세습화는 전제의 문란을 자아내는 동시에 집권적이면서도 봉건적 인 토지소유형태로 이끌어갔다 13)고 하였다. 집권체제의 구조 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관료체제와 토지제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조사회의 구조를 더욱 명백히 할 수 있다. 집권체제의 기본조건은 먼저 토지공유(국유)와 그 원칙하의 授田형태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는 단적으로 집권적 사회편성에 있어서 지배자층의 생활지반이 되어지는 것이 었다. 그 위에 그들의 수전지역을 중앙에 집중시켜 경기에 한하였던 것은 이들 귀족, 관리의 생활지반을 중앙에 흡인하여 지방분권적인 세력양성을 제약하는 효과를 기한 것이다. 다시 통치기관의 편성을 본다면 종친부, 충훈부, 의빈부, 돈령부 등 종실, 공신의 관부와 의 정부를 정 1품아문, 왕명을 받들어 중죄를 다스리는 의금부를 종 1품아문, 다시 육조와 한성 부를 정 2품아문으로 삼아 이하 제기관의 위격이 遞下되면서 각기 독립적으로 왕에 직결되 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위에 時原任議政은 제종 관아의 提調가 되어 그 장관의 임을 겸 무함으로써 정권이 왕을 중심한 몇몇 중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14) 관찰사는 이같이 문무양권을 갖고 이른바 생살여탈의 권한이 있어 봉건영주에 흡사한 존 재로서 지방에 군림하였다. 그러나 역시 군주의 대행자에 불과하였다. 그들의 임기는 2년 으로 제한되어 있어 토호화와 아울러 지방세력의 지반을 형성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또한 관리로서 자기출신지에 부임되는 일이 없이 한 것은 도당세력의 양성을 방지하기 위한 조 치라고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집권적인 행정의 운영을 위하여 역, 원, 봉수, 조운, 조창 의 제가 있었다.15) 위와 같은 토지제도를 기반으로 한 관료집권적인 중앙관제는 관료양반의 지주화를 조성 하여 토지제도의 문란과 아울러 집권적이면서도 봉건적인 사회구조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그같은 경향은 또한 유교적인 봉건사상의 변화를 얻어 한층 더 경화되어 갔다.16) 이들 양반 중에도 국초이래로 속출된 제반공신과 고급관리 들은 왕족척신들과 더불어 관 료적인 집권사회의 핵심적인 존재로서 그들에게 賜與 또는 科授된 광대한 전지는 점차 세 습, 사유지화 되어갔고 그들이 대지주로 화하여 져서는 드디어 대가, 명가를 이루어 문벌 로 화하게 되었다.17) 이 책에서는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사항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위의 국사대관 에 비하여 발전적인 점을 보이고 있다. 먼저 집권체제의 구조 를 항목으로 설정하여 다루고 12) 위의 책 p. 269. 13) 위의 책 pp. 275 276. 14) 위의 책 pp. 276 277. 15) 위의 책 pp. 277 278. 16) 위의 책 p. 280. 17) 위의 책 pp. 290 291, 봉건적 신분체제 의 양반.

- 119 - 있으며, 그 구조를 관료체제와 토지제도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점이다. 그리 하여 관료와 생활지반이 중앙에 집중되고 여러 기관이 왕에게 직결되어 있고, 왕을 중심 한 몇몇 중신에게 정권이 집중되어 있으며, 지방관이 지방세력화할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막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역, 봉수, 조운 등을 집권적인 행정의 운영을 위한 장 치로 파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토지제도를 기반으로 한 중앙관제가 집권적이면서도 봉 건적인 사회구조를 형성시켰고, 그 경향은 유교적인 봉건사상의 변호를 얻어 한층 더 강 화된 것으로 보았다. 요컨대 조선초기 중앙집권적인 사회구조를 토지제도와 관료체제 그리고 유교적인 봉 건사상을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 지배의 틀인 관료체제를 장악한 관료의 생활 지반이 토지제도를 통해 마련되었으며, 이같은 지배가 유교적 봉건사상으로 변호되고 있 다고 보아 정치 경제 사상을 하나의 틀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내용에 서 연관의 유기적인 설명이 미흡한 것 등 당시 연구성과의 부족에 기인하는 한계를 안 고 있으나, 중앙집권제를 설명하는 방향으로는 기본적으로 타당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접근방법이 한단계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중앙집권제를 하나의 전체 로서 설명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가장 큰 한계로 보이는 것은 국가를 설명해 야 할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지 않은 데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집권체제의 구조 가 지 배구조 내지는 상부구조로서 설명되었다기보다는 중앙의 관료체제와 왕, 중앙관인을 중 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군사제도가 같은 관점에서 파악되지 않았고, 토지제도나 관료체제도 밀접하게 연관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약으로 결국 집권체제의 구조 를 유기적으로 설명하여 중앙집권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3. 韓國史新論 18) 이 책은 지배세력의 변천을 준거로 삼아 시기구분하여 한국사를 체계잡은 책으로 보 인다. 조선초기 양반관료국가의 통치기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서술하고 있으나, 중 앙집권과 연관하여 해석한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먼저 1961년판의 내용을 보면,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집중한 것과19) 지방행정이 수 도에 집중한 귀족의 부지를 위한 행정적인 보조기관에 지나지 않으며,20) 조선왕조는 지 방세력의 성장을 억제하고 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하기에 노력하였으며,21) 토지제도 18) 이 책은 1961년에 國史新論 (泰成社)으로 간행되었다가 1967년에 韓國史新論 (一潮閣)으로 바뀌었다. 19) 이기백, 國史新論 (泰成社, 1961) p. 206. 20) 위의 책 p. 205. 21) 위의 책 p. 206.

- 120 - 國史館論叢 第26輯 가 관료조직의 기반이 된 것을 지적한 정도이다.22) 이를 요약하여 조선왕조는 요컨대 집권적인 양반국가였다 23)고 하였다. 이어 1976년 개정판 한국사신론 을 보면 통치기구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지적하 는 부분은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양반관료국가의 통치기구 에서 이조의 정치기구가 고려의 그것보다 관료적이었다 24)고 지적한 정도이다. 이렇게 조선초기 지배구조의 성격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은 바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체계를 잡은 이 책의 틀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곧 지배층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 문에 지배구조가 지니는 지배의 속성은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다만 통치기구의 현 상적인 변화만이 전시기에 비교하여 지적되는 데 그친 듯하다. 그리하여 지배의 여러 측면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었고, 피지배층까지를 포괄하는 의미에서 의 중앙집권제가 가지는 사회적인 의미를 지적하는데 미치지 못한 것 같다. 4. 韓國史 近世前期篇25) 이 책에는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없다. 조선정치체제의 인식에 대한 이 책의 영향은 오히려 가산관료제에 대한 언급과26) 기초적인 자료 정리에 근거한 사실 설명 부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조선왕조의 정치적 구조 부분은,27)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정치적 구조에 대한 해석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술체계의 대강은 위에서 인용한 총론 의 틀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총론 에서 틀의 바탕을 이루는 생각은 고려와 본질상 동일한 전제군주국가인 조선이 가산국가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28) 그리하여 조선왕조의 정치적 구조 를 설명함에 宮中과 府中 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정치적 구조 22) 위의 책 p. 206. 23) 위의 책 p. 217. 24) 이기백, 韓國史新論 (一潮閣, 1976, 개정판) p. 212. 25) 韓國史 近世前期篇(진단학회, 乙酉文化社, 1962). 이 책은 진단학회에서 기획하여 간행한 우리 최초의 규모있는 통사 가운데 조선전기 부분으로서 이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26) 위의 책, 총론 조선왕조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 pp. 4 7. 27) 참고로 조선왕조의 정치적 구조 부분의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절 중앙의 정치구조 : 1. 궁중과 부중 2. 주요 정무기관 3. 속아문과 권설직. 제 2절 지방의 정치기구 : 1. 지방의 행정구획 2. 관찰사 수령 향리 3. 향소 향약과 면 리 통. 제 3절 중앙과 지방의 군사조직 : 1. 친병과 오위 2. 번상과 보 3. 병 수사와 만호 첨사. 제 4절 사법제도 : 1. 사법기관과 형벌 2. 법률과 소송. 제 5절 교육 고시 관료복무 : 1. 교육제도 2. 과 거제도 3. 관료의 복무. 28) 조선의 관료제가 가산관료제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에 대해서는 旗田媒가 朝鮮史 (1952, 日語本)에서 언 급한 바 있다.

- 121 - 의 가산관료제설에 근거하여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29) 이러한 성격규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구조에 대한 많은 양의 구체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치구조의 중 앙집권적인 면은 짜임새있게 서술되지 못한 것 같다. 조선의 정치구조는 化家爲國 이라는 당시의 표현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가산관료 제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의 정치구조가 가산관료제 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규정하는 것이 조선이 본질상 고려와 동일한 전제군주국가였다는 인식과 결합되어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전한 정치구조의 실상에 다가가 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산관료제설을 수용하는 의도와는 관계없이 정체론적 인 인식에 갇히게 되는 경향을 보이며, 한편으로 왕토사상에 근거를 두고 토지국유론을 가산국가의 경제적인 토대로 해석하는 경향도 보이고 있다.30) 그러나 조선의 정치구조에는 가산관료제적인 성격과 함께 천 여년 동안의 역사적 과정 을 거쳐 발전해 온 정치적 지배가 퇴적되어 반영되어 있으며,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성격 규정 자체라기보다는 성격을 규정함으로써 정치적 지배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구조의 성격이란 그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위에서 이루 어져야 하는데, 이 책의 경우에도 본문에 서술한 내용을 근거로 고려시기와 비교하고 사 회적 경제적인 구조에서 다룬 내용과 종합하여 조선 정치구조의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韓國文化史大系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 실린 韓國法制史 (이희봉, 1965)가 있는데, 위 韓國史 近世前期篇의 내용을 정리한 정 도의 것이다. 5. 韓國通史 31) 이 책에서는 조선을 양반관료국가로 보았다. 사병의 혁파와 관제의 개혁을 왕권강화 조 처로 보아 문무고관의 회의기구의 완전 소멸과 문무 직장의 완전 분리는 상대적으로 왕 권의 강화를 의미하는 32) 것이며, 이로써 신왕조의 정치체제는 여대의 유제를 완전히 벗 어나 보다 더 분화 정비된 셈이었고, 실질적으로 6조의 직권의 확대는 의정부를 구성하는 중신의 권한 축소를 의미하고 그것은 또 왕권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33)고 하 29) 가산관료제로 규정하는 인식은 이후 오래도록 관료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 것으 로 보인다(남지대, 조선후기 정치제도사 연구현황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 상, 1987, p. 69). 30) 남지대, 위의 논문 pp. 69 70 참고. 31) 한우근, 韓國通史 (乙酉文化社, 1970) 1987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32) 한우근, 한국통사 (을유문화사, 1970년판) p. 221. 33) 위의 책 p. 221.

- 122 - 國史館論叢 第26輯 였다. 이어 세조의 즉위로 6조 직계의 제가 복구되어 왕권이 복구된 것으로 보고, 왕권의 강화에 따라 국가권력도 점차 지방으로 파급되어 중앙집권의 체제도 갖추어져 34) 갔으며, 세조의 왕권확립과 집권체제의 정비는 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인 경국대전 의 완성으로 나타났다 35)고 하였다. 중앙의 정치구조 에 대해서는 중앙의 정치기구로 보더라도 중국의 것이 다소 변형된 조선 특유의 체제로 갖추어졌던 것이며, 그 구조와 기능면에 있어서 특히 절대왕권과 양 반관료 사이의 권력의 조화가 배려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6)고 하였으며, 조선의 관료체 제의 특징으로 관료의 상하 계서가 엄밀히 규정 제한되어 있어 아주 엄격한 관료체제를 이룬 점과 관료의 승진에 특수한 제한을 두었던 점, 겸임제가 광범하게 시행되어 정치권 력이 소수 고급관료에게 집중된 점, 문관이 무관보다도 훨씬 우위를 차지하게 마련인 점 을 지적하였다.37) 그리고 관료세력의 경제적 기반에 대하여, 토지제도가 관료에게 지급되 는 과전은 이를 경기내에 제한하여 그들의 생활기반을 중앙에 두게 함으로써, 그들의 지 방에서의 토호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 했 다 38)고 하였다. 이 책의 중앙집권적인 제도의 정비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은 앞의 國史槪論 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정치적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은 구체성에 기초하여 한 단계 진전된 내용 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조선의 정치구조가 중국의 것이 다소 변형된 조선 특유의 체제로 갖추어 졌다고 본 것이나 태종대의 관제개혁으로 문무의 직장이 완전 분리되고 여대의 유제를 완전히 벗어나 보다 분화 정비되었다고 본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조선의 관료체 제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도 발전된 설명이다. 그러나 정치구조를 왕권의 확립을 중심으로 설명하면서도 왕권강화의 구조적인 의미를 이끌어내는 데 이르지 못한 한계가 있으며, 한편으로 왕권을 중시한 데서 지배층 내부의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 상대적으로 비중을 두었고 관료체제가 가지는 지배층 중심의 특징 은 지적하고 있으나, 사회 안에서의 구조적인 기능을 파악하여 설명하는 데는 미치지 못 하였다. 또한 정치구조의 중앙집권적인 실상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여서인지 거의 해석이 없다. 그리고 토지제도에 대한 설명에서 관료의 경제적인 기반과 연관시키고 있을 뿐 국가의 통치기구를 운영하는 차원에서의 해석은 거의 없다. 이 책에서 여러 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전제하고 있으면서도, 신분제나 군사제 34) 위의 책 p. 230. 35) 위의 책 p. 231. 경국대전 에 대해서는 조선초기의 사회 구조를 단적으로 제시하여 주는 것으로, 이에 대한 이해 는 조선왕조의 관료 지배체제와 사회구조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위의 책 p. 233)이라고 하였다. 36) 위의 책 p. 245. 37) 위의 책 pp. 251 252. 38) 위의 책 p. 258.

- 123 - 도, 교육 과거제도가 중앙집권이나 관료제의 구조적인 재생산과 어떻게 연결되어 운용되 었는지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이는 당시의 연구 분위기와도 상 관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배구조를 사회의 지배 피지배관계와 구체적으로 연관하여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6. 한국사 9 10 39) 1) 槪要 ( 한국사 9) 한우근 개요 에서는 태종은 사병 혁파로 병권을 집중하고 군현제도의 개편으로 왕정의 집 권화를 도모하고 6조직계제를 창안하였으며,40) 세조대의 군현의 정비로 조선왕조의 통치 체계는 국왕으로부터 일반가호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식 하이어라키를 이룩하게 되었 다 41)고 하였으며, 세조의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는 군액증강정책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보법의 실시로 군제의 정비와 왕조의 정치적인 안정은 확보되었다고 하였다.42) 앞에서 검토한 韓國通史 와 달라진 내용은 조선왕조의 통치체계가 국왕으로부터 일 반가호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식 하이어라키를 이룩하였다고 파악한 것과 이같은 세조의 중앙 집권적 왕권강화가 군액증강정책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 保法의 시행 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이다. 군사제도 가운데 군액파악방식의 변화를 중앙집권과 연결시 켜 이해한 것은 국가권력이 인민을 파악하고 지배하는 것을 고려하면서 중앙집권제를 이 해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단서로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2) 朝鮮王朝의 政治 經濟 基盤 : 한영우 먼저 고려말 개혁파들이 목표로 하는 관료체제는 국왕과 재상을 정점으로 하여 일원적 으로 그리고 차등적으로 계층화되고, 기능별로 분권화된 피라미드형의 체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43) 태조 때의 의흥삼군부의 설치는 병권의 중앙집중을 위한 조처라는 점에서 더 39) 한국사 9(국사편찬위원회 편)는 1973년에, 한국사 10(국사편찬위원회 편)은 1974년에 각 각 간행되었다. 외견상 논문집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편집의도가 통사의 편찬에 있는 것으로 보 아 개설서로 간주하여 다루었다. 이 한국사 는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한 것으로서 그 내용에 관계없이 이전 시기의 관찬사서에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0) 한우근, 槪要 (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편, 1973) p. 6. 41) 한우근, 위의 논문 p. 9. 42) 한우근, 위의 논문 p. 11. 43) 한영우, 朝鮮王朝의 政治 經濟 基盤 (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편, 1973) p. 66. 이는 儒 臣이 이상으로 추구하는 정치체제는 국왕전제체제가 아니라, 국왕은 단순히 상징적 국가수반으로 하여 재상에 의하여 주도되는 관인지배체제였던 것이다 (한영우, 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 祖-成宗), 위의 책, 1973, p. 189)라고 한 부분과 내용상으로 같다.

- 124 - 國史館論叢 第26輯 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44) 관찰사 전임제도는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를 가져 왔고 군현제도의 재개편은 토착향리의 세력지반을 붕괴시켜 중앙집권체제는 한층 강화되어 질 수 있었다고 하였다.45) 이어 태종대의 국왕중심체제의 강화를 병권의 집중과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 다. 사병의 혁파는 집권체제의 수립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이 되었으며, 중앙관제의 개혁으 로 중앙관제의 주요 부분이 고려적인 체제를 탈피하여 한층 기능이 분화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였다.46) 그리고 태종의 왕권강화는 군사제도에도 나타나, 중앙의 갑사 등 친위 병을 강화하고 지방의 영진군 수성군을 정비하였고 잡색군을 편성하였다고 하였다.47) 민본적 민족국가가 확립된 시기로 파악한 세종대에는 집현전이 세종의 왕권화에 기여한 것으로 보아 세종대에는 의정부 합의제가 형식상 존중되면서 왕권은 왕권대로 집현전을 매개로 강화되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 48)고, 중앙집권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도 정비되었던 것이다 49)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인한 국 가 경제력의 팽창과 국방력의 증강, 곧 부국강병에 기인하여 강역이 확장되었다고 하였 다.50) 결론적으로 세종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 고려적인 질서체제를 탈피하여 조선적인 질서체제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수립된 새로운 질 서체제는 고려의 그것보다 한층 세련되고 자주적이며, 민본적인 특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근세국가로서의 면모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51)고 하였다. 이 글은 조선을 근세 로 보는 시각에서 조선왕조의 정치 경제적인 기반에 대하여 종합 적으로 정리한 것이어서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에 대한 구조적인 서술을 주 목적으로 한 글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초기 개혁파 관료들의 관료체제에 대한 이념형을 제시하고 그것 을 준거로 삼아 개혁과정을 검토하여 많은 점을 시사한다. 44) 한영우, 위의 논문 p. 67. 45) 한영우, 위의 논문 pp. 69 70. 46) 한영우, 위의 논문 p. 76. 그 주된 내용은 종친과 외척의 정치참여를 억제하기 위한 돈령부의 설치, 의정부 기능의 약화와 언관제도의 강화, 私田 통제강화, 封君제도와 檢校제도의 활용 등 제도적인 개 혁으로써 중신들의 권력을 제한 억제시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한영우, 위의 논문 p. 78). 47) 한영우, 위의 논문 p. 82. 48) 한영우, 위의 논문 p. 87. 49) 한영우, 위의 논문 p. 80. 세종대에는 관리 등용제도 승진제도 산관제도 수령제도 언론제도 녹봉제도 등 관료제도의 모든 부분이 크게 정비되었 (한영우, 위의 논문 p. 88)으며 공법의 제정 등으로 국가 수입증대와 민생안정을 위한 경제시책면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한영우, 위의 논 문 p. 89)고 하였다. 50) 한영우, 위의 논문 p. 94. 국방력의 증강의 첫째 요인은 군액의 증가인데, 왕권 및 집권체제를 강화 할 필요에서 중앙군이 계속적으로 증강되어 왔으나 세종 만년에 이르러서는 집권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군을 점차 지방군으로 일원화시켜 국방병력을 증강시키는 방향으로 나갔다는 것이다(한영 우, 위의 논문 p.95). 51) 한영우, 위의 논문 p. 96.

- 125 - 이 글에서는 사병의 혁파를 통한 병권의 집중, 관찰사 전임제도, 군현제도의 개편, 중 앙관제의 개혁 등을 초기적인 왕권과 지방에 대한 중앙통제력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체제 가 한층 강화되는 주요한 계기로 파악하고 있다. 그 위에서 세종조의 여러 제도가 정비됨 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크게 정비된 것으로 보았으며, 집현전이 세종의 왕권강화를 뒷받 침하는 기구였음을 강조하였다.52) 그리하여 세종 때는 조선적인 질서체계가 확립되어 한 층 세련되고 자주적이며 민본적인 특성을 지닌 근세국가의 면모를 다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개혁이념을 근거로 하여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제도개혁을 구체 적으로 검토하여 고려시기에 비하여 분화되고 세련된 조선적인 체제의 특성을 구명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발전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조선초기의 중앙집권적인 제도의 정비과정을 해석하는 기준을 개혁파 관료의 이념형에서 찾음으로써 그 제도의 바 탕이 되는 지배관계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현실에서 토지소유관계와 신분제의 재편과정과 정치적 재편과정의 결과로서 나타난 제도개혁의 연 관을 설명하는 데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안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세종조에 농업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러한 농업의 발전이 제도개혁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까지를 추적해 들어가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한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일원화 과정을 집권체제의 확립과 연관하여 설명하 면서도 중앙군과 지방군의 일원화를 분기로 하여 나타날 수 있는 집권체제의 성격 변화 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왕을 정점으로 한 피 라미드형의 체제를 이루었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지배체제가 실현되는 구체적인 장인 군 현 내부에서의 신분제와 토지소유를 매개로 한 지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을 빠 뜨리고 있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계가 있음에도 이 글은 먼저 조선의 지배체제가 고려시기에 비하여 한층 발 전 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한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설명의 내용에서 중앙집권체제와 경제, 군사, 사상의 측면을 한 단계 더 높은 연관을 가지고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3) 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 한영우 세조대에는 육조직계제가 부활되고 부국강병책이 추진되어 왕권이 확립되고 그 위에서 대전체제가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53) 세조대의 경국대전 은 성종 초에 수정되었는 52) 집현전을 세종의 왕권강화를 뒷받침하는 기구로 보는 것은 타당한 면도 있으나, 집현전을 중심으로 왕실과 국가의 여러 의례가 정비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 때의 왕권은 세종 개인의 왕권이라기보다 는 오히려 국가의 수장으로서의 왕권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세종대의 여러 제도의 정비를 이해하는 데에서도 왕의 개인적인 지배보다는 국가의 공적인 지배를 합리화한다는 차원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53) 한영우, 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 (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편, 1973) pp.

- 126 - 國史館論叢 第26輯 데, 수정된 대전에서 의정부의 기능이 강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국왕중심체제에서 재상 중심체제로의 수정이 양자의 주요한 차이점 54)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통치체제정 비과정과 중앙집권제를 연관지어 해석한 부분은 거의 찾아지지 않으나, 다만 직전법의 실 시에 대하여 경제적 지반을 약화시킴으로써 관료의 특권을 배제하여 관료제도의 합리적 인 운영을 도모하고 그것을 통한 왕권 및 집권체제의 강화를 가져 오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며, 55) 관료의 특권배제는 그만큼 근세관료의 성격을 띠어가게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종대에는 성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권은 끝내 세조와 같은 전제권을 확립하지 못하였는데, 왕권의 약화는 다시금 중앙집권체제의 붕괴와 지방세력가 의 성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56) 그리하여 성종대는 대전체제가 형식상으 로는 완성되고 실질적으로는 붕괴되어 가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대체로 15세기를 대전체 제의 형성기로 부를 수 있다면, 16세기는 대전체제의 붕괴기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57) 여기서 특징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사항은 세조대에 편찬된 경국대전 은 왕중심체제 이었을 것인데 이것이 성종 초에 재상중심체제로 개편되었을 것으로 보는 점과, 직전법 등으로 관료의 특권이 배제되어 고용인의 지위로 이끌어 내려져 그만큼 근세관료의 성격 을 띠어가게 된 것으로 본 것 등이다. 그런데 직전법으로 관료가 고용인화하는 면이 있으 나 아울러 왕이나 국가가 관료를 통제하는 끈이 약화되었다는 측면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16세기를 대전체제의 붕괴기로 보는 것은 16세기에 정 치제도상의 부분적인 운용관행의 수정은 있었으나 체제자체를 크게 수정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보면, 역시 중앙지배층을 중심에 두고 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축으로 한 이해를 반 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정치를 왕권확립을 축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왕 개인의 정치적 능력 의 우열에 결정적으로 영향받지 않을 때에만 구조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하겠다. 정 치체제상의 왕권과 신권사이의 대립은 특정 개인간의 대립이라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 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동시에 개인의 정치력의 유무에 영향받지 않는 물적 토대에 의 해 뒷받침되고 규정되는 면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대립은 큰 맥락에서 지배체제를 깨뜨 196 201. 통치체제 정비의 내용에 대하여는 군역의 평준화와 병종의 정병으로 일원화, 진관체제 의 시행으로 국방체제의 강화, 잡색군의 재정비 강화, 호패법을 통한 호적개정사업과 보법의 시 행, 국가재정을 일원화하여 계출제입의 예산제도를 확립시킨 재정제도 개혁과 직전법의 실시 등 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한영우, 위의 논문 pp. 201 210). 54) 한영우, 위의 논문 p. 200. 55) 한영우, 위의 논문 p. 212. 56) 한영우, 위의 논문 p. 221. 57) 한영우, 위의 논문 p. 222.

- 127 - 리지 않는 범위내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사 10은 양반관료국가의 사회구조 로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부분은 1. 정치 구조, 2. 군사조직, 3. 학제와 과거제, 4. 중앙집권체제의 특성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세 편의 글에는 중앙집권적 정치구조의 내용을 다룬 것이나 중앙집권체제와 연관한 해석 은 거의 없다.58) 따라서 여기서는 4) 중앙집권체제의 특성 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4) 中央集權體制의 特性 59) 한우근 조선왕조의 정치는 명분상 왕권을 절정으로 하는 유교적인 양반관료에 의해서 통치되는 지배체제를 갖추었으나, 실제로는 유교적인 지배기구와 그 제도를 통해서만 권력이 행사 되게 마련이었으며, 또 실제로 정권이 왕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60) 그리고 양반 가운데 무반이 병권을 전적으로 장악할 수 없었는 데다 각 도의 병사 수사도 관찰사가 예겸하게 되어 있었고 그 밑의 병마절제사 첨절제사까지도 지방의 수령이 예겸 하는 경우가 많아, 결과적으로 무반에 대한 문반의 절대우위를 초래하여 무반을 문반의 종속적인 지위에 놓이게 하였으며, 본질적으로 병권을 장악해서만 확보될 수 있는 왕권을 실질상으로 허약하게 만들어서 조선왕조의 정치는 명분상으로는 왕정이고, 형식상으로는 문무 양반에 의한 관료정치라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문신만에 의한 지배체제를 이룬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하였다.61) 문반중심의 정치기구의 편제에 대해서는 행정과 사법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유 교적 정치기구의 기본구조는 대체로 크게 몇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는데, 행정의 중추기관인 의정부와 육조, 삼법사인 사헌부 형조 한성부, 언관의 기능을 하는 三 司, 유학교육 문서기록작성 제찬 경적인반 등의 임무를 맡는 여러 館院, 그 밖에 왕족과 그 외척, 공신에 대한 예우기관, 특수기술분배의 감당과 각종의 궁수 관수의 조달을 위한 여 러 院 寺 監 署 庫 등이 두어졌는데, 이러한 정치기구는 편제상 그 이상형을 주례 에 두고 있는 중국의 제도를 채용했던 여조의 것이 재편성된 것이었다고 하였다. 조선왕조 관료체제의 주요한 특징으로 ① 관료들의 생활기반을 중앙에 집중시켰다는 점, ② 고급관리에 대한 광범위한 겸임제의 시행, ③ 인사권의 집중, ④ 한품서용제를 들었다. 58) 참고로 목차의 대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치기구(차문섭) (1) 정치구조의 정비 (2) 중앙의 정치 구조(의정부 육조 삼사 승정원 의금부 문예기관 예우기관 국왕의 시측기관 6조속아문) (3) 지방의 정 치구조(한성부 개성부 8도 지방관과 관속) (4) 지방자치기구와 연락기관. 2. 군사조직(차문섭) (1) 군 사제도의 정비(중앙군제의 성립, 지방군제의 정비, 군사지휘기관의 정비, 군역) (2) 오위와 중앙군제 (오위제도, 오위의 군계급, 금군) (3) 진관체제와 지방군제(진관체제의 성립, 진관체제의 변화). 3. 학 제와 과거제(조좌호) (1) 학제(성균관 사학 향교 서원 기술계의 교육기관) (2) 사마시(고시과목 고시 방법 초시 복시) (3) 문과(식년문과, 기타의 문과, 고시절차 기타) (4) 무과 및 잡과(무과 잡과). 59) 이 글은 (1) 유교정치의 성격 (2) 정치관료구조의 성격 (3) 사회신분구조의 3절로 구성되어 있다. 60) 한우근, 中央集權體制의 特性 ( 한국사 10, 국사편찬위원회 편, 1974) p. 196. 61) 한우근, 위의 논문 p. 197.

- 128 - 國史館論叢 第26輯 ① 관료들의 생활기반을 중앙에 집중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토지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지배력을 되찾아서 국가가 田地 지급을 통하여 관료체제를 공고히하여 관료에게 지급되는 전지를 경기에 제한함으로써 그들의 생활근거를 중앙에 흡수 집중시켜 관리=지주 적 성격 이 농후하게 만들었는데, 이같은 조처는 관리가 지방에 생활기반을 확대하지 못하게 함으 로써 그들이 지방세력화되는 것을 미리 방지했던 것이며, 어느 토착세력으로 성장되는 것 을 방지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고 하였다.62) ② 고급관리에 대한 광범위한 겸임제의 시 행에 대해서는 문반경관직 내에서 특수기술관서와 여러 잡청의 책임직은 고급문관이 겸임 하도록 하여 겸직제를 통해서 소수의 고급관리가 운영의 책임을 맡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행정력의 분산을 막고 그것을 고급관리에게 집중시킨 것이며, 이들 여러 기관은 상하의 명 령계통이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병치되어 있어 소수의 명분상 책임고관을 통해서 국왕 에게 직속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63) ③ 인사권의 집중에 대해서는 인사권은 이조낭관 의 손에 의해서 좌우되게 마련이었다고 하였다.64)④ 한품서용제에 대해서는 적서관념에서 그리고 기술직이라는 직업관념에서 차별대우를 하여 품계승진 과정에서 참상관 당상관이 되는 데는 엄격한 제한을 가하여 결과적으로는 소수의 고급관리에 의한 권력집중의 효과를 기했다고 하였다.65) 이를 종합하여 양반관료의 생활기반을 경기에 집중시킨 조선왕조의 지배적인 권력은 수기치인지학 (유학)을 專修하고, 첩의 자손이 아닌 순수양반인 소수의 고 급관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 하였다.66) 그리고 지방통치구조에 대해서는 ① 군현제도의 철저한 실시,67) ② 주부군현의 명호는 인구의 다소로 정해졌으나 그 위격의 승강이 있었던 점,68) ③ 경관으로 파견한 모든 외 직(관찰사, 수령)에 대한 긴박책,69) ④ 향리에 대한 여러 가지 견제책의 시행 등을70) 지 적하였다. 62) 한우근, 위의 논문 pp. 200 201. 63) 한우근, 위의 논문 p. 202. 64) 한우근, 위의 논문 p. 202. 65) 한우근, 위의 논문 p. 204. 66) 한우근, 위의 논문 p. 204. 관료의 성격에 대해서는 혈통 문지 직업 조상의 공과 등이 결정적인 영 향을 미쳤고 엄격한 신분적인 제약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 관료정치라는 것은 중세적인 신분구조의 기반 위에 구축된 것이어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관료정치는 물론 아니었다 (한우근, 위의 논문 pp. 216 217)고 하였다. 67) 속현이나 향 소 부곡이 완전히 직접 지배를 받는 군현으로 개편 흡수되어 모든 군현에는 반드시 중앙관리(京官)를 직접 파견하게끔 되었는데, 이와 같은 군현제의 전면 실시는 중앙집권적인 시 스템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한우근, 위의 논문 pp. 204 205). 68) 명호는 순전한 행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중앙권력에 의해서 정치적 조종을 받게 된다 고 하였다(한우근, 위의 논문 p. 205). 69) 관찰사 임기(360일), 수령의 본향 부임 금지, 족친 상피제 적용 등을 지적하였다(한우근, 위의 논문 pp. 205 206). 70) 其人役, 원악향리에 대한 처벌 등을 들고 권장포상책도 잊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 129 - 이상을 조선왕조의 통치체제는 어디까지나 중앙집권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 정치권력은 소수의 중앙고급관리에 의해서 장악되게 마련이고 모든 관리의 생활기반 이 중앙(경기)에 집중되는 중에도 고급관리만은 관리지주의 성격을 농후하게 지속했던 반 면에 일반 하급관리는 고용화된 것이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전면적인 군현제의 실시에 따라서 종래의 토착세력은 일반적으로 향리로 격하되고 모든 외관은 중앙관리(경관)로 파 견하여 중앙의 직접지배하에 놓이게 하는 동시에 지방장관(관찰사 수령)에 대해서는 임 기 상피제 고과 등에 의해서 그들이 지방세력화되는 것을 방지했다. 그 위에 토착세력으 로 잔류하게 된 향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제책과 장려보상책으로 그들의 발호를 예 방했던 것이다 고 요약하였다.71) 사회신분구조 에서는 유교적인 지배체제를 확립하여 가는 사이에 관료지배계층이 그들 의 신분적인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서얼 기술직자 그리고 경외아전들을 지배그룹에 서 배제하여 하나의 특수한 신분 그룹으로 규제하여, 세조-성종조를 거치는 동안에는 이 른바 양반 중인 서민 천민이라는 네 가지 사회계급이 구성되게 되고 유교적인 양반지배체 제는 이 같은 신분적 구조를 기반으로 부지되어 갔던 것이므로 조선왕조의 정치구조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정치라고는 하지만 그 기반은 봉건적인 신분사회에 놓여 있는 것이라 고 하였다.72) 이 글은 중앙집권체제의 특성을 유교정치 일반에서 논의를 시작하여 조선적인 특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이 사회신분구조 위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의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거의 없는 실정으로 인하여 이 글은 아직까지 도 이 부문의 연구를 사실상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비슷한 지적을 여러번 하였지만, 이 글의 경우에도 문제점은 구체적인 사실 설명보다는 틀에서 찾아진다. 말하자면 중앙집권체제의 내용은 여러 모로 설명하면서도 그 체제가 딛고 서 있는 경제적인 기초와의 관계를 포괄하여 설명하려는 노력이 미흡하 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의 핵심부분인 관료체제의 여러 특성들이 사회의 경제적인 기초와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전체로서 설명하는 데 이르지 못한 느낌을 준다. 관료체제의 주요한 특성 가운데 첫째로 든 관료의 생활기반을 중앙에 집중시켰다는 지적의 경우를 보면, 과 전만을 중심으로 하여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조선초기에 이미 전국적으로 지주층이 광범 하게 존재하였고, 그들이 중앙관인의 모집단으로 기능하면서 정치의 주체로 성장하여 갔 음을 고려하면 관료의 생활기반을 중앙에 집중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교육제도상에서 전국의 모든 군현에 500丁 이상이 되면 鄕校에 敎官을 파견하 71) 한우근, 위의 논문 pp. 207 208. 72) 한우근, 위의 논문 pp. 214 216.

- 130 - 國史館論叢 第26輯 고 생원진사시와 문과 무과의 초시합격자를 중앙에 비중을 두면서도 전국에 안배한 데에 서도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급관리에 의한 광범위한 겸임제의 시행의 경우에도 고급관리에 권력이 집중 되었다는 사실의 지적보다는 고려시기 속아문제가 시행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兼判事制와 6조의 속아문제가 시행되는 조선초기의 提調 사이의 차별성을 지적하는 것이 조선초기 중앙집권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고려 이래의 귀족적 인 한계와 조선적인 발전이 뒤섞인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이는 한편으로 조선초기 에 들어 정치와 행정이 차츰 분리되어 가는 추세와도 어느 정도 상관이 있는 것으로 보 이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아쉽다고 하겠다. 인사권이 이조낭관에게 집중되었다고 하는 것은,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 같다. 오 히려 인사권에서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강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大夫 곧 4품 이상 의 경우 대간의 署經이 면제됨으로써 왕의 인사권의 행사가 관료군의 제약에서 벗어나면 서 한편으로 인사에 대한 추천 등의 행정적인 절차가 이조에 온전하게 이관됨으로써 인 사의 공적인 성격이 강화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조낭 관의 인사에 대한 권한은 이러한 공적인 인사관행이 쌓인 위에서 가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외관의 경우 수령이 군사지휘관을 겸하는 것을 지적한 것은73) 매우 중요한 지적이나 시기에 따른 그 의미 자체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나아가지 않고 다만 체제가 문반 관료 위주로 기능하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데 그치고 있다. 말하자면 수령이 군사지휘관을 겸 하는 것이 많아지게 한 집권체제의 안정화와 진관체제와 같은 군사편제의 발달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이 미흡하다. 그리고 수령의 구체적인 운용을 조선초기에 한정하여 보면 세 종대의 경우와 같이 왕이 친히 부임하기 전에 수령을 인견한 것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교육 과거제도가 중앙집권적으로 정비되고 기능한 면을 빠뜨린 것도 지적할 수 있겠다. 이는 지배층의 사회적 편제와 관료의 재생산 과정에 대한 관심의 부족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에 중앙집권적인 관료제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었다고 한다면 그 것은 거꾸로 보아 지배층이 전국적으로 분산하여 존재하고 그들이 중앙에 의해 교육 과거 제도를 통해 효과적으로 편제되고 재생산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정치가 봉건적인 신분제의 기반 위에 놓여 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나, 그 속에 사회의 발전에 따라 고려시기에 비하여 변화 된 모습이 내포되어 있는 성격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74) 73) 그런데 이는 조선초기에 한정하면 적절하지 않은 면도 있는데, 이 글이 조선 전 시기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 131-7. 조선통사 75) 중앙집권체제의 재편성 에서는 양전을 통하여 방대한 양의 隱結들이 查收된 것을 리조 봉건국가의 중앙집권력이 전국적 범위로 강력히 침투되어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의 의미 76)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개별적 량반지주들이 과다하게 국가의 공민들을 개인 소속의 사민으로 예속시키는 것은 중앙집권적 봉건국가의 물질적 기초를 위협하는 것 77)으로 보았고, 사병의 존재를 리조 봉건국가의 중앙집권력을 배제하는 요 소로 78) 보아 15세기 초에 사병제도가 철폐되고 통일적인 국가적 군대 제도-부병 제도 의 확립은 중앙집권적 군사력을 일층 강화하였다 고 하였다.79) 또한 상업의 발전 을 설명 하면서 당시 봉건국가는 비 강화된 중앙집권 을 발동시켜 상인 길드의 독자적인 발전 의 여지를 전연 주지 않고 이를 직접 장악 통제하였다 80)고 하였다. 중앙집권적 봉건통치체제의 강화 에 대해서는 매개 사회의 경제구조에는 그에 상 응한 상부구조로서의 사회적 사상과 정치적 기구들이 서게 되는 것이다 81)는 전제위에서 리조 봉건국가의 국왕은 봉건 통치계급을 대표한 절대군주로서 일체의 권력이 그의 수 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의 권력은 원칙상 그 어떤 국가기관에 의하여, 또 그 누구에 의 해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경국대전 에도 국왕 자신에 대 해서는 그 어떤 제한도 규정할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중략) 관료들의 의견 여 하를 막론하고 국왕의 의사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82)고 하였으며, 결론적으로 요컨대 15 세기 중엽에 정비 강화된 통치기구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엄격한 봉건적 계층 관계를 기저로 해서 조직되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계층적인 매개 고리는 직접 국왕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비상히 강화되었다는 것과 전제주의적 군주 국가 의 진면모를 여실히 반영한 것이 었다 83)고 하였다. 74) 조선초기 신분제에 대한 논의는 한영우교수에 의해 15세기의 발전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제기되어(한영우, 朝鮮前期의 社會階級과 社會移動에 관한 試論, 제 7회 東洋學學術會議 講 演抄, 1977) 이성무교수와의 논쟁을 거쳐, 유승원교수의 朝鮮初期身分制硏究 (을유문화사, 1987)를 통해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75) 조선통사 상(과학원출판사, 1963). 76) 위의 책 p. 456. 77) 위의 책 p. 458. 78) 위의 책 p. 460. 79) 위의 책 p. 461. 80) 위의 책 p. 476. 81) 위의 책 p. 496. 82) 위의 책 p. 493. 83) 위의 책 p. 496.

- 132 - 國史館論叢 第26輯 이 책은 북한 당국의 정책적인 입장이 관철되어 있는, 현재의 역사창조에 주체로 활동 하고 있는 근로대중을 위한 통사로 서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책의 성격이 위에 서 검토한 개설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이는 중앙집권체제의 기초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의 강화, 집권적 봉건국가의 물질적 기초를 위협하는 사병의 폐지, 중앙집권력의 상업에 대한 통제등을 강조하는 서술 방향에 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 자세는 중앙집권제에 대하여 지배관계의 근저에서 출 발하여 설명한다는 점에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타당한 것이라 하겠다. 다만 조선초기 중앙 집권제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보다는 전체적인 성격 규정에 치우친 듯하여 구체성 의 면에서 한계를 안고 있다. 이는 결론적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비상히 강화되었으 며 전제주의적 군주국가의 진면모를 여실히 반영한다고 규정지으면서도 내용 설명이 미 흡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론적인 규정의 제약과 연구성과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겠으나 전제주의적 군주국가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데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설에 대하여 논의를 크게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에 나온 한국사통론 (변태섭, 1986)이 기존 개설의 내용을 정리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논의의 진전을 위한 제안을 겸하여 초보적인 시 론 정도의 견해를 과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Ⅲ. 과제와 제언 우리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조선초기 사회에 대하여 비교적 많은 지식을 축적 하여 왔다. 그러나 앞의 개설서 검토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초기를 중앙집권적인 사회 로 규정 하면서도 중앙집권제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여기서는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의 본질적인 성격에 다가가기 위하여 풀어나가야 할 과제와 방도를 나름대로 제언하고자 한다. 1. 시 각 지배구조는 그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 위에서 짜여지고 운영되는 것이어서 지배구조의 성격은 사회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를 종합한 위에서 바르게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생산 력 수준이 낮고 분화가 덜한 사회일수록 정치와 경제그리고 사회 사상은 더 직접적으로

- 133 - 서로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조선초기 사회는 농업에 기초를 둔 신분제사회였다는 점에서 보면, 지배구조를 좁은 의미의 정치에만 한정시켜서는 중앙집권적인 구조가 지니는 본질 을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제대로 구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신분) 사상 등을 되도록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시각이 필요하다 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에서 검토한 여러 내용들은 수준의 차이는 다소 있더라도 모두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기왕의 노력이 있었음에 도 이러한 시각을 먼저 든 것은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부분적이었거 나 시기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 자체를 하나의 전체로서 구 조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과 역사발전의 긴 흐름 속에서 연결하여 파악하려는 노력과의 결합이 미흡하였던 데서 오는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 수준, 생산관계가 변 하는 흐름과 긴밀하게 연관하여 정치적 지배구조를 파악하고 그 상관을 논리적으로 체계 있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더욱 요청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계기적인 인식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들은 역사의 계기적인 인식을 전제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계기적인 인식은 해당 연구대상 시기나 분야 안에서의 계기적인 인식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조선 초기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경우, 조선초기의 변화상을 설명하는 데는 계기적이고 구조적 인 인식을 보이고 있으나 전후시기에 대한 인식은 충분히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 다고 하겠다. 15세기를 중심으로 한 조선초기 사회의 정치적 구조에 대한 설명은 앞뒤 세 기와 이어지는 맥락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며, 또한 15세기 안에서도 초반, 중반, 후 반에 따른 계기적인 변화를 전제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계기적인 인식을 사 회의 정치 부문에만 한정하지 않고, 경제 사회 사상의 부문에도 비슷한 정도로 넓혀가야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힘이 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배구조를 생산대중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신분제사회의 정치적 지배구조는 상층의 지배신분을 중심으로 짜여지고 운영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생산을 담당한 대중 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층을 중심으로 지배구조에 접근하고 해석하는 것은 기껏해 야 당시의 지배구조가 지니고 있었던 합리적인 측면을 끄집어내는 데 그치고 말아, 지금 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전체 사회에 작용하는 지배구조의 기능과 그 성격을 제대로 구명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2. 토지생산력과 토지제도

- 134 - 國史館論叢 第26輯 앞에서 살펴본 개설들의 경우 대체로 토지제도를 중앙집권의 경제적인 토대로서 주목 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은 토지제도에 국한되어 토지제도 아래의 토지소유 관계를 축으로 하는 생산관계, 그러한 생산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토지생산력에까지 나아 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의 기초가 되는 농업에서의 변화와 중앙집권제와의 연 관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건국이 토지제도를 과전법으로 고친 뒤에 이루어진 점만을 보아도 조선 초기 중앙집권제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의 전제로서 이 시기 토지생산력과 생산력 과 생산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고려후기를 거치면서 휴한농법단계를 극복하고 토지생산력이 상경농법단계로 발전하였고 세종대를 거치면서 하삼도의 선진적 인 농업기술이 북부지역에까지 확산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전세제도가 공법으로 바뀌어 간 것은 기왕의 연구로 밝혀졌다. 다만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 및 선진 농업기술의 전국적인 확산과 토지제도 전세제도의 변화에 대한 정치사적 맥락에서의 구체적 설명이 충분치 않고, 사회의 여러 제도가 정비, 재편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따져보는 작 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토지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 가 바뀌어 가고 사회의 생산관계가 변하면서, 그 위에서 지배층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제 도가 조정되어 가는 과정을 조선초기 사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인 성격과 연관하여 파악하고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토지제도에 대해 국가재정을 뒷받침하는 조세를 마련하는 제도로서, 지배층 가운데 관료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장치로서 파악하여 왔다. 그런데 중앙집권적 권력 에 의해 마련된 토지제도에 대하여 국가재정을 뒷받침하고 중앙관료의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장치로서의 면만을 지적하는 것은 표피적인 지적에 그치는 감이 있다. 중앙집권 제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제도 아래에 놓여 있는 농민과 토지소유자와 농민간 의 관계를 중앙집권제와 연관하여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곧 토지제도의 아래ᅵ에서 토지생산력에 기초하여 형성된 농민과 토지소유를 매개로 농민을 지배하는 지 배층과의 사회적 관계로서의 생산관계를 정치적 측면에서 분석할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전세제도가 바뀌는 것도 국가의 재정확보와 토지 소유계층의 이익이 관철되는 것을 함께 고려한 위에서 농민의 저항 성장까지를 아우르는 접근이 필요하다. 과전을 비 롯한 사전에 국가적인 제약이 단계적으로 가해지는 것도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 그 구조 를 움직여 간 토지소유계층을 하나의 틀 속에서 파악하여 그 정치적인 측면을 설명하여 야 할 것이다. 나아가 상경농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토지소유권의 모든 계층에게 보편 적으로 인정되고, 토지의 파악이 토지소유자의 직역과 분리되어 형식상 所耕田 위주로 파 악되어 모든 토지에 단일한 원칙에서의 징세를 지향한 것이나, 국가재정이 잡곡보다는 미 곡 위주로 짜여지면서 밭농사 위주에서 논농사 위주로 전환되어가는 사정 등도 중앙집권

- 135 - 적 지배구조와 연관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토지와 농민의 관계, 농민과 토지소유자와의 관계, 농민 및 토지소유자와 중앙 집권적 지배구조와의 관계를 하나의 틀로 설명할 수 있어야 조선초기 중앙집권적 지배 구조의 물질적 기초에 대한 토지중심의 정확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상경농법 의 단계에서의 농민에 대한 인식적 예속 지배와 휴한농법 단계의 농민에 대한 인식적 예 속 지배의 차이를 밝히는 것은 고려와 조선의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의 차별성을 밝히는 작업의 하나가 될 것이다. 3. 戶口의 파악과 役制 호구의 파악이나 역제와 중앙집권제와의 연관에 대해서는 토지제도의 경우보다 관심을 덜 쏟았다. 호구의 파악에 대한 연구는 사회나 경제에 대한 관심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역 제에 대한 연구는 군사제도와 요역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리하여 호구의 파악이 나 역제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중앙집권적인 지배구조를 전제로 한 것임을 상정한 위에 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나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 연관된 성격을 파악하여 설명하는 데 에는 미흡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조선 초에 이르러서는 고려 초에 표방한 田丁連立 의 원칙을 폐기하 고 역을 편제하는 방식을 새롭게 마련하여야 했다. 이에 조선초기에 노동력을 동원하고 군역을 부과하는 구체적인 실상과 그 변천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의 한 단면을 드러낼 수 있는 지표가 될 것이다. 조선초기의 호구 파악은 국가의 필요나 대상계층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는데, 농민과 중앙집권적 국가와의 상관을 축으로 하여 보면 결국 농민을 그 토 지에 묶어두고 경작을 강제하면서 필요에 따라 농민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징발하려는 데 주된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와 관련하여 자연촌인 里 단위에서 호 구를 파악하면서도 지배층에 속하는 品官戶의 경우 많은 餘丁이 사실상 용인되는 사정 등도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 연관하여 정치적인 기능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역의 편제는 현실의 토지소유의 분화 위에서 파악한 소경전의 규모를 기준으 로 이루어졌다. 중앙정부에서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군역과 요역이었다. 군역의 경우 농민군은 정권유지의 기초가 되는 군사력이라기보다는 국방에 필요한 군사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군과 봉족의 관계, 중앙군과 지방군의 일원화 과정, 정권을 유지하는 군 사의 역과 국방군의 역 사이의 차별성 등과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의 연관에 대한 해석 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중앙군이 대체로 甲士를 주축으로 강화된 데 비하 여 국방위주의 水軍은 차츰 그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져 水軍世傳 의 법이 마련되었고, 정

- 136 - 國史館論叢 第26輯 권이 안정되면서 중앙군과 지방군의 파악방식이 일원화되고 전국적인 군세통제체제가 진 관체제로 확립되어 병종이 정병으로 일원화되자 곧 사족을 위한 병종이 따로 마련되면서 정병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져 대립과 피역이 전사회적인 현상으로 확산된 것 등과 중앙 집권적 지배구조와의 연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요역동원 방식이 計田法으로 바뀌어 八結出一夫 의 役民式으로 정착된 것이나, 면리제의 기능 강화 및 고려식의 호가 해체되고 조선식의 호가 성립한 것과 중앙의 호구 파악 편제방식을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 연관하여 따져보고, 각 계층에 따라 호구파악방 식이나 의미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조선초기의 중앙집권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4. 신 분 제 조선초기 사회가 신분제사회였으므로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신분적인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서 중앙집권제와 신분제사이의 연관은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관심 의 수준은 대체로 관료제와 신분제사이의 개별적인 차원에 그치는 정도여서, 전체 사회에 작용하는 신분제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의 연관을 파악하여 설명하는 데는 미흡하였다. 그리고 조선초기 신분제에 대한 이해는 良賤制로 보는 시각이 제기된 이후 논쟁과 연구 를 거쳐 신분제자체에 대한 논의는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나,84) 양천제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의 연관에 대한 검토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양천제설의 대강은 모든 주민을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고 양인 안에서의 법제적인 차별 을 신분적인 것이 아니라 계서적인 것으로 하여 양인내부의 형식적인 평등이 표방되었다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앙집권적 권력과 연관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먼저 양인과 천인 을 나누는 기준이며, 다음으로 천인을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천인의 존 재가 양인내부에 어떤 작용을 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정치 경제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는 것이다.85) 그리고 어떤 농민을 천인으로 할 것인가 양인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국가 와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층간의 대립적인 측면이 있었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84) 한영우, 朝鮮前期의 社會階級과 社會移動에 관한 試論 ( 제 7회 동양학학술회의강연초, 1977) 유승원, 朝鮮初期身分制硏究 (을유문화사, 1986). 85) 필자의 생각으로는 양인과 천인을 나눈 목적은 결국 양인이 천인을 소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공적으로 소유하였을 경우에 이를 국가기관에서 관리하면서 公賤이라 하였고, 개인이 사 적으로 소유하는 경우 私賤이라 하였다. 따라서 양천제가 표방하고 있는 양인 내부에서의 형식적 인 평등이란, 그 속에 담긴 발전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와 노비소유의 차등에 의해서 사 실상 기초에서부터 무너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토지와 노비소유에서 우위를 점한 지배층과 남의 땅을 빌어 농사지어야 하는 농민간의 양천제에서의 형식적 평등에 담긴 내용은 극히 제한적 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 137 - 하는 점 등이다. 조선초에 이르러 齊一的인 양천제가 표방된 것은 토지에서 常耕이 이루어진 것을 반영 하는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적인 면과 함께 양천제에는 지배층의 이익이 관철 되고 있는 면도 있는데, 그러한 점이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가를 설명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양천제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의 연 관이 조선초기 안에서는 15세기 초반, 중반, 후반에 따라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밝혀 단계 적인 설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지배층 내에서 직역에 따른 구별이 차츰 신분적 인 벽으로 굳어져 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과 조선초기의 중앙집권적인 구조는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인지도 구명되어야 하겠다. 요컨대 조선초기 양천제가 고려후기 이래의 토지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한 사회적인 성 과라는 인식을 전제한 위에서 양천제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 속에서 작용한 기능에 대하 여 정치적인 해석을 가해야 할 것이다. 5. 정치제도 조선초기 중앙집권제는 위의 여러 변수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정치제도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정치제도의 중앙집권적인 특성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위와 같은 여 러 부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개별적인 관서를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위에서 언급한 여러 부 문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이에 정치제도 자체의 기준이 되는 틀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과제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먼저 관직의 서열과 관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기능하면서 역사적으로 변천하여 왔던 관품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관품과 관직을 구체적으로 매개하는 관 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제도의 구체적인 운영에 대한 분석이 요청된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 위에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관서들의 짜임새와 그 아래 맞 물려 있는 지배의 구체적인 장인 군현을 지배하는 군현제를 축으로 하는 지방통치제도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제도와 그를 뒷받침하는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도 이같 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 안에서 지배층을 재생산하고 관인을 충원하는 중요한 장치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군사제도도 권력의 물리력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지 배층이 관원으로 승진하는 데나 녹봉을 받아 생활하는 것과 관계되는 측면에서도 파악하 여 지배구조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1) 관직관품체계

- 138 - 國史館論叢 第26輯 관품체계와 관직 사이의 연관에 대해서는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조선초기의 정치구 조가 문반 우위의 소수 고위관료에 권력이 집중된 체제임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도의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일한 권위와 체계를 갖는 관품체계가 요 청된다. 조선초기의 관품체계는 고려초부터 발전해 온 관품체계의 연장선 위에 있으며, 고 려시기와 달라지는 점은 관품이 관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기준으로 기능 한다는 점이다.86) 관직과 신분의 지표인 관품이 구체적인 관인이나 관직으로부터 분리되 어 그 자체가 기준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신분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할 뿐만 아 니라 정치제도의 내용을 이루는 관직구조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사항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살펴보면, 조선의 관품은 18品 30階로 이루어졌 는데, 관품에서의 기본적인 구분선은 4품과 5품 사이에 있어 大夫(將軍)와 士(郞, 尉)로 그 칭호를 달리하였다. 그리고 관직과 연관하여 정 3품 상계인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 그 아래를 당하관이라 하였으며, 종 6품을 기준으로 그 이상을 참상관, 그 아래를 참하관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정 1품은 좁은 의미의 대신이라 하여 그 정치적인 역할이 특히 중요시 되었고, 종2품 이상은 넓은 의미의 대신으로 간주되어 제조를 맡거나 하여 중앙정계에서 정치적인 역할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다. 정 3품 상계인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이라 하여 이들은 기본적으로 정치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아 근무일수에 관계없이 왕의 명령에 의하여 승진이 되었다. 참상관과 참하관은 거관하여 승진하는 데 필요한 근무일수에 차별 이 있었다. 인사발령에 있어서도 大夫 이상은 왕의 敎旨에 의하였으며 대간의 서경이 면 제되었는데 비하여, 士인 郞階의 경우는 敎牒의 형식으로 발령되었고 대간의 서경을 거쳐 야 하였다. 이를 고려시기에 모든 관원의 인사에 대간의 서경이 필요하였던 것에 비교하 면 왕의 인사에 관한 권한이 강화되면서 귀족적인 성향이 줄어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와 함께 인사에 관한 실무는 사실상 정권을 잡은 대신이나 이조, 병조에 위임되는 현상은 궤를 같이하여 전개되었다. 관품 관직체계와 연관하여서는 관품체계의 정비와 사회발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과 지배층의 확산에 따라 중앙집권적 지배구조 안에 지배층을 편제하는 합리적인 기준의 마 련이 요청된 것이나 종친계, 문산계, 무산계, 잡직계, 토관계 등 여러 관품체계 간의 구조 적인 연관을 밝히고, 관직간의 서열과 중앙집권적인 구조와의 상관을 관품을 매개로 설명 하는 것 등이 주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관품체계의 확립과 왕권의 강화 사이의 연관을 밝히는 것도 요청된다. 2) 행정체계 86) 이는 관직을 띠지 않더라도 관품을 통하여 지배층의 일원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에 따라 중앙과 거의 동질적인 지배층이 전국의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관직의 수 보다 훨씬 많은 규모의 지배집단으로 효과적으로 편제할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 139 - 조선초기 중앙관서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 결과 중앙의 행정체계에 대 한 기본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앙과 지방을 포괄하여 행정체계 를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미흡한 면이 있다. 중앙의 행정체계 가운데 중앙집권적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屬衙門과 屬司제 의 보편적인 시행이다. 중앙의 행정체계는 王-議政府-六曹-各司의 체계가 기본축이 되었 으며, 필요에 따라 의정부 대신이 육조를 兼判書制를 통하여 장악하기도 하였고, 육조의 속아문인 각사 가운데 주요 아문에 提調를 두어 2품 이상의 관료가 각사를 장악하여 왕 과 직결되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는 고려시기에 宰臣이 서열에 따라 으례 6부의 尙書를 겸하였고 각사의 경우에도 대부분 兼判事가 장악하여 왕과 직결되도록 하면서 속 아문제가 거의 시행되지 않은 것에 비하면 매우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귀족적인 성향이 탈색되고 관료적인 경향이 강화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관직과 관품이 분리되어 관품이 지배층의 지표로 기능하게 된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체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왕권의 강화 로 설명된 여러번의 관제개혁이 있었 던 것이다. 고려말 도평의사사에 집중된 권력을 군사기밀과 정치 행정으로 분리하고, 다 시 군기와 왕명출납을 중추원과 승정원으로 분리하고 정치와 행정을 의정부와 육조로 분 리하면서 간쟁을 맡는 사간원을 의정부에서 떼어 내었다.87) 그리고 이러한 왕권의 강화 과정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은 이 시기에 왕의 공적인 면이 특별하게 강조된 점이다. 곧 왕권의 강화가 왕실의 대표로서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왕의 공적인 성격이 강화 되면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88) 중앙과 지방은 초기에는 행정과 군사가 상당히 분리되었으나 왜구 등의 침입의 위험이 줄어들면서, 중앙에서 문신의 우위가 구조적으로 정착되고 지방에서는 국방상의 요지를 제외 하고는 차츰 행정과 군사가 지방관을 중심으로 묶여가게 되고 관찰사를 매개로 하 여 중앙과 연결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에는 군현의 자립도가 높아진 발전이 놓여 있었 으며, 15세기에는 상당기간 과도적인 형태인 界首官이 중간에서 기능을 하였다. 행정체계의 중앙집권적인 특성은 중앙의 정치제도는 물론 중앙의 제도와 지방의 제도 사이의 관계에서도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원을 대상으로 관직을 배분하는 인사원 칙의 확립 과정과 조선초기를 거치면서 그 위에서 조선적인 인사관행이 어떻게 형성되었 87) 이는 정치 행정 군사기능을 분리하여 왕을 중심으로 체계를 잡으면서 왕명의 출납과 언론에 대한 대신의 정치적인 간여를 제도적으로 차단한 것으로 이해된다. 88) 왕권의 강화로 해석할 수 있는 4품 이상의 署經 면제, 堂上官의 왕의 特旨에 의한 승진, 輪對, 奔 競의 금지, 과거에서 座主門生制의 혁파와 殿試의 확립, 朋黨에 대한 금지, 군사지휘권의 집중, 관 찰사의 권한의 제약, 內需司의 강화, 講武에 의한 군사력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권의 확보와 親軍의 강화 등의 현상은 왕의 개인적인 권한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해석할 수도 있으나 宗親이나 外戚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통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가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왕의 권한의 강화라는 측면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140 - 國史館論叢 第26輯 는가에 대한 분석도 정치제도의 운영과 연관된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고 알려진 것처럼 2 품 이상의 고관에게 정치권력이 집중된 것과 조선초기에 이루어진 정치와 행정이 초보적 인 분리 사이의 상관도 중앙집권제라는 관점에서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육조에 속사가 갖추어진 것, 서반의 관직을 동반이 체아직으로 차지하게 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중앙집권제와 연관된 검토와 해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세력과 연관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제도적인 장치의 존재여부도 검토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조선초기 적인 특성도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3) 군현제도 조선초기의 군현제는 대체로 중앙정치의 관점에서 제도의 정비에 중심을 두고 이해되 어 왔다. 그 결과 고려 때의 향 소 부곡 등이 소멸되면서 자연촌을 기초단위로 하는 군현 제가 짜여지면서, 중앙-도-군현의 행정체계가 단일하게 갖추어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런데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의 기초가 되면서 동시에 중앙권력의 구체적인 지배의 장으로 서 군현에서의 지배의 실상에 대한 구명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군현은 곧 중앙권력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공간이었는데, 토지와 호구의 파악 에 기초하여 전세와 공물, 요역을 부과하여 거두고 군역 등의 신역을 징발하는 것은 군현 을 매개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진관체제가 세워지면서 수령이 군사지휘관을 그 등급에 따라 겸하게 되자 군현제는 한편으로 국방체계와 맞물리게 되었다. 이는 국방과 치안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은 당시의 사정에서 보면 지배체제의 이중적인 확립으로 볼 수 있다.89) 이렇게 조선초에 이르러 군현제가 보편적으로 짜여져 중앙집권적인 지배구조 의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여 휴한농법이 극복되 어 전국의 대부분의 토지가 매년 경작되어 각 군현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력이 생겨나 고, 관직과 신분의 기준이었던 관품을 띤 지배층이 전국적으로 비교적 고르게 존재하게 된 바탕에서 힘을 발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에 군현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군현내의 구조도 농민에 대한 지배가 향리에게 위임되는 고려적인 형태에서 자연촌의 성장 위에서 정착해 간 면리제에 유향품관을 적극 적으로 끌어들여 이를 매개로 수령이 직접 통치하는 형태로 짜여져 갔다. 이에 따라 수령 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는데, 그 한면이 부민고소금지법으로 수령의 통치권을 보장해 주면서 한편으로 왕이 새로 부임하는 수령을 친히 引見하여 守令七事 등을 중심으로 선 정을 당부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군현제의 지역적인 차이나 군현의 경제적인 자립도가 높아져가는 과정에 대한 89) 행정의 책임자가 곧 군사책임자가 됨으로써 지방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수령 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사실상 중앙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근본에서부터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 141 -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군현제의 정비과정과 중앙집권제가 확립되는 과정 의 연관이나 군현제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에서 한 기능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설명이 보 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려면 지방의 군사제도와 행정체계를 좀 더 구체 적으로 연관시켜 파악하여 그 성격을 밝히고 군현단위에서 지배층의 존재양태와 그 변화 상을 파악할 것이 요청된다. 그리고 중앙집권제의 정비와 하삼도의 연해축성, 북방에서 실시하던 진관체제의 전국적인 확대 실시 등과의 연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요컨대 군현제도는 중앙집권제의 토대라는 이해 위에서 지방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분석되고 군사제도나 중앙의 여러 제도와 운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중앙집권적 지 배구조 안에서의 기능이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4) 교육 과거제도 교육 과거제도는 신분제의 바탕 위에서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양성하 고 선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교육 과거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많지 않 을 뿐 아니라 그 정치적인 기능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소홀한 편이었다. 조선의 신분제가 형식상 보편적인 양천제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교육제도와 과거제도에 서도 보편적인 원칙이 표방되었으나 그 안에는 중앙권력을 장악한 정치집단의 이익이 실 질적으로 관철되는 장치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육제도에서 법제상의 차별적인 규 정을 두지 않았고 과거 응시에도 특별히 자격을 제한하지 않았으며, 문과 무과, 생원 진 사시의 초시를 전국적으로 치루어 일정한 합격자를 각 지방에 배정한 것과 지방교육제도 인 향교의 경우 호구가 500丁이 넘으면 다른 조건없이 중앙에서 敎導를 파견하여 전국에 퍼져 살고 있는 지배층에 대하여 중앙에 거주하는 지배층에 비하여 원칙적으로는 질적인 차별을 하지 않았다.90) 그러나 중앙집권적인 지배구조하에서 중앙정치세력을 걸러내는 장치로서 기능을 한 과 거제도에 중앙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한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모든 시험의 초 시합격자는 중앙에 모여 회시를 치뤘으며, 문과와 무과의 경우 전시에서 그 차서를 정함 으로써 왕의 권위를 관철하였다. 그리고 생원 진사를 성균관에 모아 일정한 기간을 공부 하게 하여 성균관과 한성부의 초시에 응시 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91) 전국적인 향교 교육과 초시 합격자의 배정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왕권의 지지기반을 전국적으로 넓혀서 중앙집권적인 지배구조로 전국의 지배층을 포섭하는 정치적인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92) 90) 이러한 것이 가능하게 된 바탕에는 전국적으로 常耕이 가능하게 되면서 지주층이 전국의 어느 곳 에나 존재할 수 있게 된 사정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91) 성균관시와 한성시가 향시에 비하여 경쟁율이 적어 붙기가 쉬웠다고 하더라도 生員 進士들에게 조 차 이러한 제약을 가하였다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하여 보면, 지방에서 생원진사시에 붙지 못한 교 생들이 문과의 초시에 응시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초시에 합격하였더라도 성균관시나 한성시에 입격한 경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불리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142 - 國史館論叢 第26輯 중앙집권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관료의 선발이라는 면에서 보면, 문과가 주로 당상관 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치집단을 걸러내는 기능을 한 데 비하여 생원진사시는 전국에 퍼져 있는 지배층을 정치적으로 포섭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중앙지배층의 모집단을 형성해 내는 기능을 하였다. 그리하여 생원진사층은 15세기를 지나면서 전함관인과 함께 지방정치의 주도적인 집단으로 성장하여 갔을 것이다. 조선초기의 교육 과거제도가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원칙 아래서 운영된 측면을 밝 혀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중앙집권제와 연관하여서는 교육제도와 과거제도가 정치권 력의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중앙정치세력의 모집단과 핵심적인 중앙정치 집단을 걸러내는 장치로서 기능을 한 측면을 밝혀내는 것이 더욱 의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 제도와 관품, 관직과의 연관도 이러한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5) 군사제도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에 대한 연구는 다른 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그 러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서인지 군사제도와 정치제도나 중앙집권적인 지배구조와의 연관에 대해서는 조선 건국초의 사병혁파와 왕권강화를 위한 중앙군의 강화 등을 설명하 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물론 이러한 측면도 중요하지만, 지배구조의 성격과 연관하여서 는 군사 제도의 짜임이 중앙권력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정당 성이 확보된 제도적인 측면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조선왕조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았던 건국 초에는 정치와 군사의 관계가 더 밀접 하였다. 이 때에는 국방보다는 정권안보를 위한 군사력의 확보가 더 시급하였다. 그리하 여 사병의 혁파나 한량품관이 중심이었던 시위패에 대한 통제, 친군으로서 甲士의 강화 등은 주로 왕권의 강화와 연관되어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지배층 내부에서 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의 성격을 군사제도의 측면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와 함께 이 시기에 국방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水軍, 지방의 營鎭軍 등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지방군사제 도가 정비되는 과정과 보편적인 군현제가 정비되는 과정 사이의 연관을 좀더 구체적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 정권이 안정된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군사에 대한 파악은 중앙군과 지방군의 파악방식 이 일원화되어 갔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중앙권력의 정당성이 군사제도상에 어떻게 관 철되었는가를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병종의 正兵으로의 단일화와 保法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지배층의 이익이 중앙권력과 어떻게 대립되었으며, 세조 사후 보법이 조정되는 과정에서 그러한 사정은 어떻게 배려되었는가 등이 밝혀지면 군사제도 92) 송준호, 科擧制運營에 있어서의 地域割當制의 成立過程과 그 意義 ( 全北大論文集 5, 1963).

- 143 - 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와의 연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전국이 鎭管體制로 짜이게 된 것은 군사제도라는 관점에서 검토는 이루어져 왔으 나 그것이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에 대한정치적인 해석은 충 분치 않았다. 군사제도의 사회적인 성격을 반영하는 한 단면은 15세기 중엽에 크게 정비되었던 雜色 軍의 분석을 통하여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천제하에서의 군역의 구체적인 실 상을 분석하고 정군과 봉족 사이의 군사를 매개로 한 경제적인 관계뿐만이 아니라 지방 사회에서의 정치적인 관계까지를 검토한다면, 신분제속에서 군사제도가 중앙집권적 사회 의 유지 재생산과 어떠한 연관이 있었는가에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요컨대 군사제도에 대한 분석이 국방의 관점을 넘어서서 신분제하에서의 사회계층의 정치 군사적인 편제라는 데까지 확대되어 군사제도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이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Ⅳ. 맺 음 말 이상에서 개설류에 대한 개략적인 검토를 통하여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설에 대하여 살 펴보았다. 우리는 조선초기의 정치나 사회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 한 지식이 역사상을 구성하는 살아 있는 전체 속의 부분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역사상의 사회를 하나의 구성체로 파악하여 체계적 이고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역사인식이 부족하여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조선초기 사회는 중앙집권적인 사회로 규정하면서도 그 특성을 정확하게 지적하여 종합 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초기 중앙집권제에 대한 인식은 오래 전부터 전제되어 왔으며, 정치제도 등에 대 한 구체적인 지식이 늘어나면서 차츰 확대되어 왔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에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편)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이후 정치제도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 되었음에도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주로 시각의 제약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하나의 구성체로 보는 시각에서 좀더 종합적이고 계기적인 인식의 체계를 모색하 여야 하겠다. 먼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물질적 기초에 대한 관심을 토지제도나 군

國史館論叢第 26 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