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생활 논단 디자인과 한글 타이포그래피 김영욱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대처가 각료들에게 단호히 말했다. Design or Resign! 당시로서는 놀 라운 발상이었다. 디자인에 착목한 그녀는 정치적 명성뿐 아니라 정계 은 퇴 이후에도 영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오늘날 런던의 거리는 의상 을 비롯한 각종 생활 디자인에서 풍요로움과 세련됨이 넘친다. 그녀의 눈 이 20년 이후의 영국을 보았기 때문일까. 런던에서만 디자인이 회자되는 것은 아니다. 디자인 못하면 사표를 내라는 수상의 엄포는 아닐지라도 디 자인이 한국의 국가적 관심사로 떠오른 지 오래다. 서울을 걷노라면 거리의 모습이 예전보다 한결 세련됨을 느낀다. 길가 에 늘어선 상점의 간판에서 화려함과 풍부함을 본다. 골목길의 서점에서 아무렇게나 고른 책에도 이제는 디자인을 읽는다. 독창적이고 세련된 책 들이 서점마다 즐비하다. 화려한 형태와 색상의 책이 넘쳐나고 세련된 붓 놀림의 책 제목들은 행인의 호주머니를 욕망한다. 무엇보다도 한글이 달 라졌다. 예전의 천편일률적 폰트가 아니다. 우리는 다채로운 한글의 모습 에 놀라고, 글꼴의 개발이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음에 또 놀란다. 순수 예술로만 생각했던 붓글씨가, 고전의 향기로만 여겼던 훈민정음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기계를 위한 알고리듬으로, 폰트로, 시스템으로 탈바 꿈한다. 국어 생활 논단 123
1446년의 훈민정음은 문자 디자인의 출발점이었다. 처음부터 한글은 활 자로 태어났다.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란 활자[type]로 글을 쓰는 행 위다[graphy]. 붓으로 고급하게 글을 쓴다는 것과 활자로 글쓰기는 그 의미가 다르다. 구텐베르크나 세종은 고급한 글쓰기에, 혹은 개인적 글쓰 기에 머물지 않았다. 문자사의 위대한 발명가들은 타이포그래피로 세상 의 지식들을 민중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였다. 타이포그래피란 문자의 민주화이다. 한글은 완전히 새로운 문자로서 여러 사람들에게 동시에 전파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알파벳이 타이프에 찍혀서 독일의 시민들에게 보인 것처럼, 한글은 활자의 모습으로 백성 앞 에 나타났다. 우물가에서 물 긷는 아낙네에게, 골목을 고샅고샅 누비던 코흘리개에게, 논두렁에서 땀을 말리던 농부들 앞에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쉽게 익힐 수 있는 문자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지식의 독점을 깨 뜨리는 계몽의 빛이다. 지배 계층에게 주어졌던 문자의 권력을 해체시키 는 지식 혁명이었다. 붓글씨가 파롤(parole)이라면 타이포그래피는 랑그(langue)다. 붓글씨 가 시간의 미학을 담고 있다면 타이포그래피는 순간의 미학이다. 한자는 오랜 세월을 두고서 전예해행초( 篆 隸 楷 行 草 )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한글에는 전예해행초가 없다. 타이포그래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글 에는 디자인의 고전적 원리가 숨어있다. ㄱ 에서 획을 추가하여 ㅋ 으로 만든 것에는 음성학(phonetics)의 원리가 있다. 혀가 고부라지는 모양에 착안하여 ㄱ 을 만든 것에서 도상성(iconicity)을 확인한다.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를 그 모양에 따라 ㅇ 으로 만든 것도 디자인이다. 자음 14자는 기본자( 基 本 字, ㄱ,ㄴ,ㅁ,ㅅ,ㅇ)와 가획자( 加 劃 字, ㅋ, ㄷ, ㅌ, ㅂ, ㅍ, ㅈ, ㅊ, ㅎ), 이체자( 異 體 字 ㄹ, ㅿ)로 이루었다. 천(ㆍ), 지(ㅡ), 인(ㅣ). 세 가지만 있으면 모음자를 모두 만든다. 천, 지, 인 의 두 개를 합치면 초출자( 初 出 字 )인 ㅗ, ㅏ, ㅜ, ㅓ 가 된다. 초출자에 천, 지, 인 을 더하면 재출자( 再 出 字 )인 ㅛ, ㅑ, ㅠ, ㅕ 로 변한다. 한글 휴대 전화가 불 124 새국어생활 제19권 제4호(2009년 겨울)
과 10개 내외의 자판만으로도 자유자재로 활용됨은 세종의 타이포그래피 를 현대적으로 응용한 덕분이다. ez-한글(나랏글) 방식 천지인 방식 ㄱ+가획(*) = ㅋ ㄱ+병서(#)=ㄲ ㄴ+가획(*) = ㄷ ㄴ+가획(*)+가획(*)= ㅌ ㄴ+가획(*)+병서(#) = ㄸ ㅁ+가획(*) = ㅂ ㅁ+가획(*)+가획(*)= ㅍ ㅁ+가획(*)+병서(#) = ㅃ ㅅ+ 가획(*) = ㅈ ㅅ+가획(*)+기획(*)= ㅊ ㅅ+가획(*)+병서(#) = ㅉ ㅅ+병서(#)=ㅆ ㅇ+가획(*) = ㅎ ㄹ = 단독 사용 초출자( 初 出 字 ) 구성 방식? ㅣ + ㆍ = ㅏ ㆍ + ㅣ = ㅓ ㆍ + ㅡ = ㅗ ㅡ + ㆍ = ㅜ? 재출자( 再 出 字 ) 구성 방식? ㅣ + ㆍ + ㆍ = ㅑ ㆍ + ㆍ + ㅣ = ㅕ ㆍ + ㆍ + ㅡ = ㅛ ㅡ + ㆍ + ㆍ = ㅠ 세종의 디자인에도 문제는 있다. 한글을 네모꼴 안에 가두었다는 것이 다. 한글은 아무리 디자인 해 봐야 알파벳처럼 다양하지도 않고 역동적이 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글을 근대화시킨 주시경 선생도 일찍이 한글의 네 모꼴이 비능률적이라 했다. 선생은 한글 풀어쓰기를 제안하였다. 그의 충 실한 제자였던 김두봉 선생은 항일 투사들을 길러내는 군관 학교 교장 시절에 한글 풀어쓰기를 실천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그는 북한으로 돌아와서도 한글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주시 경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외솔 최현배 선생도 한국에서 한글 풀어쓰기 운 동을 주도하였다. 학자들이나 재야인사들의 호응을 상당히 받았음에도 국어 생활 논단 125
불구하고 한글 풀어쓰기 운동이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네모꼴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글 서체의 원형은 점, 선, 수직, 수평, 세모, 네모, 동그라미 등 기하학 적인 도안들이 네모꼴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데에 기원한다. 세종 대왕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용비어천가( 龍 飛 御 天 歌 ), 석보상절( 釋 譜 詳 節 ) 등 의 옛 책에서 발견되는 방형의 기하학적 글꼴이 바로 한글 서체의 원형 인 것이다. 세종은 기하학적 문양 속에 우주의 질서를 담으려 했다. 우주적 질서라 는 것은 근원적인 것인데 모든 형태들을 근원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점 과 선으로 환원된다. 한글은 이러한 근원적 요소로부터의 합성을 통해서 디자인 되었다. 천지인 삼재( 三 才 )라는 점 선(수직, 수평)의 기본 글자로 부터 모든 모음자를 합성해 냈으며, 자음들도 수직선, 수평선의 합인 ㄱ, ㄴ, ㅁ 사선과 역사선의 합인 ㅅ, 우주의 원융함을 상징하는 ㅇ 등, 다 섯 가지 기본자로써 자음들을 합성해 내었다. 자음과 모음은 합쳐서 음절을 이룬다. 음절을 이루어서 글쓰는 방식이 부서( 附 書 )다. 세종이 고안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한글 모아쓰기 라는 개 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점 선에 의한 우주적 질서를 네모 속에서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 세종의 한글은 진한( 秦 漢 ) 시절에 행해졌던 예서( 隸 書 )의 표준화와 맥이 닿아있다. 당시의 동아시아인들은 세상을 네모꼴로 이미 지화 하였다. 이러한 허구의 이미지는 천원지방( 天 圓 地 方 ) 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진정한 제왕이란 하늘의 명[ 天 命 ]에 따라 지상을 다스리되 그 법이란 우 주적 질서에 근거해야 한다. 한글에 보이는 기하학적 디자인과 방형의 글 꼴은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세상에 대한 이미지를 미학적으로 담아낸 것 이다. 방형의 디자인이 표준 혹은 규격이라는 엄격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표준이 주는 선물도 있다. 126 새국어생활 제19권 제4호(2009년 겨울)
그것은 어울림이다. 한글에는 어울림의 미학이 있다. 한자와 어울릴 뿐 만 아니라, 가나[ 假 名 ]와 섞어도 어색하지 않다. 한자도 기본 글꼴이 정 사각형이요, 가나도 정사각형이다. 네모꼴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한 중 일 문자들은 서로 섞여 어우러지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영어 책에 한자 가 불쑥 등장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알파벳 가운데에 가타카나나 히라 가나가 그대로 노출이 된다면 영어권 독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한글 텍스트에 한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핵 심어구를 한자로 표시했을 때에는 오히려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를 보인 다. 네모꼴이란 음절 문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글이 음절 단위로 축약되 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노래를 사랑하는 모임 이 길다고 느껴지면 노사 모 라고 해도 된다. 영어는 이러한 글쓰기가 허용되지 않으므로 음절 단 위의 축약이 곤란하다. United States of America 를 유(U)-스테(Sta)- 오브(of)-아(A) 로 하지 않는다. 한글은 알파벳처럼 자모 문자로도 축약 된다. 인터넷 언어에서 ㅅㄱ 이라는 게 있다. 수고 했다는 인사말이다. 이런 축약이 요즈음에 들어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1970년대 중반에 국립서울대학교 를 ㄱㅅㄷ 으로 축약해서 쓴 적이 있었다. 지금도 관악 캠퍼스의 정문에는 ㄱㅅㄷ 을 조합해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 ㅇㅅ 으로 축약해서 쓰기도 한다. 한글의 다양한 쓰임들을 고려하면 한글을 굳이 네모꼴에 가둘 필요가 없기는 하다. 글꼴의 디자인에 관한 한, 한글은 열려 있다. 네모꼴이 디자인에 미학적 제약을 가하는 점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 서 한글이 지닌 네모꼴의 장점을 너무 낮추어 보아서도 안 된다. 네모꼴 이기에 쓰는 방향에 대한 제한이 없다. 알파벳은 가로쓰기밖에 할 수가 없다. 글을 쓰는 방향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정이 되어 있다. 이에 비 해서 한글은 가로쓰기를 하지만 세로쓰기도 가능하다. 글을 쓰는 방향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고정이 된 것이 아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도 국어 생활 논단 127
쓸 수 있다. 쓰는 방향에 대한 제한이 없는 한글은 실제의 운용에 있어서 장점이 많다. 큰 깃발에 글쓰기를 한다고 하자. 가로로 쓰려면 발이 길어져 곤란 하다. 긴 깃발은 바람이 불 때에는 깃발을 잡고 움직이기가 힘들고 바람 이 잔잔할 때에는 발이 접혀져 글씨를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아주 높은 깃대에 세로로 글씨가 씌어져 있으면 굉장히 힘이 있어 보인다. 게 다가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면 글자가 멀리서도 잘 보인다. 한국은 간판의 천국이다. 간판이 너무 다양하여서 규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도시에는 간판이 범람한다. 도시 미관의 문제와는 별개로, 관점을 달리하자면, 이것은 한글이 그만큼 쓰기에 자유롭기 때문에 빚어 진 사태다. 가로쓰기든, 세로쓰기든 한글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표현을 할 수 있다. 글자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면 형태에 구애됨이 없이 공 간에 적응한 글씨가 구사된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의 장점이 광고 글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꽂이에 책이 가득 찼다고 하자. 책등에 적혀 있는 한 글 제목은 세로로 쓰여 있기 때문에 찾고자 하는 책의 제목이 눈에 띄기 쉽다. 영어는 다르다. 가로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책이 세로로 꽂혀 있는 경우에는 책 제목을 알아보기 위해서 고개를 조금이라도 갸우뚱하지 않 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알파벳은 p나 b처럼, 아래로 획이 내려오기도 하고 위로도 획 이 솟구치기도 해서 서체가 역동적일 수 있는 반면에, 한글은 네모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없다는 의견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고민을 해야만 한다. 한글의 서체를 개발함에 있어서 네모꼴에서 의 탈출은 큰 과제다. 우리는 네모꼴의 묶음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그래 야 더욱 다양해지니까. 하나를 풀면 다양해진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일 즉다( 一 則 多 )라고나 할까. 다 알다시피 한글은 자모 문자다. 그것은 한글이 네모꼴에서 얼마든지 128 새국어생활 제19권 제4호(2009년 겨울)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제약은 어디 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즉일( 多 則 一 )의 세상도 둘러보아야 한다. 그들은 왜 하나로 통일을 하려 했던 것일까. 타이포그래피란 일즉다를 거쳐서 다즉일을 지향하는 동사가 아닐까. 디자이너들과 인문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훈민정음을 읽고 한글의 역사 를 되새기고 현재의 한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타이포그래피의 미래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하는 날들을 상상해 본다. 국어 생활 논단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