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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조선통감부 연구 강 창 석* Ⅰ. 서 언 Ⅱ. 일본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 Ⅲ. 통감부의 조직과 권한 Ⅳ. 통감부의 역할 1. 시정개선의 목적 2. 한국의 행정권 장악 3. 재정, 경제권의 장악 4. 교통, 통신기관의 장악 Ⅴ. 시정개선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 Ⅵ. 결 언 Ⅰ. 서 언 19세기 중엽부터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열강들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대한 이권경쟁이 한창일 때 일본은 이들에 의해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국내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두한 것이 중국대륙 침략정책이었다. 먼저 이 정책의 추진을 대륙과 연접해 있는 한반도를 완전 지배하려는 정한론에서 찾으려 했다. 일본은 이 정한론을 구체화시켜 한국을 함포외교로 강압 개항시킨 이래 청일, 러일전 쟁을 유발하여 한반도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열강들의 방해 없이 일본은 한국의 국정전반에 걸쳐 침략적인 성격으로 식민지화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침투를 감행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06년 통감부 및 부속기관을 설치하고 그 소속관제를 제정하여 이 들 기관을 앞세워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이러 한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통감부에 대한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는 한국사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 설치 배경, 조직과 기능 그리고 권한 등에 관한 연구와 1910년에 설치된 총독부와의 관계 등에 관한 사실은 반드시 체계적으로 정 리되어져야 한다. 한국 최근세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선결되어져야 할 과제이기 때 문이다.* * 東義大學校 史學科 敎授.

- 182 - 國史館論叢 第53輯 또 통감부와 총독부는 전혀 별개이고 서로 무관하게 설치된 기관이 아니라 역사 발전 과정에서 서로 계승 발전적인 관계가 있는 기관이라면 1906년에 설치된 통감부가 1910 년에 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한국에서 실시한 각종 정책이 총독부와 어떤 연관을 가지 고 있는지도 정리되어져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총독부의 설치에서 통감부의 역할이 구 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에 관한 연구는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다. 즉 1905년부터 1910년 까지의 역사도 분명 우리의 역사인데도 이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한국사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위해 바람직스럽지 못하며 총독부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통감부가 한국에서 실시한 각종 정책의 목적, 방향 그리고 그 내용을 구명하는 것은 필요한 작업이다. 따라서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래 시행한 각종 정책의 방향과 목적, 그리고 그 정 책의 구체적인 내용 또 이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과 통감부의 정책에 대한 분석 등을 통 하여 통감부와 총독부와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Ⅱ. 일본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 18세기 후반은 서구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켜 그들의 세력확보에 전념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방과 이권양여를 강요당한 중국과 일 본은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 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은 이를 수용하여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계기 로 만들었다. 그러나 막부사회를 주도해 왔던 士族들의 불만 즉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함 에 따른 그들의 지위 상실로 인한 불만을 해소하여 명치정부의 안정을 기하여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지리적인 한계 점을 극복하여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국제사회에서의 지위을 향상시켜 개화시에 상실한 손실을 보충해야 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때문에 이러한 배경하에서 대두된 것 이 중국 대륙침략정책이며 이의 첫 단계가 소위 정한론임은 주지의 사실이다.1) 이러한 1) 木戶孝允 日記 一, 1869.1. 26. 당시 일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木戶孝允은 일본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대륙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제1보가 조선을 경영하는 것이다 고 정한론의 배경을 강조하고 이어 속히 천하 의 방향을 하나로 정하고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무례를 문책하였을 때 조선이 이에 불복 하면 이와 같은 잘못의 대가로 조선의 국토를 공격하여 크게 일본의 위엄을 신장시킬 것을 요청하 는 바이다 라고 한 것이라든지 획득하기 용이한 조선, 만주, 중국본토를 대체지로 하여 조선 과 만주에서 보상받도록 해야 한다 등은 모두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평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구미열강으로부터 압박 받고 있는 일본의 국제적 지위 를 확립하고자 하는 그 제일보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정한론이 대두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183 - 목적 하에서 정한론은 일본국내의 실시 시기에 대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자극되어 서둘러 확정했다.2) 당시 일본의 외교 고문, 프랑스인 Contes des Cantons de Montblanc 은 만약 일본이 러시아의 사할린 점령을 묵인하게 되면 다음은 조선이 그 목표가 되어 전략적인 위치로 보아 일본의 자립은 불가능하게 된다라는 내용 의 건의서를 제출하게 된 것도 그 원인이 되었다.3)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 의 정한파 또는 비정한파들 모두가 그들의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서는 대륙침략이 필수 적이고 이의 제1보가 조선을 경영하는 것 4)이라고 하여 정한론의 배경이 궁극적으로 중 국 대륙침략에 있다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때문에 1870년 4월 일본의무성은 對朝鮮政策三箇條 를 서둘러 확정하였다.5) 이 에 따라 1876년 2월 26일 운양호사건 을 의도적으로 야기시켜 조선과 朝日修好條規 를 조인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이 1875년 9월 사할린지방(樺太)을 러시아에 양도하고 쿠릴 열도 (千島)를 양여받아 러시아가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는데,6) 이는 사할린지방을 상실해서라도 일본의 대한정책 추진에 러시아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 줄 것을 기대한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으로서는 한국에서의 이익에 보다 적극적이고 종래부터 종주권을 행사해 온 청국의 배제가 한반도에서 먼저 달성해야 할 과제였다. 이리하여 1894년 청 일전쟁을 야기시켜 한반도에서 청국의 세력을 배제시킴 은 물론 그들의 당초 목적인 대륙침략의 제1차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되자 서구의 열강들은 지금까지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였던 일본을 재평가하게 되고 일본 의 성장은 곧 그들의 극동아시아에서의 이익을 위협당하게 되는 결과라 판단하여 일본의 대륙침략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그들이 당초 목표한 바와 같이 일본이 국제 사회 에서 열강들의 위치에 어느 정도 도달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열강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게 되자 이 중 러시아가 가장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국운신장을 위한 태평양에로의 진출에 적극적인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정면으로 충돌 되기 때문이다. 즉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국이 군사적으로 요충지대이며 태평양진출에 교 두부 역할을 할 旅順, 大連港과 한국에서의 이익을 일본에 양여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에 러시아는 극동아시아에서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2) 당시의 일본 지도자 중 大久保利通, 木戶孝允, 三條實美 등은 국내의 힘을 배양하고 전력을 충분 히 갖출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시기적으로도 아직 빠르다 고 하여 정한론의 시기상조를 주장하였 다. 이들은 정한론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시기적으로 때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3) 日本外務省 編, 日本外交文書 第2卷 第一册, 明治 2년 1월 10일 文書, 이하 外交文書 라 편의 상 칭한다. 4) 木戶孝允日記 一, 1월 26일. 5) 外交文書 第3卷, 文書番號 89. 6) 岩波書店 編, 近代日本 總合年表 (1978) p.64.

- 184 - 國史館論叢 第53輯 독일, 프랑스와의 3 국간섭 계획으로 일본의 중국 대륙침략계획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 러한 결과는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이익까지도 위협당하게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이에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치 않을 수 없었다. 내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형성해야 할 필 요와 외적으로는 러시아를 견제할 외교적인 대책을 수립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육 해군 의 통수권을 장악한 천황제를 확립하여 군비를 비축함과7) 동시에 외교적 대책을 강구하 기 시작했다. 3 국간섭을 통하여 러시아가 청국으로부터 여순, 대련항을 조차하여 이의 경영을 적극화하고 한반도에서 그들의 세력이 점차 강화되자 일본은 한반도에서만이라 도 그들의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타협치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 의 지배가 곧 그들의 최종 목표인 대륙침략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Weber-小村覺書 (제1차 일로협약 ; 1896년 5월 14일)8)와 Lobanow-山縣 議定書 (제2차 일로협약 ; 1896년 5월 26일)9) 그리고 1898년 4월 25일의 Nichi Rosen-西 協約 10) 등이 모두 이 러한 배경 하에서 양국간에 체결된 약정이며 이를 통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다소 견제, 약화시킬 수는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배제시킬 수는 없었다. 한때 일본은 한반도를 위도 38도선을 중심으로 양분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할 것을 러시아에 제안하기도 하여 한반 도에 그들의 세력을 확보하기에 부심하였다.11) 그러나 1900년 중국의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대륙침략의 기반을 다시 형성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그들이 부설한 만주철도의 보호를 명분으로 청국에 군 을 파견하여 사실상 만주지방을 점령하게 되었다.12) 이는 아프카니스탄에서부터 러시아 와 대립하여 왔던 영국을 급속히 일본에 접근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요컨대 일본으 로서는 그들의 국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나 러시아의 만주지방 점령이 크게 부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만주지방 점령을 저지키 위하여 駐淸日 7) 不動健治 編, 百年小史 (山田書院, 1962) p.414. 8) 外交文書) 권29, pp. 789 792, 文書番號 第458. 전문 4개항으로 된 이 각서의 내용은 제1, 2항에서 俄館播遷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한국의 친러 내각을 승인하며 제3, 4항에서는 러 일양국의 한국에 駐兵權을 상호 인정하는 내용으로 일본의 한 국에 대한 독점지배에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세력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는 있었다. 9) 外交文書 권29 第一册, pp.815 817. 10) 外交文書 권31 第ᅳ册, pp.182 183. 이와 같이 러시아가 일본의 저의를 인식하면서도 일본과 타협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3국 간섭의 대가로 획득한 군사상의 요충지인 여순, 대련항의 경영에 주력하여 왔고 ( 外 交文書 권 31 第ᅳ册, p.108), 둘째, 러시아의 對韓國政策은 서울 외교계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으며 (宋炳基, 光武改革硏究 史學志 10, p.80), 셋째, 일본과 공동목적을 가지고 있는 영국을 자극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넷째, 러시아의 대한국정책이 견실하지 못했고 더욱 만주를 개발하려는 데 정책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를 만주방어를 위한 완충지대로서의 중요성밖에 인정치 못했기 때문이다(崔文衡, 列强들의 東亞細亞政策)), 一潮閣, 1978, pp. 25 26). 11) 로마노프 著, 山下義雄 譯, 滿洲에서의 露國의 利權外交史) (原書房, 1967) p.259. 12) 王蕓生 輯, 60年來中國與日本 第3 卷(1972) p.64.

- 185 - 本公使 小村壽太郞을 통해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할 경우 영국과 독일도 이에 상응하는 지역을 점령할 것이며 일본도 이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이유로 내세워 청국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만주점령을 저지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13)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만주지배와 일본의 한반도지배를 상호 승인하려는 소위 滿韓交換論과 당시의 국제정세 로 보아 극동아시아에서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영국을 배후의 비호세력으로 하려는 영일 동맹을 동시에 추진하였다.14) 당시 청국주재 일본공사로 봉직하면서 국제정세 감각이 뛰 어나 외상으로 등용되어 일본의 외교방향을 주도한 小村도 이와 같은 내용을 건의하고 있어15) 당시 그들은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확보에 최우선의 정책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의서 내용에서도 한국의 운명은 일본의 사활문제로서 조금도 등한히 할 수 없고 라고 하여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책의 방침하에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러일간의 외교 교섭에서 일본의 비호세력으로 함으로써 국 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장이 강화되고 자연히 3국간섭 이후 5년간 유지되어 온 한반도에 서의 세력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후의 지지세력까지 확보한 일본은 1903년 그들의 내각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전제하여 러시아와 교섭의 주안점을 만주에서 러시아 의 이익을 보장하되 한국의 안전을 도모하며 아울러 한국에서 그들의 경제상, 방위상의 이익을 보장받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하여 교섭에 임하였다.16) 한반도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밀접한 위치에 있고 열강들에 에워싸여 일본의 안전을 항상 위협하고 있는 곳으로 도저히 안전을 기할 수 없어 일본으로서는 이를 결코 용인 할 수 없다. 13) 淸季中日關係史料 第一卷, pp.44 45. 14) 日本外務省 編,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 上(1983) pp.201 202. 이하 편의상 年表, 文書 라 칭 한다. 英日同盟 締結에 관한 小村外相 意見書 (明治 34년 2월 7일). 淸澤洌, 日本外交史 上(1976) p.288. 15) 年表, 文書 上, pp.201 202. 여기서 小村은 한국의 운명은 우리나라의 사활문제로 조금도 등한히 할 수 없고 과거의 역 사와 현재의 사태를 비추어 보아 러시아는 우리의 희망과 같이 한국문제 해결에 응하지 않아 순 연히 외교담판으로는 처리할 수 없다. 이를 위한 방법이 오직 2가지 있다. 하나는 우리의 희망을 관철하기 위하여 교전도 불사할 결심을 보이는 것이고, 둘째는 제 3국과 결합하여 그 결과로 인 해 러시아가 부득이 우리의 희망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교전은 항상 가능 한 이를 피하도록 할 것이며 결국 둘째 방법에 의한 열국인 영국과 동맹하여 그 공동세력을 이용함으로써 러시아가 우리의 요구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된다 고 하여 영일동맹을 통한 한국지배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만주점령과 중 국 중부지방에의 진출은 영국의 양자강 연안을 중심으로 하는 이익과 인도 통치를 크게 위협하게 됨으로 러시아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일본의 제안에 영국이 쉽게 접근할 것이라는 것을 계산에 두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건의서의 내용은 곧 일본의 외교정책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음 은 주목할 만하다. 16) 年表, 文書 上, pp.210 212, 滿韓에 관한 日露協商의 件(明治 36年 6月 23日).

- 186 - 國史館論叢 第53輯 그러나 극동아시아 정책을 통해 국가발흥을 꿈꾸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이로 인하여 그 정책 추진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일본을 견제하고 이로써 만주에서의 이익을 확고하게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 에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북위 39 도선을 중심으로의 세력 분할을 제안하였 다.17) 이에 일본은 러시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 즉 만주에서 러시아의 이익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본의 이익을 주장하는 반대 제안을 하여 만약 러시아가 이를 거절할 경우 에 대비,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러시아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경우 청국과 한국에 대한 조치까지 마련하여 한국에 관해서는 어떤 경우라도 실력으로 우리의 세력 범위 내에 둠은 물론 18)이라고 하여 그들의 전통적인 대륙침략정책을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의 지로써 일본은 한국문제와 아울러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이익까지도 위협함으로써 상대 적으로 한국에서 그 들의 이익을 보장받고자 하는 遠攻近略的인 방법으로 한국문제를 滿韓問題의 단계로 발전시켜 갔다.19) 이에는 물론 러시아의 극동정책을 견제하려는 영국 의 외교적, 재정적인 보장과 또 영국을 통하여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의 중립을 보장받고 있었다.20) 특히 이때는 러시아의 국내에 이미 혁명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고, 여순 대련 항의 경영에만 專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러한 정책 발상이 가능하였다. 즉 일본 은 한반도를 그들의 대륙 침략정책에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섭이 아니면 전쟁을 통해서라도 해결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일본으로서는 한 반도를 그들의 국운이 걸린 사활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러시아와 이해가 상충 되어 다음과 같이 전제하고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21) 萬國累世의 관계로 인하여 한국의 존망은 실로 일본의 안위와 연계되어 있는 바 만약 만주를 露國이 영유하게 된다면 어찌 한국의 보전을 유지하며 이로 인하여 극동의 평화를 바라겠는가 露國은 처음부터 평화를 애호하려는 성의가 추호도 없고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여 한 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며 일본의 국익을 침해하고 있다. 17) 年表, 文書 上, pp.212 213. 18) 年表, 文書 上, pp.216 219, 明治 36년 12월 30일 閣議決定. 19) 年表, 文書 上, p.213. 당시 영국으로서는 러시아의 극동정책으로 그들의 아시아에서의 이익을 위협당하고 싶지 않기 때 문에 일본의 러시아와 교섭을 반대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일본의 군사세력으로 저지시켜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으나, 일본으로서는 한반도의 이익이 화급한 일이기에 栗野駐露公使를 통해 일본 단독으로 교섭에 임하여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과 한국철도를 만주 남부까지 연장 하는데 러시아는 반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 外交文書 권37, p.6, 明治 37년 1월 3일 小村外務로부터 在英林公使에게 보낸 電報. 21) 年表, 文書 上, pp.222 223, 明治 37年 2月 10日의 露國에 대한 詔勅.

- 187 이렇게 한국의 안전이 곧 일본의 안전이라는 논리로 한국의 안전은 일본이 이를 보호 함으로 가능하고 이로써 일본의 안전도 보장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대한정책을 수립하여, 일본은 한국에 대해 政事上, 軍事上에 보호의 실권을 장악하고 경제상으로 점점 우리 의 이권 의 발전을 도모한다22) 라 하여 한반도를 보호라는 미명 아래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대한정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발표한 것이 對韓施設綱領이었다. 여기서 일본은 한국의 외정감독, 재정감독, 교통통신기관 장악, 척식 도모 등을 통하여 한국을 사실상 지배함으로써 중국 대륙침략의 근거지로 하고자 했다.23) 이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전된 후 1905년 4월 확정되어 10월 27일자로 실행 에 들어가 한반도에 대한 타 열국들 특히 러시아의 간섭없이 완전하게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배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대외적으로 공시하여 이를 강화하기 위하여 통감부를 설치 운용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통감부의 운용도 이러한 정책 방침 즉 한국에 대한 지배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운용되었으며 이러한 통감부의 활동을 바탕으로 총독부가 설치된 것이다. Ⅲ. 통감부의 조직과 권한 중국 대륙침략을 실현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은 열강들이 세력균형을 이루 고 있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반도에 대한 확실한 지배를 계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한국의 독자적인 개혁을 억제해야만 했고 일본과 열강들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엄 정 중립선언을 무효화 시켜야만 했다. 사실 한국은 열강들의 내정간섭을 경험하면서 한민족 내부는 점차 국민적 자각이 일 기 시작했다. 1896년도의 독립협회의 활동이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협회의 활동으로 1897년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독자적인 근대화의 기반구축을 위한 광무개혁을 자주적 으로 추진해 갔다.24) 또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 23일에는 러일양국에 대하여 엄정중립을 선언함 22) 年表, 文書 上, pp.224 225, 明治 37년 5월 30일 元老會議 決定 內容. 23) 年表, 文書 上, pp.225 228, 對韓施設綱領決定의 件. 24) 宋炳基 外 2 人, 韓末近代法令資料集 권 二, pp.288 289.

- 188 - 國史館論叢 第53輯 으로써 열강들의 세력균형을 틈타 영구 자주적인 노선을 지향하려 했다.25) 이러한 한반 도의 일련의 움직임은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내정 간섭을 초래하 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물론 이는 한국의 독자적인 개혁과 엄정중립에 관한 강력힌 의지가 부족했고 일본의 대한정책이 상대적으로 강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열강들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선언된 한국정부의 엄정중립 에 관하여 한때 일본은 러시아를 의식하고 한국의 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한 반도에서 러시 아의 세력을 배제시키고자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그들의 세력 확보를 위하여 한국의 지도층 인사인 李址鎔, 李根澤, 閔永喆 등에 압력을 가하여 일본 의 대한정책에 협조토록 하면서 한국의 태도에 관계없이 실력행사로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당시 주한 일본공사가 외무대신에 게 건의한 내용은,26) 大局에 대하여는 한국의 태도여하에 관계없이 조속히 결행이 있을 것을 희망함. 한국의 태도는 우리가 실력을 행사하면 모두 우리 쪽으로 기운다고 판단하고 있음 이라고 실력행사를 통하여 목적달성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리하여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됨으로 한국은 일본에 의하여 對露攻守 의 의무가 부과되고 국정에 관하여 일본의 강압적인 충고를 받아야만 하였다.27) 따라서 열강 특히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주적인 개혁과 엄정중립에 관한 의지는 수 포로 돌아갔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라는 명분으로 한국의 내정에 적극 간여하여 한국의 엄정중립선언을 무효화시키고 또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하여 러일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적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되자 지금까지 일본의 對韓支配權行使에 장애요소가 되었던 한러간의 일체의 조약이나 협정을 파기케 하고 러시 에게 許與했던 모든 권익을 취소케 했다.28) 이로써 한국에서 청국과 러시아의 세력을 축출한 일본은 1904년 4월 31일 한국에 대 한 保護權確立을 내 용으로 하는 對韓方針을 閣議로 결정 하고 한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여 열강들이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 속에서 흔들리는 한국을 묶어두고자 했다. 이러한 기왕의 대한방침은 1905년 4월 8일 각 의결정으로 對韓保護權確立이 구체화되어 보호의 실권을 장악키로 하고29) 이를 다시 10 25) 外交文書 권37 第ᅳ册, pp.316 317, 明治 37年 1月 24日 在韓日本臨時 代理公使로부터 小村外務 에게 보낸 電報. 26) 金正明 編, 日韓外交資料集成 5(巖南堂書店, 1964) pp.32 33. 이하 편의상 資料 라 칭한다. 27) 外交文書 권37, pp.389 391, 明治 37年 2月 27日 小村外務大臣이 林公使에게 보낸 電報. 28) 위와 같음. 29) 資料 6, 上, p.3, 明治 38年 4月 8日 閣議 決定, 韓國保護權確立의 件.

월 27일 다음과 같이 의결하여 실행에 착수하게 되었다.30) - 189 - 한국에 대하여 我의 보호권을 확립함은 기히 廟議로 결정한 바이지만 이의 실행은 今 日이 最 好의 시기임 어떻게 되었던 右에 대하여 英美兩國은 이미 동의를 하였고 이 외의 諸國도 역시 韓日兩國의 특수한 관계와 전쟁의 결과를 고려하여 최근에 발표된 英 日 및 潘日講和條約의 명문에 비추어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함은 피할 수 없는 결 과임을 묵인하여 이로써 일본은 그들의 대한정책에 장애가 되는 세력을 제거하거나 또는 양해를 얻어 한반도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열 국에 공시하여 한반도에 대한 열국의 간여를 배제하고자 통감부 및 소속관청을 설치하 고자 하였다.31) 이의 실행은 가급적 대외간의 장애를 초래하지 않을 수단을 강구하면서 적당한 시기에 단행할 것을 의결하여32) 외국 열강들의 반응에도 조심스럽게 대처하면서 가급적 열강들과의 충돌을 피하려 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駐韓日本公使 林權助의 全權下 에 韓國駐割日本軍司令官의 武力으로 실시하고자 한 것임은 물론이다. 이에 따라 11월 9 일 서울에 도착한 伊藤博文의 진두지휘 하에 종래의 대한방침대로 무력을 앞세워 11월 17일 한국의 朴齊純과 일본의 林權助 사이에 5 개항의 第二次 日韓協約을 강제 체결하 였다.33) 이 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의해 약탈당하고 통감에 의해서 외교사무 가 대행되었으며(제1 3조), 그리고 한국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한다(제5조)는 것 외 에 한국의 독립 부강을 위한 시정의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한국내정에 깊이 간여하여 그 들의 목적대로 한국을 사실상 지배하고자 했다.34) 이에 따라 1905년 11월에서 1906년 3월 사이에 淸, 英, 美, 獨, 佛, 伊 등의 駐韓外國公 館이 한국에서 철수되고 영사관으로 대체되었다. 뒤이어 12월 15일자로 한국의 재외공관 마저 폐쇄시켜 한국은 모든 외교적 방법이 단절되어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자 연히 한국의 외부는 폐쇄되지 않을 수 없어서 1906년 1월 17일 議政府外事局으로 격하 되었다.35) 30) 資料 6, 上, p.10, 韓國保護權確立實行에 관한 閣議 決定. 31) 外交文書 권38, pp.519 520, 明治 38年 4月 8日 閣議決定. 여기서 한국의 外政은 東洋禍源이 伏在하는 곳으로 장래에 있어서의 紛糾再發의 端을 끊어 帝國의 自衛를 완전히 하기 위해서 제국은 此際에 進一步하여 한국에 대한 保護權을 확립하고 제 국의 對外關係를 我掌裡에 收攬케 함 이라고 하여 이러한 배경을 분명히 하고 있다. 32) 資料 6, 上, p.4, 明治 38年 4月 8日 閣議決定, 韓國保護權確立의 件. 33) 資料 6, 上, pp.36 37, 明治 38年 11月 17日 京城에서 調印된 日韓協約. 34) 위와 같음. 35) 外交文書 권 38, pp.614 615, 明治 38년 12월 11일 桂外務로부터 林公使에게 보낸 電報. 당시 한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해온 국가는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독일, 이탈

- 190 - 國史館論叢 第53輯 1905년 12월 20일에는 統監府 및 理事廳官制를 공포하여 駐韓日本公使館은 1906년 1 월 31일자로 폐쇄시키고 1906년 2월 1일자로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초대 통감으 로 伊藤博文이 부임하여36) 소위 施政改善이라는 명분으로 한국의 국정전반에 관한 지휘, 감독을 하여 식민지화를 위한 한국의 통치조직을 체계적으로 해체시켜 갔다. 이를 위해 통감은 한국에서 제국정부를 대표하고 조약 및 법령에 기한 제반 정무를 통활한다 37) 라는 법적인 근거를 치밀하게 마련하였다. 2월 1일 통감부 및 그 부속관청을 개설할 당시에는 統監, 伊藤博文을 비롯하여 總務長 官에 鶴原定吉, 農商工務總長에 木內重四郞, 警務總監에 岡喜七郞을 임명하였다.38) 통감부 설치 이전의 顧問 중 일본정부의 추천에 의해서 한국정부의 발의로 용빙된 고 문은 통감부 설치와 동시에 통감의 감독에 귀속하여 보좌관, 교관 또는 기타의 명분으로 각부에 귀속시켰다. 더구나 1907년에 체결된 韓日新協約(丁未七條約)에 의거 일본인이 한 국정부의 관리로 임용될 수 있게 됨으로 일본인 고문 또는 참여관은 거의 해고되고 차관을 비롯한 고위 관직에 일본인들이 다수 등용되었다.39) 이렇게 통감부는 이들을 통하여 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식민지화를 위하여 한국 국정에 참여 간섭하였던 바 유효한 성적을 거두었다 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듯 이,40) 한국의 국정 전반에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여 정책 결정을 주도하여 왔던 것이 다. 그러나 1907년 7월부터 통감부의 조직과 정책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발생했다. 소위 海牙密使事件이 곧 이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이 를 한일신협약의 위반이라 하여 가증스럽게도 일본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함과 아울러 새로 이보다 강화된 對韓處理方案을 閣議에서 의결하고 이를 통감에게 훈령함으로써 한 국에 대한 보다 강력한 지배를 공고히 하고 심층하는 轉機로 이용했다. 즉 일본은 이를 극히 중요한 현안문제로 부각시켜 외무대신을 직접 派韓할 정도로 한국의 완전한 지배 를 위한 기회로 포착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西園寺 總理大臣으로부터 제국정부는 現 리아, 청국, 일본 등이며 이들과는 공사관을 설치 운용하였고, 뉴욕, 런던, 파리, 홍콩, 芝罘 등지 에는 명예영사를 두고 한국의 이익과 교민을 보호하였다. 36) 실제 伊藤博文은 3월에 부임하였고 그간은 韓國駐割軍司令官 長谷川好道가 이를 대리하였다. 37) 外交文書 권 38, pp.563 567. 朝鮮總督府 編, 韓國施政年報 권一, p.5, 統監府 및 理事廳官制 第3條. 38) 朝鮮總督府, 韓國施政年報 (明治 39) pp.8 10, 統監府組織(官制). 이하 편의상 施政年報 라 칭한다. 39) 施政年報 권一,附錄, p.3. 제5조에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인을 한국관리에 임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에 차관 으로 등용된 자들을 보면 宮內部에 鶴原定吉, 內部에 木內重四郞, 學部에 俵孫ᅳ, 度支部에 荒井賢 太郞, 法部에 倉富勇三郞 등이 임용되어 한국정부를 완전 장악하여 식민지화를 위한 작업을 수행 하였다. 40) 施政年報 권一, pp.12 14.

- 191 - 下의 기회를 逸하지 말고 한국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을 희망하고 그 실행에 관 해서는 실시의 정황을 참작할 필요가 있음으로 이를 통감에게 일임한다 41)라는 극비의 對辑處理 要綱案이 통보되었다. 이 처리 요강에서 한국에 대한 조치로 3 가지의 안이 마련되었는데 그 제1안은 한국 황제로 하여금 대권에 속하는 내치정무의 실행을 통감에게 일임시킬 것, 제2안은 한국정 부로 하여금 내정에 관한 중요한 사항은 모두 통감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시행하고 또 시 정 개선에 관한 통감의 지도를 받아야 할 것을 약속받을 것, 제3안은 군부대신과 탁지부 대신은 일인으로 하여금 이에 임명토록 할 것 등이다. 그리고 別紙의 要綱에서는 한국황 제로 하여금 황태자에게 양위케 할 것. 장래의 화근을 두절시키는 데는 이 수단을 취함 이 불가피함. 단 본건의 실행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실행함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하고 국왕 및 정부는 통감의 副署없이 정무를 실행하지 못하도록 하며 주요부서는 일본에서 파견된 관리로 하여금 대신 또는 차관의 직무를 실행할 것 등을 제시하여 결국 별지의 안을 결정하고 고종의 양위와 일한신협약의 체결을 강제하게 되었다.42) 이 방침이 결정 되자 통감은 1907년 7월 18일 한국의 황제를 알현하여 해아밀사사건에 대한 해 명 요구 와 아울러 조약의 위반을 통박하고 고종의 양위를 강제했다. 이어 7월 24일 한국에서 통 감의 절대권을 인정하는 7개항의 한일신협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의 통치권은 사실상 통감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다.43) 이로써 통감은 한국의 지배 즉 식민지화를 위 한 사전 정지작업을 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까지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9월 통 감부의 조직개편에 착수하였다. 통감부에 부통감을 친임으로 하여 통감을 보좌하며 통감 의 유고시에 그 직무를 대리하게 함과 아울러 農商工部와 警務部를 폐관하고 새로이 전 임 2인의 참여관과 비서관 1인을 두고 기사 6인, 통역관 1인, 판임관 16인으로 감소시킴 과 동시에 警視 및 警部는 모두 폐관하였다.44) 그리고 새로이 감사부와 지방부를 두고 국정 전반의 감사 특히 재정감사와 지방의 조직적인 지배체제를 확대 강화하였다.45) 또 한 협정의 실행을 위한 각서 및 부속서를 통하여 재판소의 구성, 감옥설치, 借款 등을 비롯한 일인 관리의 임면에 관한 사항을 구체화하여 내정의 직접지배와 아울러 이에 따 른 한국 민족의 반발을 사전 예견하고 재판, 감옥의 사무까지 관할하고자 했다. 1909년 7월 한국의 사법 및 감옥에 관한 사무를 통감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여 司法權과 行刑權을 탈취해 갔으며 이에 따라 한국의 法務와 監獄 및 裁判所가 41) 資料 6, 中, pp.598 599, 明治 40년 7월 12일 林外務大臣으로부터 伊藤統監에게 보낸 極 秘文 書. 42) 資料 6, 中, pp.634 635, 明治 40年 7月 12日 林外務로부터 伊藤統監에게 보낸 極秘文書, 別紙. 43) 資料 6, 中, pp.634 635, 明治 39年 7月 24日 京城에서 調印된 日韓協約. 44) 年報 권一, pp.8 9, 統監府의 組織과 官制. 45) 施政年報 (明治 39) pp.10 12, 統監府의 組織, 事務分掌.

- 192 - 國史館論叢 第53輯 폐지되고 통감부의 사법청, 감옥 및 재판소가 설치되었다.46) 경찰권은 합병 직전인 1910 년 6월 24일 경찰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교환함으로써 탈취해 갔다.47) 이 각서로 경무 총감부가 설치되고 한국의 경찰권은 통감부가 專管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국정전반을 장악한 통감부는 소위 합방의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전환 하기 위하여 1909년 10월 통감부 훈령 제10호로 직제를 개편하여 통감부관방내에 문서 과, 인사과, 회계과를 두고 외무부에는 외국과와 한국과를 두어 외국인과 한국인에 관한 사무를 담당케 했으며 지방부에서는 지방의 생산, 금융, 종교, 교육, 사법, 경찰 등에 관 한 사무를 담당케 하는 체제를 확립하고 한국병탄을 위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와 같이 1905년 이래 국제 국내적인 여건이 일본에 보다 유리하게 되자 그때마다 통감부의 조직은 계속 강화되어 한국에서 그들의 지배권을 심층적으로 강화하여 한국의 정치, 경제, 군사, 사법 등의 국정전반에 걸쳐 침략적인 침투를 자행하였다. 1910년 8월 에는 단지 형식적인 국권을 병합할 뿐 사실상의 국권은 모두 이때 강탈한 것이다. 요컨 대 침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통감부는 총독부의 前身으로 이미 이때 사실상 한반도를 지배하였으며 이를 계승, 강화한 체제가 총독부였다. 이러한 통감부의 권한은 통감에게 주어진 권한과 지위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통감 의 지위와 권한은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통감을 親任官으로 하여 천황에 直隸한 천황권의 대행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통 감의 한국통치를 일본정책상 최상위에 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욱 한국에서 천황 의 대권을 대행하도록 하였던 것은 한국을 사실상 일본의 통치지역 일부로 간주하고 있 는 것이며 한국의 국권을 실질적으로 탈취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 서의 외교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의 외교 노선과 맥을 같이 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외무 를 거쳐 총리를 경유하도록 규정하고, 그 외는 모두 各省을 거치지 않고 총리대신만을 경유하여 상주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또 통감은 일본을 대표함은 물론 일본주재 외국대표자를 경유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외국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계있는 것은 모두 감독하도록 하여(통감부 및 이사 청 관제 제3조) 한국의 외교관계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안녕, 질서유지라는 명목 으로 한국수비대 사령관에게 병력사용을 명할 수 있도록 하여(제4조) 통감통치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을 탄압할 수 있도록 하였다. 통감은 한국의 행정사무를 집행함에도 한국정부에 이첩하여 그 실행을 요구할 수 있 고 또는 집행 후 한국정부에 통보할 수 있도록 하여(제5조) 한국의 국정을 자의로 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일본인 외에 타국인의 용빙은 통감의 승인 또는 동의가 있어야 하는 46) 外交文書 권一(明治 42), pp.182 183, 明治 42年 7月 12日 締結된 日韓 覺書. 47) 資料 6,下, pp. 1397 1398, 明治 43年 6月 24日 京城에서 調印된 日韓 覺書.

- 193 - 까다로운 제한조건을 두고 규제하여(제6조) 他列國들의 한반도 간여를 배제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07년 이후에는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을 단 1명도 한국의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일본인을 국정에 깊이 관여시켜 1909년 말까지 약 2,700여 명을 등용 하였다. 이러한 통감의 권한은 한국민의 저항으로 강제성을 수반하지 않고는 행사할 수 없기에 통감은 1년 이하의 금고형과 200원 이내의 벌금형을 가할 수 있는 사법권까지 소유하여 통감통치를 강행했다(제7조). 아울러 해당 관청에서 발하는 명령 또는 처분에 있어서도 정지 또는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각부의 관리를 감독하고 그의 진퇴 를 專斷할 수 있는 것도 물론이다(제8, 9조). 그리고 각부의 관리에 대한 敍位와 敍動을 上奏하여 일인 관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외에도 한국정부의 고등관리를 임명할 때에 도 통감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48) 한국에서의 인사권까지 통 감의 권한으로 귀속시킴으로 친일적인 정부조직 구성에 활용했다. 이 외에도 법령 및 처 분의 심사, 식산 및 금융, 종교 및 교육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49) 실로 한국의 국정 전반 에 걸쳐 통감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한국의 독자적인 결정, 집행권은 전혀 없 는 실정이었으니 사실상의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었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통감의 권한이 보다 조직적으로 강화되어 적극적 인 자세로 한국의 지배에 임하였다. 한국대신들의 정기 또는 임시회의를 통감관 저에서 수십 차례 주재하여 한국의 시정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항 들을 대신들에게 통고하고 그 집행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통감은 한국의 국정 을 統制하는 최고의 정책 책임 자로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위치였다. Ⅳ. 통감부의 역할 1. 시정개선의 목적 이상에서와 같은 배경과 권한으로 기왕 설치된 통감부가 한반도에서 취한 방침은 물 론 한국의 국정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곧 시정개선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이미 통감부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한국과 체결하는 각종의 조약 등을 통하여 기회있을 때마다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내용을 잊 지 않고 기록하여 이에 관한 권한을 강조하고 있다. 48) 施政年報 (明治39) p.5, 協約及議定書. 49) 施政年報 (明治39) pp.10 11, 事務分掌.

- 194 - 國史館論叢 第53輯 특히 통감부가 추진하는 이러한 시정개선을 통하여 통감부가 한국의 국정을 어떻게 장악하고 또 지배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지에 관한 과정과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 은 통감부와 총독부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하나의 요건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존망과 번영은 곧 일본의 안위와 직결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의 전근대적 인 시정을 개선하여 부강한 독립국으로 발전하는 데 일본이 善隣的인 동반자로서 도움 을 주겠다는 것이다. 즉 통감부가 시정개선을 한국에 강요하는 명분은 한국을 제3국이 병탄하면 일본의 안위가 보장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이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쇠퇴해가 는 한국의 국운을 회복하여 독립부강한 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강조하 고 있다.50) 아울러 통감은 일본국을 대표해서 한국에 주차하게 되며 일본이 한국에 대 해 취할 책임 즉 황실의 존엄유지, 외교의 관리, 시정개선, 국토방위는 모두 통감의 책무 이며 그중 한국의 외교관리는 사실상 한국의 외무대신과 같은 직무를 집행한다고,51)하여 통감이 시행하는 시정개선도 통감의 직무임을 강조하여 시정개선의 정당성을 통해 통감 의 지위를 확인하고 있다. 통감이 한국에 부임한 이래 소위 합방 때까지 한국의 시정개선을 위해 개최한 대소회 의는 430여 회나 되지만 이 중 1906년에서 1907년까지 시정개선에 관한 16희에 걸친 협 의회에서 협의, 결정된 내용이 시정개선의 주된 방향이 되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 은 그 협의회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 한국의 각부대신들을 통감관저에 불러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이미 실시하기로 결정 되어 있는 사항들을 각 대신들에게 통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통감이 제안하는 사항 이 단 한 번도 부결된 경우가 없었다. 통감이 각 대신들에 관한 인사권까지 소유하고 있 기 때문에 통감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정개선에 관한 필요성을 이등박문이 통감으로 부임한 1 개월 후인 1906년 3 월 9일 고종황제를 拜謁하는 자리에서도 다음과 같이 같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52) 이번에 博文이 우리 (일본) 황제폐하의 大命을 받들어 통감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다른 뜻이 없고 일한양국 사이의 國交를 더욱 친밀 敦睦하는 것과 동시에 귀국이 오늘날 衰 運을 만회하고 독립부강의 域에 달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목적을 이루 려면 국정의 개량이 실로 급무이고 그것을 실행하려면 오늘날이 극히 적당한 시기라 생 각한다. 이어 伊藤의 충언을 받아들여 시정개선의 일을 이 시기에 취하지 않으면 영원히 興하 50) 資料 6, 上, pp.122 123. 51) 資料 6, 上, p.240. 52) 資料 6,上, pp.122 125, 1906. 3. 9. 統監의 謁見.

- 195 - 는 날이 없이 절망할 것이라고 하여 통감의 지도 내용을 국정에 수용해야 함을 강조하 고 있다.53) 그리고 이에는 시정개선에 관한 타 열국들의 관여와 간섭을 배제하여 완전한 지배체 제를 구축해야만 했다. 따라서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한국의 존망이 일본의 안위와 직접 관계한다라는 전제아래 한국을 타국의 병합에 일임할 수 없고 필요할 경우는 러일 전쟁과 같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장래 博文의 귀국의 進運에 필요한 충언과 행동에 관해서 열국 중 異議를 나타내 거나 혹은 방해를 하는 것은 단호히 무시하겠다 54)하여 한국에 대한 타 열국들의 간섭을 배제한 독립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한국에 대한 병합을 타국에 일 임하지 않고 일본이 직접 하겠다는 역설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1906년 통감이 고종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고종은 통감에게 일본이 끝내 한국의 독립을 무시하고 합 병한다는 시중의 소문에 대한 그 진위를 확인한 사실이55) 나오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타 열국들의 배제에 관해서는 실제로 한국의 鎭海灣과 永興灣과 같은 국방상 필요한 일 정한 지점을 한정해서 토지의 매매 등을 금지시킴으로 다른 나라가 이를 매수할 우려를 사전에 배제시키고자 했다.56) 이미 러시아가 1903년도에 馬山浦의 토지를 매수해 조차했 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더욱이 軍收用地에 관해 대신회의에서도 통감은 아래와 같이 이러한 목적을 더욱 분 명히 하고 있다.57) 일본은 한국 방어의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가 이 구역 내에 진입해 오는 것을 도저히 허용할 수 없음으로 타국의 진입을 방어할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방침은 통감부가 설치되기 이전 1904년에 이미 결정되어 이후 통감부의 정책 방향이 된 對韓施政綱領에서도 다음과 같이 뜻을 같이 하고 있다.58) 마산포는 진해만에 가까이 있는 한국 남단의 가장 좋은 항구로 경부철도의 지선이 나 오는 군사상 경제상 극히 유용한 곳이다. 53) 資料 6, 上, p.127. 54) 資料 6, 上, p.123. 55) 資料 6, 上, 1906年 3月 25日 皇帝 謁見. 여기서 통감은 일부 일본인 중 정황에 어둡고 사리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이 한국을 속방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일본의 여론은 위의 정부로부터 아래 국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독립부식에 찬동하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는 실증임을 강조하여 고종황제의 확인에 답하고 있다. 56) 資料) 6, 上, pp.256 257. 57) 資料 6, 中, pp.324 325. 58) 年表, 文書 上, pp.227.

- 196 - 國史館論叢 第53輯 군사적, 경제적으로 필요한 지역은 군수용지를 고시해서라도 타국의 이 지역에 대한 관여는 단연코 배제할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 다음과 같이 이미 한국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외국인에게까지 치외법권을 철회시켜 통감부의 시정개선 시책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하고자 했다.59) 한국에서는 실제 이미 외국인에 대하여 토지소유를 묵인하고 있다. 오늘에 있어서 상 당의 배상을 하지 않으면 이를 회수할 수 없다. 다만 이를 허가한 이상 토지에 관해 서는 치외법권 을 철회하고 외국인도 비록 한국의 국법 아래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를 위한 조치인 재한 외국인에 대한 징세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 세이다. 재한 외국인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인에 대해60) 징세를 한다면 타 외국인에 대한 징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라는 의견을 주장하는 한국의 요구에 대하여 통감은 일본인에 대하여 압제적인 법령을 펼 수는 없고 일본인은 한국 인과 달라 일반에서 법률적 사상이 발달하여 통감부령으로서 한국정부에 납세하라는 규 정이 없으므로 복종치 않을 것이다 61) 라고 하여 일본인의 이익보호에는 적극적인 자세 로 임하고 있어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관한 한국내각의 동향을 보면 시정 개선에 관해 저항하는 한국인은 경찰력을 증가시키면 큰일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이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면 일부 인 민은 기뻐할 것이고 2 3년 후 실제 효과가 나타나면 필히 기뻐하게 될 것 이라고 하여 시정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62) 특히 이는 이후 한국에서 일본 경찰력의 증강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통감은 현임의 각 대신들에게 매우 중대한 과실을 제외하고는 충분히 원조할 것이니 안심하고 各位의 직무에 충실할 것과 또 희망할 사항이 있으면 주저없이 통감에게 먼저 의논할 것이며 통감을 제외하고는 황제를 알현치 말 것을 주문하고 있어63) 한국 각 대 신들을 신분보장을 이유로 그들이 추진하는 시정개선에 활용하고자 했다. 특히 모든 알 현사항은 통감을 경유토록 하여 한국황제와 대신들을 이간시켜 이로써 한국황제를 고립 시키고 그 권한을 억제하여 상대적으로 통감의 권한 행사를 보다 자유롭고 강력하게 하 59) 資料 6, 中, pp.326 327. 60) 당시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을 보면, 1907년에 약 40,000여 명으로 이 중 일본인이 37,113 명으로 주한 타 외국인과의 비율은 약 20 : 1 이다( 韓國施政年報 第2次, 明治 41年, pp.177 179). 61) 資料 6, 中, pp.478 479. 62) 施政年報 (明治39 40) p.131. 63) 資料 6, 中, pp.143 144.

- 197 - 고자 하였다. 나아가 한국 국무대신이 현재 곤란한 지위에 있는 것은 십분 이해하는 바이므로 곤 란해도 헛되이 실망 낙담하면 국가는 도저히 발달할 길이 없다. 모름지기 백절불굴의 정 신을 발휘하여 만약 곤란에 처하면 이를 이용하여 위로 君을 정하고 아래로 民을 구제 하는 방법을 강구치 않을 수 없다 64)하여 통감은 한국 각 대신들의 신분을 보장하는 조 건으로 통감부가 추진하는 시정개선의 목적달성을 위해 분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러한 통감부의 정책방향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추진되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각 대신들에게 일본은 한국에 대한 어떠한 야심적인 희 망을 갖지 않는 것을 각 대신들은 알고 있기 바란다 고 하면서 시정개선의 목적은 진심 으로 한국의 國利民福을 증진하고자 함에 있다 고 하여 시정개선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 으로 불안해하는 각 대신들을 회유하고 있다. 특히 지금 일본이 만약 한국을 병탄할 뜻 이 있다면 일거수 일투족의 노력으로 그 목적을 달성해야 함에도 그렇치 못하는 바는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여 거액의 경비를 소비하기에 부족하고 다만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을 육성케 하여 완전히 자국을 방위함으로써 일본은 한국과 동맹을 맺어 일본의 안 전을 도모하고자 할 뿐 다른 의도가 없다 고 하여65) 병탄에 필요한 경비를 일본은 조달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 통감부가 추진하는 시정개선의 당위성 과 그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상술하겠지만 이에 관한 한국민의 반응은 통감부의 시정개선 자체를 반대하고 이를 추진하는 각 대신들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통감부의 시정개선이 한국의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침략하는 것이라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시정개선을 위한 제13차 협의회에서 당시 농상공부 대신은 현세를 볼 때 여기에 열 석한 7 인의 대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排日黨이고 朴參政과 이근택 같은 자에 이르기까 지 자객의 난을 면치 못함으로 66)라고 한 발언에서 통감부의 시정개선에 대한 국민 들의 저항 정도를 알 수 있으며 시정개선의 목적이 한국의 보호가 아니라 지배에 있음 을 말해준다. 그래서 제국정부는 귀 황실의 존엄을 유지하고 그 안녕을 유지하기 위하 여 적어도 이에 반대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반역으로 간주하고 또 현 정부에 반항하는 뜻은 없어도 일한친목을 방해하는 태도 역시 반역으로 간주하여 67)라고 하여 국민들의 배일감정을 반역으로까지 규정하면서 시정개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한 국민의 통감부 정책에 대한 저항을 다음과 같이 병합의 구실로 하려고 함에 주의할 필 요가 있다. 64) 資料 6, 中, pp.221 222. 65) 資料 6, 上, pp.266 267. 66) 資料 6, 上, pp.427 428. 67) 資料 6, 中, pp.200 201, 1906年 4월 18일의 謁見.

- 198 - 國史館論叢 第53輯 일본측에서 말하면 만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였다면 만주 및 한국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일본은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한국 을 병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같이 불온하다면 한국은 끝내 한인 스스로 이것을 멸망시키게 되는 것이다. ᅳ朝當國에 반란을 일으키면 또 다시 일본으로부터 군대를 맞아 불행을 볼 것이 분명하니 나는 그와 같은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68) 여기서 일본은 한국을 즉시 병합치 않고 통감부를 통하여 기반을 다진 후에 병합을 단행하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합병의 구실을 한국민의 통감 부 정책에 대한 태도 여하에서 찾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보호를 위한 치안유지 가 불능함에 병합을 통하여 보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감부는 한국의 부강한 독립을 위해 시정개선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그 근 본 목적은 한국에 대한 지배를 위한 것이고 또 이를 위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다. 2. 한국의 행정권 장악 이러한 목적으로 추진되어 온 한국의 시정개선은 金融, 敎育, 軍事, 宮中과 府中의 分 離, 宮中財政 등을 개선의 대상으로 하여 그 구체적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 다.69) 1) 한국의 부강의 실을 거두는 것을 최급무로 하고 지금 그 시기를 遷延하면 후일 후 회한다. 2) 한국황실 및 그 정부는 진심으로 와신상담 참아야 한다. 3) 입법, 행정 백반의 개량을 실시할 것. 4) 부강의 실을 거두는 것에는 자금을 요한다. 상당의 자금을 차관하여 급함을 보충하 고 간난을 구호해야 한다. 5) 급히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수단을 연구해야 한다. 6) 지방 경찰력을 확장하고 안녕을 유지하는 수단을 취해야 한다. 여기서 통감부가 가장 먼저 추진했던 시정개선의 분야는 행정권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68) 資料 6, 中, p.449. 69) 資料 6, 中, pp.122 124.

- 199 - 각종 제도를 통감의 권한이 직접 미칠 수 있는 방향으로 개편하여야만 한국의 지배를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국정의 각 분야에 일본인을 촉탁 기타 의 이름으로 배속시켜 그 분야의 정책결정 자문에 응하도록 하여 지배를 위한 작업을 하였다. 물론 여기는 시정개선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일본 인을 용빙케 하였다. 실제로 臨時治道 사무감독 촉탁에 통감부기사 中原貞三郞, 교육 확장 사무 촉탁에 통 감부 서기관 俵孫一, 지방제도 조사위원 촉탁에 통감부 경시 龜山理平太, 통감부 통역관 鹽川一太郞 그리고 수도공사 기사 坂出 技士 등이 용빙되어 그 분야의 정책결정에 영향 을 주었다.70) 그 외에도 통감부설치 이전에 고문과 참여관으로 한국정부에 용빙된 일인 즉 財政顧問, 警務顧問, 軍部顧問, 宮內府顧問, 學府參與官 등은 통감부설치 이후 통감의 감독으로 보좌관, 교관 기타의 명칭으로 한국의 각 部에 배속되었다. 특히 재무, 경무 양 부에는 그 사무의 성질상 다른 부서보다 일인의 수가 많았다.71) 이는 재무부는 한국의 재정을 장악함으로써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함이고, 경무부는 시정개선에 저항 하는 한국민을 강제하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통감부는 이들을 궁내부에 고문 및 보좌관으로 배속시켜 궁중의 의논에 참여시키고, 군부에는 고문 및 육군교관으로 하여 군정의 자문과 군대 훈련의 일을 담당케 하였으며 탁지부에는 재정고문으로 하고 다수의 일본인을 고문본부와 고문지방지부에 분속시켜 정부 전반의 재정, 징세 및 금융에 관한 사무를 감독케 하고 또 별도로 水道局을 설치하 여 거류하는 일본인이 많은 지역인 인천, 평양, 부산의 수도사업을 지휘, 감독케 했다. 그 밖에 세관에 관한 사무와 항로 표식 등과 같은 사무에 종사케 했다. 그리고 학부에는 참여관 및 사무관으로 學政에 참여케 하고 교과서 편찬사업 등에 종사케 하였다. 또 내 부에는 참여관 및 촉탁을 두어 내무행정 및 지방행정의 회의에 참여하고 별도로 경무고 문 및 보좌관 이하 다수의 일본경찰관을 배속시켜 한국의 경찰기관의 정비와 황궁의 경 비 및 일반 치안유지를 담당케 했다. 그 외에 도로개축을 위해 治道局을 설치하여 이곳 에 일본인 기사 및 사무관을 두어 그 일을 담당케 했으며 법부에는 참여관 및 보좌관을 두고 한국의 사법사무를 지도케 했고 各道의 재판소에는 역시 일본인의 재판관과 보좌 관을 배치하여 재판사무에 보조케 했다. 농상공부에는 鑛務技監 기타 촉탁원을 두고 광 산 원예 이민에 관한 사무를 담당케 했다.72) 결과 한국의 각 部와 局에 일인을 임용케 하여 국정에 참여 간섭하였던 바 유효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73)고 일본이 스스로 평가 하고 있듯이 한국의 각부에 일본인을 배속하여 그들의 목적대로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70) 資料 6, 中, pp.195 196. 71) 施政年報 (明治 40) pp.12 13. 72) 施政年報 (明治39 40) 권一, pp.13 14. 73) 施政年報 (明治39 40) pp.14.

- 200 - 國史館論叢 第53輯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1907년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의 제5조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용한다는 규정 에 의거 지금까지 한국의 각 部와 局에 용빙된 일본인의 고문이나 참여관은 거의 대부 분 한국정부의 관리로 임용되어 한국의 시정개선을 가일층 진전시킬 수 있었다. 이를 시기별로 보면 그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당시의 정부 기록문인 구한말의 官報에 의하면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그 이전의 고문 또는 보좌관만으로 활 용하였으나 1908년에 일본인을 한국관리로 임용한 건이 248건, 1909년에는 254건, 1910 년 8월 병탄이 되기 직전까지 173건으로 이 중 1910년 3월에서 8월까지는 공휴일을 제 의한 매일 관보로 보도되고 있어 소위 합병을 위한 행정 조직을 사전에 철저하게 정비 하였음을 알 수 있다.74) 관보에 보도된 敍任, 辭令에 관한 내용을 보면 대체적으로 1908년도에는 각부에 정책 을 입안할 수 있는 高等官과 判任官에 일본인을 집중적으로 임용하여 한국의 행정을 장 악하고자 하였으며, 1909년에는 경찰관리를 집중적으로 임용, 배치하여 통감부의 시정 개선에 따른 한국인의 저항을 탄압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1910년 8월까지 한국의 모든 분야에 차관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고위직에 일본인을 임용하여 한국의 국정을 사실상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어느 분야에서도 통감과 이들의 등의 내지 승인없이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용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국 정부의 각 분야에 임용된 일본인의 수를 1909년 1월을 기준으로 보아도 다음과 같이 통계되어 있어 이러한 사항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75) 宮內府 內 閣 內 部 度支部 法 部 學 部 農商工部 計 高等官 12 5 95 102 187 20 45 466 判任官 15 8 278 860 206 86 161 1,614 計 27 13 373 962 393 106 206 2,480 이에는 물론 경찰력의 증강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조직에서의 시정개선은 한국민의 74) 1907년 1910년 사이의 統計. 75) 大同出版協會, 朝鮮併合 10年史 (1925) p.144.

- 201 - 저항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통감부는 이를 반드시 탄압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 서 시정개선을 위한 제1차 협의회에서도 제일 먼저 의제의 안건으로 등장한 것이 경찰 력의 증강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76) 그런데 경찰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으로 한국의 경찰력을 증강시키는 것보다 일본경찰력을 증강시켜 한국경찰을 보조하는 형식을 채택 하여 일본인 경찰을 증강하는 명분으로 하고 있다.77) 특히 1907년의 한일신협약에 의거 종전의 警務顧問을 警視總監으로 하고 그리고 각도 의 경무고문지부 보좌관을 각도 경시로 임명하며, 경무고문부 직원을 警視, 警部의 순사 로 임용함과 동시에 다수의 일본경찰 관리를 한국정부에 임용함으로써 내부대신의 관리 하에 종래 고문경찰은 내무경무국에서 그 사무를 총괄하였다.78) 그리고 통감부는 이러한 경찰력의 지휘 감독권을 장악하기 위한 법적인 근거를 마련 키 위해 한국 정부와 경찰사무 집행에 관한 取極書를 1907년 10월 29일자로 조인하였다. 이에서 한국경찰관은 당해 일본관헌의 지휘 감독을 받고 재한국 일본신민에 대한 경찰 사무를 집행할 것을 확약한다 79)라는 내용으로 통감부가 한국의 경찰권을 실질적으로 지휘감독할 수 있었으며 시정개선의 강행을 법적으로 보장할 수 있었다. 이로써 통감부 는 한국경찰관과 합병함으로써 경찰력을 통일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80) 합병된 경찰조직을 보면 內部에 警務局을 두고 행정경찰, 고등경찰을 통해 행정, 사법 은 물론 도서 출판 및 저작, 호구 및 민적, 이민에 관한 사항을 장악케 하여81) 실질적으 로 한국국정 전반을 장악하려 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부대신 직할하에 警視廳을 또 각도에 警察署를 두고 경시청은 皇宮 그리고 한성부 및 경기도에의 경찰사무를 관장케 하였다. 각도의 경찰서는 그 위치 및 관할구역을 내부대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部令으 로 하도록 하여 통감부가 필요에 의하여 수시로 위치 관할구역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 였다. 이러한 경찰서의 배치 및 관할구역을 보면 다음 통계와 같이 조직되어 가히 전국 을 완전 장악할 수 있게 했다.82) 警察官暑 配置表 76) 資料 6, 中, pp.126 127. 77) 資料 6, 中, p.128. 78) 施政年報 (明治39 40) 권一, p.118. 79) 施政年報 (明治39 40) 권一, p.119. 80) 당시까지의 경찰력을 보면 통감부 소속으로 警視 5인, 警部 42, 巡査 500, 顧問警察輔佐官(警視) 21, 輔佐官補(警部) 78, 補助員(순사) 1,305, 총계 警視 26, 警部 128, 巡査 1,705이었으며, 한국인 경찰관은 警視 22, 警部 88, 巡查 2,982, 皇宮 警察소속 警視 9, 警部 15, 巡査 382이었다. 그리고 일본 경찰기관으로 警察署 12, 分署 3, 駐在所 59이었다. 81) 施政年報 (明治40) 권一, p.120. 82) 施政年報 (明治 40) 권一, pp.120 122.

- 202 - 國史館論叢 第53輯 地域 警察署 警察分署 巡查駐在所 警察署名 京畿 8 4 40 京城中部, 東部, 南部, 西部, 北 部, 水原, 開城, 仁川 忠北 1 3 15 忠州 忠南 1 4 40 공주 全北 2 3 28 전주, 군산 全南 2 4 30 광주, 목포 慶南 3 3 36 진주, 마산, 부산 慶北 1 5 36 대구 江原 1 4 22 춘천 咸南 2 3 14 함흥, 원산 咸北 2 2 9 鏡城, 城津 平北 2 4 22 영변, 신의주 平南 2 2 20 평양, 진남포 黃海 1 2 25 해주 計 28 43 337 이와 같이 전국에 28 개의 경찰서와 43 개소의 分所 그리고 337 개소의 巡査駐在所를 설치하여 전국을 장악하였다. 그 중 서울을 포함한 경기지방은 행정의 중심지로서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경찰서와 주재소를 설치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 충남, 경상, 전라지방은 과거부터 보수 양반들의 세력이 타 지역보다 강해 의병 등을 통한 항일적인 성향이 강하였기에 보다 많은 경찰기관을 설치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警 察署는 그 道의 정치 행정의 중심지로서 지배를 위해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거 나 또는 개항장과 같이 과거부터 일본인들의 이익이 잔존되어 있어 이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지역에 설치되었고, 分所는 군소재지에 또 巡査驻在所는 면소재지에 설치하 여 한국전역을 체계적으로 지배하려는 기구로 하고자 했다. 이와 아울러 재판제도에 관해서도 재판사무를 위주로 일본인을 참여시켜 서서히 그 공을 거둘 수 있는 방침을 채택하여 사법권을 장악하려 했다.83) 이것도 시정개선이라는 명분하에 추진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내용을 보면 법부에 참여관을 두어 사법행정에 관한 사무와 법령개정사무에 참여 시켜 사법행정의 방향을 시정개선의 목적에 일치하도록 하였으며 평리원과 한성재판소 에 일본인 1명을 법무보좌관으로 배치하고, 13도 재판소에도 역시 일본인 1명을 각각 배 치하여 한국관리를 원조한다는 이유로 사법사무를 그들의 목적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개 편하였다.84) 그러나 1907년 이후부터는 日韓協約 (제3조)에 의거 각 재판소의 관리는 대 83) 施政年報 (明治 40) 권一, p.91. 84) 施政年報 (明治 40) 권一, p.92.

- 203 - 부분 일본인으로 배치하여 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85) 사법기관도 경찰권과 같이 통감부의 시정개선을 강제하는 법적인 보장책으로 전국 각 지역에 이를 설치 운용하였다. 이 재판소의 구성을 보면 대심원을 경성에 두고 공소원을 경성, 평양, 대구에 그리고 지방재판소는 8개의 각 지방 주요도시에 그리고 그 이하의 지역에는 103개소의 區栽判所를 설치하여 총 125개소의 재판소를 두고 한국 전역을 통 할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86) 경상, 전라, 충청지방은 역시 다른 지역보다 재판소의 설치 수가 많다. 이는 이 지역이 통감부의 시정개선책에 대한 저항이 극심한데 이유가 있다. 3. 재정, 경제권의 장악 통감부는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차입하여 한국에서 추진하는 시정개선을 위한 각종의 사업에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고자 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1904년 10월 20일 閣議로 결정한 對韓施設綱領에 한국에 대한 재정감독과 拓殖圖謀를 통한 경제권을 장악 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 바가 있다. 이에 의하면 재정감독으로 징세법개량, 화폐제도 개혁, 군대절감 등을 목적달성의 방 법으로 하였다. 특히 징세법개량에 관하여 한국을 위하여 새롭게 재원을 얻어 우리의 이권확장을 목적으로 帝國政府 관리 밑에서 한국의 食鹽, 煙草 등의 전매를 행한다 87)하 여 이미 이때 재정고문을 파견하여 한국의 재정을 장악할 계획을 하고 있다. 이어 한국 의 재정권 장악은 시정개선에 필수적임을 판단하여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행정은 하나라도 개선을 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비록 급격한 개혁을 행하면 상하 일반의 반항을 불러 일으켜 실패로 돌아간다. 고로 시기를 계산하여 서서히 착수 함을 요한다. 특히 한국의 재정은 그 문란이 극에 달하여 내외 인민에 그 폐해를 주 고 있다. 재정은 백반행정의 기초가 됨으로 이의 정리에 의해 행정 각부의 폐해를 바로 잡아 시정개선의 실을 거두어 들임에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러므로 가급적 빨리 우리 의 사람 중에 적당한 고문관을 차입하여 88) 85) 資料 6, 中, p.142. 여기서 종래 군율을 범한 한국인을 완전히 일본인으로 구성된 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벌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의 불만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고로 심판위원회에 한국관헌을 입회시키는 것이 한국 인의 감정을 유화시키는 책략이라고 하고 있을 정도로 재판소가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국 민의 불만 요소임을 지적하고 있다. 86) 施政年報 (明治 40) pp.95 96. 87) 年表, 文書 上, pp.225 226, 對韓施設綱領 決定의 件.

- 204 - 國史館論叢 第53輯 그리고 한국재정의 문란한 원인 중의 하나는 군대를 위해 과다한 경비를 지출함에 있 음으로 군대와 군인의 수를 줄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군대와 군인의 수를 줄이 는 것은 장래 일본의 한국지배를 위한 시정개선책의 실시에 대한 한국민족의 저항을 사 전 봉쇄하고자 하는 측면도 있다 할 것이다. 1903년 한국 정부의 예산에서 경상 세출총액이 9, 697, 000 元인데 그 중 약 43%인 4,123,000원이 軍費用으로 지출되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들고 있으며, 16,000 여 명의 한국 군인 중 친위대를 제외하고 점차 줄여갈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여기서도 한국의 방비는 일본이 맡고 있다는 이유를 그 명분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89) 이리하여 1904년 일본의 大藏省 主税局長인 目賀田種太郞이 한국의 재무고문으로 파 견되어 한국의 재정권 장악을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 하에서 열리는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는 처음부터 일본으로부터 의 借款問題가 중요한 의제로 대두되고 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자금은 다수의 농민을 보호해 주는 방법으로 농사개량, 도로수축, 배수관개, 식림과 같 은 장래의 물산을 증가시키는 방법에 사용함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각종의 공 사를 일으키면 다수의 인민에게 노동일을 주어 그들로 해서 직접 그 은택을 입을 수 있 다90) 하여 일본으로부터 차입한 자금으로 추진되는 시정개선은 한국민의 富를 증진시키는 데 사용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용빙된 目賀田은 시정개선을 통하여 실시하는 일 반인의 경제상태를 개선하는 방법에는 鑛山事業, 輕便鐵道事業과 같은 직접 영리를 목적 으로 하는 것과 도로수축, 관개배수 공사와 같은 간접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사업이 있어 어느 것이나 이에는 자금이 필요하다 91)고 하여 차관으로 도입된 자금으로 추진하는 시 정 개선은 근본적으로 한국의 사업 발달을 위한 것보다 광산이나 철도와 같은 일본의 국가 이익에 보탬이 되는 사업이나 농업과 같이 일본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는 目賀田이 재정고문으로 파견될 때 이미 하달받은 1904년에 결정된 對韓施設綱領의 내용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92) 이에 앞서 目賀田은 88) 年表, 文書 上, p.226. 89) 年表, 文書 上, p.227. 90) 資料 6, 中, p.131. 91) 資料 6, 中, pp.135 136. 92) 目賀田種太郞이 1904년 9월 4일 한국의 재정고문으로 파견될 당시 이러한 對韓施設綱領의 내용을 실천할 것을 일본 외무대신으로부터 직접 하달받아 파견되었다(松本重威 編, 男爵 目 賀田種太

- 205 - 한국에 부임한 후 1904년 10월 6일 한국정부와 재정고문으로의 용빙계약(6개조)을 체결 하여 재정고문으로서의 권한을 확정함으로써 재정분야의 시정개선에 대한 강제를 법적 으로 보장하였다.93) 이는 이후에도 통감부가 설치되어 추진하는 시정개선의 목적달성을 위한 법적인 근거가 되었다. 그 내용의 대략만 보아도 目賀田이 한국에서 재정고문으로 서 어떤 권한과 지위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정부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目賀田의 동의를 거친 후 시행하며 재정에 관한 사항의 의정부 회의에 참여하고 의견을 탁지부 대신을 거쳐 의정부에 제출한다(제1조). 의정부 결의 및 각부사무에서 재정에 관계되는 것은 上奏전에 目賀田의 동의 가인을 받아야 한다(제2조). 재정에 관해 謁見을 청해 上奏를 얻는다(제3조). 이에서 재정고문으로 目賀田은 한국의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의 동의없이는 재 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가 집행될 수 없어 그 지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재정에 관한 한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도 이의 동의를 구하도록 하였고 의정부의 의결과 관계없이 上奏하여 그의 뜻대로 재정에 관한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위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 위의 재정고문은 일본경제의 한국 진출을 보장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한 한국경제의 지배 도 가능할 수 있었다. 통감부 설치 후에도 재정고문은 통감의 지휘를 받지만 재정에 관 한한 변함없는 권한으로 재정에 관한 시정개선의 추진을 보장할 수 있었다. 目賀田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통감부의 시정개선을 위한 자금의 차관도 근본적으로는 일본경제의 한국진출을 합법화시킨 것으로 한국의 경제권 장악이라는 데 근본적인 목적 이 있다 할 것이다. 막대한 차관자금을 시정개선이라는 명분하에 장기적으로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각종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미약한 한국의 경제 유통과정을 혼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에 대한 경험이 없는 한국의 경제계를 파산상태로 만들어 경제적 채무국으로써 일본의 지 배 하에 두고자 하였다.94) 더욱이 1905년 6월 이래 1907년 말까지의 借款 또는 起債한 금액의 내용을 보면 다음 과 같이 통계되어 이러한 의도를 분명히 읽을 수 있다.95) 郎, 1972, 岩波, pp.205 206). 93) 官報 1904년 10월 8일자. 94) 內田良平, 日韓合邦秘史 下(原書房, 1967) pp.287 288.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물가는 점점 오르고 구화는 하락했다 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경제 가 극히 어려운 상황임을 짐작케 한다. 95) 施政年報 (明治39 40) 권一, pp.193 194.

- 206 종 류 발행차입년월 國庫 證券 1905.6 貨幣整理 資金債 1905.6 金融資金債 1905.12 起業 資金債 1906.3 計 國史館論叢 第53輯 금 액(엔) 이 자 2,000,000 年7分 3,000,000 년6分 1,500,000 無 5,000,000 년6分5厘 11,500,000 거치기간 3년 6년 5년 상환년한 1910.6 1917.6 1912.12 1918.3 여기서 국고증권은 과거 국가의 채무상환이나 기타 사유로 인한 歲計의 부족을 填補 하기 위해 일본의 제일은행에서 이를 인수, 공채를 발행하였는데 이에 사용할 금액이며 이는 한국에서 공채 모집의 효시가 되었다. 또 화폐정리 자금채는 일본의 제일은행으로 부터, 금융자금채는 일본정 부로부터, 기업자금채는 일본 흥업은행으로부터 각각 차입하 였다. 특히 일본에서 행한 국고증권 공채모집에 모집액의 4 배가 응모하고 있어96) 당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 한국의 지배에 있음을 잘 말해 준다. 그리고 起業자금채의 수입은 전적으로 한국에서의 산업, 교육, 기타의 자금에 충당하 여 利源을 개발하고 富力을 확정할 목적에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 지출 내역을 보면 1908년 말 토목에 5,066,000, 교육에 649,654, 금융에 1,435,000, 병원에 357,577, 관청건축 에 80,000, 광업에 1,272, 438, 계 8,860,669 원을 지출 통계하고 있어97) 국가 산업 발전을 위한 부분에는 전혀 투자하지 않고 다만 관청의 경비, 건축비 등에 집중 투자하고 있어 차관의 목적이 한국의 지배에 있음을 말해준다. 또 이를 연도별로 보면 1906년에는 1,245,762.376원을 투자하고 1907년도에는 2,905,787.786 그리고 1907년 이후에는 지출예 정액을 4,709,118.838원으로 전년도에 비하여 2배에 가까운 금액을 계정하고 있어 1907년 이후부터 한국지배을 위한 통감부의 시정개선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국의 기간산업인 농업에 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6년 4월 통감부 勸業模範場官制를 발표하여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고 耕地整理, 稻作試驗, 肥料試驗, 烟作試験, 養S試驗, 害蟲試驗, 家畜飼養 등에 관한 사 무 와 각종 조사 실험을 담당케 하여 한국을 그들의 식량공급지로 할 것에 대비하고 있다. 이후 면화의 채종과 재배를 주된 목적으로 목포출장소를 설치하고 1907년 4월에는 군산 시험소를 설치하여 한국의 농업을 각 분야에서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다.98) 또 1906년 9월에는 원예 모범장관제를 발표하여 농상공부의 관리 하에 京城부근에 원 예모범장을 설치하였다. 여기서 원예에 대한 시험 및 모범적 사업을 담당하게 하여 果 樹, 蔬菜, 花开栽培에 관한 각종 시험을 하도록 하였다. 96) 施政年報 (明治 40) 권一, p.194. 97) 施政年報 (明治 40) pp.196 197. 98) 施政年報 (明治 40) 권一, pp.228 229.

- 207 - 이러한 것도 역시 1904년의 대한시설강령에서 이미 강조되고 있는 내용이다. 이에 의 하면 한국에서 일본인이 합동하는 기업 중 농업이 가장 유리한 분야로서 장차 한국에 대한 지배는 일본의 국내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수적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99) 한국에서 本邦人의 기업 중 가장 유망한 것은 농사로서 유래로 한국은 농산국인 고로 전적으로 식량과 원료품을 我國에 공급하고 我邦은 공산품을 공급하여 왔다고 생각한 다. 금후 비록 양국의 경제적 관계는 이 원칙상에 발달하였다. 또 한국은 토지 면적에 비하여 인구가 적어 우수 한 다수의 本邦 이민을 받아 들여 우리의 많은 농민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초과 인구를 위한 이식지를 얻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는 우리의 부족한 식량공급을 증가시킬 수 있어 소위 일거양득이다. 이와 같이 일본은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전제하여 우수한 일본이 한 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국내문제 즉 인구문제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에 이 주한 일본인의 수를 보면 1905년 4,200명에서 1910년 126, 000명으로 증가하고 있다.100) 그리고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통감부는 일본인이 한국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이에 관한 한국의 규제법을 개정하거나 이에 저촉되 지 않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이미 대한시설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國有荒無地를 개간하여 이용하거나 민유지라도 소유권의 영구임대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교묘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101) 그러나 현시점에서 條約上 居留地外 一里以內의 토지를 임차 또는 소유할 수 없 는 고로 사실상 內地에서 田烟을 소유하여도 그 권리의 명확성이 없어 확실히 자본가가 불안을 가지고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 그러므로 농업자본가를 위해 한국의 內地를 개방 시킬 수단으로 아래 2 가지 방책을 취해야 한다. 官有荒無地: 이에 관해서는 한 개인의 명의로 경작 또는 목축의 특허를 위탁 받아 제국경부 의 관리하에 상당히 자격이 있는 일본인으로 이를 경영케 한다. 民有地: 이에 관해서는 거류지 10리 이외에 비록 경작 목축 등의 목적으로 이를 매매, 임차할 경우 한국정부가 내지에서 일본인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거나 또 영구대 차지권 같은 用地權을 인정하게 하여 경작, 목축 등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99) 年表, 文書 上, pp.226 227. 100) 施政年報 (明治 40) pp.401 402. 101) 年表, 文書 上, pp.227 228.

- 208 - 國史館論叢 第53輯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정부로부터 1907년 7월 법률 제4호로써 國有未墾地利用法 및 농상공부령 제50호로 그 시행세칙을 제정, 공포케 하여 한국에서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게 하였다.102) 이를 보면 그들의 의도가 아주 교묘해 그 내용에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알 수 있 다.103) 國有未墾地 즉 民有地가 아닌 原野, 荒無地, 草生地, 沼揮地 및 干海地의 대부를 받 을 자는 농상공부대신에게 출원하여 허가 받아야 하며 대부기간은 10년을 초과할 수 없다. 대부받은 자는 농상공부대신이 정하는 대부료를 납부해야 하고 농상공부대신은 필 요하다고 인정될 때 이를 감면할 수 있다. 농상공부대신은 國有未墾地 利用法이 공익을 해친다고 인정될 때 그 개량 또는 정 지를 명할 수 있고 혹은 대부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대부를 받은 자는 예정사업을 성공했을 경우 농상공부대신은 이에 대한 그 토지 불하 또는 대여를 할 수 있다. 사업성공 후의 불하 또는 대여 토지의 세율은 그 翌年으로부터 5년간 그 토지 소 재지의 道에 최하급에 속하는 토지부담의 3 분지 1 로 한다. 본법 및 시행세칙 규정에 의거한 처분은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에서 통감부는 일본인에게 불하 또는 대여라는 방법으로 교묘히 한국의 토지를 소 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국유미간지 이용 허가와 정지 등에 관한 권한을 형식 상 한국이 그 권한을 專斷하는 것 같지만 농상공부대신은 통감의 지시없이 집행할 수 없는 위치이기에 기실은 그렇치 못하다. 1905년 이후의 한국 官報에 나타난 국유미간지 에 대한 일인들의 신청이 단 한건도 반려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 농상공부의 요직을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난 이후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1907년 말까지 국유미간지 이용에 대해 허가를 신청한 건수를 보면 단연 일본인이 많 아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이에 대한 통계는 다음과 같다.104) 한 인 건 수 인 원 119 71 102) 施政年報 (明治 40) p.235. 103) 施政年報 (明治 40) pp.235 236. 104) 施政年報 (明治 40) p.236. 면 적 30.121.5 町段

- 209 일 인 계 229 348 141 212 뿐만 아니라 통감부는 이 법을 기초로 1908년 식산흥업이라는 명분으로 동양척식회사 를 설립 하여 토지를 수탈하였다. 또 1906년에 토지가옥증명규칙,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그리고 1908년에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을 한국정부에 강제 발표케 하여 일본인이 그 들의 거류지는 물론 한국전역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은 개항지에서 산간벽지까지 아무런 제한이 없이 토지를 소유 매매할 수 있 었다. 이러한 토지수탈은 한국병탄 직후까지 계속되어 1910년 이후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이어졌다. 통감부가 추진하는 시정개선을 통하여 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차관을 통 한 재정과 농업경제 문제에 못지않게 정책을 집중시킨 분야는 광업분야로서 국유미간지 문제와 마찬가지로 타국인을 배제하고 독점적인 이익을 확보하고자 했다. 1906년 7월 鑛業法, 砂鑛採取法을 발표하여 未採掘의 鑛物, 廢鑛 및 鑛滓는 모두 국가 소유로 하고(제1조), 광업상 필요할 때는 타인의 토지를 강제 소유할 수 있고(제2조), 외 국인도 본법의 규정에 따라 직접 출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6조). 이 경우 모두 통감의 동의를 요하는 조건으로 하고 있어(제8조) 한국에서 광업상 독점적인 권한을 규정하고 있다.105) 이에 따라 농상공부에 광산사무국을 두고 농상공부대신을 이의 총재로 하여 1906년 9 월 1일부터 그 사무를 개시하였으며, 이듬해 1월 1일부터 명칭을 농상공부 광무국으로 개칭하였다. 이의 운용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한국인이나 타외국인에 비하여 일본인에 게 단연 많은 허가를 주고 있어 통감부의 광산에 대한 정책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 의 광산에 대한 이익을 독점하도록 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106)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출원자 589명 중 약 81%인 476명이 일본인이며 외 국인이 출원한 건수는 전체의 약 0.03%에 불과하다. 또 허가 건수를 보면 일본인에 허 가한 비율은 약 36%이고 한국인에게는 27%를 허가했으며 외국인에게는 16 건 신청에 16 건 모두 허율하였는데 이는 합법적인 외국인의 허가출원을 거절하여 국제적인 분쟁 을 야기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107) 이러한 결과를 종합하면 분명 외국인을 포 105) 施政年報 (明治39 40) 권一, pp.249 251. 106) 施政年報 (明治39 40) 권一, pp.253 254. 107) 당시까지 외국인에게 허가하였던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광업법 실시 이전부터 특허권을 소유한 예는 平北 운산금광(미국운산금광회사), 충남 직산 금광 (日人 澁澤淺野組合), 황해 수안금광(영한합자회사)이 있고 광업법 실시 후 허가한 것으로는 1907년 3월 허가한 평북 초산금광(영국), 5월에 허가한 평북 선천금광(독한합자), 평북 회천금광 (일본), 평북 구성금광(영한합자), 7월에 허가한 평북 창성금광(프랑스), 8월에 허가한 평북 후창

- 210 - 國史館論叢 第53輯 함한 한국인을 배제시키고 독점적으로 이권을 확보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산에 관한 채굴권의 허가는 한국의 시정개 선의 내용이 아니고 그 자체가 곧 利權이기 때문이다. 구 분 광업 허가원(허가) 사금 채취원(허가) 계 일 인 348(103) 128(65) 476(168) 한 인 40(9) 57(18) 97(27) (1906. 9.15 1907.12 末) 외국인 16(16) 16(16) 계 404(128) 185(83) 589(211) 이와 같이 통감부는 각종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여 한국의 경제와 재정을 장악하고 식 민지화를 위한 시정개선을 추진하였다. 4. 교통, 통신기관의 장악 일본이 통감부를 통하여 한국을 지배하는 데는 행정권과 경제권을 장악하는 방법 못 지않게 주요한 것은 교통 통신기관의 장악일 것이다. 교통 통신기관을 장악한다는 것은 한국의 전역을 보다 효율적이고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 그들의 궁극목적 인 중국 대륙침략을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도 이미 대한시설강령에서 아래와 같이 그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108) 교통 및 통신기관의 要部를 우리 쪽에서 장악할 필요성은 정치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諸點으 로부터 자못 긴요하다고 느끼는 바 그 중 교통기관에서 철도사업은 한국경영의 골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을 지배하는 데는 반드시 교통기관을 장악해야 함이 필수적임을 지적 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중국 대륙침략정책의 실현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침은 통감부설치 이후 그대로 추진되어 1905년 京釜線과 馬山線을, 1906년에는 京義線을 개통하여 제일 먼저 한국의 종단철도를 확보하여 대륙침략정책에 활용하고자 금동광(이태리) 그리고 강원도 화천군의 흑연광은 미국인에게(1907. 5) 평북 정주군 석유광도 미 국과 일본인에게, 강원 강릉군 흑연광은 미국인에게(1908.2), 경북 함창군 흑연광은 독일인에게 (1908.3) 허가하였다. 이 중 운산, 선천, 직산을 제외한 지역은 사업을 시작하지 않고 試掘 試鑿 한 단계이다. 그러나 1907년 이후 한국정부의 각부에 일인이 임용됨에 따라 광업에 관한 과거와 같은 규제가 필요없었다( 施政年報, 明治 40, pp.256 258). 108) 年表, 文書 上, p.226.

- 211 - 했다. 일본이 한국 경영에 필수적으로 장악해야 할 교통기관으로 京釜鐵道, 京義鐵道, 京元 및 元山으로부터 雄基灣에 이르는 철도, 마산 삼랑진철도 등을 지목하고 있다.109) 그 이 유로 들고 있는 것을 보면 통감부가 추진하는 시정개선의 근본목적이 한국의 지배와 이 를 통한 대륙침략에 있음을 명백히 말해준다. 경부선은 한국의 남부를 종단하는 철도로 가장 중요한 선로이며 경의선은 북부지방을 종단하며 경부선과 연락되어 한반도를 종적으로 관통하고 중국의 東淸鐵道 및 關外鐵道 와 접속할 수 있어 군사상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京元 元山으로부터 雄基灣까지의 철 도는 日本海 방면과 연락할 수 있는 철도로 북방 방비상 필요한 선으로 또 마산 삼랑진 철도는 한반도 남단에서 군사상, 경제상 극히 유용하다. 여기서 철도와 같은 교통기관의 장악은 한국의 지배는 물론 대륙침략에 반드시 확보 해야 하며 군사상 경제상 극히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리하여 통감부는 이러한 방침으로 1906년 7월 1일자로 통감부 철도관리국을 설치하 였다.110) 통감부는 1906년 한 해동안 철도건설 개량비로 40,672,159 원과 1907년에는 12,272,898원의 자금을 투자할 정도로 철도의 군사, 경제적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111) 특히 1906년 3월 20일 군사목적으로 함경 남북도 및 義州로부터 江界에 이르는 선로와 그 부속 군용통신소 32개소를 설치하고 江界로부터 長津, 惠山鎭을 거쳐 茂山에 이르는 선로를 준공하여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용에 대비하였다.112) 통신기관에 관해서도 전신선을 우리 쪽에서 소유하거나 우리 관리하에 두는 것 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113)고 하여 통신기관의 장악에 관하여서도 같은 이유와 필요성 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통신기관을 장악함으로써 통감부의 시책을 보다 효율적으로 시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釜山, 京城, 仁川간에 군용전신선을 설치, 운용한 일본은 일본정부 및 在韓 日本人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다시 상당한 시설을 하였고, 1905년 4 월 1일에는 한국통신기관 위탁에 관한 取極書를 조인하여 한국의 통신사업 전부를 일본 이 위탁 관리하게 되었다.114) 이에 따라 동년 7월 1일자로 한국과 일본측의 우체국을 합 쳐 전국에 우편국 12, 출장소 41, 우편전신 수취소 1, 우편 수취소 46, 전신 취급소 10, 109) 年表, 文書 上, p.226. 110) 施政年報 (明治 40) 권一, pp.325 326. 111) 施政年報 (明治 40) p.332. 112) 施政年報 (明治 40) pp.306 307. 113) 施政年報 (明治 40) p.227. 114) 施政年報 (明治 40) pp.290 291.

- 212 - 國史館論叢 第53輯 임시 우체소 335, 합계 445 개소의 통신기관을 설치하였다.115) 다시 1906년 1월 10일까 지 53 개소를 증설하여 합계 498 개소의 전신기관을 설치하여 통감부 통신관리국에서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후 동년 9월 525 개소, 1907년 3월 말에 526 개소의 전신기관이 설치되었고 일본인이 한국의 관리로 임용되면서 통감부의 한국지배가 보다 명확해지는 1908년에는 오히려 487 개소로 감소되었다.116) 이러한 통신관서가 취급하는 사무를 보면 통상우편사무와 소포우편, 爲替貯金 그리고 한국 국고금사무와 전신, 전보사무를 취급하였는데 이 중 국고금 취급사무는 한국 전역 에서 徵税를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통신관서를 통하여 1906년도에 195,302엔 그리고 1907년에는 6,105,450엔을 징수하였는데 이는 한국 일반 경상회계년도 세입금액 의 4 분지 3을 이러한 통신관서를 통하여 징수한 결과로서117) 통감부가 추진하는 시정 개선으로서 전신기관의 정비목적이 한국의 지배를 위한 것임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우편국소는 한국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설치된 우체소를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 관 리가 근 무한다. 그러나 우체소의 다수는 철도선로와 아주 멀리 떨어져 대개 불편한 벽 지에 위치하여 생활의 물자를 얻기도 곤란함은 물론 오락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118) 하여 통감부는 산간벽지까지 통신기관을 설치하여 정책을 시달하고 이를 통하여 한국 전역을 보다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기구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이들 통신기관은 義兵 등 한국민의 통감부 시책에 대한 저항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 Ⅴ. 시정개선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 전술한 바와 같이 통감부의 한국 시정에 관한 정책은 외형상 한국의 안전과 독립을 위해 타국으로부터의 보호에 있다고 하지만 이 정책이 한국민의 아무런 저항없이 진행 된 것이 아니라 이에 반대하는 강력한 저항 속에 강제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한국민 115) 施政年報 (明治 40) p.295. 위탁 당시 한국의 통신기관은 郵遞司 44, 우체사 지사 4, 領受所 2, 전보사 31, 전보지사 4, 각 府郡 임시우체소 335 개소를 합쳐 420 개소였다. 그리고 일본측의 우체국소는 分우편국 9, 우편 국출장소 4, 신설 分우체국 3, 동 출장소 33, 임시 우체소 335, 합계 384 개소였다. 116) 施政年報 (明治 40) p.303. 117) 施政年報 (明治 40) pp.313 314. 118) 施政年報 (明治 40) p.312.

- 213 - 의 저항은 필연적으로 통감부의 시정개선책을 보다 조직적이고 철저한 탄압체제의 강화 를 초래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을 위한 한반도진출을 보호를 위한 진출 이 아니 라 지배를 위한 한국침략 이라는 성격으로 전환시키는 단서가 되었다. 일본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근본목적은 그들이 국운을 걸고 추진하는 중국 대 륙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먼저 한반도의 완전한 지배에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를 위한 통감부의 시정개선책은 강화되지 않을 수 없고 이에 따른 한국민의 저항도 자연 강화되 어 갔다. 언론을 통하여 일본의 한국침략 부당성을 폭로하거나 직접 무력을 통하여 저항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국채보상 등을 통한 민족적 저항을 하였다. 이러한 한국민의 저항은 초기에는 韓國駐领軍과 憲兵顧問警察만으로도 진압이 충분히 가능하였으나 1907년 이후 한국민의 저항은 더욱 거세어 평양을 비롯한 북한지방에 배치한 군병력까지 동원해야만 했고 급기야는 일본에서 보병 제12여단을 상륙시킬 정도로 저항이 거세었다.119) 이러한 한국민의 저항이 전국민적인 것임을 한국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伊藤統監이 본국의 외무대신에게 1907년 6월 4일 보고한 韓國內閣更迭事情通報 라는 문건에서도 다음과 같 이 기록하고 있다.120) 본관이 올 3월 하순 귀임후 일반의 정황을 관찰함에 있어서 정부공격의 聲大가 높아 져 사면초가의 정황이었다. 그 단체의 중요한 것들은 자강회, 교육회, 청년회 등이며 그 외 한자신문 및 영국인 베델이 주재하는 대한매일신문은 역시 일제히 논조를 같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표면으로 정부공격을 표방하나 실은 배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면에서는 국채보상회라는 명의아래 愚民을 선동하고 각지에 集金을 위해 연설, 토론, 인쇄물로 크게 국책상환의 필요를 설명하고 밑으로는 배일사상을 도발하는 수단으로 사 용했다. 정부는 인심을 잃고 하나의 원조도 없고 오로지 의존하는 것은 우리 쪽의 세력 밖에 없다. 또 일반의 공격은 주로 현 내각 대신의 지위에 집중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한국민의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통감부는 1907년 7월 신문지법을 제정 공포 하여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 대하여 頒布전 통감부의 검열을 거치도록 하여 배일사 상의 고취를 통제하였으며 또 발행도 통감의 허가제로 하고 정간, 압수 외에도 징역 3년 이하 벌금 300원 이하의 형벌을 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민의 저항을 사전 봉쇄하 고자 했다. 1908년 4월에는 외국인이 한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이나 한국인이 외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국내 배포까지 규제하여 그들의 對韓國政策을 호도해 왔다. 119) 施政年報 (明治 40) 권一, pp.140 141, 明治 39 40年 施政年報, 下半季 以後의 各地暴動. 120) 資料 6, 中, pp.490 491, 韓國內閣更迭의 始末.

- 214 - 國史館論叢 第53輯 1908년 말까지 押留나 發賣, 頒布禁止된 신문은 5 종의 신문에 65 회의 반포금지와 69,098매가 압류되어 통감부 시정개선책의 일단면을 알 수 있다.121) 이보다 앞서 통감부 는 同年 7月 보안법을 제정 공포하여 한국민의 행동까지 제한, 통제하고자 했다.122) 특히 1908년 9월에는 內部의 訓令으로 自衛團規則을 제정하고 각 지방의 안녕을 유지 한다는 목적으로 自衛團을 조직케 하여 지방에서 한국민의 저항에 스스로 대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 자위단은 각 面과 村에 그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헌병, 경찰군대의 지원 하에 조직케 했으며 그 임무는 호구조사에 관한 일, 개인 소장 무기 수용에 관한 일, 순 라 경계에 관한 일, 賊情을 偵察하여 官憲에 보고하는 일, 약탈로 인한 窮民의 救恤에 관한 일을 담당케 하였다. 이는 폭도의 진압에 이바지할 목적과 사정이 불투명한 한국 의 내지에서 이와 같은 양민의 단결은 다소 우리 토벌대의 행동을 용이하게 했다 123)고 통감부 스스로 평가하고 있듯이 교묘하게도 지방민의 자위를 명분으로 한국민의 통감부 시책에 대한 저항을 지방민 스스로 무마, 진압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하듯 통감부의 시정개선책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은 일본의 한국보호를 한국침략 이라는 성격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통감부는 이를 다시 치안유지라는 명분으로 한국의 병합이라는 수순으로 발전시켜 갔다. 이러한 탄압책 이외에도 한국민을 회유, 분 열시켜 저항을 약화시켰다. 1907년 12월 31일 한국 정부로 하여금 歸順勸獎條則을 頒布케 하여 귀순자에게 罰을 赦한다는 내용으로 귀순을 권장하여 한국민을 분열시켰다.124) 통감부는 귀순자를 도로건 축공사 등에 취로시킴으로써 생계를 보장하여 주고 귀순을 장려했다. 그러나 1907년 한 일신협약의 체결로 고종이 讓位되고 한국의 최후의 보루인 한국군대마저 해산되자 이들 은 의병과 합류하여 통감부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한국민의 통감부 시책에 대한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대중적인 기반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통감부는 고종양위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지시하면서도125)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대 정변이 야기되어 禪讓을 보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일본의 간섭에서 나온 것으로 오해하여 정치 121) 施政年報 (明治 41) pp.61 62, 新聞紙의 取縡. 122) 施政年報 (明治 39 40) pp.149 150, 新聞紙 及 結社. 이에는 結社의 解散(제1조), 群集의 制限과 禁止(제2조),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인정되는 자의 거주지로부터 퇴거(제4조) 등을 규정하여 한국민의 기본적 인권까지 유린하면서 통감부의 정책 을 강화했다. 이로 인하여 8월에는 보안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대한자강회 등의 애국단체가 해 산 당하기도 하였다. 123) 施政年報 (明治 39 40) pp.148 149. 124) 施政年報 (明治 39 40) 治安(暴徒鎭靜과 韓國政府) pp.146 247. 1908년 3월 함경도 甲山지방의 車道善 이하 200여 명이 귀순하였고, 8월에는 귀순자가 6,000 여 명이 넘었다고 하고 10월 말까지는 8,700 여 명이 귀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들의 분열정책 을 설명하고 있다. 125) 資料 6, 中, pp.598 599, 明治 40年 7月 12日 林外務로부터 伊藤統監에게 보낸 極秘文書.

- 215 - 상 뜻을 가진 무리들은 치열하게 민심을 선동하고 126)라고 그들의 정책을 엄폐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한국민은 통감부의 시정개선책에 협조적인 각부대신이나 친일관료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공격에서 직접 통감부관서나 재한일인들을 공격대상으로 하여 통감부 의 침략정책에 대항하고 있다.127) 이러하듯 통감부는 일본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으면 여 하한 변사가 생길지 예측불가하고 장래 한국 경찰력을 증가시켜 이를 감소할 수 있 다 128)고 전제한 바와 같이 이는 통감부의 병력을 증감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따 라서 보다 조직적이고 계통적인 탄압을 위하여 韓國駐领軍司令官 長谷川好道의 지휘아 래 경찰의 임무를 띤 경찰과 탄압을 목적으로 수비대와 헌병의 2원적인 조직을 구성하 였다. 이리하여 종래의 헌병대가 京城, 平壤, 天安, 大邱, 榮山浦, 咸興 등 6 분대 39 관 구 441 분견소 9 파견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1908년 1월에서 4월 사이에 51 관구 442 분견소 13파출소로 재배치하고 유생들의 세력이 전통적으로 강했던 영산포와 천안분견 소 관하에 36개소의 임시파출소를 집중적으로 설치하였다. 이어 7월에 다시 4 개소의 분 견소를 증치하여 1908년 말 헌병 장교 2,347 명, 보조원 4,234 명을 두어 한국민의 저항 을 탄압하고자 했다. 이렇게 통감부가 軍 警의 병력을 확충해야 할 정도로 한국민의 저 항은 강성했다.129) 이러한 한국의 치안불안은 곧 일본의 안위와 연계되어 이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하고 이 대책이 한국의 병합이라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통감부의 시정개선은 한국의 지배 를 위한 것임을 다시 말해 주고 있다.130) 이어 통감은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한인은 외교권 운운하고 있지만 일본의 羈 絆을 벗고 스스로 일어서려는 의사가 없다 131)하여 합병의 구실을 한국민 스스로의 태도 에서 찾으려 함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한편 통감은 한국민의 시정개선에 대한 저항은 고종황제의 태도여하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할 때마다 고종의 배일적인 태도를 힐책하고 있다. 또 126) 施政年報 (明治 40) p.129. 127) 이에 대한 예를 보면 1907년 7월 19일 고종퇴위에 항거 투석전이 전개되었고 종로파출소를 습격 하여 일본경찰 3명, 한국순검 2명, 일인 1 명이 사망하고 또 한국병은 경무청에 사격을 가하였 다. 또 일진회기관지인 국민신문사률 습격하기도 하고 당시의 각부대신들을 공격하였다. 128) 資料 6, 中, p.129. 129) 施政年報 (明治 41) pp.57 61, 暴徒의 歸順, 憲兵. 이 통계에 의하면 1907년 7월에서 1908년 12월까지 일인헌병 또는 경찰관이 사망 179명, 부상 227명으로 통계하고 있어 당시의 한국민의 저항이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0) 渡部學의 韓國近代史 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일본은 이 시기에 소위 백지의 땅으로 진출=보호의 이론을 벗어 팽개치고 생명선, 폭력의 무리가 준동하는 땅을 직접 제압 확보한다는 공공연한 병합=한국침략의 논리를 설명하고 있다. 131) 資料 6, 中, p.449.

- 216 - 國史館論叢 第53輯 각 대신들로 하여금 고종황제와의 접촉을 차단하여 고종황제를 고립시킴으로써 상대적 으로 통감의 국정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인이 일본을 배척하고 독립을 唱道하고 실력을 나타내는 이상 실로 무용의 공 론에 속 하며 일본의 감정을 나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해만되지 이 익은 없습니다. 인심이 배일주의에 계속 빠지면 그 동기가 되는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안됩니다...들은 바에 의하면 폐하는 항상 그러한 臣僚를 조종하고 배일주의를 민간에 게 계속 고취하고 계신다고 하는데그것은 추호도 한국을 위해 또 宰室을 위해서도 하등 의 이익이 없습니다. 오늘 이후는 단호히 이러한 小策을 꾀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132) 고 하여 고종 황제의 태도가 배일주의에 원인임을 알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고립시키 려 하고 있다. 이리하여 한국황실의 존엄유지라는 명분으로 雜輩의 출입을 禁한다라는 宮禁 肅淸의 궁궐취제를 실시하여 각 대신을 비롯한 한국인의 황제 접견을 막아 고종황 제를 고립시킴으로써 배일적인 진원지를 봉쇄하고 한국정부의 구심체를 제거하여 분열 시킬 수 있었다.133) 이와 같이 통감부의 시정개선책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은 보호의 관념을 침략의 성격 으로 전환시켰고, 통감부는 이러한 한국민의 저항을 보호를 위한 치안유지라는 명분으로 합병의 구실로 하고 있다. 명치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국내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대륙침략정책을 표방 했고 이의 첫 단계가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征韓論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정한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격동의 시기를 교묘히 이용하여 군사력을 앞세워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했다. 한국에 대한 청국, 러시아 등 열 강들의 간섭을 하나씩 계획적으로 배제하고 한국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통감부와 그 부속기관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 기관을 통하여 한국 식민지화의 기반 구축을 위해 실시한 각종 정책이 곧 한국의 부강과 독립 을 보호한다는 소위 시정개선책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 여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Ⅵ. 결 언 132) 資料 6, 中, pp.471 472, 伊藤統監內謁見始末. 133) 資料 6, 中, pp.236 237, 伊藤統監內謁見始末.

첫째, 한국의 부강과 독립을 보호한다는 시정개선책은 통감부 설치 이전 1904년 일본 내각에서 결정된 대한시설강령에서 이미 결정된 것으로 통감부는 이것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이의 추진방법은 이미 시행할 것으로 결정되어 있는 사항을 통감 관저에서 개최 되는 시정개선을 위한 협의회에서 한국의 각부대신에게 그 실행을 명령하는 형식을 취 하고 있다. 통감이 제안하는 내용이 한 번도 부결된 경우가 없다. 이는 통감이 한국 각 부대신들에 관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시정개선책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은 전국민적인 것으로 통감부가 추진하는 시정 개선은 한국의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배를 위한 침략이라는 시정개선에 대 한 성격 전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또 이러한 한국민의 저항은 통감부의 체제를 보 다 강압적인 체제로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치안유지와 그들의 안위를 이유 로 한국의 병합을 추진하는 계기로 하였다. 셋째, 이러한 목적으로 추진되는 시정개선책의 주된 내용은 한국의 행정을 그들의 목 적대로 개편하기 위하여 행정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1907년 이후는 한국 각부에 일인이 임용됨으로 이러한 목적달성이 보다 용이해졌다. 특히 경찰력의 증강은 이를 강 제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시정개선의 추진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차관으로 도입하여 주로 일본의 경제 발전을 위한 부분에 집중 투자하였고 한국의 산업 발달을 위한 부분에는 거의 투자되지 않았다. 특히 농업부분의 투자는 일본의 식량공급을 위한 목적이었다. 뿐 만 아니라 재정고문을 통하여 한국의 재정권을 약탈하여 한국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다섯째, 시정개선이라는 명분으로 진행한 한국의 교통, 통신기관의 장악은 한국의 전 역을 철저히 지배키 위한 방법이며 또 대륙침략의 기초가 됨으로 이에 대해 정책을 집 중하였다. 이 중 철도는 만주 대륙과 연결하여 장차 중국 대륙침략에 대비하였다. 여섯째, 통감부가 추진하는 시정개선책은 대체적으로 1907년을 계기로 이후는 보다 적 극적이고 강압적인 방향으로 추진되어 한국의 국정전반을 사실상 장악하였다. 즉 1907년 의 한일신협약체결 이전까지는 한국을 앞세워 간접적인 지배를 시도하였던 시기라면 그 이후에는 통감부가 한국국정을 완전 장악하여 직접 통치를 하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로써 한국의 국정은 어느 부분이나 통감의 동의 내지 승인없이는 독자적으로 결정 집 행할 수 있는 분야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1910년에 설치된 총독부도 이러한 통감부의 기능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통감부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총독부가 그대로 계승, 발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통감부는 총독부의 전신으로 명칭만 바꾸었을 뿐 기능, 역할 등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