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 國史館論叢 第42輯 金石文追補 2) 등이 간행됨으로써 韓國古代史 및 中世史의 연구에 자극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古拓本을 이용한 判讀이 체계화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금 석문을 종합적으로 간행하려는 작업이 추진되어 趙東元의 韓國金石文大系 3) 및 任昌淳의 韓國金石集成 4)과 許興植의 韓國金石全文 5) 등이 간행되었다. 그런데 금석문에 대한 탁본 및 판독과 더불어 이를 활자화하는 작업이 그 궁극적 인 목적은 아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역사 문학 어학 서예 등의 여러 분야에 걸 쳐서 이를 활용하도록 하는데 있다 하겠다. 이러한 금석문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 불어 문헌사료가 부족한 韓國古代史와 관련한 새로운 금석문의 발견은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에게는 이를 통하여 당시의 制度 및 社會相을 해명케 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迎日 冷水里新羅碑, 蔚珍 鳳坪新羅碑, 蔚州 川前里 書石, 永川 菁堤碑, 丹陽赤城碑, 眞興王巡狩碑, 戊戌塢作碑, 南山新城碑 등은 新羅史의 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冷水里新羅碑는 신라 초기 한자의 전래 과정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王命에의한 초기 律令의 실태, 왕권의 발달 및 화백회의 등에 대한 실상을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鳳坪新羅碑는 6부의 성립시기 및 성격문제, 京位 및 外位의 성립시기 문제, 법흥왕대 율령에 대한 문제, 새로이 편 입된 對服屬民에 대한 문제, 지방촌락의 구조 및 통치체제 문제 등에 대해서 그 미 비점을 보완해 줌으로써 6세기초 신라사에 대한 인식을 보다 넓힐 수 있게 되었다. 川前里書石은 上古시대부터 신라말에 이르기까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내용 뿐 만 아니라, 葛文王 및 왕과 왕비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 목되고 있다. 菁堤碑는 6세기 水利사업을 통한 당시 농업과 力役動員體制 및 法幢組 織, 官等 체계를 통한 지방호족과 중앙귀족과의 관계, 촌락민에 대한 지배체제 등의 문제를 해명하여 주고 있다. 赤城碑는 新羅帳籍에 보이는 性別, 年齡別 분류방법이 이미 진흥왕대에 인구분류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佃舍法을 통한 법흥왕대 율령제의 시행 확인, 인명 표기법, 京位 및 外位의 관등명을 통한 신라 17관등제의 성립 연대를 해명하여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眞 興王巡狩碑는 진흥왕대 巡狩의 성격 및 巡狩碑의 건립목적, 隨駕人名을 통한 진흥왕 대 중앙조직 및 近侍조직과 지방통치조직, 大等의 분화과정을 통한 정치적 성격 등 에 대해서 해명하여 주고 있다. 戊戌塢作碑는 後漢이후 중국의 각지에서 축조된 塢 가 우리나라에서도 축조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國防史 및 土木史의 一面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신라 鄕官제도의 실제적 사용 및 一尺 등에 대해서 해명하여 주고 있 2) 李蘭暎 編, 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1976). 3) 趙東元 編, 韓國金石文大系 (圓光大學校出版局, 권1, 全羅南北道篇, 1979 권2, 忠淸南北 道篇, 1981 ; 권3, 慶北篇 1983 ; 권4, 釜山市, 慶南, 濟州道篇, 1985 ; 권5, 京畿道篇. 1988 ; 권6, 서울시篇, 1993) 4) 任昌淳, 韓國金石集成 (一志社, 1984). 5) 許興植, 韓國金石全文 (亞細亞文化社, 1984).
- 69 - 다. 南山新城碑는 인명기록 방법, 官等을 통한 신라 중고 신분체제 및 촌락구조, 신라 중고의 築城을 위한 力役체계, 지방행정체제 등에 대해서 해명할 수 있는 자료로 평 가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上記한 신라 8種의 중고 금석문에 대한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연 구성과를 硏究史側面에서 再整理하여 보고자 한다. 그러나 각 연구자들의 연구성과 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며 이 점 양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Ⅱ. 迎日 冷水里 新羅碑 迎日 冷水里 新羅碑는6) 1989년 慕山學術財團7) 및 韓國古代史 硏究會를8) 통하여 다각적인 연구결과가 발표됨으로써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비문의 서체는 楷書體가 기본 서체로써 여기에 隷書體 및 草書體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에서 사용하기 쉬운 해서체가 먼저 수용되었으나, 당시 예서체로 부터 탈피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해서체와 예서체가 함께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았다.9)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비문에 보이는 乃智王, 癸未年, 至都盧葛文王 등이 그 단서가 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乃智王은 三國遺事 王曆에 보이는 納祗麻 立干 一云 內只王 과 관련시켜 納祗王으로 보았으며, 至都盧葛文王은 三國史記, 6) 이 비는 慶北 迎日郡 神光面 冷水里에서 발견되었으며, 조사결과에 의하면 화강암의 자연석 에 전면, 후면, 상면에 글씨를 새긴 三面碑로써, 비의 크기는 폭 70cm, 높이 60cm, 두께 30cm이며, 비의 형태는 하단이 넓고 상단이 축소되고 있다. 또한 비문을 그은 획이 육안으로 판독할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전면에 12행, 매행 자수 9 17자 152자, 후면에 7행, 매행 자수 7 11자 59자, 상면에 5행, 매행 자수 2 7자 20자로서 총 231 자가 새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鄭求福, 迎日冷水里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韓國古代 史硏究 3, 知識產業社, 1990, pp. 30 31). 7) 沈在完, 冷水里 新羅碑의 發見經緯와 書法攷 (慕山學術財團, 冷水里新羅碑發掘硏究, 1989). 洪瑀欽, 冷水里 新羅碑 文字判讀 述要 (慕山學術財團, 冷水里新羅碑發掘硏究, 1889). 金永萬, 冷水里 新羅碑의 內容考察 (慕山學術財圈, 冷水里新羅碑發掘研究, 1989). 8) 李炯佑, 迎日地方의 歴史, 地理的 性格 ( 韓國古代史研究 3, 知識産業社, 1990). 鄭求福, 迎日冷水里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 韓國古代史研究 3). 金永萬, 迎日冷水里新羅碑의 語文學的 考察 ( 韓國古代史研究 3). 金昌鎬, 迎日冷水里新羅碑의 建立 年代 ( 韓國古代史硏究 3). 安秉佑, 迎日冷水里新羅碑와 5 6세기 新羅의 社會經濟相 ( 韓國古代史研究 3). 文暻鉉,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보이는 部의 性格과 政治運營問題 ( 韓國古代史硏究 3). 宣石悅,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보이는 官等, 官職問題 ( 韓國古代史研究 3). 朱甫暾,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대한 基礎的 檢討 ( 新羅文化 6, 1989). 金永萬, 迎日冷水里新羅碑의 癸未年 에 대하여 ( 三國遺事의 現場的 硏究, 1990). 李喜寬, 迎日冷水里碑에 보이는 至都盧葛文王에 대한 몇가지 問題 ( 韓國學報 60, 1990). 9) 鄭求福, 위의 논문 pp. 32 33.
- 70 - 國史館論叢 第42輯 三國遺事 에서 智證王을 智度路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癸未年을 443년설 (納祗王 27)10)과 503년설(智證王 4)11)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乃智王의 王號는 廣開土大王陵碑, 中原高句麗碑, 蔚珍鳳坪碑 등에 의하면 麻立干 시기의 王號가 아니 라, 그 이전의 王號가 되므로 癸未年은 383년(奈勿王 28)으로 보아야 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2) 한편 학술토론회에서는 迎日지역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성격, 비문의 내용분석을 통한 6部 및 葛文王의 성격, 인명의 표기방식, 官等 및 官職, 財의 의미 등에 대한 연 구결과가 발표되었다. 迎日지역의 역사적 지리적 성격에 대해서, 李炯佑는 迎日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지였으며, 동해안 최대의 평야를 이룩한 형산강유역과 그 지류인 기계 천 청하천 곡강천 냉천유역 등에 지석묘 고분 등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 칠포 등의 해안 가까이에도 밀집되어 있다고 하였다. 특히 비가 발견된 냉수리는 곡강천 지류 와 형상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이며, 부근 흥곡리에는 郡內 최대의 고분군 이 있으며, 더욱이 晋率善穢伯長 이 새겨진 銅印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비문에 보 이는 節居利 라는 인물이 이 곳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13) 6部 및 葛文王의 성격에 대해서, 文暻鉉은 비문에 喙 沙喙 本彼 斯彼 등의 4개 部 名이 나오고 있음은 5세기경인 奈勿王代에 6부체제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이 러한 면에서 본다면 신라는 王京六部體制였으며 그 중에서도 喙와 沙喙의 二部 支配 體制라 하였다. 또한 종래 朴氏王妃族說과 牟梁部 朴氏族說은 성립될 수 없는 것으 로 보았다.14) 또한 이 비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葛文王은 寐錦王에 즉위하기 이전 의 왕으로서, 葛文王은 沙喙部에, 국왕은 喙部에 소속된 것으로 보았다. 즉 葛文王으 로서 국왕에 즉위한 智證은 소속이 沙喙에서 喙部로 전환된 것으로 보았으며, 국왕 의 왕자들은 소속이 喙部라 하였다. 이것은 갈문왕이 국왕이 될 수 없다는 종래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당시 신라는 寐錦王, 葛 文王의 二元制 王權과 表裏體가 된 喙 沙喙의 二部 支配體制로 보았다.15) 인명 표기 방식에 대해서, 宣石说은 비문에 보이는 인명의 표기방식은 蔚珍 鳳坪碑의 방식과 거의 비슷하나, 그 표기순서에 있어서 관등 중심이 아니라 部 중심이며, 신분의 차이 에도 기준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16) 관등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 표기방식의 경 우 蔚珍 鳳坪新羅碑와 비슷하며 丹陽 赤城碑 단계의 과도기를 거쳐 昌寧 巡狩碑 단 10) 文暻鉉, 金永萬, 金昌鎬, 앞의 논문. 11) 鄭求福, 安秉佑, 宣石悅, 앞의 논문. 12) 金昌鎬, 앞의 논문 pp. 97 103. 13) 李炯佑, 앞의 논문 pp. 11 27. 14) 文暻鉉, 앞의 논문 pp. 154 170. 15) 文暻鉉, 앞의 논문 pp. l71 177. 16) 宣石悅, 앞의 논문 pp. 182 188.
- 71 - 계에 이르러 변화하고 있는데, 이 비에서는 신라 중고기의 금석문과는 달리 전후 인 명이 같은 관등인 경우, 뒤에 있는 인명의 관등을 생략하고 있음이 특징이라 하였다. 한편 典事人의 경우 동일 관등의 생략 뿐만 아니라 신분적 구분에 의한 출신지 표기 방식도 존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麻立干 시기부터 수행되는 국가 지배체제의 확대 정비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古官制로써 반영되었고, 法興王代에 반포되는 율령에 의해 제도화된 신분제인 骨品制로 정비된 것으로 보았다.17) 관직체계에 있어서는 七 王等 으로 표현되는 大等집단의 전신인 部의 대표자 집단에 의한 상급 통치조직과 典事人 道使와 같은 하급 통치조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체계는 官府 중심의 중국식 관직체계 성립 이전 단계에 나타나는 古官制의 체계로써 마립간 시기 에 정비되는 王京의 喙評組織에 근간을 두는 합의제적 국정운영의 전통을 반영 하는 것으로 보았다.18) 한편 財의 의미를 통하여 당시 5 6세기 社會經濟相에 대하여 파악하고자 하였다. 安秉佑는 財는 그 용례로 보아 토지와 노비를 제외한 財物 財貨로 보았는데, 그것은 節居利 의 촌락사회에서 지위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며, 국가와도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財는 당시 촌락의 조세 및 力役수취와 관련된 권리로부터 발생하 는 것으로 보았다.19) 또한 節居利 의 지위는 촌락내에서 촌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유력자로 보았으며, 국가의 조세 및 力役 수취 과정에서 협조하는 관계에 있 는 인물로 보았다.20) 金昌鎬는 비의 건립목적을 財와 관련시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財는 비문에 財物 이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며, 상속도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또 한 財는 토지 등과 같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金 銀 鐵 등의 광산과 같은 특수한 것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21) 金永萬은 비문에 財 財物 此財 라 기록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당시의 경제적 발전단계에서 본다면 財는 토지를 의미 하는 것 으로 보았다. 즉 당시 신라는 이미 농경사회 단계로써 토지에 대한 소유욕이 강렬하 였고, 이에 대한 쟁탈전이 치열하였다는 점에서이다. 그리하여 대토지 소유자는 영주 가 되어 군림하고 자기의 토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農奴가 되어 영주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문에 보이는 財는 토지 및 농노에 대한 경 제적 지배권인 租稅權으로 추측하였다.22) 이와 같이 迎日 冷水里 新羅碑의 발견은 신라 초기 한자의 전래과정을 알려줄 뿐 만 아니라, 당시의 王命에의한 初期 律令의 실태, 王權의 발달 및 和白會議 등에 대 한 실상을 해명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17) 宣石悅, 앞의 논문 pp. 189 19S 18) 宣石悅, 앞의 논문 p. 195. 19) 安秉佑, 앞의 논문 pp. 115 120. 20) 安秉佑, 앞의 논문 pp. 120 128. 21) 金昌鎬, 앞의 논문 p. 104. 22) 金永萬, 앞의 논문 pp. 61 64.
- 72 - 國史館論叢 第42輯 Ⅲ. 蔚珍 鳳坪 新羅碑 蔚珍 鳳坪 新羅碑는23) 1988년 韓國古代史硏究會를 중심으로 비문에 대한 정밀판독 과 더불어 학술세미나개최24) 및 文化財管理局에의한 蔚珍鳳坪新羅碑의 調査報告 書 25)가 간행됨으로써 비문의 내용 및 성격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비문의 서체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것과 비슷한 점이 많으며, 대체로 楷書로 되어 있으나, 字劃의 형태에 隷書風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필치가 조잡하고 字型 도 일정하지 않아 같은 글자라도 글자마다 형태가 달라 정확한 자를 알아보기가 어 려운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26)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의 첫머리에 甲辰 이라는 干支가 보이고 있다는 점과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보아 524년(法興王 11)으로 확인되고 있다. 蔚珍 鳳坪 新羅碑의 발견은 기존의 史料에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 고 있다는 점에 더욱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고대사연구회에서 주 최한 학술세미나 및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조사보고서에 나타나 있는 주된 내용은 울 진지역의 역사 지리적 성격, 비문 내용과 관련한 당시의 제도 및 통치체제 관한 문제 였다. 울진지역의 역사 지리적 성격에 대해서, 李明植은 三國史記 高麗史 新增 23) 이 비는 慶北 蔚珍郡 竹邊面 鳳坪 2里에서 발견되었으며, 비의 크기는 높이 204cm로써 一面 (刻字面)은 상폭 32cm, 중폭 36cm, 하폭 54.5cm, 二面은 상폭 57cm, 중폭 62cm, 하폭 70cm, 三面은 상폭 21cm, 중폭 15cm, 하폭 5cm, 四面은 그 크기가 二面과 대체로 같음을 볼 수가 있다. 비문의 구성은 비문을 배열함에 있어서 문단별로 줄을 바꾸어 새기고 있음을 볼 수가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우리나라 금석문으로서는 첫 예라 하겠으며, 이것은 당시 신라인들의 한문사용에서 문장의 구성 및 금석문의 작성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 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任世權, 蔚珍 鳳坪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韓國古代史研究 2, 知識産業社, 1989, pp. 65 81). 24) 趙由典, 蔚珍鳳坪新羅碑의 位置確認 發掘調査 ( 韓國古代史硏究 2, 知識産業社, 1989). 李明植, 蔚珍地方의 歷史 地理的 環境과 鳳坪新羅碑 ( 韓國古代史研究 2). 南豊鉉, 蔚珍鳳坪新羅碑에 대한 語學的 考察 ( 韓國古代史研究 2). 任世權, 蔚珍鳳坪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 韓國古代史研究 2). 崔光植, 蔚珍鳳坪新羅碑의 釋文과 內容 ( 韓國古代史研究 2). 朱甫暾, 蔚珍鳳坪新羅碑와 法興王代 律令 ( 韓國古代史研究 2). 李文基, 蔚珍鳳坪新羅碑와 中古期 六部問題 ( 韓國古代史研究 2). 盧泰敦, 蔚珍鳳坪新羅碑와 新羅의 官等制 ( 韓國古代史研究 2). 李宇泰, 蔚珍鳳坪新羅碑를 통해 본 地方統治禮制 ( 韓國古代史研究 2). 25) 任昌淳, 蔚珍鳳坪新羅古碑調査硏究 (蔚珍鳳坪新羅碑調査報告書, 文化財管理局, 1988). 李基白, 蔚珍居伐牟羅碑에 대한 考察 (蔚珍鳳坪新羅碑調査報告書, 文化財管理局, 1988). 26) 任世權, 앞의 논문 pp. 65 66. 李文基, 앞의 논문 p. 140.
- 73 - 東國輿地勝覽 등의 지리지를 비롯한 여러 史書를 검토하여 울진지역이 일찍부터 신 라에 편입된 사실을 파악하였으며, 한때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편입되었다가 다시 신라에 회복되는 과정을 밝혔다. 또한 비가 발견된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일대는 고 구려에 편입될 당시부터 縣治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곳이 신라에 편입된 다음에 왕이 이곳 居伐牟羅를 巡行하여 인근의 여러 道使 및 村長들과 회동하였으 며, 이때에 律令을 받들고 있는 사정을 비문에 기록한 것으로 추측하였다.27) 인명, 지명, 관명에 대해서, 南豊鉉은 비문에 나타나 있는 인명, 지명, 관명들이 假 字(표음자)들로 표기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표기들은 이 당시 비문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써, 이들을 종합하면 이 당시 고유명사들을 표기한 假字체계 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또한 이러한 假字체계는 후에 이두와 향찰의 표기 에도 사용되어 우리 先人들의 문자생활에 중요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보았다.28) 한편 任世權은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국가의 통치에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법흥왕대로 추측하였다. 그것은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 체제를 완성한 것이 대체로 법흥왕대로 보고 이러한 체제의 효과적인 경영을 위하여 율령이 이 시기에 반포되었다는 점에서라는 것이다.29) 비의 성격에 대해서, 崔光植은 비문의 내용을 살펴볼 때에 巡狩碑로 추정하였다. 그것은 비문에 기록된 내용이 巡狩時에 이루어지는 일련의 정치행위와 부합되는 것 으로 보았다. 즉 왕 이하 신하가 宗廟에 告由하여 敎를 받는 것이라든가, 犠牲으로 殺牛하는 祭祀儀禮가 이루어지고, 법에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것 등이 그 예라 하였 다.30) 반면에 朱甫暾은 이 비의 성격을 奴人과 奴人法과 관련지었다. 奴人法이란 奴 人村인 居伐牟羅와 男彌只人을 대상으로 하여 國役을 책임 지우는 法令의 성격을 띠 고 있는데, 이 비를 세운 목적은 신라가 6세기초 이래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 서 520년(智證王 7)에 반포된 율령을 새로이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도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을 신라적인 지배질서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러한 의미 에서 본다면 이 비는 律令의 한 편목시행을 위해서 건립된 비로 보았다.31) 또한 국 왕의 지위에 대해서도 귀족회의의의장인 上大等이 설치되기 이전과 이후의 국왕권에 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상대등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국왕이 귀족회 의 의장으로서 귀족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으며, 국왕도 6부의 하나인 喙部를 冠稱 하고 있음은 당시 왕권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왕은 일반 귀족 과 마찬가지로 소속 部名을 칭하는 존재로서 후에 왕권이 강화되어 部를 초월하는 27) 李明植, 앞의 논문 pp. 26 37. 28) 南豊鉉, 앞의 논문 p. 52. 29) 任世權, 앞의 논문 p. 82. 30) 崔光植, 앞의 논문 pp. 104 108. 31) 朱甫暾, 앞의 논문 pp. 117 121.
- 74 - 國史館論叢 第42輯 지위로 부상하는 시기의 국왕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所敎事나 別敎令의 내용은 일방적인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왕이 주재하는 귀족회의에서 귀족의 일정한 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불교를 공인한 후 그에 반대하는 귀족세력과 타협에 의하여 상대등의 설치를 계기로 하여 귀족세력에 의하 여 어느 정도 제약을 받기는 하였으나, 국왕권이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 은 王號의 변경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32) 한편 律令의 문제에 있어서도, 朱甫暾은 이 비를 통하여 法興王代에 와서 신라가 율령을 처음으로 수용하여 반포하 면서 律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令은 그 篇目은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실 정에 맞게 변용시켰을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律이 행위의 결과를 다루는 형벌법규 인 반면에, 令은 정치사회를 실제적으로 규정하는 행정법규였기 때문에 정치 사회적 발전정도를 달리하는 중국의 것을 그대로 수용해서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 다. 또한 법흥왕대에 비록 율령이 반포되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통치체제가 확립되 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율령의 형식이나 내용이 완비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므 로,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축적시켜 감으로써 점차 정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비에 보이는 別敎令은 이와 같은 조치의 하나로 보았다.33) 신라 中古期 6부의 정치 사회적 성격 및 성립시기, 6부의 구조, 6부인의 특권 등에 대해서 李文基는 법흥왕 11년(524)까지 전통적으로 6부인들이 모여 합의와 결정을 도출해 내는 정월 15일의 모임이 준행되고 있는 점이라든가, 국왕 갈문왕 등이 각각 여전히 部의 長이라는 자격을 갖춘 양면적인 존재라는 점과 喙部 沙喙部 本彼部 岑喙 部 등의 長이 보여지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면 중고기의 6부는 각각 그 이전의 독자 적인 단위정치체이자 지역공동체적인 성격이 잔존하고 있었던 것으로써, 中古期의 6 부는 독자적인 單位政治體에서 단순한 王京의 행정구역으로 변화해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았다. 6부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비문에 新羅六部 라는 구절과 岑喙部 (漸梁部, 牟梁部)의 존재에서 본다면 늦어도 524년(法興王 11) 이전으로 보인 다는 점에서, 6세기 중엽 성립설이나 4 7세기 遂次成立說 등을 부정하였다. 또한 이 비를 통하여 喙 沙喙 2부의 절대적인 우세가 확인되었고 가장 열세였던 部가 漢祗 習比部로 나타나고 있어 6부내의 세력차를 추측할 수 있다 하였다. 뿐만 아니라 中 古期 김씨 왕실은 법흥왕이 喙部, 그의 弟인 立宗葛文王이 沙喙部의 長으로서 兩部 를 직접적 지배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며, 本彼部와 岑喙部에도 大阿干 이상의 고급 관등 소지자가 확인되고 있어서 적어도 眞骨이 최고 지배세력임을 알 수 있다 하였 다. 또 6부인들이 신라사회에서 지배자 공동체로서의 특권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은 奴人의 존재로 보았다. 奴人은 지방민 가운데 6부에 직접 예속되어 공납과 노역을 제공해야 했던 존재였으며, 신라는 율령속에 奴人法을 포함시켜 奴人의 의무를 규정 32) 朱甫暾, 앞의 논문 pp. 121 126. 33) 朱甫暾, 앞의 논문 pp. 126 131.
- 75 - 함으로써 6부인의 특권을 보장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라 사회구조 가운데서 6부 인 내지 6부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34) 官等 및 그 表記方式에 대해서 盧泰敦은 이 비에서 邪足智 가 확인됨으로써 신라 의 17관등제가 늦어도 법흥왕대초까지는 확립되었다는 학계의 통설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이 비에 보이는 京位 관등은 그 표기 방식에 따라서 세 부류로 나뉘어 지는데, 干支群, 奈麻群, 大舍帝智 이하의 관등이 그것이라 하였다. 또한 下干支, 一伐, 一尺, 波旦, 阿尺 등의 外位 관등이 보이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서술방식을 보면, 職名 및 출신지명, 인명, 外位 관등명 등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같은 지역 출신인 경우에는 관등의 高下에 따라서 하였고, 관등이 없는 자들은 직명을 지닌 자들을 먼저 기술하 였는데, 이러한 서술순서는 6부인에 대한 것과 동일하며, 중고기의 다른 금석문에서 도 준수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정연한 원칙에 따라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이 비가 세워질 당시에는 이미 京位 外位 및 6부인과 지방민을 표기하는 일정한 방식이 행정적인 令에 의해서 규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다.35) 한편 당시의 지방통치 체제에 대해서, 李宇泰는 법흥왕대의 지방통치는 중요 지배 거점에 道使를 파견하였으며 軍主가 이들을 통솔한 것으로 보았다. 동해안 지방의 경우 북쪽으로의 진출에 따라서 새로운 州가 설치되었으나 다른 지역과 달리 기존의 州는 폐지되지 않은 채 軍主에 의하여 통치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軍主의 지휘 아 래에 있던 지방관과 在地人들은 그 지역의 통치에 관하여 공동으로 책임을 졌으나 일정한 한계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신라 中古 지방통치체계의 한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36) 이상과 같이 蔚珍 鳳坪 新羅碑는 기존의 史料에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으므로 신라사 연구에 논란 및 미흡하였던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보완할 수가 있게 되었다. 예컨대 6부의 성립시기 및 성격문제, 京位 및 外位의 성립시기 문 제, 법흥왕대 율령에 대한 문제, 새로이 편입된 對服屬民에 대한 문제, 지방촌락의 구 조 및 통치체제 문제 등에 대해서 그 미비점을 보완해 줌으로써 6세기초 신라사에 대한 인식을 보다 넓힐 수 있다는 점에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Ⅳ. 蔚州 川前里 書石 蔚州 川前里 書石은37) 1970년부터 1975년까지 東國大學校 蔚山地區佛蹟調査團에 34) 李文基, 앞의 논문 pp. l52 169. 35) 盧泰敦, 앞의 논문 pp. 183 186. 36) 李宇泰, 앞의 논문 pp. l98 204. 37) 이 書石은 慶南 蔚州郡 川前里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크기는 자연암벽에 가로 약 10m, 세로 약 3m로 각자되어 있다. 특히 書石의 오른쪽 아랫부분에는 原銘, 追銘 으로 命名된 약 300
- 76 - 國史館論叢 第42輯 의하여 조사가 진행되어 書石에 上古時代에서 羅末에 이르기까지 많은 銘文이 새겨 져 있음이 밝혀짐에 따라서 신라사회의 모습을 해명할 수 있는 史料로서 크게 주목 을 받게 되었다.38) 書石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書石의 銘文에 乙巳年六月十八日, 三共遊來以後 年八 巳年過去, 己未年七月三日 등이 보이고 있는데, 乙巳年에 대해서는 法興王 12년(525) 으로 추정하는 견해39)와 一周甲 올려서 5세기 後半, 즉 慈悲麻立干 8년(465)으로 추정 할 수도 있다는 견해40)가 대두되었다. 己未年은 法興王 26년(539)으로 추정되고 있다.41) 書石에 대한 판독을 통하여 花郞徒의 制定年代 및 川前里와 花郞徒와의 관련성, 原銘과 追銘의 내용분석을 통한 인물 및 그 성격, 연대, 葛文王의 성격 등에 대한 연 구결과가 발표되었다. 花郞徒에 대해서, 李基東은 書石의 銘文에 보이는 乙巳年 을 法興王 12년(525) 乙巳 에 比定하고, 법흥왕 당시 이미 화랑의 명칭으로 추측되는 於史郞, 安郞이 실재한 것 으로 미루어 보면 화랑도의 제정은 법흥왕대(514 540)에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書石의 銘文 가운데서 화랑의 인명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川前 里 계곡 일대가 화랑의 遊娛地였던 것으로 알 수가 있는데, 실제로 川前里 계곡은 金 庾信이 入山修道한 바 있는 경주 咽薄山에서 發源하는 물이 蔚山만으로 빠져나가는 중간의 절경에 위치하고 있다 하였다. 또한 書石에는 후대에 四仙의 하나로 추앙된 永郞과 好世, 水品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好世는 眞平王代의 화랑 好世郞과 동일인 물이며, 水品은 善德女王 5년(636)에 上大等에 임명된 伊飡 水品으로 추측하였다.42) 書石의 原銘 및 追銘 의 내용에 대한 분석은 金龍善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표되었 다. 그는 書石의 追銘에 보이는 只須尸兮妃 는 곧 立宗葛文王의 夫人인 只召夫人과 동일한 인물이며, 其王妃只須尸兮妃 에서 其王은 당연히 立宗葛文王이 되어야 하며, 文王 은 葛文王 즉 立宗葛文王으로 추정하고, 또한 太王妃夫乞支妃 에서 太王은 法 興王을 의미하며, 夫乞支妃 에 해당되는 妃는 법흥왕의 妃인 保刀(巴刀) 夫人으로 추 측되는데, 그것은 夫乞支 와 保刀 에서 夫 는 保 와, 乞 은 刀 와 대응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興王 은 眞興王으로 보았다. 또한 書石에 三共遊來 가 보이는데, 여 기에서의 3인은 徒夫知 文王妹於史 ((彐/彐)+ )安郞 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고, 徒 夫知 는 한 인물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徒 에 존칭을 뜻하는 夫知 가 붙은 것으로 보 았으며, 3인은 文王, 妹, 於史 ((彐/彐)+ )安郎 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妹 자 정도의 銘文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金龍善, 蔚州 川前里 書石 銘文의 硏究 歷史學報 81, 1979, p. 1). 38) 黃壽永, 앞의 책 pp. 26 28. 39) 金龍善, 蔚州 川前里書石 銘文의 硏究 p. 20. 40) 黃壽永, 앞의 책. 41) 위와 같음. 42) 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一潮閣, 1984) p. 331,346.
- 77 - 는 立宗葛文王의 妹로서 原銘에 보이는 麗德光妙 를 말하며, 於史 ((彐/彐)+ )安郎 은 原銘에 보이는 友 로 보았다.43) 李文基는 追銘의 중심 인물의 하나인 徒夫知葛文 王 은 葛文王이 신라에서 왕비의 父, 왕의 父, 왕의 弟, 여왕의 匹 등에게 수여되는 準王的인 존재라는 점에서 본다면, 徒夫知葛文王 은 法興王妃의 父, 法興王의 父, 法 興王의 弟 가운데 하나로 추정하였다. 三國史記 및 三國遺事 에 의하면, 立宗이 葛文王으로 책봉된 것은 眞興王 의 父라는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法興王 弟의 자격에서였다는 견해를 참조한다면, 徒 夫知葛文王 은 法興王의 弟인 立宗葛文王이라 하였다. 妹 는 문헌사료에서는 확인할 수는 없으나 立宗葛文王의 妹이며, 그의 이름이 原銘에는 麗德光妙 로 기록된 것으로 보았다. 於史郞安郞 은 原銘에 立宗葛文王의 友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며, 立宗과의 혈연관계나 신분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并遺, 三共遊來 와 같은 표현을 통 하여 立宗葛文王 및 그 妹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인물로 보았다. 妹王考妹王 에 대 해서는 妹王考와 妹王이라는 2명의 인물로 보고, 이들은 乙巳年의 왕과 왕비에게 위 대한 인물로 인식되었다는 점과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에서 妹王考는 習寶葛文 王, 妹王은 智證王으로 比定하였다.44) 또한 書石의 銘文에는 立宗葛文王을 수행했거나 또는 이와 관계되는 인물이 보이 고 있는데, 金龍善은 이에 대해서 구체적인 職名과 官等이 나타나 있지 않은 사람과 作功人 등 구체적인 職名과 官等이 나타나 있는 사람으로 구분하였다. 前者에는 대 체로 銘文의 前 中半部에 나타나 있으며, 後者는 後半部에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또 한 前者는 立宗葛文王이 행차했을 때 并遊 했던 인물들이거나, 眞興王이 書石을 보러 왔을 때 共來 했던 인물이며 이들과 立宗葛文王 또는 眞興王과의 관계는 友 妹 등 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王族 또는 이에 準하는 인물로 보았다. 반면 에 後者는 作功人 등 구체적인 職名과 官等을 소유하고 있는데, 原銘의 作功人 은 追銘의 作功臣 과 그 직책이 같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立宗葛文王 또는 眞興王이 행 차할 때 그 행차를 주관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았다. 作食人 의 직책에는 남성 의 이름, 官等과 함께 夫人의 이름이 따라오고 있는데, 作食 이란 語意로 미루어 본 다면 立宗葛文主 또는 왕이 행차할 때 음식물을 준비,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 로 보았고, 原銘에서의 作食人 은 2인으로 되어 있으나 追銘에서는 3인이 나오고 있 는 것은 立宗葛文王의 행차 때 보다는 眞興王 행차 때에 더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는 사실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作書人 이라는 職名은 原銘에만 나오는데 이 것은 銘文을 쓴 사람으로, 禮臣 은 追銘에만 나오고 있는데 그 임무는 眞興王의 己未 年 行次 때에 의식절차와 집행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後 者에서 주목되는 것은 原銘과 追銘에서 職名의 표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즉 43) 金龍善, 앞의 논문 pp. 11 26. 44) 李文基, 蔚州 川前里 書石 原追銘의 再檢討 ( 歷史敎育論集 4, 1983) pp. 124 136.
- 78 - 國史館論叢 第42輯 原銘에는 作功人, 作書人, 作食人 妻 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追銘에는 作功臣, 禮 臣, 作食人 婦 로 되어 있음은 原銘과 追銘의 두 집단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 으로 보았다.45) 李文基는 原銘과 追銘에 보이는 수행 인물 가운데 국가로부터 官等 을 수여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띤 職名은 書石의 행차시에 임시로 맡은 업무를 나타내는 臨時職名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作功人, 作食人 등은 葛文王의 家臣的 존재로 보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原銘과 追銘에 나타나고 있는 職 名의 차이점은 중심인물의 정치적인 지위가 다른데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 며, 그 성격이나 임무는 동일했던 것으로 보았다. 또한 作功人과 作功臣의 임무는 행 차를 주관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았으며, 禮臣은 의식의 절차나 그 집행을 담 당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의 성격은 近侍臣僚로 보이기도 한다는 것 이다. 作食人은 여성으로 구성된 점이 특색이라 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立宗葛文王과 眞興王 행차시에 움식물을 준비, 제공하는 職으로써 臨時職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들 은 모두가 官等을 소유한 자들의 아내이며, 原銘에는 妻로 追銘에는 婦로 표기되어 있지만 중심인물의 지위가 다른 데서 나타난 차이일 뿐이다 하였다. 또한 이들은 沙 喙部 소속의 인물로서 中古의 왕실세력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존재들이었으며, 眞 骨 이상의 신분층으로 보았다.46) 이와 같이 川前里書石의 발견은 上古時代부터 新羅末에 이르기까지의 것으로 추정 되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銘文에 왕과 왕비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사회의 참모습을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1차 史 料라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하겠다. V. 永川 菁堤碑 永川 菁堤碑는47) 1968년 新羅三山學術調査團에 의해서 발견 조사됨으로써 학계에 소개되었다. 그 후 李基白의 判讀과 더불어 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됨으로써48) 그 가치가 인정받게 되었다.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비문에 丙辰年 및 貞元十四年의 絕對年代가 새겨져 있 45) 金龍善, 앞의 논문 pp. 26 29. 46) 李文基, 앞의 논문 pp. l36 138. 47) 이 비는 慶北 永川郡 琴湖面 道南洞에서 발견되었으며,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 130cm, 전체 폭 93.5cm, 전체 두께 45cm, 표면 높이 110cm, 폭 77cm, 裏面 높이 98cm, 폭 66cm, 측면 높이 75cm, 상단부 두께 15cm, 중간부 두께 22cm, 하단부 두께 32cm이다(鄭永鎬, 永川 菁堤碑의 發見 考古美術 102, 1969, pp. l 3). 48) 李基白, 永川 菁堤碑貞元銘의 考察 ( 考古美術 102, 1969)., 永川 菁堤碑의 丙辰銘 ( 考古美術 106 107, 1970). 金昌鎬, 永川 菁堤碑 貞元十四年銘의 再檢討 ( 韓國史硏究 43, 1983).
- 79 - 는 銘文을 볼 수가 있는데, 丙辰年은 唐의 年號를 쓰기 시작하던 眞德王 5년(651)이 기준이 되는 것으로 보아 眞德王 5년 이전의 丙辰年으로서 가능한 연대는 眞平王 18 년(596)과 法興王 23년(536)이 되는데, 法興王 23년(536)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貞元 十四年 戊寅은 곧 元聖王 14년(798)이다.49) 한편 前者가 菁堤를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築造銘이라 한다면, 後者는 菁堤 의 파손을 수리한 기념으로 새긴 修治銘으로써,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 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 碑銘에 대한 判讀 및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銘 文에 나타난 인명 및 그 성격, 水利事業을 통한 力役의 動員體制 등에 대한 연구결 과가 발표되었다. 李基白은 碑文에 보이는 將上 과 將作人 은 동원된 인원을 표시하는 용어와 숫자 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將上은 3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은 공사의 책임자로서, 그 지휘 아래 將作人 7,000명이 동원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將作은 토목공사를 맡은 官府를 지칭한 것으로서, 신라때부터 공사에 동원된 인원을 將作人으로 불리우고 있 음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50) 한편 이 碑文에는 築堤에 있어서 중앙권력이 작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築堤의 공사 책임자로 8명의 인원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중에서 7명은 王京人으로 생각되 고 나머지 1명이 當該村에 거주하는 지방호족으로 추정하였다. 이것은 戊戌 塢作碑 의 경우에는 京位를 가진 사람은 두 僧侶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外位를 가진 村의 토착 세력가였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으며, 南山 新城碑에서도 王京人이 동원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村의 세력가들이 많이 책임자로 동원되었다는 점에서이 다. 이러한 특이한 점은 切也火郡(永川)의 특수한 위치와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王京인 金城과 인접해 있는 切也火郡은 신라의 지배집단인 王京人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51) 또한 李基白은 貞元修治記에 나타난 碑文을 통하여 貞元 14년(元聖王 14, 798)에 菁堤를 修築하는 공사를 담당한 것은 所內使 라 하였다. 所內使 를 누가 임명하여 파 견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국왕이 파견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 공사는 중 앙정부의 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점은 전국적인 규모로 노동력을 동원한 점과 신라사회가 중앙집권적인 체제하에 놓이게 되는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 기 때문이라 하였다. 所內使 라는 官職은 三國史記 職官志를 비롯한 어느 기록에 도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국왕에 의하여 임명되어 일정한 임무를 띠고 지방으로 파 견되는 臨時職으로 보았다. 그런데 所內使 에 임명된 사람은 上干 年 乃未와 史須 大 舍였다. 上干은 外位 제 6등에 해당하는 관등이며, 外位는 村主를 비롯한 지방호족에 49) 李基白, 永川 菁堤碑의 丙辰銘 pp. 30 31. 50) 李基白, 위의 논문 pp. 29 32. 51) 李基白, 위의 논문 p. 31.
- 80 - 國史館論叢 第42輯 게 주는 것이며, 京位의 大舍와 같은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비문에 보이는 所內 使 1人인 年은 上干이라는 外位 및 乃未라는 京位를 같이 지니고 있음이 처음으로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年이라는 인물은 村主 다음 가는 지방유력자였을 것으로 보았다. 만약 그가 村主였다면 外位로서가 아니라 村主로써 기록 되었을 것 이기 때문에, 年은 村主 다음가는 上干이라는 外位를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年이 外 位를 사용한 것은 그가 지방호족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또한 지방호족이 왕명 을 수행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所內使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지방호족들이 중앙정부의 집권체제를 이용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펴나가던 사회적 현실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으며, 한편으로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권력과 지방호족 과의 사이에 개재하는 대립과 타협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았다.52) 金昌鎬는 所內使는 직명, 上干과 年을 분리하지 않고 합쳐서 人名, 乃未는 京位名 으로 해석하였다.53) 菁堤碑에는 당시의 力役動員 체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고 있다. 李基 白은 動員人員 중에서 斧尺 은 도끼를 사용하여 일을 하는 기술을 지닌 인원으로 보 고, 이들이 평상시에 어떤 고정된 조직체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의 기술 을 이해하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았다. 法功夫 는 法幢 소속의 功夫로써 전국적 인 力役動員 조직이라는 면에서 주목되고 있다. 三國史記 職官志에 의하면, 外餘甲 幢과 外法幢이 지방촌락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法幢이 勞動 部隊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비문에 보이는 法功夫에서의 功夫는 곧 工夫로써 勞動人夫의 뜻으로 해석 된다고 하였다. 또한 法功夫는 국가의 公的인 군 사조직을 통하여 14,140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을 동원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이에 반하여 助役 은 切火郡 및 押梁郡에서 동원된 勞動力으로 보았다. 切火郡은 곧 지금 의 永川으로서 菁堤가 소재하고 있는 郡이며, 押梁郡은 지금의 慶山으로서 永川의 隣接地라는 점에서 助役이 현장에 있는 郡과 그 인접지에서 동원된 것임을 보여 주 는 것으로써, 이것은 중앙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방의 郡에 의해서 동원되는 것 으로 보았다.54) 金昌鎬는 斧尺百卌六法 으로 보아 공사규모를, 工夫一萬四千百卌人 은 동원인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55) 52) 李基白, 永川 菁堤碑貞元銘의 考察 pp. 8 10. 53) 金昌鎬, 앞의 논문 pp. 120 123. 54) 李基白, 앞의 논문 pp. 10 12. 55) 金昌鎬, 永川 菁堤碑 貞元十四年銘의 再檢討 ( 韓國史研究 43, 1983) pp. 117 129.
- 81 - Ⅵ. 丹陽 赤城碑 丹陽 赤城碑는56) 1978년 檀國大學校古蹟踏査團에의해서 발견되어 이에 대한 判讀 과 더불어 학술발표회를 통하여 연구결과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57) 비문의 서체는 楷書體로 隷書風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남북조 초기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비문의 문장구성은 新羅의 古碑 가운데서 가장 난해 한 문장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鄕札式도 아니며 漢文體도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58)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비의 상단부가 절단되어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 지만, 새로운 점령지의 지방민을 宣撫하는 비문의 내용이나 비의 형식을 고려한다면, 신라가 赤城 지방에 진출하여 이를 점유하게 되는 眞興王 10년 초인 550년대로 추측 되고 있다.59) 檀國大學校에서 개최한 학술발표회에서는 丹陽 赤城의 역사적 지리적 성격, 비문에 대한 내용분석을 통한 비의 성격, 인물과 관등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丹陽 赤城의 역사적 지리적 성격에 대해서, 金元龍은 비 부근에서 채집된 土器片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였다. 土器片의 성격은 新羅的인 面도 있지만 百濟的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음이 주목된다고 하였다. 또한 丹陽은 본래 고구려 영토이면서 그 토기 는 南韓土器圈에 속하였으며, 경상도 보다는 忠州를 통해서 서해안 백제중심 지방과 통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赤城碑는 慶尙文化圈 에서 高句麗 百濟文化圈으로의 전환, 즉 忠淸文化圈으로의 移行에 대한 신라측의 새 로운 마음의 준비 및 자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하였고, 한편으로는 南漢江을 渡 河하기 직전의 前進 基地的인 赤城의 전략적 정치적 중요성을 신라측이 재인식하고 56) 이 비는 忠北 丹陽郡 丹陽邑 下坊里에서 발견되었으며, 비의 크기는 상단폭 107cm, 하단폭 53cm, 높이 93cm이며, 비의 형태는 상단부는 넓고 두꺼우며 하단부로 내려오면서 좁고 얇 아졌으며, 비록 상단부가 절단 파손되었으나 좌우 측면은 거의 완형이어서 전문 22행, 각행 22 21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288자의 판독이 가능하다(鄭永鎬, 石碑의 發見 調査 經緯 史學志 12, 檀國大學校, 1978 p. 5). 57) 鄭永鎬, 石碑의 發見調査 經緯 ( 史學志 12, 檀國大學校, 1978). 金元龍, 丹陽赤城의 歴史, 地理的 性格 ( 史學志 12). 金錫夏, 丹陽眞興王赤城拓境碑 解讀文 ( 史學志 12). 南豊鉉, 丹陽赤城碑 解讀 試攷 ( 史學志 12). 李基白, 丹陽赤城碑 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 部分의 檢討 ( 史學志 12). 任昌淳, 丹陽赤城碑에 대한 愚見 二三 ( 史學志 12). 邊太燮, 丹陽眞興拓境碑의 建立年代와 性格 ( 史學志 12). 黃壽永, 三國 金石文 資料 ( 史學志 12). 鄭求福, 丹陽新羅赤城碑 內容에 대한 一考 ( 史學志 12). 58) 任昌淳, 위의 논문 pp. 29 30. 59) 李基東, 新羅 官等制度의 成立年代 問題와 赤城碑의 發見 ( 歷史學報 78, 1978) pp. 178 179.
- 82 - 國史館論叢 第42輯 있는 것으로 보았다.60) 비의 건립목적 및 성격에 대해서는, 李基白은 赤城碑에는 巡狩管境이라는 文句가 없고, 또한 상단부분이 남아 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으나 民心을 撫育한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61) 邊太燮은 眞興王이 伊史夫 등 10명의 高 官에게 下敎하여 新羅拓境을 돕고 충성을 바친 赤城人 也尒次의 공훈을 표창하고 장 차 也尒次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褒賞을 내리겠다는 국가 정책의 布告로 보았다. 특히 신라의 北方經略에 있어서 죽령을 넘어 최초의 基地인 丹陽 赤城에 有功現地人의 공훈을 새기고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포상을 약속한 拓境 碑를 세운 것은 새 영토에 대한 국가정책의 闡明인 것으로 眞興王巡狩碑 정신의 최 초의 표현으로 보았다.62) 또한 李基白은 赤城碑에 小子 小女 등의 용어가 보이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것 은 日本 正倉院에서 발견된 新羅帳籍에서 연령별로 인구를 분류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린 자녀들을 분류한 용어라는 점에서였다. 이것은 곧 진흥왕때에도 이미 인구를 性 別, 연령별로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佃舍法 이라는 용어는 토지 제도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하고, 율령제가 이미 이때에 시행되고 있었다고 보았다.63) 한편 비문에는 王敎를 받은 10명의 중앙고관이 보이는데, 邊太燮은 이들은 伊干 이하 及干 이상의 고관이며 모두 喙部 沙喙部의 出身部를 가진 점으로 보아 王京人 으로 추측하였으며, 또한 인명 밑에 智 의 敬稱이 있는 것은 다른 眞興王巡狩碑와 같 으나 官等 밑에도 支 의 敬稱이 붙은 것은 특이한 예라 하였다. 많은 중앙고관 중에 서 王敎를 받은 이들은 당시 北方經略事業의 중심인물로서 군사령부의 장군으로 추 측하였다. 비문에 보이는 幢主 역시 북방경략의 담당자로서, 州에 설치된 軍主보다 는 하급단위인 村 또는 城에 설치되고 있음을 ((彐/彐)+ )文村幢主 와 勿思伐城幢 主 를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하였다64) 赤城碑文에는 伊干 彼珍干 大阿干 阿干 及干 大舍 大烏 등의 京位 官等 名과 撰干 下干 阿尺 등의 外位 官等名이 보이고 있는데, 李基東은 이들 官 等名 가운데 伊飡 大阿飡 級伐飡 大舍 등의 京位는 眞興王巡狩碑에도 나타 나 있으며, 撰干 阿尺 등의 外位도 南山新城碑에도 보이고 있는데, 波珍飡 만 은 종래 中古時代의 금석문에서 찾아보기 힘든 官等名이라 하였다. 특히 大烏 의 존재가 주목된다 하였다. 그것은 赤城碑의 발견으로 大烏 官等이 眞興王巡 狩碑보다 10년 이상 앞서는 551년에 이미 존재하였음이 밝혀지게 됨으로써, 늦 60) 金元龍, 앞의 논문 pp. 8 10. 61) 李基白, 앞의 논문 pp. 21 22. 62) 邊太燮, 앞의 논문 p.35. 63) 李基白, 앞의 논문 p. 22. 64) 邊太燮, 앞의 논문 pp. 33 34.
- 83 - 어도 568년(眞興王 29)까지에는 17관등의 대부분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주기 때 문이라 하였다. 또한 外位의 최하급 관등인 阿尺 이 보이고 있음은 적어도 551 년까지는 外位체계가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았다.65) 이와 같이 丹陽 赤城碑의 발견은 新羅帳籍에 보이는 性別 年齡別 분류방법이 이미 眞興王代에 인구분류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 니라, 佃舍法을 통한 法興王代 율령제의 시행 확인, 인명표기법, 京位 및 外位 의 官等名을 통한 신라 17관등제도의 성립연대 등을 해명하는데 귀중한 자료 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Ⅶ. 眞興王 巡狩碑 眞興王 巡狩碑66)에 대한 관심은 비의 건립목적 및 그 정치적 배경, 비문에 보이고 있는 會集人名 및 隨駕人名의 성격, 官等의 체계 및 통치체제 등에 있다.67) 비문의 서체는 楷書體로 보여지고 있으며,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昌寧碑는 비 문에 辛巳年二月一日立 이 보이고 있어서 561년(眞興王 22)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주 고 있으며, 黃草嶺碑는 비문에 八月二十一日癸未 와 歲次戊子秋八月 이 보이고 있는 데, 戊子年은 568년(眞興王 29)이며, 周의 武帝本紀 에 의하면 8월 己丑日 은 8월 初 3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8월 21일이 癸未日이 되므로 서로 일치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68) 磨雲嶺碑는 비문에 太昌元年歲次戊子 가 보이고 있는데, 太 昌 및 戊子는 568년(眞興王 29)에 건립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北漢山碑는 비문에 南川 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利川에 南川軍主를 두었던 568년(眞興 王 29)과 576년(眞興王 37)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 되고 있다.69) 昌寧碑의 성격에 대해서, 今西龍은 종래의 眞興王巡狩管境碑 또는 眞興王拓境碑라 65) 李基東, 앞의 논문 pp. 178 182. 66) 昌寧碑는 慶南 昌寧郡 昌寧邑 橋上里에, 黃草嶺碑는 咸南 咸州郡에, 磨雲嶺碑는 咸南 利原郡 에, 北漢山碑는 서울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재하고 있으며, 昌寧碑의 크기는 높이 173cm 폭 198cm, 黄草嶺碑의 크기는 높이 115cm, 폭 49cm, 磨雲嶺碑의 크기는 높이 147cm, 폭 44cm, 北漢山碑의 크기는 높이 154cm, 폭 71cm이다(崔南善, 新羅眞興王의 在來 三碑와 新出現의 磨雲嶺碑 靑丘學叢 2, 1930). 67) 盧鏞弼, 新羅 眞興王代 大等의 分化와 그 政治的 背景 ( 歷史學報 127, 1990)., 昌寧 眞興巡狩碑 建立의 政治的 背景과 그 目的 ( 韓國史研究 70, 1990). 姜萬吉, 眞興王碑의 隨駕臣名硏究 ( 史叢 1, 高麗大 史學會, 1955). 姜喆鍾, 磨雲嶺 眞興王巡狩碑의 發見經緯에 관한 一管見 ( 全北史學 3, 1979). 李文基, 新羅 眞興王代 臣僚組織에 대한 一考察 ( 大丘史學 20 21, 1982). 崔南善, 新羅眞興王의 在來 三碑와 新出現의 磨雲嶺碑 ( 靑丘學叢 2, 1930). 68) 金正喜, 金石過眼錄. 69) 위와 같음.
- 84 - 國史館論叢 第42輯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君臣會慶의 碑 또는 君臣會盟의 碑로,70) 李丙燾는 眞興王의 치적을 정리하면서 비문에 隨駕衆臣이 명단이 보이고 있다 하여 이를 巡狩 碑로,71) 李基白은 葛文王의 정치적 지위를 밝히면서 단순한 巡狩이기 보다는 대표적 인 貴族會集의 기록으로 보았고,72) 金瑛河는 巡狩碑로 본 견해를 토대로 하여 단순 한 巡狩管境碑라 보고, 또한 그 巡狩의 목적이 민심을 수습하고 영역을 확인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았으며,73) 朱甫暾은 비문에 四方軍主가 참여한 사실이 보이고 있음 에 주목하여 全軍 指揮官들의 會合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았다.74) 또한 巡狩의 목적에 대해서 申瀅植 金瑛河는 일반적으로 巡狩라 함은 왕의 정치적 활동의 일환이라 하겠으며, 문헌상에 의하면 민심수습, 군사위문, 재해구제, 영토의 확인과 재정복을 위한 宣撫의 수단 뿐만 아니라, 下敎를 위한 巡幸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75) 盧鏞弼은 巡狩目的이 단순히 영토확인 또는 민심의 수습과 같은 데에만 있지 않고 국왕 자신의 왕권 신장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敎를 하달하는 계 기로 삼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창녕비도 그 내용에 왕의 巡狩 시 하달한 詔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용은 토지, 산림 등 경제 관계의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명시하고, 그 관련업무의 실무계통의 수립과 처 벌결정권의 소재를 밝혀주는 敎事의 내용을 담고 있는 巡狩碑로 보았다.76) 또한 盧 鏞弼은 昌寧碑文에 보이는 會集人名의 大等을 통하여 眞興王代 大等의 분화와 그 정 치적 배경에 대해서 해명하고자 하였다. 즉 진흥왕대에는 大等에게 각기 담당업무 분야가 정해져 있어서, 事案에 따라서 그 업무의 전담 大等이 선임되어 처리하였으 며, 이런 경우는 그 事案을 맡는다는 의미로 典 자를 冠飾하여 典大等이라 정한 것으 로 보았다. 그 예로는 재정관계를 전담하는 大等은 稟主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또한 大等은 眞骨만이 될 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77) 한편 이러한 典大等으로 대표되는 大等의 분화는 官等의 高下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는데, 眞興王巡狩碑 자체 내에서 두 종류의 大等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大等 각각의 官等이 一 尺干과 及尺干으로 큰 차이가 있음이 그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大等 분화의 정치적 배경은 궁극적으로는 진흥왕대 非智證王系의 일원으로 그 先代에 정치적 비중이 약 화되었던 異斯夫, 居柒夫 등과 함께 진흥왕이 연합을 달성함으로써 대내적인 왕권의 70) 盧鏞弼, 昌寧 眞興巡狩碑 建立의 政治的 背景과 그 目的 ( 韓國史硏究 70, 1990) p. 35. 71)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p. 678. 72) 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研究 (一潮閣, 1974) p. 18. 73) 金瑛河, 新羅時代 巡狩의 性格 ( 民族文化研究 14, 1979) p. 237. 74) 朱甫暾, 新羅 中古期 郡司와 村司 ( 韓國古代史研究 1, 知識産業社, 1988) pp. 38 39. 75) 申瀅植, 三國時代 王의 性格과 그 地位 ( 韓國古代史의 研究, 一潮閣, 1984) pp. 85 110. 金瑛河, 앞의 논문 pp. 212 245. 76) 盧鏞弼, 앞의 논문 pp. 42 49. 77) 盧鏞弼, 新羅 眞興王代 大等의 分化와 그 政治的 背景 ( 歷史學報 127) pp. 2 9.
- 85 - 신장은 물론 대외적으로는 정복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하였다.78) 姜萬吉은 黃草嶺碑에 보이는 隨駕臣 중에서 沙門道人法藏 과 慧忍 은 隨駕佛僧으 로서 僧名이 제일 먼저 기록되고 있음은 법흥왕때에 비로소 공인되었던 신라의 불교 가 이때에 와서는 대단히 숭상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았다. 喙部服冬知大阿干 은 喙部 출신으로서 이름이 服冬이며 제 5위 관등인 大阿飡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 다.79) 金正喜는 黃草嶺碑에 보이는 眞興太王 이라는 稱號에 대해서 三國史記 및 唐書 에 의하면, 諡號는 왕이 승하한 후에 붙여주는 美稱으로서 智證王때부터 시 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데 이 비를 통하여 보면 眞興은 살아 있을 때의 칭호인 것으로 보았다. 또한 비문에는 大等 이라는 官等名에 대해서, 三國史記 職官志에 의하면 大等은 두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大等 이외에도 단순히 大 等이라고 單稱한 것도 있는 것으로 보았다. 비문에 보이는 迊干, 大阿干, 及干, 大 舍, 小舍 吉之 는 각각 3,5,9,12,13,14位의 관등을 의미하므로, 비문에 기록된 것은 모두가 차례가 있고 질서 정연하여 조금도 문란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兮 자는 인명의 아랫 부분을 의미하며, 與 자는 관청 이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80) 한편 磨雲嶺碑에 보이는 臣僚를 통하여 眞興王代 下級臣僚의 존재형태 및 그 구조 와 성격에 대해서 李文基는 비문에 기록된 隨駕人物을 5개의 집단으로 분류하였는데, 첫째 집단은 2명의 승려로서 나머지의 관등을 소유한 인물과는 구별되는 집단, 둘째 집단은 大等이라는 한 가지 명칭아래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이 소유한 관등이나 구성 원의 활약상으로 보아 중앙상급신료로 보이는 집단, 셋째 집단은 ⑫大舎 ⑭吉之로 비교적 낮고, 職名이 국왕의 행차와 관계가 있는 것들이며, 일반행정 업무와는 관련없 는 近侍供俸集團, 넷째 집단은 하급신료 집단, 다섯째 집단은 지방관집단으로 분류하 였다. 특히 지금까지 문헌 사료에서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하급신료들의 존재형태 를 이 비문에서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즉 비문에 보이는 隨駕人名 중에서 堂來客, 裏來客, 外客 은 진흥왕대의 하급신료들이었으며, 그들은 각각 중앙행정조직, 近侍組 織, 지방통치조직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각종 관직이나 관부의 설치가 미숙한 상태에서 진흥왕대에 하급신료들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 파악되었던 사실은 비록 관직이나 관부의 분화가 미숙한 상태에 있었지만 나름대로 신료들을 조직화하고 있었 던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진흥왕대는 고대국가의 한 표징인 官職과 官府의 설치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고, 비록 미숙한 상태였지만 이미 신료들은 비교적 큰 범위로 조직화하여 구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범위는 磨雲嶺碑에 의하면 중앙행정을 맡았던 臣僚, 近侍臣僚, 지방통치와 관련된 신료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본다면, 진 78) 盧鏞弼, 위의 논문 pp. 10 33. 79) 姜萬吉, 앞의 논문 pp. 66 70. 80) 金正喜, 앞의 책.
- 86 - 國史館論叢 第42輯 흥왕대의 臣僚組織은 중앙행정조직, 近侍지방통치조직으로 된 것으로 보았다.81) 金正喜는 北漢山碑文에 보이는 太主, 忠信精誠, 道人, 及干, 夫智 등의 글자는 황초령비와 같으며, 夫智 또한 황초령비에 보이는 大阿干 非知夫知 를 의미하는 것 으로 미루어 두 비가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았다. 또한 비문에 보이는 及干 은 관등이고, 內大智 는 인명이며, 干 은 阿干 迊干과 같은 의미이며, 軍主 는 都督을 의미하며, 沙 는 部이름이거나 인명의 윗 부분으로 추측되며, 大奈 智 는 大奈麻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82) 이와 같이 眞興王巡狩碑의 발견은 진흥왕대 巡狩의 性格 및 巡狩碑의 건립목적, 隨駕人名을 통한 진흥왕대 중앙조직 및 近侍組織과 지방통치조직, 大等의 분화 과정 을 통한 정치적 성격 등에 대해서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史料가 된다는 점에 그 의 의가 있다 하겠다. Ⅷ. 戊戌塢作碑 戊戌塢作碑는83) 1946년 任昌淳에 의하여 발견되어 判讀, 拓本됨으로써 그 조사결 과가 學界에 발표되었다.84) 비문의 서체는 北魏風으로서 南山新城碑와 같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85) 비의 건립 연대는 비문에 戊戌年 四月朔十四日 이 보이고 있는데, 戊戌이 어느 해 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및 三國遺事 에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결정하는 데는 비문의 내용 기록방식, 서체, 비의 양식 등을 검토한 결과 통일이전의 것으로 고증됨으로 여기서 戊戌年은 578年(眞智王 3)으로 추정하였다. 그것은 먼저 비의 양식이나 書風이 眞興王巡狩碑나 南山新城碑와 비슷한데 黃草嶺碑의 건립 연대 가 568년으로서 眞智王 3년(578) 보다 10년 후이며, 南山新城碑의 건립연대인 591년 보다는 13년 전이 된다. 만약 이 연대 보다 一周甲後의 戊戌, 즉 638년(善德女王 7 年)이라면 그 양식이나 서체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점과 당시 對外관계로 보아 防衛上 필요한 塢를 축조할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점에서였다.86) 비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任昌淳은 另冬里村 은 당시 村名으로 보이며, 특히 이곳 은 本塢가 축조된 것으로써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하였다. 高 塢作記之 81) 李文基, 앞의 논문 pp. 146 157. 82) 金正喜, 앞의 책. 83) 이 비는 大邱直轄市 大安洞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 慶北大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비의 크 기는 높이 97cm, 폭 63cm이다(任昌淳, 戊戌塢作碑 小考 史學硏究 1, 1958, pp. 9 11). 84) 任昌淳, 戊戌塢作碑 小考 ( 史學硏究 1). 85) 任昌淳, 위의 논문 pp. 3 4. 86) 任昌淳, 위의 논문 pp. 5 7.
- 87 - 에서 高 塢 는 塢의 명칭으로 보이며, 作記之 는 만들고 기록한다는 俗文으로써, 作 은 한자의 뜻으로 築造와 같은 述語라 하였다. 此成在 에서 此 는 글자 그대로 이것을 의미하며, 成在 는 吏讀體로써 在 는 敬語의 助動詞로 겨 로 읽으며, 此成在 는 塢를 築造할 때 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此塢大廣廿步高五步四尺長五十步 는 塢의 길이, 넓이, 높이를 실측하여 기록한 것이며, 此塢大는 글자 그대로 이 塢의 크 기라는 뜻하며, 文作人壹利兮一尺 에서 文作人 은 俗式記寫法으로써, 글씨 쓴 사람으 로 보았다. 중국에서 碑碣에 撰者나 筆者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漢魏六朝間에는 보이지 아니하며, 陳隋 이래로 筆者의 이름이 비로소 전하고, 唐 후에 와서는 당연히 기록하였는데, 신라 진흥왕대에는 중국 南北朝말기 즉 北朝의 記名하는 例를 따른 것으로 보았고, 人名의 표기에 있어서도 村名, 人名, 職名의 순으로 表記되고 있는 것 으로 보았다.87) 이와 같이 戊戌塢作碑의 발견은 後漢 이후 중국의 각지에서 축조된 塢가 우리나라 에서도 축조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 國防史 및 土木史의 일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신라 鄕官制度의 실제적 사용 및 一尺에 대해서 좋은 史料가 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Ⅸ. 南山 新城碑 南山 新城碑는88) 1934년 처음으로 1基가 발견된 이래, 1972년까지 총 5基의 비가 발견됨으로써, 발견된 순서에 따라서 제 1,2,3,4,5碑로 부르고 있다. 제 1,2,4,5碑에서는 지방민의 築城分團에 대한 기록이 보이고, 제 3碑에서는 慶州 6部人에 대한 기록으 로 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됨으로써 그 의미를 더해 주고 있다.89) 비문의 서체는 古拙한 六朝風으로써, 塢作碑와 壬申誓記石과 같으며,90) 비의 건립 연대에 대해서는, 비문에 보이는 辛亥年二月廿六日 에 의하여 정해지고 있음을 볼 수 가 있다. 제 1碑, 제 2碑, 제 3碑, 제 5碑가 同日字이고, 제 4碑도 잔존 부분의 제 1단 문구가 다른 3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같은 연대로 추정하였다. 비문에 보이는 辛亥 87) 任昌淳, 위의 논문 pp. 9 16. 88) 이 비는 慶北 月城郡 內南面 塔里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제 1비의 크기는 높이 91cm, 최대폭 44cm, 두께 5 13cm) 제 2비는 높이 121cm, 상단 폭 28cm, 하단 폭 26cm, 중간 최 대 폭 47cm, 두께 7 14cm, 제 3비는 높이 80.5cm, 상단 폭 30cm, 하단 폭 23cm, 두께 10 12cm, 제 4비는 높이가 좌측에서 51cm, 우측에서 39cm, 폭은 상단부 절단면이 34cm, 하 단부에서 32cm, 두께 3.5 3.9cm, 제 5비는 높이 22cm, 폭 20cm, 두께 9.2cm이다(秦弘燮, 南山新城碑의 綜合的 考察 歷史學報 26, 1965, pp. 2 3,17,23,29). 89) 秦弘燮, 南山新城碑의 綜合的考察 歷史學報 26, 1965). 李鍾旭,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 ( 歷史學報 64, 1974). 90) 秦弘燮, 위의 논문 pp. 2 3.
- 88 - 國史館論叢 第42輯 年 은 新羅시대를 통하여 많지만 비의 형태 및 서체, 또는 비문 체제로 보아 통일신 라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므로 辛亥年 은 신라통일기 이전의 干支로써, 三國史記 에 보이는 591년(眞平王 13)의 築城記錄과 三國遺事 에 보이는 建福 八年辛亥 의 築城記錄에서 찾을 수가 있다고 하였다. 眞平王 13년은 辛亥年의 干支에 해당하며, 建福八年 의 建福 은 584년(眞平王 6)에 제정한 年號로써, 그 8년은 곧 眞 平王 13년 辛亥에 해당함으로써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 의 記錄과 일치하고 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의 건립연대는 591년(眞平王 13)으로 추정하였다.91) 한편 비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秦弘燮은 제 1碑文에 보이는 罪敎事爲聞敎令誓事 之 는 罪敎事 와 爲聞敎令誓事之 의 두가지 사항이 포함된 것으로써, 敎 는 令, 使 의 의미로써, 罪敎 는 令罪, 使罪 의 뜻이며, 事 는 訓讀하여 일 이므로, 이와 마찬 가지로 敎令誓 도 令誓, 使誓 의 뜻으로 보았다. 阿良邏頭 이하는 南山新城 築城에 관여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맡은 築城 거리를 표시한 것으로 보았고, 또한 여기에 관여한 사람들의 기록방법은 職名, 屬部, 人名, 官等의 순으로 기록한 것은 眞興王巡 狩碑나 塢作碑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92) 또한 비문에 보이는 官職에 대해서는, 阿良 邏頭 는 上 下阿良村을 총괄하던 지위에 있었던 직위로 보았다. 奴含道使 營 (土+ 古)道使 는 奴含村 과 營 (土+古)村 의 道使라는 뜻이며, 한 地方行政區의 長으로 보 았다. 郡上村主阿良村 은 阿良村 을 총괄하던 郡의 上村主의 의미로써, 이 비에 참여 한 村主는 같은 上村主이면서도 格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았고, 匠尺, 文 尺 은 일종의 기술자, 즉 匠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城使 는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職名을 찾아 볼 수가 없으며, 城에 관계가 있는 武官職으로 보았다. 비문에 大舍, 撰干, 上干, 次干, 阿尺, 一伐 등의 관직이 보이는데, 大舍는 儒理王 9년 (32)에 제정한 17관등 중에서 제 12위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京官職을 호칭한 사람은 頭 와 道使 등 비교적 지방직위로서는 높은 직책을 가졌던 것으로 보았고, 또한 이 사람들만이 沙喙 이라는 部名을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93) 제 2碑의 내용에 대해서는, 秦弘燮은 沙喙 은 屬部로써, 屬部名을 기록한 사람은 列記人名 중에서 가장 직위가 높고 京官職인 小舍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았다. 地名 에 대해서 阿且兮村 은 지금의 慶北 義城郡 安溪面 安定里, 答大支村 은 지금의 慶北 尙州郡 化書面 北寧, 阿大兮村 은 지금의 忠北 沃川郡 安內面, 安南面으로 추측하였 다. 城名으로는 仇利城 과 久利城 은 같은 城으로 보여 지는데, 三國史記 慈悲王 條에 보이고 있는 仇禮城 으로, 沙戶城 은 刀 와 戶 는 서로 혼용하였다는 점에서 沙刀城 으로 보았다. 人名 끝에 之, 次 字가 붙어 있는데 이는 존칭어로 사용된 것 으로 해석하였다. 官等에 있어서 外官職으로 제 1碑文에 보이지 않는 貴干 과 彼日 91) 秦弘燮, 위의 논문 pp. 35 37. 92) 秦弘燮, 위의 논문 pp. 7 8. 93) 秦弘燮, 위의 논문 pp. 8 15.
- 89 - 이 있음을 주목하였다. 貴干은 內官職 제 10위 大奈麻에 해당하는 外官職이며, 彼日 은 外官職 제 10위이고 內官職 小烏에 해당하는 관등으로 보았다.94) 제 3碑의 내용에 대해서는, 秦弘燮은 비문에 보이는 啄部主刀里受作云云 에서 啄 部 는 6部의 하나이고, 主刀里 는 人名으로도 볼 수가 있으나 地名으로 봄이 타당한 것으로 보았다. 作上人 은 구체적인 職名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비문의 撰者 또는 書 者로 보았다. 屬部名에 서 啄部 는 이 비에서 처음 나오는 部名이며, 그 위에 다른 部名이나 村名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啄部에서 이 비를 세운 것으로 보았다. 또한 人名은 10여 명이 보이고 있는데 완전히 알 수 있는 인물은 仇生次, 只冬, 久 匠 의 3인에 불과하며, 人名 끝에 次 를 붙인 것이 2인, 知 와 之 을 붙인 것이 1인인 데, 次, 知, 之 는 모두 존칭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95) 이에 대하여 李鍾旭은 비문에 보이는 인명의 끝에는 대체로 공통점이 있는 末字가 있다 하고, 제 1碑에는 知 字 3인, 次 字 5인, 제 2碑에는 전체 14명 중에서 次 字 1인, 知 字 3인, 之 字 10 인이며, 제 3碑에는 次 字 3인, 知 字 1인이 보이고 있음은 新羅 中古期의 인명에는 공통적인 末字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96) 또한 官等으로는 大舍, 小舍, 吉舍, 大烏, 小烏 등의 內官職이 보이는데, 大舍 는 外官 제 6위인 上干 에, 小舍 는 제 7위인 干(次干) 에, 吉舍 는 內官 제 14위로 외관 제 8위인 一伐 에, 大烏 는 內官 제 15위 로 외관 제 9위인 一尺 에, 小烏는 내관 제 16위로 외관 제 10위 彼日 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제 3비는 다른 1 2비에 비하여 모두 내관직을 稱하였고 그 중에는 제 1 2비에서는 외관직을 칭했던 官職 또는 본 비문의 列記人物의 서열로서는 末席에 있는 인물마저 내관직을 칭하고 있는 점은 이 구역의 공사는 지방에서 담당하지 않 고 啄部 즉 중앙에 속한 사람들이 담당한 것으로 추측하였다.97) 제 4碑의 내용에 대해서는, 秦弘變은 비문에 보이는 古生城 은 屬部名에 보이는 古生村 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고, 書尺 은 尺 자가 붙은 匠人으로서 다른 데에 서는 볼 수가 없는 새로운 예라 하고, 眞興王巡狩碑에 書人, 塢作碑에 文作人 등이 있는데 이것을 書者 撰者의 의미로 본다면 여기에서도 書者를 의미하여 이 비를 쓴 사람으로 보았다. 石捉上人 과 小石捉上人 은 이 비 외에는 그 용례를 찾아 볼 수가 없으나 石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石捉人의 구분은 面(石)捉上 (人), 面石捉人, 石捉上人, 石捉人, 小石捉上人, 小石捉人 으로 되어 石捉人 위에 面 字나 小 字를 붙이는 것과 아무 字도 안붙이는 구별과, 石捉人 과 石捉上人 의 구 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으며, 이때 面 字의 用例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面 과 小 를 비교하면 兩字가 갖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아 面 이 상위이고 小 가 하위일 94) 秦弘燮, 위의 논문 pp. 18 22. 95) 秦弘燮, 위의 논문 pp. 24 26. 96) 李鍾旭, 앞의 논문 p. 12. 97) 秦弘燮, 앞의 논문 pp. 26 28.
- 90 - 國史館論叢 第42輯 것이며, 石捉人 과 石捉上人 의 경우는 前者보다는 後者가 상위일 것으로 보았다.98) 南山新城이라는 地名에 대해서는, 秦弘燮은 현재 南山에는 蟹目嶺을 포위하여 築 造된 城이 있고 城內에는 長倉址가 3個所가 남아 있는데, 南山新城이라는 명칭은 三國史記 新羅本紀 文武王條에 春正月作長倉於南山新城 이라 하였고, 또한 同書 眞平王條에 秋七月築南山城周二千八百五十四步 라 하여 南山에는 본래 南山城이 있 었고, 별도로 새로운 南山城 즉 南山新城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종래의 南山城 을 그 후 修築하여 新城이라 呼稱하여 南山新城이라 한 것으로 보았다.99) 또한 南山 新城의 築城經緯에 대해서도, 秦弘燮은 비문에 보이는 출신촌명이나 인명에 중복이 전혀 없는 점과 受作거리가 다른 점, 비의 발견 지점이 다른점 등으로 보아 分團別 로 受作거리가 정해진 것으로 보았다. 受作거리의 결정은 관계 인원의 多寡보다는 지형에 의한 공사자체의 難易에 있다 하였다. 그리고 비의 형태로 보아 原石의 선택 은 자유롭게 하였으며, 비문의 체제는 당시의 격식에 의하였으나 前段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약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비는 자유로이 건립된 것으로 보았다. 築城 時 비문에 나타난 所屬部나 郡村名을 보면 啄部 沙啄部 등의 6部名 이외에 여러 村 名이 보이고 있음은 여러 지방에서 동원된 것으로 보았고 築城은 엄격한 책임아래 진행되었고 이를 서약하였다.100) 축성공사의 力役動員體制에 대해서, 李鍾旭은 신라 中古의 지방통치체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비문에 보이는 인원은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 어지고 있다하고, 첫째, 邏頭와 道使라는 지방관으로서 이들은 6부 출신이었으며, 한 郡에서 3명씩 동원되었고, 이들의 임무는 주로 국가의 명령전달과 작업에 대한 총 책 임을 진 것으로 보았다. 둘째, 村主群으로서 역시 郡을 단위로 하여 동원되었는데, 이 들은 지방관을 통하여 국가의 명령을 전달받았고, 인력동원과 築城공사를 지휘 감독 한 것으로 보았다. 셋째, 作上群으로서 실제로 雜役夫를 거느리고 築城공사를 담당하 였으며, 이들은 村을 단위로 하여 전국적으로 200여 집단이 동원된 것으로 보았다.101) 비문에 보이는 郡 村에 대해서, 李鍾旭은 이것은 智證王 6년(505)에 새로이 정비되 었던 지방제도의 한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고, 신라 中古에는 州 郡 村(城)의 3 단계로 지방행정조직이 있었는데, 당시 村과 城은 제 3단계 지방행정구획의 단위명 으로서 동등한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州에는 軍主, 郡에는 幢主, 村에는 道 使(邏頭)라는 지방관이 파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지방관은 그 명칭만으로도 알 수가 있듯이 행정적 성격보다는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 로 정복사업을 수행하던 新羅 中古 지방통치체제의 특징으로 보았다. 그런데 지방관 98) 秦弘燮, 위의 논문 pp. 31 32. 99) 秦弘燮, 위의 논문 p. 34. 100) 秦弘燮, 위의 논문 pp. 38 40. 101) 李鍾旭, 앞의 논문 pp. 14 26.
- 91 - 중에서 촌락민을 통치하였던 것은 道使(邏頭)였으며, 이들은 촌주를 통하여 촌락민을 통치하였는데, 신라 中古의 촌주는 郡事를 맡아 보았다고 하였다. 또한 郡을 단위로 하여 郡上村主 郡中村主 등으로 서열이 정해져 있었던 이들 촌주는 근본적으로 동등 한 정치적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 촌주는 각기 대가족을 거느렸는데 이 중에는 기술 자와 같은 존재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村事를 담당하였던 토착세력가였 던 作上은 力役動員時에 부여되었던 명칭이긴 하겠지만, 기술관 또는 雜役夫를 거느 리고 있었던 자들로 보았다. 또한 이들 기술자들도 관등이 부여되었으며, 관료체계의 말단에 위치한 존재들이라 하였다.102) 이와 같이 南山新城碑의 발견은 비문에 있는 인물의 분석을 통한 인명기록 방법, 官等을 통한 新羅 中古 신분체제 및 村落구조, 新羅 中古의 築城을 위한 力役체계, 비문에 보이고 있는 地名을 통한 新羅 中古의 地方行政體制 등에 대해서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X. 結 語 이상과 같이 新羅 中古 金石文에 대한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았다. 이 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部의 체제에 대해서는, 迎日 冷水里 新羅碑에 喙 沙喙 本彼 斯彼 등의 4개 部名이 나오고 있음은 5세기경 奈勿王代에 六部체제가 이루어 졌으며, 이러한 면에서 본다 면 신라는 王京六部體制의 지배형태였고, 그 중에서도 喙와 沙喙의 二部支配體制라 하였다. 또한 종래 朴氏王妃族說과 牟梁部 朴氏族說은 성립될 수 없는 오류임을 밝 혔다. 반면에 蔚珍 鳳坪 新羅碑에서는 國王과 葛文王이 각각 여전히 部의 長이라는 점과 喙 沙喙 本彼部 등의 長이 보여지고 있는 점을 종합한다면 신라 중고기의 六部 는 독자적인 單位政治體에서 단순한 王京의 행정구역으로 변화해 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보았다. 6部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비문에 新羅六部, 喙部 등이 보이고 있음은 늦어도 법흥왕 11년(524) 이전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6세기 중엽, 4세 기 성립설을 부정하였다. 葛文王에 대해서는, 迎日 冷水里 新羅碑에 의하면 葛文王은 寐錦王에 즉위하기 이 전의 왕으로써, 葛文王은 沙喙部에 소속된 반면에 國王은 喙部에 소속된 것으로 보 았다. 또한 葛文王으로서 國王에 즉위한 智證은 소속이 沙喙部에서 喙部로 소속이 전환된 것으로 보았고, 국왕의 왕자들은 喙部에 소속됨으로써, 葛文또이 국왕이 될 수 없다는 종래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였고,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당시 신라 는 寐錦王과 葛文王의 二元制 王權과 表裏ー體가 된 喙, 沙喙의 二部支配體制로 보 102) 李鍾旭, 위의 논문 pp. 26 51.
- 92 - 國史館論叢 第42輯 았다. 국왕의 지위에 대해서는, 蔚珍 鳳坪 新羅碑에 의하면 국왕은 上大等을 설치하기 이전에는 국왕이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고, 국왕도 六 部의 하나인 喙部를 冠稱하고 있음은 국왕이 다른 귀족세력을 초월하는 권력자가 아 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上大等의 설치를 계기로 하여 귀족세력에 의하여 어느 정도 제약을 받기는 하였으나 국왕권이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干號의 변경에서 찾을 수 있다 하였다. 官等制에 대해서는, 蔚珍 鳳坪 新羅碑에서는 邪足智 가 확인됨으로써 신라의 17官 等制가 늦어도 法興王代 初까지는 확립되었다는 학계의 통설을 확인시켰다. 또한 法 興王代에는 이미 京位, 外位 및 6部人과 지방민을 표기하는 일정한 방식이 행정인 令에 의하여 규정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昌寧巡狩碑에서는 集會人名에 보이는 眞興 王代 大等의 분화과정을 통하여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 살폈는데, 眞興王代 大等 은 그 事案에 따라서 그 업무의 전담大等이 선임되어 처리하였으며, 이런 경우는 그 사안을 맡는다는 의미로 典 字를 冠飾하여 典大等으로 칭하였으며, 大等 분화의 정치 적 배경은 궁극적으로는 眞興王代 非智證王系의 일원으로 그 先代에 정치적 비중이 약화되었던 異斯夫 居柒夫 등과 함께 진흥왕이 연합을 달성함으로써 대내적인 왕권 의 신장과 더불어 대외적으로 정복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서 비롯된 것 으로 보았다. 律令에 대해서는, 蔚珍 鳳坪 新羅碑에 의하면 律令은 法興王代에 처음으로 수용하 여 반포하면서 律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令은 그 篇目은 알 수 없지만 신라의 실정에 맞게 변용시켰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법흥왕때 비록 律令이 반포되 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통치체제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律令의 형 식이나 내용이 완비되지 못하였을 것이므로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축적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정비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別敎令은 이와 같은 조치의 하나로 보았다. 地方統治體制에 대해서는 蔚珍 鳳坪 新羅碑에의하면 法興王代의 지방통치는 주요 지배거점에 道使를 파견하였으며 軍主가 이들을 통솔하였고, 또한 軍主의 지휘 아래 에 있던 지방관과 在地人들은 그 지역의 통치에 관하여 공동으로 책임을 졌으나 일 정한 한계는 있었으며, 이것은 신라 중고 지방통치 체계의 한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南山 新城碑에 의하면 新羅 中古에는 州 郡 村(城)의 3단계 지방행정조직이 있었는데, 당시 村과 城은 제 3단계 지방행정구획의 단위명으로서 동등한 정치적 지 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州에는 軍主, 郡에는 幢主, 村에는 道使(邏頭)라는 지방관이 있었다 하였다. 또한 이들 지방관은 행정적 성격보다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 은 新羅 中古 지방통치체제의 한 특징으로 보았다. 力役體制에 대해서는, 永川 菁堤碑에는 斧尺 法功夫 助役이 보이고 있는데, 斧尺은 도끼를 사용하여 일을 하는 인원으로 보았고, 法功夫는 法幢소속의 功夫로써 전국적
- 93 - 인 力役動員 組織이며, 法餘組織 중에서도 外餘甲幢과 外法幢이 勞動部隊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助役은 지방의 郡에의해서 동원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南 山 新城碑에서는 力役動員體制를 크게 세 집단으로 나누고 있다. 道使 및 邏頭라는 지방관은 한 部에서 3명씩 동원되었는데, 이들의 임무는 주로 국가의 명령전달과 작 업에 대한 총 책임을 진 것으로 보았고, 村主群은 郡을 단위로 하여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지방관을 통하여 국가의 명령을 전달 받았으며, 인력동원과 築城공사를 지휘 감독한 것으로 보았으며, 作上群은 실제로 雜役夫를 거느리고 築城공사를 담당하였 으며, 이들은 村을 단위로 하여 전국적으로 200여 집단이 동원된 것으로 보았다. 花郞徒에 대해서는, 蔚州 川前里書石에는 花郞의 명칭으로 추측되는 於史郞 安郞이 실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花郞徒의 제정은 法興王代(514 540)에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으며, 또한 書石의 銘文 가운데서 화랑의 명칭이 많이 나타나는 것 으로 보아 川前里 계곡 일대가 화랑의 遊娛地로 보았다. 이 밖에도 赤城碑에 보이고 있는 小子, 小女는 新羅帳籍에 보이는 용어라는 점에 주목하며 眞興王때에도 이미 性別, 年齡別로 인구를 분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戊戌塢作碑에서는 중국 각지에서 축조된 塢가 우리나라에서도 축조되고 있음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國防史 및 土木史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