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학상으로 본 한국사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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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Transcription:

高麗後期의 身分制 動搖 朴菖熙* Ⅰ. 序 言 Ⅱ. 身分制 動搖의 諸條件 Ⅲ. 身分變動의 樣相 1. 身分의 上昇移動 2. 身分의 下降移動 Ⅳ. 身分制 動搖의 影響 Ⅴ. 結 語 Ⅰ. 序言 고려사회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 체제가 성립되었고 또한 유지된 사회였다. 그런 데 이 신분제가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장구 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의 不平等 체계이겠고, 그것을 국가가 法制에 의해 강제적으 로 고정 관습화시키거나 혹은 각 사회 구성원이 그 불평등 체계를 공통적으로 認知 認定하 여 사회 慣習化함으써 사회신분으로 정착되어졌다. 따라서 신분제는 한 시대의 사회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테마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신분체계를 門閥 兩班, 中間階層, 良人, 賤人 등 4개의 범주로 구분 설정하고 있는 것이 요즈음 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보인다.1) 이같은 구분은 出生 職業 居住地 토 지소유관계 등이 기준이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나, 이것이 당시의 실상에 어느 정도로 부합되고 있는지는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2) 필자로서는 다만 上級支配身分을 門閥과 兩班 중에 어느 하나로 고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門閥을 어떻게 설정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門閥의 범위를 양반관료 전체로 설정할 경우에는 문제가 없겠으나,3) 현실적으로 여기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면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문벌을 특정 양반관료로 한정시킬 경우에는 거기서 제외되는 양반관료만의 새로운 신분범주 의 설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4) 따라서 필자는 오히려 文 武官僚의 品官群을 上級支配身分의 * 韓國外國語大學校 史學科 敎授. 1) 許興植, 高麗時代의 身分構造 ( 高麗社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81) pp.354 355. 朴龍雲, 高麗時代史 上(一志社, 1985) p.251. 朱雄英, 高麗朝 身分制 硏究의 成果와 課題 ( 歷史敎育論集 10, 1987). 2) 轉㳓劤氏에 의해 신분구분의 기준으로 血緣 職業 居住地 토지소유관계 등이 제시되어 대체적 으로 이것이 수용되어 왔으나(韓㳓肋, 韓國社會階層의 近代化 過程 思想界 8-10, 1960, p.229), 최근에 池承鍾 교수가 이를 검토하여 異議를 제기한 바 있어 주목된다(池承鍾, 身分 槪念 定立을 위한 試論 한국 고 중세 사회의 구조와 변동, 文學과 知性社, 1988). 3) 白南雲, 貴族群 (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 改造社, 1937) p.274. 4) 朴龍雲氏는 귀족의 범위를 5品官 이상의 양반관료로 한정시키고 있으나(朴龍雲, 高麗家產官 僚制說과 貴族制說에 대한 檢討 史叢 21 22, 1977; 高麗時代 臺諫制度 硏究, 一志社, 1981, pp.310 312) 이 경우 5品官 이하의 양반 관료와 향리 및 胥吏같은 中間階層 사이에 일 정한 界線이 존재하고 있어서 새로운 신분범주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범주로 설정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한데 고려 전기에 확립된 신분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武臣執權을 계기로 동요를 보 인다. 이는 당시 정치 경제질서의 문란과 농업생산력의 발전에서 촉발되어 나타났으나, 후기 사회를 균열과 갈등 속에 몰아 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신분제의 동요는 고려왕 조 붕괴와 朝鮮王朝의 성립을 촉진하는데 一助를 담당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후 기의 신분제에 대한 고찰은 고려왕조의 붕괴와 조선왕조의 성립과 연관되는 선상에서 이루 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필자는 본고를 작성하려 한다. 본고를 진행함에 있어 먼저 후기에 신분제를 동요케 하는데 일정한 계기를 마련해 준 정 치 경제 사회적 諸條件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대체적으로 기왕의 연구성과를 정리하 는 입장이나, 신분제상에서 무신집권이 갖는 의미를 재음미하려 한다. 다음으로 신분 변동의 양상을 上昇移動과 下降移動을 중심으로 살피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후기에 나타난 신분제 의 동요가 당시의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던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를 통 해 필자가 원래 의도했던 고려 후기의 신분제 동요가 고려사회의 붕괴와 조선왕조의 건국에 어떻게 작용하였겠는가 하는 문제가 어느 정도로라도 해명될 수 있을지는 저으기 의문이다. 많은 叱正을 바란다. Ⅱ. 身分制 動搖의 諸條件 10세기 초에 성립한 고려왕조는 제반 문물제도의 정비와 함께 한동안 안정을 누렸으나, 12세기에 들어 그동안 누적된 체제적인 모순이 정치적인 긴장을 고조시키더니, 결국 모순의 폭발현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李資謙의 亂과 妙淸의 亂 및 武臣亂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말하거니와, 특히 武臣亂을 계기로 武臣政權이 들어서자 고려사회는 큰 변동을 겪게 된다. 武臣들의 집권은 단순히 집권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으며, 이를 계기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야기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이 사태를 파악하지 않으 면 안된다. 일반적으로 武臣執權이란, 이로써 과거에 축적된 모순이 제기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심화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사회적인 긴장의 고조와 함께 갈등현상이 격렬해져 사회 는 전반적으로 혼란한 상태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후기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이해 하려는 것으로, 高麗史 찬자가 이같은 입장을 견지한 이래 최근까지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최근에 와서 이 시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려는 노 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고려후기를 단순히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어 답보적인 상태에 서 혼란만을 이루었던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一定한 사회적 발전을 이룩한 시기로 보고 자 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농업기술의 발전을 들고 있는 바,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토지 소유 분배관계의 개선과 신분체제상의 개선 등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5) 여기서 어느 편이 더 지배적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겠으나, 이 양 측면이 同時期에 존재한 것만은 사실이라 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고려후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모순이 심화되고 그로 인해 사 회적 갈등이 격렬하여 외관상으로는 혼란기로서 간주될 수도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모순을 척결하려는 노력 또한 진행되어 그 과정에서 발전적인 결과도 얻고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 5) 李泰鎭, 高麗末 朝鮮初의 社會變化 ( 韓國社會史硏究 農業技術 발달과 社會變動, 知 識產業社, 1986) p.109.

다. 武臣亂을 계기로 사회가 전반적으로 변질되고 있거니와, 그 과정에서 신분제 또한 큰 동 요를 일으키게 된다. 이 시기의 신분질서의 변화는 지배신분층과 賤人層의 양적 증가라는 신분이동의 측면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지위가 변화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같은 시기에 전개된 정치 경제 사회상의 변동의 결과로 초래되었다. 따라서 당시 신분제 동요 상황을 보다 실감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작용하였던 다른 면에서 의 변동상황을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는 이를 정치적으로는 정치상황의 변화라는 측면 에서, 경제적으로는 田柴科制의 붕괴에 따른 토지소유질서의 문란, 사회적으로는 流民의 대 량 발생이라는 요인을 중심으로 하여 살피고자 한다. 먼저 武臣亂 이후 정치상황의 변화는 크게 武臣執權期와 元에의 복속기 및 恭愍王 이후의 시기로 대별하여 살필 수 있다. 무신집권기에 나타난 정치상황의 변화는 크게 정치의 담당 이 과거 文臣 중심에서 武臣 중심으로 옮겨졌다는 것과 그 운영이 국가의 公的인 체계보다 는 執政者 개인의 私的인 지배체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前 者를 지금까지는 신분제 변질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고려 전기의 사회는 貴族制社會였는데, 이 때 귀족은 文臣官僚로만 구성되어 있고 武臣官僚는 여기서 제외되었는 바, 武臣亂을 계기로 신분이 낮은 무신들이 文班貴族을 대신하여 집권하게 됨에 따라 귀족에 의해 유지되던 신분제도는 붕괴되고 말았다고 한다.6) 즉, 고려 전기에 존재한 文武官僚 사이의 차별은 곧 신분적 차별로서 그것을 변혁케 했던 무신의 집권은 신분제의 변질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신분제의 변질로서 단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그와 같은 주장이 합리성을 가지려면 먼저 전기에 존재했던 文武班의 차별이 곧 신분적 차별의 결과라는 것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邊太燮氏는 다 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文武班 사이의 根本的인 차이는 그들의 社會身分上의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즉, 엄격 한 身分社會인 고려조에 있어서 文班은 武班에 비하여 家門門閥이 上位에 있었다는 신분 차이가 文班을 尊崇 優待하고 武班을 蔑視 賤待하게 하였고, 官職上의 權限에 차별이 생기게 하였으며, 나아가서 文武班의 相互通交를 방지하게 한 요인이라고 믿는다. 高麗社會에서는 文班은 대개 좋은 家門出身이 되었는데 대하여, 武班은 庶人出身의 軍卒에서 起用되었다는 門閥의 차이가 兩者 사이 에 엄격한 구별을 劃定하여 비록 法制上으로는 同列的인 兩班階級을 형성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 는 文班에 대한 武班의 劣位가 규정되고 相互通交가 허용되지 않는 결과를 야기시켰다고 생각한 다.7) 여기서 氏는 고려사회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文班官僚와 武班官僚는 그 출신가문과 문별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는데, 이것은 같은 兩班階級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양자간에 여러가지 차별을 초래케 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文班官僚만이 귀족계급을 형성하였고, 무반관료는 거기서 제외되어, 양자는 별개의 신분범주로서 파악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기의 이른바 문신귀족층 이 곧 상급지배신분층이었다는 주장이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 다. 그런데 신분의 범주가 국가 사회적 특권을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향유하면서 비슷한 6) 邊太燮, 高麗朝의 文班과 武班 ( 史學硏究 11, 1961;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p. 321. 7) 邊太燮, 앞의 논문 p.305.

사회적 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집단을 단위로 설정되고 있기는 하나, 각 사회 구성원이 한 신분만이 아닌 다른 신분의 요소도 동시에 갖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어 느 신분의 요소가 더 지배적이고 덜 지배적이었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신분을 판정하게 된 다. 그러나 그 기준이 법제적으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는 한 이같은 판정을 하기가 매 우 곤란한 것이 사실이다.8) 만일 문반관료와 무반관료를 별개의 신분범주로 설정한다면 다 른 신분층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白丁農民과 工 匠 商人, 鄕 部曲 등에 거주하는 集團賤人과 奴婢 사이에는 일정한 불평등이 내재해 있었던 바, 이들도 각각의 신분범주로 설정될 소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기왕에 설정해 놓은 신분체계는 재조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이에 따라 신분층은 숫적으로 대 폭 증가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국가 전체의 정치적 질서로서의 신분체계에 대한 체 계적이고 일률적인 파악을 어렵게 해 줄 것임은 필지의 사실이라 하겠다. 따라서 현재의 兩 班官僚 中間階層 良民 賤人의 4分的인 신분범주의 설정과 구분은 그런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 사회에서 지배신분의 획득은 원초적으로 官人身分의 획득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아 가 지위 상승을 계속하여 上級官人이 됨과 함께 그로부터 얻어진 제반 특권이 累代에 걸쳐 이어지면서 특권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관인신분의 획득여 부가 지배신분층, 나아가 좋은 가문 형성에 일차적인 조건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관인층이 하나의 신분범주로 설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연히 官人層을 하나의 신분범주로 설정할 경우 그 안에는 많은 이질적인 집단이 포함되어 현격한 불평등 체계가 계속 존재하게 된다. 이 현상은 신분범주가 국가 사회적 특전을 동일 하거나 혹은 비슷하게 共有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설정된다는 원칙에 합치되지 않는다. 따라 서 고려시대의 관인층은 신분적으로 다시 구분될 소지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문제는 어떻 게 그것을 구분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필자는 지배기구의 운영자로서의 특권을 대대로 보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으로 구분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한다. 바로 전자가 上級支配身分層을 구성하는 범주로서 여기에 文武班의 品官群이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9) 따라서 후자는 자연히 下級支配身分層으로서 기왕에 설정된 中間階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료체계 속에 동일한 品官群을 형성하면서도 文班과 武 班 사이에는 현실적으로 불평등이 게재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8) 文班과 武班의 별개 신분범주로의 설정은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邊太燮氏는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文班은 좋은 家門의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武班은 그렇지 못한 庶人出身으로 충당되었던 바, 비록 法制的으로는 同列的인 兩班階級을 형성하였으나 각기 별 개의 신분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신분에 있어서 生得的인 면 을 강조하고 반대로 成就的인 면을 간과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좋은 家門에 대해서 氏 는 특별한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累代에 걸쳐 과거나 음서 등을 통하여 文班官僚의 지 위를 유지하여 온 가문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가문은 원래부 터 형성 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에 계기가 마련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라 서 이 계기를 마련한 자의 원래 출신가문 역시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려 전기의 중앙관료는 地方吏族인 鄕吏層에서 많이 충원되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李樹健, 高麗前期土姓硏究 ( 大丘史學 14, 1978;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이로 볼 때 좋은 가문이라는 것도 결국 成就되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武班官僚 역시 이같은 차 원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9) 이들에 대해 學校의 입학 과거의 응시에 제한이 가해지고 있지 않다거나 限職制의 적용을 받 지 않는다는 것 등이 상대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누대적으로 보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田柴科에서의 토지지급 규정이나 권력소유 및 기타의 사회적 대우에서 무반이 문반에 비해 劣等했던 것이다. 이 현상을 통해 지금까지는 문반과 무반을 별개의 신분으로 구별하 여 파악함에 따라 현실적인 신분적 차별의 결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文班과 武班을 동 일한 신분범주로 설정했을 때 그와 같은 차별은 신분적 차별의 결과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를 필자는 문반과 무반이 갖는 직능상의 차이에서 오는 결 과로 보고자 한다. 兩班官僚體制에서 일반 정치는 문반이, 군사부문은 무반이 담당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여기서 일반 정치와 군사부문 중 어느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 평가를 높게 하느냐 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문제이다.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통치에 임했던 고려왕조는 군사부문보다는 일반 정치에 보다 큰 가치를 부 여했던 것 같다. 이는 군사업무라는 것이 비교적 단순한 업무였던 것에 비해 정치는 복합적 이어서 거기에는 뛰어난 경륜과 고도의 능력을 보다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정치영역에는 군사부문까지 포괄되고 있다는 데서 文 班官僚의 武班官職의 兼帶가 허용될 수 있었고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결론적으로 고려전기에 있었던 문반과 무반의 차별은 그 기능의 차별적인 평가에서 비롯 된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武臣執權期에 文 武班의 불평등이 해소되거나, 심지어 武班이 文班을 압도하는 현상은 신분제의 변질로서 보 다는 동일신분내에서 위계질서의 변화라는 입장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것이 신분 제 자체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신분제를 동요케 하는 데에 일정한 영향 을 끼쳤다. 즉 미천한 가문, 특히 李義旼이나 金俊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비출신이 정 권을 장악하는 현상은 피지배 하층민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을 각성시켜 신분상승의 욕구 를 강하게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여기에 무신집권 이후 정치질서의 문란으로 인한 執權的 統制力의 약화가 부합되어 하급신분에서 상급신분으로의 신분이동이 지난날에 비해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한편 정치질서의 문란은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崔氏政權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무신정권의 붕괴가 蒙古의 침략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한 요인으로 이 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계속 그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됨에 따라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忠 烈王 때부터 元의 王室女를 妃로 맞아들이는 것을 계기로 고려는 元의 駙馬國으로 전락됨과 함께 內政에 대해서 강한 간섭을 받았다. 심지어 王의 交替를 元의 의지대로 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됨에 따라 고려의 왕은 그 권력의 배경을 元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같은 경향은 國王에 한정되지 않고 臣僚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후기의 지배세력을 이루고 있던 權門世族의 대부분이 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설명 해 준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정부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력을 회복하여 주도적으로 그동 안 축적된 제반 모순을 척결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음은 필지의 사실이다. 이는 忠宣王 의 개혁정치가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뚜렷이 입증하고 있다.10) 이제 고려왕조는 元이라는 거대한 세력앞에 깊은 좌절을 겪으면서 王室과 지배세력은 그에 더욱 밀착하게 되 고, 나아가 차차 保守化되어감에 따라 제반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신분제는 武臣執權期 때보다 더 크게 동요하고 있거니와, 그 양상은 지배신 분층과 賤人層의 숫적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신분층의 兩極化 현상을 의미하는 것으 10) 忠宣王이 즉위하여 新進士類와 손잡고 국정전반에 걸쳐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權門世族의 강 력한 반발로 이 시도는 실패하고 王은 퇴위당하고 말았다. 忠宣王의 改革政治에 대해서는 다 음 논문을 참조. 李起男,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 歷史學報 52, 1971).

로 그것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요컨대 이 시기에 와서 公民으로서 국가재정의 기간 을 이루었던 良人이 크게 감소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로 公民인 良人이 私民化 되어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하락함으로써 야기되었던 바,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겠다. 여기서는 단지 피지배 신분층이 지배신분층으로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여지가 과거보다 이 때 한층 확대되었음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이것은 고려 내부의 문제가 발단이 되어 나 타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문제의 발생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異民族의 지배하에 처해 있는 당시 고려왕조의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元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恭愍王代 이후에도 지배신분층의 확대 현상은 계속되었다. 元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일부 附元的인 지배세력이 몰락하기는 하였으나, 그 숫 자는 전체 지배층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지배층을 증가시킨 요인 역시 외적인 충격에서 제공되었다. 공민왕대부터 빈번해진 紅巾賊과 倭寇의 침입은 여러 측 면에서 신분변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이들의 침입으로 많은 戶籍이 燒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良賤의 구별에 혼동이 생기게 되고, 이 틈을 이용 하여 많은 賤人이 良人으로 신분변화를 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恭愍王이 20년 12월에 本國戶口之法 近因播遷 皆矢其舊 自壬子年爲始 并依舊制 良賤生口 分揀成籍 隨其式年 解納 民部 以備參考 11)라는 下敎 내용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鄕 所 部曲 과 같은 지역의 일반 郡縣化에 따라 그 거주민에게 가해졌던 신분적 차별이 완화 내지 소멸 되고 있는 것 역시 이 시기에 나타나고 있는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添設職을 통하여 鄕吏를 중심으로 한 中間身 分層의 광범위한 신분상승이다. 添設職은 恭愍王 3년(1354)에 軍功을 포상하기 위해 설치된 일종의 散職이었다.12) 계속된 전란과 權貴에 의해 자행된 토지 人口의 겸병은 국가의 재정 을 어렵게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정부는 軍功者에 대해 물질적인 포상을 할 수 없는 처지 가 되었다. 그렇다고 한정된 관직에 모든 군공자에게 實職을 수여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添設職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첨설직이 남발 되는 경향을 보여 無功者에게 수여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工商 賤隸까지도 冒授하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하였다.13) 그렇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첨설직 수여의 일반적인 대상은 士 人과 鄕吏層이 되었다. 이는 麗末에 士族으로 성장한 家門中의 많은 수가 그 起家時期와 첨 설직의 남발시기와 일치하고 나아가 起家者의 관직이 대개 첨설직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입 증되고 있다.14) 요컨대 麗末의 添設職은 郡縣吏族이 대량으로 士族化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 었던 것이다. 이 때 士族化에 성공한 家門의 사람들이 대부분 麗末의 新進士類를 형성하게 되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들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건국하는데 중추적인 역할 을 담당하여 새 왕조의 지배세력으로 정착하게 된다. 후기에 오면 정치질서의 문란과 함께 사회 경제적으로도 크게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토지와 人口의 집중현상은 신분제 동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토지의 집중은 전기에 유지되어 온 田柴科制에 입각한 토지지배관계가 붕괴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이는 주로 권력 지배자들에 의한 불법적인 土地兼併의 형태로 이루어졌거니와, 이미 이같은 양상은 12세기 11) 高麗史 권79, 食貨 2 戶口 恭愍王 20년 12월조. 12) 高麗史 권75, 選擧 3 添設職 恭愍王 3년 6월조. 13) 今添設大繁 至無其數 功否混浠 僥倖日開 至於工商賤隸 階得冒授 官爵之賤 至如泥沙 ( 高麗 史 권75, 選擧 3 添設職 辛禑 9년 2월). 14) 李樹健, 高麗後期 支配勢力과 土姓 (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pp.342 344.

초 李資謙의 집권을 전후해 역사상에 나타나고 있다.15) 그것이 武臣執權을 계기로 본격화되 면서 農莊이라는 大土地所有를 성립시켰다. 農莊은 시기가 내려올수록 더욱 확대되어 元干 涉期에는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대토지소유의 성행은 토지지배 관계의 큰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田柴科制의 자체모순과 社會的 生產力 의 발전이 합치되어 일어난 현상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즉, 兩班官僚에게 지급할 分給收租地 가 항례적으로 부족하여 항상 분쟁의 소지가 있는 가운데16)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 력의 향상은 농민층 사이에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켜 階層分化를 촉진시켰으므로 몰락농민이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田柴科體制의 기반이 붕괴되어 권력층의 토지지배 의욕을 한층 자극시켰다는 것이다. 이래서 권력층의 대토지겸병은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국가재정의 악화는 큰 문제가 되었다. 과거 국가의 收租地로 기능하였던 많은 公田과 民田이 겸병의 대 상이 되어 收租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국가수입은 자연히 감소될 수밖에 없었 다. 그리하여 麗末에 이르러서 국가재정은 360石의 祿을 받아야 할 宰相이 20石도 받지 못 하는 정도로 악화되었다.17) 따라서 국가는 일반 민중에 대한 수취를 강화할 수밖에 없었고, 정부로부터 응분의 토지와 녹봉을 받지 못한 관료들 역시 민중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그것 을 보상받으려 했다. 결국 국가재정의 악화는 또다른 토지겸병을 유발하여 그것은 악순환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반 민중은 국가와 權貴 등으로부터 가혹한 수발을 당하여 그들의 생 활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이같은 양상은 곧 일반농민의 私民化를 加速化시켰다. 농민들은 국가와 權貴 등에 토지를 빼앗기거나 혹은 그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토지를 버리고 流民化하는 한편 자신 의 田地를 들어 權貴에 投託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토지를 겸병할 때 거기에 緊縛되어 있 던 농민도 동시에 그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단 私民이 되면 경제적으로 전보다는 형편이 좋아졌으나 그들의 신분적인 지위는 저하되었다. 즉, 이들은 私民이 됨으로써 국가나 기타의 權貴로부터 침탈을 면할 수 있었고, 나아가 기본적인 生計가 해결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凡民匿于豪强之家者 日 益富逸 子遺殘民 困於賊歛 18)이라고 하는 당시의 상황의 기록을 통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러나 壓良爲賤 認民爲隸 冒良人爲隸 抑良爲賤 등과 같이 良人을 강제로 賤隸로 만드는 양 상이 당시에 빈번히 일어났는데 良人의 私民化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田柴科制의 붕괴에 따른 경제질서의 문란은 公民的 존재이던 일반 농민들을 私民 化시켜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저하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Ⅲ. 身分變動의 樣相 고려시대의 신분제는 전대인 신라의 그것에 비해 보다 개방적이었다. 이는 신분이동에 대 한 법제적인 허용이 신라에 비해 고려에 와서 그 폭이 확대되었다는 점이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신라의 骨品制的인 신분제는 거의 전적으로 血緣에 의해 신분등급이 결정되었던 15) 宋炳基, 高麗時代의 農莊 12世紀 以後를 中心으로 ( 韓國史硏究 3, 1969) p.385. 16) 姜晋哲, 田柴科體制의 崩壞 ( 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p.313. 17) 而當受田三百結者 曾無立錐之可 爲宰相而受祿三百六十石者 尙不滿二十石 ( 高麗史 권 78, 食貨 1, 田制 祿科田, 辛禑 14년 7월조). 18) 高麗史 권33, 忠宣王 1 34년.

관계로 신분의 취득은 후천적으로 성취하는 면보다 生得的인 면이 강하였다. 나아가 신라왕 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분이동을 억제하는 입장을 취하여 현실적으로 신 분이동이란 실현되기 어려웠다. 이에 비해, 고려시대의 신분취득은 生得的인 면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새롭게 성취되는 경우가 많았다. 후천적인 성취에 의 한 신분취득은 法制的으로 신분이동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던 데에서 가능할 수가 있었 다고 하겠다. 그러나 良 賤간의 신분이동만은 法制的으로 엄격히 규제되었다. 따라서 賤身分 에서 良身分으로의 이동은 극히 예외적인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하겠으며, 良身分에서 賤身分으로의 이동도 국가에 의해 엄격히 차단되었다. 이에 반해, 良 身分 내부에서의 이동은 비교적 폭넓게 허용되었다. 平民인 白丁農民이나 中間身分인 鄕吏 등에게 科擧의 응시가 허용되고 있다든가 혹은 胥吏가 品官으로 상승할 수 있는 통로 등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 있었던 사실이 그것을 설명해 준다. 보다 용이한 방법으로는 選軍制 를 들 수 있는데,19) 농민들은 이를 통하여 군인이 되고 다시 武班官僚로까지 상승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같은 제도적인 장치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분이동을 하 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하층민들이 정규적인 제도적 장치, 특히 科擧와 같 이 많은 財力과 努力 그리고 시간을 요하는 방법을 통한 신분 이동은 상당히 드문 편인 것 으로 보인다. 즉 하층민에게는 장기간에 걸친 학문에의 노력과 그것을 뒷받침해 줄 사회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비교적 안정을 누렸던 고려전기 에 있어서 신분이동은 법제적으로 허용된 만큼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 고 하겠다.20) 그러나 武臣執權을 계기로 前期에 구축되었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반 질서의 붕괴와 함께 農法의 발전으로 경제적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신분이동의 정도와 폭은 한층 커지고 있다. 즉 전 신분층에 걸쳐서 큰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의 신분이동은 이동 의 방향을 기준으로 볼 때 上昇移動(upward mobility)과 下降移動(downward mobility)이, 이동주체의 규모를 기준으로 하여 볼 때는 個人的 移動(individual mobility)과 集團的 移動 (group mobility)의 형태로서 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로 이루어진 신분이 동은 결과적으로 지배신분층과 賤人層을 한층 증가시키고 있거니와, 이를 통해 신분의 兩極 化 현상이 초래되었다. 이것이 바로 후기의 신분제 변동상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신분의 上昇移動 현상과 下降移動 현상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身分의 上昇移動 신분의 상승이동으로는 賤人身分에서 良人身分이나 지배신분으로 상승하는 경우와 平民에 서 지배신분으로, 또한 鄕吏 胥吏와 같은 中間階層에서 上級지배신분으로 상승하는 경우가 19) 選軍制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이 참조된다. 張東翼, 高麗前期의 選軍 京軍構成의 이해를 위한 一試論 (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李基白, 高麗軍人考 ( 震檀學報 21, 1960; 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20) 李基白氏의 분석에 의하면 고려초기의 과거합격자가 거의 中央官吏나 地方鄕吏의 자손에 의 한 것으로 되어 있다(李基白, 科擧制와 支配勢力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4, p.181참조). 이 지적은 타당한 것으로, 고려전기에 있어서 과거를 통한 신분상승은 향리층에 서 활발히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있을 것이다. 후기에는 이러한 제 경우가 모두 나타나고 있는 바, 먼저 賤人層의 신분 상승 을 살펴보고자 한다. 賤人身分의 구성은 鄕 部曲 所 驛 津 館 등의 거주자와 奴婢로 이루어졌다.21) 이들은 身分 序列 체계에서 가장 下位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범주와 사회적 특권이 法制的으로 비교적 분명하게, 그리고 엄격히 설정되고 규제되었다. 즉, 이들은 모두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고 나 아가 과거에의 응시가 금지되었다든가, 혹은 자손의 귀속 문제 등에서 엄격한 규제를 받았 던 것이다. 특히, 奴婢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 되어 마치 물건과 같이 취급되었다.22) 그 런데, 集團賤人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고는 하나 최소한 자기의 經理를 소유하고 하나의 人格體로 존재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로써 보면 같은 賤人身分이라 해도 集團賤人과 奴婢 사이에는 일정한 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 천인신분자에게 가 해졌던 엄격한 통제와 차별은 정치질서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던 전기에는 별 변동 없이 지 속되었으나, 武臣執權을 계기로 그것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즉 이들의 신분상승 현상이 빈 번히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24) 이 현상은 크게는 奴婢가 일반 양인 혹은 지배층으로 상승 하는 경우와, 鄕 部曲 같은 지역이 일반 郡縣化함에 따라 그곳 주민의 신분이 상승하는 경 우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奴婢신분층의 변동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신집권을 계기로 한층 심하게 일어났다. 미천한 신분의 출신인 武臣들이 집권하는 사태는 곧바로 노비들의 신분상승 욕구를 자극시 켰고,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신분적 모순을 자각케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25) 이들의 이 러한 자각은 곧 신분해방을 위한 행동화로 연결되고 있거니와 崔忠獻의 私奴였던 萬積이 公 私奴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도모하고 있는 데서 그것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國家에는 庚癸 이래로 朱紫가 많이 賤隸에서 나왔다. 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 면 (누구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찌 筋骨을 수고로이 하면서도 매질 밑에서 곤욕을 당 21) 鄕 所 部曲의 신분을 종래에는 賤人으로 이해하여 왔으나(金龍德, 鄕 所 部曲考 白樂濬 還甲紀念 國學論叢, 思想界社, 1955, 및 旗田巍, 高麗時代の賤民制度 部曲 について 和田博士還曆紀念東洋史論叢, 1951;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최근에 이르러 良人說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說을 지지하는 논문은 다음과 같다. 李佑成, 高麗末期 羅州牧 居平部曲에 對하여 鄭道傳의 謫居生活을 通해 본 部曲의 內部關 係 ( 震檀學報 29, 30, 1966). 武田幸男, 高麗の律令制 ( 岩波講座世界歷史 6, 1971). 朴宗基, 13세기 초엽의 村落과 部曲 ( 韓國史硏究 33, 1981). 金龍德, 部曲의 規模 및 部曲人의 身分에 對하여 上 下 ( 歷史學報 88, 89, 1980, 1981). 또한 최근에 所民을 身良役賤層으로 비정하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金炫榮, 고려시기의 所에 대한 재검토 ( 韓國史論 15, 서울大, 1986). 22) 모든 奴婢가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주로 私奴婢에 한하여 이루어 졌다(龜田敬二, 高麗の奴婢について 1 靑丘學叢 26, 1936, pp.100 124). 23) 이같은 차별현상은 같은 奴婢層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公奴婢와 私奴婢 또는 外居奴婢 와 率居奴婢 사이에도 사회 경제적 차별이 존재하였다(洪承基, 私奴婢의 性格 및 公奴 婢의 特性, 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참조). 24) 黃雲龍, 高麗賤流顯官考 ( 签山史學 4, 1980). 洪承基, 高麗崔氏武人政權과 崔氏家의 家奴 ( 震檀學報 53, 54, 1982; 高麗貴族社會 와 奴婢, 一潮閣, 1983). 25) 邊太燮, 萬積亂 發生의 社會的 素地 武臣亂 후의 身分構成의 變質을 基盤으로 ( 史學 硏究 4, 1959; 앞의 책 p.461).

하겠는가. 우리들이 興國寺 步廊에서 모여 毬庭에 나아가 일시에 群集하여 북치고 소리치면 闕 內의 宦者들이 반드시 응할 것이며, 官奴 등도 안에서 베어 죽일 것인 즉 우리 무리 역시 城 안에 서 봉기하여 먼저 崔忠獻 등을 죽인 후 각기 그 주인을 살해하고, 賤籍을 불태워 三韓의 賤人을 없애면 公卿將相은 모두 우리가 할 수 있다.26) 萬積의 위와 같은 말 속에 신분해방 의식이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러한 의식전환이 賤人 사이에서 실제상으로 야기되었을 것까지 짐작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의 성취를 위해 봉기를 꾀하는 데까지에는 많은 수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제1차 집회에서 수 천명의 公私奴를 모아 놓고 위와 같이 말한 내용에 대해 일단 동의를 하 였으나, 거사 당일에는 불과 수 백명만이 참여하고 있는 사실을 통하여 감지되고 있다. 또한 萬積의 거사가 거기에 참여했던 律學博士 韓忠愈의 家奴인 順貞의 밀고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27) 역시 그것의 한 반증이 아닌가 한다. 順貞의 밀고가 萬積의 계획이 성공할 수 없음 을 미리 예견한 것에 연유되었던, 아니면 그 자신의 일신상의 타산을 추구한데 그 원인이 있었던, 그가 萬積이 갖었던 확고한 신념이 결여된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이 신념의 결 여는 바로 신분적 모순에 대한 각성이 철저하지 못했던 것에 기인된 결과로 보인다. 대다수 의 천인이 신분적 모순에 대한 충분한 자각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그들의 신분해방 운동 의 성공이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역사적 결과는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28) 신분해방을 위한 급진적인 거사의 실패는 일시적으로 奴婢 자신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어 그들로 하여금 현실적인 신분제의 두터운 벽을 느끼게 해 주었다. 따라서 賤人들은 신분해방을 위해 혁명적인 방법보다는 현실 속에서 보다 실현 가능한 방 법을 모색하게 된다. 여기서 그들이 택한 것은 신분제의 전면적인 부정을 바탕으로 한 신분 해방보다는 현재의 신분제를 인정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자신들의 신분상승을 꾀하다 것이 었다. 이같은 그들의 의도는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한 상황을 표출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 기를 이용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무신집권기에는 정치적 권력의 획득이 門閥과 같은 신 분제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때는 그보다 개인적인 실력, 특히 私 的인 武力에 의해 그것이 결정되었다. 이런 까닭에 각 武臣들은 私的인 武力을 양성하는 한 편, 이를 뒷받침해 줄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와 일반민중을 겸병하는데 적극적이었다. 26) 國家自庚癸以來 朱紫多起於賤隸 將相寧有種乎 時來則可爲也 吾輩安能勞筋骨 困於捶楚之下 諸奴皆然之 剪黃紙數千 皆鈒丁家爲識 約曰 吾輩自興國寺步廊 至毬庭一時群集 鼓噪則在內宦 者 必應之 官奴等誅鋤於內 吾徒蜂起城中 先殺崔忠獻等 仍各格殺其主 焚賤籍 使三韓無賤人 則公卿將相 吾輩皆得爲之矣 ( 高麗史 권129, 列傳叛逆 3 崔忠獻傳). 27) 同上. 28) 萬積의 亂 이외에도 明宗 6년(1176)에 일어난 公州 鳴鶴所民의 봉기 同王 12년(1182)의 全州 에서의 竹同의 亂 및 神宗 3년(1200)의 晋州 公私奴隸들의 봉기 등의 계속해서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당시 賤民 반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여러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겠으나, 기본 밑바탕에서는 신분적인 차별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데 이들이 신분적인 모순을 철저히 자각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신분해방을 위한 봉기를 꾀하 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全州에서 일어난 竹同의 亂에서 그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즉 이 亂은 旗頭였던 竹同이 주동하고 官奴가 참여하여 일어났으나, 그 동기가 지방관 과 향리의 苛役驅使에 대한 반발에 있었고 목적 역시 이들을 放逐하는데 그치고 있었던 것 이다(邊太燮, 앞의 논문 p.468). 이것은 아직도 당시 천민들이 신분의식을 충분히 각성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실례가 된다고 하겠다. 고려 후기에 일어난 賤民叛亂에 대해서는 다 음의 논문이 참조된다. 旗田巍, 高麗の明宗神宗時代における農民一揆 ( 歷史學硏究 2-5, 1934). 邊太燮, 위의 논문.

이 과정에서 奴隸들은 자신의 주인에 대해 더욱 돈독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그들의 신임을 얻을 수가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분적 상승을 꾀할 수가 있었다. 이 때 奴婢들은 자신 의 주인이 경제력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실무적인 일을 담당함으로써 그것을 실현하기도 하 였으나 그보다는 私兵이 되어 주인의 신임을 얻어 신분상승을 꾀하는 경우가 보다 많았 다.29) 舊制에 奴牌는 비록 큰 공을 세워도 錢帛으로 포상하였을 뿐 官爵은 제수하지 않았다. 崔沆이 執政하여 人心을 얻고자 비로소 그 家의 殿前인 公柱 崔良伯 金仁俊을 別將으로 삼고, 聶長壽를 校尉로 삼고, 金承俊을 隊正으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奴 등이 말하기를 公柱는 그 자신이 3代를 섬겨 年老하고 功도 있으니 叅職을 주십시오 라고 하자 이에 郞將을 제수하였다. 奴隸에 대한 叅 職제수는 여기서 비롯되었다.30) 위 사료의 내용이 바로 這間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보이는 崔氏 家의 家奴들은 모두 私兵으로 활약한 인물들로서 法制로 금지되고 있던 관직제수는 물론 叅 職까지 제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崔氏家가 王權을 압도하는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인해 가능하였다고 하겠으나, 그 과정에서 이들이 私兵으로서 남다 른 충성심을 발휘했고, 또한 崔氏家는 이를 바탕으로 그들을 매우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 전 제되지 않으면 안된다.31) 이는 奴隸들이 李公柱에 대한 叅職 제수를 강력히 요구하자 崔 (立+宣)가 기존의 法制를 무시하면서까지 그것을 들어주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노예들은 이제 武臣執政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 들은 자신의 이해를 강력히 주장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노예들 중에는 자신들의 신 분적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지배층의 타도와 같은 혁명적인 방법보다는 오히려 이들에게 더 욱 밀착하여 기회를 이용하는 보다 실현성이 높은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 시에 비록 정치질서가 크게 문란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아직 강한 신분질서가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신분해방과 같은 혁명적인 일이 성취되기는 극히 힘들었던 것이다. 萬積의 亂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예들은 자신의 정치 경제 사회적 처지를 효과적 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현실 속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의 主 家에 대해 더욱 충실히 하는 가운데 그들의 힘을 빌어 바라던 바를 이루는 방법을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그들의 의도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아주 절묘히 맞아 떨어져 그것 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즉 權勢家의 입장에서도 무력이나 경제력의 축적 확대 의 과정에서 자신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바탕으로 수족처럼 움직여주는 노예들이 가장 믿을만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양자의 입장이 부합됨에 따라 賤隸로서 顯官에 오르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게 되거니와,32) 그 중에는 金俊과 같이 최고의 執政에 오르는 경우도 나타났다.33) 賤人의 지배신분층으로의 상승현상은 元干涉期에 와서 더욱 확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9) 洪承基, 崔氏武人政摇과 崔氏家의 家奴 앞의 책 pp.283 294. 30) 舊制 奴婢雖有大功 賞以錢帛 不授官爵 沆秉政 欲收人心 沆始除其奴 殿前公柱 崔良伯 金仁俊 爲別將 聶長守爲校尉金承俊爲隊正 至是 奴等白竩曰 公柱身事三世 年老有功 請加叅職 乃授郞 將 奴隸拜叅 始此 ( 高麗史 권75, 選擧3 限職 高宗 45년 2월). 31) 洪承基, 앞의 논문 p.296. 氏는 여기서 崔氏家와 그 家奴와의 관계를 최대 최선의 신임과 봉 사로 특징지워진다고 하고 있다. 32) 주 34) 참조. 33) 高麗史 권130, 列傳叛逆 4 金俊傳.

이들이 顯官이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34) 이 또한 이들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적절히 이용 한 결과로 보인다. 다음의 사료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僉議府가 上言하기를 근래에 內竪 微賤者가 隨從한 공로로 仕路에 許通되어 조정의 班列에 섞 이게 되니 祖宗之制에 어긋남이 있읍니다. 청컨대 成命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 았다. 國制에 內僚之職은 南班 7品에 한정시켜 常式七品이라고 불렀다. 만약 大功이 있고 능력이 남다르다 하여도 단지 賞賜를 가할 뿐이어서 5 6品에 이르는 자는 없었다. 元宗朝에 비로소 그 길 을 터 놓았으나 將軍 郞將에 임명된 자는 한 둘에 지나지 않았는데, 忠烈王이 즉위함에 이르러 內 人 無功者가 豊官 高爵에 배수되어 누런 가죽띠를 띠었고, 자손에 이르러서는 臺省 政曹에 許通된 자가 심히 많았으며, 別將 散員같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35) 위 사료에서 內竪 微賤者들이 隨從한 공로로 仕路에 허통되어 大官 高爵에 오르기도 하고, 심지어 그 자손대에 이르러 臺省 政曹 같은 淸職에 허통된 자도 많았으며, 別將 散員 같은 하급직에 오른 자는 수 없이 많았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隨從한 공로라는 것은 당시 고 려의 王이나 世子들이 元에 出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 이들을 수행한 공로를 지칭하 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內竪 微賤者들은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고, 나아가 이를 발판으 로 仕宦하여 高官으로 승진되는 경우가 많았다.36) 특히 이들이 그 자손대에 이르러서는 淸 要職에까지 제수되고 있는 사실은 모든 관직의 제수에 있어서 신분적인 제한이 前時期에 비 하여 크게 완화된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전기의 엄격했던 신분의식이 이 때에 와서 크게 붕괴됨에 따라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비록 下級武官職이기는 하나 別將 散 員 같은 직에 賤人들로 충원되고 있는 현상 역시 그와 같은 선상에서 파악해서 무리는 없을 듯하다. 이와 함께 賤人으로서 蒙古語에 능하여 정치적인 출세를 하는 경우도 있거니와 康 允紹와 崔安道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37) 또한 당시는 元이 고려에 대한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관계로 더러는 元 세력을 배경으로 해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경우도 있었 다. 이렇게 해서 賤身分에서 지배신분층으로의 상승은 주로 자신의 주인인 權勢家나 王의 신임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한편 賤人이 仕宦하여 지배신분층으로 편입되는 경우와 함께 일반 양인으로 상승하는 일 도 빈번히 일어났다. 오히려 前者보다 後者가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들이 兩班官人이 되는 것보다는 일반 양인으로 상승되는 것이 보다 용이했으리라 는 것과, 鄕 部曲과 같은 지역이 일반 郡縣化함에 따라 그곳에 거주하던 천인이 집단적으로 일반 양인화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賤人의 개별적인 良人化는 몽 고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그 이후 계속된 倭寇와 紅巾賊의 침입으로 생긴 행정의 공백 과 문란 및 戶籍制의 혼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기에 호적의 위조를 처벌한다든 34) 洪承基, 元의 干涉期에 있어서의 奴婢出身 인물들의 政治的 進出 ( 韓國史學 4, 1983; 앞의 책). 35) 僉議府上言 近內竪微賤者 以隨從之勞許通仕路 混雜朝班 有乖祖宗之制 請收成命 不允 國制 內僚之職 限南班七品 謂之常式七品 如有大功異能 只加賞賜 未有至五六品者 元宗朝始通其路 然拜將軍郞將者 不過一二 及忠烈即位 內人無功者 拜豊官高爵 腰鞓帶黃 至子孫許通臺省政曹 者 甚多 若別將散員 不可勝數 ( 高麗史 권75, 選擧志 3 凡限職 忠烈王 2년 윤2월조). 36) 이 부류의 대표적인 인물로 靜州官奴였던 丁伍孚와 忠州官奴였던 金義共을 들 수 있다. 이들 은 일찍이 忠烈王을 侍從補佐하여 一等功臣이 되었고 將軍과 副知密直司事의 관직에 앉기도 하였다( 高麗史 권29, 忠烈王 8년 5월 庚申조 및 권31, 同王 22년 6월 乙酉조 참조). 37) 高麗史 권123, 列傳嬖幸 1 康允紹傳 및 같은 책 권124, 嬖幸 2 崔安道傳.

가 혹은 새로운 호적의 작성을 명하는 내용의 敎旨를 왕이 자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경우보다는 鄕 部曲 등의 賤人이 일반 良人化하는 것이 천인의 신분상승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시대에 이와 같은 천인 거주지역으로서의 특수행 정구역이 매우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 또한 일반 군현에 비해 결코 작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 추론된다고 하겠다.38) 그런데 이들의 良人化가 鄕 部曲 등의 지역이 일반 군현화한 결과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신분변화가 먼저 일어나고, 그 결 과로 그들의 거주 지역이 일반 郡縣化한 것인지가 궁금하다.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일 반 郡縣과 鄕 部曲과 같은 특수구역 사이에 생긴 불평등의 유래를 이해해야 하겠다. 고려시대에 일반 郡縣民과 鄕 所 部曲民 사이에 사회적 불평등이 뚜렷이 존재한 것은 주 지하는 사실이다. 이것을 신분적 차별로 이해해서 무리는 없을 듯하다. 문제는 양자 사이의 불평등의 시작이 거주지역의 차별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최초의 신분적 차별에 의해 지역적 구분이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적 차별에 의해 신분적 차별이 생겨났는지 아니면 신분적 차별에 의해 지역적 차별이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의 견 해로는 후자가 더 많은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鄕 部曲이 전쟁포로의 집단적 수용지에서 기원되고 있다거나,39) 혹은 국가에 대해 반역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범 했을 때, 그 범죄자의 출신 郡縣이 鄕 部曲으로 격하되고, 반대로 국가에 큰 功을 세웠을 때 그 반대의 현상이 전개되는 것을 통해 헤아려 볼 수 있다. 전쟁포로나 범죄자는 국가의 입 장에서 특별히 파악해야 할 존재들이었고, 이를 위해 이들을 특정 지역에 緊縛시키지 않으 면 안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 대한 평가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 이후 그들의 거 주지역이 정해진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사실은 곧 일반 군현과 향 부곡 사이의 구 분은 신분적 차별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따라서, 후기에 나타난 鄕 部 曲 등의 일반 군현화는 먼저 그 지역 주민의 신분적 해방이 전제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集團賤人이 후기에 와서 대량적으로 해방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하여 이것을 가능케 했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배경이 다음 의 세 가지 경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자 한다. 첫째는 武臣執權을 계기로 팽배된 賤人들의 身分解放 욕구와 이를 바탕으로 전개된 신분 해방 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천민의 신분상승 욕구와 그를 바탕으로 일어난 萬積의 난 의 경우에도 사실은 그 이전인 明宗 6년(1203)에 이미 公州 鳴鶴所의 민중들의 蜂起에 뒤따 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는 鄭仲夫가 집권하던 시기로 정치질서가 크게 혼란된 양상을 보 이고 있었다. 鳴鶴所 봉기의 배경으로는 국가의 가혹한 수탈이나 집권자의 잦은 교체로 인 한 정치적 혼란 등을 들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그곳 민중들의 강렬한 신분해방 욕구가 반영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봉기에는 鳴鶴所라는 단일 지역의 주민만이 참가 한 것이 아니라, 그 인근의 部曲民이나 일반농민도 참여한 대규모적인 것이었다.40) 정부는 38) 이는 成宗 2년 6월의 公廨田柴 成宗 2년 6월조. 39) 金龍德, 鄕 所 部曲考 ( 白樂濬還甲紀念國學論叢, 1955) pp.183 185. 그러나 최근에 李 佑成 교수에 의해 鄕 部曲이 越境地에서 비롯되었다는 新說이 제기된 바가 있다(李佑成, 李朝時代 密陽古買部曲에 대하여 部曲制의 發生形成에 關한 一推論 震檀學報 56, 1983, pp.21 23). 40) 李貞信, 高麗時代 公州 鳴鶴所民의 蜂起에 대한 一硏究 ( 韓國史硏究 61 62, 1988) pp.191 208.

초기에 鳴鶴所를 忠順縣이라는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켜 이들을 회유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정부군에 의해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所로 강등시켰다.41) 이 과정에서 비록 일시적 이기는 하나, 국가에 의해 所를 일반 군현으로 상승 변화시켰음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는 신분해방을 갈망한 명학소민의 욕구가 관철된 것을 의미한다. 집단행동을 통한 신분해방의 관철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는 바, 慶州의 농민폭동과 萬積의 亂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 의 피지배 身分의 民亂이 바로 그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신분해방을 위한 집단적인 투쟁은 비록 즉각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결과적으로는 賤民地域 해체에 일정 한 기여를 하였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둘째로, 후기에 와서 賤人과 일반 良人 사이에 존재했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처지의 차 이가 많이 해소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 신분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짐에 대해서 는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이는 주로 賤人이 良人이나 지배신분층으로 상 승하거나, 반대로 良人에서 賤人으로 전락하는 방향에서 나타났다. 이 양상의 심화는 良人과 賤人 사이의 차별의식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기에 충분했다. 즉 良 賤 간의 대량적인 이동 현상은 엄격했던 良 賤的인 신분질서를 크게 혼란시켰고, 나아가 기존의 전통적인 신분의식 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 양인이었던 농민들이 국가나 권세가의 침탈대상이 되어 경제적으로 점점 몰락하여 그들의 경제적인 처지가 賤人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로 인해 公民的 존재였던 많은 농민들이 권세가나 寺院 등의 私民으로 전락되었 다. 결국 이들은 기존에 隸屬民으로서 權勢家의 私民으로 존재했던 奴隸들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편, 후기에는 農法의 발달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하고 있다.42) 그리고, 일 반 군현의 농민과 鄕 部曲民이 농경에 종사하였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로 서, 이는 이들의 생활여건이 일반 군현의 농민들과 기본적으로는 같았음을 말해 준다.43) 농 업생산력의 발전이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으나, 한편에서는 그 들의 分化를 촉진시켜 몰락농민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양상은 일반 군현과 같은 생 활여건을 갖고 있던 鄕 部曲 안에서도 나타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즉 이곳의 주민 안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어 분화현상이 일어나 경제적인 풍요를 갖는 부류도 생겨났을 가능성 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일반 군현의 농민과 鄕 部曲의 주민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크게 완화시켜 실제 생활면에서 양자의 뚜렷한 구별은 어려웠으리라는 추론 을 하게 된다. 셋째로 빈번한 戰亂을 들 수 있다. 蒙古와의 전쟁상태가 30여 년간 지속되었고, 그 이후 三別抄의 항전과 진압, 日本침입의 단행, 倭寇와 紅巾賊의 침입 등, 이로 인해 국토는 크게 황폐화되어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流民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군현의 농민들뿐만 아니라 鄕 部曲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戰亂의 와중에서 戶籍 등이 燒失되 어 良賤의 구별이 모호해진 틈을 이용하여 良人으로 자신의 신분을 위조하는 경우가 많았 41) 明宗 六年 公州鳴鶴所人 亡伊嘯聚黨與 攻陷忠順縣 朝廷陞其所爲忠順縣 置令尉以撫之後降而 復叛 尋削之 ( 高麗史 권56, 地理志 1 公州條). 42) 고려후기를 農法의 발달로 해서 농업생산력이 발전된 시기로 이해한 논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金容燮, 高麗時期의 量田制 ( 東方學志 16, 1975). 李泰鎭, 14 1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 ( 東洋學 9, 1978). 金泰永, 科田法體制下의 土地生產力과 量田 ( 韓國史硏究 35, 1981; 韓國前期 土地制 度史硏究, 知識產業社, 1983). 43) 洪承基, 賤民 ( 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1975) p.341.

다. 이와 함께 鄕 所 部曲의 주민이 戰功을 세워 그 출신 지역을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는 현 상도 나타났는데 대표적으로 多仁鐵所를 들 수 있다.44) 이들 몇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후기 향 부곡 등의 집단천인이 신분적으로 해방되어갔다. 이렇게 해서 이같은 요인들은 정부의 입장에서 일반 군현의 농민과 향 부곡 의 주민들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따로 구분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했을 것 이다. 결국 후기에 와서 전기에 비해 향 부곡의 일반 군현으로서의 승격은 위와 같은 몇 가 지 요인으로 촉진되어 빈번해 질 수가 있었다고 하겠다. 신분을 상승시켜 간 경우는 賤人뿐만 아니라 일반 良人이나 中間階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이 신분을 상승시킨다는 것은 지배신분층 나아가 상급지배 신분층으로 편입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이용된 방법으로 軍功과 鬻爵制 및 添設職 그리고 戶籍의 위조 등 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戶籍의 위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국가에 의해 제도적으 로 뒷받침되어 합법적으로 운영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당시의 정치질서의 문란을 틈타 불법적인 運用이 잦아지면서 이들의 대량적인 신분상승을 유발시켰다. 장기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과 그 이후에 전개된 일련의 戰亂은 良人이나 鄕吏 같은 中 間階層의 사람들에게 軍功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였다. 군공을 세운 자들에게 정부는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포상을 위주로 하였으나,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이들에게 관직제수를 위주로 포상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添設職의 설치 운영이었다. 添設職은 恭愍王 3년(1354)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軍功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들에게 수여되는 등 크게 문란해졌다. 즉 無功 閑居者는 물론 工商 賤隸에게까지 남발되어 관료의 수를 크게 증가시켰고,45) 이로 인해 관인의 권위가 크게 저하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 서 첨설직의 남발은 후기의 관인 숫자를 크게 증가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 다. 한편 忠烈王代에 納粟補官制가 처음 실시되었는데,46) 이를 통해서도 良人이나 中間階層이 兩班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銀의 납부량에 의해 제수되는 관품이나 관직으 로 결정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은에서 米와 豆로 대체되었다. 이 때 각 관직에 따라 납 부되는 銀과 米 및 豆의 양은 다음의 표와 같다. 표 1 白身 初仕 白銀 3斤 白身 權務 白銀 5斤 初仕 權務 白銀 2斤 權務 9品 8品 白銀 3斤 8品 7品 白銀 2片 7品 參職 白銀 6斤 軍人 隊正 白銀 3斤 隊正 校尉 白銀 3斤 校尉 散員 白銀 4斤 散員 別將 白銀 2斤 44) 高麗史 권56, 地理志 1 忠州牧. 45) 高麗史 권75, 選擧志 3 銓注 添設職. 46) 高麗史 권80, 食貨志 3 納粟補官之制 忠烈王 원년 12월조. <표> </표>

別將 郞將 白銀 4斤 * 忠烈王 원년 12월 規定. 표 2 白身 從9品 米 5石 白身 正9品 米 10石 白身 從8品 米 15石 白身 正8品 米 20石 白身 從7品 米 25石 白身 正7品 米 30石 前職者 一等昇級 米 10石 * 忠穆王 원년 12월 規定. <표> </표> 표 3 白身 伍尉 米10石 豆 5石 檢校 8 品 米10石 豆15石 8 品 7 品 米15石 豆15石 7 品 6 品 米20石 豆20石 * 辛禑 2년 12월조. <표> </표> 위 표에 나타난 각각의 白銀과 米豆의 양이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의 부담이었는지는 확실 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自作農이나 中小地主의 위치에 있던 일반 양인 농민과 中間階層인 鄕吏 등에게는 위와 같은 양은 크게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休閑法 이 극복되어 常耕化가 이루어지는 등 농법의 획기적인 발달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적어도 자작농이나 中小地主들은 과거보다는 부의 축적이 용이했을 것이다. 물론 과거보다 증대된 생산량이 모두 이들의 차지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 면 당시는 권세가나 국가에 의해 이들에 대한 수탈이 한층 강화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 다. 그렇기는 하나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이들의 경제적인 처지를 조금씩 개선시킬 여지를 제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地主的 입장에 있었던 鄕吏들에게는 부의 축적이 한층 용이 했을 것이다. 休閑農法이 극복되기 이전인 成宗代의 水田 1結의 생산액이 7石 15石, 旱田 1 結은 3.5石 7.5石이었음을 생각하면47) 위 표에 나타난 米豆의 양은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 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부를 소유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 納粟補官制를 통해 자신의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특히 권세가나 국가의 양민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향리들이 담당하던 鄕役이 賤役化되어 감에 따라 이들의 신분상승 의욕은 한층 팽배 하게 되었음에 틀림없겠다. 이렇게 해서 일반 양인과 中間 階層에 속하는 사람들이 納粟補 官制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을 상승시켜 갔을 가능성은 컸다고 하겠다. 47) 姜晋哲, 高麗前期의 公田 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 ( 歷史學報 29, 1965; 高麗 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pp.391 392.

2. 身分의 下降移動 武臣執權 이후에 와서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토지집중 현상과 그에 따른 인구집중 현상이 심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현상들은 무신들이 집권하기 이전인 12세 기 초, 즉 李資謙의 집권을 전후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그것은 일부 권세가에 의해서 私田과 奴婢에 한해서 겸병이 제한적으로 자행되는데 머물렀다. 그러던 것 이 무신들의 집권을 계기로 겸병의 대상이 奴婢는 물론 公田 良人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아 울러 겸병의 주체자도 일부 권세가에서 대부분의 관료와 寺院 및 公的인 국가기관으로 확대 되어, 이제 토지와 人口의 겸병은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기에 이르렀다.48) 당시의 실정을 高麗史 의 찬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毅 明 이후 이로 말미암아 戶口는 날로 줄고 國家는 취약해져 高麗의 業이 드디어 쇠하여 갔 다. 叔季에 失德하고 版籍이 不明해지니 良民은 모두 巨室에 들어가고 田柴科制는 폐하여져 私田 이 되니 권세가의 田은 阡陌에 잇고 山川으로 경계를 삼았다.49) 위 사료는 무신집권 이후 良民이 모두 권세가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고려의 기본 토지제 도였던 田柴科制가 붕괴되어 公田이 모두 私田이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설명에 는 과장된 점도 없지 않겠으나, 기본적으로 후기에 있어서 토지와 人口의 겸병현상이 극심 하였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고려후기에 와서 토지와 인구의 겸병현 상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이 되었거니와 이것은 당시의 신분질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위 사료에서 良民이 모두 巨室에 들어갔다 라는 내용이 그것을 시사해 준다. 이 는 公民的 존재인 良民이 적지않게 권세가의 지배하에 들어가 私民的인 존재로 변질된 사실 을 전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후기에 私民이 급격히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良人이 公民的 존재에서 私民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는 것에는 곧 신분적 지위 의 변화가 수반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신분적 지위의 변화없이 단지 국가의 통제에서 逸 脫되어 私門에 예속만 되어 있는 것인지가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 良人의 私民化가 곧 賤人 으로의 轉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입장과50) 단순한 小作人的인 존재로의 변화로 보려는 입장51)으로 나뉘어 있다. 이 兩者의 견해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 개연성이 있는지 는 현재의 필자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두 가지 요소 모두를 지니고 있다고 보 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良民이 私民化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어느 정도 감지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후기에 나타난 일반 양인의 私民化는 몇 가지로 그 형태를 달리하면서 이루어졌다. 그 중 48) 宋炳基, 앞의 논문 pp.386 392. 49) 毅明以降 由是 戶口日耗 國勢就弱 高麗之業 遂衰 叔季失德 版籍不明 而良民盡入於巨室 田 柴之科廢 而爲私田 權有力者 田連阡陌 標以山川 ( 高麗史 권78, 食貨 1, 序文). 50) 林英正, 麗末 農莊人口에 대한 一考察 ( 東國史學 13, 1976). 여기서 氏는 고려 후기에 良人으로 農莊에 흡수되어 간 자들이 대개 奴婢化된 것으로 보고 이들은 農莊奴婢 로 표현 하고 있다(pp.28 29). 51) 이 입장에서는 良人이 농장에 흡수되어 私民化가 되는 경우 일부가 奴婢로 전락되었음을 인 정하면서도 대다수는 佃戶的인 존재로 변하였을 것으로 파악했다(宋炳基, 앞의 논문 pp.410 415).

에 우선 들 수 있는 것이 債務關係로 인하여 私民化가 되는 경우이다. 이는 債務者가 자신 의 채무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이 때 채무자는 자신이나 子女가 채권자에게 使喚 되거나, 심지어 妻子를 내놓기까지도 하였다.52) 고려후기의 일반 양민은 국가나 권세가들의 가혹한 수탈로 생활이 극히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혹은 국가나 권세가로부터의 수탈을 감당하기 위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富戶로부터 借貸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권세가들이 강제로 양민에게 미곡을 빌려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 번 채무를 지게 된 양민들은 국가나 권세가로부터의 계속적 인 수탈로 인하여 채무를 청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채무가 원인이 되어 양인이 私民化되는 경우는 당시의 이같은 실정에 비추어 상당히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채무로 양민이 私民化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국가는 계속적인 구제조치를 취했다. 그 주된 방법은 매매된 子女를 부모에게 환속시키게 한다든가, 혹은 使唤이 된 기간을 役價 로 확산해서 탕감해 주는 것 등이었다.53) 권세가들의 전횡으로 정치질서가 크게 문란되어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 조치들이 실효를 거물 수 있었는지는 극히 의문이다. 여기서 양민의 妻子가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곧 신분의 변화를 전제로 해서 이 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고려에서는 奴婢에 한해 인간의 매매가 허용되었다.54) 따라서 良人이라 하더라도 일단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파는 입장과 사들이는 입장 모두 가 그 대상을 奴婢的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던 데서 가능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러나 使喚되는 경우는 그 사정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즉 使喚된 子女를 質當子女 혹은 典當子女 로 표현하고 있는 바, 비록 이들이 奴婢와 같은 처우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어디까 지나 限時的인 典當者로 파악되었던 것이다.55) 따라서 이들을 奴婢로서 이해할 여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이들이 노비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현실적인 처지가 永代的으로 세 습될 조건이 법제적으로나 관습적으로 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이 당시 에 충족되어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국가의 계속된 이들에 대한 귀환조치가 바로 그같 은 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56) 물론 이들 중에는 放還되지 못하고 그대로 奴婢로 고정된 부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채무로 인한 私民化는 그 때 신분적인 변화가 수반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동시에 존재하여 진행되었다고도 하겠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壓良爲賤 認民爲隸 등으로 표현되는 강제적인 私民化다. 이 경우 또한 권세가와 寺院 및 宮院과 같은 권력기관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것은 土地兼併을 통하여 大土地所有가 진전되면서 그것을 경작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이같은 방법이 성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강제적인 방법을 통해 良人이 私民으로 되는 경우 이들을 사료상으로 賤 隸 奴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의 변화가 수반된 것으 로 이해해도 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이러한 이해는 忠烈王이 근래에 壓良爲賤者가 매우 많으니 有司는 文契가 없거나 위조한 자를 탄핵하여 죄를 주도록 하라 57)고 한 것을 통해서 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 보이는 文契는 노비문서와 같은 일종의 賤 52) 高麗史 권79, 食貨 2 借貸 忠肅王 5년 5월조. 53) 高麗史 권79, 食貨 2 借貸 恭愍王 20년 10월조. 54) 高麗史 권85, 刑法 2 奴婢 成宗 5년 7월조. 55) 債負無文契 元借錢人 已物故者 斷自辛丑十一月以前 並不許追徴 其質當子女者計傭 令歸父 母 ( 高麗史 권79, 食貨 科歛 恭愍王 12년 5월조). 56) 洪武八年 二月十三日以前 典當子女 無論久近 益許放還 (위의 책 辛禑 원년 2월조). 57) 近來 壓良爲賤者甚多 其令有司劾 其無文契 及詐爲者 罪之 ( 高麗史 권85, 刑法 2 奴婢 忠烈王 24년 정월조).

籍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 인용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壓良爲賤 을 꾀한 자 중에 文 契가 없거나, 그것을 위조하여 노비를 소유한 자를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이 조치 역시 지배 질서가 극히 문란했던 당시에 얼마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런데 여기서 壓良 爲賤者를 文契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는 국가에서도 일단 그들을 賤 人으로 간주하고 있음이 전제되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국가로서는 단지 그것이 불법 적으로 아니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느냐가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결국 壓良爲賤 認民爲 隸 冒良人爲隸 등으로 표현되는 良人의 강제적인 私民化는 신분의 변질이 수반되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양인 농민 자신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하여 권세가나 사원 및 권력기관에 投 託하는 경우다. 이는 주로 戰亂이나 국가 및 권세가 등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로 토지를 잃 고 流民이 된 자나 혹은 그러한 수탈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여기에 권세가나 권력기관 등의 적극적인 招集運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58) 농민들이 投託을 하 는 일차적인 목적은 자신과 그 가족의 생계유지에 있었다. 이와 함께 과중한 수탈에서 벗어 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된 면도 있었다.59) 결국 投託에 의해 私民이 이루어지는 경우 신분의 변질이 수반하는지 아닌지가 문제다. 이 문제는 다음의 사료에서 그 해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前朝末에는 백성의 생산을 제정하는 것은 알지 못했다. 休養케 하는 데에 道를 잃어서 인구가 번식치 못하였고, 安集하는 데에 그 방안이 없어서 백성은 飢寒에 죽었다. (따라서) 戶口는 나날이 줄었고, 현존한 호구는 빈번한 賦役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豪富家에 들어가고 권세가 에 투탁하였으며, 혹은 工商이 되고 혹은 사찰에 도망하였으니, 10에 5, 6의 인구는 이미 失籍되었 다. 公 私奴婢와 寺院奴婢가 된 자는 그 속에 들어 있지도 않다.60) 위 사료에서 당시의 양인 농민이 投託하는 상황을 잘 엿볼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권 세가에 投託한 사실과 公私奴婢와 寺院의 노비가 된 일을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 주 의를 끈다. 이는 위의 내용을 작성한 鄭道傳이 이 兩者가 동일한 차원의 현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데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즉 위에서 鄭道傳은 양인 농민으로서 公私奴婢와 寺院 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과 권세가에 투탁하거나 혹은 工商으로서의 전환 및 사원으로의 도망 등을 구별되는 현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豪富家와 權力家 및 寺院에 投 託하거나 工商으로 轉業하여 失籍된 농민이 50 60%가 되는데, 公私奴婢와 寺院奴婢가 된 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鄭道傳의 이같은 서술이 前者의 경우는 신분의 변질이 수반되지 않고, 後者는 그 반대의 현상을 띠고 있다는 인식하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鄭道傳이 麗末을 살아온 인물이고 보면 그의 이러한 인식은 사실에 기초하 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따라서 본인 스스로가 私門이나 권력 기관에 投託하여 私民이 되는 경우에는 전적인 신분의 변질이 수반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 다. 58) 今諸院 寺社 忽只 鷹坊 巡馬及兩班等 以有職人員殿前 上守 分遣田莊 招集齊民 ( 高麗史 권85, 刑法 2 禁令 忠烈王 12년 3월조). 59) 宋炳基, 앞의 논문 pp.396 399. 60) 前朝之季 不知制民之產 休養失其道而生齒不息 安集無其方 而或死於飢寒 戶口日就於耗損 其 有見存者 不勝賦役之煩 折而入於豪富之家 托於權要之勢 或作工商 或逃浮圖 固已失其十五六 而其爲公私寺院之奴婢者 亦不在其數焉 ( 三峯集 권7, 朝鮮經國典 上 版籍).

지금까지 公民으로 있던 일반 양민이 私民化되는 과정을 몇 가지의 형태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이 가운데서 어느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고 또한 대량으로 私民化시켰는지 당장 단 정할 수는 없다. 아무튼 후기에는 公民이 크게 감소되고 반면에 私民이 대폭 증가되고 있음 은 여러 자료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거니와, 이것은 위에서 열거한 諸方法이 복합 적으로 작용하여 빚어낸 결과라고 하겠다. 한편 公民的인 존재에서 私民으로 그 성격이 변 질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신분의 변질이 수반되어 나타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公民的 존재였던 일반 양인이 어떠한 방법으로 私民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보인다고 할 수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신분의 변질이 일어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동시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해도 公民으로서의 성격 상실과 그로부터 나타난 私門이나 권력기관 등에의 강한 隸屬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천인에 가깝게 해 주었다. 따라서 이들을 기존의 신분범주로 설정된 완전한 천인이 아닌 賤 人的 良人으로 이해하는 것이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Ⅳ. 身分制 動搖의 影響 지금까지 신분제의 변질을 가능케 했던 諸側面과 그 변질의 유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신분제의 동요는 前期에 構築되었던 정치 경제 사회적 제반 질서가 붕괴되면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武臣의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대두, 元에의 복속과 같은 정치적 상황의 변 화, 그리고 田柴科制의 붕괴에 따른 土地所有 질서의 문란 및 잦은 戰亂과 大土地所有의 발 달로 인한 流民의 발생은 신분제 변질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고 하겠다. 여기에 農法의 발 달에 의한 농업생산력의 발전도 그것에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반 요인 에 의해 후기에 와서 신분제는 크게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거니와 그 대체적인 양상은 지배 신분층과 천인층의 확대로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분질서의 혼란을 사회적 방면에서 새로운 현상을 창출하고 있는 바, 이는 곧 새 로운 모순이 나타남으로써 이미 기울기 시작한 고려왕조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즉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순이 심화되고 있던 당시에 신분질서의 혼란은 사회를 균열시켜 갈등을 빚 어내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고려왕조의 붕괴를 촉진시켜 조선왕조의 성립을 가 능케 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지배신분층의 확대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했 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고, 천인층의 증가는 일반 양인과 천인의 신분적 구분을 불명확하게 하여 이 양자가 계급적 동질성을 갖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후기의 신분변동은 고려왕조의 몰락과 조선왕조가 성립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 해되는 바, 이같은 관점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 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지배신분층의 구성원이 숫적으로 증가한 것이 정치 사회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빚어 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과 官人과 국가 公職의 권위 低下 및 피지배 민중의 疏外感 증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은 곧 新進士類의 등장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들에 의해 고려의 멸망과 새 왕조인 朝鮮의 건국이 추진되었다.61) 이들의 원초적인 모습은 能文能吏的인 관료 61) 新進士類의 등장과 그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조된다. 李佑成, 高麗朝의 吏 에 對하여 ( 歷史學報 23, 1964).

로서 주로 경제적으로는 中小地主의 위치에 있으면서 中間階層을 형성했던 鄕吏 출신으로 구성되었다.62) 이들이 元干涉期에 들어와 새로운 지배세력으로서 權門世族이 성립되고, 이들 이 保守化되어 가자 개혁적인 성향을 띠고 있던 士類들이 신진세력으로 등장하여 권문세족 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 때 등장한 士類들은 王들을 앞세워 개혁정치를 도모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확대를 꾀하였으나, 보수적인 권문세족의 세력이 워낙 강하였기 때문에 이들 의 의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63) 이들이 확고한 정치세력으로서 권문세족에 대항 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한 시기는 恭愍王代부터로 보이나,64) 완전한 집권세력으로서의 정 착은 李成桂를 중심한 신흥 무인세력과 결탁이 이루어지고 威化島回軍으로 권문세력이 도태 된 것을 계기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권문세족은 끊임없이 이들을 압박하고 배척한 결과 많은 수가 도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新進士類의 중앙진출은 계속되 어 결국에는 보수적인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이들의 중앙진출은 곧 신분의 상승이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같은 향리들의 강렬한 신분상승욕구와 당시의 객관적 인 여건이 부합되어 비교적 순조롭게 대량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이 때의 신분상승 욕구는 통상적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당시 지방의 향리들이 담당했던 鄕役이 과중해져 苦 役이 됨에 따라 그 役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서 관료로의 진출을 희망함에 따라 한층 강력 해 졌던 것이다. 국가와 권세가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한층 강화되는 상황에서 일부의 향리 들은 권세가와 결탁하거나 업무수행 과정에서의 농간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했 다.65)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다수의 향리들은 권세가의 침탈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租 稅나 貢賦 수취의 실무 담당자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목표액을 달성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향리들은 자신의 役을 苦役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거기서 벗어나 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것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관료신분을 획득하는 것과 스스로 流亡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향리가 하나도 없는 州縣과 鄕 所 部曲 등의 속출과66) 이들의 관인신분 획득이 대량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원래 향리들이 관료로 진출하는 통로로 주로 과거가 이용되었으나, 실제로 그것은 제한적으 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후기에 이루어졌던 향리들의 관료진출은 과거보다는 앞에서 언 급한 바와 같은 軍功이나 納粟補官制 및 添設職이 주된 통로로서 이용되었다. 이러한 통로 의 이용은 科擧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량적인 신분상승을 가능케 했다. 이렇게 해서 향리들의 士族化는 지속적이고도 대량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곧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형성과 나아가 새 시대의 주역으로서의 등장을 가능케 하 李成茂, 兩班層의 成立過程 ( 朝鮮初期 兩班硏究, 一潮閣, 1980). 金潤坤, 新興士大夫의 擡頭 ( 한국사 8, 국사편찬위원회, 1974). 李起男, 앞의 논문. 閔賢九, 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 恭愍王代를 中心으로 ( 震檀學報 51, 1981). 朴天植, 高麗 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 ( 全北史學 4, 1980). 張得振, 趙浚의 政治活動과 그 思想 ( 史學硏究 38, 1984). 62) 李佑成, 앞의 논문 pp.21 25. 63) 李起男, 앞의 논문 pp.93 97. 64) 閔賢九, 高麗後期의 權門世族 ( 한국사 8, 국사편찬위원회, 1974) p.33. 65) 諸道鄕吏 縱逞其欲 點兵則不及富戶 收租則私作大斗 匿京丁爲其田 聚良人爲其隸 誅求於民靡 有紀極 ( 高麗史 권85, 刑法 2 禁令 恭閔王 7년 4 월조). 66) 中贊洪子藩條上使民事 諸縣及鄕所部曲人吏 無一戶者多矣 外吏依勢避役者 悉令歸鄕 ( 高 麗史 권84, 刑法 1 職制 忠烈王 22년 5월조).

는 토대가 구축된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들이 사상면에서는 性理學을 신봉하였고, 정치 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改革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점에서 권문 세족의 그것과 크게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천인이나 일반 양인의 관직진출과 納粟補官制의 실시, 添設職의 남발 등은 관직 이나 吏職 같은 公職과 官人의 권위를 低下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점은 다음의 사료를 통하여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가) 지금은 添設이 크게 번잡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기에 이르러 功이 있고 없음이 混浠되어 僥倖히 날로 열려서 工商賤隸에 이르기까지 모두 冒授하여 얻으니 관직의 권한이 마치 진흙 과 모래와 같았다.67) 나) 前朝에는 補吏之法에 2가지의 길이 있었다. 소위 三都監 三軍錄事 都評議使司知印宣差는 모 두 士人으로 삼고, 椽吏 典吏 書吏 令吏 司吏의 무리는 각기 그 衙門의 高下에 따라 良家의 자제들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시험을 통하여 보직하는 법이 없고 그 스스로 천거한 것을 받 아들여 쓰게 되었으나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官에 드는 문이 많게 되어 스스로 천거하는 자 역시 줄었고 官府에서 구해도 얻지 못했다. 그 사이에 잡스럽고 미련하여 능히 刀筆을 다루 지 못하는 자가 혹 있게 되었다.68) 위의 가)는 添設職이 국가에 대한 功이 없는 자나 심지어 工商賤隸에까지도 함부로 남발 되어 관직이 마치 흙모래 같이 전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나)는 관료가 되는 통로가 많 아짐에 따라 吏職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가), 나)를 종합해 볼 때 관직에 나아가는 통로의 다양화와 함께 관인이 됨에 있어 신분적 제약이 해소되어 工商 賤人까지도 관인이 되는 상황이 되자 관직의 천시와 吏職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위 사료에는 직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관직의 천시는 곧 그것을 담당하고 있던 관료에 대한 천시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권세가의 발로로 통치 질서가 크게 문란되어 있던 후기의 고려왕조는 국가의 公職과 官人의 權威低下로 인하여 그 統治力 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결국 이같은 상황이 末期에 와서 李成桂의 집권과 新進士類 사 이에 새 왕조 건국이 논의되고 또한 설득력을 갖게끔 해 주었다고 하겠다. 많은 수의 천인과 양인 및 중간계층의 사람들이 후기에 와서 지배신분층으로 상승되어갔 으나 그 한편으로는 이 대열에서 탈락된 부류 역시 많았다. 이들의 신분상승 실패는 상대적 으로 疏外感을 깊게 심어 주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당시에 있어서 官人化의 실 패는 곧 경제적 사회적 처지를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다. 즉 많은 수의 官人과 中間階層의 사람들이 자신의 公民的 지위를 포기하면서 私民化되거나 流民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들에 대한 정치 사회 경제적인 소외의 심화는 그들로 하여금 계급의식을 갖게 할 소지는 컸 다. 나아가 反王朝的인 입장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컸던 것이다. 고려 왕조를 붕괴시키고 조 선왕조가 성립함에 있어서 일반 민중들로부터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당시의 이 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후기에는 양인 농민의 몰락으로 賤人과 賤人的 良人의 대폭적인 증가와 함께 賤人의 67) 주 13) 참조. 68) 前朝補吏之法 有二途 所謂三都監 三軍錄事 都評議使司知印宣差 皆以士人爲之 曰椽吏 典吏 書吏 令吏 司吏之屬 各隨其衙門之高下 以良家子弟充之 然無試補之法 聽其自擧 兵興以來 入官 多門 自擧者亦少 官府求之如不得 其間猥屑庸陋 不能操刀筆者或有焉 ( 三峯集 권7, 朝鮮經 國典 上 補吏).

사회 경제적 처지가 향상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바,69) 이는 良賤이 混浠되는 현상을 초 래하였다.70) 이를 통해 良人과 賤人 사이의 사회 경제적인 차별이 크게 완화되어 양자 간에 는 어느 정도 同質性이 형성되어진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흔히 處干으로 불리워지는 私民化된 良人農民과 農奴로도 불리어지기도 했던 農莊內에서 농업노동에 종사 했던 奴婢 사이에 개제되어 있을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處干은 원래 他人의 田地를 경작하며 租는 地主에게 바치고 庸調는 국가에 바치는 일종의 佃戶的 농민이 었다. 그러던 것이 권세가가 이들을 은닉 겸병하여 私民化시켜 3税를 모두 직접 수취하였 다.71) 이들은 農莊內에서 외관적으로는 小作人의 입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粗 庸 調 3 税를 主家에 바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主家에 대한 예속성은 奴婢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반면에 奴婢 특히 外居奴婢는 농장에서 농업노동에 종사하면서 일종의 身貢 인 奴貢까지 부담하고 있는 사실은72) 바로 佃戶的 농민인 處干과 별 차이가 없음을 가리키 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당시는 일반 농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악화되어 가는 한편 賤 人의 그것은 향상되고 있는 면을 보여주고 있는 바, 결국 양자의 사회 경제적 처지는 서로 비슷해져 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다. 양인농민과 천인들의 사회 경제적 처지가 비슷해져감에 따라 이들이 갖게 되는 사회의식 도 동질적으로 되어 갔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일이다. 즉, 국가나 권세가로 부 터의 가혹한 수탈과 억압을 양인농민이나 천인이 동일하게 받는 처지가 됨에 따라 이에 대 한 그들의 思考가 같아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관료로의 진출과 토 지소유에서의 탈락에서 오는 疏外感에서도 이제 良人이나 賤人 모두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같은 상황의 조성을 통해 末期의 고려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특 징을 독점하고 있는 지배 신분층과 그렇지 못한 일반 양인과 천인이 동질화된 피지배신분층 으로 크게 나뉘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신분적인 면에서 지배신분층과 賤人과 賤 人的 良人이 숫적으로 증가한 반면에 中間階層이나 순수한 일반 양인이 크게 감소되었던 것 이다. 이것은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음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말기적 현상을 연출시켰다. Ⅴ. 結語 이상에서 고려 후기의 신분제 동요라는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가능케 했던 諸側面과 그 양상 및 그것이 後期社會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신분제의 동요는 전 기에 확립되었던 사회 전반의 제반 질서가 와해되면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武臣의 정치세력화, 元의 지배와 같은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田柴科制의 붕괴에 따른 토지 질서의 문란 및 잦은 戰亂과 대토지소유제의 발달로 인한 많은 流民의 발생은 신분제를 동 요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종전에는 武臣亂을 계기로 집권세력 69) 邊太燮, 앞의 논문 pp.454 465. 70) 前朝之季 田制旣紊 豪强兼并 戶籍亦廢 良賤混浠 詞訟日繁 ( 太祖實錄 권6, 3년 8월 甲 戌). 71) 王遂命宰樞與三品以上議之 皆曰 上下皆撤處干 委以賦役可也 處干耕人之田 歸租其主庸調於官 即佃戶也 時權貴多聚民 謂之處干 以通三税 其弊尤重 ( 高麗史 권28, 世家 忠烈王 4년 7월 乙酉條). 72) 於是 禪敎各宗 爭執有土民之寺 請載裨補之籍 僧人之徒 收其田租 歛其奴貢 不供佛僧 肥馬輕 衣 ( 太宗實錄 권3, 太宗 2년 4월 甲戌條).

이 문신관료에서 무신관료로 교체된 것을 신분제 변질의 한 표징으로 이해하였으나, 필자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보았다. 이 문제는 전기의 上級支配身分層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 해답이 달라질 수 있다. 필자는 品官群 안에 위치한 文武官僚를 上級支配身分層으 로 파악하여 전기에 나타나 있던 文武官僚 사이의 차별을 그들이 각기 담당한 업무의 평가 차이에서 오는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武臣亂을 계기로 나타난 지배세력의 변동은 신 분제 변질의 표징으로서보다는 그것을 촉발시킨 원인으로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 필자가 얻 은 결론이다. 한편 신분제의 동요는 身分變動의 양상으로 나타났는 바 그 대체적인 양상은 신분의 上昇 移動과 下降移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전 신분층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결과 지배신분층 과 천인층의 구성원이 확대되는 이른바 신분의 兩極化 현상이 초래되었다. 지배신분층으로 의 상승은 軍功이나 納粟補官制 및 添設職 등이 그 통로로써 이용되었다. 이같은 통로의 다 양화와 거기서의 어떠한 신분적 제한이 두어지지 않음으로써 그 숫적인 급격한 확대가 가능 했다. 반면에 權勢家나 權力機關 및 寺院 등이 公民的 존재였던 양인들을 私民化시키는 과 정에서 많은 수가 천인으로 전락되거나 혹은 處干과 같은 사회 경제적 지위가 극히 열악한 賤人的 良人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와 함께 당시 鄕 所 部曲 같은 천민 거주지역의 신분이 良人으로의 상승이 대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그 지역 천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당시 정치 사회 경제적인 제반 여건의 변화를 통하여 가능할 수가 있었다. 이같은 양상의 신분동요는 후기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한층 심화시켰다. 즉 지배신분층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었고, 이들과 기존의 보수적인 권문세족 사 이의 갈등을 한층 첨예화시켰고, 官人의 숫적인 증가는 국가의 公職과 관인 모두의 권위를 저하시켰다. 이것은 곧 바로 왕조의 統治力 약화로 이어졌다. 지배신분층으로의 상승이동이 보다 용이하게 대량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동참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소외감을 깊게 심어 주었다. 또한 당시는 일반 양인의 사회 경제적 처지가 악화되 어 갔던 반면에 賤人의 그것은 향상되는 면이 있었다. 이로 인해 良賤이 混浠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양자는 어느 정도 同質性을 형성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이 갖는 사회의식도 동질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했을 것이다. 신분제 동요가 당시의 사회에 끼친 이같은 몇 가지 영향은 결국 고려왕조의 제반 질서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새로운 조선왕조사회의 출현을 보 다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