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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일러두기 1. 일본 문헌의 번역은 특별한 표시가 없는 한 저자의 번역이다. 본문과 인용문의 강조 또 한 특별한 표시가 없는 한 인용자(박유하)의 강조다. 2. 위안부 할머니의 경칭은 생략했다. 일반적으로는 이 명칭에 대한 이의제기를 담아 따 옴표를 붙였지만, 조선인 위안부 와 구별하기 위해 따옴표를 쓰지 않은 경우도 있다.

제2판 서문 식민지의 아이러니 1. 참담한 심경으로 이 책을 낸다. 2014년 6월 16일, 이 책은 나눔의집 고문변호사와 소장 등에 의해 위안부 할머니 아홉 분의 이름으로 고소를 당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 했다는 형사고소, 2억 7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 그리고 판매 금지와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접근 금지를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이었 다. 그 첫 고소장에서 원고 측은 이 책의 109곳을 지적하며 허위 라고 주장 했다. 초판 서문에 썼듯이 책을 내면서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고소는 예기 치 못한 사태였다. 더구나 책이 나오고 10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출간 후 이 책의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준 서평과 인터뷰가 적지 않았기 에 더욱 그랬다. 이 책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상을 보내오는 독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8개월 후인 2015년 2월 17일, 서울동부지방법원 민사21부는 가 처분신청을 일부 인용 하여 원고 측에서 수정 신청한 53곳 가운데 34곳 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 해서는 아니 된다 는 결정을 내놓았다. 다 만 나머지 19곳과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은 기각했 다.(사태의 경위와 상세한 자료는 인터넷사이트 https://www.facebook.com/ parkyuha, https://www.facebook.com/radicalthird를 참조하기 바란다.) 제2판 서문 i

이 책은 그 결정에 따라 초판본에서 34곳을 으로 처리한 삭제판 이다. 재판부는 기각한 19곳에 대해 헌법상 보장되는 학문의 자유 또는 표현 의 자유의 보호영역 내에 있다고 보이고, 이러한 견해에 대해 법원이 사전 적으로 그 표현을 금지하기보다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들을 통하여 시민 사회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건전하게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은 충분히 이러한 해결이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것으 로 보인다 고 밝혔다. 마땅히 책 전체에 대해 그런 결정이 내려졌어야 한다 는 의미에서 나와 출판사는 일부 인용 결정에 승복할 수 없었고 이의신청 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재판부도 말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이 있는 공론 의 장을 위해, 삭제판이나마 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삭제판의 모습은, 실은 체제와 국가에 반하는 사상은 검열하여 출간하던 일제강점기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식민지 체험과 그 체험이 만든 갈등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던 이 책은 뜻밖에도 우리가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잔재 를 살고 있음을 드러내게 된, 지극히 아이러니한 책이 되고 말 았다. 2. 고소장에는 이 책의 후기에 적었던, 2008년에 한국에 유입된 재일교포 학 자의 인식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또 내가 예전에 화해를 위해 서 를 썼고 제국의 위안부 를 썼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심포지움(2014년 4월, 그 발제문을 부록으로 실었다)을 열었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니 (박 유하가) 앞으로도 이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것, 제국의 위안부 의 출 판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새로운 도서를 출판 할 것이므로 박유 ii 제국의 위안부

하의 활동을 방치한다면 왜곡되고 오염된 일본군 피해자의 상이 한국과 일 본 사회에 각인될 것 이라고까지 쓰여 있었다. 결국 한국 사회 내에서의 갈 등은 더욱 증폭되는 동시에, 일본과의 위안부 문제 해결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 이므로 그런 사회적 해악 을 끼치게 될 잠재된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는 것이 고소장의 요지였다. 말하자면 이 고소는 이 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의 사회적 활동 자체 를 억압하려 한 고소였다. 원고 측은 내가 책에서 마치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난한 것처럼 언론에 흘렸고 이에 분노한 군중은 나에게 돌을 던졌다. 특 히 나눔의집 소장이 이를 선도하며 나를 일제의 창녀 라고 쓴 트윗을 리트 윗한 사실은, 이 고소의 구조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가처분신청 결정 직전 에 성남시장이 나를 친일파로 지목해 다시 한번 수천 명 시민들의 비난을 받도록 한 일은 이 책에서 지적한 진보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일이기 도 했다. 3. 고소장에는 내가 위안부 할머니를 자발적인 매춘부 라 말했다고 쓰여 있 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나는 그렇게 쓴 적이 없다. 지적 된 내용은 대부분 기초적인 독해력 부족이나 의도적인 왜곡이 만든 것들이 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부분도 삭제해야 할 곳으로 인정했다. 원고 측은 특히 매춘 이라는 단어를 문제시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에서 말하려 했던 건, 소녀 이미지를 놓지 않으려 했던 이들과, 매춘부 라고만 주장해온 이들이 똑같이 성이 관련된 문제에 대한 금기와 차별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래도록 당사자들이 어두운 곳 에서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고소는 그런 의미 제2판 서문 iii

에서도 내가 이 책에서 지적한 문제들을 극명하게 드러내보인 사태였다. 원고 측은 또 동지적 관계 를 문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물론 그것은 남성과 국가의 여성 착취를 은폐하는 수사에 불과했 다고 분명히 썼다. 무엇보다 동지적 관계 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동원되었 다는 의미였다. 또 원고 측은 이 책이 매춘을 근거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정했 다, 일본 정부를 면책했다 고 했지만, 나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았 다. 다만 일본의 책임을 묻는 논지가 기존 연구자나 지원단체와는 달랐을 뿐이다. 내 입장은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일본에도 제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는 것이다. 이 책과 기존 지원단체나 연구자들의 차이는 단지 책임을 묻는 방식 과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기까지의 논지 에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 신들의 해결 방식 과 다른 해결 방식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힘 을 빌려 나를 억압하는 일에 나섰다. 서글픈 건 그들이 오래전부터 그 누구 보다도 국가의 억압에 민감했고 때로는 직접 고통을 당했던 이들이라는 점 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일본을 향해, 그들이 끝났다고 말하는 1965년의 한일협 정의 한계 와 1990년대의 사죄, 보상의 한계 를 논거를 들어 말했다. 또 위 안부들이 제국의 유지를 위해 동원한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 지로 식민지배의 희생자다,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졌다. 그 러나 그것은 전쟁후처리였을 뿐 식민지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 다고 한다면 한일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고 보완하는 것은 다른 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앞장서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에 앞서, 제국 구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iv 제국의 위안부

수행하기 위해 위안부를 필요로 했던 나라로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 하는 일은, 제국의 욕망과 지배를 다른 제국 국가에 앞서서 반성하는 의미 를 갖는다. 제국주의로 향하게 된 일본의 사죄는 아시아의 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했던 기간 동안 희생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진심을 사죄 속에 담아야 한다 고 썼다. 그럼에도 원고 측은 오로지 전쟁의 문제로만 다루면서 법적 책임에 구 애해온 기존 주장에 회의적이라는 것만으로 이 책이 일본의 주장을 대변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의 극우세력과 아베 수상 과 관계가 있다는 식의 인 식을 퍼뜨려 국민들의 반감을 유도했다. 그러나 2015년 4월, 지원단체들은 그동안 주장해온 법적 책임 을 요구 사항에서 내렸다. 그동안 주장해온 국회입법이 아니라, 몇 가지 요구를 받 아들이면 그것을 법적 책임을 진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20년 이상에 걸친 주장을 바꾼 셈이다. 2015년 5월에는, 역사학자를 포함한 세계의 저명한 일본전문가 187명 이 일본 정부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이후 500명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성명의 내용은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도 비판하 고 있고, 운동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성매매,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원단 체는 그동안 세계 가 우리 편인 것처럼 말해왔지만, 이제 그들도 지원단체 의 인식에만 갇혀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명인 셈이다. 그러 나 한국에는 한국 비판은 생략된 채 전달되었고, 이 역시도 한국 편만 든 것 처럼 환영받는 일이 일어났다. 이 책의 부록으로 그 성명을 넣기로 한 것은 그래서다. 제2판 서문 v

4. 2014년 7월 가처분신청 심리가 시작되었고, 나는 7월과 9월 두 번에 걸쳐 책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까지 첨부한 A4 10매, 150매 분량의 답변서 를 제출했다. 그러자 원고 측은 심리기일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10월에 원고 측은 청구취지 를 변경하여 처음에 지적한 109곳을 절반 이 하로 줄이고, 허위 라던 처음 지적을 이 책이 전쟁범죄를 찬양하고 식민지 배를 옹호하는 논지를 펴고 있다는 주장으로 바꾸었다. 늦가을에는 형사고소에 관한 조사도 시작되었다. 동부지검에 다섯 번을 불려가 범죄리스트 라는 제목이 달린 53개 항목의 지적사항에 대해 대답 해야 했다. 그때의 담당 검사는 내내 나를 범인 취급했다. 그러나 가처분신청과 고소에 대한 시민사회/학계=공론장의 반응은 거 의 없었다. 고소 직후에 일부 학자와 시민들이 법정으로 가는 데에 대한 반 대의사를 표명했을 뿐, 관계자들과 관련 학계 대부분은 침묵했다. 오히려 재판부의 결정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나를 비판한 이들은 대부분 이 책이 일본을 면죄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 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본을 면죄하는 책이 아니다. 그저 법적 책임 을 물을 수 있는지를 고찰했을 뿐이다. 주로 남성 학자들이 비판에 나선 이유를 나는 책임의 탈젠더화 현상으 로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쓰겠지만, 여러 책임 요소 중에서 일본 의 책임 만 묻는 것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민족문제일 뿐 아니라 성과 계급의 문 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물론 이 책에도 쓴 것처럼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은 전쟁을 일 으키고 국민들을 전쟁에 동원한(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를 만든) 일본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러한 국가동원에 협력한 이들의 책임 vi 제국의 위안부

을 묻지 않는다면,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국가가 전쟁으로 치닫 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일본 에 대한 책임 추궁은 말할 것도 없이 필요하지만, 일본 이라는 고 유명에 대한 집착은 국가와 남성과 지배층과 일반인의 책임을 묻는 일을 어 렵게 만든다. 물론 그 모두를 실질적 처벌의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니, 그 런 책임 추궁이 물타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중적인 책임을 보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는 사태를 단순화시켜 오히려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지 못한다. 실제로, 제국이 붕괴하고 제국주의가 끝났어도 여전히 소녀 인신매매가 만연하고 국경을 넘어 여성들이 가혹한 상황에 처하는 일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과거를 생각하 는 이유가 반복을 막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책임을 다층적으로 물을 필요가 있다. 5. 한국어판 발간 직후부터 준비했던 일본어판이 2014년 11월에 출간되었는 데 아사히 신문 을 비롯한 이른바 양심세력 에 속하는 지식인과 매체들 은 예상밖의 관심과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중 하나는 이제 물음은 일본을 향하고 있다 는 말로 맺고 있었다. 또 나는 이 책을 읽고 일본군 위안부 할 머니들에 대한 아픈 마음이 한층 깊어졌을 뿐이다 (2014년 7월 31일자 동아 일보, 와카미야의 東 京 小 考 ), 일본에서 평가가 높은 것은 결코 우익이 기 뻐해서가 아니라 해결을 바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 (2015년 3월 19일자 같은 칼럼)이라는 평을 보고, 나는 내가 던진 공을 그들이 제대로 받아주었다고 느꼈다. 나는 일본어판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를 담은 일본의 국회결의 가 필요하다고 추가했었다. 제2판 서문 vii

그러나 그런 호평에 반발하는 일본의 연구자/지원단체의 비판도 2015년 들어 시작되었다. 그 대부분이, 2008년 한국에 전달된 재일교포의 시각을 잇는 내용들이다. 조만간 이에 대한 반론을 쓸 생각인데, 언젠가는 그들 중 에서도 내 진의를 이해해주는 이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일본에서 이 문제를 부정해오던 이들이 위안부의 정황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공감을 표해주었 던 것처럼. 이 문제에 관여해오지 않은 이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객관적인 판단도 기 대한다. 한일 양국을 잘 알면서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이들도 논의의 주 역이 되어주면 좋겠다. 당신은 누구 편이냐고 묻는 폭력적인 질문에는 내 친구 편 이라고 대답하면서. 힘든 나날이었지만, 소신껏 발언하고 옹호해주는 빛나는 지성의 시민들 과 지식인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일본. 다른 공간에 있는 수많은 마음 들이 나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워주었다. 그들이 있어서 이 1년 동안의 적의와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 의 힘이, 산소를 가득 품은 강물이 되어, 동아시아에 우애와 평화의 바다를 만들어주리라고 믿는다. 함께해준 모든 분께 이 책을 바친다. 2015년 6월 피소 1년을 맞아 박유하 viii 제국의 위안부

서문 다시 생산적인 논의 를 위해서 위안부 문제는 왜 1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는 8년 전 에 이렇게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화해를 위해서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뿌리와이파리, 2005)라는 책에서의 일이다. 나는 또 일본 이 주변국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있다면, 혹은 변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면, 거기에는 이제까지의 비판의 형식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데에도 원인이 없지 않다 라고도 썼다. 그리고 한일 간의 문제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 한 문제이고 그런 복잡함 을 보기 위한 본격적 인 논의가 필요 하다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문제들을 조금 깊이 볼 수 있 다면 분노와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 을 것이고 그렇게 되어 생산적 인 논의 가 가능해진다면 그때 비로소 화해를 위한 논의는 시작될 수 있을 것 이라고도.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그때 바랐던 생산적인 논의 는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한 당연한 일이었 지만, 한일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그동안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안의 견고한 기억들 에 화해를 지향하는 균열 을 내보려 했 던 8년 전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그 책이나 또 다른 한일관계 관련 책들(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 공편저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 등)에서 내가 중점을 두었던 것은 민족주의 비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민족주의 비판만으로는 한일 간 서문 5

의 갈등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 책의 시도가 실패한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일 간의 갈등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게 얽 혀 있었다. 이 책은, 세월이 흘러 이제는 왜 2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는지 를 물어야 하게 된, 그런 복잡한 구조 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 책이다. 무엇보다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보다 훨씬 나빠졌다. 그리 고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안부 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 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는 실은 결코 하나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 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우리는 위안부 에 관해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 올려왔다. 해결 해야 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을 때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야만 상황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정보에는 때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 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20년은 그중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취사 선택해서 들어왔고 그에 바탕해 위안부에 관한 새로운 기억 을 만들어온 세월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안의 위안부 는 그저 가녀린 소녀 가 아니면 노구를 이끌고 투쟁하는 투사 일 뿐이다. 그러나 그건 실은 그녀들 자신의 모습이 라기보다는 우리가 원한 위안부 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는 이 책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폭력적으로 소거시켜온 그녀들의 기억들을 다시 만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시도는, 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 편한 일이 아닐 뿐 아니 라 아프기까지 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공유하 려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그런 불편함과 아픔을 거치지 않고서는 위안부 문제 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도 완전한 군인이지 ( 강 6 제국의 위안부

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3, 246쪽)라고 말하는 위안부의 목소리를 듣 고, 그 말이 상징하는 식민지의 모순 을 직시해야 하는, 아프기까지 한 불 편함. 불편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그 모습을 외면하 는 사이에, 식민지배는 나쁘지 않았다 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그 모습들 을 왜곡해서 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나선 이들의 대부분은 극도의 혐한 감정을 갖고 있는데, 그 들의 혐한감정은 특히 이 10여 년 동안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혐 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문제 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런 그들의 감정 을 공유하는 이들이 일 본 사회에 급격히 늘어나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혐한파뿐 아니라 한 국을 잘 알고 좋아했던 이들조차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한국과 소통하기 가 힘들다고 느낀다. (지한파 교수) 그동안 일본에게 한국은 특별한 존재였 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알고 보니 짝사랑 을 한 셈이다. 이제 그만 그런 감정을 버리고 한국을 보통 나라로 대하는 것 이 좋을 것 같다. (외교관)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인들은 거짓말 까지 하면서 일본을 욕하고 언제까지고 일본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이젠 한국이 싫어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 (대학생) 말하자면 한일 양국은 20여 년의 역사 문제 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 통부재 상황에 빠져버렸다. 외교채널조차 가동되지 못한 지 일 년이 넘었 고, 현재 두 나라 국민은 상대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갈 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고, 그들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문 7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했 다. 이미 8년 전의 책에서 나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 에 관해 나름대로 사 죄와 보상 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부 위안부들이 그 사죄와 보상 을 받 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지원단체는 그 사죄와 보상 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 판단이 옳고 그르고 를 떠나,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국가 문제가 된 이상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지원단체나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 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소수 라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게 되겠지 만, 그들의 판단이 전부 옳거나 진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 안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지원단체의 의견에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현재의 방식으로는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마도 한국의 교과서는 결국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아무런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았다 고 쓸 가능성이 높 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일 수가 없다. 그런 이상, 나는 다시 쓰지 않을 수 없 었다. 그건 그저 좋은 한일관계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동안 양국 의 이해를 위해, 나아가 동아시아의 상호 신뢰회복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 에서 노력해온 이들이 쌓아올린 신뢰의 탑이 적대와 대립의 언어만이 난무 하는 가운데 무너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담론들이 마음 여린 이들을 상처 입히고, 마음 8 제국의 위안부

을 닫도록 만드는 것을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 에 대해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문제가 단지 해결 을 기 다리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 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 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안 부 문제를 일본 만의 특수한 일로 생각하는 사고는 그런 구조를 보지 못하 게 만든다. 평화 를 지향하는 현재의 운동이 평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이 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생각들을 정리해본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의 상식 에 이의제기를 하는 셈이 된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조금은 두렵기도 하 다. 하지만 당장은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든, 언젠가는 이 책이 식민지 시 대가 만든 우리 안의 분열들, 동아시아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디딤 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역사가 만드는 대립과 분열로 인해 상처 입었던 이들에게, 그럼에도 여전히, 상처를 딛고 평화와 신뢰를 만들려 하는 이들에게, 누구보다도 먼저 보내고 싶다. (이 책의 일부는 2012년 12월부터 다섯 달 동안 일본의 인터넷매체에 연재했던 글들이다. 반복을 피하기 위해 조금 다듬기는 했지만, 내용 자체는 거의 바꾸지 않 았다. WEBRONZA, 2011. 12.~2012. 5.) 2013년 7월 17일, 예순여덟 번째 8 15를 앞두고 박유하 서문 9

차례 제2판 서문 식민지의 아이러니 i 서문 다시 생산적인 논의 를 위해서 5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제1장 강제연행 과 국민동원 사이 17 1. 죄와 범죄- 강제로 끌어간 건 누구인가 2. 위안부 의 전신 가라유키상 -국가의 세력 확장과 이동하는 여자들 유괴범들과 일본의 소녀들/ 조선인의 가담-인신매매와 성매매 공창과 사창-여러 종류의 위안소들 3. 우리 안의 협력자들 4. 강제로 모집된 정신대 5. 소녀 20만 의 기억 제2장 위안소에서-풍화되는 기억들 55 1.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 -지옥 속의 평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 위안부의 역할 사랑과 평화 또 하나의 일본군-수치와 연민 관리자로서의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 망각되는 기억들 2. 전쟁터의 포주들 종군하는 업자들 강제노동과 착취 감시 폭행 중절 제국의 위안부 제3장 패전 직후- 조선인 위안부 의 귀환 92 1. 일본인 에서 조선인 으로 2. 극한상황 속에서

제2부 기억의 투쟁-다시, 조선인 위안부 는 누구인가 제1장 지원단체의 위안부 설명 107 1. 근본적인 오해 2. 정보 은폐와 공적 기억 만들기 3. 억압으로서의 성노예 상 4. 박물관의 위안부 5. 소거되는 기억들 제2장 하나뿐인 조선인 위안부 이야기 123 제3장 공모하는 욕망들 127 제4장 일본인 지원자들의 문제 135 1. 페미니즘의 모순 2. 가해자 란 누구인가 제5장 일본인의 부정의 심리와 식민지 인식 142 1. 조선인 위안부 란 누구인가-소설 메뚜기 의 위안부 2. 관여 주체는 누구인가 3. 그들만의 법 4. 애국 하는 위안부 자발성 의 구조 적극성 의 배경 과거 를 생각하는 의미

제3부 냉전 종식과 위안부 문제 제1장 해석의 정치학- 사죄와 보상 을 둘러싼 갈등 167 1. 위안부 문제 의 발생과 경과 2. 고노 담화 와 강제성 3. 여야가 합의한 아시아여성기금 4. 사죄수단 으로서의 기금 5. 위로금 인가 속죄금 인가 6. 위안부/지원단체의 분열과 당사자주의의 모순 제2장 정치화된 일본의 지원운동 192 1. 위안부 문제 의 도구화 2. 정부에 대한 불신과 운동의 정치화 3. 지원운동의 변화와 향방 제3장 한국 지원운동의 모순 204 1. 서울 정대협 운동의 공과 위안부 가 없는 위안부 소녀상 -정대협의 힘과 민족권력 2. 서울 정대협의 요구를 다시 생각한다 죄인가 범죄인가- 공식 사죄 와 법적 책임 3.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읽는다 피해자들의 생각과 한일협정/ 한일협정의 논의/ 한일합방조약의 구속/ 제국과 냉전시대의 한계/ 위안부에 대한 이해 제4장 세계의 생각을 생각한다 243 1.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2. 맥두걸 보고서의 최종보고

3. 미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4. ILO 조약권고적용전문가위윈회 소견 5. 사라진 조선인 위안부 문제 제5장 일본 정부에 기대한다 -새로운 조치에 나서야 할 세 가지 이유 258 1. 1965년 한일협정의 한계 2. 미완의 1990년대 사죄와 보상 3. 세계의 시각과 일본의 역할 제4부 제국과 냉전을 넘어서 제1장 위안부와 국가 277 1. 위안부와 제국 2. 위안부와 미국 3. 위안부와 한국 제2장 새로운 아시아를 향해서-패전 70년, 해방 70년 290 1. 식민지의 모순 2. 냉전의 사고 3. 해결을 위해 후기 315 참고문헌 321 부록 1: 위안부 문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328 부록 2: 일본의 역사가들을 지지하는 성명 341

제1장 강제연행 과 국민동원 사이 1. 죄와 범죄 강제로 끌어간 건 누구인가 위안부 란 도대체 어떤 이들일까. 아직 어린 10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 가 노예처럼 성을 유린당한 조선의 소녀들. 우리가 아는 위안부란 그런 존재다. 그런데 위안부 의 존재를 일찍이 세상에 알린 사람은 실은 한국인이 아 니라 일본인이었다. 그는 센다 가코 千 田 夏 光 라는 저널리스트로, 1973년에 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 声 なき 女 8 万 人 の 告 発 従 軍 慰 安 婦 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만으로도 이 책이 종군위안부 편에 서서 쓰인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후기에서 센다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 게 말한다. 내가 위안부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쇼와 昭 和 39년(1964)에 마이니치 毎 日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17

신문사가 사진집 일본의 전력 日 本 の 戦 歴 을 발행했을 때였다. 이 사진집은 마 이니치 클럽 毎 日 クラブ 별책으로 편집된 책인데, 15년전쟁(만주사변부터 패전까 지의 전쟁을 가리킨다-인용자) 기간에 마이니치 신문 특파원이 찍어온 이만수 천 장의 사진을 선별하고 편집하는 일을 내가 담당했다. 그런데 그 작업을 하던 중 이상한 여성의 사진을 수십 장 발견했다. 군대와 함 께 행군하는 조선인인 듯한 여성. 머리에 트렁크를 이고 있는 모습은 조선 여성 이 곧잘 취하는 자세다. 점령 직후로 추정되는 풍경 속에서 일본옷 차림으로 차 에 올라타는 여성. 중국인들의 경멸의 시선을 받고 있는 일본식 머리를 한 여성. 사진 필름에 붙은 설명에 위안부 라는 글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 여성의 정체를 쫓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위안부 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215쪽) 이후 센다는 온갖 기회를 통해 이 위안부의 실체를 알아내려 했지만, 전 쟁체험자들은 웬일인지 그 구체적 사실에 관해서는 얼버무렸 고, 이야기 해준 사람들은 익명으로 해줄 것을 완강하게 고집 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가 군의로 종군한 적이 있는 의사를 만나 그가 위안부의 검진을 명령받았 고 그 소견을 보고서로 썼다는 사실을 알았 (215쪽)고, 또 이 리포트를 통 해 군 간부가 조선인 여성들에게 착목하게 된 과정도 알게 되었다 (216쪽) 는 것이다(하지만, 이 군의관이 위안부 제도를 생각해낸 것처럼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군의관의 딸이 센다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아마코 구니, 2001). 아무튼, 군이 착목한 조선인 위안부의 비극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도 없지만 이라고 쓰고 있는 데에서도, 센다가 어떤 입장에서 이 글을 썼는지 는 명백하다. 센다는 첫머리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고지엔 広 辞 苑 에서 위안부 항목을 찾으면 전쟁터 부대와 동행하며 장병들을 18 제국의 위안부

위안했던 여자 라고 되어 있다. 위안했다 고 과거형으로 말해지고 있는 데에 그 녀들의 슬픔이 있다. 그로부터 28년, 그녀들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하지 만 혹시 말할 수 있는 위안부가 있다면 분명히 말할 것이다. 우리의 슬픔은 영원 히 화석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라고.(6쪽) 센다가 말한 위안부의 숫자는 후에 다시 보겠지만 문제가 없지 않다. 하 지만 이 책이 위안부 의 비극에 착목하고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려 했 던 첫 번째 책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가를 위한 군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은 있는데 왜 위안부에게는 없느냐는 것이 이 책의 관심사 이자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센다의 시각은 이후 에 나온 그 이었다. 사실 위안부들의 증언집을 단 한 권만 펼쳐보아도, 위안부 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의 이미지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은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동안 지원자들 과 부정자들이 위안부에 대해 가져온 상반되는 이미지는 자신들이 보고 싶 은 이미지를 벗어나는 증언은 보지 못했거나 무시한 결과물이다. 그건 꼭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이른바 위안부 문제 가 발생한 이후에 나 온 관련 연구와 발언들이 이 문제를 식민지배와 일본의 전후처리 문제로서 다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일본 (군)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일, 그에 따른 사죄와 보상 의 필요성을 주장하거나 반대하는 일이 단순히 과 거의 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서 있는 현실정치에 대해 논하는 일이 되면 서 그런 현실적 목적 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센다의 책이 조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19

선인 위안부 의 비극에 대한 사죄의식을 가지면서도 거칠게나마 위안부의 전체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현실정치에서 자유로웠기 때문 일 것이다. 센다의 책에는 1970년대 초, 그러니까 40년 전에 한국에까지 와서 찾아 낸 위안부 들을 인터뷰한 내용도 들어 있다. 말하자면 이 책에는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보다 마흔 살이나 적은, 아직 젊은 위안부 들 이 등장해서 생생한 목소리로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에는 일본인 위안부뿐 아니라 위안소를 이용한 군인들, 그리고 위안부를 모 집했던 업자 들까지 등장한다. 그렇게 이 책은 위안부의 증언에 등장하는 관계자들 대부분이 등장하는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중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인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도 위안부 문제 가 발생한 이후에는 일본인 위안부는 끝내 단 한 사람도 나 타나지 않았다. 물론 소개업자나 포주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위안부 문 제가 단순히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의 구도로만 이해된 데에는 그런 상황 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안부들의 증언에는 자신들을 데리고 간 소개업자와 포주들, 관리인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 1~5 외, 이하 강제 1 처럼 표기함). 그런데도 그 부분을 강조한 이는 위안부 문제 를 부인하는 이들 외엔 거의 없었다. 최근에 와서야 일본의 한 연구자는 이 렇게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조선인 여성들의 증언과 그 배후의 라이프스토리를 다시 한번 돌이켜보면, 그녀들 중에도 일자리를 주선해준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게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 결혼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다, 예쁜 옷을 입 20 제국의 위안부

고 돈을 벌 수 있다 는 등 속아서 끌려가 위안부 가 된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녀들은 유교적 가족의 보호와 속박의 틀 안에 있지 못했던 가난한 소녀들이거나 혹은 가난하지만 자신의 뜻이 아닌 결 혼을 거부하고 가족으로부터 도망친 소녀들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송신도 씨는 부모가 정해준 상대와 열여섯 살 때 결혼했는데, 시집을 뛰쳐나와 아는 이의 집 등을 전전하면서 아이 보는 일 같은 것을 하고 있을 때, 40대쯤의 조선인 여성이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일 하 는 걸로 결혼하지 않고도 자립할 수 있다 는 말로 유혹해 신의주의 소개소 로 데려갔고, 그 후에 봉천( 奉 天 : 선양 瀋 陽 의 만주국 시절 이름)이나 한커우 漢 口, 우한 武 漢 등지에 가게 되면서 위안부 를 강요당했다. 모르긴 해도 1920~30년 대에 걸쳐 사회적 이동성이 높아진 것을 배경으로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지향한 그녀들의 이른바 현실탈출 소망을 역이용한 인물이 감언으로 꾀었고 그녀들이 가족의 보호 기능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이용해 위안소 에 데려가는 일이 있었 던 것이다.(오노자와 아카네, 11쪽) 식민지가 된 조선의 가난한 여성들이 공부를 하고 싶거나 흰 밥 을 먹 고 싶어 조선인이나 일본인 업자 의 꾀임에 빠져 위안소 에 간 경우가 많 았다는 것은 이미 나 자신 지적한 바 있다( 화해를 위해서 ). 중요한 건, 위안 부들의 심신에 상처를 남긴 이가 군인만이 아니라 그녀들을 직접 관리한 포 주나 관리인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위안부 들을 대상으로 쇠막대 기로 우리를 후려갈기 고( 강제 1, 63쪽) 쇠꼬챙이로 맞 (64쪽)게 한 장본인 이었고, 군인을 안 받는다고 뺨을 때리고 발로 차 (78쪽)고 어쩌다 군인이 안 올라 치면 주인은 너희가 손님에게 기분 나쁘게 하니까 안 온다 며 우리 들을 마구 때렸 (79쪽)던 이들이었다. 그들 중엔 일본인도 있었지만 조선인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21

도 적지 않았다. 앞서의 연구자는 다시 말한다. 물론 조선에서 피해자 여성 본인의 출신이나 사회적 위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강 제력으로 군부에 의해 납치 연행된 사례도 적지 않았음은 잊어서는 안 되고, 면 장이나 반장, 순사 등 말 그대로 식민지 통치의 일환을 담당한 사람들 자신이 이 러한 감언으로 여성들을 위안소 에 데려간 계기를 만든 사례가 보이는 데에서 는 위안부 징집이 다름아닌 식민지하의 폭력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 나 자신이 식민지 통치자가 아니었던 이들에 의한 사기도 횡행했다는 것을 증언 에서는 알 수가 있고, 또 동시에 평상시에 이루어졌던 사기적 주선의 수법이 전 시에 식민지 권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용된 것 같다는 사실이 읽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식민지에 일본군 위안부 징집이라는 사태를 초래한 것 은 일본군이나 공창제도하의 업자들뿐만이 아니다. 평상시부터 가족 내부의 여 성들과 노동시장을 연결하는 일을 생업으로 하고 있던 이들 내지는 겉으로는 그 렇게 보이도록 하면서 여성들을 매매한 자들의 존재 방식을 고려하는 일이 중요 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안부 가 되는 전단계, 즉 위안소 로 데려가기까지의 주체로서 납치에 가까운 형태로 속여 데려간 업자 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이 연구자 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주체로 한국에 알려지고 있는 이른바 우익 이 아니다. 그것은 이 글이 실린 매체 전쟁책임 연구 가 이름 그대로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 반성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학회지라는 점만으로도 분 명하다. 그런 이가 이제 업자의 존재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센다의 책에는, 몇 달 걸려 찾아냈다 (24쪽)는 1938년 중지( 中 支 : 중국 22 제국의 위안부

중앙지역-인용자) 파견군이 처음으로 군 위안부를 모집했을 때 포주 역할 을 했던 업자를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업자는 군인의 의뢰를 받고 위안부들을 모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센다는 말한다. 제1호 위안부는 군이 모집은 했지만 그 모집에 군 인이 직접 나서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 물론 그는 그렇다고 군이 (위 안부 모집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25쪽)라는 중요 한 지적도 빠뜨리지 않는다. 결국 그는, 일본 육군은 군인도 군속도 군용상 인도 아닌 인물을 수송선에 태워 전쟁터로 데려 (25쪽)간 셈이니, 업자 란 군대에게 필요한 일은 뭐든 해주는 해결사였을 것 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일제 시대에 어린 여성들을 꼬여 팔아넘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당 시 신문들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1937년 1월 11일자 매 일신보 의 기사.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최재현(37)과 그의 처 이성녀(24)는 수일 전 서로 공모하 여 동면 동리에 있는 김인섭의 둘째딸 양근(12)을 유인해다가 군산부 개복정 2정 목 지나 支 那 요리업자 장우경에게 몸값 50원을 받고 작부로 팔고자 계약서를 작 성하던 중 경찰에 발각되어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다 한다.(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 해진상규명위원회, 55쪽에서 재인용) 불과 열두 살짜리 소녀를 유인해 중국인에게 작부로 팔아넘기려 한 것 은 같은 동네 사람이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사는 당시의 신문에 간간 이 등장한다. 수양딸로 유괴하여 매춘 강요의 악당, 시골처녀 팔아먹은 것 도 탄로, 동문서 東 門 署 서 검거취조 (같은 신문, 1937. 3. 17.), 농촌처녀 유인 마 4명을 일망타진, 수원서에서 취조중 (1937. 4. 30.), 오오! 가여운 소녀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23

들, 독아 毒 牙 희생 150명, 유괴마 하윤명 부부 죄상 확대 (1939. 3. 7.), 취직 된다 감언이설, 간 곳은 의외로 창루, 처음엔 빨래, 다음엔 화장해라 (1937. 3. 14.) 등은 그 일부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우리 앞에 나타난 한 위안부 는 이렇게 말한다. 1939년 12월, 내 나이 열일곱 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취직을 시켜준 다는 사람이 있으니 일본으로 같이 가자고 하였다. 조선에 있으나 일본에 있으나 고생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또 조선에서보다 살기가 좋다 고 하길래 그 길로 살던 집을 나왔다. 친구와 같이 평안도 신의주가 고향이라고 하는 조선인 부부를 만났는데, 그곳에는 우리들 이외에 네 명의 여자가 더 있었 다. 그 조선인 부부는 우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고 간단한 옷가지도 사주었다. 머리는 모두 단발로 자르게 하고 외모를 가꾸도록 하였다.( 강제 1, 62쪽) 이후 그녀는 신의주, 부산, 시모노세키 下 関, 대만을 거쳐 중국 광둥의 위 안소로 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스물인가 스물한 살인가 먹었을 때라고 기억이 된다. 하루 는 애기를 재워놓고 그 동네 식모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조선인 남자 한 명과 일본인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남자들은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나이는 젊 어 보였다. 그들이 다가와 광주에서 얼마 받느냐 고 물었다. 월급도 안 받고 밥 먹고 옷이나 얻어 입는다 고 대답했더니, 아이고 조선 사람들, 도둑놈들 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을 따라 일본 오사카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돈에 욕 심이 나서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따라나섰다.(같은 책 76쪽) 24 제국의 위안부

그리고는 오사카를 거쳐 상하이의 위안소로 가게 된다. 사실, 몇 권의 증언집 속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 갔다고 말하는 위 안부는 오히려 소수다. 증언자의 대다수가 이런 식의 유혹을 받고 집을 떠났 다고 말한다. 물론 센다의 책에 나오는 업자처럼 군 이 직접 업자에게 위안부 모집을 의뢰한 경우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기나 유인까지 해가면 서 마구잡이로 끌어오라고 지시했다는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 려 그렇게 마구잡이로 모집하는 것을 금지한 자료라면 존재한다(<사진 1> 참조). 그 자료는 설령 강제로 끌어간 군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공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위안부를 필요로 했던 군은, 300만 명 이상의 군인들에게 제공하려면 현 지의 매춘시설을 포함한 기존 위안소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 다. 그에 따라 위안부를 더 많이 조달하려 생각했고, 이런 요구를 센다의 책 에 나오는 업자처럼 직접 듣거나 알게 된 업자들이 모집 에 나섰을 가능성 이 크다. 당시엔 위안부 모집 광고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는데(83쪽 <사진 4> 참조), 그 사실 역시 위안부가 공적인 모집 대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군이 장기간 동안 전쟁이라는 비일상 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병사 들을 위안 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 라는 존재를 발상하고 모집한 것은 사 실이다. 그리고 군에서의 그런 수요증가가 사기나 유괴까지 횡행하게 된 이 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 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 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 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25

사진 1 1938년(쇼와 13년) 3월 4일자의 북지방면군 및 중지파견군 총참모장에게 보내는 통첩안 군 위안소 종업부의 모집 등에 관한 건. 군 위안소 종업부를 모집하는 인물을 군이 통제하여 주도적절하게 선정하는 등 모집과정에서 군의 위신 을 해치거나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군의 수요를 자신들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지배자의 요구에 호응해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다놓는 일 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에 이 런 일을 단속하고 처벌했다는 사실은 이들의 행위야말로 범죄 이고 따라 서 그들에게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 제 를 범죄행위 로 규탄하는 이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업자들이야말로 범 죄 를 저지른 자들로서 법적 책임 을 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 을 묻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지주의와 국 가와 가부장제의 강제성을 무엇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런 구조의 실천과 유지에 가담한 이들의 강제성도 함께 추궁되어야 한다. 26 제국의 위안부

다시 말해, 위안부가 안게 된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면, 당시에는 죄 로 의식되지 않았던 행위와 이미 법적 으로 규제되던 범죄 를 구별해서 함 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이들이 업자들의 범죄 를 물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군인이 직접 끌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씩 알 려지면서 최근에는 업자 등의 중간매개자들의 존재가 대중매체에 공개되 기도 했지만(2012년에 방영된 드라마 <각시탈> 등), 거기에서 업자들은 어디 까지나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의 지시에 따른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 다. 하지만 위안부들의 불행을 만든 주체가 일본군(구조적 강제성의 주체)뿐 아니라 그녀들을 보낸 사람이나 학대한 사람들이기도 한 이상, 그런 그들 의 죄나 범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구조적인 강제성과 현실적인 강제성의 주체가 각각 누구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2. 위안부 의 전신 가라유키상 국가의 세력 확장과 이동하는 여자들 유괴범들과 일본의 소녀들 업자들은 여성들의 유괴와 착취에서 결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근대 초기부터, 어린 소녀들을 유괴하다시피 데려가 외국으 로 팔아넘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가난한 소녀들이었는데, 대륙에 가까운 규슈 지방에서 그런 일이 많았다. 그들은 팔려가면서도 오로지 부모와 집을 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27

기로 한 심성 고운 딸들이기도 했는데, 그런 소녀/여성들을 고향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까지 담아 가라유키상( 가라 는 唐 이라 쓰지만 중국에 한정하지 않고 외국을 통칭하는 말. 유키상 은 가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외국에 돈 벌러 가 는 여성을 가리킨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현해탄을 넘어 한국과 중국 각지 에 만들어진 공창 국가의 허가를 받은 매춘시설 으로 팔려나갔고, 동 남아시아와 인도로까지 떠돌았다(모리사키 가즈에 森 崎 和 江, 가라유키상からゆ きさん, 1976. 이하 이 대목의 논의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한 이 책에서의 인용이 다. 저자 모리사키 가즈에는 실제 가라유키상 과 가라유키상의 양녀에게 직접 들 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 결과로, 1920년대엔 이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일본의 가난한 처녀들이 하녀로 일하거나 매춘시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러면서, 원래는 해외로 돈 벌러 가는 사람 이라는 뜻이었던 가라유키상 은, 나중에는 바다 건너로 팔려간 여자들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또 팔려간 여자들이 유곽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처럼 성을 제공해야 했던 전쟁터의 위안부도 이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같은 책, 19쪽). 일본은 근대 이전부터 유곽을 공창, 즉 국가가 공인하는 시설로 만들었고 근대 국가가 된 이후에도 공창을 존속시켰는데, 너무 어린 소녀들이 해외로 팔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15세 이하는 공창이 될 수 없도록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규정한 이민보호법은 조선과 청국(중국) 양국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116쪽). 그 이유를 모리사키는 (창기들이, 조선이나 중 국으로 앞서 건너간) 내지인(일본인)의 발을 (그곳에) 묶어두는 방편 이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해외취업녀를 계속 묵인하면서 조선/청국에 이민법 을 적용하지 않았고, 신영토에 공창제를 필요시한 것 (117쪽)이라고 설명 한다. 28 제국의 위안부

유괴범들에게 이끌려 어린 소녀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일본이 묵인했 던 것은, 조선이나 중국으로 단신으로 건너가 경제적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 한 일본 남성들의 향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 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향수에 젖거나 일상의 불편함을 겪 어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아 확대된 국가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흐름이 었고, 그런 욕망에 동원된 것이 가라유키상 이었다. 그 때문에 러일전쟁 전후엔 가라유키상의 유괴 밀항이 눈에 띄게 늘어 났 고 누구나가 점령지를 목표로 남몰래 나라를 떠나갔 다. 그리고 이윤 에 밝은 업자들은 점령지로 물밀듯 소녀들을 보냈 (126쪽)다. 모리사키는 당시의 신문을 이렇게 인용한다. 싱가포르의 인구 약 25만 명. 거주 일본인 약 1800명. 그런데 그 과반은 추업부 醜 業 婦 라고 한다. 또 이곳에 거주하는 모 씨의 말로는, 그들 중 단신으로 나라를 떠 나 밀항을 기도한 여자들이 3분의 2. 그렇지 않고 나쁜 사람의 손에 걸려 감언에 속아 이곳에 와서 몸을 팔게 된 여자들이 3분의 1.( 후쿠오카니치니치 신문 福 岡 日 日 新 聞, 1909. 5. 6.)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러일전쟁 이후의 일본인 부녀매매조직은 활발 (180쪽)했다. 한국이 합병된 1910년의 신문도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8월 30일경부터, 갑자기 여객이 엄청나게 늘어나, 매번 여객들을 다 싣지 못하 는 연락선도 많았다. 그들은 병합 발표와 함께 재빨리 젖은 손에 좁쌀 묻히는 식 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인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젊은 여성들이 많다는 점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29

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2, 30엔을 벌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가 작부가 될 뿐 아니 라 어떤 일이든 포주가 하는 대로 맡기겠다는 증서 부모의 수락서를 갖고 있 다.(132쪽, 같은 신문, 1910. 9. 6.) 당시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 및 만주 朝 鮮 及 び 満 州 에는 그렇게 해서 건너온 일본인 여성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실려 있다. 그건 한 국에 체재했던 경성 거류 일본인 총수 4만 3253인 가운데 직업을 가지고 있 는 1만 7281인의 직업별 순위를 보면, 하녀가 961인으로 제4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소위 서비스업으로 간주할 수 있는 2종예기가 347인으로 제12위 에 랭크되어 있 (허석, 56쪽)는 상황 속의 일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발간된 일본어신문도 식민지의 발전에는 그 이면에 부녀자가 잠재적 세력을 형성 하고 있는 것도 사실 ( 朝 鮮 新 聞, 1911. 2. 23. 허석, 62쪽에서 재인용)이라고 말 한다. 사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 전부터 한국에 많이 건너와 살 았다. 그중에는 속아 팔려온 소녀들이나 살길이 막막했던 가난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의 이동 을 조장하고 묵인한 건 국가권력과 민간업자 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훗날의 조선인 위안부 의 전신은 가라유키상, 즉 일본 인 여성들이었다. 그들 역시 가난한 시골처녀들이었고, 감언이설에 속거나 부모의 뜻에 따라 팔려간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인 위안부 역시 가부 장제와 국가의, 가난한 여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 만들어낸 존재 였다. 이들이 러일전쟁 때 이미 일본군을 위안 했다는 것은, 일본군이 1930년 대에 처음 만든 것처럼 알려진 위안소들이 실은 일찍부터 존재했다는 사실 30 제국의 위안부

을 말해준다. 그 시발점에는 일본인 여성들이 있었고, 민간인이 경영하는 시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처음엔 국가가 아닌 가족 을 위한 희생에 나선 것이었고 따라서 고향 의식만 강했던 이들은 전쟁이 터지자 일본인의식이 강해지면서 남 자들을 뒤에서 돌보기도 (182쪽) 하게 된다. 지사 志 士 들은 천황의 국가에 환상을 가졌고, 가라유키상은 고향의 행복에 환상 을 품고 있었다. 차원을 달리하는 이 두 가라유키가 그래도 문득 서로 접점이 생 기는 때가 있었다. 바다를 건넌 지사들은 가라유키상이 일하는 유곽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도 앞장서서 돌보았다 고 동아선각지사기전 東 亜 先 覚 志 士 記 伝 에 나온다. 그들은 가라유키상을 낭자군이라고 불렀다.(226쪽) 낭자군 이란 娘 子 軍. 사회 최하계층에서 고통스럽게 일하던 여성들을 군인 에 빗대어 부른 말이다. 국가의 욕망 실현을 위해 동원되었던 이들이 어느샌가 국가의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되는 존재로, 국가를 위한 역할을 하 는 이들로 인정받게 되면서(물론 동원을 위한 국가의 수사일 뿐이다) 생긴 말 이었다. 훗날의 위안부들 역시 낭자군 이라고 불리었고( 마이니치 클럽 별 책 일본의 전력 의 위안부 사진 설명문과 사진, <사진 2> 참조), 위안부 들은 그 렇게 국가와 남성에 의한 피해자이면서 국가에 의해 애국자 의 역할을 담 당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화해를 위해서 ). 그것은 분명 국가의 부조리한 책략이었지만, 외국에서 서러운 음지생 활을 하던 그들에게는 그 역할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수 있다. 싱가포르 근처에는 거의 6000명의 가라유키상이 있었고 1년에 1000달러를 벌었는데, 그 돈을 일본인들이 빌려 상업을 했 (232쪽)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31

다는 이야기는 해외의 가라유키상들이 일본 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간 이 동 이 더 쉬워진 근대에, 경제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타국으로 떠 났던 남성들(군대도 그 하나다)을 현지에 묶어두기 위해 동원되었던 이들이 가라유키상 이었던 것이다(가라유키상의 첫 상대가 일본 항구에 정박한 러시 아 군인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은 성적 위무 를 포 함한 고향 의 역할이었다. 일본의 가난한 지역의 가난한 소녀들이 해외로 멀리 보내져 신산한 삶 을 보냈던 상황은 야마자키 도모코 山 崎 朋 子 의 산다칸 8번 창기집サンダカン 八 番 娼 館 에도 잘 그려져 있다. 야마자키가 취재한 나가사키 長 崎 의 가라유 키 상은 아직 어린 나이에 부모에 의해 업자에게 팔려 멀리 영국의 식민지 였던 보르네오의 항구 산다칸까지 가게 된 여성이었다. 조선인의 가담 인신매매와 성매매 그중에서 조선반도에 와서 몸을 팔던 여성들이 임신해 낳은 아이들은 조 선인의 양녀 (136쪽)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가라유키상의 양녀 는 그렇게 조선인의 집에서 소학교를 다 니며 자란 여성이다. 이들은 주로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을 상대했지만, 조선인 노동자들 을 상대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철도 부설을 위해 동원된 이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때 철도 연변에서 유곽을 운영하던 사람 중에는 조선인도 있 었다. 모리사키는 일본인 출자자가 있었을 것 이라고 적는데, 그는 공사 와 밀접하게 연계하면서 유곽을 공사장이 이동하는 지역으로 옮겨갔다 (140쪽). 사실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업자, 곧 소녀들을 일본에서 32 제국의 위안부

사진 2 일본의 전력 에 실린 위안부 사진. 1938년 6월 18일 황허 연안 류위안 柳 園 에서 찍은 사진으로, 오른쪽 페이지의 군인들 사진 과 함께 도하 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다. 일본 군 또한 낭자군을 데리고 다녔다. 위안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조선 여성이 많았던 그녀 들은 언제나 진격하는 부대를 따라 최전선으 로 향했는데, 사진을 찍으려 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망향의 염을 떨쳐버리기 위 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데려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녀들이 죽으면 보충하기 위해 이경춘 은 일본으로 갔다 (143쪽). 이렇게 일본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에는 근대 초기부터 조선인 들도 깊이 관여했다. 여성을 위안부로 만들어 상품화한 업자에도, 위안부를 성매매한 이용자 군인이나 군속 중에도 조선인들은 적지 않았다. 말하자 면 위안부를 강제로 끌어간 직접적인 주체는 업자들이었다. 위안부 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그 안 에서 차별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 그리 고 조선인 위안부 라는 존재가 생기게 된 것은 이들의 위치를 조선인 여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33

성들이 대체한 결과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한국의 식민지화와 식민지 로 이식된 공창제도가 있었고, 중간매개자들은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존 재였다. 공창과 사창 여러 종류의 위안소들 여자들은 야전우편국에서 매일 고향으로 송금을 했다. 송금되는 돈은 (중략) 머 지않아 국내 창기와 마찬가지로 적어졌다. 여자들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 이다. 이런 유곽을 이용하지 못하는 병사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창굴도 늘어났다.(155쪽) 머지않아 국내 창기와 마찬가지로 적어졌다 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라유키 들이 고향을 떠나 타지까지 온 것은 유괴당하는 경우를 제외한 다면 본국보다 벌이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익숙한 고향을 떠나 이동 하는 것은 국내에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거나 임금이 국내보다 낫기 때문 이었다. 후에 다시 보겠지만 그런 식의 이동과 경제의 관계는 오늘날도 이 어지고 있다. 만주 가는 곳곳마다 우리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마굴이 없는 곳이 없다. 금년 (1907) 5월의 조사에 따르면, 다롄 大 連 에는 예기(기생)가 167명, 작부가 282명, 창 기가 113명, 중국 창기가 76명, 즉 700여 명의 매춘부가 있다. 그들 이외에 영업 신청을 하지 않은 무허가 매춘부가 얼마나 있을는지는 상상할 수도 없다.(157쪽, 후쿠오카니치니치 신문, 1907. 12. 17.) 모리사키는 이들의 숫자를 나열하면서 모두 매춘부 라고 말한다. 매춘 34 제국의 위안부

의 경로는 다르지만 노래와 춤을 제공하는 예기 도, 술을 따르는 작부 도, 남자들에게는 노래나 웃음뿐 아니라 몸도 살 수 있는 이들이었다. 실제로 우리 앞에 나타난 위안부들도 일부는 성적 위안 뿐 아니라 술을 따르거나 노래와 춤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위안부 로서 증언한 이들 중에 는 군인이 중심이 된 곳에서 단순히 성적 위안 만 제공한 이들 이외에도 매 춘을 겸하는 요릿집 등에서 당시의 표현으로 하자면 작부 나 예기 로 일한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 신문을 인용하며 모리사키는 다시 말한다. 가라유키상은 이렇게 국가의 공창제에 그대로 흡수되어갔다. 그것은 조차지뿐 아니라 일본의 지배세력이 가닿는 지역이라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풍경이었 다. 구 만주 지역은 물론이고 청국의 북쪽이나 남쪽 주요 도시에서는 가라유키상 을 공창과 사창으로 나누어 일본의 경찰권으로 관리했다.(157쪽) 북쪽 대륙 방면으로 건너간 가라유키상은 그곳에 일본의 주권이 미치기 시작하 자 곧 공창제에 의해 관리되었다.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정부 방침에 따라 헌병대 가 곧잘 창기의 매독 검사를 강화시켰다.(233쪽) 이런 과정을 거쳐 1921년에는 이미 조선, 사할린, 구 만주에서 창기 노릇 을 한 이들은 3000명이 넘었 (233쪽)다. 그중에는 국가의 영업허가를 받은 매춘시설인 공창 뿐 아니라 허가를 받지 못한 사창 도 존재했다. 공창이란 말하자면 경찰이라는 국가권력으 로 관리 했던 곳을 말한다.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군대가 관리하기 전 에 경찰이 관리했고, 경찰이 없는 전쟁터에서는 위안부 를 일본군이 관리 하게 된 것이다.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35

90년대 이후 위안소 로 알려진 곳들은, 그렇게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곽 까지 포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군인들이 그 존재는 파악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이용하지 않았던 사창까지 포함된 것일 수도 있다. 한 한국인 위안부는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도 이용하는 위안소에 있었다 면서, 그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끌려간 곳은 대만 사람의 집이었는데 큰 단층집이었다. 창문에 창살이 있었 다. 그 집에는 간판이 있었다. 간판을 받을 때는 허가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 략) 대문 입구에는 주인과 관리인이 앉아 있는 사무실이 있었고 그 앞으로 복도 가 있었다. 그리고 복도 양쪽에는 색시방이 죽 늘어져 있었다. (중략) 대문 옆에 는 꽃이랑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우리는 방을 한 개씩 차지했고 그리 크지 않은 방에는 이불과 옷이 있었다. 집안은 깨끗하지 않았다. 화장실도 하나뿐이었다.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여자들은 사무실의 오른쪽 방에 나와 앉아 있었 다.( 강제 2, 34쪽) 군인들은 들어오자마자 마음에 드는 여자를 한 명씩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 문 밖에서는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민간인 손님은 대부 분 일본인과 대만 사람이었다. 민간인이라도 한 시간씩 자고 가는 뜨내기도 있 었고 하룻밤 자고 가는 사람도 한 달에 몇 명씩 있었다. 나한테 오는 민간인들 은 주로 대만 사람이었다. 일본말이 아닌 다른 말을 하고 피부가 일본 사람보다 검고 냄새도 나니까 대만 사람인 줄 알았다. 옷은 보통 민간인 옷이었다. 추잡했 다.(35쪽) 허가 를 받아야 간판 을 내걸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민간인도 이용할 36 제국의 위안부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시설이 군인이 직접 경영한 곳이 아니라 민간인이 경 영하고 관리한 곳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군이 이곳을 허가 했다는 것은 군 인이 가도 되는 곳(지정업소)로 지정했다는 의미이다. 위안부들은, 일본군 은 기본적으로는 지정업소 에만 가도록 종용했고 그 이외의 곳에 가는 것 은 금지했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들은, 군인이 가도 될 만하다고 판단해 지정받은 업소가 아닌 일반 유곽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곳들 중에는 이전부터 있었던 곳도, 수요가 많아져 매춘사업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안 민간인들 이 새로 만든 곳도 있었을 것이다. 상관들은 시내의 좋은 곳에 가지만(대개 노래와 춤, 술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었다) 일반 병사들은 부대안 시설 같은 그보다 못한 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화해를 위해서 )도 그런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렇게 대륙 각지에 공창제가 시행되자 남방에서도 여자들이 이동해왔다. 그리 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을까 말까 할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남방에 일 본군이 공격해 들어가게 되자, 동남아시아 각지에 공창제가 재개되었다. 이번에 는 일본이 관리하고 현지 처녀들이 공창에 합류했다. 또 군 관계의 위안대가 보 내졌다. 쇼와 초기(1920년대 후반)에 상해로 건너간 가라유키상 중에는, 이때 일 본군 위안부의 감독이 된 이도 있었다.(233쪽) 말하자면 아시아 각지에 존재했던 매춘시설이 모두 일본군 위안소 였던 것은 아니다. 여러 종류의 공창 과 사창 이 존재했고, 일본군 이 관리하고 공식적으로 병사들이 이용한 것은 기본적으로는 군이 허가한 공창 뿐이었 다고 보아야 한다. 또 중국 등 전쟁을 한 점령지에는 여성에 대한 강간 도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37

많았지만, 이런 식의 공창 에 있던 여성들도 있었다. 그렇게 다른 상황에 처 해 있었던 여성들을 똑같이 위안부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본군은, 기존의 공창과 사창만으로는 모자라 위안부 를 더 모집하기 로 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업자에게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300만 명을 넘는 군대가 아시아와 남태평양 지역에까지 머무르면서 전 쟁을 하게 되는 바람에 수많은 여성들이 필요시된 데에 따라 가혹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위안부 였다. 하지만 현지 처녀들이 공창에 합류 했다는 사실은 모든 위안부가 똑같이 일본군에게 유괴 나 사기 를 당한 것은 아니 라는 사실도 말해준다. 일본군 위안소 는 하나가 아니다. 다시 말해 군인이 어느 날 독자적으로 고안해서 위안소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일찍부터 국가의 확장과 함께 존재했 던 매춘시설을 이용하다가 주둔병력이 많아지자 군이 장소를 늘리고 관리 하기 위해 지정했던 곳이 이른바 위안소 였다. 말하자면 일본군이 이용했 다고 해서 아시아 전역에 있었던 그런 유의 시설들을 전부 일본군 위안소 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군인이나 헌병에 의해 끌려간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개 별적으로 강간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자면 수요를 만든 것이 곧 강제연행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38 제국의 위안부

3. 우리 안의 협력자들 앞서의 센다의 책에는 어느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1970년대 초반, 충 청북도 출신의 쉰네 살 인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 갔지만, 1940년 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농촌이었던 우리 고향 에 키가 작은 일본인 남자가 와서 돈 되는 일이 있다. 일은 편하고 식사도 제공 된다 면서 여러 집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마을마다 일본인 경찰의 주재소 가 있었는데, 그런 경찰이나 면장(원문에는 괄호 안에 촌장 村 長 이라고 쓰여 있다- 인용자)을 대동하고 다녔으니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생활이 여의치 않은 농가에서 몇 사람 응모했습니다. 응모는 미혼인 젊은 여성만 할 수 있었습 니다. 일본 내지의 방적공장이나 군의 피복공장 등에 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에, 사람들은 그런 일로 생각하고 응모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101쪽) 키 작은 일본인 남자 가 중간업자나 포주였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런데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이 다름 아닌 면장(촌장) 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협조한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마을의 어느 집에 대상이 될 만 한 가난한 처녀 가 있는지를 알고 부모나 본인을 설득할 수 있는 이들은 순 사나 중간업자가 아닌 마을 내부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센다는 인터 뷰한 위안부의 말을 이렇게 정리한다. 그녀에 의하면, 1937년 말부터 1939, 40년 이전까지는 경찰이나 촌장을 대동하 고 오기는 했어도 강제는 아니었고, 동반한 것은 속이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 다. 쇼와 시대 초기에 도호쿠 東 北 지방에서 도쿄의 업자들이 농민을 속여 처녀들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39

을 데리고 갔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따라서 농촌에 주재하는 순사들은 주역이 아니고, 군의 어용매춘업자들의 압력기관으로서 칼소리를 내며 따라갔을 뿐이 었던 것 같다.(102쪽) 센다의 설명은 모집을 둘러싼 순사-경찰과 마을의 장-행정기관의 관 계를 가장 사실에 가깝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금의 위안부 증 언집에도 동네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알려주었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적 지 않다. 한 위안부는 지금 생각하니 나보고 배급을 타가라던 이장 아들이 계집애가 있는 집을 다 가르쳐준 것이 아닌가 싶다 ( 강제 2, 47쪽)고 말한다.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38년에 우리 동네에 어떤 사람이 와서 광목공장에 취직할 사람을 모집하고 다녔다. 그 사람은 동네 구장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하 룻밤을 자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의 묵인 아 래 동네일을 보는 구장을 따라 광목공장에 취직하러 나서게 되었다. 우리 집은 술장사, 밥장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동네 사람, 지서 주임, 면장, 구장, 반장까지도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서 주임이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한 것 같고 동네의 구장, 반장이 나서서 나를 끌어냈다.( 강제 2, 169쪽) 센다는 일본군이 조선총독부에 모집을 의뢰했고 총독부가 각 도 군 면에 내려보내 최종적으로는 면장의 책임으로 모았다 (103쪽)는 전쟁 당시 군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당시 면장의 아들을 인터뷰한 이야기도 쓴다. 그는, 1941년경 5월이나 6월 주재소 순사가 다녀간 직후에 머리를 싸 매고 고민하다가 결국 일본 내지에 좋은 일자리가 있소. 어떻소, 딸을 보 내지 않겠소? 딸한테 송금을 받을 수도 있을 거요! 라고 권유하면서 돌아다 40 제국의 위안부

닌 (104쪽) 아버지에 대해 말하는데, 면장이 돌아다닌 집은 가난한 집, 그 리고 아이가 많아서 생활이 어려운 집 이었다. 그리고 그가 권유한 처녀는 우리 고향에서는 네 명이나 다섯 명 이었고, 모인 건 두 명 이었다. 그랬 기 때문에 이들이 떠날 때의 모습은 울면서 보내는 광경은 분명 있었지만, 취직하러 고향을 떠나는 사람을 배웅할 때의 모습이었고, 심각한 건 아니었 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05쪽)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모집 대상은 위안부가 아니라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정신대였 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동네 사람들이 그런 모집에 가담한 것만은 분명 하다. 물론 이들은 당시의 국가 의 여성 동원에 협조했을 뿐이고, 그런 한 그들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신대건 위안부건, 그들 이 그렇게 동원되는 과정에 조선인이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묵과한 것이 위안부 문제 를 혼란에 빠뜨린 원인이기도 했다. 참혹하고 슬픈 시대였습니다. 아버지는 약했다면 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 만 당시의 조선 사람이 달리 뭘 할 수 있었을까요? 해방 후에는 고향을 떠날 수밖 에 없게 되었지만, 저는 아버지는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면장 을 맡게 된 게 불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106쪽) 면장을 맡게 된 게 불운 이라기보다는 한국이 병합된 것이 불운이었다. 2000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면서, 면장 이건 읍 장 이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제에 대한 영합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그 지위를 얻었다 해도 누군가는 구조적으로 국가정책에 대 한 협력자 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센다가 말하면서 그는 울었다 면서 협력 자의 아픔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협력하도록 만든 나라의 후예로서 그런 아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1

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위안부들 중에는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 들이 더 밉다 ( 강제 1, 57쪽),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자기 살려고 남을 죽을 곳에 넣었으니 마찬가지로 나쁘다 (같은 책, 71쪽)고 말하는 이들도 적 지 않다. 사죄라는 것이 미움 을 풀기 위한 응답이라면,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 게 사죄 해야 할 이들은 있다. 그런 사태야말로 식민지 의 모순이자 조선 인 위안부 의 모순이다. 식민지화란 그렇게, 국가에 대한 협력을 놓고 구성 원 사이에 치명적인 분열을 만든 사태이기도 했다. 4. 강제로 모집된 정신대 그렇다면 일본군이 강제로 데려갔다 는 증언들은 무엇일까. 위안부 들의 증언은 자신을 데려간 주체가 마을 남자 이거나 모르는 아 저씨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경찰 이나 군인 이었다고 말하는 경우 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해서 중급 규모의 여자사냥은 전쟁의 확대에 따라 대규모의 여자사냥으 로 바뀌어간다. 대규모로 여성들이 모집된 것은 1943년부터였다. 모집이 가장 극 심했던 것은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 阿 部 信 行 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이 라고 한다. 그녀들은 정신대 挺 身 隊 라는 이름하에 모집된 것이다. 정신대. 이 얼마나 그럴듯한 단어인가. 이 정신대 원의 자격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이었다. 다만 총계 20만(한국 측 추정치)이 모집된 가운데 42 제국의 위안부

위안부 가 된 사람은 5만 내지 7만 이라고 한다. 모두가 위안부가 된 것은 아니 다.(106쪽) 센다는 정신대 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가 모집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단정한 이유는 당시 일을 조사한 한국인 신문기자 (106쪽)가 우선 18세에서 22, 3세의 여성만을 골라 위안부로 만들고, 중년 여자는 군수공 장에 보내진 것 같습니다 (107쪽)라고 한 말에 있는 듯하다. (후에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처음 제기한 윤정옥 교수는 센다의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정신대와 위안부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그러던 것이 시간 이 지나면서 애매하게 겹쳐지면서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결과로 만들 어진 기억이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위안부 의 모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정신대 의 모집 은 전쟁 말기, 즉 1944년부터였다. 그리고 정신대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였다. 일본은 1939년부터 국민징용 령,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국민근로동원령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14~40세의 남자, 14~25세의 미혼 여성을 국가가 동원할 수 있도록 했는데, 12세 이상 이 대상이 된 것은 1944년 8월이었다(일본 위키피디아 여자정신 대 항목). 그나마 식민지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발동되지 않았다. 그러나 센다 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1970년 8월 14일자 서울신문 은 1944년에 정신 대 제도가 시행되었다고 쓰면서 이렇게 말한다.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이 정신대는 사실상 나치의 소 녀대보다도 잔인했던 위안대. 정신대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군수공장, 후방기지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3

의 세탁소 등에도 배치됐으나 대부분 남양, 북만주 등 최전선까지 실려가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 기사는 일본에서 시행된 제도가 곧바로 한국에서도 시행된 것처럼 오 해했고, 그에 더해 정신대가 위안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기사는 이어 서 작가 한운사의 말을 빌려 일선부대에 여자들이 끌려오면 1개 소대에 2, 3명씩 배치, 천황의 하사품으로 굶주린 사병들의 노리개가 되었고 날이 새 면 또 다른 부대로 끌려가 곤욕을 겪어야 했다 고 전한다. 그리고 군수공장 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사진에 일제는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숱한 부녀 자들을 동원, 군수공장의 직공이나 전방부대의 위안부로 희생시켰다 고 설 명해두기도 한다. 하지만 정신대 란 남성들을 전쟁에 보내 노동력이 부족해진 일본이 여 성들을 공장 등의 일반 노동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든 근로동원제도였다. 무엇보다 위안부 와 이들이 다른 것은 정신대 는 12세 이상의, 즉 중학교 이상의 학생 이나 졸업생이 주요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위안부 들의 다수는 가난이나 가부장제 속의 교육차별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거 나 저학력이었지만, 정신대 에 동원된 이들은 대부분 학교교육 시스템 안 에 있는 이들이었다. 윤정옥 교수가 정신대 에 징발되지 않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고 말하는 것도 정신대 의 대상자가 처음부터 위안부 와는 달랐 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에는 여자정신근로대, 만 15세부터 25세로 조직 이 라는 제목의 기사( 매일신보, 1945. 6. 11.,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 원회, 280쪽에서 재인용)가 보인다. 44 제국의 위안부

긴급 증산을 위하여 이미 생산전에 참가하고 있거니와 8월부터는 여자들도 근로 에 참가하기로 되었다. 만 15세부터 25세까지의 여자 중 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자들을 대상하여 여자근로정신대를 조직하는 것으로 국민의용대의 조직 발전 을 기다려서 구체적으로 결성할 모양인데 여자근로정신대원은 상시요원과 임 시요원의 구별을 두고 상시요원은 여자들이 할 만한 사업 중에 동원하며 임시요 원은 어획이 많았을 때, 운반 같은 데 동원하는 등 적절한 방면에 동원하기로 되 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에서 정신대 제도가 실제로 (법에 의거한) 강제적 동원 의 형태로 가동된 것은 1945년 8월인 듯하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1944년 에는 조선에서도 정신대가 조직되었는데, 그 배경을 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사치와 향락과 안일만을 찾고 있던 양키 미국 여자들도 싸움에 지지 않겠다고 공 장으로 몰려들어 벌써 전 미국 공원의 반 이상을 여자들로 채우고 있다고 한다. 이 양키의 도전을 마다할 황국의 여자들이 아니다. 다 같이 보내게 되지 않았는 가. 이들 장성들이 정신하고 있던 생산진은 우리들이 굳게 지키기 위하여서 반도 여성들의 총궐기가 있어야 할 지금이다. 여자는 절대로 징용을 안 한다. 이러한 때 나의 뒤를 따르라는 듯 여성 진군의 봉화를 들고 일어선 근로낭자군이 있으니 그 이름은 평양여자근로정신대이다. 이미 내지에서는 수많은 정신대가 조직되 어 증산장으로 진군하여 좋은 성적을 드러내고 있는 터이지만 조선서는 이제 평 양정신대가 여자근로의 집단동원으로는 처음이다.( 매일신보, 1944. 4. 19., 같은 보 고서에서 재인용) 내지 일본에서 정신대 모집이 시작되자 조선에서는 이런 식의 자발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5

적인 동원 이 시작되었다. 이후의 같은 신문에 실린 여기 지원병의 누이 있다, 생산전장은 어뎁니까, 함남으로부터 정신대를 자원해 내성 (1944. 9. 14.), 정신대 아니라도, 두 처녀 탄원 들어 우선 사무 위촉 (1944. 9. 16.), 가 정도 나라 있은 뒤에야, 혈서로 여자정신대 탄원한 아리마 양 (1944. 9. 20.), 처녀들이 바치는 이 적성, 여자정신대원 지원 쇄도 (1945. 2. 24.) 등의 기사 에 의하면 자원 형태가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자원 역시 (애국 심을 발휘해야 하는) 총체적 강제 속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서울신문 의 기자는 정신대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정신대가 그대로 위안부가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식의 자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다른 한편에서, 국민동원을 징 용으로 간주하고 기피했던 이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미혼 여성 의 징용을 두고 개중에는 이를 위안부로 여기는 등의 황당무계한 소문이 항간에 퍼져 있 (후지나가 다케시, 2006. 후지나가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 민기금 이 엮은 정부 조사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 4 [1998]에 수록된 1944년 7월의 일본 내무성 문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는 상황에서 앞서의 신문이 전하는 사례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하는 착각은 일본이 국민동원령 이라는 법 을 만들어 전쟁을 위한 국민동원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 분명하다. 위안 부들의 증언에는 정신대로 갔다가 위안부가 된 경우도 있으니, 그런 사례가 와전되면서 정신대와 위안부가 같은 것으로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 쩌면 처녀공출이라는 단어가 (성경험이 없는) 처녀 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정신대를 곧바로 성노동에 동원되는 위안부 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기자는 센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46 제국의 위안부

통지서가 온 다음에 사흘이 지나면 어디로 모였습니까? 면장 집입니까? 주재소 앞입니다. 거기서부터 경찰이 인솔해 트럭이나 기차에 태워서, 도망치 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서울로 데리고 왔습니다. 배웅하는 가족들, 엄마들은 딸들 발 아래 매달리면서 엉엉 울었고, 그 사람들을 경찰이 떼어놓으려고 하면 이번에 는 그 경찰의 다리에 매달려 울면서 애원했는데, 발로 걷어차였지요. 세상 어느 나라에, 딸이 군인의 노리개가 된다는데 기꺼이 보내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가 난한 농부라도 인간이니까요. (110쪽) 트럭이나 기차에 태워서, 도망치지 않도록 감시 한 주체는 경찰 이다. 그런 데다가 이들은 통지서 를 받고 모였다고 한다. 이 상황은 명확히 공 적 인 징집이었고, 징집 대상이 노동력 보충을 위한 정신대 임은 분명하다. 실제 위안부들의 증언에서, 이런 식의 이별 장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배 웅하는 가족들, 엄마들은 딸들 발 아래 매달리면서 엉엉 울었고, 그 사람들 을 경찰이 떼어놓으려고 하면 이번에는 그 경찰의 다리에 매달려 울면서 애 원 했다는 경우 역시 증언에서 나타나는 평균적인 모습과는 다르다. 실제 위안부들의 증언을 보면, 단독으로 떠나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약 간씩 차이는 나지만, 저녁이라도 준비한다고 혼자 논두렁에서 쑥을 캐고 있는데, 3, 40대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이런 고생 하지 말고 배불 리 먹을 것도 주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아봐준다고 자기만 따라오라 고 해서 가게 되는 식의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중간에 무서워져서 우는 그녀의 뺨을 때리더니 강압적으로 다시 그녀에게 길을 재촉 한 것도 일본 군이 아니라 조선인 남자 였다(이국언, 74~75쪽). 공장 에 보내준다고 속여 데려간 한 남자는 공장에 간다고 하더니 이야기가 다르지 않느냐고 하자 김 씨는 하라는 대로 하라고 하며 우리를 일본 사람에게 넘기고 사라져버렸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7

다 ( 강제 1, 87쪽). 정신대 동원과 위안부 동원의 풍경은, 예외로 보이는 증언을 제외한다 면(제외하는 이유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확연히 다르다. 이들이 트럭 이나 기 차 에 실려 대륙 혹은 남방 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대도시에 집결 한 다음의 일이었다. 재일교포 김일면의 책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 는 어떤 산촌 지 역에서는 할당된 인원을 달성하려고 트럭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신 대 로 지명한다는 통지를 내고, 만약 도망치려는 기색이 보이는 여자는 잡 아서 수갑을 채워 유치장으로 처넣었다. (중략) 나중에는 길거리에서 여자 들을 잡아왔다 (182쪽)고 말한다. 김일면 역시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한 것이다. 위안부 를 강제로 끌어 갔다고 말해 조선인 위안부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요시다 세이지 吉 田 淸 治 의 책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1977), 나의 전쟁범죄 (1983)이다. 최근까지도 언론은 요시다의 책을 강 제동원 의 증거인 것처럼 다루지만( 조선일보, 2012. 9. 6.), 이 책의 신뢰성 이 의심받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요시다 자신도 그의 책이 거짓 이라는 비판에 대해 책에 진실을 써봐야 아무런 이익도 없지요. (중략) 사 실을 숨기고 자기 주장을 섞어 쓰는 건 신문도 하는 일 아닙니까 ( 주간 신 초 新 潮, 1996. 3. 27.)라면서 반론을 하지 않겠다 ( 아사히 신문, 1997. 3. 31.) 고 말한 바 있다. 앞서의 기자나 재일교포 학자, 그리고 요시다에 이르기까지 강조된 강 제연행은 우선은 정신대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윤정옥 교수도 정 신대 모집에선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고 말한다. 강제연행이 있었다면, 국 가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정책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데려간 일반인 48 제국의 위안부

이 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신대가 그런 방식으로 모집된 시 기는 패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단기간에 20만의 소녀 를 모집할 수 있었을 리도 없다. 여성들을 군이 주체가 되어 강제로 연행/납치 한 것은 일반적으로는 전 쟁터에서 개인 혹은 집단이 자행한 글자 그대로의 강간 의 경우였다. 또 그 대상은 기본적으로는 조선인 여성 이기보다는 타국 여성 적국의 여성이 었다. 위안부 중에는 함께 있던 일본군이 중국인 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보 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조선인 위안부 와 일본군의 기본적인 관계는, 그 렇게 중국인과 일본군의 관계와는 달랐다. 5. 소녀 20만 의 기억 앞의 기자는 1943년부터 45년까지 정신대에 동원된 한일 두 나라의 여성 은 모두 20만가량. 이 가운데 한국의 여성은 5~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고 말한다.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한 기자조차 조선인 위안부는 5~7만 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동원된 정신대가 1944년 2월 시점에서 16만 명이었다고 하지만,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정신대의 숫자였다. 그런데 센다는 일본군이 동원하고 사용한 위안부 총수는 1938년에서 1945년까지 8만이라고도 10만이라고도 하는데, 그 대부분이 조선인 여성 이라고 말한다(28~29쪽). 이 책 부제목의 8만 명 은 여기서 나온 숫자였다. 그리고 센다가 쓴 숫자는 한국인 기자가 말한 숫자보다 많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20만 명이 아니라 2만 명, 아니 2000명 이라 해도,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 가 된 것이 식민지 에 대한 일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49

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 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 처 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안부 20만 명 설은, 센다를 비롯한 위안부 문제 연구자와 운동 가들이 서울신문 등의 기사를 전적으로 믿은 결과로서 정착되었을 가능 성이 크다. 설사 20만 명 이었다 해도 그 인원을 모두 군이 강제로 끌어간 것은 아니었다. 20만 명이라는 숫자 이상으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 상이 상징하는 것처럼, 위안부 가 대개 어린 소녀였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그렇지만 그런 이미지는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서 이 문제가 보도될 때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했던 데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실제로는 위안부들은, 내가 나이가 제일 적었지. 거 간 중에. 다른 여자들 은 다 스무 살 넘었어 ( 강제 5, 35쪽)라거나 우리 있는 데는 한 스무 명 남 더라구. 그 사람들은 나이가 조금 많고 스무 살 다 넘고 전라도서도 오고 경 상도서도 왔더만 (87쪽)이라고 말한다. 증언한 본인 말고는 스무 살 다 넘 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우리 앞에 있는 위안부들의 당시 나이는 오히려 예외 였다. 거기 위안죠(위안소)가 많아. 많으니께 공치는 사람도 있더라구. 거기 가면 다 남 자 상대만 한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니더라구. 거기 여자들하고 다 얘기 해봤지. (중략) 나이가 다 고만고만해. 한 스무 살, 스물한 살, 최고 많은 게 스물다 섯 살. 서른 살 최고 많더라고.( 강제 3, 96쪽)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8월에, 미얀마(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의 소 50 제국의 위안부

탕작전에서 미군의 포로로 수용되어 전쟁정보국OWI의 심문을 받은 조선 인 위안부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5세 (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후나바시 요이치, 2004, 296쪽에서 재인용)였다. 어느 조 선인 출신 일본군도 위안부들이 스무 살, 스물한 살 이었던 자신들보다 나 이가 많아 누님 으로 부르며 지냈다고 증언하면서 나이가 많은 여자들은 정신대가 될 수 없 었다고 말한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 2011). 물론 어린 소녀가 위안부가 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어린 소녀가 위안소에 가게 되었을 때는 어떤 군인이 몇 살이냐고 해서 열 네 살이라고 대답했더니 젖이나 더 먹고 오지, 부모형제 보고 싶어서 어떻 게 왔느냐 ( 강제 2, 51쪽)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나이가 결코 평균적 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위안부상이 소녀로 정착된 것(위안부를 다룬 한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소녀 이야기>인 것도 그런 의 식을 반영한다)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탓도 있지만 앞서의 20만 명 설과 마찬가지로 그런 상상이 우리의 피해의식을 키워주고 유지하는 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증언한 위안부 들의 대부분이 십대에 강간당하거나 위안부 생활을 시작해야 했으니 일본군이 어린 소녀까지도 상대했다는 것은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녀 위안부 가 위안부의 평균적인 모 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위안부들 중에 어린 소녀가 있게 된 것은 일본군 의 의도에 의 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강제로 끌어간 유괴범들, 혹은 한 동네에 살면서 소녀들이 있는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우리 안의 협 력자들 때문이었다. 위안부가 된 소녀들을 가족이나 이웃으로서 보호하기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51

보다는 공부라는 교육 시스템에서 배제해서 공동체 바깥으로 내친 우리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설날에 내가 합천에 있는 우리 작은할아버지네로 갔어. 작은할머니가 사랑에 어떤 남자를 데리고 오더니 인사하라고 해서 인사드렸지. 그 남자가 마흔 살이 넘은 그 동네 이장이었어. 인사하고 몇 달쯤 후에 그 남자가 나를 찾아왔어. 복숭아나무에 꽃핀 3월이나 4월쯤 봄이야. 만으로 열네 살이었어 (1942년). (중략) 안 가려고 했는데 이장이 잠깐이면 된다고 나를 잡아끌고 올라갔 지. 갔더니 야트막한 산 위에 행길이 있는데 거기 짐차가 와 있더라구. 타라고 해 서 탔지. (중략) 그 차를 타고 대구까지 왔어. 대구에서 나는 그 이장과 어떤 집으 로 갔고 다른 여자들은 그 차를 타고 그냥 갔어. (중략) 하룻저녁인가 자고서 그 이장이 나를 부산의 방직회사까지 데리고 갔어.( 강제 3, 193~194쪽) 산으로 봄에, 봄에 인자, 친구 둘하고 셋이서 나물 캐러 갔는데 일본 남자 하나하 고 한국 남자 하나가 쪼끄만 도라크(트럭) 차에서 내려서 곁으로 오더라고. 그 사 람들이 과자를 주면서 따라가면 밥도 하얀 쌀밥에다 고기반찬에다 해주고, 뭐 과자도 주고 옷도 좋은 옷을 입혀준다 그러더라고. 내 나이 열세 살이었어요.(같 은 책, 222쪽)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 가 우리 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 강제 1, 124쪽) 52 제국의 위안부

그날도 언니들과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인 한 명과 그 사람의 앞 잡이인 듯한 조선인 한 사람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일본인은 당코바지를 입고 있었고 조선인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가 조명길에서 바둑을 두면 서 너를 찾고 계신다 고 말했다. 같이 놀던 애들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어디론가 도망쳤다. 나는 열두 살이었지만 키도 크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있어서 열다섯 살쯤으로 보였다. 전에 아버지가 똑똑하다고 심부름을 시킨 적도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믿고 그들을 따라갔다. 조명길로 데려가서 그들은 나를 골방에 밀어넣었다. 거기에는 이미 나처럼 속아서 온 여자들이 세 명 있었다.(같은 책, 136쪽) 그러자 세 살 위인 오빠가 계집애를 가르쳐서 어디에 쓰느냐면서 학교를 못 다니 게 했다. 오빠는 학교에 못 가게 책을 모두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버리면서 계집 애는 공부 가르치면 바람난다고 했다. 그래도 내가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하자 오 빠는 집에서는 할아버지가 계셔서 나를 때리지 못하니까 서당으로 끌고 가서 낫 으로 찔러 죽인다고까지 했다. 나는 옆집의 키가 큰 언니가 학교를 다니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학교에 못 가게 했기 때문에 그해(아홉 살) 늦은 봄에 엄마에게도 말을 안 하고 고모가 사는 서울로 도망쳤다.(같은 책, 183쪽) 첫 번째 증언에서 짐차에 태워 간 사람은 군인이 아니라 동네 이장이었 다. 세 번째 증언을 한 소녀가 여기저기 전전하다 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위 안부 가 된 나이는 열다섯 살이다. 이처럼, 어린 소녀들이 위안부 가 된 경 우는 대부분 주변 사람이 속여 데려가거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보호공간 이 되지 못한 경우다.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자신을 위안소에 보냈다고 생각하는 한 위안부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53

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원망 때문에 임종 때 사람을 보냈으나 나는 가지 않 았다. 딸을 어떻게 그런 곳에 보낼 수 있는가 하는 원망의 마음이 가시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 강제 2, 181쪽)고 말한다. 위안부 들이 위안부가 되기까지의 정황은 이렇게 하나가 아니었다. 강 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 라는 인식은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업자 등 주변 가담자의 소거, 예외적인 사례를 일반화한 수용이 만든 상이었다. 54 제국의 위안부

제2장 위안소에서 풍화되는 기억들 1.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 지옥 속의 평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 위안부의 역할 센다의 책에 등장하는 한 군인은, 옛 북만주의 쑨우 孫 呉 라는 곳에 있던 대소련 병참기지로 일본인이 만든 마을 에서 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군 대용 위안소가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숫자는 사단 군인 2만 명에 50명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민간인 관리인이 있었습니다. 군은 영업에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들에 대 한 관리는 위생 면에서는 군의부 후방 관계 군의가 하고 있었습니다. 정기적으 로 검진을 하고, 화류병 환자를 발견하면 각 연대의 주번사령을 통해 각 부대에 통지하고, 그 위안부에게는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즉 관리권은 군이 갖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55

고 있었습니다. 간접관리였지만, 군으로서는 성병을 가장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요?(64쪽) 군인들이 관리 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만 명에 50명 정도라는 숫자는 위안부들의 생활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육군 소위였다는 다른 군인은 이 렇게 말한다. 위안소는 바왕청 覇 王 城 에 큰 것이 있었고 카오청현 考 城 縣 에 출장소 같은 것이 있 었습니다. 바왕청은 통과하는 부대가 많은 교통요충지였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대규모 위안소가 필요했던 거겠지요. 카오청현의 위안소는 현지 주둔부대용이 고 위안부 숫자도 적어서 각 부대별로 날짜를 정해 이용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긴 경비주둔, 특히 우리처럼 시간이 정해져 있는 미군 비행기의 공격에 대비하 는 부대는 그 시간만 지나면 한가합니다. 고참병은 요령 좋게 외출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중략) 게다가 오랜 주둔생활 기간에 같은 위안부들과 지내다 보면 부 인 같은 느낌이 되는지 군인들도 그렇게 허겁지겁 욕망을 채우려 하지만은 않게 됩니다. 언제라도 할 수 있다는 식의 분위기였지요. 그래서 그녀들은 주둔부대의 일원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또 장식품이라고 할까, 위안부가 없는 주둔부대는 과 자를 갖고 있지 않은 아이처럼 폼이 안 난달까,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군 인들은 그녀들을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위안부들도 그에 부응해서 휴일에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선물을 가지고 와서 빨래를 해주거나 진지 옆에서 기관총을 손질하는 군인 옆에서 턱을 괴고 바라보 고 있거나 꽃을 꺾거나 하기도 했는데,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노래하니 평화로운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군인들도 (위안부들에게) 점심을 먹이거나 하고 있었습니 56 제국의 위안부

다. 주둔지에서의 군인과 위안부 관계는 어디든 이런 게 아니었나 합니다. 하긴 빨래야 군인들은 초년병 때부터 훈련을 받아 익숙해져 있으니 (술장사하는) 여자 들보다는 더 잘했지만요. 다만 그런(그녀들이 빨래도 해주는) 성의를 기뻐했습니 다. 하긴 조선인 위안부 쪽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는지 빨래를 잘했던 걸로 기억합니다.(65~66쪽) 주둔부대의 일원 이자 부인 같은 느낌 이었다는 위안부들. 사실은 이것 이 조선인 위안부에게 요구된 역할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군대에 투입 되어, 회사에서 일하는 남성을 여성이 집에서 일하며 다시 회사에 나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군인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거 기에 필요한 갖가지 보조작업을 하도록 동원된 것이 위안부였다. 그런 의미 에서도 전쟁터에서의 강간의 대상이 된 적의 여자 와 위안부는 군과의 관 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가족과 떨어져 전방에 나가 있는 군인들 을 부인 처럼 신체적 정신적으로 위무하고 사기를 북돋는 역할, 그것이 위 안부들의 원래 역할이었다. 위안부들이 군인들과 휴일의 평화로운 한때 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호원도 배운다고 배왔지. 미국 사람이 뭐시가(비행기가) 오는 거 같으면 총도 맞추면 이것 배우고. 이것저것 배우고 호다이(붕대)를 갖다가 어디 맞으면 어떻 게 감으라 카는 거 그거 연신 배와주고 놀 여개가 없어요.( 강제 5, 139쪽) 거기가 일선이라도 군인들 큰 전쟁 나가서 돌아오면 기모노 입고 에프론 하고 고 쿠로사마데시타( 수고하셨습니다 ) 인사하고 보통 때는 몸뻬 입고 안 그러면 스카 트 같은 거 입고. 기모노는 겨울거 여름거 봄거. 도시 가서 돈 주고 사야지. 인기까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57

이(원문에는 괄호 안에 송별회 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연예회 [여흥을 곁들인 술자리]의 잘못된 일본어발음일 가능성이 크다-인용자) 같은 거 하거든요.(같은 책, 140쪽) 조선인 위안부가 한 일은 성적 욕구를 받아주는 일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간호도 붕대감기도 배웠고 심지어는 총쏘기(총조립하기?)까지 배워 군인들 과 함께 전쟁을 지탱했다.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면 기모노에 에프론 차림 으로 맞아들이고 축하연에 참석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대동아전쟁 나고 거기 있는 여자들이 다 훈련받았지. 아침이면 다 나와서 모두 체조하고, 군대식으로 똑같이 훈련받았지. 신작로 운동장에서 훈련을 달 반은 받 았어. 수류탄 던지는 거 그거는 거 부대서. 부대서 거기서 훈련시키는 사람 있어. 훈련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군인이지.(같은 책, 140쪽) 이것은 전쟁 발생 이후의 상황인데, 후에 다시 보겠지만 위안부들이 처했 던 상황은 장소와 시기에 따라 달랐고 전선인지 후방인지에 따라서도 달랐 다. 또한 어떤 군인을 만났는지에 따라서도 달랐다. 물론 그 어떤 경우도 그 들이 처한 상황이 불행한 상황이었다는 본질적인 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 니다. 그러나 위안부의 그런 다양한 모습을 보지 않고는 결코 위안부의 총 체적인 면모를 포착하지 못한다. 한 일본인 위안부의 이야기는 위안부 와 군인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 고 있다. 위안부가 될 때, 전쟁터에 도착해서 처음에는 이런 몸이 된 나도 나라를 위해 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전선의 위안소에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 58 제국의 위안부

는데, 후방 병참기지에 있게 되면 점차 생활에 익숙해진다고 할까 지쳐버리거든 요. 왜냐하면 전방에서는 군인들과 먹는 것도 같이 먹고 본인들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우리도 그런 그들을 진짜로 위로해주려고 생각했지 요. 군인들도 우리를 보면 수고가 많네 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후방으로 가면 정말로 공동변소 취급인 거예요. 장교나 하사관들 중엔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 람도 있었지요.(센다 가코, 81~82쪽) 즐거웠던 일은, 글쎄요. 내 경우에는 역시 시코쿠 四 国 사람을 만났을 때였어요. 그것도 아이치 愛 知 라든가 마쓰야마 松 山 라든가, 고향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기 뻤지요. 군인들도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성관계를 빼고 고향의 축제나 산이 나 강 얘기를 같이 하곤 했어요. 군인들도 그걸로 만족했지요.(같은 책, 82쪽) 이렇게 위안부 를 둘러싼 상황은 전방인지 후방인지에 따라 달랐을 뿐 아니라 상대에 따라서도 달랐다. 자원한 위안부 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역 할이 군인의 위안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것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몸 이 되었다고 자기 자신을 비하해야 할 만큼 사회의 차별적 인 시선을 받아온 그녀들에게는, 군인을 상대하는 위안부 란 처음으로 자 신의 앉을 자리를 양지 에 내받은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약간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었을 뿐, 위안 이라는 이름의 노동이 대부분의 위안부 들에게 성과 신체를 혹사 당하는 가혹한 노동이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여전히 위 안부 생활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84쪽)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센다는 속아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이렇게도 쓴다.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59

그녀들이 부대를 따라 행동할 때는 양복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양복이라고 해봐 야 면원피스나 투피스였다고 한다. 그런 복장으로 특별한 날에 입는 옷이나 자신 의 일상용품들을 넣은 트렁크를 들고 군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습지대 같은 곳을 걸을 때 혹은 강을 건널 때는 훈도시(남성용 속옷-인용자)만 걸친 군인 옆에 서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조건은 군인들과 똑같았던 것이 다.(89쪽) 센다가 종군위안부 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이러한 광경에 근거한 것이리 라. 센다가 말하는 정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사진도 실제로 남아 있다(33쪽 의 <사진 2> 참조). 직업군인이었던 어떤 이는 중국인 등보다 조선인 위안부들을 더 많이 모 집한 것은 그녀들이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적에게 통보하거나 군사정보 를 흘리는 일이 없었 (121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선인 위안부 는 그렇 게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점령지/전투지의 여성들과 구별되는 존재였 다. 말하자면 일본군과의 기본적인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식민지가 된 조선과 대만의 위안부들은 어디까지나 준일본인 으로서 제국의 일원이 었고(물론 실제로는 결코 일본인 일 수 없는 차별이 있었다), 군인들의 전쟁 수 행을 돕는 관계였다. 그것이 조선인 위안부 의 기본 역할이었다. 1945년, 600명의 군인들이 주둔했던 남방의 섬에 스무 명의 위안부 가 도착했을 때를 한 군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군인들의 그때의 기쁨이란 전쟁이 끝나고 내지로 돌아갔을 때 이상이었습니다. 행위 자체를 기뻐한 게 아닙니다. 일본의 향기를 가진 여자를 살아서 만날 수 있 었다는 것을 기뻐했던 겁니다. (중략) 60 제국의 위안부

조금 피로한 기색이기는 했지만, 젊은 일본 여성들이 방문해준 겁니다. 장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병사들의 기쁨도 더할 나위가 없었지요. 출격을 눈앞에 둔 전우들 가운데에는 소리내어 우는 이도 있었습니다. (중략) 비가 제 등을 때렸습니다. 한창 하는 도중에 문득 내지 생각이 나면서, 이러고 있는 우리의 존재가 웬일인지 무척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끝나고 나서 방을 나 오는데, 여자가 누운 채로 멋지게 죽어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뒤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여자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겠지요. 베개 옆에 여자의 옷이 가지런히 접혀 있었는데, 맨 위에 부적주머니가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전쟁터에서 위안부를 안은 건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고 이때 한 번뿐입 니다. 무엇보다 그런 일에 신경쓸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군도 이제 방어전을 하느라 필사적인 상태였기 때문입니다.(181~182쪽)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 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 을 대표하여 전방 에서 위안 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역할. 말 하자면 위안부 에게는 신체적 위안 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 까지도 요구 되고 있었다.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 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 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 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 이다. 제1부 위안부 란 누구인가 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61

물론 조선인 일본군 이 그랬듯이, 애국 의 대상이 조선이 아닌 일본 이 었다는 점에서 조선인 위안부 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딜레마를 잊고 눈앞에 주어진 거짓 애국 과 위 안 에 몰두하는 것은 그녀들에겐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 할 수는 없다. 일본군과의 연애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은 그런 딜레마를 안 을 것을 포기한 이들의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혹은 어리면 어릴수록 일본인의식이 강했을 터이니 딜레마로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이들이 훨씬 많았을 수도 있다. 센다가 인터뷰한 어느 업자는, 자신이 데려갔던 이들이 빌린 돈을 다 갚 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을 때에도 그 일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 한다. 응모했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몸이 된 나도 군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몸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네들은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로워져서 내지에 돌아가도 다시 몸 파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군인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돈도 벌고 싶었겠지만요.(26쪽) 물론 이것은 일본인 위안부의 경우다. 그러나 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서는 패전 전후에 위안부들이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고 빨래와 바느질을 하기도 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사유리 (작은 백 합), 스즈란 (방울꽃), 모모코 (복사꽃) 같은 일본이름으로 불렸다(후루야마 고마오, 하얀 논밭, 12쪽)는 것도, 식민지인이 위안부 가 되는 일이란 대체 62 제국의 위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