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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A 목차

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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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배분구조표(표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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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문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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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末 지식인의 反帝國主義論 -卞榮晚(1889 1954)을 중심으로- 崔 起 榮* Ⅰ. 머 리 말 Ⅱ. 卞榮晚의 인물과 저술 Ⅲ. 卞榮晚의 帝國主義 인식 Ⅳ. 卞榮晚의 反帝國主義論 Ⅴ. 맺 는 말 Ⅰ. 머 리 말 1900년대 후반기의 大韓帝國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여, 식민지의 바로 전단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국가적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국민적 노력은 대체로 두 가지 방 향으로 이 루어졌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義兵의 무력 항쟁과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지식인 주도의 이른바 愛國啓蒙運動이 그것이었다. 이 두 움직임의 전개는 모두 국민대중을 기반으로 하고자 하였으면서도, 상호보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국권회복의 의지를 국민들에게 고양 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었던 것이다.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한 지식인들은 교육과 殖產興業을 통한 實力養成으로 국 권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일제의 침략을 서구열강의 帝國主義 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고, 그 양상과 대응책을 살피고자 하는 노력도 경주되고 있었 다.1) 한국에서 帝國主義 라는 용어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던 1905 6년을 전후한 시기 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짐작되며, 民族主義 또는 國民主義 라는 용 어와 함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것들이 imperialism 과 nationalism 을 일본 이나 중국에서 번역한 용어의 수용임도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한말 지식인 가운데 제국주의의 이해에 관심을 보이고 반제국주의론을 전개한 대표적 인 인물로는 申采浩(1880 1936)가 널리 알려져 있고, 그에 관해서는 이미 선학들의 연 구가 적지 않다.2) 그러나 신채호보다 더욱 제국주의의 이해와 그 대응에 관심을 집중시 * 世宗大學校 講師. 1) 이에 관해서는 金度亨, 韓末 啓蒙運動의 政治論 연구 ( 韓國史硏究 54, 1986) 참조. 2)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申一澈, 申采浩의 歷史思想硏究 (高麗大 出版部, 1981)와 愼鏞廈, 申采 浩의 社會思想硏究 (한길사, 1984) 및 李萬烈, 丹齋 申采浩의 歷史學 硏究 (文學과 知性社 1989)를 들 수 있다.

- 119 - 킨 인물로 卞榮晚(1889 1954)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변영만은 漢學者 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3) 1900년대 후반기에는 법률가인 동시에 저술가로의 활약이 두 드러졌었다. 특히 제국주의에 관련된 여러 편의 논설을 발표하였으며, 1908년에는 世 界三怪物 과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라는 반제국주의론에 입각한 두 권의 번역 서를 간행하였던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4) 아마도 이것이 1900년 대 후반기에 지 식인이 제국주의에 대하여 보인 본격적인 관심으로는 유일하지 않았나 생각되므로, 필자 는 변영만을 중심으로 韓末 지식인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와 대응에 관하여 주목하고 자 한다. 叱正을 바란다. Ⅱ. 卞榮晚의 인물과 저술 변영만은 1889년 6월 23일(음) 경기도 富平郡 下梧亭面 古里洞 313번지에서 태어났 다.5) 그는 고려 말 鄭夢周의 제자인 卞仲良(卞季良의 형)의 후손으로, 크게 이름 난 가 문의 후예는 아니었다. 조선중기에는 武科 급제자들이 여럿 보이고 있으나, 후기에는 별 달리 관직에 나아간 인물도 없었다.6) 다만 그의 부친 卞鼎相(1861 1935)이 興陽郡守 康 翎郡守 慶興監理 三和監理 등의 고위 지방관직을 역임한 바 있었다.7) 그의 형제로는 영 문학자로 뒤에 제1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한 卞榮泰(1892 1969)와 시인 卞榮魯(l898 1961)가 있어, 흔히 한국의 三蘇 라 불리웠다고 한다.8) 부친이 관직에 있던 관계로 변영 만 일가는 서울의 가회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1906년 현재 서울 북서 嘉會坊 孟峴 14통 1호의 호적대장에는 변정상모친과 부부를 비롯하여 변영만 변영태 부부, 그리고 卞榮福 (영로) 등 8명과 하인 남녀 각 1인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903년 3월 이 래로 이들이 살고 있던 집의 규모는 초가 13칸이었던 것으로 보아,9) 풍족한 살림은 아 3) 변영만의 사망 직후 崔南善은 東亞日報 1954년 12월 23일자에 哀卞山康(榮晚) 이라는 추도시 조를 발표하였는데, 그 마지막 연은 爲堂이 없어져도 山康 남아 있다하여/천하의 글바들 이 헤매 는 일 없을니니/이제야 一代虹光을 어디 찾아 보리오 라 하여 鄭寅普와 변영만이 현대의 대표적인 한학자임을 지적하고 있었다. 4) 변영만에 대한 연구로는 최근 崔鉉洙, 山康 卞榮晚의 生涯와 國學觀 上( 畿甸文化 9, 1992) 가 발표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변영만을 논의한 글에서도 이들 번역서에 관해서는 겨우 이름 정도 나 논의 될 뿐이었다. 5) 草溪密陽卞氏大同譜 5(초계밀양변씨대종회, 1987) p. 49. 崔鉉洙, 山康 卞榮晚의 生涯와 國學 觀 上, pp. 57 58. 그 출생지를 林鍾國 朴魯埻, 흘러간 星座 1(國際文化社, 1966) p. 293에는 부평의 본가가 아닌 서울 車洞(순화동)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그러하였을 가능성도 크다. 6) 草溪密陽卞氏大同譜 에 따르면 변영만의 부친인 卞鼎相의 養父 卞海準이 將士郞 繕工監役을 역 임하였던 것이 17세기 이래 유일한 仕官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7) 大韓帝國官員履歷書 (國史編纂委員會, 1972) p. 400, 775. 草溪密陽卞氏大同譜 5, p. 49. 8) 흘러간 星座 1, p. 275. 9) 光武十年度 漢城府戶籍. 이 호적은 京都大學 圖書館 소장의 韓國戶籍成册 155에 포함된 것으 로, 東京外國語大學 조선어과 吉田光男교수의 후의로 그 복사본을 借覽할 수 있었다.

- 120 - 國史館論叢 第47輯 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10) 1900년대에는 邁堂 또는 塵佛이라는 호를 사용하던 그는,11) 뒤에 自旻 穀明 山康 등으로 자처하였다. 당시의 교육대로 변영만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가 뒤에 한학자로 이름을 날린 것은 부친과 가까웠던 修堂 李南珪(1855 1907)의 문하에서 상당한 기간 한학을 배 웠기 때문이었다.12) 다만 그가 成均館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고도 하나,13)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만 16세 때인 1906년 1월 14일에 法官養成所를 제4회로 졸업하였고,14) 이어 서 그 해 3월 22일자로 법관양성소 졸업생 20명과 함께 판임관 8급의 법관양성소 博士에 임명되었다.15) 여러 차례 개정된 法官養成所規則 에는 그 수학기간이 3년까지로 규정되기 도 하였으나 대체로 2년을 수학한 것으로 보이고, 그 입학연령은 변함없이 20세 이상이었 다.16) 변영만의 입학은 연령을 높혀서 가능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17) 법관양성소의 졸업 에 앞서 1905년 11월에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법관양성소의 교관들과 학원들은 그 부 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었는데,18) 변영만도 여기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법관 양성소에서 변영만은 법학통론 민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헌법 행정법 국제법 상 법 현행법률 산술 작문 外國律例 등을 배웠으나,19) 이러한 법학교육은 신학문을 중시한 교육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20) 따라서 변영만은 법관양성소 박사에 임용되었지만, 보 10) 변영로도 孟峴에 살던 시기를 부유하지 못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申采浩論 思潮 1958년 10월호, p. 71). 11) 邁堂(居士)은 法政學界 에서, 塵佛은 法政學界 와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에서 확인 된다. 12) 卞榮晚, 나의 回想되는 先輩 몇 분 ( 新東亞 1936년 6월호) pp. 211 212. 李萬烈, 丹齋 申采浩의 歷史學 硏究 p. 61. 13) 愼鏞廈, 申采浩의 社會思想硏究 p. 15에는 신채호가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성균관에서 수학 하였는데, 이때 변영만과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14) 舊韓國官報 1906년 1월 6일자 彙報 및 1월 9일자 광고. 지금까지 변영만은 1905년에 법관양 성소에 입학하여 6개월 만에 졸업하였다고 알려져 왔으나( 흘러간 星座 1, pp. 294 295), 제4 회 졸업생은 그보다 1년이 앞선 1904년 9월에 입학한 경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법관양성소에 서는 1895년 음력 4월과 음력 6월에 각기 제1 2회 입학생을 모집하여 1895년 음력 11월과 1896년 5월에 졸업시켰으며, 1903년 2월에 제3회가 입학하여 1904년 7월에, 1904년 9월에 입학한 제4회는 1906년 1월에 졸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5회는 1905년 9월에 입학하여 1908년 1월에 졸업하였 던 것 같다. 1909년 2월에 제6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던 법관양성소는 1909년 10월에 법학교로 개 편되었다. 이에 관한 자료는 서울法大百年史 (서울大學校 法科大學 同窓會, 1987 pp. 123 132 참조. 필자는 법관양성소에 관한 별도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15) 舊韓國官報 1906년 3월 26일자 敍任及辭令. 16) 서울法大百年史 pp. 28 35, 45 57에 수록된 법관양성소의 관제와 규칙을 참조할 것. 17) 이 점은 변영로가 申采浩論 p. 72에서 뒤에 판사 임용시에도 연령이 미달하자 鄭求昌과 변영 만이 10세를 높여 임용되었다고 회고한 것이 참고된다. 18) 大韓毎日申報 1905년 11월 24 25일자, 12월 3 5일자 잡보 및 12월 2일자 잡보 法官失刑. 19) 舊韓國官報 1904년 8월 5일자 및 1905년 4월 12일자 部令. 20) 그것은 법관양성소 제4회 졸업에 앞서 법관양성소장 李冕宇가 이들 졸업생의 신학문 부족을 언급 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大韓每日申報 1905년 12월 22일자 잡보 卒業還呈 ). 그러나 흘 러간 星座 1, p. 294에는 법관양성소에서 大典會通 등 舊法만을 교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 121 - 다 새롭고 본격적인 법학교육을 받기 위하여 당시 유일의 법학전문 사립교육기관이었던 2년제의 普成專門學校 法律夜學科에 1906년 2월 제2회로 입학하였고,21) 1908년 1월 29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22) 아마도 그가 야학과정에 입학한 것으로 미루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법관양성소 박사의 관직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23) 보성전문학교 재학시절 그는 普專親睦會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24) 訴訟演習會에서는 변호사의 역 할을 맡기도 하였다.25) 특별히 그가 신학문 가운데 법률에 주목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보성 전문학교에서는 상당히 세분화된 법률교육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변영만이 수강하였을 교과목만도 25과목을 넘어 섰을 것으로 짐작된다.26) 1906년 이후 2년제로 바 뀐 법관양성소의 교과목이 現行法律 이외에 10개 과목 정도를 교수한 사실에 비추어,27) 보성전문학교의 법학교육은 그보다 상당히 다양하고 심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변영만은 1908년 7월 4일자로 판임관 3등의 재판소서기에 임 명되어 京城地方栽判所 서기로 보임되었다가,28) 12월 17일자로 주임관 4등의 판사에 임 명되어 木浦區裁判所 판사에 보임되었다.29) 그러나 그가 판사직에 있은 것은 1년이 채 안되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가 언제 판사직을 사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30) 1910 년 1월에는 서울 중부 黃土峴 23통 3호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 그런데 변영만이 판사직을 그만 둔 것은 1909년 7월 24일자로 체결된 한국정부와 일본 정부 간의 司法及監獄事務委任 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32) 즉 일본에게 사 법권마저 빼앗기게 되자, 그는 판사직을 사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변호사활동 은 한일합병을 전후하여 新義州로 옮겨 계속되었다고 한다.33) 는 사실이 아니다. 다만 舊法을 중시하여 새로운 법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21) 法政學界 1(1907.5) p. 54 記事. 22) 法政學界 10(1908.3) pp. 50 51 記事. 23) 光武十年度 漢城府戶籍 에도 변영만은 박사로 표기되었는데, 다만 이 호적이 1906년 어느 시 기에 작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4) 親睦 1(1907.3) p. 32 會錄. 25) 皇城新聞 1907년 6월 5 6 7일자 잡보 訴訟演習會實況. 26) 法政學界 1, pp. 61 63과 法政學界 6(1907.10) pp. 60 61의 記事에는 제2회 법률야학과 의 1 2학년 과정이 소개되어 있는데, 법학통론 민법총론 상법총론 경제학 채권법 물권법 행정법 재정학 회사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국제사법 파산법 평시국제공법 헌법 해상법 魚驗法 상속법 전시국제공법 상행위 은행론 歲計論 증거법 통계학 등이 나타나고 있다. 27) 舊韓國官報 1906년 4월 4일자 部令. 28) 舊韓國官報 1908년 7월 10일자 敍任及辭令. 29) 舊韓國官報 1908년 12월 21 23일자 敍任及辭令. 30) 변영만의 死後 1957년 金鍾河의 편집으로 昌原龍溪書堂에서 발행된 문집 山康齋文鈔 에 수록 된 北上詞 에는 己酉孟冬棄官歸家時作 으로 되어 있다. 즉 1909년 말에 판사직을 사임하고 上 京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舊韓國官報 에서는 그의 사임이 확인되지 않는다. 31) 皇城新聞 1910년 1월 12일자 광고. 32) 舊韓國官報 1909년 7월 24일자 公吿 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33) 흘러간 星座 1, pp. 295 297. 崔鉉洙, 山康 卞榮晚의 生涯와 國學觀 上 p. 64.

- 122 - 國史館論叢 第47輯 변영만은 관직에 나아가기 이전부터 당시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활동하던 여 러 계몽단체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1906년 12월부터 普專親睦會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고,34) 1908년 3월에는 法學協會의 창립에도 관여하여 사찰원과 편술원 으로도 활약한 바 있었다.35) 그리고 畿湖興學會에도 관여하였다.36) 근대적 법학교육을 받은 그가 국민계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특히 보전친목회나 법학학회에 관여한 것으로 보아 법학과 법률보급에 대한 그의 관심이 매우 컸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어느 시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大東專門學校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 였던 것으로 보인다.37) 역시 법학을 강의 하지 않았을까 한다. 1900년대에 그는 申采浩 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는데,38) 아마도 李南珪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1900년대 초 이래 로 10년 가깝게 年上이었던 연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교분을 나누었던 것이다.39) 따라서 변영만의 현실인식과 사상형성에 신채호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매우 괴퍅하고 교만 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40) 당대의 대표적인 才士로 이름을 떨 친 바 있었다.41) 한일합병 전후 변영만이 국경지역인 신의주로 옮겨 변호사를 개업한 것은, 국외망명을 염두에 두고 결행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그와 절친하였던 신채호와 같은 인물이 중 국에 망명하였으므로, 그는 신의주에 머물며 망명객들과의 연락이나 망명을 주선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911년 가을에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던 변영만은,42) 결국 1912년 말이 나 1913년 초에 스스로도 중국으로 망명하고 만다.43) 또 그의 동생 변영태도 桂山學校와 34) 親睦 1, p. 32. 35) 法學協會雜誌 1(1908.11) p. 80, 99. 36) 大呼敎育 ( 畿湖興學會月報 1, 1908.8) p. 25. 37) 卞榮晚, 나의 回想되는 先輩 몇 분 p. 212. 당시 대동전문학교의 교장은 李重夏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1910년대 초의 일이 아닌가 한다. 38) 그들의 친분관계는 변영만의 실루에트 二, 三 ( 中央 1936년 6월호)이나 변영로의 國粹主 義의 恒星인 丹齋 申采浩先生 ( 開闢 1925년 8월호) 및 申采浩論 등의 회고에서도 짐작될 뿐 아니라, 한말에 서로의 저술에 서문을 써주었던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예컨대 申采浩의 저술인 乙支文德 (1908.5)의 서문과 교열을 卞榮晚이, 변영만의 저술인 世界三怪物 (1908.3)의 서문을 신채호가 쓴 바 있었다. 그리고 李基燦 또한 두 서적에 서문을 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세 사람이 가까운 사이였음이 틀림없다. 변영만의 문집 山康齋文鈔 에는 한문으로 2,500자가 넘는 丹齋 傳 과 600여 자의 祭申丹齋文 이 실려 있고, 悼丹齋 라는 題下의 시 3편도 수록되어 있다. 39) 卞榮晚, 나의 回想되는 先輩 몇 분 pp. 211 212 40) 흘러간 星座 1, pp. 276 281. 1923년에 쓴 私記 를 예로 보면 金允植을 鄕愿에, 俞吉濬을 奇士(畸人)로 묘사한 것으로 짐작되는 일이다. 41) 朝光 1941년 8월호, p. 104의 洪碧初 玄幾堂對談 에서 玄相允은 1910년대에 서울 長安 8才 로 鄭求昌 卞榮晚 碧初(洪命憙) 鄭寅普 등이 논의되었다고 회고하였다. 42) 山康齋文鈔 의 與洪冕憙聖武書 및 凔江傳. 이때 변영만은 通州에서 金澤榮을 만났다 고 한다. 43) 그의 망명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1912년 말부터 1913년 초였음은 山康齋文鈔 에 실린 檄 鴨綠江紀文 이 1912년에 新義州에서 지은 글이고, 東章太炎 이 1913년 중국에서 지은 것으로 설명되어 있음에서 짐작된다.

- 123 - 普成學校를 마치고 1911년 12월 만주에서 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인 新興講習所를 졸업하고 있었음으로도,44) 변영만의 망명이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는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1912년에 조직되어 활동하던 同濟社에도 참여하였 다.45) 1917년에는 세계일주를 시도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싱가포르까지 갔던 변영 만은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세계일주를 포기하고, 싱가포르에서 洪命憙와 鄭元澤 등 과 7월부터 10월까지 3개월 머물다가 상해로 돌아오고 말았다.46) 5년 넘게 중국에 망명하 고 있던 그는 1918년에 귀국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47) 귀국한 이후 계몽활동이나 정 치 활동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漢學을 중심으로 문필 활동을 하였다.48) 해방 이후 변영만은 정치나 사회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해방 직후부터 成均館大學에 관여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부터 明倫專門學校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46년에는 일 시 명륜전문학교의 제2대 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동교가 성균관대학으로 개편된 뒤에 도 한문학 교수로 재임하다가 6.25 직전인 1950년 5월 30일에 사임한 것으로 나타난 다.49) 6 25 전쟁시기에 釜山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서울에 돌아왔던 그는,50) 1954년 12월 18일 만 65세로 서울 貞陵에서 사망하였다.51)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변영만은 여러 잡지나 학보에 논설을 발표하였고, 단 행본도 출판하고 있었다. 현재 한일합병 이전에 발표된 것으로 확인되는 것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으나, 앞으로 조사에 의하여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표에 의하면 변영만은 보성전문학교의 졸업생 모임인 교우회에서 발간하던 法 政學界 라는 월간 학술지에 주로 논설을 발표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졸업한 직 후인 1908년 3월호인 제10호부터 7호에 걸쳐 10편의 글을 실었던 것이다. 親睦 에 발 표한 祝辭 를 제외하면 모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발표한 것이었고, 그 내 용은 크게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와 법률에 관한 관심, 그리고 교육이나 문명개화에의 주 목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그것들은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 역시 1900년대 다른 계몽운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실업을 기초로 한 실력 양성론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大呼敎育 이나 商業的 奮鬪 工業에 就 야 論 과 같은 논설의 제목만으로도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44) 元秉常, 新興武官學校 (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 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 13, 33. 45) 申圭植(閔丙河 역), 韓國魂 (博英社, 1974) p. 101. 46) 鄭元澤, 志山外遊日誌 ( 독립운동사자료집 8, 1974) pp. 407 408. 47) 흘러간 星座 1과 山康 卞榮晚의 生涯와 國學觀 上에는 1918년에 변영만이 귀국하였다고 언급하였으나, 무엇에 근거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48) 변영만은 1922년부터 崔南善이 발간하던 주간지 東明 등에 기고하였는데, 국한문체 이외에 순 한문의 글이 적지 않다. 그의 한문저술은 山康齋文鈔 에 실려 있다. 49) 成均館大學校史 (成均館大學校出版部, 1977) 참조. 50) 흘러간 星座 1 참조. 51) 東亞日報 1954년 12월 22일자.

- 124 순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발표시기 1907. 3 1908. 3 1908. 3 1908. 5 1908. 6 1908. 7 1908. 7 1908. 8 1908. 8 1908. 9 1908. 9 1908. 10 1908. 10 1908. 11 1909. 1 1909. 1 1909. 1 1909. 2 1909. 8 國史館論叢 第47輯 변영만의 저술 및 번역 제목 발표지(출판사) 祝辭 親睦 1 世界三怪物 廣學書舖 學界瑣譚 法政學界 10 序 乙支文德 (申采浩) 商業的 奮鬪 法政學界 13 刑典上刑을 規定 方法에 就 야 論 法政學界 14 法人의 意義及必要 法政學界 14 大東四千載第一偉人 乙支文德 敍 畿湖興學會月報 1 大呼敎育 畿湖興學會月報 1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廣學書舖 工業에 就 야 論 法政學界 16 文明 親睦 8 書出의 魚驗行爲를 先 야 外他 魚驗行爲를 法政學界 17 行 魚驗行爲의 效力을 論 國民의 法律的 精神 法學協會雜誌 1 新年祝詞 法政學界 20 帝國主義의 瞥說 法政學界 20 余의 觀 法政學界 20 帝國主義의 性質 法政學界 21 死刑廢止說 法學協會雜誌 8 비고 단행본 한문 4와 같음 단행본 졸업시험 답안 한문 그러한 가운데 두 권의 단행본이 1908년에 당시 이름 높은 출판사였던 廣學書舖에서 간행되었는데, 바로 世界三怪物 과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가 그것이었다. 후 술하겠지만 이 두 서적과 商業的 奮鬪 및 帝國主義의 瞥說 帝國主義의 性 質, 그리고 學界瑣譚 등과 같은 논설이 반제국주의의 입장에서 논의된 것이었다. 世界三怪物 은 미국인 斯密哥德文이라는 이의 저술을 변영만이 意譯한 것으로 소개 되었다. 아마도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번역본을 重譯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본문이 37면 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내용을 축약한 것이 아닌가 한다. 斯密哥德文이 누구인지 는 명확하지 않지만, 영국출신으로 캐나다와 미국에서 활동하며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관 하여 반제국주의 노선을 개진한 바 있던 골드윈 스미스(Goldwin Smith, 1823 1910)라 는 인물이 漢譯된 이름으로 보아 그 저자가 아닌가 생각된다.52) 다만 변영만이 의역한 52) 그는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그 곳에서 교수하였고 1860년대 미국의 코넬대학의 교수로 재임하 다가, 뒤에는 캐나다로 옮겨 언론에 종사하였으며 1904년에 미국 역사학회 회장도 역임한 바 있 던 정치사학자였다. Sir Sidney Lee ed., The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Oxford University Press, 1912) pp. 328 340.

- 125 - 世界三怪物 이 스미스의 어떠한 서적의 한역본을 대본으로 삼아 이루어졌는지는 확 인하지 못하였다.53)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역시 번역서였다. 그 대본에 대해서 例言 에서 변영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本書 日本 博文館에셔 發行 時代之趨勢 中 帝國主義 를 根據譯述호 間 或 西人 라인슈의 所著 世界之政治 를 參互 즉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였던 博文館에서 발행한 時代之趨勢 라는 서적 가운데 帝國主義 라는 항목을 주로 번역하였고, 아울러 라인슈라는 인물의 저술을 참조하였 다는 것이었다. 時代之趨勢 라는 서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으 나,54) 라인슈의 世界之政治 는 1900년대에 널리 알려진 서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폴 라인쉬(Paul S. Reinsch, 1869 1923)는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정치학 교수로 미국의 극동정책에 대하여 많은 저술을 낸 저명한 학자였고, 1910년대 袁世凱정권이 수립된 이 후 미국의 駐中大使로 활약하기도 하는 인물이었다.55) 世界之政治 란 1900년에 라인 쉬가 맥밀란출판사에서 발간한 World Politics at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as Influenced by the Oriental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영만이 이 영문본을 보았다 고는 생각되지 않고,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일본에서는 뒤에 早 稻田大學의 총장을 역임하는 高田早苗(1860 1938)가 라인쉬의 영문본이 간행된 지 1년 만인 1901년에, 그 내용을 반 정도로 축약하여 帝國主義論 이라는 번역서를 早稻田大 學 전신인 東京專門學校 출판부에서 발간한 바 있었던 것이다.56) 뿐만 아니라 世界之 政治 는 청말의 사상가 梁啓超(1873 1929)가 1902년에 論民族競爭之大勢 를 저술하 면서도 크게 참고한 바 있었다.57)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변영만은 時代之趨勢 를 주 대본으로 하고, 라인쉬의 서적을 초역한 帝國主義論 을 참고로 하여 二十世紀之大 慘劇 帝國主義 를 완성한 것으로 짐작된다.58) 다만 그가 일본문에 미숙한 데다가 번역 을 1주일만에 마쳤다고 한 것으로,59) 어느 정도 원문을 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두 단행 53) 혹 1902년에 발간된 Commonwealth and Empire의 한역본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서적은 미국 제국주의의 도덕적 위험에 반대하는 주장을 담았다고 한다(The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p. 337). 54) 坪谷善四郞, 博文館五十年史 (博文館, 1937)에 수록되어 있는 博文館出版年表 에서 時代之趨 勢 라는 제목의 서적은 찾을 수 없었다. 55) Dumas Malone ed., Dictionary of American Biography Ⅷ(Charles Scribner s, 1957) pp. 491 492. 56) 이 帝國主義論 은 한림대학교 아시아文化硏究所의 李一宰교수와 한양대학교 일문과 尹相仁교 수의 도움으로 早稻田大學 도서관 소장본의 복사를 얻어 볼 수 있었다. 57) 梁啓超, 論民族競爭之大勢 ( 飮氷室文集 上, 廣智書局, 1906, 時局) p. 1. 58) 다만 高田早苗의 번역본에는 民族主義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과는 달리, 변영만의 번역에는國民主 義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등의 차이가 있어 확신은 약간 주저되기도 한다. 59)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例言.

- 126 - 國史館論叢 第47輯 본은 번역서이지만 제국주의를 직접 다룬 서적이었고, 변영만이 그 내용에 공감하고 있 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특히 두 역서의 제목이 일본의 사회주의자로 이름높던 幸德秋水(1888 1911)가 1901년에 출간한 바 있던 二十世紀之怪物 帝國主義 와 유사 한 것으로 보아, 그 서적도 참고하지 않았나 생각된다.60) 결국 변영만의 인물과 저술을 통하여, 그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나 1900년대 에 전통교육과 서구학문 특히 법학을 수학하였고, 기본적으로 실력 양성론에 입각한 국 민계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卞榮晚의 帝國主義 인식 변영만이 제국주의의 이해에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은 그가 쓴 논설이나 역서 로도 짐작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09년 중에 제국주의에 관련된 번역이 아닌 저술 의 간행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이나,61) 발간되지는 못하였다. 그는 1909년 이후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많은 글을 쓸 수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변영 만 개인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은 약간의 논설과 번역서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으 나, 그가 기본적으로 번역을 통하여 제국주의를 이해하였던 것으로 짐작되어 그 개인의 독립된 저술이 없다고 해서 문제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帝國主義 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한국에서 사용되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乙巳保護條約 체결 이후인 1906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신문과 잡지에서 제국주의 의 사용이 빈번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62) 그것이 imperialism 의 번역어임은 쉽게 짐작되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서 사용한 용어를 수용하였을 것이다. 실제 변영만도 1908년 6월에 간행된 法政學界 제13호에 발표한 商業的 奮鬪 라는 논설에서 제국주의를 imperialism 의 번역어로 사용하였음이 확인 된다.63) 이미 일본에서는 1900년 말에 幸德秋水가 排帝國主義論 과 1901년 초에 帝 國主義 라는 글을 신문에 연재하였으며, 그 해 4월에는 단행본으로 二十世紀之怪物 60) 변영만은 二十世紀之慘劇 帝國主義 의 例言 에서 帝國主義의 上에 二十世紀之大慘劇 八字 冠 은 是乃譯者의 愚見인바 其所以然은 此書 一讀 에 依 야 自然 明白 리라 思量 이라고 하였으나, 그 제목은 幸德秋水의 서적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61) 法政學界 20, p. 20에 게재된 帝國主義의 瞥說 의 마지막에 余手 經 帝國主義의 譯本 이 有 니 可히 參考 지며 且余意에 其旨 根據 야 不遠間 一書 著述코져 노니 有心諸公 은 少待 시오 라고 한 것에서 짐작이 된다. 62) 한 예로 皇城新聞 1906년 11월 1일자 논설 非律賓群島自治說 이나 大韓自强會月報 5(1906.11)에 게재된 尹孝定의 專制國民은 無愛國思想論 등이 찾아진다. 63) 즉 法政學界 13, p. 3에는 爲商業 即無基礎(工業)商業은 個人의 一時方便으로 見 면 或壟斷 의 小利가 不無 지나 國家百年의 長計로 論 면 迎盜入室의 危險이 莫甚 나니 何則고 二十世紀 의 大怪物된 帝國主義 IMPERIALISM란 者가 商品을 緊隨 야 內地에 闖入 所以니라 고 하 였던 것이다.

- 127 - 帝國主義 를 간행한바 있었다.64) 이것은 자유주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제국주의를 선진 열강의 대외투자를 둘러싼 투쟁으로 파악하여 비판한 영국의 홉슨(John A. Hobson, 1858 1940)이 1902년에 帝國主義論 Imperialism 을 간행한 것보다도 1년이나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幸德秋水의 二十世紀之怪物 帝國主義 는 1906년에 이르 면 한국에서도 번역이 되어 그 일부가 朝陽報 에 연재되기도 하였다.65)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 제국주의 라는 용어와 개념은 청국 梁啓超의 저술인 飮永室 文集 의 영향이 더욱 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양계초는 國家思想變遷異同論 (1901) 이나 新民說 論民族競爭之大勢 (1902) 등에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관하여 설 명한 바 있었다. 특히 그는 당대의 유럽을 민족주의와 민족제국주의의 대립 상황으로, 아시아를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대립상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66) 아시아에서는 서구열 강의 제국주의와 아시아 여러 민족의 민족주의가 대립하였다는 것이었다. 유럽에 있어서 민족제국주의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민족국가들이 사회진화론을 배경으로 국가간 상 호경쟁이 전개되면서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형태의 제국주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67) 그 러한 면에서 민족주의가 민족제국주의로 나가기 전단계라고 볼 수 있었다.68) 특히 양계 초는 19세기 후반에 민족의 이익을 내세운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영토확장을 중시한 민 족제국주의의 대두를, 고대로부터 전개 되어온 제국주의와 구별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양계초의 견해 역시 서양과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69) 특히 제 국주의를 논의한 양계초의 國家思想變遷異同論 은 국내에서도 1908년에 國家思想 學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70) 그러한 점으로 미루어 1900년대 초 이전부터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양상을 제국주의라고 지칭하였는데, 한국에 도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제국주의에 관한 개념과 다양한 내용을 중국이나 일본에서 얼마나 이해하였는지는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수용한 한국에서의 이해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원론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을 인식하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1906년을 전후하여 제국주의라 는 용어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곧 20세기의 세계를 帝國主義의 世界 라고 부 를 만큼 그 사용이 일반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1) 64) 그것은 모두 幸德秋水全集編輯委員會 편, 幸德秋水全集 3(明治文獻資料刊行會, 1981)에 수록 되어 있다. 65) 朝陽報 제2호(1906.7.10)부터 제9호(1906.11.10)까지 연재되었다. 66) 梁啓超, 國家思想變遷異同論 ( 飮氷室文集 上, 政治) pp. 28 29. 67) 梁啓超, 論民族競爭之大勢 ( 飮氷室文集 上, 時局) pp. l 3. 68)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 49의 결론부분에서는 國民主義(民族主義 ; 필자)가 發展 야 帝國主義가 된 現今 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69) 그것은 飲氷室文集 上에 수록된 論民族競爭之大勢 의 경우만 하더라도, 미국이나 일본 학 자들의 저서를 참조했다는 양계초의 언급이 글 초두에 있음에서 짐작할 수 있다. 70) 國家思想學 은 鄭寅琥의 번역과 발행으로 1908년 5월에 간행되었다. 71) 大韓每日申報 1910년 2월 23일자 논설 二十世紀新國民.

- 128 - 國史館論叢 第47輯 변영만은 1909년 2월에 간행된 法政學界 제21호의 帝國主義의 性質 이라는 논 설에서 제국주의를 自國의 版圖 或 勢力을 擴張 는 政治的 策案 이라고 규정하면서, 제국주의와 자국의 영토확장은 一體라고 인식하였음을 밝혔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실제 적 양상이 열강의 식민지 획득에 있었음을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이해는 변영만 뿐 아니라 신채호를 비롯한 1900년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신채 호가 쓴 것으로 알려진 大韓毎日申報 1909년 5월 28일자의 논설 民族主義와 帝國主 義 에서도 제국주의를 領土와 國權을 擴張 主義 로 언급하고 있었다. 변영만은 아울 러 제국주의를 구식과 신식으로 구별하여, 고대로부터 19세기 이전에 존재한 제국주의는 개인의 존대를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19세기 이후에는 國利民福 을 표방하고 人滿地狹 을 해결한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운 정략적인 측면이 강한 것으로 설명하였다.72) 변영만 을 비롯한 한말의 지식인들이 사용한 제국주의는 그러한 구분에서는 신식제국주의, 바꾸 어 말하면 민족제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 제국주의의 발생은 유럽에 있어서 민족주의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 이 강조되고 있었다.73)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국주의의 발생이 설명되고 있었다. 各國은 此國民主義의 勢力을 發達케 기 爲 야 其活動範圍를 擴張 에 一轉 야 殖民政策이란 者가 發生 고 再進 야 帝國主義란 者가 成立 에 至 니 盖各國 은 人口의 增加와 共히 其領有土地의 狹溢 을 自覺 고 機會 利用 야 世界表面에셔 可成的으로 多分의 土地 割取코져 希望이 生 이라 然而此新態度 十九世紀 末 葉브터 今世紀에 連亘 야 著大히 國際的 競爭上에 現出 야 行來 라 74) 즉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의 출발은 국민주의 곧 민족주의가 발달하면서, 각국이 인구증 가와 국토협소로 말미암아 식민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 경영 곧 식민정책이 제국주의의 별명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75) 물론 변영만은 단순히 그러한 열강의 외형적인 이유만이 제국주의의 대두를 가져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공업 의 발달에 따른 상업의 발전도 제국주의의 대두에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었 다. 열강이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나는 무역의 발달로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가 필요하 게 되자, 식민지 확보에 진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것은 二十世紀之大慘 劇 帝國主義 에서도 논의되고 있었다. 72) 帝國主義의 瞥說 ( 法政學界 20) p. 19. 73) 이 점은 幸德秋水의 二十世紀之怪物 帝國主義 가 愛國心 軍國主義 帝國主義를 논의하고있다는 사실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井口和起, 幸德秋水 二十世紀之怪物帝國主義 について ( 人文學報 27, 1968)가 참조된다. 74)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 2. 75) 위의 책 p. 12.

- 129 帝國主義 又貿易의 擴張과 重大 利害 感 지라 各國은 本國을 繁榮케 기 爲 야 海外의 市場을 開拓 必要 認 勉 야 一面으로 航路 保讓 方 針을 採 고 一面으로 益益히 海軍을 擴張 야 海上權을 强大케 事 努力 니 76) 무역의 확장을 위한 해외시장의 개척을 해상권의 강화로 이루고자 한 열강의 시도는, 商業上의 野心이 帝國主義의 一大原因을 成 나니 歐洲에 製造가 敏捷 고 貨物이 充 溢 不得不 新市場을 求 야 其銷路 暢達 한다는 지적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77) 이 처럼 19세기 제국주의의 대두를 민족주의와 경제적 측면에서 설명한 변영만은 또 제국 주의가 군국주의 및 자본주의와 끊을 수 없는 관련이 있음을 世界三怪物 을 통하여 지적하였다. 怪物은 何를 指 이뇨 曰富族政體며 曰軍備政策이며 曰帝國主義가 是라 三者 ㅣ 其名은 雖殊 나 其實은 相資相助 며 相生相成 야 其一을 缺 면 其功用을 顯치 못 니 何者오 盖帝國主義가 아니면 富族이 新市場과 新物產을 得키 難 야 資本이 雖厚 나 利益을 收치 못 지오 且軍備政策이 아니면 國家의 威權이 不張 야 海外에 宏大 商權을 操縱치 못 지니 如此 면 엇지 富族政體 成立 며 엇지 帝國主義 實行 리오 故로 三者가 互相密接 關係가 有 고 彼此間에 原因結果의 勢가 有 바 로 恒常 政治家의 野心과 外交家의 毒手 從 야 其功用이 愈益 神明 라 78) 三怪物 이란 19세기 유럽에서 발생된 富族政體(金力政治) 軍備政策 帝國主義를 지칭한 것으로, 世界三怪物 은 그것들이 각기 이름은 다르나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즉 산업혁명 이후에 대두된 금융 산업자본주의의 결과로 자본을 축적한 유 력한 자본가계층을 부족정체로 표현하고, 무력을 수반한 상권의 확대 및 식민지쟁탈을 군비정책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19세기에 구미 열강에게 대두된 제국주 의는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별개로 하여 설명하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특히 그것은 무력을 기초로 한 군국주의의 양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열강의 식민지쟁탈의 방법은 바로 우세한 군사력의 활용이었 음을 제국주의에 관심을 가진 변영만이 강조하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변영만이 다른 곳에서 제국주의의 협찬자로 군국주의 과두정치 관료정치 보호정책 자본집중 등을 제시 한 것도 그러한 상호관계를 제대로 이해한 결과였다고 보여진다.79) 아울러 그는 번역을 76)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 12. 77) 世界三怪物 p. 27. 78) 위의 책 pp. 2 3. 79)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p. 49 50.

- 130 - 國史館論叢 第47輯 통하여 열강의 식민정책을 소개한 바 있었다. 예컨대 영국은 해상권을 장악한 것에 비하 여 대륙국가들은 육군을 강병하였다던가,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와 러시아正敎의 보호정 책을 사용, 독일은 교민 보호정책을 사용하였으며, 미국은 무역에 주력하였다는 등이 그 것이었다.80) 그런데 변영만은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에서 인식하고 있었다. 個人及國民의 欲望이 帝國主義의 主要 動機 라는 견해가 보여주 듯,81) 반제국주의론의 입장에서 제국주의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한국 이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변영만 뿐 아니라 지식인 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였다. 제국주의를 포함한 삼괴물 에 대한 견해를 世界三怪 物 의 冒頭에서, 변영만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었음에서도 짐작되는 일이었다. 世界가 不幸 야 怪物이 有 니 是怪物이 欧羅巴洲에서 孕胎 고 十九世紀에 誕生 야 蔓延滋大에 四肆咆哮 茶毒이 衆生에 遍 고 風雲이 日노 修淡 도다 優者 其力을 藉 야 盜賊의 劫殺을 逕 고 劣者는 其衝을 當 야 泡影과 치 消滅 니 此後 로브터 大地上에 將次 無數히 其財產을失 며 無數히 其性命을 亡 고 獨立 自由 平等 이 다 怪物의 消磨 될지라 怪物怪物이여 吾ㅣ驚 며 畏 고 怨恨 노라 82) 제국주의를 포함하여 부족정체와 군비정책을 모두 세상을 불행케 하는 괴물로 인식하 고 있었던 것이다. 변영만이 帝國主義의 眞狀을 遽然히 說明키 難 나 一言으로 蔽 즉 未開 或半開의 人種을 吞噬無道 一大怪物이라 고 한 것에서도 짐작되듯이,83) 제국주 의를 근대화되지 못한 약소국을 병합하는 부도덕한 움직임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견 해는 皇城新聞 1908년 11월 15일자의 기서 勸讀貨殖傳 에서 所謂 帝國主義와 强權 主義로써 吞併弱小 야 不顧公理 而已오 道德仁義가 盛於他邦이라 은 未聞 이라 한 것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바로 제국주의를 公理나 도덕 인의를 저버린 행위로, 또한 그것 을 暴行蠻習 이 극에 도달한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84) 이 같은 인식은 당시 사회에 서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나 한다. 따라서 변영만은, 錦갓고 繡인듯 二十世紀 文明天地裡에 前無後絕 一大惡獸가 儼然히 舞臺의 幕에 盤據 야 咆哮吰喝 며 惟意是肆 仁義가 其色을 失 고 强權이 其威에 諛 니 是 乃 今所謂文明世界인뎌 蒼蒼者天이여 惡劇의 閉幕이 何遲 뇨 厥獸 何오 帝國主義니 라 帝國主義 何오 擴張政略이니라 擴張政略은 何오 兼弱政界이니라 兼弱은 惡獸의 素 80) 위의 책 pp. l6 45. 81) 二十世紀之大惨劇 帝國主義 p. 45. 82) 世界三怪物 pp. 1 2. 83) 商業的 奮鬪 ( 法政學界 13) p. 4. 84)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 30.

- 131 性이라 惡獸어니 엇지 兼弱치 아니 리오 85) 라고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제국주의를 一大惡獸 로 표현하였던 것이, 반제국주의론에 서있는 변영만의 입장을 확고히 알 수 있게 해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점에서 변영만 등 지식인들은 피해자의 차원에서 국제사회의 현상을 도덕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20세기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二十世紀의 世界 公然剽竊의 盜賊窟이오 白晝扮裝의 魔劇場이라 强權이 橫行 고 仁義가 掃地 야 囂張馳突의 狀이 大地에 遍滿 고 哀哭切齒의 聲이 四面에 亂起 니 所謂新世의 文明이란 者가 元來如此 者이던가 86) 도적굴이며 魔劇場인 20세기의 세계는 열강의 强權만이 횡행하여 온통 피해 받은 경 우 뿐 이라는 것이었다. 그같은 제국주의의 부도덕한 침략활동은 주로 구미제국에 의하 여 야기되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영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 구미제 국에 주된 관심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에서도 제국주 의를 추진하고 있던 대표적인 국가로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이 논의되고 있었고, 다른 경 우에는 프랑스와 일본이 첨가되기도 하였다.87) 그러나 지식인들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제 국주의적 침략활동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大韓 每日申報 1910년 2월 23일자 논설 二十世紀新國民 만 하더라도, 구미제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주목하면서도 일본을, 幾千載 東洋孤島로 維新을 僅成 日本도 忽然 露日戰爭에 脚을 立 야 韓國과 滿洲에 其勢를 張하 도다 라고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던 한국의 지식인들이 일본제국주의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구미열강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부도덕한 침략행위를 한다는 점 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던 것도 사실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변영만은 이미 인용한 바 있는 帝國主義의 性質 에서 제국주의를 版圖或勢力 擴 張 政治的 이라는 소제목을 붙여 나름대로 분석하였다. 그는 제국주의 열강이 외형적으 85) 帝國主義의 瞥說 ( 法政學界 20) p. 19. 86) 大呼敎育 ( 畿湖興學會月報 1) p. 15. 87) 大韓毎日申報 1910년 2월 23일자 논설 二十世紀新國民.

- 132 - 國史館論叢 第47輯 로 국토의 협소와 인구의 증가를 들어 영토확장에 진력하는 것을 합리화하며, 무형의 세 력확대를 별개로 논의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88) 즉 영토확 장과 세력확대는 제국주의의 외형과 실제라는 두가지 양상이라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 어서 영토와 세력의 확장은 제국주의의 精魄 임을 강조하고, 열강이 國民自存의 必要手 段 이라고 하는 주장을 비판하였다.89) 아울러 제국주의의 주체는 정부이므로, 해외의 선 교사나 개인들의 활동이 종교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정치적인 것이 라고 파악하였던 것이다.90) 이 논설은 제국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열강이 제국주의 추진에 대하여 합리화하려던 논리를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보아 보다 깊이 있는 문제파악이 이루어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외국서 적을 읽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문제로 삼은 주제를, 그것도 상당히 모호하게 다루 고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같은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적인 안목으로 제국주의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한 노력이며 시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 어도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 열강의 제국주의 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은 변영 만을 제외하고는 찾아지지 않는다. 변영만이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를 번역한 다음, 본인이 내린 결론에서 제국 주의의 기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은 주목된다. 바로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에 대한 논급이기 때문이다. 帝國主義의 科學的 基礎 如何 가 盖此各國國民이 生活及殷富를 爲 야 軍事上及商 業上의 競爭을 不休 所以 此를 因 야 適者生存의 自然的 法則으로 世界의 政治 及經濟를 將 야 高等文明을 代表 國民手中에 歸케 同時에 劣等人種을 征服 야 人類政治의 標準을 引上코져 에 不外 다 은 乃是 歐洲人의 感情이라 91) 제국주의가 각국의 군사와 상업의 경쟁으로 말미암아 적자생존의 법칙에 입각하고 있 다는 것이 서구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제국주의의 이론적 바탕은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이었는데, 그것은 1900년대 후반기의 한국사회에 가장 널 리 영향을 미친 이론이기도 하였다.92) 1900년대 지식인의 제국주의의 인식 역시 사회진 화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국제정치를 경쟁의 차원에서, 그리고 제국주의의 대두를 弱肉 88) 帝國主義의 性質 ( 法政學界 21) pp. 10 11. 89) 위의 글 p. 11. 90) 위의 글 pp. 11 12. 91)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p. 47 48. 92) 이에 관해서는 李光麟, 舊韓末 進化論의 受容과 그 影響 ( 世林韓國學論叢 1, 1977 ; 韓 國開化思想硏究, 一潮閣, 1979)과 李松姬, 韓末 愛國啓蒙思想과 社會進化論 ( 釜山女大史 學 2, 1984) 및 朱鎭五, 독립협회의 사회사상과 사회진화론 ( 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學 論叢, 지식산업사, 1988)를 참고할 것.

- 133 - 强食이나 適者生存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전제에서 지식인들은 제국주의를 인식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한 진보를 추구하던 사회진화론은 경쟁으로 말미암은 차별을 인정하고,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논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경쟁이 進化之母 로 당시대가 競爭時代 로 표현되고 있던 지식인들의 시대 인식은,93) 제국주의적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즉 제국주의의 대두와 양상이 비 록 도덕적으로나 국제법의 입장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 에 대해서는 비판의 견해를 여러 형태로 개진하였지만, 직접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94) 특히 제국주의가 무력에 기초를 둔 군국주의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고 있던 지식인들이,95) 일본의 침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변영만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입장은 그의 반제국주의론과 관련하여 다시 논의하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변영만의 제국주의에 관한 인식은, 그것이 강국의 약소국에 대한 부도덕하 고 국제법이나 인륜을 저버린 영토와 정치력 경제에의 침략행위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정교한 논리나 구체적인 대안을 수반하고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20세기를 제국주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던 상황에서 열강의 침략행위에 대한 원론적인 이해는 당 시 지식인들에게 상식적인 것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변영만의 경우에는 제국주 의에 대한 감정적인 차원에서 죄악시하여 비난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열강 이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론을 비판하였던 사실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에 비하여 이론적인 차원에서 제국주의론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구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행위를 다룬 저서를 번역하면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였던 점은 단순히 제국 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에 머무르고자 한 호사가적 취미가 아니었다. 이 점은 후술할 변 영만의 반제국주의론에서 상론 하겠지만, 바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한국침략에 주목한 것 으로 믿어진다. 그도 직접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움직임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 지는 않았으나, 구미열강의 경우를 통하여 국민들을 계몽하고자 한 것은 한국의 현황이 었을 것이다. 양계초가 편찬한 越南亡國史 와 같은 서적이 1900년대 후반 한국에서 여러 종류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던 것도 월남의 상황이 한국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는 점을 고려한다면,96) 변영만이 제국주의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제국주의 인식은 한국이라는 피해당사자의 관점에서 열강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며, 그 부당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것으로 93) 皇城新聞 1906년 11월 19일자 논설 競爭時代. 94) 한말 지식인의 제국주의 인식에 관해서는 金度亨, 韓末 啓蒙運動의 政治論 연구 를 참조할 것. 95) 변영만의 경우에 이미 지적한 대로 世界三怪物 에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다르지 않음을 언 급한 바 있었고, 신채호도 大韓每日申報 1910년 2월 24 25일자 논설 二十世紀新國民 에서 군 국주의를 논의하였다. 96) 이에 관해서는 拙稿, 國譯 越南亡國史 에 관한 考察 ( 東亞硏究 6, 1985) 참조.

- 134 - 國史館論叢 第47輯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인식이 조직적이거나 실제적인 대안을 지니지 못하고 계몽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던 것은 한계로 지적되어야겠지만, 동시에 그것이 1900년대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의 한계이기도 하였음을 다시금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Ⅳ. 卞榮晚의 反帝國主義論 변영만이 제국주의를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하여 영토와 경제의 침략으로 이해하면서 반제국주의론을 견지하였던 만큼, 그러한 처지에 놓인 한국의 대응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그가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한 것은 민 족주의였다. 1909년 1월에 간행된 法政學界 제20호에 실린 帝國主義의 瞥說 에서 그는, 帝國主義의 被害者의 如何히 야 始可 敵應手段이라 余 斷言 야 曰民族主 義(徑言 면 一國內 同居 民族 )가 其不二法門이라 97) 고 하여, 민족주의만이 바로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하였던 것 이다.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의 대항수단으로 본 것은 변영만에 국한되지 않고, 당시 지식 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고 생각된다. 민족주의에 관해서는 이미 皇城新聞 이 1907 년 6월 20일과 21일자의 논설 民族主義 를 실어 독립 자유 문명 진보 등이 모두 민족주 의에서 발생하였다고 하면서, 민족주의의 원리 변천 국가 인물 교육의 항목을 두고 설명 한 바 있었다. 신채호도 20세기의 추세를 제국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군국주의 경제분투 로 정리하였던 것이다.98) 특히 신채호는 大韓毎日申報 1909년 5월 28일자에 帝國主 義와 民族主義 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帝國主義를 抵抗 方法은 何인가 曰民族主義 (他民族의 干涉을 不受 主義) 奮揮 이 此니라 고 하였다. 변영만과 신채호가 비 슷한 시기에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의 대항수단으로 논급하고 있었다는 점에 미루어, 이들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기실 이러한 생 각은 한국의 경우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주의 또는 국민주의가 일본과 중국에서 는 이미 제국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양계초는 이미 1900년대 초에 그러한 견해를 표명한 바 있었으며,99) 일본에서 라인쉬의 저작을 번역한 帝國主義論 에도 민족주의와 민족제국주의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의 自敍 에서 변영만은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에 대항하 97) 帝國主義의 瞥說 ( 法政學界 20) p. 20 98) 大韓毎日申報 1910년 2월 22일자 3월 3일자 논설 二十世紀新國民. 99) 國家思想變遷異同論 ( 飮氷室文集 上, 政治) p. 30.

는 방안임을 보다 자세하게 논급하였다. - 135 - 내가 이 책을 번역할 때 그 뜻이 어찌 우리 나라로 하여금 영국 러시아 독일 미국 처럼 帝國主義를 실시하도록 하는 데 있었겠는가. 국가의 모든 움직임은 人民이 대신한 다. 마치 그물에 걸린 것처럼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바로 남의 帝國主義에 빠지고서 오 만하게 스스로 소리 높여 갑자기 자국의 帝國主義를 외친다면, 그 또한 헤아릴 줄 모르 는 자일 것이다. 이 大韓의 帝國主義가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이 우리들의 지극한 소원이니, 나의 몽상이 장엄하고 엄숙하며 빛나고 또 빛나는 누각에 하루에 한번씩 머 무르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할 때가 아니다. 오늘날 마땅히 소리 높여 부 르짖어야 할 것은 바로 國民主義라! 國民主義야 말로 상세히 말하자면 바로 韓族 생존 의 주의라. 韓族 생존의 주의가 날로 커지면, 외래의 帝國主義는 위축시켜서 없앨 수 있 다. 韓族 생존의 주의가 극성에 이르면 우리의 帝國主義도 잉태하고 길러서 발휘 할 수 있다. 요컨대 國民主義야 말로 적을 막는 大道이며 進取의 큰 기초이니, 진실로 상하가 모두 힘을 합하여 여기에 노력하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행복이 강처럼 길고 바다처럼 깊 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헛된 생각을 품고 헛되이 美名을 추구하면 帝國主義만을 엿보 려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일을 그르칠 뿐 아니라 화를 재촉하여 슬픔의 구덩이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100) 즉 그는 한국의 나아갈 바가 제국주의에의 동경이 아니라, 국민주의를 통하여 제국주 의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확실하게 하였던 것이다. 국민주의 곧 민족주의가 바로 한민족 생존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외래의 제국주의는 위축되어 사 라질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제국주의도 민족주의가 극성을 이루면 자연히 이루어 질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제국주의만을 부르짖 을 수는 없음을 지적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제국주의를 이루 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먼저 민족주의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그러한 연후에 제국 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自敍 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속담에 옛날 한 사람이 星命說에 빠져서 스스로 후일에 天子가 될 것으로 믿고 농 100) 이 원문은 다음과 같다. 余之譯玆書者 其意豈欲使我國實施帝國主義如英 露 獨 米諸國乎 國 之一切動作 人其代之 如網斯縶 如窖斯幽 正陷他人之帝國主義 而若倣然自高遽唱自國之帝國主義 則其亦不知量者矣 盖此大韓之帝國主義活躍於世界之舞臺者 正余輩之至願也 則余之夢想未嘗不一 日 一逗於大莊極嚴炳炳煌煌之樓閣也 而今姑非其時也 居今之日 所宜大聲而疾呼者 其國民主義乎 國民主義者詳言之 卽韓族生存之主義也 韓族生存之主義日張大焉 他來之帝國主義 可以潜消而暗滅 之 韓族生存之主義到厥極焉 吾家之帝國主義可以孕蓄而發揮之 要之國民主義者禦敵之大道也 進取 之宏基也 苟能上下戮力拳拳於斯 我國之前途幸福 庶可以江也 其長海也其深也 而若其妄生空念虛 騖美名 必欲惟帝國主義是沾沾然 則是不徒事之不濟 抑將催禍速孽永我悲坎 ( 二十世紀之大慘 劇 帝國主義 pp. 1 2).

- 136 - 國史館論叢 第47輯 사도 안짓고 공부도 안하고 헛되이 재고 다녔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 처자에게 말 하기를 朕은 이제 죽으니 皇后는 太子를 선도하여 大業을 잇도록 하시오 라고 했다고 한 다. 본디 다른 이야기지만 재미로 인용해 보았다. 帝國主義를 일찍이 입에 담아서는 안되 는 것은 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번역한 것은 그 목적의 방향이 正 面에 있지 않고 오히려 뒷면에 있다. 저 帝國主義의 험난한 실상을 묘사함으로써 우리 國民主義의 정신을 일깨우려고 한 것이다. 아! 英 露 獨 米의 무리는 실로 帝國主義의 큰 미친 악마인데, 그 간악한 미소를 흉내내려는 나라가 바야흐로 줄을 이었다. 印度와 比律 賓의 무리는 실로 帝國主義의 노략질장인데, 그 전철을 밟으려는 나라가 무수히 많다. 災 殃이로다! 이 세상이여. 위험하도다! 급하다. 이 잭을 읽고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귀 도 두뇌도 호흡도 모두 태연하며 팔을 흔들고 다리를 멋대로 놀리며 즐거이 異民族의 말 발굽 사이로 뛰어다니며 나는 말 없다고 말하는 자는 나와 도를 함께 하지 않는 자이다. 앞서 제국주의에 대한 희구를 언급한 바 있던 변영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아무런 노력 없이 헛되이 논의만 해서는 쓸 데 없음을 강조하였다. 오히려 그는 제국주의의 험 난한 실상을 밝혀 한국민의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하였다고 밝혔던 것이다. 따라 서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를 번역하여 간행한 것은 한국이 부국강병을 이루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주된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고양하는 데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대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곧 민족제국주 의가 민족주의에서 배태된 다음 단계라는 인식은 두 관계를 분명하게 나누기 어렵게 한 다.101) 아마도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의 自敍 에서 변영만이 내세운 주장은 민 족주의의 발전을 먼저 이루고, 나아가 민족제국주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한 다. 즉 한국민의 당면과제를 현실적으로 구미열강과 일본 등 선진국의 이른바 민족제국 주의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지만, 민족주의도 이루지 못한 당시로서는 그 단계에 진력해 야 한다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국 궁극적으로 한국도 민족제국주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변영만은 이처럼 민족주의의 발전만이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民政主義 의 발전도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즉 제국주의가 협찬자로 불리운 기득권세력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한 방안 으로는 民政主義 確立 야 代議制度 一層 强固케 에 全在 밖에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102) 물론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혹 한국에서의 입헌제와 의회설치의 필요성을 은연 중에 시사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부분에서 제국주의와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다시금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한말의 지식인들이 20세기를 사회진화론의 입장에서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101) 이 점은 愼鏞廈, 申采浩의 社會思想硏究 pp. 77 80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102)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 50.

- 137 -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103) 변영만도 사회진화론적 분위기에서 그가 살고 있던 시대가 경쟁과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힌 바 있었다. 신채호와 같 은 인물도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모두 사회진화론으로 설명하였다.104) 변영만 자신도 제국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진화론이라고 언급까지 하였던 것이다.105) 그러나 다른 한편 으로 그는 진화론과 권리경쟁론의 학설을 배척하고, 그 오류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즉 法政學界 제10호에 게재되었던 學界瑣譚 은 進化說의 無意味 와 權利競爭說의 誤謬, 孟軻氏의 國家要素論 이라는 세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進化說의 無意味 는 彼進化論者의 所謂 天然淘汰, 適存惡亡 等 原理도 余輩의 異言이 無 고 容認 라 然이나 此進化說은 一種物理上 言論에 不過 고 其間에 別로 特立 意 味가 無 바 어 世人이 往往 此進化說에 風靡되야 宇宙間 一切衆理가 進化 이라 斷 言 고 從 야 崇神制 即宗敎 嘲笑蔑視 이 有 나니 是 甚히 無智 妄論이라 進化說을 一種 物理學的 理論으로 觀察 야 進化 란 者 物質不滅 이란 原則과 如히 物理學的 範圍에 可屬 着 될 이라 106) 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天然淘汰 나 適存惡亡 등 진화론의 원리가 자연계에서는 통 용되는 이론이지만, 그것이 종교와 같은 사회적인 조건에 적용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논지였다. 즉 변영만은 동물진화론은 인정하였지만, 사회진화론은 반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도 余ㅣ 曾往부터 進化說에 對 觀念이 甚히 他人과 不同 야 其巍巍 을 未見 고 其淺近 을 反覺 지라 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107)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진 화론에 관한 관점이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변영만의 주장은 진화론 전 반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진화와 창조에 관련된 문제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된다. 一般生物界에 行 適者生存의 法則은 人類界에도 貫通 原理라 은 多數의 生物學者間에 主張 라 但生物學者中에도 하쓰구스레 及 와레시 等은 人類 의 倫理 或精神的 進步를 一般生物의 進化法則과 區別 야 此를 觀察 者ㅣ라 나 生 存上 競爭狀態에 人類도 亦 一般生物과 大差違가 無 다 論 者가 不少 며 且 生物學者가 是를 是認 아니라 社會學者에 至 야도 亦此로써 眞理라 니 108) 103) 이에 관해서는 李光麟, 舊韓末 進化論의 受容과 그 影響 을 참고할 것. 104) 愼鏞廈, 申采浩의 社會思想硏究 p. 286. 105) 世界三怪物 p. 26에는 제국주의를 설명하며, 近日 大地上에 임의 주和의 文敎 反對 고 國際의 德義를 蔑棄 니 其原委 推究 면 明白히 빈氏의 唱道 바 適者ㅣ存 이라 一說에 基因 얏도다 라 하였다. 106) 學界瑣譚 ( 法政學界 10) pp. 17 18. 107) 學界瑣譚 ( 法政學界 10) p. 17. 108)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p. 46.

- 138 - 國史館論叢 第47輯 적자생존과 생존경쟁의 원리를 학설소개를 빌어 논의하고 있는데, 이것으로는 그가 사 회진화론을 배척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생물진화론의 경우에 있어서는 인류와 다른 생물을 분리하여, 인류에게는 진화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음이 틀림없다. 종교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그가 창조설을 진화론의 오류를 증명하는 방법으로 제시하였던 것으로 그렇게 생각된다.109) 그러나 인류사회를 경쟁으로 이해하고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과 같은 사회진화론의 이론은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주의의 고양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 수반되어야 할 구체적인 방안으로 변영만은 어떠한 면을 고려하였을지 궁금하다. 먼저 국민정신의 준비를 그는 주장하였다. 國民의 精神이 擧皆忠勇的되며 奮鬪的되 完全 一日을 苦待 진 國民精神을 物質經營의 先時又同時로 不可不準備 事가 的確 眞理 라 하였던 것이 다.110) 충용적이고 분투적인 국민정신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결국 국민의 애국심 과 단결의 전제 하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苟能一乃心力에 奮厥志氣 야 養成其團結之性 고 發揮其愛國愛同胞之精神 則不 徒玆會之幸이라 亦國家之幸也로다 111) 단체의 설립을 축하한 글이지만, 단결심으로 애국 애동포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약육강식의 상태에서 가장 아름다운 믿음으로 그가 偏狹 國民的 宗信 을 주장한 것도 국민정신, 즉 애국심을 다르게 표현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112) 아울러 변영만은 문명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문명개발이 扶我大韓之國權 며 保我大韓之民族 을 이룰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113) 바로 실력양성의 시급함을 내세 운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에 관여하였던 지식인들과 차이가 없이, 교육과 殖產興業에 있었다. 今日의 敎育은 要컨 國家的이오 尙武的이오 世界奮鬪的이 니 㪅言 면 器機的 敎育이 아니오 精神的 敎育이라 고 지적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이,114) 그가 지향하고자 한 것은 정신교육으로 국가정신을 양성하면서 상무적이고 적극 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었다. 商工業의 발전을 논의하면서 변영만은 상업과 공업의 병행적인 발전에 주목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공업발전에 중요성을 개진한 것은 工業은 商業의 基礎오 商業은 工 業의 發現 니 今日의 急務 工業의 風潮 爭興 야 商業의 基礎 建立 에 在 다 는 생각에서였다.115) 그는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업의 기초를 세워야 한다는 109) 學界瑣譚 ( 法政學界 10) p. 17. 110) 國民의 法律的 精神 ( 法學協會雜誌 1) pp. 9 10. 111) 祝辭 ( 親睦 1) pp. 24 25. 112) 余의 觀 ( 法政學界 20) p. 23. 113) 文明 ( 親睦 8) pp. 10 11. 114) 大呼敎育 ( 畿湖興學會月報 1) p. 17.

- 139 - 입장을 강조하였던 것이다.116) 따라서 그는 공업 발전을 위하여 개인과 국가가 함께 노 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如何 方針을 取 여야 工業의 精神을 喚起 고 其要가 有二 니(一)은 箇人이 國家公益上으로 有益 工術을 硏究發明 거 旣存 工業을 進步發展케 即 人間 倡起的 方針이 是오 (二) 國家가 人民의 工藝 保護 且獎勵 고 更進 야 此에 相當 學識을 國民의게 普及케 即 政府誘導的 方針이 是라 余ㅣ 第一方針을 有志輩에 望 며 第二方針을 權力者에 望 노라117) 즉 개인은 개별적 공업기술의 발전에, 국가는 공업기술의 보호 장려 및 보급에 진력해 야만 공업발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진단하였던 것이다. 상업의 발전은 공업발전을 전제로 하였는데, 상업에 관련된 학문의 발전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118) 아울러 상업발전 에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적한 것이 바로 상인의 국가사상이었다. 상인이 자신의 영리만 을 목적으로 하고 애국적 사상이 없게 되면 국가 뿐 아니라 개인도 생존할 수 없다고, 유태인을 牟利的이라고 예를 들어 지적하였던 것이다.119) 결국 변영만의 반제국주의론은 민족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실력양성이 민족주 의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관점에 놓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견해는 1900년대 후반기 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 변영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다수의 이른 바 애국계몽론을 내세운 지식인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 나 제국주의론에 관해서 만큼은 변영만의 주제의식과 논리성, 그리고 깊이에 있어서 다 른 계몽론자들과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世界三怪物 을 번역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今此腥風血雨의 間에 在 야 高尙 理論만 主張 고 退守主義 自甘 도 亦是 不可의 甚 者ㅣ니 何則고 國家가 亡 고 人種이 滅 所以라 嗚乎라 大勢 試觀 니 其亦天矣며 其亦天矣로다 今日을 當 야 國民의 義務가 엇지 重 고 難치 아니 리오 惡의 首 不願 나 敵의 禦 甚急 나니 國民이 無實力 無能力 無實 고 到底 히 亡滅의 慘禍 免치 못 지라 120) 115) 商業的 奪鬪 ( 法政學界 13) p. 4. 116) 工業에 就 야 論 ( 法政學界 16) p. 25. 117) 위와 같음. 118) 商業的 奮鬪 ( 法政學界 13) p. 5. 119) 위와 같음. 120) 世界三怪物 pp. 36 37.

- 140 - 國史館論叢 第47輯 Ⅴ. 맺 는 말 1900년대 후반기 지식인들의 제국주의 인식문제와 관련지어, 지금까지 별달리 논의된 바 없는 변영만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논의된 내용을 요약하여 맺음에 대신하고자 한다. 변영만은 그다지 유력하지 않은 가문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하고 1904년 9월에 법관양 성소에 입학하여 1906년 1월에 졸업하였다. 1906년 3월부터 하급관리 생활을 하면서 보 성전문학교 야간에서 법학을 다시 공부하여 1908년 1월 졸업하고 재판소 서기를 거쳐 1908년 말에 판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에 사법권이 양여되자 1909년 말에 사임하 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이어 신의주에서 일시 변호사생활을 하다가 1912년 말 경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도 관여한 바 있었다. 1918년 경에 귀국한 뒤에는 한학을 중심으로 문필생활에 진력하였다. 그는 1908년에 집중적으로 많은 글을 썼는데, 대체로 法政學界 라는 보성전문학교 교우회 발간의 사회과학 전문학보에 발표하며 世界三怪物 과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라는 번역서도 간행하였다. 그런데 그 가 주된 관심을 가지고 발표한 글의 상당 부분은 제국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에 있어서 제국주의 라는 용어는 1906년을 전후하여 사용되는데,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특히 한말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양계초의 글 을 통하여 수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1900년대 후반에는 20세기를 제국주의의 세계 로 언급할 만큼 이 용어는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변영만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무력을 기 반으로 한 열강의 영토확장을 제국주의로 인식하면서, 그것이 숙제법이나 도덕을 무시한 침략활동으로 보아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변영만은 열강의 제국주 의 합리화논리를 이론적으로 비판하였으며, 그 사상적 배경이 사회진화론임도 밝혔던 것 이다. 그는 구미열강을 대상으로 제국주의를 논의하였지만, 실제 논의의 목적은 일본제 국주의의 한국침략에 대한 국민계몽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변영만은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움직임으로 민족주의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이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논의되었을 뿐 아니라 신채호와 같은 국내 지식인도 언급하고 있 었다. 그런데 그가 민족주의의 발전이 한국의 급무라고 강조한 것은, 한국사회가 제국주 의로 나아갈 단계가 아니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제국주의가 민족주의의 단계 를 거쳐 형성되었다는 측면에서,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발전하면 민족제국주의로까지 나 아갈 수 있으리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는 제국주의의 사상적 배경이 사회진화론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생물진화에 있어서는 인간과 기타 생물을 분류하고 있었다. 변영만은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발전에는 국민정신 곧 애국심의 고양과, 문명개발을 위한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실력양성론에 있 어서는 이른바 애국계몽론자와 마찬가지로 교육과 식산흥업을 중시하고 있었다. 교육에

- 141 - 있어서는 정신교육과 상무교육을, 식산흥업에 있어서는 특히 공업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상업의 발달은 공업의 기초 아래에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 후반 일본의 한국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반제국주의론의 대두가 어떠한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변영만은 특별히 열강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국민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그것도 논리적 비판 을 통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활동과 그 부당성을 주로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제국주 의에 직접 대항한 약소국의 저항이나 민족주의의 구현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제안을 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는 지적되어야 할 것이나, 국민들이 생경하게 여기던 제국주의를 이론적으로 소개하였던 점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으로 믿어진다. 한일합병 직후인 1910년 11월 19일자 朝鮮總督府官報 를 보면 50여 종의 서적이 出版法으로 판매금지 와 압수처분이 내려지는데, 변영만이 번역하였던 世界三怪物 과 二十世紀之大慘劇 帝國主義 도 들어 있었다. 일제가 한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서적들을 규제조 치하면서, 제국주의를 비판한 서적도 포함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계몽론자로서의 변영만 의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