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가을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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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에서 개식사를 하는 김구(1940.9.17) 將士書) 를 낭독하였는데, 한국광복군이 중국군과 함께 전장에 나아가 한국의 독립과 해방을 앞당기 기를 바라는 희망이 강조된 내용이었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이었다. 이로써 2시간 30분에 걸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끝났다. 세 시간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고, 33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려 이루 어진 역사적인 일이었다. 짧은 행사였지만,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의 출발이 성립전례식처럼 기쁘고 즐거우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고급 군사간 부들이 주도하고 여군들도 참가하였으나 수십 명에 불과한 인원에, 비록 중국의 요인들이 축하하였지 만 중국군사위원회의 인정을 얻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성과 자주권을 주장 하면서 창설하였기 때문이다.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한국광복군을 그들의 예속 하에 두고자 하였다.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제시한 이른바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 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45년 5월 원조한국광복군(援助韓國光復軍) 이 시행될 때까지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제와 간섭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독립성과 자주권을 찾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한 과 정에서 초모활동과 적후방공작에 진력하였고, 영국군이나 미군과의 연합작전을 수행하며 국내정진을 시도하였다. 광복을 향한 한국광복군의 활동과 정신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끊어졌던 이 나라 군대의 맥을 이어 오늘의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졌다. 창설 70주년을 한 해 앞둔 올해에도 다시금 한국광복군을 기념하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2009 가을 _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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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상해 지도 >>> 망명 도착 이야기 상해에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억지로 장악한 조계 구역이 있었다. 프랑스ㆍ영국ㆍ미국ㆍ러 시아ㆍ일본 등이 그러한 지역을 차지했다. 다른 나라들은 합쳐 공공조계를 운영하지만, 프랑스는 독자적으로 관리했다. 프랑스 조계는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때문에 1910년 무렵부터 여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어 교두보를 마련했고, 그 터전 위에 1919년 4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이를 운영할 임시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1910년대 하비로 사진(1915년 회해중로(淮海中路)로 바뀜) 첫발을 디딘 곳은 상해 황포탄 동쪽 포동(浦東) 부두였다. 맞은편 상해 시가지는 20층이나 되는 고층건물이 강변을 따라 늘어섰다. 처음으로 보는 큰 건물들, 그것도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장면은 그 저 놀라울 뿐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터를 잡기도 했던 하비 상해 황포탄 외탄 사진 로도 서울 거리와는 너무나도 달랐고, 백범도 이 길을 걸었다. 2009 가을 _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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