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吳 浩 成 *1) 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 농본주의 사상의 구조와 개념을 밝히고 그 근원을 탐구 하는 데 있다. 農 本 主 義 란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농업을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여기고 자경농민과 농촌을 사회ㆍ경제조직의 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경영해야 한 다는 사상을 말한다. 농본주의 사상은 농업만이 생산의 근본이며 토지국유, 경 자유전, 부세균등, 병농일치, 중농억상, 상부상조, 사회통합 등의 정치적 강령 을 갖고 있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시스템이다. 농본주의 사상은 춘추ㆍ전국시대 의 경세철학에서 비롯되었으나 孟 子 에 의해 발전되고 漢 나라 때 유학자들에 의 해 국가 통치수단으로 구체화되었다. 조선 건국 초 鄭 道 傳 등이 추진한 전제개혁의 이상은 맹자가 말한 井 田 制 度 와 農 本 主 義 에 있었다. 그러나 토지개혁은 기득권층의 반발로 과전법 제정으로 축 소되어 미완의 수준에 그쳤다. 선조 때 韓 百 謙 이 평양성 밖에서 발견한 箕 子 井 田 은 조선의 성리학자들로 하 여금 조선에서도 정전법을 시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평양기전은 17 세기 후반의 대표적 경세적 사상가인 柳 馨 遠 이 농본주의 개혁을 주장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유형원의 실천적 개혁사상은 18세기에 들어와 李 瀷 을 통해 계승 되었으며 이익은 유형원의 실학적 전통을 朴 趾 源 과 19세기 초 丁 若 鏞 등에게 물 려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들 네 명의 사상가들은 모두 농촌 빈곤의 원인을 토지의 겸병에서 찾았고 토 지 겸병의 원인은 토지소유의 私 有 制 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 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토지의 사적 소유권제도를 철폐하거나 제한하여 농지를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고 농본주의적 정책을 시행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 성균관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2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주제어: 농본주의, 중농사상, 정전제도, 균전제도, 기자정전, 왕도주의 경 제정책, 유학 경제사상. Ⅰ. 序 論 우리나라는 예부터 農 은 天 下 之 大 本 1)이란 말로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농민은 士 農 工 商 의 四 民 가운데 선비를 제외한 직업가운데 으뜸의 자리에 두었 다. 농업을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여기는 농본주의 전통은 현대 산업사회에 들어 와 많이 약화되었지만 아직도 농업과 농민은 국민경제의 기반으로 국가의 보호 를 받아야 한다는 정서가 국민들 사이에 광범하게 남아있다. 農 本 主 義 란 농업을 산업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본으로 여기고 농민과 농촌을 사 회ㆍ경제조직의 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농업의 보호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상이다. 농본주의 사상의 기원은 儒 學 에 그 뿌리를 두고 있 다. 유학은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채택된 國 學 으로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었다. 유학자들이 추구해온 농본주의 사상은 단순한 중농주의 철학이 아나라 일련의 정치적 강령을 갖고있는 이데올로기 시스템이었다. 조선의 선비와 관리들은 仁 義 가 구현되는 왕도주의를 실천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농업을 왕도주의로 가기위한 유일한 경제적 수단으로 여겼다. 유생들은 백성들을 유교 적 이상사회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도덕과 예절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는 백성들의 생활안정이 선결조건이고 농업만이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이 라고 보았다. 유학에서의 농본주의는 다면적인 얼굴을 갖고있다. 농업이 衣 ㆍ 食 의 근본이며 富 의 원천이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토지국유화, 경자유전, 병농일치, 중농억상, 10분의 1세, 부역균등, 상부상조, 사회보장 등의 정책프로그람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인 사상구조를 가지고 있다. 1) 漢 나라의 文 帝 는 유학자인 賈 誼 의 진언에 따라 백성들에게 몸소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위해 文 帝 2년(BC. 178)처음으로 籍 田 을 설치하고 쟁기로 밭을 갈므로서 농사의 중요성을 가르쳤 다. 文 帝 는 이 권농행사에서 農 天 下 之 大 本 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 는 農 者 天 下 之 大 本 이라는 말의 시작이 되었다. 적전행사가 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史 記 孝 文 本 記, 前 元 2 年 正 月, 上 曰 農 天 下 之 大 本 其 開 籍 田 朕 親 率 耕 以 給 宗 室 廟 粢 盛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3 농본주의는 조선조 500년 동안 변함없이 추구해온 기본 가치였고 산업관이었 다. 조선의 관리와 유학자들은 농본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농업의 진흥을 원했고 상업과 수공업은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사욕과 사치를 조장하는 末 業 으로 취 급하여 억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농촌 사회공동체는 전쟁과 기근 등의 재난에 대 비한 사회안전망의 일환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조선의 관리와 선비들 은 국가경제가 위기에 봉착할 경우 언제나 유교적 경제사상의 원리를 통해 문제 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농본주의 사상의 기원은 유학의 왕도주의 사상에서 출발 하였으며 이 사상의 핵심은 고대 중국의 농지제도인 정전법에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 농본주의 사상의 구조와 근원을 독립된 과제로 다룬 연구는 거의 없 었다. 농본주의와 관련된 사상은 실학자들의 개혁사상과 토지개혁론의 일부로서 또는 성리학의 정치사상과 결부되어 있는 연구성과는 비교적 많이 축적되어 있 다. 17세기 이후의 쏟아저 나온 정전법과 전제개혁 논의에 대한 해석과 평가의 주류는 당색에 따라 지주제유지론 대 토지개혁론의 대결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Ⅱ. 朝 鮮 의 建 國 과 統 治 이데올로기 1. 朝 鮮 의 開 國 과 儒 學 신유학으로 불리는 朱 子 性 理 學 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던 安 珦 (1243-1306)에 의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은 원나 라로부터의 독립과 내정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기득권에 안주하는 호족과 무 신세력의 반대에 부딛혔다. 공민왕은 수구세력을 견제하고 개혁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을 중흥하고 젊은 유학자들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다. 李 齊 賢 ㆍ 李 穡 ㆍ 鄭 夢 周 ㆍ 權 近 ㆍ 鄭 道 傳 ㆍ 李 崇 仁 등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 사대부들은 공민왕을 도와 대외적으로는 반원ㆍ친명정책을 천명하고 내부적으로는 田 制 改 革 과 신분개 혁 등 혁신정책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이 시해된후 정국은 극도의 혼미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공모하여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 후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추대하였다. 이어 창왕 마저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사건을 계기로 유가출신의 사대부들은 국체를 보
4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존하며 점진적 개혁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적극적인 개혁을 위해 나라를 새로 세워야 한다는 급진파로 분열되었다. 정도전ㆍ조준ㆍ남곤 등 급진 혁명파는 정 몽주ㆍ이색 등 온건파를 제거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1392년 이성계를 옹립 하여 朝 鮮 을 건국하였다. 조선 건국의 사실상 설계자이며 총감독이었던 三 峯 鄭 道 傳 (1337~1398)은 개 국 1등공신이되어 정권의 핵심 요직을 모두 거머쥐었다. 뛰어난 성리학자였던 그는 신생국 조선의 건국 이념을 仁 義 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실현 하는 것에 두고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는데 알맞도록 조선의 정치제도 전반 을 정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2)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아 왕도정치와 민본주의 실현이라는 儒 家 의 정치철학 을 실현하는데 알맞도록 조선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군사 등 국가운영 전반에 걸 친 제도개혁에 착수하였다. 정도전은 신생국의 국호를 朝 鮮 으로 정하고 조선은 箕 子 朝 鮮 을 계승한다는 점, 왕은 仁 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인으로서 보위를 지 키고 이어가야 한다 3) 고 천명하여 仁 政 을 통치의 기본 방향으로 삼는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동시에 그는 성리학을 국정 교학으로 삼고 불교를 배척해야 하는 근거와 논리를 제시하였다. 4) 정도전이 구상한 정치제도는, 임금을 보좌하고 六 典 을 관장하는 宰 相 제도, 행 정의 중앙집권제도인 郡 ㆍ 縣 제와 守 令 제, 사대교린의 외교제도, 임금이나 재상 의 독재를 견제하기위한 臺 官 과 諫 官 제도, 전문적인 관료의 등용을 위한 과거제 도와 향교와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초등 및 고등교육제도, 풍속을 다스리는 사헌 부와 군주의 자질향상을 위한 經 筵 제도, 관리의 계급을 나타내는 품관제도, 왕 이 군ㆍ현으로 파견한 일선 수령을 감시하기 위한 감사제도, 종묘와 사직을 설치 하고 文 廟 를 세워 공자와 맹자 등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사제도 등을 만들 었다. 5) 2) 정도전은 개국 직후 朝 鮮 經 國 典, 經 濟 文 鑑, 經 濟 文 鑑 別 集 등을 지어 태조에게 바치고 이들 저서를 통해 새 정부의 정치 및 각종 제도개혁의 방향 과 내용 그리고 그 이유 등을 상세하 게 설명하였다. 朝 鮮 經 國 典 은 태조 3년(1394)에 찬진되었는데 조선의 모든 관제를 六 典 체제 에 따라 편제한 것이다. 이 책은 周 禮 를 모델로 하고 여기에 漢 ㆍ 唐 등의 제도를 가미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조정하였다. 3) 朝 鮮 經 國 典 國 號 ; 定 寶 位 ; 定 國 本. 4) 삼봉은 佛 氏 雜 辨, 心 氣 理 篇, 心 問 天 答 등의 저술을 통해 배불숭유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5) 朝 鮮 經 國 典 治 典 ; 禮 典.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5 宰 相 제도는 신하들의 수장인 재상이 행정실권을 가지고 임금의 통치행위를 보 좌하는 정치제도를 말한다. 경연이란 임금과 세자가 매일 신하들과 經 典 과 史 書 등을 공부하여 끊임없이 유가적 이데올로기를 학습하는 것을 말하며 대관은 정치 를 감찰하고 관료의 부정과 실정을 탄핵하는 기능을 말하며 諫 官 제도는 임금이나 신하의 잘못을 글로서 지적하고 탄핵하는 司 諫 院 등의 활동을, 감사제도는 일선 행정책임자인 수령들의 업무를 감시하는 8도의 監 司 와 암행어사제도를 말한다. 2. 鄭 道 傳 의 經 濟 思 想 과 農 本 主 義 삼봉 정도전은 조선의 정치제도를 정립하면서 경제개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 였다. 정도전은 나라를 운영하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데 가장 필요한 산업은 농 업이라고 생각하였다. 정도전은 왕도정치의 실현은 윤리와 도덕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윤리와 도덕의 실천은 백성들의 경제적 생활안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인 식하였다. 즉 衣 食 의 충족은 왕도정치에 앞서서 선결되어야 하는 필요조건이라 고 생각하였다. 6) 정도전은 국부를 증진시키고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농업인구의 증가와 토지의 적극적인 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일선 수령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戶 口 를 증가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山 野 를 개간하여 농 지를 넓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7) 정도전은 인구가 많아지면 농민 수도 많아 질 것이라는 근거에서 국가의 빈부는 인구의 다과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8) 정도전은 상ㆍ공업에 대해서는 본질적으로 비생산적인 산업으로 보고 부정적 인 생각을 가졌다. 삼봉은 수공업과 상업도 국가의 용도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 고 유통시키기 때문에 필요한 직업이지만 이 산업은 어디까지나 농업이 생산한 것을 가공하거나 유통시킬 뿐 본원적인 생산은 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농업 을 진흥하기 위해서는 상업과 수공업 등 농업이외의 다른 산업이 지나치게 발전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산업의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면 농업은 本 業 이고 6) 정도전의 경제관은 孟 子 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7) 經 濟 文 鑑 하, 監 司, 考 課. 8) 朝 鮮 經 國 典 상, 賦 典, 版 籍.
6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수공업과 상업은 末 業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봉은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억제해야 하는 이유로서 상ㆍ공업이 발전하면 농 업인구가 줄어들고 그 결과 본업인 농업이 쇠퇴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 상ㆍ공 인은 호적에 등재되지 않으므로 국가의 공민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정도전은 상ㆍ공업 인구의 증대를 막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이들에게 과세를 강 화 할것을 것을 주장하여 工 商 稅 를 신설하였다. 삼봉은 공업이 지나치게 발전하는 것을 막기위해 민간이 운영하던 鹽 場 을 국유 화 한 후 官 에서 소금을 구어 백성들에게 판매하도록 하였다. 그는 또 금ㆍ은ㆍ주 옥 등은 백성들이 생활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명나라에 갈 때나 宮 家 에 서 필요한 것이므로 백성들의 금ㆍ은 등의 채취행위를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동 과 철은 그릇과 농기구를 만드는 데 요긴한 것 이므로 생산이 필요하나 민간인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철광석이 나는 곳에 鐵 場 官 을 두고 인부를 모집하 여 제련ㆍ주조하는 국영 광산제를 채택하도록 하였다. 9) 정도전은 四 民 을 제외한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면 승려와 才 人, 무 당과 같이 직접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을 姦 民 으로 보고 이들의 경제행위는 구차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의리가 따르지 않고 구차하게 먹고 사는 일에 종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승려와 재인, 兼 倂 地 主, 무당 같은 놀고먹는 인구 ( 遊 民 )의 수를 줄이는 것도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요체라고 보았다. 정도전은 농업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권농정책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를 위한 정책으로 籍 田 을 설치하여 임금이 친경을 시범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기르칠 것과 백성들에게 농사지도가 필요하다고 보고 마을마다 勸 農 官 을 둘 것을 강조하였다. 10) 그는 수리시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 지방에 수리 시설의 설치를 건의하면서 이를 일선 수령들에 대한 업적평가의 중요 항목으로 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도전은 홍수와 한발, 질병 등은 天 道 가 운행하는 과정에서 가끔 생기는 것이 므로 이로 인한 기근은 나라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복 지정책의 일환으로서 흉년이나 춘궁기에 양곡과 종곡을 무이자로 대부하는 義 倉 이나 社 倉 제도를 유지하고 확충하는데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또 빈민들의 질 9) 朝 鮮 經 國 典 부전, 염법. 10) 朝 鮮 經 國 典 상, 禮 典.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7 병치료를 돕기위해 국가가 약재를 구입하여 비축하여 놓고 싼 값으로 판매하는 惠 民 典 藥 局 을 개설할 것을 강조하였다. 3. 科 田 法 土 地 改 革 과 井 田 法 思 想 고려 말은 혼란의 시대였다. 계속되는 정변과 왜구의 내습, 홍건적의 침입 등 으로 정부의 기강과 권위는 훼손되고 경제는 파탄상태에 빠졌다. 토지제도는 문 란하게 되어 權 門 勢 家 와 사찰 등이 국가 收 租 地 를 私 田 化 하고 남의 토지를 겸병 하고 빼앗는 현상이 만연하였다. 이들은 대형 農 莊 을 경영하며 인근 농민의 농지 를 투탁받아 불법적으로 세금과 신역을 면제시켜주는 대신 작인들을 가혹하게 부렸다. 토지행정도 문란하여 재상이 되면 360석의 녹을 받게 되어있는데 20석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등과하여 관직에 나간 사람이 토지를 받지 못하고 군대에 나가지 않은 자가 군전을 경작하였다. 퇴직한 관리들은 토지를 반납하지 않고 마음대로 상속하고 매매하는가 하면 토지에 관한 소송이 산더미처럼 쌓여 수령과 염사가 날마다 田 訟 에 매달려도 판결을 다 내리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11) 고려 말의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정도전은 田 制 가 무너진 뒤로 권문세가들이 남의 땅을 겸병하여 富 者 는 田 地 가 阡 陌 을 잇댈 만큼 많이 갖게 되었으나 貧 者 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게 되어 부자의 땅을 借 耕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지주들이 소출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 貧 益 貧 富 益 富 의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12) 며 빈곤 의 원인이 부자들의 토지겸병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삼봉은 이어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에 주인이 5~6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세금을 8~9번씩 거두어가고 지주는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 이외에도 人 馬 의 접대비, 조운비, 여비 등을 부담시키고 잡곡을 헐값으로 빼앗아갔다 13) 고 기록하여 농민들의 고초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고려 말 대사헌 趙 浚 은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周 나라가 800년 동안 계속되어 11) 高 麗 史 食 貨 志 1, 田 制 祿 科 田. 趙 浚 의 上 書, 辛 禑 14년 8월. 12) 삼봉은 중국 漢 나라의 董 仲 舒 의 말을 인용하여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朝 鮮 經 國 典 상, 賦 典. 13) 朝 鮮 經 國 典 상, 賦 典
8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온 것은 井 田 法 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며 漢 나라가 400년을 이어온 것은 세금을 가 볍게 하였기 때문이고 唐 나라가 300년을 이어온 것은 균전제를 시행하였기 때문 이고 秦 나라가 2대 만에 망한 것은 정전법을 폐지하였기 때문이라면서 국가의 성 쇠는 민생의 고락에 달려있고 민생의 고락은 田 制 가 균등한지의 여부에 달려있 다며 전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4) 정도전ㆍ조준 등은 토지의 집중과 부의 편재로 인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 하여서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여 경작자에게 고르게 나누어 주는 개혁이 필요 하다고 보았다. 15) 즉 정도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토지제도는 옛날의 올바른 제 도( 井 田 制 度 )에 기반을 둔 것으로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한 다음 백성의 수에 따 라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耕 者 有 田 의 원칙을 실현시키기는 것이었다. 16) 정도전ㆍ조준 등 급진 개혁파는 李 成 桂 가 실권을 장악하자 농지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내려온 國 家 收 租 地 의 私 田 化 와 그에 따른 사전 의 소유권적 지배권을 하루아침에 모두 폐지하기는 어려웠다. 권문세가 등 기득 권층의 반발로 전면적인 농지의 국유화와 모든 농민들에 대한 농지의 재분배가 어렵게 되자 정도전 등은 私 田 의 분급과 개혁을 주 내용으로 하는 科 田 法 제정으 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과전법은 토지국유의 원칙을 선언적으로 확인하면서 그동안 사유화하였던 私 田 에서의 국가수조권을 회복하고 불법적인 私 田 을 정리하여 일부 작인들에게 나 누어주는 한편 왕실과 정부기관 및 공신과 관리들에게는 수조권을 갖는 과전을 분급하고 농민들의 담세율을 낮추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14) 高 麗 史 食 貨 志 1, 田 制 祿 科 田. 趙 浚 의 上 書, 辛 禑 14년 8월 15) 정도전은 농지제도를 개혁하려는 배경을 朝 鮮 經 國 典 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옛날에는 모든 농지가 관의 소유로 되어있어 관에서 토지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경작하게 하였다. 천하의 백성가운데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땅이 없어 경작 할 수 없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빈부와 강약의 차이가 없고 그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의 일부는 모두 국가로 들어가 나라 또한 부유하였다. -전제가 무너진 뒤부터 세가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하기 시작하였다. 전하께서 잠저에 계실 때 농지제도의 문란을 보시고 분개하여 私 田 을 혁파할 것을 결심하셨 다. 그리하여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國 家 에 귀속시키고 計 口 授 田 하여 백성들에게 농지 를 지급함으로써 옛날 田 制 의 올바름을 부흥시키려 하셨다 朝 鮮 經 國 典 상, 賦 典, 經 理 16) 정도전은 三 代 이후 北 魏 ㆍ 隨 ㆍ 唐 에서 실시한 균전제나 한전제도 고식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옛날의 올바른 전제란 정전제도를 의미한다. 朝 鮮 經 國 典 經 理 賦 典 ; 韓 永 愚, 鄭 道 傳 思 想 의 硏 究 (개정판), 서울대출판부, 1999.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9 공양왕 2년 정부는 科 田 法 을 시행하기위해 모든 公 私 田 籍 을 불살라버리고 量 田 에 들어갔으나 권문세가의 비협조로 1백 수 십만결로 추정되는 전국의 토지가 운데 79만8천결의 전결을 파악하는데 그쳤다. 17) 과전법은 조선개국의 해이던 공 양왕 3년(1392) 5월에 공포되었으며 과전법에 의한 농지의 분배와 관련 농지제 도의 개혁은 조선 개국 초까지 계속되었다. 4. 科 田 法 體 系 과전법과 과전법 정신을 살려 고려 말과 조선 국초에 도입한 토지제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토지국유제 모든 토지는 원칙적으로 王 土 라는 것을 선언하고 國 家 收 租 地 로 편입하였다. 고 려의 군인전, 사원전 등을 폐지하고 불법적인 私 田 을 몰수하고 국유화하였다 그러 나 일부 농지의 사적 소유관계는 인정하되 모두 정부에 세금을 내도록하였다. 전 국의 모든 토지는 수조권의 귀속 여하에 따라 公 田 과 私 田 으로 구분하였다. (2) 관리들에게 과전 지급 공신과 관리들에게는 벼슬의 고하에 따라 수조권을 갖는 과전을 분급하였다. 벼슬은 18등급으로 나누고 벼슬이 제일 높은 제 1과에는 과전 150결을 지급하고 제일 낮은 제 18과는 10결을 주는 등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하였다. 과전의 지급 은 1대에 한하며 해당 공신 또는 관리가 죽거나 퇴직하면 분배한 과전은 국가에 반납하였다. 즉 공신전의 세습을 폐지하고 퇴직한 관리의 과전은 회수하여 재분 배하도록 하였다. 과전은 국초에 경기도 내에 있는 토지만을 분급하는 것을 원칙 으로 하였으나 경기도의 토지가 모자라게 되자 삼남지방의 토지도 지급하였다. 17) 고려 공양왕 3년(1392)에 완결된 己 巳 量 田 의 결과는 798,128 結 이었다. 기사양전 이전의 총 결 수는 50~60만 결로 추정되고 태종 5년(1405)에 실시된 양전의 결과는 126만 결이었다.
10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3) 耕 者 有 田 의 정신 전제개혁의 추진기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만 농지를 가질수 있다는 원칙을 세 우고 토지를 분급하려고 계획하였으나 과전법 개혁에서는 모든 농민에게 농지를 분급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승려, 상인과 공장인, 무당, 재인 등 농사를 짓지 않 는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토지의 소유를 금지한 다는 선에서 경자유전의 정신을 살리려고 하였다. (4) 竝 作 半 收 의 금지 농지를 타인에게 대여하고 수확물을 반씩 나누어 갖는 竝 作 制 度 는 관과 민을 막론하고 금지하였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鰥 ㆍ 寡 ㆍ 孤 ㆍ 獨 18)과 자식도 노비도 없 이 3~4결 이하를 경작하는 자는 허락하였다. 또 과전을 지급받은 관리는 과전의 경작권을 함부로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게 하였다. (5) 경작농지의 매매 및 증여 금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을 계속 자영농민으로 남아있게 하기위해 농지의 소유자 또는 경작자( 佃 戶 )는 경작농지( 所 耕 田 )의 개인적 매매 및 증여와 상속을 금지시 켰다. 정부는 남자가 농부가 되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농지를 분배하고 늙어 일정한 나이가 되거나 죽으면 농지는 회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원칙을 만 들었다. 만약 사망ㆍ이사ㆍ 戶 絶 한 경우, 또는 경영할 수 있는 규모를 초과하여 토지를 과다하게 점유하고 남이 경작할 수 없도록 번갈아가며 고의로 황무지를 만드는 경우 수조권자(국가 또는 田 主 )가 이를 회수하여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 민에게 분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6) 10분의 1세 농지에 대한 세금( 田 租 )은 토지에서의 소출량에 대한 10분의 1로 하며 오직 국 가만이 전세를 수취하고 지주의 중간수탈은 금지하였다. 19) 田 租 는 공전과 사전 18) 鰥 (환)은 아내를 잃은 늙은 홀아비, 寡 (과)는 남편을 잃은 늙은 과부, 獨 (독)은 자식이 없는 노인, 孤 (고)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를 말한다.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11 을 막론하고 水 田 1결에 대해 米 (현미) 30두, 旱 田 1결에 대해 콩 또는 잡곡 30두씩을 과세하였다. 20) 公 田 에서의 전조는 모두 국가가 직접 받는 것을 원칙으 로 하였다. 私 田 의 경우는 수조권은 과전을 받은 공신ㆍ관리들이나 관아에 있었 다. 사전의 수조권자가 개인일 경우 田 主 는 작인들로부터 세금을 대신 받아 1결 당 2두씩을 국가에 납입하고 나머지는 전주의 소유로 하였다. 21) Ⅲ. 儒 家 의 政 治 思 想 과 王 道 主 義 1. 王 道 主 義 와 覇 道 主 義 유학의 왕도주의 정치이념은 중국의 춘추ㆍ전국시대에 활동하였던 孔 子 와 孟 子 로부터 시작하였다. 공자는 仁 政 을 가장 중요한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임금은 백성들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民 本 과 爲 民 의 정치를 해야 하며 인정을 펴 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을 잘 먹이고 그 다음 덕과 예를 통해 다스려야하고 주 장하였다. 맹자는 공자의 인정을 王 道 政 治 란 표현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왕도정치 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 위해 王 道 와 覇 道 를 구별하였다. 패도란 군주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하며 법(형벌)과 경찰력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며 왕도는 백성들을 중요시하며 덕과 예로서 인정을 펴는 것을 말한다. 王 道 政 治 란 백성들을 위하는 정치로서 백성들에게 인륜의 도리를 가르쳐 교화 시킴으로서 仁 義 之 道 가 실현되는 세상을 만드는 정치를 말한다. 22) 覇 道 政 治 란 무력과 강압을 통해 나라를 부강( 富 國 强 兵 )하게 하는 정치를 말한다. 仁 義 之 道 는 사람이 살아야 할 옳바른 길로 그 본질은 백성들에게 어버이에게 효 19) 10분의 1세는 周 代 井 田 法 의 세법을 차용한 것이다. 정부는 비록 정전법을 실시하지는 못하지 만 10분의 1세를 받고 다른 세금을 일체 받지 않으면 정전법을 실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 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增 補 文 獻 備 考 田 賦 考, 租 稅. 20) 朝 鮮 經 國 典 상, 賦 典, 賦 稅. 21) 조선시대에 들어와 공전과 사전은 수조권을 기준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私 田 이란 토지의 수조 권이 개인에게 있는 토지를, 公 田 이란 토지의 수조권이 국가에 있는 토지를 말한다. 22) 孟 子 梁 惠 王, 上
12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도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도록 가르쳐 하늘의 뜻을 받들며 살도록 하는 것이다. 仁 義 之 道 는 聖 君 堯 와 舜 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치던 방식을 뜻한다. 요ㆍ순시 대는 태평성대였고 태평성대는 인의지도의 실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맹자는 인의지 도만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고 임금은 인의지도의 실 행을 治 民 의 기본노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3) 2. 王 道 主 義 의 실현을 위한 孟 子 의 네가지 基 本 政 策 맹자는 왕도주의의 실현을 위해 네가지의 基 本 政 策 이 필요하고 이 네가지 정 책이 실현되면 왕도주의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왕도주의의 실현을 위한 네 가지의 기본정책은 다음과 같다. 24) (1) 효율적인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를 임용하여야 한다 ( 選 賢 任 能 ). 백성들은 근본은 착하지만 욕심이 있어 탈선하기 쉽기 때문에 관리의 다스림 이 필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는 재덕을 겸비한 君 子 로 청렴결백해야 한다. 어진 군주와 현명하고 유능한 관리들로 구성된 정부는 왕도주의 이상을 펴는데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 25) (2) 어버이에 효도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도록 예절을 가르쳐야 한다( 敎 民 孝 悌 ). 가정과 사회의 윤리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교육해야 한다. 교육 내용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도록 하는 예절교육이 중심이 되어 야 한다. 가정과 사회에 윤리가 확립되면 천하는 안정되고 백성들은 다툼이 없이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 23) 孟 子 離 婁, 上, 下. 24) 賀 榮 一, 孟 子 之 王 道 主 義 北 京 大 出 版 部, 1993( 박삼수 역, 울산대출판부, 1997). 25) 孟 子 滕 文 公, 上.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13 (3) 인정을 실시하여 민심을 얻어야 한다( 仁 政 施 行 ). 仁 政 을 펴는 목적은 民 心 을 얻는 데 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고 천하를 얻으면 만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 仁 政 시행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민 생정책으로 백성들의 衣 ㆍ 食 ㆍ 住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다. 민생정책의 요체는 백성들로 하여금 부모ㆍ형제ㆍ처자 등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돌아가신 부모를 후하게 장사지내 효도를 다 할 수 있도록 보살핌으로서 養 生 ㆍ 喪 事 에 유감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26) (4) 국가는 재정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財 富 妥 理 ). 임금은 정부의 경비를 마련하고 각급 관리의 안정적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백 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되 재정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하여야 한다. 관 리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만큼 농업에 종사할 겨를이 없다. 그 러므로 다스림을 받는 백성은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관리를 부양한다. 관리와 백 성은 분업을 통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면 백성들이 살기 어렵게 되고 너무 적게 징수하면 정부 의 경비가 부족하여 나라살림이 궁색하게 된다. 27) 따라서 관리들을 예우하여 사 리사욕을 채우는 일을 방지하고 백성들로부터는 최소한의 세금을 걷어 재정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재정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맹자는 왕도주의로 가기 위한 재정정책은 井 田 制 를 실시하는 것 28) 이라고 말 하여 유교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는데 정전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孔 子 도 정전제도를 先 富 後 敎 를 위해 대단히 좋은 제도라고 보고 나를 등용해 주는 사람 이 있다면 정전제를 실시하여 3년 안에 정착시키겠다고 말하였다. 29) 26) 孟 子 梁 惠 王 상. 27) 孟 子 盡 心 下. 28) 孟 子 滕 文 公 상. 29) 論 語 子 路 편.
14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3. 王 道 主 義 財 政 政 策 과 井 田 制 度 井 田 制 는 고대 중국의 夏 ㆍ 殷 ㆍ 周 시대에 시행하였다는 토지제도를 말한다. 30) 정전제란 1평방 里 (900 畝 )의 정사각형 형태의 농지를 우물 井 자 모양으로 구분하 여 1구역( 夫 )당 100 畝 씩 모두 아홉 구역으로 나눈 다음 한가운데 1 夫 는 公 田 으로 하고 나머지 여덟 구역은 여덟 가구의 농민에게 私 田 으로 분배하여 주고 각기 경 작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31) 여덟 가구의 농가는 협력하여 먼저 공전을 경 작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을 정부에 세금( 田 賦 )으로 바치고 각자의 사전을 경작하여 생산되는 소출은 개별 농가가 소유한다. (1) 井 田 制 度 의 경제적 장점 맹자는 정전제의 실시를 통해 국가의 살림을 건실하게 운영하고 능력있는 관 리들을 등용할수 있으며 동시에 백성들의 민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이상 적인 제도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맹자는 정전제도는 정치ㆍ사회ㆍ군사적 측 면에서도 여러가지 장점이 있는 제도라고 강조하였다. 맹자는 정전제도가 국가의 행정을 용이하게 하고 백성들간에 빈부의 차이를 없애주며 백성들로 하여금 어려울 때 서로 의지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회보장적 기능을 할 수 있으며 전란을 맞아 병력동원에 용이한 점 등을 들어 왕도를 이룩 하기 위해 필요한 一 石 多 鳥 의 제도임을 강조하였다. 정전제도의 장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농지의 분배와 녹봉의 제정이 용이하다. 정전제는 농지를 분배하고 녹봉을 산정하는데 그리고 정부의 재정 및 부세 수 입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용이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전의 구획을 완료하 30) 정전제에 대한 내용은 孟 子 滕 文 公, 周 禮 地 官, 小 司 徒, 漢 書 食 貨 志 등에 기술되어 전해지고 있다. 31) 한서 식화지에 정전의 크기를 설명하여 사방 6 尺 을 1 步 라 하고 1백보를 1 畝 라고 한다. 100무 는 1 夫 가되고 3부를 1 屋 으로 하고 3옥이 1 井 이 된다. 1 井 은 사방 1 里 인데 모두 9 夫 와 같다고 하였다. 1척의 길이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한나라 때의 1척은 19.5cm이였으므로 1보는 약 1.17m가 된다. 따라서 1무는 가로 1보 x 세로 100보(사방 10보)의 넓이이므로 136.89평방m2 (41.36평, 1평=3.31m2)의 크기가 된다. 따라서 1부는 13,689m2(4,135.65평=1.4ha), 1정은 123,201m2 (37,220.85평=12.4ha)가 된다. 1척의 길이를 달리보아 1부의 넓이를 1.7ha로 보는 견해도 있다.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15 면 바로 농가에 농지를 분배할 수 있다. 가구당 100 畝 (약 1.4ha)씩이므로 더 계 산할 필요가 없다. 농민들은 공전을 경작하는 것으로 부세를 대신하고 다른 세금은 없다. 단 농가 는 1년에 3일씩만 부역에 동원된다. 정부는 농지세 확보를 위해 다른 수단을 강 구할 필요가 없다. 1정전의 공전은 100무이므로 정부는 무 단위로 재정을 계획하 고 신하들에게 주는 녹봉을 산정하는 데에도 편리하다. 2 백성들로 하여금 恒 産 을 갖고 걱정없이 살게 할 수 있다. 농민들에게 항산을 갖게 하면 생활보장이 되므로 恒 心 을 갖게 할 수 있다. 백 성들의 생활이 안정되면 마음이 안정된다. 32) 마음이 안정되면 쉽게 가르침을 받 아 向 善 하게 할 수 있다. 정전제는 평균 여덟 식구로 구성된 농가에게 각각 100 무의 농지를 분배하므로 각 농가는 충분히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부 양할 수 있다. 만약 한 농가에 가장 이외에 한 명의 장정이 더 있으면 25무의 농 지를 추가로 분배 받을 수 있다. 공경 이하의 관리들은 제사용으로 圭 田 을 가구 당 50무씩 제공하는데 세금은 면제한다. 3 국가경영을 위한 적정세율은 10 分 의 1 稅 로 충분하다. 맹자는 나라의 文 公 에게 왕도주의의 실현을 위해 농촌에 대해서는 9분의 1 의 助 法 을, 성내의 상ㆍ공인에 대해서는 10분의 1세를 내는 貢 法 을 채택할 것을 건의하였다. 33) 9분의 1의 농지세를 부과하는 것은 1정전을 9 夫 로 나누는 농지제 도에 근거 한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孟 子 등문공편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같은 책의 告 子 하편에서 는 10분의 1세율이 적정한 세율이라고 말하였다. 맹자는 세율이 생산량의 10분 의 1보다 낮으면 나라의 궁실, 종묘, 성곽 등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고 제사를 거행하는데 예절을 제대로 지킬 수 없고 관리들에 대한 녹봉을 제대로 줄 수 없 다고 지적하였다. 만약 세율이 10분의 1을 넘으면 백성들을 괴롭히는 폭정이 된 다고 부연하였다. 맹자는 10분의 1 세법은 夏 ㆍ 殷 ㆍ 周 삼대의 부세법을 참고하 여 정하였다고 말하였다. 34) 32) 孟 子 등문공 상. 民 之 爲 道 也 有 恒 産 者 有 恒 心 無 恒 産 者 無 恒 心 33) 맹자 등문공 상.
16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4 정전법을 실시하면 빈부의 차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전법은 모든 농가에 대하여 똑같이 100무의 토지를 주고 경작하게 한다. 세 금은 공전을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소출을 납부하게 되므로 담세도 공평하다. 이 로 인해 백성들이 화목해지고 교화가 모두 같아지며 공전에 대한 노동의 부담과 생산의 수익이 모두 공평 해진다. 35) 정전법은 토지를 국유로 하기때문에 개인적으로 분급받은 토지를 팔거나 상속 할 수 없다. 모든 남자는 20세가 되어 성인이 되면 국가로부터 100무의 토지를 받고 60세가 되면 토지를 반납해야 하므로 부자나 권력자에 의한 토지의 겸병은 불가능하다. 36) 농민들은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토지를 균분할 수 있게 되므 로 농가간에 그리고 세대간에 빈부의 차가 발생하지 않는다. (2) 井 田 制 度 의 사회ㆍ정치적 장점 맹자를 비롯한 고대의 儒 者 들은 정전제가 경제적 장점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정치적ㆍ사회적ㆍ군사적 장점도 있다는 점도 인식하고 정전제의 시행을 강조하 였다. 1 행정상의 관리가 편리하다. 대체로 마을마다 정전을 구획할 수 있으므로 한 마을에 속한 사람은 그 마을에 서 정전을 나누어 갖고 있다. 주민들은 이사를 하더라도 그 마을 안에서만 할 수 34) 맹자는 정전법에 의한 농지배분 규모는 시대에 따라 달랐으나 세율은 1 / 10이었다고 말하고 있 다. 夏 대에는 가구당 50무의 땅을 주고 10분의 1 貢 法 을 시행하였는데 세율은 흉ㆍ풍에 관계없 이 고정되었기 때문에 흉년에는 문제가 되었다. 殷 대에는 가구당 70무의 땅을 주고 助 法 을 실시, 수확량의 9분의 1을 부세로 받았다. 조법의 장점은 작황 여부에 관계없이 公 田 의 수확량을 납부 하는 것이다. 周 대에는 가구당 100무의 토지를 주고 徹 法 을 시행, 10분의 1세를 받았다. 농민들 은 은대와 마찬가지로 공전을 경작하여 수확물을 바치기만 하면 되었다. 맹자 등문공, 상편. 조 법은 정전실시로 내는 세금이 생산량의 1/9임을 의미하는데 맹자가 실제로는 1 / 10이었다고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혼란이 있었다. 이 문제는 1부의 공전에 여덟 농가가 農 舍 를 짓고 농사를 지었다는 盧 舍 設 이 나타나면서 설명이 가능해 졌다. 주희는 그의 맹자장구 에서 周 의 제도는 공전 100무 가운데 20무를 8농가의 농막을 짓는데 사용하여 실제로 경작하는 공전은 80무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8농가가 부담하는 세율은 실질적으로 10분의 1이었다는 것이다. 노 사설을 맨 처음 주장한 사람은 穀 梁 이었다. 35) 漢 書 食 貨 志 上. 36) 같은 책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17 있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더라도 그 마을에서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을 하나 하 나가 모두 행정단위가 될 수 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지방행정을 관리하기 가 매우 편리하다. 37) 2 자발적 치안망을 구축할수 있다. 동일 정전을 경작하는 여덟 가구 농민들은 농사에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 으므로 함께 전답을 지키고 가택을 보위하며 도적을 방어하는 하나의 집단이 될 수 있다. 38) 부언하면 같은 정전에 소속된 사람들은 서로 힘을 합해 농작물을 지 키고 외적에 대항할 수 있는 치안망을 만들 수 있다. 3 兵 農 一 致 로 국방에 용이하다. 농민들은 주어진 정전에 따라 한 곳에 定 住 하므로 戶 口 의 파악이 용이하고 성 격이 순박하다. 따라서 전쟁이 일어나면 주민들을 병력자원으로 동원하기 용이 하다.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이동하며 생업에 종사하는 상인과 같은 부류의 사 람들은 약삭바르기 때문에 군대에 입대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병농일치는 유사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위험한 군역의 대가로 삶의 토대가 되는 농지의 경작권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다른 제도보다 공정하고 피역을 막을 수 있다. 거주지 중심의 군 입대는 동향인끼리 대오를 편성하므로 사기의 진작과 전투력 제고에도 유리하다. 4 相 扶 相 助 및 사회보장적 기능을 할수 있다. 동일 정전의 여덟 가구 농민들은 公 田 을 함께 경작하고 또 각자의 토지를 인접 하여 경작하므로 상호 밀접한 공동체적 사회관계를 맺으므로 정전은 구성원 모두 를 위한 복지단위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다. 동일 정전의 농민들은 서로 내왕하며 우의를 다지게 할 수 있다. 기근이오면 서로 식량을 나누고 누구든지 병이 나면 서 로 도와주며 대신 농사일도 해줄 수 있다. 맹자는 의지할데 없는 鰥 寡 孤 獨 네 부류의 사람을 우선적으로 구호하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37) 孟 子 藤 文 公 上. 38) 같은 책.
18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5 관리들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 백성들은 정전의 공전을 경작하여 흉풍과 관계없이 거기에서 나오는 생산량만 납부하면 다른 세금은 없기 때문에 관리들이 다른 핑계를 대어 세금을 더 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백성들은 노동지대만 바치면 되는 제도이므로 관리들이 부패할 여지가 없다. 6 백성들에 대한 교화와 기술교육에 유리하다. 정전법을 실시하던 선왕시대에는 농사철이 끝난 다음 부녀자와 아이들을 모아 기술을 가르치고 공부를 시킨 다음 예절을 가르쳐 교화시켰다. 39) 겨울철이 되면 정전에서 농사를 짓던 백성들이 성내의 집으로 돌아오면 부인들은 밤에 한자리 에 모여 길쌈을 한다. 이 자리에서 솜씨 좋은 여자의 방적기술을 서로 배워 기술 의 차이를 평준화 하였다. 어린 남자아이들은 마을( 里 )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쳤다. 8세가 되면 소학에 입 문하여 서예. 계산, 육갑, 오방을 배우고 가족의 長 幼 에 대한 예절을 배운다. 15 세가 되면 대학에 입문하여 옛 성인들의 禮 樂 을 배우게 되어 군신간의 예의를 알 게 된다. 마을의 학교에서 우수한 자는 鄕 으로 보내 향의 학교에서 공부시킨다. 이 가운 데서도 뛰어난 학생은 제후국으로 보내 소학에 입학시킨다. 소학에서 뛰어난 학 생은 천자에게 천거하여 대학에서 공부시키고 이들을 선별하여 관직에 등용한다. (3) 井 田 制 度 와 財 政 政 策 시행의 요체 1 경제정책의 요체는 정전의 구획과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토지에 안주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정전제는 임 금의 입장에서 볼 때 작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제도이다.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步 와 畝 의 기준을 세워 그 경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 6척을 1 보로 하고 100보를 1무로 하고 100무를 1 夫 로 한다. 가구당 농지 면적이 100무씩 39) 漢 書 食 貨 志 上.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19 되도록 정확히 나누고 그 경계가 뚜렷하도록 해야 한다. 맹자는 仁 政 의 시행은 반드시 경계의 확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경계가 바르지 않으면 경지가 불균하고 俸 祿 이 공평하게 되지 않는다. 40) 고 말하여 정전법 시 행에 있어서 경계의 획정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2 농사는 때( 時 )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맹자는 국가운영에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은 농사철에는 절대로 백성들을 징 병이나 부역에 동원하여 농업생산을 방해하여서는 안된다는 점이라고 강조하였 다. 즉 농사는 때( 時 )가 중요하기 때문에 파종기와 제초기, 수확기 등의 적시를 놓지면 수확을 제대로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바쁜 농사철에는 토목공사를 시작하지 않아야 하고 군사를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서민들은 成 人 加 冠 禮, 아내를 얻는 일, 딸을 시집보내는 일, 제사 지내는 일등의 의식을 거행해서는 안되고 술과 단술을 내어 사람을 모으는 일도 해서는 안된다 41) 는 것이다. 3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과 수공업은 억제 해야한다. 맹자는 사람은 본래 착한 심성을 타고나지만 욕심을 다스리지 않으면 邪 道 로 빠져들기 쉽다며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였다. 맹자는 사람의 貪 利 心 은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고 물욕이 많을수록 善 을 행하려는 마음이 적어 지고 인성을 타락시키므로 교화를 통해 욕심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경고 하였다. 42) 유학은 仁 政 의 실시를 목표로 하고 있으므로 仁 義 를 손상할 우려가 있는 지나친 利 의 추구나 경제적 동기의 추구를 억제하였다. 맹자는 임금은 利 를 말하지 말어야 한다. 왜냐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이 를 다투게 하면 나라를 존망의 위기에 빠지게 하기때문이다. 임금은 그 대신 인 의를 중시하고 이를 강구하여야 한다. 43) 고 말하였다. 맹자는 또 닭이 울면 일 어나서 부지런히 善 을 추구하는 자는 순임금의 무리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 지런히 利 를 추구하는 자는 盜 蹠 의 무리이다. 순임금과 도척의 갈림길을 알고자 40) 孟 子 藤 文 公 下. 夫 仁 政 必 自 經 界 始 經 界 不 正 井 地 不 均 穀 祿 不 平 41) 呂 氏 春 秋 上 農 篇. 42) 孟 子 盡 心 下. 43) 孟 子 양혜왕 상
20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한다면 다른 것은 없다. 그것은 善 과 利 의 차이다. 44) 라고 지나치게 利 를 추구하 는 것을 경계하였다. 유학자들은 士 農 工 商 의 四 民 가운데 선비는 부지런히 학문을 배우고 수양을 하여 백성들을 교화해야 하는 임무를 갖고 있으며 농업은 衣 食 에 반드시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고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은 성질이 순박하여 교화하기에 쉬우므로 농업을 本 으로 보았다. 반면 상업과 수공업은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직업 이나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데다가 인의를 손상하기 쉬운 私 利 를 추구하는 직업으로 보고 末 로 취급하였다. 4 농업인구를 증가시키고 개간을 장려하여야 한다. 맹자는 농업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토지를 넓히고 농사에 종사하는 백성 들의 수를 늘려야 한다고 보고 이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군자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보았다. 45) 4. 法 家 와 農 家 의 重 農 抑 商 主 義 思 想 정전법을 중심으로한 농본주의 사상은 모두 儒 家 의 독창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전국시대에는 農 家, 法 家, 儒 家 가 공통적으로 중농정책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에 秦 나라의 상국 呂 不 韋 가 식객들로 하여금 저술하도록 하여 편찬하 였다는 呂 氏 春 秋 에는 농업과 관련되는 부분으로 상농편ㆍ임지편ㆍ변토편ㆍ심 시편이 있다. 46) 이 가운데 上 農 편은 고대 중농사상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농업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옛날의 성왕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편은 농업에 힘쓰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농업에 힘쓰면 농산물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지도 높일 수 있기 때문 44) 孟 子 진심 상. 45) 孟 子 진심 상, 하. 46) 진나라의 재상이 된 여불위에게는 식객이 3천명이 있었다. 여불위는 이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도록 하여 여씨춘추 라는 책을 였었다. 이책은 20여만자의 방대한 것으로 천지만물과 고금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고 하는 데 그 내용은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병가, 농가등 제자 백가의 설이 혼재하여 있다.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21 이다. 백성이 농업에 힘쓰면 형박하게 되고 형박하게 되면 그 힘을 전쟁에 이용 하기 쉽다. 힘을 이용하기 쉬우면 국경이 안태하게 되고 군주의 지위가 안전해진 다. 백성이 농업에 힘쓰면 둔중하게 되고 둔중하면 제멋대로의 주장이 적어진 다. 제멋대로의 주장이 적어지면 공법이 확립되고 국력도 통일된다. 또한 백성 들이 농업에 힘쓰면 家 産 이 복잡하고 많아진다. 가산이 많아지면 이주를 꺼리게 된다. 이주를 꺼리게 되면 현재 거주지에서 일생을 끝마쳐도 다른 것을 생각할 의욕이 없어진다. 백성들이 농업을 버리고 상ㆍ공업에 종사하면 上 命 을 따르지 않게 된다. 상명에 따르지 않게 되면 수비하는 것도 공격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다. 백성들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면 그들의 가산은 단순하게 정리된 다. 가산이 단순하게 되면 쉽게 이주한다. 쉽게 이주하게 되면 국가에 환란이 있 을 경우 거주하고 있는 곳을 지키려하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는 생각만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백성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면 약삭빠르게 되기 쉽고 약삭빨라지면 계산이 많아진다. 계산이 많아지면 법령을 마음대로 조종하 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한다. 47) 여씨춘추 는 농업을 단순히 식량을 조달하는 직업으로서만 보지 않고 농업을 부국강병을 위한 국가경영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상농편은 백성 들이 농업에 열심히 종사하면 국가지배상 유리한 점 세가지를 들고있다. 이것은 첫째, 백성들의 군사 동원하는 데 유리한 점 과 군주권의 강화; 둘째, 법령의 준 수와 국력의 통일; 셋째, 주민의 정주와 안정을 이룰수 있다는 것인데 이 견해는 다분히 法 家 적 생각이다. 상농편의 후반부는 농사짓는 시기에 부역과 병역을 징발하면 수확의 불순, 대 기근, 농민의 유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상농편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농업장려와 농민보호의 언급이 아니라 백성들이 末 業 즉 상업과 수 공업에 종사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 측면과 국가의 인력동원이 농사의 때( 時 )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국가와 농민간의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을 설명 하고 있다. 즉 농업노동과 국가에 대한 부역 및 병역노동은 모두 사회가 존립해 나가는데 필수적인 노동이나 이 모두를 농민들이 부담해야 하므로 시기를 잘 조 정하지 않으면 기근과 국가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임지편 이하 3편은 농업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三 才 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 47) 呂 氏 春 秋 上 農 편.
22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지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농민에게 농업기술을 설명하려고 쓰여진 것 이 아니라 위정자에게 상농편에서 나타난 전제지배의 기초로서의 중농정책의 모 습을 농업의 생산과정과 연계시켜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48) 여씨춘추 상농편은 後 稷 을 시조로 하는 農 家 의 사상을 바탕으로 法 家 의 생각 이 보태지고 여기에다가가 荀 子 의 사상을 가미하여 편저된 것으로 추정된다 Ⅳ. 漢 의 農 本 主 義 政 策 과 王 莽 의 井 田 法 개혁 1. 文 帝 의 籍 田 親 耕 과 중농주의 맹자의 유가적 농본주의와 그 가치관을 현실정치에 도입하려는 시도는 漢 의 3 대 황제 文 帝 (BC. 179-157)때부터 시작되었다. 文 帝 는 백성들의 생활안정과 튼튼한 국방을 위해 농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문제가 즉위했던 시절은 유방과 항우의 쟁패 로 백성들이 오래 동안 시달려 황폐화되었던 경제가 다시 회복되어 예전 수준으 로 돌아오던 때였다. 피폐했던 경제가 개선되자 새로운 사회모순이 생겨났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의 수가 늘고 사치를 좋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 다. 제철과 소금 판매 등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이고 백성들은 농업을 내던지고 수익이 높은 상업과 수공업에 관심을 쏟았다. 농민들 의 사정은 다시 어렵게 되었고 흉노들이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국가의 재정상황 은 악화되었다. 문제때 태부 賈 誼 는 상인과 수공업자의 수가 많아지면 농민의 수가 줄어들고 가난해지며 식량이 부족하게 된다고 주장하며 文 帝 에게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이 외적에 대해 국방을 튼튼히 하고 동시에 재해에 대비하는 길이라 며 務 本 抑 末 정책을 건의하였다. 유가출신인 가의는 해에 따라 풍년과 기근이 있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니 만약 지금 사방 2~3천리의 땅에 한발이 발생한다면 무엇으로 백성들을 구휼하겠습니 48) 西 嶋 定 生, 秦 漢 時 代 の 農 學, 中 國 經 濟 史 硏 究, 1966.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23 까. 갑자기 변경에 위급한 병란이 발생한다면 군량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습니 까.-식량을 축적하는 것이 천하를 경영하는 첫걸음입니다. 식량이 많으면 전쟁 에서 공격하면 취할 수 있고 수비하면 지킬 수 있고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떠돌아 다니는 백성들을 농업에 귀속시켜 본업에 종사하게 하고 상인들을 轉 業 시켜 농사를 짓게 하면 식량의 축적이 증가하고 백성들은 일을 하는 것이 즐거 워질 것입니다. 49) 라며 중농정책의 중요성을 호소하였다. 文 帝 때 태자의 스승인 錯 (조조)도 상인들이 경작에 종사하지도 않고 좋은 쌀과 고기를 먹고 비단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인들을 거느리고 왕후, 호족들과 교 제하여 그 세력이 관리를 능가하는 부귀를 누리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그는 현재 의 법은 농민을 존중하고 상인들을 천한 자라고하고 있지만 이미 상인들은 존귀 하게 되어 근본과 말이 거꾸로 되었다( 本 末 轉 倒 )고 지적하고 文 帝 에게 농민들이 가난하게 되는 원인에 대해 설명하였다. 농민들은 봄에 밭을 갈고 여름에 제초하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은 저장합니 다. 뿐만 아니라 관청의 부역에 나가 사계절을 통해 하루도 쉴 수 없습니다. 농 민들이 이처럼 고생하는데 가뭄과 홍수같은 재해를 당합니다. 게다가 국가는 세 금을 가차없이 징수합니다. 농민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진 것을 싼값으로 팔 아야 하고 팔 것이 없는 자는 상인과 고리대금업자에게 두 배의 이자를 내고 돈 을 빌려야 합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농지나 집을 팔아야 하고 아들이나 손자를 노비로 팔기도 해서 채무를 상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상인들이 농지를 兼 倂 하는 원인이고 농민들이 떠돌아다니게 되는 이유입니다. 50) 조조는 또 백성이 가난하면 간사한 마음이 생기고 간사한 마음은 먹을 것이 부족한 때문이며 이는 농사를 짓지 않는데서 생기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토지에 안착하지 않게되며 토지에 정주하지 않으면 고향을 떠나 집을 경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농사를 장려하여야 하고 농사에 장애가 되 는 상ㆍ공업을 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51) 면서 농업은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 할 뿐만 아니라 체제유지와 상부상조의 사회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한 산업이므로 중농을 위해서는 상업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49) 史 記 孝 文 本 記. 50) 漢 書 食 貨 志 上. 한나라 시대에는 화폐가 광범하게 사용되었다. 51) 漢 書 食 貨 志 上.
24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한나라의 文 帝 는 가의와 조조의 건의를 수용하여 백성들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중농정책을 실시하였다. 문제는 재위 22년동안 여러 차례 농업장려의 조칙을 발표하고 籍 田 을 설치하여 몸소 농사의 시범을 보이는 한편 納 粟 授 爵 정 책을 채택하고 군ㆍ현에 곡물을 비축하였다. 52) 그 결과 문제의 재위 후반기에는 창고에 쌓여있는 곡식이 넘쳐 썩어 나갈 정도 였고 세금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어 田 租 를 전부 면제하기도 하였다. 문제와 다 음 황제인 경제시대는 文 景 之 治 로 일컬어지며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평화 로운 시대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2. 桑 弘 羊 의 富 國 强 兵 政 策 과 董 仲 舒 의 農 本 主 義 思 想 (1) 상홍양의 부국강병 정책 漢 의 武 帝 는 한나라의 영토를 크게 확대한 황제로 한나라의 전성시대를 열었 다. 한무제는 중국 남부와 서강, 고조선과 남월 등을 정벌하는 데는 성공하여 국 토를 크게 확장하였지만 북방의 흉노를 복속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무제 는 흉노와 13번이나 전쟁을 치뤘다. 한무제는 잦은 外 征 으로 국고가 피폐하게 되 자 국가재정의 재건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무제는 桑 弘 羊 에게 이 과업을 맡겼다. 상홍양은 상인출신으로 法 家 的 생각 을 가진 재무관료였다. 상홍양은 大 農 丞 이 되자 황실과 정부의 재정을 분리하고 鹽 鐵 酒 專 賣 法 과 均 輸 法 平 準 法 을 고안하여 실시하였다. 53) 소금과 철은 당시 가장 귀한 재화로 이것을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상ㆍ공인은 막대한 부를 누렸다. 생활 필수품인 소금은 동쪽의 해안이나 산서성의 소금호수 또는 사천성의 염정에서만 생산되었으므로 생산자는 독점적 렌트를 누렸다. 鐵 은 전국시대 이후 철제 농기구가 보급 사용되기 시작함으로써 농업생산성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철제농구를 사용하는 농가는 목제농구를 사용하는 농가에 비해 생산량이 월등히 높았다. 철제농기구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었고 따라서 야철과 철제농기구 제조ㆍ판매업자는 큰 이익을 얻어 부자가 되었다. 52) 주 1을 참조할 것. 53) 염철의 전매는 상홍양의 전임자였던 孔 僅 에 의해 시작되었다. 漢 書 食 貨 志 下 ; 史 記 平 準 書.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25 상홍양은 소금을 생산하는 각 지방에 鹽 官 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생산되는 소금을 모두 염관에게만 팔도록 한다음 염관은 사들인 소금을 전국의 수요자들 에게 독점 판매하였다. 철은 철광을 생산하는 각 지방에 鐵 官 을 설치하고 이 관 청으로 하여금 철기를 제조하게 하고 이것을 수요자들에게 독점 판매하였다. 철 기생산에 필요한 기술과 노동력은 요역으로 충당하는 한편 관노와 죄수들도 동 원하였다. 54) 또 주각을 설치하여 정부에서 술을 전매하였다. 균수법이란 정부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물자를 정부가 생산지에서 직접 구입하 여 수송해 오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는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건은 상인이 구입 하여 중앙 또는 필요한 곳으로 수송하여 납품하였다. 이 방법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고 물건의 상태도 크게 훼손되는 것이 상례였다. 정부는 각지에 균수관을 설치하여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구입하여 중앙이나 기타 필요한 곳으로 자체 수 송하거나 수요자에게 판매하였다. 평준법이란 각 지방에 均 輸 官 을 배치하여 특정 재화의 가격이 크게 하락하였 을 때 해당 재화를 구입하여 가격의 하락을 방지하고 구입한 물자를 저장하였다 가 가격이 오르면 이것을 판매하여 물가의 상승을 억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균수 법과 평준법의 목적은 정부가 물자의 구매와 판매를 통해 물가를 조절함과 동시 에 매매차익을 확보하여 국가재정에 전입하기 위한 것이다. 상홍양은 이에 더해 상인들에게 일종의 재산세인 산자세를 물리고 세금을 징 수할 때 허위신고 한 자에게는 엄한 벌칙을 부과하였다. 상인들이 재산을 은익하 고 보고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하고 변경수비대에 1년동안 입대시키는 벌을 내 렸다. 또 범법자에 대한 고발보상제도인 고민령을 실시한 결과 중ㆍ대 상인들이 거의 파산상태에 빠졌다. 55) 桑 弘 羊 의 염ㆍ철ㆍ주전매와 균수ㆍ평준정책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정부를 재 정위기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아니라 국고를 다시 가득 채우게 하였다. 그 결과 도성과 하동의 창고는 곡물이 충만하고 도성의 균수관에 쌓인 비단만도 5백만 필 이 넘었다 54) 史 記 平 準 書. 55) 史 記 平 準 書
26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2) 董 仲 舒 의 農 本 主 義 思 想 漢 의 武 帝 때 등용된 유학자 董 仲 舒 는 무제를 설득하여 유교를 官 學 으로 삼는 데 성공하였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고 중앙집권적 통치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유학이외의 다른 학설의 전파를 금 지시켰다. 무제는 잦은 전쟁을 통하여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고 서역에 이르는 비단길을 개척하는 등 한나라의 전성시대를 건설하였으나 그의 통치 후반기에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무거운 병역 및 세금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된다가 흉년까지 자 주 발생하여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남의 땅을 소작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 는 상황이 만연하였다. 소작농민들은 보통 생산량의 10분의 5를 소작료로 내기 때문에 빈곤에서 벗어 날 수 없어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동중서는 무제의 자문에 답하여 농민들의 빈 곤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명한 글을 올렸다. 옛날에는 井 田 法 을 실시하였으므로 세금이 생산량의 10분의 1을 넘지않아 백 성들이 쉽게 세금을 납부하였고 백성들에게 身 役 을 부과할 때 1년에 3일을 넘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에 나라는 필요한 재화와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식량이 충분하므로 부모를 봉양하여 효를 다할수 있었고 어른들을 섬 기고 처자를 건사하여 즐겁게 살 수 있었으므로 기쁘게 천자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秦 나라 때 商 이 옛 제왕의 정전제도를 폐지하고 토지의 사유화와 매매 를 허락한 이후부터 부자의 농지는 농로를 따라 끝이 없게 확장되고 가난한 사람 은 송곳을 꽂을 땅도 없게 되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 난하게 되었습니다.-그리하여 어느 누구라도 豪 民 의 땅을 경작하면 생산량의 10분의 5를 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말이나 소가 입는 옷을 입 고 개ㆍ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포악한 관리들은 형벌을 제 멋대로 가하여 백성들은 바랄 것이 없게 되자 산림으로 도망하여 도적이 되니 죄 인이 길을 가는 사람의 반을 넘었습니다. 漢 나라가 일어난 후에도 이런 상황을 답습하여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井 田 法 은 당장에 시행할 수는 없다고 하 지만 조금씩 옛날의 제도에 가깝게 해야 합니다. 우선 백성들이 사유하는 토지 ( 名 田 )의 면적을 제한하여 겸병의 길을 막아야 합니다. 56) 董 仲 舒 는 秦 나라의 商 이 정전법을 폐지하고 토지의 사유화 제도를 도입한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27 이후부터 토지의 겸병현상이 일어나고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한 최초 의 유학자로 보인다. 동중서는 요ㆍ순시대의 태평성대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이상적인 재정제도인 정전법을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무 제에게 정전법의 복구가 당장 어렵다면 백성들이 소유하는 토지의 상한이라도 정하여 겸병의 길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동중서는 농촌의 빈부격차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限 田 策 을 제시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동중서의 限 田 制 案 이 처음으로 구체화 된 것은 전한 말 哀 帝 때(BC. 7)였다. 이떄 성안된 한전의 내용은 제후왕은 토지의 소유한도를 200경, 열후와 공주는 100경, 관내후와 관리는 30경까지 소유 할수 있고 그 이상은 소유 할수 없도록 하였으나 실시되지 못하였다. 3. 法 家 와 儒 家 관료들의 鹽 鐵 論 논쟁 武 帝 때 동중서를 따르는 유생출신의 신진 관리들은 법가적 통치를 행하고 있는 상홍양의 재무관료들과 국가의 통치이념을 둘러싸고 자주 충돌하였다. 무제가 죽 고 昭 帝 가 등극하자 소제는 백성들의 빈곤과 질병, 기근문제 등에 대한 자문을 얻 고자 어사대부 상홍양, 승상 차천추 등과 재야에서 추천받은 60여명의 賢 良 ㆍ 文 學 과 어전에서 토론하도록 명하였다. 토론의 주제는 무제때 장기간 계속된 팽창주의 적 변방정책과 이 정책을 뒷받침하였던 鹽 ㆍ 鐵 ㆍ 酒 의 전매와 균수ㆍ평준법을 계속 할것인가 아니면 이 정책을 폐기하고 養 民 을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였다. 57) 유학을 공부한 젊은 현량과 문학은 빈곤의 원인을 국가정책의 잘못때문이라며 염ㆍ철ㆍ주의 전매와 균수ㆍ평준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빈곤의 원인 을 국가가 철제농기구를 독점하여 크고 비싼 것만 제작하므로 대다수의 농민들 이 구입하기 어려워 아직도 목기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빈곤을 면치 못한다는 점, 염ㆍ철ㆍ주의 전매 이후 정부관리와 세력가들이 개인의 이익추구에 몰두하 여 오히려 상업이 유행하고 있다는 점 58), 전쟁은 많은 사람을 징발하기 때문에 56) 漢 書 食 貨 志 上, 用 商 鞅 之 法 改 帝 王 之 制 除 井 田 民 得 賣 買 富 者 田 連 阡 陌 貧 者 亡 立 錐 之 地 57) 桓 寬 은 소제 시원 6년(BC 81)의 염철회의의 토론을 기록하여 60편 10권의 책으로 편찬하였는 데 이것이 유명한 鹽 鐵 論 이다. 58) 염철주의 전매와 균수ㆍ평준정책을 시행하기위해서는 경험이 있는 상인들을 관리로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억상을 한다면서 실제적으로는 중ㆍ소상인들의 활동을 도와주는
28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직접적으로 농업생산을 저하시키고 또 군대가 이동, 주둔하는 지역의 경제를 피 폐시키고 있으므로 전쟁을 뒷받침하기위해 염ㆍ철ㆍ주전매와 균수 및 평준을 시 행하는 것은 국가를 재난으로 몰아넣고 농민들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 등을 들 어 기존의 재정정책을 반대하였다. 문학과 현량은 황제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향락의 근원을 막고 도덕을 권장하며 末 利 를 억제하고 仁 義 를 선양하며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여야 하 며 그런 후에 교화가 되고 풍속도 바뀔수 있습니다. 지금 정부는 염ㆍ철ㆍ주의 전매와 균수ㆍ평준으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소박한 본질은 파괴되고 탐욕스런 기풍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농 업( 本 )에 힘쓰는 자가 적고 상ㆍ공업( 末 )에 전념하는 자가 많습니다. 상공업이 발전하면 백성들은 사치스럽게 되지만 농업이 발전하면 백성들은 소박하고 진실 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소박하고 진실하면 재산이 풍족해지지만 백성들이 사치 스러우면 기근이 발생합니다. 고 유가의 산업관을 강조하며 염철ㆍ균수법등을 폐지하여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발전시키도록 촉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桑 弘 羊 과 그를 따르는 관리들은 현재 정부의 급선무는 외적을 방비 하는 것이고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방비가 필요한데 지금 이 비용 을 조달할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무제 이후 실시하고 있는 염철주, 균수법 등을 계속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지 않을 수 없다며 기존의 재정정책을 폐지하면 안된 다고 반박하고 있다. 하늘과 땅의 이익은 모자름이 없고 산과 바다의 재화는 넉넉하지 않음이 없지 만 백성이 궁핍하고 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물자의 유통이 막혀 천하의 재화 가 분산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흉노 등은 모반을 잘하여 신하로서 소임을 잘 하 지않고 여러 차례 변방을 침입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대비하려면 병사들이 고통 스럽고 방비를 소홀이 하면 흉노의 침략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先 帝 는 변방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고 약탈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성벽을 축조하고 요새를 만 들었으며 봉화대를 만들고 둔전을 두어 군사를 주둔시키므로 적들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군사비용이 부족하여 염철을 일으키고 주각을 설치하였으며 균수ㆍ평준법 을 시행하여 변방을 지키기위한 군사비를 확보하였습니다. 이것을 폐지한다면 무 슨 비용으로 변방의 병사들을 먹이고 돌보겠읍니까. 또 내지의 백성들이 편하게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29 잠들수 있는 것은 변방의 고을로 장벽을 삼고 있기 때문인데 변방에 기근이 발생 하였을 때 무엇으로 백성들을 구제하겠읍니까 라고 반박하며 국경의 안전과 평화 를 위해서는 기존 정책을 폐지해서는 안된다고 맞섰다. 현량과 문학은 유가적 논리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빈곤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기울인 반면 대부들은 법가적 생각을 배경으로 국가의 빈부문제에 더 관심을 두 었다. 유가는 국가를 민생안정의 기관으로 생각하고 법가는 외적으로부터 백성 들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급선무라는 관점에서 토론에 임하였다. 鹽 鐵 會 議 는 여러날 동안 계속되었는데 염철문제 이외에도 국가의 운영과 관련 된 정치ㆍ사회ㆍ사상등 여러가지 문제에 대하여 깊이있는 토론을 하였다. 염철 회의 결과 수도 장안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 한해서만 철관과 술 전매가 폐지되고 상홍양의 정책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토론을 계기로 유가의 경 제사상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4. 왕망의 유교국가 건설과 정전법 개혁 한나라 平 帝 때 외척으로 大 司 馬 였던 王 莽 은 구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新 왕조(AD. 9-23)를 창업하였다. 그는 유학을 숭상하던 사람으로 周 禮 를 규범으로 새 왕조의 정치기구를 정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상적 유교국가를 건설 하려고 시도하였다. 왕망은 유교를 국교화하면서 정치제도와 예제, 학제를 유교 의 교리에 맞도록 고치는 등 여러가지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井 田 法 의 모형을 따른 토지개혁 및 상ㆍ공업의 통제였다. 59) 왕망은 천하의 모든 토지를 왕토라고 선언하고 모든 매매를 금지시켰다. 각 戶 의 남자수가 8명이 안되면 호당 소유지 면적이 1 井 (여기서의 1 井 은 900 畝 이다.) 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1정을 초과는 경우 그 초과분을 친족이나 이웃 사람들 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토지가 없는 농민에 대해서는 16세가 되어 성인이 되면 토지를 분배하되 60세가 되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지주들이 토지를 감추 거나 내놓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였다. 왕망은 六 官 ㆍ 五 均 제도를 만들어 상ㆍ공업을 통제하였다. 왕망은 장안을 비롯 하여 낙양, 성도등 전국의 6대 도시에 오균관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곡물과 포 59) 漢 書 食 貨 志 下.
30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백등 주요 물자에 표준가격을 정하고 만약 시중가격이 표준가격보다 하락하면 정부에서 이를 사들이고 표준가격보다 오르면 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물자를 시 중에 팔아 가격상승을 억제하도록 하였다. 60) 육관제도란 소금ㆍ철ㆍ술 등 6가지 물품을 국가의 전매사업으로 하고 독점판 매하는 것을 말한다. 육관제도는 무제때의 재정확보를 위한 염ㆍ철ㆍ주의 전매 제도와는 목적을 달리하는 것으로 상인들의 폭리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는 유가의 억상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왕망정권은 또 빈한한 백성들에게 정부가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貸 (사 대) 制 度 도 실시하였다. 이 금융제도의 목적은 대금업자의 고리 또는 폭리로부터 농민과 가난한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대제도는 금융의 목적이 부 모에게 효도하는 제사나 장례이면 이자를 받지 않았고 영업자금이면 이를 자본 으로 해서 얻는 연간 수익의 1할을 이자로 받았다. 61)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대제도의 발상은 유가사상 특히 周 禮 사상에 의한 것으 로 토지정책의 목적과 같았다. 왕망의 토지개혁법은 심한 기근이 계속된데다가 토지소유자들의 반발과 관리들의 부패가 겹쳐 시행 3년만에 폐지되고 토지매매 금지도 철폐되었다. 왕망은 유학의 정치이념과 농본주의 사상을 가장 분명하고 과감하게 현실정치 에 도입한 통치자였지만 왕망정권은 급격한 개혁에 의한 민심이반 및 토호들의 반발과 부정부패로 15년밖에 계속되지 못하고 後 漢 의 광무제에게 멸망 당하였다. 漢 代 의 중신이였던 가의, 조조, 상홍양, 동중서와 같은 관리들과 왕망은 그 출 신이 법가나 유가를 막론하고 상업을 억제하고 중농을 강조하였다. 농업을 중시 하고 상인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춘추ㆍ전국시대에도 있었으나 62) 중농 억상 정책의 개념이 분명하게 확립되어 현실정치에 도입된 것은 漢 代 인 것으로 보인다. 60) 漢 書 食 貨 志 下. 61) 漢 書 食 貨 志 下. 62) 예를 들면 齊 나라의 管 子 와 秦 나라의 商 鞅 도 중농억상 정책을 추진하였다.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31 5. 隨 ㆍ 唐 시대의 均 田 制 와 限 田 制 西 周 말 秦 나라의 商 에 의해 정전제도가 해체되고 토지의 사유제가 실시된 후 정전제는 다시 복원 되지 않았다. 漢 나라가 망한후 조조, 유비, 손권의 삼국 이 쟁패를 겨루다가 조조의 魏 가 통일을 이룩했으나 司 馬 씨에게 나라를 빼았겼 다. 사마씨의 晉 은 곧 흉노와 선비, 돌궐 등 북방의 강력한 5개 유목민들에 의해 중원의 대부분을 빼았기게 되었다. 중국은 이후 隨 나라에 의해 다시 통일될 때까 지 약 270년간에 이르는 혼란의 五 胡 十 六 國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北 魏 는 5세기 鮮 卑 族 이 건설한 나라로 5 胡 가운데 한 나라였다. 북위는 정복전 쟁을 치르면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자 수십만에 이르는 정복지의 백성들과 선 비족을 수도 주변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정착하여 농사를 짓게하였다. 요동에서 중원으로 진출한 북위는 효문제때부터 漢 化 政 策 을 채택하였고 均 田 制 는 이때 행하여진 토지제도이다. 균전제는 주나라시대에 행하여졌다는 정전제 도를 본떠 백성의 수에 따라 농토를 나누어주는 計 口 授 田 制 를 채택하였다. 63) 균 전제는 정전제처럼 구획된 농지를 농가당 100무씩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농지 의 모양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호구를 등록시킨 뒤 남자가 15세가 되면 40무, 부 인에게는 20무의 농지를 분급하고 70세가 되면 환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분 배하는 제도였다. 64) 북위는 농가를 조직하여 5 家 를 隣 으로, 5린을 里 로 하고 5리를 으로 하는 행 정촌락을 편성한 다음 이ㆍ린ㆍ당의 삼장이 모여 토지를 분배ㆍ환수하고 세금의 징수를 담당하였다. 북위의 주민 강제이주와 계구수전제는 전쟁에서 승리한 정 복국가의 강력한 지배권을 바탕으로 국유화한 피정복자의 토지를 나누어 경작시 키는 것이었다. 65) 北 魏 에서 실시한 균전제는 오호십육국시대를 통일한 隨 나라와 그 뒤를 이은 唐 나라에서도 실시하였는데 제도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수나라는 농 민들에 대한 토지의 지급기간을 18세부터 60세까지로 줄였고 왕공 및 문무백관 63) 북위의 균전제는 효문제 9년(서기 485년) 漢 人 관료 이안세ㆍ이충의 헌책을 받아들여 실시하 였다. 64) 魏 書 食 貨 志. 65) 曾 我 部 靜 雄, 均 田 法 とその 稅 法 制 度 講 談 社, 1953.
32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과 공훈자들에게는 신분과 품계에 따라 상속이 가능한 永 業 田 을 주었다. 수나라 는 또 상인과 장인, 승려, 천민에게도 토지를 배분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唐 나라에서는 농민들에게 주는 토지를 口 分 田 과 永 業 田 으로 구분하여 균전제 도를 실시하였다. 구분전은 18세에 받아 60세가되면 국가에 반납하는 토지를 말 하며 영업전은 상속할수 있는 사유지로 초기에는 뽕나무, 닥나무, 대추나무 등 나무를 심은 토지를 영업전으로 지정하였다. 균전제아래서는 일단 백성들의 호적이 관에 등록되면 농민의 이동과 토지의 자 유로운 매매ㆍ저당 등이 금지되고 겸병과 소작이 불가능하게된다. 국가는 병농일 치의 체제를 운영하여 농민들로부터 세금과 병역과 부역을 취하고 공물을 받았 다. 唐 代 에는 수도 부근과 요지의 땅은 모두 公 田 으로 지정하고 이 땅을 공해전 또는 직분전으로 백관에게 나누어주었다. 공해전과 직분전은 인근 백성들에게 경 작시킨 다음 소작료를 납부하게하였다. 소작인은 균전농민가운데 희망자를 모집 하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지방관이 강제적으로 할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세에 돈황과 트루판의 동굴에서 발견된 고문서에 당시의 농민들에게 실시하 였던 균전제의 급전과 퇴전에 관한 문서가 다수 발견되 역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限 田 制 란 개인의 농지 소유면적에 제한을 두어 일정한 한도를 초과하지 못하 게하는 제도를 말한다. 한전제란 용어가 처음 나타난 것으 漢 나라 무제때 董 仲 舒 가 권세가와 부자들에 의한 토지의 겸병을 막고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방 안으로 백성들의 名 田 을 제한 할것을 제안한 것이 처음이라고 보여진다. 균전제 는 정전제를 실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정신을 취하여 대안으로 나타난 제도이 고 한전제는 균전제도 실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고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33 Ⅴ. 朝 鮮 前 期 의 産 業 政 策 과 社 會 政 策 1. 朝 鮮 前 期 의 勸 農 政 策 과 抑 商 工 政 策 (1) 勸 農 政 策 유교철학에 입각한 왕도정치와 三 代 之 治 의 실현이라는 국정목표는 조선조 500 년 내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세종때는 유교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각종 제도와 기반을 공고하게 구축하는 시기였다. 태조이래 역대 임금은 의ㆍ식의 근원인 농 업을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여기고 농업의 진흥을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폈다. 조선 전기의 중농정책은 양면적 특성을 지녔다. 한편으로는 권농정책을 강조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상공정책을 펼쳤다. 권농정책은 크게보아 권농기구를 설치하고 그 기관을 통해 농사를 진흥시키는 방법과 농업기술을 개선하고 보급 하는 것 그리고 농경지의 확대와 농업인구의 증가를 통해 농업생산을 증가시키 는 정책으로 대별할 수 있다. 가. 勸 農 機 構 의 설치와 운영 조선은 태조 원년 건국과 동시 임금이 백성들에게 농사의 시범을 보이는 籍 田 을 개설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農 典 寺 를 설치하였다. 적전행사란 국왕이 직접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행위를 시연함으로써 농사의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가르 치고 신하들에게 권농의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행사의 하나였다. 권 농을 직접 담당하는 행정기구는 지방의 郡 ㆍ 縣 이었다. 지방 수령의 일곱가지 중요 임무는 農 桑 을 장려하고 인구를 증가시키며, 교육 을 진흥시키고 군역과 부역을 고르게 하고 소송을 빨리 처리하고 간사스럽고 교 활한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66) 이 가운데서도 農 桑 을 진흥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국초에는 국왕이 임지로 가는 수령들에게 농업을 진흥 시키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호하는데 힘쓸것을 당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일선 수령들의 권농 임무가운데 농사를 짓는데 때를 놓치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과 농번기에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는 것 그리고 수리시설인 제언과 천 66) 經 國 大 典 吏 典, 考 課.
34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방의 축조와 유지관리, 흉년이나 재해를 만났을 때 빈민들을 구호하는 구휼활동 이 중요한 일이었다. 군ㆍ현은 권농의 책임자인 수령을 보좌하기 위하여 각 面 에 勸 農 官 을 두었다. 권농관은 실제 농민들과 접촉하는 사람으로 면민가운데 덕망이 있는 양반사족 가운데서 임명하였다. 권농관은 정부의 녹을 받는 관리가 아니고 명예직이였다. 나. 농업기술의 보급 조선시대의 농사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물은 벼였다. 벼농사가 중요한 이유는 국가의 세입과 지출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쌀이었고 농민들의 입장에서 도 쌀농사가 밭농사보다 수입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소비자들도 잡곡밥보다는 쌀밥을 훨씬 좋아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水 田 의 확대와 수도작의 보급에 관심이 많았다. 정부는 논농사의 관개를 위해 水 車 이용을 권장하였다. 세종때는 수차 를 만들줄 아는 장인을 경기ㆍ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 파견하여 수차를 보급하였 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시비기술의 부족으로 지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년에 한번씩 휴 경하는 歲 易 田 이 많았다. 세역전은 특히 토질이 척박한 산간지역에 많았는데 이 런 곳은 인구가 적은 것도 한 요인이었다. 지방의 부호 등 유력자들이 넓은 면적 의 토지를 점유하고 세역전이라는 이유를 들어 타인의 경작을 불허하고 휴경농 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부는 세역전을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連 作 常 耕 田 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67) 정부는 농민들의 농업기술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농서의 보급에도 힘썼다. 조 선 초기에는 農 桑 輯 要 四 時 纂 要 와 같은 중국의 농서를 보급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 농서들은 중국의 화북 전작지대를 주 대상으로 편찬되었기 때문 에 조선의 실정에 잘 맞지 않았다. 세종때 정부는 鄭 招 ㆍ 卞 孝 文 등으로 하여금 조선의 실정에 알맞도록 農 事 直 說 을 편찬하여 보급시키고 성종때는 姜 希 孟 으 로 하여금 衿 陽 雜 錄 을 저술하여 보급시켰다. 이 두 농서는 농사경험이 많은 독 농가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67) 태조실록 태조 3년 4월 庚 辰.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35 다. 농지의 개간과 이주 조선시대에는 토지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일수 있는 집약적 농업기술이 발달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와 유학자들은 농업생산량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 다도 농지면적을 확대하고 농업인구를 증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농지개발 은 대단히 힘든 일로 개별 농민의 힘만으로 하기 어려웠다. 간척지의 개발과 같 은 대규모 개발은 막대한 재력이 필요하므로 주로 왕실이나 유력자들이 토지가 없는 농민이나 유랑민들을 고용하여 광대한 토지를 개간하고 이들에게 소작을 주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개간을 장려하기 위해 새로 전답을 만들면 3~5년 동안 전세를 면제하 거나 감면해 주었다. 68) 대체로 첫해는 면세하고 다음 몇 해 동안은 감세조치를 취하였다. 정부는 홍수 등으로 매몰되거나 유실된 陳 田 은 관민을 동원하여 개간 하고 이를 토지없는 농민에게 분급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국방의 필요성 때문에 대규모로 하삼도의 백성들을 북변지역으 로 강제 이주시켰다. 또 인구가 부족하나 땅이 넓은 평안도ㆍ황해도와 강원도의 개발을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농민들을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관북 관서ㆍ해 서지방의 넓은 농지가 대부분 이때에 개간되었다. (2) 抑 商 政 策 유학은 원래 농업이 민생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자급자족 할 수 없고 국가의 재정운용 과정에서 공장인들의 공예품과 상인들의 교환기능을 필요로 하였기 때 문에 상업과 수공업도 농업과 함께 四 民 之 業 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 들은 분업을 통해 농 공 상이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상 공인의 업과 지 위를 선비와 농민의 그것과 같게 보지는 않았다. 儒 者 들은 士 와 農 을 本 으로 工 과 商 을 末 로 인식하고 여기에 종사하는 선비와 농민을 귀한것으로 상인과 공인 은 천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성리학자들은 사와 농은 관직을 받아 조정에 입사할 수 있지만 상과 공은 여기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 과 전법 토지개혁 때 상인과 공인에 대해서도 公 私 賤 人, 무속인, 창기, 승려들과 같 68) 經 國 大 典 戶 典, 收 稅.
36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이 취급하여 토지의 분급을 불허하고 이를 법전에 규정하였다. 69) 정도전은 先 王 이 工 商 稅 를 제정한 것은 末 作 (상ㆍ공업)을 억제하여 本 實 (농 업)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공ㆍ상에 관한 제도 가 없어 백성들 가운데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공과 상에 종사하므 로 농사짓는 백성들이 날로 줄어들고 이로 인해 末 作 이 발달하고 本 實 이 피폐하 였다. 70) 며 상과 공이 성하면 농업생산이 줄어들기 때문에 상인의 수를 줄이기 위해 상공세를 만들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태종도 사대부들이 노복을 시켜 장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보고를 듣고 농업을 후하게 대하고 말업을 억제하고 노는 무리를 엄격하게 금하라 71) 고 지시 하여 농을 본으로 보고 상업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조선시대의 상업은 市 廛, 場 市, 行 商 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시전은 국초부터 도성의 종로에 건립한 관설 점포에 입주한 상점을 말한다. 시전에 입주한 상인들 은 국가로부터 영업허가를 받은 상인으로 이들만이 독점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물 건을 팔 수 있었다. 행상은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 행상에는 보부상( 褓 商 과 負 商 ) 과 船 商 이 있었다. 정부는 건국 초기부터 상업활동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하여 京 市 署 라는 관청을 만들어 상인을 통제하고 도량형과 물가를 관리하는 업무를 맏겼다. 조선 전기에는 상업의 번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전의 상인들과 행상에게 行 狀 또는 路 引 이라는 영업허가증을 주고 매월 세금을 부과하였다. 행장과 노인은 신청하는 사람에게 다 내주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한도를 두어 운영하였다. 場 市 는 원래 국초에는 없었던 형태의 시장이었는데 성종 원년(1470) 혹심한 흉 년을 맞아 전라도 무안지방의 농민들이 자구책으로 읍내의 길거리에 모여 처음 시장이 열렸는데 이 장시는 곧 전라도 각지로 퍼졌다. 호조에서는 이것을 興 利 之 徒 들이 떼지어 나타난 대단히 우려할 사태로 보고 장시의 금지조치를 취하였다. 정부의 관리들은 장시를 務 本 抑 末 정책에 위배되는 현상으로 보고 내버려두면 농민들이 농업을 버리고 말업을 쫒는 현상이 심해지고 물가를 올리는 폐단을 낳 고 도둑들이 생기기 때문에 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뿐만 아니라 69) 太 祖 實 錄 태조 2년 12월 己 丑. 70) 鄭 道 傳, 朝 鮮 經 國 典 상, 賦 典. 71) 太 宗 實 錄 태종 9년 6월 병인. 厚 本 而 抑 末 痛 禁 遊 手 之 徒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37 농민들이 利 가 후한 상업을 쫒아 농업을 버리므로 농업생산이 줄어든다며 장시 를 금지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부 관리들은 장시가 흉년에 물자교환에 도움이되고 도산한 농민들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존재이므로 이를 용인할 것을 주장하였다. 정부는 수십 차례에 걸쳐 장시의 제한과 금지를 명하였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 었다. 장시는 중종때 더욱 발달하여 지방의 여러 도시에 7일장이 생겼다. 72) 장 시는 조선 후기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5일장으로 발전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도 성의 시전이 가지고 있던 독점권은 正 祖 의 辛 亥 通 功 때까지 계속되었다. (3) 工 ㆍ 鑛 業 抑 制 政 策 조선 전기에는 수공업을 위주로 한 가내공업도 자유업이 아니었다. 공업은 官 匠 制 수공업으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공인들은 정부의 각 기관에 예속되어 정부 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우선적으로 생산한 후 남는 시간에 시판용 제품을 만들수 있었다. 工 曹 를 비롯한 중앙관서에 예속된 장인을 內 工 匠 이라 하였고 지방관서 에 예속된 장인을 外 工 匠 이라 불렀다. 장인은 良 人 과 公 賤 으로 구성되어 소속 관부에 등록시킨 다음 공용물자를 생 산하기 위한 부역노동에 종사시켰다. 장인들의 자기 제품을 만들기 위한 노동에 대해서는 별도로 과세하였다. 조선 전기의 관장제 수공업은 생산성이 낮고 기술 개발의 유인이 적어 발전이 별로 없었다. 조선 후기 대동법이 실시되고 대부분의 관장제 공업이 철폐되고 난 후 수공업은 시장을 상대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조선시대에는 鑛 業 도 민간의 광산활동을 불허하고 국영광업체제를 유지하였 다. 광업활동은 조선 말기 고종 때까지 민간의 채광금지와 여기에서 비롯된 야금 기술의 미발달 등으로 극도로 제약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금ㆍ은ㆍ동ㆍ연ㆍ철과 같은 주요 광석의 민간채굴을 금지시키고 정부에서 농민들을 부역으로 동원하여 필요한 만큼만 채굴하여 제련하였다. 환언하면 해당 광물의 산지 수령이 관내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광석을 채굴하여 제련한 다음 이를 해당 지역의 貢 物 ( 官 備 貢 物 )로 중앙에 상납하였다. 광물의 채굴은 조선 후기 숙종 때부터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평안도 자산 72) 中 宗 實 錄 중종 12년 8월 무신.
38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에 있는 금광에 대해서만 민간의 채굴이 허용되었고 은광은 효종때 파주, 교하, 춘천, 곡산, 공주 소재의 것만 민간에 개방되었다. 금ㆍ은을 비롯한 일반 광물의 민간 채굴은 고종 때가 되어서야 허가되었다. (4) 海 外 貿 易 금지정책 조선은 개국 초부터 19세기 말 개항 때까지 일관되게 사대교린의 외교원칙에 입각하여 朝 貢 무역과 같은 정부간의 거래만 인정하고 일체의 민간에 의한 해외 무역은 금지하거나 제한된 범위에 한해서만 묵시적으로 인정하였다. 조공이란 형식적으로 볼 때 종속적 위치에 있는 나라가 종주국에 대해 예물을 보내는 것을 말하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조공품과 賜 與 형식의 답례품을 주고 받기 전에 서로 필요한 물품과 수량에 대해 상의하여 결정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국영무역이라고 말할수 있다. 조선정부가 민간의 무역행위를 금지시킨 것은 명ㆍ청나라가 대외교역을 금지하 고 조공무역으로 한정시킨 데에도 원인이 있지만 조선정부도 務 本 抑 末 의 유학적 경 세관아래 모든 상업활동을 국가적 통제하에 두고 억제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해외무역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불법적인 私 貿 易 또는 밀무역을 조장하는 결 과를 가져왔다. 중국과의 사무역은 주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의 구성원들에 의 해 행해졌다. 이들은 중국에서 값비싸게 팔 수 있는 인삼과 우피 등을 가져다 팔 고 조선에서 인기있는 중국의 비단과 백사 등 사치품을 구입,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私 貿 易 은 통역을 맡은 역관들이 주도하였다. 조선 후기 사행단을 수행하는 역관이 사무역을 통해 많은 수입을 얻자 무역로 에 접한 의주, 평양, 개성, 서울의 상인들이 관아에 청탁을 넣어 사행단에 동행 하기 시작하였다. 예산 부족에 어려움을 겪던 지방관아들도 무역별장을 딸려보 내 이들에게 무역에 종사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73) 일본과의 무역도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구성되었다. 공무역은 일본 특히 對 馬 藩 의 진상과 이에대한 조선의 회사로 이루어졌고 사무역은 조선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소수의 일본 상인들과 동래 상인들사이에 일어났다. 사행무역에 종사 할수 있는 의주와 개성상인 그리고 일본상인들과 거래를 할수 있는 동래상인들은 청 7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3, 1997, p. 444.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39 과 일본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청나라는 개국 초기부터 외국과의 해외무역을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숙종 말 경인 1730년경에 해금령을 해제하였다. 일본도 이무렵 민간인의 해외무역의 금 지하는 규정을 철폐하자 청나라의 상선들은 일본의 나가사끼에 商 館 을 설치하고 직접 일본에 드나들며 무역을 하기시작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그동안 중국의 사 치품을 구하기 위해 조선의 왜관에 드나들었으나 청상과의 직거래가 가능하게되 자 조선의 중계무역은 쇠퇴하게 되었다. 조선의 해금령은 19세기 말 외압에 의한 개항때까지 계속되었다. 2. 社 會 政 策 과 救 恤 制 度 (1) 구휼정책 유가에서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이들로 하여금 예와 도덕 을 가르쳐 仁 義 가 구현되는 세상으로 이끄는 것이다. 정부는 백성들로 하여금 足 食 할 수 있도록 각종 권농정책과 재정정책을 취하지만 관리들만의 힘으로 백성 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없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즉 홍수와 한발 등으로 인 한 기근과 전염병 등은 天 道 가 운행하는 과정에서 가끔 생기는 것이므로 이로 인 한 기근은 나라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다. 조선정부도 국초부터 백성들이 흉년을 만나거나 재해를 당하였을 때 이들을 구호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여겼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태조 원년(1392)에 義 倉 을 설립하였다. 의창은 빈민구 제를 목적으 로 하는 기구로 흉년 또는 춘궁기인 봄철에 가난한 농민들에게 양곡 과 종자곡을 무이자로 대출해 주고 가을에 원본을 회수하는 역할을 하였다. 의창 은 빈민구제뿐 아니라 농민들의 재생산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며 또 賑 貸 를 통해 부유한 계층과 빈한한 백성들 사이의 대립과 반목을 완화해주는 사회통합적 기능도 갖고 있었다. 건국초의 의창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출곡의 회수가 부진하여 어려움에 빠지게 되어도 軍 資 穀 을 돌려 지속적인 원곡의 보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대출곡의 회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비축해야 할 원곡이
40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감소하여 의창의 운영이 부실해졌다. 義 倉 의 원곡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군자곡을 끌어다 의창곡을 메우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과적으로 군자곡과 의창곡이 모두 고갈되는 상 황에 이르게 되었다. 문종때 호조에서 운영해오던 의창이 운영난에 봉착하고 군 자곡의 감소를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정부는 지역사회에서 출연하 여 이자를 받고 운영하는 社 倉 제도를 도입하도록 하였다. 社 倉 制 는 지방의 민간인이 운영주체가 되어 민간인의 곡식을 저축하여 두었다 가 흉년에 대비하도록 촌락을 기반으로 한 자치적 구호기구이다. 정부는 사창의 원곡에 보태도록 한 마을에 의창곡을 200석씩 출연하여 주었다. 사창곡은 매 석 당 3두씩의 이자를 받고 빈민들에게 대출하였다. 그러나 사창제 역시 대부곡의 회수부진으로 곧 폐지되었다. 常 平 倉 은 원래 세조때 물가조절기관으로 설립되었으나 곡가를 조절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량의 비축미를 갖고 있지 못해 제 기능을 다 하지못하자 임시기관으 로 의창과 마찬가지로 빈민구호사업을 하였다. 常 平 倉 은 의창이 운영난으로 폐지되자 중종 때 설립된 賑 恤 廳 과 함께 빈민 구 제사업을 하였다. 진휼청도 흉년이 들었을 때 굶는 백성들에게 식량을 빌려주거 나 죽을 쑤어 나누어주는 일을 하다가 흉년이 지나면 폐지하는 임시기구였다. 그 후 현종과 숙종 연간에 연속적인 대 기근을 맞아 상시적 구제활동의 필요성이 커 지자 진휼청과 상평청을 각각 독립시켜 상설기관으로 만들었다. (2) 隣 保 組 織 과 五 家 作 統 制 조선시대에는 정전법에서 이용되던 隣 保 자치조직으로 다섯 집을 한 統 으로 묶는 五 家 作 統 法 이 제정되어 시행되었다. 이 법은 다섯 집을 1 統 으로 하고 5통 을 1 里 로 하고 몇 개의 리를 합해 面 을 구성하였다. 오가작통은 세종 때부터 조 직을 논의하였는데 성종 때부터 법제화되어 경국대전에 규정되며 실시되었다. 오가작통은 원래 도둑을 방비하고 유민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한 주민 자치조 직으로 만들어 졌으나 주로 세금징수, 부역동원, 범죄자의 색출의 목적으로 이 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오가작통법을 각종 신역과 세금체납의 연대책임을 지 우는 데 사용하였다.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41 3. 土 地 政 策 과 稅 制 의 변화 (1) 과전법 토지개혁 정신의 실종과 토지의 사유화 조선은 개국과 동시 토지의 사유를 부정하고 토지매매와 병작제도의 금지 등 을 주요내용으로하는 과전법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나 그 성과는 1세대도 지속 하지 못하였다. 병작반수제도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뿌리깊은 관행으로 단순한 금지 법령으로 없어지지 않았다. 정부 자체도 경영규모의 상한을 두지 않은데다 가 노비경작은 허용하는 모순적인 법을 만들었고 환ㆍ과ㆍ고ㆍ독과 자식이나 노 비가 없는 자로 3~4결 이하의 소유지를 가진 경우는 병작을 허용한다는 예외규 정을 악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74) 뿐만 아니라 궁가나 양반관리 또는 향리의 부자들이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고 노비를 시켜 경작하는 것은 허락하여 양인들이 세금과 부역을 감면받기 위해 세 력가에 토지를 투탁하고 노비로 가장하면 이를 적발하기 어려웠다. 태조때 개국 공신과 기타 공로자들에게 내린 공신전ㆍ별사전 그리고 양반 관료들에게 대여한 녹과전 등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유물로 전락하였다. 과전법 토지개혁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관리의 수는 늘어나고 과전으로 지급 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세조 11년(1465) 정부는 과전제도를 폐지하고 현직관 료에게 재직중에만 토지를 지급하는 職 田 制 를 도입하였다. 직전제 아래서 관료들이 퇴직 후의 생계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재직중 에 농민을 심하게 수탈하는 폐단이 생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종 12년 (1471) 정부는 수조권 대신 현물로 녹봉을 지급하는 官 收 官 給 制 를 도입하고 직 전제를 폐지하였다. 직전제가 폐지됨에 따라 과전법에서 규정한 收 租 權 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 다. 세종과 세조때에 벌써 농지의 사적 소유가 광범하게 진행되어 사실상 토지의 상속과 매매가 일반화되고 병작금지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74) 太 宗 實 錄 태종 6년 11월 기묘.
42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2) 稅 法 의 변화 조선 건국시 태조는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준 다음 정전법의 세법과 같은 10분의 1세 제도를 택하였다. 그러나 이 10분의 1세 제도는 公 田 을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정부에 세금으로 바치는 助 法 75)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산물 가운데 10 분의 1을 과세하는 撤 法 과 비슷한 성격의 세제였다. 건국 초 정부는 비록 정전법을 실시하지는 못하지만 백성들에게 토지를 균등 하게 나누어주고 10분의 1세를 받으면 이것이 정전법의 정신을 살리는 제도라고 생각하고 10분의 1세제도를 택하였다. 76) 그러나 과전법의 10분의 1세의 실제 과 세액의 결정은 흉풍에 따른 損 失 踏 驗 法 을 통하여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손실답험법은 개별 농가의 농지를 일일이 답사하여 그 해의 생산량을 판단하 는 것으로 원래 지방수령이 담당하게 되어 있으나 아전이나 권농관들로 하여금 농가를 방문하여 손실의 정도를 판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조사과정 에서 담당자들이 뇌물을 받고 세액을 결정하는 등 많은 폐해를 가져왔다. 세종은 손실답험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貢 法 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세종의 공법은 10분의 1세를 받되 흉풍에 관계없이 평 균생산량을 과세하는 제도이다. 정부는 공법을 채택하기까지 16년 동안 연구를 거듭하고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세종 26년(1444) 새로운 세법인 貢 法 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신법에 따른 田 稅 는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 田 分 六 等 制 )으로 나누고 흉ㆍ풍에 따른 생산량의 정도를 9등급( 年 分 九 等 制 )으로 하되 해마다 흉풍의 연분을 조사 하여 최고의 풍년인 상상년에 1결당 현미 20두를 과세하는 것으로 하였다. 작황 이 좋지 않은 해는 정도에 따라 세금을 차감하도록 하였다. 77) 세율은 상상년의 경우 종전의 10분의 1세에서 20분의 1세로 대폭 줄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동안 연구와 시행착오 끝에 제정한 이 貢 法 은 처음에 의도하 75) 井 田 法 에 있어의 助 法 은 흉 풍에 관계없이 公 田 의 수확물을 세금으로 내는 것이고 貢 法 은 농 민들이정전의 수확물로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되 매년의 작황을 평년작으로 간주하고 평균 세액을 납부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정약용은 공법을 전지를 받은 농부들이 세금으로 곡식을 바치는 것으로 조법을 공전을 경작하여 생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정약 용, 經 世 遺 表 지관수제. 전제 1. 76) 增 補 文 獻 備 考 田 賦 考 1; 지두환, 조선초기의 정전론 논의 東 洋 學 28, 1998 참고. 77) 世 宗 實 錄 세종 26년 11월 戊 子.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43 던 정전법적 공법에 비해 이름만 貢 法 인 채 그 실제 내용은 변질되어 과거보다 개선된 것이 별로 없었다. 신 세법의 시행 결과 수세액이 종전보다 증가한 것으로 보아 감세조치는 숫자 놀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78) 새로 채택한 공법은 농민들의 토지등급을 상 향 조정하고 1결의 면적을 평균 50%를 늘린 다음 결당 기준 생산량을 300두에서 400두로 만들었기 때문에 공법의 20분의 1세는 사실상 과전법의 10분의 1세에 비 해 줄어든 것은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79) 조선의 세제는 임진과 병자년의 양난 이후 재정수요의 팽창으로 세수가 부족 하게되자 정액세법인 永 定 法 이 실시되고 貢 物 稅 대신에 토지에 부과하는 大 同 法 등이 실시되어 조선 초기의 정전법적 이상이 담겨 있는 撤 法 과 貢 法 세제의 틀에 서 완전히 벗어났다. Ⅵ. 朝 鮮 後 期 箕 子 井 田 의 발견과 國 政 및 田 制 改 革 論 議 1. 朝 鮮 前 期 의 井 田 法 논의 世 宗 은 즉위하자 바로 집현전을 만들어 젊은 유생들로 하여금 경서를 연구하 게 하고 유교적 문물제도를 정비하는데 정열을 쏟았다. 세종은 유교적 이상국가 의 건설에 뜻을 세우고 至 治 의 기반이 되는 토지제도와 세제의 개혁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졌다. 세종은 즉위 초 전라도 고부지방에 있는 큰 저수지 訥 堤 가 홍수로 터져있던 것 을 장정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제방을 수축하고 얻은 농지 1만여 결을 인근 백성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때 토지의 분배방식은 정전제를 모방하여 10결씩 구획 한 후 9인의 경작자들에게 1결씩 분배하고 나머지 1결의 토지는 공전으로 지정하 여 9인의 경작자들로 하여금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하였다. 80) 이 방법은 경작자 들이 1결의 공전을 공동경작하여 그곳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세금으로 정부에 바 78) 金 玉 根, 朝 鮮 王 朝 財 政 史 硏 究 I, 일조각, 1984, pp. 221-226. 79) 박극채, 조선봉건사회의 정체적 본질-전결제 연구 李 朝 社 會 經 濟 史 노농사, 1946, pp. 150-155. 80) 世 宗 實 錄 세종 3년 정월 무인, 依 古 者 井 田 什 一 之 法 盡 爲 經 界 受 私 田 九 結 者 同 養 公 田 一 結
44 농업사연구 제 6권 2호, 한국농업사학회, 2007. 12 치는 10ㆍ1 稅 法 으로 원래의 정전법의 助 法 세제를 현지 실정에 맞도록 수정한 정 전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눌제에서의 정전법시험은 얼마나 계속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일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정전법의 시행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3년 5 월 영의정 柳 廷 顯 이 국초의 정전법적 토지제도를 채택하려던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限 田 制 와 均 田 制 를 마련하여 실시할 것을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81)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정전제를 비롯한 고대의 전제와 세제를 집현전을 중심으로 연구 하도록 하였다. 정전법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세종 9년경에 실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고원과 습지가 있으며 꼬불꼬불한 전답이 섞여있어 정전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보고 그 대신 세법을 정전제에서 채 택하는 貢 法 으로 고쳐 시행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성종 때부터 職 田 제도가 없어지고 녹봉의 관수관급제가 실시되자 양반 관료들 은 다투어 토지를 사들이고 農 莊 을 설치하는 자구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노비를 이용하여 농장을 경작하거나 또는 토지를 잃고 몰락한 농민들로 하여금 병작경영을 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15세기 후반부터 소수인에 의한 토지의 집중현상이 다시 일어났고 중종때 부터 富 益 富 貧 益 貧 문제가 다시 사회문제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중종 10년 좌참찬 申 用 漑 가 백성들의 빈곤의 원인이 세력가의 토지겸병에 있 으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옛날의 정전법으로 돌아가거나 형편상 시행하기 어려우면 부자들의 토지 소유면적을 한정하자는 주장을 폈다. 82) 이문제는 왕도 정치를 주장하는 趙 光 祖 등의 士 林 派 가 요직에 등용되면서 더욱 탄력을 받게되었 다. 중종 13(1518)년에 정부는 앞으로 50 結 이상의 토지를 갖고있는 사람은 토지 를 더 가질수 없으며 남의 이름으로 갖는 것도 금지한다는 요지의 限 田 法 을 실시 한다고 발표하였다. 83) 그러나 이와 같은 限 田 政 策 은 소유상한이 50결로 너무 큰 데다가 이왕에 50결 이상을 가진사람은 합법화시켜 주어 토지의 재분배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형식 81) 같은 책, 세종 3년 5월 11일 임신. 영의정 柳 廷 顯 이 限 田 과 均 田 의 제도를 다시 마련할 것을 청하자 세종이 찬성하였다. 82) 中 宗 實 錄 중종 10년 2월 83) 中 宗 實 錄 중종 13년 2월 21일 경인.
農 本 主 義 思 想 의 構 造 와 根 源 (오호성) 45 적인 법이되고 말았다. 당시 50결 소유자는 큰 부호였을 뿐만 아니라 50결을 초 과 취득하여도 벌칙이 없어 한전법은 처음부터 유명무실한 법이 되고 말았다. 중종시대의 토지개혁론은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를 통해 개혁세력인 조광 조와 그를 따르는 사림파가 숙청된 다음에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2. 久 菴 韓 百 謙 의 箕 子 井 田 발견 東 國 地 理 志 를 지은 久 菴 韓 百 謙 (1552-1615)은 선조 때 戶 曹 參 議 였다. 그 는 선조 40년(1607) 그의 아우인 평안감사 韓 浚 謙 을 방문하였다가 소문으로 존 재하던 평양성 밖의 箕 子 井 田 유적을 답사하여 그 실체를 확인하고 측량한 다음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84) 한백겸은 이때의 조사를 바탕으로 箕 田 遺 制 說 과 箕 田 圖 <그림 1>라는 저술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한백겸은 그의 저작을 통해 평양성 밖에 정전 유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정전 유적은 우물 井 자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밭 田 자 형태로 구획되 어 있고 1 夫 의 크기가 70 畝 인것으로 보아 이것은 殷 나라의 정전유적 즉 箕 子 田 의 유적이라고 주장하였다. 85) 한백겸의 箕 子 田 발견은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맹자가 三 84) 기자정전의 존재는 고려 때부터 알려져 왔다. 성종때 간행된 東 國 輿 地 勝 覽 의 평양의 고적 부 분에 在 外 城 內 箕 子 井 田 遺 跡 宛 然 이라는 글이 실려있다. 또 같은 책 平 壤 의 경관에는 중국의 사신 董 越 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성종때 평안도 관찰사 成 俔 의 안내로 기자의 유적 을 찾아보고 풍월루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85) 韓 百 謙, 箕 田 遺 制 設 ( 李 家 煥 ㆍ 李 義 駿 輯 箕 田 巧 北 京 中 華 書 局, 1985) 기자전 가운데 그 흔적 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은 평양성의 含 毬 門 과 正 陽 門 밖에 있는 것인데 우물 井 자가 아닌 밭 田 자 형 밭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田 내의 밭은 네 區 劃 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한 구획의 면적은 정확히 70 畝 씩 이다. 밭은 한 단지에 田 자 형 밭이 종횡으로 각각 4개씩 병 열하여 모두 4 x 4=16 田 에, 8 x 8=64 區 (1 田 의 일직선상의 區 수는 2 區 이므로 4 田 의 일직선상 의 區 수는 2 x 4=8, 8 區 이다)를 이루고 있다. 단지는 종으로 보아도 4전 8구, 횡으로 보아도 4 전 8구씩 구성되어 있다. 기자전의 구획에는 폭 1무의 소로로 나뉘어져 있고 전체 단지의 주 위는 대로가 나 있는데 이 대 단지의 북쪽은 성벽이고 동쪽은 함구문의 남쪽에서 대동강에 이르기까지, 서쪽은 정양문에서 남쪽으로 강에 이르기까지, 남쪽은 옛 장흥사 절터의 남단에 서 정동으로 강에 이르기까지 의 주위 사방에 폭 9무의 대로 4조가 나있다. 맹자는 은나라의 전제에 대해 殷 人 은 70무씩의 농지를 받고 이를 助 라 하였는데 지금 여기에 있는 전자형 농 지의 각 구는 70무씩으로 구획 되어 있다. 기자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니 그가 가져온 제도는 당연히 殷 나라의 정전제도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