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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연구 제20집 (2009.05.31) 1920 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29) 육 상 효** 1. 2. 3. 4. 5. 6. 들어가는 말 신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방법적 시기 구분의 문제 초창기 연기 노동자 시대(1919 1926) 나운규 시대(1926 1935 초까지) 발성 스타 시대 맺는 말 국문요약 한국에서의 스타현상의 시작은 미국 영화 속의 스타들을 통해서였다. 1910 대부터 한해 수십 편씩 수입돼 상영된 미국 영화들 속의 배우들은 아주 높고 먼 산의 정상에 사는 신들처럼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을 통해서 한국의 관객들은 스타라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학습했다. 연쇄극이라는 이름으로 연극과 영화의 절충형태의 공연물이 유통되기 시작하 면서 드디어 영상 속에서 연기하는 사람들이 배우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 다. 그러나 풍경의 한 부분처럼 서 있던 배우들은 연기노동자 이상도 이하도 아 니었다. 1923 <월하의 맹서>로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무성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배우들은 픽쳐 퍼스낼리티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 디어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연기를 하는 전문인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1926 나운규의 <아리랑>이 도래하면서 한국에서의 스타덤은 한꺼번에 개화한다. * 이 논문은 2005 정부재원(교육인적자원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 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KRF-2005-079-GS0011). ** 인하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 167 -

한국학연구 제20집 아리랑 의 엄청난 성공으로 나운규는 연기 전문가에서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스타로 거듭난다 반항아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당시 식민지의 현실을 관통 해 강력한 정서적 동일시와 투사를 만들어낸다 그의 스타성을 전략적으로 이용 하고 관리하려는 초기적 의미의 스타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 다 발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스타의 조건에 목소리가 추가되었다 문예봉 은 조용하고 단아한 이미지 신파적 연기와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중립적 연기로 단숨에 발성영화 시대의 스타로 등극한다 관객들은 나운규와 함께 분노를 터뜨 렸고 문예봉을 보면서 상실된 시간을 그리워했다 대의 식민지 조선 사회는 경제적 잉여 사회 시스템의 근대적 정비 문화의 산업화 등 스타덤이 성립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들을 결여하고 있었다 일 제의 강력한 검열 또한 그것의 성립에 부정적 요소로 기능했다 그러나 식민지라 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 관객들의 스타를 향한 정서적 유대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 보다 강력했다 산업적 경제적 조건이 결여됐지만 고통의 공감을 통해서 만들어 진 강력한 정서적 연대감 이것이 당시 한국적 스타덤의 요체인 것이다 주제어: 스타덤, 픽쳐 퍼스낼리티, 연기노동자, 나운규, 문예봉, 아리랑, 자기동일시 논문 투고일 : 2009.04.02. / 심사 완료일 : 2009.05.11. / 게재 확정일 : 2009.05.22. - 168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들어가는 말 신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시네마토그래프는 애당초 운동을 연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곧 현 대 세계의 최대의 스펙터클이 되었다 촬영기는 현실을 모사하기 위해 고안되 었지만 곧 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스크린은 인간에게 거울을 제공할 것 같았는데 세기 들어와 세기의 반신인 스타를 창조하였다 영화사에 대한 에드가 모랭의 이 간명한 통찰은 한국 영화사의 초기에 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영화를 스스로 고안하지 않았고 외국으로부 터 수입했다는 점만 예외로 하면 말이다 여름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서양 도시들의 풍경을 담은 활동사진이 한국의 일반 관객들에 게 공개됐다 처음에 그것은 움직이는 사진이라는 신기한 마술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말로만 듣던 풍물이나 절경을 보여주는 만화경이 되었다 가 드디어 월하의 맹서 를 기점으로 이야기를 담아 현실을 모 방한 꿈을 보여주는 매체로 진화했다 경성을 비롯한 전국에 급속하게 극 장수가 늘어났고 영화의 대중적 파급력에 눈을 뜬 자본가들이 다투어 영 화에 투자하기 시작했지만 모랭의 표현대로 세기의 반신인 스타들은 아직 한국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꿈이라 불리기엔 한국의 영화들은 자본 적으로 기술적으로 열악했다 거친 화면에 엉성한 연기와 카메라 신파적 이야기 구조 속에 노출된 배우들에게 관객들의 감정 투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짜 신들은 밖으로부터 들어왔다 헐리우드는 아주 멀었으나 거기서 애드가 모랭 이상률 역 뺷스타뺸 문예출판사 면 이영일 뺷한국영화전사뺸 소도 면 활동사진의 최초 상영에 대해서는 일본거류 본정좌라는 주장이 손휘 무 등에 의하여 주장되지만 단지 증언뿐이어서 황성신문에 뚜렷한 문자적 상 영 기록이 있는 을 최초 상영 해로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 169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만든 영화들은 이미 급속하게 경성의 극장가에 퍼져 있었다 찰리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의 이름은 이미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스타는 신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촤프린의 최신 생활 궁궐 같은 집에 남녀 하인만 십여 명을 부려 허리우드 중앙에서 해안 쪽으로 한 오 마일 가량 되는 비버리힐이라고 하 는 곳에는 영화배우 중에도 일류들만 모여 산다고 한다 그 까닭에 그곳에는 적은 집이라고는 한 채도 볼 수 없고 모다 큰 주택들뿐이라 하여 그에 따라 생활 상태도 매우 사치스럽다고 한다 촤프린은 그곳에 조그마한 산 하나를 사 가지고 그 산 정상에다가 궁궐 같은 집을 짓고 사는데 그는 지금 부인인 포드 양과 결혼을 하기 위해 지은 집이라고 한다 중략 단지 부부가 지내는데 하인이며 고용인이 십여 명이며 하략 거의 올림퍼스 산에 사는 신들을 묘사하는 수준의 이런 글들이 당시 신 문에는 거의 매일 연재되고 있었다 채플린뿐 아니라 활극계의 거성으로 우리 조선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가진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미국의 스 윗 하트요 세계 영화계의 여왕인 메리 픽포드 의 소식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올랐다 그들의 영화에 관한 소식뿐만 아니라 결혼과 이혼 사 치와 자살 등의 사생활에 관한 소식들까지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서 일상 적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이 미국의 배우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아리스토텔 레스적인 개념으로 우리 이상의 월등한 선인 이 되었으며 신격화와 스 타예배 의 확실한 대상으로 진화되었다 어쩌면 올림푸스 산보다도 더 멀 게 느껴졌을 헐리우드와 비벌리힐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은 고단한 뺷동아일보뺸 월 일 세계적 영화배우의 약력과 예풍 뺷조선일보뺸 위의 기사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뺷시학뺸 문예출판사 에드가 모랭 앞의 책 면 - 170 - 월 일 면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식민지의 현실을 잊을 수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열광과 동 경의 정도는 방한한 모로코 의 영화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에 대한 열렬한 환영행사 등에서도 확인된다 처음으로 맞는 이 미국 영화인 을 위해 명월관 기생들이 총 출동하는 환영만찬도 열렸고 단성사에서 홍 개명 연출의 장화홍련전 특별 시사회도 가졌다 신문에서는 그의 일거 수일투족이 대서특필됐고 돌아갈 때는 적잖은 선물까지 받아갔다 한국의 배우들은 이들에 비하면 아주 초라했다 연기가 하나의 전문적 기능으로 인정받기도 전인 우리 영화사의 초창기에 여배우들은 대부분 기 생 출신이었다 포스터에는 배우들의 이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클로즈업에 익숙지 않은 감독들의 연출로는 배우들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도 없었다 보수도 일반인의 그것보다도 오히려 낮아서 고단 한 연기 노동자란 말이 이 당시의 배우들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 을지 모른다 간간이 신문에 나는 사진도 전문적인 홍보사진술에 의해 불 상의 광배와 같은 광채 속에서 클로즈업으로 나타나는 서양의 배우들과는 달리 초라한 영화 장면 사진이었다 영화배우의 힘겨운 삶을 견디다 못해 다시 기생으로 돌아간 초창기 여배우 이월화는 한 달에 원 씩만 또박 또박 주는 영화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연기에 매진하겠다 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에 이미 전국에 개의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영화는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매체가 되어 갔다 온 이래 이후 간총 월하의 맹서 가 나 편의 한국 영화가 제작됐다 만 해도 조선 영화의 총 관객은 천 백 십만 명에 달했다 안종화 뺷한국영화측면비사뺸 현대미학사 면 말썽 많든 여배우 이월화 뺷조선일보뺸 월 일 이영일 앞의 책 면 뺷삼천리뺸 권 호 뺷동아일보뺸 월 일 - 171 - 한해 이처럼 식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민지 한국에서도 영화가 주도적인 대중오락 매체가 되어감에 따라 서서히 영화배우들도 일반인에게 친숙한 얼굴이 되어갔다 서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아주 초기적인 의미에서의 스타덤이 나타나고 스타를 영화 흥행 에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스타시스템도 조금씩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의 관객들은 아주 머나먼 신들의 땅 헐리우드의 영화를 통해서 학습 한 스타 현상을 조금씩 이 땅의 배우들에게 적용시키고 있었다 나운규를 거쳐서 대 후반 최무룡 최은희 등으로 본격화하는 한국적 스타덤 이 그 맹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한국적 스타덤 스타시스템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도 여전한 한국적 스타시스템의 성격을 확인해보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영화로 표상되는 대중문화의 근대가 한국에 어떻게 이식해 들어왔나를 살펴보는 일도 될 것이다 스타덤을 스타로서의 지위 현상이라 보고 스타시스템을 그것들을 만 들고 통제하는 시스템이라고 본다면 스타덤과 스타시스템은 스타라는 동 일한 현상을 싸고도는 같은 것의 두 가지 이름이다 스타시스템이 스타의 생산과 관련돼 있다면 스타덤은 스타의 소비와 관련돼 있다 스타시스 템은 사회학 경제학 등과 관련돼 있고 스타덤은 기호학 정선분석학과 관련을 맺는다 초기 한국 영화의 스타들을 볼 때 그들을 싸고도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럼으로 무척 당연한 것이다 방법적 시기 구분의 문제 일본의 한국 강점으로 시작된 일제 식민지 시대는 세시기로 나 뉜다 강점부터 시작되어 운동까지의 무단통치기 운동으로 놀란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궤도를 수정한 리처드 다이어 주은우 역 뺷스타 이미지와 기호뺸 한나래 - 172 - 대의 문화통 면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치기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패망까지 계속되는 민족말살 및 병참기지화 시기가 그것이다 대의 무단통치기 동안 일제는 무 력을 앞세워 한국인들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였고 회사 령과 토지조사 사업을 통하여 식민지 수탈의 기본적인 골격을 만들어 갔 다 그러나 운동으로 한국민족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히자 일제의 식민 지 정책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문화정치를 표방하면 서 교원의 대검 착용 폐지 등 사회전반에 걸쳐서 완화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의 신문이 창간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은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더 가혹한 형태 로 되돌려 놓았다 민족 말살 정책은 한층 강화되어 소위 황국신민화 교 육이 철저히 시행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까지 강요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수탈정책도 더욱 노골화해 한국 은 일본이 치루는 전쟁의 식량 및 원료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가 되어 갔 다 에는 대부분의 신문과 잡지 등도 폐간하고 해방 때까지의 긴 암흑기에 들어갔다 에 활동사진이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래 까지는 주 로 영화관의 이전 단계인 활동사진소나 황실 등의 특별 상영 시설에서 활 동사진을 상영하였다 작품들도 주로 세계의 풍경 명승지 서구인의 생활 문화 등 시사뉴스나 풍물이 담긴 것이 짧은 기록 영화들이었다 의 일제 강점과 함께 경성에 한국인과 일본인 거주지가 나누어지면서 양 쪽 에서 영화 전문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프랑스 당시 영화 선진국들의 무성 극영화들이 다투어 수입되어 상영되기 시작했다 이때의 서구 영화들을 보고 자란 세대가 실질적으로 대의 초창기 한국 영 화를 제작하는 세대가 되었기에 이때의 서구 영화들은 스토리텔링의 매 체로서의 영화를 미래의 한국 영화인들에게 실질적으로 학습시키는 역할 신용하 뺷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뺸 문학과 지성사 - 173 - 면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을 하였다 당연히 서구 영화의 스타들에 대한 선망과 열광이 생겨난 것 도 이 즈음이었다 그러다 월 연극의 막 간에 영상을 보여주는 연쇄극 의리적 구투 가 개봉되면서 본격적인 연쇄극 시대가 시작되고 이후 연쇄극이 아닌 무성영화 형태로의 최초의 작품 월하의 맹 서 가 나오기까지 연쇄극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비록 연쇄극의 형태로나 마 최초의 국내 창작 영화가 나온 시기가 삼일 운동 이후에 일제가 문화 정치로 식민지 지배 전략을 수정하던 시기라는 것을 보면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분위기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가를 알 수 있다 월하의 맹서 이후에 한국은 본격적인 창작 영화 시대에 들어간다 그러다 나운규의 아리랑 을 기점으로 한국 영화는 그 생산과 소비에서 폭발적인 수치적 증가를 보이며 까지 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기간 동안 나온 작품 수만 간 무성 영화 여 편을 헤아리고 경향 각지에 수많은 극장들이 세워지면서 영화는 진정으로 이 땅의 지배 적인 대중오락 매체로 자리 잡는다 이 모두가 아리랑 이라는 작품의 예술적 상업적 성공에 힘입었다 할 수 있다 그러다 춘향전 으 로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한국 영화는 발성 영화 시대에 접어든다 이후 동안 한국의 발성 영화는 다시 무단정치로 회귀한 일 제의 검열 속에서도 나름의 활력을 띄었으나 총독부에서 조선영 화령을 공포하면서 한국 영화계는 실질적 창작의욕을 잃어버리고 몇 개 의 어용회사들의 선전영화들을 제외하면 해방까지 긴 암흑기에 들어간다 한국 최초의 영화사가 안종화는 에 쓴 뺷한국영화측면비사뺸에서 해방까지의 한국 영화사를 대략 여섯 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다 미명의 전설 시기를 거쳐 연쇄극의 시대까지 과도기 새아침의 진통 나운규의 본격기 활동사진 도래부터 수입 영화를 상영하던 최초의 한국영화 월하의 맹서 에서 아리랑 이전까지 는 꽃구름 속에 - 174 - 아리랑 부터 까지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기 아롱무늬 영롱히 향전 철인도 에서 발성영화 춘 이전까지 기 토오키의 전성시대 수난기 광풍 속에 이지러져 춘향전 부터 까지 부터 해방까지 본고의 관심은 초기의 한국 영화 전반이 아니라 그 영화 속에서 활약 하던 배우들의 스타덤과 스타시스템에 있다 그러므로 초기 해외의 활동 사진을 수입해서 보여주던 시기는 한국의 영화배우가 등장하지 않으므로 본고의 논점에서는 벗어난다 연쇄극은 그것이 완전한 영화의 형태는 아 니라 하더라도 연희 예술로 당시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었던 연극 과 영화의 배우 교류 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하다 월하의 맹서 이후의 안종화 식 시대구분에서 과도기는 연쇄극 시대와는 차이가 있으나 연극적 인 배우에서 영화적인 배우로 그 전문성에 있어서의 전이가 완전히 이루 어지지 않았다고 보고 한 시기로 묶는다 안종화의 본격기 와 난숙기 는 배우로서 보면 크게 나운규의 시대라고 보고 하나의 구분 하에 두는 게 타당하다 약진기 는 스타덤의 형성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음성이 영화 에 도입됐다는 점에서 한 시기로 구분을 두되 이후는 의미 있는 영화적 활동이 없는 암흑기라 보고 논점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시대 구분이 통사적인 입장에서 한국적 스타덤과 스타시스템 에 대해 고찰해보는 방법론적 단위가 될 것이다 초창기 연기노동자 시대 나운규 시대 발성 스타의 시대 초까지 초까지 까지 리처드 코르도바는 미국에서의 스타시스템의 출현 과정을 설명한 글에 서 연기적 담론의 시대 픽쳐 퍼스낼리티의 시대 안종화 뺷한국영화측면비사뺸 현대미학사 - 175 - 스타의 시대로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나누었다 연기적 담론의 시대에는 관객들은 스크린 상의 연기가 실제 행 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모방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그 창작적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픽쳐 퍼스낼리티의 시대는 영화 속에 서 연기를 한 배우를 인식하는 단계이다 그러다 스타의 시대로 오면 영 화의 안과 밖 즉 스크린과 실제 세계에서 그 배우의 이름은 하나의 상징 이 되서 관객들은 그 배우의 연기뿐만 아니라 이미지 사생활까지도 소비 하게 되는 것이다 전술한 시대구분에서 처음의 초창기 연기 노동자의 시 대가 연기에 대한 담론의 시대에서 픽쳐 퍼스낼리티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 나운규 시대는 픽쳐 퍼스낼리티 시대에서 스타 의 시대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 발성 스타의 시대는 음성을 장착한 훨씬 더 현실감 있는 스타들이 나타나는 시대이나 일제의 엄혹한 문화탄압으로 맹아를 보이던 한국적 스타시스템이 사위어가는 시 대이기도 하다 초창기 연기 노동자의 시대 영화 예술의 시작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였다 다 큐멘터리의 등장인물들은 허구를 위하여 현실을 모방하는 사람 배우 이 아니라 현실 속의 사람 그 자체였다 서사 영화가 등장하고 그 속에서 일 어나는 일들이 꾸며진 것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 거짓 속에서 인간의 행 동을 모방하는 사람의 창조적 노동에 주목하게 된 것은 서구에서도 영화 예술이 탄생하고 거의 이 더 지날 쯤이었다 한국에서도 영화의 시작 은 해외에서 도입된 다큐멘터리들이었지만 대에 급속히 수입된 서 구의 서사 영화들은 영화종사자들이나 한국의 관객들에게 배우의 존재를 충실하게 학습시켰다 그러다 우리는 연쇄극이라는 과도기적 연희 장르를 만나게 된다 - 176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신파 신극좌 김도산 일행이 경성에서 촬영된 대연쇄극 의리적 구투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에 활동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여기던 바 경성의 제일 명승지에서 오천원의 거액을 내어 우리 애활가 제씨는 한 번 보실만한 것이올시다 조선신파 활동사진은 금고에 처음 단성사주 박승필 근고 촬영장소 한강철교 장충단 기타 입장료 특등 원 한국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투 의 개봉 광고에는 사람의 이름은 딱 명만 나온다 감독 김도산과 제작자 박승필이다 배우의 이름은 어디 에도 없다 다만 김도산이 이끄는 당시의 신극좌라는 극단 다시 말하면 배우 집단이 나올 뿐이다 오천 원이라는 거금을 쓴 제작자로서 흥행이 절실한 상황인데도 배우들의 이름은 촬영장소보다도 광고 효과가 없었던 셈이다 적어도 이때까지 배우는 기능적으로 주어진 캐릭터를 구현하는 기능인에 다름 아니었다 신문의 연쇄극에 대한 평에서도 배우들의 연기 를 평가하는 구절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광고에서 보듯이 촬영 장소에 대한 표나는 강조는 영상의 무게가 어디에 실려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 준다 연쇄극 영상의 가치는 연극 무대에서는 불가능한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그 풍경 영상에 대한 광고는 관객을 모으는데 매우 중요했 다 여전히 영상은 초기 영화의 풍물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배 우들은 그 풍경의 일부분으로 서 있을 뿐이다 연쇄극 영상의 배우들은 아직 연기 취하는 소위 를 하는 배우 라기보다는 스틸 사진을 찍듯이 를 들이었다 전통 연극에서 해오던 대로 연쇄 의리적 구투 가 의리적 구토 라는 주장도 있으나 본고에서는 일반적인 영화사가들과 이영일의 해석을 받아들여 의리적 구투 로 한다 연쇄극 의리적 구투 의 개봉 광고 뺷매일신보뺸 월 일 - 177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극에서도 여자 캐릭터를 이응수 고수철 등의 남자배우들이 했다 이 역시 클로즈업이 없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 배우들은 여전히 합 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임을 말해준다 저축 장려 계몽영화 월하의 맹서 가 나오면서 비로소 한국 도 본격적인 무성영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의 특이한 점은 권번의 기생들이 대거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련의 곡 의 문명옥 고 심지어 애의 형제 쌍옥루 춘향전 의 한룡 의 김소진 등이 기생 출신이었 처녀의 운명 두 편은 조선 권 번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기생들의 연기 진출은 여성들의 외부적 사 회활동이 금기시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갑작스런 영화 제작 붐으로 여배 우의 수요가 늘었고 클로즈업의 발전으로 더 이상 남자배우들이 여성 역 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데 원인이 있다 물론 폐쇄된 조선 사회 속에서 기생들이 일정부분 여성 예능인으로 기능했던 것에도 원인이 있다 월 하의 맹서 에 나왔던 여배우 이월화는 기생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고하 고 후일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권번에 이름을 올린 것을 보면 신파 영 화에 나와 주로 남녀의 애정사와 관련된 연기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사회 속에서는 기생일과 별반 차이가 없게 여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아직 영화 연기는 전문적 창작 기예로 인정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영화 제작이 서서히 산업화되면서 연기에 대한 담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연기 담론의 첫 번째 의 이슈는 무엇이 영화 그것도 무성영화 속의 연기인가하는 문제였다 이 전까지의 대표적인 연희가 연극이었던 사회에서 발성도 없고 직접 보여 주는 것도 아닌 활동사진 속의 연기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당대 의 평자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주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월화보다도 채전 양의 표정이 나았었고 월화 양은 영화극 배우로는 부 적함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사람들은 잘한다하나 근육 표정은 기 - 178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대키 어려운 얼굴이니 물론 연구하고 연습을 쌓으면 못될 것은 없겠으나 그는 다시 무대에 복귀하여 주었으면 좋겠다 해의 비곡 속 연기자들의 연기를 평한 이 평문으로 보면 무 성영화 연기의 핵심은 근육표정 이다 토월회의 연극에서 츄샤나 부활 의 카 사랑과 죽음 의 포리야 등의 역할로 만장의 홍염을 토하던 여 배우 이월화 도 영화의 근육표정 연기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연극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얼굴 표정에 대한 지적은 그 이후 영화에서도 계속 나오는데 인형같이 무감각해 보이는 배우들의 표정 장화홍련전 동아 일보 그 사진이 사진이냐 막걸리냐 표정이 되었느냐 비련의 곡 매일신보 김우연 양은 안면의 움직임이 그다지 잘되지는 못하나 이채전 양은 안면 근육의 무도가 자연스러워 운영전 동아일보 출연한 배우들의 표정과 동작이 너무 단조하여 심청전 조 선일보 이렇듯 발성이 없는 무성영화 속에서 얼굴 표정의 중요성은 매번 강조 되었고 얼굴표정과 함께 또 하나 늘 강조되는 것이 있었다면 아름다운 얼굴이었는데 특히나 안종화군은 눈이 좀 작다 이채전은 눈이 크고 맑 아서 등 눈의 크기를 강조하는 평문이 특히 많았다 이런 평문들을 통해 목소리와 과장되고 커다란 동작이 강조되던 연극 연기에 비해 표정과 미 모가 강조되는 영화 연기로 연기의 전문성이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연기에 대한 담론은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이름을 관객들에게 각인시 키기 시작했다 월하의 맹서 춘향전 이구영 조선영화의 인상 뺷매일신보뺸 말썽 많든 여배우 이월화 뺷조선일보뺸 - 179 - 등의 초기영화 광고에서는 월 일 월 일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나오지 않던 배우들의 이름이 시작한다 운영전 해의 비곡 농중조 등의 광고에서는 나타나기 심청전 등 그 뒤의 작품들에서도 배우들의 이름은 광고와 평문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한 신문에서는 이월화 신일선 복혜숙 등 다섯 여배우들의 사진을 게재하고 이들의 이름을 맞추는 현상 공모를 할 정도였다 이것은 그만 큼 관객들이 배우들을 이름으로 구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픽쳐 퍼스 낼리티로서 무성영화의 배우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픽쳐 퍼 스낼리티 시대를 특징짓는 현상은 배우들의 이름과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들이 상호텍스트적인 지식의 형태로 유통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배우 이름 맞추기 공모는 한국 뿐 아니라 그보다 영화사가 앞섰던 다른 나라에 서도 이 시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시기에 벌써 조선 동아 매일 등의 신문 등은 연예 면을 만들어 영 화계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연예란에서는 영화의 개봉 소식 촬영 소식 뿐 아니라 배우들의 사생활도 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토월회의 배 우였고 월하의 맹서 로 많은 관객에게 알려진 이월화 양에 대한 사적 인 기사는 압도적이었다 조선키네마의 제 회 작품으로 촬영하기로 하였 던 운영전 에서 이월화 양과 이채전 양의 스타 다툼이 일어났다 고 할 정도로 자존심이 센 배우였던 그는 그러나 촬영 중도에 출연을 중지 하고 동 영화극단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게 됐다 그러나 수많은 남성 에게 농락당하는 대상물이 된 후에 마침내 모부호의 아들인 이모라는 청과 함께 백가약을 기약하여 고국의 동산을 버리고 갔다가 끝내 경제적 핍박으로 말미암아 고국의 산천을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고 바다의 비곡 단성사에서 뺷매일신보뺸 월 일 윤백남씨의 각색 감독이요 이월화 양과 이채전 여사 등이 주연으로 출연 함만 보드라도 그것이 얼마나 값있는 것인줄 알 것이며 조선여배우 얼굴 알아맞히기 뺷매일신보뺸 월 일 여배우 화형다툼 뺷동아일보뺸 월 일 촬영 중에 구소로 돌아온 이월화 뺷매일신보뺸 월 일 - 180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할 만큼 이월화는 사적으로도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에 대 한 이런 기사들은 배우의 사생활이 스크린 밖에서 유통되기 시작한 것으 로 이것을 한국적 스타덤의 시초를 보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픽쳐 퍼스낼리티와 스타를 구분 짓는 가장 확실한 잣대로 사생활의 패러 다임이 개입되는 것으로 본 리처드 코르도바의 논지로 볼 때 일견 타당하 다 그러나 이 사생활 기사들의 내용이나 논조가 거의 신처럼 추앙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던 헐리우드 배우들의 기사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헐리우드 배우들에 대한 기사들이 앤드류 튜더가 제시한 자기 동일시에서 숭배적 투사까지 이르는 강렬한 관객과 스타의 관계 유형을 보여준다면 당시 한국 배우들의 사생활에 대한 기사에서는 이런 유형에서 벗어난다 특히 여배우들에게는 마치 기생들의 추문을 다루는 듯 복잡한 남성편력과 그에 따른 기구한 인생역정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자기동일시나 투사 와는 거리가 먼 남성 중심적 판타지일 뿐이다 기사 속에서 당시의 최고 배우들은 한 달에 한 대로 도 못벌며 매일 촬영장에 걸어서 나가거나 자동차 차에 걸쳐서 나누어 운반되는 가난한 노동자들일 뿐이었 다 스타덤은 한국의 배우들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나운규 시대 초까지 프란체스코 알베로니는 스타발생의 사회적 조건으로 법률적이고 효율 적인 관료체계 대규모 사회 생존 수준을 넘어선 경제 발전 사회 이동의 개방성을 들었다 배리 킹의 조건들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매스미디 어의 발달과 문화 산업화의 정도 등 문화적인 영역의 대량화에 대한 조건 들이 추가된 정도이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이 나오던 말썽 많은 여배우 이월화 뺷조선일보뺸 월 일 촬영 중에 구소로 돌아온 이월화 뺷매일신보뺸 월 - 181 - 일 의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한국 사회를 위에 열거한 렌즈들을 통해서 비춰보면 어떤 모습일까 신용 하는 이 당시 한국 사회가 아직 완전한 산업자본주의 시기 이전의 식민지 생존 수준을 넘어선 경제발전은 일부 상업자본주의 시기로 보고 있다 지주와 상업자본가 식민지 관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지 대부분의 한국 민중들은 생존 자체에 허덕이고 있었다 일본이 설립한 관료체계는 조선의 것들보다 근대적인 것이었지만 식민지 수탈을 위한 관료체계라는 정치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당시의 한국 사회가 사회경제적으로는 대중 스타가 나오기에는 불완전한 조건에 있었다 이런 사회적 조건에서 나온 나운규의 스타덤 역시 불완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최고의 감독이자 배우이자 각색자였으면서도 그 스스로의 생활은 늘 궁핍하고 불안했다 이 점은 생존을 넘어선 잉여의 도출이 대 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직 요원했던 당시 영화 소비자들의 경제적 수준과 직결된다 근대적으로 정비된 관료제 하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검열은 감 독으로서 배우로서 그의 표현욕을 한없이 축소시켰다 그러나 이런 악조 건 속에서도 그는 분명히 스타였다 금붕어 사랑을 찾아서 아리랑 을 필두로 풍운아 등 그의 영화를 보지 않은 당시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상설극장 뿐만 아니라 전국방방 곡곡에서 순회 상영이 끊이 지 않던 시절이었고 그의 영화들은 해방 후까지도 순회 상영됐다 각종 신문에서는 거의 매주 그에 관한 소식을 실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몰려들 걸 우려해 평소에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다닐 정도였다 그의 출연 하나로 영화 제작비는 쉽게 모아졌다 그의 고향에서는 그의 귀향에 맞춰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열었고 그의 장례식에는 영화인 총동원을 계 획할 정도였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풍운아 천재 스타 영웅이라는 수 식어가 따라 다녔다 식민지의 상황에서 그의 영화가 보여주던 저항과 민 중의식은 당시의 관객들에게 강력한 동일시와 투사를 만들어냈다 이런 리처드 다이어 앞의 책 신용하 앞의 책 면 - 182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점은 낮은 경제 발달 수준에서도 강력한 투사를 기반으로 거의 신적인 추 앙을 받는 인도의 영화스타들과 오히려 비슷하다 나운규라는 스타는 사 회경제적 조건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 속에서 억압된 당시 민중의 원초적 욕망이 그의 영화를 통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만들어낸 한국적 스타인 것이다 나운규군은 성격배우인 점에서 아메리카의 에밀 야닝스에 필적하고 당대 인기를 끌고 있는 점에서 조선의 채플린이요 키튼이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사장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심삽도의 피끓는 청 남녀로 나운규 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고 그의 천재적 재주에 황홀하지 않은 이가 없다 에 나온 이 기사는 나윤규의 이름을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에 도 비교하고 신문사 사장들의 이름에도 비교하고 있다 그의 이름이 배역 이름과 함께 얘기되거나 연기와 관련되서 얘기되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으 로 영화 밖에서 거론되고 있다 기사는 계속 나운규와 같이 공연한 여배 우들을 소개한다 신일선 김정숙 전옥 하소양 김연실이 그들이다 백로 학인 이라는 필자는 그들을 마치 나운규가 실제 같이 살기라도 한 여자들 인양 나운규를 싸고도는 인의 여성 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다 기사는 이들과 나운규의 영화 속 애정의 관계를 영화 밖으로 끌어내어 실제의 애 정관계로 변모시키려 하고 있다 이처럼 나운규에 대한 당대의 영화 담론 은 영화 안과 밖을 쉽게 혼동시킨다 그러면서 생기는 일종의 상호텍스트 성으로 나운규의 스타덤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인 아리랑 풍운아 는 나운규가 소시절 연해주 방면에서 하루 다음 전의 삯전에 고용병 노릇을 했던 시절의 체험이 녹아있다고도 했으며 있거라 는 감독이 이경손인데도 불구하고 나운규씨의 독특한 수단의 명우 나운규 군을 싸고도는 인의 여성 뺷삼천리뺸 명화에 숨은 로맨스 뺷조선일보뺸 월 일 - 183 - 월 일 잘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하나인 엑스트라 그것도 어린이 삼 사백 명을 사용한 것 도 했다 또한 그의 영화 밖 움직임도 아리랑 문에 게재되었다 나운규 주연 현대극 야서 해양극 성 광랑 나운규 작품 을 소개하기 이후에는 중계하듯이 신 촬영 중 나운규 주연 등의 촬영 개시 소식뿐만 아니라 나운규 군 촬영귀 사나이 봉절 등 촬영 중간 소식 개봉 소식 등 도 나운규와 연관된 것은 다투어 신문에 게재됐다 뿐만 아니라 조선키 네마 탈퇴 나운규 촬영소 창설 취조 인기배우 나운규를 고등과에서 호출 등 그의 사업적인 부분까지도 신문들은 자세히 소개했으며 당시 분위기 상 공식적으로 신문에 게재하기는 어려웠으나 기생들과의 숱한 염 문들도 떠돌았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나운규는 더 이상 영화 속 에 머무는 픽쳐 퍼스낼리티를 벗어나 그의 영화 밖 행동 하나하나까지 관 객들에게 소비되는 스타의 시대를 한국 영화사에 열었다 그의 이런 스타덤은 그것의 위력을 파악한 산업에 의해 재빨리 소박하 나마 한국적 의미의 스타시스템으로 진전해간다 나운규 프로덕션의 창립 은 대표적인 스타시스템의 작동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키네마와 결 별하고 나운규 프로덕션으로 독립한 데에 일본인 사장과의 갈등을 이유로 들고 있는 견해도 있으나 결국은 아리랑 풍운아 야서 등의 작품으로 스타덤에 오른 나운규에 대한 단성사주 박승필의 상업적 기대감 이 그의 이름을 딴 프로덕션을 만들게 한 진정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나운규 프로덕션에서 그 뒤 만든 영화를 소개할 때 나운규 프로덕션 제 회 작품 등으로 회사의 이름을 빼놓지 않는 것은 영화의 흥행에 나운규 나운규 회 작품 잘 있거라 단성사 상영 뺷조선일보뺸 뺷매일신보뺸 월 일 뺷매일신보뺸 월 일 뺷매일신보뺸 월 일 뺷매일신보뺸 월 일 뺷매일신보뺸 월 일 뺷매일신보뺸 월 일 - 184 - 월 일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라는 스타의 이름을 이용하고자 한 의도가 명백하다 나운규 프로덕션에서는 제 일회 작품으로 빈민애화 잘있거라 제작을 전부 완료하고 동작품을 원작 각색 감독 주연한 나운규씨는 하략 이 영화는 나운규 프로덕션의 제 회 작품으로 동기 사이의 삼각관계를 맺는 연애를 나운규씨 수완으로 꾸며내 것이다 나운규 프로덕션에서 제 회 작품 두만강을 건너서 를 제작하기 위하여 여 명이 함경북도 회령의 국경지방의 이 사진은 종래의 나운규 작품에 비 하여 그 스케일이 웅대한 점으로 이제 나운규 팬 제씨에게 나운규씨로부터 온 소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략 위의 기사들처럼 한 기사 안에 나운규라는 이름을 몇 번씩 반복하며 나운규 프로덕션의 작품 제작 상황을 지상 중계하는 기사들을 보면 헐리 우드처럼 고도의 시장전략이 구사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타의 이름이 얼마만한 상업적 가치를 갖는가를 깨닫고 그 이름을 철저히 이용하려 한 의도는 아주 명백하다 영화 광고들도 온통 나운규 이름으로 도배를 하다 시피 했으니 월하의 맹서 등의 영화에서 배우들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점에 비춰보면 불과 몇 사이에 한국의 영화 산업은 초기적 스타시스템을 아주 빠르게 습득한 것이다 에드가 모랭은 영화 속 배역은 스타 자신에게도 영향을 주며 반대로 스타 자신도 배역에 영향을 준다는 말로 스타의 이미지와 배역 성격의 상 관관계에 대해 논했다 스타와 배역은 상호 침투한다 그들은 어떤 이질 적인 배역도 해치우지만 또한 그 모든 배역에 자신만의 퍼스낼리티를 각 잘있거라 제작 완료 나운규 주연 영화 불원간 시내 상영 뺷조선일보뺸 월 일 시사실에서 본 옥녀 뺷조선일보뺸 월 일 두만강을 건너서 촬영 착착 진보 나운규 제 회 작품 뺷중외일보뺸 월 일 에드가 모랭 앞의 책 면 - 185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인시킨다 개개의 영화 속에서 배우가 실현한 캐릭터는 영화 밖에서 그 배우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그렇게 구현된 이미지는 다시 영화 속 캐릭터 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나운규의 영화 속 캐릭터들과 스타 로서의 나운규의 캐릭터의 상관관계를 질문해볼 차례이다 [표] 나운규 출연작품과 캐릭터 작품 이름 아리랑 풍운아 야서 금붕어 제작 연도 배역 이름 영진 니콜라이 박 부랑자 두목 송재훈 잘있거라 경호 옥 형 사랑을 찾아서 동수 사나이 이태식 벙어리 삼룡 아리랑 그 후의 이야기 철인도 개화당이문 임자 없는 나룻배 성 격 인텔리 출신의 미치광이 분노와 광기 악질 청지기 기호를 죽이고 순사들에 끌려 떠난다 러시아를 떠돌다 고국에 돌아온 사나이 조국의 부정 한 것들을 바로 잡으려다 혼자 쓸쓸히 다시 떠난다 부랑자지만 포악한 부자들을 골탕 먹이는 정의감 있 는 집단의 두목 성실한 직장인 그러나 아내의 부덕에 실망하여 집을 떠난다 불의를 바로 잡으려다 뜻하지 않은 옥살이를 하고 끝 내 죽음에 이르는 의로운 청 동생과 여자를 두고 갈등하다 끝내 동생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는 청 만주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다가 불의에 맞서 싸 우다 총을 맞고 죽는 청 한 여인을 사랑하나 끝내 그 사랑을 못 이루고 여인 의 죽음을 맞는 청 벙어리 별당 아씨를 사모하는 순박한 벙어리 종 삼룡 영진 감옥에서 나와 가족을 찾다가 뜻하지 않게 살인범으 로 몰려 또다시 경찰에 잡혀 아리랑 고개를 넘는다 개고기 탄광 인부 두목의 불의에 저항하는 의로운 부랑자 이규완 김옥균을 따라 거사의 선봉에 서는 열혈 개화 청 뱃사공 딸을 범하려는 공사십장을 죽이고 배를 무용 춘삼 지물로 만드는 철교를 부수다가 기차에 치여 죽음 나운규 출연작품은 이외에도 금강한 남편은 경비대로 등 일본배우 원 산만이 만든 프로덕션 작품들과 대 초반의 연쇄극들이 있으나 그 내용 - 186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나운규가 출연한 작품은 대부분 장르적으로 가족 멜로드라마이다 가 족 멜로드라마가 나운규 이전의 신파와 다른 점은 사회적인 의식이 가족 속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사실주의 관습에 묶여 있으면서 도 매일매일의 인간들의 상호작용 내에서 계속 작동하고 있는 선악의 투 쟁을 보여준다 신성과 신화가 파괴된 지점에서 멜로드라마는 현대의 신성을 내면화하고 원리와 기준들이 붕괴된 세상에서 개인의 판단은 드 라마의 윤리이자 도덕이 되는 것이다 이런 멜로드라마 속의 문제적 개인 즉 주인공은 자신의 몸짓과 표정 의상 무엇보다도 행위에 의해 개인화된 선악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연기하는 스타의 표정과 말씨는 그것 이 곧 현실의 선악까지도 판단하게 하는 현실적 도덕으로 쉽게 전이되는 것이다 나운규는 자신이 출연한 모든 영화에서 세상의 불의에 저항하고 그것과 싸우다 희생된다 어떤 때는 광인으로 어떤 때는 그조차도 선악의 경계에 있는 부랑아로 또 어떤 때는 딸을 사랑하는 가장으로 그 스스로 세상의 불의에 의한 피해자이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반항자였다 식민지의 어두운 현실에 눌려있던 당시의 관객들은 영화 속 불의에 대한 그의 분노 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나운규라는 스타를 통하여 정의와 불의가 혼동되는 혼탁한 현실에서 자신의 도덕률들을 다듬어 나갔다 영 화 속 그의 눈물에 같이 울고 그의 분노에 같이 분노하며 드디어 분노로 정신이 나간 그의 흉기가 악인의 가슴팍을 찌르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경찰에 잡히거나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는 그의 모 습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유배처럼 아리랑을 불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운규는 더 이상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관객의 좌절과 분노를 대행 하는 식민지 한국인의 페르소나였다 당시 한 평자가 썼던 글을 보면 나 운규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자기 동일시와 감정적 투사의 정도를 짐작할 을 파악할 길이 없어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크리스틴 글레드힐 곽현자 역 멜로드라마의 기호 뺷스타덤 욕망의 산업뺸 시각과 언어 면 - 187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수 있다 모친과 아리랑 을 구경 갔었다 이웃에 사는 누구의 어머니 고모 이모 이렇게 모친과 친한 여러 부인네들도 같이 가셨다 모친은 자못 감격하여 손수 건을 적시었다 나중에 아리랑 고개에서 이별하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는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누구의 어머니도 고모도 이모도 다들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운규의 배역은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직업이 없다 광인이거나 부랑아거나 범죄자이거나 유랑자일 뿐이다 나 운규는 항상 사회에 적합하게 소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불의로 가득한 현 실은 그를 위한 자리는 남겨두지 않았다 그 불의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그는 존 웨인이라기보다는 제임스 딘이었다 존 웨인이 불의한 세상에 정 의와 질서를 회복하고 다시 거친 황야로 떠난다면 제임스 딘은 그 불의 에 고통 받고 반항하다 스스로 그 불의의 피해자가 된다 나운규는 영화 의 끝에서 항상 떠나지만 존 웨인처럼 멋지고 자신 있는 미소를 던지면서 떠나지 못한다 그는 죽거나 감옥에 끌려가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라 고 울먹일 뿐이다 악인은 항상 그의 손에 처단되지만 그 역시 종국에는 불 의한 세상의 희생자로 남을 뿐이다 제임스 딘이 반항한 대상이 중산층화 된 미국의 가족이었다면 나운규가 반항한 대상은 헤아릴 수 없는 불의가 절망적으로 중첩된 당시 사회였고 결국 이것은 총독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다른 것으로 은유화된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였다 그리고 이 은유는 놀랍게도 시골 촌락의 농부들에게까지 그 은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 다 제임스 딘이 소외 형의 반항자라면 나운규는 아노미 형 반항자였다 소외형은 사회 내에서 다른 계급과의 갈등에 반항한다면 아노미형은 현재 사회전체의 규범과 체제가 옳지 않은 것이라고 보는 데 서 나오는 반항자들이다 안동수 아노미 유형이 총체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불 영화수감 뺷영화연극뺸 호 - 188 - 월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안이었고 나운규의 캐릭터들이 당시의 관객들과 소통했던 정서도 결국 불안이었다 불안은 무엇인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정치체제든 아니면 가족이든 나운규는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변화였다 그것은 막연했기에 더 절실했다 나운규가 출연했던 당시의 영화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출 연작의 스틸 사진들을 보면 당시 나운규를 둘러싼 스타덤과 스타시스템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진2] 풍운아 의 히로인으로 분장한 나운규 [사진1] 아리랑 1926 나운규와 신일선 두 사진이 나운규를 보는 관점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앞의 사진에 서 나운규는 영화의 배역을 성실하게 소화하는 평범한 배우라면 뒤의 사 진에서 나운규는 어쩌면 영화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스타이다 앞의 사진 에서 나운규는 극중 동생인 신일선과 천진하게 놀고 있다 스틸사진의 카 메라는 나운규나 신일선 어떤 쪽에도 무게 중심을 두지 않고 영화의 내 용 혹은 영화의 풍경만을 전하고 있다 영화가 이 가난한 두 남매의 이야 기라는 암시도 사진에는 들어 있다 나운규는 스토리보다도 뒤에 놓여야 할 평범한 배우였고 당연히 영화홍보도 나운규의 존재보다는 스토리가 우선이었다 불과 몇 달 뒤에 찍혔을 오른쪽 사진에서 나운규는 전혀 다 리처드 다이어 앞의 책 면 - 189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른 모습으로 나온다 아리랑 의 당시 한국 영화사상 초유의 흥행은 나 운규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앞의 사진과는 달리 단독으로 나운규만 담 은 사진은 나운규의 위상이 그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을 보여준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단독 숏은 언제나 스타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 진으로는 영화의 내용도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오직 강렬한 인상의 스타 나운규만이 있을 뿐이다 홍보의 중심이 이야기에 대한 암시에서 스타 홍 보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또한 사진 속의 표정도 그 전과는 확연히 다르 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은 약간 위를 보는 반항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아리랑 속의 사진이 아주 편한 표정인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더구나 아마 국극의 양식에서 영향 받았을 눈 주위의 분장은 그의 모습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은 벨트에 걸친 포즈도 도전적이고 반항적이다 반항자 혹은 저항자 로서의 나운 규의 이미지는 이렇게 확고해진다 주로 당시 신문들에 홍보용으로 실렸 을 이런 사진들에서 나운규를 둘러싼 초기적인 스타시스템은 대중이 좋아 하는 반항자로서의 나운규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교묘 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세 사진을 보면 관객들이 나운규에게 무엇을 원했고 또 영화 제작자들을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그의 강렬한 눈빛과 도전적인 표정은 그의 스타성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이미 [사진3] 1927 野鼠 [사진4] 1927 금붕어 - 190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지로 계속 드러난다 야서 에 서는 보기 드문 정면 숏으로 관객 들을 쏘아본다 금붕어의 사진은 사진 백그라운드의 모습으로 영 화의 스토리를 암시하면서도 스 타 나운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촬 영기사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그 [사진5] 1928 玉女 래서 당시 기술로서는 만만치 않 았을 깊은 심도의 렌즈를 이용해 둘 다를 드러내려고 시도하고 있 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조명은 나 운규의 반항적인 눈을 더욱 음험 하게 번득이게 한다 의 옥녀 의 사진은 새로운 시도를 한다 나운규의 앞에 철창을 놓음 으로써 마치 사회에서 격리된 사 람처럼 그를 노출시킨다 앞에 놓 인 철창 그로 인해 그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막대 그림자는 마치 세상 저편에서 사회에 복수를 꿈 꾸며 노려보는 범죄자를 연상시킨 [사진6] 1932 임자 없는 나룻배 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 사진 은 반항자로서 스타 나운규의 이미지를 더욱 강렬하게 한다 이 영화를 찍었던 당시로서는 신인감독 이규환은 훗날 회고에서 나운 규가 없었다면 이 영화를 찍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나운규는 당시로서는 한 영화의 제작 자체를 좌우할 만큼 스타였다 이 영화 역시 스토리와 스타 나운규를 동시에 내세우는 것을 시도한다 그러나 - 191 - 금붕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어 에서처럼 전경과 후경의 배치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프레임 속에 서 인물의 배치로 만들어낸다 극 중 나운규의 딸로 나오는 신인배우 문 예봉은 사진 속에 등장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보다는 스토리를 암시하기 위한 보조적인 존재다 거의 나운규의 단독 숏처럼 모든 것은 철저하게 나운규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문예봉은 앉고 나운규는 혼자 서 있으며 문예봉의 시선은 나운규를 향해 있어 사진을 보는 사람도 자 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 나운규를 보게 된다 나운규는 이전의 반항적인 이미지의 사진들과는 달리 서정적인 강변의 풍경들을 배경으로 서 있다 그리고 어느 먼 곳을 보고 있다 그곳은 강의 저 쪽일 수도 있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점점 가혹해지는 사회 상황 속에서 아직은 잘 보이지 않는 희 망일 수 있다 광폭한 대를 지나 대를 맞은 나운규는 사진 속에서 한 층 더 성숙해져서 안타깝게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옆에서 그 의 손을 잡고 그만을 믿고 의지하는 딸은 손톱만한 희망이라도 그를 통 해 찾으려는 당시의 영화 관객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운규가 세상을 떠 나기 얼만 전 찍은 이 사진 속에서는 영화 속 배우로서의 그와 영화 밖 스타로서의 그 두 개의 텍스트가 충돌하고 화해하면서 공존해 있다 발성 스타의 시대 발성영화의 시대는 무성영화에서 확립되어 있던 현실과 비현실의 균형 을 뒤엎는다 갑자기 영화 속으로 들어온 현실의 소리들 정확하고 풍부한 뉘앙스를 지닌 대사는 무성영화 속에서 확립된 모든 현실을 비현실로 만 들었다 의 춘향전 을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발성영화의 시기 가 시작됐다 얼굴 근육의 움직임 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던 연기의 개 에드가 모랭 앞의 책 면 - 192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념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조선 무대극의 부자연한 세리프 대사연기 습관 에 젖은 배우들의 출연 당연히 대사가 필요한 개소에서도 이를 자주 생략한 것은 연기자의 서툴 음 때문 앞으로 연기자의 세리프에 있어서 여간할 고민이 있어야 함을 암시 신파 비극적인 대사에는 듣는 사람으로서 웃음을 웃게 한다 돌연 출현한 발성영화 춘향전 은 대사 연기에 대한 기술적 숙제들 을 영화 관계자와 배우들에게 안겨 주었다 시각적 진실의 여부만이 문제 됐던 영화에서 이제는 음성적 진실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고 특별한 방법 과 기준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신파 연극의 대사 연기 방식이 발성 영화에서도 대안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대화가 필요함으로 무대 출 신을 썼으나 대화의 억양의 지나친 과장과 동작의 부드러운 맛이 없어 그 것을 그치기에 어지간히 힘이 들었다 고 토로한 춘향전 의 감독 이 명우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중의 관객에게 오로지 육성의 힘으로만 대사를 전달해야 했던 신파극에서 확립된 대사의 부자연스런 과장이 영화 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의 영화 관계자들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알아가기 시작했고 이것은 곧바로 마치 촬영의 클로즈업처럼 영화의 대 사에서도 영화만이 갖는 연기 방식이 필요하다는 공감으로 이어졌다 이런 혼란은 당대의 스타였던 나운규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토키에 서의 연기는 무엇보다도 대화와 조화되는데서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표시된다 그 점에서 영진의 발악의 아우성 소리는 산란하다 할까 조선 토키 춘향전을 보고 뺷조선일보뺸 월 일 조선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을 보고 뺷동아일보뺸 영화 의 개관적 회고 뺷조선일보뺸 월 일 금도 조선 영화개론 뺷조광뺸 호 월 춘향전을 제작할 때 뺷조선영화뺸 제 호 월 아리랑 편을 보고서 뺷영화조선뺸 제 호 월 - 193 - 월 일 나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연출은 기가 막히거니와 나 씨의 킹콩 흉내 미친 사람은 그런 기괴성만 표현될 것인지 에 있어서는 불쾌가 지나쳐 증오의 감마저 갖게 한다 는 등 무성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던 나운규의 연기도 발성 시대에 오면서는 부담스럽고 부자연스런 괴성으로 밖에는 치부되지 않았다 이 런 상황에서 발성영화 시대의 초기를 가장 앞서간 배우가 문예봉이었다 문예봉은 세의 어린 나이로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 에서 나운규 의 딸 애연 역으로 발탁되어 천진스런 연기는 장래가 유망해 보였 고 그대로 영화계에 진출하여도 좋은 소질의 소유자 로 평가받는 등 일약 영화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으나 한 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다가 최초 의 발성영화 배우 춘향전 에서의 춘향 역으로 영화계에 복귀하여 유망한 이고 감독의 지도대로 움직이어서 과히 실패는 없었다 는 평가 를 받았다 다소곳한 용모로 도령님 이제 가시오면 언제나 오시려오 천 리 한양에 도련님 보내옵고 내 어찌 살라오 를 절창하는 그녀는 영화 속에서 한국말 대사를 처음 들어본 당시 조선의 관객들을 열광시켰으며 이 영화의 흥행적 성공은 그녀를 일약 발성 영화계의 스타로 등극시킨다 연이어 그 해에만 화에 출연하고 춘풍 장화홍련 무지개 인생항로 아리랑고개 나그네 세 편의 발성 영 수선화 등 대 후반의 거의 모든 주요 발성 영화에 출연하며 그야말로 확고한 스타 덤을 만들어 나간다 주요 신문들과 뺷삼천리뺸 뺷조광뺸 등의 문예지는 그 의 동정과 인터뷰로 지면을 채웠다 심지어 한국을 방한하여 서구 아리랑을 보고 뺷메일신보뺸 월 일 영화평 임자 없는 나룻배 뺷조선일보뺸 월 일 임자 없는 나룻배 시사를 보고 뺷매일신보뺸 월 일 조선 토키 춘향전 을 보고 뺷조선일보뺸 월 일 금도 조선 영화개론 뺷조광뺸 호 월 뺷삼천리뺸 월 현재 이 영화는 남아있지 않으나 당시 삼천리에 실렸던 시나리오가 촬영 대본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그 속의 대사를 인용 했음 - 194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영화에 경도돼 있던 이 식민지 조선의 영화인들을 열광시켰던 스타인벡 감독조차 돌아간 후 편지에서 문예봉씨에게 안부를 전한다 고 할 정도 였다 당연히 모든 영화 광고에는 그녀의 출연 여부가 첫째로 올랐으며 그 녀의 이름 앞에는 지금 조선 천지에 여왕처럼 군림하는 을 찌를 것 같은 인기가 하늘 등의 수식어가 스타 대스타 화형이라는 말들과 함께 붙었다 문예잡지 뺷삼천리뺸는 월호에서 명우 제씨의 인품기 라는 제목으로 각 배우들의 취미 연애담을 묻고 대답하는 표를 만들어 실었는데 이 표에서 맨 처음이 문예봉이고 두 번째가 심영 세 번째가 김 신재였다 의 배우들이 당시 상당한 인기를 갖고 있었던 배우들인 것으로 볼 때 이 표는 그대로 당시 배우들의 인기순위표로 해석될 수 있 고 이 표의 첫 번째에 오는 것으로 당시 문예봉이 어떠한 스타였는지 짐 작할 수 있다 춘풍 에서 문예봉과 함께 일했던 감독 박기채는 문예봉을 교양과 지성이 풍부하나 색기가 부족하고 말 속의 함경도 사투리 때문에 발성 영화 배우로서 적합지 않은 배우 라고 평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 속 에서의 문예봉은 한국적인 얼굴이 단정하고 반듯해서 남성들을 뇌쇄시키 는 요염한 여배우보다는 청순한 이미지에 가깝다 박기채의 말대로 문예 봉의 사투리 억양이 발성영화 배우로서 약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 예봉의 스타덤 또한 발성영화가 도래하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을 것이었 다 문예봉은 자신의 약점을 소리치지 않는 나직한 대사 톤과 교양 있는 스탄벅의 편지 뺷매일신문뺸 월 일 물론 이 기사는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상당히 신빙성이 의심된다 그러나 설혹 조작된 기사라 하더라도 문예봉을 중심으로 이런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것 역 시 당시 그의 스타덤의 정도를 보여준다 뺷삼천리뺸 월 뺷삼천리뺸 월 뺷조광뺸 월 - 195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얼굴 표정으로 극복해 나갔고 이런 그녀의 모습은 신파적인 과장 연기에 물든 당시의 여배우들 속에서 오히려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그녀의 연 기는 비교적 적역이나 너무 표정이 한가지라 불만 으로도 보였고 평 범한 연기로 팔 푼의 성공을 낳았으나 너무 이지적 이라는 당시의 연기 풍토에서 불만 섞인 평을 듣다가 우리에게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연 연한 표정과 동작을 보여주었고 남편의 귀향을 알았을 때의 장면은 참으 로 연연하고 곱게 보여주었다 는 극찬까지 듣게 되었다 이러한 평문들 을 통해서 그녀의 연기는 다분히 절제되고 중립적인 것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고 이런 연기 방식은 무성영화에서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즉 당시의 관객들은 발성 영화가 제시하는 좀 더 섬세하고 풍부한 현실을 문 예봉의 연기를 통해서 느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연기 방식은 단정하고 한국적인 그녀의 용모와 더불어서 그녀를 모든 남성의 첫사랑의 연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릴린 먼로보다는 그레이스 켈리 같은 스타였다 그녀가 출연 한 영화는 거의 러브스토리였고 그녀의 역할은 지고지순한 순정파 여인 이었다 잡지에 실린 그녀의 기사도 당시 난무하던 여배우들의 스캔들 기 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기사 속에서 그녀는 남편을 위해 밥 짓고 빨 래하는 조선의 현모양처였으며 스타로서의 자신의 존재까지도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겸손했다 그레이스 켈리가 미국의 남성들에게 품 위 우아함 내성적인 안정된 가족 등의 개념을 상징했다면 문예봉은 식 민지 조선의 남성들에게 청순함 단정함 가족에의 헌신 변치 않는 사랑 교양 등을 상징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런 위치는 대륙으로의 침략이 시작 되면서 조선에 대한 무단 통치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던 당시의 조선에 서는 특히나 소중한 것이었다 여배우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 자체로 신 영화 춘풍을 보고 뺷동아일보뺸 월 일 춘풍은 문예영화인가 뺷중앙일보뺸 월 일 이규환의 나그네 뺷조선일보뺸 월 일 - 196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격화 하는 과정이다 문예봉은 사랑이야기의 가련한 여주인공 역을 통 해 스스로를 스타로 만들었다 나운규가 식민지적 현실에 저항하는 남성 적 영웅으로서의 스타였다면 문예봉은 고단한 현실 속에서 가슴 속에 품 어둘 수 있는 위로와 안정으로서의 스타였던 것이다 맺는 말 영화는 가장 강력한 대중 매체로 식민지 조선에 자리 잡았다 영화배 우의 얼굴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공통의 시각적 상징이 되어갔다 신문과 잡지는 이들의 얼굴을 다투어 실어서 이 시각적 상징의 확산에 기여했고 이것은 스타의 문화적 경제적 가치에 대한 자연스런 학습으로 이어져 초 기적인 의미의 스타덤과 스타시스템을 만들어 갔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일 제가 강요한 군산 파시즘이 자연스런 스타시스템의 발전을 가로 막았다 의 영화령과 그 뒤 강제적인 군국주의 영화의 제작은 스타들에게 군국주의에 이용되거나 아니면 세상을 등지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 요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스타들이 영화계를 떠났고 겨우겨우 잉태된 한 국적 스타시스템은 그 만개를 위해 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에게 영화는 외래로부터 학습된 것이었다 영화에서의 근대는 철 저하게 미국 영화에 대한 수용과 학습을 의미했다 당시 우리의 관객은 미국 영화를 먼저 체험하고 미국영화라는 기준에 무엇이 부족한지를 찾는 방식으로 한국 영화를 경험해 갔다 스타에 대한 선망과 동경 숭배도 같 은 경로를 통해 왔다 채플린이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메리 픽포드 등의 세계적인 배우들을 먼저 스타로 경험하고 나서 한국의 배우들을 만나기 에드가 모랭 앞의 책 면 - 197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이 한국의 배우들을 스타로 인정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벌리힐즈의 언덕에 있는 신들에 비하면 그들은 너 무 가까웠다 같은 생김새 같은 옷차림 심지어 비슷한 경제적 수준에 있 었다 영화의 서사적 기술적 수준도 미국 영화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 다 그러나 나운규에 와서 관객들은 한국의 배우들이 미국의 배우들과는 다른 종류의 스타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가깝다 라는 것이 약점에서 장점으로 전환하는 지점이었다 미국의 배우들이 아주 먼 딴 세상을 위해 서 존재한다면 한국의 배우들은 관객 자신의 현실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 었다 그들은 우리의 세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식민 현실에 대한 영화적 발언을 하고 있었고 그것이 일정한 성취를 이뤄냈을 때의 공감은 미국 배우들의 사랑 놀음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나운규는 최초로 우리의 문제 를 발언하는 스타 였다 발성 영화가 이 땅에도 도래하면서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말로 한층 더 섬세하고 풍부해졌다 한국적 스타덤과 스타시스템 은 사회 시스템이나 경제적 수준이 일반적인 스타덤을 창출하는 근대성에 도달하지 않았어도 식민지라는 질곡에서 관객과 스타가 함께 느끼던 강한 동질감을 기반으로 한다 한국의 스타들은 올림푸스의 신들처럼 군림하지 는 않았으나 식민지의 고통을 영화적으로 대변하던 사람들이었고 관객 들은 강력한 정서적 반응으로 그들에게 보답했다 스타가 그 사회의 상징 이고 기호인 것은 대 이 땅의 스타들에게서 정확하게 적용되 는 것이다 - 198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ABSTRACT Beginning of stardom in Korea was provoked by stars in American films. They were adored and worshipped as the gods on Olympus as American films poured into this small country under Japanese colonialism. Therefore, it was natural that Korean film-goers adapted themselves to this star phenomenon through them. As the chaining play, mixture of theatre and film, was invented, picture performers showed up in film parts of these plays, but they couldn't claim themselves more than mere performing labours. It wasn't until the appearance of A Vow Under the Moon, the first silent film in Korea that the performers claimed their beings as picture personalities. Finally, audience became to be able to recognize actors and their expertises of acting. Stardom in Korea fully broke out with the release of Arirang, 1926. With its recordable hit in the market, Na Unkyu, leading actor of the movie, seized the position of the first Korean star. He was a rebel hero, who produced strong self-idenfication and projection with the audience suffering from Japanese colonialism. It was also through him that people in industry tried to launch a star system, which enabled them to tactically manage his stardom. The first talkie film in Korea, Chunhyang story, added voice on the list of conditions for stardom. Moon Yebong, with her grace and restrained acting, acceded to the throne of stardom in this new era of talkie. Film-goers bursted their anger with Na Unkyu and missed about things they lost under the colonialism. - 199 -

뺷한국학연구뺸 제20집 Korean society in 1920,30 was in lack of modern social system and cultural industrialization, which were inevitable for advent of stardom. Hard censorship of colonial government also worked as a negative factor for this. However, the cruel reality of colonialism forced audience to feel the strongest link with the stars. Therefore, I can boil down Korean stardom in those times to two phrases, which are the lack of social, economic conditions and the strong emotional bond enabled by common feeling of suffering between audience and stars. KEY WORDS: Stardom, Picture Personality, Acting worker, Na Unkyu, Moon Yebong, Arirang, Self-identification 참고문헌 뺷동아일보뺸 뺷조선일보뺸 뺷매일신보뺸 뺷삼천리뺸 뺷조광뺸 월 월 월 월 신용하 뺷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뺸 문학과지성사 장 보드리야르 이상률 역 뺷소비의 사회뺸 문예출판사 에드가 모랭 이상률 역 뺷스타뺸 문예출판사 리처드 다이어 주은우 역 뺷스타 이미지와 기호뺸 한나래 유민영 뺷한국근대연극사뺸 단국대학교출판부 김호석 뺷스타시스템뺸 삼인 안종화 뺷한국영화측면비사뺸 현대미학사 크리스틴 글레드힐 편 조혜정 박현자 역 뺷스타덤 욕망의 산업 뺸 시각과 언어 크리스틴 그레드힐 편 곽현자 역 뺷스타덤 욕망의 산업 뺸 시각과 언어 - 200 -

1920~30대 한국적 스타덤 고찰 고설봉 뺷이야기 근대연극사뺸 도서출판 창작마을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뺷시학뺸 문예출판사 김종욱 편 뺷실록 한국 영화총서뺸 상 국학자료원 김종욱 편 뺷실록 한국 영화총서뺸 하 국학자료원 이영일 뺷한국영화전사뺸 도서출판 소도 윤금선 뺷경성의 극장만담뺸 연극과 인간 김남석 뺷조선의 여배우들뺸 국학자료원 김미현 편 뺷한국영화사뺸 커뮤니케이션북스 권태억 외 뺷한국근대사회와 문화 뺸 서울대학교 출판부 권태억 외 뺷한국근대사회와 문화 뺸 서울대학교 출판부 - 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