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 崔氏武人政權의 對蒙講和交涉에 대한 一考察 申 安 湜* Ⅰ. 머리말 Ⅱ. 對蒙講和交涉의 姿勢 Ⅲ. 對蒙講和交涉의 推移 Ⅳ. 맺 음 말 Ⅰ. 머리말 고려 최씨무인정권은 그 성립부터 몰락하기까지 복잡한 대륙의 변화와 국내의 여러 문제에 봉착하였다. 특히 국내 문제는 무인정권의 성립 이후 불안정한 정권을 확고히 유 지하기 위해 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의 무마가 일차적인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최씨정 권은 집권초기부터 강력한 정책에 의해서 정국을 일원적으로 장악하려 하였고, 이와 더 불어 정국의 불안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집권초기 契丹遺種의 침입 뿐만 아니라 최씨정권기 의 반이상을 차지하는 몽고와의 전쟁을1)들 수 있다. 특히 대동전쟁은 외세 문제 뿐만 아니라 정권의 존립과 고려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최씨정권은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전쟁 을 할 의사는 없었는데, 그것은 본토의 민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江華遷都의 예에서 알 수 있다. 최씨정권의 대몽전쟁은 강화천도를 기점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것은 우선 국내의 봉기 세력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면서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서의 講和와 정권보위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었다.2) 그러나 최씨정권에 의한 對蒙講和交涉의 실패는 곧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고, 국가로서는 1세기에 이르는 元干涉期로 빠지는 결과 를 초래 하였다. 지금까지 선학들의 대몽전쟁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전쟁 과정을 중심으로 연구된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3) 이에 이 글에서는 대몽전쟁 기간 동안 고려와 몽고와의 강 * 建國大學校 講師. 1) 이하 고려와 몽고와의 전쟁을 대몽전쟁으로 축약한다. 2) 이러한 점은 앞서 대몽전쟁기의 민의 동향을 통해서 이미 고찰된 바가 있었다(신안식, 대몽항쟁 기 민의 동향 역사와 현실 7, 1992). 3) 閔丙夏, 高麗 武臣政權時代에 대한 一考 ( 史學硏究 6, 1959). 姜晋哲, 蒙古의 侵入에 대한 抗爭 ( 한국사 7, 1973).
- 192 - 화 과정을 주로 살펴 보고자 하였다.4) 대몽강화 교섭은 1231년(고종 18)에 전쟁이 발발 하여 6차례의 전쟁을 치를 때마다 고려 정부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리고 몽고 역시 요구 조건을 전제로 이를 받아들이는 형태가 이어졌으며, 30여 년간 대몽전쟁의 지구적인 면 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화 교섭은 양국간의 이해 득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 이었지만, 전쟁 종료 이후 고려와 몽고의 관계를 설정해 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 다고 생각된다. 고려 정부의 강화에 임하는 태도 역시 당시 고려 내부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써 최씨정권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최씨정권에 의한 강화 교 섭은 정권보위를 위한 유리한 입장을 세우는 것이었고, 상황 변화에 따라 몽고에 대한 순종 거부 지연과 재침략에 의해 환원하는 형태로써 국가의 운명 보다는 정권의 운명에 더 치우치는 감이 있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대몽강화 교섭의 推移를 살펴봄으로써 강화 이후 麗元關係의 설정과 三別抄 봉기의 원인을 고찰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우선 최씨정권의 對蒙 講和交涉의 姿勢에서는 崔瑀 崔沆 崔竩 정권의 몽고와의 사신 교류를 통한 對蒙講和의 입장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對蒙講和交渉의 推移에서는 1차 전쟁으로부터 6차 전쟁 및 최씨정권의 붕괴 이후 강화가 이루어지는 시기까지 강화 교섭의 실제를 차례대로 살펴 보았다. Ⅱ. 對蒙講和交涉의 姿勢 몽고의 대외 침략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동기보다는 경제적인 여건이 중요한 관건이 었다.5) 그리고 고려에 대한 침략도 역시 이러한 추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또한 몽고 太宗代(1234 1241)에 이르러서는 대외 정복 三代 대작전 중의6) 일환으로 이루어질 정 도로 고려 공략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대몽전쟁은 처음부터 전면전으로 이루어졌고, 몽 고의 요구 사항도 1차 전쟁부터 6차 전쟁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고려의 완전 항복을 위 한 침략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고려는 적극적인 전쟁 자세보다는 국지적인 高柄翊, 高麗와 元과의 關係 ( 東洋學 7, 1977). 尹龍爀, 崔氏武人政權의 對蒙抗戰姿勢 ( 史叢 21 22합, 1977). 閔賢九, 高麗의 對蒙抗爭과 大藏經 ( 韓國學論叢 1, 1978). 주채혁,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몽골 고려 전쟁사 연구의 시각문제- ( 애산학보 8, 1989). 주채혁,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 몽골-고려사의 성격 문제 ( 國史館論叢 8, 1989). 尹龍爀, 高麗對蒙抗爭史硏究 (1991). 4) 대몽강화 교섭의 내용에 대해서는 주 3)의 논문들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은 되었지만, 본격적인 언급은 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5) 룩 콴텐, 宋基中 譯, 유목민족제국사 (1984) p. 190. 6) 元史 권2, 태종 4년 1월, 遣諸王拔都及皇子貴由 皇姪蒙哥 征西域 皇子闊端 征秦 鞏 皇子曲出 及虎土虎 伐宋 唐古 征高麗.
- 193 - 승리를 거두는 것 외에 지속적인 和親을 요구하였다. 이제부터 최씨정권의 시기 별로 고려와 몽고의 사신 교류를 통해서 그들의 강화 교섭 의 자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표 1 7) 崔瑀政權期의 사신 교류 횟수 (高宗)시기 18년 1차 전쟁 19년 2차 전쟁 * 21년 25년 3차 전쟁 26년 * 27년 28년 29년 30년 31년 32년 34년 4차 전쟁 35년 * 36년 *는 전쟁의 휴식기 <표> </표> 高麗 蒙古 3차례 3차례 3차례 蒙古 高麗 4차례 5차례 우선 崔瑀 정권(고종 6 36, 1219 1249)에서의 대몽 접촉은 비교적 활발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1차 전쟁에서 고려 정부는 직접 고려에 내침한 적장에게 파견한 사신이 3차 례와 몽고에 보낸 사신이 였고, 몽고는 6차례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방적 인 항복이나 타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국지적인 전투에서의 승리와 民의 동향에서도 정부와 결합하는8) 등 적극적인 대몽항쟁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7) 이하의 도표는 高麗史 高麗史節耍 元史 元高麗紀事 를 이용하여 작성하였다. 사신 교류의 자세한 내용은 尹龍爀의 도표를 참고하기 바람( 高麗對蒙抗爭史硏究 p. 84, 98, 106, 118, pp. 130 131).
- 194 - 그러나 고려는 몽고의 거센 침략에 따라 항전과 화친을 동시에 도모하게 되었고,9) 그들의 요구 조건을 전제로 하여 1232년(고종 19)에 회군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이들의 요구 조건 중에서 최씨정권의 來降과10) 몽고의 감당하기 어려운 과다한 요구11) 등은 최우 정권으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최우 정권은 여러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강화 천도를 강행함으로써 몽고의 재침과 지루한 전쟁이 되풀이되는 결과를 자초하였다. 그리고 강화천도를 전후해서는 몽고의 재침으로 새로운 전란에 휩싸이기는 했지만 적 장 撒禮塔의 사망으로 인해 단기간의 전쟁을 경험하였고, 또한 민의 봉기 양상도 몽고 침략을 전후해서 거세게 일어났다. 2차 전쟁 이후 양국의 사신 파견은 고려의 가 나타났지만, 몽고의 사신 파견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2차 전쟁의 주된 문제는 고려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12) 통해서 알 수 있었고, 그것은 出陸親朝 였다.13) 하지만 최우 정권은 몽고의 요구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은 했지만 나름대로 지연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또한 이들은 침략자에 대한 응징보다는 봉기 세력에 대한 공략에 큰 비중을 두었다.14) 이것은 외적과는 지구적인 전쟁을 벌이면서도 정권보위를 위한 타협의 길을 모색했고, 국내에 대해서는 강력한 정국 장악의 의지를 표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우 정권의 의도는 정 국을 강력하게 장악하는 대신 외세에 대해서는 화친을 도모하는 철저한 이중적인 정책 을 편 것이었다. 그리고 몽고와의 3차 전쟁을 겪으면서부터는 지금까지의 강화 교섭을 계속 추진하는 한편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표방하였다. 이 시기의 양국 사신의 파견은 고려에서 3차례 와 몽고에서 가 있었다. 여기에서도 몽고는 주로 1차와 2차 전쟁에서의 요구 사항 에 대한 관철과 고려 국왕의 친조를 계속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국왕이 직접 몽 고 사신을 접대하였다던가,15) 국왕의 친조도 어느 정도 수용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몽 고 황제 太宗의 사망(1241)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기회였으며, 최우 정권도 永 寧公綧을 왕자라고 속여 質子로 보냄으로써16) 몽고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도 감행하였다. 이러한 시도에 의해 이 시기 이후 고려는 몽고의 침략으로부터 어느 정도 8) 신안식, 앞의 논문 pp. 33 35. 9) 高麗史 권23, 고종 18년 11월. 10) 위의 책 권23, 고종 18년 11월 癸巳. 11) 위의 책 권23, 고종 18년 12월 甲戌. 12)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11월 12월. 13) 몽고 사신이 직접 고려 왕의 친조를 요구한 예는 다음과 같다. 위의 책 권23, 고종 26년 4월, 蒙古遣甫可阿叱等二十人 賚詔 來諭親朝. 위의 책 권23, 고종 26년 8월, 蒙古遣甫加波下等 一百三十七人 來 更徵王親朝. 위의 책 권23, 고종 27년 9월, 新安公佺 與蒙古多可 坡下道阿叱等十七人 賚詔來 復諭入朝. 이 외에도 出陸親朝 의 문제는 몽고의 요구 사항 중에서 주된 관심사였고, 여기에 대해서는 Ⅲ장 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14) 신안식, 앞의 논문 pp. 32 33. 15) 高麗史 권23, 고종 26년 4월. 16) 위의 책 권23, 고종 28년 4월.
- 195 - 벗어 날 수 있었고, 민의 봉기도 대체적으로 소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양 국의 사신 교류는 대체로 활발한 면을 보여 주었다. 몽고는 사신 파견을 통해서 종래의 요구 사항에 대한 관철을 의도하였을 것이다. 이에 고려는 몽고의 침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의례적인 사신의 파견을 통하여 국내의 상황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씨정권의 태도는 다만 몽고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려 일시적으로 전쟁의 소강 국면을 맞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후 계속적인 전쟁의 양상을 통해서 강화 협상의 실질적인 해결을 맺지 못했다. 그것은 곧 몽고의 4차 전쟁을 야기시켰다. 몽고와의 4차 전쟁도 3차 전쟁 이후 오랜 휴식기를 지나 벌어진 전쟁이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몽고의 공세를 예상할 수 있었지만, 몽고 황제 定宗(1246 1248)의 사망으로 또다시 전쟁의 소강 국면을 맞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고려에서 3차례의 사신 파견이 있었지만, 몽고에서 파견된 사신의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최우 정권역시 별다른 몽 고와의 타협을 시도하는 것도 없이 다만 의례적인 사신 파견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 고 고려에서도 최우의 사망으로17) 새로운 정치적 변동을 가져 올 수 있는 기회도 있었 지만, 崔沆의 집권으로 종래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할 수 있었다. 표 2 崔沆政權期의 사신 교류 횟수 (高宗)시기 高麗 蒙古 * 37년 3차례 38년 39년 40년 4차례 5차 전쟁 41년 5차례 42년 6차 전쟁 43년 *는 전쟁의 휴식기 <표> </표> 蒙古 高麗 5차례 崔沆 정권(고종 36 44, 1249 1257)은 몽고의 정치적 변동기에 집권하여 아버지 최우 의 정책을 그대로 고수할 수 있었다. 정권초기에는 전쟁도 소강 상태였고, 민의 동향 역 시 기록상으로는 침체기로 이해된다. 하지만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몽고와의 사신 교류 는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5차 전쟁을 전후해서는 몽고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서 점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17) 위의 책 권23, 고종 36년 11 월 壬申.
- 196 - 이러한 가운데 최항 정권은 국왕의 친조를 대신하여 태자의 입조를 시도하려는 宰樞 들의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록 고려를 배반했던 永寧公綧과 李峴에 의해 몽고 측의 의도를 전달했던 것이지만,18) 宰樞들은 태자와 왕자의 出迎을 적극 권장하는19) 가 운데 이때에도 태자 혹은 安慶公을 보내어 항복하자는20) 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최항 정권에 의해서 저지되었다.21) 그것은 새로운 대안들이 제 시되고 고려 측에서도 수용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사실 몽고의 궁극적인 목적이 고려의 완전 항복이었고, 이것은 곧 최씨정권의 몰락을 의미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몽고의 강압적 인 태도에 대해 최항 정권도 몽고의 의도를 직시하는 가운데 출륙을 준비하였다던가,22) 태자의 입조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려는23)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 하여 왕자 安慶公淐이 몽고에 입조하기도 하였다.24) 하지만 몽고의 야욕은 처음부터 의 도된 것이었고, 고려의 지연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6차 전쟁이라는 대대적인 공세로 이어졌다. 6차 전쟁은 몽고의 총공세였고, 고려 국내의 사정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그것은 이 시기 민의 동향도 종래의 중앙 정부에 대한 저항 일색에서 침략자에 직접 투항하는 변칙적인 형태가 나타났던 것이다.25) 그리고 출륙의 문제도 국왕 뿐만 아니라 최씨정권 도 동시에 出降을 요구하는 몽고 본래의 의도를 표방하였다.26) 이러한 상황들은 최항 정 권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갖게 하였겠지만, 새로운 대처 방안도 마련되지 못했고 종래의 안일한 자세를27) 그대로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1257년(고종 44) 최항의 사망은, 이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최항 이후 이들의 입장 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崔竩의 집권이 이어졌지만, 상황은 점차 급박하게 변화되어 갔다. 표 3 崔竩政權期의 사신 교류 횟수 (高宗)시기 高麗 蒙古 6차 전쟁 44년 7차례 <표> </표> 蒙古 高麗 18)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0년 7월. 19) 高麗史 권24, 고종 38년 10월 丙辰. 20)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8월 庚午. 21)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0년 7월. 22) 高麗史 권24, 고종 40년 9월 戊寅. 23)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0월 辛未. 24)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2월 壬申. 25) 梁元錫, 麗末의 流民問題 (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pp. 279 283. 尹龍爀, 高麗 對蒙抗爭期의 民亂에 대하여 ( 史叢 30, 1986) pp. 53 55. 신안식, 앞의 논문 pp. 39 45. 26) 高麗史 권24, 고종 41년 7월 戊午. 27)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2년 2월 43년 5월.
- 197 崔竩 정권(고종 44 45, 1257 1258)은 崔瑀와 崔沆의 정책으로 시종 일관하면서도 왕 실과 宰樞들의 집요한 반격에 의해 차츰 그 세력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간 논란이 되었던 국왕의 친조 혹은 태자의 입조 문제가28) 몽고에 의해서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고려 측에서도 태자의 입조 문제가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29) 이것은 위의 도표에서 빈번한 고려 사신의 파견의 예에서도 엿볼 수 있 다. 또한 몽고의 대대적인 6차 침략은 지금까지의 지구적인 면보다는 본토에서의 민의 변칙적인 저항과 아울러 江都政府로서도 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끼던 일련의 세력들은 세자의 입조를 통한 강화를 추진하는 한편, 강화 협상에 걸림돌이 되었던 최씨정권의 제거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1258년(고종 45) 3월 최씨정권은 마침내 붕괴되었다. 결국 대몽전쟁 기간 동안 최씨정권은 항전과 화친의 양면을 동시에 진행시키고 있었 다. 이러한 최씨정권의 자세는 강화천도를 통하여 지속적인 항전 자세를 취하기도 했지 만, 실상은 유리한 강화 교섭을 통한 정권 보위에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최씨정 권이 전면에 나서서 강화를 추진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사신의 파견은 이들의 정권 유지를 위한 강화 의지를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왕과 문신 관료들도 강화를 통한 권 력 회복을 기도했지만 최씨정권의 견제를 당하는 실정이었다. 한편 최씨정권의 붕괴 이후에도 기존의 무인세력들이 정권을 독점하였고, 이들 역시 적극적으로 강화에 임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그 동안 고려와 몽고의 현안이었던 태 자의 입조 문제가 점진적으로 수용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30) 그것은 종래처럼 위기적인 상황에 대처하면서 나름대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지금까지 태자의 입조를 끈질기게 요구했던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태자의 입조는 곧 고려의 항복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무인정권은 고종의 사망 이후 새로운 왕위 의 옹립을 기도했는데,31) 이는 왕권과 문신들을 중심으로 한 몽고와 강화 협상에서의 주 도권에 대한 견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이후에는 외적에 대한 대항보다는 고려 정 부 내에서 세력들 간의 새로운 힘겨루기의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Ⅲ. 對蒙講和交涉의 推移 대몽전쟁은 1231년(고종 18)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여, 1259년(고종 46)에 고려 태자가 몽고에 入朝하여 講和가 이루어지기까지 6차례의 전쟁이 있었다.32) 대몽전쟁에서 고려는 28) 高麗史 권24, 고종 44년 7월 壬申. 29)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7월. 30) 위의 책 권24, 고종 46년 3월 壬子. 31) 위의 책 권24, 고종 46년 6월 壬寅.
- 198 - 국지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몽고의 침략에 굴복당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고려 정부는 講和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몽고가 요구 사 항을 내걸게 되면 고려가 이를 수용하는 선에서 몽고의 철병을 받아 낼 수 있었다. 하지 만 고려는 몽고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회유와 지연으로 위기 상황에 대처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재침입이 이루어지게 되 면, 또다시 몽고의 요구 사항에 대한 수용과 지연 또는 몽고의 힐책을 받는 형태가 되풀 이 되었다. 몽고의 전쟁 승리에 대한 요구 사항은 몽고가 대외 정벌시에 보편적으로 추구했던 六 事의 요구였다.33) 이러한 몽고의 요구는 1차 전쟁으로부터 6차 전쟁에 이르기까지 계속 추구 되었으며, 그것은 고려의 완전 항복이었다. 이에 맞서는 고려 정부의 대응은 최씨정권의 독단에 의해 좌우되었다. 최씨정권의 對 蒙講和에 임하는 자세는 강화천도와 같이 몽고와의 전쟁에 주안점을 두는 듯했지만, 기 실 정권 보위에 유리한 입장에서의 강화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강화천도는 최씨정권 초 기 契丹 遺種의 침입시의 경험과 당시 민의 봉기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비롯되었다.34) 강화천도 이후 최씨정권은 집권 확립기의 정국 장악에서 비롯된 항전과 타협의 양면적 인 태도를 취하였다.35)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최씨정권의 항전과 타협 정책은 도 전을 받게 되었고, 차츰 왕권과 문신 세력들에 의한 몽고와의 강화가 이루어졌다.36) 32) 이러한 대몽전쟁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尹龍爀, 高麗對蒙抗爭史硏究 pp. 40 41). 1차 전쟁 : 고종 18 19년(1231 1232) 撒禮塔 2차 전쟁 : 고종 19년(1232) 撒禮塔 3차 전쟁 : 고종 22 26년(1235 1239) 唐古 3(1)차 : 고종 22년(1235) 3(2)차 : 고종 23 24년(1236 1237) 3(3)차 : 고종 25 26년(1238 1239) 4차 전쟁 : 고종 34 35년(1247 1248) 阿母侃 5차 전쟁 : 고종 40 41년(1253 1254) 也窟 6차 전쟁 : 고종 41 46년(1254 1259) 車羅大 6(1)차 : 고종 41 42년(1254 1255) 6(2)차 : 고종 42 43년(1255 1256) 6(3)차 : 고종 44년(1257) 6(4)차 : 고종 45 46년(1258 1259) 33) 六事의 내용은, 첫째 支配層子弟를 入質시킬 것, 둘째 戶口調査를 하여 보고할 것, 셋째 몽고군의 他地域遠征時에 助軍할 것, 넷째 稅賦 食糧을 輸納할 것, 다섯째 達魯花赤을 駐在토록 할 것, 여 섯째 君王이 親히 몽고에 入朝할 것, 또는 驛站을 설치토록 할 것 등이다(高柄翊, 高麗와 元과 의 關係 東洋學 7, 1977, p. 282). 34) 신안식, 앞의 논문 pp. 29 32. 35) 강화천도 이후 전국에서의 봉기 세력에 대한 강경 진압이 이루어졌고, 別抄軍에 의한 일반민의 役에 대한 장악 역시 이 시기를 전후해서 활발한 양상을 보여준다. 36) 최씨정권에 의한 대몽전쟁의 입지를 약화시켰던 주된 요인은 당시 민의 동향과 맞물려 있었다. 또한 몽고에 의한 고려 정부의 내분을 유도한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몽고에 투항했
이제부터 對蒙講和交涉의 추이를 전쟁의 시기별로 살펴보겠다. - 199-1) 1차 전쟁 대몽전쟁은 1231년(고종 18) 8월에 개시되었다. 1차 전쟁에서 몽고의 의도를 알 수 있 는 첫 접촉은 고종 18년 10월에 平州에서 牒文을 지닌 몽고인을 사로잡은 데서 비롯되 었다.37) 첩문의 내용은 고려의 항복과 大官人의 來降이었다.38) 대관인은 최씨정권을 지 칭했는데,39) 이는 몽고 측에서 고려 내의 정치적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에 맞서 고려는 北界에서의 전투와 전국 각지에서 대몽항전을 벌이고 있었 다.40) 또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몽고병을 위로하기도 했고,41) 宗室인 淮安公侹 을42)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몽고의 잔악한 침략행위는 계속되었는 데,43) 이는 고려의 완전 항복을 받아 내려는 의도였다. 이에 고려는 몽고의 침략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보다는 講和의 입장을 수용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和親의 의사를 먼저 표시한 것은 고려 측이었으며, 이에 대해 적장 撒禮塔은 講和를 종용하는 태도와 아울러 침략의 원인으로 삼았던 사신 著古與 피 살 문제에 대한 추궁과 항복을 요구했다.44) 이러한 고려의 화친 의사와 몽고의 요구 중 에서 1차 전쟁의 특징적인 면은 몽고 측에서의 직접적인 물품 요구였다. 장군 趙叔昌이 撒禮塔에게서 보내 온 몽고 사신 9명과 함께 공문을 가지고 왔다. 그 공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몽고 大朝國 황제의 지시로서 撒里打火里赤을 시켜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가서 著古與 사신을 죽인 이유를 묻게 하였다. 삼가 황제의 지시를 받 들고 우리 사신 稍馬가 그곳으로 간다. 사신이 가거든 그에게 순종하고 사신 令公이 물 품을 바칠 것이니 응당 거기에 대한 회사 물품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 물품과 직물들 을 함께 보내야 하며 우리가 요구하는 좋은 金銀과 좋은 구슬 水獺皮 鵝嵐 좋은 의복은 던 세력들의 활약에서 엿볼 수 있으며, 특히 質子로 갔던 永寧公綧과 전쟁 초기부터 몽고에 적 극 협력했던 洪福源의 예를 들 수 있다. 37) 高麗史 권23, 고종 18년 10월 癸丑朔. 38) 위의 책 권23, 고종 18년 11월 癸巳, 北界分臺御史閔曦 還奏 曦 與兵馬判官員外郞崔桂年 承三軍 指揮 往蒙兵 有一元帥 自稱權皇帝 名撒禮塔 坐氈廬 飾以錦繡 列婦人左右 乃曰 汝國 能固守則固 守 能投拜則投拜 能對戰則對戰 速決了也 汝職爲何 對曰 分臺官人 曰 汝是小官人 大官人 速來 降. 39) 몽고에서 요구하는 大官人은 崔瑀였다. 그것은 高麗史節要 권16, 고종 19년 5월 기사의 令公 과 高麗史 권23, 고종 19년 11월 기사에서 大官人이 崔令公을 바로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40) 윤용혁, 앞의 책 pp. 41 53. 41) 元高麗紀事 태종 3년 11월. 42) 高麗史 권23, 고종 18년 12월 丙辰. 43) 위의 책 권23, 고종 18년 11월 庚戌 辛亥, 12월 丁巳. 44) 위의 책 권23, 고종 18년 12월 壬子朔.
- 200 당신이 많다고 하였다. 한번 한 말은 틀림이 없어야 한다. 당신이 주는 금은과 의복은 많으면 말 2만필에 실어 보내고 적으면 말 1만필에 실어 보내야 한다. 특별히 보내 는 물품 외에 眞紫羅 1만필을 보내야 하며 당신이 보낼 水獺皮 2백 30매를 眞紫羅와 함 께 보낼 것이다. 이번에 좋은 水獺 2만매를 보내고 귀국의 좋은 말 중에서 큰 말 1만필 과 작은 말 1만필을 보내고 왕의 자손으로서 황제에게 보낼 公主 大王 郡主 등 남자 1 천명 외에 大官人 부녀도 함께 보내야 하며 귀국의 太子 將領 大王의 자제들과 아울러 大官人의 아들 1천명과 딸 1천명도 황제에게 보내라. 우리가 요구한 물품이 빨리 오 면 군사도 빨리 돌아올 것이요 물품이 더디 오면 군사도 더디 돌아올 것이 다 고 하였다( 高麗史 권23, 고종 18년 12월 甲戌). 이 사료에서 몽고의 물품 요구의 내용은 좋은 金銀과 좋은 구슬 水獺皮 鵝嵐 좋은 의 복(1백만 군사의 의복) 등이며, 금은과 의복은 많으면 말 2만필, 적으면 말 1만필에 실어 보낼 것 등이었다. 또한 특별히 보내는 물품 외에 眞紫羅 1만필, 수달피 2만매와 큰 말 1만필, 작은 말 1 만필을 보내라고 했고, 그리고 왕의 자손으로서 황제에게 보낼 公主 大 王 郡主 등 남자 1천명 외에 大官人의 부녀와 太子 將領 大王의 자제들과 大官人의 아들 1천명도 요구하였다. 이 이외에도 매와45) 고려의 백성을 선발하여 開州館과 宣城山으로 이주 시켜 농사짓도록 하자는46) 몽고의 요구도 있었다. 이에 고려 측은 몽고의 요구에 대해 거절하기도 했고, 또한 물품과 인원을 보내기도 하였다.47) 그리고 몽고 사신의 증 정품에 대한 회사품과 앞서 몽고의 요구에 대해, 고려는 우선 사신 著古與를 죽인 것은 고려가 아님을 밝히고, 둘째로 사신을 포박한 것에 대한 해명, 그리고 셋째로 항복 문제 는 이미 우호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48) 이러한 몽고의 요구들은 고려 측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과다한 것이었다. 이에 고려는 몽고에 대해 稱臣하는 表文을 보내어,49) 앞서 몽고가 요구한 물품에 대한 삭감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정부는 몽고 측의 요구에 대한 수용과 거절 등으로써 나름대로의 강 화에 임했으며, 한편으로는 방어 책략을50)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몽고의 요구 사항들은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씨정권으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고, 그 대비책 으로써 정권보위를 위한 강화천도의 의견이 개진되어51) 마침내 2차 침입의 빌미가 되는 45) 위의 책 권23, 고종 18년 12월 辛酉. 46)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3월. 몽고의 사민 요구는 경제기초와 인력기반을 마련하여 지속적인 경제적 수탈대상과 지속적인 병 력의 공급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다(주채혁,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몽골 고려 전쟁사 연 구의 시각문제- 애산학보 8, pp. 13 14). 47)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3월, 遣西京都領鄭應卿 前靜州副使朴得芬 押船三十艘 水手三千人 發龍 州浦 赴蒙古 從其請也. 48) 위의 책 권23, 고종 18년 12월 庚辰. 49)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4월 壬戌. 50)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5월.
- 201 - 강화천도가 1232년(고종 19) 6월에 단행되었다. 결국 1차 전쟁에서 몽고는 다른 정복지에서도 그랬듯이 고려의 완전 항복을 통한 경 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했고, 고려는 항전과 타협을 통해 몽고의 침략 야욕에 대응하였 다. 2) 2차 전쟁 몽고와의 2차 전쟁은 몽고군의 직접적인 군사 행동과 전쟁의 명분이 사료상으로 결여 되어 있는 관계로 잘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시기에 몽고에서 보낸 사신의 예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52) 다만 고려 측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통해서 이해될 수밖에 없 다.53) 2차 전쟁은 몽고 측의 요구에 대한 고려의 불이행과 강화천도가 원인이었으며, 고려와 몽 고 사이에 出陸親朝 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몽고침입의 원인 인 강화천도에 대한 변명으로써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에 고려는 고종 19년 9월 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강화천도의 원인을 宋立章 許公才의 망언으로 이루어 졌으며 達 魯花赤의 살해와 사신의 포박은 사실과 다름에 대한 변명과 投拜에 대해서도 불가의 입 장을 표시하였다.54) 그리고 몽고는 주로 당시 집권자였던 최씨정권과의 강화 협상을 요구했는데, 고려는 몽고의 沙打官人에게 다음과 같은 회답 편지를 보냈다. 앞서 보내 온 답서에는 귀국에 서 우리 왕이 대신을 접대사로 내보내지 않았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통고하였다. 이미 먼 저 편지에 말한 바와 같이 비록 귀국 군사를 피하여 여기에 들어와 있으나 귀국에 대한 우리의 성의만은 오히려 더 간절하다. 그러므로 귀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서 이미 대신 아무를 당신에게 보냈고 이에 대한 회답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우리 왕이 崔令公을 접대사로 내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였는 바 이처럼 통고가 계속 잇대이니 우린들 어 떻게 하겠는가? 삼가 바라건대 당신이 이 절박한 사정을 양해하여 다소 너그러운 태도 를 보임으로써 우리의 기대에 보답한다면 고맙겠다 라는55) 난처한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몽고가 고려 측에서 최우를 접대사로 보내지 못한 것을 추궁했다는 것 은, 당시 고려의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고려 내부의 분열을 노리는 몽고의 전략이었음 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 회답 편지에는 몽고의 과다한 공물 요구에 대한 고려의 입장 과 변명 그리고 趙叔昌과 宋立章을 몽고로 압송할 것과 잦은 몽고 측의 요구와 추궁에 대한 고려 측의 항변이 담겨 있다. 이것은 최씨정권의 몽고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51)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5월 癸卯. 52) Ⅱ장의 표 1 참조. 53) 2차 전쟁의 사료상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尹龍爀은 그 상황을 자세히 서술해 주고 있다(앞의 책 pp. 53 61). 54) 高麗史 권23, 고종 19년 9월. 55)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11월.
- 202 - 것으로, 한편으로는 몽고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반면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 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즉 몽고 황제에게 보낸 陳情表에서56) 고려는 萬奴討伐 軍 조성과 親朝 그리고 戶口 파악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대신 계속적인 공납을 약속하였 고, 또한 著古與 피살과 宋立章에 대한 문제와 강화천도에 대한 변명 및 최씨정권의 投 拜 문제는 일단 거절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고려 국왕의 친조와 최우의 출륙 문제 는 계속해서 요구되었지만, 고려는 변명으로써 거절하였다.57) 한편 2차 전쟁은 적장 撒禮塔이 사망함으로써58) 상황이 돌변하였다. 적장의 사망은 전쟁을 소강 상태로 접어들게 하였다. 또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외교적인 노력은 계속되 었지만, 최씨정권의 전쟁에 임하는 태도는 강경 입장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撒禮塔의 사망 이후 몽고는 의례적인 태도로써 종래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것은 몽 고의 소위 五罪의 추궁으로,59) 대외 침략 원인에 대한 정당성과 침략국에 대한 六事의 종용을 나타내고 있다. 즉 첫째, 거란적을 평정하고 劄刺를 죽인 뒤로부터 한번도 사신 을 보내지 않은 것, 둘째, 몽고에서 보낸 사신을 활을 쏘아 돌려보낸 것, 셋째, 고려에서 著古與를 죽이고는 萬奴가 죽였다고 거짓말을 한 것, 다섯째, 戶口 파악을 제대로 시행 하지 않은 것이 고려의 책임이라는 내용이다. 또한 바다에서 나와 來朝하여 공납을 바치 는 일에 전념할 것과 몽고의 명령을 어기면 大軍을 보낼 것이라고 위협하였다.60) 이에 반해 고려는 東眞에 보낸 편지에서 몽고를 시기심이 아주 심하고 맹약과 신의 를 저 버리는 횡포 무도한 나라 로61) 비판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강력하게 요구했던 趙 叔昌을 제거하기도62)) 했다. 그리고 강화천도에 대한 공을 논하는 과정에서 州郡이 다투 어서 최우에게 아부했던 것으로도,63) 당시의 상황이 최씨정권에게 유리하게 인식되었음 을 알 수 있다. 3) 3차 전쟁 몽고와의 3차 전쟁은 2차 전쟁에서 적장 撒禮塔의 사망으로 인한 소강 상태가 1235년 (고종 22) 몽고 太宗이 세계 정벌 구도에서 본격적인 고려 침략을 감행함으로써64) 새로 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몽고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은 이후 고려에서도 국지적인 전투 56) 위와 같음. 57) 위의 책 권23, 고종 19년 12월. 58) 위와 같음. 59) 위의 책 권23, 고종 20년 4월. 60) 元高麗紀事 태종 5년 4월 24일. 61) 高麗史 권23, 고종 19년 12월. 62) 위의 책 권23, 고종 21년 3월 甲辰. 63) 高麗史節要 권16, 고종 21년 10월, 册崔瑀 爲晋陽候 先是 詔論瑀遷都之功 可封侯立府 百官皆 賀于第 王欲以乙亥册封瑀 辭以迎詔禮物不備 乃用是日 於是 州郡爭致饋遣 瑀營私第 皆役都房 及 四領軍 船輸舊京材木 又取松栢 多植家園 人多溺死 其園林廣袤 無慮數十里. 64) 元史 권2, 태종 4년 1월.
- 203 - 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몽고의 압박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2차 전쟁 이후 고려의 태도는 굴복보다는 강경한 입장을 띠면서도,65) 한편으로는 타협을 시도하였다. 將軍金寶鼎, 御使 宋彥琦를 몽고에 파견하였다. 몽고에 보낸 表文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己卯 辛卯 兩年의 강화 이후로 의지할 곳이 더욱 든든하다고 생각하여 전국 이 기뻐하였던 것은 천지신명도 아는 바였다. 그런데 일이란 단정하기 어렵고 신의가 의심을 사는 수도 있어서 도리어 당신의 질책을 받고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내어 책임을 추궁할 줄이야 어찌 의심하였겠는가. 백성들은 안착할 곳이 없고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니 이처럼 풀만 우거진 토지에서 무엇이 생산되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공물을 보내 지 않을 수도 없으니 진퇴양난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럭저럭 구차하게 임시로 미봉하여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대담하게 나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는 것이 낫지 않겠 는가. 이에 메마른 땅의 소출을 긁어모아 나의 간곡한 뜻을 표시하니 바라건대 무력으 로 위협이나 하지 않고 우리 선대의 유업을 보전하게 한다면 이 땅에서 나는 물품으로 서의 貢納이 비록 변변치 않으나 해를 건너기야 하겠는가. 지금 뿐만 아니라 영구히 그 렇게 하리라는 것을 기약하는 바이다 고 하였다( 高麗史 권23, 고종 25년 12월). 몽고의 3차 침입을 받은 고려는 위의 사료에서처럼 己卯(1219, 고종 6) 辛卯(1231, 고 종 18)의 강화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3차 전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고려는 전쟁의 이유를 1차 2차 전쟁에서의 요구 사항에 대한 불이행으로 파악하여 해마 다 물품 공납을 약속하였다. 또한 국왕이 몽고 사신을 직접 접견하여 몽고군의 철병을 얻어내기도 했으며,66) 왕의 親朝 요구도 母喪을 핑계로67) 거절하였다. 이에 몽고는 거듭 왕의 친조를 요구했는데,68) 특히 친조하는 것을 庚子年(1240, 고종 27)으로 확고한 방침 을69)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려 왕의 친조는 앞에서의 전쟁과 더불어 이후 전쟁의 추이에 따라 그 강도의 차이를 보여 주기도 한다. 70) 하지만 고려는 몽고의 재침이나 요 구가 있을 때마다 의례적인 사신을 파견하여71) 몽고의 입장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이러 한 고려의 태도와는 달리 몽고의 요구는 계속되었다. 즉 3차 전쟁 이후 몽고의 고려에 대한 요구 사항은 助征軍의 파견 및 출륙의 요구와 호구에 대한 현황을 자세하게 보고 하여 秃魯花의 수를 결정할 것이며, 貢賦를 매년 바칠 것 등이다.72) 이외에도 일반적인 65) 高麗史 권23, 고종 24년 10월. 66) 高麗史 권23, 고종 26년 4월. 67) 元史 권95, 外夷1 高麗, 태종 11년 5월. 68) 高麗史 권23, 고종 26년 4월 8월, 27년 9월 및 元高麗紀事 태종 11년 5월 10월. 69) 元高麗紀事 태종 11년 10월. 70) 몽고의 요구 중에서 중요한 관건이었던 고려 왕의 親朝는 전쟁이 진행되면서 태자 혹은 왕자의 入朝로 선회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후 전개되는 내용에서 언급될 것이다. 71) 高麗史 권23, 고종 26년 7월.
- 204 - 몽고 사신의 왕래에 대한 예로는 앞의 표 1 에서 알 수 있으며, 이들 역시 앞에서의 사신 파견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직접적인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241년(고종 28)에 몽고 태종의 사망으로(乃馬眞皇后의 섭정기 : 1241 1246)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고려에서도 그 동안 몽고 침입에 의한 피해 상황에서 잠 시 휴식기를 가질 수 있었고, 몽고의 요구에 대해서도 秃魯花의 파견을 永寧公綧을 왕자 라고 속여 衣官子弟와 더불어 質子로73) 보낼 정도였다. 또한 민의 봉기도 이 시기에는 별로 사료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최씨정권은 비교적 정권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74) 이와 같이 최씨정권은 계속해서 몽고와 講和를 시도했지만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표 방하였다. 그것은 사신들의 파견에서 몽고에 흡족할 만한 언질을 제시하지 않았던 예에 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는 곧 몽고의 4차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4) 4차 전쟁 몽고와의 4차 전쟁은 3차 전쟁 이후 약 7년간의 휴식기 이후에 벌어진 전쟁으로 이유 역시 이전 전쟁과 같은 것이었지만, 1249년(고종 36)에 몽고 황제 定宗의 사망으로75) 단 시일에 끝났다. 4차 전쟁이 발발한 이후 고려는 의례적인 사신을 파견하여76) 위기 상황에 대처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의 의례적인 태도와 더불어 몽고 황제의 사망과77) 이에 따른 섭정시기는 (海迷失皇后 : 1248 1251) 고려로 하여금 또다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몽고에 서 정권 교체시의 대외 정책은 앞서 태종의 사망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 침략에 있어서 도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몽고의 요구는 종래의 원칙론을 되풀이하는 수준 정도였다. 그 내용 은 강화천도에 대한 힐책, 호구 파악도 자신들의 의도대로 따르지 않은 점과 庚子年 (1240)의 親朝를 어긴 것에 대한 질책 등이었으며, 이에 出陸과 民戶의 점검과 고려 왕 의 친조와 供職을 다할 것 등의 요구였다.78) 그리고 이 시기에 고려에서도 최우의 사망과 崔沆의 집권으로 새로운 정권변동기를 72) 元高麗紀事 태종 12년 5월. 73) 高麗史 권23, 고종 28년 4월, 以族子永寧公綧 稱爲子 率衣官子弟十人 入蒙古 爲秃花 遣樞密 院使崔璘 將軍金寶鼎 左司諫金謙 伴行 秃魯花 華言質子也. 永寧公의 파견은 국왕의 친조를 일단 모면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이후 永寧公은 몽 고에 협력하여 홍복원과 더불어 무인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 되었다(위의 책 권90, 平壤公基 附 永寧公綧). 74) 신안식, 앞의 논문 p. 37 도표 참조. 75) 高麗史 권23, 고종 36년 1월 戊申. 76) 위의 책 권23, 고종 35년 2월 10월 壬辰. 77) 위의 책 권23, 고종 36년 1월 戊申. 78) 元高麗紀事 己酉年 8월 15일.
- 205 - 맞아,79) 전쟁의 소강 국면에 편승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내용은 몽고에서 고려의 宗親과 洪福源父의 입조를 요구하였다던가,80) 몽고의 사신들이 고려의 출륙상황을 살피 기 위해 왔을 때 고려 왕이 직접 사신들을 맞이할 것을 요구했지만 고려에서는 이를 거 절하고 대신 新安公佺을 보내어 영접하였던81) 예들에서 볼 수 있다. 한편 몽고 사신 洪 高伊가 왔을 때 고려 왕이 직접 영접했는데,82) 洪高伊는 종래의 사신들에서 볼 수 없었 던 태도로 舊京으로의 천도를 요구하지 않았을 뿐더러 江都를 그대로 인정하는 유화책 을83) 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몽고의 정권교체기는 고려로 하여금 전쟁의 소강 국면에 대처하여 사신파 견을 통한 의례적인 태도를 표방하게 하였다. 그러나 몽고의 새로운 황제 憲宗(1251 1259)이 즉위한 이후 종래의 유화적인 태도에 서 고려 국왕의 친조 및 舊京으로의 환도를 요구하는84) 강경 입장으로 돌변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태자가 몽고를 방문해야 한다는 입장과 왕이 늙고 병들어 몽고를 방문할 수 없으니 요구를 거절하되 말썽이 생기면 태자를 보내자는 의견을 세우기도 하였다.85) 이 것은 지금까지 최씨정권에 의해 저지되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려의 태도 변화에 관계없이 몽고 황제는 사신에게 密勅을 주어 고려왕이 직접 사신을 영접하지 않으면 즉시 돌아오라고 하여86) 5차 전쟁의 구실을 만들기도 하 였다. 5) 5차 전쟁 몽고와의 5차 전쟁은 4차 전쟁시 몽고 황제의 사망으로 인한 소강 국면이(고종 36 39, 1249 1252)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통한 종래의 입장을 재차 확인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永寧公綧이 몽고 군중에 있으면서 崔沆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네가 본국의 宰臣과 함께 네 나라에 돌아가 朕의 명령을 일러서 육지로 나오게 하라, 국왕이 만일 나 79) 高觀史 권23, 고종 36년 11월 壬申. 80) 위의 책 권23, 고종 37년 3월 癸未. 종친의 요구는 사신 파견의 예에서 보았듯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5차 전쟁에 가서야 몽고의 요구에 따라 王子 安慶公淐이 몽고에 파견되었다(위의 책 권24, 고종 41년 1월 丁丑). 또한 洪福 源父인 洪大純은 곧바로 몽고에 보내졌다(위의 책 권130, 叛逆4, 洪福源傳). 81) 위의 책 권23, 고종 37년 6월 庚子. 82) 위의 책 권23, 고종 37년 12월 丙辰. 83) 위의 책 권24, 고종 38년 1월 壬戌朔, 王 在梯浦宮 宴洪高伊 高伊謂王曰 國之北鄙 殘破已甚 如家 無藩籬 何可復都舊京 宜據江以自固 我當歸奏皇后 無令東擾 王 悅 待之彌厚. 84) 위의 책 권24, 고종 38년 10월 戊申. 85) 위의 책 권24, 고종 38년 10월 丙辰, 王 命宰樞 及文武四品以上 議答詔 或言太子親朝 或言王老病 未得親朝 爲辭 待更詰遣太子親朝 未晚. 86) 위의 책 권24, 고종 39년 7월 戊戌.
- 206 와서 맞는다면 곧 군사를 퇴각시키겠다고 하였다. 지금 나라가 편안하고 위태한 것이 이 한 번 일에 있다. 만일 왕께서 나와 맞지 못하거든 반드시 태자 또는 安慶公으로 하여금 出迎하게 하면 반드시 군사를 돌릴 것이니, 사직이 기업을 연장하고, 만민이 按堵하게 되 며, 公도 또한 길이 부귀를 누릴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고 했다. 李峴이 또한 군사 를 따라 와서 보낸 편지에 작년과 금년에 내린 詔書의 조건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째서 出迎하지 않는가. 국가가 만일 기업을 연장하려거든, 한 두 사람을 보내 어 항복하고, 東宮이나 安慶公으로 하여금 출영하여 진정하고 빌면 군사를 돌릴 것이다. 원하건대 公은 잘 도모하라 고 하였다(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0년 7월). 이 사료는 앞서 몽고에 質子로 갔던 永寧公綧과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배반한 李峴 이87) 崔沆에게 편지를 보낸 기사이다. 여기에서 몽고의 요구는 고려 왕의 出降이며, 만 약 왕이 出降하지 못하면 태자 혹은 安慶公淐이 出迎해도 퇴병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永寧公綧은 몽병의 퇴병 조건 뿐만 아니라 최항의 부귀영화도 약속하였다. 그리고 李峴 도 이에 편승하여 고려가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청하고, 태 나 安慶公이 出迎하 면 몽고가 퇴병할 것이라고 최항을 설득하였다. 永寧公綧과 李峴은 누구보다도 고려의 실상을 잘 아는 사람들로써 최씨정권을 설득하지 않으면 결국 강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항은 몽고에 대해 계속적인 朝貢과 사신을 파견했지만 무익했고, 태자와 안경공의 파견은 위험을 좌초하는 것이라고 하여 재추들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出迎의 문제를 저지시켰다.88) 그러나 최씨정권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몽고는 계속해서 완강한 태도로 고려에 대한 六事로써 책임을 추궁하였다.89) 이러한 요구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려가 완전 항복할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이러한 몽고 측의 강경한 요구에 대해 고려는 出力供職을90) 다하고 있다는 입장으로 변명했지만, 적장 也窟은 계속해서 고려 국왕의 친조를91)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대 해 고려는 태자나 安慶公淐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는데,92) 이 것은 앞서 永寧公綧과 李峴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당시에 이를 반대했던 최항에 대해서 다시 제기된 것이었다. 또한 고려는 大將軍 高悅을 적장 也窟에게 보내어 타협을 시도하였다.93) 즉 고려는 이미 몽고의 요구에 따라 출륙을 준비 중이었는데 몽고의 재침 87) 위의 책 권24, 고종 39년 1월 丙午. 88)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0년 7월. 89) 高麗史 권24, 고종 40년 8월 戊午, 蒙古元帥也窟 遣人 傳詔於王 其詔 責以六事 曰朕 欲自白 日所出 至于所沒 凡有黎庶 咸令逸樂 緣汝輩逆命 命皇叔也窟 統師往伐 若迎命納欸 罷兵以還 若有 拒命 朕必無赦. 90)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8월 己未. 91)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9월 甲辰. 92)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8월 庚午. 93)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9월 戊寅.
- 207 - 입으로 인하여 늦추어지고 있으며, 몽고군이 철병하게 되면 요구하는 데로 모두 시행할 것임을 제시했지만, 也窟은 사신 高悅과 崔東植을 억류하고 李松茂를 보내어 모든 城의 항복 문서를 새롭게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고군이 퇴병하면 왕과 신하가 출륙하겠 다는 것으로 응하였다. 이러한 몽고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서 최항도 종래의 입장에서 후퇴했는데, 다음의 내 용이 그것이다. 宰樞致仕 및 文武四品以上 관원들에게 명령하여 적병을 물리칠 대책에 대하여 의논하 게 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다 태자가 나가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였다. 왕이 성을 내어 承宣 李世材를 시켜 꾸짖기를 태자를 보내면 後患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 있는 가? 이 의견이 누구에게서 나왔느냐 고 하니 內侍 閔陽宣이 왕에게 가서 말하기를 崔侍 中도 그 의견을 옳게 여겼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왕의 노여움이 좀 풀려서 대신들이 잘 알아서 처리하라 고 하였다. 왕이 또 世材를 崔沆에게 보내어 몽고 병영에 보낼 만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최항이 아뢰기를 이것은 저의 결정할 바가 아니오니 왕께서 처결하시기 바랍니다 고 하였다( 高麗史 권24, 고종 40년 10월 辛未). 여기에서 퇴직한 원로와 문무 4품 이상의 관원들이 몽고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태자 의 出降을 의결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자의 出降을 최씨정권이 반대했지만, 여기에 서는 고종 자신이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出降을 崔沆 역시 찬성했다는 점에서 고종도 수긍하게 되었고, 사신의 선발도 최항이 고종에게 미루는 입장을 취하기 도 하였다.94) 이러한 내용은 그 동안 최씨정권에 의한 지연과 거절의 자세에서 유화적인 자세로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적장 也窟에게 사신을 보내어 철병을 요구했는데, 也窟은 국왕이 江華에서 나 와 몽고 사신을 영접하면 철군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사신을 보내 왔다.95) 이에 고종 자 신이 몽고 사신을 친히 영접하였다.96) 또한 也窟은 達魯花赤의 설치와 江都의 성을 헐어 버리는 문제를 제시하였고, 그 부하 胡花는 물품을 요구하였다.97) 이러한 也窟과 胡花의 요구에 대해 고려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98) 먼저 고려 왕이 몽고 사신을 직접 영 접한다면 철병하겠다고 했으나,99) 군사 1만과 達魯花赤을 설치한다는 것은 출륙에 방해 가 됨으로 철수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城을 허무는 것은 고려의 풍속과 해적 94) 고려 조정과 崔沆이 태자의 출항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몽고의 침략상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것 으로 국가적 위기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1월 辛卯). 95)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1월. 96)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1월 辛卯. 97)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1월 丁酉. 98)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1월 戊戌. 99)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1월.
- 208 - 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胡花에게 보낸 답장에서 는 金銀은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며, 水獺皮와 紵布는 얻어내기가 어렵기 때 문에 성의만 표시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고려의 종래의 태도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편 고려는 몽고의 강경한 입장을 만회하기 위해서 그간 조정에서 논란되었던, 국왕 과 태자의 친조를 대신하여 王子 安慶公淐을 몽고에 보냈다.100) 이것은 몽고의 강경한 입장에 대한 고려 측의 태도 변화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安慶公의 파견으로 인 해 몽고의 철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101) 그러나 고려의 태도 변화와 상관없이 몽고는 6차 침략을 가해 왔는데, 이는 몽고의 근 본적인 의도가 고려의 완전 항복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6) 6차 전쟁 몽고와의 6차 전쟁은 5차 전쟁의 연속으로써102) 몽고의 대대적인 공세였고, 1259년(고 종 46) 4월에 고려 태자가 입조하여 완전 항복할 때까지 계속된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 려운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 민의 동향 역시 종래의 정부에 대한 항전보다는 침략자에 게 투항하는 변칙적인 형태를 나타내기도 하여 본토의 상황이 고려 정부로부터 이완되 고 있었다.103) 이러한 상황에서 몽고는 종래의 요구를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고려의 완전 항복을 요 구했고, 고려는 사신 파견으로 퇴병을 종용하는 태도를104) 계속 취하였다. ① 몽고 사신 多可 등 50명이 공문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국왕은 비록 육지로 나왔 으나 侍中 崔沆, 尙書 李應烈 周永珪 柳璥 등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것이 참으로 항 복한 것인가 라고 하면서 항복한 고을의 관리들을 왜 죽였느냐고 추궁하였다( 高麗 史 권24, 고종 41년 7월 戊午). ② 大將軍 李長에게 명령하여 몽고군의 병영인 普賢院에 가서 長이 돌아 와서 아 뢰는 바에 의하면 車羅大의 말이 君臣百姓들이 出陸하면 다 머리를 깎게 할 것이 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왕을 데리고 가겠다. 만일 어느 하나라도 좇지 않으면 군사가 돌아갈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위의 책 권24, 고종 41년 8월 壬辰). ③ 崔璘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제가 陜州丹溪에 가서 車羅大를 만났더니 그가 말하기 를 崔沆이 왕을 받들어 육지로 나오면 군사를 철수하겠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위 의 책 권24, 고종 41년 12월 甲午). 100) 위의 책 권24, 고종 40년 12월 壬申. 101) 위의 책 권24, 고종 41년 1월 丁丑. 102) 윤용혁, 앞의 책 p. 108. 103) 신안식, 앞의 논문 pp. 39 45. 104) 高麗史 권24, 고종 41년 10월.
- 209 이 사료들은 6차 전쟁의 원인과 고려의 태도를 보여 주는 내용들이다. 우선 사료 ①에 서 국왕은 이미 출륙을 했지만,105)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崔沆 李應烈 周永珪 柳璥 등이 출륙하지 않은 것은 진정한 항복이 아니었음을 강조했고, 몽고에 항복한 고을의 관리를 죽인 것을 추궁하였다. 이것은 앞서 고려 국왕의 출륙이 몽고군의 퇴병이라는 몽고의 요 구와 비교된다. 그리고 사료 ②에서는 몽고군의 퇴병 조건으로 君臣百姓들이 出陸하게 되 면 머리를 깎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왕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다. 또한 사료 ③ 에서는 최항이 국왕을 받들어 출륙하는 것이 퇴병의 조건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 었다. 이것은 고려의 완전 항복은 최씨정권의 항복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동안 몽고 측에서 왕과 태자와 안경공의 출륙을 계속 요구해 왔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당시 집권세력들의 완전 항복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몽고의 요구는 그 동안의 요구 사항들을 되풀이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잔악한 침략 행위를 계속하였다.106)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최씨정권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기보다는 자신들의 안일 에 빠졌다.107) 그에 따라 본토 백성들은 병란과 흉년이 든 이래로 해골이 들에 덮이고, 포로 되었다가 도망하여 京城으로 들어오는 백성이 연속되었다. 都兵馬使가 날마다 쌀 한되씩을 주어 구제하였으나, 죽는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라고108) 할 정도로 큰 피해 를 입었다. 이러한 민의 참상은 고려 정부의 위기 의식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으며, 몽고 에 대한 태도에도 적극적인 강화 교섭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몽고 사신을 잘 대접하더라도 별 소용이 없었지만 계속적인 사신 파견을 위해서는 몽고 사신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109) 의견이 개진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고려와 몽고가 빈번한 사신 교류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의도가 대립되는 가운데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음 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강화 교섭의 실효성은 최씨정권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최항은 한편으로는 타 협을 추진했지만, 한편으로는 종래의 항전 입장을 고수하였다. 최항이 종래의 입장을 고 수했던 것은 郞將 尹椿의 건의에서 엿볼 수 있다.110) 즉 尹椿이 반하여 몽고에 들어갔다 가 다시 도망 와서, 몽고가 아직까지는 水戰에 능하지 못했던 점을 알리고, 고려는 섬에 서 屯田을 경작하고 淸野戰術로써 맞설 수 있음을 제시하여 최항도 이를 받아들였던 것 이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최씨정권에 의한 대몽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정권유지의 모체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다시 강조시켜 주었던 105) 위의 책 권24, 고종 41년 7월 丁巳. 106) 위의 책 권24, 고종 41년 12월 및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2년 4월. 107)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2년 2월, 崔沆 進酒饌于王 召太子諸王 宴于內殿 作樂徹夜 時民多餓 莩 王制於權臣 不得已設此宴. 108) 위의 책 권17, 고종 42년 4월. 109) 高麗史 권24, 고종 42년 9월 己酉. 110)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3년 6월.
- 210 - 것이 宰樞會議에서 몽고의 계속적인 침략에 대한 봄철 공납을 중지하자는 강경한 입장 이111) 나타났던 예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의 종래의 입장에 대한 고수에도 불구하고 강화 교섭은 계속되었다. 몽고 측의 車羅大와 永寧公이 고려 국왕이 나와서 몽고 사신을 영접하고, 태자가 친조한 다면 군사를 철수하겠다고 약속하였다.112) 이에 대해 고려는 宰樞들이 몽고의 퇴병을 의 논했지만 별다른 대책이 나오지 못했는데, 고종은 퇴병이 이루어진다면 태자의 出迎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113) 따라서 사신 愼執平을 車羅大에게 보내어 퇴병의 조건으로 몽고측의 모든 요구 사항을 수용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114) 이러한 고려의 태 도는 몽고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그것은 몽고 황제의 철병 명령과115) 車羅大의 철병으로 도116)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京城에 계엄이 해제되었고, 6차 전쟁이 일어난 지 15개월 만에 몽고의 퇴병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117) 하지만 고려의 완전 항복을 받아낸 것 은 아니었다. 한편 1257년(고종 44) 최항의 사망은 이후 고려의 태도 변화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 고,118) 최의 역시 최항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겠지만 새로운 국면을 맞는 것이었다. 또한 몽고 측에서도 고려 왕이 만일 친히 오면 곧 회군할 것이며, 태자를 몽고에 보내면 영구히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회유하였다.119) 이에 대해 고려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태자 의 입조를 추진하였다. 즉 宰樞들이 태자를 몽고에 보내어 강화를 맺자고 요구했는데, 왕이 이를 거절 하자 崔滋와 金寶鼎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왕의 허락을 받고 먼저 종 친을 보내어 상황을 살피자는 의견으로 종실인 永安公僖를 車羅大에게 보냈다.120) 그리 하여 永安公僖는 몽고 측에서 태자의 입조가 있게 되면 곧바로 퇴각하겠다는 언질을 받 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재추들이 태자의 입조를 적극 권유했으나, 고종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지만 왕의 결정이 있기 이전에 이미 재추들이 金軾을 보내어 퇴병의 조건 으로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121) 이에 몽고 측에서는 퇴병한 이후 태자와 松山이122) 함께 올 것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침략 행위도 금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몽고와의 강 화가 최씨정권과 왕권이 아닌 宰樞들의 의견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는데, 물론 이들은 친 111) 高麗史 권24, 고종 44년 1월 丙辰. 112) 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4월 壬申. 113) 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4월 癸酉. 114) 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4월 乙亥. 115) 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9월. 116) 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9월 庚戌. 117) 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10월 辛未. 118)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윤4월. 119)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7월 壬申, 金軾 自車羅大屯所安北府還云 車羅大曰 王若親來 我即回兵 又令王子入朝 永無後患. 120)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7월. 121)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7월 戊子. 122) 고려에 투하한 몽고인(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10월 甲申).
- 211 - 무인정권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최씨정권의 세력이 최우 최항 때보다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車羅大에게 물품을 진상하면서,123) 몽고 측의 의향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태자의 입조 문제와 몽병을 막을 계책이 계속해서 논의되었고,124) 이에 먼저 왕자 安慶公淐을 입조시켜125) 몽고의 태도를 살피게 되었다. 결국 그간 몽고의 요구에 대해 최씨정권은 이를 무마 내지는 지연으로 일관하였지만 몽고의 계속적인 침략에 의해 최씨정권의 의지는 점차 퇴색하게 되었고, 왕권과 宰樞들 에 의한 적극적인 강화가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강화 교섭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1258년(고종 45) 3월에 崔竩의 제거로126) 인 한 최씨정권의 붕괴였다. 7) 崔氏政權 붕괴 이후의 講和交涉 최씨정권붕괴 이후 강화 교섭은 1259년(고종 46) 4월에 태자 倎의 몽고 입조를 전후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최씨정권의 붕괴 이후 고려는 먼저 몽고군의 퇴병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출륙을 준비하였다거나,127) 몽고 사신을 고려 왕이 직접 만나기도 했던128) 상황에서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태자의 입조 문제가 중요한 내용으로 부각되면서 여 러 차례의 줄다리기가 있었다. 몽고는 고려 국왕과 태자가 西京으로 出降하면 퇴병한다 는 조건을 제시하지만, 왕은 가지 않고 永安公僖와 中樞院使 金寶鼎을 보냈다.129) 그리 고 몽고 측의 余愁達이 고려 국왕은 出迎하지 않아도, 태자의 迎降이 있을 시에 회군하 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130) 또한 고려의 태도에 별 반응이 없게 되자 余愁達이 다시 태자를 만나자는 최후통첩을 하고 있었지만, 왕은 出迎하지 않고 사람만 보냈다.131)) 그 리고 고려 왕이 친히 몽고 사신을 접대했고, 몽고 측에서도 태자의 出迎이 이루어지면 퇴병을 하겠다고 하였지만 고려 측에서는 태자의 稱病으로 거절하였다.132) 이와 같이 고려는 최씨정권의 붕괴로 왕권이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아직은 왕권을 중 심으로 하는 실질적인 세력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강화 교섭도 종래의 입 장으로 지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강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출륙을 123)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7월 壬寅. 124)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11월 癸丑. 125) 위의 책 권24, 고종 44년 12월. 126)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3월 丙子. 127)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4월 己酉, 王 聞車羅大遣使 來覘出陸之狀 是日 出文武百官于昇天府移 市肆 修宮闕 官僚家戶. 128)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5월 壬寅. 129)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6월 丙申. 130)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6월 丁未. 131)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7월 丁未. 132)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8월 己亥.
- 212 - 저지했던 것은 전적으로 최씨정권의 탓으로 돌리면서 철병을 요구하기도 하였다.133) 이러한 고려의 소극적인 태도에 몽고는 재침입을 기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고의 재 침을 맞아 항복할지와 지킬지를 의논하는 가운데 平章使 崔滋와 樞密院使 金寶鼎이 出降 을 적극 권유하였다.134) 몽고 측에서도 고려가 尹椿과135) 松山의 말을 믿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고, 또한 王萬戶는 서경에 城을 수축하고 戰艦을 만들고 屯田을 설치하는 등 영구히 주둔할 기반을 세우고 있었다.136) 이에 따라 고려는 출륙과 태자의 입조를 약 속하게 되었고, 몽고는 이 해 4월에 태자가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다.137) 그리하여 1259년 (고종 46) 4월에 태자가 몽고에 입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자의 입조는 고려의 완전 항 복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 고려와 몽고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태자가 東京에 도착하여 몽고의 재침 소식을 듣고, 이전에 태자의 입조가 있게 되면 철수하겠다는 약속을138) 상기시켜 몽고군의 출병을 중지시켰으며, 몽고 측에서 江都의 城을 헐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139) 이는 몽고 측에서 고려의 완전 항복을 기도하는 것이 었으며, 고려 측에서도 江都의 內城과140) 外城을141) 허물었던 것을 보더라도 몽고의 요 구 사항을 적극 수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왕권과 宰樞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강화 추진과 투항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또한 지금까지 최씨정권은 정권유지를 위해 소 극적인 임전 태세와 강화를 추진했지만, 왕권과 宰樞들의 입장과 같이 굴욕적인 강화를 추진하지는 않았던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국내의 사정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이었는데, 무인정권이 아직 잔 존 하고 있었던 영향을 고려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집권무인세력들이 고종 의 사망 이후 安慶公淐을 추대하려고 하자 宰樞들이 적극 반대 입장을 피력했던 예에서 엿볼 수 있다.142) 여기서 金仁俊이 安慶公을 왕위에 추대하려했던 의도는 강화 과정에서 무인 세력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무인 세력과 왕권 및 문신 세 력과의 정치적 대치 상황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143) 이에 대해 몽고 측에서는 太子 133) 위의 책 권24, 고종 45년 12월 甲辰. 134) 高麗史節要 권17, 고종 46년 1월. 135) 최항에게 청야전술을 권했던 자(위의 책 권17, 고종 43년 6월). 136) 高麗史 권24, 고종 46년 2월 庚子. 137) 위의 책 권24, 고종 46년 3월 壬子. 138) 위의 책 권24, 고종 43년 4월 壬申. 139) 위의 책 권24, 고종 46년 6월 庚辰. 140) 위의 책 권24, 고종 46년 6월 癸未, 始壞江都內城 客使 督役甚急 諸領府兵 不堪其苦 邑曰 若知 如此 不如不城. 141) 위의 책 권24, 고종 46년 6월 庚寅, 客使 聞外城不壞曰 外城猶在 可謂誠服乎 盡壞乃還 國家賂以 重寶 即令都房 壞外城 時 都人以謂 內外城盡壊 必有以也 爭買船 船價湧貴. 142) 위의 책 권24, 고종 46년 6월 壬寅. 143) 安慶公淐은 강화 과정에서 수차례 몽고에 다녀온 인물이다. 金仁俊 세력들이 이를 이용하려 했 던 점은 왕권을 장악하는 가운데, 몽고와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를 실현시키려는 목적이었을 것 이다.
- 213 - 倎을 왕위에 세우면 고려는 반드시 몽고에 복속하리라는 의도로써 몽병의 호위로 태자 를 귀국시켜 왕위를 계승시켰다.144) 몽고 세력에 의지한 왕권의 회복은 이후 고려와 몽고의 관계가 1세기에 걸쳐 종속관 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굴욕적인 강화는 몽고의 강압에 의한 고려 의 종속화와 무리한 요구를 야기시켜 1270년(원종 11)에 三別抄 봉기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145) Ⅳ. 맺 음 말 지금까지 최씨무인정권의 대몽강화교섭을 崔氏政權의 對蒙講和交涉의 姿勢와 對蒙講 和交涉의 推移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 대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崔瑀 정권은 1차 전쟁에서 민과 결합된 가운데서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江華遷都 를 강행함으로써 스스로 항전 의지를 저하시켰다. 강화천도의 목적은 본토의 민과는 별 개로 이루어졌으며, 자신들의 정권유지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적인 몽 고의 침략에 의해서 위기 상황을 자초했으며, 이에 따라 講和의 타협점을 찾기에 급급했 다. 이러한 가운데 몽고 자체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침략의 양상이 소강 국면에 처하게 되면, 최우 역시 타협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지켜 나가는 정책을 세웠다. 이러한 최우 의 정책은 崔沆 정권에 와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최항 역시 항전과 타협이라는 이중적 인 정책을 펴 나갔으며, 강화 교섭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세는 아니었다. 이러한 자 세는 몽고의 계속적인 침략을 야기 시켰으며, 고려 정부 내부에서도 왕권과 宰樞들에 의 한 강화의 의견들도 강력하게 제기되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 내부의 상황은 崔竩 정권에 와서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최의 정권도 몽고의 대대적인 공세 와중에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정책을 그대로 펼쳐 나갔지만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반발은 곧 최의의 제거를 통한 최씨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최씨정권의 붕괴는 곧 몽고와의 강화 교섭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기존의 무인정권과 왕권 및 재추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들 간의 새로운 대립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최씨정권의 강화교섭 자세는 다음의 강화 교섭의 추이에 의해 그 실제 를 살펴볼 수 있다. 1차 전쟁은 사신 著古與의 피살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고려에 대한 전격적인 침략으로 고려를 몽고의 속국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발발되었다. 여기에서 몽고는 집권세력의 항복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요구를 가해 왔다. 이러한 몽고의 요구는 최씨정권으로 하여금 위 144) 元史 권4, 세조 원년 3월. 145) 삼별초 봉기 세력들이 추대했던 인물은 몽고와의 강화 과정에서 전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承化侯 溫이었다. 이는 이들의 대몽항전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이후 이들 봉기에 가담 하는 세력들도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 214 - 기 의식을 가지게 하였고, 최씨정권에 의한 강화천도로 이어져 지루한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2차 전쟁은 고려의 出陸과 국왕의 親朝 문제가 거론되었지만, 적장의 피살로 짧은 시 일에 끝났다. 출륙과 국왕 친조는 몽고측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지만, 고려 측에서는 지연 정책과 최우의 강경 정책에 의해서 위기 상황에 대처하였다. 3차 전쟁은 몽고의 세계 정벌 구도에서 이루어진 본격적인 고려 침략이었으며, 고려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서도 최씨정권은 굴복보다는 강경한 입장을 띠면서도 한 편으로는 타협을 기도하였다. 몽고의 침략이 거세질 때에는 국왕에 의한 사신 영접을 통 해서 철병을 얻어내기도 했고, 국왕의 친조도 여러 구실을 핑계로 삼아 모면하였다. 이 러한 가운데 몽고 황제 태종의 사망은 고려로 하여금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4차 전쟁은 3차 전쟁 이후 약 7년간의 휴식기 이후에 벌어졌다. 하지만 몽고 황제의 사망은 또다시 고려로 하여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였고, 몽고 역시 종래의 원칙론을 제시할 뿐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고려에서도 崔瑀의 사망과 崔沆의 집권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변동기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새로운 몽고 황제의 즉위와 더불어 또다시 전 쟁을 야기시켰다. 5차 전쟁은 새로운 몽고 황제의 즉위를 통한 종래의 입장을 재차 확인하는데서 비롯 되었다. 이 전쟁은 몽고의 대대적인 공세였고, 또한 종래의 강경 입장에서 유화적인 여 러 시책도 제시되었다. 즉 국왕의 친조 대신 태자 혹은 왕자의 입조를 제시하였던 것이 다. 최항 역시 항전과 타협을 통한 임전 자세를 표방했지만, 몽고의 공세와 고려 정부 내부에서의 반발 등을 경험하면서, 한편으로는 종래의 입장을 견지하는 가운데 왕자를 몽고에 입조시켜 철군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몽고는 또다시 6차 침입을 가해 왔 는데, 이것은 몽고의 근본적인 의도가 고려의 완전 항복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6차 전쟁은 몽고의 대대적인 공세였고, 고려 태자가 몽고에 입조하여 완전 항복이 이 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는 고려 정국의 상황이 이미 고려 정부로부터 이완되 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몽고의 거센 침략 행위는 계속되었고, 고려 정부에서도 적극 적인 강화 교섭 논의가 있었다. 또한 崔沆이 사망하고 崔竩가 정권을 잡았으나, 최씨정 권의 세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이것은 곧 몽고의 대대적인 공세에 위기 의식을 느끼던 무리들에 의해 최의가 제거되면서 최씨정권의 붕괴를 가져왔고, 강화 교섭도 적극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최씨정권 붕괴 이후는 왕권과 宰樞들을 중심으로 하는 적극적인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종의 사망은 몽고에 입조했던 태자 세력과 새로운 무인정권에 의한 정권쟁탈 을 야기시켰으나, 몽고 세력에 의지한 원종의 즉위는 곧 고려의 종속화를 가속시켰다. 결과적으로 대몽전쟁에서의 강화 교섭은 최씨정권의 독단에 의해서 좌우되었고, 최씨 정권은 항전과 타협이라는 이중적인 정책에 의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
- 215 - 책은 본토의 민과는 별개의 것이었고 민의 봉기를 야기시켰다. 그런데 이와 같은 최씨정 권의 자세는 정권유지의 차원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굴욕적으로 항복하지는 않았다. 하 지만 최씨정권에 의한 강화 교섭은 실패했으며, 그 결과 정권의 몰락 및 1세기에 이르는 외세 간섭기로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