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Ⅰ. 몽골유목의 특징 유목은 하나의 문명이다. 유목은 개별문화를 뛰어넘어 참여가능한 제반장치와 체계를 갖 추고 있다. 이 문명의 장치와 체계를 받아들이면 한 유목민으로서 삶이 성립된다. 하나의 문명으로서 유목의



Similar documents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52*220

~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 pb61۲õðÀÚÀ̳ʸ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º´¹«Ã»Ã¥-»ç³ªÀÌ·Î

#7단원 1(252~269)교

ÀÚ¿øºÀ»ç-2010°¡À»°Ü¿ï-3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5 291

½Ç°ú¸Ó¸®¸»¸ñÂ÷ÆDZÇ(1-5)¿Ï

178È£pdf

4-Ç×°ø¿ìÁÖÀ̾߱â¨ç(30-39)

(연합뉴스) 마이더스

Jkafm093.hwp


03 ¸ñÂ÷

(중등용1)1~27

hwp

¼øâÁö¿ª°úÇÐÀÚ¿ø

(012~031)223교과(교)2-1

- 2 -

<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DocHdl2OnPREPRESStmpTarget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hwp

View Licenses and Services (customer)

CT083001C

愿묒쭊援??섏젙諛깆꽌?댁?0907

기본소득문답2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¾ç¼ºÄÀ-2

**09콘텐츠산업백서_1 2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77

내지-교회에관한교리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2002report hwp

연구노트

<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조사보고서 완본(최종인쇄본).hwp

Çѹ̿ìÈ£-197È£

지표3권1-265

01Àå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내지(교사용) 4-6부

041~084 ¹®È�Çö»óÀбâ


³»Áö_10-6

0.筌≪럩??袁ⓓ?紐껋젾 筌

¹é¹üȸº¸ 24È£ Ãâ·Â

지도학발달06-7/8/9장

나하나로 5호

È޴ϵåA4±â¼Û

토픽 31호( ).hwp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PowerPoint 프레젠테이션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5권심층-양화1리-1~172

쌍백합23호3

2015년9월도서관웹용

10월추천dvd

글청봉3기 PDF용

À¯¾ÆâÀÇ°úÇмÒÃ¥ÀÚ.PDF


CR hwp

1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êÇÐ-150È£

82-대한신경학0201

•••••1301(•••).pdf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1

통계내지-수정.indd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와플-4년-2호-본문-15.ps


Art & Technology #5: 3D 프린팅 - Art World | 현대자동차

ºñ»óÀå±â¾÷ ¿ì¸®»çÁÖÁ¦µµ °³¼±¹æ¾È.hwp

신영_플랜업0904내지_출력

04 Çмú_±â¼ú±â»ç

<C3CAC1A DC1DFB1B92E687770>

2011국립공원표지-수정

4-Ç×°ø¿ìÁÖÀ̾߱â¨è(51-74)

ad hwp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hwp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001~010)206교과-앞부속(수정)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Transcription: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1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The Present Condition & Future View of Stock Farming in Mongolia 이효선 1) (hslee@dankook.ac.kr) 국 문 요 약 몽골경제는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는데, 시장경제가 실제로 몽골 경제에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현재 전 사회주의 국가에서 진행 중인 계획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의 전환이 몽골의 유목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자유 시장경제란 본질적으로 서구사회에서 좌업 (Sedentary job), 농업, 제조업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고, 러시아와 중국의 경제적 기반도 본래 자본주의의 기반과 비슷한 것이어서 성공가능성이 있으나 몽골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몇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보면, ➀ 몽골 사회는 유목 사회이기 때문에 이동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가축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정착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지정된 장소에서 부의 축적보다는 이동적인 부의 축적, 예를 들면 가축 수의 증가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➁ 가축의 고기를 주식으로 하고, 물고기는 종교적인 이 유에서 먹지 않으며, 야채도 먹지 않기 때문에 농업의 발전이 어렵고 균형적인 산업구조를 갖추기 어렵다. ➂ 유목이 주업이기 때문에 외로운 생활을 많이 하여 솔직하고 감정적이며 판단이 단순하기 때문에 자본주 의 사회 관습과 어울릴 수가 없다. ➃ 목초지를 따라 유목하기 때문에 사유제 개념이 희박하고 공유제 개념 이 타당하다. ➄ 교역은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기나 거짓이 개재될 수 있으므로 교역을 주로 물물교환 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선호한다. ➅ 화폐 사용, 특히 지폐인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또한 외로운 유목생활 이기 때문에 화폐의 용도가 다양하지 못하고 의미가 없다. 금속화폐가 아닌 지폐는 재산 축적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재산 축적의 수단은 주로 가축의 숫자가 된다. ➆ 노동의 질보다는 노동의 양을 중시한다. 왜냐 하면, 목동의 숫자가 가축의 숫자와 비례하기 때문에 노동의 질은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같은 유목생활의 경제관은 유목을 바탕으로 한 산업 구조에 맞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운용이 몽골의 유목기질에서 성공할 수 없었듯이, 시장경제 체제의 전환도 몽골의 유목적인 경 제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크게 의문시된다. 따라서 몽골의 경제적 부흥은 유목 사회에 맞는 몽골적인 경제 체제의 개발과 선택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주제어: 유목민의 하루, 유목문화, 게르(Ger) 1) Professor. (Dankook Univ.) 투고일자: 2008. 5. 20, 심사일자: 2008. 6. 1, 게재확정일자: 2008. 6. 20.

2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Ⅰ. 몽골유목의 특징 유목은 하나의 문명이다. 유목은 개별문화를 뛰어넘어 참여가능한 제반장치와 체계를 갖 추고 있다. 이 문명의 장치와 체계를 받아들이면 한 유목민으로서 삶이 성립된다. 하나의 문명으로서 유목의 특징은 간소함 그 자체이다. 유목세계에서는 사상을 포함한 모든 것이 투명하다.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자 신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연약한 풀의 산들거림이나 작은 가 지의 휘어짐에서 유목의 존재가 드러나는 정도이다. 유목은 이동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이동성은 기원적으로 가축을 대상으로 떼지어 사는 발굽있는 동물의 습성에서 연유한다. 사 람이 이 동물의 이동로를 따라갔다는 뜻이다. 이동생활은 무한정한몽골의 하루 샤라브 작, 1910년대, 175.0X134.8cm, 몽골국립자나바자르기념미술관 소장 부의 축적을 제약한다. 이 때 문에 유목사회는 극심한 빈부차가 없고 비교적 사회구조가 평등하다. 농경사회처럼 부의 편 재가 발생하지 않는다. 유목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에 인위를 가하지 않는 점일 것이다. 농경이 본래 자연에 인위 를 가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점과 대조적이다. 유목은 가축떼를 매개로 주어진 생태계를 그 대로 이용하면서 생활주기를 유지해 왔다. 유목의 주요무대는 원래 농경에 거의 이용되지 않는 초원이나 산악지대를 포함한 건조지대였다. 그러나 역사의 진전과 함께 유목공간은 농 경에 잠식되어 간다. 유목의 기원은 농경보다도 오래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유제품 제조법 이 확립된 단계에서는 축산물을 주식으로 하여 충분히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뒤 농 경사회와 접촉하면서 유목생활에 곡물이 들어왔다. 그와 대응하여 농경사회에 가축이 도입 되고 다양한 형태의 목축이 출현하게 된다. B.C. 8,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서아시아의 초기 농경유적지에서 발견된 양뼈나 염소뼈는 유 목에서 목축으로 변화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유물로 생각된다. 유목은 유라시아 역사에 크나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 주요한 역할은 역사변동을 일으킨 내연기관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역사변동의 고비마다 확실히 유목의 힘이 작용했다. 유라시아 중앙부에 성벽도시가 형성된 것도 유목민의 공격이 그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방어시설로서 출현한 것이다.동아시아에서도 은주문명이 형성된 것은 유목세계와의 접촉이 핵심적인 요인이 되었다.특히 은문명의 의례 에 사용된 대량의 희생동물은 그들이 유목세계와 접촉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200여 년 동안 계속된 5호16국의 혼란은 유목세계의 에너지와 정주세계의 에너지가 충돌과 융합을 반복한 역사변동이었다. 이 장기간에 걸친 상호작용에서 수당제국이 성립되고 중화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3 제국의 틀이 완성되었다, 13세기 몽골족을 중심으로 세계제국이 형성됨으로써 유목세계의 힘이 최고로 발휘되었다. 유목은 수 세기에 걸쳐 다양한 상황에서 역사를 변화시킨 내연기 관의 역할을 해 왔다. 유목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까? 최근 유라시아 일부지역에서 절멸에 처한 유목이 다시 활 성화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중국 신장성 북부와 몽골지역이다. 신장성 북부의 알타이산맥이나 톈산산맥에서는 사회주의화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카자흐인을 중심으로 유목이 지속되었다. 사회주의화 과정을 통하여 부계혈연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된 사회조직은 철저한 탄압으 로 해체되었는데, 이는 유목집단의 힘을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집단화정책의 속박이 느슨해지면서 유목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부계 혈연집 단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조직이 부활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몽골에서는 사회주의 체제붕괴 후 매우 광범위하게 재유목화( 再 遊 牧 化 )가 진행되고 있다. 사 회주의시대에 물자의 분배센터기능을 담당한 지방관청이 민주화물결의 확대와 함께 존립기 반을 잃고 내부적으로 붕괴되어 갔다. 분배해야 할 물자의 공급이 완전히 두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분배기구의 구성원 대다수가 재유목화의 길을 선택했다. 몽골 서부지역에서는 관청 등 폐허화한 공공시설을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몽골에서 재유목화와 함께 세대단위를 기초로 한 사회조직이 부활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사회주의화 이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호트아일(이동을 같이 하는 유목집단)이 나 사할트 아일(인근의 유목가호) 등 세대단위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사회조직이 다시 활 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신장성 북부와 마찬가지로 아직 부계혈연집단을 기초로 하는 전통적인 사회조직이 전면적으로 부활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몽골 서부지역의 오브스아이막(우리의 도에 해당되는 행정단위) 등지에서는 행정조직 자체도 유목민과 함께 이동했다. 이러한 현상도 사회주의화 이전에는 흔히 볼 수 있던 행정행태이다. 현재 몽골에서는 군계나 도계를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의 유 목지에 복수의 유목집단이 집중될 때, 아직까지 그것을 조정할 사회조직이 만들어지지 않았 다는 점이다. 지역행정책임자는 거의 이러한 조정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몽골의 재유목화에 즈음하여 조정기능을 갖춘 사회조직을 만드는 일이 긴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 다. 신장성 북부지역이나 몽골은 생태계로 보아 유목의 최적지의 하나라고 해도 좋다. 그 때 문에 역사과정을 통해 유목집단의 활발한 활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유목으로 살아가기가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장이나 몽골에서 재유목화현상이 목전에 닥쳐오면 유목의 미래를 생각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 적어도 유목의 지속성을 염두에 두 고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유목을 재평가해야 할 시기이다. 역사적 재평가를 통해서 유목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

4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점차 표면에 드러날 것이다. 유목이 인류의 미래에 공표하고 있는 메시지는 다음의 세 가지 이다. 그것은 토지소유의 상태, 이동성, 간소함이다. 유목에서는 기본적으로 토지소유의 관념이 발생하지 않았다. 유목민의 사고에 따르면 토지 는 본래 하늘에 속한 것이다. 근대적 합리주의는 모두 사유권의 확대 위에 구축되었다. 즉, 토지는 사유권으로서 세분되고, 소유권의 절대성이 강조되었다. 국민국가이론은 여기에 기반 을 두고 있다. 토지소유관념의 부재( 不 在 )는 근대적 합리주의의 좋은 먹이었다. 식민주의 이 론은 이 토지소유관념의 부재를 이용하여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지구의 토지는 본래 우주의 생성과정에서 생긴 선물이다. 또한 지구 그 자체는 수십억 년에 걸쳐 생명체가 공유해 온 터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인류라는 종( 種 )의 일부만이 사 유권을 휘두르고 억지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우연한 시간에 지구의 토 지를 차용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지구사의 짧은 기간 내에서 유목의 특징인 토지소유관념의 부재를 근원적 의미에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동성과 간소함은 인류 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정보화시대는 수준이 다양한 사람의 이동을 가 속화한다. 간소함은 지금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생산성 지상주의나 경제지상주의의 비 뚤어진 사상을 비춰 주는 거울역할을 할 것이다. 유목이 전해 주는 메시지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메시지를 이해함으로써 미래문명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유목은 스스로 자기기반을 확고하 게 유지하면서 정보화사회의 편리성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방향을 잃지 않으면 유목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Ⅱ. 유목민의 문화 1. 이동식 주택 겔 문화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족이 거주하는 천막을 겔 이라 한다. 겔은 펠트와 목재로 되어 있다. 우선 펠트 만들기에서 천막 겔문화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몽골의 하루 에서 펠트 만들기 장면을 볼 수 있다. 펠트를 몽골어로 에스기 라 한다. 펠트는 천연섬유인 양털로 만든다. 봄 또는 초여름에 깎은 털을 긴 털, 가을에 깎은 털을 짧은 털이라 한다. 털깎는 시기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 만, 대체로 양이 살찌기 시작하는 6월중에 실시한다. 마유주 축제 에 털깎기가 그려져 있다. 가을에는 성숙하고 거세한 수컷만 깎는다. 암컷이나 새끼양은 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월동에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5 대비해서 털을 깎지 않는다. 가을에 깎은 짧은 털은 광택이 있고 부드러워 펠트 표면에 사 용한다, 털깎기는 미리 길일을 택해 숙영지 부근의 이웃과 공동작업을 한다. 참가자는 모두 털깎는 도구를 지참한다. 정한 날에 비바람이 몰아쳐 털을 못 깎게 될 경우 양 1마리에 가위를 대 어 의례적인 시늉만 하고 날짜를 변경한다. 털 깎는 날 아침 주인은 일찍이 작업을 시작하 고 도우러 오는 사람도 계속해서 증가한다. 털을 깎고 있을 때 온 사람은 가위는 날카롭고 깎은 양 수는 10만이 되라 라고 축원한다. 주인은 말씀하신 대로 되어라 라고 답한다. 양은 먼저 뒷다리를 붙잡고 천천히 쓰러뜨린다. 발로 양의 목을 가볍게 누르면서 가위를 사 용하여 복부나 사지의 털을 재빨리 깎는다. 그리고 나서 사지를 끈으로 묶고 목에서 꼬리쪽 으로 깎아 간다. 한 사람이 하루에 대략 20~30마리 정도 깎는다. 깎은 양털을 막대기로 두들겨 엉킨 것을 풀어 준다. 중국 칭하성에 살고 있는 몽골족 사이 에서 이 일은 결혼한 부인의 몫이다. 양털을 두드리고 있을 때 방문한 사람은 양털은 비단 이 되고, 두드리는 막대기는 힘줄이 되어라 라고 축원한다. 몽골의 하루 에서 이렇게 하여 부드럽게 된 양털을 낙타에 싣고 현장으로 운반하는 장면이 확인된다. 2. 펠트 만들기 펠트 만들기는 계절작업이다. 중국 칭하이성의 몽골족은 여름집에 도착하면서 이 일을 시 작한다, 내몽골 자치구 우젬친지역에서는 가을 털깎기를 끝내고 펠트를 만든다. 필자의 관찰 에 따르면 1993년 톈산의 토르고오드 몽골족은 8월 상순, 1997년 몽골 고비지역에서는 7월 말에 펠트를 만들고 있었다. 펠트를 만드는 데 가을의 짧은 털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을 털깎기가 끝나고 펠트를 만든다고 이해하면 좋다. 몽골의 하루 에 그려져 있는 것도 이 사실에 의거하고 있을 것이다. 펠트 만들기 모습은 몽골의 하루 왼쪽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털깎기와 같이 펠트도 공동 작업으로 만든다. 그림에 임산부 모습도 보인다. 펠트를 만드는 장소로는 하천주변이나 호수 가 등 물이 풍부하고 평탄한 곳을 선택하며, 바람이 없고 온화한 날이 좋다. 승려를 초청해 서 액막이를 한다. 차를 끓이고 양을 잡아 모두의 노고를 위로한다. 펠트의 질은 사람의 순 서라 하는 것처럼 가장 존경받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리더가 된다. 남자는 펠트의 선임 자, 여자는 펠트의 어머니 라 한다. 우선 두들겨 엉킴이 풀린 양털을 별도의 낡은 펠트나 소가죽 위에 넓게 펴서 겹겹이 쌓는 다. 몽골의 하루 에 양털을 겹겹이 쌓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보인다. 한편 칭하이성의 몽골 족 사이에서는 쌓아올리는 일은 처녀의 몫이다.

6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긴 털과 짧은 털을 적절히 배합하여 넓게 펴고, 각 겹에 물을 충분히 뿌린다. 몽골족의 경우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수를 뿌리지만 소금물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 내몽골자치구 아라샨지 역의 토르고오드 몽골족이나 카자흐족은 뜨거운 물을 사용한다. 겹겹이 쌓은 다음 여러 겹의 양털을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몽골의 하루 에 이 모습이 겹겹 이 쌓는 작업 아래에 그려져 있다. 남자 네 사람이 힘을 합쳐 겹겹이 쌓은 양털을 낡은 펠 트와 함께 말아 올리고 있다. 말아 올리고 있는 양털에 축봉( 軸 棒 )을 붙이는 것은 그것을 대 형가축으로 끌어당기게 하여 압축시키기 위한 것이다. 펠트를 끌어당기기 위해 씨말 두 마리가 대기하고 있다. 씨말은 남성이나 강력함을 상징한 다. 말아 올린 펠트 두루마리에 여자가 마유주를 뿌리고 있다. 씨말에 탄 소년은 말의 두 귀 사이와 어깨에 마유주를 뿌리고 있다. 좋은 펠트가 되도록 축원하는 의례이다. 선임자가 뼈 보다 튼튼하고 눈보다 희게 되라 라고 축원한다. 대개 몽골 남부 고비지역에서는 낙타나 말, 항가이지역(물과 풀과 나무가 있는 지역. 즉, 몽 골 중부지역)에서는 소를 이용해 끌어당기는 경우가 많다. 끌어당길 때에 축봉을 붙이는 경 우와 축봉이 없는 경우의 두 방법이 있다. 작업도중에 두루마리를 한 번 펴서 물을 뿌리기 때문에 재차 말아올려 거의 같은 거리를 빠른 속도로 끌어당긴다. 이 일이 끝난 후 두루마 리를 펴서 1시간쯤 놓아둔다. 그리고 펠트를 꺼내 모양을 바르게 한다. 펠트를 만들 때 남성 은 반드시 작은 칼, 여성은 가위를 사용한다. 작은칼과 가위는 각각 남녀의 노동을 상징하는 도구이다. 가축을 끌어 압축시키는 방법 외에 판판하게 펴놓은 양털을 대나무발로 말아 가위나 손으로 누르기도 하고 두드리는 경우도 있다. 중국 칭하이성 일부지역에서는 말을 이용하는 대신 여러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장단에 맞추어 손이나 발을 사용하여 반복해서 굴린다. 내몽골 아라샨지역의 토르고드 몽골족은 모두 땅바닥에 앉아 손으로 빙빙 굴린다. 카자흐족은 두 줄로 마주보고 서서 발로 차기도 하고 땅에 떨어뜨리고 두들겨 압축시키기도 한다. 3. 새 펠트는 처녀의 상징 새 펠트는 처녀펠트, 냘라흐 라 한다. 냘라흐는 어리다는 의미이다. 남자들은 새 펠트를 어린 소녀의 이마에 부딪쳐 구부러지는지 어떤지를 시험해 본다. 강력한 씨말로 끌어서 만 든 펠트의 단단함을 어린 소녀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펠트 끌기를 마치고 펠트와 펠트를 끈 말에게 마유주를 두 번 뿌려 축원한다. 그 때 다음과 같은 축시를 읊는다. 천 마리 만 마리 양의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7 지역질 분비물이 붙은 하얀 털을 넓게 펴서 겹겹이 쌓는다 백 개 강에서 물을 길어다 겹겹이 쌓은 양털을 적시고 솜씨 좋게 말아 올려 절묘하게 묶어서 씨말에게 끌게 해 뱅글뱅글 굴려서 펠트라는 이름의 물건이 넓게 완성되듯이 작업이 모두 끝난 뒤 잔치를 열고, 수고한 사람에게 통째로 삶은 양고기를 대접한다. 펠트 만들기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동작업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거행되는 큰 행사이기도 하다. 몽골의 하루 에 새 펠트 아래 숨어서 성행위에 열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내몽골에서는 1930년대 이후 한인상인이 대거 진출하면서 그들이 양털깎기나 펠트 만들기를 도급맡게 되었다. 그 때문에 내몽골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펠트 만들기 문화가 완전히 쇠퇴 했다. 한편 사회주의 시절 몽골에서는 국유화정책에 따라 정부가 양털을 통합매수했기 대문 에, 유목민의 수중에 양털이 남아나지 않았다. 또한 정부가 전통제의를 금지함으로써 펠트 만들기에 수반되는 의례 역시 단절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 펠트 만들기 전통이 부활하고 있다. Ⅲ. 텐트형 이동 주택 게르(Ger)' 1. 너무나도 닮은 몽골인과 한국인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를 분류할 때 일반적으로 3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한다. 첫째 는 코카소이드(백인종)요, 둘째는 몽골로이드(황인종)요, 셋째는 니글로이드(흑인종)이다. 황 인종을 몽골로이드라 표현하고 있음은 몽골 혈계( 血 系 )를 지닌 사람들이 황색 인종을 대표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인도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과거에 인류의 사회적 이동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

8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혈계( 血 系 )를 기준으로 하여 더듬어 올라가면 어렴풋이나 마 알 수 있다는 것이 오늘에 전해 오고 있는 설명 자료이기도 하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양인 중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이 비슷하다 하고 일본인과 한국인이 또한 비슷하다고 한 다. 그러나 세 나라 사람이 한자리에 어우러지면 서로서로가 어느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쉽 게 구별한다. 그런데 몽골인과 한국인 사이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필자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 였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몽골인이 한국인을 몽골인으로 착각하고, 한국인이 몽골인을 한 국인으로 착각하는 일이 많다. 그만큼 한국인과 몽골인은 닮은 꼴을 함께 하고 있다. 물론 몽골로이드의 분포상은 동북아 지역으로는 몽골과 중국의 내몽고, 한반도와 일본에 가장 많이 흩어져 있다.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구라파 지역으로는 러시아 일부 지방인 브리야트와 터키, 헝가리 등지에 산재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편의상 여기에서는 한국인과 몽골인과의 동질성( 同 質 性 )에 관하 여 약술하고자 한다. 첫째, 두 민족은 체구가 같고, 태어났을 때 반문( 班 紋 :몽골반점)을 지니는 것이 같으며, 오 른손을 위주로 사용하는 것이 같다. 체구는 족류( 族 類 ) 분류에 있어서 일차적인 척도가 된 다. 체구가 같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의문 해소의 지름길이 찾아진다는 것은 더 말 할 나위가 없다. 태어났을 때 불기에 반문이 있다는 것은 몽골로이드만이 아니라는 일부의 설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몽골인과 한국인간에 있어서 조상 때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전설의 내용이 비 슷하다. 몽골인의 겨우 생산신( 生 産 神 )이 세상에 빨리 나가라는 신호로써의 손자국이라고 한다. 한 국인의 경우도 삼신( 三 神 ) 할머니가 세상에 빨리 나가라는 뜻으로 볼기를 쳤다는 손자국이 라 한다. 삼신 할머니는 환인( 桓 因 )과 환웅( 桓 雄 ) 그리고 단군( 檀 君 )의 부인 세 분을 지칭하 는 말이다. 몽골인과 한국인이 모두 오른손을 위주로 사용하는 그 원인은 음양론( 陰 陽 論 )에서 유래하 고 있다. 밤은 음( 陰 )이요, 낮은 양( 陽 )이다. 여성은 음이요, 남성은 양이다. 그리고 왼손은 음이요, 오른손은 양이다. 물론 동양인은 음체질이요. 서양인은 양체질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음양의 두 요소가 다 내포되어 있다. 즉 모든 사람에게 왼손과 오른손이 있는 것처럼 말이 다. 우리의 체내에는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다.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남성다운 면모가 있는가 하면 여성스러움도 있는 것이다. 특히 생리 구조면에서 보면 머리 왼쪽에서 혈관이 터지면 오른쪽 수족이 마비되고, 머리의 오른쪽 혈관이 터지면 왼쪽 팔다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9 리가 마비 현상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음양의 조화 관계인 것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모두 낮에 일하고 밤에 잠잔다. 그리고 주간 생활에 있어서는 생활 질 서 또는 남녀간의 예절이 철저히 지켜진다. 따라서 부부생활은 밤에 이루어진다. 낮에는 거 의 금지되어 있는 것이 서양인의 경우와 다르다. 그러므로 밤 시간( 陰 )에 잉태한 어린이는 양성( 陽 性 )을 띠기 때문에 오른손을 위주로 쓰 게 되지만, 낮 시간( 陽 )에 잉태한 어린이는 음성( 陰 性 )을 띠기 때문에 오른손보다는 왼손 사 용이 더 용이하다는 성향을 띤다. 서양 사람들 가운데 왼손잡이가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같은 데서 연유한다. 이는 몽골인과 한국인은 그 기본적인 생활 방식이 원천적으로 비슷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둘째, 두 민족은 피부색과 모발의 색깔 및 형태가 같고 눈동자의 색깔이 거의 같다. 모발 이 원주형으로서 각주형이 아니다. 각주형은 니글로이드의 경우와 같이 곱슬머리 縮 毛 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셋째, 두 민족은 언어 구사에 있어서 어순( 語 順 )이 같고 서법( 書 法 )이 같다. 위에서 아래 를 향해서 글을 쓰는 종서법이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종서의 경우 한국인은 오른 쪽부터 써내려 가지만, 몽골인은 반대로 왼쪽에서부터 쓴다. 먹물을 이용하는 모필 사용시에는 몽골인의 서법이 좋은 것 같다. 아마도 한국인과 일본 인이 오른쪽에서부터 써나가는 그 습관은 중국에서부터 전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은 한국인과 몽골인과의 다른 점을 약술하고자 한다. 첫째는, 인체에 있어서 머리 부분이 약간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구 중 90%는 장두( 長 頭 )에 속한다. 그러나 몽골인은 거의 90%가 단두( 短 頭 )에 속한다. 장두와 단두의 구별법은 간단하다. 두 눈썹 兩 眉 을 연결하는 직선으로부터 머리의 뒤 통수 돌출 부분까지의 길이를 재보면 몽골인보다는 한국인이 더 길다. 그 기준에 따라서 장 두와 단두를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한사람 한사람 재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앞이마를 살펴보면 쉽 게 알 수 있다. 이른바 대머리 모양처럼 이마가 넓게 트여 있으면 그것은 장두이다. 그러나 두발이 앞 이마의 면쪽을 좁혀 가면서까지 내려덮은 것은 단두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이마 가 넓게 훤히 트인 사람은 장두에 속하고 이마가 넓지 못한 사람은 단두에 속한다. 두형( 頭 型 )이 장두냐, 단두냐 하는 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과 관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부의 관상객( 觀 像 客 )들은 말하기를 이마가 좁으면 부모의 혜택이 적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몽골인의 경우를 보면 몽 골의 대통령으로부터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가 단두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몽골인의 생활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다른 점에 대하여 언급해 두고자 한 다. 여기에서 말하는 범위는 한국인과 그 문화적인 연원은 공통성을 띠고 있으면서 표면상

10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나타나고 있는 부동성( 不 同 性 )에 관해서만 실례를 들어서 이야기해 두고자 한다. 고전무용에서 보면 샤머니즘에 해당되는 춤이라든가 의상 및 연출되는 내용이 거의 비슷 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춤은 어깨쪽에 힘이 주어진 상태에서 힘찬 율동이 펼쳐진다. 그리고 의상 부문에 있어서도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면 모자의 매듭짓는 형식이라든가 옷 고름에 새겨지는 문양 喜 등이 같으면서도 모자 또는 의상의 모양이 판이하게 다른 점이 많다. 뿐만 아니라 가야금의 연주법이라든가 가야금의 모양새는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거의 똑 같다. 그러나 줄의 수가 다르다. 한국의 것은 가야금이 12줄인 데 비하여 몽골의 것은 13줄 이다. 그 줄 하나 더 많고 적다는 것 때문에 가야금의 유래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이냐에 관 하여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많다. 즉 13선이 먼저이고 12선이 그 뒤라는 것인데, 그에 대하여 한국인은 우륵 선생에게까지 소급해 가면서 그에 대하여 수긍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 생활 속에서는 이미 다리미 라는 단어는 사라지다시피 한 것 같다. 그리고는 흔히들 아이롱이라는 외래어를 많이 쓴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아이롱을 인두 라는 말로 표현해서 우리를 놀래키곤 한다. 그밖에도 친척 을 일가( 一 家 ) 라 한다든지, 미숫가루 를 미스까레 라하며, 그리고 우리 말 의 설렁탕을 그곳에서는 술룽 이라 한다. 어린 양을 푹 고아서 그 국물을 산모( 産 母 )에게 미 역국 대신 먹이는데 그것을 가리켜 술룽 이라 한다. 2. 몽골 사람들의 이동식 주택 주택은 인간이 가족과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제1차적인 서식 공간이다. 옛부터 주택을 가 리켜 양택( 陽 宅 )이라 하여 유택( 幽 宅 :무덤)과 구별해 왔다. 양택은 인간의 길흉화복( 吉 凶 禍 福 )과 연관성이 크다 하여 그 입지 선정에서부터 건축 양 식에 이르기까지 갖추어야 할 조건도 많다. 몽골인이 애용하고 잇는 게르(GER)도 예외일 수는 없다. 게르는 몽골인들의 유목생활에 알맞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다. 게르가 지니는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몽골인들의 유목생활에 대하여 이해할 필 요가 있다. 몽골인들의 유목은 오축( 五 畜 )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오축이란 말, 소, 양, 염소, 낙타를 말 한다. 오축이 지니는 공통성은 주인이 먹을 것을 마련해 주지 않아도 저 나름대로 풀을 뜯 어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돼지라든가 닭과 같이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된 다는 점이 다른 나라의 가축의 경우와 다르다. 오축의 이동 거리는 비교적 넓은 편이다. 말과 소의 운동 반경 거리가 직경 몇 km씩 되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11 거니와 낙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경우는 좀 예외기는 하지만 그들 의 집단적인 여로( 旅 路 )는 오히려 긴 편이다. 유목을 하는 몽골인의 이동은 크게 4개 거점으로 분류된다. 즉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 계절에 따라 설치되는 숙영지( 宿 營 地 )를 중심으로 하여 이동되고 있다. 그 숙영지로 선정되 는 지역에는 최소한 다음의 조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는, 오아시스 물 가 있어야 한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3개월씩 머물러 있을 수가 없 다. 유목자인 사람도 견디기 어렵거니와 오축들도 물 없이는 견디기 어렵다. 둘째는, 풀이 있어야 한다. 사막에 있어서 풀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동물의 먹이 확 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유목 대상지로서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몽골을 가 리켜 사막 국가라고 한다. 이는 막연히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 사막협회에서 분류하는 기준에 따르면 사막은 3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사( 沙 )자가 의미하듯이 사막은 물이 적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 沙 )자는 물 수( 水 ) 변에 적을 소( 少 ) 자를 써서 표현하고 있다. 연간 강수량이 50밀리 이하일 경우에 그같은 지역을 가리켜 극사막( 極 沙 漠 )이라고 한다. 극사막 지대에서는 복사열이 있어서 모래 위 온도가 섭씨 70도 이상을 오르내린다. 극사막 지대에는 풀 한 포기도 성장하지 못한다. 다음은 사막이다. 사막은 연간 강수량이 50밀리 이상 200밀리 이하인 경우를 말한다. 풀이 나기는 하지만 목초로서는 부적당하다. 그리고 동물의 먹이를 충족시켜 주기도 어렵다. 따라 서 사막 지대에서는 유목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반사막( 半 沙 漠 )이다. 반사막은 연간 강수량이 200밀리 이상 500밀리 이하인 경우를 말한다. 이 정도의 강수량이 있는 곳에서는 풀과 나무가 자랄 수 있다. 비록 조밀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초원( 草 原 )의 개념권 속에 포함시켜도 무방할 정도의 녹색을 지 닌다. 유목이 이루어지는 지역은 곧 반사막 지대를 의미한다. 몽골의 경우는 거의 전 국토에서 유목이 가능하다. 다만 전 국토 면적 중 15.34%에 해당 하는 지역이 제외될 뿐이다. 그러므로 몽골인이 유목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의 국토 전역이 반사막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국토 여건에 적응해 가면서 유목생활을 통하여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게르 (GER)라는 이동식 주택이 필요불가결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 하필이면 이동식 게르만이 요구되는 것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있을는지는 모른다. 반사막 지대 에서 동물(오축)이 살아가자면 먹이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풀이 조밀하게 나 있지 않기 때문에 넓은 면적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분기별로 설정되는 숙영지에서도 그 숙영기지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곳으로 이동을 거듭 한다. 그러므로 사람도 동물의 이동 방향을 따라 수시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된다.

12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게르는 설치하는 데에도 2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철거하는 데 있어서도 2시간이면 충분하 다. 다시 말하면 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그 속도에 맞추어 수시로 이동이 가능하게 끔 설계된 것이 바로 게르 주택인 것이다. 몽골인들은 동물과 더불어 초지를 찾아 이동하면 서 살아가기 때문에 집도 이동식이며 식량도 이동적 휴대가 가능한 개념으로 되어 있는 셈 이다. 식량은 곧 양이다. 양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사람의 식량으로 제공된다. 몽골인들의 유목생활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아주 낭만적이다. 겨울이면 영하 50도를 밑 도는 혹한 속에서도 주택걱정이 없고 먹을 것을 걱정하여야 할 이유도 없다. 추위에 잘 견 디며 살아가는 동물(오축)이 언제나 함께 어우러져 다니고 있기 때문에 식량 걱정이 있을 리 없다. 땔감이 없어서 걱정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소의 분( 糞 )과 낙타의 분은 기름기가 많아서 건조된 것은 마치 돌덩이와도 같다. 그리 고 마분( 馬 糞 )은 상당히 부드러워서 언제나 불이 잘 붙는다. 몽골인들은 말하기를 우분과 낙 타분은 장작과 같고 마분은 불쏘시개와 같다고 한다. 게르는 그같은 사막 또는 초원에서 유목을 해가면서 살아감에 있어서 그보다 더 좋은 주 택은 아직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편의성을 자랑하고 있다. 3. 게르(Ger)의 구조적 오묘성( 奧 妙 性 ) 게르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단순한 텐트가 아니다. 정원형( 正 圓 型 )의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출입구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있을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게르군(GER 群 )이 집군( 集 群 )을 이루면서 원형으로 취락을 형성하게 될 때에는 중심지점에 자리하는 게 르의 좌향은 역시 동쪽지향적으로 방향을 정한다. 동은 광명이 솟아나는 방향이며 상서로움 을 의미하는 좌향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일출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기 위해서도 아침 햇살이 출 입구를 두드리게끔 좌향을 놓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고 있는 전통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애송( 愛 誦 )하는 시조 가운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하는 것도 동쪽 지향적 인 창의 설치 성향을 암시해 주고 있다. 게르에는 출입구가 하나뿐이다. 그리고 게르의 중앙부 천정에는 연통 구멍이 뚫려 있을 뿐만 아니라 천으로 되어 있는 개폐식 뚜껑이 마련되어 있다. 연통 구멍이면서 환기통의 작 용도 한다. 게르의 내부를 간략히 소개한다면 출입구의 내부 정면에는 반드시 가장의 침대가 놓인다. 그 침대의 좌측에는 불단( 佛 壇 )이 마련되어 있고 우측에는 가족사진 등이 걸린다. 그 방향은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13 정확히 이야기하면 서남방( 西 南 方 )과 서북방( 西 北 方 )에 해당한다.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 각 각 침대가 놓인다. 그것은 부인의 것과 아이들의 침대다. 그 옆으로 이불이나 옷을 넣는 상 하 분리식( 上 下 分 離 式 ) 장롱이 놓이고 찬장, 신장 등이 양쪽에 놓인다. 그런가 하면 출입문 좌측에는 어린 양을 보호하기 위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마유( 馬 乳 )를 보관 하는 기구들이 놓이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갖가지 생활용품을 두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게르의 중앙에는 반드시 난로가 놓이며, 난로 위에는 큼직한 물 그릇이 얹혀 있고, 그 물 그릇에서는 언제나 물이 끓고 있다. 난로옆에는 연료통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반대 편인 가장( 家 長 )의 침대가 있는 쪽 공간에는 가족 공용의 식탁이 놓인다. 게르 내부에 있는 3개의 침대 밑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들이 감추어져 있듯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다. 식사 때가 되면 그 침대 밑에서 의자를 꺼내어 사용하곤 한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지혜의 소산인 듯 느껴진다. 게르 내부의 모양은 대략 이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게르를 지탱 하고 있는 내부의 구조물이 지니는 그 의미인 것이다. 게르의 천정 구조물은 3개의 원을 형성한다. 하나는 중심원이며 또 하나는 중간원이다. 그 리고 다른 하나는 외곽원이다. 중심원은 외곽원까지를 연결하는 十 자로의 서까래가 놓인다. 이는 방향으로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계절로는 춘하추동( 春 夏 秋 冬 )을 의미한다. 중간원에서는 중심원에서 4등분된 각 공간에 두 개씩 서까래가 놓인다. 그러므로 중간원 에서는 한 칸에 3개씩의 공간이 생긴다. 즉 3 4=12라는 공간이 중간원을 형성하게 되는 바, 이것은 12개월의 월력( 月 曆 )을 나타내며, 1일 단위에서는 12시간의 시계 문자판 구실을 한다. 즉 12지( 十 二 支 )의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중간원을 중심으로 하여 12개의 공간마다 5개의 서까래가 얽혀진다. 그것은 12개 의 칸마다 6개의 공간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 여기에서 12 6=72라는 숫자가 나온 다. 72는 계절의 절후( 節 侯 )를 의미한다. 1절후는 5일을 뜻하는 바 72 5=360이라는 숫자를 찾아내게 된다. 360은 태음력( 太 陰 曆 )의 일년 간 일수( 日 數 )를 의미한다. 그리고 360도는 원( 圓 )을 의미한 다. 게르가 원형인 것은 몽골 월력의 360일을 의미한다. 서양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달력을 가리켜 태양력( 太 陽 曆 )이라 한다. 동양 사회의 일부 국 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음력은 태양 태음력( 太 陽 太 陰 曆 )이다. 서양의 태양력은 1년을 365일로 한다. (4년마다 올림픽이 이어(Olympic Year)가 있기는 하지만 - 366일) 태양 태음력은 1년을 357일 내외로 하고 있다. 365일과의 차이를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써 쓰여지고 있는 것이 매 4년마다 이루어지는 윤달 閏 月 이다. 그리고 태양력과 태양 태음력은 12개월을 큰 달, 작은 달로 구분하여 태양력의 경우에는 큰 달이 31일, 작은 달이 30일(2월은 28~29일)로 되어 있다. 태양 태음력의 경우도 큰달은

14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30일, 작은 달은 29일(2월은 27~28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몽골인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달 력은 태음력( 太 陰 曆 )이다. 태음력의 특징은 크고 작은 달의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1월부터 12월까지 균일하게 1개 월이 30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1년은 360일인 것이다. 태양력과는 연간 5일 간의 차이가 난다. 5일 간씩 밀려가다 보면 6년만에 30일이 쌓이게 된다. 즉 6년마다 윤달이 든다는 것임 을 말해 주고 있다. 몽골인의 주택인 게르 천정에는 이른바 4시, 4방위를 비롯하여 12시, 12개월 12간지의 뜻 이 담겨져 있고 72절후의 구별을 가능케 하고 있다. 즉 침대에 누워서 중심원을 바라보면 춘하추동과 동서남북의 구별을 알아볼 수 있고, 중간원을 통해서는 하루의 12시간과 일년의 12달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외곽원에서는 5일 단위의 72절후를 셈할 수 있게끔 달력 구실 을 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게르가 지니는 오묘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같이 오묘한 원리가 내함( 內 含 )되어 있는 게르의 구조를 그냥 간과해 왔었던 것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탓이 아니었던가 지적해 두고 싶다. 게르가 지니는 그 천정의 원리를 그대로 땅 위에 내려앉혀 놓아도 그 모형은 훌륭한 소단 위 지역사회의 개발 설계가 된다. 그것을 발전시켜서 필자가 제시한 바 있는 모델이 바로 몽골 게르 모델타운 인 것이다. 게르가 지니는 원리를 그대로 원용한 것이기에 그 지역 설 계 모델은 몽골인들에게 인상 좋게 수용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몽골인 전통문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발전적으로 해석하였다는 점이 게르 모델 타운 의 이론 구조였기 때문이다. 몽골인의 주택인 게르가 지역 설계의 원형으로 원용되고, 또한 그것이 새로운 타운 설계 의 모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껏 오축을 뒤따라 다니면서 살아가던 몽골인들에게 아름 다운 초원을 낙원의 터전으로 살아 정착형 생활기반 형성의 가능성을 더해 주는 데 일조나 마 할 수 있었으니, 필자에게 있어서 게르는 크나큰 매력을 던져 주었다 하겠다. Ⅳ. 유목민의 농경문화 1. 기마유목민과 농작물 기마유목민과 농작몽골은 강수량이 적어 농경에 그렇게 적합한 곳은 아니다(추위 때문은 아니다). 그래서 몽골인은 우리네 농경과 인연이 적고, 몽골어도 농업관련 어휘가 부족하다. 예컨대 야채를 가리킬 때 일반적으로 풀 을 의미하는 노고오 라 한다. 따라서 야채만을 지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15 칭할 때는 식용노고오 라 해야 한다. 곡물 이름만 보아도 보다(곡물에 붙는 어미, 또는 기 장), 보오다이(밀), 마오(곡물에 붙는 어미, 물에 붙는 어미, 또는 기장), 아르바이(보리) 등 몇 개에 불과해 결코 어휘가 풍부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은 고기와 유제품에 관한 어휘가 풍부한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누구나 가지는 의문은 옛날 몽골유목민이 곡식이나 야채를 어느 정도나 먹었을까 하 는 점이다. 그 답은 몽골인은 별로 야채를 먹지 않고 고기와 비타민이 풍부한 유제품만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곡식도 있으면 먹는 정도이지 필수품이었다고 생각하기 는 어렵다. 서아시아의 유목민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모르지만 유목민이라도 실은 농경민으 로부터 획득한 곡식이나 야채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도 시골사람은 밀가루를 제외하고 농작물을 그다지 먹지 않는다. 다만 오해가 없도록 부연 하면 옛날부터 야생동물이나 일부나물, 버섯 등을 먹은 것은 당연하고, 지역에 따라 민물고 기도 약간 먹었는지도 모르고 농업이 전무하지는 않았다. 다만 현지에서 나지 않는 것은 상 식( 常 食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2. 농업의 역사 몽골의 농업은 기원 전후 흉노시대부터 확인되고, 바이칼 호 주변 등지에서 농경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지금의 내몽골 남부지역은 한나라시대나 북위, 수당대에 중국령으로 되어 여 러 차례 농경이 시도되었다. 유목 위구르제국에서도 소규모농경이 이루어졌다. 다만 이들은 대개 한족을 비롯한 농경민이 몽골에서 한 농업이다. 몽골인 자신이 적극적으 로 농경을 받아들인 흔적은 찾기 어렵다. 또한 유입농경민의 숫자도 극히 적었다. 몽골에서 농업이 본격화되는 것은 16세기 말경 한족과 러시아가 몽골의 남북에 진출하기 시작한 후이 다. 이 무렵부터 내몽골 후흐호트 주변에 서서히 명나라로부터 한인농민이 진출하기 시작한 다. 그러나 그 후 몽골을 지배한 청나라는 한인농민의 유입을 엄격히 금했다. 유목을 보호하여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나 중국본토의 인구폭 발에 수반하여 산시성, 허베이성 등지에서 불법이민이 증가한 결과 내몽골 남부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이 되면 이미 한인농민과 상인의 급격한 진출로 인하여 토지분쟁 등 민족 분규 가 빈발했다. 또한 러시아농민에게 둘러싸인 부리야트 몽골에서도 매우 비슷한 상황이 전개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청조는 러시아세력의 남하에 대항하여 한족으로 국경을 인정시키기 위해 한인의 이주제한을 취소하고, 반대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이주가 합법화되자 한인의 이주물결은 노도와 같이 확대되고 먼저 중국 동북부(만주지역)의 만주족

16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본거지를 순식간에 잠식해 버렸다. 내몽골에서도 동부나 남부지역에서 민족분규가 더욱 많 이 발생했다. 이 지역에서 농업은 말하자면 민족존폐의 위기를 가져온 재앙이었다. 그 당시에 쓰인 문헌을 통하여 몽골인의 한인농민에 대한 원한과 반감을 강하게 느낄 수 있 다. 20세기 처음 10년 동안 내몽골의 남부 동부지역에서는 반한폭동이 빈발하고, 몽골귀족 은 한족에게 집어먹히지 않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생각에서 갖가지 방법을 모색했 다. 일부 왕공이 일본의 군사력에 기댄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한편 외몽골에서도 한인상인의 진출로 반한감정이 발생했지만 강수량이 적어 농민은 별로 이주하지 않았고, 따라서 민족의 위기감도 상대적으로 덜 심각했다. 19세기 중엽 외몽골의 한 왕공이 쓴 교훈서(역:토왕의 가르침)를 보면 기아대책으로 오히려 농업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마지못해 농경에 종사하고 있는 몽골인의 모습이 눈에 떠오 르는 듯하다. 그런데 샤라브의 몽골인의 하루 에 나타난 풍경은 20세기 초 외몽골의 모습으 로서 화면 오른쪽 윗편에 당시의 농경풍경이 보인다. 내몽골이나 부리야트와 같이 민족대립 의 위기감을 느낄 수 없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아마도 기아대책이나 몽골에 주둔한 한인, 만 주인(관리군인)의 식량공급을 겸해서 한 농업인 듯하다. 그림을 자세하게 보면 우선 냇가에 서 물을 끌어와 수로를 통해 직사각형 밭에 물을 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나 말을 사용하여 밭을 가는 모습, 오른손에 잡고 있는 짧은 낫으로 네 사람이 나란히 곡식(보리?)을 베고 있는 모습, 소 달구지나 마차로 곡물을 운반하는 모습 등이 밭과 그 주변에 그려져 있 다. 직사각형 밭에서 왼쪽 윗편으로 눈을 돌리면 곡식이 익은 조그마한 밭과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검은 허수아비 가 보인다. 허수아비는 밭 주변과 그 아래 양( 羊 )주위에도 있다. 참새나 가축의 침입을 막고 이리를 막는 데 쓰이고 있는 듯하다. 나아가 그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두 손에 러시아식 큰 낫을 들고 겨울에 쓸 가축사료(풀)를 베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허수아비 아랫편으로 눈을 돌리면 말에게 큰 돌절구를 끌게 하 는 사람, 탈곡한 곡식껍질을 허공에 띄워 올려 바람에 날리고 있는 사람, 곡식을 자루에 채 우고 있는 사람 등이 보인다. 또한 직사각형 밭의 위편에도 절구를 돌리는 사람이나 공이와 절구로 곡식을 찧고 있는 사람이 보이고 여기에도 큰 곡식자루가 있다.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몽골인일 것이다. 그러나 한인도 몇 사람묘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Ⅴ. 유목문화의 쇠퇴원인 유목은 과거의 유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즉, 유목은 이미 종말단계에 왔다고 한다. 사실 구소련령 중앙아시아지역에서는 유목을 뿌리째 흔들어 버린 절감정책이 시행되었다.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17 1930년대에 집단화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수백 만 명에 달하는 유목민이 희생되었다. 이 조 치로 인하여 전통적인 유목의 숨통은 완전히 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의 유목은 강 압적인 힘에 의해 과거형의 상태로 전락되었다. 구소련에서 시행된 유목절감정책은 그것이 낙후한 생산형태라는 근거에서 수립되었다. 근대국가의 성립과 함께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목에 대탄압이 가해졌다. 유목은 근대국가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징세 의무교육 징병제 등과 융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 하여 유목민은 복종하지 않는 백성 으로서 국가권력에 의한 무력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터 키에서는 1930~1950년대에 유목민의 정주화( 定 住 化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엄벌을 수 반한 법령의 시행과 함께 군대의 무력도 사용되었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진행된 유목의 근절정책과 강압적인 정주화정책은 확실히 유목의 종말을 가져오는 효과를 발휘했다. 유목공간은 국경을 포함한 각종 경계선에 의해 단절되고, 이동을 제약하는 갖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나아가 목초지 자체가 농경지로 바뀌었고 대형 농기계의 도입으로 유목지는 빠른 속도로 경지화되었다. 그 결과 유목을 지속하는 범위가 급속히 줄어들었고 유목은 매우 급격하게 쇠퇴해 갔다. 유목이 눈앞의 적처럼 근절의 대상이 된 출발점에 유목과 농경의 이질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고대중국의 역사서인??한서??에는 유목민을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금수의 마음을 가진 존재 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유목에 뿌리깊은 편견이 자리잡 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이질성에 더하여 유목민에 의한 공격과 약탈이 편견을 야기시킨 원 인이 되었다. 그러나 유목민측에서 보면 약탈은 생업의 일부였다. 예로부터 유목민은 지도자 의 조건으로서 무예의 자질과 중재의 공정성 외에 약탈품을 얼마나 공평하게 분배하는가를 들고 있다. 현대문명은 계통적으로 분명히 농경에서 시작되었다. 이 계통에서는 생산력 지상 주의라는 요소가 중시되고 있다. 유목은 확실히 현대문명의 계통과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따 라서 유목의 존재가치도 다른 곳에 있다, 이후 현대문명이 나아갈 방향을 숙고해 볼 때 유 목의 위치에서 본 풍경이 중요한 가치를 갖기 시작할 것이다. Ⅵ. 현대몽골의 유목의 전망 소련령 부리야트에서는 농업의 집단화가 진행되고 정착화정책이 추진되면서 유목은 자취 를 감추어 버렸다. 내몽골에서도 전후 인민공사에 의한 농업의 집단화가 진행되고, 농경이 대규모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소련 중국의 급격한 농업화정책으로 사람들은 염해( 鹽 害 )나

18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사막화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몽골(외몽골)에서도 전후에 국영농장을 설치하여 밀이 나 야채의 증산을 도모했다. 다행히 과도한 농업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유목전통은 살아남 았다. 그 후 1990년 이래 사회주의가 폐기되자 국영농장에서 하던 농업은 대부분 방기되고, 현재는 역으로 유목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끝으로 유목과 농업을 비교해 보면 유목은 농 업 이상으로 환경친화적인 생업이고 결코 후진적인 생업이 아니다. 또한 농업을 반드시 환 경친화적이라 할 수 없다. 특히 몽골이나 카자흐스탄과 같이 강수량이 적은 초원지대에서는 아주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금방 실패하여 사막화나 염해를 불러온다. 많은 물을 소비 하는 벼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밀이나 야채, 면화 등도 신중하게 재배해야 한다 는 사실을 과거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몽골 목축업의 현황과 미래전망 이효선 19 참고문헌 가바리노 원저, 한경구 임봉길 1994. 문화인류학의 역사 (일조각) 김기선 1995. 연지, 檀 君 의 어원 고찰 몽골학 3. (한국몽골학회) 김선풍 외 1992. 한몽민속의 비교를 위한 현지조사:몽골민속 (복조리) 데 바이에르 지음, 박원길 옮김 1994. 몽골 석인상의 연구(원제:칭기스칸의 혈통을 이어받은 칸 귀족들의 돌초상-13 4세기-) (혜안) 박원길 1998. 북방민족의 샤마니즘과 제사습속 국립민속박물관 학술총서25 신현덕 1996. 신현덕의 몽골 리포트:아내를 빌려주는 나라 (강) 이필영 1979. 북아시아 샤마니즘과 한국 무속의 비교연구 백산학보 25. 이효선 2006. 몽골유목경제론 (북코리아) 이효선 1997. 몽골경제사 (은혜미디어) 이효선 2004. 몽골초원의 말발굽소리 (북코리아) 최서면 1990. 최서면 몽골기행 (삼성출판사) 한 몽골교류협회 1995. 한 몽골교류천년 洞 京 國 立 博 物 館 編, 大 草 原 の 騎 馬 民 族, 洞 京 國 立 博 物 館, 1997. 內 田 吟 風, 騎 馬 民 族 史 1.2( 東 洋 文 庫 ), 平 凡 社, 1971~1972 松 田 壽 남 男, 遊 牧 民 の 歷 史 六 興 出 版 社, 1986. 山 田 信 夫, 北 ァジァ 遊 牧 民 族 史 硏 究,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989. Udo B. Barkmann, Geschichte der Monglei, Bonn, Bouvier, 1999 Bruce A. Elleman, Diplomacy and Deception : The Secret History of Sino-Soviet Diplomatic Relations, 1917~1920, Armonk, M. E. Sharpe, 1997 Nakane Chie, "New Trends in Tibetan Studies", Acta Asiatica, No. 76, 1999 Adeeb Khalid, The Politics of Muslim Cultural Reform : Jadidism is Central As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Hélène Carrère d' Encausse, trans. by Quintin Hoare, Islam and the Russian Empire : Reform and Revolution in Central Asia, London, I. B. Tauris, 1988 Willian Fierman, W. ed., Soviet Central Asia : The Failed Transformation, Westview Press, 1991

20 韓 蒙 經 商 硏 究 제19권 제1호 2008년 6월 The Present Condition & Future view of Stock Farming in Mongolia Lee Hyo Sun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make a general survey about the Mongolia's past, present and future and arouse our interest in new millenium. Mongolia is a country on a prairie. We can see various landscapes of gentle slants prairie extended to the horizon. Prairie is a ground of Mongolian traditional way of life. Nomadic life which people should always move to search for water and grass is Mongolian living economy. Meat and Dairy products from the cattle are Mongolian everyday foods and their dwelling house is Ger which is made of woolen felt. Mongolia is situated on the end of Eastern area of the great prairie which crosses the Eurasia Continent from the east to the west. Mongolian Prairie extends to the Eastern Europe and Russia. Mongolian mounted army constructed world empire containing Russia and East Asia following the Mongolian Prairie. Mongolia conquered the 7.77 million which are bigger than the total area that Napoleon, Hitler and Alexander the great conquered, and this was under control of Mongolia for 160 years. But in modern world nomadism is on the decline both Mongolia and other countries like Mongolia. And furthermore by increasing the settlement of the nomadic people, nomadic way of life itself gradually has begun to disappear. In spite of this adverse circumstances, nomadic life in Mongolia are expected to be continued until 21th century. Because living technology in nomadism and stock farming manufacture in Mongolia has begun to develop rapidly. Key words: nomadic life, nomadic culture, 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