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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國史館論叢 第68輯 한편 儒者들의 이러한 양생술은 道敎的인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송익필 은 친구인 성운에게 양생술을 행하고 있으나 잘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기한 말로 음식 을 완전히 끊는 것(辟穀)은 儒家의 생각에는 부합되지 않는 것63)이라고 지적하였다. 儒者 들은 양생이 도교적인 수양인 벽곡을 일삼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신의 몸만을 위하는 일 이어서는 더욱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三敎會通的 성격을 띤 김시습도 養生에 대하여 老子 의 神仙術은 제몸만을 위하는 것으로 세상에 무익한데 비하여, 유자의 양생은 세상에 유 익함을 주장하면서 양생법이 개인적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64) 이러한 유자들의 양생론은 나아가 일반 백성들의 구황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음식의 조절을 위주로 하는 양생의 방법들은 饑饉時 辟穀의 기술 등이 대중적으로 활용되면서 진휼 정책에도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었다.65) 1554년(明宗 9) 11월 中外에 반포된 救荒撮要 의 언해본에서66) 辟穀의 기술이 구황 에 활용된 예를 볼 수 있다. 가령 飢困하여 죽어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밥을 먹이거나 더 운 것을 먹여서는 안된다는 설명은 辟穀 등에서 소개된 기술이었는데 이러한 방법이 救 荒書에 첨입된 이후 東醫寶鑑 등에도 계속 이어져 갔다. 같은 해에 출간된 魚叔權의 攷 事撮要 에도 辟穀絶食法 이 수록되어 仙方으로 알려져 있는 양생법이 일반 구황에 적용 되었다.67) 그리고 전통적으로 구황에 자주 사용되었던 뽕나무 열매68) 도토리 열매 소 나무 껍질69) 등의 사용법이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辟穀 등의 방법을 구황에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養生法이 救荒에 적용된 후, 의서에 대부분 救荒條가 부록되어 기 근시 대비책으로 상세히 취급되었다. 養生에서 음식 조절 은 마음의 수양과 함께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醫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보다 血氣를 조섭하는 데 있 다. 그래서 醫學 書籍이나 神仙術書에서 養生을 거론할 때면 항상 음식의 절제를 먼저 다루 고 心身의 조섭을 다룬다.70) 63) 주 55) 참조. 64) 梅月堂集 雜著 第2 10章 修眞 : 김시습은 或者가 老子의 양생술과 儒者의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질문하자 사회에 유익한지의 여부로 설명하였다. 65) 김 호, 앞의 논문(1994), p.11 참조. 66) 明宗實錄 권17, 明宗 9년 11월 경술. 67) 攷事撮要 雜用 俗方編 救荒方 참조. 攷事撮要 는 판본이 여러 종 있는데, 여기에 인 용한 것은 영조대 이후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 68) 成宗實錄 권6, 成宗 원년 6월 무오. 69) 世宗實錄 권63, 世宗 16년 2월 신해. 慶尙道賑濟敬差官의 啓文에는 救荒하는 물건으로 상 수리가 제일이고, 그 다음이 소나무 껍질이라고 하였다. 70) 篠叢遺稿 권1, 贈金上舍書.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 43 - 조선전기 사람들의 음식량이나 종류 등에 대해 구체적인 연구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왕이 慶尙道監司와 敬差官에게 傳旨하기를, 사람이 하루 두끼 식사를 하지 않으면 굶주리 는 것이 이치인데 하물며 4일을 絶食을 한 자야 賑恤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다.71) 조선전기의 일반민들은 대략 하루에 식사를 2번 정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음식은 체력 유지의 기본조건이었으므로 過食이나 絶食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음 식물 섭취가 제일 중요하였고 음식과 관련하여 胃는 가장 중요한 장기 중 하나로 부각되 었다. 곡식의 기운을 氣血로 바꾸어 주는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노수신은 예방에 주목하 면서 인체에서 중요한 장기로 心과 胃, 그리고 腎을 강조하였다. 心은 모든 인지 작용 및 감정을 통제하는 중요한 기관이요, 胃는 곡식의 기운을 인체의 에너지로 바꾸어주는 역할 을 하였으며, 腎은 대를 잇는 데 필수적인 기관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인체에서 3부분 의 장기를 더욱 중요하게 취급하였다.72) 지금까지 조선전기의 儒者들이 養老書 등 양생서를 行孝와 自養의 차원에서 독서하였 음을 살펴보았다. 이 밖에도 儒者들 가운데 의학서 자체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전기 心性論의 전개과정에서 실제 心臟 의 의학적 지 식이 활용되기도 하였다. 四端七情論으로 유명한 기대승은 심성론에 대한 철저한 규명을 위하여 의서를 통해 심장의 구조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73) 한편 儒者들은 의학서를 읽는 契會를 조직하여 의서를 강독하기도 하였다. 물론 정부 에서 儒者로서 文理에 밝은 자를 뽑아 醫書習讀官으로 임명하기도 하였지만, 儒者 스스로 가 醫書 習讀 모임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74) 동시에 醫書의 讀書를 장려하기도 했 다. 구봉령은 아들들에게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여러가지 의서를 읽을 것을 권하면서 明醫雜著 는 의학의 요지를 뽑은 것이요, 和劑素問 은 命脈의 근본을 논한 것이며 銅 人經 은 經絡의 형질을 논한 것이고 本草 는 약을 쓰는 방법이 상세하니 틈이 나는대로 71) 世宗實錄 권75, 世宗 18년 12월 기축. 72) 穌齋集 下篇 養正錄 丙二 治心養胃保腎之要-附飮膳衣襨興居之節. 73) 高峯集 권2, 答先生問目 心形. 退溪가 天命圖 를 정정할 때 心 을 둥근 모양으로 그 렸는데 金謹恭은 네모난 모양이라고 하였다. 醫書에는 피지 않은 연꽃 모양이라 되어 있으나, 둥근 모양이 분명할 것이라고 하면서 의서를 心 의 연구에 참고하였다. 心臟을 開花하지 않은 연꽃 모양 으로 본 것은 중국의 醫經이랄 수 있는 內經 부터 언급되어 조선전기의 醫方類 聚 및 東醫寶鑑 등에도 인용되었던 내용인데 기대승이 무엇을 근거로 이 설명을 비판하였 는지는 불확실하다. 74) 崔演의 艮齋集 권8, 詩 題醫書習讀契會軸. 이 글을 통하여 文人들이 醫書 강독의 契會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 44 - 國史館論叢 第68輯 탐구하라 고 지시하고 있다.75) 이는 조선전기의 儒者들 가운데 의학으로 이름을 날리는 자들이 상당수 있었던 배경으로 이해된다.76) Ⅳ. 육체적 슬픔의 치유 1. 藥物 醫員 醫書의 下送 民을 위한 병 고통의 치유는 정부 차원에서 심리적 안정을 위주로 하는 厲祭과 전염 병 환자의 격리를 통한 정상인들의 위안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와 함께 실제 육체적인 고통을 덜어주려는 방법으로 의원 약물 의서 그리고 汗蒸所 등을 이용 하였다. 1451년(文宗 1) 황해도 지역에 疫病이 발생했을 때 정부에서는 해당 지역에 醫員과 藥 을 보냈다. 황해도 황주, 봉산 및 경기 원평, 교하, 풍덕 등의 곳에 惡疾이 유행하므로 醫員을 파견 하여 藥을 나누어 주고 구료에 힘썼으나 그치지 않았다.77) 지방의 의료 제도는 王城이 있는 都城 지역과 달리 열악하였다. 비록 지방에 의학교유 와 의생들이 파견되어 있었지만78)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따라서 역병이 발생하면 중 앙의 三醫司에서 藥材와 함께 의원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疫病이 발생할 때마다 의원을 중앙에서 파견하는 것보다는 지방의 의학 교육을 활성하고 의원을 양성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다. 1429년(世宗 11) 世宗은 濟州安 撫使에게 의서 17벌을 보내면서 醫生들을 가르쳐서 질병을 잘 구료할 것을 지시하였 다.79) 함길도 등의 접경 지역은 아직 인구가 집중하지 않았던 탓인지 의원조차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함길도는 국방과 관련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하였으므로 정부는 이주민들의 75) 栢潭集 권8, 答忠胤誠胤書. 76) 二樂亭集 권12, 高原尉申公神道碑銘 에서 신용개는 신숙주의 증손이었던 高原尉 申沆 (1477 1507)을 추모하면서 그가 音律 醫方 問章 書畵에 뛰어나 비록 관직은 크게 현달 하지 못하였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구제한 일을 칭송하였다( 鄭文翼公遺稿 有明朝鮮國成 均進士宋公墓碣銘 에서도 宋汝翼(1454 1528)이 醫藥에 밝아 顯達하지는 않았어도 사람들을 구제한 공이 있다고 하였다. 77) 文宗實錄 권7, 文宗 원년 4월 기사. 78) 손홍열, 앞의 책, pp.194 197 참조. 79) 世宗實錄 권43, 世宗 11년 2월 을사.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 45 - 安集을 위하여 더욱 의료 시혜에 신경을 써야 했다. 1454년(端宗 2)에 咸吉道 도절제사 는 의서와 약재를 중앙에 요청하였다. 본도에는 醫術을 業으로 하는 자가 없고 또 醫書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橫厄으로 죽는 다. 지금 여러 鎭을 설치하여 더욱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邊將과 軍民들이 藥을 구할 길이 없사오니 청컨대 方書와 이 도에서 생산되지 않는 鄕藥과 唐藥을 보내주소서.80) 한편 지방의 守令으로 醫術에 능통한 자를 선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1497년(燕山君 3) 평안도 지역에 染病이 횡행할 때 그 방지책이 논의되었는데 黃海監司 宋軼이 주장하기를 守令으로 醫術에 통한 자를 파견하도록 건의하므로 이에 따르기도 하였다.81) 의원 및 약재, 의학 교육의 활성을 목표로 추진되었던 지방 의료제도의 정비는 醫書가 출간될 때마다 즉시 지방으로 下送하는데서도 나타났다. 조선전기에 각종 의서들은 편찬 되는 즉시 지방으로 배포되었는데, 80여 권이라는 거질로 출간되었던 鄕藥集成方 조차 도 1433년(世宗 15) 6월 완성된 지 2개월 후인 8월에 전라도와 강원도 등에서 인쇄되었 던 것이다.82) 이 밖에도 世宗代에 醫方集說 등 수종의 중국 의서를 간행 반포하였 고,83) 成宗代에는 鄕藥集成方 의 권질이 너무 많으므로 요약한 언해본을 출간했으며,84) 그때 그때 필요한 救急方을 만들기도 했다.85) 이 밖에 역병 환자들의 치료에 汗蒸所를 사용하기도 했다. 汗蒸은 땀을 내게한다는 효과와 함께 더러운 몸을 깨끗이 함으로써 전염을 차단하는 효과를 동시에 추구하였다. 특히 傷寒과 같은 역병은 寒氣가 피부를 통해 몸에 침입하여 발생했다고 보고, 이를 밖 으로 발산해야 치료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몸안의 寒氣를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으로 많은 땀을 흘리게 하였다. 藥材로는 뜨거운 약(熱藥)을 주로 사용하여 氣를 밖으로 발산 하게 하였으며 더운 汗蒸浴으로 땀을 내어 역시 같은 치료효과를 보았다. 물론 藥材 사 용의 어려움 때문에 汗蒸의 방법이 더 선호되었던 듯하다. 때문에 활인서에도 汗蒸所를 두고 치료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으며,86) 財源과 汗蒸 器具를 마련하여 계속 관리하도록 80) 端宗實錄 권10, 端宗 2년 1월 정사. 81) 燕山君日記 권27, 燕山君 3년 9월 임술. 82) 世宗實錄 권61, 世宗 15년 8월 정미. 83) 위의 책 권52, 世宗 13년 5월 갑술. 禮曹가 典醫監의 啓文에 의거하여 鑄字所로 하여금 直 指方 傷寒類書 醫方集說 각 50건을 인쇄하고 補註銅人經 은 圖形이 경상도에 있으므 로 該道로 하여금 간행시켜 典醫監 惠民局 濟生院에 분급하도록 청했으므로 이에 좇았다. 84) 成宗實錄 권220, 成宗 19년 9월 경진. 85) 燕山君日記 권27, 燕山君 3년 9월 계해. 西路癘疾救濟의 策을 의논하고 留守 觀察使로 하 여금 病症을 자세히 살펴서 보고하도록 하고 내의원으로 하여금 따로 治療方文을 만들게 하였 다. 86) 世宗實錄 권18, 世宗 4년 10월 병술.

- 46 - 國史館論叢 第68輯 伸勅하였다.87) 그러나 아무 병에나 汗蒸을 해서 사람을 도리어 죽이는 폐단이 발생하기 도 했다.88) 일반민들에 비해 상층의 사대부들은 藥材나 의서 그리고 의원의 수혜를 비교적 잘 받 을 수 있었다. 비록 평소에 養生書와 醫書 및 藥材를 접한다고는 하지만 모든 儒者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또 疫病 등과 같이 갑작스런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그 대책은 그 리 간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농사철을 당하여 奴婢나 壯丁이 병으로 누워 있으 면 농사를 망치는 문제를 야기하였다.89) 그리고 국가에서 藥物과 醫員을 지방에 보내기 는 하였지만 치료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대부들은 스스로 전염병의 발생 및 질병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치료 약물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약재 값은 매우 高價였 으므로 약재 구입도 손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惠民局에서 팔고 있는 약값은 너무 비싼 까닭에 大小 病家에서 구입하여 병을 구하지 못 하니 지금부터는 가장 귀한 청심원 소합원 봉명단 외의 나머지 약은 값을 다시 정하도록 하 소서.90) 비싼 약값으로 家産을 탕진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중요한 약재로 사용되었던 甘草 등 많은 약재들이 唐藥(중국약)으로 가난한 사람은 도저히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모 처자가 병에 걸리면 마음을 쓰지 아니하는 것이 없어 값이 비싼 藥을 널리 구하고, 혹은 무당의 무리에게 부탁하여 家産을 탕진하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또 唐藥은 먼 시골에 서 구하기 어렵고 값이 비싼 물건이므로 가난한 백성은 도저히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91)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기반이 있던 사대부들에게도 약값 마련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 로 그들은 약재를 서로 扶助하는 방법을 선호하였다. 南冥 曺植은 李浚慶이 보내준 약재 에 대하여 감사의 편지를 썼으며,92) 최충성도 당시 호남의 관찰사로 있던 金宗直에게 자 신의 寒疾 치료를 위하여 필요한 藥材를 부탁하였다.93) 또는 藥契를 결성하기도 했다.94) 87) 위의 책 권110, 世宗 27년 11월 정축. 88) 위의 책 권18, 世宗 4년 10월 병술. 89) 魯齋集 附錄 知舊簡牘詩文 은 成渾의 집안에 癘疫이 돌아 농사를 짓지 못하니 걱정된다는 내용이다. 90) 世宗實錄 권90, 世宗 22년 7월 무진. 91) 위의 책 권60, 世宗 15년 6월 임오. 92) 南冥集 권2, 答李相國原吉書 에서 李浚慶(1499 1572)에게 답한 글. 93) 山堂集 권2, 上湖南方伯求藥書. 94) 이규대, 朝鮮後期 藥局契의 一考察 ( 又仁 金龍德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8).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 47 - 아마 약재의 고가 현상은 養生 등 調攝 謹身의 방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예방책을 부추켰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약을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사대부 등 상층부 일부 였다. 물론 개인적으로 치료 시설인 蒸室을 가지고 傷寒病을 치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예외적인 현상으로 생각된다.95) 조선전기 약값의 高價현상을 부추켰던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약재가 대부분 수입품이 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鄕藥 의 약재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鄕藥 의 효과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보편적인 인간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약재는 중국의 한의서 에 기록된 중국의 풀과 광물이었다. 따라서 약재의 국산화는 조선에서 불리는 鄕名의 야 생생물과 중국 醫書上의 藥物을 일 대 일로 대응시키는 實驗的인 과정을 먼저 요구하였 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本草學 수준은 한국산 풀과 광물이 중국의 의서에 기재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여 생물학적 藥理的 동질성을 확보할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설령 유사한 것 으로 대치한다해도 그 효험을 확인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의관을 수시로 중국에 보내어 향약재들을 중국 의서의 漢名 약재와 확인시켰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향약의 藥效 에 대한 의심이었다. 비록 같은 모습의 생물임이 肉眼이나 외형적으로 확인되었다고 해도 중국 약재와 동일한 약효가 없다면 소 용없는 것이다. 비싼 당약재라도 구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96) 여기에서 향약 재의 사용을 권장하려는 談論의 형성 이유가 배태한다. 비록 조선전기의 정부가 藥物과 의원의 파견이라는 한정된 대민 치료보다는 厲祭을 통 한 심리적 안정, 환자의 격리를 통한 건강한 자의 보호를 선호하였다고는 하지만, 환자의 육체적 苦痛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약재를 사용하는 일은 점차 확대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가격이 싸고 효과가 좋은 약재를 광범위하게 보급하는 것은 조선 정부가 궁극적으로 이룩해야 할 문제였다. 2. 鄕藥論 의서의 출간 신유학적 질서에 바탕한 국가 건설이 목표였던 신유학자들은 불교의 無 에서 탈출 有 를 강조하며, 실제 세계(有物)의 이론을 탐구하였다. 신유학자들은 氣의 有存性을 강 조하였고, 특히 인간의 氣가 서로 동일하다면 서로 같은 동포로서 간주될 수 있다 하여 仁 을 끌어들였다. 불교의 자비에 대신해서 仁을 강조함으로써, 불교 대신 시대 사상으 로 기능할 수 있었다. 한편, 有物의 존재와 그 理를 강조하고, 탐구의 방법으로서 格物 95) 山堂集, 권2, 蒸室記. 96) 중국과의 약재 무역은 조선시대 주요한 무역 중 하나였다.

- 48 - 國史館論叢 第68輯 致知를 언급함으로써 道家의 특화된 지식 -의학적 측면에서 말한다면, 전문적인 약물학 을 흡수할 수 있었다. 도교와 불교의 두가지 중요한 특성을 신유학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慈悲를 대신한 仁이라는 의료윤리와 약물학의 실험 의학이었다.97) 한편 조선에서 신유학이 수입될 때 주장된 自尊 의식의 영향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특히 여말선초 檀君이 민족 공동체의 뿌리로 이해되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지리 인 식의 확산은 한국의 로컬리티와 아이덴티티를 확보하는데 이르렀다.98) 중국의 세계자체 (world)에 대한 自國이라는 지역성(local) 이 강조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중국의 藥만이 전세계의 藥이요, 조선의 身土不二 약재는 雜草에 불과하였던 상황을 점차로 逆轉 시켜 나갔다. 특히 중국 약재의 고가현상으로 의료혜택의 폭이 넓어지지 못하는 것을 우 려한 신진사대부들은 鄕藥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좋은 약재임을 인식시켜 나갔다. 즉 중국과 다른 조선의 풍토와 그 풍토의 영향(外氣)을 받은 病은 동일 환경에서 자란 조선 의 풀(향약)로 치료해야 한다는 철학적 담론을 마련한 것이다. 이 장은 바로 여말선초의 의서 가운데 향약 담론의 형성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99) 鄕藥 談論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 출간된 의서를 표로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아래의 책들은 오늘날 거의 유실되었기 때문에 전모를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鄕 藥論 의 전개과정을 보기 위해 의서의 序 跋文을 중심으로 의서 출간의 의도를 살필 수 있다. 가능한 각 의서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있는 글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최종준이 撰한 御醫撮要方 이다. 그 서문은 李奎報의 作으로 다음과 같다. 국조에 茶房에서 수집한 藥方文 한 질이 있는데, 글은 간단하고 효과가 신속하여 여러 목 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해가 묵어서 탈락함으로써 거의 유실될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 樞 密相公 崔宗準 보고 애석히 여겨 인쇄에 붙여 널리 전파할 것을 생각하고 이를 임금께 아뢰 니 임금께서 드디어 欣然히 허락하였다. 이에 공은 두권으로 나누고 또 모든 方文 중에 가 장 긴요한 것을 첨부하여 사람을 시켜 선사하여 이름을 御醫撮要 라 하였다.100) 97) 운슐드는 신유학이야말로 가장 의학이 발달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된다면서 바로 불교의 윤리와 도교의 과학을 흡수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바로 송나라를 이은 金 元 의학의 집 대성을 중국의학이 이론과 실험을 합치게 된 첫번째 단계였다고 하였다(Unschuld, Ulrike, Traditinal Chinease Pharmacology: An Analysis of Its Develropment in the Thirteenth Century ISIS 68, 1977, pp.224 248). 98) 韓永愚, 朝鮮前期史學史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1) 및 韓永愚 裵祐晟, 朝鮮時代 官撰 地圖의 歷史的 背景 ( 海東地圖 해설, 서울대학교 奎章閣, 1995) 등이 참조된다. 99) 이태진, 高麗後期의 인구증가 要因 生成과 鄕藥醫術 발달 ( 韓國史論 19, 1988)에서는 여 말선초의 의서 출간이 당시 인구증가의 한 요인이 되고 이는 농업기술의 提高를 야기하는 인 구압으로 작용한다고 파악하였다. 100) 東國李相國集 권21, 新集御醫撮要方序.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표 2> 鄕藥論 형성 관련 醫書 번호 書 名 편 간 시 기 편 저 자 ① 御醫撮要方 고종13년(1226) 崔宗準 ② 鄕藥救急方 고종20년(1243)~32년(1245)? ③ 鄕藥惠民經驗方 공민왕20년(1371)? 惠民局 ④ 三和子鄕藥方 고려말기 三和子 ⑤ 鄕藥簡易方 고려말기 權仲和 徐贊 ⑥ 東人經驗方?? ⑦ 診脈圖訣 공양왕1년(1389) 鄭道傳 ⑧ 鄕藥濟生集成方 太祖7년(1398) 趙浚등三公, 金希善 ⑨ 鄕藥採取月令 世宗13년(1431) 兪孝通 등 3인 ⑩ 鄕藥集成方 世宗15년(1433) 兪孝通 등 3인 - 49 序 跋의 著者 李奎報 尹詳(重刊서문 :1417년) 李崇仁 權近 尹淮 權採 위의 서문을 보면, 13세기 초반의 의서로 전통적인 單方(한가지 약재로 한가지 질병을 치 료하는 방법)의 전통을 잇고 있음은 확인되나 약재의 鄕藥化를 시도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제목에도 향약이란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鄕藥救急方 의 발문이다. 비록 初刊本의 跋文은 아니나, 1417년(太宗 17) 의흥에서 재간되었을 당시 尹詳의 발문이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해 짐 작해 볼 수 있다. 鄕藥救急方의 효과는 매우 神驗하여 東民에 이로움이 많았다. 실려 있는 여러가지 약재들 은 모두 東人이 쉽게 알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로, 약의 조제와 복용법 역시 이미 경험 한 바 있던 것들이다. 만약 京師나 대도시에는 의사가 있으나, 窮鄕 僻郡에는 갑자기 病勢가 악화되어 良醫가 이르기 어려워도 이 서적이 있으면 사람들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일이 쉬워 공이 배가되어 이로움이 막대한 것이다.101) 초간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여 본다면, 이미 15세기 초반(1417년)에는 쉽게 알고 쉽게 얻을 수 있는 향약 을 경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미 鄕藥救急方 이 전에 중국의 약재를 高麗의 것으로 代用하려는 시도는 셋째, 삼화자향약방 에서 확인된 다. 본서의 내용은 전무하나, 향약제생집성방 의 서문에 약간의 언급이 있다. 여러가지 약을 모아 한가지 병을 고치는 것이 한가지로 그 병에 맞게 하는 것만 못한데, 다만 병을 똑바로 알고 한가지 약을 바로 쓰기가 어려운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멀리 떨어져서 이 땅에서 생산하지 않는 藥은 구하기 어려운 것을 몹시 걱정하였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풍속이 흔히 한가지 풀을 가지고 한가지 병을 고치는데 특효를 본다. 그 전에 삼 화자의 향약방이 있었는데, 아주 간단한 요령만 뽑아 놓아서 보는 사람들이 너무 略式으로 된 것이 결점이라 하였다(中略).102) 101) 別洞集 권3, 鄕藥集成方拔.

- 50 - 國史館論叢 第68輯 여기서는 여러가지 약재를 복합적으로 처방하는 것이 약값만 많이 들고, 전통적인 單 方의 효과도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향약의 대용 정도가 미약하여 간단하게 略式으로 꾸며진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단계는 다음으로 진전되면서 보다 많은 단방 처방이 수집되고 첨가되어 분류와 편집을 시도할 정도가 되었다. 넷째, 鄕藥簡易方 이다. 본서의 내용을 알 수 있게 해주 는 글로, 앞의 鄕藥濟生集成方 의 서문과 鄕藥集成方 의 서문이 있다.103) ⑤-1: 전에 삼화자의 향약방이 있었는데, 아주 간단한 요령만 뽑아 놓아서 보는 사람들이 너무 略式으로 된 것이 결점이라 하였는데, 일전에 현 판문하 권중화 공이 서찬으로 하여 금 여러 방문을 보태게 해서 간이방을 만들었으나 그 책이 세상에 많이 퍼지질 못했다. ⑤-2: 일찍이 判門下 臣 權仲和가 方書를 採集하고 이를 編輯하여 鄕藥簡易方 을 저술하였 는데 그 뒤에 또 平壤伯 趙浚 等이 官藥局에 命하여 여러 方書를 詳考하고 우리나라의 經 驗方을 모아 분류를 나눈 뒤에 다시 編輯 刊行하였으니, 이로부터 약을 쉽게 구할 수 있 었고 病도 쉽게 치료할 수 있게 되어 사람마다 便利하게 여겼다. 그러나 中國에서 나온 方書는 오히려 적고 중국과 藥名이 다른 것이 자못 많으므로 醫業을 하는 사람들이 그 책 이 구비되지 않았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의 두가지 자료에서 보듯이 簡易方 은 삼화자의 의서가 간략함을 보충하려고 여러 가지 단방을 수집 정리하였다. 당시에는 삼화자 의서와 같은 경험방 의서들이 많이 출간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권중화가 여러 方書를 채집하였다는 구절과 조준이 경험방을 모 아 편찬하였다는 구절에서 확인된다(⑤-2). 이후 조준 등이 간이방을 더욱 보완 출간한 것을 보면, 簡易方 類의 의서가 계속 증보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간이방의 또 하나의 특색은, 향약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잘못(가령 중국의 약재를 잘못 代用하는 문제: 藥名의 誤用)을 지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전하였다는 것이다. 향약론의 완성을 위 해 필요한 향약 본초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고려 말에 초간된 본서를 신유학자들이 간과하였을리 없으며, 중국의 藥材를 조선의 것으로 대체하려는 신유학자들의 노력은 다음 정도전의 글에서도 뚜렷하다. 한의학의 진 단서라 할 수 있는 診脈法 의서 진맥도결 의 저자이기도 한 정도전은 개국공신의 한 사 람으로 당시 조선 건국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 었다.104) 그의 향약론은 朝鮮 經國傳 賦典 惠民典藥局條에서 볼 수 있다. 102) 陽村集 권17, 鄕藥濟生集成方序. 103) 위의 책 권17, 鄕藥濟生集成方序 ; 鄕藥集成方 권1, 序文. 104) 조선 건국에 주도적이었던 신유학자들의 사상은 韓永愚, 朝鮮前期社會經濟硏究 (을유문화 사, 1983); 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 (지식산업사, 1983) 참조.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 51 나라에서 약재가 그 땅에서 나지 않으면, 疾病이 생겨 孝子 慈孫이 뛰어다니면서 이웃에 서 구하더라도 약은 구하지 못한 채 병은 더욱 깊어져 도저히 고칠 수 없게 되는 재앙에 처 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惠民典藥局을 설치하여 藥價로 五升布 6,000疋을 관에서 마련하여 藥 物을 골고루 갖추게 하였다. 이리하여 질병이 생기면 누구나 斗米나 疋布를 가지고 이곳에 오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게 되었다.105) 신유학자들의 治國論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의 글에서는 본격적인 의료의 제도화 를 언급하였다. 단지 향약의 사용을 권장하는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라 직접 국가가 鄕藥을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질병을 치료고자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초기 鄕藥濟生集成方 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⑧-1: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험한 것을 뽑아서 부문별로 같은 편을 골라 한데 엮어놓고 향 약제생집성방 이라 하고 (中略) 책을 많이 박아 널리 전하게 하였으니 모두 구하기 쉬운 물건이요, 이미 경험한 방문이다. 참으로 이 방문만 잘 알면 한가지 병에 한가지 약으로 되는 것이니, 이 땅에서 나지 않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바랄 것이 무엇이랴. 또 五方은 모두 제각기 타고난 성질이 다르고 천리를 넘어서면 풍속이 같지 않는 법이니 사람이 평 시에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시고 짜고 차고 더운 것이 모두 각각인즉 병이 나서 약을 쓰 는 것도 또한 다를 것이고, 반드시 중국의 방문과 꼭 같아야 할 것은 아니다. 하물며 먼 곳의 물건을 구하여 얻지 못한 채 병은 이미 깊이 들었는데 혹시 많은 값을 주고 구했다 하여도 그 물건이 오래되어 썩고 좀이 나서 약기운이 다 나갔으니 그 지방에서 산출하는 물건의 기운이 그대로 있는 것 만큼 좋지 못하기 때문에 향약을 가지고 병을 고치는 것이 반드시 힘은 적게 들고 효력은 빠른 것이다. 이 방문이 생김으로써, 백성에 혜택이 돌아 가는 것이 어떻다하랴(序文).106) ⑧-2: 장차 中外에 반포하고 영원히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모두 그 거주하는 곳에 따라 약을 구할 수 있고 병증에 따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또 우마의 병에 약을 잘못 써서 죽게함을 염려하여 그 치료의 처방을 집성하였으니 그 백성에게 덕을 베풀고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또 절실함이 이와 같다(跋文).107) 조금 길게 인용되었으나 그만큼 서 발문에는 흥미를 끄는 내용이 많다. 인용문을 주 의해서 읽어 보면, 이미 구하기 쉬운 물건, 경험한 바, 단방의 효과 등 기존의 의서들 이 주장하였던 향약의 이점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향약 담론의 완성 에 쐐기를 박는 구절이 삽입되었음을 포착해야 한다. 그동안 향약은 고가의 중국 약재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 어쩔 수 없는 代用品으로서 주장되어 왔다.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 까. 향약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를 부여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향약제생집성방 에서 105) 朝鮮經國傳 賦典 惠民典藥局. 106) 陽村集 권17, 鄕藥濟生集成方序. 107) 위의 책 권22, 鄕藥濟生集成方跋.

- 52 - 國史館論叢 第68輯 는 이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조선 藥材의 우월성 에 도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각 지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문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중국의 약재라도 오래되 어 기운이 다하면 조선의 것만 못한다는 당당한 논리는 이제 향약을 사용하는 것이 값싸 고 구하기 쉽다는 전제에서 벗어나 藥理上으로도 조선인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라는 논리 를 내세우는데 이른 것이다. 이제 鄕藥採取月令 과 같은 지침서가 필요해진 상황이 되었다. 향약의 우수성을 주장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으로 향약재의 채취와 갈무리법을 장려하는 것이다. 간단한 月課 형식이 긴요하였다. 土産藥材대략 수백여 종을 備考하여 머리에 鄕名을 注하고 다음에 味 또는 性, 春秋採取 의 早晩, 陰陽乾暴의 善惡을 모두 本草 諸書에서 찾아 鄕藥採取月令 1편을 編成 校正하 여 印刊하게 하였다.108) 향약재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鄕藥採取月令 이라는 월령식 의서에서 실질적 인 약재의 사용과 처리방법의 소개로 전환하였다가 향약론의 결정판인 鄕藥集成方 의 序文에서 완성된 형태로 결론맺고 있다. 여기서는 체계적인 향약론이 논리적으로 주장되 었다. 서문을 논리적 전개의 과정에 따라 몇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⑩-1: 自然的으로 한 區域이 이루어져서 大東의 地域을 차지하고 있는 ⑩-2: 우리나라의 산과 바다에 감추어진 寶物들과 생산되는 草木과 藥材들이 모두 생명을 養育하고 疾病을 治療할 수 있는 것들로 대개는 具備되어 있지만 ⑩-3: 다만 옛부터 의학을 疏忽히 하여 荒廢하게 되었으며, 약을 採取하는 시기도 맞지 않 고 또 가까운 데에 것은 홀대하고 먼데 것을 구하려 하니 사람들은 病이 들면 반드시 묵 은 쑥을 구하여 쓰려 하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약을 구할 길이 없으니 病 또한 구할 길 이 없게 된다. ⑩-4: 다만 民間의 노인들이 한가지 풀로 어떤 病을 치료하여 그 효과가 매우 신비한 것은 ⑩-5: 土質이 그 사람에게 알맞고 약이 病에 適合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不遠千里하 고 無名指의 不便이라도 고치려 하는 것이 人之常情일진대 하물며 나라 안에서 治療할 방 법이 있다면 구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걱정일 따름이다. 향약론의 전개를 확인해보면 먼저 ⑩-1에서 大東의 지역성(locality)을 천명하였다. 중 국과 다른 이라는 이념적 근거를 내세운 후, 조선에 훌륭한 物産이 모두 구비되어 있음 을 확인하였다(⑩-2).109) 그러나 약의 채취시기가 정확치 않고, 鄕名의 근거가 부족하여 108) 鄕藥採取月令 跋文. 109) 世宗實錄 의 지리지 부분 등 물산에 대한 조사 정리를 이러한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 53 - 중국의 약제만을 선호하는 舊弊가 있음을 지적하였다(⑩-3). 이러한 논리는 곧 조선에도 이미 오래된 단방의 전통이 있음을 확인시킨 후(⑩-4), 마지막으로 향약의 우월성, 土質 에 맞는 약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⑩-5). 향약집성방 은 여말선초의 어떠한 의서에 비해서도 체계적으로 病變을 분류하고, 또 한 향약재를 체계화하였다. 風寒暑濕의 분류에 의거하여 질병을 정리하였고, 약재의 채취 법과 조제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를 집대성하였다. 특히 76권 이하는 본초서 에 해당하는 것으로 독립적인 본초서가 不在하였던 조선 의학에 있어 藥學 발달의 기초 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110) 鄕藥의 권장은 주장으로 그쳐서는 안되며 계속적인 정부의 지지와 지원이 뒤따라야 하 는 사업이었다. 이미 世宗代부터 鄕藥의 採取法과 乾正法을 각지에 下達하였으며,111) 나 아가 鄕藥을 재배할 수 있도록 지시하는 한편112) 가장 문제가 되던 향약 약효를 떨어뜨 리지 않기 위하여 채취 시기와 채취자의 성명, 관직 등을 모두 적어 보내도록 하였 다.113) 世宗代의 정책은 成宗代에 이르러서도 그 기조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成宗이 향약 의 보급 확대를 논의할 때, 禮曹가 건의한 鄕藥興用條件에는, ① 鄕藥을 全擔하는 濟生署의 복설. ② 鄕藥集成方 의 廣布. ③ 병자가 와서 증후를 물 으면 의원은 향약방으로 약을 지어 치료할 것. ④ 본초 에 실려 있는 향약은 이미 사용하 고 있지만 농촌의 백성이 한가지 약으로 (단방) 치료하여 효과가 있으면 鄕藥本草 뒤에 첨 입할 것. ⑤ 각도의 採藥人은 대관은 5호, 소관은 3호씩 차정하여 잡역을 면해주고 월령에 따라 전적으로 약재를 채취하게 하고 부자가 계승하여 世業을 삼게할 것. ⑥ 전에 편찬한 鄕藥本草 의 내용을 확대 보충할 것114) 등을 골자로 하는 鄕藥 진흥책 등이 계속 마련되었다. 요컨대 고려말에서 조선전기에 이르는 신유학의 수입과정에서 氣質之性의 局地性 이 파악되었고 이와 더불어 鄕藥사용을 장려하려는 이론적 입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리 고 15세기를 통해 마련된 鄕藥論의 완성은 조선의 자아 의식의 변화와 더불어 생활에 침 110) 第76卷 本草 指南總論 諸品藥石炮諸法 第77卷 本草 石部 三品 第78卷 本草 草部 上品 第79 卷 本草 草部 中品 下品 第80卷 本草 木部 三品 第81卷 本草 人部 病 獸部 三品 第82卷 本草 禽部 三品病 蟲魚部 上品 第83卷 本草 蟲魚部 中品 下品 第84卷 本草 果部 三品病 米穀部 三 品 第85卷 本草 菜部 三品 등이 모두 본초에 관한 내용으로 전체 분량의 20%정도를 향약재 의 설명에 할애하였다. 111) 世宗實錄 권63, 世宗 16년 8월 무신. 112) 위의 책 권85, 世宗 21년 4월 병오. 113) 위의 책 권119, 世宗 30년 정월 을미. 114) 成宗實錄 권98, 成宗 9년 11월 임신.

- 54 - 國史館論叢 第68輯 윤되었다. 비록 16세기에 국토 인식이 조선 반도 내로 국한되는 한계를 보이기는 하지만 역으로 국내의 환경과 物産의 다양하고도 깊은 이해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었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15세기의 중국과 다른 조선의 독자성이 강조되는 속에서 鄕藥에 대한 강력 한 담론이 주장되었다면 이제 16세기 말 17세기 전반기에 이루어진 東醫寶鑑 에는 이미 향약이 俗化 되어 민중속에 깊게 뿌리박았던 것이다. 이 시기는 중국과 다른 조선의 국토 를 강조하기보다는 조선의 국토가 매우 다양함을 발견했던 시기였다. 조선의 풍토가 남북 으로 이천리가 되므로 그 안에서도 다양한 환경이 존재함이 자각되었다. 이제 중국과 다 른 조선의 존재는 常識이 되었으며 더 이상 중국에 다른 이라는 설명이 붙지 않았다. 이 시점에 이르러 바로 鄕藥이라는 설명이 조선의 醫書名에서도 사라졌다. 이제는 같은 약재 라 하더라고 경상도 약재와 전라도 약재의 차이로 구분되었다. 전라도 것이 경상도 것보 다 좋다든가 하는 설명이 일반화되었던 것이다.115) 鄕藥集成方 이 향약 담론을 완성하 는데 이바지하였다면 결과물인 東醫寶鑑 에서는 鄕藥을 俗方 즉 일반 대중(俗人)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었다. 3. 瘟疫 醫書의 출간 15세기는 주로 鄕藥論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 의서의 출간경향을 살펴보았다. 16세기 에 이르러서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조금 새로운 형태의 역병 瘟疫 이 확인되었다. 비록 세종대에 처음으로 辟瘟 이라는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瘟疫이 의서나 기록 상에 서 보다 분명하게 기존의 傷寒과 구분된 것은 16세기 전반기에 가능하였다. 16세기 전반 중종대의 瘟疫의 창궐은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증상이 高熱과 頭痛 및 腹痛 등을 수반 하였던 瘟疫은 티프스 성 질병116)으로 중국에서도 明末에 가서야 傷寒과 다르다는 정확 한 진단이 가능했다.117) 한편 조선전기의 瘟疫에 관한 의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15) 東醫寶鑑 에서 허준은 이미 향약의 사용이 일반화 되고 향약재의 藥性 등에 대한 연구가 심 화되어 조선의 국토에서 산출되는 동일 향약재라도 지역에 따라 다양한 약성이 가능함을 포착 하였다. 조선전기의 중국과 다른 이 아닌 조선 내부의 각 道의 지역성 이 발견되는 시기인 것 이다. 116) 특히 발진티프스의 경우 중간 숙주가 이(蝨)인 것이 보통이다. 16세기 중엽 이후 발진티프스 의 증가 현상은 조선전기 이래 木綿의 보급확대와 이에 따른 옷감 재질의 변화 그리고 이의 기생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다. 117) 富士川遊, 日本疫病史 (平凡社, 1969) pp.273 278. 明末 吳有性의 瘟疫論 에서 傷寒과 瘟疫의 차이점이 분명해졌다.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표 3> 15 6세기 瘟疫관련 의서 번호 書 名 편 간 시 기 편 저 자 ① 辟瘟方 世宗代? ② 諺解辟瘟方 1518년(中宗13) 金安國 ③ 簡易辟瘟方 1524년(中宗19) 金順夢 등 ④ 續辟瘟方 1525년(中宗20)? ⑤ 分門瘟疫易解方 1542년(中宗37) 金安國 등 - 55 비 고 金希壽 序文 金安國 序文 <표 3>을 보면, 瘟疫 치료서는 대개 중종대에 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의 鄕藥 集成方 醫方類聚 등 거질의 의서는 물론이고 많은 구급방 의서에는 瘟病 瘟疫 의 항목이 따로 설정되지 않았다. 모두가 傷寒 이라는 전통적 분류 속에서 瘟疫을 다루었 다. 예를 들어 1499년(연산군 5) 3월경에 출간된 救急易解方 에는 傷寒 中寒 등의 항 목 등은 있으나 瘟疫이 독립적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鄕藥集成方 에서도 권1에 서 권4 風病門, 권5에서 권8 傷寒門 권9에서 熱病門 暑寒門 濕病門 등을 다루 고 있는데, 전통적인 한의학 체계인 風 寒 暑 濕의 순서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조선 전기 최대의 종합의서였던 의방유취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風 寒 暑 濕의 순서 로 다루었으며, 비교적 傷寒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상세히 다루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후일 瘟疫書를 만들 때 의방유취 의 傷寒 부분이 적지 않게 참고된 것으로 보인다.118) 한편 조선전기의 瘟疫 전문서로 처음 출간된 것은 世宗代의 辟瘟方 이었다. 1518년 (중종 13) 同知中樞府事 金安國이 자신이 언해한 呂氏鄕約 正俗二倫行實 農書 蠶書 辟瘟方 瘡疹方 등의 책을 八道에 간행할 것을 청하면서, 세종대의 辟瘟書 가 이미 세상에 희소하므로 언해하여 널리 반포한다고 언급하고 있다.119) 이를 통해서 이미 세종대에 辟瘟書 가 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①). 그러나 현재 그 책은 전하지 않 아 전모를 알 수 없으며 이후 金安國이 이것을 언해하였으나(②) 역시 현존하지 않는다. 한편 1525년에 평안도 지역에 癘疫이 치성하여 사망자가 거의 1,000여 명에 달하자 정 부에서는, 醫方類聚 로부터 辟瘟方 에 수록되지 않은 치료의 방을 뽑아내어 續辟瘟方 이라 이름 하고 諺解 印出하여 藥과 더불어 평안도에 내려보낼 것120) 118) 의방유취 는 分門하여 중국 의서를 수집한 것이었으므로 온역서에서 이를 인용할 때에는 중 국 의서를 직접 인용기록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분문온역이해방 의 인용 서명에는 의방 유취 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방유취 에서 고려시대의 어의촬요방 을 재 인용한 것이 확실하므로 의방유취 의 이용은 확실하다. 119) 中宗實錄 권32, 中宗 13년 4월 기사.

- 56 - 國史館論叢 第68輯 을 신칙하였다. 여기서도 세종대의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辟瘟方 이 이미 출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續編이 마련된 것이다(③). 문제는 1524 년에 출간된 簡易辟瘟方 과 이듬해 출간된 續辟瘟方 이 同一한 책인가 하는 점이다. 三 木榮은 의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양자가 동일한 책이라고 추측하였다.121) 현재 簡易辟瘟 方 은 남아있지만 續辟瘟方 이 없기 때문에 양자를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다만 1542년 출간된 分門瘟疫易解方 의 서문에서 단서를 찾는 수밖에 없다. 편집을 主 管한 김안국 자신이 序文을 직접 썼는데, 거기에서 舊存辟瘟兩方抄錄 122)이라고 하여 이 미 전부터 瘟疫치료를 위해 편집된 두 方書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두 방서를 三木榮은 世 宗代의 辟瘟方 과 중종대의 續辟瘟方 즉 簡易辟瘟方 을 지목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 실 김안국은 이미 辟瘟方 을 언해한 경력이 있으므로 그간의 瘟疫治療書의 간행 경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1524년과 1525년 연속하여 책이 만들어졌다면 김안국이 모를 리가 없었으며, 따라서 세종대의 책(辟瘟方)과 중종대의 치료서(續辟瘟方)를 保合하 여 部門을 나누고 책을 출간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다만 확실한 기록으로 簡 易辟瘟方 과 續辟瘟方 이 같은 책이라고 한 적은 없으므로 양자의 동일성 여부는 확실 하지 않다는 점만을 부기한다.123) 위의 여러 瘟疫 醫書 가운데 현재는 簡易辟瘟方 과 分門瘟疫易解方 만 전하므로 이 두책을 중심으로 당시의 瘟疫치료법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簡易辟瘟方 의 경우 序文 에 이어 곧바로 疫癘病候 라 하여 疫癘의 증후에 대 하여 설명하였다. 병의 가장 주된 원인은 한 해의 氣가 和平하지 못하여, 寒 暑가 균형 을 잡지못한 결과라고 하였다. 또한 疾風과 疾雨, 露霧 등이 흩어지지 않은 무리 현상 등 기후현상과 疫病의 발병을 연계시키는 해석을 내렸다. 그리고 傳染을 통한 집안의 滅門을 가장 염려하였다.124) 다음에 보다 직접적인 瘟疫의 원인을 들면서 하수구와 같은 불결한 기운이 滯鬱되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밖에 寃抑이 쌓인 경우, 죽은 자의 氣가 鬱寂하여 생긴 것으 로 보았다.125) 이어 傳染되지 않는 법 을 소개하였다. 코로 전염된다고 생각하였는지 반 120) 위의 책 권52, 中宗 20년 정월 정축. 121) 三木榮, 앞의 책, p.28 참조. 瘟疫書의 계보도를 작성하면서 두 책이 같은 것이라고 추측하 였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는 없는 것 같다. 122) 分門瘟疫易解方 序. 123) 이미 언해된 책( 簡易辟瘟方 )이 있는데 다시 續辟瘟方 을 언해 출간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 아서는 다른 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124) 簡易辟瘟方 序文. 125) 위의 책, pp.2 3.

朝鮮前期 對民 醫療와 醫書 編纂 - 57 - 드시 환자의 집에 갈 때는 雄黃을 가루내어 물에 개서 코밑에 바르고 가게 하거나126) 洗 面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치료법으로는 服藥法도 소개되었지만 주로 기도와 근신 등의 방법을 강조하였 다. 가령 흙을 깊이 3尺으로 파고 깨끗한 모래 3斛과 술 3升을 섞어 제사지내는 것을 최 고의 良術 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 대부분의 치료법도 대개는 逼瘟丹이라든지, 降眞香 등 주로 香을 태워 疫氣을 흩뜨리는데 주력한 것이었다.127) 간이벽온방 이 이전의 醫書에서 瘟疫에 관한 方文을 초록하면서도 실제로 瘟疫 이라 고 명시되어 있는 방문은 모두 45방문 가운데 7군데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傷寒이 나 疫病 등의 治療方으로, 정확히 瘟疫에 해당하는 方文은 아니었지만 기재하였다. 특히 治溫病 의 方文을 많이 수록하였는데, 아마 瘟疫이 高熱을 동반하므로, 溫病 의 치료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대개 溫病은 瘟疫을 포함한 보다 광범한 熱病을 의미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128) 결국 瘟疫치료의 주요방법은 기도 였으며, 그 다음이 服藥으로 설정된 것 같다. 이 밖에 沐浴 등의 방법도 제시되었다. 한편 分門瘟疫易解方 은 기존의 瘟疫치료서에서 한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기존 의서의 錯雜을 정리하여 체계를 세웠다(分門)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병 의 症候 와 鎭禳門 을 서두에 싣는 등 여전히 簡易辟瘟方 의 방식을 따랐다. 내용도 그대로 簡易辟瘟方 의 것을 轉載하였다. 따라서 瘟疫의 치료법 역시 기도 등의 방식에 비중을 두었다. 다만 방법의 가짓 수가 거의 두배로 늘었으며, 簡易辟瘟方 에서 순서와 체계가 뒤섞여 있던 것을 정리하였다. 다음에 不相傳染門 을 설정하였다. 먼저 鄕藥集 成方 에서 疫氣를 마시지 않도록 하는 呼吸法을 抄錄하였다. 여기서도 기존의 간이벽온 방 에 비하여 方文을 증가하였다. 인용서적은 어의촬요방 향약집성방 간이벽온방 등 순수 국내 의서에서 千金方 聖惠方 肘後方 등 중국 의서에 이르기까지 다양 하였다. 마지막으로 服藥方術門 에서는 주로 傷寒의 치료법과 유사한 방법으로 땀을 내 게하는 熱藥이나 마찰 또는 運動의 방법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傷寒 치료법을 위주로 한 瘟疫처방은 그리 큰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瘟疫은 간이벽온방 이나 分門瘟疫易解方 에서 지적하듯이 우물 등의 오염을 통해 전 염되었으며, 傷寒에 비하여 전염성이 매우 강하였다. 16세기 전반 疫病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는 바로 瘟疫의 전염성 때문이었다. 이처럼 16세기 전반기를 126) 위의 책, p.4. 127) 위의 책, p.2, 8, 10 등 참조. 128) 上海中醫學院中醫文獻硏究室 편, 中國醫籍字典 (江西科學技術出版社, 1989) 溫 p.195; 瘟 p.370 참조.

- 58 - 國史館論叢 第68輯 휩쓸은 瘟疫(티프스성 질환)은 당시에는 처치가 쉽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갔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중 후반을 거치면서 경험이 점차로 쌓여 瘟疫에 대한 나름 대로의 처방이 축적되었다. 許浚이 新撰辟瘟方 을 저술할 수 있었던 배경이 마련된 것이 다. 新撰辟瘟方 (1613)은 목차에서부터 병의 원인을 몇가지로 분석하고 症候를 분류하여 和解시켜야 할 증상과 下劑를 사용해야 할 증상 등으로 세분하였다. 또한 병의 치료법도 鎭禳 등의 기도를 書頭에 두지 않고 적극적인 약물 치료를 위주로 처방하였다. 이는 그만 큼 瘟疫에 대한 실증적이며 실험적인 경험이 축적된 결과였다.129) 16세기 후반 瘟疫은 傷寒과 다른 병임이 확인되었으며 이후의 의서에서는 다른 처방과 病因으로 설명되었던 것이다. Ⅴ. 맺 음 말 조선전기에는 역병에 대한 대응으로 藥物과 避病 그리고 厲祭 등의 방법이 강구되었 다. 활인서과 같은 피병소의 기능은 주로 대도시와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 대한 보호 장 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가면 서울의 도성 주변 특히 강변 지역의 급격한 인구증가와 함께 활인서의 지리적 입지가 인구 밀집 지역에 속하게 되는 문제를 야기하였다. 비록 활인서의 위치가 성북동 골짜기로 잠시 이동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조선 전기의 위치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관계로 도성민을 보호한다는 종래의 기능은 무력 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후기 私的인 의료 행위가 확대되는 결과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서울에는 거의 모든 醫員들이 밀집되어 있다는 성호 李瀷의 지적은 다시 한번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다.130) 한편 조선전기 이래 高價 약재를 국산화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처음에 는 중국의 약재의 대용품으로써 향약재를 설명하다가 향약집성방 에 이르면 오히려 氣 (환경)가 상통하는 향약재의 우수성을 주장하는데까지 이른다. 그리고 東醫寶鑑 이후에 는 鄕藥이라는 명을 굳이 부치지 않더라도 俗方 單方 의 형식으로 민간에 비교적 광범하 게 鄕藥材의 사용이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16세기 전반을 기점으로 한 瘟疫의 확산은 당시 기후 조건 등의 不平으로 더 욱 확대일로에 놓였다. 확실히 기존의 傷寒과는 다른 역병이 발생하였으며 사망자 수가 129) 김호, 앞의 논문(1994), p.17. 130) 성호사설 人事門 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