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戰爭硏究 全南 東 南地域을 中心으로 李 相 宴 Ⅰ. 序 言 Ⅱ. 崔益鉉 林炳瓚 義兵과 그 影響 Ⅲ. 湖南倡義所의 義兵活動 1) Ⅳ. 安圭洪 義兵의 活躍 Ⅴ. 東 南地域 義兵의 終熄과 義兵의 限界性 Ⅵ. 結 語 Ⅰ. 序 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舊韓末(이하 韓末로 표기)의 朝鮮王朝는 그 자체 속 에 內在한 구조적 모순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대립 갈등의 연속에서 그 末期的 症狀을 노 정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한말의 위기의식은 안팎으로 더욱 고조되었으니 안으로는 전근대적인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반항하는 민중의 저항이 폭발하거나 內燃하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이 날로 가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江華島條約 이후 日本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 침략은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피폐를 재촉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체의 힘으로 체제유지와 旣得權 수호가 불가능한 위정자들은 외세와 결탁하여 민중운동을 탄압하였으니 동학농민혁명의 진압과 만민공동회의 해산이 바로 그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민중이 지향하는 反外勢의 자주독립과 反封建의 민주화를 통해 서 近代化를 이루려는 역사적 물결을 협조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안일과 무사를 위해 외세에 줄타기를 하면서 自强과 改革의 길을 외면해 버렸다. 그러한 가운데 민중은 탄압과 수탈로 빈사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나라의 운명은 위기에 처해 오다가 드디어는 1904년부터 노골적으로 침략을 개시한 일본제국주의의 먹이로 전 락하고 말았다. 日帝는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1904년 2월에 러 일전쟁을 일으키면서 韓日 1)* 全南大學校 史學科 副敎授.
- 204 - 國史館論叢 第23輯 議定書를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간여, 군사요지점령 그리고 외교권침해를 기했고 이어서 제 1차 韓 日協約을 강요하여 顧問政治를 실시했다. 그리고 러 일전쟁이 유리하게 진행되자 日帝는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미국과 영국의 협 조와 양해 속에서 얻어냈고 러시아와는 포오츠머드조약을 통해 그것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에는 乙巳條約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統監府를 설치하 여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실질적으로 이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自決을 통해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는가 하면 상소활동을 벌이면서 救 國을 외치기도 했고 言論活動이나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역량을 기르자고 나서기도 했 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온 몸을 던져 나라를 건지려는 투쟁을 전개했던 사람들도 많 았으니 五賊暗殺團의 활동이나 의병항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의병항쟁은 한말에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일제침략자와 여기에 결탁한 위정자 및 친일분자들을 공격목표로 벌인 구국투쟁으로 衛正斥邪派의 유생과 민중이 한 데 뭉치 어 전개한 외세저항운동에서 시작하였다. 전근대체제의 수호세력인 위정척사파의 양반 유생들과 그것을 부정하는 민중들은 악랄 한 일제침략자들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운명을 구출하기 위해 같은 대열에서 생 명을 던지고 싸워서 일제침략의 예봉을 꺾고 우리나라의 운명을 연장시켰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언제나 정의와 조국애에 불타는 충성으로 구국의 선봉에 서왔던 전남인들은 을사조약 이후에 전개 된 5적암살단 활동과 후기의병 항쟁1)을 주도적 으로 이끌어 나갔다. 전기의병에서 호남의병은 동학농민혁명의 좌절과 허탈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게 일어 났으며 침략자인 일본군과는 물론이고 親衛隊나 鎭衛隊 병사와도 싸움 한 번 못해 보고 왕의 선유를 받아 해산했다. 그러나 長城의 奇宇萬 奇參衍, 昌平의 高光洵 등이 주도한 호남 의병은 光州를 거점으로 하여 전남지역 13고을을 휩쓸었으며 羅州 관찰사는 도망쳤 고 참서관과 군수 총순 각 1명이 살해되었다.2) 그런데 을사조약으로 인한 실질적 망국에 저항하는 후기의병은 1906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여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은 호남지역이었고 호남 인이 그 주역이었다. 1907년 말부터 본격화 된 후기의병 항쟁의 양상을 보면 1908년에는 전남의병이 의병 의 교전횟수로는 전국의 13.9%였고 참전의병수로는 12.7%였으며, 1909년에는 의병의 1) 韓末의 義兵活動을 흔히 乙未事變과 斷髮令에 반발하여 봉기한 1차의병과 乙巳條約을 계기로 일 어난 2차의병, 그리고 군대해산 이후의 3차의병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1차의병을 전기의병, 그리 고 2, 3차의병을 후기의병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본고에서는 후자를 취하겠다. 그것은 을사조약 이후 2차의병의 전개과정에서 3차의병으로 확산되었으므로 연속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2) 拙稿, 韓末의 民族運動 長城地方의 義兵活動을 中心으로 ( 人文科學 2, 1985) pp. 7 8 참조.
- 205 - 교전횟수로는 전국의 31.8%였고 참전의병수로는 45.6%였으니3) 전남지역은 일제침략을 저지하는 최후의 보루였고 그것을 통해서 전남인의 정의감과 애국심을 잘 표출해 주었다. 그러므로 일제침략자들은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이란 전남의병의 소탕작전을 치루고서야 그들의 한국병합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남지방의 의병활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한말의 의병사를 이 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과제이며 近 現代史의 脈을 연결시켜 주는 요긴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은 이미 전남 서 북지역의 의병활동을 살핀 바 있어4) 전남의병을 총체적으로 고찰 하기 위해 본 연구를 시도한 것이다. 전남의 동 남지역은 智異山과 그 支脈들이 걸쳐 있어 지리적으로도 의병활동에 적합한 지역이며 여기에 호남인의 정의감과 구국일념으로 가득찬 충성심의 표출은 이 지역의 의 병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게 했다. 한국사에서 의병활동에 대한 학문적 성과는 이 분야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에 비해 별 로 큰 축적을 남기지 못한 상태이다.5) 특히 이 지역에 관한 깊은 연구로 姜吉遠 洪英基 兩氏의 力作이 있기는 하나6) 이 지역 의 의병활동 전반을 두루 살폈다고 볼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의병활동에 대한 연구에 많은 애로가 있으니 그것은 첫째, 의병항쟁의 주체인 우리측의 자료와 침략자인 일제측의 자료가 서로의 입장을 강조한 것들이라 객관적인 실 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고, 둘째, 의병대열 자체에 內在해 있는 限界性의 추출과 의병 활등의 繼起性을 심층적으로 살피기 어렵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본고는 을사조약 이후에 활동한 후기의병의 주축을 이루었던 全南地方에서 東 南地域의 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Ⅰ(1965) pp. 295 296. 4) 拙稿, 앞의 논문 참조. 5) 李求銘, 韓末義兵史硏究 ( 史叢 19, 1975). 金義煥, 日帝의 朝鮮侵略과 初期義兵鬪爭考 初期義兵의 鬪爭相과 義兵將들의 사상을 중심 으로 丁未年(1907) 朝鮮軍隊解散과 反日義兵鬪爭 韓末義兵運動의 分析 ( 韓國近代史 硏究論集, 1975). 姜在彦, 反日義兵運動의 歷史的 展開 ( 韓國近代史硏究, 1982). 朴成壽, 1907 10년 間의 義兵戰爭에 대하여 ( 韓國史硏究 1, 1968)., 義兵戰爭의 身分意識構造 ( 韓國史學 2, 1980). 李炫熙, 韓末義兵抗日運動管考 ( 高大文理大學報, 1959). 姜吉遠, (海山 全垂鏞의 抗日鬪爭 ( 歷史學報 101, 1984)., 澹山 安圭洪의 抗日戰爭 ( 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論叢, 1988). 洪英基, 安圭洪義兵의 組織과 그 活動 ( 韓國學報 49, 1987, 겨울호)., 舊韓末 沈南一義兵의 조직과 그 활동 ( 동아연구 17, 1989). 趙東杰, 雙山義兵陣所(和順)의 義兵城과 武器製造所 遺址 ( 韓國獨立運動史硏究 4, 1990). 拙稿, 앞의 논문. 6) 姜吉遠 洪英基의 위의 논문.
- 206 - 國史館論叢 第23輯 의병항쟁을 그 始終과 系列別 상황을 살피고 亡國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의병항쟁의 한 계성을 검토하여 한말의병항쟁의 眞面을 살피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많은 자료와 상충되는 내용들의 是非를 가리는 어려움 때문에 이 분야에 더 많 은 관심의 촉구와 문제제기에 自足하고 싶다. 관심 있는 先學들과 同學들의 많은 질정을 바란다. Ⅱ. 崔益鉉 林炳瓚 義兵과 그 影響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진원지였던 전남지방은 혁명으로 수 많은 인명과 재산의 상실로 폐 허가 되어 버렸고 生存者들마저도 좌절과 허탈에 빠져 전기의병은 다른 지방보다 늦게 일 어났으며 왕의 선유를 받아 해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병대열의 전국적인 현상으로 유생의병장들은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했지만 의 병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민중들의 향방은 일정치 못했다. 농지를 가진 농민은 농업으로 되돌아 갔지만 유랑농민이나 화적 그리고 동학여당들은 안주할 生業이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동학농민군과 의병 그리고 火賊이나 英學黨 西學黨 南學黨 등의 이름으 로 민족적 계급적 요구의 실현을 지향한 민중들의 상호관계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기록들에서 동학농민군과 의병 그리고 화적들의 칭호가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것 을 보면 실제로 그들이 轉身하여 活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京師金姓女 受嚴貴妃旨 祈醮于金海地 火賊馬中軍所掠 馬湖西人 甲午投東匪 丙申投義兵 亡 命嘯聚 7) 위에서 火賊인 馬中軍은 甲午年에는 동학농민군이었다가 전기의병시인 丙申年에는 의병 으로 활약했고, 1899년에는 화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黃玹은 의병의 반수가 동학농민군이었다고 지적했고, 의병들이 土匪로 바뀌어 警報가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8) 또한 동학농민군이 전기의병을 거쳐 西學黨 英學黨 南學黨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英學 黨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였던 興德 古阜 茂長 高敞 등지에서 활동했다. 즉 서울에서 만민공동회의 示威에 참가하여 연설까지 했던 李化三과 동학접주로 망명 중인 李二先 등 이 주동하여 1898년 12월에 흥덕군을 점령하고 군수를 축출하여 公事를 집행했다. 그로 인해 李化三 등이 구속되었다. 그런데 1899년 5월 4일에 흥덕군에서 영학당들이 李化三 7) 黃玹, 梅泉野錄 (국사편찬위원회 편, 1955) 光武 3년 己亥 10월. 8) 黃玹, 위의 책 建陽 丙申 2월 및 丙申 夏 4월.
- 207 -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봉기하자 인근 각 군의 영학당들이 호응하여 27일에는 400여 명이 무장군아를 점령했고 28일에는 흥덕군아를 그리고 29일에는 고부군아를 점령했으며, 5월 31일에는 고창군아를 습격했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30여 명이 사살되고 6명이 생포된 채 실패한 사실이 있다.9) 그리하여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던 의병들의 일부는 화적이나 서학당 남학당 영학당 등으 로 전전하면서 그들의 반봉건적 투쟁을 계속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농민층의 분해 로 발생한 유랑농민들의 주축을 이룬 이들은 1900년부터 1905년까지는 活貧黨 활동을 전개하여 그들의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을 활발히 했는데 그것을 밝혀주는 연구업적들이 많다.10) 그러므로 동학농민군으로 혁명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일부는 1896년의 전기의병에 참여 했다가 해산된 후 東匪 火賊 서학당 영학당 남학당 등으로 활동하다가, 1900년부터 1905 년까지는 남한일대에 馬中軍 孟監役 등의 조직을 가진 활빈당으로 반봉건 반제국주의 활 동을 계속하면서 상황변화의 추이를 주시하여 왔던 것이다. 한편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勅使의 진두지휘하에 하야시 (林權助)公使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駐韓日軍司令官의 무력지원을 받아 1905년 11월에 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統監府를 설치하여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 이 되었다. 일제의 악랄한 침략정책에 희생의 제물이 된 한국민은 亡國이나 다름없는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항하여 민족정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上疏活動 殉國抗爭 言論에 의한 규탄, 密使를 통한 구국활동, 매국노의 암살활동, 국채 보상운동 등의 전개를 통해 을사조약의 파기와 일제침략의 저지 그리고 친일파 처단을 주 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국활동 중 가장 격렬하고 적극적이었던 것은 일제침략자와 附日 輩(土倭)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의병항쟁이라 할 수 있다. 후기의병의 중심지였던 全南義兵의 발화점은 崔益鉉 林炳瓚 등의 丙午義兵이었다. 勉菴 崔益鉉은 衛正斥邪派의 주창자였던 華西 李恒老의 首弟子로 일찍이 大院君을 탄핵 하여 下野하게 했고 1876년 강화도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때 五不可疏 를 올리고 折斧伏 閤하여 당시의 유생들로부터 명망과 기대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최익현은 淵齋 宋秉璿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고 뜻이 통하는 관료나 俛宇 郭鍾錫 艮齋 田愚 등에게 같이 거사하자고 편지를 보냈으나 응 9) 韓末 英學堂 李化三等 供草 및 愼鏞廈의 위 보고서 解題( 韓國學報 35, 1984, 여름) pp. 244 260. 愼敎授는 특히 영학당사건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재발한 것이며, 이 운동은 농민의 만민공동회운동이며 동학의 개화운동이라고 주장했다. 10) 吳世昌, 活貧黨考 ( 史學硏究 21, 1969) 및 姜在彥, 앞의 논문. 朴賛勝, 活貧黨의 活動과 그 性格 ( 韓國學報 35, 1984, 여름) 참조.
- 208 - 國史館論叢 第23輯 답이 없자 그는 함께 일할 사람과 일할 곳이 없음을 한탄했다. 그때 興德에 사는 제자 高 石鎭이 樂安과 任實 郡守를 역임한 林炳瓉과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진언을 하자 마음을 작정했다. 崔益鉉은 그를 따르는 호남의 유생들을 위해 1905년 인근 익산군 임피면에서 講學과 論文을 한 일이 있었고, 寶城의 白景寅이나 李白來 등 뜻 있는 선비들이 그를 찾아 나라 를 걱정했고 대책을 논의했다.11) 최익현은 을사조약의 체결을 보고 倡義討賊疏 를 올려 倡義의 당위성을 밝히고 8도의 名 儒들에게 글을 보내 倡義救國을 역설하고 전국의 동문 제자를 동원하여 擧義를 준비했다.12) 그러한 과정에서 최익현은 정의를 사랑하고 충성심이 강하여 국난을 당할 때는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호남인의 기상을 높이 사게 되었고, 李白來 白弘寅과의 접촉도 있었던 가 운데 흥덕에 사는 제자 高石鎭의 진언이 주효하여 호남을 거점으로 거병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최익현은 먼저 1906년 음 1월 제자 고석진을 시켜 泰仁의 임병찬과 접촉하게 하여 의 사를 타진했고, 2월 9일에 鎭安에 사는 제자 崔濟學에 게 서신을 주어 임병찬을 찾아가 구체적인 협의를 하게 했다. 최익현은 이미 2월 21일에 의병봉기를 위해 泰仁으로 출발하여 윤 4월 1일에 임병찬을 만나 이곳의 상황을 묻자 임병찬은 재정이 고갈되고 농무가 한창 바쁜 시절이니 가을을 기다려서 거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면암은 시일이 급하다고 재촉하므로 성 패를 不計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삶을 버리고 거사해서 대의를 천하에 외칠 수밖에 없다고 거병을 서두르기로 하여 윤 4월 13일로 거사를 결정했다.13) 면암은 閔泳奎 便에 倡義를 알리는 소장을 올려 전 낙안군수 임병찬과 합력하여 13일 에 거병하여 북으로 올라가서 伊藤博文과 長谷川好道를 불러 을사조약을 철회시키고 각 부의 고문관이란 것을 없애고 모든 우리 國權을 침략하고 우리 민생을 박해하는 전후의 勒約을 萬國의 公論에 회부하여 바로 잡겠다고 밝혔다.14) 또한 면암 최익현은 8일 潭陽 龍秋寺에서 松沙 奇宇萬과 南道 선비 50여 명을 만나 결 의를 다지고 면암의 명의로 격문을 崔在學이 작성했는데, 모두가 힘을 합쳐 원수 오랑캐 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그 소굴을 불지르며 역적의 도당을 섬멸하여 나라의 명맥을 튼튼히 하자는 내용으로 순천 낙안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에 통고 하게 했으니 바로 전남의 동 남지역을 중요 대상으로 했다.15) 11) 臨戰日錄 에 의하면 李白來는 자주 최익현을 찾아 시국을 논의했고 擧義를 綾州 雙峯寺에서 하기로 했으며 白景寅이 최익현 명의로 발표한 謹告八道士民書를 찬술하였다 함. 12) 勉菴先生文集 附錄 권3, 年譜 참조. 13) 習齋實記 권上, 乙丙擧義日記 윤 4월 1일. 14) 위의 책 윤 4월 2일. 15) 위의 책 윤 4월 8일.
- 209 -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은 드디어 윤 4월 13일(양 6월 4일) 泰仁의 武城書院에서 講會를 통해 왜적이 국권을 장악하고 逆臣이 죄악을 빚어내어 500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를 위해 死生을 초월한다면 천지신명이 도울 것이라고 역설한 후 사생을 같이해서 거의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즉시 일본정부를 성 토하는 글을 보냈는데 일본이 저지른 죄악 16가지를 열거했으니, ① 甲申年에 변란을 일으켜 임금을 옮기고 재상들을 죽인 죄. ② 甲午年에 大鳥圭介가 궁궐을 불태우고 제도문물을 폐기시킨 죄. ③ 乙未年에 국모를 시해한 죄. ④ 철도부설 어장 산림 항해 등의 이권을 침탈한 죄. ⑤ 일본의 한국토지 점령 친일배를 추천한 죄. ⑥ 철도 토지 점령 일본군율 실시를 계속한 죄. ⑦ 한일의정서로 국권침탈한 죄. ⑧ 충신과 공론을 막은 죄. ⑨ 일진회를 만들고 애국단체를 탄압한 죄. ⑩ 한국인을 외국에 팔아서 학대한 죄. ⑪ 전신국 우체국 등 통신기관을 장악한 죄. ⑫ 顧問政治를 실시한 죄. ⑬ 억지로 차관을 제공하고 재정을 정리하며 화폐제를 고쳐 일화를 유통시켜 착취하고 日 人을 고빙하여 혈세를 축낸 죄. ⑭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⑮ 외교를 감독하는 통감이 政治를 전담하는 죄. ⑯ 移民規例를 정해 人種을 바꾸려는 죄. 등 모두가 구체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일본의 침략행위와 배신을 규탄한 글이었다.16) 최익현 임병찬이 의병을 일으키니 흥덕의 高龍鎭(고석진의 형)이 강종회 등과 포수 30 여 명을 거느리고 참여했고, 15일에는 井邑을 점령하여 무기를 접수하고, 16일에는 淳昌 을 점령해서 楊允淑 蔡永賛 등이 포수 수십명을 인솔하고 참여하여 부서를 정한 후 倭兵 10여 명을 성밖에서 격퇴했다.17) 17일에는 谷城에 진입해서 18일에 郡守로 하여금 軍器를 바치게 한 후 長城으로 향하 여 蘆嶺의 地理를 이용하자고 했다. 이날에 長城의 金松鉉 嚴德祚가 포수 수십 인을 거느 리고 합세하였다. 19일에 長城을 떠나 淳昌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日兵을 격퇴하고 얻은 정보에 의하면, 全州觀察使 韓鎭昌과 淳昌郡守 李建鎔이 왜병을 인도하여 의병을 謀害하 려 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大怒하여 군수를 죽이려 했으나, 李郡守가 죄의 용서를 빌자 그를 선봉장으로 삼아 淳昌邑으로 진입했다. 20일에는 광주관찰사 李道宰가 사람을 보내 16) 위의 책 윤 4월 13일. 17) 위의 책 윤 4월 14 15 16일.
- 210 - 國史館論叢 第23輯 해산을 권유했으며, 광주진위대의 50명 병정이 玉果 30리 지점에 육박했고, 全州 南原의 진위대 병사들이 진격해 왔다. 면암 최익현은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해산을 종용하니 20여 인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진위대의 본격적인 공격을 받아 中軍將 鄭時海가 대전하 다 쓰러지니 남은 자는 12인이었고, 21일을 지낸 후 22일에는 체포되어 全州로 押送되어 최익현 임병찬의 병대는 막을 내렸다.18) 의병을 일으킨 지 10일만에 최익현 임병찬의 호남의병은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하 고 해산하고 말았지만 그것이 끼치는 영향은 전남지방은 물론 전국에 매우 컸다. 특히 전 남의 동 남지역은 최익현 임병찬 의병이 스쳐 갔고 谷城에서 준비차 회합을 갖고 동참을 권유한 글을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포했다는 점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선 光陽에 은거 중인 前主事 白樂九가 李恒善(李光先이라 칭하기도 함) 盧元集 蔡相 淳 柳秉禹 등과 거병하니 의병의 수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19) 백낙구의병대는 9월 20일 밤을 기하여 順天邑을 기습하려고 약속을 하고 출동하였는데 각지의 응원부대들이 연락착 오로 도착하지 못해 기다리다가 날이 밝자 병정들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어 굽히지 않고 항거하다가 古今島에 유배를 당했다. 그는 1907년 봄에 석방되어 의병에 가담하였다가 泰仁에서 전사했다.20) 또한 高光洵은 昌平出身으로 松沙 奇宇萬 省齋 奇參衍과 함께 전기의병에 참여했고, 왕 명으로 해산된 후 재기를 도모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최익현 임병찬 의병과 합류하고자 했다. 鹿泉 高光洵은 이보다 앞서 을사년에 5적의 무리가 왜놈의 위세를 빙자하여 祖宗의 강토를 동해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생각하여 吳駿善 奇參衍 등과 함께 松沙 奇宇萬의 집에 모여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고자 맹서했다. 그리하여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켜 최익현에 게 달려 갔으나 최익현 등이 체포되자 南原으로 들어가서 梁漢奎와 함께 거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南原을 점령했다. 그러나 梁이 流彈에 맞아 순국하자 의병대가 敗走하여 高光洵 은 잔병을 수습해 和順으로 향했다.21) 이때의 일제측 기록은 崔의 잔당은 끊임없이 민심을 선동 도발하고 있었는데 1906년 양 11월 4일 본도의 유생으로서 최익현을 따르는 光陽郡의 白樂九, 長城郡의 奇宇萬, 昌 平郡의 高光洵 李恒善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직한 前郡吏 등과 통모하여 求禮郡 中大寺에 모여 총원 50여 명(총기 10여 정)으로 다음날 5일에 거사, 구례로부터 광양군을 통과하 여 7일에 순천에 이르렀다 고 되어 있다.22) 18) 위의 책 윤 4월 17일 22일. 19) 黃玹, 앞의 책 光武 10년 丙午 9월. 20) 李瑄根, 白樂九 略傳 ( 韓國獨立史 ) 참조. 2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湖南義兵列傳 義兵將 高鹿泉傳 吳駿善 撰 (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0) 참조. 22) 전남폭도사 pp. 21 22. 전남폭도사는 전남도 경무과에서 1913년에 작성한 전남의병의 활 동기록인데 李一龍氏가 입수하여 秘錄 韓末全南義兵鬪爭史 로 번역하여 1977년에 출간함.
- 211 - 고광순은 화순의 능주 동복 구례 광양 순천을 무대로 활약하다가 세력이 약해지자 군대 를 해산하고 昌平에 은거했다. 그 후 1907년 8월 4일에 고광순은 朴聖德 高濟亮을 도총 및 선봉으로 삼고 申德均 尹永淇 등을 참모로 삼아 昌平에서 再起하여 求禮로 향하다가 7 일에 同福의 순사주재소를 습격한 후 구례의 燕谷寺에 유진하니 동복 순천 곡성 광양 구례 등지에서 의병이 참가하여 그 수가 1000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고광순의병대는 분산되 어 훈련을 하고 윤영기 신덕균 등은 광주로 해산군인을 소모하려 떠난 상황에서 광주의 기노(木野)中隊 및 오까자끼(岡崎)보좌관 이하의 정찰대가 기습하여 9월 17일에 연곡사 에서 고광순 고제량 등 13명이 전사했다.23) Ⅲ. 湖南倡義所의 義兵活動 全南의 東 南地域에서는 1907년 음 3월에 梁會一 林昌模 李光先(일명 恒善) 李允善(李 白來의 字임) 등이 綾州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의병에 대한 칭호로 여러 견해 가 있으니 雙峰寺중심의 의병,24) 雙山義所,25) 그리고 湖南倡義所26)라 명명하고 있어, 모두 그럴만한 주장이라고 생각되나 본고에서는 호남창의소로 부르겠다. 桂棠山 중심으로 거병한 호남창의소는 梁會一 중심의 杏史實記 27)와 李白來 중심의 臨戰日錄 28)에서 각각 그 주인공을 盟主 혹은 都大將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1907년 3 월의 의병봉기는 양회일이 맹주인 것 같고 1908년 이후의 호남창의소는 이백래가 主將이 라 생각된다.29) 梁會一은 綾州 五柳村(현 和順郡 梨陽面)에서 1856년(哲宗 7)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뜻을 키우고 학문을 연마하다가 1894년(甲午)에 世道가 크게 변함 23) 高尼山, 鹿泉公行狀 ( 尼山遺稿 및 全南暴徒史 ) pp. 26 27 참조. 24) 본인은 교양잡지인 錦湖文化 1989년 3월호에서 臨戰日錄 의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는 견 지에서 雙峯寺가 의병봉기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쌍봉사 중심의 의병 이라 칭했다. 25) 趙東杰 교수의 앞의 논문에서 의병의 근거지가 雙山이기 때문에 그렇게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 고 여기에는 양회일 이백래 임창모 의병대는 물론 安圭洪 의병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 다. 그러나 안규홍 의병을 여기에 포함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26) 洪英基, 舊韓末 湖南倡義所에 대한 몇가지 문제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학술발표회, 1989. 11. 4)에서 그렇게 주장했는데 檄告文이나 각종 榜文에서 湖南倡義所를 명기하고 있으니 그러 한 칭호가 타당할 것 같다. 27) 杏史實記 는 杏史 梁會一에 관한 기록으로 1950년판과 1958년판이 있는데 모두 4권으로 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1958년판을 이용했고 盟主 이하 구성원 略傳은 1950년판을 이용했다. 28) 臨戰日錄 은 李白來 의병장이 陣中에서 작성한 日記이며 1960년 3월 그의 長姪 李容植이 정리했는데 사료로 이용할 때 많은 검증이 필요할 것 같다. 拙稿, 解題 ( 全南史學 2, 1988) pp. 193 194 참조. 29) 杏史實記 권3, 行狀 安圭容 撰.
- 212 - 國史館論叢 第23輯 을 보고 1896년(丙申)에 山中에 茅屋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 후 귀향하여 국가가 날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킬 뜻을 가지고 당대의 명망가인 老柏 鄭載圭와 松 沙 奇宇萬을 찾아가서 큰 격려를 받았다. 그는 을사조약 후 분개하여 두문불출하고 있었 는데 淵齋 宋秉璿과 勉菴 崔益鉉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鹿泉 高光洵 省齋 奇參衍과 의논했더니 각각 근거지에서 起兵하여 원수를 갚자고 했다. 그는 고향의 子弟 100여 인 과 家財 3000金을 기울여 원근의 智謀人들을 모집하여 1907년 3월에 기병하였다. 한편 일제측의 기록에는 양회일은 벼슬이 없으나 양반으로 재산이 많으며 학자이자 애 국의 선비로 인근에서 명성과 덕망이 있었다. 그러나 의거에 관계하고 나서부터 점차 가 산을 탕진하여 친척의 전답을 잡혀 2000여 원을 마련해 기병했다고 되어 있다.30) 그런데 梁會一의 동생인 梁會龍은 家狀에서 起兵過程의 서술로, 당시의 山野에 도적이 성하여 1906년에 郡守가 이것을 막기 위한 自衛組織으로 各坊 里가 총포를 사서 경비하 게 했는데 그 책임을 양회일에게 맡겨 그것을 의병의 봉기에 활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安圭容의 行狀이나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후술할 이웃 고을인 寶城에서 起兵한 安圭洪의 기록에도 이러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自警團이 의병조직으로 轉身 한 것 같다.31) 양회일은 林昌模 李白來 安賛在 柳泰京 申泰焕 鄭世鉉 등과 같이 여러 차례 의논하 1907 년 음 3월 9일에 雙峰(桂棠山)을 본거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부서는 다음과 같다.32) 盟 主 梁會一 總 務 梁烈默 參 謀 林相永 朴重一 梁壽默 書 記 李秉華 都統將 李光彥 副統將 盧鉉在 先鋒將 林昌模 副 將 辛在義 中軍將 安淇煥 後軍將 崔基杓 (食+高)軍將 林魯福 安賛在 砲軍將 柳炳珣 義 士 鄭世鉉 金大鉉 車在文 魯寅洙 李允善(白來) 梁昌默 鄭淳祐 全信默 梁台默 鄭淳學 梁東默 裵鳳圭 梁在東 南甲宗 鄭乙鉉 梁在錫 朴孟鍾 林魯成 金炳圭 具祐 徐必桓 事實不傳義士 李仲鉉 金成伯 金泰善 趙乃成 金永彬 全龍默 金坤庸 尹行源 30) 전남폭도사 p. 24. 31) 杏史實記 권3, 家狀 梁會龍 撰.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趙東杰 교수의 앞의 논문에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32) 杏史實記 권4, 盟主 이하 주요 구성원 略傳.
- 213 양회일의병은 起兵前인 1907년 1월 19일 盟主 梁某의 이름으로 檄告文 을 발표하고 기병과 동시에 誓告軍中文 을 발표하여 의병봉기의 당위성과 의병의 행동방향을 분명히 했다. 격고문 에서는 君父가 훼손을 당하고 국모가 화를 입으면 人臣된 자는 마땅히 원수 를 갚아야 하는데 丙子通商 이후 甲午年과 乙未年의 滅義와 비통을 당했으며 乙巳年의 변 괴로 5백년의 사직과 3천리 강토가 다 무너졌다. 淵齋 宋秉璿 勉菴 崔益鉉 趙秉世 閔泳煥 등의 원로들이 순국했으니 우리 모두 일어나서 왜를 물리치고 逆臣들을 응징하기 위해 3 월 상순에 雙山義所에 참여하라고 역설했다.33) 또한 誓告軍中文 에서는 동지들이 合心하여 五賊을 섬멸하고 伊藤을 죽여 국가의 수치 를 갚기 위해 서로의 지킬 바 5조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34) 條約 1. 軍資 三千金은 이미 마련했으니 村民을 침략하지 말 것. 1. 器械兵仗은 往年의 防禦時 官에서 허가된 것으로 大砲 30柄 小砲 50柄이 있어 사용할 수 있고 各坊에 있는 民砲도 收用할 것. 1. 당당한 의병은 正名을 위선하고 行軍時 平民을 害하는 일이 없을 것. 1. 선봉 중군 후군 諸將은 각각 그 임무를 지켜 서로 다른 부서를 침범하지 말 것. 1. 都砲將은 砲軍을 거느리고 步卒將은 步兵을 거느려 각각 부서를 지키고 위반하지 말 것. 이러한 제조항을 잘 알아서 지키되 위반자는 군율이 있을 것임. 양회일의병대는 3월 9일(양 4월 21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활동하다가 양회일 등이 체포되어 수뇌부를 잃고 잔여부대가 綾州로 퇴각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흩어진 것 같다. 그간의 활동상을 보면 음 3월 9일에 李光彥 柳秉禹 義將이 군병을 거느리고 합세하여 능주로 향해 자정을 기하여 郡衙와 倭憲兵 分遣所 및 稅務署를 습격하고 전주를 넘어뜨려 전선을 절단하고 양총 5정과 군도 3자루 총탄 700여 발을 노획하고 건물과 倭人의 집을 불지르고 화순을 향해 진군했다.35) 이러한 양회일의병의 전과는 일제측의 기록과 날자나 피해상황이 일치하고 있어 양회 일 이광선 등의 의병 100여 명(총기 45정)이 군아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총 5정을 노획했 음이 틀림 없다.36) 또한 양회일의병은 3월 10일(양 4월 22일) 초저녁에 화순군아와 분견소를 습격하여 33) 檄告文은 杏史實記 에 1907년 1월 19일 梁某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臨戰日錄 에는 1907 년 3월 湖南倡義所의 명의로 되었는데 날자는 起兵日을 감안하면 杏史實記 의 기록이 타당한 것 같으며 그것으로 미루어 격고문의 발표자는 湖南倡義所 盟主 梁會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34) 杏史實記 에는 날자가 없고, 臨戰日錄 에 3월 9일 盟主의 명의로 되어 있어 이 서고군 중문 은 3월 9일 기병과 동시에 발표한 것 같다. 35) 臨戰日錄 1907년 양 4월 21일. 36) 전남폭도사 p. 23.
- 214 - 國史館論叢 第23輯 전선을 끊고 건물을 불질렀으며 양총 6정과 군도 3자루 총탄 500여 발을 노획하고 일진 회원의 집을 불질렀다고 하나 일제측의 기록은 군아와 분파소를 공격하여 보조원 3명과 교전한 다음 동복방면으로 퇴각했다고 되어 있다.37) 그리고 양회일의병은 3월 11일(양 4월 23일) 정오에 동복군아와 왜분파서를 습격했으 나 일본측이 미리 대비하여 겨우 양식을 보충하고 건물을 불지른 후, 광주쪽으로 향하다 가 광주와 경계지점인 刀摩山에서 적의 추격을 받아 大將 鄭世鉉아 죽고 梁會一 林昌模 李允善 安賛在 柳泰京 申泰焕 등 6명이 체포되었다.38) 양회일 등은 광주에 수감된 후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모든 사실을 시인하여 政事를 변경 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자의 죄로 사형에서 1등을 감하여 종신형에 처하여야 하나, 우매 몰지각하여 1등을 감하여 양회일 임창모는 流 15년에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이윤선은 流 10년에 처했다.39) 그 후 동년 양 7월 8일에 이들의 유배지를 全南 智島郡 智島로 결정하여40) 복역 중 1907년 12월 3일에 純宗의 즉위를 기념하여 赦典詔勅에 의해 양회일 등이 석방되었다.41) 그 후 양회일은 귀향하여 은거하던 중 1908년 5월에 강진의 헌병에게 압송되었으나 전 혀 굴하거나 숨기지 않고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역설하여 어쩔 수 없이 귀가조치 되었다. 그런데 양회일은 6월에 장흥의 헌병에 구속되어 혹형을 받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7일 만 에 옥중에서 죽으니 6월 24일이었다.42) 그런데 의병의 맹주 양회일의 구속과 혹형은 李白來 중심의 호남창의소 활동과의 관계 때문인 것 같다. 임전일록 의 1908년 6월 16일의 기록에 의하면, 이백래의 호남창의 소 의병대가 장흥헌병대를 습격하여 적 7명을 죽였는데43) 그때 양회일이 체포되었던 것 이다. 그러므로 6월 17일 양회일의 체포는 6월 16일의 장흥습격에 대한 보복이나 배후 조종세력을 수사하는 것일 가능성이 많으며 양회일이 이에 항거하자 혹형을 받았고, 양회 일은 이에 항거하여 7일간 단식하다가 6월 24일에 옥사했던 것 같다. 1908년 이후의 湖南倡義所를 이끈 사람으로 보이는 省齋 李白來는 字가 允善이며 본관 은 廣州로 寶城에서 世居했고 1862년(哲宗 13)에 寶城郡 龍門面 大橋村에서 출생했다. 그는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나라의 일에 관심이 깊었고 勉菴 崔益鉉을 師事하여 忠節을 중 히 여겼다. 그는 동생 李玉來와 長姪 李容植을 대동하고 上京하여 살면서 국가가 위태로 37) 臨戰日錄 양 4월 22일과 전남폭도사 p. 24. 그런데 서로의 기록에 전과의 과장이나 피해를 축소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38) 臨戰日錄 양 4월 23일과 전남폭도사 p. 24. 그런데 서로의 기록에 날자가 다르나 대 한매일신보 에 의하더라도 23일에 체포되었음이 확실하다. 39) 官報 제3815호, 광무 11년 7월 11일. 40) 官報 제3818호, 광무 11년 7월 15일. 41) 官報 제3939호, 융희 원년 12월 3일. 42) 杏史實記 권3, 行狀 안규용 찬. 43) 臨戰日錄 1908년 6월 16일.
- 215 - 와 감을 안타깝게 여겼다.44) 그는 同鄕人인 李沂 羅寅永 吳基鎬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爲國濟民의 道와 華夷와 邪正 을 論辨했고 李沂를 시켜 倭皇에게 伊藤을 責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勉菴을 찾아가 5적을 토벌하라는 고서를 내리라는 상소를 하도록 간청했고 의병을 일으키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조카를 1906년 4월 최익현 임병찬 등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통해 의병봉기 를 선언하는데 참여시켜, 준비가 부족하여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일이 급하니 능주의 雙峰 寺에서 후일에 거병하는 것이 좋다고 진언했다. 그는 또한 1906년부터 羅寅永 吳基鎬 朴大 夏 등과 5적암살을 숙의했고, 그와 그의 동생 李玉來는 6조 중 제 3조에 소속되어 李鴻來 康元相 申泰焕 柳泰京 朴用溪 등과 같이 군부대신 權重顯을 저격하기로 하여 寺洞에 은신하 였다가 거사했으나 실패하여 康元相이 체포되자 다른 사람들은 능주로 피신했다.45) 성재 이백래는 전술한 바와 같이 1907년 3월 9일에46) 양회일 임창모 등과 같이 雙山 義所의 의병에 참여하여 능주 화순 동복을 습격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光州로 향하다가 3월 11일에 刀摩山에서 체포되어 내란죄로 10년의 유배형에 처해져 智島에서 복역하다가 양회일 등과 함께 1907년 12월 3일에 석방되었다. 이백래는 석방되어 광주에 들려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마련하여 능주의 본거지로 돌아와 흩어진 의병을 규합하고 새로 의병을 모집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훈련에 열중하여 1907년 12월 18일(양 1908년 1월 21일)에 의병을 일으켰다.47) 이백래가 都大將인 湖南倡義所의 任將錄을 보면 여러 가지로 검토되어야 할 人名들이 있으나 우선 그 부서별 분담은 아래와 같다.48) 都大將 大將 都副將 右先鋒將 中軍都統將 左中軍將 李白來 梁會一 白景寅 安命錫 林昌模 魏啓龍 寶城 勉菴門人 綾州 勉菴門人 長興 勉菴門人 寶城 寶城 長興 都副將 先鋒都統將 左先鋒將 銃砲將 參謀督戰將 左從事將 沈守澤 李光彦 鄭世鉉 崔 湜 李玉來 李南載 咸平 河東 勉菴門人 同福 和順 寶城 長興 44) 국사편찬위원회 전 자료관리실장 金厚卿氏가 撰한 李白來 行狀抄에 보면 이백래는 만민공동회 에 참여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확인할 자료가 없다. 다만 당시의 서울시민으로 뜻있는 자들은 거의 이 민중집회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아 그러할 가능성은 많다. 45) 臨戰日錄 광무 8년 5월 21일 광무 11년 1월 11일 참조. 그런데 그 기록에는 5적암살거 사를 1907년 1월 11일에 했다고 하나 權重顯저격사건은 3월 25일(음 2월 12일)에 일어났다. 그러나 5적암살단은 호남인들이 주도했으며 申泰焕 柳泰京 朴用溪 등이 모두 호남창의소의 의 병진에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백래도 이 사건에 관련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46) 梁會一이 맹주가 된 1907년 3월의 擧兵日은 杏史實記 에 3월 9일로 되었기 때문에 臨戰 日錄 의 3월 7일은 착오일 것 같다. 47) 臨戰日錄 1907년 12월 26일 및 1908년 양 1월 21일. 48) 臨戰日錄 湖南倡義所任將錄(地名은 거주지를 기록했음).
- 216 - 國史館論叢 第23輯 右中軍將 朴重一 綾州 後軍都統將 盧鉉在 南原 勉菴門人 左護軍將 魯寅洙 綾州 右護軍將 辛在義 咸平 都砲將 柳炳珣 井邑 左砲將 安淇焕 寶城 右砲將 林魯成 綾州 軍律司監將 李敎文 寶城 蘆沙門人 司書將 梁烈默 綾州 蘆沙門人 軍需都將 李容植 寶城 糧餉將 白亨七 長興 (食+高)軍將 林魯福 綾州 遊擊都將 李司維 靈光 英學黨 左擊將 崔其杓 和順 東學 右孽將 裴鳳圭 和順 東學接主 砲擊將 南甲宗 綾州 東學 把撥都統將 梁東默 綾州 先撥將 林相永 綾州 中撥將 崔 瀛 和順 後撥將 朴泰焕 寶城 右從事將 召募都統將 敎練將 操砲將 召募將 召募將 軍器將 謀士將 坐從援金 主醫 親衛左翼將 親衛右翼將 親衛把撥將 魯寅洙 咸平 安賛在 羅州 柳秉禹 光陽 金炳圭 求禮 柳以三 井邑 全垂鏞 任實 李秉華 綾州 朴用溪 驪州 柳思甲 和順 朴湳鉉 寶城 安 極 寶城 李秉相 寶城 朴夏元 光山 松汀 全信默 淳昌 從醫 鄭淳學 綾州 梁在東 南原 柳泰京 井邑 申泰焕 井邑 梁會龍 綾州 그런데 위에서 梁會一을 大將으로 기록한 것은 1907년 3월의 호남창의소의 盟主요 대 장으로 활약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 같으며 1908년 이후의 호남창의소에서는 실제로 활동하지 않은 듯하다.49) 그리고 都副將으로 되어 있는 沈守澤(南一)과 召募將으로 되어 있는 全垂鏞은 獨立部隊로 활동하고 있는 명망 있는 의병장들인데 그들을 편제상에 포함 시켜 勢를 과시하려고 한 것 같다. 또한 任將錄은 대체로 1907년 3월과 1908년 1월의 호남창의소의 의병활동 부서를 총 망라 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李白來가 都大將으로 활약하는 당시의 편제로 보아서는 안될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편제로 활동하였는지는 사실들이 뒷받침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신빙하기 어렵고 다만 勢의 雄大함을 보이기 위한 명목상의 任將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위의 任將錄에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유생이나 전직 관료출신보다 농민층 이 대부분이고 특히 동학당이나 영학당 출신들이 부서의 책임을 맡고 중요임무를 수행했 음을 볼 수 있으며 의료진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50) 한편 李白來 都大將은 1907년 12월 6일 호남창의소 맹주의 명의로 倭賊協力者를 엄단 하리라는 榜文 과 後錄節目 을 발표하였다.51) 49) 杏史實記 의 어떤 기록에도 梁會一이 1908년 이후에 의병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50) 책임을 맡은 51명 중 勉菴이나 蘆沙의 門人은 7명 뿐이고 전직관리였던 사람은 4명이고 나머 지 40명은 학통을 내세우지 못할 처지이거나 농민 동학당 영학당 등 민중출신인 것 같다.
- 217 - 그는 榜文 에서 우리 민족이 天主의 덕과 上帝의 은혜로 三綱과 五倫을 잘 지켜 각자의 임무를 다해 왔는데 皇上은 倭에게 궁궐을 침범당하고 士民은 倭에게 강탈당해 창의했으 니 倭를 격퇴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나 우리 士民으로 왜적에게 아부하여 韓人을 해치는 자나 왜에게 협력한 자를 다음 後錄에 의해 엄중 처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기준으 로 後錄節目을 例示했는데 稅錢捧收者 巡檢 및 通譯 客主 왜적 은닉자 군수 관리 세무주사 面長 里長 등으로 왜에게 협조하거나 아첨하는 자들을 들었다. 이백래 의병대는 1908년 음 1월 8일과 10일에 장흥경찰서를 습격하거나 長平에서 잠 복하여 많은 적을 죽이고 총과 탄약을 다량 획득했다고 한다.52) 또한 이백래의 호남창의소는 1908년 1월 11일에 본부에 모여 효과적인 의병항쟁을 전 개하기 위해 호남전역을 6路로 나누어 지역을 분담 관할하게 하고 무기와 자금을 나누었 다. 제 1로는 盧應玄의 지도하에 남원 옥과 곡성 임실 순창을 관장하고, 제 2로는 柳泰京 申泰焕 柳以三의 책임하에 정읍 태인 고창 고부를 관장하게 했으며, 제 3로는 沈南一 安賛 在의 책임하에 함평 나주 영광 남평을 주관하게 했고, 제 4로는 李光彥 朴用溪 柳秉禹의 책임하에 광양 구례 순천을 관장하게 했으며, 제 5로는 호남창의소 직할로 白景寅 朴昌模 가 주관하며 보성 장흥.양양 낙안 강진 완도를 관할지역으로 책정했고, 제 6로는 李司維의 책임아래 장성 담양 고창을 관할하게 했다.53) 그런데 위와 같은 6로의 분담 관할은 형식적이고 기록상의 편제에 지나지 않은 것 같 으며 직할부대인 제 5로가 호남창의소의 중심이었고 실제적 활동무대였던 것 같다.54) 한편 이백래 의병대는 계속되는 적과의 투쟁으로 병력이 손실되고 감소되자 보충에 동 학의사의 잔병과 士民 그리고 천예들이 적극 참여했으니 의병의 지도층 몇 사람을 제외하 고는 민중출신이 그 중심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55) 또한 이백래 의병대는 같은 고장출신인 안규홍 의병과 연합작전을 폈으니 1908년 2월 21일에 공동으로 장흥경찰서를 습격했고 1908년 9월 20일에는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보 성 복내의 헌병분파소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56) 한편 호남창의소의 도대장 이백래는 호남창의소 맹주의 명의로 1909년 1월에 왜적에게 51) 臨戰日錄 및 編册 全北古警秘發 제159호, 1907. 12. 16. 그런데 이 榜文의 발표일자 가 1907년 음 12월 6일이 분명할 때 고부경찰서에서 이 방문의 입수 보고가 양 12월 16일이 므로 李白來의 호남창의소가 아니라 편책 의 방문은 李錫庸의 호남창의소의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문은 의병대들 사이에서 많이 流布되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52) 臨戰日錄 1908년 1월 8일 10일. 그런데 일제측의 기록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53) 臨戰日錄 1908년 1월 11일. 54) 의병활동이 게릴라활동이고 임기응변의 투쟁을 주로 하기 때문에 대규모의 조직이나 관할구역의 책정, 그리고 편제를 가지기가 어렵고 실제의 전투상황에서 그러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55) 臨戰日錄 1908년 11월 15일 및 호남창의소임장록 참조. 56) 臨戰日錄 1908년 2월 21일 및 9월 20일.
- 218 - 國史館論叢 第23輯 보이는 글을 발표했는데 그 글에서 왜와 우리는 하늘과 땅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가 되 었는데 古今의 이치는 싸우다가도 和平할 수 있으며 원한도 서로 용서할 수 있지 않느냐. 너희 나라에 두 번이나 글을 보내 평이하고 명백하게 天下事理를 설명했는데 너희는 자신 에게 너무도 너그럽거나 오만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원수로 여겨 온갖 학 대와 핍박 형벌 살륙을 자행하니 우리의 복수심은 너희 임금과 이등박문을 박살내어 세계 열강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우리를 없애려 하지만 그것은 너희 나라가 폐허가 된 다음일 것이다라 하여 왜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분명히 했다.57) 이백래 중심의 호남창의소 의병대는 오랜 동안의 투쟁과 일제침략군의 토벌작전으로 점 점 쇠약해져서 이백래는 군자를 보충하기 위해 寶城邑 大野里 茅嶺부락의 자택에 은거했 더니 洞長 朴德明이 밀고하여 長興 盃山憲兵隊의 습격을 받아 1909년 5월 17일에 체포 되었다가 5월 20일에 순국했다.58) 그러므로 1907년 3월 9일 雙峰(桂棠山)에서 일으킨 의병은 (食+高)軍將인 林魯福 (參奉)의 집을 중심으로 한 와甑洞을 본거로 하여 주변에 무기제작소인 대장간, 탄약의 재료인 유황을 저장한 유황굴, 그리고 의병들을 지켜주던 의병성, 의병이 거처했던 막사 가 있었을 정도로 규모를 갖추고 작전을 폈다.59) 호남창의소는 1907년 3월 9일부터 11일까지는 양회일을 맹주로 임창모 이백래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이광선 정세현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지휘했으며 軍資는 양회일의 家財 가 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1907년 음 12월 18일(양 1908년 1월 21일)부터는 호남창 의소의 都大將을 성재 이백래가 맡아 자금과 군기를 충당했고 의병을 지휘했다. 그리하여 호남창의소는 1907년 3월부터 1909년 5월 20일까지 능주의 雙峰(雙山 흑은 桂棠山)을 중심으로 전남의 동 남지역인 보성 화순 곡성 구례 순천 광양 장흥 고흥에서 창 의소 내의 개별부대단위와 공동작전을 폈으며, 때로는 안규홍 심남일부대와 연합작전을 펴면서 일제침략자와 그 협력자들을 응징했다. V. 安圭洪 義兵의 活躍 安圭洪은 字가 濟元으로 1879년 (高宗 16)에 寶城郡 寶城邑 牛山里 宅村에서 아버지 安達焕과 그의 後妻 鄭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竹山으로 보성에 世居하였고 丙子 胡亂때 湖南義兵의 영수였던 文康公 牛山 安邦俊의 10대 손이다. 57) 臨戰日錄 및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Ⅰ, PP. 702 703. 58) 臨戰日錄 1909년 5월 17일 및 5월 20일. 59) 趙東杰 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의병성과 무기제작소를 실증하고 그것과 연관시켜 雙山義所의 의 병을 자세하게 논술하여 본인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
- 219 - 그는 집이 가난하여 글을 배우지 못했고 어려서부터 의탁할 곳이 없어 고용살이를 하여 편모를 봉양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안담살이라고 부르는 것은 머슴살이를 칭하는 말로 뒤 에 호가 되어 澹山이라 했다. 그는 1882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4살의 어린 아이로 어머니를 따라서 20여 떨어진 보성군 文德面 桐山里 法化에 사는 朴濟鉉의 집으로 이사했는데 박제현은 안규홍과 姑從四寸 사이였다. 그는 담략이 뛰어났으며 항상 전쟁하는 방법을 연습했는데 하루는 나 무를 해가지고 마을에 돌아오니 稅吏가 방자한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을 때리는 것을 목도했 다. 그는 분노하여 그 세리를 결박해 놓고 이 마을에는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고 꾸짖으니 마을사람들과 세리가 모두 감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타고난 성품이 강하고 정직하기 때 문에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강직하다고 남에게 미움을 받을 정도였는데 성장하면서 호방하여 사물에 구속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비록 체구가 작지만 담대하였고 의협심이 강하며 용기가 있기 때문에 배운 것이 없으나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60) 安圭洪은 비록 국가의 녹을 받았거나 양반으로 세도를 누리는 처지가 아니었지만 나라 의 운명이 기울어져 감을 보고 한탄과 분노를 참지 못했다. 특히 그는 을사조약이 왜적의 위협으로 체결되어 왜적이 우리나라를 통치하게 되어 우리는 나라도 없고, 임금도 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해 죽을지언정 오랑캐가 되고 짐승이 되어서 살 지는 않겠다고 맹서했다. 그는 거사할 계획을 세우고 동지 몇 사람과 함께 맹서하기를 왜적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원수이며 壬辰年 이후부터는 하늘을 같이 하고 살 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를 삼켜 버리고 우리 임금을 욕보이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만들게 되었다. 우리들은 先王의 臣民이요 先祖의 자손으로 이 광경을 차마 보고만 있겠 느냐. 한 도둑놈만 죽이더라도 실로 이것이 나의 일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 말에 순 종했다고 한다.61) 그는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무식하고 物望이 없다 하여 사람들이 그와 함께 일을 계 획하기를 부끄러워 했다. 그런데 이때 匪賊의 무리들이 마을로 다니면서 횡포를 부리자 마을마다 장정 수백 명씩 모집해서 북을 치면서 비적을 방비해 왔다. 이에 안규홍은 그 장소에 가서 자기의 뜻을 말하자 여러 사람들이 뛸듯이 기뻐하고 따랐다. 그러나 안규홍은 재물이 없었으니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호미 팽이 나 무작대기에 불과했다. 그때 江原道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姜性仁(姜龍彥 : 일명 姜士文)이 보성 부근에서 활약하기에 그 휘하로 들어가 姜이 탐학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겁취하자 그 를 죽이고 의병장이 되었다.62) 60) 독립유공자 호남유족회 편, 澹山實記 澹山實記 序 梁會甲 撰 家狀 安鍾連 撰 洪英基, 앞의 논문 참조. 61) 澹山實記 家狀 참조. 62) 전남폭도사 p. 137에서 安이 강용언의 부장으로 활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담산실
- 220 - 國史館論叢 第23輯 안규홍은 1908년 2월에 廉在輔 孫德浩 林昌模 李貫會 등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각각 부서를 정하고 의병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倡義諸員芳名은 아래와 같다.63) 義兵大將 安圭供 副大將 廉在輔 參謀將 吳周一 羅昌運 李京三 宋柱興 先鋒將 李貫會 林昌模 行軍將 安性淳 鄭在和 左右翼將 任秉國 孫德浩 遊擊將 安宅焕 蘇輝千 先後軍將 宣圭明 金鶴千 中軍將 金鍾喆 李良先 布糧將 運糧 宋基休 楊東勳 起軍將 書記 李永三 尹榮采 左右砲將 柳德三 左右執事 鄭基賛 宋敬會 其他將卒 申麟休 張載模 吳允七 安載瓚 朴濟鉉 文宇三 李良來 任淨鉉 張載瑁 柳春道 趙敬述 任在文 金有得 林厦仲 李京俊 金道珪 金仁彥 黃鳳大 安君明 金求禧 安賛在 廉龍洙 張桂鎭 廉圭範 廉君明 林鶴奎 尹供八 宣容錫 曺喜明 그 밖에 先鋒將으로 活躍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張仁初가 있고64) 安의 부하로 120명을 거느리고 高興郡 占岩面 聖柱洞에 1909년 7월에 잠복했다가 도주한 部將 申成 九가 있으며65) 안규홍이 체포된 후에도 계속 활동하다가 1909년 10월 2일에 장성군 森 溪面 生村에서 체포된 吳參奉이 있고66) 안규홍 의병대의 砲軍이 되었다가 의병 30명을 인솔하고 다닌 광주출신 朴奉石이 있으며 보성 복내사람으로 의병활동 중 체포되어 1년 형을 선고받은 崔鳳成도 있다.67) 그리고 湖南節義史 에 보이는 廉晚洙는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興陽 馬輪에서 격전하 던 중 전사했고68) 안규홍 의병대의 部將으로 활약한 劉叉三(또삼) 申文景 金永禧 등이 처 음부터 끝까지 활동하다가 체포되거나 자수했다.69) 또한 담산실기 의 倡義諸員芳名의 細註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당시에 꺼리고 오래된 일이라 많은 사람의 이름이 빠졌으리라 보아진다. 안규홍 의병대는 대장이 빈한한 농민인 머슴출신이기 때문에 그의 고종사촌으로 경제적 인 도움을 주었을 朴濟鉉(地主) 林昌模와 그의 아들 林鶴圭(양반) 安賛在(참봉) 그리고 吳參奉 任參奉을 제외하고 거의가 농민출신이고 목수나 해산군인이 책임을 맡고 있으며 기 에서는 姜이 安의 부장이라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洪英基氏의 앞의 논문에서도 밝혔다. 63) 담산실기 追錄 倡義諸員芳名. 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 Ⅰ 의병항쟁재판기록 (1985)(이하 의병항쟁재판기록 으로 표시하겠음). 65) 전남폭도사 p. 123. 66) 전남폭도사 p. 139. 67) 의병항쟁재판기록 p. 706. 68) 湖南節義史 人篇 73장. 69) 한국독립운동사 Ⅰ, P. 842 및 編册 長警秘發 제 89호, 1909. 3. 25.
- 221 - 병졸로 활약한 사람들은 모두가 농민출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70) 안규홍의병대의 활약상을 보면 다른 어느 의병대보다 뚜렷한 전과를 세우고 있으며 다 른 의병대들이 일제의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토벌되어 시들어가는 가운데서도 끈질긴 투 쟁을 하여 더욱 그 활동이 부각되었다. 우선 안규홍의병대의 전과로 크게 명성을 떨친 坡靑戰鬪와 大元寺戰鬪, 同福 雲月峙 중 심의 戰鬪 그리고 眞山戰鬪 등을 살피고 그 밖의 활약상을 시기 별로 고찰해 보겠다. 坡靑戰鬪는 1908년 양 4월 26일 寶城郡 松谷面 坡靑村(現 得粮面 禮堂里)의 鳩峴(비 들고개)에 안규홍 의병 150여 명이 잠복하였다가 보성분견소의 헌병 3명을 포위하여 永 戶와 平井을 죽이고 1명은 중상을 입고 민가로 피신하여 분견소에 위급을 알리려 했으나 村民도 헌병에게 돌을 던져 도망친 싸움이다. 그 후 분견소의 부대와 다른 응원부대가 현 장에 출동하였는데 의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高地에 散在하였으나 촌민들은 그것을 부인 했고 그 보다 앞서 장흥 우편체송인인 日人이 이 부근에 접근했다가 촌민들이 헌병의 시 체를 끌고 다니는 것을 보고 우편물을 버린 채 도망했다. 이에 보성의 병력은 물론 낙안 강진 능주의 병력이 총집결하여 추격했으나 지형이 불리하여 성과 없이 퇴각했다. 그리하 여 일제측은 안규홍의병대의 명성을 알게 되었으며 여러 고을에서 이곳의 의병진을 찾아 모여들어 이후 일본헌병과 경찰의 경계대상이 되었다.71) 다음으로 大元寺戰鬪에 대해서 살펴보면 寶城郡 文德面 竹山里에 있는 大元寺에서 1908 년 양 5월 1일에 순천경찰서 순사 9명이 의병 60여 명과 충돌하여 2시간 동안의 격전 끝 에 東崎와 田中 등 순사 2명이 중상을 입고 낙안주재소로 철수했는데 의병은 5명이 죽고 부상자가 약간 있었다는 것이다.72) 그런데 編册 에는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1908년 5월 1일에 日人 순사 6명, 한인 순사 4명은 약 60명의 의병이 大元寺에 나타났다 하여 그 토벌에 나섰는데 대원사 房內와 삼림 중에서 의병이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두 순 사가 중상을 입고 겨우 낙안주재소에 도착했다. 그 의병대는 강용언 의병대로 생각되는데 그들은 일찍이 파청에서 헌병 2명을 죽이고 1명을 중상시킨 일이 있다고 했다.73) 그런데 안규홍 의병의 기록인 담산실기 에는 의병대가 大元寺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고는 기록하고 있으나 이 전투의 실상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실을 빠 뜨린 것에 불과하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안규홍 의병대가 거둔 승전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안규홍 의병대는 同福 雲月峙(현 승주군 주암면)에 주둔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수시로 출몰하여 日兵을 죽이고 헌병분견소를 소각하는 전과를 올렸다. 70) 洪英基, 앞의 논문 참조. 71) 編册 長秘發 제 9호, 1908. 4. 30 및 담산실기 권2, 巴靑勝捷碑 참조. 72) 전남폭도사 p. 45. 73) 編冊 順天驚察分署長報告, 1908년 5월 2일. 이때 강용언은 4월 6일에 안규홍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므로 안규홍 의병대 라 칭해야 한다.
- 222 - 國史館論叢 第23輯 담산실기 에 보면 1908년 6월에 동복의 운월치에서 의병(疑兵)을 만들어 일본측으 로 하여금 공격의 집중을 흐리게 하고 밤에는 동복수비대를 공격하여 적을 죽이고 병기를 빼앗으니 수비책임자 渡邊政秋는 도망쳤다고 한다.74) 또한 1909년에도 계속 용맹을 떨친 안규홍의병대를 토벌하기 위해 일제침략자들은 양 4월 하순부터 광주수비대 1개대대와 남평수비대 1개대대가 합동해서 순천 보성지역을 집중 공격했다.75) 그리고 同福 부근에 서 의병과 동복분견소 헌병의 충돌이 자주 발생했으며 5월 21일에는 화순군 二西面 寶山 里 金永人집에 의병이 들어와 동복면 거주 金明新이 친일한다고 구타한 후 강물에 던져 죽였고 6월 28일에는 화순읍 金田里의 公錢領收員 崔奉擧의 집을 습격하여 공전을 압수 하기도 했다.76) 또한 안규홍의병대의 포군으로 활약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朴奉石 의 재판기록을 보면 안규홍의 지시를 받은 의병 8명이 동복시장에서 물품을 사러오는 일 본군인과 한국인 통역 1명을 살해하고 그 소지품인 총과 기타의 휴대품을 빼앗으려 출동 하여 5월 18일 오후 3시 경 1등병 2명과 통역 盧在鳳을 철봉으로 난타하여, 1명은 즉석 에서 죽고 1명은 허리 및 두부에, 노재봉에게는 두부에 중상을 입히고 총 2정과 칼 1자 루를 빼앗았는데 노재봉은 광주로 옮겼으나 숨진 사실이 있다.77) 끝으로 眞山戰鬪는 1909년 음 8월에 있었던 싸움으로 전국의 의병은 물론 전남의병도 이미 몰락해 가는 중이었으며 여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혈투였다. 그런데 그 전적을 담산실기 에서는 8월에 眞山(보성군 문덕면 陽洞里)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밤을 타서 습격하고 두겹으로 포위하였다. 이에 온 군사가 장차 범의 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안규홍은 몸을 일으켜 서서 크게 호령하기를 조금도 두려워 할 것 없다 하고 손수 千步大銃에 불을 켜 가지고 이것으로 적군의 선봉장 을 떨어뜨렸다. 이것을 보자 포위했던 군사의 세력이 크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공은 다시 불을 붙여 들고 앞으로 달려서 후군을 시켜 산을 타고 가서 적군을 놀라게 했다. 이 리하여 이 싸움에서 적을 사로잡고 노획한 물건이 많으니 적군들은 모두 말하기를 安某는 참 비장(飛將)이라 했다 고 서술하고 있다.78) 그런데 이때와 비슷한 일본측의 기록에는 양 8월 21일 복내장 헌병분견대가 그곳 서방 10리 지점에서 약 200명과 충돌하여 2명을 사살하고 5명을 부상시켰다고 서술되었다.79) 이상의 대규모 전투 외에 안규홍 의병대는 의병의 전술 전략상 주로 애용하는 게릴라전 74) 담산실기 傳 安鍾南 撰. 75) 전남폭도사 p. 107. 76) 전남폭도사 p. 112 및 p. 120. 77) 의병항쟁재판기록 p. 824. 78) 담산실기 傳. 79) 한국폭도봉기의 건 (3) 참 1발 제404호, 1909년 9월 13일. 그런데 眞山戰鬪는 남한대토 벌작전에서 안규홍의병이 死線을 돌파하는 싸움으로 볼 수 있어 일본측의 기록이 사실에 가까 울 것 같다.
- 223 - 을 통해 일본군인과 경찰 우체인 세무원 관료 일진회원 그리고 악질부호들을 처단했는데 그 활동으로 보이는 사실들을 시기별로 기록해 보겠다. 1908년 양 2월에 순천 보성 화순 창평군 내를 횡행하는 의병 130여 명(안규홍 의병인 것 같음)을 습격했는데 일본군 조장 1명 상등병 1명이 즉사하고 1명이 부상당했는데 그 근거지는 大元寺이다.80) 그리고 양 5월 초순에는 염인서 정기찬 등이 보성군 鳳德面 法 化村에 사는 일진회원 廉永化의 집을 침입하여 일본에 밀고한 자라 하여 총살했고,81) 동 5월 19일에는 보성군 복내면 眞鳳里 瑞峰에서 기병과 순사토벌대가 의병 100명을 포위하 여 의병 25명을 살해했는데 일본측은 2명이 살상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5월 15일에 安의 부대 40명이 松廣面 大谷里 주재 순사를 습격한 사실과 연관하여 안규홍 의병대인 듯하다.82) 또한 1908년 양 8월 24일 승주군 住岩面 廣川店 수비대 7명과 순사 1명이 보성군 文 德面에서 安이 이끄는 의병 70여 명과 충돌했는데 복내 주둔 기병 7명이 내원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니 일군의 피해는 중상 3명 경상 1명이었다.83) 그리고 동년 9월 1일 의병 50명이 광양군 津月面 望德里에 내습하여 일인 어부 3명을 죽이고 그 가옥을 불지른 후 그 마을의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여 고용인인 일본인 高橋를 바다에 던져 익사케 하고 해 안에 정박 중인 일본 어선을 소각했는데 그 규모로 보아 안규홍 의병대인 것 같다.84) 또한 1908년 양 10월 3일 보성군 복내면 복내리 주둔 기병대를 안규홍 의병대 120명 이 습격하여 숙사 및 마구간을 방화하고 공용서류를 소각시켰다.85) 7일에는 순천 수비병 과 한인 순사 1명이 보성군 文德面 龍岩里 牛峙에서 안규홍 의병대 30명과 충돌하여 한 인통역 1명이 즉사하고 보병 2명이 부상당했고 의병 12명이 죽었으며, 13일에는 능주 자 위단장 朱聖振 林春化를 살해했는데 모두 안규홍 의병대의 활동으로 보인다.86) 한편 1908년 양 12월 17일 경에 안규홍 의병대의 염인서 이하 40여 명이 양민의 재물 을 겁취하는 강모를 동북군 내남면 주소리에서 포박하여 강물에 던져 죽인 일이 있다.87) 1909년 2월 26일에는 보성분견소 헌병 2명과 보조원 5명이 벌교읍 馬洞에서 安의 부하 20명과 충돌한 일이 있으며,88) 3월 6일 경에 염인서 장인초 임하중 등이 일진회원인 朴 鳳朝를 보성군 松谷面 鳳洞에서 죽인 일이 있다.89) 80) 編册 順警秘 제13호, 1908년 2월 7일. 81) 의병항쟁재판기록 pp. 840 841. 82) 전남폭도사 p. 48 및 洪英基, 앞의 논문 참조. 83) 전남폭도사 p. 61. 84) 전남폭도사 p. 62 및 洪英基, 앞의 논문 p. 88 참조. 85) 전남폭도사 p. 66. 86) 전남폭도사 p. 67. 87) 의병항쟁재판기록 pp. 841 842. 88) 전남폭도사 p. 94. 89) 의병항쟁재판기록 p. 841 842.
- 224 - 國史館論叢 第23輯 그리고 1909년 양 3월 15일에 보성군 복내면 獐川里 下津에서 安의 부하로 보이는 80 여 명이 재무주사 上田 일행을 습격하여 호위병이 응전 격퇴했으나 상등병과 閔主事가 경 상을 입었다.90) 4월 3일에는 安이 이끄는 100여 명이 장흥군 夫山面 龍盤里에 나타나 일진회원 朴大洪과 方立西를 총으로 쏘아 方은 즉사하고 朴은 부상당한 일이 있다.91) 또한 1909년 양 4월 11일에 安의 부하 120명이 보성군 득량면 海坪里에 나타나 魏秉 煥 집에 저장해 둔 소작료 70가마를 가져간 일이 있다.92) 4월 20일에는 순천군 쌍암면 쌍암시장에서 순천수비대 古賀 상등병 등 6명이 안규홍 의병대의 기습을 받아 古賀 상등 병 외 2명이 전사했다.93) 그리고 1909년 양 5월 12일에는 보성군 熊峙面 웅치 골짜기를 병영분견대 高木 일등 졸 이하 3명이 통과할 때 安의 부하로 보이는 150여 명의 의병이 기습하여 廣畑 일등졸 이 전사한 일이 있고,94) 18일에는 복내시장에 파견한 척후병 2명과 통역 1명이 安의 부 대로 보이는 30명의 의병으로부터 저격을 받고 전원이 즉사한 일이 있다,95) 이어서 24일 에는 보성군 蘆洞面 知心洞에서 능주수비대 특무조장 이하 18명이 安의 부대 100명과 조 우하여 교전 끝에 與那覇 일등졸이 사살되고 의병 2명이 전사했다.96) 또한 1909년 양 6월 13일 임창모 임하중이 장흥군 회령면 능평리 文南瑞에게 군자금 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구타한 일이 있고, 동월 30일에 위 양인이 보성군 南上面 七洞 에 사는 崔泰京에게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총살한 일이 있다.97) 그리고 1909년 양 7월 3일에 안규홍 임창모의 의병 170여 명이 화순군 남면 운산리 이장 申公百을 요격하여 복내면 일봉리에 납치 살해했다.98) 8월 3일에는 순천군 外西面 道新里에 270여 명(반수는 무장)이나 되는 안규홍 의병이 내습하여 일진회원 李用西를 베어 죽였다.99) 그 밖에도 보성 화순 순천 곡성 광양 구례 고흥 장흥 등지에서 안규홍 의병대의 활동으 로 보이는 일본군경의 살해 및 일진회원 稅吏 官員 그리고 악질부호의 살상사건이 많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어 다루지 못했다. 그런데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한국병합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남의병을 토벌하는 남한 90) 전남폭도사 p. 98. 91) 전남폭도사 p. 101. 92) 전남폭도사 p. 102. 93) 전남폭도사 p. 104. 94) 전남폭도사 p. 104. 95) 전남폭도사 p. 111 및 의병항쟁재판기록 p. 706. 崔鳳成의 調書에 의하면 안규홍 의병의 전과가 확실하다. 96) 전남폭도사 p. 113. 97) 의병항쟁재판기록 pp. 875 877의 林廈仲 판결문 참조. 98) 전남폭도사 p. 122. 99) 전남폭도사 p. 128.
- 225 - 대토벌작전을 1909년 9월 1일부터 전개하여 소탕전을 벌이니 안규홍 의병대도 많은 의병 들이 투항하거나 체포되며 피살되었다. 그러므로 호남의 모든 고을은 兵站 아닌 곳이 없 이 밤낮으로 경찰해서 밥 먹는 자에게서도 약탈해 가고 잠자는 자도 놀라게 하며 의병으 로 나간 부모 친척까지 모두 魚肉을 만드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안규홍은 스스로 이미 일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여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 가를 위하고 민생을 위하려던 것인데 하늘의 도가 일정치 못하여 적군의 형세가 이 같이 강성해 졌으니 적은 숫자로 많은 숫자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밖으로는 날파리 만큼도 후원할 힘이 없는 데다가 안으로는 범이 잡아 먹으려는 위급한 경지에 놓 이게 되어 공연히 선량한 백성들에게 해독만 끼치게 되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다 하 겠다. 그대들은 각자 스스로가 잘 계획해서 다시 뒷날 일을 도모하라 100)하고 의병대장을 사임했다. 그후 안규홍은 어머니에게 사실을 고하고 멀리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하려 집에 들렸다가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 법화촌에서 제 8중대장 富石 大尉 이하 6명과 한인 순사 2명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안규홍 의병대의 규모와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巨魁 安圭洪 보성군 문덕면 법화촌 융희 2년(1908) 4월 순천부를 점거한 姜龍彥(일명 강성인)의 부장으로 있다가 동년 5월 어 떤 일로 해서 姜을 원망, 그를 죽이고 스스로 수괴가 되어 보성군을 중심으로 각 군을 날뛰었 다. 그 세력이 한창일 때에는 부하가 200명을 넘었고, 全海山 沈南一과 나란히 폭도 거괴 중 첫째 가는 인물이다. 여러 번 관헌과 충돌할 때마다 교묘하게 체포를 면했고 악랄한 약탈을 자 행했는데 대토벌이 시작되자 부하를 해산하고 여러 곳에 숨어 다녔으나 여기서 체포되었다.101) Ⅵ. 東 南地域 義兵의 終熄과 義兵의 限界性 全南의 東 南地域에서 활약한 의병장으로 전술한 湖南倡義所의 양회일 이백래 의병과 安圭洪 義兵 외에 많은 독립부대의 의병활동이 있었으니 그 중에서 규모나 활약이 두드러 진 몇 사람의 의병활동을 간단히 살펴 보겠다. 먼저 沈南一은 咸平郡 月也面에서 출생한 布衣寒士로 본명은 沈守澤인데 奇參衍 金準 金律 등의 湖南倡義會盟所의 部將으로 활동하다가 金準 형제가 죽자 잔여 의병을 수습하 고 새로 의병을 召募하여 1908년 음 2월 경에 南平에서 기병하여 姜武景 張仁初를 선봉 장으로 삼고 權澤을 謀士將, 廉元淑을 서기겸 모사, 安賛在 朴士化를 中軍將으로, 羅聖化 100) 담산실기 家狀. 101) 전남폭도사 p. 137.
- 226 - 國史館論叢 第23輯 盧炳友를 후군장으로, 金道淑을 都統將으로 삼았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면서 全南第一의 首將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南一이라 불렀는데, 세 상에서 그것을 따라 불렀다. 그의 의병대는 권택이나 안찬재 같은 유생이 참여하기도 했 지만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상인이나 목수 등 민중출신이었다. 심남일 의병대는 화순 곡성 보성 장흥 등의 전남 동 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때로는 나주 함평 그리고 영암에서 도 활동했으며 全海山 曺敬焕 安圭洪 의병대와 연합하여 작전하기도 했다.102) 심남일 의병대는 1909년 양 10월 체포될 때까지 일본군인과 경찰을 상대로 격전을 벌 였는데 몇 가지 실례만 들겠다. 1908년 8월 28일 영암수비병 하사 이하 9명이 영암면 寒 大洞에서 150명의 심남일 의병과 2시간 동안의 격전 끝에 탄약이 떨어져 퇴각했고103) 10월 23일에는 光州市 平洞에서 전해산 조경환 김기순 의병과 연합한 250명과 군경의 충 돌이 있었다.104) 또한 1909년 음 3월 6일 심남일 의병이 장흥군 長東面 면장 겸 공전영수원인 鄭昌鉉 이 가혹하게 양민을 착취하고 그의 아들 鄭漢翊이 일본말을 연구한다 하여 그 父子를 납 치하여 社倉市場에서 총살한 일이 있다.105) 그리고 그는 유명한 의병장으로 전해산 임창 모와 함께 가장 늦게까지 활동하다가 남한대토벌작전 중에 1909년 양 9월 화순군 淸風面 風峙 산속의 암굴에서 그의 부장 姜武景과 佐竹 大尉 이하 47명의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 었다.106) 다음으로 林昌模는 보성출신이며 號를 樂均이라 했는데 일찍이 국모가 피해하고 국권이 탈취당함을 분히 여겨 日本人과 背水一戰하여 국가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하려 했는 데 능주군을 지나다가 양회일을 만나 같이 擧義하자고 하여 이광선 이백래 등과 함께 참 여하여 그 선봉장이 되었다.107) 그는 1907년 음 3월에 양회일 이백래 안찬재 등과 같이 능주 화순 동복을 휩쓸고 광주 로 향하다가 同福에서 피습되어 체포당해 15년의 유배형을 받았으나 뒤에 解配되어 이백 래의 호남창의소에 참여하여 中軍都統將으로 활약했다하나108) 독립부대를 거느리고 많은 전과를 올렸는데 그 수가 많을 때는 500여 명이나 되었다. 임창모는 뒤에 安圭洪 의병대에 참여하여 그 선봉장으로 많은 활약을 했고 때로는 독립 부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안규홍 의병대가 前述한 바와 같이 점점 쇠약해지고 특 102) 독립운사 자료집 2 沈南一實記 및 洪英基, 구한말 심남일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 참조. 103) 전남폭도사 p. 61. 104) 전남폭도사 p. 69. 105) 의병항쟁재판기록 pp. 850 852, 李世昌 재판기록 참조. 106) 전남폭도사 p. 140. 107) 官報 제3815호, 광무 11년 7월 11일. 108) 臨戰日錄 의 任將錄이나 투쟁기록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나 李白來 휘하에서 활동한 사 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 227 - 히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되어 지탱하기 어렵게 되어 의병을 해산하자 그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여 잔여부대를 수습하여 싸우다가 1909년 양 8월 13일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좌절하지 않고 108인의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일본의 대토별작전에 대항하다가 1909년 10월 13일에 아들 林鶴圭와 같이 보성군 복내면 墨石洞 전투에서 전 사했다.109) 또한 劉秉淇는 求禮郡 馬山面 출신으로 그는 일본의 통감정치를 혐오하여 國權을 회복 하고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자 田愚. 奇宇萬이나 郡守들을 찾았으 나 실패했는데 김준 김율 형제가 기병함에 참여하여 그 참모대장이 되었다. 그는 뒤에 梁 相基의 起兵에 참가하여 中軍將이 되어 그가 지휘하는 의병이 많을 때는 700여 명(총 500정)이나 되었으며 함평을 중심으로 昌平 光州 同福 등지에서 日人家屋을 소각했고 1907년 양 12월에 동복군 新平에서 토벌대와 교전하여 日兵 3명을 죽였다. 그는 1908년 2월 2일 昌平 舞童村에서 토벌대와 교전해 대승하여 일본병 수명을 죽였고, 쌍안경 단총 군도 각 1점씩을 노획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전과를 올렸는데 1909년 11월 8일 구례지 방에서 광주경찰서원에게 체포되자 국가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 것 이 김준 등 동지에게 수치스럽다고 술회했다.110) 그리고 申德均은 光州人으로 1906년 최익현을 찾아 영향을 받고 동생 申相澈과 의병을 일으켜 합세하려다가 최익현이 체포되자 중단했다. 그런데 1907년 1월 고광순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을 점령하고 동복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대를 조직하여 쫓아갔으나 고광순이 패배하자 광주로 돌아와 再起를 도모했다. 그 후 1907년 9월 고광순이 昌平에서 재기하자 申德均도 가담하여 참모를 맡아 해산군인을 召募하러 광주에 갔는데 고광순 등이 연곡사 부근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자 독립부대를 거느리고 智異山을 중심으로 활약 했다. 그는 부대를 정비하여 高泰元을 선봉으로 삼고 蔡永賛 蔡相淳 등으로 참모장을 삼아 300여 명으로 河東의 花開로 진군하다가 왜적 30여 명을 만나 무찌르고 南原으로 퇴각한 후 副將에게 군대를 맡기고 軍器 준비차 광주로 향했다. 그 후 신덕균은 장성 정읍으로 다 니면서 왜적과 싸우다가 1908년 11월 7일 古阜에서 적에게 피살되었다.111) 또한 谷城出身으로 申正雨와 盧仁先이 구례 곡성 등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신정우는 곡성군 竹谷面 南陽里 출신으로 1907년 양 3월 경에 일군을 축출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을 일으켜 총기를 휴대하고 의병 20명과 함께 군량과 군자금을 조달하고 4월 10일에는 노인선과 연합하여 곡성군 죽곡면 桐溪에서 육군수비대 및 경찰과 충돌했 다. 그리고 10월 20일에는 곡성의 泰安寺에 들어가 승려 鄭奉賛을 체포하여 군자금을 요 구했으나 응하지 않자 칼로 찔러 죽인 일이 있는데 1908년 11월 25일 곡성의 헌병과 경 109) 전남폭도사 p. 130 및 p. 141. 110) 編册 光警秘發 제1048호의 2, 1909년 11월 27일. 111) 전남도지편찬위원회 편, 전라남도지 1 (1982) pp. 787 788.
- 228 - 國史館論叢 第23輯 찰에 의해 체포되었다.112) 노인선은 곡성군 죽곡면 太平里 출신으로 1907년 11월 金東 臣 의병대에 가담했다가 1908년 4월 중에 28명(총 21정)을 모집하여 곡성 구례 순천 보 성을 무대로 활동했고 신정우와 연합하여 일본군경과 충돌했으며 태안사의 승려를 살해했 다. 그리고 1908년 5월 30일에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순천군 月燈面 三街里에 사는 일 진회원 金道洪을 살해했다.113) 그 밖에 林東奎는 나주출신으로 順天의 曹溪山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조계산부대라 불렀 는데 순천 보성에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저항하는 중 피살되었다. 그리고 金炳道는 화순 능주출신으로 1906년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는데 능주 공격을 준비하다가 적의 야습 으로 전사했다.114) 이와 같이 전남의 동 남지역도 서 북지역과 같이 치열한 의병항쟁을 계속하여 전국의 다른 지방에서 의병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제침략자들을 괴롭히고 응징하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침략을 완수하는 한일합방을 서두르기 위해 전남지 방의 의병을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개된 남한대토벌작전은 대구에 있는 한국 임시파견대 사령관 渡邊 少將에 의해 주도되었다. 여기에 동원된 병력은 보병 2개연대 및 제 11艇隊(수뢰정 4)의 석유발동기선과 우메마 루(梅丸) 승조원 그리고 현지의 헌병과 경찰이 총동원 되었다. 토벌기간은 제 1기 15일, 제 2기 15일, 제 3기 10일 합계 40일을 계상했는데 뒤에 15일을 연장하여 총 55일을 소 요하였다. 그리고 작전지역은 육상으로 전북의 태인 갈담 남원을 잇는 선에서 섬진강 상류 院村에서 섬진강 연안의 河東 高浦에 이르는 선으로 전남의 인접지역인 전북과 경남에서 시작하여 전남 일대를 휩쓸었다. 토벌대는 경비부대와 행동부대로 나누어 8월 31일까지 外圍線 및 경계선에 배치하고 9월 1일부터 행동을 개시하는데 이를 준비하기 위해 해당 군수 및 면장을 소집하여 훈령하고 경찰서장에게 정찰수색에 전력을 다하도록 지시하여 전남의병의 섬멸작전을 자행했는데115) 黃玹은 梅泉野錄 에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116) 일본군이 길을 나누어 湖南義兵을 수색하니 위로는 珍山 錦山 金堤 萬頃으로부터 東으로 晋 州 河東, 南은 木浦로부터 四方을 포위한 것이 그물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순찰병을 파견하 여 촌락을 수색하며 집집마다 모조리 조사하여 조금만 의심해도 문득 죽이니 이에 행인들은 자연적으로 끊어지고 이웃 마을과 왕래하지 못하니 의병들은 셋 다섯 도망하여 사방에 흩어 지며 숨을 곳이 없게 되었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하여 싸우다 죽고 약한 자는 꾸물거리다 칼을 받았으며, 점차 쫓겨 강진 해남 땅에 이르러 갈 곳이 다하니 죽는 자가 무려 수천 명이 112) 의병항쟁재판기록 pp. 699 702 및 전남폭도사 p. 74. 113) 의병항쟁재판기록 pp. 699 702 및 전남폭도사 p. 50 및 p. 74. 114) 전라남도지 pp. 790 792. 115) 전남폭도사 pp. 130 133. 116) 黃玹, 앞의 책 융희 3년 己酉 8월.
- 229 나 되었다. 이렇게 전남의병의 대토벌작전이 전개되어 10월 25일에 끝났으니 9월 1일부터 55일 간의 대살륙전의 결과를 전남폭도사 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117) (1) 폭도의 死者 420명 (2) 체포 또는 自首者 1,687명 (3) 총기노획 455정 (4) 노획도쟁(刀鎗) 51정 그리하여 남한대토벌작전을 전후해서 전남의 동 남지역 출신 의병들도 수많이 살해되고 포로가 되거나 자수하여 그 중의 일부는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118) 義兵抗爭裁判記錄 姓 名 出身地名 活 動 內 容 刑 量 <표> 吳日祿 李世昌 李益洙 金亨注 金聖澤 李炳鉉 金憲白 孔成瓚 朴周一 金成言 孫德五 廉仁瑞 鄭奇賛 林夏仲 崔鳳成 鄭永珍 張仁初 黃俊聖 李一根 長興郡長西面 高興郡多鴨面 順天郡住岩面 麗川郡突山面 光陽郡津上面 求禮郡馬山面 求禮郡土旨面 谷城郡梧枝面 寶城郡鳳德面 寶岩面 福內시장 和順郡同福面 寒泉面 莞島郡郡內面 珍島郡南面 </표> 의병대에 가담, 총검을 휴대코 횡행하며 폭동 5년 沈南一의병대에 가담, 총기휴대코 면장과 공금영수원 살해 교수형 金승지 義兵隊에 가담, 총기휴대코 폭동 7년 梁京鶴 등과 같이 의병대를 조직, 교살 및 폭행 종신징역 黃俊聖과 결탁하여 의병대 조직 3년 黃俊聖의병대에 편의 제공 2년 黃永文의병대에 가담, 총칼휴대코 일인살해 및 일인가옥 소화 교수형 홍형관, 임세묵과 같이 의병대에 가담, 金成九의 부장, 日軍과 전투 교수형 高光洵의병대에 가담, 李永七의병대에 가담 3년 梁允淑의병대에 가담, 방조행위 1년반 安圭洪의 都砲將 左右砲將 左右翼將으로 활약 교수형 安圭洪의 左右砲將 左右翼將으로 활약 교수형 安圭洪의 砲軍習將 起軍將으로 활약 교수형 安圭洪의 都什長 運糧官으로 일진회원을 살해 교수형 安圭洪에게 日軍의 정보를 제공 1년반 高光洵의병대에 의병알선 및 총기알선 5년 安圭供의병대에 가담, 沈南一의병대에 가담, 安의 선봉장 교수형 內亂罪로 완도에 유배중 의병으로 再蜂起, 황두일의병대와 활동 교수형 金律의병대에 가담 3년 남한대토벌작전의 결과 전남의 의병들도 거의 섬멸되어 전국의병의 활동상은 미미하여 전국의병의 교전횟수나 교전의병수가 대폭 감소하였다. 1909년의 교전횟수 1,738회 교전 의병수 38,593명이, 1910년에는 교전횟수 128회 교전의병수 1,832명으로 되었다. 특히 117) 전남폭도사 p. 142. 118) 의병항쟁재판기록 pp. 565 941.
- 230 - 國史館論叢 第23輯 전남지방은 1909년의 547회 10,544명에서, 1910년에는 1회 5명으로 거의 전멸했 다.119) 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침략의 마무리로 한일합방을 서둘러 거칠 것 없 이 한국을 병합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명을 돌보지 않고 애국항쟁을 전개한 의병의 처절한 활동도 결실을 보지 못한 채 한일합방의 비극은 빚어졌다. 그러므로 의병활등은 그 나름대로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 으니 그것은 우선 악랄한 침략을 자행한 일본제국주의와 다음으로 망국을 자초하게 한 왕 을 포함해 집권관료들인 위정자들의 행위에서 찾을 수 있겠다. 즉 비극적 망국의 책임은 배신과 만행을 자행하면서 한일합방을 추진한 침략 당사자인 일본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와 야합하거나 외세를 이용하여 반봉건 반외세를 주장하는 민중을 탄압 한 위정자들이 져야 하며120) 의병항쟁의 가장 큰 한계성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는 1854년 미국에 開國된 후 1868년에 재빨리 明治維新을 단행하여 처음 에는 韓 中 日 三國이 연합하여 서양세력에 대처하자는 興亞會를 조직하고 동양권의 공동 대응을 강조하더니 곧바로 脫亞圈의 국가로 자처하여 자본주의체제로 진입하였고 歐美帝 國主義의 대열에 합류하고 편승했다. 그들은 대륙침략을 위해 한국이 교두보로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自國의 대내적인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도 한국이 필수불가결한 要地였기에 필사적인 침략을 자행했다. 일본은 1876년의 한국에 대한 開國過程에서 함포사격을 선행한 후 전쟁과 강화를 선택 하라고 강요했고 1884년의 甲申政變도 한국침략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시에는 억지의 구실을 만들어 출병하여 농민혁명군의 驅兵入京 盡滅權貴 를 좌절시켰고 궁궐을 침입한 후 淸日戰爭을 도발하여 한국을 독점하려 했다. 그들은 三國干 涉으로 그들의 침략정책이 저지되자 天人共怒할 乙未事變의 범죄행위를 자행했고 그로 인 해 국제적 비난이 빗발치자 정치적인 후퇴를 하면서도 경제적 침투를 더욱 노골화하였다. 또한 일본제국주의는 1898년 말에 반외세와 반봉건을 주장하던 만민공동회를 군인을 동원해 무력진압하도륵 사주하여 민중역량의 축적을 방해했고 드디어는 1904년 초에 러 일 전쟁을 도발하면서 노골적인 침략을 자행했다. 1904년의 한일의정서나 제 1차 한일협 약은 한국을 그들의 수중에 두려는 계획된 침략이었고 러 일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미 영의 협조와 양해 아래 한국의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한 후 러시아와는 포오츠머드조약 을 맺어 한국독점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고 1907년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治安과 군사작전이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침략에 저항하는 우리민족의 의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그들은 무자비한 살인과 방화를 자행하여 그들의 119) 주 3)과 같음. 120) 安秉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사회경제와 민족운동 ( 변혁시대의 한국사, 1979) pp. 145 146 참조.
- 231 - 만행은 외국의 분노와 항의도 받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121) 일본제국주의는 그들의 합방계획을 마무리하기 위해 최후까지 저항하는 전남지방의 의 병항쟁을 진압하려고 남한대토벌작전까지 전개하여 대살륙을 자행했고 그것으로 의병들이 벌인 살신성인의 구국투쟁은 사라져 갔다. 그러므로 의병항쟁의 한계성은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침략정책에 있는 것이고 여기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무기나 전술 전략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 침략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의병항쟁은 처절한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로 의병항쟁의 한계는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 자행한 망국적 행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왕과 집권관료들은 부정과 부패 그리고 무능으로 일관하여 그들 자신의 목전의 이익에 혈안이 되었고 기득권을 향유하기에 급급했다.122) 그 예로 왕과 위정자들은 동학농민군의 반봉건 반외세의 주장을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 화시켜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군을 불러 들여 국민들을 살상했다. 그리고 자주독립과 민권을 주장하는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만민공동회를 일제침략자의 권 고를 얻어내어 군을 동원해서 진압하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려는 근대화의 꿈을 무 산시키고 민중의 역량을 축적하지 못하게 했다.123) 그리하여 왕을 포함한 한말의 위정자들은 집권자로서 국민의 역량을 기르고 외세를 막 을 수 있도록 막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할 소임을 외면한 채 오히려 亡國의 길로 잘못 인 도하는 賣國的 행위를 자행했다. 그들은 국익과 국권을 지키기는 커녕 침략자들에게 각종 의 이권을 팔아 넘기고 침략자의 편에서 반외세 반봉건을 주장하는 민중들을 탄압했다. 한말에 조선 정부의 관료군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亡國을 적극적으로 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目前의 이해관계 때문에 소극적이나마 한일합방을 도왔던 것이므로 국왕을 포함 한 조선왕조의 관료군은 한일합방의 죄악에 대한 책임자인 것이다.124) 그러므로 의병장이나 의병들이 그들의 생명을 바치면서 주장했던 忠君愛國의 실체는 허 공에 떠버린 채 오히려 왕은 일제침략자의 괴뢰나 앞잡이가 되어 의병을 진압하고 해산시 키는 일에 동원되었으니 한말의병의 한계와 애로는 분명한 것이다. 세번째 한말의병의 한계성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의병대열 자체 내에 內在해 있는 여러 문제점들이라 볼 수 있다. 우선 의병장들의 思想的 根幹이 되었던 衛正斥邪論은 불합리하며 낙후되어 무지한 時局 觀 華夷觀 西學觀 洋物觀 交易觀 賊邊人說로125) 근대지향적이 되어야 할 반봉건 반제국주 121) 맥켄지,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의 비극 (1974) pp. 198 245. 국사편찬위원회 편, 高宗時代史 6(1972) pp. 703 704. 122) 拙稿, 梅泉黃玹의 歷史意識 ( 역사학연구 8, 1978) pp. 8 18 참조. 123) 拙稿, 韓末의 民衆運動 中樞院의 변천을 중심으로 ( 全南大論文集 29, 1984) 참조. 124) 安秉直, 앞의 논문 p. 146. 125) 李離和, 斥邪衛正論의 批判的 檢討 ( 韓國史硏究 18, 1979)에서 비현실적 시국관, 사 리에 맞지 않는 華夷觀과 西學觀 그리고 賊邊人說, 無知한 洋物觀이 잘 설명되고 있다.
- 232 - 國史館論叢 第23輯 의의 지도이념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위정척사론은 의병을 일으키는 기폭제 가 되었으며 전기의병의 지도이념은 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의병항쟁의 중핵인 후기 의병 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는 될 수 없는 취약성을 가졌다. 다음으로 전근대적인 신분구조 속에서 파생된 여러 문제점을 들 수 있으니 그 하나가 유생의병장들과 민중의병들의 불협화음이다. 黄玹은 전기 호남의병의 영수인 奇宇萬을 지 적하여 門族이 恣横하여 鄕里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고 서술했으며126) 그러한 처지였 기에 동학농민군과의 제휴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 토벌에 협조하였으니 민중출신인 의병들 과의 일체감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분계층 간의 갈등은 전국적인 현상으로, 전기의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堤川義兵에서 대장 柳麟錫이 그의 선봉장으로 忠州를 점령 하는데 큰 공을 세운 포수출신의 金伯善을 양반에게 불손하다해서 처형했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분계층 간의 갈등은 후기의병으로 넘어 오면서 민중출신의 의병장들이 다수 등장하고 민중들이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의병항쟁을 주도하면서 약간은 극복되었다. 또한 전근대적 신분구조 속에서 의병의 지도층에 민중출신이 적극 참여하지 못했으니 그러한 현상은 전국적인 경향이었으나 특히 호남지역은 농민층이 동학농민군으 로 혁명을 주도했다가 대부분 참살당했기 때문에 심각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오랜 동안의 의병항쟁을 통해 포수 해산군인 농민 동학교도 영학교도 工人 상인 출신들도 그들의 역량을 키워 드디어는 유명한 의병장이 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영남의 신돌석 과 호남의 안규홍이었다. 끝으로 의병 자체의 권력이 취약했다는 점이니 물적 자원인 무기와 장비면에서 근대적 인 무장을 한 침략군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인 죽창이나 화승총을 사용했다. 그리고 전술면 에서 훈련되고 精兵인 일본군과 오합지졸에다가 훈련이나 명령계통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의병들은 적수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약간 은 극복되었으나 원래의 큰 격차는 메꾸어지지 못했다. Ⅳ.結 語 韓末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 민족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면서 민중 민족운동 을 활발히 전개했다. 특히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 제국주의는 그들의 침략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일합방을 서둘렀는데 침략자를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하 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시키면서 적극적인 투쟁인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그러한 의병활동 126) 黃玹, 앞의 책 建陽 원년 丙申 정월 참조.
- 233 - 중 그 中核이 된 것이 호남의병이었고 전남의병은 그 主流였다. 우리는 위에서 全南義兵의 두 本流 가운데 하나인 全南의 東 南地域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말의 의병활동을 주체자인 우리측과, 침략자요 가해자인 일제측의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그 실상에 접근해 보았다. 또한 한말의 의병항쟁은 그 전후에 전개되었던 민족 민중운동 인 동학농민혁명운동 화적 서학당 남학당 영학당 그리고 활빈당활동과 서로 연결성을 가지 면서 繼起的으로 지속되었음을 살폈다. 1905년 11월 亡國이나 다름 없는 乙巳條約을 계기로 전개된 구국항쟁인 후기 호남의 병은 전기의병과는 달리 다른 지역 보다도 비교적 빨리 일어났으며 치열했고 다른 지방의 의병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후기 호남의병은 1906년 음 4월 최익현 임병찬 등이 泰仁에 서 起兵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일제침략군과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하고 동족 끼리의 살상을 피하자고 전주 남원 진위대에 앉아서 체포당함으로써 끝나버렸지만 그 여 파는 호남전역은 물론 전국 각지에 매우 컸던 것이다. 蘆嶺을 끼고 있는 전남 西 北地域과 아울러 智異山과 그 支脈이 걸쳐 있는 전남의 東 南地域은 구례 곡성 화순 보성 순천 광양 장흥 지방이 모두 의병의 활동무대였고 이곳의 주민들은 의병에 참석했거나 그 지원세력이었다. 이 지역의 의병활동은 최익현 임병찬 의 병에 동조하려 했던 高光洵 白樂九 의병대가 선구를 이루었고 그 다음으로 최익현의 사상 을 많이 받았던 梁會一 李白來가 주도했던 湖南倡義所의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호남창의소의 의병대는 1907년 3월의 盟主인 양회일과 1908년 이후의 都大將인 이백 래가 양반 유생출신이고 재력도 충분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의병활동을 지도했지만 농민들 과 동학당이나 영학당 출신들도 중요 부서를 담당했고 의병의 기층은 민중출신이었다. 그 리고 머슴출신의 안규홍과 그 의병들은 전남의 동남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의병으로 남한 대토벌 때까지 끈질기게 투쟁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심남일 임창모 유병기 같은 의병장들이나 신정우 노인선 임동규 그리고 김병도 같은 소부대의 의병들이 전남의 동 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제의 군경이나 일본인 친일 관료 세력인 일진회원 그리고 백성을 괴롭히는 토호들을 응징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은 그들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 마지막 장애인 전남의병의 소탕 작전으로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했고 다른 한편으로 1909년 8월에 전라선유사를 파견하 여 전남인들을 회유하려 했다. 日帝侵略者들은 한말에 人望이 있었던 茂亭 鄭萬朝를 全羅宣諭使로 파견했는데 鄭은 광 주에 도착해 일본수비대의 보호를 받으며 전체 시민들을 모아 놓고 우리 皇太子(英親王 李垠)가 영민하여 지금 외국에 유학 중이어서 국가 中興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시민들은 의병 같은 데 가담하지 말고 정부를 신뢰하여 생업에 전념하라고 회유하자 이 말을 들은 군중들은 이를 비웃고 욕설을 하면서 해산해 버리니 鄭은 무료함을 금치 못하여 즉일로 귀경해 버렸다.127)
- 234 - 國史館論叢 第23輯 일제침략자들은 야만적인 살륙과 공갈 속에서 남한대토벌작전을 완수하고 감언이설로 회유하면서 그들의 한국합방을 추진했다. 그러므로 전남지역은 일제침략을 저지하는 마지 막 보루였으며 전남인들은 그러한 항쟁을 통해서 호남인의 충성심과 정의감을 남김없이 표출했고 더 나아가서 한국의 근 현대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을 감당해냈 던 것이다. 한말의 의병항쟁은 한일합방을 강행한 일제침략자의 악랄성과 그들과 야합하고 협력한 왕을 포함한 집권관료들의 망국행위로 결실을 볼 수 없었던 한계성을 지녔다. 그리고 의 병대열 자체 내에 내재한 취약성인 지도이념의 부재 신분구조상의 문제점 천양의 차이가 있는 전력의 열세 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말의 의병항쟁은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수많은 희생을 내면서 침략자와 친일분 자(土倭)들을 응징하여 한일합방을 지연시켰다. 그리고 안으로는 민족 민중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면서 저항의식을 온축시켰고 밖으로는 한만국경이나 연해주에서 활발한 독립군 투 쟁의 주역이 되었다. 127) 黃玹, 앞의 책 隆熙 3년 己酉 8월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