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 表 調 査 報 告 2015-16 김제 순동 농업용창고신축부지 국비지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2015. 10
地 表 調 査 報 告 2015-16 김제 순동 농업용창고신축부지 국비지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2015. 10 학술적 또는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지표조사보고서를 공개하는 데에 동의함.
[별지 제3호서식] 사업 내용 지표 조사 조사 결과 사 업 명 사업지역 면 적 사업시행자 조사기관 조사기간 조사비용 *계약금액기 준 주변문화재 조사결과 조사기관 종합 의견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 김제 순동 농업용창고신축부지 국비지원 문화재 지표조사 사업기간 2015~2016년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산95-1 일원 전체사업면적 620m2 지표조사면적 620m2 사업목적 농업용창고신축 기관명 (개 인) 배순희(개인, 여) 연락처 010-9670-3685 고고,역사분야 (재)전북문화 재연구원 책임조사원 진만강 조사원 이하 옥창민 진현석 민속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수중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고건축분야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자연문화재 책임조사원 조사원 이하 2015. 10. 08 2015. 10. 14. (사전조사 0일, 현장조사 1일, 정리분석 0일, 보고서 작성 0.1일) 고고 역사 분야 1,749,000원 민속 분야 원 수중 분야 지정문화재 비지정 문화재 김제 순동 유물산포지 2(조사지역에서 서쪽으로 약 500m 정도 이격) 김제 순동 대정유적(조사지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정도 이격)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3(조사지역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이격) (앞쪽) 원 고건축 분야 사업부지내 문화재 조사결과 유적있음 유적 없음. 기존 지상문화재 신규 기존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 매장문화재 신규 기존 건축물 신규 기존 민속자료 신규 금번 지표조사 지역은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으로 조사지역은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의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에서 보고된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 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사결과 해발 30m 내외의 구릉 정상지역으로 소나무 묘목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조사결과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사지역이 구릉 정상이고 주변 지형 이 삭평등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상태로 원지형이 잔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사업시행에 앞서 유적의 부존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입회조사가 선행되 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지표조사가 지표상에 나타난 현상에 한하여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업시 행 과정에서도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며, 사업시행 과정에서 매장문화재가 발견된 경우 관 계기관과 협의하여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에 의거 적절한 조치를 취해 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지표조사의 방법 및 절차 등에 관한 규정 별표 3에 따라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서를 제출합니다. 원 2015년 10월 일 문 화 재 청 장 귀 하 (재)전북문화재연구원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표 (뒤쪽) 1 연번 1 2문화재명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 3소재지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 4 면 적 5시대 삼국~고려 6종류 7유적 구분 기 존 신 규 8 의견 구분 유물 입회 산포지 조사 조사의견 9 조사 면적 620 m2 10 사유 유물산 포지에 사업부 지 포함 11비고 2 김제 순동 유물산포지 2 김제시 순동 산 102-3번지 일원 삼국~고려 유물 서쪽으로 약 산포지 400m 이격 3 김제 순동 대정유적 김제시 순동 147번지 일원 고려 유적 동쪽으로 약 200m 이격 4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2 김제시 백학동 64-6번지 일원 삼국~고려 유물 동쪽으로 약 산포지 500m 이격
目 次 Ⅰ. 조사개요 1 Ⅱ. 조사지역과 그 주변환경 3 1. 자연 지리적 환경 3 2. 고고학적 환경 5 3. 역사적 배경 12 Ⅲ. 조사내용 16 1. 문헌조사 16 2. 사업구역 및 주변 문화재 현황 18 3. 고고 역사분야 21 4. 민속분야 21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의견 24 1. 종합고찰 24 2. 조사단 의견 25
圖 面 目 次 도면 1. 조사지역과 주변 지형분포 현황도(soil.rda.go.kr에서 발췌) 4 도면 2. 조사지역 위치 및 주변유적 분포도(1:25,000) 10 도면 3. 조사지역 위치도[ 朝 鮮 五 萬 分 之 一 地 形 圖 (1:50,000)] 11 도면 4. 조사지역 위치도 및 주변유적 분포도(1:10,000) 15 도면 5. 사업구역 범위 및 공사계획 평면도 19 寫 眞 目 次 사진 1. 조사지역 위성사진(www.daum.net에서 발췌) 17 사진 2. 조사지역 전경(남-북) 26 사진 3. 조사지역 전경(동-서) 26 사진 4. 조사지역 근경(동-서) 27 사진 5. 조사지역 근경(남서-동) 27
Ⅰ. 조사개요 1. 조 사 명 : 김제 순동 농업용창고신축부지 국비지원 문화재 지표조사 2. 조사경위 : 사업시행자인 배순희(개인, 여)가 의뢰한 김제 순동 농업용창고신축부지 문화재 지 표조사는 김제시 순동 391-1번일원에 농업용 창고 신축에 앞서 지표조사를 실시함으로써 해당지 역의 매장문화재의 분포여부를 확인하여 원활한 매장문화재의 보존 및 보호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고자 그 목적이 있다. 조사의 진행은 2015년 10월 8일 (사)한국매장문화재협회와 계약을 체결하고, 2015년 10월 8일 착수하여 10월 14일까지 일정으로 지표조사를 진행하였다. 지표조사는 조사의 특성상 조사지역내 에서 매장문화재나 지정문화재를 우선 확인하고 사업예정지역과 주변지역에 포함되는 고고 역 사 민속 건축자료 등 모든 문화유적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3. 조사지역 및 범위 : 전라북도 김제시 순동 391-1번지 4. 조사면적 : 620m2 5. 조사기간 : 2015년 10월 08일 ~ 2015년 10월 14일 (사전조사 0일, 현장조사 1.0일, 정리분석 0일, 보고서작성 0.1일) 6. 조사단구성 단 장 : 김 규 정(전북문화재연구원 원장) 책임조사원 : 조 사 원 : 준 조 사 원 : 진 만 강(전북문화재연구원 조사과장) 옥 창 민(전북문화재연구원 사무과장) 진 현 석(전북문화재연구원 연구원) 7. 조사의뢰기관(개인) : 배순희(개인, 여) 8. 조사방법 1) 조사방법은 각종 문헌 자료를 검토하여 조사지역내 유적의 존재여부와 위치 등을 확인한 후 이를 근거로 지표면에 드러나 있는 고고 역사유적 등에 대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2) 고고 역사분야는 관련문헌을 대상으로 조사지역과 주변 일대에 대한 지초 자료를 분석하고, 이 자료를 통해 유적조사 카드를 작성한 후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과 현 - 1 -
장조사를 병행하여 유적의 분포를 파악하고, 지표에 드러나지 않은 유적은 지형적인 입지조건과 GIS자료를 활용한 공간정보를 바탕으로 유적의 분포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다. 3) 역사유적은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현지주민을 통한 설문과 탐문조사를 실시하였고, 현장조사를 통해 유적의 존재여부를 파악하였다. 4) 조사된 유적은 현상을 기록하고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유적의 범위를 지도에 표시하였다. 미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 보완조사를 실시하였다. 9. 보고서 작성 1) 보고서 작성은 조사내용을 대상으로 고고 역사 민속분야롤 나누고 조사지역을 중심으로 기 술하였다. 2) 유적에 대한 조사내용은 유적명, 소재지, 시대, 현황, GPS, 참고문헌 등의 순서로 기술하였다. 유적명은 기존 조사에서 확인된 경우는 그대로 인용하였고, 새로이 확인된 유적은 행정명칭(자연마 을명)을 따랐다. 역사유적과 지정 문화재는 고유명칭을 사용하였다. 3) 조사지역과 유적의 위치는 1/25,000의 지형도를 활용하여 표시하였고, 현재 지형과의 비교를 위해 구한말 지도를 수록하였으며, 그 외 사업계획평면도를 수록하였다. 4) 유적의 사진은 인공위성 사진과 사업대상지역 전경, 유적의 전경, 유물이 확인되는 경우 수습 유물의 순서로 수록하였다. 단, 수습유물의 경우 현지보존을 원칙으로 하였다. 5) 조사단 의견에는 조사대상 유적과 주변유적을 정리하였다. - 2 -
Ⅱ. 조사지역과 그 주변환경 1. 자연 지리적 환경 1) 김제시는 전라북도의 서부 중앙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군산시 익산시와 마주보 고 동으로는 완주군 전주시, 남으로는 정읍시와 접해있다. 남서로는 동진강을 경계로 부안군과 일 부가 맞닿아 있고 서로는 서해와 접하고 있다. 수리적 위치는 경도 126 53 29.64 E, 위도 35 50 2.27 N에 해당된다. 지세를 보면, 동남부의 노령산맥 지맥에는 母 岳 山 (793.5m) 象 頭 山 (575.3m) 九 城 山 (487.6m) 등 이 솟아 있고 이곳으로부터 낮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남부와 동부 및 중북부에 구릉지대를 형성 하고 있다. 이러한 구릉지대는 모악산 지대를 제외하면 최고봉은 凰 山 (121.3m)이며 그 밖에는 烽 火 山 (82m) 進 鳳 山 (72.2m) 高 山 (68.8m) 尼 城 山 (60.9m) 升 盤 山 (56.2m) 社 倉 山 (55.7m) 鳴 良 山 (51m) 祖 宗 山 (48m) 長 燈 山 (40.7m) 등으로 비교적 높이가 낮다. 지형은 호남평야의 중심에 위치하여 충적평야 또는 화강암이 침식을 받아 형성된 구릉지가 대부 분으로, 준평원은 노년기 산지의 침식으로 이루어졌고 하천 및 지류 유역의 충적평야는 이들 하수 에 의하여 운반된 퇴적물이 쌓여서 생성되었으며 또한 서해 연안의 넓은 평야지대는 근래의 대규 모 간척공사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조사대상지의 토양은 송정통( 松 汀 統 )으로 식양질계 적황색토이며 이 토양의 표토는 갈색내지 암 갈색의 양토( 壤 土 )이고 심토는 황적색의 식양토( 埴 壤 土 )이며 기층은 황적색의 화강암 풍화물질인 세사양토 또는 미사질양토( 微 砂 質 壤 土 )이다. 이 토양은 주로 구릉지에 분포한다. 토양배수가 양호 한 성산통( 聖 山 統 )과 백산통( 白 山 統 )은 곡간충적지나 산록경사지에서 송정통과 인접하며 삼각통 ( 三 角 統 )과 달천통( 達 川 統 )은 유사한 지형에 분포한다. 송정통( 松 汀 統 )의 토양 배수는 양호하고 투 수성은 보통이며 유거는 보통 내지 빠르다. 이 토양이 분포하고 있는 매우 약한 경사지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구릉지나 저구릉지는 임지로 이용된다. 남동부에 집중되어 있는 산지는 노령산맥의 일부에 해당된다. 쥬라기때 화강암의 매입으로 접촉 변성을 받아 풍화에 강한 암석인 편상화강암이 되고, 이후 풍화에 약한 대보화강암과의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하천들은 중부 구릉지대를 기준으로 그 북부의 만경강 수계와 남부의 동진강 수계로 나뉜다. 만 경강 수계에는 才 南 川 과 芙 蓉 川 및 기타 소하천들이 있어 북류한다. 완주군 이서면의 여러 시내가 모인 才 南 川 은 용지면 동북부를 거쳐 백구면 동부 麻 田 에서 만경강에 합류하며, 용지면, 백산면 동 부, 공덕면 동부, 백구면 서부의 물이 합친 芙 蓉 川 은 백구 童 子 浦 에서 本 流 와 만난다. 또한 만경강 의 제방을 따라 개설된 수로로 연결되어 西 流 하면서 여러 시내와 내를 합수하고 청하면 척산에서 강으로 흐른다. 동진강 수계에는 신평천과 원평천이 있는데 백산면에서 발원한 신평천은 김제시 서 1) 金 堤 市 史 編 纂 委 員 會, 1995, 金 堤 市 史, 金 堤 市. - 3 -
부, 월촌동 북부, 성덕면의 시내들을 합수하면서 서남류하여 성덕 한포에서 계화만으로 흘러든다. 원평천은 水 原 이 다섯 곳이며 상두산에서 발원한 본류는 금산면 남부의 계류들을 모아 서북류하다 가 서류하면서 금산천 금구천 감곡천 두월천 등의 지류와 다수의 시내들과 합수하고 죽산면을 횡 단하여 명량산 서쪽에서 동진강구로 유입한다. 도면 1. 조사지역과 주변 지형분포 현황도(soil.rda.go.kr.에서 발췌) 기후는 대륙성이지만 해안성 기후의 특색도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름이 길고 우량은 적은 편으로 맑은 날이 많으며 겨울에도 대체로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은 12 C~12.5 C로서 1월 평 균 기온이 -1.8 C이고 8월 평균 기온은 26.7 C이다. 연강수량은 1,250mm 내외로 한강유역과 비슷한 강수량을 갖고 있다. 특히 여름에 폭풍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연중 안개일수는 50~70일 정도 나타난다. 식생은 모악산 일대를 중심으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김제시 지역에 식생 하는 식물은 김정언 임 양재 황병학의 보고를 종합하면 104과 342속 594종 1아종 84변종 4품종 등 총 683종류로 정 리된다.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모악산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주변의 저지대에는 소나무, 때죽나무, 졸참나무, 벚나무, 국수나무, 조록싸리, 누리장나무, 서어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섞여 분포하며, 초 본층에는 칡, 천남성, 제비꽃, 고사리, 고비, 고비고사리, 우드풀, 나비나물, 털대사초, 땅비싸리 등 이 함께 서식한다. 금산사 계곡을 지나 정상으로 오르는 길옆에는 누리장나무, 갈참나무, 서어나무, 개회나무, 벚나무, 국수나무, 사람주나무, 산딸나무, 곰의말채, 철쭉꽃, 진달래, 노린재나무, 층층나 무, 박쥐나무, 생강나무, 으아리, 제비꽃, 나비나물, 산박하, 여로, 둥글레 등이 서식하고 있다. 정상 부근에는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철쭉꽃, 병꽃나무, 정금나무, 조릿대, 당단풍, 산박하, 고사 - 4 -
리 등의 출현 빈도가 높다. 조사지역이 위치하고 있는 백산면은 동쪽은 용지면( 龍 池 面 ) 백구면( 白 鷗 面 ), 남쪽은 김제시( 金 堤 市 ), 북쪽은 공덕면( 孔 德 面 ) 청하면( 淸 河 面 )과 접하며, 서쪽은 만경강 하구를 거쳐 서해에 면한다. 백산면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두악산( 斗 岳 山 :57m) 승반산( 升 盤 山 :57m) 승가산( 僧 伽 山 :56m) 등의 산지가 있을 뿐, 대부분 충적평야에 형성되어 있는 저구릉지대이다. 김제지역에서 조사 확인된 고고학적 유물 및 유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제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군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김제 공덕- 전주간 도로확포장공사군간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백구면 석담리 D지구에서 석기류가 수습되었으 며 2), 2007년에는 호남문화재연구원에서 금강(Ⅱ)지구 김제 2-2공구인 양청리 유적에서 구석기시 대 문화층과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3). 최근 호남고속철도 건설구간 내 상동동유적에 서는 구석기시대 유물포함층이 확인되었다. 유물포함층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석기 약 1,000여 점이 수습되었다 4). 신석기시대 유적은 진봉면 심포리 일대를 지표조사 하던 중 신석기시대 토기편 1점이 수습된 예 가 있을 뿐 5) 현재가지 조사된 예가 없다. 그러나 군산 및 부안 등 인근지역에서 상당수의 신석기 시대 유적들이 조사 보고되어 있고 6), 지리적 환경으로 볼 때 인근지역과 마찬가지로 유적이 존재 할 가능성은 높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1974년에 백구면 부용리 성자동에서 異 形 의 마제석검이 한 점 수습되었을 뿐 7), 이렇다 할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최근 활발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유구들이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주거지의 경우 백구면 석담리에서 중앙에 타원형구덩이가 설치된 방형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다 8). 반월리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말각방형 띄고 있 다. 점토대토기편, 무문토기편, 파수부대호, 방추차, 석창, 토제추 등이 출토되었고, 토기요지는 평 면 원형 3기, 타원형 3기, 방형 3기, 구상 2기로 구분되며 단면형태는 U'자형을 이루고 있다. 유 물은 점토대토기호, 두형토기, 소형토기, 흑도장경호, 무문토기호, 무문토기발, 방추차 등이 출토되 었다 9). 제상리 유적 A지구에서 조사된 주거지는 길이 11.2m, 너비 8.64m의 규모로 내부에는 중 2) 群 山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金 堤 石 潭 里. 3) 湖 南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金 堤 山 稚 里 兩 靑 里 羅 是 里 遺 蹟. 4) 고금님 차상민, 2011, 김제 상동동유적, 2010 2011년도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성과, 호남고고학회. 5) 國 立 全 州 博 物 館, 1999, 金 堤 深 浦 里 一 帶 文 化 遺 蹟 收 拾 調 査 報 告, 扶 安 海 岸 一 帶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學 術 調 査 報 告 第 5 輯. 6) 崔 完 奎 李 信 孝 李 永 德, 2001, 띠섬 貝 塚, 群 長 國 家 工 團 造 成 地 域 ( 群 山 地 域 ) 文 化 遺 蹟 發 掘 調 査 報 告 書 Ⅱ, 圓 光 大 學 校 博 物 館 學 術 叢 書 12. 尹 德 香 崔 盛 洛 金 建 洙, 2002, 群 長 國 家 工 團 造 成 地 域 ( 群 山 地 域 ) 文 化 遺 蹟 發 掘 調 査 報 告 書 Ⅰ, 飛 鷹 島 駕 島 筽 篒 島 貝 塚, 木 浦 大 學 校 博 物 館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叢 書 34. 崔 完 奎 金 鍾 文 李 永 德, 2002, 노래섬(Ⅰ), 圓 光 大 學 校 馬 韓 百 濟 文 化 硏 究 所, 遺 蹟 調 査 報 告 第 49 冊. 7)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1985, 金 堤 地 方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全 北 地 方 文 化 財 調 査 報 告 書 第 5 輯. 8) 群 山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金 堤 石 潭 里. - 5 -
앙축선을 따라 2개의 노지가 설치되어 있으며 노지를 중심으로 장축선을 따라 1열로 배치된 초석 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초석열이 확인된 예는 익산 영등동 Ⅱ-7호에서 확인된 예가 있어 양 지역 간의 비교연구가 가능하다. 출토유물은 환상석부, 양인석부, 삼각만입석촉 등 전기의 특징적인 유물 들이 출토되었다. 제상리 B지구에서도 1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 10m, 잔존너비 3.7m의 규모로 내부에는 장축선상을 따라 5개의 초석이 배치되어 있다. 유물은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편, 양인석부, 이당경식석촉, 고배편 등이 출토되었다 10). 김제 검산 동유적에서는 중앙에 타원형구덩이와 내부 양단에 2개의 주혈이 배치된 소위 송국리형주거지 2기 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외반구연토기편, 석촉, 지석, 석재 등이 출토되었다 11). 김제 상동동유적에서 는 주거지 3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내부에서는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 편, 이중구연거치문토기편, 구순각목문토기편, 토제어망추, 토제방추차, 석촉편, 석검편, 미완성석기, 석재 등이 출토되었다 12). 최근에는 김제 지평선산업단지조성부지에서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청동기시대 유적 이 확인되었다. 부거리Ⅰ-1유적에서는 평명형태가 장방형을 띄는 전기주거지 3기가 확인이 되었 다. 내부시설로는 무시설식노지, 저장공, 2열 3행, 2열 4행의 주열, 벽구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 석촉, 석도, 방추차가 출토되었다. 주거지이 외에 토광묘도 확인되었다. 토광 묘는 생토면을 굴광하고 축조된 것으로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에 가깝다. 유물은 바닥면에서 피장자 의 발치로 추정되는 서쪽벽에서 석검 1점이 출토되었다. 검신끝은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부장하였다. 부거리Ⅰ-2, 부거리Ⅱ유적에서는 각각 6기와 9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평면형태는 방형과 (타)원형이며 주거지 바닥면 중앙에 타원형구덩이가 있으며, 내부 양단에 기둥구멍이 배치된 전형 적인 송국리형주거지이다. 내부시설로는 벽구와 주혈이 확인되었으며, 홍도, 발형토기, 석부, 석검, 환상석부, 석촉, 지석, 석도, 석착, 방추차등이 출토되었다 13). 수록리유적에서는 모두 10기가 조사 되었다. 장방형인 1호 주거지를 제외하고는 평면형태는 (말각)방형과 (타)원형이며 주거지 바닥면 중앙에 타원형구덩이가 있으며, 내부 양단에 기둥구멍이 배치된 전형적인 송국리형주거지이다. 대 형 주거지인 1호 주거지의 경우, 평면형태가 장방형이며, 장축 14m, 단축 9m 가량 된다. 내부시설 로는 중앙부에 인위적으로 마련한 단 시설 이외에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을 봤을 때 다른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과 대동소이하여, 취락 내 제의 공간이나 공동 집회장소 같은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편, 반월형석도, 삼각형석도, 석촉, 삼각만입촉, 석착, 미완성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14). 지석묘는 청도리 동곡마을, 성계리 신암마을, 구월리 어유마을 15), 금성리 용복마을 일대 16) 등 금 9) 방민아 정명옥, 2007, 김제 반월리유적 개보, 2006 2007년도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성과, 호남고고학회. 10) 湖 南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金 堤 大 靑 里, 堤 上 里 遺 蹟. 11) 박현수 윤성준, 2009, 金 堤 劍 山 洞 遺 蹟, 전주대학교박물관. 12) 고금님 차상민, 2011, 김제 상동동유적, 2010 2011년도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조사성과, 호남고고학회. 13) 박상선 진현석, 2012, 김제 부거리 ⅠㆍⅡ유적, 2011ㆍ2012년도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성과, 호남고고학회. 14) 조인진ㆍ신소미, 2012, 김제 수록리유적, 2011ㆍ2012년도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성과, 호남고고학회. 15)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1985, 金 堤 地 方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全 北 地 方 文 化 財 調 査 報 告 書 第 5 輯. 16) 圓 光 大 學 校 馬 韓 百 濟 文 化 硏 究 所, 2007, 金 堤 市 文 化 遺 蹟 分 布 地 圖, 遺 蹟 調 査 報 告 第 72 冊. - 6 -
산면을 비롯한 각지에 분포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 분묘유적으로는 산치리유적 17), 장화동유적 18), 부거리Ⅻ유적 19), 서정동유적 20), 수 록리유적 21) 에서 16기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생토면을 굴광하여 축조하였으며 장방형, 장타원형 을 띄고 있다. 바닥에는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들 토광묘는 단독 또는 군집을 이루어서 축조되었는데 군집을 이룬 경우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축조되었다. 유물은 흑도장경호, 점토대토기, 세형동검, 검파두식, 동부, 철도, 삼각형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원삼국시대 유적을 크게 주거유적과 분묘유적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주거유적으로는 1981년 국 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청하면 동지산리 일대를 긴급 수습조사 하던 중 확인된 주거지가 있다. 확인 된 주거지는 1기이지만 김제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원삼국시대 유적으로, 도로개설로 인하여 북쪽 일부만이 잔존하고 있었으며 평면형태는 방형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로는 주구토기, 호형토기, 장 란형토기 저부편 등이 있다 22).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던 중 확인된 진봉면 심포리 주거지는 방형계의 주거지로서 남벽과 서벽이 유실된 상태이며 주거지의 특징적인 시설로는 燒 土 部 가 확인되었다. 소토는 유구의 서북단에 치우쳐 있는데 注 口 土 器 를 비롯한 다량의 토기편이 집적 되어 있었고 토기편과 하부에 탄화된 곡물이 소토와 섞여 있는 상태였다. 또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 는 연질완 내부에서도 탄화된 팥이 다량으로 담겨있었다 23). 이외에 청하면 대청리 유적Ⅱ에서 원 삼국시대 주거지 2기가 조사 되었는데,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내부시설로는 벽구, 벽주공, 노지, 배 연시설이 확인되었다 24). 부거리Ⅰ-2유적에서는 14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평면형태는 방형이 며 대부분 4주식의 주혈형태를 갖추고 있다. 내부시설은 벽구, 부뚜막시설,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 다. 출토유물은 호형토기, 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시루 등이 출토되었다 25). 분묘 유적으로는 만경읍 대동리 유적 26), 공덕면 황산리 유적 27), 백구면 반월리 유적 28), 청하면 장산리 유적 29), 양청리 분구묘 30) 등이 있다. 대동리 유적은 구릉 정상부에서 분구를 조영한 성토 층과 주구 및 토광의 윤곽선과 옹관편이 확인되었다. 황산리 유적은 개간 과정에서 옹관이 발견되 어 긴급 수습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옹관묘는 적갈색점토층을 장방형으로 파고 그 안에 대형 옹관 2 기를 합구한 형태이다. 파괴가 심하였으나 이른바 선황리식 옹관의 형태이다. 반월리 유적에서는 17) 湖 南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金 堤 山 稚 里 ㆍ 兩 靑 里 ㆍ 羅 是 里 遺 蹟. 18) 金 奎 正 ㆍ 梁 英 珠 ㆍ 安 鉉 重, 2011, 金 堤 長 華 洞 遺 蹟, 전북문화재연구원. 19) 전북문화재연구원, 2012, 김제 지평선 일반산업단지 조성부지(1구역) 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20) 장지현ㆍ정인숙ㆍ김유리나, 2012, 김제 서정동2 유적, 2012년 유적조사발표회 자료집, 한국고고학회. 21) 조인진ㆍ신소미, 2012, 김제 수록리유적, 2011ㆍ2012년도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성과, 호남고고학회. 22) 李 白 圭, 1982, 金 堤 靑 蝦 住 居 地 發 掘 報 告, 全 北 史 學 第 6 輯, 全 北 大 學 校 史 學 會. 23) 國 立 全 州 博 物 館, 1999, 金 堤 深 浦 里 一 帶 文 化 遺 蹟 收 拾 調 査 報 告, 扶 安 海 岸 一 帶 遺 蹟 地 表 調 査 報 告, 學 術 調 査 報 告 第 5 輯. 24) 湖 南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金 堤 大 靑 里, 堤 上 里 遺 蹟. 25) 전북문화재연구원, 2012, 김제 지평선 일반산업단지 조성부지(1구역) 내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26) 金 建 洙 姜 元 鍾, 2004, 金 堤 大 東 農 工 團 地 造 成 敷 地 內 文 化 遺 蹟 試 掘 調 査 報 告 書 金 堤 大 東 里 遺 蹟, 湖 南 文 化 財 硏 究 院, 試 掘 調 査 報 告 第 4 冊. 27) 全 羅 北 道 全 北 文 化 財 硏 究 院, 2003, 全 北 地 域 百 濟 文 化 遺 産. 28) 방민아 정명옥, 2007, 김제 반월리유적 개보, 2006 2007년도 호남지역 문화유적 발굴성과. 29)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2003, 西 海 岸 高 速 道 路 ( 群 山 - 高 敞 間 ) 建 設 區 間 內 文 化 遺 蹟 發 掘 調 査 報 告 書 金 堤 大 木 里 ㆍ 長 山 里 ㆍ 壯 山 里 遺 蹟, 總 書 39. 30) 湖 南 文 化 財 硏 究 院, 2009, 金 堤 山 稚 里 兩 靑 里 羅 是 里 遺 蹟. - 7 -
총 4기의 옹관묘가 합구되어 출토되었다. 양청리 분구묘는 낮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며, 주구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매장시설로는 소형 옹관묘 6기가 확인되었고 매장주체부는 토광묘로 추정 된다.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벽골제, 분묘유적, 사찰유적, 생산유적, 성곽유적이 있다. 벽골제에 대한 三 國 史 記 의 기록은 신라 訖 解 王 21년(330년)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 데, 둘레가 1천 8백보 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나중에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고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比 流 王 27년 (330년)으로 보고 있으며, 바닥층의 탄소연대측정 결과 31) 또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분묘유적으로는 공덕면 공덕리 고분군, 금구면 선암리 고분군, 금산면 장흥리 고분군 32), 금산면 금 성리 고분군 33), 백구면 석담리 34) 등이 알려져 있다. 금성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횡혈식 석실분은 산경사면과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괴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상부는 내경하게 쌓았다. 연도에는 문주석 2기를 세우고 판석으로 입구를 막았다. 개석은 판석을 이용하여 덮었다. 장흥리 고분군 1호분의 뒷벽은 2매의 판석을 세로로 붙여 수직으로 세웠고 양 옆의 윗부분을 둥글고 좁게 가공하여 벽의 내경석과 가구하고 있다. 양 장벽은 하단에 장대판상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3 단 내지 4단으로 내경 시켜 쌓아 단면은 둥글게 보인다. 석담리 유적의 C지구에서는 백제계 저장 공으로 추정되는 원형유구가 조사되었으며, D지구에서는 백제 고분의 속성을 보이는 석곽묘 3기가 조사되었다. 이 시기의 사찰로는 金 山 寺 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금산사는 전라북도 내 최대의 사찰로서 다 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창건에 대해서도 많은 설화가 전해진다. 東 國 輿 地 勝 覽 과 金 堤 邑 誌 등에는 후백제의 甄 萱 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三 國 遺 事 에는 眞 表 律 師 가 12세 때 금산사에서 승려가 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金 山 寺 誌 에는 초창연대를 백제 法 王 원년(559년)으로 밝히고 있어 창건연대가 확실하지는 않 으나 대체로 삼국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 외에 김제시 興 福 寺 와 文 殊 寺 도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 찰로 알려져 있고 1980년에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 일대에서 국보급 유물인 백제시대 동판불 4점 이 수습되어 35) 당시 중요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생산유적으로는 김제시 장화동유적 36), 장흥리 은곡 제철유적 37) 이 있다. 장화동 유적에서는 삼국 시대(백제) 와적유구 1기, 삼국~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기와가마 2기가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와적유구에서 선문계의 암기와, 무문의 수키와, 연화문수막새 기대 토기합ᆞ뚜껑 각종 철기 등 이, 가마에서 다량의 선문계기와가 출토되었다. 특히, 와적유구에서 출토된 유물은 공주, 부여, 익산 등 백제 도성지역을 비롯한 백제 중앙지역에서만 출토된 유물로 이런 유물이 장화동에서 출토되었 31)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1985, 金 堤 地 方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全 北 地 方 文 化 財 調 査 報 告 書 第 5 輯. 32) 崔 完 奎, 1992, 全 北 地 方 의 百 濟 古 墳 新 資 料, 沃 溝 將 相 里 百 濟 古 墳 群 發 掘 調 査 報 告 書, 圓 光 大 學 校 博 物 館. 33) 圓 光 大 學 校 馬 韓 百 濟 文 化 硏 究 所, 2007, 金 堤 市 文 化 遺 蹟 分 布 地 圖, 遺 蹟 調 査 報 告 第 72 冊. 34) 群 山 大 學 校 博 物 館, 2002, 金 堤 石 潭 里. 35) 金 堤 郡, 1994, 金 堤 郡 史. 36) 金 奎 正 ㆍ 梁 英 珠 ㆍ 安 鉉 重, 2011, 金 堤 長 華 洞 遺 蹟, 전북문화재연구원. 37) 李 映 澈 權 赫 周 외, 2011, 金 堤 長 興 里 隱 谷 製 鐵 遺 蹟, 대한문화유산연구센터. - 8 -
다는 것은 이 지역이 백제의 중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장흥리 은곡 제철유적은 조선후기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련로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된 폐 기장, 공방지, 수혈 등의 부속시설이 확인되었다. 제련로는 은곡마을과 시목마을을 동-서로 가로지 르는 해발 530m 정도의 국사봉의 지맥이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가지 능선상의 산지(해발 199m) 로 산록경사지(해발 108m)의 등고선방향과는 약간 사선방향으로 틀어져 축조되어 있다. 제련로의 동쪽 사면부와 계곡부에 걸쳐 노벽과 목탄이 포함되어 있는 폐기장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공방지 는 1기가 확인되었으며, 제련로에서 서쪽 사면 상당부에 위치한다. 슬러그 폐기장은 제련로를 중심 으로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확인되었는데, 제련로 보다 해발이 1m정도 높은 해발 109~110m정도 의 산사면부에 분포하고 있다. 제련로 폐기장을 비롯하여 수혈 등 부속시설에서는 조선 후기 지방 에서 생산된 백자와 도기가 다량 출토되어 유적의 조업시기를 18세기 중반경으로 편년하고 있다. 성곽유적으로는 김제시 교동 성산성지ᆞ월성동 월성토성ᆞ난봉동 난산성지, 금구면 금구산성과 봉산토성, 부량면 명금산토성지 등이 있다. 금구산성에 대한 기록은 金 溝 邑 誌, 大 同 輿 地 圖 등 에 전해오고 있는데 금구읍지에는 백제시대에 쌓았다는 '구지성'이라고 하는 구전이 실려 있으며 다른 기록물에는 山 城 峰 이라는 말로 산성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성은 테뫼식 산성으로 동쪽에 자연석으로 석축한 산성이 약 100m 정도 남아 있다. 최고 높이 2m 내외로 자연경사면을 이용하 였으며 급경사의 자연성벽까지 약 900m의 성이다. 통일신라 유적으로는 김제 청도리 歸 信 寺 38), 청도리 學 仙 庵, 금산사 내 幢 竿 支 柱, 김제 심포리 望 海 寺 등이 있다. 귀신사는 義 相 大 師 가 文 武 王 16년(67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제 法 王 때 왕실의 內 願 寺 로서 처음 세워졌다고 주장한 설도 있다. 이 절의 이름은 國 信 寺, 鬼 神 寺, 狗 脣 寺 또는 歸 信 寺 등으로 불렸는데, 각각의 이름이 어느 시기에 그렇게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지방유 형문화재 제62호인 3층 석탑을 비롯하여 지방유형 문화재 제64호인 석수와 지방유형문화재 제63호 인 浮 屠 등의 석조물이 있으며, 건물로는 보물 제826호인 大 寂 光 殿, 冥 府 殿 그리고 요사채가 있다. 고려시대는 주로 불교 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는데, 萬 福 寺 를 비롯하여 금산사 내 노주, 석등, 오층석탑, 육각다층석탑, 혜덕왕사 진흥탑비 등이 있으며 심원암 북강 삼층석탑, 귀신사 부도, 석수, 석탑 등 금산면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진봉면 고사리와 심포리 일대에는 傳 貢 礪 址, 傳 牧 場 址 39) 로 고려시대에 숫돌제작과 말을 키워 나라에 바쳤다는 곳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유적은 현재 남아있는 향교를 비롯하여 다수의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금산면 일대에는 다수의 陶 窯 址 가 분포하고 있는데 금산리, 청도리, 화율리에서 총 16개소의 자기요지가 확인 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미 파괴가 이루어져 있지만 지표 상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상당수의 瓷 器 片 및 燒 土 등이 주변에서 수습되고 있다 40). 38)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1985, 金 堤 地 方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全 北 地 方 文 化 財 調 査 報 告 書 第 5 輯. 39) 全 北 大 學 校 博 物 館, 1985, 金 堤 地 方 文 化 財 地 表 調 査 報 告 書, 全 北 地 方 文 化 財 調 査 報 告 書 第 5 輯. 40) 國 立 全 州 博 物 館, 1997, 全 北 의 朝 鮮 時 代 陶 窯 址, 學 術 調 査 報 告 第 3 輯. - 9 -
도면 2. 조사지역 위치 및 주변유적 분포도(1:25,000) - 10 -
도면 3. 조사지역 위치도[ 朝 鮮 五 萬 分 之 一 地 形 圖 (1:50,000)] - 11 -
3. 역사적 배경 역사적으로는 김제지역에 대한 百 濟 중엽 이전의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까지는 자세히 알려진 바 가 없다. 다만 馬 韓 54개국 중 辟 卑 離 國 에 해당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朝 鮮 時 代 말에 이 르기까지도 設 官 置 守 를 중심으로 한 단편적인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김제 지역에 대 한 최초 최고로 전해지는 비교적 확실한 기록은 三 國 史 記 의 碧 骨 堤 축조에 관한 것으로서 백 제 비류왕 27년(330)의 일이다. 三 國 史 記 에 의하면 현재의 김제지역이 삼국시대 때 백제 영토 였고 이곳에 碧 骨 (혹은 辟 骨 ) 豆 乃 山 (혹은 豆 奈 知 ) 首 冬 山 乃 利 阿 武 斤 村 仇 知 只 山 也 西 伊 등의 고을이 있었다는 내용만 전해질 뿐 언제부터 백제의 영토로 되었는지, 그리고 당시의 지방행 정체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日 本 書 紀 에 의하면 당시의 지명은 辟 支 山 또는 避 城 이었고, 이 避 城 은 한때 백제부흥군의 근 거지였다고 전한다. 즉, 泗 沘 城 이 羅 唐 聯 合 軍 에게 함락된 뒤 周 留 城 에 웅거하여 항전하던 豊 璋 王 의 백제 정부가 663년 2월 丙 戌 日 에 周 留 城 으로 되돌아 간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김제가 비록 60여 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백제의 왕성으로서 마지막 수도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또한 백제의 亡 國 史 에서 炭 峴, 黃 山, 任 存 城, 周 留 城 등과 함께 유명한 지명인 伎 伐 浦 ( 白 江 )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김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663년 주류성의 함락 후 백제는 사실상 당과 신라에 의해 양분되었는데, 백제 영토의 동부는 이 미 신라가 점령하였고 서부 평야지대는 당에 직속되었다. 당의 점령지는 웅진도독부 관할 하에 7 州 51 縣 으로 개편되고 각 州 縣 의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때 당의 屬 領 에 포함된 김 제지역의 고을 중 仇 知 只 山 은 당산으로 개칭되어 魯 山 (함열) 州 의 領 縣 이 되었고, 碧 骨 과 豆 乃 山 은 각각 辟 城 과 淳 牟 로 개칭되어 古 西 ( 古 阜 ) 州 의 領 縣 이 되었다. 대략 현 김제시의 동부는 魯 山 州, 서 부는 古 西 州 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唐 軍 이 철수한 후 백제의 모 든 영토가 신라에 복속되게 되었다. 신라에 병합된 舊 백제 영토는 신문왕 5년(685)까지 신라식의 4주( 泗 沘 完 山 發 羅 菁 ) 3소경( 金 官 南 原 西 原 ) 및 다수의 군, 현으로 재편되었고, 당에 의한 중국식 지명들이 복구 및 점차 신라화 되었다. 신라는 景 德 王 16년(757)에 당의 방식을 따라 州, 郡, 縣 간의 領 屬 체제를 강화하면서 전국의 모든 지명을 중국식 한자명으로 고쳤다. 그에 따라 전 주 총영부의 관내인 碧 骨 은 김제군으로 개칭되었으며, 豆 乃 山 首 冬 山 乃 利 阿 武 斤 村 은 각각 萬 頃 平 皐 利 城 武 邑 으로 개칭되어 모두 김제군의 領 縣 이 되었다. 또한 仇 支 只 山 은 金 溝 로 개칭되 어 전주의 領 縣 이 되었고 也 西 伊 는 野 西 로 개칭되어 大 山 郡 ( 井 邑 郡 七 寶 )의 領 縣 이 되었다. 여기에 서 김제, 만경, 금구 등의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20여 년 만인 惠 恭 王 12년 (776)에 백관의 호가 모두 복구되었고 각 州, 郡, 縣 의 이름도 복구되었다. 고려시대 초기인 太 祖 23년(940)에 김제지방의 武 邑 과 野 西 는 각각 富 潤 과 巨 野 로 개칭되게 된 다. 金 提 萬 頃 金 溝 平 皐 利 城 등도 이 무렵부터 점차 공용화하기 시작하였다. 顯 宗 9년 (1018)에 고려는 지방통치제도로서 전국을 京 畿 와 鎬 京 및 12 界 首 官 道 로 정연하게 나누게 된다. 이러한 편제 하에서 김제지역의 고을들은 全 州 道 에 속하였으나 모두 任 內 로서 다른 고을에 예속되 어 金 提 縣 을 비롯하여 平 皐 縣 利 城 縣 金 溝 縣 巨 野 縣 櫟 陽 縣 및 大 栗 部 曲 鳴 良 鄕 堤 見 鄕 才 - 12 -
南 所 豆 毛 村 所 馬 川 所 등은 全 州 牧 의 任 內 였고 萬 頃 縣 과 富 潤 縣 및 尼 波 山 所 등은 臨 陂 縣 의 任 內 였다. 이는 당시 지방 세력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김제지역이 全 州 와 臨 陂 의 두 세력에 의하 여 분할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기본적으로 고려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지 만 중기 이후 많이 변화하게 되고, 그 동안에 김제지역에서도 변화가 있게 된다. 먼저 臨 陂 縣 의 임 내였던 萬 頃 縣 이 睿 宗 1년(1106)에 임무관이 되고 후에 현령관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臨 陂 縣 의 임 내였던 富 潤 縣 과 尼 波 山 所 가 萬 頃 縣 의 임내로 이속되었다. 이 새로운 임무관은 睿 宗 1년(1106)과 睿 宗 3년(1108)에 萬 頃 縣 외에도 70개 이상의 고을에 설치되었다. 仁 宗 21년(1143)에는 全 州 牧 의 임내였던 金 提 縣 이 현령관이 되고 동시에 平 皐 縣 과 巨 野 縣 및 從 政 部 曲, 鳴 良 鄕, 堤 見 鄕, 才 南 所, 馬 川 所 등이 金 提 縣 의 임내로 이속되었다. 明 宗 원년(1170)에는 全 州 牧 의 임내였던 金 溝 縣 이 현령관이 되고 全 州 의 임내였던 櫟 陽 縣 과 大 栗 部 曲 이 金 溝 縣 의 임내로 이속되었다. 또한 본래 全 州 의 임내였다가 仁 宗 21년(1143)에 金 提 로 이속되었던 巨 野 縣 과 從 政 部 曲 이 다시 金 溝 로 이속되었 다. 금구는 전주출신으로서 무인정권의 실력자 중의 하나였던 李 義 方 의 외향이었던 관계로 그의 세 력에 힘입어 이곳에 수령이 배치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김제지역에서는 만경 현 김제현 금구현이 차례로 현령관으로서 수령관이 되었고, 나머지 縣 과 鄕 所 部 曲 등은 이들 3 縣 에 임내로서 분할 예속되었다. 다만 利 城 縣 과 豆 毛 村 所 는 여전히 全 州 의 임내로서 남아 越 境 地 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太 宗 3년(1403)에 金 提 縣 이 군(지군사, 세조12년(1466)에 군수로 개칭)으로 승격 되었다. 太 宗 15년(1415)에는 벽골제가 크게 중수되었으나 그 이득은 적고 폐해만 많다고 하여 곧 폐기됨으로서 호수는 마르고 그 자리는 황무지화 되었다. 光 海 君 20년(1620)에는 萬 頃 縣 이 폐 지되고 그 경역이 모두 김제군에 병합되었다. 김제에 속했던 만경은 2년 후에 전주부로 이속되어 越 境 地 가 되었다가 縣 이 폐지된 지 18년 만인 仁 祖 15년(1637)에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 純 祖 1년(1801)에는 만경현의 고군산도가 분계되어 독립행정구역이 되었다. 고군산도는 본래 이름이 군 산도이며 고려시대에는 對 中 항로의 주요 기항지였으며 군산진이 설치되어 크게 융성했으나, 고려시 대 말경 대중무역이 위축되고 군산진이 옥구현 진포( 現 군산시)로 옮겨가면서 쇠퇴하였다. 그 후, 仁 祖 2년(1624년)에 진이 다시 설치되면서 지명이 고군산도로 바뀌고 1801년에 獨 鎭 으로 승격됨 과 동시에 萬 頃 縣 으로 부터 분계된 것이다. 고군산도는 高 宗 32년(1895)에 羅 州 府 智 島 郡 에 속했 다가 1914년에 옥구군 光 面 의 일부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경현과 금구현은 1895년에 각각 군이 되었고, 동시에 김제군과 함께 전주부(관찰사)에 속하였 으며 이듬해에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3군은 함께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 다. 1906년 전주군의 越 境 地 인 舊 利 城 縣 의 3면이 만경군으로 편입되고 1914년에는 만경군과 금 구군이 김제군에 병합됨으로써 오늘날의 김제의 경역이 형성되었다. 또 종전의 3군 관내의 38면 376리가 17면 152리로 폐합되었다. 1914년 3월에 새로 17개면으로 편제되었고, 1931년 11월 김제면이 읍으로 승격되어서 1읍 16 면으로 개편되었다. 1935년에는 쌍감면과 수류면이 각각 황산면과 금산면으로 개칭되었으며, 하리 면과 초처면이 봉남면으로 병합 개칭되어 1개 면이 줄었다. 그러나 1949년에는 진봉면으로부터 광 활면이 분할됨으로써 다시 1읍 16면이 되었다. - 13 -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되면서 월촌면 전 지역과 백산면의 3개리(하리, 흥사리, 상동리)와 봉남면의 1개 리(월성리), 황산면의 3개 리(황산리, 난봉리, 오정리)가 김제시로 편입되 었고, 또 다시 1990년 8월 1일, 봉남면 3개 리(도장리, 서정리, 양전리)가 김제시로 편입되면서 김제시의 행정구역은 30개 법정동에 134개 마을을 관할하게 되었고, 김제군의 행정구역은 15개면 에 126개 법정리와 556개 마을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1월 1일자로 김제군이 김제 시와 통합됨에 따라 김제군 전 지역이 김제시 관할이 되어 김제시는 151개 里, 洞 에 678개 마을 을 관할하게 되었다. - 14 -
도면 4. 조사지역 위치도 및 주변유적 분포도 (1:10,000) - 15 -
Ⅲ. 조사내용 1. 문헌조사 김제에 대한 기록은 三 國 史 記 의 碧 骨 堤 축조와 관련된 백제 비류왕 27년(330)의 일로 백제 의 영토인 김제지역에 碧 骨 (혹은 辟 骨 ) 豆 乃 山 (혹은 豆 奈 知 ) 首 冬 山 乃 利 阿 武 斤 村 仇 知 只 山 也 西 伊 등의 고을이 있었다는 내용만이 전하고 있다. 또한, 日 本 書 紀 에 辟 支 山 또는 避 城 이 었고, 이 避 城 은 한때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였다고 전한다. 이후 웅진도독부 관할 하에 김제지역의 고을 중 仇 知 只 山 은 당산으로 개칭되어 魯 山 (함열) 州 의 領 縣 이 되었고, 碧 骨 과 豆 乃 山 은 각각 辟 城 과 淳 牟 로 개칭되어 古 西 ( 古 阜 ) 州 의 領 縣 이 되었다. 景 德 王 16년(757)에는 중국식 한자명으로 고 치면서 碧 骨 은 김제군으로 개칭되었고, 豆 乃 山 首 冬 山 乃 利 阿 武 斤 村 은 각각 萬 頃 平 皐 利 城 武 邑 으로 개칭되어 모두 김제군의 領 縣 이 되었다. 고려시대 940년(고려 태조 23) 부윤( 富 潤 ) 거야( 巨 野 )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403년(태종 3) 김제현이 다시 김제군으로 승격하였다. 1620년 (광해군 12) 만경현이 김제군에 일시적으로 병합되기도 하였고, 東 國 輿 地 誌 에 의하면, 당시 김 제군은 19면이었으며, 輿 地 圖 書 에는 김제군의 19면 이름이 모두 기록되었다. 大 東 輿 地 圖 에 읍성이 표시되어 있다. 조선 시대 김제군은 지금의 김제시 시내, 죽산면 부량면 백산면 용지 면 백구면 일대에 해당하며 읍치는 김제시 교동 요촌동 일원에 있었다. 군현지도 등에서 고을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진산인 성산( 城 山 )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만경군과 금구군을 김제군에 병합하였다. 1931년 김제면이 김제읍으 로 승격하였고, 1989년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하면서 김제시와 김제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 년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합되면서 김제시가 신설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사지역이 포함되어 있는 백산면은 김제시 1읍 14면의 하나로 북쪽에 위치한 면이다. 본래 김제군의 지역으로서 흰 돌이 있으므로 백석면(백석면)이라 하여 금동( 金 洞 ), 삼수( 三 水 ), 석정( 石 井 ), 사가( 四 街 ), 괴방( 傀 方 ), 소음( 所 音 ), 황경( 黃 經 ), 자학( 紫 鶴 ), 상서( 上 書 ), 하서( 下 書 ), 요교( 寥 橋 ), 돌제( 突 堤 ), 옥정( 玉 井 ), 석정( 石 井 ), 상두악( 上 斗 岳 ), 하두악( 下 斗 岳 ), 상말( 上 末 ), 하 말( 下 末 ), 전남( 前 南 ), 학당( 學 堂 ), 후남( 後 南 ), 불로( 不 老 ), 생건( 生 巾 ), 정자( 亭 子 ), 하건( 下 乾 ), 부거( 富 巨 ), 신리( 新 里 )의 27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연산면( 延 山 面 )의 전석( 前 石 ), 후석( 後 石 ), 앙청( 仰 靑 ), 신리( 新 里 ), 중건( 中 乾 ), 점리( 店 里 ), 하건( 下 乾 ), 부거( 富 巨 ), 상상( 上 尙 ), 중상( 中 尙 ), 하상( 下 尙 ), 산치( 山 雉 ), 하조( 下 祖 ), 상조( 上 祖 ), 중조( 中 祖 ), 의 15개 동 리와 모촌면( 母 村 面 )의 신성( 新 成 ), 수하리( 水 下 理 )의 각 일부와 입천면( 立 川 面 )의 순동( 蓴 洞 )일부 와 대촌면( 代 村 面 )의 수곡리( 水 谷 里 ) 일부와 마천면의 월현( 月 弦 ), 중대( 中 垈 ), 목교리( 木 橋 里 )의 - 16 -
각 일부와 만경군 동이도면( 洞 二 道 面 )의 조종리( 祖 宗 里 ) 일부와 같은 군 남일면( 南 一 面 )의 부흥리 ( 復 興 里 ), 신점리( 新 店 里 )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백석과 연산의 이름을 따서 백산면이라 하여, 상 동, 상리, 상정, 흥사, 하리, 하정, 하서, 석교, 부거, 수록, 조종의 11개 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용지면, 남쪽은 김제읍과 월촌면, 서쪽은 성덕면과 만경면, 북쪽은 청하면과 공덕면이 인접하여 있 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백산면이 되었다. 김제시의 문화유적은 사적 제482호 金 堤 郡 官 御 와 鄕 校, 등록문화재 제187호 金 堤 新 豊 洞 아리 따 設 計 家 屋, 등록문화재 제219호 金 堤 新 豊 洞 孫 孝 誠 家 屋 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제9호 金 堤 鄕 校 大 成 殿, 유형문화재 제60호 金 堤 東 軒, 유형문화재 제61호 金 堤 內 御, 유형문화재 제65호 金 堤 傳 敎 碑, 유형문화재 제78호 齋 宮 里 石 燈, 유형문화재 제104호 趙 必 達 將 軍 遺 物, 유형문화재 제149호 石 亭 李 定 稷 遺 著 遺 墨, 유형문화재 제175호 文 殊 寺 磨 崖 如 來 坐 像, 유형문화재 제177호 文 殊 寺 木 造 釋 迦 如 來 坐 像, 유형문화재 제178호 文 殊 寺 木 造 阿 彌 陀 如 來 坐 像, 유형문화재 제181호 興 福 寺 大 雄 殿 木 造 三 尊 佛 坐 像, 무형문화재 제6-1호 松 筍 酒, 무형문화재 제12-3호 樂 器 匠 ( 長 鼓 ), 기념물 제 89호 金 堤 新 豊 洞 八 孝 祠 은행나무, 민속자료 제7호 月 村 立 石, 민속자료 제11호 長 華 쌀뒤주, 민 속자료 제33호 吳 永 順 生 家 의 전라북도지정문화재가 있다. 이외에도 유물산포지 75개소, 생활유적 2개소, 무덤유적 4개소, 산업생산유적 3개소, 성곽 3개소, 불상 6개소, 민속유적 4개소, 주거건축 2개소, 관아 3개소, 사찰 5개소, 유교건축 30개소, 근대건축 2개소, 碑 碣 12개소, 입석 1개소, 동 산문화재 3개소, 무형문화재 2개소, 노거수 8개소 등이 있다. 사진 1. 조사지역 위성사진(www.daum.net에서 발췌) - 17 -
2. 사업구역 및 주변 문화재 현황 본 지표조사는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에 해당하며, 농업용창고신축부지에 대한 문화재 지 표조사이다. 조사지역은 해발 30m 내외의 구릉 정상지역으로 현재 소나무 묘목이 식재되어 있으며 본래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1) 사업구역 문화재 현황 (1)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익산 77, 78) 위 치 :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 시 대 : 삼국~고려 이격거리 : 포함 현 황 : 유물산포지는 용곳마을 주변 구릉일대로 크게 남-북으로 이어진 구릉에 동-서방향 으로 여러갈래 퍼져있다. 서측에는 가막재골이 있고, 정상부측에는 716번 국도와 만나는 작은 소 로가 지나간다. 구릉은 대부분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삭평은 어느정도 이루어진 상태이다. 유 물은 주로 사면의 밭에서 확인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타날문경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있 다. 조사지역은 해발 30m 내외의 구릉 정상부에 해당하며, 현재 소나무 묘목이 식재되어 있다. 그리고 조사지역 내에 컨테이너 1동이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지방도가 서쪽으로는 곡간평야지대가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분묘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계단식 경작지가 있다. 조사지역은 백학동 유물산포지 1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사업부지 전체면적 620m2가 모두 유물 산포지에 해당한다. 조사결과 조사지역 내에서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구릉 정상의 평탄 대지를 이루고 있어 원지형이 잔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사업시행에 앞서 입회조사를 통 하여 유적의 부존여부를 확인해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좌 표 : N35 48 25.6, E126 55 36.9 참고문헌 :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2007,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 18 -
도면 5. 사업구역 범위 및 공사계획 평면도 2) 주변 문화재현황 주변 유적은 사업구간에서 500m 내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을 우선 대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하 고, 이후 동일 지형상에 인접하여 있는 유적에 대하여도 추가적으로 조사를 실시하여 사업지역과 관련 주변 문화유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조사결과, 사업지역 경계외곽으로 주변 500m 이내와 인 접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유물산포지 3개소가 확인되었다 41). 유적의 현황은 도면 4)와 같으며, 기 존에 확인된 유적에 대하여 현황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문화유적과 조사지역간의 이격거리 및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 위 치 : 김제시 백학동 296-1번지 일원 시 대 : 삼국~고려 이격거리 : 사업구역내에 해당 현 황 : 유물산포지는 용곳마을 주변 구릉일대로 크게 남-북으로 이어진 구릉에 동-서방향으 41)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김제시, 2007,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 19 -
로 여러갈래 퍼져있다. 서측에는 가막재골이 있고, 정상부측에는 716번 국도와 만나는 작은 소로가 지나간다. 구릉은 대부분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삭평은 어느정도 이루어진 상태이다. 유물은 주로 사면의 밭에서 확인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타날문경질토기편,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있다. 좌 표 : N35 48 24.9564, E126 55 36.7666 참고문헌 :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김제시, 2007,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2) 김제 순동 유물산포지 2 위 치 : 김제시 순동 산 102-3번지 일원 시 대 : 삼국~고려시대 이격거리 : 서쪽으로 약 400m 이격 현 황 : 가막골 주변 구릉일대로 바로 옆으로는 호남선이 지나간다. 마을은 구릉의 서사면 말 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구릉 사면의 대부분은 밭으로 형성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분묘군이 조성되어 있다. 바트로 이루어진 곳은 삭평이 이루어진 상태로 유물은 주로 밭에서 수습되었다. 수습유물로는 황갈색연질토기편, 회백색연질구연편, 회청색경질토기저부편, 회청색경질토기편등이 있다. 좌 표 : N35 48 27.9167, E126 55 12.3949 참고문헌 :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김제시, 2007,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3) 김제 순동 대정유적 위 치 : 김제시 순동 147번지 일원 시 대 : 고려시대 이격거리 : 동쪽으로 약 200m 정도 이격 현 황 : 호남고속철도 건설구간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유적은 해발 11m 내외의 구릉 말단부 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기와가마 1기 폐기장 1기 수혈유구 16기 등이 확인되 었다. 고려시대 가마는 반지하식등요이며, 소성부와 배수시설등의 구조가 확인되었다. 내부에서 무문 양의 암키와가 출토되었다. 수혈유구는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내부에서 옹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좌 표 : N193774.375 E357240.080 참고문헌 : 전라문화유산연구원, 2013, 김제 봉산동 강정 순동Ⅱ유적. (4)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3 위 치 : 김제시 백학동 64-6번지 일원 시 대 : 삼국~고려시대 이격거리 : 동쪽으로 약 500m 정도 이격 현 황 : 진관마을 서측에 위치하는 구릉으로 동-서방향으로 두갈래를 포함한다. 구릉과 구릉 사이는 논으로 경작되어 구릉의 동측은 대부분 밭으로 경작되고 일부는 인삼밭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서측은 송림과 분묘군이 위치하고 있다. 유물은 전체적으로 확인되었지만 유물의 수는 많지 않다. 수 - 20 -
습된 유물은 연질토기저부편, 회청색경질토기편, 회청색경질구연편, 황갈색연질구연부편등이 있다. 좌 표 : N35 48 21.1313, E126 56 00.8206 참고문헌 :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2007,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3. 고고 역사 분야 조사지역은 전라북도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이며, 조사면적은 620m2이다. 사업구역은 현 재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 42) 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2007년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의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에서 보고된 김제 백 학동 유물산포지 1 의 중앙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3개소의 유적과 유물산포지가 분포 하고 있다. 사업지역과 조사지역 주변으로 신규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4. 민속분야 1) 마을의 지명과 유래 43) 김제시( 金 堤 市 ) ; 전라북도 6시, 8군의 하나. 본래 백제의 벽골군( 碧 骨 郡 )인데, 신라 제 35대 경 덕왕이 김제로 고치고, 고려초에 전주의 딸린 고을리 되었다가, 제 17대 인종 21년(1143)에 현령 ( 縣 令 )을 두고, 조선 제3대 태종 3년(1403)에 명나라 환자 한첩목아( 韓 帖 木 兒 )의 청으로 말마암 아 군으로 승격되어, 읍내( 邑 內 ), 입천( 立 川 ), 대정( 大 井 ), 모촌( 母 村 ), 금굴( 金 堀 ), 회포( 回 浦 ), 공 동( 公 洞 ), 대촌( 代 村 ), 반산( 半 山 ), 식포( 食 浦 ), 홍산( 洪 山 ), 부량( 扶 梁 ), 월산( 月 山 ), 목연( 木 淵 ), 백석( 白 石 ), 생건( 生 巾 ), 마천( 馬 川 ), 연산( 延 山 ), 개토( 介 吐 )의 19개 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만경군( 萬 頃 郡 )의 군내( 郡 內 ), 북면( 北 面 ), 동일도( 東 一 道 ), 동이도( 東 二 道 ), 북 일도( 北 一 道 ), 북이도( 北 二 道 ), 남일( 南 一 ), 남이( 南 二 ), 하일( 下 一 ), 하이( 下 二 ), 상서( 上 西 )의 11 면과 금구군( 金 溝 郡 )의 동도( 東 道 ), 서도( 西 道 ), 낙양( 洛 陽 ), 일북( 一 北 ), 이북( 二 北 ), 하서( 下 西 ), 남면( 南 面 ), 수류( 水 流 ), 초처( 草 處 )의 9면과 전주군 이서면( 伊 西 面 )의 은교( 銀 橋 ), 신기( 新 基 ), 매 암( 梅 岩 ), 대농( 大 農 ), 신오( 新 五 ), 앵곡( 鶯 谷 ) 등 6개리의 각 일붕하 같은 군 우림면( 雨 林 面 )의 축령리( 杻 領 里 )와 익산군 춘포면( 春 浦 面 )의 월포리( 越 浦 里 )와 고잔( 古 棧 ), 신덕( 新 德 ), 회화( 回 化 ) 의 각 일부와 같은 군 남일면( 南 一 面 )의 감상리( 甘 上 里 ), 동자포리( 童 子 浦 里 ) 일부와 남이면( 南 二 面 )의 황천리( 荒 川 里 )와 고부군( 古 阜 郡 ) 백산면( 白 山 面 )의 대선( 大 仙 ), 소삼( 小 三 ), 대삼( 大 三 ), 주 소( 舟 所 )의 일부와 태인군 용산면( 龍 山 面 )의 고잔( 古 棧 ), 군포( 郡 浦 )의 각 일부와 사곡면( 師 谷 面 ) 의 소칠리( 小 七 里 ) 일부와 같은 군 감산면( 甘 山 面 )의 사리( 四 里 ) 일부를 병합하여 다시 김제군이 42)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2007, 문화유적분포지도-김제시. 43) 柳 在 泳, 1993, 全 北 傳 來 地 名 總 攬. 한글학회, 2003, 한국 지명 총람 11 -전북편 상.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제주편-. - 21 -
라 하고, 김제, 월촌, 죽산, 백산, 용지, 백구, 부량, 만경, 공덕, 청하, 성덕, 진봉, 금구, 하리, 쌍감, 수류, 초처의 17개 면으로 개펴 관할 하였는데, 1931년 11월 1일 김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35년 1월 15일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완주군 우림면의 청도리를 편입하고 하리면의 오정리를 황산면에 넘겨주는 동시에 초처면 전역(신덕, 용신, 회성, 행촌, 구정, 종덕, 내광의 7개리)을 병합 하여 봉남면으로, 쌍감면의 옥성리를 금구면에 넘겨주는 동시에 하리면의 오정리를 병합하여 황산 면으로, 수류면으 금산면으로 고쳐서 1읍, 15면이 되었다가, 1949년 8월 13일 진봉면의 남쪽 일 부를 갈라서 광활면을 증성하여 다시 1읍 16면이 되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 하여 익산군 오산면의 목천리, 남전리, 신지리의 각일부를 편입하는 동시에 백구면의 반월리, 강흥 리 일부를 익산군에 넘겨주고, 백석면의 삼정리 일부를 아리시에 념겨주어서 1읍, 16면을 관할하였 다. 1989년 1월 1일 김제군의 김제읍, 월촌면, 백산면, 봉남면, 황산면 일부가 김제시로 승격, 행 정분할되었으며 1990년 8월 1일 대통령령 제 13406호로 봉남면 일부가 김제군에서 김제시로 편 입 행정구역 변경, 1994년 12월 26일 대통령령 제 14434호로 용지면 금평리가 완주군 이서면에, 용지면 남정리와 백구면일부가 전주시에 편입되었다. 같은해 12월29일 김제군 조례 제 1435호로 김제군 황산면 남상리 상교마을이 봉남면 대송리에 편입되고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김제시와 김제군을 통폐합하여 김제시가 신설되었다. 순동( 蓴 洞 )[순동리] : 본래 김제군 입천면의 지역으로서 소못에 순채가 많이 있으므로 순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리, 진관리, 대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순동리라해서 김제읍에 편입됨. 1989년 1월 1일 김제읍이 김제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에 편입되어 순동동이 되었다. 순동에는 원순동, 대리, 농원의 3개 마을이 있다. 개미-방죽 소못. 걸치기1 : 한우물 남쪽에 있는 골짜기 걸치기2 : 걸치기에 있는 들. 금이-제( 金 伊 堤 ) 소못. 농원 : 만경거리 남쪽에 되는 마을. 새로 농장이 생겼음. 대-리( 大 里 ) 한우물. 대리-제( 大 里 堤 ) 한우물방죽. 대정-리( 大 井 里 ) 한우물. 만경-거리 : 한우물 북쪽에 있는 마을. 말뚝-배미 : 한우물 동남쪽에 있는 논. 맹-무덤 : 한우물 북쪽에 있는 등성이. 배암장이-골 : 순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북해-동 : 만경거리 동쪽에 되는 마을. 산적--너멀 : 순동 서쪽이 되는 마을. 신지뜸 : 한우물 동쪽이 되는 마을. 신지기집이 있음. 서낭-댕이 : 순동 북쪽에 있는 당. 소매-방죽 소못 소-못[개미방죽, 금이제, 소매방죽, 우제] : 순동 동쪽 산 너머에 있는 큰 못. 전에 순채가 많이 있 었음. - 22 -
순동( 蓴 洞 ) 순동리. 앞-고라당 : 한우물 앞 동쪽에 있는 들. 우-제( 牛 堤 ) 소못. 원-배미 : 하우물 북쪽에 있는 논. 원-순동( 元 蓴 洞 ) : 순동의 원 마을. 윗-골 : 한우물 북쪽에 있는 골짜기. 윗골-들 : 윗골에 있는 들. 의견-비 : 개미방쭉 남쪽에 있는 비. 작-답 : 한우물 남쪽에 있는 논. 점-터 : 한우물 앞 동쪽에 있는 터. 옹기점이 있었음. 참샘-골 : 순동 동북쪽이 되는 마을. 샘이 있음. 한-우물[대리, 대정리] : 순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 한우물-방죽[대리제] : 한우물 동북쪽에 있는 방죽. - 23 -
Ⅳ. 종합고찰 및 조사단의견 1. 종합고찰 본 지표조사는 김제 순동 농업용창고시설부지에 대한 문화재 지표조사로 사업시행 이전에 지표조 사를 실시함으로써 사업대상 예정지역과 그 주변의 문화유적 분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 로 문화재 훼손방지 및 보전, 보호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함과 동시에 원활한 사업 추진에 필요한 기본 자료를 제공함에 그 목적이 있다. 지표조사는 먼저 조사지역에 대한 사전 작업으로 문헌자료를 검토한 후, 인근 지역민의 탐문조사 를 실시하였다. 이후 조사대상지역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그 주변 지역에 대해서도 문화유적의 분포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조사지역은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이며, 조사면적은 620m2이다. 조사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김제시 순동 일대는 저구릉지대와 충적평야로 구분되며 사업부지가 위 치하고 있는 곳은 해발 30m 내외의 구릉 정상부에 해당된다. 남쪽과 북쪽으로 계단식 경작지가 위 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지방도가 남북으로 진행중이다. 지표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지표조사 구역은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사업면적 620 m2가 유물산포지에 포함되어있다. 지표조사 구역은 현재 소나무 묘목이 식재되어 있는 밭으로 이용 되고 있으며, 구릉 정상부에 해당하며 조사결과 원지형의 훼손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사업시행 에 앞서 매장문화재의 부존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입회조사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2) 사업구역 및 사업구역 외곽경계로부터 500m 이내에 국가지정 및 도지정 문화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3) 주변유적은 사업구역 외곽 경계로부터 약 200~500m 정도 이격되어 유적과 유물산포지 3곳 이 위치하고 있다. 조사지역 및 주변지역의 문화재현황은 다음의 표1)과 같다. - 24 -
표 1. 조사지역 및 주변지역 문화재현황 조사기관 유적 번호 유적이름 행정구역 (주소) 면적 (m2) 유적 성격 조사기관 의견 비고 사업대상지에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1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 유물산포지 대한 입회조사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2 김제 순동 유물산포지 2 김제시 순동 산 102-3번지 일원 유물산포지 서쪽으로 약 400m 이격 전라문화유산연구원 3 김제 순동 대정유적 김제시 순동 147번지 일원 유적 (가마터등) 동쪽으로 약 200m 이격 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4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2 김제시 백학동 64-6번지 일원 유물산포지 동쪽으로 약 500m 이격 2. 조사단의견 금번 조사는 김제 순동 농업용창고신축부지내 문화재 지표조사이다. 조사지역은 김제시 순동 391-1번지 일원이며, 조사면적은 620m2이다. 조사지역의 제 백산면 하정리 태양광발전 시설 부지 내 문화재 지표조사이다. 조사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김제시 순동 일대는 저구릉지대와 충적평야로 구분되며 사업부지가 위 치하고 있는 곳은 해발 30m 내외의 구릉 정상부에 해당된다. 남쪽과 북쪽으로 계단식 경작지가 위 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지방도가 남북으로 진행중이다. 조사지역 주변으로는 위 표1)과 같이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상태이다. 금번 지표조사 결과를 토대로 판단된 본 조사단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지표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김제 백학동 유물산포지 1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사업부지면적 620m2가 유물산포지에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원지형이 잔존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사업시행에 앞서 매장문화재의 부존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입회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2. 조사지역 주변으로 위치한 유물산포지는 사업지역에서 약 200~500m 정도 이격되어 있어서 사업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3. 다만, 지표조사가 지표상에 나타난 현상에 한하여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 으며, 사업대상지역이 유물산포지에 해당되어 있는 상태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며, 필요시 관계기 관과 협의하여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에 의거하여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 으로 판단된다. - 25 -
사진 2. 조사지역 전경(남-북) 사진 3. 조사지역 전경(동-서) - 26 -
사진 4. 조사지역 근경(동-서) 사진 5. 조사지역 근경(남서-동) - 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