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민주노총 첫 직선제, 제8기 임원선거를 마치며 / 허영구 민주노총 첫 직선 제8기 위원장 후보, 좌파노동자회 대표 1. 직선제 투쟁의 첫 마무리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고, 투표인명부를 확보할 수 없고, 선거 관 리가 어려워 부정선거 시비가 생길 것이고, 돈이 너무 많이 들고, 직 선제를 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총연맹 직선제 실시를 반대해 온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2014년 11월 8일 선 거운동을 시작한 이래 12월 23일 결선투표까지 한 달 반이 걸린 민주 노총 첫 직선제는 별 탈 없이 끝났다. 네 개 후보조가 출마했다. 12월 9일 끝난 1차 투표결과 좌파노동 자회 독자후보로 출마한 기호 3번 허영구, 김태인, 신현창 후보조는 민주노총 첫 직선제, 제8기 임원선거를 마치며 51
기대와 예상과 달리 4만여 표, 9.7% 득표로 4팀 중 4위에 그치고 말 았다. 결선투표는 쌍용차 77일간 파업투쟁을 이끌었던 전 지부장 한 상균 후보조와 금속연맹위원장과 인천본부장을 지낸 전재환 후보조 가 치렀다. 결과는 한상균 후보의 근소한 차이의 승리였다. 지난 10 년간 민주노총 집행부를 맡아 온 자주파와 국민파의 패배로 끝난 것 이다. 민주노총 직선제는 1998년 민주노총 2기 이갑용 집행부의 공약 이었다. 필자도 부위원장으로서 직선제 실시를 위한 기획에 합류했 다. 그러나 1999년 대의원대회에서 찬성이 3분의 2에 조금 미치지 못 해 규약 개정에 실패했다. 2000년대 중반 이수갑 선생과 공무원노조 초대 차봉천 위원장 등도 직선제 실시를 위해 노력했다. 민주노총은 2007년 대의원대회에서 규약 변경을 통해 직선제를 도입키로 했으나 계속 집행을 유예했다. 직선제 기금 20억원도 다른 용도로 전용했다. 좌파노동자회는 2012년부터 직선제 쟁취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집행부는 직선제 유예를 기도했고 급기야 대의원대회가 부정으로 치 러지기도 했다. 2013년 초 필자는 이갑용 전 위원장 등 여러 동지들 과 함께 약 한 달 간 위원장실 점거농성을 펼쳤다. 당시 어떤 정파도 직선제 투쟁에 호응하지 않았고 냉소적이었다. 직선제의 조직적, 정 치적 의미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민주노총 창립 이후 17년 만에 직선제로 민주노총 8기 집행부가 출범한다. 52 특별 기고
2. 5대 혁신안 준비 민주노총 직선제는 민주노총 혁신의 일환이었다. 직선제로의 규 약 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은 3년 유예했기에 2007년 제6 기 집행부 선거는 간선제로 치러졌고, 이때 필자는 좌파 독자 위원장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했다. 그리고 2012년 6기 집행부가 또 다시 직 선제 실시를 3년 유예할 때 좌파노동자회만이 민주노총 혁신의 기초 가 직선제라고 주장하며 투쟁에 나섰다. 대의원대회에서의 대응, 위 원장실 점거농성을 거쳐 결국 3년 유예를 2년 유예로 단축시키는 성 과를 만들어냈다. 더 이상 유예는 불가능하게 됐다. 2013년 간선제로는 마지막으로 치러진 제7기 집행부 선거에 민 주노총 제2대 위원장이었던 좌파노동자회 이갑용 위원장이 출마했 다. 1차투표에서 1등을 했으나 과반수 득표를 못해 결선에서 찬반투 표를 하게 됐는데, 자주 계열인 민주노동자전국회의 소속 대의원의 이탈로 선거는 무산됐다. 재선거가 이뤄졌고 전국회의, 국민파, 중앙 파의 연합후보가 당선됐다. 2013년의 일이며, 마지막 간선제 집행부 로 기록되게 됐다. 2012년 4월 발족한 좌파노동자회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수탈체제 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을 결의하고 민주노조운동 혁신을 통한 계 급적 좌파노동운동 실현, 비정규불안정노동자 조직화, 좌파정치 토 대 구축, 탈핵반전평화와 국제연대 실천을 주요 의제로 설정하고 활 동을 전개했다. 2012년 청소노동자 김순자 후보가 대통령선거에 출 민주노총 첫 직선제, 제8기 임원선거를 마치며 53
마했을 때 필자는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시 핵심 공약 중 하나가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이었다. 이 운동의 성과로 2013년 알바연대와 알바노조를 창립했고, 요양보호사, 간병인 등의 돌봄노 조를 건설하는 등 비정규불안정노동자 조직화에 나섰다. 전국의 장 기투쟁업장과 연대하면서 새로운 노동운동을 모색하였다. 좌파노동자회는 2014년 8월 조합원 수련회를 통해 민주노조운동 혁신을 위해 민주노총 직선제에 적극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와 동 시에 여러 차례의 혁신기획회의를 통해 민주노총 5대 혁신과제 를 완성했다. 그리하여 10월에 전략노조와 지역체계 강화로 불안정노 동자를 조직하고 신자유주의와 투쟁하자! 는 슬로건을 담은 소책자 로 출판했다. 혁신선언의 채택과 강령을 개정하는 목표의 혁신, 비정 규불안정노동자의 전략적 조직화를 중심으로 하는 주체의 혁신, 투 쟁계획 공지와 대중적 참여를 조직하는 투쟁의 혁신, 지역본부 강화 와 재정 확충을 통한 조직의 혁신, 녹색좌파정치 전개를 통한 노동자 정치의 혁신을 제시했다. 이 혁신안을 바탕으로 민주노총 첫 직선제 제8기 임원선거 공약을 마련했다. 3. 좌파후보 논의와 독자후보 출마 지난 10년간 민주노총 집행부를 담당해 온 우파진영은 어려운 정 세와 박근혜정권에 대응하자며 통합후보 를 제안했다. 그러나 좌파 진영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노동전선(변혁정치모임)과 좌파노동자 54 특별 기고
회 등 좌파진영이 선거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논의는 단 한 차례도 진행하지 못했고 후보 선출 방식의 차이로 좌파진영의 후보 논의는 종료됐다. 변혁정치모임의 기관지는 좌파노동자회가 논 의를 깨고 이탈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10월 말 후보 등록 시기에 임박해서 좌파진영의 위원장 후보로 거론된 당사자들로 4자 모임이 네 차례 진행되었다. 10월 한 달 동안 정책과 공약을 중심 으로 전국적인 순회토론회를 거쳐야 했지만 실기한 뒤였다. 좌파노 동자회는 혁신과제를 중심으로 후보 논의를 진행할 것을 주장했지만 위원장 후보 선출 방식과 관련된 논의에 내몰리게 됐다. 결국 정책은 커녕 후보 선출 방식에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해, 후보 등록 시작일인 11월 3일에 논의는 최종 결렬됐다. 이후 발전노조 전 위원장이자 전해투 위원장인 이호동 동지와 공무원노조 김중남 전 위원장은 출마를 포기했고, 노동전선의 한상 균 후보와 좌파노동자회의 필자가 위원장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한상균 후보 측은 4자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러닝메이트를 구한 상 태였다. 반면 좌파노동자회는 좌파진영 후보 단일화 논의에 집중하 다 러닝메이트를 결정하지 못했다. 좌파노동자회에서 위원장 후보는 허영구로 결정했지만 수석부위원장과 사무총장 후보는 결정하지 못 한 상황이었다. 결국 독자후보 출마로 내몰린 상황이 되었고 회원 중 에서 후보를 확정했다. 전국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돌봄지부 부 지부장으로 비정규직 조직화에 매진하던 김태인과 한국지엠자동차 공장 하청노동자 신현창을 후보로 내세웠다. 네 후보 진영 중 유일한 민주노총 첫 직선제, 제8기 임원선거를 마치며 55
비정규직하청노동자 후보였다. 4. 전국을 누비며 조합원을 만나다 11월 8일부터 민주노총 역사상 첫 직선제가 실시됐다. 공직선거 인 대통령선거를 제외하곤 전국 단위로 가장 규모가 큰 직접선거였 다. 투표소가 2만여 곳이 되었다 하니 민주노총 조직력으로서는 매 우 벅찬 선거였다. 그러나 조합원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첫 걸음 을 뗀 셈이다. 민주노총 직선제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던 좌파노동 자회가 선거에 후보를 낸 것은 민주노조운동 혁신을 위한 당연한 귀 결이었다.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선대본부장을 맡고 허영구 가 위원장 후보로 나선 것은 민주노총 직선제 실시의 대미를 장식하 기 위한 역사적 의무이기도 했다. 민주노총 총 유권자 67만 명을 상대로 하는 직접선거가 열렸다. 민주노총 창립 이후 산별노조만이 보유하고 있던 조합원 명부를 민 주노총 중앙이 확보한 순간이기도 했다. 16개 지역본부에서의 합동 유세, 국민TV 생방송 토론회 두 차례, 매일노동뉴스 토론회 등 25 일간의 대장정이 진행됐다. 그 누구도 선거 결과를 자신 있게 전망할 수 없었다. 체육관에서 몇 백 명 대의원이 모여서 뽑는 상층 정파 담 합 구도인 간선제와는 비교할 수 선거였기 때문이다. 유권자 규모로 보면 1,000배가 커진 선거판이었다. 매일 지역을 이동해야 하면서 이루어지는 현장 방문과 지역유세 56 특별 기고
를 통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합원을 대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합원이 밀집해 있는 대공장이라 하더라도 짧은 시간에 생산라인을 다 돌 수도 없고, 교대근무가 있으면 조합원 전체를 만날 기회를 갖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500명 당 한 표를 행사하는 대의원 들의 간선제와는 달리 직선제에서는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 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만 처음 실시하는 데다가 민주노총이 준비 부족으로 제대로 홍보하지 못했고 특히 선거공보물이 조합원 개개인 에게 전달되지 못함으로써 후보 간 공약의 차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한계가 드러났다. 좌파노동자회는 직선제 쟁취 투쟁에 앞장섰고 실제 이를 현실화 한 주체로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찍이 민주노총 혁신안 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공약을 만들었기 때문에 급조된 나열식 공약 과는 당연히 차별화되었다. 선거 이전부터 전국적으로 민주노총 혁신 안을 알려나갔고, 선거 돌입 후 조직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원 들은 열정적으로 공약을 설명하면서 선거운동을 펼쳐나갔다. 후보 간 토론에서도 공약 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 라 정책적으로 선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공약을 알려나가는 데 있어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이 너무 컸다. 5. 8기 민주노총 임원선거를 마치며 제1차 선거 25일을 포함하여 결선까지 한 달 반 동안의 민주노총 민주노총 첫 직선제, 제8기 임원선거를 마치며 57
첫 직선제가 끝이 났다. 일반적인 예상은 비록 직선제라 하더라도 정 파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처음 실시하는 조합원 직접선거이기 때문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조심스런 전망 도 있었다. 결과를 보자면, 자주파인 전국회의, 국민파, 금속 중앙파 가 연합하며 통합후보 를 자처한 전재환 후보조가 1차투표에도 예 상과 달리 2등을 했고 결선에서도 한상균 후보에게 패배했다. 선거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4파전이지만 전재환 후보조는 1차투표에서 과 반수를 얻을 것을 자신했다. 그렇지 못한다 해도 결선에서는 당연히 이길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예상은 빗나갔다. 직선제에서는 정파 담 합 구도는 현저하게 약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른 한편, 이는 지 난 10년간의 우파 집행부에 대한 심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기호 3번 후보조는 당연히 한상균 후보조와 2, 3위 경쟁을 펼칠 것으로 예상했다. 나아가 결선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 다. 그러나 3위는커녕 3위와도 한참이나 차이가 나는 4위에 그치고 말았다. 기간이 짧아 민주노총 혁신안이 조합원들에게 제대로 알려 지지 못했고 따라서 다른 후보와의 차별성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다 른 한편으로는 정파 활동가인 노조 간부들의 영향을 받아 투표하는 성향을 보인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우리 후보의 공약이 오히려 우리 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착 되고 있는 산업(별)노조 입장에서는 지역본부 강화를 위해 인력과 재정의 50%를 배정하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은 해고자 생계비 지급과 장기투쟁사업 58 특별 기고
장에 투쟁기금을 지원하거나 비정규직 조직화 방안으로 조직가를 확 보하기 위해 총액임금 1%로 조합비를 인상하는 것 역시 찬성하지 않 았을 것이다. 알바하청비정규직 100만 명 조직화나 시급 1만원 투 쟁 등을 정규직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는 공약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우리 후보조의 득표가 4위에 머물 렀다는 것은 직선제가 정파 담합 구조는 약화시켰지만 산업(별)조직 구조를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세 명의 후보 모두 민주노총에서는 가장 큰 금속과 공공운수노조 소속이긴 했지만, 금 속노조 한국지엠의 하청비정규직노동자이거나 공공운수노조(연맹) 내 돌봄지부나 공공연구노조 소속으로서는 조직적으로 표를 얻는 데 한계가 드러났다. 직선제 실시로 간선제가 갖고 있는 정파 구조의 영 향력이 약화된 반면, 산업(별)조직이나 대기업(공장)의 영향력은 여 전히 완강하게 버티고 있음이 드러났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은 좌파 후보 단일화 실패 이후 한상균 후 보와 좌파 지지자들의 표를 나누어 가져야 하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내 좌파조직이나 좌파활동가들이 내세운 한상균 후보조에 비해 우리 조는 조직적으로 열세였다. 필자의 민주노총이나 노동운동 경력만으 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이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지난 6년간 의 쌍용차 투쟁의 상징성이나 쌍용차 투쟁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에 표심이 한상균 후보에게 몰린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 우리 후보조 는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4위에 그치고 말았다. 여러 가지 평가해 민주노총 첫 직선제, 제8기 임원선거를 마치며 59
야 할 문제들이 있었지만, 결선투표에서는 한상균 후보를 지지할 것 을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1차 투표에서 우리 후보를 지지한 조합원 대부분이 결선투표에서 한상균 후보에게 투표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지난 10년간 우파가 집행부를 맡아 온 민주노총을 좌파가 맡게 되었다. 이후 구체적인 선거 평가는 선본을 중심으로 후 보와 선거운동원, 나아가 회원들의 참여 속에 진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 선본으로서는 당락을 떠나 매우 아쉬운 선거였다. 무엇보다 현재의 정파 구조나 산업노조 조직에 갇혀 과연 민주노총 혁신이 가 능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나아가 혁신 없이 투쟁은 물론이고 바닥으 로 떨어진 민주노조운동의 복원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유물론과 계급적 이론의 기초 위에 굳건하게 서야 할 노동운동이 관 념론이나 감성주의에 빠져 있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다. 또 이번 선거는 조합원 스스로 계급적 연대와 투쟁보다는 실리주 의와 대리주의에 익숙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이런 한계에도 불 구하고 우리 선본은 선거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노동운동을 민주노총 내에서 실현하는 것은 조직적으 로나 시기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좌파노동자 회가 지난 3년간 실천해 온 계급적 좌파노동운동은 민주노총 직선 제와 5대 혁신 을 넘어 중단 없이 계속될 것이다.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