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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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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2013년 3월 15일(금요일) 168호

168호 2013년 3월 15일(금요일) 05 그 때 그 현장 처참한 현장에서 특종을 하기까지 안재기 전 MBC아카데미 이사 세월 참 빠르다는 걸 요즘처럼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대학 졸업하던 해인 77년, 잠시 쉴 틈도 없이 MBC에 입사한 지가 벌써 몇 십 년이 흘렀는지 까마득하 다. 평생직장인 MBC를 뒤로 하고 유관 기관이라 할 수 있는 KT스카이라이프 사 외이사직도 지난 2월로 마감하고 나니 내 나이 벌써 60대라니. 진짜 실감이 나 지 않는다. 까마득하고 아련한 기억을 더 듬어 1977년 시계태엽을 사건 당시로 되 돌려본다. 때는 MBC 기자로 갓 입사한 초년병 시 절인 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저녁이 었다. 평소처럼 밤 9시 50분쯤 회사(당시 서대문구 정동 소재) 앞 술집에서 나와(당 시 총각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사건기 자 대다수는 퇴근 후 선후배와 어울려 거 의 매일 술집을 드나들었다) 습관적으로 혹시나 그새 무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 나 싶어 회사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보도국 안은 야단법석 이었다. 조금 전 전라북도 이리역(현재는 익산역)에서 원인 모를 화약이 폭발해서 이리시의 3분의 2가 폭삭 내려앉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 다. 도대체 어떤 폭약이기에 이리시의 절 반이 무너졌다는 말인가. 화약 호송 책임자와 단독 인터뷰 선배인 김성태 기자(현재는 고인)와 나, 그리고 박채규 카메라 기자 등 3명이 야 간 당직자의 지시에 따라 즉시 사고 현장 으로 달려갔다. 총알처럼 달려가 새벽 1 시쯤, 이리역에 도착했다. 시가지는 굴속 처럼 어두웠고 폭발 때의 충격으로 깨지 고 튕겨져 나간 유리 파편들이 사방에 쌓 여 있어서 기분 나쁜 빛까지 내뿜고 있었 - 이리역 폭발 사고를 되새기며 다. 사고 현장인 이리역 구내에서는 찢기 고 일그러진 화물 차량에서 계속 시뻘건 불을 토해내고 있어서 현장 접근조차 어 려웠다. 한 아주머니로부터 폭발 당시 상황을 듣고 녹음한 뒤 또 다른 목격자를 찾던 중, 검은색 점퍼를 걸친 작은 체구의 한 청년에 눈에 띄었다. 그 청년에게 다가가 "폭발 당시 현장을 목격하셨나요?"라고 묻자 초라한 행색의 그는 피식 웃기만 했 다. 녹음기를 든 내가 기자임을 알고 그 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눈짓을 했다. 어둡고 구석진 곳으로 나를 데려간 그 는 자기가 바로 폭발한 화약의 호송 책임 자(신무일 당시 36세)라는 사실을 밝혔 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그럼 당신 혼자 서 화약 호송을 맡았나요?"라고 물었고 그는 "그렇소. 나는 이제껏 7년 동안 혼자 서 화약 호송을 했지만 별다른 사고가 없 었어요."라고 답했다. 나는 이어 "이 사실 을 회사 측과 가족에게 알렸나요?"라고 물었고 "아직 알리지 못했어요. 지금쯤 내가 죽은 줄 알 겁니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요."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너무나 태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1시간가량 그와 얘기를 나눴고 인 터뷰 내용을 녹음한 뒤 MBC 사고 대책 본부가 있는 이리 시청으로 향했다. 사고 대책 본부에 있던 김성태 선배가 TV방송 을 위해, 호송인 신 씨의 얼굴도 꼭 필요 하다고 했다. 선배의 지시에 따라 신 씨 를 다시 찾던 중 이리역 구내 대합실 벤 치에 쭈그리고 자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타사 기자들과 경찰들 이 대합실을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대학 친구인 동양방송(TBC)의 H 기자가 내게 다가와 뭐 건진 게 있느냐고 물었 다. 나는 아무것도 건진 게 없다고 답했 다. 기자의 세계는 이처럼 매정한 법이 다. 특종을 위해서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기자의 소명 이 아니겠는가. 나는 타사 기자들과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20여분간 대합실에 머물렀다. 술에 곯아떨어진 신 씨를 등에 업고 차 뒷좌석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현장. 에 태웠다. 잠시 후 신 씨의 주머니를 뒤 져 주민등록증과 호송인 명찰을 꺼내 그 가 화약 폭발 사고의 장본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타사 기자, 경찰 따돌리며 특종성공 다음 날(77년 11월 12일 토요일) 아침 6 시 50분 쯤 '뉴스의 광장' 방송을 위해 스 튜디오가 있는 전주MBC까지 가야 했다. 전주로 가는 도중에도 여러 대의 경찰차 와 오토바이가 스쳐지나 갔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고 전주MBC까지 무사히 도착 했다. 그를 숙직실에 앉힌 뒤 전북 도경 수 사과에 전화를 걸었다. '당신들이 전국에 지명 수배를 내린 신무일 씨를 우리가 보 다. 선배와는 TBC 경제부에서 시작해 KBS 경제부장 시절까지 같이 일한 기억이 많다. 선배의 지시를 받아 농수산부를 출 - 故 우석호 선배를 추모하며 입하면서 기사를 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 3월 4일 오전 10시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런 우 선배가 '기어 하다. 특히 경제부 출입 기자는 한 달 치 평 쯤 핸드폰 벨이 울렸 코 암이라는 놈에게 KO를 당했구나' 싶었 균 기사가 20~22건 정도여서 3,000원씩 다. 핸드폰을 열어보 다. 하기야 간암을 이기고 모임에 나왔을 받던 ENG 취재비가 단연 1위였다. 당시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으로부터 명령 아 니 '우석호 선배'라 때에도 안색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었다. 고수웅 닌 명령을 받고 취재 발인 날짜, 병세를 물 한국지역민방협회 부회장 는 발신자 이름이 떠 지시를 가장 많이 내 전 KBS 해설위원 있었다. "네! 우 선배! 어볼 겨를도 없이 우 렸던 것 같다. 나도 모 저 수웅입니다. 웬일이세요?"라며 반갑게 선 서울대 병원이 장 르게 취재 계획이 올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핸드폰에서 들려오 례식장이라는 것만 알 라가 있던 기억이 떠 는 목소리는 젊은 남자였다. "아저씨, 저 고 전화를 끊었다. 승 오른다. 승두예요." 승두는 우 선배의 장남이다. " 두 군은 어릴 때 우 선 일 밖에 모르던 우 선 응, 승두야. 오랜만이네. 웬일이니?", "아버 배 집에서 가끔 본 적 배, 남에게 지지 않으 지가 오늘 아침 운명하셨어요.", "뭐?" 나 이 있어 자연스럽게 려던 우 선배, 잠시도 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이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 쉴 틈을 주지 않아 야 었다. 것이다. 우 선배는 그동안 암을 이겨내고 가끔 모 우 선배는 일에만 파 지난 2011년 3월, 본지와 인터뷰 후 청계천에서 속했던 우 선배, 부원 들이 피곤해 하는 줄 임에 나왔고 여전한 입담으로 나와 대화를 묻혀 지내던 사람이었 촬영을 했던 고우석호 전SBS보도본부장. 추도사 "제발천당에서는일좀그만하세요" 호하고 있으니 와서 데려 가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경찰 기동 순찰 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뒤로 하고 우 리는 '뉴스의 광장' 방송을 위해 전주 MBC 2층에 마련된 스튜디오로 향했다. 내 자랑을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 쑥스 럽다. 기자 생활을 접은 게 언제인데 아직 까지 기자 생활 당시의 이런 저런 상황이 꿈속에서 아른거린다. 참 고약하다. 치매 가 걸린 것도 아닌데 당시의 상황이 너무 나 뚜렷하게 오늘의 일처럼 떠오른다. 현재의 직장인들이 토, 일 연속으로 쉬 는 것을 보면 나는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 진다. 우리 기자들은 그 때 그 시절 일요 일도 없이 근무하길 밥 먹듯 했는데 세월 참 좋아졌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지금 나는 일주일 내내 놀면서 즐기는 백 수 신세인데도 말이다. 요즘 맑은 정신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 해 노력 중이다. "진리에 역행하지 말고 물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면 만사가 평온 하다."는 누군가의 글귀를 마음에 새기면 서 말이다. 도 모르고 끊임없이 일감을 던져 주던 우 선배, 마치 황소처럼 일에만 파묻혀 살던 우 선배지만 그래도 선배 밑에서 일을 배 우며 힘들었던 추억이 방송기자로서 가장 뿌듯한 시절이었음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우 선배는 경기도 양주 소방도 로에 몇 천 평의 땅을 흔쾌히 내주시는 분 이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KBS 경제부장 자리가 KBS 사장도 모를 온갖 외압과 외풍 속에서 지 켜야 할 자리였던 것 같다. KBS 보도국장 을 거쳐 SBS 관리상무까지 올라가서도 외 부인들과 접대성으로 마신 술이 우 선배의 건강을 해친 게 아닌가 싶다. 모르긴 해도 우 선배는 아마 염라대왕 앞 에서도 일거리가 많은 곳으로 영혼을 보내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제발 이제는 천당 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고 일은 그만하시길. 우 선배!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합 니다.

08 2013년 3월 15일(금요일) 168호

168호 2013년 3월 15일(금요일) 09 "KBS 최초 여성 해설위원장, 책임 크지만 뿌듯하죠" - 후배 여기자들이 더 많은 기회 갖도록 하는데 도움 주고파 전복수 KBS 해설위원실장 써 오히려 자신의 전문성을 키운 것이 다. "다행히도 경제 분야는 흥미로웠어 요. 사건사고와 달리 경제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기사를 쓰기 힘든 분야라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했죠. 그게 적 성에 잘 맞았어요. 기자는 자신을 소 진하는 직업인데 끊임없이 공부를 해 서 자신을 채울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험난했던 여기자의 길이었지 만 기자의 길에 우연히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막연히 꿈꿨던 미래가 바로 지 않을 거야>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불 러일으켰어요. 보통 은혜를 베푼 사람 보다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더 잘 잊 어버리는 법인데 일본에서는 잊지 않 고 매년 그를 추모하더라고요. 같은 해에는 또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는 데 그 때 일본에서 모리 수상, 나카소 네 수상 등 유력 인사들을 두루 인터 뷰했던 기억도 소중한 기회였다고 생 각해요. 2002년에는 모두가 기억하는 한일 월드컵이 개최됐죠. 제가 특파원 으로 있던 3년간 한국과 일본을 연결 기자는 상상했던 것만큼 매력적인 직업 도쿄 특파원 시절 가장 기억에 남아 기자로 걸어온 32년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전복수 해설위원실장. "KBS 여기자로는 처음으로 이 자리 를 맡은 만큼 의미가 남다르죠." 1981년 KBS 기자로 입사했다. 선배 여기자 6명, 동기 2명을 포함해 그 해 KBS 여기자는 9명에 불과했다. 개인 의 열정과 기대와는 별개로 여기자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기 힘든 시대 였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 꼬박 32 년이 됐고 꿈꿔 왔던 것과 크게 다르 지 않은 기자의 삶을 살아왔다는 전복 수 해설위원실장. "방송보도의 영역에서 해설은 극히 일부분이지만 그 역할이나 기능은 결 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해요. 20~30년 간 기자를 하면서 쌓은 경험과 전문성 을 바탕으로 2분 30초라는 짧은 시간 이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시청자들에 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해 의 경우 결혼을 하면 그만두는 게 일 반적이었다. 여기자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간에 그만 둔 선배나 동기가 거의 없었고 지금까지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다. 류현순 정책기획본부장, 이정옥 글로 벌센터장이 대표적이다. "결혼이나 출산으로 관두는 분위기 였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그러나 선배나 동기들이 다 같이 삶의 동반자 처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 자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게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죠." 그러나 한계를 느낀 순간은 많았다. 당시 여기자가 갈 수 있는 출입처는 제한적이었다. 문화부, 경제부 정도가 전부였다. 경제부도 상대적으로 덜 중 취재 영역 제한 있었던 시절 한계 극복 경제부 출입하며 오히려 전문성 키워 설위원실장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직 접 방송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줄었지 만 아이템을 선정하고 방송이 될 때까 지의 전 과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 만큼 책임이 큰 자리라고 생각해요." 80년대 초반만 해도 여자 아나운서 요한 분야라고 인식됐던 유통 쪽만 출 입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경제부를 출입하게 됐고 경제부 평기자를 거쳐 이후 차장, 부 장까지 하게 됐다. 제약이 많았던 시 절에 한 분야를 오랫동안 출입함으로 기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화제를 찾아다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해보 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했었어요. 그게 기자라는 직업으로 구체화된 건 대학에 가서였죠. 그러다 전설의 여기 자 오리아나 팔라치를 알게 됐고 그 기자의 책을 읽으면서 기자의 매력에 빠졌죠. '이 일은 진짜 한 번 해봐야겠 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렇게 KBS 기자가 됐어요." 기자가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던 순간은 도쿄 특파원 시절이다. 99년 말부터 2002년까지 특파원으로 있던 시절,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굵직한 사건이 많았다. "특파원으로 발령이 나기 전에 경제 부 차장을 하고 있었어요. 사무실에 앉아서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고 현장 에 있는 취재 기자를 도와주는 역할이 기 때문에 사실 보람을 찾기가 힘들었 어요. 현장 취재에 대한 열망이 컸던 시기였죠. 그러다 도쿄 특파원으로 발 령이 났고 3년간 취재의 한을 풀었던 때라고 생각해요. 매년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죠. 2000년에는 오키나와에서 G7 회의가 열렸는데 서방 선진국 중심인 G7을 취재하면서 파워 국가들이 세계 경제 를 어떻게 움직이려고 하는지를 가까 이서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됐죠. 2001 년에는 그 유명한 이수현 사건이 있었 어요. 당시 일본 언론은 이수현 군의 의로운 행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걸 직 접 목격했죠. 저는 이게 최초의 한류 라고 생각해요. 2006년에는 <너를 잊 하는 굵직한 사건들 덕분에 기자 시절 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 덕분일까. 그는 기자로 걸 어온 32년을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기자는 상상했던 것만큼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는 방송 이 의미 없는 방송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두려워했지만 그 덕분 에 더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 아요. 특히 경제를 공부하면서 어렵다 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걸 시청자들 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만큼 공부를 많이 해야 했죠. 설명은 쉽게 하되 정보는 최대한 많이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시청자들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어요." 자신이 걸어온 길이 곧 후배 여기자 들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그에게는 몇 년 남지 않은 기자 생활 동안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도쿄 특파원을 하면서 '이걸 제대로 해내서 후임으로 후배 여기자가 올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 요. 실제로 여기자가 후임으로 가게 됐을 때는 정말 기뻤죠. 지금까지는 그동안 제게 주어졌던 기회가 사장되 지 않고 후배 기자들이 이어갈 수 있 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이었다면 앞으로 는 후배 여기자들이 저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박성희 기자 bjc@kbj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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