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um for Korean Contemporary History
CONTENTS 04 편집자 노트 편집위원회 기획 특집 : 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0 남 정치체제 성립과 전개과정 고유환 36 분단 이후 남 경제 궤적 양문수 64 법률체계와 헌법 특징 이효원 86 국과 조선 국제관계 김명섭 F orum for K orean C ontemporary H istory 106 분단 70년 남정부 통일패러다임 비교: 공존과 통일을 향 변주곡 박종철 국 근 연구동향 : 신작 소개와 서평 130 비동시성 동시성 임혁백 140 [서평] 비동시성 동시성 을 읽고 강원택 148 해방일기 김기협 158 [서평] 해방일기 를 읽고 윤경섭 168 미완 청산 박진 178 [서평] 미완 청산 을 읽고 이동준 저작자 : Henrik Ishihara Globaljuggler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globaljuggler) 라이선스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Unported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이 표지는 Henrik Ishihara Globaljuggler (https://commons.wikimedia.org/wiki/user:globaljuggler)이 작성 진 저작물 Panmunjeom_DMZ.pn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nmunjeom_dmz.png)을 이용하여 작성 것입니다. 이 표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Unported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로 배포됩니다.
편집자 노트 5호를 발간하며 5호 기획특집 주제는 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이다. 해하기 쉽게 정리 논문이다. 분단체제는 남 정치체제에 공히 국회 권 국가주권이 회복되는 과정보다는 복 이후 우리 를 다루자는 것에 을 제하고 시민회 발전을 억압하면서 통령과 주석에 권을 집중 해서는 공감가 형성되었지만, 어떤 주제에 포커스를 맞출지에 해서는 시키는 권위주와 전체주 체제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기적으로 볼 때 자 편집위원들 간 논가 필요하였다. 올해는 복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 유민주주를 채택했던 남에서는 민주화가 실된 반면, 전체주를 기반 지만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우리는 분단체제와 남관계를 역 으로 했던 에서는 3 세습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이 논문은 잘 04 적인 관점에서 재검토하고, 아울러 분단체제 극복으로서 통일까지도 염두 에 두자는데 합하였다. 이번 기획특집 주제를 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 설명해주고 있다. 양문수 교수 분단 이후 남 경제 궤적 은 분단 이후 남 경제 05 일 로 결정 것은 분단체제와 남관계 역는 물론 그것 극복이라는 소 성과와 그러 성과 차이를 발생시킨 요인에 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는 망을 반영 것이었다. 논문이다. 경제성과 차이를 발생시킨 요인으로 이 논문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 기획특집은 남을 비교 연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어 떤 체제 우월성을 주하고자 기획 것은 아니다. 남통합 혹은 통일 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기 때문에 남 서로에 이해, 특히 우리 입 것은 경제개발전략이다. 수출지향 산업화 전략과 선별적 산업정책을 채택 남은 높은 경제성을 달성했지만, 자력갱생론에 입각 중공업 우선 전략 을 채택 은 1960년부터 경제침체를 경험하였고 회주권이 붕괴 편 집 자 노 트 에서 회에 이해를 더 크게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우리는 보다 1990년 이후 경제침체는 더욱 악화되었다. 기 경제침체 정확 남 비교 분석을 위해 정치, 경제, 회, 문화 분야 등으로 구분하 원인은 특수성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 여 세부주제를 정하고, 동시에 이런 주제들을 5호와 6호, 두 번에 걸쳐 다루 특성이 중요하다고 이 논문은 주하고 있다. 기로 결정하였다. 이 번 5호에서는 정치체제, 경제성, 법률체 이효원 교수 법률체계와 헌법 특징 은 법률체계와 국 계, 국제관계(외교), 통일정책과 같이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주제를 다룬 5편 가기구 작동원리 등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는 논문이다. 은 성 논문을 실었고, 다음 6호에서는 회, 문화 분야 관련 주제를 다룬 논문을 문법 형식 국내법으로 헌법, 부문법과 규정 법률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이 게재할 계획이다. 5호에 실린 5편 논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들 법률은 주체상과 선군상을 지도지침으로 삼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1948년 제정된 이래 총 11차례에 걸쳐 수정된 헌법은 법률체계에서 최 고유환 교수 남 정치체제 성립과 전개과정 은 분단체제 성립 고 규범으로서 지위를 가진다. 이 헌법에 따르면, 주권은 근로인민(1998년 과 그것이 남 정치체제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가에 역적 설명에 에 군인이 추가)에게 있고 개인 권리보다 무를 강조하고 있으며 법치주 기초하여 초기 정치체제 차이가 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이 는 국가정책을 실하는 도구로서 미를 가져 전형적인 회주 법이론에
기초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법률과 헌법이 인간 존엄과 가 국 근 연구동향 코너에서는 기획특집 주제와 관련성과 일수교 치를 보해주고 있지 않아서 통일헌법 기본원리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50주년을 맞이하여 일관계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세권 책을 선정하여 소 김명섭 교수 국과 조선 국제관계 는 반도에서 국제관계 형성 개하였다. 임혁백 교수 비동시성 동시성 은 비교역정치학적 관점에서 계기와 분단 이후 국과 조선에서 국제관계가 어떻게 변화 발전되어왔는지 국 긴 20세기 에 이루어진 근화 정치를 분석 책이다. 이 책에 해 를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는 논문이다. 국은 유엔 감시 하 총선거 서는 강원택 교수가 시간으로 읽어낸 국 정치 라는 주제로 논평해주었다. 06 를 통해 수립되어 유엔 승인과 자유 우방 국가들 승인을 받아 외교적 우위 를 점했지만, 1950년 중반 이후 서구 제국주 식민지들이 독립하여 제3 김기협 교수 해방일기 (1~10권)는 해방기에 통일국가(민족국가)를 수립하 지 못하고 분단국가가 수립된 이유를 중-극 립 관점에서 설명하는 흥미 07 세계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국제무에서 외교적 위상이 높아졌다. 그 로운 책이다. 이 책에 해서는 윤경섭 교수가 해방일기 해방 해방기 인 러나 지속적인 경제성과 그를 기반으로 민주화 성공은 국 국제적 식 이라는 주제로 논평해주었다. 박진 교수 미완 청산 은 일 양국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 1980년 이후 국 외교 영토는 확된 반면, 외교는 주변화되어 갔다. 박종철 교수 분단 70년 남정부 통일패러다임 비교 는 국제적 요 과거 문제 핵심을 이루고 있는 청구권 교섭 세부과정을 분석 책이다. 이 책에 해서는 이동준 교수가 일 청구권 교섭에 자기성찰 보고서 라는 주제로 논평해주었다. 편 집 자 노 트 인과 국내적 요인 영향을 받아 남정부 통일패러다임이 분단 70년 동 안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잘 정리해주고 있는 논문이다. 국제적 요인으로 5호는 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이하여 분단체제 하에서 남 가 중요 것은 냉전과 탈냉전이다. 냉전 시기 남 정부는 선건설 후통 발전과정을 검토하였다. 정치체제와 제도 면에서 이질화가 확되고 일론 입에서 경제개발에 중점을 두었고 1980년 초에 통일패러다임이 있다는 점도 발견했지만 그간 남관계가 결 경쟁에서 화해 협력 관 처음 마련될 정도로 방어적 입을 취했다. 반면에 국내 체제를 일찍이 안정 계로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국제적 국내적 환경 시킨 정부는 1960년에 이미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안하고 국지적 무력도 변화에 조응하여 남관계 개선에 회적 공감가 확산되고 있는 상 발을 일으킬 정도로 공세적 입을 취했다. 탈냉전 시기에는 정치, 경제, 회 황에서 5호에 실린 글이 남관계를 이해하고, 그 개선에 좋은 분야에서 남 이 역전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남 정부는 점차 공존형 참고자료가 되길 기해 본다. 통일패러다임을 주하는 입으로 전환 반면에 정부는 방어적 체제 생존 전략에 입각 통일패러다임으로 변경하였다. 편집위원회
Forum for Korean Contemporary History 기획 특집 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남 정치체제 성립과 전개과정 고 유 환 2 분단 이후 남 경제 궤적 양 문 수 3 법률체계와 헌법 특징 이 효 원 4 국과 조선 국제관계 김 명 섭 5 분단 70년 남정부 통일패러다임 비교: 공존과 통일을 향 변주곡 박 종 철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고 유 환 * 남 정치체제 성립과 전개과정 이승만 정부가 3 15부정선거로 무너지고, 4 19혁명으로 집권하게 된 면정 부는 통령 중심제를 내각제로 바꾸고 민주정부를 구성했지만 참여폭발과 과 잉민주 를 감당하지 못하고 5 16군쿠데타를 불러왔다.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화 기치를 내걸고 유치를 통 개발촉진전략 에 따라 외자유치를 통 수 출주도형 경제발전정책을 추진했다. 1972년 남에 유신체제와 유일체제가 구축되면서 남과 이 체제경 쟁은 심화되고 적적 존관계 가 형성되기도 했다. 민국은 1980년 말 10 Ⅰ. 머리말 산업화와 함께 민주화를 달성하여 권위주체제를 민주주체제로 전환시켰 11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맞았지만 곧바로 분 다. 하지만 에서는 수령중심 유일체제 가 후계구축으로 이어지면서 견고 단됐다. 해방과 함께 우리 민족 급선무는 일제시기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모 수령절주체제 로 굳어지고 있다. 아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하나 민족건설(nation-building)과 국 가건설(state-building) 과업은 신탁통치 찬반논쟁과 함께 미국군정과 소련 군정이 들어섬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수년천 동안 하나 생활권에서 살던 우 리 민족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면서 다른 생활권으로 나누어 살게 됨으로써 이 질화는 심화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두세 이상 분단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지금은 자본주 민족 과 회주 민족 으로 둘로 나눠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냉전 진행과 함께 반도에 출 남과 분단정권들은 자 유민주주체제와 공산주체제 실험이었다. 일제 강점기 과성 식 민지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 통치를 경험 남 민국과 조선민주주 인민공화국은 정부수립과 함께 강력 통치기구를 구축하고 체제경쟁을 시 작했다. 분단 이후 남과 은 서로 자기 체제로 흡수통일 또는 적화통일을 실하 기 위해 체제결을 지속해 왔다. 6 25전쟁 이후 남은 화없는 결시 로 접어들었다. 전쟁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 늪에 빠지게 만들고 내부 권력강화와 기집권을 위 구실을 제공했다. 남측에서는 기집권을 꾀하던 남과 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며 체제경쟁을 지 어느덧 70년이 되었다. 남분단 이후 우리는 변수가 삶 일부를 지배하는 분단체제 에서 살아가 고 있다. 회주권이 붕괴되고 세계적 차원 냉전이 해체됐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에는 냉전적 분단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글 목적은 반도에서 두 개 분단국가가 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 후 분단 70년 동안 남과 두 체제가 경쟁하는 과정을 체제비교 관점에서 분석해 보는 데 있다. Ⅱ. 두 개 분단정부 수립과 전쟁 우리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 식민지로부터 36년 만에 해방 을 맞았다. 해방 기쁨도 잠시 위 38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에 미국군정과 소련군정이 들어섰다. 일본군 무해제를 위 정치적 군적 편주 를 내세운 미국을 비롯 연합국측이 소련군 반도 38도선 단에서 주둔을 용인하면서 분단은 시작됐다. 2차 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연합군 측이라 남과 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면서 기간 분단체제를 유지할 것으로 누구도 예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분단과 관련 외부적 요인이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 동국 교수, 학, 핵문제 해법과 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다수 논저. 았지만, 2차 전 종전이후 미국과 소련 등 초강국들 이해관계와 경쟁에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해서 분단된 것은 분명하다. 영토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미칠 수 있는 심각 고 되었다. 트루만에 하면 연합국은 어떠 코멘트나 반도 제시하지 않았다 려 없이 강국들 정치적 군적 편주에 해서 졸속으로 처리된 반 (Truman, Memoirs 1: 440) 고 다. 반도 분할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트 도 분단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삶을 제약하는 멍에로 작용하고 있다. 루만은 그것을 일본 군통치기구 갑작스런 붕괴에 따라 반도 힘 공 미국이 반도 분할을 결정 데는 행정적 편뿐만 아니라 정치적 고려도 백상태가 생겨났을 때 이에 실적 안(Truman, Memoirs 2: 317) 으로 깔려 있었다. 미국은 반도 분할을 통해서 2차 전 종결 이후 예견되는 소련 결정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문제에 관 결정이 단지 국주둔 일본 과 경쟁에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 전략적 입에서 볼 때 반 군 무해제와 항복접수를 위 일시적인 편에 것이었다는 당초 주 도 분단은 소련이 독단적으로 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태를 방지하고 공산주 은 그것이 영구 분단으로 굳어져가는 오늘날 실에 비추어 볼 때 단히 12 자들 활동범위를 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미국 정책결정자들 유치하며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임이 판명되었다. 최초에 반도 주둔 일본군 13 과 마찬가지로 소련지도자들은 만주 일본군 전력을 과평가하고 반도를 항복을 받아내기 위 일시적인 군적 편 때문에 시도되었던 국 분할은 분할 점령하는 것보다는 일본열도 점령에 미군과 함께 참여하길 바랐던 것으로 곧 되돌릴 수 없는 실로 고착되어 갔다. 1946년 미 소 공동위원회가 국통 보인다(길영환 1989: 48-53). 2차 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8월 8일 일본선전포고를 소련이 일본 패망 이후 홋카이도( 北 海 道 ) 반부에 관할권을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도에 야심을 드러냈다. 스탈린 일본에 욕구는 매우 강했 던 것으로 알려진다. 스탈린은 1945년 8월 38선 설치에 관 미국 제안을 수 락하는 전문( 電 文 )에서도 소련이 일본 홋카이도 반부를 점령하도록 해 달라 는 요청을 바 있었다(이정식 1994). 반도 분단은 국제형(주변 국가들 반도에 영향력 경쟁)과 내쟁형 일정부 수립을 지원다는 명목으로 개최되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러 노력들도 동서냉전 진전에 따라 아무런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길영환 1989: 51-53). 소련군정기간 쪽에서는 1946년 2월 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공산주정권을 수립하기 위 준비가 소련군정 지도아래 은밀히 진행되었 다. 김구를 비롯 남측 민족주 진영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 력했지만, 공산주자들 통일전선 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남측이 단독 총선 거를 하지 않았다면 김구가 염원했던 통일정부 수립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1945년 9월 20일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 內 爭 型, 민족내부갈등)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정식은 반도 분단을 정권을 수립하라 는 스탈린 지령과 1946년 2월 실질적인 정부 성격을 띤 영구화하는 결정이 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아무 연관이 없이 해방된 두 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다면 김구가 바라는 통일정 달 후인 1945년 10월말에 내려졌다고 주다. 미국이나 소련 반도에 부 수립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 이승만은 공산주 전략과도 상관없이 일본에 양 국가 이해상충에 따라 반도가 분 세력 동유럽과 아시아로 확산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통일정부 수립을 단됐다는 것이다(이정식 1994). 염원했던 김구와 김규식 등 임시정부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이에 해 길영환은 소련 일본열도에 야심을 인정하면서도 미국 군 반하고 5 10총선 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유엔 결정에 따라 1948년 적 편 때문에 반도가 분단됐다는 주을 하고 있다. 미국이 38도선을 따 5월 10일 남만 총선거를 실시하고 1948년 8월 15일 민국을 건국했다. 라 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은 1945년 8월 13일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통보 소련군정 지도아래 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 공산주자들은 미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군정을 포함하는 내각책임제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다가 미국 반로 뜻을 하고, 남쪽 미국군정과 통합을 식하여 마르크스-레닌주를 전면에 내 이루지 못했다(김국후 1995). 세우지 않았다. 남측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측에서는 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기 반도에서 이념과 체제가 다른 2개 분단정권이 수립되고 곧이어 냉전이 반으로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이란 이른바 인민정권 수립 진행되면서 통일정부 수립 희망은 라지고 분단체제 가 굳어졌다. 2차 전 때 을 선포하였다. 은 남이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했기 때 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연합국으로 나치즘과 파시즘, 군국주를 표방 추 문에 어쩔 수 없이 1948년 9월 9일 단독정부를 수립했다고 주해왔다. 축국들에 맞서 함께 싸웠다. 2차 전 이후 미국 중심 유일패권질서는 오래가 주과는 달리 1945년 복 직후부터 소련군정과 김일성은 반도에 공 지 못했다. 중국에 공산주정권이 들어서고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로 공산주 14 산주정권을 수립하기 위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실 세력을 확하면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양극체제(bipolar system) 15 은 1946년 2월 8일 김일성 위원이 조선 정치 정세와 조선임시인민위원 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회 조직에 관하여 (조선 민주주 정당, 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 표 냉전 서막을 연 것은 6 25전쟁이었다. 분단 이후 곧바로 남과 은 서로 확협회에서 보고)란 제목으로 행 연설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최영재 2015). 이 연설문은 조선로동당당역연구소가 1963년 조선로동당 당 출판에서 발행 1963년 판 김일성선집 Ⅰ 에 실려 있다. 1963년 이후 발행 개정판에서는 김일성이 단독정부를 남 단독정부 수립 이전부터 치밀 하게 준비 중이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이 부분을 삭제했다. 1963년 판 김 일성선집 Ⅰ 연설문에서 김일성은 단독 정권 수립을 강력하게 언급하 였다. 김일성은 오늘 조선에 중앙 주권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완전히 성숙된 과업 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우리나라에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조선 림 자기 체제로 흡수통일 또는 적화통일을 실하기 위해 체제결을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자유민주주를 국시( 國 是 )로 내세우고 진통일 을 외쳤다. 이 승만 정부는 단독정부 수립에 비판을 잠재우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군 경제원조를 얻어내기 위해 진통일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진통일론에 맞서 김일성 정권은 선제적으로 민주기지노선 에 입각 남조선해방전쟁 을 일으켜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남침으로 시 작된 6 25전쟁은 유엔군과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인 국전쟁으로 비화 하고 재까지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군 무해제를 위 38도선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시 인민위원회가 이런 기관으로 되어야 다고 인정합니다. 중앙 주권기관 이 분단정권으로 이어지고 국전쟁을 계기로 만들어진 휴전선은 냉전체제 조직은 인민 중 리익에 부합되며 조선에 민주주적 질서를 수립하는 과업 치열 치점(열점, flash point)이 됐다. 휴전선을 기점으로 국-미국-일 에 완전히 부합되는 조치로 되는 것입니다 라고 밝혔다. 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본 남방삼각체제와 -소련-중국으로 이어지는 방삼각체제가 형성됨으 는 1947년 2월에 조선인민위원회 로 명칭을 바꾸었고 1948년 9월 9일 이 위 로써 반도 문제 국제화는 더욱 심화되고 남 체제경쟁이 본격화됐다. 원회를 기초로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을 수립했던 것이다. 반도 분단과 전쟁은 분단체제 와 정전체제 로 고착돼 제로섬(zero-sum) 해방 이후 냉전이 진행되면서 남쪽은 자유민주주를 표방하는 민국 적인 치열 체제경쟁을 지속하게 만들었다. 분단체제는 상 자유를 제약하 이 들어섰고, 쪽에는 마르크스-레닌주에 입각 공산주 정권이 들어섰 고 상를 부정하는 데서 자기정체성을 찾는 자폐적인 정관(selfrighteous 다. 하지만 소련군정은 통일전선 차원에서 쪽 내부 민족주 진영을 포섭 posture) 을 만들어냈다. 자유민주주와 공산주를 공식 이념으로 표방 상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호 적적인 세력에 이질적인 정치체제가 등함으로써 남 양 체제 토되다가 이승만 안로 통령 간선제로 뒤바꿨다. 민당 세력 요구에 따 이 상호경쟁과 갈등, 그리고 적개심은 커져갔다. 분단이후 민국은 라 원내각제 가운데 국무원제와 국무총리제를 받아들여 내각 관을 국회 을 흡수 상으로 바라보며, 은 민국을 해방(적화) 상으로 하 원이 겸직하도록 했다. 그러나 국회로부터 신임을 잃은 이승만 통령은 여 전쟁과 도발을 일삼아 왔다. 국전쟁이 진행 중인 1952년 7월 7일 이른바 발췌개헌 으로 알려진 제1차 개헌 외세 개입과 내부 분열로 어쩔 수 없이 분단정권을 수립했지만 조만간 통 을 통해서 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민원 4년, 참원 6년)로 통령 선 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열망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그 전쟁을 아직까지 출방법을 바꿔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승만 통령은 1954년 11월 29일 이른바 종결하지 못함으로써 분단체제는 정전체제와 결합돼 우리 일상 삶을 구조적 오입( 四 捨 五 入 ) 개헌을 통해서 통령연임제을 철폐하고 3선에 성공했 16 으로 제약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 시기 진보당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 다. 제2차 개헌을 통해서 이승만 통령은 통령 종신연임을 가능하게 하고 17 봉암 평화통일론 은 적과 내통으로 인식될 정도로 냉전시 은 화해 원내각제 요소를 전면 삭제 신통령제 를 확립했다. 하지만 기집권을 협력 상이 아니라 흡수통일 상이자 금기( 禁 忌 ) 상이었다. 1960년 위 두 차례 개헌이 정통성 약화를 가져오고 3 15 부정선거가 알려지면 이승만 정부가 4 19혁명 으로 무너지고 면 정부가 출범했을 때는 통일논 백화제방시라고 할 정도로 과 평화통일을 위 다양 논가 봇물 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곧바로 1961년 5 16쿠데타 로 집권 박정희 정 부는 선건설 후통일 을 표방하고 과 화나 교류협력 없이 본격적인 체제 경쟁에 돌입했다. Ⅲ. 분단정권들 체제공고화 과정 서 붕괴 길로 접어들었다. 1960년 이승만 정부가 4 19혁명 으로 무너지고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 헌이 이뤄지면서 국민 기본권이 강화된 원내각제(내각책임제)가 채택됐다. 원내각제에서도 통령 직책이 유지됐고 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되 5년 중임까지 할 수 있도록 했다. 면 정부 원내각제는 행정권 이원적 구조 에 따라 국가 원수이며 국가를 표하는 형식상 통령을 두었지만, 모든 정 치지도와 결단은 국무원에 귀속시켜 실질적 권을 부여했다. 민주당 면 정부는 1960년 11월 29일 제4차 개헌을 통해서 반민주행위자 및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1. 민국 통령제와 원내각제 실험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 소급입법을 추진했다. 면 정부는 자유민주주를 정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7월 17일 제헌헌법 공포, 8월 15일 민국 정부 치이념으로 표방하고 반공 반독재민주주 정치노선과 행동정향을 가지고 수립 선포 등을 통해 38도선 이남에 자유민주주 정부가 수립됐다. 민국 있었다. 민주주 경험이 짧은 신생독립국가에서 국민 기본권을 강화 내각 은 민족주, 민주주, 국제평화주를 건국이념으로 표방했다. 당시 집권당 책임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제되지 않은 자유와 과잉민주는 효율성 위기 인 자유당은 정치이념으로 반일 반공 민족주와 자유민주주를 내세웠다. 를 불러왔다. 보수계 파벌적 분열과 혁신계 정당 출은 참여폭발 이라는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표방하고 진통일 을 공언했다. 정치발전 위기를 불러왔다. 민주당 정부 지도력 부족과 회불안이 가증 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로 출범 민국은 초 통령을 국회에서 ( 加 增 )되는 것이 빌미가 돼 군부 정치개입을 불러왔다. 1960년 4 19혁명 이 간선으로 선출하고 임기는 4년 중임으로 제했다. 원래는 내각책임제 안이 검 후 1년 동안 집권했던 면 정부는 정치발전을 위 능력을 발휘할 충분 시간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이 없었다. 면 정부는 군부에 해 전복되었을 당시 경제발전을 위 기적 인 계획을 착수하려던 참이었다(길영환 1989: 73). 5 16 군정변으로 면 정부는 출범 1년도 되지 않아 무너지고 박정희 군 부정권이 들어섰다. 2차 전 이후 신생독립국가들에서 자주 볼 수 있던 군부 안정화를 기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 산업화 성과는 기집권 빌미로 활용됐다. 1969년 10월 27일 통령 3선을 허용하는 이른바 3선개 헌 (제6차 개헌)을 공화당 원끼리 변칙 처리하면서 박정희 통령 기집 권 길을 열어줬다. 정치개입이 국에서도 나타났다. 서구식 회 민주주를 이식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혼란을 틈타 군부가 정권을 잡고 효율성을 전면에 내걸고 산업 2. 인민정권 수립과 주체확립 화를 위 동원체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군부정권은 1962년 12월 26 정권은 소련군정 지도하에 소련파, 빨치산파, 연안파, 국내파 연립 18 일 제5차 개헌을 통해서 통령 4년 중임, 비례표제, 국회단원제(4년)를 골간 정권으로 출범했다. 1948년 9월 9일 정권이 출범할 당시는 회주 혁명 19 으로 하는 통령중심제 권력구조를 확립했다. 박정희 정부 역시 자유민주주 과 건설보다는 반제반봉건민주주혁명 과 민주개혁 이 급선무였다. 정권 를 목표 가치로 제시했다. 하지만 공화당 정부는 자유민주주 확립을 위 전 은 남연립정권 수립과 국토완정( 國 土 完 整 ) 1 을 염두에 두고 조선로동당 규약 제조건으로 근화이념을 구체적인 실천이념으로 설정했다. 박정희 정부는 조 국근화 란 기치를 내걸고 근화 민족주(modernizing nationalism) 를 표 방하고 국가주도형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 획을 시작으로 총 4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근화(산업화) 에 괄목할만 성과를 거뒀다. 박정희 정부는 통령에게 권이 집중되면서 국회 권이 상적으로 약 화되는 행정국가적 경향이 나타났다. 박정희 정부는 군부, 관료, 재벌이 지배동 맹을 맺고 경제발전을 국가가 주도하는 관료적 권위주체제 를 운영했다. 오 도넬이 개념화 관료적 권위주는 군부가 하나 제도로 정치에 개입하여 관 료와 국내외 자본(국 경우는 재벌)과 지배집단을 형성하고 민중을 배제하 면서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비민주적 지배체제를 미다. 유신 이전 박정희 정부는 민주적이고 입헌주적인 정체( 政 體 )를 수립했지만, 1972년 10월 유신 과 함께 권위주 정치체제로 변모했다(길영환 1989: 128). 박정희 정부는 자유무역지 설치를 통 외자유치와 수출드라이브정책으 로 산업화 기초를 놓았다. 군정변으로 집권 박정희 정부가 정통성을 만 회하기 위해 추진 산업화전략이 성과를 거두면서 효율성을 확보하고 정권 이나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헌법에 마르크스-레닌주를 공식이념으로 표 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이나 이나 통일정부 수립을 염두에 둔 헌법을 채택 하고 통일을 지향했다. 당시 헌법상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수도는 서울이며, 평양은 임시 수도였다. 민국 제헌헌법은 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우리 영 토로 규정하여 진통일 과 흡수통일 을 지향했다. 2 1 국토완정은 나라 영토를 단일 주권 밑에 완전히 통일하는 것 을 미하는 식 표으로, 1948년 9월 10일 김일성이 발표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정부 정강 ( 政 綱 ) 에서 처음 등하였다. 이후 국토완정은 1949년 신년를 통해 통일방안으 로 공고화되었으며, 김일성은 국토완정을 달성하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일으켰 다. 은 해방 이후 민주기지론 에 따라 지역에 먼저 공산주 기지를 건설하고, 민 족해방전쟁 을 일으켜 전 반도 공산화 통일을 이룩하여 국토완정을 실하고자 했다. 2 1948년 9월 9일 제정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헌법 제103조에 하면 조선민주주 인민공화국 수부는 서울시다. 1948년 8월 15일 제정 민국 제헌헌법 제4조 영토 조항에서는 민국 영토는 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다 고 규정하여 실제적으로 통 치권이 미치지 않은 지역까지도 우리 영토로 봤다. 이것은 우리와 처지가 비슷했 던 서독헌법 제23조에서 기본법 적용지역을 그 당시 서독지역으로 정하고, 독일 그 밖 지역은 그들이 연방국에 가입 후에 기본법이 효력을 발생다 고 규정 것과 조되는 조항이다.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파벌 연립으로 출범 정권은 어느 파벌 혁명 전통을 내세울 수 는 상황에서 은 주체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 없는 조건에서 소련식 마르크스-레닌주 또는 스탈린주 3 를 그로 수용하 상이 태동하게 된 외적 배경은 1950년 중반 중 소분쟁 와중에서 소련이 여 우선 당과 국가를 세우고 민주개혁 을 하는데 주력하면서 반도 전체 공 나 중국 어느 편에 기울지 않고 자율성을 획득하려는 지에서 출발 산화 통일(국토완정)에 주력했다. 해방 이후 통일정부 수립에 실패 남과 은 것이다(고유환 2001: 91). 진통일과 국토완정을 내세우고 흡수통일과 공산화통일을 지향했다. 은 1950년 중반 이후 김일성은 중 소 양국 영향력과 국내 반파들 간 민주기지 4 노선에 따라 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을 혁명 책원지 로 하여 국 섭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정권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내적으로 주체확립 토완정을 위 6 25전쟁을 감행했던 것이다. 을, 그리고 외적으로는 자주노선 을 선언하고 유일상체계 형성에 박차를 20 에서 주체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 것은 1950년 중반 혁명세력들(빨 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주체상 형성은 국내정치 및 외관계 21 치산파, 소련파, 연안파)간 회주 건설과 관련 노선투쟁에서 소련식, 와 밀접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체 개념은 김일성체제 확립 중국식 이 아닌 우리식(식) 이 강조되면서부터다. 당시 이 주체확립 과정에서 경쟁자들 숙청을 정당화하고 김일성 자신 정통성을 구축하는 역 을 들고 나온 것은 내부 이른바 종파분자들, 주자들, 수정주자 들과 노선투쟁과 국제공산주운동 속에 나타난 수정주 침습을 막기 위 것이었다. 따라서 주체확립을 위 투쟁에서 무엇보다 중요 것은 상 업에서 주체를 철저히 세우는 것이었다(고유환 1995: 48-52). 1950년 중반 이후 김일성이 주체를 강조 이유는 내적 권력지향적 동 기와 외환경 변화에 따른 실적 필요성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김일성 권력지향적 동기는 안과 밖 도전에 직면하여 자신 지위를 강화하고, 비판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주체상을 이용 것이다. 주체 할을 하였고, 중국과 소련 간 갈등에 응하는 방패 기능도 수행하였다(고 병철 2001: 88). 공식문헌은 주체상 시원을 1920년 말에서 1930년 초로 잡 고 있지만, 이보다 훨씬 뒤인 1955년 12월 28일 당 선전선동 일군들 앞에서 행 김일성 연설 상업에서 교조주와 형식주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 할데 하여 에서 주체 가 처음 등하기 시작했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우 리식 (식) 진리 창조를 강조하면서 최초로 상업에 주체를 도입할 것 을 주했다.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상을 내세우게 된 외환경 변화에 따른 실적 필요성은 당시 중 소분쟁 주체확립 은 처음부터 민족주를 토로 하고 있었으며 주로 소련 회 심화로 말미암아 중국이나 소련을 더 이상 믿을만 동맹국으로 간주할 수 없 주 경험을 반하는 것이었다. 주체상 발생과 보급 원인은 소련과 중 3 김일성이 1948년 3월 28일 조선로동당 제2차 회에서 중앙위원회 업총화보고에 하면 위 레닌-쓰딸린당 이란 표이 나온다. 당시 소련공산당이 레닌주와 스탈 린주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서숙 편 2004: 38). 4 민주기지란 혁명이 진행되는 나라에서 다른 지역보다 먼저 혁명이 승리하고 개혁이 실시되 어 앞으로 전국적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 근거지가 되는 지역을 말다. 원래 민주기지 란 소련 세계공산화정책에서 유래되는데, 은 민주기지를 민주주 혁명 발전 책 원지 라 정하고 있다. 1945년 10월 10일에 열린 조선공산당 조선 5도 당 책임자 및 열 성자회 에서 제기되었으며, 남지역 공산화를 위해서는 먼저 지역을 기지로서 강 화하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국학중앙연구원 2015). 국을 염두에 둔 주 와 투쟁과 관련이 있다. 이러 미에서 주체상 반중국적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박길용 김국후 1994: 102). 회주권 붕 괴 이후 중국과 이 관계가 기만큼 좋지 않은 것도 주체상 창시 이러 상적 연원에서 찾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Ⅳ. 남 체제경쟁 본격화: 유신체제와 유일체제 과 시민회 저항으로 수명을 다했다. 1. 박정희 유신체제 1970년에 들어오면서 미중간 데탕트 흐름이 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2년 남과 이 7 4 공동성명, 1973년 6 23선언을 채택하는 등 남관계 에도 화해 조짐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 중국 화해가 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통령 서거와 함께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전두환 중심 신군부 가 제주를 제외 전국에 비상계엄조치를 취하 고 여야가 합 직선제 개헌안을 무산시키고 제8차 개헌을 통해서 통령 7 년 단임제(선거인단 간선), 내각제 요소를 가미 비례표제(4년)를 채택했다. 22 국 반도 안보공약 약화로 이어질 것으로 예단하고, 로시터(Clinton L. Rossiter) 위기정부(crisis government) 개념을 도입하여 통령과 행정부 권을 강화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 을 채택하고, 12월 김일성 정권이 주석제헌법 을 채택함으로써 남 유신체 제와 유일체제 이에 이른바 적적 존관계 가 형성됐다. 남 정치권력들이 상 위협으로부터 정권과 체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내부권 력을 강화하는 적적 존관계를 형성하고 기집권체제로 접어듦으로써 체 제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고유환 2007). 박정희 정부는 우리 실을 준전시상태 로 규정하고 국력 조직화와 능 률 극화를 통 효율적인 위기극복 정치체제를 구성다고 하면서 1972 년 10월 유신( 維 新 )을 단행하고 국적 민주주 를 표방했다. 국적 민주주 상적 기초는 민족주 가치, 자주, 자립, 자조, 자위, 자결 원리에 입각하여 민족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민족주체성을 확립하여 민족국가 를 재건하고 존적 민주체제에서 주체적 민주체제로 전환다는 것이 유신 논리였다. 실천수단으로 제시 것이 새마을운동, 국민교육헌, 서정쇄신( 庶 政 刷 新 )이었다. 2. 김일성 유일체제 1956년 8월 종파건 에서 연안파, 소련파가 몰락하고 1967년 유일상체계 가 확립된 것을 계기로 모든 권력은 김일성 중심 빨치산 수중에 들어 갔다. 은 당 창건 이후 이른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들 에 숙청작업을 계속 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1967년 5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가 소집될 당시까지도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이 전원회 에서 당중앙 5 으로 불렸던 김정일은 당안에 나타난 부르주아 및 수정주 분 자들 반당 반혁명적 책동을 폭로 분쇄하고 당 유일상체계를 철저히 세워 나가는 데서 중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일은 당 유일상 체계는 곧 수령님 상체계이며 령도체계 라고 하면서 이른바 반당 반혁명 분자들 을 숙청하고 당 유일상체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것으 로 알려졌다. 1967년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를 계기로 당 유 일상체계와 김일성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은 수령중심 유일 체제(수령제) 로 나아갈 수 있는 토를 마련했다. 1970년 은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 23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유신헌법은 통령 지위를 국가 모든 기관에 하여 우위에 두는 영도 자 로 자리매김하는 권력 인격화 를 가능하게 했다. 통일주체국민회가 헌법 기관으로 임기 6년 통령과 국회원 1/3(유정회)을 선출했다. 유신체제는 외적 충격에 응전과 내적 질서확립을 위 도전에 응다는 명분으 로 효율성에 치중 나머지 민주적 절차를 소홀히 함으로써 권력 내부 분열 5 김정일을 지칭하는 당중앙 혹은 영스러운 당중앙 이라는 호칭은 1960년 후반부터 용되기 시작하였고, 언론매체인 로동신문 에는 1974년 4월부터 당중앙 이라는 호칭을 용하기 시작하여 1980년 10월에 열린 6차 당회 때까지 용하었다. 1981년 6 월부터 영스러운 당중앙 이라는 호칭 신에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 라는 호칭을 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3년 1월 28일 로동신문 인덕정치가 실시되는 회주 만세 라는 논설에서는 위 영도자 란 호칭을 용하였다.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건을 갖추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반파가 모두 숙청됐고, 경제적으로는 전 일 제6차 당 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군위 후( 戰 後 ) 복구업과 회주 개조를 마무리하고 자력갱생 원칙에 입각 자 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됨으로써 후계자 위치를 공식화했다. 립적 민족경제 기초를 다졌다. 이러 자신감을 바탕으로 은 1972년 12 에서 수령 후계문제를 1970년에 본격적으로 서두른 것은 소련 스 월 주석제 헌법을 채택했다. 회주 헌법 중요 특징은 혁명적 수령 탈린 망 후에 전개되었던 정치적 혼란을 크게 식하고 그러 태가 론 을 헌법적으로 제도화 주석제 규정이다. 1972년 헌법에 따르면, 공화국 에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석직은 국가 수반이며 국가주권을 표하는 직책으로 국가 활동에 주 객관적 요인과 함께 김정일에 후계자 문제 해결을 회주, 공산주 건 석 유일적 영도를 보하기 위해 주석이 중앙인민위원회를 직접 지도하며 필 설에서 수령과 혁명 승계 하나 모델로 창조하기 위 것으로도 볼 수 있 24 요에 따라 정무원 회를 소집하고 지도하며 전반적 무력 최고령관, 을 것이다. 25 국방위원회 위원으로서 국가 일체 무력을 지휘 통솔하는 직위다. 당내에서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은 상이론 해석권을 악하고 온 회 1972년 헌법 국가권력 구조는 주석-중앙인민위원회-정무원으로 이 김일성주화(주체상화) 요구를 철저히 관철하여야 다고 하면서 1974 어지는 3단계 중앙행정체계를 이루고 행정부에 권이 집중돼 있었다. 따라서 최고 주권기관으로서 최고인민회가 형식상이나마 보유하던 권이 폭 축 소됐다. 더욱이 법기관인 중앙재판소와 중앙검찰소도 중앙인민위원회 지 도를 받게 됐다. 실질적인 행정집행기관인 정무원 위에 중앙인민위원회를 신설 것은 당 국가기관에 영도적 지위를 보하고, 당 행정통제를 원활 하게 하기 위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석제 채택 당시 김일성은 당 영도적 역 할을 유지하면서 국가기능을 활성화하려는 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 나 김정일이 당권을 악 후 권력이 국가로부터 당으로 다시 이동하면서 주 년 4월 14일 당 유일상체계 확립 10원칙 을 만들어 공포하였다(김정 일 1987: 91-124). 1 위 수령 김일성 동지 혁명상으로 온 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 다. 2 위 수령 김일성 동지를 충심으로 높이 우러러 모셔야 다. 3 위 수령 김일성 동지 권위를 절화 하여야 다. 4 위 수령 김일성 동지 혁명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 교시를 신조화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석과 중앙인민위원회 역할과 기능은 점차 축소됐다. 하여야 다. 주석제 헌법 채택 이후 은 곧바로 김정일로 후계체제 구축을 시작했 5 위 수령 김일성 동지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다. 다. 은 혁명계승론, 혈통계승론, 세교체론, 김일성 화신론 등 후계자 6 위 수령 김일성 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 상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 론에 따라 1970년 김정일 후계체제를 본격적으로 구축했다. 김정일은 학 결을 강화하여야 다. 을 졸업 직후인 1964년 6월 1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 7 위 수령 김일성 동지를 따라 배워 공산주적 풍모와 혁명적 업방법, 인 이 되면서부터 당 활동을 시작해 1973년 9월 17일 당 중앙위원회 비서, 1974 민적 업작풍을 소유하여야 다. 년 2월 13일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 8 위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안겨 주신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며 수령 출되면서 당내에서 김일성 유일 후계자로 추됐다. 이어 1980년 10월 14 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자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답하여야 다. 9 위 수령 김일성 동지 유일적 령도 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결같이 움직 이는 강 조직 규율을 세워야 다. 10 위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 위업을 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 며 완성하여 나가야 다. 락했다. 김일성이 살아있는 동안에 후계자 김정일에게 군권에 권력이양 을 서두른 것은 회주권 붕괴를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일은 김일성 생전에 군부문에서 제도적인 권력승계를 완료하고 김일성 후를 비했다.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는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 함께 본래 기능을 상실 하고 유명무실 국가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회주 국가에서 권력은 총 부리에서 나온다 고 할 만큼 군권은 매우 중요 실권이다. 군권이 없는 주 당 유일상체계 확립 10원칙은 당 규약과 국가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석과 김정일 공식 정치기구를 통하지 않는 측근 중심 정책결정 등으로 주 26 일종 규범과 같은 것으로 수령중심 유일체제 유지와 후계 구축 정당성을 석제는 더 이상 존재를 찾지 못하게 됐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망 이 27 부여하는 최상위 계율( 戒 律 ) 로 기능하였다. 후 3년간 유훈통치 를 실시 은 1998년 9월 개정 헌법에서 주석제를 폐 1974년 2월 김정일이 당내 후계자로 지명된 이후 은 실상 김일성-김 지하고 국방위원회 위원을 국가수반 지위로 격상했다. 정일 공동정권 으로 운영됐다. 당 창건 40돌을 맞는 1985년을 계기로 권력 상당부분은 김정일에게로 넘어왔다. 1985년부터 김일성이 망 1994년 7 월 8일까지를 김정일-김일성 공동정권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 중반 이 후 김일성은 위 수령은 곧 국가주석 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태상왕 위 치에서 군림(reigning) 할 뿐이었고, 실질적인 통치(ruling) 는 당권을 악 김정일이 국가기관인 중앙인민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당과 그 측근들을 중심 으로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은 1990년에 들어오면서 김일성이 가지고 있던 군권을 물려받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24일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제6기 제19차 전 이와 같이 주석제는 후계체제 구축에 이용돼 후계체제 완성과 함께 그 생 명을 다했다. 김정일이 죽은 수령을 영원 주석 으로 추하고 주석제를 폐지 했다는 것은 형식상 수령제(수령-당-국가체제)를 다소 완화하고 당-국가체 제 를 복원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 후 당보다는 국가기관 인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치하는 군 우위 준전시적 위기관리체제인 선 군( 先 軍 )체제를 운영했다. Ⅴ. 민주화 이행과 3 세습체제 구축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원회에서 조선인민군 최고령관에 추됐다. 김정일은 1992년 4월 20일 1. 남 1987년 체제 와 민주화 이행 원수 칭호를 수여받았다. 1992년 4월 9일 제7차 개정헌법 제113조에서 조선 남 분단 정권들은 자유민주주 정치제도와 회주 공산주 정치 민주주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은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다 고 규 체제를 도입하여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체제 결을 지속해 왔다. 분단 정해, 주석이 가지고 있던 군권 일체를 국방위원회 위원에게 이관했다. 그 이후 남에서 새로운 정치제도를 도입할 때는 회 새로운 집단들이 동원 리고 1993년 4월 9일 최고인민회 제9기 제5차 회에서 국방위원회 위원 되고 주민 정치참여가 확되는데 따라 새로운 정치제도가 창출되는 것이 아 에 추됐다.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위원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주석 지위는 니라, 오히려 제도가 먼저 만들어져서 참여를 선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0 헌법적으로도 실권이 없는, 주로 외교권을 행하는 식상 국가원수 로 전 년에 들어오면서 정치제도 발전은 정치참여 요구와 필요성에 보다 밀접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히 적응해 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70년에는 이러 추세가 지속될 수 없 은 타도 상이 아닌 포용 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타도 상을 었다(길영환 1989: 79). 남에 구축된 유신체제와 유일체제라는 동원 정 포용 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 회 내부에서는 인식을 둘러 치(politics of mobilization) 는 남 정치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 싼 남남갈등이 벌어졌다. 남남갈등 근저에는 변화론과 불변론 이 자리 했다. 위로부터 주도된 동원형태와 위계적 권위관계, 중앙집권식 하향적 명령 잡고 있었다. 지속적인 포용정책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정권 본질은 체계는 1970년까지 남 정치 특징 중 하나였다. 이러 정치행태는 변하지 않았다는 측과 남정상회담 등 당국 간 회담과 교류협력으로 남 간 민주주가 국적 토양에 성공적으로 뿌리 내리는 것을 방해했다. 민주정치 신뢰가 쌓이고 도 점차 변하고 있다는 측 이 변화논쟁이 벌어졌다. 실패는 분단정치에 해 더욱 악화됐다. 1970년와 80년 남에는 권위 화해협력정책(햇볕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은 이념갈등, 지역갈등 등과 결 28 주와 전체주가 각각 자리 잡고 적적 존관계를 형성하고 내부 권력 공 합돼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2007년 제17 통령 선거에서 보수세력 29 고화에 주력했다. 은 친좌파정권 잃어버린 10년 이란 정치구호를 들고 나오는 등 김중-노 1980년 중반부터 본격화 소련 및 동구권 개혁 개방과 제3세계에서 무정부 화해협력정책에 정치적 심판을 요구했다. 결국 햇볕정책을 비 민주화 이행 물결이 국에서 민주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87 년 6월 민주화 항쟁 으로 전두환 정부는 호헌( 護 憲 ) 지를 꺾고 1987년 10월 29 일 통령직선제(5년 단임) 개헌을 했다. 유신이후 15년 만에 통령 직선제 개 헌이 이뤄지면서 국 민주화는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1987년 체제 6 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며 여야 간 정권교체도 이뤄졌다. 국 민주화 이행과 함께 에 인식도 달라졌다. 1988년 노태우 정 부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 특별선언(7 7선언) 을 통해서 을 타도 상에서 화해협력 상으로 자리매김하고 방정책 을 추진하여 1990년 판했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관계 재설정을 요구하고, 이 이를 거부하고 핵실험과 천안함-연평도태 등 남도발을 감행함으로써 남관계 는 단절됐다. 2. 선군정치와 3 세습체제 구축 남에서 유신체제가 붕괴하고 민주화가 진행되는 동안 은 유일체제를 강화하고 3 세습체제를 구축했다. 1990년 초 은 소련과 동구권 체제 개혁을 회주 포기로 간주하고 우리식(식) 회주 를 고수하기 위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소련과, 1992년 중국과 각각 수교했다. 해 노력했다. 회주권 정치개혁 핵심이 당 영도적(지도적) 역할 포기 민주화 진전과 함께 남화해가 이뤄짐으로써 김중-노무 정부시기 남 에 따른 당-정 분리와 입법기관 권 증 및 다당제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이 두 차례 이뤄졌다. 에 햇볕정책 이 진행되는 동안 이와는 조적으로 은 당과 수령 영도적 역할을 더욱 강화하고 군를 앞 6 1987년 체제는 1987년 노태우와 3김(김영삼 김중 김종필)이 통령 직선제 등을 담 은 헌법 개정에 합하면서 구축된 체제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전두환 전 통령이 통 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 13 호헌( 護 憲 )조치를 발표하자, 이에 반발 국민들은 6월 민주화항쟁을 일으켰다. 이에 노태우 당시 민정당 표가 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6 29 선언을 발표해 통령 5년 단임제를 골자로 9차 헌법 개정을 이뤄냈다. 이 헌법은 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1987년 체제는 6 29선언으로 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 서 형성된 정치체제를 말다. 세우는 위기관리체제를 운영하면서 유일체제 유지에 주력했다. 김정일 시에 접어들면서 내외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회주 권 붕괴, 김일성 망, 경제위기 심화 등으로 김정일 정권은 고난 행군 을 지 속하면서 군를 앞세우는 선군정치 를 들고 나왔다. 1990년 후반 은 회주권 붕괴와 김일성 망에 따른 체제위기 심화 등 시련과 도전을 극복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하기 위해서 준전시적 위기관리체제인 군국가 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군 수위에 오름으로써 명실상부 최고지도자가 됐다. 왕조시 왕위 은 1998년 헌법개정을 통해서 국방위원회 중심 군국가를 제도화하고 강 계승처럼 권력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진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수령제 통치시 성국건설을 표방하면서 선군정치를 김정일 시 기본정치방식으로 규정하 스템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3 세습을 관습헌법 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이고, 권력층도 선군정치는 마르크스가 밝힌 선행 회주 정치방식인 선로정치방식( 先 勞 김정은을 진심으로 받들어야 다 는 김정일 10 8 유훈 7 에 따라 외견상 충 政 治 方 式 ), 선당후군( 先 黨 後 軍 ) 건설방식을 선군혁명영도, 선군후로( 先 軍 後 勞 ) 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적어도 집권층은 지도자와 운명공동체 방식으로 바꾸어 새롭게 정립 것이다. 선군정치는 군을 하나 회 식을 가지고 김정은을 수령으로 옹립하고 기득권을 누리려 다. 이와 같이 30 계급적 지위로 규정하고 선군상, 군인문화 등을 통해서 확재생산하는 군 은 수령중심 유일체제 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선 수령 망과 동 31 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다. 당국은 혁명 수뇌부 를 중심으로 당=군= 시에 후계 수령이 곧바로 권력을 악하고 수령제 를 이어가고 있다. 인민 일심단결(선군단결)을 강조하면서 군을 혁명 주력군으로 내세웠다. 김정은 권력승계 수순은 김정일 경로를 그로 따랐다. 2011년 12월 30 김일성 후 에서 군국가화가 진행된 것은 항일유격 혁명전통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군중시상을 국가기구체계( 국방위원체제 )로 제도 화하여 정권과 체제유지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준전시적 위기관리체제로 운영 해 나가겠다는 김정일 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군국가는 혁명적 군인정신 등 군 모범을 회 모든 부문이 따라 배워 적용하고, 나아가 군이 회 모든 부문을 통제하는 위기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2008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이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이후 당국은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야 다 는 혁명계승 일 군 최고령관직을 먼저 승계하여 군권을 악 후 당과 국가 최고직책 을 잇달아 승계하여 공식승계를 마무리했다. 김정일을 영원 총비서, 영원 국방위원으로 추하고 자신은 같은 권을 갖는 당 제1비서, 국방위원회 제 1위원이란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서 그 자리에 올랐다. 김정일이 3년 걸린 공 식승계 절차를 김정은은 불과 4개월여 만에 끝냈다. 김정일 경우 오랜 후계구 축기간을 거쳐 실권을 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승계를 서둘지 않았다. 하 지만 김정은은 후계구축기간이 짧고 전권을 악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점에 서 공식승계를 서두른 것으로 보인다.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론과 혈통계승론 후계논리에 따라 김정은으로 후계구축을 본격화해 나갔 김정일 시는 당을 통 정치과정이 생략되고 국방위원회를 혁명 수뇌부 다. 은 2010년 9월 제3차 당표자회를 개최하고 김정일 3남 김정은을 로 하는 군국가가 제도화 됐다. 이는 총체적인 위기 하에서 정권과 체제를 수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호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군정치는 군부 과성을 불가피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망과 동시에 김정은 시가 열렸다. 은 4 월 11일 당표자회, 4월 13일 최고인민회를 연이어 개최하고 김정은을 최고지도자로 추하는 공식승계 절차를 마무리했다. 김정은이 당 제1비서 와 국방위원회 제1위원에 추됨으로써 반도 절반 새로운 상속인으로 공 인됐다. 선 수령 망과 동시에 후계 수령으로 등극 김정은이 당 정 7 로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일이 2011년 10월 8일 김정은 위성에 하여 말하면서 일군 들이 김정은 당중앙군위원회 부위원을 진심으로 받들어야 다고, 일군들은 앞으로 당 두리에 마음 뜻으로 굳게 뭉쳐 일을 잘해나가야 다고 거듭 당부 하였다고 밝 혔다. 로동신문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잘 받들어 주체혁명위업을 빛나게 계승해나가 야 다! 이것이 어버이 군님 가 큰 념원이며 우리 일군들과 인민들에게 남기신 간 곡 당부이다 하고 밝혔다( 로동신문 2012년 1월 18일).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하게 하는 문제가 발생다. 과성 군부는 김정은 체제 정책적 자율성 을 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김정일도 김정은으로 후계를 공식화하는 과 정에서 당 역할을 다시 강조했다. 김정은 시가 열리면서 은 회주 체제 전통적 통치방식인 당-국가체제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정일 후 발표 4 6담화 8 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을 김일성-김정일 당으로 강화 발전시켜야 다고 하면서 당 유일적 영도체계와 당중앙 유일 는 데는 계가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김정은 체제가 효율성을 얼마나 발휘하 느냐는 3 세습 태생적 계를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수령복을 로 누린다는 달콤 말만으론 인민을 끌고 갈수는 없 다. 먹는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운 만성적인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인민 은 등을 돌릴 것이다. 인민 불만이 높아지면 야심가가 나타나거나, 반체제세 력이 조직화할 수밖에 없다. 적 영도체계 확립을 강조했다. 김정은은 4 6담화를 통해서 당에 군 통 32 제를 분명히 했다. 김정은은 2012년 헌법에 핵보유국 임을 명문화하고, 2013년 3월 당중앙위원 회 전원회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 병진노선을 채택했다. 김정은은 이제 군 강국을 이뤘으니 경제강국으로 나가야 다는 경제우선주를 표방하고 나섰 다. 김정은은 첫 공개연설인 2012년 4 15 연설 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 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회주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 리 당 확고 결심입니다 라고 밝혔다. 김정은은 인민제일주 를 표방하면 서 인민생활 향상에 국정 최우선 순위를 두고, 군에 자원배분을 줄이고 내각 중심 경제발전, 즉 내각책임제를 강조하고 있다. 김정은 체제 안정성 여부는 내부 유일 위협세력이 될 수 있는 군 부 지지여부와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30 초반 카리스마가 부족 김정은 체제가 안정화되려면 효율성을 발 휘해야 다. 김정일 시처럼 항일무투쟁 혁명전통을 강조하면서 과거 지 향적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혁명가 계라는 것만으로는 통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3 세습을 통해서 공고 화된 유일체제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경제문제를 해결하 Ⅵ. 맺음말 분단정권 수립 이후 남은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채택하고 체제경쟁 을 지속해 왔다. 냉전시 자유민주주체제와 회주체제 경쟁에서 자유 민주주가 승리했듯이 남 간 체제경쟁에서도 남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 하고 있는 것도 실이다. 냉전시 남 분단정권들은 안보를 최우선 순 위에 두고 강력 국가권력 구조를 유지해왔다. 안보국가 과성 국가 권력이 동원체제를 구축하고 체제경쟁을 함으로써 시민회가 위축되기도 했 다. 하지만 1970년 말부터 본격화 권위주체제 민주화 흐름과 1980년 중반 이후부터 본격화 회주권 개혁 개방은 반도에도 영향을 미쳤 다. 남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했다. 반면 에 은 개혁 개방을 거부하고 수령 중심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3 세 습체제를 구축하였다. 남 민국은 자유민주주 이념에 따라 시경제를 도입하였고, 조 선민주주인민공화국은 계획경제를 도입하였다. 민국은 이승만 정부시기 잠시 수입체산업화를 시도했지만 박정희 정부 이후 유치를 통 개발촉진전 략에 따라 수출주도형 개방경제를 추진했다. 남이 추진했던 수출드라이브정책 33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은 자본주세계체제로 활발 편입을 통해서 종속적 발전 또는 상호존 8 김정은이 2012년 4월 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담화( 4 6담화 ) 위 김정일동지를 우리 당 영원 총비서로 높이 모시고 주체혁명 위업을 빛나게 완성해 나가자 ( 로동신문 2012년 4월 19일). 적 발전 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은 자력갱생원칙에 입각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노선 을 표방하고 지금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1 까지도 본격적인 개방을 주저하면서 폐쇄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은 정권수 근혜 통령과 김정은 제1비서는 신뢰를 회복해서 상생과 공영 상호존관계 립 초기 천리마운동 등 동원체제를 통해서 경제성을 이뤘지만 1960년 말 로 남관계 질적 발전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내부 성 동력이 고갈된 을 기점으로 성은 계에 도달하였고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경우 외관계 확을 통해서 새로운 성 동력을 찾아야 다. 미 적 은 회주국가들과 부분적 교역을 추진하면서 자력갱생에 주력했다. 이 관계와 남 분단체제 갈등구조를 해소하지 않고는 이 구조적이고 총체 정권수립 초기 주체 와 자주 노선을 표방하면서 자력갱생을 통해서 성과를 거 적인 체제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둘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가 반도 쪽에 공업화 기초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 편 국경제도 지속적인 성을 위 새로운 성 동력을 찾아야 다. 수 인지도 모른다. 출주도형 국경제 계, 고용 없는 부 양극화 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34 개방경제는 중심부 국가에 존 또는 종속이 불가피하지만 자본과 기술 도 방에서 희망을 찾아야 다. 남경제협력을 확해서 내수시을 키우고 중 35 입을 통 도약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반면 자력갱생경 국, 러시아 등 방으로 뻗어나가야 새로운 일자리 창출 돌파구를 찾을 수 있 제는 외부존을 줄일 수는 있지만 경제성에 필요 자본과 기술 획득이 어 을 것이다. 려워 성에 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실 회주체제가 실패 것은 3차 산업혁명인 정보혁명을 제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단체제가 지속하면서 확 재생산되듯이 분단체제 권력도 재생산되고 있다. 재 남과 정치권력은 과거 권력과 연관돼 있다. 당분간 반도 운명은 박정희 전 통령 딸 박근혜 통령과 김일성 주석 손자 김정은 제1 비서에 해 결정되게 됐다. 김정은 제1비서가 수령체제 지속에 따른 귀 속지위를 부여받았다면, 남 박근혜 통령은 자신 노력에 따른 업적지위를 성취했다. 하지만 남과 정치권력은 신화 에 기반하고 있다. 남은 근화 신화가, 은 항일무투쟁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박근혜 통령은 선과정에서 다시 번 잘살아보세 를 표방했고, 김정은 참 고 문 헌 고병철(2001), <주체상 형성과 상체계 분석>, 개론, 을유문화. 고유환(1995), <중 소분쟁과 유일상체계 형성>, 연구 1995년 가을호. (2001), <통치 이데올로기: 주체상>, 정치 이해, 을유문화. (2007),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 구축에 희생된 경제>, 신동아 5월호. 길영환(1989), 남 비교정치론, 문맥. 김국후(1995), <소 45년까지 지도자 미정>, 중앙일보 1995년 2월 14일. 김정일(1989), 주체혁명위업 완성을 위하여 3(1974-1977), 조선로동당출판. 박길용 김국후(1994), 김일성 외교비, 중앙일보. 서숙 편(2004), 문헌연구: 문헌과 해제, 경남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이정식(1994), <해방후 반도 통합 실패, 상 하>, 중앙일보 1994년 10월 10일 12일. 남 정 치 체 제 성 립 과 전 개 과 정 제1비서는 첫 공개연설에서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 고 최영재(2015), <김일성, 1945년 말부터 단독 정권 준비했다>, 아시아투데이 하면서 인민생활 향상을 다짐했다. 두 지도자 모두 민생 을 강조했다. 남과 이 소모적인 분단체제를 지속하면서 립 갈등할 경우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2015년 4월 20일. 국학중앙연구원(2015), 국민족문화백과, 네이버검색. 어렵다. 남 간에 긴이 높아지면 남은 외신인도가 떨어질 수 있고, 은 키워드 미관계 정상화 등 외관계 확이 어려울 것이다. 남분단, 남 정치체제, 유신체제, 유일체제, 민주화, 3세습 박정희와 김일성이 분단체제를 활용해서 적적 존관계 를 유지했다면, 박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양 문 수 * 분단 이후 남 경제 궤적 Ⅱ. 남 경제개발전략 1. 남 경제개발전략 1) 수출지향적 산업화 남을 비롯 동아시아 국가들 경제발전에 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 지만 부분 견해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설명요인은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 략일 것이다. 이는 외지향적 경제발전 전략 또는 수출주도형 성전략이라 36 Ⅰ. 머리말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반도는 외부세력에 해 남과 으로 분단되었고, 그로부터 만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분단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남과 은 해방과 분단, 그리고 국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경제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해방은 비록 식민지 경제라는 취약성은 있었지만, 종전에 일본과 맺고 있던 경제적 분업연관관계가 파괴됨을 미했고, 게다가 분단으로 인해 기존에 남과 이에 존재했던 분업연관관계 조차 끊어졌다. 나아가 국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그러 어려운 초기 조건을 안고서 남과 은 상이 경제체제와 상이 경 제발전전략을 가지고 경제개발에 착수했다. 남과 은 때는 고도성을 구가 했지만 경제침체, 더욱이 경제위기와 같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 늘에 이르고 있다. 이 글은 반도가 남과 으로 분단된 지 만 70년이 지난 시점에서 남 경제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간단히 정리,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 로 다. 아울러 남 경제 주소를 간단히 비교하면서 이것이 남 경 제통합에 해 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이 글 또 다른 목적이 다. 다만 지면 제약 등으로 인해 남 간 경제교류, 나아가 남경제통합 문제는 직접 다루지 않기로 다. 고도 다. 남 경제발전 모델을 흔히 박정희 모델이라고 부르는 데서 잘 나타나 있 듯이 상기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은, 박정희 정권이 등 이후 1960년 중반부터 추진되었다. 이 전략은 외국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 수출산업을 육 성하고, 유휴인력을 저임금으로 고용하여, 해외에서 수입 반제품을 가공함 으로써 수출 및 성 극화를 이루고자 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조 순 1992: 238). 이 때 산업화에 필요 자본은 주로 외국자본에 존하였는데 이들 외자는 직접투자보다는 주로 간접자본, 특히 상업차관 형태로 도입되었다. 또 수 출에 필요 원자재, 중간재, 자본재는 수입에 존하였다. 특히 인접 일본으 로부터 중간재, 자본재를 효과적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이것은 후방연쇄효과 가 해외, 특히 일본으로 나가는 것을 미했지만, 바로 이를 통해 수출과 성 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은 같은 시 다른 개도국이 택 산업화 전략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 이었다(이제민 2007: 98-99). 당시 다수 개도국은 소비재 내지 경공업 위주 1차 수입체산업화를 진행 다음 후방연쇄 에 따라 생산재 부문 수입 체를 추구하는 수입체 산업화 전략을 취 데 반해, 국은 만 등과 함께 경 공업 내지 소비재 공업을 바탕으로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을 택했다. 이러 발전전략 채택은 지금에서 보면 당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60년에는 37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 학원학교 교수, 경제학, 경제 시화: 양태, 성격, 메커니즘, 함 등 다수 논저.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그렇지 않았으며, 국은 개도국 중에서 단히 예외적인 존재였다. 2) 산업정책 이러 수출지향적 발전은 수입체산업화보다 훨씬 더 시경제에 가까웠 국은 단순히 수출지향적 발전전략을 추구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유치 다. 물론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이 단순히 시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 산업을 육성하는 선별적 산업정책(industrial targeting) 을 시행하였다. 즉 초 었다. 우선 수출을 위해 필요 교통수단이나 에너지 등 회간접자본에 해 기에는 단순 노동집약적 제품을 수출했지만 다음 단계 수출을 위해 좀 더 기 서는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하고, 수출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서는 보조금 지급 등 술집약적인 제품 국내생산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정부 인센티브가 있어야 다. 1960~70년 국 정부는 이런 측면에서 충 유치산업 선별육성은 이미 1960년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1970 실히 역할을 수행하면서 강력 수출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러 형태로 수출 년 중화학공업화에서 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때 정부는 강력 중화 38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중요 배경으로 무엇보다 정치적 리더십을 꼽을 수 있 학공업화 드라이브 정책을 폈다. 정부는 선별육성 상인 중화학공업을 보호했 39 다. 즉 박정희 리더십 하에 있는 경성국가( 硬 性 國 家, hard state) 가 수출 드 을 뿐 아니라, 금융을 산업정책에 종속시켜 중화학공업화에 이용하였다. 재정 라이브를 걸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국은 부분 개도국과 달리, 번 면에서도 중화학공업에 세제상 유인을 제공하였다. 결정된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는 경성국가 였다. 국 경제개발전략, 나아가 고도성은 이러 정치적 리더십에 고려 없이는 제로 이해될 수 없다 (이제민 2007: 98-105). 남정부는 우선 수출관련 활동에 자원을 집중시키기 위 유인제도를 만들 었다. 수출 기업들은 수입물품 구매를 위 외환 보유 허용, 거 모든 수입규 제 해제 및 관세 면제 등과 같은 지원을 받았다. 정부 통제 하에 있던 은행 들은 수출기업에게 우금리로 자금을 지원했으며, 수출실적을 해당기업 신 실제로 국이 1960~70년에 실시 이러 정책은 이른바 시 실패 또 는 시 부재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정부는 자신이 민간보다 기업가적 예견력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유치산업을 직접 선별해 육성했다. 선별된 유치 산업에 해서는 국내시에서 규모 경제를 확보하고, 선발기업이 창출하는 외부효과를 보상다는 명목 하에 시에 여타 기업 진입을 제했다. 1 국정부는 금융을 산업정책에 종속시켜 유치산업을 선별 육성하는데 적극 활용했다. 이른바 관치금융 으로서 이는 적어도 원래 도만 놓고 보면, 금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용평가기준으로 용했다. 재정정책은 재정흑자를 조성하여 이들 기업에게 이 융을 왜곡(distortion) 시키거나 억압(repression) 하기 위 것이 아니라, 그 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수출기업에 조세감면 외에도 정부는 핵심산업들 로 두면 정부가 선별 육성하고 싶은 산업으로 자금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을 에 해 시적으로 별도 조세특혜를 부여하기도 했다. 기업들과 협를 것으로 보고, 정부가 산업정책적 목표 하에서 깊숙이 개입 것이다. 더욱이 통해 정부는 산업별로는 물론이고 개별기업에게도 수출목표를 설정해 주었다. 1960~70년에 국은 외자도입에 크게 존했는데 당시에 개별 금융기관이 그리고 이 목표치들은 실제 기업 활동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 스스로 신용으로 국제시에서 차입을 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부 다. 성공적인 수출기업에게는 상기 금전적인 인센티브 이외에도 국민표창이 수여되기도 했다(OECD 1994: 17-18). 1 진입을 할 수 있는 기업가는 기존 기업가 중에서 선발했기 때문에 정부 산업정책은 기업 다각화와 맞물리게 되었고, 이것은 재벌체제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정부는 또 희소 재능인 기업가적 능력을 집약적으로 이용하고 기투자를 위 내부금융시 및 내부노동시을 창출다는 관점에서 재벌형성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가적 재능에 서든, 정부에 로비에서든, 번 능력이 입증된 람은 누적적으로 유리 입에 서 게 되었기 때문에 재벌형성은 가속화되었다.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개입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자립성을 보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국정부는 이와 함께 선별된 유치산업에 해 각종 세제상 유인을 제공 이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취해 온 수단 정책, 즉 제도, 조직, 자 하는 등 재정 측면에서도 유치산업을 적극 지원했다. 또 공단을 조성하고 조 원배분정책 등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중앙집권적 계획제도라는 제도적 기반 하 기입주자에게 부지를 헐값으로 제공했는데 이는 외부효과를 상쇄하기 위 조 에 소비 희생 강제저축 메커니즘을 통해 높은 수준 자본축적을 달성 뒤 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본을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해 경제성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처럼 국 산업구조를 고도화다는 목표를 내걸고 시행된 산업정책은 러 경제성은 외적으로는 자력갱생 방식에 해, 내적으로는 정신적 무역, 재정, 금융, 산업조직, 지역개발 정책까지 얽혀 있는 종합 패키지, 나아가 자극을 통해 주민들을 동원함으로써 달성하고자 것이다. 40 하나 경제시스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제민 1998: 80-81). 냉전체제 하 회주 국가들은 체로 중공업을 우선 발전시킴으로써 선 41 1970년 들어 정부 역할은 보다 강화되었다. 중요 투자 및 그 밖 자원배 진공업국을 추월하고자 하는 정책지를 가지고 있었다. 회주 국가들은 미 분에 관 중요 결정이 정부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은행에 정부 국을 위시 서방국가와 정치 군적으로 립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 상 통제는 1960년 말부터 점차 강화되었지만 1970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후 더욱 철저하게 되었다. 비단 국내자금 용뿐 아니라 외자 도입, 공업 입지, 업종 선정까지 정부가 담당함으로써, 중점 육성 부문에 거 모든 기업 기능(entrepreneurial function)을 정부가 맡게 되었다(조 순 1992: 241) 황은 당시 회주 국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신속 경제발전을 통하여 세계 여러 민족들 속에서 자립하는 것을 국가와 민족 존망에 관계되는 시급 문제 로 판단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급속 중공업화 실이 곧 경제발전이며 빈곤 과 낙후를 벗어나는 지름길로 판단하였다(이일영 양문수 2001). 분 단 이 후 남 따라서 박정희 시 경제개발 모델은 기본적으로 정부 주도 경제개발 모 델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나아가 국 경제기적은 정부가 시을 효과적 으로 통제 결과라는 주들(표적으로는 Amsden 1989)도 결코 적지 않다. 에 있어서도 중공업 우선발전을 위 저소비 고축적 전략은 경제발전 전략 기본골격을 형성했다. 즉 소비보다 축적에 우선적 를 두면서 축적 을 보다 급속하게 증가시키려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이것은 자금이 보다 많이 경 제 궤 적 축적에 돌려질수록 생산은 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인민 생활은 보다 빨 2. 경제개발전략 리 향상될 것이라는 논리에 해 합리화되었다. 1) 경제개발전략 주요 내용 경우,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중공업 우선 전략과 자력갱생론 결 체제 기적인 목표가 회주 건설 과 체제 생존 이라면 경제 합이다. 공식문헌은 자력갱생에 해 자국 혁명을 기본적으로 자기 개발 목적은 군력 확보 강화와 경제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주체적 역량에 거해 이루고자 하는 철저 혁명적 입이며 자국 건설을 도 회주공업화 2 는 회주 완전승리 필수적 조건으로 된다. 회주 자국인민 노동과 자국 자원에 해서 추진하고자 하는 자주적 입 이라고 공업화는 회주 물질 기술적 토를 창설 강화하고 나라 경제적 설명하고 있다. 자력갱생론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원칙으로 이어진다. 자력 갱생 원칙을 기초로 자국인민 힘과 자국 자원을 동원하여 자신 기술과 2 에서는 다른 회주국가와 마찬가지로 회주건설 을 위해 공업화에 우선순위가 주어졌기 때문에 경제개발은 회주공업화와 거 같은 말이다. 자금에 거할 때에만 자립적 민족경제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력갱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생론이 외무역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에서는 외무역이 자립 창성을 강조하여 왔다. 실 어느 정도 독자성이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적 민족경제건설과 그 발전에 철저히 복무해야 하고, 따라서 자립적 민족경제 표적인 것이 첫째, 다른 회주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적 계획제도를 토에 입각해서 외무역을 발전시키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자력갱생론 도입하였지만 보다 집권도가 강 집권제를 추진 것, 둘째, 구소련과 달리 원칙하에 외무역은 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자력갱생 3 을 강조하여 온 것, 셋째, 물질적 자극보다 정신적 자극을 우선시킨 이러 자력갱생론과 결합하여 중공업 우선 전략은 다소 독특 성격 것 등이다. 을 띠게 되었다(양문수 2001). 즉 중공업건설에서 우리 당 노선은 새로운 기 하지만 경제개발전략에서 핵심적 요소는 중앙집권적 계획제도, 고축적 강 술로 비되고 주로 국내 자연자원과 원료원천에 거하여 발전하며 그리고 축적, 중공업 우선발전과 같은 자원배분 기본틀과 관련된 정책이다. 결국 42 우리 인민경제에 필요 자재, 연료, 동력 및 기계설비들을 기본적으로 국내에 경제개발 전략은 독자성을 인정다고 해도 경제전략 43 서 생산보할 수 있는 자체 중공업기지를 창설하는데 있었다. 이것은 곧 자 부분이 스탈린 그것에 꽤 가깝다는 것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 립적이고 적인 중공업을 창설하는 노선 이라고 다. 왜냐하면 자국 천 할 필요가 있다. 연자원과 원료원천에 발을 붙이지 못 중공업은 안정성이 없고 타국 경제에 존성, 예속성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경제개발전략 특징 실제로 1940~50년에 회주권내에서 이념 정치 군 경제 등 면 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던 소련 영향력은 단 것이었다. 소련은 경제성을 위 회주적인 길을 개척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최초 두 개 5개년 계획에서 소련은 급속 공업화, 빠른 경제성, 경제구조 뚜렷 분 단 이 후 남 앞에서 보았듯이 은 군력 확보 강화와 경제발전이라는 목적을 실 하기 위해서 중앙집권적 계획제도라는 제도적 기반 위에 자력갱생, 정신적 자극 우선, 고축적 강축적, 중공업 우선발전과 같은 수단을 가지고 경제개발 전환을 실했다. 더욱이 소련은 나치스 맹공에 훌륭히 견디어 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침공을 되받아쳐서 결국 제2차 세계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일정 정도 역할을 수행했다. 경 제 궤 적 전략을 전개했다. 회주제국 일반적인 경험에서 보면 급속 공업화, 군력 강화 필 특히 중앙집권적 계획제도는 고축적 강축적, 중공업 우선발전과 같은 자원 요성은 1신생 회주국가 부분이 경제적으로 낙후된 상태에서 출발, 경 배분, 분배정책을 전개하는데 딱 들어맞는 제도였다. 실제로 구소련, 중국 등 제적 후진성을 없애는 것이 중요 과제였다는 것, 2주위가 적 (자본주국) 회주제국은 이들 3가지 전략이 하나 세트로 되어 진행되었고 도 예 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도 제2차 세계전 종전 직 외가 아니었다. 이것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경제개발전략은, 전부는 아 후에 등 저개발 신생독립국이고 정권 수립 후, 미국 국과 치상태가 니라 하더라도 부분은 구소련 경제개발 전략 혹은 스탈린 공업화 모델에 지속되었기 때문에 급속 공업화, 군력 강화 필요성은 꽤 컸다. 입 꽤 가깝다고 할 수 있다(서재진 외 2004; 양문수 2001). 에서 보면 구소련 경험은 하나 모델 이 되기에 충분 것이었다. 물론 전략이 스탈린 모델 단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잘라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지도부는 1950년 말 이후 자기네 전략 독자성, 독 3 다만 구소련도, 자력갱생 정도는 아니지만, 소극적인 무역정책을 전개했고 또 수입체를 강조했었다.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더욱이 경우, 김일성 정권 수립에 있어서 소련 역할은 결정적이 며 노동당과 국가기구가 소련군 점령을 기초로 출하였다. 지도부가 소 련 모델 많은 요소들을 받아들인 것은 실 매우 당연 일이다. 중심으로 상당 경제성을 이루어냈으나 1950년 말부터 미국 원조가 줄 어들면서 심각 불황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소비재 위주 공업 건설, 기간산 업부문 및 농업 경시, 원료 과도 해외존에 따른 국내조달 가능 원자재 개발 상적 위축 등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원조 감축에 따른 원료 부 Ⅲ. 분단 이후 남 경제 전개과정 족으로 공 가동률이 급격히 하락했다. 1. 남경제 전개과정 2) 1960~70년 44 1) 해방, 국전쟁, 그리고 1950년 5 16 쿠데타로 집권 박정희 정권은 당시 국민 여망이 경제발전에 있음 45 해방 당시 남 농업은 소작농체제로 인해 생산성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을 간파하고, 이를 국가정책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집권 3개월 농촌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농지개혁은 미 군정 당시부터 가 큰 정치 경 만에, 경제성을 위해 정부 주도 하에 경제개발을 추진할 것을 발표했다. 이러 제적 이슈였는데, 좌익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우익은 유상매입 유상분배 를 주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0년 동 시행령 및 시행세칙 제정 등을 통해, 우익이 주 로 유상매입 유상분배로 매듭 지어졌다. 이와 함께 과거 일본인이 소유했던 각종 생산시설을 비롯 재산을 남 내 민간에 불하하는 것도 해방 직후 최 안 하나였다. 당시에 불하작업은 지지부진했으나 국전쟁 이후 전후 복구작업이 본격화함과 동시에 빠르게 진 맥락에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이 탄생했다. 이 계획은 기 본 목표를, 모든 경제 회적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경제 달성을 위 기반 을 구축하는 데 두었다. 이 기간 동안 연평균 경제성률은 8.5%를 기록, 목표 치를 초과 달성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 기간 동안 수출지향적 산업화전략은 뿌리를 내리고 고도성은 본궤도에 올랐다. 수출은 계획 최종년도에 당초 계 획 2배를 상회했고, 연평균 경제성률은 목표치 7%를 웃도는 9.7%를 달성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행되어 가까스로 일단락되었다. 했다. 최종년도인 1971년 산업구조는 농림수산업 24.2%, 공업 29.9%, 남은 해방 후 무질서와 국전쟁을 겪으면서 극도에 달 정치 회적 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 45.9% 구성을 나타냈다. 혼란과 경제 파탄을 경험했다. 정부는 이 기간 동안에 극심 인플레이션 이 기간 동안 경제개발전략으로서 가 특기할 만 일은 일부 중화학공 수습과, 도탄에 빠진 민생 구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고, 국민경제 기적 업 육성을 지향 산업정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67년에 기계공업육성 발전에 비전도 부족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경제발전전략을 수립하지도, 실 법 및 조선공업육성법이 제정되었고, 1968년에는 포항제철 설립이 공표되었 행하지도 못했다. 으며, 1969년에는 전자공업육성법이, 1970년에는 철강공업육성법과 석유화학 1950년는 이른바 원조경제 시 였다(유호 1992: 25-26). 1953년부 공업육성법이 각각 제정되었다. 또 1970년에는 수출자유지역설치법이 제정되 터 1961년까지 전후 경제복구기간 중 국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는 약 22 어 그 해에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이, 1973년에는 이리에 수출자유지역이 설치되 억 8천만 달러에 달했다. 남경제는 전후 4~5년간 섬유공업과 식료품공업을 었으며, 울산에 석유화학단지, 구미에 전자산업단지가 설립되었다. 이러 법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규 제정과, 정부에 공업단지 설립 등은 정부가 본격적으로 선별적 산 토 및 방향 전환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도달했다. 1980년 초중반에 업정책(industrial targeting) 을 시행하기 시작했음을 미다. 이 정책은 원 는 1970년에서와 같은 극단적인 선별적 산업정책은 상당히 후퇴했으며, 수출 래 일본 정부가 기술진보 가능성이 높은 산업을 집중육성하기 위해 1950년 목표 달성을 위 드라이브 정책도 꽤 완화되었다. 뚜렷 성과를 거두지는 못 부터 실시 정책인데, 10여년 시차를 두고 국이 이 정책을 쓰게 된 것이 했지만 재벌 중심적 구조,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기 위 정책, 은행에 정 다(조 순 1992: 239). 부 통제를 완화하기 위 정책들도 시행되었다. 남정부는 1970년 들어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본격화했다. 박정희 통 그런데 1980년 중반에 국내외 경제여건이 크게 변화했다. 특히 전혀 예상 령은 유신헌법을 제정해 기집권 길을 연 1972년 다음 해인 1973년 1월, 치도 않았던 이른바 3저 상이 나면서 국경제는 내재적 모순을 정리하기도 46 이른바 중화학공업화 선언 을 발표해, 철강, 석유화학, 조선, 기계, 비철금속, 전에 새로운 활기를 되찾을 외생적 여건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유호 1992: 47 전자 등 6개 산업을 중점육성할 것을 천명했다. 유신정권은 수출목표 달성과 38). 특히 1985년 G5 재무관 이른바 프라자 합에 따라 일본 엔화, 독 중화학공업 건설에 정권 운명을 걸었다. 그리고 앞에서 서술했듯이 정부는 경 일 마르크화 등이 폭 절상되고, 이에 따라 국 화폐가 폭 평가절하됨으로 제개발 과정에 보다 깊숙이 개입했다. 남경제는 1970년에 거시경제 지표상으로는 비교적 순항했다. 제3,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동안에 경제성은 다소 굴곡을 보이면서도 고율 성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외자도입에 근거하여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계속 추진 결과, 외채가 크게 증가했다. 또 물가상승 압력은 가중되었고, 기업경 영은 갈수록 부실화되어 남경제는 1979년에 와서는 위기에 빠졌다. 그런 상 황에서 10.26을 맞이했다. 써 국 수출 가격경쟁력이 일시에 폭 강화되어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했 다. 수출 폭 증가로 1986년에 처음으로 경상수지가 흑자를 기록했고, 그 후 흑자폭은 엄청난 증가세를 보였다. 특히 1986~88년에 다액 무역수지 흑 자가 실되어 1980년 전반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외채가 크게 줄었다. 1980년 후반 호황이 3저라는 외적 호조건에 크게 힘입었음에도 불 구하고 국회는 비효율적인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새로운 발전동력을 창출 하기 위 노력을 소홀히 하였다. 재벌은 호황기에 축적 자금을 바탕으로,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1979~80년 경제위기 이전 양적 팽창주 전략으로 회귀했다. 억눌렸던 노 3) 1980년 및 그 이후 동자들 요구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분출하여 1987~89년 이에 임금이 노 몇 년 내에 선진국에 진입하리라 기했고, 또 세계적으로 찬를 받으면 동생산성보다 빠르게 상승했다. 결국 수출증가세가 둔화되면서 1990년 이후 무 서 고도성을 지속하던 국경제는 1980년에 들어서면서 커다란 난국에 봉 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섰으며, 기업경영이 악화되고 경제는 다시 침체기를 맞 착했다. 무엇보다도 1980년에는 1962년 경제개발계획 추진 이후 처음으로 마 이했다. 이너스 성(-6.2%)을 기록했다. 그동안 경제개발과정에서 누적된 여러 가 이러 상황에서 1997년에 국은 건국 이래 최 경제위기인 외환위기를 지 구조적인 문제점에다 10.26으로 국내정치가 크게 불안정해졌고, 여기에다 맞이하게 되었다. 국은 1997년 10월부터 원화가치가 폭락하고 가용 외환 보 제2차 석유파동까지 겹치면서 국경제는 휘청거렸다. 유고가 격감하여, 외채무를 지불하기 어려운 상황, 즉 국가부도 위기에 처 결국 종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비롯 경제개발 전략 전반에 재검 했다. 국정부는 같은 해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12월 초에 IMF와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구제금융 협약에 조인했다. 195억 달러에 달하는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진전으로 국내 경제와 세계 경제 연관성은 더욱 높아지면서 동시에 기업과 국은 국가 부도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금융기관이 개방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세계적 기준에 맞는 제도정비가 이루어 1997년말부터 외환위기는 국제금융시 취약성과 외부충격, 국경제 졌다. 즉 기업 회계기준, 지배구조, 은행 BIS 비율 등 해외 투자가들이 요 구조적 문제점 및 정부실책 합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직접적으 구하는 수준에 맞게 기업 및 금융제도를 정비 것이다. 로는 국제금융시 취약성과 외부충격이라는 요인이 중요 역할을 했다. 하 금융구조조정을 통해 부실금융기관은 퇴출되고, 금융기관 경영진은 경영에 지만 그동안 경제성과정에서 누적되었던 국경제 구조적 문제점, 특히 해 책임을 지는 구조로 바뀌어나갔다. 게다가 외국계 은행 진출 확로 경 재벌 과잉투자, 금융기관 부실 출심, 정부 금융건전성 감독 부 쟁이 격화되는 등 은행 경영 여건도 상당 변화가 발생해, 정치권 및 관료 48 재라는 제도적 또는 미시구조적 취약성이 없었다면 금융위기가 발생하지 않았 부당 외압이 종전보다 어려워졌다. 자율과 책임에 바탕을 둔 시규율이 강 49 을 것이다(이제민 1998; 이헌창 2014). 화되었다. 편 IMF는 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긴축적 거시경제정책, 구조조정 외환위기 이후 재벌체제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1980년 기준 30 재벌 중 및 외개방 확를 요구조건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정부는 금융 기업 노동 공공부문 구조개혁을 추진해 왔다. 더욱이 김중 정부는 IMF가 요구 이상으로 외개방을 추진했고, 이는 외환자유화, 자본자유화, 무역자유화 로 이루어졌다. 1997년 외환위기는 국 재벌체제, 금융산업, 노동시 등 경제질서 전 반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을 뿐 아니라, 정치질서, 회질서, 식구조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박정희 집권기에 구축된 경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변 2007년까지 라진 재벌은 모두 10개에 달다. 도산 재벌은 모두 무리 영 업확 추구로 인 과도 부채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마불( 大 馬 不 死 ) 신화는 라졌다. 재벌은 부채에 존하여 외형 확을 추구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다만 2000년에 재벌 지배구조와 경 영 투명성을 개선하기 위 제도적 개혁이 효과를 거두었는지에 해서는 논 란이 계속되고 있다.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화시킴으로써 1960년 고도성 시동 다음으로 중요 미를 가진 경제적 2. 경제 전개과정 변혁을 몰고 왔다(이헌창 2014: 631). IMF 구조개혁 요구는 건국 이래 최 경제위기와 맞물리면서 국회 타성과 이해관계집단 반발을 극복할 수 있는 강력 무기를 제공하여, 세 계적 기준에 부합하는 시경제질서로 향 변화가 진행되었다. 금융실명제, 시제도 정비, 민주화 진전 등으로 인 정경유착 약화는 시 건전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는 귀중 환경을 제공했다. WTO 가입(1995), OECD 가입(1996), IMF 구제금융 협약(1997) 등을 계기 로 국은 이른바 세계적 신자유질서에 동참하게 되었다. 외개방 폭적인 1) 해방, 국전쟁, 그리고 1950년 해방 직후 당국은 회주 경제체제 구축을 위해 먼저 토지개혁에 착수 했다. 1946년 3월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토지개 혁을 실시, 단 20여 일만에 이를 매듭지었다. 이어 같은 해 8월에 주요 산업 국 유화 법령을 발표하여 주요 공, 기업소, 산, 발전소, 운수, 체신, 은행, 상 업 및 문화기관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 결과 전체 산업 90% 이상 인 1,034개소 산업시설이 회적 소유로 전환되었다. 은 해방후 일본인 철수, 국토 분단 혼란으로 인해 1946년 공업생산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이 44년에 비해 71.7%나 감소했으나 1947~49년에 연평균 49.9% 높은 성 노선과 국방 경제 병진노선이 등해 군비 지출 부담이 더 늘어났다. 률을 기록하면서 해방 전 공업생산수준을 거 회복했다. 이 시기 고성 이에 따라 1966년 10월 당 표자회에서 계획기간을 3년 연키로 결정했 은 구소련으로부터 자본과 기술 원조, 비교적 풍부 전력정 등에 힘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초 계획목표는 전반적으로 미달된 상태에서 계획은 입은 바 크다. 종료되었다(표 1 참조). 당국이 그동안 어느 정도 발표해왔던 경제통계 전후복구 3개년 계획(1954~56년)은 산업생산에 있어서 전쟁 이전 수준을 회 발표를 중단 것도 바로 이 시기부터라는 실로부터도 이 시기 경제적 성 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어 실시된 5개년 계획(1957~60년)은 회주 과를 유추할 수 있다. 공업화 토를 구축하고 주민들 식 주 문제를 해결다는 목표를 내 이어 은 1971년부터 6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이 기간 중 가 특기할 만 50 걸었다. 이 시기에 은 중공업 우선정책을 내세우게 되었다. 중공업 우선정 실은 1972년부터 74년까지 서방세계로부터 들여온 규모 차관 등을 토 51 책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에서 채택된 이후 줄곧 로 량 기계 플랜트를 도입 것이다. 그런데 1974년 오일쇼크 여 경제개발 기본노선으로 추진되었다. 은 또 이 시기에 이른바 생산관계 파로 수출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은 서방세계에서 도 회주적 개조를 완료했다. 1954년부터 농업 집단화 등에 나서 1958년 8월에 농업 협동화, 수공업 및 중소상공업 협동화 등 생산수단 회주 적 소유화를 매듭지었다. 3개년 계획과 5개년 계획은 연평균 공업성률이 30~40%에 달하는 큰 성과 를 거두었다고 당국은 발표했다(표 1 참조). 특히 5개년 계획은 국민소득, 공업총생산, 농업총생산 등 면에서 성률이 목표치를 크게 웃돌아 전체적으 로 계획목표를 2년 앞당겨 달성 것으로 발표되었다. 외부 관찰자들도 이 시 입 차관 등을 제때 상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외채문제 가 표면화되었고 이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특히 이 1985년부터는 이자마 저 상환하지 못하게 되자 서방세계 채권단은 1986년 을 파산국가 로 지정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 문제들로 인해 당초 계획목표 달성이 힘들게 되었다. 은 1975 년 8월에 갑자기 6개년 계획 목표를 1년 6개월 앞당겨 달성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철강, 시멘트 등 일부 분야에서는 실적이 부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기 경제 고도성에 해서는 별다른 이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 이 있다. 이에 따라 은 그 이후 무려 2년간 완충기를 설정, 미진 부분을 보 시기 고성은 전후복구기라는 특수 시적 성격도 있겠지만 구소련, 중국 충하는데 주력함으로써 실상 계획기간을 1년 연했다. 등 회주 국가들 규모 원조와 천리마 운동 등 범위 중동원체계 등 은 인민경제 주체화, 화, 과학화를 기본과업으로 설정하고 1978 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년부터 제2차 7개년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은 계획 마지막 년도인 1984년이 다 가도록 이 계획 추진결과에 해 일체 발표가 없다가 1985년 2) 1960~80년 2월 16일에 갑자기 제2차 7개년 계획이 84년 말을 기해 완료되었다고 뒤늦게 은 1961년부터 제1차 7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1950년에 경제개발 발표하였다. 이에 해 외부세계 관찰자들은 이 기간중 공식통계 중요 축 하나였던 중공업 우선정책은 60년 초에 약간 완화되는 듯 했으 신뢰성에 해 강 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계획도 종료된 뒤 다음 나 1962년 10월 쿠바태 이후 다시 강화되었다. 더욱이 이 때부터 4 군 경제계획에 착수하기까지 2년간 완충기를 거쳐야 했다.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제3차 7개년 계획(1987~93년)은 계획목표가 몇 개 분야를 제외하고는 이전 Ⅳ. 남 경제에 평가 경제계획보다 하향 책정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경제상황이 그만큼 어려워졌으며 이러 상황을 타개할 뚜렷 방안을 찾아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 남 경제에 평가 1) 남 경제 성과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 1960년 중반 이후 50년 동안 남 경제가 이 52 3) 1990년 및 그 이후 이러 상황 하에서 1990년 이후 구소련을 비롯 회주권이 붕괴하게 되 고 이에 따라 은 외거래 기반 상실이라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 해 은 미증유 심각 경제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은 1993년 12월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향후 3년간을 완충기로 설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은 완충기가 종료 된 1996년 이후 지금까지 새로운 기 경제계획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재 이 당면하고 있는 심각 경제난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고, 더욱이 외부세계 도움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길도 마땅히 없다는 인식에 근 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계획 3개년 계획 (1954~56) <표 1> 주요 경제계획 목표와 실적 (단위: %) 국민소득증가율 공업생산증가율 곡물생산증가율 목표 실적 목표 실적 목표 실적 20.5 30.1 37.5 41.8 10.8 7.1 루어낸 성과는 실로 눈부신 것이다. 남 1인당 명목 GNI(Gross National Income, 국민소득)는 지난 1960년 80달러에서 1995년에는 1만 달러를 넘어 섰고, 2014년에는 28,180달러를 기록했다(그림 1 참조). 또 남 경제규 모(명목 GDP)는 1970년 세계 38위에서 2013년 재 15위로 상승했다. 국은 전형적인 개도국에서 출발해 이제는 중진국 단계를 넘어서 선진국 문턱에 도 달하였다. 더욱이 국은 일부 기업이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 중간 내지 중상위 기술 산업에서 세계적인 유효경쟁자로 등할 수 있게 되 었다. 20세기 후발산업화 가 성공적인 례국가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림 1> 남 1인당 국민총소득 추이 (단위: 달러) 30,000 25,000 20,000 15,000 10,000 53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5개년 계획 (1957~60) 1차 7개년 계획 (1961~70) 6개년 계획 (1971~76) 2차 7개년 계획 (1978~84) 3차 7개년 계획 (1987~93) 17.1 20.9 21.1 36.6 5.6 7.2 15.2 7.5 18.1 12.8 8.2 2.7 10.3 9.2~10.3 14.0 16.3 5.8~7.0 8.2 9.6 8.8 12.1 12.2 2.4 2.4 7.9-9.6-4.9 - 주: 발표치, 자료: 통일부 5,000 0 1961 1963 1965 1967 1969 1971 1973 1975 1977 1979 1981 1983 1985 1987 1989 1991 1993 1995 1997 1999 2001 2003 2005 2007 2009 2011 2013 자료: 국은행 국 산업화 전략은 외부지향적 산업화로 출발하였고 국제분업 체계에 편 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국제하청 등을 통해 수출을 했으나, 이런 지위 에서 벗어나 고도기술산업에서 선진국 기업과 정면 경쟁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목표로 삼아 나아갔고, 이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을 비롯 동아시아 NICs 만이 이러 기회를 활용할 수 있었다. 국은 1960 국은 직접투자 유치와 국제하청 중심으로 산업화를 추진 동남아제국이나 부 년 중반 다른 개도국이 수입체산업화를 추구하고 있을 때 수출지향적 산업 품생산 내지 틈새시 공략을 위주로 만 등과는 달리 일본모델을 보다 충 화 전략으로 전환함으로써 준지 를 누릴 수 있었다(이제민 2007: 101-103 ). 실히 따른 셈이다. 즉 자신 상표와 자신 기술력을 근거로 선진국 기업과 물론 국이 당시 그러 전략을 채택하게 된 것은 역적으로 형성되어왔던 경쟁할 수 있는 기업 육성이라는 점에서 국은 산업화 역상 일본 다음으 국경제 구조적 특성, 그리고 1960년 당시 국 상황과 무관하지 않 로, 개도국으로서는 아직 유일하게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다. 해방과 분단은 국만 힘으로 단기간 내에 공업화를 달성하기에 어려운 국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으로 빼놓 경제구조적 특성을 결과하였다. 해방은 기존 일본과 분업연관관계를, 분단 54 을 수 없는 것이 1960~70년 매우 양호 외적 여건이다(이제민 1995: 은 기존 남 이 분업연관관계를 각각 단절시켰다. 55 27-28). 아울러 미국으로부터 막 원조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무상원조가 감축됨 첫째, 세계경제가 유례없는 고도성과 무역 확를 실했다. 1950년부 에 따라 수출 증 외에는 안이 없었던 것이 수출지향적 발전으로 눈을 돌리 터 1973년까지 OECD경제는 연평균 4.9% 성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직전 시기이자, 세계 자본주 역상 최악이자 최인 공황기였던 위기 시 (1913~50년) 연평균 1.9% 성률은 말할 것 없고, 그 이전 시기인 황 금 시(golden era, 1870~1913년) 2.5% 성률보다 훨씬 높은 것이다. 또 1950~73년 연평균 수출 증가율도 8.6%로서 1913~50년 1.0%와, 1870~1913년 3.9%를 크게 웃돌았다. 둘째, 다자주에 기반을 둔 안정적인 세계경제질서가 2차세계전 이후에 게 된 중요 요인이었다. 일본과 특수 관계, 즉 지리적 근접성과 식민지 지배를 통 관계 등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1960년 들어 미국이 원 조를 줄이는 신 개도국으로부터 수입에 시을 개방 것도 무시할 수 없 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 남 경제 문제점 및 과제 1960~70년 강 기적 으로 불리는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국은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형성되었다. 이러 질서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전 혼란으로부터 세계 자 막 비용을 치러야 했다. 이러 비용은 정경유착, 관치금융, 부실기업, 본주를 지키기 위해 미국 주도 하에 구축되었다. 이러 상황이 개도국에게 재벌체제, 지(이권)추구 등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던 용어들에 압축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수출지향적 산업화에 유리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 질서 표출되고 있다. 금융기관과 기업은 범위 도덕적 해이 상을 나타냈으 확립이 전후 호황과 무역 확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간접적으 며, 규모 금융 스캔들과 금융 및 기업 부실화는 국경제 고질적인 병폐 로 도움이 되었고, 전후 다자주적 무역을 위 조직인 GATT가 선진국과 개 가 되어 버렸다. 도국간 비칭적인 무역관계를 허용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결국 다른 개도국과 마찬가지로 국에서도 시 실패 를 교정하기 위 실 2차 세계전 이후 국제 정치 경제 질서는 크게 변화했다. 특히 개도국 정부 개입은 정부 실패 를 가져왔다(이제민 1998: 83). 그리고 이러 에게는 세계자본주 체제에 편입되는 것, 특히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을 채택 국경제 고질적 병폐는 앞에서 보았듯이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온 내적 요 하는 것이 유리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런데 개도국 중에서는 오직 국 인으로 작용했다.
기획 특집_복, 분단 70년 그리고 통일 2 문제는 과거 박정희 시 경제성 방식을 가지고는 앞으로 지속적인 성 국 고도성 시는 종언을 고했다. 1963년부터 시작된 고도성 시 을 이뤄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동안 고도성을 이끌어온 요인으로서 국 는 외환위기가 발생 1997년에 끝났다. 경제연구원 추계에 하면 내적으로는 풍부 노동력, 저렴 임금, 기업 왕성 투자욕, 강력 정부 국 잠재성률은 1980~88년에 9.1%, 1989~97년에 7.4%, 1998~2007년에 지원을 들 수 있고, 국제적으로는 용이 기술도입, 자유무역을 보 환경을 4.7%, 2008~2012년에 3.8%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또 경제연구원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이 라졌다. 이제는 노동력(특히 고급 경제전문가들을 상으로 설문조 결과에 따르면, 국경제 가 큰 인력)이 부족하고, 임금은 높아졌고, 정부지원은 약화되었다. 해외에서 기술 내적 제약요인은 투자 부진과 인구 감소에 따른 성잠재력 저하 로 지적되었 도입도 어려워지고 국제환경도 종전보다 불리하게 되었다. 재 국경제가 더 다(주원 2014). 56 욱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종전 압축성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 1960~80년는 고도성, 실업율 감소, 중산층 확 등 점에서 국 57 요인인 자생적 성요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조 순 1991; 유 경제 황금시였지만 1990년 들어서는 이 황금시가 끝나자마자, 국은 호 1992). 실 이러 점은 일찍이 1990년부터 지적되어 왔고, 또 지금도 소득불평등 확와 고령화시 도래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계속 지적되고 있는 바이다. 박정희 시 경제정책은 1979~80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변화하기 시 작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변화 요체 는 국가주도적 개발전략이 시중심주 정책으로, 제적 개방체제가 전면적 개방체제로 전환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회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세계적 기준에 부합하는 시경제질서로 향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부실기업, 재벌체제, 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혹 구조조정이 이뤄지면서 경쟁력이 있는 부문과 없는 부문 간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이에 따라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기 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성 임금 복지 수준 격차는 갈수록 커졌다. 나아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또 차례 구조조정도 산업과 소득 양극화 상을 심화시켰다. 아울러 전체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에 3.8%에 불과 했으나 2000년에는 7%를 넘어섰고, 2010년에는 11%에 달하였다. 아직 선진국 분 단 이 후 남 경 제 궤 적 (이권)추구 등 국경제 고질적 병폐들도 종전보다는 완화되었다. 에 채 진입하지도 못 상태에서 고령화시를 맞이 것이다. 소득불평등 하지만 이러 전환은, 정부 규율은 해제하면서도 정작 시 규율은 제로 확와 고령화 심화는 회복지 확를 요구다. 국은 잠재성률이 하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중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기업경영 불투명 락하는 가운데 복지재정을 확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 금융 불건전성, 정치권과 관료 부당 외압, 만연 도덕적 해이 등과 (이헌창 2014: 667-669). 같이, 시 공정성과 효율성을 저해하는 요소는 방치 채, 정부 규제 조 정 기능을 급속히 약화 해체시킨 것이다. 그래서 행정규제 완화가 시질서를 2. 경제에 평가: 성과와 문제점 건전하게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이헌창 2014: 631-634). 경제실적은 기적인 시야에서 보면 성률 기 하락 경향이다. 국회에서 세계적 기준에 부합하는 시경제질서 확립은 여전히 크나큰 과 1950년에 고속성을 기록 경제는 60년부터 성이 둔화되기 시작 제로 남아 있다. 해 70년 전반,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지만 70년 후반 또는 80년 전반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