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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 國史館論叢 第77輯 가 높아졌다.35) 주목해야 할 점은 외획으로 조세금을 얻은 상인이 엽전 수송시의 불편과 제반 수송비를 덜기 위해 개항장이나 대도시에서 일본지폐로 태환하여 가는 행태가 점차 늘어가고 있었던 점이다.36) 이러한 양상은 다음 자료들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平壤錢 대량 남발로 엽전시세가 下向 一路를 치닫자 지폐 소지자는 항상 意外의 이득을 얻기 때문에 기민한 조선상인들은 엽전이 더이상 하락할 것을 예상하고 너도 나도 일본지폐 를 買占하여 엽전시세 하락에 의해 巨利를 차지하려고 하는 자가 많다.37) 世子宮 誕辰 科擧에 응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儒生 등 대부분이 일본지폐를 휴대해와 當地(京城)에서 교환하기 때문에 일시 葉錢需要를 증가시켰다.38) 大邱 商民으로서 공전을 挪劃하여 장사하는 자는 7 80명이온바 金允蘭 鄭孝先 徐允瑞 李泰模 姜寅初 등이 가장 豪商이라. 각기 犯한 공전이 1백만 냥은 족히 되며 本港(東萊 港: 인용자) 일본은행(제일은행: 인용자)에 積置한 엽전이 현재 70만 냥이온대 일본인에게 탐문한즉 모두 말하기를 대구 상민이 맡기고 지폐로 바꾸어 간 것이라 하니 39) 일본화폐의 조선내 유통량은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약 100 150만원 정도였다가40) 청일전쟁 직후에는 600만원 가량으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이고 1898년 일본의 금본위제 이행을 계기로 하여 감소되었다가 1900년에 250만원 정도의 유통량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내 화폐유통 총액 약 800 1,000만원의 약 25 31%에 달하는 비중이었 다.41) 한편 1894년 현재 조선에 지점을 설치한 일본계 은행은 제일은행(1878), 제18은행 (1890), 제53은행(1892) 등 3개였지만, 이 중 제일은행은 자본축적이 미약한 단계에 있 었던 일본이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하는 데 선봉을 맡고 있었다.42) 이 은행은 부산 (1878), 원산(1880), 인천(1883), 서울(1887) 등에 지점 또는 출장소를 설치하여 일본인 의 무역 상업 금융은 물론 1886년부터는 일본정부와의 위탁계약 하에 조선산 금지금 매 입으로 조선의 부를 유출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43) 그러나 제일은행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 35) 慶尙全羅二道農商況 ( 明治官報 2536호, 明治 24년 12월 11일). 36) 庚寅十月初四日 京居劉景九所志 ( 各處所志謄錄, 규18015). 37) 仁川港貿易景況(6月中) ( 明治官報 2746호, 明治 25년 8월 22일). 38) 京城商況(3月) ( 明治官報 2962호, 明治 26년 5월 17일). 39) 光武 3년 7월 25일 訓令 慶南北關察使 ( 訓令編案 5책). 40) 오두환, 앞의 책, p.95. 41) 도면회, 앞의 논문, pp.391 392. 42) 제18은행 제53은행의 조선에서의 금융활동은 1894년까지 극히 미미한 것으로 나타난다(高 嶋雅明, 앞의 책, pp.240 247). 43) 村上勝彦, 植民地 (大石嘉一郞 編, 日本産業革命の硏究 下, 1975; 정문종 역, 식민지, 한울출판사, 1984) 참조.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93 - 자본력의 견실함에 있었다기보다는 일본 및 조선정부의 예금을 취급하고 있었던 점, 조선 해관세 취급특권을 획득했던 점, 이를 바탕으로 한 조선정부에 대한 소규모 차관의 지속 적인 공여 등 다른 일반은행에는 없는 특별한 신용창조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884년에 획득한 조선 해관세 취급특권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일개 사립 은행인 제일은행이 조선의 중앙은행과 같은 공적 성격을 획득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첫 째, 조선해관세 취급 업무가 이자 부담이 전혀 없고 오히려 수수료를 받는 유리한 사업이 었다는 점(처음에는 0.25%, 1887년의 제2차 계약 때는 5%), 둘째, 해관세라는 가장 확실하 고 안정적인 예금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 셋째, 제일은행이 해관세로 멕시코은화 일본은화 일본지폐 조선엽전 등의 화폐를 수납하고 그 대신 납세자에게 예탁어음을 발 행했던 바 이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은행권과 유사하게 유통되면서 일본상인이 발행하 는 한전어음 의 신용도를 제고시키고 나아가서는 1902년부터 발행되는 제일은행권의 신 용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 등이다.44) 당시 해관세는 수출세 수입세 톤세를 합쳐서 1885 1894년간 총계 약 343만원 정 도의 거액이었으며, 1897년 이후에는 매년 100만원을 넘는 수준이었는데 이는 당시 정 부 재정수입의 15 30%에 달하는 액수였으므로45) 조선정부에게는 실로 중요한 재정수 입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제일은행이 예금으로 확보한 해관세 등 공금예금은 단순 히 조선정부의 요구에 의해서만 지출되는 不動資金이 아니라 자본력이 취약한 일본상인 들의 상업 무역 자금으로 유용됨으로써 일본상인의 조선상인에 대한 금융적 지배를 직 접 지원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는 1897년 일본상인들의 일본정부에 대한 진정서 내용 중, 關稅 및 기타 公金이 탁지부에서 제일은행 등에 예입된 것은 거의 100만원에 달하고 이 금액의 대부분은 日韓貿易의 運轉資金으로 이용되어 널리 각지에서 유통되고 있습니다46) 라는 고백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몇몇 유력한 일본상인을 제외하고는 이 일본은행으로부터의 자금 융자에 바탕 해서 무역 상업자본을 마련했던 것이고 이러한 자금이 곡물 수출 면제품수입 구조 에 편입되어가던 조선상인들에게 주로 곡물 구입을 위한 선대자금으로 대부되어 금융 연쇄 체제를 형성하고 일본인들의 곡물수출과 내지행상을 촉진시켰다.47) 44) 村上勝彦, 위의 논문(국역본), p.59. 45) 金順德, 1876 1905년 關稅政策과 關稅의 운용 ( 韓國史論 15, 1986) p.69. 46) 京城府史 제2권, pp.663 664. 47) 도면회, 화폐유통구조의 변화와 일본금융기관의 침투 ( 1894년 농민전쟁 연구 1, 1991)

- 94 - 國史館論叢 第77輯 제일은행은 해관세를 한국정부 명의의 예금으로 예치했을 뿐 아니라, 조선정부의 요청 에 따라 여러 차례 소규모 차관도 제공하였다. 예를 들어 1898년 가을 궁내부의 요청에 의해 홍삼제조비로 20여 만원,48) 1901년 9월 한국정부의 요청에 의하여 재정차관 50만 원,49) 1902년 12월말에 또 탁지부에 10만원50) 등 전후 100여 만원 가량의 차관을 제 공하였다. 또, 미국인 콜브란의 요청에 의하여 그가 담당한 종로 용산 사이의 電車線路 공사비로 15만원을 제공하는51) 등 한국 내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위를 불안하게 한 것은 후술하듯이 1899년부터 화폐제도 개혁과 은행 설립 등을 위하여 한국정부가 다방면에 걸쳐 추진한 차관교섭이었다. 물론 제일은행도 차관교 섭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러시아 프랑스 미국 영국 등 다른 열강들로부터 조선정부가 차관을 얻게 될 경우 제일은행은 한국에서의 영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셈이었 다. 제일은행은 이미 1895년 전후부터 독자적인 은행권을 발행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 는데, 1900년 4월 한국정부가 프랑스계의 금융자본인 雲南신디케이트 와 폐제개혁 차관 조약을 체결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차관조약을 무효화시키는 공작 을 펴는 한편, 조약 이행이 잠시 지체된 9월 이후부터 은행권 발행 준비를 서둘러 한국 정부에는 한 마디의 연락도 없이 1902년 5월20일부터 부산 목포 인천 경성 지점에서 1원권부터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일은행권은 金貨와의 태환이 보장된 태환지폐도 아니고 일본은행태환권과의 태환만이 보장된 불환지폐였기 때문에 제일은행이 상당한 은행권 발행 이익을 취득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인으로서는 그만큼의 상품 및 노동력을 기만적으로 수탈당하게 되는 셈이 된다. 제일은행권이 신용을 획득할수록 한국의 화폐 금융은 일본의 일개 사립은행에 의 해 통제되고 나아가서는 그 자본 창출력에 의해 상권마저 일본 상인에게 빼앗길 우려가 높은 것이었다.52) 제일은행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경인지방 상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한국정부는 1902년 9월 11일 제일은행권 수수 금지령 을 각 지방에 내렸다. 그러나 곧바로 일본정 부의 거센 항의에 부딪친 한국 정부는 4개월간의 외교적 분쟁 끝에 일단 굴복하여 1903 년 1월 8일 금지령을 해제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금 이용익 및 보부상단체 상무사, 경 p.241. 48) 皇城新聞 광무 3년 8월 5일 잡보. 49) 皇城新聞 광무 5년 9월 9일 잡보. 50) 皇城新聞 광무 7년 1월 10일 잡보. 51) 皇城新聞 광무 3년 8월 14일 잡보. 52) 은행권의 유통은 주로 대부에 의하여 이루어지므로 제일은행권이 일본상인 및 한국의 매판적 상인에게만 선별적으로 대부되면 이들의 자본력은 여타 한국상인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는 곧 상업 무역에 있어서 주도권 획득의 기초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95 - 인지방 상인들에 의해 1월 2월, 6월 11월까지 반대운동이 끈질기게 진행됨으로써53) 제일은행권의 발행고는 더 이상 증대되지 못하고 1903년 말 현재 87만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54) 화폐주권이 제일은행 조선지점에 의해 침탈되기 시작함으로써 한국정부는 중 앙은행 설립과 화폐제도 개혁을 최대의 급선무로 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1903년 3월 준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은행조례 와 태환금권조례 를 반포한 것 은 그 귀결이었다. Ⅱ. 근대적 금융기관의 설립과 운영 1. 朝鮮銀行(韓興銀行) 조선정부는 1880년대 중엽부터 외채를 도입하여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화폐를 발행하 고자 하는 시도를 여러 차례 했으나 종주국으로 행세하는 청국의 방해로 좌절을 겪어야 했다.55) 1894년 개화파정권 역시 중앙은행 설립 구상을 명백히 지니고 있었지만 재정자 금의 궁핍으로 화폐발행 기능은 典圜局에, 國庫金 취급 기능은 미상회사 공동회사 등에 맡기는 임시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미상 회사 공동회사의 특권은 폐지되었고 화폐발행 기능만 전환국에 맡겨져 있는 상태로 되 었다. 갑오개혁기에 실현되지 못한 금융기관 설립의 움직임은 1896년 이후 정부 관료들로부 터 시작되어 1896년 6월 25일 大朝鮮銀行所(이하 朝鮮銀行)의 창립으로 귀결되었다. 조선 은행의 설립은 이미 1895년 후반 탁지부대신이었던 沈相薰의 구상으로부터 시작되었 다.56) 심상훈은 프랑스공사의 제의를 받고 국채 300만원을 프랑스회사로부터 얻어서 전 국 조세금 취급권을 갖는 은행을 설립하려 하였다. 그러나 탁지부대신으로서 직접 나서다 가 훗날 책임질 일이 두려워 아관파천 이후 중추원의관으로 좌천되어 있던 安駉壽로 하 여금 프랑스공사 플랑시를 통하여 피브릴회사 사원 그릴을 만나게 하고 교섭을 담당하게 하였다.57) 안경수가 그릴을 만난 바에 의하면 그릴은 조선은행의 자본금으로 300만원을 53) 자세한 경과에 대해서는 나애자, 앞의 논문, pp.79 84 및 오두환, 앞의 박사학위논문, pp. 241 246 참조. 54) 第一銀行, 株式會社第一銀行韓國支店出張所開業以來營業狀況, pp.3 4. 55) 오두환, 앞의 책, pp.131 134. 56) 日本外交文書 제30권, 문서번호 601 議政 金炳始ノ動靜報告ノ件 (附記)朝鮮國ノ內政ニ 關スル安駉壽ノ談話(一).

- 96 - 國史館論叢 第77輯 조선정부에 대여하고 조선정부는 향후 50년동안 연 6만원씩의 이자를 피브릴회사에 지불 하면 원금 상환이 완료되는 것으로 하되 조선은행에 전국의 조세금을 취급하는 특권을 갖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안경수는 이에 대해 이 상담은 일견 유리할 것 같지만 잘못하면 헛되이 피브릴회사를 살찌울 뿐 아니라 조선의 재정이 피브릴회사에 좌우되는 불행을 초 래할 것이라 생각하여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은행 설립 논의는 1896년에 들어 다시 제기되었다. 6월 16일 탁지부대신 沈相薰, 탁 지부협판 李在正, 농상공부협판 李采淵, 그리고 金宗漢 安駉壽 李根培 尹奎燮 方漢德 崔錫肇 우항선 오영열 등이 은행 설립 논의를 하였다.58) 이들은 새로 설립하는 은행 이 日本銀行과 같이 정부재정기관으로서 탁지부 국고금을 취급하는 특권을 획득하게 하 려고 했다. 그러나 탁지부 재정고문 브라운이 이 은행이 충분한 신용을 쌓기 전까지는 국 고금 취급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반대함으로써 半官半民의 사립은행을 설립하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였다.59) 조선은행의 은행장은 안경수가 맡고60) 장정과 조례는 김종한 안경수 이근배 윤규섭 이 만들기로 했는데61) 은행 설립을 청원하여 정관과 함께 탁지부의 인가를 받은 것은 다 음해인 1897년 2월 10일이었다.62) 그러나 예상과 달리 주식 모집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창립광고문에 의하면 자본금은 20만원으로 하고 4천 주(매주당 50원)의 주식을 모집하는 것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했으나63) 1898년 말까지 모집한 자본금은 6만원에 그친 것으로 확인된다.64) 조선은행 창립 발기인의 면면을 보면, 김종한, 안경수, 이완용, 이채연 등 독립협회 발 기인으로 참여한 현직 고관들과 이근배, 윤규섭, 이승업 등 상인들이었다. 김종한은 갑오 57) 안경수로 하여금 교섭에 나서게 한 것은 그가 이미 1891년에 典圜局幇辦으로 고종의 명령을 받고 일본의 화폐제도를 시찰하고 新式貨幣條例 제정작업에도 참여한 경력의 소유자였기 때 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석륜, 앞의 책, pp.233 234 및 오두환, 앞의 책, pp.135 141 참조. 58) 독립신문 건양 원년 6월 18일 잡보. 59) 本年上半期間仁川港金融ノ景況 ( 日韓通商協會報告 제14호, 明治 29년 10월) p.57. 60) 山口精, 朝鮮産業誌 下, p.25. 61) 독립신문 건양 원년 6월 18일 잡보. 62) 山口精, 朝鮮産業誌 下, p.25. 63) 독립신문 건양 원년 6월 13일 대조선은행소 창립 광고문. 은행 창립 광고의 일자를 6월 25일로 하면서도 광고는 그보다 12일이나 앞선 6월 13일에 게재하고 있다. 64) 러시아 大藏省(국역), 韓國誌 -본문편-(정신문화연구원) p.519. 조선은행의 자본금 규모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앞의 山口精, 朝鮮産業誌 에서는 10만원, 信夫淳平 의 韓半島 (1900年刊)에는 3만원 내외로 기록하고 있으나 1898년 한국 탁지부재정고문으로 잠시동안 임명되어 탁지부 재정 정리 작업을 했었던 알렉시에프의 보고가 더 정확할 것으로 판단되어 韓國誌 통계를 인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97 - 개혁 이전까지는 민씨 척족정권하에서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다가 갑오개혁기에 궁내부 협판, 1896년 6월 현재 侍從院卿을 맡고 있어65) 왕실 측근 인물로 판단된다. 안경수는 갑오개혁기의 주도세력으로 활발한 개혁활동을 하다가 아관파천 이후 失勢하기 시작하여 중추원의관으로 좌천되었고 이후에는 1898년 8월 고종폐위 음모사건으로 망명할 때까지 독립협회 활동과 각종 회사 설립에 참여하였다.66) 이완용은 정동구락부의 핵심세력으로 갑오개혁기에 학부대신에 발탁된 데 이어 아관파천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1897년 7월 까지 외부대신으로 재직하면서 학부대신서리 농상공부대신서리 임시서리탁지부대신 등 요직을 거쳤다. 이채연은 초대 주미공사관의 통역으로 진출하여 갑오개혁기에 농상공부협 판에 임명되었다가 의흥군수로 좌천, 아관파천 이후 다시 농상공부 협판, 이어서 1896년 10월 한성판윤에 임명되는 등 정동구락부 계열의 인물이다.67) 이에 반해 이근배는 1885년 정부의 개화정책 하에 설립된 機器局 委員, 1894년 7월 탁지아문참의 등 중간급 관직을 역임하였지만, 관직 생활보다는 위 독립협회 발기인 그룹 과 함께 대조선저마제사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68)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 으며,69) 정부 상납금을 외획받아 미곡무역에 종사70)했을 뿐 아니라, 1899년에는 국내철 도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추대되는 등71) 활발한 경제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윤규섭 은 1898년 10월 3일 중추원 3등의관으로 임명72)되기 이전에는 관력이 없고 갑오개혁기 에 공동회사 사원으로 활동하고 1900년 漢城郵遞司長으로 상업활동에 종사한73) 것으로 보아 상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李承業은 1896년 6월에 다시 조직된 상무회의소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74) 한성은행 발기인으로도 참여하고 있으며,75) 開城의 대규모 蔘圃를 사들였던 점 등76)으로 볼 때 한성의 대상인이었을 것이다. 65) 朱鎭五, 獨立協會의 主導勢力과 參加階層 ( 東方學志 77 78 79합집, 1993) p.668. 66) 宋京垣, 韓末 安駉壽의 政治 經濟活動 硏究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1993) pp.19 66. 67) 朱鎭五, 앞의 논문, pp.668 670. 68) 독립신문 건양 2년 6월 12일 논설. 69) 독립신문 광무 2년 1월 27일, 2월 26일 잡보. 70) 독립신문 광무 2년 3월 31일 잡보, 탁지부에서 각도각군 상납전 중에서 40만 원을 외획 하여 고영근 이근배 정종윤으로 하여금 미곡 산지에 가서 시가대로 무곡하여 서울로 실어 올려 서울 인민의 양식을 풍족하게 하려 하였더니. 71) 皇城新聞 광무 3년 8월 17일, 9월 20일 잡보. 72) 安龍植, 大韓帝國官僚史硏究 Ⅰ(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1994) p.436. 73) 皇城新聞 광무 4년 3월 21일 잡보, 漢城郵遞司長 尹奎燮氏가 平理院에 被囚한지 月餘러니 昨日에 蒙放하야 從近히 崔錫肇氏와 함께 燕台에 往 야 昨年 蒸造한 官蔘을 放賣한다더라. 74) 독립신문 건양 원년 6월 30일 잡보. 75) 독립신문 건양 2년 3월 25일 한성은행광고. 76) 皇城新聞 광무 2년 9월 12일 잡보, 南署 銅峴사 前主事 朴有必氏가 前遂安郡守 玄興澤 氏의게 松都蔘圃 三千間을 買入 였다가 朴氏가 도로 茶洞셔 사 前判官 李承業의게 二十八 萬兩에 結價 야 放賣하였.

- 98 - 國史館論叢 第77輯 이상의 분석에 의하면 조선은행 창립 발기인은 곧 독립협회 설립을 발기한 고위 관료 와 소수 상인들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은행의 영업상황은 독립협회 운동의 성쇠에 따 라 부침하고 있었다. 조선은행은 초기에 독립문 건립 기금 수취,77) 독립협회 월보 판 매78) 등 초기 독립협회운동과 관련되어 운영되었고 1897년 2월 한성은행과 함께 정부의 1896년도 잉여금 예치 교섭을 받고79) 한성은행과 함께 탁지부 국고금 954,555원 26전 8리를 예치하고 있는 등80) 호조건에 놓여 있었다. 1897년 8월 21일에는 조세금 운송 및 국고금 출납 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은행 지소 를 광주 진주 황주 평양 개성에 설치하겠다는 청원을 올려 탁지부의 인가를 받았으 나 실제로 개설한 적은 없다. 1898년 2월 18일 국고금 38,657원 48전 8리를 100원당 월 6厘의 이율(0.6%)로 예치했었으나 그후 더 이상 발전을 보지 못했다.81) 조선은행의 영업이 부진했던 이유는 독립협회운동의 성패와 연관지어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창립 발기인 대부분이 독립협회 창립 발기인인 점, 독립협회운동이 고조기에 달 했던 1898년까지는 정부의 조세금 취급 인가를 받거나 국고금 예치 등의 특혜를 얻을 수 있었지만 1898년 후반 독립협회운동의 좌절 이후에는 영업상황을 보여주는 사실이 나타 나지 않는다는 점, 은행장 안경수가 1898년 6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제일은행 頭取 澁澤 榮一을 통하여 100만원을 차입하여 태환지폐를 발행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82) 그가 8월에 망명함으로써 은행을 주도할 수 있는 인물이 없어진 점 등에서 그러하다. 영업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은행 관련인들은 1899년 10월 후반 은행명을 韓興銀 行으로 개칭하고 權在衡을 사장으로, 閔泳煥을 評議長으로, 李采淵 金永準을 장부조사위 원으로 임명하고 사무를 정리하여 재출발하였다.83) 새로 선임된 한흥은행 임원들은 대체 로 정동구락부 세력(민영환 이채연)이거나 독립협회 창립 당시 발기인(권재형 이채연)이었 지만, 1899년 전후의 정국에서 어느 정도 정치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들이었고 金永 準 역시 정동구락부나 독립협회와는 관련이 없지만 고종 측근 인물로 분류될 수 있는 인 물이다.84) 특히 권재형은 1899년 10월 전후 탁지부 임시서리대신을 맡아 한흥은행 영업 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85) 77) 독립신문 건양 원년 7월 4일 논설. 독립문 건립 기금 모집과 조선은행과의 관계는 朱鎭五, 19世紀 後半 開化 改革論의 構造와 展開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5) pp.87 90. 78) 독립신문 건양 원년 12월 17일 잡보. 79) 日韓通商協會報告 제18호(明治 30년 2월) p.70. 80) 독립신문 광무 2년 3월 24일 잡보. 81) 山口精, 앞의 책, p.26. 82) 澁澤靑淵記念財團龍門社 편, 澁澤榮一傳記資料 제16권, p.76. 83) 皇城新聞 광무 3년 10월 30일 잡보. 84) 森山茂德, 近代日韓關係史硏究 (1987; 김세민 역, 近代韓日關係史硏究, 玄音社, p.81).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99 - 한흥은행은 이 무렵부터 다소 영업이 호전되는 것으로 보인다. 1899년 11월에는 京元 鐵道 技士 內田錄雄의 월급과 답사 인원의 여비 2개월분 2천원을 정부에 대출해주고 있 고86) 황해도 지역 등에서 조세금을 수납하는 특권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87) 그러나 1900년 후반 황제 측근이었던 김영준이 사형당하고 나서88)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지원이 끊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한흥은행의 중역들은 精算事務所를 설치하고 1901년 1월 1일 은행을 폐점하고 그간의 손익을 정리한 결과 손실금 1만여 원이 생겨 중역들이 소유 한 토지 가옥을 매각하고 自費를 지출하여 충당함으로써 정리를 마쳤다.89) 2. 漢城銀行(公立漢城銀行) 조선은행의 발기인이나 사장직에 전현직 탁지부관료가 참여하고 있는 예에서 보듯이 이 시기 은행의 성공 여부는 대체로 정부재정, 특히 조세금 취급 특권 획득 여부에 달려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확인해주는 것이 한성은행(현 조흥은행의 전신)과 대한천일 은행(현 상업은행의 전신)이다. 한성은행은 김종한 민영찬 조재명 한치조 이승업 김영모 이규정 김태진 권석 영 등이 발기하여 한성은행규칙 과 은행지소규칙 을 제정하고, 1897년 2월 19일 은행 창립 청원서와 함께 탁지부대신에게 제출하여 당일로 인가받았다.90) 그러나 한성은행 설 립 인가는 이미 1월 8일 내려졌고,91) 1월 19일 다음과 같이 조세금 취급 특권을 부여받 았던 것으로 보인다. 現今中外貨幣가 輸運極難故로 於是에 刱立漢城銀行則宜有外道支店然後에 公貨를 可以滙換 이오 商貨도 隨亦流通 지라 本銀行會員 ( )을 委往府下 야 方設支店이기로 玆庸發訓 85) 권재형은 1899년 9월 탁지부대신임시서리, 10월 법부대신, 1900년 7월 의정부찬정, 1901 년 군부대신임시서리 등 요직에 임명되고 있다(안용식, 앞의 책, p.37). 86) 皇城新聞 광무 3년 11월 25일 잡보. 87) 광무4년 10월 19일 訓令 黃海道 鳳山郡守 ( 公文編案 86책), 韓興銀行 支店에셔 各處所 捧公錢을 任置於各浦口旅閣主人處이온데 恣意犯逋 오니 嚴訓各郡 여 督捧出給 야 以完公納 事로 該社員 洪淳英訴告를 據 야 玆庸發訓 니 此是公錢이라 公錢犯逋가 原係重罪 니 重罪 所犯을 何可容貸리요 到卽左開該漢을 嚴囚猛督 야 刻到准捧 야 出給社員 야 以完公納케 되 毋或漫漶生梗事. 위 사료에서 나오는 한흥은행 지점이란 조선은행 당시 설치 인가를 얻어 놓았던 黃州 지점으로 추정된다. 88) 도면회, 총론: 정치사적 측면에서 본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 ( 역사와 현실 제19호, 1996) pp.29 30. 89) 山口精, 앞의 책, p.26. 90) 조흥은행, 朝興銀行八十年史 (1977) p.28. 91) 山口精, 앞의 책, p.26.

- 100 國史館論叢 第77輯 니 須卽知委各郡 야 無論公私貨幣하고 欲其免換이거든 送付銀行支店 야 俾爲無碍運納이되 銀行規程을 賫往하니 准此施措케 미 可홈.92) 조세금 취급특권을 먼저 창립된 조선은행에는 부여하지 않고 한성은행에 부여한 까닭 은 한성은행 발기인의 면면을 분석해보면 그 일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조선은행 창립 발기인이었던 김종한 이승업이 한성은행 발기인으로 나오는데, 이후의 사태에 즉해 서 보면 김종한 이승업은 조선은행의 영업 부진을 예상하고 투자의 중점을 한성은행으 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閔泳瓚은 민씨 척족의 일원으로서 1896년 12월 학부협판에 임명된 이래 1897년 중추원의관, 1898년 법부협판과 궁내부협판, 궁내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93) 權錫永은 한성 中署 蛤洞에서 金을 매매하는 商人,94) 韓致調는 貸金 業者로서 守錢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돈 모으는 데 악착스럽던 인물이며,95) 金泰鎭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역시 貸金業과 관련된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96) 이상에서 볼 때 한성은행은 서울의 大商人 또는 貸金業者들과 김종한 민영찬 등 세력 가문의 고위관료가 합자하여 설립한 것이다. 당초 은행 자본금은 20만원으로 하고 1주에 50원씩 총 4천 주를 모집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조선은행과 마찬가지로 자본금 모집이 순 조롭지 않아 실제 불입된 자본금은 45,000원이었다.97) 한성은행이 제출한 한성은행규칙 은 6개 장, 전문 34개 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중요한 부분만 정리하면 한성은행은 당초 公立으로 설립되었으며(제2조), 兌換銀券 즉 은화에 기반한 지폐를 발행하면서도(제18조) 각종 상품을 무역하고 대출과 예금, 국공채 매입 등의 영업을 하는(제10조) 것으로 구상되었다. 그리고 동 은행 주식을 소유한 자들 로 은행원을 구성하되 그 중에서 은행장과 부은행장을 선정하며, 주식 지분이 많은 주주 가 총무 감사 출납을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제21조, 제22조).98) 92) 建陽 2년 1월 19일 訓令 慶尙南道觀察使 李恒儀 ( 公文編案 67책). ( )는 원문에 비어있 는 부분임. 93) 안용식, 앞의 책, pp.222 223. 94) 皇城新聞 광무 2년 9월 21일 잡보. 95) 皇城新聞 광무 5년 12월 9일 論說. 96) 皇城新聞 광무 3년 6월 13일 잡보, 別銀中商 李景九氏가 朴永勳의 家券事로 金泰鎭과 裁 判 던 事 向報에 記 얏니와 高等裁判所檢事 閔泳璇氏가 金氏의 家券僞造 과 李氏의 抑寃 理由를 知하고 公決裁判 야 該家 李氏가 全權放賣 라 얏더니 漢城銀行所에셔 言 기 를 該家를 當初에 漢城裁判所의 印紙로써 執行 얏거 今에 李哥에게 還奪 니 銀行所權利에 大段損害라 고 該 家券을 還索코져 다니 果然인지 傳者의 誤인지. 97) 러시아대장성, 앞의 책, p.520. 불입자본금 액수는 조선은행과 마찬가지로 자료에 따라 차이 가 난다. 山口精, 앞의 책, p.26에 의하면 1만 3천원이고 信夫淳平, 앞의 책, p.52에 의하면 3만원 내외라고 되어 있으나 조선은행 경우와 마찬가지로 알렉시에프가 보고한 액수가 보다 신빙성 있을 것 같다.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01 - 앞의 탁지부 훈령과 위의 한성은행규칙 을 보면 한성은행은 국가 조세금을 취급하는 특권을 받아 업무를 확장하여 公立 나아가서 國庫 은행으로 발전하려는 지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03년 公立漢城銀行으로 명칭을 개정하여 재출발할 때 銀行章 程 제3조에 本銀行規則 제1장 제2조 중 本銀行 私立의 私字는 公字로 改定할 것 으로 한 점으로 볼 때 위의 규칙 제2조는 설립 직후 私立 으로 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한성은행의 영업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정부의 보조금 을 받거나 조세금을 外劃하여 확보한 자금으로 5 7일 期限의 어음을 할인하고 일본화폐 한국화폐를 환전하거나 객주를 대상으로 대부하는 것이 주업무였다.99) 한성은행은 창립 직후 전술했듯이 조선은행과 함께 정부의 1896년도 잉여금 예치 교 섭을 받고 조선은행과 함께 총 954,555원 26전 8리의 탁지부 국고금을 예치하였으며, 1897년 2월 30일 연 6푼(0.6%)의 이율로 탁지부 보조금 65,000원을 대부받았다가 1899년 12월 31일 상환하였다.100) 그리고 조선은행이 주식 배당금 지급이 없었던 데 반하여 1898년 1월과 1899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주식 배당금을 지급할 만큼 영업수익 을 올렸다.101) 이러한 영업 수익은 우선 앞의 사료와 다음 사료에 의하면 한성은행이 조선은행과 달 리 전라 경상 충청 황해도 등 4개 道에 은행원을 보내 조세금 상납 특권을 부여받았 음을 알 수 있다. 漢城銀行長 閔泳瓚請願書를 據 즉 內稱 凡中外貨幣가 無碍通用然後에 商路를 可以興旺이 오 民心을 隨以底定이기로 曾於年前에 銀行을 創立 며 地方各府에 支所를 另設 事로 貴 大臣 許可를 承有 와 爲先 三南海西四道에 本銀行會員中 一員式委往各該道 와 管內各郡 公私貨幣를 間多滙換이옵더니102) 本郡 丙申條結稅錢中에 七千兩을 輸納于全州府銀行所 고 受取人 高尙鎭의 捧票 粘付 上送票紙 考証 와 尺文下送緣由 報告事 (題) 領受證은 到付이견과 待該府來納 야 當 出尺 事.103) 98) 조흥은행, 앞의 책, pp.28 31. 99) 信夫淳平, 앞의 책, p.52. 한성은행이 전당포와 같은 은행영업을 취하고 있었다고 하는 자료 도 있으나(韓翼敎, 韓相龍君を語る, 1941, p.53), 한상룡이 당시 한국에 있지도 않았을 뿐 더러 새로 창립된 한성은행의 비중을 높이기 위하여 구한성은행의 위치를 격하시킬 필요가 있 었던 점에서 사실을 은폐한 듯하다. 100) 山口精, 앞의 책, p.26. 101) 독립신문 광무 2년 1월 18일, 광무 3년 2월 8일, 광고. 102) 光武 2년 6월 訓令 黃海道觀察使 金嘉鎭 ( 公文編案 52책). 103) 光武 二年 五月三日 沃溝郡報告 ( 公文編案 42책). 이 자료에 나오는 高尙鎭은 한성은행 본점의 幹事員이었다(朝興銀行, 朝興銀行九十年史, 1987, p.53). 이로써 볼 때 지방관으로 부터 조세금을 지급받은 은행원은 대체로 본점에서 내려간 간사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102 - 國史館論叢 第77輯 이에 의하면 탁지부에서 三南과 海西地方 外劃訓令 의 각 道와 郡에 外劃 훈령을 내려 각군의 度支部 尺文 지방관 조세금을 한성은행에서 파견한 銀行會員 또 領受證 는 현지의 支所員에게 지급하고 영수증을 받 영수증 조세금 아서 탁지부로 올려보내면 탁지부에서는 은 조세금 영수증 행원이나 지소원이 조세금을 국고에 완납함 을 기다려 각 지방의 영수증에 의거하여 尺 은행회원 지소원 文을 발급함으로써 조세금 상납 완료를 확인 해준다는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세금을 지방관으로부터 지급받은 은행원 지소원은 다음 자료와 같이 다른 상인 등 고객에게 대출해주었다가 다시 상환받아 원금은 정부에 상납하고 이자를 축적하는 방식 으로 영업을 해나갔다. 現接監獄署在囚尹泰兢 請願書 內開 本人이 往在戊戌(1898년: 인용자)에 漢城銀行支店派 員으로 奉承府訓 와 下往海州府 와 公私貨幣之各郡劃送者 這這換付本銀行 야 已盡磨勘 이 고 至於海州郡 와 爲設店之當地故로 各年結稅 年年劃納考尺이온바 始自設店以後로 放債取殖 야 以補經費이 더니 挽近商路人心이 不古 야 多有乾沒逃躱之擧 와 因此而其 間見害가 數甚不少 와 海州郡各年結錢已劃未勘者 四十萬二千七百三十六兩七戔而 今於督刷 之下에 尙不辦納이 伏切悚惶이오며 本支店放債中 京中署河橋居 金永佑處 所捧條 爲四十萬兩 이온대 此錢債給時 渠之田庄文券을 典執捧手標 고 定限以陰曆本年四月還報爲約矣러니 104) 당시 군수가 差人을 선정하여 중앙으로 직접 상납하게 하거나 관찰사가 관내 각군 조 세금을 중간에서 都聚하여 상납하는 방식도 존재했던 만큼 한성은행이 각도 조세금 전부 를 외획하여 중앙으로 상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해주군 각년도 결전만 해도 40만 냥이었으므로 여타 군의 결전까지 생각하면 황해도 전 지역에서 한성은행이 취급한 조세금 액수는 최소한 백만 냥(2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은 초과했을 것이며, 삼남지 방의 조세금까지 합하면 당시 조세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한 성은행이 삼남지방에서 조세금을 군수로부터 지급받은 사례로는 전북 沃溝郡,105) 전남의 順天郡106) 谷城郡,107) 경북의 柒谷郡108) 醴川郡109) 眞寶郡110) 咸昌郡111) 順興 104) 法部來去文 (奎 17884) 4책, 照會 法部 (光武 7년 8월 28일). 105) 公文編案 42책, 沃溝郡 光武 2년 5월 3일. 106) 公文編案 44책, 順天郡 光武 2년 7월 1일. 107) 公文編案 44책, 谷城郡 光武 2년 6월 6일.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03 - 郡112) 慶州郡113) 등 다수 발견된다. 한성은행은 이렇게 해서 상당한 자본축적을 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상인층이 원리금 을 상환하지 않고 위 자료처럼 도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자본축적에 심각한 장애요인 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전술했듯이 두 차례에 걸쳐 주식 배당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결코 은행 영업이 부진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은행의 조세금 취급 특권은 1899년에 들어서면 1월에 설립된 대한천일은 행에 넘어가게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 근거는 첫째, 1899년 이후부터 한성은행의 조 세금 징수 사례가 안 보인다는 점, 둘째, 후술하듯이 1899년 3월부터 대한천일은행이 전 국 각 지역에서 조세금 징수를 행하고 있는 점 등이다. 그리하여 한성은행은 1899년 이 후 영업 상황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졌으나 懇親會를 개최하고114) 於音을 발행하는115) 등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다.116) 이후 한성은행은 1903년에 이르러 재창립을 하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제일은행 조선지 점의 한국침략의 일환에서 이루어졌다. 1902년 말부터 고종은 중앙은행 설립과 화폐제도 개혁을 위해 러시아와 500만원 차관교섭을 개시하고 있었는데117) 이는 지금까지 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해오던 제일은행 조선지점이나 이를 발판으로 하여 침략정책을 수립하 고 있던 일본정부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사태였다. 즉 일본측으로 볼 때 러시아의 차관에 의해 한국에 중앙은행이 설립되고 1901년에 반포된 금본위화폐조례대로 금화를 발행하면 서 영업을 시작하게 되면 지금까지 제일은행 조선지점이 장악하고있던 해관세 취급특권 108) 公文編案 45책, 柒谷郡 光武 2년 8월 27일. 109) 公文編案 44책, 醴川郡 光武 2년 7월 7일. 110) 公文編案 45책, 眞寶郡 光武 2년 12월 30일. 111) 公文編案 45책, 咸昌郡 光武 2년 12월 1일. 112) 公文編案 45책 順興郡 光武 2년 9월 6일. 113) 公文編案 45책 慶州郡 光武 2년 6월 8일. 114) 한국상업은행, 大韓天一銀行公牒存案解說 (1960; 이하 天一銀行公牒存案 으로 약칭함) p. 158, 前日 退定하였던 懇親會를 來 日曜日 下午 8時에 水月樓에서 更設할 터이오니 僉位 來 臨하심을 伏望 / 광무4년 7월 15일 / 漢城銀行. 115) 皇城新聞 광무 6년 4월 3일자 광고, 本人이 漢城銀行에 壬寅(1902년-인용자) 正月晦日推 次 當五錢 三萬兩於音 後面에 三圖章踏한 於音 一片을 見失하였아오니 물론 內外國人하고 若 有拾得이면 休紙施行함. 116) 山口精, 앞의 책, p.26에 의하면 1900년 1월에 파산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05년 한성은 행측의 설명대로 재창립할 때까지 3 4년간 停業상태였다( 皇城新聞 광무9년 11월 16일 잡 보)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117) 日本外交文書 제35권, 문서번호 253 露韓借款ニ關スル件. 韓翼敎, 앞의 책, p.52에 의 하면 러시아공사가 고종황제에게 500만원 차관을 억지로 강요했다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위 외교문서에 의하면 황제의 밀지를 받은 이용익의 능동적 교섭에 의하여 차관 교섭이 진행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04 - 國史館論叢 第77輯 과 그 신용에 의거해 확보한 한국금융계에서의 독점적 지위, 그리고 제일은행권을 통한 신용창출 등 막대한 이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일본외무성은 한편으로는 한국정부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리 에 제일은행장 澁澤榮一에게 이 차관교섭을 결렬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澁澤榮一은 제일 은행 경성출장소장인 高木正義로 하여금 일본공사관과 조선주둔 일본군수비대장 野津鎭 武 中佐를 황제의 從兄弟인 李載完에 접근하게 하여 한성은행을 재창립하게 만들었다. 澁 澤榮一의 구상은 명목상으로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을 하나 만들되 자본금은 제일은 행이 후원하도록 한 후 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폐제개혁을 한다는 구실 하에 러시 아 차관을 거절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118) 野津鎭武 중좌는 이재완을 비밀리에 만나 500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은행을 만들기보 다는 당시 한국경제의 상황으로 볼 때 창립비용은 30만원이면 족하다고 설득하고 새로 만드는 은행을 주식회사로 하든지 혹은 이재완 개인의 은행으로 하든지 마음대로 정하라 고 유혹하였으며119) 여기에 혹한 이재완은 고종에게 그 내용을 상주하였다. 고종은 러시아차관 교섭으로 인하여 일본공사의 항의를 받고 있었던 데다가 후술하듯 이 그때까지 미국 프랑스 벨기에 일본 등과 수차례에 걸쳐 추진한 차관 교섭이 모두 열강간의 상호 견제에 의하여 실패한 경험도 있어서 결국 러시아차관을 거절하고 한국인 이재완 명의의 은행 설립을 허가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때 제일은행은 이재완에게 30 만원의 융자를 하되 25만원은 은행설립비와 영업자금으로, 5만원은 궁내부에 바친다는 명목으로 이재완이 자유로 처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정부가 500만원 의 러시아 차관으로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던 계획을 단 30만원으로 저지한 것이다. 이재완은 새로 은행을 창립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얻기까지 시간도 걸리고 귀찮다고 하 여 한성은행장이었던 金宗漢과 협의하여 종래의 한성은행을 무조건 인계하기로 하고120) 1903년 2월 7일 탁지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2월 10일에 인가를 받았다. 청원서에 의하 면 사립은행을 공립은행으로 변경하고 자본금 20만원을 2백만원으로 개정한다고 하였으 며, 원래의 영업 항목 외에 황실 소용 물품의 조달과 황실 및 정부가 차관할 때 擔保를 받고 대출한다고 하여 皇室銀行 성격을 가미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121) 그러나 창립할 때 공립한성은행의 자본금은 35,000원을 제일은행으로부터 무담보로 빌려온 것이 전부였다. 이 돈으로 安國洞에 약 20間짜리 기와집을 매입하고 남은 돈으로 118) 韓翼敎, 위의 책, p.52. 119) 西四辻公堯, 魚潭少將回顧錄 ( 明治百年史叢書 302, 1930) p.62. 120) 韓翼敎, 앞의 책, pp.53 54. 121) 조흥은행, 조흥은행구십년사 (1987) p.56.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05-1903년 12월 7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은행장은 이재완, 副長은 金宗漢, 左總務에 李 普應, 右總務에 韓相龍(이완용의 외조카)122)이 선임되었는데, 이재완과 김종한이 신식장부 를 몰랐기 때문에 신식장부 외에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장부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은행 업무는 거의 대부분 한상룡이 전담하는 꼴이었다.123) 한성은행의 영업은 전적으로 제일은행에 종속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한상룡의 회고에 의하면, 제일은행으로부터 日步 2錢 7厘124)로 돈을 빌려 한국인에게 日步 6錢(月利 1.8%)의 이자율로 대부해주었는데 당시 이자율은 月利 3% 또는 5%가 보통이었기 때문 에 대단히 낮은 이자율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경쟁상대라고 할 수 있는 대한천 일은행이 이자를 月利로 계산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부받는 입장에서 볼 때 한성 은행의 대부조건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금을 제일은행으로부터 빌어오는 한 한성은행의 영업은 부진할 수밖에 없 었다. 한 예로서, 대부할 때는 대개 토지나 가옥을 담보로 하는데 먼저 한성은행원이 이 를 감정하여 대출액을 1차 결정한 후 제일은행에 이를 통보하면 제일은행원이 다시 한성 은행에 나와서 감정을 하고 그 감정가격에 의하여 대출액수가 최종 결정된다. 등기가 끝 나고 나면 제일은행으로부터 돈을 빌어서 고객에게 건네주는 방식이었으므로125) 자본금 조달면에서나 영업면에서나 제일은행에 대한 종속성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126) 공립한성은행은 제일은행의 자금 지원과 영업 지도를 받으면서도 1905년 말까지 영업 부진을 면할 수 없었는데, 이는 후술하듯이 대한천일은행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및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후술하듯이 고종은 1902년 후반부터 대한천일은행의 은행장에 영친왕을, 부은행장에 당대의 실권자 이용익을 임명하는 등 대한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삼으려는 구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공립한성은행에 대한 지원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 으로 보인다. 또 공립한성은행이 설립된 1903년의 정치정세는 러시아세력의 영향력이 강 하게 미치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127) 친일적인 한성은행에 대하여 정치권력으로부터 직 간접적 지원을 줄 리 없었을 것이다. 122) 韓翼敎, 앞의 책, p.1. 123) 韓翼敎, 위의 책, pp.53 54. 124) 日步란 1일간의 이자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는 100圓에 대하여 계산했으므로 日步 2전 7리 를 月利로 계산하면 0.027원 30일=0.81원, 즉 0.81%의 이자율이다. 125) 韓翼敎, 앞의 책, pp.55 56. 126) 1905년 目賀田種太郞이 주도한 화폐정리사업 으로 인한 공황을 구제하기 위해 공동창고회사 를 설립할 때 공동창고회사 투자가들이 한성은행을 제일은행의 지점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런 연유로 인한 것이었다( 皇城新聞 광무 9년 11월 15일 잡보). 127) 韓翼敎, 앞의 책, pp.51 52.

- 106 - 國史館論叢 第77輯 3. 大韓天一銀行 조선은행(한흥은행)과 한성은행(공립한성은행)이 정부 고위관리 또는 황실이 주도하여 설립 된 반면 대한천일은행은 고종의 측근 인물이었던 張浩鎭의 회고에서 볼 수 있듯이 전적으로 상인층의 발의에 의해 창립되었다. 金斗昇 金基永 白完爀 趙鎭泰 等이 은행을 설시할 필요가 있으니 나로 하여금 황제에 게 상주하여 황실의 내하금을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에게 상주하여 그 처분 을 받았는데, 황제는 李鐘健을 불러들여 金斗昇이 믿을 만한지를 하문하고 이어 말씀하시기 를 張浩鎭은 짐이 믿고 부리는 신하요 김두승은 卿이 보장했으니 마땅히 상주한 대로 실시 하라 고 하였다. 이종건이 나를 데리고 김두승 등에게 찾아가니 모두들 기뻐 마지 않았다. 여러 차례 모여 논의한 후 마침내 天一銀行을 창립하였으니 이는 한국측 은행의 효시였다. 김두승이 股金(주식 대금: 인용자)을 맡고 나는 주주가 되었으며 황실의 株金을 內下할 때 는 淳嬪 嚴氏가 嚴柱益(뒤에 중역이 됨)이 거행하도록 하였다.128)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대한천일은행 설립을 발의한 것은 김두승 김기영 백완혁 조진 태 등인데, 이들은 모두 서울의 대상인 또는 자본가들이었다.129) 황제의 내락을 받은 이 들은 1899년 1월 22일 탁지부에 은행 설립 청원을 하고 동월 30일 인허를 받았다. 그런 데 설립 청원서에는 원래 발의했던 김두승 김기영 외에 당시 고위관료였던 李根澔130)와 중간관료급인 宋文燮 鄭永斗, 그리고 상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朴景(敬)煥 등이 청원인으 로 서명하고 있다.131)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대상인 또는 자본가가 발의한 위에 고종황 128) 張浩鎭, 南渠自述 ( 天一銀行公牒存案, p.5에서 재인용), 金斗昇 金基永 白完爀 趙鎭泰 等 以銀行設施之必要 要余稟達期蒙皇室內下金 故余修陳上奏 果蒙處分 命召李鐘健 下詢金斗昇 之信否 仍敎曰 張是朕之信使也 金則卿旣擔保 當依奏下施矣 李將臣出語于金 諸人之歡敬摯 至乃 屢會經紀 竟成天一銀行 此是韓國側銀行之嚆矢也 金斗昇代辦股金 推余爲株主 及其皇室株金內下 時 淳嬪使嚴柱益擧行(後爲重役). 여기서 보듯이 장호진은 고종이 믿고 있던 측근 인물 중의 한 명인데, 1897년 규장각주사로 궁내부 典膳司주사를 겸임한 이래 1899년에는 物品司주사 를 겸임하는 등(安龍植, 앞의 책, p.681) 황실의 물품 조달을 담당하고 있었다. 129) 1905년 7월 경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되었을 때 김기영은 의장, 조진태는 총무의원, 백완혁은 회계원으로 선출되었고( 皇城新聞 광무 9년 7월 22일 잡보), 다시 10월에 들어 조진태가 의 장, 백완혁이 회계원으로 선출되었음( 皇城新聞 광무 9년 10월 6일 잡보)을 볼 때 이들이 서울 상업계에서 명망있는 상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두승은 앞서 조선은행 창립 발기인이 었던 이근배와 함께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한 자본가였다. 130) 이근호는 1898년 11월 24일 경무사, 12월 22일 법부 협판 겸 고등재판소 판사, 1900년 1 월 21일 농상공부협판에 임명되는 등 고위 관직을 지냈고(안용식, 대한제국관료사연구 李 根澔條), 1899년 5월 보부상단체인 상무사를 조직할 때 제3인자급인 都事務長을 맡았다(鄭 喬, 大韓季年史 下, p.17). 131) 天一銀行公牒存案, p.1. 宋文燮은 1898년 11월 군부경리국 제2과장을 맡고 있었고 鄭永斗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07 - 제 측근의 고위관료와 군부 궁내부 등 대한제국기에 급속하게 팽창한 부서의 중간급 관 리들이 청원인으로 참여한 점이다. 이 점은 1월 29일 천일은행을 창립할 때 발기인 34명 중 위 청원서를 제출한 6명과 관력이 확인되지 않는 2명을 제외한 26명의 1899년 전후 관력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표 2>에서 보듯이 전체 26명 중 반 이상은 1899년 이후 대한제국 정권의 핵심인 물이고132)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궁내부와 군부에 근무하는 관료들이 대부분이 다. 천일은행이 순조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일은행은 창립 당일 임원 선정을 하여 사장은 민병석, 부사장은 조한근, 이사는 최석 조 최문식, 감사는 정영두 김기영 박경환, 사무는 김두승 김동숙으로 선임하였다.133) 천일은행은 동년 3월 6일 탁지부에 정관을 제출하여 인허받고 4월 8일 정식 개업식을 거 행하였는데, 정관에서 특징적인 점은 다음과 같다. 자본금은 5만 6천원으로 정하고 一衿에 5백 원씩 112衿을 모집하며(제5조), 宮內府와 政府에서는 자본금의 1/2 내지 1/3을 지급하고 주주가 되며 정기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 되(제6조) 자본금 총액 중 5만원이 모집되면 영업을 개시한다고 하였다(제7조). 또 純益 金 총액 중 8/10을 주주 배당금으로 지급하고 1/10은 적립금으로 하여 자본금 손실이 있을 경우에 보충한다고 하였다(제13조). 은행의 영업 종목은 ① 정부 발행의 銀標 및 換票 기타 商業標의 할인 대부와 매입, ② 각종 물화의 무역과 화폐 교환, ③ 金銀 및 動産을 담보로 한 대부, ④ 공채증서 및 정부가 발행하는 각종 증서를 담보로 한 임시 대부와 당좌대월로 되어 있으나(제14조), 이 외에도 정부의 위임에 의한 태환권 발행(제17조), 탁지부대신의 인허하에 各 港口 및 各 府郡 조세금의 運輸까지 망라하고 있었다(제18조).134) 이들 규정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궁내부와 정부가 자본금의 1/2 내지 1/3을 담당하여 최대 주주가 되고 태환권 발행과 조세금 취급 특권을 갖겠다는 조항들이다. 대한천일은행 역시 앞의 조선은행 한성은행과 마찬가지로 국고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전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의 창립인 명단에 의해서 볼 때 고종의 의향에 따라 얼마든지 현실 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천일은행은 고종과 정부관료들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원하 던 바를 성취해 나갔다. 는 1898년 12월 궁내부 物品司長, 1899년 2월에는 탁지부 전환국 기사에 임명되었다(안용 식, 위의 책, 각 해당 人物條). 132) 도면회, 정치사적 측면에서 본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 ( 역사와 현실 19) pp. 24 30. 133) 한국상업은행, 大韓天一銀行日史 (1959) p.11. 이하 天一銀行日史 로 약칭함. 134) 天一銀行公牒存案, pp.7 15.

- 108 國史館論叢 第77輯 <표 2> 大韓天一銀行 創立人 官歷 (순서는 가나다 순) 성명 창립시 관직 1898 9년간 역임관직 비 고 高圭晉 機器局委員(1887) 吉永洙 軍部砲工局砲兵課長 農商工部商工局長 金敎鴻 法部主事 仁川監理署主事 金東肅 孝陵參奉(1900) 金榮浩 大邱郡守 鍾城府使(1892) 金龍浩 中樞院議官 農商工部大臣,學部大臣,署理宮內府 閔丙奭 軍部大臣 大臣事務 閔丙漢 內部大臣署理 警務使, 宮內府特進官 閔泳綺 平安道觀察使 度支部大臣, 農商工部大臣 沈相薰 宮內府特進官 內部大臣,軍部大臣,量地衙門總裁官 兪箕煥 高等裁判所裁判長兼法部大臣 軍部大臣署理 漢城判尹,親衛隊 大隊長, 咸鏡北道 李根氵鎔 警務使 觀察使 李基東 侍衛隊大隊長 法部協辦 兼 高等裁判所裁判長 李吉善 龍川府使(1889) 鐵道司監督兼宮內府各道各鑛 李容翊 監督 典圜局長, 內藏司長 李寅祐 法部協辦兼高等裁判所判事 農商工部協辦 親衛隊大隊長, 軍部 砲工局 工兵 李漢英 漢城府判尹 課長 張鳳煥 侍從院侍從 平理院檢事 張雲澤 寧海郡守(1897) 趙東潤 宮內府特進官 軍部大臣署理,元帥府軍務局長 趙漢根 秘書院丞 羅州府觀察使(1896) 崔文植 侍從院侍從 崔錫漳 典膳司主事 中樞院3等議官 崔錫肇 度支部典圜局長 度支部財務官 崔榮夏 宮內府參書官兼侍從院侍從 外部協辦,漢城府判尹,會計院卿 洪正燮 侍從院분시종(1900) * 安龍植, 大韓帝國官僚史硏究 Ⅰ(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1994). 천일은행은 당초 계획과 달리 1899년 말까지 자본금 모집을 13,800원밖에 하지 못했 다. 창립 발기인은 34명이었지만 株金을 실제로 불입한 주주는 18명이었고, 총 112주 중 에서 29주밖에 모집하지 못했다.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립 직전인 1월 21일에 이미 황실로부터 전환국 소재 화폐 중 3만원을 자본금으로 특별히 지급받고 2월 5일부터 銀地 金 綿布 등 상품을 담보로 하여 최초의 대부 업무를 시작하였다.136) 135) 위의 책, pp.21 22. 136) 天一銀行日史, p.12, 17. 황실의 자금은 무상으로 지급된 것이 아니라 대출해준 것으로 판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09 - 이어서 2월 4일 한성부에 家舍田土典當規則 을 제출하고 승인받아 8일부터 부동산담 보 대부를 개시하였다.137) 정관 제15조에 부동산을 저당받고 대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 상당한 가사 전토가 있는 것은 예외로 한다는 단서 조항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가 사전토전당규칙 에 의하면 3개월 기한으로 대출액 400원 이상은 月 4%, 4백원 이하는 月 5%라는 높은 이자율로 대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家券을 들고 대부를 청하는 사람이 몰려들어 일대 장터를 이룰 정도였다.138) 그러나 부동산 저당 대출을 승인했던 천일은행 창립인이자 한성판윤이었던 李漢英이 면관되고 閔商鎬가 부임한 이후인 3월 1일 家舍 전당 대출은 무방하되 田土 전당 대출은 외국인이 이로 인하여 後弊를 낳을 염려가 있으니 금지한다고 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 다.139) 게다가 가권을 전당잡고 대부하는 업무도 궁내부대신 李載純이 普信會社를 설립 함으로써140) 중단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당잡았던 가권들도 모두 보신회사에 보내고 대 출액을 상환할 때는 보신회사에서 가권을 찾아가게 하였다.141) 천일은행은 주요한 영업 항목을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영업 항목, 가장 수익이 많이 생기는 조세권 취급권을 획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각 지방에 지 점을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동년 3월 17일과 22일 인천 부산 목포에 지점을 설치 하는 건과 支店規則 실시를 각각 승인받음으로써142) 각 항구와 各 府郡의 조세금을 취 급하는 특권을 획득하게 되어 은행 영업의 성공을 보장받았다. 3월 28일에는 개성에 지 점을 설치하겠다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4월 15일자로 탁지부대신의 인 가를 받았다.143) 지점이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은 인천이었다. 인천 지점은 5월 10일 인천항 圻浦에 설치 되고144) 徐相潗이 監事員으로 운영 책임을 맡았다. 이어서 개성 북부에도 지점을 설립하 단된다. 137) 天一銀行公牒存案, pp.15 16. 138) 天一銀行日史, pp.19 20. 139) 위의 책, p.24. 즉 외국인 금융업자들이 자기들도 대한천일은행과 마찬가지로 전토 담보 취 급권을 달라는 청원을 해오게 되면 정부로서도 난처하다는 입장이었다. 140) 독립신문 광무3년 5월 17일 잡보. 141) 皇城新聞 광무 3년 5월 20일 광고. 이러한 변화는 이재순의 보신회사 설립 청원과 이를 허가한 고종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1899년 9월 농상공부가 보신회사에 과세 하려 하자 보신회사측에서 본 회사는 내탕금 1만원을 하사하여 설립한 부동산회사니 면세해 달라고 한 점( 皇城新聞 광무 3년 9월 26일)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리하여 천일은행은 5 월 17일에 고종으로부터 내하받은 돈 중 1만원과 그동안 전당잡았던 家券 22장을 보신회사로 보냈다( 天一銀行日史, pp.55 56). 142) 天一銀行公牒存案, pp.23 24, 38 40. 143) 위의 책, p.54. 이는 개성상인의 자본을 끌어들이려고 한 것일 수도 있고 내장원에서 개성의 삼포를 관장하기 시작한 일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지만 확신할 수 없다.

- 110 - 國史館論叢 第77輯 였다.145) 같은해 9월 26일에는 전주지점과 군산분지소를 설립하려는 청원을 올려 승인 받고 그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 지출까지 했으나 실제로 설치되지는 않았다.146) 이들 지점은 다음 <표 3>과 같이 상당한 이익을 올림으로써 천일은행의 금융계에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었다.147) 특히 인천지점 감사원 서상집은 단기간에 천일은행의 신 용을 확립하여 다른 외국은행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하여 은행장 민병석이 포상까지 할 정도였다.148) <표 3> 개성 인천지점 純益金 연 도 개성지점순익금 1900 3,439.960 1901 1,529.462 1902 2,522.682 1903 4,295.926 1904 3,758.470 1905 3,085.150 총 계 18,631.650 * 한국상업은행, 大韓天一銀行公牒存案解說 (1960) p.25. (단위: 원) 인천지점순익금 1,726.154 3,009.076 7,195.050 2,175.050 14,105.330 천일은행은 위 양 지점을 통한 영업 외에도 본점의 영업을 통해서도 상당한 수익을 올 릴 수 있었다. 물론 지방관의 판단에 따라 조세금을 직접 운반할 수도 있었으므로 모든 조세금이 천일은행 지점이나 본점 또는 은행원을 통해 상납된 것은 아니었지만 1899년 한 해 동안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58만 3천원(291만 5천 냥)의 조세금을 거두어 탁지부 명의로 입금하고 탁지부의 요청에 따라 지출하고 있다.149) 이는 1899년 탁지부 실제 세입 중 當該年度 地稅와 旣往年度 所屬收入의 합계액인 408만원150)의 14%에 해 당하는 비중이었다. 144) 皇城新聞 광무3년 5월 23일 광고. 145) 皇城新聞 광무3년 6월 18일 광고. 146) 天一銀行公牒存案, pp.91 97. 147) 위의 책, p.25. 148) 위의 책, p.82. 149) 大韓天一銀行 皇城本店, 度支部稅金出納通帳 (奎 21858). 이 자료에는 1900년 2월까지 입 금된 조세액 통계만 있어 1900년 2월 이후에는 천일은행이 각 지방 조세금 취급권을 부여받 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0) 이윤상, 1894 1910년 재정제도와 운영의 변화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 pp.118 119. 천일은행의 탁지부세금출납통장 에는 1899년분의 지세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연도 지세 미납분까지 포함되어 있으므로 천일은행의 취급액의 비중을 구하기 위하여 위 박사논문 통계 중 당해연도 지세 실수입액과 기왕년도 소속수입(대부분 지세와 호세인데, 호세의 비중은 미 미함)을 합친 408만원과 비교한 것이다.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11 - 천일은행은 조세금을 예치하고 탁지부 명령에 따라 지출할 때까지 단기 운영 자금으로 사용하였을 것이고, 그와 별도로 탁지부에 청원하여 1899년 8월에 보조금 5만원을 대여 받는 등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151) <표 4> 1899 1900년간 탁지부세금출납액 (단위: 원) 연 월 입금합계 출급합계 비 고 1899년 3월 7,683.000 0.000 1899년 4월 39,584.674 12,330.000 1899년 5월 73,084.330 33,819.000 1899년 6월 105,686.250 133,654.000 1899년 7월 783,62.220 47,008.000 1899년 8월 95,797.180 162,232.656 1899년 9월 74,403.058 67,311.782 1899년 10월 74,672.792 73,740.000 1899년 11월 31,827.602 53,096.506 1899년 12월 1,900.000 15,206.950 1899년 소계 583,001.106 598,398.894 1900년 1월 16,640.780 700.000 1900년 2월 2,593.824 4,975.902 1900년 11월 1,839.086 出納局推來錢 누 계 604,074.796 604,074.796 * 大韓天一銀行 皇城支店, 度支部稅金出納通帳 (奎 21858). * 1900년 11월 입금액은 탁지부로 지급한 총액에 비하여 조세금으로 입금된 총액의 부족 분을 메꾸기 위하여 탁지부 출납국과 精算하여 가져온 것이다. 이러한 지원과 특권에 기초하여 천일은행의 영업실적은 자본금에서나 입출금, 주식 배 당비율 등에서 다음 <표 5>와 같이 나날이 증대되어 갔고 1900년 3월에는 재정 궁핍으 로 관리의 봉급도 주지 못하게된 탁지부에 1만 5천원을 대출해 줄 정도가 되었다.152) <표 5>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천일은행의 주주수 자본금 예금액 대출액이 1902년 이후에 들어 획기적으로 급증하고 1903년 이후에는 대출액이 예금액의 2배 이상으로 늘 어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천일은행의 운영에 큰 변화가 발생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선 탁지부가 재정 궁핍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세금을 미납한 지방관들을 적극적으로 사법처리하기 시작하여 1901년 12월에는 조세금 체납액이 과다한 지방관은 법부로 넘겨 교수형까지 처한다는 극단적인 강경책을 세우기까지 한 점이다.153) 이로 인하여 조세금 151) 天一銀行公牒存案, pp.76 81, 184 185에 의하면, 천일은행은 1901년 3월 이 보조금 5 만원 중 2만원을 먼저 상환한 상태에서 1904년 3월 그동안의 이자 9,375원만 상환하였는데 원금 잔액 3만원은 1905년 말에 이르기까지 상환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152) 위의 책, pp.131 132.

- 112 - 國史館論叢 第77輯 체납 지방관들은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현금을 마련하기 시작했는데 집문서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리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표 5> 천일은행 주주수 및 영업 실적 (단위: 원) 年度 株主數 納入資本金 預金 貸出 純益金 配當率(%) 18 13,800 41 1899 18 23,500 95,111 81,970 6,736 58 1900 24 27,500 89,718 130,339 15,000 37 1901 38 44,000 418,581 421,911 15,242 37 1902 48 54,000 408,198 707,463 23,075 42 1903 48 55,000 689,008 708,747 19,712 36 1904 51 56,000 370,212 981,334 14,731 26 1905 * 한국상업은행, 韓國商業銀行七十年史 (1969) p.34. 단, ① 주주수는 한국상업은행, 大韓天一銀行公牒存案解說 (1960) pp.111 112, 174 175, 187 188, 213 216, 229 232, 234 237, 260 263, ② 순익금은 p.176, 190, 217, 234, 239, 265에서 元 이 하는 반올림함. 천일은행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1900년 7월에 전당포를 개설하고 專任事務員으로 주주 중의 한 명인 趙鎭泰를 선임하고154) 외국인 전당포로 家券을 들고 가지 말고 천일 은행으로 오라는 광고까지 신문에 게재하기 시작하였다.155) 전술했듯이 가권을 전당잡고 대출해주는 업무는 천일은행 설립 직후 황실 인물인 이재순이 설립한 보신회사로 넘어갔 는데 어떻게 다시 천일은행으로 넘어오게 되었는가? 이 역시 보신회사 설립과 마찬가지 로 고종의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서, 고종은 이 전당포 설립 자본금으로 4만원을 지급했 다고 한다.156) 153) 이윤상, 앞의 논문, p.127. 154) 天一銀行公牒存案, p.167. 155) 皇城新聞 광무 5년 12월 3일 광고. 156) 皇城新聞 광무 5년 12월 6일, 近日 度支部에서 公錢督促이 嚴急 기로 家券典質者가 城市 에 奔走 天一銀行에서도 資本을 得 야 典券 或云其資金은 四萬元이니 內下 신 것 이라더라. 사실 천일은행의 영업은 창립 이후부터 고종과 밀접한 관련 하에 운영되어 왔다. 앞에서 지 적했듯이 창립인 대부분이 1899년 이후 황제권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 인물들이거나 황제권 강화와 함께 팽창확대된 궁내부 군부의 관리였다. 또 1900년 1월 20일자로 천일은행 운영 의 핵심적 역할을 해왔던 理事員 두 명 중 鄭永斗가 거세되고 崔錫肇가 은행 업무를 專管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天一銀行公牒存案, pp.116 117), 최석조는 이용익과 함께 전환 국장을 교대로 맡아가면서 고종의 지시에 따라 백동화 주조 발행 업무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또 천일은행은 창립 직후부터 고종의 개인금고격으로 사용된 경우도 많았다. 즉 당시 인천에 있던 전환국에서 고종에게 상납할 백동화를 가져와 천일은행에 입금해 두었다가 고종의 지시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13 - 무엇보다 획기적인 변화는 1902년 3월 25일 당시 6세에 불과한 英親王이 은행장으로 선임되고 이를 보좌하기 위하여 4월 7일 이용익이 은행부장으로 임명된 사건이다.157) 천 일은행의 정관에는 한성은행과 달리 은행장과 부장의 임면에 관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데,158) 이는 설립 당초부터 고종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리하여 영친왕이나 이용익을 임명할 때 은행원간에 논의를 거치거나 총회를 개최함도 없 이 영친왕과 이용익을 임명한 것이다. 천일은행의 조직도 개편되었다. 은행장과 부은행장이었던 민병석 이근호를 위하여 평 의원제도가 신설되어 민병석이 평의장, 이근호 엄주익 하상기가 평의원으로 임명되었는 데, 평의원회란 것은 그 권한에 대한 규정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虛設機構에 불과한 것이 었다.159) 영친왕의 천일은행장 부임과 함께 천일은행의 주주수와 자본금은 급격히 증가하였다. 우선 영친왕 명의로 8천원을 出資하여 16株의 주식을 매입하였고160) 새로 주주로 출자 한 인원도 1901년 현재 24명에서 1902년 말 현재 38명으로 급증하여 자본금 역시 <표 5>에서 보듯이 27,500원에서 44,000원으로 급증한 것이다.161) 이러한 추세는 그 후에 도 계속 이어져 1903년 1월 27일 주주총회에서는 그때까지 수시로 주주를 모집하던 것 을 금지하기로 결의했을 뿐 아니라 1904년 12월 28일 주주총회에서는 추가로 주식을 매 입하는 자가 있을 경우 주식 1주당 액면가 500원에 그간의 적립금 46,000원의 1/110인 418원을 추가하여 918원에 매입하게 하자는 결의까지 할 정도로 호황을 구가하였다.162) 그러나 천일은행은 1903 1905년간 대출금이 입금액을 2배 이상 상회하는 과다 대출 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것은 불량 대출이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그 당시 급속도로 팽창 하고 있던 황실 관련 경비 지출로 인한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1905년 7월 1일부터 目賀田種太郞이 주도한 화폐정리사업 이 시작되고 그로 인한 금융공황을 맞으면 서 천일은행은 과다한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금을 돌려주지도 못하여 일시 휴업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에 따라 궁궐로 이송해 가거나 특정인에게 지급하였다( 天一銀行日史, p.13, 15, 20, 22, 29). 157) 天一銀行公牒存案, p.201, 203. 158) 한성은행의 경우 은행장과 부장은 은행원 중 聲望이 있는 자로 선출한다고 규정되어 있다(한 성은행 정관 제21조). 159) 天一銀行公牒存案, pp.202 203. 160) 위의 책, p.204. 이는 1901년 현재 천일은행 납입자본금의 1/3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161) 위의 책, p.216. 162) 위의 책, p.217, 239.

- 114 - 國史館論叢 第77輯 4. 中央銀行 전술했듯이 갑오개혁의 주도인물들은 중앙은행 설립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가 정권의 몰락과 함께 실패했고, 그후에 설립된 조선은행(한흥은행)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의 설립 주체들도 한결같이 중앙은행 역할을 담당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지만 모두 좌절되 었다. 이들 은행들이 당초부터 중앙은행으로 창립되거나 영업 개시 이후라도 중앙은행으 로 승격되지 못한 것은 이하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황제가 이들 은행과 별도로 독자적 인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앙은행 설립 시도가 본격화한 배경에는 전술했듯이 백동화 남발과 외획의 폐단을 개 혁해야 한다는 여론의 비등과 일본의 금본위제 이행으로 인한 일본은화의 환류라는 사태 가 깔려 있었다. 특히 1897년 10월부터 일본 화폐제도가 금본위제로 이행하여 조선에서 조선의 본위화 처럼 유통하던 일본은화가 일본으로 환류하면 조선 국내에는 백동화 엽 전 등과 교환할 수 있는 고액권화폐의 부족 현상이 초래될 것이었기에 중앙은행 설립과 본위화 발행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이후 중앙은행 설립 문제는 화폐제도 개혁과 불가분 의 관계로 결부될 수밖에 없었다. 본위화폐의 주조와 그 신용에 의거한 지폐의 발행이 무 엇보다 선결되어야 할 문제였고 중앙은행은 이를 운영하는 주체로 상정되는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무력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이후 고종은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을 통해 군사교관의 파견과 아울러 300만원의 재 정차관을 요청하였다. 러시아는 군사교관 파견 요구만 수락하는 등 소극적 태도로 임하다 가 1897년 7 9월경 한반도에 대한 적극적 정책으로 변화하여 군사교관을 추가 파견한 데 이어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영국인 브라운을 해임하고 11월 5일 러시아의 고위 세무관 리 알렉시에프를 재정고문으로 고빙하게 만들었다.163) 한국의 재정 전권을 장악한 알렉시에프는 본국 황제의 칙령에 의거하여 12월 5일 센트 피터스버어그에 설립된 로한은행의 지점을 1898년 2월 17일 서울 새문안에 설립하였다. 이 은행은 보통의 은행 업무 외에도 ① 개항장에서 부동산 및 각종 상품의 매매, ② 河海 路 및 육로를 통한 물화 운송 및 그 보험, ③ 兩 弗 파운드 및 기타 국가의 화폐에 대 한 兌換券의 발행, ④ 한국의 稅收 및 기타 국고에 관한 사업 및 한국정부의 허가 하에 한국화폐의 주조 및 한국 국채이자의 지불, ⑤ 매회 러시아 대장대신의 허가를 거쳐 한국 에서 각종 이익권의 획득(철도부설권 및 전신가설권 등) 등의 업무를 하도록 하였다.164) 로 163) 李玟源, 俄館播遷 前後의 韓露關係:1895 189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 위논문, 1994) pp.97 165.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15 - 한은행이 단순한 외국계 은행이 아니라 한국의 중앙은행과 같은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로한은행은 개업 직후 10만원 가량을 탁지부로부터 예치한 데 이어165) 앞서 조선은행 과 한성은행 두 곳에 맡겨두었던 은화도 예치하였으며 이후 각도 관찰부에 지소를 개설 하여 조세금 상납을 관장하려 하였다.166) 그러나 브라운 해임에 대한 영국측의 저항과 독립협회의 반러시아운동, 그리고 러시아정부의 극동정책 변화로 인하여 1898년 3월 7 일자로 알렉시에프는 해임되고 로한은행 역시 4월 27일자로 폐점함으로써167) 러시아측 의 의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같은 혼란을 겪은 후 정부는 1898년 후반부터 일본이나 프랑스 미국 러시아 벨 기에 등 가능한 한 모든 방면으로부터 외국 차관을 도입하여 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하 였다. 우선 각인부원은 통용금지령을 해제하게 하기 위해 1898년 6월에 방한한 일본제일 은행 사장 澁澤榮一에게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해준다면 위 통용금지령을 해제해주겠다는 교섭을 하였으나, 澁澤榮一의 교묘한 회피로 통용금지령만 해제해주는 실 없는 교섭으로 끝났다.168) 같은 시기에 주일한국공사를 통하여 일본정부에 전환국에서 10개월 동안 주조할 5냥은 화 50만 매(50만원)와 1냥은화 500만매(100만원)에 필요한 은지금을 매각할 것을 요청하 였는데, 고종은 손해득실에 구애됨이 없이 5냥은화를 1000만원 정도 주조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최대한 20만원 가치에 해당하는 은지금만 매각하겠다고 회답함으로써 본위은화 발행 계획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본위은화 주조계획이 무산됨으로써 한국정부는 화폐제도 개혁에 관하여 재차 논의를 시작하여 1898년 7월 27일 금본위제로 화폐제도를 개혁한다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러 나 한국 형편에는 아직 금화 유통이 부적당하므로 만들어 두기만 하고 수십 년 후에 행 용하기로 하였고 1899년 5월 화폐제도 개혁 논의를 집중적으로 행한 후 은화를 본위화 로 삼기로 결정하였다.169) 164) 京城府史, p.650 및 독립신문 광무 2년 3월 1일 광고. 165) 露韓銀行開設の照會 ( 日韓通商協會報告 제30호) p.42. 166) 독립신문 광무 2년 3월 10일. 167) 독립신문 광무 2년 4월 9일 광고, 본국 은행 총대위원의 명을 받아 대한 서울에 있는 로 한은행이 오늘부터 정지되니 제군자는 그렇게 아시오. 은행 사장 게부리올, 콜레일닌. 로한은 행의 폐업일자는 경성부사 (5월 9일)나 한국지 (4월 27일) 등 사료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독립신문 에 광고를 낸 일자가 가장 정확할 것으로 생각된다. 168) 澁澤榮一傳記資料 제16권, pp.76 82. 169) 羅愛子, 앞의 논문, pp.62 64. 같은 해 9월에는 심상훈 민영기 유기환 고영근 등 독립 협회와 대립하고 있던 황제 측근세력 20인이 국립은행을 창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은행 명칭은 대한은행으로 하고 자본금은 황실에서 1만원, 이들이 각 2천원씩 합 5만원을 모으되 고영근이 사무를 맡기로 하였으나( 독립신문 광무 2년 9월 17일 잡보) 이 은행은 창립되지

- 116 - 國史館論叢 第77輯 금본위 화폐제도를 천명했다가 다시 은본위 화폐제도 유지로 복귀한 셈이었다. 그러나 본위은화 발행을 위한 재정적 여유가 없었던 한국정부로서는 다시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관 교섭은 먼저 미국 영국공사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으나 영국공사가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과중한 데다가 미국공사가 이 사실을 알고 이의를 제 기함으로써 중지하였다. 이어서 1899년 11월 하순경 이용익이 일본공사를 찾아와 차관 요청을 했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으로부터 500만원을 차입하고 여기에 1899년 홍삼 매상고(약 2백만원)에서 생기는 이익 및 종래의 준비금(약 100만원)을 합쳐 총액 700만원 내외를 모두 본위은화로 저장하 고 이에 대하여 지폐를 발행할 것이며 아울러 은행을 설립하고 조세징수권을 준다170)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은행은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 이용익이 주한일본공사에게 전달 한 각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중앙정부은행 또는 황실은행의 형태로 당시 다른 은행이 맡고 있던 조세금 징수권을 독점하고 독자적인 금은화를 발행하고 이에 의거하여 지폐를 제조하여 發券利益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財政流通은 은행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우리나라에 數三의 은행이 있으나 이름만 있을 뿐 본위화는 없고 화폐가 전국에 유통하지 않음으로써 중앙정부은행 또는 황실은행을 설립하고 各郡의 公錢을 은행에서 專管收納하게 할 것이다. 이 은행에서 외국은행으로부터 500만원을 월 3厘 利息으로 차관하여 金銀地金을 貿來하고 우리 極印을 인쇄하여 통용시키며, 그 금은 화에 대하여 지폐를 제조하면 이익이 적지 않다. 차관은 그 은행에서 10년동안 상환할 것이 다.171) 일본은 이 차관교섭을 받아들일 경우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간섭을 초래할 것을 고 려하여 미국 영국 등과 제휴하여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이용익은 미국 영국 러 시아 어느 나라에서든지 쉽게 차관을 얻을 수 있지만 미국 영국 경우는 광산을 저당으 로 해야 하고 러시아에는 정치적 간섭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이로써 은본위 화폐제도에 의거한 중앙은행 설립 구상은 일단락되고 말았다. 이후 1903년까지 중앙은행 설립정책은 고종의 지시 하에 측근인물인 이용익과 탁지부 고문 브라운, 기타 정부대신을 통해 프랑스 러시아 벨기에 영국 미국 일본 등과 무 차별적으로 차관교섭을 하게 하는 형태로 추진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차관교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170) 日本外交文書 제32권, 문서번호 192 韓廷外債新込ニツキ具報ノ件. 171) 日本外交文書 제32권, 문서번호 198 韓廷外債新込ニツキ續申ノ件.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17 - 섭은 러시아 프랑스 동맹세력, 영국 일본 동맹세력 사이의 한국을 둘러싼 이권 각축전, 그리고 이에 연결된 각 정부대신들의 이해관계 대립과 맞물림으로써 여러차례의 우여곡 절을 거치면서도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172) 1900년 10월부터 이용익은 프랑스 雲南신디케이트 와 교섭하여 1901년 4월 차관조약 을 체결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당초 1898년 7월에 결정되었던 금본위 화폐제도를 실시 하기 위하여 1901년 2월 12일 금본위화폐조례 도 공포하였다. 그러나 조선 해관세 취 급권을 상실하게 될 것을 우려한 일본제일은행측과 조선해관 장악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려 한 영국측이 방해공작을 하고 차관교섭 상대측 인물이 病死함으로써 교 섭이 중단되고 말았다. 곧이어 차관교섭을 재개하였으나 차관 담보로 제공하려고 했던 해 관세가 브라운에 의해 수도공사와 항만시설 비용으로 할당되어 담보 설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1902년 2월 26일 프랑스공사에게 차관조약의 파기를 선언할 수밖 에 없었다.173) 이처럼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이용익의 차관 교섭은 관세관리권과 처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브라운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브라운은 영국의 극동정책 하에서 러시아의 세 력 팽창을 저지하고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종은 이용익과 별도로 브라운에게도 차관 교섭을 맡겼었다. 브라운은 1899년 10월, 화폐제도 개혁 및 기타 공공사업 자금으로 해관세를 담보로 하여 500만원 이내의 금액을 차입하라는 고종의 칙서를 받고 上海로 가서 영국계 香港上海銀行과 차관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측과 차관교섭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00년 4월부터 일본제 일은행측과 교섭한 결과 1900년 11월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렀으나 차관협상 내용이 사 전에 누설되어 정부대신 및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의 반대에 부딪힘으로써 좌절되었다. 雲南신디케이트 차관계획이 거의 성사되어 가던 1901년 3월 이용익이 브라운을 해고 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에 따라 브라운은 다시 적극적으로 일본제일은행과의 교섭을 시작 하였다. 교섭내용은 해관세를 저당으로 300만원을 대부하되 200만원은 제일은행권으로 100만원은 日本通貨로 하고, 제일은행에 제일은행태환권을 발행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 이었다. 1902년 1월 성사단계까지 이르렀던 이 교섭은 고종이 재가를 미룸으로써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174) 1902년경이 되면 그때까지 차관에 의거해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던 계획에 변화가 나타 172) 森山茂德, 近代日韓關係史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87; 김세민 옮김, 근대한일관계사연 구, 玄音社, 1994) pp.111 136. 173) 나애자, 앞의 논문, pp.71 74. 174) 金賢淑, 韓末 顧問官 J. McLeavy Brown에 대한 硏究 ( 韓國史硏究 66, 1989) pp.131 140.

- 118 - 國史館論叢 第77輯 났다. 즉 차관교섭을 계속하면서도 기존의 민간은행을 황실이 인수 경영하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그 대상은 당시 가장 활발하게 영업하면서 높은 수익율을 올리고 있던 대한천 일은행이었다. 전술했듯이 고종은 1902년 3월 영친왕을 천일은행장, 이용익을 부은행장 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175) 이러한 시도가 더 이상 발전되 지 않은 것은 전술했듯이 고종은 1902년 말 다시금 러시아와 교섭하고 있었던 5백만원 차관 건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은 러시아 차관교섭이 성사될 것같다는 판단하에 일거에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는 계획으로 선회한 것인데, 일본정부와 제일은행측의 방해공 작으로 좌절되고 공립한성은행 창립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제일은행은 조선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1902년 6월부터 조선 국내에서만 유통하는 것을 조건으로 제일은행권이라는 불환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정부로서는 화폐주권을 침탈당한 것이다. 고종과 이용익은 1902년 9월부터 제일은행 권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독자적인 지폐발행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전환국 으로 하여금 지폐 模型을 급히 조각하게 하고 내륙지방으로부터 개항장에 출하되는 사금 및 금괴를 매수하여 지폐 발행 준비금에 충당하려 하였다.176) 고종은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데 필요한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1903년 3월 24일 정부회의에서 여러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앙은행조례 와 태환금권조 례 를 반포하였다.177) 5월경에는 금화를 주조하기 위해 금괴 3만 개를 내장원으로 운반 적치하여178) 12월경에 이르면 전환국에 약 120만원의 금괴를 저장하고 50錢銀貨(半圜銀 貨)도 150만원 정도를 주조하였으며179) 1904년 4월에는 태환권 및 백동화어음의 인쇄작 업에 들어갔다.180) 그런데 이렇게 많은 액수의 본위화폐를 주조하고 금은지금을 확보하 는 데 필요한 자금은 역설적으로 전환국에서 대량 남발한 백동화로 충당하였다.181) 175) 전환국 초빙기사였던 三上豊의 회고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이를 인수하여 중앙은행으로 삼으 려 했다(三上豊, 典圜局回顧錄, 한국경제사문헌자료 1, p.79). 176) 도면회, 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의 문란과 그 영향 ( 韓國史論, 1989) p.430. 177) 奏本 34號 中央銀行設立事 奏本 35號 兌換金券發行事 ( 奏本 66책). 중앙은행조례 실시에 반대한 대신은 李根命 李道宰 成岐運 閔種黙 등 4명, 찬성은 金奎 弘 金疇鉉 金聲根 沈相薰 李載克 등 5명이었고, 태환금권조례 실시에 대해서는 이근명 김규홍 김주현 이도재 심상훈 이재극 성기운 등 7명이 반대하고 김성근 민종묵 등 2명 이 찬성했을 뿐이다. 중앙은행 설립 자체에 반대하는 대신보다 태환금권 발행에 반대하는 대 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금본위화를 전혀 주조 발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조례가 실 시될 경우 불환지폐가 대량 남발되어 백동화 남발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178) 皇城新聞 광무 7년 5월 12일 잡보. 179) 皇城新聞 광무 7년 12월 16일 잡보. 180) 日本外交文書 제36권 1책, 문서번호 636 韓國典圜局鑄貨狀況報告ノ件 (附記 二)典圜局 處分ニ關スル件.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19-1904년 11월 폐쇄되기 직전까지 전환국에서 주조 또는 저장한 각종 화폐와 金銀地金 의 액수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宮內府 內藏院(1905년 3월 이후는 經理院)의 회계장 부에 의하면 1904년 1월 전환국으로부터 은화 91만 5천원, 백동화 149만 9,750원, 적 동화 1만 2천원을, 12월에 銅貨 173만 42원 5전 4리를, 그리고 1907년 10월 전환국에 서 주조되었던 半圜銀貨 50만 3천 圜을 신화폐와 교환하여 48만 6,673圜을 수입하였 다.182) 이상 내장원으로 적치된 각종 화폐의 총액은 1905년 화폐정리사업 이 시작되기 이전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465만 9,792元의 거액이었고,183) 내장원으로 옮겨지지 않은 화폐 액을 합해서 추정하면 1903년 말경 한국정부는 화폐 발행액 면에서 1901년의 금본위화 폐조례 를 실시할 수 있는 준비를 상당한 정도까지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중앙은행 설립 준비는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상당히 지체되었다. 중앙은행조례 가 반포된 지 5개월이 지난 1903년 8월에 들어서야 중앙은행 사무소를 정하고 주식 모집을 시작하였다.184) 8월 23일에 총재로 심상훈, 부총재로 이용익을 임명 한 데 이어 9월 7일과 30일 두 차례에 걸쳐 다음 <표 6>의 인물들을 중앙은행 창설사무 위원으로 임명하였다.185) 이들 23명의 관직이나 은행 관련 경력을 살펴보면 우선 과거 조선은행이나 한성은행에 관련했던 인물은 전혀 없고 천일은행 주주 또는 임원이었던 인 물이 7명, 탁지부 실무 관료가 3명, 나머지 대부분은 궁내부 산하기관의 관료들이다. 중앙은행 창설사무위원들은 9월부터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중앙은행을 前 寫字廳 자 리에 웅대하게 건축하기로 결정하고 각도에 지소를 창설한다는 방침 등을 수립하였 다.186) 그런데 중앙은행에서 지폐를 발행하겠다는 고종의 구상에 대해 정부 내에서는 여 181) 일본거류민이 발행하는 漢城新聞 1903년 10월 24일자에 의하면 최근 백동화 폭락의 원인 은 한국정부가 중앙은행의 창립과 지폐발행 준비금과 本店 支店의 자본금을 조달하기 위한 것으로서, 백동화를 남발하여 사금을 사들이고 금화를 주조하여 준비금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 이다(三上豊, 앞의 글, p.81). 182) 이윤상, 앞의 논문, pp.290 294. 여기 인용된 會計冊 (奎 19113) 光武 8년 1월 12월, 隆熙 원년 10월의 관계항목을 다시 상세히 참조함. 전환국에서 내장원으로 각종 화폐를 옮긴 이유는 1904년 1월에는 러일전쟁 개전 직전의 불안한 국제정세 때문이었을 것이며, 12월에 는 目賀田 재정고문이 전환국을 폐쇄함에 따라 남아있던 백동화 등을 옮겨야 했기 때문이며, 1907년 10월의 半圜銀貨는 고종이 따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화폐정리사업 으로 인하여 어 쩔 수 없이 교환하기 위해 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1903년 말까지 전환국으로 운반 적 치한 금괴 3만 개로 주궤하여 만든 120만원 값어치 금괴의 행방은 지금까지 찾을 길 없다. 183) 半圜銀貨 50만 3천 圜은 1905년 화폐정리사업 이전의 50만 3천 元과 가치면에서 다를 바 없었다. 184) 皇城新聞 광무 7년 8월 11일 잡보. 185) 舊韓國官報 광무 7년 9월 9일, 10월 2일. 186) 皇城新聞 광무 7년 9월 19일, 10월 20일, 10월 23일, 10월 31일 잡보.

- 120 - 國史館論叢 第77輯 전히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다.187) 아직 금화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폐를 발행할 경우 백동화 남발보다 더한 폐단을 낳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고종 의 의지는 확고하였고 이로 인하여 탁지부대신 김성근과 군부대신 윤웅렬이 상소를 올리 고 사직할 정도였다.188) <표 6> 중앙은행 임원 및 창설사무위원 이름 은행경력 현임관직 이름 은행경력 현임관직 沈相薰 충북관찰사 吳相奎 탁지부 출납국장 李容翊 天一銀行副銀行長 尹德榮 비서원경 權重顯 육군법원장 李健榮 탁지부 사세국장 金嘉鎭 중추원부의장 李根澔 天一銀行副銀行長 의정부찬정 金斗明 內藏院 工業課 技師 李吉善 天一銀行 監事員 정3품 金疇鉉 내부대신 李寅榮 서북철도국감독 柳正秀 탁지부 사계국장 李夏榮 조사위원장 閔商鎬 통신원 총판 趙東完 궁내부특진관 閔泳璇 지계아문 부총재 崔文植 天一銀行監事員 정3품 安重基 前 主事 崔思永 天一銀行株主 정3품 嚴柱益 天一銀行株主 군부 협판 崔錫彰 정3품 嚴俊源 天一銀行株主 육군 副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8월의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인 目賀田種太郞이 재정 고문으로 부임함으로써 중앙은행 설립 계획은 전면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目賀田은 1904년 11월 전환국을 폐쇄시킨 다음 1905년 1월에는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에 한국 의 국고금 출납에 관한 모든 사무를 취급하는 중앙은행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만들었 다.189) 이로써 고종이 추진하던 본위금화와 태환권 발행, 중앙은행 설립 계획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Ⅳ. 맺 음 말 갑오개혁 이후 신식화폐제도와 조세금납화 조치가 실시되었지만 그 운영에 필수불가결 한 금융기관, 특히 중앙은행이 설립되지 않음으로써 한국의 화폐금융구조는 극심한 내적 모순에 시달리게 되었다. 187) 皇城新聞 광무 7년 9월 19일 잡보. 188) 皇城新聞 광무 7년 10월 2일 잡보. 189) 이윤상, 앞의 논문, p.215.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21-1898년경부터 정부 재정 부족으로 인하여 남발되던 백동화가 1900년 이후에는 주로 황실의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재원으로서 엄청난 규모로 남발되고, 이에 더하여 내외 국인에 의한 사주 묵주 특주 등으로 백동화의 폐해는 극에 달하여 갔다. 이와 동시에 중앙정부의 외획과 지방관의 세납차인을 이용한 조세금 상납이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림 으로써 재정수입은 궁핍 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내적 모순구조는 외적 계기인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정과 맞물려 일본화폐의 信 用度 提高와 본위화 역할을 허용하였고, 일본제일은행 조선지점이 한국의 중앙은행 역할 을 일부 담당하게 만들었으며 제일은행권과 같은 불환지폐를 임의로 발행 유통시키는 금 융 화폐주권상의 침탈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896년 이후 한국정부 관료층과 상인층에 의해 설립된 은행이 여럿 있었지만 이들 은 행은 이러한 문제들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독립협회운동의 초기 주도세력에 의해 설립 된 조선은행은 독립협회운동이 좌절하고 은행장이었던 安駉壽가 쿠데타음모 미수로 망명 함으로써 영업 부진에 빠져들었고, 이를 재정비하여 개명한 韓興銀行도 발전 가능성을 잠 시 보이다가 1900년 이후 폐업 정리하고 말았다. 조선은행과 같은 시기에 출발한 한성은행은 창립 초기부터 三南과 海西地方의 조세금 취급 특권을 보장받고 1898년과 1899년 초 두 차례에 걸쳐 주주들에게 이익 배당금을 분배할 만큼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성은행이 주된 영업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조세금 취급 특권을 1899년 3월 이후 천일은행이 장악함으로써 한성은행의 전성 기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03년 일본의 대한 침략과정의 일환으로 창립된 공립한성은행은 자본금과 영업 양 측면에서 일본 제일은행조선지점에 종속된 상태였고, 더군다나 당시 반일적인 정치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국면이었기 때문에 1905년에 이르기까지 발전 가능성이 닫혀 있었다.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1899년 1월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었다. 한성의 대 상인들과 황실 군부 등 전제군주권 강화에 핵심적인 부서의 고급 중견관리들을 주축으 로 하여 창립된 천일은행은 초기부터 전국 조세금 취급특권을 획득하고 막대한 이익을 올렸으며, 1902년 이후에는 영친왕 이용익 등 황제권과 밀접히 연관된 인물들이 은행장 부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자본 규모와 영업 이익 양면에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고종은 이와 별도로 중앙은행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은행 설립 자본 금 부족이 문제였다. 1902년 초까지 고종은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 아 등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에게 무차별적인 차관교섭을 시도했으나 모두 열강 상호간의 견제, 특히 일본의 책략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고종은 1902년 중반 제일은행권 발행이라 는 화폐주권상의 침탈을 받고 나서야 自力에 의한 중앙은행 설립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

- 122 - 國史館論叢 第77輯 나, 때가 이미 늦었다. 중앙은행 설립 준비가 시작된 지 반 년도 되지 않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국정부의 재정은 일본인 재정고문 目賀田種太郞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에 의하여 일본 제일은행의 한국 중앙은행화, 화폐정리사업, 징세기구 정리 등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그나마 대한제 국기에 성장해 왔던 은행들은 일본 금융기구에 예속된 형태로 재편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동안 추진해왔던 중앙은행 설립 노력도 좌절되었다. 그리고 제일은행의 한국 중앙은행 으로의 승격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만들어 가는 첫 과정이 되고 말았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갑오개혁 이후 설립된 금융기관들이 순조롭게 성장하지 못한 이유 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력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상품화폐경제 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가장 큰 국내 유휴자본은 곧 조세금이었고 이를 상납하 는 역할을 맡는 것은 가장 확실한 영업자본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특권을 획득 유지하는 것이 사실상 은행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치권력의 변동이 극히 무상한 시기였기 때문에 특정한 은행이 조세금 취급특권을 장기 적으로 획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가장 안정적으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천일은행 마저 1900년 이후에는 그 특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둘째, 1898년 이후 지속적으로 심화된 백동화 인플레이션의 영향이다. 인플레이션이 급속도로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화폐형태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화폐자본의 減損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不動産 형태로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자 본 보전 방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은행에 예금을 하려는 동기가 유발될 수 없다. 천일 은행 영업실적에서 예금고가 1901년까지 10만원을 밑도는 이유는 그때문인 것으로 판단 된다. 또 한성은행 천일은행에서 어느 정도 순이익을 올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명목상 의 순이익일 뿐, 상품구매력 등 실질적인 순이익은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자본 축적 이 순조롭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고종이 국내 자본을 동원하려 하지 않고 외국차관에 의존하여 중앙은행을 설립 하려는 구상을 견지한 점이다. 앞서 보았듯이 비록 백동화를 대량 발행하였더라도 전환국 에서는 1903년부터 1904년 말까지 단 2년만에 화폐제도 개혁을 위한 준비를 상당한 정 도까지 진척시킬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종 은 1902년 중반 일본제일은행의 은행권 발행이라는 화폐주권상의 침탈을 당할 때까지 외 채에 의존한 화폐제도 개혁과 중앙은행 설립 구상을 견지하였으니, 이는 정책상의 오류라 고 할 수 있다. 또 이로 인하여 중앙은행조례 반포 이전에 존재했던 여러 은행들에 대 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역시 정책의 오류, 더 나아가서는 정책의 결여라고 볼 수

갑오개혁 이후의 근대적 금융기관 - 123 - 밖에 없다. 지금까지 갑오개혁 이후 몇 안 되는 근대적 금융기관의 설립과 운영상황을 검토하면서 금융 부문에서 자주적인 자본주의화에 실패한 원인을 검토해 보았지만, 본고는 몇 가지 중요한 미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직접적인 사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각 은행의 영 업상황 변화를 보다 세밀하게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은행 주주 및 예금 대출 명세서, 금융관행과 이자율의 변화 등을 거의 다루지 못하였다.190) 둘째, 갑오개혁 이전과 이후에 존재했던 客主 契 貸金業 典當鋪 換錢商 등 금융업 이 이들 은행과 비교하여 당시 금융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추적하지 못하였 다. 특히 갑오개혁 이후 정부에서 추진했던 전당포 대금업 환전상 등에 대한 통제가 어 떠한 정책 구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검토해 볼 만한 작업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갑오개혁 이래 한국정부의 금융정책이 구체적 으로 어떠한 내용이었는지를 형상화하지 못한 점이다. 이는 정부의 금융정책을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일관된 사료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처럼 흩어진 사료들 속 에서 정책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의 결여 때문이기도 하다. 190) 이 점에서 한성은행과 천일은행의 後身인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에서 풍부한 사료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