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hwp



Similar documents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09콘텐츠산업백서_1 2

152*220

<3034BFEDC0CFBDC2C3B5C7CFB4C2C1DFB1B9BFECB8AEC0C7BCF6C3E2BDC3C0E52E687770>

DocHdl2OnPREPRESStmpTarget

(중등용1)1~27

<C0BDBEC7B0FA2028BEC8B8EDB1E2292E687770>

< > 수출기업업황평가지수추이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 pb61۲õðÀÚÀ̳ʸ

目 次 第 1 章 總 則 第 1 條 ( 商 號 )... 1 第 2 條 ( 目 的 )... 2 第 3 條 ( 所 在 地 )... 2 第 4 條 ( 公 告 方 法 )... 2 第 2 章 株 式 第 5 條 ( 授 權 資 本 )... 2 第 6 條 ( 壹 株 의 金 額 )..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 hwp

....pdf..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¹é¹üȸº¸ 24È£ Ãâ·Â


041~084 ¹®È�Çö»óÀбâ

11+12¿ùÈ£-ÃÖÁ¾

³»Áö_10-6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감사회보 5월

2013unihangulchar {45380} 2unihangulchar {54617}unihangulchar {44592} unihangulchar {49328}unihangulchar {50629}unihangulchar {51312}unihangulchar {51

토픽 31호( ).hwp

+ 최근 전력소비 증가세 둔화의 원인과 전망 경제성장률 총전력 증가률 총전력 추세 그림 1 경제성장률과 총 전력 증가율 계절변동 2 전력소비 추세 둔화 현상과 주요 원인 전력수요의 추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계절의 변 화에 따른 변동치를 따로 떼어놓고 보아야 한다. 그

한류동향보고서 16호.indd

I. 경기부양을 위한 지방채 발행 년 2월 국무원에서 발표한 2009년 지방정부 채권 발행에 관한 보고 에 따라 지방채 발행이 초읽기에 들어감 -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시행될 2009년 지방채 발행 규모는 2,000억 위안에 달할 전망이며, 지방채로 조달된


한국 시장경제체제의 특질에 관한 비교제도분석

º»ÀÛ¾÷-1

- 2 -

나하나로 5호

01¸é¼öÁ¤


需給調整懇談会の投資調整―石油化学工業を中心に


2ÀåÀÛ¾÷

Çѹ̿ìÈ£-197È£

<C7D1B1B9C7FC20B3EBBBE7B0FCB0E82DC3D6C1BE612E687770>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ITFGc03ÖÁ¾š

Ⅰ. 중국 고급 냉장고 1) 시장의 성장 년 중국 가전하향( 家 電 下 鄕 ) 정책에 힘입어 보급형 냉장고 매출이 크게 증가했고, 동시에 고급 냉장고 시장도 빠르게 성장 - 시장 선점을 위해 (, )은 고급 냉장고 생산기지 건설을 추진 중이고, (, )는 2

<652DB7AFB4D720BFECBCF6B1E2BEF720BAB8B5B5C0DAB7E E687770>

CR hwp

대해서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交 通 放 送 은 96 年 상반기도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交 通 專 門 放 送 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委 員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더욱더 사랑 그러면

01정책백서목차(1~18)

쌍백합23호3

~

10월추천dvd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½Å½Å-Áß±¹³»Áö.PDF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 2 -

16-27( 통권 700 호 ) 아시아분업구조의변화와시사점 - 아세안, 생산기지로서의역할확대

C O N T E N T S 1. FDI NEWS 2. GOVERNMENT POLICIES 中, ( ) ( 对外投资备案 ( 核准 ) 报告暂行办法 ) 3. ECONOMY & BUSINESS 美, (Fact Sheet) 4. FDI STATISTICS 5. FDI FOCU

<B3B2C0E7C7F62E687770>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ps

(연합뉴스) 마이더스


04 특집

에너지절약_수정

....(......)(1)

ÆÞ¹÷-Æîħ¸é.PDF

< B3E2C0E7BCF6C1A4C0FCB8C128C8ABBAB8BFEB292E687770>

°¨Á¤Æò°¡

I II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º´¹«Ã»Ã¥-»ç³ªÀÌ·Î

Y Z X Y Z X () () 1. 3

한류동향보고서 26호.indd

197

allinpdf.com

5 291

CC hwp

기본소득문답2

Microsoft PowerPoint H16_채권시장 전망_200부.pptx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82-대한신경학0201

!aT내지

CT083001C

2003report hwp

<B8D3B8AEB8BB5F20B8F1C2F72E687770>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¹ßÇ¥¿äÁö

coverbacktong최종spread

Readings at Monitoring Post out of 20 Km Zone of Tokyo Electric Power Co., Inc. Fukushima Dai-ichi NPP(18:00 July 29, 2011)(Chinese/Korean)

CC hwp

750 1,500 35

닥터큐3.indd

? !

ºñ»óÀå±â¾÷ ¿ì¸®»çÁÖÁ¦µµ °³¼±¹æ¾È.hwp

141018_m

Transcription: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Working Paper Series 박정희정부 개발정책의 경제사적 배경 이영훈 Working Paper 2011-6 August, 2011 Naksungdae Institute of Economic Research 933-6, Euncheon-dong, Kwanak-ku, Seoul, 151-843, South Korea

박정희정부 개발정책의 경제사적 배경 1) 이영훈 2) 1) 이 글을 2011년 5월 13일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주관한 5ㆍ16 50주년 학술세미나 에서 발표된 것이다. 2)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yhrhee@snu.ac.kr

박정희정부 개발정책의 경제사적 배경 1. 들어가며 5ㆍ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 출신의 정치가들이 이후 한 세대간 한강의 기적 으로 불리는 경제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국내외 시장조건에 규정된 가운데 한국 사회와 경제에 내재해 있던 성장의 잠재력 을 극대로 동원할 수 있었 기 때문인데, 그 비결은 간략히 요약하여 기존의 自 立 的 輸 入 代 替 工 業 化 노선을 開 放 的 輸 出 主 導 工 業 化 노선으로 전환한 데 있었다. 1964년부터 본격화 한 수출주도공업화로의 전환이 요구한 환율 및 금리정책의 수정, 수 출지원정책의 재편, 제반 정책의 모색ㆍ결정ㆍ집행체계의 정비, 나아가 외교 및 군사 노선 까지 포괄하는 發 展 國 家 體 制 의 성립에 관해서는 기왕에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연구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노선의 전환을 가능케 한, 어느 의미에서는 자연스럽게 유도한, 국내의 산업구조와 국외 시장조건에 관해서이다. 노선의 전환을 앞장서서 견인한 것은 산업과 시장의 동향에 밝은 기업가 집단이었다. 이러한 조건들을 가리켜 앞에서는 성 장의 잠재력 이라 하였는데, 20세기를 통해 형성되어 온 그 역사적 조건들이야말로 군인들 의 탈법적 쿠데타를 이른바 근대화혁명 (교과서포럼, 대안교과서 한국근ㆍ현대사, 180-181 쪽)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이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그에 관해 아주 적게 준비 된 범위에서 약간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노선의 전환은 이념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되돌아보면 명쾌 하게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불투명한 모험적인 선택이었다. 전환을 심하게 방 해한 것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둘러싼 한국 정치와 지성의 분열이었다. 분열의 정도는 집권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들이 아니었다면 쉽게 극복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였다. 무엇보다 소여의 성장의 잠재력 을 현실화할 수 있었던 것은 군인 출신 정치가들의 체계적 이고 종합적이며 일관된 행정능력과 그를 뒷받침한 강인한 성취동기였다. 대개 이상의 점들 을 종합한다면, 이 글에 요구된, 동시대 후진국과의 비교에서 박정희시대의 개발 경험이 갖 는 특수성 내지 일반성도 찾아지지 않을까 싶다. 2. 최초의 주자들 경제개발에의 강력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정부는 초기 2-3년간 체계적인 개발정책 을 결여하였다. 1963년은 군사혁명 의 전도가 어두운 비관의 시간이었다. 그 전 해 62년은 최악의 흉작이었으며, 그 해 연말에 전격 시행된 통화개혁은 혼란만 유발한 치졸한 작품이 었다. 그 뒤의 63년에는 경제의 혼란과 사회의 불안이 증폭되는 가운데 민정이양을 둘러싼 정치의 갈등이 우심하여 장차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 李 秉 喆, 湖 巖 自 傳 )의 탄식으로 모두가 우울하였다. 바로 그 63년에 알게 모르게 이후 박정희정부 15년간을 이끌어간 수출주도공업화로의 청 신호가 수출시장에서 밝혀졌다. <표1>은 박정희정부가 이전 정부의 계획서를 참조하여 성 급하게 작성한 제1차5개년계획(62-66)이 기대한 수출의 계획치와 실제의 수출고를 비교하 고 있다. 수출의 주력은 농수산물의 食 料 品 과 광산물의 非 食 用 原 材 料 로 기대되었으며, 그 점에서 박정희정부의 초기 개발전략은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수입대체공업화 노선에 충실 - 1 -

하였다. 게다가 초년도 62년의 실적치는 계획치에 미달하였다. 그런데 비관의 분위기가 가득했던 63년에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수출 실적치가 계획치를 초과하였는데, 초과 달성의 공신은 수출의 주력으로 기대되었던 식료품과 비식용원재료가 아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原 料 別 製 品, 곧 제조업의 공산품이었다. 당초 공산품에 기대 한 63년의 수출 계획치는 640만 달러에 불과했는데, 실적치는 물경 2,810만 달러나 되었 다. 크게 고무된 박정희정부는 제1차5개년계획을 보완하여 64년의 공산품 계획치를 1,920 만 달러로 높여 잡았는데, 이번에는 4,230만 달러의 실적을 거두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엉 뚱한 곳에서 그토록 목말라 하던 달러 박스가 튀어나온 셈이었다. 대체 이 수출시장은 어디 있다가 63년 그 해에 나타나 전도 암울한 박정희정부를 그토록 고무하였던가. <표1> 상품류별 수출의 계획과 실적(제1차5개년 원계획 및 보완계획) (단위: 100만 달러, %) 1962 1963 1964 1965 1966 계획 실적 계획 실적 원계획 보완 보완 보완 실적 원계획 실적 원계획 계획 계획 계획 실적 식료품(a) 20.1 21.9 23.2 18.1 27.6 24.7 26.3 31.6 27.9 28.2 35.8 33.3 35.1 비식용 원재료(b) 25.8 19.8 29.4 26.2 32.2 33.7 31.4 46.9 36.8 37.0 50.9 45.1 40.5 원료별 제품(c) 5.8 6.2 6.4 28.1 8.3 19.2 42.3 9.2 36.4 66.4 10.0 43.0 73.6 기계류 - 1.4-4.1 - - 2.2 - - 5.5 - - 8.4 잡제품 4.6 2.0 7.3 6.4 9.1 9.2 13.2 9.9 7.6 34.5 12.0 9.0 52.2 합 계(d) 60.9 54.8 71.7 86.8 84.1 94.0 119.1 105.6 112.8 175.1 117.5 135.6 219.0 (a+b)/d 75.4 76.1 73.4 51.0 71.1 62.1 48.4 74.3 57.4 37.2 73.8 57.8 34.5 c/d 9.5 11.3 8.9 32.4 9.9 20.4 35.5 8.7 32.3 37.9 8.5 31.7 33.6 주: 1)음료 및 연초, 광물성연료, 화학제품 등 몇 개의 유별 통계가 빠져 있기 때문에 표에 제시한 유별 수출액과 합계액은 일치하지 않음. 출처: 계획 원계획: 경제기획원(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1962-1966, 81-82쪽. 보완계획: 경제기획원(1964),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회, 보완계획, 136쪽. 실적: 기획조정실(1967),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평가보고서, 123쪽. 63년 그 해 수출의 총아 는 1,211만 달러의 철강재였다. 그 다음은 675만 달러의 단판 및 합판이고, 그 다음은 414만 달러의 면포였다. 이들 공업에 대해 잠시 설명한다. 해방 후 남한의 철강산업은 46년의 鋼 塊 생산이 그 전 해의 20%에 불과했듯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떠나고, 만주와 중국에서 들어오던 유연탄 및 코크스 연료가 두절되 었기 때문이다. 볼만한 생산시설은 삼척의 三 和 製 鐵 과 인천의 大 韓 重 工 業 公 社 (원 朝 鮮 理 硏 株 式 會 社 仁 川 工 場 ) 둘 밖에 없었는데, 조업이 저조한 가운데 그마저 6ㆍ25전쟁에 의해 심 하게 파괴되었다. 이승만정부는 52-53년에 걸쳐 삼화제철의 용광로를 복구하였는데, 수입 연료의 고부담으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조업이 부진하다가 58년의 민영화 이후에야 정상화 하였다. 61년 삼화제철은 3기의 용광로를 가동하여 연산 선철 2만 1,000M/T의 능력을 갖 추었다. 또한 이승만정부는 54년 대한중공업의 제강업을 재건하기 위해 서독의 DEMAG회 사에 50M/T급 평로 1기의 건설을 발주하였으며, 56년 말에 준공하였다. 뒤이어 57년에는 같은 회사에 연산 12만M/T 分 塊 壓 延 施 設, 연산 10만M/T의 中 型 壓 延 施 設 등을 발주하여 59년 말에 대부분 완공하였다. 이 언저리에서 제선, 제강, 압연으로 이어지는 철강산업의 기본 줄기가 국민적 산업으로 확보되었다( 金 胤 亨, 韓 國 鐵 鋼 工 業 의 成 長, 50-64쪽). 이 같은 이승만정부의 철강산업 재건과 더불어 전후 복구의 활발한 붐을 타고 약 30여개 의 군소 철강공장들이 전국에 널린 전쟁 고철이나 수입 半 鋼 製 品 을 원자재로 하여 족생하였 - 2 -

다. 이들은 58년 이후 삼화제철과 대한중공업의 정상화에 따라 더욱 큰 발전을 보았는데, 그 결과 이미 60년이 되면 생산시설의 과잉상태를 맞게 되었다. 동년 7월의 보도에 따르면 국내의 철판 업자들이 동 제품의 수입 금지를 요청하면서 두께 32미리 이하의 철판의 경우 국내 연간 수요가 2만M/T인데 생산시설은 3만 4,000M/T이며, 이에 亞 鉛 鍍 鐵 板 의 경우 국 내 10여개 업자들이 2만M/T의 재고를 쌓아둔 채 조업단축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朝 鮮 日 報 60년 7월 27일). 철강업자들은 탈출구를 수출에서 찾았다. 1962년 최초로 日 新 製 鋼 이 2,594톤, 47만 5,000달러의 철강판을 월남에 처녀수출 함에 성공하였다( 韓 國 鐵 鋼 年 表, 24 쪽). 그 월남으로의 철강재 수출이 63년에 이르러 위와 같이 1,211만 달러의 대박을 터뜨 린 것이다. 월남이 철강재를 수입한 것은 미국의 AID원조에 의해서였다. 한국의 빈약한 철 강산업이 당시 세계 최대의 철강국가로 부상하고 있던 일본을 제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BA(Buy America)정책에 규제되어 월남이 값싸고 질 좋은 일본제품을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貿 易 年 鑑 64년판, 28쪽). 단ㆍ합판공업도 철강공업과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 1950년대에 국내의 단ㆍ합판 공장은 인천의 大 成 木 材, 부산의 東 明 木 材, 대구의 盛 昌 企 業 이 주력이었다. 이들은 원래 식민지기에 인천에 설치되어 만주에서 원목을 수입하여 합판을 생산하던 일본인 공장이었다. 해방 후 귀속업체로서 민간에 불하되어 대성목재가 되었는데, 6ㆍ25전쟁 때 시설의 일부가 부산과 대구로 소개되어 동명목재와 성창기업이 되었다. 1954년 天 佑 社 가 대성목재를 인수한 다음, 유엔 군납을 목적으로 서독에서 일제보다 우수한 기계를 도입하였으며, 미8군 합판 기술자 의 지도를 받아 군납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경쟁사와 합동으로 60년 미국시장을 개척함 에 성공하였다( 雪 峰 全 澤 珤 傳 記, 139-142쪽). 60년의 처녀수출 은 고작 1만 5,000달러에 불과했는데, 품질이 일본산보다 좋다는 시장의 호평에 힘입어 63년에 이르러 위와 같이 675만 달러라는 또 하나의 대박을 터뜨렸던 것이다. 제3위의 주자였던 면공업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이다. 일제가 남긴 꽤나 풍성한 면방직의 시설은 6ㆍ25전쟁에 의해 거의 70%나 파괴되었다. 52년 한국정부와 UNKRA 사 이에 한국섬유공업부흥정책에 관한 협약 이 성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56년까지 방추 40만 에 직기 8,500대를 건설하고 그를 위한 자금을 UNKRA 원조가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56년까지 약 886만 달러의 UNKRA 자금이 설비 도입에 투입되었다. 원료 원면은 FOA-ICA와 PL480 원조에 의해 공급되었는데, 각기 1억 7,347만 달러와 4,000만 달러의 거액에 달하였다. 그 외에 정부보유 달러가 직접 면공업의 투자되기도 했다. 정부는 민간업 자가 생산시설을 불하 받음에 있어서 유리한 조건의 금융을 대량으로 공급하였다. 방직업계 는 원면을 회원 업체에 불하함에 있어서 방추 설비의 규모를 기준으로 하였으며, 이는 업체 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설비를 늘리게 하는 유인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56년 방추 총수가 43만에 달하여 당초의 목적을 초과하였는데, 그 역시 조기적으로 설비 과잉에 따른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56년부터 면제품의 수입을 완전히 금지하여 국내시장을 보호하였을 뿐 아니 라 업계의 해외시장 개척을 독려하였다. 업계 스스로도 염색기술의 개량, 스프방적으로의 전환, 노후시설의 개선에 힘써 60년부터 미약하나마 수출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62년에는 미국시장에 183만 달러의 면포를 수출하게 되어 그 해 연말 미국 통상 당국 으로부터 한국산 직물의 수입을 억제하겠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63년에는 미국시장이 297 만 달러로 더 크게 열리는 가운데 영국, 서독, 네덜란드 등의 EEC 시장까지 개척함에 성공 하여 총 414만 달러의 면포를 수출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전도 암울했던 박정희 정부를 구한 공산품의 수출시장은 그 이전 정부가 丹 心 으로 추구한 수입대체공업화 노선의 결실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정부는 이승만정부를 부정하였지만, 실은 그 정부가 남긴 유산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더 길게 보면 그 물적 유산 의 역사적 원류는 20세기 전반의 식민지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눈에 잘 띄지 않아 놓치기 - 3 -

쉽지만 사유재산권 등, 시장경제체제의 제도적 기초까지 추급해 가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기나긴 이른바 先 行 條 件 充 足 期 가 있었던 것이다. 3. 세계시장의 확대와 비교우위의 이동 63년에 벌어진 위의 사건은, 한국무역협회에 의하면, 해방 후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종 래 농업, 수산, 광산물 등 제1차 산품에 의존하던 우리나라의 수출상품 구조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으며, 협소한 국토에 제한된 자원 만으로서는 수출 증대에 한계가 보이던 차 이 같은 공산품의 수출 증대는 우리나라 수출 전망에 서광을 던져 준 것이었다( 貿 易 年 鑑 64년판, 21쪽). 이 사건은 군인 출신의 정치가들에게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똑바로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제1차5개년계획을 공산품의 수출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보완하였는데, 당시의 언론은 이를 수출계획 으로 보도하였다. 그와 동시에 수출 만이 살 길 이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金 立 三 自 傳, 201-201쪽). 왜 63년부터였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60년부터 미약하나마 수출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 었던 한국의 공업이 상대해야 했던 60년대 세계시장의 동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2차대 전 이후 세계자본주의가 일반적 예상과 달리 영원의 번영 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IMF와 GATT를 양대 축으로 하여 세계를 자유무역시장으로 편성하고 강화해 온 이른바 미국체 제 (Pax Americana)에 힘입은 바가 크다. 몇 가지 잘 알려진 통계를 소개하면, 세계경제의 총생산은 90년 가격으로 1950년의 5.2조 달러에서 98년 33.7조 달러로 6.5배 증가하였다. 그에 비해 세계무역은 동기간 210.3억 달러에서 1조 251억 달러로 48.7배나 증가하였다. 세계무역의 증가가 세계 총생산의 증가를 견인한 것이다(Angus Maddison, The World Economy). 그런데 실제 58년까지 IMF-GATT체제는 작동이 유보되었다. 주요 국가들이 전후 복구과 정에서 자국 통화를 방어하기 위해 미국 상품이나 화폐를 차별하는 것을 미국이 양해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른바 IMF과도기조항 이 폐지되고 주요 선진국 간에 상품과 통화의 자유시 장이 성립하는 것은 58년부터이다. 그 사이 미국은 약 640억 달러의 원조를 세계 각지에 살포하여 각국의 전후 복구를 도우고 세계시장을 지탱하였다. 한국의 이승만정부도 그 가운 데 약 30억 달러를 챙겨 그의 국민경제를 건설하였다. 58년이 또 다시 중요한 것은 그 해 EEC가 성립했기 때문이다. 61년에 취임한 미국의 케 네디 대통령은 이를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자유무역주의를 보다 공세적 으로 주창하여 64년부터 GATT 제7차 라운드를 성립시켰다. 67년에 타결을 본 이른바 케 네디라운드 에 의해 주요 통상국가의 관세율은 평균 50%나 인하되었다. 그 사이 세계무역 은 일층 확대되어 52-63년 세계무역의 연평균 성장률 7.4%는 64-72년에 11.6%로 높아졌 는데, 특히 67년 이후의 신장세가 두드러졌다(World Trade Organization, International Trade Statics 2008, TableⅡ.1) 세계무역은 양적으로 팽창했을 뿐 아니라 구조적 변화도 보였는데, 곧 종전까지 세계무역 의 중심을 차지한 농산물과 연료ㆍ광산물의 비중이 줄고 공산품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예컨 대 64-72년간 세계무역에서 농산물 수출의 연평균 성장률은 7.2%, 연료ㆍ광산물의 수출은 10.8%임에 비해 공산품의 수출은 13.8%나 되었다. 이 같은 구조 변화에 따라 자원보유국 인 구식민지 출신의 후진국이 세계무역에서 점차 소외되어 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 고 해서 세계무역이 선진국들만의 잔치이지는 않았다. 미국시장의 변화가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64-73년간 미국의 수출시장에서 공산품의 비중은 61.4%에서 62.8%로 별다른 변화 를 보이지 않았던 반면, 미국의 수입시장에서 공산품의 비중은 40.5%에서 60.5%로 급증하 였다(ibid, TableⅡ.4). 다시 말해, 미국이 세계에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중심국다운 국제분 - 4 -

업의 연관을 확보한 것이다. 미국이 수입하기 시작한 공산품은 미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함 에 따라 더 이상 미국에서 생산할 수 없는 노동집약적 제품들이었다. 의지와 능력이 있는 후진국이라면 선진국에서 생겨난 이 같은 새로운 공산품 시장은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 다. 그러한 능력을 발휘했던 첫 번째 대열의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한국이 속하였다. 63 년 한국의 수출시장에서 공산품이 수위를 점한 것은 크게 보아 이 같은 60년대 세계시장의 구조변동에 의해서였다. 세계시장의 큰 동향이 그렇게 움직였지만 막상 박정희정부를 부추긴 것은 한국을 둘러싼 地 經 學 (geo-economics)이었다. 56년 전후복구의 완료를 선언한 일본은 동년 중화학공업화 의 추진을 계기로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상 전례가 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하기 시작했으며, 62-64년의 이른바 올림픽 景 氣 의 기간에는 연평균 10%라는 놀라운 성장률을 이룩하였다 ( 金 宗 炫, 日 本 經 濟 史, 296쪽). 일본의 수출시장 역시 구조적 재편이 불가피하였다. 예컨대 60-70년간 일본의 수출시장에서 경공업 제품의 비중은 44%에서 21%로 줄어든 반면, 중화 학공업 제품의 비중은 47%에서 73%로 늘었다. 그런데 같은 기간 한국에서는 그 역방향의 추세가 있었다. 수출시장에서 경공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32%에서 70%로 급증한 것이 다( 金 泳 鎬, 東 アジア 工 業 化 と 世 界 資 本 主 義, 84쪽). 이같이 인접한 두 국가에서 관찰된 역방향의 추세가 시장과 산업의 깊은 연관에서 발생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변동에 따라 노동집약적 공업이 거점을 옮기는 현상이 세계 제2의 공업국으로 부상하는 일본과 그의 인접한 옛 식민지 한국 사이 에서 전형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국교도 수립되기 전, 이미 63년에 한국에서 保 稅 加 工 調 査 團 이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으로 넘어올 노동집약적 공업을 물색하였으며, 그 결과 동년 5월 에 이미 1,400만 달러의 확정계약이 체결되었는가 하면, 1,500만 달러가 교섭 중이었다. 동 조사단에 일본의 기업가들은 숨김없이 말하였다. 일본이 한국에 기대하는 것은 싸고 손쉽 게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이다 ( 朝 鮮 日 報 63년 5월 9일). 당시 전경련의 사무국장이었던 金 立 三 은 이같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산업이 급속히 이동하는 국면을 꿀벌의 분봉 현상에 비유 하였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가지만 들만 될 일이다. 바가지를 들어라. 그가 남긴, 당시 人 口 에 널리 膾 炙 된, 명언이었다( 金 立 三 自 傳, 186쪽). 시장의 이 같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개발계획의 당국은 보세가공의 형태로 일본에서 산 업이 넘어오는 것을 크게 반기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부가가치율도 낮지만 한국의 값싼 노동을 이용하겠다는 일본자본의 의도가 구래 식민지적 종속관계를 연상시켰을지 모른 다. <표1>에 의하면 64년 수출계획의 보완 당시 보세가공이 포함된 잡제품의 보완 계획치 는 65년과 66년 경우 오히려 원 계획치보다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시장의 움직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의류, 신발, 人 髮, 조화 등의 보세가공에 의한 수출 실적치가 64년에 보완 계획치 920만 달러를 훌쩍 넘는 1,320만 달러에 달했으며, 66년에 이르러선 보완 계획치 900만 달러의 근 6배에 가까운 5,220만 달러를 이룩하여 전체 수출의 24%나 차지하였다. - 5 -

<표2> 주요 對 美 輸 出 品 의 시장점유율: 1962-72년 (단위: 1,000 달러) 수입 증감액 점유율 증감(%) 한 국 일 본 한 국 일 본 기여율(%) 생사 -1,403-23,974-1.3-78.9-0.20 합판 125,854 9,123 26.3-26.2 18.06 직물용사 2,890 21,337 0.9-7.8 0.41 면직물 3,979 28,937 0.7-8,8 0.57 면직물이외직물 12,222 114,357 1.9 6.0 1.75 철강제품 46,348 555,863 3.3-7.8 6.65 기타 전기기계 51,864 166,899 5.5-2.9 7.44 의류 235,477 195,339 12.4-13.3 33.79 신발류 43,602-2,204 4.8-37.0 6.26 완구 등 9,209 81,326 1.6-32.0 1.32 기타 잡제품 57,111 35,059 17.2-8.3 8.19 소계 587,154 1,182,061 7.3-11.4 84.24 주: 1)상품명은 國 際 標 準 貿 易 品 分 類 (SITC)의 3 digit에 의한 것임. 출처: UN Comtrade database(http://comtrade.un.org) 보세가공을 넘어 60년 이래 수출산업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공산품은 세계 최대의 미국시 장에서 일본 제품을 밀쳐내어 갔다. 62-72년 미국의 수입시장은 162.5억 달러에서 555.6 억 달러로 3.4배 확대되었다. 동기간 한국 공산품의 미국 수출은 1,072만 달러에서 7억 770만 달러로 66배나 증가하였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상품은 총 222종에 달하였 다(SITC 4digit 기준). 이 222종의 제품이 미국시장에서 차지한 점유율을 동기간 일본 제품 의 점유율과 비교하면 두 점유율이 다 증가한 것이 133종, 둘 다 감소한 것이 14개, 한국 의 점유율이 증가하고 일본의 점유율이 감소한 것이 72종, 일본의 점유율이 증가하고 한국 의 점유율이 감소한 것이 3종이었다. 동기간 한국의 수출 주력품은 <표2>와 같은 11종이다(SITC 3digit 기준). 이들로 동기간 한국의 대미수출의 84%를 설명할 수 있다(기여율 참조). 기여도의 크기는 의류, 합판, 기타 전기기계, 철강제품, 신발의 순서이다. 철강제품을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 원자재나 중간재 를 수입하여 가공수출하는 노동집약적 제품들이다. 이들의 미국에서의 시장점유율은 생사 1 종을 제외하면 모두 증가하여 평균 7.3%의 증가율을 보였다. 반면에 이들과 경합한 일본 제품의 점유율은 면직물이외직물 1종을 제외하면 모두 감소하여 평균 11.4%의 감소율을 보였다. 요컨대 박정희정부의 수출주도공업화정책을 유도한 것은 60년대 세계시장의 팽창과 노동 집약산업의 후진국으로 이동이라는 세계시장의 구조적 재편이었다. 수출주도공업화로의 전 환은 세계 제2의 공업국으로 부상하는 일본과 바로 인접하였다는 한국의 지경학이 박정희 정부에 안겨준 선물이었다. 그 점에서 박정희정부는 이전 이승만정부에게는 기회가 없었던 큰 행운을 누렸다. 4. 잘 돌아간 관민협동체제 孟 子 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함에 있어서 天 時 는 地 利 만 못하고 지리는 人 和 만 못하다고 하였다( 孟 子 公 孫 丑 下 ). 이 동양 고래의 명언에 빗대 전경련의 김입삼은 박정희 - 6 -

정부가 추구해야 할 급무에 대해 이 나라 수출산업 촉진을 위한 時 利 와 地 利 는 갖추어져 있다. 이에 예지와 협동을 가미하여 결실을 기할 따름이다. 라 하였다( 金 立 三 自 傳, 186쪽). 군사 쿠데타가 근대화혁명 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 요인은 바로 이 예지와 협 동 의 체제를 성공적으로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신앙에도 불구하고 왕조시대에 사 대부가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의 개인적 배경으로 인해 그의 집권기에 걸쳐 상공인들과 만나 국정을 허심탄회하게 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일이 최초로 있은 것은 장면정부 시절이 었다. 61년 3월 24일 오후 7시 장면총리의 집무실에서 총리 및 주요 각료와 한국경제협의 회의 회장단과의 비공식 회동이 밤늦은 시간까지 있었다. 이를 두고 김입삼은 일제 강점기 간과 광복, 6ㆍ25동란 등 온갖 풍상 속에서 정보력과 경영능력을 키워온 재계가 국가경영 의 한 주체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라고 감격해 마지않았다(동상, 26쪽). 한국에서 기업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서 20세기 초가 그 실질적 출발이었다. 공장 형 태의 제조업을 소개하면, 대한제국기인 1907년 전국의 공장은 70개였는데, 그 가운데 한국 인 소유는 7개에 불과하였다. 이후 식민지 초기인 1915년에 공장 수는 766개로 늘고 그 가운데 한국인 소유는 207개였다. 43년 식민지 말기가 되면 전국의 공장 수는 12,187에 달하고, 그 가운데 남한에 소재한 것이 9,323이었다. 한국인 소유는 알 수 없지만 거의 3/4 에 달했다고 보인다. 이후 해방 후의 혼란과 전쟁을 거친 1955년의 공장 수는 8,628, 뒤이 어 급격한 공장 설립의 붐을 맞아 60년에는 15,204에 달하였다. 그 대부분은 군소 규모에 다 존속 연한도 수년에 불과하였지만, 그런대로 기업이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성장의 잠재 력 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기업가능력 이 두텁게 축적되어 왔다. 장면정부가 개시한 관민협동체제는 박정희정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 다. 개발정책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들고 있지 않았던 박정희에게서 시장경제의 현실에 어 둡고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비관적 전망만 늘어놓는 강단의 경제학자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 지 않았다. 반면 어려운 시장 환경에서 무역에 종사하고 공장을 가동해 온 기업가들은 이 나라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지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정보와 명징적인 행동프로그램을 갖 고 있었다. 박정희는 자연히 그들과 어울렸으며, 자주 즐겨 어울리는 과정에서 그들의 충고 대로 움직여 갔다. 박정희에게 개발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훌륭한 기업가가 한 둘이 아니었지만, 여러 문헌에 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대표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두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천우사의 全 澤 珤 와 삼성그룹의 李 秉 喆 이다. 둘 다 식민지기에 농장과 공장 경영을 통해 기업가로 입 신한 사람들이다. 전택보는 대성목재를 인수한 다음 그것을 수출기업으로 키워 60년대 내내 제1의 수출업자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해방 후 홍콩에 들러 그곳에서 중국 피난민들이 왕성 하게 전개한 보세가공을 인상 깊게 관찰한 뒤, 이미 50년대 말부터 일본 기업가와의 개인적 인 지면을 활용하여 부산 일대에서 보세가공을 일으켰으며, 5ㆍ16 이후는 박정희를 만날 때마다 보세가공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그에게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전택보는 박 정희에게 개방적 무역정책의 중요성을 가르친 기업가였다( 雪 峰 全 澤 珤 傳 記 참조). 이병철은 경제학의 고답적인 상식을 깨고 대기업 중심의 창조적인 개발 프로그램을 그렸 던 걸출한 기업가였다. 그는 비관의 분위기가 가득했던 63년에 한국일보에 우리가 잘 사는 길 을 5회에 걸쳐 기고하였다. 거기서 그는 우리에게 농업에서 출발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고전적 코스를 걸을 여유는 없다고 단정하였다. 부족한 것은 자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넘쳐흐른다. 그 외자를 과감하게 향후 10년간 21-30억 달러를 도입하여 약 1,000개의 공장을 짓고, 그 공장이 250만 명의 인구를 부양하고, 그 공장과 연관을 갖는 중소기업이 자생하여 또 그 만치의 고용효과를 낳고, 그렇게 소득과 고용이 증대하면 세수 가 증대하고 공무원의 월급이 올라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농업도 1인당 경지면적이 늘어 생 산성과 소득이 증대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모든 개발 프로그램을 실행해 감에 있어서 위정 - 7 -

자와 기업가는 물론, 국민 모두의 도덕적 각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하였다( 湖 巖 自 傳, 133-141쪽). 이후 한 세대에 걸친 한국경제의 발전은 이 같은 이병철의 큰 그림을 따랐다고 볼 수 있 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ㆍ부품 연관이 생겨나는 것은 73년부터 박정희에 의해 강행된 중화학공업화에 의해서이다. 그 즈음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없이 소원해져 있었지만, 대기업 에서 중소기업으로 내려오는 톱-다운 방식의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그 아이디어의 원천이 위와 같은 이병철의 63년도 구상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정부에 들어 부쩍 잦아진 정치가, 관료, 기업인 간의 공식적 비공식적 회동은 수출 주도공업화 노선이 어느 정도 확정된 65년에 이르러 月 間 經 濟 動 向 報 告 와 輸 出 振 興 擴 大 會 議 라는 두 관민합동의 회의체로 발전하였다. 65년 1월부터 경제기획원 주관 하에 정례화한 월간경제동향보고는 79년 9월까지 177개월의 기간에 도합 146회나 열렸다. 상공부가 주관 한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정례화 하는 것은 66년부터 1월부터인데, 79년 9월까지 165개월의 기간에 도합 147회 개최되었다(강광하ㆍ이영훈ㆍ최상오, 한국고도성장기의 정책결정체계, 107, 174쪽). 이 두 회의체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집착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는 74년 8월 15일 그의 부인이 흉한의 총탄에 쓰러졌음에도 28일 예정대로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열렸음 에서도 알 수 있다. 월간경제동향보고는 물가와 국제수지 등, 국가경제의 거시적 지표를 점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개별 산업의 개발정책이나 공기업의 구조조정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국정의 과제 를 다루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수출과 연관된 국내외 시장의 동향과 수출정책을 미시적 으로 추구한 회의였다. 이 두 회의체는 아젠다에 따라 관련 업계와 학계의 전문가를 초빙하 는 관민합동으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소수의 전문가만이 참여하는 비공개 회의 였는데, 70년대에 들어와 새마을운동의 추진체로 그 기능이 바뀌는 가운데 점차 정치적 의 례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이 두 회의체의 역사적 공헌은 관계, 학계, 업계가 축적한 고급 정보를 광범하게 수집하 고 분류하고 집중하여 개발정책의 모색, 결정, 집행, 조정의 극히 효율적인 체계를 창출하였 다는 데 있었다. 실제 많은 개도국의 개발경험에서 그들이 실패했던 중요 이유는 계획 (planning)이 아니라 실행(implementation) 능력의 결여에 있었다. 개발 가능한 부문을 찾 아내고, 개발의 수익-비용구조를 분석하고, 합당한 정책을 수립하는 계획 능력은 많은 후진 국에서 그리 결정적인 장애는 아니었다. 막상 어려웠던 것은 개발 계획이 산업과 시장의 현 장에서 봉착하게 되는 예상치 못한 장애 또는 수익-비용 구조의 어긋남을 조속히 인지하고, 중앙으로 보고하고, 그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개발 정책들을 상호 조정하고 보완하는 일 이었다(Albert Waterston, Development Planning: Lessons of Experience, pp.332-368). 이를 위해선 유능하면서도 책임감이 강한 관료제 행정기구가 잘 가동되어야 할 뿐 아니 라, 중앙정부의 최고사령탑으로서 전국의 개발 현장을 점검하고 종합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갖춘 상시 가동의 조직이 설치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후진국이 실패한 것은 이 두 차원의 행정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행정기구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국 정을 책임지는 최고 권력자의 개발의지가 얼마나 강력한가, 그리하여 그 상시 가동의 조직 을 얼마나 자주 찾는가의 문제였다. 예컨대 이 같은 행정조직은 수상실 옆에 국가운영실 (National Operations Room)을 두고 전국의 개발 상황을 월간 브리핑으로 점검했던 말레 이시아에서 훌륭하게 가동되었다. 태국과 필리핀이 이를 본받아 온갖 설비를 갖춘 유사한 방을 만들었지만, 최고 권력자가 의지를 갖고 챙기지 않은 통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ibid, pp.360-362). 좀 더 따져 봐야겠지만 말레이시아의 국가운영실은 그 장기적 일관성이나 정책능력의 강 력함에서 한국의 두 회의체에 비견할 바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모든 정부가 대소간에 피 - 8 -

할 수 없는 정부의 실패 가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경제에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시 대의 한국에서 낮은 수준으로 눌러질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을 보완 또는 대체하여 정보를 창 출하고 평가하고 분배하는 관민협동회의체라는 한국적 시장경제제도가 훌륭하게 가동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그 회의체의 역사적 전제는 한국의 우수한 기업가능력이었다. 그렇게 성립한 회의체의 가장 볼만한 결실은, 이후 박정희가 또 한 차례의 정변을 일으킨 위에 중화학공업화를 강행하여 한국경제에 파천황의 결과를 초래했음을 두고 보면, 경제의 논리와 현실에 매우 잘 훈련된 최고 권력자를 배출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5. 맺음말 이 글에서 필자는 5ㆍ16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의 정치가들이 이후 한 세대에 걸쳐 한강의 기적 또는 근대화혁명 의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의 사회와 경 제에 내재해 있던,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성장의 잠재력 이 컸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에 서, 그에 관해 적게 준비된 좁은 범위에서 약간의 논의를 펼쳐 보았다. 부족한 내용이나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립적 수입대체공업화에서 개방적 수출주도공업화로 개발 노선의 전환은 단절적인 듯이 보이지만 그것을 견인한 국내 산업과 수출시장의 조건은 매우 연속적이었다. 이승만정부가 수입대체공업화를 통해 육성한 공업은 1960년을 전후하여 이미 수출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었으며, 63년에 예상 밖의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다. 60년대에 들어 가속화한 자유무역과 세계시장의 확장은 의지와 능력이 있는 후진국에게 선진국으로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을 수출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국이 그러한 기회를 선 구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위와 같은 국내의 산업조건과 더불어 세계 제2의 공업국 으로 급속히 부상하고 있던 일본이 바로 인접한 국가라는 지경학의 이점에 의해서였다. 한 국은 일본으로부터 노동집약적 공업을 직접 이전받거나 수출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탈취하 였다. 이전 정부가 누릴 수 없었던 박정희정부의 또 하나의 행운은 개발의 노선과 정책을 올바 로 충고할 수 있는 우수한 기업가집단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정부와 기업가집 단의 협조체제는 이후 월간경제동향과 수출진흥확대회의라는 관민합동회의체로 발전하였다. 이들 회의체로 대표되는 정부와 민간의 협동체제는 개발정책의 모색, 결정, 집행, 보완에 있 어서 극히 효율적인 시스템을 창출하였다. 그 밑바닥에는 동시대 다른 후진국의 정치 지도 자들에게 쉽게 찾을 수 없는 군인 출신 정치가들의 강력한 개발의지(will-to develop)의 작 용이 있었다. 동시대의 한국 사회가 5ㆍ16으로 집권한 군인 출신의 정치가들에게 진 빚이 있다면 바로 그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이 보다 완전해지려면 추가로 다루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글 중에서 잠시 언 급했지만, 사유재산권을 비롯한 시장경제제도와 책임감이 강하고 우수한 관료제 행정조직에 관해 그 성립과 전개의 역사를 추구하여 보완할 필요가 있다. 보다 긴 역사적 안목에서는 기업가능력 을 넘어 한국 사회에 축적되어 온 인적 자본 내지 사회적 자본 의 수준이나 특질까지 추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상이 주로 경제사적 시각에서 5ㆍ16을 규정했던 요인들이라면, 정치외교사의 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65년에 있었던 한일국교정상화라고 하겠다. 실은 그 사건을 통과 하고 나서야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한국-일본-미국을 연결하는 자본, 기술, 시장 의 국제적 연쇄가 일종의 자기유지적인 체제로 정착할 수 있었는데, 그 점에서 그 사건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사적 사건이었다. 그를 둘러싼 국내 정치와 지성의 격렬한 분열과 대립 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5ㆍ16에 대한 엇갈린 평가도 실은 그 점에서 비롯되고 있 다고 보인다. 그 분열과 대립의 역사적 근원은 멀리 18-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제대 - 9 -

로 조망된다고 여겨지는데, 그에 관해 재미있고 유익한 글을 조만간 읽을 수 있기를 고대하 면서 이 글을 닫는다. -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