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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 50 - 國史館論叢 第94輯 당시는 일본 내의 여러 방침이 조선에도 바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표되던 시기였는데, 그 러한 방침들은 일본이 수행하고 있던 전쟁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과정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지위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이 1940년대 들어 대동아공영권 을 표방하고39) 1942년 11월 大東亞省을 설치하여 국내외의 모든 사무를 통할하면서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일본 내 정보위원회의 주요 결정사항이나 활동 등은 대부분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조 선에도 공포 실시되었다. 일본 내 정보위원회 관련 주요 일지 를 보면,40) 이것이 1945 년 8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일본측의 對民 선전 여론기관의 중추로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41) 戰況의 변화에 따른 시의적절한 선전방침과 국민교화 방 침, 또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관련한 각종 방침 등이 논의 결정되어 공포 시행되는 과 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몇가지 대표적인 방침을 보면, 중일전쟁 직후 에 支那事變에 대한 선전방책, 태평양전쟁 직전에 決戰 여론지도방책 요강 (1941.6) 과 對英美문제에 관한 여론지도방침 (1941.11)이나 日英美전쟁에 대한 정보선전방책 대강 (1941.12.8), 일제가 막바지에 몰려있던 당시 대동아전쟁의 현단계에 卽應하는 여 론지도방침 (1945.1.30) 등이 閣議의 양해를 거쳐 결정 발표되었다. 支那事變에 대한 선전방책 을 보면, 전쟁의 원인을 중국측에 돌리는 것과 사건 불확 대 방침이라는 중일전쟁에 대한 기본 방침을 토대로 7월 17일 사무국 회의에서 중일전쟁 에 대한 선전방책을 합의했다. 사건 보도나 논평 등을 통해 외국의 여론을 고려하면서 일 본측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42) - 정확히 상세한 뉴우스를 신속히 홍보하는 것에 특히 유의할 것, 대외에서 특히 그러함 - 현지 및 각국 출장지에서 각 기관은 외국측과 접촉하여 적극적으로 우리측의 보도자료를 공급하고 列國이 중국측에 서지 않도록 공작할 것 - 유력 신문사는 외국의 曲論에 대해 당당한 論陣을 펼치고 또 외국신문 논조는 우리에게 좋은 것과 함께 적당히 나쁜 것을 병용하여 국내에 소개하는 것을 고려할 것 - 중국측의 불법 비인도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내외에 速報할 것 - 이번 파병의 진정한 의의에 대해서는 금후 모두 旣定 방침에 기초하고 현지 군대의 안전 39)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용어를 일본 정부에서 처음으로 발표한 것은 1940년 8월 1일 제2차 近 衛내각의 外相 松岡洋右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1938년 당시 陸軍省 軍務局 軍事課員 岩 畔豪雄(中佐)과 참모본부 작전부 전쟁지도과원 堀場一雄(小佐)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岡部牧 夫, 大東亞共榮圈 論, 歷史學硏究會 編, 講座 世界史 8 : 戰爭と民衆, 1996, 東京大學出 版會, pp.130 131). 40) 戰前の情報機構要覽 : 情報委員會から情報局まで, 1964.3, 奧平康弘 監修, pp.355 385 참조. 41) 終戰 이후 일본 내 정보위원회는 정보국으로 계승되었다. 42) 앞의 戰前の情報機構要覽 : 情報委員會から情報局まで, pp.76 79.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 51 및 在留邦人의 생명 재산보호 외에 다른 뜻이 없음을 철저히 선전할 것 - 위 방침에 기초하여 在外 帝國 官憲은 한층 적극적으로 任國정부를 지도하고 특히 외국의 관여는 오히려 사건을 확대시키는 데 불과하다는 점을 적합한 방법으로 상대국에 전달할 것 - 동맹통신사의 보도는 위 방침에 기초하여 정보위원회에서 지도할 것 한편 對英美문제에 관한 여론지도방침 에는 美日관계가 악화되어 태평양전쟁이 발발 하기 직전인 1941년 11월 오히려 對英美 國交 긴장에 관한 객관적 사실 보도의 억제를 종래에 비해 완화한다 는 방침을 발표하여 여론지도상 대중이 前途에 희망을 가질 수 있 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진주만 공격이 개시된 12월 8일 정보국에서는 日英美전쟁에 대한 정보선전방책 大綱 을 통해 국내 여론지도에서 만주, 중국전선, 추축국, 적국, 남방지역, 중립국 등으 로 지역을 나누어 선전방책을 설명하였다. 여기서는 국내 여론지도의 요령으로서 장기전 에 대한 각오와 함께 국민생활상의 핍박은 전쟁의 진전에 따라 증가한다 해도 皇國의 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시키고 1만 국민의 고통은 이를 적개심의 刺激으로 이끌어 도리어 전의를 앙양시키도록 지도함, 또 적국측 특히 英 蘇 및 重慶에서의 국민생활의 핍박의 정황을 適時 보도하고 생활의 핍박은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이해시킴 이라고 하여, 민중의 생활상의 압박을 戰意로 해소시키겠다 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시점인 1945년 1월의 대동아전쟁의 현단계에 卽應하는 여 론지도방침 에서는 전쟁이 정의의 전쟁 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론지도방법을 실행하도록 하였다.43) 국민이 勝戰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도록 하면서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제한하여 정보를 공개하는 것 등을 지시하고 있음이 주 목된다. 1) 보도시 단지 국부적인 戰果나 낙관적인 자료 등을 강조한 나머지 국민에게 戰局의 실상 및 국내정세에 그릇된 인식을 주지 않도록 발표방법이나 보도기관의 보도방법 등에 대해 적절한 방도를 강구할 것 2) 이번 전쟁이 우리의 自尊自衛를 위해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국민에게 한층 철저 히 하기 위해 대동아전쟁 발발전의 외교의 眞相을 명확히 하고 이를 위해 미발표 외교문 서로서 적당한 것을 공표하는 등 방도를 강구할 것 3) 적개심의 앙양을 도모하기 위해 적의 일본처분안, 무조건항복의 주장 및 이번 전쟁에서 의 포악한 행위 등을 주지시킬 것 4) 우리가 힘들 때는 적도 역시 힘들다는 것을 알게 하고 필승의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적국 內政의 곤란 및 적의 人的 손해를 주지시킬 것 43) 앞의 책, pp.283 290.

- 52 國史館論叢 第94輯 5) 국민이 時局의 眞相을 오해하지 않도록 안이감을 주거나 혹은 우리의 전의를 저해하는 등의 결과를 가져 오지 않도록 敵國 또는 중립국측의 보도를 국내에 보도하는 데에 충분 히 유의할 것 정보위원회 외에 일반 행정조직이나 경찰조직을 이용하여 실시한 여론 선전책으로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일반 조선인을 대상으로 이른바 시국인식 을 철저히 하기 위해 실시 한 각종 좌담회 강연회 등이었다. 강연회의 경우, 도지사나 중추원 참의, 종교가 등 유 력자를 지방에 파견하여 시국에 관한 순회강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밖에도 각종 대 회나 행사, 예를 들어 全鮮中堅청년대회나 戰勝기념행사 등을 개최하여 수시로 민중층을 동원했다. 특히 농어촌지역 민중층의 時局인식 을 위해 중요했던 것은 일제 경찰측에서 1937년 9월 이후 전국 각 농촌 등지의 주재소를 매개로 개최한 시국좌담회 였다. 좌담회에서는 종래의 강연회 형식과는 달리 좌담회 형식을 취하고 대상인물에 따라 매우 평이한 질 의 응답 방식을 취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중일전쟁의 원인과 진행과정 및 당시 동양에서의 일본의 위치나 구미 각국의 상황 등을 설명했는데, 직접 시국과 관련되는 일 이라 할지라도 지방개량이나 생활개선 문제 등 구체적인 긴급 사항에 대해서는 오히려 적당한 지도 를 행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좌담회 개최가 일반 민중층에 경제적 부담을 주거나 가정생활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유의하고 회합의 범위나 개최시기, 소요시간, 사용어 등에도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항상 대상인물의 지식정도나 생활상태 등을 고려하여 점차적인 방법을 통해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여 기탄없이 의견을 토로하도 록 고려해야 한다고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아울러 좌담회시 고등경찰상 특히 주 의를 要하는 질문이 있을 경우는 질문자의 주소 이름 직업 사상경향 등을 內査하여 철저히 보고할 것 44) 등도 지시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좌담회에서 참고했던 자료를 보면, ①時報委員會에서 발행한 시국 선전자료, ②육군성 신문반 또는 해군 군사보급부에서 발행한 자료, ③일본이나 조선의 官報 부록, ④본부의 관계 각과에서 발행한 시국관계 각종 자료, ⑤본부 보안과에서 각도 에 통첩한 자료 ⑥기타 자료 등이 활용되었다. 이밖에도 당장 이용하기에 좋다고 생각되 는 참고자료로서 중일전쟁과 조선인의 지위, 시국의 중대화와 국민의 각오, 중일전 쟁과 조선, 농산어촌 銃後의 임무 등이 있었다.45) 44)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に關する指示注意事項, 1937.11, 諸會議綴, 1937, 정부기록보 존소 MF, No.88-89, p.801. 45) 제73회제국의회설명자료 (경무국), 1937, 한국역사연구회 편,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총서 2, pp.437 439.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 53 - 좌담회는 1937년 9월부터 1940년 1월까지 전국에서 총 개최 회수 308,751회, 참가연 인원 16,060,402명이라는 숫자에 달하여 민중계몽상 좋은 결과를 보았다고 일제측은 평 가하였다. 구체적으로 시국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높이고 유언비어를 감소시키고 출정군 인의 환영, 유가족의 위문, 국방헌금의 속출, 주의인물의 사상전향, 기독교도의 신사참배 등 그 효과가 매우 크다 고 보았다.46) 당시의 좌담회는 시국좌담회 와 방공좌담회 로 구분되었는데, 종래에는 일반 민중에 대 해 주로 시국좌담회만 개최하다가 이 시기 들어 사상정화운동 의 유효한 방법으로서 사상 분자의 지도 계몽을 위해 방공좌담회의 개최가 강조되기도 했다. 방공좌담회는 방공단과 의 긴밀한 관계하에 蘇聯의 內政을 폭로하거나 공산주의의 폐해를 강조하는 등을 내용으 로 했다.47) 어쨌든 이러한 좌담회에 조선민중은 半강제적으로 동원되었고 이를 거부하면 非국민, 불순분자 로 취급당했으므로 실제로 위와 같은 효과 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좌담회에서 조선민중은 어떠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까? 참고로 일제측 이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농촌진흥회의 월례회나 경찰측이 개최한 좌담회 등에서 조선인 이 질의 응답한 내용을 정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48) 1. 중일전쟁은 언제쯤 終局을 告할까 2.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대한 列國의 反感이 높아져 결국 일본이 고립에 빠질 우려는 없는가 3. 蘇日이 開戰할 경우 국제연맹은 어떠한 태도로 나올까 4. 蘇日開戰이 반드시 일어날 태세가 되어 가지 않는가 5. 事變으로 일반 物價는 더욱 앙등함에도 불구하고 곡물 등 농산물만 하락하는 이유는 무 엇인가 6. 중국 또는 소련의 空軍이 조선에 날아올 염려는 없는가 7. 조선인의 병역 의무는 언제쯤 지게 되는가 8. 사변이 장기화한 결과 국민의 부담이 증가하지 않는가 9. 국방헌금을 내지 않으면 군사비가 궁핍한가 10. 일본에 대해 미국 등 기타 列國이 경제봉쇄를 실행할 것인가, 아닌가 11. 무엇 때문에 列國이 중일전쟁에 간섭하는가 12. 이번 사변으로 중국이 敗戰할 것은 명확하지만, 패전 결과 중국은 어떻게 되는가 13. 일본이 戰捷한 결과, 북중국의 5省은 우리 영토가 되는가 14. 사변후 각 금융기관은 점점 대출을 보류하고 있는데, 군비 부족을 알리는 결과인가 15. 사변이 장기화 되면 穀價는 더욱 하락하는가 대체로 중일전쟁 자체에 대한 관심과 우려, 蘇日전쟁의 발발 여부, 세계 열강의 일본에 46) 施政30年史, p.490. 47) 朝鮮總督部 警務局 保安課, 高等外事月報 제2호, 1939.8, pp.4 9. 48) 時局ニ關スル棟居管理局長談話ニ基ク臺灣及朝鮮狀況ノ對比, 時局宣傳事務報告, 1937.

- 54 - 國史館論叢 第94輯 대한 태도,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력, 전쟁으로 인한 물가 등귀와 생활고 등 전쟁으로 인 해 조선인이 지게 될 부담의 정도에 대한 질의로 집약된다. 일제 당국은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조선인에 대한 각종 정책을 구상하고 실시했다. 즉 그들이 조선민중의 皇民 化 의 정도를 가늠하는 자료로 활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좌담회 등의 과정이나 결과가 일제측이 희망 하는대로 이루어지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좌담회의 지도급 인사로서 참여한 조선인조차 일제측의 선전을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 경기도 長湍郡 長道面 胎 封청년단 단장인 鄭重奎(41세, 농업)는 종래 향리에서 일반 민중으로부터 유식자라고 인 정 되어 공직에도 추천되었던 적이 있는 마을의 지도급 인사로서 그의 한 마디 한 행동 은 곧바로 부락민 전체가 신망 했다고 일제측에서도 파악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시국좌담회, 방공좌담회 등에서 오히려 지도자들에게 現下 우리 일본은 표면상 중국 한 나라를 적으로 전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이면에 중 국의 배후에는 구주 열강의 援將정책이 있어서 지금 우리나라(일본을 말함-필자)는 중대 한 비상시에 직면하고 있다 등의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49)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보위원회의 방침이나 각종 기관에서 실시하는 좌담회 등 여론 선전책에도 불구하고, 조선내에서는 전쟁이 진행될수록 영 미에 대한 기대와 의존 도가 높아져 갔다. 조선인의 경우 일제측이 바라는대로 실질적인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을 감내하려는 마음가짐이 굳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극심한 경제적 핍박과 일제 패망 에 대한 희망이 교차되는 속에서 皇民으로서의 자각 이 약화되어 가는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2. 각종 매체의 現況과 宣傳政策 戰時下에서 매채를 이용한 모든 보도 선전은 기본적으로 일제측의 통제와 검열 아래 놓여 있었다. 전쟁과 관련한 각종 유언비어 등이 난무하고 정확한 정보를 가질 수 없었던 민중층은 사실과 다른 인식을 가지기가 쉬웠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제측에서는 이전 시기 보다 조선인에 대한 선전과 여론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천황제파시즘 이 49) 坡警高秘 第623號-1, 靑年團長の造言飛語に關する件, 坡州警察署長, 1939.4.12, 京城地法 檢事局, 思想ニ關スル정報綴, 1939,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MF, No.100-019, pp.242 251. 그는 청년단의 청년단원 선출을 명령받았을 때도 그것을 표면상 철도공사의 出役을 빙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의 敗戰으로 인한 兵員보충책이라면서, 1939년 3월 태봉청년단에서도 2명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청년단원인 李長石, 李光根 등 4명에게 같은 내 용을 이야기하고 일단 전쟁터로 가면 한명도 살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 55 - 데올로기 하에서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명실상부하게 황국신민 으로 양성하기 위해 서는 언론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본 좌담 회나 강연회 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라디오 출판물 등 각종 매체와 유언비어의 단속 등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특히 전시하에서는 朝鮮軍 당국도 직접 보도 선전요강 등을 작성하여 각 기관에 배 포하거나 민중 일반에 대해 직접적인 조사와 통제를 가하기도 하였다. 1940年度 조선군 보도 선전 계획안의 제2항 일반요령 중에서 보면,50) 事變 제4년에서 民心의 이완에 대해서는 특히 國際戰機의 眞相과 東亞에서 帝國의 국제적 지위 약진의 중대기라는 것을 인식시켜 장기적으로 서로 견인 노력이 필요한 까닭을 철저히 이해시킨다. 단 半島民衆 에 대해 시국인식을 깊게 하여 그 奮起를 요하기 때문에 헛되이 帝國의 劣勢를 강조하여 그 신뢰의 念에 동요를 주는 것과 같은 것은 엄중히 경계를 요한다 라고 기본적인 방향 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방향 아래 구체적인 보도선전 사항으로서, ①일반국방관계(22 항), ②군사상 필요한 사항(6항), ③대외관계 사항(5항) 등으로 나누어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하였다. 한편 1938년 4월과 10월 두차례에 걸쳐 전국의 언론기관 대표자 및 편집 책임자를 총 독부로 초청하여, 정부의 성명을 발표하고 총독부의 대책 및 기사 취급 방침 및 대외 선 전요지 등을 說示하는 懇談會를 개최하였다. 또 1939년 7월 부산에서 南鮮 각도에서 발 행되는 신문 통신 잡지의 편집 책임자 및 일본의 山口 福岡縣에 발행소를 둔 大每 福日 關門日日新聞 등 일본 내 유력 신문의 편집 책임자의 회동을 개최 하고, 12월에는 평양 경성 대구 등 각 지방별로 언론기관 편집 책임자를 소집하여 정부의 성명과 총독 부의 取締 방침 및 대외선전의 요지 등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1940년에는 時局에 대응한 여론지도방침을 각도에 시달하였고, 각도에서는 이에 기초하여 지방의 언론기관에 대해 재차 지도하였다.51) 그런데 당시 대중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언론매체의 상황은 극히 열악했다. 따라서 대중의 여론은 지식인, 여론 지도자, 종교 지도자 등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일제 의 선전정책 역시 부득이하게 口頭 커뮤니케이션 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중일 전쟁 당시 라디오 보유자수는 총 11만대 정도였는데 이 중 조선인의 보유수는 4만대에 불과했고 이는 100세대 당 3.7의 비율이었다. 신문은 1944년 9월 당시 총 발행부수가 50) 朝鮮軍 司令部, 昭和15年度朝鮮軍報道宣傳計劃(案), 1940.8.10, 일본육해군성문서 중. 이 계획은 1940년도 보도 선전을 위해 조선군보도선전요강 에 기초하여 外情에 필요하다고 인 정되는 사항에 대해 토론한 것이다. 51) 朝鮮總督府 警務局, 朝鮮出版警察槪要, 1941.5, p.58.

- 56 - 國史館論叢 第94輯 106만부 이상이었는데, 일본인을 포함한 당시 총인구 2,600만을 기준으로 보면 25:1의 비율이지만 조선인은 66.5명당 1부를 구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이 소수의 매체는 일부 계급 계층에서만 향유될 수 있었으므로, 일반 민중들 로 하여금 광범위하게 전쟁상황 등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했던 매체는 바로 戰時유언비 어 라는 風聞들이었다. 즉 대중 여론에 대한 주도권은 매체의 장악이 아니라 대중과 직접 적인 관계 아래 있던 유언비어 등이었고, 이는 일제측에서도 인식하고 있던 바였다.52) 그러므로 실제 대중의 여론 조성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살 펴보았던 시국좌담회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측은 민중층의 유언비어 단속에 더욱 열을 올렸는데, 조선헌병사령부의 육군형법 제99조에 의하면 전시 또는 사변시 군사에 관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는 3년 이하의 禁錮에 처한다 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패망 시까지 유언비어는 줄지 않고 계속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서는 조선인의 일본어 해득율이 높아져 갔고 따라서 신문 잡 지 방송 등의 언론이 상대적으로 대중과 가까와졌던 측면은 있었다. 이 점은 전시하 유 언비어 중 상당 부분이 이들 매체를 통한 정보가 여러 차례 口頭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상승효과를 겪는 것을 볼 때에도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선인의 일본어에 대한 이해 정도 는 1928년에 6.9%, 1933년에 7.8%에 불과하던 것이 전쟁 이후 1938년에 12.4%, 1941년에는 16.6%로 증가하여53) 1942년말에는 약 500만명 정도가 일본어를 해득하였 다.54) 이는 당시 황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던 일본어 교육이 각종 기관과 시설을 통해 적 극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매우 낮은 수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일본 어 교육은 황민화 정책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으로서 실제로 일본어가 보급이 되어야 이를 바탕으로 여타의 정책들, 예를 들어 지원병이나 징병 징용 등이 원활하게 실시될 수 있 었기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라디오방송은 제1방송(일본어)과 제2방송(조선어)이 있었는데, 제1방송은 戰時 의식 의 앙양, 與論의 통일, 국민의 사기 고무 격려, 필승신념의 견지 등을 위해 편성되었고, 제2방송은 일본정신의 앙양, 內鮮一體 의 구현, 시국인식의 철저 를 기할 목적으로 편성 52) 박용하, 앞의 논문, pp.16 17. 宮田節子 역시 일반 대중이 매스미디어의 영향하에 있지 않 았으며 따라서 당국은 국가의 의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또 다른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하였다( 조선민중의 중일전쟁관,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pp.409 412). 53) 京城日報社, 朝鮮年鑑, 각 년도판 참조. 54) 합방 이후 보통학교 졸업자가 약 250만, 당시 재학자가 약 230만, 기타 훈련소 등 수료자 가 35만 정도인데, 사망자 등을 計上하면 약 500만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또 1943년 말 10세 이상 조선인 중 일본어 이해자는 33.7% 정도였다( 總督統治終末期實態(1), 朝鮮近代 史料硏究集成 제1호, 1959.3, 재단법인 友邦協會 조선사료연구회).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 57 - 되었다. 1939년에는 조선어 방송에 대한 대대적인 시설 확충이 도모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인의 일본어 해득율이 급격히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했던 측면도 있었다. 당 시 조선인의 라디오 보급 상황은 아래와 같다. 라디오 보유자는 1940년을 전후하여 급격 히 증가했는데, 경기도 당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쟁 이후 조선인의 경제력이 급 격히 상승한 결과라고도 평가하기도 했다.55) 라디오 보급 상황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조선인 40,257 49,116 76,059 117,085 135,062 139,803 154,960 168,884 전 체 117,838 128,073 167,049 227,573 271,994 277,281 295,033 311,653 출전 : 宮田節子, 조선민중의 중일전쟁관, 日帝末期 파시즘과 韓國社會, p.410 충북에서도 중일전쟁 이후 라디오 청취자 수가 전쟁전에 비해 수십배 증가하여 1941 년 당시 약 3,500명 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배급통제의 강화 등으로 인해 건전지를 구 할 수가 없었고 전등이 없는 벽지에서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어도 청취가 불가능한 상태 였다. 따라서 결국 2,916명으로 약 20%가 감소하여 약 600대의 라디오가 사장되었다면 서 道 당국은 문화 경제상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고 우려하였다.56) 한편 1942년 9월 부터 총독부 체신국에서는 일반인 중 短波 또는 電波 수신기를 소유한 자는 반드시 당국 에 신고하도록 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엄중 처벌한다고 공표하였다.57) 한편 동아 조선이 폐간되기 직전인 1939년 당시 신문의 현황을 보면, 주요 일간신문 으로는 일어판이 85개(222,577부), 한글판이 22개(259,199부)가 발행되고 있었다. 京 城에서 조선일보 와 동아일보 가 각 59,394부, 55,977부가 발행되었으며, 일어판의 55) 經濟警察課, 情報週間展望 제32집, 1941.10.18. 여기서는 경기도의 라디오 보급상황을 아 래 표와 같이 집계하고 있다. 이 통계는 위의 표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상호 비교해 보면 당시 조선인에 대한 라디오 보급의 상당부분은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 도 일본인 조선인 총 계 1937 70,221 41,811 112,032 1938 77,694 51,150 128,844 1939 88,706 78,774 167,480 1940 106,695 115,098 221,893 1941.9 116,423 134,173 250,596 56) 情報週間展望 제34집, 1941.11.1. 57) 每日新報, 1942.9.8.

- 58 - 國史館論叢 第94輯 대부분은 매일신보 58)와 경성일보 가 각 95,939부와 61,976부 발행되었다. 이밖에도 청진의 北鮮日報, 나남의 北鮮日日, 함흥의 北鮮時事, 원산의 원산매일, 신의주 의 鴨江日報, 평양의 평양매일, 경성의 조선신문 과 조선일일, 인천의 조선매 일, 대전의 中鮮日報, 해주의 황해일보, 군산의 군산일보, 전주의 전북일보, 광 주의 광주일보, 목포의 목포신보, 대구의 조선민보, 마산의 南鮮日報, 부산의 부산일보 등이 지방신문으로서 각기 몇천부씩 발행되었다. 이들 신문은 기본적으로 검열과 통제로 인한 삭제 등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심지어 일 제의 어용기관지였던 매일신보 와 경성일보 조차 각기 3건, 4건의 치안방해를 기록하 였다.59) 한편 전국의 일간신문사 대표자로 朝鮮春秋會를 조직하고, 경성을 시작으로 하 여 각지 신문사 및 잡지사 간부 또는 편집책임자와 수시로 간담회를 개최하여 목적 달성 을 위한 협조 연락 을 요망하였다.60) 그런데 위의 신문들 중에서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이 발행하는 신문으로서 허가된 것은 수시로 발행되는 매일신보 의 각 도 호외지뿐이었으며, 잡지 역시 方應謨가 발행하는 월 간지 朝光 (1940.10.15까지)뿐이었다. <조선인 발행 출판물 허가 건수 비교표(출판법에 의한 것)>에 따르면, 1936년에는 2,272건, 1937년 2,383건, 1938년 2,054건, 1939년 2,749건씩 허가되던 것이 1940년에는 1,604건으로 대폭 감소되었다. 이렇게 언론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 대해 이를 당국의 부당한 언론 압박 이라고 보는 여론 역시 존재했다. 하지만 일제측에서는 조선인 발행 신문이나 한글신문의 논조는 곧장 조선대중들에게 반 영되어 그 통치상 미치는 영향 또한 감당할 수 없어서 단속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주 장했다. 총독부측에서는 한글신문이 비록 중일전쟁 발발 당초보다는 180도 전환한 셈이지만, 여전히 민족적 편견에 기초한 것 혹은 일본정신과 相容하지 않는 筆致의 자취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예를 들면 조선인 創氏문제에 대해서도 당초에는 그 게재를 기피하고 싫어 하여 특히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에 비해 한층 소극적이었고 또 독자의 질문회답란에도 忠과 孝는 어느 것이 중요한가 등의 愚問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해답해도 반대로 八紘一 宇 의 의의에 대한 질문에는 전혀 답을 게재하지 않는다 고 불만을 토로했다. 유럽의 전쟁 발발에 대해서도 동아일보에 英 佛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한 것, 또 여전히 미국이 세계의 경시총감격이라고 말한 것 등의 筆致는 유독 사설만이 아니라 단평 등에서도 그 58) 종래 경성일보사에서 발행되던 每日申報 를 每日新報 로 개칭하여 완전한 총독부 기관지로 정착시켰는데, 기구를 확충하고 紙面을 쇄신하여 시국하 조선인의 지도 계몽에 노력 하였다 ( 施政30년사, pp.497 498). 59) 朝鮮憲兵隊 司令部, 昭和14年朝鮮治安關係一覽表, 1940.11, 일본육해군성문서 중. 60) 施政30年史, pp.497 498.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 59 -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면서, 戰況이 獨 伊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논지를 전환시켰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에다 물자난, 일어 보급 등을 이유로 1940년 8월 10일 동아 조선 양지를 폐간시켰다.61) 그러면 당시 신문 잡지 등을 포함한 출판물이 조선인 각 계급 계층에 얼마나 배포되 고 있었는가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다음 표를 통해 확인해 보자. <계층별 출판물 배포 상황표(1940년 말)> 종교 관공리 농공상 양반 계 유생 관계자 노동자 부녀자 기타 정치 일본인 26,432 11,798 8 725 982 829 5,540 46,314 법률 조선인 26,754 10,703 2,112 1,525 1,113 450 4,058 46,715 사회 일본인 11,868 6,311 484 655 2,037 1,398 3,910 26,663 사상 조선인 11,750 11,938 2,595 2,555 1,866 910 3,727 35,341 재정 일본인 21,706 22,191 178 911 1,558 1,383 4,363 52,291 경제 조선인 14,874 26,507 3,398 1,478 2,001 1,077 6,940 56,275 과학 일본인 6,850 13,254 105 244 3,964 995 4,272 29,684 산업 조선인 7,025 16,694 2,231 534 2,393 634 4,163 33,674 교통 일본인 6,922 4,562 63 110 952 415 2,697 15,720 통신 조선인 6,013 5,405 551 343 964 309 3,328 16,913 국방 일본인 10,723 10,001 294 330 3,340 1,736 15,466 41,892 이민 조선인 8,939 10,925 1,150 805 3,433 4,850 9,899 40,001 78,081 43,482 2,174 6,738 11,130 53,831 102,335 297,771 기타 일본인 조선인 146,477 81,380 19,291 14,168 27,464 25,667 109,151 423,598 162,581 111,949 3,306 9,723 23,963 60,587 138,586 510,335 계 일본인 조선인 221,832 163,552 31,428 21,408 39,234 33,897 142,266 652,517 총계 384,413 275,501 34,734 31,121 63,197 94,484 280,852 1,162,852 출전 : 朝鮮總督府 警務局, 朝鮮出版警察槪要, 1941.5, pp.32 35 총계 93,029 62,004 108,566 63,358 32,633 81,893 721,369 1,162,852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인이 510,335명, 조선인이 652,517명으로 조선인이 앞서지만 실제 인구를 고려할 때 조선인에 대한 배포 상황은 매우 열악한 편이었다. 조선인 중에서 도 대체로 관공리나 농 공 상업을 경영하는 사업주측이 대부분이었고 거의 경성 등 일 부 도시 중심으로 반포되고 있었다. 따라서 출판물이 농 산 어촌의 민중층에게까지 닿 기는 어려웠으며, 또 당시의 문맹률 등을 고려할 때 이들에게 출판물은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웠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출판물의 부분적인 내용은 유언비어 등 풍문을 통해 민중들에게는 주로 口頭로 전달되었다. <보통출판물 행정처분 건수 年次別 표>에 따르면, 치안방해 건수가 1931-36년까지는 61) 朝鮮總督府 警務局, 朝鮮出版警察槪要, 1941.5, pp.7 16/p.32.

- 60 - 國史館論叢 第94輯 25-49건 정도를 유지하다가 1937년을 기점으로 매년 74건, 28건, 87건, 71건으로 격증 하였다. 풍속교란 건수 역시 1937년 이전에는 거의 없다가 1937년 이후에는 매년 4-7 건을 기록했으며, 특히 1937년에는 54건에 달했는데 이것은 전부 일본인에 의한 것이었 다. 조선인에 의한 치안방해 건수는 장고봉 노몬한 사건과 극심한 가뭄으로 사회적 혼란 이 뒤따른 1939년에 격증하여 68건을 기록했으며, 그 해에는 1930년대에 유일하게 조선 인에 의한 풍속교란 건수가 4건이나 발생하기도 했다.62) 심지어 소년조선일보 에 쓴 아 동의 작문조차 아동 작품인데도 명랑하지가 않고 내용이 온건하지 않다고 하여 치안방해 명분으로 차압 처분하기도 했다.63) 외국어로 된 신문이나 출판물의 경우도 反日的인 기사와 逆선전적인 기사가 끊이지 않 아 검열이 강화되었는데, 주로 영문 중문 노문 등이 많았다. 정치 경제 재정 등 다각 도로 일본내의 상황이 불안하다는 논조와 일본의 국민성이나 일본황실의 권위를 모독하 는 것이 수시로 발견되었다. 특히 1939년 9월 일본이 獨 伊의 추축국측에 가담하자 이 러한 경향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논조를 보면, 먼저 일본의 新體制 문제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幕府制度로의 복귀(英 文)라거나 일본의 南進침략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향후 일본외교는 곤란에 빠져 남진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露文)는 것이었다. 獨 伊 日 삼국의 군사동맹에 대해서는 전쟁 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 중일전쟁으로 곤란해진 일본은 결국 獨 伊의 희생만 될 것이 고 일본군벌은 결국 일본국민을 파멸로 이끌 것(英文)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이 泰國을 사주하여 泰 佛 印 분쟁이 발생하고 美 日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고(英文), 삼국동맹이 라는 것도 일본이 신속히 태평양의 영 미 영토를 공략하고 독일이 功英을 용이하게 하 기 위해 성립시킨 것(中文)이라고 선전되었다. 한편 식민지 문제, 특히 조선통치와 관련하여 에드가 스노우의 日米戰論 ( 아시아 1 월호, 제16권 제1호, p.120)에는 東亞에서 약소 諸식민지의 민족해방 및 민주주의 국가 군에의 편입을 要한다 라고 주장하면서 조선민족의 해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또한 일 본 국민 내부의 反軍的 경향을 논하고 2년 이내에 중일전쟁의 정리가 이루어지면 일본에 는 반드시 內亂이 일어날 것이고, 일본이 白人의 노예 아래 신음하는 諸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으면서도 東亞共榮圈 확립의 구체화로서 조선민족과 만주민족을 해방하지 않는 것 62) 앞의 조선출판경찰개요, p.60. 63) 앞의 조선출판경찰개요, p.110. 이것은 한 아동의 米 라는 작문인데, 米라는 것은 실로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작년은 흉년으로 우리는 米가 부족하여 크게 곤란했다. 특히 우리 인천에서는 이 때 돈을 가지고도 쌀을 사기가 매우 어려웠다. 1년 흉년으로 이 같이 쌀을 사기가 곤란한데, 올해도 이렇게 비가 내리지 않아 큰일이라고 어른들은 매일 심려 하고 있다 라는 내용이다.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 61 - 은 모순 (英文, 자 상하이 이브닝포스트 1.14, 제64권 제12호)이며, 조선민족은 專 壇的인 총독정치의 노예로 되어 있지만 곧 해방될 것 (英文, 월트 아웃룩 3월호, 조선 인 姜鏞乙의 논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64) 일반 단행본 출판물의 경우에도 검열과 단속 뿐만 아니라 여론 선전책 차원에서 추 천 권장하는 서적들만 발행되었다. 중일전쟁 초기만 해도 일본도서관협회에서 추천한 서 적은 東洋文化史槪說 (上野菊爾, 1937, 淸敎社), 處世信念 (大倉邦彦, 1937, 대창정신 문화연구소), 國家構造論 (眉高朝雄, 1936, 岩波書店), 商品の科學 (白崎享一 佐久間 哲三郞, 1937, 國勢社), 躍進支那を診る (神田正雄, 1937, 학교미술협회출판부), 日本 文化と佛敎 (辻善之助, 1937, 대일본도서주식회사) 등 비교적 다양한 듯했지만,65) 이후 에는 대체로 파시즘적 국가주의적 성격의 서적들만 권장되었다. 이 영향으로 인해 당시 청년 학생층이 주로 합법적으로 읽고 감동을 받는 서적이 바로 히틀러나 뭇솔리니의 책 들이었던 것이다.66) 중일전쟁 발발 이후 총독부측에서 발행하는 선전용 책자의 경우 각 행정단위를 매개로 배포되고 그 감상이 토론되기도 했는데, 官報의 부록으로 월 2회 발행되는 通報 (매월 1일과 15일 발행)와 지도층의 시국인식 자료로서 海外論評 이 발행되었다. 이밖에 조선 군사연맹에서도 蘇支不可侵條約に對て 등을 발행했으며, 조선어로 된 支那事變과 조선 인의 각오 (文書課 발행)는 여타 서적이 1-2만부 정도 발행되는 것과는 달리 50만부나 발행 배포되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9호당 1권 정도 비율로서 중일전쟁에 대한 일제측 의 선전 입장을 담은 조선인의 필독서였다. 물론 皇國臣民의 서사 는 학무국에서 110만 부나 발행 배포했으며, 이후 청년용 황국신민의 서사 2 를 별도로 20만부 인쇄 배포 하기도 했다.67) 이밖에 각종 좌담회 등에서는 영화 연극, 종이연극 등을 수시로 상영했는데, 대표적으 로 영화 銃後의 조선 이나 종이연극 支那事變과 銃後의 半島, 金小佐의 奮戰, 生業報國 등이 있었다. 또한 각 지방의 시국인식 자료로서 뉴스사진 도 제작하여 전국 2,370개 邑 面에 일제히 배부했으며, 이후 다시 학교 등에도 배급했다. 별도로 軍歌 民謠 등을 제 작 보급하여 각종 傳承報告旗行列이나 戰勝축하행사에 조선민중을 동원했다. 총독부측의 64) 앞의 조선출판경찰개요, p.67. 65) 朝鮮讀書聯盟, 讀書 제1권 6호, 1937.11, pp.49 60. 66)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전시파쇼체제기(1937-45) 청년층의 인식과 활동 - 독립 및 국가건 설 준비 문제를 중심으로 ( 한국근현대청년운동사, 풀빛, 1995) 및 일제말 전시파쇼체제하 학생민족운동의 전개와 민족주의적 성격 ( 국사관논총 제67집, 1996)을 참조. 67) 朝鮮總督府 官房 文書課, 朝鮮時局宣傳事務槪要 (조선중앙정보위원회 활동상황 및 同會 附 議 사항), 1937.11.20, 時局宣傳事務報告, 1937.

- 62 - 國史館論叢 第94輯 중일전쟁 관련 경비 예산 중 이러한 작업에 소요된 선전비가 50,180원에 달했다. 물론 국민정신총동원 관련 諸費는 166,530원이 별도로 집행되었다.68)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매체에 대한 단속과 검열은 더욱 강화되었다. 1940년 1월에는 制令 제1호로 조선영화령 을 공포하여 조선 내 영화의 제작 배급 상영은 모두 일본 내 의 영화법에 의하도록 규정하였다(일본 내 영화법 제19조는 제외).69) 동아 조선 등 한 글신문이 모두 폐간된 상태인데도 여타 신문에 대한 기사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예 를 들어, 1941년 2월 23일에는 육군특별지원병훈련소 생도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 일제측은 당국의 발표 이외에 일체 신문에 게재하지 말 것을 각 신문사 에 경고하였다. 물론 사상사건이 발생한 경우는 당연히 신문에 게재할 수 없도록 했 다.70) 일본 내에서도 일반 신문 등의 기사는 안녕질서 관계 로 구체적인 단속을 받았는데, 예 를 들어 조선인 노동자의 內地 渡航에 관한 정부 당국의 의향에 관한 것(1939.6.3), 支那에서의 회교도의 反蔣防共운동에 관한 사항은 軍 당국 발표 이외에 일체 이를 신문 지에 게재하지 말 것(1939.3.20), 조선총독 및 대만총독의 경질에 관한 기사는 사전에 이를 신문지에 게재하지 말 것(1940.10.31), 獨蘇間의 분쟁에 관해 帝國이 채택할 방 침 및 조치에 대해서는 당국 발표 이외에 이를 推知하는 듯한 사항 및 이에 관련한 의견 이라 할지라도 일체 신문지에 게재하지 말 것(1941.6.22), 국민정부에 대한 우리의 차 관 공여에 대해서는 당국 발표 이외에 일체 신문지에 게재하지 말 것(1941.6.27) 등의 방침이 내려졌다.71) 이러한 통제와 단속 외에도 일본 내에서는 徵用 조선인 등을 대상으로 일제측이 필요 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 매체를 이용하여 적극적인 선전작업이 행해졌다. 예를 들 어 1944년에는 징용 조선인이 계약기간 2년 만료로 조선내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일본 정부는 그 연장을 위해 각종 방법을 동원하여 선전하였다. 그 한 예로서 1944년 5월 20 일 동경방송에서는 이를 소재로 징용에 대한 조선인 3명의 반응을 劇化하기도 했다. 1명 은 징용을 기다리다 못해 노동봉사를 지원하고, 또 1명은 처에게 일을 맡기고 훌륭한 일 본인으로서 그의 일을 완수했으며, 나머지 1명은 자식이 위독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 선에서 태어났다해도 훌륭한 일본인이다. 그러므로 일본 臣民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 다 면서 徵用에 응한다는 내용이었다.72) 68) 앞의 朝鮮時局宣傳事務槪要 중. 69) 施政30年史, pp.498 499. 70) 朝圖秘 第502號 新聞記事警告に關する件,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1941.2.23. 예를 들어, 1941년 1월 원산서에서 취조중인 사상사건에 대해 신문기사의 통제를 가하였다. 71) 內務省 警報局 檢閱課, 主要ナル記事編輯上主義事項調, 1942.1.10.

일제 식민지 지배 문화정책의 실체와 성격 - 63 - 이상에서 조선인에 대한 여론 선전작업의 역할을 수행했던 각종 매체의 현황을 살펴 보았다. 당시 조선민중의 한글 및 일본어에 대한 문맹율이나 라디오 등 전파 매체의 수 적 지역적 제한 등을 고려했을 때 실제로 얼마나 민중의 여론 선전책으로서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대체로 좌담회 등에서의 영화나 연극 내용, 황국신민의 서 사 와 같이 대량 유포를 통해 강제로 암기시키는 세뇌 작업 등을 제외한다면 일상적인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이 가령 신문이나 잡지, 방송, 강연 등을 통해 부분적인 전쟁 소식이나 정책 변화의 소식을 접하더라도 이를 순수하게 믿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Ⅳ. 맺 음 말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은 기본적으로는 식민지 사회구조 전체를 안정화 시기려는 데에 있었다. 이는 1910,20년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적 수탈구조가 어느 정 도 체계화되었다고 판단한 일제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새로운 단계 로 접어들자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즉 조선 인과 조선문화를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인간형과 그 문화로 성숙시켜 식민지화를 문화 적 사상적으로 완성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그 실질적 방책으로서 일본으로 의 同化 라는 방향을 구체화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본으로서는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장 기적 단계적 과제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이 장기 국면으로 돌입하고 위로부터의 전시파시즘 정책이 강행되면서, 일제측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식민지 안정화 라는 美名보다는 원활한 전쟁 수 행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의 효과적인 수탈과 동원이라는 측면이 보다 중요해졌다. 결국 1930년대의 식민지 안정화정책은 궁극적으로는 1931년 만주사변 을 시발로 1937년 이 후 확대되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 작업으로 귀결되었다. 현상적으로 그 것은 1930년대 전반기의 內鮮融和 단계를 넘어서서 內鮮一體 라는 명분 아래 同化 정책, 즉 皇國臣民化 정책을 적극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사회구조가 일본제국주의의 침 략적 군국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발판으로서만 기능하도록 하는 가운데 식민지 전시파시즘체제 의 구축이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일제의 문화정책 역시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배경에서 진행되었다. 즉 문화정 72) E.와그너, 日本における朝鮮少數民族(1904-1950) (현대일본조선관계사자료 제1집, 1975, 湖北社) pp.47 48.

- 64 - 國史館論叢 第94輯 책의 성격 자체가 조선인을 진정한 황국신민 으로 양성하여 침략전쟁에 효율적으로 동원 하기 위한 기재로서의 성격만을 허용했고 또 실제로 그것만이 가능했다. 따라서 이 시기 문화정책은 일반적인 근대 국가의 문화정책 방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오히려 천 황제 파시즘 을 모토로 한 극단적인 사상통제와 강력한 對民 선전 및 여론 조성 등 군국 주의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세뇌 작업으로만 나타났다. 이 점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 문 화정책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 본국이 아니고 완전한 일본국민이 거의 없는 식민지 에서 이러한 對民 이 데올로기화 작업을 통해 전시파시즘 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일제의 모든 정책 들이 노렸던 것은 조선인의 國體 관념, 天皇에 대한 충성,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 강요 등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단일한 국가를 유지하면서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모색한 경험 을 지닌 조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으로의 同化 라는 것은 자신들의 전통과 역사, 미 래를 총체적으로 부정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으로 친일화 한 몇몇 사람들과 현상적으로 순응 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이 존재한 다고 해서, 당시 조선민중 일반이 일제측이 목표로 한 皇國臣民 즉 완전한 일본국민 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개인적 집단적 희생만을 강요하고 아무런 대가나 보답이 주 어지지 않는 식민지의 전시파시즘 하에서, 다수가 잠재적 침묵자 로 존재할 수는 있어도 진정한 동조자나 협력자 가 될 수는 없었다. 바꿔 말하면 잠재적 침묵자 는 경우에 따라 저항의 주체 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식민지 조선의 상황만을 놓고 보면, 일제의 침략전쟁과 황민화 정책은 무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일본측 역시 8 15 해방 이후 식민통치에 대한 자체 평 가와 반성에서, 결국 종합적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皇民化 정책은 실패 했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同化主義 에 기반한 이러한 정책의 실패를 善意의 惡政 이라고 묘사하 기도 했지만,73) 善意 라는 측면은 日本 自國의 입장에서 나온 발상이며, 조선인의 입장 에서 본다면 결국 惡政 이 가져다 준 현실적 고통과 조선의 상대적 낙후성만으로 받아들 여졌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73) 外務省 調査局, 朝鮮統治の性格と實績 - 反省と反批判, 1946, p.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