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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정책보고서 2-45 글로벌 정상외교 - 참여정부 정상외교의 비전 및 성과 - 2008 작성중인 초안자료 <집필 참여자> 안보전략비서관: 박 선 원 행정관: 김 호 홍 외교부 북핵외교기획단 북핵정책과 : 손 창 호

발 간 사 참여정부가 혁신과 통합을 표방하며 출범한 지 5년, 이제 그 성과와 한계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국민들 앞에 내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참여정부의 지난 5년은 말 그대로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혁신과 통합의 길목마다 어김없이 반발과 저항, 분열 세력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부 언론과 정치세력의 왜곡과 호도 앞에 정부의 어떤 정책 활동도 사실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혁신과 통합 과정에서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는 것은 참여정부의 의무이자 과제일 것입니다. 특정 정부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성과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책추진 당시의 목표와 정책 환경이 객관적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책추진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해결과정, 해결방법도 가급적 상세하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와 증언도 뒷받침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는 이런 고민에서 기획되었습니다.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는 지난 5년 동안 추진되었던 핵심 정책 중 77개 과제를 선정, 정책 과정중심 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명칭을 정책보고서 로 한 것도 일반 백서 처럼 정책의 진행 일지나 자료를 모아 놓는 수준이 아니라 정책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국민들에게 보고 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005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시작된 정책보고서 작업은 청와대 비서관실별 집필 T/F팀과 정책기획위원회 주관으로 본격 추진되었습니다. 보다 생생한 기록을 만들기 위해 전 현직 국무총리와 청와대 수석 및 보좌관과 비서관, 전 현직 장 차관과 담당 공무원, 시민사회 단체, 국회의원 등을 직접 또는 서면 인터뷰를 했습니다. 국회 속기록과 언론 보도, 각계의 성명서와 기고문을 수집하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정책보고서는 일반 백서와 차별화하고 보다 내실 있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몇 가지 기본 원칙하에 추진되었습니다. 첫째, 정책과정 중심으로 기록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책추진과정의 우여곡절과 정책에 관여 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국정의 소중한 경험들이 계승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책과정 중심의 기록은 사적 기억 을 공공의 기록 으로 만드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성과의 나열이나 자화자찬이 아니라 정책 추진 과정의 다양한 찬반 논란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자 하였습니다. 때문에 77개 과제 중에는 성과가 미흡한 과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셋째, 객관적인 자료와 논증을 통해 참여정부의 정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정치적 곡해를 바로 잡고자 하였습니다. 넷째, 차기 정부에 넘겨줄 인수인계서의 의미를 두었습니다. 권력만의 인수인계가 아닌 정책의 실질적인 인수인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공무원들의 인사이동이나 조직 개편에도 불구하고 국정의 소중한 경험을 공유되어야 한다는 취지이기도 합니다.

이런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작성된 정책보고서는 크게 사회정치 개혁, 정책추진, 정부 혁신, 청와대 개혁 등 4개의 대주제로 이루어졌습니다. 4개의 대주제는 다시 사회정치개혁 분야 7개 과제, 정책 추진 관련 경제 분야 17개, 사회분야 24개, 통일외교 분야 6개 등 47개 과제, 정부혁신 분야 21개 과제, 청와대 개혁 분야 2개 과제 등 6개 분야 총 77개 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작성 과정에는 많은 분들의 땀과 노력이 서려 있습니다. 집필을 책임진 청와대 각 비서관과 담당 행정관, 부처의 담당 공직자, 국책 및 민간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이 참여 하였습니다. 집필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정책기획위원은 물론 국정과제위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과제들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외부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쳤습니다. 전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여러 부처의 전 현직 장차관이 해당 과제를 직접 검토하거나 인터뷰에 적극 참여해 주었습니다. 특히 청와대의 현직 비서실장과 정책실장 등도 바쁜 일정 속에서도 직접 보고서를 검토하고 수정해 주었습니다. 정책기획위원장으로서 지난 2년 2개월 동안 정책보고서 집필 과정에 참여하여 심혈을 기울여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전 현직 공직자, 국책 및 민간 연구소 관계자 분들께 발간사를 빌어 심심 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정책보고서는 국민은 물론 관련 공무원과 전문가들이 쉽게 접근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전 과제를 PDF 파일 형태의 CD로 제작 배포할 것입니다. 청와대 브리핑 및 정책기획위원회 홈 페이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에 올려 무상 다운로드가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각 연구기관이나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통한 자료의 재배포 및 연구자의 자유로운 인용도 허용할 것 입니다. 정책보고서를 내놓는 지금 이 순간, 정책과정 중심의 새로운 백서 문화를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냉철한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떠나 정책성과와 한계를 객관적 으로 기록하고 공정하게 평가받으려 했던 참여정부의 노력과 진실이 있는 그대로 읽혀지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 국민의 애정 어린 비판과 조언, 따뜻한 위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정부 정책 보고서 를 국민께 바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 2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 김 병 준

-목 차- 제1장 참여정부의 정상외교 개관 1 1. 정상 외교란? 3 2. 정상외교 준비 과정 5 3. 참여정부 정상외교 출범 당시의 배경 8 4.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외교의 시작 11 제2장 참여정부 글로벌 정상외교의 비전과 전략 19 1. 균형적 실용외교 노선 21 2. 새로운 동맹관계의 재정립 22 3. 외교의 지평 확대와 적극적 경제외교 23 4. 에너지 자원의 확보 24 5. 세계 중심국가로의 도약 26 제3장 글로벌 정상외교의 추진과정 27 1.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 외교 29 2. 동북아시대를 위한 균형적 실용외교 40 3. 한반도 주변 4국과의 외교 47 4. 지역별 특성화 외교 : 경제 외교를 중심으로 95 5. 세계로 나아가는 다자 정상외교 154 - i -

6. 선진통상국가 구현을 위한 경제외교 195 7. 세계로 나아가는 선진외교 213 8.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한 투자형 정상외교 228 9. 유엔 사무총장 진출을 위한 정상외교 265 제4장 참여정부 글로벌 정상외교의 성과와 과제 271 1. 주요 성과 273 2. 향후 과제 286 3. 미래로 향한 정상외교의 나침반 288 - ii -

제 1 장 참여정부의 정상외교 개관 - 1 -

1. 정상 외교란? 한 나라의 외교 활동은 그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 다. 외교 활동 자체가 곧 전방위적인 촉각을 곤두세우고 가장 적절한 대응 방법을 찾아 끊임없이 변모하는,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와도 같다. 사안에 따라 빠르 고 느림의 템포가 조절되고 접촉면이 달라지는가 하면, 활동 범위는 점점 커질 수밖 에 없다. 특히 세계화와 정보화가 빠르게 진전되는 현대에는 단순한 양자 관계 관리 차원을 넘어 지역적 혹은 범세계적 차원으로 외교 대상이 확대되어 간다. 국경과 정 치적 헤게모니로 대표되는 정치 안보 의제 중심의 냉전 시대를 지나 경제, 문화, 과 학기술, 에너지 자원, 개발원조 등 그 의제가 광범위하고 다양화해지는 탈냉전 시대 에는 더욱 그렇다. 바야흐로 현대는 외교의 세계사적 전환 시대로,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다양하고 폭넓은 이슈들에 직면하고 있다. 정부 수립 이후 50년간 한국의 외교는 동맹국 중심의 편안한 안방외교였다. 그러 나 탈냉전 이후 우리 외교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안보 측면에서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고,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팎으로부터 제기되는 다양한 과제에 직면한 지금과 같은 시대는 우리 외교사에 일찍이 없었다. 갈등 구조가 여전히 상존하는 동북아에서, 더욱이 북핵 문제를 안고 살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세계 12위의 경제력과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모범 선진국으로 도약해 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처한 역사적 상황, 이러한 독특한 문제들이 우리 외교의 범위와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이슈에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공격적인 외교 전략과 외교 전문가들의 조직적인 활동이 요구 되는 것은 기본이다. 국가가 안고 있는 긴박한 과제들은 나아가 훨씬 효과적이고 강 력한 외교를 요구한다. 바로 일국의 정상이 직접 나서 발로 뛰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정상외교이며 이러한 정상외교는 21세기에 들어 그 유 용성과 가치를 더욱 인정받고 있다. 우리 정상의 해외 방문의 경우도 방문국과의 오랜 현안을 해결하고, 미래의 양자 관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현지에 상주하고 있는 우리 기업과 동포들 - 3 -

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계기가 된다. 정상 외교를 전후하여 양국 간 다양한 인 적 물적 교류가 확대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정상 간의 교류를 통해 우의와 신 뢰가 축적됨으로써 해묵은 외교 현안이 극적으로 타결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정상외교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결실이다 외교의 주도권도 보다 다양하게 분권화되고 있다. 과거처럼 외교력과 외교과제가 정치 군사적 능력을 배경으로 한, 즉 힘의 논리에 의해 특정한 전문가 집단에게 주 어지는 시대가 아니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 공동체가 직면한 다양한 요구를 가장 적 합한 방식으로 책임 있게 국제사회에 제시해내는 자(국가)가 우선권을 갖게 된다. 정상외교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외교수단인 것이 다. 정상외교는 전문가 외교, 부처별 외교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외교정책의 우 선순위에 따라 각 부처와 국민들의 역량과 국력을 결집 동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대통령은 법률적으로나 그 직무의 성격에 있어서 국가의 최고 외교관이기 때문이 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상외교는 국가 외교력의 총결산이자 일종의 종합 예술이라 고 할 수 있다. 정상외교에는 철학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정상외교의 영역은 매우 넓고 복잡하 며, 단순히 기존의 이슈나 상황을 관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중장기 비전과 목 표를 대내외에 제시하고,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국익을 새롭게 창출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정상외교는 멀리보고 깊이 생각하여 국 가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축약하면, 정상외교는 국가의 최고 외교관인 대통령이 국가 공동체가 처한 상황 과 시대적 요구를 전 국가 역량을 결집하여 비전과 철학에 바탕한 가장 적합한 방 식으로 국제사회에 제시하고 해결해 나가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탈냉전 정보화 시대로 대표되는 세계사적 변화와 함께, 앞서 언급한 우리의 독특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에게 정상외교는 다른 어떤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 하다고 볼 수 있다. 참여정부는 바로 이러한 정상외교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체 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4 -

2. 정상외교 준비 과정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27회에 걸쳐 56개국 순방 외교를 실시해 왔다. 매년 5차례 이상의 정상외교를 포함한 세계 곳곳의 순방외교를 펼치며 국가 최고 외교관 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왔다. 이처럼 노무현 대통령이 펼친 활발한 정상 외교 노력은 외교관들의 통상적인 외교업무나 외교 교섭과는 다른 커다란 힘을 발 휘하였다 정상외교의 핵은 역시 대통령이다. 모든 것이 대통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양한 정보와 자료들이 대통령의 머릿속에 집중되어야 하고, 또 대통령의 입을 통해 효율 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대통령으로서는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다. 긴 장은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 자그마한 실수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 외 순방기간 동안 되풀이된 일상의 풍경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기나긴 일정을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소화해 냈다. 그러면,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외교를 어떻게 준비할까. 외교 안보라인에서는 이구동성으로 과거 어느 정부에서도 이렇게까지 준비를 한 적은 없다 고 한다. 철저한 준비과정을 지켜보아왔던 반기문 당시 외교보좌관은 한 마디로 그야말로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고 설명했다. 핵심 측근이었던 이종석 전 장관에 따르면 정상 간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한 계획서가 그려진다. 노무현 대통 령의 직접 지시로 이루어지는 정상회담 준비는 최소 2개월(D-60일) 전부터 시작된 다. 통상 해외 방문은 국내에서 외국 정상을 맞는 경우보다 더 많은 준비기간을 필 요로 한다. 먼저 비서실과 국정원, 외교부, 필요한 경우 관계부처 직원들로 구성된 합동 조사단이 사전에 현지를 방문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온다. 현 시점에서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방문국과의 쟁점들이 모아진다. 수집 자료들은 비서실 을 통해 전략자료로 만들어진다. 이 보고서는 정상외교에서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 는 목표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를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정상회담을 주먹구구식이 아닌 전략적 관점에서 기 획했다는 점, 그리고 준비 과정에서 국정원 정보를 최초로 활용하는 등 관계 부처의 역량을 체계적으로 집약했다는 점 등이 참여정부 정상외교 준비과정의 특징 이라고 - 5 -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 자료와 함께 계기별 일반자료가 정상의 일정에 따라 꼼꼼히 작성되 고 대통령에게 보고된다. 일반자료에는 해당국에 대한 일반적인 사항에서부터, 상 대국 정상의 특성, 전달할 메시지, 상대국이 관심을 갖고 있는 의제에 대한 우리 입 장 등이 빼곡히 담겨있다. 비서실과 외교부, 국정원,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정상회담을 포함한 정상 일정의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이 만들어져 간 다. 여기에는 상대국 정상이 좋아하는 농담까지 분석이 되어있다고 한다. 방문 외교의 경우, 보통 최소한 세 번은 관련 회의를 갖는다. 첫 회의는 관련 부 처 및 청와대 외교 안보라인의 책임 있는 인사들이 모여 모든 것을 훑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두 번째 회의는 첫 회의에서 걸러진 의제에 초점이 맞춰진다. 물론 회의 참석인원도 줄어든다. 세 번째 회의는 출발 하루 전쯤에 소수의 보좌진과 함께 회담 에 임하는 전략과 강조점 등을 집중 논의한다. 그야말로 완전 숙지가 될 때까지 정 리하는 것이다. 정상외교를 위한 준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통령은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공식수행원들과 회담의 전반적인 상황 등을 논의한다. 이어 도착 당일 오찬이나 만찬을 함께 하며 전체 전략 등의 업무협의를 갖는다. 이어 정 상회담 당일에는 조찬 등을 통해 마지막 점검을 한다. 그리고 실제 정상회담장에는 몇 장의 준비된 메모만 가지고 들어간다. 한편, 외국정상의 방한 시에도 의전 측면에서 최대한 성의껏 맞을 준비를 한다. 회담과 관련해서도, 외교 안보라인에서 올리는 회담 의제와 목표 및 현안, 방한하는 정상과 관련한 참고자료 등을 숙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담 직전에도 한 차 례 이상 회의를 갖고 내용을 점검한다.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과 스태프들이 혼연 일체가 되어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전략적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정상외교는 과거 정부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 준비는 거시적, 전략적으로 기획됐다. 처음부터 이러한 준비 과정이 정착된 것은 아니다. 초기의 과도기적인 상황도 있었다. 이종석 전장관은 정상회담 준비 과정이 구체적 이고 전략적인 시스템으로 발전하여 정착되기까지 1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1-6 -

년 반 만인 2004년 9월의 러시아 정상회담 즈음, 이러한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외교 시스템은 그 틀을 확고히 하고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상외교 준비 시스템의 발전과 정착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외교에 대 한 신념과 철학이 바탕이 되었다. 또한, 중요한 현안이 있을 경우 대통령은 그냥 대 충 넘기지 않았다. 외교란 그런 것 이라며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것도 대통령은 철 저하게 설명한다. 정상회담을 화기애애한 친교의 장 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고, 자신과 상대를 설득하는 이해의 장 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통령의 철학은 실제 정상회담 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형식적으로 시작해서 의례적으로 끝날 수 있는 회담에 진지함과 솔직함을 무기로 들고 나선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실용철학은 긴박한 현실을 풀어가는 데 주요했다. 각 국의 위치와 입장을 정확히 짚어내고 정상들에게 그에 맞는 역할을 주문했다. 먼저 타국 이 원하는 것을 가능한 선에서 들어주고, 그 다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 해 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솔직함과 진정성을 담아내었다. - 7 -

3. 참여정부 정상외교 출범 당시의 배경 참여정부의 정상외교를 준비과정과 정상의 철학을 넘어서 공동체적 관점에서 구 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자리 매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 면, 참여정부의 정상외교는 과거 정부의 외교적 과제를 승계하는 동시에 새로운 도 전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건국 이래 지난 50년간 한국 외교는 크게 냉전체제의 안보외교, 수출 및 경제개 발에 치중한 경제외교와 이후의 전방위 외교로 구분된다. 다시 말하면,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 정상외교는 1950년대는 한 미관계를 주축으로 한 반공 안보외교, 1960년대는 친 서방 일변도로 외자도입( 外 資 導 入 )과 경제개발 지원에 치중한 외교, 1970년대는 비동맹외교와 수출주도형 경제외교, 1980년대는 선진국 진입노력과 전 방위( 全 方 位 ) 외교에 주력하였다. 한편, 1990년대 들어서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의 붕괴, WTO출범 등 정치 경제 질 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면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나타나 기 시작했다.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포용 정책과 우리의 경제 규모 확대에 따른 외교의 지평 확대 노력도 등장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다변화 지역협력 미래지향을 추구하는 신외교 정책 5대 기조,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 등이 실례이다. 그러나 과거 정부의 정상외교는 새로운 외교의 지평을 열어 나가고 실리를 확보 함에 있어서 지속적이고 전략적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제기되었다. 참여정부는 역 대 정부 정상외교의 성과를 바탕으로 올바른 방향성은 계승하되 그 한계를 극복하 고 시대적 요구에 충실코자 했다. 이러한 노무현 대통령의 균형외교는 참여정부 출범 당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 한 조응인 동시에 우리의 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제기된 과제이기도 하였다. 다 시 말하면, 북핵 위기와 9 11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재편 그리고 세계 12위의 경제규 모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할 역사적 과제에 대한 고 민의 산물이었다. - 8 -

참여정부 출범 당시의 국제정세는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었다. 경제적 으로는 WTO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답보를 보이는 가운데 지역화 경향이 심화되었다. 그 영향으로 전 세계는 자유무역협정(FTA) 확산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세계 각국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시급히 안보전략을 수립하고 있었다. 우선, 안보적 측면에서 참여정부 출범 당시 우리의 상황은 그야 말로 안보의 IMF 시대 였다. 2002년 10월 북한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 시인 문제로 제2차 북핵 사태가 발발, 미 북간 대결이 격화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안보환경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장 상태로 빠져들었다. 또한 과거 국민의 정부와 부시 행정 부와의 인식 차이는 참여정부 출범 전 한미관계에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더불어 여 중생 사망사건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민주화와 국력신장에 따른 한국민의 자긍심 고취와 맞물리면서 반미감정을 촉발시키고 있었다. 안보적 도전은 전세계적 범위에서 제기되었다. 이라크전 발발 및 이라크 재건과 전후 처리, 유럽의 통합 확대 움직임 지속, 테러와 대량 살상무기(WMD) 확산, 안보, 환경, 초국가적 범죄 등이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어 이를 해결해 나가기 위한 범세계 적인 노력이 강조 되던 때였다. 특히, 미국은 대량살상무기가 테러에 지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량살상무기 개 발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는 불량국가 또는 실패국가 를 직접 겨냥하였다. 이들 국가에 의해 대량살상무기가 테러 조직에 공급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봉 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향후 수년에 걸쳐 세계적 차원에서 해외 주둔 미군의 재배치, 조직 재구성 및 임무 재부여 등의 전면 재조정 을 통해 21세기의 안보 환경 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 나갈 것임을 밝혔다. 이라크 파병, 북핵 문제, 주 한미군 재조정을 둘러싼 한미 동맹 문제 등이 총체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전개되고 있었다. 국내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에 이라크 파병 문제가 수 면 위로 떠오르면서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는 전면화 되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할 만큼, 각각의 시안들을 놓고 국론은 갈라지고 여론은 양분되었다. 사분 - 9 -

오열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난감한 것은 대통령이었다. 대화는 좀처럼 수렴되 지 않았고, 국정운영의 책임자로서 대통령이 제시하는 의제는 각자의 정파적 입장 에서 재단되었다. 접점은 없었고 합리적 중도는 이야기도 꺼내기 힘든 지경이었다. 주변국의 정세도 유동적이었다.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자민당 총재로 재선 되면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고, 한편으로는 역사교과서 문 제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주변국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2002년 11월 제16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후진타오 주석체제가 등장했으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강대국 지위 회복과 실리추구형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 10 -

4.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외교의 시작 이렇듯 참여정부가 출범할 당시는 국제적 도전이 밀려오고 국내적으로나 국제적 으로나 해묵은 산적한 숙제와 풀어야할 새로운 과제가 한꺼번에 분출하던 때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이 결정될 때부터 이러한 국면을 타개해나가야 할 뚜렷한 외 교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관련 측근들에게 자신의 외교전략을 분 명히 제시했는데, 그 기본은 안전과 평화 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인으로서 좀 더 이상에 충실했다면, 이 제는 대통령으로서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교의 어떤 결과 물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전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 가 외교전략을 선택하는 기준이고 원칙입니다. 라는 철학을 피력했다. 이러한 철학 에 기초하여 노무현 외교의 공식들이 만들어지고, 참여정부 글로벌 외교의 비전과 전략이 구체화되었다. 앞으로 열흘 넘는 순방은 하지 맙시다. 어지간해선 힘들다 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이 2004년 12월 9일 새벽 서울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중 나온 참모들에게 던진 일성이 었다. 지난 4개월 동안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졌던 순방의 고단함이 가벼운 농담 같 은 진지한 호소로 묻어나왔다. 하루의 일정이 마무리되면 대통령은 다음날 또는 다음 순방국 자료를 모니터에 띄웠 다. 영빈관의 늦은 밤, 호텔 서재의 이른 아침, 때로는 비행기 내의 짧은 이동시간도 자료 검토에 활용했다. 그리고 행사와 행사 막간사이의 자투리 시간들조차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된 카드식 자료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보완하는데 활용했다. 출발 15 분 전, 코디네이터의 분장이 시작되면 대통령은 눈을 감는다. 명상을 하는 것일까 아 니면 검토한 자료의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반추하는 것일까? 의전 비서관이 의전 절 차를 비롯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들을 보고하는 것도 이때다. 5분도 안 되는 짧 은 시간에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수많은 사항들이 입력되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은 그 많은 정보들을 머릿속에 담고 방을 나선다. 이야깃거리는 항상 부족하다.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공식 오찬 또는 만찬이 있기 때 문이다. - 11 -

식사 때는 상대국 정상의 부인 등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부분은 어쩌면 참모들이 준비할 수 있는 영역의 바깥에 있다. 오로지의 대통령의 순발력과 유머감각이 결정적 변수다. 대통령이 감당해야할 몫이다.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가장 큰 스트레스는 역시 시차가 아니었을까? 어지간히 강인한 의 지의 소유자인 대통령도 남미에 이은 유럽 순방에선 시차의 위력 앞에 때로 힘들어 했다. 단순히 시차 때문이라기보다는 가중된 피로가 누적된 결과인 듯 싶었다. 불과 1시간여의 자투리 시간에도 대통령은 간혹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고단한 대통령의 단잠을 깨운 뒤, 또 다시 기억해야할 사항들을 빠짐없이 전달해야하는 참 모들의 곤혹스러움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통령은 언제나 참모들의 우려에 한 결 같이 말했다. 괜찮다. 순방의 끝이 곧 휴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은 그 동안의 부재로 인해 평소의 배로 늘어난 국내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12월 귀국도 마찬가지. 대통령은 여독을 미처 풀지도 못한 채 국내일정에 전념하다 다시 한일 셔 틀외교를 위해 공군 1호기에 몸을 실었다. 피로의 끝이었을까. 대통령은 회담이나 회 견 등 행사 하나를 마칠 때 마다 연신 하품을 하며 밀려드는 졸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음 행사가 시작되면 대통령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언제 그랬냐는 듯, 특유의 또박또박한 목소리와 정연한 논리로 적극적인 설득과 설명에 힘을 쏟는 것이다. 혼신의 힘 이 거기에 있다. -청와대 국정일기(8) 평화를 설득하고 통상을 열다 중- - 12 -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외교 일지 일 자 방문 국가 2003 2004 2005 2006 2007 5.11~17 미국 방문 6.6~9 일본 국빈방문 7.7~10 중국 국빈방문 10.6~9 제7차 ASEAN+3 정상회의(발리) 10.19~24 제11차 APEC 정상회의(방콕) 참석 및 싱가포르 국빈방문 9.19~23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러시아 공식방문 10.4~12 인도 베트남 국빈방문 및 ASEM 정상회의(하노이) 11.12~23 11.28~12.8 12.17~18 일본 방문 APEC 정상회의(산티아고) 참석 및 미주(LA, 아르헨티나, 브라 질, 호놀룰루) 순방 ASEAN+3 정상회의(비엔티엔) 참석 및 구주 3개국(영국, 폴란 드, 프랑스) 순방 4.10~18 독일, 터키 국빈방문 5.8~12 러시아 전승 60주년 기념행사 참석 및 우즈베키스탄 국빈방문 6.9~11 미국 방문 9.8~17 멕시코, 코스타리카 국빈방문 및 유엔 고위급 본회의 참석 12.8~16 ASEAN+3(쿠알라룸푸르) 정상회의 참석 및 말레이시아, 필리핀 국빈방문 3.6~14 이집트 공식방문, 나이지리아, 알제리 국빈방문 5.7~15 몽골 국빈방문,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연합 공식방문 9.3~16 10.13 중국 방문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국빈방문 및 ASEM 정상회의(헬싱 키) 참석 / 미국 방문 11.17~22 APEC 정상회의(베트남) 참석 및 캄보디아 국빈방문 12.3~10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 국빈방문 1.13~15 ASEAN+3, EAS 정상회의(세부) 참석 2.11~17 스페인 국빈방문, 교황청 공식방문, 이탈리아 공식실무방문 3.24~30 사우디, 쿠웨이트, 카타르 방문 6.30~7.7 과테말라 IOC 총회 참석 / 미국 방문 9.6~10 APEC 정상회의(시드니) 참석 11.19~22 ASEAN+3, EAS 정상회의(싱가포르) 참석 - 13 -

2003 2004 2005 2006 일 자 방한 정상 6.2-4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7.17-19 하워드 호주 총리 7.20 블레어 영국 총리 7.24-27 클리크 뉴질랜드 총리 8.24-26 탁신 태국 총리 9.15-19 카이 베트남 총리 11.5-7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11.12-14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11.24-26 엥흐바야르 몽골 총리 12.8-11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 2.8-10 에르도안 터키 총리 3.9-11 페르손 스웨덴 총리 7.14-16 알-사바 쿠웨이트 총리 7.21-22 고이즈미 일본 총리 7.24-26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8.22-24 압둘라 말레이시아 총리 3.9-12 쥬르차니 헝가리 총리 3.16-20 카빌라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 3.21-25 맥컬리스 아일랜드 대통령 4.26-27 살레 예멘 대통령 5.23-26 룰라 브라질 대통령 5.26-28 주린다 슬로바키아 총리 6.20-21 고이즈미 일본 총리 9.28-30 아지즈 파키스탄 총리 10.18-19 바세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11.7-8 베르호프스타트 벨기에 총리 11.16 똘레도 페루 대통령 11.16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11.17 부시 미국 대통령 / 하워드 호주 총리 11.19 푸틴 러시아 대통령 11.18-19 제13차 APEC 정상회의(부산) 2.6-9 칼람 인도 대통령 3.20-23 훈센 캄보디아 총리 3.28-30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4.5-8 메시치 크로아티아 대통령 4.19-22 카트라이트 뉴질랜드 총독 5.14-16 아난 유엔 사무총장 6.13-16 아부다비 아랍에미리트연합 왕세자 6.29-7.1 페르난데스 도미니카 대통령 9.18 아베 일본 총리 10.17 프라드코프 러시아 총리 10.24-26 사카 엘살바도르 대통령 11.6-7 오바산조 나이지리아 대통령 11.22-25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 12.18-19 유센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 14 -

일 자 방한 정상 2007 4.17-19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 4.1-4 하인쯔 피셔 오스트리아 대통령 4.10-11 원 쟈바오 중국 총리 4.11-13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 4.17-19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 4.23-25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5.2-4 응쿠카 남아공 대통령 5.21-22 모하메드 UAE 총리 5.28-30 엥흐바야르 몽골 대통령 7.23-26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8.9-13 봉고 가봉 대통령 9.3-5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10.6-11 마그레테 2세 덴마크 여왕 11.4-6 시도르스키 벨로루시 총리 11.14-16 농 득 마잉 베트남 당서기장 - 15 -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외교 관련 통계 - 5공화국 이후 비교 - 총 방문국 수 대통령 시기 방문대상국 계 1981 미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1982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캐나다 1983 버마 1984 일본 1985 미국 1986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1987 1988 미국, 말레이시아, 호주,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1989 미국, 독일, 헝가리, 영국, 프랑스 1990 일본, 미국, 소련 1991 미국, UN총회 참석, 멕시코 1992 중국, 일본 1993 APEC정상회의 참석(시애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1994 인도네시아, 호주, APEC지도자회의 참석 (자카르타) 유럽사회개발정상회의 참석(코펜하겐), 프랑스, 체코, 독일, 영국, 덴마크, 벨기에, 1995 미국, 캐나다, UN특별총회 참석, APEC정상 회의 참석(오사카) 인도, 싱가포르, ASEM정상회의 참석(방콕), 미국, 과테말라,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1996 페루, 베트남, 말레이시아, APEC정상회의 참석(마닐라) 일본, 유엔환경특별총회 참석, 멕시코, 1997 APEC 정상회의 참석(밴쿠버) 17 13 27-16 -

대통령 시기 방문대상국 계 1998 ASEM정상회의 참석(런던), 미국, 일본, 중국, APEC정상회의 참석(쿠알라룸푸르), ASEAN 정상회의 참석(하노이) 1999 러시아, 몽골, 미국, 캐나다, APEC정상회의 참석(오클랜드), 호주, ASEAN+3정상회의 참석(마닐라) 김대중 대통령 2000 이탈리아, 교황청, 프랑스, 독일, 일본, 북한, UN천년정상회의 참석, APEC정상회의 참석 (브루나이), ASEAN+3정상회의(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노르웨이, 스웨덴 27 2001 미국, APEC정상회의 참석(상해), ASEAN+3정상회의 참석(브루나이), 영국, 노르웨이, 헝가리, 프랑스 2002 일본, ASEM정상회의 참석(코펜하겐), 네덜란드, APEC정상회의(로스까보스), 미국 2003 미국, 일본, 중국, ASEAN+3정상회의 참석 (발리), APEC정상회의 참석(방콕), 싱가포르 2004 카자흐스탄, 러시아, 인도, ASEM정상회의 참석(하노이), APEC정상회의 참석(산티아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ASEAN+3정상회의 참석(비엔티엔), 영국, 폴란드, 프랑스, 일본 노무현 대통령 2005 2006 독일, 터키, 러시아 전승60주년 기념행사 참석, 우즈베키스탄, 미국, 멕시코, 코스타리카, UN고위급본회의 참석, ASEAN+3정상회의 참석(쿠알라룸푸르), 필리핀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몽골,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연합, 그리스, 루마니아, ASEM정상회의 참석(헬싱키), 미국, 중국, APEC정상회의 참석(하노이),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호주, 뉴질랜드 56 2007 ASEAN+3정상회의, EAS정상회의 참석(세부) 스페인, 교황청, 이탈리아, 사우디, 쿠웨이트, 카타르, IOC 총회(과테말라), 미국, APEC 정상회의(호주), ASEAN+3 정상회의(싱가포르) - 17 -

노무현 대통령 총 해외순방 일자 및 이동거리 (2007년 11월 기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2003년 5월 미국 방문을 시작으로 해외순방을 한 나라 와 횟수, 그리고 이동 거리는 다음과 같다. 총 해외순방 일자 해외순방 횟수 이동거리 168일 27회 515,000km 위 표에서 살펴보듯 노무현 대통령의 이동 거리는 515,000km이다. 이 거리는 지구(지구둘레 : 약 42,390km)의 열세배 정도에 해당하며 지구에서 달까지(지구에서 달까지 거리 : 약 380,000km)보다 훨씬 멀다. 또한 지역별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방문 지역(2003-2007) - 18 -

제 2 장 참여정부 글로벌 정상외교의 비전과 전략 - 19 -

1. 균형적 실용외교 노선 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한 균형적 실용외교 란 한마디로 참여정부가 추구하는 자 주적 외교정책을 일컫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균형적 실용외교란 가치와 국익, 동 맹과 다자협력, 세계화와 국가정체성, 한국과 상대국가 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 는 것이며, 외교 및 안보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정책 결정 및 집행과정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와 국익의 균형 은 평화, 인권, 주권 등 보편적 가치와 함께 국가적 실리를 갖추는 일이다. 동맹과 다자협력의 균형 이란 한 미 동맹을 안보의 근간으로 삼되 다자안보대화 및 협력정책을 함께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국가 정체 성의 균형 은 개방적인 세계화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도 국가 고유의 특성 과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 간의 균형 은 대외관계에서 협력적, 수평적 호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외교의 저간에는 우리가 외교정책과 외교적 사고의 중심이 되어야 한 다는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정세나 주변 여건의 객체로 전락해서는 안 된 다는 세계관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은 정세를 가지 고 아무리 계산을 해도 내가 그 정세의 변수가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끌려만 다니 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변수가 되는 것, 주변국이 전략을 결정하는 데도 우리가 변수가 될 수 있으면 하는 데까지 밀고 가야 함을 강조했다. 나아가, 우리 미래의 주관적 이해관계와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내고, 그 방향으로 모든 당사자들의 행동 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적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이치 라며, 작은 국 가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영향을 미친다 는 점을 지적했다. 균형외교의 원칙은 현실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칙을 현실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상황과 처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구체 원칙을 제시했 다. 즉,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기초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구현하고, 이를 실현하는데 적합한 대외환경을 조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공고한 한 미 동맹을 바탕으로 주변국 및 전 세계적 차원에서 균형적 실용외교 를 적극 추진해나가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동북아 차원에서는 일본 중국 러시 - 21 -

아와의 관계를 격상시키면서, 동시에 한국이 중심을 잡고, 중 일간의 경쟁은 한 미 협력으로 풀어나가는 해법을 제시했다. 아울러, 동북아 시대를 열려면 먼저 한반도에 평화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야한 다 며, 그냥 평화정책이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번영까지 꼭 집어넣고 동북아 비전 을 제시하는 것은 남북 대화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염두에 두고 있음 을 밝혔다. 원 칙과 현실, 전략과 전술, 목표와 수단, 당면 과제와 장기 비전간의 균형을 중시한 대 목이다. 2. 새로운 동맹관계의 재정립 노무현 대통령은 상황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동맹국 및 우방국들과 대 등하고 상호보완적인 협력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글로벌 정상외교를 추진해 나갔다. 특히 최대의 동맹국인 미국에 대해서도 우리의 국익과 배치되는 사안에 대 하여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관철해 나가는, 말 그대로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 는 데 목표를 두었다. 또한 미래 한 미동맹은 한반도 및 주변 안보환경 변화에 부응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라는 공통의 가치를 토대로 포괄적 역동적 호 혜적 관계로 지속 조정 발전해 나가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종전보다 더욱 건강하고 균형적이며,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동맹으로 발 전하고 있다. 역사 인식이나 고대사, 영토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노정되기도 하였던 일본, 중국과의 관계도 과감하고 단호하게 원칙에 입각하여 가닥을 잡아나갔다. 특히 일 본에 대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이 과거 행했던 여러 차례에 걸친 사과와 반성에 대해 일본의 역사인식은 우리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로 새로운 사과가 아니라 과거 의 사과에 맞는 행동을 보여달라 는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에 기초 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일관된 노력을 경주하였다. 중국과는 고대사 문제에서 비롯된 양국 간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어 나가면서 역대 최상의 양자 관계를 구축했다. 후진타오 주석은 수교 10년 사이에 이렇게 큰 - 22 -

관계 발전을 이룩한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것 이라고 평 가하면서, 한국이 동북아에서 유능한 중재자의 역할을 계속해 주기를 희망 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종석 전 장관은 한중 관계의 비약적 발전은 참여 정부의 균형적 실용외교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볼 때 동북아 정세 당사국으로서 우리가 지금처럼 중요 변수로 부각된 적은 없었으며, 북핵 위기와 같은 문제가 한국 정부의 균형적 역할로 인해 오히려 한국 외교의 위상을 높여주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고 설명했다. 3. 외교의 지평 확대와 적극적 경제외교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정상외교 대상지역을 대폭 확대해나갔다. 미국 등 전통적 우방국에 국한하지 않고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흑해 지역을 잇는 유라 시아 남부는 물론, 아프리카와 남미 지역에까지 우리의 외교 네트워크를 넓혀갔다. 그러나 정상외교의 지평을 넓힌다는 것은 단순히 협력 대상국들의 수를 늘리는 양 적 팽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참여정부는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가장 큰 영향 을 미치는 주요 국가들의 전략을 길게 읽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정상외교의 큰 그 림을 그리고자 했다. 관심 분야에 있어서도 외교 안보 분야와 경제 분야는 물론이고 문화, 과학기술, 자원에너지, 환경 분야에 이르기까지 정상 간에 다루어질 논의 영 역을 대폭 넓힘으로써 포괄안보시대에 걸맞는 정상외교를 전개해 왔다. 참여정부는 이를 위해 글로벌 정상외교 중 장기 전략 을 수립하고 대상 지역이나 국가의 특성에 맞춘 뚜렷한 목적과 의미도 정립하였다. 이를 위해 국가별 지역적 전 략에 따라 정상외교의 의제 범위를 융통성 있게 설정했다. 예를 들면, EU와는 북핵, 테러, 인권, 마약 등 국제 현안 관련 공조 강화에 합의하고 금융, 첨단 기술 협력 기 반을 확대하였다. 아태지역 국가들과는 경제개발경험 전수, 자원 협력 등 실무 현안 을 논의하면서, APEC, ASEAN+3 를 중심으로 다자 협력 체제 구축에 주력하였다. 아 중동, 중남미, 중앙아 국가들과는 장기간 미 방문한 자원 부국을 중심으로 에너지 개발 협력을 강화하고 국가 인지도를 제고하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외교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대단했다. 정상회담 자료의 첫 - 23 -

부분은 주로 양국 관계의 무역과 투자, 우리 기업들의 활동에 제약이 되는 상대국 제도의 문제점 등이 빼곡하게 차지했다. 그리고 특유의 솔직함으로 우리 기업을 세 일즈하고 우리와의 실질 협력이 가져올 이익에 대해 설득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는 이제 여러분 앞에 동북아의 관문인 한국이 열려 있습니 다. 지금 한국에 투자하십시오. 한국은 동북아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유망하고 신뢰 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라고 설득했다. 해외 순방 중에는 빠짐없이 이러 한 경제인 간담회를 개최하고 협력을 당부했다. 그리고, 정부가 할 일을 체계적으로 지원해 나가기 위한 후속조치 시스템을 도입했다. 기업에 대한 평가도 빠뜨리지 않 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미국의 실질 대표는 우리 상품 이며, 기업이 바로 나 라 라고 강조했다. 우리 기업인들은 전쟁의 폐허에서 맨주먹 하나로 성공을 일구 어 냈다 고 칭찬하며, 바로 그런 점에서 한국 기업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고 설득했다. 4. 에너지 자원의 확보 시대를 막론하고 정상외교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20세기 정상 외교에서는 이데올로기와 핵우산으로 상징되는 군사차 원의 동맹외교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경제 통상 외 교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한 세계 각국 정상들의 행보가 숨 가쁘게 이어지고 있다. 만성적인 고유가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에너지 공급의 약 96.5%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에너지 안보를 위한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자원 에너지선의 확보야말 로 장기적인 국가발전을 위한 선결조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에너지 자 원 확보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진 데는 에너지 자체의 문제 이외에도 에너지 안보가 패권경쟁의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동맹 재편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 이기도 하다. 각국 정상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는 에너지 자원 정상외교 는 이러한 국제 안보환경의 변화를 잘 말해주고 있다. 냉전기 정상외교를 잇는 주요 - 24 -

연결고리가 이데올로기의 공유였다면 현재의 정상외교에서는 경제협력과 에너지 자 원 협력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양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도 에너지 자원확보 외교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원협 력약정 체결을 비롯하여 자원 공동개발, 발전소 송 배전선 건설협력, 가스협력 등 다 양한 형태로 자원 에너지 협력을 성사시키기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유라시아의 러 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몽골, 중남미의 멕시코, 브라질, 아 르헨티나, 칠레, 코스타리카, 동 서남아시아의 인도,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아 중동 지역의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랍에미리트 등이 그 대상지였다. 윤병세 안보 수석은 이러한 후발개도국 방문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런 자투리땅 을 왜 가느냐 는 식의 비판 아닌 비판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가장 유용하고 성공적인 정상 방문이 바로 그러한 방문 이었다고 평가했다. 사실 에너지 자원 외교에서 정상외교는 더욱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관한 한 우리나라가 후발주자였던 까닭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여정부 의 더욱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정상외교가 요구되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실제로 2004년 9월 카자흐스탄 방문부터 2006년 12 월 인도네시아까지 숨 가쁘게 진행된 에너지 자원 정상외교는 다소 늦게 출발한 후 발주자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이고도 발 빠른 행보였다. 특히 중동 중남 미 아프리카 등의 자원 보유국들은 자국 내 정치체제를 고려할 때 국가 지도자의 상의하달식 의사결정이 국가 정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를 간파한 노무현 대통령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정상 간의 신뢰와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후발주자로 서의 불리함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기존의 시장 확보를 통한 안정적 공급선 확보 에서 한 걸 음 더 나아가 적극적인 해외자원 개발과 투자 로 그 전략 기조를 전환하였다. 우리 가 직접 자원을 개발해 보다 확고한 에너지 안보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 25 -

5. 세계 중심국가로의 도약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경제력과 민주주의 발전 및 높은 문화적 창의력 등을 바 탕으로 우리가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해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동시에 기대 를 받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정상외교에 그대로 투 영하고 다자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냄으로써 우리의 국가 브랜드를 제고하고 국 민들에게는 드높은 자긍심을 심어 주고자 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국제협력을 강조하면서도 우리나라만 잘살면 그만이라 는 식의 국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해외 순방 기간 중 에는 우리 상품이 많이 팔려서 기분이 좋기는 한데, 우리만 팔아먹으면 장기적으 로 결국 우리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라며 문제를 제기한 후, 결국 서로 윈- 윈 하는 협력 모델을 찾아야 한다 는 취지의 발언을 하곤했다. 이러한 인식은 바로 국제 관계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기본 철학과 길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모든 나라가 공존하며 이익을 누리는 공동번영의 국제질서 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가치와 대의 중심의 국제질서 창출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학과 비전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은 부산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ASEM 정상회의 아시아 조정국으 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여 우리의 위상을 드높였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국 가들에 대한 원조 확대와 개발 경험 전수를 골자로 하는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 브 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사회에서의 응당한 기여와 번영된 국제 공동체 를 위한 정상 차원의 노력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선출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 26 -

제 3 장 글로벌 정상외교의 추진과정 - 27 -

1.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 외교 1-1. 실용외교로 대화의 길 열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한반도 정세는 최악의 긴장상태였다. 1994년 핵 위기 이후 전 쟁위기설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3년 2월 25일 취임 일성 은 대화를 통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이었다. 아울러, 북핵 불용과 우리의 주도적 역할을 천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그 후 외교행보는 대화를 통한 북핵문제 의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북한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전날인 2월 24일 단거리 지대함 크루즈 미사일로 추정되는 미사일 발사를 감행했고, 취임 다음날인 26일에는 5MW 원자로를 재가동 했으며, 3월 2일에는 북한 전투기가 공해상에서 미 정찰기(RC-135S)를 약 20분간 추 적한 일이 발생했다. 이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Baltimore Sun 등 14개 지 방지와의 인터뷰에서 대북 군사적 옵션 을 명시적으로 최초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은 3월 13일 미국의 부 시 대통령과 통화하고, 북한 핵문제를 외교적 노력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한, 윤영관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미국(3.26~3.29)과 일본 (3.30~31)에 파견하는 한편,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을 러시아(3.30~4.1)와 중국(4. 2~4.3)에 급파하여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전달하 고 다자 협력을 통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한반도에 전쟁 위협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2003년 4월 베이징에서 북 미 중 3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이 회담에서 한국이 배제되어, 일부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 실종 이라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가 협상테이블 에서 배제되어도 좋으니 무조건 대화부터 시작해 상호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고 말해 형식보다 내용에 무게를 두었다. 이른바 노무현 대통령의 실용외교 를 국 제무대에 처음 선보인 사례였다. 2003년 4월 3자회담이 확정 발표되기 약 3주전, 부시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다. - 29 -

한반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할 것 이라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을 제외한 북 미 중 3자 회담이 열리게 된다 는 내용도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3자 협의가 발표되면 한국 국민들은 소외된 데 대해 몹시 섭섭함을 느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사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을 다자 대화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방위 외교 를 펼쳐왔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바로 전날 중국을 방문한 파월 국 무장관이 중국에게 다자회담이 열릴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구한 후 중국의 중 재가 시작되었다. 3월 말에 이미 미국은 우리 정부에 한국이 참여하지 않은 채 3자 대화로 출발하는 방안 을 타진해왔다. 다자 틀 안에서 양자 대화 라는 유연성을 보 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형식에 관계없이 무조건 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는 입장을 확인해주었다. 상황악화는 정리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해간다는 대승적 견 지에서 내린 결단이었다. 상황 전개과정을 내내 보고받고 있던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익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음에도, 막상 실제로 한국이 빠지게 된다는 부시 대통령의 통보에는 안타까 움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국내에서 일어날 여론의 반응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화 통화에서 부시 대통령은 10여 분에 걸쳐 3자회담 결정까지의 막후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통화 끝이 씁쓸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 한 국 처지가 안팎곱사등이라더니 어쩌겠습니까. 안고 가야지. 외교통상부는 미국 일 본과 사전 협의를 거친 뒤 4월 16일 공식발표했다. 예상대로 언론이 들끓었다. 일부 언론은 왕따 당한 주도적 외교 라고 힐난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굳이 세세히 설명하고 방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때리는 대로 맞고 갑시다 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화 창구를 열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대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4개월 동안의 숨 가쁜 막후 접촉을 거쳐 마침내 2003년 8월 3자회 담이 아니라 제1차 6자회담이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반기문 당시 외교 보좌관은 한국의 참여가 배제되었을 때 그래도 괜찮다. 3자 회담이라도 성사되게 해야 한다 는 노무현 대통령의 결심이 인상적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당시 국민정서 - 30 -

때문에 우리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다자회담은 성사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지나놓고 보니 그것이 6자 회담의 결정적 계기였던 것이다. 1-2. 6자 회담 출범과 9.19 공동성명 채택까지의 과정 북핵 문제에 있어 참여정부는 한반도 문제에서는 한국의 입장이 가장 중요하다 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이 북핵문제에 가장 강한 발언권을 행사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북핵문제의 주도권은 사실 북한과 미국이 쥐고 있었 으며, 어떤 면에서 결정적인 캐스팅보트는 중국이 가지고 있어 공식적으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기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저 구경꾼이 될 수만도 없었다. 우리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면 미국이나 북한의 결정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야 한 다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북핵 해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주변 4개국과의 정상회담과 다자 정상회의를 통 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물꼬를 트는데 힘을 쏟아왔다. 특히 2003년 5월에 열 린 참여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한 미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의 해결과 관련하여 중 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핵 불용과 더불어 평화적 해결이라는 입장이 재천명되는 동시에 모든 옵션(all options)에 포함되는 무력사용 가능성이 배제된 것이다. 또한, 첫 번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 미 두 정상 간의 구축된 개인적 신뢰는 이후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한 미 공조의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 미에 앞서 참모진들은 혹시 냉대를 받거나, 오히려 불편한 상황이 초래되면 어찌하 나 라는 고민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나, 첫 한미 정상회담은 기대이상으로 성 공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첫해 북핵 외교를 위한 주요국 순방외교는 탄력을 받기 시 작했다. 미국 방문에 이어 6월에는 일본을 방문했다. 북핵 해결에 한반도 주변국들 의 협조를 얻기 위한 중요한 첫 시도였다. 일본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의 평화적 해결원칙을 재확인하는 한편, 일본과의 이견도 조율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이 즈미 총리가 대화와 압박의 병행 필요성 을 지적하자 압박도 대화를 위한 수단이 어야 한다 고 설득하였다. 이어 7월에 개최된 한 중 정상회담은 북핵 평화해결을 위 - 31 -

한 중국의 건설적 중재 역할을 이끌어냄으로써 6자 회담을 성사시키는 중대한 계기 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 문하였고, 후진타오 주석은 우리는 북한과의 채널이 열려 있다 며 역할 이행을 약 속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 같은 외교적 노력은 미국이 다자틀 내 양자접촉이 가능하다 고 천명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전쟁만은 안 된다 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력하고도 확고한 의지표명으로 미측도 더 이상 모든 옵션이 테이블위 에 있다 라는 식의 군사적 위협 발언을 하지 않고 6자회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북 한도 선( 先 ) 양자회담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마침내 6자 회담을 수용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북핵 문제는 그 후 2003년 8월에 개최된 제1차 6자회담을 시작으로, 2004년 2월 제2차 회담, 2004년 6월 제3차 회담을 거쳐 2004년 7월과 9월 두 단계의 제4차 회담을 통해 마침내 역사적인 9 19 공동성명이라는 옥동 자를 낳았다. 6자회담에서 우리의 역할이 말뿐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6자회담의 진전과 정에서 우리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는 주변국들이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위기 때 마다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원칙을 일관되게 견지 하면서 정상간 대화를 통해 당사국을 설득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2003년 10월 방콕 APEC 정상회의 계기에 개최된 두 번째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미국의 북 한에 대한 서면안전보장 방안 검토 가능성을 얻어냈다. 2005년 6월 정상회담에서는 협상이란 서로 신뢰하는 사람끼리 하는 게 아니라 불신을 갖고 있는 사람끼리 협 상을 해서 타결해 나가는 것이 의미있는 것 이라고 설득하였으며 이후 부시 대통령 도 한동안은 김정일 위원장을 거짓말쟁이 라고 비난하는 것을 자제하고, 미스터 김 정일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 32 -

1-3. 공동성명과 새로운 복병, 그리고 포괄적인 해결을 위한 행보 제4차 6자 회담 공동성명 채택으로 북핵 문제는 중대한 해결 국면을 맞이하고 있 었다. 2005년 9월 19일 베이징에서는 남북한과 미국을 비롯한 회담 참가국들이 북 핵문제 해결의 원칙과 목표에 대해 합의하였다. 북한은 공동성명을 통해 모든 핵무 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 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현존하는 모든 핵 프 로그램 포기 의사 를 문서로 밝힌 사례는 범세계적 비확산 노력의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의 핵개발 포기 의사가 분명히 확인되는 문건이었다. 미국도 북한의 핵 포기에 상응한 대 북한 관계개선과 에너지 지원 동참, 나아가 경제협력 의사를 확실하게 밝 혔다. 또한, 미국은 북한이 핵문제 해결의 관건으로 제기하였던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 요구에 대해서도 평화적인 공존 과 함께 핵 또는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 임을 약속하였다. 특히 공동성명은 북 미 관계정상화뿐 아니라 북 일 관계정 상화 및 직접 당사자 간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 등 한반도 냉전구조 및 정 전체제 해체와 관련된 중대 의제들도 포괄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5년 9월20일 국무회의에서 4차 6자회담 공동성명에 있는 4조 의 평화체제 구축 과 관련하여 가장 합리적인 대화체제가 마련될 수 있도록 준비 해야 한다 며, 결국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동북아 평화번영의 토대를 놓을 수 있 는 계기로 발전될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 4조2항은 노무현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한반도 안보환경의 개선과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진입이라는 비전을 구체화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관철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33 -

9.19 공동 성명 주요 내용 1조. 비핵화(북핵 폐기 / 북한 안보 우려 해소) - 북한은 모든 핵무기 및 현존하는 핵계획의 폐기, 조속한 NPT 및 IAEA 안전조치 복귀 공약 - 미국은 한반도내 핵무기 부재 및 북한에 대한 공격 또는 침공 의사 부재 확인 - 한국은 자국 영토 내 핵무기 부재를 확인하고,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에 따라 핵무기 부재 공약 재확인 -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준수 및 이행 필요성 언급 - 여타국은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 권리 존중 및 적절한 시기 경수로 제공문제 논의에 동의 2조. 관계 정상화 - 미 북간 상호 주권존중, 상호공존 및 관계정상화 - 일 북 관계정상화 3조. 대북 국제지원 - 에너지, 교역 및 투자분야 경제협력 증진 - 대북한 에너지 지원을 포함한 참가국간 경제협력 등 공약 - 한국은 2백만Kw 전력공급 제안 재확인 4조. 평화체제(한반도 동북아 안정 / 평화비전 제시) - 직접 관련당사국간 적절한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개최 -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방안 모색 5조. 이행원칙 -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 단계적으로 상호 조율된 조치 6조. 차기 회담 - 2005년 11월초 북경 개최 그러나 9 19공동성명의 구체적인 이행 과정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 다. 북한은 제5차 회담 1단계회의부터 불법행위에 관한 미국의 금융조치문제를 제 기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핵 문제 논의에 임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금융조치는 불법행위로부터 미국의 국익을 보호하기 위 한 방어적 조치로서 6자회담과는 별개의 법집행 차원의 문제이며 타협의 대상이 아 니라는 입장 하에 북한이 6자회담에 조건 없이 복귀할 것을 촉구하였다. 북미 간의 입장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상대국 지도부에 대한 상호비난이 이어 지는 등 감정적 대립마저 격화되었다. - 34 -

2006년 새해가 되었지만, BDA 문제로 6자회담은 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 저 러한 해결 방안이 수면 아래에서 논의되기는 하였으나, 북미간 입장 차이를 좁히기 에는 역부족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BDA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모 든 문제와 미북 양측의 관심사를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구상은 실무진간의 조율을 거쳐 마침내 2006년 9월 개최된 한 미 정상회담에 서 논의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 6자회담 재개 및 9 19공동성명 이행 을 위한 한 미간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 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해서 위태위태한 벼랑 끝 전술을 펼 치고 있었다. 북한은 2006년 7월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실 험 발사한데 이어서, 한미 양국의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을 둘러싼 관련국간 협의 가 진행되는 가운데, 10월 9일에는 마지막 카드 로 여겨졌던 핵실험마저 강행했다. 국제사회는 미사일 발사에 대응한 유엔 안보리 결의 1695호에 이어서 안보리 결의 1718호를 채택하였고, 미국을 위시한 관련국들의 잇따른 대북 제재가 발표되었다. 1-4.북 핵실험 국면의 타개 모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언론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안이한 대북 인식 과 퍼주기식 대북정책, 그리고 미온적인 대응에 대한 비판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위기 국면에서도 균형감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차분하면서도 냉정 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나갔다. 국민들 중에는 정부가 전쟁도 불사하겠 다는 자세로 강력히 대응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 통령은 정부가 전쟁도 불사한다고 하면 한반도에는 긴장이 고조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경제 상황이 불안해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들의 몫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핵 위협, 엄중하지만 과장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노 무현 대통령의 통치철학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조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엄정히 대응 하되,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한다는 전략적 기조 하에 대 처해 나갔다. 대북 인도적 지원 중단, 대북 성명 발표, 안보리 제재 동참 등의 조치 를 취하는 한편, 이러한 안보상황이 여타 분야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 35 -

관리해 나갔다. 우리의 주식시장, 금융시장, 국가신용도 등 경제전반이 별다른 영향 을 받지 않고 안정을 유지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게 위기의 순간에서도 협상의 동력을 잃지 않기 위해 외교력을 최대한 집중하였다. 파국을 막으려는 외교 노력은 진정으로 혼신의 힘 을 다하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핵실험 당일 한 미 정상 통화 및 한 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핵실 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2006년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한 중 정상회담에서 노무 현 대통령은 미국에 제시했던 포괄적 접근방안 을 중국측에 설명했다. 6일 뒤 후진 타오 주석은 탕자쉬안 국무위원을 평양에 특사로 보냈다. 국제사회에는 점차 북한 의 핵실험에는 단호히 대응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회담 복귀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조율된 대처방안이 필요하다는데 공감대가 형 성되어 갔다. 2006년 11월 18~19일 양일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APEC 정상회 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4국 모두와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의제는 차기 6자회담 재개관련 협력방안이 주가 되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을 직접 설득했다. 북핵 문제는 미국이든 북한이든 누군가 먼저 결단을 내리면 해결된다 고 설득하여 마침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북한이 핵 무기를 포기한다면 남북한과 미국이 만나 종전 선언문에 공동 서명할 수 있다 라는 발언을 이끌어 냈다. 점차 회담 재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우리는 미측과의 협의를 진행하는 한편, 중국과도 협의를 계속했다. 마침내 2006년 10월 31일 전격적으로 북 미 중 회동이 이 루어지고,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실질적인 합의 도출을 위해서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미북 간 베를린 접촉이 추가로 이루어졌고, 2007년 2월 9 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 합의문이 채택되었다. 이른바 2 13 합의 라 불리는 위 합의문의 채택을 통해, 2005년 9 19 공동성명을 실 천단계에 진입시키고 북한의 실질적인 핵폐기 과정을 개시하는 기반이 확보되었다. 북한은 비핵화와 관련한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하는 한편, 이에 대 응하여 여타 5개국은 북한에게 에너지 지원을 하기로 하였다. 또한 한반도비핵화, 미 북/일 북 관계정상화, 경제 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 안보 체제의 5개 실무그룹이 - 36 -

구성되어, 2 13 합의와 9 19 공동성명 이행을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틀도 마련하였 다. 이 밖에도, 6자 외교장관회담을 개최하여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방안을 모색하 기로 하고, 9 19 공동성명에도 포함된 한반도 평화 체제 협상을 갖기로 한 점을 재 확인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정치 안보 경제적 우려를 해소하여 핵을 포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다층적 장치를 본격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1월 한미 정상회담과 북핵 실험 이전에 개최된 9월 한미 정상회담은 6자회담 재 개와 북핵 폐기 진전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룬 회담이었다. 이러한 정상차원의 합의 를 기초로 미북 간 베를린 합의가 탄생했고, 2007년 2월 6자회담이 재개되어 9 19 공 동성명 이행을 위한 2 13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종석 전장관은 2 13 합의 는 9 19 공동성명 이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냐 파국이냐의 거의 마지막 갈림 길에서 이루어진 대반전 이라고 평가했다. - 37 -

<2.13 합의 요지 > o 북한 내 1 핵시설의 폐쇄 봉인 및 IAEA 요원 복귀 2 모든 핵프로그램의 목록 작성 협의(60일 이내) - 60일 이내 중유 5만톤 상당 긴급에너지 대북 지원 o 미 북/일 북 관계정상화 위한 양자 대화 개시(60일 이내) - 미측은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과정 개시 o 대북 경제 에너지 인도적 지원(다음 단계) - 1 모든 핵계획 완전 신고 및 2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 불능화 기간 중 중유 95만톤 상당의 지원 제공 - 지원부담은 한 미 중 러간 균등 형평의 원칙에 따라 분담 합의(일측은 자국 우려 사항 진전시 참여 기대) o 6자회담내 5개 실무그룹(W/G) 구성(30일내 회의 개최) - 한반도 비핵화, 미 북 관계정상화, 일 북 관계정상화, 경제 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 안보체제 o 초기단계 조치 이행 완료 이후, 6자 장관급 회담 개최 o 직접 관련 당사자들간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관련 협상 1-5. 북핵 정상외교 평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정상외교의 터널 끝은 수차례 보였다가 사라지곤 하는 과 정을 반복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는가 싶다가도 또 다시 어둠속에서 장애물이 등장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희망과 신념을 잃지 않았으며 취임 초기부터 밝 힌 원칙과 기조에서 흔들림이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이 되어 갈 즈음 에 밝힌 바와 같이, 적어도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는 점이 최소한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종석 전장관이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로서는 북핵 문제는 곧 우리의 사활이 걸린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항상 신 중하고 정확한 상황 파악 후 대처하려고 노력했고, 미국측의 불만과 다소간의 갈등 - 38 -

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한 결과였다. 나아가, 한반도에서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소극적인 성과 이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원칙과 주장이 결국에는 미국이 북핵 문제의 해법과 관 련하여 전략적인 변화를 도모토록 유도한 효과도 발휘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공 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에 동의하고 북한과의 양자 접촉을 통해 2 13합의에 이르는 소 위 마지막 갈림길에서의 대변화 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미국이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끝까지 열어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대목도 있다. 북핵 실험 이전에 북핵 문제 해결의 가닥을 잡았더 라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적기를 놓치고 나서 지금이라도 북핵 문제 해결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진전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이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결국 자신들의 벼랑 끝 전 술이 효과를 거두었다 라는 식의 잘못된 자신감을 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 그것이 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북핵 정상외교는 여전히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12월, 2 13 합의가 아직 도출 될 가능성이 가시권에 잡히지도 않은 어느 날, 북핵 문제 해결에 가장 주도적인 역 할을 했을 때 9 19공동성명이 나왔다. 탄생하자마자 땅에 묻혀버렸지만, 봄이 오면 싹이 트듯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평화구축,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평화체제의 방향 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것 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발언은 당장은 지난날의 노력이 헛되 보여도 결국은 평화를 위한 씨앗이 될 것임을 확신하 는 의지와 신념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 39 -

2. 동북아시대를 위한 균형적 실용외교 2-1.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와 동북아 균형자론의 탄생 동북아 정치 지형은 분명 숱한 잠재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북핵문제, 양안위 기, 영토분쟁, 과거사,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 등이 그것이다. 그럴수록 우리와 같이 역사적 고난을 겪은 나라의 평화와 화해협력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망과 염원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동북아 구상을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긴요한 생존전략 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위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동북아 균형자 론이었다. 즉 동북아 균형자론의 한 축은 과거 우리 역사에 대 한 처절한 반성이었고,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고 있는 동북아 현실에 대한 우려가 또 다른 한 축이었다. 동북아 균형외교 란 동북아시아에 평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EU같은 지역 공동체 를 구축하자는 참여정부의 고단위 외교 전략이다. 동북아 균형외교의 시발점인 동 북아시대 구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시절인 2001년 초안이 작성된 발상의 전환 과 동북아의 중심국가, 2002년 11월 강연한 21세기 시대정신과 리더십, 2002년 9 월 유럽연합 기자단을 대상으로 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질서 란 연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동북아 역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노무현 대통 령의 관심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것이었다. 대통령은 산에 오를 때마다 우리 역사 를 이야기하곤 했다. 때로는 인조의 삼전도 굴욕 사건을, 때로는 대원군의 선택 을, 때로는 100년 전 우리는 평화를 추구했으나,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던 우리 땅에 서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저 지켜봐야만 했고 마침내 나라마저 강탈당하고 말았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동북아 역사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관심과 정책적 의지는 당선자 시절부터 계 속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3일 당선자 시절 취임사준비회의에서 동북 아시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 수백 년 동안 갈등과 대립을 겪어온 동북 아, 그 속에서 어느 쪽에 기댈 것인가를 놓고 우리끼리 싸우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 우리 한국이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번영의 새 질서를 제안하고 주도해 나가는, 적 어도 동참해 나가는 그런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도할 - 40 -

수 없는 역사를 뛰어넘어 자주적인 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시대가 동 북아시대입니다. 이러한 동북아시대에는 미국도 동북아 동반자의 일원으로서 함께 대등하게 참여해서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고 혜택도 함께 누리는 관계가 될 것입니 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동북아 구상을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의 구상은 대통령 선거공약의 4대 정책목표 중 동북아 중심국가로 의 도약 으로 설정되었다가 인수위원회를 거치며 참여정부 3대 국정목표의 하나인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로 구체화된다. 동북아 시대 로 바뀐 데에는 동북아 중 심국가 란 단어가 주변국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내부 토의와 의견 수렴이 진행되면서 동북아시대 구상 실현을 위한 핵심적인 전략 과제로 자주 국방을 위한 자주적 군사력 건설과 국방개혁, 균형적 실용외교를 수행하기 위한 선 진외교체제 구축 자주국방과 균형적 실용외교를 기반으로 하는 한 미동맹 발전 신 뢰구축과 예방외교를 통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 구축 등이 설정된다. 이러한 동북아 구상은 우리나라만의 발전과 번영에 국한하지 않는다.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공존의 질서 구축을 위해서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보다는 관 련국들과의 상호조화와 협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아 시대 란 단어 의 지리적 개념은 남 북한과 중국, 일본, 러시아, 몽골에 국한되지만 이를 기능적 개 념으로 확대하면 미국과 ASEAN 국가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기능적 개념이란 미국 이 동북아 지역의 경제와 안보에 미치는 영향력과 ASEAN 국가들의 잠재력을 고려 한 개방형 지역협력을 염두에 둔 것이다. 2-2.동북아 구상의 본격 출범과 비판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변방 역사 극복론 을 제시한 후 같 은 해 8월 15일 경축사를 통해 동북아시대 구상의 개요를 명확히 밝혔다. 동북아에도 협력과 통합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쪽에 기댈 것인가를 놓고 편을 갈라서 싸우다가 치욕을 당하는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동북아시대 구상의 핵심 입니다 제58주년 광복절 경축사 - 41 -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구상에 대한 비전과 의지는 2005년 일본의 역사왜곡, 신 사참배, 전쟁미화 등을 거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공개적으로 언급되었다. 2005년은 을사조약 100주년, 한일 수교 5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 령은 2005년 2월 25일 취임 2주년 기념 국회연설에서 우리 군대는 스스로 작전권 을 가진 자주군대로서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로서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 낼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평화를 추구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 다. 이제 우리 군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것을 목 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자로서 이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 낼 것입니다. 이를 위해 동북아시아의 안보협력구조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한미동 맹의 토대 위에서 주변국들과의 더욱 긴밀히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라고 밝혔다. 그리고 다시 3월 22일의 3사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동 북아시아의 전통적인 평화세력입니다. 역사 이래로 주변국을 침략하거나 남에게 해 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우리야말로 떳떳하게 평화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 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 을 해나갈 것입니다. 따질 것은 따지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주권국가로서의 당 연한 권한과 책임을 다해나가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 라 동북아의 세력판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균형자 라는 용어 자체가 미 국과 중국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찾는, 말하자면 근대 서구 외교사에 있어서의 소위 세력 균형 개념으로 오인되면서, 이는 한미 동맹 관계를 약화시킴으로써 국가 안 보를 근본에서 위태롭게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당시 정동영 장관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한 미 일 3각 동맹이 아니다 라고 발언 함으로써 논란이 더욱 확대되고 정치화되었다. 정치권과 언론계 등에서는 동북아 균형외교 를 내세운 참여정부가 한 미동맹을 떠나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즉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국이 남방 삼각관계 (한 미 일 삼각관계)를 떠나 북방 삼각관계 (북 중 러 삼각관계)로 들어가려는 움직임이 아니냐는 것이다. - 42 -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은 무엇보다 긴밀한 한 미동맹 유지 를 기반으로 해서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메커니즘을 추구하는 것 이라고 잘라 말했 다. 유럽에서 미국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중요한 회원이자 OSCE(유럽안보협력기 구)의 일원이듯이, 동북아에서도 한 미동맹을 바탕으로 미국을 동북아 안보와 경제 협력에 동참하게끔 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대통령의 연설 그 어디에도 한 미동맹을 불안하게 하는 언급은 없었다. 오 히려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대통령의 균형자론은 한 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동북아 균형자를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동북아 미래의 불 안 요인은 결국 중국과 일본 이며, 우리가 말하는 동북아 균형자는 19세기 유럽에 있어서의 세력균형이라는 의미에서의 균형자가 아니라, 적어도 한국이 중심을 잡 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가야한다 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었다. 2-3.동북아 균형자로서의 위상 확립 노력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의회 연설에서도, 미국과의 정상회담이나 조야 인사를 대 상으로 한 연설에서도,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 중국의 청화 대학에서도 자신의 동북 아 구상의 논리 구조와 당위성을 역설했다. 다자무대에서는 2006년 9월 10일 핀란 드 헬싱키에서 열린 아시아 유럽정상회의(ASEM)를 계기로 나는 냉전시대의 불신의 벽을 제거하고 유럽통합의 기초를 닦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성공적 협력 사 례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을 위한 귀중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 언 급함으로써,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 구상을 국제사회의 다자무대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개와 설득만으로 동북아 균형자 구상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언급했듯이 전략이라는 것은 그 전략을 운영하는 힘이 있 을 때 비로소 전략으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동북아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균형자로서의 위상을 제고하는 노력이 체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했다. 이러한 위상 제고는 실력을 배양하는 작업이었고, 주변국을 설득하고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앞서 상술한 바 있는 실용적 균형외교 로 풀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동북아 구상, 동북아 균형자론, 균형적 실용외 - 43 -

교가 하나의 논리 구조 속에서 내적인 응집력을 갖추면서 수렴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2월부터 협상이 시작된 한 미 자유무역협 정(FTA) 체결에 심혈을 기울였다. 개방적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우리의 대외 경제정 책적 고려와 자유뮤역협정 체결에 따른 경제적 효과 이외에도, 한미동맹의 영역을 안보 군사 분야를 넘어 경제부문으로까지 심화 확장시키려는 안보 전략적 가치도 고 려되었다. 동북아시대 구상은 폐쇄적 지역주의 가 아닌 개방적 지역주의 를 핵심 원칙으로 하고 있고, 미국을 포함한 새로운 다자 안보체제 구축이 핵심 과제중의 하 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2006년 10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합의한 것도 자주국방과 균형적 실용외교를 위한 대표적인 동북아시대 구상 전략과제 중 하나였 다. 자주국방의 핵심요체인 작전지휘권 없이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다자안보 협력 체제를 구축하자고 제안해봐야 실효성과 반향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외교의 또 다른 축이라 할 수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강화에도 나섰다. 일본과는 올바른 역사인식에 기초한 관계를 추구했고, 중국과는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 를 구축함으로써 질 양적 측면 에서 눈에 띄는 발전을 가져왔다. 러시아와는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 로 양국 관계를 격상시켰다. 이러한 양자 관계 강화와 병행하여 한중일 3국의 상호의존성을 높이고 협력 사업 을 발굴함으로써 동북아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한 중 일 3국 정상은 2003년 공동선언을 통해 안보 통상 재무 환경 등 14개 협력 분야에서 3국간 협의체를 발족키로 하였으며, 2004년 3자 정상회담에서는 공동선언의 이행 촉진을 위한 행동전략 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한중일 협력 과정에서 우리가 먼저 움직이고 주도하고 모범을 보였다. 동북아 구상의 또 다른 핵심축인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을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 로 경주하였다. 현실적으로는 북핵 문제 등 동북아 안보 불안 요인을 해소하고 상호 신뢰를 구축해야 하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어려움이 따르고 있었다. - 44 -

그러나 6자회담 과정에서 채택된 9 19 공동성명에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을 위한 관 련국간의 협력 조항을 포함시키고, 2 13 합의 이후에는 동북아 안보 및 평화 체제 논 의를 위한 실무 그룹을 구성하여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동북아 핵심국 모두가 참여하 는 다자간 안보 대화의 장을 출범시켰다.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에서의 다자 안보협력은 각 구성원의 안보 이익을 동시에 증진하는 협력안보 와 정치 군사적 차 원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포함하는 포괄안보, 민 주주의, 인권 등 인류 보편의 가치에 기반한 인간안보 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추진 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몇 가지 방안에 대한 논의를 주도했다. 반관 반민 성격의 동북 아 안보 대화 협의체인 동북아협력대화(NEACD, Northeast Asia Cooperation Dialogue) 를 활성화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점차 이를 동북아 국가간 안보현안문제를 협의하는 다자안보 협력체로 점진적으로 발전되도록 유도하는 방안, ASEAN지역포럼(ARF, ASEAN Regional Forum)을 확대시켜 점차 동북아에서의 비전통적 안보 위협은 물론 전통적 안보문제 영역으로까지 확대하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 2-4.평가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바와 같이 동북아 구상은 우리의 생존 전략이고 우리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 이다. 국경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이 동북아 평화 비전의 꿈을 갖게 하고 싶은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소망이었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을 방문할 때 는 한 마디라도 더 그 나라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욕심으로 일정을 짜고 실제 로 행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과는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균형적 실용외교를 통 해 우리의 위상을 제고하고, 주변국과의 포괄적 협력을 강화하는 성과에도 불구하 고, 정작 동북아 다자 안보체제 구축과 같은 동북아 구상의 핵심 지표는 성취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한일 관계는 정체되고 일중 관계마저도 회복 조짐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기간 중 동북아 평화 번영 구상이 손에 잡히는 구 체 결과를 거둘 것이라고 당초부터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자안보 협력 강화와 동북 아 평화체제 구축은 당면 목표라기보다는 어떻게 지향해 나가느냐하는 개념의 문제 이기 때문이었다. 동북아 지역이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평화 번영의 공동체를 이룩 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 선상에서 움직이는 것이 - 45 -

중요하며,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10년 후, 15년 후 결실을 맺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한 중 일 정상회담 등 3국 협력이 일본의 역사 를 거스르는 행위로 때로 불발되기도 하고 동력이 약화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역사로부터의 반성-동북아균형자론 2005년 2월 27일, 대통령은 불현듯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1월 말, 일본 문부과학성 장관이 군대위안부를 기술한 역사교과서를 자학적 교과서라고 비난한 데 이어 2월 22일에는 시마네( 島 根 )현 의회가 독도의 날 제정 조례안을 제출하고, 이에 대해 주한 일본대사가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일본 땅 이라고 주장하는 등 어 처구니없는 발언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3 1절은 이틀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통령은 점점 더 그 도가 심각해지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손 녀의 재롱을 뿌리치면서 꼼꼼히 메모를 했던 대통령은 3월 국민에게 드리는 글 을 통해 외교전 불사 가능성 언급 등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다. 사실, 이전의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 인식은 정부 내의 일반적인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0년 당시 독도의 주무장관인 해양수산부장관이었던 시절의 노무현 장관 역시 정부의 방침에 따라 독도 문제를 우리가 특별히 제기하여 문제로 삼지 않는다 는 입장에 충실했다. 이러한 입장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도 일관되게 견지되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2003년 6월, 일본 방문 때 이른바 유사법제가 통과되었을 때에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그 후 계속되는 일본의 지도적 정치인들의 역사왜곡발언에 대해서도 굳이 공개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사과를 무효화시키는 일본의 행동이 거듭되자, 대통령 은 그 뒤에도 몇 차례 일본 측에 분명한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일본의 반응은 우이독경 ( 牛 耳 讀 經 )이었거나 국내용 발언 이라는 폄하 수준을 벗어나 지 못했다. 그렇게 동북아의 미래를 위해 유보하고 인내해왔지만 여전히 한 치도 변 함없는 일본의 태도를 보면서 대통령은 마침내 펜을 들고 입을 열었다. 그것이 국 민에게 드리는 글 이고 동북아 균형자론 이다. 그것은 지난날의 잘못된 역사가 더 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절박한 인식의 소산이었다. 국정일기(10), 윤태영 제1부속실장 - 46 -

3. 한반도 주변 4국과의 외교 현재 동북아 지역은 각국의 전략적 이해갈등과 국내 민족주의 정서 심화 등으로 여전히 냉전적 역사적 대립 구도가 잔존하고 있다. 다양한 안보문제마저 서로 맞물 려 있어 타협점을 찾기란 대단히 어렵다. 특히, 최근에는 북한의 핵문제로 한반도 및 동북아 안보상황이 복잡해지면서 협력과 갈등의 구조가 병존하는 양상으로 전개 되고 있다. 3-1.한 미 동맹의 포괄적 역동적 미래지향적 발전 3-1-1. 한 미 동맹 재조정의 불가피성 지난 50년간 한 미동맹은 냉전기에 형성된 그 어떤 동맹보다도 성공적인 동맹이 었다. 이 시기 한미 동맹은 군사 동맹으로 한국방어와 대북억지 가 중심이었다. 하 지만 1980년대 말 시작된 냉전종식 과정과 이로 인한 국제안보 환경 변화, 그리고 한 미 양국의 내부적 변화는 한 미동맹의 변화를 요구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해 왔다. 특히 9 11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안보전략이 변화되면서 한미동맹은 새로운 국 면으로 접어들었다. 2002년 6월의 미국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은 민주주의 확산과 국력신장을 통해 발전한 한국 국민의 인식수준에 따라 미래지향적인 한미동 맹의 재정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취임 당시 한미 관계는 참여정부 대외정책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었다. 과거와 같은 일방적이고 의존적인 한미 동맹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미 동맹의 재조정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반미라서 흔든다 는 식의 비판이 계속되었다. 이와 관련, 이종석 전장관은 참여 정부가 하고 자 했던 것은 흔한 비판처럼 한미 동맹의 폐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조정 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조정을 대표하는 용산기지 이전,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및 감축 등은 모두 양측의 필요에 의한 문제였다. 우리 내부의 변 화와 미국의 요구 속에서 한미 동맹 조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 47 -

3-1-2. 북핵보다 더 시급한 것이 한 미 동맹 참여정부 출범당시 한반도의 처지는 94년 이후 최고조에 달한 북핵 문제로 인해 급박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북핵문제보다 더 시급한 것이 한 미동맹관계의 재확인 이라는 목소리도 높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 미동맹 관계의 재확인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고, 새로운 반전의 기회를 모색해 나갔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래 한미동맹 조정의 방향은 현재 의 동맹관계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키면서 보다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한반도 및 주변 안보환경 변화에 부응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 장경제체제라는 공통의 가치를 토대로 한 포괄적 역동적 호혜적 동맹관계로 지속 조 정 발전되어야 한다. 는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관계에 대한 큰 원칙이 세워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취임식을 통해 한미 동맹은 우리의 안전보장과 경 제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으며 우리 국민은 이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고 강조하고, 이어서 우리는 한미 동맹 관계를 소중히 발전시키고 호혜 평등의 관계로 더욱 성 숙시켜 나갈 것 이라고 천명했다. 3-1-3. 첫 번째 한 미 정상회담 취임 후 5월 초로 예정된 방미 일자가 가까워지자 미국의 공식, 비공식 외교사절 들의 방한이 러시를 이루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첫 한 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기회 로 활용하였다. 4월 16일에는 상춘재에서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 시니 어와 만찬을 함께 했다. 부시 시니어는 한 미 정상회담에 유익한 조언을 해달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나는 당신의 친구요. 나는 한 미 관계에 대해 당신과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고, 내가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 당신이 이런 것들을 도와주면 좋겠소 라고 말하라 고 하면서 대통령님의 솔직함이 우리 대통령과 통하 게 할 것입니다. 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에 대한 정치 적 부담을 많이 갖고 있다는 점에 공감한 뒤 한국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 지 최대한 설명을 하고, 한국이 원하는 것들을 있는 대로 모두 제시해야 한다 고 했 다. 만찬 대화는 한 미 관계에서 북한문제로 넘어간 뒤 예정 시각보다 훨씬 늦게 끝 - 48 -

이 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4월 한 달 동안 미국에서 온 여러 주요 인사들을 접견했다. 그들 은 한 미간에 놓여 있는 현안보다는 부시 대통령의 성격이나 취미 등 개인적 면모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워싱턴의 원로 의원들 사이엔 한국에 대해 매우 강한 위 기감이 있었다. CBS방송의 60분 이 2월 9일에 보도한 <양키 고우 홈 한국의 반미 정서>가 영향을 미친 탓도 있었다. 미국내에서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 이 시 사프로그램은 주한 미8군 사령관 찰스 캠벨이 한국에서 성조기가 찢기는 모습을 설 명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전국에 중개했다. 2002년 12월 14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는 촛불시위대에 의해 대형 성조기 여러 개가 찢겨졌다. 미국 방문 길에 노무현 대통령이 풀어야 할 시급한 현안은 어쩌면 북핵보다 한 미 동맹관계의 재확인이었다. 한 미 정상 간의 만남을 준비하는 데에는 최소 2개월이 걸렸다. 외교통상부와 NSC가 형식과 내용을 만들어갔다. 북핵문제와 한 미 동맹, 주 한미군 재배치, SOFA(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 개정 등 굵직한 이슈들이 한꺼번에 걸려있는 상황은 실무자들을 버겁게 했다. 정리된 내용들이 부서별로 취합되면 순 방준비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수시로 보고를 올렸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회의가 열 렸다. 너무 과욕을 부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보 불안과 경제 심리를 안정시 키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며 노무현 대통령은 담당자들에게 긴장 이완을 주문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길에는 반미냐, 친미냐, 친북이냐, 반북이냐, 동맹이냐, 자 주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져 있었다. 어떤 언론은 한반도에 최악의 위기상황이 발발 해 있다고 했고, 어떤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이 좀 더 자주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 는다고 힐난했다. 방미 직전 청와대에서 열린 마지막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참 모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합시다. 우리 처지는 지금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앞에는 강이 있고 뒤에는 절벽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 있는 제 느낌을 비굴하지 않게, 그러나 솔직하게 전달하겠습니다. 따지고 지켜야 할 국익이 친미, 반미 같은 의미없는 논쟁에 우선한다는 의미였다. 5월 11일 밤, 대통령 전용기가 13시간 40분을 날아 마침내 뉴욕에 도착했다. J.F. 케네디 공항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미 공항 측은 한국의 대통령 전용기가 착 - 49 -

륙한 직후 모든 비행기들의 이착륙을 금지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들이 단골 로 묶는 유서 깊은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 짐을 풀었다. 워싱턴에 앞서 뉴욕을 먼저 방문한 것이다. 이유는 경제 때문이었다. 5월 12일 오전부터 시작된 미 국 경제인들과의 만남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시장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친 시 장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노사 신뢰관계 구축, 관치 금융 근절, 시중은행 인사 불개입 등에 관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표명은 그의 경제 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급진 좌파이고 반시장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강했던 미국 경제인들은 직접 만나고 연설을 들으면서 다른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5월 14일 오후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묵 고 있는 백악관 영빈관인 블레어하우스에는 거의 30분 간격으로 미국 측 주요 인사 들이 찾아왔다. 부시 대통령의 막역한 친구인 에반스 상무장관을 비롯해 모스크바 에 출장 중인 파월 국무장관 대신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예방을 했는가 하면 럼스펠드 국방장관도 노무현 대통령을 찾았다. 부시 시니어 전 대통령이 상춘재를 다녀간 이후 뉴욕에서부터 워싱턴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찾았던 사람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한 미 동맹관계를 강화해 달라고 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북 핵 문제를 풀기에 앞서 한미 동맹관계를 확인하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이 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 연방 의사당에서 하원 지도부와 만났을 때, 한 노 의원을 만 났다. 그 의원은 한국전쟁을 상기 시키면서 한국이 미국에 빚이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미국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알링턴 국립묘지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을 방문한 직후 참모들에게 말 했다. 5만 4천명이라는 미국인이 한국전쟁에서 죽었다. 한국에서 반미 시위하는 거 보고 미국이 펄펄 뛰는 거 이해한다. 40년 전 한국은 미국을 위해 베트남 전쟁에 갔 다. 그리고 미국을 위해 이라크에 가고 있다. 동맹이라는 평등한 친구관계는 어떻게 빚을 갚고 나야 이뤄지는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말 속에는 한 미 간의 동맹관 계가 이제 호혜적 평등적 관계로 발전해 가야 한다는 분명한 원칙이 숨어 있었다. - 50 -

5월 14일 오후 6시 30분, 드디어 한 미 정상회담이 시작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그 의 친구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부시 대통령은 대통령님 과 제가 남자 대 남자로 친해지길 바랍니다. 오늘 대통령님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 고 계신 것을 자유롭게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이 친구들 간에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 북핵문제에서부터 이라크전, 국제 경제, 경영 지배 구조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주한 미군 재배치의 시기 조정과 미 국의 전략 변화, 군사력에 대한 논의도 오갔다. 정상회담 후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걱정했 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을 보장했다 고 밝혔다. 사실, 한 미 정상회담 이 진행되기 직전까지 양측 실무팀은 공동선언문 내용을 두고 밤샘 토론을 벌였다. 문구가 수정되고 다듬어졌다. 특히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 될 경우에는 추가적 조치(further step)의 검토가 이루어지게 될 것 이라는 문구에 대한 심도있는 토의가 이루어졌다. 추가적 조치는 모든 옵션(all option)을 배제하 지 않는다 는 미국 측의 입장을 완화한 표현이었다. 여기에 북한이 상황을 악화시킬 때에 한한다는 전제가 배경 설명으로 덧붙여졌다. 두 정상 간의 만남은 실무진들 사 이에 지루하게 이어져왔던 토의를 종식시켰다. 한 미 동맹관계에 대한 우려가 불식 되는 듯했다. 북핵 문제로 인한 경색 분위기는 북핵문제 평화적 해결 원칙 재확인 이라는 성문( 成 文 ) 아래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야당과 국내 언론의 반응은 차가웠다. 방미 기간 중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발언들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도 분분했다. 아양 떤다 평소 소신과 거리 미국 예찬 등 국내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가 대미 저자세였다고 맹비난했 다.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주최한 행사에서 53년 전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 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을 것 이라고 한 발언이 꼬투리가 됐다. 미 의회 지도자들 과의 만남에서 한국은 미국의 이상과 제도, 협력이 가장 성공적으로 꽃피운 나라 라고 말한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귀국길 기내 기자간담회에서 어느 기자가 물었다. 방미 후 미국은 대통령님에 - 51 -

대한 불신을 해소했다고 합니다만, 국내에서는 대통령께서 어떻게 저렇게 변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개의치 않습니다. 미국에 가서 그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 나쁜 소리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한 미 관계는 좋은 관계여야 합니다. 라고 답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전략은 일련의 순서를 가지고 있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 었던 3월에는 한 미 동맹관계를 우려하는 여론에 개의치 않고 분명한 입장을 고수하 면서 미국이 평화적 해결 을 천명하기를 기다렸다. 4월에는 이라크 파병을 통해 미 국에게 도움을 준 뒤 미국이 대북 관련 평화적 해결 방침 을 확고히 밝히자 비로소 동맹관계 수습에 나섰다. 5월 방미 기간 동안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신뢰 표 명은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북핵 위기설은 한 미 정상외교를 기점으로 급격히 잦아들었고, 양국 정상 간에는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 우정을 갖고 해결할 수 있는 신뢰가 구축되었다. 부시 대통령 은 우리가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 우정을 갖고 해결한다는 데 대해 조금도 의심이 없다 고 신뢰를 확인했다. 우리는 북한과 관련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성 취해 나가는 데 있어 진전하고 있다 고 말하면서, 나는 한국 경제에 관해 자신감을 갖고 있다 고도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한 미 동맹관계가 지난 50년 동안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50년간, 아니 그 이상 더욱 더 발전시켜 나 갈 것에 합의했다 며 한 미 동맹 관계를 적극 부각시켰다. 또한 많은 국가 정책적 문제에도 합의를 이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부시 대통령과 제가 더욱 신뢰하게 됐 다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과 참모들에게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고 말했다. 첫 번째 한미 정상회담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했던 한 측근은 당시 상황과 정상회담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핵과 주한미군 재조정 문제가 현안으로 제기된 가운데, 정상회담의 성과를 기대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비서실과 관계 부처가 정상회담을 전략적으로 준 비하고, 대통령 특유의 솔직함과 자신감, 그리고 설득력으로 대응한 결과 정상회담 은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한미 관계 발전의 단초를 열었고, 이후 미국은 참여정부의 외교역량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 52 -

3-1-4. 심리적 의존상태 벗고 모든 관계를 정상화 합리화하자...2사단 후 방 배치 동의 참여정부 초기 미 2사단의 후방 배치가 논의되자,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인계철선 을 가지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안 된다 는 여론이 팽배하였다. 심지어 정부 안에 서도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다. 한쪽에서는 미 2사단 물리고 나서 북한이 밀고 들어 오면 어떻게 하느냐, 다른 한쪽에서는 만약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북한이 전방에 있는 2사단에 즉각 보복할 텐데, 2사단을 빼면 보복할 데가 없어지니까 미국이 북한 을 때리기 위한 사전준비 작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주한 미군 재배치와 감축을 적극 수용하자고 한 이유는 너무 무리하게 친구 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결국 그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데 지장이 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며, 미국 군대를 서울 북방에 두고 거기에다 인계철선이라고 부르는 것 은 우리 국민들로서도 부끄러운 일이고 미국에게도 예의바른 일이 아니다 라고 말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야말로 모든 관계들이 정상적이고 합리적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반대 여론을 뒤로 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지력이 약화 되지 않고 공동의 이익이 증대되도록 긴밀히 협의하자 는 원칙을 세웠다. 정직하 게 보는 관점에서 국방력을 비교하면 이제 2사단 뒤로 나와도 괜찮습니다. 심리적 의존 관계, 의존상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국방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한테 매달려서, 미국 뒤 에 숨어서 형님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라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물리적으로 국방력이 앞선다 는 계산보다는 국가의 존재감과 국민적 주인의식의 문제가 더 크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치밀한 전략적 판단이 깔려있었다. 당시 미국 이 세계 군사전략 재편을 추진하고 있었던 만큼,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한미군 재조정을 추진해 나갈 것으로 판단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안보 상황에 이상이 없다 면 차라리 미국의 요구를 과감히 수용하되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명확히 제시하여 관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계산이었다. 2003년 5월 첫 번째 한미 정상회 담에서 양국이 합의한 주한 미군 재배치의 신중 추진 도, 같은 해 10월 방콕 APEC - 53 -

계기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반도 안보환경을 고려한 주한미군 및 용산 기지 재배 치 합의 도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이후 참여 정부는 한반도 안보상황과 협력 적 자주 국방 추진 계획 등을 고려, 주한미군의 감축 시기 및 대상 등과 관련된 우 리입장을 적극 개진하여 2008년까지 점진적으로 감축토록 조정했다. 용산기지 이전도 추진되었다. 금싸라기 땅에 지하철도 도로도 못 내고 있는 용산 기지의 이전 문제는 이미 노태우 대통령이 합의한 사항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돈이 없어 안 하였고, 국민의 정부는 IMF 때문에 못 하였다. 용산기지는 우리 국민들 가 슴 속에 자주국가의 상징이란 측면에서 자존심에 상당한 손상을 주고 있었다. 비록 우방이지만 수도 한복판에, 그것도 과거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였던 자리에 외국군 대 기지가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민족자존의 문제도 있었다. 참여정부는 이 문제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먼저 미국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가지는 비중에 걸맞는 대우를 받도록 하고, 주한 미군 재배치 등 모든 과정에서 신뢰를 중시했다. 평택지역에 349만 평과 대구 포항지역 13만 평 등 총 362만 평을 미국 측에 제공하 는 대신, 전국적으로 산재돼 있는 35개의 미군기지와 7개의 훈련장 등 총 5,167만 평의 기지를 돌려받음으로써, 순수히 4,805만 평을 되돌려 받는 방향으로 논의를 정 리했다. 이종석 전장관은 용산 기지 이전과 관련하여, 당시 한나라당 전원이 용산 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결의를 채택하면서 이 문제를 정쟁화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용산 기지의 민족공원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라고 회고했다. 3-1-5. 두 번째 정상회담 2003년 10월 19일 노무현 대통령은 APEC 참석을 위해 태국 방콕으로 날아갔다. 초미의 관심사는 한 미 정상회담이었다. 20일 오전 8시 30분, 방콕 하얏트 호텔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 두 번째로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이라크 추가파병 방침을 전달하는 한편,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 결정에 대한 감사표시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은 영국, 호주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일으킨 해외 전쟁마다 지원병을 보 내준 세계 3대 동맹국가였다. 부시 대통령은 거듭 감사 인사를 하면서, 우리 입장 - 54 -