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財 ) 東 亞 文 化 硏 究 院 地 表 調 査 報 告 第 14 輯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구간내 文 化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書 2 0 0 4. 10
目 次 Ⅰ 7. 조사개요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8 1. 김해시의 자연환경 1. 8 2. 김해의 역사적 환경 2. 10 3. 조사대상지역 개관 3. 28 Ⅲ 29. 현지조사 및 조사단 의견 참고문헌 참고문헌 30 사진 사진 31-3 -
圖 面 目 次 도면 도면 1. 조사지역 및 주변유적분포도(1/50,000) 5 2. 조사지역 지형도(1/5,000) 6 寫 眞 目 次 사진 1. 조사지역 원경( 서 동) 33 사진 2. 조사지역 전경1( 서 동) 33 사진 3. 조사지역 전경2( 북 남) 34 사진 4. 수습유물 34-4 -
도면 1. 조사지역 및 주변유적분포도 - 5 -
도면 2. 조사지역 지형도 - 6 -
Ⅰ. 조사개요 우리 연구원은 아름다운건설( 주) 가 시행하는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 축공사구간에 대하여 시행자로부터 문화재보호법 제74조의2 동법 시행령 제43조 의3 규정에 의거 당 사업구간의 문화재지표조사를 의뢰받고 사업 시행계획 수립시 사업구간내 지표조사를 통해 문화유적 분포여부를 조사하여 확인된 유적에 대한 보존 방안을 수립하기 위하여 본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현장조사는 사업구간 전구간 및 주변지역까지의 구간을 대상으로 하였다. 현장 조사를 실시하기에 앞서 조사대상지역과 그 주변 일대에 대한 문헌조사를 실시하 였다. 문헌조사는 고문헌조사 및 기존에 보고된 각종 발굴조사보고서와 학술지를 조사하였다. 현장조사는 전구간을 도보로 실시하여 유적의 유무를 확인하였다. 지표조사를 위한 조사단의 구성과 조사지역은 아래와 같다. 조사단 구성 조 사 단 장 : 신용민( 동아문화연구원 고고역사조사단장) 책임조사원 : 정우열( 동아문화연구원 유ㆍ무형문화재부장) 조 사 원 : 김용탁( 동아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조 사 원 : 김유정( 동아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조사보조원 : 백경희( 동아문화연구원 연구원) 총조사기간 : 2004. 10. 04 ~ 2004. 10. 23 예비조사 현장조사 : 7일 : 3일 자료분석ㆍ정리, 보고서 작성 : 9일 조사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신용리 591외 10필지 조사면적 : 10,234 m2( 약 3,100 평) 의 뢰 처 : 아름다운건설( 주) - 7 -
Ⅱ. 역사 ㆍ 고고분야의 조사 1. 김해시의 자연환경 김해시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대 가야문화의 발상지로서 낙동강 하류에 위치 한 水 陸 交 通 의 요지이며, 영남동남부의 요충인 雄 府 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 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현대 도시로서 급격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김해시는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부산광역시 의 강서구 및 양산시와 접하고, 북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밀양시와 접하며, 남서 쪽으로는 창원시 진해시와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 볼 때 김해시는 북단이 生 林 面 都 要 里 ( 동경 128 51 59, 북위 35 23 31 ), 남단은 長 遊 面 長 遊 里 ( 동경128 49 44, 북위 35 9 10 ) 로 남북간의 거리는 약 32 km에 이른다. 그리고 동단은 大 東 面 月 村 里 平 村 마을( 동경 129 0 48, 북위 35 16 16 ) 이며, 서단은 進 永 邑 佐 昆 里 光 大 峴 ( 동경 128 41 47, 북위 35 18 12 ) 으로 동서간의 거리는 약 37 km이다. 지형적으로 볼 때, 김해시의 북쪽은 小 白 山 脈 의 지맥과 洛 東 江 에 면하여 대략 300~400m 의 낮은 산악지로 형성되어 평지가 적은 편이며, 서부지역은 龍 池 峯 ( 해 발 743m), 花 山 ( 해발 798m), 屈 岩 山 ( 해발 662m) 과 같은 높은 산지로 에워싸여 진해시ㆍ창원시ㆍ마산시 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으로는 바다와 접하고 있다. 또한 낙동강이 김해시 북쪽의 無 隻 山 ( 해발 700m) 에서 남쪽 神 魚 山 ( 해발 630m) 에 이르는 산맥의 동부를 따라 曲 流 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소백산맥의 지 맥과 접하는 북반구와는 달리 남반부는 낙동강의 지류를 따라 넓고 기름진 평야지 대( 김해평야가 그 대표적이다) 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구조가 예로부터 김해 시를 중심으로 한 김해지역과 인근지역을 구분 짓는 자연경계가 되어 왔다. 특히 한반도 남단을 가로 지르는 낙동강은 동에서 남쪽으로 곡류하는 과정에서, 북쪽 花 浦 江 과 密 陽 江 의 합류지점에 비교적 넓은 沖 積 地 帶 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시 남 으로 곡류하여 하구에 이르러서는 아주 넓은 三 角 洲 平 野 를 발달시키고 있다. 그런 데 이러한 삼각주평야도 과거에는 대부분 江 岸 의 背 後 濕 地 상태였으나, 근대에 이 르러 자연퇴적이 증가하면서 제방축조와 매립에 의하여 지금의 넓은 김해평야 지 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1) 결론적으로 김해시는 크게 북쪽으로 鎭 山 인 神 魚 山 ( 해발 630m) 과 盆 城 山 ㆍ慶 雲 山 ㆍ林 虎 山 등의 산지가 동서로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낙동강의 하안평야가 전 개되어 있는 지형이다. 또한 이 평야 주변을 낙동강과 그 지류인 潮 滿 江 및 海 畔 川 등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해반천의 경우 김해시의 서부에서 남류하고 있고, 조 1) 金 海 市 ㆍ 東 亞 大 學 校 博 物 館, 문화유적분포지도-김해시, 東 亞 大 學 校 博 物 館, 1998. - 8 -
만강이 남부 신어천 북부의 농경지를 관개한다. 기후는 溫 帶 氣 候 地 域 에 속하며, 특히 남해 海 洋 性 氣 候 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에서도 가장 온화한 지역 중의 한 곳에 해당한다. 연평균 기온이 14 로서 가장 추운 1월 평균기온은 0.9 이며, 일 평균기온이 0 이하인 연평균일수는 10일 미만에 불과한 정도이다. 그리고 가장 더운 8월의 평균기온은 25.5 이며, 연교차 는 23.3 로 대체로 적은 편에 속한다. 최저기온이 0 이하인 날은 연간 60일 이 하로서 제주도를 제외하면 전국적으로 가장 적은 편에 속한다. 또한 최고기온 3 0 이상인 날은 년간 30 일 이하이며, 년평균 일교차는 8 이하로서 이는 타지 역과 비교하면 아주 적은 편이다. 그리고 연평균 강우량은 1466.2mm로 전국을 놓 고 비교해 볼 때 비교적 많은 양이며, 주로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내리고 있다. 김해시의 地 質 形 態 및 地 形 을 살펴보면, 이 지역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 실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생산되는 鐵 과 천연소금 으로, 이곳의 대표적인 천연자원이다.( 이 중 특히 지질형태와 직접 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철이다) 첫째,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鐵 의 생산이다. 이곳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철 광석이 많이 생산된 지역으로서 이는 곧 고대국가시기에 국력의 源 泉 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철생산에 힘입어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인 가야가 강 력한 國 家 權 力 을 형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日 本 ( 倭 ) 과 樂 浪 地 域 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지질구조와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 가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김해지역의 지형은 비옥한 삼각주상의 평야가 형성되어 농경 에 더 없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와 함께 지질적으로는 중생대 慶 尙 系 지층으로 덮여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2) 즉 심성암인 석록암 및 화강암, 분 출암인 석영반암, 맥암으로서의 석영반암 및 규장석 등의 산성암과 섬록반암 등의 고기성암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곳에 따라서는 금ㆍ은ㆍ아연 鑛 床 을 수반할 때 도 있다. 그리고 각 암석의 脈 類 는 서로 수반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곳에 따라서는 석영맥 소화강암 또는 거창 화강암의 소맥을 수반하여 전체적으로 화강섬록암 등 의 심성암을 이루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김해시를 중심으로 하는 낙동강구의 서 쪽 및 가락동 일대, 그리고 김해시 삼정동 등지에서 국부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지질학적 구조로 인하여, 경주와 김해를 포함한 낙동강 하류권에 오늘날의 자철광상 17개소가 있으며 이 가운데 13 개소가 김해일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적 철광상은 김해일대에만 3 개소가 있다. 그러므로 총 20개의 철광상 가운데 16 개, 곧 80% 가 김해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셈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김해지역은 초기 가야사회부터 이미 鐵 을 생산하여 각지로 수출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판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9 -
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金 海 府 東 甘 勿 也 村 ( 上 東 面 ) 3)에서 철을 산출하였다 고 한다. 睿 宗 元 年 (1469) 에 편찬된 續 撰 慶 尙 道 地 理 誌 의 < 金 海 都 護 府 > 條 에 의 하면 砂 鐵 이 金 海 府 東 甘 勿 也 村 에서 산출되는데, 세공으로 正 鐵 479근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太 宗 11 년(1411) 에는 김해 땅에서 明 나라에 조공할 금은을 채집하였고, 12년 3 월에는 回 回 沙 門 ( 아라비아의 승려) 都 老 가 김해에서 300근을 채집해서 조정에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천연소금의 생산이다. 이 지역의 히 오랜 것으로 보이며, 내륙지역으로, 製 鹽 業 에 대해서는 大 東 輿 地 圖 에도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는 상당 과거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낙동강을 통해 영남 그리고 동해안을 중심으로 원거리 지역까지 널리 공급되었다고 한 다. 이것이 고대에 있어 철과 함께 중요한 교역 자원이 되었으며, 이는 바로 고대 김해지역이 가지고 있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현재 김해시의 행정구역은 1 읍( 진영읍), 7 면( 한림면ㆍ생림면ㆍ상동면ㆍ진례면 ㆍ주 촌면ㆍ대동면ㆍ장유면), 9동( 동상동ㆍ회현동ㆍ부원동ㆍ내외동 ㆍ북부동ㆍ칠산서부동ㆍ 활천동ㆍ삼안동ㆍ불암동) 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구 수는 131,948 세대, 인구는 407,368 명이며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2003 년도 통계 자료 참조). 4) 교통상으로 인근에 김해국제공항이 있고, 또한 남해 고속도로, 김해~ 양산간 고속도로 등 2개의 고속도로와 국도ㆍ지방도 등 교통망을 갖추고 있어, 경상남도 동남부 지역의 요충지 로 자리잡고 있다. 2. 김해시의 역사적 환경 (1) 金 海 市 歷 史 槪 要 김해시 인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부터 이다. 農 耕 文 化 의 싹이 튼 대표적인 지역 낙동강하구의 삼각주에 넓게 펼쳐진 평야주위의 언덕진 곳이나 들 가운데 섬같이 솟아 있는 대지들은 先 史 時 代 의 유적 아닌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로 인해 新 石 器 時 代 부터 三 韓 時 代 에 이르는 각종 유적과 유물들이 도처에 산 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유면 수가리패총ㆍ범방패총ㆍ농소리패총ㆍ봉황대패총 과 예안리고분군ㆍ양동고분군ㆍ대성동고분군 등은 우리나라의 선사문화와 가야문 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유적들이다. 또한 일찍부터 鐵 器 를 본격적 으로 사용하게 되고, 벼농사가 퍼지면서 김해의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기원전 3) 김해시 東 20 리에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철 생산으로 유명하였던 곳으로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와 대감리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田 溶 新, 韓 國 古 地 名 辭 典, 高 麗 大 學 校 民 族 文 化 硏 究 所, 1995). 4) 김해시청 < 홈페이지 통계자료> 참조. - 10 -
2 세기경에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여 삼한시대에는 狗 耶 國 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였고, 이것이 駕 洛 國 5)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김해지역의 역사를 개관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국의 건국설화를 간략 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 기 때문이다. 6)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가야의 건국신화는 ( 金 ) 首 露 王 의 탄강설 화로 알에서 태어난 것, 알이 내려 온 龜 旨 峯 과 관련된 것, 그리고 허황후의 도래 설이 대표적이다. 이를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서기 42 년에 가락국이 건국되었다거나, 수로왕이 158년간 나라를 다 스렸다고 하는 설화를 실제 그 시대의 歷 史 的 事 實 로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현 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天 孫 降 臨 說 話, 農 耕 社 會 의 傳 統 과 민속의례, 즉위의례 등은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화학과 민속학적 측면에서 볼 때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는 신화나 설화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 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있는 고대인들의 사상과 역사적 배경 등 보다 종합적인 검 토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수로왕의 설화에서는 크게 2 가지 특징을 엿 볼 수 있다. 첫째, 天 孫 降 臨 과 卵 生 說 話 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 과 둘째, 海 洋 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첫째, 하늘에서 내려왔다 라고 하는 천강신화는 아마도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수로왕을 단순히 한 개인으로 볼 것이 아니고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당시의 김해지역 또는 가야지역 으로 이 주한 先 進 集 團 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김해 지역에 토착세력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9 干 의 존재이다( 차 후의 사료 13 참조). 결국 이러한 토착세력과 새로운 수로왕이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고대 가락국이었을 것이다(9 간 세력은 아마도 靑 銅 器 文 化 를 기반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수로왕은 선진적인 鐵 器 文 化 를 가진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해양성과의 관련은 三 國 遺 事 < 魚 山 佛 影 > 에 萬 漁 寺 는 옛날 阿 耶 斯 山 이 다. 이웃에 가락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해변으로 내려와 사 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수로왕이었다 7)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락국 5) 駕 洛 國 ( 加 洛 國 ) : 고대 낙동강 하류에서 일어난 나라. 일명 가라, 가야 및 육가야로 불렸다. 낙 동강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수십 개의 부락들이 점점 작은 부족국가들을 형성하여 이른바 6 가야가 되었다. 6 가야는 금관가야( 지금의 김해), 아라가야( 지금의 함안), 고령가야( 지금 의 진주? 또는 지금의 경북 상주군 함창?), 대가야( 지금의 고령), 성산가야( 지금의 상산), 소가 야( 지금의 고성) 를 말한다. 그 중 금관가야의 세력이 가장 커서 다른 5 국의 맹주가 되었다. 금 관가야는 수로 혹은 수릉이 세워 491 년 동안 계속하였다.( 田 溶 新, 韓 國 古 地 名 辭 典, 高 麗 大 學 校 民 族 文 化 硏 究 所, 1995) 6) 건국설화인 金 首 露 王 전설은 三 國 遺 事 < 駕 洛 國 記 > 에 잘 나타나 있으며, 오늘날까지 여러 이야 기들로 전해져 오고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부분은 생략하고 설화와 관련된 유물들과 역사적 사실들 을 언급하고자 한다. 7) 三 國 遺 事 < 駕 洛 國 記 > 魚 山 佛 影 참조. - 11 -
의 지리적인 立 地 條 件 과 鐵 을 매개로 한 해상교역이 빈번하였다는 점으로 볼 때, 거북( 龜 旨 峯 설화 및 龜 旨 歌 ) 으로 표현되는 해양문화 역시 수로왕과 밀접한 관련 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왕비인 허왕후 설화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건국자 수로왕의 아내인 許 王 后 역시 하늘의 명으로 바다 건너 아유타 국으로부터 왔다는 설화가 있다( 사료 5 참조). 그런데 이 아유타국의 위치는 현재 인도 지방일 것이라는 추정 외에 정확히 비정되지 않고 있지만, 왕비가 바다를 건 너 渡 來 하였다는 설화와 婚 姻 關 係 說 話 등은 아마도 이 시기에 선진문물을 가지고 수로왕 세력과 제휴한 새로운 외래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 여하튼 三 國 遺 事 < 駕 洛 國 記 > 에 의하면 서기 42 년 ( 金 ) 首 露 王 이 가야를 건국하 여 10대 491년을 이어오다가 신라 法 興 王 19 년(532), 仇 亥 王 ( 또는 仇 衡 王 ) 이 신 라에 투항( 服 屬 ) 하니, 신라는 그를 예우하고 가락국을 金 官 郡 으로 고쳐서 食 邑 으 로 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통일 후인 文 武 王 20 년(680) 에 5京 제도를 실시하면서 金 官 小 京 으로 개칭하였다가, 景 德 王 16 년(757) 에 이르러 비로소 金 海 小 京 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김해지역이 신라에 예속되기 전인 의 역할과 영역이다. 3~4세기경 가락국으로서 주지하다시피 금관가야가 전기 가야연맹체에서 주도적인 역 할을 한 점, 그 영역을 정확하게 비정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김해시 일대 및 부산 광역시 강서구, 사하구와 사상구 일대를 포괄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의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김해시 어방동 분산성, 주촌면 양동리 내삼성( 歌 谷 山 城 ) 과 천곡리 천곡성,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 림동 죽도성( 馬 峴 山 城 ) 등이 이 지역들에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9) 하지만 이러 한 판도는 5 세기에 들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가야와 신라의 대립에 있 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한 高 句 麗 의 군사적 진출로 인한 타격이다. 10) 이로 말미암 아 김해를 통한 百 濟 와 日 本 ( 倭 ) 사이의 연결이 차단되었고, 이 여파로 극심한 타 격을 입은 김해의 駕 洛 國 은 이로써 거의 멸망한 듯하다. 물론 그 중심 세력의 일 부는 이 엄청난 변화를 모면해 경상남도 내륙 산간지역( 대가야 지역) 이나 일본 열 도로 피신한 듯하다. 그렇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신라의 감시 아래 8) 김해지역에는 金 首 露 王 과 許 王 后 에 관련된 전설과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허왕후가 처음 내린 마을을 主 浦 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綾 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旗 出 邊 으 로 불렀으며, 가락국의 제8대 질지왕은 452 년 수로왕과 왕비가 만나 혼례를 치른 곳에 王 后 寺 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고도 한다. 이들과 관련된 유적들로는 구산동의 구지봉 아래에 있는 수로왕릉비( 사적 제74 호), 김해 구산 동고분군( 사적 제75 호), 서상동 수로왕릉( 사적 제73 호), 봉황동의 봉황대( 사적 제2 호) 등이 있다. 9)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2002. 10) 서기 400년 廣 開 土 大 王 이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들여 5만의 구원병을 출병시켜 임나가라 및 그 인근 지방을 정벌하고 군대를 주둔( 巡 邏 兵 ) 시킨 것( 廣 開 土 王 碑 文 참조). - 12 -
세력을 펴지 못하거나 복속된 듯하다. 11) 이 후 김해지역은 완전히 신라의 행정구 역으로 편성됨으로써 가야의 역사는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太 祖 23 년(940) 에 金 海 府 로 고쳤다가 臨 海 縣 으로 강등, 다시 임해군 으로 승격하였으며, 成 宗 14 년(995) 에는 金 州 安 東 都 護 府 로 고쳤고, 顯 宗 3 년(1012) 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그러다가 元 宗 11 년(1270) 에 방어사 金 咺 이 密 城 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공과 삼별초를 막았다는 공으로 金 寧 都 護 府 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忠 烈 王 19 년(1293) 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동왕 34년 (1308) 다시 金 州 牧 으로 승격되었고, 忠 宣 王 2 년(1310) 에 이르러 김해부로 개편 되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침탈로 인한 폐해가 남해안 전 지역을 비롯하 여 내륙지방까지 미치고, 이로 인해 왕조의 基 底 가 위협받기에 이르렀는데, 김해지 역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김해지역은 日 本 ( 倭 ) 과 가장 가까운 海 路 의 요충지였 으며, 物 産 또한 풍성한 큰 고을로서 잦은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의 대상이 되어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禑 王 때 김해부사 朴 葳 는 이를 격퇴하는 한편, 김해에 邑 城 과 盆 山 城 12)을 수축하여 왜구의 침탈로부터 방비를 강화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먼저 太 宗 13 년(1413) 에 金 海 都 護 府 로 승격되었다. 이 때서야 이곳에 鄕 校 가 설치되었으며, 웅천ㆍ완포를 속현으로 대산ㆍ천읍을 부곡으 로 삼았다. 世 宗 實 錄 < 地 理 志 >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김해부의 호구 수는 1290 호, 인구는 6,642 명이었다. 그리고 文 宗 2 년(1452) 에는 웅신현과 완포현을 웅천현 으로 통합하여 현감을 두었고, 世 祖 13 년(1467) 에 지방군제 개편으로 경 상우도병마절도사 관하의 鎭 管 을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宣 祖 25 년(1592) 에 壬 辰 倭 亂 이 발발하고 가락면 죽동에 상륙한 왜군 제3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 국 김해성이 함락되기도 하였다( 김해성 전투). 13) 이후 金 海 府 邑 誌 의 기록에 의하 면, 英 祖 35 년(1759) 김해도호부의 호구 수가 8,511호에 인구가 33,015명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러다가 高 宗 32 년(1895) 에 지방관제 개편으로 김해군 으로 되었다 가, 43 년(1906) 大 山 面 이 창원군으로 편입되고, 양산군에 大 上 面 ㆍ大 下 面 이 편입 되었다. 1910년 9 월, 21개 面 이 13 개 面 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 군ㆍ면 폐합에 따라 밀양군의 下 南 面 ㆍ下 東 面 의 일부를 병합하여 14개 面 과 134개 里 로 개편하 여 관할하였다. 1918 년 좌부면과 우부면을 병합하여 金 海 面 을 신설하고, 1928년 11) 여기서 토기 유물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5 세기 이후 고령 대가야 토기문화의 始 原 型 式 이 대성동 고분군에서 많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는 5세기 초 이후에 갑자기 단절되고 있으므로, 토기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김해의 지배집단 일부가 고령 지방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푸 른역사, 2002) 12) 김해지역에 현존하는 읍성 및 성곽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된 < 城 郭 과 烽 燧 > 를 참조할 것. 13) 이때 四 忠 士 를 중심으로 백성들은 끝까지 왜군과 싸웠고,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사충사는 宋 賓 ㆍ李 大 亨 ㆍ金 德 器 ㆍ柳 湜 등 4 명으로 후일 이들을 위해 분산성에 四 忠 壇 을 설치하고, 高 宗 8년 (1871) 에는 사충단비를 설치하였다. - 13 -
4 월 하계면을 進 永 面 으로 하고, 1931년 11 월 김해면을 金 海 邑 으로 승격하였다. 1942 년 진영면을 읍으로 승격, 2읍 11 면이 되었다. 근ㆍ현대에 와서는 1978 년 김해군의 대저면, 명지면, 가락면의 강동지구가 현 부산광역시 北 區 에 편입되었고, 1981년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되면서 김해군과 분리되어 김해군의 세력이 한때 약화되기도 하였다. 1983년 2 월 김해군 生 林 面 의 금곡리와 생림리 일부가 二 北 面 에 편입되었으며, 1987년 1월 입구면이 翰 林 面 으 로 개칭되었다. 1973 년에는 남해고속도로가, 1993년에는 낙동대교가 완공 개통되었 다. 그리고 1995 년 도농통합시로 市 ㆍ郡 이 병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김해시와 관련된 文 獻 資 料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김해시는 고대로부터 역사적 유서가 깊은 지역으 로서 이와 관련된 역사적 史 實 들도 여러 文 獻 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그 양도 다양하고 많은 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경우를( 상기에서 파악한 것을 중심) 선별해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史 料 1 : 三 國 志 < 魏 書 > 東 夷 傳 弁 辰 條 ( 상략) 변진의 구사국이다 ( 하략). 14) 史 料 2 : 三 國 史 記 卷 1 < 新 羅 本 紀 > 第 1 赫 居 世 居 西 干 19年 條 赫 居 世 居 西 干 19 년(39), 춘정월 변한이 항복하여 왔다. 15) 史 料 3 : 三 國 史 記 卷 1 < 新 羅 本 紀 > 第 1 脫 解 尼 師 今 1年 條 脫 解 尼 師 今 이 즉위하였다.(57) ( 중략)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 하략). 16) 史 料 4 : 三 國 史 記 卷 1 < 新 羅 本 紀 > 第 1 祗 摩 尼 師 今 3年 條 祗 摩 尼 師 今 4 년(115), 춘 2 월 가야가 남쪽 변방을 침입하였다. 추 7월 왕이 직접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14) 三 國 志 < 魏 書 > 東 夷 傳 弁 辰 祚. ( 상략) 弁 辰 狗 邪 國 ( 하략). 15) 三 國 史 記 卷 一 < 新 羅 本 紀 > 第 一 赫 居 世 居 西 干 十 九 年 條. 赫 居 世 居 西 干 十 九 年 春 正 月 卞 韓 以 國 來 降. 16) 三 國 史 記 卷 一 < 新 羅 本 紀 > 第 一 脫 解 尼 師 今 一 年 條. 脫 解 尼 師 今 立 ( 중략) 初 至 金 官 國 海 邊 金 官 人 怪 之 不 取 ( 하략). 黃 山 河 를 건넜다. 17) 17) 三 國 史 記 卷 一 < 新 羅 本 紀 > 第 一 祗 摩 尼 師 今 三 年 條. 祗 摩 尼 師 今 四 年 春 二 月 加 耶 寇 南 邊 秋 七 月 親 征 加 耶 帥 步 騎 度 黃 山 河. - 14 -
史 料 5 : 三 國 史 記 卷 4 < 新 羅 本 紀 > 第 4 法 興 王 19年 條 法 興 王 19 년(532), 금관 국주 金 仇 亥 가 왕비 및 그의 세 아들인 맏아들 奴 宗, 둘째 아들 武 德, 막내 아들 武 力 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여 왔다. 왕이 예에 맞게 그를 대우하여 상등의 직위를 주고, 금관국을 그의 食 邑 으로 주었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角 干 에 이르렀다. 18) 史 料 6 : 三 國 史 記 卷 7 < 新 羅 本 紀 > 第 7 文 武 王 20年 條 文 武 王 20 년(680), 가야군에 金 官 小 京 을 설치하였다. 19) 史 料 7 : 三 國 史 記 卷 34 < 雜 志 > 第 3 地 理 1-新 羅 김해소경은 옛날 금관국( 伽 落 國 또는 伽 耶 라고도 한다) 이었다. 그 나라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10대 왕인 구해왕이 梁 나라 中 大 通 4 년, 신라 法 興 王 19년 (532) 에 백성들을 거느리고 항복해 와서 그 지역이 금관군이 되었으며, 文 武 王 20 년(680) 永 隆 元 年 에는 소경이라고 하였다. 景 德 王 이 김해경으로 개칭하 였는데 지금( 고려시대) 의 金 州 이다. 20) 史 料 8 : 三 國 遺 事 卷 2 < 奇 異 >2 駕 洛 國 記 ( 상략) 나라를 大 駕 洛 이라 하였으며 또 伽 耶 國 이라고도 일컫었으니, 즉 여섯 가야의 하나이다. 남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 었다. 나라 경계는 동쪽이 黃 山 江 이요, 서남쪽이 바다요, 서북쪽이 地 理 山 이요, 동북쪽이 伽 耶 山 이요,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 하략). 21) 史 料 9 : 三 國 遺 事 卷 2 < 奇 異 >2 駕 洛 國 記 ( 상략) 가락국이 망한 후에 이 땅은 대대로 부르는 이름이 같지 않았으 니, 신라의 31 대 정명왕( 神 文 王 ) 이 즉위한 開 耀 원년 辛 巳 (681) 에는 金 官 京 이 라 하여 태수를 두었다가 그 후 259 년 만에 우리( 高 麗 ) 太 祖 에게 귀속하여 통 합된 후에는 대대로 임해현이라 하고 排 岸 使 22)를 두었던 것이 48 년이요, 다음 18) 三 國 史 記 卷 四 < 新 羅 本 紀 > 第 四 法 興 王 十 九 年 條. 法 興 王 十 九 年 金 官 國 主 金 仇 亥 與 妃 及 三 子 ; 長 曰 奴 宗 ㆍ仲 曰 武 德 ㆍ季 曰 武 力 以 國 帑 寶 物 來 降 王 禮 待 之 授 位 上 等 以 本 國 爲 食 邑 子 武 力 仕 至 角 干. 19) 三 國 史 記 卷 七 < 新 羅 本 紀 > 第 七 文 武 王 二 十 年 條. 文 武 王 二 十 年 加 耶 郡 置 金 官 小 京. 20) 三 國 史 記 卷 三 十 四 < 雜 誌 > 第 三 地 理 一 新 羅. 金 海 小 京 古 金 官 國 ( 一 云 伽 落 國 一 云 伽 耶 ) 自 始 祖 首 露 王 至 十 世 仇 亥 王 以 梁 中 大 通 四 年 新 羅 法 興 王 十 九 年 率 百 姓 來 降 以 其 地 爲 金 官 郡 文 武 王 二 十 年 永 隆 元 年 爲 小 京 景 德 王 改 名 金 海 京 今 金 州. 21) 三 國 遺 事 卷 二 < 奇 異 > 二 駕 洛 國 記 條. ( 상략) 國 稱 大 駕 洛 又 稱 伽 耶 國 卽 六 伽 耶 之 一 也 餘 五 人 各 歸 爲 五 伽 耶 主 東 以 黃 山 江 西 南 以 濸 海 西 北 以 地 理 山 東 北 以 伽 耶 山 南 以 爲 國 尾 ( 하략). 22) 高 麗 時 代 해안방어를 맡았던 관직명칭이다. - 15 -
에는 임해군 혹은 金 海 府 라고 하여 도호부를 둔 것이 27 년 동안이요, 또 방어 사를 둔 것이 64 년 동안이다 ( 하략). 23) 史 料 10 : 三 國 遺 事 卷 3 < 塔 像 >4 金 官 城 婆 娑 石 塔 금관 虎 溪 寺 에 있는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으로 되었을 때에 시 조 임금인 수로왕의 왕비, 이름을 황옥이라고 하는 허황후가 東 漢 ( 後 漢 ) 建 武 甲 申 年 ( 戊 申 年 임) 24 년(48) 에 서역의 아유타국으로부터 이 탑을 싣고 왔다. 처 음에 공주가 양친의 명령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도중 에 큰 풍파( 波 神 ) 를 만나 못 가게 되었으므로 돌아와 父 王 에게 그 연유를 사 뢰었더니 父 王 이 이 탑을 싣고 가도록 하니, 아주 편하게 건너게 되어 남쪽 해안에 와서 닿았다 ( 하략). 24) 史 料 11 : 高 麗 史 卷 57 < 志 > 第 11 地 理 2 金 州 는 원래 駕 洛 國 이었다 ( 중략) ( 고려) 太 祖 23 년(940) 에 전국의 주ㆍ 부ㆍ군ㆍ현의 명칭을 개편함에 따라 김해부로 되었고 후에 강등되어 임해현으 로 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成 宗 14 년(995) 에 금주로 고쳐 안동도 호부가 되었고, 顯 宗 3 년(1012) 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쳤다. 元 宗 11 년(1270) 에 방어사 金 咺 이 密 城 폭동을 진압하였고, 三 別 抄 의 진출을 막아 내는데 공 로가 있었다고 하여 금녕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忠 烈 王 19 년(1293) 에 낮추어 서 현으로 하였고, 34 년에는 다시 금주목으로 승격되었다. 忠 宣 王 2 년(1310) 에 전국의 목이 없어짐에 따라 다시 김해부로 되었다. 首 露 王 의 墓 ( 서쪽에 있 다) 와 招 賢 臺 ( 동쪽에 있다) 또 三 分 水 ( 동쪽에 있는 황산강, 민간에서는 三 叉 水 라고 부른다) 가 있다. 주현에 소속된 군이 2 개, 현이 3 개 있다. 25) 史 料 12 : 世 宗 實 錄 卷 150 < 地 理 志 > 金 海 都 護 府 본래 駕 洛 國 이다 ( 중략) 나라 이름을 駕 洛, 또는 伽 倻 로 일컫다가 뒤에 金 官 國 으로 고쳤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 黃 山 江 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伽 倻 山 에 23) 三 國 遺 事 卷 二 < 奇 異 > 二 駕 洛 國 記 條. ( 상략) 國 亡 之 後 代 代 稱 號 不 一 新 羅 第 三 十 一 政 明 王 卽 位 開 耀 元 年 辛 巳 號 爲 金 官 京 置 太 守 後 二 百 五 十 九 年 屬 我 太 祖 統 合 之 後 代 代 爲 臨 海 縣 置 排 岸 使 四 十 八 年 也 次 爲 臨 海 郡 或 爲 金 海 府 置 都 護 府 二 十 七 年 也 又 置 防 禦 使 六 十 四 年 也 ( 하략). 24) 三 國 遺 事 卷 三 < 塔 像 > 四 金 官 城 婆 娑 石 塔 條. 金 官 虎 溪 寺 婆 娑 石 塔 者 昔 此 邑 爲 金 官 國 時 世 祖 首 露 王 之 妃 許 皇 后 名 黃 玉 以 東 漢 建 武 二 十 四 年 甲 申 自 西 域 阿 踰 陁 國 所 載 來 初 公 主 承 二 親 之 命 泛 海 將 指 東 阻 波 神 之 怒 不 克 而 還 白 父 王 父 王 命 載 玆 塔 乃 獲 利 涉 來 泊 南 涯 ( 하략). 25) 高 麗 史 卷 五 十 七 < 志 > 第 十 一 地 理 二. 金 州 本 駕 洛 國 ( 중략) 太 祖 二 十 三 年 改 州 府 郡 縣 名 爲 金 海 府 後 降 爲 臨 海 縣 又 陞 爲 郡 成 宗 十 四 年 改 爲 金 州 安 東 都 護 府 顯 宗 三 年 更 今 名 元 宗 十 一 年 以 防 禦 使 金 咺 平 密 城 之 亂 又 拒 三 別 抄 有 功 陞 爲 金 寧 都 護 府 忠 烈 王 十 九 年 降 爲 縣 三 十 四 年 陞 爲 金 州 牧 忠 宣 王 二 年 汰 諸 牧 爲 金 海 府 首 露 王 墓 ( 在 州 西 ) 招 賢 臺 ( 在 州 東 ) 又 有 三 分 水 ( 府 東 黃 山 江 ( 중략) 俗 稱 爲 三 叉 水 ) 屬 郡 二 縣 三. - 16 -
이르며, 서남쪽은 큰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 중 략) 신라 法 興 王 이 仇 亥 의 항복을 받아 객례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食 邑 으 로 삼게 하고, 이름을 금관군으로 하였는데, 文 武 王 이 처음 金 官 小 京 을 설치하 였고, 景 德 王 이 金 海 小 京 으로 고쳤으며, 고려 太 祖 23 년(940) 庚 子 에 김해부 로 고쳤다. 뒤에 강등시켜 臨 海 縣 으로 하였다가, 또 올려서 군으로 하였고, 宗 14 년(995) 乙 未 에 金 州 安 東 都 護 府 로 고치고, 顯 宗 3 년(1012) 壬 子 에 강 등시켜 金 州 防 禦 使 로 삼았다. 元 宗 11 년(1270) 庚 午 에 방어사 김훤이 密 城 의 난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를 막아 공이 있는 까닭으로 올려서 金 寧 都 護 府 로 삼고, 김훤을 발탁하여 都 護 로 삼아 진수하게 하였다. 忠 烈 王 34 년(1308) 戊 申 에 金 州 牧 으로 올렸다가, 忠 宣 王 2 년(1310) 庚 戌 에 여러 牧 을 없앰에 따라 다시 김해부로 하였는데, 本 朝 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太 宗 13 년(1413) 癸 巳 에 例 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 하략). 26) 成 史 料 13 :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32 < 金 海 都 護 府 > 建 置 沿 革 본래 가락국이다. 혹은 가야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금관국 이라 고쳤다. 시조 김수로왕으로부터 구해왕까지 무릇 10대 491년을 전하여 내려왔다.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니 法 興 王 이 객으로 예대하고 그 나라를 ( 식) 읍으로 만들어서 금관군이라 불렀다. 文 武 王 이 금관소경을 설치하였고, 景 德 王 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 그대로 소경이라 하였다. 고려 太 祖 는 부로 강등 시켰고, 뒤에 또 임해현으로 강등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으로 승격시켰 다. 成 宗 이 금주 안동도호부라 고쳤고 顯 宗 은 강등시켜서 방어사로 만들었다. 元 宗 은 방어사 김훤이 밀성 반란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를 拒 戰 한 공이 있다는 것으로 금녕도호부로 승격하고 훤을 발탁하여 도호로 삼아, 진수하게 하였다. 忠 烈 王 2 년(1276) 에는 안렴사 劉 顥 를 살해한 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다시 금주목으로 승격시켰다. 忠 宣 王 2 년(1310) 에 여러 목을 선별ㆍ폐지하면 서, 다시 김해부로 만들었는데 本 朝 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太 宗 朝 에 도호부라 고쳤고 世 祖 朝 에서 鎭 을 설치하였다 ( 중략) 郡 名 가락ㆍ가야ㆍ금관ㆍ임 해ㆍ금주ㆍ금녕ㆍ분성이라고도 한다. 27) 26) 世 宗 實 錄 卷 一 百 五 十 < 地 理 志 > 金 州 都 護 府. 本 駕 洛 國 ( 중략) 國 號 駕 洛 又 稱 伽 倻 後 改 爲 金 官 國 其 國 東 至 黃 山 江 東 北 至 伽 倻 山 西 南 際 大 海 西 北 界 智 異 山 ( 중략) 新 羅 法 興 王 卽 受 仇 亥 降 待 以 客 禮 其 國 爲 食 邑 號 金 官 郡 文 武 王 始 置 金 官 小 京 景 德 王 改 爲 金 海 小 京 高 麗 太 祖 二 十 三 年 庚 子 改 爲 金 海 府 後 降 爲 臨 海 縣 又 陞 爲 郡 成 宗 十 四 年 乙 未 改 爲 金 州 安 東 都 護 府 顯 宗 三 年 壬 子 降 爲 金 州 防 禦 使 元 宗 十 一 年 庚 午 以 防 禦 使 金 咺 平 密 城 之 亂 又 拒 三 別 抄 有 功 陞 爲 金 寧 都 護 府 仍 擢 暄 爲 都 護 以 鎭 之 忠 烈 王 三 十 四 年 戊 申 陞 爲 金 州 牧 忠 宣 王 二 年 庚 戌 汰 諸 牧 復 爲 金 海 府 本 朝 因 之 太 宗 十 三 年 癸 巳 例 改 爲 都 護 府 ( 하략). 27)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三 十 二 < 金 海 都 護 府 >. 建 置 沿 革 本 駕 洛 國 或 稱 伽 倻 後 改 金 官 國 自 始 祖 金 首 露 王 至 仇 亥 王 凡 十 世 四 百 九 十 一 年 仇 亥 降 于 新 羅 法 興 王 王 待 以 客 禮 以 其 國 爲 邑 號 金 官 郡 文 武 王 置 金 官 小 京 景 德 王 改 今 名 仍 爲 小 京 高 麗 太 祖 降 爲 府 後 又 降 爲 臨 海 縣 未 幾 陞 爲 郡 成 宗 改 金 州 安 東 都 護 府 顯 宗 降 爲 防 禦 使 元 宗 以 防 禦 使 金 晅 平 密 城 之 亂 又 拒 三 別 抄 有 功 陞 爲 金 寧 都 護 府 擢 咺 爲 都 護 以 鎭 之 忠 烈 王 二 年 以 殺 按 廉 使 劉 顥 降 - 17 -
史 料 14 : 增 補 文 獻 備 考 卷 14 < 輿 地 考 >2 歷 代 國 界 2 금관국 : 輿 地 志 에 이르기를 지금의 金 海 府 이다. ( 중략) 수로왕의 묘가 있 으며, 그 묘 옆에 사당이 있다. 龜 旨 山 동쪽에 왕비의 묘가 있다. ( 중략) 駕 洛 國 紀 에 이르기를 동으로는 황산강과 서남으로는 큰 바다와 서북으로는 지리 산과 동북으로는 가야산으로써 경계를 삼아 남쪽에 나라를 만들었다.( 황산강은 민간에서 삼차수라고 불리며, 김해부의 동쪽에 있다) 28) 史 料 15 : 增 補 文 獻 備 考 卷 22 < 輿 地 考 >10 山 川 4 ( 상략) 神 魚 山 : 일명 仙 魚 山 이라고 한다. 동쪽 10 리에 있다 ( 중 략) 洛 東 江 : 고을에서는 海 陽 江 이라고 일컫는데, 輿 地 勝 覽 에는 磊 津 이 라고 하였다. 북쪽 48 리에 있다. 밀양 등 18 고을을 보라. 昌 原 에서부터 府 의 地 境 을 거쳐서 바다에 들어간다 ( 하략). 29) 史 料 16 : 東 國 通 鑑 卷 2 < 三 國 紀 > 新 羅 高 句 麗 百 濟 壬 漢 建 武 十 八 年, 新 羅 儒 理 王 十 九 年, 高 句 麗 寅 大 武 神 王 二 十 五 年, 百 濟 多 婁 王 十 五 年 ; 춘삼월,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 즉위하였다. 처음에 가락 에는 九 干 이 있었는데, 아도ㆍ여도ㆍ피도ㆍ오도ㆍ유수ㆍ유천ㆍ신천ㆍ신귀ㆍ오 천이었다 ( 중략) 나라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라고 칭하였다. 나머지 다섯 명은 각기 다섯 가야의 주인( 왕) 이 되었다. 아라가야ㆍ고령가야ㆍ대가야ㆍ성산 가야ㆍ소가야이다. 뒤에 가락은 금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30) 史 料 17 : 東 國 歷 代 總 目 附 < 地 誌 > 金 海 : 옛날 가락국으로 혹은 가야라 칭하였다. 후에 금관군으로 개칭되었 다. 신라가 이를 취( 병합) 하여 금관군으로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고쳐서 김해 부가 되었다. 31) 爲 縣 後 陞 金 州 牧 忠 宣 王 二 年 汰 諸 牧 復 爲 金 海 府 本 朝 因 之 太 宗 朝 改 爲 都 護 府 世 祖 朝 置 鎭 ( 중략) 郡 名 駕 洛 伽 倻 金 官 臨 海 金 州 金 寧 盆 城. 慶 尙 道 邑 誌 第 十 冊 < 金 海 府 邑 誌 > 의 건치연혁과 군명 기타 설명도 위의 기록과 유사하다. 28) 增 補 文 獻 備 考 卷 十 四 < 輿 地 考 > 二 歷 代 國 界 二. 金 官 國 : 輿 地 志 曰 今 金 海 府 ( 중략) 有 首 露 王 墓 墓 傍 有 廟 龜 旨 山 東 有 王 妃 墓 ( 중략) 駕 洛 國 紀 曰 東 以 黃 山 江 西 南 以 滄 海 西 北 以 智 理 山 東 北 以 伽 倻 山 南 爲 國 ( 黃 山 江 俗 號 三 叉 水 在 金 海 府 東. 29) 增 補 文 獻 備 考 卷 二 十 二 < 輿 地 考 > 十 山 川 四. ( 상략) 神 魚 山 一 作 仙 魚 在 東 十 里 ( 중략) 洛 東 江 邑 稱 海 陽 江 輿 地 勝 覽 作 磊 津 在 北 四 十 八 里 見 密 陽 等 十 八 邑 自 昌 原 經 府 境 入 海 ( 하략). 30) 東 國 通 鑑 卷 二 < 三 國 紀 > 新 羅 ㆍ高 句 麗 ㆍ百 濟. 壬 漢 建 武 十 八 年 新 羅 儒 理 王 十 九 年 高 句 麗 寅 大 武 神 王 二 十 五 年 百 濟 多 婁 王 十 五 年 春 三 月 駕 洛 國 始 祖 金 首 露 立 初 駕 洛 有 九 干 曰 我 刀 曰 汝 刀 曰 彼 刀 曰 五 刀 曰 留 水 曰 留 天 曰 神 千 曰 神 鬼 曰 五 天 ( 중략) 國 號 大 駕 洛 又 稱 伽 耶 餘 五 人 各 爲 五 伽 耶 主 曰 阿 羅 伽 耶 曰 古 寧 伽 耶 曰 大 伽 耶 曰 星 山 伽 耶 曰 小 伽 耶 駕 洛 後 改 稱 金 官. 31) 東 國 歷 代 總 目 附 < 地 誌 >. - 18 -
史 料 18 : 東 史 綱 目 附 錄 卷 - 下, 地 理 考 -三 韓 考 辰 韓 : 지금 경상도 낙동강 동쪽의 땅이다. 북으로는 濊 貊 과 연결되고 서북 으로는 馬 韓 과 접하며, 서쪽 경계에서는 많은 고을( 마을) 들이 卞 韓 의 고을( 마 을) 들과 더불어 섞여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倭 와 통교를 한다. 마한에 복속되었다가 후에 신라의 땅이 되었다. 32) 史 料 19 : 海 東 繹 史 권40 < 交 聘 志 >8 海 道 附 狗 邪 韓 國 은 지금의 김해부이다. 33) 史 料 20 : 嶠 南 誌 卷 51 < 金 海 郡 > 沿 革 본래 駕 洛 國 으로 혹은 가야라고도 하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시조 金 首 露 王 으로부터 仇 亥 王 까지 무릇 10대 491 년이다. 仇 亥 王 이 신라 法 興 王 에게 항복하니, 왕이 객례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식읍으로 삼고, 금관군 으로 하였는데, 文 武 王 때 金 官 小 京 을 설치하였고, 景 德 王 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이에 小 京 으로 만들었다. 고려 太 宗 ( 태조) 이 낮추어서 부로 하였다가 후에 다시 낮추어서 임해현으로 되었고, 곧 다시 올려 군으로 되었다. 成 宗 이 금주안동도호부로 고쳤으나, 顯 宗 이 낮추어서 방어사로 삼았다. 元 宗 때 방어 사 김훤이 밀성의 난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를 막은 공이 있어 승격하여 금녕 도호부로 삼고, 김훤을 발탁하여 도호로 삼아 진수하게 하였다 ( 중략) 李 朝 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太 宗 때 도호부로 고치고, 世 祖 때 진을 설치하였다 ( 중략) 高 宗 建 陽 元 年 에 군으로 고치고, 光 武 10 년(1906) 에 대산면을 나누 어 창원에 이속시키고, 양산과 대저면을 합하여 본군으로 만들었다. 大 正 3년 (1914) 에 이대로 따랐다. 34) 이상의 사료들에서도 드러나듯이 김해지역은 고대부터 중요한 정치적 거점이자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던 역사적인 곳으로 낙동강을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 金 海 : 古 駕 洛 國 或 稱 伽 倻 後 改 金 官 國 新 羅 取 爲 金 官 郡 至 高 麗 改 爲 金 海 府. 32) 東 史 綱 目 附 錄 卷 下 地 理 考 - 三 韓 考. 辰 韓 : 今 慶 尙 道 洛 東 江 以 東 之 地 北 連 濊 貊 西 北 接 馬 韓 西 界 多 與 卞 韓 錯 居 東 渡 海 通 倭 服 屬 馬 韓 後 爲 新 羅. 33) 海 東 繹 史 卷 四 十 < 交 聘 志 > 八 海 道 附 條. 狗 邪 韓 國 今 金 海 府. 34) 嶠 南 誌 卷 之 五 十 一 < 金 海 郡 >. 沿 革 本 駕 洛 國 或 稱 伽 倻 後 改 金 官 國 自 始 祖 金 首 露 王 至 仇 亥 王 凡 十 世 四 百 九 十 一 年 仇 亥 王 降 于 新 羅 法 興 王 王 待 以 客 禮 以 其 國 爲 食 邑 號 金 官 郡 文 武 王 置 金 官 小 京 景 德 王 改 今 名 仍 爲 小 京 高 麗 太 宗 降 爲 府 後 又 降 爲 臨 海 縣 未 幾 陞 爲 郡 成 宗 改 金 州 安 東 都 護 府 顯 宗 降 爲 防 禦 使 元 宗 以 防 禦 使 金 咺 平 密 城 之 亂 又 拒 三 別 抄 有 功 陞 爲 金 寧 都 護 府 擢 咺 爲 都 護 以 鎭 之 ( 중략) 李 朝 因 之 太 宗 改 爲 都 護 府 世 祖 置 鎭 ( 중략) 高 宗 建 陽 元 年 改 爲 郡 光 武 十 年 割 大 山 面 移 屬 昌 原 合 梁 山 大 渚 面 爲 本 郡 大 正 三 年 因 之. - 19 -
던 곳이다. 여기에 발췌된 사료들을 통하여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인근지역의 지명과 역사적 변천과정 및 행정구역의 변천과정 등을 몇 가지로 요약ㆍ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해시를 비롯한 인근일대의 행정적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 변진의 狗 邪 國 으로 비정되는 것을 시작으로, 현재의 김해시까지 역사 적 변천과정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먼저 김해의 지명명칭( 행정구역의 명칭) 을 고대부터 統 一 新 羅 전까지 정리하면, 狗 倻 國 駕 洛 國 金 官 郡 ( 法 興 王 19 년;532) 金 官 小 京 ( 文 武 王 20 년;680) 金 海 小 京 ( 景 德 王 15 년;756) 으로 바뀌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統 一 新 羅 부터 高 麗 時 代 까지 행정구역명 변천과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통일신라) 金 官 小 京 ( 景 德 王 때) ( 고려 太 祖 ) 김해부에서 임해현으로 다시 임해군으로 승격( 太 祖 23 년;940) 금주도호부 ( 光 宗 22 년;971) 안동대도호부 ( 穆 宗 3 년;1000) 금주( 顯 宗 3 년;1012) 금녕도호부( 元 宗 12 년;1271) 현 으로 강등 ( 忠 烈 王 19 년;1293) 금주목( 同 王 34 년;1308) 김해부( 忠 宣 王 2 년;1310) 로 바뀌었다. 高 麗 時 代 이후 朝 鮮 時 代, 近 ㆍ現 代 까지의 행정변화는 다음과 같다. 김해도호부( 太 宗 13 년;1413) 鎭 管 설치( 世 祖 13 년;1467) 金 海 郡 으로 승격( 高 宗 32 년;1895) 金 海 邑 (1931) 김해읍이 金 海 市 로 승격(1981) 金 海 市 郡 이 통합하여 金 海 市 로 승격(1995) 되었다. 둘째,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한 인근일대의 地 名 變 化 를 알 수 있다. 사료들에 언급된 지명을 살펴보면, 크게 가락ㆍ가야ㆍ금관ㆍ임해ㆍ금주ㆍ금녕ㆍ 분성 으로 이는 國 名 또는 각 시대의 행정변화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다. 셋째, 김해시의 역사적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고대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이후 신라와의 대외관계 및 충돌, 그리고 신라 에 예속된 후 행정명칭의 변화 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나라의 명칭과 境 界, 그리고 여타 가야의 성립과정을 알 수 있게 하며, 건국설화의 내용도( 許 王 后 전설 등) 담고 있다. 이상의 것들을 통해 초기 가야의 세력권과 신라와의 對 外 關 係 가35) 어느 정도 유추될 수 있다. 또한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 건국설화와 그 위치( 疆 域 ),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들에 대한 설명은 전체적인 김해의 역사를 손쉽 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넷째, 김해시의 山 川 과 境 界 를 알 수 있다. 김해시를 형성하고 있는 자연산천에 대한 설명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 다. 그 중 김해지역을 대표하는 낙동강과 신어산을 중심으로 인근의 지역들을 설 명하고 있으며, 본문의 사료에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많은 古 蹟 들도 함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들과 비교해 볼 때, 큰 차이 35) 이를 근거로 유추해 보면 초기 가야는 철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여, 신라를 위협 할 정도로 그 세력이 맹위를 떨쳤던 것 같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사료 8의 하나를 예로 들었 지만( 祗 摩 尼 師 今 의 親 征 ) 이 외에도 예속되기 전까지 여러 곳에서 잦은 분쟁이 일어났다. - 20 -
점이 발견되지 않고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6) 비교적 문헌에 상세하 (3) 金 海 市 의 文 化 遺 蹟 김해시는 그 유래와 역사가 깊은 곳으로 많은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산재한 곳 이다. 이를 간략하게나마 城 郭 과 烽 燧, 寺 刹 및 불교문화, 書 院 ㆍ鄕 校 ㆍ祠 宇 ㆍ亭, 민속놀이로 분류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金 石 文 과 古 墳 은 그 양이 방대하여 지 면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1) 金 海 市 의 城 郭 과 烽 燧 37)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군사시설물의 유적으로는 城 郭 과 烽 燧 가 대표적이다. 이 러한 군사시설물을 일컬어 關 防 이라고 칭한다. 김해시는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 며, 남해와 동해,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현재 여러 군데 산재하고 있는 관방유적을 각종 문헌과 자료를 이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盆 山 城 ( 김해시 어방동, 사적 제66 호) 鎭 山 인 해발 321m 의 盆 山 산정에 위치하며, 金 海 平 野 를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 는 산정의 요충에 자리 잡고 있다. 三 國 時 代 에 축성된 것인데, 이곳에 있는 靖 國 君 朴 公 葳 築 成 事 蹟 碑 에 의하면, 1377년에 김해부사 朴 葳 가 왜구에 대비하고자 수 축하였음을 알 수 있고, 鄭 夢 周 가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38) 그리고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1871 년 부사 鄭 顯 奭 이 다시 축성하여 현재의 성벽으로 개축하였다 고 되어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성곽의 기초 선정법이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루는 테뫼식 석성인 것으로 보아, 이 성의 처음 축조 연대가 삼국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가락국의 중심 근거지를 이룬 산성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 성에는 봉수대와 기우단도 있었다고 한다. 분산성은 임진왜란의 격전지이다. 1592 년 왜장 黑 田 長 政 의 주력군과 치열한 격 전( 김해성 전투) 이 있었던 곳으로, 이 당시 전투 기록을 살펴보면 지금은 확인할 36) 물론 이외에도 世 宗 實 錄 < 地 理 志 > 등 여타 사료에서도 김해에 대한 것은 자주 등장하고 있 고, 내용도 방대한 편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이후는 文 獻 을 간략하게 정리ㆍ요약하였다. 이 중 김해시를 중심으로 한 성곽유적에 대해서는 본문의 < 城 郭 과 烽 燧 > 에서 부연 설명한다. 37) 김해시에 산재한 여러 성곽과 봉수에 대해서는 慶 尙 南 道 의 鄕 土 文 化 ( 下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1999) 및 增 補 文 獻 備 考 卷 27 < 輿 地 考 >15 關 防 3, 城 郭 3 慶 尙 道 에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이를 참고로 요약한 것이다. 38) 金 海 文 化 院, 金 海 金 石 文 總 攬, 1999 참조. - 21 -
수 없지만, 당시 분산성 주위에 해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분산성에는 盆 山 城 築 城 碑 가 있는데, 1871 년 부사 정현석은 축성한 뒤 萬 丈 臺 를 쌓고 사적비를 세웠다. 이 외에도 靖 國 君 朴 公 葳 築 城 事 蹟 碑 ㆍ興 宣 大 院 君 萬 世 不 忘 碑 ㆍ경상 감사 金 世 鎬 碑 ㆍ 김해 부사 정현석 축성비가 있다. 성 안에는 가야불교와 관련된 海 恩 寺 가 있어 그 유래를 더욱 소급시켜 주고 있다. 해은사는 허왕후가 바다를 무사히 건너 온 은혜 에 보답하고자 세웠다고 전하며,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또한 기 록에 의하면 이 곳에 승군이 있었다고 한다. 산성 서쪽 산록인 삼산리에는 고분군 이 위치하며, 그 서쪽으로 首 露 王 后 許 氏 陵 과 龜 旨 峯 이 있다. 2 竹 島 城 가락동 죽림리와 봉림리의 가락산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金 海 城 이라고도 한다. 서낙동강의 우측에 건립되어 있으며, 3 면은 논으로 싸여 있다. 金 海 邑 誌 기록에 따르면, 성 아래에 선박을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락산에 있어 일명 駕 洛 城 이라고도 한다. 이 성을 중심으로 농소리의 新 畓 倭 城 과 마사리의 馬 沙 倭 城 등이 支 城 으로 위치하고 있다. 죽도성은 1593년 7월 왜장 鍋 島 直 茂 와 勝 茂 두 부자가 석성을 쌓아 수년간 주둔한 곳이다. 전체 길이는 약 1.2km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 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동서 길이 100m 정도의 성벽뿐이다. 면적은 11,000평 정도이다. 이곳을 지금은 城 所 라고 한다. 현재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죽림리와 봉림리에 있다. 3 金 海 邑 城 ( 김해시 동상동) 金 海 府 의 邑 城 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世 宗 16 년(1434) 에 처음으로 석축 하였다. 1451 년 三 道 都 體 察 使 鄭 苯 의 서계에 의하면, 둘레 4,418 척, 높이 13 척, 女 裝 높이 2 척, 敵 臺 20 개, 문 4 개, 옹성이 있는 女 墻 이 931 개였으며, 虎 溪 川 이 있고, 우물이 28 개, 해자는 4,683 척 이라고 하였다. 전체 길이는 1,950m 이며, 평 지성으로 동문인 해동문과 서문인 해서문, 남문인 진남문, 북문인 공진문의 4개 성문이 있었다. 성과 성문은 1895 년 이후 모두 철거하였으며, 성벽의 일부가 동삼 동 사무소 북쪽 민가에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가공이 덜 된 자연형태이다. 4 泉 谷 山 城 ( 김해시 주촌면 천곡리) 뒷산은 가야국 시대의 산성이라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서 북에서 동남으로 뻗은 곳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동서남북에 걸쳐 약 180m 가 량 弓 形 으로 토축되어 있다. 성안에는 많은 우물이 있다. 동쪽 계곡의 계단은 석축 이었으나 모두 무너져 돌무더기로 남아 있다. - 22 -
5 新 安 土 城 (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 무송) 가야국 때 수로왕이 왕자를 진례성주로 봉하고 왕궁을 지을 때 사방에 흙으로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통일신라말기에 金 仁 匡 이 進 禮 城 諸 軍 事 가 되어 이곳을 지 켰다고 한다. 鳳 林 寺 의 眞 境 大 師 塔 碑 에 의하면 진성여왕 때 金 律 熙 가 진례성제군 사였다고 한다. 6 馬 峴 山 城 ( 김해시 생림면 봉림리 마현) 가야국 수로왕 때의 성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나 그 연혁은 확실하지 않다. 마현 산성은 뒷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동북쪽은 천연의 절벽을 이용하 였고 남서쪽은 성을 쌓았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져 버리고, 현재 둘레 약 600m, 높이 2m 가량만 남아 있다. 7 進 禮 山 城 ( 창원시 토월동ㆍ김해시 진례면) 창원시와 김해시의 경계인 봉림산 산정에 있으며, 둘레 약 4km의 석축성으로 현 재 대부분 붕괴되었다. 이 산성은 창원시 북쪽의 정병산 동쪽으로 뻗어 오다가 그 머리를 남으로 돌려 휘어감아 분지를 이룬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은 동남쪽에 만 남아 있으며, 남문지와 서문지는 석축이 무너져 있고 북쪽은 성벽이 거의 없다.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김해 고적조와 金 海 邑 誌 에 보면, 府 서쪽 35리에 있는데 옛터만 남아 있으며, 신라시대 金 仁 匡 으로 하여금 進 禮 諸 軍 事 를 맡게 했다 고 하 였으며, 또 輿 地 集 成 에 보면, 수로왕 때에 한 왕자를 봉하여 진례성의 왕이 되 게 하였다 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이 성이 가야시대까지 연대가 소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8 歌 谷 山 城 (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해발 332m 의 산정에 위치하고 있는 석축성으로 테뫼식이다. 성은 김해평야와 낙동강 하구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주변의 良 洞 里 고분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산성은 서부경남으로 나가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다. 가야시대 의 土 石 混 築 城 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북 두 성문 자리에 초석이 잔존하고 있으며, 성내에는 우물자리가 수개 처 남아 있다. 붕괴가 심하여 대부분 원형을 잃고 있으 며, 토성과 석성이 반복되고 있다. 주위에는 가야시대의 토기조각이 흩어져 있다. 盆 山 城 의 文 獻 上 에서는 子 城 으로 생각된다. 가곡산성 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내삼리와 양전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內 三 山 城 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위치한 지역의 이 름을 따서 良 洞 山 城 이라고도 한다. 增 補 文 獻 備 考 에는 가곡산성은 서쪽 20리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가 600 척인데 지금은 폐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 23 -
9 內 德 山 城 ( 김해시 장유면 내덕리) 산 정상부에 있으며 鉢 卷 式 의 토석혼축성으로 주위는 약 700m에 달하나 많이 붕 괴되었다. 마을에서는 馳 馬 山 城 이라고 부르며, 산정에는 3ㆍ1 운동 기념탑이 있다. 10 新 畓 倭 城 (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임진왜란 때 죽도성의 뒤를 이어 축조하여 그 支 城 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계단형으로 되어 있는 지세를 이용하여 장방형의 높은 대지를 만들고 남 쪽과 동쪽에 허술하게 석축한 흔적이 남아 있다. 주위는 약 500m 에 달한다. 11 馬 沙 倭 城 ( 생림면 마사리) 임진왜란 때 죽도왜성의 축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대부분 허물어졌다. 12 烽 燧 가. 盆 山 烽 燧 : 남으로 성화례산, 북으로 자암산에 응하였다고 한다. 인근에 분 산성과 만장대가 있다. 나. 子 巖 山 烽 燧 : 남으로는 분산, 북으로는 밀양 남산에 응하였다고 한다. 39) 2) 金 海 市 의 寺 刹 및 佛 敎 文 化 연번 명칭 소재지 문화재지정여부 비고 1 은하사 대웅전 삼방동 882 도유형문화재 제238호 2 은하사 대웅전 벽화 삼방동 882 도유형문화재 제402호 3 婆 娑 石 塔 구산동 119-3 문화재자료 제227호 4 봉화산 마애불 진영읍 본산리 산4-3 도유형문화재 제40호 5 초선대 마애불 안동 685-1 도유형문화재 제78호 6 구산동 마애불 구산동 산57-1 도유형문화재 제186호 7 안곡리 삼층석탑 안곡리 166-1 8 장유화상 사리탑 장유면 대청리 산68-1 문화재자료 제31호 9 신천 망월석탑 한림면 신천리 471 문화재자료 제262호 10 東 林 寺 址 삼안동( 안동) 남쪽 경사 삼국시대로 추정 39)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32 < 金 海 都 護 府 > 古 蹟 條 참조. - 24 -
3) 金 海 市 의 書 院 ㆍ鄕 校 ㆍ亭 ㆍ祠 宇 분포 현황40) 1 龜 川 書 院 ( 김해시 구산동) 純 祖 22 년(1822) 金 海 府 서쪽 居 仁 里 에 창건, 23 년 삼산리로 이건하였으나, 高 宗 5 년(1868) 에 훼철되었다. 배향인물은 許 景 胤 이다. 肅 宗 2 禮 巖 書 院 ( 김해시 안동) 34 년(1708) 禮 巖 祠 로 창건하여 후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6 년에 중건되었다. 배향인물은 曺 爾 樞 이다. 3 勿 峰 書 院 ( 김해시 대동면 주종리) 純 祖 14 년(1814) 창건되었다가, 高 宗 5 년(1868) 에 훼철되었다. 배향인물은 曺 九 齡 이다. 4 薇 陽 書 院 (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 純 祖 32 년(1832) 창건되었다가, 高 宗 5 년(1868) 에 훼철되었다. 遺 墟 碑 만 남아 있다. 배향인물은 金 係 錦 이다. 5 松 潭 書 院 (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 肅 宗 42 년(1716) 祠 宇 로 창건하였다가, 英 祖 39 년(1763) 중건, 正 祖 8 년(1784)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純 祖 1 년(1801) 훼손되었다가 24 년(1824) 재건하였다. 그 리고 33 년(1833) 俵 忠 祠 로 사액을 받았으나, 高 宗 5 년(1868) 훼철된 것을 1978년 동상동으로 이건하였다. 배향인물은 宋 賓, 李 大 亨, 金 得 器, 柳 湜 이다. 宣 祖 6 新 山 書 院 (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9 년(1576)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중건하여 光 海 君 1 년(1609) 사액을 받았으나, 高 宗 5 년(1868) 훼철되었다. 그 후 山 海 亭 으로 재건 하였다. 배향인물은 曺 植, 申 季 誠 이다. 7 金 海 鄕 校 ( 김해시 대성동 224, 도유형문화재 제217 호) 창건시기는 15 세기이며, 18 세기에 이건되었다. 현황 조성시기는 19 세기이다. 비 교적 완만한 경사에 입지하였으며, 필수적인 건축물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직선축 상에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조선 太 宗 8 년(1408) 에 김해읍 고진산 아래에 창건하였으나, 宣 祖 25 년(1592)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 33 년(1600) 에 부사 鄭 奇 男 이 읍동쪽 茶 田 洞 위에 재건 40) 慶 尙 南 道 의 鄕 土 文 化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ㆍ 書 院 ( 안장헌ㆍ이상해 ) ㆍ 한국의 건축문화재 ( 강명환) 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집부 ) 참조. - 25 -
하였다. 그러나 英 祖 45 년(1769) 화재로 재소실되어 이듬해 현 위치인 송악산 아 래에 이전 재건하게 되었고, 이 향교의 건축적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 후 수차에 걸쳐 중수 보존ㆍ관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880~1885 년, 1887년 등 불 과 7년 동안 3차례나 중수된 기록이 있어 보존상태가 원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다. 현재 이 향교에서는 대성전에 5성과 송조 2 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 하고 매년 음력 2월과 8 월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한다. 8 樂 五 亭 ( 진례면) 진례면 청천리에 있는 정자. 임진왜란 때 순국한 四 忠 士 의 한 사람인 유식을 추 모하기 위해 세운 寓 慕 所 로서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친할아버지 愼 翁 이 대동면 馬 山 에 건립하였는데 1921 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현재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팔작지붕의 정면 4 칸 목조와가 건물이다. 곳 9 山 海 亭 ( 대동면 주동리, 도문화재자료 제125 호) 조선 中 宗 때 학자인 曺 植 ( 호는 南 冥, 1507; 燕 山 君 7 년~1572; 宣 祖 5 년) 41)이 이 新 山 의 경치를 사랑하여 정각을 세워 산해정이란 이름을 짓고 제자들을 강학한 곳이다. 사후에 제자들이 정자 동쪽 기슭에 新 山 書 院 을 세워 봉사하였다. 산해정은 임진왜란 이후 폐절된 것을 純 祖 18 년(1818) 김해부사 李 錫 夏 가 지방유림과 힘을 모아 재건하였으며, 당시의 양산군수 金 裕 憲 이 < 山 海 亭 記 > 를 지었다. 1968년 번 와공사를 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규모는 정면 5 칸, 측면 2 칸의 목조와가이다. 10 瞻 慕 齋 ( 진례면 답안리) 진례면 답안리에 있는 송빈의 齋 室 이다. 임진왜란 때 김해성에서 순국한 四 忠 士 의 한 사람인 송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재실이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 지만, 高 宗 10 년(1873) 송정리에서 別 廟 와 함께 옮겼으며, 1969년 현 위치로 다 4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昌 寧. 자는 楗 中 또는 健 中, 호는 南 冥 이다. 김해의 炭 洞 에다 산해 정을 지어 제자 교육에 힘썼다.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그의 명성을 듣고 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1561 년 지리산 德 川 洞 으로 이거하여 山 天 齋 를 짓고 강학 에 더욱 힘썼다.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전념한 학문은 알기만 하면 족하다는 것이 아 니라 反 躬 體 驗 과 持 經 實 行 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특히 敬 義 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敬 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義 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 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 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다. 그는 특히 실천궁행을 가장 강조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철저 한 절제로 일관하여 不 義 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경상좌도의 巨 儒 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대유학자로 쌍벽을 이루 었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들은 한국 유학사에서 크게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둘째,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 학을 진흥시키고 文 風 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라 하겠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문인 으로 몸소 앞장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남명의 문집으로 南 冥 集 南 冥 學 記 類 編 破 閑 雜 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 南 冥 歌 > ㆍ < 勸 善 指 路 歌 > 가 있다. 시호는 文 貞 이다. - 26 -
시 옮겼다. 현재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건물규모는 팔작지붕의 정면 4칸 목 조와가로 별묘와 토석으로 담을 둘렀다. 김해시는 그 유래와 역사가 깊은 곳으로 많은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산재한 곳이다. 이를 간략하게나마 城 郭 과 烽 燧, 寺 刹 및 불교문화, 書 院 ㆍ鄕 校 ㆍ祠 宇 ㆍ亭, 민속놀이로 분류하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金 石 文 과 古 墳 은 그 양이 방대하여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4) 金 海 市 의 民 俗 놀이 1) 동제 대부분의 마을에서 동제가 행해진다. 홍동 1 구에서는 마을의 뒤편 林 虎 山 중턱 의 山 神 堂 과 마을 중간에 있는 堂 山 에서, 연 1회 정월 14일 자정 전후해서 지낸 다. 동리의 가장 연로한 사람을 제주로 삼고, 도수 1 인, 제관 2 인을 선정하여 祭 堂 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낸 다음 거리잡신을 위하여 마을 동 ㆍ서ㆍ남 세거리 입구에 제물을 진수하여 제를 마친다. 2) 金 海 五 廣 大 김해군 가락면에서 음력 정월대보름날 밤에 연희되던 탈놀이다. 약 90여년 전에 < 東 萊 野 遊 > 와 < 草 溪 대광대탈놀음> 을 본받아 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래ㆍ진주ㆍ마산의 오광대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두 여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과장은 중[ 僧 侶 ], 둘째 과장은 노름 꾼, 셋째 과장은 양반, 넷째 과장은 영노, 다섯째 과장은 할미ㆍ영감, 여섯째 과장 은 사자춤이다. 내용은 대개 파계승의 풍자, 양반에 대한 조롱, 一 夫 대 妻 妾 간의 삼각관계, 逐 邪 延 祥 의 呪 願 등을 보여주고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나기 전까지 놀았다. 그때 놀았던 놀이꾼들은 거의 고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그 연기와 춤 등 을 계승하는 이가 없어 명맥유지가 힘든 상태이었다가 최근 전승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상태이다. 金 海 文 化 院 에서 계보 3) 金 海 崇 善 殿 祭 禮 ( 春 祭 ㆍ秋 祭 ) 崇 善 殿 은 김수로왕과 허황후 두 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흔히 수로왕릉전역 을 의미하기도 한다. 왕릉 자체는 납능이라 하고 숭선전 앞에는 숭안전이라 하여 왕묘가 없는 2대에서 9대까지의 8왕과 왕비 16 분의 위패를 모셔 두고 있다. 수로 왕릉은 국가 사적 제73 호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제향을 지내고 기타 왕은 金 海 金 氏 문중에서 제사 지낼 때 동시에 하며 執 禮 는 따로 따로 한다. - 27 -
이 곳에서 행해지는 춘향대제는 매년 3월 15 일( 음) 이며, 추향대제는 매년 9월 15 일( 음) 이다. 대제를 행할 때 구형왕과 김유신장군의 祭 도 모신다. 초헌관은 정부 의 대표가, 아헌관은 종친 대표가, 그리고 종헌관은 유림 대표가 각각 맡고 있다. 조선시대에 제례가 완비되었기 때문에 儒 敎 式 으로 奉 行 되고 있다. 대제의 일시는 조선 예조에서 선정하였다. 부속건물로 제기고인 전사청과 향촉, 대 보관소인 안향각이 있으며, 가락 유물관 에는 대제시 제단의 모형을 전시해 놓고 있다. 단을 차릴 때, 날 것으로 차리는데 이는 왕은 血 食 君 子 라는 의미이고, 술을 놓지 않고 茶 를 사용하는데 이는 허황후 가 아유타국에서 渡 來 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3. 조사대상지역 개관 금번 지표조사지역인 진영읍 신용리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 지역은 진영읍 신용리 591외 10필 일원으로 면적은 10,234 m2( 약 3,100 평) 에 해당된다. 먼저 김 해시의 관할 면 단위 행정구역명 전승관계 및 변천의 결과를 간략하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전승된 이름(4 곳) : 진례면ㆍ주촌면ㆍ상동면ㆍ생림면 사라진 이름(16 곳) : 활천면ㆍ좌부면ㆍ칠산면ㆍ우부면ㆍ율리( 역) 면ㆍ유하면( 유등 야면)ㆍ유촌면ㆍ상북면ㆍ하북면ㆍ중북면ㆍ하계면ㆍ태야면ㆍ하동면ㆍ덕도면ㆍ대 상면ㆍ대하면 새로 생겼다가 사라진 이름(1 곳) : 이북면 새로 생겨 지속되는 이름(4 곳) : 김해면/ 읍/ 시ㆍ한림면 ㆍ진영면/ 읍ㆍ대동면 42) 이상에서 보듯이 進 永 邑 의 진영 이라는 명칭은 근대에 새로 생겨 지속되는 것 으로써, 그 이전의 역사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단지 원래부터 과거 金 海 郡 의 한 지 역으로 大 正 3 년(1914) 의 군ㆍ면통폐합의 행정개편 때 下 界 面 6 개 里 ( 하계, 여래, 진영, 우동, 방동, 좌곤) 와 中 北 面 6 개 里 ( 신용, 내리, 설창, 죽곡, 의전, 본산) 및 上 同 面 가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進 永 面 의 전신인 下 界 面 이 되었다가, 1928년에 進 永 面 으로 개칭하고, 면사무소를 진영리로 이전하게 되었다라는 사실이 전부이다. 이 시기의 자료인 嶠 南 誌 < 金 海 郡 > 邑 面 里 洞 條 에 보면, 당시 진영면에 속한 進 永 里 를 비롯한 13 개 里 의 명칭들이 기록되어 있다. 43) 그리고 1942 년 邑 으로 승격 되면서, 당시 金 海 邑 과 더불어 金 海 郡 의 동ㆍ서 양대축을 형성하여 김해지역의 발 전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1995년 도농통폐합에 따라 김해군과 김해시가 통폐합 42) 경남대학교 경남지역문제연구원 편, 경상남도 연구, 경남대학교, 1997. 43) 嶠 南 誌 卷 之 五 十 一 < 金 海 郡 > 邑 面 里 洞 條. ( 상략) 進 永 面 : 進 永 里 新 龍 里 內 龍 里 雲 倉 里 竹 谷 里 蟻 田 里 本 山 里 余 來 里 牛 洞 里 芳 洞 里 荷 溪 里 佐 昆 里 舍 山 里 ( 하략). - 28 -
되면서, 현재 김해시의 일부가 되었다. 진영읍의 지형을 살펴보면, 남부에 동서로 뻗은 金 屛 山 (272m) 을 비롯한 소규모 의 산지가 분포하고 있으며, 북부에 북쪽에서 동류하는 낙동강과 그 소지류들에 의해 이루어진 평야가 동서로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의 산업은 평야지대를 중심으 로 발전해 있다. 지질형태는 慶 尙 系 의 지층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進 永 이라는 명칭은 風 水 地 理 說 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곳이 군사들의 陣 營 의 형국 이 며, 또한 金 屛 山 을 上 帝 奉 所 形 으로 보고, 余 來 里 의 동쪽을 將 軍 大 座 形 의 명당으 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해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진영읍의 면적은 39.9 km2이며, 서쪽으로 마산, 창원시 와 접하고 있고, 읍소재지는 여래리이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단감의 원 산지이자 먹거리( 특히 갈비) 의 소비문화 중심형태로 마산, 창원을 근교지역으로 편 리한 교통과 유통의 활성화 지역으로 진주선과 부마고속도로가 통하고 있으며, 부 산~ 대구간 국도와 부산~ 마산간의 국도가 교차하는 등 편리한 교통망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다. 가구 수는 9,143호에 인구는 26,71 명이다.(2004년 9 월 통계) 44) 유 물ㆍ유적으로는 진영동의 남방식 고인돌( 支 石 墓 ), 본산동의 가야시대의 寺 址, 하계 동의 陣 將 軍 墓 등이 있다. Ⅲ. 현지조사 및 조사단 의견 조사지역은 鷹 峰 山 ( 해발 284m) 북쪽 능선 끝자락의 평지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 면적은 10,234 m2( 약 3,100 평) 이다. 조사지역의 북쪽으로 약 10m 이격되어 경전선이 지나고 남쪽으로는 14번 국도 가 지나고 있다. 조사지역은 평지화되어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일부 복토된 부 분은 인근 주민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 현장조사는 아름다운아파트 신축공사구간에 대하여 전구간을 도보로 진행하였 일부 복토된 구간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조사는 불가능하여 현지 지표조사는 조사지역내에 토양의 관찰이 용이한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지역을 집중적으로 실 시하였다. 조사결과 조사지역 내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을 비롯한 각종 토기편을 확인하였고 조사지역과 1km 정도 이격된 곳에 삼국시대 고분군인 양지고분군이 위치하고 있 으므로 사업시행전 이 지역에 대한 정밀조사가 요망된다. 다만, 아파트공사가 조사구역을 약 3m정도 盛 土 하고 다시 11m정도로 파일작업 을 실시하여 건설한다는 점을 참조하여 문화재 보존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좋을 것 이다. 44) 김해시청 < 홈페이지 통계자료> 참조.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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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사진 1. 조사지역 원경( 서 동) 사진 2. 조사지역 전경1( 서 동)
사진 3. 조사지역 전경2( 북 남) 사진 4. 수습유물 - 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