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의 향기 윤동주가 경험한 이적 - 이적( 異 蹟 ) 자세히 읽기- 이상섭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 평론가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 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오늘 따라 연정, 자홀,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우리 시의 향기 119
이적 은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해 여름, 1938년 6월 19일에 쓴 것이다. 그는 지금도 남아 있는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3년이나 살았 는데 시간이 나면 혼자 근처 산과 들을 산보하였던 것 같다. 당시 연 희의 숲은 무척 우거져서 여우, 족제비 등 산짐승이 많았고, 신촌은 초가집이 즐비한 서울(경성) 변두리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시골 마을이 었고, 사이사이에 채마밭이 널려 있었고,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 대까지 잔다리 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지금의 홍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 서 낚시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이러한 사실은 1946년부터 신촌에서 살기 시작한 필자가 잘 기억하고 있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 西 湖 落 日 ) 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 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필자도 5, 60 년대에 그렇게 그 연못가로 산보를 하곤 했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갑자기 그의 몸이 가벼워져 물 위를 걸을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 베드로의 사건이 다시금 벌어질 듯하다. 풍랑 이는 갈릴 리 호수에 배를 저어 가던 베드로 등 예수의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 는 예수를 보자 유령인가 하여 놀랐지만 예수가 안심시키고 믿음이 있으면 물 위로 걸을 수도 있다고 하니 베드로가 물 위로 걷다가 물결 이 무서워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기사가 마태복음 14장 24절~33절과 마가복음 6장 47절~52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기사를 인용하면 이렇다. 120 새국어생활 제15권 제2호(2005년 여름)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 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 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 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 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 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 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 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 라. 후세의 기독교인들이 으레 부딪치는 걸림돌이 성경에 나오는 이적 또는 표적에 대한 기사들이다. 어릴 때에는 실제로 일어난 놀라운 이 야기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청소년기에 반드시 괴로운 불안과 의심을 죄책감과 함께 느끼기 마련이다. 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윤 동주도 그랬을 것이다. 실상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 모든 종교의 기 본 경전들은 모두 그런 기적적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이성적, 합리적, 상식적 세계 인식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된다. 그러나 이른바 이성적, 합리적, 상식적 세계 인식이 사람의 근본적인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하는 한 종교적 이적은 언제나 어떤 힘을 가지고 남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상식적인 의미의 사실이라고 믿거나 안 믿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확 증해야 할 지식이나 정보라기보다는 초월자와의 관계에서 삶의 태도 를 올바르게 가지라는 준엄한 요청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지금 황혼 녘에 연못가에 선 윤동주도 성경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자기가 어느 틈에 보통 연못가가 아닌 성경의 갈릴리 같은 호숫가 에 도달하여 호면으로 걸을 수 있을 듯한 놀라운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 다. 이는 일부 서양 예술가들이 말하는 현현(epiphany), 즉 순간적 비 전 같은 것이다. 우리 시의 향기 121
내사 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 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기숙사 식당에서 여러 친구들과 저녁을 먹은 후에 혼자 서호낙일 을 구경하러 산보를 나왔지만 갑자기 그는 그런 일상적 습관의 차원 을 넘어 갈릴리 호숫가에 불려 나온 듯한 놀라운 느낌, 이적 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한다. 그의 말씨도 일상적 언어가 아닌 기도의 말씨로 변한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가 대신 내사 라는 청록 파 시인들이 즐겨 쓰던 말투를 써서 그의 순간적 경험이 예사롭지 않 았음을 말하고 있다. 상식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를 물에 빠지게 하는 것은 물보다 비 중이 큰 그의 몸뚱이이다. 몸뚱이 라는 말은 바로 달을 쏘다 라는 그의 수필에서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 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달이 있다. 라고, 그가 못가에 선 자기를 가리켜 한 말이다.(이 수필은 예사롭게 못가로 산보하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물 위로 걷고 싶은 마음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그 몸뚱이 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적 인식은 돌연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를 물 밑으 로 끌어당기는 온갖 무거운 것들에서 해방되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짐을 느끼는 순간적 이적 을 그는 경험한다. 단순히 그의 무거운 몸뚱이 보다도 연정, 자홀( 自 惚 ), 시기 따위가 그의 발에 터 분하게 1) 달라붙어 그를 침몰시키려고 위협하는 무거운 것들인데 그 것들이 일순 씻겨져 나갈 것 같은 것이다. 바로 그렇게 가볍게 되는 순간, 그는 베드로처럼 예수의 명을 따라 물 위로 걸을 것 같다. 오늘 따라 연정, 자홀,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1) 터분한 이 1955년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에는 터부한 으로 되어 있어 필자가 참으로 부끄럽게 우스운 해석을 한 적이 있다. 터분하다 라는 말은 기분이 매우 답답하고 따분하다 란 뜻이다. 122 새국어생활 제15권 제2호(2005년 여름)
윤동주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것이 민감한 청년의 이성에 대한 그리 움( 연정 ), 자기 도취( 자홀 ), 남에 대한 질투( 시기 ) 따위의 고민들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정 에 대해서는 명상 瞑 想 에서,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라 말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1937년 8월 20일, 만주 용정학교 재학 시 지은 것으로 어떤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청소년 시 절의 애틋한 연정은 1년 뒤 그가 연희 전문 1학년 시절 바로 위의 이 적 과 같은 날짜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2) 사랑의 전당( 殿 堂 ) 에서도 다음 같이 표현되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청춘! 성스런 촛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 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 이적 에서 그가 벗어 버리고자 한 연정 은 바로 이런 성질의 것 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아가씨와 서로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어져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혼자 몰래 앓을 것을 결심했다. 그 러나 그것은 그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마음의 짐이 아닐 수 없었다. 2) 원고를 보면 이적 을 쓴 날짜인 1938. 6. 19.라는 날짜가 이 작품의 말미에 적혔다 가 그 뒤에 한 연을 덧붙이면서 그 날짜를 지웠다. 우리 시의 향기 123
여기서 자홀, 즉 자기도취를 그가 괴로운 짐으로 여겼다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이 쏠린다. 겸손하고 얌전한 윤동주, 그에게 무슨 자기 도 취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의 습작기의 작품인 공상( 空 想 ) 을 보면 제2연에서 그는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한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금전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 이 작품은 윤동주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잡지 숭실활 천( 崇 實 活 泉 ) (1935, 10)에 발표했던 것인데 나중에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에 편입시키면서 끝줄의 금전 지식 을 황금 지욕( 知 慾 ) 으 로 수정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꿈이 많은 민감한 소년답게 금전과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 자신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자기를 가슴 설레며 그려 보았음 직하다. 그것이 그의 자홀, 즉 자기도취였 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제로 모든 똑똑한 소년의 꿈이기도 하다. 어 른이 된 그가 금전 지식 을 황금 지욕 이라는 더 적극적인 부귀와 지식에 대한 욕망을 뜻하는 말로 바꿈으로써 그것이 더욱 허망함을 나타내려 했던 것 같다. 이는 자기의 욕망에 대하여 스스로 은근히 비 판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끈질기게 남아 있는 소년 시절의 자기 도취를 지금 그는 자기를 밑으로 끌어당기는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괴롭히는 시기 는 누구에 관한 것이었을까? 역시 소년기에 쓰인 그 여자( 女 子 ) 에 보면,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 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던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124 새국어생활 제15권 제2호(2005년 여름)
라고 하는데, 이 시에 그 여자 라는 제목이 붙지 않았다면 시 자체 로서는 먼저 익어 떨어진 능금 을 전혀 엉뚱한 사람이 집어 갔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 제목을 미루어 보아 우리는 이 시가 한 동네 에서 함께 자란 예쁜 여자를 딴 동네 남자가 아마도 결혼하여 데려갔 다는 이야기인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시인은 자기가 몰래 그리워 하던 여자를 빼앗아 간 남자를 질투하는 모양이다. 앞서 사랑의 전 당 에 나온 순이 가 바로 그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 든 그런 성적 질투나 공부 따위의 집단 행동에서의 경쟁자에 대한 시 기가 없으면 그는 가벼워져서 물 위로 걸을 것 같다. 그리고 그를 물 밑으로 끌어당기는 그런 연정, 자홀, 시기 따위가 오늘 따라 금메달처럼 만져 진다고 한다. 이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비유(직유)의 하나이다. 그러한 마음의 온갖 짐이 간단하게 떼어 버릴 수 있는 메달 같은 것이며, 세속적 승리를 상징하는 금메달 이 떼어 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된다는 발견은 그가 경험한 놀라운 이 적 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고, 앞뒤의 기도의 말씨에서 친근한 이웃에게 하는 말씨로 돌변한다. 그리 하여 번쩍이는 영광의 표시인 금메달이 실상은 무거운 짐이 될 뿐이 라는 말은 오로지 그런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갈릴리 호수에서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베드로가 실패 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어쩌면 금메달 같은 마음의 짐 들을 떼어 버리면 베드로의 실패를 저지르지 않고 성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그는 다시 기도의 말씨로 돌아가 직접 기도 의 대상에게 간절히 구한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우리 시의 향기 125
그를 가라앉게 하는 마음속의 짐들을 남김없이 씻어 버릴 수 있을 절대 순수의 순간적 이적 을 그는 경험했다. 피와 살을 가진 몸뚱이 로서 물 위를 걷는 요술 같은 이적 과는 상관없이 (그런 일은 실상 배를 타면 문제없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를 짓누르는 마음의 짐들을 금메달처럼 벗어 버릴 수 있는 순간이 진정한 이적 임을 그는 발견하고 이를 희구하는 것이다. 그 순간 모든 평범한 물가는 갈릴리 호숫가가 되고 그는 그 호면으로의 부름을 따라 사뿐사뿐 걸을 수 있 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예수의 제자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황혼 처럼, 다시 말하면 아름다 운 순수한 시인으로서 자연처럼 호면 위로 걷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 다. 그에게는 신앙만큼 순수한 시도 이적 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것 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하여 당신 은 기독교적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 에서 시라는 이적을 허락하는 또 하나의 하느님 이라는 상당 히 모호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126 새국어생활 제15권 제2호(200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