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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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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연수용교재 선거로본대한민국정치사

광주시향 최종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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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이후 조성된 열린 정치공간의 가능성은 5 16쿠데타로 봉 쇄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 만 이 시기 동안 경험한 민주주의, 진보의 가치는 이후 긴 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특집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홍석률 5 16쿠데타의 원인을 보는 시각 1960년 4 19민주항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후 보다 민주적인 장면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일 년도 가지 못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과 일부 청년장교들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이후 한 국 사회는 근 30년 동안 군장교 출신 인사들이 권력의 핵 심을 차지하는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통치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 5 16쿠데타의 발생 원인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장면 정권의 부패와 무 능, 4 19 직후의 사회 혼란 때문에 군부 쿠데타가 불가피 했다고 한다. 반면 일부는 당시 한국군 내부의 심각한 승 진정체 문제로 인한 소장 장교집단의 불만에서 5 16쿠데 타가 촉발된 원인을 찾는다. 일부는 5 16을 눈부신 경제개 발을 가져온 근대화 혁명의 첫걸음으로 이야기하며, 반면 홍석률 _ 성신여대 교수, srhong@sungshin.ac.kr [ 86]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87]

일부는 5 16을 정치화된 군인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일 으킨 헌정 질서의 유린 행위라고 본다. 한편 한국군의 작 전지휘권을 미군 장성이 갖고 있었던 만큼 미국의 책임 문 제도 5 16쿠데타의 원인과 결부되어 많은 논쟁을 양산하 고있다. 역사 속에 벌어진 사건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어느 한 원인만으로 단선적으로 설명 하는 것은 항상 문제를 야기한다. 여러 원인이 중첩되어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회과학자들은 주로 여러 원 인들을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로 나누어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즉 주된 원인을 독립변수로 놓고, 나머지는 종속변 수로 하여 원인을 서열화하여 정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실질적으로 독립변수는 존재하기 어렵 다. 역사는 다양한 변수와 가능성 속에서 인간들에 의해 형성된다. 여타의 변수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 재하는 변수란 현실 속에서 존재하기 어렵다. 역사적 흐름 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원인과 변수들의 거미줄 같은 그물 망 속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거미줄도 자세히 보면 기틀이 되는 굵은 줄이 있고, 가는 줄이 있듯이 그러한 차 원에서 중요한 원인과 부차적인 원인을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른바 내인( 內 因 )론과 외인( 外 因 )론의 문제도 마찬가 지이다. 최근 5 16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책임이 미국에 있는지, 아니면 장면이나 윤보선 등 한국 정치지도자에게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른바 내인론과 외인론이 대립하는 논쟁구도는 해방 직후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의 원인 규명을 두고도 벌어졌던 것으로 한국 현대사를 이야 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내인과 외인을 이분 법적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틀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국 현대사의 흐름을 볼 때 외인과 내인은 기본적으로 중첩될 수밖에 없었 다. 분단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한국인 내부의 좌우대립이 분단을 발생시 켰다는 내인론이 있고, 반면 미 소의 냉전을 강조하는 외인론이 있다. 그 러나 실질적으로 해방 직후의 한국인 사이의 좌우 갈등은 순수하게 내부적 으로 진행된 것이라기보다는 38선을 경계로 미 소 양군에 의해 분할 점령된 상태 그리고 각 점령 주체들이 갖고 있었던 상이한 정책 때문에 더욱 증폭되 었다. 또한 이른바 모스크바 3상 결정을 둘러싼 논란에도 나타나듯 한국인들 의 정치적 동향이 강대국의 정책 수행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외인과 내인은 따로 떨어져 있기보다는 함께 뒤엉켜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양자를 분리하고, 그 중 어느 것이 주된 원인이냐를 따지 는 방식은 역사를 설명하는데 그리 유용한 것이 아니다. 5 16쿠데타가 왜 발생했고, 성공했는가 라는 문제도 다양한 변수들과 원인들을 독립적으로 분리시켜 보기보다는 상호 연관 속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면 정권기 한국 사회의 동향과 5 16쿠데타 5 16의 발발 원인으로 주로 많이 이야기되는 것이 장면 정권기 사회 혼란 이다. 4 19 직후 한국 사회는 갑작스러운 민주화의 과정에서 그동안 표출되지 못한 온갖 불만과 불평,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무절제하게 분출되 었고, 이에 극심한 사회 혼란이 있었으며, 부패 무능한 장면 정권은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5 16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장면 정권기 사회 혼란 때문에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거의 상식적인 차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러한 설 명은 일단 쿠데타가 준비되고 발생하는 구체적인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는 난점이 있다. [ 88]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89]

쿠데타 지도자 박정희는 이미 4 19 직전에도 쿠데타를 계획했고, 그 전의 1950년대에도 쿠데타를 생각하고, 이미 주변 인물들을 규합해 나가고 있었다. 5 16을 주도한 세력 들 스스로가 밝혔듯이 이들이 쿠데타의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한 것은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회합부터 였다. 이때 박정희와 소장 장교집단들은 쿠데타에 필요한 구체적인 준비와 역할분담을 했고, 조직적으로 동조자들 을 포섭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충무장 회합이 있던 9 월 10일은 장면 정권이 출범한지 보름 정도밖에 지나지 않 은 시점이었다. 또한 쿠데타 주도세력들이 장면 정권기 사 회 혼란의 가장 대표적인 양상으로 지목하는 민간 통일운 동 같은 것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장면 정권기의 사회 혼란이 5 16쿠데타를 일 으킨 주체들이 거사를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 로 작용했 다고 보기는 일단 어렵다. 또한 장면 정권기의 이른바 사회 혼란 은 실질적으로 너무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다. 4 19 직후 민주화의 과정 에서 각종 사회운동과 저항이 분출된 것은 사실이었고, 그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도 사실이었 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기존 헌정질서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을 정도의 위기적 상황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 도 많다. 각종 데모는 확실히 1961년에 들어서면서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있었고, 데모가 많았다고는 하지만 그 양상이 그 리 과격한 것도 아니었다. 장면 정권기 가장 과격했던 데 모로 이야기되는 것은 이대 악법( 二 大 惡 法 ) 반대운동 과 정에서 1961년 3월 22일 서울에서 발생한 야간 횃불시위 였다. 3 22시위는 당시 언론에서 아주 과격하고, 극단적이며, 위험한 데모 로 언급되었다. 그런데 3 22시위의 양상은 대규모 군중집회 후 야간에 횃 불을 들고 시위를 한 것이었다. 횃불시위라는 것이 대단히 자극적이기는 했지만 폭력사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일부 시위대가 장면 총리 의 사저가 있는 명륜동으로 향해 가다가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하고, 경찰은 이에 맞서 20 30발의 최루탄을 발사한 것이 전부였다. 해방 직후 시위의 양상이나 이후 군사독재정권기의 시위 양상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시위 자체가 그리 과격하고 폭력적인 것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당시 사회혼란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것이 민간 통일운동이다. 일부 논자들은 통일문제 같은 민감한 문제가 장면 정권기에 전면적으로 쟁점화 되어 보수와 진보 사이에 양극화가 심각하게 나타났고, 때문에 처음 시작 된4 19 직후의 유약한 민주주의가 결국 파탄이 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와 통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보수와 진 보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이 표출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갈등의 표 출 자체가 양극화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의견 차이와 갈등이 더욱 그 격차를 넓혀가고, 폭력화되는 양상을 보일 때 양극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통일 논의의 과정을 보면 보수 정치인들 중에서도 일부는 민간 통일운동 세력의 요구를 제한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혁신적인 정책 제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보수야당이었던 신민당 내의 일부 소장 파 의원들은 서신교환 등 제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획기 적이었던 남북교류를 주장하여 당 중진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또한 당 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폭력적인 대결로 가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면 1961년 5월 13일, 민간 통일운동단체였던 민족 자주통일중앙협의회는 서울운동장에서 대학생들의 남북학생교류 제안을 지지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 후 일부 참가자들은 이 땅 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하였다. [ 90]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91]

반면 반공단체의 회원들은 스피커를 장착한 지프차 등을 동원하여 시위 대열을 따라가며 이 땅이 뉘 땅인데 빨갱 이가 설치느냐 라는 구호를 외쳤다. 양자의 입장 차이는 아주 극단적으로 표출되었지만, 무력충돌이나 폭력사태 같은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장면 정권이 통일운동 및 진보적 정당과 사회단체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하여 데모 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을 만들려고 할 때 진보 세력들 은이를 이대 악법 으로 규정하고 전국 중요 도시에서 반 대시위를 벌였다. 이때 반공단체들은 이대법( 二 大 法 ) 제 정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양자는 같은 날, 같은 장 소에서 집회 및 시위를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양자 사 이의 심각한 무력충돌은 없었고, 폭력사태도 발생하지 않 았다. 민주화가 많이 진척되었다고 하는 지금도 과연 이러 한 상황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속에서 항상 반복되는 것이지만 왕조 또는 정권의 교체가 있을 때마다 새로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은 자신들 의 거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과거의 통치자들의 부패와 무능,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우 리가 흔히 승자에 의한 역사왜곡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러한 측면이다. 당시의 구체적인 실상을 볼 때 장면 정권 기의 사회 혼란,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 등은 실질적으로 너무 과장된 측면이 있다. 다만 당시에 각종 사회운동과 저항이 분출된 것은 사실이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표출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저항과 갈등의 표출 자체를 싫어하는 수구적인 세력은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 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쿠데타가 준비된 정황을 볼 때 5 16쿠데타 주체세력들이 거사를 일으킨 동기로 작용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주 류 기득권 집단이 헌정질서를 유린한 쿠데타를 수용하도록 만드는 원인으 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장면 정권기의 사회 혼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쿠데 타가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하나의 유인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인요인은 기본적으로 승자에 의해 너무 과장된 측면이 있 다. 따라서 이를 너무 강조하여 쿠데타라는 헌정질서의 유린행위를 합리화 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명분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차 원에서도 문제가 있다. 1950년대 한미군사동맹과 한국군의 정치화 5 16쿠데타의 원인을 4 19 이후의 단기적인 국면 속에서만 설명해서 는 곤란할 것이다. 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독재정권이 장기적으로 유지된 배경에는 한국전쟁 이후 군의 과도한 성장과 정치화, 또한 이것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한미군사동맹 관계의 문제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어떤 역사 적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규명할 때 이를 불러일으킨 직접적이고, 단기적 으로 작용하는 원인도 중요하지만 그 배후에 존재하는 구조적이고, 장기적 차원에서 누적된 원인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1953년 휴전 직후, 한국군은 무려 72만 병력을 갖게 되었다. 휴전으로 미군은 2개 사단만 한국에 남고, 나머지 사단은 모두 철수하였다. 그 공백 을 채우기 위해 한국군은 오히려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병 력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였고, 원조경제는 군사적 성격이 강했다. 원조물자를 판매하여 마 련된 대충자금의 중요 부분은 72만 한국군을 유지하는데 사용되었고, 이 것과는 별도로 미국이 무기나 탄약들을 직접 군에 제공하는 군사원조도 진행되었다. [ 92]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93]

군이 나라의 물적, 인적 자원을 집중하고 비대화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에도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는 현상도 1950 년대에 이미 나타났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으로 이 승만 정권과 미국이 갈등을 보였을 때, 이용문 작전국장을 핵심으로 한 육군본부의 일부 장교 집단들이 쿠데타를 모 의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 박정희는 이용문 바로 밑인 작전차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에 반대하 여 미국과 갈등을 일으켰다. 휴전을 전후하여 미국 정부는 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통제를 떠나 단독북진할 경 우에 대비하여 이른바 에버레디(ever-ready) 계획이라고 하는 비상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 내용은 이승만 대통 령이 미군의 작전통제권을 떠나 단독북진 같은 것을 시도 할 경우, 한국군을 동원하여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낸다 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수립과정에서 한국군은 자연 스럽게 한국 정치의 구도를 결정하는 하나의 집단으로 부 각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에버레디 계획의 존재는 일급비 밀이었지만, 한국군 고위 장성들과 일부 고위 정치인들은 그 당시에도 이러한 계획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야당 지도자 조병옥은 후일 국회에서 휴전 때 미국 이 이승만 대통령을 폐위( 廢 位 ) 하려 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1950년대 한국을 통치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여든을 넘긴 고령의 지도자였다. 대통령이 언제 죽을지 모 르는 상태에서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 정부는 이승만 이 후의 한국의 권력구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검토하 는 보고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이러한 보고서들은 거의 빠 짐없이 이승만 사후에 군이 정치에 개입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능성 있는 변수의 하나로 취급했다. 1959년 미국 상원외교위원회가 콜론 협회 에 의뢰하여 동아시아 정세를 조사하여 작성된 보고서에도 한국에서 군부 쿠데타 가능성이 언급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콜론보고서는 국내에 도 보도되어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4 19 직후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군부 쿠데타설이 항간에 떠돌기도 했다. 군이 정치에 개입할 조짐은 4 19 이후에 시작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었고, 이러한 군의 정치화 조짐들은 항상 한미군사동맹 관계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처 럼 1950년대부터 진행된 군의 비대화, 정치화의 흐름은 5 16쿠데타의 장 기적 차원의 원인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정군( 整 軍 ) 운동과 쿠데타 세력의 결집 5 16쿠데타를 주도한 장교 집단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어 떻게 결집될 수 있었을까? 5 16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한 대령, 중령급의 소장 장교집단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기수로는 5기생, 8기생들이 주축이었다. 이 중 5기생들은 박정희가 육군사관학교 교 관으로 있을 때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5기생들은 병력을 동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육사 8기생은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 로 동기생 숫자가 8백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육사 기수 중에는 최대 집단 이라 할 수 있었다. 육사 8기를 우등으로 졸업한 생도들은 곧바로 육군본 부에 배치되었다. 이들이 배치될 무렵 박정희는 좌익 프락치 혐의로 체포 되었다가 주변 인사들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예편되어 육군본부에 서 민간인 신분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처조카였던 김종필을 중심으 로 한 육사 8기생들은 4 19 직후 일종의 군 내부 정화운동이었던 정군 운 [ 94]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95]

동의 주축이 된 집단이었다. 8기생들은 실제 병력 동원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지 만 많은 장교 집단을 포섭하여 쿠데타의 조직과 기반을 넓 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데타에 가담한 5기생 집단 은 박정희 개인과의 관계 속에서 쿠데타에 참여했지만, 서 로 횡적인 연대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8기생 집단 은 수적으로도 많았을 뿐 아니라 참여자들 사이의 횡적인 연대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쿠데타 이후 권력장악 과정에 서 거사에 참여한 장교 집단들 사이에 엄청난 파벌투쟁이 있었지만, 실제 박정희와 함께 권력을 잡은 것은 8기생 집 단이었다. 그밖에 박정희가 개인적으로 포섭한 여러 장교 들이 쿠데타에 참여했다. 5 16 거사 때 많은 병력을 동원 했던 해병대 세력의 경우는 원래 독자적인 쿠데타를 추진 하다가, 박정희가 주도하는 그룹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5 16쿠데타에 참가한 장교 집단은 출신 지 역, 해방 전의 군경력, 병과, 출신 배경, 교육 배경 등에서 대단히 다양했다. 전두환이 주도한 12 12쿠데타의 경우, 경상도 출신의 육사 졸업생을 주축으로 하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쿠데타 주체세력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 러나 5 16쿠데타 주도 세력들은 이러한 사조직 같은 것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또한 이전에 어떤 특정 파벌을 구성 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한국군의 주류는 만주군 출신 장교 집단들이 형성했다. 일본육사 출신 또는 중국군 출신 장교 집단이 있었지만 이들은 수적으로나 영향력 면에서 만주 군계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다. 한국군의 주류 장교집단은 만주군계 중에서도 주로 이북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형 성되었다. 즉 백선엽이 주도하는 평안도파와 정일권이 주도하는 함경도파 가 1950년대부터 군 요직을 차지하고 중요 파벌을 형성하였다.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이기는 했지만 경상도 출신이고, 좌익경력 때문에 이러한 파벌 에 가담하거나 중요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5 16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 대부분은 이와 같은 한국군 주류 파벌집 단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쿠데타 주도 장교집단은 한국군 내부에서 비 주류이자 불만세력이었고, 고위 장성집단이 아니라 영관급 소장 장교집단 이었다. 박정희가 이들 세력을 결집해서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조 직이나 파벌의 힘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사조직과 파벌은 서로 밀고 당겨 주는 인사상의 특혜를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것인데, 박정희는 이러한 것을 제공할 위치에 있지 못했다. 박정희는 4 19 직전에도 쿠데타를 기획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쿠데 타에 필요한 충분한 세력을 규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광범위한 소장 장교집단을 규합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4 19 직후 한국 군 내부에서 벌어졌던 정군 운동이었다. 4 19 직후 군의 소장파 장교집단 들은 선배 장성급 장교집단들이 이승만 정권기에 군에 만연된 부패와 부정 선거에 책임이 있으니 사퇴하라는 이른바 정군 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정희 소장은 이승만 하야 직후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용퇴할 것을 건의하는 서한을 보내 이와 같은 소장파 정군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로 이미 부각되 어 있었다. 당시 소장파 장교집단의 정군 운동은 4 19 직후 민주화의 기운을 타고 있는 것이었고 나름대로 명분이 있는 것이었다. 한편 정군 운동은 승진정 체라는 당시 한국군 내부의 특수한 사정과 결부되어 소장파 장교집단의 현 실적인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군정기 한국 군 창설의 모태가 되었던 군사영어학교 출신과 육사 초기 기수 장교들은 급속한 승진을 거듭했다. 한정된 장교자원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전쟁으로 군이 급격히 팽창하다보니 대단히 빠르게 장성 진급을 했던 것이다. 한국 [ 96]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97]

전쟁기 육군참모총장은 모두 30대의 청년들이었다. 그러 나 전쟁이 끝나자 그 밑의 육사 5기생, 8기생 장교들은 극 심한 승진정체를 겪어야 했고, 선배들과는 달리 빨리 별을 달지 못하고 장기간 영관급 장교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 선배 장성집단이 나이라도 많았으면 이들에게 희망 이 있겠지만 일찍이 별을 단 선배장교들과 5기생, 8기생은 현저한 계급 격차에도 불구하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일찌감치 장성으 로 진급하여 5 16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 과 육사 8기생으로 중령으로 있던 김종필은 단 세 살 차이 였다. 이들은 군 내부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장성 진급 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소장파 장교집단이 정군 운동을 명분으로 선배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19 직후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허정과 이후 권력을 장악한 장면 총리는 모두 선배 장성집단이 퇴진하고, 소장 장교집단들이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새로 등장한 장면 정권의 경우에 가급적 기존 고위 장성들을 교 체하고 새로운 인물을 세우는 것이 군의 정권에 대한 충성 도를 높이는 데에도 필요했을 것이다. 때문에 장면 총리는 집권 초기부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의 협의 하에 가 급적 광범위한 군 인사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매 그루더를 비롯한 미군 장성들은 경험 있는 지휘관이 갑자 기 정치적인 이유로 교체되는 것은 군 전력의 약화를 가져 온다는 이유를 들어 선배 장성들의 퇴진을 완강히 반대했 다. 미군 장성들에게 당시 한국군의 고위 장성들은 한국전 쟁 때 같이 싸운 전우들이었고, 때문에 이들이 정치적 변 동 때문에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정군 운동을 둘러싼 장면 정권과 미군 장성들의 갈등은 미 국방부 군사 원조국장 팔머가 방한하여 더 이상의 고위 장성의 퇴진은 없어야 한다. 고 주장하자, 장면 정권에 의해 새로이 참모총장에 임명된 최경록이 내정 간섭이라고 항의한 것에도 나타나듯 당시 이미 표면화되었다. 이밖에 장면 정권이 경제개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추진한 감군 정책 또한 미군 장 성들과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비밀해제된 주한미국 대사관과 주한미 군 고위 책임자들의 회의록을 보면, 미군 장성은 물론이고 대사관 관계자 까지도 장면 정권의 감군 정책에 대해 우려와 불만을 피력하였다. 또한 장면 정권이 당시 여론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한미행정협정 체결 을 요구한 것도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의 국무부는 장면 정권의 한미 행정협정 체결 요구를 수용해 주었지만, 미국 군부는 여기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렘니쩌 같은 사람은 국무부, 합동참모 부 회의에서 만약 한국인들이 행정협정을 체결하기를 고대한다면, 우리 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행정협정이냐 아니면 미군 철수냐를 선택하도록 만 들어야 한다. 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군부 장성들과 장면 정권의 갈 등은 주한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그 위험성을 지적할 정도로 상당히 심각 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미군 장성인 유엔군 사령관이 갖고 있었고, 한국군은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군 장성들의 인사권은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한국 정부의 최고지도자가 갖고 있었다. 그 러나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고위 장성의 인사 문제는 유엔군 사령관과 사 전협의를 통해 처리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장면 총리는 유엔군 사령관을 비롯한 미군 장성들의 반발 때문에 고위 장성을 극히 일부밖에 교체하지 못했고, 때문에 정군 운동으로 표출된 소장 장교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결국 실패하였다. 만약 장면 정권이 대규모 군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면 소장 장교집단 [ 98]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99]

의 불만은 그만큼 감소했을 것이었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 쿠데타를 주도했던 세력이 애초부터 권력 장악을 목표로 했다고 하더라도 소장 장교집단들의 불만이 체제 내부에 서 일정 부분 해소가 되었다면, 이들이 세력을 결집하는 작업은 그만큼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장면 정권 은 미국의 압력 때문에 군 인사정책을 통해 이와 같은 군 내부의 소장 장교집단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이러한 상태에서 장면 정권이 경제개발의 재원 마 련을 위해 감군 정책을 추진하게 되니 그렇지 않아도 승진 정체에 시달리고 있었던 소장 장교집단은 장면 정권에 대 해 더욱 불만을 품고, 더욱 일탈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 었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5 16쿠데타의 주도자들은 결 국 이 과정에서 정군 운동이라는 명분을 바탕으로 쿠데타 에 필요한 세력을 결집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의 발발과 성공 과정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5 16쿠데타의 주도세력들이 스 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1961년 1월에는 이미 쿠데타에 필 요한 장교들의 포섭을 완료했고, 비밀유지를 위해 더 이상 추가적인 조직 확대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후4 19 1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면 거사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학생들이 군부 쿠데타 설을 의식하여 침묵시위로 4 19 1주년을 마무리함에 따라 거사 는 실패하였다. 그 후 쿠데타 음모는 자꾸 누설되기 시작 하였고, 최근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미국 CIA도 1961년 4 월 하순경 쿠데타 음모에 대해 감지하고, 박정희가 그 지 도자인 것도 알게 되었다. 쿠데타 주도 세력들은 거듭되는 비밀누설을 차 단하기 위해서라도 거사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마침내 1961년 5 월 16일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5월 16일 당일도 군 방첩대에 의해 거사 조짐이 탄로 난 상태였기 때문 에 이들은 애초 기획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병력만을 동원하는데 성공하였 다. 이들이 동원한 중요 병력은 해병대와 공수대 일부, 6군단 포병대 등으 로 전체 2,500명 내지 3,000명 정도 되는 규모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은 쿠데타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1군 사령관 이한림은 쿠데타에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5월 16일 미 군 방첩대(CIC)는 요원들을 동원하여 거리에서 쿠데타 군을 지켜보는 시민 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은 쿠데타 에 우호적이었으며, 2명은 우호적이나 시기상조라 생각했고, 4명은 쿠데 타에 반대했다. 1961년 5월 31일 주한미국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서울 대학생들의 쿠데타에 대한 지지도도 50 대 50이라 했다. 사람 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전반적으로 볼 때 쿠데타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 단 호하게 대처하였더라면 진압이 가능한 상태였다. 쿠데타가 발발하자 마샬 그린 대리대사와 유엔군 사령관은 미국 정부 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유엔군 방송을 통하여 공표되기는 했지만, 쿠데타군의 언론 통제 로 말미암아 한국 신문이나 방송에는 물론 보도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당시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쿠데타를 진압할 적극적인 의사가 있었지만 장면 총리는 도망가서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윤 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진압이 실패했다고 이 야기하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 당일 아침 매그루더 사령관을 만났을 때 쿠데 타 진압에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이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 [ 100]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101]

다.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이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한 국 정치지도자들의 의사를 확인해 보는 것이 필요했고, 그 것이 사태를 결정짓는 요소였다면 내각책임제 하에서 실 권이 없는 대통령 윤보선의 의사는 실질적으로 그리 중요 한 것이 아니었다. 최근까지 장면 총리는 쿠데타 직후 잠 적하여 미국 대사관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 려져 있었지만, 최근 공개된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이 는 사실과 다르다. 장면은 5월 16일 쿠데타 당일 두 차례 주한미국 대사관 마샬 그린 대사에게 전화를 했고, 사태를 유엔군 사령관이 맡아 처리해 줄(take charge) 것을 당부 했다. 따라서 매그루더가 쿠데타를 진압할 확고부동한 의 사가 있었지만, 한국 정치지도자들이 미온적으로 반응하 여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타당성이 없다. 매그루더는 전후 맥락을 볼 때 정군 운동의 우두머리였 던 박정희도 싫어했던 사람이고, 또한 장면 정권도 싫어했 던 사람이었다. 그가 당시 쿠데타를 진압할 확고한 의지가 있었는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샬 그린의 회고에 따르 면 쿠데타 당일 아침 자신이 장면 정권을 지지하는 성명서 를 발표하자고 제안했을 때 매그루더는 미국이 쿠데타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공표하겠지만, 쿠데타를 지지하 거나 반대한다는 이야기는 못하겠다. 고 말했다 한다. 그 러나 매그루더의 참모들은 쿠데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으면 미국이 쿠데타를 사주했다는 의심을 받 을 수 있다며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서 발표를 건의 했고, 매그루더는 마침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 정치지도자인 장면과 윤보선이 쿠데타 를 저지하고,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최선 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는 없다. 정치지도자로서 이는 틀림없이 비판받을 일이다. 그러나 설사 장면과 윤보선 모두 적극적으로 쿠데타에 단호하게 반대했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매그루더도 쿠데타 진압 의사가 확실했다 하더라도 쿠데타 진압 결정 그 자체는 매그루더 유 엔군 사령관이 혼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미군이 2개 사단 이나 진주하고 있고, 휴전상태에 있는 한반도에서 여기에 대한 결정은 미 국의 중앙 정부, 특히 케네디 대통령의 승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캐나다를 방문 중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 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마샬 그린과 매그루더가 장면 정권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보고를 듣고 당황하는 기색을 표했다고 한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한 달 전인 1961년 4월 미국 CIA와 군부 세력이 후원하 는 반카스트로 쿠바 망명 집단의 군대가 쿠바에 상륙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피그스만 사태로 곤경을 치르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가 급적 또 다른 분쟁에 미국이 직접 개입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린과 매그루더의 성명은 미국 행정부 내에서도 사실 상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국 시간으로 5월 16일 오전, 한국 시간으로는 17일 새벽에 워싱턴은 마침내 한국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미국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 고, 이는 즉각 주한미국 대사관과 유엔군 사령관에 전달되었다. 쿠데타가 이미 발생해서 쿠데타 군이 정부기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불개입 결정은 실 질적으로 쿠데타를 추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5월 17일 장면 총리는 프랑스 대사를 메신저로 주한미국 대사관에 보내고, 또한 직접 전화를 걸 어 마샬 그린에게 미국이 쿠데타를 진압해 줄 것을 당부했으나, 그린은 미 국이 직접 개입할 수 없으며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은 한국인 스스로로 부터 나와야 한다고 했다. 장면은 다음 날 은신처에서 쿠데타 군에 의해 이 끌려 나와, 사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매그루더는 17일 1군 사령관 이한림을 만났다. 매그루더도 역시 [ 102]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103]

미국이 개입할 수 없으며, 다만 자신은 쿠데타를 명백하게 지지하는 발언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한림은 그 후 쿠 데타에 반대했던 태도를 누그러트렸고, 18일 아침 8기생 부하 장교들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었다. 5 16쿠데타가 발생하였을 때 한국의 지도자와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를 진압할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양상을 보 였다.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였을 때 작전지휘권을 갖 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이 이를 진압할 1차적인 책임을 갖 는지, 아니면 인사권을 비롯한 나머지 군 통수권을 갖고 있고 헌법을 수호할 책임이 있는 한국 정치지도자가 1차적 인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에서 누가 1차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 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도 대체 왜 이러한 양상이 생겨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 가 있다. 군의 통수권 문제는 국가의 중대사 중에 중대사 이다. 결정적이고 위급한 상황에서 군 통수의 책임문제를 두고 관련자들이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는 분단 상태에서 한국은 한미군 사동맹 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여 여기에 대처해 왔다. 한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인 유엔군 사령관이 갖고 있고, 미국의 군사 경제원조에 의존하던 상황에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고위 장성의 인사문제도 유엔군 사령관과 협의하지 않고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는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군에 대한 통제력과 장악력을 심 각하게 잠식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를 막고 헌정질서를 수호할 1차적 책임이 한국 정치지도자들에게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군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 자체가 한미동맹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이미 잠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쿠데타를 진압할 1차적인 책임은 한국인 들 스스로가 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과 미국이 맺은 군사동맹 관계 의 틀 자체가 한국인들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기반을 이미 잠식하고 있 었던 것이다. 5 16쿠데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고, 거사 주체세력들이 결집할 수 있는 근거가 된 소장 장교집단의 불만이 정군 운동으로 표출되었을 때, 미 군 장성들은 한국군 인사 문제에도 개입하여 장면 정권이 군 내부에 인사 교체를 단행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소장 장교들의 불만이 더욱 일탈적인 방향으로 표출되어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 정부는 한국 정치지도자가 책임질 일이라 했다. 미국은 한국군에 대한 막대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쿠 데타로부터 헌정질서를 수호하는 책임은 한국이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 면 한국 정치지도자들은 헌정질서를 수호할 책임이 있지만, 군에 대한 이 들의 권한과 권위는 이미 잠식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책임과 권한이 불일 치한 한미군사동맹 관계의 문제점은 5 16쿠데타가 발생하고, 이것이 성공 하게 된 구조적 차원의 원인이라 할 것이다. 5 16쿠데타의 원인을 보다 거시적이고, 구조적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항상적인 군사적 긴장을 일으키는 분단의 문제가 있고, 그 안에 존재하는 한미군사동맹 관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 한국인들이 세계 역사에서 가장 긴 종전( 終 戰 ) 없는 정전( 停 戰 )체제 하에서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는 분단 상황 속에서 살아가면서, 또한 이로 말미암아 한미군사동맹 관계라는 구조적 틀을 유지하며 살아가면서 얻는 것도 있었겠지만 잃어야 할 것도 있었으니, 그 중에 하나가 한국의 민주주의였다. [ 104] 특집 : 혁명과 쿠데타 5 16쿠데타는 왜 발생했으며 어떻게 성공하였나? [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