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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동북아역사논총 41호 인과 경계공간은 설 자리를 잃고 배제되고 말았다. 본고에서는 근세 대마도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을 주로 영토와 경계인 식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시기 대마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을 살펴볼 때는 근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탈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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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동북아역사논총 42호 금융정책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대외금융 정책의 기본원칙은 각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별도의 발권은행을 수립하여 일본 은행권이 아닌 각 지역 통화를 발행케 한 점에 있다. 이들 통화는 일본은행권 과 等 價 로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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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북아역사논총 50호 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 는 일본 정부의 주장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 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므로 한일청구권협정 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 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또한 2011년 8월 헌 법재판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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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3/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양인실 양인실 2004년 리쓰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연구과에서 전후 일본의 영상 미디어에 나타 난 재일조선인의 표상 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부터 이와테대학교 인문사회과 학부 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의 문화교류사 및 전전 일본의 영화 속 식민지 조선의 이미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해제 일본의 영화 저널리즘과 조선영화를 보는 시선 (한국영상자료원 편, 일본어잡지로 보는 조선영화 02, 현실문화연구, 2011), 제국 일 본을 부유하는 영화(인)들 ( 국제고려학회서울지부논문집, 2011), 해제 일본의 저널리즘과 그 특징 (한국영상자료원 편, 일본어잡지로 보는 조선영화 01, 현실문화연구, 2010) 등이 있다. 80 일본비평 8호

1. 들어가면서: 재일제주인 표상의 현주소 최근 한국에서도 재일제주인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재일제주인들의 고향(관념적 고향을 포함)인 제주도에서는 재일제주인기념 센터를 건립하기도 하고, 제주MBC에서는 20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재 일제주인 애향 100년 나의 살던 고향은>을 2012년 7월 2일부터 매주 월 요일에 방영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 재일제주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지고 있는 한편, 일본에서도 이들이 주로 살고 있는 오사카와 도쿄를 중 심으로 재일제주인에 대한 문화적 재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2010년 11월 6일 NHK는 특집드라마로 재일조선인 3세와 미얀마에서 온 불법 (이하 불법)체류자와의 사랑을 그린 <오사카 러브 앤 서울 이 나라에서 산다는 것>(이하 <오사카러브>)을 방영했다. 동 방송국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1년 2월 7일에는 이례적으로 재방영을 하기도 했 다. 1 이 영상에서는 오사카 이쿠노쿠( 生 野 区 )를 배경으로 제주4 3사건(이 하 4 3)을 피해 일본으로 온 재일제주인들의 삶과 현재, 그리고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일본으로 와서 난민 신청을 하며 살아가는 미얀마 인들의 삶이 동시에 표현된다. 이 드라마는 오사카 쓰루하시( 鶴 橋 )를 배경으로 1948년 4 3을 피해 오사카로 밀항한 재일조선인 1세와 1950년 한국전쟁 시에 태어난 재일 조선인 2세,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태어난 재일조선인 3세의 가 족과 그 주변인물들을 그린다. 여기에는 밀항과 불법체류, 오사카 시 이 쿠노쿠, 난민 신청, 재일외국인들 간의 사랑이라는 요소가 75분이라는 짧 은 시간에 특집드라마라는 형식으로 모두 담겨 있다. 이처럼 전후 일본 에서는 재일조선인을 다룬 많은 영상텍스트들이 제작되었고, 특히 최근 1 일본에서 방영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은 TV 드라마는 복잡한 저작권문제로 재방영까지는 오랜 시간 이 걸린다. 원작자, 각본가, 각 출연자, 음악 담당자 등 분야별, 개별적으로 승낙을 받아야 해 대부분 반년에서 길면 1년 정도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재방영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 81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에는 재일제주인을 다루려 하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일 본의 영상텍스트에서 재일제주인이 어떻게 재현되었으며, 구체적으로 어 떻게 변해 왔는지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연구에서는 전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상물, 그 중에서 도 TV 영상물를 주 텍스트로 한다. 일본의 TV 영상물, 특히 다큐멘터리 는 전후 방송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시대와 사회, 역사의 변화 에 민감한 미디어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TV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온 사 쿠라이는 TV 다큐멘터리의 세 가지 특징으로 화제성, 시기적절함 그리 고 접근방법의 독창성을 들었다. 2 또한 TV는 사적 영역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편하게 일본 사회의 지금 을 보여주는 매체다. 3 2003년 NHK의 조사에서는 일본인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3시간 반 이상을 TV를 보는 데 사용한다 4 고 하니, TV는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환경 중 일부가 되었다고 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외교가 정상화되는 즈음인 1965년, 그 리고 두 나라에서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2000년대 초반, 마지막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TV 영상물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 재일제주 인이 어떻게 재현되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TV 영상물이 재일 제주인을 포함한 재일조선인을 다루었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당시 일 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이 화제성이 있고 시기적절하며 독창적인 테마 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2 桜 井 均, テレビの 自 画 像 : ドキュメンタリーの 現 場 から, 筑 摩 書 房, 2001, 80~81쪽. 3 藤 竹 暁, 思 想 の 言 葉 : 環 境 となったテレビ, 思 想 第 956 号, 2003, 6쪽. 4 藤 竹 暁, 思 想 の 言 葉, 2쪽. 82 일본비평 8호

2. 이동/이주하는 생활권과 밀항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연구에서 자주 사용할 재일제주인이라는 용 어에 대해 우선 살펴보자. 제주발전연구원은 2000년에 내놓은 정책 연구 에서 재일제주인에 대해 본적지가 제주도이면서 일본에 거주하는 자, 그 리고 그들의 배우자와 직계자녀 2세와 3세라고 규정했다. 5 이 논문에서 사용하는 재일제주인은 이 제주발전연구원의 정의에 따른다. 또한 문맥 에 따라서는 재일조선인과 재일제주인을 구분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6 재일제주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 져 왔다. 여기에서 재일제주인에 대한 연구를 일일이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히 최근에는 일본의 마이너리티인 오키나와와 재일제주인을 관련시키는 연구, 7 그리고 고령화되어 가는 재일제주인 1세들과의 인터 뷰를 통해 생활사적으로 접근하려는 학제적 연구, 8 2008년부터 시작된 오 키나와 류큐( 琉 球 )대학의 사람의 이동과 21세기의 글로벌사회 프로젝트 연구로서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류큐지역과 제주도를 비교한 성과물 9 등 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오키나와와 제주도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위치하 여 각각 독자적 문화와 왕국을 형성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사람들의 이동 과 이민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서, 이동과 이민이 중앙과 국가를 거치 지 않은 루트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이 연구는 지적하고 있다. 한편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제주인은 12만~15만 명으로 추 5 제주발전연구원, 100만 제주인의 사회적 통합 증진과 역량 극대화방안 연구, 2000. 6 재일제주인을 다룬 기존의 연구들을 보면 처음에는 제주도 출신 재일조선인이라는 표현에서 재일제 주인이라는 표현으로 바뀌고 있다. 또한 2012년 9월 14일에 개관한 제주대학교의 재일제주인센터를 보면 재일제주인이라는 단어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7 소명선, 마이너리티 문학 속의 마이너리티 이미지: 재일제주인 문학과 오키나와 문학을 중심으로, 대한일어일문학회 편, 일어일문학 54, 2012. 5, 283~320쪽. 8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편, 재일제주인의 생활사 1: 안주의 땅을 찾아서, 선인, 2012. 9 津 波 高 志 編, 東 アジアの 間 地 方 交 流 の 過 去 と 現 在, 彩 流 社, 2012. 83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정되는데, 주로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 関 東 ) 지역과 오사카를 중심 으로 하는 간사이 지역에 이들의 94%가 거주하고 있다. 또한 간사이 지 역에는 전체 재일제주인의 69%인 8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중에 서도 오사카 지역에 7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오사카에 재일제주인들이 많이 살게 된 것은 1910년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의 호경기 때 공장 노동자로 고용되면서부터 인데 10 1923 년에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직행편 정기항로 기미가요( 君 が 代 ) 호가 생기 면서 더 많은 제주 출신자들이 이동했다. 1922년 당시 오사카에 사는 재 일제주인은 1만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1923년 정기항로가 생기면서 많은 이들이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32년 오사카의 재일제주인은 10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1940년에는 30만여 명으로 늘어 났는데, 이는 각각 오사카 전체 재일조선인의 30% 내외, 11 일본 전체 재 일조선인의 10%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 제주도로 돌아간 이들도 많았지만 식량난, 콜레라, 정치적 혼란 등을 피해 1947년까지 3000명 정도가 다시 일본으로 도항했으며, 그 수단은 주로 밀항이었다. 그리고 1948년의 제주4 3사건은 일본으로 의 도항에 박차를 가했다. 예를 들면, 1948년 6월~8월 사이에 에히메( 愛 媛 ) 현에 밀항한 조선인 290명 중 281명이 제주도 출신자였다. 12 그러나 1948년에 분단국가가 수립된 8월 직후 해상봉쇄가 강화되기도 하여 그 실태는 아직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13 상황이다. 1965년 한일국교 정 상화 이후에는 일본으로 정식 입국이 가능했지만, 수속이 번잡하여 밀항 은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1970~1974년 사이의 한국인 불법 입국자 10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편, 재일제주인의 생활사 1, 8쪽. 11 오사카의 재일제주인 커뮤니티 형성사에 대해서는 杉 原 達, 越 境 する 民 : 近 代 大 阪 の 朝 鮮 人 史 研 究, 新 幹 社, 1998을 참조할 것. 12 藤 永 壮, 済 州 四 三 事 件 の 歴 史 的 位 相, 帝 国 の 戦 争 経 験, 岩 波 書 店, 2006(단, 여기에서는 文 京 洙 (2008)에서 재인용). 13 文 京 洙, 済 州 島 4 3 事 件 島 のくに の 死 と 再 生 の 物 語, 平 凡 社, 2008, 203쪽. 84 일본비평 8호

는 740명이었는데, 그 중 제주 출신자가 608명으로 전체의 82.2%를 차지 했다. 14 1980년대에도 여전히 밀항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제주도 출신자 였는데,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힘들어 일본에 왔으며 영세기업에서 일하 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을 하 15 기도 했다. 아사히신문 의 기사 에 따르면 1984년도 밀입국자는 412명이고 그 중 대부분이 한국 출신이 며, 나가사키의 오무라( 大 村 )수용소에는 여성 19명을 포함한 75명이 송환 대기 중인데, 이 중 95%가 제주도에서 왔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밀항자 중의 71%가 오사카에 잠복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16 이처럼 밀항은 재일제주인들이 중앙과 국가를 거치지 않은 루트를 통 해 도일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그 절정기 였다. 밀항을 하기 위해서는 밀항브로커를 거쳐야 했고, 그 수수료도 15 만 엔에서 20만 엔으로 비싼 편이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제주 인들은 여전히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밀항을 선택했다. 최근 연구에서는 재 일제주인들의 밀항이 생활권을 확대하면서 생긴 필수불가결한 이동경로 였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17 3. 4 3의 기억과 정체성 제주도에 본적을 두거나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재일제주인 작가들에게 제주도는 중요한 테마였다. 예를 들면, 재일제주 인 작가 김석범은 13살 때 제주도 땅을 처음 밟았는데, 그 후 6개월 정도 14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편, 재일제주인의 생활사 1, 10~11쪽. 15 多 い 韓 国 済 州 島 からの 密 航, 朝 日 新 聞 東 京 版, 1985년 10월 6일. 16 多 い 韓 国 済 州 島 からの 密 航, 朝 日 新 聞 東 京 版, 1985년 10월 6일. 17 최근의 연구동향으로는 伊 地 知 紀 子 村 上 尚 子, 解 放 直 後 済 州 島 の 人 びとの 移 動 と 生 活 史 : 在 日 済 州 島 出 身 者 の 語 りから, 蘭 信 三 編, 日 本 帝 国 をめぐる 人 口 移 動 の 国 際 社 会 学, 不 二 出 版, 2008; 전은 자, 제주인의 일본도항연구, 탐라문화 제32호, 2008; 신재경, 어떤 밀항이야기(1)-(26), 제주 의 소리, 2008년 3월 16일~10월 27일 게재 등이 있다. 85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살았던 고향에서의 생활이 그 후의 생활과 삶의 방식에 근원적인 영향 을 미쳤으며, 자신이 일본국민, 황국신민 이 아니라 조선인, 제주도 인 이라는 민족적 자각 18 을 하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물론 여기에서 제 주도는 조국 그 자체이며 관념상의 고향 19 이다. 김석범은 4 3을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 4 3에 대한 소 식을 듣고 1957년 8월과 12월에 각각 간수 박서방( 看 守 朴 書 房 ) 20 과 까 마귀의 죽음( 鴉 の 死 ) 21 을 발표한다. 그가 제주도에 대해 쓰는 이유 중 가 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이 그 피투성이가 된 고향섬에 사는 눈물도 메 말라버린 사람들 중의 한 사람 22 이라는 생각이었다. 4 3에 대한 간접적 경험과 제주도에서의 생활체험이 작품의 주 내용을 이루게 된 것이다. 특히 김석범의 작품활동 중에서 4 3과 관련하여 눈에 띄는 것은 제 주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23 을 일본에 서 번역했다는 점이다. 순이삼촌 은 한국 사회에서 4 3을 처음으로 공 론화시켰다고 평가받는 소설인데, 출판이 되자마자 한국 정부로부터 출 판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 소설로 인해 현기영은 필화사건을 겪게 되는 데, 그의 집을 수색할 때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 이 발견되어 압수당 하기도 했다. 또한 1984년에는 아직 해금되지 않았던 순이삼촌 을 일본 에서 김석범이 번역하여 바다( 海 ) 24 에 게재했다. 25 이에 대해 재일제주 인 학자 문경수는 4 3의 비극을 역사의 어둠에서 구원해 내려는 시도 중에 이런 두 작가의 바다를 건너는 암묵의 공진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 18 済 州 道 と 私, 耽 羅 研 究 通 信 第 2 号, 1985 年 7 月 (단, 여기에서는 河 野 (2006)에서 재인용). 19 金 石 範 金 時 鐘, なぜ 書 き 続 けてきたか なぜ 沈 黙 してきたか 済 州 島 四 三 事 件 の 記 憶 と 文 学, 平 凡 社, 2001, 90쪽. 20 文 芸 首 道, 1957 年 8 月. 21 文 芸 首 道, 1957 年 12 月. 22 済 州 島 のこと 四 三 事 件 の 惨 劇 に 想 う, 朝 日 新 聞, 1971 年 5 月 10 日. 23 창작과 비평 1978년 게재, 단행본은 1979년 11월 출판. 24 特 集 玄 基 栄 ( 金 石 範 訳 ) 順 伊 (スニ)おばさん, 海 龍 の 話 金 石 範 玄 基 栄 について, 海, 1984 年 4 月 号, 中 央 公 論 社. 25 文 京 洙, 済 州 島 4 3 事 件 島 のくに の 死 と 再 生 の 物 語, 平 凡 社, 2008, 183~184쪽. 86 일본비평 8호

서는 안 된다 고 말한다. 4 3은 현해탄을 사이에 둔 제주 출신 작가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 출신 또는 제주도에 본적을 두지 않은, 다시 말하자 면 재일제주인 작가가 아닌 재일조선인 작가들에게도 4 3은 큰 영향을 끼친 듯하다. 예를 들면 이회성은 1969년 또 다시 이 길에(またふたたび の 道 ) 로 제12회 군조( 群 像 ) 신인상 을 받으며 재일조선인 2세들의 사회 진출을 알린 대표적 재일조선인 작가다. 그런데 그의 소설 가야코를 위 하여( 伽 倻 子 のために) 에서는 주인공 임상준의 학교동아리 동무 들이 등 장하여 제주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에서 처음으로 제주도에 대해 나오는 장면은 학교 동무 들끼리 간 커피숍에서였다. 유 동무. 그 여자친구 고향이 어디지? 만약 제주도라면 일을 많이 해서 동무를 먹여살려 줄 거야. 그곳 여자들은 해녀니까. 그래도 그만두는 게 나아. 제주도 여자는 좋을 때는 좋아. 하지만 한번 안 되면 남자들한테 해를 끼치지. 만약 그 녀가 함경북도 사람이라면 좋을 거야. 조선의 여자 중에서 함경북도 여자는 제 일 좋거든. 그래도 북조선 여자들은 드세니까 다른 지역은 안 돼. 남편이 죽으 면 머리 위 광주리에 남편을 넣어 고향까지 돌아간다고 할 정도니까. 26 서툰 일본어로 이런 말을 하는 동무의 말을 듣고 같이 있던 일행은 마시던 음료수를 내뿜는데, 주인공 상준은 지방의 특색이 어느 정도 성 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단언하는 건 오히려 우리들의 인식문제인 거 아냐? 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고국에서 태어났 다 는 동무 는 자신이 조선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제주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 첫 부분이다. 이후 소설에서는 제 주도에서 왔다는 상준의 연극동아리 동무인 최명희의 입을 통해 4 3에 26 李 恢 成, 伽 倻 子 のために, 新 潮 社, 1970, 98~99쪽. 87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대한 진술이 이루어진다. 최명희는 자신이 그 당시 10살 정도의 아무것 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지만, 그 때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해 잊을 수 없 다 고 조용히 상준에게 이야기한다. (전략) 어떤 사람이 불사조는 500년째에 죽어 다시 살아난다고 말했어. 가능하 다면 제주도에서 죽은 사람들도 불사조처럼 무덤에서 살아돌아왔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무덤조차 없었지. 내가 있던 촌에서도 집단학살이 이승만의 앞잡이들은 마을 사람들 몇십 명을 철사로 묶어 배에 태워 바다에 빠뜨렸어. 떠오르는 이들을 오리를 사냥하듯이 쏘았지. 항쟁이 길어지니 학살도 계속됐어. 도민 30만 명 중에서 8만 명이 죽거 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 믿어지니? 내 가족도 그 때 처형당했지. 27 상준은 최명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향 하던 시기와 최명희가 4 3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하던 시기가 같은 시 기였음을 깨닫는다. 각기 다른 이유와 경로로 일본에 온 재일조선인들이 비슷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 명희는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간다. 이 작품은 1984년 오구리 고헤이( 小 栗 康 平 )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다. 원작소설과 영화는 다른 부분이 많지만 원작과 마찬가지로 최명희가 상준에게 4 3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원 작소설과는 달리 4 3에 대한 장면은 앞뒤 문맥과 연결되지 않으며, 최 명희가 상준을 대상으로 혼자 고백하는 형식이다. 이 영화는 재일조선인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차별의 실태, 역사가 그려져 있지 않 27 李 恢 成, 伽 倻 子 のために, 143~146쪽. 88 일본비평 8호

았다 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28 고 하는데, 작품 속에서 그려진 재일조 선인의 역사는 이 4 3에 대한 이야기가 유일무이하다. 여기 제주도 사람 많지? 저 할머니도 그래. 나는 여기 와서 한라산을 떠올려. 1948년 이승만의 탄압으로 30만 도민 중 8만 명이 죽임을 당했어. 아직 나는 10 살의 어린 아이였지. 그래도 눈에 선해. 오빠들은 한라산에 숨어 싸웠어. 나는 밀항선을 타고 왔어. 49년에 일본에. 실은 나도 엄마와 함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어. 빨치산이 나온 집은 전원이 처형당했거든. 그런데 나를 본 경관이 못 본 척 해준 거야. 어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빨치산은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마을에 내려왔어. 같은 마을이 낮과 밤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 원작에서는 4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길게 느껴지지 않는 장면인데, 상준이 명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명희의 경험에 자신의 경험을 비춰보고, 자신들의 경험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 닫는 과정이 상준의 입장에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경제 적 이유로 고서점에 자신의 책을 처분하러 가는 상준의 모습이 그려지는 장면과, 상준과 가야코가 함께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을 보는 장면 사이 에 삽입된 이 4 3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이질적이다. 이 시퀀스에서 상 준은 앉아서 듣기만 하고 명희는 그 앞에 서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는 듯하다. 결국 영화에서는 명희의 이야기로 인해 재일조선인사의 흐름 속 에 4 3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는 상준의 모습이 삭제되어 강력한 인상 을 주지 못하고 말았다. 4 3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이렇게 교훈적이고 설교적인 시퀀스로 처리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결코 소 홀하지는 않았다. 영화는 재일조선인들의 생활모습을 담기 위해 김장에 28 DVD-BOX 小 栗 康 平 監 督 作 品 集 解 説 ブックレット, 2005. 89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절여진 배추를 툇마루에 쌓아놓은 풍경과 처마에 널어놓은 마늘과 고추 를 한 화면에 담고, 여자아이들이 널을 뛰는 모습과 이에 대한 설명도 잊 지 않는다. 김장과 널뛰기라는 한반도의 민속적 생활모습과 함께 4 3도 재일조선인의 삶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하고 싶은 듯 하지 만 앞뒤가 이어지지 않는 설명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겨우 4 3이 이야기되기 시 작했고, 1990년대에 들어 위령사업과 증언집 발간, 피해자 조사가 실시 되었으며, 2003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 식 사죄했다. 영상 미디어에서도 1999년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주 4 3>(mbc), 제주MBC가 재일제주인들과 4 3을 연관하여 <섬을 떠난 사람들>(2004년) 29 과 <재일제주인> 3부작(2006년) 30 등을 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이런 동향이 일본의 재일제주인 사회에 바로 전해진 것은 아니었 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 하에 있는 일본의 국가 사 회의 감시체제와 더불어 재일한국인들의 말과 행동을 규정해 왔 31 고, 이 는 4 3을 증언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제주4 3사건이 처음으로 일본 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에 서도 서술했듯이 재일제주인 작가 김석범의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는 각 종 소설과 번역활동을 통해 일본에서 꾸준히 4 3을 알리려 노력해 왔다. 1963년에는 김봉현과 김민주가 제주도 인민의 4 3무장투쟁사 를 펴냈 는데, 이후의 움직임은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는 1987년 12월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4 3사건의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정계에서 처음으로 4 3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1988년에는 도쿄와 서울에서 4 3사건 40주년 기념행사인 제주도4 3사건 40주년 추도 기념 강연회 (4 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 주최)와 29 2004년도 한국방송협회 저널리즘 분야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30 제1부 이주 100년사, 제2부 망향의 세월, 제3부 머나먼 조국으로 구성. 31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편, 재일제주인의 생활사 1, 14~16쪽. 90 일본비평 8호

4 3학술세미나 가 각각 개최되었다. 4 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 四 三 事 件 を 考 える 会, 이하 4 3모임) 32 이 만들어졌으며, 오사카에서는 1991년 4월에 처음으로 4 3추도 심포지엄이 열렸다. 1997년에는 제주도4 3사건 50 주년 기념 실행위원회 가 발족되었으며, 2000년 1월에 한국에서 4 3특 별법 이 제정된 이후에는 해마다 오사카와 도쿄에서 재일제주인들을 중 심으로 각각 관련 기념사업이 행해지고 있다. 33 최근에는 4 3사건 60주년째 되는 해인 2007년과 2008년에는 특집 다큐멘터리로 <바다의 우레소리 속을 시인 김시종의 60년>(2007년 10월 3일, NHKBS하이비전)과 <ETV특집 비극의 섬 제주 4 3사건 재일코리안 의 기억>(2008년 4월 27일 NHK) 등이 방영되었다. 34 시인 김시종은 4 3을 직접 체험했지만 그의 작품 니가타( 新 潟 ) 외의 작품이나 공식석상에서 4 3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니가타 35 에서는 4 3에 대해 제주도의 해변은 모래사장이 아니라 자갈 해변인데, 거기에 철사줄로 손목이 묶인 채 바다로 던져진 희생자들의 시체가 떠오르는 상황 으로, 이곳으로 바 다에 잠긴 아버지를 그 아들이 찾아온다 36 고 표현했지만, 그 외에 4 3 에 대해 표현한 글은 없었던 것이다. 김시종이 1949년에 제주도를 떠나 밀항으로 일본에 온 후 다시 제주도를 방문하게 된 것은 1998년의 일이 고, 4 3에 대해 공식석상에서 입을 연 것은 2000년의 일이었다. 32 4 3에 대해 꾸준히 연구활동을 하면서 4 3모임의 중심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재일제주인 연구자 문 경수에 따르면 4 3모임의 중심멤버는 김석범, 김민주, 현광수 등의 구총련 지식인이었다( 文 京 洙, 済 州 島 4 3 事 件 島 のくに の 死 と 再 生 の 物 語, 185쪽). 33 이상 일본 사회가 4 3사건과 어떻게 관련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제주도4 3사건 60주년 사업실행 위원회(오사카)가 편집한 제주도4 3사건 60주년 기념사업 자료집(오사카)( 済 州 島 四 三 事 件 60 周 年 記 念 事 業 資 料 集 ( 大 阪 )) 및 문경수의 연구( 済 州 島 4 3 事 件 島 のくに の 死 と 再 生 の 物 語 )를 참 조했다. 34 최근에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시각예술가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이 4 3사 건을 담은 영상 <불일치의 반복(Reiterations of Dissent)>을 2011년 가을에 덴마크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제주의 소리, 2011년 10월 17일자). 35 金 時 鐘, 新 潟, 構 造 社, 1970. 36 金 石 範 金 時 鐘, なぜ 書 き 続 けてきたかなぜ 沈 黙 してきたか 済 州 島 四 三 事 件 の 記 憶 と 文 学, 平 凡 社, 2001, 179~180쪽. 91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김성례가 말하는 것처럼 기억은 과거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재배열 하는 것 인데, 왜냐하면 기억이란 현재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과 거의 이미지들의 흐름을 선택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4 3사건 의 기억의 구조는 망각과 기억의 사회적 정치적 동학에 근거하고 있으 며 바로 그것이 사건의 기억을 일상과 공적인 삶 속에서 생산 37 하는 것 이다. 1990년대 이후의, 특히 1990년대 말부터 제주도와 일본에서 4 3 을 둘러싼 기억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은 재일조선인, 특히 재일제주인에 대해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시종처럼 4 3을 피해 오사카로 온 재일제주인들 중에는 4 3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며, 제주 출 신임을 숨기고 살아온 사람들도 많다. 한국 정부 및 일본의 재외공관도 2000년에 제정된 제주4 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 별법 으로 희생자 유족 신청을 받고 있지만 일본에서의 신청자는 2008년 현재 78명에 그치고 있다. 38 한국 사회의 4 3에 대한 관심은 재일제주인 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4 3에 대한 트라우마를 부각시킬 우려도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과 더불어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재일제주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관련 영상도 급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 지 일본의 영상 속에서 재일제주인이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에 대한 연 구는 거의 없다. 특히 일본의 TV 프로그램에 대한 연구 자체가 일본에 서는 마이너리티에 속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에 대한 연구성과 가 매우 적다. TV 프로그램 속에 재일제주인이 어떻게 재현되는지에 대 한 연구가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연구는 지금까지 재일제주인 들이 일본의 영상 미디어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또는 어떻게 부재해 왔는지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론이 될 것이다. 37 金 成 礼, 文 化 節 合 韓 国 近 代 への 喪 章 暴 力 と 済 州 抗 争 の 記 憶, 現 代 思 想 第 6 券 第 7 券, 1998 年 6 月 号, 176~195쪽. 38 오사카의 증언 학살의 섬에서 살아 남았다, 한겨레21, 2008년 4월 8일호. 92 일본비평 8호

4. 불법과 합법의 경계 한일국교 정상화를 향한 움직임이 매일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고, 그 한 편에서는 신문과 TV가 밀항과 불법체류자들 에 대한 기사를 매일처 럼 안방으로 전달하던 1960년대 일본에서 재일제주인을 다룬 주목할 만 한 TV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일본에서 TV방송이 시작된 것은 1953 년인데, 1957년 10월에 처음 방영된 TV 다큐멘터리 시리즈 <일본의 맨 얼굴( 日 本 の 素 顔 )>(1964년 4월까지 방영)은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장을 열었 다고 평가된다. 이중에서도 1958년에 방영되었던 <일본의 맨 얼굴 일본 속의 조선>은 오사카의 이쿠노쿠를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전후 일본의 TV에서 처음으로 재일조선인을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한일 간의 국교 정상화 직후인 1965년 11월 7일 방영되었던 아사히 방송 39 의 <김재원의 고백( 金 在 元 の 告 白 )>은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이주해 살고 있는 김재원이라는 재일제주인의 삶을 통해 재일조선인들의 현주 소를 되짚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일본의 방송국에서는 정치적 배 려를 이유로 재일조선인을 다룬 많은 영상물의 제작이 중지되거나 제작 되었어도 방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40 <김재원의 고백>은 도쿄 39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역에서는 아사히TV( 朝 日 テレビ)에서,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 역에서는 TBS계열에서 방송되었다. 방영시간은 둘 다 1965년 11월 7일 오후 8시에서 8시 56분 사 이였다. 40 다큐멘터리 외에도 드라마에서 재일조선인 을 다루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대부분이 제작을 끝내고 도 방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1963년 10월 9일부터 1964년 4월 1일까지 23부의 옴 니버스 형식으로 방영될 예정이었던 드라마 <여기는 사회부(こちらは 社 会 部 )>(TBS계열)는 스폰서 의 압력으로 12회에서 끝났다. 다만 이 드라마의 방송이 중지된 것은 전쟁 중에 군대에서 엑스레이 촬영 시에 사용된 조영제로 인해 방사능 후유증을 앓던 아들이 사망하자, 그 어머니가 후생성을 상 대로 하여 이 아들의 죽음을 전사로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낸다는 내용의 <여기는 사회부 18년째 의 전사(こちらは 社 会 部 18 年 目 の 戦 死 )> 때문이었다. 죽은 이유가 약물 때문인데, 이 드라마의 스 폰서가 제약회사라는 이유가 공식적인 방송 중지 이유였고,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여기는 사회 부 가깝고도 먼 나라(こちらは 社 会 部 近 くて 遠 い 国 )>는 아직 방영하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이진 우 소년의 이야기를 극화한 <타인의 피( 他 人 の 血 )>(1961)의 경우에는 시나리오 작업과 캐스팅을 마 친 상황에서 위로부터의 명령으로 제작이 중지되었다. 그리고 1966년 9월 후지TV에서 방영된 <젊 은이들( 若 者 たち)>은 34회로 방송이 중단되었고, 재일조선인이 등장하는 <안녕(さよなら)> 편은 방 영되지 못했다. 방송국 밖의 검열이나 심의라는 제도가 없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검열과 스폰서 93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방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1 아사히신문 1965 년 11월 7일자 도쿄판을 보면 <어느 밀입국 한국인의 고뇌(ある 密 入 国 者 の 苦 悩 )>라는 제목 하에 프로그램 내용이 소개되는 등 그 날의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김재원의 고백>에서 김재원은 많은 재일제주인들의 생활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식민지기 시모노세키에서 태어나 해방 후 제주도로 돌 아가지만 홀어머니와 아내를 남겨두고 1951년 다시 시모노세키로 밀항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이 더 악화되자 일본으로 밀항하여 생활 하게 된 것인데, 몇년 후에는 제주도에 있던 아내도 일본에 밀항을 하여 같이 살게 된다. 영상의 오프닝은 양복을 잘 차려입은 직원들이 급하게 걸어가는 장 면으로 시작한다. 긴박감 넘치는 음악과 이들의 발자국소리가 영상을 압 도하면서 시작하는 이 시퀀스에서, 시청자들은 이들이 공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며 지금 어떤 불법적인 일을 한 사람들 을 단속하러 간다는 걸 쉽 게 예상할 수 있다. 이들은 한 공장에 들어가 불법체류자가 있다고 이야 기를 들었다 고 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외국인 등록증명서를 하나하나씩 다 검사하고 각자에게 나라가 어디냐 고 물어본다. 그리고 불법체류자 로 추정되는 한 여성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타이틀롤이 뜨기 전에 보여지는 외국인 등록증명서와 수갑은 이 다큐멘터리가 앞으 로 합법과 불법을 오가는 주인공을 보여줄 것임을 예고한다. 이후 김재원의 고백 이라는 타이틀롤이 뜨고 오프닝 시퀀스와는 다 르게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한 여성이 느릿느릿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이 시퀀스는 오프닝과는 달리 인물의 모습과 내면이 그림자와 소리라는 청각적 요소로만 표현되어 더욱 긴장 의 검열이라는 내부적 압력 이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41 오사카 판 아사히신문 1965년 11월 7일자를 보면 TV프로그램란 오후 8시에는 <다큐멘터리 김재원 의 고백 예술제 참가작품(ドキュメンタリー 金 在 元 の 告 白 芸 術 祭 参 加 作 品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94 일본비평 8호

감을 더한다. 이후 그림자는 한 골목으로 사라지고 골목 끝에 위치한 집 에서 밀입국자 인 긴자이겐( 金 在 元 ) 과 교진슈쿠( 姜 仁 淑 ) 부부와 그 가 족이 등장한다. 밀항자라는 낙인이 찍혀 오무라수용소 42 로 보내진 후 제 주도로 송환된 적이 있는 교진슈쿠 는 입국관리국에 가서 밀항자 라는 고백 을 하는 일을 망설이기는 하지만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생각해서 입국관리국에 갈 결심을 한다. 8월 15일 재일한국인들이 모여 대한민국 만세 를 외친 후 입국관리 국에 가족 모두가 가서 불안한 마음으로 자수 를 한다. 그 과정에서 김 재원은 독백으로 만약 제주도로 돌아가게 되면 아이들에게 보리밥이라 도 배불리 먹일 수 있을지 걱정 이라며 울먹거린다. 입국관리국에서는 김재원이 어떤 경로로 밀항을 했는지 몇 명이 어떤 배를 타고 왔는지에 대해 자세한 취조가 시작되었고, 내레이터는 그의 밀항이 결코 성공이 아니라 패배 의 시작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김재원 가족은 일본에 처음 도착한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에 오기까지 일을 했었던 곳에 가서 자신이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을 주위 의 일본인들에게 증명해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 조산원, 일을 했던 곳, 거래처 등의 일본인들에게 자신들이 등록증 이 없 는 불법체류자 였음을 고백 하고 증명을 부탁하는데, 일본인들의 친절 에 김재원 부부는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취조담당 직원의 엄격한 취조 끝에 이들 가족에게는 강제송 환 대상자임이 선언된다. 한국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생활할 수 없어 불법체류 를 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국관 리국 직원의 선언으로, 김재원 가족에게는 제주도로 돌아가는 길밖에 남 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쿄의 법무성 입국관리국에서 김재 42 밀항자 가 밀고되어 한국으로 강제송환되기 전에 임시로 수용되는 곳이 오무라였다. 이에 대해서는 玄 武 岩, 密 航 大 村 収 容 所 済 州 島, 現 代 思 想 第 35 卷 第 7 号, 2007을 참조할 것. 95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원 가족은 재류 판정을 받게 된다. 당신들의 밀입국은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린이들의 장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 니 앞으로 훌륭하게 키워 일본 사회에 공헌할 인재로 만드는 게 당신들 의 의무 라는 판결문에 김재원은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에 그는 밀항으 로 보낸 14년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 고백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시종일관 밀항 의 불법성을 추궁하면서 이런 입국관리국의 방침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어느 나라에서도 비 슷하게 존재한다는 걸 예로 들어, 밀항 은 보편적인 범죄 임을 강조한 다. 또한 영상에서는 김재원 가족이 사는 이쿠노쿠가 일본에서도 비교적 조선인이 많아 그들이 일본어를 몰라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고, 밀항자라는 죄의식 도 처음보다 많이 없어졌다고 지적한다. 43 제주인들 에게 밀항은 그 불법성을 추궁당할지언정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선택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동방법 44 이었지만, 이 영상에서 김재원 가족의 영상을 다루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법 을 지키지 않은 죄인 에 대한 취 조인 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불법과 합법의 경계는 취조방식뿐만 아니라 김재 원 또는 김재원 가족이 이용하는 이동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진다. 김재원 또는 많은 불법체류자들의 밀항 도구인 배 45 는, 국가에 의한 감 43 오사카 이쿠노쿠는 밀항자가 많았지만, 그에 따라 밀고자도 많았다. 영화 <HARUKO>의 주인공 정 병춘 씨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하기 위해 6번 밀항을 했다고 인터뷰에서 답했다( わが 青 春 の 思 い 出, ウリ 生 活, 1990년 5월호, 152쪽). 그리고 오사카에는 밀항으로 온 사람들을 밀고하는 사람 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 わが 青 春 の 思 い 出, 152쪽) 편히 살 수 없기 때문에, 도쿄로 삶의 터전 을 옮겼다고 답했다. 44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편, 재일제주인의 생활사 1, 13쪽 45 사람들이나 문화의 이주/이동에서 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에 대해서는 Paul Gilroy, The Black Atlantic Modernity and Double consciousness, 1993, p. 4, p. 14를 참조할 것. 또한 재일제주 인들의 이주/이동에서 배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다. 예를 들면 아사히신문 이 2010년 1월 27일부터 12월 24일까지 특집으로 연재한 백년의 내일 일본과 코리아( 百 年 の 明 日 ニッポンとコリ ア) 를 보면, 재일조선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여러 종류의 배가 등장한다. 구체적으로는 니가타와 북한을 왕래하는 만경봉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왕래하는 관부연락선, 그리고 제주도와 오사카를 왕래하던 기미가요호와 전후의 크고 작은 이름 없는 밀항선들이다. 관부연락선은 재일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아내들의 이동에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내선결혼으로 식민지조선에서 살다가 96 일본비평 8호

시의 대상이며 실정법을 수행하는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언제나 단속된 다. 밀항하다 적발되어 오무라로 수용되는 이들을 보여주는 영상은 그들 의 이동수단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적발되지 않더라도 합법적 체류자가 아닌 이들은 1960년대 일본 고도경제성장의 상징 중 하나였던 자동차를 이용할 수가 없다. 김재원은 신발공장을 경영하며 많은 납품업 체를 돌아다녀야 하지만, 운전면허증을 딸 수 없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이동수단은 자전거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땀을 흘리며 이동하는 김재원 의 옆으로 달려가는 많은 자동차들은 합법적 거류자들의 몫이다. 마지막 으로 보여지는 이동수단인 전차는 김재원 가족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가 족여행의 수단이기도 하다. 입국관리국에 자수한 이들 가족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전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 이들 가족의 첫 여행이 입국관리국에서 원하 는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또한 이 텍스트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밀항에 대한 두 가지 시선이다. 영상은 밀항이 단속의 대상이며,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측에 서도 불법으로 보고 있음을 끊임없이 주지시키지만, 여기에서 단속의 대 상이 되는 것은 어른들이며 밀항하는 어린이들은 미담의 대상이었다. 김 재원 가족이 입국관리국에 불려가서 취조를 받을 때 초등학생인 큰 딸은 직원의 질문에 대해 소신껏 대답한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이마에 흐르는 땀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되면서, 어른들이 저지른 불법이 죄없는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영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재류허가 판결문은 어린이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재 류를 허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시선은 이 프로그램뿐 아니라 밀항이 많아지던 1960년대에 밀항을 보도하던 신문기사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전후에도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일본인 아내들이 남편과 자식을 한국에 남겨둔 채 1962년 2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朝 日 新 聞, 2010년 3월 4일자). 97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있다. 예를 들어 1968년 8월 21일자 아사히신문 을 보면, 오사카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 밀항했지만 적발되어 후쿠오카( 福 岡 ) 입국관리국에 체류 중이던 13살의 김양숙은 같이 온 31명의 밀항자들이 강제추방되었음에 도 불구하고 강제송환 처분이 보류되어, 어머니와 면회를 하고 풀려나게 된다. 46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화제를 불러모았는데, 당시 한국방송작 가협회 이사장이었던 조남사는 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KBS에서 방영하고, 일본의 영화사 도에이( 東 映 )에서 일하던 영화감독 박영훈에게 감독을 부탁하여 영화화하려고 하기도 했다. 47 TV문화를 연구했던 피스크는 TV를 문화 그 자체의 이야기 전달꾼 이라고 하면서, 문화 전반에서도 또 각각 다른 차이를 보이면서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 전달꾼 의 기능을 수행하 고 있다 48 고 했다. TV 프로그램은 그러한 의미에서 그 시대의 문화적 상 상력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밀항을 다룬 <김재원의 고백> 이 말해주는 불법체류자 를 보는 시선과 그들을 다루는 방식은 1960년 대 일본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5. 가족 서사와 재일제주인 1세 여성들의 자리 49 한편 일본의 TV 다큐멘터리는 1970년대 이후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 고, 그 자리를 오락적인 버라이어티나 리얼 프로그램들이 채우기 시작했 46 韓 国 から 母 を 慕 い 密 入 国 の 金 良 淑 さん 仮 放 免 か, 朝 日 新 聞 東 京 版, 1968년 8월 21일자. 47 金 良 淑 密 航 少 女 物 語 りを 映 画 化, 韓 国 新 聞, 1961년 8월 21일자. 48 John Fiske & John Hartley, Reading Television, London: Routledge, 1978, 池 村 六 郎 訳, テレビを< 読 む>, 未 来 社, 1991, 112쪽. 49 이 장은 2012년 4월 20일에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와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인 문학연구단에서 공동개최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포스트 <GO>의 불/가능성 의 일부분을 수정, 가 필한 것이다. 98 일본비평 8호

다. 50 그리고 전통적인 TV 다큐멘터리는 중앙방송국이 아닌 지역방송국 이나 심야방송의 몫으로 남겨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는 기존의 사회파 다큐멘터리에서 더 발전하여 영화도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는 미디어 액티비즘, 자신을 찍는 셀프 다큐멘터리 등 보다 세분화 되었다. 특히 1990년대 말 이후 일본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휴대가 간편 한 소형 비디오카메라로도 장기 촬영이 가능해지면서 그 테마나 촬영방 법에서도 개인화 경향이 현저해졌다. 51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나 온 재일조선인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들 중 화제가 된 영화들도 이런 움직임속에서 제작된 것이다. 2004년도 키네마순보(キネマ 旬 報 ) 문화영화 1위는 <해녀 양씨> 52 가 차지했다. 이 영화는 원래 오사카에 살면서 식민지조선에 관한 문헌자료 를 수집하고, 한편으로 기록영화를 만들던 재일조선인 2세 신기수가 찍 은 작품이다. 신기수는 해녀 양의헌 씨가 쓰시마( 対 馬 )에서 일하던 모습 을 2년 동안 카메라맨 김성학과 함께 필름에 담았다. 1966년에 완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간사이의 방송국에서 방영될 예정이었지만 신기수와 방송 국 측의 의견이 맞지 않았다. 53 2000년 12월에 다큐멘터리 감독 하라무 라 마사키는 신기수의 작품을 보고 나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로 하고, 미공개 영상과 새로운 양의헌 씨의 모습을 추가했다. 이렇게 해서 TV 다큐멘터리 <53년만의 제주도-바다를 건넌 해녀의 기록(53 年 ぶりの 済 州 島 )>(2002년 6월 16일 NHKBS 1 방영)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방영 이후 방송 에서 담아내지 못했던 영상들을 다시 모으고 재편집하여 다큐멘터리 영 화 <해녀 양씨>(2004년)가 만들어졌다. 영화에는 방송 후 양의헌 씨가 북 송사업으로 북한에 가서 살고 있는 세 명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평양과 50 丹 羽 美 之, ポスト ドキュメンタリー 文 化 とテレビ リアリティ, 思 想 第 956 号, 2003, 92~93쪽. 51 佐 藤 真, ドキュメンタリーの 修 辞 学, みすず 書 房, 2006, 13쪽. 52 사쿠라( 桜 )영화사 제작, 하라무라 마사키( 原 村 政 樹 ) 감독. 53 原 村 政 樹, 崇 高 なる 母 との3 年 間, 海 女 のリャンさん 解 説 ブック: 映 画 をより 理 解 するために, 2004, 2쪽. 99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함흥으로 가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또 하나 화제가 된 작품은 <HARUKO>(이하 <하루코>)이다. <하루코> 는 <53년만의 제주도>가 방영된 지 1년 후인 2003년 9월 28일 후지TV가 방영한 <더 논픽션 어머니여! 갈기갈기 찢어진 재일가족(ザ ノンフィクシ ョン 母 よ! 引 き 裂 かれた 在 日 家 族 )>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출발한다. 방영 후 다시 보고 싶다는 시청자들의 반응과 호응에 힘입어 동 방송국이 영화화 했다. 45분이었던 영상은 TV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필름들을 다시 재편집하여 영화로 재탄생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TV 다큐멘터리의 제목들이 재일제주인 1세의 삶과 역사를 담고 있는데 비해 영화의 제목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변경되 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3년만의 제주도>는 양의헌 씨가 53 년만에 제주도를 방문했다는 점을 제목에 넣어 시청자들에게 양의헌 씨 가 고향 제주도를 53년 동안 방문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하 고, 그 안에서 재일제주인들의 삶을 되짚어보게 한다. 또한 <어머니여! 갈기갈기 찢어진 재일가족> 역시 한 곳에 모여 사는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 재일제주인들의 특수한 역사적 사정에 대해 생각하 게 한다. 그리고 양의헌 씨와 하루코(본명 정병춘)라는 개개인의 삶이 결코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는 <해녀 양씨>와 <하루코>라는 각 개인의 이름으로 제목 을 지어 TV 다큐멘터리의 제목에서 제시되었던 재일제주인의 삶과 역 사를 삭제했다. 영화 제작진의 해설에 따르면 <더 논픽션>이 호평을 받 아 영화를 만들기로 했을 때 어떤 재일가족의 특수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와 가족의 보편적인 이야기 라는 메시지를 담아 <하루코>라는 제목을 만들었다 는 것이다. 앞서 말 했듯이 TV 다큐멘터리는 이미 그 설 자리를 잃고 심야방송 및 지역방송 국으로 밀려나고 있다.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는 어느 정도 상 업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재의 TV 다큐멘터리는 영화보다 마이너리티에 100 일본비평 8호

대해 더 적극적인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역설적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 이다. 그럼 이 두 영화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공교롭게 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이 두 다큐멘터리는 공통점도 많다. 영화를 보면 두 영화의 주인공이 친분을 나누는 장면도 등장하며 쓰루하시의 조 선시장을 함께 걷는 부분도 있다. 또한 신기수가 양의헌 씨의 쓰시마에서 의 해녀작업을 촬영할 때 동행한 카메라맨 김성학은 정병춘 씨의 아들이 며, <하루코>의 내레이터이며, 이 영화에 수많은 영상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삶을 보면 우선 양의헌 씨는 1916년 6월 제주도에 서 태어났고 1941년에 해녀로 도일하지만, 오사카공습으로 인해 1944년 에 제주도로 돌아갔다가 제주도4 3사건으로 다시 1949년에 일본으로 밀항한다. 남편 김한배는 조총련 활동가였는데, 1956년부터 시작된 북송 사업에 차남, 삼남, 사남이 북한으로 건너간다. 양의헌 씨는 해녀로 활동 하며 가계를 꾸려왔는데, 1966년에 신기수가 이를 알고 촬영을 시작했다. 남편 김한배는 1994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일본인 스태프들이 촬영을 개 시한 것은 2001년이며 제주도에 귀향한 것은 2002년이었다. 양의헌 씨의 영상을 찍던 신기수 씨는 2002년에 사망했다. 현재 양의헌 씨의 가족은 북한에 세 명, 한국에 한 명, 일본에 세 명이 사는 이산가족이다. 양의헌 씨는 1982년 이후 2003년까지 20회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 그러나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계속 한국을 방문할 수 없었던 양의헌 씨는 53년만인 2002년에야 비로소 제주도를 방문하게 된다. TV 다큐멘터리 의 제목인 <53년만의 제주도>는 이렇듯 재일제주인의 역사와 사회적 배 경을 압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병춘 씨는 1917년 제주도에서 출생했고 12살인 1929년에 오 사카로 도일, 1943년 오사카대공습으로 인해 오이타( 大 分 )로 소개되었다. 1945년까지 시모노세키에서 생활하다 4 3사건이 있던 1948년 제주도로 간 그는 사녀를 낳고 1950년 장남과 차녀를 데리고 밀항한다. 1963년에 101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는 제주도에서 밀항하다 발각되어 오무라수용소에 수감된 넷째 딸을 데 려오게 된다. 그리고 1986년에는 장남이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국적을 변경했으며, 1997년에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1998년에 제주도를 방 문했다. 이후 2000년에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변경했으며, 2001년에는 제주도로 가서 조상의 산소를 이장했다. 그동안 주로 해온 일들이 합법 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아 37회의 체포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양의헌 씨와 정병춘 씨의 개인사는 한국과 일본, 북한의 복잡 한 근현대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김부자는 재일조선인 여성과 디 아스포라, 젠더와의 역학관계에서 <하루코>를 분석하면서, 장남 김성학 의 독백형식의 내레이션[실제 목소리는 배우 하라다 요시오( 原 田 芳 雄 )] 에 보이는 피사체와 영화제작자 간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 과 일본인, 여성과 남성이라고 하는 이중, 삼중의 권력관계 54 에 주의해 야 한다고 말한다. 그 예로 <하루코>의 클라이맥스 부분의 내레이션 우 리들 재일은 민족분단이 없는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지금의 행복은 어머니들 1세의 피눈물로 가득 찬 고생 위에 있다 는 부분을 예시했다. 김부자는 또한 이 부분이 일본 사회, 일본인이 요구하는 마땅히 있어 야 할 재일상 즉, 다시 말하자면 일본인에게 이의를 주장하지 않고 풍 랑을 일으키지 않으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일본 사회에서 살고 있 음에 감사하 고, 역사적 내력을 묻지 않고 스스로 일본인과 화해 하려 는 55 재일조선인상이 표현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이에 가장 부합하는 것 은 장남 김성학의 모습이며 정병춘은 오히려 아들과 대조되는 모습이라 고 했다. 한편 <해녀 양씨> 마지막 부분은 가족의 끈을 끝까지 지켜온 해녀 54 김부자는 이 논문에서 식민지시대의 풍부한 역사자료와 일본과 한국의 근현대사관련 자료를 가지고 젠더와 재일조선인 여성과 디아스포라라는 시점에서 <하루코>를 분석했다. 김부자, HARUKO: 재 일여성 디아스포라 젠더, 황해문화 2007년 겨울호, 새얼문화재단, 117~147쪽. 55 김부자, HARUKO, 143쪽. 102 일본비평 8호

양씨, 얼마 안 있어 88세, 미수( 米 壽 )를 맞이합니다 라는 내레이션으로 끝 이 난다. 같은 근현대사 속에서도 다른 길을 걸어온 양의헌 씨와 정병춘 씨는 각각 따로 제작된 영화에서 가족 을 잘 지켜온 어머니들의 모습으 로 자리매김된다. 양의헌 씨와 정병춘 씨의 개인 연보는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에서 태 어나 같은 근현대사를 경험하면서도 개인의 삶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상황에 의해 얼마나 좌지우지되는가를 보여준다. 양의헌 씨는 일본과 북 한과 한국에 가족을 두고 있으면서도,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제 주도를 방문할 수 없었다. 그리고 TV 방영 이후 북한을 방문하는 모습 은 당시 일본과 북한의 관계로 인해 감독 하라무라 마사키가 동행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양의헌 씨의 북한 방문에 동행한 아들이 그 영상을 찍게 된다. 또한 양의헌 씨는 4 3으로 인해 다시 오사카로 오는데 조총련 활 동에 빠진 남편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아들들을 북한으 로 보냈으며 현재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까 두려워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변경하지 못한다. 그래서 고향인 제주도에 돌아가 기까지 5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양의헌 씨와 정병춘 씨의 연표에서 보이는 삶은 조총련과 민단, 귀국 사업이라는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역사적, 정치적 배경과, 4 3 및 밀항이 라는 재일제주인을 둘러싼 기억, 가족을 방치한 아버지라는 공통 요소를 지닌다. 그러나 영화는 가족 서사를 중심으로 그리면서 어머니의 이야기 만 남겨놓았다. 재일제주인의 역사와 제주도, 일본, 북한을 둘러싼 역학 관계는 어머니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위치하는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중에 가족 서사가 중심이 된 작품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나카타 도이쓰( 中 田 統 ㆒)의 <오사 카이야기( 大 阪 ストーリー)>(1996)나 마쓰에 데쓰아키( 松 江 哲 明 )의 <안녕 김 치(アンニョンキムチ)>(1999)는 이전의 다큐멘터리들이 역사와 정치에 초점 을 맞추던 것에 비해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체 103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성을 이야기했다. 사토 마코토( 佐 藤 真 )에 의하면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렇듯 가족 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은 1990년대부터라고 한다. 56 그는 199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정치나 사회보다도 사생활에 초점 을 맞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이들 작품 모두 자신의 아버지, 가족, 아내, 친구, 민족 등에 초점을 맞춰 어디까지나 일인칭으로 이야기를 하 는 것으로 속된 정치영화의 테마 중심주의를 벗어나려 했다고 평했다. 일 인칭의 사적 공간인 가족이야기라는 점에서 <하루코>나 <해녀 양씨>도 이런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의 흐름에 위치한다. 사토 마코토는 이런 사 생활에 초점을 맞춘 자아찾기 다큐멘터리들이 스테레오타입화하는 젊 은이들의 표상이나 재일조선인상을 해체하는 기분 좋은 느낌 은 있을지 라도 결국에는 개인의 잡감( 雑 感 ) 으로 환원되는 유약함도 같이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57 이런 점에서 최근 <가족의 나라(かぞくのくに)> 58 로 다큐멘터리와 극영 화를 횡단하는 양영희 감독의 도전은 주목할 만하다. 양영희는 2005년 다큐멘터리 영화 <Dear Pyongyang>(이하 <디어 평양>)으로 주목을 받기 시 작했다. 이 작품은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귀국사업으로 북 한에 간 오빠들을 방문하는 가족이야기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태어나 15 살에 일본의 오사카로 건너와 해방 후 조총련에 몸담고 귀국사업으로 자 신의 아들들 세 명을 북한에 보낸 아버지의 인생이 영상에 재현될 때, 관 객들은 이 다큐멘터리가 평범한 가족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다.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가끔 카메라를 들이대는 딸과 대화를 하면서 도 느닷없이 카메라 앞에서 관객들에게 자신과 딸의 이야기를 늘어놓으 며 웃음을 선사한다. 감독 스스로가 말하듯이 이 작품은 개인의 삶에서 56 佐 藤 真, ドキュメンタリーの 修 辞 学, 12~13쪽. 57 佐 藤 真, ドキュメンタリーの 修 辞 学, 13쪽. 58 2012년 2월 제62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어 국제연맹상을 수상했다. 104 일본비평 8호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59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국가에 대항하여 가족 서사를 엮어낸 60 작품이다. 2009년 한국의 지원으로 만든 두번째 다큐멘터리 영화 <굿바이 평 양> 61 에 대한 인터뷰에서 양영희는 가족이란 타인이 모인 팀이며, 그렇 기 때문에 그냥 두면 붕괴하고 마는,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이어질 수 없 는 62 관계라고 설명했다. 양영희의 다큐멘터리는 사회와 역사를 배제하 지 않는 개인의 삶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되돌리 는 도전이다. 6. 다문화주의의 가능성과 표상 1) 제주도 방문 및 제주도로의 이주 전후 일본의 영화에서는 많은 재일제주인들이 등장한다. 특히 1979년 이 학인이 <이방인의 강( 異 邦 人 の 河 )>을 만든 이후 1980, 90년대 그리고 2000 년대에 만들어지는 재일조선인 영화 속에서 재일제주인의 모습은 주연, 조연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975년에 시작된 재일조선인의 고향방문단사업 63, 1986년 아시안게임 서울 개최, 1988년 서울올림픽 개 최로 일본 미디어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일조선인과 한국을 연결시키려는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특히 1981년 11 59 萩 野 亮 編 集 部 編, ソーシャル ドキュメンタリー, フィルム アート 社, 2012, 151쪽. 60 萩 野 亮 編 集 部 編, ソーシャル ドキュメンタリー, 146쪽. 61 일본어 제목은 < 愛 しのソナ>이다. 62 萩 野 亮 編 集 部 編, ソーシャル ドキュメンタリー, 152쪽. 63 재일조선인의 고향방문단사업은 남북의 7 4남북공동성명 합의에 따라 1975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1 회 고향방문단(1975년 5월)은 1300여 명이 고향을 방문하지만, 이후 조선적을 가진 이가 고향을 방 문하려면 한국으로 적을 변경하고 신원조회를 받아야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결국 1970년대에는 매년 4000~5000명에 이르던 방문단이 1980, 90년대에는 계속 줄어들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고향방문단이 세력판도 바꿨다, 한겨레21, 2000년 8월 17일호를 참조할 것. 105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월 제주도가 노비자(no visa) 지역 64 으로 설정되고, 이어 1984년 5월25일 한국의 전국소년체전이 처음으로 제주에서 개최되면서 많은 재일제주인 들이 손쉽게 제주도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의 움직임 을 다룬 TV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65 또한 드라마에서도 재일제주인 작가 원수일의 이군의 우울( 李 君 の 憂 鬱 ) 66 을 원작으로 하는 <이군의 내일( 李 君 の 明 日 )>이 1990년 NHK에서 제작되었다. 이 드라마에 대해 원작자 원수일은 재일조선인의 소설을 소재로 하여 일본인들이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되묻는 개별적 의식 이 보편성 으로 바뀐 훌륭한 만남이었다 67 고 평가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영화에서는 픽션에서도 일찍부터 재일조선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TV 드라마에서는 1990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에도 알려진 최양일이 감독한 <피와 뼈( 血 と 骨 )>(2004)가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재일제주인 작가 양석일의 소설을 원 작으로 하여, 주인공 김준평이 1923년에 기미가요호를 타고 제주에서 일 본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그린다. 또한 이 영화는 재일제주인의 역사가 4 3이나 밀항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시기에서 시작되고 있음 을 이야기한다. 이외에도 사사베 기요시( 佐 々 部 清 )의 <커튼 콜>(2004) 68 은 막간예능인 69 64 이외에도 1982년 6월에는 도쿄와 제주, 도쿄와 오사카 사이에 국제 직통전화선이 연결되어 관광지 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는 관광객(15일 이내 체재)에 대한 비자가 폐지된 것은 1994년이다. 65 예를 들면 <두 이름을 가지고 재일 3세의 일본( 二 つの 名 前 を 持 って 在 日 三 世 のニッポン)>(1982년 5월 25일 방영, 요미우리TV)의 주인공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친척들이 있는 제 주도를 찾아간다. 또한 <제주도 어머니인 섬으로의 귀향( 済 州 島 母 なる 島 への 帰 郷 )>(1982년 10월 18일 방영, NHK)은 노비자 관광지역인 제주도를 찾아간 재일제주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66 元 秀 一, 李 君 の 憂 鬱, 猪 飼 野 物 語 : 済 州 島 からきた 女 たち, 草 風 館, 1987. 67 元 秀 一, 李 君 の 明 日 体 験 記, ほるもん 文 化 第 1 号, 1990, 83쪽. 68 도쿄의 잡지사에서 유능한 기자로 일하던 하시모토 가오리는 실수를 한 탓에 시모노세키의 지역잡 지사로 좌천된다. 여기에서 그녀는 예전에 있었던 미나코극장이라는 곳의 막간 예능인을 찾아달라 는 한 노부인의 엽서를 받아 그를 찾아 나서게 된다. 일본영화가 전성기였던 시절, 시모노세키의 미 나코극장에서 일하던 슈헤이는 아내와 딸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일본영화의 쇠락과 함께 직업을 잃게 된다. 그는 다른 직업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게 벽이 되어 좀처럼 106 일본비평 8호

슈헤이와 그 딸의 이야기를 축으로 하여 가족이야기와 최근 일본영화의 한 주류인 노스탤지어를 잘 배합했다. 여기에 나오는 슈헤이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데, 바로 그가 일자리를 잃고 돌아간 곳도 제주도였다. 69 그렇다면 밀항과 불법체류의 이미지가 강했던 1965년에서 40여 년이 지난 지금 TV는 재일제주인의 다른 모습을 전달하고 있을까. 2003년 11 월 15일 70 TV아사히에서 방영한 <텔레멘터리 2003 재일이어서 정말 다 행이야 병아리 아이돌의 낯선 조국에서의 도전(テレメンタリー2003 在 日 でホントよかった アイドルの 卵 見 知 らぬ 祖 国 での 挑 戦 )>은 1980년대 재일 조선인 2, 3세들이 조국을 체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체험형 조국 방문이라는 도식을 답습하면서도, 제주도를 방문하는 재일제주인들의 방 문코스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재일조선인 3세인 유리는 한국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한 것 을 계기로 한국에서 아이돌스타가 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할 아버지가 왜 일본에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할아버지의 고향 인 제주도를 방문한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자신이 방문했던 제주 도의 풍경은 영화 <쉬리>의 촬영지였던 해안이었고, 자신의 의지로 방문 한 두번째 제주도에서는 무인도와 밭,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풍경을 만난다. 유리는 다큐멘터리에서 화면에 비춰진 제주도 의 풍경과 자신의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재일조선인이어서 정말 다행 이라고 인터뷰를 마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유리는 일본인들 에게 제주도를 설명하고 한국을 설명하는 한국의 대변자이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 그의 아내는 고생 끝에 딸을 남겨두고 숨을 거두고, 그는 시모노세키에 딸을 남겨둔 채 고향 제주도로 돌아간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왕래하면서 일본영화의 흥망에 맞춰 한 막간 예능인의 인생을 재현해 낸다. 69 막간 예능인이란 영화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영화와 영화 사이에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무대와 나와 노래를 부르거나 개그를 선보이는 사람을 말한다. 일본영화의 전성기에 흥했다가 점차 일본영 화에 관객이 끊기게 되자 막간 예능인들도 설 자리를 잃었다. 70 간토( 関 東 ) 지역에서는 11월 17일 방영. 107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2) 특별한 영주권자와 서류 미비자의 차이 그런데 2000년대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이 자이니치( 在 日 ) 로 살아 가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낄 만큼 사회가 변했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이 논문의 처음에 이야기한 드라마 <오사카러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겠다. 이 드라마의 광고문구는 거기에는 국적도 없고 민족조차도 없다 이 다. 그런데 실제로 드라마를 보다보면 국적과 민족이 아주 큰 역할을 차 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주인공 가네다( 金 田 哲 浩 )는 취직은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밴드활동을 하는, 이 시대 일 본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젊은 세대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 리던 해에 태어났으며, 고생을 모르고 자랐고 마음은 일본인이며 일본어 밖에 하지 못한다.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과 사이의 거리감을 한국전쟁과 서울올림픽 사이만큼의 거리라고 말하는 그에게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 는 존재다. 그의 할머니는 4 3을 피해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왔으며,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에 태어나 지금은 쓰루하시에서 커다란 불 고기집을 경영하고 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에서 만난 미얀마 여성 네이치틴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네이치틴은 불법체류자 라는 자 신의 불안정한 위치 때문에 항상 고민한다. 실제로 이 네이치틴 역할을 맡은 다반사이헤인은 미얀마 출신으로 대학생 때 민주화운동에 참여했 지만 신변에 위협을 느껴 2004년 관광비자로 일본에 입국, 그대로 체재 하게 되었다. 그 후 난민 신청을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입국관리국 에 수용되었다가, 2008년 두 번째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져 현재 간사이 ( 関 西 )의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연기경험은 없지만 일본에 사는 난민들 의 현상을 전하고 싶어 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71 극 중에 71 이상은 프로그램 홈페이지 http://www.nhk.or.jp/dodra/lovesoul/cast/index.html에 의함. 108 일본비평 8호

서 네이치틴은 가네다의 하모니카에 맞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AMAY EIN(어머니의 집)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갈 때/피곤에 지친 마음이/그리워하는 것은 어머니의 집 어머니의 따뜻한 애정에서/멀리 떠나와버렸다고/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돌아가고 싶어 따뜻한 어머니의 집으로/돌아가고 싶어 쉴 수 있는 어머니의 집 으로/잠들 수 없는 밤에 기적소리가 들리면/참을 수 없이 돌아가고 싶어 정치적 난민 신청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본 사회에서 정치적 망 명자로 살아가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네이치틴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 지만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앞에 놓여 있다. 특별히 영주할 수 있는 권리 를 가진 재일조선인 3세로서 다른 일본 의 젊은이들처럼 하고 싶은 밴드활동을 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 당하면서 생활하는 가네다의 모습과 불안정한 거주자로서 입국관리국의 눈을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네이치틴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가네다와 네 이치틴이 있는 삶의 장소는 네이치틴이 입국관리국에 수감되어 면회를 할 때, 이 둘 사이에 놓여진 유리벽의 두께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만큼 차이가 있다. 재일조선인 1세와 2세들의 삶이 밀항 과 불법체류 라는 테두리 안 에서 불안정하게 영위되어 왔음을 말하면서 미얀마인들의 현재 삶과 다 르지 않았고 현재 일본 안의 불법체류자 들의 모습도 재일조선인 1, 2세 들의 옛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해도 될 법하건만 드라마는 그런 점들 을 배제한 채 진행된다. 미얀마인들의 정치적 망명과 4 3을 전후해 제주 도에서 오사카로 건너왔던 재일제주인들의 모습은 매우 닮아 있지만, 가 네다의 할머니가 네이치틴이 일하는 가게로 찾아가 그를 위로하고 어머 니가 보고 싶을 텐데 보지도 못하는 신세가 불쌍하다며 포옹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 이 둘의 눈물은 고향(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인데, 현 109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재 부유하게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와 2세, 그리고 자신의 꿈을 쫓아 살아가는 가네다의 모습에서 그들의 역사는 과거에서 머무르고 있고 현 재와 이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네이치틴은 입국관리국에 갇히게 되고, 제 3국인 캐나다로의 정치적 망명을 하는 선택이 놓여진다. 그러나 드라마 는 마지막에 네이치틴과 가네다의 가족이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모습으 로 끝난다. 최양일의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나( 月 はどっちに 出 ている)>는 1993년 일본의 총인구에서 재일조선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 가 넘었다고 화제가 되었을 때 나온 작품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재일조 선인 2세로 필리핀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이 둘은 해피엔드를 예감하며 이상적인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2000년대 만들어진 <오사카러브>에서 해피엔드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연출 한 아다치 모지리( 安 達 もじり)는 연출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드라마에는 시대에 휩쓸리고 여러 헤어짐 을 경험한 인물이 등장한다. 찢 기는 아픔, 그 마음의 상처가 있기 때문에 가족은 같이 있고 싶다 고 강렬하 게 바라게 된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 누구도 사람들의 유대관계를 찢을 권리 는 없다 는 당연한 사실을 선언함과 동시에 아무 이유도 없이 휩쓸렸던 사람들 이 많았던 가혹한 현실을 극복하는 각오 와 강한 유대관계 를 키우는 것이야 말로 가족이 된다 는 것이라는 것을 두 젊은이의 갈등과 성장을 통해 그리고 싶었다. 거기에는 국적도 없고 민족조차도 없다. 지금 이 시대에 함께 살면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키워갈 수 있다.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여기에서는 지금 일본 사회가 국적과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인연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행복한 사회임을 강조하며 다문화주의가 일본에서 가능한 일인 듯 이야기하지만, 정부가 발급하는 비자를 받지 못하는 이 들(서류 미비자들)에게 일본에서 살 수 있는 길은 거의 막혀 있다. 예를 들 110 일본비평 8호

면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지자체가 독자적으로 재류자격과 상관없이 외 국인등록증을 발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재류자격이 없는 외국인 과 그 자녀의 경우에도 인권상의 배려에서 교육이나 의료의 혜택 을 받 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2012년 7월 9일부터 새로 시행되는 재류관리제 도는 지자체가 아니라 국가가 일원적으로 외국인을 관리하여, 기존의 외 국인등록증이 아닌 재류카드를 발급하게 된다. 이 카드에는 위조방지를 위한 IC칩이 내장되어 있고, 기존의 외국인등록증에도 기재되어 있던 사 진, 이름, 국적, 주소, 재류자격 이외에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가 추가로 기재되어 불법체류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인과 같은 주민기본대장(주민표)을 사용하게 했다. 이 같은 조처들은 재일외국인에 대한 감시를 더 강화하고 불법체류자들을 줄이려는 의도 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72 비자가 없는 외국인들에 대한 경계와 감시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밀항으로 건너온 많은 재일 제주인들이 밀고되고 한국으로 강제송환되었던 것처럼, 현재 일본에서도 체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서류가 미비한 이들에게 삶은 여전히 힘들다. 3) 다문화주의의 가능성과 열린 결말 니시카와 나가오가 말하듯이 다문화주의는 현재 사회의 중심과제가 서 구의 전통적인 인종 중심의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 마이너리티 측의 문 화=민족적 가치를 어떻게 형성하거나 양립시킬 것인가라는 문제, 또 하 나 중요한 것은 국민국가적 아이덴티티에 대해 다문화주의적 아이덴티 티 형성의 문제임을 명확하게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문화 주의는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면서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 72 外 国 人 の 在 留 管 理, 国 に 一 元 化 新 カードの 交 付 始 まる, 朝 日 新 聞, 2012년 10월 9일자. 111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다. 73 또한 니시카와는 다문화주의가 21세기에 대한 인권선언 이라고 하 였다. 그는 인권선언이 처음에는 소수 특권자들의 해방을 의미하는 기 만적인 것이었지만, 처음 인권에서 배제되었던 하층 노동자나 농민, 여 자, 어린이, 외국인 등이 이 인권 을 방패 삼아 인권개념을 확대하면서 자신들의 해방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고 지적하며, 인권선언은 결국 식 민지를 해방시키지 못했 지만 우리는 다문화주의를 21세기의 인간의 존재방식을 정하는 기본적 원리로 키워나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 는 질문을 던진다. 74 일본의 영상 미디어에서 보이는 재일제주인의 모습은 이런 다문화주 의의 폐해를 그대로 답습한다. <오사카러브>의 연출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적과 민족 을 뛰어넘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되는 연애가 가 능한 지금의 이 시대는 행복 하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다문화주의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왔다는 니시카 와 나가오의 지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사카러브>에서는 재일조 선인 1세와 2세들이 경험한 과거를, 현재 재일조선인 3세인 가네다와 연 결시키기보다 미얀마인 네이치틴과 연관시킨다. 그리고 네이치틴이 캐나 다라는 제3국행과 가족이라는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는 분명 하지 않지만, 엔딩은 가네다의 가족사진 안에 네이치틴이 들어가는 장면 이다. 가족 서사는 여전히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주문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네이치틴과 가네다는 일본어를 사용한다. 방 송 홈페이지에는 네이치틴의 일본어가 너무 어색하니 차라리 미얀마어 를 말하게 하고 일본어 자막을 덧붙이는 것이 의사전달에는 더 효과적이 었으리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 일본어 자막이 사용되 73 西 川 長 夫, 新 植 民 地 主 義 論, 平 凡 社, 2006, 151쪽. 74 西 川 長 夫, 新 植 民 地 主 義 論, 151쪽. 112 일본비평 8호

는 곳은 가네다와 그의 아버지가 방문한 제주도에서이다. 그들은 제주도 에서 가네다의 사촌이면서 일본어를 전공한다는 대학생 덕분에 언어의 장벽을 넘어 쉽게 친지들과 커뮤니케이션을 나눌 수 있다. 고향 제주도 에서 친지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제주도의 방언인데, 이들 말에는 일본어 자막이 들어간다. 여기에서 가네다와 가네다의 아버지는 일본의 안방에 서 TV를 보는 일본어 화자들과 같은 위치에서 제주도의 방언을 듣게 된 다. 가네다의 아버지는 통역 없이도 제주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친지들은 그가 제주도의 방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있는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을 주고 받는다. 가네다는 제주도에서 자신의 할머니가 밀항을 할 때 배를 탔다는 조 그만 시골 마을의 포구를 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4 3의 희생자들이 된 친지들을 모셔놓은 무덤 등을 보면서 점차 아버지와 할머 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에는 할머니가 밀항을 하기 위해 배에 탔던 것처럼 자신들도 배를 타고 돌아가자고 아 버지에게 건의한다. 가네다가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자신의 뿌리에 대 해 생각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이동 경로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었다. 밀항과 배는 여기에서 재일제주인 3세인 가네 다가 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을 이해하는 주요 도구가 된다. 기존 일본의 TV 다큐멘터리들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기 위 해 선택했던 고향 방문과 고향 체험, 그리고 제주도에 대한 설명은 이 드 라마에서도 답습된다. 1980년대 많은 일본의 다큐멘터리들이 1988년 서 울올림픽 개최 등을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재일조선인과 한국을 연결시키려고 했음을 생각하면, 주인공인 가네다가 1988년에 태어났다 는 설정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1988년 서울올림픽은 일본 사회가 한국 에 주목하고 재일조선인에 주목할 수 있는 전환점이었는데, 이 해에 태 어난 가네다는 오히려 자신의 에스닉 아이덴티티나 일본 사회에 무관심 한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113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가네다의 아버지가 제주도 에서 친지들을 만나 겪는 에스닉 아이덴티티에 대한 갈등이다. 이 텍스 트에서 가네다의 아버지, 즉 재일조선인 2세에 대한 재현은 매우 전형적 이다. 1993년 최양일의 <달은 어디에 떠 있나>에서 자신의 클럽에서 일 하는 필리핀 여성과 사귀겠다는 아들 충남에게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을 하는 재일조선인 2세의 모습은 마이너리티였던 재일조선인들이 이 제 머조리티(majority)가 되어 일본 내의 다른 외국인들을 차별하는 모습 이었다. 이 텍스트에서도 가네다의 아버지는 네이치틴과 결혼하겠다는 가네다에게 외국인과의 결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며 반대한다. 가네 다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도 외국인인 주제에 외국인과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반항을 했다. 여기까지는 이 영 상텍스트가 기존의 재일조선인을 재현한 작품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 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주도에 간 가네다와 그의 아버지는 의외의 상황에 부딪힌 다. 가네다는 제주도의 말이나 한글을 이해하지 못하니 친지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말은 할 수 없지만 제주도 말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런 그를 두고 제주도의 친지들 은 마음껏 나쁜 소리를 한다. 그는 언제나처럼 일본에서 제주도의 친지 들을 위한 선물로 옷가지를 여러 벌 장만해 가는데, 예전의 가난에서 벗 어나 부유해진 친지들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옷가지는 촌스럽고 입지 못 할 거추장스러운 선물일 뿐이다. 또한 가네다의 가족들이 제주도에 없는 동안 돌봐준 무덤에 대해서도 사례를 바라는 모습을 본 가네다의 아버지 는 자신의 에스닉 아이덴티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자신은 일본인인가, 재일조선인인가, 아니면 재일제주인인가. 기존의 영상 미디어들은 재일조선인 1세들이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가졌다고 믿었으며, 재일조선인 3세나 4세들도 고민하거나 갈등하면서 도 결국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사이에 낀 재 114 일본비평 8호

일조선인 2세들은 생계유지에 급급하여 에스닉 아이덴티티에 대해 절실 하게 생각하는 모습은 없었다. 가네다의 할머니는 한국어를 말하지만 가 네다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다. 가네다의 아버지는 들을 수는 있 지만 말은 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입장이다. 그러나 이 영상텍스트에서는 고향 방문이 주인공 가네다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에스닉 아이덴티티를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 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왜 친지들에게 불쾌감을 주었 는지, 그리고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자신을 되짚어보게 된 것이 다. 가네다의 아버지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 는다. 이는 생활에 쫓겨 여유가 없던 재일조선인 2세들에게도 이제 여유 을 가지고 자신의 삶과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문제제기임과 동시에 재일조선인을 다루는 영상텍스트의 새로운 가능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7. 나오면서: 전통적 인 다큐멘터리의 가능성 이 글에서는 전후 일본의 영상 미디어, 그 중에서도 TV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재일제주인들이 어떻게 보여져왔는지를 되짚어보았다. 여기에 서 일본의 TV 다큐멘터리라는 영상 미디어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볼 필 요가 있다. 영화에서 시작된 다큐멘터리는 처음에 상업적인 오락영화 와는 달리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계몽의 수단 이었으며 성실한 담론(discourse of sobriety)으로 객관적인 내레이션을 자주 사용하 는 매체였다. 전후 일본의 TV 다큐멘터리에는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의 초창기 특징이 수용 되었고 공공서비스에 공헌한다 는 인식으로 텔레비전의 권위를 높이기 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이 아니라 보통 사 람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재현하는 인간 중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 115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특집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게 되었다. 이는 전통적 다큐멘터리 문화가 채용한 설명적 스타일과 대 비 되는 형식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레이션과 설명적 편집을 거부 하는 형식이었다. 전통적 다큐멘터리에서는 영상과 음악은 내레이션의 설명에 맞게 교묘하게 편집 되었으며 설명이나 내용의 전개를 보충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연출적 재현이나 스테레오타입적 묘사 도 적극적으로 사용 75 되었다. 이런 TV 다큐멘터리의 특징에서 재일제주인을 재현하는 TV 다큐 멘터리를 살펴보면 이들 영상물이 매우 전통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의 다큐멘터리 중에는 음악과 내레이션을 적극적으 로 배제하는 관찰적 인 작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일제주인을 다루 는 영상물들은 여전히 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이에 맞는 음악 을 사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TV 다큐멘터리에서 다루어지는 재일제주인 의 재현방식은 설명적이고 교훈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가족 서사와 더불어 등장한 다큐멘터리들은 정치, 사회와 역사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보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런 작품들은 예전에 카메라를 저항의 무기로 삼았을 때보다 유연하게 개인의 시점에 서 국가를 보려고 하고 있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의 일본학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일본의 식민 지주의를 이야기할 때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 있었던(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세 가지 여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첫 번 째는 1948년 이후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오는 작은 배에 탔던 밀항자들의 여로, 또 하나는 1960년대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간 재일조선인들과 일본인, 그리고 현재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탈북귀국자들의 여로 75 丹 羽 美 之, ポスト ドキュメンタリー 文 化 とテレビ リアリティ, 思 想 第 956 号, 2003, 91~92쪽. 116 일본비평 8호

인데 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76 이렇게 본다면 4 3과 밀항의 문 제 그리고 그 재현은 재일제주인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 전체, 더 나아 가 한반도와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에 재일 제주인의 표상을 재고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76 テッサ モーリス スズキ, 日 本 の 植 民 地 主 義, 移 民, 他 者 恐 怖 : 3つの 旅 路, 同 志 社 大 学 人 文 科 学 研 究 所, 社 会 科 学 86, 2010 年 2 月 号, 39 62쪽. 117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일본 TV 영상물의 재일제주인 표상 양인실 투고일자: 2012. 11. 16 심사완료일자: 2012. 12.1 게재확정일자: 2013. 2. 6 최근 한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재일제주인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제주도와 오 사카의 지역방송국을 중심으로 재일제주인을 중심으로 한 특집 다큐멘터리나 드라마가 많이 제작 되고 있다. 이들 최근의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는 재일제주인을 재현하면서 주로 밀항, 불법체류, 오 사카 시 이쿠노쿠, 난민 신청, 재일외국인들 간의 사랑이라는 요소를 다룬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밀항이 급증하던 1965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에도 오사카 시 이쿠노 쿠를 중심으로 밀항과 불법체류, 난민 신청이 중심이 되어 재일제주인 문제가 다루어지는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방송에서 재일제주인이 다루어질 때 반드시 나오는 제주4 3사건, 밀항, 다른 재일조선인들과는 다른 방식의 고향에 대한 향수 등을 들어, 각 방송 프로그램에서 재 일제주인들이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에 대해 시대별로 살펴보았다. 우선 1960년대 영상물은 재 일제주인들이 4 3사건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으로 왔고, 그 과정에서 밀항 이라는 수단을 선택했으며, 불법체류자로 일본에 살면서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강조하면서도 가족애와 미담 의 대상으로 재일제주인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재일제주인 1세 여성들을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는 재일제주인 여성으로서의 삶과 굴곡이 잘 표현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영화화 되는 과정에서 역사와 맥락이 삭제되기도 했다. 또한 재일제주인 3세나 4세가 주인공이 되면 이들 의 관심은 정치나 역사보다는 한국의 문화로 옮겨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재일제주인 1세와 2세들 의 밀항의 기억은 이들을 연결하는 키워드가 된다. 그리고 재일조선인들을 등장시키는 일본의 많 은 영상 텍스트들이 재일조선인 1세와 3세를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뇌로 연결하고, 2세를 타자화해 왔다면, 최근의 영상 텍스트는 2세들에게 여유을 가지고 자신의 삶과 뿌리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문제제기를 한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이 기존의 텍스트와는 다르게 재일조선 인을 다룬 영상물, 특히 재일제주인을 다룬 영상물들이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미래에 대해 서는 낙관적이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온 일본의 다문화주의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고 도 볼 수 있다. 주제어: 재일제주인,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밀항, 난민, 아이덴티티, 다문화주의, 제주4 3사건 중국잔류 일본인 을 둘러싼 포섭과 저항: 본국 귀국자 라는 다중적 아이덴티티의 가능성 현무암 투고일자: 2012. 11. 26 심사완료일자: 2012. 12.10 게재확정일자: 2013. 2. 6 1972년의 중일국교 정상화 이후, 특히 1980년에 들어서 전후에 중국으로부터 귀환하지 못했던 많 은 잔류 일본인 이 귀국하게 되었다. 이들이 일본 패전 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국인의 가정에 들어가게 된 이른바 잔류부인 및 잔류고아 다. 하지만 간신히 조국의 품에 안 기게 되었어도 중국잔류 일본인 에 대한 일본 정부의 냉대와 사회적인 차별 속에서 이들은 사회 적인 마이너리티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지원과 존재의 정당성을 위 해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등 싸워나가야 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여느 전쟁 피해에 대 한 소송에서처럼 국가의 책임 에 대해서는 전쟁피해 수인론( 受 忍 論 ) 을 가지고 부정하면서도 실 질적으로는 특별한 조치 를 통해 구원 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수인론 과 전쟁 책임론 사이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중국잔류 일본인 을 통해 기민과 이산이라는 역사성이 투 331 국문초록

the time, including the execution of the 100,000 international student plan, the enforcement of the Revision Immigration Control Law, the abolition of the personal reference system, and other policies related to the inflow of international students and illegal foreign workers, including the acceptance of foreign workers in either professional or technical fields. For now, this paper points out that the roles of the nation-state and corporate enterprises, which have not yet been thought of as a factor in the theories of immigrant studies, were important in the Joseon-jok s immigration to Japan. Keywords: Joseon-jok living in Japan, invisible minority, international students, foreign workers, migration Koreans of the Jeju Origin Living in Japan: As Represented in the Post-war Japanese Television Media Yang In sil In recent years, the term Koreans in Japan from Jeju (zainichi jejujin) has grown popular in the academia of both Japan and South Korea. Also, a number of TV dramas and documentaries on Koreans from Jeju living in Japan have been aired over the last few years, led by local broadcasting stations in the Jeju Island and in Osaka. These TV dramas and documentaries often take up themes such as the Jeju people smuggling themselves into Japan, their illegal residence in Japan, their attempt to apply for the refugee status; at the same time, they also deal with themes such as romance with other foreign residents in Japan, or life in the Ikuno community in Osaka (where Koreans from Jeju are concentrated in), which symbolically speaks for this group. In fact, these same themes can be found in the television documentaries made around 1965, the period when the number of illegal migration from South Korea to Japan was rapidly increasing. In this study, I discuss how these television programs have represented Koreans from Jeju in accordance with the changes in different time periods, by observing how each media depicted the Jeju 4.3 Massacre, the Jeju people s smuggling themselves into Japan, and their nostalgia for their homeland Jeju, which reveals to be different from their fellow Koreans living in Japan from different parts of Korea. These are recurring themes in the visual media where Koreans of the Jeju-origin living in Japan appear. For instance, the television texts of the 1960s use Koreans from Jeju living in Japan as subjects of heart-warming story based on familial love, while emphasizing their (direct or indirect) experiences of having crossed over to Japan after surviving the Jeju 4.3 Massacre and the Korean War, their life as illegal residents, and their feelings of regret for having made the wrong choice of becoming illegal residents as ex-patriots. Although recent documentaries about the first generation Korean women from Jeju present their lives as full of twists and turns, such historical contexts are often deleted when adapted to the screen. In cases where Koreans of the third or fourth immigrant generations play central characters, politics becomes their main concern, and memories possessed by the first and second immigrant generations smuggling themselves into Japan from Jeju become a lynchpin that connects them to their 335 영문초록

descendant generations. Moreover, while many visual texts on Koreans living in Japan in general, who have come from regions other than Jeju, tend to emphasize the ethnic identity of the first and third immigrant generations as that of zainichi Koreans (Koreans residing in Japan), such texts often present the second generation as Others in the story. On the contrary, visual texts on Koreans of the Jeji origin differ from such visual texts in that they try to help the second generation Koreans from Jeju build up their confidence about their ethnic origin and roots. However, even though films on Koreans living in Japan have become increasingly diversified in terms of themes, especially those films on Koreans from Jeju, these texts still seem to be reproducing the discourse of the Japanese multiculturalism, which presents an unrealistically hopeful future while silencing the past. Keywords: Koreans in Japan from Jeju, television documantaries, smuggling, refugee, identity, multiculturalism, Jeju 4.3 Massacre The Multiple Identities of the Japanese who Remained in China after WWII Hyun Moo am Following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China and Japan in 1972, many of Japanese who remained in China after WWII because they could not be repatriated during the postwar period returned to their homeland, especially in the 1980s. These people, known as Japanese orphans or Japanese women remaining in China, are people that lived on along with the Chinese people in order to survive the aftermaths of Japan s defeat. They were able to return to their motherland with difficulty, however, they were treated not as Japanese but as a foreigner. Therefore, as a minority, they had to struggle to receive reparation from the nation, which required having to prove their residency in Japan. In the end, the Japanese government denied the responsibilities of the state based on the war damage endurance theory. At the same time, however, the government implemented the special policy to support them. This paper examines Japan s policies toward the Japanese who remained in China after WWII, which stand on the border between the war damage endurance theory and the ideology of war responsibility. This paper considers the position of these people as well as the meaning that they hold in the context of historical consciousness during postwar Japan. Keywords: Japanese Left-Behind in China, The support and communication center for people returning from China, war damage endurance theory, war responsibility The Two Moons Appearing in the World of 1Q84: Aum-Question, System, and Minority Park Kyu Ta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meanings of the various mytho-magical binary oppositions present in the novel, 1Q84, by Haruki Murakami by focusing on the two keywords, System and Minority. These include the Year of 1984 and 1Q84 ; Mother and 336 일본비평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