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민주화운동 오승용
목 차 제1장 머리말 06 제2장 4 19혁명 Ⅰ. 들어가는 말 10 10 Ⅱ. 제1단계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기 1. 4월 19일 이전 상황 2. 반독재민주화투쟁의 폭발(4월19일~4월26일) 1) 광주지역 2) 전남지역 Ⅲ. 제2단계 사회민주화 및 민족통일운동의 시기 1. 진보세력과 7 29선거 2. 청년운동: 통일민주청년동맹 전남도맹과 전남대 민통련 3. 민족통일운동: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전남협의회 12 12 14 14 26 27 27 36 41 Ⅳ.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 유산( 流 産 ) 혹은 미완( 未 完 )? 45 Ⅴ. 맺음말 49 제3장 한일회담반대운동 56 Ⅰ. 들어가는 말 56 Ⅱ. 한일회담의 전개과정 1. 이승만 정부 하의 한일회담 2. 장면정부 하의 한일회담 3. 박정희 정부 하의 한일회담 4. 한일회담의 성격 Ⅲ. 한일회담 반대운동 1.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전개 과정 2.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Ⅳ. 광주 전남지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1.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2. 1965년 협정비준반대운동 58 58 62 63 66 67 68 72 75 75 78
Ⅴ.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1. 전국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2. 광주 전남지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대한 평가 3. 한계 80 80 84 86 제4장 유신시대와 반유신운동 97 Ⅰ. 들어가는 말 97 Ⅱ. 유신체제의 형성 배경 98 Ⅲ. 유신체제의 형성과정 104 Ⅳ. 유신체제의 특징: 대통령 1인지배의 제도화와 긴급조치 106 Ⅴ. 1970년대의 사회운동과 반유신운동 112 Ⅵ. 유신시대 광주 전남의 민주화운동 1. 함성지 사건 2.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3. 침체기의 학생운동들 4.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5. 전남대 학생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 119 119 123 126 133 139 Ⅶ. 맺음말: 유신시대 지역 민주화운동 평가 139 제5장 1987년 민주화운동 141 Ⅰ. 들어가는 말 141 Ⅱ. 6월항쟁의 전개과정과 의미 1. 6월항쟁의 전개과정 2. 6월항쟁의 주도세력 3. 6월항쟁의 평가와 의미 143 143 153 156 Ⅲ. 광주지역의 6월항쟁 1. 6월항쟁의 배경: 대중운동의 성장 167 168
2. 광주지역의 6월항쟁 173 Ⅳ. 전남지역의 6월항쟁 1. 목포 2. 순천 3. 여수 4. 기타 지역 5. 전남지역 항쟁의 특징 194 197 202 207 211 213 Ⅴ. 맺음말 214 제6장 91년 5월투쟁 218 Ⅰ. 들어가는 말 218 Ⅱ. 91년 5월투쟁의 전개과정 1. 투쟁의 개시 및 확산기(4월 26일-5월 4일) 2. 투쟁의 고양기(5월 9일-5월 18일) 3. 투쟁의 퇴조기(5월 25일-6월 29일) 4. 91년 5월투쟁 소결 221 221 223 224 227 Ⅲ. 광주전남의 91년 5월투쟁 1. 광주에서의 91년 5월투쟁: 박승희 분신 2. 운암동 투쟁 3. 윤용하와 김철수, 정상순의 분신 229 229 232 233 Ⅳ. 전남에서의 1991년 5월투쟁 237 Ⅴ. 91년 5월투쟁 평가 1. 91년 5월투쟁 특징 2. 91년 5월투쟁에 대한 평가 238 239 241 Ⅵ. 맺음말 248 제7장 민주화 이후 시대의 민주화운동: 결론을 대신하여 257 참고문헌 261
제1장 머리말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이제는 불가역(irreversible)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1987년 민주화 선언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제도화를 통한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쳤고,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도 경험했다. 물론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는 것과 확립된 민주주의에 만족한다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권위주의에는 싱가포르의 연성권위주의에서 유신체제와 같은 초권위주의가 있듯이, 민주주의에도 다양한 층위의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민주주의의 품질 (quality)을 통해 설명하려는 이론적 시도가 있다. 정치체제의 범주를 억압성이나 민주성이라는 단순한 준거로 더 억압적인 정치체제 혹은 덜 억압적인 정치체제로 구분하거나, 더 민주적인 정치체제 혹은 덜 민주적인 정치체제 등과 같이 구분하는 것보다는 정치체제의 품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정치체제를 구분하려는 시도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제도화와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품질 높은 민주주의와 제도화는 진전되었지만 제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실천이 제도디자인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 품질 낮은 민주주의 등으로 구분하여 각 체제의 특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의 불가역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만 민주주의는 고정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다양한 사회세력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모양이 조금씩 변하고 상태도 달라지는 유기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민주화란 일반적으로 정치체제 안에서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할 때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민주주의를 이념형에 가깝게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확대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불가역적이란 말과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다. 정치체제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법은 선거와 의회를 통한 절차적 방식이 있고, 집회와 시위 등의 항의를 통한, 운동적 방식이 있다. 그런데 해당 사회가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체제, 즉 체제 내에서 민주주의가 억압되고 왜곡되어 있을 때 절차적 방법(방식)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대나 정상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대개 운동적 방식, 거리의 정치와 같은 또 다른 수단을 통한 민주화가 필요하고 효과적이다. 과거 우리 정치체제의 진화과정을 보더라도 전자의 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방식보다는 후자의 방식을 통해 정치체제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해왔다. 이 연구의 목적은 정치체제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대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화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였던 관계로 제도적 방식의 민주화의 역사보다는 운동적 방식의 민주화, 체제 저항적 방식의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논의의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민주화운동이란 1964년 3월 24일 이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헌법이 지향하는 이념 및 가치의 실현과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 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을 매우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동법 시행령에서 항거는 직접 국가권력에 항거한 경우 뿐 아니라 국가권력이 학교 언론 노동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사용자나 기타의 자에 의하여 행하여진 폭력 등에 항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권력의 통치에 항거한 경우 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법률적 보수적 정의이며, 정치적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부 수립 이후 정치체제 내의 민주주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문란케 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통치와 정치적 행위에 저항했던 모든 정치적 실천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의 출발점도 위 법이 규정하고 있는 1964년 3월 24일, 그러니까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3 24시위 부터가 아니더라도 이미 1995년 시행된 <국가유공자등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에 따라 4.19의거 가 4.19혁명 으로 전환됐으며 4.19의거희생자유족회 등 4.19관련 단체도 4.19혁명희생자유족회 등 혁명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4.19혁명도 민주화운동의 법률적 범주에 포함하더라도 학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부분은 없다. 다만, 민주화운동이란 헌정질서로부터 유래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현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의 활동은 민주화운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고, 포함되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 연구의 출발점은 정부 수립 후 최초의 대규모 사회운동이지 민주화운동이었던 4 19혁명으로 정리된다. 민주화운동 기술의 출발점을 언제부터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다음 문제는 민주화운동의 종기( 終 期 ) 문제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법률적 판정을 담당했던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일부 예외사례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으로 노태우정부 시기까지를 권위주의정권으로 보고 해당 시기까지의 항거행위를 민주화운동 및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해왔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권위주의정권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형식논리를 따른 결과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도 동 위원회의 심의결과를 존중하여 민주화운동의 종기를 노태우정권 하의 항거 행위 혹은 활동으로 제한했다. 물론 이런 판단의 배경에는 또 다른 요인도 있다. 1992년 5월투쟁 이 종료된 이후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이 민주화운동 7
중심이 된 민주화운동보다는 시민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민주화운동보다는 시민운동이라는 범주에서 김영삼 정부 이후의 사회운동을 기술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시각에서 기술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일 것이다. 1) 따라서 이 연구는 노태우정부 하의 민주화운동까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1991년 5월투쟁까지의 민주화운동만을 다룰 것이다. 세 번째로 정리가 필요한 문제는 연구대상으로서의 지역 이다. 모든 지역연구에서 선결과제는 그 대상을 적절하게 호명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통칭 지역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이론적 관점과 접근방법에 따라 지역, 지방, local area, region 등 여러 가지 개념이 있다. 언뜻 유사한 것 같지만 이는 지역의 단위, 규모, 성격 등을 어떻게 규정하고 분류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와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로컬(local)은 국가중심의 하부인 국지적 영역, 글로벌/로컬, 전체와 부분을 표현한다. 즉 물리적인 공간경계에서 추상적인 인식의 경계까지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구분과 범주가 지역학 연구에서 개념화하는 지역과 어떻게 닮아있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나아가 중심화와 전지구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로컬을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견도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경향을 거칠게 요약하면, 로컬리티라고 하는 것이 그 둘레를 선으로 쉽게 경계를 그릴 수 있는 그런 범역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기본적으로 로컬리티라는 것은 문제가 되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프로세스, 또는 사회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관계, 사회적 프로세스가 로컬리티마다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지방 이라고 할 때는 중앙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다시 말해서 중앙에서 지방 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방 에 내재화되어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지역을 만들어가는 외부와의 권력관계 등을 간과한다. 그래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지역을 구속하는 권력의 연결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역에 대한 연구가 보다 큰 의미를 획득하려면 지역을 어떻게 담론화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고, 지역이라는 개념이 갖는 고유한 특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도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지역연구가 모든 지역은 다 고유하다는 인식하에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기술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각 지역이 고유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 고유한 것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론화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지역의 고유성이 어떻게 생성되느냐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지역학 연구에서는 각 지역의 고유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상이한 자연 인문적 조건이 서로 결합되어 형성된다고 봤는데, 각 지역의 고유한 특성은 다른 지역과의 관련성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보다 큰 상위 스케일 속에서 각 하위 1) 시민운동 영역은 민주장정 100년 지역사회운동사 연구 의 또 다른 연구주제이기도 하다. 2) 서울 올라간다, 광주 내려온다 와 같이 일상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사용되면서 지방 은 중앙의 타자로서 계속 만들어져 간 다고 할 수 있다. 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스케일의 지역들이 어떤 특정한 역할을 부여받거나, 다른 지역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역의 고유성이 생성된다고 보는 시각이 필요하고, 지역민주화운동을 기술하고, 해석하고, (이 연구의 후속작업을 통해) 이론화해야 한다. 이 연구, 특히 지역민주화운동에 대한 연구와 기술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 작업이 갖는 학술적 역사적 의미 또한 여기에 있다. 다만 이 연구는 통사적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진 않다. 일종의 다섯 개의 큰 사건 혹은 계기를 중심으로 4 19혁명부터 91년 5월투쟁까지의 지역 민주화운동을 조망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의 치명적인 약점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시계열적 서술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사적 서술의 장점이 발현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민주화운동사 서술이 각 년도 별로 발생한 사건을 빠짐없이 서술하는 생활사가 아닌 이상 정치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비록 통사적 접근법을 취하고 있진 않지만 지역 민주화운동사의 큰 흐름은 모두 언급하고 있다. 오히려 이 연구에서 채택하고 있는 계기적 접근법은 지역 민주화운동의 전환점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접근법일 수 있다. 즉 민주화운동의 흐름이 시작 복원되는 흐름과 단절되는 흐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흐름과 단절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5 18항쟁은 이 책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5 18항쟁이 민주화운동이 아니어서가 결코 아니며 오히려 5 18민주화운동이 광주 전남지역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의미와 비중이 남다르기 때문에 독자적인 지면에서 5 18민주화운동에 대한 탁월한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가 별도로 기술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비록 이 책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광주전남의 민주화운동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5 18항쟁이 지역민주화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연구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5 18민주화운동 부분이 별도 연구로 독립하면서 빠지긴 했지만, 광주 전남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4.19혁명, 한일회담반대운동, 반유신운동, 87년 6월항쟁, 91년 5월투쟁이 이 연구에서 다루는 민주화운동 관련 주요 사건들이다. 연대기적 서술을 따르고 있진 않기에 계기적 운동사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 연구에서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을 위해 전국적 흐름과 지역적 운동 흐름을 균형 있게 기술하고자 노력했다. 민주화운동 9
제2장 4 19혁명 Ⅰ. 들어가는 말 4 19에 대한 기억과 자료를 발굴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3) 광주 전남지역에서 4 19혁명은 잊힌 혁명이기 때문이다. 4) 애초에 광주 전남지역 4 19와 관련된 자료가 많지 않고, 자료의 부족을 대신하여 4 19를 기억하고 진술해줄 이들의 수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기존 역사서에서 서울과 기타 지역 의 형태로 서술되어온 방식도 지역 차원의 4 19에 대한 관심을 이완시키고, 기록의 보존을 어렵게 했던 요인 중의 하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글은 광주 전남지역 4 19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고찰로서는 미흡하다. 이 글의 작성과정에서 활용한 자료가 제한되어 있고, 채록한 구술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적 허점과 사실의 누락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공개 혹은 미공개된 광주 전남지역의 4 19혁명에 대한 자료들을 동원하여 4 19혁명의 사상( 事 狀 )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보고자 한다. 광주 전남지역 4 19의 전개과정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나는 4 19의 명칭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4 19의 시종( 始 終 ) 문제다. 사건 발생일을 사건명으로 정하는 관행에 따라 일반적으로 4 19라고 부르지만, 4 19에 따르는 명칭은 의거( 義 擧 )에서부터 항쟁( 抗 爭 ), 봉기( 蜂 起 ), 혁명( 革 命 ) 등에 이르기까지 4 19를 바라보는 주체들의 시선 과 이념 에 따라 다양하다. 5 16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은 불법적인 쿠데타를 혁명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4 19를 의거로 격하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4 19의거라는 표현은 이미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언론과 제도권 정치인들(주로 야당)이 선호하던 명칭이었음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5 16쿠데타 세력이 4 19를 의거로 격하했기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4 19를 의거 로 부르기에는 한국현대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고, 이후 3) 이하 4 19혁명에 대한 기술은 필자의 광주전남의 4월혁명 (정근식, 권형택 편 2010)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4) 4월 혁명 당시의 행정구역 편제로 보면 전남지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4월 혁명이 주로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현재의 전남지역에서는 매우 제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광주 전남지역을 구분한다. 단, 4월 혁명 관련 1차 자료나 관련자 구술 인용에서 전남지역으로 표기한 부분은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광주지역을 포함한다. 1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한국사회의 변화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 이승만 정부의 하야라는 정치적 승리뿐만 아니라 철저한 사회개혁 요구, 자립적 경제구조의 건설, 종속적 자본주의 위기 극복, 분단체제 하에서 억눌려 있던 민족통일운동 전개 등 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흐름이 존재했기 때문에 우리는 4 19를 의거가 아니라 혁명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만, 여기서는 4 19혁명이라는 명칭이 혁명의 발생일 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고, 혁명의 외연을 조금이라도 확장하기 위해 4월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계승과 발전은 제대로 된 이름 부르기 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문제는 4월 혁명의 시종( 始 終 ) 문제다. 4월 혁명을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가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위가 이루어낸 혁명 등으로 규정할 경우 4월 혁명은 4월 19일에 시작되어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4월 26일에 끝난 사건이 된다. 그렇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4월 혁명을 이승만의 하야를 초래한 학생 및 시민들의 봉기와 더불어 제2공화국 시기에 전개된 학생 민중 혁신정치세력들의 사회변혁운동으로 보다 폭넓게 정의할 경우 4월 혁명은 1960년 2 28민주항쟁에서부터 1961년 5 16쿠데타 직전까지의 시기로 확장된다. 즉 4월 혁명은 4월 19일 피의 화요일부터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까지의 일주일이 아니라, 이승만의 하야가 발표된 바로 그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박태순의 용법을 따른다면, 의거로서의 4 19는 역사적 소임을 완수한 것이 되고, 혁명으로서의 4 19는 그로부터 새롭게 그리고 끈질기게 진행되어나가야 했던 하나의 원점 역할을 했다(박태순 1983). 이렇게 4월 혁명을 접근할 경우 4월 혁명의 성공적 측면(이승만 하야와 새 정부의 출범)보다는 실패의 측면(5 16쿠데타로 사회민주화 요구 좌절)만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4월 혁명을 통해 창출된 이른바 4 19공간 (박태순의 표현임)의 역사적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후자의 시각을 채택하여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4월 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월 혁명을 2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단계는 3 15부정선거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 2월 28일부터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된 4월 26일까지의 시기가 해당된다. 이 시기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학생과 시민들이 4월 혁명의 주체로 부상하고, 반독재민주화투쟁이 혁명의 이념으로 정립된다. 제2단계는 이승만 하야 이후부터 5 16군사쿠데타 직전까지의 시기로서 혁명의 주체가 분화하고, 혁명의 과제가 심화된다. 진보세력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사회민주화 요구와 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 2대악법 반대투쟁, 조국통일운동 등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4월 혁명이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규모로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 전남지역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로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4월 혁명이 발생했고, 목포와 여수, 순천, 그리고 나주(영산포)에서 제한적인 규모의 저항이 표출되었다. 11 민주화운동
이 글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위의 시기구분에 따라 광주 전남지역의 4월 혁명의 전개과정을 서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된 4월 혁명의 지역적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전국적으로 전개된 4월 혁명과 지역에서 전개된 4월 혁명의 공통점과 차이점, 4월 혁명이 광주 전남지역에 미친 영향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제1단계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기 1. 4월 19일 이전 상황 적어도 4월 19일 이전까지 광주 전남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조용했다. 4월 19일 시위에서 광주학생은 살아 있다, 광주학생만세 등의 구호가 나왔던 이유는 대구, 마산, 서울 등지에서 이미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을 때 광주지역의 학생들이 동참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비록 4월 19일 이전까지 광주 전남지역에서 3 15부정선거와 이승만 정부에 대한 저항의 빈도와 강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약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의미 있는 저항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3월 15일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장송 데모 였다.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승만 정부가 국가권력을 총동원하여 기획한 유례없는 폭력과 부정선거였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도 대리투표, 사전투표, 3인조 투표 등이 실시되었고, 민주당 참관인이 곳곳에서 내쫓겼다. 광주 전남지역 4월 혁명과정에서 민주당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던 역할은 부정선거 감시운동 이었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의 학생들을 조직하여 부정선거감시단을 조직했고, 이들이 광주지역 각 투표소에 배치되어 자유당과 정부의 관권부정선거를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이러한 소극적인 활동도 이승만 정부는 용인하지 않았다(김시현 구술, 2007. 7. 19). 이에 민주당 전남도당은 투표소에 배치했던 부정선거감시단 및 참관인을 철수시켰다. 민주당 전남도당 사무실에 모인 민주당원들은 오전까지의 부정선거실태로 보건대 이미 선거결과는 명약관화하다고 판단하여, 오후에는 폭력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5) 민주당 전남도당 사무실에 모인 사람들은 시위 전개 방법을 논의한 결과 부정선거 규탄 거리시위를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오후 12시 50분경 곡 민주주의( 哭 民 主 主 義 ) 라고 쓴 만장을 앞세우고 거리시위에 나섰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2005, 11-12). 6)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장송 데모는 마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발생한 부정선거 규탄시위였다. 이날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경에 선거무효를 선언했고, 민주당 중앙당사에서는 오후 4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5) 이런 상황은 3 15사태 로 불렸던 제1차 마산시위와 비슷하다. 6) 이 때문에 이날 시위를 민주주의 장송 데모 라고 부른다. 1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선언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112). 곡 민주주의 라고 쓴 만장을 든 민주당원들이 민주당 전남도당 사무실을 나와 금남로로 진출하자 경찰은 즉각 제지에 나섰고, 경찰과 민주당원 및 시민들 간에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경찰은 곤봉을 들고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했는데, 당시 경찰들은 선거질서 유지를 위해 카빈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 진압과정에서 카빈소총 개머리판으로 시위대를 폭행하기도 했다. 당시 전남일보는 이 시위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5일 민주당 전남도당부에서는 각종 부정 사실을 지적,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이날 상오 열두시 오십 분경 곡 민주주의 라는 만장을 선두로 흰 두건을 쓴 약 오십여 당원들이 지프차와 트럭 그리고 일부는 도보로 이필호의원이 앞장서서 금남로 소재 당부통령 선거사무소를 출발 도청 쪽으로 데모 하였다. 민주주의는 죽었다 고 소리높이 외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곡성을 울린 이들이 법원 앞을 조금 지나자 경찰관과 백차가 출동 제지하였으나 이들은 억세게 데모 를 계속 경찰국장 관사 앞에 이르렀다. 이때 두 대의 소방차도 출동 물세례를 퍼붓기에 이르렀는데, 경찰과 민주당원이 한 동안 옥신각신 끝에 부상자도 냈었다. 무저항으로 데모 를 계속했던 이들은 물세례로 다시 금남로로 길을 되돌아 출발 지점인 사무소에 해산되었으나 그곳에도 잠시 동안 옥신각신이 벌어졌다(전남일보, 1960. 3. 16). 3월 15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 이후 광주 전남지역에서 후속 규탄시위가 있었다는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일부 구술을 통해 도청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시위를 계속했다는 진술은 있지만(김시현 구술; 이문규 구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언론보도나 관련 기록은 찾기 어렵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2). 다만,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이 4월 16일 정오를 기해 시위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경찰과 학교 측의 감시로 무산되었다는 기록은 있다(전남일보, 1960. 4. 16). 4월 18일, 광주고의 상록회, 하이 Y 와 같은 서클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이공범(당시 광주고 졸업생), 문순태(광주고 3학년), 이홍길(광주고 3학년) 등은 4월 초부터 시내에 <정의의 투사 학생들은 모두 궐기하자> 제하의 벽보를 밤에 몰래 붙이곤 했다. 또 광주시내에서 4월 들어 학생시위가 발발할 것이라든가, 발발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는 반정부적 성향을 대표하는 조직이 광주지역의 대학이나 고등학교 등에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급단위로 모여서 시위를 계획했는데, 그것도 학급 전체가 아니라 학급에서 친한 친구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계획했다고 한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7). 13 민주화운동
2. 반독재민주화투쟁의 폭발(4월 19일-4월 26일) 1) 광주지역 광주의 4 19 시위는 광주고에서 시작했고, 참여자도 가장 많았다. 이홍길의 증언에 따르면, 광고생은 농촌 출신이 많아 자취 하숙생이 많았고, 그래서 친구들끼리 모여 시국과 시위에 관한 토론이 활발했다 고 한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7). 당시 광주에는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사범대(광주교대 전신)가 있었지만, 고등학교는 광주고, 광주공고, 조대부고, 광주상고, 광주농고, 수피아여고, 숭일고, 광주사범학교, 광주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등 11개의 학교가 있었다. 고등학생의 수적 우위와 조직적 동원이 용이한 조직구조, 일제 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부터 이어진 운동역량의 축적이 고등학생 주도의 4월 혁명을 초래했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혁명의 폭발은 4월 19일 시위에서부터다. 4월 18일 밤 이홍길, 김신담, 김병욱, 홍갑기 등은 19일을 기해 시위를 벌이고자 결의하고, 그 구호는 3 15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마산의 발포 경찰을 처단하라, 서울 등지의 구속 학생을 석방하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하지 말라 의 4가지로 정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2005, 12). 당시 상황에 대해 이홍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8일 밤 홍갑기, 김병욱 등과 함께 하숙방에 모였는데, 10명이었다. 우리는 19일 1교시가 시작하는 데로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약속하였다. 부서를 정하여 1, 2, 3학년 각반에 난타의 종소리가 들리면 전부 운동장에 집결할 것이며, 이를 미리 학우들에게 알려두라고 했다. 몸집이 큰 신강식, 조병수가 타종수를 맡았다. 7) 이날 밤 모임에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의 전만길이 참여하여 광주고가 시내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조대부고생을 이끌고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19일 아침 어떻게 알았는지 교장선생님이 우리들의 모의 사실을 알고 모의 학생과 학교의 대표학생 전체를 교장실로 불러들였다. 교장선생님은 자중하고 대학입시에 전념하라는 훈화말씀을 하였다. 우리들은 우리들끼리 협의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여 시간을 얻어 회의를 진행한 끝에 데모할 것을 결의하였다. 교장실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난타의 종소리가 들렸고, 전교생들은 속속 운동장에 집결했다. 그들은 우리들, 그러니까 대표 학생들이 교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교장에게 제지만 받고 있을 수가 없어서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1960년 4월 19일 10시 조금 못되어서였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8-159). 광고생들은 운동장에 집결했으나 정문은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다. 정문이 막히자 광고생들은 김선담, 조병수 등이 앞장서서 후문으로 진출했다. 당시 시내로 진출한 학생은 1백 50명 정도였다. 후문을 통해서 계림동 광고 앞길로 나오자 경찰은 이들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했고, 경찰의 7) 이홍길의 진술과는 다르게 신강식은 타종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9). 1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곤봉세례에 광고생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시위대의 주력이 되는 한 대열은 계림동 파출소 쪽으로, 다른 한 대열은 경양방죽 쪽으로 향했다. 계림파출소 앞에 이른 시위대는 대기하고 있던 경찰 백차에 저지당하면서 수십 명이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이때 연행된 학생은 총 48명이었다. 경찰이 사위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자 학생들은 10명 단위로 흩어졌는데 이들은 인근 학교를 돌며 시위 참가를 호소했다(김효중 1960). 이들 시위대가 가장 먼저 찾은 학교는 전남여고였다. 전남여고 앞에서 시위 학생들은 전남여고생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외쳤으나 반응이 없자 광주여고로 향했다. 광주여고에는 이미 경찰이 배치돼 있어서 시위대는 광주공고(지금의 광주시 동구청 자리)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학생 일부가 경찰에 연행되었다. 광주여고생 1백 50명 정도는 운동장에 집결하여 학교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교사들의 제지와 교문 밖을 지키고 있던 경찰의 봉쇄와 엄포로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59). 한편 경양방죽 쪽으로 향한 광고생들은 광주일고로 향했다. 이들은 일고생 나와 라고 외쳤으나 당시 광주일고는 편입시험이 있어서 1, 2학년은 이미 하교했고, 3학년은 교사의 감시와 제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광주일고생과의 합류에 실패한 시위대는 금남로를 지나 광주세무서 앞에 이르렀고, 여기서 광주여고와 광주공고생을 불러내던 또 다른 광주고 시위행렬과 합류했지만, 합류한 시위대는 그 규모가 20여명에 불과했다. 광고생들은 다시 광주농고로 갔다. 광주농고 교사들이 학생들을 제지했으나 이미 광고생의 시위 소속이 알려져 술렁이고 있던 광주농고생들은 누군가가 친 타종을 신호로 거리로 나서게 된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1). 경찰의 제지 속에 농고생들은 대열이 흩어졌고, 시위대열의 일부는 도청으로 향했다. 19일 오전 시내로 진출한 광고생 일부는 광주상고에 와서 시위 동참을 외쳤다. 이들은 상고에서 반응이 없자 물러갔으나 오후 2시경에 다시 찾아왔고, 시위대가 던진 돌에 광주상고 교실 유리창이 깨지는 순간 광주상고생들은 교문을 나와 금남로를 향했다. 금남로로 향하는 와중에 광주상고 시위대는 광고생들과 합류한다. 금남로 성결교회 앞에서 경찰이 제지했으나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도청을 향했다. 시위대에 포위된 경찰은 도망가고, 학생들은 쓰리쿼터 8) 와 백차 9) 등 진압 차량들을 부숴버렸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2). 광주공고생들은 3월 15일에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계획한 바 있었다.4월 19일 광주공고생들도 전날의 고대 4 18시위 소식과 정치깡패에 의한 고대생 테러 소식을 듣고 들떠 있는 상태였고, 광주시내 일원의 시위 분위기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광고생들의 일부가 광주공고로 가서 시위 동참을 호소했고, 광주공고생들 역시 나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교문은 교사와 경찰이 8) 미군이 사용하던 군용트럭을 민간용으로 개조한 소형 트럭으로 적재량이 Three Quarters 즉, 3/4톤이라는 데서 명칭이 유 래했다. 9) 군용 지프차를 개조하여 경찰에서 순찰용으로 사용하던 차량으로서 차량 색깔이 흰색이었던 탓에 백차로 불렸다. 15 민주화운동
지키고 있어서 나설 수가 없었다. 광주공고 3학년이었던 정방섭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계속 교사들이 제지하자 우리는 정문 아닌 다른 돌파구를 찾았어요. 서석국민학교와의 경계가 판자울타리였는데, 이걸 밀어 넘어뜨렸어요. 막상 모두 힘을 합쳐 밀고 나니 금방 넘어져버리더군요. 우리는 서석국민학교로 쏟아져 들어갔다가 광주여고 후문 쪽으로 나갔어요. 거기에서 금남로는 지척 아닙니까?(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3) 광주 4 19 당시 집단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유일한 여고였던 광주여고는 4 19시위에 적극적이었다. 계림파출소를 거쳐 광고생 일부가 시위 동참을 요구하며 나타났고, 이들을 추적하는 경찰 백차가 광주여고 후문 쪽에 등장하자 광주여고생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학생 일부는 거리로 나서려고 했으나 교사들이 제지하자 여고생들은 후문 판자울타리를 밀어 넘어뜨리고 시내로 진출했다. 거리로 나간 광주여고생들은 노동청 사거리에 모였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노란색 물감을 탄 물을 뿌려댔다. 여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다가 일부는 물러섰고, 일부는 흩어졌다. 경찰이 강력하게 막고 나서자 많은 여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 후 점심때부터 광주여고생들은 다시 학교 밖으로 나가 시위에 참여한다. 광주여고생들은 거리에 나서면서 시내로 진출하는 광주공고생들과 합류했다. 조대부고는 전만길 등이 광주고의 이홍길, 홍갑기 등과 18일 밤에 연합 시위 모의를 가질 정도로 조직적이었고, 광주 시내에서 발생했던 4 19시위의 전 과정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0) 조대부고생들이 거리에 나설 때 숭일고생들도 금남로로 향했다. 19일 오후 2시경 금남로는 고교생들이 운집했다. 광고생, 조대부고생, 광주공고생, 광주농고생, 광주상고생 그리고 광주여고생이 학교별로 시위대를 형성했다. 광주일고, 살레시오고, 수피아여고,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개인적으로 거리에 나섰다. 이 무렵부터 경찰의 최루탄 발포가 시작되었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4). 19일 오후에 이르도록 시위 학생은 대부분 고교생들이었다. 그렇다고 1960년 4월 19일 오후 충장로, 금남로 시위에 고등학생만 참여하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 전남일보는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고, 시민들도 연도에서 이따금 박수를 쳐대며 응원했다 는 식의 시위보도를 계속했다(전남일보, 1960. 4. 20). 즉 주역은 학생이었고, 시민들은 조연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와는 다르게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19일 밤 광주에서는 8명이 사망했는데, 시위대가 7명 사망했고, 경찰이 1명 사망했다. 8명을 10) 당시 전남일보 김효중기자의 광주학생 4 19의 발자취 연재기사( 어느 부고생 )에는 조대부고생들이 4월 19일 시위 내내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김효중 1960). 1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직업별로 분류해보면 공원(노동자) 2명(김준호, 김순희), 취업준비 중인 속성학원생 2명(이귀봉, 장기수), 경찰관 1명(최금동), 3명 무직. 학생은 단 1명도 없었다. 이들 희생자들이 19일 밤 사격을 전후하여 시위대에 합류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분명 19일 오전은 고등학생들만의 시위라고 볼 수 있지만, 오후 들어 시내로 시위대가 진출하면서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다. 1960년 4월 당시 이발소에 근무했고, 19일 밤 경찰 곤봉에 중상을 입었던 정동채의 증언에 따르면(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67), 많은 시민들이 19일 오후부터 시내를 중심으로 시위가 본격화되자 시위에 참여했다. 고교생들이 주축이 되고 시민들도 다수 참석한 가운데 시위대는 도청 앞에 집결한다. 곧 시위대는 1천명을 넘어서는 대규모로 발전했다. 시위대 중 일부가 충장로로 향하자 경찰이 제지했고, 이때 시위대는 경찰에 돌을 던지며 맞섰다. 오후 2시 10분경 충파는 시위대의 투석으로 인해 유리창이 깨졌다. 충장로 파출소 투석 이후 시위대는 파출소가 보이면 공격해서 유리창을 부수곤 했다. 시내 쪽 파출소(충장로, 계림동, 대인동, 학동 등)는 모두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충파를 투석한 시위대의 주력은 충장로를 타고 내려가 서중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이른다. 여기서 광주학생만세를 3창했다. 시위대는 기념탑 앞에서 잠시 머문 후 시위대열은 광주소방서 앞에 이르렀다. 소방서 앞에 도착하자 시위대는 살수차와 소방서에 돌을 던졌다. 시위대가 소방서를 공격한 이유는 당시 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소방차를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마산시위 때는 소방차의 물에 빨간 잉크를 타서 시위대에 뿌림으로써 시위자 색출을 용이하게 했는데, 이런 방식이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또 소방차를 동원해 시위대에 물을 뿌림으로써 기세를 꺾는 효과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김효중 1960). 시위대의 소방서 습격으로 소방서 대원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조광범 경비과장의 지시로 최루탄이 발사됐다. 최루탄이 발사되자 소방서 주위의 시위대는 퇴각했다. 이때가 오후 3시경이었고, 이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찰의 계속되는 최루탄 발사로 시위대의 대응도 더 격렬해졌다(김효중 1960). 자유당사와 서울신문사 전남지사를 파괴한 시위대는 충장로를 타고 내려갔고 여기서 금남로 3가의 시위대와 합류했다. 합류지점은 충장로 파출소 앞이었다. 소방서에서 퇴각했던 광고생 중심의 시위대는 동명동으로 향해 김일도 전 광주시장 관사에 돈을 던진 후 금남로로 진입했다. 충장로, 금남로는 시위대로 가득 찼고 시민, 대학생들이 고교생 중심의 시위대에 속속 합류함으로써 시위는 광주시민이 나선 시민투쟁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때가 오후 5시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시간이었다(김효중 1960). 5시 20분경, 경찰이 공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공포탄과 함께 최루탄도 발사했다. 시위대는 도청으로 서서히 전진해 나갔고, 도청 쪽에서는 소방차 2대가 진격해왔다. 소방차는 붉은 소화수를 뿌리면서 시위대의 전진을 저지시키려 했다. 시위대와 소방차가 맞붙는 곳은 경찰국장 관사 앞이었다. 경찰국장 관사 앞쪽에는 경찰의 방어벽이 설치돼 있었다. 시위대와 경찰 간에 투석전이 전개되었고, 인근의 경찰국장 관사, 호남신문사의 유리창이 깨져나가고 쏟아지는 돌멩이에 17 민주화운동
경찰바리케이트가 파손되기 시작했다(김효중 1960). 시위대는 도청 앞에서 금남로 1가 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경찰은 광주경찰서 쪽에 집결해 있었다. 경찰은 계속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아댔고 시위대는 투석전을 전개했다. 시위대는 더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밤이 되자 더욱 격렬하게 투석전을 전개했다. 이럴 즈음 남광주역 주변에 있었던 시위대는 학동파출소 앞으로 모여들었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73). 학동 파출소 습격 중 강정섭은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8시 30분경 학동파출소를 습격한 시위대는 8시 40분경 양림동 파출소로 향했다. 양림파출소가 장악되자 시위대는 도청 앞을 거쳐 광주경찰서 앞으로 갔다. 이때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금남로 1가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는 충장로, 금남로 일원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하다 점차 광주경찰서 쪽으로 다가갔다. 당시 시위대는 폭력 경찰 때려죽여라, 민주 역적의 소굴 경찰서를 쳐부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광주경찰서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주변에 모여들었고,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 발사로 저지하고 있었다. 후퇴와 진격을 되풀이하던 와중에 경찰의 실탄사격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시위대의 머리 위로 실탄을 발사하며 위협사격을 가했다. 시간은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김효중 1960). 당시 시위대는 광주 학생의 피는 끓고 있다. 몽둥이 경찰 죽여라. 선량한 민주의 사도, 연행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19일 밤 9시 25분, 40명으로 구성된 경찰 돌격대는 시위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을 지휘하던 구서칠 도경 보안과장, 조광범 도경 경비과장 등은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실탄사격이었다. 광주발포사건 재판기록(1960년 광주지검 형제2031호)에 따르면, 사격은 9시 40분에 이뤄졌다. 4월 19일 밤,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8명이 사망했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76-178). 이날 발포책임자에 대한 재판기록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오후 9시 30분경부터 동 10시경까지 사이에 경찰서 앞에 밀려온 약 1천 명 가량의 학생 데모 대원을 해산시킴에 있어서 실탄을 발사하여 동 데모 대원에 대한 살상이 있을 것을 예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장경찰부대에게 실탄 발사를 명령하여 동 경찰부대로 하여금 경찰서 앞으로부터 YMCA 앞, 고등법원 앞 4거리 505특무대 앞을 거쳐 광주 충장로 2가 화인약방 근처까지 진격하면서 칼빈 실탄 86발을 무차별 발사케 함(광주지방검찰청 공소장, 1960. 6. 3) 1960년 4월 20일 광주는 무장한 계엄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광주 시내 모든 학교는 휴교상태였으며, 19일 밤에 다친 사람들은 응급처치를 하고 몸을 숨겨야 했다. 20일 오전 10시 전남대입구(태봉산이 있던 자리로 지금의 광주 신안동)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형성됐다. 19일 시위를 주도했던 고교생들과는 달리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이들은 계엄령 속에서 학교 정문 근처에 모인 것이다. 전남대생들이 모이자 광주농고생들이 이 시위대열에 1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합세했다. 학생들은 플래카드를 펼쳐놓고 협잡선거 다시 하여 민주 대한 이룩하자 라고 혈서를 썼다.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광주역(지금의 구역 사거리)으로 갔다. 이 시위에는 4월 19일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많은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11) 시위대는 구역 사거리에서 충장로 4가 입구로 갔다. 이때 최초로 장갑차(GMC) 12) 10대가 등장했다. 시위대는 금남로로 전진하지 못하고 흩어졌고, 재집결을 시도했으나 장갑차의 돌격에 흩어지고 말았다. 장갑차의 공격으로 시위대는 대열을 형성하지 못한 채 일부는 충장로 1가로, 다른 일부는 금남로 1가 쪽으로 향했다가 지산동으로 쫓겨 갔다. 13) 충장로 1가에 이른 시위대는 광주우체국 옆에서 군대와 잠시 충돌했다. 시위대중 몇 명이 벽돌과 기와를 군인에게 던졌으나 무장 군인에 의해 진압 당했다. 일부 학생이 군인들에게 벽돌을 던지자 즉각 위협사격이 개시되었다. 시위대는 광주공원 쪽으로 쫓기다가 흩어지고 말았다. 시위대가 흩어진 뒤 시내는 무장군인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4월 24일에는 4 19희생자 합동위령제 가 열렸다. 오후 3시부터 진행된 합동위령제는 4 19 당시 산화한 김재복, 이귀봉, 박순희, 구중석, 장기수, 김주호를 대상으로 열렸는데, 이 합동위령제는 자유당 산하 기관인 국민회가 주체했기 때문에 시민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날 위령제는 오후 4시에 끝났는데, 국민회 전남도 본부회장 김철주가 제주를 맡아 제문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14) 학생대표의 조사는 없었고, 헌화만 있어서 더욱 4 19 주체들로부터 비난을 샀다(전남일보, 1960. 4. 25). 이날 오후에는 민주당원들이 노인환 광주시장의 사퇴를 권고했다. 25일 새벽 5시 계엄사령부 광주지구 계엄사무소(소장, 박현수 육군소장)는 국무원 훈령 제85호에 의거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경비계엄에 의해 광주지구 계엄사무소는 포고문 제8호를 통해 언론출판의 사전 검열 폐지, 야간 통행금지 시간의 계엄선포 이전 복귀를 발표했다. 오후 2시 이하영 전남도지사는 부상 치료자에게 위문편지를 발송했다. 광주경찰서에는 광주 시위의 주동자로 구속했던 이현주, 강동기, 김영갑, 김숙, 박정용 등 5명을 전원 석방했다. 26일에 전남도경찰국 간부 일동은 경찰 중립화를 결의했다. 도경 경감 급이 주동이 된 이 결의에서 일당 일파의 사병이 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남일보, 1960. 4. 27). 이날 11시경 전남일보는 호외 제2호를 배포했는데, 이승만의 하야 발표가 알려져 시민들은 크게 고무됐다. 오후 6시 광주지검 조희채 검사는 민주당 전남도당 피습사건과 관련하여 광주경찰서 사찰계 이송학, 김재수 순경을 구속했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4). 11) 당시 대학생 시위는 전남대에서 김시현, 정환담, 김충룡, 김규룡, 송성우, 윤재차, 임세택 등이었고, 조선대에서는 김수용, 김주호 등이 참여했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2). 12) 정확한 명칭은 M40 Gun Motor Carriage로서 2차 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105mm포를 장착한 장갑차다. 13) 이 당시 유인학(당시 전남대 법대 3학년)은 계엄군에 연행되어 6일 동안 감금당했다고 한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 회 1995, 183). 14) 제문( 祭 文 )은 재천의 영령들이여, 자연계의 모순으로 동지들의 가슴은 꽃피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거름이 될지어다 라고 되어 있다(전남일보, 1960. 4. 25). 19 민주화운동
4월 27일 12시 30분경 광주에서는 광주상고 2 3학년 학생 50명이 주축이 돼 시위를 벌였다. 많은 시민들이 동참했던 이 시위대는 도청 앞에서 3 15 부정선거 앞잡이 이하영 도지사는 물러나라. 살인경찰의 책임자 경찰국장을 처단하라. 살인경찰의 지휘자 광주시장을 즉각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상고생이 주축이 된 시위대에 50여명의 전남대 시위대가 합세했다. 이들은 광주경찰서로 가서 경찰서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광주경찰서장은 이미 4월 20일 사표를 제출했다면서 시위대에게 사과했다. 학생들은 계속 구호를 외치다가 1시 50분경에 해산했다. 이 시위는 광주지역의 4월 혁명의 마지막 시위였다.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책임자 처별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향후 책임자들의 재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4). 이날 오전 11시 조선대학교 학도호국단 대표들은 박현수 계엄사 광주사무소장을 방문해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5) 조선대학교 학도호국단 대표들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시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사퇴가 권고됐던 노인환 광주시장이 이날 사표를 제출했으며, 전라남도에서는 부상자를 돕기 위해 문교사회국장실에 구호 본부를 설치했다(전남일보, 1960. 4. 28). 4월 21일 이후 광주지역 시위는 대체로 사태추이를 주시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광주경찰서 앞의 19일 밤 발포가 널리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분노했으나, 이미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당시의 야당을 비롯한 반정부단체는 조직적인 저항을 지도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4월 혁명 기간 각 학교별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 같다. 1 전남대학교(50주년 4 19혁명기념사업회. 2011. 전남대학교. 4 19혁명사(상권), pp.491-494). 4 19 이전의 상황 1959년 11월 3일 오전 10시 제7회 학생의 날 광주학생독립운동 3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전국 155개 학생위원장들은 광주일고 교정에 마련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참배를 마친 후, 전남대학교 통학버스로 도청 앞 희망예식장에서 전국학생위원장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3 15부정선거의 획책 징후 및 자유당 독재정부 부패상에 대해 국가안위를 걱정하고 나라를 바로 잡는데 대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11월 4일에는 어제의 결의를 재확인하기 위해 대학생 위원장단이 통학버스를 이용해 전남대학교를 방문했다. 당시 주관자는 전남대학교 총학생위원장 및 상과학생위원장 김평수, 문리과대학 학생위원장 겸 총학생회 총무부장 최흥열, 공과대학 학생회위원장 김충용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위 대화를 마친 위원장들은 광주시내 귀거래다방 및 여명반점, 왕자관 등에 나뉘어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연락망을 구축하면서 수시로 만나 정보교환 및 자유당 정부에 항거하자는 의지를 다졌다. 15) 요구사항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 1995, 180-181). 경찰의 학원 간섭을 반대한다. 경찰 발 포자는 처단해야 한다. 여수, 광산지역 민주당원 피살범인은 엄단해야 한다. 해당 지역의 경찰서장을 파면하고 지역의 재 선거 일정을 공고하라. 2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전남대학교 대표 김평수, 최응열, 김충용 등과 조선대학교 대표 정을배, 고제현, 류경현 등이 한얼회를 조직해서 매주 여명반점 및 왕자관에 모였다. 겉으로는 전공을 발표하는 것으로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대학생 결집과 자유당 정부에 항거하자는 집회를 가진 것이다. 3 15부정선거를 획책한 자유당 정부는 당시의 전남도당 위원장(정명섭 국회의원)을 통해 김평수, 최흥열, 김충용 등을 불러 회유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전남대학교 총회장 김평수와 문리대 회장 겸 총무 최흥열, 그리고 공과대학 위원장 김충용은 1960년 1월에서 3월초까지 당시 연세대 총학생위원장 유영철(당시 한국학생운동자협의회 회장), 전북대학교 총학생회 회장 김용화 등과 수시로 서울 종로 1가 왕실다방 등에 모였다. 서울, 전주, 광주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운동방향 등을 숙의하면서 부패정부 타도에 앞장서기로 결의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다. (당시 참석자 민병천, 신달선, 조창도, 남호명, 정원찬 등) 4 19 당시 활동 상황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사태로 고무된 상황 속에서 뒤이어 마산사태가 터졌다. 전남대학교의 김평수, 최흥열, 김충용 등은 마산사태 위문금 모금을 빙자해 광주시내 고등학생들과 연계해 4월 7일 정오 북동 천주교회 앞에서 집결하기로 모의했으나 정보당국의 탐지로 무산되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소식을 접한 전남대학교는 4월 19일 광주역 광장에 모여 집회를 가진 뒤 고등학생, 일반 시민과 합세했다. 공대위원장 김충용이 학생들을 독려해가며 시위를 시작했다. 금남로 4가, 충장로를 거쳐 도청 쪽으로 향한 시위대에 총위원장 김평수, 문리대위원장 최흥열이 감시망을 피해 합류하여 우체국에 도달할 무렵,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의 무차별적인 곤봉세례와 완강한 제지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연행되었으며, 시위대는 광주공원 쪽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김평수, 김충용은 내일을 기약한 후 피신했다. 최흥열은 연행되어 서석초등학교로 이송되는 도중에 감시망을 피해 탈출했다. 4월 19일 오후 5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20일 밤늦게 시위대에 가담했던 7명(공원, 속성학원생, 무직 등)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소문을 접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태봉산에 긴밀히 모여 다시 시내로 진입하고자 시도했으나 이미 계엄령 하의 군인들이 진압봉과 최루탄으로 봉쇄하므로 다른 방도가 없어 일단 해산했다. 대신 소그룹으로 흩어져 도심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했다. 전남일보 벽보판을 읽는 척하면서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위하기도 했으나 워낙 강력한 경찰들의 제지에 밀려 더 이상의 대규모 시위는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21 민주화운동
4 19 이후의 상황 시위가담으로 계엄군에 의해 당시 서석초등학교에 연행되었던 전남대생들은 대학 당국에 의해 1960년 4월 21일 밤 10시경 석방되었다. 36명이 석방되었고, 부상자 7명은 전남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24일과 25일 양일간에 걸쳐 전남대 학생회 대표(김평수, 최흥열, 김충용) 등과 대학당국은 4 19희생자와 부상자를 위한 가두(금남로, 충장로) 모금을 했고, 모금액은 곧바로 유족 및 77국군통합병원에 전달했다. 26일 이승만대통령의 하야 성명과 동시에 광주시내는 일시적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학생대표들과 뜻있는 사회단체, 종교단체 대표들이 YWCA 소강당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사회질서 유지를 깊이 있게 논의한 것이다. 전남대학교에서는 김평수, 최흥열, 김충용이 참석했고, 백영흠목사, 국기열, 사회단체, 그리고 신문사 편집국장등이 참석했다. 곧이어 최흥열은 군에서 제공한 지프차를 이용하여 시내 가두방송을 하면서 사회질서 유지와 생업에 돌아가자는 호소로 시민들을 선도하며 진정시키는데 앞장섰다. 27일 김평수, 최흥열 등은 4 19발포로 희생당한 김재복(광주 서동), 김준호(광주 양동), 고용석(광주 계림동), 장기수(광주 금남로) 등의 집을 찾아가 위로했다. 2 광주고등학교(50주년 4 19혁명기념사업회. 2011. 광주고등학교. 4 19혁명사(상권), pp.546-549). 광주 YMCA와 YWCA에서는 광주 각 고등학교 기독학생 동아리인 hi-y(남고생)와 y-teen(여고생)을 소속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광주 YMCA 총무는 김천배-이영생으로 이어졌고, YWCA 총무는 조아라여사였다. 광주고등학교 hi-y 동아리 지도 선생은 광주고 영어교사였던 이종수 선생님(충남대 해직교수)이었고, 광주고 hi-y 학생회장은 김선담이었다. YMCA 김천배 총무, YWCA 조아라 총무는 hi-y나 y-teen 또는 합동예배나 모임시 자유당 정부의 독재와 부패를 비판하였고, 특히 이종수 선생은 당시 노총각으로서 독재와 부패 불의에 대하여 신랄히 비판하며 오직 희망은 학생들에게 있으며, 특히 학생운동의 본거지인 광주학생들에게 있다고 역설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고등학생들은 광주학생들이 분연히 일어서야 하고, 그것도 어느 특정 학교만이 아니라 광주 전체 고등학교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광주고 hi-y 들이 앞장서서 광주 각 학교 hi-y 와 y-teen 동아리를 주축으로 조직을 하고 극비 속에 연락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던 중 대구에서 2 28학생사건이 터졌다. 이에 광주 YMCA, YWCA학생들은 크게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학생운동의 발상지인 광주가 먼저 일어서지 못한데 대한 허탈감과 반성이 있었다. 2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그 당시 광주에서는 3 1절 행사를 광주서중학교 학생탑 앞에서 거행했는데, 이때 YMCA와 YWCA 소속의 hi-y와 y-teen은 각 학교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3 1절 행사가 끝나고 학생들이 각 학교로 돌아갈 때 학생들을 금남로로 인도하여 집결시키고 도청과 경찰서로 향하는데 대대적인 데모를 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도 학무과(현 교육청)에서 3 1절날 아침 각 학교로 전문을 보내 3 1절 행사는 각 학교단위로 분산하여 행할 것을 긴급 지시했다. 이리하여 광주 3 1절 데모계획은 무산되었다. 3 15부정선거가 실시되자 그 동안 학생들은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전단을 만들어 돌리고 벽보를 붙이는 등 소규모 행동들이 연달아 발생하여 경찰당국은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 잡히면 살아나기 힘든 저항운동이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광주 전체 고등학생들이 일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광주고등학교에는 자연발생적인 학생동아리들이 많이 있었는데, 각 동아리 별로 불의에 항쟁하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상록수 동아리(이홍길, 박상욱 등)에서는 독재와 부패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전단을 만들어 시내 여러 곳에 벽보를 붙였다. 마산 김주열 사건이 터지고 4 18 고대데모가 터졌다. 이에 충격을 받은 광고생들은 광주 전체 고등학생이 도이에 데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고려대가 했던 것처럼 광주고가 먼저 데모를 하고 광주 전 고등학교에 이를 알려 광주 전체 학생데모로 유도키로 하고 4월 18일 저녁 광주고 각 동아리대표들이 이홍길 자취방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광고생 11명과 부고 1명(전만길)이 4월 19일 아침 데모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데모 결의문을 작성하고 데모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예를 들면 몇 시에 누가 종을 치며, 누가 각 학급을 돌며 데모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데모의 대열과 선봉은 누가 맡으며, 광주 각 고등학교에 데모소식을 누가 전달하는가 그리고 누가 선생님을 막고 어떻게 경찰 저지망을 뚫고 나갈 수 있는가 등등 세부적인 작전을 짰다. 그들은 이홍길 집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고 4 19 아침 일찍 등교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데모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아니면 학생들의 데모조짐을 알아냈는지 등교하자마자 학생간부들을 교장실로 불러 모아 감금하였다. 이에 김선담이 먼저 배탈이 나서 설사중이라며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빠져나와 각 교실을 돌며 비상종을 치면 수업을 포기하고 교정으로 모이라고 알렸다. 한편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교장실 유리창을 깨고 튀어나온 간부 학생들(정원채, 김병웅 등)이 학교종을 난타하므로 전교생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데모 대형이 만들어져 주모자들이 제일 앞서고 키가 큰 학생들부터 그 뒤에 서는 대열이 형성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앞을 막고 학교 정문을 거꾸로 밀어 열고 나가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뚫고 1차 데모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경찰의 군화발과 곤봉에 맞아 쓰러지고 피를 흘렸으며, 연행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협조로 경찰의 손에서 벗어나는 등 그야말로 전투 아닌 전투가 벌어졌다. 23 민주화운동
너무 많은 경찰과 너무 잔인한 곤봉세례와 연행, 물대포 등으로 시청과 도청에 진출하지 못한 채 계림동 오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감선생님이 나와서 연행학생 전원 석방 등 주모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학교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경찰에서 고문과 구타와 회유를 당한 경험이 있는 주모자 11명의 학생들은 연행된 학생들이 걱정이 되어 연행학생을 데모현장으로 데려오면 철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연행학생들이 버스에 실려 데모현장에 도착하는 것을 본 데모대는 일단 학교로 돌아옴으로 1차 데모는 이렇게 끝이났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한 학생들은 다시 교정에 집합하여 경찰이 막고 있는 정문은 놔두고 학교 후문(골목길)길을 통하여 2차 데모에 돌입, 전교생이 빠져나가 광주시내 금남로에 집결하였다. 4월 18일 저녁에 각 임무를 배정하였지만 뿔뿔이 흩어져 이행이 안 됨으로 학생대표 정원채, 김선담 등은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부고, 전남여고, 광주일고, 광주농고, 광주상고 등을 돌며 광주고등학교가 데모를 시작했는데, 많은 학생이 부상당해 피 흘리고 있으며 연행되었으니 빨리 금남로로 모여 데모에 참여하라고 전하면서 외쳤다. 특히 광주여고 같은 경우는 남학생이 못 들어가고 면회가 안 됨으로 김선담, 정원채 등이 학교 밖에서 크게 외치고 모자를 흔들므로 2층 학생들이 보고 듣고 전교생이 정문으로 나오려다 교문이 막혀 담장 목책을 무너뜨리고 나와 데모에 참여했다. 소식을 들은 광주공고, 광주여고, 전남여고, 조대부고, 광주농고, 광주제일고, 광주상고, 수피아고, 숭실고 등과 일부 시민들이 금남로로 집결하여 자유당 정부의 앞잡이인 광주경찰서로 진입을 시도하는 가운데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과 물대포, 총포 발사를 통하여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4 19 저녁 내내 일진일퇴가 거듭되는 처절한 살육의 밤이 계속되었다. 3 광주숭일고등학교(50주년 4 19혁명기념사업회. 2011. 광주숭일고등학교. 4 19혁명사(상권), pp.553-554). 4월 14일 광주숭일고등학교 학생 김귤근, 최영길, 윤승웅, 김용석 등이 학교 옆 할머니빵집 에 모여 우리 선배들은 항일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적극 참여한 자랑스러운 기록이 있는데, 지금 3 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시기에 우리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있느냐 며 데모하자는데[시위를 조직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의논했다고 주장한다. 2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이 자리에서 이들은 학생동원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각 학년별, 각 학급별 주동자를 먼저 선정하기로 했다. 정보가 새어나갈 염려가 있으므로 주동자 선정은 충분한 검토를 해서 엄선하기로 하고 다음 날(4월 15일) 10여명이 다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학생동원 책임은 최영길, 플래카드 및 구호 문구 작성은 윤승웅이 책임지기로 했으며, 19일에 전교생이 데모에 참여할 수 잇도록 모두가 재학생 설득작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19일 오전 수업을 마치자 최영기 등 주동자들이 각 교실을 돌며 모두 운동장에 모이라 고 소리를 치자 학생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운동장으로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선생님들이 교무실에서 나와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라고 소리쳤지만 벌써 일부 학생들이 정문으로 몰려 나가고 또 다른 학생들은 학교 뒷담을 넘어 양림동 오거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찰들이 나와 학생들 집회를 저지하자 학생들은 동방극장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경찰의 저지를 뿌리치고 일부는 사직교 쪽으로 일부는 양림교를 지나 동방극장을 향해 달렸다. 오후 2시경 동방극장 앞에는 3백여 명의 숭고생들이 모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는 구호를 위치며 금남로를 향해 전력 질주하고 있는데 충장로 1가 쪽에서 부고생 등 타교 학생들이 몰려와 박수를 치며 함께 구호를 제창했다. 그들 학생들도 뛰쳐나와 데모에 돌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숭고생들이 금남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벌써 광주고교, 광주공고, 광주여고, 광주상고 학생들이 경찰들과 대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금남로에 학생들 수가 늘어나자 경찰도 인원수를 늘려 강력한 저지를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학생들도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과격해지자 그때부터 경찰은 폭력을 가하면서 잡히는 데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충장로 쪽으로 후퇴한 학생들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때 숭일고 최영길이 충장로 파출소를 공격하자고 소리치자 돌멩이와 각목을 든 학생들이 충장로 파출소에 몰려갔는데 경찰들은 이미 모두 도망치고 텅 비어 있었다. 흥분한 일부 학생들이 파출소 기물을 부수기도 했지만, 곧 물러나와 광주일고 학생탑에 참배하고 금남로로 올라와 경찰과 다시 대치,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부상자가 발생하고 연행되어간 학생 수도 늘어났다. 이런 과정에 서로간의 감정도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밤 9시경 흥분한 학생들이 붙들려간 학생들을 구출하자며 각목과 돌멩이를 들고 광주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이 드디어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가 공포탄이 아닌 실탄 발사로 총을 맞은 몇몇 학생들이 도로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본 학생들의 감정도 격화되었으며 경찰도 더욱 과격해져 닥치는 대로 무차별 구타를 하고 총탄을 발상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는 시위학생들이나 경찰 모두 이성을 잃어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결국 경찰에 쫓긴 광주숭일고생 일부는 불로동 쪽으로 후퇴한 후 내일 다시 교정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날은 일단 해산했다. 25 민주화운동
2) 전남지역 16) 4월 18일부터 민주당 목포시당에서는 농성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원래 목포시당은 3 15부정선거 규탄시위 계획을 목포경찰서에 제출해 공식적으로 시위를 벌이려 했으나, 이 시위가 불허되자 목포시당사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김상태 목포시의원이 3 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공식 허가될 때까지 농성하겠다는 선언서를 낭독하고 농성을 시작했는데, 19일에도 계속됐다. 4월 19일 새벽 1시 백여 명의 경찰은 민주당원의 집회는 불법으로 행해진 것 이라면서 민주당사로 난입했으나, 1시간에 걸친 밀고 당기는 몸싸움 끝에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 민주당원 8명이 부상당했다. 19일 아침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학생들이 찾아왔고, 여러 장의 혈서를 써서 민주당사 창문에 붙여놓기도 했다. 19일 오전에는 이재용 전남도의원이 참가했고 농성자 수는 50여명으로 불어나 4월 혁명 기간 중 농성투쟁을 지속했으며, 4월 26일 목포시위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4월 26일에는 목포와 여수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목포 시위는 4월 26일 오전 10시 달성국민학교에서 고교생 연합 시위대 5백여 명이 집결함으로써 시작됐다. 시위대는 목포경찰서 앞으로 가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학원을 간섭하지 말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10여분 동안 연좌데모를 벌인 시위대는 경찰 기동대 소속의 백차 2대 선도에 맞춰 평화극장 앞 도로를 행진한다. 이 와중에 계속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1시 20분 서울발 목포행 열차에 김부련 군의 시체가 도착했다. 김부련은 무안군 흑산면 가거도 출신으로 서울 서라벌 예술고교 재학생이었는데, 4 19 당시 서울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시민들은 시신이 도착한 목포역으로 몰려들었고, 시신 인도를 놓고 경찰과 민주당 목포시당원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목포역에 모인 군중들은 김부련의 시체 이송을 목격한 후 목포 시내를 행진했는데, 목포경찰서, 자유당 목포시당, 역전파출소, 자유당 시당 위원장 유정도의 집 등을 공격한다. 시위는 격렬했으나 경찰은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시위대가 목포경찰서 최중옥 서장과 면담하여 경찰은 모든 간섭과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 는 약속을 받아냈고, 경찰을 이를 끝까지 지켰다. 여수에서도 4월 26일 시위가 전개되었다. 12시를 기해 민주당 여수시당에서 당원과 시민들을 규합해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담자는 2백여 명이었고 대다수의 시민들은 연도에서 박수를 치며 시위대를 지지했다. 시위대는 여수 중심가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책임지고 즉시 물러나라. 고 김용호 동지의 살인 공범자와 사주자를 즉시 체포하라 등이 여수 시위에서 시위대가 외친 구호였다. 여수의 시위대는 여수시 중앙로터리에 이르러 민주당 여수시장 부위원장의 만세 삼창을 끝으로 해산했다. 여수시위는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으며, 격렬한 시위로 발전하지도 않았다. 학생이 아닌 민주당원 중심의 시위여서 시민들의 참여가 적었기 때문이다. 순천에서는 27일 대규모의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의 규모는 1천5백여 명 규모였다고 한다. 시위대는 순천시 중앙로에서 집결해 11시에 대오를 갖췄다. 시위대 일부는 순천경찰서 앞에서 연좌 16) 전남지역의 4월 혁명 전개과정은 호남 4 19 30년사 편찬위원회(1995, 187-190)의 내용을 참조했다. 2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농성을 했고, 일부는 자유당원 집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시민들이 참여한 시위는 밤까지 이어졌고, 학생들이 마련한 횃불을 들고 행진하며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경찰은 별다른 저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측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4월 29일에는 전라남도 영산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밤 9시경 학생과 읍민 약 150명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고, 영산포 지서장이 나와서 만세를 선창했다. 30일에도 영산포에서는 남녀중학생 5백 명이 오전 10시경 역전에 모였다. 여기서는 지역에서 지탄받는 인사가 퇴진해야 한다는 구호가 나왔다. 이사형 자유당 소속 민의원, 이 씨의 숙부였던 영산포 읍장, 선거대책위원장 이상만 등이 영산포 주민들의 지탄대상이었다. 학생대표들은 읍장과 회동하여 거론된 인사들의 퇴진을 요구한 후 해산했다. Ⅲ. 제2단계 사회민주화 및 민족통일운동의 시기 1. 진보세력과 7 29선거 4월 혁명의 본격적인 전개는 이승만의 하야 이후부터다.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의 시기가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선 정부반대투쟁이었다면 이승만의 하야를 기점으로 정부교체 이후 전개되는 사회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은 4월 혁명의 주체와 과제를 확장했다. 이러한 과정의 중심에는 혁신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혁신세력은 4월 혁명의 제1단계에서는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 부상할 수 없었지만, 이승만 하야 이후 4월 혁명 주체세력의 분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4월 혁명의 주체세력 중의 하나로 부상했다. 이승만 하야 이후 민주당은 이미 사회혁명의 대상으로 변질되었고, 학생세력도 분화를 거듭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4 19 직후 결성된 혁신정당의 분화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7) <표 1> 혁신정당의 분화과정 4 19 이전 4 19 당시 5 16 군사쿠데타 직전 건준(여운형) 인민당 사로당 근 로인민당(5당 캄파계) 민족자주연맹(김규식) 진보당(조봉암)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 사회당(5당 캄파계, 최근우) 혁신당(진보당계 일부, 장건상) 사회대중당(진보당계 일부, 김달호) 통사당(진보당계 일부, 민주혁신당, 한국사회당, 민족자주연맹, 민사당, 사회혁신당 17) 이하 혁신세력 및 혁신정당의 분화과정, 그리고 전남지역 혁신정당의 분화과정에 대한 설명 부분은 오승용(2008, 122-133) 의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27 민주화운동
한국전쟁 이후 지하화 진보당 해산(조봉암 법살) 7 29 선거에 대비하기 위한 선거정당 결성 이념 계보에 따른 분화와 대중운동과의 결합 시도 혁신세력 침체 잠복기 범혁신세력 통합기 분열과 재통합 모색기 * 자료 : 정태영(1995, 538)을 재구성.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혁신정당은 4 19혁명을 기준으로 침체 잠복기를 거쳐 범혁신세력 통합모색기, 분열과 재통합 모색기를 거쳤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4 19 직후부터 5 16 군사쿠데타 직전까지의 기간 동안 전남지역에서 결성되었던 혁신정당들이다. 1960년 5월 12일 발기한 사회대중당은 이승만 정부가 퇴진한 후 4월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던 시점에서 결성준비가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정당이다. 18) 사회대중당은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의 순으로 도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도당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각 지역에서 도당창당준비위 결성대회를 마치자 1960년 6월 17일 삼일당(구 진명여고 강당)에서 범혁신세력의 집결체인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 결성대회가 치러졌다.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결성에 참여한 인사들은 크게 보면 진보당계와 비진보당계로 나눌 수 있다. 진보당계열로는 임춘호, 조중환, 박세원 등이 참여했고, 비진보당계열로는 조선공산당 간부로 이정윤계인 강석봉, 한길상, 조극한, 이기홍 등 반박헌영계 인사들, 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 부위원장을 지낸 국기열, 김철 등 28명이 발기인이 되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결성준비위가 구성되었다(김세원 1993a, 328). 전남도당 결성준비위를 통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지도부가 선출되었는데, 도당위원장 국기열, 총무부장 조중환, 조직부장 박세원, 선전부장 임춘호였으며, 그밖에 강석봉, 한길상, 이기홍, 서동열, 김철중, 정균형, 김주섭, 임무창 등이 임원으로 참여했다. 7 29총선에 입후보할 후보자들에 대한 공천심사는 박세원, 조중환, 임춘호가 주로 담당했다고 한다(김세원 1993a, 330).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하나는 1960년 7 29선거에서의 성공 여부, 다른 하나는 혁신 4당으로 분열된 이후의 활동이다. 우선, 제5대 민의원선거에서의 성공 여부를 살펴보자.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43명, 참의원 8명을 공천했고, 혁신세력의 통일전선이었던 사회대중당은 전남지역 32개 선거구 중 22개 선거구에 23명의 후보자를 공천했다. 19) 18) 사회대중당 발기인으로는 최근우(근민당), 김달호(진보당), 김성숙(근민당, 민혁당), 유병묵(근민당), 유한종(한독당, 근민 당), 이동화(민혁당), 이훈구(민족주의민주사회당), 박기출(진보당), 서상일(민혁당), 윤길중(진보당), 윤우현(부산혁신세력 총집결) 등이다(정태영 1995, 539). 19) 7 29총선 당시 전남지역의 각 선거구에서 출마한 후보자들의 득표현황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 (http://www.nec.go.kr/sinfo/index.html)을 참조하라. 2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표 2> 전남지역 정당 단체별 입후보자 수 입후보자수 민주당 자유당 무소속 사회 대중당 통일당 헌정 동지회 혁신 동지연맹 민의원 163 43 6 88 23 1 1 1 참의원 25 8 3 13 1 * 자료 : 연합연감(1961, 139 & 141)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의 당선자를 보면 전남지역 32개 선거구 중에서 민주당은 29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배출했으며, 무소속 후보가 2개 선거구에서, 통일당 후보가 1개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사회대중당은 22개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했지만 단 1명의 후보도 당선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득표율도 민주당이나 자유당, 통일당에 뒤졌다. 전남지역 32개 선거구 중에서 비( 非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경우는 제22선거구(영암)에서 통일당의 김준연후보가 무소속 박종오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사례와 제15선거구(고흥)에서 무소속 서민호후보가 역시 무소속인 지영춘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사례가 있는데, 이 지역은 전남 32개 선거구 중 민주당이 유일하게 공천을 하지 않았던 선거구였다. 또한 제20선거구(해남)에서는 무소속 홍광표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들 비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된 3인의 당선자 중 통일당의 김준연은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 제3차공산당사건(ML당사건) 에 관련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지만, 해방 이후 한민당에 입당하여 제3대와 제4대 민의원을 역임하는 등 통상적인 혁신계 정치인들과 계파는 물론 정치행적 자체가 달랐다. 서민호 역시 1967년 대중당 소속으로 대통령후보로 출마하는 등 혁신세력과 일정한 연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반공주의자였고, 보수적인 이념을 포지했던 인사였다. 해남에서 당선된 무소속 홍광표 당선자는 혁신세력과는 무관한 정치인이었다. 결국 전남지역 32개 선거구에서 범혁신세력의 통합정당인 사회대중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으며, 득표율 역시 민주당이나 무소속 후보의 합계와 비교할 때 뒤진다. 7 29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은 전국적으로 541,021표를 득표해 5.96%를 득표했고, 이는 민주당의 41.71%, 무소속 합계 46.80% 보다 크게 낮고, 20) 전남지역만 보더라도 민주당 46.01%, 무소속 합계 40.82% 보다 낮은 8.16%의 득표율에 그치고 있다. 22개 선거구에 후보자를 공천한 정당의 득표율치고는 너무 낮은 득표율이다. 20) 7 29총선이 4 19 직후 치러진 관계로 상당수 자유당 출신 내지 자유당 성향의 후보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것을 고려 할 때 실제 사회대중당은 자유당의 득표율보다 낮았을 수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29 민주화운동
7 29총선 당시 전남지역 선거구의 각 정당별 입후보자 수와 득표현황은 아래와 같다. <표 3> 정당별 득표현황 합계 민주당 자유당 사대당 한사당 통일당 한독당 기타 무소속 전국 (득표율) 9,077,835 3,786,401 (41.71%) 249,960 (2.75%) 541,021 (5.96%) 57,965 (0.63%) 17,293 (0.19%) 26,649 (0.29%) 149,366 (1.65%) 4,249,180 (46.81%) 전남 (득표율) 1,271,405 585,030 (46.01%) 41,109 (3.23%) 103,731 (8.16%) 14,878 (1.17%) 7,630 (0.60%) 519,027 (40.82%) * 출처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대선거정보시스템(http://www.nec.go.kr/sinfo/index.html) 7 29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의 실패는 당의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7 29총선을 앞두고 범혁신세력이 선거참여를 위해 급조한 성격이 강했던 사회대중당은 선거 실패로 당을 유지 결속시킬 구심점을 상실했고, 이에 덧붙여 사회대중당으로의 범혁신세력 결집 및 통합의 과정에서 잠복해 있던 당 지도부의 이념 및 노선, 계파간의 갈등이 총선 실패를 계기로 노골화되면서 당은 결국 분열했다. 사회대중당 중앙의 분열과정과 마찬가지로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분열과정 역시 그 출발점은 구 진보당 계열의 이탈로부터 시작된다. 총무부장 조중환, 조직부장 박세원, 선전부장 임춘호, 전남도당 준비위원이었던 노응상, 이명하 등 구 진보당 계열의 인사들이 사회대중당을 이탈했는데, 이들은 후에 통일사회당 전남도당을 결성한다. 21) 구 진보당계열이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에서 이탈하자 도당위원장 국기열을 중심으로 김철, 강석봉, 조극환, 이기홍, 서동열, 이호면, 임무창, 김규남, 홍정희, 조규선, 염동호, 임우택, 김철중 등이 향후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진로와 관련한 문제를 논의했으나(김세원 1993a, 337), 결국 김철중 등 김달호 계열의 인사들을 제외하고 다수는 사회당 전남도당 창당준비위원회로 합류한다. 끝까지 사회대중당을 지켰던 김철중은 1960년 5월 20일 사회대중당 전남준비위원회를 조직한 후 총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사회대중당 결성과 함께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7 29총선 당시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전라남도 제25선거구(무안군)에 출마했으나 2,225표에 그쳐 낙선한 뒤 사회대중당의 분열과정에서 통일사회당이나 사회당으로 합류하지 않고 끝까지 사회대중당에 남아서 활동한다. 특히 장면정부가 정부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기 위해 2대 법안을 발의하자 2대악법반대 전남공동투쟁위원회 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다 5 16 군사쿠데타 이후 전라남도사회대중당사건 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는다(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 1962b, 21) 김세원에 따르면(1993a, 337), 당시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분열은 선거실패 외에도 당 공천기탁금의 착복 시비도 한 몫 했었다고 한다. 30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783-791).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의 결당은 몇 가지 의미를 갖는다. 사회대중당은 4 19혁명 직후에야 정치활동을 개시한 혁신세력이 제5대 민의원선거를 맞이하여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결성한 선거정당이었다. 사회대중당을 선거정당으로 규정할 경우 사회대중당의 성과와 한계는 보다 분명해진다. 결당준비위 출범에서 총선까지 1달여의 짧은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범혁신세력 최초의 통합을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948년 단정 수립 이후 지하화 되었던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남로당, 빨치산 참여 인사들과 진보당사건으로 정치활동의 제약을 받았던 김규식과 조봉암계열의 민족주의적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범혁신세력이 4 19라는 특수정세에서 합법적으로 결성한 정당으로서 제도정치권 내부의 권력경쟁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된다. 다만 이념적 지향이 강했던 사회대중당이 무소속으로 대거 출마한 구( 舊 )자유당 계열의 후보자들이나 민주당 후보 및 정책과의 차별성 제시에 실패했고, 특히 민주당의 색깔공세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등 급조된 선거정당으로서 지도력의 한계도 그대로 노정하고 말았다. 이러한 한계들은 결국 7 29총선에서 사회대중당이 실패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특히 선거 실패 이후 당 내부의 리더십 갈등이 재현되고, 내부 파벌들 간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와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최초의 통합정당이 최후의 통합정당이 되어버린 점은 사회대중당의 역사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통일사회당은 1961년 3월 24일 19시경 광주시 남동에 위치한 통사당 전남도당 인권옹호위원장인 박세원의 집에서 통사당 당무위원회 부위원장이자 통사당 전남지역 임시 조직책 이명하의 주도로 최운기, 정해룡, 조중환, 임춘호, 박세원, 노응상, 정길문 등 통일사회당 전남도당 결성준비위원 18명이 회동하여 전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를 개최했다. 해당 모임에서는 우선 통사당 전남도당 준비위원회의 임원을 선출하고 부서를 결정했다. 통일사회당 전남도당결당준비위의 임원은 아래와 같다. 전남도당 위 원 장 최운기 부위원장 정해룡(정치위원 겸임) 조중환 조직국장 노응상 당무위원장 임춘호 인권옹호위원장 박세원 이하 미상 통일사회당 전남도당의 활동은 크게 2대악법반대투쟁과 관련한 정치 강연회의 개최와 중립화 31 민주화운동
통일 전남도연맹 결성과 관련되어 있다. 22) 1961년 3월 24일 개최한 통사당 전남도당 준비위원회 모임은 중앙당의 지방유세 개최를 위한 준비모임의 성격도 동시에 띠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날인 3월 25일 14시에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 통사당 주최의 정치 강연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 강연회 행사준비와 관련해서는 지역 조직책 이명하가 행사의 취지와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행사개최를 위한 도당준비위의 임무를 분담하는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23) 이날 모임에서는 이명하가 전달한 동서냉전의 희생에서 해방되고 미소양국의 세력 전에서 벗어나는 정치적 군사적 완충지대, 즉 영세중립화통일조국을 수립하는 중립화만이 통일독립을 가능케 한다 는 취지의 영세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선언문 100여부를 참가자들이 분배 회람한 후 동시에 영세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전남도맹 결성을 합의하여 최운기를 전남도맹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이명하가 전달한 유인물은 정해룡을 통해 같은 해 4월과 5월경 통사당원인 정길문과 손성훈 등을 통해 보성군 지역에 배포하는 것을 비롯하여 결당준비위원들이 동 유인물을 배포하여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론의 확산을 모색했다. 1961년 3월 25일 14시경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 개최된 통사당의 정치 강연회에서는 통사당(중앙당) 정치위원장인 이동화가 연사로 나서 민주사회주의 노선의 역사적 임무 제하의 연설을 하고, 통사당 특별위원회인 통일촉진위원회 위원장인 김기철이 중립화 통일에 대하여 제하의 연설을 했으며, 통사당 조직국장이자 민의원인 박권희가 2대법(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반대한다 제하의 연설을, 선전국장 고정훈이 국내의 정세보고 제하의 연설을, 전남 조직책이자 당무위원회 부위원장 이명하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살 것인가 제하의 연설을 했다. 통사당 주최의 이 정치 강연회에는 10,000여명의 시민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행사 참석자들에게 영세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발기선언문을 배포했다. 이 정치 강연회에서 연설한 연사들은 집권당인 민주당의 무능과 장면정부의 비민주성, 2대악법이 혁신정당을 탄압하고 보수정책의 도구화하려는 시도라는 점, 한국의 영세중립화 통일안이 한국의 정치적 특수성과 국내정세의 제반사정에 비춰 대한민국의 진정하고 유일한 통일방안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통사당 전남도당은 통민청이 주최한 4 19혁명 1주년 기념식 에도 참여했는데, 통사당 부위원장인 조중환은 1961년 4월 18일 13시경 통일사회당 전남도당 당사에서 통일민주청년동맹 전남도맹 위원장 김시현 등과 만나 통민청 주최로 4월 혁명 1주년 기념행사시에 별도로 2대악법 반대 성토대회 및 시위를 진행할 계획을 전달받고 김시현 등에게 행사 준비를 위해 통사당 전남도당 사무실을 사용케 하고, 통사당 전남도당 사무실에서 4 19혁명 1주년 22) 통일사회당 전남도당의 활동내용은 정해룡의 3남 정길상이 제공한 통일사회당 사건 재판기록을 통해 정리한 내용임을 밝 혀둔다. 인용을 허락해준 정길상씨에게 감사드린다. 23)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는 3월 25일 광주공원에서 개최예정이던 정치 강연회 행사를 위해 일체의 준비를 분담했는데 정해 룡은 사회를 담당하기로 결정됐고, 박세원은 행사장의 설비책임을, 조중환은 자동차와 마이크 준비 책임을 각각 분담했다. 32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기념행사에 사용할 피켓(구호판) 및 플래카드 등에 학원의 자유를 달라,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 배고픈 백성에게 악법보다 빵을 달라 는 등의 구호 등을 기재한 후 다음날인 4월 19일 광주공원 앞 광장에서 거행된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 및 시가행진에 동참했다.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는 준비위 단계로 활동하다 5 16군사쿠데타로 도당준비위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는데, 5 16 군사쿠데타 직후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구속된 통사당 간부들은 정해룡, 조중환, 임춘호, 박세원, 노응상 등 5명이었다. 이들은 재판과정에서 혁명검찰부의 기소내용과 같이 정치 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사실이고, 김기철이 중립화 통일에 대한 연설을 한 것도 사실이나 그 내용이 1954년 제네바 유엔총회 때 한국대표 변영태가 제안했던 14개 조항을 기초로 한 유엔 감시 하 인구비례제의 총선거와 미국 상원의원 맨스필드의 의견이 한국중립화 통일에 대한 전망을 종합하여 설명하고 국민의 여론에 묻고자 한다는 요지의 연설이었음을 항변했다. 또한 정치 강연회가 합법적인 절차를 수속한 정당 활동임을 강조했으나 혁명재판부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원회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른 혁신정당들과 비교할 때 재정적으로는 가장 안정된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통사당 전남도당준비위는 독자적인 사업을 전개하기보다는 통민청 등 청년운동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공동투쟁 및 연대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을 택했다(김시현 구술, 2007. 7. 19; 이문교 구술, 2007. 10. 16). 전남지역에서 전개되었던 2대악법 반대 공동투쟁 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통일운동에 있어서는 통사당(중앙당)이 민자통에서 이탈 중통련을 결성하며 독자적인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관계로 민자통 전라남도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와 관련된 행사에도 민자통 전남협의회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행사를 모색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2007. 7. 19; 이문교 구술, 2007, 10. 16). 사회당 창당 준비위원회의 핵심간부는 주로 조선공산당, 남로당, 근로인민당계 인사들이었다. 전남지역에서 사회당 창당준비위에 참여한 인사로는 김철(70세, 3 1운동 주도, 45년 인민당 전남도당위원장, 건준 전라남도 부위원장), 강석봉(1926년 제3차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책, 45년 건준 전라남도 부위원장), 한길상(3 1운동 참가 투옥, 제3차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45년 건준 전라남도 산업부장), 이기홍(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제적, 1934년 적색 농민운동사건 투옥, 45년 건준 광주시 노동부장, 조공 남로당원, 49년 남북로동당 합당시 탈당), 성시백(특수공작선 멤버, 53년 구국투쟁동맹 노장환 사건 투옥), 서동열(만주 공청에서 항일운동, 45년 남로당, 53년 구국투쟁동맹), 최백근(항일운동, 1932년 투옥, 45년 근로인민당, 1948년 해주에서 개최된 남북협상회의에 근민당 대표로 참가, 1949년 4월 월북, 근민당 재북 당무부장에 취임하여 체류하다가 6 25 당시 조국통일민족전선 정치공작원으로 남하, 9 28 월북, 1952년 9월 대남공작원으로 남파, 1952년 12월 피검 투옥, 1955년 만기출옥), 국기열(동아일보 정치부장, 45년 33 민주화운동
건준 전남부위원장), 이호면(구국투쟁동맹사건으로 투옥), 그리고 김세원 등이었다(김세원 1993a, 338-339). 사회당의 강령은 민주사회주의에 입각한 새 역사의 창조, 독재세력을 타도하여 자유를 수호, 계획적 경제체제와 현대적인 복지국가 건설, 인간의 지능과 창조력을 배양 개발, 우방 제국과의 긴밀한 제휴로서 민주적 조국통일의 주체가 된다는 내용의 5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권희경 1989, 93), 24) 정치운영(4개조) 경제정책(13개조) 사회문제(5개조) 국방정책(2개조) 현대화(6개조) 등 각 부문별 정책을 제시했다(권희경 1989, 93-97). 사회당 전남도당 결성준비위원회의 임원구성을 보면, 위원장은 국기열, 당무위원장 이호면, 조직위원장 서동열(실질적인 조직위원장은 이기홍), 선전위원장 김세원(청년학생 지도책), 도당 부위원장 겸 재정위원장 강석봉, 부위원장 한길상, 도당 고문 김철, 선거대책위원장 임무창, 총무부장 이영복, 부녀부장 김주 등이었다. 사회당 전남도당은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원로들로 구성되었는데, 이기홍이 실질적으로 조직을 맡아 조직화를 담당했고, 이기홍이 지역적 연구가 없는 지역 혹은 빨치산활동 경력자와의 연계가 없던 지역이었던 화순군과 장흥군, 보성군의 경우에는 김세원이 조직을 담당했다(김세원 1993a, 344). 중앙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결성준비위원회 출범 직후 사회당 전남도당은 크게 세 가지 활동에 주력한다. 하나는 2 8 한미경제협정체결반대 공동투쟁위원회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2대악법 반대공동투쟁위원회 참여, 마지막으로 민자통 결성이다. 물론 사회당 전남도당이 이러한 투쟁을 독자적으로 추진해 나갔던 것은 아니다. 사회당의 외곽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통민청 전남도맹과 긴밀히 연계하여 조직화와 대중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사회당 전남도당 역시 다른 정당에 비해 수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대중투쟁을 독자적으로 주도해 나갈 정도로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중투쟁의 중심은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정당이었다기보다는 학생운동 혹은 청년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사회당의 역할은 실제 대중투쟁을 기획하며 대중시위를 주도하기보다는 의제를 설정하고 청년운동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통민청에 대해서는 사회당의 원로급 인사들이 직접 지도를 담당했다. 당시 사회당 전남도당이 주도했던 대표적인 정치활동은 2 8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이었다. 통민청 출범 직후 첫 번째 정치활동도 광주공원에서 개최한 2 8한미경제협정반대성토대회였다. 당시 성토대회는 전남지역의 혁신계 정당들이 분열된 후 처음으로 2 8한미경제협정반대 전라남도공동투쟁위 를 결성하여 연대를 모색했던 첫 행사였다. 그러나 당시 전남지역의 24) 김세원에 따르면(김세원 1993a, 339-340), 사회당 결성 당시 당헌 기초소위원으로 최백근, 유병묵, 김진한, 김세원 등이, 당 강령 규약은 최백근, 김진한, 김세원이, 선언문은 유병묵이 작성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공인된 주장은 아니다. 실제 김 세원의 비트(1993a)에 언급된 사회당의 강령내용은 자료로 전해지는 사회당의 강령내용과 많이 다르다. 34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혁신정당들, 특히 사회당은 내적으로 조직역량이 뛰어났지만 외부행사를 개최할 여력까지는 없었으며, 통민청이 앞장서 일을 추진하면 사회당이나 통사당, 사회대중당이 뒤에서 원조하는 형태로 거의 모든 행사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또한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행사를 개최하려면 힘드니까 한번 행사를 개최하면 (한미)경제협정 문제부터 통일문제까지 여러 문제들을 결합해서 투쟁하는 형태였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2007. 11. 3; 박익수 구술, 2007. 11. 2; 이규영 구술, 2007. 11. 2). 당시 전남지역의 혁신정당들과 통민청 사이에는 일종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혁신정당들은 자금동원, 인력지원 등을 전담하고 통민청은 전면에 나서 대중행사를 주관했다고 한다. 통민청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단체는 사회당과 민자통이었고, 이들 중 상당 수 인사들은 공안기관의 감시로 공개 활동이 자유스럽지 못한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통민청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2007. 11. 3; 박익수 구술, 2007. 11. 2). 결국 사회당 전남도당결성준비위는 통민청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당면한 이슈에 대응했는데, 2대악법반대투쟁도 마찬가지였다. 사회당은 4 19 이후 나타났던 혁신정당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당이다. 사회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과거 조선공산당, 남로당, 근로인민당계 인사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전남지방은 사회당 참여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고, 25) 한국전쟁 당시 입산자, 즉 빨치산 참가자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대구와는 달리 인민군의 완전 점령 지역이었던 관계로 좌익운동 관계자들이 완전히 노출되었고, 인민군과 국군의 점령이 거듭되면서 과거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인사들이나 좌익운동 관계자들은 대부분 정치활동을 억압당했다. 4 19혁명은 이들에게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사회대중당은 이들이 최초로 활동을 개시한 정당이었고, 7 29총선 실패 이후 대중운동을 통한 조직화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당이 결성되었고 이들 세력이 결집한 사회당이 다른 혁신정당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정책방향에 있어 가장 급진적인 것은 당연했다. 또한 사회당은 통민청과의 연계를 통해 당의 활동능력을 배가시켰다. 다른 혁신정당들이 선언문이나 성명서 발표 수준에서 활동을 전개할 때 사회당은 통민청이라는 청년운동단체에 대한 지도와 민자통이라는 대중적 통일운동조직의 건설을 통해 대중들과의 접촉면을 넓혀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회당의 활동이 미처 정상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5 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사회당의 모든 활동은 정지당하고 말았으며 사회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옥고( 獄 苦 )를 치러야만 했다. 25) 일제 때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무수한 저항운동이 발생했던 지역이며,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박헌영이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해방되던 시점까지 광주 백운동의 한 벽돌공장에서 은거하면서 인근 화순탄광 등 을 거점으로 비밀리에 조직화를 전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8 15 해방 직후에도 미군정과 민중들과의 대립이 매우 치열했 던 지역 중의 하나이며, 그 과정에서 곳곳에서 양민들이 학살당하는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35 민주화운동
2. 청년운동: 통일민주청년동맹 전남도맹 26) 과 전남대 민통련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 비해 결성 시점도 늦을 뿐만 아니라 조직의 강령, 통일방안, 변혁노선, 조직원 등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통민청은 민민청과 함께 청년운동의 중심축을 담당했던 조직으로서 이후 학생운동은 물론 진보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통민청 전남도맹은 1961년 2월 14일 결성회의가 개최된다. 2월 14일은 여러 가지 정치적 행사가 개최되었던 날이다. 서울에서는 사회대중당 당사에서 2 8한미경제협정반대 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되던 날이었고, 전남에서는 민자통 전남도협의회 결성을 위한 준비회의가 최종적으로 개최되었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결성은 전남대학교 김시현이 주도했는데, 최초 결성 모임에 참석한 인원은 9명이다. 27) 통민청 전남도맹 결성을 지원했던 중앙통민청 전남조직책 박익수, 김시현, 이문교, 김수영, 박복규, 박명서, 최준섭과 사회당의 김세원, 그리고 한길상 등 총 9명이 결성회의에 참석했다. 이들 중 최준섭과 김세원은 당시 학생이 아니었고, 나머지 5명은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이었다. 28) 이들이 통민청을 결성하게 된 1차적 계기는 민주당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신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4 19혁명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던 학생들이었다. 당시에도 서울을 제외하고 운동역량과 조직이 가장 강력했던 지역 중의 하나였고, 특히나 남로당 출신과 구 빨치산 경력자들이 많이 생존해 있던 전남지역에서 민민청이 조직되지 않았던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전남지역의 학생운동 및 청년운동세력들은 7 29총선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을 혁신세력의 분열에서 찾고 있었다. 따라서 청년운동만은 지역에서 비슷한 성격의 조직들을 만들어 투쟁역량을 분열시킬 필요가 없고, 그래야만 통일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매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김시현 구술, 2007. 7. 19; 이문교 구술, 2007. 10. 16). 29) 통민청의 조직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통일세력의 결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존 정치세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세력, 보다 구체적으로 청년운동이 중심이 된 새로운 집권세력의 구축이었다. 이들은 기존 정당과 기존 정치세력들을 전부 배제하고 청년학생들이 앞장을 서서 새로운 통일세력과 집권세력을 구축하자는 결성취지문에 찬동했기 때문에 통민청에 가입했고 이러한 26) 이하의 기술은 통민청 전남도맹 위원장 서리 김시현과 선전국장 이문교, 그리고 통민청 맹원이었던 이규영과 박익수와의 구 술내용에 크게 의존했는데, 이는 통민청 전남도맹 관련 자료나 연구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27) 재판자료나 다른 논문 등에는 10여명으로 나온다. 28) 김시현은 조직을 하는데 장소가 어디 대외적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사회당 의원 한길상씨 댁에서 우리가 통민청을 조직했 다고 증언하고 있다(김시현 구술, 2007. 7. 19). 29) 이문교는 우리가 수차례 모임을 거듭하고 전남에서 청년학생조직의 중심세력으로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결 통일시키기로 하고 전남 통민청을 결성했습니다. 말하자면 전남에서는 통민청 외의 다른 청년조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전남에 서 청년학생들은 전부 통민청으로 하나의 조직 속에 묶어서 집결시키자는 그런 취지의 우리 결의가 여기 있었(다) 고 증언 한다(이문교 구술, 2007. 10. 16). 36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
조직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했었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통민청을 단순히 사회당의 하부조직만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김동춘 1991, 123), 통민청의 조직목표나 활동수준을 볼 때 사회당과 긴밀히 연계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당의 하부조직이나 사회당이 조직한 청년운동조직이라는 평가는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통민청의 역할이 자체의 조직화와 학생운동 지원, 민자통의 운영을 담당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의 정치세력을 대체하는 대안세력의 중심, 새로운 정치조직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통민청(민민청도 마찬가지)은 혁신정당 외부에서 혁신정당을 채찍질하며 독자적인 활동영역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통민청과 통민청 전남도맹과의 연계는 중앙통민청의 박익수, 박현채와 통민청 전남도맹의 김시현을 통해 이루어졌다. 김시현의 증언에 따르면(김시현 구술, 2007. 7. 19), 박현채는 가끔 한 번씩 들르면 전화통화, 서신 일체 안 해. 실제 만나서 가지고 있는 자료, 우리가 했던 것, 유인물이라든지 포스터라든지 실질적으로 논의를 해 가지고 또 거기서 내용을 우리한테 알려주는 형태로 전남통민청과 중앙통민청과의 유기적 연계를 모색했다고 한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조직구성을 보면, 위원장 서리 겸 동원국장에 김시현, 사무국장에 김수영, 선전국장에 이문교, 교양국장 박복규, 투쟁국장에 박명서 그 외에 최준섭, 박동희, 오택명, 김상태, 안태순, 나기주 등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운영에 중추적으로 참여했다. 통민청 전남도맹은 중앙통민청의 조직화방식과 마찬가지로 군 단위 지방조직의 결성을 시도했다. 비록 5 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전체 군 단위로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이문교가 우선적으로 자신의 고향인 완도지역을 중심으로 계몽활동 당시 교류하던 청년학생들을 접촉한 후 통민청의 취지와 유인물 등을 전달하고 그 필요성에 대해 동의를 받은 후 완도읍의 정기탁을 책임자로 정해 인근 해남군과 강진군을 하나로 묶는 조직결성을 추진했었다고 한다(이문교 구술, 2007. 10. 16). 그러나 5 16 군사쿠데타 직후 이문교가 통민청 활동을 이유로 경찰에 검거되면서 통민청 전남도맹의 군 단위 조직화가 무산되었다. 통민청은 원래 서울과 전남 중심의 조직이었는데, 이는 사회당의 세력권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회원은 증언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이문교는 내 기억으로는 140~150명이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가는데, 5 16이 터지자 (회원명부를) 모두 없애버렸어요. 김시현이가 그걸 보관했어요. 아마 김시현이가 가장 잘 알거예요 라고 증언하고 있고, 김시현은 꽤 많았어. 대략 내가 명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백여 명이 넘었으니까. 민통련은 사실 별로 얼마 안됐어. 통민청은 (구속이 된 사람만) 80-90명 가까이 됐으니까. 150명은 넘고, 전체 규모라면 한 160-170명쯤 될 것 같아 (김시현 구술, 2007. 7. 9). 회원구성을 보면, 전남대학교 학생을 주축으로 조선대학교,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육대학교), 광주여고, 전대사대부고, 청년부의 기세문, 안태순, 오택명과 박동환 등 종연방직(현 전남방직) 37 민주화운동
노조원까지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기세문 구술, 2007. 10. 19; 박동환 구술, 2007. 10. 19). 기세문의 증언에 따르면, 사회당 선전부장이자 청년부 조직책이었던 김세원이 자신에게 통민청 위원장을 권유했지만, 자신은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르고 비전향으로 출소한 상태에다가 병역기피문제까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외부에 노출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측면에서 협조하기로 했다고 한다. 30) 이 부분은 김세원의 수기 비트 에서도 확인된다(김세원 1993a). 당시 통민청은 통민청 발기인이자 중앙위원이었던 이규영이 통민청의 기관지격인 신세대 라는 잡지를 발간했는데, 이규영이 직접 가지고 내려온 적도 있고(이문교의 증언), 박익수나 박현채를 통해 전달되기도 했다고 한다(김시현 구술, 2007. 11. 3; 이문교 구술, 2007. 10. 16; 박익수, 2007. 11. 2). 31) 통민청 전남도맹은 주로 민자통과 사회당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정치이념은 사회당 소속의 강석봉, 이기홍, 김세원, 김철, 기세문 등의 지도를 받았고, 민자통의 한길상, 문태곤 등으로부터는 통일노선 및 정책과 관련한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지도의 형태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사상학습의 형태와 유사한데, 주로 비밀리에 이들의 집에 모여 당면 정세를 토론하거나 교양하는 형태의 지도였다고 한다.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은 크게 민자통 결성대회 참가와 2대악법 반대투쟁, 남북학생회담촉진 전남학생대회 개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32) 통민청 전남도맹 위원장 서리 김시현은 1961년 2월 19일 광주시 금남로 2가 YMCA회관에서 개최된 민자통 전남협의회 결성대회에 통민청 전남도맹 대표로 참가하여 민족자주적인 평화통일과 남북경제문화교류, 서신왕래 등을 주장했던 민자통 전남협의회에 가입한 후 학생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김시현은 또한 2월 25일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개최된 중앙민자통 결성대회에 통민청 전남도맹 대표로 박복규, 유광원 등과 함께 참석하여 남북한 민주민족 주체 세력의 협상을 통한 평화통일과 완충지대에 우체국설치, 남북한의 경제 문화 인사 등의 교류 등의 투쟁목표 채택을 결의했다. 3월 4일에는 광주시 불로동 한길상의 집에서 통민청 전남도맹 간부회의가 소집되어 김시현이 참석자들에게 민자통의 취지를 역설하여 참석자 전원의 찬동을 받고 중앙의 혁신단체 연사를 초청하여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전남도민들에게 평화통일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통일정책을 선전할 것을 결의한다. 통민청은 3월 12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청중 약 6,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전남도맹 교양국장 박복규의 사회로 시작하여 중앙 민자통 조직국장 김배영, 중앙 통민청 교양국장 박익수, 집행위원 김영광, 혁신당 선전위원장 유병묵, 민족일보사사장 조용수 등이 참석하여 중립화통일, 남북협상, 남북평화통일 등과 함께 30) 이 부분은 기세문의 미간행원고인 과도기의 론리, 우리 민족의 살길 의 160쪽을 인용했다. 31) 기관지 신세대 는 후에 신시대 로 제호를 변경하고 월간지 형태로 발간했다. 32) 통민청 전남도맹의 활동내용은 한국혁명재판사편집위원회(1992b, 1117-1127)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했다. 38 민주장정 100년, 광주 전남 지역사회운동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