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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주제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上) - 태조실록 과 세종실록 을 중심으로 -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 上 ) 제2주제 I 들어가는 말 역사를 돌아보며 현재를 살아갈 혜안을 얻는 것은 그것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덕분이다. 역사의 기록 중에서도 으뜸은 실록( 實 錄 )이다. 실록은 조정에서 일어나거나 보고되는 일들 을 기록한 궁정( 宮 廷 )의 일기( 日 記 )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실록인 조선왕조실록 은 당대의 정치, 외교, 경제 및 사회와 종교 등 다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총망라하고 있는 중요한 사료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임금의 명령, 각 관청 관료들의 보고 및 건의사항, 지방에서 올라오 는 상소나 공사( 公 私 ), 시비( 是 非 )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국정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 실록 에 기록된 대화의 장( 場 )에서는 국가의 정책과 국사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왕과 신하들은 하나의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 때 다양한 의견이 하 나로 수렴되기까지는 서로 다른 입장의 조정이 필수적이었다. 각자의 주장을 상대에게 관철 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했고, 이 노력은 설득의 장으 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 속 설득의 순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호와 다 음호에 걸쳐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각 시기의 대표적인 시대를 살펴볼 계획이다. 이 번호에서는 조선 전기를 다룬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太 祖, 재위1392-1398)의 한양 천도 논 쟁, 세종( 世 宗, 재위1418-1450)의 인재 등용의 과정을 통해 조선시대 왕들은 자신의 정치 이상을 펼치기 위해 어떻게 신하들을 설득했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하겠다. 2) 1) 박홍갑, 2008, 조선왕조실록의 의의와 편찬방식, 코리아나 제22권 제3호. 2) 실록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국역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intro/intro_info.jsp 검색일: 2013.11.07.)를 근거로 하며 해당 내용은 실록의 연, 월까지 각주로 표기했다. 19

Ⅱ 소통의 기록으로서의 조선왕조실록 1. 조선왕조실록 의 의의 조선왕조실록 은 태조강헌대왕실록( 太 祖 康 獻 大 王 實 錄 ) 부터 철종대왕실록( 哲 宗 大 王 實 錄 ) 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통틀어 지칭하는 것으로 3), 2,000 여 권에 달하는 역사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은 국보 제151호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한 왕조의 역사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이라는 점과 역사 기술에 있어 높은 진실성과 신빙성을 인정받은 결과다. 2.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당대 정치커뮤니케이션의 특징 조선왕조의 설득의 순간을 살펴보기에 앞서 당대 정치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을 알아봄으로써 설득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시대적 분위기와 상호 설득의 장이 생겨난 배경을 이 해하고자 한다. 조선왕조는 군신공치( 君 臣 共 治 ) 4) 를 지향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의견을 모아 국정을 운영 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정치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공론정치( 公 論 政 治 ) 로 규정할 수 있다. 공론은 본디 서구에서 민의( 民 意, public opinion)를 뜻하는 것이나 신분 질서가 엄격한 조선에서 모든 백성들의 의견이 조정까지 닿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 운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공론정치는 백성의 대표로서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조선의 공론정치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집단인 조정 관리나 사림들이 토론과 비판이라는 합리적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수렴된 공통의 의견 5) 이라 본다. 3) 조선왕조실록 에는 고종태황제실록( 高 宗 太 皇 帝 實 錄 ) 과 순종황제실록( 純 宗 皇 帝 實 錄 ) 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들은 1927-1932년 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과 황제, 황실의 동정에 관한 기록에서 왜곡이 많으며 조선시대의 엄격한 실록 편찬 규례에서 맞지 않기 때문이다. 4) 국사를 왕의 독점적 권한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결정하고, 이를 통해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정신을 뜻한다. 5) 김영주, 2002, 조선왕조 초기 공론과 공론형성과정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2권 제3호, 87쪽. 20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 上 ) 제2주제 조선왕조에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성리학 및 중국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역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선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성리학적 유교 전통 사회에서 형성된 조선의 공론 정치사상에도 중국 문화의 영향이 남아 있다. 고대 중국에서도 공론정치를 높은 정치 이상으로 여겨 여정( 輿 情 )은 여론( 輿 論 ) 이라 며 공론을 치우치지 않은 의론 또는 공평한 의론 등으로 정의한 바 있다. 6) 중국 송대( 宋 代 )의 성리학자 회암( 晦 庵 ) 주희( 朱 熹 )는 주자대전( 朱 子 大 全 )에서 군왕은 비록 명령을 제정 하는 것으로 직분을 삼는 것이나, 반드시 대신과 함께 도모하고 간관( 諫 官 )의 의견을 참고 해야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충분히 의논하게 하여 공론의 소재를 구해야 합니다. 7) 라고 말 하며 공론정치의 의의를 설명한 바 있다. 군신간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히 해 공론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뜻은 조선왕 조실록 의 기록에도 잘 나타나있다. 태조실록 에는 공론이란 것은 천하국가( 天 下 國 家 )의 원기입니다. 8) 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에는 공론 의 유사개념인 여론 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여론 에 좇아 이 일을 파하시면, (중략) 백성의 큰 행복입니다. 9) 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실록 에는 공론을 따르면 치평( 治 平 )하고 공론을 폐하면 위난( 危 難 )해진다 10) 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공론정치의 분위기 속에서 논쟁과 설득의 순간은 언로( 言 路 ) 를 통해 나타났다. 언로 는 상소 등으로 나타나는 간쟁( 諫 錚, 임금의 과오를 바로잡도록 말하는 것), 봉박( 封 駁, 임금의 명령에 대해 논박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어전회의인 시사회의( 視 事 會 議, 국정 전반에 대 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 및 성리학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강학회의( 講 學 會 議, 학문적 토론의 자 리)를 뜻하기도 했다. 11) 성종실록 에서는 공론폐즉언로색( 公 論 廢 則 言 路 塞, 언로가 막히면 공 론이 막힌다) 12) 이라고 명시해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신하와 군주의 토론과 상호 비판 을 바람직한 소통의 방식으로 여겨 정론( 正 論 ) 이 정론( 政 論 ) 으로 채택되는 것을 지향했다. 조선시대는 이와 같이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소통의 장을 바람직한 정치라 여겼다. 서로 다른 의견을 조화시켜 하나의 안으로 수렴해 나가는 과정은 곧 각자의 주장을 피력하는 가 운데 상대를 설득시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6) 김영주, 1992, 고대중국의 여론개념과 여론수렴제도, 사회과학연구 제4집, 312쪽. 7) 주자대전 14권 26엽{김영수, 2009, 세종대의 정치적 의사소통과 그 기제, 역사비평 제89호, 37쪽에서 재인용}. 8) 태조실록 1년 11월. 9) 세종실록 23년 11월. 10) 성종실록 23년 12월. 11) 이현출, 2002, 사림정치기의 공론정치 전통과 현대적 함의, 한국정치학회보 제36집 3호, 120쪽, 김운태, 2002, 조선왕조 정치 행정사 (서울: 박영사)를 참조하였다. 12) 성종실록 23년 8월. 21

Ⅲ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군주의 설득법 이 글에서는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 과 세종실록 을 중심으로 군주의 설득법을 살 펴보고자 한다. 태조실록 의 기록은 조선 건국 직후 한양 천도의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 며, 세종실록 에서는 세종이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 반대 세력을 설득해 나가는 과정 을 살펴본다. 1. 이청득심( 以 聽 得 心 ), 귀를 기울여 마음을 얻은 태조 13) 서울이 오늘날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의 도읍이 되면서부 터다. 1392년, 조선의 건국 직후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했다. 조선 건국 과정에서 위화도회 군( 威 化 島 回 軍 ) 14) 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던 태조는 기존의 왕조를 무너뜨리 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강경한 추진력을 보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조선의 천도 과정 또한 태조의 독단적인 결정과 명령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에 기록된 천도의 과정을 살펴보면 태조를 청정( 聽 政 )의 리더십을 가 진 인물로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1392년부터 1394년 10월까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과정 은 태조가 대신들의 다양한 안( 案 )에 귀 기울이고, 그 중 가장 합리적인 안으로 의견을 모 아가는 설득의 시간이었다. 건국 직후 태조가 풍수도참설( 風 水 圖 讖 說 ) 15) 을 원용해 한양 천도를 결정하자 신하들은 동 요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태조는 궁궐 및 성곽 등 제반 여건의 미비를 이유로 들어 천도를 미루는데, 실질적으로는 중신들의 반대가 주된 이유였다. 16) 태조는 일단 독단적인 의사 결 정을 멈추고 신하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태조가 이전부터 예로부터 왕 13) 태조의 한양 천도 과정은 김흥순, 2009, 조선개국 초 한양천도 논쟁, 국토계획 제44권 제4호를 참조하였다. 14) 고려말기인 1388년, 요동정벌에 나선 고려의 장수 이성계( 李 成 桂 )가 압록강의 위화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발판이 되었다. 15) 고려 말, 조선 초에 유행했던 사상으로 산천( 山 川 ) 수로( 水 流 )의 모양을 인간의 길흉화복( 吉 凶 禍 福 )에 연결시켜 설명한다. 특히 지리와 터가 인간과 혈족,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믿는 사상이다. 16) 태조실록 1년 9월. 22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 上 ) 제2주제 조( 王 朝 )가 바뀌고 천명( 天 命 )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17) 라며 하루 빨 리 천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에 비추어 볼 때, 한 걸음 물러나는 큰 결정이었으리 라 여겨진다. 자유로운 논의의 장이 마련되자 신하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천도지로 논 의된 곳은 한양, 계룡산, 무악, 불일사와 선고개, 광실원 동쪽 계족산, 고려조의 신경터, 도라 산 등이었는데 그 중 핵심이 되는 것은 한양, 계룡산, 무악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18) 먼저 문하부판사( 門 下 府 判 事 ) 권중화( 權 仲 和 )의 건의에 따라 계룡산이 천도 후보지로 급 부상하자 태조는 직접 계룡산에 올라 19) 그 적절성을 평가했다. 태조는 서운관원( 書 雲 觀 員 ) 20) 이라는 술사( 術 師 ) 21) 관료 집단을 만들어 입지의 적정성을 분석하도록 했는데 주요 내 용은 조운( 漕 運 )의 편리함, 도로 접근성, 성곽 축조의 용이성 등이었다. 22) 태조는 또한 종 묘, 사직, 궁전, 조시( 朝 市, 조정과 시정) 등 실제 시설의 도상배치를 통해 계룡산 입지의 적정성을 분석했다. 23) 태조는 이를 위해 왕사( 王 師 ) 자초( 自 招, 무학대사)를 데리고 현장에 나서 그의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자초를 비롯한 전문 관료들은 대체로 계룡산이 도읍지로 최적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의미로 알 수 없다 고 말하며 반대했다. 24) 결국 계룡산 천도 는 태조2년 12월에 중단된다. 태조는 이어 경기도관찰사 하륜( 河 崙 )의 주장에 따라 지금의 신촌, 연희동 일대인 무악을 천도지로 검토했다. 25) 그러나 권중화와 문하우시중( 門 下 右 侍 中 ) 조준( 趙 浚 )을 비롯하여 지관 ( 地 官 )들은 대체로 무악이 좋지 않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26) 태조는 지관들이 계속하여 반 대하자 유신들에게 또 의견을 물었다. 27) 많은 이들의 의견 중 가장 논리적인 답을 한 이는 정도전( 鄭 道 傳, 1342-1398)이었다. 그는 국가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왕이 풍수에 미혹되 지 말 것을 상언하면서 도읍은 국토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에 유리하고 궁궐과 조시, 종사 ( 宗 社, 종묘와 사직)를 세우기에 적당한 곳으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8) 이후 터가 좁다 17) 태조실록 2년 2월. 18) 김연호, 2008, 조선 초 천도 논의에 대한 고찰 : 지리신법 적용에 의한 재조명, 민족문화논총 제39집, 582쪽. 19) 태조1년 2월 8일부터 13일까지 계룡산에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 서운관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던 기구로 천문학, 지리학, 책력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태조1년에 다시 설치되어 정3품 판관 등을 중심으로 천문, 재상, 역일 등에 대한 연구를 했다. 21) 술사란 도술에 능한 사람을 일컫는다. 22) 태조실록 2년 2월. 23) 태조실록 2년 2월. 24) 태조실록 2년 2월. 25) 태조실록 3년 2월. 26) 태조실록 3년 6월. 27) 태조실록 3년 8월. 28) 태조실록 3년 8월. 23

는 이유로 무악 역시 천도후보지에서 최종 탈락하게 된다. 29) 여러 안이 무산되자 태조는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향했다. 왕은 지관 윤신달( 尹 莘 達 )에게 한양의 지세를 묻고, 자초(무학대사)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개경을 주장한 윤신달은 개경 다음으로 지세가 좋으나 북쪽이 낮아 물과 샘이 마르다 30) 는 의견을 내놓았고, 자초는 사 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만하다 31) 라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서도 무악을 지지했던 하륜과 기존의 세력 기반인 개경을 고수하려는 일부만이 반대할 뿐 대체로 한양이 적절하다고 동의했다. 신하들은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 理 水 )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32) 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후 도평의사사( 都 評 議 使 司 ) 33) 에서 한양 천도를 정식으로 건의해 34) 태조3년 10월 25일 마침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1) 경청 설득법 태조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처음부터 자신의 의견만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하 지 않고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새로운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활발 한 의사소통의 기회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안에 대한 각계의 다양한 관점을 수 렴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계룡산과 무악의 안이 새로이 제시되었을 때 서운관원 이나 술사관료집단 및 유학자들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는 점이 이러한 노력을 보여준다. 경청의 설득은 첫째로 설득하는 자가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어 갈 수 있게 해준다. 35) 경청의 힘 의 저자이자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인 래리 바커(Larry Barker)와 키 티 왓슨(Kittie Watson)도 대화의 주도권은 경청하는 자의 것 이라 말한 바 있다. 경청하 는 자는 경청을 통해 상대의 의견을 먼저 인정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면서 논의의 틀을 정교화 해나가는 데 주도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태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본인의 의견을 덧붙여 한양 천도의 안( 安 )으로 수렴해나가는 과정도 경청을 통해 논의의 틀을 정교 하게 다듬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29) 태조실록 3년 11월. 30) 태조실록 3년 8월. 31) 태조실록 3년 8월. 32) 태조실록 3년 8월. 33) 도평의사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국가 최고 정무기관이다. 34) 태조실록 3년 8월. 35) 경청의 설득에 대한 내용은 Barker, L., K. Watson, 2013, 마음을 사로잡는 경청의 힘, 윤정숙 역(서울: 이아소)을 주로 참조하였다. 24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 上 ) 제2주제 둘째로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청정( 廳 政 )은 대신들과의 호의적인 관계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의 지혜와 처세를 담은 탈무드 에는 인간에게 귀가 두 개이고 입 이 하나인 것은 적게 말하고 많이 듣기 위해서이다 라는 말이 나온다. 경청의 자세는 상대 방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경청은 곧 존중의 태도이며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36) 즉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은 만큼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경청의 설득은 특히 지속적인 관계 유지에 필수적이다. 건국 직후의 도읍 이전 문제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태조의 청정은 의미 있는 노력이었다. 정권 성립 초기의 천도는 왕이 지난 왕조의 지배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형성해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해 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문제였다. 태조가 하나의 왕조를 함께 설계하고 이끌어나갈 대신들을 규합한다는 지속적 관계의 측면에서 청정은 효과적인 설득법이었다. (2) 반론과 재반론의 설득법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기까지의 과정은 단순히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한양으로 귀결 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태조는 의중이 이미 한양을 향하고 있는 와중에 대신들의 제안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이를 반박하는 방법으로 한양 천도의 설득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태조가 처음부터 한양을 염두에 두었다는 단서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이를 뒷 받침하는데, 이는 태조가 즉위 직후 한양 천도를 명했다는 점과 무악에서 반대 의견이 나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양으로 향한 점, 군신 간에 합의를 이루자마자 신속하게 한양으로 천도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37) 설득력 강화에는 자신의 설득 논리에 힘을 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의 설득 논리를 약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태조는 이러한 측면에서 반론과 재반론의 설득법 을 구사했다. 반론의 논거에 대한 적절한 부정의 논거를 대는 재반론은 자신의 의견에 대한 상대의 비판 이 틀렸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38) 태조의 반론과 재반론 의 설득법은 첫째로 신하들이 제시한 안에 대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반박하는 것을 가리키며, 둘째로 한양의 안에 대해 신하들이 반대 했을 때 그 반대의 이유에 대해 재반박함으로써 36) 백미숙, 2006, 효과적 리더십으로서의 효과적 경청, 숙명리더십연구 제4집, 86쪽. 37) 김흥순(2009), 27쪽. 38) 반론과 재반론의 설득법에 대한 설명은 이시한, 2012, 논리로 설득하고 스토리로 공감하라 (서울: 경향미디어)를 참조하였다. 25

상대의 비판에 논리적인 근거로 대응하여 설득에 성공하는 것을 가리킨다. 태조실록 에 따르면 태조는 신하들이 새로운 안을 제시했을 때 그 이유는 무엇인가 를 반드시 확인했는데 이는 논거의 적절성을 합리적으로 따져보려는 시도였다. 태조는 조운의 편리함, 도로 접근성, 성곽축조의 용이성 및 종묘, 사직, 궁전 등 시설과의 배치 등을 근거 로 계룡산 안을 반대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무악의 안에 대해서도 서운관언 유한우( 兪 漢 遇 ) 가 지리의 법을 들어 무악이 좋지 못하다고 말했을 때, 태조는 그 이유를 말하라 고 명했 고 이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지관들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39) 또한 지관들을 비판하며 유신들에게 대답을 물었을 때 정도전이 도읍으로서 어느 특정 지역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도읍이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 그 조건을 제시한 것은 반론 과 재반론의 설득법 중 하나인 전제 반론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0) 전제 반론이란 어떠 한 주장이나 근거가 나오게 되는 사고의 과정 중 가장 기저에 있는 원론을 비판함으로써 관 점 자체에 대한 토론을 가져 오는 것으로 설득에 있어 생각의 틀을 전환하는 효과가 있다. 태조는 마지막에 한양을 제시했을 때 개경파인 지관 윤신달이 한양에는 장점도 있으나 지세가 단점이라고 말하자, 개경도 부족한 점이 많다며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곳은 없다는 취지로 윤신달의 주장에 재반론했다. 재반론의 근거에 더해 태조는 한양이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 사방 으로 통하는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가 통한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41) 태조는 이러한 반론과 재반론의 과정을 거친 후, 이곳이 신하들의 반대가 다른 안에 비해 최 소화 되었다는 점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곳이라 평가해 최종적으로 천도를 결정지었다. 2. 애민주의( 愛 民 主 義 ), 백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세종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백성을 사랑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어리석은 백성을 불쌍 히 여겨 라는 훈민정음 서문은 세종의 애민( 愛 民 )정신을 상징한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 정 또한 세종의 애민정신을 잘 보여준다. 당시에 한자 사용으로 기득권을 누린 사대부와 관료들은 훈민정음의 창제가 부당하다며 세종26년, 집현전( 集 賢 殿 ) 42) 부제학 43) 최만리( 崔 萬 39) 태조실록 3년 8월. 40) 이시한(2012)은 전제 반론과 전제 부정이 논거 부정보다 더 강력한 설득 기제라고 강조했다. 41) 김흥순(2009), 28쪽. 42) 세종2년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기관으로 30여명 내외의 정예 관원들을 선발해 유교주의적 의례, 제도, 문화 연구에 힘쓴 곳이다. 43) 부제학은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 經 書 ) 사적( 史 籍 )을 관리한 홍문관과 그 전신이었던 집현전의 정3품 당산관직이다. 26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 上 ) 제2주제 理 ) 등을 중심으로 반대 상소를 올렸다. 44) 세종은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 다 45) 라고 하며 백성을 위하여 생각할 것을 강조했다. 이 정신은 다양한 국가 정책을 추진 시켜나가는 원동력이었다. 세종은 백성을 위함 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워 국책의 결정 과정 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반대 의견을 잠재웠다. 세종의 애민정신은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 반대파를 설득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세종의 시대가 앙부일구(해시계), 측우기(물시계), 혼천의(천체 관측기) 등 역사상 최고 수준 의 과학 기술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장영실( 蔣 英 實 )의 등용을 둘러싼 반대 세력 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당대에 궁중기술자로 종사했던 장영실이 제련( 製 鍊 ), 축 성( 築 城 ), 농기구 및 무기 수리 등에 뛰어나다는 점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세종은 그에게 관직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장영실에게 정5품 상의원( 尙 衣 院 ) 46) 별좌( 別 坐 ) 자리를 주는 것 을 둘러싸고 예조판서 허조( 許 稠 ) 등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급격하게 일기 시작했다. 장 영실은 노비 출신이었기에 철저한 신분제, 계급제 사회였던 조선 사회 분위기에서 그를 높 은 관직으로 등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각에서는 기생의 소생 이라는 비판 도 이어졌다. 세종은 먼저 자신의 뜻을 접고 신하들과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때 그는 백성을 위한 생활 과학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장영실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즉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다면 신분이 아닌 능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또한 능력이 있다면 인재 등 용에 차별이 없어야 함도 강조했다. 재상( 宰 相 ) 47) 이었던 황희( 黃 喜 )와 맹사성( 孟 思 誠 ) 등도 세종의 의견에 설득되어 황희는 김인( 金 寅 )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사 람에 뛰어나므로 태종( 太 宗 )께서 특별히 호군( 護 軍 )을 제수하셨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 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리 있겠습니까. 48) 라고 말했다. 대신 유정현( 柳 廷 顯 )도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 49) 고 동의했고, 이러한 지지를 기반으로 세종은 장영실을 등용했다. 이후 장영실의 성과가 대 내외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세종의 인사정책도 신뢰받게 되었다. 44) 훈민정음 창제는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세종실록 에도 창제의 과정에 대한 기록은 미미하며 다만 최만리 등이 올린 반대 상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45) 세종실록 26년 2월. 46) 조선시대의 상의원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47) 재상은 임금을 돕고 모든 관원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2품 이상의 벼슬을 말한다. 황희와 맹 사성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다양한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청백한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48) 세종실록 15년 9월. 49) 세종실록 15년 9월. 27

인사를 둘러싸고 신분의 경계를 혁파하려는 세종의 애민정신은 유학생 파견 정책에서도 드러났다. 50) 세종은 성리학과 유교의 발상지이자 문화와 학술의 중심지인 명나라에 유학생 파견을 구상한 적이 있다. 이때 그 대상자의 자격을 두고 신하들과 의견차가 발생했다. 도 승지( 都 承 旨 ) 51) 안숭선( 安 崇 善 )이 사대부집 자제로 제한하려고 하자, 세종은 사대부 집 자 제이거나 시골에서 뽑아 올린 보통 백성이거나를 물론하고(막론하고) 나이 적고서 총명하고 민첩한 자를 선택하게 하라. 보통 백성의 자제라고 어찌 취할만한 자가 없겠는가. 52) 라고 말했다. 신분제의 벽으로 인해 재야의 인재들이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인재 등용에 있어서는 철저한 애민주의를 최고의 원칙으로 내세워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했다. 인사만사( 人 事 萬 事 ) 이념으로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자들을 등용하고자 한 세종의 노력은 백성들을 사랑해 기회의 공평함을 실현하고, 훌륭한 인재로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는 애민주의 정신의 발현이었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도 반대파를 설득하는 데 애민 의 설득 틀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1) 겸양의 설득법 세종은 소통의 군주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맨 처음 한 공식 발언이 의논하자 53) 였 을 만큼 그는 신하들과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는 논박의 과정을 중시했으며 이는 국사를 결 정하는 데 있어 필수 과정이었다. 더불어 의논한다( 與 論 ) 가 세종실록 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54) 특히 세종대의 군신간의 소통은 경연( 經 筵 ) 55) 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세종은 집현전이 주관한 경연을 매우 선호하여 재위기간 중 1,898회나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56) 또한 세종은 육조직계제( 六 曹 直 啓 制 ) 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 議 政 府 署 事 制 )를 복구시켜 의정부를 중심으로 재상들 간의 활발 50) 세종대의 명나라 유학생 파견과 관련한 내용은 박병련, 2007, 세종대의 정치엘리트 양성과 인사운용의 특성, 동양정치사상사 제6권 제1호, 43쪽을 참조하였다. 51) 도승지는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 承 政 院 )의 정3품 관직이다. 52) 세종실록 15년 9월. 53) 세종실록 1년 8월. 54) 김홍우, 2005, 한국정치사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정치사상의 전통과 새지평, 7쪽. 55) 경연이란 조선시대에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 연마하고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자리를 말한다. 56) - 박현모, 2009, 세종정부의 의사결정 구조와 과정에 대한 연구: 제1, 2차 여진족 토벌 사례를 중심으로, 동양정치사상사 제8권 1호, 166쪽. - 세종이 경연에 1,898회 참가한 것은 역대 왕들의 재위 기간 중 경연 참가 횟수와 대조해볼 때 그 수치의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태조 23회, 정종 36회, 태종 80회, 문종 210회로 기록되어 있다. 28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 上 ) 제2주제 한 국정 논의를 가능케 했다. 57) 오늘날 크고 작은 공론의 장이 그러하듯, 당대에도 공론의 장은 곧 논박의 장이었다. 국 가 정책을 둘러싸고 신하들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갈등하기도 했고 세종과 신하들 간의 의견차도 빈번했다. 세종은 최대한 많은 의견이 자유로이 오고가도록 활발한 발언을 독려했는데, 이 과정에서 도출된 수많은 의견을 하나로 모아가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였다. 이 때 세종은 신하들에게 백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하며, 애민정 신을 그 수렴점으로 설정했다. 애민사상이 최고의 국정 원칙이었던 것이다. 세종은 애민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자가비하( 自 家 卑 下 )의 설득법을 사용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많이 나온다. 세종은 나라가 태평하게 다스려지도 록 도모하였으나 그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58), 농사가 한창인 지금 한재가 너무 심한데,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해보니 잘못은 진실로 나에게 있는 것 59) 이라 말하며 민중의 어려움의 이유로 자신의 부덕을 탓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것은 신하들이 스스로를 반 성하도록 하며 애민정신을 발휘할 것을 독려하는 대목이었다. 세종의 설득은 또한 이보전진( 二 步 前 進 )을 위한 일보후퇴( 一 步 後 退 ) 였다. 60) 장영실 등용 에 대한 양반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세종은 일단 그 뜻을 접어두고 신하들과 논의하는 자리 를 마련했다. 완고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태도로 반대 의견을 충분히 수 렴하는 태도는 설득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세종이 신하들을 설득하는 과정 없이 자신의 주 장만을 고수했다면 장영실을 등용하는 것은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하며 장영실이 관직에 오 른 이후에도 그는 대신들과 조화를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세종이 장영실을 등용하는 과정에서 한걸음 물러나 대신들의 의견에 폭넓게 귀 기울이는 양보의 태도는 상 대방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기분을 좋게 한다는 점에서 상대의 입장을 변화시 키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57) 육조 직계제는 태종과 세조 대의 정치제도로 모든 정무를 육조( 六 曹, 이조, 호조, 병조, 형조, 예조, 공조)에 서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다. 세종은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했는데, 이는 3정승이 모여 육조에서 올라온 보고 내용을 검토한 후 왕에게 보고하는 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세종이 의정부 대신 들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음을 나타낸다(최승희, 1994, 세종조의 왕권과 국정운영체제, 한국사 연구 제87호를 참조하였다). 58) 세종실록 7년 6월. 59) 세종실록 7년 6월. 60) 양보의 설득적 효과에 대한 내용은 Thomas, J., 2007, 협상의 기술, 이현우 역(서울: 세종서적)을 참조하였다. 29

(2) 당위의 설득법 세종이 꿈꾼 세상은 민본( 民 本 ) 중심의 유교적 이상국가였다. 오랜 성리학의 전통으로 인간 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와 예의에 대한 규범이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백성을 위한다는 것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큰 근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녹봉을 받는 관료는 국 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백성을 위함 은 국가 관료가 마땅히 추구해야하는 도리 였다. 이러한 세종의 애민정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설득력이 컸다. 여기에 반대하면 유교 덕 목을 부정하는 명분 없는 반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최고이자 궁극의 논거로 그 어떠한 반대 의견도 잠재울 수 있는 강력한 설득 기제였다. 세종의 애민주의 설득법은 당위의 설득법 이다. 61) 당위란 마땅히 해야 옳은 것으로 행 동의 전제가 되는 순리( 順 理 )를 의미한다. 가령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윤리나 도 덕, 행동 양식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는 사회적인 대의, 공익의 틀을 제시하거나 옳은 것, 해야 하는 것 이라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의미를 부여해 상대방의 행동 변화를 촉구하 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을 생각한다면 마땅히 우리를 선택해야 한다 고 설득하는 기업 광고 (유한킴벌리,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마땅한 선택을 촉구하는 설 득 전략(기업은행, 기업은행에 예금하면 기업을 살리고,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늘어난다 ) 은 당위의 설득의 대표적인 예다. 상대방이 거절하기 어려운 당위적인 틀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전개해 나 가는 방법은 상대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설득 전략이다. 당위는 갈 등 상황에서 갈등을 타파해야하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를 다시금 일깨우기 때문이다. 장영실을 등용하는 문제를 논할 때도 민중을 위함 이라는 당위는 단순히 관직을 하사하는 논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합의를 모색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생각하게 했다. 이러 한 당위는 설득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 올바른 정치 의 자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종의 애민주의 설득법은 백성을 위하는 정치인 으로서 왕에게 요구되는 역할 수행을 가능하게 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선택한 국가 지도자로서, 정적( 政 敵 )들과 화해해야 하 는 정치인으로서, 사대부와 나약한 백성들 간의 대치되는 이해관계를 해결해야 하는 조정자 로서 세종은 자신의 역할이 좁게는 자신의 안위와 넓게는 국가의 안위를 결정지을 수 있음 61) 당위적 설득에 대한 내용은 홍성준, 2013, 차별화의 법칙 (서울: 21세기 북스)을 참조하였다. 30

조선왕조실록 에 나타난 설득의 리더십 ( 上 ) 제2주제 을 일찍이 알았다. 62) 다양한 세력들 간의 서로 다른 이해 다툼 사이에서 세종이 애민 을 갈등 조정의 절대적 궁극점으로 설정한 것은 하나의 목표로 정책이 수렴하도록 하여 자주 적으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적 설득 전략이었다. Ⅳ 맺음말 학창시절 국사에 특별히 큰 흥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 역사 속 조선왕조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다. 텔레비전 드라마 및 영화뿐만 아닌 문학에도 조선왕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매체에서 그리고 있는 왕의 모습은 유사한 점이 많다. 화려한 복색은 물론이고 수십 여 명의 내관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아 강직한 어조로 대신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대체로 왕의 역할을 생각해볼 때 왕의 모습을 강력한 통치권을 가진 인물로 설정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왕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왕이 엄격한 상하관계 속에서 거대한 권력을 누린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까 지 살펴본 실록의 기록은 이러한 보편적 인식과 대조적인 점이 많다. 태조의 한양 천도와 세종의 인재 발탁 과정에 대한 실록의 기록이 주목할 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왕이 자신의 절대적 권력으로 뜻한 바를 맹목적으로 추진한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의 의견에도 귀 기울이고 그들을 설득해 의견을 조율하면서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천도의 중요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이 목적한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수많 은 대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한 태조와, 백성을 위한다는 유교적 명분과 당위에 부합하 는 설득의 틀로 반대 의견을 설득한 세종의 노력은 설득에서 중요한 태도는 자신의 의견만 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62) 이영경, 2011, 정치인 세종대왕의 수사에 나타난 이미지 연구: 세종실록 내용 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외국어 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논문, 44쪽. 31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태조와 세종의 태도는 설득적 리더십의 가치를 전한다. 중요한 결 정의 순간에 발휘한 설득의 지혜는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현대인들에게 현재와 미래를 살아 가는 혜안을 준다. 일상에서 상호간의 의견 차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때 자신의 입장 만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다. 유연한 자세의 경청과 당위의 설득이 상대의 입장을 변화시키는 핵심이 될 수 있다.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