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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의 西學思想 崔 奭 祐* Ⅰ. 머 리 말 Ⅱ. 西學의 전래와 이해 Ⅲ. 西學思想의 형성 1. 西器 수용과 인식의 변모 2. 西敎 인식과 朝鮮敎會의 설립 Ⅳ. 西學思想의 分化 Ⅴ. 맺 음 말 西學思想의 연속성 Ⅰ. 머 리 말 조선후기 사회에 漢譯西學書1)가 전래된 것은 17세기 초로 16이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 1552 1610)가 서양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북경에 들어간 직후였다. 이렇 게 볼 때 조선 사회에서는 중국과 거의 같은 시기에 西學2)을 접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이후 서학에 대한 이해는 중국에 훨씬 못 미치게 되었고, 조선의 전통사회 안에 서 언제나 한계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서학 전래 당시의 학문 사상적 분위기가 小中華論에 입각한 尊明排淸의 北伐論 내지는 崇儒闢異論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으므로 이 를 극복하는 터전 위에서 서학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한계성을 뛰어 넘을 수는 없 었다. 다만 서학 자체가 脫封建 내지 近代化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 韓國敎會史硏究所 所長. 1) 17세기 초 이래로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일체의 漢文 서적을 일반적으로 漢譯 西學書라 지칭하고 있다(李元淳, 朝鮮西學史硏究, 一志社, 1986, p. 13). 혹자는 이를 東傳 漢文西學書(金玉姬, 西學의 受容과 그 意識構造 韓國史論 1, 1973) 또는 漢文西學書(琴 章泰, 東西交涉과 近代韓國思想의 趨移에 관한 硏究, 成均館大, 1978)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 저작 내용이 선교사들의 탐구 결과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서양 서적의 한문 번역 또는 편찬 물에 가까우므로 한역서학서라 하는 것이 의미상 타당할 것이다. 이 밖에도 그 내용을 분류하여 漢譯西敎書 漢譯天文書 漢文敎理書 등의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2) 조선 후기에는 서양의 종교(천주교)와 윤리, 그리고 과학 기술 역법 지리 등을 통칭하여 西學 또 는 邪學이라 부르거나, 혹은 전자만을 지칭하여 天學 天主學 洋學 洋敎 邪敎 西敎 등으로 표현하 였다. 그러나 西學을 통칭하는 경우에도 전자와 후자에 대한 견해는 차이가 있었고, 실제 내용적 으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明末 李之藻(我存 ; 1565 1630)가 天學初 凾 을 편찬하면서 한역서학서를 理編과 器編으로 구분한 예를 바탕으로 西學을 西敎=天主敎 ; 서양의 종교 윤리적 측면 과 西器 ; 서양의 과학 기술 지리 등 器的 측면 으로 분류하였다.

- 190 - 國史館論叢 第22輯 인식은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서나마 명맥을 유지해 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西學思想은 조선후기 일부 지식인들의 新文化 수용 과정에서 배태된 하나의 인 식 형태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학 안에 담겨져 있는 이질적 가치 체계 즉 西敎(天主敎 신앙 윤리) 문제와 관련하여 수용이냐 아니면 배척이냐 라는 상반된 결과를 중 시하도록 하였으며, 정치 대외적 측면과 관련하여서는 朋黨政治論이나 民族自主論의 이해 과정 속에서 단편적으로 그 사상이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서학 안의 器的 측면, 즉 西器(서양의 과학 기술 천문 지리)의 이해 과정조차도 올바로 평가되지 못한 점이 있었다. 물론 서학 사상에 대한 종래의 그릇된 평가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재평가되어 왔고, 그 결과 宣祖 말 이래 19세기 후반까지 약 250여 년간에 걸쳐 전개된 서학 사상의 흐름을 일관된 맥락에서 조명하려는 노력도 있게 되었다.3)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조선후기 지식인 들의 사상체계 속에서 西學思想이라는 하나의 인식 형태를 찾아 내고, 그러한 과정에서 조 선후기 사상계의 흐름을 구명하는 데도 일정한 시사를 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서학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아직도 새롭게 조 명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서양의 선진 문물과 관련된 西器的 요소, 그리 고 天主敎 신앙 체계가 불가분의 연관성 아래 조선의 위정자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철저 히 배격됨으로써 新文化 수용 운동을 저해했다는 사실은 여러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 이다. 또 천주교 신앙이 오랜 박해 속에서도 敎勢를 확대해 나간 사실과 함께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구명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에서 서학 안의 두 요소인 西器와 천 주교의 관계가 적어도 19세기까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이른바 천주교 迫害期 를 서학 사상의 단절로 보려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 조선후기의 역사 조류가 탈봉건 탈성 리학 운동을 바탕으로 한 近代志向的인 것이었다면,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출발한 서학 인 식은 보다 근대적인 조류인 開化思想의 한 요소로 자리잡기 전까지 일련의 연속성 아래 이 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서학 사상의 전개를 서학의 이해 서학 사상의 형성 서학 사상의 분화 서학의 재인식 의 단계로 파악하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 사상의 일면을 조 명해 보고자 하였다. 다만 본 논지의 성격상 이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일일이 검토하지는 못하였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구명되어야 할 세부 내용에 대하여는 문제의 제기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이 점 여러 제현들의 보완 연구가 있기를 기대하며, 본고의 미흡한 점에 대해 서도 아울러 질정이 있기를 바란다. 3) 이러한 연구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李元淳 琴章泰의 저서를 들 수 있다.

Ⅱ. 西學의 전래와 이해 - 191 - 조선 사회와 西學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宣祖 말엽인 17세기 초였다. 이미 밝혀진 것처럼, 1593년에 日本 예수회의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 : 1551 1611) 신 부가 왜군의 從軍 신부로 조선에 건너와 활동한 것이나 그 후의 조선 전교 시도를 서학(특 히 천주교)의 조선 전래와 관련짓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하겠다.4) 분명히 조선 서학의 전래는 조선후기의 일부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던 新文化에 대한 욕구 내지는 華夷論 尊明 排淸 의식의 극복과 北學에 대한 관심, 조선 사신들과 명말 청초의 학자들 및 서양 선교사 들과의 만남 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학의 조선 전래의 서막은 세계지리 인식, 특히 서양 歐羅巴 의 존재 파악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李睟光(芝峰 : 1563 1628)의 芝峰類說 에 따르면, 1603년(선조 36) 李光庭과 權憘가 중국에서 가져와 홍문관에 전한 歐羅巴國輿地圖 (1건 6폭)를 당 시 부제학이던 이수광 자신이 보고 그 정교함에 감탄한 글이 나오는데,5) 이것이 서학 전래 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 구라파국여지도 는 곧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 竇)가 만든 山海輿地全圖 의 증보본인 坤輿萬國全圖 로, 그가 북경에 진출한 다음 해인 1602년(萬曆 30)에 李之藻가 판각한 것이었다.6) 그러므로 명말 북경에서 서학이 전 파되기 시작할 무렵에 조선에도 그 일부 내용이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4) 세스폐데스 신부의 활동과 조선 전교를 관련지어 설명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山口正之, 朝鮮西敎史 (雄山閣, 1967). J.G. ルイズデメデイナ, 遙かなる高麗 16世紀韓國開敎と日本イエズス會 (近藤出版社, 1988). 朴哲, 예수회 신부 세스뻬데스 한국방문 최초 서구인 (서강대학교 출판부, 1987). 반면에 세스페데스 신부와 천주교의 조선 전래를 관련지은 데 대해 논박한 연구들은 아래와 같다. 拙著,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pp. 8 9. 李元淳, 壬辰 丁酉倭亂時의 朝鮮俘虜奴隸問題 倭亂性格一貌 ( 邊太燮博士華甲紀念 史學論 叢, 一志肚, 1985). 또 李元淳은 メデイナ(Medina)의 저서 내용을 분석하여 그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기도 하였다 ( 교회와 역사 165, 1989.2, pp. 4 12). 한편 천주교의 조선 전래 시도와 관련하여 예수회의 Vilela 신부(1565년경), 도미니카회의 Juan 신부(1611년경), 權 빈첸시오(일본명 : 嘉兵衛, 1614년 이후) 수사 등 일본 교회의 노력, 그리고 徐光啓(1620년경), Antonie 신부(1650년경), Noel 신부(1703년경) 등 중국 교회의 노 력을 중시하기도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고 하겠다. 5) 李睟光, 芝峰類說 권2, 外國조. 6) 17세기 이래 조선에 전래된 세계지도와 그 영향을 논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船越昭生, 朝鮮におけるマテオ リツチ世界地圖の影響 ( 人文地理 제23권 2호, 1971). 金良善, 明末淸初 耶蘇會宣敎師들이 製作한 世界地岡 ( 梅山國學散稿, 崇田大博物館, 1972). 李龍範, 中世西洋科學의 朝鮮博來 (東國大出版部, 1988). 다만 이들 중 船越昭生과 金良善은 지봉유설 의 내용에 있는 馮寶寶를 利瑪竇의 오기로 보고 그 세계 지도를 坤輿萬國全圖 로 파악하고 있는데 반해, 李龍範은 馮寶寶를 중국에 와 있던 무명의 선교사로 이해하고 곤여만국지도 가 이 무렵에 조선에 전래된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 192 - 國史館論叢 第22輯 한편 지봉유설 에서는 세계지도 외에 리치가 저술한 天主實義 와 交友論 (원문 에는 重友論이라 기록하고 있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7) 이 중에서 특히 천주실 의 는 훗날 조선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천주교 호교서였다. 그러나 이들도 이수광 자신이 가져온 것 같지는 않고, 다른 사람이 전해 준 책을 읽은 것 같다. 그가 북경을 다녀 온 것은 1590년(선조 23) 1597년(선조 30) 1611년(광해 3) 등 세 차례이지만, 이 중 서 학에 접할 수 있는 시기는 1611년의 사행 때 뿐이다. 다만 1611년의 사행 때도 그 자신이 서양 선교사와 접촉했다거나 혹은 서학 관계 서적을 전래했다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다.8)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서양 문물을 접하고, 특히 천주교를 최초로 조선에 소개 한 사람은 許筠(蛟山 : 1569 1618)이라 한다.9) 그는 1597년 1614년 1615년(광해 7) 등 전후 세 차례에 걸쳐 북경에 다녀 오는데, 후의 두 시기에 모두 서학과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이미 마테오 리치가 사망한 뒤이지만, 그의 저서들이 널리 퍼져 읽혀지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균 자신의 기록에는 북경에서 서학을 접한 사실이나 그 관련 서적을 조선에 들 여온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1606년 정월에 종사관으로 중국의 사신 朱之蕃을 맞이 하였을 때의 기록인 丙午紀行 에 하물며 이제 천하가 한 집안이고 四海가 모두 형제인 데 누가 中國에서 태어난 것을 스스로 자랑할 수 있겠는가 10)라는 朱의 말이 있음을 볼 때 종래의 華夷的 세계관에서는 이미 벗어나고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또 閑情錄 에 갑 인 을묘 두 해에 일 때문에 재차 북경에 갔을 때, 집안 재물을 내어 서적을 구입했는데 거 의 4,000여 권이었다 11)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가 1614년과 1615년에 구입한 서적 가운데 한역 서학서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허균과 동시대인이자 그보다 선 배인 柳夢寅(於于堂 : 1559 1623)이 허균이 중국에 도착해서 그 지도(마테오 리치의 지 도)와 偈十二章 을 얻어 왔다 12) 하였고, 洪時濟의 訥菴記略 에도 광해군 때 허균 7) 芝峰類說 권2, 外國조. 8) 다만 이수광이 1597년의 사행에서 安南國 사신과 교제하고, 1611년의 사행에서 琉球 暹羅國(泰 國) 사신과 교류한 사실, 그리고 지봉유설 에서 佛浪機國(葡萄牙) 永吉利國(英國)에 대해 소개 한 사실은 그의 지리 인식과 서양 인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는 盧禎 植, 芝峰類說에 나타난 地理學的 內容에 관한 硏究 ( 大邱敎育大學論文集 4, 1969) 참조. 9) 朴趾源, 燕岩集 書, 答巡使書조, 野乘 仇羅婆之國 有道曰伎利但者 方言事天也 有偈十二章 許 筠之使中國 得偈而來 然則邪學之東 蓋自筠而倡始矣 顧今邪學之輩 自是筠之餘黨也. 그러나 박지원의 이 기록은 다음의 본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柳夢寅의 기록에 자신의 견해를 첨부한 것인 듯하다. 10) 許筠, 惺所覆瓿藁 丙午紀行. 11) 許筠, 閑情錄 凡例. 12) 柳夢寅, 於于野談 西敎조. 한편 偈十二章 을 12端祈禱文 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柳洪烈, 한국천주교회사 上, 가톨 릭출판사, 1962, p. 54), 찬미가 12章 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河聲來, 天主歌辭硏究, 성 황식두루가서원, 1985, p. 46), 偈의 의미가 찬미하다 는 뜻은 있으나 당시의 여러 정황에서 볼

- 193 - 이 七克 을 구입하여 왔다 13)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가 중국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한역서학서를 구입하여 조선에 전래했다는 사실은 일단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여기서도 허균이 천주교 조선 전래의 창시자였다는 朴趾源 安鼎福의 기록에는 여전 히 의문이 남는다. 서양과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세계지도 등에 대해 이수광 보다도 정 확한 논평을 남긴14) 유몽인 또한 1609년(광해 1)에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 때 이 미 서양 문물에 접하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허균에 앞서 이광 정 이수광 유몽인 등이 서학 내용의 일부를 알고 있었지만, 훗날 역적으로 참수당한 허균에 게 특히 서학 전래의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박지원이 천주교를 邪學이라 하 면서 이 사실을 기록한 점도 그 뒷받침이 된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거론한 사람들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서학과 접촉하고 이를 이해하기 시작한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과 서학과의 만남은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나 偈十二章 칠극 천주실의 교우론 등 일부 서학관계 문물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이에 대 한 깊은 관심과 이해에까지 이를 수는 없었다. 이 점은 이수광이 기존에 이해하고 있던 지 리 지식과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서양이나 그 世界에 대한 설명 이상의 내 용이 지봉유설 에 나타나 있지 않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15) 혹자는 허균이 천주교를 신봉한 최초의 조선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6) 그러나 칠극 偈十二章 등이 천주 교 교리를 설명한 한역서학서라 하여 허균이 천주 신앙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이를 신앙으 로 수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훗날 李植(澤堂 : 1584 1647)이 허균의 말 가운데, 남녀 정욕은 天이요, 윤리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天은 또 성인보다 한 등급 높으니 나 는 天을 따르되 감히 성인을 따르지는 않겠다 는 내용을 지적하여 異端邪說이라 하였다.17) 그러나 남녀 정욕은 天 이니 天은 성인보다 한 등급 높다 라고 한 것을 가지고, 또 칠극 을 전래하였다 하여 이를 천주교의 교리 설 명이라거나 천주교 수용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 이,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서양 세계를 알고 華夷的 세계관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이 인 식의 변모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점은 이수광이나 유몽인의 경우에 때는 기도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여러 漢譯西學書와의 대비 검토가 요구된다. 13) 洪時濟, 訥菴記略 (切頭山殉敎者紀念館 소장본) 7b. 이 자료에 대하여는 趙珖,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高大民族文化硏究所, 1988) p. 10 참조. 14) 柳夢寅, 於于野談 西敎조. 15) 李睟光, 芝峰類說 권2, 外國조. 16) 柳洪烈과 河聲來가 이 경우에 속한다. 주 12) 참조. 17) 李植, 澤堂別集 권15, 雜著, 顧嘗聞其言曰 男女情慾天也 倫紀分別聖人之敎也 天且高聖人一等 我則從天而不敢從聖人 其徒誦 其言 以爲至論 此固異端邪說之極致.

- 194 - 國史館論叢 第22輯 도 마찬가지였다. 곤여만국전도 를 보고 그 내용을 이해하였다면 그 서문에 있는 地形 은 본래 圓珠이다 라는 설명이 周髀算經 이래의 天圓地方 인식 즉 中華主義的 세계관 을 벗어나게 하는 데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수광은, 그 지도를 보건대 심히 정교하고, 특히 西域이 상세하다. 중국 지방, 우리나라 8도, 일본 60주에 이르러는 지리의 원근 대소가 섬세하여 빠트림이 없다. 이른바 구라파국은 서역에 있 는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과의 거리가 8만여 리나 된다. 地中海는 이것이 천지의 중앙에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18) 고 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힌 사실과 함께 서양의 지리지식이 뛰어남을 소박하 게나마 표현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이수광과 유몽인이 천주실의 를 통하여 미흡하게나마 천주교 교리를 이해 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의미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천지 창조 영혼 불멸 천당 지옥설 천주 강생론 敎化皇과 不婚 등 천주교의 기본 교리와 윤리가 이미 조선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이해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19) 뿐만 아니라 허균이 전한 한역서학서를 볼 때 그 역시 이 내용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유몽 인만이 천당 지옥설과 不事婚娶의 태도를 惑世之罪로 파악하고 있었다.20) 이처럼 17세기 초에 이루어진 서학 이해는 새로운 지리 인식과 천주교 교리 파악 등 초보적인 단계에 지 나지 않았으나 이미 천주교 신앙은 전통적인 인식 체계와 갈등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는 이후 약 1세기 간에 걸쳐 조선 지식인들의 서학 이해가 깊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의 내적 필요성에 따라 이를 적극 수용하려는 노력도 있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학 전래의 다음 단계는 보다 적극성을 나타내게 되며, 이때 전래된 것들은 주로 천문 역 산서, 과학 기술서 등 西器的인 내용들이었다. 앞서의 과정을 통해 赴京使行員들은 이미 明朝 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존재와 서학의 유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21) 그 중 일부가 직접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고 서학 관계 서적 문물을 조선에 가져 올 수 있었다. 우선 1630년 陳奏使로 북경을 향해 떠난 鄭斗源은 山東省 登萊에 20일 정도 머물게 되 18) 李睟光, 芝峰類說 권2, 外國조, 見其圖甚精 巧於西域特詳 以至中國地方 䀈我東八道 日本六十州 地理遠近大小纖悉無遺 所謂歐羅 巴國在西域 最絶遠去中國八萬理 地中海者 乃是天地之中 故名云. 19) 拙稿, 天主實義에 대한 韓國儒學者의 見解 ( 東亞硏究 3, 1983) pp. 1 23 참조. 20) 柳夢寅, 於于野談 西敎조. 21) 조선의 赴京使行員과 중국 선교사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 문화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 들이 참고된다. 山口正之, 淸朝に於ける在支歐人と朝鮮使臣 ( 史學雜誌 제44권 7호, 1933). 全海宗, 韓中關係史硏究 (一潮閣, 1970). 李元淳, 赴京使行의 文化史的 意義 ( 史學硏究 36, 1983).

- 195 - 었을 때, 예수회 선교사인 로드리게츠(J. Rodriquez, 陸若漢 : 1561 1633)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22) 이때 로드리게츠는 登萊巡撫인 천주교인 孫元化의 초청으로 이곳에 머물면 서 서양식 병기를 전수해 주고 있었다. 여기에서 정두원이 먼저 로드리게츠를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귀국 후 올린 장계에 의하면, 로드리게츠가 먼저 정두원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23) 그러나 정두원은 그가 明朝에서 우대받고 있으며, 서양의 천문 역법 기술에 정통한 사실을 알고는 역관 李榮俊과 別牌陣 군관 鄭孝吉을 보내 서양의 天文法과 放砲法 을 습득해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로드리게츠를 방문하여 군사 관계, 천문 역법 관계, 지리 풍속 관계의 문물 서적을 얻어 다음해 조선에 가져 오게 되었다.24) 다만 정두원의 장계에 천주교관계 서적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로드리게츠의 글에 따르면 천주교관계 서적도 조선으로 보냈음이 분명하다.25) 당시 정두원은 군사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고, 이영준은 천문 역법 관계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에 관한 내용은 장계에 보고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李榮俊이 로드리게츠에 보낸 서한을 보 면,26) 그 자신이 萬國地圖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 )에 설명되어 있는 五洲之 說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영준은 중국의 성인들, 그리고 조선이 文明之邦이라는 종래의 중화의식이 이때 이해한 새 지식과 다르다는 점을 파악하고는 또한 中州之外에 이와 같은 인물, 이와 같은 敎化, 이와 같은 制作이 있는가? 27)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1644년 3월 淸의 入關 이후 조선에 서양 문물을 전래한 인물로는 昭顯世子와 韓興一을 들 수 있다. 소현세자는 이 해 9월에 북경으로 이거하여 11월 귀국 때까지 紫禁 城 안의 文淵閣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欽天監正으로 있던 서양 선교사 아담 샬(J. Adam Schall, 湯若望 : 1591 1666)과 왕래하면서 서양 문물과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된 후 그로부터 천문 역산, 천주교 서적과 輿地球 1架, 天主像 1幅을 기증받아 귀국시 조선에 들여오게 되었다.28) 이때 소현세자는 천주교 교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존경 22) 山口正之, 위의 논문. 23) 國朝寶鑑 권35, 仁祖 9년 7월, 17b 및 大東野乘 권33, 辛未 7월 鄭斗源狀啓. 24) 위와 같음. 국조보감 의 기록에 따라 이때 정두원이 조선에 가져온 서양 문물 서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문물 : 紅夷砲 焰焇花 千里鏡 自鳴鐘 日晷觀(1坐) 紫木花 天文圖南北極(2幅), 萬里全圖(5幅) 天 文廣敎(2幅). 서적 : 治曆緣起(1책) 天文書(1책) 遠鏡書(1책) 千里鏡說(1책) 職方外紀(1책) 西洋國風俗記(1 책) 西洋國貢獻神威大鏡疏(1책) 紅夷砲題本(1책) 天問略(1책). 25) J.G. ルイズデメデイナ, 앞의 책 pp. 122 123. 이 글은 로드리게츠가 마카오에서 사망하기 직 전인 1633년 2월에 남긴 글인데, 여기에는 천주교 서적을 의미하는 우리 信仰에 관한 서적 이란 표현이 있다. 26) 이 서한은 로드리게츠가 李榮俊에게 보낸 서한과 함께 山口正之, 앞의 논문에 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27) 與西洋國陸掌敎若漢書, 抑中州之外 亦有此等人物 此等敎化 此等制作乎.

- 196 - 國史館論叢 第22輯 심도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의 분위기도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저는 지금 서양 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지고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우리나라에 는 아직 天主敎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가장 염려하는 일은 異端邪敎로 지목되어 천주의 존엄성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주상을 귀하께 돌려 드려 과실이 없게 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29) 그러나 천주상을 돌려 보내겠다는 것은 인사말에 불과했고, 소현세자는 이것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귀국시 천문 역산 관계 서적과 聖敎正道(천주교) 서적을 조선에 가져오게 되 었다. 이 중 천주교관계 서적은 아담 살의 저작인 主敎緣起 (4권) 主制群徵 (2권) 眞福訓詮 (1권) 進呈書像 (1권) 등이라 생각되나, 그의 천문 역산 관계 저작물은 20 여 종에 이르므로 그 중에서 무엇을 소현세자에게 기증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소현세자 가 아담 샬에게 보낸 답신에서 보면, 귀국시 그는 아담 샬에게 선교사 1명을 동반시켜 줄 것도 청하였으며, 서양 천문학의 조선 보급까지도 염두에 두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러나 예수회 본부의 거절로 선교사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0) 한편 서양 천문학 보급에 관한 그의 견해는 1645년 3월에 귀국하는 鳳林大君의 護行宰 臣인 한흥일의 태도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한흥일은 귀국시 아담 샬로부터 기증받은 改界圖 와 七政曆比例 1권씩을 가져 왔는데, 그해 6월 이들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曆象授時 帝王之先務 라 하여 조선의 역법을 밝힐 것을 진언하였다.31) 이렇게 볼 때 훗날 조선에서 時憲曆을 채용하게 되는 직접적인 서막은 소현세자와 한흥일에 의해 열리고 있었 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서학의 내용이 서적 문물을 통하여 조선에 전래되고, 그 폭 또한 넓어지면서 서 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태도는 호기심이나 감탄의 정도를 넘어 그 일부를 현실에 적용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초기의 주장은 주로 천문 역법 즉 農政 社會의 현실과 민생에 긴요한 부분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정두원과 같이 군사적 측면에 깊 은 관심을 보인 지식인도 있었다. 반면에 인식의 확대 내지는 화이론의 세계관 변화에 영 향을 준 것은 세계지도와 서양의 지리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시작된 西器의 이해가 점차 서양 문명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北學(17 세기 이후 淸의 새로운 학문) 안에 이미 서양의 선진 문물이 용해되어 있었고, 훗날 조선 28) 山口正之, 昭顯世子と湯若望 ( 靑丘學叢 5, 1931) pp. 101 117 참조. 29) 黄斐默, 正敎奉褒 제1책, 25장. 30) 拙著, L Érection du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du Catholicisme en Corée(1592 1837) (Suisse, 1961) pp. 11 12. 31) 仁祖實錄 仁祖 23년 6월 甲寅조.

- 197 - 에서 주장되는 北學論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수용하고자 한 것이라면, 西器의 전래와 이해 과정은 곧 북학론의 萌芽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학 내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북학 자체가 간접적인 이해였다는 점에서, 또 조선의 지식인들이 이해한 西器의 내용이 다시 한 단계를 거친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게 마 련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성은 이후 조선에서 새로운 역법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노출 되고 있었다. 한편 천주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말한 것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 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욱이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던 소현세자가 귀국 후 3개월 만에 암살된 점은 천주교 신앙의 수용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뿐만 아 니라 1623년의 仁祖反正 이후로 북벌론을 강하게 제기해 왔던 西人 세력이 존재하는 한 천주교 신앙의 유포는 오히려 북학 내지는 서학의 수용에 장애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Ⅲ. 西學思想의 형성 1. 西器 수용과 인식의 변모 조선 후기 사회의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이해되어 온 西器 즉 서양의 지리 천문 역산 기 술 등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당장에 필요했기 때문에 일단 조선 사회에서 시험 대상이 되었 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산은 帝王之先務 로 가장 큰 관심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천문의 이해 또한 중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역법의 도입에만 주력했던 17세기의 관상감 원들은 천문 지리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인식 변화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 초 이론 議論 보다는 결과적 曆算表 立成 의 도입에만 주력했고, 기초 이론을 설명해 줄 선교사도 없었기 때문에 그 시행에는 한계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32) 조선에서 時憲 曆 을 시행한 지 137년이 지난 1791년에서야 관상감 提調 徐浩修가 八道刻差法 을 제시 하며, 京都와 八路의 일출 일몰 절기가 각각 다르므로 이 사실을 역산표에 삽입해야 함을 주장하게 된 것도33) 그 동안의 한계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조선의 曆法은 고려 충선왕 원년(1309)에 채용된 元나라 郭守敬의 授時曆이 근간이 되 어 왔다. 조선 초기에 明의 大統曆을 받아들이고, 세종 때 이슬람의 回回曆을 바탕으로 32) 훗날 金堉이 改曆할 것을 진언하면서 但雜興一持來之册 有議論而無立成 蓋能作此書者 然後能知 此書 不然則雖探究十年 莫知端保矣 ( 仁祖實錄 仁祖 23년 12월 丙申조)라 하여 議論과 立成 이 함께 필요하며, 서양 역산서의 이론은 서양 선교사들만이 터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점도 이러한 한계성을 예견한 것이라 하겠다. 33) 正祖實錄 正祖 15년 10월 乙卯조.

- 198 - 國史館論叢 第22輯 七政算外篇 이라는 독자적인 역법을 개발하기도 하였지만, 수시력의 틀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34) 그러한 가운데 접하게 된 서양의 역법은 종래 수시력의 결점을 극복할 수 있는 아주 면밀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러므로 韓興一은 아담 샬의 역법서를 바탕으로 觀象監에서 改曆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미 중국에서 아담 샬의 西洋新法曆書 에 기초한 時憲曆을 1645년부터 채용하고 있었으므로 보다 설 득력을 지니게 되었고, 관상감 提調 金堉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1653년에 이르러 시헌력 채 용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서양 천문 역산의 실용화, 즉 시헌력 채용과 역법 改修 과정에서는 金堉 金尚范 許遠 등 관상감 관원들의 활약이 컸다. 그 중 허원은 1711년(숙종 37)에 玄象新法細草類彙 라 는 천문역법서를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청에서 구입한 時憲法七政表에 따라 1708년부 터 시행한 時憲五星法 을 기초로 한 조선 최초의 역법서였다.35)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 은 새롭고 올바른 역법이 있으면 마땅히 옛 역법을 버리고 이를 취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 게 되었으며,36)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청의 시헌력 密買도 상관치 않게 되었다. 당 시 청에서는 1646년에 아담 샬을 欽天監正에 임명함으로써 전년에 채용한 시헌력의 실시 를 분명히 하였지만, 종래의 역법가들이 서양 역법을 규탄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었으므 로 1646년 이후 북경에 간 金堉 李景奭 등은 공적으로 역법서를 구할 수 없었다. 이 때문 에 그들은 아담 샬과의 접촉을 비밀리에 꾀하는 한편 140 150권의 역법서를 구입하여 조 선에 가져올 수가 있었다.37) 이때 김육 등이 이해한 내용은 崇禎曆書 나 시헌력 그리고 그 안에 담겨져 있던 티코 브라헤(Tycho Brahe, 第谷 : 1546 1601)의 천문학설 등이었다. 비록 티코 브라헤의 천문학이 당시 서양에서는 이미 낡은 天動說에 근거하고 있는 한계성을 지닌 것이었지 만,38) 그들이 지니고 있던 새로운 학설의 수용 정신은 이미 북학론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 이었고, 새 천문학설의 수용은 조선의 천문 역법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법은 이후에도 계속 개량되어 갔다. 1725년에는 청으로부터 新修時憲七政法이 34) 조선 역법의 변화를 상세히 연구한 논저들은 다음과 같다. 全相運, 韓國科學技術史 (科學世界社, 1966). 李龍範, 中世西洋科學의 朝鮮傳來 (東國大出版部, 1988). 35) 李龍範, 위의 책 p. 182. 36) 仁祖實錄 仁祖 23년 12월 甲寅조 觀象監提調 金堉啓. 37) 仁祖實錄 仁祖 24년 6월 戊寅조. 여기에서 보면 1646년 6월 謝恩使로 燕行한 李景奭은, 日 官 李應林의 아들로 포로가 되어 청에서 거주하는 李奇英으로 하여금 아담 샬에게서 역법서를 구해오도록 했는데, 그 책이 140 150권에 달했다 한다. 이때 구해 온 역법서가 1634년에 완 성된 崇禎曆書 (135권)인 듯하나, 이보다 분량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외에도 다른 역법서 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38) 藪內淸, 中國の科學と日本 (朝日新聞社, 1978) pp. 141 143 참조.

- 199 - 전래되어 사용되었고,39) 특히 1732년에는 티코 브라헤의 천문학설을 뛰어 넘은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시니(Cassini)의 新法(噶法)이 조선에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카시니의 신법은 천체 관측에 있어 圓軌道說 대신 케폴러(Kepler)의 楕圓軌道說을 따른 것인데, 1725년에 흠천감 감정이 된 예수회 선교사 쾨글러(Ignatius Kögler, 戴進賢)가 그 이론을 청의 역 법 작성에 도입하였고, 1732년에 관상감 관원 李世澄이 북경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萬年曆 을 통해 조선에 알려진 것이었다.40) 이후 관상감의 건의에 따라 日官 安重泰 安國麟 安國 賓 등이 북경을 왕래하면서 그 신법을 터득한 결과 1744년부터는 日躔 月離 交食만은 이에 따르게 되었다.41)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 중 일부는 地圓說이나 地轉說(地動說)에 관심을 갖고 이를 주장하는 인물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수광 유몽인 허균 이래로 일부 지식인들이 地圓說 을 이해하고 華夷論의 관념을 벗어나고는 있었지만 이들 중 天圓地方의 고정 관념에 반대되 는 이론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金堉 이래로 安國賓까지 조선의 관상감원들 또한 기존의 인식 체계를 벗어날 수는 있었다 할 지라도 새 역법을 수용하는 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서학 인식의 폭을 넓혀가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서학 사상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이론이 나오는 것은 18세기 북학론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 된다. 조선 지식인 가운데 최초로 地圓說을 제기한 사람은 金萬重(西浦 : 1637 1693)이 다.42) 그는 이미 기존의 주자학설을 비판하였고, 이단시되던 불교에 대해서도 동조적인 언 론을 펴고 있었는데,43) 이러한 그의 기본 인식이 西學의 전래와 이해 과정에서 地圓說을 주장하도록 한 것 같다. 이후 李頣命(疎齋 : 1658 1722)도 동양의 分野之說과 天圓之方 의 이론이 서학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이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하였지만, 이와 관련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지는 못하였다.44) 이것은 曆象之學 九章之術(수학) 자명종 渾天儀 등에 관한 그의 採西思想이 華夷觀의 기본 관념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 어진 것이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으며,45) 결국 이러한 사실은 이이명 자신이 東道西器的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地圓說은 李瀷(星湖 : 1681 1763)에 의해 구체화 된다.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그는 1678년 燕行使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부친이 구해 온 수많은 장서를 연구하여 백과전 39) 正祖實錄 正祖 15년 10월 觀象監提調 徐浩修啓. 40) 增補文獻備考 권1, 象緯考. 쾨글러의 역법 작성과 카시니의 噶法에 대해서는 李龍範, 앞의 책 pp. 307 309 참조. 41) 위와 같음. 42) 金萬重, 西浦漫筆 下. 43) 李明九, 西浦 金萬重 ( 實學論叢, 全南大 湖南文化硏究所, 1975) p. 372. 44) 李頤命, 疎齋集 권19, 書牘. 이이명의 燕行과 쾨글러(Ignatius Kögler, 戴進賢) 소레즈(Joseph Saurez, 蘇霖)와의 만남에 대하여는 山口正之, 淸朝に於ける在支歐人と朝鮮使臣 참조. 45) 崔昌圭, 疎齋 李頤命의 實學思想 ( 實學論叢 ) P. 392.

- 200 - 國史館論叢 第22輯 서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으며, 흔히 近畿學派(성호학파)라 불리어지는 조선후기 신지 식인들의 학문 사상적 大宗이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이익이 서학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제기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말하자면, 그의 서학 이해는 서양의 과학 역산 뿐만 아니라 지리 인식, 천주교 윤리 등 전반에 걸쳤고, 그 결과 가 후학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46) 그러므로 지리 천문 역학 등의 수용 과정 에서 마련된 조선 서학사상의 기초는 이익에 이르러 그 폭이 넓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익이 地圓說을 긍정하게 된 것은 새로운 지리 인식과 천문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47) 물론 그의 이해에는 한계성이 없지 않았다. 전통적인 천문 이론과 서양의 천문설을 복합적으로 이해하였는가 하면,48) 새로 이해한 12重天說 가운데서도 제 10중천(南北歲差) 이상은 형이상학적인 천체 구조론임에도 불구하고 그 합리성을 인정하고 있는 점이 그러한 한계성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하겠다.49) 다만 그에게 있어서 天圓地方에 근거한 화이관은 분명 다음과 같은 지원설의 이해에 따라 극복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이 항해를 하여 서쪽 끝까지 갔더니 마침내 동양이 다시 나왔던 것이 다. 그들이 항해를 계속하면서 별들을 측정한 결과 天障이 각각 차이가 났는데, 이로써 지구 아래의 바다도 또한 지구 위의 바다와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50) 이와 같이 이익이 지원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가 시헌력을 찬양하면서 아 담 샬의 업적을 높이 사고 있는 점,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인정한 점 등과 함께 기존 인식 체계에 수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51)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이익의 西器 수용 정신은 북학론자들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 이익과 북학파 계열의 지식인들은 서로 문호 가 다르고 학문적 성향도 같지 않지만,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星湖僿說 을 읽고 있 었다52)는 점에서 이들이 성호의 학문적 경향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학론자들 가운데 시기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가장 앞선 사람은 洪大容(湛軒 : 1731 1783)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천문 역산에 관심을 가졌고, 1762년에는 스스로 籠水 46) 李元淳, 앞의 책 pp. 110 154참조. 47) 이익이 지은 星湖僿說 星湖僿說類選 星湖先生文集 등에 나타나는 서양 천문 지리 관 계 서적들은 아래와 같다. 天文 暦算類 : 天問略 治曆緣起 時憲曆 簡平儀說 幾何原本 日月蝕推步 書 乾坤體義 方星圖 六片方星圖 西國方星圖 星土開坼圖 西國渾天圖 渾蓋通憲圖說. 地理類 : 坤輿圖說 職方外紀 萬國全圖 大地全圖. 48) 朴星來, 李瀷의 西洋科學 受容 ( 東園金興培博士 古稀紀念論文集, 外國語大, 1984) p. 381. 49) 李龍範, 法住寺所藏의 新法天文圖說에 對하여 下 ( 歴史學報 32, 1966) pp. 103 105. 50) 李瀷, 星湖先生文集 권55, 跋職方外紀. 51) 李元淳, 앞의 책 pp. 131 152 참조. 52) 鄭寅普, 薝園文錄 권4, 湛軒書目錄序.

- 201 - 閣이라는 천문대를 짓기도 하였다.53) 그리고 1765년 軍官의 직임을 얻어 처음으로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청의 학자와 선교사를 만나 새로운 천문 역산의 이론을 그들로부터 직 접 듣게 되었다.54) 이때의 사실을 기록한 劉 飽問答 에는 당시 그 자신이 서양의 천문 역산과 儀器 등에 대해 감탄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서양의 法은 籌數(數理)에 기본을 두고 儀器를 이용하여 만물을 살펴 천하의 遠近 高 深 巨細 輕重을 모두 눈앞에 모아 놓고 손바닥 위에서 가려 놓을 만큼 되었으니, 이것은 漢 唐 에서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해도 망언이 아닐 것이다.55) 이러한 그의 西器에 대한 찬사는 毉山問答 의 내용을 보면 더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여기에서 홍대용은 地圓說뿐만 아니라 地轉說(自轉說)까지도 이해함으로써 한걸음 앞선 이 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의 지전설은 朴趾源(燕岩 : 1737 1805)의 洪德保墓誌銘 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는데,56) 이것은 바로 북학론이 기존의 성리학 체계를 극복하고 있 는 사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西學思想(즉 西器 수용론)이 북학론의 기본 바탕이 되고 있 다는 일면을 나타낸 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의 지식인들 가운데 최초로 地轉說(天靜地動說) 을 주장한 사람은 金錫文이었다.57) 그는 易學圖解 에서 이미 이를 주장하였는데, 박지 원은 이를 잘못 이해하여 김석문은 三大丸浮空之說 을 말하였고, 홍대용이 지전론을 제시하 였다고 한 것이다.58) 김석문의 지전설은 자코부스 로(Jacobus Rho, 羅雅谷)의 五緯曆 指 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홍대용의 선배인 李敏哲 宋以頴 등도 1664 1669년에 이 미 1일 1회전(自轉)하는 地球儀를 제작한 바가 있었다.59) 서학을 일부 수용한 북학론자들의 주장이 성리학 체계를 극복하고 있는 점은 華夷之分 內外 之分의 고정적 관념을 벗어나 華夷一也를 주장한 데서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서 양이라는 夷狄이 있을 수 없고, 따로 中華라는 문화 가치나 상 하의 질서도 있을 수 없었다. 비록 그렇다고 할 지라도 孔子가 바다 넘어 九夷에 있어 中華로 夷를 변화시키고 周나라의 道를 域外에서 일으켰다면 內外之分과 尊攘之義는 응당 域外春秋(夷)에 있었을 것이다. 이것 53) 李元淳, 앞의 책 p. 255. 54) 이때 홍대용이 만난 서양 선교사는 할레르스타인(Augustinus von Halerstein, 劉松齡)과 고 가이슬(Antonius Gogeisl, 鮑友管)이었다(山口正之, 앞의 논문 참조). 55) 洪大容, 湛軒日記 권1, 劉鮑問答. 56) 朴趾源, 燕巖集 권2, 洪德保墓誌銘. 57) 이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참고된다. 閔永珪, 17世紀 李朝學人의 地動說 ( 東方學志 16, 1975) 李龍範, 金錫文의 地轉論과 그 思想的 背景 ( 震檀學報 41, 1976) 小川晴久, 18세기의 哲學과 科學의 사이 洪大容과 五浦梅園 ( 東方學志 20, 1978). 58) 朴趾源, 燕巖集 別集 권14, 熱河日記 鵠汀筆談. 59) 全相運, 湛軒 洪大容의 科學思想 ( 實學論叢 ) p. 468.

- 202 - 國史館論叢 第22輯 이 孔子를 성인이라 하는 이유이다.60) 흔히 域外春秋論 이라 설명되는 이와 같은 주장은 화이적 세계관의 타파로 설명될 수 있 다. 그러므로 尊明排淸에 입각한 북벌론은 홍대용에게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고, 오 히려 北學(淸의 새로운 학문)이나 西學(西夷의 새로운 학문) 수용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점은 박지원이 許生傳 에서 북벌론을 비판하고 일본의 師夷精神을 높이 평 가하고 있는 점과도 일치한다.61) 박지원의 이러한 주장도 西器 수용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 러한 태도는 利用 厚生 正德 62)의 과정으로 설명되는 북학론의 출발점으로 利用을 위해 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師夷 정신은 朴齊家(楚亭 : 1750 1815) 에 이르러 海外通商論 내지는 西士顧聘策으로 발전되었다. 박제가가 주장한 해외 통상은 곧 交易之利를 위한 것으로 北學議 와 1786년 정조에게 올린 丙午所懷 에 잘 나타 나 있는데,63) 여기에서 그는 중국의 開港場을 터전으로 하여 서양과 통교할 것을 주장하였 다. 아울러 그는 부국강병과 민생 해결을 위해 서양의 우수한 제반 기술 뿐만 아니라 천문 역법 의학 軍事 등에 대한 것을 배워야 하고, 이에 정통한 西士를 초빙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박제가의 서사고빙책까지로 발전한 북학론자들의 採西思想은 利用 厚生즉 부 국강병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에서 설명될 것과 같이 그들 이 西器 이외에 西敎의 수용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북학론은 곧 東道 西器論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것은 조선 사회의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제기 한 門戶開放論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1850년대 魏源의 海國圖志 의 전래와 이 해 과정에서 형성된 조선 지식인들의 師夷長技식 동도서기론과 문호개방론은 이미 18세기 에 그 터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지리 천문과 같은 서학에 대한 이해는 지 원설이나 지전론으로 전개되었고, 이것이 일차적으로는 전통적 화이관을 극복하게 하면서 華夷一也 내지는 域外春秋論으로 발전하였으며, 다음 단계에서는 師夷 정신과 문호개방론 을 낳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西敎 인식과 朝鮮敎會의 설립 북학론자들에 와서 발전된 서학 사상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천주교 신앙에 대한 이해 도 그렇게 개방적인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 수용과 관련하여서는 오히려 중국 선교사들이 60) 洪大容, 湛軒書 內集 권4, 補遺 毉山問答. 61) 朴趾源, 燕巖集 권14, 玉匣夜話 중 許生傳 및 권7, 北學議序. 62) 위의 책 권11, 熱河日記 渡江錄. 63) 朴齊家, 貞蕤集 北學議 內 外編 및 附 丙午所懷.

- 203 - 원용한 補儒論的 측면까지도 강하게 부정되고 있었으며, 서양 문물 수용과 문호 개방을 주 장하던 북학론자들도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만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64) 東道에 터전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당장에 필요한 利用에 관련된 한에서 인식의 수정이 필요했을 뿐이며, 西敎에 대한 개방된 자세까지는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태도는 물론 이익을 대종으로 하는 近畿學派와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한 것과 같이 천주교 교리 내용이 조선 사회에 알려지면서부터 이에 대한 거부감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유몽인이 천당 지옥설과 不事婚娶 의 태도를 惑世之罪로 비판한 것은 그러한 斥西論(反西敎論)65)의 시작이기도 하거니와 성 리학의 전통적 闢異論이 극복되지 않는 한 천주교 수용에는 언제나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 었다. 뿐만 아니라 北伐論이 비등하던 당시 조선 사회의 분위기 또한 그 배경이 되었을 것 이다.66) 그러나 조선 사회의 전통이 천주교 신앙에 의해 거부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한, 그 리고 西器의 필요성이 천주교 전래에 대한 인식보다 강하게 요구되는 한, 1642년 이래 중 국 사회에서 야기된 儀禮論爭, 雍正帝의 천주교 박해 사실들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문제 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653년의 시헌력 채용에서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조정에서는 서 교 문제가 등한시되고 있었고, 그 사이에 한역서학서를 통한 천주교 교리가 보다 많은 지 식인들에게 이해되고 있었다. 李能和가 조선의 지식인들을 평가하면서 서양에도 윤리 도덕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은 井蛙 之見, 夏蟲之科 67)라고 한 것은 18세기 중반 천주교 배척의 논리가 비등해져 간 이후를 말 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斥邪論者(反西敎 反西器論者)들은, 이능화가 존중하고 있는, 이 익이 천주교 교리 배척에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西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점을 들어 비판을 시작하였다.68)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익은 西器에 대하여는 기존의 인식을 극복하 64) 李元淳, 朝鮮後期 實學者의 西學意識 ( 朝鮮西學史硏究 ) pp. 197 202. 65) 종래에는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西敎 비판 또는 배척 이론을 단지 斥邪論으로만 표현하여 왔다 (洪淳昶, 韓末의 民族思想, 探求堂, 1975및 琴章泰, 앞의 논문 pp. 40 56, 149 179). 그러나 이 척사론 자체도 1791년의 辛亥珍山事件을 계기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의 양상이 다르 고, 또 이후의 척사론 전개도 18세기 초까지와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자면, 1791년 이전까지의 척사론은 천주교 교리 비판에 역점 을 둔 反西敎論 본고에서는 이를 斥西論으로 표현하였음 이었고, 이후의 척사론은 조정에서의 禁壓 정책과 관련된, 그리고 義理的 서학 배척 단계(琴章泰, 앞의 논문 p. 50)로 변모한 보다 강화된 의미(反西敎 西器)에서의 斥邪論이었으며, 1866년 이후에는 여기에 斥洋과 自存의 논리 가 가미된 衛正斥邪論이 대두한 시기였다. 66) 조선 후기 北伐論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참고된다. 韓㳓劤, 白湖 尹鑴 硏究 1 2 3( 歷史學報 15 16 19, 1961 1965). 洪鍾佖, 三藩亂을 前後한 顯宗肅宗年間의 北伐論 ( 史學硏究 27, 1977). 李迎春, 尤菴 宋時烈의 尊周思想 ( 淸溪史學 2, 1985). 67) 李能和, 朝鮮基督敎及外交史 上 (朝鮮基督敎彰文社, 1928) p. 9. 68) 李正觀의 闢邪辨證 (1839) 가운데 있는 天學攷辨 내용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尹

- 204 - 國史館論叢 第22輯 고 地圓說을 주장할 정도로 호의적이었지만, 한역서학서에 담겨져 있는 천주교의 기본 교리 인 천당 지옥설은 불교의 윤리설과 같이 황망한 것이라 비판하고 있다.69) 그러면서도 七 克 天主實義 등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는 補儒論的 태도도 지니고 있 었다. 이것은 그가 서양 윤리서인 판토하(Juan de Pantoja, 龐迪我 : 1571 1618)의 칠극 을 논평하면서 유교에 나타나 있지 않은 내용도 있어 克己復禮에 도움이 되는 것이 며, 天主鬼神之說만을 제외한다면 儒家의 類와 같을 뿐만 아니라 克己의 방법은 오히려 유 교보다 다양하고 적절하다 70)고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천주교를 가리켜 오로지 天主를 숭상하는 데 천주란 유교에서 말하는 上帝이다 71)고 한 것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 실의 에서 내세운 보유론의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익의 논리는 벽이 론에 입각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기존의 사상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면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72) 또한 이로부터 그 자신이 西器의 우수함을 인정하도록 하는 터전이 마련될 수 있었던 반면에 척사론자들에게는 비판의 여건을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후학들은 적어도 천주교 신앙에 대한 평가에서만은 이익과 달랐다. 흔히 星 湖右派로 지목되는 安鼎福(順菴 : 1712 1791) 계열에서는 성리학 체계를 고수함으로써 西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星湖左派로 지목되는 權哲身(鹿菴 : 1736 1801) 계열에서는 성리학에 회의를 품거나 새로운 사상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73) 그러므로 후자들의 경우는 대부분 17세기 이래 전래된 西敎에 대해서도 일단 적극적인 이해 내지는 수용 태도를 견지하였다. 다만 그들의 이러한 자세가 곧 천주교 신자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은 볼 수 없다. 또 신자라고 할 때도 이에 대한 증거는 매우 불명확한 것이, 여기에는 신 앙적인 차원에서의 해석 문제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74) 宗儀, 闢衛新編 1, 諸家論辨 참조). 그러나 이익이 星湖僿說 에서 피력한 西學思想은 이 미 1780년대부터 徐祖修 같은 인물에 의해서 비판되고 있었다(安鼎福, 順菴集 順菴先生年 譜 正祖 12년 戊申조). 69) 李瀷, 星湖先生全集 권55, 跋天主實義. 한편 이 책의 내용에서 보면, 이익이 열람한 한역서학서 중 서양의 종교 윤리에 관한 것들은 天主實義 七克 主制群徵 交友論 등이다 70) 李瀷, 星湖僿說 권11, 人事門 七克. 71) 星湖先生全集 권55, 跋天主實義. 72) 李佑成은 이러한 이익의 사상 일면을 知識主義 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李佑成, 韓國의 歷史像 (創作과 批評社, 1982) p. 105. 73) 위의 책 pp. 104 105. 74)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초기 천주교 신자 가운데 한 인물로는 丁若 鏞을 들 수 있다. 필자는 이미 그의 西學的 生涯에 대해 밝힌 적이 있는데( 丁若鏞과 天主敎의 관계 Daveluy의 備忘記를 중심으로 茶山學報 5, 1983 丁茶山의 西學思想 丁茶山 과 그 時代, 民音社, 1986), 그 중 필자가 정약용의 回心期(1811 1836) 라 설명한 내용에 대해 최근 반론이 제기되었다(金相洪, 茶山學 硏究, 啓明文化社, 1990, pp. 11 85). 金相 洪은 위의 책에서 주로 與猶堂全書 를 바탕으로 정약용의 背敎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 히 정약용이 저술한 일련의 墓誌銘을 중심으로 이를 良心宣言書라 하여 절대적인 사료로 인정하 고 있다. 다만 安春根 편집의 洌水全書 권27, 續集 8(현 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의 묘지명들

- 205 - 천주교 교리에 대해 비판의 태도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제시한 斥西論者로는 愼後聃(河濱 : 1702 1761)을 들 수 있다. 그는 저서 西學辨 을 통해 천주실의 뿐만 아니라 삼비아 시(Franciscus Sambiasi, 畢方濟 : 1582 1649)의 靈言蠡勺 알레니(Julio Aleni, 艾 儒略 : 1582 1649)의 職方外紀 를 비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보유론적 태도나 천당 지옥설 영혼 불멸설 그리고 求福畏禍 現世否定의 천주교 교리는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75) 그 러므로 그는 천주실의 를 비판하면서, 저들의 天堂地獄 精靈不滅의 설은 분명 佛氏의 설이다. 일찍이 우리 儒家書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아직 그것이 佛氏와 다른 점이 무엇이고, 우리 유교와 같은 점이 무엇인지 를 알지 못한다. 구구히 佛氏의 餘論을 모았으면서 도리어 불교를 배척하니, 利瑪竇 諸人은 우리 유교의 죄인일 뿐 아니라 처음부터 佛氏의 反賊이다76) 라고 규정하였다. 그에게는 스승 이익의 보유론적 설명, 즉 天主學은 불교도가 혹세무민하 는 것과는 다르다. 천주학의 天主說에 어두운 자는 놀라지만, (유교)경전에 실려 있는 上帝鬼神之說로써 이를 본다면 또한 서로 부합되는 점도 있다 77)는 가르침도 벽이론의 관 념에 의해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양의 인문 지리서인 직방외기 조차도 不倫이 극심하고 황당한 것 78)이라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내가 생각 컨대 중국은 천하의 한 가운데 위치하여 풍기가 바르다 79)는 中華主義的 관념 위에서 제기 된 것으로 기존의 틀을 조금도 극복하지 못하는 폐쇄성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 다.80) 따라서 그의 비판 논리가 체계적인 척사론의 전개를 의미한다고 생각되지만, 서학 사상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이익보다 후퇴한 것이라 하겠다. 1785년에 天學考 를 저술하고 이어 天學問答 을 편찬한 안정복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성호우파를 이끌어 나간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천주교 교리 비판은 신후담보 다도 심도있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우선 천학고 에서는 천주교의 東傳 과정을 파 악하고 있으며, 이어 천학문답 에서는 그 교리를 세부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신후담과 같이 안정복의 교리 비판도 현세 부정 死後求福 천당 지옥설의 비판에서 시작 되고 있다. 그러나 안정복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주교의 三仇說(현세에서의 세 가지 원수 만을 가지고 신앙인이 아니었다 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들이 秘本 으로 전해졌다는 사실 자체도 오히려 정약용 자신이 당시의 배경 아래에서 그 내용의 비밀스러운 부분 이 노출되 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여유당전서 곳곳에 나타나는 정약용의 서학 이해 내지 수용의 일면도 분명히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좀 더 면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75) 拙稿, 天主實義에 대한 韓國 儒學者의 見解 pp. 7 8, 11 12. 崔東熙, 愼後聃의 西學辨에 관한 硏究 ( 亞細亞硏究 15권 2호, 1972) pp. 12 17. 76) 愼後聃, 西學辨 天主實義. 77) 愼後聃, 河濱集 2, 內篇 紀聞論. 78) 慎後聃, 西學辨 職方外紀. 79) 위와 같음. 80) 李元淳, 職方外紀와 傾後聃의 西洋敎育論 ( 歷史敎育 11 12, 1969) P. 215.

- 206 - 國史館論叢 第22輯 인 己身 世俗 魔鬼), 三魂說(生魂 覺魂 靈魂)을 비판함과 아울러 그 교리에서 死後를 중시 하는 것은 불교의 餘論이고, 愛仇說이나 約身論은 墨子의 이론으로 異端임이 분명하다고 한다.81) 그러므로 한역서학서에 담겨져 있는 보유론의 논리도 유교의 事天은 正이요, 천 주교에서의 事天은 邪 이며, 유교는 公이고, 천주교는 私 라고 하여 부정되고 있다.82) 이 렇듯 안정복이 철저하게 천주교 교리를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이단이라고 인식된 이유도 있었지만, 1784년(甲辰年)에는 이미 성호좌파 안에서 천주교가 만연되고 있었고, 따라서 이를 경계하는 일이 급박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83) 이 밖에도 당시 천주교 교리를 비판한 인물로는 李獻慶(艮翁 : 1719 1791)과 正祖 때 處士였던 洪正河(髯齋) 등이 있다. 이헌경은 안정복과 같이 斥西에 앞장선 인물로 정조 15 년(1791)에는 천주실의 비판서인 天學問答 을 저술하였다.84) 그리고 홍정하는 천주실의 眞道自證 盛世芻蕘 萬物眞原 등을 읽고 그 내용을 비판하는 證 疑要旨 를 지었는데,85) 특히 서양 윤리와 천주교의 천지 창조론을 배척함으로써 보유론 자체까지도 반박하는 견해를 나타냈다.86) 그러나 이들의 斥西論은 시기적으로 늦은 것이었 고, 그 비판 논리도 결코 신후담 안정복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18세기에 있었던 이와 같은 천주교 교리 비판은 이후 攻西派나 斥邪論者들에게 기본 논 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안정복의 이론은 비록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비판이 되고 있었 을 지라도, 성리학자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하여 천주교 교리를 철저히 공박하면서 체계적 인 척서론을 전개한 것으로 당대의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견제하고자 한 성 호좌파 안에서의 천주교 교리 연구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서양의 발달된 문물과 천주교 신앙을 동양 사회에, 그리고 폐쇄 적인 조선 사회에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선교 단체는 예수회(耶蘇會, Society of Jesus)였다. 그러므로 保護權(Padroado)과 결부된 포르투갈 스페인 선교단체들의 갈등, 이와 관련하여 야기된 예수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의 儀禮論爭 등으로 인해 1773년에 예수 회 해산 결정이 내려진 것은 동 서 문화 교류사 내지는 서학 전래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본래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신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예술 방면에서도 탁월한 안목이 있었고, 상부층에 대한 보유론적 포교 정책을 바탕으로 점차 하 층민에까지 전교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스페인의 보호를 받던 도미니코회 프란시스코회 아 81) 安鼎福, 順菴集 권17, 天學問答 13항 28항. 82) 위의 책 2항 3항. 83) 安鼎福, 順菴集 권6, 答權旣明書(甲辰), 其後轉聞 洋學大熾 某某爲首 某某次之 其餘從而化 者 不知幾何云 不勝驚怪 旣己狼籍於人 則不必掩遮於相好之間矣. 84) 李晚采, 闢衛編 권1, 李艮翁天學問答. 85) 許侙, 大東正路 권5, 證疑要旨. 86) 홍정하의 이러한 비판론에 대하여는 朴鍾鴻, 天主學의 導入 批判과 攝取 ( 韓國思想史論 攷, 瑞文堂, 1977) pp. 313 333을 참조.

- 207 - 우구스티노스회의 선교사들은 신학에는 정통했지만 다른 분야에는 조예가 깊지 않았고, 더 욱이 하층민을 대상으로 전교를 시작하면서 중국의 儀禮를 미신으로 여기고 있었다.87) 그 러므로 예수회의 해산은 첫째로 東西文化交涉의 후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 라 1724년 이래 雍正帝가 禁敎策을 취하면서도 서양의 과학과 예술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예수회의 해산으로 그러한 청 황실의 관심이 줄게 되고, 이것이 천주교 박해를 부추기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88) 다음으로 예수회의 해산은 조선의 서 학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1773년 이후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여전히 북경에 남아 있 었다고는 하지만, 이제 전교 활동의 중심은, 도미니코회나 프란시스코회로 넘어가게 되었 고, 이에 따라 조선에 전래된 서학관계 서적 문물도 점차 과학 기술관련 분야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89) 더욱이 이후에 야기된 조선 사회의 祖上祭祀 문제와 교회 성격도 이러한 중 국 교회에 배경을 두고 있었다. 안정복이 표현한 것처럼 1784년 이전에 이미 성호좌파 안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만연되어 있었고, 그 중 천주교 신앙을 종교적 차원에서 수용하고자 하는 少輩之有才氣者 들도 나타나게 되었다.90) 이들은 주로 權哲身을 따르는 소장 학자들로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에 앞서 洙泗學(孔孟學)에 관심을 가지고 先進儒學 탐구에 힘을 쏟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洛閩學(程朱學)에 대한 비판적 견해까지 갖추게 되었다. 우선 말하자면 이러한 유교 경전에 대한 신해석의 풍토가 이들로 하여금 陽明學이나 西學(특히 西敎)에 관심을 갖도록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91) 그렇다면 예수회 선교사 저술의 천주교 서적을 접한 이들이 그 보유론적 측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점이었을 것이다. 천주실의 에 담겨져 있는 유학적 견해도 바로 先進儒學이었기 때문이다. 丁若鏞(茶山 : 1762 1836)에 따르면, 이익이 1763년에 사망하자 성호학파 중 재주있 는 무리들이 모두 권철신을 따르게 되었다 한다.92) 이후 권철신은 성호좌파의 宗主로 부각 되었고, 그의 후학들은 講學을 통해 서로의 학문을 토론하게 되었다. 천주교 문제와 관련하 87) 矢澤利彥, イエズス會士の來華とカトリツク布敎の展開 ( 西歐文明と東アジア, 平凡社, 1971) pp. 211 217. 88) 위의 논문 pp. 222 230. 89) 崔韶子, 東西文化交流史硏究 (三英社, 1987) pp. 265 270. 90) 安鼎福, 順菴集 권5, 與樊巖書(丙午). 91) 성호좌파의 이러한 학문 경향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참고된다. 洪以燮, 實學에 있어서 南人學派의 思想的 系譜 ( 人文科學 10, 延世大 文科大學, 1963). 李乙浩, 茶山經學思想硏究 (乙酉文化社, 1966). 李佑成, 鹿菴 權哲身의 思想과 그 經典批判 ( 退溪學報 36, 1982). 劉明鍾, 韓國의 陽明學 (同和出版公社, 1983). 琴章泰, 丁茶山 思想에 있어서의 西學受容과 儒敎的 基盤 ( 茶山學報 9, 1987). 徐鍾泰, 茯菴 李基讓의 陽明學 受容 ( 韓國史硏究 56, 1989). 92) 丁若鏞, 與猶堂全書 1집 권15, 鹿菴權哲身墓誌銘.

- 208 - 國史館論叢 第22輯 여서는 그 중 1779년 달레(Ch. Dallet)의 기록에는 정유년(1777) 에 走魚寺(현 京畿 道 廣州郡 退村面 소재)에서 실시된 강학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 주어사 강학 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왔는데,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할 때, 그 모임이 성리 학적 강학에서 시작되었지만, 李檗(曠菴 : 1754 1786)의 참석을 계기로 천주교 교리 연 구도 행해졌던 것이라 생각된다.93) 흔히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 인물로 거론되는 인사들이 1784년을 전후하여 천주교회 창설을 도모하기까지는 종래의 강학과 같은 모임이 필요했을 것이며, 기록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교리 강학 모임도 주어사 강학 뿐이라는 사 실 또한 이에 대한 심증을 갖게 해 준다. 주어사 강학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권철신을 위시하여 이벽 丁若銓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등 南人系 소장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그 무렵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이후부터는 이벽을 중심으로 천주교 교리 연구가 신앙 운동으로 변모되어 갔 다. 그 과정에서 이벽은 李家焕 李基讓 등과 토론을 하여 그들을 논리적으로 압도하면서 서 울의 李承薰, 중인 崔昌顯 金範禹 등과 楊根의 權日身 丁若銓 若鏞 형제 등을 신앙 운동에 끌어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훈이 북경에서 귀국한 해인 1784년 9월(음)에는 水標橋 이벽의 집에서 영세식을 거행하고 이때 영세한 사람들이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마침내 조선 교회의 설립을 보게 되었으며, 1801년의 辛酉迫害 때까지는 1만여 명에 이르는 신자 들을 확보하게 되었다.94) 그동안 한국 교회의 지도층 인물들은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면서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 지만, 교리 이해수준은 점차 높아져 갔다. 그들의 교리 이해는 일차적으로 한역서학서를 통 해서였다. 이 중 조선의 천주교 지식인들이 읽은 천주교 관계 서적들은 주로 천주실의 칠극 聖年廣益 畸人十編 眞道自證 敎要序論 萬物眞源 聖經直解 등과 明末 李之藻가 편찬한 天學初凾 가운데 있는 천주교 서적들이었다.95) 그러나 邪學懲義 중 妖畵邪書燒火記 의 기록에 보면, 1801년에 조정에 압수 소각된 한역서 학서와 한글 번역 천주교 서적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96) 그 중 한글본 서적들은 번역 필사 되거나 목판 또는 활판으로 인쇄되기도 했는데, 이 사실은 이미 1787년부터 司諫 李師濂 93) 지금까지 走魚寺講學에 대해 연구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논고들이 있다. 李元淳, 天眞菴 走魚寺 講學會 論辯 ( 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產業社, 1983). 趙珖, 韓國 初期敎會史와 走魚寺 ( 司牧 91, 1984). 이들은 주로 Ch. Dallet, Histoire de l Eglise de Corée t. 1, pp. 14 15의 내용에 근 거하여 주어사 강학 모임을 천주교 교리 연구와 관련시켜 왔는데, 일부에서는 이 사실에 의문을 품어 오고 있다. 주어사 강학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에 卞基榮 신부와의 토론 형식으로 된 3편의 논고를 司牧 제144호(1991. 1)에 발표한 바 있다. 94) 拙稿, 天主敎의 受容 (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희, 1975) pp. 100 123., 天主敎의 儒敎社會에의 挑戰 ( 한국사 15) pp. 155 225. 95) 李元淳, 앞의 책 pp. 80 91. 96) 邪學懲義 권2, 新愛家埋置邪書掘出記조.

- 209 - 正言 李景溟 등에 의해 조정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97) 1791년에는 책자의 간행 사실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98) 1801년 조정에 압수된 천주교 서적들을 분류해 보면 한글본이 86종, 한역서학서가 37종으 로 한글본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사실은 우선 천주교가 이미 일반 대중에 널리 침투하고 있 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이들을 다시 세분화해 보면 그 중에는 瞻禮用(신자의 기 본 의무를 위한 서적)이 무엇보다도 많고, 다음으로 神功用(개인 信心用 서적)이 차지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기본 의무 에 충실했으며, 기도와 정신적 수련을 중심으로 한 실천 신앙에 충실했음을 나타내 준다.99) 한편 1786년에 천주교 신자가 된 丁若鍾 1790년대에 쥬교요지 (主敎要旨)라는 최초 의 한글 敎理書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상 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상편에서는 하 느님의 존재와 속성을 밝히고, 불교 도교의 교리를 비판했으며, 하편에서는 하느님의 계시 와 救贖論이 설명되어 있다. 또 1794년에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周文謨 신부도 고 요 리 고 셩챤 셩테문답 과 같은 한글 교리서를 지어 유포시키도록 하였다.100) 이 러한 점을 토대로 할 때, 1801년 이전에 이미 천주교의 주요 교리 내용이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이해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교리 수용이 조선 신자들로 하여금 기존 인식 체계를 극 복하고 신앙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에게는 이러 한 현상이 천주교 신자들 지도층이건 일반 신자이건 의 인식 변모라는 측면에서보다 滅 倫亂常의 사회 저항 세력으로 평가되었다. 천주교 교리가 널리 전파됨에 따라 闢異論에 근 거한 正學 對 邪學이라는 학문 사상적 비판 구도에서 祖上祭祀 문제와 관련한 사회 윤리적 배척의 입장이 강화되어 간 것이다.101) 1791년 辛亥珍山事件을 계기로 변화된 조선 사회의 천주교 인식 태도를 조선 교회의 측 면에서는 新文化受容運動에서 民衆宗敎運動의 차원으로 전환되었다 고 설명되기도 한 다.102) 물론 그것은 1790년 말 신자 尹有一에 의해 조선 교회에 전달된 북경 교회 구베아 (Gouvea) 주교의 祖上祭祀禁止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명령이 결국 양반 계급의 지도 층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멀리 하도록 했고, 신해진산사건 辛亥迫害 으로 廢祭焚主한 尹持忠 權尚然이 참수된 이후 점차 秘密敎會로 변모해 갔기 때문이다.103) 이러한 결과를 야기시킨 초기 신자들의 교리 이해와 조상제사 문제가 어떻게 결부되어 있었는지는 윤지충 97) 日省錄 正祖 丁未년 4월 27일 甲子조 및 正祖實錄 12년 8월 辛卯조. 98) 李基慶, 闢衛編 p. 59 및 正祖實錄 15년 10월 辛未조. 99) 拙稿,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初期天主敎會 ( 敎會史硏究 2, 1979) PP. 21 23. 100) 위의 논문 p. 24, p. 41. 101) 拙稿, 天主敎의 儒敎社會에의 挑戰 pp. 155 164 및 186 206 참조. 102) 趙珖, 앞의 책 pp. 5 6 및 p. 31. 103) 拙稿, 天主敎의 儒敎社會에의 挑戰 pp. 155 164 및 天主敎 迫害 ( 한국사 15) pp. 226 285 참조.

- 210 - 國史館論叢 第22輯 이 전라도 관찰사 鄭民始에게 진술한 다음의 내용에 잘 나타난다. 天主를 大父母로 위하므로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결코 흠숭하는 뜻이 안되며, 사대부 집안의 木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이므로 차라리 사대부에서 죄를 얻을 지언정 천주께 죄를 얻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과연 神主를 집 뜰 안에 묻었습니다. 죽은 사람 앞에 酒食을 올리는 것 또한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또 庶人이 신주를 세 우지 않더라도 나라에서는 엄금하는 일이 없으며, 가난한 선비가 設享하지 않더라도 예로써 엄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주를 세우지 않고 設享하지 않은 것은 단지 천주교의 가 르침을 위한 것으로 國禁을 범한 일은 없는 듯합니다.104) 이러한 윤지충의 주장은 나름대로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실상을 설명하고, 천주교의 가 르침대로 한 것이 국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님을 주장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를 문초 한 정민시의 의견은 只知有天主 不知有君親 105)이라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그동안 敎化主 義를 표명해 오던 正祖나 蔡濟恭도 윤지충 권상연을 참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조선 교회의 초기 상황을 신자들의 교리 이해나 교회 자체의 변모 과정으로만 설 명할 수는 없다.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서도 지식 계층은 먼저 서양의 과학 기술에 관심을 보이다가 신앙 운동에 참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李承薫(蔓川 혹은 晚泉 : 1756 1801)의 경우에는 신자가 되기 전부터 서양의 曆象 數學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106) 李家 焕(錦帶 : 1742 1801)도 천주실의 칠극 등과 함께 직방외기 西學凡 등 을 읽었으며 특히 天文과 幾何學에 정통하였다.107) 또 丁若鏞(茶山 : 1762 1836)의 경 우에는 이미 잘 알려진 것과 같이 利用監의 신설을 계획하기도 하였고,108) 1792년에는 정 조가 하사한 奇器圖說 을 바탕으로 고안한 起重機를 水原城 축조에 이용한 적이 있었 다.109) 한편 老論系 인물이었던 金健淳(1776 1801)은 신앙 운동에 참여한 이후에도 북 경의 선교사로부터 利用厚生의 방법을 배워 오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110) 이상과 같이 한역서학서를 통해 조선에 알려진 천주교 교리는 西器와 마찬가지로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이해되기 시작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응은 상반된 결과로 나타났다. 즉 한 편으로는 천주교 신앙이 이질적인 서양의 학문 윤리로 파악되면서 전통적 벽이론의 관념 아래 성호우파에 의한 斥西論의 맹아를 보게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 차원에서의 수 104) 正祖實錄 15년 11월 戊寅조, 以天主爲大父母 則不遵天主之命 決非欽崇之意 而士大夫家木 主 天主敎之所禁 故寧得罪於士夫 不願得罪於天主 果埋神主於家庭之內 死人之前 薦酹酒食 亦天 主敎之所禁也 且庶人之不立主 國無嚴禁 窮儒之不設享 禮無嚴防 故不立主不設享 只爲天主敎也 似無犯國禁之事也. 105) 위와 같음. 106) 위의 책 15년 11월 己卯조 및 Gouvea 主敎의 書翰 ( 敎會史硏究誌 3) p. 123. 107) 黃嗣永, 帛書 46 47행. 108) 丁若鏞, 經世遺表 권2, 冬官工曹 利用監. 109) 丁奎英, 俟菴先生年譜 正祖 16년 壬子조. 110) 黃嗣永, 帛書 57행.

- 211 - 용과 실천으로 이어져 성호좌파에 의한 조선교회의 설립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성호학파는 북학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개혁과 民生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西學에 대한 인식에서만은 西敎 즉 천주교 교리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서학 사상사에서 중시해야 할 점은 성호학파의 천주교 교리 이해 뿐만 아니라 그 신앙 운동과 관련하여 일반 신자들 지도층이 아닌 의 교리 이해 내용이다. 하나 하나 드러나지는 않 지만, 여러 한글본 교회 서적을 통해 볼 때 일반 신자들의 교리 이해와 신앙은 매우 실천 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호좌파의 신앙 수용이 기존의 인식 체계와 사 회 윤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인 것처럼 일반 신자들의 신앙 실 천도 전통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박해라는 현실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Ⅳ. 西學思想의 分化 신해진산사건 이후 종래의 斥西(反西敎) 기운은 斥邪(反西敎 西器) 운동으로 변모되기 시작 하였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제 천주교는 물론 西器의 수용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으며, 斥邪 의 입장에 서는 것만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더욱이 1801년에 純祖가 등 극하면서 南人時派 특히 성호좌파 계열의 몰락을 가져온 辛酉迫害가 발생하였고, 이에 이은 黄嗣永(1775 1801)의 帛書 사건으로 天主敎=邪敎=賣國之道 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갔 다. 그 중에서도 황사영이 중국 선교사들에게 건의하고자 한 洋舶請來의 문제는 1801년 1월 大王大妃 金氏가 내린 斥邪綸音과 12월의 討逆頒敎文에 타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었다.111) 그러나 조선교회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신앙 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박해를 무릅쓴 일부 지도층 신자들의 聖職者 迎入運動도 계속되었다. 그 결과 1831년에는 로마의 교황청에서 조선 교회를 朝鮮敎區로 승격시켜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였으며, 이때 파리 外邦傳敎會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가 조선교구를 담당하게 됨에 따라 성직 자의 조선 진출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다만 예수회와는 달리 파리 외방전교회가 순수한 선교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신자들의 교리 이해와 신앙 실천에는 도움이 되었 지만, 서양 문화의 조선 유입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112)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사회의 서학 인식은 크게 두 방향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 러한 현상은 기존의 서학사상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西敎, 즉 천주교 신앙에 대한 수용과 배척이라는 좁은 의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791년 이후 斥西論의 형성과 더불 어 이루어진 그와 같은 분화 과정은 1850년을 전후하여 서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제기 111) 拙稿, 天主敎의 儒敎社會에의 挑戰 pp. 201 206. 112) 拙稿, 빠리 外邦傳敎會의 韓國進出 ( 柳供烈博士華甲記念論叢, 1971) pp. 473 479.

- 212 - 國史館論叢 第22輯 되기까지, 길게는 1876년 開國이 이루어지기까지 표면화되고 있었는데, 그 기간은 조선 사 회가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로, 대외적으로는 쇄국주의로 점철된 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 교회의 활동은 종래의 신문화 수용 운동과는 무관하게 단지 신앙운동으 로만 전개되고 있었으나 교리의 이해나 실천은 보다 심화되어 갔다. 丁夏祥(1795 1839) 의 上宰相書 는 이 시기의 교리 이해 정도를 설명하는 데 대표적인 예가 된다.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丁若鍾의 차남인 그는 부친이 참수된 후 조선 교회를 재건하는 데 노력하 던 중, 1839년에 己亥迫害가 일어나자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이를 저술해 두었다. 상재 상서 는 모두 3,400여 자에 달하는 짧은 글이지만, 정하상은 다음과 같이 자신이 주장하 고자 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적고 있다.113) 첫째, 보유론의 입장에 서서 天主의 존재를 설명하고, 十誡를 바탕으로 천주교의 실천 윤리를 강조하였다. 둘째, 천주교는 無父無君의 종교가 아니며, 조상제사와 神主는 현실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셋째, 천주교는 유교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 덕이 담겨져 있음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護敎的 입장에서 표명된 것이지만, 박해기 천주교 신자들의 교리 이 해와 그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정하상의 설명에서 알 수 있다. 십계는 두 가지로 귀결되는데, 천주를 만물 위에서 으뜸으로 사랑하는 것과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上三誡는 천주 섬기는 도리를 밝히는 절목이며, 下七誡는 마음을 닦고 살피 는 공부로서 顔回의 四勿과 載記의 九思도 여기에 견주기는 부족하다.114) 이처럼 천주교의 교리는 신자들에게 절대적인 규범 즉 신앙 윤리로 인식되었다. 그러므 로 孝나 忠의 근원도 초월적인 존재인 천주에 연결시킴으로써 무엇보다도 중요한 神의 명 령으로 받아 들여지게 되었다. 부친의 명을 듣고 임금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그 죄가 중하지만, 임금의 명을 듣고 天地大 君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그 죄는 비할 바 없이 더욱 큰 것입니다.115) 그 결과 천주교 신자들은 죽음에 앞서서도 善을 상주고 惡을 벌하시는 이도 천주이십니 다 라거나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그 교리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죽는 한이 있어도 113) 丁夏祥, 上宰相書 (香港 : 納匝助靜院, 1887) 및 李晚采, 闢衛編 권6, 上宰相書. 114) 上宰相書, 十誡摠歸二者 愛天主萬有之上及愛人如己 上三誡昭事之節目也 下七誡修省之工夫 也 顔氏之四勿戴記之九思 不足比. 115) 上宰相書, 聽家父之命 而不聽國君之命 則其罪重矣 聽國君之命 而不聽天地大君之命 則其罪 尤極無比.

- 213 - 버리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116) 그러므로 박해 때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來世志向的이거나 祈福的일 수밖에 없었다.117) 박해기의 신자들이 교리를 이해하는 데 바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보다도 한글로 번 역된 교회 서적들일 것이다. 그러나 달레(Ch. Dallet)의 기록을 보면, 초기 교회 때 번역 필 사된 교회 서적들은 상당수가 압수되거나 감추어져 널리 읽혀질 수 없었다.118) 실제로 1830 년대 이후의 신자들은 천주교 서적보다는 오히려 가족이나 이웃으로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 신 앙을 실천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119) 그러던 중 1849년에 司祭 서품을 받고 귀국한 崔良業 (1821 1861) 신부에 의해 보급된 한글 天主歌辭는 신자들의 교리 이해와 그 전파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되었다.120)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思鄕歌 는 당시에 이해되고 있던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유교 윤리와 비교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는 천주교를 外國의 道라 훼방하고 모욕하는 일 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121) 네일 에 쓰 행도(行道) 외국소 (所來) 젹잔토 /가례(家禮)거니 상례(喪禮)거니 본국에 셔 지은거냐/복셔(卜書)거니 슐서(術書)거니 외국문셔 아닐너냐/너희밋 셕가여 (如來) 셔 국소산(所產) 아닐너냐. 지금까지 최양업 신부가 지은 천주가사로는 모두 22종이 알려져 있는데, 사향가 이 외에는 주로 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 그것이 신자 敎化와 교리 전파에 이용되었으 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122) 한편 1858년 이래로 최양업 신부 다블뤼(Daveluy, 安敦伊 : 1818 1866) 주교 등에 의해 저술된 敎義와 倫理에 관한 서적 또한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123) 이 시기에 이르러 다블뤼 주교는 교리서의 저술 이외에 조선 교회의 殉敎史 를 정리하였으며, 75년 간의 조선사 연표를 敎會曆과 비교하여 작성하기도 하였다.124) 뿐 만 아니라 조선교구의 제 4대 敎區長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 1814 1866) 주교는 1859년에 신자들의 무지를 방지하기 위하여 서울에 설립한 木版印刷所에서 각종 기도서 교 리서 신심서 등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125) 이들은 대부분 현존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116) Ch. Dallet, 韓國天主敎會史 中 (崔奭祐 安應烈역주, 분도出版社, 1979) p. 176, p. 481. 117)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의 성격을 분석한 논고로는 아래의 글들이 참고 된다. 崔容奎, 己亥 丙午敎難期 天主敎徒의 分析的 考察 ( 敎會史硏究 6, 1988) pp. 227 276. 高興植, 丙寅敎難期 信徒들의 信仰 위의 책 pp. 277 310. 118) Ch. Dallet, 앞의 책 pp. 10 11. 119) 崔容奎, 앞의 논문 p. 256. 120) 金眞召, 天主歌辭의 硏究 ( 敎會史硏究 3) pp. 257 277 참조. 121) 資料 思鄕歌 필사본. 122) 金眞召, 앞의 논문 p. 259. 123) Ch. Dallet, 앞의 책 p. 296. 124) 위의 책 p. 299.

- 214 - 國史館論叢 第22輯 한역서학서의 한글 번역본도 있었지만, 다블뤼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이 직접 저술한 것도 있었다.126) 이후 1866년의 丙寅迫害 때 체포된 韓成任의 경우 45권의 교회 서적을 볼 수 있었던 것도127) 이러한 서적 간행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또 이때 충남 保寧에서 군문효 수된 黃錫斗도 儒業에 종사하던 중 천주교 서적을 읽고 입교하였다 한다.128) 이러한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거의 맹목적으로 천주 십계를 따르고 내세지향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층은 점점 無識者層으로 확대되어 갔고, 신자 집단들은 박해의 위협 속에서 일반 사회와 유리되어 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문화의 유입이라는 측면 은 전혀 생각도 못하게 되었다.129) 그 결과 천주교 신앙은 조정의 탄압과 척사론자들의 배 척 속에서 언제나 異端邪說로밖에 인식될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천주교 신앙이 전국적으로 유포되어 곳곳에 신자 집단이 형성되고, 이에 대한 박해도 가열 되면서 기존의 闢異端的 斥西論은 明正學 息邪說 의 교화주의적 입장을 완전히 벗어나 西敎 =滅倫 賣國之道 라는 적극적 斥邪衛正 사상으로 변모되어 갔다. 그리고 1866년 두 차례의 佛艦 來侵이 있게 되면서는 攘夷論의 대두와 함께 西敎=洋夷 라는 인식도 고착되어 갔다. 이러한 對西敎 인식은 1801년의 討逆頒敎文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있었다. 이후 천주교 교리 비판이나 배척의 논리는 1801년 이전보다 깊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기 의식이 내재되어 다음과 같이 보다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들(天主敎徒)온 무릇 겉으로는 邪術을 칭탁하며 안으로는 異圖를 품고, 처음에는 神敎를 假托하여 몰래 하늘을 넘보는 화를 지어내다가 마지막에는 君父를 원수같이 보아 공공연히 모 반을 행한다.130) 천주교 신자들을 역적의 무리로 규정한 이 내용은 기해박해(1839) 후의 斥邪綸音에 와 서는 한층 더 심화되고 있다. 즉 천주교를 慢天褻天하는 禽獸之道 滅倫之道로 규정하고, 천 주교 신자들의 비밀 전교 활동을 黃巾賊 白蓮敎徒와 비교하기에 이른 것이다.131) 조정에서의 이러한 태도는 1830년대부터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제기되어 간 斥邪論에 도 영향을 주었다. 李恒老의 論洋敎之禍 (1836), 李正觀의 闢邪辨證 (1839), 尹宗儀 의 闢衛新編 (1848) 등은 그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비록 서학서를 볼 수 없어 이론적으로는 취약하였지만, 종래 이익 안정복 계열의 불철저한 천주교 비판 태도를 배격하 면서 척사론의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 李正觀(盥如 혹은 念齋)의 이론은 李恒老(華 125) 위의 책 pp. 363 364. 126) 拙稿, 韓國敎會 敎理書의 變遷史 ( 司牧 35, 1974) p. 27. 127) 左捕盜廳謄錄 丙寅 12월 24일조. 128) 右捕盜廳謄錄 丙寅 2월 3일조. 129) 高興植, 앞의 논문 p. 283. 130) 純祖實錄 원년 12월 甲子조. 131) 憲宗實錄 5년 10월 庚辰조.

- 215 - 西 : 1792 1868) 金平默(重菴 : 1819 1888) 등에 영향을 주어 闢邪錄辨 (1863)과 闢邪辨證記疑 (1847)를 낳게 하였다.132) 한편 윤종의(淵齋 : 1805 1886)는 이정관과 도 친분이 있던 인물이었지만, 어느 하나의 이론에 국한되지 않고 청과 조선 학자들이 제기 해 온 기존의 이론을 모두 섭취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척사론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터전하 여 海防論 내지는 禁洋論까지 주장하였다. 이러한 윤종의의 이론은 1850년대에 이르러 조선 지식인들의 척사론이 이미 斥洋 의식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기도 하였다.133) 이렇게 재정립의 단계를 거치는 가운데 1866년에 발생한 丙寅洋擾는 조선 사회에 보다 직접적인 위기감을 가져다 주었고, 이에 따라 尊華攘夷에 입각한 鎻國禦洋論의 탄생과 西 敎=洋夷 라는 인식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항노가 당시 主戰論者들을 國邊人, 主和論 者들을 賊邊人이라 규정하면서 철저한 쇄국과 斥洋의 논리를 편 것은 그 대표적인 예였 다.134) 이러한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理氣論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吾儒의 이른바 事天의 天은 오로지 道 理라 할 수 있지만, 서양인의 이른바 事天의 天은 오 로지 形氣 情欲이라 할 것이다.135) 이처럼 道 내지 理를 궁극적 존재로 파악하는 道學的 입장에서 천주교의 교리 기반을 비 판하고자 한 이항노에게는 서양 曆法까지도 西學의 테두리 안에서 천주교 신앙과 구별될 수 없었다.136) 그러므로 이른바 衛正斥邪派의 祖宗이라고 일컬어지는 이항노에게 있어 천 주교 신앙은 慢天侮聖 滅性殉欲 惑世誣民의 邪術이었으며,137) 윤리적 측면에서도 無父無 君 通貨通色의 邪說일 수밖에 없었다.138) 이와 같은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은 그의 문인들인 김평묵 柳重敎(省齋 : 1821 1893)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서양인을 禽獸, 서양 선교 사를 西胡라고 부르는 극단적인 표현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139) 결과적으로 화서 계열의 척사론 척양론은 천주교와 서양 세력의 침투라는 시대 배경 속 에서 自主 自存 의식을 지키는 데는 큰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된다.140) 그러나 이러한 폐쇄 적 자기 보존의 논리는 전통의 유지에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경제적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 고 近代化로 나아가는 데는 逆作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즉, 1791년 이래로 성숙되어 간 132) 琴章泰, 앞의 논문 pp. 53 54. 133) 車基眞, 尹宗儀의 斥邪論과 海防論 인식에 대한 연구 ( 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論 叢, 知識產業社, 1990) pp. 21 46 참조. 134) 李恒老, 華西集 권3, 辭同副承旨兼陳所懷疏. 135) 華西集 권25, 闢邪錄辨 西洋事天與吾儒事天相反辨. 136) 위의 책 西洋曆法與堯時曆法不同辨. 137) 위의 책 天堂地獄辨. 138) 위의 책 권 15, 溪上隨錄二. 139) 重菴別集 권5, 闢邪辨證記疑 및 省齋集 권37, 玉溪散錄. 140) 琴章泰, 앞의 논문 p. 160, p. 166.

- 216 - 國史館論叢 第22輯 척사론이 천주교 신앙 운동 뿐만 아니라 新文化 운동 자체를 억압함으로써 東道西器的 경 향 내지는 脫性理學的 의식까지도 좌절시켰다는 데 역사 전개과정에서의 문제점이 있는 것 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19세기 중반 이후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西學에 대한 재인식 기운 이 있게 되면서, 그리고 開國을 전후하여 開化思想이 형성되면서 척사론은 그 자존의 논리 에도 불구하고 점차 시대 역행적인 이론으로 소외되어야만 하였다. Ⅴ. 맺 음 말 西學思想의 연속성 이상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17세기 新文化 수용 운동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서학사상은 약 1세기에 걸쳐 기존의 인식 체계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 중 西 器的 측면의 영향은 조선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中華主義的 華夷觀을 극복하고 東道西器的 경 향이나 開國通商論의 주장에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반면에 西敎(천주교 신앙) 교리는 특히 성호좌파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어 조선 교회를 탄생시키는 신앙운동으로 발전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박해와 함께 이와 결부된 西器 수용에도 타격이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세기 전반 반세기 동안 서학사상은 천주교신앙에 대한 인식의 범위 안에서만 수용과 배척 의 택일을 강요당하면서 철저하게 분화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와 같은 변모 과정을 단순히 서학사상의 소멸로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전근대적인 것으 로부터 벗어나려는 조선 후기 사회의 양상은 민중들에게 전파되어 가는 천주교 교리나 新文 化 수용의 욕구를 억제하고 제어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西器 수용의 기운은 1830 년대 이후 전통 지식인들 사이에서 斥邪論이 재정립되고 심화되어 가는 가운데서도 다시 제 기되고 있었다. 따라서 西學(西敎 및 西器)에 대한 조선 사회의 인식은 개국을 전후하여 천 주교 박해가 종식되면서 단순한 신앙운동으로 이해되거나, 아니면 開化思想 속에서 서양의 과학 기술 수용론이 거부감 없이 이해되기까지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서학 사상의 변모와 연속성에서 볼 때, 그리고 당시 조선사회에서 무엇보다도 近代 志向的인 면을 중시해야 한다고 할 때, 천주교 신앙운동의 전개과정도 간과해서는 안 되지 만, 이보다는 18세기에 있었던 北學論者들의 서학사상을 더 중시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의 脫中華主義的 의식 西器 수용론 통상개국론 등이 李圭景 崔漢綺 朴珪壽 등을 통해 개화사상 으로 연결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척사론자였던 尹宗儀의 인식 전 환, 1880년대 초에 나타난 郭基洛 朴淇鍾 高頴聞 李斗永 등의 東道西器論 또한 採西의식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141) 141) 洪淳昶, 앞의 책 pp. 173 180.

- 217 - 李圭景(五洲 : 1788?)은 李德懋의 손자로 五洲衍文長箋散稿 를 저술한 백과전서적 학자이다. 이 저서 안에는 1,400여 항목에 걸친 辨證說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名物度數之學(자연과학)의 부흥과 함께 80여 항목에 걸쳐 새롭게 연구한 서학의 내용을 제 시하고 있다. 그의 서학 사상은 形而上學으로서의 천주교 교리는 비판하되 形而下學으로서 의 서양 학술은 중시하는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단순히 서양의 자연과 학 서적을 읽고 그 안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李之菡 (土亭) 柳馨遠(磻溪)의 通市富國策을 높이 사고, 개국통상론까지 주장한 것이다.142) 이규경의 이와 같은 인식은 앞서 설명한 朴齊家의 통상개국론과도 매우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崔漢綺(惠崗 : 1803 1873) 朴珪壽(瓛齋 : 1807 1876)의 통상론과 西學受容論 에도 연결될 수 있는 일면이 있다. 한편 박규수의 동료이자 철저한 척사론자였던 윤종의도 185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海防論을 우수한 西器의 도입으로 보완하고자 하였다.143)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이처럼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 변화에 영향을 준 것은 魏源의 海國圖志 와 徐繼畬의 瀛環志略 등이었다.144) 이들의 조선 전래는 위정척사론자들 의 척사론이 어양론으로 변모되고 있었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어지고 있는 상 황 아래서도 西學에 대한 이해를 무조건 거부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하였다. 즉, 일부 지식 인들 사이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西器의 수용 내지는 通商策의 강구가 중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최한기가 西敎가 천하에 만연되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 라 實用(西器)을 모두 취해 쓰지 못하는 것을 근심해야 할 것 145)이라고 한 점도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서학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은 1850년대 이후 새롭게 변화되기 시 작하였고, 開國을 전후하여 吳慶錫 姜瑋 申櫶 등 초기 개화사상가들의 이론 속에 자리잡게 된다고 할 수 있다.146) 물론 그들의 서학 인식은 西敎 西器의 분리와 西器導入論에서 출발 하고 있지만, 척사론자들처럼 서학 자체를 철저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1886년 韓佛條約이 체결될 즈음에는 천주교 전교에 대한 용인이 있을 수 있었고,147) 서기도입론이 나 개국통상론도 개화사상의 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겠다. 142)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권32, 與番舶交易辨證說. 143) 車基眞, 앞의 논문 pp. 40 41. 144) 李光麟, 海國圖志의 韓國 傳來와 그 影響 ( 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pp. 2 3 참조. 145) 崔漢綺, 推測錄 권6, 器用學. 146) 李光麟, 姜瑋의 人物과 思想 ( 韓國開化思想硏究, 一潮閣, 1979) pp. 2 44 참조. 147) 拙稿, 韓佛條約의 체결과 그 후의 양국 관계 ( 韓佛修交100年史, 韓國史硏究協議會, 1986) pp. 75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